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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도장 "국새(國璽)"

 
나라의 도장 "국새(國璽)"
 

국권의 상징으로 국가 문서에 사용되던 도장을 우리는 “국새(國璽)”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국새는 언제부터 썼을까요?. 《삼국사기》에는 “신라 남해왕 16년(서기 19)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濊) 임금의 도장을 주워 임금께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도장은 실물이 전해지지 않지만, 예맥(濊貊)은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의 뿌리임을 생각하면 적어도 문헌상에 보이는 우리 겨레 국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그 뒤 고구려에서도 국새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차대왕(次大王)이 시해되자 좌보(左輔, 고구려 초기에, 병마'兵馬'를 총괄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어지류 가 사람을 보내서 임금의 동생을 모셔 오게 했다. 그가 오자 어지류는 꿇어 앉아 국새(國璽)를 바치며 말하기를, ‘임금이 불행히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이 있으나 능히 나라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무릇 인심은 어진이에게 돌아가므로 삼가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니 청컨대 보위에 오르소서.’하였다.”


이를 보면 새로운 임금을 맞이할 때 고구려 신하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국새를 올리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명과 청으로부터 받은 공식적 국새는 모두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으로 ‘인(印)’자를 새겼고, 손잡이의 모양은 신하의 도리를 상징하는 거북이였다. 그러다 1897년 고종이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황제국가에 걸맞은 <대한국새(大韓國璽)>를 새겼고, 그밖에 <황제시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등을 새겨 쓰게 된다. 고종때야말로 제대로 된 나라의 위상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국가상징이란 국제사회에 한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자기 나라를 잘 알릴 수 있는 내용을 그림·문자·도형 등으로 나타낸 공식적인 징표로서 국민적 자긍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국가상징은 어느 한 순간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동안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나라의 역사·문화·사상이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국가상징은 연령·신분의 고하, 빈부의 격차에 불구하고 그 나라 국민이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며 누구나 공감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영속적인 가치를 갖는다.
 
국가 상징의 기능
국가상징은 국제사회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표면적 기능 외에도 사회적·도덕적 혼란을 예방하고 국민통합을 유도하는 중요한 내면적 기능을 갖고 있다. 국가상징이 추구하는 목표인 국민통합은 강제적 통합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여 화합과 조화를 기초로 한 규범적 사회통합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의 도덕적 혼란을 방지하고 문화의 지속성을 보장함으로써 국가의 영속성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국가 상징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세계의 각 나라마다 그 역사와 문화를 기초로 한 국기·국가·국화 등을 국가상징으로 정하여 대내적으로는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대외적으로는 나라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가상징으로는 태극기(국기), 애국가(국가), 무궁화(국화), 국새(나라도장), 나라문장 등이 있다.
여기에서 나라의 도장인 "국새(國璽)"에 대하여 알아본다.
 
국새의 명칭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印章)의 명칭은 새(璽), 보(寶), 어보(御寶), 어새(御璽), 옥새(玉璽), 국새(國璽)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져 왔다. 여기서 새(璽), 보(寶)는 나라의 인장(印章)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어보(御寶), 어새(御璽)는 시호, 존호 등을 새긴 왕실의 인장을 뜻하는 말이다. 옥새(玉璽)는 재질이 옥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대적 의미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의 이름으로는 국새(國璽)라고 표기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국새의 의미
국새는 국사(國事)에 사용되는 관인으로서 나라의 중요문서에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국새는 국가 권위를 상징하며, 그 나라의 시대성과 국력, 문화를 반영하는 상징물이다. 국권의 상징인 국새가 가진 불가침의 권위와 신성성은 다소 퇴색하였으나, 오늘날에도 국새의 상징적 의미는 그대로 존재한다. 정부에서는 헌법 개정 공포문의 전문, 대통령이 임용하는 국가공무원의 임명장, 외교문서, 훈장증 등 국가 중요문서에 지금도 국새를 사용하고 있다. 국새는 동양(한국, 일본 등)에서는 인장의 형태로, 서양(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압인의 형태로 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사용처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유사하다.
 
대한민국 국새 변천 현황
제1대 국새(1949. 5. 5. ~ 1962.12.31.)
제1대 국새
인영(印影)인뉴(印紐,손잡이)
제1대 국새.gif
알수 없음
  • 크 기方2寸 (6.06×6.06㎝)
  • 재질,중량
  • 규 정국새규정(대통령령 제83호)〔’49. 5. 5.〕
  • 관리기관①총무처 ②국무원 사무국 ③국무원 사무처 ④내각사무처
제2대 국새(1963. 1. 1. ~ 1999. 1.31.)
제2대 국새
인영(印影)인뉴(印紐,손잡이)
 
제2대 국새.gif
제2대 국새 인뉴.gif
  • 크 기正方形 (7×7㎝)
  • 재질,중량銀, 2.0㎏
  • 규 정국새규정(각령 제643호)〔’62. 4.10.〕
  • 관리기관①내각사무처 ②총무처
제3대 국새(1999. 2. 1. ~ 2008. 2.21. / 2010.11.30. ~ 2011.10.24.)
제3대 국새
인영(印影)인뉴(印紐,손잡이)
제3대 국새.gif
 
제3대 국새 인뉴.gif
  • 크 기正方形 (10.1×10.1㎝)
  • 재질,중량金합금, 2.15㎏
  • 규 정국새규정(대통령령 제16096호)〔’99. 2. 1.〕
  • 관리기관행정자치부
제4대 국새(2008. 2.22. ~ 2010.11.29.)
제4대 국새
인영(印影)인뉴(印紐,손잡이)
제4대 국새.gif
제4대 국새 인뉴.gif
  • 크 기正方形 (9.9×9.9㎝)
  • 재질,중량金합금, 2.9㎏
  • 규 정국새규정(대통령령 제20641호) 〔’08. 2.22.〕
  • 관리기관①행정자치부 ②행정안전부
제5대 국새(2011.10.25. ~ )
제5대 국새
인영(印影)인뉴(印紐,손잡이)
제5대 국새.gif
제5대 국새 인뉴.gif
 
불량 국새 논란을 불러온 제4대 국새(國璽)가 조만간 폐기돼 국가기록원 서고로 들어간다. 나라 도장인 국새가 제작 방법 등이 허위로 드러나면서 국새는 만신창이가 됐고, 국새 제작을 총지휘했던 민홍규씨는 사기죄로 감방에 수감된 상태에서 새 국새 제작을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4대국새는 전대미문의 불량 국새로 판명되어 사회적인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의 경향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인용하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새로 4대 국새는 제작단장 민홍규씨가 전통기법으로 만들지 않는데다 여기저기 민씨의 이름 등 개인적인 문구가 적혀 있는 사실이 드러나 국가 상징물로서 권위를 상실해 폐기가 결정됐다. 4대 국새는 조만간 경기도 성남시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의 행정박물 보존서고에 보관된다.

4대 국새가 장인 민홍규씨의 제작 사기극으로 막을 내린 후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국새를 정밀 분석하면서 드러난 실상은 놀라웠다.

국새에 새겨진 ㄴ‘대한민국’ 글자 중 ‘대’ 자의 디귿 사이에서 민씨의 한문 이름과 제작 연도인 ‘二千七年 閔弘圭作(이천칠년 민홍규작)’이 발견됐다.

깜짝 놀란 경찰이 접사 사진을 찍어가며 국새를 정밀 분석하자 국새 봉황의 턱 부분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새겨진 민씨의 성 ‘민(閔)’ 자도 드러났다.

이를 놓고 ‘민씨가 국새의 가장 윗부분에 자신의 성을 새겨 놓아 대한민국을 내려다보려 했다’, 국새를 찍을 때마다 국새가 민씨에게 인사하게 했다‘는 등의 재미있는 해석이 나돌기도 했다.

민씨는 시방서에 있지도 않은 이상한 문구들을 국새의 훤히 보이는 곳 여기저기에 새겨 놓기도 했다.

봉황 꼬리 안쪽에는 세로로 ’태평년(太平年)‘, ’만세새(萬歲璽)‘라고 썼고 손잡이 받침대 부위에는 ’太平萬年(태평만년)‘이라는 글씨를 적었다.(2010년 11월23일자 경향신문 기사 인용)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제5대 국새"에 대하여 알아보자.
제5대 국새는 2010년 9월부터 전문가 간담회, 국민 여론조사, 공청회 등 전문가 및 국민의 폭넓은 의견을 수렴하고, 2010년 11월 각계 전문가로 국새 제작위원회를 구성하여 국새 제작에 들어가 2011년 9월 제작을 완료하고 2011년 10월 25일부터 사용하고 있다. 국새는 가로, 세로 10.4cm 정사각형이며 무게는 3.38kg으로 국새의 존엄성과 권위·위엄을 높이기 위하여 기존의 국새보다 크게 제작하였다. 국새 내부를 비우고 인뉴와 인문을 분리하지 않고 한 번에 주조하는 중공 일체형(中空一體型)으로 제작하였다. 국새의 재질은 금, 은 구리, 아연, 이리듐으로 구성하였으며, 희귀 금속인 이리듐을 사용함으로써 합금 성분 간의 조직을 치밀하게 하여 균열을 방지하였다. 인문(印文)은 ‘대한민국’을 훈민정음체로 각인하였다. 인뉴(印紐, 손잡이)는 쌍봉(雙鳳)이 앉아있는 자세로 날개와 꼬리 부분은 역동적이며 봉황의 등 위로 활짝 핀 무궁화를 표현하고 있다.
 
제5대 국새 인뉴1.gif
제5대 국새 인뉴(손잡이)
 
제5대 국새 인영1.gif
제5대 국새 인영
 

제5대 국새 백서다운로드

 
국새의 사용(국새규정 제6조)
  • 1. 헌법 개정 공포문의 전문
  • 2. 대통령이 임용하는 국가공무원의 임명장 및 ‘공무원임용령’ 제5조 제1항에 따라 대통령이 소속 장관에게 임용권을 위임한 공무원의 임명장
  • 3. 상훈법 제9조, 제19조 및 동법 시행령 제17조의 규정에 의한 훈장증과 포장증
  • 4. 대통령 명의의 비준서 등 외교부의 날인을 요청하는 외교문서
  • 5. 기타 행정자치부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문서
그리고 국새 규정의 상세내용은 아래 글자를 클릭하면 나온다.
국새규정
위에 소개된 내용과 같이 현재의 국새는 제4대 불량 국새의 파동을 거치면서 중의를 모아 제작된 것이다. 최근 들어와 세월호 사건, 사드배치 건 등으로 사회적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이 국새를 사용할 때마다 사회의 도덕적 혼란을 방지하고 문화의 지속성을 보장함으로써 국가의 영속성을 도모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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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할 우리의 꽃 섬말나리

지켜야할 우리의 꽃 섬말나리
조선시대 독도를 지킨 안용복(安龍福)에 관한 글을 조사하던 중 일본 사이트에서 '다케시마 나리'란 꽃을 발견하고 이를 확인해보니 울릉도 자생종인 우리의 꽃 섬말나리였다.

울릉군에 유일한 평지인 나리마을은 예로부터 나리꽃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데 울릉 ‘섬말나리’는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조선 고종 때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지면서 개척민들이 나리 분지에 정착해 춘궁기 때 나리 뿌리를 음식을 해먹으면서 배고품을 달래기도 했던 구황작물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지역이름이 ‘나리골’ 즉 현재 나리분지로 불리게 되었다.
7월 중순은 울릉도 섬말나리가 해발 900미터인 나리분지와 성인봉 일대에 노란 꽃잎 6개를 활짝 펴보이는 시기다. 이러한 섬말나리는 백합과 식물 연구자들 사이에 유명한 꽃이 된 지 오래다.
최근 들어 불법 채취가 늘고 야생 유해조수에 의해 개체수가 감소해 1997년 산림청 희귀·멸종위기 식물 제37호로 지정했다. 환경부는 2007년 경북 울릉군 나리마을 자연생태복원 우수마을로 선정됐다. 또한 2013년 슬로푸드국제본부가 음식문화유산의 소멸을 막고 세계음식에 관심을 두자는 취지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경북 울릉의 ‘칡소’와 ‘섬말나리’ 등 5개 품목을 맛의 방주로 (Ark of Taste) 지정하였다. 이처럼 멸종 위기의 섬말나리의 보호와 자국내외적으로 자연생태복원을 추진하고있는 셈이다.
아울러 ​울릉군은 섬말나리를 관상용, 약용 외에 전통음식 복원 차원에서 산채비빔밥에 뿌리와 어린 순을 섞는 음식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섬말나리5.jpg
울릉도가 원산지인 섬말나리의 봉오리
 
섬말나리꽃0.jpg
섬멀나리의 피어나는 모습
 
학명은 Lilium hamsonii LEICHTL인 섬말나라는 울릉도에서 자라는 다년초이다. '섬+말+나리'로 이루어진 말로서 '말'은 초형이나 키가 큰데서 유래된다.
인경(鱗莖 : 덩이뿌리)은 달걀모양이고 약간 붉은 빛이 돌며 간혹 비늘 모양의 조각에 관절이 있다.원대는 높이 50∼100㎝로서 몇 층의 돌려나기 한 잎과 작은 어긋나기 한 잎이 있다. 돌려나기 한 잎은 6∼10개씩 달리고 길이 10∼18㎝, 너비 2∼4㎝로서 도피침형()이다. 어긋나기 한 잎은 돌려나기 한 잎과 크기와 형태가 비슷하며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져서 포와 연결된다.
 
섬말나리꽃4.jpg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활짝핀 섬말나리
 
섬말나리-잎- 돌려나기.jpg
섬말나리의 특징인 돌려나기 잎 모양
 
꽃은 6∼7월에 피고 원줄기 끝과 가지 끝에 1개씩 달리며 전체 4∼12개의 꽃이 밑을 향하여 핀다. 화피열편은 6개이며 두껍고 피침형() 또는 도피침형이며 길이 3∼4㎝로서 붉은 빛이 도는 황색이다. 꽃덮이는 뒤로 말리고 검은 점이 흩어져 있다. 꿀샘에 털이 없고 씨방은 암술대보다 짧으며 삭과()는 지름 2.5∼3.5㎝로서 거의 둥글다. 열매는 삭과(튀는열매)로 익으면 과피가 말라 쪼개지면서 씨를 퍼뜨리는 여러 개의 씨방으로 된 열매이다.

 
섬말나리에 대해서 육종의 선진국인 네덜란드는 수년 전 교배를 시작했고, 특히 일본은 이 식물에 ‘다케시마 유리’(독도 백합이란 뜻)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본이 독도에 자생하지도 않는 꽃에 다케시마를 붙인 것에는 저의가 있게 마련이다. 섬말나리는 유전자원 보호는 물론 독도 주권 차원에서도 선제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 할 수 있다.


 

竹島百合農場1.jpg

일본 나가노현의 섬말나리 재배농장

 

竹島白合0.jpg

일본에서 핀 섬말나리

 

​일본에 ‘다케시마 나리’라는 꽃이 있는데 즉, 독도 나리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 70년대 울릉도에서 이 꽃을 몰래 가져간 후, 마치 자기네들 꽃인냥 '다케시마 나리'라며 전 세계적으로 홍보를 하면서 판매도 하고 있다.독도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 같은 명칭을 쓰면서 마치 독도에서 서식하는 것처럼 버젓이 이름 붙이고 독도 영유권 주장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다케시마 나리의 실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울릉도에서만 자생하고 있는 백합과의 ‘섬말나리’꽃이다. 기가 찰 노릇으로 일본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행동이다.
 
태고의 신비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특이한 식물이 많이 있는 울릉도. 나무종류 섬단풍, 섬벚나무,너도밤나무,우산고로쇠,섬피나무등 목본19종 섬말나리를 비롯,섬기린초,섬노르귀,섬바디,섬백리향,울릉국화,섬초롱꽃,큰노르귀 등  초본류 22종  수목 194,초본류 456등 650여종이 자생 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잘지켜 나가야할 우리의 중한 자산이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꽃 울릉도 섬말나리의 꽃은 관상용으로, 어린싹, 비늘줄기는 식용으로, 비늘줄기는 약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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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포의 봉수 응봉봉수대

다대포의 봉수 응봉봉수대
-역사속에 담긴 힐링 스토리텔링3


윤공단을 답사 후 뒷편에 있는 두송산(=아미산)에 있는 응봉봉수대로 이동하였다. 응봉 봉수대로 가는 도중에 아미산일출전망대에 올라 주변을 둘러 보았고 요왕대신을 모신 약수터에서  시원한 약수물로 목을 적셨다. 응봉봉수대는 다대포 동북쪽 아미산(두송산)의 해발 해발 234m 지점에 위치하여 높이는 비록 낮지만 바로 아래에서 올라가아야 하므로 경사도가 높아 숨이 턱에 차오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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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국이 피어있는 응봉수대대 초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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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피어있는 노란꽃??

아미산일출전망대-DSCN1733.JPG
아미산일출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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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산신을 모셔놓은 약수터

윤공단을 답사 후 인근 두송산에 있는 응봉봉수대로 이동하였다. 응봉 봉수대로 가는 도중에 아미산일출전망대에 올라 주변을 둘러 보았고 요왕대신을 모신 약수터에서  시원한 약수물로 목을 적셨다. 응봉봉수대는 다대포 동북쪽 아미산(두송산)의 해발 해발 234m 지점에 위치하여 높이는 비록 낮지만 바로 아래에서 올라가아야 하므로 경사도가 높아 숨이 턱에 차오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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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가 서식하여 응봉이라 불렸던 응봉봉수대

응봉 봉수대의 위치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3에는 “동쪽으로 오해야항에 응하고, 서쪽으로 김해의 성화례산(省火禮山)과 응한다.”라고 적혀 있으며, 『동래부지()』에는 “응봉은 동래부 남 50리에 있으며 다대진 북쪽 두송산이다.”라고 적혀 있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輿)』에는 황령산·계명산·간비오산·오해야항 등 4곳의 봉수대만 기록되어 있으나,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輿)』권23에는 “동쪽으로 오해야항에 응하고, 서쪽으로 김해의 성화례산(省火禮山)과 응한다.”라고 적혀 있으며, 『동래부지()』에는 “응봉은 동래부 남 50리에 있으며 다대진 북쪽 두송산이다.”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그 사이에 응봉 봉수가 신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응봉 봉수대는 임진왜란 시기를 포함하여 줄곧 이용되었으며, 갑신정변 이후 1896년(고종 35)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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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봉봉수대-동행한 답사자들은 서로 기념사진을 찍어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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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봉봉수대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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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봉수 연결경로도

봉수대의 종류는 경봉수, 연변 봉수, 내지 봉수 등 세 가지가 있는데, 경봉수는 서울의 목멱산[남산]에 설치된 것으로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직결되는 중앙 봉수를 말하는 것이며 다섯 개의 화덕이 있었다. 연변 봉수는 국경선이나 바닷가 근처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한 봉수를 말한다. 내지 봉수는 경봉수와 연변 봉수를 연결하는 중간 봉수로, 직선 봉수[직봉]와 간선 봉수[간봉]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봉수 전달 경로 5개 중 응봉 봉수대는 제2경로의 시발 지점으로, 다대포~양산~경주~영천~안동~단양~충주~광주~서울 남산으로 전달되었다.

대략 2∼30리의 거리를 두고 후망(侯望)의 요지가 되는 산봉우리에 봉수대(烽燧臺 : 烽火臺, 煙臺)를 두어 밤에는 횃불을 밝히고, 낮에는 연기를 내어 인근의 봉수대에 연락했다. 평시에는 일거(一炬, 낮 : 一煙), 적이 나타나면 2炬(二煙),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炬(三煙), 경계를 침범하면 4炬(四煙), 적과 접전(接戰)하면 5炬(五煙)로 차례로 서울까지 연락하였다.

 

위치로 보아 군사적 전략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잘 알려 주는 관방 시설이라 평가할 수 있다. 다대포와 서평포진을 내려다보며 낙동강 하구 일대와 몰운대 앞바다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으며, 왜선()의 동향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해망()의 요지이다. 인근의 가덕도 연대산 봉수대와 생곡동 성화례산 봉수대 및 구봉 봉수대와 교신하며 국토 최첨단에 위치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쾌청한 날이면 거제도 연안과 대마도까지 보이는 연변 봉수대이다.


봉수대는 하급 장교인 오장()과 봉수군인 봉졸이 배치되어 있었다. 오장은 봉수군과 같이 생활하면서 봉수대의 이상 유무 등을 확인하여 수령이나 진장()에게 보고하였다. 응봉 봉수대는 도별장 1명과 그 아래에 별장 6명, 감고 1명, 봉군 100명을 두었고 다대진()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연대()의 서쪽 입구 아래에 약간의 평지가 조성되어 있고, 주변에서 기와가 수습된 것으로 보아 봉수군이 기거하였던 가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응봉봉수대초기.jpg

초기 정비공사 봉수자리를 표시한 모습

1976년 봉수대 복원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석기류가 발견되었다. 출토 유물은 편평양인석부 2점, 편평편인석부 4점, 석착 1점, 숫돌 2점으로 신석기 시대 분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응봉봉수대전망3.jpg

응봉봉수대애서 내려단 풍광

 

응봉봉수대전망5.jpg

응봉봉수대에서의 전망 안내판

다대포에는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다대다대팔경(多大八景)이 전해오는데 일경이 아미반월(蛾嵋半月)"이라 하여 아미산(蛾嵋山) 산위에 걸려있는 달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 깊은곳에 잔잔한 물결같은 정겨움이 느껴질 정도로 광경이 평화로웠음 나타내고 있다.

 

야밤에 볼 수 있는 "아미반월" 대신에 응봉봉수대에서 바닷가를 내려다 보는 풍광도 만만잖다. 왼쪽부터 두송반도와 솔섬, 고래섬, 화손대, 나무섬,쥐섬, 몰운대가 펼쳐져 있으며 쾌청한 날이면 거제도 연안과 멀리 대마도까지 보일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2010년 1월 1일에는 사하구청이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봉수대 모형을 석축 위에 설치하였다. 복원된 응봉 봉수대는 기단, 화구, 봉수 1개[직경 3.4~ 2.8m, 높이 3.5m]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응봉봉수대와 같이 봉수대를 복원한 타 지역에서도 예산적인 이유로 인해 1개만 복원해 놓고 있다. 이 경우 5炬(五煙)으로 인접 봉수대로 알렸음을 전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최소한 안내판에서나마 5개의 봉수를 표시하였으면 교육적인 측면에서 훨씬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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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 설움 씻어준 최초의 민권운동가 한광국

천민 설움 씻어준 최초의 민권운동가 한광국
-역사속에 담긴 힐링 스토리텔링2

 
윤공단의 입구를 들어서면 계단 오른 쪽에 다대첨사 관찰사 등 다대진(지금의 사하) 지역에 혜택을 베푼 인물들의 은덕을 칭송하는 선정비(善政碑)를 한 곳에 모아 두었다.

대부분 군역감면 등의 시혜내용을 담고 있으며 혜택을 받은 군졸(軍卒), 군뢰(軍牢), 사령(使領) 등이 건립했다. 이 비석은 사람의 통행이 많은 주요 도로변에 세워졌으나 1970년대 이후 도로확장 등 도시계획 사업으로 인해 원래 위치에 보존하기가 어려워 이곳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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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진 선정비(善政碑)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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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진 선정비(善政碑)군2

선정비의 주인공을 보면
첨사(僉使) 이승운(李乘運)의 만고불망비(萬古不忘碑).
첨사(僉使) 이동식(李東植)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관찰사(觀察使) 이경재(李景在)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첨사(僉使) 이동식(李東植)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관찰사(觀察使) 홍종영(洪鐘英)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진리(鎭吏) 한광국(韓光國)의 구폐불망비(球弊不忘碑)
관찰사(觀察使) 서헌순(徐憲淳)의 만고불망비(萬古不忘碑)
병조판서(兵曺判書) 민응식(閔應植)의 만세송덕비(萬世頌德碑)
첨사(僉使) 정제빈(鄭濟斌)의 송덕불망비(頌德不忘碑)
첨사(僉使) 김정근(金炡根)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겸목관(兼牧官) 이득형(李得馨)의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청덕선진비(淸德善賑碑)
겸감목관(兼監牧官) 고도성(高道成) 비(碑) 등 열세 개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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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한광국 구패불망비-관리요원이 선정비 주변의 풀을 뽑고있다.

이들 비석 중 "진리(鎭吏) 한광국(韓光國)의 구폐불망비(球弊不忘碑)"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다대진은 다대포에 주둔했던 조선시대 해군부대로 정3품 첨사가 다스렸다. 한광국은 영조 때 활동했던 다대포 사람이다. 과거를 보지 않아 중앙관직에는 나가지 않은 관계로 생몰(生沒)과 활동사항 등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한학에 조예가 깊어 지방 관리로 일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대진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로 일명 이서 (吏胥)·이속(吏屬)·서리(胥吏)로 불렸던 아전(衙前)이었다
 
한광국불망비는 2기가 있는데 하나는 다대포 윤공단 경내에 있는 진리 한광국 구폐불망비(1861년)이고, 또 하나는 윤공단 맞은편 원불교 다대교당 뜰에 있다. 절충 한공광국 구폐불망비(1908년)이다. 진리(鎭吏)는 다대진 아전을 말하고, 구폐는 폐단을 바로잡음을 뜻한다. 절충은 정3품 무신 당상관인데 다대진 아전을 정3품 절충으로 격상했을만큼 고마운 마음의 컸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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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한광국 구폐불망비(鎭吏韓光國捄弊不忘碑)

1861년에 세워진 구폐불망비의 크기는 높이 98㎝, 너비 34㎝, 두께 13㎝이다. 대좌는 없고 비석의 상부는 둥글다. 비의 앞면에는 ‘진리 한광국 구폐불망비(鎭吏韓光國捄弊不忘碑)’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뒷면 음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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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 한광국 구폐불망비(鎭吏韓光國捄弊不忘碑) 음기

“세 가지 썩지 않는 것 가운데 공로를 이루는 것과 덕을 베푸는 것이 그 둘을 차지하지만, 지난날 공로와 덕이 있었는데도 정당한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 고을에는 미역밭이 있는데 이는 실로 부주(涪州)의 여지(荔枝) 공납……과 같은 병폐인지라, 이 때문에 포구의 여러 민가들이 거의 다 없어져 버렸다. 공이 이것을 병폐로 여겨 감영과 서울 관청에 진정하면서, 여러 번 빈사할 지경을 겪으면서도 비로소 조정의 허가를 받게 되었으니, 이때가 건륭 28년[1763] 가을 8월이었다.
[三不朽 立功立德 居其二 疇有功德而不酬 玆州之有藿田 固非連□□珠之往復 而實是涪荔武芽之瘡痏 數些浦戶 以此幾無 公病之 呈營呈京司 累濱死境 始蒙朝家允旨 乃乾隆二十八年秋八月也]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은 것이 그 얼마인가? 우리 다대진의 관문 방비도 예로부터 후망(候望)하기 힘든 폐단이 있었는데, 이것도 모두 고쳐졌다. 그러므로 공의 공로와 덕은 산수(山水) 간에 가득하니 아마 현한(峴漢)의 비석…… 보다 더 오래갈 것이다. 숭정 기원 후 네 번째 신유년[1861] 8월 포구 주민들이 세우다. 이원복·왕선웅·이한동·김정지·김시천·김일원·권윤·김작사·김동완, 화주 최상운·김정원·전인복

[至今受賜 爲如何哉 本鎭關防 古有候望之弊 幷此俱革 然則公之功德 在山在水間 殆壽於峴漢之碑也夫 崇禎紀元後四辛酉八月日浦民立 李元福 王先雄 李漢東 金正之 金時天 金一元 權允 金作沙 金東完 化主崔尙運 金正元 田仁福].”

 

또한 다대포 포민(浦民)들은 천민이었다. 조선시대 천역(賤役)이란 관청에서 허드레 일을 하는 하급 노비, 형을 집행하는 하급 병사, 지방관청에서 잔일을 하는 하급 노비, 봉수대의 봉군, 역참의 역졸, 조운창의 수군, 수영의 수군 등의 7가지 직업을 천역이라 하고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칠반천역(七般賤役)이라고 했다. 천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정월 초하루 아침에, 자신이 천직 종사자임을 표시(짚으로 만든 허리띠와 머리띠)를 하고 관아에 모여 고을 사또에게 절(망배)을 올려야 했다. 천역(賤役)인 사람들도 조상제사는 지내야 했는데 정월 초하루에는 사또에게 예를 올려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신정 하루 전인 섣달그믐에 조상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포민들에 대한 신분 차별, 인간 차별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한 한광국은 다대포에서 한양까지 그 먼 거리를 '아픈 몸을 이끌고 수차례' 찾아 부당성을 진정했다. 다대진부터 구폐하라는 조정 윤허가 떨어지자 봇물 터지듯 전국 포민이 면천 혜택을 받았다. 천민임을 나타내는 짚 머리띠며 허리띠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신정다례를 섣달그믐에 지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한광국의 행동은 시대를 앞서간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운동가라고 부르기 충분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남해안 항, 포구 일부 어민들이 그의 묘지 앞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61년에 '진리 한광국 구폐불망비(鎭吏韓光國 救弊不忘碑)'를 세웠다. 음기의 말미에 세운 연도는 숭정(崇禎)기원 후 네 번째 신유년(1861) 8월로 1763년 가을에 조정으로부터 윤허가 떨어진 지 약100년 후다.

 

이처럼 다대진 아전 한광국을 기리는 진리 한광국 구폐불망비(鎭吏韓光國捄弊不忘碑)는 조선 후기 천민 신분 이었던 포구어민을 평민으로 격상시키고 정월초하루에 신정다례를 지내게 하였다. 아울러 포구 주민들의 불평이 높았던 미역밭의 면세를 실현하는 등 곽전(藿田)공납에 관해 알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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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당 뒤편에 위치한 절충 한광국 구폐불망비(折衝韓光國 弊不忘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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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충 한광국 구폐불망비(折衝韓光國 弊不忘碑)

한광국으로 인해 은혜를 입은 전국 각 항, 포구 어민 모두가 입을 모아 “일부 어민들만의 일이라고 할 수 없다”며, 엽전 한닙씩 각출하여 다대포 입구(다대포 현대아파트 길 건너편 해송아파트 자리)에 비각을 짓고 공덕비를 1908년에 세웠으며, 비문에는 “절충 한광국 구폐불망비(折衝韓光國 弊不忘碑)”라 했고, 뒷면에는 “융희 2년 무신 4월 각 포민 개립”이라 새겨져있다. 전국의 포민들이 자발적으로 비석을 세웠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지못해 세웠을 귀부이수(龜趺螭首:거북 모양을 한 비석 받침돌과 비석 위에 용의 모양을 새긴 돌) 송덕비보다 방부원수(方趺圓首: 네모 받침에 둥근 머리)구조의 한광국불망비가 더 품격이 있어 보이는 이유다. 절충 한광국 구폐불망비를 세운 연도는 융희 2년(순종2, 1908)이다.

한광국의 묘소 앞 언덕(지금의 해송아파트 자리)에 불망비를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묘지와 불망비는 도로학장공사와 아파트공사로 흔적도 남아있지 않으며, 묘지에 있던 진리 한광국 구폐불망비(鎭吏韓光國捄弊不忘碑)는 마땅히 둘 곳이 없어 방치되었다가 사하구 다대동 산24  현 윤공단 옆 ‘다대고을 첨사 윤덕비’옆에 놓여 있으며, 1908년에 세운 절충 한광국 구폐불망비(折衝韓光國 弊不忘碑)는 비각도 없이 원불교 교당 뒤편 뜰로 옮겨지고 청주 한 씨 다대포 10대 후손들이 살피고 있다

 

섣달그믐에 조상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일부지만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지금까지도 섣달그믐 신정다례 풍습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 이유를 모른 채 ‘우리 집안은 옛날부터 그렇게 지내오고 있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1763년 한광국의 힘겨운 상소에 의해 갯가 어민들도 정월 초하루 아침에 신정다례를 지내도록 윤허를 받았다. 아울러 이를 기리기 위해 혜택을 입은 전국 포민들이 세웠던 비석은 다대포에 오늘까지 자리잡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구 폐습을 폐기하고 앞으로는 정월 초하루에 올바른 신정다례를 지내는 것이 올바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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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공단과 풍양 조씨 3대의 인연

  
윤공단과 풍양 조씨 3대의 인연
 -역사속에 담긴 힐링 스토리텔링1

지난 6월 7일부터 7월 1일까지 부산시 사하구 사하창업비지니스지원센터에서 실시된 "역사속에 담긴 힐링 스토리텔링" 시간에 사하구와 부산진구에 있는 유적을 둘러 보고 쓴 기사임을 밝혀둔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다대첨사윤흥신(多大僉使尹興信)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부산시 다대동에 있는 윤공단(尹公壇)은 잘 가꾸어진 소나무숲속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단 중앙의 비석은 전면에는 ‘첨사윤공흥신순절비(使)’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한자 12행으로 공의 전적이 기재되어 있다. 비 양측에는 윤공의 동생 「의사윤흥제비()」와 「순란사민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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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공단 입구 계단앞에 세워져있는 홍살문 -삼지창과 태극문양이 파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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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윤공단 순절비 정면-왼쪽에 의사윤흥제비()」와 오른쪽에「순란사민비(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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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공단 순절비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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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사윤공흥신순절비 정면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은 선조 25년(1592) 부산에 상륙한 왜적이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후, 다대진을 공격하자 동생 흥제와 군관민을 이끌고 이들과 대치하다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때 첫 승전을 거두고서도 사액 사우(賜額 祠宇)인 충렬사에 배향되지 못하였고 단비조차 없었던 다대첨사 윤흥신을 위해 동래부사 조엄(趙曮)의 3대에 걸친 84년간의 오랜 노력이 깃들여 있다. 1772년(영조48) 3월 25일 순절 180여년 만에 충렬사에 위패가 봉안하고 1841년 조엄의 아들 조진관(趙鎭寬)이 지은 비문을 손자 영의정 조인영(趙寅永) 대감이 명을 하여 동래부사 홍종웅(洪鍾應)이 249여년 만에 다대포에 순절비 윤공단(尹公壇)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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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장군이 순절한 부산진순절도의 부분 상세그림으로 부산진성을 공격하는 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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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성전투도 부분 상세그림으로 다대진을 공격하는 왜군-임란 후 가물었던 어느 해 우측 상단에 연못에서 윤흥신의 시신을 찾았다.

임진왜란 때 다대포진의 결사 항전한 다대첨사윤흥신의 공적이 1758년 7월 조엄부사가 1박2일 일정으로 다대포진을 방문할 때까지 묻혀져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서평포다대포부산진 등이 모두 지금의 부산영역이지만다대진은 부산진보다 군사적 비중이 낮고 규모도 작으며 당시로 보아서는 외떨어진 곳이라서 상황을 잘 전할 수 없었던 것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다대첨사윤흥신의 공적은 아래와 같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었다. 
-1604(선조 37) 625일에 공포된 선무공신록권(宣武功臣錄券)에 원종(原從) 1등 공신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다대진 첨사 윤흥신이 순절한 기록을 윤흥신은 왜적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죽었다고 기록
-유성룡(柳成龍) 징비록(懲毖錄)에는 다대진 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가 죽음을 당했다고 기록
-영조 43(1766)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구사맹(具思孟)조망록 (弔亡錄)에는 윤흥신이 왜적을 맞아 싸운 내용이 간략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함
-1693년(숙종 19) 학자 신령(申靈)이 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는 도적이 병사를 나누어서 서평포다대포를 함락케 했다. 다대진 첨사 윤흥신은 힘껏 싸웠으나 피살되었다.’고 한다.
- 1764(영조 40) 당시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지은윤공사절기 尹公死節記>에는 다른 글에 씌어진 윤흥신과 관련된 기록을 모두 인용하여 임진왜란 당시 그의 행적을 적었다.
 
이렇듯 윤흥신의 순절 사실은 분명했지만 조엄(趙曮)이 동래부사로 부임하기 이전까지는 그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1757(영조 33) 조엄이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충렬사(忠烈祠)를 참배할 때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 그리고 여러 이서(吏胥)와 노비까지 모셔져 있는데 윤흥신만이 빠져 있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겼다. 이 사실을 안 조엄은 윤흥신의 사적(史蹟)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읍지(邑誌)를 꼼꼼히 살펴보고  다대포를 직접 방문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윤흥신에 대한 기록과 당시의 전황을 들려 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후 1761(영조 37) 그가 영남감사(嶺南監司)가 되었을 때, 경상도 내에 효열과 충절이 두드러진 사람을 포상할 것을 예조(禮曹)에 상소할 때 윤흥신의 증직(贈職)을 청원하였다
 
윤흥신은 어떤 인물일까.  징비록 등 기록에 따르면 윤흥신은 조선 중종의 비(妃)인 장경왕후의 오빠로,  최고 권력을 구가하던 찬성 윤임(尹任)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6살 때이던 명종 1년(1545년) 을사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되고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이 유명을 달리한다. 겨우 목숨을 건진 윤흥신은 최고 권력자의 아들에서 관노로 전락한다. 이후 1567년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가 즉위하고 선조 10년인 1577년 윤임도 신원복권되면서 윤흥신 역시 32년간의 관노에서 벗어난다. 그다음 해에는 윤임의 무과 경력과 공신 후손이라는 자격을 인정받아 무과별시에 응시, 출사하는 등 순탄한 길을 걷는 듯했다. 1582년 진천현감이 되었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문자를 읽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운명에 처한다.

선조 23년(1590년) 왜구로 남해가 다시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한 선조는 당시 우의정 류성룡의 천거에 따라 윤흥신을 다대첨사로 임명한다. 하지만 1592년 4월 13일 오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왜는 윤흥신과 군사 800명이 지키는 다대진을 공격해왔다. 윤흥신은 동생 윤흥제와 함께 첫날 조선군의 동태를 살피던 왜 100명을 물리쳤으나, 다음 날 1200명의 왜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 순절했다.

 
명문 풍양조씨 3대가 84년에 걸쳐 왜 이토록 윤흥신 공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을까? 조엄(趙曮)의 아들 조진관(趙鎭寬)이 지은 윤공단의 순절 비문을 보면 “임란 중 그 충절이 크게 나타난 사람은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부산 첨사 정발 (鄭撥) 그리고 다대포 쪽에는 윤흥신(尹興信) 공이 있으니 이들 세 사람을 동래 순절신이라 부르고 동래부 사람들은 충렬사를 지어 송· 정 두 분을 제사 지내 왔으며 윤흥신 공은 집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라고 하였고 “팔곡 구사맹(八谷具思孟) 공이 조망록(弔亡錄)에 상세히 기록해둔 점과 선친 조엄이 조선통신 정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와 공의 순절 내용을 상세히 알게 되어 이런 사실을 밝혀 조정에 공에 대한 일을 시행 하게 되었다” 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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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엄진상

아버지 조엄(趙曮)은 39세에 정3품 동래부사 직에 오르고 이후 경상감사, 6조참의, 참판, 판서 및 금부도사, 암행어사를 지낸 청렴결백한 관리이며 백성을 위한 대표적 목민관으로 영조 39년 조선통신사로 가던 중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고 춘궁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위해 고구마 한 한 자루를 구하여 먼저 본국에 보내 재배토록 하였다. 1757년 7월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튿날 충렬사를 참배 하면서 충신 윤흥신 첨사가 위패도 제사도 없는 것을 발견하고 3대에 걸쳐 윤공단을 세우게 된다.

 

조진관.jpg
조진관 진영


아들 조진관(趙鎭寬)은 홍국영과의 마찰로 김해로 귀양 간 아버지 조엄으로부터 네가 평생보고 들어서 알겠지만 다대포첨사 윤흥신 공의 일을 다 마치지 못했으니 다대포에 그를 기리는 단을 만들어 비석을 세워주라는 마지막 유언을 받는다.  그 후 이조판서에 임명된 조진관은 아버지 조엄이 윤양후의 술책에 넘어가 인사를 잘못한 사실을 들어 2번에 걸쳐 판서직을 고사하고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다대포를 방문한다.


병조판서를 지낸 조진관은 이해문 첨사가 세웠다는 윤공단을 찾았으나 단만 만들고 비석을 갖추지 못한 체 제사를 지내고 다대를 떠난 후 후임첨사가 단마저 헐어버린 사실에 낙담한다. 다시 이조판서에 오른 그는 생의 마지막 관직이 될 것을 알고 아들 조인영(趙寅永) 을 불러 이제 이조판서를 끝으로 6조 판서를 다 해보는 마지막 벼슬에 올랐어도 윤공단(尹公壇)을 세우라는 네 조부의 유지를 실천 못했으니 참담 하다고 하자 23살의 나이로 출사 전 이었지만 순조19년 장원급제할 만큼 총명했던 조인영(趙寅永) 은 “언젠가 실행할 날이 오겠지요” 라고 답한다. 이에 윤 첨사를 위해 지은 순절비문을 아들 조인영에게 맡기고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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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영진상


1841년(헌종7) 4월 영의정에 오른 조인영 대감은 동래부사 홍종응을 불러 명령이나 다름없는 지시를 내린다. 지금부터 84년 전 나의 조부께서 시작한 일로 마무리 하지 못한 일을 영의정이 된 내가 마무리할 시점이라 시에 능하고 명필인 홍공을 동래 부사직을 맡겼으니 일을 잘 마무리 해 달라는 부탁을 하며 충렬사에 윤흥신공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게 한 사람이 나의 조부이며 선친께서는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윤흥신 첨사가 전사한 다대진 첨사영 연못자리에 충절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려 하였으나 다대첨사들의 비협조로 세우지 못하고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비문을 33년간 보관해오다 이제야 조부와 선친의 뜻을 받들 수 있는 기회라며 비문을 전한다. 이에 동래부사 홍종응은 첨사가 돌아가신 4월안에 순절비를 세우고자 밤낮으로 작업을 진행하여 정해진 기일에 비석제작을 완료하고 다대포 첨사영 연못자리에 단을 짓고 비석을 세워 윤공단 제를 올리게 된다. 이상 풍양조씨 3대에 결친 윤흥신 관련 추진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757년(영조 33) 7월 조엄(趙曮)이 동래부사로 부임, 이틀 후 충렬사 참배 시 윤흥신 위패 없음을 확인

-1758년 조선 영조 34년 7월 : 동래부사 조엄, 윤흥신 다대첨사 공적을 조사를 위해 다대포 방문

-1765년 영조 41년 : 부제학 조엄의 부탁을 받은 다대첨사 이해문, 다대진 첨사영내에 윤흥신 첨사를 위한 윤공단을 세우려다 통영 3도 수군통제사에 의해 파직 당함.

-1722년 2월 충렬사에 합향됨

-1800년 순조 즉위년 : 조엄의 아들 보국숭록대부 조진관, 부친의 유언 실행을 위해  다대포 방문

-1841년 4월 : 조엄의 손자 영의정 조인영의 지시로 동래부사 홍종응이 다대진 첨사영 내에 윤서공단 세움

 

임란 때 목슴을 바친 다대첨사 윤흥신의 충절을 추모하고 후대에 알리려는 조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다대포첨사윤공전망사적서(多大浦僉使尹公戰亡事蹟敍)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징비록懲毖錄>을 보니 ‘다대포첨사 윤흥신尹興信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라고 쓰여 있고, 또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는 ‘왜적이 병력을 나누어 서쪽으로 다대포를 함락시켰는데 그 때 다대포첨사 윤흥신이 힘껏 싸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라고 되어 있었다.
 
<징비록>은 바로 선조 때 정승인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책이고, <재조번방지>는 바로 동양위東陽尉의 맏아들 신경申炅(象村 申欽의 손자)이 지은 책이다. 이는 모두 왜란 당시의 문헌으로 반드시 증거가 있어서 쓴 것일 것이므로 가히 믿을 만하였다.

임진왜란이 난지 166년이 지난 정축년(1757년, 영조 33년)에 내가 동래부사로 임명되어 관아에 부임하던 다음날 ‘충렬사忠烈祠’를 배알하였는데 그 충렬사는 곧 임난 당시 동래부사였던 송상현宋象賢공과 부산 첨사釜山僉使였던 정발鄭撥공의 신위를 모신 곳이었다.
 
윤흥신공도 임난 당시 앞서 말한 두 분과 같은 곳에 있었고 또 함께 훌륭한 일을 하다가 순국殉國하였으니 그 공적을 숭배하고 갚기기 위하여 사당에 제향하는 은전恩典을 똑같이 베풀어 마땅하다. 그런데 두 분은 한 사당에서 나란히 제향을 받을 뿐 아니라 당시 함께 순국하였던 관아의 아전이나 노예奴隸들까지도 제사를 지내어주는데 윤흥신공만이 홀로 그곳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읍지邑誌’를 상고해 보고 또 다대포를 비롯하여 여러 포진浦鎭을 찾아 탐문해 보았으나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전하여 오는 이야기도 막연하였고 그의 후예後裔들도 찾아볼 수가 없어서 새로운 사실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분의 의리와 충렬이 드러나지 못하고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라질 것임을 안타까워하였다.
 
신사년(4년 뒤임) 봄에 내가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 도내道內에서 ‘효열절의孝烈節義’가 두드러진 사람을 낱낱이 추천 받아서 칭찬할 만한 사람을 골라 포상褒賞하여 주자는 내용으로 임금에게 장계로 청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윤흥신공의 일이다. 그리하여 예부[禮曹]로부터 증직贈職을 해주자는 제목題目을 덧붙여 정부[議政府]에 보고되고 정부에서는 임금님에게 재심해 달라는 주청[覆奏]를 올려 조만간에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마는 그래도 나의 마음에 미흡한 것은 그의 사적이 자세히 갖추어진 것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근일에 우연히 팔곡 구사맹八谷具思孟이 쓴 <조망록吊亡錄>을 읽다가 그 책의 ‘사절조死節條’에 다대포 첨사 윤흥신에 대하여 특별히 갈라서 써놓고 그 해설에 이르기를 ‘왜적이 성을 둘러쌌는데 힘껏 싸워 물리쳤다’라고 하고 그 아래 또 쓰여 있기를 ‘내일 만일 많은 적병이 와서 공격하면 견디기 어려울 터이니 성을 버리고 나가 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누군가 말하니 흥신이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도망가겠는가?’라고하였는데 과연 많은 적이 몰려오자 군졸들은 모두 도망가고 윤공만 홀로 종일 적을 향하여 활을 쏘다가 성이 함락되자 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또 시詩를 지어 애도하였는데
 
  ‘奔亡列邑已全空 : 여러 고을들은 모두 도망가서 텅텅 비었는데
  分死危言獨效忠 : 죽는 것이 분수라는 말로 혼자 충절을 다했네.
  麾下若敎終未散 : 휘하의 군졸들로 흩어지지만 못하도록 했다면
  孤城猶足策奇功 : 외로운 성이라도 큰 공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을.‘
 
하여, 이 책에서 윤공의 공적이 훌륭하다는 사실이 <징비록>이나 <재조번방록>보다 더욱 자세히 기록되었다.
 
이리하여 공이 남긴 충렬은 여기에서 더욱 빛나고 두드러져서 앞으로 천년만년 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들일 것이다. 이러한 데도 충렬사의 제사에 함께 배향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공의 충성스러운 넋을 위로하겠는가? 그런데 절개와 의리가 드러난다든가 묻혀버리는 일도 각각 때가 있어 그런가?
 
내가 계미년(1763년, 영조 39년)에 왕명을 받들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그 때 임진년의 변고[龍蛇之變]를 도리켜 생각하니 분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갑절도 더 되었다. 그리고 충렬忠烈을 다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존경하며 그분들의 업적을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하여야 한다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였다. 그 때 나는 함께 갔던 막료幕僚들과 이러한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서로 한탄하기도 하였다. 막료 중에 수령守令을 역임한 이해문李海文은 무사[壯士]이면서도 시詩를 잘하였다. 곁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더욱 분하고 원통함을 나타내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뒤 그는 다대포 첨사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윤흥신공의 의열義烈이 사라져 없어질 것을 애석히 여겨 사수四首의 율시律詩를 지어 가지고, 편지에 동봉하여 내개 보고하고 나의 글[序文]을 얻어서 관아의 벽에 걸어두겠다고 하였다. 그의 뜻은 실로 변방의 선비들을 고무[聳動]시키고 윤공을 드러내어 빛나게 하는데 있었다. 이는 과거 십년 동안 내가 가진 본래의 뜻이기도 했다. 비록 아직도 조정으로부터 나의 장청狀請이 허락을 받지 못하여 송정宋鄭 두분과 함께 충렬사에 배향하도록 하지는 못하였지마는 지금 본진本鎭인 다대포의 벽에 찬양하는 시를 걸어 놓겠다고 하는 제안을 내가 문장이 미숙하다고 하여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전후의 사실을 대강 주어 맞추어 앞에 쓴 것과 같이 기록한다.
 
숭정기원후 백삼십팔년(1766년, 영조 42년) 원임행부제학 조엄 찬
崇禎紀元後 百三十八年                            原任行副提學 趙曮 撰
 
풍양조씨의 3대 84년이 걸린 이 이야기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역사 속에 묻혀져 가는 인물을 대를 이어가며 기억하려는 한 가문의 노력이 쉽게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파평윤씨(坡平尹氏)와 풍양조씨(豊壤趙氏) 집안의 각별한 인연은 후세에 모범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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