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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22회] 헌병들이 나타나 범인 채 가

[22회] 헌병들이 나타나 범인 채 가

<악의 축> 안두희 평전/[9장] 안두희 흉탄 4발로 김구를 쏘았다 2013/12/09 08:00 김삼웅
마치 날쌘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 가듯이 순식간에 나타나 범인을 채 간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은 헌병대 소속 김병삼 대위 등 현역 헌병들이었다.

이들은 어디에 있다가, 아직 관할 경찰서에서도 도착하지 않은 시간에 유령처럼 나타났을까. 그리고 비서들이 신고조차 하지 않았던 시점에서 사건을 어떻게 알고 현장에 나왔을까. 김구 암살 배후의 미스테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김병삼 등은 안두희를 헌병사령부로 데려왔다. 당시 헌병사령관은 장흥이었으나 마침 당일 성묘를 하러 시골에 갔기 때문에 부사령관 전봉덕이 안두희의 신병을 인수하고, 오후 2시경 “범인이 의식을 되찾는대로 그 배후를 엄중 조사하겠으나, 단독범행인 것 같다”고 공식 발표했다. 다음날 안두희는 특무대로 이송되었다. 6월 27일 오전 국방부는 “진상은 목하 엄중 취조중”이라며 지금까지 판명된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고 발표했다.

① 안두희는 한독당원으로 김구 씨의 가장 측근자라는 것.
② 안두희는 누누이 김구 씨와 상봉하여 직접 지도를 받던 자인 것.
③ 당일은 인사차 김구 씨를 만나러 갔다가 언론 쟁투가 되어 격분한 결과 순간적 살의가 발생한 것.

다음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담화에서 “조사결과 이번 범행이 하등 군내에는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발표했다. 안두희가 아직 본격적으로 취조받기도 전에 군에서는 ‘단독범행’, ‘한독당 내분’, ‘김구의 측근’, ‘군과 무관’ 등을 애써 변명했다.

안두희는 헌병사령부와 군특무대에서 본격적인 취조를 받지 않고 치료만 받았다. 6월 27일 특무대로 이송되자 곧 김창룡 특무대장이 찾아와 커피를 마시며 안두희에게 경어를 쓰는 등 각별히 예우하였다. 국무총리 이범석은 호남 순찰중 목포에서 암살 소식을 듣고 “일반 국민은 억측과 요언(妖言)을 엄금하기 바란다”는 묘상한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7월 2일 경교장으로 문상행차에 나서면서 발표한 성명에서 “…백범의 추종자가 그 의견 차이의 논쟁을 결말짓고자 취한 격렬한 수단은 결국 비극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는 더욱 요상한 말을 하였다. 모두 한독당 내부의 소행이란 것에서 일치한다.

전봉덕 헌법사령관과 김태선 시경국장은 7월 1일 공동으로 ‘포고문’을 발표, “군경의 건재함에 신뢰를 갖고 항간에 유포되는 조언비어와, 사실을 왜곡 모략 선동함에 부화뇌동하여 경거망동하지 말며 군경에 절대적인 협조를 바란다”고 하였다.

군경이 국민에게는 이처럼 위협적인 발언을 하는 뒷켠에서 김창룡의 특별 배려를 받은 안두희는 ‘특별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창룡은 안두희를 위해 숙직실을 개조하여 ‘호텔과 같은 특별 감방’에서 범인은 좋은 음식을 먹고 목욕을 하고 신문을 보면서 편안하게 지냈다. 가족 면회와 김창룡은 물론 포병사령부 장교들의 면회와 김지웅은 돈 봉투를 주면서 안두희를 격려하였다.

김창룡은 취조관으로 임명한 노엽 대위와 이진용 중위를 안두희에게 소개하였고, 이들은 ‘안소위님’이란 경어를 쓰면서 담배를 권하고, “하기싫은 말은 안해도 된다”고 권유하였다. 또한 홍종만ㆍ김지웅ㆍ장은산 등 세 사람에 대하여 안두희가 진술까지 했으나, 수사관들이 안두희 상부는 더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수사를 의도적으로 축소하였다. 안두희의 진술이 윗선으로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고, 검찰에 송치할 때까지 조서를 보여주지도 않고 서명날인케 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시 수사관 노엽 중령이 몇 년 전 TV에 나와 수사 당시 김지웅이가 안두희를 면회올 때 자기가 외삼촌이라고 하면서 면회한 사실이 있고 김지웅의 태도가 너무 건방져서 이진용 수사관과 함께 “저 새끼 구속해버릴까” 하고 상의까지 하였으나, 상부의 압력으로 그 배후를 조사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증언을 한 것이 있다.

사건 당일 헌병들을 경교장 일대에 미리 배치한 사람은 헌병순찰과장 김병삼 대위였다. 당일 헌병사령부의 당직 사관이었던 오석만 중위와 사령관실에 근무하던 장석인 소위의 증언에 따르면, 김병삼이 사건이 일어나기 1시간 전인 오전 11시 30분경 사령부에 비상을 걸었으며 사령부 본관 뒤에 찝차와 스리쿼터에 헌병 15~16명이 승차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12시 40분경 김병삼이 장석인에게 전화하여 김구 암살사건을 사령관에게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전병덕 부사령관은 보고 전에 이미 사령부에 나와 있었다고 증언한다. (주석 8)


주석
8> 이 부문, 국회법제사법위원회, <백범김구선생암살진상조사보고서>, 17~25쪽, 요약,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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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21회] 2층 올라간 지 2, 3분 만에 권총발사

[21회] 2층 올라간 지 2, 3분 만에 권총발사

<악의 축> 안두희 평전/[9장] 안두희 흉탄 4발로 김구를 쏘았다 2013/12/08 08:05 김삼웅

피로 얼룩진 김구의 옷. ⓒ김종성

공판 과정에서 “변호인이 살해 경위를 말해보라”고 하자 안두희는 시국문제 등 언쟁 끝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의자에 반쯤 몸을 일으키고 권총을 내어 눈감고 제1탄을 발사하였다. 선생은 두 손을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주석 4) 고 진술했다. 허위진술이었다.
비서들의 증언에 따르면 불과 2, 3분의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 사이에 시국문제에 대해 ‘논쟁’을 하고 김구가 “에이 고약한 놈, 나에게 반동하는 놈은 국가와 민족의 반역이다” 따위의 면박을 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평소 그의 어법상 “나에게 반동” 운운은 상식에도 어긋난다. 그리고 면식이 별로 없는 일개 소위와 시국논쟁을 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안두희의 진술은 치밀하게 준비된 시나리오였다.

안두희가 손에 권총을 든 채 2층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래층에서 이풍식ㆍ이국태 비서가 뛰어올라가려는 순간, 안두희가 권총을 계단에 철거덕 떨어뜨렸다.

“선생님을 내가 죽였다….”

그가 중얼거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국태가 먼저 서재로 뛰어 올라갔다. 나도 뒤따라 층계 위를 내달렸다. 허벅지와 무릎이 욱신욱신했다.… 선생의 얼굴과 오른편 가슴에서 유독 붉은 피가 왈칵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석 5)

안두희는 45구경 권총 4발로 김구의 심장을 관통시키고(그는 군에서 명사수였다) 여러 발의 실탄이 남아 있었는데도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권총을 내던졌다.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어디까지나 각본에 따른 암살, 배후가 든든하지 않으면 행하기 어려운 수법이었다.

이풍식과 선우진이 안두희를 구타하여 그를 의자에 쓰러뜨렸다. 암살자는 스스로 권총을 버리고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그때 불현듯이 군 작업복을 입은 괴청년 3~4명이 나타나서 비서들을 제지하고 재빨리 안두희를 일으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경교장. 복원작업이 진행되던 지난 1월 5일에 찍은 사진. ⓒ김종성

“마침 이때 서대문경찰서 경비주임이 달려와 안두희를 경찰서로 연행하려고 했다. 그러자 괴청년 서너 명이 더 나타나 경비주임은 막았다. 경찰이 어떻게 군인을 연행할 수 있느냐고 윽박지르며 안두희를 데리고 나가 문밖에 있던 스리쿼터에 싣고는 서둘러 사라지고 말았다.” (주석 6)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장면이었다. 경황중에 비서들이 서대문경찰서에 신고하여 경찰이 도착하기도 전에 군복의 괴한들이 먼저 들이닥치고, 이들은 순식간에 범인을 데리고 사라졌다. 이들이 사라진 후 성모병원 원장으로 김구의 주치의인 박병래 박사가 도착했지만,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변하여 손을 쓸 여지가 없었다.

안두희의 재판기록은 6.25전란의 와중에 모두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언론인 오소백의 공판 취재 기록이다. 안두희는 법정에서 암살 당일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역시 사전에 짜맞춘, 단독범행임을 위장하려는 진술이었다.

그날 아침 조반을 먹고 예사로이 포병대에 나가려고 동화백화점 앞까지 와서 자동차를 타려다 문듯 어제 밤에 아내가 낙태한 것을 생각하고 돈을 주려고 다시 집으로 갔다. 집에서 나오면서야 비로소 그날이 공일인 줄 알고 영천 친구네 놀러가려던 맘에서 자동차를 집어 탔다. 대한문을 거쳐 이화여중 앞을 지나 로터리에 다달았을 때 경교장 김구 주석을 만나겠다는 충동이 일어나 그만 차를 내려 자연장 다방으로 발을 옮겼다.

차를 마시다가 가정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생각하며 번민했다. 오늘은 꼭 선생을 만나 최후의 본심을 알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30분 후 자연장을 나왔다. 경교장에 들어가자 선우 비서와 악수를 하고 잡담을 교환하고 있으니 강대위가 들어왔다
. (주석 7)


주석
4> 오소백, <백범 살인범 안두희 공판기>, <전집(12)>, 467쪽.
5> 선우진, 앞의 책, 213~214쪽.
6> 앞의 책, 214~215쪽.
7> 오소백, 앞의 책, 여기서는 <전집(12권)>, 4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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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20회] 운명의 시각, 화창한 일요일 한낮

[20회] 운명의 시각, 화창한 일요일 한낮

<악의 축> 안두희 평전/[9장] 안두희 흉탄 4발로 김구를 쏘았다 2013/12/07 11:07 김삼웅

김구가 암살당한 장소인 2층 창가. ⓒ김종성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상가, 사회운동의 통합지도자 장 조레스(1819~1914)가 암살당한 다음날 여성작가, 시인 안나 드노아유는 그의 죽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어느 여름날 저녁에 그 강력한 죽음을 보았다.
준엄한 전율, 식탁을 옆에 하고
초라한 곁에 잠든 영광.

나는 장엄한 그 죽음과 간소한 그의 방을 보았다.
방은 사람의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존경으로 들러싸인 몽상의 분위기
장중하게 잠든 이 사람에게 평화가 둘러붙어 있었다.
(주석 1)

마치 35년 뒤 김구의 암살을 그리는 듯 하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도 초여름의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김구는 2층 거실에서 <중국시선(中國詩選)>을 읽고 있었다.

이날 주일 예배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차가 없어서 교회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무료를 달래며 책을 읽고 있었다. 이 무렵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가끔 예의 떨림체로 휘호를 썼다.

자주 쓰는 휘호에는 서산대사가 지은 이른바 ‘담설야(踏雪野)’ 라는 싯구도 있었다.

踏雪野中去 不修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는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운명의 날 오전 11시가 조금 지나 포병소위 안두희가 경교장에 나타나 김구를 뵙기를 요청하였다. 김구는 먼저 방문한 창암학원의 여 선생과 면담 중이었다.

이 방문객이 돌아가자 비서 선우진은 강흥모 대위에 이어 안두희를 김구의 방에 안내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마치 2~3분이 채 못되어 2층에서 총소리가 울리고 김구는 쓰러졌다. 총소리에 놀라 아래층 응접실에 있던 비서 이풍식ㆍ이국태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대광고등학교 교장인 박동엽, 경비원 2명이 튀어올라 갔을 때는 이미 운명한 후였다. 이때 시간이 12시 45분경, 향년 74세였다.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생애를 보낸 김구는 이날 안두희가 쏜 4발의 흉탄에 쓰러졌다. 일제가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와 암살에 혈안되었지만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던 민족의 지도자가 해방된 조국에서 동족의 흉탄에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김구는 암살 전날 충남 공주에서 건국실천원양성소 제10기 개교식에 참석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돌연 이 행사가 취소되었다. 공주 경찰서장이 이승만 정부에 과잉충성하느라 장소사용을 불허한 것이다.

암살자들은 25일 수원과 오산 사이 병점고개에서 사살할 계획을 세우고 현장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뒤늦게 행사가 취소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주행이 취소되자 김구는 고향 사람 윤예학(목사)ㆍ이병찬, 정릉한의원의 위병식 등과 한강으로 나가 차일을 친 배를 전세내어 점심도 배에서 먹으며 오후 3~4시까지 뱃놀이를 했다. 수행했던 선우진의 증언.

이날 백범 선생은 유난히 손문(孫文) 무덤을 비롯해 중국의 유명한 무덤 이야기를 많이 했다.
(주석 2)

운명의 날, 26일은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김구는 일요일이면 남대문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는데, 마침 이 날은 차가 없어서 경교장에 머물며 한시를 짓거나, 손님을 맞았다.

이날 경교장에는, 아들 신(信)은 현역 공군이어서 유엔한국위원단의 옹진지구 시찰을 수행하기 위해 새벽에 집을 떠났고, 얼마 전 중국에서 돌아온 그의 장인ㆍ장모가 머물고 있었다. 비서 선우진ㆍ이국태ㆍ이풍식과 경비순경 고세곤ㆍ송병규ㆍ유원의ㆍ조기행이 경비를 맡았다. 이들은 서대문경찰서 소속이다.

오전 11시 30분경 돌연 포병소위 안두희가 찾아왔다. 이보다 앞서 창암학교 여교사가 방문하여 2층 서재에서 김구와 대담중이었다. 김구는 모친의 이장 장례식 부의금과 아들의 결혼식 축의금을 모아 건국실천양성소와 청암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안두희가 도착할 무렵 여교사가 내려오고, 충징 임시정부 시절부터 잘 아는 동향의 강홍모 헌병 대위가 들어왔다.

그는 문산에서 오는 길인데, 자동차에 기름을 좀 넣어달라고 하여 이국태가 넣어주었다. 그리고 기왕 온 김에 김구 선생에게 인사만 드리고 오겠다고 안두희의 양해를 구했다. 중국에서 강홍모는 김구가 성도군관학교에 보내주어 해방 후 졸업하고 귀국하여 국방경비대에 입대, 헌병 대위로 복무중이었다.

뒷날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가 문산에서 온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안두희의 거사 직전에 2층의 상황을 점검하고자 암살조직에서 파견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이 따른다.

안두희가 경교장을 방문했을 때 그는 45구경 권총을 차고 있었다. 비서진이나 경비경찰이 방문자가 권총을 휴대하고 있는 데도 쉽게 출입이 허용된 것은 경교장의 경비가 그만큼 허술했음을 보여준다. 선우진은 안두희가 권총을 차고 있었음에도 제지하지 않고 2층으로 안내한 것을 두고 죽을 때까지 후회하였다.

10여 분 뒤에 강 대위가 2층에서 내려왔다. 안두희가 일어나자 내가 2층으로 안내를 했다. 백범 선생은 휘호를 쓰려는 듯 의자에 단정히 앉아 계셨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때가 12시 40분을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나는 선생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바로 지하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모 아주머니가 만둣국이 다 되어간다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위층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났다. 순간 식은땀이 났다. 정신이 멍해졌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주석 3)


주석
1> 막스 길로 지음, 노서경 옮김, <장 조레스 그의 삶>,13~14쪽, 당대, 2009.
2> 선우진, 앞의 책, 212쪽.
3> 앞의 책,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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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19회] 정계은퇴의 평범한 일상

[19회] 정계은퇴의 평범한 일상

<악의 축> 안두희 평전/[8장] 김구의 마지막 행적 2013/12/06 08:00 김삼웅
김구는 암살 직전에 <공염불과 현실>, <평화통일의 길>이라는 짧은 두 편의 시평을 썼다. 이것은 유고가 되었다. 당시 김구의 심중이 배인 글이다. 사후에 한 잡지에 실린 <공염불과 현실>의 중간과 뒷 부문이다.

양군철퇴, 남북통일, 완전자주독립은 반탁이념의 3대 요소라 하겠다. 탁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 같은 민족적 양심에서 일치하게 이것을 주장하였으니 이 또한 자연한 이성의 발로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이르러서 반탁진영의 보조에도 혼란이 생긴 것은 유감이다. 이 역시 조급한 정치적 의욕과 당파적 분열에서 되어진 것 뿐이요, 민족적 양심에서는 아닐 것이다.

이래서 분열 저래서 분열, 분열에서 반대로 또 반대에서 분열로 이러는 가운데서 이 겨레의 혼란을 빚어내고 있다. 실상은 미ㆍ소의 정책으로 조성되는 현실 위에서 피차에 압제당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열이 나서 서로 싸우기만 하려는 것은 허무한 일이다.

다시 한 번 마음을 진정하고 반성함으로써 냉정한 이성을 회복하여 한결같은 민족적 양심으로 정성단결하여 다 같이 외세의 압력을 거부하고 자주통일의 길로 향하여 총진군할 수 있는 날이 비로소 이 겨레의 앞에는 통일과 자유의 서광이 비칠 것이다.

4년 동안이나 ‘공염불’처럼 떠들어 오던 양군 철퇴도 마침내 현실 단계에 다달았다. 이제는 남북통일, 완전독립이란 다른 ‘공염불’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가 꾸준하게 분투노력하는 데서 꼭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는 ‘공염불’이 아닌 것을 ‘공염불’이라고 볼 수도 있고 가장 ‘현실적’인 것도 ‘비현실적’으로 볼 수도 있으니 이때에 구태어 서로 시비를 가릴 것은 없다. 외군이 철퇴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앞으로의 우리의 해야 할 일을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만이 이 나라를 위하여 가장 현실적이며 건설적일 것이다.
(주석 10)

김구 암살의 시점은 그 전후에 발생한 정치적 사태와 연결할 때, 이승만 정권의 절묘한 타이밍이 작동한 것을 살피게 한다. 1949년 5월 외국군 완전철수와 남북회담, 반민특위법 제정을 주도한 노일환ㆍ이문원 등 진보적 소장파 의원 13명을 남로당프락치 혐의로 구속,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6월 6일에는 이승만 정권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반민특위를 경찰을 동원하여 짓밟았다. 헌법 조항에 따라 설치된 국가기관을 ‘국립경찰’이 짓밟은 폭거였다. 그리고 6월 26일 이들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김구가 암살되었다. 권력 상층부에서 절묘하게 준비한 스케줄이라는 인상이 짙다.

이즈음 김구의 일상은 평범했다. 한 신문의 보도다.

김구 옹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혁명가다운 간소한 생활, 규칙적인 생활을 즐기었다. 측근자의 말을 들어보면 하루 세 때 식사도 국과 김치ㆍ나물 같은 두세 가지의 찬으로 만족하게 생각하였으며 의복도 검소한 것을 즐겨 입었다 한다.

그리고 옹의 일과표를 읽어보면 ‘기상 오전 7시, 취침 밤 10시 반’의 일과는 한 달이 하루 같고 한 해가 하루 같았다 한다. 기침하면 우선 습자와 기도 독경, 열보(閱報)ㆍ신문 읽기가 계속되며, 아침 9시에 조반이 끝나면 청강(聽講)이 있고 접객은 보통 하오, 그리고 저녁밥이 끝난 후에도 청강에 주력하여 취침 전에는 꼭 묵상을 하였다 한다.
(주석 11)

김구의 평양행에도 수행하고 암살 당일 안두희를 2층 서재로 안내했던 비서 선우진은 신문 기사와는 달리 “백범 선생은 오전 7시가 아니라 이른 5시에 기상하여 세면을 했다. 그뒤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대개 경교장에서 독서와 서예를 하고, 손님을 맞으셨다”고 회고했다. (주석 12)

김구는 암살 당하기 3개월 전인 3월 어느 날 삼균주의학생연맹의 초청으로 강연을 하였다. 제목은 <역수어(逆水魚)>였다. 자신의 생애를 ‘역수어’에 빗대었다.



주석
10> <민성(民聲)>, 1949년 7월호.
11> <서울신문>, 1949년 6월 28일.
12> 선우진, <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210쪽, 푸른역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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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안두희 평전' - [18회] 이승만의 단독정부 세워지고

[18회] 이승만의 단독정부 세워지고

<악의 축> 안두희 평전/[8장] 김구의 마지막 행적 2013/12/05 08:00 김삼웅
평양에서 회담을 마친 김구는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귀환성명을 통해 이 회담이 민주적 조국통일을 재건하기 위해 남북의 단선ㆍ단정을 반대하는데 있으며, 미소 양군 철수를 요구하는데도 의견이 일치했고, 북쪽이 절대로 단정수립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며, 송전과 연백저수지 개방에 동의한 점 등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하지는 남북정당 사회단체대표 합동회의 요청서에 대한 불찬성 성명을 발표하고, 5ㆍ10 선거가 남한만의 참여로 치러져서 4김회담을 비롯한 남북협상파의 노력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겨레의 소망과는 달리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예정대로 남한에서는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고 7월 17일 이승만의 주장대로 대통령 중심제의 헌법이 제정되었다. 7월 20일에는 국회에서 정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이승만이 180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단독정부에 참여를 거부한 백범에게도 13표가 나왔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60여 표가 나왔다.

1920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위임통치’ 등의 이유로 탄핵을 당하여 쫒겨났던 이승만이 신탁통치 정국의 분단정부 수립론을 들고 나와 대통령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치매의 역사현상’일까,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남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참여를 거부해온 김구는 반쪽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남북협상과 통일정부 수립의 꿈을 접지 않았다.

김구는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고 야인의 입장에서도 남북통일에 대한 열망이 멈추지 않았다. 1949년 5월 31일 유엔 한위에서 김구는 통일에 관한 소견을 피력하였다. 남북회담의 실천방안을 제시했다.

① 남북 민간지도자 혹은 정당ㆍ단체 인물로서 사인(私人) 자격에 의한 남북회담을 개최하여 통일방안을 강구할 것 (모든 곤란한 형식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남북정권의 대변인도 사인 자격으로 참여할 것).
② 회담 지점(장소-필자)은 서울에서 할 것.
③ 회담 내용에 대해서는 관련 방면의 합의에 의해 발표할 것.
④ 이 회의에서 통일방안에 대하여 초보적인 합의가 성립되는 대로 각기 원지역에 돌아가서 정식 남북회담이 실현되도록 노력할 것.
⑤ 유엔한위는 이 회담이 실현될 수 있도록 모든 환경과 조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적극 협조할 것.
(주석 6)

1949년 6월 15일에는 한독당 전국대회를 열었다.
한독당의 <선언문>과 <미소양국 원수ㆍ맥아더 장군ㆍ남북동포ㆍ제정당ㆍ사회단체 등에 보내는 메시지> 등을 채택했다. 이날 김구는 자신이 창당한 한독당의 마지막 전국대회에 참석한 것이다. <선언문>에서 김구의 정신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 <선언문>의 뒷 부문이다.

국토의 양단은 경제의 파탄과 동족상잔을 초래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사생(死生)의 관두에서 방황케하고 있으며,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의 발호와 봉건세력의 잔존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자유 발전을 방해하고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억압과 침략을 위한 어떠한 기도도 이를 저사(抵死) 반대 할 것이며 전세계 평화를 애호하는 인민과 더불어 영구한 세계평화의 확보를 위하여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제 약소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자결권을 유린하는 낡은 제국주의세력의 침략정책을 배격하고, 당면한 역사적 과업의 최고 목표인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최대의 열의를 경주하며 투쟁할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항상 민주주의적 합법적 수단과 방법에 의하여 통행될 것이며, 먼저 세계적으로 보장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언론ㆍ집회ㆍ결사의 진정한 자유가 확보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며, 언론 비판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발전의 필수조건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외군 철퇴와 남북평화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는 한 한국위원단에 대하여 협조적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유엔 한위는 한국문제 해결의 완전 주체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일가와 민족자결의 이념하에서 세계평화와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독립을 위하여 최후까지 용감하게 투쟁할 것을 만천하에 정중히 선언하는 바이다.
(주석 7)

이무렵 김구는 틈을 내어 어려운 동포들을 돕고 50여 명의 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나누어주었다. 기금은 아들 신의 결혼식과 어머니와 부인의 이장 장례식 때에 들어온 부조금을 모아두었던 것이다. 이 돈의 일부로 학교도 세웠다.

환국 후 김구의 사생활과 정치활동은 근검하고 청렴하기로 알려졌다. 많은 국민과 재력가들이 그를 존경하여 금품을 보내왔지만 대부분 돌려보냈다. 정치활동에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였을 터인데도 부정한 돈을 받지 않았다. 특히 친일파들이 구명의 조건으로 독립운동가 들에게 거액을 헌납하는 것이 상례처럼 되고, 이에 대해 비난 여론이 일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철저하게 주변을 관리하고 자신도 청렴성을 견지하였다. 김구의 청렴성에 관해서는 한 가지 비화가 있다. 개인비서였던 선우 진의 증언을 리영희 교수가 저서에 남겼다.

김구 선생이 환국한 지 얼마 안 된 어느날 경교장에 전화가 걸려왔다. 선우 비서가 받으니 유명한 친일 박모 씨가 김구 선생을 숙소로 찾아 뵙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하면서 선생의 허락을 요청하였다. 선우 비서가 선생께 그 뜻을 전하자 선생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잠시 뒤에 박씨는 승용차를 타고 경교장 정문에 나타났다. 안내하고 들어온 비서의 손에는 녹색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선우 비서가 선생에 아뢰자 역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간청하니 선생이 못이겨 허락하였다. 집안에 들어온 박씨는 온갖 아첨 끝에 비서가 들고온 보따리를 풀어놓고는 정치자금으로 헌납하니 받아달라고 청원하였다. 지폐로 300만 원이었다고 한다. 그때로서는 거액이다. 그것을 본 김구 선생은 낯이 붉어지더니 대갈일성하였다.

“나를 왜놈으로 착각하는가! 친일파의 근성을 바로잡지 못하거든 썩 물러가시오!”

박씨는 비서로 하여금 돈 보따리를 챙겨들게 하여 총총히 문 밖으로 사라졌다. 박씨는 그길로 이화장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을 찾아갔다. 대문에 들어선 박씨가 이씨의 개인비서를 통해 내방의 뜻을 전하자 곧 이씨가 몸소 현관까지 마중 나왔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미스터 박, 반갑습니다. 어서 올라오시오.”

두 사람의 대좌의 자리에서는 유쾌한 웃음이 터지고, 백년지기와 같은 오랜 대담 끝에 박씨는 이승만과 다정한 악수를 나누고 물러났다. 뒤에는 돈 보따리가 남겨졌다. (주석 8)

리영희는 또 ‘목격자로부터 들은’ “김구 선생의 정신과 풍모에 관하여 내가 들은 일화 두어가지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승만과 그를 떠받느는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고 공산당의 극좌 세력으로부터도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던 험악한 그 시기의 어느 날에 어떤 이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국내 정치 지도자들을 위로하는 주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 때에 남한에는 전력이 태부족이어서 북한에서 전력이 공급되고 있었다. 전기보다는 남폿불이나 촛불이 차라리 조명의 주종이었다.

얼마쯤 연회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에 갑자기 전깃불이 나갔다. 장내가 암흑이 되는 순간에 그 어둠 속에서 좌석은 혼란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백범 노선을 따르는 정치인들에게는 쉼없이 생명의 위험이 가해지고 있을 때였으니까. 그러나 정전은 잠깐이었다. 곧 전기가 들어왔다. 좌석은 텅 비어있었다.

그런데 김구 선생만이 홀로 그 자세대로 그 자리에 태연하게 앉아 계시더라는 것이다. ‘테러의 괴수’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김구 선생은 진실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석 9)


주석
6> <조선중앙일보>, 1949년 6월 1일.
7> <조선중앙일보>, 1949년 6월 17일.
8> 리영희 <자유인 자유인>, 37~38쪽, 범우사, 1990.
9> 앞의 책,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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