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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한석헌 - [93회] 6.29 항복선언의 날 입원하다

[93회] 6.29 항복선언의 날 입원하다

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6 08:00 김삼웅
노태우가 6.29 항복선언을 하던 날 함석헌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7월 13일 췌장, 담낭, 십이지장 등 종양부위의 절제수술이 4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입원 두 달 만인 8월 29일 잠시 퇴원했다가 9월 4일 백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 수술 상태가 좋지 않아서였다. 군부독재의 항복선언의 날에 함석헌이 입원한 것은 하늘의 섭리였는지 모른다. 독재세력의 항복으로 이제 그의 저항도 마무리할 시점이라는 섭리였을까, 그는 ‘섭리사관’을 믿어왔었다.

함석헌은 재입원하면서 <씨알의 소리> 복간의 뜻을 밝히었다.
1980년 7월 강제폐간 당한 지 7년 째가 되었다. 6월 항쟁으로 5공세력의 기가 어느 정도 꺾이면서, 그리고 직선제 개헌과 대선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느리게나마 민주화가 진척되고는 있었다. 해서 <씨알의 소리> 복간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악명 높은 언론기본법이 폐기되고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함석헌은 12월 22일 <씨알의 소리> 복간을 신청했다. 하지만 문공부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이 함께 출마하여 노태우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게되고, 6월항쟁은 결국 군부정권을 5년간 연장시키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노태우 정권이 <씨알의 소리>의 복간을 미루게 된 정치적 백경이 되었다.

함석헌은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성치않은 몸으로 단일화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김대중ㆍ김영삼의 단일화가 되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양김이 각각 잇따라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한 후 그의 자택에는 양김과 그들의 측근들의 발길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선거 결과를 예감한 듯 쌍문동 자택을 찾아온 양김 가운데 한 후보의 부인과 그 부인의 절친한 여성운동가 앞에서 <노자> 제29장의 한 구절을 써서 풀이해주었다고 한다.

將慾取天下而爲之 吳見基不得己 天下神器 不可爲也

장차 천하를 먹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자를 보면 나는 그 먹지 못함을 볼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런 그릇이므로 거기에 무엇을 어쩌지는 못함을 볼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런 그릇이므로 거기에 무엇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이다.
(주석 2)

제96호(1988년12월호) 복간호

6월 항쟁으로 민주세력이 집권하지는 못했으나, 1988년 4.26총선에서 여소야대로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5공과 같은 폭압은 사라지고,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씨알의 소리>는 1988년 7월 18일 폐간 8년만에 정기간행물 등록증을 교부받았다. 등록번호 <라 - 3676>였다. 법적 처리기간은 신청한지 1개월내로 내주게 되었으나, 정부는 무려 7개월 만에 등록증을 내주었다. 군사독재 잔당들에게 함석헌과 <씨알의 소리>의 존재가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다.
함석헌은 새편집위원으로 계훈제ㆍ김경제ㆍ김동길ㆍ김용준ㆍ김영호ㆍ노명식ㆍ법정ㆍ송건호ㆍ송기득ㆍ안병무ㆍ이태영ㆍ조요한ㆍ한승헌을 위촉하고, 이중 김용준(위원장)ㆍ김영호ㆍ한승헌으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편집기획과 자문 역할을 맡겼다.

1988년 12월호로 복간호를 발행하였다. 200여 쪽에 내용도 풍부했다. 함석헌의 <절대승리>, 특집 <씨알ㆍ반핵ㆍ통일>, 조요한의 <군사문화는 청산되어야 한다>는 시론, 박두진의 축시 <깃발>, 김경재의 <자유혼, 인간 김재준>, 김준엽ㆍ송건호ㆍ법정ㆍ계훈제의 <복간축사> 등이 실렸다.

함석헌은 8년 만에 다시 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의 <씨알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에서 통한의 사연을, 그러나 정제된 언어로 정리한다.

저들은 씨알을 칼로 자르면 쉽게 죽을 줄 알았겠지만 씨알은 죽지 않습니다. 죽는 법 없습니다. 죽이면 죽은 것 같으나 다시 살고, 다 죽어 없어졌다가도 굳은 땅껍질을 들추고 일어나는 들풀같은 씨알입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불의한 세력들은 나를 연금, 미행, 도청 등 갖은 방법을 다해 나의 입을 막고 나의 붓을 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전국 곳곳, 어느 산 어느 골짜기 골짜기마다 이름모를 수많은 씨알들의 꿈틀거림, 작은외침, 부르짖음이 함성이 되고, 마침내 도도한 물결을 이루어 불의의 세력들을 밀어부친 것이 작년 6월의 싸움이 아닙니까? 이때 나는 갑작스런 병을 얻어서 병원에 누워 있었고 마침내 대수술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병원을 드나들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주석 3)

함석헌은 퇴원을 했으나 노령인데다 큰 수술을 하여 건강이 예전치 못했다. 그러나 타고난 건강체질과 정신력으로 <씨알의 소리> 발행에 전력하였다. 복간호에 이어 1988년 1.2월호에는 특별한 글을 쓰지 않았다. 4월호가 통권 100호이기에 여기 준비를 서둘렀다. 평상시라면 창간 10년에 통권 100호가 발행되지만 <씨알의 소리>는 독재와 싸우느라 두 차례나 목이 졸려서 19년 만에야 100호가 나오게 되었다. 통상적이라면 200호가 나올 시점이었다.

함석헌은 재복간과 100호 준비, 그리고 몇 차례 시국강연으로 다소 무리를 한 것인지, 8월 3일 서울대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 1년 만이었다. 의사는 안정을 권하였다.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제24회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노태우정부는 올림픽평화대회의 공동의장으로 함석헌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올림픽개최의 날 노태우와 함께 평화대회의 공동의장으로서 평화의 문에 불을 지폈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5공의 제2인자로서 헌정 유린과 인권탄압에 핵심적 역할을 한 장본인이었다. 위기에 몰리자 6.29선언을 통해 국면을 전환하고, 야당분열의 선거전에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나마 전두환과 다른 점이라면 1988년 7월 7일 ‘대북정책 특별선언’을 통해 대북 화해무드를 조성한 것이다.

함석헌이 민주진영 일부로부터 “망령이 들었다” 는 격한 비난을 들어가면서 병중의 몸으로 서울올림픽평화대회 추진위원장으로서 노태우와 평화대회의 공동의장이 된 것은 올림픽의 평화정신과, 대북 화해 분위기를 살리고자 했던 것 같다. 이제까지의 삶과는 달리 군사정권이 주최한 ‘행사’에 참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이에 앞서 1987년 10월 12일에는 동아일보사가 제정한 ‘인촌 언론상’을 수상했다.
인촌 김성수의 일제말기 친일행적을 둘러싸고 지인들 사이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함석헌의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인들과 <씨알의 소리>독자들이 이 상을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 상을 수상했고, 상금 전액을 오산학교 남강문화재단에 장학기금으로 내놨다. 그는 1984년 남강 이승훈을 기리는 ‘남강문화재단’을 오산학교에 설립하고 원고료와 강연료 등을 털어 기금으로 희사해왔었다.


주석
2> 이치석, 앞의 책, 637~638쪽, 재인용.
3> <씨알의 소리>, 복간호 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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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함석헌 - [92회] 전두환 타도의 맨 앞장에서

[92회] 전두환 타도의 맨 앞장에서

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5 08:00 김삼웅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폭로> 20년 전 박종철 씨가 공안당국의 고문에 의해 사망했을 때 군사독재정권은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신부들의 용기 있는 폭로가 있었기에 암흑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국민은 전두환 독재정권에 언제까지 굴종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청년ㆍ학생들이 금단의 철벽에 도전하였다. 1982년 3월 18일 일군의 학생들이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하면서 광주학살에 미국의 역할을 성토한 것이 반독재 항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어서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결성되어 투쟁하면서 5공의 철옹성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향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1984년 5월 18일 김영삼ㆍ김대중 계의 야당인사들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면서 저항운동은 야당 진영에까지 확대되었다.

80년대 초기 민주화운동의 선두 그룹에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면서 연대를 이루어 온 재야인사들이 있었다. 1983년 5월 31일 함석헌ㆍ문익환ㆍ홍남순 등 재야 지도급 인사들은 “광주학살 진상” 등을 요구하는 <긴급민주선언>을 발표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이에따라 6월 16일 양심수가족협의회가 NCC사무실에서 양심수 석방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고, 이것은 고려대학을 필두로 대학가의 시위로 확산되었다.

시대는 다시 함석헌을 부르고 있었다. 함석헌이 새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전두환의 폭정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면서, 5공은 날이 갈수록 더욱 흉폭해지고 민심의 이반속도가 빨라졌다. 정부는 저항하는 민주인사들을 고문하고 용공으로 몰았다.

함석헌은 김재준ㆍ윤반웅ㆍ홍남순ㆍ이민우ㆍ문익환ㆍ지학순ㆍ김대중ㆍ김영삼 등과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1985년 11월 11일 <고문용공조작은 절대로 은폐될 수 없다>는 성명에 이어 농성을 시작했다. 위원회는 <우리의 주장>에서 5가지를 주장했다.

-. 고문과 용공조작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한 수사기관원들을 색출ㆍ처단하라.
-. 국회에서 위증한 내무장관과 법무장관은 인책ㆍ사퇴하라.
-. 우종원 군의 사인을 공개수사를 통해 밝혀라.
-. 현정권은 다시는 고문 및 용공조작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국민과 세계 앞에 공약하라.
-. 우리는 국민의 자유로운 정부 선택권과 언론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총력을 경주할 것이다.
(주석 1)

많은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이 분신ㆍ투신ㆍ할복 등 극한적으로 저항에 나섰다. 전두환 정권은 막나갔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을 당하다가 숨졌다. 함석헌 등 민주인사들은 1월 26일 기독교회관에서 ‘고 박종철군 국민추모회준비위원회’ (추모위)의 발족식을 갖고, 고문살인 사건의 진상규명과 이 땅에서 영원히 고문 등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을 추방하기 위한 국민연대를 결성했다. 그리고 박종철군 국민추모대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추모위’는 이후 민주쟁취의 대장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함석헌은 6월 5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면서 홍남순ㆍ강석주ㆍ문익환ㆍ윤공희ㆍ김지길ㆍ김대중ㆍ김영삼과 공동으로 고문을 맡아 이 단체를 이끌었다. ‘국민운동본부’ 는 전국에서 노도처럼 일어나는 6월항쟁의 중심이 되었다. 함석헌은 많은 집회와 시위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고, 국민운동본부의 주요 성명을 발표할 때이면 이를 낭독하였다.

시민의 궐기에 견디지 못한 신군부 정권은 6월 29일 마침내 노태우가 항복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수구세력의 교활한 국면 전환용 전략이었다. 그들은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유화책을 쓰고, 가라앉은다 싶으면 다시 칼을 빼드는 숫법이었다. 최근에는 이명박이 촛불집회로 위기에 몰리자 반성하는 듯 하다가 곧 공안카드를 꺼낸 바있다.

들불처럼 번지던 6월항쟁은 6.29선언과 함께 보수야당이 체제내로 귀환하면서 곧 대선 정국으로 전환되고, ‘전두환 타도’의 열기는 사라졌다. 이번에도 혁명적 열기로 치솟던 민중의 역량이 비등점에서 사그라지고 말았다. 매번 그랬다. 반유신 항쟁이 10.26사태로, 반전두환 6월항쟁이 6.29선언으로, 반이명박 촛불집회가 MB의 반성 발언으로 수그러들었다.

함석헌이 늘 걱정했던대로 국민적 ‘의분’ 이 모자랐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눈물로 전송하고, 박정희가 암살되어 장례를 치를 때 수많은 국민이 연도에 나와 눈물을 흘렸다. 전두환이 백담사에 유폐되었을 때도 많은 국민(신도)들이 그를 찾아갔다. 인정이 많은 국민인지, 의분이 없는 국민인지, 그래서 압제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일 터이다. 1911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의 반독재 투쟁의 치열했던 것과도 비교된다.


주석
1> <6월항쟁 10주년기념자료집>, 45쪽, 6월민주항쟁 10주년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엮음, 사계절,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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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함석헌-[91회] 20권으로 묶인 <함석헌 전집> 간행

[91회] 20권으로 묶인 <함석헌 전집> 간행

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4 08:00 김삼웅

983년 3월 한길사

함석헌의 80순을 넘긴 1982년 암담한 시국에서도 지인들이 ‘함석헌선생 8순기념문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씨알ㆍ인간ㆍ역사>라는 390쪽 분량의 문집을 발간하였다. 문집편집위원에는 김동길ㆍ김성식ㆍ김용준ㆍ송건호ㆍ법정ㆍ안병무 등이 참여했다.
문집은 안병무의 <선생님께 드리는 글>, 박두진의 기념시 <빙원행>에 이어 제1부는 안병무의 <순수와 저항의 길>, 송건호의 <언론인 함석헌>. 김경제의 <뜻ㆍ역사ㆍ민족>, 송기득의 <함석헌의 저항론>을 묶었다.
제2부는 양호민의 <마르크스ㆍ레닌의 민족이론>, 박현채의 <한국농업의 상황과 농업혁명에의 길>, 장을병의 <평등이념의 정치적 접근>, 제3부는 안병무의 <세례요한과 예수>, 유동식의 <한국사상과 기독교신학>, 장일조의 <인간의 자기해방과정으로서의 역사>, 남정길의 <정의관념의 붕괴와 그 결과에 대한 고찰>, 제4부는 장회익의 <인간:우주적 실재에 대한 역사적 모형>, 김용준의 <분자생물학의 현재>, 장기홍의 <지구의 초기사>, 제5부는 김성식의 <이집트 문화의 재음미>, 김정환의 <페스탈로찌의 정치철학적 저작 연구>, 이태영의 <자녀의 양육에 관한 연구>가 쓰였다.

한길사는 1983년 3월부터 함석헌전집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1988년까지 20권의 전집을 펴냈다.
편집위원은 계훈제ㆍ고은ㆍ김동길ㆍ김성식ㆍ김용준ㆍ법정ㆍ송건호ㆍ안병무로 구성되었다.
전집은
1. 뜻으로 본 한국역사.
2. 인간혁명의 철학.
3.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4.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5. 서풍의 노래.
6. 수평선 너머.
7. 간디의 참모습 / 간디 자서전.
8.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9. 역사와 민족.
10. 달라지는 세계의 한길 위에서.
11. 두려워 말고 외치라.
12. 6천만 민족 앞에 부르짖는 말.
13. 바가바드 기타.
14.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15. 예언자 / 퀘이커 3백년 외.
16. 사람의 아들 예수 / 예언자 [칼린 지브란]
17. 민족통일의 길.
18. 씨알의 옛글 고쳐 읽기.
19. 영원의 뱃길.
20. 함석헌의 삶과 사상.
(주석 14)

당시 생존 인물의 저작물이 20권의 전집으로 묶여나온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함석헌은 80여 년의 생애에서 그만큼 많은 글을 쓰고 강연, 인터뷰 그리고 여러 권을 번역한 노력의 결정이었다. 편집위원회의 간행사 몇 대목이다.

“이 시대에 살면서 글줄이나 읽은 사람치고 ‘함석헌’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삶과 뜻을 훌륭하다 칭찬하는 사람, 또는 부질없다 나무라는 사람, 또는 마땅치 않다 욕하는 사람이 다 있어 그 의견이 한결같을 수는 없으나, 그 누구도 함석헌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잡아떼지는 못할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해방 후 40여 년, 아니 그 이전 일제시대부터의 이 나라 이 민족 역사에 있어서 그의 이름은 언제나 그 현장에 있었고 또 매우 아름다운 이름이 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막상 ‘함석헌이 어떤 사람인가?’하고 누가 묻는다면 성큼 ‘이런 사람이다’ 라고 대답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그런 인물이다. 금강산에는 만물상이 있는데, 이렇게 보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런 것 같아서 무어라 이름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런 면이 있는가 하면 또 저런 면이 있으니, 어떤 형용사도 그 바위산의 특정을 나타내지 못하여 만물상이라는 이름이 붙였을 것이다.”

“학자이기도 하고 학자가 아니기도 하고, 문인이면서 문인이 아닌 함석헌은 또한 종교인이면서 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기독교를 배우고 우찌무라ㆍ유영모 같은 이들의 여향을 받았으며, 현재는 퀘이커 교도들 모임에 몸을 담고 있는 그가 크리스찬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신앙의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는 정치와는 아주 거리가 먼 곳에서 늘 살아왔지만 해방 이후 이땅의 가파른 정치사에 큰 선을 긋는 영향을 미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인이 아니지만 칼날같은 날카로운 붓끝으로 한 시대의 잘못을 고발한 언론인이 또 누구이겠는가? 그의 붓끝을 따라 한 시대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함석헌은 누구인가? 만물상이기 때문에 뭐라고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다. 몇 마디로 굳이 표현하자면, 그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이며 ‘죽어가는 시대의 양심’이다. 그는 ‘민중의 대변자’로서 ‘시대의 예언자’로서, 이 날 이 시간까지 살아왔다. 그는 ‘씨알’을 위해 씨알과 더불어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면서 가시밭길 80년을 헤치고 예까지 걸어온 우리 시대의 자랑스런 얼굴이다. 에머슨이 ‘위대한 것은 오해받기 마련’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인간 함석헌은 바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삶과 역사를 살아온 우리 시대의 참 인간상이다.”
(주석 15)

함석헌전집은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20권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공전의 인기를 불러모았다. 그런데 뒷날 함석헌기념사업회는 이 전집의 많은 오ㆍ탈자를 비롯 문장의 부분적인 탈락 등편집상의 여러 가지 부실성을 들어 판매금지를 요구하고, 출판사가 이를 수용하면서 서점에서 절판되었다. 전집 편찬 이후에 발굴된 각종 자료까지 포함하여 새 전집의 발간이 기대된다. 


주석
14> <씨알ㆍ인간ㆍ역사>, 차례, 한길사, 1982.
15> <전집>, <함석헌전집 간행에 부쳐>, 3~5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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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함석헌 - [90회] 각종 저작 단행본으로 속속 출간

[90회] 각종 저작 단행본으로 속속 출간

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3 08:00 김삼웅
한승헌 변호사가 조작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생계형’으로 삼민출판사를 차렸다. 그리고 1982년 5월 함석헌의 <씨알의 옛글풀이 하늘 땅에 바른 숨 있어>를 펴냈다. 그동안 <씨알의 소리> 등에 연재한 동양고전을 묶은 것이다. <제1장, 동양정신의 뿌리>, <제2장 장자>, <제3장 둬두는 정치 (속 장자)>, <제4장, 노자>, <제5장 맹자>, <제6장 잡편>이다. <예와 이제(古今)>이란 서문의 한 대목을 보자. 그의 고전에 관한 인식의 편린을 알게 된다.

길을 찾기 위해 나는 옛길을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다. 왜? 그 안에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운 기본적인 모습, 그리고 그렇게 살고 죽는 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때야말로 초창시기기 때문에 사치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고, 비교적 간사한 지혜가 없이 순전히, 너도 살고, 나도 살며, 나도 인간답게 죽고 너도 인간답게 죽어, 이 인생을, 이 생명을 이 하늘을 한 뜻 속에 실현해보려고 애썼던 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중략) 세상 풍조는 새것만을 좋아하고 옛것을 존중할 줄 모르지만 뜻 있는 이는 그렇지 않다. 옛날에 위대했던 이들은 예외 없이 다 옛길을 찾았다. 모든 종교, 모든 철학이 그것을 증거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고등기술의 급작스런 발달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변하는 새 풍조만을 따르고 옛 정신을 거의 무시하게 됐지만, 이대로 오래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주석 11)

이 책의 <잡편>에 풀이한 굴원(屈原)의 글 <고기잡이 늙은이가 묻기를>에서는 이 무렵 함석헌의 심기와 통함을 느끼게 한다.

굴원이 이미 내침을 받음에 강담에 놀아 못가에 걸으며, 읊조리니 낯빛이 바싹 마르고 모양이 마른 나무처럼 시들었더라. 고기잡이 늙은이가 보고 묻기를, 그대 삼려대부가 아닌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 이르렀는고,

굴원이 가로되, 온 세상이 다 흐렸는데 나 홀로 맑았고, 뭇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었노라. 이러므로 내침을 보았노라. 고기잡이 늙은이가 가로되, 어진 이는 무엇에나 걸림이 없어 세상으로 더불어 잘 어울려 옮겨가는 것이다. 온 세상이 다 흐렸거든 어찌하여 그 진흙을 휘저으며 그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고. 그러고는 깊이 생각하고 높이 서서 스스로 내침을 받도록 하는고. 굴원이 가로되, 나는 들으니 새로 머리 감은 이는 반드시 감투를 튕겨서 쓰고 새로 몸 씻는 이는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하니, 어찌 내 몸의 깨끗함을 가지고 남의 얼룩덜룩한 것을 받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소상강에 나가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 지언정 또 어찌 차마 희고도 흰 맑음을 가지고 더러운 세상의 티끌을 무릅쓸 수 있겠는가. 고기잡이 늙은이 빙긋이 웃고 뱃삯을 쳐 떠나가면서 노래하기를, 창랑물 맑거들랑 내 갓끈을 씻읍세나, 창랑물 흐리거들랑 내 발을 씻읍세나. 드디어 가 버린 다음 서로 다시 말이 없더라.
(주석 12)

함석헌은 죽을 때까지 퀘이커교인으로 생활하였다. 세계적으로 연대를 갖고 국제 모임은 물론 국내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그리고 1985년 11월에는 삼민사에서 <현대의 선(禪)과 퀘이커신앙>을 편역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영문학자로서 일본 퀘이커의 원로인 이기에 유끼오의 <퀘이커의 길>은 1958년 호주 퀘이커 연회에서 퀘이커신앙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소개할 목적으로 펴낸 것을, 그쪽에서 한국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펴내기를 희망하여 번역하게 되었음을 서문에서 밝힌다.

이 책은 <제1부 기독교는 달라져야 한다>, <제2부 종교의 원천을 찾아서>, <제3부 퀘이커의 길>로 구성되었다. 1부는 함석헌이 퀘이커 예배모임에서 발표한 내용이고, 2부는 유끼오의 글을 조형균의 번역, 3부는 부길만이 각각 옮겼다. 함석헌은 이 책을 펴내는 이유를 말한다.

이상하게도, 그 진실하고도 담대한 정신의 개척자들이 북아메리카에도 가고, 아프리카에도 가고, 인도에도 가고, 일본에까지 오면서도 오직 우리, 졸고 있는 은둔자라 불리던 우리에게만 늦었다. 그래서 인류역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끔찍한 환난인 6ㆍ25에 와서야 비로소 그 개척자들의 발길이 우리나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먼저 그 물결에 접한 우리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 수난의 여왕의 지침이 너무해서 그랬는지, 30년이 넘는 동안 우리는 이렇다할 만한 새 정신의 증거를 한 것이 없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차차 젊은 혼들로부터 “퀘이커란 무엇입니까” 하는 고마운 질문을 받게 된다. 지금 여기 펴내는 조그만 책자도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함으로써 새로 남의 꿈틀거림을 일으켜보자는 하나의 움직임이다. (주석 13)

여기서 함석헌의 책 얘기를 덧붙이기로 한다. 그의 사회적인 명성이 높아지면서 출판사들의 책 출판이 이어졌다. 1959년 3월 생각사에서 처음으로 펴낸 <새 시대의 전망>은 반응이 좋아지면서 1979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게재하여 몇 달 만에 5쇄까지 찍었다. 기왕에 발표했던 글을 묶은 책이다.

이에 앞서 1969년 1월 칼릴 지브란의 번역서 <예언자>가 삼중당에서, 역시 번역한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이 1976년 5월 한샘문화원에서 출판되었다. 1978년 10월 휘문출판사가 <씨알은 외롭지 않다>, 1979년 4월 동광출판사가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1985년 11월 한길사가 산문을 모은 <들사람 얼>을 각각 펴냈다. 이들 책에는 중복된 내용이 많아서 독자들을 실망시켰다는 평도 따랐다. 휘문출판사는 1989년 “나의 인생관” 시리즈 10권을 편찬하면서 함석헌의 책을 <씨알은 외롭지 않다>라는 제목을 달아 펴냈다.


주석
11> 함석헌, <하늘 땅에 바른 숨 있어>, 5~6쪽, 삼민사, 1982.
12> 앞의 책, 315~316쪽.
13> 함석헌 외, <현대의 선과 퀘이커의 신앙>, 2~3쪽, 삼민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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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함석헌 - [89회] <월간 마당> <신동아> 등 인터뷰

[89회] <월간 마당> <신동아> 등 인터뷰

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2 08:00 김삼웅
5공 시대에 잡지와 가진 인터뷰는 <월간 마당>이 처음이었다.
1981년 5월에 갓 창간한 잡지였다. 앞 장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퀘이커 관련 회견이 중심이었다. 인터뷰어는 “꿋꿋한 허리, 정정한 목소리, 조리 있는 말은 80대 노인을 장년처럼 느끼게 한다”고 적었다. 이 잡지 25~37쪽에 실린 회견문 중에서 ‘발문’을 소개한다. 당시 함석헌의 정신을 살필 수 있다.

“꼭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든지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야.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나 스스로 절대화해서 우리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하죠.”

“기독교가 찾는 하나님이란 자리를 노장(老莊)이 말하면 도(道)라 하지 않겠는가, 그걸 관념적으로 분석하면 다를 지 모르지만, 믿는 입장에선 그 자리가 같아.”

“사회적인 문제가 해결될려면 기독교인을 통해서 해야될 것인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썩어가니 어떻게 해야될지! 그들이 도무지 이렇게 무식한 짓을 할 줄 몰랐어요.”

“이 도교(道敎)가 평화주의야요. 우리나라 선비사상도 그렇고, 단군신화에 전쟁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은 주의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다가 압박을 받으면서 비겁하게 달라져 버렸어.”

“진리가 다수에만 있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한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데, 이런 뜻에서 퀘이커에서는 다수 가결이 없어요. 전원일치제지요. 절대 서두르지 않고 토론을 충분히….”

“쓸데 없는 곳에 돈을 가장 많이 들여 하는 게 전쟁이니 최고의 사치지요. 실제로도 사치 생활과 전쟁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기업 유지 위해 전쟁하는 것 아닙니까?”

“국민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을 만한 인격이 솔직한 말로 한 사람도 없다면 이것은 참 걱정 아닙니까? 재목은 길러야지 내 생각과 다르면….”

“난 흑백논리가 아주 싫어요. 이 우주의 본의가 뭔고 하니, 온갖 꽃과 수만 가지 식물, 곤충들만 보더라도 다원의 세계지요. 다(多)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물었다.

“함 선생님을 비난한 책을 최근 서점 주인들이 진열하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건 그러라고 그래요. 내버려 두라고 그래요. 나는 믿으니까. 하나님 일 아닌 것 없다고 생각하는 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걸 누가 어떻게 하겠나, 무슨 까닭이 있어 그러시갔디. 내 잘못이 없다는 것 아니야, 있기야 있지만…. 이런 것을 내가 말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한국의 지성에 대한, 도덕에 대한 시험인지도 몰라요.
(주석 9)

당시 정보기관의 후원으로 제작된 <위선자 함석헌> 등의 책을 서점 주인들이 판매를 거부하였다. 이런 경우는 찾기 드문 현상이었다. 함석헌은 온갖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이만큼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함석헌은 1983년 5월에는 <신동아>에서 언론인 최일남과 인터뷰하였다. 5공체제에서 제도권 언론과는 쉽지 않았던 인터뷰였다. 최일남은 3년 전에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질문과 답변 몇 대목을 뽑았다.

- 민족주의가 왜 뒤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근거는?
◇ 한 민족에도 우리 편이 있고 우리 편 아닌 것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문제도 세계적으로 해석해야지 민족주의만으로 풀어가서는 안됩니다. 물론 민족 자체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내셔널리즘만 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민족주의만 내세우는 걸 보면 안타까와요.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어요. 세계 인류가 같은 운명으로 나가야 합니다. 민족은 영원한 것이니까 그걸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나,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기본이 민족에 있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는 찬성할 수 없어요.

- 우리 민주주의의 수준을 어떻게 보십니까?
◇ 맞아요. 자꾸 가르쳐야 합니다. 의식이 박약해요. 여기에는 언론의 힘이 큰데… 우리는 고려 이후부터 그랬습니다. 국민의 기운을 키워주어야 하고 이것은 정치의 양심입니다.

- 야인이란 말은 저같은 속물에게는 멋있게도 들립니다.
◇ 멋이란 것이 있나요. 우리나라는 껍데기만 보니까 그럴지 몰라도, 이상주의로 보는 게 옳습니다. 좀 경지를 높이자면 엄자릉(嚴子陵)이나 허유 소부(許由 巢父) 같은…. 그와 관련해서 한 마디 할 것은, 나는 굉장히 간소한 생활을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 때로 좌절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살아오시는 동안에 말입니다.
◇ 마음은 약한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극복이 됩니다.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절대 긍정주의자입니다. 살고 싶다고 살고 안 살고 싶다고 안 살수 있습니까. 어떻든 살아야 하니까. 좌절까지는 모르지만 힘껏 살아오고 있습니다. 정신 가다듬고 목숨 있는 한은 말입니다.

- 함석헌, 그는 평생 돈과는 인연이 먼 사람으로 보인다.
◇ 그래요. 돈 모을 줄 모르지만 생각도 안해봤으니까. 그 대신 나는 아끼는 사람입니다. 천성이 그래요. 물건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내게 돈은 없고, 돈이 나를 거쳐갈 뿐이지요. 1928년부터 38년까지 10년 동안 선생 노릇을 한 후로는 줄곧 무직자로 있었는데, 내 수중에는 무슨 형식으로든지 돈이 들어왔다가 나를 거쳐 나갑니다. 따라서 마음은 자유로와요. 살아가는데 걱정 안해요.

- 얼마 전 함옹의 조카되는 분이 분명히 함옹을 가리키는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낸 일이 있다.
◇ 조카도 아닙니다. 괜히 그 놈이 그러는 거지. 개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에요. 책 보지도 않았습니다. 보나마나 그까짓거….

- 생애를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 내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후회는 안해요. 고통이 많으나, 그것은 어느 정도 적응해서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어서도 그렇겠으나, 노장자(老莊子) 사상의 도움이지요. 그분들도 우리 같은 처지를 겪으면서, 그 가운데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를 터득한 분들이지요. 속된 얘기로 초탈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문제가 나와도 상관없어요. 자기 마음의 자유를 안 잊으니까. 그런 인생관은 어느 정도 되어 있어요. 감히 됐다 안 됐다는 말을 할 수 없을지 모르나, 어떤 사람이고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은 안 해요.
(주석 10)

함석헌은 1982년 1월 30일 YMCA 강당에서 열린 간디 34주기 추모강연회에서 작심하고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내란음모라고 왜곡된 광주사태는 반드시 진실이 규명되고 바로 잡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개석상에서 5공비판은 이것이 최초의 발언이 아니었는가 싶다.

이 해 함석헌은 26년간 살았던 원효로 4가 70번지의 집에서 아들이 사는 도봉구 쌍문동으로 이사하였다.
낡은 원효로 집을 혼자 관리하고 지내기가 어렵다. 쌍문동 집은 1985년 8월 28일 의문의 화재로 평생 아끼던 책과 자료가 몽땅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함석헌은 이 해 10월 퀘이커 세계협회의 초청으로 멕스코 종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를 다시 방문했다. 워싱턴 수도 장로회에서 <정치와 종교>, 워싱턴 한인교회에서 <그리스찬의 사명>, LA한인교회에서 <새사람>을 주제로 각각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연말에는 일본 와세다 교회에서 <한국의 민중운동과 나의 걸어온 길>이란 주제의 강연을 하고 돌아왔다. 이 해에 두번째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되었다. 행운의 여신은 끝내 그를 비껴갔다. 그의 꿈은 15년 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석
9> <월간 마당>, 1983년 8월호, 인터뷰어 한용상.
10> <신동아>, 1983년 10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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