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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29회] 부인에게 보낸 청절한 사연

[29회] 부인에게 보낸 청절한 사연

[7장] 국민대표회의 소집 주도, 결렬의 아픔 2013/04/07 08:00 김삼웅
안창호가 임시정부를 조직하기 위하여 상해로 올 때 부인과 어린 자식들은 미국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언제 죽게 될 지 모르는 전장에 가족을 동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계 문제의 해결도 단신으로 오게 된 배경이 되었다.

상해에서 활동하는 동안 가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가정적이었던 그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절절한 사랑의 정이 배이고, 자식들에 대한 애정은 보통 어버이와 다르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속사정 그리고 여러 가지의 사연이 담긴다. 띄엄띄엄 소개한다. (제목은 필자가 임의로 붙힌 것이다)

“식구들의 사진이라도 보내주시오”

나의 사랑 혜련. 우리가 서로 작별한 지가 달이 지나고 지나서 이제는 해가 지나였소이다. 나는 바쁜 것만 생각하여 도무지 편지하지 아니함으로 큰 빚을 진 듯이 괴로웠소이다. 그런데 해가 지나고 보니 더욱 미안하여 큰 죄를 진 듯이 고통이 되옵니다.

나를 충성으로 사랑하고 나를 깊이 생각하는 당신의 뜻을 위로는 못하고 도리어 괴롭기만 함을 생각하니 스스로 무정함을 책망하나이다. 당신은 너그러히 생각하여 용서하소서.

지금에 몸은 어떠하며 아이들은 어떠하옵나잇가? 지난 겨울에 과히 춥지 아니 하였나잇가? 지금도 그곳 부인들이 전과 같이 나라를 위하여 성충을 다하여 합심 총력하는지오? 내가 비록 편지는 하지 아니하였으나 날로 당신을 생각하고 아이들 보고싶은 마음을 그치지 아니합니다.

로스앤젤레스에 모든 것이 다 눈에 어리나이다. 식구들의 사진이라도 보내어 주시오. 나 능력없는 사람으로 한동안 큰 일을 혼자 맡아 가지고 지나었고, 여러분이 모인 후에는 좀 나을까 하였더니 다시 복잡하여 분주함이 일만이훼다. 내 평생에 처음으로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이곳 모든 형편은 잘 진위(鎭慰)하여 왔소이다. 그러나 앞길이 어려울까 하나이다. 본국 동포들의 열심을 전과 같다 하매 우리 조카딸 맥결이도 독립운동하다 20일 동안이나 갇히어 고생과 욕을 많이 보았다고 합니다. 강서댁에서는 흉년으로 큰 곤란에 빠졌다(하여) 김창세와 나와 합하여 돈 100원과 아이들의 의복감을 사서 보내었소이다.

내가 병원에서 류하다가 경비가 너무 많이 드는 고로 집을 잡고 밥은 한국 사람 집에 12원씩 주고 부쳐 먹습니다. 평안북도 강계군 사람 류상규라 하는 23세 된 청년이 이왕 영도와 같이 나를 극진히 도와줌으로 다행이웨다. 두 주일 전에 내가 심히 아픔으로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병원에 들어가 치료하였더니 지금은 좀 나음으로 다시 일을 하나이다.

김창세 군 집안이 다 평안하고 그 내외가 나를 극진히 위로하여 줌으로 위로가 많이 되오이다. 당신은 평생에 나를 멀리 보내 정신상 고생을 받았으런가? 이번에는 특별히 국가와 민족의 큰 일을 위하여 오해 받게 되었나니 당신은 국사를 위하여 스스로 위로하소서.

바쁜 가운데 되는 대로 써서 보내오니 편지를 자주 주고 사진을 보내어 주소서.

- 민족 2(1920)년 4월 22일 창호 (주석 10)

“당신을 떠난 것은 나 한몸 위함 아니오”

나는 편지를 아니하나 혜련이야 어찌 그럴수가 있을까 하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필립ㆍ필선ㆍ수산ㆍ수라가 매우 보고 싶으웨다. 이것들이 다 잘 있나이까? 어떤 때에는 다 데려와도 되겠다는 생각까지 불 일 듯하나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고 하니 참나이다. 내가 당신을 멀리 떠나는 것은 나 한 몸 무엇을 위함이 아니오, 오직 국가와 민족의 관계임을 당신은 잘 아는 바니 당신은 네 아이를 데리고 스스로 위로하여 지내소서, 나는 달 반 전에 몸이 편치 아니하여 홍십자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지금은 나았소이다. 병은 신체가 쇠약하고 뇌력이 약하여 일하기가 어려웠소이다. 지금은 많이 낫소이다.

내가 이왕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로 있을 때에는 여러 직원과 같이 복잡하게 지내였거니와 근간에 지내는 형편은 이러합니다. 부엌까지 다섯 칸 되는 집에 한 방은 내 침방으로 쓰고 한 방은 나를 주야에 같이 있어서 도와주는 류상규 군의 침방으로 쓰고 한 방은 내 사무실로 쓰고 밑층 한 방은 응접실 겸 사무실로 쓰는데 서기는 김복형 군이라 내가 상해에 왔을 때부터 내 서기로 늘 도와주었소이다. 또 심부름하고 보호하는 이 전재순 군이라는 이로 처음부터 오늘까지 충성을 다하나니 그런즉 나는 진실한 세 청년과 같이 관청 겸 가정을 이루고 지내고 밥은 밥하여서 파는 한국집에서 갖다가 먹는데 맛있는 집인 고로 싫지 않소이다.

- 민국 2(1920)년 4월 22일 (주석 11)

“두 딸이 기침으로 고생한다는데…”

나의 사랑 혜련.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당신의 편지를 오늘에야 받아 보았습니다. 내가 괴로울까 편지 아니하였다 하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편지 보는데 무슨 괴로움이 있을까요. 당신은 내 편지를 보면서 기쁘다 하면서 그러하니잇가? 인정이야 어찌 다르리오.

당신은 나를 잘 알지오. 본래 편지 쓰기를 좋아하지 않는 특성이 있지 않나잇가? 그러한 중 참 바쁘게 지내여서 편지를 자주 못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두 딸이 기침으로 고생하는 것이 애석하웨다. 필립은 그같이 컸다 하니 더욱 보고 싶소이다. 이번 편지에서 아이 말이 다 있는데 오직 필선의 말이 없으니 웬일이오잇가? 좋은 것이나 언짢은 것이나 다 바로 알려주시오. 이것이 부부간의 마땅히 지킬 ‘도’라 합니다.

나는 이즈음에 몸이 좀 편하웨다. 일은 다시 많아집니다. 우리 사람은 정도가 낮은고로 어데든지 이치에 불합(不合)하고 때에 맞지 아니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흥사단 주의를 철저하게 지키고 발전하여 내 몸과 마음으로 우리에게 의지하는 어린것들부터 개량하여 분명하고 건전한 국민을 양성하여야 되겠다 합니다.

- 민국 2(1920)년 5월 1일 창호 (주석 12)

“내 몸 위험에 들더라도 상심말고”

혜련, 나는 20년 동안 내 민족을 위하여 고생도 다소간 받았고 남의 시비와 의심도 받었다 하나 남녀 동포에게 믿음과 사랑을 받은 것은 더 많소이다. 그 믿음과 사랑을 무엇으로 보답할런지 스스로 황공하여 희생하는 것 하나밖에 없다 하나이다.

당신은 나를 항상 멀리 두고 외롭게 지내는 것이 참 아니되었소이다. 그러나 불쌍한 우리 동포를 위하여 잘 참고 스스로 안위하소서. 이번 일에 설혹 내 몸이 위험한 때에 들어가더라도 상심하지 말고 당신은 당신의 직분을 다하여 아이들을 잘 교육하여 그것들도 나라와 동포를 위하여 일하게 하소서.

당신도 좋은 서적을 자주 보시와 도덕과 지식을 더 늘리어 장차 교육과 자선사업에 락을 붙이어 일하게 되도록 예비하소서.

- 4253(1920)년 8월 3일 창호 (주석 13)

“얼굴에 주름 늘고 머리 흰털 많아지는데…”

오! 혜련! 나를 충심으로 사랑하는 혜련! 나를 얼마나 기다립니까? 나는 당신을 보고 싶은 생각이 더욱 더욱 간절하옵니다. 내 얼굴에 주름은 조금씩 늘고 머리에 흰털은 날로 더 많아집니다. 이제는 늙은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늙어감으로 혜심(慧心)이 드노라고 이런지 전날 보담 당신을 사모하고 생각하는 정이 더욱 간절하옵니다.

이왕에는 당신의 부족한 것이 많이 기억되더니 지금은 그 반대로 당신이 옳은 것을 기억하고 나의 부족한 것이 많이 생각나옵니다. 당신은 나를 만남으로 편한 것보다 고(苦)가 많았고 즐거움보담 설움이 많았는가 합니다.

속히 만날 마음도 간절하고 다시 만나서는 부부의 도를 극진히 하여보겠다고 생각도 많습니다마는 나의 몸을 이미 우리 국가와 민족에게 바치었으니 이 몸은 민족을 위하여 쓸 수밖에 없는 몸이라 당신에게 대한 직분을 마음대로 못하옵니다. 금년 안으로는 한 번 다니여 올 생각이 많습니다마는 어찌 될는지 모르겠나이다.

- 1921년 7월 14일 당신의 남편 (주석 14)

“힘없는 남편이라 괄시나 마소서”

전에도 말하였거니와 늙어감으로 그러한지 가정이란 생각이 점점 더 많아지는데 나의 사정은 그렇게 되지 아니합니다. 실로 답답할 때도 많으나 부모 처자를 영영 버리고 나라에 향하여 피를 흘리고 죽으신 많은 애국자를 생각하고 수다한 노인과 청년이 그 친족을 떠나서 만추리(만주)와 시베리아의 찬 바람에 고생하는 자들을 보고 스스로 억제하옵나이다.

슬프다. 나의 과거 평생을 돌아보고 현재를 생각하건데 집도 돕지 못하고 나라에도 큰 유익을 준 것이 없으니 두루 자책할 뿐입니다. 곧 미주로 돌아가고자 하나 내가 지금 돌아간다 해도 처음으로 가족을 대할 때에 난 좋다하려니와 돈도 없고 연약한 몸으로서 처자를 거두지 못할 것을 가나 아니 가나 일반일뿐더러 도리어 삯빨래하여 번 밥을 뜯어먹을 형편이라.

내가 원동에 온 지가 4년인데 장래 원동에 발전할 만한 기초를 세우지 않고 미주로 쑥 들어가면 오십의 백발을 날 터이라 다시 무엇을 하리오. 그럼으로 상당한 기초를 세워서 내가 죽은 후에라도 일에 발전이 있기를 위하여 오늘까지 주춤하고 있더이다.

혜련, 우리는 나라 망한 사람이라 무엇에나 만족이 있으랴? 그래도 우리 민족의 큰 사업의 기초가 세워지면 나는 아무 한할 것이 없고 크게 기뻐하겠습니다. 이번 국민대표회의나 지나고 내년 봄이나 여름에는 집에 다니어 오려고 하노이다. 그때에 힘없는 남편이라고 괄시나 하지 마소서.

- 1922년 11월 23일 안창호  (주석 15)

안창호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 몇 편을 골랐다. 사적인 사연 중에서도 그의 애국정신과 독립운동에 생애를 건 청절한 모습이 담담하게 전한다. 또 상해시절 그의 생활상과 고뇌, 임시정부 수립 초기 국무총리 대리로서 숙소와 관사의 모습이 역력하다. 남편으로서 4남매의 아비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한 애틋한 사연은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똑같이 겪었던 아픔이었을 것이다.


주석
10> <도산 안창호 서간집 - 나의 사랑 혜련에게>, 103~104쪽, 박재섭ㆍ김형찬 편저, 소화, 1999.
11> 앞의 책, 106~109쪽.
12> 앞의 책, 108쪽.
13> 앞의 책, 112~113쪽.
14> 앞의 책, 112~113쪽.
15> 앞의 책, 127~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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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28회] 개조파와 창조파로 대립되고

[28회] 개조파와 창조파로 대립되고

[7장] 국민대표회의 소집 주도, 결렬의 아픔 2013/04/06 08:00 김삼웅
회의가 계속되면서 독립운동의 방략과 시국문제의 토론에서 각 지방과 단체, 개인 사이에 이견이 대두되었다. 대별하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개편 보완해야 한다는 개조파의 주장으로 나뉘었다. 안창호는 개조파에 속하였다.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어 회의는 팽팽하게 열전을 펼쳤다.
3월 20일 이후에는 정식 회의를 그만두고 비공식 접촉을 가지면서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다. 공백기간이 지난 뒤 4월 11일부터 회의가 재개되었지만, 결국 다시 임시정부 처리문제로 돌아왔다.

63회 회의가 열린 5월 15일을 끝으로 양대 세력의 활동모임은 없었다. 결렬을 눈앞에 둔 6월 4일에 안창호ㆍ손정도ㆍ정신ㆍ왕삼덕 등 개조파와 신숙ㆍ윤해 등 창조파 및 김동삼이 합석하여 타협책을 마련하느라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마져도 결렬되었다. (주석 5)

안창호의 실망은 컸다.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해 추진해온 회의가 결렬되면서 실망과 함께 분노를 가누기 어려웠다. 공개회의 석상과 물밑에서 대표들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했으나 활동지역과 단체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는 한계에 도달하였다.

안창호는 이 회의에서 의정원 의원과 대표회의 회원 합동으로 헌법을 제정하고, 기관을 조직한 뒤 종전의 헌법과 기관을 일체 폐지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또 그를 비롯한 개조파 대표는 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의 비공식 연합회에서 헌법회의를 구성하고, 그 조직이 완료되면 양쪽이 해산하며 헌법회의 결정사항을 임시정부 국무원에서 공포하도록 하자는 안을 마련했지만, 모두 임시정부측에 의해 수용되지 않았다. (주석 6)

국민대표회의는 비록 결렬되고 말았으나 독립운동사에 차지하는 그 의의는 적지 않았다.

1) 이 회의는 독립운동사에서 최대 규모의 모임이었다. 일제의 위협과 장소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각 지역, 단체가 대거 집결하였다.
2) 독립운동계가 안고 있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이루어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임시정부의 재평가와 지난 독립운동의 공과에 대한 반성을 통해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3) 192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성향과 동포사회의 분포뿐만 아니라 성향과 방략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4) 임시정부가 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 회의의 자극으로 임시정부는 1925년 2차 개헌을 단행하는 등 체제정비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5) 독립운동계에 민족협동전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주었다. 이념의 벽을 넘어 전민족의 역량을 한일투쟁으로 결집시켜야 할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민족협동전선 운동이나 유일당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6) 참가한 모든 대표들이 임시정부 문제를 토의함으로써 정부조직 자체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주석 7)

안창호는 여운형ㆍ김동삼 등과 더불어 국민대표회의의 결실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였다. 그에게는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전선에 함께하기를 바랐다. 이 회의가 비록 결실보다는 결렬의 아픔을 겪고 말았으나, 안창호 개인으로서는 이때의 포용적 사고가 뒷날 대공주의(大公主義)로 결실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도산의 일기를 보면, 1920년대 초에 연아론(聯俄論)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에 레닌이 식민지 조선의 운동노선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아니라 민족혁명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를 위해서 임시정부에 자금까지 지원하고 있던 그 기회를 중시한 전략전술이었다고 보이지만, 도산은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나 함께 민족주의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민족주의의 용광로에 넣으면 모두 용해될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한 생각이었으므로 고려공산당의 상해파 이동휘나 일츠크파의 여운형도 모두 측근에서 배척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포용적 사고가 후일 대공주의를 창안한 기초가 된 것으로 진단된다. 그리고 그러한 대범한 사고의 인품이었으므로 개량주의자도 품 안에 끌어안아 혹간의 후학으로부터 비판의 화살을 받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주석 8)

국민대표대회의 연보

안창호가 1920년 12월부터 1924년까지 추진했던 국민대표회의 연보를 정리한다.

1920. 12. 8 : 이승만 상해 도착.
1921. 1. 24 : 이동휘 국무총리, 이승만과의 불화로 사임.
이승만계와 이동휘계의 대립이 심각하므로 조정해 보았으나 실패 - 도산도 김규식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사퇴함.
1921. 2. 3 : 이때부터 시태수습을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관심 - 여러 차례의 국무총리 추대를 사양함.
1921. 5. 12 :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연설 (2월에는 원세훈, 박은식 등이 ‘우리 동포에 고함’을 발표하여 국민 대표회의 소집 요구, 4월 20일에 북경군사통일주비회(박용만ㆍ신채호)에서도 요구 발표, 5월 6일에 만주 액목현회(額穆縣會)의 여준ㆍ김동삼에서도 국민대표회의 주장, 협상회(신규식ㆍ이시영)와 마찰이 일어남.
1921. 5. 19 : 국민대표회 소집 촉구 연설.
1921. 5. 20 : 이승만 중국을 떠나 하와이 도착(태평양회의-워싱턴 군축회의에 대한 외교 준비).
1921. 6. 6 : 국민대표회 기성회 결성, 회장 취임.
1921. 8. 13 : 태평양회의(1921. 11. 11~1922. 2. 6) 외교후원회를 구성하여 주도.
국민대표회의 소집노력은 당분간 보류(태평양회의 후원문제와 자금문제 때문).

1922. 4. 6. : 안창호는 현안과제가 국민대표회의 소집임을 천명 (여운형이 4월 10일에 상해로 돌아와 안창호와 합세). 국민대표회의 소집노력이 다시 활기를 찾음 (태평양회의 결실 없고, 극동인민대표회의(1922,1.21~2.2) 때 레닌의 지원으로 자금문제 해결).
1922. 4. 14 : 임시의정원에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위한 청원안 통과.
1922. 5. 10 : 국민대표회의주비위원회 소집 선언 (9월 1일 개최예정), 여운형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조직하여 국민대표회의 소집지원.
1922. 9. 1 : 국민대표회 개최 연기(10월 10일과 11월 21일의 개최 예정일도 계속 연기)
1922. 10. 28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창립 (발기인 7명 중 이유필, 조상섭, 손정도 등 흥사단원 3명, 주요 회원 가운데 김흥서, 나창헌, 문일민, 이강 등도 흥사단원) - 안창호가 간접적으로 관여되었음을 의미.

1923. 1. 3 : 국민대표회의 개최(5월 15일까지 124명의 대표가 63회에 걸쳐 회의).
안창호(미주대한인국민회 대표)는 임시의장이 되었다가 1월 18일에는 부의장이 됨(의장 김동삼, 부의장 안창호와 윤해일 재만독립군 대표를 우대한 독립운동의식의 반영).
1923. 5. 15 : 국민대표회의 결렬(개조론과 창조론).

1924. :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이상촌건설 운동(독립운동 근거지 - 신민회 계획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됨).
남경에 동명학원 설립(유학생 인재양성).
1924. 12. 16 : 미주 샌프란시스코 도착 - 미주에서 임시정부 유지비를 지원(인구세와 애국금).
임시정부 국무총리 박은식 취임 - 박은식이 대통령 대리로 선임됨(헌법개정에 착수)

1925. 3. 23 : 박은식 대통령 선임(대통령 탄핵안 통과 후). - 1월 20일 안창호가 이유필ㆍ조상섭에게 보낸 편지에서 임시정부의 과도기 두령으로 박은식과 이상룡을 추천하고 있음.
1925. 4. 7 : 임시정부 내각책임제 헌법개정. (주석 9)

안창호는 이 기간 한 때 만주로 건너가 만주의 독립군 단체인 통의군 결성에 참여하고 총장에 선임되었다.
1922년 1월 하순이다. 그의 몸은 상해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만주에서 일제와 싸우고 있는 독립군들의 곁에 있었다. 국민대표회의 결성을 그토록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것도, 모든 독립운동단체를 묶어서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무력전쟁을 펴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주석
5> 국회도서관 <도산안창호자료집(1)>, 9쪽, 1997, 김희곤, 앞의 책, 162쪽.
6> 앞의 책, 98쪽, 김희곤, 앞의 책, 162쪽, 주26.
7> 김성민, <국민대표회의>, <한국독립운동사사전(3)>, 409쪽, 독립기념관, 2004.
8> 조동걸, 앞의 책, <중국에서 도산의 독립운동>, 113쪽.
9> 조동걸, 앞의 글, 109~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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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27회] 국민대표회의 소집의 배경

[27회] 국민대표회의 소집의 배경

[7장] 국민대표회의 소집 주도, 결렬의 아픔 2013/04/05 08:00 김삼웅
안창호는 독립운동 진영을 하나로 묶는 데는 국민대표회의 외에 달리 길이 없다고 믿었다.
해서 여기에 전력을 쏟았다. 여운형과 강연회를 갖고 대회의 필요성을 거듭 주창했다. 임시정부측으로부터 조직적인 반발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면서 대회 소집을 추진하였다.

다행히 동조자(세력)가 많았다. 박은식 등 14인의 <아 동포에 고함>이라는 지지선언과 북경의 신채호ㆍ박용만 등 군사통일주비회, 그리고 여준ㆍ이탁ㆍ김동삼 등 만주 액목현 회의 지도그룹, 여기에 1921년 겨울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 멤버들도 안창호의 활동을 지지하였다.

미국이 주도한 태평양회의에 큰 그대를 걸었던 이승만그룹의 외교독립론이 무산되면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때마침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극동인민대표회의에 23개 단체 52명이 참가(소련ㆍ중국ㆍ일본ㆍ자바 등 5개국 144명), 대표 중 한국인이 36퍼센트가 될 만큼 다수가 참가하였다. 이 대회는 한국문제에 대한 토론의 결과 “한국에서 계급운동은 시기상조이며, 계급운동자들은 독립운동을 지원해야 하는 한, 임시정부는 개혁할 필요가 있다.” (주석 2)고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와 여론을 발판으로 안창호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4월 24일 각계 인사 129명의 서명을 받고 발회식을 열어 임시정부의 단점, 시정책, 혁신과제 등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에 대해 임시정부측은 내무부 통첩을 통해 “불온 언동에 대한 주의”를 발표하는 등 여전히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반대하였다.

안창호 등이 국민대표회의를 적극 추진한 데는 임시정부내의 여러 가지 문제와 함께 1920년 혼춘사건(간도참변)도 한 변수가 되었다. 3ㆍ1운동 후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자 일제는 이들을 없애기 위해 병력을 투입할 구실을 찾았다. 일제는 마적 수령 장강호(長江好)를 매수하여 마적단 400여 명으로 하여금 혼춘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 습격으로 혼춘의 일본영사관 직원이 경찰 가족 등 일본인 9명이 살해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삼아 마적토벌이라는 구실로 군대를 출동시켜 일대의 조선인과 독립운동가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르고 한인회와 독립단 조직을 파괴시켰다. 특히 독립군의 활동기반인 조선인 교포의 학살에 역점을 두었으므로 혼춘에서만 250여 명의 조선인 교포가 참변을 당했다. 이 사건을 시발로 하여 일본군의 만주지역 조선인 교포 학살행위가 그치지 않게 자행되면서 독립군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 무렵에 벌어진 자유시참변(일명 흑하사변)도 국민대표회의 개최의 요인으로 대두되었다.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정도 떨어진 수라세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부대인 사할린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불상사였다. 이 사건으로 사망 272명, 포로 864명, 행방불명 59명 등 막대한 한인 교포의 희생이 따랐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임시정부의 군무부를 만주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으며, 결국 국민대표회의 개최로 중지를 모으게 되었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1921년 3월 15일 국민대표회촉진회를 조직하면서 임시정부를 개조하는 동시 정부 명칭을 폐하고 위원제도 또는 당의 조직으로 변경할 것을 1차적인 대회개최의 목표로 삼았다. 5월 19일 대회 소집에 찬동하는 300여 명의 명단이 확보되고, 6월 6일 국민대표회주비회를 열어 회의소집 예정일과 대표자격, 대표선출구역 등을 확정하였다.

주비회는 또 대표를 지방대표와 단체대표로 나누고 단체는 다시 보통단체와 특수단체로 구분했다. 지역대표는 국내 26명을 포함하여 모두 47명, 보통단체는 종교ㆍ노동ㆍ청년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인데 회원 100명 이상일 경우 1명, 1만 명 이상일 경우 2명의 대표를 파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회의에 참가할 지역 및 단체는 135개이며 대표는 158명이었으나 자격심사를 받아 대표로 확정된 인원은 국내, 상해, 만주일대, 북경, 간도일대, 노령, 미주 등지의 대표 125명으로 확정되었다.

1923년 1월 3일 상해 프랑스조계 민국로(民國路)의 미국인 예배당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일제의 방해와 교통사정 등으로 개회 당일 참석자는 62명이었다. 대회는 안창호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였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각지의 대표들이 속속 참석하고 열기도 뜨거웠다.

개회 벽두에 임시의장 안창호에 대한 대표권 불신임이 제기되어 회의는 소연해졌다. 안창호의 대표권 불신임의 이유는 안의 소속단체인 ‘북미국민회’가 미국에 대하여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은 독립운동의 모독이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노령파(대한국민의회)의 원세훈, 윤해 등이 ‘배미파(拜美派)’를 제거하려는 책동이었다. 오랜 분규 끝에 안창호의 대표권은 승인되었으나, 이 대회에서는 일관하여 안창호 등의 상해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이 일대 지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모스크바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으나, 원세훈 등의 대한국민의회파는 신숙 등의 북경파(군사통일회)와 협동하여 기어히 임시정부해체를 주장하고 있었다. 신숙 등의 북경파는 외교활동의 독립운동 따위는 빨리 청산하고 실력(무력행동)으로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안창호ㆍ여운형 등의 문치파를 배격하려는 것이었다.
(주석 3)

열린 회의에서 의장에 김동삼을 선출하고 안창호는 윤해와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평균 3일에 1회 꼴로 열린 회의는 독립운동 대방략에서부터 시국문제, 국호 및 연호, 헌법, 위임통치사건 취소, 자유시참변, 통의부사건, 기관조직 등이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회의는 군사, 재청, 외교, 생계, 교육ㆍ노동 등의 6개 분과로 나누고, 헌법기초위원회, 과거문제조사위원회 등 2개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경비는 독립운동단체에서 부담하고, 찬조금으로 한형권이 모스크바의 레닌에게서 받아온 기금으로 충당하였는데, 이 자금문제를 둘러싸고 회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이 지참한 20만 루블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기금이라 주장하면서 인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한형권은 윤해를 통해 안창호와 여운형 등 국민대표대회 비용에 충당하도록 인계하였다.

임시정부 간부들은 그 돈이 원래 임시정부에 공급된 것이니만큼 자기들에게 인도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나와 안창호 등은 그 돈을 국민대표대회 소집에 충당하도록 윤해에게 요청했던 바 임시정부쪽의 반대가 강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윤과 한은 우리의 의견에 찬동하였으므로, 1923년 봄에 상해에서 대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주석 4)


주석
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3, 67~70쪽 참조, 1967.
3> 김준엽ㆍ김창순, <조선공산주의운동사>, 383쪽, 청계연구소, 1987.
4> <여운형조서>, 41쪽, 여기서는 김준엽ㆍ김창순, 앞의 책, 3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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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26회] 각료직 퇴진 이유를 밝히다

[26회] 각료직 퇴진 이유를 밝히다

[7장] 국민대표회의 소집 주도, 결렬의 아픔 2013/04/04 08:00 김삼웅
안창호는 공사 생활에서 진퇴가 분명했다.
임시정부에서 이제 물러나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하고 퇴임을 단행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초석을 마련하고 대한국민의회와 통합정부를 성취시켰지만 내부의 갈등만은 어찌하기 어려웠다. 이승만과 이동휘 사이에 국정운영 문제를 놓고 벌어진 갈등을 수습하기 위해 양 계열 인사들을 만나 타협점을 찾고자 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1921년 1월 24일 이동휘가 총리직에서 퇴임하고, 안창호도 김규식과 함께 내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내각에서 물러났지만 임시정부를 떠난 것이나 독립운동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임시정부를 강화하고 독립운동에 더욱 정진하기 위해서였다. 이 부문에서 의문이 따른다. 꼭 물러나는 것만이 능사였을까, 임시정부에 남아서 개혁을 추진할 여지는 없었을까.

안창호는 여러 사람이 몇 차례에 걸쳐 임시정부를 떠나고 물러난 이동휘가 맡았던 국무총리에 추대되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각료직에서 물러나는 편이 효율적이라 믿은 때문이다. 여러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 제의한 국민대표회의를 성사시키고, 이와 더불어 국민유일당운동을 통해 민족진영을 대동단결시키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안창호는 상해교민회에서 5월 12일과 17일 두 차례에 걸쳐 <정부에서 사퇴하면서>란 시국강연을 하였다. 임시정부 각료에 물러나게 된 ‘사퇴의 변’과 아울러 향후의 계획 그리고 이즈음 그의 심경을 헤아리게 하는 내용이 담겼다. 띄엄띄엄 소개한다.

“내가 정부를 설립한 처음부터 오늘까지 2년 동안 이것을 붙들어 오다가 오늘에 와서 이와 같이 나오게 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 말이 장황하여 시간이 허락지 않습니다.”

“내가 본시 정부에 있었던 것은 누가 고와서 있었던 것이 아니요, 지금 나온 것도 누가 미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나의 들어가고 나옴은 조금도 감정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는, 만일 내가 정부에 있을 때 욕과 괴로움이 있었다면, 내가 밖으로 나온 후에도 그 욕과 괴로움은 의연히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즉, 내가 나온 것은 욕이나 괴로움을 피하려고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왜 나왔는가? 내가 나온 오늘에는 내가 노동총판으로 일하는 것보다 평민으로서 일하는 것이 독립운동에 좀 더 유익하지 않을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대한 사람은 사나 죽으나, 성공하나 실패하나 독립운동을 끝까지 계속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한 사람 된 자의 천직이요 의무입니다. 독립운동을 계속할까 말까 주저하는 이도 독립이 싫거나 자유가 싫어서 그것을 할까 말까 주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독립운동이 성공할지 성공하지 못할지 하는 의심과 상심 때문에 그리하는 줄 압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얼른 보면 우리에게는 인재도 부족하고 재력도 모자라고 그밖의 무엇도 부족하고 무엇도 없으므로 독립을 성공할까 못할까 하는 의심이 생길 듯도 합니다만, 여러분은 조금도 의심하거나 상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독립할 가능성은 확실히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한 사람은 무엇으로 보든지 근본적 자격이 독립할 민족이요, 결코 이민족의 노예 생활을 오래 할 민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 민족으로서 독립을 요구하는 이 날, 세계의 시운은 우리의 요구에 응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러시아와 미국이 장차 일본을 치려하고 있고, 영국과 불란서도 일본을 해치려 하며, 호주와 캐나다도 또한 일본을 배척하려는 것이 다 사실입니다. 그런즉 오늘 세계의 현상이 모두 일본을 둘러치는 때니 이것이 전에 없던 우리의 큰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민족의 근본 자체로 보든지, 외국의 형세로 보든지, 우리의 독립을 완성할 가능성이 있거늘 어찌하여 의심하고 주저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는 데에 대해 의심하고 주저한다면, 그 가장 큰 원인은 이것입니다.”

“이제 다른 것은 다 생략하고, 통일운동에 대하여만 말하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군사운동이니, 외교운동이니 하는 다른 모든 운동이 성공하고 실패함은 통일운동의 성패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통일을 하자고 많이 부르짖는 까닭에 ‘안창호의 통일독립’이란 별명까지 있지만, 독립을 완성하려면 우리 민족적 통일의 완성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힘으로는 성공이 불가능하고, 미국이 도와주고 안 도와 주는데 달려 있다.’고 하여 미국만 쳐다보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독립정신에 위배될뿐더러, 설혹 미국의 도움을 받기 바란다 해도 벗은 몸으로 외롭게 서서 손만 벌린다고 미국이 그같이 어리석어 몇 개인만 보고 원조를 해주겠습니까?
남의 도움을 받기 원하면 먼저 우리 자신이 통일하여 민족적 운동을 실현시켜야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것은 이 국민대표회가 생겨나게 된 것은 형세에서 면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국민대표회가 각방의 원만한 찬성으로 성립이 되면 그 결과에 따라서 원만할 것이요, 불행하면 장래에 대결렬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조건이든지 합동이 될 만한 조건을 세워 가지고 합동을 요구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국민대표회라는 하나의 큰 조건을 세워가지고 비단 노령뿐 아니라, 각 방면 사람이 한 번 다 크게 모여들자 함이니 이에 대하여 무엇을 의심합니까?” (주석 1)

안창호의 연설을 다소 길게 인용한 것은, 민족의 단합(통일)이 되면 독립이 가능하다는 그의 확신, 우리는 결코 외세에 종속될 민족이 아니라는 민족적 자긍심, 정확한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 국민대표회의 구성의 필요성 등을 살피려는 이유 때문이다.


주석
1> 윤병석ㆍ윤경로, <안창호 일대기>, 280~310쪽,(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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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25회] 임시정부 2년의 핵심 사업들

[25회] 임시정부 2년의 핵심 사업들

[6장] 상해임시정부 조직 핵심 역할 2013/04/03 08:00 김삼웅
안창호는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1921년 5월 11일 노동국총판을 사임할 때까지 2년여 동안 임시정부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임시정부의 조직과 업무의 상당 부분을 직접 관리하였다. 주요 활동을 요약한다.

1919년
6월 28일 -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
7월 8일 -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내무총장으로 시정방침 발표
7월 10일 - 임시정부 국무령 제1호로 연통제 실시 공포, 상해 임시정부와 미주 대한인국민회와 통합결의
7월 13일 - 내무총장 명의로 ‘대한적십자회’ 설립
7월 17일 -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설립, 총재로 선임
8월 21일 - 기관지 <독립> 창간
8월 23일 - 정재면을 러시아 대한국민의회에 파견, 임시정부와 통합 논의
9월 2일 - 내무총장 직속으로 선전위원회 설치
9월 23일 - 임시사료편찬위원회, <한ㆍ일관계사료집> 4권 편찬
9월 28일 - 임시헌법 개정안과 임시정부 개조안, 국무원에 제출
12월 7일 - 교민단사무실에서 <방황하지 말자>주제로 강연

1920년
1월 3일 - 교민단 사무소 신년축하회에서 <우리 국민이 결단코 실행할 6대사> 연설
1월 19일 - 임시정부 내무부 선전위원장에 피선
1월 21일 - 러시아에서 온 이용(이준 열사 아들)의 방문 받고 러시아에서 군사훈련과 군사모집 시행을 지시
2월 8일 - 군사연구회에 참석, 군사연구부 조직
2월 14일 - 선전위원장 사직서 제출했으나 부결, 상해에서 흥사단 입단식 거행
3월 1일 - 3ㆍ1절 기념행사에서 축사
3월 10일 - 임시정부 내무부 지방선전부 조직, 선전업무 전담
3월 20일 - 애국부인회에 촉탁하여 군적 등록운동 전개
4월 19일 - 국무원 회의에서 안정근ㆍ이탁을 북간도, 계봉우를 서간도 파송원으로 선정
4월 24일 - 이동휘ㆍ이동녕ㆍ이시영ㆍ신규식과 함께 시국수습 논의
4월 29일 - 구국모험단원들의 폭탄제조 중 폭발사고, 부상자에 위로금 지급
5월 7일 - 남만주 광복군사령부를 발전시킨 ‘대한광복군총영’ 설치
6월 28일 - 극동 순방 미국의회 시찰단 영접준비위원장에 선임
8월 13일 - 천진 남개대학총장과 회견, 양국간의 공동전선 등 토의
8월 19일 - 중국 대사를 지낸 미국인 랜취의 ‘한국자치론’ 주장을 통박
9월 3일 - 상해 모이당에서 ‘태평양회의’ 관련 연설, 외교독립론 비판
11월 27일 - 민단사무실에서 ‘독립당’ 관련 연설
12월 29~30일 - 흥사단 제7회 대회를 원동에서 개최

1921년
2월 3일 - 김희선ㆍ노백린에게 정부정책 설명
2월 6일 - 김규식과 시국대화
2월 18일 - 국내로 들어갈 뜻을 밝힌 이광수 만류
2월 27일 - 이동휘ㆍ이시영ㆍ신익희로부터 총리직 맡아 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절
3월 1일 - 상해 올림픽극장에서 대한교민단 주최 독립 선포일 축하식 거행, 국민대표회 소집을 제안
5월 11일 - 노동총판 사임.
(주석 17)

안창호의 사임에 앞서 이승만에 대해 불신임을 표명하다가 뒤늦게 취임한 국무총리 이동휘가 자신의 정부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921년 1월 말 임정을 떠나고, 이 해 4월에는 김규식이 사임, 5월에는 안창호마저 떠나고 말았다.

통합 상해임정의 출범으로 이승만ㆍ이동휘ㆍ안창호를 3축으로 하는 삼각내각(三脚內閣)이 출현하였다. 통합 상해임정 성립의 일등 공신인 안창호는 국무원 중 서열이 최하위인 노동국총판에 불과했으나,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로부터의 재정적 지원,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그리고 일본유학생 출신들로 이루어진 인적자원에 힘입어 상해 정국을 주도해왔다. 1919년 말 당시 총장 이하 상해임정 직원 61명의 3분의 2가 넘는 48인이 평안도 출신이었다.

통합 상해임정에 취임하기 위하여 9월 18일 상해에 도착한 이래,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의 입장을 표명하며 취임을 미루어오던 이동휘가 마침내 상해임정 참여를 결심하게 된 것도 상해 여론을 주도하고 있던 안창호 추종세력들의 압력 때문이었다.
(주석 18)

이승만은 미주에서도 그랬지만 상해에서도 아집과 독선, 분열과 불화로 임시정부를 제대로 이끌지 못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의정원의 탄핵을 통보받고 다시는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안창호는 이승만에게 지원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으나 돌아온 것은 언제나 냉대였다.

도산은 우남(이승만-필자)의 국가 수반 지위를 강화하여 주기 위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승만을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으로 격상시키고, 국내의 유력 독립운동자를 거의 임시정부로 집결ㆍ활동하게 하였다.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하여 이동녕ㆍ신규식ㆍ이시영ㆍ김구ㆍ홍진ㆍ손정도ㆍ박은식 등등이 임시정부에 모였고, 우남도 상해에 와서 친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우남에게는 3ㆍ1운동 직전에 주장한 국제연맹에서의 ‘위임통치청원’문제와 국제외교를 내세운 구미위원부를 통한 ‘국채발행’ 그리고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와 임시정부의 ‘대통령 칭호’ 편의 혼용사용 문제 등이 얽히며 제기되어 반대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도산은 이런 문제를 여러 가지로 해명하고, 혹은 두호하며 우남을 상해로 초청한 결과 1920년 말에는 우남이 상해에 밀항하여 대통령에 취임하고, 도산은 노동국총판으로 내려앉았다. 그러므로 외형으로는 일시 국내외 독립운동이 임시정부로 통합된 것이고 임시정부가 국내외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이며 한민족의 조국광복을 지휘할 임시정부로 권위를 갖췄다.
(주석 19)

안창호가 임시정부를 조직하면서 ‘발탁’한 인물 중에는 김구가 있다.
두 사람은 이미 신민회 시절의 동지로서 막역한 사이였다. 또 성사되지는 않았으나 1903년 최광옥의 소개로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와 김구의 혼담이 오가는 등 두 사람은 서로 잘 아는 관계였다. 김구가 안악사건(안명근 사건)으로 긴 옥고를 치르고 1919년 상해로 망명했을 때, 안창호는 그를 경무국장으로 발탁하여 임시정부 청사의 보호와 요인들의 경호, 밀정색출 등의 임무를 맡겼다.

김구가 1876년 생이고 안창호가 1878년 생 이어서 김구가 2년 연상이었으나, 안창호는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임시정부 수립을 지도하는 책임자였다. 해서 내무총장 산하의 경무국장을 맡긴 것이다. 김구는 안창호의 권유로 흥사단의 ‘특별단우’로 입단하기도 하였다. 김구의 증언이다.

나는 안창호 동지에게 정부의 문지기를 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이유는 종전에 국내에 있을 때 나의 자격을 시험하기 위해 순사시험 과목을 보고 혼자 슬며시 시험해 본 결과 합격이 어려울 것임을 알았다. 그런 경험과 허영을 합하여 실무에 소흘히 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내무총장은 내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기가 미국에서 본 바에 의하면 특히 백악관만 지키는 관리를 두었으니 우리도 백범 같은 이가 정부청사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좋다 하여 국무회의에 제출하여 결정 하겠다 했다. 다음날 도산은 나에게 느닷없이 경무국장 사령서를 교부하여 취임하여 임무를 시작할 것을 강력히 권했다.

그 때는 국무회의 각부 총장들이 아직 다 취임하지 않았으므로, 각부 차장이 총장의 직권을 대리하여 국무회의를 진행했던 때였다. 그 때 차장들은 윤현진ㆍ이춘숙 등 젊은 청년들이었으므로 노인에게 문을 여닫게 하고 그리로 통과하기가 미안하다 하고 내가 다년간 감옥 생활로 왜놈의 실정을 잘 알 터이니 경무국장이 적합해 인정되었다고 했다.

나는 한사코 사양했다.
“순사의 자격조차 되지 못하는데 어찌 경무국장이 된단 말이요?”
그러나 도산은 굽히지 않았다.
“백범이 만일 사양하고 피하면 청년 차장들의 부하가 되기 싫어한다고 여러 사람들이 생각할 테니 사양하지 말고 공무를 집행하시오.”
나는 부득이 응해 승낙하고 취임할 수밖에 없었다.
(주석 20)

안창호가 1923년 개조파의 거두로서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할 때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서, 이 대회의 해산령을 내리는 등 한때 사이가 갈라지기도 했지만, 안창호가 떠난 임시정부를 김구는 끝까지 지키면서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다.

뒷날 안창호 서거 10주기를 맞아 그의 묘소 앞에서 읽은 김구의 추도문은 많은 사람을 오열시켰다. 이 부분은 뒤에서 소개한다.


주석
17> 도산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 도산 안창호의 생애>, 242~246쪽,(요약), 1999.
18> 반병률, <안창호와 ‘통합’ 상해임정의 수립>, <도산사상연구> 제5집, 150쪽, 1998.
19> 윤병석, <민족수난기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도산사상연구> 제8집, 113쪽, 2002.
20> 김구, <백범일지>, 267~268쪽, 열민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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