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메뉴

기본 메뉴

사용자 성격

커뮤니티


달력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31

블로그 통계

방문자수

  • Today 15
  • Yesterday 5
  • Total 102346

활동지수

  • 인기도 7740
  • 친구 8 명
  • 퍼가기 0 개

기타 정보


블로그 테마

  • 테마 글을 등록해주세요.

구독중인 폴더

더보기
  • 구독중인 폴더가 없습니다.
  • 게시판 형식으로 보기
  • 앨범 형식으로 보기
  • 포스트 형식으로 보기

박진으로 떠나는 전쟁과 평화의 주말여행

뿌옇게 빛바랜 철모의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철모는 말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세월을 흘러온 저 낙동강 물처럼 유리 전시관 안에서 묵묵하게 그날의 참혹함을 기억할 뿐-.



박진 전투. 그 전적(戰績)을 기리는 기념관이 얼마전 문을 열었다. 1950년 여름 한국전쟁이 터진 뒤 부산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끝없이 밀려만 가던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킨게 바로 박진 전투였다.

전쟁은 깊고도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우리는 그날의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념관을 둘러보는 내내 머리 속을 뱅뱅 돌던 화두였다.


기념관 앞마당에 세워진 국군 동상.

◇혈전의 역사를 찾아서=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월하리. 박진 전쟁기념관이 둥지를 튼 곳이다. 서울에서 아침 9시에 고속철도(KTX)를 타고 출발하니 이 곳까지 4시간이 채 안 걸린다. 폭염 때문에 차를 몰고 가려다 '전투적으로 도전해보자'는 생각에 대중 교통편을 이용했다. 여행이란 본디 여정 자체가 더 즐거운 것 아니겠는가.

처음 타보는 KTX였는데 그런대로 괜찮았다. 맞은편 열차가 '쐐액 ̄'하고 쏜살같이 스쳐 지나갈 때야 비로소 이 열차의 스피드가 실감났다. 땡볕에 농익어 짙은 초록색으로 물든 논을 볼 때는 맘까지 절로 싱그러워졌다.

서울역에서 동대구역까지는 2시간이 채 안 걸렸다. 역사엔 울긋불긋 휴가복 차림의 시민들로 만원이다. 이번엔 지하철을 타고, 서부 터미널로 가서 영산행 버스를 탔다. 터미널은 투박하고 깨끗하지 않았지만 정감은 넘쳤다.

1시간 정도 걸렸을까. 생각보다 일찍 창녕군 영산읍에 도착했다. '꼬르륵' 소리에 조그만 중국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온 국민의 애호식 짜장면으로 허겁지겁 민생고를 해결했다. 주인 아주머니의 인심이 넉넉하다. "박진에 어떻게 가느냐"고 묻자 꼬치꼬치 길을 일러준다.

멀지 않은 영신 버스터미널에서 '박진행' 표시가 붙은 버스를 탔다. 승객 대부분은 비닐 보따리를 한움큼씩 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다. 학생들이 슬리퍼를 신은게 특이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으니 에어콘이 따로 없다. 상큼한 풀냄새에 또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여유로움과 어릴적 시골의 향취가 밀려온다.

30분 쯤 지나니 사람들이 다 내리고 혼자 남았다. 운전사 아저씨가 묻는다. "어디서 왔능교 ̄." 외지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여차저차 박진에 간다고 얘기를 했더니 아저씨의 수다가 이어진다. "미국 사람들도 많이 옵니더.""거기 잘 만들어 놓았지예 ̄.(들은대로 적었는데 사투리가 이게 맞나 모르겠다)"

1시간쯤 되니 키작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바로 박진전쟁기념관이다. 주변 경관이 수채화가 따로 없다. 야트마한 언덕들에, 옆엔 낙동강이 흐르고, 시퍼런 하늘엔 뭉게구름이 얹혀 있었다.

이런 동네가 50여년전엔 시뻘건 피와 무자비한 총소리로 뒤덮였다니-. 감히 상상조차 어려웠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리 크지는 않아도 건물을 제법 세련되게 지었다. 월상 초등학교 폐교 부지를 이용했다는데 깨끗한 현대식 건물로 새롭게 태어난 셈이다. 근처의 야트마한 산에 박진전투 전적기념비가 세워져 있던 차에 역사적인 현장을 제대로 기록하자는 생각에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고 한다. 경상남도 도비와 창녕군 군비 등 모두 34억원을 썼다고 한다. 그래도 어떻게 보면 변두리인 이 곳에 이런 기념관이 있다는게 기특했다. 어쨌든 아프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를 보듬고 있는 곳이 아닌가.

정문을 지나 기념관 마당에 들어서니 눈길을 잡아끄는게 많다. 국군 동상이며 탱크(M-46), 장갑차, 야포 등을 전시해 놓았는데 아이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그만일 것 같다. 절로 카메라 셔터에 손이 간다. 사진을 몇장 찍고 전시관 안으로 들어섰다.

전시관은 다양한 아이템으로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입구의 조그만 방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나면 ▶전쟁 발발 ▶남으로 남으로 자유를 찾아 ▶최후의 저지선 낙동강 ▶남북한 전투 장비 ▶혈전 일지 ▶한맺힌 38선 ▶ 전쟁 그 후 등의 테마로 전시관을 한바퀴 돌게된다.

바쁜 중에도 일부러 전시관까지 와서 안내를 해준 창녕군의 양용준 문화공보과장은 "전시관 벽에 붙은 패널에 기록된 내용만 찬찬히 읽어봐도 한국전쟁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딱딱한 설명보다 생생한 사례가 많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쉽게 한국전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국전쟁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이 곳에서 제공하는건 역사적 기록이요, 그 단초들이다.

눈길을 끄는건 전시관 중앙에 있는 박격포, 고사포며 각종 무기들. 국방부에서 얻은 것이란다. 지금은 유리 안에 조용히 들어가 있지만 여기서 날아간 총탄이 젊은이들의 사지에 박혔다고 생각하면 끔찍할 따름이다. 옛날 '배달의 기수'에서 봤던 동그란 탄창이 달린 총도 눈에 띈다. 이른바'따발총'. 북한군이 쓰던 것으로 원래 명칭은 슈파긴 총이다.

한 쪽 코너에 걸려 있던 참전용사 러스터의 사진도 눈길을 잡아 끌었다. 미군 해병 5연대 소속인 그는 박진 전투에서 한 쪽 팔을 잃었다고 한다. 2002년 숨진 그는 유언으로 한국 땅에 주검을 묻어 달라고 했다. 군청 양과장은 "전투에 참가했던 미국인들이 옛 기억을 되살리려 자주 방문한다"고 했다. 한 미국인은 이곳 전투에서 친구가 전사했다며 미국에 있는 친구 묘지에 뿌려줄 흙을 한줌 퍼가기도 했다고 한다.

전시관 가운데에 박진 전투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축소 모형도도 눈에 띄었다. 당시의 치열한 공방전을 파란색, 빨간색 전구로 알기쉽게 표시해 놓았다. 그렇게 보니 이나라 땅 덩어리가 좁긴 좁아 보였다. 이렇게 좁은 땅에서 그들은, 아니 우리는 뭘 얻기 위해 그렇게 피를 흘렸을까.

◇그날 무슨 일이=때는 1950년 여름이었다. 거침없는 기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계속하다 8월 초 낙동강을 끼고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북한군 제4사단 병력은 창녕군 남지읍 박진 지구 등 3곳으로 대대적인 침투 작전을 폈다고 한다. 이에 맞서 국군과 미 24사단 병력이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양쪽의 인명피해만 나고 전투는 끝이 없었다.

결국 8월15일 미 해병 1여단이 투입돼 결국 북한군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북한군에게 박진 지구는 부산 점령을 위한 아주 중요한 작전지역이었고 8월 말 3만여명에 가까운 대규모 병력으로 2차 공세를 펼쳤다. 우리 쪽에선 미 2사단이 필사적으로 맞서 결국 북한군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북한군은 게릴라전으로 침투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박진 전투의 승리로 인천상륙작전의 전기가 마련됐으며 압록강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박진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전시관에 마련된 한 미군의 증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8월9일 아침. 우리 중대는 저녁에 증원군이 올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와 몇몇 병사는 진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전사자들을 고지 아래의 본부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그 날 죽음의 냄새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 냄새는 절대 잊을 수 없었다. 텔레비전이나 뉴스, 영화를 통해 사람들은 전쟁의 소음이나 혼란 같은 것은 비슷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주검의 냄새는 기록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한 전사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의 얼굴은 백납같이 창백해지고, 그의 몸은 뻣뻣해졌으나 우리가 그 사체를 들고 달리는 동안 창자가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크 코치 (상병, 해병 제5연대 D 중대)'

◇피비린내를 씻자=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전쟁기념관 주위엔 평화스런 생태공원과 따뜻한 온천 관광지가 함께 있다. 피냄새나는 전쟁 기록에 질렸다면 가족, 연인들과 이 곳에 들러 자연과 평화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것도 좋을 듯.

박진 전쟁기념관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린다는 우포늪(upo.or.kr)은 국내 최대의 자연 늪이다. 창녕군 대합면 주매리와 이방면 안리, 유어면 대대리, 세진리 등 70만평에 걸쳐 있다. 수많은 물풀이 끝없는 늪지 위로 머리를 쏙 내밀고 있다. 늪에 반쯤 밑동을 담근 나무들이 '원시 자연'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부들, 창포, 갈대, 줄, 올방개, 붕어마름 등을 볼 수 있다.

땅이 가마솥 모양이라고 해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부곡온천(bugok.cng.go.kr)은 워낙 유명한 관광지다. 박진 기념관에서 20분 거리. 최고 78℃의 온천수를 하루 6천톤 채수할 수 있는 유황온천이라고 한다. 유황 외에도 규소, 염소 등 20여종의 무기질을 함유하고 있다. 호흡기질환, 피부질환 등에 효과가 크단다.

창녕=김준술 기자


* 자세한 교통편 및 관광 문의는;
.박진 전쟁기념관 (☎ 055-526-5677)
.창녕군 문화공보과 (☎ 055-530-2236~9)
.창녕군 관광진흥계 (☎ 055-530-2241~2)

기념관 입구. 왼쪽으로 가면 기념관 건물이 나오고, 오른쪽 야산으로 올라가면 박진 전적비가 나온다.



전시관 내부. 한국전쟁의 발발부터 휴전까지 다양한 테마를 담고 있다.

박진 전투를 재현한 축소 모형도. 당시의 처절했던 일진일퇴 사투가 한눈에 들어 온다.

박진 지역에서 발굴된 군인들의 유품. 다 삭아 없어진 이 군화의 주인은 어떻게 됐을까.

국군과 미군이 사용한 무기들.

북한군이 썼다는 12.7 mm 고사포.



  • [중앙일보] 기사 본문 읽기

    2004.08.06 15:08 입력
  • 포스트 제어

    | 메일 | 인쇄

    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과거사 포괄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사업 필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30일 오전 청와대에서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로부터 활동 결과를 보고받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30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향후 활동방향과 관련, "과거사 문제를 단편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 쟁점이 됐던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사업이 필요하다"며 "국회에서 이 부분에 대해 방향을 잘 잡아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또 비전향장기수 강제전향 거부에 대한 의문사위의 민주화 기여 인정 논란과 관련, "민주화운동만 조사대상으로 삼은 규정때문에 생긴 혼란으로, 원칙적으로 민주화운동이든, 아니든 공권력의 불편부당한 행사로 인해 발생한 인권과 국민침해 행위를 조사해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며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 씀으로써 경계와 교훈으로 삼는 것은 수천년 인류사의 확고한 가치로 자리잡은 것"이라며 "반민특위 해체이후 잘못된 역사의 규명이 되지 않고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는데 누군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지난달말 활동이 종료된 2기 의문사위로부터 활동결과를 보고받은 자리에서 "의문사위의 판단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정치적으로 왜곡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같은 입장을 밝혔다고 김종민(金鍾民) 대변인이 전했다.

    김종민 대변인은 기자간담회에서 '포괄적' 국가사업이라는 의미에 대해 "국회에서 삼청교육대 진상규명 등 여러 논의가 있는데 그렇게 하나씩 따로 위원회를 만들기보다는 과거사 전반을 포괄해 다루는게 적절하지 않겠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변인은 또 '반민특위 이후 잘못된 역사는 어떤 역사를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특정한 것은 아니다"며 "일제하에 가려진 역사, 군사독재 시절, 물론 유신, 5.6공 시대 등에서 밝혀지지 않은, 공권력 부당 행사 등을 통한 인권침해를 말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의문사위 활동에 대한 논란이 많이 있는데 이 점은 의문사위의 의미와 법적 성격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국가권력의 행사가 합법성과 정당성을 상실하면 공동체 질서는 유지되지 않는 만큼 국가권력에 의한 국민 침해행위는 철저히 견제되고 방지돼야 한다"면서 "그래서 우리가 과거의 잘못을 밝혀 교훈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고 의문사위의 존재의미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의문사위의 법적 성격과 관련, "의문사위는 대통령이 국회동의를 얻어 구성한 기관이지만 법적으로 활동이 독립돼 있어 대통령이 간섭하거나 지시하는 것은 법 규정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또 "의문사위에 대한 오해나 왜곡을 시정하기 위해 국민에게도 소상하게 보고했으면 한다"고 의문사위측에 당부하고 "앞으로 의문사위 활동과 관련된 문제는 국회에서 논의해 합당한 결정을 내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앞서 노 대통령은 모두발언을 통해 "의문사위가 대통령의 지시와 명령으로 운영되는 것처럼 국민에게 전달돼 여러 혼선이 있는 듯하고 나한테도 부담이 되지만 의문사위 활동도 대통령때문에 부담이 되고 공격받는 것 아닌가 싶다"며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의문사위를 공격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의문사위 결정과 관련한 대통령에 대한 답변 요구와 관련, "대통령상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은 점이 많다"며 "과거 모든 것을 대통령이 좌우하던 시대가 아닌데 대통령 권력에 대한 인식이 유신시대와 5공시대 때처럼 남아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한편 노 대통령은 이날 의문사위의 향후 활동방향 등과 관련한 제도적 보완사항들을 관계부처에 전달해 필요한 보완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서울=연합뉴스)

  • [중앙일보] 기사 본문 읽기

    2004.07.30 10:09 입력
  • 포스트 제어

    | 메일 | 인쇄

    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장로(壯老)' 세대 위한 '전원주택+여가시설' 개발을"

    '부동산학 박사 1호' 홍성관 박사

    "사회적으로는 퇴출을 강요당합니다. 노인 취급 당하는 거지요. 1~2명 밖에 안되는 아이들은 키워서 결혼시켜 내보내면 그 외로움이란…."

    조용조용하지만 조리있는 그의 말은 계속됐다. "조사를 해 봤더니 55세에서 69세까지 이런 사람들이 많습디다. 장년층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노인이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장로(壯老)'세대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홍성관 박사(61.사진). 그는 최근 건국대에서 부동산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수여장에 '부동산학'이라는 명칭이 기재된건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다. 그동안 부동산 관련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많았으나 행정학박사같은 타이틀이 주어졌었다. 말하자면 '부동산학 박사 1호'가 바로 그다. 논문 주제는 '장로 세대를 위한 부동산 개발 모형'.

    "정보기술(IT)의 발달로 장로 세대는 점차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지요.""그럼 뭘로 먹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홍박사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바로 자본이득입니다." 돈을 모은 뒤 잘 굴리고 불려 50대 중반 너머의 삶을 가꿔야 한다는 것이다.

    홍박사는 "자본이득도 여러가지가 있다"며 "'일과 여가와 돈'을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는 장로 세대엔 부동산이 합리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모델은 일종의 농업법인 마을. 1만6천여평의 땅에 전원주택 단지와 여가시설 등을 세워 가구마다 월 2백만원(최소 생계비 월 85~100만원, 용돈 80~100만원) 가량의 소득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있고, 출가자녀 등 여러 세대가 사랑을 나누며 즐길 수 있는 공간을 그렸다.

    홍박사는 "부동산 개발에서 중요한건 '문화'를 붙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려면 '수요자'가 누구인지를 잘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생각한 모델은 기존의 '실버 타운'과는 다르다고 한다. "실버타운은 돈을 쓰기만 하는 소비지향적인 곳이 되기 쉽고, 일은 물론 정서적으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그의 논문은 28년간 '집장사'를 한 경력과 무관치 않다. 홍박사는 지난 1972년 선경건설주식회사(지금의 SK 건설)에 현장 소장으로 입사해 99년 퇴직할 때까지 부사장, 주택사업본부장 등을 거치며 올림픽 아파트 건설같은 굵직한 부동산 개발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그 때마다 대증적 요법으로 부딪쳤습니다. 그냥 시장흐름에 기대 직감으로 사업을 했던게지요."그는 사업을 할 때마다 부동산 시장에 대한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고민했다. 마침 건국대 부동산대학원에서 겸임교수를 제의해 강단에 서게 되면서 박사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공부를 시작한지는 4년 정도. 학위는 3년만에 땄다. 처음엔 박사 과정에 떡 하고 지원했더니 "후배들도 많은데 나이 드셨으니 양보하라"는 소리도 들었다. 건설현장을 휘젓고 다닌 야전사령관이었던 그가 물러섰을리 만무하다. 홍박사는 "국내에도 부동산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만 아직 학문적 체계가 잘 잡혀있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홍박사는 국내 건설사의 산 증인과도 같다. 그는 지금의 부동산 정책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의 입에서 쓴소리가 쏟아졌다.

    "지금 학계와 정.관계가 내건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부동산 문제를 잡을 수 없습니다." 모두 과거의 경험과 자료에 기대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려고만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설렁탕 세대가 햄버거 세대를 이해하기 어렵듯 현실의 문제점이 뭔지 정확히 모르면 답도 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강남 8학군의 부동산 값을 누가 정하나요. 바로 수요자요, 소비자들 아닙니까." 홍박사는 "그 땅을, 부동산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하자면 수량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학군이며, 녹지며, 주변환경 같은 정성적(定性的) 요인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동산 심리학을 단초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먼저 국민의식을 철저하게 이해.분석한 뒤 처방전을 내리는게 중요한데, 정치적으로 나쁘게 이용만 하려 드는게 문제라고 했다.

    특히 "학문하는 사람이 실물을 알아야 하고, 실물하는 사람도 학문을 알아야 한다"는 지론을 펼쳤다. 독일의 장인제 같은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관료들에 대해선 "정책을 만들려면 부동산 중개업자들하고 대포를 마시면서 실물 흐름을 꿰뚫어 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정도가 돼야 하지 않겠나. 매일 정치인 눈치나 보고 있으면 뭐가 되나"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ŕ년에 인허가 40여개 받으러 다닐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완전히 병폐가 없어진건 아니다"고도 했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만 해도 그래요." 그의 비판은 계속됐다. "통상 이기적이기 쉬운 정치집단이 전체 국익과 관련한 사안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나요. 국민들의 삶에 어떻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경제적 타당성에 촛점을 맞춰 이전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반문했다.

    이 쯤해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부동산 모르면 웬지 뒤쳐질 것만 같고, 실제로 많은 국민들이 부동산 IQ 높이기에 혈안이 돼 있는데요."

    그러자 홍박사는 "투자와 투기는 사실상 같은 것 아니겠나"라며 "다만 투기는 정보가 불완전하고 불건전하게 다뤄지고 유통될 때 나타나는데 지금 이런 식으로 남발되는 정보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논문 모델을 실제로 사업화하기 위해 수도권 땅을 보러 60곳 이상을 돌아 다녔다. 그러면서 절감했다고 한다. 시장이 얼마나 난장판인지를. 홍박사는 "부동산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그런 시장은 없다"며 "부동산 중개업자들의 장난에다, 부동산을 보지도 않고 거래하는 사람들까지 시장 물을 흐려 놓고 있다"고 질타했다.

    김준술 기자

  • [중앙일보] 기사 본문 읽기

    2004.07.25 09:54 입력
  • 포스트 제어

    | 메일 | 인쇄

    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與 '김혁규 지명 고사는 順理'

    김혁규(金爀珪) 의원의 총리직 지명 고사에 대해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되도록 말을 아꼈다.

    특히 '김혁규 반대론'을 언급했던 초.재선 소장파 의원들은 "노 코멘트'로 일관하는 등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한 '항명'으로 비쳐질 것을 우려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이번 재.보선 참패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김 의원의 총리카드는 백지화 시키는 것이 순리가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반(反) 김혁규론'을 폈던 정장선(鄭長善) 의원은 후임 총리 문제에 대해 "대통령이 알아서 할 것"이라며 "이제 당에서 언급하면 안된다. 재보선 결과를 잘 살펴서 당이 국정을 책임지는 정당으로 안정된 모습으로 가는게 중요하다"고 했다.

    총리 지명 문제를 가지고 당이 또 다시 시끄러워지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듯 했다.

    하지만 박명광(朴明光) 의원은 "김 의원 개인은 훌륭한 총리감으로 보지만 정치는 상대가 있는 것"이라며 "본인이 고사의사를 밝힌 것은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치켜세웠다.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유인태(柳寅泰) 의원은 "이런 저런 논란에 대해 본인으로선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며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차기 총리의 기준에 대해 "행정경험이 있는 분을 고르지 않겠느냐. 청문회에서 지적될 일이 없는 분으로 선택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초선 의원은 "김혁규 카드가 이번 재보선의 최대쟁점이었던 점은 부인하기 어렵지 않느냐"며 "정치는 냉정한 것이고, 김 의원이 총리지명 고사 의사를 밝힌 것은 정치적으로 순리"라고 말했다.

    다만 유시민(柳時敏) 의원은 "(총리직 고사는) 본인의 생각이고 대통령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다"며 김 의원의 고사에도 불구, 대통령이 그를 총리로 지명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관측해 대조를 보였다. (서울=연합뉴스)

  • [중앙일보] 기사 본문 읽기

    2004.06.07 09:24 입력
  • 포스트 제어

    | 메일 | 인쇄

    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2004년 7월 14일 서해 NLL서 일어난 일

    중앙일보는 지난 14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에 대한 포격 당시의 생생한 상황보고를 담은 군 정보당국의 '분석 보고서'를 단독 입수했다. 당시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는 NLL을 넘고도 오히려 우리 해군 함정에 "귀측이 침범했다"며 퇴각을 요구했다.

    이날 오후 4시12분 황해도 등산곶을 떠난 684호는 곧바로 NLL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해군은 즉각 1200t급 초계함 성남호를 보냈다. 그리고 핫라인을 통해 북한 함정과 교신을 시도했다.

    오후 4시35~36분=우리 해군 함정은 북한 경비정을 세번 호출했다. 응답은 없었다.

    40~51분=해군 함정은 북한 경비정에 4회의 경고 통신을 보냈다. 역시 응답이 없었다.

    남:"귀측은 해상 분계선 1.2마일 전이다."(1차 무전), "즉시 침로(방향)를 변경하라. 0.3마일 전이다."(2차 무전), "북상하지 않을 시 발포할 것이며, 모든 인적.물적 책임은 귀측에 있다."(3.4차 무전) 해군 함정이 교신을 시도하던 오후 4시47분 등산곶 684호는 NLL을 넘었다.

    51~52분=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은 우리 함정에 처음 응답했다.

    북:"한라산 둘, 백두산 둘, 지금 내려가는 것은 우리 어선이 아니고 중국 어선이다."(한라산 둘은 남측 함정, 백두산 둘은 북한 함정 호출 부호)

    그러나 해군과 정보당국의 서해 해군전술지휘통제체계(KNTDS) 기록에 따르면 당시 북한 경비정은 NLL을 넘은 중국 어선을 끼고 내려오고 있었다.

    52분=해군은 북한 경비정에 무전으로 경고 통신을 보냈다.

    남:"현재 NLL을 침범 중이다. 지금 즉시 310도로 변침(방향을 바꿔) 북상하라. 북상하지 않으면 발포한다."

    오후 4시54분 해군은 684호에 함포 두발을 경고 사격했다. 곧 북한 경비정으로부터 두번째 송신이 왔다.

    54분=북한 경비정은 "한라산 둘, 백두산 둘. 지금 남하 선박은 중국 선박인데 빨리 ○○해역에 있는 귀선(우리 측 함정)을 변침해 남하하라"며 거꾸로 퇴각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 경비정은 통신 직후 기수를 북으로 돌렸다.

    56분=북한 경비정이 우리 함정에 3차로 송신했다.

    "한라산 둘, 백두산 둘, 그쪽 선박이 지금 군사분계선(북측이 주장하는 해상경계선) 1마일을 침범했다. 빨리 내려가라"고 다시 요구했다.

    북한은 다음날인 15일 전화통지문을 보냈다.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의 북측 단장 안익산 소장(준장급) 명의였다. 통지문에서 북한은 송신 시간을 실제보다 10분 앞당긴 허위 시간을 통보했다. 북한 경비정이 무전을 보냈던 시간을 오후 4시51~56분이 아닌 오후 4시41~45분으로 알린 것이다. 통지문은 또 "우리가 세차례 호출했는데도 남측이 응답하지 않았다"며 "남측이 제3국 선박을 우리 측 어선이라고 하면서 우리 수역에 남측 함정을 침입시켜 경고사격하는 도발을 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등산곶 684호는 14일 NLL 침범 당시 남측에 위치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기지와 통신을 거의 하지 않았다. 북한 경비정은 평소엔 1~5분 간격으로 기지와 무선 통신을 한다. 군 정보당국은 이에 따라 등산곶 684호가 처음부터 NLL을 무력화하려는 치밀한 계획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분석했다.

    김민석.박신홍.채병건 기자

  • [중앙일보] 기사 본문 읽기

    2004.07.20 06:24 입력
  • 포스트 제어

    | 메일 | 인쇄

    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목록 넘겨보기

    이전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