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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60회] 안창호,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60회] 안창호,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11장] 추모의 글과 회고, 평가 2013/05/08 08:00 김삼웅
안창호, 그는 누구인가. 많은 지인, 측근, 연구가들이 이렇게 평한다.

“늠름한 체격과 성실한 인품”
“외유내강과 인자한 마음”
“탁월한 두뇌와 정연한 논리”
“고결한 인격과 겸손한 자세”
“정직한 마음과 깨끗한 처신”
“양보정신과 협동정신”
“무실역행과 자력갱생”
“태산동명의 웅변과 심연같은 침묵”
“원대한 구상력과 탁월한 조직력”
“절망을 모르는 낙관주의”
“준엄한 비판과 따뜻한 포용”
“지행일치와 실천궁행”

그의 말은 살아 있다, 그리고 묻는다

안창호의 각종 연설문, 자료집에 나오는 아포리아를 모았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痛悔)하라.”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君父)의 원수는 불공대천이라 했으니, 평생에 죽어도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하리라.”
“우리 청년이 작정할 두 가지가 있소. 하나는 속이지 말자. 둘째는 놀지말자. 이 말을 매일 주야로 생각하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 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 청년은 태산 같은 큰 일을 준비합시다. 낙심 말고 겁내지 말고, 쉬지 말고, 용감하고 담대하게 나아갑시다. 총독부나 (일본군) 사령부라도 당돌히 출입하는 청년이 되세요. 죽을 작정하고 담대하게 일합시다. 사투(死鬪)에 겁(怯)하고 공수(空數)에는 용(勇)하시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묻노니 여러분이시여! 당신은 대한사회의 주인입니까? 손님입니까?”
“나라가 없고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 받을 때에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 없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백성의 병고를 불쌍히 여기거던 그대가 먼저 의사가 되라. 의사까지는 못 되더라도 그대의 병부터 고쳐서 건전한 사람이 되라.”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동지를 믿으라, 믿고 속아라.”
“마음 놓고 믿는 동지가 있다는 것처럼 세상의 행복이 또 어디 있으랴.”
“죽더라도 동포끼리는 무저항주의를 쓰자. 때리면 맞고 욕하면 맞자. 동포끼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대하자.”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우리는 각기 자기 허물만 스스로 고칠 뿐이요. 결코 남의 일에나 허물에 개의치 말자.”
“모진 돌이나 둥근 돌이나 다 쓰이는 데가 있는 법이니 다른 사람의 성격이 나와 같지 않다고 나무랄 것이 아니다.”
“먼저 힘써 일하고 그 후에 도와주기를 기도하라.”
“우리 민족은 서로 사랑하는 민족이 되자. 서로 사랑하면 살고 싸우면 죽는다.”
“나 하나를 건전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의 길이다.”
“내가 이에 간절히 부탁하는 바는 이것이외다. 여러분은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이 말이외다.”
“힘은 건전한 인격과 공고한 단결에서 난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그러므로 인격 훈련과 단결 훈련, 이 두 가지를 청년제군에게 간절히 요구하는 바이다.”
“후리는 어디를 가든지 정의돈수 네 글자에 의지해서 삽시다.”
“책사도 학교다. 책은 교사다. 책사는 더 무서운 학교요 책은 더 무서운 교사다.”
“천병만마를 쳐 이기기는 쉬우나 내 습관을 이기기는 어려운 일이니, 우리는 이 일에 일생을 노력해야 한다.”
“역사에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죄다.”
“거짓말 잘하는 습관을 가진 그 입을 개조하여 참된 말만 하도록 하자. 글 보기 싫어하는 그 눈을 개조하여 책 보기를 즐기도록 하자.”
“얼렁얼렁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했다. 우리의 최선을 다하더라도 최선 되기 어렵거늘 하물며 얼렁뚱땅으로 천년 대업을 이룰 수 있는가.”
“남더러 합하지 않는다, 편당만 짓고 싸움만 한다고 원망하고 꾸짖는 그 사람들만 다 모여 서 합동하더라도 적어도 몇 백만 명은 되리라.”
“오늘날 우리가 요구하는 합동은 민족적 감정으로 하는 합동이 아니요. 민족적 사업에 대한 합동이다.”
“어떤 신이 무심중에 와서 홀출 내게 묻기를, ‘너는 무엇을 하느냐’ 할 때에 ‘나는 아무것을 하노라’고 서슴지 않고 대답할 수 있게 하라.”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의 인민이니 결코 노예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를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자의 양심과 이성뿐이라야 할 것이다. 결코 어떤 개인이나 어떤 단체에 맹종하여서는 아니 된다.”
“은둔하는 것이 내 일신으로 보면 가장 편안한 일이다. 내 쇠약한 건강상태로 보아서도 그러하지마는 내 심신에 아직 활동할 기력이 남아있고, 우리 민족의 현상이 우려할 형편에 있는 이때에 제 일신의 편안이나 명성을 위하여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리는 것처럼,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독립국의 열매가 있고, 노예될 만한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망국의 열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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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59회] 지인ㆍ연구가들의 평가 ⓷

[59회] 지인ㆍ연구가들의 평가 ⓷

[11장] 추모의 글과 회고, 평가 2013/05/07 08:00 김삼웅
“자식들에게 연필 한 개도 못사줘”

그는 만 23세에 결혼한 지 36년 후에 가셨는데, 그동안의 13년 간, 즉 결혼생활의 1/3만 가정생활을 하였다. 남은 2/3의 세월은 모두 나라를 위하여 바치신 것이다. 사실상 가정에 있을 때에도 국민회와 흥사단 일을 위하여 출타한 사실이 매우 많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그래서 1925년에 상해에서 미국으로 돌아오셨다가 1년 후에 다시 중국으로 떠나실 때 그를 위한 송별회 서상에서 “나는 자녀들에게 연필 한 개도 사주지 못해서 미안해 ⋯.” 하는 말씀을 할 때에 좌석에선 흑흑 눈물을 흘리는 친구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주석 17)

“성실한 진리탐구의 구도자 같아”

도산이 호수돈을 찾아온 사연을 조용히 말하였다. 서울의 여러 여학교를 알아보았더니 어느 학교고 조선의 딸로 길러달라고 마음놓고 맡길 데가 없다고 탄식하면서,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최종적으로 송도의 호수돈을 찾아왔노라고 하면서 어렵겠지만 자기의 소청을 들어 그 아이의 전학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특히 송도의 여성들은 다른 곳의 사람들과 달리 검소하고, 규모있고, 참을성도 있고, 또 지조도 높다고 거듭 칭찬하면서 호수돈여고의 교육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 도산은 우람한 체격도 아니었고 두 눈이 남달리 빛나는 특별한 면모도 아니었다. 나의 첫 인상으로는 성실한 진리 탐구의 구도자와 같이 느껴졌다. (주석 18)

“애국적 지도자의 표상이다”

필자는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무수한 애국자의 행적을 추적할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문헌 속에서나마 많은 애국자는 만날 수 있었지만 애국적 지도자는 만나기 힘들었다. 험난한 독립운동의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민족의 통일전선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또, 그를 위하여 포용적 잣대와 자질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는 애국자는 되어도 지도자로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1920년대 중국에서 통합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와 유일당운동을 주도하면서 그리고 애국의 소리를 남발하지 않으면서 독립운동진영의 통일에 심혈을 기울였던 도산의 뜻과 그림자를 오늘 되새겨서 우리가 당면한 통일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을 강조해 두고 싶다. (주석 19)

“훌륭한 지부자요 내조자인 이혜련 여사”

여기서 불가불 언급하고 싶은 인물은 도산의 첫 도미 때 19세의 젊은 나이로 서둘러 성혼, 동행하여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로 오가며 반세기 이상의 생애를 보내며 도산을 한 시대의 출중한 애국자로 내조하면서도 3남 2녀를 훌륭하게 생육, 도산 가정을 번창시킨 이혜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도산이 도미 5년째인 1907년 국사를 위하여 자신과 자녀를 그대로 둔 채 환국하려고 할 때, 그의 애국심을 알고 “당신은 애국자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대로 활동하시오” 라고 하면서 흔쾌히 승낙하여 보낸 지부자(知夫者)이며 내조자였다. 36년 동안의 결혼생활 중 동거는 미주에서 전후 14년이고, 도산이 동지들의 도움도 입었겠지만, 청빈한 제반 가사는 자주성사시켰다. (주석 20)

“연구해야 할 도산의 여러 측면”

우리가 연구해야 할 도산의 여러 측면이 있다. 교육자로서의 도산, 정치가로서의 도산, 혁명가로서의 도산, 민주주의자로서의 도산, 민족주의자로서의 도산, 웅변가로서의 도산, 문필가로서의 도산, 사업가로서의 도산, 전략ㆍ전술가로서의 도산, 조직의 명수로서의 도산, 종교인으로서의 도산, 수양인으로서의 도산, 생활 예술가로서의 도산,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또는 가정인으로서의 도산 등등, 여러 각도에서 도산을 볼 수 있다. (주석 21)

“대동단결 통해 독립전쟁 준비”

도산의 민족운동론은 헤게모니 우선 장악이 아닌 민족분쟁을 조정함으로써 민족의 ‘힘’을 키워 반드시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907년 신민회 활동 이후 1938년 사망하기까지 한편으로 변화와 정세를 수용하기도 했지만 그 운동론은 시종일관한 면이 강하다.

1910년 대 독립운동기지건설론운동, 1919년 연통제, 교통국 설치, 임시정부 통일운동, 국민대표회의 준비, 민족유일당운동의 전개, 1926년 자치론 배격,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상호모순을 극복하고 중도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대공주의 주창, 한국독립당 결성, 이상촌운동의 전개 등등, 도산은 대동단결을 통해 국민적 기반을 마련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준비하였다.

이들 운동은 실패하고 또 다른 시도를 거듭했지만 이 과정에서 통일전선운동을 주재해 나간 도산의 역사적 경험은 독립운동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주석 22)

“일본 자본주의부터 먼저 타도”

1930년 이후 안창호와 함께 항일 투쟁에 참여해온 구익균은 안창호를 ‘사회민주주의자’로 한다. 한국독립당의 당의ㆍ정강에 있어서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다분하다는 평가였다. 안창호는 1932년 4월 원동흥사단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에 있어서는 계급 운동자도 민족해방을 요구하게 된다. 우리도 계급운동(혁명)을 할 마음이 있다마는 그것을 달하는 데는 조선은 자본주의가 발달 못된 나라라 자본가를 타도하는데도 일본 자본주의를 타도하여야겠다. 우리는 계급혁명을 반대하지 말자. 우리도 그것을 하면서 반대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만일 해되는 점이 있으면 반대하자. 우리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태도를 가지지 말자.

이 발언을 액면대로 받아들여 안창호가 한때 사회주의를 수용한 것처럼 인식하는 것은 단견이 될 것이다. “당면의 과제인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주의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는 주장인 것이다. (주석 23)

“사회주의자 아닌 연대의 필요성 주장”

안창호는 분명히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안창호의 입에서 통일전선이라는 말이 나온 적도 없었다. 그러나 안창호는 사회주의에 대해 공감하고 사회주의 운동과의 연대의 필요성을 인정한 인물이었다. 안창호에 대한 총체적 평가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마져 포괄할 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주석 24)

“흥사단계열, 자유민주국가 건설 기초 놓아”

흥사단 계열은 20세기 전반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지식인 집단으로, 해방후 미군정에 대거 진출하여 각종 정책을 입안하면서 자유민주국가 건설의 기초를 놓았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8.15해방을 민주주의 연합국의 승리로 주어진 해방으로 인식하고, 민족의 자아혁신과 실력양성을 통해 완전독립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완전독립을 위한 민주건국의 요체로 자아혁신을 통한 신생활운동을 제창하였다. 국민 의식수준의 향상이 없이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하다는 공통된 인식에서였다.

그러나 자유의 사회적 허용 기준, 해방정국의 우선과제, 남한 단독정부 수립 등의 문제를 놓고는 내부에 도산우파와 도산좌파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의 입장 차이가 나타났다. 예컨대 조병옥ㆍ정일형 등은 자유수호를 우선의 가치로 내세워 반공주의를 정당화하고, 가능지역의 총선거를 통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지지하였다. 반면 김붕준ㆍ오기영 등은 만인의도덕적 자유와사상의 자유를 앞세워 냉전적 반공주의를 비판하고, 남북좌우가 통일단결하여 완전독립을 이루는 것이 우선의 과업임을 강조하였다. (주석 25)


주석
17> 한승인, <내가 만난 잊을 수 없는 사람들>, 221쪽, 일월서각, 1988.
18> 유달영, <소중한 만남>, 123 ~ 124쪽, 솔, 1998.
19> 조동걸, <중국에서 도산의 독립운동>, <도산 안창호의 사상과 민족운동> 122 ~ 123쪽.
20> 윤병석, <도산 안창호의 사상과 민족운동>, 앞의 책, 101 ~ 102쪽.
21> 안병욱, <도산사상> 346쪽, 대성문화사, 1970.
22> 이명화, 앞의 글, <도산 안창호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연구 동향>, 270 ~ 271쪽.
23> <원동흥사단의 당연 공작>, <흥사단보> 제18권 5호(1932).
24> 이준식, <안창호와 사회주의>, <도산학연구> 제13집, 2010. 앞과같음
25> 장규식, <미군정하 흥사단 계열 지식인의 냉전 인식과 국가건설 구상>, <한국사상사학> 제38집, 245~246쪽,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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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58회] 지인ㆍ연구가들의 평가 ⓶

[58회] 지인ㆍ연구가들의 평가 ⓶

[11장] 추모의 글과 회고, 평가 2013/05/06 08:00 김삼웅
“합리성과 논리성 중시하는 지도자”

도산이 매사에 그 합리성과 논리성을 찾은 것은 철저했다. 그가 개혁에 앞장서고 근대화에 선각자가 되었지만 이것은 기존한 제도와 습성에서 언제나 늘 그 불합리한 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민주주의의 실천자이었지만 이것은 이러한 원칙 위에서만 인간관계의 합리성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이 적다고 해서 되는대로 해치우거나 즉흥적으로 하는 습관을 버리라고 했다. 일이 크거나 적거나 이것은 반드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써서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고로 도산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했을 것이냐 하는 것을 헤아려 보는 데 있어서 가장 도움 되는 열쇠는 그의 이지성(理知性)을 혹은 그 논리성을 주도하게 따져 나아가는 데 있을 것이다. (주석 11)

“임정수립하고도 장관의 하위직 원해”

도산이 뜻만 있다면 최고의 직위를 맡을만큼 중인(衆人)의 숭앙을 받고 있었으나 도산에게는 명리를 도외시하는 인격과 아량이 충만하였다. 백범이 문지기를 원한 태도와 같이, 하필이면 장관의 하위직인 노동국총판에 만족해하는 태도를 보아도 도산의 위인다운 인격을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사실 임시정부를 탄생시키고 그 기초를 완비시킨 어른들 중에 그 공을 평가하려면 도산을 먼저 손꼽아야 할 것이다. 미국을 떠날 때 자금을 지니고 임한 것, 연통제 조직, 독립신문 창간, 인화공작(人和工作)으로 중인을 포섭하는 것 등등은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대외교섭에 있어서도 거룩한 영향을 끼쳤다. (주석 12)

“도산을 간디같은 인물로 만들지 말라”

지금 국내에 있는 여러 동지 중에 도산을 간디같은 인물을 만들기로 생각하는 이가 있는 줄 알지만 나의 부탁은 제발 도산을 간디 같은 인물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오. 도산은 간디가 알지 못하고 내어놓지 못한 흥사단주의를 내여세우고 우리에게 유전하였습니다.

간디가 무엇이오. 손일선(손문)이 삼민주의를 말하였지만 중국 민족이 도산이 세워놓은 주의주장을 유구하는 것이지마는 손일선이 쓰지 못할 것이오.

도산이 삼군(三軍)을 몰고나가서 일본을 향하여 전쟁할 것을 몽상하였고, 워싱턴과 같이, 링컨과 같이 이유(理由, reason)을 위하여 일하려는 인물인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주석 13)

“위장친일 따위 상상도 못해”

일제 말기에 도산이 살았으면 창씨를 하였을까. 한국 젊은이들을 징병하라는 연설을 하면서 돌아다녔을까. 장황한 설명을 요하지 아니한다.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창검을 목에다 대고 강요를 하였을지라도 절대로 응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도산은 위장친일이나 위장아부를 상상조차 아니 하였을 것이다.

내가 흥사단 정신으로 살았는가를 알자면 같은 경우에 도산은 어떻게 하였을까를 대조해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우리 중에는 흥사단 정신과 목적대로 사는 사람도 있거니와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나는 애석하게도 후자에 속한 사람임을 자탄한다. (주석 14)

“공리망담보다 돌 하나씩이라도”

쓸데 없이 하늘과 바람을 잡는 공론망담보다 일토석(一土石)과 반행보(半行步)라도 무실역행주의(務實力行主義)에 치중하였다. 도산은 이 주의를 일반 학생에게 실행시키기 위하여 아침 상학 때마다 반드시 돌 한 개씩 가져오기를 지시하였다. 평양은 도회지라 돌 한 개도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학생들은 하는 수 없이 야간에 성밖에까지 가서 준비하였다가 아침마다 가져가게 되었다.

아침마다 상학하는 400명의 학생이 돌 한 개씩 가져오는 풍경은 과연 장관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몇 주일 되지 않아서 쌓인 석탑(石塔)은 작은 모란봉이 세 개나 이루어졌다. 그후 대강당 건축 때에 그 주위의 긴 담은 전부 그 돌로써 쌓아서 후일까지 그 적공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였다. (주석 15)

“최창학의 100만원 돌려주기도”

상해임시정부를 조직할 때에 미국 동포들이 도산의 전보 한 장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에 당장에 2만 5천불이라는 대금을 보내준 것이다. 그들이 만일 도산의 인격을 믿지 아니하였다면 송금을 주저하였을 것이다.

서재필의 “도산은 돈에서 깨끗하지”라고 한 말은 재미 교포사회에서 유행담 같이 알려져 있다. 1936년에 최창학이가 야밤중에 도산을 찾아와서 “민립대학을 세워주십시오” 하고 일금 1백만 원을 내놓은 것도, 천하 깍쟁이라는 별명을 듣는 그가 도산의 인격을 100%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도산은 일본 총독부에서 자기가 민립대학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할 터이니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주석 16)


주석
11> 장이욱, <도산의 인격과 생애>, <기러기> 제14호, 1968.
12> 이강훈 편저, <청사에 빛나는 순국선열들>, 607~608쪽, 역사편찬회, 1990.
13> 곽림대, <안도산 (직해)>, <전집> 제11권, 전기1, 674쪽.
14> 한승인,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 936쪽.
15> 일문하생(一門下生), <안도산의 교장시대>, <전집> 제2권, 299~230쪽,
16>  한승인, 앞의 책,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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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57회] 지인ㆍ연구가들의 평가 ⓵

[57회] 지인ㆍ연구가들의 평가 ⓵

[11장] 추모의 글과 회고, 평가 2013/05/05 08:00 김삼웅
안창호의 거대한 생애와 위대한 업적을 한 두 마디로 압축한다는 것은 무리다. 마치 백두산이나 한강수를 한 두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움과 비슷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굳이 허용된다면 ‘민주적 민족주의자’ 라는 평가에 동의한다.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청천하늘의 별들과 같은 뭇 성좌가 자리잡고 있다. 모두 나름의 애국심과 철학과 리더십으로 숱한 고난을 극복하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제국주의가 판치는 시대적 상황과 적지 또는 외국이라는 공간적 한계에서의 독립운동은 각별한 신념과 실천행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 한계 속에서도 안창호는 민주주의적 이념과 실천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민회의 창설로부터 공립협회 조직, 임시정부 운영에 이르기까지, 그는 민주주의의 방식을 도입하고 실천하였다. 안창호 전기를 쓴 한승인의 분석이다.

“철두철미 민주신봉자다”

도산은 철두철미 민주주의 신봉자라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미국에서 20대 약관으로 친목회, 공립협회 등을 조직할 때부터 임원선거, 중요 안건 통과에는 반드시 투표를 통하여 결정하였고, 한국에서 신민회, 기타 모임에서도 민주주의 방법인 투표로 모든 중대사를 결의할 것을 주장하고, 그대로 실시하였다. 아마도 한국에서 단체의 일에 민주주의 원칙을 채용한 사람은 첫째가 서재필이고 다음이 도산일 것이다. 이 두 분은 독립협회 시절부터 미주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존경하고 친근하게 지낸 좋은 동지였다.

안창호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은 ‘제도적 민주주의’에 그치지 않는다. 국민의 주권의식에서 그 가치를 찾았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현대민주주의적인 인식이었다. (주석 5)

“민주적 민족주의자다”

오랫동안 흥사단 단원을 지낸 전 연세대 총장 백낙준의 평가다.

나는 도산의 정치사상을 국가 주인의 민주적 민족주의라고 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민주적 민족주의라는 생각이다. 도산의 유명한 말에 “당신은 우리나라의 주인인가?”, “내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책임을 지자”는 뜻의 말도 있다. 모든 국민은 자기의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주인 의식으로 봉사하고 책임지라는 교훈을 도산은 청년들의 교훈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주석 6)

“깨끗하고 고결한 인격자다”

안창호처럼 공사생활에서 깨끗한 지도자도 흔치 않을 것이다. 청교도적인 도덕주의와 자신의 철학인 흥사단정신, 그리고 대공주의와 독립운동가로서의 민족사랑은 모두 청결한 도덕성에서 발원한다. 언론인 송건호의 지적이다.

사실 도산의 생활은 깨끗했다. 그의 가정은 평생 셋방살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한 생활이었다. 모든 정력을 민족을 위해 바친 도산으로서는 가정을 돌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산은 여성문제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깨끗했다. 미국생활에서 처음 돌아왔을 때 아직 나이 30 전후였던 그는 서울에서 이미 유명해져 있었으며 그래서 하루는 도산을 사모하는 한 기생이 그와 더불어 가정을 꾸밀 것을 꿈꾸어 하다못해 하룻밤 사랑이라도 나누고자 구애를 했으나 도산의 부드러운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중국 남경의 어느 여학교 졸업반인 한국인 여학생의 열렬한 구애를 받았으나 타일러 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도산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깨끗했고 고결한 인격자였다. (주석 7)

“단우 중 친일행적자 어찌할 것인가”

일제 강점하에서 흥사단은(…)민족주의적인 독립운동은 물론 반봉건적 입장에 서서 민족운동을 전개했는가 하는 점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흥사단은 해방 후 일제 잔재 청산에 앞장섰는가 하는 점과 군사독재에 항거하면서 인권ㆍ민주화에 헌신하였는가, 그리고 분단을 극복하기위한 통일운동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가지고 흥사단을 평가해볼 수 있을 것이다.

흥사단 운동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금요강좌와 기관지를 통해 4ㆍ19민주혁명에 기여한 역할이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와 함께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인권ㆍ민주화 운동에 관여한 점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 불붙기 시작한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서북계가 많다고 지적되는 흥사단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해방 후 흥사단원 중에는 일제의 잔재청산의 대상인 사람이 있었다. 그럴 때 흥사단 개인 단우로서가 아니라 흥사단이라는 기구가 일제 잔재 처난 문제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흥사단 운동을 민족사와 관련시키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물음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아울러 흥사단은 단우중 친일행적을 남긴 분들에 대해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에 대해 해명도 충분히 필요하다고 본다. (주석 8)

“통일조국의 스승으로서의 도산”

개항 이후 오늘에 이르는 수난과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의 노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민족문제를 안고 씨름하며 스러져 갔다. 그러나 그 가운데 도산만큼 이름과 빚이 지속되고 있는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도산의 경우 그럴 만한 여러 이유와 요인이 있지만 그 중 한 요인으로 흥사단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흥사단은 도산의 정신과 사상의 태내로부터 나온 도산사상의 정신적 분신이다. 그래서 해방 이후 정치사회적 혼란과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혼돈 속에서도 도산정신은 흥사단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더욱이 분단시대를 마감하고 민족통일시대를 전망하는 시대를 맞이하며 도산정신과 사상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 분명하다. 분파와 파쟁으로 얼룩진 독립운동사에 도산만큼 통일지향적인 노선을 걸으며 구체적으로 이를 실천에 옮긴 인물은 별반 많지 않다. 따라서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남북 대치국면을 극복할 통일운동의 이념으로서 도산과 그의 정신은 더욱 주목될 것이다.  (주석 9)

“지도자의 자기반성”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난경에 당면한 우리 국민 각개가 또는 지도층으로 자처하는 모든 인사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할 때에 입으로는 얼마나 애국 애족을 부르짖고 실제에 있어 얼마나 이를 궁행(躬行)하느냐, 스스로 참괴할 점이 없을 것인가, 개인 개인이 사리(私利)에 급급하고 준법을 경시하여 병역을 기피하며 납세를 속이려하고 암거래를 심상히 여기며 공공시설을 도용하며 정실과 뇌회(賂賄)에 몰두하며 사치와 방종을 자랑삼는 등 도도한 탁류에 상급할 때에 실로 국가전도를 위하여 개탄하지 않을 자가 누구이런가. 스스로 돌아보고 자괴함이 없을 자 과연 몇 명이런가.

도산의 정신을 살려야 할 때는 곧 지금일 것이다. (주석 10)


주석
5> 한승인, 앞의 책, 258쪽.
6> 백낙준 <위인 안도산의 진면목>, <나라사랑>, 제39집, 33~34쪽, 외솔회, 1981.
7> 송건호, <안창호>, <한국현대인물사론>, 229쪽, 한길사, 1984.
8> 이만열, <흥사단과 민족>, <도산학 연구>, 제9집, 39~40쪽, 2003.
9> 윤경로, <도산연구의 새 지평을 위한 사례연구>, <도산사상연구> 제4집, 247쪽, 1997.
10> <지도자의 자기반성>, <민주신보>, 1953년 3월 10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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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56회] "안도산 선생 애도문" - 김구

[56회] "안도산 선생 애도문" - 김구

[11장] 추모의 글과 회고, 평가 2013/05/04 08:00 김삼웅

환국직전 김구 선생 ⓒ 눈빛아카이브

대한민국 30년 3월 10일에 김구는 삼가 고 도산 안창호 동지 선생 영전에 수언(數言)을 올리나이다.
선생이여!
거금 15년 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해에서 적괴(敵魁) 백천(白川) 등을 박살함으로써, 찬란한 세계역사의 한 페이지를 창조하던 그날에 우리는 선생을 적에게 빼앗겼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승리의 소유자가 된 그 쾌미와 그 영광을 끝없이 느끼면서도 선생을 잃은 불행을 회복하려고 우리의 최선을 다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척에 있는 왜 영사관에서 선생을 구출하려고 우리의 뇌즙을 짜볼대로 짜보았던 것입니다. 이 운동에 있어서는 지금 우리나라 서울에 와있는 미국 친우(親友) 피치 선생 부부의 노력이 자못 컸던 것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실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동은 필경 수포로 돌아가고 선생은 적의 부로(俘虜)가 되어 한 많은 고국에 돌아와 영어(囹圄)의 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왜적을 타도하고 자유로운 조국강토 위에서 선생을 맞이하고자 주소(晝宵)로 상제께 선생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였더니, 천(天)이 불우함이었는지 우리의 악운이 미진함이었는지 선생은 드디어 적의 독해를 입어 옥중에서 거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입국하기는 선생이 서세(逝世)하신 후 7주년이었습니다. 우리는 입국한 그때부터 동포들과 손을 맞잡고 선생의 미진한 유업을 완성하고자 분투노력하였나이다. 그러나 이룬 것이 하나도 없이 이제 동지들과 함께 선생의 거세 10주년을 맞게 되니 한갓 무량한 감회만 금할 수 없나이다.

선생이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것을 십 분으로 보면 그중 칠분은 우리의 애국적 선열선현(先烈先賢)들의 혈한(血汗)일 것이요, 그 7분 중에는 선생의 노력이 또한 중요한 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다언(多言)을 요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 최후의 3분이 우리의 힘으로 되지 못한 까닭에 우리의 해방은 사전 상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 될 기괴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해방이 왜적을 구축(驅逐)하여준 것만은 감사한 일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통일과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분열과 구속과 불행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해방의 환희도 벌써 지나간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선생이 누워 계시고 이 몸이 붙이어 있는 남한의 정세를 볼지라도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날마다 늘어가는 것은 실업자뿐입니다. 이 겨울을 지내는 동안에 서울 안에서만 강시(殭屍)가 61명인데 그들은 거의 다 전재동포(戰災同胞)라 합니다. 그 외 행려병사자가 금년 1월 한 달 동안에만 111명이라 하는바, 이것은 작년 1월중 70명에 비하여 41명이 격증된 것이며, 작년 1년도 599명에 비하여 벌써 5분지 1의 놀랄만한 숫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가련한 농촌의 동포들은 과분한 공출에 신음하고 있으되 식량의 부족은 의연히 도처에서 위협을 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설상가상으로 모 기관 모 단체에서 가지가지의 명목으로 나오는 가연(苛捐)은 향촌과 도시의 빈곤한 동포를 울리고 있습니다. 근로동포들은 공장에서 종일 노역하되 호구도 극난한 형편입니다.

학교는 문이 열려있으되 교수는 부족하고 부담금은 과중하여 순진하고도 정열에 타오르는 청년 학생들의 가슴을 초조하게 하고 있습니다. 발전소는 여러 곳에 있으되 석탄 부족으로 인하여 최대한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북한의 부족한 공전(供電)만 의뢰하고 있는 까닭에 전등과 동력은 정돈(停頓)되는 때가 더 많습니다. 지하에 석탄은 상당히 매장되었다 하나 이것을 힘껏 채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장은 불소(不小)하게 있으되 이것을 운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철로의 증설은 고사하고 있는 열차도 운휴 통고뿐입니다. 화폐의 정리는 고사하고 지폐는 필요한대로 찍어내기만 합니다.

모리배는 탐관오리와 구결(勾結)하여 경제를 교란하며 가련한 세민(細民)들의 피를 빨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물가는 기하급수로 올라만 가고 있습니다. 그중에도 가장 큰 결함은 과거에 왜적에게 가장 충량(忠良)하던 주구배・부호배 등 특수계급의 등용입니다. 그들은 최근 수년간에 벌써 군정에 반근착절(盤根錯節)하여 가장 견고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므로, 이제는 군정당국이 그들을 좌우하기보다 그들이 군정당국을 좌우하게 되었으므로 만일 군정당국이 그들에게 단호한 처단을 하고자 할진대 치안까지 고려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군정당국이나 일부 우리 지도자간에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처단은 한인의 독립정부가 성립된 후에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상 그들이 여하한 명목이라도 가차하여 통일된 독립정부, 더구나 애국자로서 조직된 정부의 수립을 방해할 것은 자연한 논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미국의 정책이며 하지 장군의 진의리까마는 이것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인대야 어찌 하겠나이까? 그러므로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독일에서도 일본에서도 다 진보와 발전이 있으되, 오직 우리 한국에서만 수년 동안에 하등의 향상이 없는 것이 무리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가보지 못하는 북한에도 장단이 각유(各有)하겠지만 다수한 동포가 남하하는 것을 보면 남한보다도 더욱 참담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미소공위에서 이 모순이 해결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미소공위는 도리어 우리에게 신탁을 강요하다가 영용한 우리 애국동포의 분노와 반대로써 실패되었습니다. 이에서 실망한 우리는 UN의 정의의 발동으로써 정당한 해결이 있기를 간망하였습니다. 과연 UN에서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관면당황(冠冕堂黃)한 결의안을 통과하고 그 결과로써 임시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한 것입니다. 과연 그 위원단 의장 메논 씨는 그 위원단을 대표하여 환영회 석상에서 혹은 방송국에서 우리에게 굳은 언약을 하였습니다. 말하기를 ‘하나님이 합한 것은 사람이 나눌 수 없다’ ‘통일이 없으면 독립이 없다’ ‘이번에 38선은 기어이 철폐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1개월 후에는 그것을 잊어버린 듯한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북한에 입경(入境)하겠다는 서한 1통을 보낼 뿐, 입경거부가 있은 후에는 하등의 성의 있는 노력도 없었습니다. 노력이 있었다면 뉴욕을 내왕한 것뿐이었고, 성공이 있었다면 자기가 파키스탄의 분열에서 맛본 고통을 우리에게 맛뵈려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분열공작을 성공하는데는 미국인이 제조한 ‘북한에서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요언이 상당한 효과를 내었다는 것까지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중에도 우리와 가장 길게 환난을 같이 함으로써 친교가 깊은 중국의 대표가 남한의 단선을 주장하여서, 한국을 재할(宰割)하는 것을 국제적으로 합리합법화 하려하는데 노력할 줄은 몽상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중국의 내란은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고 중국의 위신을 국제적으로 추락시키고 있거늘 우리 한국에 동양(同樣)의 화근을 심을 필요야 어디 있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비율빈(比律賓) 대표가 우리 한국에 미국의 육・해군 기지를 건설하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워싱턴 7일발 UP통신에 의하면 해지(該地) 소식통의 전언으로써, ‘남한정부 수립 후에라도 일정한 기간은 미국의 보호를 계속하리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더욱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면 남한의 전도는 불보다도 환하게 보이는 것이며 UN 임시위원단의 할 일이 무엇이라는 것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이지만, 특별히 동병상린의 처지에 있는 약소국 대표들이 이 공작에 중요한 배우로 출연하는 것은 우리로서 이해하기 곤란한 일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 못할진대 하필 우리 자손만대에 영원히 망각할 수 없는 원한이야 끼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선생이여! 그러나 이것도 감사하다고 수무족도(手舞足蹈)하는 수많은 무치지도(無恥之徒)가 우리 안에 있는 바에야 수원수구(誰怨誰咎)하오리까? 4국신탁이 싫다고 미소공위를 반대한 것이 애국자라 한다면 UN의 협조 하에 실시하려는 1국 신탁도 반대하는 것이 애국자일 것입니다. 소련만을 의존하는 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 조국을 분열하는 반역자라고 규정하면서 자기 자신이 남한 단정을 수립하려 한다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규정하여야 옳겠나이까? 옛날의 보호조약을 찬성한 것을 매국노라 규정한다면 앞으로 오는 보호조약도 방지하는 것이 당연히 애국자일 것입니다.

선생이여!
선생은 조국의 강토를 수호하고자 방방곡곡에서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려고 기피역진(氣疲力盡)하였던 것입니다. 망한 조국을 광복하기 위하여 만리이역에서 동분서치(東奔西馳)하다가 불행히 적의 포로가 되어 영어(囹圄)에서 생명까지 빼앗긴 줄을 단군의 자녀로서는 다 알고 있나이다. 그러나 선생의 위대한 정신과 영용한 전적을 체득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나이까? 오늘 이 자리에서 선생을 추모하는 자 중에서는 선생의 발자취를 밟고 나갈 동지가 얼마나 되겠나이까? 바라건대 삼천만 각개의 뇌수(腦膸)마다 선생의 위대한 정신을 주입하여서 조국의 통일과 독립이 완성될 때까지 영용한 투쟁을 계속하게 하여 주사이다.

선생이여!
옛날에는 조국의 비운이 당두하면 수운(愁雲)이 전토에 미만(瀰滿)한 중에서 혹은 통곡, 혹은 순사(殉死), 혹은 투쟁 등의 각종방식으로써 민족의 정기가 표현되더니, 지금에는 조국의 위기를 담소와 환희와 추종으로 맞는 자가 불소하나이다. 이러한 정시(正視)하지 못할 현상을 볼 때마다 김구도 일사(一死)로써 그들의 정신을 환기하고자 선생의 뒤를 따르고 싶은 맘이 불현듯이 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한갓 죽는 것보다는 잔명이 있을 때까지 좀 더 분투하는 것이 좀 더 유효할까하여 구차히 생명을 연장하고 있나이다. 이것이 행복한 듯한 때도 많으나 도리어 송구하고 고통스러운 때가 더 많습니다.

선생이여!
국난에 충신을 사한다 하였거니와 조국의 위기가 점점 박두할수록 위대한 지도자를 추모하는 심회가 더욱 간절하나이다. 그러므로 이날을 당한 우리는 애사(哀辭)를 베풀어 선생의 가신 것을 슬퍼하기보다는 선생에게 오늘의 우리의 처경(處境)을 하소연하여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원(懇願)하고 싶습니다.

선생이여!
선생의 영혼이 계시면 이날 이때에 평안히 누워 계시지 못하리이다. 김구는 도탄에 빠진 삼천만 동포, 그 중에도 특별히 38선 넘어 우리의 그리운 고향에 있는 가련한 동포를 대표하여 선생께 우리의 갈 길을 가르쳐 주시기를 간구(懇求)하나이다. 앞산에서 두견이 울면 선생이 부르시는 줄 알 것이요, 뒤창에서 빗소리가 나면 선생이 오신 줄 알 것이니, 꿈에라도 나타나서 우리의 갈 길을 일러주사이다.

선생이여!
강산도 의구하고 선생의 발자취도 완연하건만 선생의 영자(英姿)만은 찾을 길이 없으니 서글픈 가슴을 어찌 진정하오리까. 곤곤(滾滾)한 한강수가 다할지언정 면면(綿綿)한 차한(此恨)이야 어찌 끝이 있아오리까! (주석 4)

주석
4> 환국한 백범 김구가 1948년 3월 10일 서거 10주기를 맞아 발표한 추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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