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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33회] 민족유일당 건설 위해 동분서주

[33회] 민족유일당 건설 위해 동분서주

[8장] 중국 관내 지역의 민족통일운동 주도 2013/04/11 08:00 김삼웅

원산 부두 노동자들의 총파업 사진

안창호는 북만주 일대의 순방을 마치고 8월 16일 상해로 돌아왔다. 7개월여 동안 돌아본 이 지역 동포들의 처참한 생활을 지켜보고, 그런 상황에서도 기회만 있으면 무장독립운동에 나선 용기와 애국심에 감격하였다. 동포들은 토착민들과 일제에 시달리고, 마적 무리에게 재산을 빼앗기는 경우도 있어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상해의 삼일당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재만 동포들의 비참한 실상과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실정을 보고하고, 민족유일당 결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운동에는 안창호뿐만 아니라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뜻을 함께하였다. 갈수록 포악무도해지는 일제를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이 선결 과제로 인식되었던 까닭이다.

이 시기 독립운동 세력들이 구상하였던 민족유일당은 한인세력의 ‘대단결체’로서, 정당형태의 최고권력기구였다. 이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리를 원용한 조직으로서, 망명세력의 정치적 둥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주권ㆍ영토ㆍ인민이라는 국가의 구성요소가 부재한 피식민지 상황에서는 정부보다 정당 형태의 중심조직이 적합하다는 주장으로 뒷받침 되었다. (주석 5)

안창호 등이 민족유일당 운동에 적극 나서게 된 데는 국공합작에 의한 중국 국민혁명운동의 추이와 더불어 국내의 상황도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세력의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즈음 국내에서는 일부 지식층과 자산계급에 의해 대일 타협주의 노선이 공공연하게 제기되었다. 자치론, 참정권론, 실력양성론, 민족개조론이 잇따라 제기되고, 식민체제에 안주하려는 민족개량주의 풍조가 확산되었다.

이같은 현상은 절대독립, 완전독립, 무장투쟁 노선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독립운동의 전열을 교란시키게 될 암적 요인이었다. 따라서 민족주의계열이나 사회주의계열을 가리지 않고 민족해방 진영은 위기감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하게 된 상황이었다. 그 중심에 안창호가 있었다.

안창호가 1926년 7월 8일 상해 삼일당에서 행한 연설은 유일당 결성론에 대한 공감대를 크게 증폭시켰다. 그는 “우리가 성취하려는 것은 민족혁명이고 우리의 혁명은 이족통치의 타파와 신국가의 건설이니, 장래 건설된 정체를 위해 싸우지 말고 주의를 위해 다투지 말고 2천만 동포가 공동 일치하여 일제와 싸워야 한다”고 역설하며, ‘유력한 단일 대혁명당’의 결성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안창호는 8, 9월 북경을 왕래하며 창조파의 원세훈을 만나, 임정해체론의 철회를 요구함과 동시에 유일당 결성에 관한 구체적 협의를 진행시켰다. 양인은 지방별 조직의 결합에 의한 당 결성 방안을 마련하여, ⓵지방별 촉성회의 설립 → ②그 대표들로 구성되는 당조직 주비회의 조직 → ③주비회 중심의 결당이라는 순서로 일을 추진해 가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합의에 기초하여 홍진은 임시정부 국무령으로서 3대 정강에 ‘전민족을 망라한 공고한 당체(黨體)조직’을 포함시켰다. (주석 6)

민족유일당 운동은 역동적으로 추진되었다. 북경에서는 구창조파의 중심인물 등 반임시정부 또는 좌익 성향의 독립운동가 40여 명,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국무령이 된 김구를 비롯하여 국무위원 6명 전원, 광주에서는 의열단원 등 170명의 회원, 무한과 남경 등에서 한민족유일당 촉성회가 각각 결성되었다.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중국 5대 도시에서 500명을 넘는 회원이 확보되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ㆍ노령ㆍ미주에서도 촉성회가 결성되고 참여를 통보해왔다.

이 해 11월 9일 상해에서는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연합회의가 개최되었다.
본 회의에서는, “첫째, 한국의 유일한 독립당의 성립을 촉성하는 각지 촉성회주비회 성립에 노력한다. 둘째, 한국 독립에 필요한 전 민족적 일체 혁명역량을 총집중하는 데에 선구가 된다. 셋째, 우리들의 실상과 세계대세에 비추어 독립당 조직에 관한 계획을 연구 제공할 것을 도모한다”라는 강령 채택과 함께, 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운동을 촉구하기 위한 대표 파견을 결의하였다. 또 전위조직으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을 산하에 두었다.
(주석 7)

안창호는 희망에 부풀었다. 민족유일당이 결성되고 모든 지역ㆍ이념ㆍ계층의 독립운동가들이 한 울타리로 결속한다면 본격적인 항일전쟁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내외정세도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28년 12월 27일 코민테론이 이른바 ‘12월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해소와 노동자ㆍ농민을 중심으로 ‘1국 1당’의 재건을 지시하고, 국내에서는 노동쟁의, 소작쟁의가 들불처럼 전개되었다. 1929년 1월 원산의 노동자 총파업, 11월에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광주학생운동 소식은 안창호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중국의 정세변화가 모처럼 전민족적 단일정당 결성의 발목을 잡았다. 1927년 7월 이래의 국공합작 노선이 파탄되면서 장개석세력과 모택동세력이 대결하여 한국독립운동 진영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이의 작용으로 나타난 코민테른의 식민지 혁명전략의 전환이었다. 코민테른이 극좌노선으로 선회하면서 유일당 추진 운동에 좌파 독립운동 세력이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ML파는 민족주의 계열과는 분리를 강조하고 좌파헤게모니 전취를 고창하면서 ‘대중적ㆍ전투적 협동전선론’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당적 형태의 협동전선의 결성은 불가능하다”고 못박아 말하며 유일당운동의 대열로부터 이탈하였다. 화요계와의 알력과 노선갈등은 1929년 7월의 중동로(中東路) 사건을 계기로 하여 극적으로 해소되었다.

중동로사건에 대한 반응에서, 화요계도 ML파와 한 목소리로 국민당정부를 규탄하고, 소련 수호를 촉구하는 선언서를 발표한 것이다. 그 후로 ML파의 협동전선론이 좌익진영의 전선통일론으로 확립되었다. 이로써 한인독립운동전선에는 ‘민족 대 공산’의 대립구도가 자리잡았고, ML파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완고한 국수주의자 혹은 ‘민족파시스트’로 비난하였다.
(주석 8)


주석
5> 한상도, <일제하 중국지역 협동전선운동의 전개와 의의>, <도산사상연구> 제5집, 10쪽 주3.
6> 김영범, <민족유일당운동(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사사전>(4), 498쪽, 독립기념관.
7> 한상도, 앞의 책, 17쪽.
8> 김영범, 앞의 책, 4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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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35회] 이광수의 친일행각에 관계 단절

[35회] 이광수의 친일행각에 관계 단절

[8장] 중국 관내 지역의 민족통일운동 주도 2013/04/13 08:00 김삼웅

춘원 이광수

안창호는 1929년에 만 51세가 되었다. 이 해 2월 9일 흥사단의 기본 정신을 미국 동지들에게 거듭 천명하였다. 흥사단이 마치 수양단체인 것처럼 연체화되고 있는 데 대한 우려에서 나온 조처였다.

<미국내 재류하는 동지 여러분께>란 메시지를 통해 “흥사단은 수양단체가 아니라 한국의 혁명을 중심으로 하여 투사의 자격을 양성코자 하는 혁명훈련 단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필리핀으로 건너갔다. 대한인국민회 지부 설치와 필리핀 총독을 만나 한인 이주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총독 면담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마닐라에서 중국인이 발행하는 <민초보>에 <한국혁명방략>을 기고하였다. ① 혁명총역량을 집중할 것. ② 계통 조직적 진행을 실시할 것. ③ 경제협동의 운영을 촉진할 것. ④ 청년훈련운동을 제창할 것. ⑤ 일반민중으로 하여금 혁명의 이해를 마음에 감소케 할 것. 이밖에 “최후로 허용할 혁명방략은 일본의 정치ㆍ경제ㆍ군사행동을 파괴하여 일본제국의 통치를 벗어나도록 극단의 수단까지라도 써 볼 것이다”라는 요지였다.(주석 11)

3월 말에 중국으로 귀환한 안창호는 이 해 11월 23일 수양동우회의 수양 자를 빼고 ‘동우회’로 개명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재양성을 위하여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지부적 성격을 띤 단체였다.

이광수가 1922년 2월 서울에서 조직한 수양동맹회와 같은 해 7월 평양에서 조직된 동우구락부가 안창호의 지시로 1926년 1월 합동하여 수양동우회로 결성되었다. 그런데 국내 조직에서 변화가 생겼다.

귀순한 이광수는 총독부의 묵인 또는 양해 아래 흥사단의 약정을 약간 변형하여 수양동우회를 조직하고, 또 <동광(東光)>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점점 친일의 노선을 걸고 있었다. 이와 관련 1926년부터 내부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자 안창호는 1927년 9월 흥사단 단우 주요한을 중국으로 불러 흥사단의 운동방향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흥사단운동은 조선의 독립이 달성될 때까지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흥사단과 수양동우회를 혁명단체로 변혁시키는 것은 자칫 와해될 위험이 있으므로, 두 조직은 부문운동을 전개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행각을 위장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안창호와 연계되는 것처럼 행세하였다. 1922년 국내에서 물의를 일으킨 <민족개조론>의 글머리 ‘변언(辯言)’에서는 자신이 추진하는 ‘민족개조’의 철학이 “재외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하여,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안창호의 뜻임을 내세워 자신의 글을 합리화시키려 들었다.

나는 많은 희망과 끓는 정성으로, 이 글을 조선민족의 장래가 어떠할까, 어찌하면 이 민족을 현재의 쇠퇴에서 건져 행복과 번영의 장래에 인도할까 하는 것을 형제와 자매에게 드립니다. 이 글의 내용인 민족개조의 사상과 계획은 재외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내 것과 일치하여 내 힘과 나의 일생의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외다.

나는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전하게 된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알며 이 귀한 사상을 생각한 위대한 두뇌와 공명한 여러 선배 동지에게 이 기회에 또 한번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주석 12)

독일의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자들 그리고 각국의 제국주의세력이 다윈의 <진화론> ‘적자생존설’을 왜곡하여 인종학살과 약소민족 침략의 구실로 삼았듯이, 이광수도 안창호의 ‘민족개조’와 ‘무실역행론’을 도용 왜곡하면서 자신의 친일변절을 합리화시키고자 하였다.

도산은 일제에 투항한 이광수를 아낀 나머지 그와 1922년 1월과 1923년 10월 두 번에 걸쳐 상해와 북경에서 밀회를 하고 국내에서 흥사단운동 전개에 관한 방략을 협의했다. 이광수가 허영숙을 따라 귀국한 것도 일제 당국의 공작 결과였으며, 그러한 그가 도산과 두 번이나 밀회한 것도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성실한 도산을 속여 아직도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자신을 위장한 것이었다. 이광수는 수양동맹회를 결성할 때 이미 사전에 총독부 당국과 긴밀히 협의하고 그들의 협조를 얻고 있었음은 총독의 고문 아베(阿部)가 남긴 서한에 밝혀져 있다.  (주석 13)

안창호는 이광수의 친일행각이 드러나면서 자칫 자신이 이광수의 수양동우회를 지지하는 것 인양 오해될 소지를 우려하여 수양동우회의 ‘수양’ 자를 빼도록 조처한 것이다. 이것은 이광수와의 관계에 대한 단절을 의미했다.


주석
11>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도산 안창호의 생애>, 253쪽.
12> 이광수, <개벽> 1922년 5월호.
13> 송건호, <안창호>, <한국현대인물사론>, 231쪽, 한길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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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34회] 부일세력의 ‘자치론’ 비판

[34회] 부일세력의 ‘자치론’ 비판

[8장] 중국 관내 지역의 민족통일운동 주도 2013/04/12 08:00 김삼웅
안창호는 민족유일당 창당을 추진하면서 한편 일제와 부일세력의 ‘자치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민족의 부활을 위해서는 유일혁명당의 결성밖에 없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다음의 주장을 들어보자.

<독립운동자 중 사상의 오류> : 흑자는 혁명수단에 의하여 완전한 독립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실력이 없고 또 단계를 밟지 않은 때문이다. 차라리 자치를 먼저 얻고 그리고 독립을 얻어야 한다고 창도하나 이것은 큰 잘못이다. 그 이유는 일본정부는 오히려 우리들에게 자치를 허여할 시기가 빠르기를 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은 그들의 준비에 다망(多忙)을 극하고 있다. 그 자치제가 시행되기에 이르렀을 때에 있어서 여하한가를 말하건대 한국 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내지 일본 동화자만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에 있어서의 지면(地面)의 대부분은 그들의 손에 있고 그리고 국내의 경제 또한 그들의 수중에 있으므로 장래 독립할 기회가 있어도 자치를 얻는다는 것은 절망일 것이다. 또, 일파에서는 먼저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청하나 이것 또한 불가하다.

자본, 지력, 경험이 부족한 아민족(我民族)은 가령 일본 정부가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본인 자본가와 경쟁할 수 없다. 하물며 우리에게 실력과 문화의 진보를 할 기회를 주지 않을 때에 있어서랴. 이제 한국 내의 토지의 대부분은 일본인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불쌍한 우리 동포는 동으로 일본의 공장에서 피와 땀을 흘리고 북으로는 만주의 황야에서 방랑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음은 실력양성 주창자의(잘못된) 이상을 웅변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의 생명의 부활을 위해서는 혁명의 한 길이 있을 뿐이며 그것을 유력하게 함에는 보편적이고 또 유력한 일 대혁명당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산만적 운동보다도 조직적 운동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석 9)

국민대표회의가 그랬듯이 이번의 민족유일당 결성에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안창호는 어떻게 해서든지 파국을 막고자 동분서주하였다. 하지만 1929년 10월 26일 상해촉성회의 해체 선언을 시작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은 사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각 독립운동 단체들은 각자 도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몇 해 동안의 노고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안창호가 주도한 민족유일당운동의 좌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이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한 연구가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4년 여의 유일당운동이 도산의 뜻과는 달리 무산되고 말았다. 무산된 이유는 해외의 독립운동단체가 국민 또는 대중의 기반이 없는 각기의 영웅주의적 역량에 의하여 명멸했던 점과 1927년 중국국민당의 국공분열 그리고 28년 코민테른 12월 테제 이후 공산주의운동이 극좌노선의 영향 등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유일당운동으로 나타난 통일전선의 형성이 당장에는 실패하였지만 그것이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되어 우선 정당발생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1930년을 전후하여 한국독립당(상해), 조선혁명당(만주), 한국독립당(만주) 그리고 한국혁명당(남경) 등의 발생이 그것을 말한다. 이러한 정당의 발생은 독립운동이 조직적 발전이란 측면과 민족주의의 달성을 위한 정강정책의 수립 등 이념의 정비와 독립운동이론의 발달이란 측면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보다 유일당운동이 통일전선의 추진이었다는 점에서 당시에는 물론 통일을 앞둔 오늘날에 주의깊게 살펴 볼 가치가 있으므로 역사적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한 통일전선형성에 누구보다도 열성을 바쳤던 도산이었으므로 1920년대 상해에서 좌우익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주석 10)

거듭되는 말이지만, 이번의 좌절에도 안창호는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유일당운동에 정진하면서도 자신이 맡고 있던 여러가지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1928년 5월 20일 중국의 <세계신문사>와 <중앙일보>에 한ㆍ중 양국 합작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고중국 혁명동지>란 논설을 게재하고, 12월 20일에는 국내 연희전문 축구단의 상해 원정경기장에서 민족정신을 담는 훈화를 통해 “개인은 민족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무와 인류에 대한 의무를 완수하라”고 역설하였다.


주석
9>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559~600쪽, 1984.
10> 조동걸, 앞의 책, 118~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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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32회] 짧은 체미기간, 다시 중국으로

[32회] 짧은 체미기간, 다시 중국으로

[8장] 중국 관내 지역의 민족통일운동 주도 2013/04/10 08:00 김삼웅
미국에서 안창호의 생활은 여전히 분주하였다. 그에게 독립운동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다. 오랜 별리에서 복귀한 가장의 위치보다 더 시급한 일이 독립운동이었다. 산적한 미주의 일과 상해에서 날라온 소식이 촌분의 휴식도 허용하지 않았다. 상해에서는 국민대표회가 성과 없이 끝났지만, 임시정부는 자구적으로 혁신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안창호는 1월 20일 이유필과 조상섭에게 편지를 보내 임시정부의 과도기 수반으로 박은식과 이상룡을 추천하였다. 이상룡은 만주 무장전쟁 독립군세력을 배려한 조처였다. 4월에는 뉴욕, 보스턴, 시카고 등 동부지방의 교포사회를 순회하고, 5월 22일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을 방문하였다.

서재필과는 1987년 독립협회에서 만나고, 1921년 상해에서 헤어진 이래 처음이었다. 당시 서재필은 1914년에 설립했던 ‘필립 제이슨 상회’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고, ‘이탄 뉴 상회’의 설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듬 해부터 이 상회를 발판으로 <신민(新民)>이란 잡지를 발행하였다. 안창호는 7월 2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그곳에 온 서재필을 만나 흥사단 관련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안창호는 미주 여러 지역을 순방하면서 교포들을 위로하고 원동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해가 바뀐 1926년 3월 1일 가족, 동지들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23일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서 개척지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4월 22일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역시 독립운동의 열기가 뜨거운 중국이었다.

만주에서는 여전히 무장독립군이 일제와 싸우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었다. 책임비서는 김재봉이었다. 한편 총독부는 치안유지법을 공포하여 반일세력을 더욱 옥죄고(5월 7일),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식민사관을 통한 한국사 왜곡작업을 본격화했다. 일제는 만주에서의 한국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가 봉천성 경찰청장과 이른바 ‘미쓰야(三矢) 협정’을 맺었다. 재만 한국인들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하고 무기휴대와 집회결사를 금지시키는 내용이었다.

안창호가 상해로 돌아왔을 즈음 임시정부 요인들이 그를 국무령에 천거하였으나 수용하지 않았다. 입각하는 것보다 달리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한 이후 제2대 대통령에 박은식을 선임하였다. 그는 헌법을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바꾸는 개헌을 단행하고 얼마 뒤 (11월 1일) 순국하였다. 임시정부는 국장으로 그의 장례를 치렀다.

이상룡이 국무령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김동삼ㆍ김좌진을 비롯한 무장독립운동 지도자 9명을 국무위원에 임명하였으나 이들도 모두 사임하였다. 임시정부는 여전히 지도체제를 갖추지 못한 채 난맥상태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안창호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것은 대독립당(유일당)의 조직과 만주에 이상촌을 건설하겠다는 목적이었다. 국무령의 취임은 거부했으나 임시정부에는 협력하였다. 상해 삼일당에서 열린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에 앞서 7월 8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임시정부 존립과 대혁명당 조직>에 관한 연설에서 “우리들이 성취하려는 것은 민족적 혁명이다.(…) 장래 건설될 정체를 위해 싸우지 말고 주의를 다투지 말고, 이천만 동포가 공동 일치하여 이민족과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혁명당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후 그의 모든 일정은 이 두 가지 사업의 추진에 맞춰졌다.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대독립당 촉성회가 속속 결정되었다. 그의 활동반경은 만주에까지 확대되었다.

1927년 1월 14일 만주 길림에 도착하여 고구려ㆍ발해의 옛 유적지를 답사하고 동포들을 격려하면서 유일당 조직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러던 중 의외의 사건이 벌어졌다.

1월 27일 길림성 동대문 밖 대동공사에서 동포들을 상대로 <조선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란 제목으로 연설을 할 때 일제와 중국경찰의 합동수색으로 피체된 것이다. 이 지역 독립운동가 40여 명과 함께였다. 이른바 ‘길림사건’이다. 한국노병회 등의 노력으로 20일 만에 석방되었으나 사건의 충격파는 적지 않았다. 일제가 중국경찰을 앞세워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한 것이다.

한국노병회는 1922년 10월 김구ㆍ여운형ㆍ이유필ㆍ손정도ㆍ양기탁 등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주도하여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였다.

‘길림사건’이 일어나자 문제의 심각성을 간파한 한국노병회는 즉각 상해와 북경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중국 북경 정부와 길림성 당국과 교섭하여 3주 만에 안창호를 비롯 피체된 전원을 석방시킬 수가 있었다. 안창호는 하마터면 이 때에 일본경찰에 넘겨져 국내로 송환될 뻔했다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안창호는 위기를 겪었다고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었다. 4월 1일 ‘길림사건’의 현장인 대동공사에서 만주로 이주해온 한인들의 생활안정을 위한 ‘농민호조사’를 결성하고, 길림에 거주하는 동지 이탁의 집에서 통의부, 참의부, 정의부 삼부의 간부들을 초청하여 통합 문제와 독립운동의 기본방향을 논의하였다. 3부는 대표적 무장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어서 3부 통합을 위한 신안둔(新安屯) 회의에 참석하여 제1회 대표자회의를 주재하고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이런 노력의 성과는 1929년 3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가 2차 통합 회의를 열어 자치기관으로 국민부를 조직하게 되는 촉매제가 되었다. 압록강 상류지역의 참의부, 남만주 일대의 정의부, 북만주 중동선 지역의 신민부가 각각 관할지역으로 삼아 활동해 온 삼부의 통합은 무장 독립운동 역량의 결집과 더불어 교포사회의 단결을 가져오게 되었다.

안창호는 만주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단체들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는 강연을 하였다. 가는 곳마다 이 지역 동포들의 비참한 생활 상태를 목도하였다. 그리고 한국유일당 창립을 위해 독립운동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하얼빈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현장을 답사하고, 송화강 지역 동포 사회를 둘러보았다. 이 무렵 광동ㆍ무한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가 결성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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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평전] ''투사와 신사' 도산 안창호 '- [31회] 국내 신문기고문 삭제ㆍ중단 당해

[31회] 국내 신문기고문 삭제ㆍ중단 당해

[8장] 중국 관내 지역의 민족통일운동 주도 2013/04/09 08:00 김삼웅

춘원 이광수

안창호가 미국으로 돌아온 1924년, 중국에서는 연초에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는 등 큰 정세의 변화가 일고 있었다. 반면에 국내에서는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사설 <민족적 경륜>을 게재하여 항일노선을 포기하고 이른바 자치운동의 구실 아래 변절의 길을 택하였다.

이광수는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제작하고 흥사단의 요직을 맡는 등 안창호의 핵심측근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2월 18일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로 들어갈 뜻을 밝히는 이광수에게 안창호는 “이제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적에게 항복서를 바치는 것이니 절대 불가요, 당신들 개인 앞날에 앙화를 만드는 것이라 속단으로 행하지 말고 냉정한 태도로 양심의 지배를 받아 행동하라”고 간곡히 타일렀으나 그는 끝내 배신의 길을 걸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이광수는 1924년 4월 8일 북경으로 건너가서 안창호를 만나고자 하였다. 그때까지 이광수가 이른바 자치운동에 앞장 서고 있는 것을 자세히 몰랐던 안창호는 그와 만났다. 이날 안창호는 이광수와 수양동맹회를 원동흥사단의 지부 조직으로 할 것, 잡지 발간 문제 등을 논의하고, 천진(天津)에 까지 그를 배웅해주었다. 이광수의 친일훼절이 알려지면서 안창호의 이 같은 행위는 독립운동가들의 입심에 올랐다.

안창호는 1925년 1월 23~25일치 <동아일보>에 <동포에 고하는 글>을 연재했다.
4회를 연재하고 총독부의 압력으로 부분 삭제 및 중단되고 말았다. 망명 이후 국내 신문에 기고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안창호 일대기>를 엮은 윤병석ㆍ윤경로는 이 책에서 “1924년 안창호가 상해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시켜 쓴 글로서 1925년 1월 23일, 24일, 25일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으나 일본측에 의해 삭제 및 연재 금지를 당하였다” (주석 1)고 기록했다.

연재된 글은 <동포에게 고하는 글>과 <비관적인가 낙관적인가>, <불평과 측은> 등 세 편이다. 기고문은 일제치하의 신문, 또 이광수에게 구술한 것이어서인지, 에둘러 표현되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모처럼 국내 동포들에게 말 하고자 하는 뜻은 충분히 담아 있었다. 해서 일제는 삭제 또는 연재를 중단시켰던 것이다.(발췌한 내용이다)

동포에게 고하는 글

나는 어머니를 떠난 어린 아이가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고국을 그리워합니다. 얼마 전에 고국으로부터 온 어떤 자매의 편지 중에 “선생님, 왜 더디 돌아오십니까? 고국의 산천초목까지도 선생님이 빨리 돌아오시기를 기다립니다”라고 한 구절을 읽었을 때에 비장한 느낌이 일어났습니다.

더욱이 지금은 여러분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비애와 고통을 받는 때라, 고국을 향하여 일어나는 생각을 스스로 억제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일을 직접 보고, 여러분이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듣고자 하오며, 또 나의 품은 뜻을 여러분께 직접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일찍 눈물로써 고국을 하직하고 떠나왔으며, 다시 웃음 속에서 고국 강산을 대할 기회가 오기 전에는 결코 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간접적으로나마 고통 중에는 슬퍼하는 것을 위로하는 말과 그와 같은 어려움 중에서도 ‘선한 일’을 이루어 가심에 대하여 치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주석 2)

비관적인가 낙관적인가

돌아보건대 우리가 왜 이 지경에 처해 있습니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을 행하지 않은 결과로 지금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이 지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옳은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이루기에 합당한 옳은 일을 지성으로 해나가지 않으면 목적을 세웠다 함은 사실이 아니오, 허위이기 때문에 실패할 것입니다.

옳은 일을 지성으로 지어 나가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스스로 경계하고, 여러분 형제자매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는 옛날과 같이 옳은 일을 하지 못할 만한 옳지 못한 지위에서 떠나, 옳은 일을 할 만한 사람의 자격을 가지도록 먼저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동포 중에 열명, 스무 명이라도 진정한 의로운 정신으로 목적을 향해 나아가면 앞으로 천 명, 만 명이 같은 정신으로 같이 나아가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주석 3)

불평과 측은

만일 일본이나 중국에 구미 문화가 들어올 그때 우리 민족도 같이 신문화를 받아들였다면 우리 민족이 일본민족이나 중국 민족보다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일본 민족은 바다섬의 성질이 있고, 중국 민족은 대륙적 성질이 있는데 비해 우리 민족은 가장 발전하기에 적당한 반도적 성질을 가진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우수한 지위에 있던 우리 민족이 이와 같은 불행한 지경에 처하여 남들로부터 열등 민족으로 오해를 받음에 대해 스스로 분하고 서로 측은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천년의 정을…(일부 삭제)

마음과 또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고 불평하는 마음을 측은히 여기는 방향으로 돌려 서로 돕는 정신이 일어나면 우리 민족의 건져짐이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청년 남녀들은 우리 민중을 향하여 노한 눈을 뜨고 저주하는 혀를 놀리지 말고 5년 전에 흘리던 뜨거운 눈물을 계속하여 흘리기 바랍니다. (5년 전은 3ㆍ1운동을 지칭-필자) (주석 4)


주석
1> 윤병석, 윤경로, 앞의 책, 312쪽.
2> <동아일보>, 1925년 1월 23일치.
3> 앞의 신문, 1925년 1월 24일치.
4> 앞의 신문, 316~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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