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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20회] 광주에 ‘카프카서점’ 고객은 불온분자들

[20회] 광주에 ‘카프카서점’ 고객은 불온분자들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5장] ‘창작과비평’ 통해 시인으로 등단 2014/09/06 08:00 김삼웅
시인으로 등단한 김남주는 시를 위한 시인이 아닌 투사로써의 시를 쓰고자 했다. 그리고 유신체제를,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전사가 되고자 했다. 시는 혁명의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시인은 혁명투쟁에 몸소 참가함으로써 가장 잘 혁명적인 시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혁명투쟁에 깊이 관여하면 할수록 그가 쓰는 시도 그만큼 깊이가 있을 것이고 폭넓게 참가하면 할수록 그만큼 그가 쓴 시도 폭이 넓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주석 9)

김남주의 <시의 요람, 시의 무덤>이라는 글에서 그의 시관 또는 문학관의 지향점을 살필 수 있다. 시의 후반이다.

시의 요람, 시의 무덤

당신은 묻습니다 나에게
시를 쓰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있느냐고
나는 이렇게 노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혁명은 나의 길이고 그 길을 걸으면서

시라는 것을 첨으로 써보게 되었다고
노동의 적과 싸우다보니 노동의 이웃
농민과 함께 노동자와 함께 피흘리며 싸우다 보니
시라는 것도 저절로 나오더라고
나는 책상머리에 쭈구리고 앉아 머리 싸매고
억지로 시라는 것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내 시의 요람은 안락의자가 아닙니다
투쟁입니다 그 한가운데 소용돌이입니다
안락의자는 내 시의 무덤입니다. (주석 10)

저항시인 또는 전사시인의 길에 들어선 김남주는 숙명적으로 따라 다니는 가난을 해결하고자 광주에 서점을 열었다. 해가 바뀐 1975년, 그의 나이 어느덧 30세가 되어서였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도 싸우기 위해서는 먹고 살아야 했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흔히 풍찬노숙이란 많이 쓰이게 된 배경이었다.

김남주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광주에 사회과학서점 ‘카프카’를 개설하여, 우선 호구지책으로 삼고자하였다. 그런데 사회과학전문 서점을 열면서 사회과학의 명성 있는 학자나, 저항문인의 경우 예컨대 네루다 혹은 아라공 등이 아닌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를 상호로 택한 것은 의문으로 남는다.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의 소설가로서 <변신>, <심판> 등을 남긴 카프카는 1970년대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작가였다. 그는 살아생전 마지막 뜻으로 자신의 모든 작품을 불태우고, 텍스트를 출간하는 것을 금지시킨 데(그러나 유산관리자가 그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시인과 ‘사업’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더욱이 김남주는 정보기관의 감시 대상이었다. 이 시기 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얼마 후 사무실에 나타난 김남주 당사의 인상은 그의 시의 펄펄 뛰는 생동감과 자뭇거리가 있었다. 그의 시는 김수영ㆍ조태일ㆍ김지하 같은 앞세대 시인들의 선행업적을 충분히 숙독한 흔적 즉 날카로운 현대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의 사람됨은 도무지 때가 벗지 않은 투박함 그것이었다. 맺힌데 없이 벌씬벌씬 웃는 그의 웃음이 더 그런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후 드문드문 나타나는 그에게서, 그리고 역시 드문드문 발표되는 그의 시에서 알게 된 것은 그가 단지 선량하고 천진한 촌놈일 뿐만 아니라 비판정신에 가득찬 독서가이며 또한 우리말의 가락에 민감한 시인이자 현실의 암흑에 온몸으로 맞서고자 하는 불퇴전의 실천가라는 점이었다. (주석 11)

광주에서 사회과학시점으로는 처음인 카프카는 그러나 ‘서점’의 구실보다는 이 지역 ‘불온분자’들의 집결지가 되어갔다. 그것은 경영주가 바라던 바였을 지 모른다. 개점 시기가 대단히 민감한 때였기 때문이다.

1974년 3월 들어 각 대학에서 유신철폐 시위가 발발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박정희정권은 전국 대학의 반독재 연합시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4월 3일 서울대, 연세대, 성대, 이대 등 주요 대학에서 소규모 시위와 함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민중ㆍ민족ㆍ민주선언>과 함께 <민중의 소리> 등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기회를 노리던 정부는 이날 오후 칼을 빼들었다. “공산주의자의 배후 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이 점조직을 이루고 암호를 사용하면서 200여 회에 걸친 모의 끝에 화염병과 각목으로 시민폭동을 유발했으며 정부를 전복하고 노농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며 학생시위를 용공으로 날조하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면서 다수의 학생들을 체포했다.

또 정부는 같은 날 밤 10시를 기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면서 윤보선ㆍ지학순ㆍ박형규ㆍ김찬국 등을 배후 조종자로 몰아 구속,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김남주는 석방된 후 경찰의 감시로 꼬투리가 잡히지 않았으나 친구 이강은 민청학련 연루자로 구속되었다.

전국 도처에서 유신헌법 철폐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를 선포하여 △ (유신) 헌법의 부정 반대ㆍ왜곡ㆍ비방행위 금지 △ 헌법의 개정ㆍ폐지 발의 및 청원행위 금지 △유언비어의 날조ㆍ유포 금지 △ 금지행위의 선동ㆍ선전 및 방송ㆍ보도ㆍ출판 등 전파행위 금지 △ 이 조치의 위반자 및 비방자는 영장없이 체포ㆍ구속ㆍ압수ㆍ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과 1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는 초헌법적 조치를 선포했다. 유신헌법을 철폐하라는 국민의 요구를 폭압적으로 금지시킨 것이다. 이어서 긴조 4호를 선포하였다.

정치적으로 폭압과 폭력이 설치는 시대에 지방의 사회과학 서점은 팔리를 날리게 되고, 그 대신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시대의 저항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서점은 구매자 아닌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개중에는 정보기관원들도 끼었을 것이다.

남주는 ‘카프카서점’ 이라는 책방을 내서 경영주가 되었다. 이 무렵이 지금도 후배들 사이에 말해지는 잊을 수 없는 광주의 카프카시절이었다. 민청에서 풀려나온 징역장이들이 운집하던 사랑방이며,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남주의 후배들이 먹고 자며 뒹굴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이 시대의 멋진 시인들의 <5월시 동인>은, 거의 대부분 카프카에서 혼이 적셔진 후배들이다. 박몽구ㆍ이영진 등의 시인은 더욱 특별한 인연이었으니까. 경제적 계산 속이라고는 한 푼도 없던 남주였으니, 카프카서점이 망하여 문이 닫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주석 12)

민청련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풀려난 이강은 광주에서 서점을 열고 있던 이 시기의 김남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즈음 남주는 새로운 사상을 널리 보급하여 확산시켜야겠다는 필요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으로써 ‘카프카서점’을 시작했다. 함석헌 씨가 발행하는 <씨알의 소리>와 <창작과 비평>을 비롯한 비판적 사상서적, 일어나 영어로 된 외국의 문학서적을 주로 취급하였다.

‘카프카서점’은 광주 청년학생운동 활동가들과 문학청년들의 사랑방이 되었지만 오래 되지 않아 문을 닫아야 했다.
애시당초 이재에 밝지 못하고 동가숙 서가식이 몸에 배인 자유주의적 생활풍모의 남주가 서점의 운영에 실패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할 노릇이었다. 이와 더불어 오랫동안 계속된 도시에서의 무력한 준룸펜적 생활은 남주에게 심각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남주는 자신의 모든 것을 회의하기 시작하였다. (주석 13)

광주의 카프카시점은 2년여 만에 문을 닫았지만, 서점에서 뿌려진 사상의 씨앗들이 3년 후 광주민주항쟁의 한 몫을 하였던 것은 물론이다.


주석
9> 김남주, <시와 혁명>, <김남주 문학에세이>, 358~359쪽.
10> 앞의 책, 338쪽.
11> 염무웅, 앞의 책, 99쪽.
12> 박석무, 앞의 책, 157쪽.
13> 이강, 앞의 책,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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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19회] 한국저항문학의 고딕체 ‘잿더미’

[19회] 한국저항문학의 고딕체 ‘잿더미’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5장] ‘창작과비평’ 통해 시인으로 등단 2014/09/05 08:00 김삼웅
데뷔작 중에서 수작으로 꼽히는 <잿더미>는 9연에 달하는 장시다. 한국저항문학사에 고딕체로 남는다.

잿더미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은 어디에 있는가
피는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피가 잠자는가
핏 속에 꽃이 잠자는가

꽃이다 영혼이다
피다 육신이다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육신이 보이지 않는다
꽃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피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영혼이 깃드는가
핏 속에 육신이 흐르는가
영혼이 꽃을 피우는가
육신이 피를 흘리는가
꽃이여 영혼이여
피여 육신이여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육신을 던져보았는가
죽음의 불길 속에서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파도의 심연에서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꽃이다 피다
육신이다 영혼이다
그대는 영혼의 왕국에서
육신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파도의 침묵 불의 노래
영혼과 침묵은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던가
숯덩이처럼 검게 타버리고
잿더미와 함께 사라지던가

그대는
새벽을 출발하여
폐허를 가로 질러
황혼을 만나보았는가
황혼의 언덕에서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난파선의 침몰을 보았는가
승천하는 불기둥을 보았는가
침몰과 불기둥을 보았는가
꽃을 닮고 있던가
피를 닮고 있던가
죽음을 닮고 있던가
그대는
황혼의 언덕을 내려보다
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새벽을 기다려보았는가 그때
동천에서 태양이 타오르자
서천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죽어버린 별
죽으로 가는 별
죽음을 기다리는 별
그대는 달과 별의 부활을 위해
새벽의 언덕에서 기도를 드려보았는가

그대는 겨울을
겨울답게 살아보았는가
그대는 봄다운
봄을 맞이하여보았는가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동토(凍土)를 녹이던가
봄은 어떻게 폐허에서
꽃을 피우던가 겨울과
봄의 중턱에서
봄은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눈 속에서 속삭이던가
보리는 밟아줘야 더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박토에서 군거(群居)하던가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가시처럼 번식하던가
곰팡이는 왜 암실에서 생명을 키우며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성하던가
죽순은 땅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죽창을 깎고 있던가

아는가 그대는
봄을 잉태한 겨울 밤의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그대는 아는가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꽃이 함께 피와함께 합창하는가를

꽃이여 피여
피여 꽃이여
꽃 속에 피가 흐른다
핏속에 꽃이 보인다
핏속에 영혼이 흐른다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그것이다!
(주석 8)


주석
8> 앞의 책, 2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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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18회] ‘창비’에 8편의 시로 등단

[18회] ‘창비’에 8편의 시로 등단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5장] ‘창작과비평’ 통해 시인으로 등단 2014/09/04 08:00 김삼웅
김남주는 시를 썼다. 담 벼락에, 마당 언저리에 ‘그 알량한’ 시를 썼다. 몇 편이 모여지자 계간 <창작과비평>에 투고하였다. <사상계>가 이미 유신의 칼 끝에 목이 날라가고, 그나마 백낙청 씨가 창간한 이 계간지가 유신의 엄혹한 시대에서도 한 줄기 서광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이 잡지를 통해 국내외의 시인과 혁명문인들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비>에 투고를 한 것이다.

김남주는 <진혼가>, <잿더미> 등 8편의 시를 <창비>에 투고하여 1974년 여름호에 실렸다. 시쳇말로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다. 당시 <창비>의 주간으로 김남주의 시를 뽑았던 염무웅 씨의 회고담.

어느 출판사 건물의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간 2층 한귀퉁이에 책상 두엇 놓은 초라한 사무실이었지만 넘치는 의욕으로 <창작과비평>을 내고 있을 무렵이다. 어느 날 투고된 원고들 중에서 김남주의 작품을 발견한 것은 신선한 기쁨이고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감동이었다. 당시로 말하면 강권적 유신체제가 선포된 지 1년 반쯤, 터져나오는 저항을 폭압적인 긴급조치로 억누르던 서슬퍼런 공포의 계절이었다. <잿더미>, <진혼가> 등 지금 읽어도 가슴을 뜨겁게 하는 김남주의 시들은 바로 이 죄어드는 현실 한복판에서 솟아오른 가장 찬란한 예술적 형상이자 싱싱하게 살아 있는 정신의 가장 힘찬 발언이었다. (주석 5)

저명한 문학평론가에게 “신선한 충격이고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감동”을 안겨 주었던 김남주의 데뷔작 <진혼가>와 <잿더미>를 소개한다. 이 시들은 <창비>에 실렸던 것을 훗날 본인 (김남주)에 의해 부분적으로 개작한 것이다.

진혼가

(1)

총구가 내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신념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신념 나의 싸움은 미궁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발바닥이라도 핥아주겠노라

더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을 유일한 나의 확실성이라고
나의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2)

나는 지금 쓰고 있다
벽에 갇혀 쓰고 있다
여러 골이 쑥밭이 된 것도
여러 집이 발칵 뒤집힌 것도
서투른 나의 싸움 탓이라고
사랑했다는 탓으로 애인이 불려다니는 것도
숨겨줬다는 탓으로 친구가 직장을 잃은 것도
어설픈 나의 신념 탓이라고
모두가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고
나는 지금 쓰고 있다
주먹밥 위에
주먹밥에 떨어지는 눈물 위에
환기통 위에 뺑기통 위에
식기통 위에 감시통 위에
마룻바닥에 벽에 천장에 쓰고 있다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쓰고 있다
발가락이 닳아지도록 쓰고 있다
혓바닥이 쓰라리도록 쓰고 있다
공포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하는 가장 좋은 무기이다라고

(3)

참기로 했다
어설픈 나의 신념 서투른 나의 싸움은 참기로 했다
신념이 피를 닮고
싸움이 불을 닮고
자유가 피같은 불같은 꼴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칼자루를 잡는 행복으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는
온몸으로 온몸으로 죽음을 포응할 수 있을 때 까지는
참기로 했다

어설픈 나의 신념
서투른 나의 싸움
신념아 싸움아 너는 참아라
신념의 바위의 얼굴을 닮을 때까지는
싸움이 철의 무기로 달구어 질 때까지는. (주석 6)

김남주의 시는 문단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것도 책상거리의 관념적인 시가 아니라 자신이 고문을 당하면서 겪었던 생생한 현실을 담았고ㅡ “칼자루를 잡는 행복으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는” 참기로 했다는 반어법에서 시인의 꿋꿋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데뷔작 <진혼가>는 바로 이 패배의 기록이다. 하지만 단순한 패배자의 기록은 아니다. 그는 육신에 가해진 무자비한 타격을 통해 자아의 내부에서 무엇이 부서지고 무엇이 확인되었는지 그 과정을 가혹할만큼 냉정하게 관찰한다. 권총을 이마에 데고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막무가내로 다그치는 수사관의 혹독한 대우 앞에서 양심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어설픈 관념적 요소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동물적 수준의 몸뚱어리만이 자기 동일성을 증거하는 마지막 보루로 남는 것을 그는 경험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지옥의 체험이었다. (주석 7)


주석
5> 염무웅, <사회인식과 시적표현의 변증법 - 김남주시집을 읽고>, 김준태 외, <김남주론>, 99쪽.
6> <김남주신전집>, 29~31쪽.
7> 염무웅, <역사에 바쳐진 시혼 : 김남주를 다시 읽으며>, <실천문학>, 2014년 봄호,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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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17회] 통절한 심경으로 아우에게 쓴 시

[17회] 통절한 심경으로 아우에게 쓴 시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5장] ‘창작과비평’ 통해 시인으로 등단 2014/09/03 08:00 김삼웅
귀향한 김남주는 짚으로 새끼를 꼬고 낡은 노트에 시를 습작하면서, 유신시대에도 여전히 참담한 농촌의 실상을 체험한다. 1978년에 쓴 <아우를 위하여>에도 이같은 모습이 절절하다.

아우를 위하여

없는 놈은 농자금도 못 타 쓴다더냐
있는 놈만 솔솔 빼주기냐
조합장 멱살을 거머쥐고
면상을 후려치던 아우야

식구마다 논밭 팔아
대학까지 갈쳐논께
들쑥날쑥 경찰이나 불러들이고
허구한 날 방구석에 쳐박혀
그 알량한 글이나 나부랑거리면
뭣한디요 뭣한디요 뭣한디요
터져 분통이 터져 집에까지 돌아와
내 얄팍한 귀창까지 찢었던 아우야
내 사랑하는 아우야

오늘밤과 같이
눈앞이 캄캄한 밤에는
시라도 써야 겠다
쌓이고 맺힌 서러움
주먹으로 터지는 데 분노를 위하여
고이고 고인 답답함
가슴으로 터지는 데 사랑을 위하여
차마 바로는 보지 못하고
밥상 너머로만 훔쳐보아야만 했던
내 눈 속 네 얼굴을 위하여
시라도 써야겠다
그 알량한 시라도 써야겠다
오늘 밤과 같이

눈 앞이 아찔한 밤에는. (주석 3)

김남주의 해남 귀향은 ‘설움’과 ‘아픔’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옥고를 치루고 나서 돌아온 고향(농촌)은 옛날의 농촌이 아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농촌의 구조적 모순과 수탈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다. 한 시인ㆍ평론가의 분석이다.

<함성>지 사건으로 전남대 영문학과를 도중 하차하고, 고향에 내려간 김남주는 드디어 저 한민족의 지평선, 한민족의 영원한 어머니일지도 모르는 대지의 한복판에 다가 자신의 ‘귀향의 의미’를 되살린다. 비록 ‘밤을 도와 부끄럽게’ 찾아간 ‘매맞은 몸으로 돌아간’ 고향이지만, 그는 그러나 <진혼가>에서처럼, 상처 받은 자신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저 대지의 진정한 목소리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고 만다. 아니 거기에 살아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농토와 농민들을 비로소 만난다. 그리하여 그는 이땅의 원형질, 투박스러우나 질기고 끈적진 삶의 밑바닥, 막걸리 사발과 애증의 연대(年代)를 만나고야 만다. (주석 4)


주석
3> 앞의 책, 42~43쪽.
4> 김준태, <김남주론>, 김준태ㆍ이강 외 <김남주론>,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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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 [16회] 출옥하여 귀향, 참담한 현실 시로 담아

[16회] 출옥하여 귀향, 참담한 현실 시로 담아

<혁명적 민중시인> 김남주 평전/[5장] ‘창작과비평’ 통해 시인으로 등단 2014/09/02 08:00 김삼웅
김남주는 1973년이 저물어가는 12월 18일 석방되었다.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이끌고 갈 곳이 따로 없었던 그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금판사’는 커녕 시국사범으로 죄인의 딱지를 달고 찾아간 고향이었다. 부모와 가족들을 만나 볼 면목이 없었다. 1970년대 한국은 의인이 설 땅이 없는 사회가 되고 있었다. 불의에 저항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침묵하면 살아남을 수 있고, 타협하면 출세길이 열렸다.

유신체제의 나팔수가 된 신문과 방송이 ‘함성’지 사건의 주역들을 ‘사회혼란자’로 매도하면서 김남주의 부모는 마치 자식이 대역죄나 저질른 것처럼 주위의 따가운 눈치를 살펴야 했다. 아들이 재판을 받는 동안 정사복 경찰이 수시로 찾아와서 가족이 불안에 떨기도 하였다.

김남주의 <달도 부끄러워>라는 시는 이 시기 그의 참담했던 심경을 말해준다.

달도 부끄러워

차마 부끄러워

밤으로 찾아든 고향
달도 부끄러워 숨어버렸나
보이는 것은 어둠뿐
들판도 그대로 어둠으로 깔리고
어둠으로 보이는 것은 농민의
농민에 의한 농민을 위한
허수아비 뿐이다

차마 부끄러워
어둠으로 기어든 마을
똥개도 부끄러워 짖지를 않나
길은 넓혀졌지만 지붕도 벗겨졌지만
개똥불처럼 전깃불도 가물거리지만
원귀처럼 소소리처럼 들리는 한숨
소리 껍데기뿐이다.

차마 부끄러워
도둑처럼 밀어 여는 사립문
고양이도 부끄러워 엿보지 않나
텅 빈 마당이 허전하고
텅 빈 마구간이 허전하고
발길에 밟히는 것은 소스라치게 놀라
달아나는 쥐새끼뿐이다. (주석 1)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 해야 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유신 치하의 한국사회는 1년 여의 옥고를 치루고 돌아온 한 청년의 귀향을 부끄럽게 하였다.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왜경에 붙잡혀 옥고 끝에 귀향할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도 유신은 일본 메이지유신으로부터 작동된 조선총독부 시대와 일치점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김남주는 아우 덕종이에게 <우습지 않느냐>란 시를 지어 주었다. 당시 참담했던 심경을 담았다.

우습지 않느냐

우습지 않느냐 덕종아
너의 형이 우습지 않느냐
대학까지 구경하고 그도 모자라
감옥까지 구경하고 이제는 돌아와
탄식이 되어버린 고질
푸념도 고질이요 넋두리도 고질
생활까지 탄식이 되어버린
얼씨구! 너의 형이 우습지 않느냐
돈이라면 반가운 줄이나 알았지
애타도록 기다릴 줄 모르는 주제에
돈벌이를 한답시고 담배를 빨아 대며
궁리를 짜고 있는 내가 우습지 않느냐
새끼가 한 바퀴에 이백원이면
작은 돈이 아니라고 하루마다
세바퀴를 꼴 양이면 천원을 벌고
열흘이면 만원이요 한달이면 삼만원
웬만한 월급쟁이는 저리 가라고
손가락 꼬부려 생활을 계산하는
너의 형이 우습지 않느냐

우습지 않느냐 덕종아
새벽부터 일어나 짚을 추리고
휘파람을 불어대며 장단 맞추며
돈이 돈다 돈이 돈다 돈을 굴리는
너의 형이 우습지 않느냐. (주석 2)


주석
1> <김남주시전집>, 44쪽.
2> 앞의 책, 39~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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