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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안두희평전을 마치며] 김구와 이승만 그리고 영화 <암살>

[안두희평전을 마치며] 김구와 이승만 그리고 영화 <암살>

<악의 축> 안두희 평전/[21장] 부록 2014/02/07 08:00 김삼웅
안두희 평전을 쓰면서 내 머릿속에는 항상 두 인물이 떠나지 않았다.
김구와 이승만이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이었고 김구는 경무국장이었다. 이승만의 대통령추대에는 ‘위임통치 청원’ 등을 이유로 신채호ㆍ이회영ㆍ박용만ㆍ김창숙 등의 완강한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1년 반이 지난 뒤에야 상하이로 와서 취임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탄핵되어 쫓겨났다.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에게 ‘청원’ 했다.

나는 안 내무 총장에게 임시정부 문 파수를 보게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에는 내 뜻을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이 청원을 한 동기를 듣고는 괘락하였다. 내가 본국에 있는 때에 순사 시험 과목을 어디서 보고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혼자 답안을 만들어 보았으나 합격이 못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을 탐하기 어려워할 뿐아니라, 감옥에서 소재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나라 정부의 정청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하여줍소서 하였더라는 뜻을 도산 동지에게 말한 것이었다.

안 내무 총장은 내 청원을 국무회의에 제출한 결과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다른 총장들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유현진ㆍ이춘국ㆍ신익희 등 새파란 젊은 차장들이 총장의 직무를 대행할 때라, 나이 많은 선배로 문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자고 하였다는 것이다.

김구의 지휘로 1932년 이봉창ㆍ윤봉길 의거가 감행되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그같은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2천만 조선동포와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쾌거라고 할 때였다.

일제가 패망하자 이승만은 미태평양전구 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수 차례 편지(전보)를 통해 귀국과 편의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미국무차관 에치슨의 다음과 같은 서약요구서에 서명하고 김구보다 먼저 귀국할 수 있었다.

나는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지역이 현재 미군에 의해 통제되는 군정의 통치하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군정이 종식되기 전까지는 동 지역에서의 체류기간 중 본인의 모든 활동이 동기관의 법령과 규칙에 의해 통제를 받을 것에 동의한다.

김구는 중경에서 귀국을 앞두고 이런 글을 남겼다.

만일 누가 어떤 모양으로 죽는 것이 네 소원이냐면, 나의 최대한 욕망은 독립이 다 된 날 본국에 들어가 영광의 입성식을 한 뒤에 죽는 것이지마는, 죽더라도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보고 오는 길에 비행기 위에서 내 시체를 던져, 그것이 산위에 떨어지면 날짐승ㆍ들짐승의 밥이 되고 물에 떨어지면 물고기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나는 서대문감옥에서, 인천 축항공사장에서 몇 번 자살할 생각을 가졌으나 되지 못하였고, 안명근 형도 굶어죽으려고 나흘이나 식음을 전폐한 것을 서대문 옥리들이 억지로 달걀을 입에 흘려넣어 죽지 못하였으니, 죽는 것도 자유가 있는 자라야 할 일이어서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나의 70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하여 산 것이 아니요, 살아져서 산 것이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지 못한 이 몸이 필경은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

두 지도자의 처신과 사생관을 보게 된다. 이승만은 미국무성의 서약서에 서명하고 귀국하여 미군정에 충실하게 협조하고, 김구는 ‘국자(國字)’ 제1호, 2호를 발령하는 등 미군정과 대립하였다. 전자는 분단정권을 선호하고 후자는 통일정부 수립을 바랐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 되고 김구는 초라한 재야인사가 되었다. 이승만 집권 1년도 안되어 ‘악의 축’에 의해 김구는 암살되고, 12년 동안 이승만은 1인 독재자가 되었다. 김구는 묘소의 참배도 거부되는 ‘망각의 인물’ 이 되었다.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은 추방당하고 김구는 복권되었다. 진상규명이 시작될 즈음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군부정권 30여 년 동안 김구는 여전히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었다. 반대로 이승만은 방대한 전집이 나오고 대학에 연구소가 차려졌다.

반세기 만에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김대중 정부 시절 백범 김구 기념관이 세워지고 전집이 간행되었다. 민주정부 시대는 너무 짧게 지나가고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이승만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서울에 거대한 이승만동상이 세워지고 ‘이승만주의자’ 유영익 씨가 국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어록’ 이다.

“이승만은 로마제국의 기독교화에 기여한 콘스탄티누스대제의 공적에 비견된다.”
“이승만의 업적은 조선4대 태종, 고대중국의 진시황ㆍ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한 모세 등과 비견된다.”
“이승만은 가장 돋보이는 독립운동가다.”

반면 김구는 ‘종북 좌파의 우두머리’ 쯤으로 매도되었다. 이명박 정권 초기 5만원 권 초상화의 인물을 두고 일반과 전문가 여론조사에서 김구가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이명박정권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그를 배척하고 신사임당 초상화로 대체했다.

청소년들과 일반 국민의 ‘가장 존경하는 인물’ 의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로 김국가 뽑힌다. 독재권력과 사이비 민간정부가 아무리 폄하하고 덮으려 해도 국민과 역사는 김구의 독립운동과 통일정부 수립정신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올해는 김구 선생이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지 65주년이다. 간디 암살과 케네디 암살 관련 훌륭한 영화가 제작되었듯이, 그리고 지금 영화 <변호인>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국민을 감동시키고 있듯이, 백범 김구암살을 다루는 영화가 제작되었으면 싶다.

정녕 <변호인>의 관람객이 1천만 명에 달하는 이 시대에, 김구 암살을 주제로 하는 감독ㆍ제작사가 없단 말인가. 김구 선생의, 의문의 ‘암살 배후의 배후’ 는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밝혀지는가. 친일ㆍ독재를 미화하는 교학사 교과서를 완벽하게 거부하는 위대한 우리 국민과 함께 묻고 기대한다.

“김구 암살을 다루는 영화 감독ㆍ제작사를 찾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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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부록] 안두희와 사건일지

[부록] 안두희와 사건일지

<악의 축> 안두희 평전/[21장] 부록 2014/02/06 08:00 김삼웅
안두희 일지

1917. 3. 24 : 평북 용천군 동하면 용산동 240 출생
(楊市) 보통학교 / (龍山) 공립보통학교 / 신의주 상업학교 졸업
1934. 3.20 : 금융조합 서기
1935. : 금융조합에서 쫓겨남
1936. 봄 : 결혼 -> 張씨(선천, 신성여중 졸업)
1939. 5 : 도일(渡日)
명치대 법과 편입 -> 황운룡, 마무시노조
학업 중도 포기 -> 신의주로 돌아옴 -> ?
도중국(渡中國) -> 곽태경(정미소경영) 신세짐
봉천 -> 여행증명서 위조 -> 여행중 들통 -> 고교 동창 아까마쓰 만나 위기 모면
천진 -> 아까마쓰
산해관
천진 ->아편장사 김여복의 식객
창덕(彰德, 하남성) -> 거류민회 서기로 잠시 일함
북경 -> 백(신의주사람, 기생집 명화관)과 함께 인쇄소 -> 박물관
1942 : 박옥례(기생)와 결혼
1942. 가을 : 박덕애(박옥례 오빠)와 싸요에서 마쓰다요꼬 송전양행(松田洋行) 경영 -> 돈 모음 -> 서주(徐州)에서 냉면집 돈 모음 -> 당시 서주에서 10여리 쯤 떨어진 곳에 일본군 군대가 주둔 ->학도병 10여 명이 냉면 사먹으러 일요일마다 옴. 김용희 만남(광복군 소속으로 지하공작할 때) -> 귀국(전황의 급박으로)
1943. : 용암포에서 징용 피해 군청직원 됨.안병서ㆍ최창학과 압록강토지개량주식회사 경영
1947. : 월남 -> 처제집에서 묵음. 서청 총무부장(일설 서청 종로지부 사무국장)
1948. : 부인 아들과 월남
1948. 11. 11 : 육사 입교
1948. 12. 7 : 육사 8기특별3반 입교 -> 다른 서청원들과 함께
1949.2 : 홍종만 소개로 김지웅 만남(안두희 얘기로 군 입대 전에 홍 소개 로 김지웅 만났다 함)
1949. 2. :김학규. 홍종만과 경교장 행
1949. 3. 7 : 육군 소위 임관
1949. 4. 14 :한독당 입당
1949. 6 :탄피 꽃병들고 경교장 행 -> 글씨 두폭 받음.
1949. 6. 26 :경교장 -> 김구암살 -> 헌병사령부
1949. 6. 27 : SIS 특별 수사대로
1949. 8. 31 :군법회의 결과 불명예 파면
1950. 7. 10 : 국방부 특명 제4호로 육군 소위로 복직 -> 수도사단 야포대 근무
1950.9. 15 : 중위로 진급 -> 육군정보국 근무
1951. 2 : 특사
1951. 3. 15 :대위 진급
1951. 12. 31 :국방장관 이기붕의 특명으로 복직 취소

사건일지

1943. 3. : 루즈벨트, 이든 외상에게 신탁통치문제 밝힘
1943. 11. : 카이로 회담 -> 적당한 절차를 거쳐서 독립
1943. 2. : 얄타 회담 -> 신탁통치 원칙적으로 합의
1945. 10. : 빈센트(미국무성 극동국장) 발언 -> 미국 우선 신탁통치 주장
1945. 12. 16 :모스크바 삼상회의 -> 임시적 한국정부 수립
주한 미ㆍ소군 사령관으로 공동위원회 구성. 미소공위가 한국 임시정부와 단체 참여 아래 작성한최장기간5년기한의 신탁통치안을 4개국이 검토하도록 제출한다는 요지의 공동성명 6항으로 발표.
1945. 12. 30 : 송진우 암살
1947. 7. 19 : 여운형 암살
1947. 12. 2. 오후 : 장덕수 암살
1948. 2. 26 :UN소총회 UN한위 접근 가능지역(남한)에서만 선거실시 결의
1948.4. 3 : 4ㆍ3 제주사건
1948.4. 19 :김구 북행(5.5까지)
1948. 5. 10 :5ㆍ10 선거
1948. 5. 27 : 제헌국회 성립
1948. 5. 31 : 김구 UN한위 초청 연설(국제호텔)
1948.8. 15 : 정부수립
1948. 10. 20 : 여순사건 -> 14연대 / 4ㆍ3 진압 위해 제주 파견
12연대 / 3연대(마산) / 4연대(광주)
1948. 10. 27 : 진압
1948. 11. 중순 :오대산 사건
1948. 11. 11 :안두희 육사 입교
1949. 2. :안과 김지웅 만남 -> 홍종만의 소개. 동향(평북)
1949.3. 2 : 안두희 소위 임관
1949. 4. 14 : 안두희 한독당 입당
안두희 포병사령관실 연락장교로 발령(장은산이 권총 1자루와 지프차, 허모 운전자 1명 고정 배치해 줌). 김지웅 장은산에게 작전개요 설명→장은산 행동대 지휘감독자로 자청. 장은산 병 핑계로 서울대병원 특실에 입원 암살단 지휘에만 전념.
1949. 6. 23 : 국회 프락치사건을 조작 경교장에 김약수ㆍ이문원 등이 은신해 있다는 구실을 조작 경교장을 습격 김구선생을 살해계획 -> 실패
1949. 6. 25 : 공주에서 건국실천, 10기 입소식 참석하는 김구 선생을 수원과 오산 사이 (쑥고개)에서 사살계획 실패(공주경찰서장의 과잉충성으로 입소식 집회 허가 불허)
포병사령부 영등포에서 후암동으로 이동 -> 장 포병사령관 서울대학병원 특실에 신병을 핑계로 입원.

국방부 제4국 1기 훈련생

독고녹식 -> 서청원(西淸員) 평북
이춘익 -> 서청원(西淸員) 평북
정익태 -> 서청원(西淸員) 평북 / Black boy
한국상 -> 친형제간
한국용 -> 친형제간
한봉수 -> 서청원(西淸員) 평북
안두희 -> 포병소위
오병순 -> 포병소위 / 6.25때 전사
한경일 -> 포병소위 / 한남의원장(박윤근) 朴배근(박윤군 형, 인천직할시장))조카
홍종만 -> 홍우명(김지웅이 지어줌), 이병일(김준연이 지어줌) -> 오소백 중학교 동창.

독고노식ㆍ오병순ㆍ정익태ㆍ한경일ㆍ한국용 -> 평북의주 출신
독고녹식ㆍ오병순ㆍ한국용 -> 의주信成학교 출신
정익태ㆍ한경일 -> 중일학교 제자
강흥모 -> 헌병사령부 문산 파견대장, 헌병특별수사대 소속
김근찬 -> 국방부 제4국 국장
김명욱 -> 대위. 국방부 제4국 정보과장 -> 백봉일지 / 행동대원들의 일일 보고서
김병삼 -> 소령. 헌병사령부 행정사령관, 행정과장 -> 군작업복 차림의 군인들을 이끌고 사건 직후 경교장에 들어옴. -> ‘헌병사령부 장교 김문호가 사고를 당해 적십자병원에 입원해 있기 때문에 위문을 하러 가다가 총소리를 듣고 들어갔다 -> 김용희, “조사결과 김문호는 적십자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김정채 -> 헌병사령부 제2과 정보과 주도적 역할 -> LA 이민
김천근 -> 장은산 참모, 장은산 밑에서 비밀연락 책임
박윤근 -> 다른 부대로 전출 됨. 강홍모 부관
“강대위는 문산 파견대장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 나 문산에는 없다시피 했다.”
오석만 -> 중위, 헌병사령부 행정계장. 6.26 일직사관
-> 한 하사관 : “비상소집입니다”
오석만 : “임마, 당직사관도 모르는 비상소집이 어딨냐?”
김병삼 : “김구가 총 맞아 죽었다”
-> 11시 35분경
김비석 -> 국방부 당직. “11시 30분경 비상소집이 됐다” 재판 없이 형무소 3개월 복역후 파면당함 -> 4.19 후 김병삼 찾아가 비상소집 문제 항의

임선하 ->
경비순경 -> 고세곤 / 서대문경찰서 소속으로 경교장에 2년간 파견 근무.
마포구 신수동 62-58,714-2470,69세,1991.10.10이전
송병규 / 서대문경찰서 소속
유원의 / 서대문경찰서 소속
조기행 / 서대문경찰서 소속
한경철 -> 동아일보 기자, 안두희가 방청권을 보냄.
이기섭 -> 선생님 주치의 회고록 유무. 현장기록 유무
김지림 -> 비서
이국태 -> 비서
이풍식 -> 비서

1949. 6.26
안두희 -> 11시 조금 넘어 경교장 도착
김덕은 전화 -> 선우진 받음. “1시간 전에 한독당 당원에게 들은 얘기, 적십자병원 근처에 헌병이 많이 집결해 있다. 경교장 부근에도젊은사람들이 서성거린다”
교통부장관 허정실 전화 -> 이풍식 받음.

박동엽 도착
11:20
김병삼 대위 비상소집 -> “경교장에서 김구가 총에 맞았어” -> 28일 서울 시내 순찰 당번
12:20
강홍모 12시 20분 전후 경교장 도착

안두희 -> 경비경찰관 -> 작업복 입은 군인들 안을 말림 -> 강용주 경위(서대문경찰서 형사주임) -> 군 트리쿼터 1대 경교장 도착. 그중 안경 쓴 3명의 군인 뛰어 들어옴. “군인을 왜 때려?”, 폭언 -> 장 경위 안 연행하려 하자 폭언 뒤 安을 트리쿼터에 태워 헌병사령부로 감. 트리쿼터에 여러 명의 정복 헌병이 타고 있었음(김병삼) -> 13:00 적십자병원 의사 도착(이기섭) -> 수 십명의 군헌병들 경교장 출입문 봉쇄, 모든 사람의 출입을 통제했다

이하성(서대문경찰서장)
최대교(서울지방검사장), 이원희(당직부장검사) -> 김병삼에 의해 경교장 현장 검증 못함. 검찰청에 돌아와 한참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5분가량 지나서였을까 김병삼이 정중히 사과하면서 “안내하겠으니 검증하시도록 하십시요”

홍영기(육군 법무감실 검찰과장), 이진용(육군 정보국직속 특수정보대 중위) 이미 현장 검증
14:00 첫 공식수사 발표(전봉덕 이름으로)

1961. 4. 28 -> 김병삼 오전 10:45 비상소집령 내림 / 저격시간 12:34
1961. 6. 27 -> 안두희 육군 정보국 특무과(SIS, 특무부대 전신. 조선호텔 맞은편 ‘대륙공사’)로 이송. -> 安 3,4일간 묵비권 -> 김창룡, 김지웅 다녀간 후 입을 염 -> 일주일 후 ‘피의자 심문조서’ 작성 -> 국방경비법 제43조(군인으로서의 정당가입), 제48조(권총으로 불법살해)위반혐의로 기소 ″
6. 28 -> 중간발표(국방부 보도과)
7. 3 -> 이승만 특별성명 <한독당 내분>
7. 20 최종수사 결과 발표
8. 3 중앙고등군법회의(서울지방법원 대법정, 오전10:20-오후4:30). 헌병, 기마경찰대, 기관총 배치)
재판장 : 원용덕
재판관 : 강문봉, 양국진, 원태섭, 김형일, 주인주, 손성겸
검찰관 : 홍영기 소령, 김선진 대위
변호인 : 관선 / 김종만 소령 -> 변호사 사무실 운영(덕수궁 옆 태평로 365)
특별 / 양정수 중령 -> “대한민국에서 표창을 받아야 할 안두희”새한합동법률사무소 공동운영 (무교동 남강빌딩 6층)
민간인 / 이상기 -> 대법원 판사 -> 사망
증인 : 김학규 한독당 조직부장, 엄도해 한독당 선전부장, 선우진 비서, 이풍식 비서, 한종만 한독당 당원, 함상훈 민국당 선전부장, 강용수 서대문서 형사주임, 이기행 경비순경, 이기섭 적십자 병원 외과 의사

홍영기 검사 사형 구형
관선변호인 3명 집행유예 요구
무기징역 판결

안두희 SIS에서 이태원 육군형무소로 옮김(형무소장 백원교 소령)
8.13 대위로 파면 퇴역

1949.11. : 징역 15년형으로 감형 (채병덕 상신, 신성모 감형 조치)
1950. 6.27 : 육본 수원으로 이동하면서 군법회의 관계서류 일체 소각 -> 安 기록도 소각.
육군 중앙고등군법회의 -> 安 잔형소급면소, 형면제조치, 집행정지판결을 내렸다고 발표 -> 대전에서 신성모 반색
7.10 국방부 특명4호(50.7.10)로 잔형 집행정지 처분 받고 육군소위로 복귀 -> 포병교육대 교관 -> 며칠 뒤 중위 승진 ->(송요한 헌병사령관의 묵인) 헌병 전투부대 육군형무소 중대장 -> 김계원 포병사령관의 포병장교로의 원대복귀 요청이라는 설

1951. 2.15 : 잔형완전면제(육군 중앙고등군법회의 명령56호) -> 신성모국방장관 지시
1951. 3. 15 : 대위 -> 대통령 특별지시
1951. 5. 7 : 신성모 국방장관직 물러남(거창사건, 국민방위권 사건으로) -> 이기붕 국방장관
1951. 8. 20 : 제47차 국회 본회의에서 서인환 의원 안 문제 시비함 -> 안 대령급자리(국방부 모국) -> 이용순 내무부장관, 이기붕 국방부장관, 김일환 국방부차관
1951. 12. 25 : 국방부령 229호에 의거 소령진급 동시 예편. (이종찬 육군 참모총장)
1951. 12. 31 : 국방부령 229호에 의거, 육군본부 특명 갑 제718호로 안두희 복직 취소
1952. 5. 26 : 부산 정치파동 처리후 원용덕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서 헌병총사령관됨 -> 安 헌병 총사령부 문관 채용
1954. : 소령 진급
1956. : 몇 달 뒤 포병 진급 중령 -> 대령(서울 수도방위사단 사령부의 고급부관) -> 대판 잠복공작(일본에서 교포북송문제로 북송선에 어뢰공격 계획) -> 실패
1956. 5. : 중령 강등 예편. / 건설회사 부사장(서울 명동 소재)
1956 : 신의기업사 -> 김창룡의 도움
1956. 1.30 : 김창룡 피살
1956. 6. 11 :양구에서 군납품 생산공장(신의산업사) 준공식(양구면 중리 66) -> 이기건(평북 자성 출신) 사단장이 후원자 -> 이재학ㆍ김진만ㆍ인태식ㆍ이상철과 관계
1960. 5.24 : 김준연ㆍ장인근, 고정훈(구국청년단 발기인) 발표 ->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임모(임병직)와 국방장관인 신성모 등 두 사람이 공모해서 당시 포병사령관 장은산 중령을 시켜 안두희를 하수자로 골라 백범을 암살했다”
1956. 5. 25 : 신성모 뇌일혈로 이대부속병원 201호실에 입원
1956. 5. 29 : 신성모 사망(오전 11시반) / 이승만 하와이 망명
1960. 6.26 : 김구 11주기 / 백범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구성 /백범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 국민대회 개최
1961. 4. 17 : 안두희 김용희에 잡힘.-> 14:00 안두희 검찰청에 넘김/담당검사(김홍수, 현변호사) 일사부재리와 공소시효 경과로 안두희 재입건 안함 -> 이승만, 김태선, 전봉덕ㆍ허정ㆍ김준연ㆍ김지웅ㆍ홍종만ㆍ이춘익을 검찰에 고발(살인 및 살인방조죄) 준비와 민족정기재판소 구성 중 5ㆍ16으로 중지됨 -> 정일권 고발 취소
1961. 5. 16 :쿠데타 직후 징역 8개월(양구에서 군납공장 지을 때 경찰관에게 폭행한 죄)로 서대문 형무소 수감

1965. 12. 22 : 곽태영, 안을 응징 -> 이병남ㆍ박찬 등 16명 무료 변론
1966. 3. 5 : 백범살해진상규명 일본 위원회 발족
1966.7. 30 : 안두희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으로 나옴.(춘천지방법원1심/5년 구형) -> 3년 선고

1987. 3. 27 : 권중희 의거
1992. 4. 12 : 안 -> 배후가 있음을 고백, 김창룡을 배후로 거론
1992. 6. 26 :안 -> 배후가 있음을 고백, 장은산을 배후로 거론
1996. 10. 23 : 박기서, 안두희 처단

정부 요인

이승만 대통령 -> 윤석오 비서관
이범석 국무총리 : 48. 7.31 -50. 4.20
신성모 국방장관 : 49. 3.21-51.5.6 -> 51.2.11 거창사건으로 관직 물러남 -> 60.4.29 뇌일혈로 사망
임병직 외무장관 : 48.12.25-51.5.15
김효석 내무장관 : 49.3.21-50.2.6
국무총리 -> 이범석 : 1948. 7.31~1950. 4.20
장기영 체신부장관 : 49.6.14-52.1.11
서리 신성모 : 1950. 4.21~ 1950.11.22
권승열 법무장관 : 49.6.6. - 50.5.21
장면 : 1950.11.23~1952. 4.19
윤보선 상공부장관 : 49.6.6.-50.5.8
허정 교통부장관 : 48.10.4 - 50. 5. 9

김계원 포병부사령관
김명욱 국방부 제4국 정보과장. 대위 -> 백봉일지
김성주 서청 부위원장 -> “김구 암살의 진실을 폭로하겠다” -> 1953.6.25 국가보안법 위반 협의 -> 54.4.17 살해 당함.
김안일 SIS대장 -> 채병덕 이례적으로 SIS본부에 나와서 김안일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김 대장은 안두희 사건을 취급하지 말고, 노엽 중위에게 취조를 맡기시요, 곁에도 가지 말아요”
김익진 검찰총장
김지웅 정치 브로커
김창룡 연대 정보장교 -> 관동군 헌병대 하사관 -> 56.1.30 허태영에게 암살 당함
김태선 시경국장
백선엽 육군 정보국장. 중령
원용덕 54년 김성수 살해사건에 연루 돼 구속 됨 -> 68.2.5 사망
이상국 소령. 채병덕 부관
장 흥 헌병사령관
장은산 포병사령관 -> 도미 유학(백범 선생 국민장이 치러지는 그 북새통에 도미 군사 유학 명목으로 서울 떠남)
6.25 이후 자진 귀국 -> 가족에게 자살 통지 -> 윤 모씨(당시 대구 헌병사령부 조사계장)
전봉덕 경기도 경찰부 경무과장 -> 보안과장 -> 헌병부사령관
정일권 일본 육사 56기/ 봉천 군관학교 5기
채병덕 일본 육사 49기 / 부평 육군조병창 공장장 -> 육군참모총장 -> 안 군복귀에 큰 힘이 돼 줌 -> 50.7.27 진주 하동전투에서 전사
홍영기 육본 법무차감 겸 검찰과장
김일한 : 인천 특무대장. 중령
보성전문 졸업(운동)
안두희 이종8촌
안두희 인천 살 때 “형님 서청에 계시다는 말 듣고 왔습니다”
김두광 : 김천복
인천 서청원
시라소니(이성덕, 양반집안) 수석 부하

1. 안두희 김일한의 소개로 김창룡 만남
안두희 월남하자마자 서청 종로지부(서청본부의 위성부대, 바로 문앞에 있었다. 수송국교자리)에 있었다.

88구락부

종로구 팔판동 8. 허정의 집

A설 : 허정을 따랐거나 신세를 진 동향(경남지역)의 각료급들의 친목을 위한 비공개적 모임 허정
신성모
김효석
오위영

B설: 신성모가 내무에서 국방으로 옮긴 직후 군부와 경찰의 정보관계 핵심분자들 상호간의 정보 교류 명목

신성모
장은산
김창룡
김태선
김준연
김지웅

정회원 : 국방부장관 / 정계 거물 /헌병사령관 /방첩대 대장
준회원 : 중요 포스트에 있는 관리
옵서버 : 서열 낮은 정치인 / 군인ㆍ경찰ㆍ주요관리

1949년 봄 어느날 밤 88구락부
몇몇 군관계자, 평소 보지 못하던 인물, 자주 나오던 2,3명 장관 불참
신성모, 채병덕, 원용덕, 김창룡, 장은산, 김지웅, 서울시경의 주요 간부
최종회의: 신성모, 김창룡, 채병덕, 김성주, 장은산, 김지웅
정치적 책임은 88구락부 회원들
행동책임: 장은산
작전지휘:김지웅
인원동원, 작전에 필요한 세부계획 : 김지웅ㆍ김성주
연락책임ㆍ군내부 움직임ㆍ무기준비:김창룡
자금 : 경찰, 헌병사령부

친일 인사

김정제
노덕술:평남도경 보안과장
노 엽:해방당시 정규 일 헌병 30명 중 계급 가장 높음
윤우경:황해도 송해서장
이익흥:해방직전 평북 박천서장
전봉덕:일제말 경기도 경찰부 경무과장 보안과장

만군 출신

김동하 김백일 김일환 문용채 박동균 박엽영 석규암 신학진 신현준 양국진 원용덕 윤태일 장은산 정일권

김지웅
1945. 8. 15이전 : 아편, 쌀 장사로 치부 / 관동군 헌병통역 / 왕조명 정권의 모략 고문 ->안두희ㆍ김지웅의 전속 부관
1960. 8. 28 : 일본 복강현(福岡縣)에 밀입국
1960. 8. 30 : 복강지검에 송치
1960. 11. 15 : 후꾸오까 지방 재판소에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3년 판결 -> 후꾸오까 입국관리국에 수용됨
1961. 3. 8 : 가석방->경찰관계자들이 보증인이 되어 줌 / 나까야마 -> 보증 / 팔목신웅(八木信雄), 전 전남도지사) -> 중산우(中山優, 전 만주 건국대 교수, 김지웅이 왕조명 정권의 육군 소장, 여단장시 만주국에서 왕조명 정권에 파견되었던 公使 형, 아세아 대학 교수)
1961. 3. 30 :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서촌 의원에 대한 중촌(中村, 법무성 입관국 차장), 북동 아시아협회 조직 -> 한일회담 체결과 함께 / 대표이사 : 팔목, 상임이사 : 김지웅
1961. 3. 5 : 김구선생시해규명일본위원회 조직
1965. 말 : 일본에 망명 요청

고마다 - 김지웅이 만주에서 소속됐던 일본 특무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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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80회] '악의 평범성'이 안두희형 인물키워

[80회] '악의 평범성'이 안두희형 인물키워

<악의 축> 안두희 평전/[20장] ‘축’으로 엮인 ‘악’의 현상 2014/02/05 08:00 김삼웅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 사상가 한나 아렌트(1905~1975)는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 책임자로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악의 평범성’을 지적했다. ‘나치의 악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이 예시한 아돌프 아이크만은 평범한 석유회사 직원이었고, 요지프 멩겔레는 그저 평범한 아우슈비치의 의사였으며, 요하임 리벤트로프도 평범한 샴페인 세일즈맨, 마틴 보르민은 평범한 부동산 중개업자, 한스 프랑크는 평범한 변호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평범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해군 장교라는 것이다. 이 중에 정신질환을 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머리에 부상을 입거나 뇌에 손상을 줄만한 병을 앓은 사람도 없다. 이들 대부분은 컨버그 박사가 ‘악의적 자기애’ 라고 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중심적이고 야심적이며 무자비하지만, 동시에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자기 가족에 한해서는 충성하는 것도 가능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주석 15)

평범했던 이들이 나치에 가담하면서 히틀러가 이들 안에 잠재되어 있던 악을 깨우는 측매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두희도 격동기의 평범했던 사람이 서북청년단에 가입하고 폭력성에 이성이 잠식되고 이승만의 측근들과 미 정보원들로부터 김구에 대한 증오심이 주입되면서 민족지도자 암살이라는 범죄를 저질르기에 이르렀다. 광신주의와 도착적 심리 그리고 가학성 인격장애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아이히만 등 히틀러 추종자들과 안두희 등 이승만 추종자들의 비극은 이성을 올바로 사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특정 조직이 부과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행위이다. 자신이 속한 회사, 단체, 정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민 대다수의 피해가 명백한 행위 조차도 거리낌 없이 수행하는 것은 이성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범죄이다.” (주석 16)

‘이성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최근 한국에서도 국가정보원, 국군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의 ‘평범한’ 공직자들이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특정후보, 정당을 비난하거나 찬양하는 등 선거에 개입하는 국기문란 행위를 자행했다. 이들뿐만 아니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권력기관들 때문에 한국사회는 다시 반동으로 치닫고 사태는 점차 악화되어가고 있다.

안두희와 그를 조종하는 배후와 ‘배후의 배후’는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을, 그리고 개인과 조직의 ‘이성’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대표적인 인물군에 속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설파한 다음의 내용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 보고를 하면서 나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언급을 하였는데, 이는 어떠한 이론이나 사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악의 현상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었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는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주석 17)

안두희가 ‘악인(惡人)’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자신은 연약한 한 개인에 불과했다. 그를 악인으로 만들고 악행을 하게 한 것은 ‘악의 축’으로 구성된 맹목적인 충성분자들이었다. 국가나 조직에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주체가 정당했을 때의 일이다. 정당하지 못한 정부나 조직일수록 맹목적인 충성이 강요되기 일쑤다.

“충성을 강요하는 것은 대개 사악한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도덕적 불만을 충성의 힘으로 극복하여 한다는 증거다.” (주석 18)

국내에 조직기반이 취약하고 독립운동에서 이렇다 할 업적이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충성분자들이 요구되었다. 또한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해왔던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기득권을 보호해 줄 권력자가 필요했다. 이승만과 친일세력이 끈끈하게 밀착되는 배경이었다.

이로써 일제강점기의 ‘악인’들이 속속 이승만의 권력주변에 모여들고, 생계와 출세에 눈이 먼 새로운 추종자들이 여기에 끼어들었다.

“즉 ‘악’은 절대권력을 쥔 인물들에게서 발생하기 쉬운 것으로 누구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악’이라는 개념과 현상을 주도하는 개인이나 집단 곁에 항상 ‘악’의 추종자들이 들끓고 있어서 그들 모두로 인해 ‘악’이 보편적인 인간행동의 한 현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석 19)

우리 나라만 해도 절대권력자들 밑에서 ‘악의 추종자’들이 최능진과 김구를 죽이고 조봉암을 사법살인하고,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고, 김대중이 바다에 던져지고, 인혁당 8인이 처형되고, 광주학살, 박종철ㆍ이한열이 죽임을 당하는 등 각종 악행이 자행되었다.

‘악의 축’을 제거하지 못한 결과이며 다른 한편 우리 주변에 넘치고 있는 ‘악의 평범성’을 외면한 때문이다. 안두희는 거대한 ‘악의 축’의 한 종양이었다.

극우 극좌 모험주의, 광신적인 확신범들이 권력을 쥐면 그 사회(국가)는 불안해진다. 국민이 희생양이 되고 종양이 악화되면 전쟁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주석
15> 마이클 스톤, 앞의 책, 537쪽, 재인용.
16> 박종식, <고전읽기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부대신문>, 2013년 9월 2일치.
17>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뒷표지, 한길사, 2006.
18> 에릭 펠턴 지음, 윤영삼 엮음, <위험한 충성>, 문학동네, 2013, <한겨레>, 2013년 8월 26일치.
19> 미란드 트위스 지음, 한정석 옮김, <세상을 움직인 악>, <옮긴이의 말> 363쪽, 이가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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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79회] 비뚤어진 성장기와 태생적인 잔혹성

[79회] 비뚤어진 성장기와 태생적인 잔혹성

<악의 축> 안두희 평전/[20장] ‘축’으로 엮인 ‘악’의 현상 2014/02/04 08:00 김삼웅
안두희의 평전을 쓰면서 새삼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이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그 사람도 부모 밑에서 태어났을 때는 선한 바탕의 유아로서 사랑을 듬뿍 받으면 세상에 나왔을 거였다.

하지만 자라면서 어머니와의 이른 사별과 계모의 학대, 아버지의 재물욕과 방탕에 따른 파괴적인 가정환경, 학창시절의 비뚤어진 생활과 일찍부터 발을 들여 놓은 화류계 등 그는 건전한 젊은이들과는 달리 비뚫어지게 성장하였다.

성장하면서 그리고 사회활동을 하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친일파였던 부친에 대한 잠재의식에는 양가적(兩價的) 의식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정의감이나 시대에 대한 아픈 인식보다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하면서 삶을 즐기는 탐욕과 방탕형의 아버지상과, 그나마 해방 후 어렵게 일군 재산과 지위를 하루 아침에 빼앗겨 버린 공산당에 대한 저주와 좌절이 담긴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부친에 대한 증오와 동정이 기묘하게 복합된 ‘오이디프스콤플렉스’였다.

프랑스-알제리전쟁(1954~1962)을 취재한 프랑스 언론인 세르반 슈르비리는 두 나라에서 자행된 고문 실태를 조사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세상에는 악하게 태어난 사람은 없다…. 사람의 야수성을 불타오르게 만드는 상황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내던져진 상황에서 얼마나 쉽게 운명의 장난감이 되는 지, 알제리에서 확인하지 않았는가.” (주석 9)라고 기록했다.

반면에 미국 컬럼비아 의과대학 임상정신의학 교수로서 방대한 <범죄의 해부학>을 저술한 마이클 스튼은 견해를 달리한다. “악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드물지만 존재한다. 이들은 학대나 자극을 받지 않았는데도 평시에도 재미로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주석 10)고 분석한다.

안두희는 두 가지를 ‘겸비’한 대단히 특이한 성격의 인물이다. 월남하여 서북청년단, CIA요원, 군입대, 김구 암살, 기업경영과 도피생활 등의 행적 어디에서도 고민하고 참회하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추적자들에게 쫓기고 붙잡혀서 배후를 고백할 것을 강요받았을 때에도 지극히 냉혈적이었고, 오히려 이들을 증오하고 저주하였다. 나중에 일부 고백을 하긴 했으나 반성이나 참회라기보다 위협때문이었다. 그나마 핵심부문은 다음날 번복하기를 되풀이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안두희는 악인이고 악을 알면서도 행하는 일종의 사이코패스였다.

악이란 의도적인 행동으로 선량한 사람들을 해치거나, 학대하거나 모욕하거나 인간성을 말살하고 파괴하는 것 - 또는 자신의 권위와 조직적 힘을 이용해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악이란 “알면서도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이다.” (주석 11)

묵자는 인간의 바탕은 물들지 않은 생사(生絲)와 같다고 하였다. 푸른색에 물들이면 푸르러지고, 노랑색에 물들이면 노래진다는 것이다. 안두희는 후천적으로 삭막한 가정과 일제말기 돈벌이에 눈이 먼 부친의 일탈된 행위에서 정신적으로 오염되었던 것 같다.

안두희는 도착적 심리, 편집증, 광신주의자, 자기집착, 자아도취적 과대망상가, 충동적 병리적 가학성 인격장애자 등 심리적 중증장애를 갖고 있었다. 안두희의 생애를 추적할 때 특히 자기집착이 심한 편이었다.

자기집착은 광기의 첫번째 증상이다. 사람이 자기자신에 집착하면 거짓을 참으로, 허상을 실재로, 폭력과 추함을 정의로 받아들인다.… 이 환상적 자기집착 속에서 인간은 기적과도 같은 광기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광기의 상징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않고 자신을 비추어보는 사람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가정 속에 나타나는 꿈을 은밀하게 선사하는 거울과도 같다. 광기는 진리와 세계보다는 인간과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각할 수 있는 모든 진리와 거래하고 있다. (주석 12)

마치 안두희의 심리상태를 분석하고 있는 것 같다.
안두희는 암살과 그 이후의 행적, 언행으로 보아 ‘악의 정수’를 갖춘 악인의 전형이다. 무엇이 ‘악의 정수’이고, 어떤 행위가 악행이 되기 위해서는 4가지를 갖춘다.

1. 기가 막힐 정도로 끔찍해야 하고,
2. 사건의 악의(악한 의도)가 행위에 앞서야 하며,
3. 희생자에게 가한 고통의 정도에 극도의 과함이 있어야 하고,
4. 범행의 성질이 이해 불가능하고 당혹스러우며 광범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야 한다.
(주석 13)

안두희의 범행에 빠지지 않는 조건들이다. 안두희는 일제 말-해방-미군정-이승만 정권이라는 격동기를 살아가는, 건전하지는 못했지만 평범한 청년이었다.

분단이 되면서 빈털털이로 월남하여 서북청년단에 입단하면서 그의 삶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서청은 평안도 출신을 중심으로 평남동지회로 출발한다. 안두희는 고향 사람들의 주선으로 여기에 들어가서 활동한다. 서청은 전성기에는 회원이 7만 명에 이를 정도로 남한 사회를 주름잡는 반공단체가 되었다. 크고 작은 정치테러에는 서청이 개입되었다. 제주 4ㆍ3사건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가한 것도 군ㆍ경과 서청의 몫이었다.

서청 사무실은 한민당본부가 들어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는데, <동아일보> 사옥 옥상에서는 ‘성분 심사’ 등으로 매타작이 하루가 멀다시피 있었고 그때마다 ‘살려달라’는 비명과 기절이 엇갈리는 생지옥이 연출되었다.
(주석 14)

안두희는 서청에서 각종 테러와 폭력에 동원되고 이때부터 발군의 역량을 발휘했다. 당연히 조직의 핵심부에 진출하게 되고, 이것은 경찰의 정보망에 포촉되었다. 미 정보기관에도 알려지고, 조병옥 경무국장과 장택상 수도청장의 천거로 CIA의 정보원이 되었다가 다시 능력이 발휘되면서 ‘요원’으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주석
9> 마이클 스튼 지음, 허영은 옮김, <범죄의 해부학>, 541쪽, 재인용, 다산초당, 1913.
10> 앞과 같음.
11> 필립 짐바르드 지음, 여흥호ㆍ임지원 역, <루시퍼 이펙트(LUCIFER EFFECT)>, 26쪽, 웅진지식하우스, 2007.
12> 미셀 푸코 지음, 김부용 옮김, <광기의 역사>, 38~39쪽, 인간사랑, 1991.
13> 마이클 스톤 지음, 허형은 옮김, <범죄의 해부학>, 29쪽, 다실초당, 2013.
14> 서중석, <한국현대 민족운동연구 2>, 138쪽, 재인용, 역사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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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77회] 이승만 정권기 여성지도자들과 안두희

[77회] 이승만 정권기 여성지도자들과 안두희

<악의 축> 안두희 평전/[20장] ‘축’으로 엮인 ‘악’의 현상 2014/02/02 08:00 김삼웅
안두희의 몇 차례에 걸친 진술 또는 고백에는 이승만 시대의 여러가지 비화 그리고 타락상이 한 눈에 드러난다. 당시 명사들의 타락상은, 이들에게서 정의감이나 도덕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부산 피난 시절 안두희는 계엄사령부 임시계엄부원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안두희 진술 녹취록>에 나타난 일부 내용이다.

“어느날 김종원 대령(계엄사령관-필자)이 나(안두희)를 불러요. 그래서 내가 가니까 인사드려, 그래서 인사를 드렸지요. 저 - 안두희입니다. 그랬더니 모윤숙 여사와 박순천 여사가 유심히 보시데요. 그러더니 박순천 여사가 먼저 묻더만요. 아니 저 안병희 형 안 대위 아니에요? 그래서 예, 그렇습니다. 챙피합니다. 그랬더니 원 별 말을…. 박순천 여사쯤 되게 되면 그때 <부인신문사> 사장했을 적입니다.

<부인신문사>라면 대한민국에 처음생긴 <부인신문>인데, 그쪽 박순천 여사는 한국에서 유명한 유명인사 아니에요? 뭐 여사치고 그만큼 정치적으로 활달했고 알려져 있는 사람없잖아요. 그런데 그런 <부인신문사>에 내 동생이 어떻게 시험을 치고 들어가서 신문사 기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이 박순천 여사 사랑을 받고 있는데 박 여사가 나보고 금방 알아차릴 줄 몰랐어요. 그래서 창피하다고 말을 했더니 별 말 다한다고 그러더니 모윤숙 여사한테 소개해줄께 하더니, 이 분 동생이 내 신문사에서 전시기자로 있는데 그의 형 안두희 씨야 그랬거든요.

모윤숙 여사가 손을 내밀면서 아이구 반갑습니다. 아무려면 대한민국에서 안두희 모를 사람 있을라구요. 형님도…그러면서 웃대요. 그런 소개가 끝난 다음에 김종원 대령이 정식으로 얘기하는 거에요. 안두희도 알겠지만 대한민국의 두 거물 여사가 어떻게 하다 큰 고생으로 다 늦게야 부산으로 오시게 되었는데, 자네가 알다시피 셋방 한 칸이라도 두 칸이라도 아무래도 좋다고 하시는데 물론 따로따로 있으면 좋겠지만 정 안 되게 되면 한 집에서도 계시겠다고 그러니 안 대위가 잘 안배해서 따로따로 얻어드리라고, 이렇게해서 제가 이 두 분 집을 얻어 주려고 직접 나갔습니다.”

부산지역 계엄사령관이 안두희에게 박순천ㆍ모육숙의 집을 얻어줄 것을 지시한 것이다. 안두희는 ‘두 여사’의 방을 얻어주었다고 한다.

“한 번은 안 대위님 전화왔습니다. 그래서 받아 보니까, 나 이화대학 학장인데요, 그래서 왜요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김활란 박사 아니십니까? 그랬더니, 그래요, 그래요. 그런데 여기 지금 국방부장관이 내 서재에 와 있습니다. 오래간만에 부산 내려 오셨다가 내 서재에 오셔서 이 얘기 저 얘기 하시다가 안 대위님이 계엄사령부에 계시다는 말을 누구한테 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번 만나보면 좋겠다고 그러시는데 시간이 과히 바쁘지 않으면 한번 오십시오. 지금 여기 계십니다. 그러는 거에요. 그리고 또 거리가 얼마 멀지 않은데 있어서 예, 가겠습니다, 하고서 지프를 타고 거기까지 갔습니다.(…).”

“들어가서 김활난 박사한테 인사하고 보니까 저쪽 비쩍 말라가지고 북어대가리 같은 신성모가 앉아 있더만요. 그래서 간단히 경례만 하고 안두희 부름받아 왔습니다. 했더니 앉아, 해서 앉았지요. 그랬더니 지금 소속이 어디지? 그러니 뭐 소속이 어디인지 정보부에서 와서 일하라고 해서 갔더니(…)

나도 모르는 곳에 전속명령돼 와서 지금 계엄사령부에 와서 임시계엄부원으로 간단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수고 많았어. 그동안 여러가지 말도 많이 듣고 수고도 많았데면서? 하더니 주머니에서 계면쩍은 자세로 봉투를 내미는 거에요. 빈약하지만 그동안 수고했는데 그저 용돈이나 쓰시오. 그러구 지금 포병이니까 포병으로 돌려줄까? 예. 저는 원래가 포병이니까 포병으로 돌려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서 가만히 있더니 책상 위의 봉투를 다시 집어주는 거예요.”

“인사부로 안들어 가고 거기 가기 전에 다방이 있는데 다방에 들어가서 혼자서… 저 사람이 소위 무슨 88구락부 주요간부… 88구락부 저 사람들보다 높은 거예요. 물론 윤치영이니 무슨 외무장관, 내무장관 다 있는데 그 해 내무장관이 김태선…그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기억이 나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서 지금 이것들이 아직도 살아 있구나, 아직도 이것들도 그렇고 이승만도 그렇고 이것들한테 반항하게 되면 그 대가를 내가 치를 것 아니냐, 그 대가라는 거는 뭐 그저 뻔한 거, 내 목숨을 바쳐야 되는 겁니다. 그런 층들돌이니까. 자기들이 한 죄과에 대해서 정말 깨끗이 벗어나는 형식을 취할려면 내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거, 그것은 그것들도 다 압니다. 나도 물론 다 알고…. 종국에는 이승만이도 다 알지 모르지요.”

“88구락부 아직도 절치부심하면서 떠오르고 있는 윤치영ㆍ임병직ㆍ신성모ㆍ김태선ㆍ김준연 그 외에도 이건 88구락부는 아니지만 김지웅이니 장은산이니 이런 것을 내가 잊겠어요. 항상 절치부심하면서 이것을 잊지 않고 있는데 지금 또 그 얘기가 재연되누만요.”

“그대로 송도 해수욕장 근방 모래밭에 나가서 해가 저문 서쪽 하늘을 우러러 보고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이 자들이 해놓은 원수를 갚을 수 없는가 생각하고서 아무리 생각해 봐야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나 자신 목숨이 위태롭고 지금 겨우 정신을 차려서 생활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저 불쌍한 내 처를 생각해서라도, 내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경거망동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뉘우치면서 또 차를 타고 천천히 걸어서 중간에 토성동에 있는 형님 있는 데를 와 봤습니다.” (주석 4)


주석
4>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백범김구암살진상규명소위원회, <안두희진술녹취록(Ⅱ)>, 585~589쪽(발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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