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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동시대의 부산역

중앙동시대의 부산역

1905 경부철도(지금의 경부선) 개통될 당시의 부산 종착점은 초량역(지금의 초량 중앙극장 )이었다부산의 일본인거류지에서 초량역까지는 1개 역의 거리가 있었다. 그 구간을 도보 또는 인력거로 다니는 수 밖에 없었고 짐이 많을 때나 비가 올 때 등 아직은 불편했다.

 

일본인들은 이런 불편을 없애기 위해 그들의 거류지 부근으로 부산역을 옮길 계획을 수립한다. 먼저 초량과 일본인 조계지 사이에는해발 130척이나 되는 쌍산(雙山)이 가로막고 있고쌍산 아래는 바다여서 쌍산(雙山) 착평(鑿平)하고바다를 메워서 육지로 만들어야 했다. 1905 말부터 영선산 동북부 일대를 착평하여 해안을 매축하고 간선도로를 부설하여 1908 3 임시 부산역(지금의 중앙동 무역센터 자리)까지 연장공사를 마쳤다.
 

이렇게하여 1910 부산역사를 준공하기에 이르렀고 1953 부산역전 대화재로 인해 부산역이 불탈 때까지 부산역 중앙동시대가 열리게 된다.

 

 
釜山停車場1-1.jpg
1910년 준공된 부산역사

1908 6월에 착공한 부산역사(釜山驛舍) 1910 10월 31일 철저한 서구식 건축기법을 따른 붉은 벽돌건물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역사건물은 처마 높이가 36척이고, 반구형으로 된 (Dome지붕의 꼭대기까지는 75척에 이르렀다.
 
부산역사(釜山驛舍) 신축한 자리는 본디 바다였던 곳을 흙으로 메운 땅이기 때문에 지반이 약해서 땅속 깊이까지(25척) 말뚝을 숱하게 박고요소요소에 콘크리트를 부어 붉은 말장(抹杖=말목) 걸친 다음, 기초부분 전부를 연결시켜 놓았다(이러한 공법은 부산세관 기초공법과도 같아서 부산세관 철거  
기초공사에서 밝혀진다). 


 
釜山停車場1-5 역내부.jpg
부산역사의 1층 내부

부산역사의 내부구조를 살펴보면 1층에 철도 관계자 대기실, 매점, 매표소, 3등객 대합소(한국인 전용), 서양식 화장실, 개찰구, 전신실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철도호텔, 매품실, 주방, 식당, 샤워실, 화장실, 보통 침실 4, 특별 침실이 3실에 초인종과 방화설비가 방마다 설치되있고 계단 위에 사무실, 전신실, 오른쪽에 위치한 탑으로 가면 회전식 계단이 있어 전망대로 이용했으며 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1,2등객 대합소와 그옆에 1,2등객 여성용 대합소가 있다. 역을 건설하는데만 17만원이 소요되었고 수하물창고, 플랫폼 상옥, 차장실, 역부실, 조차계의 대기소 등 부속건물을 포함하여 총 공사비는 35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어로 발행된 부산일보 1910년 2월18일자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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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사와 앞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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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가 교통수단으로 된 1915년 이후의 부산역사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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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대의 고급차량 행열이 역사앞이 있어 고위인사의 방문으로 추정되는 사진

 
釜山停車場2-1.jpg
아름다운 부산역사의 외관
 
건물의 외관적인 특징은 붉은 벽돌로 쌓은 외관장식은 처마선과 나란히 회색의 화강암 선을 네겹둘러 붉은 색과 회색을 강조함으로서 자칫 붉은  외관으로 인한 시선의거부감을 상쇄시키고 오히려 환하고 부드럽고 그리고 날렵하게 다가오도록 만들었다경사가 급한 건물의 슬레이트 지붕에는 창문을 밖으로 내단 각탑(角塔) 일정한 간격으로 두고 중앙의 지붕 위에는 시계탑을 얹었다
부산역사 건물은 일본 근대건축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가인 타쓰노 긴고(辰野金吾, 18541919) 영국에서 3년간 건축연구를 하고 돌아와 설계한 것으로고대 르네상스 시대 중기에서 중세 건축과 미술에  영향을 끼쳤던 독특한 양식의 사라센(Sarasens)풍을 연상시키는 건축디자인이었다.
 
辰野金吾1.jpg
                          일본 근대건축의 거장 타쓰노 긴고(辰野金吾) 

준공 당시 부산역은 부산세관, 부산우편국과 더불어 부산의 3대 르네상스식 건물로 꼽혔다. 는 일본의 국회의사당, 일본은행본점, 동경역 등을 설계하였으며 한국에서는 부산역과 조선은행본점(현 한국은행)을 설계했다. 그가 설계한 건축은 만주, 중국, 대만에 아직도 건재하여 명성을 띠고있다.

준공 당시 부산역은 서울역보다 컸을뿐 아니라 1914년 동경역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일본 본토 오사카, 고베 등을 포함해도 최대 규모의 역사였다.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의 첫 관문이었던 부산역이 가지는 의미가 컷음을 말해준다. 준공 당시 부산역은 부산세관, 부산우편국과 더불어 부산의 3대 르네상스식 건물로 꼽혔다. 
 

1910년대 부산항 주변1.png
1910년 이후의 부산항-왼쪽에 제2부두, 오른편에 제1부두와 세관이 보인다. 부산역과 제1부두는 연결회랑이 이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산역과 그 주변에는 최신의 서양식 일본식 건물이 들어서고 간선도로와 전차가 부설됐으며, 일본인들이 배에 내려 바로 열차를 이용할 수 있는 부산잔교역, 세관과 잔교 관광안내소 여관 등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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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 왼쪽으로 철도호텔과 부산공회당이 보여 1928년 이후 사진으로 보인다.
 
1920년대에 들어서 부산역전 공터를 매입해 철도호텔을 짓고 1928년에 부산공회당을 준공한다.

 
 
釜山停車場7-증축된 부산역호텔-홍보용엽서.jpg
1930년대 증축된 홍보용 엽서에 소개된 철도호텔

 
釜山停車場1-7 부산공회당.jpg
부산공회당 건물

일제 강점기 철도국의 원조와 당시 부산 지역 일본인 유지들의 기부로 1926년 8월 공사를 시작하여 1928년 3월 준공되었다. 연인원 2만 5000명 정도가 공사에 동원되었고, 총 공사비는 17만 원이 소요되었다. 면적은 1927.2㎡[약 584평], 건축물의 구조는 철근콘크리트 조이며 층수는 4층 규모였다. 부산 공회당에는 무대가 딸린 대집회실과 소집회실, 영사실, 당구실, 오락실, 대합실, 끽연실, 식당, 화장실, 창고를 갖추고 있었다. 대집회실에는 약 1,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釜山停車場1-8 1945 해방후 귀향차 인산인해를 이룬 동포.jpg
해방 후 부산항으로 귀국한 동포들이 귀향을 위해 부산역 광장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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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전선으로 가는 미군 찝차를 실은 화차


釜山停車場1-10  6.25때 전장으로 가는 장병과 군악대.jpg
전장으로 가는 미군들과 환송하는 군악대


釜山停車場1-11  6.25때 몰려든 피란민들.jpg
6.25 때 부산역으로 몰려든 피란민1

 
釜山停車場1-12 붐비는 부산역 출입구.jpg
6.25 때 부산역으로 몰려든 피란민2
 
"서울 가는 12열차에 홀로 앉은 젊은 나그네...." 12열차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8열차니 30열차니 하면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엔 등불이 존다...." '삐익ㅡ' 하고 기적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경상도 아가씨가 슬피 우네/이별의 부산 정거장...."
1953년에 발표한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피란민들의 애환이 어려 있었다. 이뿐이겠는가. 경상도 아가씨의 끈끈한 순정도 담겨 있었다. 유호(작사가)와 박시춘
(작곡가)과의 우정은 3년간의 피란살이를 함께할 만큼 돈독한 사이였던 것. 작품상으로서는 바늘과 실. 그리고 찰떡 궁합이었다. 남인수 또한 그랬던 셈이었고....역시 대박이 터졌다. 당시 레코드 사상 초유의 판매 기록을 내고 말았다.
이상은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이별의 부산정거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남인수 - 이별의 부산 정거장
 
부산역은 전쟁으로 인한 이별과 실향의 상징이었다.  대중가요로 불러진 부산 노랫말은 대부분 이별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항구의 특성상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장소적인 특징 때문이었다. 이별은 한국전쟁 때 부모형제, 연인 그 뒤 , 해양산업의 성장과 함께한 마도로스와 부산 아가씨들과의 이별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대중가요를 불렀던 피난민들이나 근대화의 환상에 빠져 부산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점차 부산 사람이 되었다.
 
 
釜山停車場1-13 6.25때 부산역 앞.jpg
군인과 피란민이 있는 부산역 앞

 
釜山停車場1-15 6.25때 부산역 앞 풍경.jpg
교통경찰과 군용차량 정차하고 있는 부산역 앞


釜山停車場1-19 역광장에 개최된 사진전.jpg
 부산역 광장에 개최된 홍보 패널과 시민들


釜山停車場1-20 1953년 부산역전대화재 이전 부산풍경.jpg
부산역전 대화재 인전의 중앙동에서 영도방향의 풍경-사진 중안에 부산역과 부산세관이 보인다.

 
釜山停車場10-부산역전대화재-국제신문 영상 캡쳐화면.jpg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대화재로 역사가 전소하여 중앙동에 임시가건물을 역사로 사용하다가 1965년 11월 1일 부산진역과 통합하여 부산진역에서 영업을 하였다.
 
 
釜山停車場1-21 1953년 부산역전대화재 흔적.jpg
부산역전 대화재 후 참상
 
부산 중앙동에 있던 부산역, 부산공회당, 부산일보 본사, 부산방송국, 부산우체국등 많은 근대 건축물들이 소실됐다위 사진을 보면 부산공회당은 벽 이 무너져있고 부산역의 지붕이 내려앉았다. 화재 진압 후 마치 폭격 맞은 것 처럼 처참하다. 이로써 중앙동시대의 부산역은 화재속에 사라지고 만다.
 
 
부산역-1970년대0.jpg
1970년대의 부산역

부산역 대화재로 역사가 전소된 이후 중앙동에 임시가건물을 역사로 사용하다가 1965년 11월 1일 부산진역과 통합하여 부산진역에서 영업을 하였다. 그 후 1968년 지금의 위치에 역사를 신축하여 1969년 6월 10일 역사를 준공하여 역무를 이전하였다. 현재의 부산역사는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에 맞추어 증․개축되었다.

 
부산역-1980년대.jpg
1980년대의 부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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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부산역사는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에 맞추어 증․개축되었다.

현재의 부산역사(釜山驛舍)전면을 유리로 꾸미고 배를 내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부산역사(釜山驛舍)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없는 건물 보여 안타깝. 중앙동 시대의 부산역사(釜山驛舍)는 건물미적인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시대를 살면서 새로운 환경에 어울리고 그러면서 오래도록 기념되는 정말 건축다운 건축은 도시를 밝게 하고  기능과 잠재력을 일깨우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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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구건조증치료기의 강소기업 서동메디칼

 
안구건조증치료기의 강소기업 서동메디칼

 

 
근례들어 안구건조증은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의 10명 중 3명이 앓고 있으며  그 중 33.3%가 우울증이 나타났다는 연구보고(분당서울대학교병원)가 있는가하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는 안구건조증이 주가되는 '눈물계통의 장애'가 늘어나면서도 특히1~3월에 증가치가 높다는 발표가 있었다.

위에 거론된 안구건조증에 대한 치료기기를 개발, 판매하고 있는 회사가 주목을 받고있다. 부산의 한 중소기업인 서동메디칼에서 안구건조증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의료기기를 개발, 판매하면서 영국 안과학 SCI저널 BJO논문 발표와 게재 및 보건복지부 고시 신의료기술평가에 선정되어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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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메디칼 김창온 대표이사
 

지난달 29일 부산IN신문의 임민희 기자와 부산테크노파크 고령친화산업지원센터의 시니어기자단원 3명은 안구건조증 치료의료기기 생산업체인 서동메디칼을 방문하여 김창온 대표로부터 설명과 제품 체험 평가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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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구건조증 치료의료기기 '누리아이-5800'에 대한 질의 (부산IN뉴스 임민희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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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버튼(LCD디스플레이)과 안면부가  연결관으로 구성된 누리아이-5800본체
 
김창온 서동메디칼 대표(60)누리아이 제품은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할 수있는 안구건조증 치료의료기기라며 시력이 나빠지는 이유는 안구에 먼지가 쌓이기 때문인데 누리아이-5800을 어릴 때부터 꾸준히 사용하면 시력이 좋아지고 노인들에게 발생하는 백내장, 녹내장도 예방된다고 자신했다.

 

설명에 따르면 안구건조증은 건조한 실내 환경과 컴퓨터·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장시간 사용, 소프트렌즈 착용 등이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눈을 과도하게 혹사시키면 눈 주위의 피부근육과 신경이 굳어져 혈액순환이 안 되고, 눈물샘이 막혀 눈물이 나오지 않는 안구건조증을 유발한다
 

요즘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의례히 컴퓨터나 노트북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업무를 하며 출퇴근 시간에는 휴대폰 화면에 눈을 돌릴 새가 없을 지경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란 말처럼 눈은 우리 인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기관 중 하나지만 정작 혹사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안구건조증으로 인해 눈의 기능이 상실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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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메디칼의 제품인 누리아이-1(좌), 누리아이-5800(우)

 

여기에서 안구건조증이란 무엇인가안구건조증은 눈물 샘에서 안구를 촉촉히 적셔주는 눈물이 나와 안구에 묻어 있는 먼지, 눈물 찌꺼기, 이물질 등을 씻어 눈물 순환을 해줘야 하는데, 이 같은 눈물 찌꺼기를 못 씻어 주어서 생기는 증상을 말한다안구건조증의 증상으로 눈시림, 눈피로, 눈뻑뻑함, 눈부심, 이물감, 충혈, 잦은 염증, 침침함, 뿌연시야, 눈꼽낌 등이 있다안구건조증 증상은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방치함에 따라 휴유증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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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구건조증으로 진료받은 환자 수는 200497만 명에서 2014214만 명으로 최근 10년 동안 2배 이상 증가했다.(출처=대한안과학회)

안구건조증이 심하면 각·결막염과 백내장, 녹내장으로 진행돼 시력이 나빠지거나 잃을 수도 있다. 실제로 안구건조증 환자는 해마다 53.7%씩 증가해 많은 사람들이 백내장 수술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특히 디지털 기기를 많이 사용하는 10대 청소년에서 안구건조증 증가율이 195%, 3040대에서 207%로 급증했다. 
 

서동메디칼의 김창온 대표이사는 이처럼 안구건조증 환자가 늘어나는 추이를 미리 예견하고 근본적인 치료용의료기기 개발에 나섰다. 김창온 대표이사는 일반 영업맨 출신으로 해외 영업을 하면서 선진국에서는 눈에 대한 보호가 일찍부터 실행되고 있는데 반해 국내에는 그렇지 못한데 착안을 하여 1996년에 창업하였다. 그리고 눈 주위를 마사지하여 눈의 피로를 풀어주는 누리아이-1을 개발하였다. 이어서 눈 주위의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는 공기압, 진동, 온열 마사지를 해서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고 눈물을 순환 촉진하여 안구건조증을 치료하는 누리아이 5800을 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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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아이-5800'-서동메디칼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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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구건조증이 심할 경우 설명-서동메디칼 홈에서

누리아이-1’은 서동메디칼이 처음 개발한 눈 주위 마사지기(의료용 진동기)로 눈 주위를 마사지하여 눈 주위 굳은 근육을 풀어주어 눈 주위 근육통증을 완화시켜 눈의 피로를 풀어주는 제품이다. 누리아이-1’의 사용방법은 본체 머리끈을 머리에 감싼 후 조여 찍찍이로 고정하면 된다. 장시간 PC사용이나 운전할 때, 눈이 자주 침침하고 피로한 젊은 층에게 사용을 권한다

누리아이-5800’의 사용방법은 본체 안쪽에 마사지 시트를 장착한 후 안대처럼 눈에 밀착해 착용한다. 본체 머리끈을 머리에 감싼 후 조여 찍찍이로 고정하면 된다. 
처음 전원을 켜면 5분 동안 공기압 마사지와 진동마사지로 눈 주위 피부 근육을 풀어주고 5분이 지나면 따뜻한 온열이 눈 밑을 데워준다. 이렇게 총 15분 동안 작동하며 막힌 눈물샘을 자극한다

제품은 5단계의 공기압 마사지와 15단계의 진동마사지, 저온·고온의 온열마사지 기능을 수동으로 조절할 수 있으며 건전지 사용이 가능해 휴대하면서도 작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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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리아이-5800의 작동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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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아이-5800의 15분 자동 코스
 
누리아이-5800’은 세계 최초로 출시된 안구건조증 치료의료기기라 당시엔 관련법이 없었고 의료기기다보니 의학적,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검증돼야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누리아이-5800’은 지난 2011년 식품의약품안전처 고시에 따라 부산대학교 병원과 인제대학교 부산백병원 2곳에서 안구건조증 환자 144명을 대상으로 1개월간 임상시험을 진행해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 받았다임상실험의 결과 정리와 식품의약안전처에 허가를 득하기 위해 라면 박스 8개 분량의 데이타 자료를 보내는 등 갖가지 난관을 헤쳐나갔던 스토리가 깔려 있다.   
 

그로부터 2년 뒤 2014년 세계적인 권위의 영국 안과학 SCI저널 BJO논문 게재는 물론 현지에서 사례가 발표되어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201410월에 보건복지부 고시 신의료기술평가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5년에는 또 한 번 산업 통상자원부 장관 세계일류상품으로 12월에 선정되는 등 안구건조증 치료기로서 탁월한 면목을 갖추고 있다이러한 최근의 결과는 김창온 대표이사의 집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국내 안과 300여 곳에 누리아이-5800’ 제품이 납품되고 있으며, 내년 3월부터는 전국의 안과에서 이 제품을 사용할 수 있을 전망이다. 초기에는 안과 의사들로부터 외면당하던 제품이 통상용 의료기기로 전환되었음은 안과의사들이 누리아이-5800’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서동메디칼의 누리아이-5800’은 지난 7월부터 건강보험 행위 비급여(안구건조증 치료를 위한 마사지 요법)로 적용되고 있다  
 

서동메디칼은 현재 대부분이 국내 수요지만 해외수출 물량도 점차 늘려나가고 있다. ‘누리아이-5800’은 미국 LA와 우크라이나에 정식 수출 중이며, 베트남 등 총 11개국에 판매되고 있다. 내년에는 안구치료 의료기기로 미국식품의약국(FDA)과 유럽시장 통합안전인증(CE)을 받을 예정이다
 

서동메디칼 김창온 대표는 앞으로 전망에 대해서는 “3~5년 내에 누리아이-5800을 보험급여로 전환과 복지용구 등록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눈 건강을 위해 비용 부담없이 누리아이 제품을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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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누리-5800을 체험하는 시니어기자단 (부 산IN뉴스 임민희 기자 촬영)

 

시니어기자단은 인터뷰를 마친 후 제품체험에 나섰다. 기본적으로 얼굴에 장착 후 15분간 작동되는데 5단계의 공기압마사지·10단계의 진동마사지, 저온·고온의 온열마사지 기능이 교대로 진행되었다.

 

사용해 본 결과 부담없이 진행되었고 눈이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다만 진동의 경우 예민한 사람을 위해 강약을 조절하는 것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동행한 기자단원은 최근 일정이 많아 피곤한 상태였는데 제품을 써보니 두통도 없어지고 시야가 밝아졌다면서 누리아이-1은 진동이 좀 더 강했지만 코가 펑 뚫리는 시원한 기분이었다고 만족감을 보였다. 또 다른 기자단원은 제품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눈 관리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누리-5800의 효과적인 관리방법으로는 사용 후 부드러운 천으로 알코홀로 소독하며 습기나 물기가 없는 깨끗하고 건조한 장소에 보관하면 된다.  잠들기 전후에 사용하면 편리하므로 안방의 침대맡에 보관해 두는 것을 김창온 대표이사는 추천한다.

 

A/S에 대해서는 제품하자시 1년간 무상 수리와 택배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보증 기간후에는 실비로 부품비만 받고 교체해 주며 이러한 일은 부산 양정동 본사에서 맡고있다.

 

김창온 대표이사로부터 서동메디칼의 아이누리-5800 개발 내력과 제품 특징을 들은 뒤 실감나게 제품체험을 하였다. 이를 통해 서동메디칼은 비록 중소기업이지만 제품의 기술력은 이미 세계적인 귄위있는 단체로부터,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알찬 강소기업임을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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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공원 주변의 계단과 사연

 
용두산공원 주변의 계단과 사연


부산을 찾는 외지인들이라면 반드시 들려보는 곳이 용두산공원이다. 도심속에 있는데다 용두산타워 전망대에 오르면 일대를 전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49미터 높이의 동산같은 용두산은 조선시대는 이 지역이 초량이라 초량소산(草梁小山)이라 불리기도 하고 때로는 소나무 숱이 울창하다고 해서 송현산(松峴山)이라고도 불렸다. 개항 이후는 용두산, 중산(中山), 해방 이후 한때는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를 붙인 우남공원이 되었다가 4·19혁명 이후는 용두산공원으로 불리면서 명칭에서부터 격동의 역사를 겪어왔다.

이처럼 용두산은 붙여진 이름만큼이나 시대에 걸쳐 다양한 이야기가 스민 유서 깊은 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약 십만평에 달하는 넓은 면적 활애하여 일본인들 전용주거지로 허가하여 조선과 거래를 하였던 초량왜관 시절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관수가(館守家) 입구에 놓인 37계단을 오르냈으며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부청 건물을 짓기전까지 사용하였다. 이른바 수탈의 역사가 자행되었던 근거지 역활을 한 내력을 담고있다.
 
해방 후 6·25 전쟁이 일어나고 임시 수도가 들어선 부산으로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용두산공원을 비롯 판자집으로된 산동네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경사기 심한 곳에는 계단을 만들어 오르내렸다. 동광동의 40계단도 그러한 계단중의 한 곳이다. 사람들은 계단을 오르내리면서서 하루를 시작하였는가하면 약속의 장소로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
 
한 손에는 연탄 한 장을 새끼에 꿰어 들고 다른 손에는 쌀 한 봉지를 들고 고개 숙여 걷던 40계단의 고달픈 가장 모습이 용두산 공원의 194계단에서도 펼쳐졌다. 삶의 애환과 역사의 내력을 담고있는 계단을 당시에 불려졌던 가요와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1. 관수가 37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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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코대 타니무라 문고 '朝鮮繪圖'속의 관수가 - 2등변 삼각형으로 보이는 부분이 37계단이다.
 
초량왜관은 1678년 4월 23일에 오늘의 용두산으로 이사를 와서 1872년 9월에 외무성에서 완전히 접수할 때까지 자그마치 194년 동안 존재했다. 초량왜관의 최고 책임자인 관수(館守)가 거처하던 공관이 바로 관수가(館守家)이다. 당시에는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쪽이 가장먼저 시가지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배를 대는 선착장이 가깝기 때문이다. 일본사람들이 배로 들어와 동쪽을 중심으로 살기 시작했고, 관수옥을 지나 왜관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관수는 외교교섭의 진행과정을 파악하여 본국(대마도)에 보고하고, 현장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관수일기(館守日記)』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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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수가 앞 37계단
 
관수가(館守家)는 개항 후 부산 일본 관리관청, 이사청, 영사관 등을 거쳐 부산부청, 일본영사관으로 활용되었다. 지금은 입구쪽에 폭4m 정도의 37계단만이 남아있지만 조선의 감시와 통제를 받은 외교와 무역의 장소였고, 부산부청은 일제의 억압의 공간이자 지배기구였다. 우리에게 아픔의 역사를 안고있는 작은 공간이다.

용두산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초량왜관은 안에는 신사를 비롯하여 일본인들의 편의 시설이 가득했다. 지금은 공원으로 들어가는 3군데의 진입로가 만나는 지점에 초량왜관 터라는 비석이 놓여져있어 예전에 이곳이 초량왜관이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관수가는 전문적인 연구자가 아닌 일반인의 눈으로도 그 흔적을 확인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관수가 위치를 찍은 사진이 구한말부터 일제시대까지 꽤 남아있어 그런 건데 계단을 기준으로 사진들을 살펴보면 건물들과 주변 모양이 조금 바뀌었을뿐 관수가 터는 그 형태가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옛 지도를 들고 초량왜관에 어떤 시설들이 있었는지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초량왜관은 스토리와 규모로 볼 때 세계적으로 찾기 힘든 독특한 유적임을 알게될 것이다
 
 
2. 40계단과 경상도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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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의 40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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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40계단
 
40계단이 언제 처음 생긴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동광동 일대가 개발됐던 1908년을 전후로 생겨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지금의 40계단길의 기준이 되는 계단도 원래의 40계단이 1970년대 난개발로 사람 한 명 지나기도 불편할 정도로 좁아지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옛 40계단은 지금의 40계단보다 북쪽으로 100m쯤 떨어진 지점에 있다

40계단은 1912년 영선산(營繕山) 착평공사를 실시하여 오늘날 영주동에서 옛 부산역과 여객부두를 왕래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계단이 설치되었다.
40계단은 1950년 6·25 피난시절 교통·행정의 중심지였던 부산중구에 위치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그 주위에 판잣집을 짓고 밀집해서 살았던 피난민들은 이계단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오르내렸다. 바로 앞 부두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내다 파는 장터로, 그리고 피난 중 헤어진 가족들의 상봉 장소로 유명했다. 또한 피난살이의 애환을 상징하던 곳으로 1951년 박재홍이 부른 “경상도아가씨”라는 곡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당시 영주동 뒷산, 동광동, 보수동 일대에 흩어져 살았던 10만이 넘는 피난민들에게는 가장 친근한 장소였다. 이들은 헤어진 가족들과 만남의 장소로 영도다리와 함께 40계단을 이용하기도 했었다. 그 시절의 피란민들에게는 40계단이 헤어진 가족을 그리며 마냥 '앉아 우는' 장소였다. 오죽하면 인정많은 경상도 여인네들이 그 사연을 물었을까.

199386일 기념비를 세웠는데 기념비 뒷면에는 옛날 즐겨 불렀던 경상도 아가씨의 노래 가사가 새겨져 있다.
 
지난날 삶의 애환을 달래고 그 때를 추억하기위해 2004년 4월 지금의 장소에 1950~60년대의 분위기를 재현하여 추억과 휴식의 장소로 40계단을 새로이 정비하고 기념비를 세웠으며,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를 조성하여 국내외 관광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고있다. 건설교통부 지정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선정된 이 거리는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부터 40계단을 거쳐 40계단 문화관과 팔관광까지 약 450m 가량에 이르는 거리를 일컫는다.
 
경상도 아가씨
작사 : 손로원, 작곡 : 이재호, 노래 : 박재홍 (1924~1989)
1.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우는 나그네
울지말고 속시원히 말좀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자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없이 슬피우는
이북고향 언제가려나.

2
고향길이 들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
담배장수 하더래도 살아보세요
정이들면 부산항도 내가살던 정든산천
경상도 아가씨가 두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눈물만이 흘러젔는
이북고향 언제가려나.

3.
영도다리 난간위에 조각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고향얘기 들려주세요
복사꽃이 피든 날밤 옷소매를 부여잡든
경상도 아가씨가 서러워서 우는구나
그래도 잊지 못할 가고 싶은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박재홍-경상도 아가씨  
https://youtu.be/qh3DwTOGhYc
 
 
3. 194계단과 용두산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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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동에서 용두산공원으로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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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계단 자리에 들어선 4대의 에스컬레이터

1916년에는 일본인들이 용두산을 공원으로 조성했다. 아마 이 시기에 광복동에서 용두산으로 오르는 돌계단도 만들어졌을 테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 1964년 고봉산이 불렀던 '용두산 엘레지'에 나오는 계단이 194개다. '한 계단 두 계단 일백구십사 계단에 사랑 심어 다져 놓은 그 사람은 어데 갔나'라며 실연의 아픔을 노래한다. 에스컬레이터는 1997년 10월부터 1998년 2월까지 차례로 설치됐다. 1호기부터 4호기까지 총 길이는 87m다. 용두산공원 진입로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이후 노인과 아이 등 보행 약자가 공원에 접근하기 쉬웠다.

광복로 입구에서 패션과 21세기도약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시티스팟 방향으로 가다 보이는 4단 에스컬레이터. 밑에서 바라본 에스컬레이터의 끝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다. 용두산 오르는 가파른 비탈길은 지금은 에스컬레이터지만 원래는 돌계단(1927년 설치)이었다. 1916년에는 일본인들이 용두산을 공원으로 조성했으므로 이 시기에 광복동에서 용두산으로 오르는 돌계단도 만들어졌을 것을 보인다.  ‘194계단’으로 불렸던 이곳은 1964년 고봉산이 불러 히트한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 한 발 올려 맹세하고 두 발 딛어 언약하던/ 한 계단 두 계단 일백 구십사 계단에 사랑 심어 다져 놓은 그 사람은 어데 갔나'라며 실연의 아픔을 노래한 ‘용두산엘레지’라는 노래로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던 명소였다. 계단 오를 때 그냥 오르는 연인들은 없었다. ‘가위바위보!’ 하면서 올라오는 연인들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편리하게 올라가는 그대신에 연인들의 낭만은 사라지고 말았다.

용두산 엘레지

작사 : 최치수, 작곡 : 고봉산, 노래 : 고봉산(1924 - 1990)

1.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을 변치말자
한발올려 맹세하고 두발딛어 언약하던
한계단 두계단 일백구십사 계단에
사랑심어 다져놓은 그사람은 어디가고
나만홀로 쓸쓸히도 그시절 못잊어
아  못잊어 운다

2.
용두산아 용두산아 그리운 용두산아
세월따라 변하는게 사람들의 마음이냐
둘이서 거닐던 일백구십사 계단에
즐거웠던 그 시절은 그 어디로 가버렸나
잘있거라 나는간다 꽃피던 용두산
아  용두산 엘레지




고봉산 - 용두산 엘레지
https://youtu.be/XKtI8D211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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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홍은 어떤 인물인가

 
문기홍은 어떤 인물인가
 

1955년 정월대보름(양력 1955년 2월7일)에 부산 용두산공원에 수화예방비를 세우는데 주도한 수화예방기도회(水火豫防祈禱會)회장인 문기홍(文基洪)은 어떤 인물일까?. 생몰미상인큼 잘 알려지지 않은 "문기홍(文基洪)"이란 인물에 하여 도움이 될 만한 당시 신문 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제감점기 시절 동아일보에 보도된 문기홍에 관한 2건의 기사를 인용,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 1931.11.18. 문기홍 보도.jpg
1931년 11월18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문기홍에 관한 기사

19311118일자 동아일보에 빈자무료치료(貧者無料治療)라는 제하에 문기홍(文基洪)이라는 한의사의 선행에 대한 기사가 눈에 뛴다. 내용은 본적을 부산에 두고 지금 울산읍 옥교동에 와서 일반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濟世堂 醫師 文基洪씨는 일찍부터 鍼灸術을 연구하여 마산, 창원, 포항, 경주 등 경상남북도를 다니며 보통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중병을 많이 고치는 중 특히 빈한한 환자에게는 약까지 무료로 써가며 친절히 고쳐주었다이다.

 
동아일보 1932.11.06. 문기홍 보도.jpg
1932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문기홍에 관한 기사
 

다음해인 193211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의술로 유명한 문기홍씨. 예나 지금이나 병을 잘 고치는 사람을 편작이라고 한다. 제세당 문기홍 선생은 부산을 위시로 각도와 여러 군에서 그 의술로 불치의 병을 완전히 고친 환자들이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문 선생이 간 곳마다 공적비가 서고 그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침구술이 능숙하여 한번만 문 선생에게서 시술을 받으면 어떤 어려운 병이라도 쉽게 치료되어 일반인들의 신임이 매우 두텁다고 한다.” 

 

1931, 2년 동아일보에 보도된 두 기사는 문기홍(文基洪)이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있는 선행을 칭찬하는 기사이다. 문기홍(文基洪)은 호가 제세당(濟世堂)이며 부산 태생으로 울산에서 뛰어난 의술로 활동을 하였다. 그는 영남지역을 순행하면서 진료를 하였는데 침구술(鍼灸術)로서 병원에서 치료하지 못한 중병을 많이 치료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수많은 병자들을 완쾌시켜 가는 곳마다 공적비가 서있을 정도로 명성을 날린 명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저술한 제세보감의 이력을 보면 관허 받은 의생, 침술사, 제약사, 약종상으로 관련분야를 두루 통달하였음이 뒷받침 해준다

 

문기홍은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의학의 이치를 연구한 사람, 즉 학문적으로 유학적 색채를 가지고 있는 의사인 유의(儒醫)였다. 1933년에 저술한 제세보감(濟世寶鑑)”은 먼저 제일 앞쪽에 수백 종의 병증을 기록해 놓고, 그 안에 침법(鍼法), 구법(灸法, 뜸법) 등을 병기하였다. 어떤 난치병도 치료할 수 있는 방안은 제세보감(濟世寶鑑)에 정리된 침구처방(鍼灸處方) 속에 녹아들어 있다. ‘제세보감(濟世寶鑑)’은 당시 활동했던 한의사들을 위해 저술된 순수한 임상지침서였다. 그래서 한의학계에서는 실제 임상에서 활용성이 강한 처방 중심으로 초점을 맞춘 것으로 한국의서의 전통적 맥락에서  , 매우 파격적 형식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한의신문 2011년 2월 25일 "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139 ": 경희대 한의대학 김남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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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 간행된 자세보감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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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세보감의 차례와 제세당문선생연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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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증별로 처방 수백종을 기록하여 놓고, 그 안에 침법(鍼法), 구밥(灸法) 등을 병기 해놓은  제세보감(濟世寶鑑)

 

처방마다 그에 해당하는 침구법이 같이 기록된 1933년 간행된 문기홍의 제세보감(濟世寶鑑)으로 그의 약력에 관허: 의생, 침술사, 제약사, 약종상으로 기록되어있다

 

그의 침뜸은 편작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하여 불치의 병을 치료하였다. 하지만 정작 후세사람들이 그를 존경한 까닭은 그의 의술이 아니라, 의술로 제인기세(濟人起世) 즉 사람들을 구제하고 세상을 일으키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포항, 감포, 경주 석굴암, 울산, 언양, 양산 통도사, 동래 좌수영, 마산 봉화령, 칠원 구산 등 경남북 일원 9군데에 그의 공덕을 찬양하는 돌비가 세워졌다.


 

제세보감 중 울산에 있다고 알려진濟世堂 文先生 基洪 永世不㤀碑1-2.jpg

                제세보감에 나오는 문기홍 불망비의 모양

부산지역의 경우 "동래 좌수영"이란 지명은 오늘의 "수영"으로 비석의 현존여부는 알 수 없으나 불망비에 기록된 비문은 다음과 같다.

理以陰陽, 良相之衡, 藥石梁肉, 治亂治平, 醫國經綸, 濟世度量. 受業諸生, 竪碑不忘  음양을 다스림은 어진 재상의 저울질이요, 약과 침으로 어려운 병을 다스리고 좋은 음식으로 평상시를 다스리니, 나라를 치료하는 경륜이요 세상을 구제하는 도량이로구나. 배움을 받는 여러 생도들은 비를 세워 잊지 않고자 하노라.  

 

그의 의술은 전국에 걸쳐 소문이 자자하였기에 그의 밑에는 수많은 문하생들이 운집하여 의술을 전수받았다. 문하생으 김정호, 류공진, 김수경, 이우성, 김수량, 이용수, 김용택, 이원필, 김만천, 김정래, 김실근, 한정호 등이 그의 제자들로 남기홍의 숭덕비에 이름을 찾아 볼 수 있다.

 

문기홍은 울산에서 한약방을 한 후 그는 30년대 후반 다시 부산으로 생활거처를 옮겨 유림과 관계하며 대동유림합동안(大東儒林合同案,1938)을 발행한다. 1950년대 들어 단군시보사(檀君時報社) 사장의 직함으로 국조단군지(國祖檀君誌,1953) 등 발행하여 국조단군숭상운동을 하는데, 이는 민족정기회복과 관련 있는 듯하다.

 

문기홍의 마지막 행적으로는 국제시장대화재, 부산역전대화재, 용두산공원대화재가 연이어 발생하자 가장 시급한 사회적인 문제해결에 뛰어든다. “수화예방기도회란 단체를 만들어 경상남도 및 부산시 등 관과 손잡고 화재예방을 위한 이색적인 방책을 수립한다. 이것이 바로 수화예방비1955년 정월대보름에 용두산신위비”, “수화예방기도대회기념비를 세울 때 그의 제자들이 문기홍 영모비를 함께 세운다. 몇 달 뒤 보국충신비를 용두산공원 북쪽 기슭에 추가로 세워 모두 4기의 수화예방비를 세우게된다. 넓은 의미의 제인기세의 한 방편이자 참담한 피란민들을 구하고자한 문기홍 방식인 것으로 해석된다.

 

부산수화예방비 수립 이후 문기홍에 대한 기록된 행동은 밝혀지지 않아 베일에 쌓이게 해준다. 보도된 내용에 따라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전반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울산에서 활동한 시기로 문기홍은 의술을 펼쳐 무료진료로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한의학술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동료 한의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임상지침서를 저술에 힘썼다.

 

후반기인 1930년대 후반 부산에서는 활동은 기본적인 의술과 함께 영남지역 유림에 관여하여 1938년 대동유림합동안과 1953년 국조단군지를 발행 민족정기회복에 힘썼으며, 1955년에는 부산수화예방비를 세워 화마로부터 수많은 사람을 구하려고 하였다. 문기홍은 전반에는 의술로 사람들을 구제하고 후반에는 사회활동으로 세상을 일으키고자 하였던 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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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적인 수화예방비와 그내력

이색적인 수화예방비와 그내력
 
부산을 방문하는 외지인을 비롯하여 외국 관광객들을 누구나 한 번쯤 용두산공원을 찾는다. 부산타워, 청동의 충무공 동상, 노랑 빨강의 꽃시계 앞에서 사진 한 장 안 찍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부산’ 하면 제일 먼저 용두산공원을 손꼽는 것은 부산을 대표하는 공원이자 부산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1916년 준공된 부산 최초의 근대공원으로 올해로 ‘준공 100년’째인 용두산공원은 일제강점기, 6.25전쟁과 피난, 산업화, 민주화 등 부산 나아가 우리나라의 드라마틱한 근대화 역정과 궤를 같이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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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 뒤로 부산타워가 보이는 부산 용두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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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정 뒤편에 있는 북쪽산책길과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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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문화원에서 시행하고있는 "길에서 만나는 인문학"의 강사인 부산민학회 주경업회장으로부터 수화예방비에 관해 설명을 듣고있는 수강생들  
 
이러한 용두산공원에는 이색적인 수화예방비(水火豫防碑)가 세워져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한 북쪽 산책길에서 석축을 따라 팔각정 뒤편으로 걸으면 수풀 속에 이른바 수화예방비를 만날 수 있다. 최초 3기를 발견하고 이어 1기를 추가로 찾아내어 4기의 비석이 있다. 화재예방을 위해 세운 '용두산신위비'를 중심으로 5m간격으로 우측에 수화예방비를 설립을 기념하는 '기도대회낙활영모비', 맨 오른쪽에 안중근, 민영환, 이준 열사의 이름이 '충신보국비'가 있고 '용두산신위비' 왼쪽으로 수화예방비를 세운 부산수화기도회 단체장인 '문기홍의 영모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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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수화예방비인 용두산신위비
 
가장 특징있는 '용두산신위비'는 높이 136㎝, 너비 49㎝, 두께 9.5㎝의 화강암으로 만든 비신 전면에는 관허(官許)라 고 상단에 쓰고, 그 아래에 큰 글자로 '용두산 신위'라 새겼다. 관아 글씨는 붉게 칠하고 그 위를 시멘트로 만든 지붕돌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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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안의 불 화(火)를 물 수(水)자로 에워싸고 있는 것이마치 부적같은 이채로운 모습
 
비신 후면의 상단에는 부산수화예방(釜山水火豫防)이라 써있고 그 아래에  네모를 두르고 네모 안에 다시 네모를 그려 그 속에 불 화(火)를 새겼다. '화'자를 중심으로 네 방위에 물 수(水) 자를 돌아가면서 새겼다. 그리고 네모의 왼쪽에 황하수급 사해용왕(黃河水及 四海龍王)을 두 줄로 새겼고, 그 아래에 이 비를 세운 이들의 직책과 이름을 새겼다. 이는 물과 불이 상극이라는 수화상극의 이치를 이용해 불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민가에서 기둥에 물 수(水)를 거꾸로 붙여 화의 기를 누르고자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보이는 화재막이를 위한 민속신앙의 한 경우가 용두산에 비보(碑補)되어 있는 것이다. 
 
부산수화예방비를 세운 당사자 였던 도지사 이상용, 국장 최치환, 시장 최병규, 서장 김장환, 이학동, 과장 백영우 그리고 설립한 단체의 문기홍 외 8명의 이름이 기록되어있다. 글씨는 붉게 칠하였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탈색되어가는 상태다. 이 비석은 4288년(1955년) 정월 대보름(양력 1955년 2월 7일)에 화재예방비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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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예방비 설립을 기념하는 용두산기도단설립기도대회낙활영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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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단군'이란 글과 함께 안중근, 민영환, 이준 열사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충신보국비'

용두산산위비 맨 오른쪽에 있는 '보국충신비(報國忠臣碑)'는 '국조단군'이란 글과 함께 안중근, 민영환, 이준 열사의 이름이 새겼으며 1955년 4월 10일에 세운 비석이다. '용두산신위비'가 1955년 정월 대보름날에 세워졌고, 몇 달 만에 또 다른 비석을 세운 것이다. 중구 토박이인 이영근씨와 함께 이 비석을 발견한 주영택 부산민학회 회장은 "구국충신들의 호국정신을 담아 부산을 화마로부터 구해내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정했다. 나라의 충신의 힘을 빌려서까지 화재를 막으려고 했을만큼 다급해졌음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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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예방비를 세운 단체장인 문기홍선생영모비-그의 제자들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부산수화예방비를 세운 단체인 수화예방기도회(水火豫防祈禱會)의 회장인 문기홍(文基洪)에 대한 불망비가 용두산신위비 오른쪽에 서있다. 문기홍은 덜 알려진 인물로 유의(儒醫)이자 침술로 이름을 떨친 문기홍은 호(號)가 제세당(濟世堂)으로 1931, 32년 동아일보에 소개된적 있다. 기사에 의하면 영남지역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무료로 치료해 준 덕으로 8개지역에 그의 이름을 칭송하는 불망비가 8기가 세워져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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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예방비 안내판
 
이처럼 이색적인 화재를 막기위한 '수화예방비'와 '보국충신비'가 세워진 내력은 무엇일까. 시간을 돌려 1950년대 초 부산지역으로 돌아가면 쉽게 이해가 된다.  
 
 
Kenneth Lehr가 찍은 화재 후의 부산 국제시장의 모습-1953. 1. 31..jpg
Kenneth Lehr가 찍은 화재 후의 부산 국제시장의 모습(1953. 1. 31)
 

먼저 1953년 1월30일 당시 임시수도 부산의 경제적 심장부였던 국제시장을 휩쓴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불은 이날 저녁 7시 40분 춘향원이란 판자집 술집에서 실수로 일어난 불로 7시간만인 1월31일 새벽 2시경에야 겨우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당시 한,미 합동 소방대까지 출동하였으나, 불길이 크게 번졌던 것은 수도가 고장나 초기 진화가 어려웠다고 한다. 당시 피해규모로는 총액이 1,400억원 이었고, 4,260채의 가게가 전소되었으며 6,800세대 3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국제시장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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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PATHE TV의 부산역대화재 영상을 캡처한 화재현장

그리고 19531127일 저녁 830분경 영주동 서쪽 산비탈에 있는 피난민 판자촌에서 불이 일어나 때마침 거세게 불어 닥치는 하늬바람을 타고 영주동·동광동·중앙동·대청동 입구 일대까지 불길이 번져 그 이튿날인 1128일 새벽 630분이 돼서야 겨우 불길이 잡혔다. 역전 대화재로 인한 피해를 살펴보면, 피해 총액은 177억환으로 집계되었고, 잿더미가 되어버린 주택이 3,132, 29명의 인명 사상자가 발생했는가 하면 6,000여 세대 30,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당시 피해액은 국제시장 대화재 때의 12.6배에 이르렀다 한다(부산역전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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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산 미군 군수기지사령관이었던 위트컴(Richard S. Whitcomb) 장군이 고아들과 찍은 사진(1954.10.16)
 
부산역전대화재 때 우리를 도와 준 고마운 분이 있다. 당시 부산 미군 군수기지사령관이었던 위트컴(Richard S. Whitcomb) 장군은 화재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 기거할 천막촌을 짓고, 학교, 교회를 세우는 등 군수물자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에 화재 1년 후 부산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위트컴 장군에 대한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 비석은 현재 찾을 수 없다


부산역전 대화재 때의 엄청난 불길이 할퀴고 간 채 아물기도 전인 1954년 12월26일 아침 6시20분경 화재가 발생하게된다. 당시 동아일보에 따르면 전기공사청부업자 정수홍(33)의 집 식모 안순자(22)라는 여자가 판자집 2층 마룻바닥에 촛불을 켜둔 채로 잠자고 있을 때 촛불이 마룻바닥으로 그만 떨어져 불길이 일어났다 겨울철이라 이때 부는 계절풍인 서북풍이 강하게 불어서 불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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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2.10일 새벽 벌겋게 불타고 있는 용두산 판자촌-2006년 6월 40계단문화관 사진전에서 소개된 용두산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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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2.11일자 용두산 대화재를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

용두산에 자리 잡은 피난민 판자촌에 불이 나서 용두산 동쪽 언덕 그 기슭일대와 광복동·창선동 일대의 판자집 1,093채가 전소되고, 8,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용두산은 조선시대부터 해송이 울창하게 이루고 있다고 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 불렀다. 용두산은 화재가 발생하여 피난민 판자집이 거의 전부 불타 버렸고, 또한 아름들이 소나무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대화재 이후 용두산은 다시 정비하여 나무를 심어 산림지대로 가꾸면서 지금의 용두산으로 가꾸어지게 되었다. 이때 피해를 입은 표면이 장미꽃처럼 변행된 석축의 돌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피해를 가늠케해주고 있다. (용두산공원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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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대화재 때 상흔으로 고열로 인해 장미모양으로 변형된 석축표면-용두산체력단련장에 있다.

이때 발생된 화제로 인해 언급안된 문화재 피해가 있었다. 6.25 전쟁 중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안전 하에 궁중유물들을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황급히 이송시킨 적이 있다. 이 궁중유물들은 부산까지 내려와서 관제청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창고에 보관된 유물들은 총 4000여점이었고 궁중일기, 조선왕들의 어진, 왕실유물, 역대재상을 그린 초상화, 어필, 많은 서적과 은제기 등이었다. 이러한 궁중유물들도 용두산 대화재를 비켜 갈 수 없었다. 1955년 1월6일 진상조사 결과 유물 4000여점 중 무려 3500점이 소실되고 반만 타거나 재활용이 가능한 유물 546점을 겨우 빼내 광복동에 있는 국립박물관 창고에 보관했고 남은 유물들은 영조와 철종의 어진과 덧불여 34점의 역대 재상 초상화, 그리고 어필과 제기만이 남았을 뿐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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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로 훼손된 1928년 김은호 화백의 순종어진   순종어진 복원 모사도(2014년)

  순종사후에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한 어진

당시 피해를 본 순종의 어진은 모사, 복원되어 87년만인 2015년 12월에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 시대 역대 임금의 모습과 어진 제작 과정을 살펴보는 특별 전시회에 발표된 적있다.


부적비석으로 막지 못했던 화마를 선조의 힘을 빌려 막으려 한 노력은 성공했을까. 앞에서 살펴본 대화재 이외에도 1957227일 당감동 큰불(220세대 전소)이 발생하였고, 19591023일 양정동 피난민수용소에 큰불(320세대 전소), 196032일 범일동 국제고무공장 큰불(63명 사망, 30명 부상), 19601021일 충무로 5가 일대에 큰불(판자집 800여채 전소), 19601225일 국제시장 큰불 있었다. 환도 이후 7년간 큰불이 자주 나서 큰 피해를 입었다
 
1950년대초 부산은 "섰다 하면 교회요 났다 하면 불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부산은 화재가 많았다. 부산의 '釜'가 '가마솥 부'라서 불이 자주 난다는 말과 함께 부산을 '불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후 부산시에서는 화재로 타고남은 판자집들은 도시미관을 위해 강제 철거되고 구획정리 사업의 시발이 되었으며, 이주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도시정비가 착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용두산신위비'가 세워진 건 용두산 대화재 직후. 당시 지역신문인 부산일보 기사에 따르면 '화마는 물론 수난(水難)까지 예방하여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신념으로 문기홍을 중심으로 수화예방기도회(水火豫防祈禱會)라는 민간 단체가 탄생했다고 한다. 연이은 대화재로 크나큰 피해를 당한 경상남도 지사와 부산시장은 수신인 용의 힘을 빌려서라도 화재를 막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간절한 염원으로 민과 관이 합심하여 1955년 정월 대보름에 화재예방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나온다. 뒤이어 충신들의 이름을 내세워 비를 세웠다. 비석 건립과 기도대회를 주도한 수화예방기도회는 침술사로 영남지역에 명성을 날린 제세당(濟世堂) 문기홍(文基洪)이 회장으로 있던 단체다
 

유달리 불이 많이났던 부산지역에는 수화예방비를 세우면서라도 화마를 막으려고 했던 사연들이 숨어 있다. 해마다 화제는 발생하고 있어 자나깨나 불조심을 해야겠지만 한편으로 올 겨울 부산을 비롯 전국에 화재없는 날이 오기를 수화예방비의 효과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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