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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의료의 풍경 6] <제중원>의 이전 - 헌법재판소 <제중원>의 뒷 이야기는...

(글 순서)

 
23.  <제중원>의 이전 - 헌법재판소 <제중원>의 뒷 이야기는...
24.  <제중원>의 환수 - <제중원> 의사들이 권총 차고 나선 사연은...
25.  <제중원> 보고서(1) - <제중원>에 말라리아 환자가 많았던 이유는?
26.            - " -        (2) - <제중원>의 성병 환자는 어떻게 치료했을까?
 

헌법재판소 <제중원>의 뒷 이야기는…

[근대 의료의 풍경·23] <제중원>의 이전 ③

기사입력 2010-05-17 오후 12:11:28
 

이번 회에서는 우선 구리개 제중원 사진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재동 제중원의 뒷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구리개 제중원 사진으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해링턴(Fred Harvey Harrington)의 저서 (1966년)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남쪽(명동성당 쪽)에서 북쪽(을지로 쪽) 방향으로 찍은 것으로 생각된다. "도시 전체와 시골까지 조망할 수 있다"라는 알렌의 기록과 잘 부합한다.

또 한 가지는 선교 잡지 1934년 8월호에 실린 것이다. 경사로 보아 사진의 왼쪽은 명동성당 쪽, 오른쪽은 을지로 쪽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규모가 상당히 큰 이 사진 속 건물은 동향(東向)으로 생각되며, 건물 왼쪽에 조금 보이는 것은 에비슨의 사택일 가능성이 있다. 많은 사람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병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것으로 여겨진다.

YWCA 주차장 옆, "명동 우당(友堂) 길"에는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 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 표석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대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독립 투사 이회영(友堂 李會榮·1867~1932) 가문의 집이 있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 터" 표석. 표석 앞의 길이 "명동 우당 길"이며, 뒤에 보이는 것이 YWCA 주차장이다. 이회영은 안중근이 일제에 의해 처형된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내년은 이회영 형제들이 만주에 세워 항일 독립 운동의 중요한 인적·물적 기반이 된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프레시안
이회영 등 6형제가 그곳에서 태어나 1908년 무렵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지금의 중국 동북 3성 지역)로 망명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시기와 위치가 구리개 제중원과 상당 부분 겹친다. 이회영 집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는지, 구리개 제중원 터와 관련하여 앞으로 연구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면 1886년 늦가을, 제중원이 구리개로 이전한 뒤 재동에 있던 제중원 건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1885년 4월에 설립한 뒤 1년 6개월 동안 크게 두 차례 확장과 단장을 했지만 졸지에 소박을 맞은 셈이었는데, 소박당한 신세처럼 뒷 소식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재동 제중원 건물이 다시 주목의 대상이 될 기회는 몇 차례 있었다. 1895년 의학교 및 부속병원 설치가 논의되었을 때, 1899년 의학교가 실제로 설립되었을 때, 그리고 같은 1899년 내부 소속의 병원(뒤에 광제원으로 개칭)이 창설되었을 때이다. 새로운 의료 기관을 설립할 때 기왕에 병원으로 썼던 건물을 이용하는 편이 여러 모로 편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세 차례의 경우에 재동 제중원을 활용하려 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1895년의 경우에도 그 전해에 에비슨에게 운영권이 넘어간 구리개 제중원을 환수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제7회), 재동 제중원에 대한 언급은 없다. 관련 기록이 유실되었을 수도 있고, 소유권이 민간인에게 넘어가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항간에는 이상재(月南 李商在· 1850~1927)가 한때 재동 제중원 자리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 1899년 5월 30일자 <독립신문> 기사. 내부 소속의 병원(대한 병원이라고 표기했다)이 6월 1일 전 사간원 건물(公廨)을 이용하여 개원한다는 사실을 알렸고, "행여 문구로만 돌리지 말고 (…) 외국 병원들과 같이 내실 있게 사업을 하기 바란다"라며 이 병원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나타내었다. ⓒ프레시안
그러다가 <황성신문>에 1900년 10월 13일자 및 15~18일자 등 다섯 차례에 걸쳐 다음과 같은 광고 기사가 실렸다. "광제원을 북서 재동의 전 외아문 위 왜송나무 있는 집으로 이전했으니 병을 가진 남녀 여러분은 찾아오십시오. 광제원에서 알림"(廣濟院을 北署薺洞 前外衙門上 倭松이집으로 移設얏스니 抱疴士女 來臨시오 廣濟院 告白)

이 기사대로 외아문(갑오개혁 뒤에 지금의 세종로 미국 대사관 근처로 이전했고 명칭도 外部로 바뀌었다) 위의 집이라면 예전 제중원 자리임이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백송나무"(제11회)가 아니라 "왜송나무"라고 한 점이다. 혹시 근처에 왜송나무가 있는 집이 따로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조금 뒤에 보듯이 재동 광제원 자리가 제중원 자리와 일치함은 명백하다. 어쨌든 백송을 왜송이라고 한 것은 수수께끼이다.

광제원은 대한제국기의 국립병원으로, 요즈음 식으로 말해 양한방 협진 병원이었다. 그 병원의 성격처럼 대한제국 정부의 의료 정책의 골간은 근대 서양 의학과 전통 한의학을 병용하는 것이었다. 그 시기의 국정 방침인 구본신참(舊本新參)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 최신경성전도(1907년). (A) 외부(外部)가 있었던 자리. 이 지도에는 이미 외부 대신 통감부가 자리 잡고 있다. (1) 광제원의 첫 자리 (2) 1900년 10월에 이전한 광제원 자리 (3) 의학교 자리. 당시 중요한 국립 의료·의학 교육 기관들은 대개 이 지역에 있었다. ⓒ프레시안
앞에서 말했듯이 광제원은 내부 소속이었다. 제중원도 1894년 8월까지는 외부 소속이었지만, 갑오개혁 때 내부로 소속이 바뀌었다. 광제원(처음 이름은 그저 "병원"이었으며 내부 소속이어서 흔히 "내부 병원"으로 불렸다)의 처음 위치는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앞 사간원(司諫院) 자리였다. 지금의 지명으로 사간동에서 개원을 한 것이다. 처음부터 재동 제중원을 이용하거나 구리개 제중원을 환수받아 문을 열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던 이유는 알 수 없다.

광제원은 처음부터 환자가 적지 않았다. 외래환자 수는 한 달에 1000명이 넘었고, 양약 시술을 받은 환자와 한약 시술을 받은 환자의 비율은 대체로 6대4였다. 환자 수로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한성병원(漢城病院)과 비슷했고, 구리개 제중원보다는 많았다. 광제원은 개원 1년 4개월 뒤인 1900년 10월 재동 제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간원 건물이 원래 병원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어서 여러 모로 불편하고, 또 많은 환자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황성신문> 1908년 2월 8일자. 학부(學部)에서 관립 여학교를 설립할 것이며, 학교 건물을 빠른 시일 내에 새로 짓기 어려워 이전의 광제원을 사용할 것이라는 기사이다. ⓒ프레시안
▲ <독립신문> 1899년 10월 5일자. 한성병원에서 9월 한 달 동안 외래환자 519명을 보았고, 투약 시술 수는 868명이라고 보도했다. 외래 환자와 투약 시술자를 구별한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두 가지를 합치면 광제원을 이용한 환자 수와 비슷했다. 또 한성병원(지금 Cinus 명동점 자리)이 있던 곳은 이미 일본인 밀집 지역이었는데, 환자가 모두 한국인이라고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프레시안
1907년 3월 광제원은 의학교, 적십자사병원 등과 함께 대한의원(大韓醫院)으로 통폐합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재동에서 대한의원 신축 건물(지금의 서울대학교병원 자리)로 이전했다. 또 제중원이자 광제원이었던 터와 건물은 관립여학교(지금의 경기여자고등학교의 시초)로 이관되었다.

그 점은 1908년 2월 8일자 <황성신문>이 잘 보여주고 있다. <대한매일신보>도 같은 날짜에 마찬가지 내용을 게재했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정리하면, 1886년 후반부터 약 15년 동안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옛 제중원이 1900년 10월부터 1908년 초 무렵까지 7년여 동안 광제원으로 쓰였다가 다시 관립여학교로 넘어간 것이다. 관립여학교가 제중원 자리에 있었던 것은 여러 다른 자료들로도 확인되는 바이므로 앞에서 언급했던 "왜송" 문제도 해결된 셈이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메일보내기

 

 

<제중원> 의사들이 권총 차고 나선 사연은…

[근대 의료의 풍경·24] <제중원>의 환수

기사입력 2010-05-21 오전 6:42:06

 

구리개 제중원은 1894년 9월에 에비슨에게 운영권이 이관되었다가 10년 반이 지난 1905년 4월에 대한제국 정부로 환수되었다. 일부에서는 그 사이에 정부가 제중원을 환수하려는 의사가 없었다고 하지만, 제중원을 되돌려 받으려는 계획은 1895년과 1902년, 두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9년에 학부 소속의 의학교와 내부 소속의 병원을 설립할 때에도 논의가 있었는지 모른다.

갑신쿠데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朴泳孝·1861~1939)는 근 10년 만인 1894년 8월에 귀국한 뒤 12월에 내부대신에 임명되어 7개월가량 재임했다. 박영효는 이 가운데 처음 5개월은 친일 성향의 김홍집과, 나중 한 달 남짓은 친미적인 박정양과 연립내각을 이끌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지난 번(제7회)에 살펴보았듯이, 1895년 6월 14일(음력 5월 22일) 내부대신 박영효는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공문을 보내, 앞으로 쓸 일이 있으므로 에비슨에게 빌려준 전(前) 제중원 관사를 되돌려달라고 했다. 제중원은 그 전해 8월에 내부로 소속이 바뀌었지만, 그 직후인 9월에 에비슨에게 제중원 운영권을 이관한 부서는 외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제중원을 환수하려는 박영효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20여 일 뒤인 7월 6일 박영효가 내부대신 직에서 전격적으로 해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영효의 갑작스러운 실각에 대해서는, 그가 일본에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일본이 그를 견제해서, 왕권을 제약하려 해서 국왕의 눈 밖에 났기 때문에, 또는 역모를 꾀했기 때문에 등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그만큼 실각 사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기대와는 달리, 1895년 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 간섭" 이후 박정양, 이완용, 이범진, 이채연, 윤치호, 이하영 등 친미-친러파가 세력을 점차 넓혀갔다. 미국 주재 공사를 지낸 박정양(朴定陽·1841~1904)이 5월 31일에 총리대신에 임명된 것도 그러한 정세 변화의 한 단면이었다.

또 알렌이 당시 총리 임명 과정에 관여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이때에도 알렌에 대한 국왕의 신임은 각별했다. (알렌은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 재직 시절 박정양, 이완용, 이채연 등과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었다. 특히 이채연은 제중원 주사로 재직할 때부터 알렌과 가까운 사이였다.)

▲ <조선귀족열전>(1910)에 수록된 박영효 사진. 박영효는 일제에 의해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귀족회관 건물주가 됨으로써 옛 구리개 제중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프레시안
제중원 환수 시도가 실각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일본과 친일파의 힘이 약화되고 반면에 미국과 친미파의 세력이 더 커가는 속에서 그러한 행동이 박영효에게 도움이 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이때의 일이 다른 정치인들과 관료들에게 상당한 "학습 효과"를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무렵, 제중원과 관련되는 또 다른 일이 발생했다. 6월 25일(음력 윤5월 3일), "에비슨의 순검(경찰관) 폭행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서흥에 사는 오치서(吳致瑞)라는 사람이 제중원 앞에서 횡사하여 순검이 조사해보니 병을 고치러 제중원을 찾았다가 치료가 어려워지자 의사가 쫓아내어 횡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성부에 문서를 보내어 매장하도록 했는데, 그날 밤에 제중원의 서양인 의사 '어비슌'이 병원 고용인 십여 명을 거느리고 구리개 파출소(交番所)로 와서 시체를 옮기려 하면서 당번 순검을 무수히 구타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경무사(경찰청장) 이윤용은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6월 27일자로 공문을 보내, 위와 같은 조사 결과를 알리고 순검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서양인 의사에게 폭행과 모욕을 당했으니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 경무사 이윤용이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보낸 1895년 6월 27일(음력 윤5월 5일)자 공문. ⓒ프레시안
이윤용의 이 보고가 과연 사실일까? 이 보고를 뒷받침하거나, 반박하는 다른 자료는 보지 못해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느 정도 추론은 가능할 것이다.

이윤용(李允用·1854~1939)은 동생인 이완용과 함께 나중에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지만 1895년 무렵에는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에 깊이 관여하는 등 친미-친러파의 대표적인 인사였다. 즉 이 당시에는 정치외교적 노선 때문에 에비슨을 공격할 리는 없는 것이다. 또 이윤용은 평생 줄서기와 눈치 보기의 대가로서 공연히 에비슨을 무고하여 막강한 미국의 눈 밖에 날 일을 할 사람도 아니다.

또 이 사건이 에비슨의 개인적 일탈 행위인지, 제중원 반납 요청에 대한 불만의 표현인지 알 수 없지만 시기적으로 묘하게 겹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6일 내부대신 박영효는 국왕의 명령으로 해임되었으며, 경무사 이윤용은 경무관 이규완, 최진한과 더불어 내부의 제청으로 해직되었다. 체포령이 내려진 박영효는 그 즉시 일본으로 달아나 다시 10여 년간의 망명 생활을 하게
▲ 이윤용. 일제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과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았고, 또한 남작 작위도 받았다. ⓒ프레시안
되었고, 이윤용은 얼마 뒤인 8월 13일 경무사로 다시 임명을 받았다가 10월 8일의 "왕비 암살 사건"(을미사변) 뒤 친일파들이 득세하자 재차 쫓겨나 동생 이완용과 함께 정동의 미국 공사관에 숨었다. (국왕은 을미사변 며칠 뒤 왕비의 생사가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왕비에게 쫓겨났던 상궁 엄씨(1897년에 영친왕을 낳았고 고종의 계비, 즉 엄 황귀비가 되었다)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국왕은 나중에 민 왕비의 죽음이 확인된 뒤에는 백성들의 동정을 한 몸에 받았다.)

그 뒤 이들 정동파(친미-친러파)는 11월 28일, 일본군과 친일파들에 의해 경복궁에 유폐되어 있던 국왕을 구출(탈취)하기 위해 "춘생문(春生門) 사건"을 일으켰다. 이 "거사"는 실패했지만 두 달 반 뒤인 이듬해 2월 11일 이들은 다시 "아관(俄館)파천"을 감행하여 성공했다. 12·12 군사반란 때처럼 수도의 한복판이 활극의 무대였다.

▲ <일성록> 1895년 7월 6일(음력 윤5월 14일)자. 여기에는 박영효, 이윤용 등의 해임 사실만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프레시안
이 춘생문 사건 때 에비슨은 언더우드, 헐버트 등 선교사들과 함께 권총으로 무장하고 국왕의 침실을 지켰다(<구한말 비록 (상)>, 에비슨 지음, 대구대학교 출판부 펴냄, 47~53쪽). 이는 에비슨에 대한 국왕의 신임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때 알렌도 미군 10명을 이끌고 국왕이 있는 경복궁으로 향했다고 한다.

한참 뒤인 1902년 11월 4일자 <황성신문>에는 원수부(元帥府)에서 2연대를 창설하기 위해 구리개 제중원과 인근 가옥을 매입할 계획이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후속 보도나 다른 기록이 없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러한 논의가 있었다면 이미 재동 광제원과 훈동 의학교 및 부속병원이 있는 이상 정부가 구리개 제중원을 환수하더라도 병원으로 사용할 계획은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구리개 제중원이 정부로 환수된 것은 1905년 4월이었다. 이때 미국 측과 협상을 한 것은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하기와라(萩原守一)였고, 일본이 나섰던 것은 물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즉 제중원을 환수받아 에비슨이 쓰던 사택은 전형적인 친일파 미국인으로서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 고문이었던 스티븐스(Stevens)의 사택으로 사용하고, 병원은 일본인과 친일파의 사교클럽격인 대동구락부가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제중원의 환수 조치는 에비슨에게서 되찾아 사실상 일본인들에게 다시 넘겨주는 것으로, 대한제국의 입장으로서는 하나마나한 일이었다. 아니, 환수를 하기 위해 치를 비용을 생각하면 오히려 손해나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환수를 위한 비용이란 1894년 9월 제중원의 운영권을 에비슨에게 넘겨주면서 맺은 협정에 따른 것이다. 즉 에비슨 측이 건물의 증개축, 수리 등에 들인 비용을 정부가 환수 시에 지불해야 하는 돈이다. 이 협정에 따라 정부는 에비슨 측에 건물의 증개축, 수리 비용 1만1269원90전, 임차료 및 이사비용 1700원을 지불했다. 그밖에 별도로 제중원에 이웃한 에바 필드의 집과 대지를 구입하는 비용 1만9020원을 지불했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가 대금 지불을 끝낸 뒤 곧바로 대동구락부 신축공사에 들어갔다.

대한제국 정부로서는 하나마나하거나 오히려 손해나는 환수를 했지만, 어쨌든 환수는 한 것이었다. 일본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제중원을 환수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전시작전권 환수만큼이나 어려운 제중원 환수였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에비슨 측에 지불한 건물의 증개축, 수리 비용 1만1269원90전의 내역을 살펴보자. <제중원 반환에 관한 약정서>(1905년 4월 10일)에는 다음과 같이 내역이 밝혀져 있다.


이 가운데 병원과 관련해서 지출한 비용은 얼마나 될까? 에비슨의 사택이 양옥 1채, 한옥 1채라고 하니 "한옥 수리비(Repairs on Korean buildings)" 중의 일부는 병원 수리비로 쓰인 것일까? "의사 사택 건축비"만 하더라도 거의 3년치 제중원 운영비이다. 반면에 "하인 거처 비용"의 구체적 내역은 알 수 없지만, 고작 260원이다.

에비슨이 자기 집을 짓는 데 사용한 비용의 일부라도 병원에 들였더라면, "선교부는 현재 우리가 일하는 환경처럼 나쁜 곳에서 일 시킬 권리는 없다"라고 한 에바 필드의 하소연(제21회)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않았을까? 에비슨이 그토록 제중원의 운영권을 넘겨받으려 했던 이유가 진정 무엇이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된다.

▲ <제중원 반환에 관한 약정서> 영문본. 증개축 및 수리 비용의 내역이 적혀 있다. 원래 두 쪽에 나뉘어 기록된 것을 편의상 합쳐서 나타내었다. ⓒ프레시안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메일보내기

 

 

<제중원>에 말라리아 환자가 많았던 이유는?

[근대 의료의 풍경·25] <제중원> 보고서 ①

기사입력 2010-05-24 오전 9:39:25
 

해링턴은 알렌의 조선에서의 활동을 자신의 저서 제목처럼 "하느님, 마몬(재물의 신), 일본인" 등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했다고 했는데(제23회), 거기에 "기록자(chronicler) 알렌"이라는 칭호 한 가지를 더 붙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알렌은 (1904년), (1908년)과 같은 저서뿐만 아니라 일기, 편지, 보고서 등 매우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우리나라의 모습과 미국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거니와, 특히 제중원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알렌의 그 같은 기록들이 없었다면 제중원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훨씬 피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 잘못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의 표지. <알렌의 조선 체류기>, <조선 견문기> 등 두 종류의 한글 번역본이 있다. ⓒ프레시안
알렌 역시 당시의 다른 서양인과 마찬가지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과 편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조선의 문화와 종교와 (전통) 의료를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문명적 요소가 거의 없다고 여긴 조선을 그저 개화(開化)와 교화(敎化)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알렌 개인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류 속에서 서양인은 자신만이 진정한 문명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선교사는 일반 서양인보다 더 강한 기독교식 "선민의식(選民意識)"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다른 서양인의 기록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알렌이 남긴 기록을 볼 때에도 주의가 필요하지만, 그 기록을 통해 많은 지식과 정보뿐만 아니라 성찰 거리를 얻을 수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몇 회에 걸쳐 알렌의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가운데 특히 질병과 환자 진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이 <보고서>는 알렌과 헤론이 제중원에서 첫 1년 동안 자신들이 활동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작성을 의뢰한 기관이나 단체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제출처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공식 문서의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헤론은 1886년 4월 8일자에서 "보고서를 이미 작성했습니다"라고 했으며, 알렌은 4월 12일자에 "연례 보고서를 펴내느라 분주합니다"라고 했다. 이것으로 보아 대체로 4월 초순에 보고서 작성이 완료되어 출판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알렌의 6월 20일자 편지에 "병원 보고서들을 입수했습니다. 보고서 중 얼마를 박사님께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보고서는 6월 20일 이전에 발행(표지에 인쇄처가 일본 요코하마의 Meiklejohn 회사로 되어 있다)된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표지, 제중원 도면, 병원에 관한 서술(Narrative Concerning the Hospital), 외래 환자 분류(Dispensary Cases Classified), 외래 환자에 대한 설명(Notes on Dispensary Cases), 입원 환자의 상세한 기록(Hospital In-Patients in Detail), 입원 환자에 대한 설명(Notes on Hospital Cases), 재정 보고(Treasurer's Report) 등 총 38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보고서의 총론격인 "병원에 관한 서술"과 "재정 보고"는 알렌 혼자 작성했으며, 나머지 부분은 알렌과 헤론이 공동으로 서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알렌은 "병원에 관한 서술" 부분의 말미에서 1년 동안 제중원을 찾은 환자의 질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말라리아는 가장 흔한 질병으로, 4일열(four-day ague)이 가장 흔하다. 매독은 말라리아 다음으로 많으며, 그 영향(증상)이 매우 많고 다양하다. 쌀을 먹는 모든 나라와 같이 물론 소화 불량이 많다. 소화 불량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은 종교가 아닌 다른 대상물들을 신봉하거나 적어도 그에 대한 믿음은 확실하다.

나병이 흔하다. 모든 종류의 피부병을 볼 수 있다. 수종(水腫)이 흔히 보인다. 연주창이 매우 많다. 요컨대 이곳에서는 잘 알려진 모든 질병이 다양하게 변형된 상태로 보이며 각기와 멜라닌증(黑色症) 등 흔치 않은 병들도 있다. 디스토마와 사상충증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7쪽. 제중원을 찾은 환자들에서 보이는 질병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첫 해 동안 제중원을 찾은 환자 가운데 말라리아와 매독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았다. ⓒ프레시안

이것은 언뜻 평범한 임상 기록으로 보이지만, 우리나라 의료사에서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근대 서양 의학의 관점으로 우리나라의 질병 발생 상황을 다룬 최초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1883년 4월부터 1885년 3월까지 부산의 제생의원 원장을 지낸 고이케(小池正直)가 <계림의사(鷄林醫事)>에서 자신이 제생의원에서 진료한 조선인과 일본인 환자들의 질병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지만(제4회) 그 책이 출간된 것은 알렌의 <보고서>보다 1년 늦은 1887년이어서 "최초"의 영예를 차지하지 못했다.

알렌은 이렇게 환자들의 질병을 개관한 다음, "외래환자 분류"에서 다음 표와 같이 질병을 크게 18가지로 분류했다. 이러한 질병 분류 방법은 요즘과는 조금 차이 나는 것으로, 당시 미국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생각된다.

▲ 이 표는 <보고서>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을 필자가 정리한 것이다. ⓒ프레시안

표에서 보듯이 제중원을 찾은 환자는 소화기계 환자(19.4퍼센트), 비뇨 생식계 환자 및 매독환자(18.2퍼센트), 발열 환자(11퍼센트) 순이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 기록은 제중원을 찾은 환자에 관한 것이지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당시 조선의 질병 발생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할 터이다.

▲ <보고서> 8쪽. 발열 환자를 접촉성(contagious), 접종 부작용(by innoculation), 풍토병성(endemic) 등으로 세분했는데, 대부분(94퍼센트)이 풍토병성 발열 환자였다. ⓒ프레시안
이제 가장 흔한 세 가지 중 발열(fever) 환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발열 환자 1147명 중 4일열이 713명(62퍼센트), 매일열 177명(15퍼센트), 3일열 171명(15퍼센트), 우두(접종 부작용) 31명(3퍼센트), 이장열(弛張熱) 18명(2퍼센트), 각기 15명(1퍼센트), 두창 8명 순이었다.

앞의 "병원에 관한 서술"에서 언급한 것과 연결을 지어 보면 알렌은 4일열, 매일열, 3일열 등 풍토병성 발열을 모두 말라리아로 여긴 것 같다. 이 점은 "외래 환자에 대한 설명"을 보면 더욱 뚜렷하다.

"치료한 질병 중 가장 흔했던 것 가운데 한 가지가 다양한 종류의 말라리아였는데, 모두 1061례를 진료하여 전체 환자의 대략 10분의 1을 차지했다. 이러한 환자들은 전국 도처에서 찾아왔으며, 500리(135마일)나 떨어진 곳에서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겨울에 본 환자들은 거의 모두 4일열 말라리아였고, 여름과 가을에 병원에 온 환자들은 주로 매일열과 3일열 형이었다는 점이다."


▲ <보고서> 22쪽. 알렌과 헤론은 말라리아 환자 중 겨울에는 4일열이, 여름과 가을에는 매일열과 3일열 환자가 많았다고 기록했다. ⓒ프레시안

사실 이때까지 서구에서도 말라리아에 대한 연구는 크게 진척되지 않았다. 1880년 프랑스의 기생충학자 라베랑(Alphonse Laveran·1845~1922)이 알제리에서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원충(原蟲)을 처음으로 발견했으며, 영국의 기생충학자 로스(Ronald Ross·1857~1932)가 아노펠레스 모기가 사람을 물 때 말라리아 원충이 사람의 핏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실히 밝힌 것은 1895년이었다. 또 증상만이 아니라 혈액 검사를 통해 말라리아 여부와 종류를 진단한 것은 서구 사회에서도 20세기 들어서의 일이었다.

▲ 라베랑(왼쪽)과 로스(오른쪽). 이들이 말라리아 연구로 각각 1907년과 1902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것은 당시 말라리아가 조선과 같은 후진국에서만이 아니라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을 침략하던 서구 선진국에서도 큰 문제였음을 뜻한다. ⓒ프레시안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말라리아는 거의 모두가 3일열 형(型)이다. 1930년 충청남도 서산과 홍성에서 처음 4일열 말라리아의 발생이 보고되었는데, 그것도 오진으로 보는 학자가 있을 정도로 4일열은 매우 희귀하다. 그렇더라도 1880년대에는 4일열이 많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생태계의 급격한 변화와 같은 뚜렷한 이유 없이 몇 십 년 사이에 말라리아의 주된 타입이 바뀔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마라리아의 증세와 치료법". 당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에 재직하던 박병래가 쓴 글로 <가톨릭청년> 1933년 7월호에 실렸다. 이 글에서 박병래는 4일열 말라리아가 충남 등지에 더러 발생한다고 했는데, 그것조차도 오진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기생충학자도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말라리아는 거의 모두가 3일열 형이다. ⓒ프레시안
따라서 알렌이 4일열 말라리아라고 진단한 것은 열이 4일 주기로 오르는 다른 종류의 질병들을 제대로 분간(감별 진단)하지 못한 때문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알렌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당시 근대 서양 의학의 말라리아 진단 기술의 한계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외국인인 알렌으로서는 조선에서 발생하는 말라리아가 거의 모두 3일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열의 특성이 어떻든 말라리아로 생각했을 것이다.

요컨대, 제중원에서 말라리아 환자라고 진단받은 사람 가운데 실제 말라리아 환자는 보고치보다 훨씬 적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른 근거가 없는 이상 3일열 형만 말라리아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당시 진단이 어떻든 발열에 대한 치료제는 무조건 "특효약" 금계랍이었다는 점에서 진단의 의미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1899년 독일의 제약 회사 바이엘이 아스피린을 출시한 뒤로 해열제로서의 금계랍의 독점적 지위는 무너졌다.)

요즈음은 발열의 원인을 모른 채 무작정 해열제를 쓰는 것은 금기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달랐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제중원>의 성병 환자는 어떻게 치료했을까?

[근대 의료의 풍경·26] <제중원> 보고서 ②

기사입력 2010-05-27 오전 8:26:23

 

남아메리카 페루(잉카)의 원주민이 오래 전부터 말라리아와 같은 열병 치료에 사용하던 기나 나무껍질이 유럽에 도입된 것은 1630년대였다. 그리고 200년쯤 뒤인 1820년에 프랑스의 약사 펠레티에(Pierre Joshep Pelletier)와 카방투(Joshep Bienaime Caventou)가 기나 나무껍질을 분리, 정제해서 키니네(중국인들은 음을 따서 "金鷄蠟"이라고 적었다)를 만들어내었다. 키니네는 말하자면 아메리카 전통 의료와 유럽 근대 과학의 합작품인 셈이다.

프랑스에 이어 곧 독일, 영국에서도 키니네의 대량 생산에 들어갔고, 19세기 말에는 미국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약의 성격이 채집, 재배되는 식물(약초)에서 공산품으로 변화하는 시초였다. 그리고 새로운 약품을 생산한 나라들은 새로운 시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 기나 나무(Cinchona pubescens·金鷄蠟樹). 페루의 국목(國木)이다. 키니네의 화학 구조식(오른쪽). ⓒ프레시안

그러면 금계랍(金鷄蠟)이 조선에 들어온 시기는 언제쯤일까? 황현(黃玹·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루걸러 앓는 학질은 속칭 '당학(唐瘧)'이라는 병인데, 우리나라 사람이 이 병을 아주 두려워했다. 노쇠한 사람은 열에 네다섯은 사망했으며 젊고 기력이 좋은 사람도 몇 년을 폐인처럼 지내야 했다. 금계랍이란 약이 서양에서 들어온 뒤로는 사람들이 그것을 한 돈쭝만 복용해도 즉효가 있었다. 이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불려졌다. 우장(牛漿·우두 원료)이 나오자 어린아이가 잘 자라고, 금계랍이 들어오자 노인들이 명대로 살게 되었네."

이어서 황현은 "이 해부터 서양의 습속을 따라서 석탄, 석유, 성냥을 쓰게 되었다"라고 한 다음, 석유에 대해 "우리나라는 경진년(1880년) 이후 처음 사용했는데 처음에는 색이 붉고 냄새가 무척 지독했으며 한 홉이면 열흘 밤을 켤 수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이것을 보면 금계랍이 처음 전래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미 1880년 무렵부터는 조선에서 널리 쓰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호를 개방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벌써 조선은 서양산 약을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중원을 찾은 열병 환자가 많은 것으로 보아 제중원도 금계랍을 보급하는 데 한몫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 1898년 10월 12일자 <독립신문>(왼쪽). 세창양행과 제중원의 금계랍 광고가 나란히 실려 있다. 세창양행은 독일제, 제중원은 미국제를 수입해서 팔았다. 당시 금계랍은 황금(金)알을 낳는 닭(鷄)이었다. 제중원 광고 기사 위의 태극 문양이 인상적이다. 일제시대의 금계랍 포장지(오른쪽). 금계랍은 일제시대에도 여전히 가장 많이 쓰인 약 가운데 하나였다. ⓒ프레시안

금계랍은 1890년대와 1900년대 대표적인 히트 수입 상품이었다. <독립신문>에는 1896년 11월 7일부터 1899년 12월 4일 폐간 때까지 금계랍 광고가 600회 이상 실렸다. 전체 광고 건수 4693개의 15퍼센트나 되었으니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 1899년 8월 9일자 <황성신문>. 당시 제중원에서는 미국산 금계랍 외에 회충약과 고급 벽지(盤子紙)도 팔았다. 제중원의 광고는 1899년 8월부터 10월, 1901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거의 매일 게재되었다. 태극 문양의 위 아래가 <독립신문>과는 반대이다. ⓒ프레시안
금계랍 광고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독일인 마이어(Eduard Meyer)가 경영하는 세창양행(世昌洋行) 광고였고, 간혹 제중원에서 내는 광고도 실렸다. 제중원의 금계랍 광고는 <황성신문>에 게재한 경우가 더 많아 100회가 조금 넘었다.

이번에는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말라리아 다음으로 많다고 언급된 매독과 비뇨 생식계 질병을 살펴보자. 이 계통의 환자 1902명 가운데 매독 환자가 760명이었고, 매독 골막염 96명, 매독성 항문 고무종 89명, 매독성 궤양 60명, 매독과 나병 병발 52명, 매독성 여각진 44명, 안면 매독 결절 21명, 매독성 인후궤양 18명 등 매독의 후유증으로 제중원을 찾은 환자는 380명이었다(매독 공포증 7명은 제외). "외래 환자에 대한 설명"에는 매독 후유증을 200례 이상 치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독과 그 후유증을 합치면 1140명으로(이것으로 보면 말라리아 환자보다 더 많다) 전체 환자 1만460명 중 10.9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리고 연성하감 235명, 임질 156명, 경성하감 146명, 만성임균성요도염 51명으로 매독 이외의 성병환자는 모두 588명으로 전체 환자의 6퍼센트였다.

매독은 1494년 이탈리아와 프랑스 군대 사이의 전투 과정에서 돌연히 발생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구대륙" 각처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그 전에는 매독을 구대륙에서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1494년 유럽의 한 복판에서 새로운 병(한 동안 매독은 "새로운 병", "프랑스 병", "이탈리아 병" 등으로 불렸다)이 생겨난 것일까?

▲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의사인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1478-1553). 유명한 의학시(醫學詩) <프랑스 병에 걸린 시필리스(Syphilis sive morbus gallicus)>(1530년)를 지었다. 시필리스(매독)라는 병명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시에는 매독이 성적 접촉에 의해 전파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적혀 있다. ⓒ프레시안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아직도 대립하고 있다. 한 가지는 아메리카로부터의 전래설로, 1492년 콜럼부스 원정대가 자신들이 "발견"한 카리브 제도(서인도제도)에서 유럽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원래 유럽에 미미하게 있었던 매독이 이 무렵 여러 사회적·자연적 조건의 변화로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기원이야 어떻든 유럽에서 출발한 매독은 1498년 인도, 1500년 무렵에는 벌써 중국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에는 1512년부터 매독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며, 조선에도 1515년쯤에는 상륙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의 교통 수단을 생각하면 매우 빠른 전파였다.

그리고 어느 나라든 일단 매독이 발을 들이면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갔다. 조선 시대의 우리나라에는 대유행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그렇다고 전혀 유행이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매독은 성 풍속과 관련이 있으므로 성에 대해 엄격했던 조선에서는 전파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렸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독에 대한 뾰족한 예방과 치료 방법이 없었고, 위생 상태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던 시절에 매독 환자가 병리생태적 균형에 이를 때까지 점차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다른 성병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중원의 성병 환자가 전체 환자의 16퍼센트나 차지하므로 매우 많게 보이지만 그것을 부정할 근거도 별로 없다. 당시 매독과 임질 등에 대한 진단이 혈청 검사나 세균 검사를 통한 것이 아니므로 오진의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1905년 독일의 동물학자 샤우딘(Fritz Schaudinn·1871~1906)과 피부과 의사 호프만(Erich Hoffmann·1868~1959)이 매독균을 발견하고, 다음 해에 독일의 세균학자 바서만(August von Wassermann·1866~1925)이 매독의 혈청 검사법(바서만 법)을 개발하기 전에는 의사의 임상적 판단이 진단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임질 등 다른 성병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성병들 사이의 감별 진단이 까다로울 수는 있지만, 성병과 그밖의 다른 질병들을 분간하는 것은 대체로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매독 환자 11퍼센트, 그 밖의 성병 환자 6퍼센트라고 보고된 것은 상당히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수치가 전체 인구의 성병 감염률을 대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알렌과 헤론은 "외래 환자에 대한 기록"에서 자신들의 매독 치료 효과가 매우 좋아서 제중원을 찾는 매독 환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종창이나 고름이 생긴 환자에 대한 외과적 절개 등으로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했겠지만 근대 서양 의학도 전통 의술과 마찬가지로 매독이나 그밖의 성병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시대는 아직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매독 특효약인 "살바르산 606"은 1910년에 세상에 선을 보였고, 다른 세균성 성병들에 대한 치료는 항생제가 개발된 1940년대에나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밖에 1932년부터 만들어진 설파제가 어느 정도 치료 효과를 거두었을 뿐이다.

▲ 최초의 매독 특효약인 "살바르산 606"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독일의 면역학자 에를리히(Paul Ehrlich·1854~1915)와 일본의 세균학자 하타 사하치로(秦佐八郞·1873~1938). 엄밀히 말해 이 약을 개발하는 데에는 하타의 공이 더 컸다고 평가된다. 이들의 업적은 매독 치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학요법의 길을 연 것이었다. 에를리히는 이미 1908년에 면역 반응의 이론으로 곁가지설(側鎖說·side chain theory)을 제창하는 등 면역학에 관한 업적으로 메치니코프(Ilya Ilich Mechnikov)와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매독 특효약인 살바르산 계통 화합물의 구조식(오른쪽). 이제 약초에서 유효 성분을 추출, 정제하여 약을 생산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험실에서 연역적으로 신약을 합성하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은 자본과 기술이 축적된 회사와 나라에서만 가능했으므로, 약의 세계적 독점 시대가 개막된 것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 프레시안 2010.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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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고 암병원 MD앤더슨 종신교수 '김의신' - 담배보다 나쁜 게 동물성 기름...나이 들수록 삼겹살은 피하라

美최고 암전문의 "한국인 먹는 흰쌀밥…" 충격

 
[중앙일보] 입력 2012.06.23 00:56 / 수정 2012.06.23 11:53

 

[사람 속으로] 미국 최고 암병원 MD앤더슨 종신교수 김의신
담배보다 나쁜 게 동물성 기름 … 나이 들수록 삼겹살은 피하라

 

 

미국 대표적인 암 전문 병원 MD앤더슨 암센터의 종신교수인 김의신 박사는 “동물성 기름을 섭취하면 서양인은 피하지방이 되고 동양인은 내장지방으로 쌓인다. 그러니 올리브 오일 같은 식물성 기름을 많이 먹어라. 우리가 배고픈 시절에 먹었던 보리밥·된장·고추장 등이 돌이켜보면 모두 건강식이었다”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미국 최고의 암 전문 병원-텍사스대학교의 MD앤더슨 암센터다. 연간 연구비용만 6000억원이 넘는다. 단일 연구기관으로선 암 연구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암 연구비의 15%는 기부금으로 채워진다. 세상이 MD앤더슨에 거는 기대는 그만큼 크다. MD앤더슨이 암 연구의 최전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종신교수가 된 한국인이 있다. 김의신(71) 박사다. 그는 1991년과 94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최고의 의사(The Best Doctors in America)’에 뽑히기도 했다. 연간 MD앤더슨을 찾는 한국인 암환자는 약 600명이다. 그중에는 대기업의 오너들도 있다. 김 박사는 “9·11 이전만 해도 외국에서 오는 환자가 3분의 1이었다. 중동의 왕족들도 많이 왔다. 9·11 이후에는 미국 입국이 어려워져 이들의 발걸음이 확 줄었다”고 말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재력 있는 암환자들이 찾아가는 곳이 MD앤더슨이다.

김 박사는 세계적인 핵의학 전문가다. 의료 선진국에서 한국인 의사의 명예를 드높였다는 이유로 국민훈장 동백장도 두 번이나 받았다. 그런 김 박사가 18일 인천의 가천 길병원을 찾았다. 암센터 11층 가천홀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암 이야기’ 강연을 했다. 청중석에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병원복을 입은 환자들, 또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염려하는 이들이 앉아 있었다. 김 박사는 30년 넘는 세월 동안 암 연구를 하며 꿰뚫은 ‘암에 대한 통찰’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때로는 직설적이었고, 때로는 유머가 넘쳤다. 강연을 마친 그와 마주 앉았다.


김의신 박사가 종신교수로 있는 MD앤더슨 암센터.
 
“담배보다 몸에 나쁜 것이 동물성 기름이다. 피자나 핫도그 등 기름에 튀긴 음식, 지방이 많은 삼겹살 등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청중의 눈이 동그래졌다. 삼겹살은 한국인에게 친근한 음식이다. 그런데 피하라니.

●주장이 과격하게 들린다. 왜 삼겹살을 피하라고 하나.

 “미국에선 그런 음식이 베이컨이다. 젊을 때는 괜찮다. 20대에는 동물성 기름을 먹어도 분해 효소가 왕성하게 분비돼 문제가 없다. 그런데 40대가 넘어서면 달라진다. 동물성 기름을 소화하는 효소가 적게 나온다. 그래서 기름이 몸 안에 쌓이게 된다. 서양인들이 동물성 기름을 먹으면 피부 아래 지방이 쌓이는 피하지방이 된다. 그래서 뚱뚱해진다. 동양인은 다르다.”

●동양인은 어떻게 다른가.

 “동양인은 겉모습이 그다지 뚱뚱해지진 않는다. 대신 기름기를 많이 먹으면 내장에 기름이 찬다. 내장지방이 된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뚱뚱하지 않으니까 먹어도 되겠지’라고 다들 생각한다. 그건 큰 착오다.”

●왜 착오인가.

 “나이가 들수록 혈관에 콜레스테롤이 쌓인다. 혈관벽에 기름이 찬다. 그런데 그게 들러붙어 있다가 어느 순간 뚝 떨어진다. 그리고 몸 안을 돌다가 조그만 모세혈관에 가서 달라붙는다. 뇌에 가서 들러붙으면 중풍이 오고, 치매가 온다. 간에 기름이 끼면 지방간이 되고, 간암이 된다. 췌장에 기름기가 차면 당뇨병이 생긴다.”

●그럼 어떻게 먹어야 하나.

 “40대가 넘어가면 몸에서 분해 효소도 적게 나오고, 인슐린도 적게 나온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식사량을 줄여야 한다. 소식(小食)해야 한다. 삼겹살도 양을 줄여야 한다. 몸은 40대인데 20대 때 먹던 습관대로 먹으면 곤란하다. 나도 예전에는 배가 아플 만큼 많이 먹었다. 이젠 식사량을 줄였다.”

 김 박사는 “암보다 더 무서운 게 혈관성 병”이라고 했다. “나쁜 암은 진단 후 1년 안에 사망한다. 거기서 끝이다. 그런데 치매나 중풍 같은 혈관성 병은 10~20년씩 투병하며 가족을 힘들게 한다.” 혈관성 병을 예방하다 보면 암 예방도 된다는 지적이었다.

 김 박사는 ‘암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꼬집기 시작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치료하기 힘든 암환자가 한국인이다. 그들은 암으로 죽기 전에 굶어서 죽는다. 치료를 견디지 못해서 죽는다”고 말했다.

●굶어 죽는다니. 무슨 뜻인가.

 “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잘 먹어야 한다. 고기도 먹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병원에서는 암환자에게 고기를 못 먹게 한다고 들었다. 항암 치료는 독하다. 일종의 독약을 먹는 셈이다. 그게 몸에 손상을 많이 준다. 우리 몸의 단백질을 파괴한다. 그래서 단백질을 보충해야 한다. 단백질이 가장 많은 게 고기다.”

●암 진단 후의 방사선 치료도 마찬가지인가.

 “그렇다. 쉽게 말해 방사선 치료는 우리 몸을 확 구워버리는 거다. 불고기 굽는 것과 똑같다. 기운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때 고기를 먹으면서 기운을 차려야 치료를 견딜 수가 있다. 그런데 채식만 하거나 잘 먹지 못하면 체중이 빠진다. 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나 방사선 치료에 들어가면 절대 체중이 빠져선 안 된다. 입맛이 없고 체중이 떨어지면 항암 치료제도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고기를 먹지 않는 암환자는 암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치료를 견디지 못해 죽게 된다.”

암 환자에게 권하는 오리고기와 현미잡곡밥.
 
 
●어떤 고기가 좋은가.

 “나는 개고기나 오리고기를 권한다. 동물성 기름이 적거나 불포화지방이기 때문이다. MD앤더슨에서 항암 치료를 하다가 두 환자에게 2~3개월간 쉬라고 했다. 기운이 너무 떨어져서 그냥 쉬다 오라고 했다. 한 사람은 하와이에 가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건강 숙소’에 가서 채식만 하다 왔다. 얼굴이 반쪽이 돼서 왔더라. 또 한 사람은 한국에 가서 개고기 먹고서 체력을 보충하고 왔다. 이후 항암 치료를 두 번째 사람이 훨씬 잘 받았다.” 이에 덧붙여 그는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물을 많이 마시라”고 주문했다. 독한 약을 먹는 만큼 물을 많이 마셔야 속에서 희석이 된다는 얘기다.

 그는 암을 대하는 자세도 중요하다고 했다. 한국인과 미국인은 아주 다르다고 했다. MD앤더슨에는 한국의 재력가도 꽤 온다. 김 박사는 “한국인 암환자들이 의사에게 꼭 묻는 질문이 있다. 미국인들은 그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운을 뗐다.

●그 질문이 뭔가.

 “‘선생님, 제가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다. 나는 미국인에게서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의사가 그걸 어떻게 알겠나. 그건 하나님만 아는 거다.”

●그 물음에 미국 의사들은 뭐라고 답하나.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럼 한국인 암환자들은 ‘여기가 세계 최고의 병원인데, 어떻게 그것도 모르느냐?’고 따진다. 내가 옆에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미국인 의사의 말이 맞다. 몇 년이나 살지 그걸 의사가 어떻게 알겠나. 그런데 재미있는 건 한국인 환자 중에 직업이 의사인 사람들이 그걸 더 많이 물어본다.”

 그 말 끝에 김 박사는 “한국인 암환자 중에 의사 말을 가장 안 듣는 사람들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저었더니 그는 “의사와 간호사, 약사, 변호사들이다. 그런 직업을 가진 암환자를 치료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

●왜 그들을 치료하기가 어려운가.

 “그냥 시골에서 온 순박한 사람들은 의사가 처방한 대로 따라온다. 그런데 의사 직업을 가진 한국인 암환자에게 항암약을 처방하면 집에 가서 밤새 인터넷을 한다. 약에 대한 성분과 부작용을 조사한다. 그런데 부작용 내용을 보다 보면 어김없이 ‘죽을 수도 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럼 그 다음날 병원에 와서 따진다. 왜 내게 이런 약을 처방하느냐고 말이다.”

●환자 입장에선 그렇게 따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약을 의심하고, 의사를 의심하면 환자의 마음이 닫힌다. 마음이 닫히면 몸도 닫힌다. 그럼 치료가 안 먹힌다. 그게 진짜 문제다. 한국 사람은 ‘얼마나 사느냐, 이 치료법이 내게 잘 듣겠는가’만 묻는다. 그런데 그동안 복용한 약명과 용량을 정확하게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인 환자는 반대다. 그들은 앞의 질문은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지금껏 복용한 약명과 양을 정확하게 적어서 온다. 병실에 가도 한국인과 미국인 암환자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제 동료 중에도 암으로 죽은 사람이 있다. 병문안 가서 나는 우는 걸 본 적이 없다. 31년 동안 숱하게 암환자를 대하면서도 미국인 환자나 가족이 우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인 환자나 가족은 대화를 나누다가 울음이 복받쳐서 얘기를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다른 건가.

 “미국인은 기본적으로 삶과 죽음은 신이 결정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병은 전적으로 의사에게 맡긴다. 자신은 마음과 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집중할 뿐이다. 그래서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한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회사에 출근을 한다. 죽기 전날까지 일을 하는 경우도 봤다. 그럼 암에 대해서 걱정하는 시간이 훨씬 줄어든다. 미국인 암환자들은 항암 치료를 받으며 구역질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한국인은 다르다. 암에 걸리면 일단 직장부터 그만둔다. 그리고 하루종일 암과 죽음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건 환자의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인 환자는 대부분 구역질을 한다.”

 김 박사는 30년 넘게 암을 연구하고, 암 환자를 상대하고, 암 치료를 해왔다. 그가 보는 암의 원인은 뭘까. “우리 몸에는 좋은 성분과 나쁜 성분이 늘 같이 있다. 그 둘이 균형을 이루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떤 요인에 의해 균형이 깨지면 병이 생기는 거다. 암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균형을 깨뜨려 암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너무 많아서 암의 이유를 딱히 뭐라고 지적할 수는 없다.”

 그는 공기를 예로 들었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에는 균이 잔뜩 있다는 거다. 똑같은 곳에서 공기를 마셔도 어떤 사람은 감기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건강하다. “호르몬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에게는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 함께 있다. 둘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여성 호르몬이 너무 많으면 유방암이나 자궁암이 생긴다. 반면에 남성 호르몬이 너무 많으면 전립선암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 몸 안의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 박사는 “하얀 쌀밥을 조심하라”고 강조했다. “흰 쌀밥은 완전히 흰 설탕이라고 보면 된다. 설탕을 숟가락으로 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 쌀밥을 오래 씹어 보라. 그럼 단맛이 난다. 내가 직접 실험도 해봤다. 흰 쌀밥만 먹고 나서 당을 측정하면 확 올라간다. 그런데 잡곡밥을 먹고 당을 측정하면 내려간다. 그런데 한국의 식당에 가면 대부분 쌀밥만 나온다. 보리밥이나 잡곡밥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심지어 병원에서도 식단에 흰 쌀밥을 내놓는 곳이 있다. 그건 상식 이하다.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차원에서라도 식당에서 흰 쌀밥이 나오면 곤란하다. 미국은 전체 예산의 17%가 의료비로 나간다. 그게 앞으로 25%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그러니 예방의학이 얼마나 절실하고 중요한 일인가. 흰 쌀밥 대신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먹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중요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몸도 함께 변한다. 늘 청춘이 아니듯이. 김 박사는 “나이를 먹을수록 몸의 기관에 탄력성이 줄어든다. 탄력성이 줄면 구불구불하게 주름이 잡힌다. 그럼 구불한 지점에 변 같은 배설물이 고인다. 그럼 거기에 염증이 생기고, 암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 된다”고 설명했다.

●암에도 기적이 있나.

 “있다. 암에도 기적이 있다. 지금껏 나는 기적적인 환자를 최소한 20명 정도 봤다. 우리 병원에서도 모두 포기하고 임종을 위해 호스피스동으로 간 환자가 있었다. 그런데 죽음을 기다리는데 안 죽더라.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도. 검사를 해보니 암이 없어진 건 아니더라. 다만 암이 활동을 멈추고 있더라. 그건 과학적으로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거다. 또 난소암 4기인 한국인 여성도 있었다. 정상인은 암 수치가 40~60 정도다. 당시 그 여성은 암 수치가 800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수치가 점점 떨어졌다. 그러더니 정상치가 됐다. 검사를 해보면 암 덩어리는 그대로였다. 어떤 덩어리는 더 커진 것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껏 18년째 잘 살고 있다.”

●기적적인 치유를 한 환자들의 공통점이 있나.

 “있다. 겸손이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에게 모든 걸 맡기기도 했다. 그럴 때 뭔가 치유의 에너지가 작동했다.”

●독자들이 암을 예방할 수 있게 조언해 달라.

 “암의 원인은 정확히 모른다. 그런데 암은 유전적 성향이 있다. 그래서 가족력에 암이 있는 사람은 유심히 봐야 한다. 가령 아버지가 위암에 걸린 적이 있다든가,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린 적이 있다면 그 암에 대해 특별히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런 암이 왜 생겼는지 알아야 한다. 담배를 많이 피운 게 원인이라면 본인은 절대 담배를 피워선 안 된다. 그리고 해당하는 암에 대한 정기 검진도 자주 해야 한다. 남다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암은 예방이 최고다.”

●그래도 암에 걸린 사람은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나.

 “나는 크리스천이다. 기독교인의 눈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암에 걸리는 것은 뭔가 시련을 줘서 나를 단련시키고자 함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어느 순간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암에 걸린 덕분에 내가 소중한 뭔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치유의 에너지가 작동한다. 그런데 ‘암 걸린 게 억울해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힘들다. 오히려 암이 더 악화하기 쉽다. 그러니 마음 가짐이 얼마나 중요한가.”

김의신 박사는

김의신 박사는 전북 군산 출신이다. 가천대학교 이길여 총장과 동향이다. 서울대 의대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그는 “나와 이길여 총장은 앞날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지나간 일에 대해 돌아보지 않는 점이 닮았다. 미국에서 쌓은 연구 노하우를 미래 암치료를 짊어진 한국의 젊은 의사들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31년간 몸담았던 MD앤더슨을 올해 떠나는 김 박사는 이런 인연으로 9월부터 가천 길병원에서 석좌교수로 일할 예정이다.

 김 박사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가정교사를 했다. 당시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 그와 동급생이었다. 전교 1등이던 그에게 교장 선생님이 아들 방에서 함께 지내길 권했다. 그렇게 시작한 가정교사 생활은 대학 졸업 때까지 계속됐다. 군의관으로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서울대에서 예방의학을 전공한 그는 1966년 서울대 의과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와 워싱턴대를 거쳐 존스홉킨스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내과, 임상의학, 핵의학 등 세 분야의 전문의다. 텍사스대 의과대학 내과 교수, MD앤더슨 암센터 종신교수, 미주 한인의학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김의신 박사가 말하는 암 예방법

① 가족력에 암이 있는 사람은 해당하는 암을 공부하라. 그리고 해당 암에 대한 정기검진을 자주 하라.

② 동물성 기름 섭취를 피하라. 흰 쌀밥도 마찬가지다. 카레에 담긴 카카민이란 성분은 항암 효과가 크다. 카레를 자주 먹어도 좋다. 고기는 기름이 적은 개고기나 오리고기가 좋다.

③ 40대가 지나면 몸에서 분해효소도 적게 나온다. 적게 먹어라.

④ 적당한 운동을 하라. 걷는 운동이 좋다. 심장에 무리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⑤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죽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는 데는 종교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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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의 엇박자 '부정맥(不整脈)' ...老年건강 복병

심장의 엇박자 부정맥(不整脈), 치매·암보다 많이 발병… 老年건강 복병

  
  (조선일보 2011.12.13)

김철중 의학전문기자의 심층 리포트

나이 들수록 증가 60~70대 많이 발생, 모르고 지내다 禍 자초… 뇌경색·심장마비 불러
건강보험 적용도 미흡, 제대로 치료 못 받아
 
 
경기도 안산시에서 조그만 기계 공장을 운영하는 권씨(65)는 현재 뇌경색으로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오른쪽 뇌로 들어가는 뇌동맥이 혈액이 굳어서 생기는 피딱지(혈전·血栓)로 막힌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와 팔 운동 기능과 감각이 떨어진 상태다. 그는 50대 중반부터 '고혈압약'을 먹어왔다. 동맥경화로 뇌동맥이 다소 좁아졌으나, 갑자기 뇌경색이 올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느닷없이 뇌로 날아든 피딱지였다. 발원지는 심장이다. 심장의 심방·심실 중 왼쪽 심방에 고여 있던 젤리 같은 피딱지가 대동맥으로 빠져나와 뇌동맥으로 흘러왔다.

피딱지의 근본 원인은 심방세동(心房細動)이었다. 왼쪽 심방이 정상적인 박동을 하지 않고 발작적으로 '부르르~' 떠는 부정맥(不整脈)이다. 이 때문에 왼쪽 심방의 혈류는 회돌이를 치며 맴돌고 흐름이 멈춘다. 그 과정에서 피딱지가 생겼다. 권씨에게 부정맥 신호는 최근 몇 개월 동안 여러 차례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고, 이유 없이 몸에 기운이 쭉 빠져 주저앉기도 했다. 하지만 금세 괜찮아졌고, 건강검진 심전도에서도 '심장은 정상'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무심코 넘겼다.

부정맥, 모르고 당한다

나이 들수록 부정맥은 증가한다. 심장에는 정기 박동을 유도하는 전기회로가 장착돼 있다. 연식(年式)이 오래된 자동차에서 엔진과 시동장치 고장이 잦듯이 사람도 나이가 들면 심장 전기장치에 잔고장이 늘기 때문이다.

대한심장학회 부정맥연구회 조사를 따르면 대표적인 부정맥인 심방세동 환자는 40대에 인구 10만명 기준으로 195명 생긴다. 그러다 60대가 되면 808명(4배), 70대에는 1231명(6배)으로 뛴다. 40~50대의 부정맥은 과음과 흡연,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다. 현재 부정맥은 65세 이상에서 3~5%, 80세 이상에서 10%가량 발견된다. 부정맥에 대한 인식이 낮아 진단받지 않고 지내는 수를 감안하면 국내에 최대 100만명의 잠재 환자가 있을 것으로 심장학회는 보고 있다. 고령인구에서는 발생률이 치매를 앞지른다. 남성에서 발병 위험률이 암 발생 1위인 위암보다 10배가량 크고, 여성에서는 유방암보다 보다 8배 높다.


고려대병원 심장내과 김영훈 교수가 부정맥 환자의 3차원 심장 영상을 보면서 전기 도자 시술을 하고 있다. 부정맥을 일으키는 심장의 비정상 전기 신호를 일일이 찾아내어 고주파나 전기 자극으로 지져 없애는 방법이다.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그럼에도 진단이 늦어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잦다. 고려대병원 부정맥센터 김영훈 교수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답답하고, 숨이 차고, 어지러운 부정맥 증세는 좀 쉬면 금방 가라앉는 경우가 많아서 환자들이 병원에 잘 안 온다"며 "그러다 뇌경색이나 심장마비 증세로 쓰러져 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부정맥은 증세가 없는 평상시에는 심전도를 찍어도 잘 잡히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환자 중에는 갑자기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공포감을 느껴서 병원을 찾았다가도 '심전도 정상'이라는 말에 공황 장애로 오인받는다. 이 때문에 부정맥 환자가 정신과를 전전하기도 한다.

부정맥, 알고도 당한다

부정맥으로 인한 무서운 합병증은 뇌경색이다. 환자 10명 중 한 명꼴로 생긴다. 예방을 위해서는 피딱지가 생기지 않게 피를 철저히 '묽게' 해야 한다. 이때 쓰이는 것이 '와파린'같은 항(抗)응고제이다. 하지만 심장학회 부정맥연구회가 전국 27개 대학병원을 찾은 3700여명의 부정맥 환자를 조사한 결과 환자의 약 30%만이 와파린을 제대로 복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최기준 교수는 "적절한 항응고제 치료가 이뤄지는 비율이 선진국의 절반 수준"이라며 "피검사를 번거롭게 자주 받아야 하고, 자칫 다쳤을 때 피가 멎지 않아 출혈이 크게 일어날 수 있는 우려 때문에 환자들과 일부 의사들이 약물 사용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상당수 환자가 불충분한 치료로 뇌경색 발생 위험을 안고 지낸다는 얘기다. 심장학회는 ▲부정맥과 함께 심부전이 있거나 ▲당뇨병 또는 고혈압이 있거나 ▲75세 이상 고령인 경우 등에서는 항응고제를 적극적으로 써야 한다는 제시한다.

건강보험 적용이 미흡한 것도 부정맥을 키우는 요소다. 부작용이 적은 항응고제 신약(新藥)은 고가(하루 약 6000원)인 이유로 기존 약물을 쓸 수 없는 케이스와 상관없이 모든 환자에게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된다. 약물치료로 부정맥이 조절 안 될 경우 심장 내에서 부정맥을 일으키는 전기 잡음을 레이저로 지져 없애야 하는데, 이 시술에 쓰이는 3차원 심장 영상비용 300만원은 전액 환자가 부담해야 한다.

☞ 부정맥(不整脈)

심장은 일종의 전자제품이다. 심장 상단에서 전기 스파크가 규칙적으로 일어나면 전기 신호가 심장 근육 속의 전선(電線)을 따라 아래로 퍼지면서 심방과 심실은 일정하게 박동을 한다. 가만히 있을 때 박동수는 1분에 60~90회 정도가 정상이다. 그러다 전기 스파크를 내는 중앙 발전소에 문제가 생겼거나 별도의 지방 발전소가 생겨 중구난방으로 전기 스파크를 쏘아대면 심장 박동이 불규칙적으로 ‘널뛰기’를 하게 되는데, 이런 상태가 부정맥이다.
 
 
< 집에서도 '휴대폰 심전도'로 실시간 잡아낸다 >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입력 : 2011.12.13 03:08 | 수정 : 2011.12.13 04:50



 

병원 안 가도 증세 진단 가능, 기기 대여비용 한달 17만원

 
 
집이나 직장에서 부정맥 증세가 생겼을때 휴대폰을 이용해 환자의 심전도를 의료진에 바로 보내서 부정맥 상태를 진단받을 수 있다.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가정주부 최모(52)씨는 지난여름부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한 증상을 수차례 겪었다. 한번은 몇초간 정신을 잃고 실신도 했다. 이상하다 싶어 병원을 찾았지만 검사결과는 정상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세가 있는데 병원에서 심전도 검사받을 때는 괜찮으니 이것 또한 답답한 노릇이었다. 이에 의료진은 최씨의 상태가 간헐적이고 발작적으로 나타나는 부정맥인 것으로 의심하고, 언제 어디서나 심전도를 체크할 수 있는 진단법을 적용했다.

최씨는 일상생활을 하다가 가슴이 답답하면 하트 모양의 간이 심전도 체크기를 왼쪽 가슴에 댔다. 이를 통해 찍힌 심전도는 휴대폰을 통해 실시간 모니터링센터로 전송된다. 거기서 최씨의 증세가 심방세동(心房細動)이었음이 밝혀졌다. 왼쪽 심방의 박동이 정상적이지 않고 간혹 '파르르~' '잔 떨림' 상태가 되는 부정맥이다. 이로 인해 혈류 순환이 뚝 떨어져 순간적으로 졸도도 한 것이다. 이후 최씨는 심장에서 파행적인 전기 신호를 내는 곳을 레이저로 없애는 시술을 받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

이처럼 IT 기술을 활용하여 집이나 직장생활 중에 불쑥 나타나는 부정맥을 찾아내는 진단법이 최근 확산하고 있다. 생활 밀착형 실시간 심전도 진단법이다. 휴대폰으로 전송된 심전도는 모니터링센터에 기록되고, 전문 간호사에 의해 판독된다. 환자의 심전도가 위험한 상태로 판단되면 병원에 즉각적으로 알려줘 응급조치를 취하게 한다. 현재 전국적으로 약 2000명의 환자가 이 진단법을 이용하고 있다. 적용 대상은 ▲부정맥이 의심되거나 ▲부정맥 치료를 받고 경과를 봐야 할 때 ▲몸에 인공 심장박동기를 심었거나 ▲협심증 환자 ▲심장 수술을 받은 환자 등이다. 대학병원 심장내과에 문의하면 이용할 수 있다. 기기 대여 비용은 한 달에 약 17만원이다.

이 밖에 '활동형 심전도' 기기를 1~2일 몸에 부착하는 방법도 쓰인다. 가슴 두근거림, 통증, 호흡 곤란 등이 생길 때만 전원 버튼을 누르면 최대 7일까지 사용할 수 있다. 휴대폰처럼 생긴 소형 심전도 체크기를 가지고 다니다가 증상이 있을 때마다 가슴에 대어 그때의 심전도를 기록하는 방식도 이용된다.
 

< 부정맥 고치는 전자기법 >

 

입력 : 2011.12.13 03:08 | 수정 : 2011.12.13 04:5
 



부정맥은 심장의 전자회로 이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치료에는 각종 전자 기법이 동원된다.

1. 전기 쇼크를 준다

심장마비 환자에게 전기 쇼크를 주어 심장을 깨우는 것처럼 부정맥 환자에게도 일시에 전기 충격을 가해 전기 회로를 바로 잡는 치료를 한다. 컴퓨터로 치면 '리셋(re-set)'하는 식이다. 성공률이 75~94%이지만 재발률도 60%다.

2. 레이저로 전파 잡음을 없앤다

왼쪽 심방에는 부정맥을 일으키는 전기 잡음(雜音)이 많이 발생한다. 그 부위를 레이저나 고주파로 일일이 지져 없애는 치료를 한다. '중앙 방송'에서 나오는 전기 신호 외에 심박동을 헷갈리게 하는 '지방 방송'을 없애는 식이다.

3. 인공 박동기를 몸 안에 심는다

고질적 부정맥의 경우, 심장이 '부르르~' 떨다가 심박동이 멈추는 최악의 상황이 언제 벌어질지 모른다. 수술을 통해 심전도 센서가 달린 인공 박동기를 심방 주변에 심어 놓는다. 부정맥이 심하게 발생하면, 심전도를 자동으로 읽고, 전기 쇼크를 발사해, 심박동을 원상태로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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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의료의 풍경 5]

미국에서 온 <제중원> 여의사는 '가짜' 의사?

[근대 의료의 풍경·20] 최초의 여의사 엘러스의 정체

기사입력 2010-05-06 오전 7:26:40

1886년 7월 4일 엘러스(Annie J Ellers·1860~1938)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일할 헐버트 부부, 길모어 부부, 그리고 번커와 함께였다. 독신으로 조선에 온 엘러스와 번커(Dalziel A Bunker·조선식 이름은 房巨·1853~1932)는 꼭 1년 뒤 부부가 되었다.

"조선에 온 최초의 여의사"라는 엘러스. 하지만 그는 의사가 아니었다. 다음은 헤론이 1886년 10월 19일 엘러스가 의사가 아니라는 문제에 대해 엘린우드와 편지상의한 대목이다.

"저희는 엘러스 양을 좋아합니다. 그녀는 (임무를 마치고) 교체될 때까지 역할을 잘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식 의사라면 많은 면에서 더 나을 것입니다. 그녀가 의학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 다시 말해 그녀는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녀가 궁궐에 소개되었을 때, ___ 의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We like Miss Ellers and think she will fill the place well until she is relieved. Of course a regular physician would be better in many respects; it is not known here that she has not a medical education, in other words that she is not a doctor. When she was introduced to the palace it was a ___ physician, so that it is a very uncertain place we are in)."

▲ 별세한 지 1년 뒤인 1939년 10월 <Korea Mission Field>에 실린 엘러스(1860~1938)의 사진. ⓒ프레시안
알렌도 비슷한 사정을 1886년 12월 16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했다.

"새로운 여의사 한 사람도 파송하셔서 박사님이 엘러스 양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녀가 저희와 함께 귀국하여 2년 동안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You had also better send a new lady Dr. and allow Miss Ellers to go home with us and obtain her degree as she is bound to do in two years anyway by your promise to her)."

알렌의 말대로 엘러스가 의학 학위를 받기 위해 2년 동안의 과정이 더 필요하다면, 엘러스는 의학 교육을 어느 정도 받고 조선에 왔던 것일까? 일부에서는 "1881년 록퍼드 대학졸업하고 보스턴 의과대학진학했으며 선교사로 파견될 무렵 의학 과정을 거의 마친 상태"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국에서 4년제 의과대학의 효시는 1893년에 설립된 존스홉킨스 의대이다. 1880년대에는 하버드 의대 등 몇 군데만이 3년제였고, 대부분 2년제이거나 그보다 더 짧았다. 알렌은 1년, 헤론은 2년 동안 의대를 다녔다. 설령 당시 보스턴 의대가 3년제였다고 하더라도, 알렌의 언급대로 2년을 더 다녀야 한다면 엘러스는 조선에 오기 전에 1년 동안 의대를 다녔을 뿐이다. 한편, 헤론은 엘러스가 "의학 교육을 받지 않았다"라고 했다.

요컨대, 엘러스는 의학을 전혀 공부하지 않았거나 조금 공부한 상태로 조선에 와서 의사 행세를 한 것이었다. 따라서 엘러스는 "조선에 온 최초의 여의사"가 아니라 "조선 최초의 무자격 의사"였던 것이다.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총무인 엘린우드는 이러한 사실을 언제 알았을까? 헤론의 10월 19일자 편지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것일까? 같은 편지의 다른 구절을 보면 그런 것 같지 않다. 헤론의 보고 이전에 엘린우드도 이미 무언가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인상이다.

"박사님께서 저희에게 보내신 지난 편지에 또 다른 여의사 파송에 관해 물어보신 데에 대해서, 그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In reference to the question asked in your last letter to us, concerning the sending out of another lady physician, it does not seem to be necessary)."

또 앞에서 인용한 알렌 편지의 "박사님이 엘러스 양에게 약속하신 대로"라는 구절은 더욱 의아하다. 엘린우드가 엘러스에게 그러한 약속을 한 시기가 나와 있지 않지만, 처음부터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엘러스를 조선으로 파견하며 나중에 의학 교육을 받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었을까?

엘린우드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시기보다, 그가 전후 사정을 알고서도 시정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헤론은 1887년 11월 13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별다른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러다가 감리교 쪽에 새로 온 여의사 때문에 엘러스의 자질 문제가 궁궐 내에서 불거지는 듯하자, 서둘러 학위를 소지한 여의사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왕비의) 약을 받으러 온 관리가 감리교 선교병원에 새로 온 여의사(메타 하워드)에 대해 물으면서 그녀와 번커 여사 중 누가 더 훌륭한 의사냐고 했습니다. 저는 번커 여사는 알지만 이 (새로 온) 여성은 온 지가 얼마 안 되어 잘 모르겠다고 답하기는 했지만, 그런 질문을 듣고 깜짝 놀라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박사님께 호턴 양을 지체 없이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 번커 여사가 학위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당장 우리 둘 모두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The official who came to get the medicine inquired concerning the new lady doctor at the M.E. compound, "whether she or Mrs. Bunker were the best physicians?" I replied that "I knew Mrs. Bunker and that this lady had been too short a time for me to know her", but I was startled at hearing such a question and wondered what it meant and it made me decide to urge you to send out Miss Horton without delay. (…) If it should come out that Mrs. Bunker has not a degree, I am afraid trouble would at once arise for us both)."

의사가 아닌데도 의사 행세를 한 엘러스,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은 헤론과 알렌(엘러스를 귀국시키자고 건의는 했다), 그리고 엘린우드. 선교사, 의사, 종교 지도자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소양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 엘린우드(Frank Field Ellinwood ·1826~1908). 딸 메리 엘린우드가 1911년에 편찬, 발간한 <엘린우드의 생애와 활동>에 수록된 사진이다. 그는 예순이 다 된 188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초까지 20년 가까이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로 조선 선교를 총괄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프레시안
미국에서라면 이들이 이렇게 행동했을까? 이들은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와, 조선 국왕과 왕비를 어떻게 여겼던 것일까? 지난 번(제13회)에 언급했듯이 북장로교가 조선에서 감리교와 치열한 선교 경쟁을 했고, 그 핵심에 여의사 파견이 있었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사정이 있었다 해도 이들의 행동이 합리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여의사 파견의 주된 목적이 조선 여성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것이었을까? 당연히 그러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했던 이유는 왕비와 국왕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1887년 5월 30일)에 따르면, 엘러스와 알렌은 거의 매일 입궐했는데 대개 진료는 이목을 피하기 위한 구실이었고, 국왕과 왕비에게 바깥소식을 전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고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1887년 7월 엘러스는 번커와 결혼식을 올렸다. 예식 장소는 알렌의 집이었고, 주례신랑의 육영공원 동료 교사이자 목사인 길모어가 맡았다. 조선 왕실에서는 결혼을 축하하여 신혼부부에게 집을 장만해주었으며, 신부에게는 조선산 금 60돈(8온스)으로 만든 커다란 팔찌선물로 주었다.

▲ <일성록> 1888년 1월 6일(음력 1887년 11월 23일)자. 국왕은 엘러스에게 내린 직첩과 문적은 세상에 반포하지 말라고 명했다. ⓒ프레시안
그리고 국왕은 1888년 1월 엘러스에게 정2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을 특별히 제수했다. 이때 헤론에게도 2품계를 내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국왕은 엘러스에게 내린 직첩(사령장)과 문적(관련 문서)은 세상에 반포하지 말라고 명했다(職牒文蹟勿爲頒布). 알렌과 헤론에 대해서는 없던 일이었다. 국왕이 엘러스의 문제점을 간파했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국왕과 정부로부터 상당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특히 결혼 뒤에 엘러스의 근무 태도에 문제가 많았음을 헤론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주사들이 제게 말하기를 때때로 그녀(엘러스)를 거의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한답니다. 그녀는 오전 11시에 출근해야 하는데도 종종 오후 2, 3시쯤 와서 기껏 15분이나 20분 있다가 가버린다고 합니다. 병원 관리들의 불평이 대단합니다(Chusa's tell me, that they have to stay almost all day sometimes, waiting for her, going often at 2 or 3 pm, when her hours is eleven am. She hurries through and goes away, never staying more than 15 or 20 minutes and often less. The hospital officials complain greatly)."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8년 1월 15일자 편지)

하지만 이러한 점만으로 엘러스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할지 모른다. 엘러스는 조선 여성의 교육에 힘을 써 정동여학당(정신여학교의 전신)을 탄생시켰다. 1917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필자의 외조모는 자신의 신앙심과 민족 의식이 주로 정신학교 재학 시절에 길러졌으며, 그 덕에 3·1운동 때 처녀 교사의 처지임에도 가혹한 감옥살이를 견뎌낼 수 있었다고 말하곤 했다.

엘러스는 1894년 감리교로 소속을 바꾸어 1926년까지 선교사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32년 사망한 남편의 유골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했으며, 1937년 조선으로 돌아와 1년을 더 살았다. 1938년 8월 8일 세상을 떠난 엘러스는 남편 곁에 합장되었다. 이들 부부의 묘비에는 "날이 새고 흑암(黑暗)이 물러갈 때까지(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ree away)"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알렌이 고종에게 서울 '소공동'을 요구한 까닭은?"

[근대 의료의 풍경·21] <제중원>의 이전 ①

기사입력 2010-05-10 오전 6:07:19

여성 전용 병원설치를 의미하는 재동 제중원의 제2차 확장(제19회)이 마무리된 시기는 엘러스가 조선에 도착한 전후일 것이므로 1886년 7월 초쯤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14일에 알렌은 외아문 독판 서리 서상우(徐相雨)에게 공문을 보내 제중원을 재동에서 남별궁으로 이전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알렌이 보낸 공문을 흔히 "공립병원(公立病院) 이건(移建) 확장에 대한 건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1967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말~대한제국기의 외교 문서들을 묶어서 <구한국 외교 문서>로 펴낼 때 편의를 위해 임의로 붙인 문서 이름이지, 원래 그 문서들에는 제목이 없었다.

아마도 알렌 측에서 영어 공문에 첨부하는 한문본을 작성하면서 "Government Hospital"을 "공립 병원"이라고 번역했는데, 1년여 전 "공립 의원 규칙"에 한번 등장했을 뿐 그밖에는 쓰이지 않던 단어가 사용된 연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알렌은 이 문서에서 제중원의 이전 이유로 (1) 병원이 너무 좁고(too small), (2) 인구 중심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too far removed from the center of the city's population), (3) 전혀 위생적이지 못해 중요한 수술들을 안전하게 할 수 없다(as the germs of disease collect and poison the atmosphere so that we cannot in safety do important operations)는 점을 제시했다.

▲ 알렌이 1886년 8월 14일 외아문 독판 서리 서상우에게 보낸 공문. 알렌은 서상우에게 제중원을 남별궁으로 옮길 것을 요청했다. ⓒ프레시안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외아문 독판 서리에게 새 건물을 제공하고 수리비와 운영비를 지급해 줄 것을 요청했고, 나아가 바람직한 곳으로 남별궁(Nam Pell Khun would be a desirable spot)을 지목했다.

알렌이 제중원의 이전 장소로 요청한 남별궁(南別宮)이란 어떤 곳인가? 남별궁은 지금웨스틴조선호텔과 황궁우(皇穹宇) 자리에 있던 큰 저택으로, 대지 면적은 재동 제중원의 다섯 배쯤 되는 약 2만2000제곱미터(6700여 평)에 이른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중구 소공동 87번지에 속한다. 원래 이 집은 태종(太宗)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 부부가 살던 집이었으며, 소공동(小公洞)이라는 지명도 바로 "작은 공주 댁"에서 유래한 것이다.

남별궁이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1580년대 선조(宣祖)가 특히 총애하던 아들 의안군(義安君)이 거주하면서 남별궁이라 불렸다는 얘기도 있고, 임진왜란 때 그곳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국왕 선조가 자주 찾아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언도 있다.

어쨌든 남별궁은 이여송 이래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최고위급 사신이 머물던 곳으로 중국 천자의 권위가 깃든 곳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중국 칙사(勅使)가 머물 때면 조선의 고관대작과 그들이 준비한 선물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인솔해 온 우창칭(吳長慶)과 1883년 11월 총판조선상무(總辦朝鮮商務, 공사 격)로 부임한 천서우탕(陳壽棠)도 남별궁에 머물렀다. (소공동 일대에 차이나타운이 조성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천서우탕이 도착하기 직전에 이미 오늘날 명동의 중국 대사관 자리에 청나라 공사관(商務公署)이 완공되었지만 천서우탕은 전임자들처럼 남별궁에 주둔했다. 그만큼 남별궁은 청나라가 오래도록 포기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 청나라가 조선 정부에 남별궁을 되돌려 준 것은 1884년 7월 지금의 롯데호텔서울 자리(을지로 입구 남서쪽)에 청상회관(淸商會館)을 짓고 나서였다.

그런데 알렌은 1885년 12월, 청나라 공사관원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제의를 받았다. 이때는 얼마 전인 11월 17일(음력 10월 11일)에 부임한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기세등등한 직함을 가지고 이미 "총독"처럼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눈에도 그렇게 비쳤다.

"중국인들은 자기네 공사관을 구궁(舊宮)으로 옮기기를 기대하며, 내게 지금의 (공사관) 자리를 병원과 학교로 쓸 것을 제의했다(The Chinese expect to move their Legation to the old Palace and offered me their present place for a hospital and school)." (알렌의 일기 1885년 12월 20일자)

이 문장에서 구궁은 남별궁, 병원은 제중원을 가리킴이 틀림없을 것이다. 달리 생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세워지기 전이지만 학교 역시 제중원 학당일 것이다. 즉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구궁"이었던 남별궁으로 공사관을 옮겨가고 싶어 했으며, 명동에 있던 청나라 공사관 자리에는 제중원을 유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은 바로 위에서 보듯이, 알렌 일기의 원문에는 위안스카이가 그러한 제안을 했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안스카이가 알렌에게 직접 제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원문을 오독했거나 잘못 번역된 것을 보아서 그럴 것이다. 물론 중국인(공사관원)들이 그런 제의를 한 것은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받았거나 적어도 승낙을 얻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청나라 공사관측이 그런 제의를 한 구체적 의도가 무엇인지, 또 그 제의에 대해 알렌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나 자료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다. 어쨌든 청나라 측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사관을 남별궁으로 이전하는 일이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천서우탕의 재임 시절 조선에 돌려주었던 남별궁을 다시 차지하려 한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위안스카이의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남별궁을 지키려는 조선 국왕과 정부의 바람이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대신 조선 쪽에 크게 손해나는 거래를 했을지도 모른다.)

▲ 일제에 의해 철거되기 전의 원구단(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1897년 10월 12일 이곳에서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이에 앞서 10월 3일 고종은 아홉 차례의 사양 끝에 신하들의 황제 즉위 요청을 마지못해 수락하는 "절차"를 거쳤다. ⓒ프레시안
그 뒤의 일을 보아도 그러한 점을 잘 알 수 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남별궁 자리에 새로 지은 원구단(圓丘壇)에서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나라 이름도 대한제국으로 개칭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청나라로부터 되찾은 남별궁은 그만큼 국왕과 국가의 위엄과 자존을 뜻하는 곳이었다. 또 그러했기에 일제가 1913년 원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을 지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원구단뿐만 아니라 남별궁의 각별한 의미도 훼손시켰다.

알렌은 그러한 내력을 지닌 남별궁으로 제중원을 이전할 것을 요청했다. 남별궁이 조선 국왕과 정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렌이 몰랐을 것 같지 않다. 이미 여덟 달 전에 청나라 측으로부터 남별궁과 관련되는 제안을 받았고, 그 제안이 어떻게 이행되지 않았는지를 보았던 알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렌은 자신의 힘을 확인하거나 과시하고 싶어 그러한 요청을 했을까? 아니면 협상용 카드였을까?

▲ 조선철도국이 1913년부터 남별궁 자리의 원구단을 헐고 1914년에 완공한 조선철도호텔(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보통 조선호텔로 불렸다. 위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호텔 건물 왼쪽의 황궁우와 왼쪽 아래의 정문은 철거하지 않고 남겨두었다. 새 건물의 위용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이것 이외에 나머지 부속 건물들은 철거되거나 이전되었다. "고종황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02년에 세워진 석고각은 나중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었다)의 종루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1939년 10월 15일 안중근의 아들 준생은 박문사를 방문하여 참배했고 그 다음날 조선철도호텔에서 이토의 아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죄했다. 모진 세월, 가혹한 운명이었다. ⓒ프레시안
당연히 조선 정부(외아문)는 알렌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백성들을 위한 의료 사업에 항상 자비롭고 적극적이신" 국왕도 알렌의 이 청원은 들어줄 수 없었던 것 같다. 대신 국왕은 알렌에게는 여러 모로 남별궁에 못지않은 새 병원("구리개 제중원") 부지를 마련해 주었다.

이제 이 글의 앞머리에서 언급한, 알렌이 제시한 병원 이전 이유들에 대해 순서대로 생각해 보자.

(1) 우선, 알렌은 재동 제중원이 너무 좁다고 했다. 좁고 넓은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재동 제중원이 남별궁이나 구리개 제중원보다 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 설립되었을 때의 넓이가 약 2000제곱미터(600여 평)이었고, 두 차례의 확장으로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제중원 학당을 제외하고도 50퍼센트 가량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또 단순히 면적이 넓어진 것이 아니라 "국왕의 특별한 배려로 멋진 새 건물이 하사됐다" "설비가 잘 된 학교도 새 병원의 한 면모"라면서 크게 반겼던 알렌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수의 증감이다. 환자가 계속 늘어났다면 병원도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환자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의하면 첫 1년 동안 진료한 외래환자는 모두 1만460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첫 6개월 동안은 7234명이었다. 따라서 나중 6개월의 환자는 3226명으로 처음 6개월의 절반 미만(45퍼센트)으로 줄어들었다. 오히려 구조 조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지난 번(제18회)에 살펴보았듯이 헤론은 이미 1885년 10월에 의사 두 사람이 근무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며, 실제로 1886년 1월부터는 알렌과 헤론이 격주로 번갈아 병원에 출근했다. 알렌이 외아문에 "이건 확장"을 제의한 8월에도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격주로 일하고 있었다.

"오늘 병원으로 막 떠나려는데 국왕이 사람을 보내 저를 불렀습니다. 이번 주는 제 (근무) 주라서 헤론에게 대신 병원에 가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는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저는 환자가 많지 않아서 병원 일은 2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886년 8월 23일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2) 둘째, 재동이 인구 중심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을 들었다. 재동은 당시 양반들이 살던 북촌(北村) 마을의 어귀이며, 그 남쪽의 중인 및 서민 거주지에서 멀지도 않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도 아니었다. 그리고 재동 제중원 자리에는 1900년부터 1908년까지 7년이 넘게 대한제국기의 국립병원 광제원(廣濟院)이 설치되어 수많은 환자를 진료했다. 이렇듯 재동은 당시 한성에 사는 조선인을 위한 병원의 위치로 최적지 가운데 하나였다.

알렌과 엘러스가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경복궁도 남별궁이나 구리개보다 재동에서 훨씬 가깝다. 또 재동 제중원은 외아문과 바로 붙어 있는 장점도 있다. 아니, 거꾸로 그 점이 알렌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이전 이유였는지 모른다.

남별궁이나 구리개의 지리적 특징은 알렌을 비롯한 서양인이 주로 살던 정동에서 가깝다는 점이다. 청나라 사람들의 거주지와는 더욱 가깝다. 일본인들도 1885년 무렵부터 구리개 제중원의 남쪽에서 남산 아래쪽에 걸쳐 밀집해 살기 시작했다.

▲ 수선전도(首善全圖). 김정호의 수선전도를 기초로 펜으로 필사한 지도로, 1892년 무렵 제작되었으며 미국인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 재동 제중원(재동) (2) 구리개 제중원(을지로 2가) (3) 남별궁(소공동) (A) 경복궁(세종로 1가) (B) 미국 공사관(정동) (C) 청국 공사관(명동) (D) 일본 공사관(예장동) ⓒ프레시안

(3) 셋째, 알렌은 재동 제중원이 비위생적이라는 점을 이전의 이유로 꼽았다. 알렌이 이전 요청을 할 때까지 조선 정부가 제중원의 수리, 개조에 비용을 지출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1년 4개월 사이에 위생적인 병원 환경을 갖추지 못했다면, 정치적 행정적 책임은 조선정부에게 있겠지만 기술적 실무적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알렌의 소원대로 구리개로 이전해서 그러한 점이 개선되었는가? 구리개 제중원에 근무한 여의사 에바 필드가 남긴 다음의 기록(<미국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 제63차 연례보고서> 1900년, 169쪽)을 보면, 심지어 에비슨이 운영권을 이관 받고 5년이 지난 뒤에도 제중원의 위생 환경 문제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선교부는 현재 우리가 일하는 환경처럼 나쁜 곳에서 일 시킬 권리는 없다. 한 여성을 수술하기 위해 높이가 다른 마당을 두 번 지나야 남자 환자들이 훤히 보이는 수술방 문에 이르게 된다. 수술이 끝나면 다시 바깥으로 나가서 높이가 다른 마당을 두 번 지나 깨끗하게 소독침대가 아니라, 누가 어떤 질환으로 또 얼마나 많은 환자가 누웠는지도 모르는 종이 바닥에 누워야 한다." (<제중원>, 박형우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2010년, 246쪽에서 재인용)

실제 이전의 이유가 무엇이든, 제중원은 재동 시절을 마감하고 새로운 구리개 시대로 접어든다. 다음 회에서는 제중원을 이전한 시기 등을 검토하기로 하자.
 

<제중원>이 '명동길'로 옮긴 까닭은?

[근대 의료의 풍경·22] <제중원>의 이전 ②

기사입력 2010-05-13 오전 9:37:25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편지로 보고한 내용을 중심으로, 재동에서 구리개로 제중원을 옮긴 과정을 알아보자.

"국왕은 훌륭한 새 병원을 약속했고 그 일을 담당할 관리를 임명했습니다. 저는 어느 날 국왕을 진료하면서 그것을 제안했습니다(The King has promised a new good hospital and has delegated an officer to look it up. I proposed it to him one day while examining him)." (1886년 8월 20일)

알렌이 국왕에게 직접 제안한 시점이 외아문 독판 서리 서상우에게 공문을 보낸 1886년 8월 14일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번에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신임하는 국왕의 힘을 빌려 새 병원 이전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는 외아문 대신에게 보낼 (새 병원에 관한) 편지를 헤론 의사에게 보여주고 그의 전적이고 자발적인 동의를 받았습니다. (…) 저희는 요청한 장소(남별궁)를 얻지 못했지만, 제가 아는 새로운 장소를 제안 받았습니다(I had written a letter to the Foreign Minister which I showed to Dr. Heron and obtained his full and free consent to it. (…) We failed in obtaining the place asked for but that a new place, on known to me, was proposed)." (1887년 1월 17일자)

지난 회에서 언급했듯이, 남별궁은 조선 국왕과 정부에 각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라, 알렌에 대한 국왕의 신임이 아무리 두텁다 하여도 얻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위의 편지는 발송 시기가 매우 뒤늦은데, 알렌이 새 병원 문제를 둘러싸고 헤론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것을 해명하고자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알렌은 위의 편지에서처럼 처음부터 헤론과 충분히 협의를 해 가며 일을 진행시켰다고 주장했고, 헤론은 알렌이 자신과는 아무 상의 없이 새 병원 이전을 추진했다고 호소했다.

"새 병원은 우리의 기대보다도 훨씬 더 훌륭합니다. 병원 부지는 광대하고, 바로 도시 한 복판의 언덕 위에 있어 도시 전체와 시골까지 조망할 수 있습니다(The new hospital is far excelling our highest anticipations. The site is magnificent, right in the heart of the city and on a hill overlooking the whole town and some country)." (1886년 10월 2일자)

"새 병원은 업무를 시작할 준비를 거의 마쳤는데 제 기대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많은 점에서 이 병원은 이 도시에서 최고의 건축물입니다. 건물대지 비용 이외에 수리비만 3000 달러 이상 들었습니다. 모든 가구를 외국제로 장만할 것으로 기대합니다(The new hospital is nearly ready for occupation and is far ahead of my highest anticipations, in many respects it is the best house in the town. Beside the buildings and ground the repairs simply have cost over $ 3,000 and I expect an appropriation for foreign furniture throughout)." (1886년 10월 28일자)

새 병원의 위치는 뒤에 언급하듯이,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2가) 일대이다. 알렌은 새 병원을 "이 도시에서 최고의 건축물"이라면서 처음 요청했던 남별궁보다도 더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리비만도 제중원의 1년 예산인 3000달러 이상을 지출했으니, 조선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그러면 "한성 최고의 건축물"인 구리개 제중원으로 이사한 시기는 언제일까? 유감스럽게도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는 기록은 발견된 것이 없다.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알렌은 미국 공사 자격으로 외무대신 유기환(兪箕煥)에게 보낸 1902년 4월 22일자 공문에서는 "1886년"이라고 했으며, 저서 <Korea : Fact and Fancy>(1904년)에는 "1887년"이라고 기록했다. 또 알렌의 "세브란스 병원 정초식 기념사"(1902년 11월 27일)에는 "정해년"(1887년)으로 되어 있다. 그밖에 올링거(1886년)와 스크랜튼(1887년)의 언급이 있지만 참고 사항일 뿐이다. 당사자라고 할 알렌의 증언도 엇갈리는 판이다.

그러면 실제 이사를 했을 1886년~87년의 기록은 어떠한가? 일부에서는 "헤론과 언더우드는 알렌이 병원의 이전과 관련해 정부와 협상했다는 사실을 1886년 12월말에 들어서야 외부 소식통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이전하지 않았고 따라서 1887년 1월 이후에 이전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음의 헤론의 편지를 그 근거로 들었다. (또 다른 근거 자료라는 언더우드가 같은 날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도 비슷한 내용이다.)

"저는 몇 주 동안 외부의 소식통으로부터 알렌 의사가 새로운 병원과 관련하여 정부와 교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에 관해 저에게 한마디 말도 없었습니다(I had known from outside information for a number of weeks that Dr. Allen was in communication with the government concerning the new hospital. He had however said nothing on the subject to me)." (헤론이 1886년 12월 27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언뜻 보면 헤론이 이 편지를 보내기 몇 주 전에 처음으로 병원 이전에 대해 알게 된 것 같지만, 사실 이 편지는 벌써 몇 달 전인 9월초에 표출되었던, 이 문제를 둘러싼 알렌과의 갈등에 대해 헤론이 나중에야 엘린우드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 점은 알렌의 다음 편지를 보면 분명하다.

"그(헤론)가 저를 비난하는 유일한 점은 제가 자기 도움 없이 새 병원을 얻었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는 어느 날 밤 외아문 저녁식사 자리에서 처음으로 어느 외국인에게서 우리가 새 병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 앞에서 언급한 저녁식사가 있던 날 오후에 새 병원을 선정할 관리가 임명되었습니다(The only thing he could accuse me of was in getting the new hospital without his assistance. (…) Then he said that at the Foreign Office dinner the other night he first heard that we had a new hospital from another foreigner. (…) An officer had been appointed to select a new hospital, the afternoon of the dinner mentioned)." (1886년 9월 7일)

요컨대, 헤론이 다른 외국인한테 병원 이전을 들은 것은 외아문에서 저녁식사가 있었던 8월 20일(새 병원 이전 담당 관리가 임명된 날) 무렵이었고, 그 문제에서 자신을 소외시켰다고 알렌을 비난한 것은 9월 7일쯤이었다. 따라서 12월 27일자 헤론의 편지는 1886년에 병원을 이전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비슷한 내용의 언더우드 편지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언급한 10월 28일자 알렌의 편지로 되돌아가보자. 알렌은 "새 병원은 업무를 시작할 준비를 거의 마쳤다"라고 했다. 따라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면 곧 이사를 했을 것이다. 혹시 무슨 사정이 생겨서 뒤로 미루어졌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업무를 시작할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에서 별 문제가 생겼다는 근거가 없는 이상, 이때 즉 10월말 또는 11월초에 이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번에는 "구리개 제중원"의 위치와 넓이 등에 대해 알아보자. 에비슨은 <신동아> 1933년 1월호에서 구리개 제중원이 황금정 동양척식주식회사(지금 을지로 2가 외환은행 본점의 서쪽 부분)의 바로 옆에 있었다고 언급했다. 선교사 알렌 클라크도 <에비슨 전기>에서 1934년 에비슨이 동양척식회사 앞에 서서 그 근처가 제중원 자리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기록했다. 이것만으로도 일단 구리개 제중원의 위치는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더 구체적인 사항은 연세대학교 왕현종 교수 등의 연구에 의해 상당 부분 밝혀졌다. 지금으로서는 관련 문헌, 지적도, 지적 목록, 사진 등을 활용한 그 연구에 추가하거나 보완할 사항이 별로 없다. 왕 교수 팀이 구리개 제중원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언급한 곳은 아래 [도면 1]에서 (1)과 (2)이다. 병원 부분인 (1)은 황금정 2정목 193번지로 면적이 1100평이며, 에비슨의 집이 있었던 (2)는 명치정 1정목 3번지로 710평이다. 이 두 부분을 합치면 1810평이다.

[도면 1]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경성부 지적도 "일필매(壹筆每)"(1929년 발행)에 구리개 제중원 관련 사항을 표시했다. 구리개 제중원에 근무한 여의사 에바 필드의 집(지금 한국YWCA연합회 빌딩)은 제중원 바깥이었는데, 1905년 "제중원 환수" 때 조선 정부가 사들였다. ⓒ프레시안

(1)은 1905년 "제중원 환수" 이후 대동구락부, 광무기관 관방(鑛務技官官房), 농상공부를 거쳐 귀족회관이 되었으며, 지금은 외환은행 본점 건물의 동쪽 부분과 주차장이 있다. (1)의 서쪽에는 1908년부터 일제의 대표적 수탈기구인 동양척식회사가 있었으며, 지금은 외환은행 본점 건물의 서쪽 부분이 서 있다. (2) 자리에는 현재 YWCA 건물이 있다.

[도면 1]에서 파란색 사각형으로 표시한 부분은 왕 교수 팀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구리개 제중원 부지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여기는 곳이다. 이곳들과 위의 (1), (2) 부분을 합치면 면적이 5046평에 이른다. 조선정부에 남별궁(6700평)을 요청했고, 그에 앞서 청나라 측으로부터 제중원을 청국 공사관(6405평)으로 옮길 것을 제의받았던(제21회) 알렌이 "병원 부지는 광대하다"라고 표현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파란색 사각형 부분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면 2] 1907년에 발행된 최신경성전도 중 구리개 제중원 터와 그 주변. "제중원 전(前)" 바로 아래에 "헌병 의무실"이 표시되어 있다. 구리개 제중원 주변은 1880년대 중반부터 청나라의 프랜차이즈였다. 구리개 제중원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청상회관(롯데호텔서울 자리), 동쪽에는 청국군 병영(을지로 2가 네거리 남동쪽), 남서쪽에는 청국 공사관(중국 대사관 자리)이 있었으며 소공동, 북창동, 명동, 관수동에는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청국군 병영을 일본수비대가 사용하는 등 일본인들이 그 자리를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프레시안

필자는 그밖에 (A) (B) (C) (D) 구역(약 600평)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면 2]는 1907년에 발행된 최신경성전도(最新京城全圖)의 구리개 제중원 터와 그 주변이다. 이 도면에 "헌병 의무실"로 표시된 부분이 그 구역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헌병대가 제중원 바깥 구역에 의무실을 설치했을 수도 있지만, 기왕에 병원으로 썼던 곳을 의무실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1886년 늦가을, 이미 중국인들의 거점 지역이 된 구리개로 제중원을 이전한 이유를 확실하게 말해주는 자료는 없지만, 알렌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가 되지는 않을까?

"제가 병원과 제 영향력을 중국에 넘겨준다면, 병원에 대한 완전한 지원과 저에게 만족스러운 봉급이 보장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I am assured of full support for the hospital and a good salary for myself if I will turn the institution and my influence over to China). (알렌이 1887년 6월 15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도면 3](왼쪽) 구리개 제중원은 지금의 외환은행 본점의 동쪽 부분, 전국은행연합회, 서울로얄호텔, 서울YWCA 빌딩, 신영증권, 동양종합금융증권 등을 포함하는 자리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파란색 원은 현재 "구리개 제중원 표석"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고, 빨간색 원은 그 표석이 옮겨져야 할 위치이다. 외환은행 본점 건물 서쪽 끝 근처에 설치되어 있는 (구리개) 제중원 터 표석(오른쪽). 재동 제중원 터 표석과 마찬가지로 위치와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 ⓒ프레시안

마지막으로 "구리개 제중원 터 표석"에 대해 살펴보자. 그 표석은 외환은행 본점 건물 서쪽 끝 근처에 설치되어 있는데, 동쪽 구역의 "명동 우당(友堂)길" 입구 근처로 옮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내용도 "제중원은 1885년 4월 14일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으로 1886년 늦가을 재동에서 옮겨왔다"로 바꾸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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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 종주국 '한국', 미국 시장서 고전하는 이유는

 

 

인삼 종주국 '한국', 미국 시장서 고전 이유는

 
[중앙USA]입력 2011.11.29 06:11
 
 

미국에서 한국산 인삼은 품질면에서 최고 수준으로 인정 받고 있다. 하지만 캐나다산, 중국산에 비해 시장 점유율은 미미한 수준이다. 23일 LA지역 포천인삼 매장에서 한 고객이 제품들을 보고 있다. 백종춘 기자
 
 
 
 
22일 LA 차이나타운 내 풍하 약재상.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한약 냄새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약재상 안에는 대여섯 명의 중국인 손님들이 유심히 약재를 살펴보고 있었다. 한국의 한의원처럼 약재상 내부는 황토색 서랍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는데 저마다 서랍에는 약재 이름이 한자로 쓰여 있었다.

먼저 중국말로 인사를 건넨 점원에게 영어로 "한국산 인삼이 있나요?"라고 물어보니 "렌셴"이라고 답하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중국어로 '렌셴'은 '인삼'을 뜻한다. 때마침 약재를 살피던 한 남성 고객도 사장에게 "한국산 인삼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약재상 사장인 샤오 치엔 씨는 "제일 고가의 인삼은 한국산 인삼"이라며 튼실해 보이는 인삼을 들어 보여주었다. 그는 "크기로 봤을 때는 캐나다 산이 제일 크지만 품질면에서 보면 한국산 인삼을 따라갈 만한 물건은 없다"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한국 인삼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 상태다.

미국산 인삼은 대부분 홍콩으로 수출되기 때문에 미국시장에서 유통되는 인삼은 대부분 수입품이다.

연방농무부(USDA)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은 모두 1616만 달러 분량의 재배 인삼(가공제품 제외)을 수입했다. 이는 2009년(1485만 달러) 보다 더욱 늘은 수치다.

하지만 지난해 수입된 인삼을 국가별로 분석해 보면 지난해의 경우 홍콩(596만 달러) 중국(578만 달러) 캐나다(206만 달러) 타이완(176만 달러) 등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미국은 한국으로부터 지난해 54만 달러 분량의 인삼을 수입했는데 이는 2009년(62만 달러) 보다 더욱 줄어 들은 수치다.

품질 좋다는 한국산 인삼이 고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판·품질·효능 최고지만 저가 중국산에 시장 뺏겨
일반 소비자 구분 힘들어 가짜 한국산 무분별 유통


일단 한국산은 가격이 높다. 특히 지난 여름 한국에서 폭우로 인해 인삼 생산량이 급감해 가격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격 상승은 다른 나라 인삼과의 경쟁력에 있어서 좋지 않은 소식이다.

최근 한국인삼공사와 인삼경작자협의회는 홍삼 제조에 쓰이는 6년근 인삼 수매가를 750그램당 3만2100원으로 정했다. 이는 지난해(3만 원) 보다 7% 오른 가격이다. 아직 인삼가격 상승 여파가 소매시장까지는 미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한국 내는 물론 미주지역에도 곧 가격 상승의 여파는 있을 전망이다.

미국 소매시장에서 이상적이라는 6년근 인삼의 가격은 크기나 무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한국산은 보통 한 뿌리에 100달러대. 중국산 등 다른 인삼들은 크기가 같아도 한국산보다 20%정도 가격이 낮다.

약재상 사장인 샤오 치엔 씨는 "한국산 인삼은 동체가 굵고 다리가 2~3개로 품질과 효과에 있어서는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한국산은 가격이 비싸다 보니 손님들이 캐나다나 중국 인삼을 선호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미주지역에서 다량으로 유통되고 있는 저가의 중국산 인삼이 한국산으로 둔갑돼 유통되는 것도 문제다. 한국산 인삼에 대한 이미지나 판매율이 타격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포천인삼 이종범 대표는 "사실 직접 먹어보고 효능을 알기 전까지는 일반 소비자들이 중국산과 한국산을 외관상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며 "게다가 이를 전문적으로 구분하고 검증할만한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다는 것도 미국에서 한국삼의 이미지를 떨어뜨리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한국 인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마케팅 전략 수립도 필요하다.

고려인삼센터 백광수 대표는 "한국 인삼은 양(열)이 많다는 인식 때문에 날씨가 따뜻한 가주지역에서는 잘 팔리지 않는다"며 "오히려 열이 적은 미국삼이나 캐나다삼이 이곳에서는 더 인기가 많은 것도 한국삼이 부진한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인터뷰] 한국인삼공사 정동영 미주법인장
유사품 불법판매 막고 고급·브랜드화로 차별


22일 한국인삼공사 정동영 미주법인장(사진)은 한국산 인삼이 미주시장에서 탄탄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인삼의 '고급 제품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삼공사는 2015년 5억 달러 수출달성을 목표로 브랜드 상점을 미국 전역에 30개 곳으로 확장하면서 타인종과 주류사회 공략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정 법인장은 "한국의 고려인삼의 품질과 효과는 세계 최고이기 때문에 이를 더욱 특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한국산 인삼을 세계적인 상품으로 키우기 위해 캔디와 같은 기호상품 차 등 다양한 품목으로 제품화시켜서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더 넓은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법인장은 또 한국 인삼의 고급 제품화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중국산 등과 차별되는 대응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국인삼공사의 대표 브랜드인 정관장의 경우 미주지역에서 인기가 높아지면서 위조 제품이 LA를 비롯한 뉴저지 버지니아 애틀랜타 등 북미 전지역에서 불법 유통돼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례도 접수된 바 있다.

정 법인장은 "정관장 브랜드를 이용해 미주 지역에 위조 제품이 유통된 사실이 드러나 자체적으로 성분분석조사를 펼치는가 하면 한국 법무부가 재빨리 법적 대응을 위해 생산자와 유통경로 등을 밝혀내는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 법인장은 "한국 고려삼의 품질은 세계 어느 인삼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품질에 자신감을 갖고 명품 인삼을 부각시켜야 한다"며 "다른 나라 인삼이 한국삼으로 둔갑한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인삼이 최고기 때문에 흉내를 내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장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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