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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수도 부산유산 14개소

피란수도 부산유산 14개소
 
앞에서 부산시가 문화재청으로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신청서를 접수한 것을 소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잠정목록 14개소’에 대하여 사진과 간략한 개요를 소개하고자한다.

 
1. 희망 유산

1-1 가덕도 등대(부산시 유형문화재 제50)

가덕도등대.jpg


가덕도 등대는 1909년 12월에 완공된 등대로, 대한제국 때 건립한 41개의 유인(有人) 등대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등대가 등탑과 부속사를 별도로 건립하는 것과 달리 8각형의 등탑을 부속사의 중앙에 올려 세워 등탑과 부속사를 단일 건물로 구성한 상당히 이례적인 등대 건축이다.


기초와 기단부는 콘크리트, 벽체는 적벽돌 치장쌓기, 등탑은 콘크리트로 쌓은 동체 위에 점등실을 원형의 철제 지붕과 유리로 제작하였다. 지붕은 적벽돌 벽체 위에 목조 트러스를 걸어서 완만한 경사의 4모지붕 형식으로 올리고 함석으로 시공하였으며, 외벽은 적벽돌 치장 쌓기를 한 다음 흰색 페인트로 마감하였다.


상부 난간벽은 적벽돌로 쌓아 올리고 버팀벽의 상부를 더 높게 올려서 고딕건축의 첨탑을 연상시키며, 수평의 난간벽과 적벽돌 모서리를 돌출시킨 수평 돌림띠, 수평의 상․하인방을 설치한 외벽 창호 등은 중세 성관(Chateau)건축에 사용된 르네상스 풍의 의장수법을 연상시키고 있다. 또한 정면 현관 캐노피 지붕은 고딕건축의 첨탑식(尖塔式) 지붕에 한국 전통건축 양식의 주두와 접시받침이 있는 기둥을 세우는 등 동․서양의 의장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현관 캐노피 상부 페디먼트에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보이는 오얏꽃으로 추정되는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당시 일제가 조선황실의 문양 사용을 종용했던 사실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덕도 등대는 평면 및 입면의 구성 방식과 의장수법, 근대적 양식건축에서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철․시멘트․콘크리트․적벽돌․유리 등을 사용하고 있어 부산 지역의 근대건축 도입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일 뿐 아니라,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결코 소홀하게 취급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또한 근대 서구 건축양식과 건축재료, 의장수법 등이 최초로 사용되었던 건물 중의 하나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상당 부분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세부적인 건축기법을 통해서 당시의 건축기법 등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돋보이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1-2 부산항 제1부두

부산항 제1부두.jpg

 

부산항(釜山港)은 북항(北港), 남항(南港)[1974년 부산항에서 분리됨], 감천항(甘川港), 신항(新港)으로 구성되어 있다. 1876년(고종 13) 부산항 개항 당시의 항구가 현재의 북항이다. 북항은 1876년 부산포(釜山浦)라는 명칭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항으로 개항한 부산항이 근대적 무역항으로 개발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북항은 제1 부두를 시작으로 제2 부두·제3 부두·제4 부두를 건설하고, 1970년대 들어와서 컨테이너와 다양한 화물 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특수 목적 부두인 제5 부두·제6 부두[컨테이너 부두]·제7 부두·제8 부두 건설과 1980년대 이후 신선대 부두·우암 부두·감만 부두 등 컨테이너 부두 신설을 통해 항만 설비를 확대하였다. 부산항 북항 제1 부두, 부산항 북항 제2 부두, 부산항 북항 제3 부두, 부산항 북항 제4 부두는 부산항 건립 초기에 형성된 부두로 부산항 제1 부두, 부산항 제2 부두, 부산항 제3 부두, 부산항 제4 부두로도 불리며 통칭해 재래 부두로도 불린다.

부산항 북항 제1 부두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이후 항만과 철도 노선의 연결을 통해 부산항을 대륙 침략의 거점이자 식민지 수탈품의 수송로로 활용하기 위해 일제가 건립하였다. 1876년 개항 이후 1898년에 부산 해관 부지 매축(埋築) 공사 및 확장 공사를 시초로 하여, 1902년에 약 13만 6,777㎡를 매축하여 정차장, 세관, 우편국을 설치하면서 축항 공사를 시작하였다.1912년 6월 15일에 경부선 철도와 연결되며 부산항 북항 제1 부두가 완공되어 부산 지역과 일본 혼슈[本州] 야마구치 현[山口縣] 시모노세키[下關市]를 오가는 관부 연락선 부두로 이용되었다.

 

1-3 영도대교(부산시 기념물 제56)

기념물영도대교(影島大橋).jpg


 

영도대교는 1932년 3월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 개통된 길이 214.7m, 폭 18.3m의 우리나라 최초의 연육교(連陸橋)이다. 하루 총 6회씩 도개하여 부산 뿐 아니라 전국적인 명물이 되었지만, 1966년 9월 증가하는 차량통행으로 인하여 도개 기능이 멈추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부산 시민과 애환을 함께 해 온 영도대교는 한국전쟁 당시 생활고에 지친 피난민들이 애환과 망향의 슬픔을 달랬던 장소였다. 당시 영도대교에 가면 친인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영도대교 인근은 피난민으로 가득했고, 이들의 사연을 듣고 상담하는 점집들이 성업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사와 함께 해온 구조물인 동시에 근대 부산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다리이다.


영도대교의 건설은 부산항 물류장 확충, 간선도로의 개설과 함께 근대 부산의 도시 발달에서 중요한 사업이었으며, 특히 영도는 부산 도심과 육로로 연결되고 전차가 개통되는 등 도시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영도구 도시발달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영도대교는 교량 뿐 아니라 다리를 구성하는 건축물들도 건축적인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교대(橋臺) 부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바른 층 쌓기를 하여 교대를 형성하고, 모서리 돌은 직사각형 화강석으로 모접기 등을 하는 등 정교한 디테일을 갖고 있다. 교대 좌우측 화강석 계단, 교량 입구의 교문주(橋門柱)와 난간 등은 영도대교의 구성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교량 입구 광장인 다리목 광장은 영도대교의 얼굴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근대 교량의 형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영도대교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단엽식 도개교로 희소가치가 매우 높은 교량이며, 일반적인 도개교와는 달리 안벽부(岸壁部)에 도개장치를 설치하고 있어 도개교량의 형식에서도 특이성이 인정되는 등 한국 교량사 및 토목사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없어 우리나라 근대 교량사를 연구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다리이다. 복원공사를 통해 도개기능을 복원하여 2013년 11월 27일 다시 도개를 시작하였고, 매일 12시(정오)에 도개를 하고 있다.

 

2. 치유 유산

2-1 성지곡수원지(등록문화재 제376) 

성지곡수원지(등록문화재 제376호) 1.jpg

1876년 부산이 개항된 이후 점차 거류민의 수가 늘어나면서 물 부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시가지 개발과 더불어 근대적 상수도 개발을 추진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상수도 시설공사를 시작한 것은 1894년 6월로 이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된 근대적 상수도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사용 인구가 약 4~5천명에 불과하여 본격적인 상수도 시설로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그 후 거류민의 수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음수용 물의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류지의 일본인들은 1900년 1월 엄광산에 저수지 공사를 시작하여 1902년 2월에 준공하였으며, 1909년에는 성지곡수원지가 준공되면서 부산은 본격적인 상수도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2-2 복병산배수지(등록문화재 제327)

복병산배수지(등록문화재 제327호)-4.jpg


성지곡수원지와 함께 복병산에 배수지를 설치하고 성지곡수원지의 침전지에서 끌어온 물을 각 가정으로 공급하였다. 당시 공사비는 대한제국 정부가 일부를 부담하고 나머지는 일본거류민들이 융자를 얻어 충당하였다고 한다.

복병산의 배수시설은 성지곡수원지의 물을 끌어와 각 가정에 공급하기 위해 1910년에 건립한 것으로, 당시에는 1기만 건설하였으나 1973년에 1기를 추가로 증축하여 현재는 좌우 대칭형의 배수지를 구성하고 있다. 일반적인 배수지 형식을 따라 지하에 저수조를 설치하고 그 위를 복토한 후 잔디를 심어 놓았으며, 배수지 출입구 위에는 '요지무진(瑤池無盡)‘이라고 새긴 화강암 석판이 있다. 복병산배수지는 1906년경 건설한 엄광산배수지, 수정산배수지와 함께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복병산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에 초량왜관(草梁倭館) 내의 일본인 난동, 왜관 밖에서의 일본인들의 풍기문란 행위, 밀무역을 하는 잠상(潛商)행위 등을 막기 위해 초량왜관에서 동래로 통하는 산에 병사를 잠복시켜 놓았던 복병막(伏兵幕)이 설치되어 생긴 이름이다.

복병산배수지는 성지곡수원지(등록문화재 제376호)의 댐과 함께 부산 지역에 최초로 건설된 근대적 상수도 시설의 하나로 토목사, 생활사에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2-3 부산지방기상청(부산시 기념물 제51)

釜山地方氣象廳1.jpg

부산지방기상청(釜山地方氣象廳)은 1904년(고종 41) 3월에 일본기상대임시측우소 부산측우소로 발족되었다. 이후 1939년 7월에 조선총독부기상대 부산측우소가 되어 일제 패전 시까지 유지되었다. 정부 수립 후 1948년 8월에 국립중앙기상대 부산측우소로 개칭하였다가, 1992년에 부산지방기상청으로 승격되었다. 부산지방기상청 건물은 부산광역시 중구 복병산길32번길 5-11[대청동 1가]에 위치한다.

 

부산지방기상청 건물은 1905년(고종 42) 12월 31일에 준공되었다. 이후 1934년 1월에 지상 4층 규모로 개축하였다. 2002년에 부산지방기상청이 옛 동래세무서 자리로 이전하였고, 현재 부산지방기상청 건물에서는 기상 관측 업무만 담당하고 있다.

 

현재 보전되고 있는 건물은 1934년 개축 당시의 모습으로, 면적 9,145㎡의 지상 4층 콘크리트 건물이다. 외벽은 타일로 장식하였다. 건물의 외관은 선박 형태이며, 꼭대기 층과 지붕의 모습은 선장실을 상징하는 모양이다. 건물 형태를 배 모양으로 고안하기 위해 수평적인 가로줄을 많이 강조하여 르네상스적인 기풍이 보인다. 내부 수직 창의 기술적 여닫이 처리와 천장 몰딩 문양의 거푸집 처리가 특징적이다.

 

현재 부산지방기상청 건물의 소유자는 국가이고, 관리자는 부산지방기상청이다. 2001년 10월 17일에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어 근대 건축물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부산지방기상청 건물은 기상청이 생긴 지 100년에 가깝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념비적 가치 이상의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건축물의 내·외부가 거의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측면에서도 근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2-4 부경고등학교 본관(등록문화재 제328)

부경고등학교 본관(등록문화재 제328호).jpg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녀의 고등교육을 위해 세운 부산제일공립상업학교 교사이다. 좌우대칭형 평면으로 정면 가운데에 현관 포치(porch)가 돌출되어 있고, 포치 위쪽으로 독특한 형태의 첨탑이 설치되어 있으며, 벽면의 수직 몰딩 처리, 수직의 긴 창문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등 전체적으로 위엄 있는 입면을 갖고 있다.

1927년 신축되어 해방 이후인 1946년부터 경남상업고등학교(당시 경남공립상업중학교, 현재 부경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고 있다.

해방과 더불어 미군 진주 후 군인병원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해방 이전의 자료는 찾기 어려운 상황이며, 학교 건물로 사용되면서 일부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중앙 현관의 계단은 학교 건물로 사용되면서 변화가 이루어졌으며, 또한 외부 벽돌을 보호하기 위하여 페인트를 발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 없이 유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2-5 대한성공회부산주교좌성당(등록문화재 제573)

대한성공회부산주교좌성당(등록문화재 제573호) 1.jpg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은 1924년에 지어진 로마네스크양식의 벽돌조 건물로 최초 내부 평면은 1랑식 장방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64년 측랑이 증축되어 변형된 2랑식 평면구성을 갖고 있다. 종탑부의 지붕처마 및 버트레스 상부의 석재장식, 제단 아치의 석재장식 등이 뛰어나며, 종탑의 첨탑형태와 제단 앱스 천장의 석조리브는 국내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다.

 

3. 정부기능 유산

3-1 부산임시수도대통령관저(부산시 기념물 제53)

부산임시수도대통령관저(부산시 기념물 제53호).jpg


임시수도 대통령관저는 일제강점기에는 경상남도지사의 관사로, 한국전쟁기에는 임시수도의 대통령관저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1925년 4월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옴에 따라, 1926년 8월 지금의 자리에 경상남도지사 관사가 준공되어 줄곧 경남도지사 관사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으로 1950년 8월 18일 수도가 부산으로 옮겨오자 경남도청 본관이 임시정부청사로, 경남도지사 관사는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게 되었다. 1951년 1.4후퇴로 다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어 1953년 8월 15일 서울로 환도(還都)할 때까지 임시수도의 대통령관저로 사용되었다. 1983년 7월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가면서 임시수도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과 유물 전시를 위하여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단장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을 중심으로 유물을 전시하였다.

입구 현관에는 「사빈당(思邠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면서 읊은 시의 ‘한양을 떠나지만 큰 계책이 있다(去邠在大計)’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서울 수복 및 환도의 의지가 담겨 있는 당호(堂號)이다. 임시수도기념관은 한국전쟁 44주년인 1997년 6월 24일 한국전쟁 관련 내용과 임시수도로서의 부산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새롭게 단장하여 기념관 및 동족상잔의 비극을 이해하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2000년에는 한국전쟁 당시 유물을 추가로 확보하고 건물을 전면 개․보수하여 전시공간을 재단장 하였다.

이 건물은 2층 건물로 일본식과 서양식의 절충형식이다. 도지사의 대외 활동 공간인 대현관과 응접실, 서재는 서양식으로, 도지사 가족의 주거공간은 일본의 전통적인 주거양식으로 구성하였다. 20세기 초 일본이 수용한 근대적인 서양식 건축에 일본의 전통적인 주거형식을 절충시킨 새로운 주거형식의 건물로 일제강점기 근대건축의 수용 및 발전 과정을 잘 보여주는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건물이다.

또한 일제의 수탈과 착취의 중심이었던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인 경남도지사 관사였다는 점에서 후손들에게 일본의 침략상을 교육시킬 수 있는 좋은 역사 자료이다. 아울러 한국전쟁기에 3년여 동안 임시수도의 대통령관저로 사용되면서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역사적 현장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한국근대사에서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3-2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등록문화재 제41)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2.jpg


이 건물은 도청 소재지를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기면서 건립한 경남도청으로, 한국전쟁 당시 임시 정부청사로 사용하였다. 처음 준공할 때는 ‘一’자 모양의 평면으로 구성하였으나, 1960년대 증·개축으로 ‘ㅁ’자 모양, ‘日’자 모양으로 바뀌었다. 정면 가운데에 현관 포치(porch)가 돌출되어 있고, 가운데와 양쪽 끝 부분을 돌출시키고 그 위쪽을 박공지붕으로 구성하는 등 전체적으로 위엄 있는 입면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간직한 역사적인 건물로 구 경상남도지사 관사(지금의 임시수도기념관)와 더불어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근대 공공 건축물이다. 현재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3-3 한국전력중부산지사(등록문화재 제329)

한국전력중부산지사(등록문화재 제329호).jpg

 

이 건물은 한국전력주식회사의 전신인 남선전기 사옥으로 건립하였다. 1970년대에는 한국전력 부산지사로 사용하였으나, 한국전력의 조직 개편으로 현재 중부산 지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1층은 화강석 마감으로 사각기둥 형태의 필라스터(pilaster)를 이용하여 출입구를 강조하고, 2층 이상은 타일로 마감하였으며, 위쪽 처마선 아래에는 수평 돌림띠가 둘러져 있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였다는 역사성이 있고 내부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등 한국 근대 사옥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3-4 부산근대역사관(부산시 기념물 제49)

부산근대역사관(부산시 기념물 제49호).jpg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 49호인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때 대표적인 수탈기구인(구)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이었다. 1920년대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서 서구양식이 도입되는 당시의 건축 경향을 알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건물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 숙소로 이용되다가 1949년 미문화원으로 개원한 후 부산시민들의 끊임없는 반환요구로 1999년 대한민국정부로 반환되었다. 그리고 그 해 6월 부산시가 인수하였다. 외세 지배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건축물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기에 부산시는 시민들에게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교육 공간으로 이 건물을 재조성 하였다.

전시 내용은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형성된 부산의 근현대역사를 중심으로 하였다. 개항기 부산, 일제의 부산수탈, 근대도시 부산, 동양척식주식회사, 근현대 한미관계, 부산의 비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4. 인류애 유산

4-1 부산시민공원(옛 하얄리야 부대)

부산시민공원1.jpg


부산시민공원(釜山市民公園, 영어: Busan Citizens Park)은 기억(Memory), 문화(Culture), 즐거움(Pleasure), 자연(Nature), 참여(Participation) 5개 활동주제로 조성되었다.

부산의 심장부를 대표하는 새로운 공공 경관과 치유와 침적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의 축적의 장으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최첨단 공원으로 공원조성 면적은 473,279㎡ 이며, 그중 공원 중앙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하야리아 잔디광장 면적은 약40,000㎡(축구장 6배)이다.

공원 내에는 97종 85만여 그루(교목 은행나무등 46종 9,937 그루, 관목 43종 844,314 그루)의 나무가 심어졌으며 공원역사관, 공원안내소, 부전천(2.5㎞), 전포천(2.5㎞), 분수(4개소), 광장(6개소), 어린이놀이시설(9개소) 등과 주차장(902면), 카페(3개소), 편의점(2개소), 화장실(22개소)등의 편의시설이 만들어졌다.

부산시민공원은 부산 시민과 우리나라 국민들은 물론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세계적인 명품 공원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4-2 워커하우스

부경대 내 워커하우스2.jpg


6·25전쟁 초반 낙동강까지 밀려내려 온 대한민국은 국가적 위기의 순간을 맞았다. 전쟁 발발 39일째인 1950년 8월 3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마산∼왜관∼포항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으로 최후 저지선을 구축한다. 유엔군 14만명과 엄청난 화력을 집중해 낙동강 라인을 구축한 이가 당시 미8군 사령관인 워커장군이다. 장군의 이름을 따서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워커장군과 참모들이 낙동강 방어전투를 지휘하던 지휘소가 지금의 부경대 안에 있는 워커하우스이다.
 
이상과 같이 피란민의 애절한 희망을 담았던 '희망 유산' 피란민의 처절한 삶을 치유했던 '치유 유산' 정부기능을 유지했던 '정부기능 유산' 유엔 지원으로 전쟁 후유증을 극복한 '인류애 유산' 등의 개요를 살펴 보았다. 조블 가족님들 중에서 는 피란수도 부산의 문화유산 목록 중 몇개소를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5~7개소를 알고 있다면 부산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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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에 도전하는 "피란수도 부산"


세계유산에 도전하는 "피란수도 부산"

 

부산시는 지난해 연말(1220) 6·25전쟁 때 대한민국 '피란수도'였던 부산이 당시의 역사를 간직한 다양한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대외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 임시수도기념관 등 대한민국 피란수도 부산유산’ 14곳을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하기 위해 문화재청에 신청서를 제출하였기 때문이다.


부산시에서 피란수도 부산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추진 내력을 2015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란수도 부산유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고 추진하는 목적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부산발전연구원은 6·25전쟁의 특수한 상황에서 수도 기능을 한 '피란수도 부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기초연구를 최근 마무리하고 2016323일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6·25전쟁과 피란은 부산을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 100만명의 도시로 만들었고, 부산의 현재 모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산복도로, 감천문화마을, 비석마을 등 산허리에 주거지가 형성된 것이나 국제시장, 부평시장, 자갈치아지매, 책방골목, 40계단 등 부산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원형질 역시 피란민 때문에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피란수도 당시 부산은 국가의 최후의 보루 역할을 했다. 1천일이 넘는 장기간 대통령관저인 경무대를 포함해 입법, 사법, 행정의 국가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임시수도'라는 명칭으로 부산의 특수성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6·25전쟁 당시 부산은 피란으로 발생한 생활, 문화, 예술, 행정, 정치 등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개념인 '피란수도'로 불러야 한다고 밝혔다.

  

피란수도 부산유산-부산발전연구원분석자료.jpg

부산발전연구원의 피란수도 부산유산에 대한 분석자료

 

부산은 195019536·25전쟁 기간 123일 동안 대한민국의 피란수도였다. 부산 원도심을 비롯한 곳곳에는 지금까지도 피란수도 시절의 건축물과 문화유산이 다양하게 남아 있다. 부산시와 부산발전연구원은 피란수도 건축·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온전한 상태로 후대에 전하기 위해 20157월부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해 왔다. 1년간에 걸처 피란수도의 역사를 간직한 유형자산 264, 무형자산 200여 건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20여 차례에 걸친 현장조사, 전문가그룹 조사, 시민 설문조사, 전문가 참여 선정위원회 등을 진행했다. 이 과정을 통해 유네스코 기준에 부합하며 세계유산으로서 가치가 높은 18개 시설 25곳을 선정하였다. 부산광역시는 지난해 610일 시청에서 설명회를 가졌다.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신청 대상 유산 18개소는 아래와 같다.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18개소 리스트.png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신청 대상 유산 18개소 목록
 

잠정목록 등재신청서에 오른 피란수도 부산유산 18개소.jpg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신청 대상 유산 18개소 분포도

 

부산시와 부산발전연구원은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신청 대상 유산을 소유·관리하는 기관 대표자와 해당 자치구청장, 전문가 등을 이날 설명회에 초청해 그동안의 사업 추진 경과와 향후 계획을 설명하고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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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란수도 세계유산 포럼 초청장

 

그리고 부산시와 부산발전연구원은 대한민국 피란수도 부산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하기 위한 연구성과 확산을 위해 연속으로 개최하였다. 먼저 812일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세미나실에서2회 피란수도 세계유산 포럼개최하여 관련전문가, 문화관광해설사, 연구관련자, 공무원, 일반시민 등이 참여해 피란수도와 관련한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공유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피란수도 부산유산 학술세미나-2016.8.30.jpg

 2016년 8월30일 학술세미나 안내장

이어서 830일에는 누리마루 APEC 하우스에서 '대한민국 피란수도 부산유산' 을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유네스코와 이코모스 및 각계의 전문가및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진상황에 대한 보고와, 그 추진 방향을 논의하였다.

 

피란수도 부산 기록찾기 공모전.jpg

피란수도 부산 기록찾기 공모전 포스터

 

한편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은 2016년 8월25일~9월30일 ‘피란 수도 부산 기록 찾기 공모전’을 추진해 천막교실, 국제시장, 광복동 거리, 운동회 모습, 아이젠하워 장군 환영대회 등 63점을 발굴해 11월에 공개하였다.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이 10일 공개한 1950년 부산 초량 항도국민학교 ‘천막교실’.jpg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이 부산 기록찾기에서 최우수작인 '피란 시절 천막교실'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피란 시절 천막교실’은 이송연씨(88)가 1950년 부산 초량 항도국민학교를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에는 임시 천막 안에 초등학교 학생들이 나무로 만든 의자에 빼곡하게 앉아 수업을 받고 있는 장면이 담겨 있다. 
 
1952년 촬영된 국제시장-국가기록원부산기록관.jpg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이 부산 기록찾기에서 선정된 '1952년에 촬영된 국제시장'
 
광복동 거리풍경, 천막교실과 운동회모습, 맥아더장군 퇴역후 새로 부임한 아이젠하워 장군 환영대회 등도 당시의 생생한 역사현장을 규명하는데 귀중한 기록물로 평가됐다.
 

부산 국제시장 등 최우수작을 출품한 이송연(88세, 부산 연지동) 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함흥에서 단신으로 월남한 후 틈틈이 촬영한 사진들을 장롱속에 간직해 왔다. 이번에 피란수도 부산관련 기록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출품했다”며 원본 사진들을 모두 부산기록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일련의 진행을 통해 상기의 18개소에서 피란민 수송시설, UN군 수송시설 등을 제외하여 14개소로 집약한 다음 문화유산을 크게 4개군으로 나눴다. 피란민의 애절한 희망을 담았던 '희망 유산' 피란민의 처절한 삶을 치유했던 '치유 유산' 정부기능을 유지했던 '정부기능 유산' 유엔 지원으로 전쟁 후유증을 극복한 '인류애 유산' 등이다.
  

피란수도 부산-유산14개 목록.jpg

피란수도 부산유산 '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신청 현황

 

희망 유산에는 가덕도 등대(부산시 유형문화재 제50), 부산항 제1부두, 영도대교(부산시 기념물 제56)가 있다. 치유 유산에는 성지곡수원지(등록문화재 제376), 복병산배수지(등록문화재 제327), 부산지방기상청(부산시 기념물 제51), 부경고등학교 본관(등록문화재 제328), 대한성공회부산주교좌성당(등록문화재 제573)이 포함됐다. 정부기능 유산에는 부산임시수도대통령관저(부산시 기념물 제53),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등록문화재 제41), 한국전력중부산지사(등록문화재 제329), 부산근대역사관(부산시 기념물 제49)이 들어갔다. 인류애 유산에는 부산시민공원(옛 하얄리야 부대), 워커하우스가 있다.

 

피란수도 부산-1.png

대한민국 피란수도 부산유산 14개소 분포도

 

부산시는 지난해 년말 문화재청에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를 신청함에 따라 올 1~2월에 문화재청 심시위원들이 엄격한 현장 실사를 통해 문화재위원회(세계유산분과)에서 잠정목록 등재여부를 최종 심의한다. 잠정목록에 올리면 그 뒤 세계유산 우선 등재 추진 대상 선정세계유산 신청현장심사 등을 거쳐 오는 2023202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정식 등재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세계유산은 해인사 장경판전(1995년), 종묘(1995년), 석굴암 ·불국사(1995년), 창덕궁(1997년), 수원화성(1997년),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 남한산성(2014년)으로 총 11점이 있다.


 

세계유산 등재는 도시정체성을 확립하고 새로운 글로벌 문화콘텐츠로 부산의 도시 브랜드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부산시민들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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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연락선(釜關釜連絡船)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관부연락선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부산항과 시모노세키 항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한 여객선을 말한다. 여명기의 부산항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대륙침략의 야욕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부관연락선의 내력을 살펴보면 러일 전쟁이 종결된 후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연결된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氣船株式會社)는 일본의 산요선 철도와 한국의 경부선 철도를 연결하기 위한 선박 수송을 계획하고, 정기 여객선 운항을 추진하였다.
 
'관부'(關釜)이라는 이름은 시모노세키의 뒷글자(關, 관)와 부산의 앞글자(釜, 부)를 딴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순을 바꾼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또는 일본에서는 관부항로(關釜航路)라고도 부른다. 연락선이라는 명칭은 협의로는 일제 강점기 및 그 이전의 일본측 노선을 의미하지만, 관습적으로 동 항로를 이어받아 운행하는 현재의 부관 페리도 위와 같이 부르기도 한다.

그 결과 1905년 9월에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 사이 240km를 잇는 1,680톤 급의 정기 여객선 일기환(壹岐丸:이키마루)가 시모노세키 항에서 취항하였다. 이것이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첫 번째 정기 연락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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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1,680톤 급의 첫 정기 여객선 일기환(壹岐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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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로 취항한 대마환(對馬丸)
 
이후 1945년 일본의 패전 직전에 미군의 공습으로 항로가 차단되면서 정기 여객선으로서의 생명이 중단될 때까지 부관 연락선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대표적인 운송 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패전 직후에는 한때 한반도와 일본에서 귀환자들을 수송하는 선박이 이 항로를 정기적으로 왕복하였다.
 
그 항로개요와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항로개요
·관부항로  시모노세키∼부산 240km 소요 7시간 30분 (1940년 10월)
·하카다부산항로 하카타∼부산 215km 소요 8시간 10분 (1943년 7월)


=항로연혁
·1905년 9월11일-산요 기선이 대한 제국에의 외국항로로서 시모노세키∼부산간에 「관부연락선」을 격일 1왕복으로 신설. 경부선이 개통 하고 있었던 것에 따른다. 이키 마루가 취항.
*1905년 11월1일-대마환이 취항해 매일 운항이 된다.
*1906년 12월1일-철도국유법에 의해 국유화되어, 철도원의 운영이 된다.
*1910년 -한국합방에 따라, 일본 국내항로 취급이 된다.
*1943년 7월15일-시모노세키항의 용량부족과 수송력의 증강의 목적에서,
            하카타∼부산간에 「하카다부연락선」신설.
*1943년 10월5일 미명 -관부연락선의 곤륜환이 미국 해군의 잠수함   
            'Wahoo'의 어뢰직격을 받아 침몰(사망자실종자583명). 이후, 야간
            항행이 자숙된다.
*1945년 6월경-선박의 공습에 의한 피재와 대마도 해협의 봉쇄에 의해 사실상
            소멸.

일본 재계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정기 항로를 취항시키려는 움직임은 개항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실업가이며 제일국립은행(第一國立銀行) 총감인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는 부산을 방문하여 일본인의 상업 실태를 시찰하였다. 그 후 최초의 일본인 무역 상사인 대창조상회(大倉組商會)를 설립 운영하고 있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와 공동으로 서명하여 1877년 8월에 정기 항로 개설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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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자와 에이이치(좌)와  오쿠라 기하치로(우)

이들은 명치 정부의 대장성(大藏省)에 조선과의 무역을 확장하기 위해 자금 10만 엔을 대부할 것과 매월 2~3회의 정기 항로를 열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명치 정부는 규슈(九州)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남전쟁(西南戰爭)으로 인해 혼란한 정국이 진정된 후에 운항을 허락하겠다고 회답하였다.

1890년대에 들어서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인적 이동과 물동량이 증가함에 따라 정기 항로 개설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893년에 일본의 민간 회사에 의해 인천과 오사카(大阪) 그리고 모지(門司)를 연결하는 645톤 급의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가 취항하였고, 이어서 1902년에는 원산과 4, 원산과 모지를 연결하는 746톤 급의 스미다가와마루[隅田川丸]가 취항하였다. 이 두 선박의 운행이 근대 한일 양국 항로의 효시가 되었으며 부산~시모노세키 사이의 항로에 정기 연락선이 취항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05년 9월 11일 밤 일기환(壹岐丸:이키마루) 선박이 시모노세키 항을 떠나 다음날 아침 부산에 도착하였다. 당시 운항 시간은 11시간 30분이었고 여객 운임은 1등실 12엔, 2등실 7엔, 3등실 3엔 50전이었다. 이후 1942년 조정된 운임은 1등석 20엔, 2등석 10엔, 3등석 5엔.
 
​관부연락선요금과 여행 시간
일기환(壹岐丸)·대마환(對馬丸)의 시모노세키∼부산간의 운임은 각등 모두 식사 딸린 요금으로.
 1등 12엔 양식
 2등 7엔
 3등 3엔50전

관부연락선의 취항으로 인해 여행 시간이 단축되었다.
 오사카-부산 29시간여
 오사카-교토 44시간여
 도쿄-부산 48시간여
 도쿄-교토 60시간여 

 

동경서울間連絡時間略表.jpg
토쿄-서울간 열차시각표

일기환(壹岐丸:이키마루)은 선박 길이 82미터, 폭 10.9미터, 총 규모는 1,680톤에 달하였다. 여객 정원 317명, 화물 300톤을 적재할 수 있는 규모였다. 영국의 해외 항해 선박을 모방하여 만들어져 선단에서 선미까지 평평한 갑판으로 되어 있었다. 1905년에는 부산항에 이 배를 직접 접안시킬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초량 앞바다에 정박한 후 소형 선박을 통해 승객과 화물을 부두로 이동시켰다. 1912년에는 부산제1부두에 부산잔교역을 개설하여 관부연락선 승객이 바로 열차를 탈 수 있도록 편리를 도모하였다. 
 
부산제1잔교2.jpg
1912년 부산잔교역 이전

부산제1잔교1.jpg1912년 부산잔교역을 준공, 곧바로 열차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부산항과 시모노세키 항의 접안 시설이 근대화되면서 정기 여객선의 규모와 편수가 계속 늘어갔다. 일제 강점기에 걸쳐 시기에 따라 약간 승객 수가 감소한 경우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연락선을 통한 인구 이동은 계속 증가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1943년 10월 미국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곤륜환(崑崙丸) 선박이 침몰하는 등 피해가 심해졌다. 1945년 6월 20일 일본 정부는 관부 연락선의 모든 선박을 안전한 항로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의 항로는 사실상 중단되었으며 일제 강점 하의 관부 연락선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인적,물적 수송의 대동맥 중 하나로 식민지 시기 사회,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 해운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조선 침탈의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이 항로는 일본 - 조선 - 만주로 이어지는 대륙 침탈 기지의 중계 노선으로서도 중요했기 때문에 국가 정책적, 군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노선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노선이 개설된 1905년의 부산, 시모노세키간 총 수송 승객 수가 약 35,000명인데 이것이 점차 늘어나 1910년대 말에는 40만명을 넘고, 1930년대 후반이 되면 100만명을 넘어서며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징용,징병하기 시작하는 1940년대가 되면 200만에서 많게는 300만에 가까운 인원을 수송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여객 수송과. 해방 직후의 귀환자 수송을 합하면 총 3000만 명 이상의 승객이 관부연락선을 이용하였다


​관부연락선의 종류 

 

선명

운항기간

총톤수

길이

(m)

정원

()

적재량

(t)

속도

(Knot)

일기환

(壹岐丸)

1905.9 ~ 1931.5

1680

79.4

337

300

15

대마환

(對馬丸)

1905.11 ~1925.12

1679

82.5

337

300

15

고려환

(高麗丸)

1913.1 ~ 1932.10

3029

102

603

930

16

신라환

(新羅丸)

1913.4 ~ 1945.5

3024

98.9

603

930

16

경복환

(景福丸)

1922.5 ~ 1945.6

3620

114.3

949

430

20

덕수환

(徳壽丸)

1922.11 ~ 1945.6

3620

114.3

945

430

20

창경환

(昌慶丸)

1923.3 ~ 1945.6

3620

114.3

945

430

20

금강환

(金剛丸)

1931.11 ~ 1945.5

7082

134.1

1746

3170

23.2

흥안환

(興安丸)

1937.1 ~ 1945.6

7082

134.1

1746

3170

23.2

일기환

(壹岐丸)

1940.11 ~ 1945.6

3519

103.8

-

4617

17.2

대마환

(對馬丸)

1941.4 ~ 1945.6

3516

103.8

-

4617

17.2

천산환

(天山丸)

1942.9 ~ 1945.6

7907

143.4

2048

2223

23.3

곤륜환

(崑崙丸)

1943.4 ~ 1943.10

7908

143.4

2050

2223

23.4


배 이름을 보면 묘한 특징이 있는데 아직 정식으로 일제의 지배가 시작된 것이 아닌 1900년대에는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섬들(壹岐, 對馬)에서 일제의 한국 식민지배가 본격화된 1910~1930년 사이에 취항한 배의 이름은 한국의 왕조 이름(신라, 고려), 궁궐 이름(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산 이름(금강산)으로 옮아가고,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기에 접어드는 1930년대 이후에는 만주, 중국의 지명{싱안(싱안링산맥), 천산(天山), 곤륜(崑崙(쿤룬)}으로 옮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일본 → 대한제국 → 만주 → 중국으로 점차 확장되는 일제의 침략 의도가 배 이름에 들어 있는 것임을 나타낸다.

Keifuku_Maru-景福丸(1922年就航).jpg
1922년에 취항한 경복호
 
Kongomaru-金剛丸(1936年就航).jpg
1936년부터 취항한 금강호

일본인들의 조선 도항에는 큰 제한이 없었으나 조선인들의 일본 도항에는 여러 차례 제한이 있었다. 일본 도항을 위해서는 도항증명서를 얻어야 했는데, 이런 도항 허가제는 일본 본토의 정치,경제 사정에 따라 여러 번 폐지되었다가 다시 생기기를 반복했다. 최종적으로 내지 도항제한이 완전히 철폐된 것은 1945년 3월에 이르러서였는데 이것은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일본 본토 내의 노동력이 부족해 더 이상 도항 제한을 둘 이유가 없었던 일제의 생색내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기주(韓琦柱)와 함께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여가수였던 윤심덕(尹心悳)이 1926년 8월 4일 이 노선의 덕수환을 타고 가던 중 새벽 4시 대마도 근해를 지나던 중 애인이었던 유부남 김우진과 함께 자살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6년 8월 5일자 사회면에서 이들의 자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지난 3일 오후 11시에 하관(시모노세키)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배 이름)이 4일 오전 네 시경에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으며 그 선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시 북교동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었으며,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일백사십 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이십 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는데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情死-연인끼리의 동반 자살)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이 사건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으며, 1991년 '사의 찬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가 탔던 배도 이 관부연락선이며,

​이병주의 소설 『관부연락선』의 주인공 유태림이 유학 갈 때 탔던 배가 관부연락선이다. 조용필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에서 나오는 가사가 이 관부연락선이다.

 
관부연락선 수송실적.jpg
일본에서 작성된 관부연락선의 인원수송실적

이 노선은 1905년부터 운항이 중지되는 1945년까지 40년간 총계 약 3천만에 달하는 인원을 수송하는 등 명실상부한 조선과 일본 간의 대동맥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조선과 일본을 잇는 다른 해운노선도 많았지만, 통계자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조선과 일본간을 도항한 약 8,90%의 인원이 부관연락선을 통해 한일간을 왕복했다. 물론 물류 수송의 측면에서도 부관연락선은 큰 역할을 담당한 노선이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의 경우는 유학생, 사업가, 노동자 등이었으며 노동자의 경우 일본 내에서 값싸고 일본인에 비해 힘이 세다는 이유로 수요가 많았다. 우리집의 경우, 1940년대초 경남 문산읍 안전리에서 조상대대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이 일본 효교현으로 일자리를 찾아 부관연락선을 탔으며 그곳에서 누나와 형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였고 어머니는 조선인 상대로 작은 식당을 운영한 내력을 갖고 있다,


전시 체제가 가동되던 1930년대 말 ~ 패망까지의 시기에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연고로 관부연락선에는 수많은 한이 서려있다.아래표는 1937년부터 1945년 5월까지 일본으로 송출된 조선인 현황표이다. 

 
부산항을 통해 송출된 조선인실적.jpg

일제에 의해 진행된 ‘강제 동원’은 크게 ‘노무 동원’, ‘병력 동원’[군인·군속], ‘성 동원’[일본군 위안부]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징용, 징병, 위안부로 강제 동원 되었던 사람들 중 22%가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 출신이었다. 더불어 육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강제 동원, 특히 일본 또는 남양으로 강제 동원된 사람들은 부산항을 통해 송출되었다.
 
반대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의 경우는 대부분 일본의 조선 이주 정책으로 인해 신천지를 찾아온 농민들이 많았다. 이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싼 값으로 토지를 불하받아 자영농이 되었다.
 
관부연락선이 운행되면서 뜻하지 않는 고민거리도 종종 발생하였다. 일제 강점기 부산은 '전염병의 수입지'였다. 부산에는 연락선을 타고 입출국하는 사람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늘 외항 선원들로 붐볐기 때문이다부산항에서 검역한다 해도 콜레라 환자가 유입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237월에는 중국인 우백천이 부산에 왔는데 심한 토사를 하고 고통스러워했다. 증세가 콜레라로 의심되었으므로 곧바로 전염병 환자를 수용하는 순치(順治)병원에 격리했다

 

가끔 연락선 안에서 호열자(콜레라) 환자가 발생했다. 19298월에는 부산항에 입항한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에서 호열자로 의심되는 토사 환자가 나타났다. 승객 전원은 내리지 못하고 모두 신선대 검역소에 격리됐다. 환자의 검사 결과를 12시간 이후에 알 수 있으므로 집에 가지 못하고 무작정 대기했다.
 

19465월 귀환동포 3150명을 싣고 중국에서 온 수송선이 일주일이 넘도록 부산에 입항하지 못하고 있었다. 배 안에 호열자가 창궐해 2명이 사망하자 이들을 수장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방역부에서 소독했지만 허술한 방역 정책으로 인해 귀환선을 통해 들어와 부산을 덮친 콜레라는 전국으로 퍼졌다. 이 때 57000여 명의 콜레라 환자 가운데 36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의 수탈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30년 12월 25일 남해 여수항과 일본 시모노세키항을 연결하는 ‘려관연락선(麗關聯絡船)'이 1945년까지 다녔다. 이로인해 여수는 교통의 편리와 아울러 해륙산물의 집산이 풍성한데다 기후의 온화로 인해 상공도시로 변모하게된다.

한편 1988년부터 시행했던 코레일과 JR 6개사가 연계하여 판매하는 한일공동승차권이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KTX(서울 - 부산) <-> 부관페리(부산 - 시모노세키) <->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각지로 철도가 연계되는 구조. 하지만 항공편에 비해 시간대비 가격의 메리트가 떨어지는 지라 이용률은 저조한 편. 결국 2015년 6월 30일자로 폐지되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된 후 부산시와 시모노세키 시 사이에 정기 여객선 재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 결과 1970년 6월 19일에 관부 페리호가 운항을 시작하였고 1983년 4월 27일에는 부관 훼리호가 운항을 시작하였다.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국제여객터미널은 중구에 있던 구 터미널에서 이전하여 2015831일에 개장했다. 향후 부산역과 보행데크로 연결될 예정이며, 지금은 중앙역과 부산세관, 부산역 후문과 신국제여객터미널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도보로는 부산역 7번 출구에서 나와 충장대로를 건너 국제여객터미널로 갈 수 있으며 이 경우 15분 정도 걸린다. 또한 초량역 6번출구에서 나와 지하도를 건너 큰도로쪽으로 올라가면 되며 여기도 15분정도 걸린다.
 

국제여객터미날에서 현재 운항하는 국제노선은 일본뿐으로 후쿠오카(하카타)노선, 시모노세키노선, 오사카 노선, 대마도 노선 등 4개로선이 운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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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선교사 어을빈과 하이칼라여성 양유식

 

의사선교사 어을빈과 하이칼라여성 양유식

 

개화기 부산에 있었던 국경 넘은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인 헌트 해관장의 딸과 양산 대석리 출신 권순도와 러브 스토리에 이어, 개화기 의료선교사였던 미국인 어을빈과 20대 초반의 미혼여성 양유식과의 러브 스토리를 소개한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부산 중구청의 홈페이지 인물란에 소개된 내용에 의한 것 임울 밝혀둔다.

 

우리나라 개화기(開化期)에 부산에 찾아든 외국인 선교사(宣敎師)가 적지 않았으나 그들 가운데서 오늘의 중구 지역을 생활 근거지로 삼았던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醫療宣敎師)인 찰스 휴스테츠 어빈(Charles H. Irvin :1862-1933) 뿐이다. 어빈은 어을빈(魚乙彬)이라는 우리나라 방식 이름을 따서 쓰기까지 하면서 부산에서 42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지내다가 부산땅에 묻힌 오직 한 사람의 개화기 외국인 선교사다. 따라서 어을빈의 파란 많던 일대기(一代記)를 남겨 놓지 않을 수 없어 여기에 소개한다.


어을빈은 1893년 북미 장로회(北美長老會) 소속의 의료 선교사로 부산에 첫발을 디뎠다. 어빈은 메리 위팅 진료소(Mary Whiting Dispensary) 의사로 사역하면서, 윌리엄.M.베어드(裵緯良, 1862~1931) 선교사와 고학륜(高學崙) 조사 등과 함께 순회전도 활동을 하며, 진료소를 젼킨 기념병원(Junkin Memorial Hospital)으로 확장하였고, 병원에서 치료받은 녹산 사람 배성우(裵聖友)를 전도하여 생곡교회 설립을 도왔고, 감만동에 국내 최초로 나병원을 설립하는 등 17년 동안 왕성한 선교활동을 해왔다.

 

베타 부인 역시 남편을 도와 의료선교 활동을 하며 부산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규범학교(閨範學校)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당시 22년 간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복귀하는 개혁파 인사 박영효(朴泳孝:1861~1939)와의 교분으로 중앙정치에도 인맥을 형성하고, 양산과 부산지역의 유력인사 정준모(鄭駿模)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는 등 선교 동역자로서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아내까지 데리고 와서 그 무렵 부산 해관장(釜山海關長)을 지낸 영국인 사택을 양도받아 널따란 정원을 살구나무로 울타리를 두르고 그 숲 속에 병원을 차렸다.

오늘의 동광동 5가에 있던 이 병원에는 「어을빈병원(魚乙彬病原)」이라는 간판이 나붙었고, 그 옥상에는 미국 성조기(星條旗)가 일본인 중심의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나부껴 그 무렵 부산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존재로 느껴졌었다.

어을빈이라고 하면 그 무렵 부사 사람들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만큼 크게 이름이 나 있었다. 어을빈이 그렇게 이름이 널리 알력지게 된 것은 「만병수(萬病水)」라는 물약 때문이었다.

그는 어을빈 병원 구내에서 만병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뜻밖에도 우리나라 곳곳에 팔려나가 크게 호평을 받았다. 그때 만병수는 북으로는 평안북도에서 남으로는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날개 돋친듯이 팔려나갔다.

어을빈 병원에서 만병수라는 물약을 만들어 냈을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약방에서 생약을 사다가 일일이 달여 먹고만 있었다. 그런 무렵에 불에 달이지 않고 병마개만 따서 그냥 입에 대고 마시면 되는 만병수가 나왔기 때문에 잘 팔려나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신기한 물약이 선을 보이자 삽시간에 부산 일대에 퍼져 나갔고 전국 방방곡곡에 그 소문이 퍼져 어을빈과 만병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만병수는 위장병에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어을빈이 만병수를 만들어 팔려고 했던 것은 위장병에 대한 효과를 노렸던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쩐 셈인지 항간(巷間)에서는 만병수가 감기와 두통, 심지어 치질과 임질에 이르는 화류병(花柳病)에 이르기까지 고칠 수 있는 특효약으로 소문이 퍼져 어을빈 병원에 만병수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바람에 부산 우체국에서는 각지로 발송하는 만병수 소포가 날마다 100~1509상자나 됐었다 이 때문에 그 무렵 우정국 당국의 특별지시에 따라 날마다 자동차를 어을빈 병원에 보내어 만병수를 실어 내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렇게 상품을 전국에 우송 판매하는 기업체는 그 무렵으로서는 아무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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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2월25일 동아일보의 만병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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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만들어 만주까지 팔린 만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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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3월15일 동아일보 광고-1933년 어을빈 사망 후 그의 아들이 만병수를 개량하여 정제로, 판매하였다.

어을빈은 그 무렵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 각 신문에 수시로 만병수 광고를 냈었는데, 그나마도 한 면의 3분의 1씩이나 되는 커다란 광고까지 냈었다.
 

어을빈은 애초에 선교사 자격으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부산항에 파견돼 왔다가 의사를 본업으로 삼아 만병수 제조 판매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일약 거부가 됐던 것이다. 이때 만병수 판매를 담당하고 있던 지배인은 간호부 양유식의 동생 양성봉이었다.

어을빈은 부산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의 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미모의 젊은 간호부 양유식과 불미한 관계를 맺은 것이 드러나 소문이 크게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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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구 문화관광 홈페이지의 애니멘터리 캡처화면

양유식은 1888년 부산 좌천동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1907년 온 가족이 미국 하와이로 이민 갔다가 1909년경 귀국하였고, 귀국 후 어빈의 병원 간호사로 근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모가 아름답고 영리하며 영어도 곧잘하여 어빈의 총애를 받게 되고, 양유식 또한 유부남인 어빈을 사랑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볼 때 실로 용납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어을빈의 이혼 사건은 마침내 그 무렵 부산에 와 있던 외국인 선교사 사회에까지 말썽을 빚게 됐다. 그래서 외국인 선교사들은 교회 재판을 연 끝에 어을빈을 교회에서 추방할 것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곧장 북미장로회에 보고되어 어을빈에게 본국 소환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어을빈은 교회에서 추방된 이상 본국 소환령을 따를 까닭이 없게 되어 부산에 그대로 눌러앉아 살게 되었다.

어을빈은 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던 한국인 약제사인 고명우라는 젊은이를 양자로 삼았고, 처녀 간호부 양유식을 양녀라고 부르며 이 두 사람을 짝지어 주겠노라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어을빈은 처음 얼마 동안 양유식을 귀애해 주다가 그녀의 고운 얼굴에 마음이 차차 달라져 나중에는 그만 못 넘을 선을 넘고 말았다.

이로부터 양유식은 고명우를 자꾸만 꺼리게 됐고, 고명우도 그 눈치를 채게 되면서 어을빈의 배신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끝에 병원을 그만두고 초량 정관 입구에서 양약방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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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식은 어을빈과 살림을 차린 뒤에도 그 무렵 인구 7만의 부산 거리를 보아란듯이 나다녔다. 그야 어떻든 지금으로부터 약 1세기 이전의 부산에서 양유식 여인은 오직 한 사람인 우리나라 하이칼러 여성으로서 등장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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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챙이 넓은 모자에 베일을 늘어뜨리고 펌프스(이브닝드레스와 함께 신는 신발로서 끈으로 매지 않는 부인용의 야외 구두) 차림의 양장으로 거리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 무렵 이 고장 사람들은 그녀에게 어을빈네 첩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도 막상 그 화사한 자태를 보고는 멍하니 넋을 잃었다고 한다

 

선교사로서 부산을 찾아왔다가 「만병수 장사꾼」으로 탈바꿈한 끝에 엄청난 돈을 모은 어을빈은 그 돈으로 김해 쪽에 땅을 사들였고 마산에 외국인 조계지가 마련됐을 때 그곳 땅도 사들이기까지 했었다.

 

이렇게 화려하게 겉치장을 하고 부산 거리를 나다니던 양유식이기는 했지만 어을빈과 그의 본처가 이혼했던 때 입은 충격이 컸었던지, 그 무렵으로서는 난치병인 폐결핵을 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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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초량에 집을 얻어 혼자 나와 요양 생활을 했다. 그런 즈음에 부산 시내에서 화재 보험 지사장을 지내고 있는 일본인 홀아비 요시하시와 눈이 맞아 동거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요시하시가 양유식을 가까이한 것은 그녀가 어을빈 병원에서 모은 재산이 탐나서 유혹한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게 나돌았다. 그런 줄도 모르던 양유식은 요시하시와 정을 통한 뒤 그의 일본 본적지에 혼인계까지 냈다. 한동안 동거 생활을 해 나가던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서 살던 집이 타 없어지는 불상사가 생겼다.

 

경찰이 수사에 나서자 요시하시는 핑계를 둘러대고 발뺌했지만, 양유식은 심한 충격을 느낀 끝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러자 요시하시라는 일본 사나이는 양유식이 남기고 간 재산을 가로채려고 그녀의 친척들을 상대로 소송까지 일으켰었다지만 뒷소식은 감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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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구 문화관광 홈페이지의 애니멘터리 캡처화면

양유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녀에게 깊은 미련이 있던 어을빈은 좌천동 공동묘지에 묻힌 그녀의 무덤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꽃다발을 바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사흘에 한 번씩 꼬박꼬박 그 무덤을 찾아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을빈은 그 꽃다발을 훔치러 오는 동네 아이들을 따돌리기 위해서 감시원을 상주시키기까지 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을빈은 나이 들어 비계살로 뚱뚱해진 몸집을 주체할 수 없어 지팡이에 기대며 가까스로 거동했었다. 그는 때때로 병원 문밖으로 걸어 나와 산책을 즐겼다. 이때 동네 아이들이 몰려 와서 「어을빈 할아버지 나오신다아 !」라고 외치면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한 줌 꺼내어 던져 주었다.

 

한편으로 짖굿은 아이가 「어을빈이 나온다」라고 손가락질하면 지팡이를 휘두르며 쫓는 시늉을 지어 보였다. 그런가 하면 병원 구내 넓은 뜰 안에 장난 치러 들어오는 아이들을 내쫓노라고 공포를 쏘아 놀라게 하기도 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을빈은 한 주일에 한번쯤은 동냥아치들을 돕는다는 생각에서 병원 문밖에 가마니채로 동전을 잔뜩 꺼내다가 뿌리기도 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 동전을 주워 챙기러 몰려드는 동냥아치들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는 버릇도 있었다.

 

어을빈의 만병수가 그지없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어을빈 병원」이 법인 조직으로 개편되자, 이것을 시샘하고 있던 부산 상공회의소 의원이자 약사인기도 한 에비스라는 일본 사람은 어을빈 병원으로 들어가는 남쪽 입구에 1933년 2층 벽돌집을 짓고 「만병약수」공장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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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스라는 일본인이 만든「만병약수」

이 일본 사람은 「잔나비 잔치」같이 「만병수」와 이름이 비슷한 「만병약수」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광고도 대대적으로 냈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일본 사람의 「만병약수」을 어을빈의 「만병수」로 잘못 알고 사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만병약수」장사를 벌였던 에비스는 꽤 오랫동안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그러자 화가 치민 어을빈은 에비스를 걸어 상표 침해로 부산 지방법원에 소송을 냈다. 그러나 일본이 중국 침략에 한창이던 시절 일본 경찰의 날카로운 감시를 받고 있던 어을빈의 불리한 처지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재판은 질질 끌려나갔고, 마침내 어을빈은 그 결심공판조차 보지 못하고 몸져누운 끝에 40년 동안 정들여 살아온 부산땅에서 1933년 2월8일 자택에서 눈을 감게 되고 말았다. 어을빈의 유해 또한 살아생전의 만년이나 다름없이 거의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서 어을빈병원 가까이에 있던 복병산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혀 들었다.

1933년 어을빈이 사망한 후 어을빈제약은 그의 아들이 물려받았고, 만병수정(萬病水錠)이란 알약 형태로 판매가 재개돼 1942년까지 판매되었다. 시작은 비슷하지만, 끝은 너무나 달랐던 어을빈과 양유식의 사랑이야기로 막을 내린다.

 

후일담으로... 
어을빈의 본처였던 Mrs. Charles H.(Bertha Kimmerer)는 이혼 수속을 밟고, 자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녀가 받은 위자료를 가지고 교토에 있는 한인교회를 지원하고, 도시샤(同志社)여자대학에서 음악교수로 활동한다. 교토한인교회 재건축시 그녀는 많은 헌금을 하였고, 교회에서는 어을빈 선교사 기념교회라 이름을 붙였다. 1935년 본국으로 귀국한 후 194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하였다. 
 
어을빈을 따라했던 일본인 약사 에비스는 결국 어을빈 병원을 사들였고, 얼마 뒤에 일본인 3대 재벌중 하나였던 조선제일의 수산왕 카시아에게 넘긴다. 요시하시는 양유식이 남기고 간 재산을 가로채려고, 그녀의 친척들을 상대로 소송까지 일으켰으나 뒷소식은 감감했다고  한다. 양유식의 동생이었던 양성봉 (梁聖奉)은 계속 만병수 판매를 담당했고, 나중에 초량교회 장로와 초대 부산시장 등을 역임한다

 

중구에서는 문화탐방코스에 어을빈집터가 포함되고 있으며 어을빈에 대하여 흥미위주로 소개되고 있다. 다만 의료선교사로 근무할 때 국내 최초 나환자병원을 설립하는 등 선교의료인으로 17년간 활동에 대해서도 제대로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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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조선청년 권순도의 로맨스

개항기 조선청년 권순도의 로맨스
 
1876년 개항이후 부산에 불었던 개화 바람 가운데 국경을 초월한 애틋한 러브스토리도 한몫을 했다. 국경 넘은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인 헌트 해관장의 딸과 양산 대석리 출신 권순도와 러브 스토리와, 개화기 의료선교사였던 미국인 어을빈과 20대 초반의 미혼여성 양유식과의 러브 스토리를 2편을 나눠 소개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부산 중구청의 홈페이지 인물란에 소개된 내용에 의한 것임울 밝혀둔다.
 
 
헌트 해관장과 해관직원.jpg부산해관앞에 찍었던 해관직원과 헌트(출처: 부산세관박물관)

1888년 제3대 부산해관(釜山海關 : 오늘의 부산세관) 책임자로 영국사람인 헌트(J·H·Hunt)가 부임해 왔다. 하문덕(何文德)이라는 한국명을 쓰며 지냈던 헌트는 아내와 외동딸의 단출한 식구를 거느리고 오늘의 동광동 5가 복병산 북쪽 비탈 울창한 숲 속에 있던 부산 해관장 관사에서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드넓은 관사 뜰 안은 말할 나위가 없었고 집 관리가 소홀해져서 곤란을 겪고 있었다. 허드레꾼을 구한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한 젊은이가 찾아와 부산 해관장 관사에서 서생(書生)겸 허더레꾼으로 함께 지내게 됐다. 이 젊은이는 1870년 6월 13일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대석리에서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 태어난 권순도(權順度)였다. 권순도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부산으로 찾아들어 어떻게 하든 영어를 배워 보겠다고 마음을 다졌던 이른바 개화 청년(開花靑年)이었다.

이때 헌트가 부산 해관으로 출근하고 나면 넓은 관사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헌트의 아내와 딸 그리고 한국인 가정부 등 세 여인과, 남자라고는 유일하게 권순도 뿐이었다.

 
따라서 헌트의 아내는 권순도의 존재가 신경이 쓰여져 권순도의 속을 떠볼 셈으로 일부러 돈지갑을 아무 곳에나 허술하게 팽개쳐 둔다든지 해서 낌새를 살펴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미끼에 권순도는 걸려 들지 않았다. 오로지 영어를 배워 개화 선구자가 되기만을 바라고 있던 권순도였기 때문에 아무리 허더레꾼 노릇을 하고는 있을망정 돈 같은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한편, 고국을 떠나 아버지를 따라 이역만리 극동의 항구에 찾아 들어온 헌트의 외동딸은 무료하게 하루해를 지내야하는 지겨운 나날이었다. 넓은 부산해관장 관사에서 말벗이 돼 주는 사람이라고는 어머니 딱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영국 아가씨 앞에 나타난 조선의 청년 권순도의 존재는 어쩌면 신선한 충격이었다.


개화기 헌트 부산해관장 딸의 사랑 이야기 '리즈 헌트'의 한 장면..jpg
2000년 초 영화 'Liz Hunt'(감독 허종식·45분)의 한 장면(사진출처: 부산일보)

권순도와 이 영국 아가씨가 처음으로 마주치게 된 것은 헌트가 타고 다니는 말을 씻고 빗질해 주고 있을 때였다.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던 헌트의 딸은 권순도에게 말을 태워 달라고 청했다. 이때부터 영국 아가씨는 권순도의 도움을 받고 말을 타고 다니게 됐고, 또 권순도가 넓은 뜰 안을 청소하고 있을 때면 따라다니기도 했었다. 열아홉살 꽃다운 나이의 헌트의 딸과 준수한 용모의 조선청년 권순도와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관사내에서 무료하게 지내고 있던 영국 아가씨의 마음을 권순도가 사로잡음에 따라 영국 아가씨는 어머니의 눈을 속여 가면서 권순도에게 접근해왔다. 이렇게 시작된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은 그 당시로서는 놀라운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권순도는 영국 아가씨가 자꾸만 가까이해 오자 겁이 나자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피했다. 그러나 집요하게 접근해 오는 영국아가씨를 권순도로선 어쩔 수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권순도 조차도 가슴을 설레면서 영국 아가씨를 만나면서 깊은 사랑의 늪으로 빠져들게 됐다.
 
그러는 사이에 1년이 지났던 무렵에 일은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헌트의 딸이 어머니가 눈치 챌 만큼이나 입덧이 나는 임신 초기 증세가 드러난데다 날이 다르게 복부가 불어만 나갔다. 콧대가 세기로 이름난 영국 신사인 헌트에게도 일이 들켜지고 말았다. 그러자 화가 난 헌트는 권순도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려하였을 때 헌트의 딸이 제 몸으로 권순도 앞을 가로막아서는 등 위험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길 수가 있었다.

관사 안에 남아 있다가는 아무래도 아버지가 기어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생각이 든 영국 아가씨는 권순도를 부추겨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기로 했다. 처음에 겁을 먹었던 권순도 역시도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영국 아가씨를 고향집으로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권순도는 영국 아가씨의 이방인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그녀에게 상복을 입히고 그 위에 방갓을 쓰게 해서 양산군 대석리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
 
이 사랑의 도피행각으로 인해 헌트를 더욱 성나게 하고 말았다. 헌트는 그 무렵 부산항에서 외교 사무와 사법 사무까지도 도맡고 있던 동래감리서에 수색원을 냈다. 그 위에 헌트는 부산 해관장으로서만이 아니라 외교관 특권까지 내세워 한시 바삐 딸을 찾아 내도록 압력을 가해 왔다. 따라서 동래 감리서 소속 포졸들은 영국인 아가씨를 찾기에 모두가 벌집 쑤신 듯이 법석을 떨며 사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권순도가 영국 아가씨를 고향인 양산 상북면 대석리에 데리고 들어가자 먼저 소동이 벌어진 것은 권순도의 집안이었다. 아들이 며느릿감이라고 데리고 온 노랑머리의 영국 아가씨인데다 홑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온 집안이 야단법석이 나 있던 참에, 뒤쫓아 온 동래감리서 포졸들이 들이닥쳐 불난 데 부채질하는 판국이 돼 버렸다.

동래감리서 포졸들은 권순도를 밧줄로 꽁꽁 묶어 끌고 가는 한편으로 영국 아가씨는 가마에 태워 대석리를 떠났다. 대석리 사람들은 오랏줄에 꽁꽁 묶여 압송돼 가는 권순도를 바라보며 양색시를 며느리감으로 데리고 온것을 알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권순도는 영주동에 있던 부산 감영(교도소)에 갇힌 몸이 됐고, 헌트의 딸은 헌트와 그 아내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부산 해관장 관사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헌트의 외동딸은 식음을 전폐하고 권순도를 그리며 몸부림을 치는 나날을 보냈다.
 
헌트는 소중한 외동딸을 되찾기는 했지만 부모의 말조차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고 「형편없는 미개국 청년」만 그리고 있는 딸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창피를 무릅쓰고 영국 공사의 주선으로 홍콩해관으로 전근 가 버렸다.

그리운 한국인 청년과 생이별하고 아버지를 따라 홍콩으로 건너간 영국 아가씨는 그곳에서 그해 아들을 낳았다. 이 소식은 편지로 곧 권순도에게 날라 들었다. 이때부터 권순도와 영국 아가씨 사이에는 애틋한 사랑 편지가 한 달에 한 번씩 오감에 따라 아들이 탐스럽게 자라 간다는 소식도 권순도에게 전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딸과 권순도를 떼어 놓은 것을 미안해하던 헌트는 놀랍도록 큰 돈을 부쳐져 왔다. 권순도는 사랑하였던 애인의 아버지가 보내온 돈을 자본으로 오늘의 동광동 3가 번화가에 포목상을 차렸다. 이 가게는 「권순도 상점」이라고 불려 크게 이름났었다고 한다.
 
이렇게하여 영국인 해관장 헌트의 딸과 조선의 청년 권순도와 애절한 러브스토리는 생이별로 각자의 길로 가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 확인되지 않은 후일담이 하나 있다. 8ㆍ15 해방 직후 미국 하와이에서 한국인 동포들이 모임을 하고 있던 자리에 영국인 장교 한 사람이 나타나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갔다는 것이다.

제 어머니는 영국 사람이지만 아버지는 부산에 살고 있던 한국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진에서조차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인 여러분, 행운이 있으시길 빕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한국인 여러분.」

 

순도 100% 한국청년 - 세기의 사랑1.jpg

              극단 가마골이 무대에 올린 연극 "순도 100% 한국 청년" 주인공

권순도는 중구청의 인물로 선정되어 국경을 초월한 러브 스토리를 소개되고 있으며, 부산지역 영화인들은 2000년 초 'Liz Hunt'(감독 허종식·45분)라는 영화로 제작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했다. 극단 가마골은 2005년 11월 18일 부산 APEC 개최를 맞이하여 부산 문화를 알리는 행사로<순도 100% 한국 청년> 이 선정되어 무대에 올렸다.
 
홍콩으로 건너간 영국 아가씨에 관해 더 이상 뒷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은데 비해 부산에서 새로운 삶을 펼쳤던 권순도의 이야기는 상세하게 전해져 오는데 다음과 같다.
 
권순도상점은 장사가 잘 됨에따라 권순도는 부산 상무사(商務社)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상무사는 1899년 상업과 국제무역, 기타 상행위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던 기관으로 전국 보부상단의 업무도 관장하였다.

상무사의 회원들은 면암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에 유배되었을 때 그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대마도를 오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대우를 잘해 보냈다. 부산 상무사 사무장 김영규는 대마도에서 단식 투쟁 끝에 순국한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의 부고를 듣고 모든 사원과 함께 사무를 철폐하고 망곡한 다음, 큰 글씨로 ‘면암 최선생 호상소(勉庵 崔先生 護喪所)’라 써서 문 위에 걸었다. 그리고 상무사 사원(社員)을 업무를 나누어 상구(喪具)를 준비하였다. 이 때 권순도(權順度)는 유진각(俞鎭珏), 이유명(李裕明)과 함께 호상(護喪)을 맡았다.
 
 

의충단-권순도 세운 최익현 추모소 홍룡사 입구 홍룡폭포 아래.jpg
바위에 새긴  ‘면암 최선생 춘추대의 일월고충(勉庵 崔先生 春秋大義 日月高忠)(사진출처: 한국향토문화대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망하자 권순도는 부산의 포목 상점을 그만두고 고향인 양산 상북면 대석리로 돌아갔다. 낙향한 권순도는 그가 숭배한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을 추모하는 일을 하였다. 의충단을 쌓고 ‘면암 최선생 춘추대의 일월고충(勉庵 崔先生 春秋大義 日月高忠)’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겼다. 이곳을 추모소로 삼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항일사상을 은연중에 불어넣었다. 권순도는 양산군수가 찾아들 때면 영국식 프록코트로 갈아입고 접대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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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도가 지은 정자가 오래됨에 따라 새로 지은 가홍정() (사진출처: 시니어기자 유혜경)

 

권순도는 고향 친구인 석은() 이재영()과 더불어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홍류동 지역에 가홍정()이란 정자를 지어 경전을 읽고 시를 읊으며 살았다. 보통학교 어린이들이 이곳에 소풍 올 적마다 밥과 떡을 지어 배불리 먹였다고 한다. 또한 홍룡폭포를 알리기 위해 길목에 ‘세계인 환영(世界人 歡迎)’, ‘제일강산(第一江山)’, 상용추(上龍湫)란 석비(石碑)를 세우고 바위에 글자를 새겼다. 영국인 해관장인 헌트의 딸을 사랑한 국제적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답게 홍룡폭포를 안내하는 비석에 세계인 환영이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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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룡폭포를 알리기 위해 길목에 세운 ‘세계인 환영(世界人 歡迎)’ 석비(石碑) (사진출처: 시니어기자 유혜경)

권순도가 만년에 읊은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하여진다. “계곡 위의 하늘은 푸르고 폭포의 물빛은 더욱 희구나/ 까마득한 옛날 누가 땅의 영혼을 일깨웠는가?/ 계곡의 곳곳마다 큰 바윗돌이 숨겨져 있어/ 험준한 계곡 첩첩이 둘러싼 양산은 나라의 빗장이라/ 이렇듯 굳건한 기둥을 세운 자연의 솜씨여!/ 그를 읊조리는 내 마음도 깨어나누나/ 시를 아는 친구들이 멀리서 찾아와/ 흔연히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마치 군자의 향기가 도는 듯하구나( ).”

 

이때의 권순도는 부산에서 포목상을 기반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으며 그만큼 사회적인 명사가 돼 있었다. 이러던 권순도는 여생을 고향땅에서 즐기다가 1934년 1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서 인생의 후반을 지내면서 면암 최익현의 추모활동과 친구 이재영()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던 권순도에 대해 양산에서는 지사적인 인물로 표현하여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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