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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가족개념의 재정립 필요성

가족(家族)이란 무엇인가? 결혼을 하고 가정(家庭)을 꾸리면서 자식을 낳으면 가족이 성립된다. 자식이 없으면 가정은 될 수 있지만 가족이라 말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갖는데 두려움을 갖는 시대가 돼버렸다. 결혼을 하면 으레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자연법칙이건만 인간만이 이해타산을 따져 자녀의 출산을 제한하고 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이 경제적 문제다. 사회경제가 발전하면서 오히려 상대적 빈곤 때문에 자녀의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한다. 자녀가 경제적 삶의 걸림돌로 생각되는 잘못된 인식이다. 다시 말하면 자녀에 의해 자신의 삶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그릇된 패러다임이다.

어머니가 자녀를 낳기 위한 초산(初産)의 적령기가 2026세 정도라고 본다. 초산을 경험한 후 30세가 넘어 자녀를 출산해도 그렇게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30세 이후의 초산에는 어머니 건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자녀에게도 좋지 못하다고 본다.

앞으로 가족이 점점 줄어드는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우선 결혼하지 않으려는 경향과 자녀를 생산하지 않으려는 패러다임의 증가다. 서구 유럽은 이미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남녀가 60%에 육박했다. 우리 사회에도 머지않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남녀가 점점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결혼이 주는 경제적 부담 때문이다. 특히 남자들의 기피현상이 늘어난다. 결혼과 함께 부인의 심기를 거슬려서 이혼이라도 한다면 쪽박을 차는 신세로 전락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만약 잘못되어 이혼을 하게 되면 위자료가 만만치 않고, 자녀까지 있었다면 자녀의 육아보육비 등을 포함한 남자의 경제적 부담이 일생을 망치게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현대는 결혼하기도 쉽지만 이혼하기도 매우 쉽기 때문에 결혼과 자녀생산을 매우 꺼리게 된다. 그 편법이 동거라는 잘못된 형태로 생겨났다.

어떤 사람은 이혼할 수 없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지만 결혼을 잘할 수 있는 교육이 더 필요하다. 신중을 기하지 않고 결혼해서는 안 된다.

보통 사람들이 결혼하면 상대가 내 소유물이 될 수 없음에도 불고하고 마치 내 소유물처럼 인식하기 쉽다는데 문제가 있다. 해와 달처럼 떨어져 성장했는데 어떻게 서로가 자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겠는가?

옛날처럼 10 대에 결혼 한다면 살아가면서 생각도 같고 행동도 같아질 수 있지만 30이 넘어서 결혼 한다면 어떻게 생각과 행동이 같을 수 있겠는가?

결혼은 내 소유물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돕는 상호의존(협조)의 삶에서 시너지 효과를 얻기 위함이다. 그동안 서양 사람들이 동양의 가족제도를 부러워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대가족 제도도 모두가 붕괴될 것이다. 아니 이미 붕괴되어 대가족 제도는 우리주변에서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인간은 어울려 살아야 자녀가 커가면서 가풍(家風)을 익히고 대를 이어갈 수 있다. 서로가 믿고 사랑하고, 인내와 도리, 좋은 인간성, 사회문화, 시민정신 등 살아가는 삶(life)의 방법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커나는 자녀들은 대가족제도에서 배워야 할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덕목을 맛볼 수 없게 됐다. 이런 삶의 덕목을 따로 배워야하는 환경이 됐다. 그렇게 쉽지 않은 환경 속에 자녀들이 살고 있다.

많은 시간을 컴퓨터와 스마트 폰으로 보내고, 식생활은 홀로 인스턴트식품에 젖고, 홀로 생활하면서 올바른 길을 찾아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때문에 청소년 시절의 교육이 더욱 어렵고 잘 되지도 않는다.

나 또한 각별한 방법이 없어 사회적 물결에 휩쓸려 간다. 다만 조금이라도 가까운 근거리에 자식들을 두고 손자손녀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도 사회적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점점 노부부(老夫婦) 또는 독거(獨居) 어르신들의 삶이 늘어난다. 대부분 그들은 남은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가야 함에도 불고하고 그렇지 못하다. 갑자기 경제적 발전을 가져온 산물일 수 있다.

90세 이상 장수하고 있는 서양 사람은 행복하고, 신에게 감사한다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우리 노인들의 대부분은 마지못해 삶을 살면서 오래 사는 생존을 오히려 한스러워 한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 문제는 약과 의학의 발달, 건강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의 발다 등에서 오래 살 수 있게 됐지만 노후보장이 거의 안 돼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나 급속한 시대의 변천으로 자신의 노후를 위한 준비를 못했고, 자녀들에게 노후를 의존할 수 없는 사회풍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풍습은 어린자녀가 장성할 때까지 아니 장성해서까지도 부모가 모든 삶을 희생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노후에 생활력이 없어지면서 자녀에게 노후의 부담을 줄 수 없는 환경으로 변모했다.

농경사회에서는 어릴 때 부모가 자녀를 돌보고, 부모의 노후에 자녀가 돌보는 것이 매우 바람직한 사회풍습이 있었으나 자본주의와 더불어 밀려온 서구문화가 환경을 바꾸어 놓았다.

서구문화를 아무런 준비과정 없이 결과만 받아들여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 사회의 삶은 잘못된 패러다임이다. 준비 없는 복지정책이 더욱 사회를 혼란 속에 몰아넣고 있다.

선거문화 때문에 준비되지 못한 복지공약(福祉公約)의 덫에 걸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국가부채로 나라가 흔들린다. 민주주의의 허점이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그리스의 경우를 보면서 남의 일로 생각할 처지가 못 된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녀를 기르면서 늘 자녀의 머릿속에 깊이 심어 주어야 할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자녀를 도울 때마다 내가 너희들이 힘없을 때 돌보는 것처럼 내가 늙어 힘이 없으면 너희들이 잘 돌봐 주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해 주는 것이 좋다. 꼭 자녀의 도움을 바래서가 아니다. 이것이 상부상조, 상호협력 정신 상태를 늘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자녀들에게 나는 너희들 덕 보지 않겠다.”는 말을 자주하면 늙어 생활력이 떨어져 정말로 자녀의 돌봄이 필요할 때 전혀 돌볼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부모가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겠는가? 그러나 자신의 삶(life)은 차치하고 생존(living)마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가 나서서 돌볼 수 있겠는가? 인과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가족 아닌가? 국가에서 돌보는 것은 한 치 건너서다.

우리는 과거 가족구성을 튼튼히 했던 가족사회로 회기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핵가족 사회의 잘못된 선택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꼭 한 지붕 밑에 살지 못해도 근접한 이웃에 살면서 서로 늘 어울리고, 서로의 잦은 만남에서 어려움을 나누고, 즐거움을 같이 수 있는 가족사회를 다시 찾아야 한다.

자식은 부모의 어려움을 모른 체할 수 있지만 부모는 아직도 자녀를 끔찍이 돌보고 있다. 자녀가 성장했음에도 결혼을 못()한 경우 독립시키지 않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용돈마저 마련해 주고 있다. 잘못된 부모의 생각이다.

성장한 자녀를 독립해 홀로 세우지 않으면서 부모는 연로해서대책 없이 자녀의 곁을 떠나야 하는 잘못된 사회풍조다. 아주 잘못된 자녀교육과 가족개념의 사회풍조다. 다른 것은 서양에서 잘 받아들이면서 자녀를 독립시키는 방법은 배우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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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의식(儀式)의 기회 부여

우리는 일생동안 여러 가지 단계를 밟아가면서 살아간다. 태어나 삶의 성장과정을 절대의존단계, 독립단계, 상호협력단계로 크게 분류할 수도 있고, 수용단계, 표현단계, 개척단계 등으로도 나누어 볼 수 있다.

자녀가 이런 여러 단계를 밟아 발전하는 가운데 더욱 세분하면 여러 단계로 나누어 세분해 볼 수 있다. 어떤 커다란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실행하게 될 때 단박에 실현할 수는 없다.

좀 더 세분하여 형식과 격식을 취해보는 과정을 갖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런 세분된 행위 과정이 하나하나의 의식(儀式)이 된다. 이러한 세분된 의식(ritual)을 성실히 실행하고 좋은 결과를 완수해가야 큰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어떤 의식을 거행하려면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의식, 이벤트를 가질 수느 없다. 좀 더 실감나게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마라톤같이 멀리 달리기를 잘하려면 처음부터 장거리에 도전 하는 것보다 기초체력을 단련하면서 단거리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멀리 달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극기(克己) 훈련을 행하고, 장거리를 달릴 수 있는 힘을 배분하고 최선의 기량을 발휘해야 한다.

장거리보다 단거리 달리기를 할 때 짜임새 있는 기획과 노력을 통해 경주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의 의식이요 이벤트가 된다. 이러한 의식(儀式)과 이벤트를 세분해서 연습해야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를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한 평생을 장거리 달리기와 비교한다면 일상생활에서 그때그때 작은 목표를 정하고 정진하는 것이 마라톤 연습의 단거리에 속한다. 이런 의식을 계속하는 동안 기량이 쌓여가면서 시간이 흐르면 우리의 삶의 목표를 달성하게 되는 위력(偉力)을 발휘된다.

자녀들도 발전과정에서 이벤트가 많으면 많을수록 기량을 축적할 수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출생축하, 백일이 되면 백일잔치, 돌이 되면 돌잔치 등등은 부모의 행사도 되지만 자녀에게 커다란 사회성을 기르는 기회가 된다. 이런 의식은 어른 중심에서 행해지지만 중요한 것은 자녀중심의 의식이나 이벤트가 필요하다.

절대의존단계에서 독립단계로 가기 위한 준비로 고개를 가누고, 엎어지고, 배밀이를 하고, 기고, 걷는 과정에서 자녀 스스로 완성해 가는 단계가 있다.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의 입장에서 대견해 보인다.

이런 하나의 의식(단계)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런 과정의 의식을 계속하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성장과정에서 수많은 의식과 이벤트가 일어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며 배우는 것이 하나의 의식이고 이벤트로 보아야 한다.

어린자녀가 자라서 어린이집 등에서 집단생활이 시작된다. 많은 놀이를 통해 성장하게 되는데 이런 의식이나 이벤트를 강조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놀이로 끝낼 것이 아니라 어떤 작은 의식이나 이벤트를 조성해주어 실행할 수 있다면 자녀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개별적 이벤트도 필요하지만 집단적 의식을 자주 갖는 것이 더욱 좋다. 어려서부터 어떤 목적의식에 부합하도록 다 같이 협력하여 노력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서 서로 돕고 성취하는데 더욱 재미를 느끼게 된다.

혼자 하는 성과보다 서로 협력할 때 더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커가며 상호협조의 가치를 알게 된다. 공동체의식(共同體意識)을 기르는 행위다. 요즈음 이러한 공동체의식의 결려로 사회기강이 무너진다.

부모와 선생님이 협력해 자녀들이 재미있게 놀면서 학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하는데 적극성 필요하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부모와 선생님의 적극적 태도가 자녀에게 보다 좋은 즐거움과 배움의 기회를 만들어 간다.

자칫 너무 많은 의욕 때문에 자녀들에게 버거운 의식이 될 수도 있다. 자녀 중심이 아니라 학부모, 선생님 중심의 만족, 보람을 위한 행사(의식)는 오히려 자녀에게 해로울 수 있다.

늘 자녀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이 즐겁고 만족하는 이벤트, 의식이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자녀의 이벤트, 의식행위를 어른들의 욕심에 초점을 맞춘다면 자녀는 그때부터 재미와 흥미를 잃게 되고 고달픈 의식이나 이벤트가 될 수 있다. 오직 자녀 중심에서 행사가 진행되어야 함을 다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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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공감할 때만 자녀지도 가능

우리는 늘 모든 사물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한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과 다르게 행동하면 틀렸다고 본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행동을 보일 때 언제나 언짢게 느껴져 어떤 이해심을 갖거나 인내하지 못하고 권위를 동원해서 제재(制裁)를 가하려고 한다.

부모 자신의 소신대로 따르고 행동하도록 설득해보고 안되면 화를 내 보이고, 그래도 안 되면 억압과 완력을 동원하기 쉽다. 왜 억압과 완력이 동원될까? 자녀를 약자로 보기 때문이다.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했을 때 진정한 가르침보다 감정이 선행된다.

우리는 무엇을 누구에게 가르치려고 할 때 공감적 이해의 전제 조건이 구비돼 있어야만 가능하다. 서로의 감정적 관계가 틀어져 있다면 가르치려는 시도가 자칫 억압이나 비판이나 무시하는 형태로 받아들여 역효과를 초래한다.

부모라는 권위의식으로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해!’라고 생각하기 쉽다. 말을 잘 듣지 않으면 권위에 따른 완력이 가해진다. 그래서 자기 자녀를 직접 교육하기가 어렵게 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 판단하고, 자기 방식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쫒아올 것을 늘 강요하기 쉽다. 그리고 고함 치고 위협까지 동원하고 안 되면 주먹이 올라가고 매를 든다.

자신이 먼저 이해심을 갖고, 공감적으로 객관적으로 접근하여 바라볼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 어린 자녀에게도 형성된 인격이 있음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인격을 인정했을 때 객관적인 견지에서 올바른 가르침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 앞에서 어떤 문제라고 생각하는 일에 직면했다면 그 문제가 발생할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대부분 해결할 수는 없다.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의 사고방식에서 정 반대적 관점으로 자녀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있을 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우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지는 않았는가? 잠시 숙고해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이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패러다임이란 의미를 쉽게 설명하다면 마치 지형의 형태를 그려 놓은 지도(地圖)와 같다고 이해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지형의 모양이 변모했는데 옛날에 그려진 지도를 들대고 찾아 간다면 쉽게 찾을 수 없다. 자녀가 곧바로 찾아가지 못한다면서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요즈음 녀석들은 못 돼먹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과거의 잣대로 보면 그렇다는 불만이다. 지금 어른이 돼서 과거의 관점으로 젊은이들을 바라보면 똑같은 말을 하게 된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이 그려 놓은 옛 지도로 현재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았거나 쫒아가지 못한 결과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오래 동안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지형에 따라 새롭게 지도를 수정하고 준비해 간직해야 하듯이 세상의 변화에 민감해져야 한다. 그렇다고 외적인 환경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행이 자아의식과 상상력이라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 우리는 자아의식을 동원해 주워진 환경과 반응 사이에서 상상하고 양심적으로 선택할 자유와 권한이 있다.

자아의식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양심적으로 올바른 지도형태를 늘 수정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현재의 패러다임을 검증할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순발력이 떨어진다. 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지 못하면 현실을 쫒아서 지도를 수정하기 어렵다. 옛 지도를 소중히 간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롭게 변화함에 따라 수정한 현실적 지도가 있어야 옳게 찾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해 시대에 맞는 패러다임을 늘 수정해 가지 못하면 사회생활에서 젊은이들로부터 수구골통이라는 따돌림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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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록키 마운틴(Canada Locky Mountains) 차창넘어로

캐나다 럭키 마운틴(Canada Locky Mountains)의 여행은 맑은 하늘, 싱그러운 공기, 높은 산에는 흰눈, 낮은 산에는 욱어진 침엽수림, 맑은 물은 아니나 모이면 에메랄드 빛깔를 내는 호수, 구불구불 흐르는 아름다운 강, 서로가 어우러진 자연환경의 조화에 넋을 잃고 조용히 밀려오는 감흥에 젖어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아닌가? 그 토질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높은 산은 대부분 바위와 돌로 이루어져 있어 나무가 살 수 없지만 쌓이는 눈으로 아름답게 장식되고 있다.  

복잡한 도시의 엉클어진 생각을 멈추고 삶을 정화함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활력소가 된다. 나는 가끔 그곳에서 담아온 영상들을 보며 그 때로 돌아가 즐거움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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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부서, 공공기관 지역안배의 문제점

우리는 수도권 인구집중 방지와 지방발전 활성화 방안으로 정부부서, 공공기관의 지방배치에 어떤 연구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시절 시작된 공공기관의 지방이전이 업무의 효율성보다 정치적 이해타산으로 나누어 먹기 식의 분산정책이 강행되고 있다.

모든 정부기관이 세종시로 집결되도록 같이 옮겨가지 못한 부작용이 크게 늘고 있다. 총리를 비롯한 정부청사가 세종시로 옮겨가면서도 직접관련이 큰 대통령과 국회가 서울에 남았다. 청와대와 국회등이 옮겨가는데 무슨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이 있지만  헌법을 고쳐서라도 같이 있어야 한다. 다 같이 못 옮긴다면 애당초 세종시가 생기는 것이 문제였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할 정부부처가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과 국정을 상의하기 위해 몇 시간씩 허송(虛送)해야 하는 결과를 낳고 있어 중요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실기(失期)하고 허둥대다가 망쳐버린 사건이 이어서 일어나고 있다. 좋은 사례가 세월호 사건, 메르스질병 사건이다.

물론 전화도 있고 화상회의(畵像會議)도 가능하지만 일반 사항이 아닌 중요한 사안(事案)일 경우 얼굴을 맞대고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데는 매우 부족하고 부적절하다. 또 다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걱정이다.

정부와 국회의 여러 가지 관계에서 긴밀히 접촉할 일이 많은데 가고 오는 교통문제로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된다. 때문에 청와대와 정부청사 그리고 국회는 지근거리에 있어야 함이 옳다.

자식들의 교육문제 등 서울에 거주해야하는 공무원들은 아침저녁 5시간 넘게 출퇴근 시간을 보내면서 만성피로에 지쳐 업무에 많은 방해를 받고 있다.

몇 가지 더 예를 들어보자! 메르스(MERS) 질병 발생 사태에 문제점이 크게 들어났다. 질병관리본부가 충북 청주시 오송읍으로 옮겨감으로서 일선 병원들과 먼 거리에 있다. 질병관리본부와 일선 병원 의사들 간에 원활한 의사소통이 쉽겠는가? 이번 서울삼성병원에서 의뢰한 메르스 병원체를 확인하는데 3일이 걸렸다고 한다. 바이러스 검체(檢體)를 옮기는 데만 빨라도 1시간 30분 걸린다.

세계 전염병이 들어오는 곳은 인천공항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관리본부와 국립보권 같은 시설은 인천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야 효율적이다.  

그리고 범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 인구 밀집이 큰 서울과 서울 인근지역이다. 그런데 국립과학수사 연구원이 강원도 원주 골짜기로 옮겼갔다. 그 뿐인가? 같이 연관을 맺고 있는 한국전력은 전남 나주시로, 한국전력기술 본부는 경북 김천시에,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 서울 광화문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 원활한 업무를 기대될 수 있겠는까?

정부기관, 공공기관 등등의 배치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원활히 협력할 수 있도록 재조정해야 한다. 늦으면 늦을수록 국가의 발전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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