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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46회] 독립운동가 양성의 이상촌건설 노력

[46회] 독립운동가 양성의 이상촌건설 노력

[10장] 재수감 병고 끝에 만 60세로 서거 2013/04/24 08:00 김삼웅

흥사단 제4주년 기념대회(1916)

안창호는 신민회 시절 이래 기회 있을 때마다 민족운동 진영의 단합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 임시정부의 개조나 민족유일당운동의 추진도 이를 위해서였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국민의, 독립운동가들(단체)의 단합이 선결과제라고 주창해왔다.

안창호가 석방되어 국내에 머물게 되면서 지지자들도 많았지만 비판, 음해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사회주의자 인정식이 <조선중앙일보>에 안창호를 비판하는 글을 쓰고, “한때 대성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우정을 나누었던 기호 출신의 윤치호가 1932년 7월 이광수의 요청으로 경기도 경찰부에 구금되어 있는 안창호의 석방을 위해 당국자들과 접촉하자, 신흥우ㆍ유억겸ㆍ김활란 등 이승만계의 기호파 인사들이 분개해 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주석 8)

이같은 상황에서 안창호는 동우회측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국내 민족운동세력의 통합을 위하여 끈질기게 노력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자신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동우회가 어느 수준 정도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앞에서 잠시 소개했듯이 수양동우회는 1922년 2월 서울에서 조직된 수양동맹회와 같은 해 평양에서 조직된 흥업구락부가 1926년 1월 서울에서 통합하면서 결성되었다. 안창호가 미주에서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지부적 성격의 민족운동단체였다.

안창호는 송태산장에 거주하면서 건강이 회복 되는대로 평양 부벽루와 달마산 근처에 이상촌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상촌건설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1926년 3월 상해로 돌아오는 길에 경유지인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신개척지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12월에는 흥사단원 유기석을 동반하고 유일당운동과 이상촌 후보지 탐색을 위해 만주를 답사하였다. 하지만 바쁜 일정과 피체된 후 국내 압송으로 뜻을 이루기 어려웠다.

오랜 흥사단 단우인 구익균은 (안창호가) “만주에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을 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다. 그 하나는 유토피아를 실험하여 후일에 한국이 독립되면 동지들을 그 샘플을 그대로 건설하여 보겠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만주에 산재하여 있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집단생활을 시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어 큰 역량을 발휘하자는 것이었다.” (주석 9)

1916년 이래 안창호와 인연을 맺고 미주와 국내에서 가까이 지냈던 장면 정권 시기의 주미 대사를 지낸 장이욱의 회고다.

그는 국내에서의 이상촌을 구상하면서 그 계획을 밀고 나가고 있었다. 이 이상촌은 먼저 직업학교풍의 인격수련과 기술체득을 목적으로 삼는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설계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류의 이상촌을 국내 여러 곳에 세우려고 생각했다. 도산은 그 제1호로 이상촌을 평남선 항선역에서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달마산 아래 세우기로 계획했다. 여기는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

1936년 이른 여름 어느 하루 나는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을 모시고 송악산장에 올라갔다가 일박했다. 그 다음날 우리는 약 15리 길을 도보해서 달마산 아래 이르렀다. 여기 세워질 제1호 이상촌에 대한 청사진은 벌써 도산의 머릿속에 소상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직업학교는 기숙사가 어디쯤 지어진다. 강당 교회 욕탕 등의 위치는 어디쯤이야 한다. 실습지나 일반 주택구역은 대체 어느 쪽에 어떤 방향으로 놓여야 한 다 등 소견을 말해 주었다.

도산은 특히 이 직업학교 문제를 위해서는 내가 일본에 가서 견학하고 오기를 바랬다. “중도 제 머리는 못깎는다고 했지” 그러며 “장 교장(이 때는 이렇게 불렀다.) 일본 다녀오는 여비는 내가 주선해야지” 그는 일금 4백 원을 주선해 주었다.
(주석 10)

장이욱의 회고담 한 가지를 더 소개한다. 그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총독부의 조선인 출신 고위 간부 T가 안창호와의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하여 셋이 1938년 봄 어느 날 저녁 서울 중앙호텔에서 만났다.

T는 안창호를 상대로 1. 거대해진 일본의 국력. 2. 돌릴 수 없는 일본의 대륙정책. 3. 일본은 조선통치를 영구화하고 또 이런 정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거점으로 삼기로 한 것. 4. 실력을 써서 독립쟁취란 가망 없는 노릇임을 설파하고, 일본정부 고위층에서는 수도를 경성(서울)으로 옮길 필요를 말하는 사람까지 생겼다면서, 안창호의 전향 의사를 완곡하게 타진하였다.

이제 도산이 이 중대한 민족문제에 관해서 그 소신을 말하려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그의 태도가 보다 더 근엄한 듯 했고 또 침통한 빛이 짙은 듯 했다.

“고맙소. 잘 알아들었소. 나는 일본 국력이 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소. 또 일본의 야심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러나 한 민족(조선)의 운명은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되고 마는 것이라고 나는 믿지 않소. 나는 우리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비관을 갖지 않소” (주석 11)


주석
8>  앞의 책, 47쪽.
9>  구익균, <상해에서의 도산>, <기러기>, 1980년 11월호 23쪽.
10>  장리욱, <안도산비록>, <사상계>, 1965년 3월호, 239~240쪽,
11>  앞의 책,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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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45회] 동지들에게 향후 계획ㆍ구상 밝혀

[45회] 동지들에게 향후 계획ㆍ구상 밝혀

[10장] 재수감 병고 끝에 만 60세로 서거 2013/04/23 08:00 김삼웅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된 후 수형사진(1937)

안창호는 출옥 뒤 각계 인사와 여러 동지들을 차례로 만나 향후 계획과 구상의 일단을 밝혔다. 다음은 장규식 교수가 정리한 내용이다.

1) 조선은 과거에 찬연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현재에도 결코 비관할 것이 없다. 조선의 장래 운명은 국제정세의 여하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2) 최근 동우회운동의 침체는 유감으로 나 자신의 옥중생활도 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 운동은 약법이 있으므로 나의 있고 없고에 따라 변할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 수양만 할 것이냐는 급진의견도 있으나 출옥 후 각지를 시찰하니 조선 현하의 상황에서는 정치운동보다 당분간 수양운동을 위주로 하는 것이 적당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3) 동우회가 오랜 역사와 우수한 분자를 가지고 있는 점은 다른 결사와 비할 바 아니나, 회세가 활발하지 못한 것은 회원의 동우회에 대한 책임 관념이 결핍되었기 때문으로 우리들 회원은 자아혁신운동에 의해 개인의 실력을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 오늘날과 같이 발전한 것은 명치유신을 거치며 우선 개인의 실력을 양성하고, 이어 교육ㆍ산업ㆍ국방을 충실히 하였기 때문이다.

4) 김옥균 등의 혁신운동과 1919년의 독립운동은 조선인의 자아혁신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조선민족을 자아혁신시키기 위하여는 우선 동우회원 자신부터 혁신을 하여 타에 미치도록 할 일이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항을 목하의 급무로 삼아 힘쓸 일이다.

① 출판물을 발행하여 일반 민중의 지식을 향상시킬 것.
② 직업학교와 모범농촌을 건설하고 단기강습회를 개최하여 청년에게 기술을 가르칠 것.
③ 체육장려를 위해 보건운동을 할 것.
④ 중앙에 동우회 회관을 설립하고 유급 상무이사를 두어 침체상태에 있는 회세를 부활시킬 것.
➄ 신용조합을 비롯한 합자의 상조적 경제조직을 조직하여 회원의 경제력을 풍부히 할 것.
➅ 일반 사회에 대해 사랑으로 감화하고 비록 관리일지라도 조선인은 동포로서 감화시켜 (동지로) 획득할 것.
➆ 일본인에 대해서는 아부하지도 적대하지도 말며 표면상 평범하게 나아갈 것. (주석 6)

안창호가 출감하여 국내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서 맞부닥친 것은 지방색의 문제였다.
기호파와 서북파의 해묵은 갈등이 심각한 상태로 번지고 있었다. 여기에 민족주의 대 사회주의의 이념적 대립까지 겹치면서 민족운동 진영은 공동의 적 일제보다 ‘지방열’과 이념의 색깔로 더욱 심하게 분열되고 있었다.

안창호는 기호 대 서북이라는 지방색과 민족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대립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는데, 그것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못지않게 그의 운신 폭을 옥죄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지방색은, 그래도 논리적인 성격을 지닌 이념 노선상의 대립과 달리 뿌리 깊은 편견과 선입견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처럼 풀기 힘든 문제였다.

사실 도산에게 평안도는 양날의 칼이었다. 도산은 평안도 주민들의 탄탄한 지지를 발판삼아 일약 민족의 지도자로 떠오를 수 있었다. 반면에 지역감정과 맞물리면서 그것은 도산이 전국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되는데 커다란 족쇄가 되기도 하였다. (주석 7)


주석
6>  장규식, 앞의 책, 42 ~43쪽, 재인용, <독립운동사자료집> 12,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1977.
7>  장규식, 앞의 책, 46 ~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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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44회] 대보산에 손수 송태산장 짓고 기거

[44회] 대보산에 손수 송태산장 짓고 기거

[10장] 재수감 병고 끝에 만 60세로 서거 2013/04/22 08:00 김삼웅

강서군 대보면 대보산 송태산장

안창호는 3월 중순 경에 평남 대동군 대보면 대평내리 대보산에 있는 조신성의 별장에서 지내다가 고려시대 송태암이라는 절이 있다가 폐허가 된 이곳을 사서 50평 대지에 건평 18평의 목조건물을 손수 짓고 은거하였다.
대성학교 학우회 제자들과 평양에 있는 유지들이 성금을 모아 집을 짓게되었다. 가끔 서울을 출입하며 원세훈 등 동지들과 만났다. 일경의 감시로 자유로운 활동이 어렵고 민족진영 인사들과의 회동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1월 18일 가출옥 형기가 만료되었다. 이로써 법률적으로는 수인(囚人)의 신분에서 풀려난 것이다.

안창호는 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기거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의 감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11월 30일 조만식ㆍ한근조 등 13인이 발기하여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선생 환영회’를 열기로 했으나 경찰의 금지로 열리지 못했다. 안창호는 그런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틈틈이 유지들을 만났다. 2월 20일부터 대전ㆍ이리ㆍ군산ㆍ금구ㆍ광주ㆍ목포ㆍ순천ㆍ여수ㆍ하동ㆍ진주ㆍ마산ㆍ대구 등 남부지방을 순회하고 2월 말 서울로 돌아왔다. 동포들의 생활은 20여 년 전 신민회 시절의 상황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안창호는 9월 5일 압록강 건너편 안동현으로 건너갔다. 안동청년회 요청으로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의 집회 불허로 강연회 대신 만찬회로 바뀌었다. 인사말 형식으로 진행된 이날의 강연은 2천여 명의 청중을 크게 감동시키는 내용이었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나는 최후로 국가제일 민족지상의 이념에서 내 나라를 부하게 하고 내 민족을 흥하게 함에는 민족자본주의를 주장하며, 최근 사회혁명사상에는 민족평등ㆍ정치평등ㆍ경제평등ㆍ교유평등 이상 4대 평등인 대공주의를 적극 주장한다” (주석 4)라고 설파하였다.

안창호는 일단 법률적 족쇄가 풀리면서 보다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동우회원들을 비롯하여 각계 인사들을 만나고 교회와 사회단체의 초청으로 강연을 하였다. 평양 남산현 교회에서 열린 평양감리교회 연합예배에서는 <기독교인의 갈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신의주에서는 <인격혁명>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서울에서는 조선어학회의 찬조연사로 나서 강연 중 일경의 제지로 중단되기도 했다.

생활비와 활동비는 동우회원들과 유지들의 지원으로 가능했으나 얼마 후에는 일경의 뒷조사로 생활비가 차단되는 경우가 잦았다.

“평양지역의 동우회원 김성업ㆍ김동원ㆍ오경숙ㆍ김용장 등은 안창호가 출옥한 다음 달인 1935년 9월 18일 이후 수차에 걸쳐 중앙호텔 주인 김병찬에게 그같은 현금을 보관시킨 것으로 일제 관헌은 파악하였다.” (주석 5)


주석
4>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256쪽.
5> <동우회 관계보고>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1012쪽, 1937 ~ 19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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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43회] 만기 9개월 앞두고 가출옥

[43회] 만기 9개월 앞두고 가출옥

[10장] 재수감 병고 끝에 만 60세로 서거 2013/04/21 08:00 김삼웅

수형기록카드에 부착된 안창호 정면 및 프로필 사진

안창호는 1934년 2월 10일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하였다. 상해에서 피체된 지 4년여 만이다. 만기 출옥을 9개월 여 앞두고 가출옥 된 것은 일본 정부가 왕세자 출생의 ‘은사’를 이유로 풀어주었다.

이날 오후 1시 30분 대전형무소에서 출감할 때 주요한ㆍ박흥식ㆍ김동원ㆍ안맥결 등 친지와 지인들이 마중하고,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언론계와 유지 등 100여 명이 출옥을 환영나왔다. 가출옥의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출옥한 후의 감상이야 왜 없겠소. 그러나 이것은 말하지 아니하겠소. 옥중에서 다소 건강을 손한 까닦에 당분간은 휴양하여 이것을 회복시키기에 전력하겠고, 앞으로 어찌할 것은 그 후에라야 언명하겠소. 그동안까지는 침묵기로 두어두겠소이다.” (주석 1)

안창호가 대전감옥에서 출감할 때 환영 나온 이들에게 일본인 간수가 칠기화병을 들고나와 이것이 안창호의 옥중 작품이라고 소개하였다.

도산은 사상 전향자 정치범으로 독방에서 흰 종이로 노끈을 꼬아 수공품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래서 종이를 엮어 화병을 만들고 그 위에 옻을 칠한 것이었다. 어디로 보나 빈틈없는 전문가의 수법으로 된 화병이었다.

옥중에서라도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그의 성실함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도산은 “나의 고향은 옻칠의 생산지인 만큼 나를 칠 공장에 일을 시켜주면 칠 공장 기술을 배워 후진을 지도하겠다.”라고 했다 한다. (주석 2)

안창호의 언명대로 긴 옥고를 치루느라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보다 건강회복이 시급했다. 부인은 너무 먼 길이어서 출옥한 남편을 맞지 못하였다. 한국에까지 올 수 있는 여비의 마련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평양역 전경. 1935년 2월 11일 오후 2시 44분, 열차로 평양에 도착한 안창호를 맞기 위하여 4천여 관중이 이 광장을 메웠다.

서울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11일 평양으로 갔다. 오윤선ㆍ조만식과 대성학우회 회장 등이 사리원역에까지 마중을 나오고,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3,4천 명의 동포들이 환영하였다. 이틀 뒤 고향인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를 찾았다.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자신이 설립한 기양교회를 방문했다.

2월 16일 오후 평양역에서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맡고 있는 여운형과 극적으로 만났다. 상해에서 헤어진 지 5년 반 만이었다. 여운형도 상해에서 일경에 피체돼 국내에서 옥살이를 하고 출감한 터였다. 안창호와 여운형의 만남을 <조선중앙일보>는 두 사람의 사진과 함께 비중 있게 취급하였다. 당시 여운형은 이 신문의 사장이었다.

(평양) 수일 전에 가출옥하여 평양에 와 있는 안도산을 만나기 위하여 본사 려 사장은 영동지방 여장을 풀 사이도 없이 16일 오전 6시 평양역차 열차로 평양에 왔고, 안도산도 고향 강서에 가있다가 오후 2시 반 차로 입양하매 려 본사 사장은 평역에까지 나가 프렛트폼에서 감격에 넘치는 회견을 하였다.

상해에서 손을 나눈지 이미 5년 반에 각각 고역을 치루고 나오는 같은 코스를 밟아 조선하늘 앞에 첫 악수를 하니 양편이 모두 감개무량한 듯 잠깐은 서로 말이 없었다. 곧 동차로 오윤선 장로의 집으로 가서 저녁때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로 회포를 풀었다.
(주석 3)

용강온천에서 열흘간을 정양하다가 3월 11일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옛 동지들의 지원으로 삼각정 중앙호텔에서 보름정도 유숙하였다.

주석
1> <동아일보>, 1935년 2월 12일치.
2> 권영준, <도산 안창호>, 전집 13권. 317쪽
3> <조선중앙일보>, 1935년 2월 18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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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42회] 감옥에서 부인에게 보낸 편지

[42회] 감옥에서 부인에게 보낸 편지

[9장] 망명 23년 만에 국내로 압송 투옥 2013/04/20 08:00 김삼웅

안창호는 서대문형무소에 이어 대전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면서 미국의 가족에게 “형무소의 법규가 두 달에 한 번밖에 편지를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자주 편지를 하기 어려웠다. 1933년 6월 1일 대전형무소에서 부인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가 남아 있다. 띄엄띄엄 소개한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평생에 당신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지 못했고 이제 늘그막에 와서 근심과 슬픔만 주게 되니 불안한 마음을 헤아릴 수 없소. 더욱이 집안일과 아이들에 대한 모든 시름을 늘 혼자 맞게 하니 미안하고 미안하오.
내가 조용한 곳에 홀로 있으며 평소에 그릇된 여러 가지 허물을 생각하고 한탄하는 중에 남편의 직분과 아비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또한 스스로 책망하는 조건이오. 또한 당신 이외에 미국에 체류하는 여러 친구와 동포들이 나를 동정하여 걱정하심에 대하여도 황송할 뿐이오.”

“당신은 본래 성격이 겁을 내지 않고 담대하니 내가 이 지경에 처한 것에 대해 근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집안일을 돌아보며 아이들을 교양하는 데 수고하는 것으로 낙을 삼으시오. 당신이 만일 걱정하는 빚을 띠면 집안에 화기가 사라지고 따라서 아이들의 신체 발육과 정신발달에 큰 영향을 줄 터이니 나에 관한 모든 것은 아주 없어진 것처럼 일소하여 버리고 가정의 유쾌한 공기와 아이들의 활발한 기상을 만들기에 주의하시오.”

“옥에서 목숨을 멈춘다 하여도 한할 것이 없소. 나는 나의 장래를 자연에 맡기고 다만 평소에 지닌 죄과를 참회하고 심신을 새로이 단련하여 옥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어디서든지 남아 있는 짧은 시간을 오직 화평한 마음으로 지내려고 스스로 준비하고 힘쓰고 있소.”

“아이들 혼인에 대해서인데 필선이는 아직 문제가 안 될 것이고, 수산과 수라의 혼인이 염려되어. 미주 우리 사회의 혼인의 문이 넓지 못한 바 실제로 혼처를 구하기가 곤란할 것이오. 그러나 그 형편에 맡길 수밖에 없소. 당신이 감독하는 밑에서 저희들이 자유로 선택할 터인데 아이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지식을 먼저 지도하여 주시오. 특별한 사람을 구하지 말고, 직분을 존중히 하고, 직업을 사랑하는 근실한 사람이면 만족할 줄 아시오. 그 중에 필립의 혼기가 너무 늦은 것은 유감이오. 그러나 임의로 늦어진 바에 좀 더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 하오. 내가 만일 죽지 않고 나가게 되면 내가 나가서 주선하는 것이 나을까 하오. 나의 나갈 형기가 1936년 11월 6일인즉 앞으로 3년 5개월이 남았소. 3년 시간이 잠깐 갈 터이니 기다림이 좋을까 하오.”

“집안 생활이 본래도 곤란한데 지금 특별히 불경기에 처하여 있으니 얼마나 곤란하겠소. 그러나 이것도 평생을 받아 오는 바이므로 견디는 힘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오. 다만 주의할 것은 필영이를 제외한 네 아이는 무엇을 하든지, 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더라도, 모두 일 전씩의 벌이라도 버는 일을 실행케 하고 이 불경기를 이용하여 공부하게 하시오.”

“사랑, 이것이 인생에서 밟아 나갈 최고의 진리요, 인생의 모든 행복은 인류간의 화평에서 나오고 화평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해 본 바, 어떤 가정이나 그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면 화평하고, 화목한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오, 그와 같이 사랑이 있는 사회는 화평의 행복을 누리오.”

“그런즉 나나 당신의 앞날에 있을 시간에 우리들이 어떤 곳에, 어떤 경우에 있든지 우리의 마음이 완전한 화평에 이르도록 사랑을 믿고 행합시다. 내가 이처럼 고요함을 공부할 생각만 하는 동시에, 이것을 당신에게 선물로 줄 마음이 있어서 ‘사랑’ 두 글자를 보내오니 당신은 당신의 사랑하는 남편이 옥중에서 보내는 선물로 받으시오.”

“말이 너무 길어지므로 그만 줄이오. 아이들에게도 자주 편지하고 싶으나 형편이 허락하지 아니하오.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은 평시보다 더욱 간절하오. 그 중 필영이 생각이 더 많이 나오.”  (주석 13)


주석
13> 윤병석ㆍ윤경로, 앞의 책, 368~372쪽(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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