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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사랑의 의미는 실행에서 알게 된다.

사람의 행동은 늘 가슴(마음)으로 결정한다. 두뇌를 비롯한 우리의 몸이 컴퓨터의 하드웨어(Hardware)라면 마음은 소프드웨어(Software)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두뇌를 비롯한 육체적 성장과 발달이 형성되면서 그 안에 마음이 깃들어져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한다.

우리는 두뇌를 비롯한 몸과 그 속에 담긴 마음이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성장한다. 우선 건강이 먼저지만 그 속에 담기는 마음이 건전(健全)해야 한다. 우리가 영양섭취를 하고, 운동을 하고, 쉬는 행동은 몸이란 하드웨어를 관리하기 위한 것이고, 공부하고, 사색하고, 인간관계를 맺는 등등은 좋은 소프트웨어를 연마하는 행동이다.

어느 부분도 중요하지 않을 수 없지만 건강하게 자라면서 마음을 훌륭하게 연마해야 한다. 그중에 사랑과 배려도 꼭 갈고 닦아야할 덕목이다. 사랑은 마음속에 묻어두는 것으로 부족하고 해동으로 실행함으로서 결실을 맺게 된다. 대부분 머리로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가슴에서 자신의 이익을 뒤로하고 남에게 양보하고 베푼다는 희생이 이루어지는 사랑의 행동이 쉽지 않다.

사람이 두개의 사탕 중 한 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은 다소 쉽게 행할 수 있지만 하나밖에 없는 사탕을 남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자기의 희생이 따르기 때문에 쉽게 행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이러한 행동이 가슴에서 나오는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다. 이러한 사랑의 감정은 느낌에서 끝내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져야하는 숭고한 결실이다.

그런데 아주 조그만 사랑이라고 실천하지 않으면 큰 사랑도 베풀지 못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자주 작은 희생부터 할 줄 아는 실천이 반복되어야 큰 사랑도 행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경험을 어려서부터 익혀야한다. 자신을 위한 이해득실(利害得失)을 깊게 사고하며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기 어려운 영유아의 시기에 특히 감정이 지배하는 대로 행동하는 단계에서 어떤 사랑의 환경에 노출됐을 때 작은 희생의 경험을 자주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어린 손녀딸을 되리고 과천 서울대공원에 놀러갔을 때 어떻게 하다가 제 또래 아이와 같이 돌고래 쇼를 관람하면서 서로 가지고간 과자를 내좋고 다정히 나누어 먹는 것을 보았다.

네 것 내 것이란 개념이 전혀 없이 서로 나누어 먹는 모습이 오래도록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라면서 이해관계에 억매여 사는 어른들도 저렇게 순진하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자녀가 생후 8개월 쯤 되면서 판단력을 조금씩 갖게 된다고 했다. 주위 환경에 적응하고 무엇을 보고 구분할 줄 아는 시기가 된다. 혼자 있으면 두려워하고,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을 구별한다. 다시 말하면 우뇌의 직관적인 판단과 사고가 발달한다.

성장하면서 모든 것을 이해관계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운지 알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커간다.

때문에 지각이 발달하면서 자기중심적 사고가 강화되기 전에 정직성, 참을성, 사교성, 협동성, 표현성 등의 마음을 연마하는 조기교육이 필요하다. 혼자 놀이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과 어울려 놀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어야 상호관계를 자주 인식한다.

어린 시절 부모들이 같이 놀아 주며하는 행동을 바로 따라서 한다. 첫 돌이 지나면서 관찰력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남이 하는 행동을 주시하고 자기도 그렇게 해보려고 한다.

부모의 이야기를 이해하면서 아주 간단한 의지를 표현하기 시작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행동을 중지시키면 화낼 줄도 알게 되고 자기에게 잘 대해주면 응석도 부린다.

이 응석은 필요할 때는 들어줘야 하지만 계속되면 의타심이 생기게 되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무시(거절)하게 되면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배운다.

인간만이 간직할 수 있다는 자아의식과 상상력이 강해지면서 독립성이 생긴다. 욕심이 점점 생기면서 본인 위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되는데 이때부터 다소 냉정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해야 한다. 양보하며 다른 사람과 상호협력의 필요성도 조금씩 알도록 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혼자 놀면 재미없고 같이 놀면 즐거울 수 있는 놀이를 많이 택해 줄 필요가 있다. 물건을 서로 협력해서 운반할 수 있는 놀이, 주고받아야 놀이가 될 수 있는 놀이,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놀이를 선택해 준다,

다른 아이와 다투었을 때 다른 아이의 입장이라면 어떻겠는가? 다른 아이가 없으면 어떻게 놀 수 있겠는가?”라는 것을 항시 곧바로 이야기 해주어 남의 기분을 이해해 보는 기회를 자주 갖도록 해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영유아시절부터 조금씩 발견되지만 반복되는 교육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인지가 발달되고 더불어 살아야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상호협력의 필요성을 알 수 있게 된다.

부모는 자녀가 보는 앞에서 먹을 것, 장난감 등을 다른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독점하려는 생각을 접도록 하고, 남을 배려해야 재미있게 상호 협력하여 놀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도록 도와야 한다.

사람은 늘 재능보다 인성이 앞서야한다고 했다. 인성은 어머니의 태교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마음인 인성의 형성도 조기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옛 어른들의 경험에서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이기심을 줄이고 남에게 헌신과 봉사하는 마음을 길러 준다면 이기적인 행동을 억제할 수 있는 성품으로 발전시켜줄 수 있다. 봉사와 헌신의 사랑은 아주 어려서부터 실천하지 않으면 먼저 이기적 성품이 강화되어 장성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물질적인 면에서 알아보자! 어려서부터 이기심이 강화되면 본인이 쓰고 남아도 남을 돕는 행동마저 매우 어렵게 된다. 있다고 해서 나눔의 실천이 되지는 않는다. 모르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란 더욱 불가능하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 더욱 어렵다.

일반적으로 1 만원이 있을 때는 10 만 원쯤 있으면 생각하고, 10 만원이 있게 되면 100 만 원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농사를 지어 99 섬을 추수한 사람이 겨우 1 섬을 추수한 사람에게 100 섬을 채울 욕심으로 1 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한다는 이야기는 인간의 한없는 욕심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대부분이 자기중심적으로 이해관계를 생각하는 이기심을 어려서부터 키워 왔기 때문이다. 교육이 없다면 누구나 그렇게 자라게 된다. 물론 이세상은 생존경쟁 환경에서 잘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적자생존(適者生存) 법칙이 통용되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아의식, 상상력, 양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육에 의해서 다 같이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지고 사는 것이 보람되고 유익함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더불어 사는 좋은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마음을 길러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보통 사람은 누구나 먼저 본인을 생각하고 다음에 주위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이기심을 키워주는 교육이 반복되면 이타심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 사회에서 지탄 받는 인성이 형성된다. 특히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현시대의 환경에서는 다른 사람과 어울려 놀 수 있는 기회를 부모들이 의식적으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자연의 심오한 뜻을 배우게 된다. 동식물까지도 살아가기 위한 방법과 조건으로 협력성의 주요함을 알고 있는데 사고력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이야 두 말할 필요 없다. 세상에 태어나 최소한 살아가기 위해 방법과 조건을 유지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석가모니께서 말하는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란 의미는 이 세상에서 나만이 존귀하고, 잘났다고 뽐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 그 자체 하나하나가 존귀하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 세상에 존귀하게 태어나서 첫째는 생존이고, 다음이 생존과정에서 남으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고, 보람되게, 행복하게 살다 가는 사람으로 길러지는 것이 진정한 삶의 근본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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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도덕(道德)과 윤리(倫理)

앞서 율()과 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 모두가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바른 행위인 도리(道理)이다. 윤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사회적 법률에 따라 형벌(刑罰)을 받아야 하지만 도덕에 어긋난 행동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개인적 지탄(指彈)의 대상이 된다.

도덕이 우리의 삶에 대한 개인적 가치관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윤리는 도덕을 포함한 사회적 가치관(價値觀)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우선 도덕적 가치관을 확립하기 위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다.

초등학교에서 바른생활을 배우고, 중고등학교에서 보다 높은 경지의 도덕에 대한 교육을 받고, 대학에서 윤리에 대한 사상이나 철학적 삶을 배운다.

문제는 어려서 정직하고, 성실하고, 약속을 잘 지키고, 서로의 사랑과 배려의 덕목을 잘 길러야 중고등학교,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사회적 윤리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다. 이때부터 윤리에 대한 학문적인 경지로 발전해 간다.

그런데 때로는 공동체에서 약속을 잘 지킨 사람만 손해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렇다고 약속이나 규칙을 지키지 않도 된다는 교육은 해서 안 된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배제(排除)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착해서 손해본다는 의식은 심어주지 말아야 한다.

윤리학은 본질적으로 도덕을 포함한 철학의 한 부분이다. 인문학 또한 도덕을 포함한 철학적인 학문에 속한다. 그런 삶의 철학이 대학에 들어가서만 배운다고 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바른생활, 도덕에 대한 일반적 기반이 형성돼야 인문이나 윤리의 철학적 과정에 들 수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무엇보다 먼저 가정을 비롯해 사회생활에 필요한 공동체 덕목을 잘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인지 깨닫도록 해야 할 의무가 부모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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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참회하고 계(戒)를 지키도록 하자!

세존께서 율()보다 계()를 더 강조하셨다. 율은 타율적인 제약을 받는 규범이고 계라는 것은 자발적인 마음으로 지켜야 될 도리이다. 계를 어겼다고 처벌을 받지는 않지만 율을 어기면 마땅히 법에 의해 사회적 지탄(指彈)을 받아야 한다.

계를 좀 더 쉽게 말해 보자!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일반적으로 식사하기 전에 세수를 한다. 물론 샤워를 할 수도 있다. 어쩌다 그렇게 못했다면 마음이 개운치 못하다. 일을 하거나 운동하거나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샤워를 하거나 적어도 손발과 얼굴을 씻어야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환경에 놓여지면 어쩐지 개운치 못하다. 이렇게 지켜야할 것을 지키지 못하여 마음이 언짢은 것을 계라고 한다.

석가모니 성자의 5가지 계를 소개해보자!

살생을 하지 않도록 하라!

도둑질을 않도록 하라!

음행을 하지 않도록 하라!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술을 마시지 않도록 하라!

이것들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며 완전하게 전부를 지킬 수는 없지만 지켜보려는 노력이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러한 계가 석가모니 성자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공자님도, 다른 많은 성인(聖人)들도 같은 내용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들려주고 강조하고 있다.

이 계야말로 일반인들이 참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품격, 인성을 기르기 위한 근본적 인성교육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자녀를 가진 부모는 어린 자녀들을 자기 소유물처럼 다루지 않도록 하라!”고 하나 더 덧붙여보고 싶다.

살생을 하지 않도록 하라! 말씀하시는 첫 번째는 생명의 귀중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살생은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나 해가 되지 않는 한 미물을 포함해서 살아있는 어떤 생명이라도 일부러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모두가 이 세상에 어떤 연유로 태어났다면 살아갈 권리와 자유가 있다. 우리 또한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인데 자연을 지배하겠다는 과욕으로 살생을 하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도둑질을 않도록 하라! 두 번째 도둑질이란 넓게 보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최소한의 먹을 것, 입을 것, 거처할 곳을 얻는 행위 이외에 대한 물질적인 탐욕을 금하도록 하라는 말씀이시다.

물질에 대한 절대적 빈곤이 해결됐다면 탐욕과 과욕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여 다른 사람에게 고통과 손해를 끼치지 않아야한다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상대적 빈곤을 해결하고 그 이상의 탐욕에 시달려 이것저것 과욕을 내다보면 그 소유를 위한 행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소유에 지배를 받게 된다.

음행을 하지 않도록 하라! 세 번째 음행이란 실지 음란한 행동을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속으로 품어보는 것까지도 행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마음에 품고 있으면 마음이 흐트러지고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이 씨받이를 위한 성적행위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런데 사람만이 씨받이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는 성행위의 즐거움을 잊지 않고 자연법칙의 허용범위를 넘어가며 행동한다. 때문에 윤리와 도덕성을 넘지 않도록 율로서 금하고 있다.

오늘날 성적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일어나는 성적추행이 자주 일어난다. 어른들의 사회적 패가망신은 물론 자녀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수 있을까?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네 번째 거짓말은 남에게는 물론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까지도 삼가야 한다. 우리의 삶 중심에는 신뢰가 가장 중요함을 늘 강조했다. 신뢰를 잃으면 삶의 모두를 잃는 것과 같다.

술을 마시지 않도록 하라! 다섯 번째 술을 마시되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될 때까지 마시면 안 된다는 의미다. 술 또한 하나의 음식 일부로 봐야 한다. 지나친 식음은 독이 된다. 마음이 즐겁거나 괴로울 때 신경을 무디게 만드는 효과가 있지만 그 때마다 술로 해결한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행동이다.

요즈음 모든 드라마,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술이다. 청소년들이 보고 어떤 마음으로 술을 받아들일까? 걱정이다. 청소년이 많이 볼 수 있는 드라마에서 술 마시는 장면은 자제돼야 한다. 오늘날 음주는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어른들이 어렸을 때 부모 앞에서 술을 배우게 하고 청소년들 끼리 음주를 배우는 경우가 없도록 꼭 주의했으면 한다.

하나 덧붙이고 싶은 행동은 부모가 됐다고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해 어린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지 않고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것이다. 성인이 돼서 결혼했다고 상대를 내 것이라 여기는데서 부부 간의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욕심 낼 때 탈이 생긴다.

삶에서 이 계들을 완전하게 지키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이 쉽게 지키지 못할 것을 왜 제시했을까? 자신을 항시 뒤돌아보면서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여 또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서 연마해야할 필요한 것들이다. 자녀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주어야 훌륭한 자녀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늘 참회(懺悔)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세존께서 이를 율로 보지 않고 계로 본 이유를 이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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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해가 부르는 큰 교통사고

정확한 이해 없이 넘겨짚으면 큰 사고를 일으키거나 당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넘겨짚다 팔 부러진다.“는 말이 있다. 얕은 상식을 동원하다보면 생각지 못한 사고가 난다.

우리는 길에서 차는 오른쪽으로 사람은 왼쪽으로란 슬로건(slogan)을 듣고 배워 보행해왔는데 어느 날 차는 오른쪽으로 사람도 오른 쪽으로 걸어라!’하고 바뀌었다.

차도의 건널목을 건널 때는 오른쪽 도보 걷기가 차와 일어날 수 있는 교통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크게 기여한다는 데 이해가 되지만 이면도로처럼 차와 사람이 같이 사용되는 도로에서는 반대로 교통사고의 큰 원인이 된다.

그 이유는 사람이 왼쪽보행을 한다면 앞에서 닥아 오는 차를 보면서 주의할 수 있지만 오른쪽보행을 한다면 뒤에서 오는 차를 전혀 볼 수 없어 사고가 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운행되는 차는 소음이 매우 작아 듣고 확인하며 행동하기 어렵다.

나도 이면도로에서 오른쪽보행을 하다가 뒤에서 오는 차를 미처 의식하지 못해 교통사고를 당하고 6개월 정도 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연구 없이 잘못된 탁상공론에 의한 오른쪽보행 지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하철을 자주 사용하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모두가 오른쪽에 서 있고 왼쪽을 비워 두어 빨리 가야하는 사람들에게 배려하고 있다. 이 또한 탁상공론에서 나왔다. 이런 방법으로 에스컬레이터를 운용하면 늘 오른쪽에 큰 부하를 가하여 망가지기 쉽다.

모든 기계는 균형을 유지하며 운행돼야 고장이 적게 일어난다. 잘못된 관행이 되어 차후에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 운동, 걷거나 뛰지 말라고 캠페인을 수 없이 했지만 고쳐지지 않고 캠페인마저 포기한 상태다. 모든 교육은 처음에 신중하게 사고하고 행해야 한다. 어린 자녀들에게 교통사고의 미연 방지를 위해 올바른 교통교육을 하지 않으면 자라서 교통사고를 방지하기 어렵게 된다.      

또한 운전자가 4거리나 3거리에서 교통신호가 없어 자율주행이 행해질 경우 매우 주의를 하며 주행해야 한다. 이 때 규칙은 절대로 앞차가 가는 뒤를 꼬리 무는 질주 주행을 삼가야 한다. 항시 정차한 후 상대방 도로를 주시하며 먼저 도착한 차가 먼저 서행으로 먼저 가는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또한 신호등이 있어도 교통량이 줄어드는 야간 시간에 원활한 통행을 위하여 교통신호를 바꾸어 황색점멸 신호나 적색점멸 신호로 바꿔 놓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히 알지 못하고 대충 운행하여 큰 충돌사고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황색점멸인 경우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서행하여 교차로를 지나야 한다. 서행한다는 것은 15Km 이하로 달리다 위험하면 바로 멈출 수 있는 속도로 운행하는 것을 말한다. 적색점멸 신호인 경우 일단 정지선을 지켜 정지해 있다가 도착한 순서에 따라 서행하며 교차로를 규칙적으로 지나야 한다.

황색점멸과 적색점멸의 차이를 몰라 대충 짐작하고 교차로를 지나다가 크게 교통사고를 내는 경우가 있으면 후회하게 된다. 우리는 한가한 도로에서 교통신호를 꼭 지키지 않고 대충 운전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어린 자녀들을 태우고 교통위반은 훗날 자녀들의 교통사고를 방치하는 경우와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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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의 중요성과 그 시기는?

삶의 기본은 정직성과 공정성에 있다.

요즈음 학교나 사회에서 인문학(人文學)이 뒤로 밀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생존을 위한 물질적 획득을 위한 노력과 투쟁으로 쏠림 현상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 강하게 위협 받는 것이 생존이다. 생존을 위해 최소한 먹고, 입고, 쉴 수 있어야 한다.

이 절대적 빈곤(貧困)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삶이 불행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날로 번성해 가면서 유혹에 빠지기 쉽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많이 벌고 많이 쓰는 것이 가장 보람된 삶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가난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물질적 부를 창조하는 쪽으로만 쏠림현상이 생긴다. 언뜻 보아 부를 창조하면 인생의 모든 삶이 풍요롭고 바람직스럽게 될 것 같다.

물질적 형태는 사실적 근거가 반드시 요구되고 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굳어진다. 과학적 이론과 사실이 확실하지 않으면 다른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한다.

언어, 문화, 역사, 도덕, 철학 등 인간으로서의 삶 따위를 논하는 인문학은 실체가 있는 과학과 달리 인간의 감성적 관계에 존재하기 때문에 과학과 같이 즉시 증명되고 눈앞에서 확인할 수 없다.

과학적으로 볼 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새해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그 자체로서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다. 그렇다고 감성적으로 우러나는 가슴의 따스함이 삶과 전혀 다른 이단(異端)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우리의 삶에서 오히려 최종적으로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것은 물질적인 근거에 의해서라기보다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정서적 감정에서 우러나온다.

인성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훌륭한 인성교육이란 과학적으로 그렇게 쉽게 정의하고 규명되지 않아 접근하기 쉽지 않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인성(人性)을 풀이하면 사람의 품성, 인간다움, 사람의 됨됨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지만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인과관계에서 인성은 개인의 정직성, 가치관, 정체성, 도덕성, 사랑, 정서, 흥미, 신념, 인내 등등을 긍정적으로 총 망라한 복합체이다.

많은 학자들이 훌륭한 인성교육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과학적 정의가 어렵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참된 인간성을 말할 수 있으나 참된 인간성의 정의가 그렇게 쉽지 않다. 인간의 활동무대가 매우 넓어져 세계화 되면서 더욱 정의하기 어려워진다.

인성을 이야기 하려면 윤리성, 도덕성을 중심으로 그 기질과 품성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 윤리도덕 자체가 가문, 지역사회의 발달, 문화적 차이, 세대 간의 상대적 관점차이에 따라서 달라지고 바뀌기 때문이다.

인성의 개념을 내용중심으로 정직성, 공정성, 성실성, 자율성 등을 이야기할 수 있고, 형식적으로는 도덕적 덕목, 윤리, 습관등을 말할 수 있다. 인성은 가치관의 결합으로 완성되는 사람의 인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가치관이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상대적인 문화적 차이에서 흔들릴 수 있다.

올바른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는 또한 많은 지적발달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에 아이들에 대한 훌륭한 인성교육은 더욱 어려움에 봉착한다. 때문에 아이들의 성장발달과 더불어 합당한 정서적, 지적 인식의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전래되는 불교, 유교, 도교, 예수교의 사상을 심화시키고 우리의 전통문화와 결합해서 새로운 정신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문화가 지역에 따라,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그 것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도 사회발전에 따라 크게 변화한다.

나는 아주 어렸을 적에 어른들로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평평해서 멀리가게 되면 뚝 떨어져 죽게 된다고 들었으며, 남쪽으로 갈수록 따뜻해 남쪽 끝에 가면 불가마 속과 같다고 그런 사실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해는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저녁에 서쪽으로 진다고 듣고, 보고 알았다. 그러나 학교에 다니면서 해는 정지돼 있고 지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기 때문에 마치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인식되는 착각이었다. 또한 지구의 북극과 남극은 적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햇볕이 엷어져 내내 추운 혹독한 겨울과 같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하나의 산을 중심에 놓고 산 뒤쪽에 사는 사람은 그 산을 앞산이라 부르고, 산 앞에서 사는 사람은 뒷산이라 하며, 산 동쪽에서 사는 사람은 서산이라 하고, 산 서쪽에서 사는 사람은 동산이라 부른다. 자기가 살고 있는 위치를 중심으로 서로 다르게 부른다.

우리나라의 동쪽에 있는 바다를 동해’, 서쪽에 있는 바다를 서해라고 부르지 않는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는 언제 어떻게 다른 의미로 변화될지 모른다. 원래 인간의 지적능력은 불안정하기 때문에 도덕과 윤리도 환경에 따라, 시대에 따라, 지역의 문화에 따라 변천된다.

과거 인간은 노예제도(奴隸制度)를 만들고 주인의 마음에 따라 물건처럼 팔고 샀으며 생명까지 마음 내키는 대로 관리할 수 있던 시대도 있었다. 그 시대에는 누구나 그렇게 행동함이 하나의 관행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런 행동은 생태적 양심을 저버렸던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그 당시에는 비난받지 안했다. 그만큼 인성교육이 어렵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태양은 고정돼 있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해서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진다.”는 일상생활의 생각을 부정해야 옳은가? 그렇지는 않다. 그 많은 해를 중심으로 그려진 시(), 동요, 길들여진 습관 등을 꼭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는 과학적인 논리적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정서적 느낌의 산물일 뿐이다.

정서적 느낌이 하나의 착각이지만 어떤 피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면 정서적 감정마저 기피하거나 말살할 필요가 없다. 아니 정서적 감정의 표현을 더욱 존중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논리적인 행동보다 정서적인 행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사람, 동물, 자연에 대해 해로운 행동을 삼가야 된다는 사실은 변화할 수 없는 양심의 근본원칙이다. 따라서 스스로 자기감정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고 생명의 존귀함을 알아야하며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절실히 필요하다.

서울대학과 동덕여대에 계셨던 손봉호 총장이 은퇴하시며 교수시절 가장 아쉬운 점이 정직성과 공정성을 학생들에게 교육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회고다.

대학생들에게 철학, 윤리, 도덕 등등 인문학적인 교육을 통해 기대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는 교육시기가 잘못됐다는 의미다. 어린 시절의 인성교육이 부재했고 이미 혈연, 학연, 지역 간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구조, 환경 속에서 배우고 자란 대학생에게 윤리와 도덕, 정직성과 공정성이 비집고 들어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는 의미다.

200810월 전국학업성취도 평가에서 매우 우수했다고 믿었던 전북 임실의 기적이 조작으로 임실의 부정직성으로 판명됐다. 교육계마저 부정직하다면 모든 교육은 실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직성이다. 정직하지 못한 사회에 휩싸이면 정직했던 사람도 정직성에 둔감해진다. 그리고 서로 믿는 신뢰사회를 이울 수 없다.

사람은 거짓말과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한다. 거짓말 중에는 사실을 오도하지는 않지만 진실을 빼놓고 말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 감정이 메말라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부정직하고, 부도덕한 행위에 직접 가담은 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방관하게 된다.

같은 예로 포로수용소에서 짓밟힌 자유가 오래도록 지속된 후 자유를 얻어도 한동안 정서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그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큰 코끼리가 발에 묶인 쇠사슬을 충분히 끊고 자유를 찾아 도망칠 수 있지만 어려서부터 사슬에 묶여 지내며 머릿속에 간직된 생각이 쇠사슬은 끊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커서도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같은 논리로 볼 때 전반적인 사회가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사회분위기에서 정직과 공정성이 인식되기 어려워 뿌리를 내리기 어렵게 된다.

모든 사람이 길에서 침을 뱉고, 자가용 차창 밖으로 담뱃재를 털어대는 시대에 감히 누가 나서서 그런 행동을 제지할 수 있는가? 모두가 도덕적으로 잘 지키고 있을 때 몇 사람이 잘못한다면 누구나 쉽게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의 10% 이상이 마약에 손대고 있다면 법으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이 유럽사회에서 증명 됐다.

일반 부모들은 어린자녀가 속임수를 쓰는 거짓말을 용납하면서 애정의 배려로 착각하기 쉽다. 우리는 자녀에게 정식하고, 성실하고, 근면할 것을 어린 시절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부여해야 한다.

부모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이나 거짓을 자녀에게 사랑의 행동이라고 정당화하기 쉽다. 그러나 자녀가 눈치 채고 있는데 변명이나 거짓말 한다는 것은 부정직성을 심어주는 좋지 못한 행위다. 어쩌다가 부모의 잘못된 행동이 자녀들에게 전해졌다면 어떤 변명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다.

부모는 늘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고 분명하게 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모의 솔직한 감정을 감출 수도 없지만 감추어서도 안 된다. 또한 자녀가 정직하지 못하게 행동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지적하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용인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모가 진실한 사람으로 자녀들은 받아들인다.

부모가 진실하지 못하면서 자존감, 근면, 성실, 사랑, 용기, 충성, 용서, 화해, 정의, 평등, 평화, 자유 등등을 교육하는 것은 모두가 허구에 불과하다. 부모는 늘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 놓아야 부모로부터 솔직함, 정직함, 인간적인 관계 등을 배워간다.

자녀들의 잘못된 행동을 시정하기 위해 부모의 권위를 앞세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의 감정 상태를 전함으로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구나! 내가 잘못 했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억압하고, 제한하고, 명령 한다면 그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 정당화하기 위해 심지어 부모에게 대들기까지 하면서 반격해 올 가능성이 많다.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는 자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부모는 늘 상담자, 조언자의 역할만 하고 지켜보며 기다려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다만 문제의 핵심을 누가 해결할 것인가? 하는 원칙이 필요하다. 부모가 주체가 되어 해결해야할 문제인가? 자녀가 스스로 해결해야할 문제인가?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수 없이 많은 부모들이 자녀가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문제를 부모가 안고 대신 떠맡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자녀가 해결할 문제를 없다는 판단으로 부모가 짊어진다면 의존성이 커지고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 줄 수 없게 된다.

부모가 해결할 문제는 자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자녀가 해결할 문제라면 다만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봐야 한다. 부모가 적극적으로 경청만 해주어도 그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경우가 많아진다.

요즈음 헬리콥터 맘이란 어머니의 행동이 크게 확대됐다고 한다. 그 전에는 자녀를 돌본다는 이유로 유치원, 초등학교, 좀 심한 어머니는 중학교까지 쫒아 다니며 일일이 간섭하고 주위를 맴돌며 해결사 노릇을 했지만 지금은 그 범위가 크게 확대됐다고 한다.

심지어 대학은 물론 입대한 자녀의 주위를 어머니가 개입해 문제해결을 나선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자식은 자기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고 늘 남에게 의탁하는 의존적 삶을 살게 된다. 언제까지 부모가 돌볼 수 있을까? 자식의 앞날의 삶을 요원(遼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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