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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34회] 박열 - 가네코와 김남주 - 박광숙

[34회] 박열 - 가네코와 김남주 - 박광숙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8장] 징역15년, 박광숙의 옥바라지 제안받아 2014/09/20 08:00 김삼웅
김남주와 박광숙이 감옥의 철벽을 사이에 두고 나누게 되는 믿음과 사랑을 보면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1920년대 초반 일본 도쿄에서 일왕 부자를 폭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국사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무기로 감형)를 받았던 독립운동가 박열과 그의 동지, 연인이었던 일본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불꽃같았던 사랑과 신념의 이야기다.

아나키스트였던 두 사람은 국경을 넘어 반제 이데올로기의 동지가 되고 일본제국의 상징인 일왕을 척살하고자 하였다. 국가주의ㆍ폭력주의를 거부하면서 활동했던 이들은 20대의 청춘으로 감옥에 갇혀 가네코는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박열은 일제가 패망하면서 22년 만에 석방되었다.

박열이 감옥에서 가네코에게 쓴 시다.

철창의 겨울밤은 이슥히 깊었는데
찬기운 살을 에고 먼 하늘에 주린 듯
허리굽은 그믐달을 철창으로 엿볼 제
우당탕 지겟문을 흔드는 찬바람
아, 저달이 몸서리친다, 달아 반가운
명절은 왔건만은 닥쳐오는 기한은 어찌하랴
부와 귀에 추세하는 명절이 헐벗고
주린 우리에게 하 그리 반가우랴
고르지 못한 세상 생지옥의 세상
아, 원수의 생지옥, 달아 기한에
수족이 얼었으리니 추하나마 쉬어 가라
달아, 이 밤에 나와 함께 이곳에서. (주석 12)

다음은 가네코가 옥중에서 쓴 시의 일부이다.

꽃은 진다
꽃은 지더라도 기요탄(사형기구)에서
지더라도 꽃피어라 혁명의 친구
기요탄에 사라진 넋이런가
들에 핀 진달래의
붉은시선. (주석 13)

두 사람은 박열과 가네코를 닮았을까, 김남주의 생각이다.

“나는 그녀의 옥바라지를 받아가면서 옥살이를 하면서도 가끔씩 괴로워하기도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징역살이와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다음 시는 그런 나의 심경을 적어놓은 것이다.”

잡아 보라고
손목 한 번 주지 않던 사람이
그 손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오
옥바라지를 해주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이리 꼬시고 저리 꼬시고
별의 별 수작을 다해도
입술 한번 주지 않던 사람이. (주석 14)

김남주가 10여 년을 혹독한 옥살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데는 그의 혁명가적인 신념, 정신력과 더불어 박광숙 씨의 헌신적인 옥바라지가 크게 기여하였다.

한 순정한 시인이 감옥에서 견디기 어려운 옥고를 치루고 있을 때에 전두환 정권은 거칠 것 없이 폭주하고 있었다. 김재규를 비롯한 박정희 살해 관련자 5명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고, 김대중을 학원 소요 및 광주 민중항쟁 배후조종과 내란음모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그런가 하면 얼론통폐합 등으로 비판언론에 족쇄를 채우거나 폐간하고, 비판적인 172개 정기간행물을 등록 취소시켰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91.6%의 찬성을 받았다고 발표하면서 5공정권을 출범시켰다.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조직하고, 언론기본법ㆍ노동법 등 각종 악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1981년 3월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런 참혹한 반동의 역사를 옥중에서 관제언론을 통해 들으면서 김남주는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 체르나이셰프스키의 말을 곱씹었다.

역사의 길은 네프스키광장의 탄탄대로와 같은 것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광야를 횡단하고 어떤 때는 나락(奈落) 위를 넘는다. 여기서는 흙모래를 뒤집어쓰고 저기서는 진창에 빠진다. 흙모래 뒤집어쓰기를 두려워하고 자기의 신발이 흙탕물에 더럽혀지는 것을 꺼려한 사람은 사회적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게 좋다. (주석 15)

김남주는 훗날 박광숙이 자기 곁에 나타난 것을 두고 <내가 드리는 사랑의 시>에서 이렇게 뜨거운 마음을 전했다. 시의 두 연을 소개한다.

그대는 내게 왔다 기적처럼
마지막 판가름 한판 승부에서
보기 흉한 패배로 내가 누워 있을 때
해적의 바다에서
난파선의 알몸으로 내가 모든 것을 빼앗기고
떠돌 때
그대는 왔다
파도 속의 독백처럼
비밀을
비밀 속의 비밀을 속삭이면서

세계를 잃고 그대 하나를 내 얻었나니
그대 이름 하나로 우주와 바꿨나니
나는 만족하나니
지금은 다만 그대만이 그대 사랑만아
내 안에 가득한 행복이나니. (주석 16)


주석
12> 김삼웅, <박열 평전>, 216쪽, 가람기획, 1996.
13> 앞의 책, 220쪽.
14> <김남주문학에세이>, 134쪽.
15> <김남주문학에세이>, 75쪽.
16> <내가 드리는 사랑의 시>, <김남주옥중연서>, 67 ~ 68쪽, 삼천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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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31회] 광주교도소 수감, 끔직한 감옥실태

[31회] 광주교도소 수감, 끔직한 감옥실태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8장] 징역15년, 박광숙의 옥바라지 제안받아 2014/09/17 08:00 김삼웅
‘사상범’이 된 김남주는 1980년 12월 23일 광주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좌익수들이 감금된다는 특수 사동이었다. 전두환 일당이 휩쓸고 간 광주는 아직 핏자국이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그가 남민전에 가담하지 않고 광주에 있었다면 십중팔구 항쟁의 선두에 섰을 것이고, 그 이후의 상황은 예측하기 어렵다. 운명의 여신은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시도를 하곤 한다.

반유신 투쟁을 전개해온 민주인사들이 독재자가 암살되면서 속속 석방된 데 반해 김남주는 그의 타도의 대상이 제거되었음에도 길고 험한 옥살이를 새로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 역시 운명의 작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승냥이를 몰아내려다 사나운 늑대를 만난 격이었다.

김남주가 좋아하는 네루다가 “오직 불타는 인내만이 최후의 승리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란 말을 하였다. 하지만 네루다는 노벨문학상 수상식장에 서게 됐으나 자신은 0.7평의 감방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와 혁명정신’ 만은 묶을 수도, 멈추게할 수도 없었다. 아마 네루다의 <커다란 기쁨>을 연상하면서 옥고를 시작했을 터이다.

나는 민중을 위하여 쓰는 것이다
그들이 나의 시를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나의 생활을 일신시켜주는 대지여
언젠가 내 시의 한 줄이
그들의 귀에 다다를 때가 올 것이다(중략)
그리고 그들은 틀림없이 말할 것이다.
“이것은 동지의 시다” 라고! (주석 1)

김남주는 연인 박광숙 씨에게 보낸 옥중서한에서 1986년 9월 1일 전주교도소로 이감될 때까지 6년여를 보내게 되는 광주교도소 ‘보금자리’ 의 실태를 소개하였다.

내가 수용되어 있는 사동은 소위 좌익수들이 감금되어 있는 특수 사동으로서 시멘트 복도를 사이에 두고 문패에 1.06평, 정원 3명이라고 씌여진 방이 서른여섯 개씩 있습니다.

평수가 1.06평이라고 씌여져 있으나 방에 딸린 변소(뺑기통)를 빼면 0,7평 정도밖에 안되고 정원 5명이라고 씌여져 있으나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한 방에 한 명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동을 일컬어 ‘특사’ 라 하기도 하고 ‘시베리아’ 라 하기도 하는데 그 까닭은 아마 이 사동에 수용되어 있는 수인들의 특수한 성격과 그 사동의 분위기가 한여름에도 찬바람이 부니까 붙여진 이름인 것 같습니다. ‘시베리아’ 라고 부른 또 다른 까닭은 이 사동이 정치범을 감금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석 2)

잡범들에게 감옥은 ‘지옥’ 이지만 정치범 또는 사상범들에겐 사유와 철학을 담금질하는 단련의 장소가 된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인물들이 감옥에서 사상적 성장을 이루고 명저를 남겼다. 김남주가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시인ㆍ작가 중에 감옥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명저 상당수가 옥중에서 집필되었다. 함석헌은 감옥을 ‘인생대학’ 이라 불렀다.

김남주가 갇혔던 우주선의 ‘캡슐’을 좀더 소개한다.

복도에서 가로 1미터 세로 1.5미터 철문을 끌어당기고 들어가면 비좁은 공간이 강요하는 압력 때문에 금방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장이 바로 머리 위에서 누르고 양 옆의 벽이 바로 옆구리에서 조여오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방에 붙어 있는 뺑기통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숨통이 막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의 환경에 대한 적응 능력이란게 대단한 것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죽지 않고 살아지기는 합니다. 이런 데서 십년 이십년 감금되어 있는 사람들의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닭이나 오리, 소나 말을 이런 곳에 처넣어 두면 며칠을 못 견디고 숨을 거둘 것이라는 겁니다. 사람이란 게 참으로 지독한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주석 3)

김남주가 남민전사건으로 수배ㆍ구속될 때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여러 날 후에야 부음 소식을 듣고 목 놓아 울었다. 왕조시대에도 국사범이 아닌 죄수가 부모상을 당하면 풀어줘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지만 군사정권은 그런 인간의 기본적인 의례도 없었다.

아들이 면서기라도 되어 평생 구부리고 산 허리를 펼 수 있도록 염원했던 아버지는 머리좋은 둘째 아들이 이름만 들어도 소름끼치는 국보법 위반 혐의로 수배되고 있는 상황에서 운명하였다.

아버지 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쫒기는 몸이었던 나
타관 어디 구석에 숨어 있었습니다
숨도 크게 못 쉬고
불도 밝게 못 켜고

그리워도 고향이
찾아갈 수 없었던 나
어린 시절의 아버지 생각 때문에
아버지의 성장과 노동과 좌절이 준 중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아무도 몰래 일어나 나는
남녘으로 난 창을 열었습니다. 거기 밤하늘에
별 하나 가물가물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사로잡힌 몸이 되어
옥에 갇히고
어둠의 끝조차 보이지 않는 세상 끝에서
십오 년 징역살이를 시작하던 날
어느새 따라왔는지 그 별도
저만치 내 철창 밖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이날 이때까지
날이 흐리고 눈보라가 창살을 때리고
밤이 깊도록 그 별이 철창 밖에서 빛나지 않으면
날이 새도록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주석 4)


주석
1> 네루다 <커다란 기쁨>, 장석준, <혁명을 꿈꾼시대>, 179쪽, 살림, 2007.
2> <김남주문학에세이>, 67~68쪽.
3> 앞의 책, 68쪽.
4> <김남주시전집>, 103 ~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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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30회] 프랑수아 비용과 닮은 김남주

[30회] 프랑수아 비용과 닮은 김남주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7장] 남민전사건으로 구속돼 혹독한 고문 2014/09/16 08:00 김삼웅
김남주와 남민전 지도부의 행위는, 정부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면서 ‘해방 이후의 최대 공안사건’ 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것과는 차이가 많았다. 앞서 인용한 검찰의 공소장 역시 어디까지나 검찰의 시각이어서 실제와 얼마나 부합되는지도 의문이지만, 설혹 공소장 내용이 사실대로라 해도 그렇다. ‘강도미수사건’ 이거나 ‘긴급조치위반’ 정도의 사건을 과대 포장하고, 5공 사법부는 검찰공소사실을 대부분 그대로 인정하였다.

2006년 3월 국무총리 산하의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남주 등의 재벌 집 침입사건을 두고 위원들 사이에 논쟁이 일었다. 의병, 독립운동가들이 항일투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친일부호나 일본은행을 털었던 사례들이 적시되었다.

논란 끝에 김남주 등은
1. 유신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할 목적으로 남민전에 가입하여 활동.
2. 신청인들의 항거행위는 유신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되었다.

김남주를 보면 불현듯 프랑스의 프랑수아 비용(1431 ~ 1463?)을 생각하게 된다. <소유언>과 <대유언>을 쓴 이듬해 그는 절도 혐의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석방되었으나 ‘영원한 방랑자’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32세 되는 해,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대유언>의 한 연이다.

우리 비록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망정
그대들을 형제라 부르나니 비웃지 말라
세상사람 모두가 다 한결같이
현명하다 장담할 수 없는 법이니라
우리가 처형을 당한 뒤에는
성모의 아들에게 죄사함을 빌어
지옥의 불길에서 우리를 건져내고
그 은총이 우리 위에 임하도록 하라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자유로우니
우리 죄사함만 하느님께 빌어 달라. (주석 16)

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되고 그의 총애를 받았던 정치군인들이 12.12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하면서 ‘서울의 봄’을 짓밟고 이어서 권좌에 올랐다. 그런 격변기에 권력에 길들여진 검찰과 사법부는 김남주와 남민전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을 속전속결로 진행하였다.

1980년 2월 4일 열린 1심의 첫 공판에서 검찰은 김남주에게 무기형을 구형하고, 5월 2일 1심 판결에서 판사는 징역ㆍ자격정지 15년을 선고했다. 9월 15일의 2심 판결도 1심과 다르지 않았고, 12월 23일 대법의 최종심에서 징역 15년의 실형이 확정되었다.

1926년에 태어나 신산한 젊은 날을 보내다가 28세 때에 구속되어 1년여를 복역하고, 1979년 34세에 두 번째 체포되어 1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기구한 삶이었다. 프랑수와 비용과 비슷한 생애였다.

김남주의 ‘남민전 편’을 마무리하면서 공안당국의 사각과 국내외 연구가의 평가, 그리고 남민전 가족의 시각을 소개한다.

남민전은 당시 한국사회를 미제와 한국 민중간의 기본모순으로 이루어진 식민지사회라고 파악하고, 폭력투쟁으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하에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체제와 유신정권타도, 민족자주, 민주연합정권수립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남민전은 전국적 차원의 폭발적 대중봉기를 기본으로 하고 도시에서의 무장전위대(혜성대)를 결합시킴으로써 정권을 타도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고 있었다. (주석 17)

우리현대사는 민족통일과 민주주의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남민전을 평가하기 전에, 그리고 긍정적 부정적의미를 떠나 남민전사건은 아직도 우리 역사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남민전의 이론적 기초와 정치노선, 조직노선, 투쟁노선에 대한 깊은 연구ㆍ평가와 당시의 사회상황, 운동상황의 이해와 결합한 총체적 평가와 비판이 이루어지기를⋯. (주석 18)

정부당국 측이 단언했듯이 남민전은 김일성주의를 신봉하여 북한으로부터의 지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조직이었다고 도저히 볼 수 없고 또 그런 사실도 없었다. 이재문 씨 등이 북한에대해서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평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은 사실이라 하겠으나, 이재문 씨 자신의 표현대로 “애벌레와 청개구리가 모두 등이 푸르다고 해서 애벌레를 청개구리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정부당국 측이 북한과의 연관을 입증하려고 가지고 나온 ‘사실’ 등은 얼핏 살펴보아도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어설픈 조작으로 꾸며진 것들이고, 때문에 거기에는 의문점이 농후하며, 또 당시의 북한측의 공식문헌과 비교해 보아도 일치되지 않은 점이 쉽게 발견되고 있는 것들이다. 실제 정부당국 측도 당초의 프레임ㆍ업(조작ㆍ흉계) 이후 이 북한과의 연계라는 면에서 피탄압자들의 법적 투쟁에 의해 궁지에 몰리게 되었는데 이 점을 보아도 조작이었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주석 19)

남민전은 처음부터 비공개적 조직으로 구성되어 서로의 운동경력이나 활동분야를 모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것을 보자면 발기인으로 참여한 당시 40대 인사 수명은 50년대 중ㆍ후반에 대학을 졸업하고 4.19민주혁명에 참여했거나, 4.19이후의 혁신계활동, 민족자주통일운동에 참여한 인사들로서 8.15이후의 이 나라 민족자주, 민주운동의 이념을 계기적으로 계승한 사람일뿐 그들이 북의 노선에 동조한 인사들이 아니라는 것은 남민전의 강령분석을 통해서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배권력은 남민전사건을 어떻게든지 정치적 볼모로 붙잡아 둠으로써 그들 최후의 반공이데올로기 보루로 삼고 그것을 통해 모든 진보적 민족ㆍ자주적 민주운동을 북한과 연결시켜 국민과 민족ㆍ민주세력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민족민주 내부분열을 꾀하려하고 있습니다. (주석 20)



주석
16> 김삼웅, <넓은 하늘아래 나는 걸었네>, 71쪽, 동방미디어, 2000.
17> 경찰청 보안국, 앞의책, 100 ~ 101쪽.
18> 안병용, 앞의 책, 277쪽.
19> 가지무라 히데키, 앞의 책, 213 ~ 214쪽.
20> <남민전사건 가족이 보는 남민전>, 앞의 책, 206 ~ 208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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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29회] 재벌집에 들어가 ‘군자금’ 마련키로

[29회] 재벌집에 들어가 ‘군자금’ 마련키로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7장] 남민전사건으로 구속돼 혹독한 고문 2014/09/15 08:00 김삼웅
남민전사건은 박정희 암살이라는 정국의 지각변동적인 사건과 12.12군부 반란사건 등의 와중에 언론에 공개되고, 사건전말은 붉은색깔로 언론에 도배되다시피하였다. 10월 9일 내무부는 남민전이 대규모 반국가 단체라는 내용의 1차 발표에 이어, 10월 16일 남민전이 월남(베트남) 방식으로 적화를 획책했다고 발표하고, (10월 26일 박정희 사망) 11월 13일 치안본부가 남민전이 북괴와 연결된 간첩단임이 확인됐다고 3차 발표했다.

다음은 김남주 등이 재벌가에 들어가 강도행각을 했다는 부분의 공소장이다.

동월 20일 14:00경 동 박석률의 집에서 동 신향식, 동 박석률, 동 박석삼, 동 이학영, 동 김종삼과 만나 범행일시를 동월 27일 10:30으로, 범행장소를 강남구 반포동 소재 동아건설주식회사 회장 최원석의 집으로 정하고, 범행계획을 <전위대 1호 땅벌작전>이라고 명명하고, 범행방법으로서 동 이학영, 동 차성환은 건설업 하청업체에서 상납차 방문하는 것으로 위장, 명함을 제시하고 경비원을 칼로 제압하여 동 신향식이 길을 횡단하는 것을 신호로 동 박석률, 동 박석삼, 동 김종삼 및 피고인은 일시에 침입하여 건물로 들어가 가족들을 제압, 감시하고 동 박석삼, 동 김종삼은 집을 수색하여 금품을 강취, 수송조에게 인계하고 도주하기로 의논하고,

동월 26일 15:00경 동 박석률의 집에서 동 이재문 및 전위대원 전원과 만나 출정식으로서 묵념을 하고 피고인은 “혁명에 임한 나는 민족앞에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 나는 자유와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이 몸을 바치나니 후회없이 민족통일을 위한 싸움에 나선다. “자유민주 만세! 조국통일 만세!” 라는 내용의 유고문을 작성, 낭독하고 동 이제문은 필승의 신념으로 땅벌작전을 수행하라는 격려사를 하고 각각 건배한 후 피고인은 단도, 나이론 끈, 보자기, 벙거지, 차비 2,000원 등을 지급받고,

동월 27일, 10:30경 동 최원석의 집앞에 이르러 동 이학영, 동 차성환은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열어주는 경비원 김염철(27세)에게 동 차성환은 “최사장댁 입니까, 심부름을 왔습니다” 고 말하면서 대문 안으로 침입, 명함을 제시하고, 동 이학영은 과도를 꺼내어 동 김영철의 목을 겨누면서 동소 왼쪽에 있는 화장실로 끌고 들어가 왼쪽 옆구리와 등을 각 1회 강타하고 끈으로 손과 발을 결박한 후 얼굴에 벙거지를 씌워 동인에게 요치 약 1개월의 흉부좌창 등을 가하고, 동 신향식과 동 박석삼은 대문을 통하여 건물 안으로 침입,

관리인 이광식(22)을 과도로 위협한 후 끈으로 손과 발을 결박하고 얼굴에 벙거지를 씌워 각 항거불능케 하고 피고인은 대문을 통하여 정원까지 침입, 금품을 강취하려다 동 김영철의 “도둑이야” 라는 고함소리를 듣고 인근주민들이 모여들자 도주하여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서 목적 수행을 위하여 강도상해하고⋯. (주석 13) (후략)

이것이 남민전이 벌였다는 이른바 ‘강도행각’ 의 검찰 공소장이다. 검찰은 이 사건과는 별도로 김남주가 피신 중에 번역 사업과 전단 살포행위 등을 ‘이적행위’ 로 들었다.

동년 6월 초순 일자불상경부터 동년 10월초순 일자불상경까지 동 이재문의 아파트에서 조직의 자금활동을 조달하기 위하여 동 이재문의 지령에 따라 밀로반 질라스 저 영문판 <새로운 계급>을 번역료 70만 원에, 일어판 <아시아 아프리카연감>을 번역료 50만 원에, 프레처 저 영문판 <여자의 방>을 번역료 40만 원에 각 번역하기로 하고 이를 번역하여 동 이제문으로 하여금 <새로운 계급>의 번역료 중 20만 원을, <아시아 아프리카연감>의 번역료 중 10만 원을 각 수급하게 하여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하고,

동년 8월 하순 일자불상 22:00경 동 이재문의 아파트에서 동소에 함께 은신중인 남민전의 산하단체인 민학련의 지도위원 이수일로부터 동 민학련에서 주도하는 ‘꽃불 1호작전’ 의 전단 초안 내용을 검토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동 박석삼, 동 차성환과 함께 검토한 결과 저생활층에서는 이해하기 곤란하다고 판단, 각각 YH사건과 박정권 타도를 주체로 하여 전단초안을 작성, 제출한 “압제자 박정희를 타도하자”를 채택, 동월 28일 18:30경 동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소재 청산학원, 동시 중구 무교동 소재 서울빌딩, 서울역 부근 등에 살포하게 하여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 (주석 14)

김남주는 경찰서 → 안기부 → 검찰청으로 이어지는 60일 간의 수사기간에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재판이 진행되면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수사과정에서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서대문감옥에 들어와서 “아 해방이다 살 것 같다” 고 썼을까. <감옥에 와서>의 전문이다.

감옥에 와서

아 해방이다 살 것 같다 이제 죽어도 좋다 !
허위로부터 위선으로부터
고문으로부터 공포로부터
60일 간의 긴장으로부터 해방이다 !

이제 남은 것은
남아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계적으로 계산된 재판
죽음일지도 모른다

아뭏든 좋다 일단 해방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자!
(주석 15)

주석
13> 대검찰청, 공안부 편, <좌익사건 실록>.
14> 앞과 같음.
15> <김남주 시전집>,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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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28회] ‘나는 왜 남민전에 참가했는가’

[28회] ‘나는 왜 남민전에 참가했는가’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7장] 남민전사건으로 구속돼 혹독한 고문 2014/09/14 08:00 김삼웅
김남주는 광주에서 강의 내용이 밀고되어 수배를 받게되자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살아 온 방식대로 동가숙 서가식하며 지내고 있을 즈음 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에서 알게 된 박석률과 만나, 그의 소개로 남민전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4일 체포되었다. 이 부분 검찰의 공소장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1978년 5월 일자 불상경부터 과거 광주 구속자협회의 같은 회원으로서 활동하여오던 상피고인 박석률과 접촉하여 오던 중 동년 6월 중순 일자불상경 강남구 영동소재 영동로타리 부근 상호불상 다방에서 동 박석률로부터 소위 민청학련사건 관련자인 전시 이재문을 소개받은 후 동년 8월 중순 일자불상 12:00경 성북구 하월곡동 127동 박석률의 집에서 동 박석률로부터 현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반정부 활동을 같이 하자는 제의를 받고 이를 승낙하고 동인으로부터 학생이나 일반 지식인들로 하여금 반정부활동에 참석하도록 선동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의 시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해방자>라는 제하의 “민중을 억압하는 압제자를 타도해야 한다” 는 내용의 불온시를 써주고, 동시를 남민전이 발행하는 지하신문인 <민중의 소리> 1호에 게재 배포케 하고⋯. (주석 9)

남민전의 부서는 조직의 최고 부서로 서기를 비롯하여, 조직의 최고결정ㆍ집행기관인 중앙위원회, 총무부, 출판부, 교양선전선동부, 통일전선부, 무력부, 대외연락부, 정보부, 조직부 등이 있었다. 김남주는 교양선전선동부 소속이였다.

서기 : 이재문
중앙위원회 : 이재문ㆍ 신향식ㆍ김병권(김병권 유고로 안재구)
총무부 : 부장 - 이해경, 부원 - 전수진ㆍ이문희ㆍ김문자
출판부 : 부장 - 임준렬, 부원 - 임기욱
교양선전선동부 : 부장 - 안재구 - 부원 - 김남주ㆍ곽선숙ㆍ박광숙
통일전선부 : 부장 이재오 - 위원 -김승균, - 임기욱ㆍ권오헌ㆍ나강수ㆍ김정자
무력부 : 부장 - 임동규, 부원 - 최평숙ㆍ김종삼

김남주는 교양선전선동부에서 함께 활동했던 박광숙으로부터 옥중에서 구애를 받고 석방 후에 결혼하였다. 이 부분에 뒤에 다시 쓰겠다.
김남주는 뒷날 석방되어서 남민전에 가입하게 된 사정을 이렇게 밝혔다.

내가 남민전에 들어간 동기도 이런저런 책에서 얻은 지식탓이었어요. 특히 체르니셰프시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의 생애>, 스위즈ㆍ휴버만 공저인 <쿠바혁명의 해부> 등의 탓이 컸을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혁명적 조직 없이는 혁명의 성공은 없다” 는 명제를 내 나름으로 가슴깊이 새겼기 때문일 거예요.

남민전에 내가 가입한 또 하나의 동기는 내가 세운 다음과 같은 명제를 실천하기 위해서였어요.
“해방 투쟁의 과정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어갈 것이다. 수천, 수만 명이 죽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그 수만, 수십만 명의 죽음이 해방의 새날을 가져올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겠어요. 나는 남민전에 들어갈 때에 이름도 없이 죽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 다른 사람이 죽어주기를 내가 바랄 수 있겠어요. 해방은 죽음 없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 인식을 왜 내가 실천하지 않고 남이 해주기를 기다려야 되겠어요. 적어도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주석 10)

무릇 모든 혁명가들이 그렇듯이, 김남주도 남민전에 참여하면서 생명을 걸 결심을 했던 것 같다. 그는 맡은 부서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김남주 등이 이루고자 했던 ‘혁명’ 은 정부당국이 몰아부쳤던, 그리고 유신ㆍ5공시대의 관제언론이 색칠한 ‘김일성주의의 혁명’이 아니었다. ‘남민전준비위원회’ 가 작성한 ‘현상인식’ 은 김남주의 인식과 맞닿아 있었다고 하겠다.

현재 세계에는 네 개의 기본모순이 존재해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모순, 자본주의 상호간의 모순, 제국주의와 신식민지간의 모순, 그리고 노동과 자본사이의 모순이다. 따라서 투쟁의 성격은 민족해방혁명이라는 양상을 띠고 있다. 여기에서 해방이란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탈출하고 비자본주의적 방향으로 발전해가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당면한 투쟁목표는 반파쇼민주화투쟁이다. (주석 11)

김남주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혐의로 중형을 선고받게 된 ‘활동’ 의 일부를 검찰의 기소장에서 찾아보자.

동년 10월 16일 19:00경 중구 신당동 로타리 부근 옥호미상 다방에서 동 임동규, 동 박석률, 동 김종삼, 동 이학영 등과 접선, 동인 등과 한 조가 되어 2시경 종로4가 세운상가로 가서 동 임동규, 동 김종삼, 동 이학영 등은 주위에서 망을 보고 피고인과 박석률이 동 세운상가 2층에 올라가 “모이자 10월 17일 광화문네거리로” 라는 제목의 삐라 1,000매를 종로방향 노상에 집어던져 이를 살포하고,

동년 10월 말경 18:00시경 전시 전수진의 집 근처 옥호미상 빵집에서 동 박광숙과 접선, 동인에게 <민중의 소리> 제작용 등사판 1대, 철필 3개를 교부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고⋯. (주석 12)


주석
9> <남민전사건 김남주 공소장>, 대검찰 공안부 편, <좌익사건실록>,1981.
10> <김남주문학에세이>, 122쪽.
11> 가지무라 히데키, 앞의 책, 211쪽, 재인용.
12> 검찰청, <남민전사건 김남주공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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