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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숙소였던 서산사

조선통신사 숙소였던 서산사
-대마도답사기행7
 
이즈하라시 내에 위치한 서산사(西山寺: 세이잔지)는 조선통신사가 머물렀던 절로 유명하다. 지금은 대마도 유일의 유스호스텔로도 운영되고 있다. 숙박시설이 빈약한 대마도에서 이미 가장 인기 있는 장소다. 이 서산사를 찾아가면 3군데의 볼거리가 있는데 이태안의 건축물과 김성일 선생의 시비(詩碑),그리고 현소스님의 석상이다.
 
데마서산사1.jpg
서산사로 올라가는 돌계단

 
対馬 西山寺3.jpg
일본풍의 건축인 서산사의 이정암(以酊庵) -서산사에 붙어 있는 오래된 '이정암(以酊庵:이테이안)' 이라는 이름의 목조건물이다. 건물에서 풍기는 역사의 내음이 예사롭지 않다.
일본은 조선·중국의 외교를 위해서는 기초 교양인 한문이 절실했고, 한문이나 한시 능력이 뛰어난 스님이 필요했다.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시게'는 후쿠오카(聖福寺)·교토(慶福寺) 등의 주지를 지낸 '경철 현소(景轍 玄蘇, 게이테쓰 겐소 1537-1611)'를 초청해서 조선과의 외교를 맡게 했다. 특히, 임진왜란의 경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를 받아 명나라와의 교섭을 하기도 했다.
 
현소는 그 시절 대마도에 사찰을 지었는데, 자신이 태어난 정유(丁酉, 1537년)년의 의미를 담아 '이정암(以酊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732년 대화재로 본당이 소실돼 건물의 일부가 현재의 세이잔지로 이전됐다. 현소는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양국의 전쟁을 막아보려고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양국 사이에 끼어서 고통 받는 쓰시마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고심한 사람이다. 종래 임란시
 
현재의 건축물은 화재로 손실 된 것을 복구한것이나 입구부분의 구조물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조선통신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옛 대조선 외교기관이라 할 수 있다.
 

서산사법당.jpg
           서산사의 본전 내부

서산사 내부방.jpg
          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있는 서선사 
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있는 서선사 방내부. 이곳은 호텔이라기보다는 '숙방(宿坊:슈쿠보)'이다. 일본의 '숙방'은 승려나 참배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숙박시설이다
 
학봉김성일시비2.jpg
조선국통신사 학봉김성일선생시비-의성김씨 문중과 시비 추진 위원회가 학봉 김성일 ( 퇴계의 문하생)시비를 2000년 11월에 건립 하였다

김성일 (金誠一, 1538년~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다. 1590년 일본에 정사 황윤길과 통신사 부사로 갔다와서 일본이 침략을 하지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여 보고함으로써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았다.
 
어전 회의에서 정사 황윤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일본의 침략을 예고하였으나, 부사 김성일은, "전혀 그러한 조짐이 없었사옵니다."라고 상반된 대답을 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상을 묻는 질문에도 황윤길은, "눈에 광채가 있고 담략이 남달라 보였사옵니다."라고 한 대 비해 김성일은 "눈이 쥐와 같고 생김새는 원숭이 같으니 두려울 것이 못 됩니다."라고 다르게 대답하였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잔디밭 정원에 서있는 시비(詩碑)에는 서산사에서 체류할 때 주고받은 서산사에 관련된 시 한편을 시비 뒷면에 새겨 놓았다.
 
一堂簪蓋兩邦臣 區域雖殊義則均
尊俎雍容歡意足 傍人莫問主兼賓

한 집에 의관 갖춘 두 나라 신하/ 지역은 달라도 의리와 식은 균일 하도다./
정성껏 접대함에 긴장 풀리고 환대에 족하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를 묻지 마시오.

국경을 초월한 학자들의 우정이 서려있는 시다. 이 시비(詩碑)의 건립동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학봉 김성일 선생은 유향(儒鄕)인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덕행과 훈업(勳業)이 청사에 빛나는 도학자이다. 대과에 급제하여 청관(淸官)을 두루 거친 선생은 1590년에 조선국통신사로 한일양국의 선린우호를 위한 국가외교와 문화사절로 일본국을 향한 행사(行使) 길에 올랐다. 대마도에 들려 선위사 현소(玄蘇) 승(僧)의 영접을 받고 객관인 서산사(西山寺)에 체류하는 동안 두 분은 시를 주고받았는데, 그 중 서산사와 사연(事緣)이 깊은 시를 골라 이 돌에 새겨 후세에 기리 전하고자 한다.>

서선사 현소.jpg
           현소의 석상
승려 현소는 하카다(博多) 세이후쿠사(聖福寺)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하였다.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름을 받고 그의 수하 승려가 되어 1588년(선조21년)부터 조선에 드나들며 자국의 내부사정을 설명하고, 일본과 수호관계를 맺고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요청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제1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휘하에서 참모의 신분으로 종군하였다.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으로 조선과 화해의 교섭에 임했다.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허성)등의 통신사 일행은 풍신수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일본으로 갈 때 동행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입국하여 조선을 국정을 살피고 토요토미의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섭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제1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國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이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제의로 이루어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 이덕형 등과 강화회담에 [야나가와 초신]과 함께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서산사 뒤 산기슭에 스님의 부도탑이 안치되어 있고 김성일 선생의 시비도 나란히 서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도로 사정을 왜군에 전달한 승려 현소(玄蘇:겐소)가 1611년에 개창한 절이라 그의 석상이 있다. 
 

대마서산사5.jpg
이즈하라 서산사의  현소의 부도
조선을 드나들며 자료를 수집하고 첩자 역할을 해 후에 임진왜란의 발판이 되었던 일본승려 현소(玄蘇:겐소)의 부도탑과 학봉김성일선생시비가 서산사에 1m 사이로 나란히 있어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부사의 신분으로 대마도를 찾은 김성일이 대마도 승려 현소가 시담을 나눴다는 서산사는 한국관광객들에게 대표적인 투어 코스였다. 하지만 유적지 흔적을 지워버리려는듯 서산사 건물을 아예 유스호스텔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으아스러운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더불어 대마도의 이즈하라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구가 2012년까지는 ‘대마도를 방문한 한국인을 환영합니다’였다에서 ‘일한 친선을 소중히 하는 한국인을 환영합니다. 일본 고유의 영토 쓰시마(대마도의 일본표기)는 역사와 관광의 섬입니다’라고 변경되었다. 이는 대마도를 잃어버린 영토라고 주장하는 한국사람들의 기세를 막으려는 것으로 보여 씁쓰레한 마음이 들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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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의 하사품 삼구족과 만송원

조선왕의 하사품 삼구족과 만송원

-대마도답사기행6
 

만송원(万松院)은 대마도 영주인 종(宗)가의 보제사(菩提寺 보다이지)에서 1615년에 종가 20대 소요시나리(宗義成)가 아버지 소요시토모(宗義智)의 명복을 기원해서 건립한 것으로 나라에서 지정된 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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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되고 있는  금석성
금석천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금석성의 원형이보존되어 있고 그 앞에 만송원(万松院)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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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원(万松院)의 입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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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원(万松院)의 출입문-사천왕상이 좌우에 자리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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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원(万松院)이 국가지정기념물임을 나타내는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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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원(万松院) 불당의 모습으로 일본의 여늬 사찰과 다른 느낌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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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왕이 하사한 불구 삼구족(三具足)을 보관하고 있다.
동일한 삼구족이 일본 내 한벌 더 있는데 니코의 동조궁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무덤앞에 있으며, 노천에 방치되어 검은 녹이 슬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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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전()에 차리는 법구()의 하나. 화사(), 화병(), 촉대()의 세가지 한 조를 말한다. 화사는 향로의 일종이며 모양이 집과 유사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고, 화병은 꽃병이다. 중앙에 화사를 놓고 화병은 좌측에, 촉대는 우측에 놓는다. 화사를 중앙에, 화병과 촉대를 각각 한 쌍씩 좌우에 놓는 오구족()을 간략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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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도쿠가와 위패

임란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일본을 제패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먼저 국교수립을 다시 세우고자 조선통신사를 다시 초청하게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마도가 조선과 가까이 있으며, 긴밀한 관계때문에 대마도에 여러가지로 지원을 해주었다. 이런 연유로 대마도에는 감사의 의미로 도쿠가와 집안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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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아름다운 아치형 돌다리의 입구는 잠겨져 있어 입장료를 내고 반대편으로 해서 묘지로 올라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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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첫째주 주말에 행해지는 만송원 마쯔리때 무료개방이 되는데 지금 사진에서 보는 이 위치에서 돌계단의 양쪽 석등에 촛불을 배열해놓는다. 밤에보는 불빛어린 돌 다리는 정말 아름답다. 햐쿠칸키(百雁木)라고 하는 132개의 돌계단을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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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10대∼32대까지의 묘지인 오타야마가 있고 거대한 무덤이 나열해 있다.그 규모는 대영주같은 정도의 규모로 가나자와시의 마에다(前田) 번묘지, 하기시(萩市)의 모우리(毛利) 번묘지와 함께 일본 3대묘지의 하나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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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0년 수령의 삼나무
만송원의 삼나무중 오래된 것은 묘지의 앞에 수령 1200년 정도 된 만송원의 큰 삼나무가 3개가 있는데 삼나무로는 대마도에서 제일 오래된 수령을 자랑하고 있다. 이 삼나무는 나가사키 현 나무 콘테스트에서 은상을 받았다고 한다
 
대마도의 89%는 산지이며 삼나무를 주종으로 편백이 울창하다. 대마도의 나무를 팔면 일본이 4년간 먹여 살릴 정도라니 대단하다. 대마도를 방문하는 한국관광객들이 이구동성으로 부러워하는 것이 바로 울울창창한 숲이다.
깨끗한 바다, 울창한 삼림, 맑은공기가 한데어울려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자연 그대로의 섬이다.국경의 섬 대마도는 자연 그대도를 간직하며 한국의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다.
 
 
** 공지사항 **
4월12일부터 16일까지 마닐라 업무출장으로 인해 잠시 쉬게됨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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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비와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

조선통신사비와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대마도 답사기행5
 
팔번궁신사를 답사후에 티이라쇼핑센터를 지나 대마도교류센터 뒤편 작은 비탈길을 따라 오르며 대마도 역사민속 자료관이 자리잡고있다. 대마도 역사민속 자료관 입구에 조선통신사비가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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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역사민속 자료관 입구-경사로를 따라 오르면 조선통신사지비와 역사민속자료관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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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역사민속 자료관으로 오르는 비탈길
왼쪽 아래 금석성의 노문(櫓門:야쿠라몬)이 보인다. 작년 8월에 답사기록을 보면 조선통신사지비 오른쪽에 조선통신사를 맞이한 고려문(태풍으로 훼손된 것을 1989년에 복원)이 있었는데 정비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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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지비1
1697~1811(210년)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1992년 조선통신사지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세우고 최세화(崔世和)가 썼다고 기록되어있다. 대마도에는 이곳 외에 수많은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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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지비2
조선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 을 가져다 주었고 당시 통신사 일행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를 "누에"와 비교할 정도이니 그 광경을 짐작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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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 일본의 역지빙례(易地聘禮: 외국의 사신은 본국의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역에서 예를 다함) 정책에 의하여 12차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서 머물다 귀국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통신사의 왕래는 끊기고 말았다. 통신사는 원래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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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역사민속 자료관
1977년 설립된 대마도 역사민속 자료관은 월요일 휴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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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천(金石川) 에 핀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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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성(金石城: 가네이시죠)의 노문(櫓門:야쿠라몬/누각문)
대마도에서 볼 수있는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금석천 축대와 어울려 옛성의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금석성은 옛날 대마도주가 살았던 곳으로 1990년에 복원하였다. 매년 여름철에 펼쳐지는 대마도아리랑축제 때 출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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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가 종백작가 어결혼봉축 기념비
역사민속 자료관에서 걸어서 7∼8분 거리에 있는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는 대마도 역사를 탐방하면서 반드시 들러야 할 곳 중 하나이다. 고종의 딸로 태어나 1931년 5월 대마도주 종무지(宗武志:소다케유키)와 신문화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강제 결혼케 된 옹주의 결혼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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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핀 벚꽃아래서 가이드로부터 비운의 황녀-덕혜옹주의 결혼과 삶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다.

대마도내 거주하는 한인들이 세운 것으로 ‘이왕가 종백작가 어결혼봉축 기념비(李王家 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라고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에 약 2만명의 동포들이 대마도로 끌려가서 숯굽는일, 군사시설 건설 등의 강제 노역을 당한 우리 동포들이 옹주의 대마도 방문을 환영하기 위하여 십시알반으로 돈을 모아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를 서기 1931년 10월 팔번궁신사 경내에 건립했다. 서기 1955년 6월 종무지와 덕혜옹주가 이혼을 한 후 대마도 인들은 야박하게 비를뽑아, 금석성 풀밭에 내동댕이쳤다. 지금 서있는 비는 서기 1999년 7월 14일 부터 부산 대마도 직항 선박의 취항으로 한국관광객이 모여들자 방치해 둔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볼거리가 부족한 관광객에게 볼거리 하나 더 제공하여 돈벌이를 해야겠다는 목적으로 서기 2001년 11월 10일 되 세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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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혜옹주와 종백작의 신혼초 모습
덕혜옹주는 1912년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때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을 통해 얻은 외동딸이다. 그는 어린시절 영친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내고 쓸쓸해하던 고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천진난만하게 지냈다. 옹주 나이 7세때 고종이 승하하자 후손이 없던 순종은 옹주를 친딸처럼 돌봤다.

그러나 덕혜옹주는 13세되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로 일본에 건너가며 비극을 맞게 됐다. 이역만리 낯선 생활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한 옹주는 신경쇠약증세를 나타냈으며 17세때엔 생모 양귀인이 숨진 충격으로 증세가 심해져 조발성치매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병세가 약간 호전되자 일본은 19세된 옹주를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종무지백작과 결혼시켰고, 유일한 소생인 딸 (종정혜)을 얻었으나 지병은 도져만 갔다. 계속된 병상생활 끝에 53년 종백작과 이혼했고 단 하나의 혈육 정혜마저 결혼에 실패한 뒤 현해탄에 현해탄에 몸을 던짐으로써 옹주의 절망은 극에 달했다.

해방후 고국에 돌아오려 하지만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로 50세가 된 이날에야 겨우 귀국한다.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몸으로 돌아온 그는 고독하고 어려운 세월을 보내다 89년 4월 77세 나이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일제에 의해 대마도주 아들과 강제 결혼한 뒤 정신병을 앓다가 숨져간 옛 왕가 여인의 비운을 보여주는, 우리와 관련된 애증의 역사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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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대표적인 팔번궁신사

 대마도의 대표적인 팔번궁신사
 -대마도 답사기행4
 
이즈하라 시내 382번 도로변에 팔번궁(八幡宮)신사 입구를 나타내는 대형 도리이(鳥居)를 볼 수 있다.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로 끌려 와 처음 3개월간 수용생활을 했던 장소가 바로 이곳 하치만구신사의 광장. 지금은 수용시설과 관련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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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번 도로에서 본 팔번궁신사(八幡宮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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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번궁신사(八幡宮神社)의도리이(鳥居) 

팔번궁신사(八幡宮神社)는 대마도의 대표 신사이다. 이즈하라 하치만신을 모신 하치만궁신사, 우노도신사, 천신 신사, 와카미야 신사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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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만신(八幡神)은 가마쿠라 막부를 창시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99)대에 이르러 막부의 수호신으로 신앙되었으며, 이후 전국 신사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제10대 오진(應神)천황이 바로 하치만이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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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객이 팀별 이곳에서 팔번궁에 대한 설명이 펼쳐지고 있는 모습
이러한 스토리를 마치 역사 시간의 선생님같이 여행객들을 앉혀놓고 가이드들은 열심히 해설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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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번궁신사 입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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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번궁 신사로 가는 신도 
왼쪽에 팔번궁신사에 돈을 희사한 사람들의 이름이 돌에 세겨져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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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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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소원을 기록한 에마에는 한글이 여럿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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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참배전 손과 입을 씻는 데미즈야
일본의 신사나 사찰에는 참배하기 전에 먼저 데미즈야(手水舍)라고하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공간이 있다. 즉, 돌로 된 수반에 깨끗한 물이 가득 채워져 있고 참배객은 여기서 국자로 물을 떠서 번갈아 가며 왼손과 오른손을 씻은 다음 왼손바닥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군 뒤 배전(拜殿) 앞에서 예를 갖춘다.
얼핏보면 약수터처럼 보여 이를 모르는 방문객을 위해 그림으로 설명해 놓은 곳도 있다. 이런 정화의식을  신도(神道)에서는 하라이라고 부른다.  얼핏보면 우리나라 약수터 같아 마시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마신다고 시비거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혹 이상하게 보여지거나 마시기엔 수질이 다소 좋지 않을 수 있으니 주의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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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와 병사를 지켜주는 팔번신을 모시는 신사로 일본에서 유명한 팔번궁신사
참배하는 순서는 먼저 헌금함에 5엔의 동전을 던저넣고 방울이 매달린 줄을 잡아당긴다. 이렇게 방울을 울리는 것은 신을 불러 내는 의식이다. 그 다음 자신만의 기원을 하면서 합장을 하고 두번 절하고 두번 손뼉을 친다음 한번 절하고 물러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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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궁신사(今宮神社: 이마미야 진자)
팔번궁신사 왼쪽으로 다시 돌계단을 오르면 비극의 여인 안덕천왕(安徳天皇)을 모신 금궁신사(今宮神社: 이마미야 진자), 일명 마리아 신사가 있다. 금궁신사(今宮神社)는 ‘고니시 마리아’를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고니시 유끼나가’의 딸이며 19대 대마도주 ‘소요시모토’와 결혼하였다.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는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평양까지 침공한 인물이다
 

팔번궁신사 왼쪽으로 다시 돌계단을 오르면 비극의 여인 안덕천왕(安徳天皇)을 모신 금궁신사(今宮神社: 이마미야 진자), 일명 마리아 신사가 있다. 금궁신사(今宮神社)는 ‘고니시 마리아’를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고니시 유끼나가’의 딸이며 19대 대마도주 ‘소요시모토’와 결혼하였다.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는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평양까지 침공한 인물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직전에 제2인자였던 ‘도꾸가와 이에야쓰’를 비롯한 가신들을 소집하여 “내가 죽은 다음에 어린 자식을 잘 보필해 달라.”고 당부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꾸가와 이에야쓰가 정권을 잡으려 하자 히데요시의 막료들이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이에야쓰에 강력히 대항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이에야쓰 군과 히데요시 세력의 미쓰나리군단 간에 ‘세끼가하라(關が原)전투가 벌어진다. 전투가 벌어지자 전국의 다이묘들은 전투에서 어느 편을 들어야할 지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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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된 녹나무- 마리아 신사옆에는 일본 제일의 녹나무가 세월을 안고 서있다. 장뇌목(樟腦木)·장수(樟樹)라고도 하는 오래된 녹나무 앞은 한국의 방문객들이 즐겨 사진을 찍는 포토존이다.- 함께 답사에 나선 동아리회원이 인증샷을 찍은 모습
 
의리로 치면 당연히 히데요시 편의 미쓰나리 군단에 들어야하나 이에야쓰 편의 강력한 군사력을 보건대 전투에서 이에야쓰 편이 이길 것이 뻔한 일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히데요시가 그렇게도 아끼던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
는 세끼가하라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세가 우세한 이에야쓰 편에 들어 구마모또성에서 나오지 않아 전후에 이에야쓰의 신임을 얻는다. 반면에 히데요시의 막료로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끼나가는 질 것을 알면서도 의리상 히데요시 군단에 가담했다가 참변을 당하고 만다.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고니시 유끼나가는 참수를 당하고, 유끼나가의 딸을 아내로 삼았던 대마도주 ‘소우요시토시’는 장인 때문에 대마도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사태에 처하게 되자 ‘고니시 마리아’를 내쫓는다. 내 쫓긴 고니시 마리아는 나가사끼로 건너가 죽었다고 한다. 고니시 유끼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를 이곳 이즈하라 이마미야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대마도인들이 악령의 재앙을 두려워해서라고 전해진다.
 

하늘 천자 모양의 도리이는 일본에서는 새가 인간과 신을 연결해 주는 메신저 역활을 한다고 믿었기에 새가 앉을 수 있는 모양의 구조물을 설치하며 신사의 경내와 인간의 속계를 구획하는 경계로 삼았다. 그 아래에는 양쪽에 고마이누(狛犬:고구려개) 2마리가 마주보고 신사를 수호하고 있다. 오른쪽에 입을 벌리고 있는 개는 숫개이고, 입을 다물고있는 개는 암개이다. 귀신을 쫓는다는 삽삽개의 풍모와 비슷한 고마이누는 한반도의 해태나 삽살개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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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한파 작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半井桃水館)

지한파 작가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半井桃水館)
-대마도답사기행3
 
수선사 방문에 이어 두번째 찾은 곳은 대마도 출신의 신문기자이자 소설가인 나카라이 토스이기념관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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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으로 가는 나카무라지구의 거리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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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들이 살았던 나카무라지구의 주택은 단단한 돌담으로 둘러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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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입구
나카라이 토스이는 대마도출신의 기자이자 소설가로, 가장 한국적인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춘향전을 일본에 소개한 사람이다. 나카라이 집안은 대대로 쓰시마 번주의 주치의 가문으로, 토스이는 1860년 이즈하라에서 태어났다. 부산의 왜관에서 의사로 상주하던 아버지를 따라 소년기를 부산에서 보내면서 한국어를 배우게 된다. 15세에 귀국하여 동경의 영문학 학원인 공립학사를 졸업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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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라이 토스이 탄생의 땅이라고 표기된 돌말뚝
1875년, 강화도에서 일본 군함 운양호 '포격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태에 일본 여론은 흥분하지만, 신문 논조는 의외로 냉정하여 유력 신문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나 「유빈호치(郵便報知)」 등은 무력행사 반대론을 전개했다. 15세의 학생이었던 토스이도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에 무력행사 반대에 대한 투서를 보내, 게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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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과 안쪽 마당
1882년, 다시 아버지의 조수로 부산으로 건너간 그는, 아사히신문 촉탁으로 부산 특파원이 된다. 그가 체재한 1887년까지의 5년간,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이 일어났다. 토스이는 이 보도로 이름을 떨쳤으며, 아사히는 판매부수가 단번에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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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는 나카라이 토스이에 관한 설명판이 세워져있다.
그러나, 그가 자랑으로 여기고 있던 것은 화류계나 서민의 풍속 등, 조선의 일상을 전하는 르포기사나 한글 입문과 같은 문화 자료였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춘향전」을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한 것일 것이다. 그의 번역으로 아사히의 연재 소설이 되었다(18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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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건물 오른쪽 마당에 자리잡고 있는 오래된 펌프.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귀국 후, 소설기자로 아사히신문사에 정식으로 채용된다. 그의 대표작 「호사부는 바람(胡砂吹く風)」은 대마도번 무사가 부산에서 양반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로, 이 소설의 권두를 이치요가 단가로 장식했다. 연재되었던 시기(1891~1892년)가 정확히 이치요와의 '사제관계'의 시절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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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내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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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내부2
다다미방에 준비된 녹차 기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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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내부3-기모노 입는 체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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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내부에 나카라이 토스이에 관한 기록물이 전시된 모습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 여론이 대조선 강경론 쪽으로 크게 기울어도, 그는 대조선 강경론과는 반대의 자세를 취했다. 1895년에 연재된 「속 호사부는 바람」에서는 일본·조선·중국·만주의 정치적·문화적 독립과 원만한 동맹관계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사태는, 일본의 한국합병을 시작으로 대륙으로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돌진한다. 그는 이미 설 자리를 잃고, 아사히의 조선 보도뿐만 아니라 일본의 문학계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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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라이 토스이가 신문에 발표한 한국 고전소설 춘향전-아사히신문에 20회에 걸쳐 소개하여 인기를 모았다.
토스이는 1926년 11월21일 사망, 향년 67세로 무덤은 도쿄 분쿄구 고머고메의 요소지 절에 모셔져있다. 「어떤 메이지인의 조선관 나카라이 토스이와 일본·조선의 관계」를 쓴 카미가키(上垣外憲一)씨는 "토스이의 문장은 기본적으로 공평을 중요시하며, 조선에 대해서는 동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에서의 생활 체험이 길어, 조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느끼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나카라이 토스이는 '지한파(知韓派)'의 작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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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나카라이와 이치오가
나카라이를 이야기하면서 빠뜨릴 수가 없는 것이 현재 일본 5000엔 지폐의 주인공인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이다. 이치요가 토스이와 처음 만난 것은 1891년 4월15일. 이치요 19세, 도수이 31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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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0엔 지폐의 주인공인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
이 때 이치요는 몰락한 일가를 지탱하기 위하여 신문소설을 쓰기 시작한 바로 직후였으며, 아사히(朝日)신문의 소설기자로 활약하고 있던 토스이의 제자로 입문했다. 이후 이치요는, 아내와 사별하여 독신이었던 핸섬한 토스이에게 스승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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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 대동구에 있는 이치오 기념관에 관한 소개

그러나 일년 후, 이치요 이외의 여성에게도 자상했던 토스이의 행동으로 이른바 "이치요의 오해"로 절교를 통고하게 된다. 그러나, 이치요의 일기 등에 따르면 토스이를 향한 마음은 그녀가 24세로 요절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유명한 작가가 된 그녀에게, 예전의 약혼자나 문학 동료, 출판사의 후계자 등이 구애했지만, 그녀는 차갑게 거절했다. 그녀의 사후 남겨진 일기를 통해 토스이를 향한 연모의 정이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의 토스이관은  대마시의 마을조성 커뮤니티 지원교류관으로 2006년부터 NPO법인 대마도 향숙(郷宿)이 지정관리자로써 운영하고 있다. 다다미 방 (6, 8), 다목적 공간, 특산물판매 공간 등을 대관해주기도 하고 시민 관광객들의 휴식의 장소, 활동의 장소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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