블로그 메뉴

기본 메뉴

사용자 성격

커뮤니티


달력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29
30

블로그 통계

방문자수

  • Today 51
  • Yesterday 78
  • Total 189940

활동지수

  • 인기도 657
  • 친구 17 명
  • 퍼가기 0 개

기타 정보


블로그 테마

  • 테마 글을 등록해주세요.

Blog News Today


구독중인 폴더

더보기
  • 구독중인 폴더가 없습니다.
  • 게시판 형식으로 보기
  • 앨범 형식으로 보기
  • 포스트 형식으로 보기

[문창극 칼럼] 하늘의 평화

문창극
대기자
대통령 선거 결과를 다룬 외국의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박근혜 당선자를 지칭하면서 전 군사 지배자(former military ruler), 또는 전 독재자(former strongman)의 딸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한국민의 선택을 은연중 비아냥거리거나 경멸하는 투가 배어 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이 뭐 대단한 건가라는 말없는 무시가 깔려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정말 한국이 그들의 시각처럼 그 정도 나라에 불과한 건가? 선거 후에 낙선자가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 그리고 승자가 패자를 감싸려는 모습… 설령 겉모양일지라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높은 투표율과 팽팽한 득표율… 어느 민주 선진국 못지않은 결과였다. 세대별 득표율이 확연히 갈라진 게 흠이지만 미국도 레드 스테이트니, 블루 스테이트니 해서 한 정당이 싹쓸이하지 않는가? 선거 당일까지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지만 우리는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이런 나라를 두고 마치 미숙해서 그런 사람을 뽑았다는 투의 선입견은 잘못된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숙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보다도 더 성숙되어 있음을 이번에 보여 주었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포퓰리즘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고통을 겪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도 양쪽 모두 포퓰리즘을 띤 공약을 했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우리는 유럽의 어떤 나라들처럼 포퓰리즘 쪽을 택하지는 않았다. 민주주의의 약점은 개인의 이기주의에 있다. 나라나 공동체를 생각하기보다 개인의 이해에 따라 판단한다. 이번에 많은 사람들이 안보를 걱정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공동체의 안전에 대해 그만큼 책임감을 느꼈다는 증거다. 이렇듯 포퓰리즘에 흔들리지 않았고, 공동체의 안전을 걱정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바로 성숙한 민주주의에 들어갔다는 말이 아닌가?

 이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세대가 50대였다는 분석이 많다. 50대는 누구인가? 60대 이상이 가난의 압박에 너무 시달렸다고 한다면, 40대 이하는 그런 고통은 이미 벗어났던 세대다. 50대는 이 나라가 독재로 억압받고 있을 때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이고 나라의 가난을 경험한 거의 끝 세대로서 경제발전에 직접 참여한 세대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억압받을 때 고통을 느꼈고, 가난이 무엇이라는 것도 아는 세대다. 그들이 이번에 왜 90%에 가까운 놀라운 투표 참여율을 보였는가? 그들의 선택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들은 민주와 경제를 모두 아는 세대였다. 그들이 선거 과정에서 느낀 것은 불안이었다고 한다. 나라가 이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한국 현대사를 모두 체험한 그들로서 무엇이 나라를 위해 올바른 길인지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념이나 개인의 이익을 넘어 나라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 세대였다.

 민주주의에서 한 표는 똑같은 효력을 갖고 있다. 한 표라도 이긴 쪽이 승리자다. 그러나 표의 값이 같다고 표의 무게도 같을까? 이 나라 현대사를 몸으로 체험하고, 인생 50년 역정을 견뎌온 사람의 한 표와 지금 겨우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사람의 한 표 무게가 같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그들은 무게를 따로 계산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자식들도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들은 홀로 묵묵히 투표장으로 나갔다. 그렇게 모인 표가 이번 선거의 결과를 만든 것이다. 비록 표의 값으로는 아슬아슬한 과반을 넘겼지만 그 표의 무게로 본다면 우리 현대사의 좌우 시소게임을 완전히 끝장내게 한 그런 선거였다. 50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젊은 세대는 겸허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반대의 결과가 되었을 때 지금 이 나라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역사의 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역사의 신은 늘 우리 일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베일 뒤에서 지켜보고 있기만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그는 베일을 뚫고 나타나는 것 같다. 마치 동화에서 수호천사가 갑자기 나타나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구해 주듯이 말이다. 우리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대한민국을 지켜 주었던 그가 나타난 것은 아닐까? 혹자는 그것을 집단지혜라고도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그가 50대의 마음을 움직여 이 나라를 붙잡은 것 같다.

 역사는 순환이 아니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또다시 갈등과 분열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아침이다. 예수가 왜 이 땅에 아기로 와야 했는가? 우주의 주관자가 그 권리를 포기하고 가장 낮은 자로 내려온 것이다. 우리에게 평화와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제 승자는 그 권리를 포기하고 상처 받은 쪽을 감싸고 안아 주어야 한다. 이긴 자와 진 자가 거의 반반이다. 일대일로 안아줄 수 있다면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면, 하늘의 평화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 기사 본문 읽기

    2012.12.25 00:39 입력
  • 포스트 제어

    | 메일 | 인쇄

    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문창극 칼럼] 선거 스트레스

    문창극
    대기자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이 다시 소란스럽다. 지난해 봄 독재자 무바라크를 내쫓는 재스민 혁명을 했지만 새로 뽑은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아랍의 봄’이 왔다고 들떴지만 다시 ‘아랍의 겨울’로 돌아가고 있다. 민주주의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선거가 일주일 남았다. 일주일 후면 누구든 대통령이 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누가 되든 우리에겐 이집트와 같은 소요와 불안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비록 지지했던 사람이 당선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 생활인이 될 것이다. 그런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나라는 그만큼 성장했다. 그럼에도 선거 날이 가까워올수록 스트레스가 늘어난다. ‘누가 되면 큰일 난다’ ‘누가 되면 나라가 거꾸로 가게 된다’라는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고 그런 말들로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바로 그런 말을 하는 쪽이 정말 위험하다고 믿어도 좋다.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두려움과 불안을 자극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란 반대쪽에 대해서도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들의 회고록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백악관에 들어간 지 3개월이 채 안 되어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정말 없구나’ 하고 깨닫는다는 것이다. 우리 경우도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후보들은 경쟁적으로 경제민주화, 복지를 외친다. 기업은 미운 털이 박혔다. 그러나 대통령이 아무리 경제를 흔들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우리 경제의 80%가 해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의 영향을 그만큼 크게 받는다. 우리는 이미 대통령 개인보다 제도의 힘이 더 큰 나라가 되었다. 국회가 있고, 언론이 있고, 기업이 있고, 노동조합이 있다. 그런 제도가 든든할수록 대통령이 누가 되든 나라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민주주의란 본래 온건하며 점진적이다.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민주주의는 선택이다. 왕정이나 전제정은 통치자를 선택할 수 없다. 백성은 그들 밑에서 지배를 당할 뿐이다. 민주주의는 나를 통치할 사람을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며, 동시에 한 사람의 가치를 가장 귀하게 받드는 제도다. 두 후보가 우연히 똑같은 수의 표를 받았다고 치자. 그리고 개봉치 않은 마지막 한 표가 남았다. 그 한 표가 정권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가 가난한 자이든, 무식한 자이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상관없다. 그 한 사람의 결정을 이의 없이 따라 주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 한 사람은 1000만분의 1, 1억분의 1이 아니다. 또 ‘국민’이라는 대명사를 붙여 도매금으로 취급해서도 안 된다. 한 사람이 바로 나라이고, 한 명이 모두인 것이다. 이 어찌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닌가.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나의 의지로 선택한 만큼 그에 대한 책임도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하려면 책임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들 때문’이라는 변명은 있을 수 없다. 속은 것도 내 책임이다. 그러니 민주주의만큼 냉엄한 제도도 없다. 선택하는 사람은 ‘나’이지만 오로지 나의 입맛, 감정, 선호만을 생각해선 안 된다. 나를 넘어선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뿐만 아니라 또 다른 수많은 ‘나’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시민의식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할까? 미래와 긍정의 정신이다. 한 나라의 존재는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실체다. 우리는 현재만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젊어서 땀 흘려야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듯이 때로 현재를 희생할 수 있어야 바람직한 미래가 오는 것이다. 현재 있는 것을 나누기보다 미래를 위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식 세대들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 포퓰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시키는 데 있다. 또한 긍정의 마음을 가진 리더를 찾아야 한다. 발전의 힘은 부정에서가 아니라 긍정의 정신에서 나온다. 이 나라를 이만큼 끌어올린 힘은 바로 긍정의 정신이었다. 비판정신도 필요한 때가 있다. 그러나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마음이 지배하는 나라는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을 누가 더 긍정의 정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역사는 도도히 흐르는 물길이다. 그 물길 가운데 바위가 있으면 물길은 잠시 멈춘다. 그러나 곧 바위를 휘돌아 자기 갈 길을 가는 법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는 가장 험난한 계곡에서 출발하여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대양을 향해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일류기업들, 한류 문화 등은 그 물길이 거침없음을 말해 주고 있다. 설혹 우리의 눈이 흐려져 대표자를 잘못 뽑는다 해도 그것이 잠시의 걸림돌이 될지언정 물길을 막지는 못한다. 걱정할 게 없다. 선거 스트레스야 물러가라.

  • 기사 본문 읽기

    2012.12.11 00:26 입력
  • 포스트 제어

    | 메일 | 인쇄

    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문창극 칼럼] 파랑새의 백의종군

    문창극
    대기자
    파랑새가 추락했다. 새장 안에서 자란 그는 밖으로 나오는 순간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날갯짓 몇 번 하다가 곤두박질쳐 버렸다. 그는 새장 안에서 창공을 얘기하고 멋진 신세계에 대해 말했다. “내가 날아오르면 당신들의 꿈은 금방 이루어진다.” 목마른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그를 이용하려던 사람들은 그를 부추겼다. 파랑새는 자기를 독수리로 착각했다. 멋지게 날아가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쉬워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날개가 그렇게 가냘픈지 몰랐다. 땅에 떨어져 날개를 퍼덕이며 눈물을 흘렸다. “이 독수리는 죽지 않았다. 저 폭풍우를 뚫고 다시 날아갈 것이다.” 파랑새는 아직 독수리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파랑새의 꿈을 살려주지 못한 거센 바람을 탓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바람도 견디지 못한 파랑새의 허약함을 비웃었다. 그러는 사이에 약삭빠른 사람들은 다른 새를 날려 보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박수를 친다. 파랑새는 곧 잊혀질 것이다.

     안철수는 너무 맥없이 무너졌다. 그는 온실에서 성장한 화초였고 새장 안에서 고이 자란 파랑새였다. 야생성이 없는 그는 단일화 압박을 견뎌낼 수 없었다. 뒤늦은 평가이지만 당선이 되었다 해도 그런 약한 대를 가지고 험난한 국정을 끌고 갈 수 있었겠는가? 지도자의 길은 바람 몰아치는 광야에 홀로 서는 것이다. 출마 선언을 했으면 지는 것이 뻔하더라도 끝까지 가야 했다. 그 시련을 견디는 것이 용기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하차하는 순간 대중은 그로부터 떠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열심히 공부해 의사가 되었고 모범적인 가정도 꾸렸다. 창조적인 생각으로 기업을 이루었고 또 나눔을 실천한 인물이다. 사람은 잘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있다. 자신의 재능을 알고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게 살았던 안철수가 무슨 콘서트 길에 나서면서부터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의 허방이었다. 인기가 너무 높았기에 스스로 ‘세상이 별거 아니구나’ 하고 느낄 만했다. 그는 “너 자신을 알라”는 기본을 놓쳐버렸다.

     정치라는 지형에 맞는 인간형이 있다. 그런 사람들만 그 땅에 모여들고, 그런 사람들만 살아남는다. 역사, 문화적 조건 때문인지 우리 정치가 유독 그런 경향이 심하다. 그렇다고 정치를 그런 사람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다. 안철수가 말하는 새 정치는 그래서 기대가 높았다. 안철수의 등장으로 불안해진 인물들은 바로 정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100명의 의원을, 100만이 뽑은 대통령 후보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안철수의 공로는 그런 사람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분 것이다. 권력만 보지 말고 사람을 보라는 메시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등장과 소멸은 하나의 개혁운동으로서 의미가 있다.

     그의 사퇴는 정치에서 ‘책임’이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본인도 책임이 없이 행동했고, 지지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여론조사가 무엇인가? 인기란 무엇인가? 누구에 대해서도, 무엇에 대해서도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그저 의견만 표시하면 그만이다. 그런 무책임성에서 안철수 현상이 만들어졌다. 정당인은 최소한 정치적 소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즉 조직으로 결집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힘을 쓰겠는가, 아니면 아무 부담을 가지지 않는 무정형한 군중이 힘을 쓰겠는가? 안철수의 지지율이 떨어진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허무한 사람끼리 허무하게 좋아하다 허무하게 헤어진 것이다. 그래서 민주정치는 책임정치가 되어야 하고 그러자면 정당정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당에도 문제가 있다. 혼자 힘으로 집권할 능력이 없으면 왜 그런지 반성을 하고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변해야 한다. 그래야 정당정치가 제도로서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변할 생각은 안 하고 눈속임으로 정권만 잡으려 한다. 단일화가 바로 그런 것이다. 안철수를 등장시켜 성장시키고, 단일화 압력을 넣는 과정을 돌아보면 너무나 기획 냄새가 난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니 안을 등장시켜 판을 흔든 뒤, 그 주인공마저 ‘팽’을 시키는 수순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는 사퇴의 변을 하면서 ‘백의종군’을 말했다. 백의종군이 무슨 뜻인가. 이순신처럼 나라를 위해 아무 보상도 없이 묵묵히 전장에 나가는 것이다. 당파를 위한 투신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는 것이었다. 안철수는 자신을 불쏘시개로 이용한 한 정파를 위해 뛰겠다고 한다. 답답한 일이다. 그는 이 나라 젊은이들의 ‘롤 모델’이었다.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자기만의 일을 가지고, 성공했던 옛 자리로 돌아가라. 묵묵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라. 나라를 위해 이름 없이 일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백의종군이다.

  • 기사 본문 읽기

    2012.11.27 00:24 입력
  • 포스트 제어

    | 메일 | 인쇄

    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문창극 칼럼] 길 잃은 개혁

    문창극
    대기자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기억이 난다. 앞에 구덩이가 있어 그리로 가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으면 꼭 그곳에 빠지고 만다. 마치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 거기로 돌진하곤 했다. 초보자여서 자전거의 관성을 컨트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 초보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안철수는 단일화라는 구덩이를 피해야 하는데 그리로 끌려 들어갔다. 주변의 힘, 정치공학적 계산 등에 밀려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그곳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단일화는 왜 안철수가 피해야 할 구덩이였는가. 그가 정치를 시작한 모든 이유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증오의 정치를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 절반을 적으로 돌리는 정치는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고 했다. 옳은 말이었다. 그래서 박수가 나온 것이다. 그런 그가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하겠다고 한다. 그 민주당은 어떤 정당인가? 그 정당은 불과 몇 개월 전에 총선에서 대패했다. 왜 일반의 예측과는 반대로 패배했을까? 그 정당 스스로가 인정했듯이 패거리 정치에 국민들이 실망했기 때문이다. 증오의 정치는 노무현 시대의 병이었다. 지금 민주당은 누가 움직이고 있는가? 바로 그 사람들 아닌가. 나라를 분열시키는 지역주의 정치는 이 나라의 고질병이다. 그걸 없애자는 것이 새 정치다. 새 정치를 외치는 안철수는 단일화 선언을 광주에 가서 했다. 왜 하필이면 광주일까? 국민의 반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왜 지역 냄새가 가장 많이 나는 길을 선택했는가?

     그의 존재가치를 위해서는 반드시 피해야 할 길을 그는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정치개혁을 하자면 불가피하다고 변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부터 움직였어야 했다. 최소한 총선 전에라도 그 당에 들어가 동지를 모아 개혁을 시도했어야 했다. 그래야 진정성과 실천력을 검증받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선거를 코앞에 두고 뒤늦게 민주당과 단일화를 하면서 정치개혁을 내세우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100명 넘는 의원이 있는 정당에 교수 몇 명 끌고 들어가 무슨 연합을 만든다고 개혁이 되겠는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안철수의 정체성은 다시 점검받아야 한다. 그는 단일화 선언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독립, 중도, 양심세력이라고 스스로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는 민주당 진영, 더 나아가 좌파 진영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진영정치를 비판했지만 지금은 스스로 한쪽 진영을 택했다. 새 정치를 말했던 그가 헌 거푸집 속으로 들어갔다. 이후에 나올 수 있는 것은 그 거푸집과 똑같은 모양의 붕어빵일 수밖에 없다.

     그의 변신으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다. 어느 쪽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던 이 나라의 중간층 사람들이다. 진보·보수를 넘어 통합을 바라는 사람, 경제가 발전하면서 동시에 열매를 골고루 나눌 수 있기를 바란 사람, 모든 자녀에게 공평한 도전의 기회가 보장되기를 바란 사람,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안철수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런 공통의 열정이 안철수 현상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스스로 한쪽 편에 가담했다. 이 중간지대 사람들의 꿈을 이루어 줄 사람이 이제는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정치의 환멸을 안겨준 것이다.

     어느 사회나 변화를 갈망하게 되면 개혁의 열정이 끓어오르게 마련이다. 그 개혁의 열정은 대변해 줄 인물을 찾게 된다. 그래서 갑자기 어떤 인물이 부상하는 것이다. 설혹 중도에 그 사람이 사라진다 해도 그 열정 자체는 식지 않는다. 사회열정은 그 역할을 대신 맡아 줄 또 다른 사람을 찾게 되어 있다. 1900년대 초의 미국은 혁신의 열정이 끓어오르던 시대였다. 그 시대를 대변했던 사람이 시어도어 루스벨트다. 그는 3선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낙방했다. 뒤를 이은 윌슨 대통령은 반대당이었지만 미국사회의 개혁 열정을 받아내어 임기 중 가장 많은 개혁입법을 이룬 인물로 꼽히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충만한 개혁 열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 선거는 그 열정이 지배할 것이다. 누군가 이 열정을 풀어 주어야 한다. 그 열정을 받아내어 풀어 줄 사람은 누구인가? 안철수에게 실망했다면, 문재인인가? 박근혜인가? 박근혜는 우파 정당 출신이다. 그가 개혁 열정을 이어받을 수 있을까. 그러려면 정치개혁에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청와대 중심, 의원 중심, 권력기관 중심이 아니라 국민 중심의 정치를 과감하게 선언해야 한다. 나눠먹기가 아니라 개인의 재능을 최대로 꽃피우는 그런 경제 민주화가 되어야 한다. 계층, 지역, 정파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향한 과감한 플랜을 제시해야 한다. 소소한 문제에 매이지 말고 성큼성큼 큰 발걸음을 떼어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야권의 단일화가 오히려 그에게 기회로 변할 수도 있다.

  • 기사 본문 읽기

    2012.11.13 00:52 입력
  • 포스트 제어

    | 메일 | 인쇄

    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문창극 칼럼] 안철수 시험대에 서다

    문창극
    대기자
    모든 눈이 단일화에 쏠려 있다. 선거 판도를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일화를 주장하는 쪽은 그것이 이기는 길이라고 믿고 있는 반면 반대하는 쪽은 이를 막아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진보인사들은 촛불시위 때처럼 국민의 이름을 들먹이며 단일화를 재촉하고 있다. 반면에 단일화를 비판하면 마치 여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출마 의사를 밝혔으면 투표를 통해 국민의 결정을 따르면 될 일을 왜 막 뒤에서 단일화를 하느냐 못하느냐로 일을 삼는가? 문제는 안철수의 태도다. 더 이상 애매해서는 안 된다.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의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인기는 어디서 왔나?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기성 정치인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국회의원 수를 줄이고 정당 보조금 제도를 바꾸겠다고 공약했다. 그러자 여야 정당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사사건건 싸우던 그들인데 왜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목소리가 같을까. 왜 정치를 바꾸어보자는 제안에 반대할까. 대의제 민주주의를 하자면 정당정치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 정당들이 그에 걸맞게 역할을 해 왔던가? 권력에 눈먼 사람, 출세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라의 미래에는 관심도 없이, 보수니 진보니 이념을 내걸며 패거리 싸움을 해 오지 않았던가? 이 나라는 앞으로 더 나가고 싶어도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다. 아이들이 자라면 그에 맞는 옷을 입히듯 나라도 성장하면 그에 따른 새 제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 정치도 옷을 바꾸어 입혀야 한다. 안철수는 바로 이런 욕구의 상징이었다. 그의 존재이유는 정치개혁에 있다.

     정치개혁과 단일화는 상극이다. 단일화는 정치담합이자 권력만을 노린 게임이기 때문이다. 기성 정치인들이 대선 때마다 되풀이하던 짓이었다. 거기에는 국민이 빠져 있다. 우리는 단일화를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 이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데 무조건 이기고 보자고 짝짓기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런 단일화는 바로 정치개혁의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분상으로 볼 때 안철수가 단일화를 하는 순간 그의 정치개혁은 헛구호가 되는 것이다. 현실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야당이 정권을 쥘 목적으로 정치개혁에 동의해 단일화 했다고 치자. 그 종이 한 장의 약속이 선거 후에 지켜질 것인가? 단일화로 안철수가 정권을 잡았다고 치자. 의원 과반수를 넘는 여당이 국회를 지키고 있는데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잘못된 수단을 택하면 그 때문에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수단이 목적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안철수의 고민이 있다.

     안철수는 이제 시험대에 올랐다. 어느 길을 걷느냐에 따라 그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한쪽은 넓은 길인데 그 끝에는 권력이 있어 보인다. 다른 쪽은 이상을 향한 좁은 길이다. 그가 권력을 탐하는 인물로 보였다면 애초부터 젊은이들이 그렇게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그를 통해 이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변화를 갈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꽃가마를 타는 게 아니다.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고난을 지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고난의 짐을 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사람은 감히 나서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그 선택을 수용해 출마를 한 이상 끝까지 스스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기존 정당들이 정치개혁을 반대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현재 상황을 유지해야 이득을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득권이다. 변화란 이 기득권을 깨는 것이다. 이를 깰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기득권은 말 그대로 힘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힘으로는 깰 수가 없다. 그것은 국민의 열망과 지도자의 도덕적 우월성으로만 깰 수 있다. 안철수는 정치의 혁신을 바라는 민중의 열망으로부터 탄생했다. 그를 신선하게 보았던 이유는 그의 도덕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무소속의 안철수가 자기 길을 끝까지 걸어 당선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기존 정당에는 회오리바람이 불 것이다.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얼마나 큰가를 입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민의 열망은 ‘새 대통령의 힘’으로 바뀔 것이다. 여야 경계선은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세력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일시적인 불안이 있더라도 새 길이 열릴 것이다.

     변화와 개혁은 이렇게 뜻밖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진심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품은 씨앗은 반드시 싹이 나게 되어 있다. 그는 씨앗을 뿌린 것만으로도 역사에서 한 역할을 이룬 것이다. 반대로 그가 현실을 쫓아간다면 그는 과거 모든 제3의 인물들처럼 역사의 한 포말이 되어 흩어질 뿐이리라.

    문창극 대기자

  • 기사 본문 읽기

    2012.10.30 00:38 입력
  • 포스트 제어

    | 메일 | 인쇄

    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목록 넘겨보기

    이전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