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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초간의 첫인상이 미치는 영향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첫인상이 좋아야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맨 처음 대하는 0.5초간의 짧은 기간에 첫 인상이 상대방을 파악하는 시간이 되고, 그 첫인상이 상대를 판단하고 오래도록 기억하게 된다.

첫인상은 짧은 시간동안 우뇌에 의해서 감성적으로 받아들인 상태다. 우리의 삶에서 감성이 이성보다 늘 앞서 간다. 감성은 오감을 통한 직감적으로 일어나는 자극이어서 우리의 감성적 지배를 더 쉽게 지배한다는 의미다. 이미 얻어진 감성적 첫인상이 다른 논리적 변화에 의해 첫인상이 바뀌는 데는 많은 시간과 그럴만한 타당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첫 만남에서 0.5초간 상대방에 대한 감성적 판단으로 얻어진 첫인상은 추후에 알게 되는 가문이 좋든 나쁘든, 공부를 많이 했든 적게 했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든 그렇지 않든, 종합적 논리적 판단보다 강하다.

많은 예비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처음 만나면서 첫인상이 나쁘면 미리 알고 있던 좋은 정보에 의한 선입견이 모두 허물어진다. 그래서 처음 대하는 첫인상은 매우 중요하다.

우선 첫인상의 파악은 인간의 됨됨이인 인간성을 판단하려고 한다. 예의는 바른가?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은 어떤가? 때로는 미리 얻어진 나쁜 정보라도 첫인상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만큼 우리의 감정적 느낌의 영향이 논리적 사고보다 강하여 오래도록 기억된다.

그런데 첫인상을 파악하는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자기가 쓰고 있는 안경이 있었다면 근본색상이 어떤지 깨닫지 못하고 안경에 내재한 색상에 따라 인식한다. 그럼으로 보이는 사물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인식체계(paradigm).

그렇지 않은 사람을 첫인상으로 잘 못 파악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자기가 쓴 안경을 벗고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있는 혜안의 눈을 갖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있는 관점이 혹 잘못돼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자신의 인식체계가 옳은지 늘 관심을 갖고 바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의식이 있어야 본연의 사물을 바로 볼 수 있고 사실과 부합하는 정확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증진 된다.

첫인상의 단정적인 판단이 잘못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의식체계를 한번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을 정확히 인식하는데 소홀히 하면 자신에게 불이익이 초래된다.

커나는 자녀들에게 첫인상이 오래도록 잘못 이해 될 수 있음을 알리고 자신의 첫인상을 나쁘게 보일 수 있는 차림이나 품위 없는 행동으로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지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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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법에 대한 우리의 각오

김영란 법을 놓고 사회가 왈가왈부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김영란 법이 우리 사회에 생긴 부정부패 문화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부정부패에 깊숙이 빠져있다.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벗어났기 때문에 원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 김영란 법이다. 김영란 법을 살펴보면 저촉되는 수없이 많은 항목을 열거하고 있다. 일일이 따져가며 법을 지켜야한다면 머리가 아플 것이다.

밥은 얼마까지. 선물은 얼마까지, 부조금은 얼마까지 제공해도 좋다는 등,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일일이 저촉사항을 열거해야 일깨워 줄 수 있는 사회가 됐을까? 어떻게 하면 김영란 법에 저촉되는지 따져 봐야하는 세상이 됐을까? 서글프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아야 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같이 식사하고 어떻게 쩨쩨하게 각자 밥값을 지불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잘못된 패러다임이다. 골프를 쳤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끼리 만나 각자 비용을 지불하고 즐겁게 하루를 보내면 된다. 내 돈 내고 치는 골프는 즐겁지 않고 운동도 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

각자 부담하는 식사 자리, 술 자리, 골프 모임이 불편하고 고민된다는 패러다임을 고쳐야 한다. 지형이 바뀌었는데도 옛날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가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잘못된 사회문화을 바꾸려면 생각과 행동의 패러다임을 바꿔야지 과거의 관행에 따라 행동한다면 지탄 받을 수밖에 없다.

잘못된 관행에 젖어 있어 김영란 법이 우리의 삶을 삭막하게 만든다는 반대자들도 있다. 경제발전에 저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잘 못된 사회문화가 형성돼 있다. 꼭 뇌물(賂物)을 주고받아야 경제가 무너지지 않고 좋은 사회가 된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뇌물로  나가던 돈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쓸 수 있다.

김영란 법에 명시된 공무원, 교사, 기자만이 지켜야할 법이 아니다.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적용돼야할 법이다. 우리의 공동체의식을 높여 부조리에서 벗어나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국민소득 3 만불 시대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법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김영란 법을 시행한다고 부정한 관행이 사라질수 없다. 그에 앞서 우리의 마음 갖임을 바로잡을 교육이 선행되어 부정부패 사회문화가 바로 잡히도록 우리의 근본적 삶을 되돌아 보고 고쳐야 한다. 그 근본 원인을 찾아 치유해야지 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올바른 생활이 정착될 수 있도록 교육환경이 바뀌어야 한다규칙을 어기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을 때 체벌 그자체가 무서워 지켜야 된다는 생각을 갖도록 교육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규칙과 규율을 지키는 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이롭다는 정직성, 공정성의 가치관을 깨닫도록 교육해야 한다.

김영란 법을 비롯한 모든 법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 억제하고 방지하는 일종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못 된다. 인간은 자아의식과 상상력, 양심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양심을 저버리지 않도록 교육해 궁극적으로 법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혈연, 지연, 학연 등에 따라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끼리끼리 서로 돕는것이 미풍양속이란 허울 속에 행동하고 법망을 피해보려는 생각보다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법에 의해 정직한 행동을 요구하기보다 양심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법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인간의 두뇌를 조정할 수는 없다. 법보다 자신은 물론 혈연, 학연, 지연에 따라 충돌하는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어려서부터 교육해야 정직하고 공정한 사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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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생활을 위한 예의범절

공자님은 묻는 것이 예()라고 말씀하셨다. 예를 정립(正立)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자님도 남의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가시면 아는 것도 늘 물어보셨다고 한다.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훌륭할 점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님처럼 잘 알고 있어도 늘 물어보아 확인하는 태도야말로 배움의 근본자세다. 모를 때 물어보는 것이 꼭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아는 것도 다시 보고, 물어보아 더 배울 수 있도록 끈임 없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면서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잘 지킴으로서 사회적 잘서가 유지되고 공동생활을 원활히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의범절이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르다.

예의란 남과의 관계에서 삼가야 하는 말과 몸가짐. 남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는 조심성, 등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할 행위가 많다보니 조금은 귀찮고 조금은 번거롭게 생각될 수 있다. 잘 지키려면 적응하기 위한 인내가 필요하다.

예절을 잘 지키면 오히려 자기의 존엄성이 낮아지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쉽다. 예의(禮儀)를 잘 지킨다고 자신이 낮아지는 법은 없다. 예의는 남에 대한 사랑과 존경, 존중의 표시이다. 상대에게 예의가 바르면 좋은 감정이 싹터 서로간의 친화력이 생긴다. 예의를 지키는 것은 또 하나의 겸손함이다.

요즈음처럼 집안에 하나 아니면 둘 정도를 둔 아이들이 귀한 존재일 때 잘못하면 예절을 가르치는데 소홀하기 쉽다. 버릇없게 가르치는 잘못도 있지만 버릇없이 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버릇없는 행동을 그대로 보아 넘기는 것을 자녀에 대한 어른의 너그러움이나 사랑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싫은 것은 나만 싫은 것이 아니라 남도 싫어한다.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행동이나 무리하게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예다. 번거롭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서로 참고 예를 갖춰야 한다.

예의를 지키기 위해 첫째는 예의 기본인 인사성을 길러주는 것이 좋다. 인사를 잘 한다는 것은 상대를 존중해 준다는 의미다. 지난 우리사회에서는 어른들을 처음 뵙게 되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도록 교육했다. 그 이유는 방에 앉아서 생활하는 습관 때문이다.

상대보다 머리를 낮추는 것이 예인데 방바닥에 앉아 생활하다보면 무릎은 꿇고 머리를 낮추는 자세가 필요하게 된 때문이다. 현대 서구의 문물이 밀려오면서 비굴한 행동이라고 도외시하는 경향이 많다. 의자생활에서 무릎을 꿇고 절한다는 것은 어울리는 예의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동년배나 별 차이가 거의 없는 상대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방법까지는 권할 수 없지만 많은 나이차가 있을 때는 그러한 인사법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방에 앉아서 생활하는 우리의 생활 습성이 아직도 많은데 고개만 꾸뻑하는 것 보다 더욱 사랑과 존경의 표시가 되려면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누구를 대하거나 인사하는 행동이 꼭 필요함을 알고 영삼이 시절부터 습관화 돼야한다. 서양 사람들에 비해 우리는 인사하는 행동에 그렇게 익숙해 있지 못하여 난처한 경우가 많다.

특히 승강기(엘리베이터) 같이 좁은 공간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과 잠시 동안이지만 같이 머물러 있을 때 서로의 서먹서먹함은 꼭 무엇인가 잘못된 느낌이다. 가볍게 목례를 하든가, 간단히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서로 나누었다면 그렇게 거북하고 부자연스러운 자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인사에 익숙하지 않으면 성장해서 더욱 못하게 된다. 서양인은 어려서부터 서로 알거나 모르거나 눈만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며 가볍게 헬로(hello)?”라는 간단한 인사말을 꼭 한다.

나 또한 모르는 서양인과 마주쳤을 때 인사를 나누지만 그러한 인사가 동양인과 달리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생각된다. 서양은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 누구를 만나든 서로가 인사를 하는 것이 상예로 돼 있어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런데 동양인을 만나 인사를 했을 때 어색한 느낌은 왜 그럴까? 받아주는 상대방 쪽에서 반응이 없거나 알지도 못하는데 왜 나에게 인사해?’라는 표정으로 거부감을 표시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물론 어색한 인사는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거나 거북하게 한다. 우리도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받아주는 환경을 영삼이 시절부터 가르치고 실천해서 기분 좋은 사회가 돼야 한다.

두 번째는 언행이다. 말은 자기의 품격을 그대로 표현하여 상대에게 전달하게 된다. 공손하고 겸손하고 정중한 말은 존경의 표현이고, 친절한 말은 사랑과 우정의 표현이다.

그렇게 행동한다고 자신의 위신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친근하다고 거친 말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욕설과 좋지 않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 격의 없이 절친한 관계로 착각하기 쉽다. 우리는 친할수록 예의를 갖추고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존대 말을 사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고 말을 배우는 단계에서 욕설을 대하는 것은 좋지 못한 언어 환경이다. 요즈음 청소년 학생들의 뒤를 따르며 대화를 들어보면 너무나 쌍소리가 많고 과격한 표현이 많다.

마치 그런 행동이 청소년들의 어떤 특권으로 여기는 것은 큰 잘못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전혀 언어순화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말이 거칠면 행동 또한 거칠게 된다.

어디서 그런 좋지 못한 말이나 행동을 배웠을까? 현실감 있게, 강하게 표현한다는 생각에서 강조되는 영상문화(영화, 드라마 등)는 잘못된 풍토다. 영상문화의 특성도 아니다. 독특한 의사전달보다 오히려 어린들의 언어순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영화 친구등은 언어순화 면에서 나쁜 영화로 남는다. 요즈음도 국내영화는 대사가 매우 거칠다. 특히 국내영화는 왜 그렇게 많은 욕설로 대화가 진행되어야 할까? 이상한 기류의 발상이라고 본다. 언어 순화에 역행하는 행동으로 책임을 통감했으면 한다. 언어나 행동의 현실감과 강조어법도 좋지만 언어와 행동의 순화에 영상매체의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세 번째 외모, 표정, 행동이다. 남 앞에 설 때는 신체적으로 지저분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다든가, 얼굴이 깨끗한 느낌이 안 든다든가, 손이 지저분하다든가, 손톱에 때가 보인다든가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불편하고 불쾌감을 준다.

또한 몸에서 냄새가 난다든가, 입고 있는 옷이 깨끗하지 못하든가, 헤진 것이 보인다든가, 속옷이 겉으로 보이는 등 단정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허점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되고 예의에 어긋난다.

행동은 어떤가? 필요 없이 손발을 심하게 움직이든가, 다리를 떤다든가, 말할 때 침이 자주 뛴다든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큰소리로 말하는 것 등등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특히 스마트폰이 많아져 전화를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어디서나 큰 소리로 전화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생활이 편리해지면 그에 합당한 예절이 탄생돼야 한다. 짧고 간결한 전화방법을 어려서부터 배우도록 지도해야 한다.

무제한 통화에 가입했어도 꼭 필요한 의사전달로 끝내는 것이 전파낭비를 막는 길이다. “내 돈 내고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 있을까?” 라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에게 불편을 덜고, 공공이익에 기여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예의다.

네 번째 식사문화의 예의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식사를 통한 에너지 공급이다.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식사예절 또한 문화의 일부다. 아무리 남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우수한 지식을 가졌다 해도 식사예절이 부족하면 천해 보인다. 특히 공동으로 같이 먹어야하는 음식은 반드시 덜어 먹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특히 한국음식은 국물문화다. 반찬의 대부분이 국물과 함께 먹도록 되어 있다. 공동으로 먹는 반찬, 입에 들어갔던 수저나 젓가락으로 공동으로 먹는 식생활은 비위행적이다. ‘앞 접시를 사용하는 법을 어려서부터 길러야 한다.

그런데 앞 접시에 익숙해지지 않아 사용이 너무 번거롭게 생각된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익숙해진다면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화된 지금 각국의 식사예절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양식을 차려놓은 둥근 식탁에서 자신의 빵이나 음료수를 찾지 못하면 망신스런 경험을 한다. 모르면 물어보는 것이 예의다.

엄지손가락이 위로 보이게 손을 들어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만들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왼손이 빵(bread)b자가 되고, 오른손은 음료수(drinking water)d자가 생긴다. 오른쪽에 있는 빵과 왼쪽에 있는 음료수가 자신이 먹어야할 것들로 구분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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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의 공감대 형성

 

공감이란 상대방의 의견, 주장, 감정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는 느낌을 같이 갖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로의 마음이 일치되어 감성적으로 통했다는 의미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앞서 감성적인 동화에 의해 공감대가 형성된다.

서로가 기쁜 마음으로 팔을 들어 손바닥을 마주치는 하이 파이프(High five) 또한 공감의 표시다. 또한 우리가 박수(拍手)를 보낸다는 것은 공감한다는 의미다. 하이 파이프(High five)나 박수는 포옹과 같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 간에 크게 공감이 이루어지면 포옹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공감할 때는 모두가 포옹할 수 없어 박수로 대신한다.

박수가 환영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공감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크게 공감할 때 손뼉을 치며 마음을 열어 크게 웃는다는 말이 바로 박장대소(拍掌大笑). 크게 공감하면 웃음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만나는 사람 앞에 웃음으로 다가선다는 것은 공감하기 위한 준비가 됐다는 의미다. 누가 환영하지 않겠는가? 내가 싫은데 남에게 행동을 요구하여 공감될 수는 없다. 좋은 감정으로 다가가지 않는다면 상대방에게 감정적 동화(同化)가 이루어질 수 없다.

공감대가 형성되어 계속되는 것을 우리는 정()든다고 말한다. 이 정은 우선 자신의 감정과 상대방의 감정이 동화되어 하나가 된 결과가 계속되는 형태다. 조화로운 공감대를 갖는다는 것이 정이라고 했지만 실은 우리가 서로 존중하는 하나의 예()가 된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표현을 예()라고 할 수 있다.

공감적 이해가 그렇게 쉽지 않다. 많은 노력이 요한다. 공감은 높은 수준의 인내, 이해, 솔질함이 우선해야 한다. 공감적 이해심이 없으면 남의 말을 경청할 수도 없고 예를 다할 수도 없다.

부모가 어린 시절부터 자녀들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자주 물어보고 관심을 갖게 되면서 자신의 감정을 느끼려고 노력하게 된다. 나아가 자녀들에게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하여 관심을 갖도록 자주 물어보는 것이 좋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대인관계를 시작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동일한 문제나 사건에 서로 상반되는 감정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려야 한다. 즉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생길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애지중지하던 강아지가 병들어 죽었을 때 강아지의 죽음만은 슬픈 일이지만 더 이상 강아지가 아파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초점을 옮긴다면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 이런 복합적 감적표현도 자주 넓게 인식시켜주는 것이 좋다.

초콜릿 등 과자가 맛있어 좋았는데 이가 썩는다고 생각하니 과자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좋은 것만, 나쁜 것만 즉, 한쪽만 강조하다보면 한쪽으로 치우친 사고방식을 배우게 된다.

모든 사물에는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복합적으로 생길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늘 말하지만 모든 사물은 늘 복합적으로 상대적 양면을 갖고 있다. 동양에서는 이를 음()과 양()의 관계로 구분한다. 음양사상이다.

우리생활에서 가장 밀접한 물, , 공기 등에서도 양면성을 쉽게 발견하여 자녀들에게 설명할 수 있다. , , 공기 등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때로는 홍수나 해일, 화재, 허리케인, 태풍이 우리를 엄습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이치(理致)는 늘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공존함으로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깨우쳐 주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자연적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었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좋은 것만 먼저 취하다보니 나쁜 것이 남아 공해(公害)가 찾아온다.

우리의 깊은 슬픔이 마음과 몸의 질병을 유발 시키지만 너무 즐거운 것도 똑같이 지나치면 또한 질병을 유발시킨다. 또한 슬픈 것이 나쁜 것 같지만 마음을 정화하여 분노를 삭여주어 평온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모든 것이 한쪽으로 너무 기울면 해롭지만 조화로울 때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대인관계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서양 속담에 많은 결혼식 파티에 참석하여 많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면 후에 많은 장례식에 참석해 슬픔을 맞보아야 한다.” ,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즐거움과 함께 슬픔이 동반한다는 의미다. 우리의 조화로운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적절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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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공격적으로 되는 원인과 치유

어떤 일로 인해 자녀들이 공격적인 행동이 시작됐다면 부모가 강하게 체벌하거나 방치하거나 그 자리를 모면하려고 회피하는 것은 또 다른 공격적 행동의 여지를 남겨둘 뿐이다.

자기의 행동에서 스스로 만족감을 얻을 수 없는 한 더욱 공격적인 행동을 행하는 어린이들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없다. 공격적 행동을 할 정도가 됐다면 자기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고 본다.

우선 공격적 행동을 시작하면 자녀의 정서적 안정을 위하여 꼭 잡고 과격한 감정이 누그러들 때까지 시간의 흐름을 기다려야한다. 그리고생각하는 의자나 어떤생각하는 지정장소를 정해 편하게 앉혀놓고 너를 돌보는 것이 엄마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알리면서 눈을 마주하고 무엇이 잘못된 행동인지 잘못을 반성하면 엄마에게 와도 좋다.”라는 강한 의사를 표현해 보이고 스스로 반성할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한다.

처음에는 울고 떼쓰지만 강하게 붙잡아생각하는 의자생각하는 지정장소에 억지로라도 앉히고 꼼짝 못하게 제압하면 된다. 시간이 흐른 뒤 감정이 정리되고 반성 후 부모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앞으로 그런 행동을 다시는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반성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꼭 안아주는 행동과 함께 사랑으로 감싸주어야 한다. 부모는 언제나 자기 옆에서 지켜보고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어 감정을 순화시켜야 한다.

밖에서 다른 아이에게 공격적인 행동으로 문제를 야기 시켰다면 격한 감정이 누그러지도록 먼저 자녀의 행동을 인정해 주면서 동조해 감정이 좋아졌을 때 사건의 중심에서 상대방의 입장이 돼 생각하도록 지도해 스스로 해결점을 찾도록 감정에 호소해야한다.

자녀들의 나쁜 버릇에만 집착하여 혼내주면 원인을 찾기 어렵고, 행동을 바로잡을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앞서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이이들은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으로 불안감이 쌓이고 해소할 방법을 찾게 되는데 남을 공격하는 나쁜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한번 나쁜 유혹에 넘어가면 벗어나기란 들어설 때의 몇 배 노력이 필요하다.

비록 아이들이지만 인격을 존중해 주고, 무시하거나 과격한 언사, 체벌로 감정을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엄하게 키워야 손가락질 받지 않게 된다고 쓰린 마음을 참아가며 엄격한 규율과 체벌로 자녀를 기르기 쉽다.

늘 엄하게 꾸짖는 것만이 좋은 방법은 아니다. 일시적인 효과에 그치기 쉽다. 철이 들어야 잘못을 뉘우친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자신이 문제의 중심에서 생각하고 반성한다는 의미다.

아이들의 대부분은 억압하고 때리는 법을 부모에게서 배워 남을 제압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격적인 성품으로 자란다. 부모가 무섭게 체벌해서 눈치 보면서 행동을 삼가는 것이 바르게 고쳐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자녀들을 체벌하고 과격한 언사를 행하는 부모라면 스스로 자기의 과거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혹 어린 시절 자기의 부모에게 많은 체벌과 꾸지람을 받고 크지는 않았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적대시하는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나?

인생에서 여러 번 실패하고 세상을 원망했던 부모라면 자녀들에게 이 세상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강하게 길러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은 아닌가? “시집살이 많이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더 매섭게 한다.”고한다.

내가 당한 시집살이를 며느리에게 절대로 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을 여러 번 하지만 깊이 잠재해 있다가 의지가 약해지면 곧바로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면서 더 심한행동이 나타난다. 그래서 시어머니를 빼닮았다고 듣게 된다.

우리는 의지보다 잠재력이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렸을 때 체벌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가혹한 체벌을 가하게 된다. 대를 이어 아들딸에게도 체벌을 가하도록 교육하게 된다.

아버지에게 매 맞는 어머니 밑에서 보고자란 딸이 아버지와 같은 사람에게 절대 시집가지 않겠다고 다짐 하지만 시집갈 때는 아버지와 닮은 사람을 골라 결혼하게 된다. 어려서 보고 듣고 배운 잠재력이 의지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교육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것은 극명한 사실이다.

억압과 체벌 앞에서는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행하지만 스스로의 감정에 따라 고쳐진 자발적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수동적이어서 일에 의욕이 떨어지고, 창의성이나 행동에 대한 능률이 떨어져 노동생산성이 높아질 수 없다.

아이들의 모든 잘못에 대해 문제 중심에서 반성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고쳐지지 않는다. 부모가 이해시키고, 설득하고, 제안하는 것은 효과가 있는 듯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고 시간만 많이 걸리고 시정되지 않는다.

억압과 체벌은 일시적인 효과이고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서로간의 감정적 간극을 크게 만들어 애정과 신뢰를 쌓아갈 수 없게 만들어 감정계좌만 줄어든다.

만약 좋은 감정계좌가 적자인 상태에서 체벌이나 혹독한 훈계는 반성의 기회라기보다 반감과 거짓말을 강요하는 결과가 된다. 스스로 감정을 다스릴 수 있을 때만 잘못을 반성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이 잘못인가?,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가? 잘못하면 어떤 결과가 나에게 미치는가?” 생각해보고 자기중심에서 문제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만약 자녀들이 갑자기 말 잘 듣고 얌전해 졌다고 보일 때 무엇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관심을 갖고 관찰해할 중요한 시기다. 부모가 체벌하고 억압하면 체념하게 된다. 근본적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나쁜 행동이 살아날 수 있다.

스스로 깊이 사고하고 과거를 반성하고 창의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면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점점 떨어진다. 공산주의가 몰락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사상이 나빠서라기보다 스스로 이해하고 활동해서 만족감을 얻을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서는 사고하고 행동할 의욕과 창의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시키는 대로 일만하면 된다. 민주주의의 단점을 개선하려고 이론적으로 무장한 것이 공산주의 아닌가? 이론적으로 공산주의가 천국이라고 하지만 실천에서 모순이 들어난다.

사람에게 의욕과 창의성을 제거하고 시키는 일만하는 것은 로봇(Robot)에 불과하다. 그러한 자신의 행동은 즐거움과 보람이 없고 지루하고 피곤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삶의 지혜와 교훈을 배운다는 사실을 믿도록 충만한 사랑으로 유연하게 감싸 주어야한다. 규칙을 어기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을 때 체벌 그자체가 무서워 지켜야 된다는 생각을 갖도록 교육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규칙과 규율을 지키는 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이롭다는 정직성, 공정성의 가치관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자녀들을 교육할 때 엄격한 것과 강압적인 억압과는 구분해야한다. 규칙은 엄격하게 지켜야한다. 그러나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행동이 훌륭하고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강압적인 행동으로 훌륭한 재능을 구속하지는 않는지, 현재의 엄격한 행동이 혹 강압적인 행동은 아닌지 부모는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엄격하다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고, 방정하지 못한 것을 본인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원칙에 따라 지도하는 방법이다.

엄격한 교육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자녀가 감정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어리다고 원칙에 벗어난 행동을 눈감아 주고 감싸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정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을 심어주게 된다. 이성을 기만하지 않고 올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잘못한 행동의 경중에 따라 자녀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을 일시적으로 압수한다거나, 가장 좋아하는 놀이를 일시 정지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좋다.

서양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벌을 받게 되면 곧장 실행에 들어간다. 예를 들어 어떤 잘못으로 1주일간 TV를 못 보게 한다면 켜져 있는 TV 앞을 지날 때 손으로 눈을 가리고 지나간다.

왜 그렇게 행동할까? 부모가 합리적으로 잘못에 대한 징계를 가하기 때문이다. 그 벌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본인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벌을 지키지 않으면 용돈이 깎인다든가, 기대되는 부모와의 약속이 취소된다든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를 할 수 없다든가, 다른 불이익을 감수해야 된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강압적인 행동은 인격을 무시하여 자존심을 꺾고, 마음의 상처를 주는 행동이다. 체벌은 신체적 고통을 체험하고 상기하여 벌벌 떨게 하는 억압적인 행동이다. 마치 나쁜 사람처럼 대접받고 감시받는 느낌을 같게 해서는 안 된다. 어려서 학대 받고 자라면 수치심을 모르고 잔인해지기 쉽다.

때로는 어린 아이들의 표현력이 부족해서 비판받고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고통 받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가? “자식을 이길 장사가 없다.”는 부모의 약점을 아이들에게 노출시켰기 때문에 잘못을 고쳐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발명왕 에디슨은 수업시간에 보통 아이들과 달리 색다른 질문을 계속하다가 문제아로 취급돼 퇴학을 당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넓은 아량으로 훌륭한 발명가가 되었다. 자녀들이 경솔한 말을 했다면 그 자리에서 꾸짖는 것보다 사과하도록 해야 한다.

왜 사과했는지 어떤 부적절한 행동을 했는지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혹독한 훈계로 오히려 두려움으로 마음이 상해서는 안 된다. 옛말에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들에서 새지 않는가?" 집에서 잘못된 교육에 의해 잘못된 행동이 밖에 나가서 지탄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학교나 사회단체 생활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

아이들에 대한 공격적인 행동은 어떤 이유에서 나올까?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

욕구충족을 위한 행동

현실이나 상황에서 도피하기 위한 행동

공격적인 행동에 의해 기쁨을 얻는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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