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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얼은 불의 사람’ 김남주선생의 헌사

‘얼은 불의 사람’ 김남주선생의 헌사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19장] ‘저항적 민족시인’ 김남주 평전을 마치며 2014/11/17 08:00 김삼웅
김남주 선생은 췌장암 진단을 받기 얼마 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공연에서 자기를 비유해 스스로 개똥벌레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개똥벌레는 딱정벌레과에 속한 곤충으로, 복부 뒤쪽에 발광기가 있어 반딧불을 내지만 열이 없다. 보통 1분간에 70~80회 반짝거린다. 어둔 밤에 작은 빛을 발하고 자취없이 사라지는 개똥벌레.

6월항쟁 후 ‘10년옥고’이면 그 세계에서는 대단한 ‘훈장’이다. 정치권의 영입 0순위이고, 민주ㆍ진보 단체의 수장급이다. 그런데 김남주 선생은 스스로 하잘 것 없는 한 마리 개똥벌레로 치부하고 그렇게 활동했다. 그는 여전히 겸손했고 투박한 언술로 시를 쓰고 강연을 하였다. 그의 말과 행동은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이 무렵에 지은 <개똥벌레 하나>는 바로 ‘자화상’이다.

개똥벌레 하나

빈 들에 어둠이 가득하다
물 흐르는 소리 내 귀에서 맑고
개똥벌레 하나 풀섶에서
자지 않고 깨어나 일어나
깜박깜박 빛을 내고 있다

그래 자지 마라 개똥벌레야
너 마저 이 밤에 빛을 잃고 말면
나는 누구와 동무하여
이 어둠의 시절을 보내란 말이냐

밤은 깊어가고
이윽고
동편 하늘이 밝아온다
개똥벌레는 온데간데 없고
나만 남아 나만 남아
어둠의 끝에서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한다

풀잎에 이슬이 아침 햇살에 곱다
개똥벌레야 나는 네가 이슬로 환생했다고
노래하는 시인으로 살련다
먼 훗 날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시대 가장 치열하고 가장 격렬하고 가장 순수했던 시인, 누구보다 심장이 뜨겁고 영혼이 맑았던 아나키스트, 세속에 살면서도 속기라고는 없었던 무사기(無邪氣)했던 시인 혁명가, 저항이라는 용어도 모자라 김남주라는 일반명사 ‘자유와 해방’의 시인 전사.

나는 김남주 선생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중국의 혁명작가 루쉰의 <불얼음(火的水)>이란 글을 자주 떠올렸다. 그의 내면은 뜨거운 불이고 외면은 차거운 얼음이였다. 아니 불과 얼음의 혼합체 그것이었다.

움직이는 불, 그것은 녹아버린 산호(珊瑚)인가?
한 가운데는 푸른 흰 빛, 산호의 심장 같고, 온몸은 붉은 빛이라 산호의
고기 같으며, 바깥쪽은 약간 검은 빛을 띠어서 산호초라네.
그런 건 그런데, 잡으려면 손을 데인다지.
아지 못할 찬 것을 만나 불은 곧바로 얼음이 되어버렸지.
한 가운데는 푸르른 흰 빛, 산호의 심장 같고, 온몸은 붉은 빛이라 산호의
살점 같으며, 바깥쪽은 약간 검은 빛이라 산호초라네.
그런건 그런데, 잡으려면 뜨거운 국물 같은 얼음에 손을 데인다지.
불, 얼어버린 불이여, 사람들도 어쩔 수 없고, 스스로도 고통스럽겠지?
아아, 얼어버린 불이여.
아, 아아, 얼은 불의 사람이여.

‘얼은 불의 사람’이 김남주 선생이다. 49년의 짧은 생애가 그렇고 500여 편의 작품이 또한 그러하다. 불의와 압제가 극심하던 시대에 그는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보여주었고, “사람은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한다”(바이런)는 민주주의 시민정신을 실천하였다.

그의 삶과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은 양식 있게 살아 온 산 자들의 추모에서 드러난다.
10주기 때 <실천문학>이 특별기획으로 <우리는 그의 이름을 김남주라 부른다>를, 2014년 봄호에서는 <김남주 20주기>를 특집으로 꾸며 13명의 지인ㆍ필자가 참여하였다. 창비에서는 20주기를 맞아 <김남주시전집>을 꾸며 화보와 그동안 밝혀진 모든 시를 모아 ‘정본(正本)’을 제작하였다.

2004년 2월 서울ㆍ광주ㆍ해남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로 10주기 추모문화제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를 개최하고, 12월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로 10주기 추모 심포지엄을 열었다. 2006년 3월 노무현 정부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

2010년 6월에는 전남대학교에서 명예졸업장과 동문명예대상을 받고, 2014년 20주기에는 실천문학사 주최로 기념 심포지엄 ‘꽃 속에 피가 흐른다’와 기념행사 ‘김남주를 생각하는 밤’(한국작가회의 주최)이 개최되었다. 이 무렵 창비에서 <김남주시전집>과 <김남주 문학의 세계>가 간행되었다.

10주기, 20주기에 이처럼 추모 집회와 심포지엄, 시전집과 비평서가 나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항일문학인들의 경우는 다르지만 저항문인, 반체제 문인들의 경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이런 의미에서도 김남주 선생의 삶과 문학은 후인들의 전범이고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

김남주 선생의 평전을 마무리하면서, 필리핀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젊은 나이에 제국주의세력에 처형당한 호세 리잘의 유언을 삼가 영전에 바친다.

묘목하나 비석 하나없이 나의 무덤
찾는 이 없을 때
농부의 쟁기가 떠엎고
삽이 파헤치어
내 ‘재’가 그대의 산이나
들에나 골에 날리우면
오, 나의 나라여 그대 나
잊어도 슬프지 않으리.

김남주 선생 사후 20년이 되는 2014년 여름과 가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두 사람이 있었다.

박근혜정부가 세월호참사와, 수준, 상식 이하의 인사참사를 되풀이 하고 노동자ㆍ농민들의 삶이 더욱 피폐하고, 양식과 사회정의가 실종되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과,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두 사람이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경제적 불평등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해악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미 20년 30년 전에 김남주 선생이 토했던 말이 아니던가.

“죽은 사람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 로자룩셈부르크의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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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91회] 고인의 평가와 추모

[91회] 고인의 평가와 추모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18장] 마지막 열정과 사망 그리고 평가 2014/11/16 08:00 김삼웅
김남주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기리고 그의 문학을 평가하는 많은 평론이 나왔다. 몇 편을 요약한다.

비극적 시대를 살다 간 그는 자신이 꿈꾸던 정치적 민주화가 만개한 시절을 살아보지 못한 채 험난한 투쟁으로 점철된 인생을 거둬들였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해서,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천박한 민주화의 양상을 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비극적 삶으로 시종한 그가 누릴 수 있었던 드문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적 전환과 권력의 부침이란 파고를 겪으며 민주화운동의 경력이 값싸게 거래된, 그 공과가 허술하게 재단되기에 이른 작금의 상황에서 생전에 그 어떤 영광도 누리지 못하고 서둘러 삶에 종지부를 찍은 그의 운명은 착잡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주석 26)

김남주의 죽음은 그러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죽음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내야 하는지? 이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 ‘위엄 있는 인간’이 죽었다. 인간답게 살자는 소망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고목’으로 우뚝 서 있다.

대지의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주름투성이 얼굴과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이 이곳저곳을 보라
나도 저러고 싶다 한오백년
쉽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 <고목>

두 번째 진정한 통일꾼이 죽었다. 많은 고통과 슬픔이 분단이라는 현실구조에서 파생된다. 한 때 그것의 철폐를 가장 뜨겁게 소망했던 사람이 죽은 것이다.(주석 27)

돌이켜 보건대 그는 끝내 어떤 타협주의나 거짓된 해답에 기울지 않았다. 그의 생애도 문학도 미완의 것으로 남긴 채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미완성에 의해 그가 최대의 진정함을 쟁취했다는 것, 그럼으로써 늘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이유다. (주석 28)

만약 김남주 시인이 우리 곁에 좀 더 머물렀다면 어떠했을까. 그랬다면 우리는 높지만 그만큼 핍진한 ‘사상의 거처’에서 조금은 더 구체적인 실존과 갈등으로 풍요로운 ‘지상의 거처’로 내려온 김남주를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자본과 제국주의에 대한 거대 서사와 물러설 틈 없는 긴장과 적대로 가득한 <나의 칼 나의 피>를 비롯한 혁명의 시뿐만 아니라, 네루다의 <소박한 것들에 바치는 송가>처럼 나날이 새로워지는 생명의 가치들로 충만한 시의 대지 또한 갖게 되지 않았을까.(주석 29)

그의 삶과 문학이 이제는 살아 있는 우리들의 소중한 역사가 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가 김남주를 거론하지 않고 우리 민족문학사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언젠가는 이 음탕하고 술 취한 듯 비틀거리는 반동기가 끝나고 다시 역사의 전진이 시작되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주석 30)

김남주가 사상과 조직을 만들고 전사이자 투사가 되기를 결의했던 시기는 헌법으로 보장된 기본권을 국가가 유신이란 이름으로 무력화시킨 때였다. “총구가 나의 머리 숲을 헤치는 순간”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는「진혼가」의 한 구절처럼 폭력과 죽음의 두려움에 맞서 스스로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결단의 시점이었다.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김남주, 그는 유신에 맞섰던 것이다.

하지만 잊혀져 갔던 김남주와 전사들은 반유신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들은 1980년 광주를 거치며 근본적인 사상과 운동을 실천하기 시작한 1980년대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였다. 김남주 20주기, 그가 마지막까지 놓치려 하지 않았던 ‘사상의 거처’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은 유신과 신군부란 폭력에 맞섰던 ‘사상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주석 31)

김남주는 대중의 고통에 영감의 뿌리를 내리고 시대의 맨 척후에서 이름 없는 자들의 이름으로 노래했다. 대지는 그의 악보였고 독재권력과 자본은 그에게 악의 뮤즈였다. 그 시와 삶이 오늘을 부르고 있다. 순치된 적 없는 그 끓는 몸짓이야말로 시대의 겨울을 녹일 수 있는 열정에 찬 지혜인 까닭이리라. 봄과 새벽을 여는 정의의 적자로서 김남주는 시를 닮은 혁명을 거침없이 꿈꾸었다. 시와 민주주의가 일치를 향해 내닫던 목소리, 그 김남주를 다시 읽는다. 한시도 종으로 살지 않기 위하여 김남주 뿐 이랴. 이 땅에는 고난을 기꺼이 앞서 헤쳐간 뼈저리도록 거룩한 인간 교과서들이 있다. 인간보다 정확한 노선은 없다. (주석 32)

언젠가 냉장고를 수리하러 왔던 젊은이가 벽에 걸어놓은 아이 아빠의 시를 보고 이거 김남주 시인이 직접 쓴 시냐고 묻더군요. 저는 그 시인을 아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집이 시인의 가족이 사는 집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습니다.

수리공이 자기가 아는 시인들의 이름들을 한참 주워섬기며 자기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새삼 놀란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시골 구석에서 더욱이 책을 가까이 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한 젊은이의 입에서 듣는 그의 이름과 그가 열거하는 시들을 들으며 저는 지식인의 역할 같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주석 33)


주석
26> 남진우, <혁명의 길 전사의 길>, <김남주의 문학세계>, 188쪽.
27> 강형철, 앞의 책, 376~378쪽, 발췌.
28> 영무웅, 앞의 책, 106쪽.
29> 송경동, <진정한 근대의 인간들>, <김남주문학의세계>, 373쪽.
30> 김영현, 앞의 책, 229쪽.
31> 김원, <'전사’ 김남주의 ‘사상의 거처’는 사라졌는가>, <경향신문> 2014년 2월 15일치.
32> 서해성, <다시 김남주>, <한겨레>, 2014년 2월 15일치.
33> 박광숙, <빈들에 나무를 심다>,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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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90회] 49세로 파란의 삶 접다

[90회] 49세로 파란의 삶 접다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18장] 마지막 열정과 사망 그리고 평가 2014/11/15 08:00 김삼웅
김남주는 옥중에서나 출감해서 건강에 관심이 많았다. 참된 민주주의를 일궈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꾼들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남민전 동지인 박석률 씨가 1989년 4월 옥중 시ㆍ서간을 묶어 <저 푸른 하늘을 향하여>를 간행하였다.

김남주는 <박석률 동지의 삶과 사회적 실천을 돌이켜보며>라는 추천사에서 박석률과 함께했던 일들을 돌이키고, 이어서 건강문제를 거론한다.

그의 육체는 항상 지쳐 있었고 나는 그런 육체에서 어떤 위기를 감지하고는 했다. 그 위기란 “저 친구 저러다가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좋은 일을 해야할 사람이 저러면 안되는데⋯”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건강에 개입하게 되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박석률 동지와 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치를 보았다. “물질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의 기초이다. 인간의 육체도 물질의 한 형태로서 정신의 토대를 이룬다. 그 토대가 단단해야 정신도 단단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전제에서 우리는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사회적인 실천을 하는 사람은 제 건강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제 건강을 소홀하게 하는 그 행위는 변혁의 대상에게는 이로운 행위라 규정하기까지 했다. (주석 20)

동지의 건강에 대해 이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중요시했던 김남주는 막상 자신의 건강에는 소홀했던 것인지, 아니면 ‘욥의 질문’ 대로였는지, 그도 아니면 ‘운명’이었는지, 덜컥 돌이키기 어려운 췌장암의 진단을 받고 말았다.

김남주가 목동 20층 아파트 꼭대기의 20여 평 집에서 투병 중일 때 문인들이 병문안을 갔다. 의연한 모습을 전한다.

남주형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나도 두렵고 몹시 힘들더라. 심리적인 흔들림도 많았구.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흘러가니까 마음도 가라않더라. 사람은 언젠가는 한번은 다 죽게돼 하는 기분이⋯들더라. 사람답게 살다 죽으면 되지, 뭐.”

그렇게 말하는 남주형은 의외로 의연한 표정이었다. (주석 21)

1994년 2월 13일 새벽, 김남주는 부인 박광숙과 한 점 혈육인 다섯 살 짜리 토일이를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때도 흰눈은 쏟아졌다. 저 먼 우주 공간으로부터 이곳 지구와는 별 위로 세상은 고요했고 대낮에 버려둔 깡통도, 한낮에 내버린 모든 오물들도 흰눈에 목이 잠겨 영원한 침묵 속으로 갈앉아갔다.

세상의 시인 김남주가 눈을 감던 순간 그 곁에선 그의 동지, 대지의 벗 박광숙이 오열하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살아서 사람 사는 세상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고 울부짖으며. (주석 22)

김남주의 운명을 지켜보았던 동지 박석률의 증언.

운명하기 몇 시간 전, 가래를 뱉어내고 호흡을 길게 고르자 그대가 토해낸 말!

⋯아름다운 세상, 깨끗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다가 ⋯내가 이렇게 빨리 가게 되다니 ⋯. (주석 23)

김남주의 마지막 가는 길은 그러나 외롭지 않았다. 많은 선후배와 동지, 민주인사들이 문병하여 쾌유를 빌고 업적을 평가하였다.

재야인사 한 팀이 문병을 다녀간 후 얼마 있다 백낙청ㆍ염무웅ㆍ이시영 선생이 병실로 들어왔다. 백교수는 환한 얼굴로 웃으며 “우리 남주!” 하면서 시인의 두 손을 잡았다. 시인도 비로소 환하게 웃었는데 그 웃음은 이런 자리에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환했다. 그리고 그는 그 특유의 허허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을 뭔가 좀 베풀다가 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무슨 말이야, 남주가 얼마나 큰 것을 베풀었는데!” 백교수가 꾸짖듯이 말했다. (주석 24)

김남주의 영결식은 <민족시인 고 김남주선생 민주사회장>으로 경기대 교정에서 엄숙하게 치러지고, 영구차는 1천리 길을 달려 눈덮힌 광주 망월동 5ㆍ18묘역에 안장되었다.

영결식장에서, 장지에서 여러 지인들이 정성어린 추념사를 하면서 애통해 하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애통하고 절통한 사람은 연인으로서 10년, 부부로서 5년을 함께 하고, 다섯 살짜리 아들을 둔 부인 박광숙 여사였을 것이다.

내게 목숨 하나 던져놓고는 훨훨, 어디로 그렇게 급히, 가야할 길이 그렇게도 바빴더란 말입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내 입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려는 당신에게 잘 가라고 말해놓고도, 내 손으로 당신의 감기지 않는 눈을 감겨주고, 닫히지 않는 입을 다물리고 수의를 입혀주고, 내 손으로 당신의 묶인 몸 위에 검은 흙을 덮어주었건만 이건 분명 현실이 아닙니다.

내 안에 가득한 당신, 당신아들의 살과 뼈와 눈동자와 어깨에, 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득한 당신, 그 당신이 바로 죽음이었습니까? 숨이 떠난 주검, 주검이 돼버린 그 당신이 뜨거운 숨을 쉬던 바로 그 당신이었습니까. 뜨거운 숨결로 속삭이고, 노래하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당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요. 주검이 돼 버리다니요. (주석 25)


주석
20> 박석률, <저 푸른 하늘을 향하여>, 16쪽, 풀빛, 1989.
21> 김영현, <김남주, 그 의연한 또 하나의 싸움>, <말>, 1994년 1월호.
22> 김영현, <대지의 삶 대지의 노래>, <피여 꽃이여 이름이여>, 369쪽.
23> 박석률, <전사 김남주를 말한다>, <피여 꽃이여 이름이여>, 402쪽.
24> 황지우, <그대, 뇌성 번개치는 사랑의 이 적막한 뒤끝>, <실천문학>, 1994년 봄호, 124~125쪽.
25> 박광숙,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된 당신>, <실천문학>, 1994년 여름호,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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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89회] ‘천도론’과 ‘욥의 질문’에 의문

[89회] ‘천도론’과 ‘욥의 질문’에 의문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18장] 마지막 열정과 사망 그리고 평가 2014/11/14 08:00 김삼웅
김남주는 1993년 사면복권에 이어 제3회 윤상원문화상을 받았다. 민족문학 작가회의 상임이사에 선출되고, 한국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12월 23일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김남주 문학의 밤’이 개최되어 수많은 문인, 청중들을 상대로 자신의 문학론을 열강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식적인 활동은 여기까지다.

출옥 이후 김남주는 역사와 민중의 소명에 열심히 부응하다가 이래 세계사적인 전환기를 맞았고, 그 출구를 위한 모색의 결과가『사상의 거처』(창작과비평사 1991)였다. 그는 어려운 시기의 김수영처럼 번역작업을 본격 가동하는 한편 진지하게 드라마에 관심을 가질 참이었는데, 아마 그건 브레히트에게 암시를 받았을 것이다. 1993년 하반기부터 소화가 잘 안된다며 투덜거리더니 점차 약화일로로 치닫다가(⋯). 브레히트의 번득이는 드라마의 명장면을 구상했던 그의 모든 꿈이 종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출옥 후 그의 삶은 너무 팍팍했고 짧았다. (주석 18)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천도론(天道論)’이 널리, 깊게 인식되어 왔다.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하늘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를 묻는다. 그리고 하늘은 공명정대함으로 인식된다. <노자> 제70장에는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지만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고 하였다. 아무리 악당과 악행이 판을 치는 세상사라 해도 진정한 승리는 하늘이 항상 선한 사람들의 손을 들어준다고 믿는다.

사마천의 <사기> 중 가장 빛나는 무분은 <백이열전(伯夷列傳)>이다. 자신도 궁형을 당했던 태사공은, 가장 청렴하고 의리를 중시했던 백이와 숙제는 모두 수양산에서 굶어 죽고 말았다고 소개하면서 하늘에 과연 정도가 있느냐고 물었다.

성서의 구약에 ‘용의 질문(Hiob's Frage)'이 있다. 세상에서 왜 선한 자가 고난을 받고 악한 자가 성하는가 하는 질문을 말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는 멀리 떠난 자였다. 그런데 여러 자식이 죽고 가축에 잇따라 가혹한 시련이 내렸다.

욥은 사탄의 시험을 받고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묻는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이른바 ‘욥의 질문’이다. 왜 욥은 시련을 받았고, 왜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바르고 똑똑했던 안연은 굶어죽어야 했는가. 왜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권부를 손에 쥐고 떵떵거리며 살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는가. 왜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은 재물이 넘치고, 민주화운동가들은 헐벗고 어렵게 살아야 하는가.

김남주가 병원을 찾았을 때 이미 병마가 그의 육신을 깊숙이 갉아먹고 있었다. 췌장암 말기라고 했다. 출감 후 과도한 업무라는 측면도 있지만, 10년 동안의 무지막지한 옥살이와 부실한 음식 그리고 한반도와 국민, 인민이 처한 고통에 대한 고통의 심적 작용도 컸을 것이다.

김남주는 일찍이 옥중에서 <죽음을 대하고>란 시를 지었다. 달관한 듯한 사생관을 보여준다.

죽음을 대하고(부분)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있네 언제라도
지금이라도 나는 벗이여 사십 년이라는 내 삶의
뒤안길을 머뭇거리며 돌아보지 않고
의연하게 먼 산을 바라보며 저승의 사자를 맞이할 것 같네
그것이 어떤 이름의 죽음일지라도 (중략)

마지못해 영위되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네
억지로 가는 노예의 길이네

그러나 다만 억울한 것은 벗이여 (그대는 민주주의겠지)
사랑의 팔로 여인의 육체를 단 한번도 안아보지 못하고 가는가하는 것이라네
소위 저 세상으로 말이네
다만 억울한 벗이여 (그대는 고개를 끄덕여주겠지)
세상의 모든 죄악의 뿌리
사유재산의 뿌리를 뽑아버리지 못하고 가는 것이라네

그러나 벗이여 내가 죽거들랑 속삭여주게
바람에 날려 대지위를 굴러가는 가랑잎의 귀에 대고
남주에게도 여인이 있었다고 혼신의 힘으로 사랑했던
그녀가 나를 사랑했는지 사랑했다면 어떻게 사랑했는지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고 손익계산의 척도로
사랑의 눈금을 재지는 않았다고.(후략) (주석 19)


주석
18> 임헌영, 앞의 책, 61쪽. (⋯)은 필자.
19> <김남주시전집>, 144~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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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88회] ‘한길문학’에 ‘정치범들’ 기고

[88회] ‘한길문학’에 ‘정치범들’ 기고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18장] 마지막 열정과 사망 그리고 평가 2014/11/13 08:00 김삼웅
문학기행은 이튿날 생가를 떠나 인근 대흥사 요사채로 옮기어 김남주의 <나의 문학과 나의 삶>을 주제로 하는 강연 그리고 미황사와 땅끝마을의 답사로 이어졌다. 김남주에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김남주는 <한길문학> 1991년 겨울호에 <부처님 오신 날> <하늘도 나와 같이> <정치범들>을 발표하였다. 감옥에서 썼던 <정치범들>의 2, 3연을 소개한다.

정치범들

(2)

광주민중항쟁 7주년인 오늘
한꺼번에 스물네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 속에는
이랑처럼 수심이 깊은 늙은 농부의 얼굴이 섞여 있었고
팔뚝이 무쇠처럼 완강한 철공소의 직공도 끼여 있었다
철문을 따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사동의 문턱을 넘어
하나씩 하나씩 지정된 방으로 들어갈 때마다
정체불명의 박수소리가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것은 먼저 투옥된 사람들이 감방에서 보내는 환영의 인사다
철장에 어둠이 깃들고 간부들의 순시가 뜸할 시간이다

여기 저기서 자기를 소개하는 중구난방의 질문과 대답이 오간다
간수몰래 바깥소식이 벽을 타고 방에서 방으로 전달되는가 하면
식구통과 식구통으로 팔을 뻗혀 빵과 우유와 책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감옥의 밤에 취침 나팔소리가 울려퍼지면
어떤 사람은 담요를 깔고 요가를 하기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철창에 기대서서 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어떤 사람은 이불을 책상 삼아 독서를 한다

(3)

그들에게 있어서 감옥은 감옥이 아니다
인간의 소리를 차단하는 벽도 아니고
자유의 목을 졸라매는 밧줄도 아니고
감옥은 팔과 머리의 긴장이 잠시 쉬웠다 가는 휴식처이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독서실이고 정신의 연병장이다.  (주석 15)

김남주는 가정을 갖고 바쁜 활동 속에서도 마음 한가운데 몽우리진 깊은 공허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출감 다음 해의 천안문사건, 동구권 변혁, 소련몰락 그리고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부정적 실태를 보고,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생각했던 현실사회주의에 실망과 좌절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자본주의의 승리인 것처럼 자만하면서 더욱 거세게 치부와 탐욕에 빠져드는 부유층의 행태가 겹치면서 그의 고민은 한층 깊어갔다. 상대적으로 짙어가는 노동자, 농민, 실업자들의 한숨소리에는 견디기 어려웠다.

출감 4년만인 1993년에 사면복권이 이루어졌다. 법적으로는 완전히 자유인이 되었다. 그런데 노태우 정권의 폭압통치로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사위 도중 경찰에 맞아 사망하는 등 정권의 폭력성은 여전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되었다. 학생ㆍ노동자들의 잇따른 ‘분신정국’에서, 어느 저명한 저항시인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환멸도 느꼈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젊은 시절의 이상주의는 연륜의 타성에 밀리어 보수적이 되기 쉽다. 그러나 모진 세월의 풍상과 시대의 질곡에서도 초지로 일관하는 아름다운 영혼들도 적지 않았다. 김남주는 그런 유형의 시인으로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모습으로 시를 쓰고 강연을 하며 노동자들의 곁에서 살았다. 이 시기 그를 만났던 한 작가의 기록이다.

김남주를 직접 만난다는 설렘으로 앉아 있는데, 정작 내 앞에 나타난 사나이는 사십대 중반의 참으로 허수룩한 인간의 보통 인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부스스한 배추머리, 두꺼운 안경테 너머의 선량하고 쌍커풀진 눈, 약간 가무잡잡한 얼굴에 웃을 때마다 유난히 하얗게 드러나는 치아, 작달막한 키에 약간 뒤뚱거리는 듯한 걸음걸이, 형사 콜롬보가 입고 다니던 그런 다구겨진 바바리 코드⋯.

누가 뭐라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해남 사투리로 “그려”하고 느릿하게 말하는 투도 참 오래간만에 보는 영락없는 논두렁 밭두렁 촌놈의 그것이 아닌가. 그는 한마디로 폼이라고는 하나도 잡을 줄 모르는 그런 인간이었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고향 전라남도 해남 들녘처럼 넉넉한 모습의 그런 인간이었다.  (주석 16)

열혈의 전사이고 치열한 저항시인이고, 혁명을 꿈꾸는 아나키스트의 격정적인 인상과는 딴판의, 지극히 허수룩한 정형의 모습이다. 그런데 공적인 자리에 서면 달라진다. 김영현 씨의 소묘를 더 들어보자.

비록 사석에서는 그렇게 부담 없고 허술해 보이는 그였지만 일단 공식 석상에 나타나 대중 앞에 마이크를 잡는 순간 그는 다시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혁명시인으로 변하였고 사자와 같고, 성난 파도와 같은 목소리를 가진 전사로 변하였다.

나는 그를 따라 여러차례 공연을 다녀보았는데 정말이지 그가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이 일제히 기립하여 귀가 먹먹할 정도로 박수를 치곤하는 모습을 보았다. 느릿하지만 강력한 그의 시낭송 솜씨도 일품이었다. 어디 그게 솜씨이겠는가. 가슴속에 들끓는 열정없이 그렇게 빛나게 시를 낭송할 수 있겠는가. (주석 17)


주석
15> <한길문학>, 1991년 겨울호, 113~114쪽.
16> 김영현, <김남주 그 의연한 또 하나의 싸움>, 월간 <말>, 1994년 1월호, 227쪽.
17> 앞의 책, 227~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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