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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따라 영가대의 변신

세월따라 영가대의 변신
 
 
영가대(永嘉臺)는 일본에 파견되었던 통신사행(通信使行)과 관련이 깊은 장소이다. 1614년(광해군 6) 경상도 관찰사 권반(權盼)이 설치했다. 당시는 임진왜란의 여진이 남아 있고, 왜적에 대한 방어가 중요한 시절이었다. 부산포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전함이 빨리 노후화하는 일이 발생하자 권반은 항만 기능을 진작시키기 위해 부산진성(釜山鎭城) 근처의 해안이 얕고 좁아 새로 선착장을 만들었다. 이때 판 준설토가 높은 언덕을 이뤘으며 권반은 주변에 나무를 심고 바다를 구경하고, 망도 볼 수 있는 8칸 규모의 정자를 세웠다. 처음에는 아무런 이름이 없었으나 1624년(인조 2) 일본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된 선위사(使) 이민구(求 :1589~1670)가 이곳에 영가대(永嘉臺)라는 이름을 붙여 줬다. 영가(永嘉)는 권반의 본향(本鄕)인 안동의 옛 지명을 가리킨다.  
 
1617년 정사 오윤겸(吳允謙)이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영가대에서 처음 일본으로 출발한 후로 통신사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기점이 되었다. 이후 영가대는 조선 후기 통신사를 비롯한 역대 대일() 사신들이 무사 항해를 기원하며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해신제당()의 역할은 물론, 출발과 귀환의 상징적인 지점이 되기도 하였다. 통신사의 사행길은 멀고도 긴 험난한 길이었으며, 수행인원이 350~500여명이었다. 위험한 해난사고가 언제든지 통신사 일행을 덮칠 수 있었기에 통신사 일행은 떠나기 전에 영가대에서 제당을 차리고, 제물을 진설하여 해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해신제(海神祭)를 올리기 전에 제관들은 필히 목욕재계를 하고 술 담배를 끊는 등 엄격한 금기도 뒤따랐다. 이렇게 영가대는 해신을 정성껏 모셔 통신사 수행을 무사히 마치기 위한 기원 행사가 열렸던 공간 역활을 하였다.
 
1872년 지방지에서 본 부산진성의 모습.jpg
1872년 지방지에서 본 부산진성의 모습
 
동래부사접왜사도-영가대.jpg
      정선(鄭敾)의 동래부사 접왜도(東萊府使接倭圖) 영가대

사로구승도.jpg
이성린(李聖麟)의 사로구승도(槎路勝區圖)

사로구승도 확대ㅗ.jpg
사로구승도속의 영가대 부분 확대

영남기행화첩과 영가대.jpg
김윤겸(金允謙)의 「영가대」,


『부진제영(釜鎭題詠)』의 「영가대기(永嘉臺記)」에 의하면 영가대는 큰 배를 가라앉혀 돈대(墩臺)를 쌓고 그 위에 세운 8칸의 작은 누각이라고 한다. 그 모습이 가운데는 동그란 것이 마치 엎드린 거북 같고, 사방으로 똑같이 보여 호리병 속의 별천지를 이루었다고 한다. 영가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그림으로는 정선(鄭敾) [1676~1759]의 「동래부사 접왜도(東萊府使接倭圖)」와 김윤겸(金允謙)[1711~1775]의 「영가대」,이성린(李聖麟)[1718~1777]의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등이 있다.

1730년(영조 6)~1750년(영조 26)경 그린 것으로 보이는 정선의 「동래부사 접왜도」에서는 영가대가 정면 5칸의 합각지붕 형태를 띠고 있다. 1748년(영조 24)에 그린 이성린의 「사로승구도」에서는 영가대가 작은 창문이 있고 사방이 막혀 있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집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1770년(영조 46)에 그린 김윤겸의 「영가대」에서 영가대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으로 사방이 트여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영가대는부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부산을 찾은 사대부들이 꼭 들르는 유람 코스였으며, 시인 묵객들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다. 동래부사들이 부임을 한 뒤로 영가대에 들러 빼어난 부산포의 절경을 시 한 수로 읊었다.

 

高臺蕭瑟出雲端 높은 대가 소슬하게 구름 끝에 솟았는데
陂水千尋石色磻 언덕 밑 천길 물에는 돌그림자 서려 있네
柯艦穩如藏大壑 배들이 평온히 큰 구렁에 숨겨져 있는 듯
海中終日自波瀾 바다 가운데에는 온종일 물결이 치는구나. (1643년 신유 「영가대」)

또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64년부터 동래부사로 재직하던 강필리(姜必履)는 영가대에서 본 수려한 경치를 "바다가 높은 난간에 들어와 홀연 한 잔 술이 되었네"라고 노래했다.

 

영가대는 한 폭의 그림도 되었다. 이성린이 통신사의 여정을 그린 '사로승구도권'과 김윤겸이 영남지역의 명승지를 그린 '영남기행화첩'에 영가대가 등장한다. 부산진지성 바로 앞에 아담한 언덕이 솟아 있으며, 그 위에서 아름다운 영가대가 먼 바다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영가대0-1 1890년 초반 부산 진지성과 영가대.jpg
1890년 부산진지성과 영가대

영가대4-1907년경 부산진 일대 주택과 영가대.jpg
경부선 설치후 부산진일대와 영가대(1905년)
 
영가대2-경부선 철로 부설 직후 영가대.jpg
경부선 철도 설치직후 영가대(1905년)


1910년경 영가대 옆을 지나는 경부선 열차.jpg
영가대앞을 통과하는 열차(1910년)

1912년에 찰영한 영가대.jpg
1912년에 촬영된 영가대

일제는 조선 침탈과 군수 물자의 수송을 목적으로 경부선 철도가 영가대 옆을 통과하도록 노선을 잡았다. 영가대는 1905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양분되고 일제강점기 때 부산의 대지주였던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의 별장인 좌천동의 능풍장(陵風莊)으로 옮겨졌다가 그후 도시화 과정에서 별장이 철거되면서 영가대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영가대 본터 안내.jpg
영가대 본터 안내판

 
영가대본터 안내판과 입구.jpg
      영가대본터 안내판과 영가대본터로 들어가는 골목입구

영가대본터 입구골목.jpg
      영가대본터로 가는 골목 - 초록색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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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대 본터1 - 녹색 철망 뒷편이 경부선 철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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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대 본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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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대 기념비 건립경위를 기록한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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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대 기념비 안내판

영가대 비각내부의 모습.jpg
      영가대 기념비각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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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가대기념비
      
기념비건립 헌금자 명부.jpg
기념비건립 헌금자 명단
 

영가대는 원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진시장 뒤쪽 철로 변에 있었다. 『동래부지()』에 “영가대는 동래부() 남쪽 21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흔적은 사라졌다. 그나마 옛터에 1951년 지역청년조직인 한청북부단부(한청북부단부)의 범2동 주민 30여명이 영가대 기념비를 세웠고, 비각은 후에 만든 것으로 1956년 10월 16일이 대들보에 기록되어있다. 주민들의 지역 사랑정신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골목안 철로변에 있는 이곳은 찾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출입문이 잠겨져 있어 일반인의 경우 보물찾기나 다름없을 정도다. 
 
영가대 부산포왜관 표석.jpg
영가대·부산포왜관터 표석

영가대 위치.jpg
영가대·부산포왜관터 표석에 나타낸 영가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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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대 공원 동쪽 조선 통신사 역사관 앞에 있는 영가대
 
영가대 현판.jpg
영가대 현판

영가대 2.jpg
영가대 뒷편에서 본 정자모습

2000년 부산광역시의 역사유적지 표석 설치계획에 따라 동구 좌천동 지하철역 부근의 도로공원에 “부산포왜관·영가대터” 표석을 세웠다. 2003년 동구청에서 영가대 본터가 철로변이라 건축물이 들어설 자리로는 마땅하지 않고 시민들의 접근성도 크게 떨어질 것으로 감안하여 원래의 위치에서 동구 범일동 590-5번지 자성대 공원 내에 영가대 정자를 복원하였다. 바로 곁에는 2011년 4월 21일 개관한 ‘조선 통신사 역사관’이 있어 역사교육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영가대는 선착장 공사 시 준설토를 이용하여 만들어졌고 이 후 통신사행(通信使行) 시 해신제를 지내는 공간으로, 당시 조선과 일본의 관심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경부선 철로를 부설할 때 영가대 앞을 통과하면서 반쪽이 나고, 한술 더 떠서 일본인 대지주가 건물을 뜯어가 개인 별장으로 활용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해방 후 1951년 범2동 주민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영가대 본터임을 알리는 비각을 세웠다. 2002년 12월에는 동구청에 의해 영가대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고, 2003년 9월 25일 현재의 자성대(子城臺) 동쪽에 영가대를 세워졌다. 세월따라 도시의 발전에 의한 영가대의 변신을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지만 영가대 본터의 관리만은 하루 속히 제대로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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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나환자의 친구였던 맥켄지 목사

한국 나환자의 친구였던 맥켄지 목사


 
한국에서 처음 나환자를 돌보았던 사람들은 19세기 말 이땅에 들어 온 외국 선교사들이었다. 1909년 사회로부터 문둥이라고 버림받았던 나환자들을 종교의 힘으로 따뜻하게 보담았던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조선총독부도 못본채 할 수 없어 1915년 소록도에 나환자 요양소를 세우게된다. 오늘 소개하는 호주출신 맥켄지 목사는 부산지역에서 나환자를 돌보고 치료했던 인물로 정공단 오른쪽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부산포 개항가도에 표시된 매견시(맥켄지 목사의 한국 이름)목사 안내판 -좌천동 일신기독병원 왼쪽 모퉁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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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기독병원 왼쪽 모퉁이에 세워져있는 맥켄지 목사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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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다시 세운 맥켄지 목사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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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켄지 목사 기념비의 설명문

 "스코틀랜드의 유(the Isle EWE)섬에서 태어났다. 1882년 무디 부흥집회에서 목회자의 소명을 갖게 되었고, 1894년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뉴헤브리디스 선교사로 안수를 받아 비누아트에서 15년간 선교사로 사역한 선교개척자이다.

1910년 한국으로 파송받아 부산에 도착, 매리 켈리 선교사와 결혼하여 14녀를 두고 29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후 두 딸인 헬렌 맥켄지와 케서린 맥켄지는 부산 좌천동 소재에 일신병원을 세웠다. 선교활동 기간동안 52개의 교회를 관할하였으며, 울릉도를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이다.

1912년에는 한센병 환자의 사역을 맡아 부산의 감만동 소재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요양소인 '상애원'의 설립, 1928년까지 4,260명의 환자들을 수용하고 치료하였으며, 대풍자유 치료법을 개발하여 한센환자 사망률을 25%에서 2%로 감소시켰다.

1921년 상애교회에서는 111명의 세례교인과 40여명의 학습자들이 있었고, 복음을 받아들인 한센병 환자들의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다. 1931년에는 의사 자격을 취득하여 지역사회에서 나병수용소가 아닌 병원으로 인식시켰다. 부인 켈리 여사는 한센병 환자들의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1919년에 '미감아의 집'을 세웠다.

1940년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총회장에 당선되어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호주의 이민정책, 백호주의를 반대하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나환자의 친구'인 매견시 목사는 19567, 92세로 본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001년 상애교회, 일신기독병원, 한호문화교류 협회에 의해 기념비가 재건되었으며 현재 좌천동 소재 일신기독병원에 위치해 있다."라고 적혀있다.


1915년 부산경남에서 활동하였던 호주선교사가족일동-맨왼쪽이 매켄지 선교사.jpg
1915년 호주 출신 선교사들이 찍은 단체사진- 맨왼쪽이 맥켄지 목사이다.
 
한국 초대 선교사 중 한 사람인 제임스 노블 맥켄지( James Noble. Mackenzie  1865-1956 : 한국명 매견시 梅見施) 선교사는 1910년부터 1939년까지 29년간 주로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부산에 있는 일신기독병원은 바로 그의 두 딸인 헬렌과 케더린에 의해 설립되었다.

천형병(天刑病)으로 알려질 만큼 나병(한센병, 문둥병으로도 불림)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병인데 당시 한국에는 많은 나환자들이 있었지만 적절한 치료나 보호없이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었으며 이들을 위한 선교사들의 사역은 필요하고도 적절한 것이었다.

영국구라선교회(英國救癩宣敎會)에 의해 시작된 나병선교회는 1909년 부산에 나환자수용소를 건립하였는데 그 후 호주선교부로 이관되었고, 1910년 2월 내한한 맥켄지 선교사가 1911년에 이 일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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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켄지 목사  

맥켄지 목사 부부와 헬렌 그리고 케서린.jpg
맥켄지 목사부부와 두 딸 헬렌과 캐서린

1884년 9월에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 알렌(Horace Allen)과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를 시작하였으며 인도 및 동양 각국에 나병자 구호회에서 조선 선교회에 상의한 결과 부산에 나병원을 1911년에 맥켄지 목사가 부산 감만동에 상애원(相愛園)을 설립하였고 1909년 4월에 포사이트(Forsythe, w. h., 보위렴)선교사, 우월순(R.M.Wilson) 선교사 양씨가 광주에 나병원을 설립하였으며 1913년 3월에 플레처(A. G. Fletcher)선교사가 대구나병원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외국 선교사들에 의한 구라사업에 자극을 받은 당시 일제 당국은 1915년 2월에 본 소록도 서북단에 부지 19만9천7백평과 원주민 가옥10동을 매수하고 동년 7월에 착공하여 다음해 1916년 1월에 본관회 47동을 신설 준공하고 환자 백명을 수용하여 동년 5월17일 전남도립 자혜 의원으로 개원 되었다.


1909년 10월 영국 구라선교회가 세운 상애원(한센인용 상애교회).jpg
상애교회 입구

용호동 상애원(1910).jpg
상애교회와 나환자들
 
1909년 감만동(戡灣洞) 한센병원에서 시작하여 일제시대, 해방, 미군정, 군사독재,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의 구석진 곳에서 그들은 최소한의 생존 터전을 자리잡고 일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은 물론 온갖 고통까지 견뎌내야 했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관심으로 이들은 1911년부터 상애원(相愛園) 한센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재활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의 득세로 내외적 신앙 성장과 의료 사업에 많은 압력과 장애가 다가왔다. 이같은 걸림돌이 있긴 했지만, 기독교적 구원과 인간애로 상애원(相愛園) 은 점점 사랑의 동산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40년대에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일제는 당시 군용지였던 용호동 산2번지 부근인 감만동 상애원에는 외국인, 특히 적국(敵國)인 미국, 영국, 호주 등의 사업기관은 둘 수 없다고 하여 한센 환자들을 돌보던 선교사들이 쫓겨나게 되었다. 
 

매견시 목사 목회 20주년 기념비석 제막 기념-1(1930년).jpg

1930년에 나환자를 비롯 교인들이 좌천동에 세운 "맥켄지 목사 20주년 기념비"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 훗날 이 비석은 분실되고 만다

재개발되기전 한센인교회 상애원.jpg

재개발되기전 마을 풍경
 
당시 총독부에서는 1940년 12월말까지 자진 이전이 불가능하면 소록도로 강제 이송하겠다는 엄명까지 내렸다. 그러나 감만동 상애원은 이전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결국 총독부에 의한 강제 철거가 눈앞에 이르자, 그해 10월부터 그들은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되었고 그래도 갈 곳 없는 사람들은 12월 소록도로 강제 이송되고 만다. 당시 600여 명 가운데 200여 명은 스스로 길을 찾아 떠났고, 일제의 두 차례에 걸친 강제 이송에도 불구하고 감만동 상애원을 그대로 지키던 사람도 있었으나, 일제의 끈질긴 압력에 이듬해인 1941년 3월에 소록도로 떠나게 되어 여기서 감만동 시절을 마감하게 된다. 


 

상애교회에서 바라 본 오륙도와 한센인들이 살았던 용호마을 전경(2000년)..jpg재개발되기전 상애원에서 바라다 본 오륙도 풍경
 
서구 감천동(甘川洞)과 영도 동삼동을 거쳐내야 했던 서럽던 시절을 뒤로하고 1947년 미군의 지원아래 용호동에 새붕지를 틀었다. 그 당시 이주한 사람의 수는 270여명이었다. 양성환자는 소록도로 보내지고 음성환자만 남아 자활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이들이 용호농장을 경영하면서 채소와 닭과 돼지를 기르게 된 것이다. 이곳의 지리적 특성은 북(北)편으로는 장봉산이 북풍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그 기슭 사이로 옥천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으며 남(南)으로는 드넓게 펼쳐진 태평양 바다 위에 오묘한 조화로 오륙도가 보인다.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천혜의 요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이다.
 
오륙도 SK VIEW.jpg

오륙도 SK-view 아파트 - 음성환자들은 숱한 애환의 세월속에 지금은 옛날 용호농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상애원은 2004년 정관신도시로 이전하였으며 2012년 오륙도 SK-view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초등교육을 받았던 맥켄지 목사의 큰딸인 의사 헬렌 맥켄지(Dr. Helen Mackenzie, 매혜란)와 둘째딸인 간호사 캐서린 맥켄지(Catherine Mackenzie, 매혜영)는 1950년 6.25 일어나 우리 민족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을 때인 1952년 9월에 부모가 일하였던 부산으로 건너와 부산시 동구 좌천동 부산진교회의 일신유치원에 일신부인병원(Il Shin Women's Hospital)을 설립했다. 그 후 현재의 자리에 병원을 신축하여 운영하다가 20년을 마무리하고 1972년 9월에 부산진교회의 김영선 의사에게 원장을 넘겨 운영케하고 본국으로 귀국했다. 그 후 관계되는 교육기관의 신설, 진료과목의 증설, 200병상의 시설 확장 등 발전을 계속하다가 1982년 11월에 종합병원으로 승격하면서 현재의 이름인 일신기독병원으로 개명했다. 3대 병원장 때 모자보건센타와 함께 병원을 크게 확장하여 지역 굴지의 우수병원으로 발전하여 병상 320개를 가지고 하루 외래환자 1천 명, 매 년 분만 수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매혜란, 혜영 자매는 귀국 후 수시로 자신이 설립한 병원을 찾아와 출석하였던 부산진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2002년 9월에는 개원 50주년을 맞아 맥켄지 역사관을 개관하고 맥켄지 목사가 한국에 온 지 20주년을 기념하여 1930년에 건립하여 소실된 건립비를 일신기독병원과 상애교회가 공동으로 일신기독병원 옆에 복원 제막하였다.

 

맥켄지 목사의 묘.jpg
     맥켄지 목사의 묘

한국에서 29년 활동하고 귀국한 맥켄지 목사는 빅토리아 총회장을 맡는 등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90여년 간의 생애를 마감하고 1956년 7월1일 세상을 떠났다. 부산 상애원을 운영하면서 나환자들의 피고름난 상처를 싸매주고 고독한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의 아버지요 형제요 벗이 되어 주었던 제임스 노블 맥켄지 목사의 묘비에 '한국 나환자의 친구(Friend of Korean Lappers)'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맥켄지 목사의 한국 나환자에 대한 숭고한 사랑의 정신을 다시한번 읽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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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공단(鄭公壇)과 부산첨사 정발(鄭撥)

 
정공단(鄭公壇)과 부산첨사 정발(鄭撥)
 
안용복기념관 외부에서 내려다 보면 정공단(鄭公壇)이 자리잡고 있다. 내리막 길이라 금새 도착하게된다. 정공단(鄭公壇)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산첨사 정발(鄭撥)을 비롯한 여러 분을 모신 곳이다.
 
DSCN1842.JPG
안용복기념관 외부에서 내려다 보면 정공단(鄭公壇)이 발아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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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공단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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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밖에서 본 정공단 입구 내부 - 왼쪽에 '충장공정발전망비'가 보인다.
 
정공단외삼문.jpg
정공단으로 들어가는 계단과  외삼문 - 왼쪽이 관리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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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첨사 정발과 그를 따라 순절한 군민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제단
 
정공단은 1766년(영조42) 부산첨사 이광국이 임진왜란때 부산첨사 충장공 정발 장군이 순절한 부산진성의 남문 바깥에 설치한 단으로, 정발장군을 비롯한 순국선열의 넋을 모신 곳이다. 정공단에는 '충장공정발장군비'가 세워져 있고 뒤쪽에 '증좌승지이공정헌비', 향 우측에'열녀 애향비', 좌측에 여러 군민을 모신 '전망제공비', 단 밑에 충직한 노비'충복 용월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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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충장공 정발장군비와 정발의 막료였던 이정헌의 비는 정발장군 비의 서쪽에 있다
 
임진왜란의 첫 접전지는 부산이며 부산진성을 지키던 정발(鄭撥:1553∼1592)장군은 첫 접전지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장군과 같은 충용의 장군이 열사람만 되었더라도 우리가 받았던 피해와 고통은 그 지경이 아니었을 것이라 한다.

충장공의 자(子)는 자고(子固)요 본(本)은 경주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얼마 뒤에 종성에 가서 북노를 쳐서 평정한 공을 세웠으며 그 후 거제현령, 위원군수, 훈련부정을 지내고 임진대란을 앞두고 부산진첨사로 부임하였다.
 
1592년 5월 24일(음력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군이 부산진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했다. 14일 일본군은 예측대로 부산포의 우암()에서 삼분하여 결진하고는 배를 포안()에 붙여 차례로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이때는 6시경이었다. 일본군은 성을 공격하면서 흙과 돌로써 참호를 메우면서 성벽에 접근하고 사면으로 성을 첩첩으로 포위하였다. 다수의 병력을 가진 일본군의 대군은 신무기인 조총()을 발사하며 성을 넘어 오려고 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사면에서 활과 화살을 쏘며 사력을 다하여 성을 지켰다. 일본군은 서문이 쉽게 돌파되지 않자, 조선군의 후방인 북쪽의 방어가 허술하다는 것을 알고 북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북쪽 성벽을 넘어 성으로 난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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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숙종 35년(1709)에 처음 그려진 것을 화가 변박(卞璞)이 영조 36년(1760)에 다시 그린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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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당시 부산진성은 바닷가에 위치하여 윗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

전투 개시 전 정발 장군의 전투 준비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조경남의 난중잡록을, 그리고 전투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선교사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신부의 일본사를 참조해야 한다. 1760(영조 36)에 그려진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1668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정발 장군을 추모하여 쓴 글을 토대로 그렸다고 한다.

첨사 정발은 군민을 지휘하여 활과 화살을 쏘며 죽음을 각오하고 분전하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성중은 아비규환()으로 변하였으며, 피아간에 장렬한 육탄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굳센 항전도 적의 대군 앞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마침내 첨사 정발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아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고 성은 곧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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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순절도의 부분 확대도

당시 일본군의 만행은 극에 달하였다. 일본 측의 기록에 “성중의 군대는 물론 부녀자, 어린 아이 심지어 개와 고양이까지 모두 죽였다”고 하였으니, 참혹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우리 측의 기록으로는 정발의 막빈()으로 성에 있다 싸움에 임했던 이정헌()의 사적에 “온 영()에 해골이 쌓였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전사자를 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부산진성 전투가 끝나고 난 이후 정발 장군은 1603(선조 36) 정발의 부인인 임씨(任氏)가 조선 정부에 탄원서를 올리기 전까지 거의 10여년 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망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모양이었다. 선조가 경상도순찰사(巡察使) 이시발(李時發)에게, 이시발은 다시 경상좌수사(左水師) 이영(李英)에게 명하여 전투 전말을 알아보게 하였다. 부산진성 전투에 참전했던 부산진에 거주하는 토병(土兵:향병) 가은산(加隱山) 외 2명의 증언을 토대로 정발 장군은 '도망자'라는 누명을 벗게 된다.
 
부산진성 전투는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일본군을 맞이하여 처음 치른 싸움이었다. 일본군과 군사수와 무기 면에서 비교하여 현저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군·관·민이 나라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결사 항전했다는 점에서 길이 역사에 남을 만한 전투였다. 이에 일본군도 정발 등이 용감하게 힘껏 싸운 점을 찬양하여 임진왜란 때 가장 용감한 장수는 부산의 흑의 장군()이라고 하였다. 일본군은 상륙 당일로 부산진성을 점령함으로써 조선군의 해안 방어 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침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충장공 정발장군의 충령을 모신 사당이 정공단이며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 23 (좌천1동) 에 소재하고 있으며, 해마다 부산진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4일이면 여기에 제단을 마련하여 장군의 충용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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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는 역대 부산첨사와 관리의 불망비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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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정발전망비 안내판
경상좌수사 박재하()가 1761년(영조 37) 부산진성을 돌아보다 영가대() 옆에 정발 전망비()를 세웠다. 실로 임진왜란 후 170년 만에 박재하가 왕명을 받들어 경상 좌도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에 머물게 되었다. 한 번 부산진성에 올라 공이 남긴 자취를 돌아보고 개연히 탄식하며 ‘이곳에 어찌 충장공의 전망비가 없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돌을 캐어 영가대 옆에 세우고 사적을 비석 뒤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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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장공정발전망비 
 
비의 앞면에는 ‘충장공 정발 전망비()’라는 비제()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새겼다. “지난 임진년의 왜란 때에 부산의 첨사 정발 공()은 사기를 돋우며 성을 돌아다니면서 왜적을 무수히 쏘아 맞추어 하루 만에 적의 시체가 산처럼 쌓인 곳이 세 곳이나 되었다. 화살이 떨어지자 부하 장수들이 성을 빠져나가 구원병을 기다리자고 간청하였다. 공은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 또다시 성을 포기하자고 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하니 군사들이 모두 흐느끼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얼마 후 공이 탄환에 맞아 절명하니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정공단이 건립된 이후부터 매년 음력 4월14일에 역대 부산첨사가 제향을 봉행해 왔으나, 갑오경장이후 1895년 첨절제사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국비지원은 중단된 후에는 지역주민들이 향사계를 올려 왔다. 지금은 (사)정공단보조회에서 매년 정성을 다해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2010년 고증 을 거쳐 단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정공단은 1972년6월26일 시지정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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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구 중앙대로251번길 8-2에 있는 정발장군의 동상
 
정발장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51호. 묘역은 민간인 통제선 안쪽의 야산 중턱에 있는데, 봉분은 단분()이며 부인 풍천임씨()와의 합장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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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가 조선땅임을 일본으로부터 인정받은 안용복

독도가 조선땅임을 일본으로부터 인정받은 안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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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조감도- 주차장 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부산항 개항의 역사와 독도지킴이 안용복 장군의 국토수호정신을을 기리는 '안용복 기념 부산포 개항문화관'이 지난 2014년 3월11일 부산 동구 좌천동 제일아파트 옆 증산로변에 문을 열었다. 문화관에는 안용복 장군의 자료와 부산항 개항 역사 자료 등이 전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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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원도심 산복도로 일대에 부산의 근현대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정발장군을 기리는 정공단과 일신기독병원, 부산진교회까지 역사가 그대로 보존된 명소들이 가득하다.

이러한 명소들과 안용복 기념 부산포 개항문화관이 한데 어울려

부산포 개항가도를 더욱 볼거리를 풍성하게 만든 셈이다. 특히 원도심 산복도로 한가운데 경사형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새로운 관광 명소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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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좌천동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에서 증산공원 구간에 설치된 경사형 엘리베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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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내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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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내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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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내부3-도일 상징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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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내부4 -죽도도해금지경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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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내부5-안용복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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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내부6-부산진성을 지키는 정발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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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내부7-민족자긍심의 상징, 독도
변영태 외무부장관이 발표한 성명서를 읽으면 우리가 독도를 지켜나가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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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축지에 있는 안용복의 생가터를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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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동구 성남이로 57에 있는 안용복의 생가터 표지

홍보 전문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2015년 10월 25일 '독도의 날'을 맞아 이곳에 '안용복 생가터'라는 표지를 설치했다. 개인 주택 외벽에 가로 90㎝, 세로 60㎝ 크기의 주물 동판이다.

 

안용복(安龍福)은 조선시대 숙종 때 부산 동래 사람으로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에 걸처 도일(渡日) 활동으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일본 막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데 결정적 활을 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왜구가 출몰하는 바다를 지키기 위하여 수군(水軍)으로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하였으 며, 부산의 왜관(倭館)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말을 잘하였다고 한다.
 
안용복이 1693년(숙종 19) 봄 동래어민 40여명과 함께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일본 어민들과 시비가 벌어졌다. 조선 정부는 15세기 초 왜구의 침탈로부터 섬 주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울릉도 주민들을 육지로 데려오는 쇄환정책을 쓰 고 있었다.



울릉도에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 틈을 타서 일본 어부들이 17세기 초부터 울릉도를 드나들면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일본인과 충돌한 안용복은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잡혀갔다.
이때 호키주(伯耆州, 지금의 돗토리현) 태수와 에도 막부에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하고 막부로부터 이를 확인하는 서계(書契)를 받았다. 하지만 부산으로 돌아오던 중 나가사키(長崎)에서 대마도주에게 그 서계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미 17세기 초부터 울릉도를 차지하려고 했던 대마도주는 안용복을 송환하는 동시에 조선 정부에 서계를 보내어 조선의 어민이 일본 영토인 울릉도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지시켜 달라고 집요하게 요청하였다.

1696년 봄, 안용복은 다시 10여 명의 사람들과 울릉도에 가서 마침 어로 작업 중이었던 일본어선을 발견하고 일본까지 추격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한 것에 항의 하고 두 섬이 조선의 땅임을 더욱 명확히 하였다. 그런데 귀국 후, 나라의 허락 없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조정에 압송되어 사형까지 논의될 지경이 이러렀다. 당시 영의정 유상운과 전직 영의정 남구만 등의 간곡한 만류로 사형에서 감하여 유배를 가게 되었다.
 
2차에 걸친 안용복 도일 사건은 그동안 방치되었던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고 일본에게 이곳이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받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안용복 사건 후 조선 정부는 장한상(張漢相) 등 수토사(搜討使)를 보내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분명히 했다. 한편 일본은 죽도도해금지령(竹島渡海禁止令)을 내림으로서 일본 어민들은 울릉도와 독도에서 고기잡이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했다.
 
竹島渡海禁止令 경고판.jpg
죽도도해금지 팻말
일본 경매시장에서 150만엔(2000만원)에 팔려 한국으로 반입된 1837년 일본 에도막부시대의 ‘죽도도해금지(竹島渡海禁止) 팻말. 가로 72, 세로 33크기의 소나무 팻말로 윗부분에 2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

팻말에는 "죽도(울릉도의 일본 이름)는 겐로쿠(元祿·1688~1704)시대부터 도해(渡海) 정지를 명령한 곳이므로 다른 나라 땅에 항해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한다""죽도의 오른쪽 섬도 항해해선 안 된다"로 기록돼 있다. 오른쪽 섬이란 독도를 말하는 것이다. 즉, 독도와 울릉도가 한국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7세기 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확인시킨 안용복의 활동은 1870년과 1877년 일본 메이지 정부로 하여금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는 관계없는 조선 의 영토라는 것을 재확인케 하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독도(獨島)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주장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엄연한 우리 땅이며 실제로도 우리가 영유하고 있는 독도를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 땅이라는 주장을 되 풀이하여 ‘분쟁지역화’하려는상습적인 행위로 보아 그냥 넘겨버릴 일이 결코 아니다. 조선시대 안용복의 당찬 행동을 거울삼아 더 늦기 전에 적극적인 대응과 함께 주권에 대한 도전행위임을 엄중 히 경고하고 잘못된 주장의 취소를 강력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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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타고 구석구석 돌아보는 부산 여행의 재미

 

버스타고 구석구석 돌아보는 부산 여행의 재미
   

부산 곳곳의 웬만한 명소는 이제 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다. 부산 시티투어버스가 해운대, 광안리, 태종대, 오륙도, 송도, 센텀시티, 용궁사 등 기존에 널려 알려진 관광지뿐만 아니라 원도심 산복도로와 서부산 낙동강 일대 숨어있던 명소까지 구석구석 운행하기 때문이다. 
 
부산 시티투어버스는 기존 BUTI버스와 점보버스 외에 최근 만디버스와 낙동강에코버스가 운행을 시작해 모두 4개 노선으로 늘어났다. 
 
시티투어버스 노선도.png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해운대 노선 BUTI버스·태종대 노선 점보버스 : BUTI버스는 부산역을 출발해 해운대구와 남구 일대 관광명소를 둘러보는 코스를 운행하며,  점보버스는 부산역을 출발해 영도구와 남구, 서구 일대 관광명소를 둘러보는 코스를 운행한다. BUTI버스를 타면  해운대, 광안리, 오륙도, 센텀시티, 용궁사 같은 명소에 갈 수 있고, 점보버스를 타면 태종대, 오륙도, 송도 같은 명소를 즐길 수 있다. 
 
BUTI버스.png
BUTI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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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보버스
BUTI버스와 점보버스는 부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동부산 일대 명소 위주의 코스를 운행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 생긴 만디버스와 낙동강에코버스는 원도심과 서부산 일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를 찾아관광객들에게 안내한다. 
 
산복도로 노선 만디버스 : 지난달 14일 운행을 시작한 만디버스는 부산역에서 30분 간격으로 출발해 원도심 산복도로 골목골목을 다닌다. 부산 산복도로의 대표명소인 감천문화마을을 비롯해 보수동 책방골목, 동대신동 닥밭골, 초량동 이바구공작소·유치환우체통 같은 산동네 명소를 구석구석 둘러보는 코스를 운행하는 것. 티켓 1장으로 하루 종일 원하는 정류장에서 타고 내리며 6·25전쟁 피란시절부터 형성된 부산 산복도로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산복도로 어디에서나 탁 트인 부산항 전경을 즐길 수 있고, 마을주민이 운영하는 이색 카페에서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송도 구름산책로까지 오면 태종대와 오륙도로 가는 2층 시티투어버스인 점보버스로 갈아탈 수도 있다. 물론 점보버스를 먼저 타고 만디버스로 바꿔 타는 것도 가능하다.
 
만디버스.png
만디버스

서부산 노선 낙동강에코버스 : 지난달 15일 운행을 시작한 낙동강에코버스는 사상역에서 4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이 버스는 대도시에서 찾기 힘든 느긋함, 자연 속 휴식, 생태체험을 즐길 수 있는 코스를 운행한다. 
 
낙동강 변에 들어선 화명생태공원, 삼락생태공원, 을숙도생태공원을 거쳐 다대포해수욕장까지 이어진다. 낙동강에코버스를 타면 여름철에는 화명·삼락생태공원 야외 물놀이장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딩기요트, 카약, 바나나보트, 수상스키 같은 수상레포츠도 즐길 수 있다. 낙동강 변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갈대밭을 걷거나, 연꽃이 활짝 핀 습지 옆에 자리를 깔고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다대포해수욕장 갯벌에서 조개 캐기도 색다른 체험이다. 자녀와 함께라면 낙동강의 철새와 습지, 생태, 지질 관련 자료를 풍부하게 전시하며 체험학습 프로그램도 운영하는 낙동강하구에코센터에 꼭 가보자. 아미산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모래섬 낙조 또한 놓치기 아까운 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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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에코버스

BUTI버스, 점보버스, 만디버스, 낙동강에코버스를 두고 무얼 탈지 고민이라면 환승제도를 이용하거나 통합티켓을 활용하면 된다. 부산 시티투어버스 요금은 어른 기준으로 BUTI버스와 점보버스 각각 1만5천원, 만디버스 1만원, 낙동강에코버스 7천원이다. 하지만  BUTI버스와 점보버스는 5천원만 추가하면 환승할 수 있다. 점보버스와 만디버스, 낙동강에코버스를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는 통합티켓도 2만원에 구입할 수 있다.
※문의 : (주)태영버스(051-714-3799) 
 
시티투어버스 노선도2.png

이처럼 부산을 찾는 분들에게 시티투어버스편으로 경제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둘러 볼 수 있는 부산여행을 권유코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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