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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밭속 영혼의 안식처 부도밭

 

솔밭속 영혼의 안식처 부도밭
-금정산범어사답사6


 
범어사라면 부산에 사는 사람치고 한 번쯤 가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만큼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래서 범어사는 찾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하지만, 이런 범어사에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은 한적한 곳이 있는데 바로 범어사 부도밭이다. 부도밭은 글자 그대로 수행자로 한 생을 살다 입적한 스님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부도가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묘탑, 즉 부도라는 용어로 승려의 사리탑을 가르키는 실례는 신라말부터 보이고 있다. 872년(경문왕12)에 거립된 대안사적인조륜청정탑비(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의 비문 중에 "기석부도지지(起石浮屠之地)"라는 구절은 승려의 묘탑(廟塔)이 곧 부도(浮屠)라고 알컬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부도로 추정되고 있는 것은 844년(문성왕 6)에 조성된 전흥법사영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 : 국보제104호)이다.  
 

傳興法寺廉居和尙塔 1.png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국보 제104호 전흥법사영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
우리나라 부도의 기점을 이루고 있는 전흥법사영거화상탑은 8각형을 기본으로하여 상대석(上臺石) 중대석(中臺石) 하대석(下臺石) 등의 기단부는 물론이고 그 위에 놓이는 탑신굉대, 탑신부, 옥개석, 상륜부까지 모두 8각으로 조성되어있어 전체적인 평면이 8각이다. 이러한 부도를 가르켜 8각원당형이라 하며 이후 신라시대에 건립된 부도는 모두 이러한 형태를 기본으로 삼고있다.
 
 

法泉寺址 智光國師塔.jpg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法泉寺址 智光國師塔)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101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址 智光國師塔:국보 제59호)과 같이 평면이 4각으로 변하여 일반 석타과 같은 형태가 나타나기도 하고, 범종 모양과 비슷한 형태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가 나타나 8각원당형과 함께 발전되었다.
 
부도(浮屠)에는 다른 석조물과 달리 탑비(塔碑)가 따로 세워져있어 부도의 주인공과 생애 및 행적 등을 알 수 있을 뿐아니라 나아가 당시의 사회상, 문화상등을 알 수 있어 주목된다.아울러 각 부의 정교한 불교의 조각과 화려한 장식문양도 조각의 극치를 보이고 있으며, 형태도 전체적으로 균형된 조형미를 갖추고 있어 우리나라 석조미술의 백미로 꼽히기도 한다.
 
범어사 부도밭천왕문 앞에서 대웅전 쪽을 바라보고 왼쪽 계곡으로 펼쳐진 너덜지대를 지나서 있는 숲 속에 있다. 이곳은 일부러 마음을 내지 않으면 발길이 닿지 않는 후미진 곳일 뿐만 아니라, 범어사를 자주 찾는 사람조차도 범어사 부도밭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범어사 부도밭의 범어사를 비롯 주변 암자에 흩어져있던 부도를 이곳으로 모았으며 조성시기는 광무년간에서 해방 전까지로 보인다.
 
  
범어사부도밭0-3.png
범어사부도밭1
별다른 특징 없이 대부분 석종형으로 이루어진 부도밭이지만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풍경속에 자리잡고 있어 매우 단정하면서도 엄숙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30기의 부도탑들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어느 하나도 튀어 오르거나 위축되지 않고 소박하고 평범하다. 엄격한 격식은 갖추지 않았지만 흐트러지거나 초라하기보다는 겸손하면서도 단정한 기품이 깃든 공간이라는 느낌이들게 해준다.
 
부도는 화려함을 억제하고 전체적인 균형미를 극대화했다. 한 수행자가 진리의 원음으로 몸을 가득 채우고 앉아 자비의 향기를 뿜어내는 듯한다. 그래서 조륜청정탑(照輪淸淨塔)은 바라보기만 해도 몸 속의 오욕칠정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부도와 탑비 그리고 그 뒤로 선원의 지붕을 지나 아스라이 겨울 하늘이 펼쳐져 있다.


범어사부도밭0-4.jpg
범어사부도밭2

부도의 배열상 맨 앞을 1열로하고, 1열에는 11기가 있으며 표기순서는 좌측에서 우측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1 동주당벽파대선사사리탑                                                                    1-2 금하당광덕대선사사리부도
1-3 송호당전흡대선사지탑
1-4 화양당섭문대사
1-5 선계당수지
1-6 보명당재총탑
1-7 우화당성규대사방광탑
1-8 혼해당찬윤대사방광탑
1-9 금계당성율대화상서탑
1-10 회현당석전대선사방광탑
1-11 나옹당치홍방광탑                                                                 

 
왼쪽 모서리에서 前 동국대 이사 벽파(碧坡 1929 ~2001)스님과 불광사 창건주 광덕(光德 1927~1999) 스님의 부도를 만나볼 수 있다. 앞줄의 부도 가운데 일곱 번째부터 열한 번째 부도의 몸돌에는 방광탑(放光塔)이라는 탑명이 새겨져 있다. 이 다섯 기의 부도 주인은 성규(聖奎), 찬윤 성진 석전 지홍 스님이다. 그들의 수행력이 얼마나 높았으면 몸 혹은 부도가 방광을 했을까?  수행자에게서는 우주의 좋은 기운들이 빛으로 스며들게되며 안으로 쌓인 서기(瑞氣)가 밖으로 발휘되는 것을 방광이라 하는데, 옛날 범어사의 스승들은 스스로 빛이 될 때까지 수행정진에 오롯했던 것이 ‘방광탑’이란 부도의 이름이 입증하는 것이다.
 
 범어사부도밭0-5.jpg
범어사부도밭3
 


범어사부도밭0-6.jpg

범어사부도밭4

범어사부도밭0-7.jpg
범어사부도밭5
 
두 번째 줄(가운데)에도 11 기의 부도가 있으며
2-1 덕진당여유대선사부도
2-2 제운당수산대화상적조탑
2-3 소천대선사
2-4 낙안당낭백대사
2-5, 6, 7, 9, 11 이상 5기는 각자없음
2-8 우운당
2-10 제일당
 
긴 침묵의 법석을 시연하고 있는데, 왼쪽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부도에 눈길이 머물게된다. 세 번째 부도는 소천(昭天. 1897~ 1978) 스님의 것으로 석종의 몸에 매우 다양한 문양이 들어가 있다. 아랫단의 영기문(靈氣文)과 연화문(蓮花文)은 거스름 없이 조화를 이루고 윗단 연잎들은 매끈하다. 몸통에는 톱니바퀴도 있고 해와 달도 있다. 네 번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도는 좀 오래된 것으로 몸돌에 ‘樂安堂 浪伯大師’라고 새겨져 있다. 낭백수좌 혹은 만행(萬行)수좌로 불렸던 낙안당 스님은 범어사로 출가해 평생 보시행을 펼쳐 그 행적과 이름이 전설로까지 전해지는 인물이다. (기사참조: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eskang&folder=1&list_id=13668281&page=1)


 
범어사부도밭0-8.jpg
범어사부도밭6
 
세 번째 줄(맨뒷줄)에는  8기의 부도가 있으며
3-1 도원선사소신공양지탑
3-2 지붕대사심정
3-3 해안당지담대사
3-4계우당종신
3-5 충허당호연대사
3-6 청암당연백대사
3-7 해송당초영대사
3-8 각자없이 탑비만 있음
 
맨 왼쪽에는 ‘도원선사소신공양지탑’이라 새겨져 있다. 도원스님(1200~1253)은 황실 귀족출신으로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도원사상의 정수이며, '지관타좌(지관타좌)'는 그의 실천법이다. 스님은 금강석 같은 불심으로 온 몸을 부처님께 바친 모양이다. 우리나라에는 소신공양의 사례가 그리 많지 않지만 전혀 없지도 않아서 근래에도 태고종의 충담원상 스님이 소신으로 평화통일 등의 큰 서원을 부처님께 공양한 적이 있다


 
범어사부도밭0-9.jpg

범어사부도밭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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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부도밭8

범어사 부도밭은 애초 이곳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범어사를 비롯 주변 암자에 흩어져있던 부도를 이곳으로 모았으며 조성시기는 광무년간에서 해방 전까지로 보인다.
 
솔바람에 산새소리 들리는 숲속에 자리잡은 범어사 부도밭은 단순한 죽음의 공간이 아니다. 고승들의 영혼의 안식처라고 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본래 둘이 아니어서, 삶 속의 죽음을 바로 보아야 하고 죽음 속의 삶을 형형하게 알아차려야 함을 가르치는 법문이 울려 퍼지는 곳으로 금정산범어사의 소중한 공간이다. 
 

 

범어사등나무1.jpg
범어사 등나무
범어사부도밭에서 범어사버스정류소로 내려가는 길에는 등나무군생지를 통과한다. 등나무가 피는 봄철에는 맑은 숲속에서 꽃 향기기 취해보는 재미가 추가된다. 범어사 등나무군생지는 천연기념물 176호(1966.1.13 지정)로 등록되었으며 등나무가 무리지어 있는 계곡을 등운곡(藤雲谷)이라 부르며 금정산의 절경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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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암에 새겨놓은 이안눌의 詩 2수

 

청룡암에 새겨놓은 이안눌의 詩 2수
 -금정산범어사5
 

범어사 지장전 오른쪽이자 산령각 아래 법당처럼 거대한 바위가 범어사 청룡암(靑龍巖)이다. 이 바위의 규모가 가로9m × 세로8m로 하나의 법당처럼 거대하다. 청룡암의 바위 이름은 범어사 터가 풍수적으로 청룡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형상인 청룡승천형으로 금정산을 청룡에 비유한다면 범어사 경내는 청룡의 입에 해당한다. 고당봉 현무에서 입수룡(入首龍)이 들어와서 와혈(渦血)을 이루면서 용맥(龍脈)이 완전히 그치는 지점에 우뚝 솟은 바위를 청룡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거대한 바위에 조선시대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이안눌의 시가 2수 새겨져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동래부사(1608.2.11.~1609.7.10.)를 지낸 인물이다. 이안눌은 담양부사, 경주부윤, 강화유수 등의 외직을 포함하여 형조참판·예조판서까지 지낸 고위 관료이면서, 엄청나게 많은 시문을 남긴 걸출한 당대문인이었다. 호방한 석주 권필과 온후한 동악 이안눌은 당대 2대 문인으로 꼽힌다. 

동래부사로 왔을 때는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41년(1608) 2월 이였다. 그 당시 동래는 점점 성장하는 왜구을 견제하는 국방의 요충지이자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송시현 동래부사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동래성 전투에서 패하면서 왜구들의 약탈이 빈번이 일어나 백성의 생활은 궁핍해졌다.

먼저 동래부사로 민심을 수습하던 그는 4월 15일날 이른 아침부터 집집마다 곡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상하여 늙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날이 바로 바다 왜적의 침입으로 동래성이 함락되어 당시 부사였던 송상현이 충의롭게 순절하고 온 성안은 피바다가 되고 천백 명에 한두 사람만이 겨우 살아남은 대 참상이 있었던 날이라는 이야기를 듣게된다. 그리고 이런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가 본 비참한 광경을 「四月 十五日」이라는 시로 그가 겪은 술회를 옮겨 놓았고 이는 그의 대표작이 된다.


 

4월15일 -이안눌.jpg


四月十五日 /이안눌(李安訥)

四月十五日(사월십오일)   사월 십오일은
平明家家哭(평명가가곡)   날 새자 집집마다 곡소리로다.
天地變蕭瑟(천지변소슬)   천지도 쓸쓸히 변해가고
凄風振林木(처풍진림목)   슬픈 바람 숲을 흔든다.
哭聲何慘慽(곡성하참척)   곡소리 어찌하여 이리 슬픈고?
驚怪問老吏(경괴문노리)   늙은 아전에게 놀라 물으니
壬辰海賊至(임진해적지)   임진년에 왜적이 들이닥쳐
是日城陷沒(시일성함몰)   이날 바로 동래성이 무너졌지요.
惟時宋使君(유시송사군)   그 당시 송사또(동래부사 송상현)께선
堅壁守忠節(견벽수충절)   성벽을 굳게 하여 충절을 지킬 제
闔境驅入城(합경구입성)   관내 백성들도 성에 몰려 와
同時化爲血(동시화위혈)   동시에 피바다가 되었답니다.
投身積屍底(투신적시저)   몸을 던져 바닥에 시체가 쌓이니
千百遺一二(천백유일이)   천 백에 한 두 사람 살아났지요.
所以逢是日(소이봉시일)   해마다 돌아오는 이날이 되면
設奠哭其死(설전곡기사)   제수 차려 그 죽음을 통곡합니다.
父或哭其子(부혹곡기자)   아비가 그 자식을 우는가 하면
子或哭其父(자혹곡기부)   자식이 그 아비를 울기도 하고
祖或哭其孫(조혹곡기손)   할아비가 그 손자를 우는가 하면
孫或哭其祖(손혹곡기조)   손자가 그 할아비를 울기도 하죠.
亦有母哭女(역유모곡녀)   또한 어미가 딸을 우는가 하면
亦有女哭母(역유녀곡모)   또한 딸이 어미를 울기도 하고
亦有婦哭父(역유부곡부)   또한 지어미가 지아비를 우는가 하면
亦有父哭婦(역유부곡부)   또한 지아비가 지어미를 울기도 하죠.
兄弟與姉妹(형제여자매)   형제와 자매 할것없이
有生皆哭之(유생개곡지)   살아 있는 사람이면 모두 운답니다.
蹙安聽未終(척안청미종)   콧날이 시큰하여 듣다가 말고
涕泗忽交頤(체사홀교이)   홀연 두 줄기 눈물 턱에서 만난다.
吏乃前致詞(이내전치사)   그러자 그 아전 또 하는 말이
有哭猶未悲(유곡유미비)   울어 줄 이 있는 이야 그래도 낫지요.
幾多白刃下(기다백인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칼날 아래
擧族無哭者(거족무곡자)   온가족 모두 죽어 울 사람도 없다오.


그리고 이런 백성들의 충절을 기리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 25의용단 사당을 만들었다. 이 때의 일들을 기록하여 정방록을 만들고 25인의 집 문앞에 "義勇"이란 두글자를 써붙혀 25인의 충의를 선양하였다.  25의용단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싸우지도 않고 수영성을 버린 경상좌수사 박홍을 대신해 약탈을 일삼는 왜군들과 7년 동안 유격전을 벌인 성민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외에도 동래부사로 그는 임진왜란 때 의사적을 조사 하며, 당시 정경을 담담하게 읊은 『행하유감』시를 남겼다. 또한, 송상현공을 모신 사당인 송공사에 휘진제를 올려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을 애도하였고 이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송공단을 남기고 단제가 끊이지 않게 한 초석이 되게 하였다. 이렇게 짧은 기간의 동래부사 재임 중에도 동래지역의 사람들과 경물(景物)에 대한 정체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동래지방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범어사청룡암1.jpg
지장전 오른쪽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청룡암(靑龍巖)
청용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는 대신 이안눌의 시는 아래쪽에 있어 눈여겨 보아야 찾을 수 있다. 뒤에 지붕만 보이는 건물이 산령각(山靈閣)이다.

 

이안눌청룡암시.jpg 

청룡암에 새겨놓은 이안눌의 시

청룡암시목판1.jpg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있는 청룡암시목판(부산시 유형문화재 제25호) 

 
1609년 5월 10일 이안눌이 병 때문에 사임의 뜻을 보이자 선위사(宣慰使)가 국왕에게 파직을 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하지만 후임 관리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 찌는 무더위를 못이겨 한 달 뒤에 평소 잘 아는 범어사 혜정(惠晶) 큰스님의 방에 거처하게 되었다. 이때 혜정 큰 스님이 시를 한 수 지어 바위에 새겨 놓을 것을 요청 받자 시를 지어 바위에 새겼는데 바로 청룡암시와범어사증도원산인()시이다. 
 
17세기 초에 판각된 것으로 보이는 목판(木版)은 연대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래부사를 역임한 이안눌의 친필 판각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이안눌청룡암시목판(李安訥靑龍巖詩木版)은 1999년 9월 3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이안눌이 지은 2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범어사 청룡암 시 (오언율시)
德水李居士 (덕수이거사, 덕수 사람 이 거사)
萊山晶上人 (내산정상인, 동래 사람 혜정상인)
烟霞一古寺 (연하일고사, 안개 속 한 옛 절에)
丘壑兩閑身 (구학양한신, 산수 즐기는 한가한 두 사람)
掃石苔粘 (소석태점, 바위 밟으니 신발에 이끼 푸르고)
觀松露塾巾 (관송로숙건, 소나무 보느라 두건에 이슬 젖는다)
蒼崖百千劫 (창애백천겁, 수만 겁 내려온 푸른 바위에)
新什是傳神 (신십시전신, 이제 새로이 문장을 새기네)
萬曆己酉六月(만력기유육월,만력기유년은 1609년이다)
東岳(동악)  
 
범어사 청룡암 시Ⅱ(칠언절구)
石崖苔逕入烟霞 (석애태경입연하)
坐倚松根看夕暉 (좌의송근간석휘)
蜀魄一聲山寂寂 (촉백일성산적적)
轉頭三十九年非 (전두삼십구년비)
바위 벼랑 이끼 낀 길은 안개 속으로 접어들고
소나무 뿌리에 기대 앉아 석양을 바라본다
접동새 한 마리 우는 소리에 산은 적막하고
돌이켜 생각하니 삼십구년 내 인생 어리석구나
 
東谷(동곡) 李子敏(이자민,子敏은 이안눌의 자이다)

범어사 경내를 둘러 볼 때 주변의 전각에 비해 지나처버리기 일쑤인 청룡암에는 동래부사의 이안눌의 시가 기록되어있어 볼 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동래부사이자 당대의 문장가 이안눌의 시가 새겨진 크고 질박한 바위가 지장전과 나한전 사이에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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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속의 동산대종사 부도탑

대나무숲속의 동산대종사 부도탑
-금정산범어사답사4 
 
1950년대 한국불교의 정화운동을 이끌었던 조계종 전 종정 동산당 혜일대종사의 열반 50 주기를 맞아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수불 스님)에서 추모재가 봉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추모 다례재는 지난 5월11일 범어사 보제루에서 엄수되었으며 이어 금어선원 대숲 앞에 봉안돼 있는 동산 대종사 부도탑 참배가 이어졌다고 한다.
 
싱그런 5월의 신록속에 대나무향을 맡으며 동산대종사의 부도탑을 찾았다. 예전에는 범어사경내에서 직접 참배가 가능하였으나 지금은 오른쪽으로 청련암입구에서 왼쪽길로 둘러 가야한다. 그래서 특별히 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은 부도탑 앞에 금어선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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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런 대나무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걷는 일행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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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 세계에 들어서면 마치 마음이 곧아지는 느낌이 드는 명상의 길로 이끌어주는 느낌이들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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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속의 동산대종사부도탑 전경
대나무 숲을 10분 남짓 걸으면 동산대종사부도탑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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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대종사부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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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와좌대 위의 탑신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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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올리는 차대에는 구름과 비천상이 조각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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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모서리에 자리잡고있는 사자상
웃고있는 사자의 모습이 무척 평화롭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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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대종사사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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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 조성에 힘쓴 시주자명단을 기록해 놓은 비


동산스님은 어떤분이신가. 동산스님은 범어사로 출가해서 범어사에서 입적한 진정한 범어사 스님이다. 동산스님은 1890년 2월25일 충북 단양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하동규(河東奎)였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5세가 되어 보통학교에 들어가 신식교육을 받았다. 이때 만난 스승이 주시경 선생이다. 그리고 주시경 선생의 권유로 19세(1908년)에 서울의 중동중학교를 거쳐 경성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의술을 배웠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하동규는 고모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을 통해 용성선사를 만나 불교와 용성스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12년 23세의 청년 하동규는 범어사로 출가해 동산(東山)이라는 법호와 혜일(慧日)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당시 동산스님의 은사는 용성(龍城, 1864-1940)선사였고 계사는 성월(惺月)화상이었다. 이후 동산스님은 용성선사와 한암선사(1876-1951)를 통해 사교(四敎)와 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오대산 상원사, 금강산 마하연, 속리산 복천암, 태백산 각화사, 함양 백운암, 황악산 직지사 등에서 용맹정진했다. 동산스님은 38세 되던 1927년 여름 범어사로 돌아와 금어선원(金魚禪院)에서 하안거를 시작했다.
 
용성스님은 동산스님의 깨달음을 인정했고, 1929년 범어사 조실이 되었다. 45세 때 1934년 용성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다. 1940년에는 은사스님인 용선대선사가 입적했고, 동산스님은 해인사와 범어사를 오가다 1945년 범어사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스님은 종단개혁에 앞장섰고 6.25 후 1954년에는 불교정화운동에 깃발을 올리고 1954년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했되었다. 1955년 8월 불교정화운동이 비구승의 승리로 끝나자 동산스님은 종정에서 물러나 범어사로 내려온다. 그 후 스님은 범어사 조실과 주지를 겸하고, 선원중심으로 사찰을 운영하고 납자 제접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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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 법을 설하는 동산 스님
 
1958년 8월 동산스님은 다시 종정에 추대되었고, 1962년 4얼 비구와 대처 통합종단이 구성되자 종정을 사임하고 다시 범어사로 내려왔다. 1964년에는 일주문, 금강문, 보제루(普濟樓)를 중수하고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참배로를 정비하였다.
 
동산스님은 1965315, 범어사 금강계단 제65회 보살계 산림을 주관하시고, 323일에는 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평일과 다름없이 새벽예불, 정진, 도량청소를 하고 점심 공양후 약간 피로한 기색을 보이시더니 종단의 앞날을 염려하면서 방일(放逸)하지 말고 부디 정진(精進)에 힘쓰도록 하라고 하시고, 아래의 글을 남겼다. 그리고 저녁 6시 무렵 세수 76세, 법랍 53세로 원적에 들었다. 동산스님의 탑과 탑비는 선원 동쪽 대나무숲에 세워졌다. 현재 일주문 옆 성보박물관 마당 끝에는 또한 동산대종사의 사리탑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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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대종사의 사리탑비(사진출처:오마이뉴스)

元來未曾轉 원래 바꾼 적이 없는데
豈有第二身 어찌 두 번째 몸이 있겠는가.
三萬六千朝 삼만 육천 일을
反覆只這漢 반복하는 건 오직 이놈뿐일세.
 
“복을 구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단순하고 피상적인 방법으로 복을 구하는 것은 너무 허망한 일이다. 불교는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자기가 지은 인과의 업보로 설명하니, 범부(凡夫)들이 불전(佛前)에 한두 번 불공이나 하고 시주나 조금 한다고 그 죄가 없어지고 대뜸 복을 받겠는가? 우리가 복을 구하더라도 복을 받을 행동을 해야 되는 법이니, 실질적으로 복을 받을 신앙생활과 수행을 쌓아야 되겠다.”
 
범어사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동산 대종사는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성철, 지효, 지유, 능가, 고산, 광덕, 정관, 무진장 스님 등 쟁쟁한 이들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이들 스님이 한국 선불교 중흥을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했으므로 동산 대종사가 한국 불교에 이바지한 바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범어사 율학승가대학원장인 수진 스님은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견디고 참고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감인대(堪忍待) 정신'을 오늘날 되새길만한 동산 스님의 정신으로 꼽았다. 스님이 속세의 옷을 벗은 지 반백년이 흘렀지만 스님이 남긴 사상과 정신은 여전히 우리 가슴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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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비림과 성월대선사


범어사 비림과 성월대선사
-금정산범어사답사3
 
지금으로부터 약1,300년 전인 신라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범어사(梵魚寺)는 합천 해인사,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 3대사찰로 수십개의 말사와 산중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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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산과 금샘

아득히 먼 옛날,금정산 봉우리에 한 우물이 있어 우물에는 황금빛 물이 항상 가득해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 어느날, 금빛 물고기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이름과 하늘나라의 고기라는 뜻의 ‘범어사(梵魚寺)’라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범어사는 오랜 역사와 함께 의상,원효,성월,동산,경봉,성철등 수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으며,수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유서 깊은 도량이다.이러한 범어사가 최근 조계종의 종합수행도량인 '총림'으로 승격되어 경사를 맞았다.이제 범어사도 종단의 어른인 방장이 주석하는 사찰로 거듭난 것이다. 범어사가 2012.11.7일자로 팔공산 동화사, 지리산 쌍계사와 함께 대한 불교조계종 총림으로 승격되었다. 총림은 강원,선원,율원 등을 모두 갖춘 종합수행도량으로 방장이 주석한다. 금정총림으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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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산교(魚山橋)와 어산노송(魚山老松)

맑은 냇물을 가로질러 놓인 돌다리인 어산교(魚山橋)로부터 범어사는 시작되는데. 이 다리를 지나 비스듬히 숲속 길을 오르면 화엄도량인 범어사 입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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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판의 중간에서 어산교 방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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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줄 석판 중간에서 일주문(조계문) 방향의 모습
13줄 석판이 깔린 길 양쪽에 울창한 소나무들이 빽빽히 서 있어 한층 산사(山寺)의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내는데 옛사람들은 이를 어산노송(魚山老松)이라 불렀다. 어산노송은 '금정산팔경'의 하나로 범어사의 명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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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龍城)대선사비와 성월(惺月)대선사비,
범어사 어산교를 지나서 조계문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용성(龍城)대선사비와 성월(惺月)대선사비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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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대선사비와 성월대선사비 앞 암반에 "혁신범어사 선찰개창주 성월당 일전"이라고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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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범어사 선찰개창주 성월당 일전2
비석이 서 있는 앞쪽 바닥에 있는 큰 암반에 "革新梵魚寺 禪刹開創主 惺月堂 一全(혁신범어사 선찰개창주 성월당 일전)"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월(법호)당 일전(법명)은 구한말 범어사의 주지를 지낸 스님으로 선원을 세우는 등 범어사를 중흥한 스님이다.

 
1899년 겨울 금강암에서 금강선사(선원)을 개설하였는데 현재의 선찰대본산 범어사가 있게한 지대한 공을 끼친 스님이다. 근래와서 경허스님이 주석한 이후 범어사선원이 더욱 유명해졌다. 범어사는 성월일전( 惺月一全, 1866~1943)대선사가 으뜸선찰로 혁신하였으며 동산대종사(東山大宗師 1890~1965) 때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중심사찰이었다.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부산 범어사를 대표하는 문구이다. 눈 밝은 납자들이 정진했던 참선수행 도량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선찰대본산은 성월일전( 惺月一全, 1866~1943)스님이 주석할 때 붙여진 이름이다.
  
1866년 7월15일 울주군 온사면 우봉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오철근(吳哲根)으로  7세 되던 해 부산 범어사에서 보암정호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지리산 칠불암 아자방(亞字房)에서 용맹정진하고,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에서 가행 참선 수행했다. 세상나이 30세일 때 퇴설당에서 정진하던 어느날 깊은 밤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고 게송을 읊었다.

  

大千本來空(대천본래공) 空空無空空(공공무공공) 無一法可得(무일법가득) 八萬四千劫(팔만사천겁).”

 
한동안 해인사에 머물던 스님은 천성산 내원사에서 혜월(慧月)스님과 불법(佛法)을 논한후 양산 통도사 백운선실(白雲禪室)에서 수옹(睡翁)스님과 안거 정진했다. 범어사로 돌아온 스님은 금강암에 선사(禪寺)를 열고 23명의 납자와 함께 정진했다. 이때가 1899년으로 산중선방(山中禪房)의 효시(嚆矢)로 여겨지고 있다. 잇달아 안양암.내원암.계명암.원효암.대성암.원응정사 등에 선사를 개설하고 경허(鏡虛)스님을 초빙해 계명암에서 무차선회(無遮禪會)를 여는 등 선풍을 일으켜 범어사를 참선 근본도량으로 장엄했다. 이에따라 선찰대본산으로 사격을 일신 시켰다.

 

스님은 참선뿐 아니라 계율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04년 만하율사(萬下律師)를 모시고 금강계단을 설립해 천불여래대소승계법(千佛如來大小乘戒法)을 복원하여 계맥과 전통을 다시 세웠다.


 

19102월에 범어사내원청규(梵魚寺內院淸規)를 제정하는 등 범어사가 선종 수사찰의 위상을 갖추도록 했다. 숭유억불로 피폐해진 조선불교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로 또 한번의 위기를 맞이했을 무렵 9개의 선원을 열었던 성월스님의 원력은 범어사뿐 아니라 한국불교 중흥의 일대 계기였음에 틀림없다.

 
43세 되던 해 담해(湛海)스님을 이어 총섭(總攝)으로 추대되어 가람을 중건하는 등 불사에 진력을 다했다. 학교를 설립하고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인재불사에도 관심을 보였다. 산내 암자에 흩어져 있던 선방을 통합해 금어선원(金魚禪院)을 개설했다. 

 
1950년대 동산스님이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하였고, 한국근대불교를 이끌었다.
그리고 선찰대본산 수행 도량임을 자랑하고 있다.선찰대본산은 마음을 닦는 맑은 도량이라는 뜻이다. 참선을 통해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갖가지 잡념과 망상을 쉬게하고 자신의 내면세계의 참다운 불성을 깨닫게 하도록 마음을 수행하는 근본도량이라는 뜻이다. 구한말의 범어사에는 오성월스님이 범어사 주지로 소임을 보고 있을 때 성월스님은 먼저 범어사를 선찰대본산으로 명명하고 당대에 최고 고승 경허스님을 범어사 조실스님으로 초빙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선수행 도량이다. 
 
양산 통도사가 불보종찰이고, 합천 해인사가 법보종찰이며, 순천 송광사는 승보종찰이다. 그러면 범어사는 그 네번째 선종본찰로서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는 수행도량이어야 한다. 이것이 선찰대본산의 의미이다. 

선원과 선회를 창설을 통해 선사상을 강조하는 범어사의 사상적 경향은 경허 스님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며 오성월 스님이 이를 실천한 것이라 하겠다 (대원사 발행 '범어사' 중에서) 이런 연유로 성월 스님을, 혁신범어사(革新梵魚寺) 선찰개창주(禪刹改創主)라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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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월대선사
 
본사 주지를 3차례 역임한 스님은 1943년 8월9일 사시(巳時)에 열반에 들었다. 세수 78세. 법납 71세였다. 비는 1988년 범어사 경내에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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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새겨진 시주자 명단(갑계)
용성대선사비와 성월대선사비 오른쪽에 "갑오갑보사유공단(甲午甲補寺有功壇)"이라고 기록된 바위가 있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궁핍해진 절살림을 돕기위해 같은 절에 있는 승려들이 조직한 계회를  동갑계(同甲稧)라고도 한다
 
큰 사찰에는 10여 종 이상의 사원계가 동시에 조직되어 있기도 했다. 이 중에서도 계원이 승려만으로 구성되고 그 목적이 보사(補寺사찰을 지원함)에 있었던 계로는 갑계·도종계·사종계(私宗契어산계 등이 있었지만, 갑계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사원에서 갑계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는 19세기 이후이다. 그 방법은 계원이 되는 이들이 얼마씩의 입계금(入稧金)을 내고, 또 절에서 받은 찬조금으로 기본금을 삼아 식리(殖利)도 하고, 계원들의 공동노력으로 사중 공사를 맡아 생기는 소득을 계 자금에 넣어 기본금을 늘린다. 계원들이 늙으면 땅을 사서 절에 바치고,
그 밖에 필요한 불사()나 도구 따위를


계금으로 마련하여 절에 비치하기도 한다. 이 계는 경상도의 사찰들에서 성행하였는데, 한말까지 존속되었다. 현재 범어사(梵魚寺)에는 12기의 갑계 보사비(補寺碑)가 남아 있고, 통도사(通度寺)에는 2기가 있다. 이 두 절은 갑계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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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산노송속의 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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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간지주(幢竿支柱)

같은 편에 부산시지정 유형문화재 제 15호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다. 울창한 노송 사이에 보이는 거대한 석물은 높이가 석물보다 더 큰 소나무들 때문에 흔히들 그냥 지나치기 쉽다. 당간지주란 당간을 세우기 위햐 좌우에 당간이 지탱할 수 있게 세운 기둥을 말한다. 당(幢)이란 사찰마당이나 입구에 꽂은 깃발로 이것을 법회나 의식이 있을 때 걸기 위해 당간과 당간지주를 제작하였다. 요즘말로 하면 플랭카드걸이라고 할까. 당간지주는 사찰경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풍수설로는 비보(秘宝)의 역할, 행주형布形일때 돛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돌, 나무, 쇠가 재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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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석조(石槽) 
돌로 만든 물을 받아 두는 석제수조(石製水槽)가 사찰 입구에 있다. 특이한 것은 그 형상이 마치 배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범어사 지세가 행주형 배모양으로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이 작품은 고려말이나 조선 초기 작품으로 추정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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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골과 낙안선사 이야기

비석골과 낙안선사 이야기
-금정산범어사답사2


지장암을 뒤로하고 옛길을 따라 오솔길을 비스듬히 이어간다. 주변에는 유독 서어나무가 눈에 많이 띈다. 꼬불한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다섯 기의 비석(정현덕, 홍길우, 조엄, 정현교, 장호진)이 서 있는 비석골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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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옛길을 걸으면 아래쪽에 순환도로가 이어져 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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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나무 숲속의 범어사 옛길을 걷는 회원
서어나무는 낙엽활엽교목으로 줄기는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 자라고 나무껍질은 암회색 또는 회백색이며 굴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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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골에 세워진 5기의 동래부사 영세불망비1

꼬불한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5 기의 비석(정현덕, 홍길우, 조엄, 정현교, 장호진)이 서 있는 비석골이 나타난다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曮革祛寺弊永世不忘壇),

순상국홍공우길영혁고막만세불망단(巡相國洪公祐吉永革痼瘼萬世不忘壇),

부사정공헌교영혁폐막만세불망단(府使鄭公獻敎永革弊瘼萬世不忘壇).

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

통정대부참서관장공호진영세불망비(通政大夫參書官張公浩鎭永世不忘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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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골에 세워진 5기의 동래부사 영세불망비2


피폐한 사찰구제와 보시로 은덕을 베풀었던 부사들의 마음씀에 대한 고마움을 범어사는 불망비로 대신했다. 특히 영조시대의 조엄(趙曮, 1719~1777)과 범어사는 각별한 인연으로 전해진다. 맨 왼쪽에 있는 비문은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비(巡相國趙公  革祛寺幣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석에는 불가(佛家)의 설화에 의하면 사찰의 폐단을 없애 칭송받았던 동래부사 조엄은 조선시대 초 낭백(浪佰) 또는 만행(萬行) 수좌로 불렸던 낙안선사(樂安禪師)의 현신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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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曮革祛寺弊永世不忘壇),
선사는 일찍부터 범어사에 입산(入山)하여 굳은 뜻과 신심(信心)을 가지고 학문을 닦고 수행에 정진하다가 문득 경전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큰 원행(大願行)을 스스로 실천하겠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무주상보시란 말은 남을 위하여 착한 일을 하되 마음속에 내가 착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함이다. 보시(布施라는 말은 남에게 시주(施主)한다는 것이오 시주를 하되 내가 시주한다는 생각없이 하는 시주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한다

선사는 그러한 보시정신을 가지고 자기가 가진 재물을 모두 가난하고 병든사람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이제 빈몸으로 나아가서 현재 금정구청이 있는 기찰(機察)에 가서 한 길가에 우물을 파고 정자나무를 심어 목마른 사람은 물을 마시고 피로한 사람은 그늘에 쉬어가도록 하였으며, 지금의 기장군(機張郡)으로 가는 칼치재(刀魚嶺)에 초막을 짓고 거기에서 짚신을 삼아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신을 시주하였으며, 또 동래온천(대낫들)에 외밭을 일구어 오가는 사람들의 기갈을 면하도록 외를 심어 보시하여 그들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만족하였다.
 
이와 같이 선사는 일생을 무주상보시의 실천에 바쳐 오다가 늙어서 이제 남을 위하여 일할 수 없게됨에 자기 몸마저 보시하기를 원하고 범어사 성지약수터 밀림속으로 들어가 3일 3야를 노숙하여서 결국 주린 맹호의 밥이 되어 이 세상을 조용히 떠났다. 낙안선사는 범어사에서 수도하는 사이에 절에 대한 지방관청의 폐단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음을 통절히 느껴서 내가 죽어서는 이 폐단을 맹세코 없애도록 할 것이라 다짐하였다. 입적을 앞두고 자기가 살던 방에 "이 문을 닫는자가 이 문을 열것이다(開門者是閉門人)" 라고 유언을 써붙이고는 문을 잠그고 돌아 오지 않을 길을 떠났던 것이다.
 
불가(佛家)의 설화에 의하면 낙안선사는 죽어서 서울의 조제상(趙帝相) 가문에 태어나서 일찍이 과거에 등과하여 동래부사가 되고, 또 경상감사가 되었는데 범어사로 와서 전생에 낙안선사가 살던 방문을 스스로 열고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 아래 만연했던 폐단을 제거하여 주었다고 한다. 즉 낙안선사가 전생에 맹세한 다짐을 실현하였다는 인과응보담(因果應報譚)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과설화의 증좌(證左)가 되는 것이 지금 범어사경내에 있는 순상국조공 엄혁거사폐 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 嚴革祛寺幣 永世不忘壇)라 한다.

이 단비(壇碑)는 경상감사 조엄공(趙嚴公)이 절의 폐단을 제거하여 준데 대한 은공을 길이 잊지못한다는 단비이다. 이 단비는 1908년(순조 8년) 8월에 조중려(趙重呂)가 범어사의 요청에 의하여 써준 비문으로서, 동래부사 조엄이 절의 폐단을 제거하여 준 것에 대한 은공을 잊지 못한다는 뜻이 새겨져 있다.

 
단비문에서 말하듯이 조엄공(趙嚴公)은 사찰의 폐단을 혁거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거니와 또한 민생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부사요 관찰사였다. 예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오는 도중에 고구마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오늘날까지도 민간식량으로 널리 재배되고 있다. 조감사의 사적은 ≪동래읍지≫에 의하면, "丁丑 七月到 己酉 正月 移防監司"라고 하였다. 정축년은 1757년(영조 30년)이고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승진한 것은 기묘년(1759) 1月이니, 만 2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감사로 승진한 셈이니, 이는 조공의 선정(善政)이 만 백성의 민심을 안정시켰기 때문이리라. 조엄공(趙嚴公)은 자비와 인덕(人德)이 둘이 아님을 실천을 통해서 보여준 분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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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  


금어동천에 각인된 또 한 명의 이름이 눈길을 끈다. 고종 시절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 1810~1883)이다. 대원군의 심복으로 쇄국정책을 주도했지만 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 척족정권에 의해 파면되어 유배당했다. 동래부사 재임 중에 동래부의 인정과 경치를 노래한 시 ‘동래별곡(東萊別曲)’이 전한다.
 
동래부사는 1546년 초대부사 이윤탁으로부터 시작해 1895년 사임한 정인학에 이르기까지 349년간 모두 255명이 거쳐 갔다. 그 시절 부산은 작은 포구에 불과했고 동래가 부산의 중심으로 동래부사는 국방과 외교를 책임지는 자리인 만큼 국왕의 신임이 두텁고 강명한 인사들이 많이 발탁되었다. 부산 곳곳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래부윤 출신으로 윤필은 은 동래부사, 경상우도 관찰사, 동래부 감리서를 지낸 윤필은(尹弼殷 1861~ ?) 대한제국 임시정부 재무차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윤현진( 尹顯振) 열사의 부친이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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