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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쁘면 모든게 용서?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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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 Krzysztof Kieslowski

Bleu

감독 : Krzysztof Kieslowski
촬영 : 슬라보미르 이디악
편집 : 자끄 위타
음악 : 찌비그다우 프라이즈너
배우 : 줄리에뜨 비노쉬, 브느아 레정, 엠마누엘 리바, 샤를로뜨 베리


『블루』는 세 가지 색 『블루, 화이트, 레드』 라는 케이슬롭스키의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프랑스 국기의 삼색에서 영감을 얻어 자유, 평등, 박애라는 부르주아 혁명의 슬로건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영화는 폴란드와 프랑스의 합작 영화이며 93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황금사자상과 여우주연상 촬영 상을 받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 영화의 주제가 '블루' 즉 '자유' 라고 했으나 스토리 라인은 줄리(줄리에뜨 비노쉬)의 사랑얘기로 일관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리에게 포커스를 맞춘 1인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유혹적인 이미지와 홀린 듯한 음악과 함께 줄리라는 한 여성의 자기발견과정을 따라가며 사랑과 관대함 그리고 예술로 완성되는 그녀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은 줄리, 그녀는 삶의 모든 의미를 잃었다.




그러나 풀어야 할 삶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 역시 줄리로부터 풀어내야 할 수수께끼가 있었다. 그것은 남편 패트리스에게 줄리가 알지 못했던 연인이 있었으며 또한 유럽 공동체 최고의 작곡가 중 한 사람이었던 패트리스의 미완성 유작이 줄리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 수수께끼들이 줄리를 절망으로 몰고갔다면 이 영화는 범작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된다. 요란한 소음만 들리는 검은 화면, 서서히 카메라가 뒤로 물러서고 달리는 자동차 바퀴가 보인다. 이어서 불안한 침묵이 흐르고 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차안에 어린 소녀의 얼굴이 잠깐 비춘다.

잠시동안의 휴식. 자동차 밑으로 아주 조금씩 기름이 새어나오는 장면의 클로즈업.

그리고 들리는 브레이크의 파열음, 개 짖는 소리, 저만치 굴러가는 자동차의 파편들.

줄리가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녀의 눈에 비치는 사람은 의사뿐, 그녀의 남편과 딸은 사고로 죽었다. 모든 것을 상실한 줄리는 병원의 의약품 저장실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흰 알약을 한 움큼 집어 입안에 처넣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모두 토해내고 달려온 간호사에게 용서를 구하듯 "미안해요." 라고 말한다.

무엇을 사과하는 것일까?

창문을 깨뜨려서? 죽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그러나 죽음은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살아남기로 결심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삶이란 자기 자신이외의 모든 것의 의미에 눈감아버리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 문닫고 들어앉아 자기자신만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녀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집을 처분하고 남편의 유작을 불태우며 모든 가구와 집기들도 정리해버린다. 그래도 정리되지 않는 것은 마음속 가득했던 사랑, 남편과 딸에 대한 그리움과 고통이다.

그녀는 남자를 부른다.

남편과 함께 일했던 젊은 작곡가. 평소 그녀를 좋아하는 눈치를 보였던 사내다.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렇다면 지금 오세요." 빗속을 달려온 그 사내를 안고 줄리는 격정적인 섹스를 한다. 모든 걸 불살라버리듯 그와 함께 하루 저녁을 보낸다. 그리고 아침에 혼자 떠난다.

"고마웠어요. 저도 특별한 게 없는 여자예요. 잊어주세요." 그리고 줄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담 모퉁이를 돌면서 울퉁불퉁한 콘크리트 담벽에 그녀는 주먹을 문지르며 걷는다. 손등에 맺히는 핏방울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녀의 상처난 가슴속을 대변한다. 그러나 사랑했던 남편과 딸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남편과 살던 저택, 살림도구 등 추억의 흔적을 모두 버리고 혼자서 허름한 아파트에 들어간 줄리는 수시로 밀려드는 고독감과 아픈 상처 때문에 눈물을 삼킨다. 그녀는 또한 아무 것도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녀가 들리는 게 있다면 모든 과거를 잊기 위해 이사한 동네에 있는 수영장에서 그녀가 수영할 때마다 들리는 음악의 파편들뿐이다. 음악은 마치 푸른 물 속에 숨어있다 나타나듯 그녀의 주위를 감싼다.

어느 날 누군가 아파트 문을 두드리지만 그녀는 결코 문을 열지 않는다. 그것이 힘없는 노파에 불구할 지라도 그녀는 보지 못한다. 마치 계단에 앉아있을 때 그녀의 얼굴에 비치는 빛의 일렁임을 그녀가 느끼지 못하듯이 말이다. 그녀는 삼류아파트의 이웃에 사는 창녀와 걸인 악사 등 이제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하류층 사람들의 말벗도 되어본다. 견딜 수 없을 때에는 수영장에 뛰어들어 숨이 막힐 때까지 잠수를 한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남편에게 따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면서이다. TV에서 남편과 관계되는 프로를 방송하는데 거기에 남편과 함께 있는 여자의 사진. 이제까지 본적이 없는 여자사진이 자료화면으로 방영된다. 소스라쳐 알아본 결과, 남편에게는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녀는 미친 듯이 그 여인을 찾아 대면한다. 미모는 아니지만 지성미 있는 여류변호사인 그녀의 목에는 남편이 자신에게 선물한 것과 똑같은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있다. 눈에 띄게 부풀어있는 배. 그녀는 줄리에게 말한다.

"듣던대로에요. 착하고 너그러운 분이라고 그 분이 항상 말했어요." 그 여인의 말대로 줄리는 그 여자에게 추호도 미운 생각을 품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하면 이 집을 가지세요.' 라고 말하며 남편과 살던 집을 내어줄 생각까지 한다. 모든 걸 용서하고 그 보상으로 자신은 자유를 얻은 것이다. 믿고 사랑했던 남편의 배신과 그 정체를 확인한 것이 그녀를 옭아맸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힘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패트리스의 유작을 완성하려는 남편 친구 올리비에의 작업에 참여하며 그의 간절한 사랑까지 받아들인다. 줄리가 그토록 거부하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자유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사랑의 수용이야말로 자유에 부여된 절대적인 과제, 곧 자유가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에 대한 신중한 결정이며 진지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폴란드 감독이며 유럽 공동체 최고 감독 중 한 사람인 키에슬롭스키는 돌연히 칼날처럼 우리의 삶에 던져지는 비극을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구원의 시간으로 바꾼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직관적인 상상력과 우연적인 만남들을 통해 구현된다. 그 직관적인 상상의 세계는 우울하면서도 청아한 블루라는 색조와 플루트 음악, 코러스를 통해 전해진다. 그리고 영화가 그 흐름을 멈추는 순간, 예컨대 돌연 이미지가 사라지고 모노 톤의 화면이 극장의 공간을 압도할 때, 영화의 서술구조가 만들어내는 합리성의 세계를 떠나 직관의 세계로 들어선다. 키에슬롭스키는 사물의 질서가 무너진, 이를테면 갑작스런 비극으로 혼돈에 빠진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직관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는 결코 밝지만은 않다.

그는 부족한 것은 없으나 기쁨이 없는 루실의 공허를 직시하고, 세상을 향한 유일한 창인 TV앞에 앉아있는 줄리 어머니의 침묵과 줄리와 올리비에의 포옹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칸막이를 세워놓은 듯 환희속에 고통을 추적한다. 때때로 그의 영화의 탐구는 환상과 공허를 넘나드는 경탄할만한 영화를 만들어내었다. 키에슬롭스키 감독은 삶의 우연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촬영장에서도 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러나 그가 촬영 중 배경으로 지나가던 차 중에 한 대가 이곳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누군가 그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그러면 왜 안 되는데?" 라고 반문할 것이다.

운명은 그의 탐구대상이고 우연은 친숙한 것이다. 줄리가 당한 운명의 사고현장에서도 그가 즐기는 우연한 목격자가 존재한다. 안개낀 거리에 홀로 볼로케 놀이를 하고 있었던 그는 자동차가 아주 아주 멀리서부터 달려와 그의 앞에서 사고를 내는 것을 보았으며 현장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줍는다. 그는 그것을 줄리에게 돌려주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그에게 준다.

그후 우리는 그가 무언가 심사숙고하는 모습을 본다. '삶은 언제나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곳에서 불시에 발생하는 불행은 없고, 구원은 우연히 불쑥 나타난다.' 키에슬롭부키의 생각이다.


일상 안에서 신의 섭리를 길어 올리는 감독 크쥐스토프

키에슬롭부스키는 "타르코프스키의 뒤를 잇는 최후의 예술영화가" 라는 극찬을 들으며 20세기말의 유럽대륙 전체의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고 한때 신부가 되려는 꿈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소방학교와 디자인 학교를 거치는 방황 끝에 선택한 폴란드 국립영화학교 로쯔로부터 빛나기 시작한다.

그의 영화이력은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한다. 영화 카메라를 의미 있는 현실에 대한 기록장치로 사고하는 다큐멘터리 장르는 그에게 현실의 삶이야말로 모든 의미가 응축된 진실의 보고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폴란드 사회주의 하에서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가장 합리적인 체제인 사회주의의 모순을 관찰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영화는 탈 이성의 영역을 모색하는 세기적인 통찰로 확장되어 나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모든 영화는 인간이 지향하는 이념과 인간의 본성과의 관계를 관찰하면서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의 새로운 세계이해방식과 의사소통방식을 실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타르코프스키의 뒤를 잇는다." 는 찬사가 주어진 것은 그가 현대성이 직면한 문제를 영화, 즉 이미지와 사운드라는 탈 현대적인 언어로 성찰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탈 현대적인 성찰이 현대성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유럽의 문화와 사상에 견고하게 더해있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자체가 현대와 탈 현대를 잇는 튼튼한 가교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지적인 언어로 구성된 치밀한 뼈대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현상너머의 것을 열어주는 이미지와 파동을 통해 관객의 감각적인 인식을 자극하는 사운드가 조화되어 신비스러운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영화를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두명의 인물이 있다. 감독의 구상을 시나리오로 구체화한 크리지스토프 피시비츠와 때로 영상을 압도하는 사운드로 그의 영화를 완성한 음악감독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이다. 특히 바르샤바 법대를 졸업하고 현직 변호사로 활동하던 피시비츠는 키에슬롭스키의 영화가 개인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윤리적인 궁지를 출발점으로 삼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는 1991년작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필두로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하여 성 베네딕트 시청각 종교교육연구소에서 출시한 『십계 10부작』으로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세가지색 블루, 화이트, 레드 3부작』에 이어 십계시리즈의 5편, 6편을 극장용으로 제작한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과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극장 개봉되었다. 그밖에 다큐멘터리 작품들은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통해 두 세 편이 소개된 정도이다. 그는 <세가지색 3부작>의 마지막 편인 『레드』를 끝으로 "나는 완전히 지쳤으며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는 말과 함께 은퇴를 선언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가 심장마비로 급사할 즈음 자신의 창작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피시비츠와 함께 「천국, 지옥, 연옥 3부작」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블루란 영화는?

『블루』는 수없이 많은 이미지들로 짜여진 고운 비단이다.

언뜻 보면 성긴 듯하지만 한올 한올 더듬어 살펴보면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짜인 직물이다. 단절된 것으로 보이는 개개의 이미지들은 한 올의 실이 되어 비단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몸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리고 딸이 찾아와도 정신이 오락가락해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줄리의 어머니가 안락의자에 파묻혀 매일같이 보고있는 TV에 비치는 화면은 놀랍게도 번지점프를 하고있는 남자의 모습이다. 안락의자에 심겨져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식물'인 그녀의 소망은 밧줄하나에 몸을 맡긴 채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활기찬 '동물'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식물이 꾸는 동물의 꿈은 결국 비상 즉 자유의 꿈이었던 것이다. 이 이미지는 영화 『블루』를 시종 관종하는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희구하는 것으로 영화의 주제를 잘 나타내는 것이다. 비상을 새에 비유하는 케케묵은 사유대신 번지점프를 차용한 것은 현대적이며 감각적이다.


『블루』는 곧 이 영화의 형식인 동시에 주제가 된다.

'푸른색'이라는 색깔은 영화 속에 숱하게 명멸하는 이미지들의 밑바닥을 흐르는 바탕색인 동시에 형식미를 노리고 있는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제어이다. '푸른색'이 영화에서 크게 성공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자유라는 이 영화의 주제를 잘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의 형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또 다른 '주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푸른색이 의미하고 있는 자유와 푸른 색깔 그 자체는 곧 이 영화의 주제와 형식이 되어 절묘하게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제와 형식이 하나가 되어 들려지는 화음은 장중하고 아름답다.

『블루』의 이미지는 자극적이다. 남편과 딸을 잃은 후 처절한 고통 속에서 방황하던 줄리가 어두운 방 한구석에서 유리를 씹어먹듯 그래서 마침내 시퍼런 피가 입가에 줄줄 흘러야 할 것만 같은 푸른색 사탕, 새벽의 푸르스름한 안개, 고양이가 뜯어먹던 뻘건 몸뚱이인 채 아직 털도나지 않는 쥐새끼들, 교통사고를 당한 후 줄리의 눈동자에 비친 "괜찮냐"고 묻는 의사의 모습 그리고 푸른 빛깔뿐인 수영장에서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아마 푸른 물살에 씻겨 보이지 않았을 줄리의 푸른 눈물.


『블루』의 이미지들은 자극적이고 강렬한 동시에 치밀하다.

교묘히 계산되어진 개개의 이미지들은 강렬한 눈빛으로 정점을 향해 투사되어있다. 『블루』에는 자그마한 삽화들도 주제를 위해 정교히 동원되어있다.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창녀가 수영장의 줄리에게 건네는, "나는 팬티를 입지 않아. 너도 한번 벗어봐. 얼마나 편한지." 와 같은 말이다. 레스토랑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줄리에게 하는. "당신은 집착하고 있군요." 와 같은 말들도 주제를 향한 감독 키에슬롭스키의 집요함의 산물이다. 그러나 키에슬롭스키가 이야기하고자하는 자유가 '∼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으로의' 자유라는 것은 무척 인상적이다. 그가 노리는 자유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줄리가 허무에서 벗어나서 강한 집착을 가지고 남편이 만들다만 곡을 작곡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블루의 주제?

푸른 색깔의 유리구슬이 매달린 샹데리아에 집약되어있다. 푸른빛이 영롱한 유리구슬을 각자 개별적인 인격이 실현하는 자유이다. 그러나 세게 속에서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의 자유란 다양한 자유실현의 총화로서 존재한다. 때문에 샹데리아는 단 하나의 구슬로 이루어질 수 없다. 다양성의 총화 그것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자유로운 인격이 선택하는 최선의 관계이다. 그것은 마치 샹데리아의 가운데 박힌 전구와도 같은 것이다. 자유의 찬란함은 사랑에 매여 더욱 영롱해지고 사랑의 빛은 자유에 의해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

 

직관의 이미지, 사운드

키에슬로프스키의 <블루>는 유혹적인 이미지와 홀린듯한 음악과 함께 쥘리라는 한 여성의 자기 발전 과정을 따라가며 사랑과 관대함 그리고 예술로 완성되는 그녀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갑작스런 교통 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은 쥘리. 그녀는 삶의 모든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풀어야 할 삶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 역시 쥘리로부터 풀어내야 할 수수께끼가 있었다. 그것은 남편 파트리스에게 쥘리가 알지 못했던 연인이 있었으며 또한 유럽 공동체 최고의 작곡가 중 한 사람이었던 파트리스의 미완성 유작이 쥘리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이 수수께끼들이 쥘리를 절망으로 몰고갔다면 이 영화는 범작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된다.

폴란드 감독이며 감히 말하건대 유럽 공동체 최고 감독 중 한 사람인 키에슬로프스키는 돌연히 칼날처럼 우리의 삶에 던져지는 비극을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구원의 시간으로 바꾼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직관적인 상상력과 우연적인 만남들을 통해 구현된다. 그 직관적 상상의 세계는 우울하면서도 청아한 블루라는 색조와 플루트 음악, 코러스를 통해 관객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영화가 그 흐름을 멈추는 순간, 예컨대 돌연 이미지가 사라지고 모노 톤의 화면이 극장의 공간을 압도할 때 관객들은 영화의 서술 구조가 만들어내는 합리성의 세계를 떠나 직관의 세계로 들어선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사물의 질서가 무너진, 이를테면 갑작스런 비극으로 혼돈에 빠진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직관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런 직관은 그의 전작인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에서 두 명의 베로니카를 잇는 끈이기도 했다.

남편의 연인이 그의 아들을 잉태하고 있음을 안 쥘리는 그 연인에게 남편의 집을 주고 또한 태어날 아이에게 그의 이름을 주라고 당부한다. 남편의 연인은 말한다. 그는 늘 당신이 부드럽고 관대하다고 이야기했다고. 마지막으로 쥘리는 미완성 합창 교향곡을 완성하는데, 이제 남편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그 곡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한다. 남편의 흑색 잉크로 씌어진 악보는 쥘리의 블루 잉크로 수정, 완성된다.

이 영화는 세 가지 색 <블루, 화이트, 레드>라는 키에슬로프스키의 3부작 중 첫번째 작품이다. 프랑스 국기의 삼색에서 영감을 얻어 자유, 평등, 박애라는 부르주아 혁명의 슬로건을 영화화한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주제가는 참다운 사랑에서 관결되는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쥘리가 남편의 연인을 찾기 위해 들른 법정 장면은 두 번째 작품인 평등을 다룬 <화이트>의 주요 공간 중의 하나다.

어느 날 저녁 풍경이 자아내는 음울한 푸른색, 아름다운 샹들리에 구슬의 반짝이는 푸른색, 그리고 텅 빈 수영장의 수면 위로 어른거리다 사라지는 푸른색, 이 모든 푸른색들과 신비로운 음향으로 이루어진 <블루>가 주는 감동은 그러나 한 가지 의혹을 남긴다. 만일 쥘리라는 '부드럽고 관대한' 그래서 남편의 이름까지 줄 수 있는 이 여성은 혹시 남성의 무의식이 투사된 완벽한 여성상이 아닐까?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남성의 이상적인 여성상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또한 남편의 이름 위에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용기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의 연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은 아이를 잉태해본 여성들끼리의 우정으로도 독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부장제의 독선을 거부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의 교조성의 함정 역시 거부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 속에서 생산되고 있는 모순적인 여성의 모습을 비평가의 입장에서 준열하게 비판하기보다는 그 모순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엇갈린 이미지들을 열린 공간으로 끌고와 관객들의 판단에 맡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자, 이제 관객들의 합의와 경합에 의해 어떤 이차적인 담론이 만들어질 것인가?

-김소영의 <영화 리뷰>(한겨레신문사)에서 인용.


출처:  http://france.co.kr/cinema/bleu.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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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가득히> - 르네 끌레망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 (1960) * * * 1/2

감독
르네 클레망 Rene Clement

주연
알랭 들롱....톰 리플리
Alain Delon....Tom Ripley

모리스 로네....필립 그린리프
Maurice Ronet....Philippe Greenleaf

마리 라포레....마르쥬 듀발
Marie Laforet....Marge Duval

엘비레 포페스코....포포바 부인
Elvire Popesco....Mrs. Popova

에르노 크리사....리코르디
Erno Crisa....Riccordi

프랭크 라티모어....오브라이언
Frank Latimore....O'Brien

빌리 컨즈....프레디 마일즈
Billy Kearns....Freddy Miles




1.

이 영화가 나왔던 1960년대엔 [태양은 가득히]는 '젊은 영화'였습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한 [열차의 이방인]과 이 영화를 비교해보면 그 '감각'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누벨 바그의 공격에 열받은 르네 클레망 영감이 자신의 젊음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다더군요.

40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가 그렇게 젊어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가 '젊다면' 아직도 요새 관객들을 만족시킬만한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클레망 영감이 과시한 의식적인 젊음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우린 그 모든 것들에 익숙해져 버렸던 거죠.

2.

[리플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 소설에 대해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또 그 이야기를 되풀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원작과의 차이점만 간단히 나열하기로 하죠.

원작은 리플리가 뉴욕에서 디키의 아버지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영화에선 리플리와 디키가 이미 친구가 된 뒤부터 시작합니다. 원작에서는 어정쩡하고 멋없는 인물이었던 마르쥬(마지는 이 영화에서는 프랑스 인입니다)는 마리 라포레가 훨씬 예쁜 인물로 연기하고 있고요. 원작과는 달리 리플리는 마르쥬에게 연정을 품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정말로 그 사람의 사랑까지 얻습니다. 물론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결말이고요.

[리플리]와 비교해보면, [태양은 가득히]가 원작에 훨씬 가깝습니다. 스토리의 공간적 흐름은 [리플리] 쪽이 더 비슷하지만, 사건을 다루는 냉정한 태도는 하이스미스의 어투에 더 가깝지요. 그건 아마 르네 클레망이 그만큼이나 개성이 없는 감독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릅니다. 젊은 감각이 어쨌건, 그는 '오퇴르'는 아니었던 거죠.

3.

[태양은 가득히]가 당시 관객들을 열광시켰던 건 그 젊음의 느낌이었습니다. 60년대 초라면 젊은 문화가 싹트고 있을 때지요. 영화는 교묘하게 이들의 분위기와 유행에 영합하는 분위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건 거의 고전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스미스의 엄격한 원작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톰 리플리의 성격하고도 무관한 것이죠.

왜인지는 모르지만 늘 젊은 문화와 연결되는 강한 바다의 이미지는 이런 분위기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여기엔 알랭 들롱이라는 배우가 있었지요. 사실 들롱은 이 영화에서 클레망보다 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의 잘생긴 외모는 캐릭터의 나르시시즘과 금지된 열정을 그럴싸하게 정당화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의 무도덕적인 스토리에 관객들을 손쉽게 끌어들였습니다. 나이든 영화광들이 이 영화에 감상적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죠. 이 영화는 그네들의 젊음의 징표였습니다.

4.

그러나 전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60년대식 젊은이의 초상' 분위기에 그렇게 끌리는 편은 아닙니다.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한다면 그건 클레망이나 알랭 들롱 때문이 아닙니다. 영화에 많이 남아있는 하이스미스의 특성 때문이지요. 정교하게 그려지는 리플리의 범죄행각은 흥미진진합니다. 첫 번째 살인의 갑작스러운 리듬과 두 번째 살인으로 이어지는 서스펜스 역시 훌륭하고요. 이 영화의 무슈 리플레는 밍겔라의 미스터 리플리보다 훨씬 솜씨 좋은 범죄자여서 그의 범죄에는 훌륭한 예술품 특유의 미적 쾌감이 느껴집니다.

클레망이 하이스미스의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프랑스식 감성은 하이스미스의 냉정한 앵글로 색슨식 정신과 자주 충돌하니까요. 그래도 이 영화를 근사한 서스펜스 영화로 만드는 데엔 문제가 없습니다.

바뀐 결말에 대해서도 불평은 없어요. 권선징악이건 아니건 강한 결말이 하나 있어야 하니까요. 영화의 결말이 주는 강한 연민과 충격 역시 가치 있는 것이고요.

5.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지만 캐릭터들은 미국인입니다. 알랭 들롱이나 모리스 로네와 같은 캐릭터들은 미국인을 연기하고 있는 거죠. 미국인들만 나온다면 차라리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겠는데, 이탈리아가 무대니 사정은 복잡해집니다. 이탈리아인들이 등장할 때는 언어의 리얼리티가 지켜지지만 영화 속의 미국인들이 이야기할 때는 그런 게 가차없이 무너지니까요. 게다가 마르쥬는 프랑스인이니 정신이 없는 거죠. 차라리 프랑스인들로 바꾸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봐요.

6.

60년대 영화에 대한 감상은 없습니다. 반대로 저희가 [태양은 가득히]에 미온적이라면 바로 그 시대의 느낌 때문이지요. 그러나 구식 영화광들의 감상적인 추억을 모두 지워내면 우리는 간결하고 냉정하며 무척 고전적인 서스펜스 영화와 마주치게 됩니다. 노인네들이 뭐라건 그게 이 영화의 진짜 가치일 겁니다. (00/02/12)

D&P


기타등등

[태양은 가득히] 때만 해도 들롱은 꽤 괜찮았었는데, 그 뒤로 참 흉하게 늙어버렸죠. 이 영화에서도 가끔 그의 늙은 얼굴이 슬쩍 슬쩍 보여서 기분이 이상해져요.

출처:  http://djuna.cine21.com/movies/purple_no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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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글 출처:  영화 음악 이야기 @ 김제건http://blog.naver.com/jaygunkim/100009169771?Redirect=Login


리뷰 + 동영상과 음악
1960년/감독: Rene Clement/주연: Alain Delon + Maurice Ronet +
Marie Laforet/음악: Nino Rota/112분

우리나라 사람들이 1960-70년대에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의 남성 배우는
단연, "Alain Delon" 이었다.
그리고 이 "Alain Delon"하면 고유명사의 영역을 넘어 잘생긴 남성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고, 그래서 "Alain Delon"같이 생겼다 하면 아무리 영화를 모르는
사람들도 무슨 뜻인지를 쉽게 알 수가 있을 정도로 이미 일반적인 단어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외모는 같은 남자가 봐도 정말 완벽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과히 여성들이 그에게서 느꼈던 감정은 말을 안해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이다.
물론 지금까지야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1960-70년대에는 이 178Cm 키의 "Alain Delon" 보다
더 잘생긴 남성 배우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1935년11월8일이 생일이라고 하니 청춘의 상징이었던 그도 벌써 70 이다.
프랑스 남부의 "Sceaux" 라는 소도시의 한 결손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고생도 많이 하였고, 또 학교도 잘 가지 않으면서 방황도 많이 했다고
하는데,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미 군대에 자원을 하여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베트남에서 터프 한 공수부대 원으로 복무를 하였다고 한다.
제대 후(1950년 중반)에는 웨이터생활과 시장에서의 짐꾼(Porter)생활도 잠시
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 잘생긴 외모가 어디 가겠는가?
당시 미국에서 한참 인기였던 "James Dean"(1931-1955, 미국)같은 이미지의
배우를 찾던 제작자에게 발탁이 되어 드디어 그는 1957년에 영화계에
발을 디디게 된다.

그의 데뷔작은 “여자가 사건에 말려들 때”(Quand La Femmes en Mele,1957)이지만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그의 출세작은 6번째 출연작인 바로 이 작품이다.
이태리와 프랑스의 합작영화인 이 작품에서 그는 야망을 채우기 위해,
살인을 포함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삐뚤어진 청춘 역으로, 바로 악한으로서
출연을 하였는데도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후 갱영화 등에서의 연속적인 성공으로 1964년부터는 제작까지 직접 하게 되고
1973년부터는 감독도 하고 또 1976년부터는 각본도 직접 쓰게 된다.
현재까지 약 90여 편의 영화에 출연을 하였는데, 약 50년의 활동기간에 비하면
그리 다작을 한편은 아닌 셈이다.
얼굴값을 한다는 우리나라 속담도 있지만, “Romy Schneider"(1938-1982)와의
5년간의 동거를 비롯하여, “Nathalie Delon"(1941, 모로코)를 포함한 세 명의
부인들과 모두 이혼을 하고 (2002년에 마지막 이혼)
현재는 (젊은 모델과 함께)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20대 중반의 고아,
"Tom Ripley"("Alain Delon", 1935, 프랑스).
이태리로 가서 방탕 된 생활을 하고 있는 고교동창,
“Philippe Greenleaf"(Maurice Ronet, 1927-1983, 프랑스)
데려오면 5,000달러(지금 돈으론 약10만 달러)를 주겠다는 재벌인 “필립”의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폴리로 간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하니
“Marge"(Marie Laforet, 1939, 프랑스)라는 여자와 연애를 하면서
제 멋대로 사는 “필립”은 “탐”을 마치 하인 대하듯 우습게 보고 무시를 한다.
“마르쥬”와 함께 셋이서 나선 요트 여행. 그에게 쌓여 있던 콤플렉스와 질투가
어느새 변하여 증오가 되고 급기야 “탐“은 ”필립“을 요트위에서 살해하게 된다.
그리고는 죽은 필립의 행세를 하며 예금도 인출하고 편지도 위조를 하면서
음모를 꾸미며 못된 야망을 불태운다.

그러나 거짓은 거짓을 낳고 죄는 또 죄를 낳는 법,
모든 걸 눈치 챈, “필립“의 친구 “프레디“마저 할 수 없이 살해를 하는 ”탐”.
그리고 “필립“이 ”프레디“를 죽이고 자살을 한 것처럼 위장을 한 후, 짝사랑하던
“마르쥬“의 사랑도 뺏는데 성공을 한다. 그러나 경찰이 항상 말하고 주장 하는대로
완전범죄는 없는 것 인가? 요트를 팔기위해 그 배를 포구로 인양하는 과정에서
바다 속으로 빠뜨렸다고 생각한 “필립“의 시체가 그 배의 스크류에 걸린 채 딸려
올라오고 경찰은 그동안 의심해왔던 “탐“의 모든 범행을 알게 된다.
그리고 너무나 유명한 끝 장면,(아래 동영상 참조)
“리플리 씨, 전화 왔어요” 라는 식당 여주인의 말에 해변의 의자에서 일어나 웃으며
걸어오는 “탐“의 얼굴 뒤로 이글거리는 태양빛이 가득한 아름다운 바닷가 모습의
전경이 다시 보인다.
* 아래 동영상이 바로 그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입니다.(꼭 감상 하시길....)


* Thanks for the File from "jwpower72" !

1946년에 2차 대전 당시의 레지스탕스 이야기를 다룬 “철로 변 전투”
("La Bataille Du Rail")로 깐느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이어, 1952년에 발표한
“금지된 장난“(Jeux Interdits)으로 이미 세계적인 스타급 감독이 되어있던,
“Rene Clement"(1913-1996, 프랑스) 감독은
당시에 급물살을 타던 ”Jean Luc Gordard"(1930, 파리)등이 주도한
“Nouvelle Vague"운동을 그때에는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Nouvelle Vague"가 뭐 새로운 게 있냐는 듯이,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준 (도전장 같은)이 영화를 발표하였는데, 오히려 이 작품이 마치,
“Nouvelle Vague"의 주류 작품인 듯, 대단한 찬사를 받게 되었으니 역시
베테랑 감독의 역량이라는 것은 무슨 새로운 풍조라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듯도 하다. 특히 이 영화에선 영웅이 주인공이 아니고, 악한이 주인공인데도
관객들로 하여금 그 나쁜 주인공과 동화가 되게끔 한 기막힌 그의 연출솜씨는
과연 높이 살만하다. 영화가 끝 장면으로 갈수록, “탐”의 편을 들어주게 되는 이유는
이렇게 단지, 주인공인 "Alain Delon"이 잘생겨서만은 절대 아닌 것이다.
(“Rene Clement"의 자세한 이야기는 1952년의 “금지된 장난” 리뷰에서)

1999년도에 “The Talented Mr. Ripley"라는 또 다른 영화로도 리메이크 된 적이
있지만, 이 작품의 원작은 1955년에 출판된 영국 출신의
“Patrica Highsmith"(1921-1995, 영국)의 “The Talented Mr. Ripley" 인데
추리소설 작가인 그는 이 작품이후 “Mr. Ripley, Under Ground"
(1970년 출판 / 2004년에 "Mr. Ripley's Return"으로 영화화가 됨)에 이어
“Mr. Ripley, Under Water"(1991년 출판)까지 모두 5편의 “Mr. Ripley" 시리즈를
출판하였다. 따라서 왠만한 감독 같으면, 끝 장면을 달리해서라도 후속 작을
[“(속)태양은 가득히“ 같은 것]생각 해 봤을 것도 같은데, “Clement" 감독은 아예
생각조차도 않하였다고 하니, 역시 흥행보다는 단 한편이라도 작품성을 먼저 생각하는
비범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원작소설은 속편을 위해 “탐“의 완전 범죄로 끝이 남/ 원작소설에 좀 더 충실하고
또 다양한 재즈 삽입곡들로 영화 음악적으로도 뛰어난 “Anthony Minghella”감독의
“The Talented Mr. Ripley"(1999) 도 매우 우수한 리메이크 작품이다.
별도의 1999년도의 “리플리” 리뷰 참조)

이태리와 합작이라서 그런지 영화음악은 이태리출신으로, 당시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Federico Fellini"(1920-1993, 이태리)의 짝꿍(Collaborator)
"Nino Rota"(1911-1979, 이태리 )가 맡았는데
동양적인 감각의 따뜻하고 쉬운 멜로디로 만들어진 Main Theme이 우리나라에서는
영화의 히트 못지않게 연주 음악으로도 상당히 널리 알려졌었다.

역시 당시의 유행같이 한곡의 Theme을 여러 스타일로 변주하여(재즈 스타일 포함)
여러 번 반복을 하는데, 때론 실로폰으로, 바이올린으로 또 색소폰과 피아노로도
연주를 하고 있다. 또 영화 초반에 “마르쥬“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Delon"도 우리가 잘 아는 노래, “사랑의 기쁨“(Plasir D' Amour")을
부르는 장면이 특이하게도 잠깐 나온다. 잘생긴 "Alain Delon"은 목소리도 상당히
쎅시 해서, 음반도 여러 장을 낸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Dalida"와 함께 부른
“Paroles, Paroles"는 무척 큰 히트를 하였었다.
한편 영화에서도 노래를 하는 “Marie Laforet“ 역시 이 영화의 주제곡을 나중에
음반으로 발표도 하였고 ( “금지된 장난“의 주제곡 포함) 또 가수로서도
잠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하늘과 바닷물 색깔이 어쩌면 저렇게 푸를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들 정도로, (마치 물감으로 칠 한 듯) 너무나 컬러풀한 화면이
인상적인데, 무공해의 맑은 태양빛아래 찍은 환상적인 자연 풍광이 몇 십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너무나 깨끗하다. 촬영은 나폴리를 중심으로 그 인근 작은 마을들에서
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일본인이 아주 멋지게 작명한 “태양은 가득히“ 라는 제목이
(영어제목은 ”Purple Noon")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전반적으로 밝은 톤의 원색
화면이 무척 보기에 좋다. 이렇게 화면 좋고 음악 좋고 거기에 배우까지 보기에
좋으니, (거기에 스릴 있는 줄거리까지) 이 영화는 분명 세월이가도 영원히 남는
명작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영원한 미남, "Alain Delon"을 이야기 하자면
절대로 빼 놓을 수가 없는 작품인 것도 역시 틀림이 없다.
(사족) 그나저나 아직도 그는 영화 출연을 계속하고 있는데,(이 년에 약 한편정도)
왜, 그의 근작은 통 볼 수가 없는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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