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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49회] "김창룡에게 이용 당했다"

[49회] "김창룡에게 이용 당했다"

<악의 축> 안두희 평전/[15장] 암살범 응징은 계속되고 2014/01/05 08:00 김삼웅
권중희의 설득과 응징으로 입을 연 안두희는 범행 43년 만에 이제까지의 ‘단독 범행’을 최초로 번복하기 시작했다. 안두희는 자택에서 범행 후 처음으로 한 언론과 인터뷰에 응하면서 배후 관계와 심경 등을 털어놓았다.

▲ 백범을 살해한 이유는?
- 백범이 빨갱이들에게 둘러 싸여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 백범을 원래 증오했나?
- 아니다. 백범을 국부로 생각했지만 김창룡 특무대장(범행 당시는 육군정보국 방첩대장)을 만난 뒤부터 생각이 변했다.

▲ 49년 6월 26일 범행한 이유는?
- 우연히 기회가 주어져 암살했다. 다른 날이라도 암살할 준비는 돼 있었다.

▲ 백범 저격 당시의 심정은?
- 백범과 나의 생명을 맞바꾸리라 마음먹었다.

▲ 권총을 어디서 났는가?
- 평소 차고 다니던 권총이다

▲백범을 암살하기 위해 사격연습을 했는가?
- 나는 포사격은 1위였고, 권총사격은 상위권이었다. 따라서 따로 연습할 필요가 없었다.

▲ <시역의 고민>이라는 백범 암살기는 왜 쓰게 됐나? 지시를 받고 쓴 것이 아닌가?
- 내가 김 특무대장에게 수기를 쓰겠다고 자청했다. 김 대장이 형무소장에게 말해 집필조건을 마련해준 것으로 알고 있다.

▲ 김창룡으로부터 어떤 보장을 받았는가?
- 특수요원들은 어떤 말이든 딱부러지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신변을 보호해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 백범 암살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 젊은 놈이 총 한자루 갖고 우쭐대다가 말려들어 갔다. 군인이 정치에 말려들 필요가 없었는데….

▲ 김창룡에게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나?
- 결과적으로….

안씨는 이 말을 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 지금까지 김창룡의 범행 지시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은….
- 없다.

▲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 이민 간(지난 77년) 아내는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 배후를 밝히면 신변에 위협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냐?
- 북한에 두고 온 첫 부인 소생 딸을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다. 그때까지는 무사히 지내고 싶었다.

▲ 왜 지금까지 이 사실을 숨겼나?
- 김 특무대장의 가족이 국내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리 때문에….

▲ 지금 심정은….
- 달관 진인사(盡人事) 대천명(待天命). (주석 3)


주석
3> <동아일보>, 1992년 4월 13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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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48회] 권중희, '대통령에게 보낸 통고서'

[48회] 권중희, '대통령에게 보낸 통고서'

<악의 축> 안두희 평전/[15장] 암살범 응징은 계속되고 2014/01/04 08:00 김삼웅
안두희의 입을 통해 최초로 김구 암살 배후에 김창룡과 미 CIA가 있었음을 실토받은 권중희는 7월 24일 대통령 노태우에게 재수사를 통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대통령에게 보낸 통고서>를 제출했다.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배후를 추적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지난 10년의 경험에서 알았기 때문이었다.

“건국 초기 이승만은 인재 궁핍을 빙자해 과거의 친일반역배들을 중용하여 각계 각층에서 군림토록 하였을 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적극 지지하는 반민특위마져 강제 해체하여 당연히 처형되어야 할 친일 수괴들을 석방시킴과 동시에 도리어 민족양심 세력들을 투옥, 처형했는가 하면 심지어 안두희 같은 반역배를 조종하여 불세출의 독립투사를 암살케하고도 그런 암살자의 부귀영화를 보장해주었다.”고 주장했다. 권중희의 ‘통고서’는 이어진다.

다른 범죄엔 시효가 있어도 민족반역자 처형엔 시효가 없다는 것은 세계적인 통례요, 불문율로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나, 독일, 프랑스 등은 그들 민족에 해악을 끼친 자들은 지금까지도 끝까지 추적하여 세계 어느 곳에 숨어 있든 우격다짐으로 강제납치해서라도 기어코 처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진정 본받아야 할 그런 일은 흉내조차 내지 않고 본받아선 안 될 일들만 열심히 본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79년 귀하가 9사단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진입하여 그 악명높은 전두환 정권 창출에 결정적 역할을 다했던 그 힘과 정열의 만분의 일만이라고 민족정기를 소생하는 일에 썼다면, 안두희 같은 반역배는 벌써 능지처참되고도 모자랐을 것이며 그로 인한 귀하의 명성도 후세에 길이 빛나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백보를 양보해 설사 사법적 형벌은 시효로 접어둔다 하더라도 역사의 진실 규명엔 결코 시효가 있을 수 없는데도 안두희 같은 반역자의 증언이 살아 있을 때 왜 암흑사의 진실마저 밝힐 생각조차 않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나라는 망하더라도 역사만 망하지 않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말처럼, 우리가 제대로 밝혀진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된 것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며, 잘한 것은 더욱 잘해보자는 데 있습니다.

안두희는 지금 여생을 점치기 어려운 병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응징은 고사하고 사실 규명만이라도 꼭 해야 한다는 시대적 책임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정기를 위한 본인 나름의 충정을 이해하시고 그 어떤 획기적 조치가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마음 같아서야 지금 당장이라도 쫓아가 개인적 사형을 가해서라도 입을 열게 하고 싶습니다만 개인자격보다는 국가적 차원에서 조치하는 것이 대국민 교훈면에서 보다 효과적이라 사료됩니다. 그러나 귀하께서 아무런 조치가 없을 땐 개인 자격으로나마 모종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천명해둡니다. (주석 2)


주석
2> 문일석, <김구암살범 안두희 배후>, 179~180쪽, 한솔미디어,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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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47회] - 세번째 주자 권중희, 자백 받아내

[47회] 세번째 주자 권중희, 자백 받아내

<악의 축> 안두희 평전/[15장] 암살범 응징은 계속되고 2014/01/03 08:00 김삼웅
안두희의 업화(業火)는 생전에 맹화(猛火)처럼 타올랐다. 사법기능을 독점한 국가가 책임을 하지 못함으로써 개인이 연거푸 응징에 나섰기 때문이다.

세번째 타자는 권중희였다. 193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으나 13세 때에 우연히 접한 <백범일지>를 읽고 남다른 애국심과 김구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김구에 관한 각종 저서와 자료를 섭렵하던 중 아직도 안두희가 살아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고 안두희 추적에 나섰다. 세번째 추적자가 된 셈이다.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어디까지나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노라는 사명감의 발로였다.

권중희는 1992년 4월 12일 인천시 중구 신흥동 동명아파트 502호에 은거하고 있던 안두희를 찾아내 준비한 각목으로 응징하면서 ‘배후’를 고백하라고 요구했다. 권중희는 당일 한독당 동지회 청년부장 윤철희, 반민족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 전신) 회원 원궁재와 함께 오전 9시경 인천행 전철을 탔다. 1983년부터 추적하여 마침내 그의 은신처를 알아내고 이날 ‘거사’에 나선 것이다.

권중희 일행이 도착한 오전 11시경 안두희는 여전히 자리에 누워 있었다. 일어나 이야기를 하자고 설득해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가라고만 소리쳤다. 누워서도 좋으니 얘기를 하자고 3시간 동안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권중희가 이불을 걷어치우고 위협했다.

“이 역적아! 너는 어찌 그리도 한 가닥 양심조차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소리 치느냐. 이 역적아!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너는 저승으로 가면 되고, 나는 형무소로 가면 되지만, 나는 일이 이렇게 끝나길 원치 않는다.”면서 몇 차례 구타하면서 배후를 실토하라고 윽박질렀다.

안두희는 테러리스트답게 쉽게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나이도 이미 75세의 노령으로 오랜 도피 생활때문인지, 심신이 많이 피로에 지친 듯이 보였다. 권중희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배후가 영원히 묻힐 것 같아 끈질기게 달래고 위협하였다. 마침내 범인이 입을 열었다.

“김창룡이가 시켰어. 그리고 미CIA야.” 하는 것을 서두로 아주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춰가며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실감을 하지 못했다. 83년부터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으니까 꼬박 10년째다. 그 10년 동안 한결같이 ‘단독우발 범행’이라고 되풀이 강조하던 그가 부분적이나마 털어놓는 것을 보고는 내 정신이 도리어 혼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승리, 성공, 보람 등 어떤 말이나 글로서도 잘 표현 할 수 없는 심정에서 젊은이들을 끌어안았다.

“이게 정말 꿈은 아니지?”라고 말하는 내 눈에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가 MBC와의 회견 때 내가 그를 때렸다는 것을 호소하는 장면을 보고 모 신문사에서 폭력에 대한 항의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을 논평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나는 이번에 이 사건을 보도하는 보도기관의 태도를 보고 너무 실망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쏴 죽인 것도 의거 아닌 폭력이고,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장쾌한 의거도 모두 폭력이란 말인가.

행위 자체야 물론 폭력이라 할 수 있지만 행위만을 단편적으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민족정기를 파괴하기 위해 총을 4발이나 쏜 반역범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양심에 호소하다 못해 몇 차례 구타한 것을 문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이 애국이고 반역죄인지조차 부 분간 못할 정도로 의식이 마비돼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주석 1)


주석
1> 권중희, <토요신문>, 1992년 5월 7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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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46회] 행동대원 홍종만 25년만에 ‘양심선언’

[46회] 행동대원 홍종만 25년만에 ‘양심선언’

<악의 축> 안두희 평전/[14장] 4월혁명으로 쫓기는 신세 2014/01/02 08:00 김삼웅
김구 암살의 행동대원이었던 홍종만이 사건 25년 만인 1974년 5월 15일 한 신문과 회견을 통해 양심선언을 하고 진상을 폭로했다.

사건 직전 김구가 이끄는 한독당원으로 있으면서 육군소위 안두희를 한독당에 입당시키는 등 김구 암살사건에 열쇠를 쥐고 그동안 행방을 감췄다가 이날 홀연히 나타났다.

홍종만의 회견에는 백범기념사업회 이사인 김용희도 동석하여 홍종만의 자백내용을 지켜봤다. 홍종만은 안두희의 처삼촌벌임이 이날 밝혀졌다.

“백범 선생이 살해된 후 항상 죄의식 속에 살아왔다”는 홍종만은 “법적인 시효는 지났다해도 양심의 시효는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김구 선생의 25주기를 한 달 앞두고 “선생의 영전과 국민 앞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사건진상을 폭로한다”고 밝혔다.

홍종만은 “백범 선생이 살해된 후 이 사건은 당시 군수사기관과 군법회의서 안두희의 단독범행으로 종결지어졌으나 사실은 배후가 있는 계획적인 암살이었다”고 말하고 “백범 살해를 일선에서 지휘한 사람은 당시 포병사령관 장은산 중령(사망)이었으며 그 밑에 각본을 꾸민 김지웅(현재 일본에 체류)이란 자가 있고, 안두희와 자신을 포함한 10명의 행동대원이 구체적 암살계획을 수행케 했다”고 폭로했다.

홍종만은 또 당시 김지웅이 서울시경 간부와도 자주 만났으며, 주로 경찰이 행동대 주위에 가까이 맴돌았다고 밝히고, “당시 일부 경찰과 신모 장관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돼 있지 않나 직감했다”고 말했다.

홍은 자기가 한독당원이면서 김구 암살음모에 가담한 동기에 대해 “같은 당원인 백영호 씨가 김지웅을 소개해준 뒤 김지웅이 백범 선생을 공산당원으로 모는 등 잦은 획책을 쓰고 용돈과 술대접을 푸짐히 하는 등 유혹하는 데 일시적으로 빠졌던 때문”이라고 말했다.

홍은 자기가 사건 전해인 48년 11월 서북청년회 태평특별분회원으로 있다가 한독당에 입당한 것과, 또 조카사위뻘인 안두희를 한독당에 입당시킨 것은 백범 선생을 따르고 싶은 순수한 동기에서였으나, 김지웅을 알게 되고, 또 안두희를 김지웅에게 자기가 소개한 것이 이런 범행을 저지르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홍은 이어서 한독당 조직부장이던 김학규 씨가 반대하는 데도 안두희의 당원증에 ‘비(秘)’자를 찍어주기는 했으나 공판정에서 논란이 됐던 것처럼 한독당에 비밀당원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김지웅은 안두희를 소개받은 뒤 홍종만을 시켜 자주 안두희를 데려오라 했으며, 셋이서 명동일대 요정으로 다니며 수 십 차례 술을 같이 나누었다는 것이다. 김지웅의 돈 씀씀이가 호탕해 하루 몇 만 원(지금의 수 십만 원)을 쓰는데 유혹됐던 것만은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그 뒤 김지웅의 각본과 지시에 따라 홍씨와 안두희는 같은 평북이 고향인 육군소위 오병순 ㆍ한경일ㆍ김창걸 등 장교 3명과 독고녹성ㆍ정익태ㆍ한국상ㆍ이춘익ㆍ한봉수 등 모두 10여 명으로 행동대(당시는 이런 명칭은 없었다함)를 조직 수시로 모였으며, 거사자금은 김지웅이 전적으로 댔다는 것이다.

무기는 암살사건 두 달 전 김지웅이 장은산에게 말해 안두희를 시켜 미제 45구경 권총을 나눠주었다. 하루는 우이동에 가서 권총을 10발씩 쏴보며 총쏘는 연습도 하였다. 49년 6월 23일, 이들이 노리던 첫 거사일이 닥쳐왔다. 이들의 암살계획은 1, 2차는 실패, 3차 거사로 결국 김구 선생을 살해하였다.
(범행기도와 과정 부문 생략-필자)

“사건 직후엔 당초 김지웅이 보상하겠다던 생활비도 제대로 안주고 배신, 김지웅을 만나기만 하면 찔러 죽이고 싶었다”면서 4ㆍ19혁명이 났을 땐 가진 돈도 없이 신변이 두려워 대구ㆍ부산ㆍ울산 등지로 숨어다니며 고생을 했다고 말한다.

홍씨는 현재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5남중 한 아들과 부인과 같이 근근이 살고 있으며, 4형제는 군에 복무중이라고 말했다. 홍씨는 그를 백방으로 찾던 백범기념사업회 이사 김용희씨와 얼마 전 만나 자백의 뜻을 밝혔으며, 지난 일요일인 12일 낮 본기자와 3차 대면한 가운데 백범 살해 음모에 얽힌 진상을 폭로하기에 이르렀다. (주석 7)


주석
7> <동아일보>, 1974년 5월 15일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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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45회] 안두희 배후 김병삼도 응징에 나서

[45회] 안두희 배후 김병삼도 응징에 나서

<악의 축> 안두희 평전/[14장] 4월혁명으로 쫓기는 신세 2014/01/01 08:00 김삼웅
곽태영은 출옥하는 자리에서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무서운 정치 암살범이 거액의 보수로 편하게 세상을 활보하고 있는 것을 정의감이 살아 있는 젊은 남자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고 소감을 말했다.

재크 나이프로 안두희를 응징할 때 안두희로부터 “헌병사령부 김병삼 대위가 헌병대 차로 경교장까지 태웠다 줬다.”는 자백을 받아낸 곽태영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내각사무처장으로 있던 김병삼에게 경고문을 보내 그 죄상을 국민 앞에 고백하라고 촉구했다.

1967년 2월 10일자의 ‘경고문’에는 권력층에 기생하는 배후세력을 응징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져 있다.
경고문

귀하에게 다시 김구 선생 암살 사건에 관련한 사건을 국민 앞에 고백하여 구국선열과 국민 앞에 속죄하기를 요구하는 경고문을 보내게 됨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소생 곽태영은 일신을 희생하여 구국지사 김구 선생님의 암살 배후를 만천하에 밝혀서 선열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더러웠던 역사의 오점을 씻고 죽겠다는 일념으로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것을 각오하면서, 귀하에게 양심적 고백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보내는 바입니다. 2차에 이르러 보낸 경고문에서도 고백과 지성으로써 선열과 국민 앞에 사죄하라는 내용으로 충고했으나, 오늘날까지도 하등의 자성하는 정(情)이 없음을 의식적인 회피로 간주하고 귀하의 비양심적인 처사를 국민 앞에 고발 규탄하는 바입니다.

18년 전 민족의 태양이신 백범 김구 선생님이 하수범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셨을 때, 그 당시 귀하가 위치하여 활동했던 상황을 돌이켜 보시고 냉정한 이성으로 돌아가서 자성해보면 충분히 양심의 무서운 자책을 받으리라고 믿습니다. 본인이 1966년 12월 22일 양구에서 국민의 원수인 하수범 안두희의 목에 비수를 겨누고 배후를 추궁하여 귀하가 김구 선생 암살 사건에 관련한 사실을 자백받고 그 이상의 배후를 고백받으려다가 오히려 심한 역습을 받고 필사적인 격투 끝에 간신히 생명을 구했던 것입니다.

애국지사의 암살 배후를 밝히기 위하여 이미 목숨을 바칠 것을 각오한 나로서 하수범의 입에서 귀하의 가담 사실을 확인한 이상 더 침묵을 지킬 수 없으며, 양심의 명령을 이상 더 지연할 수 없습니다. 천인공노할 국부 살해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추호의 반성함이 없이 오히려 자기 행위를 애국 행동이라고까지 망발하고 있는 역적 안두희와 동일한 심정으로 귀하도 김구 선생 암살 사건에 가담한 처사가 당연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천만번의 경고문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귀하의 지성으로 충분한 양심이 있을 것을 믿고 국민 앞에 김구 선생 암살 배후의 진상을 고백하기를 촉구합니다. 아무리 민족정기가 해이된 오늘이지만, 어떻게 국부 암살에 가담한자로 이 국정에 참여하여 요직의 자리에서 부귀에 도취되어 있는 현상을 보고도 묵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타언을 필요치 않으며 만일 귀하가 김구 선생 암살 사건에 가담한 사실을 망각하고 계속 국민을 속이고 선열과 국민 앞에 고백하여 속죄하지 않으면 피골이 백산당하여 백번을 같이 죽어도 김구 선생 암살 배후가 밝혀져서 그 일당들이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될 때까지 계속 투쟁할 것을 다짐하면서, 속한 시일내 귀하의 죄상을 선열과 국민 앞에 고백하여 속죄하기를 재삼 촉구합니다.

※ 비밀은 존재할 수 없으며, 정의는 승리하고 마는 것은 평범한 진리인 것입니다. (주석 6)


주석
6> 윤일석, <김구 암살범 안두희 배후>, 163~171쪽, 한솔미디어,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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