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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야의 이색유물, 새무늬 청동기

소가야의 이색유물, 새무늬 청동기

  

소가야(小加耶)는 고성(固城)을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에 자리한 가야이다. 삼한시기의 고성지역에는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이는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고자국(古自國)" 또는 "고사포국(古史浦國)"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소가야는 당시의 고성(固城)이라 했으며, "일본서기"에는 "구차(久嗟)", "고차(古嵯)"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고자국"에 대한 표현상의 차이이다.  고성 동외동유적(東外洞遺蹟)에서 발견된 이색적인 유물인 새무늬청동기(鳥文靑銅器)를 소개하고자 한다

동외동 패총유적1.jpg
경상남도  기념물  제26호 동외동패총 (東外洞貝塚)-사진출처: 문회재청임
소가야국의 중심지인 고성평야의 남서 구릉지로서, 과거에는 그 야산을 가리켜 당산(堂山)이라 하였고, 음력 섣달그믐에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성동외동패총’이라고도 한다.
 

당산 정상부에서 서쪽 경사면에 걸쳐 형성되어 있던 조개더미 일부를 1974년 6월에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였다. 그 때 조개더미 주위에 천도교회당을 신축하기 위하여 부지정리작업을 하던 중, 조개껍질과 함께 청동기조각과 토기조각 등이 대량 출토되어 긴급구제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동외동 패총유적2.jpg

 동외동패총 (東外洞貝塚) 발굴당시(1974년)-사진출처: 문회재청임
1974년 동아대박물관은 고성읍 동외동 패총유적의 아랫단에서 넓이 3×1.5m 두께 2~5㎜의 야철지(冶鐵址)를 발견하였다. 출토 유물로는 각종 토기(土器), 동물뼈로 만든 화살촉(骨鏃), 중국(中國) 한(漢)나라의 거울조각(鏡片), 철기류(鐵器類) 등 많은 유물(遺物)들이 수습(收拾)되었다. 이는 당시의 생활상태(生活狀態) 및 중국(中國)과의 교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발굴당시 모습.jpg
                     1995년 진주박물관에 의한 발굴당시의 새무늬 청동기
1995년 국립진주박물관은 동외동패총 윗단 중앙부의 제사유적에서 두 마리의 새가 마주보는 청동장식을 발굴하였다.
 
새무늬 청동기2.jpg
    쇠가야로 불렸던 소가야의 새무늬 청동기(鳥文靑銅器)
새무늬 청동기(鳥文靑銅器)는 1995년 고성읍 동외동유적(東外洞遺蹟)내 구릉 정상부의 광장의 제사유구에서 출토된 것이다. 형태는 길이8.9cm 너비6.4cm인 작은 방패모양으로 되어있다. (4세기).
 
앞면에는 크게 상하 2부분으로 나누어 상부에는 손바닥무늬가 있으며, 하부에는 새 두 마리가 좌우 대칭으로 새겨져 있다. 손바닥무늬 윗부분에는 여러 마리의 새를 좌우 대칭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좌우면에 고사리무늬가 새겨진 돌출부가 있고, 윗면에는 원형고리가 7개 달렸다. 뒷면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상세하게 살펴보면 앞면의 손바닥무늬 위에는 고사리 무늬, 톱니 무늬, 점열 무늬 등이 치밀하게 새겨져 있는데 환상적이며 기하학적으로 돌출되어 있다. 그 아래 여러 마리의 작은 새를 좌우 대칭으로 표현하였다. 특징적인 것으로 가운데 두 마리의 큰 새와 주변에 작은 새가 40마리로 모두 42마리의 새가 새겨져 있다
 
 
 
수동리 출토 새무늬 청동기.jpg
고대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 중 가장 강성했던 마한의 문화를 살펴 볼 수 있는 전남 영광 수동리에서 과거 출토된 새무늬 청동기
 
전대전출토농경문.jpg
전대전출토농경문동기(傳大田出土農耕文銅器)
 
고대 가야인들에게 새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거나, 또는 곡령신을 불러다 주는 매개체로서 신성시 되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대전 괴정동 출토 청동기시대 유물이 있긴 하나 시기적으로 가야시대라는 점, 문양이 전면이 빽빽하면서 다양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대전 출토의 농경무늬 청동기(기원전 3세기)와 같이 위쪽 좌우에 노끈을 꿸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에 매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전라남도의 영광 군동 유적에서도 이와 유사한 새무늬 청동기가 발견되어 새에 대한 특별한 의식이 삼한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마한조에 보면, 기원 후 3세기에 “항상 5월 파종 때와 10월의 추수할 때에 제사를 지냈고, 소도에 큰 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방울과 북 등을 매달았다”고 하는데, 가야의 농경 의례 때에도 새무늬가 있는 이 청동기를 매달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새무늬 청동기(鳥文靑銅器)는  3~4세기(원삼국시대)경의 제사장(際祀長)이 소지하고 제사를 집행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여 진다. 또 네 귀퉁이 마다 원형의 구멍이 뚫려있어 제사장(際祀長)급 지도자의 옷 장식품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드문 청동기 유물(靑銅器遺物)이라고 할 수 있다.  고성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유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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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의 미늘쇠

아라가야의 미늘쇠 

 
얇은 철판에 오리를 매달은 특이한 구조의 미늘쇠는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납작한 형태의 철제 유물로 유자이기(有刺利器)라고도 불린다. 아라가야의 본 고장인 함안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미늘쇠를 소개하고자 한다.
 
함안박물관2.jpg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에 있는 함안박물관
 

IMG_8417.jpg
함안박물관1

IMG_8420.jpg
 함안박물관2


말이산고분군.jpg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는 사적 제515호인 말이산 고분군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에 있는 군립 박물관. 가야 시기의 '도항 말산리 고분군' 일원에서 출토된 말갑옷, 수레바퀴모양 토기, 불꽃무늬토기, 문양뚜껑, 미늘쇠 등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가야 미놀쇠2.jpg
     초기의 미늘쇠1
 
가야 미놀쇠3.jpg
      초기의 미늘쇠2

미늘쇠장식은 함안 도항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자이기(有刺利器)이다. 얇은 철판으로 직사각형을 만들고 양 장변을 오목하게 도려내어 홀쭉하게 만들었는데, 단변에 자루부가 위치한다. 양 장변에 새 모양의 장식이 3개씩 서로 대칭되게 모두 6개가 달려 있고 선단부의 중앙에 새머리를 배치하였다. 철판과 새 모양의 장식물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는 유자이기를 사용할 때 천이나 실로 만든 장식물을 끼워 바람에 흩날리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늘쇠장식은 가야의 대표적인 철제 의기로 새나 고사리무늬의 장식을 많이 사용하였다.
 
4세기 전반의 덧널무덤(木槨墓)에는 덩이쇠를 이용하여 하단부는 양쪽에서 오려서 공부(銎部: 자루에 끼우는 부분)를 만들고 측면을 양쪽에서 오리고 길게 늘여서 소용돌이무늬로 말아놓은 것이 최초의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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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세기, 길이 59.1㎝, 함안 도항리 고분 출토

이후 시기 신라고분에서는 가시가 돋친 것처럼 만들고 크기도 그리 크지 않지만 가야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은 크고 장식이 많이 되어 있다. 특히 함안 도항리고분군에서 출토되는 것은 네 귀퉁이가 삐쳐 나온 장방형의 몸통에 작은 구멍을 규칙적으로 뚫고 가장자리에는 가시를 삐쳐내는 대신 철판을 오리모양으로 만들어 붙여놓았다. 신라와 가야의 일정 수준 이상의 무덤에서 출토되던 미늘쇠는 5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소멸되고 합천 저포리고분군과 같은 변두리의 고분에서 퇴화된 형태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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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을 받은 미늘쇠의 아름다운 모습1
새모양의 소형 철판이 좌우에 나란히 붙어 있다. 새는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지배자의 권위를 나타내며 각종 의례행사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늘쇠2.jpg

조명을 받은 미늘쇠의 아름다운 모습2 
형태로 보면 일상적인 용도를 생각하기 어려우며 자루에 끼울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의장행열과 같은 데서 장대에 끼워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정되므로 의기(儀器)로서 성격이 있음을 이해하여 볼 수 있다. 미늘쇠가 최상위 급의 무덤에서 출토되지 않고 중형급 이상의 신라·가야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서 미늘쇠를 부장한 피장자의 신분은 지배세력 가운데 중·상위 계층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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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를 상징하는 신어상과 태양문

가야를 상징하는 신어상과 태양문
 
약 500년간 존속했던 가야는 1500여년 전 신라에 의해 멸망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당시 가야는 김해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철을 이용해 수준 높은 철기문명을 꽃피운 동북아의 선진국이었다. 그동안 김해의 해반천 일대에서 많은 유적이 출토되며 그 실체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 그 유물들을 만나 볼 수 있는 곳이 국립김해박물관이다.
 
김해 구산동에서 봉황동에 이르기 까지 가야사(伽倻史) 누리길에서 신어상, 태양문,  오리모양 토기, 굽다리 접시, 수레바퀴모양 토기, 새모양장식 미늘쇠, 새무늬 청동기, 용봉황무늬 고리자루 큰칼 등에서 다양한 문양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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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김해박물관의 철제담장
김해 시내에서 가야 시대 주요 유적은 대부분 해반천이라는 작은 물길의 동쪽, 분산의 남서쪽 아래 평지에 몰려 있다. 가장 북쪽인 수로왕비릉에서 최남단의 봉황동 유적까지는 직선거리로 2㎞ 남짓. 이 일대를 ‘가야의 거리’라고 부르는데, 이곳의 명소를 잇는 ‘가야사(伽倻史) 누리길’이라는 도보길도 꾸며져 있다. 가야사 누리길은 5㎞ 정도로, 천천히 걸으며 역사 탐방을 하기에 적당하다.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 전시하기 위한 고고학 중심의 박물관으로 탄생한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加耶)의 건국신화가 깃든 구지봉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1998년 7월29일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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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김해박물관의 철제담장속의 신어상과 태양문1
 
이 국립김해박물관의 담장에는 신어상과 태양문이 녹색의 담장이덩굴 사이에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멀리 인도에서 시집왔다는 허황후의 이야기를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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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김해박물관의 철제담장속의 신어상과 태양문2
 
김해 시내에서 가야 시대 주요 유적은 대부분 해반천이라는 작은 물길의 동쪽, 분산의 남서쪽 아래 평지에 몰려 있다. 가장 북쪽인 수로왕비릉에서 최남단의 봉황동 유적까지는 직선거리로 2㎞ 남짓. 이 일대를 ‘가야의 거리’라고 부르는데, 이곳의 명소를 잇는 ‘가야사(伽倻史) 누리길’이라는 도보길도 꾸며져 있다.
 
남릉정문신어상1.jpg
김수로왕릉의 납릉정문에 그려진 2마리 물고기1
인도의 초기불탑을 연상시키는 탐 모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쌍어문(雙魚文)이라 불리는 2마리의 물고기

 
은하사 대웅전 수미단 쌍어 문양.jpg
신어산 은하사의 불단에 그려진 2마리의 물고기2

쌍어1.jpg
해반천 다리에서 볼 수 있어 신어상 조형물

허황옥 공주가 인도 아유타국 출신임을  공개적으로 처음 연결시킨 사람은 아동문학가인 이종기(1929-1995) 선생이다. 1977년 인도에 들렀다가 아요디아를 찾은 그는 수많은 건물에 쌍어문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수로왕릉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종기 선생의 탐방기에 영향을 받아 40년동안에 걸쳐 허황옥 공주를 추적한 사람은 김병모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이다.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역사의 아침 펴냄)에서 한국의 김해와 인도의 아요디아, 그리고 중국의 안웨가 오늘날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맺어진 것임을 밝혔다. 쌍어는 신을 보호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는 신어(神魚)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난 이런 사상이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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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물줄기가 나오는 각배분수대 모서리에 만들어 놓은 신어상 조형물
가야의 거리의 다리와 주변에 신어상을 설치하여 가야의 전설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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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조 신도비-가락기년1886년 세워진 비. 파형동기와 같은 태양문양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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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조 신도비의 확대 모습 - 신도비에 조각된 태양문양은 지금도 인도 아유타 지역에서 볼 수 있어 인도에서 온 허황옥과 연결시켜 주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드는 건 인도 출신이라는 허황옥 무덤에 없는 신어상과 태양문이 김수로왕릉에만 있을까.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김수로왕의 탄생설화와 어긋나는데도 말이다. 허황옥 릉에 있는 파사의 석탑 하나로
인도 출신임을 충분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미스터리가 있는 가운데 잃어버린 왕국이나 신비의 왕국으로 불리는 가야사는 신비롭고 이야깃거리가 더욱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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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나온 무령왕릉 진묘수

나들이 나온 무령왕릉 진묘수


국립김해박물관(관장 김정완)은 오는 8월 10일까지 특별전 ‘한국의 도교문화-행복으로 가는 길’을 선보이고 있다. 3부로 나눠진 전시 주제인 ‘도교의 신과 의례’에서는 다양한 소주제를 통해 신을 향한 조상들의 염원이 어떻게 표현됐는지와  ‘불로불사’에서는 조상들이 생각한 도교적 이상향과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수복강녕’에서는 다양한 종교사상과 소통하며 공존한 도교문화의 모습과 회화, 공예품 등으로 일상 가까이 남은 도교의 흔적들을 확인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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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교인물주전자

이번 전시에는 국보ㆍ보물 6건 8점을 포함해 고고발굴품, 서화, 도자, 금속공예품, 전적류, 그리고 민속품 등 2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이 중 유독 특이한 유물을 만났다.

 
鎭墓獸 3.png

공주 국립박물관에서 온 무령왕릉을 일제의 도굴로부터 지켜준 수호신인 진묘수(鎭墓獸)가 그 주인공이다. 단 2주간만(6.24.~7.6.) 전시되어 백제문화의 진수를 가까이서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정면 앞에서 보면 그래도 돼지와 약간 닮은 평범한 동물인듯 한데 오른쪽 옆모습으로는 약간 해태 같기도 하다. 입과 눈쪽을 보면 이건 도무지 감이 안잡히는 묘한 동물! 이 기기묘묘하게 생긴 진묘수는 왜 '진묘수'라고 할까? 문자 그대로 무덤(墓)을 지키는(鎭) 짐승(獸) 즉 진묘수(鎭墓獸)이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에서 7번째 발견된 무덤으로 무령왕과 왕비님의 합장묘였다. 발굴당시 묘의 축조 정황을 정확하게 기록한 지석이 발견되어 언제 어떤 사람을 위해 만든 묘인지 알수 있었던 대단한 발굴이었다. 무령왕릉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그야말로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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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에서 본 진묘수(鎭墓獸))-(국보 제162호, 국립공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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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서 본 진묘수(鎭墓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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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면에서 본 진묘수(鎭墓獸)

그런데 그중 석수라는 이것. 돌로 만든 동물이라는 뜻의 석수(石獸)라고도 불리운 이 유물이 바로 진묘수이다. 겉보기에는 약간 돼지 같기도 하고, 몸통은 오소리 같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해태 같기도 하여 그 모양이 아주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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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출토된 도자기처럼 구운 도제품 진묘수

이와 비슷한 유물로는 고대 중국인들이 무덤에 악귀가 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묘 입구에 무서운 동물상을 만들어 두었던게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일종의 진묘수라 한다.

이런 문화적 교류와 영향을 받아서인지 무령왕릉에도 진묘수가 있었던 것이다.  공주 무령왕릉의 진묘수는 우리나라 모든 역사적 유물중에 단 하나뿐으로 유일하여 더욱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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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된 무령왕릉 석실앞에 진묘수가 보인다.(19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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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 당시의 진묘수


1971년 7월 8일 밤 무령왕릉 발굴자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국보 162호 석수(石獸·사진)였다. 어두워질 무렵 무덤 입구를 열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마치 야수와도 같은 실루엣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처음 발굴 당시 도랑을 파는데 인부의 삽에 뭔가 걸리는 소리가 나는게 심상치가 않아 입구를 막은 벽돌의 맨 윗줄을 들어내니 해태 같기도 하고, 돼지 같기도 한 바로 그 짐승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 진묘수를 발굴할 당시 역사학자들은 모양이 워낙 독특해서 다소 당혹스러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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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된 모습의 무령왕릉과 진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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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진묘수(좌)와 빼어닮은 중국 남조 석수의 사진(오른쪽)

 

지난 2011년 난징 시내 남쪽 시산(서선)교라는 곳의 부근 도로변에서 발굴된 남조시대 단실 벽돌무덤에서 나왔다. 돼지처럼 퉁퉁한 몸매와 앙증맞은 네다리 등과 몸체에 새겨진 말린 문양 등이 무령왕릉 진묘수와 판박이로 닮은꼴이다. 무령왕릉 진묘수 특유의 왕방울 눈과 돼지 주둥이, 대가리에 꽂은 금속뿔이 없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무령왕릉의 진묘수는 특유의 해학적인 모양새 때문에 백제 특유의 디자인 감각이 발휘된 것이 통설이었으나 백제 문화가 6세기 양나라 등 남조문화의 수용에 훨씬 적극적으로 열려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기 충분하다.
 

동아시아에서 석수는 중국 한대 이래 유행했다. 무덤 속 혹은 무덤 입구에 마력의 동물의 배치함으로써 사후의 유택이 훼손되지 않기를 소망한 것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남의 무덤을 건드리는 것 자체를 터부시했다. 송산리 고분군의 상당부분은 일제 강점기에 왜인들에게 도굴되기도 하였고 해방 이후에도 성행했다.
 
현재까지 무덤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백제 유일의 왕릉인 무령왕릉. 이 무덤 역시 숱한 도굴의 위협을 받았을 것이나 용케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해왔다. 덕분에 오늘날 수많은 부장품들이 국보 등으로 남아 후손들에게 보여지고 있다. 그 이유 또한 이 진묘수(鎭墓獸)가 무덤을 잘 지켜준 덕분이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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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여년전 '현대 신사의 하루'

90여년전 '현대 신사의 하루'
-협동광고(1922. 5. 25 매일신보)
 
지금부터 약 90년전 이 땅의 신사들의 하루는 어땠을까. 1922년 5월25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현대신사의 일일"이란 기사를 살펴보자. 

    1922년 광고 ' 현대신사의 일일'

만화처럼 보이지만 신사가 하루에 해야 할 일을 8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협동 광고로 각각의 이야기는 다양한 상품과 연결되어 있다.
 
이야기를 따라가면 먼저 아침에 일어난 신사는
-일본산 ‘라이온 가루치약’으로 이를 닦고,
-‘레토후드’에서 만든 크림을 바르고,
-‘오리지나루(Original)’ 향수를 뿌리고 출근한다.
-약속장소를 가기 위해 동경가스전기 주식회사의 자동차를 타며,
-피로회복에 좋은 ‘헬프’ 약과
-구강 위생을 위해 ‘카오루’도 챙긴다.
-일을 할 때는 ‘스완’ 만년필을 사용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카스케도’ 맥주를 한잔 하며,
 -‘아지노모도’ 조미료를 써서 만든 부인의 요리를 기다린다.
-식사가 끝나면 ‘부인구락부’ 잡지를 읽고,
-아이에게는 ‘모리나가’ 밀크캐러멜을 건네준다.
 
당시 현대적인 남성들에게 상품 소비를 위한 광고를 만화처럼 만들어 광고를 하였다니 흥미롭다.
 
그 땐 일과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와서 가볍게 맥주를 한잔 마시고 부인이 만든 요리를 먹은 다음 잡지를 읽고 밀크캬라멜을 가족과 함께 먹는다니 무척 가정적이고 포근한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다.  
 
1926년 잡지 『별건곤』 12월호에는 ‘신여성 구혼경향-신랑 표준도 이렇게 변한다’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연애에 눈을 뜨면서 애인이나 남편감으로 원하는 이상형이 시기에 따라 변해 왔다는 것이다.

초기 신여성들은 ‘문학청년’들에게 마음이 쏠려서 “시 한 구, 소설 한 편만 발표하여도 그 청년에게는 여자의 연애편지가 사면팔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그 뒤에는 ‘법학출신자’가, 그 후에는 ‘자유직업으로 돈벌이 괜찮은 장래 의사’가 선호됐다. 1926년 당시에는 “그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돈만 있으면 어느 놈이든지 좋다”고 하는 ‘황금만능시대’가 도래했다고 평하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잘 어울리는 아침에 가루 치약으로 이를 닦고, 저녁에는 캬라멜로 가족들과 즐겨 먹을 수 있는 경제적인 조건을 갖춘 남성상이 광고의 주인공인듯하다.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남자로써 경제력에 대한 책임과 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 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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