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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세계를 움직인 미녀들의 신화 - 김남석

        세계를 움직인 미녀들의 신화
    지은이: 김남석
    출판사: 선녀와 나무꾼
 
     
      제1장  사랑은 전설이 되어
    죽어서도 아름다운 미의 대명사, 그레이스 켈리
  "나는 작은, 이름없는 꾳에 묻혀 잠들고 싶다. "
스크린의 여왕에서 실제 여왕의 자리까지 차지한 그레이스 켈리.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태
양의 나라 모나코의 황태자였다. 배우로서 가장 인기가 있을 때 과감하게 배우 생활을 끝내
고 300개가 넘는 왕궁의 안방마님이 되었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현대판 신데렐라
라 일컬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만 예기치 않은 자동차  사고로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남긴 채  아스라이
기억 속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비록 그녀는 갔어도 그녀가 남긴 아름다움은 오늘까지도 퇴
색되지 않은 채 전해 오고 있다.
 
    인생의 방향 전환
  모나코의 황태자 레니에는 칸느 영화제가 열리던 어느날 그레이스를 처음 만났다. 지금까
지 보아 온 여자 중에서 그녀만큼 기품 있고 우아한 여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실 왕비
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면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아름다움 뒤에는 위엄도
있어야 하고 지삭과 지혜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나야 했다. 그런 여자만이 한 나라의  왕비가
될 수 있는 거라면 수 많은 아름다운 여성 가운데 그레이스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뛰어나게 아름다웠지만 우아함에서  부족하고, 마릴린 먼로는 기품이
없었고. 또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열연을 보였던 오드리 헵번은 깜찍하지만 위없이 없었
다. 할리우드에서 이 모든 것을 갖춘 여성을 꼽는다면 그레이스밖에 없었다.
  자격은 곧 기회를 불렀다. 1995년 칸느  영화제 때 그레이스는 모나코 왕궁을  방문했고,
그녀의 인생은 그대로 방향 전환을 하게된다.
  "저는 파리 마치 기자입니다. 모나코 왕궁에서 그레이스 켈리양과 레니에공과 함께  사진
을 찍고 싶은데요."
  "모나코는 참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정말 한번 가 보고 싶었어요."
  그레이스 켈리는 함께 사진을 찍을 사람이 독신인 줄도 몰랐고 또 왕궁이 어떻게 생겼는
지 본 적도 없지만 흔쾌히 승낙을 하였다.
  모나코는 칸느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왕궁에 도착하자 이미 연락을
받은 레니에가 나와 손님들을 안내했다. 방이 300개나 되는 왕궁 내부와 정원 그리고 작은
동물원까지 그레이스를 안내하면서 그는 정성스럽게 설명해 주었다. 카메라 셔터가  눈부시
게 터졌지만 레니에는 평소처럼 얼굴에 아무런 표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레
니에가 그레이스에게 반해 어떤 말이라도 나올까 싶었지만 그저 자신의 집을 찾아온 먼 나
의 손님을 맞이하는 정도의 관심을 보였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모나코 왕궁에 갔다 온  후
에도 그레이스는 레니에와 아무런 스캔들이 없었다. 모두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사람들이었
다.
 그 후 그레이스 켈리는 <백조>의 촬영에 들어가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백조>는 우연하
게도 한 나라의 왕자를 사랑해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그레이스는 필라델피아의 부모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런데 갑자기 모나코의 레니에가 필라델피아를 방문하여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
다.
 그레이스 켈리는 다소 흥분이 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이유로?"
 "미국에 오시는 목적은 건강진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비공식적인 방문
이라 언론도 이 사실을 모릅니다."
 그레이스는 흔쾌히 승낙했다. 지난번 모나코  왕궁에서 사진도 함께 찍은 인연도  있었고,
한 나라의 왕자가 직접 자신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오겠다는데 거절할 명분도 없었던 것이
다. 사실 그레이스 켈리도 모나코 왕궁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독신이라는 점에 마음이 끌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니 한
마디로 백조가 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다. 그해 마지막 날에 레니에는 파니에서 춤을 추며 그녀
에게 구혼을 했다.
 "그레이스, 나의 궁전은 혼자 지내기엔 너무 넓어요."
 그레이스는 레이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 남편이 그레이스 켈리 부군이라고 불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결혼한다면 남편
의 성을 따르고 싶습니다."
 모나코 왕비로 불리고 싶다는 말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우회적인 말로 결혼을 청하고 승
낙을 한 것이었다.
 결혼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 그레이스 켈리는 그 동안 교제를 해 오던 유부남  오레
그 카시나에게 전화로 짤막하게 알렸다.
 "신문에서 읽기 전에 내 입으로 말하고 싶어요. 저 레니에 3세의 부인이 되기로 승낙했어
요."
 이것이 그레이스 켈리가 마지막으로 미국 사회에서 로맨스를 불태운 남자에게 했던 작별의
말이었다.
 망명한 러시아 귀족의 손자로 파리에서 태어난 오레그는 로마와 뉴욕에 가게를 갖고 있는
유명한 드레스 디자이너였다. 그레이스는 그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이혼 경력이 있는데다 플레이보이로 소문이 나 있어 부러울 것이 없는 그레이스 켈리 집안
에서 반대하는 것을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그레이스 켈리 집안은 부자였다. 아버지는 필라델피아 건축 회사의 사장이었고  어머
니는 모델 출신인 미인이었다. 그레이스의 백부는  퓰리처 상을 받은 바 있는  극작가였다.
그로 인해 그레이스 켈리는 돈 떄문에 아무 영화에나 출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음에  드
는 배역과 영화만 선택해서 몰두했다. 그 때문에 그녀가 출연한 11편의 영화가 모두 성공을
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세기의 결혼
  1956년 4월, 모나코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레이스 켈리와 부모는 여객선을 타고 모나코로 향했다. 일행 모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전야제에 뒤이어 결혼식은 18일과 19일 이틀 동안 두 차례에 걸쳐 거행되
었다. 법률상의 결혼식과 종교상의 결혼식이었다.
  르네상스식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레이스와 나폴레옹 시대를 연상시키는 훈장을 단 레니
에공의 결혼은 바로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을  감상하며
사람들은 밤새 춤을 추었다. 모두들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축복하고 있었다.
  세기의 결혼으로 불린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공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수
많은 하객들이 몰려들었다. 호텔마다 만원이었고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두 사람의  결혼
식을 취재하기 위해 각국에서는 2,000명이나 되는 기자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기도 했
다.
  같은 왕족이 있는 영국은 보다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우리 영국은 발레단을 보내겠소."
  "우리 프랑스도 발레단을 보내겠습니다."
  만약에 그레이스 켈 리가 왕자를 낳지  못하면 모나코는 프랑에 합병당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또한 그레이스 켈리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유럽은 온통 축제의 분위기였으면, 온 세계에서 사절단을 보내 이 결혼식을 축복해 주었
다. 군함에 탄 수병ㅇ들이 모나코를 방문하여 결혼식을 축하하기도 아였다. 모나코  국민은
물론 소많은 관광객들이 한집안 식구처럼 즐거워하며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세기의  결혼식
을 축복해 주었다.
  19일 저녁,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으며 탄생한 이 부부는 레니에의  요트'데오쥬반
테'를 타고 스페인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결혼식 소동은 일주일
씩이나 계속되었다.
  모나코로서는 그레이스 켈리를 신부로 맞이한으로써  현실적으로 몇 갑절의 관광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뜨거운 태양과 지중해의 에메랄드빛으로 둘러싸인  꿈 같은 작은 나라. 관광과  카지노의
수입으로 사는 2만 5,000의 구구민들은 나라에 세금을 낼 필요조차 없이 부유하게 살았다.
게다가 그레이스가 모나코로 시집을 감에 따라 삽시간에 미국인들의 모나코 여행이  급증했
다. 이 때문에 모나코는 관광 수입이  부쩍 늘어 국민들은 이래저래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
다.
  그레이스 켈리는 황태자의 아내가 된 후, 일절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녀의 팬들로서
는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었지만,그녀는 배우로서 가자 인기 절정에 있을 때 과감하게 배
우의 일생을 정리한 것이이었다.
  "성공이나 명성도 서로 나눠 가질 상대가 없으면 허무할 뿐이다."
  그레이스는 더 이상 영화에 미련을 갖지 않았다. 작은 나라의 왕비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
하며 모나코를 이을 왕자를 낳는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이윽고 그레이스 켈리는 차례차례 세  아이를 낳아 모나코를 프랑스에 합병당할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그레이스에게 왕궁 생활이 그리 쉬운 건 아니었다. 엄격한 규칙이나 전통을 제대로 지켜야
하고, 언제나 긴장하며 위엄을 갖춘 모습을 보여야만 GotEK. 크게 웃을 수도, 누구와 잡담
을 할 수도 없는 생활이었다. 게다가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레니에와의 생활은 자유
롭게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서 다소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탄탄하게 다져진 연기 훈련 덕택에 무난하게 왕궁 생활에 적응을 했고 쉽게
왕궁의 법도를 익힐 수 있었다.
 "내가 배우 생활에서 익힌 시간을 엄수하는 일, 같은 일을 몇 차례고 되풀이하는 일, 화장
하는 방법, 걸음걸이, 남과 접촉하는 방법 등은 다시 배울 필요가 없었다."
 배우 그레이스 켈리는 한 나라의 왕비로서 만족을 하며 아무탈 없이 지냈다.
 
    이름없는 꽃에 묻혀 잠들고
 1957년 1월에 공주 캐롤라인을, 이듬해 알베르도 왕자를, 그리고 65년에 스테파니  공주를
낳고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는 매일 분주하게 살았다. 왕비이면서 한 사람의 아내이고, 또 어머니이면서  300개가
넘는 방이 있는 궁정의 여주인이기도 했던  그녀로서는 바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  서너
차례 옷을 바꿔 입을 정도로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낮에 입는 옷, 만차을 위한  드레스,
발레나 오페라를 관람할 때 입는 옷.....
 모나코 왕궁에서 그레이스 켈리의 이야기가 나오면 세계는 귀를 번쩍 뜨고 소식을 전하느
라 바빴다.
 장녀 캐롤라인이 자라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호텔왕의 아들 테니스 보그와 장 폴  벨몽드
등을 상대로 염문을 뿌리기 시작했다.  끝내 캐롤라인은 부모의 반대를 물리치고  19년이나
연상인 플레이보이와 결혼을 했다가 곧 이혼을 하고 말았다.
 세계의 언론은 캐롤라인의 염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흥미거리로 삼았다.  언제부터인가
모나코 왕궁은 스캔들의 원산지로 지목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그레이스 켈리는 더욱  자녀
교육에 신경을 썼지만, 자식만큼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훗날 모노코를 이끌고 나갈 알베르도 왕자도 심심찮게 스캔들을 뿌리고 다녔고, 차녀인 스
테파니도 담배를 피우며 디스코에 열중하였다.  그레이스로서는 세상의 평범한 부모들보다
몇 배 더 머리 아픈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자녀들의 염문은 늘 세계적인 특종감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특종은 그녀의 최후에 찾아왔
다. 그레이스 켈리의 사고 소식이 모나코 왕궁에서 흘러나왔을 때 세상은 온통 슬픔에 잠겼
다.
 "1982년 9월 13일, 별장에서 스테파니 공주와 함께 왕궁으로 돌아오던 왕비께서는  산길에
서 급커브를 돌다가 40미터 절벽 아래로 추락하여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곧 몬테카를로 병원으로 운반되었으나 상태가 매우 위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레이스 켈리의 사고 소식이 전세계로 빠르게 전해졌다. 모나코에서 가장 인기 있고 사랑
받는 그녀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도하며 국민들은 모두 침울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이튿날인 14일 오후 10시 30분에 머나먼 나라로 떠났다. 26년간의 가장
행복한 결혼 생활과 53년 동안 불꽃처럼 타올랐던 생을 마감한 것이다.
  죽기 전에 그레이스의 입술이 가볍게 움직였다.
  "난 작은, 이름없는 꽃에 묻혀 잠들고 싶어......."
  죽음이 찾아와 눈을 감으면서도 생전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변함리 없었다.

  미의 대명사로 불리던 그녀가 남긴 주옥 같은 영화와 생전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사람들의
감슴에 남아 오래도록 잊여지지 않고 있다. 
 
      비운의 영국 장미
    다이애나
  몰락해 가는 영국 귀족 스펜서가의 딸로  태어나 전세계인의 사랑과 흠모를 한몸에  받고
살다가 떠나간 행복한 여인.  그녀는 열세 살이나 많은 찰스 왕세자의 눈에 띄어 결혼과 이
혼. 그리고 재혼할 도디와 함께 사고로 죽을 때까지 가장 염문을 많이 뿌린 여자인 동시에,
세계 무대를 상대로 자선사업과 개인지뢰 금지 활동으로 짧지만 크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비운의 왕세자비였다.
 
    도디와의 만남
  "다이애나. 이건 진심이오. 당신과 결혼하면 다른 결혼하면 다른 어느 영국 왕족못지않게
행복하게 해 주겠소. 우리의 약혼 기념 선물로 이 반지를 드리겠소."
  도디는 억만장자인 아버지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배경으로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작을  하
는 사람이었다.
  다이애나 불행하지만 행복한 순간을 함께했던  도디는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뒤 초호환판 파티에서 만났다.
  "영화 제작자인 도디 파예드 씨입니다. <화차>와 <훅> 등의 영화를 제작하신 분이지요."
 도디 파예드를 소개받은 다이애나는 다부진 몸매와 세련되 매너,그리고 잘생긴 얼굴이  마
음에 들었다.
  이날 이후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도딛는 다이애나를 만날 때마다 엄청난 재력
가라는 사실을 하나씩 하나씩 교만을 떨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해 주었다. 도디는
자신과 결혼을 하면 다이애나가 손대고 잇는 자선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겠다며  다이애
나에게 결혼을 승낙받기 위해 노력했다.
  도디는 다이애나보다 다섯 살 위로 영국 육군사관학교를 족업하고 장교로 근무를  하였던
엘리트였다.
  또한 1987년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톱모델 수잔 그레가드와 결혼했다가 8개월 만에 이혼
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 위자료로 200만 달러를 주어 세간을 놀라게 하였다.
  그 후 도디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로서 유명 인사들과 아버지 의 소유인 파리의 리츠 호
텔과 뉴욕, 로스앤젤레스의 자기 저택과 별장에서 파티를 여는 일로 세월을 소비하고 있었
다.
  도디와 염문을 뿌린 영화배운 가운데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줄리오 로버츠.티나  시나트
라, 브룩 실즈 등등 셀 수 없이 많았다.
  "사실 나는 그 동안 여러 유명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린 것도 사실이오. 그러나 당신과 결
혼만 한다면 반드시 남을 여생을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소."
  다이애나는 도디와 만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의 매력에 끌리고 있었다.
 '도디라면 내 인생을 맡겨도 충분해. 그는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어!'
 결국 다이애나는 결혼을 승낙하고 도디가 약혼 선물로 준비한 약 1억 8000만 원을 호가하
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손가락에 끼었다.
 이미 여름 휴가 때 프랑스의 휴양 도시 생 트로페즈에게 함께 달콤한 휴가를 보냈던 두 사
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지중해의 보랏빛 바다 위의 초호화 요트에서 반라의 모습으로 키
스를 하거나 포옹하고 있는 장면이 파파라치의 망원렌즈에 걸려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영국 왕실은 비록 다이애나가 이혼을  했지만 바람둥이 도디와의 뜨거운 사랑이  공개되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에 질세라 세계 각 언론은 이 사진을 전송받아 대서특필하였으
며, 그 동안의 다이애나 염문설이 또 한번 도마 위에 올려졌다.
 
    다이애나의 연인들
 찰스 왕세자와 별거 생활을 할 당시  외로움과 고독을 이기지 못해 다이애나는 승마  교관
휴이트와 밀회를 즐겼는데, 그 장면이 파파라치들에 의해 심심찮게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
밖에도 여러 남자가 있었지만 다이애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애나의 동서인 퍼거슨이 책 한 권을 들고서 그녀가 살고 있는  캔징턴
궁으로 찾아왔다. 그 책에는 다이애나가 어려울 때 퍼거슨에게 털어놓았던 휴이트와의 불륜
관계 등이 적나라하게 쓰여 있었다.
 "지금 이 책을 출간하겠다는 겁니까?"
 "이왕이면 더 솔직하게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그렇지, 남의 사생활을 이렇게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거예요?"
 다이애나는 경악했고 다시는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며 쫓아 보냈다. 그러나 퍼거슨은 빚 때
문에 결국 책을 출간하고 말았다.
 국민들은 모든 것이 뜬소문으로 남길 바랐었다. 그런데 정작 동서라는 사람이  다이애나의
사생활에 대한 책을 내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미지는 엄청난 손상을 입었다.
 그러자 다이애나는 모 방송국 대담 프로에 나와 휴이트를 정말 사랑했으며 깊은 관계까지
갔었다며 울먹였다. 텔레비전을 통해 영국 국민과 전세계 사람들은 다이애나의 솔직하고 대
담한 발표에 놀라고 말았다.
 처음 여론은 나빴다. 아무리 찰스가 바람을 피우고 별거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영국의 정
신적인 지주인 왕실의 왕세자비가 보통  시민과, 그것도 교관과 놀아났다는 사실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영국 왕실은 이제 끝났다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영국 국민과 세계 사람들은 인간 다이애나의 고독과 슬픔에 동정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온갖 스캔들을 잊으려는 듯 전셰계의 후미진 곳을 돌아다니며 자
선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훤칠한 키에 빼어난 미모, 영국의 왕세자와 이혼한 35세의 전왕세자비를 언론은 그냥 두지
않았다. 그녀가 가는 곳에는 늘 스캔들이 터져나왔고 가십거리가 제공되었다. 전세계  패션
을 주도하며 염문을 뿌리는 귀부인을 그냥  둘 언론이 아니었다. 음유 시인 스팅이  노래를
부르면서 다이애나와 의문의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고, 톰 행크스에게 끈질기게 구애를 퍼부
었으나 톰 행크스는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심지어는 미 프로농구의 악동 로드먼에게 추파
를 던져 여름에 그녀가 묵고 있는 캔징턴  궁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소문도 나돌았
다.
 이러한 소문에 다이애나는 노코멘트로 일관하며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
다. 하지만 휴이트가 떠나간 뒤에 해스냇 칸이라는 파키스탄 의사와 사랑에 빠진 사실만큼
은 그녀도 인정하였다.
 심장병 전문의인 칸은 다이애나의 친구가 입원해  있는 병원 의사였다. 분병을 가서  강한
인상을 받은 다이애나는 그와 사랑에 빠졌고 곧 그와 결혼해서 딸을 낳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 다이애나가 정식 이혼을 하고 난 후,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캔징
턴 궁과 병원을 오가며 두 사람은 사랑을 불태웠다.
 그러나 칸은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이고 물론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칸은 종교를 떠나
서 그녀를 사랑했지만 칸의 가족은 이슬람교도가 아닌 그녀를 원치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다이애나는 또 한번의 시련의 아픔을 잊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랑
과 평화의 사절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세계의 남자들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도디와 만나
게 되었고, 결국은 재혼까지 할 계획이었다.
 
      마지막 만찬
  도디와 장래의 일을 계획하며 다이애나는 호텔에서 주로 문나 밀월을 즐겼다. 열므 휴가
때 파파로치들에게 걸려들어 언론에 자신들의 사진들이 나간 이후, 다이야나는 바깥에서 도
디를 만난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도디를 파리의 자신의 소유인 호텔이서 주로 그녀와 만나 데이트를 하였다. 그리고 운명
의 8월 30일 오후, 드 사람은 리츠 호텔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가 나
오기 전에 와인을 따로 놓고는 사랑을 속삭이며 도디는 다이애나에거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
워 주었다. 다이애나가 잔잔한 미소로 대답을 할 뿐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이윽고 도디가
저녁 식사를 끝내고는 한마디 하였다.
  "내 아파트로 갔다가 런던으로 가는 게 좋겠소."
  "밖에 파파라치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을 텐데요."
  다이애나는 파파라치들이 따라붙는 것이 싫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호텔이 머물고 싶었
다.
  "걱정 마시오. 내 모든 준비를 끝내 놓았으니까!"
  도디가 듬직한 말로 다이애나를 안심시켰다. 생 트로페즈에서 파리까지 용케  파파라치들
을 따돌리고 온 터라 다소 걱정이 덜 되었다. 도디는 호텔 전속 운전기사들을 불러모았다.
  "장. 자네는 내 리무진을 몰고 루브르 박물관 쪽으로 달리게. 그리고 샘 자네는 호텔 VIP
전용차를 몰고 그 뒤를 따라가다가 개선문 쪽으로 달려. 파파라치들을 어떡하든 따돌려야만
해."
  도디의 운전사는 파파라치들이 얼굴을 잘 아는 장이었다. 그래서 눈속임을 하기 위해도디
와 다이애나는 장이 모는 차를 타지않고 대신 도디의 경호원인 앙이 폴을 호텔로 나오도록
하였다.
  "폴. 자네가 벤츠를 몰아 내 아파트까지 가줘야겠어."
  "예. 잘 알겠습니다."
  계획이 끝나자 다이애나와 도디로 변장한 남녀 한 쌍이 계획된 자동차에 올라타고는 10분
간격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파파라치들은 진짜 다이야나와 도디가 탄 자
동차를 끈질기게 추적해 왔다.
  "일곱 명이나 되는데요."
  "알마교를 빠져나가."
  도디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에 폴은 속도를 높이며 오토바이를 탄 파파라치들을 따돌리
기 위해 전속력을 냈다. 차는 센 강 북쪽 강변로를 바람을 가르며 달렸고, 알마교 바로  앞
교차로의 터널로 접어들었다.
 자동차가 지하차도 안에서 급회전을 하자 귀를  찢을 것 같은 금속성이 났다.  다이애나는
그 순간 도디의 가슴으로 쓰러졌고, 곧 이어 자동차는 벽을 들이박고 폭발하고 말았다.
  자하차도 안은 굉음과 연기, 그리고 먼지로 온통 가득했다. 파파라치들은 다가와서  사람
들을 구해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사진 찍기에 바빴다. 뒤이어 따라온 자동차에서 내린  사람
들이 파파라치들을 폭행하고 카메라를 빼앗았다. 곧 이어 경찰차가 달려왔다.
  도디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다이애나는 응급실로 급히 후송되었다. 라 피티에 살페트
리에르 병원에 급히 수송된 그녀는 두 시간 뒤 조용히 의사에게 한 마디 남기고는 숨을  거
두었다.
  "날 홀로 내버려 둬요."
  다이애나는 흉부 과다 출혈로 새벽 4시쯤 영원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영국 왕실과 영
국 국민들은 큰 슬픔에 잠겼다. 찰스는 두 아들을 데리고 가까운 교회에 가서 그녀의  영혼
을 위해 기도를 하였다. 전세계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전문을 보냈다.
  "헌신적인 사랑으로 인류를 위해 봉사를 실천하였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사고 소식에 슬
픔을 전한다."
  "다이애나는 전쟁 고아와 에이즈 환자, 노약자들을 위한 평화의 사도였다."
  영국 국민들은 다이애나를 추모하기 위해 지방에서 런던으로 올라왔다. 정부가 임시 열차
편까지 마련할 정도로 추모객은 수백만을 넘었다. 그녀의 시신이 모셔져 있는 궁에는 꽃다
발로 쌓여있었다. 영국 국민과 전세계의 국민들이 다이애나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는데,  정
작 영국 왕식은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이지 않아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우리의 영왕은 왜 침묵하는가?"
  "영국 왕실은 이제 끝인가!"
 여론의 화실이 거세지자 영국 왕실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버킹검 궁에 조기를 내걸어 조의
를 표한다는 조치를 취했다. 크라이스 교구 교회에서 열린 다이애나 세자비 추모 예배에 엘
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한 왕실들이 참석하였다.
  사실 다이애나와 영국 왕실은 사이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찰스 왕세자와 이혼 전에
연인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또 이혼  후에도 도디라는 사내와 함께 있다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애나 또한 권위적이고 점점 소원해지는 왕실에 대해 감정이 많았다. 다이애나
는 자신의 고문 변호사를 통해  '사랑의 매듭'이라고 불리는 시가 약 21억원이나 나가는 왕
관을 경매에 내놓으려고 은밀하게 알아보고 잇었다. 이에 영국 왕실은 왕관이 다른 사람에
게 넘어가는 것ㅇ르 막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다이애나가 경매에 내놓은 것으로는 약혼식 때 받은 약혼 반지를 비롯하여 사우디
아라비아 왕자가 선물한 사파이어 귀걸이 등을 꼽을 수 있는데, 하나같이 비싼 값이 나가는
물건들이었다. 더구나 다이애나는 자신이 결혼해서 지급까지 입었던 각종 드레스 80벌을 자
선기금으로 경매에 sodhg아 약 5,000만 달러의 판매금을 자선단체에 모두 기부했다.
  그녀가 이러한 자선기금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테레서 수녀를 만나고 나서부터이다. 작고
보잘것없이 행색이 초라한 테레사 수녀를 처음  본 순간, 그녀는 큰 감동을 받았아고  말했
다. 마치 큰 산앞에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그러나 다이애나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 왕실에 대한 반발심,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
에 대한 반발심도 은근히 작용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녀의 갑작스런 죽으메 클린턴 미  대통령의 페스트레이디 힐러리 여사는 "그녀는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강해지면서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평화의
사도였다."고 애도했다.
  그녀만큼 세게의 언론과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린 여자도 없었다. 그리고 또한 마지
막 가는 길도 세계인이 함꼐 슬퍼하였고 애도해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염문을 뿌린 평
범한 여자였지만, 공적으로는 활발하게 수많은 활동을 하며 왕실의 권위를 벗어던지고 아프
고 어려운 세계 속의 사람들에게로 다엊ㅇ하게 다가간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계를 그녀에게
아낌없는 찬사와 애도를 보내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영원한 세계인의 연인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은
도디라는 한 남자에게 다이애나를 빼앗가지 않으려고 일찍 데려갔는지도 모른다.
  20세기 마지막 신데렐라였던 다이애나의 36년 생은 엘튼 존의 노래 가사처럼 그렇게 살다
가 끝났다.


  영국의 장미여, 안녕.
  당신은 우리 마음에 영원히 피어날 겁니다.
  당신은 생명이 갈갈이 찢긴 곳에 놓인 우아함 그 자체였습니다.
  당신은 우리 조국을 소리쳐 구해 냈고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게 속삭여 주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천국에 계시고 
  별들은 당신의 이름을 수놓고 있습니다.
 
 
  당신은 다랍 속의 촛불처럼 사라졌습니다.
  비가 몰려와도 해가 저물어도 꺼지지 않는
  당신의 발은 항상 여기에 머물 것입니다.
  영국의 촛불은 오래 전에 꺼졌으나
  당신의 전설은 영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스러움.
  당신의 미소가 없는 날들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 횃불을 계속 운반해 갈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황금빛 아이를 위해.
  우리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진실은 우리를 눈물 속으로 데려갑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당신이 가져다 준 기쁨을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 없습니다.


  영국의 장미여, 안녕.
  당신의 영혼을 잃은 이 땅에서 우리는 당신의 연민의 날개들을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리워할 것입니다.

 다이애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을 떠나 런던 북쪽 스펜서 집안 소유의 옛 교회당 터에 묻혔
다. 두 아들이 수시로 엄마의 무덤에 찾아올 수 있게 배려를 하였다는 왕실의 발표도  있었
다.
 이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이애나는 그렇게 엘튼 존의 노래처럼 우리 곁에서 사라졌
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흔적은 영원히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사랑의 전설'로 인류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대영제국의 왕관을 버리게 한 여자
    심프슨 부인
 
 불륜도 사랑에 속할까? 그것이 불륜이든  사랑이든 당사자들에게는 '진정한 사랑'일  것이
고, 타인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일 것이다.
 한 남자를 사랑함으로써 역사를 바꿔 놓은 여자가 있다. 유부녀인 심프슨 부인. 그녀가 사
랑한 남자는 대영제국의 국왕이었다.
 왕관을 건 이 세기의 사랑은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으나 그들은 끝내 사랑을  이루고
야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세기적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가
장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라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명예와 지위와 가정을 버리고 사랑을  위
해 결혼한 두 사람의 행동을 가장 용기 있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세기적 사랑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1930년, 겨울에 이루어졌다.
 독일의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에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들 중에 이 두 사람이 있었고,
그곳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세기의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영국 국왕의 자리를 빼앗아 버린 심프슨 부인은 과연 어떤 여자인가? 심프슨 부인은 한 번
의 이혼 경력이 있고, 두 번째 결혼으로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미며 살아가던  평범
한 미국 여자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당시 에드워드 황태자는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미혼의 청년이었으며, 영국의 어떤  여성이
라도 가슴이 설렐 만큼 미남이었다. 이무렵 유럽의 여러 공주들이 에드워드 8세의 프로포즈
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에드워드 8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성은 윌리스 심프슨이었다. 미국 볼티모어
의 평민 여성이며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 황태자는 서른여섯이었
다.
 방곡호에 대피해 있던 그날 마침 윌리스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재채기를 하자 옆에 있던
황태자가 말을 걸어 왔다.
 "이곳엔 미국식의 중앙 난방이 없군요. 그렇죠?"
 그러자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말로 대답했다.
 "전하는 저는 실망시키셨어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영국 황태자 앞에서 그런 언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그녀의 말에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뭐라고요?"
 그녀가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영국에 와 있는 미국인은 어느 누구에게나 이런 질문을 받아요. 저는 전하께서 독창적인
말을 하시리라 기대했거든요."
 그녀는 또박또박 한치의 떨림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것도 눈웃음을 흘리며.
 황태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자기 앞에서 속생각을 그렇게 또박또박  이야기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프슨은 그런 여성이었다. 재치가 넘치고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그런
매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가정 생활은 평범했지만 뭔가 비범한 기질을 타고났던 것이다. 방
공호에서의 첫 만남, 그 짧은 대화로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역시 그런 타고난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황태자는 말을 잘 하고 언제나 편안한 웃음을 주는 이 미국 유부녀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은밀히 황태자의 별장에서 둘만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고, 귀족들의 파티에  심프슨
부인을 데리고 나타나기도 했다. 정해진 수순처럼 이는 곧 상류 사회의 이야깃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서로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자 심프슨  부인은 당당하게 그녀의 가족들과 인사를  시키기
위해 저녁 식사에 황태자를 초청하기도 하였다. 황태자가 집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친해져 공식적인 파
트너가 되기에 이르렀다.
 황태자는 그녀에게서 지금까지 자기가 만난 여자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을 발견했다.  상류
영구 여성은 장갑을 낀 채 악수하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이 여성에게서는 맨손의 따뜻한 감
촉을 느낀 것이다. 그녀의 미소와 밝은 웃음소리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황태자가 속해 있
는 세계에서는 소리를 내어 웃는다는 것은 품위 없는 행위로 여겨져 왔기에, 그녀의 웃음은
더욱 가치를 발휘할 수 있었다.
 윌리스는 잘 웃었다. 그것도 유쾌한 소리로 웃었다. 가식없이 마음껏 웃을 뿐만 아니라 재
미있는 말을 주위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녀가 있는 자리엔 늘 웃음이 넘첬으
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두 사람을 맺어 준 것은 바로 그 웃음이었다. 황태자는 그녀 같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해방감을 맛볼수 있었다.
  두 사람이 여러 장소를 전전하며 웃음을 나누는 동안 사랑은 점점 깊어졌다. 그러나 그녀
는 더 이상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평범한 남성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국
왕이 될 사람이었고. 윌리스 역시 자유의 몸이 아니라 엄연히 한 남자의 부인이며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였다.
  황태자가 빈번하게 자동차를 집 앞으로 보내고, 또 자주 드나들며 그녀를 사교계에 데리
고 나가는 일련의 변화에 대해 남편이 태연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화려한 의상을 해 입느라 지출이 부쩍 늘기도 했다.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더
이상 그대로 놔 둘 수 가 없었다.
  "이봐. 황태자의 청을 딱 잘라 거절할 수는 없겠어?"
  윌리스는 커다란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말했다.
  "이것은 전하의 명령이에요."
  "알아. 하지만 당신은 한 가정의 어머니야. 당신의 신분에 맞게 생활해야 돼."
  "지금 나에게 설교하시는 것예요? 저는 전하의 명령에 따라 파티에 가는 것뿐이에요."
  그녀는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큰 고통과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도 황
태자의 명령이란 말로 모든 사실들을 정당화하려 했다.
  "당신은 지금 정상이 아니야. 불장난을 하고 있어."
  그녀의 남편은 걱정스런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그때 이미 그녀는 평범한 시민에 불과한
남편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아이들에게도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사교계의 모임에 들락거리는
데 온통 정신이 빠져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가 말을 듣지 않자 황태자에게 직접 자신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
나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내와 황태자의 불장난을 지켜보
며 그저 매일 매일 가슴만 앓고 있었다.
  가정은 점점 엉망이 되어 갓따. 여자 그리고 엄마의 자리가 비게 되자 모든 질서가  무너
녀 버리고 마랑ㅆ다. 그녀가 황태자와 함께 파티에서 춤을 추는 날이면 남편은 술로 마음을
달래며 몇 번이고 "내 아내를 유혹하지 마시오."라고 혼자 소리첬다. 그러나 행여 황태자에
게 직접 이런 말을 전했다가는 그 즉시 아내를 잃을 것 같았다.
  그는 아내를 잃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막강한 황태자와 맞서 싸울 수도 없었다. 그렇
다면 방법은 하나. 그 고독하고 처절한 시간을 감내하면서 언젠가는 아내의 불장난이 끝나
가정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의 마음이 식으면 아내는 나에게로 돌아오겠지. 전에도 황태자는 몇 사람의  유부
녀들과 지내다가 결별을 했으니까."
  하지만 심프슨은 다른 유부녀들과는 달랐다. 그는 황태자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았다.  두
사람의 사이가 급진전되자 결국 남편은 더 이상의 미련을 갖지 않았다.

    왕관을 벗어던지더라도 결혼을 하겠다
  1936년 부왕 조지 5세가 별세하고 황태자는 그 뒤를 이어 에드워드8세가 되었다. 이는 곧
국민의 신망의 부응해야 하는 공인의 몸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황태자의 자리와 국
왕의 자리는 연장선상이라기보다는 전혀 벌개의 세계였다. 이제 영국 전국민의 정신적인 지
주인 국왕이 스캔들을 일으키며 생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국 여자와 너무 깊어지지 않도록 하시오."
  영국 왕실은 국왕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충고해 왔다. 비난의 화살이 빗발치자  윌리스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영국 국민이 결혼한 여잘르 왕비로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해요. 나도 왕비가 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형식에 얽매이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요. 저는 그저 폐하의 좋
은 친구로 남고 싶어요."
  그녀는 그저 국왕의 애인으로 머물러 있고 싶었다. 때때로 국왕이 그녀를 불러 주거나 집
을 방문해 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왕은 윌ㄹ스와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오."
  그말을 들었을 때 윌리스는 새파랗게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미친 짓이이에요."
  그녀는 겁이 났다. 수많은 영국 국민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난 당신 없이 국왕이 되고 싶지는 않소."
  "폐하. 전 이대로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그녀는 울먹이며 국왕에게 말했다. 그러자 국왕은 그녀의 흔들리는 어깨를 살며시 껴안고
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과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소. 왕관을 벗어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윌리스는 사교장에서나 왕가에서 할 비난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잘못했다간 미국으
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국왕과는 영원히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했다.
 "국왕의 자리를 떠나는 일이 발행한다 해도..."
 국왕은 그녀의 입술을 가져다 살며시 키스를 하였다. 그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윌리스의 귓가에서 국왕의 나지막한 음성이 맴돌았다. 윌리스는 몸이 떨렸다. 국왕의 사랑
이 진정이라는 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영국의 운명은 윌리스의 대답 한
마디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냉정히 자신을 추스리며 말했다.
 "폐하! 그건 안 돼요. 당신이 나하고  결혼을 한다면 전세계 사람들이 날 비난할  거예요.
그리고 영국 국민들은 국왕으로부터 자신들이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당신 없이는 국왕으로서의 직무를 단 하루도 해낼 수 없소."
 "폐하. 지금처럼 곁에서 폐하를 돕겠습니다. 언제고 절 만나러 오실 수도 있고,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가겠어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이 난 싫소. 나 혼자만 당신을 가까이 하고 싶소.  이
건 내 진정이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이 문제로 심하게 충돌했다. 이때 윌리스가 본심과는 다르게 완강
하게 거절했다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또한 국왕의 지위가 아니라 한 인간
으로서의 국왕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곽 아이들과 헤
어진다 해도 국왕과 함께 남은 생을 불꽃처럼 살다 가고 싶었다.
 윌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 같은 걸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모두가 우리 두 사람을 결혼시키지 않으려 하
거든요."
 윌리스의 이 교묘한 말이 국왕의 마음을 자극하고 말았다.
 "누가 우리 두 사람을 갈라 놓을 수 있단 말이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하고 말겠소."
 이 순간 두 사람의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다.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다툴 일도  없었다.
국왕은 그녀의 남편을 직접 만났다.
 "나는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겠소. 당신과 가족에겐 미안한 일이오만, 난 이 여자가 옆에
없으면 단 한 시간이라도 삶의 의미를 못 느끼겠소."
 "폐하. 일시적인 감정으로 모든 걸 결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폐하를 지켜보는 눈들이 많습
니다."
 "난 세상의 비난 따윈 두렵지 않소. 오직 그녀와 함께한다면......"
 더 이상 그녀의 남편은 국왕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서둘러 그녀와 이혼을 하였다.
 이혼이 결정된 후 그녀와 국왕은 두  사람만의 보금자리를 꾸미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세계의 언론들이 연일 떠들었고, 영국 국민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왕가
의 반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자존심 강한 영국 국민들은 달라진 세상, 달라진 국왕을 한탄
했다.
 "영국은 국왕이 이혼 경력 있는 여자와 결혼하는 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두 차례의
이혼 경력을 가진, 애까지 낳은  여자와는 하늘이 두 쪽이  된다 해도 인정할 수가  없습니
다."
 이미 두 아이를 낳은 중년의 나이 때문에 왕가의 혈통을 이을 자녀를 충산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는 불안감도 많이 작용하였다.  왕실에서는 국왕에게 다른 나라의 공주와  결혼할
것을 강력히 종용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내각은 심프슨 부인과 결혼을 한다면 모두 사
퇴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국왕 혼자 힘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군은 아무도 없었다. 외롭고 힘든 싸움이 계속되었다.
 "폐하. 저 한  사람으로 인해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더구나 폐하께는  고통만 전해 드리
고......."
 나라 안팎에서 거센 반발이 일자 국왕과 왕실은 연일 회의를 거듭했지만 국왕의 의지는 변
할 줄 몰랐다.
 "폐하. 고집을 꺾으세요. 이제 저를 잊어 주세요. 당신과 당신 나라를 위해서 저는 미국으
로 떠나겠어요."
 그녀는 더 이상 영국에 머무는 것이 국왕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러나 국왕의 생각은 단호했다.
 "난 결코 당신을 포기할 수 없소. 만일 나라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난 왕위를 물러나겠소."
 국왕은 그녀를 껴안고 통곡했다. 한 여자와의 사랑 때문에 영국의 국왕이 울고 있었다. 그
는 왕실과 국내외의 비난에 이미 자제심을 잃고 지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 수상 볼드윈이 나섰다.
 "폐하. 국왕으로서 국민의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이 말이 제가 국왕께 드리는 마지막 청
이옵니다."
 수상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부탁을 하였다. 하지만 국왕의 대답은 냉정했다.
 "국민에겐 미안한 일이오만, 나는 그녀와 결혼할 작정이오."
 수상도 더 이상 국왕의 결정을 바꿀 수 없었다.
 왕실과 내각은 에드워드 국왕의 퇴위를 준비하기에 바빴다. 국와 즉위식을 준비한 지 1년
도 채 안 되어 퇴위식을 준비해야 하는 관리들은 비통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드디어 12월 10일, 에드워드 8세는 퇴위 선언서에 서명을 하였다. 국왕에 즉위한 지 불과
1년도 안 된 325일 13시간 57분이었다.
 
    사랑의 승리자
 국왕의 퇴위 소식을 들은 영국 국민들은 놀라움과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원래 여자를 좋아하여 자유롭게 스캔들을 일으키는 사람이긴 하였지만, 이혼을 두  번이나
한 유부녀와 결혼을 하기 위해 국왕의 자리까지 차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영국 사람들 너무 실망한 나머지 국왕의 퇴위 소식에 차갑게 침묵했다.
 오래 전부터 그녀와 가까운 사람들은 "만일 국왕이 퇴위하고 당신과 결혼한다면 당신은 세
상에서 가장 미움받는 여성이 될 것이다." 라며 우려를 나타냈었다. 그 우려는 즉각 현실로
다가왔다. 윌리스는 글자 그대로 사면에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가 되어 버렸다. 외출은 물론
사교 모임에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언론은 세계의 비난과 침통함을 재빠르게 전해 주었다. 증오와 살의가 가득한 내용의 편지
들이 연일 그녀의 숙소로 배달되었다. 수천 통의 편지들이 수북이 쌓여 갔다.
 영국 자존심의 상징이며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는 사람들로부터 국민을 배반한 배신자
로 낙인찍혔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렇게 매도되었다.
 버킹검 궁은 그에게 2년 동안 영국을 떠나 있으라는 유배의 명을 내렸다. 전 국왕은  국민
에게 라디오를 통해 작별을 고했다.
 "여러분은 내가 왕위를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난  오랫
동안 봉사하고 노력해 온 국가의 일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이것만은 국민도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모든 것을 이미 포기한 상태인지라 그의 음성은 차분했다. 오히려 이 고별 방송을 듣는 국
민들의 심정이 더 착잡했다. 윌리스는 칸느의 친구 별장에서 그 방송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
다. 그 동안 국왕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스트리아의 스키  여
행, 요트 여행, 스페인에서의 피크닉, 마조르카 섬의 한적한 해변, 남편과 별거 후 집으로
매일 보내왔던 국왕의 장미꽃, 하루에도 몇 차례씩 걸어 주었던 전화, 밤마다 그가 그녀의
손님이 되었던  아름다운 날들......."
 "왕위를 버리면서까지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내 사랑하
는 여성의 조력과 도움이 없이는 국왕으로서의 중책과 의무를 다할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윌리스의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윌리스는 국왕 한 남성만을  사랑했지만,
국왕은 그녀를 위해 자신의 왕실과 국가와 온 세계를 버린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한없이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곧 자신을 위해
희생양이 되어 버린 전 국왕을 맞이할 채비를 해야만 했다.
 윈저공으로 불리게 된 전 국왕은 자신을 윌리스에게로 태워다 줄 영국 해군의 구축함 갑판
에 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조국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러한 결정은 내가 또다시 태어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에 관한 한 나는 영원
한 승리자이다."
 
    조촐한 결혼식
 윌리스와 윈저공의 결혼식은 그녀의 이혼이 성립된 지 6개월후인 1937년 6월 3일에 거행되
었다. 초대손님으로는 고작 16명으로 친한 친구와 친척들뿐이었다.
 윈저공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영국 왕실에서는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 새로 국왕의  자리
에 오른 윈저공의 동생은 윌리스를 몹시 원망했다. 동생 또한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보다는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어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결정짓게 한  장본인
윌리스를 맘에 들어할 리가 없었다.
 그의 형 에드워드 8세를 왕위로부터 끌어내려 파멸시킨 그녀에게 왕실은 공작 부인의 칭호
를 주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윌리스는 비록 공작 부인의 칭호를 받진 못했지만 언제나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었다.
 조촐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식장  안이
너무 썰렁해 참가한 사람들조차 슬픈 표정을 지었다.
  "행복한 얼굴을 지어 주십시오."
 카메라맨이 웃으며 주문을 하였다. 그러자 윌리스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언제나 행복해요."
 윌리스의 말에 윈저공은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그들은 며칠 이상 떨어져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함께였다. 1974년 그의 조카인 에리자베스 공주가 결혼할 때 윈저공은 아내
와 함께 아니면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버킹검 궁은 끝내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
았다.
  왕실의 태도는 여전히 두 사람에 대해 냉담했다. 여왕이 프랑스를 방문할 계획이 있었다.
그러자 두 삶에게 무언의 압력이 다가왔다.
 "여왕께서 파리에 오시는 데 자식 된 입장으로 안 만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만나자니  세
상에 또 한번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는 꼴이 되고..."
 결국 윈저공 부부는 여왕이 파리를 방문하는  동안 은밀하게 파리를 떠나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고 언론의 지면을 뒤덮었던 두 사람의 세기적 사랑도 이제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1972년 윈저공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의 어머니는 처음으로  윈저
공이 누워있는 병실로 찰즈 왕자와 함께 찾아왔다. 윌리스는 우아하고 위엄을 갖춘 그의 어
머니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어머니가 다녀간  얼마 후 그녀는 버킹검 궁으로부터  결혼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윈저공은 그녀가 공작 부인의 작위를 받기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장례식엔 100여 명 정도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영국을 떠날 때와는 달리 이제 국민들의
감정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오히려 사랑을 위해 과감하게 왕관을 벗어던진 그의 용기에 찬
사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두 사람은 35년간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시곗바늘이 거꾸로 돈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결정을 할 것이오."
 그녀는 영국 황실 공동묘지로 향하는 남편의 관을 바라보며 옛날 일들을 떠올렸다.
  세월은 흘러 심프슨 부인에서 윈저공의 공작 부인으로 신분이 바뀐 그녀도 죽음을 맞이하
여 영국 왕실 공동묘지 구역에 고이 묻혔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세기적 사랑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아르헨티나를 사랑했던 성녀
    에바 페론
  1997년 전세계는 한 여자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죽음을 그린 영화 <에비타>에  주목하였
다. 이미 그너에 대한 전설적인 삶과 사랑은 <아르헨티나여 울지 마오>라는 노래로 세계인
의 주목을 받아 온 지 오래이다.  한마디로 이 노래 덕분에 아르헨티나라는 국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정도로 이 노래는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제 다시 세기의 가수 마돈나의 얼굴로 스크린 위에 그려진 여인, 에바 페론.
  미국이나 유럽도 아닌 남미의 개발도상국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안주인이었던 그녀가 죽은
지 45년 만에 다시 우리들 가슴 속에서 부활 한 것이다.
  그녀의 인기는 아른헨티나의 페스트레이디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필리핀의
이멜다와 버마의 아우산 수지 그리고 지나치게 총명한 미국의 힐러리가 있지만, 이들은 에
바 페론이라는 한 여자의 인생 역정을 따라올 수가 없다.

    거리의 부나비에서 대통령의 부인으로
  그녀는 1919년 아르헨티나의 대초원 로스 톨도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는 자신이 일하던 농장 주인과의 상이에서 다섯 명의 사생아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넷째로
에바가 태어났다. 이런 이력과 계급성은 그녀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그들을 발판  삼아
권력의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아무도 기뻐하거나 돌보지 않았던 사생아 시절에서부터 대통령의 안주인이 되기까지,  그
녀가 겪어야 했던 인생 역정은 그래로 한 편의 드라마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있
다. 한마디로 그녀의 입지전적인 삶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는 일종의 대리 만족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가 있다.
  그녀는 열네 살이 되자 간단한 옷을 넣은 가방 하나만을 들고는 고향을 떠나 부에노스아
이레스에 도착했다. 도시 생활이라는 것이 모든 게 낯설고 어려은 삶이었지만, 타고난 미모
덕택에 그녀의 삶은 공장 노공자의 그것과는 처음부터 달랐다. 낮에는 삼류 배우로 활동하
면서 밤이면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날아다녔다. 때로는 하룻밤의 열정으로, 때로는 짧ㅅ
은 동거에 들어가기도 하면서.
  부나비처럼 떠돌던 그녀가 후안 페론이라는 육군  대령과 만나 긴 동거 생활에  들어가게
된 것이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넷이었고, 후안의 나이는 마흔
여덟이었다.
  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후안 페론은 히틀러의 사회주의를 내걸고 선거를 치러 당선되었
다. 페론이 대통령이 된 것은 앞  뒤 가리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며 선거운동을  했던
그녀의 절대적인 역할 때문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페론에게 얼마나 절대적인가를 증명할 수 있는 사건은 무수히 맣다. 페론
이 자유민주주의 성향이 큰 '반페론  주위자들'에게 감금되었을 때, 그녀는 미모와  정열과
수류탄과 돈으로 밤낮 가리자 않고 노동운동가들을 찾아다니며 매수하고 사주햇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이루어졌고 그 덕택에 후안 페론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에바 신화'에 감동한 노동자들이 후안 페론을 지지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후안은
에바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니지 못한 하층 계급의 지지율을 그녀는 갖고  있었
다.
 "에바. 우리 결혼합시다."
 후안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직전 장기적인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떳떳하게 결혼하자며 에
바에게 제의를 했다. 에바가 하층 계급을 단결시키면 그 힘이 자신의지지 세력으로 지격ㄹ
된다는 것을 후안은 이미 알고 있었다.
 페론주의를 내걸고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후안이었지만 페론주의를 추동하고 선봉에서  이
끈 것은 에바였다. 페론주의는 애국자본주의를 우선 아르헨티나에서 몰아냈다 그  위험하고
도 과감한 조치를 그들은 페론주의에  입각해 거침없이 취해 나갔다. 자신들의지지  기반인
노동장들의 생활과 권익을 위해 법을  만들고 실행에 옮겼다. 한순간에 노동자들의  생활이
신장되었다.
 남녀 노동 임금에 대한 차별도 거의 사라져 여성의 평균 임금이 남성의 90%에 달했다.  자
본주의 사회에서 이처럼 근접한 임금은 사실상 힘든 일이었다. 또한 여성들의 친권과 혼인
에서의 남녀평등을 입법화했다.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등 여성들의 활동이 눈부시게 발
전했다.
 노동자들은 에바와 후안을 환호하며 그 동안 고통받고 억압당하며 살아왔던 자신들의 운명
을 바꿔 줄 인물로 믿고 광적인 지지와 열광을 보냈다.
 
    독재자의 면모
 대통령의 아내가 된 후 그녀는 자신이 마음대로 정권을 주무를 수 있도록 교묘히 자기  사
람들을 내각에 임명했다. 또한 자신과 남편에 대한 우상화 작업에 들어갔다. 한마디로 김일
성 우상화 작업과 다를 게 없었다.
 국민학교에서는 매주 페론 부부를 찬양하는 글짓기 숙제를 해야 했으며, 에바를 차양한 자
서전 <<내 인생의 사명>>을 배웠다.
 우상화 작업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 그녀의 독선을 염려한 나머지 반대하는 자들이 나타났
다. 그녀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소리 없이 잡혀가 고문당하고 심지어는 죽음을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이제 그녀 때무넹 흘린  눈물이 그 여자가 닦아 준 눈물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녀가 도움을 준 사람들로부터는 성녀로 통했지만,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악녀
라 불렀다. 따라서 그녀는 거룩한 악녀였고, 천한 성녀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에바의 생활은 나날이 사치스러워졌고, 군부의 권력은 하늘을 찔렀다. 대통령의  안주인에
게 내맡겨진 아르헨티나 정부는 나눠먹기 식으로 이권을 챙기는 등 부패하기 짝잉 없었다.
그리고 국가의 기간산업을 확충한다는 미명 아래 무리한 중공업 계획이 추진되어 경제가 기
우뚱거리고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런 와중에 에바는 척수백혈병과 자궁암 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받
아들였다. 남은 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노동자와 빈민들을 만나고, 여
성들 정치적인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조직을 강화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말없이 저
세상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었으며 또 한편으로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에바. 장례
는 아르헨티나 국장으로 치러졌다. 한달간 아르헨티나는 에바라는 한 여인의 죽음을 슬퍼하
고 기뻐하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에바 페론이 없는 아르헨티나는 곧 혼돈 그 자체였다. 더 이상 후안 페론은 대통령에 머물
수가 없었다. 후안 페론에 대한 카톨릭의 반대가 심해지자 그는 권력을 이용해 카톨릭을 탄
압하기 시작해싿. 이 때문에 페론은 자신의지지 기반이었던 군부에게 쫓겨나 1955년 해외로
망명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20년간 떠돈 에바의 시신
 정권을 잡은 새 군부는 제일 먼저 '페론주의'를 없앴다. 그리고 아직 에바 페론의 노동자
와 여성을 중심으로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의 시신을 비밀리에 이탈리아
로 빼돌리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에바 페론의 시신을 당장 돌려 보내라."
 페론주의를 지지하는 일부 국민의 거센 반발과 압력에 의해1971년 이탈리아에 있던 그녀의
시신은 후안 페론이 망명 가 있던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넘겨졌다. 여기서 에바의 시신은 또
한번 후안 페론을 위해 기적을 일으킨다.
 그 당시 아르헨티나는 잦은 정권 교체와  악성 인플레이션, 엄청난 실업률로 인해  혼란과
빈곤 그 자체였다. 노동자와 빈민들은 당연히 그 옛날 '에바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바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좌경 세력을 결성하고 투쟁의 기치를 내세우는 집단들
이 늘어났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총파업이 이어지며 유혈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에바는 소원대로 죽어서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후광을 보내고 있었다. 정국의  혼란을
수습할 기력이 없는 군부는 망명 가있던 '후안 페론'의 귀국을 허용했으며, 뒤이어 선거를
실시했다.
 197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에바의 후광을  업고 후보로 나온 일흔여덟의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 선거사상 가장 높은 지지율인 61.85%를 얻어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는 기적을 보
여 주었다. 노동자와 여성들은 에바가 저승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르헨티나를 도와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페론 대통령은 노령에다 심장마비로 권자에 오른 지 열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망명지에서 결혼한 이사벨 페론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를 이었다.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에바의 관을 자신의 관저로 옮겨 놓는 일이었다. 비록 죽었지만 에바가 있는 한 자신의  정
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 에비타'의 효험은 그녀에게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을 가로챈 여인을
죽은 사람인들 좋아할 리가 있을까. 결국 세계 최초의 이 여자 대통령은 21개월 만에  군부
의 쿠데타로 물러나고 말았다. 대통령의 관저에 극진히 모셔져 있던 에바의 관도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가족 묘역에 안치되었다. 죽은 지 24년만에 비로소 그녀는 정열을 바쳐 일했던
조국 아르헨티나의 흙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누가 그녀로 하여금 깊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하였는가?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조국 아르헨티나에 묻혔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잊지  못하
는 사람들은 그녀가 이룩한 전설적인 신화를 들으며 지금도 열광하고 있다.
 1997년 영화 <에비타>로 그녀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다시 한번 복원되었고 세계인들의 가슴
에 커다란 울림을 남겼다. 거리의 창녀에서 대통령의 안주인으로, 독재자로, 그리고 노동자
와 여성을 사랑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인 여걸로.

     
      제 2장 마성의 육체 뒤에 남은 슬픔
     '전갈'이라 불린 전설적인 배우
   
    마리네 디트리히
 아름답게 늙은 여인은 있다. 그러나 젊었을 때의 미모를 그대로 유지하는 여인은 많지 않
다.
 여기 이 여인, 미리네 디트리히는 어떤가.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각선미와 가는 눈썹, 음
영이 깊은 냉냉한 얼굴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시대의 선망을 한몸에 받아 왔다. 그래서
그녀의 당당한 모습은 늘 남성들의 시선을 모아 왔다.
 
    세계적인 각선미
 세계에서 가장 비싼 다리를 지닌 마리네 디트리히.
 최고의 각선미를 자랑하는 그녀의 다리는 그에 걸맞게 그 당시에 무려 200만 달러의 보험
에 들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아름다운 각선미를 유감없이 보여 준 영화는 놀랍게도 그녀가 일흔일곱 살에 찍은
영화 <저스트 어 지골로>였다. 인생의 황혼기에 영화에 출연하는 것도 대단한  정력이지만,
스크린에 등장한 그녀의 자태가 쉰 살도 채 안 돼 보이는 데에 모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영화라는 것이 분장술에 의해 20대도 60대로 보여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마리네 디트리히가 단지 분장에  의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특히 검은 멋쟁이 드레스에 살짝살짝 가려진 아름다운 다리는 그녀의 보물답게 완벽하고 건
재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저건 요물이야."
 "마네킹 아닐까?"
 사람들은 모두 탄성을 자아냈다. 그녀의 다리는 200만 달러 다리답게 아직도 젊음을 그대
로 유지하며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고 있었다.
 그녀가 이처럼 완벽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여배우라는 직업을 가졌을 때부터 남
보다 엄격하고 철저한 자기 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보조개가 들어가면  섹시하다는
생각에 어금니를 빼고, 눈썹을 뽑아 내고서 아이펜실로 얇게 눈썹을 그릴 정도로 미에 관심
이 많았던 배우였다.
 "어차피 배우의 길을 걷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것은 가장 기본적
인 의무지요."
 배우라는 직업을 택한 이상 살아 있는 동안 아름답게 남아 있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바람
이었다. 그녀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여 왔던 것이다.
 그녀는 배우로서 자신을 관리하는 데 엄격했을 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그
만큼 엄격하고 철저한 긴장감의 연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그녀를 두고 많은 식자들은 아
름다움을 간직한 여장부라고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사상에 걸맞게 어네스트 헤밍웨이나 레마르크 같은 예술가들과 교제를 하였
다. 그런 지성적인 남자들만 골라서 사랑을 하였으며, 그녀 또한 그런 남자들로부터만 사랑
을 받았다.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그녀와 처음 만난 것은 스페인 전선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여객선에
서였다. 1930년대 중반 호화 여객선 '일과 사랑'에 우연히 같이 탄 것이 계기가 되어  운명
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여객선 레스토랑에서 13번 자리를 받은 그녀는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그때 헤밍웨이는 키
가 크고 눈썹이 진한 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자신이 배정받은 자리를 양보하였다.
 장시간 여객선을 타고 오는 동안 두 사람은 문학과 사상 그리고 세상의 일상사에 대해  많
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후 미국에 도착해서도 두 사람의 만남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두 사람 사이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세계적인 대문호
와 대스타의 평범하지 않은 관계는 줄곧 '우정'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미국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함께 사는 행운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개선문>의 작가 레마르크였다.
 "레마르크는 좋은 사람입니다. 내가 없으면 그는 곤란한 사람입니다."
 당시 레마르크는 디트리히와 같이 나치스가 싫어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와 그녀의 집
에 오랫동안 머물게 된 것이다. 그의 작품 <개선문> 속에서는 디트리히와 똑같은 주인공이
그려져 있다. 콧대가 높고 눈과 눈 사이가 넓은 창백한 얼굴의 가수 '죠안'은 미트리히  그
자체였고, 또 다른 당장인물인 감성이 풍부하고 나치 독일을 미워하는 사교계의 꽃 '남 케
이트'도 디트리히의 다른 일면이었다.
 프랑스의 배우 장 가방도 그녀와 친한 관계의 남자였다. 그러나 그만은 다른 남자들과 성
경을 달리한다. 두 명의 대작가 외에도 장 콕토, 루키노 비스곤티 등 마리네 디트리히가 어
떤 방식으로 든 친했던 남자들은 전부  지적인 예술가들이었는데, 장 가방은 책 읽는  것은
싫어했고, 극장이나 오페라홀에서는잠을 잤으며, 멋진  매너도 없었고,지넉인 대화도 하지
못했다. 그는 노르망디의 자연을 사랑한,  마음씨 좋은 털털한 연예인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헤밍웨이와 레마르크, 장 가방에게는 일면  공통점이
있다. 모두 바위와 같이 단단한 체격이었고, 내면에는 셈세하게 떨리는 혼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배우이자 가수 그리고 투사
디트리히의 이름이나 얼굴, 또 그녀의 유명한 노래 <릴리말렌>의 그 독특한 목소리는 잘 알
고 있지만 영화로 그 얼굴을 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녀는 <모로코>에서 게리쿠퍼와 같이 공연한 적이 있다.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보고 흘
러흘러 모로토의 허름한 술집에서 가수가 된 그녀는 영화속의 '아리로리'로 분하여  퇴폐적
이고 아름다우면서 선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역시 그 잘 빠진 다리가 거침없이
각선미를 드러낸다.
 스토리 자체는 서로 내일도 없는 사랑에 불타는, 과거 있는 남녀의 멜로드라마일 뿐이다.
하지만 광할한 사막이라든가 모로코의 술집,  대자연의 풍경이나 외인부태, 몰락한  여가수
등등 그야말로 독특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특히 사막 저편으로 죽을 각올 떠나는 게리쿠퍼
를 쫓아서 모래에 발을 빠뜨려 가며 달려가고 매달리는 라스트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랜
감동을 준다. 디트리히가 하이힐을 벗어 버리고 비틀거리며 가는 장면에서는 관개도 자신의
발바닥에 뜨거운 모래의 감촉을 선명히 느낄 정도였다.
  디트리히는 1901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1924년 영화 관계자인 루돌프 자퍼와  결환하였다.
딸 마리아를 낳은 후, 1930년 미국으로 혼자 건너가 <모로코> <간첩X27> 등의 영화에 출연
하여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디트리히가 영화의 제 1선을 떠났을 때는  나이 오십이 지나고 잇었다. 남편도 있도  딸도
성장하여 결혼했고 저축된 돈도 있을 네는 은퇴해도 좋을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은퇴 대신
가수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노래하며 세계 여러 나라를 순례했다. 과거 나치스를 싫어해
버려야 했던 그 모국에서 다시 노래할  무렵에 그녀의 나이는 이미 일흔이었다. 물론  가수
선언 이전에도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노래를 하고 있었다. 활발한 배우 시절에, 그것도
전장의 최전선을 누비면서 말이다. 그만큼 그녀는 열정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에겐 돈과 명예와 가정이 있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풍족한 삶을 누릴수 있었지만
그녀는 가수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그녀를 높이 사는 이유는 투사의  얼굴을
대중에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국이 나치 독일이 되었을 때 히틀러의 정책을 실
랄하게 비판했다. 히틀러와 그 측근들을 혐오한 나머지 국적을 버린 여자였다. 그녀가 미국
인이 되어 할리우드에서 얌전히 영화만 찍었다면  나치 독일도 그녀를 용서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얌전히 있지 못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뜨거운 피를 그대로 잠재울  수가
없었다. 수없이 많은 인터뷰와 신문 지면을 통해 독일군과 히틀러를 비난했다. 그녀는 유태
인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끌려가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일을 당할 때 독일 국민은 왜 침
묵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녀는 독일 국민들에게마저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원하여 미군에 3년간 종군하였다. 그것도 알제리, 이탈리아,벨기에,프랑스
등 위험천만한 전장과전선에서 <릴리말렌>을 부르며 다녔다. 전장을 누비던 군인들은  세계
적인 대스타의 노래와 용모에 반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녀는 투쟁하는 가수였
다.
 과거에는 공연을 하거나 여행을 할 때마다 36개의 트렁크와 50개의 짐을 지니고 다니던 대
스타였지만, 그 당시 그녀가 갖고 다닌 소지춤은 슈츠 하나뿌닝었다. 그녀는 그렇게 전장을
누비며 노래로 그녀의 조국 독일과 싸웠다.
 그녀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을 용서한다? 그것은 독일에 의해 고통받았던 이들의 특권이에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히틀러는 침묵 속에 잠들고 있지만  히틀러의 영혼은 아직도 독일과 독일인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 이처럼 용기 있는 발언을 한 독일인이 또 있을까?
 나치스를 신봉하고 세계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그녀는  전
갈 같은 여자로 매도되고 있다.

    건강한 미인, 큰 인물
  그녀의 노래 중에 <나는 아직 베를린에 슈츠케이스를 두고 있습니다>라는 노스탤지어풍의
곡이 있다.
 
  나는 아직도 나의 슈츠케이스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에는 지나간 그리운 날들이 들어 있습니다.
  베를린의 공기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나는 슈츠케이스를 가지러 또 베를린에 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병사 디트리히, 용기 있는 여성  디트리히. 그녀의 삶은 전쟁과 같은  것이었다.
특히 조국을 적으로 삼았다는 의미에서 인생은 그녀에게 전장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독했
다.
 그녀가 히틀러와 나치스를 비난하고 있을 당시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독일에 남아 있
었다. 매국노라고 불리는 딸을 두고 어머니는 얼마나 안타까운 생각을 했을까? 마리네는 어
머니와 그의 여동생이 당할 고통을 생각하며 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녀는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딸과 서로 인정하고 서로 존경하는 좋은 남편과도 떨어져 살
았다.
 그러던 1976년 여름, 그녀의 좋은 동반자였던 남편 루돌프 자퍼가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
녀는 슬픔을 딛고 2년 뒤 <저스트 어 지골로>에 출연하였다. 그 이후 그녀는 파리의 하파트
에서 조용히 생활하면서 노년을 보냈다.  그녀에게 부여된 마리네 디트리히의 전설을  안고
서...
 
 디트리히를 두고 사람들은 가장 현명하고 멋진 여성이라고 말한다. 마릴린 먼로나  엘리자
베스 테일러를 그렇게 부르진 않는다. 그만큼 그녀는 여느 여배우가 따라오지 못할 기품과
위엄이 있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건강했다. 그녀는 건강한 미인이었고, 큰 인물이
었다.
 그녀가 멋있다는 것은 헤밍우에나 레마르크와 같은 남자들에게 사랑받은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훼밍웨이나 레마르크와 같은 남자들을 '골라서 사랑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누구에게 사랑받기보다는 자신이 사랑의 대상을 골라 찾아다녔다. 지적이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점잖은 남자들을.
 일생 동안 한 사람의 남편을 사랑하고 그와의 결혼을 지키며 살아온 여자. 극히 보통의 자
애로운 어머니의 얼굴로 딸을 키우며 살아온 여인. 인간의 생명은 모두 평등하고 귀하다는
신념으로 조국을 버리면서까지 투쟁한 용기있는 여성. 바로 마리네 디트리히이다.
 
      사랑과 정역의 화신

    카트리느 드뇌브
 차가운 미소, 그러나 가슴 속은 활활 타오르는 정열의 화신. 부모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고,
각광받는 배우인 언니를 시기하며 자란 고독한 소녀. 카트리느 드뇌브는 한 사나이를 만나
사랑하지만, 미혼모가 된 채 헤어진다. 그 이후, 남자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불꽃이었다.
 
    차가운 불꽃
 오늘날에도 고전 명화로 칭송을 받는 뮤지컬 <셀부르의 우산>으로 카트리느 드뇌브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천진하고 밝고 귀여운 얼굴은 오랫동안 그녀를 잊지 못하게 하
는 매력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1966년에 찍은 <낮얼굴>에서는 비도덕적인 토ㅔ폐성을  보이
자 비로소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평가를 다시하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그 이미지에 걸맞게 숱한 염문을 뿌리며 세간의 바람둥이 남자들을 쉴새없이 바
꾸는 정열의 화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은, 수수께끼의 베일 같다고 말한다. 남성을 미치게 하고 파멸
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마성의 여인을 손꼽는다면 단연 카트리느 드뇌브를 떠올린다. 그
만큼 그녀는 섹스와 정열의 화신이었다.
 키 168센티미터, 체중 50킬로그램, 남자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듯한 커다란 눈, 신비
로운 머릿결..... 과연 남자들은 그녀의 외모에 반해 열병을 앓은 것일까?
 카트리느 드뇌브와 많은 작품을 함께했던  미셀피 콜리는 카트리느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말한다.
 "카트리느는 타오르는 불꽃입니다. 그러나 그 불꽃은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그녀에게 한번
사로잡히면 모든 것이 활활 타 버리고 맙니다. 차갑게."
 모든 남성들의 가슴을 새까맣게 태울 정도로 열정을 가슴에 담고 다니는 여자. 그녀의 사
생활 또한 그러했다.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동안 차가운 정열의 삶을  살아왔다.
비리지트 바르도의 첫 남편이기도 한 로제 바딤 감독과 열정에 빠져 임신을 하였지만 끝내
그와 결혼은 하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여자였다.
 
    애정 없는 동거 생활
 스타 제조기로 불리는 로제 바딤과의 첫 만남은 당시 신인 배우였던 그녀의 언니 프랑소와
즈를 만나러 촬영 장소에 갔던 것이 계기였다.
 "저기 키 큰 사람이 바로 로제 바딤 감독이야. 너 인사할래?"
 장래가 기대되던 프랑소와즈는 자신의 동생을 바람둥이 명감독에게 소개했다.
 "동생 카트리느예요. 지금 막 영화를 시작했어요."
 "오호, 영화배우시군."
 "그런 건 아니고, 단역 정도에 불가해요."
 카트리느를 소개받은 바딤은 순간 내부에서  강한 정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흠칫
놀랐다. 바딤은 순진하고 발랄한 카트리느를 눈여겨 살펴보았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가
명조련사의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바딤이 카트리느의 몸매와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는
동안 그녀는 알몸이 된 것 같아 숨이 막히는 듯했다.
 "지금 머리칼도 충분히 매력을 발산하지만, 남자란 금발을 좋아한단다."
 "제가 금발이 어울릴까요?"
 "그럼. 너도 예쁘게 변신하고 싶지 않니?"
 "저, 영화를 위해서 말예요?"
 "....아니."
 바딤은 조용히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바딤과 열일곱 살 풋처
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바딤의 눈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날 위해서."
 그녀는 더 이상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려웠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좋아요."
 그녀의 대답은 짧았으나 단호했다. 바딤은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고는 머리를 매만져  주었
다. 열일곱 살의 소녀 카트리느는 이미 바딤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 브리지트 바르도를 일
약 세계적인 스타의 자리에 올려놓은 명감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위대한 명감독이
풋내기에 지나지 않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보통 행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잘 하면 언니 프랑소와즈보다 더 인기 스타가 될지 모른다는 욕심
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이건 신이 나에게 준 행운이야.'
 그녀는 바딤을 슬쩍 바라보았다. 바딤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미 바딤은
두 차례의 이혼 경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바딤의 나이는 서른세 살.
 
 두 사람은 서로를 충족시켜 줄 여건이 맞아떨어져 만난 지 5일만에 정열의 나라 타히티로
여행을 떠났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카트리느는 바딤이 시키는 대로 머리를 금발로 물들였다. 속옷을 입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
다. 이미 바딤은 여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는 중년이었다. 여자가 원하는 것을 바
딤은 충분히 줄 수 있었기에, 카트리느는 불과 열일곱 살의 나이에 바딤에게 몸과 마음  모
두를 바쳤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그런 수줍음 많은 소녀가 아니었다. 시나리오 작가, 기업가,
프로듀서 등 어린 그녀가 사귄 남자들은 놀랍게도 아버지 나이의 중년이었다. 무대 배우였
던 아버지의 사랑을 별로 받고 자라지 못한 그녀는 보상 심리로 인해 나이가 많은 남자들을
상대했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인도해 줄 버팀목이 필요했
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출세를 도와 줄 지서오가 애정, 그리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남
자들을 상대로 사랑을 나누었다. 어릴 때부터 세상을 일찍 알고 남자를 알아 버린 그녀에게
바딤은 자신이 꿈꾸어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고의 남자였다.
 "카트리느. 이제부터 넌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돼."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께요. 최고의 스타만 될 수 있다면."
 바딤은 그녀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악덕의 영예>를 제작했다. 물론 그녀를 주인공으로  캐
스팅한 영화였다. 하지만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는 원만
하지 못했다. 사랑으로 만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목표가 실패로 끝나자 헤어질 생
각을 하고 있었다.
 카트리느는 더 이상 바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카트리느
는 바딤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고민 끝에 그녀는 바딤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았다.
 "임신했다고?"
 바딤은 조용히 카트리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착잡한 심정이 얼굴에 나타났다.
 "그래, 낳을 거야?"
 카트리느는 한참 만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자 바딤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
다가 무겁게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 결혼하지."
 결혼! 동거 3년 만에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카트리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바딤과의 만남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3년간의 동거를 하는 동안 두
사람 가운데 누구 하나 결혼하자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두 사람 다 사랑보다는 자신
들의 목적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은 하지 않지만 아이는 낳는다."
 사람들은 그녀의 독한 마음에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카트리느는 바딤과 헤어진 후 파
리의 한적한 병원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 열아홉 살의 미혼모라는 사회의 비난을 받으면
서.
 카트리느가 바딤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동안 바딤은 <윤무>라는 영화 촬영에 들어가
제인 폰다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트리느는 남자에 대한 절망과 슬픔, 괴로움으
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딤에 대한 증오는 한편으로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내가 어려움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딤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다."
 훗날 카트리느는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듯이, 그녀는 바딤에게  상처받은
뒤 어린 사생아를 안고 다니며 영화사를 기웃거렸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향해 부도덕하
다고 비난을 퍼붓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격려를 보
내기도 하였다. 카트리느가 바딤과 결혼하지 않으면서도 사생아를 낳아 기를 생각을 한 것
은 어떤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열아홉의 나이로, 그것도 미혼모의 상태에서  자신이
추구하던 출세의 길을 가기엔 너무 힘들고 먼 길이라는 것을 새삼 꺠달았다. 사회는 냉정했
으며 더구나 영화 쪽은 사생아를 낳은 그녀에게 냉담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뜻하지 않은  행운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를 세계적인  스타로
기억되게 한 영화 <쉘부르의 우산>이었다.
 "출연료는 5,000달러밖에 안 되는데......"
 영화사 관계자는 다소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카트리느에게 말했다.
 "5,000달러라고요?"
 카트리느는 다소 놀라는 표정으로 영화감독을  쳐다보았다. 영화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트리느는 사생아로 자라고 있는 어린 딸 크리스티를 떠올렸다. 여기
서 물러선다면 자신은 영영 스크린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카트리느는 바딤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쉘부르의 우산>에 전력을 다해 매달렸다.  여
기서 실패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이 영화는 1964년 칸느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했다. 이때 카트리느의 나이 스물한 살
이었다.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것이다.
 
    또다시 고독 속으로
 크리스티를 볼 때마다 바딤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강인하게 딸을 키우며 영화에 몰
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제 바딤이 미국 여배우와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식을 올
렸다. 이에 감정이 상한 카트리느는 사진작가 베일리와 전격적으로 결혼을 하였다.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녀는 바딤에 대한 상처 때문에 베일리와 쉽게 결혼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결혼도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베일리는 카트리느의 몸매에  더
관심이 많았다. 카트리느를 모델로 사진을 찍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이
다.
 카트리느는 점점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밖에서 생활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소문이 들렸지만 베일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 5년 만에 이혼하고 말았다. 다행히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혼자 살고 있는 그녀에게 바딤은 언제나  마음 한구석의 그늘로 자리하고 있었다.  바딤이
그녀에게 끼친 영향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크리스티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런던의 폴란스
키 감독의 집에서 벌어진 파티에서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해바라기>의 스타 마르첼로 마
스트로얀니였다.
 "저 남자다. 나는 이제 혼자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저 남자와 살아야 해."
 카트리느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를 보는 순간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둘이 만난  지
한 달 후 마르첼로는 로마에 처자를 남겨  두고 세느 강가에 있는 카트리느의 집으로 아예
옮겨왔다. 두 사람만의 사랑이 카트리느의 호화 맨션에서 싹트고 있었다. 1970년, 카트리느
는 스물여덟이었고, 마르첼로는 마흔여섯이었다. 그녀에게는 그처럼 아버지 또래의 나이 많
은 사람들이 더 편했는지 모른다.
 마르첼로와 카트리느는 <슬픔이 끝나는 때>와 <썰물> 등 몇 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훗날 카트리느는 <썰물>은 자신이 연기한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였다고
고백했다. 하기야 사랑하는 사람과 지중해의 태양과 파도를 배경으로 실제와 같이 영화 촬
영을 했으니..... 온 세상이 자기 것처럼 기쁘기만 하였다.
 지중해에서의 촬영이 끝나고 카트리느는 마르첼로의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번쨰 아기를 가진 그녀는 마르첼로와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첼로에게는
20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미안하군. 우리 조국 이탈리아에선 이혼이 인정되지 않아."
 그 당시만 해도 이탈리아에선 이혼이 인저오디지 않았다. 마르첼로는 이탈리아의 법을  들
먹이며 변명을 했다. 실제로도 그는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카트리느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
다.
 "그래요? 난 괜찮아요. 지금이 행복하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카트리느는 두 번째로 사생아를 낳았다.  그녀는결혼에 집착을 갖거나 사랑이  영원하다고
믿지는 않았다. 하루하루가 재미있고 행복하면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아이를 낳은 지 3년 후 마르첼로는 결국 이탈리아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갔다. 카트리느는
또 혼자가 되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고독을 이겨 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고독이 밀려왔을 때, 슬픔이 엄습했을 때 나는 내 자심을 고양이처럼 훈련시켰다. 고양이
는 어둠 속에서도 위험한 물건을 분간하고, 지붕에서 떨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고 사뿐히 땅
에 내려앉는다."
 카트리느는 혼자 살면서 두 아이를 길렀다. 그리고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 보았다. 과연 자
신에게 행복한 날들이 있었던가.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살았고 또 그의 아이도 낳았음에도
여전히 혼자인 자신의 인생에 대해 점검해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 난 내 아이들이 태어난 날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 이제부턴 사회적인 명성이
나 성공보다 나는 개인적인 사랑이나 행복을 선택하고 싶어."
 어느새 카트리느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그녀의 바람대로 과연 개인적인  사랑과
행복이 찾아올 것인가. 그러나 아무도 카트리느의 미래에 대해선 장담을 하지 못했다.
 
 아직도 여전히 혼자인 카트리느. 그래도 그녀는 프랑스 정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럽 최고의 섹스 심벌, 브리지트 바르도
 마성의 츅체로 뭇 남성을 매료시키고 가엾은 사랑의 편력을 거듭 되풀이했던 여자. BB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유럽의 섹스 심벌로 사나이들을 유혹했던 그녀도 결국 흐르는 나이를 잡지
못했다. 뜨겁게 타오르던 그 사랑의 불꽃도 이제는 덧없는 신화가 되어가고 있다.
 
    프랑스 영화계의 부나비
 "세상의 아내들로부터 남편을 강탈한다."
 얼마 전 타계한 프랑스 문단의 거성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브리지트 바르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브리지트 바르도의 남성 편력은 죽기 전까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시샘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입방아를 찧었다. 그 말에는 은근히 브리지트 바르도의 애정행각을 질투하
는 측면도 있었다.
 브리지트 바르도는 맨발이 가장 어울리는  여자라고 한다. 여자의 맨발은 무엇을  뜻할까?
왠지 여자의 맨발은 성욕을 느끼게 하는데, 가령 방금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 여자의 모습을
볼 떄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이 바로 맨발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성욕이 잔뜩 묻어 있는
맨발로 세상의 바람둥이 남자들을 톡톡 건드리고는  저만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훨훨
날아갔다가, 기억 속에서 잊혀질 즈음이면 다른 남자 품에 어느새 안겨 있었다.
 남자들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도원해 애인의 육체를 탐하고는 갈아 치우듯, 브리지트 바르
도도 프랑스의 내노라 하는 인기 스타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는 싫증이 나면 언제든지 쉽
게 갈아 치웠다.
 요즘 세상이라면 여자가 애인을 쉽사리 차  버리는 게 무슨 큰 사건이겠는가 생각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1960년댈하면 사정이 좀 다를 것이다. 대단한 용기가 있거나, 아니면 어떤
성격 결함이 있는 것으로 여길 정도로 사회의 반응은 그만큼 보수적이었다.
 이런 시대에 한 사람에게 만족을 못했던 브리지트 바르도는 늘 연하의 남자를 골라 애정행
각을 벌여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에 충분했다. 부나비처럼 이 남자 저 남자  품을
골라 날아 다니는 그녀에 대해 일부 여성 운동가들은 "브리지트 바르도는 성해방의 선구자
이다." 라고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적인 여성들은  "브리지
트 바르도는 단순히 육체의 향연을 쫓는 타락한 여자일 뿐이다."라며 거칠게 비난을 퍼부었
다.
 세간의 내노라 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가 된 브리지트 바르도의 애정행각은 이
미 한 사람의 스캔들이 아닌 프라스 전체의 관심으로 발전하여, 언제 누구와 또 다른  애정
행각을 벌일지 브리지트 바르도가 가는 곳이면 늘 소문이 따라다녔다.
 
    새로운 스타의 탄생
 그녀의 가정은 부유한 편이었다. 가정교육은 엄격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공부를  싫어하여
중학교 졸업이 그녀의 최종 학력일 뿐이다. 그녀는 내성적인 편이어서 사람들 앞에 나설 때
에는 수줍어했으며, 몸은 어릴 때부터 마른 편이었다.
 부유한 재산의 상속녀이기도 했던 그녀는 로제 바딤이라는 한 남자를 만나면서부터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보부아르는 "여자는 남성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 아닐까.
 로제 바딤은 겨우 열여섯 살의 브리지트 바르도를 '여성'으로 만들어 그녀를 차지해 버렸
다. 여섯 살 연하의 그녀를 바딤은 매우 귀여워하였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아파트엔 햇
볕이 들지 않고 침대도 중고였지만, 바딤과 그녀는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냈다. 로제 바딤
과 결혼할 당시 양친의 반대에 부딪혀 그녀는 자살 소동까지 벌여 가며 결혼을 성사시켰다.
 로제 바딤은 <아름다운 악녀>라는 영화에 그녀를 주연으로 내세워 그녀와 자신을 어느 날
갑자기 유명 인사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변신의 천재였다. 로제 바딤은 브리지트 바르도와
헤어진 후에도 똑같은 수법으로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자신의 영화에 배우로 캐스팅한  뒤
그 여자와 동거를 거쳐 결혼을 하고 마는 성적 매력이 넘치는 사나이였다. 로제 바딤은  브
리트 바르도말고도 카트리느 드뇌브, 제인 폰다 등 자신이 만들어 낸 유명 배우들과 동거하
고 결혼하고 이혼하는 과정을 거듭하였다.
 아무튼 로제 바딤이 브리지트 바르도를 처음 발견한 것은 잡지 표지에서였다. 로제 바딤은
잡지를 들고는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위대한 배우로서의 가능성이 있는 여자로 점찍었다. 로
제 바딤은 한번 점찍은 여자는 반드시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어오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는
감독이었다. 또한 그에게 사로잡힌 여자는 반드시 철저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교육시키고 키
워 나갔다.
 그는 브리지트의 블라우스와 내의를 벗기고 맨살에  꽉 끼는 스웨터는 입혔다. 집에  있을
때는 절대로 내의를 입지 말도록 아내인 브래지트에게 늘 충고를 하였다.
 "브래지어나 팬티는 여자가 모르는 사이에 여자를 성적으로 둔감하게 만든다."
 바딤은 늘 여자는 아름다워야 하고, 그  아름다움을 가꿀 줄 알아야 하고, 그  아름다움이
실생활에 배어 있어야 하고, 또 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바딤의 주문대로 머리를 금발로 물들였다. 금발은 남자들을 성적으로 흥분시킨다고
바딤은 생각했다. 브리지트는 옷을 걸치지 않은 알몸에 금발을 펄럭이며 집안을 걸어다니거
나 때로는 동물처럼 뛰어다녔고,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앉아 있거나 심지어 책을  읽을
때에도 같은 모습이었다. 잠을 잘 때에 알몸인 것은 당연했다.
 바딤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영화 속에서 알몸의 브리짓트가 나이에 맞지 않게  태연하게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실생활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블루진에 꼭 끼는 스웨터, 맨발 차림으로 산트로페를 걸어다니는 그녀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브리지트 바르도  때문에 온 세상의 소녀들이 블루진을  섹시하게
입기 위해 알몸으로 옷을 입는 유행이 번져 나갔다. 바딤의 생각은 멋들어지게 맞아떨어졌
다. 사람들은 브리지트 바르도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마치 누드로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여자다."
 드디어 바딤과 브리지트 바르도가 원하는 대로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여배우가 탄생한 것
이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바딤은 그녀를 유명한 배우로 탄생시켰지만 여자
로서, 아내로서 그련를 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엔 내가 바딤에 의해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는 생각에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어
요. 하지만 저도 배우 이전에 여자란걸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ㅇ낳았어요.
바딤은 분명 훌륭한 감독임에는 틀림없어요. 한의 외모를 바꾸고,살아가는 방식을 바꿔  주
고... 하지만 날 아내로서 인정을 해 주지 않는 것 같았어요."
 바딤은 여자를 보는 관점에 있어 귀족적 취미와 악마적 냉담함을 동시에 지닌 사나이였다.
바딤이 사랑하는 것은 렌즈로 통한 브리지트일 뿐이지 아내로서의 브리지트는 아니었던  것
이다.
 
    끝없는 애정행각
  브리지트가 스스로 여자임을 느끼게 한 사건은 놀랍게도 <아름다운 악녀>의 상대역이었던
장 루이 트랑티냥과의 러브신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장과 뜨거은 포옹을 되풀이하는 동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껐어
요."
 남편 바딤의 냉담함에 비하면 장은 여자를 보살펴 줄 줄 아는 따스함과 매너가 잇는  매력
적인 남자였다.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은 절대로 그대로 가슴에 담아 두지 못하는  브리
지트 바르도는 남편 바딤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고백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대화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했다. 촬영이 끝나는 날 브리짓트는 오랜 침묵 끝에 바딤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저어, 바딤. 날 좀 봐요."
 바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냉담한 표정으로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고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딤. 화내지 말고 내 말 잘 들어요."
 바딤은 순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장을 사랑하고 있어요."
 바딤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남편에게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브리지트의 모습이 천진난만한 소녀 같았다.
 "언제 부터지?"
 그녀가 씨익 웃으며 남편 바딤의 얼굴을 매만졌다.
 "영화를 찍을 때 장과 뜨거운 포옹을 하면서 사랑을 느꼈어요."
 "그래? 잘 생각해 봐. 장과 영화를 찍는 그 순간만의 감정이 아닌지. 정말자신이 장을  사
랑하고 있는지 냉철해질 필요가 있어."
 역시 바딤은 사랑에 관한 한 냉정한 사람이었다. 혹시 바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브리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말을 꼭 하지 않으면 영영 후회할 것 같았다.
 "바딤. 하지만 장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언제나 함께 있고 싶은걸요."
 바딤은 다소 당황한 듯 잠시 눈을 감고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럼 언제 나갈 거야?"
 "지금 당장."
 브리지트는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남편에게 등을 돌리고는 영원히 돌아가지 않았다.  그
녀의 성격을 잘 보여 준 이별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브리지트가 세상의 남자들을 자신
의 입맛에 맞게 사냥하며 자유를 누리는 첫걸음이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을 만족시켜 줄 새로운 남성을 찾아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는가 하면, 브
리지트답지 않게 사랑을 위해 자살 소동까지 벌이는 등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켜 나갔다.
 자신 있게 이 남자 저 남자를 품에 안고 자유롭게 사는 브리지트였지만 바딤의 그늘을  영
원히 떠날 수는 없었다. 바딤은 나름대로 의 철학을 갖고 그녀를 배우로 키워 주고  여자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었다. 그런 만큼 비록 헤어졌지만 두 사람에게는 우정과 존경이 남아 있
었다. 그녀가 품에 안았던 다른 남자들에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던 데  반해,바딤과는
헤어져 있으면서도 우정과 존경의 마음이 항상 남아 있었다.
 어쨋든, 브리지트는 트랑티냥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는데, 결국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트랑티냥의 부인이 절대로 남편과 이혼을 하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텼기 때문이었다. 이에
브리지트는 잠시 조용히 지내는가 싶더니, 트랑티냥이 군에 가자마자 무료한 생활을 달래기
위대 다른 사내에게 접근하였다.
 2년 연하인 스물두 살의 핸섬한 배우 자크 샤리였다. 두 사람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사
랑을 나누느라 모든 생활을 잊고 있었다.
 1959년, 브리지트는 재혼하여 가정 생활에 충실하며 그 이듬해에 아들 니콜라이를 낳았다.
하지만 자크는 대스타의 남편이라는 긴장 속에 살다 보니 사사건건 그녀를 속박하기 시작했
다. 원래 섬세한 성격이었던 자크는 자신도 군 복무로 그녀 곁을 떠나게 되자 점점  그녀의
싱활을 일일이 체크하며 자유분방한 그녀를 집에 가두려 했다. 브리지트는 남편의 극에 달
한 간섭에 상상할 수 없는 망상 때문에  집에서 아이를 기르며 무료한 생활으 하기 시작했
다.
 이 무렵, 그녀는 쿠르조 감독의 <진실>에 캐스팅되어 촬영에 들어갔다. 쿠르조는 처음부터
영화 촬영보다는 그녀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영화는 뒷전으로 밀어 놓고 그녀에게 온갖 선
물 공세를 하면서 열을 올렸던 것이다. 그 바람에 쿠르조의 아내인 여배우 베라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그녀는 또 한번 세상의 구설수에 올랐다.
 결국 쿠르조와는 별볼일 없이 헤어지고,<진실>에 상대역을 맡았던 새미푸레이와의  사랑에
열을 올렸다. 이 소문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군 복무 중이던 자크의 귀에
도 들어가, 결국 자크는 자살 소동을 일으켰다. 다행히 병원으로 급히 옮겨 목숨을 건졌지
만 몸과 마음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폐인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
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의 애인 새미푸레이가 자살을 기도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 자신이 자살을 기도했다. 다행히 그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당시 연이여 그견와
그녀 주변에서 이어지는 자살 소동은 프랑스 최대의 스캔들이 되어 버렸다.
 그 후 그녀는 사랑하고, 결혼하고,  이혼하는 패턴을 답습하며 문란한 사생활을  끈질기게
되풀이하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녀가 남자를 마음대로 골라 동거하다가 결혼하고  싫증이
나면 순식간에 차 버리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의 최초의 남편 바딤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만큼 사치한 여자는 없다. 그녀를 손에 넣는 남자는 아마 지옥 같은 생활을 경험할 것
이다."

    BB와 MM
  흔히들 브리지트 바르도를 BB, 그리고 마릴린 먼로를 MM이라고 부른다. 한 사람은 유럽의
섹스 심벌, 또 한 사람은 미국의 섹스 심벌이다. 두 사람 모두 마성적인 육체를 무기로  삼
은 여배우라는 점에서 같은 점이 많았으나, 살아가는 모습은 판이하게 달랐다.
 남성 편력의 수는 바르도보다 마릴린 먼로가 더 많았으나, 깊은 상처를 당하는 쪽은 언제
나 마릴린 먼로였다. 물론 브리지트도 사랑 때문에 자살 소동을 벌였지만 그것은 그녀의 성
격에서 오는 히스테리 발작에 의한 소동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자살 소동을 벌일  때도
자신이 어디에서 발견될 것이라는 것을 이미  계산에 넣고 행동하는 영악함이 드러나  보인
다. 그만큼 브리지트는 남자 사냥꾼이었지  사냥감은 아니었다. 자신은 상처를 입지  않고,
사냥감인 남자를 철두철미하게 상처를 입혀 놓고는 유유히 언제 그랬냐는 듯 떠나는 스타일
이었다. 이러한 남성 편력과 성격을 잘  알면서도 남자들은 그녀와 연애를 못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바로 그녀의 매력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남자들을 안달이 나도록 만드는  그
섹스 심벌.
 그녀는 사랑의 상대를 2년에 한 번 정도 바꾸었고 결혼 생활은 길어야 7년을 넘기지  못했
다. 열여섯 살 때 바딤과의 첫 결혼, 자크 샤리와의 두 번째, 그리고 억만장자  자쿠스와의
세 번째 결혼. 하지만 모두 파국을 맞았다.
 자쿠스는 억만장자답게 수많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찾아 다니는 유럽 제일의  플레이보이였
다. 그 플레이보이 눈에 브리지트가 안 들어올 리가 없었다. 물론 그 또한 브리지트의 사냥
감에 불과했지만, 그 플레이보이는 돈을 물 쓰듯 하며 온갖 비싼 선물 공세를 편 끝에 그녀
를 자가용 비행기에 태우고는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억만장자에
게서 그녀는 루비,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세 줄의 목걸이를 결혼 선물로 받았다. 프랑스 3
색기를 연상시키는 호화찬란한 예물이었다. 그러나 2년 만에 유럽 최고의 플레이보이도  어
김없이 브리지트의 밥이 되어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도 이젠 성숙해져 배우로서나 여자로서나 정산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정상에
오르면 누구든지 내리막길이 있기 마련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흔히 나이가 들면 배우오서
또는 생활인으로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게 보통인데, 브리지트에게만은 여전히 남자  사냥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1970년에 들어서자 브리지트는 동물보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브리지트 바르도 기금
을 설립하고 야생 동물 보호에 열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타고난 마성은  결국
남자 사냥감을 찾아 방황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40의 나이에 <파리는 변덕쟁이> <램의 대로> <돈판> 등의 영화에 출연하는 한편 파리 태생
체코슬로바키아의 조각가와 5년간 동거를 하였다. 그러다 1982년, 텔레비전 프로듀서인  알
랑과의 연애로 그녀의 마성은 종착점을 찾는 듯하였다. 알랑과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 이미
마흔여덟이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은 육욕을 즐기는 데 소비했다. 그러나 육체는 언젠가는 썩고 마는 것."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며 그녀답지 않은 말을 하여 사람
들을 또 한번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알라오가의 열애도 2년 만에 파탄으로 끝나고 말았다. 마흔아홉의 생일을 맞은 날
그녀는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는 깊은 바다를 향해 몽롱한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다행히 위험한 순간에 의사에 의해 발견되어 병원으로 보내져 목숨은 건졌다.
 그녀는 현재 동물보호운동에 전심전력을 다하며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그녀의 비극은 로제 바딤이라는 매력적인 마술사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속
담에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튼 세월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발레로 단련된 멋진 육체는 수많은
남성들을 사로잡았지만, 결국 나이가 들자 유럽을 지배했던 섹스 심벌도 더 이상 남성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어느 날,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가'라는 영화 기자들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싫어하는 것을 모두 하는 거죠."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의 사
치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세계 최고의 부나비,엘리자베스 테일러
 세계 최고의 요부. 이 남자 저 남자 품으로 부나비처럼 꿀을 찾아 떠도는 여자.  고양이처
럼 푸른 눈을 가진 이 여자 앞에서는 아무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제임스 딘이나, 몽고메리
크리프트, 혹은 리처드 버턴이라 할지라도 그녀 앞에선 모두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너무 아름다워 신이 시기를 했다는 리즈 테일러. 여러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동안
더더욱 아름다움이 더해진 리즈는 사랑하는 사람과는 반드시 결혼을 하고야 마는 완벽한 여
자였다.
 
    완벽한 미모의 배우
 지금까지 엘리자베스 테일러만큼 많은 남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여자는 없었다.  이혼과
결혼의 횟수만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반드시 그 남자를 독점했으며, 또 그남자와 결혼이라는  통과의
례를 거쳐야만 만족을 하는 여자였다. 사랑하여 아이를 낳았지만 경코 결혼은 하지 않는 카
트리느 드뇌브와는 또 다른 면을 가진 여자였다.
 엘리자베스와 공연을 하거나 함께 일한 남자들은 거의 모두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어갔다.
초승달처럼 가는 눈썹, 파란 눈동자를 가진 커다란 눈, 성적 매력이 넘치는 석고상 같은 완
벽한 입술, 오똑한 코, 가는 허리, 미끈한 다리......... 그녀는 완벽한 미모를 지닌 배우
였다.
 리즈와 촬영을 함께 한 남자들은 그 상대가 누구건 간에 모두 그녀로 인해 애를 태웠으며,
결국은 가정을 버리고 그녀와 결혼을 하는 파멸의 길을 걸었다.
 이런 그녀의 습관적인 결혼과 이혼을 두고  세간의 많은 사람들은 창녀 기질이  있다느니,
태어난 운세가 요부의 기질을 갖고 있다느니 비난의 화실을 퍼부었다.
 과연 리즈 테일러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걸일까?
 
    결혼과 이혼, 이혼과 결혼
 리즈 테일러는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리즈의  재능과
아름다움을 알고는 대스타로 키우기 위해 할리우드 근처로 이사를 왔다. 이미 그녀는 명견
래시를 등장시킨 어린이 영화 <가로>에 출연하여 대스타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
다. 그 후 열세 살 때 <녹색의 천사>로 인기 스타가 되었다.
 그녀는 여느 세계적인 스타들과 마찬가지로 열일곱의 나이에 그 당시 호텔왕의 아들 닉 힐
튼과 첫 결혼을 하였다. 대부호의 돈과 미모의 그녀가 만난 애정 없은 결혼 생활의  시작이
었다.
 두 사람은 4주간 일정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과 축복을 한몸에 받
고 떠난 초호화판 신혼여행에서 두 사람은 심하게 다투었다.
 "난 이 남자와 결혼 생활을 오래 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벌써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성격 차이로 결혼 생활 6개월을 못 넘겼다. 그 후 리즈의 불가사의한  애정행
각이 버릇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결혼은 리즈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인 영국 배우 마이클 와디오가였다. 그녀는 닉
힐튼처럼 자신의 성격을 감싸 주지 못하는  절믕ㄴ 남자보다는 나이가 지긋하게 든  사람을
남편으로 택한 것이다. 하지만 마이클 와딩은 끝내 그녀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아니 감히 리즈라는 대스타와 맞설 수 있는 스타는 아니었다.
 결국 와딩은 그녀가 해외 촬영이나 지방 촬영을 떠날 때마다 옷이나 가방을 챙겨 주는  역
할밖에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녀가 영화 촬영을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동안 와딩은 별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친구들을 불러 샴페인이나 터트리고 무위도식하며
세월을 보냈다. 결국 두 사람은 마이클 주니어와 크리스토퍼를 낳고 이혼을 하고 만다.
 리즈는 이혼에도 별 동요 없이 <자이언트>에서 영원한 청춘 스타 제임스 딘과 열연을 펼쳤
다. 세 시간 18분의 대역작을 촬영하는  동안 스물세 살의 리즈는 처녀역부터 손자가  있는
할머니역까지 열연을 평쳐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녀는 촬영이 끝나고 시사회를 보다가 제임스 딘의 자동차 사고 소식을 듣고는 절망의 소
리를 질렀다고 전한다.
 "그럴 리가. 거짓마, 거짓말이야."
 제임스 딘은 자신이 아끼던 자동차로 스피드를 내다가 그만 사고를 일으켜 즉사하고 말았
다.
 그녀는 제임스 딘과 몽고메리 크리프트와 같은 배우들을 좋아했다. 두 사람 모두 반항적이
고 섬세하며 여자로 하여금 모성 본능을 일으키게 하는 남자들이었다. <애정이 꽃피는 나무
>를 촬영할 당시 그녀는 상대역인 몽고메리  크리프트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신의 질투
 마이클 와딩과 이혼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자 세상의 능력 있고 용기 있는 남자들
이 그녀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혼 소식이 나간 바로 그 다음날,<80일간의  세
계 일주>를 제작해 위대한 제작자로 알려진 마이크 토드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리즈. 좀 만나지. 할 이야기가 있는데."
 토드는 이미 리즈를 영화사 식당에서 본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하고 앉아 있었지만
이렇다 할 이야기는 나누지 않고 눈만 마주 보며 웃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오가는 동안 토
드는 유독 눈이 아름다운, 그래서 그 눈을 30억 원짜리 보험에 든 리즈에게 그만 빠지고 말
았다. 
 그눈을 잊을 수 없어 불멸의 밤을  지새웠던 날이 얼마던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 그는 리즈를 자신의 집에 초댛하기도 했다.
 그후 토드는 매일 그녀의 집으로 커다란 꽃다발을 보내고, 지방 촬영이 있는 날이면 어김
없이 전화를 거는 등 그녀의 환심을 사기에 바빴다. 촬영 도중 휴가를 얻게 되면 토드는 자
신의 자가용 비행기를 그녀에게 보내 뉴욕으로 초대했다. 애지중지 아끼는 보물이 다른 사
람의 손에 닿지 않게 해서 하기 위해서.
 "난 당신과 결혼을 하고 말 거야. 당신을 사랑한다고."
 영화 제작자로서의 명성과 부, 게다가 다른 남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정열의 소유자 마이
크 토드는 결국 리즈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한다.
 리즈는 1957년 1월 31일.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에 두 번째 이혼을 한다. 그리고 이틀  뒤
인 2월 2일 아카폴코에서 마이크 토드와 결혼을 한다. 그녀는 한번 사랑하면 고민 같은  것
은 하지 않고 결혼도 순식간에 해 버리는 불 같은 성미를 지닌 화끈한 여자였다.
 "마침내 바라던 남자와 결혼하게되어 행복하다."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자신과 걸맞는 영화 제작자와 함께 사는 것이 즐거웠다. 인생의 의
미를 생각하며 한 여인으로서 또한 영화배우로서  순탄한 길만이 그녀에게 있을 것만  같았
다.
 그녀와 토드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름다운 리즈와  위대
한 영화 제작자를 보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리즈는 가정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라는 영화를 마지막
으로 토드를 보필하며 가정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녀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녀가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그녀와  함께
사는 남자들에게 불행을 안겨다 주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녀가 혼자 남아 영화를 통해  세
상 사람들의 영원한 연인이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해 토드는 최우수 쇼맨으로 선정되어 뉴욕의 시상식장으로 비행기를 타고 타고  있었다.
물론 리즈도 함께 갈 예정이었으나 심한  감기몸살 때문에 집에 혼자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은 비행기를 몰고 나간 후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기상 악화로  비행기
가 산봉우리에 충돌하여 영원히 제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토록 리즈와 결혼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마이크 토드. 결국 그녀를 자신의 품에 넣었
지만 그것은 고작 14개월에 불과했다. 미의 여신들은 한 삶이 그녀를 오랫동안 차지하는 것
을 원치 않았다. 너무도 아름다운 그녀였기에 신들도 시샘하는 듯했다.
 리즈는 또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이번에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데비  레
이놀즈의 남편인 가수 에디 피셔와 놀아났다.
 에디는 처음에는 리즈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를 만났다. 그러나 대화를 하고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사랑으로 변하고 말았다. 에디 피셔와 리즈가 함께 춤을 추는 사
진이 신문에 났는데도 데비 레이놀즈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리즈는 나의 친한 친구다. 그리고 내 남편과  리즈 또한 친구다. 친구와 함께 춤을 추는
것이 뭐가 이상한가?"
 그녀는 남편과 친구  리즈의 관계가 우정 이상은 아닐 거라고 자만했다. 물론 데비 레이놀
즈와 에디 피셔는 소문난 잉꼬 부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뜨겁게 달아올랐으며 결국 결혼에 이르고 말았다. 이때부터 리즈와 에디
피셔는 배신자, 추한 사람들이란 비난과 함께 인기가 떨어졌다. 에디는 남자를 홀리는 리즈
의 불가사의한 미모와 상상을 초월한 그녀의 재산 때문에 리즈를 선택한 것이었다.
 에디는리즈가 벌어 놓은 돈을 쓰면서  살았다. 리즈는 세상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클레오
파트라>의 주인공을 맡아 촬영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따. 에디는 그녀의 뒤를 돌봐 주며 심
부름을 하고 짐을 꾸리는 역할밖에 할  수가 없었다. 촬영을 끝내고 초죽음이 되어  돌아온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술취한 남편 에디와 무위도식하는 그의 친구들이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야. 내가 왜 이 남자를 선택했을까. 그의 위로에 내 마음이 흔들였을
뿐이야. 이 남자와는 평생 같이 살 수가 없어."
 리즈는 결론을 내렸다.
 
    결혼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여자
  에디 피셔와 관계가 소원해질 즈음 이미 리즈는 할리우드의 간판 스타 리처드 버턴과 열
애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집에 들어 가지 않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깊ㅇ느사랑을  나
누었다.
 세상은 또다시 리즈와 리처드 버턴의 애정행각에 대해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리즈가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리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데..."
 리처드 버턴의 아내 시빌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불륜 관계를 맺어  온 두 사람을 비난하는 사회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리처드 버턴에게 떨어지는 비난보다는 리즈에게의 비난이 더 컸다.
 '남편을 빼앗는 상습범' 또는 '가정 파괴범'이라는 비난에 두사람은 배우자에게  위자료를
지불하고는 서둘러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리
즈나이 서른둘이었다.
 "이것으로 사랑을 갈망하던 그녀의 오랜 애정 편력도 마침내 끝났다. 리즈의 얼굴이 저렇
게 행복으로 빛나는 것을 여태 본 적이 없다. "
 리즈를 오랫동안 지켜본 의상 담당은 리즈의 방황이 끝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
만 얼마 안 가 또다시 이혼을 하게 될거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이혼을 하게 될 것이다."
 리처드 버턴의 도움으로 그녀는 오스카 상을 두 번이나 휩쓸며 할리우드의 대스타로 자리
를 잡아 갔다. 호화  저택이 곳곳에 세워  졌고, 그들은 요트에다 비행기까지 갖추고 살았
다. 남 부러울 게 없는 두 사람은 사치를 부리며 돈을 물 쓰듯 하였다. 리즈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나 보석은 액수에 상관없이 반드시 자신의 손에 들어와야 만족했다. 파티에 나갈 때
는 그날 입을 드레스를 사는 데 무려 100만 불을 쓰기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또 무슨 악마의 장난이 깃든 것일까.
 "우리는 서로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다."
이 무슨 해괴한 이유란 말인가? 변명 아닌 변명으로 헤어진 두 사람은 이후 1975년  아프리
카에서 만나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도대체 리즈는 어떤 여자야? 결혼과 이혼을 뭐 취미로 하는 줄 아나 봐."
 사람들은 리즈가 또 누구와 결혼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절대로 그녀의 결혼 생활이  오래
가지 않을 것라는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예측대로 리즈는 리처드 버턴과 이혼하고, 두 달만에 상원의원 존 위너와 번개처
럼 결혼식을 올려 세상을 또한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존 위너 상원위원
과도 이혼을 하였다.
 리즈는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여자였으며 또한 한 남자와도 살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러
나 타고난 미모와 재산 때문에 수많은 남자들이 지금도 리즈를 못 잊고 있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요부는 아니었다. 리처드 버턴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그녀만큼 스캔들 많은 여자도 없다고 말하지만, 리즈는 사랑을 하면 반드시 결
혼이라는 형태로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리즈는 순정의 여성이다."
 이제 그녀가 사랑했던 몽고메리 크리프트도 죽고. 리처드 버턴도 죽었다.
 그녀는 변호사와도 결혼을 했다가 이혼하고, 또  다른 사람과 결혼, 이혼... 계속  결혼과
이혼을 버릇처럼 해 왔다. 1996년에 열번째 남편으로 만나 살았던 의사와도 헤어졌다. 나이
칠순을 바라보는 그녀지만 언제까지 그녀의 결혼식을 볼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수면제 남용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나이에서 오는 비만으로 예전에 비해 아름다움이 덜하
지만, 아직도 그녀는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미모를 지니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밀잡 인형관에는 리즈와 결혼했던 사나이들의 인형이 전시되어 있다. 칠순을
바라보는 리즈의 고독을 달래 줄 남자가 또 나타날지 어떨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
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인형관에는 아직도  그녀 곁에 서 일을 밀납 인형의 예비  자리가
남아 있다.

      자존심 강한 세기의 스타
    비비안 리
  <바람과 함꼐 사라지다>로 세기의 영원한 스타의 자리에 올랐던 비비안 리. 아름답고 자
존심 강한 그녀는 한 사나이를 사랑하고 헤어지면서 마음이 병들고 지쳐 버렸다. 아카데미
주연상까지 받았던 남부 출신의 강한 여자 비비안 리. 죽는 순간까지 로렌스 올리비에만을
생각했던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외롭고 고독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스칼렛의 화신
 <바라모가 함꼐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역을 환벽하게 소화해 낸  그녀는
영화 속의 스칼렛과 너무도 똑같은 이미지를 타고났다고 비평가들은 입을 모았다.
 불타는 듯한 에메랄드 눈빛, 코르셋으로 질끈 동여맨 17인치의 가는 허리, 앞가슴이 탁 터
져나온 은백색의 피부, 유난히 눈에 띄는 야릇한 미소, 신비롭고 오만한 모습으로 상대방을
얕잡아보는 성깔 있는 암코양이  표정. 그 모든 것이 책 속의 스칼렛 그대로였다.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극장에서 상여오디자마자 비비안 리의 인기는  하루아침
에 하늘을 찔렀다. 미국 남부의 자존심을  몽땅 간직한 듯한 그녀의 스칼렛 연기에  매료된
남성들은 한동안 밤잠을 설칠 정도로 흥분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처음 상영될 당
시엔 비비안 리의 이름은 몰라도 스칼렛 오하라의 이름은 모두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그 영
화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차츰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한 비비안 리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인기가 치솟았던 것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애수>등의 영화에서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유감없이 발휘되었
다. 이 영화에서도 관객들은 남자들을 무시하는 듯한 자존심 강한 여자에게 매료되고 말았
다.
 
    올리비에와의 결혼과 유산
 그녀는 1913년 인도의 다지린에서 영국인 금융가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성장하여  덕망
있는 변호사는 남편으로 맞이해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타고난 미모에다 배우의 꿈
을 간직한 그녀는 집에만 특어박혀 지낼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영화관을 들락
거리다가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스크린 속에서 있었다.
 스크린 속의 로렌스 올리비에의 남성다움에 끌린 그녀는 그때부터 올리비에와  결혼하겠다
는 꿈을 키운다.
 "난 이 남자아 결혼하겠어."
 "아이까지 딸린 여자가 누구와 결혼한다고? 게다가 이 남자 역시 유부남인걸."
 친구들은 비비안 리를 무시하며 놀려 댔다. 하지만 그녀의 눈초리는 오랫동안 빛났다. 야
밤에 광채를 번득이며 먹이를 노려 보는 고양이처럼.
 그녀는 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여자였다. 결국 그녀는 로렌스 올리비에
와의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두 사람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비
난의 화살을 쏘았다. 당연한 사회 분위기였다.  가족을 버린 바람난 여자와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한 남자.
 그래도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정을 떨쳐 버리고, 주변의 모든 따
가운 비난을 감수하며 20년을 행복하게 아무 탈 없이 살았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은 없는 것일까? 그들에게도 파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기가 생겼지만 비비안 리가 유산을 하는 바람에 그때부터 두 사람의  관
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비비안 리는  심한 조울증에 시달렸다. 올리비에의 성심을  다해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기는 또 생길 거야.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
 올리비에의 말대로 비비안 리는 두 번째  아이를 가졌다. 그러나 또 유산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거의 미친 여자와 다를 바 없었다. 작은 일에도 사사건건 화를 내고  물건
을 부수고 벽에 몸을 부딪쳐 상처를 냈다. 마치 호랑이나 살쾡이처럼 그녀의 성격이 광포해
졌다.
 "여보, 아기를 낳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 두 사람만 사랑하면 되잖아."
 올리비에의 말도 소용이 없었다. 남편을 향해 그녀는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이제 더 이
상 올리비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우울증은 밤이고 낮이고 때를 가리지 않았다. 발
작이 없을 때는 감히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도도함과 오만함이 가득한 아름다운  미녀였
다. 하지만 발작이 시작되면 아무데서나 벌거벗거나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울부짖었다.
 올리비에는 언제까지 비비안 리를 간호하며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수가 없었다.  올리비에는
영국 고전극의 대부였다. 한가하게 아내의 병간호를 하도록 사람들이 그를 ㅗ나 두지 않았
다. 비비안 리는 이제 올리비에에게 짐이 되고 앞길을 막는 악처일 뿐이었다.
 "난 더 이상 비비안 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올리비에의 말을 전해 들은 친구 엘튼 존은 자신이 비비안 리를 맡겼다고 선뜻 나섰다. 엘
튼 존은 오래 전부터 비비안 리의 아름다움에 반해 은근히 사랑하고 있었다. 결국 올리비에
는 엘튼 존에게 비비안 리를 맡기고 그녀의 곁을 떠났다.
 이때부터 비비안 리는 엘튼 존을 벗삼아 외로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엘튼 존은 그
녀가 생각하기에도 올리비에와는 견줄 수 없는 배우였다.
 엘튼 존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발작이 점점 심해졌고, 짐승 같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증상은 올리비에가 떠난 뒤에 더 심해졌다. 일종의 폐쇄 공포증이나 불면증, 히스
테리 같은 것이었다. 이런 알 수 없는 증상으로 인해 그녀는 애인이었으며 신이었던 남편에
게서 버림받게 된 것이다.
 1961년, 그때 나이 마흔일곱이었다. 아직도 뭇 남성들을 설레게 할 정도로 아름답고 재능
있는 그녀는 점점 마음과 몸이 병들어 갔다. 물론 그녀가 이렇게 된 것에는 그녀 자신의 성
격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올리비에의 명성에 도전하려던 그녀는 심
한 갈등과 패배를 맛보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올리비에는 남편이기도 하였지만 배우로서 최
고의 자리에 오르려는 경쟁 상대이기도 하였다. 그만큼 그녀는 자존심 강하고 우월감이 넘
쳐났다.
 영국의 대스타, 고전극의 햄릿으로 불리는 올리비에가 국가각 주는 최고의 작위인  '경'의
호칭을 받았을 때, 그와 동시에 비비안 리도 레이디 올리비에로 불리게 되었다. 영국인으로
서 더 이상의 영광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소식을 들은 비비안 리는 갑자기 무서운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비비안 리
는 남편 올리비에를 영화배우로서의 경쟁 상대로 여겼던 것일까? 그것도 발작을 일으킬 정
도로 질투심이 강했던 것일까?
   
    최고를 꿈꾸었던 여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그녀는 세상의 모든 남성들로부터 오랫동안 기립박수를  받았
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영국 여성에게 주는 '데임'의 칭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
다. 그녀는 영화계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최고가 되길 원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발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유산하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게
다가 다시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강박관념과 올리비에가 나날이 번창하면서 젊고  아름다
운 여자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든다는 점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올리비에가 집에
없는 날이면 그녀의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비비안 리의 병이 차도가 없자 올리비에는  친구인 엘튼 존에게 자신의 부인에 관한  모든
것을 양도하겠다는 각서를 쓰고는 젊고 이쁜 제인 프로라이트와 열애에 빠졌다.
 모든 것이 그녀가 염려헀던 대로였다. 이미 예견했었고 또 이제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지
만 비비안 리는 아직도 올리비에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었다.
 올리비에가 젊고 아름다운 신인 여배우와 결혼을 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하자 그녀는 일
생을 통해 사랑했던 전 남편 올리비에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는 애틀란타로 가기 전에 뉴욕
에 들러 올리비에를 만나기로 하였다.
 그녀는 올리비에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레스토랑에 가기 위해 정성을 다해 화장을
했다.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올리비에를 처음 만나러 가는 그런 기분으로 가슴이 두근
거리며 설레었다.
 그녀가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올리비에가 웃으며 손짓을 했다. 그런데 그 옆에 젊
은 여자가 올리비에의 손을 꼬옥 잡고 앉아 있었다. 레스토랑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두  사
람의 만남을 숨소리를 죽이며 지켜보았다.
 비비안의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잘못하면 발작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
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은 그녀 앞에선 절대로  발작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녀는 매우 완벽하게 걸어서 올리비에에게  다가갔다. 그는 젊었을 때보다 더  우아했다.
올리비에가 새로 선택한 제인은 젊고 건강한 여자였다. 아름다움에 비한다면 중년을 지나가
고 있는 비비안 리를 따라오지 못했다. 비비안 리는 아직도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다. 나이
가 들면서 원숙미까지 넘쳐흘러 아직도 전성기 때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우린 결혼할 거야. 내주에."
 올리비에의 말에 비비안 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긍정해 주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
었다.
 돌아서는 길에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째서 올리비에는 제인을 아내로 선택한 것일
까?
 그렇다. 아름다움에 비한다면 자신보다 못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건강미를
갖고 있었다.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고 젊은 여자였다.
 비비안 리는 자식과 착하기만 한 남편을 버리고, 올리비에 또한 임신 중인 아내를 저버리
고 두 사람은 결혼을 했었다. 그때 버림받은 그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순간 비비안
리는 전 남편의 허탈한 심정을, 올리비에의  착한 아내의 고통스런 모습을 느낄 수가  있었
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앞에 두고서 그녀는 비로소 과거 자신들에게서 버림받은 사람들
의 가슴 아픈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자신들을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그녀의 전 남편은 언제나 알게
모르게 그늘이 되어 자신의 성공을 도와  주고 있었고, 올리비에의 전 부인 역시  깨끗하게
두 사람의 결합을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어쩌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그들은 인내했
으리라. 지금의 비비안 리처럼.
 비비안 리는 새로 만난 애인 존에게  편지를 썼지만, 올리비에를 만났던 심정은  사실대로
쓰지 않았다. 그만큼 비비안 리는 존보다는 올리비에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죽는 그날까지
도.
 존은 비비안 리가 올리비에를 열렬히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집안 구석구석 올리비
에의 흔적이 그냥 남아 있었지만 존은 말없이 그녀를 도와 주고 있었다.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 주고 성적 욕구가 일어날 때 섹스 파트너가 되어 그녀가 건강을 되찾기를 바랐던 것이
다. 세계 최고의 여자와 함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올리비에와 그의 새로운 여자를 만난 다음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녀는 애틀란타의 시사
회에 참석하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70밀리로 새롭게 재탄생되었지만 스크린  안의
인물들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뒤였다.
 그녀는 시사회에 참석해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눈물을 흘렸다.
 인생이란 이렇게 왔다 가는 것이구나.또 사랑이란 것도 이처럼 갑자기 다가왔다가  언젠가
는 훌쩍 달아나 버리는 것이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비
비안 리는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깊은 잠 속으로
 그 후 그런대로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병색이 짙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올리비에가 결혼한 줄을 몰랐었다.
 "오늘 아침 뉴욕에서 로렌스경이 결혼을 했습니다. 지금 심정은?"
 순간 가슴이 비수에 찔린 듯한 통증이 왔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뉴욕에 갔을 떄 두 사람을 만나 행복을 빌어 줬어요."
 올리비에의 결혼 사실을 알고도 그녀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대외적으로는 별 영행을 주
지 않는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한창 진행중인 영화를 마무리하는
데 열중했다.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발작이 그렇게 심할 때에도 영화 촬영이 있을 때에는 전혀 그런 증
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늘 비중이 큰 배역이 맡겨졌다.
 그러나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나자 그녀는 점점 광포해지고 사나워졌으며 짐승처럼 울부짖
었다. 그녀가 제정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존이 끝까지 그녀를 보듬고 사
랑해 주었지만 그녀의 우울증은 고쳐지지 않았다.
 가족을 버리고 한 남자를 사랑한 여자,  사랑한 남자의 명성에 도전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패배한 여자.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고는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했다. 겉
으로 강한 모습을 보이는 자가 상실감이 더 큰 법. 그녀는 올리비에가 자기를 떠났다고  생
각하자 인생의 의미를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1967년 7월 7일이었다. 전처럼 그녀의 애인 존은 그녀가 살고 있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 소리가 오랫동안 울렸으나 받지를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녀의 집을 방문했
다. 당행히 그녀는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침실은 작약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사진첩에는 올리비에와 둘이서 연기한 로미오와  줄리
엣이 있었다. 그때 화장을 짙게 하고 올리비에는 로미오 역을 맡았었다. 아무도 그 사진의
로미오가 올리비에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존은 잠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는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15분 후에  다시
들어가 보니 그녀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정신 좀 차려요. 어서!"
 존은 그녀를 흔들어 깨웠으나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의 여
자 스칼렛 오하라, 그리고 그녀의 화신 비비안  리가 이제 영영 저 세상으로 간 것이었다.
요란하지 않게 조용히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생각하며.
 영화사상 가장 빛나는 주역으로 두 개의 오스카 상을 휩쓴 그녀는 그렇게 말없이 떠났다.
 사랑의 패배를 가슴에 안고 그녀는 그렇게 말없이 떠난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비비안 리. 타는 듯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와 초승달 눈썹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
에 살아 있다. 그러기에 그녀는 아름다움이 남아 있을 때 우리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것
이다. 자존심 강한 그녀는 짧지만 굵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영원히 아름다운 여자로 기억되길 원하며.


      눈부신 마성의 육체파
    마릴린 먼로
  할리우드 역사상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섹스 심벌로서 논란이 끊이지 않은 배우는 오직 말
릴린 멀로 뿐이다.
그녀는 금발에 푸른 눈, 터질 듯이 풍만한 가슴과 섹시한 엉덩이, 늘씬한 허리와 긴 다리를
지닌 전형적인 육체파 배우였다.
 가난 때문에 단돈 50달러를 받고서 옷을 벗고 찍은 자동차용 캘린더 사진 앞에서 남성들은
눈이 멀고 말았다. 남성들로 하여금 성욕을 일으키게 하는 그녀는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나
신이었다. 그녀를 찍인 캘린더 회사는 그녀의 누드 사진으로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고 한다.
그녀 또한 그 누드 사진으로 인해 할리우드의 섹스 심벌로 자리잡으며 돈과 명예를 거머쥐
고 스캔들을 끊임없이 일으킬 수 있었다.
  
    스타 탄생의 징후들
  그녀는 가난 때문에 선원이었던 짐 도허티와 열여섯 살의 나이에 결혼하였다. 그때 남편
의 나이는 스물한 살에 불과했다.  남편은 자유뷴방했고 가정에 충실하지 않는  바람둥이였
다.
 그녀는 짐 도허티에게 별로 잔소리도 하지  않고 편하게 생활했다. 짐 도허티에게  그녀는
두 번째 부인이었다. 한 여자에 속해 있다는 것보다는 여러 여자와 춤추고 술 마시며  노는
것을 그는 더 좋아했다.
 도허티에 비해 그녀는 남편과 외출을 할 때나 낯선 분위기에서는 잘 적응하지 못해 늘  불
안해했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말을 걸거나 눈길을 주면 언제나 화난 얼굴로 질투했다.
 이토록 순진무구한 그녀가 어떻게 할리우드를 잠재우는 섹스심벌로 우상적인 존재가 된 것
일까?
 1943년 여름, 그녀는 남편과 밴뉘스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곳에서 어떤 예술가와 그의 약
혼녀, 회계사, 여대생 등과 사귀게  된다. 이때부터 그녀의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댄
스 파티를 열자고 제안하기도 하고. 큰 소리로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그녀는 어느 모
임에서나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늘 사람들의 중심이 되었다. 어린 남편은 늘 그게 불만이었
고 과거와는 달리 이젠 남편의 질투로 인해 종종 다춤이 일어났다.
 그해 여름 그들은 산타모니카 베니스 해안에 자주 놀러갔는데, 그 해변에서 그년는 뭇 남
성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말았다. 비키니를 입은 그녀의 못브은 마치 살아 있는 비너스였다.
비너스가 살아서 해변을 움직일 때마다 해변에 쏟아져 나온 남자들의 눈이 안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매가 다른 여자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짧은 반
바지에 배꼽티를 입고 해변에 나가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를 본 사람들은 뒤에서 수
군거리며 침을 삼틸 정도로 그녀의 몸매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화가 난 젊은 남편은 "이 바닷가의 모든 남자들이 너의 몸매를 감상하며 상상 속에서 너를 
강간을 해도 좋으냐."며 절대로 반바지를 입지 말라고 야단쳤다. 그러나 그녀에게느 통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노출된 몸이 얼마나 큰 무기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무기로 점점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비키니 대신 몸에 착 달라붙는 니트를 입고 해변을
산책할 때면 비너스 같은 8등신의 윤곽이 너무나도 잘 나타났다.
 "그녀는 나쁜 의도 없이 그저 순수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훗날 그녀의 첫 남편이었던 짐  도허티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짐 도허티가 군 복무를 위해 근무지로 떠나자, 자유를 찾은 그녀는 1945년 1월 이곳  저곳
을 여행하다가 낙하산의 안전성을 검사하는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여기서 자신의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인연을 만났다. 바로 '군인영화제작단' 소속
의 카메라맨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촬영하기  위해 갑작스레 방문을 하게 된  것이
다.
 "어떤 악마가 이런 여자를 여기에 숨겨 놓았어?"
 카메라맨들은 소리치며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찍기 위해서 셔터를 눌러 댔다. 순식간에 그
녀는 그들 앞에서 스타가 되었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여러 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 가운
데는 그녀에게 빠져 데이트 신청을 하는 남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 카메라맨들 중에 데이
비드 커노버라는 육군 하사가 있었는데, 그는 컬러 사진으로 그녀를 찍고 싶다고 제의를 해
왔다.
 "내가 공장 지배인에게 이야기해서 시간을 잡아 놓을 테니 촬영 한번 해 보겠어?"
 " 좋아요."
 그녀는 벌써 모델이 된 것처럼 흥분되어 떨렸다. 데이비드 커노버의 스튜디오에서  그녀는
마음껏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아주 잘 나왔고 그녀 또한 만족했다.
 1945년 봄이 되자 이미 그년는 사진 모델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발탁
된 지 1년 만에 그녀는 샴푸 광고 모델로 나서게 되었다.
 "금발로 염색을 하는 게 좋겠어. 아예 계약서에 금발로 물을 들여야 한다고 적어 놓아."
 회사의 요구대로 그녀는 금발이 되었고, 금발은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트레이드마크가 되
었다. 그녀는 카메라 앞에 서면 대단한 열정을 보이며 카메라맨이 요구하는 대로 싫은 표정
하나 짓지 않고 다 소화해 냈다. 농담도 잘 했고 성격도 좋아 인기가 높았다.
 
    마침내 스타가 되다
  1945년 6월부터 열므 중반까지 데이비드 커노버는 그녀를 데리고 캘리포니아를 거쳐 바스
토우에서 리버사이드까지, 죽음의 계곡에서 배스거필드까지  쉬지 않고 촬영을 다녔다.  그
가운데 몇몇 사진은 군인 잡지에 실려 인기를 독차지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2일, 그녀는 커노버와 다른 카메라맨들의 권유로 모델협회에 등록을 했다. 본
격적인 모델 수업을 받으며 자신의 몸을 무기로 삼아 할리우드를 점령할 준비가 시작된 것
이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열린 패션쇼에도 여러 번 나갔지만 광고 효과는 별로 없었다. 왜냐하
면 사람들이 새로 나온 옷을 보는 게 아니라, 옷을 입은 그녀의 몸매를 감상하려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하리우드에 알리는 효과로서는 충분했다.
 그녀의 나체 사진은 군인들이나 노동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전장이나 공장에서  사기
를 올리는 데도 한몫ㅇ르 했다. 근인들의 철모 안쪽에 그녀의 사진을 안 가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녀는 이혼을 한 후 각종 잡지의 커버걸이 되었으며, 이때 20세기 폭스사와 전속 계약을
맺으면서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계약을  취소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서른 살 연상의 할리우드 실력자 자니 하이드의 눈에 든  그녀는 그의 강력한 후원
을 업고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제 그네에게 20세기 폭스사는 헤어드레서와  연기
코치까지 배정해 줄 정도로 그녀의 비중이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1950년에는 이미 조연으로 자리를 잡아 6편의 영화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그 가
운데 <아스팔트 정글>과 <이브의 모든 것>에서 주목을 끌더니 드디어는 매스컴을  플래시를
받는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1952년 매스컴이 그녀가 과거에 누드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파헤치면서 그녀를 바라
본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3년 전 배고픈 시절에 방값을 벌고, 자동차 할부금을 내기  위해
캘린더 누드 사진을 찍은 것이 화근이었다. 묘한 성적 충동을 일으미는 이 사진들은 불티나
게 팔려 거리에 넘첬고, 미 전역에  이발소의 포스터로 나붙었고, 군인들 수첩에  애인처럼
자리를 자치했다.
 그러나 20세기 폭스사는 여기서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온갖 매체를  동원해
마릴린 먼로의 입지적인 삶을 오히려 솔직하게 밝혔다. 이 전략은 인간적인 마릴린 먼로를
이해시키는데 성공하여 그녀의 인기가 더욱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에 먼로는 할리우드에서 정상급 배우로 뛰어올랐다.
 그해 <플레이보이>는 창간호 커버에 먼로의  지나간 누드를 게재할 정로도 그녀는  누드에
의해 일약 스타가 된 여배우였다.
   
    섹스 편집증과 약물 중독
  1954년 그녀는 할리우드의 스타가 되었을 때  미국 야구의 영웅 조 디마지오  전격적으로
결혼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두 사람은 가는 곳마다 팬들에게 둘러싸여 즐거운 비명을 질
렀다.
 세 번째 남편은 극작가 아서 밀러였다. 그러나 그녀는 신호 초부터 복잡하고 위험한 애정
편력을 엿보였다. 그 바람에 남편에게 구타를 당해 9개월 만에 이혼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녀는 그때부터 마약과 약물에 빠지면서 몸과 마음이 눈에 띄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세
번의 공식적인 결혼이 있었지만 그것과는 저혀 무관하게 사생활이 문란해 세인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프랭크 사나트라. 이브 몽탕, 케네디가의 형제들과의 염문설이 계속 신문 지면
을 장식하며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와 섹스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없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
였다.
 그녀만큼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한 배우도 드물었다. 말년에 그년는 섹스 편집증이란 정신
병을 앓고 있는 듯했다. 남자라면  아루하고나 섹스하길 원했다. 자신의 사진작가,  음악감
독, 후견인, 잠지기작, 햇병아리 배우,  먼로 프로덕션의 동업자, 그리고 말년에는  자신을
태워 준 택시 기사는 식당 종업원들까지 자신의 즉흥적인 섹스 파트너로 삼았다.
 정신병원에 수용된 1961년 2월 이후부터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1년 반을, 그는 장차 케네
디가의 아내가 될 것이라는 과대망상을  보였다. 게다가 하루의 절반을 혼소상태에  빠지는
심한 약물 중독 상태에 있었다.
 그가 약물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되었을 때 그녀의 재산은 고작 5,000달러에 불과
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선 지금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공식 사인은 약물 중독
이었다.
 2차대전의 종말과 함께 미국 사회는 성 개방 풍조의 물결이 나타났고, 그 흐름을 타고  마
릴린 먼로 라는 관능적인 섹시 스타가 할리우드를 장식한 것이었다.
 이러한 섹시 스타의 등장에 남자들은 사랑을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성의 유희를위해 먼로를
그냥 놔 두질 않았다. 또한 섹스에 관한한  그녀 또한 병적이어서 어느 누구와도 쉽게 옷을
벗고 잠자리를 할 수 있었다.
  끝내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 두지 못하고 혼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마릴
린 먼로의 비극적인 종말은 그녀를 형화  사상 가장 위대한 신화의 잘에 올라서게  하였다.
섹시 스타로서 말이다.
 마릴린 먼로의 사진집은 지금도 계속 판매되고 있고, 그녀의 영화들은 재상영되며  여전히
인기를 몰고 있다. 심지어는 마릴린 먼로의  모습과 표정, 언어, 행동을 닮은 사람을  찾는
대회를 열기도 한다.
 마릴린 머로 69주년을 기념하여 미국 체신부에서는 '할리우드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웃
고 있는 마릴린 먼로의 초상화를 발행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1995넌 6월1일자로 발행된
이 우표는 여성을 노리랫감으로 강조했다 하여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4억 장을  발행한
이 마릴린 먼로 우표는 순식간에 재고마저 바박이 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마릴린 먼로만큼 화려한 스캔들과 섹시  스타로 자리를 굳힌 여배우는 드물었다.  마릴린
먼로만큼 세상의 남자들롭터 사랑을 받은 배우는 없었다. 그녀는 영원한 섹시스타로서 팬들
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1962년 사망한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 3장 불타는 사랑 재가 되어 예술로 남고
      자유를 사랑한 현대 무용의 선구자
    이사도라 덩컨
  춤은 변하지 않은 채 200년 동안이나  유럽을 지배하였다. 유럽의 춤은 곧 발레였다.  그
하늘거리는 발레복과 슈즈를 신고 추는 춤은 오랜 세월 동안 견고한 철옹성처럼 굳게 다혀
있었다.
 슈즈를 벗어 던지 맨발에 자유스런 복장으로,  각본에 의한 동작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춤으로 표현한 여자가 있었다. 현대 무용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이사도라
덩컨이라는 무서운 여자였다.
 
    혁명의 춤, 해방의 춤
  20세기 초 유럽은 춤의 전성기였다. 다 쓰러져 가는 우럽의 발레에 러시아가 새로운 바람
을 몰고 왔던 것이다. 유럽 발레에 새 기운을 불어넣은 사람은 아눔자 포킨과 그의  파트너
파블로바였다.
 러시아 제일의 발레리나는 춤으로 유럽을 평정한 파블로바였다. 러시아가 , 아니 전 유럽
이 아꼈던 파블로바는 1917년 러시아 혁명후  많은 갈등 속에서 생활하다가 러시아와 결별
을 선언하고는 조극을 떠난다. 혁명의 환성이 파블로바와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갈림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파블로바의 춤은 혁명군이 원하는 그런 춤이 아니었다. 파블로바 또한
그런 춤을 출 수가 없었다.
 로마노프 왕정을 몰아내고 공간국가를 세운 혁명군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사도라  덩컨에
게 손짓을 보낸다. 민중적인 그녀의 춤이 반드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군이 날 초청했어요."
 이사도라 덩컨은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고 이사도라는  혁
명이 일어나던 날 밤, 맨발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밤새 열광적인 춤을 추었다.
 "그동안 자유를 위해 싸우다 탄압받고 고문에 의해 고통스레 죽어 가야만 했던 그 모든 사
람들이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에 넘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밤새 추고
또 추었지요."
 그녀는 자서전에서 그날의 기쁨을 이렇게 전했다. 이사도라 덩컨이 밤새 열광적인 춤을 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페테르부르크로 춤의 명인 파블로바를 만나러 가는 길에 긴 장례행렬과 마주친  적
이 있었다.
 "도채체 누구의 장례식이지?"
 그녀는 장례행렬이 다 지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905년 1월 5일, 차르의  겨울
궁정으로 빵을 달리고 탄원하러 갔던 노동자들에게 러시아군은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그때
희생당한 사람들의 장례행렬이었다.
 "난 앞으로 압제에 의해 고톤받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겠어."
 그녀는 장례 행렬을 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이러한 의식을 지니고 있던 그녀가 혁
명 정부의 초청에 발벗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동자 계급에 의해 이루어진 혁명의
나라. 그곳에서 그녀는 진정한 인간 내면의 춤을 허위와 형식 없이 마음껏 추고 싶었다. 혁
명의 나라에서.
 그녀는 그 당시 두 명의 애인에게서 난 딸과 아들을 교통사고로 모두 잃고 실의에 빠져 있
었다. 게다가 자신의 춤을 전수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 설립마저 지지부진한 상태
였다. 이때 꿈에 그리던 혁명 정부 소련은 1912년 이사도라를 초청한 것이다.
 "내가 소련에서 원하는 것은 춤을 출 아이들을 가르칠 학교와 학생, 그리고 간단한 식사와
무욕복, 또한 최고의 작품을 선보일 기회일 뿐이다."
 이사도라의 요구에 소련은 즉각 모스크바로 올 것을 제의한다. 모스크바에 오기만 하면 학
교와 춤을 배우고 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해 7월, 이사도라는 미국에서 소련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가난과 추위와 부족한 시설이었다. 자신을 초청할 정도였다면 적어도 500명의 학생들을  가
르칠 수 있는 시설과 뒷받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학생 수는 고작 50명  내외였
다. 그나마 학교 운영비도 지원을 받지 못해 그녀가 가지고 있던 돈으로 운영을 해야만  했
다.
 "노동자 계급에 의해 이룩된 혁명 정부는 당연히 예술 쪽에도 공정하게 분배를 해야 합니
다."
 그녀는 러시아 혁명을 제2의 그리스 혁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혁명 정부 소련의 재
정은 빈약했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그녀는 루나차르스키의 충고를 받아들여 소련 각지를 돌며 공연에 들어갔다. 학교 운영 자
금을 얻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사도라는 1921년 11월 처음으로 소련에서 춤을 추었다. 놀랍게도 차이코프스키의  '슬라
브 행진곡'을 교묘하게 이용해 혁명의 당위성을 춤을 통해 보여 주었다.
 슬라브 행진곡은 차이코프스키가 차르에게 헌정한 음악이었다. 황제를 칭송하는 찬가를 이
사도라는 제정 러시아에서 농민들이 노예의 삶을 사다가 해방되는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놀
라운 재주를 보여 주었다.
 교향악단에서 '신이여, 황제를 축복하소서'의 첫 음절이 나오면 농민들이 채찍에 쓰러지며
고통스런 얼굴로 무대로 나온다. 황제에 의해 농민들이 고통을 당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
다. 그 후 혁명군에 의해 해방의 순간이 오고, 클라이맥스에서 이사도라는 춤을 추며 최대
의 효과를 거둔다.
 그 당시 소련에서는 음악과 춤, 미술, 문학 모든 것들이 혁명의 내용을 담고 있어야 했다.
혁명의 당위성을 알리는 일에 소련은 모든  것을 다 바쳤다. 혁명을 알리기엔 예술보다  더
좋은 도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러시아 사람들 자체가 원래 춤과 음악을 사
랑한 민족이었다.
 이사도라는 소련에서 무용학교 설립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번에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녀의 애인 에세닌과 함께.
 그러나 미국은 예전처럼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소련에 귀화한  이
사도라에게 고운 눈길을 보낼 리가 없었다. 혁명 정부의 당위성이 짙게 나타나 있는 '슬라
브 행진곡'과 '인터내셔널'을 추지 않는다는 조건을 이사도라가 받아들여 공연은 어렵게 이
루어졌다. 그러나 언론은 이사도라의 춤보다는 에세닌과 그녀와의 관계에 대한 스캔들을 알
리는 데 더 열심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은 보수성이 강한 나라였다. 자신보다 한참 연하의 애인을 데리고 다
니고, 게다가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춤꾼에게 대중 여론이 호의적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
떤 무용사가들은 이후부터 이사도라 덩컨의 춤과 업적을 아예 뺴놓고 무용사를  이야기하기
도 했다.
 
    슬픈 종말
 미국 공연은 이사도라가 생각한 것만큼 성공적이기 못핬다. 아니, 실패에 더 가까웠다. 그
러나 더욱더 불행한 것은 그녀의 마지막 남편이자 애인이었던 에세닌이 미국 공연 이후 자
살해 버렸다. 이사도라 또한 운명의 장난인지 프랑스 니스에서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
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어이없게도 목에 두른 스카프가 풀어져 자동차 바퀴에 감기는 바람
에 목뼈가 부러져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자신의 춤을 전수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이루지 못한 채 그녀는 어이없게도 슬픈  종말
을 맞이하고 말았다.
 결국 모스크바 무용학교는 운영난으로 설립을 할 수가 없었고, 그녀의 춤은 이어지지 못하
고 그대로 사장되어 오늘날 몇 편의 자료 사진으로나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마지막 남편 에세닌이 춤과 시를 견주어 이사도라에게 말한 의미가 새
삼 돋보인다.
 "지금 사람들은 당신과 당신의 춤에 열광하지만 춤은 곧 사라지고 말아. 그 춤을 본  사람
들조차 죽고 나면 그 다음 세대는 당신을 잊고 말 거야. 그러나 시는 다르지. 내 시들은 영
원히 살아남는다고..."
 
    춤의 혁명
 이사도라 덩컨의 춤은 사라졌다. 파리의 한  가든 파티에서 춤추는 덩컨을 포착한  장면이
짧은 기록영화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과연 이사도라 덩컨의 춤은 완전히 끝난  것일
까.
 "미래의 무용가는 자연스런 영혼의 언어가 몸의 움직임이 될만큼 몸과 영혼이 함께 조화스
럽게 성장하는 그런 무용가일 것이다... 그 무용가는 여성의 자유를 여성의 자유를  추구하
며 춤추리라."
 이사도라 덩컨은 이렇게 자유를 선언하고  발레리나들이 신던 슈즈를 벗어 버리고  맨발로
춤판에 나섰다. 그 당시로선 놀라운 발전이며 춤의 혁명이었다. 슈즈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치장과 격식을 허물며 춤판에 나선 이사도라 덩컨을 현대 무용의 효시로 보는 까닭이 여기
에 있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춤이라 하면 극장에서 발레리나들이 무용복을 입고 슈즈를 신고서 추는 춤
이 지배적이었고, 그 춤은 200년 동안이나 불문율이 되어 전해져 왔다. 이러한 전통을 무시
하고 이사도라는 춤의 혁명을 이룬 것이다.
 춤추는 사람도 가고 그 춤을 본 사람도  가고 나면 사람들 사이에서 춤은 곧 잊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에세닌의 추측은 빗나갔다.  춤도 문학처럼 여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사도라 덩컨이 제자들을 길러내지는 못했어도, 오늘날 춤의 성격을  살펴보
면 그녀의 춤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덩컨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어머니가 이혼한 후 음악 교습으로 근근히 입에 풀칠을 하
며 살았기 때문에 발레학교에 다닐 생각도 못했다. 무용학교는 고사하고 학교 교육도 열 살
무렵까지밖에 받지 못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며 독학으로 무용 공
부를 하였다.
 그렇게 공부하여 그녀는 음악과 내면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춤으로 무대 진출을 시도해 보
았지만, 미국은 그녀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가족은 19세기 마지막 해에 가축수송선을 타고 영국 런던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이
사도라는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추는 맨발의 춤꾼 이사도라에게 영국은 열광했다. 이곳에서 이
사도라는 날개를 단 듯 자시느이 춤의 세계를 구현하며 숱한 전설을 만들어 냈다. 200년 동
안 내려오던 굳건한 전통 발레를 일시에 무너뜨린 놀라운 혁명이었다.
 그래서 맨발의 이사도라 덩컨은 인간 내면의 세계를 춤으로 표현한 현대 무용의 효시로 여
겨지고 있는 것이다.
 

      패션과 향수의 여왕
   
    코코 샤넬
 한 여인의 삶이 세계여성들의 몸에서 영원한 향수(香水)로 남아 있다. 샤넬 No.19.
 불행한 과거를 숨기고 과감히 부(富)와 명성에 도전한 여자 코코 샤넬. 고아로 자라나 야
심과 재치로 패션계의 정점을 차지한 여자.
 그러나 그 고독한 내면의 그늘은 평생 그녀를 뒤쫓고...
 
    패션의 마술사
 "밤에 잘 때 무슨 옷을 입고 잡니까?"
 기자가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세계적인 섹시 스타 마릴린 먼로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샤넬 넘버 5."
 샤넬이 만든 옷과 향수는 세계를 장악했다. 세계의 유명 스타들이 그녀가 만든 옷을 입기
위해 몸부림칠 정도였다. 그녀는 세계의 유행을 창조하고 변화시킨 패션의 마술사였다.

 명성과는 달리 그녀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하고 불행했다. 여섯 살 때 병든 어머니가 죽
었고, 그의 아버지는 오베르뉴의 이모에게 샤넬을 맡기고는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그 당시
이모의 집은 가난해서 삯바느질을 하며 근근히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샤넬은 학교에 갈 나이
가 되었지만, 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하고  이모를 도와 바느질에 매달렸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란 샤넬은 열여섯의 나이에 비시 성당의 신부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그녀에
게 성당에서의 생활은 답답하기만 했다.
 어느 날, 그녀는 경마장을 갖고 있다는 남자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천눈에 반한 그녀는 다음날 그를 따라 무작정 나선다. 그녀는 일생 동안 많은  남자
들을 만났지만 정작 자신이 사랑한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는데, 그가 바로 그
중 한 사람인 보이 카펠이었다.
 샤넬이 처음 일한 곳은 모자점이다. 그것은 일하고 싶어 안달이 난 그녀를 위해 카펠이 열
어 준 가게였다. 그녀가 만든 모자는 차양이 짧았는데, 그것은 그 당시 유행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모자는 순식간에 인기를 얻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간다. 그녀는 카펠
에게서 빌린 돈을 금방 갚을 정도로 장사 수완이 좋았다.
 다음엔 양장점에서 저지라는 소재로 새로운 드레스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당시
저지는 내의로밖에 사용하지 않던 소재였다. 여자들은 코르셋이나 고래뼈로 몸을 묶는 장식
과다의 패션에 시달리고 있던 시대였다. 저지를 사용함으로써 샤낼은 여자들의 육체를 해방
시킨 것이다. 그리고 전설적으로 유명해진 '샤넬 블랙'을 탄생시켰다.
 "블랙은 가장 눈에 띄는 색이에요."
 샤넬은 검은색이 여성을 아름답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얀색을 가장 우월한  색으
로 생각했다. 갖가지 색이 넘친 당시 여자들의 패션 속에서 샤넬의 단순한 블랙과 화이트는
곧바로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난 늘 새로운 시대를 위해 일해 왔다."
 그 당시의 디자이너들은 활동하지 안ㅌㅎ는 한가한 여자, 하녀에게 양만을 벗기게 하는 여
자들을 위해 일해 왔다. 마룻바닥을 길게 끌고 다니던 귀족풍이라든가 파리 사교계 모임에
서 남자들과 춤을 추는 우아한 여성의 모습을 샤넬은 무척 싫어했다. 샤넬은 파리 사교계를
14세기와 같은 어리석음과 비현실성이 가득한 곳이라고 꼬집어 비판하였다. 물론 그녀는 단
한 번도 상류 사회의 사교 모임에 나간 적이 없었다.
 샤넬은 한마디로 말해 대중적인 옷을 만들어 보급하는 데 노력했다. 긴 치마를 잘라 무릎
까지 올렸고, 긴 차양이 달린 모자는 단순하게 고쳤다. 샤넬은 스커트의 길이를 짧게 하여
그때까지 긴 스커트 밑에 숨겨졌던 여자의 다리를 해방시켰다. 샤넬은 짧은 스커트가 여자
의 다리를 가장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긴 치마보다는
짧은 치마가 생활하기에 훨씬 편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여자에게서 판탈롱을 처음으로 벗겨 낸 것도 그녀였다. 그건 순전히 여성의 아름다움을 나
타내기 위함이었다.
 "나는 활동적인 여자들을 고객으로 맞이했다.  드레스는 소매를 걷어올리지 않으면 안  된
다."
 샤넬의 숄더백도 그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활동적인 여성은 두 손을 다 써야 하는데 백
을 들기 위해 한 손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 그녀가 만든 셔츠가  등장했다. 우아하고 스포티하여 언제 어디서나  입을
수 있는 스타일이었다. 유행에 전혀 관계없이 점심때나 야외 활동에도 통용되는 신기한 셔
츠였다. 그녀가 만든 이미테이션의 진주 목걸이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샤넬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어느 파티에 가 보니 17명의 여자들이 모두 샤넬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벌도  샤
넬의 가게에서 만든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샤넬이 파티에 등장하자 가짜  옷을
입은 여자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그러자 샤넬이 말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입은 이  옷도 진짜 내 가게에서 만들었는지  확실치가
않으니까요."
 재치있는 유머인 동시에 통렬한 야유였다. 고아 출신의 샤넬이 세계 패션계를 움직이며 유
행을 창조할 당시는 부르주아 시대와 결별하고 민주주의를 준비하는 시대였다. 여기에 샤넬
의 귀족적이지 않은 실질적이고 대중적인 패션이  힘을 얻음으로써 날로 급성장을 한  것이
다.
 
    샤넬의 두 얼굴
 1912년, 스물여덟 살 샤넬의 가게는 불과 여섯 명의 종업원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의 수가 3,50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향수 샤넬 넘버 19 덕택에 샤넬은
성공한 여자라는 영예와 함께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샤넬 향수는 처음에 천연 재료를 사용
하였으나, 후에는 합성에 의해 향을 내는 원료를 사용함으로써 향수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
했다.
 "코코가 만진 것은 무엇이나 황금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샤넬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세상 사람들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 성공의 비결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맹렬하게 일하는 데 있다."
 실제로 샤넬은 일을 많이 했다. 하루 이로가가 끝나면 손이 붓고 굳어질 정도로 필사적으
로 일을 했다.
 "돈이 없으면 사람은 아무 가치도 없다."
 샤넬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남보다 불행하고 고생이 심했던 어린 시절 때문
이기도 했다. 그리고 샤넬은 언제나 만족을 못하고 자신에게 화를 냈다.
 "나는 마음이 고약하고 화를 잘 내며, 도둑에다 거짓말쟁이 그리고 엿듣기의 명수다. 그것
이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었다."
 그것은 출생의 열등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1883년 프랑스 남부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과거
를 코코는 몹시 부끄러워했다. 그녀는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서 그 사실을 부
정했다.
 "우리 아버지는 미국에 갔다. 나는 숙모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성공하고 돌아올  때까
지."
 그러나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코코에게  돌아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숙모 이야기도  꾸며
낸 말이었다.
 샤넬은 자주 화를 냈다. 코를 벌름거리며 심장이 멎을 정도로. 이것은 소녀 때부터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버려진 몸이었다는 사실과 대항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코코는 늘 지붕 밑의 방에서 꿈을 꾸었다. 새하얀 옷, 하얀 방, 그리고 흰 커튼에  둘러싸
여 사는 꿈을. 그 무렵부터 코코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여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자기
를 버린 아버지, 아니 아버지 같은 남자들 모두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실제로 그녀는 그녀
의 꿈이 모두 이루어진 후에 어렸을 때의 꿈대로 하얀 방에서 흰 옷을 입고 살았다.
 
 "내 유일한 단점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사실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거쳐 지나갔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그녀를 남겨 두고 떠났듯
이.
 어린 나이에 무작정 영국인 보이 카펠을 따라간 그녀는 함께 동거에 들어갔다. 보이 카펠
은 그녀에게 일과 교양의 기초를 가르쳤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생아를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닮은 점이 많았다. 야심에 넘쳐 있었고, 재능도 있는데다 인생의
굴욕의 맛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10년 가까이 사랑을 나누었으나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느 가릉, 카펠은 코코와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면서,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칸느로 향했다. 카펠의 자동차는 스피드를 내며 달리다 칸느를 얼마 안  남
겨 놓고 낭떠러지로 미끄러져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보이 카펠의 사고 소식을 들은 샤넬은 엄청난 충격 속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카펠은 그녀의 모든 희망이며 삶이었다.
 "내 인생은 실패였다."
 샤넬은 땅을 치면서 통곡했다. 생애를 통해  유일하게 사랑한 사나이 보이 카펠의  죽음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 여자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는 충격 속에서 잠시 헤어나지 못했지만, 그녀는 일에 열중하면서 차츰 카펠의 사고를 잊게
되었다.
 
    내게는 친구가 없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 모이 카펠이 죽은 이듬해인 1912년 코코는 드미트리를 만나는데, 그는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알베르트 2세의 손자였다. 그녀가 자서전에서 밝힌, 진심으로 사랑
했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드미트리는 샤넬보다 11년 연하로,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키가 크고
귀족풍의 미남인 그는 코코를 사랑했다. 그의 가슴에 안기면 재스미니 향내가 났다. 코코를
향수의 세계로 이끌어 '샤넬 No. 5'를 낳게 한 장본인이 바로 드미트리였다.
 샤넬 넘버 5는 사향노루의 분비물로 만든  샤넬 최초의 향수였다. 이 향수는 미를  탐하는
세계  여성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코코는 '5'라는 숫자는 좋아했다. 그래서 No.5라
는 이름을 붙였다.
 드미트리와 코코의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였다. 드미트리는 다소 여성적이었고 또
매사에 무엇인가 두려워하는 기피증이 있었다.
 드미트리와 헤어진 샤넬은 이번엔 웨스트민스터공과 사귀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웨스
트민스터라면 영국 제일의 부자로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웨스트밑스터는 샤넬에게  완전히
반해 버렸다. 그러나 그녀를 자신의 품에 잡아 두려는 다소 권위적인 남자였다. 샤넬은 과
감히 그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영국의 공작 부인은 많이 있지만 마드모아젤 샤넬은 한 사람
밖에 없다는 이유에서 였다. 한 남자에  속해 살아가느니 자신의 영역을 펼치며 삶을  꾸려
나가겠다는 도전적인 샤넬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그밖에 위대한 사나이들이 샤넬과 염문을 뿌렸다. 그녀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남자들과
수없이 많은 교제를 했다. 피카소,장콕토,  스트라빈스키 등등... 유명한 시인들,  화가들,
작가들이 그녀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 그녀로부터 부엇인가를 배우면서 그녀를 거쳐갔다.
 쉰 살 때 디자이너 폴 일리브라는 사람이 샤넬의 애이이 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ㅈ거
이 있었다. 그러나 "일리브와의관계를 욕정이었다."라고 코코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여자로
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 대상으로 불행하게도 일리브가 선택된 것이었다.
 세상의 유명한 남자들과 염문을 뿔리던 그녀가 그해 여름 프랑스  남부에서 처음으로 결혼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녀는 많은 남자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연인 관계를 유
지했지만 단 한 번도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여자였다. 그러한 성격의 샤넬이 뒤늦게 연하의
남자 일리브와 결혼을 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코코는 그녀의 별장에서 소녀처럼 웃으며 애인인 일리브와 사랑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제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이 사나이와 함께한다면.'
 이런 행복한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일리브는 테니스를 쳤다. 흰 테니스 웨어를 입은 사나
이가 힘차게 뛰는 모습을 보며 코코는 사랑으로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일리
브가 코코 쪽으로 손짓하며 달려오는 순간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코코는 또다시 고독한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평생 고독한 인생을 살라는 운명
이 정해진 것이진도 몰랐다.
 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코코는 파리의 가게를 닫아 버리고 13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그녀에게 또 다른 소식이  들렸다. 60이 된 샤넬에게 서른 살밖에  안
된 젊은 연인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샤넬이 사랑한 젊고 미남인 이 사람은 독일  정보
기관원이었다. 그녀는애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하기 위해 스위스로 가려 했으나  뜻대로
되질 않았다.
 샤넬은 그 일로 생애 최대의 오점을  남겼으나, 적대국의 남자를 사랑한 것은  여자로서의
샤넬에게는 마지막 정려을 불태운 것이었다.
 
    다시 불사조처럼 일어나다
 1954년 파리로 돌아와 첫 컬렉션을 열었으나 프랑스 파리에서는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샤
넬 스츄는 미국에서 호평을 받았고 지금도 여성 정장의 고전으로 불리고 있다.
 고희의 나이에 샤넬은 다시 소생했다. 칼라를 떼고 둥근 목선에 테두리를 댄 샤넬 투피스
는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샤넬
은 늙었고, 현대 감각에 맞는 새로운 패션이 무수히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불사조처
럼 일어섰다.
 어느 날 마리네 디트리히가 그녀에게 말했다.
 "왜 또다시 일을 시작하나요?"
 "심심하게 죽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기  전까지 일에 매달리는 것밖에 없었다. 끝없는 창조와
정열을 바쳐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샤넬의 아름다운 모습이며 진정 그녀가 사랑하는 모습이
었다.
 그 무렵 코코는 일요일을 몹시 싫어했다. 크리스마스나 신년 휴일도 싫었다. 고독한 노파
에게는 휴일이나 명절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코코에게는 이제 남자가 없었다. 그를 거쳐간 수많은 사나이들이 있었지만 모두 요절을 하
거나 아니면 그저 연인 관계일 뿐이다.
 늙어서까지 연하의 남자와 함께 잠을 자야만 했던 샤넬. 그러나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
다. 오직 밤이면 남자 대신 외로움을 달래 주는 약과 일만이 있을 뿐이었다.
 죽기 전날 밤도 코코는 일을 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일요일, 오랫동안 살아온 파리의 리츠
호텔에서 코코는 세상을 마쳤다. 그녀 나이 여든일곱이었다.
 장례식의 꽃은 모두가 흰색뿐이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색이었다. 하얀 집에서 살고 싶었던
그녀는 소망대로 집안을 온통 하얗게 꾸며  놓고 살았다. 그리고 죽어서도 역시 하얀  꽃에
묻혀 떠나갔다.
 그 중에서 루키노 비스콘티만이 빨강 장미를  바쳤다. 루키노도 코코를 사랑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대량 생산 체제의 상업주의 패션 시대가 열리기 직전 샤넬은 후배들에게 패션의 여왕 자리
를 넘겨 주고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그녀는 디자이너로서는 마지막 예술가이자 운동가였다
고 평가되고 있다.
 "진정한 디자이너라면 지나치게 기발한 착상은 피하려고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평균적
인 여성을 위하여 옷을 만들어 왔다. 그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아름다운 몇몇 여성들이 사장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랑에 살고 노래에 산 샹송의 여왕
 
    에디트 피아프
 에디트 피아프. 1915년 12월 19일, 파리의 빈민굴, 그것도 노상에서 그녀는 태어났다. 매
춘굴에서 커 가며 세 살 때 백내장으로 실명되었으나 일곱 살 때 기적적으로 회복된 그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던 그녀가 <사랑의 찬가> <장미빛 인생> 등  불멸의 명곡을 남긴 샹송의 여왕이 되었
다.
 그리고 그녀는 1963년 마흔일곱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랑에 상처를 입고서도 다
시 사랑을 위해 노래를 계속했던 애처로운 여자. 파리의 빈민굴에서 태어나 노래만으로 출
세한 그녀가 암으로 세상을 뜨던 날 4만 명의 조문객이 울음을 터뜨렸다.
 
    저 남자는 내 것
 피아프는 47년을 사는 동안 세 번 결혼했지만,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녀를 거쳐갔다. 물
론 그녀 또한 남자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살 정도로 외로움을 많이 타는 여자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명예와 아름다움으로 인해 주변에는 늘 사회의 유명 인사들이 들끓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생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원래  신은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을  탄생시키기
위해 시련과 고통을 준다고 했던가. 바로 에디트 피아프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녀 곁에는 늘 남자들이 있었다. 남자와의 사랑과 이별의 아픔은 에디트 피아프가 샹송을
부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는 사랑에 살고 노래에 산 가수였다.
 
 파리 빈민굴에서 태어난 에디트 피아프.  아버지는 거리의 악사였고, 어머니는  가수였다.
피아프는 아버지를따라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활고를 해결했다. 그러다 열일곱 살  때
석공인 루이와 동거하면서 딸이 세 살 때 병사하자 그녀는 루이와 헤어져야 했다.
 에디트는 푸른 눈과 금발의 남자를 병적으로 좋아했다. 가수로서 성공한 후에도 푸른 눈의
사나이에게 옷을 사 주고 악어 가죽의 구두를 사 주는 것이 취미였다.
 그러나 그녀가 마음속으로 사랑한 남자들은 푸른 눈이거나 금발은 아니었다. 복싱 세계 챔
피언 마르셀, 마지막 남편이었던 샹송 가수 테오, 그리고 이브 몽탕이나 무스타키... 이들
은 모두 밤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였다.
 "나는 연애를 많이 했지만 단 한 사람밖에 사랑하지 않았다. 마르셀 세르당밖에."
 그녀는 진정 마르셀을 잊지 못했다. 물론 마르셀을 만나기 전 그녀는 샹송 가수 이브 몽탕
을 만나 열애를 했지만 가슴 아픈 이별로 끝이 나고 말았다.
 1944년 여름, 그녀는 물랑루주의 무대에서 이브 몽탕과 처음 만났다.
 "옷은 서커스 복장, 제스처는 꼭두각시 같고, 당싱의 샹송은 천하고 속되다. 마치 카우보
이처럼."
 이브 몽탕은 그녀의 조소 섞인 비평을 듣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당신이 날 믿어 준다면 당신은 위대한 가수가 될 수 있다."
 이브는 에디트의 이 말에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자존심이 강한 이브 몽탕은 마르세유
의 출신답게 여자에게 충고를 당하는 것이 체질상 맞지 않았다.
 에디트는 문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바보군! 하지만 황홀할 정도의 미남이야. 언젠가  저 사나이는 샹송의 혁명을 일으킬  거
야. 그리고 언젠가는 꼭 내게로 돌아올거야."
 바로 그대로였다. 이브는 에디트의 마력에 끌려 그녀의 제자가 되었고, 뒤이어 그녀의 애
인이 되었다. 에디트의 말대로 이브 몽탕은 샹송 가수로서 파리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저 사나이는 내 것이야. 내가 만들었지."
 그의 무대 모습을 지켜보면서 에디트는 이렇게 확인했다.
 눈 깜짝한 사이에 이브 몽탕은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러자 에디트의 은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출세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귀찮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집에서 늘 소리 높여 싸웠다. 어떤 때는 이브 몽탕에게 맞아 얼굴이 멍들고  상
처가 나기도 하였다. 이제 에디트의 얼굴을 칠 정도로 이브 몽탕은 인기가 있었다. 울부짖
고 괴로워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웃고 떠들고 사랑하며, 이브 몽탕과 에디
트는 여느 부부들처럼 그렇게 살았다.
 
    사랑하므로 떠난다
 이브 몽탕의 공연을 즐겨 지켜보던 그녀는 어느 날 진지한 충고를 하였다.
 "무대에선 땀을 닦지 마. 마치 선창가의 인부같이 보이니까."
 "뭐라고? 내가 내 손으로 성공을 거둔 거야. 다른 사람이 참견 할 바 아냐."
 이브틑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녀가 잠자코 이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몇 번 앵콜을 받았는지 알아? 자그마치 열세 번이야."
 "그 앵콜로 우린 진절머리가 난 거야."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매번  그렇게 싸우면서도 에디트는 그를 깊이  사랑했
다. 이브도 그러했다.
 에트와르좌에서의 공연으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관객들로부터 앵콜  소리와
박수가 끊일 줄 몰랐다. 이런 모습을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그날 밤 한 가지 결심
을 하게 된다.
 "이번에야말고 끝장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아."
 그날 밤, 그녀의 방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브라면 돌아가."
 에디트는 냉정하게 말했다. 노크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 왔다.
 "열어 줘, 어서!"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에디트 피아프는 그런 여자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성공한 것을 지켜본 후에 그의 곁을 말
없이 떠나는 여자.
 
    권투선수와의 사랑
 그녀는 길거리 생활 때부터 수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죽을 때까지 사랑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 주인공이 바로 마르셀 세르당이었다. 마르셀은 가수도  아니
고 외인부대의 병사도 아니었다. 때리고 얻어맞으며 사각의 링을 맴도는 권투선수였다.
 에디트의 뉴욕 공연 때였다. 호텔 방에 혼자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입니다.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해요."
 첫 데이트부터 그들은 헤어질 수가 없었다.
 그들은 뉴욕 아일랜드에서 청룡열차 같은 제트  코스터를 탔다. 에디트는 그에게 꼭  안겨
비명을 질렀는데, 그것은 공포의 비명이 아니라 기쁨의 함성이었다.
 언젠가 마르셀은 그녀에게 시합을 보러 와 달라고 부탁했다.
 "무서워서 보고 싶지 않아요."
 에디트는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이 노래할 때 나도 두렵지만 들으러 갑니다."
 마르셀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그날 밤 피투성이가 된 채 이겼다. 달려온 에디트를 마르셀은 부드럽게 밀어 냈다.
 "괜찮아요, 에디트.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게 내 일인걸요."
 넉넉한 그 사나이다움에 에디트는 반하고  말았다. 이브 몽탕보다도, 자신이 지금껏  만나
왔던 어느 남자보다도 마르셀은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에디트에게 행운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계속해서 고통을 이겨
내며 좋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에디트는 마르셀과 만나기 위해 스케줄을 짤 정도로 사랑했다. 물론 마르셀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그래서 가족이 없다면 마르셀은  에디트와 결혼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곤  했었
다.
 그러던 어느 날 에디트는 뉴욕에서  공연이 있었고, 마르셀은 프랑스에서 시합을  사였다.
두 사람은 국제 전화를 하였다.
 "마르셀.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나도 당신이 보고 싶소. 내가 시합이 끝나는 대로 달려갈 테니 기다리시오."
 마르셀은 시합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끝내 마르셀은 에디트의 곁으로 영영 오
지 못했다. 그날 밤 마르셀이 탄 비행기가 추락했던 것이다.
 그녀는 거의 실신할 정도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보다못한 매니저가 공연을  취소하겠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슨 말이에요. 전 노래할 거에요."
 무서운 집념을 가진 에디트였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녀는 관중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이었다. 무대에 오른 에디트는 창백하고 지쳐서 평소보다도 더
작게 보였다.
 "오늘 밤은 마르셀 세르당을 위해서 노래하겠습니다. 오직 그 사람 하나만을 위해서."
 그는 마지막까지 창백한 얼굴로 노래했다. 유명한 그 <사랑의 찬가>를 마르셀을 위해 불렀
다.
 "당신의 타오르는 손으로 나를 안아 줘요. 내가 바라는 영원의사랑을 위해..."
 그녀의 나이 서른넷. 샹송의 여왕 그녀는 운명적으로 또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노래는 나의 생명
 에디트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남자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지만,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 줄 남자들을 만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마르셀이 죽은 후 각양각색의  남자들이 그녀는 스쳐 지나갔다. 샤르르  아즈나블,
에디 콘스탄티스, 재크 필스...
 샹송 가수 재크 필스를 만나는 날 에디트는 목욕탕으로 달려가 모르핀 주사를 맞았다. 그
녀가 진통제를 맞기 시작한 것은 1951년 자동차 사고때 팔을 다쳤기 때문이었다. 
 "이걸 맞으면 통증도 없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이것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살지 못했
을 것이다."
 에디트는 재크 필스에게 류머티즘 약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녀가 남자를 좋아했던  것은
안정된 생활을 얻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재크와의 결혼이 약의 악습으로부터 자신을 구
해 줄 것이라고 에디트는 기대했다.
 정식으로는 첫 결혼이었다. 에디트는 서른 여섯, 재크는 마흔이었다. 1952년 9월 20일, 뉴
욕에서 그녀의 결혼식이 거해오디었다. 친구인  마리네 디트리히가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 결혼은 5년 만에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죽기까지 약 10년간은 술과 약과  노래와의 사투라 할 수 있는 생활의  연속이었
다. 그리고 사고와 병이 쉴새없이 밀어닥치는 불운의 시절이었다.
 차 사고 네 번, 자살 미수 한 번, 마약  치료를 위한 입원 네 번, 발작, 알코올 중독,  폐
렴, 그밖에 수술 일곱 번... 그녀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 기간에 그녀는 조르쥬
무스타키와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카네기홀에서의 대성공이 있었고, 올림피아에서의  리
사이틀 레코드가 2만 장이나 팔렸다.
 그러나 몸은 더욱더 나빠져 더 이상 노래를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더 이상 노래하는 것은 자살 행위다!"
 가수에세 노래를 부르지 말라니...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된 그녀는 이
렇게 말했다.
 "자살이라도 좋아. 노래는 내 생명이니까."
 노래 없는 인생은 에디트에게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테오 사라보와 만났을 때도 그녀는 암 때문에 고통당하고 수로가 약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존재는 여전히 샹송계의 여왕이었다. 그녀 나이 마흔일곱.
 테오는 스물일곱의 미남 가수였다. 사람들은 그가 돈 때문에 에디트와 결혼했다고  경멸했
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에디트는 사나이들과의 열애 때문에 이미 파산하고 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가 죽은 후 남은 것은 4,500만 프랑의 빚더미뿐이었다.
 테오는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그녀가  무일푼이며 암으로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에디트와 결혼했다. 어쩌면 자신이 존경했고 사랑했던  스승의
마지막 생을 함께해 주고 싶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암으로 고통받고 생활고에 쪼들리는 그녀와의 1년이 금방 지나갔다. 테오는 헌신적으로 그
녀를 간호하며 함께 살았다.
 "테오. 미국 공연을 준비해 줘. 케네디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멋지게 부르고 싶어."
 그러나 그녀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체중이 33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는 거의 송장이
나 다름없었다.
 
 1963년 에디트 피아프는 마지막 애인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샹송 가수를 추모하는  열기는 뜨거웠고 경건했다. 생전에 그녀가  사랑했던
외인부대 병사들은 그날만큼은 군복이 아닌 검은 옷을 입고 묘지에 몰려들었다. 생전에 그
녀가 즐겨 부르던 샹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가는 그녀에게 존경과 애정을 바치기 위해 묘지로 몰려
들었다. 조문객은 무려 4만 명에 이르렀다. 노래 하나로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
았던 여자는 역사상 없었다. 그녀는 샹송  가수로서 살아 있는 전설을 남기고 47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훗날 그녀의 마지막 남편이자 스무 살 연하의 애인 테오가 에디트와 함께 묻혔다. 지금도
테오와 함께 잠자는 묘지에는 사랑으로 고민하는  여자나 창녀들이 꽃을 바치기 위해  줄을
잇는다고 한다.
 빈민굴 출신의 그녀가 프랑스 최고의 샹송 가수의 자리에 오른 전설적인 삶은 오래도록 전
세계인의 가슴 속에 길이 남을 것이다.


      금세기 최고의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
 '난 언젠가 백조가 되고 말 거야.'
 뚱보 오리로 불리던 그 소녀는 백조를  꿈꾸며 자라났고, 마침내 세기의 프리마로  성장한
다.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세상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녀는 노래에 그리고 사랑에 정열을 불태우며 불꽃처럼 타
올랐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마리아 칼라스는 세계 오페라계의 여왕이며 부와 미모와 위엄을 갖춘 위대한 여성이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키워 주고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한 뛰어난 매니저이자 남편인 메니기
니가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가정을 이루며 10년을 아무 탈 없이 행복하게 살아오다가 그녀의
나이 서른 네 살 때 운명이  바뀌었다.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라는 새로운 운명이  그녀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가 한번 찍은 여자들은 모두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바람둥이 오나시스가 세계적인 프리
마돈나 마리아 칼라스에게 눈길을 돌리기 사작했다. 돈과 권력이 있었기에 내로라 하는 미
녀들이 그의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런 미녀들에게 싫증을 느낀 오나시스는 젊지는 않
지만 미인에다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인 그녀를  자기의 정부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오나시스는 한번 마음먹은 것은 그대로 실천하는 도전적인 사나이였다. 그는 돈과  권력을
앞세워 수많은 여자들을 그의 앞에 무릎 꿇게 하는 절대적인 힘이 있었다.
 오나시스가 마리아 칼라스를 처음 만난 것은 2957년 베네치아에서였다. 그 후 또 어느 파
티에서의 만남이 있었지만 그저 가벼운 인사 정도에 그쳤다.
 그녀는 뉴욕, 이탈리아, 파리, 런던 등 초일류 대극장에서의 공연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적인 만남에서 오나시스는 마리아 칼라스를 자신의 사정권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파리에서 있었던 자선공연과 저녁 만찬 때였다. 그것은 그녀에게 사상 최대의 공연
이었다. 세계 각지로부터 정상급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윈저공 일가, 아랍의 부호  알리
칸, 억만장자 로스 차일드, 샹송 가수 그레코, 영화배우 브리지트 바르도, 채플린, 프랑소
와즈 사강... 이런 사람들 중에 오나시스가 일등석에 앉아서 마리아 칼라스를 물끄러미 지
켜보고 있었다.
 마리아 칼라스는 절정기에 달한 기량으로 노래를 불러 청중들을 압도했다. 그러나 다른 사
람들이 모두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에 넋이 빠져 환호하고 있는 동안 점잖도 돈 많은 정력적
인 오나시스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랑은 용기 있는 자만이 성취한다고 했던가. 그만큼 오나시스는 탐나는 여자를 자신의 여
자로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는 정력적인 남자였다.
 "마리아 칼라스. 그대도 결국 내 앞에 무릎을 꿇고 토스카를 부르게 될 것이오."
 오나시스는 마리아 칼라스가 토스카를 부르는 것을 지켜보며 이렇게 속으로 읊조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생각을 하면 그는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마리아 칼라
스와 남편인 메네기니를 크리스티나호로 초대했다.
 크리스티나호는 바다에 떠 있는 궁전으로  불리는 호화로운 요트였다. 오나시스가  여자를
유혹할 때 자주 이용하는 요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요트에 올랐던 여자들은 예외없이 그
의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
 오나시스의 초청 제의를 남편에게서 들은 마리아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자 남
편은 조용하고 다정한 말로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나시스의 요트는 아주 초호화 요트래요. 바다에 떠 있는 궁전이라고 하고, 당신 주치의
도 바다의 햇살이 당신 몸에 좋다니 얼마나 좋은 기회요. 그러니 이번 여행은 당신에게  좋
은 휴양이 될 것이오."
 메네기니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겨냥하고 있었다.
 7월 22일, 이들 부부를 태운 크리스티나호는 몬테카를로를 출항했다. 그러나 이 뱃길이 두
사람의 갈림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오나시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또한 마리아 칼
라스에 있어서는 자신의 애창곡 <사랑에 살고 노래에 살고>의 토스카를 실제로 행하는 여행
이기도 했다.
 
    남편의 침실로 돌아오지 않은 칼라스
 크리스티나호는 순풍을 받으며 지중해를 달렸다. 손님 중에는 영국의 처칠 전 수상도 있었
다. 손님들은 샴페인을 터뜨리고 갑판에서 일광욕을 즐겼다. 밤마다 호화로운 파티가  새벽
까지 연일 계속되었다.
 이런 호화로운 생활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마리아는 놀랐다. 도대체 이 배의 소유
주인 오나시스는 얼마나 돈이 많길래 이렇게 흥청망청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오나시스
를 다시 한 번 생각하였다. 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정력적이고 추진력이 강하다는 뜻이었
다.
 당시 마리아도 나름대로는 상류 계층에 속해 있었다. 그 또한 남 부러울 것이 없이 행복하
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오나시스의 호화 요트에 올라타기 전까지는. 그녀는 그
당시 한 차례 공연에 우리 돈으로 약 2,000만 원의 출연료를 받았다. 이탈리아 베로나에 두
개의 궁전을 갖고 있었고 그리스에 별장과 수많은 미술품, 보석, 거액의 황금을 갖고 있었
다. 하지만 오나시스의 호화 요트에서 벌어지는 세계는 상상을 초월한 별천지였다.  이것은
마리아 칼라스에겐 자유와 방종의 체험이기도 했다.
 오페라 가수의 일상 생활이란 엄격한 레슨과 무대 출연의 연속이었다. 무대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었고 마리아는 다음 무대를 향해 언제나 비행기 여행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
다. 그리스의 별장에서 편히 쉴 수 있는 날은 별로 많지 않았다. 빽빽한 일정 때문에 늘 시
간에 쫓겨 다녔고 쉬는 날에는 연습을 해야만 하는 고통이 뒤따랐다. 게다가 마리아의 나이
는 이제 30중반이었는데 비해 남편은 60 중반이었다. 정열적인 마리아를 만족시켜 줄 강한
남자가 그립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을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키워 준 남편의 은공을 잊을 수가  없었
다. 그때마다 마리아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1933년 12월 4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던 날은 눈이 내렸다. 그리스 약제사의 딸 마리아
는 뒷골목의 작은 병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평생 꿈이었던 라디오의 성악 콩쿠르에서 그녀가 1등을 차지한 뒤로 마리아의 생
활은 서른이 넘도록 오로지 노래, 노래뿐이었다.
 이렇게 노래뿐이었던 마리아의 전반기 인생은 크리스티나호 갑판 위에서 갑자기 종막을 고
했다. 자유와 풍만한 여우,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인생살이의 한 풍경을 그곳에서 만났던 것
이다. 그리고 운명은 급속도로 새로운 세계를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여보. 이제 침실로 들어갈까?"
 남편이 물었다.
 "왜요? 저는 좀더 있다 가고 싶은데요."
 "그래? 그럼 나 먼저 들어가 쉴게. 좀 피곤해서 그래."
 "좋도록 하세요. 하지만 저는 여기 있겠어요."
 그녀의 검고 커다란 눈동자가 남편을 바라보며 동요의 빛을 띠고 있었다. 남편은 그런 부
인의 표정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이제 기회가 온 것이다. 뭔가 다른 세상과  접할 수 있는 자유의 기회. 그날 밤  마리아는
오나시스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마리아는 아침까지 남편의 침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후 마리아는 자신과 남편과의 사이에 무엇인가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로맨스와 그것에 정열을 불태우는 스릴. 내로라 하는 여자들만 상대했던 오나시스가 마리아
칼라스를 잠자리에서 요래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에게는 커다란 신
선함이었고, 그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체험이었다.
 그 후 그들 부부 사이에는 눈에 띄게  언쟁이 잦아졌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환갑이 훨씬
넘은 노인이었다. 30대 중반의 그녀를 만족시켜 주기엔 역부족이었다. 남자로부터 또  다른
강력한 체험을 해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오나시스에게서 새로운 체험을 경험한 그녀
는 늙은 남편이 싫었다. 자신을 키워  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인생을 그와 함께 마무리한다는 것은 너무 큰 희생이었다.
 "당신은 저를 한 번도 사람으로 대해  주지 않았어요. 언제나 나를 죄수처럼  감시했어요.
사슬에 묶어 두려고 했어요."
 그녀는 남편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들 듯이  말했다. 메네기니에게 이 말은 무서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시골뜨기 당신을 발견하여 오늘날의 당신으로 키워 준 사람이 도대체 누구지?"
 메네기니는 충분히 그 말을 하고도 남을 만큼 그녀에게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사실 마리아
칼라스에게 메네기니의 헌신은 늘 짐이 되었다. 그렇다 해도 그들은 별탈 없이 서로 신뢰하
고 존중하며 부부로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나시스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세기의 프리마
 1947년 베로나의 야외 원형극장에서 공연된 <라조콘다>에 출현 한 것이 스물세 살 때, 칼
라스는 아직 무명이었다. 당시 마리아 칼라스는 110킬로그램 체중을 가진 거구의  아가씨였
다. 게다가 극도의 근시로 두꺼운 안경을 써야 했다.
 그러나 노래는 훌륭했다. 성량이 좋고 음역도 풍부한데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정열
을 갖춘 음성이었다.
 베로나의 실업가이며 오페ㅇ라 애호가였던 메네기니는 곧 젊은 마리아 칼라스의 소질을 꿰
뚫어보았다. 메네기니는 마리아의 몸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이미 설계를 시작하고  있었다.
쓸데없이 몸 구석구석에 붙어 있는 지방분을 뺀다면 그녀는 훌륭한 미인이 될 것이라는 판
단이 섰다. 마리아는 그리스인 특유의 윤곽이 뚜렷한 용모와 커다란 눈을 갖고 있었다.
 "당신의 노래는 아주 훌륭하오. 하지만 당신에겐 적이 있다오. 바로 당신의 체중이오."
 그때부터 마리아와 메네기니는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오페라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마리
아의 노래를 들으며 일일이 지도를 해 주었다.
 그는 마리아를 위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사업도 내던지고 그녀의 매니저가 되기로 결심
했다. 그의 감시 밑에 마리아는 4개월 만에 61킬로그램까지 체중을 줄였다. 놀라운 발전이
었다. 메네기니 또한 훌륭한 조련사였다.
 훗날 그녀는 마치 새처럼 날아갈 것 같았다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그 이듬해에 두 사람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결혼을 했다. 스물 다섯 살의 신부와 쉰네 살
의 신란이었다. 외모나 나이로 볼 때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다. 마리아 칼라스
는 키가 무척 컸다. 신장이 190센티미터의 장신인 데 반해 메네기니는 그녀의 어깨밖에 차
지 않았다.
 그러나 메네기니는 마리아에게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존재였다.
 "누가 무명이었던 당신을 스타로  만들었으며, 누가 전세계 극장에  출연할 수 있도록 했
지?"
 메네기니의 음성은 비통함으로 떨렸다. 막 떠나가려는 배를 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 모습
은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작가 헤밍웨이가 '황금 목소리의 허리케인'과 '천국의 소리를 가진 태풍'이라고 칭송해 마
지않았던 세계적인 프리마돈나가 지금 당장 그에게서 떠나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
다.
 온갖 어려움과 고생을 마치고 지금 절정기를 맞은 칼라스, 그의 아내이면서 보물이고 예술
이며 자랑이며 신앙이었던 그녀, 가는 곳마다 황금알을 낳는 마리아 칼라스가 그의 품에서
떠나려 한다는 사실에 허탈감을 느꼈다. 그리고 오나시스의 요트 초청에 응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마리아. 당신은 그리스의 바람둥이 오나시스에게 속고 있는 거야. 언젠가는 당신은  안중
에도 없다는 듯 길거리로 내몰리게 될 거라고."
 "그는 부와 명예와 젊음이 있어요. 당신에게 없는 그 무엇이 있단 말예요."
 이미 마리아 칼라스는 오나시스에게 푹 빠져 있었다. 자신을 키워 준 은공도 고맙지만 남
은 인생을 좀더 넓고 자유롭고 멋지게 살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멍청한 여자야. 아직도 모르겠어? 그리스의 바람둥이 그놈은 널 사랑하는 게 아냐. 단
순히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당신을 성의 노리갯감으로 삼는 것뿐이야."
 마리아의 넘편을 눈물로 호소를 하였지만 그녀는 말없이 오나시스에게로 떠났다. 메네기니
는 자신이 공들여 키운 보물을 빼앗겼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오나시스는 요트 파티가 있던 날에  이런 식으로 마리아를 모든 사람 앞에서  소개를
했었다.
 "나는 위해 마리아 칼라스 같은  세계 일류 여성이 참가했다는  것을 난 자랑스럽게 여긴
다."
 마리아는 사실상 오나시스의 애인이 되었다. 오나시스는 아내와 이혼하고 두 사람은 그 후
10년 간 연인으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정식 부부 관계는 아니었지만 세상의 사람들
이 모두 알고 있는 부부나 다름없었다.
 마리아는 전처럼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무대에 서지 않게 되었다. 공연을 극도로 줄이고
오나시스와 요트를 타고 별장을 오가며 사랑을 불태웠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 결혼하지
는 않았다. 격렬한 기질의 마리아와 또한 강렬한 성격의 오나시스가 원만히 조화를 이루리
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아무말썽 없이 10여 년 동안 그저 좋은  연인
관계로 또는 섹스 파트너로 부부나 다름없이 지내 왔다.
 
    시련이 없는 인생은 싫다
 "나는 시련이 없는 인생은 싫다."
 마리아는 늘 이렇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어렸을 때 마리아는 뚱보였다. 그녀 자신도 자기의 몸을 보면서 보기 싫을 정도였다고 한
다. 다른 아이들이 놀리는 게 싫어서 그 뚱뚱함을 보상하려는 듯 닥치는 대로 단  음식이나
스파게티를 먹어 댔다.
 마리아의 소녀 시절은 불행했다. 한 번도 여자답게 인형놀이나 소꼽놀이를 해 본 적이 없
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노래만을 강요했다.
 마리아는 고독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만나면 언제나 싸움질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백조가 되기를 원했다.  언젠가는 눈부신 백조로 변해 이 고달픈  세상을
내려다볼 것이라 믿었다."
 풋내기 무명 시절 당시, 이 그리스 피를 받은 뚱보 아가씨가 세계 오페라계에 군림하는 최
고의 가수로 성공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난 반드시 토스카니니에게 음성 테스트를 받고야 말겠어."
 이러한 마리아의 야심에 그의 동료들은 비웃거나 안타까운 미소를 보내곤 하였다.
 "틀림없이 언젠가는 토스카니니에게!"
 마리아는 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실현하고야 마는 강직한 성격을 타고날 때부터 갖고
있었다.
 당시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전속 가수가 되는 것이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꿈이었다. 그
러나 마리아에겐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메트로폴리탄은 언젠가 무릎을 꿇고 내게 노래 부르기를 청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는
무조건 기뻐하며 승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마리아는 성격이 곧고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그런 성격이 세계적인  프리마돈나
로 성공하게 한 것이다.
 얼마 후 마리아는 토스카니니에게서 찬사를 받았고, 메트로폴리탄도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 줄 것을 정중하게 청하게 되었다.
 그 전에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으로부터 마리아 칼라스에게 <나비부인> 출연 교섭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그 무대에 서기를 원했건만 그녀는 아무 미련 없이 거절했다.
작곡가 푸치니의 의도를 살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나비부인은 좀 심하
지 않은가.
 그러나 언젠가는 꼭 나비부인 역을 하고 말 것이라고 마리아는 맹세를 했다. 이윽고 체중
이 60킬로그램 가까이 줄자 마리아는 1955년  시카고에서 이를 훌륭하게 소화해 내  절찬을
받았다.
 오페라 가수에게 꿈의 전당은 밀라노의  스카라 극장이었다. 마리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
다. 이미 부귀와 명성을 모두 손에  넣고 세계 각지의 가극장에서 노래를 했지만  웬일인지
밀라노의 스카라 극장만은 그녀에게 문을 닫고 있었다. 스카라에 서지 못한 가수는 진짜 오
페라 가수라 말할 수가 없었다. 칼라스는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그 스카라로부터 요청이 왔다. 그러나 당시 마리아 칼라스와 쌍벽을 이루던 소프라
노 가수 레나타 테발디의 병으로 인한 대역이었다. 목마르게 그 기회를 노리고 있던 마리아
였으나 이런 사실을 알고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최고의 예술가를 맞이하는데 고작 대역이라니?"
 이 때문에 그녀가 원했던 스카라의 출현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으나 나중에는 결국 스카라
의 여왕으로서 오랫동안 군림하게 되었다.
 좀 무겁고 어두운 느낌을 주는 칼라스의 목소리는 100년 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것으로
평가된다. 오페라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1948년부터 4년 사이에 마리아 칼라스가 연기한 오
페라의 횟수가 173회이며 18명의 주인공 역을  맡았다면 아마 놀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18명의 히로인이 모두 사랑 때문에 죽든지 혹은 사랑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여자였다.
 그러나 실력과 명성을 얻은 마리아는 무대에서도 사생활에서도 오만함을 발휘하기  시작했
다. 이유 없이 오페라의 공연을 개막 두 시간 전에 퇴짜를 놓거나 상대역이 마음에 들지 않
는다고 연습장을 떠나 버리곤 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줄무늬가 있는 타이거라 불렀다.
 
    시련의 날들이 계속되고
 오나시스의 공식적인 여인으로 알려지자 마리아  칼라스의 무례함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러한 일들은 무성한 소문으로 세상에 퍼져 나갔다.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극장에서 한 시즌에 받은 출연료가 6억원을 넘는데도 그리스에서  장
사를 하고 있는 노모에게는 한푼도 송금하지 않았다느니, 또 다시 이유 없이 공연을 거부했
다느니, 신문기자를 주먹으로 때렸다느니, 모나코 그레이스 왕비를 쳤다느니 스캔들이 끊일
새가 없었다. 이러한 소문은 부정확한 것도 있었고 사실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는 다른 오페라 가수에 비하면 너무나도 일찍 쇠퇴했다.  오나시스와
의 사랑의 행위가 전성기를 일찍 쇠퇴하게 만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또는 20대에 무리한 다
이어트가 그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또 발성적으로 성량적으로도 무모한 스케줄로 어려운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소리를 죽이고 말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수로서는 시련에 가득 찬 날들이었지만 사랑으로 사는 여자로서는 마리아 칼라스는 행복
했는지도 모르다.
 오나시스와의 사랑의 날들은 약 10년간 계속되다가 오나시스가 재클린 케니디와  결혼함으
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오나시스가 마리아 칼라스를 버리고 케네디댜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과 결혼 발표를 하는 날, 사람들은 놀랐다.
 오나시스의 결혼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나의 가장 멋진 친구다. 그도 나를  가장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문제가 있으면 내게로 왔다. 그것은 내가 결코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자들에게 심정을 토로하면서 애써 태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히 나타났다.
그녀는 강한 여걸이었다. 사랑 때문에 울고불고 매달릴 여자가 아니었다. 떠날 때는 말없이
깨끗하게, 그걸 아는 여자였다.
 오나시스와 헤어진 후 그녀는 무대로 다시 돌아왔다. 세계를 돌면서 활동을 재재했으나 그
녀의 영광의 시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정성기를 지난 그녀의 노래를 듣기보다는 새로운 스
타의 탄생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그를 차츰 잊어 가고 있었다.
 1977년 9월 16일, 마리아 칼라스는 심장 발작을 일으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
이 쉰셋이었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가 너무나도 일찍 타 버린 천재의 갑작스런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했다
 그녀는 노래에 살고 가장 화려한 사랑에 살다간 이 시대의 여걸이었다.


 "난 반드시 토스카니니에게 음성 테스트를 받고야 말겠어."
 이러한 마리아의 야심에 그의 동료들은 비웃거나 안타까운 미소를 보내곤 하였다.
 "틀림없이 언젠가는 토스카니니에게!"
 마리아는 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실현하고야 마는 각직한 성격을 타고날 때부터 갖고
있었다.
 당시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전속 가수가 되는 것이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꿈이었다. 그
러나 마리아에겐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메트로폴리탄은 언젠가 무릎을 꿇고 내게 노래 부르기를 청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는
무조건 기뻐하며 승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마리아는 성격이 곧고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그런 성격이 세계적인  프리마돈나
로 성공하게 한 것이다.
 얼마 후 마리아는 토스카니니에게서 찬사를 받았고, 메트로폴리탄도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 줄 것을 정중하게 청하게 되었다.
 그 전에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으로부터 마리아 칼라스에게 <나비부인> 출연 교섭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그 무대에 서기를 원했건만 그녀는 아무 미련 없이 거절했다.
작곡가 푸치니의 의도를 살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나비부인은 좀 심하
지 않은가.
 그러나 언젠가는 꼭 나비부인 역을 하고 말 것이라고 마리아는 맹세를 했다. 이윽고 체중
이 60킬로그램 가까이 줄자 마리아는 1955년  시카고에서 이를 훌륭하게 소화해 내  절찬을
받았다.
 오페라 가수에게 꿈의 전당은 밀라노의  스카라 극장이었다. 마리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
다. 이미 부귀와 명성을 모두 손에  넣고 세계 각지의 가극장에서 노래를 했지만  웬일인지
밀라노의 스카라 극장만은 그녀에게 문을 닫고 있었다. 스카라에 서지 못한 가수는 진짜 오
페라 가수라 말할 수가 없었다. 칼라스는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그 스카라로부터 요청이 왔다. 그러나 당시 마리아 칼라스와 쌍벽을 이루던 소프라
노 가수 레나타 테발디의 병으로 인한 대역이었다. 목마르게 그 기회를 노리고 있던 마리아
였으나 이런 사실을 알고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최고의 예술가를 맞이하는데 고작 대역이라니?"
 이 때문에 그녀가 원했던 스카라의 출현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으나 나중에는 결국 스카라
의 여왕으로서 오랫동안 군림하게 되었다.
 좀 무겁고 어두운 느낌을 주는 칼라스의 목소리는 100년 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것으로
평가된다. 오페라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1948년부터 4년 사이에 마리아 칼라스가 연기한 오
페라의 횟수가 173회이며 18명의 주인공 역을  맡았다면 아마 놀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18명의 히로인이 모두 사랑 때문에 죽든지 혹은 사랑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여자였다.
 그러나 실력과 명성을 얻은 마리아는 무대에서도 사생활에서도 오만함을 발휘하기  시작했
다. 이유 없이 오페라의 공연을 개막 두 시간 전에 퇴짜를 놓거나 상대역이 마음에 들지 않
는다고 연습장을 떠나 버리곤 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줄무늬가 있는 타이거라 불렀다.
 
    시련의 날들이 계속되고
 오나시스의 공식적인 여인으로 알려지자 마리아  칼라스의 무례함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러한 일들은 무성한 소문으로 세상에 퍼져 나갔다.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극장에서 한 시즌에 받은 출연료가 6억원을 넘는데도 그리스에서  장
사를 하고 있는 노모에게는 한푼도 송금하지 않았다느니, 또 다시 이유 없이 공연을 거부했
다느니, 신문기자를 주먹으로 때렸다느니, 모나코 그레이스 왕비를 쳤다느니 스캔들이 끊일
새가 없었다. 이러한 소문은 부정확한 것도 있었고 사실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는 다른 오페라 가수에 비하면 너무나도 일찍 쇠퇴했다.  오나시스와
의 사랑의 행위가 전성기를 일찍 쇠퇴하게 만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또는 20대에 무리한 다
이어트가 그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또 발성적으로 성량적으로도 무모한 스케줄로 어려운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소리를 죽이고 말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수로서는 시련에 가득 찬 날들이었지만 사랑으로 사는 여자로서는 마리아 칼라스는 행복
했는지도 모르다.
 오나시스와의 사랑의 날들은 약 10년간 계속되다가 오나시스가 재클린 케니디와  결혼함으
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오나시스가 마리아 칼라스를 버리고 케네디댜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과 결혼 발표를 하는 날, 사람들은 놀랐다.
 오나시스의 결혼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나의 가장 멋진 친구다. 그도 나를  가장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문제가 있으면 내게로 왔다. 그것은 내가 결코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자들에게 심정을 토로하면서 애써 태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히 나타났다.
그녀는 강한 여걸이었다. 사랑 때문에 울고불고 매달릴 여자가 아니었다. 떠날 때는 말없이
깨끗하게, 그걸 아는 여자였다.
 오나시스와 헤어진 후 그녀는 무대로 다시 돌아왔다. 세계를 돌면서 활동을 재재했으나 그
녀의 영광의 시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정성기를 지난 그녀의 노래를 듣기보다는 새로운 스
타의 탄생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그를 차츰 잊어 가고 있었다.
 1977년 9월 16일, 마리아 칼라스는 심장 발작을 일으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
이 쉰셋이었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가 너무나도 일찍 타 버린 천재의 갑작스런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했다
 그녀는 노래에 살고 가장 화려한 사랑에 살다간 이 시대의 여걸이었다.

 

      고독한 영혼의 천재 작가
 
    프랑소와즈 사강
 열여덟의 나이에 전세계 팬들로부터 천재 작가라는 칭호를 받으며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
을 누렸던 여자.
 나이를 앞질러 갔던 그 지나친 성공이 어쩌면 극도로 민간함 그녀의 감수성을 조금씩 갉아
먹은 것이 아닐까? 젊어서 얻은 부와 명성이 그녀의 고독한 내면까지 충족시켜 줄 수는  없
었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과 동거를 거듭하면서도 그년느 언제나 늘 고독한 얼굴이었다. 어
쩌면 그녀의 소설 <잃어버린 얼굴>은 그녀 자신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천형(天刑)처럼  따
라다니던 그 고독한 영혼은 끝없이 알코올을 요구했고, 퇴폐라는 일반의 잣대와는 상관없이
도박과 소설을 사랑하면서 삶을 불태워 갔던 것이다.
 
    열여덟 살의 베스트셀러 작가
 프랑소와즈 사강이 세인의 전폭적인 관심을 끌게  되면서 언제나 따라다니게 된 것은  '천
재'라는 소식어였다.
 천재 소녀 사강.
 무엇이 그녀를 천재로 만들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녀가 열여덟 살 때 쓴 소설 <
슬픔이여 안녕>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발표 후 1년간에 걸쳐 33만 부가 팔려 나간  이
베스트셀러는 분명 열여덟이라는 나이 때문에 더욱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비단 그것 때
문만은 아니었다. 그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내용 역시 그녀의 천재성을 탄탄하게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화적 고지대라 부를 수 있는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은 곧바로 미국을 비롯
하여 전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뒤이어 영화로 제작되면서 전세계적인 초베스트셀러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슬픔이여 안녕>은 여전히 인기를
누리며 팔려 나가고 있다.
 
 어린 나이에 그녀는 지나치게 조숙했고 일면은 악마적인 성향마저 지니고 있었다.
 소설 외적인 면에서도 그녀는 세인의 관심을  계속 끌어 왔는데, 이를테면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밤새도록 춤을 추거나  카드를 하면서 돈을 탕진하고, 고급  승용차를
자유자애로 바꿔 타면서 사고를 내는 등 그녀의 기행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녀의 그런 파격적인 행동은 '천재성의 부수품'쯤으로 이해될 수 있었으나, 나이가  들엇
는 늙은 어린애의 치기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의 히트작 <슬픔이여 안녕>은 아버지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세실과 그 아버지를 빼앗으
려는 여인 안느 사이의 심리를 파헤치고 있다. 결론은 셋실이 속임수를 써서 마침내 안느를
자살로 몰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보수적이었던 1930년대 당시의 프랑스 사회에 카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스캔
들과 반사회적인 심리, 그리고 부도덕한 결말로 가득 찬 내용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작가가 열여덟 살의 소녀라는 사실이었다.
 사강은 고집스러웠고, 친구들 사이에서나 파티에서 언제나 주인공 자리에만 앉으려  했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중심이 되는 장소엔 아예 나타나지를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  엄청
난 인세로 돈이 많았던 그녀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들었다.
 
    들개 같은 소녀
  1935년 6월, 사강은 전망 좋은 바닷가의 별장에서 태어났다. 그만큼  그의 가족은 부유했
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기 또래에 비해서 상당히 조숙했는데, 그것은 언니 오빠들과의 나이
차이가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낯을 몹시 가리는 아이였다. 또한
뭔가 열등감을 갖고 있어 말도 더듬거렸다. 그 때문에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골
방에서 혼자만의 세계를 꿈꾸며 고독을 즐기게 되었다.
 언젠가 인터뷰를 할 때 사강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애초부터 난 어른이었을까? 아니면 지금도 어린아이 그대로일까? 나이 먹은 지금도..."
 그녀는 카톨릭계의 여학교에 다녔다. 그 당시로선 꽤 명문 학교였는데, 그 명성만큼 틀에
박힌 학교 생활이 그녀를 몹시 지루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생들이 갈 수 없는 카페에서 허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런 사강을 보고는  들개 같다며 탄식했지만, 그 카페는  그녀에게
소설의 길을 열어 주게 된다. 그녀는 카페 모퉁이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면서
앙드레 지드를 만나고 프루슽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녀는
점점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을 치른 이듬해에 그녀
는 처음으로 구체적인 고민을 시작하였다.
 바캉스가 시작되어 인기척이 하나 없는 프랑스의 거리를 산보하며, 또는 아파트에  처박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달반에 걸쳐 탈고한 소설이 바로 <슬픔이여 안녕>이었다.
 탈고를 끝낸 사강은 줄리아르 출판사를 찾아갔는데, 편집장이 원고를 읽어 보고는  즉석에
서 계약을 하자고 하였다. 무엇보다 작가가 아직 소녀 티를 벗어나지 않는 열여덟 살  소녀
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줄리아르 출판사는 우선 초판 4,500부를 찍었다. 3주일 째는 1만
부, 그리고 매달 몇만 부씩을 찍더니 이윽고 1년 후에는 33만 부가 팔려 나갔다. 일종의 열
병처럼 팔려 나가던 이 소설은 마침내  미국으로 번역되어 갔고, 뒤이어 세계 각국이  앞을
다투어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1954년부터 58년에 갈쳐 사강이 받은 인세는 9,700만 프랑(당시 원화로 약 3억 원)을 넘었
다.
 스물이 갓 넘은 젊은 아가씨로서는 기절할 정도의 엄청난 돈이었다.
 그녀는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썼을까. 놀랍게도 사강이 첫 인세로 산 것은 쟈가(경주용  스
포츠카)와 표범 모피 코드였다. 인세는 신기할 정도로 계속해서 들어왔고 그녀의  사치벽은
점점 대담해져 갔다. 산토로페에 별장을 사고 승용차를 계속해서 바꾸었다. 운전을  하다가
고장이 나면 그대로 내버리고 새로운 차를 산다는 소문까지 남길 정도였다.
 카바레에서는 술에 취해 돈을 물 쓰듯 했으며, 친구들 뿐 아니라 낯선 사람들에게까지 의
기양양하게 수표를 끊어 주었다. 파리에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들이 자유롭게 사
용할 수 있도록 고급 아파트까지 사 놓았다.
 이 젊고 재능 있는 그리고 돈 많은 여류 작가 주위에 강아지처럼 남자들이 모여들었다. 자
신이 언제나 중심에 있기를 원했던 그녀는 이 모든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여러 남자
들과의 스캔들 속에 있거나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세월이  흘러
갔다.
 <슬픔이여 안녕>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그처럼 냉철하게 파헤쳤던 사강이 자신의 삶은 수
많은 스캔들 앞에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 놓았던 것이다.
 
    어긋나는 결혼 생활
 시간이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는 그녀는 언제나 스포츠카를  몰았
다.  자동차광이자 스피드광이었던 그녀는 일반적이고 검소한 생활에서 오는 안락함이라든
가 소박함을 가장 샗어했다. 그런 성격에 걸맞게 매끄럽게 잘 빠지고 또 그만큼 잘  나가는
스포츠카는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애마였다.
 1957년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그녀는  스포츠카를 몰고 스피드를 즐기다가 센느의  오와즈
가도에서 절벽으로 굴러 떨어졌다.  스포츠카는 보기 흉하게 망가졌고, 사강은 중상을 입은
채 숨을 헐떡였다.
 자동차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임종을 대비한 사람들은 목사
까지 불러왔다. 목사는 숨을 헐떡이는 사강에게  성수를 뿌려 가며 임종 의식을  거행했다.
이로 인해 '사강, 교통사고로 죽다'라는 뉴스가 전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강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았다. 거의 기적처럼 그녀는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망
아지처럼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던 사강은  3개월 동안 병원 신세를 지면서 비로소  인생의
의미와 그 심연의 깊이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병원에서의 생활은 사람의 죽음에 대해, 사랑에 대해, 인생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할 충분한 시간을 갖게 했어요."
 병원에서 되원하는 즉시 그녀는 상상을 초월했던 낭비 생활과 위스키와 나이트 클럽, 그리
고 스피드라는 유혹을 끊기로 작정했다.
 퇴원하고 며칠이 지나 친구의 집에서 쉬고있을 때, 사강은 운명의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키가 큰 갈색 머리의 조용한 신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출판사를 경영하는 세레르라는 중년
의 사나이였다.. 어딘가 인생살이에 조금은 지친 듯하면서 고뇌의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는
남자였다. 스물두 살의 사강은 첫눈에 그 남자에게 반하고 말았다. 훗날 그녀는 그가 <슬픔
이여 안녕>의 주인공인 세실의 아버지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였다.
 "나는 나 자신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일으켜 줄 사람과 결혼 하고 싶다. "
 즉흥적인 성격의 사강은 이 남자야말로 자신의 동반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여
러 생각 할 것도 없이 적극적인 구애 작전으로 세레르에게 사랑의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8년 3월, 그녀는 모든 스캔들을 뒤로 하고 스무 살이나 연상인 세세르와 결혼식
을 올렸다.
 그러나 그 결혼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나이 차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강이 예전과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파티나 사교 모임보다는 집에서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
러나 남편은 달랐다. 이미 사회적인 지위와 나이가 있었고 밖에서의 모임이 잦았다.
 행복한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남편은 밖으로 나돌고 아내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게
다가 두 사람은 취미도 달랐기에 서로의 공감대를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남편에
대한 반항으로 그녀의 '끼'가 다시 발동했다. 노는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녀
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메멋대로 나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를 만나고 남자들과 어울려 춤
을 추고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 돈을 쓰며 돌아다녔다.
 사강은 남편의 포용력과 평화를 원했지만 결국  이혼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사강의
첫 남편은 그녀의두번째 작품인 <어떤 미소>의 모델로 등장했을 뿐 그녀의 인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첫 결혼이 불과 2년 만에 끄나 버린 뒤부터 사강의 남성 편력은 더욱 자유분방해졌고 또한
인생을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했다. 다시 예전처럼 주위에 많ㅇ느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그
녀는 매일 밤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인생을 즐겼다.
 이혼 후 2년 만에 사강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상대는 로버트 웨스토프라는, 패션
디자이너 출신의 젊고 잘생긴 미국인 조각가였다.
 둘 사이에는 곧 아이가 태어났지만, 이 결혼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로버트는 그녀의 자유
뷴방한 기질과 방종한 생활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또한 사강의 명예과 호사스런 생활
에 질투가 심했으며, 그녀의 행동이나 인간 관계를 점점 구속하기 시작했다. 사사건건 그녀
의 사생활에 브레이크를 걸었으며 그때마다 사강은 물러서지 않고 대들었다.
 아들 도니가 태어난 얼마 후 두 사람은 기어이 별거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두 사람의 사랑
은 그녀의 소설<멋진 구름> 속에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어째서 나를 사랑했지?"
 "난 당신이 태평스러운 미국인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미남이어서."
 "그런데 지금은?"
 "태평스럽지 않은 미국인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변함없이 미남이고요."
 이혼한 후 사람은 어찌 된 일인지 다시 동거를 시작했는데, 이 동거 생활은 뜻밖에  7년간
이나 지속되었다. 사강에게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자유롭게 헤어질 수 있는 동거 형태
의 생활이 적합했는지도 모른다.
 
    꿈꾸는 것은 모두 내 손에
  여전해 사강의 책은 잘 팔렸다. 뛰어난 사랑의 묘사와 분석 그리고 감수성으로 그녀의 팬
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계속해서 막대한 인세가 들어왔으나, 그돈은 쉽게  사라졌
다.
 사강은 돈을 모으거나 계획을 세우거나, 혹은  안정을 찾거나 검소하게 사는 삶의  형태를
싫어했다. 무계획이 계획이었고 하루하루 재미있게 즐기며 살아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녀는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그녀는 좋아하는 것만 사랑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독서, 위스키, 재즈, 모차르트였는데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
었다. 바로 도박이었다.
 두 번째 남편과의 동거를 끝내고 각각 남남이 될 무렵, 사강은 몹시 지쳐 있었다.  괴팍한
그 성격이 어디서나 거침없이 드러났다. 결국 그 성격은 노이로제로 발전하여 매일 밤 안정
제를 먹어야만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는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옛날에 비해 위스키의 양도 더 늘었고, 도박에 손을 대면서부터 돈을 남아돌지 않았다. 자
신이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도박판에 끼여 들었고, 출판사에서 받은 인세를  하룻밤 사이
에 몽땅 날린 적도 있었다.
 결국 그녀는 프랑스에서는 도박장에 출입할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런던
으로 원정을 가기도 하였다. 그의 가까운  친구들도 사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모두들
포기하고 말았다. 사강은 도박에 대해 나름대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게 있어 도박은 일종의 정신적인 정열이다. 그리고 돈이라는 것은 본래의 장소로 되돌
아가게 마련이다."
 도박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녀에게 있어 젊은 시절의 나이트클럽이나 한때의 사치 같은 것
으로 간주되었던 모양이다. 결국 이런 것들은 모두 가상 자신의 본능적인 고독을 잊기 위한
몸부림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도박 때문에 한때 산더미 같은 빚을 진 사강은 파산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사강은 이렇
게 태연히 중얼거렸다.
"현재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지금 소니 비디오 카세트가 탐나지만 그걸 살 만한 돈도
없다. "
 가장 뛰어난 천재 작가로 불리었던 사강의  말년은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는,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보다못한 아들 보니가 처음으로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사강은  처음
이자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비판을 당하자 정신을 차리게 된다. 훗날 사강은 잘못된 생활로
부터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은 아들 도니였다고 술회했다.
 "아들 도니가 있음으로 해서 나는 처음으로  나를 비판할 권리가 있는사람이 가장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들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면서 나는 이제 죽음의 자유를잃었다는 느
낌이 들었다. "
 사강은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꿈꾸는 것을 모두 손에 넣었다." 라고. 사실 사강은 꿈과
함께 사람들이 탐내지 않는 것, 그리고 원하지 않는 체험까지도 손에 넣었다. 중독이 될 정
도의 알코올, 자동차 사고, 수면 부족, 도박, 파산, 고독, 그리고 소설을 낳는 고통까지...
 "그러나 난 후회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나는 인생을 즐기며 살아왔다. 몇 년 동안 놀고 먹
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
 애당초 그녀가 소설을 쓰게 된 것은 거짓말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데 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나는 소설을 쓴다."
 그러나 한편 이렇게도 말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쓰지 않는다. 느끼지 않는  것도 쓰지 않는다. 체험한 일이 없는 것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는 40대 후반부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리 늙어 갔다. 옛날의 발랄함과 재기 넘치
는 말솜씨도 사라졌다. 주름잡힌 얼굴, 핏기 없는 입술, 슬픔이 서려 있는 커다란 눈...
 그녀의 작품 <브람스를 좋아한요>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여자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았다. 그러나 시간이야말로 그녀를 조금씩 좀
먹어 옛날에는 사랑받던 용모를 거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강을 좀먹어 들어간 것은 어떤 것일까. 그녀를 나이에 비해 놀랄 정도로 늙어 보이게 한
것은 무엇일까.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외출을 하는 것이 결코 즐겁지  않다
는 것과 그 어떤 것도 모험하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무도 그녀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품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그리하여 사강은 쉰 살이 되기도 전에 완전히 할머니와 같은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 얼굴
에 새겨진 주름살이나 생을 초월한 모습은  알코올이나 사랑, 도박이나 수면 부족,  그리고
신경안정제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사람이 꿈꾸는 것을 모두 손에 넣
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녀 때부터  인간의 내면을 냉철하게 꿰뚫어보았기 때문이기도  했
다. 그러므로 그 얼굴은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그녀의 훈장과 같은 것이었다.

 슬픔이여 잘 가거라.
 슬픔이여, 안녕!
 ...
 욕정을 돋우는 육체의 사랑.
 사랑의 억셈.
 몸이 없는 괴물처럼 유혹이 끓어오른다.
 희망을 배신한 얼굴.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이여!

 


      채털리 부인의 화신
 
    프리다
 성은 더럽고 추악하고 죄 많은 것으로 생각하던 구시대적 성윤리에 과가하게 도전하여 성
은 솔직하고 자연스러우며 조화로운 것이라 노래한 사람이 있다. 그는 육체의 교섭을 통하
여 사랑과 정열을 노래했으며 섹스로써 섹스를 초월한 세계를 예찬했다.
 문제성 많은 작가 로렌스.
 그의 소설은 모두가 셀지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유명한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역시 실제로 그가 사랑한 유부녀와의 도피 행각을 그린 것으로 잘 알려져  있
다.
 
    프리다에 의해 다시 태어난 로렌스
 남자는 두 번 태어난 다고들 한다.  한번은 어머니에 의해서, 또 한번은 사랑하는  여성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로렌스는 프리다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 그와 동시에 로렌스의
성 문제를 다룬 문학 작품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로렌스가 쓴 < 채털리 부인의 사랑>만큼 성을 통해 인간의 진실으르 알린 소설
은 그리 많지 않다. 실제로 그의 소설은 민감한 성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다.
 영화로도 유명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실제 주인공은 로렌스에게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친 어네스트 위클리 교수의 아내 프리다였다. 네 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무명의 작가 로
렌스를 만나 서로 사랑을 나누며 인간의 진실을 느끼게 된다. 이미 그녀는 40년 연상의  남
편과 세 자녀와 함께 격식과 품위를 유지하며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안정되고 조용한 가정에 고렌스의 등장은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으며 가정을 버
리고 도피행각을 벌이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은 이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만 생가계 하
는 무서운 마력을 지닌 무기가 되기도 한다. 두 사람은 서로 못 보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사
랑을 느끼며 성을 통새 진실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로렌스가 스물일곱 살 되던 해였다. 로렌스는 초등학교 교편 생
활을 그만두고 뭔가 다른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문득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은사
를 떠올렸다. 어느 봄날 로렌스는 위클리 교수 댁을 찾아 나섰다. 혹시라도 강사 자리를 얻
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작품에 향기를 넣고 꽃을 피울 수 있는 한 여성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잘 정돈된 저택은 남 부러울 것 없이 안정되어 보였다.. 정원에서는아이들이 공놀이를 하
며 뛰어놀고 있었다. 봄바람에 열린 창문 사이로 하얀 커튼이 나부꼈다. 그 한켠에 자신의
운명을 바꿔 줄 프리다 부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외유내강의 모성과 적극적인 외모를 지니
고 있는 여자였다. 로렌스는 한눈에 그녀에게 반해 교수의 집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남늦게 교수의 집을 나온 로렌스는 황톳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다섯 시간이
나 걸리는 길을 그는오직 프리다 부인  생각을 하며 피곤한 기색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부터 로렌스는사랑의 열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매일 그녀의 얼굴과 미소를 떠올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용기를 내어 해쓱해진 얼굴로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마침 교수는 집에 없
었고 그녀 혼자뿐이어서 많은 시간을 문학과 인생에 대해 이애기하며 산책을 하였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지고 말았다.  물론 그 때까지만 해도 서로 사랑한다고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눈빛을 통해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로렌스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뻤다.  상대가 유부녀인데다 고명한 교수의  부인이긴
하였짐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맘에 드는 이상형의 여자와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프리다만이 그의 가슴에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났다. 물론 프리다의  저택이 있는 곳 부근에서. 때로는 산책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시냇물이 흐르는 곳으로 가서 놀기도 하였다.
 로렌스는 그녀가 낳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다. 종이배를 만들어 시냇물에 띄워  보내기도
하였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좋아하며 뛰어놀았다.  아이들과 로렌스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그녀는 점점 로렌스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어렵게
대학을 나온 무명의 작가. 게다가 네 살 연하인 로렌스에게.
  
    그녀의 고향으로 사랑의 도피를
  두 사람이 함께 사랑을 찾아 떠나기로 결정한 계기가 된 것은 어느 날 일요일이었다.  로
렌스가 그녀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이미 교수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로렌스와
그녀는 자연스럽게 더 친밀감을 보이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로렌스가 집으로 돌아갈 기미를 보이자 그녀가 붙잡았다.
 "오늘은 자고 가요."
 그토록 기다리던 말을 듣고도 원래 천성이 착하고 사려가 깊은 로렌스는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이 안 계시는데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먼저 우리가 사랑을 나누기 전
에 선생님께 우리 두 사람의 진실을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 밤 로렌스는 아쉬움을 남긴 채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두 사람이 만난
지도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저는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당신과 함께 사랑을 쫓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의 사랑
을 나눌 수 있도록 저희 고향으로 떠나요."
 대학 교수의 아내이며 세 명의 자녀를 둔 가정주부의 이 말은 그 당시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륜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만의 사랑의 도피를 위해 그들은 과감하게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정든  곳
을 떠난다. 마침 그녀의 아버지가 독일 국적의 남작이었으므로 도버 해협을 건너기로 서로
약속했다. 1919년 5월 4일 그녀는 나이 어린 아이들과 남편 위클리를 뒤로 한 채 도버 해협
을 건너 로렌스와 함께 메츠메로 떠났다.
 남편 위클리는 신사적인 사내였다. 물론 나이가 40이나 차이가 났기 때문에 성적으로 그녀
를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젊은 남자 로렌스가 나타나 그녀의 성을  자극했
고, 그 동안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지 아이와 가정과 남편을 버릴 만큼 소중한  것을
찾아 떠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
 프리다는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정열적인 여자였다. 성을 꾹꾹 참으며 방사할 때까지  기다
리는 암표범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가 40년  연상의 남편을 만나 숲 속의 잠자는  미녀가
되어 있아가 비로소 잠이 깬 것이다. 그녀가 한번 잠에서 깬 이상 그녀는 원래의 모습인 암
표범으로 계속 남길 원했다.
 "나는 지금껏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왔다. 나는 비로소 나의 진실을 찾게 되었다."
 그녀는 로렌스와 사랑의 도피를 하면서 남편과의 12년 7개월간의 결혼 생활을 뒤돌아볼 여
유가 없었다. 이미 자신의 과거는 없는 사람처럼, 오직 두 사람만의 미래만을 생각하며 도
피행각을 벌였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 두 사람은 모든 것을
잃는 대신 사랑의 승리를 택한 것이었다.
 로렌스야 물론 잃을 것이 벌료 없어싿.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사랑이 목말
라 있었으며 한번 찾은 생명의 샘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가족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로렌스와 로렌스와 밀회를 나누었
다. 그러나 그것도 성에 차지 않자 다른 곳으로의 도피를 생각하였다.
 
    채털리 부인의 탄생
  그러던 어느 날, 로렌스가 영국 간첩으로 오인되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결
국 그녀는 자신의 정부인 로렌스의 정체를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을 수 가 없어싿.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일단 불장난 같은 사랑놀이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라도 로렌스를 감옥에서 빼내야만 했다.
 "이 사람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오. 영국  장교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란 걸 내가 증명하
오."
 "남작께서 증인이 되어 주신다면 얼마든지 석방시켜 드리겠습니다."
 남작의 도움으로 석방된 로렌스는 그날로 그녀의 아버지 앞으로 끌려갔 .
 "이 사람아. 젊은 사람들이 뭐가 부족해 이런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가. 그리고 너는 어엿
한 남편이 있는 주부이고 아이가 셋이나 딸린 어미인데, 어째서 이런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거야. 아서 가정으로 돌아가!"
 그녀의 아버지는 호되게 두 사람을 질책했다. 때로는 조용히 타일러 보기도 하였다.
 "어버지.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 결혼할 거예요."
 프리다는 애원하며 매달렸다. 하지만 도저히 이 결혼만큼은 들어줄 수 는 없는 일이었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아버지는 그녀에게 더 많은 질책을 가했다. 그년는 잠시 두고 온 아이들과 넘편을 생각하
였다. 그러나 잃은 것이 너무 많은 지금 다시 영국으로 돌아간들 나아질 것은 아무것도  없
었다. 아버지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것라고 생각한 그녀는 다시 2차 도피행을
하기로 결심한다.
 5월 25일, 두 사람은 독일 뮌헨에서 합류했다. 이곳에서 만난 후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기
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너무 행복한 모습의 두 남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살포시 눈을 떴
다. 창문을 열자 파란 하늘에 구름이 높게 떠 있었다.상쾌한 바람이 두 사람의 살갗을 건드
리며 지나갔다.
 "너무 기쁜 아침이야. 오랜만에 마음놓고 함께 지낼 수 잇어서  좋아."
 "오늘 아침은 우리 생에 있어서 최고의 날이 될 거예요."
 두 사람은 첫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기쁜 모습으로 오랫동안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쐬었다. 두 사람음 힘껏 포옹을 하고 입맞춤을 하면서 지난 밤의 격정을 떠올리며 행복해했
다.
 8월 5일. 꿈만 같은 3개월 가량의 생활을 그곳에서 보낸 두 사람은 영원히 안착할  장소를
찾아 이탈리아로 떠난다. 그들은 간단한 옷차림과 가방을 들고서 알프스를 넘기로 했다. 그
들은 눈덮인 알프스 산정을 쳐다보며 6주간의 도보 여해으로 알프스를 넘었다. 이 험나나한
여정 동안 두 사람의 사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으로 넘쳐흘렀다.
 두 사람은 목적지에 정착하여 1914년 7월 13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비로소 그토록
원하던 부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각지로 전전하며 결혼 생활을하는 동안, 로
렌스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1929년 4월. 사라아하는 로렌스를 홀로 병원에 놔 두고 그
녀는 런던으로 돌아왔다.
 1927년부터 폐병을 앓아 온 로렌스는 그녀가 떠난  지 꼭 1SSU이 되는 1930년 2월에 병이
악화되어 요양소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3월 2일 오후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소설 <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남겨 놓은 채.
 성 해방의 윤리와 가치와 진실을 포함한 대작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작가가 온몸을 다
해 마지막 정려을 불사르고 세상에 선을 보인 것이었다. 스승의 아내를 가로채 달아난 남자
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끝없는 사랑의 도피행으로  일생을 마친 로렌스. 그가 숨을 거둘  때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는 그의 곁에 없었다.
 병든 로렌스를 두고 영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로렌스가 죽은 그 다음해에 다른 남자와 동거
생활에 들어갔으며, 그 후 정식으로 결혼했다.
 병든 로렌스에게서 그녀는 더 이상 그녀가 추구하는 성적 만족을 채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또 다른 성을 찾아 숱한 고생과 사랑의 흔적을 뒤로 하고 영국으로 떠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 의해 로렌스라는 작가가 탄생되었으며, 성의 보고서라고 불릴 정도로  ㅇ니
가가 있는 채털리 부인이 탄생되었다.

      제 4장 죽음보다 강한 사랑
    송도삼절이라 불린 사랑의 용광로
 
    황진이
 스스로 송도삼절이라 부르며 노래와 춤과  시로 당대의 문자가들과 세도가들을 무릎  꿇게
했던 황진이.
 기녀이기 전에 철학자요, 예술가의 삶을 살았던 그녀는 동서고금을 통해 몇 안되는 여장부
였다.
 30년을 수행한 지족선사를 하룻밤에 파계시킨 미모, 화담 서경덕과의 우정, 그녀가 그리워
한 벽계수, 당대의 가인 송순과의 만남,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무덤에 술을 올렸다 하여
관직헤서 파면당한 벽파...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며 아직도 우리의 마음속에 맴돌고 있다.
 
    황진이가 기녀가 된 까닭
 한창 물오를 나이가 된 황진이의 그 뛰어난 미모와 천부적인 문장 실력 때문에 이미  그녀
의 주변에는 흠모하는 남자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비록 황 진사의 서출로 태어난 그녀였지
만 어느 여염집 여자아이보다도 총명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황진이가 집을 뛰쳐나가 기생이 된 까닭은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다.
 황진이가 사는 마을의 한 총각이 먼발치에서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는 그만 상사병
에 걸려 누워 있다 결국 죽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황진이는 어느 날 집 앞
에서 상여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웅성거렸다. 황진이가 사는 집 앞에서 상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상사병에 걸려 죽은 사람은 그 집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벌일세. 그러니..."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ㅇ다도 황진이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
는 옷장 속에 곱게 접어 둔 적삼과 치마를 꺼내 사람들에게 주었다. 상여꾼들이 그 옷을 관
위에 얹어 놓자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
 황진이는 자기 때문에 죽은 자의 상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인생에 대
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의 외모 때문에 한 남정네가 죽었다. 내 용모가 사람을 죽인 것이다. 내가 그냥 있다가
시집이나 간다면 다른 남정네들이 또 죽게 될지 모른다. 아마도 내 팔자는 박복해서 이렇게
태어났는가 보다.'
 황진이는 여러 모로 생각 끝에 기생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로라 하는 문장가와 풍류객들에게 이름이 알려지
게 되었다. 세상의 풍류객들은 황진이를 만나러 먼 길을 달려 송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황진이를 두고 하늘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온 선녀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황진이가 노
래를 하면 모두들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 절조는 처음이라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잘 빠진 몸
매, 온몸 구석구석에서 나오는 정열과 색의 향기에 남정네들은 모두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녀는 시를 잘 지어 시인 판서 소양곡과 사랑을 나누었으며, 노래를 잘 불러 당대 최고의
가인 송순과 친하게 지냈으며, 풍류를 알아 당대의 풍류가인 이사종과 6년 동안 환상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삽시간에 송도는 물론 한양에서 소문을 듣고 달려온 풍류객들을 휘어잡은 그녀는 점점 화
류계에서 오만해지고 도도해져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내로라 하는 남정네들이 그녀 앞에선
맥도 못 쓰고 비실거렸다.
 그녀는 이제 이런 부류의 남자들말고 색다른 남자들을 농락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은근히
들었다. 자신처럼 아름다운 여자의 유혹을 뿌리칠 남자가 과연 있을까? 결국 그녀는 커다란
모험을 시도하기로 했다.
 
   하룻밤에 파계된 30년 생불
 당시 30년 동안 불도를 닦아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지족선사가 그녀의 첫 번째 유혹 대상
이었다.
 천마산 청량봉 아래에 있는 지족암으로 스님을  찾아간 날, 지족선사는 산 아래에서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알 만한 기생 황진이가 자신을 찾아온 것에 그만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더
구나 산에서 불공만 드리던 스님은 눈이 부시게 빛나는 황진이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
다. 이미 스님의 마음을 꿰뚫어본 그녀는 슬슬 스님을 농락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스님. 저로 인해 상사병에 걸려 죽은 총각이 있나이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못 잊어 죽
을 수도 있나이까?"
 "허허! 나무관세음보살!"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요염한 자태에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다. 제대로 황진이를 바라볼 수
가 없었다. 잘못하다간 30년 수도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판국이었다.
 '과연 빼어난 미모를 가졌구먼. 저 정도의 얼굴이면 상사병이 걸릴 만도 하겠어.'
 시간이 흘렀다. 산사의 밤이 깊어지자 지족선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를 덥석 안아
버렸다. 지족선사의 가슴에 안긴 그녀는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본격적으로 유혹했다.
 그날 지족선사와 밤을 함께한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새벽녘 암자를 내려왔다. 30년 불공
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기녀의 묘한 웃음 뒤에는 자만감과 허탈감이 교차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화담
 지족선사를 화룻밤 사이에 파계시킨 장본인 황진이는 이번에 화담 서경덕에게 화살을 겨눴
다.
 대학자 서경덕을 만약 유혹할 수 있었다면 사내들은 늙은이고 젊은이고 모두 계집 치마폭
에서 놀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그녀는 서경덕 선생을 점찍은  다
음부터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시정 잡사를 멀리하고 오로지 초당에 기거하며 학문에 정열을 불태우는화담 선생.  만인의
존경을 받는 대학자를 반드시 자신의 미모로 유혹해 그의 고매한 인격과 높은 학문을 일시
에 땅에 떨어뜨려 보겠다는 일종의 오기가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화담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상황은 달랐다. 지족선사는 자신의 미모에 너무 당황
해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는데,  화담은 달랐다. 황진이가 큰절 올리자  편히
앉으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황진이의 미모따위엔 전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래, 어쩐 일로 날 만나러 왔소?"
 "일찍이 선생님의 고매하신 인격과 높은 학문의 경지를 들었사옵니다. 미천한 제가 선생님
의 고매한 정신을 배우기 위해 이렇게 불쑥 찾아뵙게 되었나이다. "
 황진이와 화담은 서로 학문과 시를 겨루어 보았다. 밤이면 술과 춤으로 화담 선생을 휴혹
하려 했으나, 화담은 황진이가 하는 행동을 그저 귀여운 어린아이가 재롱떠는 정도로만 여
겼다. 황진이는 오기가 발동해 며칠 동안  화담을 유혹했지만 화담 선생은 전혀 그런  그런
것과는 무관한 표정이었다.
 황진이는 생각다 못해 마지막으로 육탄 공세를 취하기로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초
저녁부터 황진이는 비를 맞고 싸돌아 다녔다.  탄력 있는 유방. 가는 허리, 물기를  머금은
그 자태는 한 마리의 학을 연상시켰다.
 황진이는 온갖 교태를 다 보이며 드러난 물기 어린 몸으로 화담을 방에 들어갔다.
 "선생님. 너무 추워요."
 황진이는 화담 선생이 앉아 있는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화담과 그녀의 살갖치  부딪쳤
다.
"허허, 이런. 온몸이 비에 젖었구려. 어서 옷을벗고 이리 들어오시오."
 옷을 벗으라는 화담의 말에 황진이는 옳거니 너도 별수없구나 하며 화담 앞에서 옷을 하나
하나 벗었다. 이윽고 눈부신 그녀의 알몸이 드러났다. 그러나 화담은 아무렇지 안은 듯 젖
은 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아니, 내 벗은 몸을 보고도 아무런 동요가 일지 않는단 말인가!'
 그녀는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화담을 쳐다보았다.
"젖은 몸으로 그대로 있으면 감기가 드니 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있으시게. 내 옷을 말려
줄 터이니."
 화담은 알몸인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옷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
는 황진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코를 골며 이내 잠이 들었다.
 '비로소 내가 남자를 만났구나.'
 황진이는 저절로 화담의 인격에 고개가 숙여졌다. 한 여자가 남자에게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잠이 든 화담의 못습을 보면서 황진이
는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진이는 화담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냈다.
 이튿날 그녀는마른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화담에게 큰덜을 올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
은 채 이렇게 말했다 .
 "선생님. 송도의 삼절(三絶)을 아시나이까?"
 "송도삼절? 글세, 그게 무슨 뜻인고?"
 "송도에는 삼절이 있사온데, 하나는 박연폭포이고, 또 하나는 황진이옵고, 나머지는  화담
인가 하옵니다."
 화담ㅇ느 대답 대신 미소를 머금고는 황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연에서는 박연폭포
이고, 여자 세계에서는 자신이며, 남자 세계에서는 화담이란 말이었다.
 송도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황진이는 문장의 대가들과 시를  지으면서도절대
로 뒤떨어지는 법이 없었다고 전한다.
 
    멋진 남자를 그리워한 황진이
  그러나 그녀도 여자였으므로 남성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로라 하는  양반들이
그녀 앞에서 기어다니다시피 하였지만, 마음에 드는 사내가 있으면 언제 그를 다시 만날까
하는 그리움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다. 이렇듯 남자를 그리워하는 그녀의 외로움은 결국
시가 되어 오늘날 고전문하긍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더이다.

  어져 내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 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치고 유유히 떠나간 사람이 화담말고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벽계수였
다. 그는 황진이의 아름다움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아무리 황진이가 유혹을 해 온다
하더라도 절대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하고는 황진이와 풍류를 즐겼다.
 황진이는 귀인 벽계수를 유혹하기 위해 별 수단을 다 써 보지만 결국 벽계수는 도도히  흐
르는 물처럼 스쳐 지나갔다 .
 황진이는 벽계수를 그리며 그 외로움을 시심으로 달랬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그녀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자를 그리워하며 밤마다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한 가정을 이
루지는 못해도 이성을 향하나 그리움은 어느 여염집 여자와 다를 바 없었다.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을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임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그녀는 결국 임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그 뜻을 펴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만다. 40이
채 안 된 그녀는 그때가지도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눈을 감았다.
 생을 마감할 때는 누구나 자신을 뒤돌아보듯이, 황진이 역시 여자로서 뭇 남자들의 애간장
을 태우며 살아온 팔자에 대한 죄책감을 유언 속에 담았다.
 "내가 살아 생전 내 몸을 사랑하지 못했으니  내가 죽은 후에는 관에 넣어 매장하지 말고
동문 밖 모래 틈에 시체를 버려 세상 여인들로 하여 경계하게 하라."
 그러나 황진이를 아는 이웃들은 결코 유언을  따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체를
장단 근교 구정고개 남쪽 길가에 고이 묻어 넋을 위로해 주었다.
 
  후에 당대의 문장가 백호 임제가 관의 일로 송도에 왔다가 제일 먼저 황진의 안부를 물었
다. 황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 그는 즉시 묘소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때 임제
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을 어데 누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양반가의 사람으로 일개 송도 기생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제사를 지내 주었다는 소식
이 장안에 퍼져 나갔다. 결국 조정에까지 이 사실이 알려져 그는공직에서 파면을 당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하찮은 기생 따위의 죽음을 슬퍼하여 넋을 위로하다니.당장 파
면시켜라."
 백호는 덤덤한 심정으로 관직을 내팽개쳤다. 당대의 손꼽히는 문장가였기에 그녀의 죽음을
두고 슬퍼했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황진이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존경
을 받은 기녀는 없었다. 그녀는 기녀이기 전에 예술과 철학을 통달한 신화적인 존재였다.
 그녀는 가장 완숙한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할 때 세상을 등졌다. 그녀가 천수를 다하고 죽
었다면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별로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현해탄 바닷속게 잠긴 조선의 가수
   윤심덕
  조선의 가수 윤심덕.
  뛰어난 미모와 가창력으로 인해 그녀에겐  많은 남자들이 따랐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단 한 사람, 김우진이란 남자였다.
 그가 유부남이었기에 윤심덕이 치러야 했던 숱한 곤욕과 지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의 우리 사회상을 생각할 때 그 정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위해 모든 시련을 감내했다. 그리고  그 감내의 결과는 마지막, 죽음의  일본행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부산으로 향하는 여객선 갑판 위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 사랑을 나누다 검
푸른 바닷속으로 멀고 먼 이별 여행을 떠난다.
 
    조선 역사상 인기 있었던 노래
  1920년 당시 최고의 인기 가요는 <사의  찬미>였다. 그 인기는 5,60년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훨씬 압도했다.
 사랑에 실패하거나 사랑을 얻거나 모두들 이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랬다. 우울한 식민지
지배 하의 백성들에게 <사의 찬미>는 암울하나  사회의 저변에 깔린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곡이었다.
 윤심덕은 사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여자였다. 돈도 명예도 다 싫다고 외치며 오직 사
랑하는 유부남 김우진과 한평생 살고 싶었던 평범한 여자였다. 그러나 왜 현해탄 검푸른 바
닷속으로 죽음의 여행을 떠나야 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자는 그녀가 우리 땅에서 많은 남성 편력과 유부남과의 불륜 관계로 지탄을
받았다고도 하고, 또 폐병을 앓고 있었다고도 하고 , 또 일본에서 취입한 레코드가 사실 별
로 반으이 없자 사랑하는사람과 죽음을 택한 게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다.
 
  1923년 8월 3일.
 연락선 도쿠슈마류는 부산을 향해 검푸른 물살을 헤치며 침하게 나아갔다. 모두들 잠든 사
이 두 사람은 갑판 위에서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다가 검푸른 바다에 눈길을 보냈다. 바다가
자꾸 손짓 하며 두 사람을 유혹하고 있었다.
 윤심덕은 일본에서 레코드 취입을 끝내 노래 <사의친미>를 조용히 부르기 시작했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며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서름
  우는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으니
  생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새벽 어둠에 잠겼던 바다도 윤심덕의 노래를 듣고 우는 듯 파도를 일렁였다. 노래가 끄나
자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그들의 울음소리는 파도에 휩쓸려 먼 바다고 사라졌
다.
 두 사람이 이렇게 현해탄 바다 한가운데까지 오는 데는 너무도 많은 시련과 고난의 세월이
흘렀다.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이었다.
 
  김우진은 목포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구마모토 현립 농업 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나온 역극 학도였다.  그는동경 유학생등의 연극 단체인 동우회를  조직하여
국내 순회 공연에 혼신을 바치고 당시 유행처럼 번진 신극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총망받
는 극작가였다.
 두 사람은 일본 동경에서 신극 운동에 참여하다 만났다. 말이 별로 없고 조금은 수줍음을
타는 김우진과, 키가 늘씬하게 크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윤심덕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장래가 유망한 성악가와 젊고 능력 있는 극작가의 만남.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
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김우진은 이미 고향에 처자를 두고 온 유학생이었다. 유부남을 사랑하게 된 윤심덕
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김우진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
다. 성격적으로 다소 내성적이었던 김우진은 미녀 윤심적의 끈질긴 구애에 손을 들고 말았
다. 맘에 드는 물건이든 사람이든 사람이든 일단 갖기로 생각하면 절대 놓치지 않는 그녀는
사랑의 부나비가 되어 김우진의 가슴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당시 윤신덕은 동경 우에노 음악학교 졸업 기념 공연에서 제국극장 경영주의 눈에 띄었
다. 사장은 매달 150원의 출연료를 주겠다며 전속 계약을 맺자고 했다. 그러나 윤심덕의 대
답은 '아니오'였다. 주위의 친구들이 놀랐고,  그녀 자신도 놀랐다. 그토록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여자로서 동경의 제국극장에서 노래를 부른다면 출세가 보장된 것과 다를 바 없었지
만, 그녀는 김우진이라는 한 남자를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과감히 일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부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사랑을 찾아서!
 
    뜨거운 사랑
 1921년 7월 9일부터 8월 18일까지 약 한 달간 22명의 동우회 회원들은 동경에 유학 온  고
학생들의 학비 마련과 회관 건립 기금 모금을 위하여 순회 공연을 떠났다.
 부산, 김해, 마산, 경주, 대구, 목포,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등지를 거치며 윤심덕과
김우진은 사랑을 불태우며 뜨거운 관계로 발전했다.
 그 후 윤심덕은 귀국해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목포에 내려가 있던  김우진에게
뜨거운 사랑의 편지를 보내지만 그녀의 편지는 한 번도 제대로 전달된 적이 없었다. 중간에
서 누군가가 편지를 가로챈 것이다. 윤심덕에게는 소식 없는 김우진이 첫째 걱정이요, 가족
의 생활고를 해결해야 하는 가장의 노릇이 두 번째 걱정이었다.
 그녀는 눈만 뜨면 음악회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기회만 있으면 레코드 취입에 열을 올렸
다. 게다가 방송 출연까지 하며 장안의 인기 스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 김
우진은 포근한 가정 생활에 만족을 하며  그녀를 잊었는지 소식이 없었다. 그녀는 돈  버는
것도 짜증이 났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든 게 힘이 들었다.
 많은 한량들이 미모의 여가수에게 추파를 던졌고 중매가 들어왔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동
대문 갑부 이용문이란 사내와 가깝게 지냈다.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
게 퍼져 있었다. 결국 윤심덕도 돈 앞에서는 약해진 것일까.
 그러나 윤심덕은 욕심이 있었다. 돈만 있으면 꿈에 그리던 이태리 유학을 갈 수 있다는 생
각이었다. 그러나 이용문과는 곧 헤어졌고 또 다른 남자들과의 염문이 끊이지 않고 나돌았
다. 그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일종의 스타에 대한 스캔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윤 선생. 가수 활동을 그만두든지 학교를 그만두든지 하세요."
 교육계의 반발이 심했다. 윤심덕은 더 이상  조선 땅에 머물며 노래하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없었다.
 "전 하얼빈으로 떠나겠습니다."
 자신을 향한 비난을 끝내 감수하지 못하고 그녀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하얼빈으로  떠났다.
김우진과의 사랑을 뒤로 한 채.
 1년 6개월 뒤 뒤늦게 사라진 윤심덕을 찾기 위해 김우진 역시 하얼빈으로 향했다. 그러나
윤심덕은 이미 서울로 떠난 뒤였다. 김우진은 낙담하여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두 사람은 서울에서 다시 만나 오랜만에 해후를 풀며 사랑을 불태웠다. 그들은 여관을 전
전하며 사라오가 예술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떠로이 생활을 했다. 그녀는 '토월
회'와 '백조회'로 옮겨다니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살림은 나아지지 않고 갈수록  형편
없었다. 더 이상 서울에서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일본으로 가는 게 어떻겠어요?"
 "일본?"
 김우진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의 결심이 서 있는 듯
했다. 김우진 또한 견디기 힘든 생활고를 걱정하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곧 호구지책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행히 윤심덕은 오사카 닛토  레코드
회사에서 <사의 찬미>를 비롯해 10편의 노래를 취입할 수 있었다. 노래의 반주는 동생 윤성
덕이 맡았다.
 동생 윤성덕은 그녀가 레코드 취입을 끝내자 요코하마에서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이화여
전을 나온 성덕은 클리 클럽의 지휘자로 서울에선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동생을 미국
으로 보낸 윤심덕은 이제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레코드 취입을 해서 받은 돈으로 주머니
사정도 좋아졌다.
 "목포 오빠."
 그녀는 김우진을 그렇게 불렀다. 김우진은 밝게 웃으며 쳐다보았다.
 "오빠,. 우리 다쿄서 시모노세키까지 해안선을 따라 여행을 해요."
 "돈이 많이 들 텐데..."
 "제가 가지고 있는 돈 모두 써 버리자고요."
 "배표는?"
 "우리가 멀고 먼 곳으로 가는 표, 그건 사야죠."
 두 사람은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며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마음껏 사랑을 누렸다. 죽음 앞에
선 연인들처럼 그들은 정열을 아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현해탄에 던진 사랑
 김우진은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는 <사의  찬미>를 경청했다. 윤심덕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1926년 8월 45일 새벽 4시. 두 사람은 그동안 사랑했던 과거를 떠올
리며 눈물지었다. 그리고 서로 부둥켜 안고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었다.
 이제 서울에 돌아가도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의 사랑을 나눌 힘도 없었다.  이
대로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검푸른 바닷속으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파도는 두 사람을 휘감고 먼 곳으로 설어갔다. 그들의 사랑 뒤에 따
라올 세속의 비난과 조소를 뒤로 한 채.
 '더 이상의 비난과 조롱은 싫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그곳으로 가자. 영원한 사랑을 찾
아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사랑을 위해 윤심덕은  죽음을 택했다. 그녀가 현해탄에 몸을  던진지
어언 70여 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수 윤심덕의 정열적인 사랑 이야기는 신화처
럼 전해 오고 있다.


 
      사랑으로 불행해진 1,000일 왕비

    앤 블린
 사람들은 드러난 정사(正史)보다는 숨어 있는 비사( 史)에 더 끌린다. 때로 역사의  커다
란 변화가 사랑 하나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랑의 주체가 최고 권력자일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헨리 8세가 교황청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스스로  영구 국교회를 만든 역사의 무대  뒤에는
앤 블린과는 운명적인 사랑이 있었다.  대영제국의 국왕을 굴복시킨 강한 자존심과  명민한
두뇌, 그리고 타고난 미모로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른 앤 블린.
 사랑에 있어 철저히  폭군이었던 헨리 8세의  왕비로 그녀가 궁권에서  보낸 시간은 불과
1,000일밖에 안 되지만, 단두대에서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그녀와 헨리 8세가 남긴 일화들
은 오늘날까지도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끝없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국왕을 사로잡은 여인
 소문난 바람둥이 헨리 8세는 1509년 열여덟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547년까지 38년 동
안 영국을 다스렸다. 왕위에 있는 동안 이루어 놓은 치적도 만만치 않지만, 그보다는 여왕
을 여섯 명이나 맞이한 이력 때문에 '사랑의 폭군'이란 별명이 그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
다. 그는 사랑에 관한 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쟁취한 다음 쉽게 버리는 바람둥이였다.
 헬리 8세의 첫 결혼은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의 아내 캐더린 왕비는 죽은 형 아더의  부인
이었던 것이다. 부왕 헨리 7세가 장남  아더가 죽자 맏며느리를 둘째 아들에게  대물림하였
다. 헨리 7세의 생각은 다분히 국가의 이익을 우선으로 한 것이다. 캐더린은 그 당시  세계
최강인 에스파니아의 왕 페르디난트의 딸이었다.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영구보다 월등
히 우세했던 에스파니아의 공주를 그대로 며느리 자리에 앉혀 두어야 했던 것이다. 에스파
니아의 비위를 거슬려서는 안 되었기에 며느리를 생과부로 언제까지 그대로 둘 수 없는 입
장이었다.
 떄문에 헨리 8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없이 형수였던 캐더린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형제의 부인을 아내로 삼
아서는 안 된다는 성서의 구절이 걸렸던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로마 법왕에게 특별히  부
탁을 하여 면죄부를 받았다.
 처음부터 마음에도 없는 캐더린과의 결혼 생활에 싫증이 난 헨리 8세는 전부터 점찍어 뒀
던 처녀 앤 블린을 얻기 위해 은밀히 이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미 캐더린과 20년을  함께
살아온 터였다. 더구나 그녀는 헨리 8세보다 여섯 살이나 위였다. 또한 박색의 얼굴에 키만
엉성하게 큰 그녀의 용모로는 호색한이었던 헨리 8세의 눈에 도무지 들 리가 없었다.
 그러나 20년 동안 이혼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에스파니아는 날이 갈수록  국력이
강해져 갔다. 신대륙을 발견하고, 멕시코와 아스테카 문명을 정복하였다. 또한 1525년에 프
랑스를 크게 무찔러 그 기세가 유럽을 뒤덮고도 남았다. 선나라인 영국의 운명은 에스파니
아의 입김에 따라 좌지우지 되었다.
 그러는 사이 앤 블린은 어느새 스무 살이 되었다. 헨리 8세를 만나 연애를 한 지도  2년이
흘러 버렸다. 헨리 8세는 점점 캐더린이 싫어서 아예 딴 방을 쓸 정도였다.
 헨리 8세가 앤 블린에게 보내는 애타는 연서는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편지의 말미에는
언제나 "당신의 충실한 종이며 친구인 헨리로부터"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일국의 국왕을 이토록 사로잡은 여인, 앤 블린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러나 자존심이 강하고 강직한  성격의 앤 블린은 국왕의 열렬한 사랑의 호소에도 불구하
고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원래 바람기가 많기로  소문이 나 있기도 했지만, 그녀의 언니와
어머니에게까지 헨리 8세는 염문을 뿌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 이번엔 내 차례란 말이지? 나는 절대로 안 넘어갈 거야.'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국왕이라고 해서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다  보
니 헨리 8세의 마음은 조급해졌고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진실
이 담긴 편지를 거의 매일 앤 블린의 집으로 보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했던가. 앤 블린은 점점 국왕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대로 국왕의 연애 상대로 남지는 않겠어. 난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않는 한  절
대로 헨리 8세와는 결합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이미 자신의 앞날을 내다보고 있었다. 국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다음 반드시 국왕의
비가 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국왕 폐하. 저도 폐하는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국왕께선 엄연히 왕비
님이 계신데 제가 감히 어떻게..."
 "캐더린과는 벌써 이혼하려고 준비를 서두르고 있소. 하지만 로마 법왕청에서  좀처럼이혼
을 허락해 주지 않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오."
 헨리 8세는 솔직하게 캐더린과의 이혼에 대해 앤 블린에게 알려 주었다.
 "폐하. 그렇다면 캐더린 왕비님과 이혼을 하고 저와 결혼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이오. 당신 없는 이 세상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단 말이오."
 국왕은 그녀의 손을 잡고는 정성을 다해 구혼했다. 그녀는 비로소 국왕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주 사랑을 불태웠다. 헨리 8
세는 이윽고 캐더린 왕비와 이혼을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카톨릭 국가였던 영국은 로마 법왕청에서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원칙을 줄곧 고수해 왔다.
그 바람에 헨리 8세의 온갖 노력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더구나 캐더린은 당시 로마 법왕인
카알 5세의 숙모였다. 그러니 캐더린 숙모와 이혼하려는 헨리 8세의 청을 수락할 리가 없었
다.
 "빌어먹을 카알 5세. 당신이 죽기 전까진 절대로 캐더린과 이혼할 수 없단 말이지. 하지만
두고 보라고. 난 반드시 그 못생긴 늙은 여자와 이혼하고 말 테니."
 헨리 8세는 앤 블린을 위해 새로운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앤 블린은 헨리 8세가 자신을
위해서 화려한 궁전을 짓고 있는 것에 매우 만족해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캐더린은 반드시 이혼당하고 말  거야. 그런 다음 헨리 8세와  결혼하여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거야.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앤 블린은 현명한 여자였다. 헨리 8세의 마음을 꽉 잡고는 고무줄놀이를 하듯 잡아당겼다
풀어 주었다 하며 사랑놀이를 즐겼다. 헨리 8세는 그녀에게 빠져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앤 블린은 슬픈  얼굴로 헨리 8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흐느꼈
다.
 "무슨 일이오. 누가 당신을 이토록 슬프게 했단 말이오?"
 "..."
 앤은 말없이 흐느꼈다. 그러자 안달이 난 헨리 8세가 다그쳐 물었다. 그녀는 울음을 거두
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헨리 8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국왕 폐하!"
 "어서 말해 보라니깐."
 "사람들이 저를 보고 국왕의 정부라고 손가락질을 하옵니다."
 "뭐, 정부라고?"
 앤 블린은 또다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가냘픈 어깨까지 들먹이며  훌쩍였다.
헨리 8세는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보듬으며 나직이 말했다.
 "앤. 조금만 기다려요. 캐더린과의 이별도 얼마 남지 않았다오. 앤.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
립시다. 새로 지은 궁전에서 당신은 곧 살게 될 것이오."
 "폐하. 그 궁전은 빈 집이 될 것이옵니다."
 "그 무슨 말이오. 오로지 앤 당신을 위해 지은 궁전이오."
 사실 그랬다. 앤 블린을 위해 지은 새 궁전에서 두 사람은 아예 살다시피 했다. 앤은 공공
연히 헨리 8세의 아내 노릇을 하며 나라 일에 간섭을 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신하들이 어떤
일을 결정하기 위해 앤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 결정에 따르는 경우도 있었다.
 
    왕비에서 대역죄인으로
 헨리 8세는 반에스파니아 색채가 짙은 중산 계급 출신의 하원 의원들과도 모임을 가졌다.
그래야만 자신이 꾸미고 있는 법률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없다. 그만큼 그는 철저하게 앤
블린과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결혼을 서두르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이미 앤의 뱃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
이다.
 "폐하. 아기를 가졌사옵니다."
 "오호, 앤. 드디어 당신이 엄마가 되는구려."
 국왕은 너무 기뻐 앤을 안고는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캐더린이 이혼하지 않은 상태여서
앤이 아기를 낳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헨리 8세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일을
서둘러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국내외적으로 인기가 있으며 덕망이 높은 학자 토머스 모어를 대법관의 자리에
앉혔다. 게다가 로마 법왕청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중산층 계급의 하원의원들과도  비밀리
에 만나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하원들은 원래 헨리 8세가 좋아하지 않는 중산층이
었지만 자신이 만든 법률을 통과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계급층이었다. 그러니 앤 블
린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그러니 앤 블린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중산 계급들은 한창 잘 나가고 있는 에스파니아의 독주를 싫어했다. 따
라서 반에스파니아 국민 정서를 일이키는 데 중산 계급 하원의원들을 이영하기에  안성맞춤
이었다.
 자신의지지 기반을 구축해 놓은 헨리 8세는 1530년 형식적으로 다시 한번 로마 교황청에게
캐더린과의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한 건 국민들의
분위기를 자신 쪽으로 돌리려는 속셈이였다.
 "나 헨리 8세는 형수인 캐더린이 과부가 되어 하는 수 없이 결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결혼을 무효로 해 주시길 간청하나이다."
 하지만 교황청의 결정은 매번 똑같았다. 이에 헨리 8세는 세계 역사상 전대미문의 결정을
내린다.
 "이제부터 교황청과는 단절하겠다."
 카톨릭 국가에서 교황청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고립을 자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헨리 8세 또한 역대 유럽의 수많은 군주들이 교황청의 결정에 도전했다가 패가망신한 사례
들을 잘 알고 있었다. 몰론 아비뇽 사건 때처럼 교황청의 권력이 그렇게 막강한 것은  아니
었지만, 카톨릭 국가에게는 여전히 교황청의 입김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원은 재빠르게 반교황청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국내의 수도원 및 수녀원에 대해 무
서운 탄압으르 시작했다. 그리고 헨리 8세는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키며 그 교회의 최고 자
리에 오른다. 오늘날의  '성공회'가 바로 헨리 8세의 결혼을 위해 만든 종교인 것이다 .
 영국 국교회는 앤 블린이라는 한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헨리 8세가 반강제적으로 만든 교
회였다. 헨리 8세는 1533년 신임 '캔터베리 대사교'로 하여금 캐더린 왕비와의 결혼 무효화
를 선언함과 동시에 앤을 왕비로 인정함을 정식으로 포고하게 하였다.
 이미 두 사람은 정월에 아무도 모르게 결혼식을 한 상태였다. 앤이 헨리 8세의 아이룰  잉
태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앤과 헨리 8세의 대관식이 화려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대법관 토머스 모어는 대관
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더구나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그
는 하루아침에 대법관에서 대역죄인으로 자리가 뒤바뀌었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는  대학자
답데 의연한 자세로 투옥됐으며, 2년 후인 1535년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자신
에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없애 버리겠다는 헨리 8세의 공포정치가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토머스 모어는 두 눈을 가린 채 의연한 자세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훗날 사람들은
그의 고매한 인격과 높은 학식을 기려 그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난 1925년 7월 6일에 성인으
로 추앙하였다.
 이미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토머스  모
어를 처형한 것은 헨리 8세의 최대의 실수였다.  국민 대다수는 앤이 왕비가 된 것을 무척
싫어했다. 민심은 헨리 8세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민심만큼이나 헨리 8세의 마음도  앤에
게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천성이 바람둥이인 헨리 8세가 앤을 차지한 뒤에 일편단심으로
그녀만을 사랑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어느새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앤은 그냥 넘어갈 여자가 아니었다. 아름답긴 했으나 깐깐하고 오만한
그녀의 성격은 결국 궁궐 안에서도 많은 적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운명은 바람에 날
리는 거와 같다고 했던가. 토머스 모어가 단두대로 사라진 지 10개월 만에 앤은 런던  탑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헨리 8세는 공주를 낳은 앤 블린이 매사에 자신을 피곤하게 하는 데 화가 나 있었다. 그래
서 그녀와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고서는 또다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앤. 당신은 국왕과 결혼한 후 3년 동안 다섯 명의 남자와 밀통을 했다. 그 죄가 너무 커
극형에 처함이 옳으나 재판을 받기까지 일단 런던 탑에 수감될 것이다."
 대법관의 준엄한 판결에 앤은 비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와 밀통을 했다는 사람 가
운데에는 그녀의 오빠도 끼여 있었다.
 "억울하다. 누가 이런 누명을 씌웠는가?"
 "누명이라고? 너의 오빠의 부인이 고발을 해왔다."
 "뭐,뭐라고? 새언니가?"
 하늘도 웃을 일이었다. 앤의 방에서 오빠가 서너 시간 머물다 간 적이 있었는데, 그걸  빌
미로 삼아 오누이가 간통을 했다고 고발을 한 것이다. 모두 헨리 8세가 시킨 일이었다.
 고문 앞에는 장사가 따로 없다고 했다. 앤의 오빠를 비롯해서 다섯 명의 남자들이 모두 앤
왕비와 간통을 했다고 진술을 하고 말았다.
 '이제 국왕의 마음이 나를 떠났구나.'
 앤은 비통한 심정으로 어두운 굴 속 같은 런던 탑으로 향했다. 왕비에서 대역죄인의 몸으
로.
헨리 8세는 기분에 따라 사람의 운명을 저울질하는 자리에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
들이 영국에서 벌어졌다. 헨리 8세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자신을 괴롭히던 토머스
모어도 단두대에서 간단하게 처리해 버렸으며,  로마 교황청의 간섭도 없는 영국  국교회의
수장임과 동시에 영국 국왕의 자리에 있는 자신의 행동을 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의 말 한마디면 하루아침에 그의 정적들은 단두대의이슬로 사라졌다. 한마디로 공포의 왕정
이 펼쳐진 것이다.
 
    런던 탑의 앤
  앤은 죄인의 신분으로 1936년 5월 6일 런더 탑에 갇힌 상태에서 헨리 8세에게 편지를  썼
다. 간사한 무리들의 말을 듣지 말고, 공주의 앞날을 위해서도 결코 자신에게 부끄러운 오
명을 뒤집어 씌우지 말라는 애절한 편지였다.
 그리고 공정하게 재판을 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만약 잘못된 판결이 나올 때에는  반드시
하느님 앞에 헨리 8세와 나란히 앉아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번 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한 때마나 앤을 사
랑했던 정이 있다면 이 청을 반드시 들어주시리라 믿겠다는 말과 함께 말미에는 "런던 탑의
슬픔에 잠긴 감옥에서 폐하에게 그지없이 충실하고 항상 성실했던 아내 앤 블린"이라고 썼
다.
이 편지는 곧장 헨리 8세에게 전달되었다. 헨리 8세는 비통한 심정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
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위해 왕궁까지 새로 짓고 또 교황청과
싸우면서 까지 결혼한 사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녀의 매운 성격이 문제였다. 런던 탑에서 그녀가 다시 나온다면 반드시 또 자신
을 괴롭힐 게 뻔했다. 그녀의 마지막 애절한 호소는 결국 헨리 8세를 움직이지 못했다.
 1536년 5월15일, 앤이 밀통했다는 전대미문의 거짓 재판이 진행되었다. 헨리 8세에게 충성
을 다짐한 귀족 26명이 이 사건을 놓고 재판을 시작했다. 재판은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여섯 명에 대해 사형이 확정되었다.
 앤은 런던 탑에서 나와 그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아직도 앤은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
었다. 햇빛을 보지 못해 핏기 없는  얼굴에 독기가 서려 있어서 재판관들은 제대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볼 수가 없었다.
 "나 왕비 앤은 절대로 이 재판을 인정할 수 없다. 더구나 나와 밀통을 했다는 이 사람들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이들은 죄가 없다."
 그녀는 원래의 성격대로 한치의 굽힘도 없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누구하나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헨리 8세가 짜 놓은 각본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재판이 있은 이틀 뒤인 17일. 앤의 오빠를 배롯해 다섯 명의 사내들은 단두대 위에서 목이
잘려 나갔다. 자신과 밀통을 했다는 남자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앤은 이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헨리 8세를 지옥에서 만나 반드시 재판을 받게 해 주겠다는 독기를 품으
며.
 "간통죄는 불에 태워 죽이는 형벌로  규정되어 있지만, 전 왕비에 대해서만큼은  배려하여
단두대에서 죄값을 치르도록 하라."
 헨리 8세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배려는 고작 단두대에서의 죽음이었다. 헨
리 8세와 앤 블린과의 결혼 무효 발표가 있은 지 이틀 만인 19일, 그녀가 형장의 이슬로 사
라지는 날이었다.
 그녀는 런던 탑에서 나오기 전에 머리를 고치고 옷매무새를 아름답게 꾸몄다. 그녀를 도와
주는 하인은 눈물을 떨구며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 그녀의 차림새를 정성스레 다듬고 매만졌
다. 앤은 말없이 하녀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수많은 관중들이 야유하며 또는 겁먹은 얼굴로 단두대가 설치되어 있는 곳을  지켜보았다.
저암ㄹ로 앤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질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더러는 헨
리 8세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랜만에 햇빛을 받으며 앤은 사형 집행인들에 의해 끌려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
가 나타나자 백성들은 웅성거리며 야유를 보냈다. 앤의 간통을 믿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오
만하고 건방졌던 앤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기에 그녀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사람
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형 집행인은 그녀의 죄명을 조목조목 읽기 시작했다. 자신의 죄목을 들으면서 그녀는 시
종일광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죽음을 체념한 왕비의 품위를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것이 그녀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또한 죽음 같은 건 두렵지 않은 그녀였다. 그녀의 성격이
워낙 대범하고 고집이 있던 터라 절대로 비굴하게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소원이 있다며?"
 사형 집행인은 큰 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단두대의 도끼로 목이 잘리는 건 싫어요. 칼로 제 목을 잘라 주세요."
 그 바람에 시퍼런 칼을 든 사형 집행인이 올라왔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이 여러 사람에게
잡혀 형틀 위에 올려졌다. 사형 집행인이  그녀의 하얀 목 위로 칼을 내려치려다가  움찔했
다.
 "고개를 아래로 숙여요. 날 쳐다보지 말아요."
 그녀는 눈에 독기를 뿜고는 칼을 든 사형 집행인을 당당하게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독
기 서린 그녀의 눈을 보면서 목을 내려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설에 의사면 그녀는 "너
무 아프게 자르지 말아요. 제 목은 너무 가느니까..." 라는 말을 남기고는 저 세상으로  갔
다고 한다. 또 한편에서는 그녀가 간통을 인정만 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는 헨리 8세의
말을 거절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한다.
 뛰어난 미모와 재치 있는 화술로 헨니  8세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한 여인의 삶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스물아홉 살이었고 왕비가 된
지 1,000일이 되던 날이었다.
 그 후 원래 여자를 좋아했던 헨리 8세는 네 번이나 다시 결혼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결
혼 생활은 언제나 불만투성이였고, 또 언제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실제로 다섯  번쨰
왕비 캐더린 하와드는 바람기 있는 여자였는데 여러 남자와 밀통한 사실이 밝혀져 처형되고
말았다. 이때 앤을 밀통으로 고발한 오빠의 부인도 연좌제에 걸려 목굼을 잃고 말았다. 헨
리 8세는 기분에 따라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리한 폭군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헨리 8세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앤 블린을  처
형한 지 11년째 되는 해에 헨리 8세도 병석에 눕고 말았다. 워낙 여색을 좋아하다 보니  닥
치는 대로 여자들과 잠자리를 하는 바람에 매독에 걸려 그 병균이 뇌에까지 침범해 죽음 이
르렀던 것이다.
 권력을 남용하고 음모를 일삼으며 향락을 쫓던 그도 끝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내칠
수는 없었다. 이미 그는 노쇠한 몸이었고, 앤 블린이 그토록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며 떠났
던 그 길을 따라서 가고 있었다.
 "앤, 앤 블린! 수도승 이놈들, 수도승놈들!"
 병색이 짙은 헨리 8세는 결국 이 말을  남기고는 저 세상으로 떠났다. 1548년, 그의 나이
쉰일곱이었다.
 
 끝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면서 저 세상으로 떠난 앤 블린. 그녀
를 헨리 8세는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앤 블린의 원귀가 저승사자가 되어 죽음
의 길을 안내한 것일까.
 "나는 단두대에서 사라지지만 내 딸은 훗날 존경과 사랑을 받는 여왕이 될 것이다."
 런던 탑에서 의연하게 죽음의 길을 떠나기 전에 앤은 하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앤 블린의 말대로 그녀의 딸은 엘리자베스 1세가 되어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
왕으로 칭송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1588년 에스파니아의 무적 함대를 격파하여 영
국의 국위를 선양하고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또한 그녀는 문화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당대에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베이컨 등 다수의 세계적인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유럽을 감동시킨 사랑의 천사
 
    류시이
 금세기 최고의 간첩 사건으로 불리는 드레퓌스 사건.
 이 사건은 유태인을 극도로 싫어하는 프랑스 군이 조작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류된
사람들만도 수십 명에 이른다.
 드레퓌스가 무죄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의 아내 류시이의
노력 덕택이었다. 그녀는 온갖 협박과 야유 속에서도 끝까지 남편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었
다. 그 진실된 믿음이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으며, 그 믿음과 사랑은 결국 남편이 석방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류시이라는 한 여성이 있었기에 드레퓌스 사건은 승리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군 기밀이 적힌 쪽지
 프랑스 육군성에 근무하는 유태계 드레퓌스는 군 기밀을 독일로 빼돌렸다는 심증만으로 구
속되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뿐 아니라 전 유럽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한 인간의 권리
와 주권이 조작에 의해 어떻게 파멸되어 가는가를 잘 드러낸 사건이었다.
 앙드레 말로는 프랑스 제 3공화국을 뒤흔든 3대  사건 중 하나로 이 사건을 꼽기도 했다.
에밀 졸라는 40년에 걸쳐 자신의 작품과  명예를 걸고 드레퓌스 사건은 조작되었다고  밝혀
매국노 소리를 들으며 무고죄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군 고위 간부와 첩보부 대원들이 새로운 사실을 다시 조작하면서 사
건을 점점 복잡해지고 미궁 속에 빠져 누가 진짜 범인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프랑스 국
민들은 두 파로 나뉘어 연일 데모를 벌일 정도로 이 사건은 간첩 사건으로는 처음으로 역사
에 기록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출발은 1904년 가을 아침에 일어났다. 평소의 생활 신조처럼 UDFTLAGL 살아가는
한 집안의 가장인 드레퓌스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그가 근무하는 육군성으로 들어가 막 자리
에 앉았다. 이때 갑자기 군 수사관들이 그를 에워쌌다.
 "무슨 일이오?"
 "당신이 드레퓌스 맞소?"
 "그렇습니다만."
사나이들은 총으로 그를 위협했다. 드레퓌스는 무슨 일인지 몰라 사나이들에게 소리를 질렀
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육군 장관의 명령으로 체포한다. 잔말 말고 따라와."
 이렇게 드레퓌스는 체포되었다. 그의 죄명은 독일에 군 기밀을 정기적으로 알려 준 간첩죄
및 국가반역죄였다.
 "뭔가 잘못됐거나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하오."
 "잔소리 말고 독일에 팔아 넘긴 군 기밀이나 어서 말해. 그리고 누구와 접선을 했는지  말
하지 않으면 크게 다치고 말 거야."
 군 수사관들은 드레퓌스의 항변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그들에겐  소
귀에 경 읽는 꼴이었다. 이미 범인으로 단정짓고 조사하는 끼워 맞추기 식의 수사였다.
 사건의 발단은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일어났다. 독일 대사관에 숨겨져 있던  이상한
편지 하나를 프랑스 간첩이 빼내 오면서 시작되었다.
 세 토막으로 찢어진 종이 쪽지 한 장, 이 한 장의 편지에는 프랑스 육군의 중요한  기밀을
팔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특히 포병에 관한 항목이 세 가지나 언급되어 자연스레 포병
장교에 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참모총장도 육군 대장도 쉬쉬 하며 극비리에 범인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 고위 수뇌부의  특별 명령을 받은 군 수사기관은 프랑스  군부
내의 요직에 있는 자들을 상대로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게 육군 수사기관은 바쁘게 움직였다. 범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고도의 작
전이 필요한 사건이었다. 수사망은 현직에 근무하는 포병 장교로 좁혀졌다. 편지에  포병에
관한 군 기밀이 다른 기밀에 비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포병 장교들은 평소와 같이  아무
것도 모르고 근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친구가 의심이 가는군."
 "누군데?"
 "아르사스 출신인데..."
 "그렇다면 유태계가 아닌가?"
 "그래, 분명히 이 작자의 소행이 틀림없어."
 그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유태인을 무척 싫어했다. 수사관들은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단정
짓고는 상부에 보고했다.
 "이번 사건은 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유태인에다 포병 장교라고 해서 함부로 범인으로
단정지을 순 없는 일이다. 그러니 필적 감정을 하도록 해."
 군 수뇌부는 긴장했다. 잘만 하면 쉽게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레퓌스는
군 수사관들이 시키는 대로 영문도 모른 채 편지를 써 내려갔다.
 "이 메모 쪽지와 편지를 쓴 사람은 동일인이 틀림없습니다."
 한 사람의 필적 감정인은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단정지었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의 필적 감
정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절대로 같은 사람의 필적이 아닙니다."
 수사관들은 혼란스러웠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두 사람의 감정인을 선발했던 것이다. 그러
나 프랑스 군부는 사회에 알려지기 전에 조용히 이 사건을 매듭짓고 싶었다.
 "우린 한 사람의 감정인의 진술만으로  충분합니다. 드레퓌스는 독일에 프랑스 군  기밀을
팔아 넘긴 간첩이 틀림없습니다."
 사건은 이렇게 군부 내에서 조용히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누가 반유태계  신문에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그 다음날 신문에 '유태인 간첩, 군 기밀을 팔아먹다!' 라는 대문짝
만한 기사가 인쇄되어 나왔다.
 유태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프랑스 사람들은 기회다 싶어 도처에서 공격의 화살을
군부에 퍼부었다.
 군부로서는 가능한 빨리 이 사건을 매듭지어야만 했다. 잘못 처리했다가는 군부에 대한 불
만과 내걱 전체에 불신임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다.
 드레퓌스는 근무를 하기 위해 아침에 집을 나선 지 한 달 반 만에 비로소 집에 있는 아내
에게 편지를 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 동안 가족과의 면회는 단 한 차례는 허락되지
않았다. 1개월 반 동안 지금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또 어떻게 진행되고  있
는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악마의 섬으로
 1894년 12월 19일부터 20일까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군법회의가 열렸다. 드레퓌스를  아
는 적지 않은 사람들과 지식인들이 졸속 재판에 대해 항의를 하였지만, 대부분의 프랑스 사
람들은 그가 유태계라는 이유로 재판을 받기도 전에 그를 간첩으로 매도하였다.
 "피고 드레퓌스 대위는 군의 기밀을 장교 신분으로 적국에 팔아 넘기려 했다. 무서운 죄를
지은 피고에게 다음과 같은 벌로 다스린다. 군적과 계급을 박탈하고 종신형을 언도한다."
 드레퓌스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피가 모두 빠져나간 사람의 얼굴처럼. 그 하얀 얼굴 위에
놀라움과 분노의 표정이 교차하며 일그려졌다. 
 그의 마지막 진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미 군 수뇌부는 유태계의 드레퓌스 대
위를 범인으로 처음부터 지목한 상태였다. 50%의 필적 하나만을 가지고 그는 대역죄인이 되
어 버린 것이다.
 그 당시엔 독일뿐 아니라 유럽 사람  모두가 유태인들을 싫어했다. 그 뿌리는  중세에까지
올라가는데, 오늘날에도 문화 선진국이라는 유럽에는 유태인들을 믿지 않는 관습이 남아 있
을 정도다. 사회에 불만을 많이 가진 자일수록 유태인들을 싫어했다. 유태인들은 나라 없이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근면과 성실과 적극성으로 살다 보니 나태하고 무능
한 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고, '가난도 죄악도 모두가 다 유태인 때문이다'라는 고정
관념을 낳게 되었다.
 프랑스 군 수뇌부에도 이런 오래 된 관념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 때문에 드레퓌스는 기니
아 앞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류열도 까운데 있는 '악마의 섬'이라 불리는 곳으로 유
배되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드레퓌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사회에
팽배해 있던 반유태주의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악마의 섬에 도착한 그는 단번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까
지 나병 환자들을 수용했던 악마의 섬은  섬 전체가 암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고  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없었다. 그를 감시하는 관리인이 있었지만 드레퓌스에게는 관리인과 대화하는 것
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외로운 악마의 섬에서 실망하지 않고 훗날을 대비해 영
어와 수학 공부까지 하는 열성을 보였다.
 '정의는 반드시 살아난다.'
 그가 살아오며 줄곧 지켜 온 좌우명이었다. 드레퓌스가 악마의 섬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
한 낙은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구명 운동을 벌이고 있는 아름다운 아내
류시이의 편지였다.

 그리운 당신에게.
 억울하고 슬프시겠죠. 모두 다 낙심하여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어요. 그곳에서도  당신이
떳떳하고 남자답게 행동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한 자세를  굽히
지 말고 지켜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우리 꼬마들도 당신을 훌륭한 아버지라고 존경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꼬마들을 당신과 같
은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겠습니다. 저에게는 당신 외에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단지 꼭 한 번 뵙고 싶군요. 그렇지만 비록 뵙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것
만은 꼭 잊지 말아 주세요. 당신이 아무리 먼 곳에 계신다 하더라도 당신의 류시이는  어김
없이 따라갈 것입니다. 이런 일이 과연 허락될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당신 곁으로  가겠
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어요. 마음을 단단히 가지세요. 우리의 두 어린 자식을 위해서, 그리고 저
를 위해서요. 굳건하게 살아 가세요.
 당신의 류시이.
 
   
    아내 류시이의 구명 운동
 류시이는 성품이 고우면서도 강한 여자였다.  보면 볼수록, 만나면 만날수록 신뢰가  가고
총명한 여자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여자의 몸으로 진범을 찾는 일에 모든 시간을 들였다. 그런 사이 어느덧 10개월의
세월이 흘렀다. 드레퓌스 사건은 사람들 사이에서  차츰 잊혀져 가고, 진범으로 몰린  그는
악마의 섬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남편의 무죄를 세상에 밝히기 위해 그녀는 온갖 어려
움을 무릅쓰고 사회 단체와 요로에 호소문을  보내 재조사를 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런 가운데 기적은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류시이의 눈물 어린 편지를 받아 든 신임 첩보부장은 드레퓌스가 진범이라는 데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가 범인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의
감이 가득 찬 피가르 중령은 곧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개인적으로 재조사를 하기 시작했
다.
 그러던 중 피가르중령은 드디어 하나의 단서를  잡았다. 프랑스 군에서 품행이 좋지  않던
에스테라지 소령이 독일 대사관의 무관과  주고받은 비밀 문서를 입수한 것이다.  피가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직접 필적  감정사를 대동해 검사를 해 본 결과  에스테라지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었다.
 피가르 중령은 상부에 보고를 하는 즉시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청했다. 이에 놀란 군 수뇌
부는 피가르 중령을 서둘러 대령으로 승진시켜 먼 곳으로 전근 명령을 내렸다. 게다가 그가
간첩을 옹호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로 이어졌다. 이에 격분한 피가르는 즉시 프랑스에 있
는 변호사에게 이 사건을 일임하였고, 류시이 부인을 선두로 드레퓌스 일가가 모두 힘을 합
쳐 이 사건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희를 돕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
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류시이 부인은 다시 힘을 얻어 여러 곳에 재심을 하게 해 달라며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에
지식인들이 동조를 하기 시작했고, 당시 재야의 거물인 크레만소 등이 신문에 기고를 하면
서 언론전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드레퓌스 사건은 또다시 혼란 속에 빠져들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그
당시 가장 위대했던 작가 에밀 졸라와 아나톨 프랑스가 류시이의 편이 되어 드레퓌스의 무
고를 주장했다. 여론이 들끓자 정부와 군 수뇌부는 진범인 에스테라시 소령을 체포하여 조
사하고 군법회의에 넘겼다. 그리고 피가르 대령이 프랑스로 돌아와 증인이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군 법정이 증거 불충분으로 에스테라시 소령을 석방하고 오히려 피가르 대
령을 무고죄로 투옥시키면서 사건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는 반유태주의, 즉 국수주의자들과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갈라
져 싸움이 시작되었다. 도처에서 군중대회가 열리고 시위가 벌어졌다. 쌍방간의 유혈  충돌
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이 이 사건의 결말에 대해 귀추
를 주목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드레퓌스는 무죄다. 재판을 다시 하라."
 아나톨 프랑스는 붉은 외투를 걸치고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이렇게 외치며  돌아다녔다.
에밀 졸라가 <청년에게 고한다> <프랑스에 고한다>등의 글을 발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에밀 졸라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정직하지 못한 군부를 규탄하다가 국수주의자들에게 폭
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에 <나는 탄핵한다>라는 유명한 글을 신문에 기고하였는데,  반대
파들은 에밀 졸라를 매국노라고 여기고 군부를 모독한 죄인으로 고소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에밀 졸라를 재판하는 법정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에밀 졸라는 프랑스 문단의 핵이나 마
찬가지였다. 그가 신성한 군부를 모독한 것에 대한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사람들은 숨죽이
며 지켜보았다.
 "드레퓌스는 무죄다. 나는 그가 무죄라는 것을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분명히 말한다. 나의
목숨을 걸고 나의 명예를 걸어... 나는 나의 조국이 허위와 부정 속으로 가라앉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은 당장 많은 사람들이 나를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후일 프랑스는  프랑스의
명예를 구하는 일에 주력한 나에게 감사할 것이다."
 법정은 에밀 졸라에게 금고 1년과 3,000프랑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에 에밀 졸라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년 동안 영국으로 망명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반유태주의자들의 승리가 기
정사실화 되는 듯한 상황에서 피가르가 석방되어 나왔다. 피가르는 석방되자마자 이 사건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에스테라지의 애인 집에서 관련 서류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법정은 또 한번 에스테라지와 그의  애인을 증거 불충분으로 풀어 주었다.  그리고
군부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해 조작한 위조 서류가 발견되고, 그 위조 서류를 작성한  첩
보부장이 체포되어 수감되는 사태로까지 발전되었다.
 첩보부장은 감옥에서 면도날로 정맥을 잘라 자살을 하고 말았다. 이와 동시에 범인으로 지
목되었던 에스테라지가 프랑스에서 사라졌다. 또한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포르가  뇌졸중
으로 갑작스레 쓰러진 뒤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루베가 새로 대통령이 되었다.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하자 드레퓌스의 재심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역사를 바꾸어 놓은 사랑
 사건이 일어난 지 1년 반 만에 드레퓌스는악마의 섬에서 나와 1896년 7월 1일 새벽  2시에
프랑스 땅을 밟게 된다. 그는 감옥에서 면회 온 아내 류시이를 만났다.
 "여보."
 두 사람은 할 말이 많았지만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일년 남짓한  기간이었
지만 드레퓌스는 20년은 더 늙어 보였다.
 8월 7일부터 드레퓌스의 재심 법정이 열렸다. 그러나 뜻밖에 드레퓌스를 변호하는 주임 변
호사가 킬러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날지 모두들
궁금해했다. 드디어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그 동안의 정상을 참작하여 금고  10년에 처한다."
 이 판결로 프랑스 사회전체가 놀랐고, 유럽  전체가 프랑스의 잘못된 양심에 대해  들끓기
시작했다. 이에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드레퓌스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류시이는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성명을 발표했다.
 "처음부터 이 일과 무관한 남편에게 특별 사면이라니, 이건 남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 결백한 남편에게 무죄를 판결하기 싫으면 차라리 다시 수감하기 바란다."
 그녀는 당당하게 금고형이 잘못됐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에 드레퓌스도 "명예가  수반
되지 않는 자유란 나에게 하등의 의미가 없다."라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를 도왔던 많은
사람들이 드레퓌스보다는 류시이의 사랑과 노력에 박수를 보냈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드레퓌스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1906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승진하여 소령이 되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의 운명를 좌지우지하기는 쉽다. 그러나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에서는
소수가 다수를 이길 수 있다. 드레퓌스 사건은 그러한 신화를 보여 준 사건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부부의 힘이 프랑스 전체를 상대로 싸워 이겨 낸 대역
전극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정의 실현을 위한 사회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 비
전을 제시한 사례가 되었다.
 한 여인의 사랑의 힘이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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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세계를 움직인 맞수 - 김남석

        세계를 움직인 맞수
    지은이:김남석
    출판사:밝은세상
 

        제1부 뜨는 별 지는 별
    첨단과학의 승리-F15
  1982년 6워 9일, 이스라엘, 시리아 국경인 베카고원 상공에서 굉장한 공중전이 벌어졌다.
  "모든 전투기들은 지상군이 작전에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공중지원을 한다.  그리고 F-4
팬텀과 A-4스카이호크는 베카고원에 있는 시리아의 지대공미사일 진지를 공격하라. 이상."
  이스라엘을 출발한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편대장의 지시에 따라 대열을 정열하고 시리아의
상공으로 날아갔다. 이날 오후 출발한 이스라엘의 전투기들은 F-15, F-16과 F-4 팬텀, A-4
스카이호크 등 총 96대였다. 이들은 주로 베카고원에 있는 SAM5, SAM6 지대공 미사일 진
지를 공격했다. 이에 시리아 공군도 MIG-23, MIG-21 등 총 62대를 동원하여 응수함으로써
국경지대의 전 상공에서는 무려 160대의  전투기가 출동된 무서운 공중전이 벌어지게  되었
다.
  "레이더에 시리아 전투기 발견! 전 편대는 즉시 전투태세로 돌입하라!"
  시리아의 MIG기를 먼저 발견한 이스라엘  공군은 즉각 전투태세에 돌입하여 사이드와인
더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콰과광!"
  엄청난 굉음과 함께 시리아의 전투기들은 우수수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떨어지기 시작
했다. 이에 기세가 오른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시리아의 전투기들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
날의 전투는 약 1시간 후인 오후 2시 35분에 모두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끝날 수 있어TEjs 것은 주로 미사일기지에 대한 공격이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짧
은 시간에 이처럼 많은 전투기들이 공중전을 벌인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 그리고 네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에 있어서도 일찍이 이렇게 대
규모적인 공중전은 없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공중전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수치로 나왔다. 시리아군의 MIG-23, MIG-21은 29대나 격추된 반면
에 이스라엘의 피해는 한 대도 없었다. 다음날인 10일에도  이스라엘은 레바논 동부를 공격
하기 위해 같은 규모의 전투기를 발진시켰다. 하지만 전날 크게 피해를 당한 시리아 전투기
들은 고작 20대 정도만이 대응할 뿐이었다.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날도 역시  이스라
엘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시리아군은 8대를 격추당하고 말았다.  이날 이후로 크게
타격을 입은 시리아의 전투기들은 더 이상  출동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공중전은 막을  내렸
다.
  6월 12일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휴전협정을 조인한 7일간의 전투에서 공중전은6일에서  10
일까지 5일간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시리아군이 56대를 격추당한 반면 이스라엘의  피해는
단 1대에 불과했다. 놀라운 결과였다. 이러한 전투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남부를 점
령하게 되었으며,  시리아의  고란고원을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F-15, F-16과  MIG-23,
MIG-21의 공중전 수행능력에 있었다.  엄청난 피해를 본 시리아는  즉각 소련에 항의했다.
하지만 소련으로서도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처음에는 시리아 조종사들의  기량 차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스라엘보다 시리아 조종사들의 연습시간이 더  많은 것으로 판명되어 신빙성
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전투기의 성능이 떨어지는 것  또한 아니었다. 소련제 MIG-23은 마
하 2.3, MIG-21은 마하 2.1인 인 반면 F-15가  마하 2.5, F-16이 마하 2.0인 점을 비교하면
상승력과 선회능력에 있어 약간 미국기가 앞섰을 뿐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또한 공중전이
벌어진 전투지역도 베카고원과 레바논 동부, 고란고원 등 모두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지
역이어서 오히려 레이더에 의한 공중전  대비와 전투기 지원은 지상병력과  지대공미사일을
압도적으로 갖추고 있던 시리아가 유리한 입장이었다.
  여러 가지 측면으로 전략 분석을 한 결과 시리아 군사 전문가들은 다른 곳에 원인이 있음
을 발견했다.  전투기의 성능이나 조종사의 기량에 차이가 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레이더와
미사일 탑재에 있었다. 이스라엘의 F-15 레이더는 100킬로미터 전방에서 적을 발견할 수 있
으며, F-16은  소형 레이더로도  4,50킬로미터  전방을 탐색할  수 있는  장비였다.  그러나
MIG-23은 40킬로미터 이하의 거리를, MIG-21은 25킬로미터밖에는 탐색할 수 없었다. 게다
가 이스라엘의 공군기들은 하나의 목표를  조준, 추적하면서 다른 전투기의 움직임도  탐지,
발견할 수 있는 반면에 시리아의 전투기는  목표를 조준하면 다른 전투기의 움직임은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공중전에서는 상대를 먼저 발견하여 전투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F-15와 F-16은 시리아의 MIG-23과 MIG-21을 먼저 발견하여 즉각 공
격함으로써 사정거리에 들어와서야 이스라엘 전투기를 발견한 시리아의 전투기들을  초토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F-15와 F-16에는 레이더와 연결된  최신 전자장치인 헤드업
디스플레이장치(HUD)가 있어서 전방을 주시한 채로도 적의 모든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시리아의 전투기를 놓치는 일이 있어도 그 위치를 자동적으로 표시해 주어 조종사의
전투 조작을 충분히 도와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헤드업 디스플레이장치란 조종사가 계기판이나 레이더를  따로 볼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한  장치인데 구조 또한 매우 간단했다.  브라운관의 상을 중계렌즈를
통해서 거울로 반사시켜 조종사 정면에 있는 하프밀러에 비춰주면  화면에 기체의 상태, 목
표의 움직임, 목표까지의 거리, 조준기호,  사정 거리 내 표시, 사격거리  외에 남은 탄환수,
장비미사일, 미사일의 도착시간 등이 표시되어 조종사가 신속하게 전투에 대응할 수 있도록
고안된 첨단장비이다.
  미사일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사이드와인더가 중심이었으며, 시리아군은  소련
의 AA2미사일을 사용했다. 두 미사일은  공히 적외선 유도방식으로 거의  성능에는 차이가
없었지만 AA2는 이스라엘의 사이드와인더와 같은 성능이 있긴 했지만 이스라엘 것이 최신
형인  L형인데 반해 시리아는 20년  전의 모델인 B형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차이는 실제
전투에서 엄청난 격차를 보여주었다.  사정거리나 성능면에서 B형도  거의 L형과 등급이긴
했지만 L형은 운동성이 좋으며 특히 상대의 정면이나 측면에서도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리아의 사이드와인더인 AA2는  상대의 후방, 즉 열을
추적하는 방향이 직접적으로 포착된 장소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사정거리에 시리아의 전투기가 잡히면 즉각 사이드와
인더를 발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F-15는 레이더의 유도를 받으며  20킬로
미터에 이르는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반면에 시리아의 미사일은 5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아 거
의 F-15의 독무대가 되어 버린 셈이다. 실제로 시리아의 전투기들은 이스라엘의 전투기들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추락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것 외에도 이 공중전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가 보유하고 있지 않은  E-2C 레이더
경계기와 보잉707을 개조한 전자방해기도 함께 출동시켰다.  E-2C 레이더 경계기는 후방에
서 이스라엘 전투기를 지휘하면서 시리아 전투기들의 움직임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으며, 보
잉 707은 시리아의 레이더에 방해전파를 발사함으로써 시리아의 전투기들이 지상  레이더기
지의 정보를 전달받을 수 없게 차단했다. 모든 장비면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보다 한발 앞
서 있었다. 이스라엘이 첨단무기를 장착하고 전쟁에 임한 반면 시리아는 구식무기로 대항하
였기에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러한 첨단무기의 도움으로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공중전에서의 승리뿐만 아니라  시리아
의 지대공 미사일기지인 SAM6진지 16군데를 파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과 시리
아의 전쟁에서 여실히 드러난 바와 같이 첨단 무기를 누가 더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나는 것이다. 비행기, 미사일. 레이더와  기관제장치, E-2C, 전파 방해장치에 의
해서 56:1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지만 이 전쟁만을 가지고 F-15나 F-16이 MIG-23과 MIG-21을 앞섰다고 볼 수는 없다.
시리아 전투기들이 탑재한 장비들은 소련 정규군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틀리기 때
문이다. 소련도 우수한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기밀이 새어나갈까 두려워하여 시리아에
게는 첨단장비를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소련은 자국의 전투기의  명예회복을 위해
중동지역 국가들에게도 소련 공군전투기와  같은 첨단무기들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F-15, F-16이 첨단무기로 무장한 MIG-23, MIG-21과  싸운 일이 없기에 어느 쪽
이 우세하다고는 판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끝없이 진행되는 첨단과학 연구개발
에서 NEL지는 쪽이 패배한다는 것인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전투에서 본 바와 같이 자명한
일이다.
 
    남아공의 진통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
  1994넌 4월 28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커다란 변화의 순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와아! 만세!"
  "이제 우리 흑인들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이제 모든 백인들은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
  요하네스버그 거리는 기쁨에 날뛰는 흑인들로 가득했다. 기나긴 고통의 끝이었다. 몇 시간
을 기다려 투표를 끝낸 흑인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한 설레임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소리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평생 동안 2등 시민의 자격조차도 주어지지 않았
던 3천만 흑인들이 완전한 시민권을 획득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특정 인종의 희생을 강요하진 않겠다. 국가 발전을  위해 남아공 국민 모두에게 희
생을 요구할 것이다. 이를테면 모든 국민이 공정하게 세금을 내야 하고, 정부는 투자 유치를
위해  세금을 적게 부과해야 한다. 이미 백인들도 남아공의 대다수  국민이 처해 있는 열악
한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나름대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이제 남아공에서는 백인가 흑인
이 조화된 새로운 사회가 건설되어야하며 백인들도 과거의 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남아공
을 위해서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백인정권을 유지해 오던 데 클레르크의 말이다. 흑인들의 우상인 만델라와 백인
정권의 최고 권력자 데 클레르크의 이 같은 모습은 과거의 추억과는 너무나도 크게 변화되
어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40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나치
즘(NAZISM)을 계승한 독일인이 주축이 된  정치인들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흑백의  갈등
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인종 우월주의를 주장하면서 전세계를 게르만 민족이 장악해야 한다는 사상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유입되면서 백인 우월주의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백인지역과 '
홈랜드)'라는 흑인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어 흑인이 백인  거주지에  들어가거나 백인이 흑인
거주지에 들어가면 벌을 받을 정도로 인종분리정책이 심하게 운영되었다.
  하지만 이 사상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많
은 흑인들을 괴롭혔다. 이후 백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 차별정책을 실행하기 시작
했으며, 1949년에는 이족혼 금지령이 통과되면서 흑인들은 절대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계 민족 다음인 3등 국민 자지로 밀려나게 되었다. 흑인들은 백인정부로부터의 어떠한 혜택
도 누릴 수 없었으며, 편견과 차별이라는 커다란 장벽에 부딪쳐 좌절해야한 했다. 뿐만 아니
라 흑인들은 자치구역을 벗어날 경우에는 통행허가증이 있어야만 했다. 실로 미국의 노예시
대를 방불케 하는 일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시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가장 잔인한 암흑기였습니다."
  만델라는 백인들의 폭력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모든 인간은 평등해
야 하며 인종에 따른 차별과 편견은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흑인운동에 투신하여 혼신을 기
울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이름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데
클레르크 정권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ANC(아프리카민족회의)를 성장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흑인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하도록 해서 데  클레르크에게 저항하기
위해 태업을 선동하였으며, 그 해 1964년 만델라는 태업죄로  인해 남아공 법원으로부터 무
기징역에 5년을 추가한 형을 받고서 케이프타운에서 떨어진 남대서양의 로벤 섬 감옥에 수
감되었다. 데 클레르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흑인들을 지도하던 만델라를  감옥으로
보냈으니 이제는 별다른 걱정없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이끌어갈 수  있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데 클레르크는 함정에 빠져 있었다. 비록 만델라는 세상과 단
절된 로벤 섬에서 돌을 깨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흑인에 대한 열정은 포기하지 않
았다. 이러한 상황은 그에게 오히려 더욱 강한 의지를 가지고 해줄 뿐이었다.
 '이곳이 비록 감옥이기는 하지만  백인들의 편견과 차별이 없으니  더 아름답군. 이곳에서
쓰러진다면 나를 믿고 있는 수천만의 흑인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이런 상황일수록 더
욱 열심히 공부를 하자. 그래서 억압받는 우리 흑인들에게 평화를 전달해 주어야 해.'
  만델라는 마음 속으로 수없이 다짐하면서 시간을 아껴쓰기 시작했다. 그는 법률, 역사, 경
제, 그리고 백인정권을 더 잘 알기 위해 아프리칸스(남아프리카의 공용 네덜란드 말)를 혼자
서 공부했다. 백인 정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흑인들의 자유는 인정받을 수도 아니 획
득하기 힘들다고 나름대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록 감옥 생활이기는  했지만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되었고 이러한 지식들을  바탕으로  함께 교도소에 들어온 젊은 혁명가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신은 비록 세상에 나갈 수 없지만 다른 이들은 형기를 마치고 세상에
복귀할 수 있기에 만델라는 혼심의 힘을 다해서 이들을 가르쳤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몫까
지 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러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  로벤 섬으로 만델라를 찾아 들어오는  젊은
혁명가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이곳을 <만델라 대학>이라고 부를 정도였으
니 만델라의 열정은 보통사람이 생각하기 힘든 일들을 감옥에서 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만델라는 비록 몸은 갇혀 있지만 다른 이들을 통해서 ANC를 움직이게 하고 행동하게 만들
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데 클레르크는 고뇌했다.
  만델라의 아성은 꺾일 줄 모르고 커져만 갔다. 만델라의 이러한 노력은 전세계 언론에 알
려졌으며, 평화를 사랑하고 인간의  평등을 획득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노력이 세계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많은 언론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권상황과 흑인들에 대한 불평등에 대해 항의하기  시
작했으며, 급기야는 UN에서 의제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각하, UN에서 선언문이 도착했습니다. 우리 유엔대사가 열심히 활동을 하였지만  대세는
이미 기운 것 같습니다. 이번 선언문에는 우리가 아파르트헤이트(인종 차별정책)를 철회하지
않을 시에는 전세RP적인 경제제재를 취할 것이며 외교단절도  고려하겠다는 경고성 협박이
강하게 심어져 있습니다. 아울러 IOC에서는 국제 스포츠 행사에 우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막기로 결의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우리가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데 클레르크는 UN의 성명서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구시대적인
아파르트헤이트를 고수하면 할수록 더욱 고립되어 간다는 것을.
  "각하, 세계에서 고립되면 몇 년은 버틸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기간이 흐른다면 외교적인
피해뿐 아니라 극심한 경제적 빈곤을 이겨낼 수 없다고 판단됩니다. 이제 흑인들도 우리 백
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주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순간이 왔다는 말이군, 그렇다면 짐. 서둘러 각료들
을 모아주게."
  데 클레르크는 이 문제를 여러 각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시간
의 회의가 진행되었으며, 흑인과 백인이 공존할 수 있는 남아공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 고
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얼마 뒤 로벤 섬에 깔끔한 양복차림의 낯선 사내들이 만델라를 찾아왔다.
  "만델라 씨, 우리는 지금 중대한 결정을 하기 위해서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이 낯선 이방인들의 방문에 만델라는 의아해하면서도 여느 때와는 다른 태도로 자신을 대
하는 모습에 약간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 노인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왔다니 무슨 얘기인지는 들어와야겠군요."
  "고맙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무척이나 상냥했으며 친근감을 주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우습기까지  했
다. 이들이 다녀간 이후에도 계속해서 편지고 오고가자 마침내 만델라는 백인정부 관리들과
비밀회합을 갖고 흑인과 백인이 함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만델라 씨,우리는 더 이상 흑인과  백인의 관계가 악화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흑인의 대표인 당신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데 클레르크는 만델라에게 정중하게 질문을 했다. 그의 이런  태도에 만델라는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일들이 눈앞을 스쳐갔다.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해온 흑인들의 생존을 위해 맨주먹
으로 대항하던 시절, 자신들이 거리에 나서면 무차별 사격을 가하던 경찰들, 그리고  죽어간
동료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언젠가는 흑인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하
던 날들.....
  지금 자신을 탄압하고 감옥에 평생을 가두려 했던 자가 이제는 반대로 도움을 청하고 있
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만델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흑인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릴 수 잇는 모든 권리와 백인과 평등하게 살  수 있
는 조건이 우선 입니다. 그리고 나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총선을   통해서 진정 국민이 원하
는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델라 씨,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당신들 흑인들이 선거에서 승리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하지만 백인정권에서 살아온 흑인들이 갑자기 흑인정권으로 바뀐다면 우리 백인들에게 폭력
을 행사할 것은 뻔한 일 아닙니까?"
  "이것 보시오, 당신들은 우리들을 살해하고도 뻔뻔스럽게 지금까지 잘 살아  오지 않았소.
그러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이지 양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들이군. 하지만 걱
정하지 마시오. 우리 흑인들은 당신들 백인들과는 달라서 폭력보다는 평화를 좋아하는 편이
니 걱정하지 마시오."
  만델라는 백인들의 뻔뻔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꾹 참고 흑인들이 백인들과 얼마나 다른가
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히려 호통을 쳤다. 데 클레르크는 만델라의 당당한 태도에 기가 죽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밀림 속에 숨어 있는 일부 무장세력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
의 새로운 시도에 반대하여 무력을 사용할 경우 협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니까
요."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ANC의 책임자로서 무장 세력들과 만나서 잘 해결되도
록 노력할 테니까요. 이제 더 이상의 피를 흘린다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새
로운 정권이 탄생하더라도 우리는 백인들의 안전을 위해서 HCLTJS을 다할  것 DFM 약속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부 요직에도 등용하여 인재를 아끼지 않는 민주정부를 만들기 위해서
당신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할 생각입니다."
  만델라, 데 클레르크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40년 동안의 기나긴 갈등과 편견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각각 흑인과  백인을
대표하여 싸움을 전개하던 두 사람의 화해는 이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새로운 탄생을 예고
하는 것이었다. 그 후 90년 2월 2일 데 클레르크는 ANC를 합법화하고 만델라를 석방하였으
며, 마침내 93년 11월 잠정 헌법 채택과  전 인종 총선 실시에 합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파르트헤이트를 둘러싸고 남아공이 전면 내전으로 빠져들 것을 막음으로써 그  해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쿠바 섬의 위기-케네디와 카스트르
  "우리는 쿠바 섬에 핵무기 미사일기지를 만들려고 하는 소련의 음모에 모든  힘을 동원하
여 막아낼 것을 다시 한번 말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의 흐루시초프 서기장과  쿠바의 카스트로 제 1서기가 꾸민  음모에
강하게 대처할 것을 전세계에 발표하였다.  1959년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을  게릴라 전술로
무너뜨리고 사회주의혁명을 외친 카스트로는 1962넌 10월 소련의 중거리미사일을  반입하여
미국을 위협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수련과 협작하여 기지를 만들 것을 발표했다.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소련의 중거리미사일을 쿠바에 설치할  것이며 미
국이 이를 계속해서 반대한다고 해도 우리는 기어이 실행하고 말 것이다."
  카스트로 또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각하, 지난 61년 6월  흐루시초프 서기장과의 면담을 생각하시어  소련과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비서실장은 오스트리아에서 만나던 흐루시초프의 약속을  상기하며 케네디에게 제안했다.
당시 케네디는 흐루시초프와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세계 평화를 위하여 협조할
것을 굳게 약속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지만 케네디는 그 약속을 지금은 믿을 수가 없었다.
  "흐루시초프라는 사람이 정직하지 않고 아침에  하는 소리와 저녁에 하는 소리가  틀리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
  "하지만 각하, 지금의 상태로 간다면 전쟁의 위험도 생각해야하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
리고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공해상에서의 소련  무장 선박을 무력으로 막기에는 벅찬  일
입니다."
  케네디로서도 선택할 방법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소련의 계획을 그대로  두고 본다면
미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쿠바에 중거리 마시일기지가 설치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 집
안방에 총을 쏘시오 하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눈치 챈 카스트로와 소
련은 케네디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 자신들의 계획을 순조롭게 진행시켰다.
  "서기자임, 소련에서 중거리미사일을 실은 선박이 출발했다는 보고가 왔습니다."
  "음 그런가. 그렇다면 미국의 조치에 대비해 전투선박들을  카리브해 연안에 배치하여 경
계태세에 들어가도록 전군에 전달하라."
  "네, 알겠습니다."
  먼 바다를 바라보며 지시를 내리는 군복 차림의 카스트로는 그의 턱수염이 우직해 보이기
까지 했다. 그는 명령에 전투선단은  즉각 카리브해 연안에 배치되었으며, 소련의  수송선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전쟁의 위험이 카리브해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선택이 세계를 움직일 것이다!>
  전세계 언론들은 쿠바의 중거리미사일 배치가 세계대전도 불사한 최대의 관심거리로 연일
대서특필했다. 실제로 소련은 공해상에서 자신들의 선박에  대해서 무력조치를 취한다면 가
만히 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으며, 카스트로 또한 쿠바의  영해에  들어오는 배
는 무조건 공격하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미국의 팬타곤(미 국방성 건물의 별칭)은  바쁘게
움직였다. 시시각각 인공위성을 통해서 소련 선박의 위치를 파악하는가 하면 쿠바의 반응도
일일이 체크하고 있었다.
  "이번 사태를 그냥 넘어간다면 소련은 기고만장해서 우리에게 엉뚱한 요구를 해올지도 모
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선박을 막는다면 핵무기를 쏜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의 음보를 분
쇄시켜야 합니다."
  전군 참모장은 강한 어조로 케네디에게 말했으며, 그의 두 주먹에는 강한 힘이 들어 있었
다.
  "그렇다면 우리 미해군의 선박으로만 쿠바의 포위할 수 있을까?"
  케네디는 회의에 참석한 장군들에게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해군 제독은 그 질문
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즉시 답변을 했다.
  "가능합니다. 각하. 해군기지에 있는 모든 선박을 동원하여 쿠바 주변에  배치한다면 조그
마한 배라도 나갈 수 없습니다."
  제독의 답변을 들은 케네디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의 평화를 깨려고 하는  소련의 음모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우리 미국을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중거
리 미사일이지만 어느 때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의  숨통을 죄어올지  모를 일입니다.  나는
전 해군에 쿠바 섬을 포위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전군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케네디는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며 자신있게 외쳤다. 그의 지시는
곧바로 실행되었다.
  "서기장님, 미해군의 군함들이 쿠바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미군 군함들이...?"
  카스트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이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올 것이라고 생
각지도 못했었다. 카스트로뿐만이 아니라 소련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케네디가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서 강경조치를 위하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기장님. 카리브해에 도착한 중거리미사일 운반선들이 미군의 경계 때문에 도저히 쿠바
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좋은 방법이 없을까?"
  "지금의 케네디라면 전면전도 불사할 것으로 판명됩니다. 하지만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분
명 바보 같은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실리적인 외교를 펴는 것이 어떨까요?"
  케네디의 강경조치에 기가 질린 흐루시초프도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카리브해를 차단당
한 소련선박은 그저 쿠바를 배회할 뿐이었다.
  "각하. 소련선박은 우리 미해군의 강경조치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재된 상황을 설명해 주겠는가?"
  "네. 현재 소련도 처음의 모습과는 다르게 우리의 태도에  대응할 방법을 찾고 있지 못하
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각하.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설치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미국이 쿠바
를 침공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명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수를 쳐서 쿠바를 침
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것이 어떨까요?"
  전쟁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소련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련 또한 계속해서 쿠바의
미사일기지를 주장할 경우에는 서로 어려운 난관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
다. 그때까지도 카스트로는 자국에 미사일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었다.
  "서기장님, 미국으로부터 전문이 도착하였습니다. 이번 사태를 힘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대
화로써 해결하자는 뜻을 전달해 왔습니다."
  "미국에서?"
  "그렇습니다. 세계의 시각이 좋지 않습니다. 이 기회에 마지못한 척하면서  미국과 타협을
하는 것이 어떨까요?"
  숨가쁜 순간이었다. 미군과 소련군 모두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핵폭탄들은  금방
이라도 날아갈 듯이 전비하고 있었다.
  "케네디 그 친구 대단한 배짱이구만. 하지만 별 수 없지. 서로 양보하는 선에서 타협을 하
는 것이 좋겠군."
  흐루시초프는 돌아가는 사정을 살펴본 후 이렇게 말했다. 미국과 소련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대화를 시작하였으며,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동시에 소련은 미사일, 폭격기 등을 쿠바에
서 철수하고 이의 이행을 확인하기 위해서 미국측의 사찰을 인정한다."
  이로써 케네디는 카스트로를 배제시키고 소련과 극적인 타협을 가지게 되었고 그후  이를
계기로 미국과 소련은 부분적인 핵실험 금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미국과 소련간의  갈등을
해소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쿠바의 미사일기지 설치 문제는 케네디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대
결보다는 대화로써 타협한 두 수권자들의 선택은 이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
법으로 사태를 해결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링컨은 흑인의 해방 문제로 목숨을 잃었다. 나도  그들의 평등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
우겠다'라고 말한 케네디 대통령은 자신이 구상한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신념의 사회를 시
작도 하기 전에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직도 그의 암살 배경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케네디에 맞섰던 독재자 카스트로는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는 쿠바를 겨우겨
우 지탱해 나가고 있을 뿐이다.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아라파트와 이스라엘
  "따르르릉! 따르르릉!"
  새벽을 깨우는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무슨 일인가?"
  "네. 지금 워런 크리스토퍼 미국무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아직 잠자리에 누워 있던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
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크리스토퍼 장관입니다."
  "아 그래요. 그래 무슨 일인가요?"
  "다름이 아니라 13일에 있을 이스라엘과 PLO간의 평화협정 서명식에 총리각하께서  직접
와주셨으면 한다는 대통령 각하의 명령을 받고 전화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미 야세르 아라
파트 PLO의장은 워싱턴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라파트 의장이 직접 서명하러 온다니 미국측에서도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총리가 와 주
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클린턴 대통령께서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저희 대통령각하께서는 이번 서명식에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보다는 총리
각하께서 직접 참석하는 것이 자리를  빛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각하를 공식 초청하는 것입니다."
  라빈은 뜻하지 않은 전화에 잠시 머뭇거렸다. PLO와의 화해를  오래 전부터 결심한 그였
지만 아직은 숙적 아라파트와 자리를 함께 하라 의향은 없었다. 그러나 클린턴 미국 대통령
의 공식 초청을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라빈은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내가 가겠소."
  중동 평화협상에서 또 하나의 장벽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곳의 분쟁은 제2차 세계대
전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히틀러의 유태인 말살정책에  의해서 아우슈비츠 등 살인공장에서
유태인들이 무수히 살해당했다. 이에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군측은 유태인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을 주기 위해서  회의를 시작하였으며, 그들의 조상이  살았던  이스라엘의 땅을
되찾아 주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영국,  프랑스가 주축이 된 연합군들이 1948년  요르단강과
예루살렘에서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내고 유태인의  나라 이스라엘을 만들어 주게  된
것이다. 나약하게 자신들의 땅을 잃어버린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성전을 선언했고, 요르단 강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을 탄압하기 시
작했다. 날마다 이 싸움으로 피가 흘려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하지만 미국과  유
럽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을 맨손인 팔레스타인이 이기기에는 벅찬  상대였다. 이에  주변
회교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을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이 문제는 이스라엘 대 중동  회교
국가의 전쟁으로 번져갔다. 이에  투쟁을 선언한 팔레스타인인들은  리비아, 레바논, 요르단
등에서 조직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팔레스타인 건
국의 아버지로 찬양받는 아라파트가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결성하여  조국없는 팔레
스타인인들을 대변해 주었다. PLO조직이 회교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를 구성하면서
외교적 노력을 시도하자 이스라엘의  총리 라빈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모사드  요원들을 
보냈다. 하지만 아라파트는 모사드의 추적을 교묘하게 따돌리며 활동을 계속해 왔다.
  "각하, 큰일났습니다."
  "비서실장,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그러나?"
  "뮌헨에서 급전이 도착했는데, PLO 테러 단체가 우리  이스라엘 선수촌을 습격하여 무참
히 살인을 자행하고 있답니다."
  "뭣이라구!"
  라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도발에  대해서 그는 도저히 참
을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그들과는 어떠한 협상도 있을 수 없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들이 다시는 우리에
게 테러를 가할 생각도 할 수 없게 조치를 취해!"
  이 사건으로 뮌헨 올림픽은 피로 물들었으며, 팔레스타인에 대해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던
나라들도 PLO의 테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결국 테러  요원들은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서 이스라엘의 특수부대에 의해서 모두 최후를 맞이했다. 라빈은 아라파트의 이러한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며,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마침내 87년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군의  탄압
에 견디다 못해 봉기하기 시작했다.
  "침략자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떠나라!"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싸움을 중지하지 않겠다!"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이스라엘군을 향해서 돌을 던졌다.
  "대장님, 팔레스타인인들의 수가 엄청납니다.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것 같습니다."
  시위 장면을 지켜보던 장교가 다급한 목소리로 군단장에서 보고하자 해동할 준비를  모두
끝낸 채 그의 결정만을 기다리는 이스라엘군에게 드디어 작전을 개시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막아라! 우리 이스라엘에 반항하  자는  우리 땅에서 살 자
격이 없다!"
  "두두두두두두!"
  군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스라엘군의 총구에서는 불꽃이 튀기 시작했고 총에 맞은  팔
레스타인인들의 흰옷은 붉게 물들어 갔다. 끔찍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싸우다 순교자로 죽어 천국에 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라파트가 침통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이제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깊은 계곡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모두 끊임없이 이어지는 희생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
지만 서로의 감정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할 채 계속되었다.
  그러나 평화협상은 뜻밖의 계기로 시작됐다. 비밀협상통로가 최초로  제안된 것은 92년 6
월. 노르웨이 사회과학자인 테제르로에드 라르센에 의해서였다.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연구활
동을 해오던 라르센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양측의 온건파들과 친분이 있었다.
  "당신들의 전쟁은 끝도 보이지 않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전세계는 냉전시대를
지나 대화와 타협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감정을 누르고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라르센의 말에 동의하였다. 그들은  중요한 협상 중재자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라르센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협상은 시작되었다. PLO와 이스
라엘은 93년 말부터 런던에서 비공식 회담이 시작되었다. 이 협상을 눈치 챈 강경파들은 이
를  저지하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동원하였지만   그들은 협상  장소를 알아내지 못했다.
PLO강경파와 이스라엘  강경파들은 워싱턴으로 요원들을 파견하였으나 실제로 협상은 노르
웨이의 여러 곳에서 진행되었다.
  "이것이 우리 위원들이 협의한 평화 협상안입니다. 잘 검토해 보십시오."
  PLO측 수석 협상 대표인 아메드 쿠리에는 서류뭉치를 이스라엘측에 넘겨주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양측 대표들의 분위기는 옛친구를 만난 것처럼 친숙했다. 중동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
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협상대표들은 노르웨이산 니트웨어를  입고 숲속을 거닐며 사슴
고기나 연어 등의 노르웨이 별식을 즐기며 다가올 평화를 기원하기도 했다.
  "장관님. 협상 대표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무엇인가?"
  "네. PLO 아라파트 의장이 제시한 평화 협상안이라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전혀 만족스
럽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디 한번 줘 보게."
  신중하고도 자세하게 서류들을 살펴 가던 페레스 외무장관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었다.
뭔가 매우 흡족한 듯 그는 즉시 라빈 총리에게 서류를 전달했다. 서류를 살펴 보던 라빈 총
리는 페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가자지구와 예리코 우선적 자치안은 흥미가 있네."
  페레스는 라빈 총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는 듯 즉시 협상대표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세하
게 협의할 것을 지시하였다. 협상은 급진전되었으며 양측은 보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내
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이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 라빈과 아라파트는 계속해서
노르웨이로 전화를 걸었다.
  "하하하. 이 정도면 만족하시겠지요. 어떻습니까?"
  "우리 PLO도 이 협상에 만족합니다. 그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협상 결과는 3단계로 나뉘어진 자치구 설정이었다.  1단계는 이스라엘과 PLO가 상대방을
공식 승인한다. 2단계는 9개월 내에 팔레스타인 통치위원회를 구성한다. 3단계로는 이스라엘
과 PLO는 2년 이네에 예루사렘의 지위에 관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이제 양측을 대표하
는 사람이 서명만 한다면 이 협상은 성공리에 끝나는 순간이었다.
  "아니 이것이 사실입니까?"
  협상안을 살펴보던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하하.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이것은 새로운 중동평화를 위한 시작에 불과하니까요."
  1993년 9월 13일 역사적인 만남이 미 백악관에서  이루어졌다. 전세계 각국의 외신기자들
은 카메라를 들고 몰려들었고 정원에 모습을 드러낸 라빈 이스라엘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
장은 흐뭇한 얼굴로 협상안에 서명하였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클린턴은
몹시 기뻐 어쩔줄을 몰라했다. 이제 중동에 평화가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49년간의
숙적이었던 두 사람이 마주선 이 역사적인 자리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였기에
그 기쁨 또한 배로 더하였다. 중동을 양분하던 두 맞수가 서로 양보하고 끈질기게 대화함으
로써 영웅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중동에 평화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싸움보다
는 대화와 타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세계 만국에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보이지 않는 정보전쟁-KGB와 CIA
  "놈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심해서 미행해. 놈이 눈치채면 우리의 계획은 허사로 돌아가게 되니까."
  CIA와 FBI 요원들은 헐만이라는 TV 카메라맨을  뒤쫓았다. 그는 KGB 요원이라는 의심
을 받고 있었다.
  "예상대로 무인 우편함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헐만은 주위를 살피며 긴장된 얼굴로 무인 우편함에 놓여진 물건을 가지고 가려 했다.
  "사진으로 찍어! 증거가 필요해!"
  반장의 말에 사진기를 든 요원은 망원카메라를 이용해 헐만의 행동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
기 시작했다. 헐만은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자신의 집으로 KGB가 보낸  물건을
들고 돌아갔다. 그제서야 모습을 나타낸 CIA와 FBI 요원들은 헐만을 어떻게 체포할 것인가
하는 것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물건은 분명히 헐만에게 내려진 지령임이 틀림없어"
  "그렇다면 증거 사진도 있고 물증도 그가  가지고 있으니 지금 당장 체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그게 좋겠군. 어서 서두르자고."
  수사요원들은 혹시라도 헐만이 증거를 없앨까 걱정하며 그의 집으로 몰려갔다.
  "헐만 씨 같이 좀 가주시겠습니까?"
  FBI의 배지를 내 보이며 말을 건네자 헐만은 올 것이 왔다는 듯이 고개를 수그리며 순순
히 요원들의 뒤를 따랐다. 이로써 18년 동안이나 첩보원 생활을  해왔던 헐만은 CIA와 FBI
의 끈질긴 추적  끝에 덜미를 잡히고  말게 되었다.  헐만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75년  CIA가 미국에 입국한 소련인 두  명 중 한 명이 비합법공작원을  지원하는 연락책
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FBI에 이를 통보함으로써 그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FBI는 6
개월 동안 이들 두 사람에 대해 집중 미행감시를 해오던 중,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뉴욕 서
부 75마일 떨어진 장소에 있는 무인 우편함을 설치 운영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끈질긴
노력 끝에 그 속의  물건을 찾아가는 첩자 헐만을 체포하게 된 것이다.
  "우선 자네가 미국에 침투할 수 있었던 방법을 알고 싶네?"
  "저는 1961년 서베를린으로 침투하여  그곳에서 유리공장 노동자로  있다 KGB의 지시에
따라 TV 카메라맨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에서 캐나다 이민이 한창일 때 저
도 캐나다 입국 비자를 획득하게  되었고 곧바로 전 가족이 캐나다로  이주했습니다. 그 후
곧바로 미국으로 이민하여 뉴욕 롱아일랜드에 거주하면서 지금까지 TV 카메라맨으로 활동
하고 있었습니다."
  CIA 요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활동은 아주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되어
왔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어떤 정보를 캐냈지?"
  "캐나다에서는 6년 동안 거주하면서 KGB에 포섭되어 활동하던 캐나다  교수와 KGB간의
중간 연락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주로 NATO에 관한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헐만은 철저하게 남의 의심을 받지 않도록 행동했으며 그 방법도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라
CIA요원들도 혀를 내둘렀다.
  "굉장히 치밀하게 준비를 했군.  그 동안  첩보원 노릇을  했다면 꽤 많은  돈을  벌었을
텐데?"
  "네. 하지만 KGB는 제가 개인사업을 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TV 카메라맨
이나 일정한 직업을 가지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그래야 의심을 덜 받게 된다면서요."
  "정말 문제군. 자네와 같은  사람이 이 나라에 한두  명이 아닐텐데. 어떻게 모두  잡아내
지."
  심문을 하던 CIA요원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그는 1년에 한 번씩 소련으로 가 활동상황을 보고하였다. 그 때마다 의심을 받지 않기 위
해 전 가족이 휴가 여행을 가는 것처럼 꾸며 스위스를   경유,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소련선
박을 이용해  레닌그라드까지 이동한  후  모스크바로 도착하는  수법을  썼다고   자백했
다. 
KGB는 공작원을 파견할 시에는 십여  년을 유럽에서 생활하게 한 후  때가 되면 미국으로
보내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그러한 스파이들에  민감한 CIA는 전 세계의 첩보망을 통해서
자국 내로 들어오는 첩자들을 발각하고  그 사실을 FBI에 통보하여  체포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CIA는 1947년 소련으로부터의 위험예측과 군축협상에 관련된  정보분석을 주업무로 맡아
다루었는데 비밀 정보작업의 중요성을 인지한 후부터는 전세계를 무대로 KGB의 행동을 감
시하고 역으로 소련에 자신들의 첩자를 파견하는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KGB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독일 나치시절  SS의 첩보방법을 습득하여  소련 국가보안위원회라는
기구를 창설하고 해외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외국인과 외국에  대한  공작을 전담했으며,
아울러 소련 국내의 방첩  활동과 민간인 사찰을  맡는 막강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KGB는 5개의 총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해외업무는 17개의 과로  나누어 전담하고있는데
우리나라는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의 정보를 총괄하는 제5국이 담당하고 있다.
  KGB의 방대한 조직망과 그 행동영역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알 길이 없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하다는 것밖에는...이러한 KGB에 대항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는 미해군성이 중앙 정보국의 창설계획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국가 갖추어야 할 형태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중앙정보국의 창설은 지상과제이며 미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필요한 조직이라고 생각합니
다."
  "그렇다면 그 조직이 기존의 조직과 어떻게 분리될 것인가에 대해선 생각해 보셨습니까?"
  "현재 대외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OSS를 확대하여 조직을 만들어 가는 것은  어떻겠습니
까?"
  "차라리 FBI를 확대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미국 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시민들도  과연 어떠한 조직이 탄생할  것인가 궁금증을
가지고 지켜보았으며, 보다  훌륭하고 뛰어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1945년 도노번이 주장한 OSS의 확대안이 부결되자 FBI의  확대안이 유력한 듯이 보였으나
이 또한 부결되었다. 미국 국민들은 보다 강하고 민주적이며  자유를 수호하는 기관이 탄생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중앙정보그룹의 설립을  골자로 한  최정
법안이  채택됨에 따라 다른 안건들은 자동적으로 중지되었다. 그리하여  1947년 해외 정보
업무를 담당하는 CIA를 창설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FBI는 국내  문제를 전담하는 두 조
직의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정보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CIA가  국내에 침투한
소련 정보원을 잡아낼 경우에는 FBI와 행동을 같이하거나  수사협조를 얻는 형태가 이루어
지게 되었다.  결국 이체제가 완성됨으로써 정보를 독점하는 기관이 사라지게 되었고, 상호
협조와 타협을 통한 수사를  진행하게 됨으로써 미국은 KGB에  맞서는 강력한 정보조직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소유냐 존재냐-그랜트와 리
  1861년 미국은 노예해방문제로 시끄럽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공업이 중심인 북부와 농업
이 중심인 남부와의 의견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아 기어이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북
부는 연방국이 23개 주였으며 남부를 11개 주였다. 첫번째 전쟁은 1861년 7월 21일 수도 워
싱턴에서 서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불런 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다.  하지만 치열한
싸움 끝에 당연히 우세하리라고 예상되었던 북부의  대패로 첫번째 전쟁은 끝이 나고  말았
다. 남부군의 명장 리 장군이 이끄는 부대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대통령 각하, 곳곳의 전투에서 우리 북부군이 밀리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지?"
  "네, 남부의 리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그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작전으로 다른 어떤 부대
도 그가 이끄는 부대 앞에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합니다."
  링컨은 보고를 받으면서 아찔했다. 물자나 병력면에서  남부군을 월등히 앞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휘관이 없어 연전연패를 하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각하, 서부 지방의 사령관인 울리세스 그랜트 장군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합니다. 그에게
좀더 높은 직책을 주어 전쟁에서 큰 전과를 올리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니 그런 장군이 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그를 서둘러 전선에 투입하도록."
  링컨은 비서관의 보고에 한심하다는 듯이  질책하면서 그랜트 장군에게 기대를  걸어보았
다. 링컨의 판단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랜트 장군이 전선에 본격적으로 투입되면서  서서히
북군이 승전보를 전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치밀하고 뛰어난  작전을 구사하는 리 장
군에게는 계속해서 시달림을 당해야만 하는 어려운 난관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맥클레런 장군님, 중대한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워싱턴의 방위를 맡고 있던 맥클레런은 숨차게 들어온 부관을 바라보며 무슨 일인지 궁금
해했다.
  "다름 아니라 워싱턴의 북쪽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리 장군의 비밀 작전을  우리 첩보원이
알아왔습니다."
  "뭣이라구. 어디 한번 보세."
  신출귀몰하는 리 장군이 실수를 다 할 때가 있구나 하는 기분으로 맥클레런은 부관이 들
고 온 첩보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리의 군대가 안티텀으로 몰래  이동하여 워싱턴으로 쳐들어  온다는 계획이군. 그렇다면
우리 국군이 미리 안티텀에 기습할 준비를 갖춘다면..."
  맥클레런은 기쁨의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한 리 장군을 이길 수 있
는 좋은 호기였다. 남군의 작전을 알아낸 북군은 남군의  진로에 미리 대비하여 안티텀에서
그들을 마구 공격하였다.
  "탕탕탕탕!"
  "으아아아악 북군의 기습이다!"
  총소리가 귓전을 울리면서 퍼부어지기 시작하자 남군은  놀라 허둥대기 시작하였다. 뜻밖
의 공격을 받은 남군의 군사들은 변변히 저항도 하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리 장
군의 첫 패배였다. 링컨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9월 22일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하였다.
  [863년 1월 1일부터 모든 노예는 영원히 자유를 가진다.]
  이 선언은 흑인의 해방을 뜻하는 동시에 모든 인간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평등해야 한
다는 민주주의 원리를 강조한 선언으로서 깊은 의미를 가진다.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 되었
으며, 처음과는 달리 그랜트 장군이 이끄는 동부군은 교묘한  작전으로 남군을 미시시피 강
에서 후퇴시키고 있었다. 1863년 7월 1일, 그랜트와 리 장군의 대결이 처음으로  게티즈버그
의 산기슭에서 벌어졌다. 그랜트는 산기슭을 따라 진지를 만들고   100대 이상의 대포를 준
비했다. 이에 질세라 리 장군이 이끄는 남부군도 산기슭 맞은편에 진을 치고 전투태세를 갖
추었다. 이윽고 어둠이 밀려오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쾅쾅쾅! 탕탕타!"
  포소리와 총소리가 어둠의 정적을 가로지르며 날아다녔다.
  "전군은 목숨을 걸고 싸워라! 남부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리 장군이 군사들을 돌려하자 남부군은 질풍처럼 빠르게 어둠 속으로 달려나갔다.
  "남부군이 다가왔다. 전 포문을 열고 사격을 시작하라!"
  밀려드는 남부군에 북부군은 포격으로 응수했다. 산기슭  여기저기에 터지는 폭탄에 수십
명의 군사들이 쓰러져 갔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된다. 진격! 진격!"
  그랜트와 리 장군은 서로 기선을 잡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밀고 밀리는 접전이
사흘동안 계속되던 전투는 화력과 병력에서 앞선 그랜트의 승리로  결말이 낫다. 무려 부군
은 2만 3천, 남군은 3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어마어마한 전투였다. 그랜트는 이 기세를 몰아
남부군을 공격하여 미시시피 강 기슭에 있던 요새를 항복시키는가 하면 피츠버그  전투에서
도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이 두 전투에서 남군의 포로는 무려 7만 4천 명에 이르렀다.
  리 장군을 이긴 그랜트의 등장은 북군에게 전세를 역전하는 기회를 가지게 해주었다.
  이 즈음 1863년 11월 19일 링컨  대통령은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제막식에서 후대에  길이
기억되는 연설을 하게된다.
  "87년 전의 우리 조상은 자유의 사상과,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신념으로 이
대륙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커다란 내란 속에 휩싸여 있습니다. 자유 평등의 정
신과 신념을 지금까지 지켜 온 이 나라가 앞으로 국난을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를 스스로 시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용사들의 최후의 안식처로
서 이 터의 한 모퉁이를  바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들  명예로운 전사자들의 뒤를
잇고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굳은 결의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하느님의 보호 밑에  새로운 자유의 나라로 재 출발시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지구 위에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
겠습니다."
  이 연설은 극찬을 받았으며 특히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은 민
주주의의 뜻과 목적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 당시 전쟁에 지쳐있던  북군에 엄청난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1864년 2월, 의회는 그랜트 장군의 공적을 높이 사 그를 육군 중장으로 선임하는 한편 그
에게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겼다. 그 해  5월 그랜트와 리 장군은 마지막  운명을 건 싸움을
전개하게 된다. 두 군대는 래피댄 강을 사이게 두고 격렬한 육박전을 전개하였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남부를 지킨단  말인가! 힘을 내라! 힘을  내서 저 북부군을 섬멸하
자!"
  리 장군은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최전선에서 칼을 들고 직접 군사들을 지휘했다. 리
장군은 열정적이고도 강한 신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 남부군은  용기 백배하여
북군과 싸웠고 북군 또한 밀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사령관님 마치 죽음을 위해 달려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 너무나 처절한 전쟁이다. 하지만 이 전투는 가장 중요한 전쟁이다. 전선에서 한여름
을 다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그랜트의 얼굴에 굳은 각오가 드리워져 있음을 발견한 작전참모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
다. 사실 이 전투가 남북전쟁의  종지부를 결정짓는 순간이라는 것을 그랜트와  리 모두 잘
알고 있었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지휘하였다.
  "공격하라! 진격!"
  "펑펑펑! 탕탕탕!"
  "아아악! 으악!"
  포성과 아우성, 총소리로 래피댄 강은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했다. 강변을 시체로  즐비
했고 강물도 붉게 물들 정도였다.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계속
해서 새로운 병사가 총을 쏘며 진격해 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군. 아아 물자보급만 원활히 된다면 걱정이 없겠는데..."
  전투가 오랫동안 진행되자 물자를 공급받지 못한 리 장군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랜트는 리 장군이 래피댄 강가 전쟁에 심혈을 기울이는 틈을 이용해 부하 셔만 장군을
시켜 다른 지역에 남아 있는 남군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물자가 모자란 남부군은 셔만 장
군이 가는 데마다 항복하거나 투항할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전쟁을 수행하기
보다는 포로와 노획한 무기를 정리하기에 더 바빴다. 한편  끈질기게 전개된 래피댄 강에서
의 그랜트와 리의 전투는 서서히 그랜트의 승리로 장식되고 있었다. 리 장군은 그랜트 장군
을 상대로 용감히 싸웠으나 병사들이 도망가고 식량과 무기와 자금력이 떨어져 극심한 물자
부족 현상을 겪어야만 했다. 1866년 4월 9일 링컨에게 한 편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오늘 아침 남부군의 리 장군이 우리가 내놓은 조건에 따라 항복하고 북버지니아 군을 인
도해 왔습니다.]
  남북전쟁이 끝을 맺는 아주 중요한 전보였다. 리 장군은 그랜트 장군과 다정히 악수를 나
누며,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그리고는 약속대로  리 장군을 비롯한 모든 남부군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떠났다. 4월 10일 워싱턴의 교회마다 평화의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모든 관청에서
는 성조기가 아침을 맞이했다. 전쟁은 끝난 것이다. 그랜트와 리의 대결은 누가 이겼다고 얘
기할 필요가 없는 싸움이다. 모두 최선을 다한  싸움이 아니었던가! 전쟁 후 그랜트는 미국
의 제 18대 대통령이 되어 미국을 다스리게  되었고 리 장군은 워싱턴 대학의 학장이 되어
교육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진리를 등불로 삼은 용기-루터와 칼뱅
  "임금님, 지금 황제의 군대가 슈만칼덴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뭣이라구, 기어이 올 것이 왔군. 별 수 없지 전 군대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황제의 군대를
쳐부수자!"
  황제의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말에 제후들은 즉각 군대를 출동시켰다.
  때는 1530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부르짖으면서 독일은 종래의 카톨릭(구교)을 지지하는 황
제와 교회에서 독립하여 루터나 칼뱅의 주장을 받아들여 새로이 형성된 프로테스탄트(신교)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갔다. 1529년, 황제 칼 5세가 루터파를 금지시키자 독일의 신교도  제
후와 제국의 11개 도시가 도일 슈만칼덴에서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무력
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낸 것이다.
  "이 어리석은 놈들아 덤벼라! 감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다니!"
  "우리 제후들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하지만 제후들의 힘은 황제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었다.  엄청나게 몰아치는 황제의 군대
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어도 자신
들의 신교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이번에 패하기는 했지만 우리의 의지는 결코 꺾을 수 없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다시 싸
우겠다."
  16세기 유럽에서는 국왕의 세력이 강화되고 교황의 권력은 차츰  쇠퇴해 갔다. 그러나 독
일의 주민들은 높은 신앙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교황의 지배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사치스럽고 부패한 교회는 그 씀씀이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빚을  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직자가 되어 돈과 권력을 얻으려고 타락하는 이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자 교회에 대한 불만
은 점점 더해만 갔다. 이러한 중에도 교황 레오 10세는  성 피에트로 대성당을 더욱 화려하
게 꾸미고 싶어했다.
  "하지만 교황님 그렇게 하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한데요."
  "음, 그렇다면 예전처럼 이번에는 신도들에게  면죄부를 팔아 돈을 거두어들이도록  하지.
그 금액을 올려서 판다면 되지 않겠는가."
  교황의 명령에 성직자들은 전 유럽에서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다. 면죄부는 카톨릭 교회가
선행을 한 신자에게 주는 증서로 본래는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돈이나 금품을 교회에 바치고
이 면죄부를 교회에서 받아가는 것이었는데, 이 제도가 부패하면서 면죄부를 싼값으로 대량
으로 일반 신자에게 팔고 있었다. 교회는 이것을 사면 모든 죄가 없어진다고 선전하여 신자
들로 하여금 막대한 돈을 거두어 들였다.
  "이 면죄부를 가지면 당신은 죄를 면하게 되고 천국으로 갈 수도 있어요."
  "여러분이 교회에 기부하시는 돈이 이 기부금 상자에 떨어지는 순간 죄를  짓고 허공에서
괴로워하는 여러분의 부모와 친척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당시의 성직자들은 가난한 농민들을 이처럼  꾀어서 막대한 돈을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은 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장사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1514년 이후 8년 기한으로 독일에서 판매된 면죄부는 여러 지방에서 많이 팔렸다. 그러나
이 같은 면죄부 판매에 의문을 제기한 독일의 성직자이자 대학 교수인 루터는 즉각 반박문
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하나님을 돈벌이로 삼은 타락한 성직자의 못된 짓일 뿐이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대와 참다운 신앙과 성서의 중요성을 강
조한 96개조 의견서를 비텐베르게 성교회 문 앞에 붙임으로써 종교 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면죄부는 인간의 영혼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면죄부가 없더라도 진실로 회개하는  그리스
도는 구원을 받게 된다. 교황은 인간의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지 않았다.]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한 이 의견서는 라틴어로 쓰여졌지만 곧 독일
어로 번역되어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루터의 의견에 동
의했으며, 그 동안 쌓였던  교황에 대한 불만과 성직자들의  타락에 대해 성토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교황은 몹시 화를 내었다.
  "루터는 이단자다. 그를 믿지 마라!"
  "내가 교황에게 질 줄 아는가, 독일의 제후와 많은 시민들이  나를 따르고 있지 않는가!"
  교황은 황제에게 루터를 탄압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루터는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는 자신을 믿는 제후, 시민들과  함께 교황에게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1524년, 루터의
개혁에 자극을 받은 독일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교회를 부수는 등 점차 과격해지자 루
터는 이 반란을 반대했고, 기어이 제후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독일에서 신교와 구교를  놓고
강하게 대립하고 있을 무렵, 루터의 종교 개혁에 영향을  받은 칼뱅은 프랑스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북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에서 태어난 칼뱅은   오를레앙 부르제 대
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했다. 그는 카톨릭에 반대하고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주장하
여 파리에서 종교 개혁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로 인한 탄압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스위
스로 망명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성서의 신앙에서만 얻을 수 있고,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오직 근
면 성실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하면 됩니다. 또 재산을 모은다는  것도 결코 나쁜 일은 아닙
니다."
  칼뱅은 고통은 참고 견뎌야 하며 헌금을 많이 내야 천국에 간다고 설교하는 성직자들과는
전혀 다른 종교관을 내세웠다. 근검하고  절약하는 생활이 올바른 신앙심이라는  그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찬동하여 믿고 따랐다. 또한 그는 기존의 교회제도를 개혁해 나갔다.
  "자꾸만 독재적으로 되어 가는 카톨릭 교회의 제도는 좋지 않아요. 신자의 대표가 목사를
도와서 교회를 운영하는 방식을 채택해야 합니다."
  "맞아요, 교회도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칼뱅은 종래의 교황권 체제의  교회 제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목사와 신자를 대표하는
장로가 교회를 운영하는 장로 제도를  만들었다. 칼뱅은 신자들의 헌금으로  막대한 권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카톨릭의 성직자들과는 달리 목사와 신자가 같이 운영하는  교회
를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새로운 형태를 제안한 셈이었다. 그 후 칼뱅은 시민의 지지를 받아
1541년부터 제네바의 시정을 맡게 되었으며, 정치와 종교를 일치시키는 정치를 실행했다. 이
런 칼뱅의 개혁은 각지에서 크게 환영받았고 제네바는 종교 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한편 독일에서는 계속해서 구교를 믿는 황제와 루터를 따르는 신교 제후들간의 싸움이 그
치질 않았다.
  "아직도 루터파를 제거하지 못했는가?"
  "폐하, 그들의 저항이 워낙 거세고 루터를 따르는 자들이  너무 많아 그들을 근절하는 것
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벌써 그렇게...그렇다면 내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기나긴 싸움에 지친 황제는 루터파를 없앨 수 없을 바에는 화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
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555년 9월 25일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독일의 루터파와 카
톨릭파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게 이르렀다.  이 조약에서는 '영주의 신앙이 영내를 지배한다'
는 원칙 아래 루터파의 신앙을 카톨릭 신앙과 동등하게 인정해 주었고 제후와 각 지역의 신
앙 선택권이 주어지는 일약일대 사건이었다. 이로써  루터파의 신교는 독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루터파의 신교가  공인되자 많은 시민들이 좋아했지만  구교냐 신교냐는 것
은 영주의 판단에 따른 것이어서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종교 개혁 이후 교황과 황제의 권위는 점차 약화되었고 제후와 시민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유럽 사회는 근대로 접어들게 된다. 루터파는 독일에서 공인되었으나 칼뱅파는 인정되지 않
았다. 하지만 독일을 제외한 전 유럽  사회는 근대로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독일을  제외한
전 유럽은 칼뱅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영국에서는 청교도(종교적으로 근엄하고 결백한 사람).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네덜란드에서는 게우센이라 불리었다. 루터와 칼뱅,  이 두 사람은 절
대권력을 휘두르던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여 시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사한 위대한 인물
들이라 일컫을 만하다. 교황과  황제가 종교를 빌미로 해서 농민과 시민, 상공업자들을 괴롭
히던 당시에 교회가 교황과 손을 끊음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
다. 이 두 사람은 올바른 종교생활을 주장한 것 외에도 불합리에 도전하여 정의를 실천했다
는 점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칼뱅과 루터, 이들은 종교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맞수
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무적함대와 영국함대
  "전함이 보인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다!"
  바다를 지켜보던 영국 병사가 다급하게 외쳐대는 소리를 들은 모든 이들의 얼굴은 굳어지
기 시작했다. 목숨을 건 해전이 이제 곧 시작될 판이었다.
  "뭐라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라고?"
  "그렇습니다."
  "전원 전투태세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라! 스페인의 무적하대가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
리 영국 해군을 이길 수는 없다! 모두들 자신감을 가져라!"
  영국군은 넬슨 제독의 명령에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펠리페 2세가 이끄는 함대는
1571년 터키가 그리스도교를 믿는 유럽을 침략해 오자 교황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연합군
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뛰어난 전투력을 과시했다. 당시의 전투는 해상 백병전이었는데
스페인의 6척이 터키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육박전을 전개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켜  유럽
제패를 노리던 터키를 쫓아내는 공을 세웠다. 이때부터 펠리페 2세가 이끄는 함대를 무적함
대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후로도 이 함대는 곳곳에서 뛰어난 해상전투를 전개하여 그 명
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적함대와 맞서는 영국군은 그들을  두려워했고 스페인 함대는 지나친  자신감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영국의 소형 전함들을 우습게 보았으며 전투에서 제일 경계해야 할 자
만에 빠져 있었다.
  "하하하! 저 조그마한 배들이 영국 해군이다!  자 속히 전투를 전개하여 영국군이 다시는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해주자!"
  "펑펑펑!"
  "콰과과광!"
  무적함대의 거대한 포에서는 천둥소리와 함께 포탄들이 영국 함대를 향해서 날아갔다. 그
러나 영국해군의 배들은 재빠르게 피하며 진격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비록 무적함대보다는 힘이 떨어지지만 우리 배를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저 거
대한 배들은 우리의 배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니  스페인 거함들의 사이에 끼어
들어 재빠르게 공격해야 한다!"
  넬슨 제독의 명령에 따라 바람을 잘 이용할 수 있는 영국 함선들은 종횡무진 스페인 함대
의 틈 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으며, 집중적인 포격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함대는 재빠르게
피했다.
  "무슨 놈의 배가 저렇게 빨리 움직여! 도저히 맞출 수가 없어!"
  무적함대는 전함 127척에 수병 8,0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에 맞서는 영국 함대는  전함
80척에 병력 8000명이었다. 전함의 숫자도 그렇지만 사람의 숫자도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두
함대는 지중해의 해상권을 자국으로 가져오기 위해 필사적인 전투를 수행해야만 했다. 비록
스페인이 영국을 공격하는 입장이지만 여기서 패하는 나라는 엄청난 피해를 본다는 것을 펠
리페 2세나 넬슨 제독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지중해의 해상권을 쥐고
있을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어느 나라도 무적함대와 싸울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
다. 하지만 영국만은 사사건건 스페인의 정책에 방해하고 나섰다. 특히 네덜란드의 신교도들
을 부추겨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도와주어 1581년 네덜란드는 연방공화국으로서  스페인
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이에 스페인은 수차례 네덜란드를 공격하였으나,  영국
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네덜란드를 정복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영국 해상을 지나가는 스페인의 상선을 약탈하는 등 스페인과의 사이는 점점 악화
되어만 갔다.
  "폐하, 영국군이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여왕을 처형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스코틀랜드 여왕을 처형했다고?"
  "그러하옵니다. 19년간의 감금도 모자라 처형을..."
  스코틀랜드 여왕은 스페인과 친분이 있었으며, 그녀는  신교보다는 스페인과 같은 구교였
기에 펠리페 2세도 그녀를 무척이나 아꼈었다. 그러한 스코틀랜드 여왕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펠리페 2세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했다.
  "네 이놈들을 반드시 혼내주고 말겠다!"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여왕은 엘리자베스 1세의 먼 친척으로 처음에는 프랑스의 왕비
였으나 남편이 죽은 뒤, 귀국하여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암
살음모에 가담했다가 19년간 감금되어 1587년 끝내  처형되고 말았다. 구교도인 스코틀랜드
여왕을 처형했다는 것은 스페인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이에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의
영국원정을 결정했다.
  "이 무슨 고약한 짓이냐! 영국은 윌 스페인의 상선을 약탈하는가 하면 네덜란드의 독립을
원조하고 이번에는 구교도인 스코틀랜드 여왕을 처형했다. 이건 우리 스페인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그렇습니다. 영국을 더 이상 봐주다가는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속히 영국에 쳐들어가 다시는 이런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단단히 다짐을 받은 것이 옳
은 줄로 압니다."
  신하들은 영국과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펠리페 2세에게 간언하였다.
  "좋아. 이번 기회에 영국이 다시는 우리 스페인을 넘보지 못하도록 해주자! 우리의 무적함
대로 영국을 무찌르리라!"
  펠리페 2세는 1588년 5월 28일 자신이 직접 무적함대를 이끌고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포
르투갈의 리스본 항을 출발하였다.
  "여왕 폐하,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리스본을 출항했다고 합니다."
  "뭣이,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세계 최강의 함대인 무적함대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리스본항을 출발했다는 정보를  들
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마에 식은땀이 고였다. 영국으로서는 무적함대에  맞설 수 있는 부
대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경들의 의견을 듣고싶다."
  "폐하,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도버해협에 관한  한 윌 영국 함대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적절한 풍향과 지형을 이용한다면 의외의 결과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
다."
  신하들의 막연한 대답에 여왕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여왕 폐하, 제가 항해에 뛰어난 넬슨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를 함대의 제독으로
임명하시어 무적함대와 대결시키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호오, 그런 인재가 있었소. 내  경의 말을 따르기로 하겠소.  넬슨은 모든 함대를 이끄는
제독이 되어 무적함대를 무찌르도록 하여라."
  아무도 넬슨 제독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가 무적함대에 패할 것이라고 생
각했다. 하지만 넬슨은 영국함대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스페인의 전함은 영국 전함의 몇
배나 되는 크기였다. 넬슨은 이 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볼 참이었다.
  "폐하, 영국 전함들은 소형이라 행동이 민첩해 공격하기 힘듭니다!"
  "뭣이라고, 정신차리고 똑바로 공격하라!"
  하지만 이미 전세는 영국의 승리고 기울고 있었다. 영국의  전함은 포격거리가 짧아 스페
인의 전함 사이를 오가며 신나게 공격했으며, 스페인의 전함들은 무적함대라는 이름이 무색
할 정도로 전투에서 밀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무적함대의 숫
자는 늘어만 갔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와아아아! 도망치는 스페인 놈들을 박살내자!"
  싸움의 진행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펠리페 2세는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무적함대 최초의
패배였다.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는 넬슨의 전법에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겨우 도망친 스페인 함대는 기진맥진하여 스페인으로 향했으나, 그들에게는 또 다른 불행
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악, 폐하 폭풍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폭풍이? 엎친 데 덮친 격이군. 모두들 자기자리를 지키고 배는 꼭 살려야 한다."
  무적함대는 폭풍우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며,  겨우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127여 척 중 54척만이 겨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무슨 창피스러운 일인가?"
  펠리페 2세는 분하고 원통해서 가슴을 쳤지만 이미 그의 자랑이던 무적함대는 깨어진 신
화가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은 원정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수십 척의 전함을 잃음으로써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지중해의 상권도  서서히 영국이 잡기 시작했다. 넬슨  제독의
화려한 승전보에 영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리고 영국은 이  승리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라는 명칭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영국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무너지자 영국을 막을 나라는 더 이상 없
었다. 넬슨은 국민의 영웅이 되었으며,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화려한 시대를 마감시키는 국
왕이라는 엇갈리는 운명이 되었다. 두 맞수의 대결은 자만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 신중하게
대처하는 자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필연의 숙적-나폴레옹과 웰링턴
  "와아아아! 프랑스군을 격퇴하라!"
  "전진! 전진!"
  "탕탕탕! 펑펑"
  1815년 6월 16일 벨기에의 남동쪽 워털루 남쪽 평원은 비오듯이 쏟아지는 포탄과 총탄으
로 요란하였으며 대지는 연기로 가득했다.
  "폐하, 프로이센군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숫자는 대략 12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부관의 보고에 나폴레옹은 두 눈을 부릅뜨고 정열에 가득찬 목소리로 외쳤다.
  "나를 엘바 섬에 가두었던 그 모든 놈들을 기어이 죽이고야 말겠다. 전군을 전투대형으로
집결시키고 포대는 계속해서 프로이센군을 공격하도록 지시하라!"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12만 5천  명 정도였다. 숫적으로는 백중지세였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갇히기 전의  기백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자신에 차  있었
다.
  "프로이센 놈들보다도 웰링턴이 문제다. 그는 뛰어나고 교활한 놈이야. 그 놈을 이기지 않
고서는 잠이 오질 않는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패한 웰링턴과의 싸움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연합군에 패하여 파리
를 점령당했으며 자신은 엘바 섬에 갇히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815년 3월,  섬
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와 다시 황제에 등극하여 자신에게 수모를 주었던 나라에 대한 공
격을 시작한 것이다. 그의 결심은 비장했다.
  "폐하, 영국군은 아직 워털루에서 거리가 먼 곳에 진을 치고 있으니 안심하시고 프로이센
과의 싸움에 집중하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알았다. 어서 나가 보자."
  나폴레옹을 앞세운 작전 참모진들은 전쟁터의 모습이  보이는 상황실로 가 전황을  살펴
보았다. 프로이센군도 사기가 충천한 상태였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감행할 
 
때 영국, 러 아, 오스트리아 연합군과 함께 나폴레옹의 대군을 무찌르고 파리를 점령한 경
험이 있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제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걱정하지 말고 진격하라!"
  프로이센군은 평원을 짙은 감색으로 물들이며 프랑스군과의  결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프
랑스군은 강했다. 그들은 프로이센군보다 조직적이었고 싸움에 능수능란한 솜씨를 보여주었
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프로이센군의 수는 줄어들었고 그만큼 사기도 떨어지기 시작했
다. 병사들은 프랑스군이 쏘아대는 포탄소리가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만 같아 두려움에
떨었다.
  "이제 싸움을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다. 기병을  선두에 내세워 프로이센군의 중앙을 허물
어 버리고 포대는 적의 좌우를 집중 공격하여 보병이 쉽게 진격할 수 있도록 도와줘라!"
  나폴레옹은 간단하고도 명료한 지시를 부관에게 내렸고 프랑스군은 신속하게 그의 명령대
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에 탄 기병들은 쏜살같이 겁에  질린 프로이센군을 뒤로 물러서게
하였다. 치열한 전투는 얼마 가지 않아 프랑스군의 승리로 거의 기울어졌다.
  "장군. 프랑스군의 공격이 워낙 거세 막기가 힘에 벅찹니다. 서둘러 퇴각 명령을  내려 주
십시오."
  "뭐라고? 우리 12만 군대가 이빨 빠진 나폴레옹 하나 이겨내지 못한단 말이냐!"
  장군은 패배의 수모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는 회복하기 힘든 것
이었다. 얼마 뒤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와아아, 승리다! 승리는 프랑스의 것이다!"
  "와아아아!"
  거대한 함성소리가 프랑스군에서 울려나왔으며, 나폴레옹에게는 재기의 확신을 주는 대승
이었다. 그의 눈은 밝게 반짝였다.
  "사령관님, 워털루로 진격해던 프로이센군이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뭣이라고, 프로이센 군대가?"
  연합군의 사령관 웰링턴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한
후 몇 달만에 대군을 일으켜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의  군대가 나약할 것으로 예상
했던 웰링턴의 생각이 보기좋게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사령관님, 나폴레옹은 이 기세를 몰아 윌  영국군에게 총공격을 시도할 것이 틀림없습니
다. 신속히 대비하는 것이...."
  "알고 있다. 그는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 영국군은  이곳의 지
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적을 괴멸시켜야 한다."
  웰링턴은 나폴레옹을 잡는 명수로 유럽에  명성이 파다한 장군으로 1809년부터  포르투갈
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대항하였다.  도한 1812년에는 나폴레옹의 러
시아 원정을 계기로 프랑스군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물리쳤으며 1814년에는 파리를 점령하여
나폴레옹을 엘바 섬에 가둔 영웅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탈출하자 다시 연합군
의 사령관으로 발탁되어 나폴레옹과의 대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와아아아!"
  18일 프랑스군은 영국군에 총 공격을 개시했다.
  "사령관님, 드디어 프랑스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과연 나폴레옹이군.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다니. 그렇다면 우리도 싸움에 최선을 다해야
겠지."
  그는 약간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전투복을 입었다.
  "영국군을 죄우에서 고립시켜라! 그런 다음에 포격을 통해서  피바다를 만들어 주고 말겠
다. 각오해라 웰링턴!"
  나폴레옹은 영국군이 시야에 들어오자 즉각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프랑스군은 거세게 영국군을 공격했다.
  "탕탕탕탕! 펑펑펑!"
  총소리와 포격소리가 다시 워털루를 요란하게 흔들어댔고 쓰러지는 병사들이  늘어갈수록
평원은 붉게 물들어 갔다.
  "사령관님, 백중지세입니다. 과연 프랑스군의 용기는 대단합니다."
  "그렇군. 다 쓰러져가는 나폴레옹을 위해서 저렇게 처절하게 전투를 전개하다니.  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전쟁이 되겠는걸."
  물자의 보급이나 병력을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연합군인지라 웰링턴은 다른 전투  때와는
달리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탕탕탕탕!"
  그때 갑자기 프랑스군을 포위한 수많은 프로이센 병사들이 총을 쏘아대며 공격하기  시작
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폐하, 프로이센의 기습입니다."
  "뭣이라고, 막아라! 말아야 한다!"
  다급해진 나폴레옹은 참모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미처 기습에 대비하지 못한 프
랑스 병사들은 허무하게 쓰러져 갔다. 전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됐다. 이제 우리가 전면적인 총 공세를  할 때다. 전군은 프랑스군의 중앙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라!"
  웰링턴은 프로이센의 원군을 얻자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승리는 자신에
게 있음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프로이센과 영국군의 합동 공격을 받은 나폴
레옹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4만의  군사를 잃은 그는 결국 퇴각하였고
웰링턴은 끝까지 그를 추격하였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은
다시 영군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웰링턴의 또 한번의 승리였다. 나폴레옹은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  그리
고 오랫동안 위를 앓던 그는 21년 5월 5일 섬 전체를 진동하는 폭풍우 속에서 숨을  거두었
다. 그는 날카로운 현실파악의 탁월한 지적능력, 감상성 없는 행동력으로 거의 마력적인  인
물이었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고도 냉정한 웰링턴과
의 승부에서는 번번이 패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대결은 전 유럽의 평화에 대한 문제였으며,
세계를 변화시킨 최대의 맞수였다.

   욕망과 명분과의 싸움-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BC 31년 그리스의 중서부 악티움. 양편으로 갈라선 옥타비아누스군과 안토니우스와 클레
오파트라군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집정관님, 잠시 후면 악티움 앞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알겠다. 모든 선단에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하라."
  이집트를 출발해 500여 척의 선단을 이끄는 안토니우스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자신이
로마를 비우는 사이 옥타비아누스와 원로원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도전해
왔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 우리 병사들은 육전에 강하니 지상에서 싸움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오."
  "아니에요. 로마군은 육지전에는 강하지만 해상전에서는 우리 이집트 병사들이 더욱 강하
게 훈련되어 있어요. 그러니 해전을 감행하는 것이 당신에게도 유리할 거예요."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주장에 수긍하지 않았다. 사실 로마군은 육지전에서는 지중
해 어느 나라도 이길 수 없는 강군이었으나, 배를 이용해서 지중해 경제를 주도하는 이집트
의 항해술은 로마를 앞서고 있었다.
  "알았소. 당신의 뜻을 따르도록 하겠소."
  "고마워요. 안토니우스. 당신은 꼭 승리할 거예요. 나는 이 곳에서 당신의 승전 소식을 기
다리겠어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패하여 죽음을 맞이한다면 저도 당신의 뒤를 따르겠어요."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비장한 결심을 안토니우스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를 보면서 안토니
우스는 기필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여 클레오파트라와  행복한 생활을 하리라고 다짐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군대와 이집트 병사가 얼마나 잘 융화될 것인지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
지만 자신의 숙적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전쟁이 끝난 후 로마
의 원로원을 혼내 주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두 눈에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당시 로마는 시저
가 브루투스에게 살해당한 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시저가 살해되자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
스는 브루투스와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전 로마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동방
을,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각각 장악하였다. 그러나 레피두
스가 제거된 후에는 두 사람이 서로 최고의 권좌에 오르기 위해 대립이 격화되어 기어이 전
쟁으로까지 치닫게 된 것이다.
  "집정관님, 안토니우스의 부대가 악티움 앞바다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 아그리파 부장. 우리가 어떤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느냐?"
  "네. 현재 바람은 악티움 앞바다를 가로질러 불고 있습니다. 저희가 바람을 등지고 싸운다
면 적이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불화살을 퍼부어 적의 기세를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아주 좋은 방법이구나."
  "그렇습니다. 집정관님, 서둘러 전 선달을 바람을 등지는 방향으로 옮기어  밀려드는 안토
니우스와 이집트 선단을 마주 보게 하십시오. 기필코 저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부장 아그리파의 작전에 옥타비아누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작전은 논리적이었
고, 아직 악티움 바다의 지형과 바람에 익숙하지 않은 이집트  선단을 선제 공격할 수 있는
좋은 제안이었다.
  "이제야 내 누이의 원한을 갚을 수 있게 되었구나.  안토니우스 이 바람둥이 녀석 각오해
라!"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사이가 나빠지자 화해의 뜻으로 자신의 누이를  안토니우스
의 아내로 맞이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서 자신의 누이
동생을 돌보기는커녕 이집트에서 로마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게다가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
트라를 아내로 삼아 그녀와 그의 아들에게 광대한 영토를 멋대로 나누어주는 등 방종을 일
삼고 있었기에 로마원로원과도 좋지 않은 관계였다.
  "전 선단은 안토니우스의 선단이 도착하기 전에 바람을 등지는 방향으로 이동하라!"
  "두둥둥둥, 삐이이이잉."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옥타비아누스의 500여 척의 전투선들은 바람을  등
지는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자리를 옮겨 그들이 악티움에 도착하면 선제 공격을 가할 만반
의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안토니우스는 알 까닭이 없었다.
  "아직 적은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악티움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공격을 시작할 것을 전 선단에 통보하고 불을 지펴 화살공격을 준비하라."
  "네 알겠습니다."
  안토니우스의 선단은 빠른 속도로 악티움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돛을 단 500여
척의 배가 몰려드는 것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최후가 될  줄은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으니...
  "안토니우스의 선단이 악티움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서둘러 제1선단은 공격을  시작하고 제2선단은 안토니우스의  우측을, 그리고 제3선단은
좌측을 공격하도록 하라! 공격개시!"
  옥타비아누스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로마의  배들은 빠른 속도로 안토니우스의  선단을
감싸안으면서 불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핑핑핑핑"
  "화르르르르르."
  "아악! 배에 불이 붙었다. 빨리 물을 가져와."
  하늘의 공기를 가르는 불화살들은 정확하게 이집트 군사들의 배에 꽂혀 이내 배를 불태우
기 시작하였다. 옥타비아누스의 공격은 대성공이었다.
  "집정관님, 옥타비아누스의 선제공격에 전면에 있던 선단이 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뭣이라구, 그럴 수가..."
  "서둘러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싸움의 승패가 빨리 결정나게 됩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선제 공격에서는 실패했지만 모든 선단을 집중시켜 옥타비아누스 선단의  가운데를 집중
적으로 공격하도록 지시하라."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지고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전투선들은 옥타비아누스의 공격에
물러섰고 이에 기세가 오른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들은 더욱 가열하게 화살을 퍼부어댔다.
  "무서움에 떠는 안토니우스에게 화살을 쏘아라. 이제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바다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고 검게 그을린 배들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으며 떠다니는
나무를 붙잡고서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병사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500여 척이 넘던 안토니
우스의 전투선은 몇십 척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완전히 작전 실패였다. 안토니우스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집정관님, 이러고 계시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다음을 기약하시고  이집트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대로 손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패한 안토니우스 선단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이집
트로 향하고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맹렬히 추격을 가하였다. 그  수로 육지와 바다에서 전
투가 벌어졌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안토니우스의 패배로 끝이 났다. 이제 더 이상 재기 불능
의 상태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그에게 전해져 왔다.
  "집정관님, 클레오파트라 여왕께서 자살하셨다고 합니다. 흐흐흐흑."
  "뭣이라구!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자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생사고락을 같이하자고 약속한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말에 안토니우스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안토니우스는 끝내 자살을  하고야 말았다. 싸움에서의 패배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클레오파
트라는 죽지 않았었다. 자신의 비밀 장소에서 안토니우스의 승전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자살하자 옥타비아누스 군대는 파죽지세로 이집트로 밀려들었으며, 옥
타비아누스의 포로가 도리 것을 안 클레오파트라도 독사에게 물려 자살하고 말았다.
  이 해전으로 로마를 두 세력으로 갈라놓았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대결은 종지부
를 짓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후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서민출신으
로 고대 로마의 초대 화제에 올라 로마를 평화롭게  지배하였다. 그리고 패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 이야기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신권이냐, 왕권이냐-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
  "신은 종교문제를 교황에게 맡겼고,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황제에게  맡기셨다. 성직
자(영주)를 임명하는 권리는 예전부터 황제에게 있었는데  그것을 금지하다니 그레고리우스
를 교황의 자리에서 추방해 버리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권위가 높아지자 불만을 토로하면서  교황에
게 도전했다. 자신이 가진 영주임명권을 교황이 간섭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  교황
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감히 신성한 로마 교황에게 도전하다니, 그 따위 황제는 교회에서 파면시키겠다."
  당시 교황의 권위는 하늘의 신과 비견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대노
하여 하인리히 4세를 교회에서 파면시켰다. 교회에서 파면  당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당시 사회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거 큰일났군. 교황과 황제가 맞붙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게 말야. 황제는 교황을 나가라고 하고 교황은 황제를 파면시켰으니..."
  지방을 지배하는 제후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1075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성직자를  임명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하지
만 성직자를 임명하는 권리는 프랑크왕국 시대부터 국왕에게 있다고 규정되어 왔기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도 그 권리를 주장하여 성직자 임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은 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성직자가 아내를 거느리는 것이나 성직을 매매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리고  사교, 수도원
장 등 상급 성직자의 임명권은 교황에게 있다. 앞으로 황제들은 이 사항들을 지켜야 한다."
  상급 성직자는 넓은 토지를 지배하는 종교 제후(영주)였기 때문에 이는 단순한 교회 내부
의 문제가 아니라 교황과 황제,  국왕 사이에 치열한 대립을 부르게  된 복잡하고도 미묘한
문제였다. 197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자신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
자 이에 강력히 반발했으며, 교황을 몰아내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교황을 폐위시켜야 한다. 그는 교황으로서의 임무보다 황제의 권리를 가지려고 한다!"
  "하인리히 4세의 의견에 동참하는 모든 황제와 국왕은 파문시키고 말겠다."
  교황과 황제가 대립하자 제후들은 모여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띤 토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파면당한 황제 따위는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
  "무슨 말인가? 황제의 권위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교황의 권위에 도전할 수는 없잖는가?"
  의견이 분분하여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간을 두고 이 일을 처리하도록 합시다."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1년 이내에 황제의 파면이 풀리지 않으면 황제로 인정하지 않기로 합시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모든 제후들은 이 의견을 제안한 제후에게 천성의 뜻을  전달하였다. 이제 남은 하인리히
4세가 교황으로부터 다시 황제로서 승인을 받는 일 뿐이었다.
  "폐하, 황제께서 1년 안에 교황으로부터 재임명을 받지 않는다면 제후들이 황제로서 인정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뭣이라고, 제후들이...!"
  보고를 받은 하인리히 4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교황의 권위에 도전할
줄 알았던 제후들이 자신을 배신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폐하, 아직은 교황의 권위에 눌려  어떤 국왕이나 제후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못 하다가는 폐하는 해하려는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곤란하게 되었군. 국내 제후들까지 나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사태를 극복하는 길은 폐하께서 교황에게 잘못을 빌고 용서를 받는  길뿐이라고 생각
됩니다."
  신하의 간곡한 진언에 하인리히 4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교황을 모
욕했는데 이제 와서 용서를 빈다는 것은 황제로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력을 사용하기에는 군사력을 제후들에게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별 수 없군. 창피하지만 교황에게 빌어서라도 파면을 풀어달라고 조르는 수밖에..."
  하인리히 4세는 창피를 무릅쓰고 이탈리아 북부의 카놋사로  교황을 찾아갔다. 하지만 교
황은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감히 교황에게 도전한 자를 만난다는 것은 나의 수치다. 그러니 돌아가라고 해라!"
  하인리히 4세는 난감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교황의 용서를 받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폐하, 이러시면 큰일납니다. 지금은 겨울입니다."
  하인리히 4세는 성문 앞에 무릎을 꿇고 교황이 용서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신하들의 가슴은 메어지는 것만 같았다.
  황제는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에 금방이라도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지만 황제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아무런 동요도 없이 용서를 빌었다.
  "교황님, 노여움을 푸시고 저를 용서해 주십시요. 잠시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의 노여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하인리히 4세가 저렇게 용서를 비니 이제 파문을 거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내가 그를 용서할 수 있는가. 신에게 도전한  황제는 어떤 꼴을 당하는지 천하게
보여주고 말겠다."
  교황은 두 번 다시 자신에게 도전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못을 박아두고 싶었다. 하인리히
4세는 눈이 내리는 성밖에서 눈을 맞으며 용서를 빌었다.
  "용서하실 때까지 이렇게 무릎을 꿇고..."
  식음을 전폐한 황제가 3일 동안이나 이렇게 용서를 빌자, 교황의 마음도 누그러들기 시작
했다.
  "눈 내리는 성 밖에서 3일동안이나 뉘우쳤으니 용서해 주겠다.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오
늘로서 거두어들인다."
  "고맙습니다. 교황님!"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파문을 취소하자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의 뜻을 표했다.
교황이 황제를 용서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각 제후들도 다시 황제를 인정했으며, 하인리히 4
세는 다시 자신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1077년에 발생한 '

놋사의 굴욕'이다. 교황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 위에  있다는 것을 세상에 과시한  사건이기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인리히 4세는 본국으로 돌아와  제
후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교황의 권위에 더 이상 굴복한다면 우리가 앞으로 어떤 불평등한 요구를 받게 될지 모르
오. 그리고 우리가 교황에게 도전하여 승리한다면 교황의 승인 없이도 자유롭게 성직자들을
임명할 수 있게 되오."
  상황은 다시 하인리히 4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황제는 1080년
국내의 제후들을 규합하여 이탈리아를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의 절대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 자 모든 병사들아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자!"
  "와아아아!"
  하인리히 4세가 이끄는 병사들은  파도처럼 이탈리아를 점령했다. 어디에도  이들을 막을
군대는 없었다.
  "교황님 어서 피하십시오. 하인리히 4세가 목숨을 노리고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괘씸한 놈. 그때 용서를 해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카놋사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교황의 일행은 하인리히 4
세가 도착하기 전에 살레르노로 도망쳤다.
  "그새 도망쳤군."
  카놋사에 도착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잡지 못해 안타까웠지만 다시 황제의 권위를 회
복하게 되자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이제 더 이상  황제에게 교황이 대항한다는 것은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살레르노로 도망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5년 그 곳에서 죽음을 맞
이함으로써 끊임없이 이어진 두 사람의  대결은 하인리히 4세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황제와 교황의 싸움은 이 후로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교황이  정치에 관여해야 하는지 아
니면 종교적 입장에 서야 하는지의 문제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대결은 마지막에  무력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다.
  그 후 십자군 원정으로 약해진 교황의 권위에 헨리 8세가 도전하여 심하게 의견대립을 보
이자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끊고 영국 국교회를 성립시킴으로써 교황권은 일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각국의 정치에 간섭하는 교황의 행동에 불만을 느낀 많은 제후들을 중심으로,  새로
운 종교형태를 주장하는 루터와 칼뱅의 의견을 받아들여 교황과의 단절을 시도하게 된 것이
다. 근대에 이르러 교황은 정치적 문제에서 벗어나 종교의  전파나 세계평화를 위해서 활동
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평화와 종교적 신앙심을 강조하는  교황을 존경하게
되기까지 교황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 반면에 황제는 이후  시민사회를 거쳐 민주주의가 확
립되면서 서서히 몰락해 갔으며, 그의 절대적 권리는 다수의 국민들이 가지게 되었다.  오늘
날 일부 국가에서 명목상의 국왕이라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역사의 갈림길-김구와 이승만
  "탕탕탕탕!"
  네 발의 총성이 평양을 향하는 기차에서 울려퍼졌다.
  "아, 아니 선생님께서..."
  민족의 이단자 안두희 소위에 의해서  민족의 지도자 김구가 숨지는  순간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경호원들은 안두희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그를 체포했다.  하지만 김구를 살릴 수는
없었다. 김구 선생은 한 나라에 두 개의 정부가 설 수 없다며 대한민국의 통일을 위해 김일
성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해주에서 동학운동을 지휘하였고 1896년에는 일본 육군 중위를 죽이고 체포되어  감
옥에 갇히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1919년 4얼 상하이에서 이승만, 이동녕, 이시영, 김규식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한 김구는 1945년 해방이 되기 전까지 일본과의 싸움을 전개했다. 그 중 윤봉길 의사와
의 일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윤 의사, 자네게 홍코우 공언에서 일을 성사시켜 주기 바라네."
  "염려 마십시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  참석한 침략자들을 섬멸하고야 말겠습니
다."
  윤봉길을 보내는 김구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이것이 그와 만나는 마지막이 될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시계가 낡았군요. 저의 세 시계와 바꾸시지요.  임시정부의 일을 하시다 보면 시
간을 정확히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시간을 알아야 한다는 그의 말에 김구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시계를 풀어 주었다. 죽음의 길을 떠나면서도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는 그의 모습에
독립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자성하면서 윤봉길과 시계를 바꾸어 차고 마지막 이별을 하
였다. 1932년 4월 윤봉길은 홍코우 공원에서 있었던 행사장에 일본군의 치밀한 경계를 뚫고
들어가 도시락 폭탄을 단상으로 던져 일본군 사령관 사라카와를 비롯하여 많은 일본 정치인
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구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여의도 공항에  70세의
나이에 27년의 독립운동을 정리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해방이  된 이후 조선은 혼란
이 거듭되고 있었다. 공산계열과 민족계열로 편을 가른 싸움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조선인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김구는 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우리가 서로를 헐뜯는다고 대한민국의 힘이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라도 대
화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서로 조금씩만 양보한다면 이렇게  다툴 이유는 없을 것입
니다."
  이때 미국대표부 책임자였던 이승만은 미군정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한민당을 조직하여
왕성한 정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평소 형님, 아우 관계로 지내오던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끝의 해후를 즐겼다.
  "형님,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 뜻을 같이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동상, 나는 아직 모자라는 것이 많으니 많이 도와주기 바라네."
  두 사람은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해방된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 뜻을 함께 할 것을 약속했
다. 1945년 12월 15일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외상들은  소련의 모스크바에 모여 조선을 앞
으로 5년간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 신탁통치 한다고 결의했다. 하지만 신탁통치란  조선
이 힘을 기를 때까지 자신들이 지배하겠다는 또 하나의 침략을 의미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여지껏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일본과
싸워 왔건만 이제 와서 또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김구와 이승만은 몹시 분노하여 신탁통치를 반대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하였으며, 이에
거리거리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깃발의 물결로 가득했다.
  "신탁통치를 반대한다! 기필코 이 나라를 지키겠다.!"
  "미국과 소련은 이 나라에서 떠나가!"
  각 단체 회원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위를 계속했다. 한국 국민들의
반대가 극에 달하자 이에 놀란 서방국가들은 1947년 10월 유엔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오랫동안 일본의 식민지 생활을 해왓습니다. 그러기에 신탁퉁치를 한
다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독립정부수립을 도와주는  유엔 임지
한국 위원단을 설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의견은 유엔에서 대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되었으며, 대한민국에  독립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유엔 감시단이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1948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유엔 감시
단은 북측을 지배하고 있던 김일성의 거부로 38선을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혔다. 당시 한
반도는 미국을 지지하는 세력이 남쪽에 소련은 지지하는 세력이 북쪽에 각각 나뉘어져 있었
다. 김일성은 유엔 감시단이 계획하는  독립정부 수립을 반대했으며, 유엔이 관여하지  않는
순수한 한민족간의 통일을 논의하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이승만은 북
쪽이 반대한다면 남쪽만이라도 총선을 실시하여 독립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독립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면 윌 남
쪽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해야 합니다."
  "형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남쪽, 북쪽이  아니라 한민족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
로 38선으로 갈라 두 개의 정부를 세울 수 있단 말입니까? 통일된 정부만이 우리 민족이 나
아갈 길입니다. 분단이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김구는 이승만의 의견에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나섰다. 해방된 기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남과 북을 갈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김일성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평양에 이미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김구도 선
거에 참여할 것을 부탁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절대로 분단된 선거에는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형님이나 국회
의원이 되든 대통령이 되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아니 통일에 대한  그의 열망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
리 많지가 않았다.
  "한핏줄을 이어받은 우리 겨레가 이번 기회에  뭉치지 못하면 영원히 두 동강 나고  맙니
다."
  김구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김규식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이승만과 남
북협상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대한민국의 통일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입장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김일성이란 자도 이승만씨와 독같군. 모두들 미쳤어. 엊그제만 해도 형제고  동지로서 조
국의 독립을 외치던 자들이 이제는  서로 새 정부의 수반이  되겠다고 저렇게 날뛰고 있으
니.."
  김구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자 마침내 이승만은 단독 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김구가 끝내 선거에 참석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미군정과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겠네."
  평생 동지였던 두 사람은 이때부터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미워하거나 반대하지는 않았다. 단지 서로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승만의 한민당을 밀어줍시다."
  "나는 국민 여러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이 집권하고 있는 북쪽의 공
산세력을 몰아내고 평화를 사랑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서하겠습니다."
  이승만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선거 유세를 했지만 김구는 서울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된 나
라를 건설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1948년 마침내 남쪽만의 선거가 실
시되었고 이승만이 이끄는 한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그 해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많은 시민과 외국  인사들이 중앙청에
모여 정부수립의 기쁨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면서  김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
다. 남쪽에 정부가 수립되면 북쪽의 김일성도 정부를 수립할 것은 뻔한 일이며, 그렇게 된다
면 통일의 길은 더욱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만나야
겠다고 결심했다. 이러한 김구의 결심을 파악한 이승만은 김구를 설득시키러 애를 썼다.
  "동생, 이미 북쪽은 김일성의 세상이야. 자네가 간다 해도 별다른 수확이 없을 것이네."
  "형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통일을 위해서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도 독립운동
을 했었던 사람이라니 저의 뜻을 이해한다면 협상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입니다."
  김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공산주의와 민주계열로 나뉘어진 현실이 너무도 암담
하여 자신이 죽음을 당하더라도 기어이 평양을 방문하겠다고 결론을 지었다.
  "동생이 정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말릴 생각은 없네. 나도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고 싶네.
그러나 그 날을 기다리다가는 미군정을 끝낼 수 없지 않나.  천천히 일을 진행하는 것이 순
리인 것이야. 정 동생이 평양을 가겠다면 나도 더 이상 말리지 않겠네. 하지만 몸 조심하게.
평양은 우리가 사는 서울과는 다르네."
  이승만은 걱정되는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자신과 뜻이 다른 김구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체념했다. 하지만 이것이 두 사람이 만나는 마지막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 평양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김일성과 ㅁ나나
우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설득하겠습니다. 그리고..."
  "와아아아!"
  "김구 선생 만세!"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통일을 염원하는 수많은 지지자들의 환송을 받으며 열차에 올랐
다. 이번에는 기필코 통일을 위한 약속을 받아내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가 그의
얼굴에 잔뜩 서려 있었다. 기자들은  김구 주위에 몰려 김일성과 무슨  말을 나눌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하지만 속이 깊은 김구는 아무말 없이 무덤덤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
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때 한 육군소위가 김구를 찾아왔다.
  "선생님과 긴히 논의하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알았네. 모두들 자리를 비켜 주겠는가?"
  경호원들은 육군소위를 의심하였지만 김구와 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리를  비켜주었
다. 하지만 그것이 크나큰 실수였다. 12시 50분경에 울린 총소리는 김구를 향해서  날아갔고
그의 죽음과 함께 한반도의 통일도 끝이 난 것이었다.
  '하느님이 나의 소원을 묻는다면 첫째도 조선의 독립이요,  둘째도 조선의 독립이요, 셋째
는 더욱 목소리 높여 조선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희망했던 민족
의 지도자 김구는 이렇게 허망하게 최후를 마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행렬을 뒤
따랐으며, 서울은 그야말로 눈물 바다였다.
  "그가 죽다니 나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비록 듯을 달랐어도 이승만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가슴 아파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
해서 자신의 몸을 바쳤던 두 사람. 분단은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으며 한 사람은 대통
령으로서 남고 한 사람은 가슴속에 깊이 기억되는 민족의 지도자로서 우리의 기억 속에 남
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는 38선의 철책을 없애지 못하고 있다. 언제쯤이면 그의 소원이던 조
국의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질지...

    대의냐 소의냐-모택동과 장개석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장개석과 혁명을 완수하려는  공산주의계열로
갈려 혼돈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황제가 사라진 중국은 미국과  영국 등 외국 세력들이 정
치에 간섭했으며,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중국은  대
륙을 지배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을 전개해야만 했다. 중국의  전체 실권을 장악한 장개석이
중심이 된 국민당군과 그의 독재에 반대하는 모택동이 구성한 홍군으로 나뉘어진 중국은 심
각한 내전에 빠져들었다. 1931년 11월 중국의 동북부 지역에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
영은 임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며 세력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모
택동의 움직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대규모 토벌대를 조직하여 홍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택동만 제거한다면 전 중국은 그의 손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였다. 그의 공격은  얼마 지
나지 않아 호북, 호남, 하남을 평정하고 모택동의 근거지로 즉각 10만의 군대를 파견했다.
  모택동의 공산군과 홍군은 장개석의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서 3년 뒤 그 유명한 1만 2천
킬로미터의 기나긴 대장정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장정에 많은 민병, 농민들이 국민당의  보
복을 두려워하며 행렬의 뒤를 다르기 시작했다. 약 1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원이 기나
긴 행렬을 유지하며 도망친 것이었다.  행렬의 처음과 끝의 거리는 약  일주일을 걸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장개석은 이 행렬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한  달 동안 모택동은 오만 오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잃어야 했다.  무사히 포위망을 탈출한 홍군은  서쪽으로 움직이며
귀주와 준의에서 지방토벌을 제압하고 오랜만의 휴식을 취하였다. 이곳에서 홍군은 더 이상
국민당군과의 내전보다는 중국대륙을 노리고 군대를  파견한 일본에 대한 저항을  전개해야
한다는 생각에 북쪽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이때 장개석은 모택동 일행이 사천으로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미 힘을 잃은 모택동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장개석의 의중
을 알아채고 다시 준의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장개석이 다시  좇아오자 이번에는 북상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장개석은 모택동 일행을 토벌하기 위해서 끝없이 추격
하였고 모택동은 홍군의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사천의 서쪽 무공에 도착하기 위해서 끊
임없이 분투했다. 마침내 모택동은 강과 산을 건너 티베트를 지나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대
설산을 넘어 기어이 장국도가 이끄는 제4방면군과 합류하게 된다.  강서 이후 7천 킬로미터
를 8개월 동안 걸어온 모택동의 북상항일을 반대하여 기어이 모택동과 헤어져 남하해 버렸
다. 모택동은 8천명이라는 인원을 거느리고 다시 북진을 개시했다. 거대한 늪지대를 건너 납
자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국민당군을 무찌르고 10월에는 육백산을 넘어 마침내 섬서성의  오
기진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는 제15단군 사령 서동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제 모택동의 기
나긴 고난의 시간이 끝났음을 예고한 것이었다. 모택동은 산맥  열여덟을 넘고 강 열일곱을
건너, 성  열둘을 가로지르고 소수민족지구 여섯 곳을 통과하였으며, 62개의 시와 마음을 공
략 점거했다. 총 거리는 1만 2천 킬로미터라는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그리고 얼마 후 모택동
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던 제4방면군과 하룡의 제2방면군이 섬북으로 도착하여 장개석에 대
한 역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의 홍군을 섬북이라는 외진 곳으로 몰아낸 장개석은
강한 군사력을 중심으로 중국 최고의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구미 열강으로부터
신식무기를 구입하여 각 지방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936년 당시  그의 군대는 약 2백만 명
에 이르렀으며 그 중에서도 장개석 직계 군대는 약  1백만 명에 이르렀다. 장개석은 중국을
지배하며  교통망의 정비를 서둘러 진행하기 시작하여 철도와 자동차 도로의  건설에 주력
했다.  그리고 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파기하고 대학, 학술기관의 설립을 추진하여 내
란에 지쳐  있던 중국을 근대와의 과정에 접어들게 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민을 위한 정
치보다는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그는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모
든 산업을  국유화하면서 국민에게서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였으며, 지방에는 공산당을 탄
압하기  위한 치안조직을 구성했다. 이 치안 조직의 유지비는 농민이 감당하게 하여 국민들
의 살림살이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갔다. 뿐만 아니라 장개석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
서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신해혁명 이후 독
재의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장개석은 중국을 지배하였지만 보호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과
의 전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과 전쟁을 벌일 경우 지방군벌과 홍군이 자신을 공
격할 것이라 생각하고 일본과 지속적으로 타협하며 영토를 내주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항
일의식을 금지시킬 정도였다. 이에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여 국민 스스로 의용대를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의 우유부단한  모습과는 달리 모택동은 대장정의
목표인 일본의 격퇴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있는 섬북의  주변은  어이없게도
장개석의 군대가 포위하고  있었다. 총구가 일본이 아니라 동포에게 겨누어 있다는 것은 가
슴  아픈 현실이었다. 이에 모택동은 일본과의 전쟁에 다함께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8.1'선
언을 발표했다.
  [형제는 서로 다투어도 밖의 모욕은 함께 저지한다는 진지한 각오로 모두 일어서라. 일본
침략자와 그들과 타협한 장개석을 쳐부숴라. 용감히  소비에트정부와 동북 각지의 항일정부
와 하나가 되어 전 중국의 통일국방정부를 조직하라. 홍군과  동북인민혁명군 및 각종 항일
의용군이 하나가 되어 전 중국통일 항일연합군을 조직하라.]
  모택동의 항일 투쟁선언에 많은 중국인들은  공감을 표명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내전의 종식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라는 문제였다. 하지만 장개석
은 포위망을 풀지 않았다. 이에 심균유, 장내기, 동행지  등이 중심이 되어 전국 구국연합회
를 결성하여 모택동과 장개석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과 전쟁을 수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모택동은 받아들였지만, 장개석은 오히려 군대를 동원하여 모택동을 공경하려고 했다.  국민
보다는 일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한 장개석의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장
개석이라 해도 국민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많은  장군들이 일본과 타협하는 그에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으며, 여론도 그를 매국노라 칭했다. 이에 장개석은 모택동과의 내전
을 중시하고 힘을 합하여 일본과 싸울 것을 승인하게 되었다.
  중국대륙은 이제 힘을 합쳐 일본과 싸울  것을 다짐하며 사로 적대 관계였던  국민당군과 
홍군이 함께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의 제안이 성공했던 것이다. 그는 권력보다도
일본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사명에 더 큰 비중을 두었기에 많은 중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일본군은  중국에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
여 마침내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대화된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  앞에 중국군은
번번이 패했으며, 전쟁 시작 반년  만에 수도 남경을 일본에 내주어야  하는 불운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남경에 들어온 일본군은 짐승처럼 중국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살육은 밤낮
없이 진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남경 대학살'이다. 이때 죽은 사람의  수만도 무려 30만  명
에 이르며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들까지 닥치는 대로 목숨을 빼앗긴 지옥과도 같은  사건이
다. 연일 일본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중국군은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
이 벌어지고 있는 순간에도 장개석은  어떻게 하면  공산당의 군사권을  장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골몰했다. 뿐만 아니라  3개월만 싸우면 소련군이  출동하여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 생각하며 일본군과의 전투를 회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택동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장개석과 군대를 합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패하는 이유를 알아내고자 고민을  계속했
다. 그는 오랜 생각 끝에  현대화된 장비를 갖춘 일본군과 정면으로  대결을 펼친다는 것은
무리였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중국의 지리를 이용하여  국민과 군대가 협조하는 게릴라전을
전개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실제로 북쪽에서  전투를 전개하고 있는 부대들은  게릴라
전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일본군의 진출을 막아내고 있었다.
  중국연합군은 일본의 공격에 다시 저항을 시작하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장개석은 연합
군의 대표하는 이유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본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모택
동도 그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활발히  전개되던 전쟁이 1939년경부터 대치상태
에 들어가 더 이상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북과 화중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택동의
팔로군과 신사군은 계속해서 일본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승전보를 들으며 장개석은
두려움을 느꼈다. 전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걱정한 그는 오히
려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는 팔로군을 공격함으로써 다시 한번 권력에 대한 그의 끝없는 욕
심을 드러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모택동과의 협력도 끝나고 말았다. 장개석은  자신의 욕
심을 채우려 했지  항일이라는 절대절명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사태가 장개석
과 모택동으로 가라지자 많은 사람들은 전투를 중지한 장개석보다는 끊임없이 일본과  전투
를 벌이는 모택동의 진영으로 몰려들었다. 과거 화려하게 정권을 유지했던 장개석보다는 중
국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 싸움을  전개하는 모택동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
다.
  모택동은 전면적인 군사활동뿐 아니라 지역 농민들에게도 항일 게릴라전을 펼칠 것을  독
려하여 전국은 일본에 대한 복수심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에 힘입어 1940년에는 팔로군이
40만 명으로, 신사군은 10만 명으로 급증하였으며, 그와 함께 행동하는 민병만도 1백만을 넘
어섰다. 모택동의 군대는 일본군에 대한 공격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에도
장개석은 전투에서 승전보를 울리는 모택동군을 시기하여 전투중인 신사군에게 다시 공격을
감행하여 9천명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택동은 힘이 들었
다. 일본군과 싸우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장개석은 계속해서  자신의 군대를 공격해오니 답
답할 뿐이었다. 그는 중국의 평화를 위해서  두 개의 적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전세는 미국이 일본과 태평양전쟁을 개시하면서 중국에  유리한 입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했다는 소식에 중경에서 움직이지 않던 장개석은 다시 정권에  복귀해야
겠다는 생각만 하였으나 모택동은 자신의 지역에 있는 국민들과 함께 항일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45년 장개석은 중경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자신의 일당독재를 확립하기 위해서 공산당에
대한 규제조치를 발표하여 모택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등극을 위해서 모택동과
의 내전을 다시 시작할 뜻을 내비친 것이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전쟁의 상황은 급변하여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이 전쟁에 항복하게 되었다. 이 소식은 전 중국을 기쁨에 들끓
게 했지만 다시 장개석의 욕심에 의해 내전에 빠지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장
개석은 국민당군을 이동시켜 잔인하게 홍군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일본군에게는 보이지 않
았던 용맹성을 나타냈다. 하지만 중국 국민들은 누가 자신들이 택할 지도자임을 잘 알고 있
었다. 과거 일본가의 전쟁에서 꽁무니 빼며 오히려 일본군을  무찌르고 있는 군대를 습격한
장본인이 누구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택동의 군대는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
았지만 장개석의 군대는 무력으로 마을을 지배하려 했다.
  장개석의 패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국민이  등을 돌린 이상 그는  모택동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우유부단하며, 개인의 안일만을 위해서 살인도 서슴지 않는 그에게  아무
도 도움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후 그의 부대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여 기어이는
중국대륙에서 탈출해야 하는 운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1949년 12월, 200만 명에 달하는 사람
들과 함께 장개석은 미해군 함정의 보호를 받으며 쓸쓸히  대만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그는
대만에 정부를 수립하여 지배권을 확대시켜 갔다. 한편, 대륙에서는 같은 해 10월 1일, 모택
동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이제 중국대륙은 모택동이 지배하게  되었으며, 항일전쟁을 자신의  권력수단으로 사용한
장개석은 대만이라는 작은 섬에 살게  된 것이다. 권력에 눈멀지 않고  오직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사람에게 빛이 내리는 법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이라 해
도 주변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모택동과 장개석의
대결은 이러한 사람됨의 문제에서 결말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구려 기상과 당의 전략-양만춘과 당 태종
  "와아아! 안시성을 함락하라!"
  안시성을 둘러싼 수십 만의 당 군사들은 벌떼처럼 안시성으로 몰려들었다. 화산이 하늘을
가렸으며 성에서는 부로가 뜨거운 물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당 군사들을 공격하였다.
  "모두 힘을 내라. 길은 어디에도 없다. 이 싸움에서 지는 날엔 우리 모두가 저들에게 죽음
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구려의 운명도 다하는 것이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은 벼락같은 목소리로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안시성의 인구는 모두
합하여 10만 정도이며 그 중에서 전투를 할 수 있는 성인 남자는 몇 만에 불과했다.
  "장군, 서쪽 성벽이 당군의 신무기인 충차(큰 나무로 성에 충격을 주는 무기)와 포차(돌을
날리는 무기)에 의해서 일부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뭣이라구! 어서 병사들을 보내어 목책을 쌓아 적들의 침입을 막아라! 어서."
  양만춘은 가슴이 철렁했다. 만약 성벽이 무너져 내려 수십만의  당 군사가 몰려든다면 아
무리 훈련을 잘 받은 군사라 해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와아아아아아."
  "거대한 돌들이 날아온다 모두 피해라."
  당군은 포차를 이용하여 계속해서 성벽에  거대한 돌을 쏘아대고 있었다.  하지만 조국을
지키겠다는 고구려군의 사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폐하. 고구려 군사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합니다."
  "무슨 일을 이렇게 하는가! 우리는 적보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군사와 물자가 있는데도 성
하나 점령하지 못한단 말인가?"
  안시성 공격이 몇 달째 계속되고 있는데도 점령하지 못하자 당 태종은 부아가 치밀어 부
관과 모사에게 화를 내었다.
  "폐하, 날마다 예닐곱 번씩 들이쳐도  끄떡도 하지 않고 오히려  고구려 군사들의 사기는
높아만 가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당 태종은 작전참모의 말을 듣고는 몹시 불쾌했다. 중국 천하를 통일한 자신이 성 하나를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내 일찍 고구려 병사들의 기상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강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습니다, 폐하. 안시성을 점령한 이후에는 성안의 남자들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야겠
습니다. 만약 살려두었다가는 나중에 큰 화가 될 줄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포위된 안시성 주민들과 양만춘은 혼연일체가 되어 당군을 막아내었고, 그 기상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만 갔다. 성벽을 부수면 어느 틈에  목책을 세워 대비하고 공격을 시
작하면 일제히 화살과 불이 날아들어 아무리  수적으로 많다 해도 병사들의 사기면  에서도
당나라 군사들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장군, 언제가지 저들과 전투를  계속해야 합니까? 평양에서 지원군은  오지 않는 것입니
까?"
  부관은 이러한 상태로 당군을 막아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되었다. 평양에서 물자를 보급
받지 못하고 있기에 장기전으로 진행된다면 언젠가는 패할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15만 군사가 이미 저들에게 패한
상태라 더 이상의 군사적 지원이나 물자보급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가 무너진다
면 고구려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저들이 약점을 보일 때  전면전으로 들어가 이 땅에서 몰
아내야 한다. 우리에겐 선택할 권리도 없는 상태다. 알겠는가?"
  "네, 장군."
  양만춘은 안시성을 포위한 당군의 막사를 쳐다보았다. 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막대한 수
의 군사들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당군, 하지만 자신이 무릎 꿇는다면  조
국 고구려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싸움에 대한 결의를 다져  칼
을 힘껏 쥐었다. 싸움은 당나라와  신라가 합작하여 고구려를 뜻대로  움직이려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자신들보다 힘이 강한 고구려에 대비하기 위해 신라는 김춘추를 내세워 당나라
와 외교를 맺고 당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실력 행사를 해줄 것을 제의함으로써 당 태종은 한
반도를 자신의 지휘 아래 두고자 하는 야심에 신라의 제의를 승낙했다.
  "신라는 우리와 동맹을 맺은 나라이니, 너희는 백제와 더불어 군사를 거두라! 만약 도 다
시 신라를 치면 군사를 보내 저희를 다스릴 것이다."
  당의 사신은 연개소문에게 당 태종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이  친서를 받은 연개소문은 고
구려를 깔보는 태도에 분노를 느껴  군사들에게 싸움에 대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수백만 군사도 무찌르고 요동의 주인으로서 중국대륙의 세력과 겨룰 수 있을 정도
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연개소문은 당 태종의 태도가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당 태종은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연개소문은 친서를 보지도 않음
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신을 동굴에 가두어 버렸다. 이에  당 태종은 신라처럼 자신을 섬기지
않는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요동은 본래 중국 땅인데 수나라가 네 차례나 군사를 출동시켰어도 되찾지 못하였다. 지
금 내가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중국으로서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와 그 가족들의  원수를
갚고 죽음을 당한 임금의 수치를 씻는 데 의의가 있다. 내 기필코  그 원한을 풀어 주기 위
해 고구려를 정벌하리라."
  이렇듯 출사표를 내건 당 태종은 수십만의 군사들을 이끌고 요동으로 밀려들어 왔다.
  "요동이 어찌 중국의 땅이란 말인가? 천하가 알다시피 요동은 본시 수천 년을 누려 온 우
리 선조 고조선의 안마당이 아닌가! 사방을 삼켜 천하를 지배하려는 저들에게 우리 땅을 내
주고 비굴하게 살수는 없다."
  당 태종에 맞선 고구려는 강직한 주체성으로 맞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645년 고
구려와 당나라는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천혜의 요새라
불리는 요동성, 개모성 등의 성들을 손쉽게 빼앗았지만 안시성에  와서는 전혀 진전이 보이
지 않자 당 태종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성을 치는 소모전으로는  도저히 안시성을 점령할 수  없을 것 같다. 여봐라,  도
종."
  "예, 폐하."
  "그대에게 60만의 군사를 줄 테니  안시성의 성벽보다 높은 흙산을  쌓도록 해라! 그리고
이세적은 도종이 흙산을 쌓는 동안 안시성을 공격하라. 알겠느냐."
  "네, 폐하."
  당 태종의 새로운 작전에 다라 두 장수들은 자신이 맡은  일들을 진행시켰다. 한 달이 지
나도록 변화가 없자 당 태종은 지금의 공격으로는 도저히 성벽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
하고는 성벽보다 높은 흙산을 쌓아 성안으로 쳐들어갈 생각을 한 것이었다.
  "장군, 놈들이 성 남쪽에 흙산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흙산을 높이 쌓아  성 안으로
쳐들어오겠다는 속셈인 것 같습니다."
  "뭐라고, 흙산을?"
  "그렇습니다."
  부관의 다급한 보고를 받은 양만춘은  난감했다. 당 태종은 끈질기게  안시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탁자에 높여 있는 지도를 묵묵히 보고 있던  양만춘은 빛나는 눈빛을 하며 부
관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들이 쌓는다면 우리도 쌓으면 될 것이 아닌가. 서둘러 성벽을 올리도록 하라."
  "아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밤낮으로 60만 명의 당 군사들이 쌓는 흙산은 60일이 지나자 마침내 성벽과 나란
한 위용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전세는 양만춘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성루 위로 당나라  군
사들의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폐하, 드디어 흙산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안시성은 우리 당나라의 것
입니다."
  "오,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렇다면 흙산은 부복애 부대가 수비하도록  하
라."
  지시를 받은 부복애 부대는 흙산의 정상으로 올라 안시성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흙산과
성벽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하늘을 메웠다. 안시성은 이제 흙산으로  인해 커다란 위험에 처
하게 되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양만춘을 그대로 저버리지 않았다.
  "우르르르르! 와르르르."
  "아아아악! 흐, 흙산이 무너져 내린다."
  "아이고,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으아아악."
  갑자기 흙산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공격을 하던 당나라  군사들은 흙에 파묻혀 밀려
내려가거나, 돌에 깔려 죽은 이들 등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장군, 당의 흙산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당군들이 놀라 산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습
니다."
  "그래,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뛰어난 병사들로 결사대를 구성하여  흙산을 점령하
도록! 이제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양만춘은 기쁨에 넘쳐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제 승리는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했다.
  "와아아아! 공격하라."
  용맹스러운 고구려 결사대는 흙산 위에 남아 있던 병사들은 물론이기 도망치는  군사들을
전멸시키며 당군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태종은 허무했다. 두 달  동
안 밤낮 가리지 않고 흙산을 쌓았는데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병사들 또한 그
러했다. 하지만 흙산을 빼앗은 고구려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지를 듯했으며, 어떠한  군대
가 와도 도저히 꺾을 수 없는 병사들처럼 보였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흙산을 다시 찾아야 한다."
  당 태종의 명령에 수많은 군사들이 흙산을 찾기 위해 공격하였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죽음뿐이었다. 3일 동안 계속된 전세는 점점  기울어졌고 군량마저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에 신하들은 당 태종에게 퇴각할 것을 간하였고  당태종 또한 고구려의 사기
에 기가 죽어 더 이상 싸움을 진행시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별 수 없구나. 아아, 이런 치욕을... 내가 너무 고구려를 가볍게 본 것 같다. 듣던 대로 고
구려에는 훌륭한 장수들이 많이 있구나!"
  그제서야 당 태종은 자신의 고구려 침략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나라 군사들
은 거친 바람이 부는 요동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양만춘은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성문을 열어 적을 공격하라! 한 놈이라도 살려 보내서는 안된다!"
  성문이 열리자 용맹한 고구려 기병들이 퇴각하는 당나라 진영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갔다.
고구려군의 갑작스런 추격에 혼비백산한 당군은  태종을 에워싸고 도망치기에 정신이  없었
다. 하지만 그대로 도망치게 놔둘 고구려 군사가 아니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격했다.
  "아악! 고구려 군사들이다. 서둘러 피하라."
  경비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구려 병사들이 당 진영으로 쏟아져들자 이에 놀란 당
군은 당 태종을 호위하고서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핑!"
  "아악!"
  그때 고구려 병사의 화살 하나가 당 태종의 왼쪽 눈에  정확하게 꽂혔다. 그의 눈에선 피
가 흘러나왔지만 도망치기에 급급해 치료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쫓기어 자신의 나라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군사를 거느린 당 태종, 포위된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 도저히 싸움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고구려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로 무장한 양만춘의 승리로 끝났다. 두 사람의
싸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굳은 결의가 승부를 갈랐다고 할 수 있다. 백성들을 독려하며
혼연일체가 되어 성을 지킨 사람들.  그들이 있었기에 안시성 싸움이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지성과 칼의 대결-서희와 소손녕
  "와아아아! 안융성을 함락시켜라!"
  10만의 거란족 병사들은 자비령의 안융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맹렬히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에 맞서는 고려의 군사들도 서희를 주축으로 강하게 저항했다.
  "힘을 내라! 우리가 어찌 거란족에게 패배할 수 있단 말이냐!'
  싸움은 열흘 동안이나 계속되었지만 거란족은 안융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싸움은 장기
화의 조짐을 보였고 붉게 물든 저녁 노을처럼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갔다.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은 압록강 건너 만주 지방에 요나라를 세우고 사방으로 세력을 확장
시키고 있었다. 그들과 맞서는 고려가 북진정책을 수립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요나라는 10
만 병사를 동원하여 993년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했다.
  "요나라가 저렇게 많은 군사를 몰고 와 우리 고려를 괴롭히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고려 임금 성종은 소손녕이 이끄는 요나라 군사들이 연일 승리를 거두며 파죽지세로 밀려
들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하들도 모두 의기소침하여  임금만을 쳐다볼 뿐 별다
른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마, 요나라에 파견되었던 이몽전 대감이 돌아왔사옵니다."
  "그래, 어서 들라 이르라."
  "마마, 신 이제 돌와왔사옵니다."
  "인사는 그만 두고. 그래, 요나라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이유를 소상히
말해 보아라."
  "네, 신이 적장 소손녕을 만나 의견을 알아본즉, 자비령의 북쪽땅을 모두 내놓으면 당장에
철수할 수 있다고 하옵니다."
  "뭣이 자비령 북쪽 땅을?"
  "그렇습니다, 마마. 저들의 태도는  매우 불순했으며, 또한 10만이나  되는 대군이 있기에
미처 싸움을 대비하지 못한 우리한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옵니다."
  이몽전의 말에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긴장된 얼굴을 펴지  못했다. 모두들 요나라와의 싸
움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손녕의  군사들은 단숨에 봉산군을 함락시킨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마마, 저들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러니 이번 싸움은 피하시는 것이 좋을 줄로 사려되옵니
다."
  "그렇습니다. 저들이 요구하는 자비령  북쪽은 수확이 적어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지역이므로 내준다 해도 큰 손해는 없을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그대들의 의견은 알겠으나 그들이 다시 우리를 침략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자비령의 군량미들을 모두 대동강에 버려 요나라가 쓰지 못하게 하여 우리도  군사를 키
워 침략에 대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모두들 요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자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있던 서희는 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이 무슨 망발이오. 어떻게  우리의 땅을 거란족과 같은  아둔한 무리들에게 내줄
수 잇단 말이오. 이번 요구를 들어준다면 저들이 다음 번에는  또 어떤 요구를 해올지도 모
르는 것이 아니오. 마마, 비록 우리가 힘이 약하나 군량미나 물자면에선 저들보다 유리한 입
장이옵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전략에  달려 있습니다. 맞서 싸워야 합니다! 저희
가 장기전으로 들어간다면 저들은  틀림없이 물자가 떨어져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
다."
  서희가 강하게 싸울 것을 주장하자 성종은 그의 기백에  감동하여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고려는 거란족의 침입에 맞서 대항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전쟁이 별다른 변화없이 지지부
진하게 진행되자 요나라 군사들은 조급해지기 시작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맥빠지는 접전만이
거듭될 뿐이었다.
  "장군, 싸움이 장기화된다면 저희가 불리합니다.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식량은 얼마가지 못
해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사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고려 군사들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대항하지 어쩔 도리
가 없지 않소. 무슨 뾰족한 방법이 없겠소?"
  "저들이 맞싸움을 전개한다면 모르겠으나, 저렇게 방어만을 하면서 시간을 끌어대니 별다
른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계속 공격을 감행하여 적이 지치도록 하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소손녕은 가슴이 답답했다. 참모진들은 안융성을 함락시킬 방법을 알지 못했다. 또한 식량
도 거의 떨어져 간다는 소식에 마음만 조급할 뿐이었다. 소손녕의 군대는 처음과는 달리 점
차 사기가 떨어지고 피로도 누적되어 오히려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런 이들의 동태를 눈
치챈 서희는 임금을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아뢰었다.
  "마마, 제가 저들을 찾아가 이 싸움을 끝내도록 해보겠습니다. 부디  소신을 보내  주시옵
소서."
  서희를 신임하고 있던 성종은 그의 말에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서희의 기백이라면 능히
소손녕과 맞설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좋소. 그대의 생각대로 한번 해 보시오."
  임금의 승낙을 받은 서희는 혼자서 거란 진영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
에 놀란 소손녕은 그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올 것을 명하였다.  두 사람은 탁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이 자리에서 밀린다면 싸움에서 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서희는 마음을 차분
하게 가지려 애를 썼다.
  "적장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
  소손녕은 서희의 진의를 알기 위해 천천히 입을 뗐다. 하지만 서희는 서두르지 않았다.
  "요나라가 자비령 북쪽을 내놓으라는데 그건 어떤 이유에서인가 궁금합니다."
  소손녕은 잘 다듬어진 수염을 매만지며 서희를 노려보았다. 대의명분이 적절하지 못할 시
에는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요나라가 고구려의 옛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땅이었던 자비령은 우리  요나라의 것이
당연하지 않소."
  소손녕의 대답에 서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구려의 후손이라면 그건 당연히 우리 고려가 아니오. 무엇보다 나라 이름이 그렇지 않
소. 또 옷 입는 것이나 먹는 음식 그리고 풍습과 말이 고구려와 같지 않소?"
  자신들이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라고 주장하던 소손녕은 서희의 말에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떠한 말로도 서희의 말을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서희는  소손녕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때
를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두 나라가 싸움을 한다는  것은 국력의 낭비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소손녕은 아무 말 없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희의 말은 적절했으며, 싸움은  지지부진하
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도 이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고려가 자신들과 외교관계를 맺
자는 제안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문제는 내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니 전령을 본국에 보내어 고려의  뜻을 전달
해 보겠소."
  소손녕은 급히 서희의 의견을 적은 전문을 자신의 임금에게  보내었다. 그리고 고려와 강
화를 맺는 것이 좋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요나라 본토에서 회답이 오려면 7일을 기다려야 하니 이곳에서 편안하게  기다리는 것이
좋겠소."
  "그렇게 하겠소."
  소손녕은 비록 적일지라도 지적이고 기백이 넘치는 서희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매일
잔치를 베풀어 서희를 깍듯하게 대접해 주었다.
  "장군,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본국의 전문이 도착했다는 보고에 서희와 소손녕은 요나라 임금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무척 궁금했다. 전문을 읽던 소손녕은 미소를 지으며 서희를 바라보았다. 그 의미를  서희가
모를 리 없었다.
  "우리 임금께서 그대들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소."
  이로써 고려는 요나라로부터 홍화진, 귀주, 용주, 철주, 통주,  곽주 즉 강동 6주를 되찾게
되었다.
  "아주 현명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이제 양국은 친구의  관계로서 싸움보다는 서로가 어려
울 때 도움을 주는 선린관계가 되었으니 잔치를 베푸시는 것이 어떻겠소."
  그 날 요나라 진영에서는 거대한  잔치가 베풀어졌다. 그리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위해서
병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법. 서희의 인간됨에 소손녕뿐이 아니라
요나라 임금도 그의 기백에 감복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손녕은  서희와 헤어지면서 낙타 10
마리와 말 1백 필, 양 1천 마리와 비단 5백 필을 선물로 주었다.
  서희는 994년에는 두만강 쪽의 여진족을 무찌르기 위해  출정하기도 했다. 고려를 받들던
여진족들이 자신들의 세력이 강해지자 동북지방의 두만강 국경을 자주 넘어와 고려의  백성
들을 괴롭혀 그를 제지하기 위함이었다. 서희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곳에 여섯 개의 성을
쌓는 큰 공적을 세워 다시는 여진족이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서희가 직접 적진에 들어가 담판을 지음으로써 전쟁의 위험에서 고려를 구한 그의 기백
은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적장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조리 있는 말솜씨로 강
동 6주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되찾은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서희가 있었기에 고려는
거란과 여진의 위협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의 뛰어난  외교실력은 싸움보다는 대화로 문제
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감이 되었다. 자비령 북쪽의  땅을  두고 벌인 두 사
람의 담판은 전쟁의 위험에 슬기롭게 대처한 외교적 사건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제2부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20세기의 다윗과 골리앗-IBM과 마이크로소프트
  "어떻습니까? 이제 저희 윈도우즈를 채택할 계획을 세웠겠지요?"
  마이크로소프트의 사장 빌 게이츠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IBM시스템부 부장인 빌  로우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천만에요. 우리는 당신들의 읜도우즈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의 윈도우즈가 탁월한 성능을 가지고 있는데도  저희 소프
트웨어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빌 게이츠는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컴퓨터 대형회사들이 자신이 만든  윈도우즈를 자사
컴퓨터에 장착하려고 안달이 나 있는데 유독 IBM만이 거부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윈도우즈에 버금가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으니까
요."
  "아니. 당신들이 개발한다 구요? 정말 우습군요. 두고  보십시오. 당신들은 개발하지 못해
서 제 방으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게 될 테니까요. 그때  오늘 받은 수모를 모두 돌려드리겠
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윈도우즈는 당신들의 제품보다 2년 정도 앞선 기술력이란 말입니다."
  빌 게이츠는 자신이 개발한 윈도우즈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윈도우즈를 거부한
IBM의 결정을 수긍하려 들지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우즈를 개발하기 위해서 걸
린 많은 시간과 고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실 마이크로소프트의 24명의
프로그램 개발 전문가가 3년 동안 무려 11만 시간을 쉬지 않고 개발한 땀의 결실이었다. 그
리고 시중에 판매하기 위해서 네 명의 제품 매니저와 세 명의 개발부장이 바뀌는 진통 또한
겪어야 했다. 이러한 제품을  IBM에서 거부한다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라고 볼 수밖
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이크로소프트는 아직 초보단계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네트워크
분야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IBM은 당시들보다 더 많은  전문적인 기술을 축적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하하하, 하지만 개인용 컴퓨터에  관한 한 저희마이크로소프트가  IBM보다는 더 앞서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MS-DOS를  우리가 개발해서 당신들에게  제공하여 IBM도 엄청난
수익을 올렸었다는 사실을 설마 잊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두 사람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토론을 벌였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토론 끝에
로우는 게이츠에게 양보를 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윈도우즈를 우리 회사 제품에 맞게 개량해  주십시오. 그러
면 되겠지요?"
  "그렇다면 저도 동의하겠습니다."
  빌 게이츠로서는 자신의 직원들이 고생하며 만든 윈도우즈를 완벽하게 성공시키는 순간이
었다. 모든 컴퓨터회사에서 자신들이 개발한  윈도우즈를 사용하게 되는 아주  숨가쁜 순간
말이다. IBM은 1930년대부터 컴퓨터 업계를 이끌어 왔을 뿐만  아니라 70년대 말부터 80년
대 초에 정보의 수집, 처리, 전달을 기초로 해서 지속적이 성장을 해온 전체 시장의  70퍼센
트를 점유하고 있는 컴퓨터 전문 업체이다. IBM이 개발한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계는 전세
계 모든 컴퓨터 생산업체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애플사를 제외한 모든 컴퓨터가 IBM 호환용
으로 만들어져 있을 정도로 그 기술력과 영향력이 광범위하다.  그리고 전세계에 지사가 있
으며, 컴퓨터 본체에 관한 한 세계 최대 기업으로 어느  기업도 IBM에 도전장을 낼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이다. 이러한 IBM에  거세게 도전하는 기업이 바로  소프트웨어 전문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빌 게이츠라는 컴퓨터 천재에 의해서 성장한 기업으
로 그는 하버드대학 재학시절부터 컴퓨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75년 2월 하버드 대학생인 그에게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빌, 나 폴이야. 우리의 시험이 성공했어. 너의 베이식은 아주 성공적으로 작동했어."
  "저, 정말이야? 야 대성공이다!"
  앨버커키에서 걸려 온 폴의 전화에 빌은 너무나 기뻐 환호성을 질렀다. 다른 기업의 프로
그래머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아직 학생인 빌이 동료들과 함께 마이크로컴퓨터 업계에 커다
란 충격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당시만 해도 디스크대신 천공카드를 사용하던 시기였기에 빌
이 개발한 베이식은 회계나 통계 분야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응용 프로그램 개발의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빌의 베이식은 이후 6년 동안 마이크로컴퓨터 시장을 지배하는 놀라운 성
과를 올렸다. 이에 힘입은 빌은 동료 앨런과 함께 1975년  뉴 멕시코 주의 앨버커키에서 마
이크로소프트라는 회사를 공동으로 설립하게 된다. 이렇게 컴퓨터 산업이 발달할 무렵 IBM
은 1980년 드디어 마이크로컴퓨터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IBM의 이 계획
은 마이크로소프트와의 만남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IBM이 컴퓨터업계에서의 명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하지?"
  "시질적으로 우리가 마이크로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
다."
  "그 이유는?"
  IBM의 경영진들은 시스템부의 실험실 실장 빌 로우의 말에 의아해 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윌 IBM의 규모가 너무 거대해서 철저한 품질 확인절차를 고려해
볼 때, 디자인에서부터 완제품까지는 적어도 4년이 걸립니다. 그러나 컴퓨터시장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체적인 개발은 무리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로우 실장의 말에 당황한 경영진은 침통한 얼굴로 질문하였다.
  "현재 컴퓨터업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기업은 애플사입니다.  이 회사는 독자적인 소
프트웨어 개발업자들이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함으로써 빠르게 변하는 컴퓨터시장에서  지
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 IBM도 새로운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회사 내에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하여 개발팀을 구성한다면 보다 빨리  컴퓨터시장
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우 실장의 제안은 파격적이긴 했지만 반복된 설명에 설득을 거듭한 끝에 경영진들을 이
해시켰고, 곧바로 실행되기에 이르렀다. 잭  샘슨을 중심으로 새로이 구성된 개발팀은  다른
컴퓨터회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실장님,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가 상당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
습니다."
  "그래?"
  "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애플2, 탠디 TRS-80, 코모도어 PET 등의 기종에서 마이크로 베
이식이라는 소프트웨어가 거의 표준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회사의 전문적 지식
은 마이크로컴퓨터용 언어분야에서 폭넓게 인정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는 아직 작은 회사였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IBM개발팀을 긴
장시켜 자신들이 손잡고 일할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되어졌다.  그 후 IBM은 마이크로소프
트사를 직접 방문하여 빌 게이츠와의 몇 번의 만남을 거쳐 1980년 11월 6일 마침내  연간수
입 280억 달러의 거인 IBM은 총수입 수백만 달러 정도의 조그만 회사의 25세 밖에 되지 않
은 사장과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것은 빌 게이츠에게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IBM은 새로운 컴퓨터 운영체계 시스템을 개발해 줄 것을 제의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당시
SCP에서 근무하던  페터슨이라는 프로그래머가  개발한 DOS의  연구에 들어갔다.  그리고
1981년 팀 패터슨을 마이크로소프트 직원으로 고용함으로써 그의 DOS 소유권을 사게 되었
다. 마이크로소프트 프로그래머들은 IBM의 감사관들의 감시를  받으며 연구실에서 나올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계획은 해를 넘겼고  마이크로소
프트사의 직원도 백 명으로 늘어낫다. 그 중 35명이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거 너무 힘들군. 해결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리고 이렇게 감시를  당하는 것
도 기분이 나빠."
  앨런은 게이츠에게 짜증스런 말투로 말을 건넸다.
  "앨런, 너무 짜증내지 말게. 이 프로그램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시장을 가지게
되는 거야. 그리고 우리 마이크로소프트도 명성을 날리게 될 거야. 두고 보라고."
  게이츠는 앨런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사실 그도 힘은 들지만  이 계획이 성공리에 끝나고
난 후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들의 열정과 신념은 마
침내 1981년 7월에 MS-DOS 1.0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 시스템은 IBM의 철저한 제품 평
가과정을 거쳐 아주 뛰어난  제품으로 평가를 받게  되었고 IBM은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NS-DOS를 공식적인 자사 운영체계로 받아들여 IBM PC의 공식 시스템이 되었다. 이제 빌 
게이츠는 소비자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IBM은 공식적으로 개인용 컴퓨터
시장 진출을 발표하였고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MS-DOS를 장착한  컴퓨터를 시판하기
시작하였다.
  이 프로그램으로 IBM은 하루아침에 개인용 컴퓨터 업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
었고 컴퓨터산업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만약 마이크로소프트가  없었다면 IBM은 지금의 자
리에 있을지도 의심스러운 대사건이었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최고였다. 기존의 복잡한  운영
체계를 하나의  디렉토리로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간단하여  모두들
MS-DOS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봐 앨런, MS-DOS에 호환성을 주는 일이 필요할 것 같아."
  "그건 왜지, 게이츠?"
  "응, 지금의 반응이라면 IBM 외에도 많은  컴퓨터회사들이 우리가 개발한 운영체계를 사
용할 것 같다. 모든 컴퓨터에서 우리의 프로그램을 사용한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멋진가."
  게이츠의 판단은 너무나도 정확한 것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진들은 다시 MS-DOS
를 보완하기  위해서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MS-DOS 하에서  작성된 프로그램들은
MS-DOS를 운영체계로 하는 어떤 기기에서도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  호환성을 가지게 됐
다. 이러한 변화가 주어지자 마이크로소프트는 수백 명의 업자들에게 자사의  DOS를 팔 수
있게 되어 엄청난 수익을 가져왔다. 그리고  MS-DOS의 운영체계는 모든 컴퓨터의 표준이
되었으며, 아울러 IBM컴퓨터 역시 모든 컴퓨터의 표준이 되는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빌 게
이츠는 약관 31세의 나이에 개인재산 12억 5천만 달러라고 하는 엄청난 부자로서 컴퓨터 업
계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아마 개발 착수 당시 팀 패터슨이 게이츠에게 DOS를 팔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운명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빌 게이츠는 애플사의 매킨토
시 베이식을 개발하여 애플사가 IBM에 맞설  수 잇는 컴퓨터를 가지게 해주었으며  다양한
사무처리기능을 가진 액셀을 개발함으로써 소프트웨어에서 경쟁 대상이었던  로터스를 제압
하게 되었다. 그 후 마이크로소프트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 가운데 독보적인 존재로 올라서
게 되었다.
  1986년 말, 빌 게이츠는[PC매거진]이 제정한, '우수 기수' 부문에서 특별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 상은 보통 소프트웨어 제품에 수여되는 것이 관례라서 개인에게 준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 번만 예외적으로, 그가 쌓은 전체적인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게이츠에게 상을 내
린 것이다. 빌 게이츠의 윈도우즈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IBM측으로부터  대단한
만족으로 얻어낸, 두 회사 공동의 멋진 작품이었다. 윈도우즈 역시 MS-DOS처럼 모든 개인
용 컴퓨터에 장착되어 많은 전문가와 PC 애호가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한 젊은이의 끝없는
상상력과 연구의지가 보여주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역사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아울러 25세의 젊은이를 흔쾌히  동반자로 인정한 IBM의 선견지명 또한 그들이 세
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비결일 것이다. 현재 컴퓨터 시장은 거의 IBM, 애플이라는
컴퓨터 회사와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소프트웨어 회사로 양분되고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첨
단 과학의 세계. 조금만 늦어도 뒤떨어지는 치열한 경쟁으로 보다 더 빠르고 좋은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은 영원한  맞수이며 동반자일 것이다.

    구름 위의 라이벌-보잉과 에어버스
  사람을 가장 빠르게 그리고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것은 잘  알고 있다시피 여객기이다. 거
대한 몸체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와 나라의 국경을 쉽게 넘나들게 해주는 이 여객기
에 관한 한 보잉사와 에어버스사는 지구상 최대의 맞수이다.  현재 지구의 하늘에는 수많은
여객기들이 오가고 있고 그 모양도 가지가지다. 이 여객기  중에서도 보잉사가 제작한 여객
기는 전체의 54퍼센트를 차지해 단연 선두를 점하고 있으며, 그 뒤를 프랑스, 독일 등  유럽
5개국이 공동출자한 에어버스의 기종이 2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이 두 항공사가 여객기 부문에서 이처럼 불꽃튀는 경쟁을 벌이는 데에는 유럽과 미국이라
는 오래된 자존심의 대결의식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이들 여객기 업체들은  새로운 기종을
만들 대마다 수많은 연구개발비를 들여가며 세계 최고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 보잉사는 다가오는 21세기를 대비하여 새로운  여객기인 767X를 개발 중에 있습니
다. 이 중단거리 여객기는 95년 5월에 첫선을 보일 예정입니다."
  1990년 초 보잉사는 경제성과 안정성이 뛰어난 767X 여객기의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특
히 이 개발 계획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중공업회사인 미쓰비시,  후지 등이 참여하여 중단거
리 비행기에서 앞서 있는 에어버스를  추월하겠다는 보잉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에어버스도 이에 맞서기 위해 최첨단장비를 갖춘  비행기 개발을 목표로 연구의 끈을  바짝
조이고 있다. 숨나 개의 부품으로 구성되는 비행기는 작은  실수에도 엄청난 피해를 가져올
수 있기에 기술력이 여간 뛰어나지 않으면 개발하기 힘든 분야이다. 즉 앞서 나가는 기술력
이 여객기 사업의 최대 관건인  셈이다. 보다 간편하고 보다 편안한  여객기 여행을 목표로
보잉사와 에어버스사는 기내에 욕실과 영화관 등 여러가지 문화시설을 대폭 보강하기  위해
첨단산업의 연구결과를 접목시키고 있다.
  이 두 회사의 개발 발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른바 '나르는 섬'이라고 불리워질 여
객기를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다. 무려 1,000명이 탑승할 수 있는 초대형 여객기를  만들겠다
는 놀라운 야심이 각사의 연구실 불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탑승 인원이 늘어도 연료는 적
게 들고 여객에게 더욱 편안한을 주기 위해서 지금까지 나타난 여객기의 단점들을 보완해야
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단시일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꾸준한 연구개발비와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사는 이 개발을 완성하기 위해서 1백 50억에서 2백억 달러라
는 막대한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슈퍼점보기는 제4세대 제트여객기
라고 부른다. 1세대는  52년 운항을 시작한 영국 디 하비랜드사의 코밋기이다. 이 여객기는
세계 최초의 제트여객기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기체가 너무 작고 사고가 잇달아 2년만에 실
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뒤를 58년  미국 보잉사에서 B707기로 제트여객기 2세대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3세대는 지난 70년  제작된 보잉사의  B747기를 비롯 DC 10, 에어버스사의
A300 등이 있다. 보잉사와  에어버스가 개발중인  제4세대 제트여객기의 기본 개념은 대형
화와 고속화라고 볼 수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 보다 빠르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여객기
는 정말로 기대할 만하다.
  보잉과 에어버스는 이렇게 장기적인 대책을 수립하면서 또 다른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
해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비행기는  많은 연료가 들어 중간 중간에  경유지를 들러 연료를
공급받아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목적지까지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다. 시
간이 곧 성공가치와 직결되는 현대에 있어 보다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비행기의 등장은 모두
가 바라는 일이다. 이러한 고충을 해소할 수 있는 초장거리  운항 여객기 개발이 현재 활발
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분야에서는 에어버스가  보잉사보다 약간 앞서 있다. 유럽의  에어
버스는 이미 93년도 파리에어쇼에서 파리와 오클랜드(뉴질랜드) 사이를 경유지를 거치지 않
는 논스톱으로 직항하는 세계기록을 세웠다. 이 때의  기종은  에어버스의 차세대 여객기인
A340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여객기는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도록 네 개의 엔진을 갖고 있으
며,  295명을 태우고 7천 해리가 넘는 거리를 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하지만 여객기가 오랫동안 비행을 하려면 원래의 항로에서 상당히 이탈한다는 문제가  여
전히 남아 있었다. 지구의 자전에 의해 목표점 항로를 계속적으로 지탱하는 데 어려움이 있
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어버스는 이 문제는 첨단장비를 사용함으로써 멋있게 해결했다. 하늘
에 떠 있는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여객기의  위치를 지상의 관제탑보다 확실하게 잡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A 340은 94년부터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회사에서 운행되고 있는
데 미국의 인공위성의 도움을 받아 지상 관제탑의 도움 없이도 목적지와 활주로를 정확하게
찾아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에어버스에 선수를 당한 보잉사도 그저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보잉사는 A340에 대하여
95년 말쯤 본격 운항할 B777로 맞서고 있다. B777은 쌍둥이 엔진으로 350명을 태우고 A340
과 같이 7천 해리를 날 수  있다고 한다. 여객기의 성능은 이러한  기계적인 뛰어남과 함께
탑승객을 위한 서비스 측면도 같이 겸비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양사는 탑승객들이 기내에서
도 원활하게 사무를 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서비스를 강화할 수 있는 첨단 통신장비를  장
착하고있다. 최근에는 인공위성을 통해 승객들이 기내에서 지구상 어느 곳과도 통화하고 호
텔을 예약하며 렌터카를 빌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휴대용 컴퓨터나 팩시밀리를 기내
전화코드에 연결, 서류를 주고받거나 결재할 수 도 있도록  하여 기내에서도 사무실 기능을
연장하고 집처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
  보잉과 에어버스 외에 초음속여행기의 대명사인 콩코드의 제작사인 프랑스  아엘로스파시
일사와 프랑스 국립  항공우주 연구센터에서는  새로운 콩코드인  '얼라이언스'를 개발  중
에 있다. 지금은 파리와 미국을 두 시간 걸려  도착하지만 극초 음속여객기인 얼라이언스는
LA와 동경을 두세 시간 안에 주파할 수 있다고 한다. 빠르면 2005년쯤 모습을 드러낼 얼라
이언스는 몸체 길이가 88m(콩코드는 61.66m), 날개길이가 45m(콩코드는 25.56m)나 되는 대
형이다. 그 뿐이 아니다. 항속거리는 콩코드의 두  배인  1만 1천 km이며, 승객도 콩코드보
다  두 배 이상인 250~300명을 태우면서도 1km당 연료소모는 불과 43g이라고 한다.
  이러한 극초음속기들이 실제로 등장하면 지구의 자전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에 여객기가 서
쪽으로 여행하면 해가 동쪽으로 지는  진기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 실로 과학의
발전은 인간을 경이의 세계로 이끄는 징검다리라 할 수 있다. 현재 NASA에서 연구중인 여
객기는 대기권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대기권 안으로 들어오는 극초음속  여객기라고 한다.
이렇게 여객기의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된다면 비행기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는 일도  머지않
아 실행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2등은 없고 1등만이 존재하는 첨단과학의 세계, 서로  1위
를 차지하기 위해 밤을 세우는 양사의  각축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대감에  설레이게
한다. 과연 다음에 개발될 여객기는 어떤 것일까? 총체적인 산업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는
여객기 산업의 미래는 그 상상의 범위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게 계속될 것임에 틀
림이 없다.

    밀림의 왕자-코브라
  "타타타탓!"
  엄청나게 큰 프로펠러 소리가 베트남의 밀림을 흔들었다.
  "와아아아, 코브라다. 어서 공격하라! 저쪽에 베트콩들이 몰려있다.!"
  코브라 헬기가 도착하자 전투를 저개하고 있던 미군들은 환호성으로 반갑게 맞이했다.
  "두두두두! 슈웅 슈웅!"
  작전지역에 도착한 AH-1G(휴이) 코브라는 기체 앞에  다린 건쉽을 사정없이 쏘아대었고
날개 옆에 달린 로케트탄도 적진을 향해 퍼부었다. 코브라의  공격을 받은 적진지는 순식간
에 초토화되어 불길과 연기로 뒤덮여 버렸다.
  "자, 이제부터는 우리 일이다. 진격!"
  코브라의 공격이 중지되자 힘을 얻은 보병들은 용감하게 베트콩 지지로 나아가 이내 적진
지를 점령하였다. 보병으로 점령하기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던 전투에서 코브라 헬
기의 도움으로 큰 희생 없이 적의 진지를 점령하는 성과를  올린 것이다. 코브라 헬기는 월
남전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무기 중의 하나이다. 끝없이 밀림이 이어진 베트남의 지리적 조
건은 미군의 전쟁수행을 어렵게 하여 밀림을 이용하는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번번이  패하여
새로운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밀림지역은 협소할 뿐 아니라 정확한 공격지점에 폭탄을 투하하는데  여러 가지  문제점
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항공기의 지원이 힘들다는 지적인가?"
  "네, 그렇습니다. 전투기나 폭격기들은 고속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지역이 좁고  정확한 공
격을 해야 하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새로운 공중공격력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전참모의 설명을 들은 장군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새로운 공중공격력을 가지고  있는
대안이 무엇인가를 되물었다.
  "무장헬기를 전선에 대량 투입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헬기는 전투기와는 달
리 제자리에 정지하여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로케트탄을 장착한다면 폭격기
이상의 효과를 올릴 것입니다."
  "좋았어, 그렇다면 현재 가동할 수  있는 육군헬기를 모두 전선에 투입하도록  하게. 내가
상부에 보고하여 헬기부대의 지원을 요청하겠네."
  작전회의 결과는 헬기를 전선에 투입하여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자는 방향으로  결정났
다. 이에 기총과 로케트탄을 장착한 전투헬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코브라 헬기가  밀림지
역에 투입되면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했다. 이러한 전과는  수송수단이라는 기존 헬기에 대
한 개념을 바꾸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과거에 헬기는  단지 전투병력을 가까운 거리에
이동시키는 수단으로만 이용하였지만 월남전에서부터는  첨단 무기를 장착하는  전투형으로
개념이   바뀌었다.  이를   계기로   AH-64  아파치(미국),   A-129  망구스타(이탈리아),
PAH-2/HP/HAC-3G(서독 및 프랑스), MI-24(소련) 등 세계 각국이 공격용 헬기 개발에 뛰
어들었다. 특히 소련의 MI-24는 10톤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헬리콥터로,  대전차 미사일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8명 이상의 보병분대도 탑승시킬 수 있는 실로 어느 나라도 감히 꿈
꾸지 못했던 공격용 헬리콥터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적외선을 이용하여 명중률과 조작이 편리해진 반자동  유선유도탄인
TWO와 HOT가 개발되어 사정거리가  4,000미터 정도로 길어져 헬기는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헬리콥터에 의한  대전차 공격이라는 새로운 전략
이 주목받게 되었다. 헬리콥터는 하늘을  나는 기동력으로 그 이동속도가  전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를 뿐만 아니라 고정 날개를 가진 항공기와는 달리 공중에서 정지할  수
도 있고 정글 속의 좁은 공간을  날 수도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게다가 지형에 따라서
숲을 스칠 듯 말 듯,  혹은 숲 속을 헤치고 나는  포복비행이라는 비행방법으로 상대방에게
거의 발각되지 않고서도 효과적인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다.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헬리콥터 중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공격용 헬기는 바로 미국
이 가지고 있는 AH-1S 코브라와 AH-64A  아파치 헬기이다. 이 두 헬기는 전투력에서  뿐
아니라 장착 무기의 첨단성도  다른 헬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헬기들이다.
AH-1S 코브라는 월남전에서 용맹성을 떨친 AH-1G 코브라를  더욱 강하게 개조한 헬기이
다. 이 헬기는 최초의 공격용 헬리콥터로서 현재 전세계  공격용 헬리콥터의 기본형태가 되
고 있다. 초기형인 AH-1G는 소프트(비장갑 표적) 및 세미 소프트 타켓용(트럭이나 보병)이
었지만 S형에 이르러 TWO 대전체 미사일 8발을 탑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20밀리 기관포탄
750발과 620킬로그램의 연료도 탑재할 수 있어 보다 강력한 공격용 헬리콥터로 자리를 잡았
다. 이 코브라 헬기는 미육군에  99기가 배치되어 있으며, 이스라엘과 일본으로도  수출되었
다. 또한 프로펠러 두 개를 단 쌍발형인 AH-1J 시코브라는  미해병대에 배치되었는데 해병
대는 엔진을 보다 강화시켜 AH-1T 슈퍼  코브라를 탄생시켰다. T형은 S형보다 더욱 강해
져 최대 이륙 중량이 6,350킬로그램으로, 20밀리 기관포탄 750발, 헬파이어 대전차 미사일 8
발 외에 사이드 와인더 공대공미사일 2발토 탑재하고 있다. 특히 사이드와인더 공대공 미사
일은 적의 공격용 헬기와 마주쳤을 때를 대비한 무기시스템으로 아직까지는 헬기간의  공중
전이 기록된 적은 없지만 앞으로 공격용 헬기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쌍방간의 공중전도 미
리 예상하여 개발한 것이다.
  코브라 헬기에 맞서는 공격용 헬기는 역시 미육군이 보유하고 있는 AH-64A 아파치이다.
코브라의 후속 기종으로 개발한 아파치 헬기는 총 572대를 미육군에 배치할 계힉이어서 미
육군의 주력 헬기가 바뀌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아파치는 지금까지 나온 헬기 중
가장 강력한 공격용 헬리콥터로 알려져  있다. 16발의 헬파이어 대전차유도탄, 최대  76발의
2.75인치 로케트탄, 1,200발의 30밀리 기관포탄을 탑재한 이 헬기는 고도로 발달한 전자장비
로 갖추고 있어 최첨단 헬리콥터로 불리기도 한다. 아파치에 장착된 첨단장비는 광학,  저광
량 텔레비전 (LLLTV), 열선  야간투시장치(FLIR), 레이저 조사장치,  레이저 거리측정장치,
레이저 추적장치를 결합시킨 시스템과 야간 전투용인 PNVS, 그리고 승무원의 헬멧에 장비
하는 디스플레이(IHADS) 시스템이다. 특히 이 장치들은 조종사가  일일이 상황판을 보면서
헬리콥터의 상태를 점검하는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조종사의 헬멧에 부착하여 직접 눈 앞에
나타나는 화상화면을 통해서 적의 위치와 공격거리, 그리고 공격 예정시간 등을 폴리그램으
로 확인할 수 있어 보다 빠르고 정확한 공격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주요 부분은 23밀리 기관포에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변속장치는 윤활유 없이
도 30분간을 운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헬리콥터가 초속 12.8미터의 낙하속도로 불시착하
더라도 승무원의 생존율이 95퍼센트에 달하여 떨어지면 죽는다는 헬리콥터의 위험성을 상당
히 극복한 기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파치 헬리콥터는 이와 같이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의 공격용 헬리콥터인 동시에 가장 값비싼 헬리콥터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코브라 헬리
콥터가 더 경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한 전투력을  인정받은 AH-1S 코브라와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AH-64A 아파치 헬리콥터. 결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모두 우수한 헬
리콥터들이다. 소련도 공격용 헬리콥터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코브라와 아파치처럼 날렵
하고 기민한 헬리콥터는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10톤  이상의 다무장 헬리콥터 분야에
서만큼은 활발한 진전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마하 2.5~3의 속도로 하늘을 누비는 전투기와는 달리 숲 속이나 건물 사이를 오가며 전투
를 벌일 이러한 공격용 헬기는 지상의 왕자라고 불리워지던 탱크의 위력을 일순간에 무력화
시킬 무기시스템으로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지상전에서는  전차부대와 합동으로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강력한 공격용 헬리콥터를 보유하고 있는 쪽이 승리한다는 전략을  새
로이 만들어 냈다. 그 예로 이라크와 미국의 걸프 전쟁을 살펴본다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쿠
웨이트를 도망치던 수상대와 탱크부대를 사막에서 전멸시킨 미군의 공중공격력은 상상을 초
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코브라와 아파치의 능력을  비교할 만한 자료가 부족
하여 어느 헬리콥터가 더 우수한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바닷속의 전쟁-원자력 잠수함
  해양은 거대하고 넓다. 바다 위에 전함을 띄우고 항공모함이  등장하면서 바다에 대한 관
심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전략무기를 개발하는 많은 나라들이 해상뿐 아니라 바닷속을 마음
대로 오가는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 연구하던 중 부력을 가지는 잠수함을 제작하기 시작했
다. 처음에는 아주 자그마한 모양이었지만  점점 개발이 전개되면서 그  크기는 대형화되어
마침내 어뢰를 달 수 있는 잠수함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세계 군사 강대국들은 자
신들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는 잠수함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바닷속을 누비는 거대한 잠수함. 처음 U-보트가 독일에 의해 개발되었을 때, 전세계는 놀라
움을 금치 못했다. 바닷속에서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잠수함이  나타나 어뢰로 많은 미전함
들을 침몰시켰으니 그도 그럴 수 밖에...이에 뒤를 이어 미국과 소련, 프랑스 등 많은 나라들
이 잠수함 개발에 전력을 쏟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수함의  크기와 적재무기 그리고 탑승
승무원 수만이 경쟁대상이었지만 점차 소련과 미국의 냉전체제가 격화되면서 핵무기 개발과
함께 원자력잠수함 개발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영국은 제2세대 전략 미사일을 탑재한 트라이던트 D-5를 선보였다. 1985년 4월에 취역한 
랭플레시블에 이어 1980년대 후반기부터  건조가 시작된 프랑스 해군의  마시일잠수함 7척,
그리고 현재 정비가 계속되고 있는 미국 해군의 오하이오급 및 소련의 타이푼급과 델타4급
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미소 양국간의 원자력 잠수함의 개발경쟁이 시작되었다.
  잠수함 개발에 있어 미국과 소련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유는 지상에 있는 핵무기  발사
기지들은 그 위치가 노출되어 있어 전쟁시에는  적의 비행기에 파괴될 우려가 있는  반면에
잠수함은 바닷속에서 계속 위치를 변경하면서 언제 어디서든지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자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는 성공리에 원자력을 이용하여 원자
력 잠수함을 고안했으며, 막대한 힘을 발생하는 원자력을 통해  30톤이 넘는 미사일을 여러
개 장착할 수 있게 되었다. 오하이오와 타이푼이라는 미국과  소련이 내놓은 신형 잠수함의
등장으로 기존의 전략미사일 탑재 원자력 잠수함들이  대폭 교체되었다. 오하이오와 타이푼
이라는 미국과 소련이 내놓은 신형 잠수함의 등장으로 기존의 전략미사일 탑재 원자력 잠수
함들이 대폭 교체되었다. 이 두 잠수함은 길이가 무려 170미터나 되며 탑승 승무원 수도133
명, 150명으로 작은 섬 크기와 맞먹는다. 이들 잠수함들은 보다 뛰어난 성능을 가진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대량으로 장착하기 위해서 그 크기도 대형화된 것이다. 미국의 오하이오는 트
라이던트 1,2형 미사일 24기를 탑재할  수 있으며, 소련의 타이푼은  SS-N-20을 탑재할 수
있다. 길이 15미터, 무게가 30~50톤이나 되는 미사일을 무려 20~24기까지 장착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거대한 잠수함의 크기에 대해서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이 두 잠수함을 개발하기 위해서 자국 내 모든 기술을 집중시켰다. 이처럼
거대한 기지가 움직인다는 것은 막대한 에너지와 그리고 철저한 방사능 관리체계를  갖추어
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잠수함들은 한 번 출항하면 대략 일 년 정도 바닷속에서 임무
를 수행하다 기지로 돌아오기 때문에 승무원들의 식량과 부대시설을 갖추어야 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원자력 발전의 기술이 향상되면 될수록 잠수함의
크기도 같이 커갈 수밖에 없었다. 현재 오하이오가 사용하는 원자로는 신형 S8G형으로서 6
만 마력의 힘을 낼 수 있다. 이 원자로는 기존의 폴라리스 및 포세이돈 잠수함이 가지고 있
는 원자로 S5W의 15,000마력에 비하면  출력이 약 서너 배나  늘어난 것이다. 물론 소련의
타이푼도 이에 지지 않는다. 타이푼은 4만 마력의 원자로가 2기가 장착되어 8만 마력이라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잠수함이다. 특히 소련의 타이푼은 내각과 외각 사이를 1.8미터  떨어
뜨려 외부의 공격을 당해도 내부에는 큰 충격을 주지 못하게 설계되어 있어 미국의 오하이
오와 다른 점을 보인다. 내각과 외각 사이를 떨어뜨림으로써  소련의 타이푼은 앞에서 보면
원 두개를 나란히 늘어놓은 안경형의 형태를 이루는가 하면 오하이오는 전통적인 잠수함 형
태인 둥근 원형의 단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같은 설계의 차이점은 여러 분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하이오는 사령탑을 앞에 두
고 바로 뒤에 미사일을 배치한 반면에 타이푼은 전방에 미사일 발사관을 10기씩 두 줄로 배
치하고 사령탑을 중앙에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타이푼은 이러한 설계의  잇점으로 북극해
의 얼음을 뚫고 부상하여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독특한 성능을 지니게 되었다. 즉,  북
극의 얼음을 부수고 잠수함이 부상하려면 가장  먼저 얼음바닥에 닿는 부분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만약 오하이오처럼 사령탑이 전방에 있을 경우 얼음에 부딪히면서 균형을  잃어버리
고  선미가 떠올라 잠함과 프로펠러가 손상될 위험이 있기에 얼음을 뚫고 미사일을 발사한
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타이푼의 경우는 사령탑이 중앙에 있기 때문에 부상할
때 중심 역할을 해 주어 잠수함의 앞을 약간 들어올린 상태로 유지하여 얼음을 깨기에  가
장 적합하다. 그렇기 때문에 타이푼은 오하이오보다는 보다 넓은 거리에서 자유자재로 공격
할 수 잇는 장점을  이용하여 미국의 레이더망에서 벗어날 수 잇는 것이다.
  미사일을 장착하는 종류에 따라서 잠수함의 폭도 크게  달라진다. 오하이오의 경우는 553
밀리 발사관으로 대함미사일이나 토마호크 대함미사일을 발사한다. 하지만 타이푼은 발사기
나 발사관을 미사일에 따라 별도로 설치함으로써 SS-N-7과 SS-N-9를 탑재하며, SS-N-19
도 장착할 수 있어 오하이오보다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미사일의 수와 탑재할 수 있는  미
사일의 수도 많다.
  잠수함은 언제나 레이더와 군함을 추적을 받는다. 잠수함은 언제나  그 거대한 몸집이 물
속을 가르는 소리와 추진 장치의 엄청난 기계 소리를 동반하는데 이 소리를 탐지하여 잠수
함의 위치를 파악한 군함은 폭뢰를 발사하여 잠수함을 파괴시킬  수 있다. 대서양을 자신의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던 U-보트는 미군이 개발한 레이더시스템에 의해서 거의 전멸의 위기
를 맞이했었다. 이 때문에 잠수함의 필수조건은 함 자체에서  나오는 소음을 최대한으로 줄
이는 것이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잠수함의  단점을 잘 알고 있는 오하이오
는 추진장치의 소음을 줄이는 데 큰 역점을 두었다. 특히  저속 시의 일차 냉각수의 순환에
소음이 많이 나는 펌프를 사용하지 않고  바닷물의 흐름에 따라 순환하도록 설계하여  현재
존재하는 잠수함 중에서는 가장 조용한 잠수함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반해 타이푼은 항해
할 때 내는 잡음이 커서  탐지  당하기 쉽다는 일차평가를 받았다. 이에  소련  과학자들은
이 소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드러운 타일  모양의 물질로 만든 클러스터 가드라고  불리는
음파 반사 방지제를 부착했다. 이 음파반사 방지제는 잠수함과 어뢰가  보내는 소음의 반사
를 줄이는 동시에 잠함의 잡음이  수중으로 전파되는 비율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클러스터 가드는 오하이오도 내부의 진동과 소음이 발생하는 곳 부근에 설치됐을 것으로 추
정되고 있다.
  이처럼 오하이오와 타이푼의 공통점은 동일한  성능을 지닌 탄도미사일을 탑재하는  전략
잠수함이라는 사실뿐이고 탑재 미사일 수, 전체 구조의 설계 원칙, 크기, 배치, 취약성 등 모
든 면에서는 대조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잠수함 개발은 여기서 끝나지 않
고 현재까지 나타난 약점들을 보완하기위한 연구그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전략미사일의 사
정거리는 점점 길어지고 잇다. 따라서 전략미사일을 탑재하는 잠수함을 자국 항공기와 함정
의 호위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해역에서 발사태세를 갖추고 있다.  예를 들면 오하이오는
미국의 동서해안과 아주 가까운 해역에서, 또한 타이푼은 오호츠크 해와 백해, 그리고  바렌
츠 해에서 상대방의 중추부를 향해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원자력 잠수함은 핵미사일 전략에 있어서는 빠질 수  없는 무기로 등장했다. 서로가
알고 있는 핵미사일 기지 외에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 잠수함은 언제 어느 바다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능이 다
른 미사일을 배치함으로써 상대방의 대응을 더  힘들고 복잡하게 만드는 등 원자력  잠수함
개발에 소련과 미국은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도 오하이오와 타이푼은 아무도 알지 못
하는 바다 밑에서 서로 최고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과학의 세계엔 불
가능이란 없기에 이들보다 더 뛰어나고 강한 잠수함이 언젠가는 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때까지는 오하이오와 타이푼의 경쟁도 바닷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질 전망이다.

    일류는 하나-벨과 에디슨, 그레이트
  "와트슨! 일이 생겼으니 잠깐 와 주게!"
  다락방에서 전선을 고치고 기계를 만지던 벨이 잘못해서 황산을 엎지르고는 다급하게  아
래를 향해 소리쳤다. 벨의 방에서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도 지하실까지 들릴 리가 없음에
도 불구하고 벨의 그 외침이 지하실에 있는 조수 와트슨의 귀에 똑똑히 들린 것이다. 그 소
리는 와트슨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수신기에서 울려 나왔다. 지하실과 다락방 사이에 연결
된 벨의 목소리가 전선을 통해 울려 나온 것이다.
  '아니 선생님의 목소리가...?'
  깜짝 놀란 와트슨은 정신없이 단숨에 벨이 있는 다락방으로 뛰어올라갔다.
  "벨 선생님, 들렸어요! 수신기에서 선생님의 소리가 들렸어요!"
  "아니, 무슨 소리가 들렸단 말인가. 와트슨?"
  와트슨의 들뜬 행동에 놀란 벨은 그의 행동을 의아해 했다.
  "방금 와트슨! 일이 생겼으니 잠깐 와주게! 그러지 않으셨어요? 그 말이 수신기에서 울려
나왔단 말이에요!"
  "뭐라고 내 목소리가?"
  벨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지하실로 자신이 직접  내려가면서
와트슨이 말하도록 했다. 정말이지 선명하게 와트슨의 목소리가 지하실로 들려왔다.
  "성공이다! 성공이야!"
  벨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벨은 다락방으로 올라와 와트슨을  껴안고 온 방안을
돌며 춤을 추었고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1876년 3월 10일의 일이었다.
  "선생님, 우리가 발명한 전화기를 특허신청을 내야죠.'
  "그렇지. 와트슨 서류들을 준비해 주게."
  흥분이 가라앉은 두 사람은 차분하게 서류를 정리하고는 곧바로  특허신청을 냈다. 이 당
시에는 전화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발명 즉시 특허신청을 내야 했다.
  "선생님, 우리의 서류가 최초예요. 이제 전화기는 선생님께서 최초로 발명하신 겁니다."
  두 사람은 즐거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기계를 발명하기  위해 주변의 갖은 멸시와 천대
도 참아내야만 했고 게다가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을 때는 그만두고 싶은 유혹에 부딪히곤
했었다. 사실 처음으로 기계소리를 주고받았을 때는 곧바로 사람의  목소리도 보낼 수 있으
리라는 기대로 몇 달을 고생하였으나 말이 전해지지 않자 벨은 전기학자 조지프 헨리 박사
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저는 전선에 전류를 보내, 부릉 부르릉 하는 소리를 전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습니다. 그러
나 사람의 말을 전류에 그대로 싣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요? 불가능한 것을 발명하려
고 헛된 애를 쓰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헨리박사는 답장을 보내었다.
  "당신의 연구는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소.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서  연구하시오. 연구에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성공할 것을 굳게 믿습니다."
  헨리박사의 '연구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은  실망에 빠진 벨에게 다시  힘을  불어넣
어 오늘의 감격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연구한 그의
자세가 낳은 결과였다.
  "삐이이익."
  그때 갑자기 서너 명의 사람들이 다급하게 달려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뭉툭한 서류뭉
치들이 들려 있었다.
  "우리가 전화기를 발명했어요. 우리가 말예요!"
  그도 기쁨에 들떠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바로 벨과 같은 원리의 전화기를 두번째로
발명한 애리샤 그레이트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똑같은 원리의 특허신청일 경우에
는 먼저 신청한 사람에게 권리가 주어지기에 그의 전화기는 몇 시간의 차이로 벨에게 허탕
치고 말았다.
  벨이 하루만 늦게 신청했어도, 그 동안 애쓴 보람도 없이   그 특허권을 그레이트에게 빼
앗길 뻔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쟁자를 당당히 물리치고  전화기를 발명한 최초의 과학자
가 되었다. 벨의 전화기 발명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신기해하기만 했다. 벨이  전화기를
발명한 지 4,5년이 지난 후, 발명왕  에디슨이 전화기에 관심을 갖고 벨의 전화기를  연구하
였다.
  "전화기가 자꾸 나의 마음을 잡아당기는군.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것 같아."
  발명왕 에디슨과 전화기 발명자 벨이 보다 우수한 전화기를 놓고 경쟁에 들어서는 순간이
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나의 전화기를 따라올 수는  없을 거야. 그는 전화기가 전공
이 아니니까."
  그 동안 벨도 계속해서 자신이 내놓은 전화기를 개량하여 상당히 질 좋은 전화기를 만들
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에디슨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어나 날 에디슨이 전화기에  관심을
가진다는 소식을 들은 큰 전기회사 간부들이 그를 방문했다.
  "에디슨 씨, 우리는 당신의 연구열과  발명에 관한 천재적인 기질에  깊은 감명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번에 저희 전기회사에서는 벨 씨의 전화기보다 훨씬  우수한 성능을 지닌 전화
기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그 연구를 부탁드리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말은 에디슨을 기쁘게 했다.
  "저도 전화기에 대해 큰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침 제게 관심을 가져 준다고 하니 이
제안을 받아들여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전개되자 두 사람은 보다 우수한 전화기를 만들기 위한 경쟁에 들어갔다. 에
디슨이 만든 송화기(말을 보내는 기계)는 벨의 회사에서 만든 것보다 성능이 좋았다. 하지만
수화기(말을 듣는 기계)는 단연코 벨의 것이 더  뛰어났다. 두 사람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에디슨  역시 전화기의 발명은 자기 분야
가 아님을 깨달았다.
  "저는 이제 전화기 연구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더  이상의 투자는 시간낭비라고 생각됩니
다."
  다른 분야에 관심이 쏠린 에디슨은 전화기 제작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그 후로는 벨만이
전화기 제작을 도맡아 벨의 전화기는 전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벨과
경쟁할 사람이 없을 만큼 전화기에 관한 한 벨 이외의 사람은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벨의
끈질긴 노력과 오직 한길만을 걸은 장인 정신이 그를 만든  셈이었다. 그 후 벨은 연구소를
세우고, 벙어리의 발성문제와 축음기, 광선전화 등을 연구하며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전화기의 발명에서 손을 뗀 그의 마지막 맞수였던 에디슨은 그  후 축음기, 전구의 발명 등
세계 최고의 발명가가 되었다. 만일 그가 전화기를 만드는  일에만 매달렸다면 지구의 역사
는 몇 년 더 후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저문 분야에서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즐거운 일이 생긴
다는 것을 그들이 보여줬다 고나 할까. 벨과 에디슨은 사람들의 생활을 위해서 경쟁한 아름
다운 맞수였다. 촛불이 자기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듯이 이들도  자신의 전 생애를 마친 노
력으로 인류에게 편리함을 선물해 준 것이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왕산악, 우륵
  "둥 두두두둥. 땅 땅다다다 땅."
  "호오, 그 소리가 참으로 아름답구려. 음악 속에 흐르는 웅장한 기상이 짐의  마음을 더욱
벅차게 하오."
  "송구스럽습니다. 마마."
  왕산악의 거문고 연구를 듣던 양원왕은 매우 흡족한 얼굴로 칭찬하였다. 왕산악은 임금의
명을 받아 진나라의 칠현금을 고치어 고구려에 맞는 여섯 개의 현으로 구성된 거문고를 만
들어 왕에게 자신의 연구 결과를 보여주었다. 양원왕 8년인 552년, 중국 진나라에 다녀온 사
신이 처음 보는 악기를 들고  왕산악의 집으로 찾아왔다. 평소에 노래와  춤에 관심이 많고
또한 악기도 잘 다루는 왕산악은 사신이 들고 온 악기가 무척이나 궁금하였다.
  "대마리간, 이게 요즘 진나라에서 유행하는 악기입니다."
  "호오, 그래요. 아주 진기한 것을 구해오셨구려. 흐음 줄이 일곱 개고."
  "예, 그래서 중국에서는 칠현금이라고 합니다."
  대신은 왕산악에게 아주 공손히 소개했다. 왕산악은 당시 고구려의 국상(현재의 국무총리)
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 악기를 한번 연구해 보겠소?"
  "송구스럽게도 켜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워낙 음악에는 재주가 없어서.  하지만 대
감께서 음악을 좋아하시어 이렇게 가지고 온 것입니다."
  "허허, 이렇게 답답한 사람을 보았나. 악기를 가져올 때면 그 소리내는 방법을  익혀 오는
것이 마땅한 것인데."
  왕산악은 앞에 놓인 악기의 소리가 듣고 싶었으나 켤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답답해했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칠현금에 대한 소문을 내어 칠현금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을 찾았
다. 하지만 고구려에는 아무도 그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악
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견디다 못한 왕산악은 자신이 직접 칠현금을 연주
하는 법을 깨우치기로 하고 이리저리 소리를 시험해 보았다.  평소에 노래와 악기에 관심이
많았던 탓인지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칠현금을 켤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소리가 훌륭하기는 했으나 왕산악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고구
려의 웅장한 기상이 실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그는  고구려에 맞는 새로운 악기를 만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음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역시 소리를 아름답게 내기 위해서는 뒤 판은 밤나무가  좋고, 위 판은 오동나무로 하는
것이 좋겠구나."
  이리하여 왕산악은 여러 시험을 거친  끝에 줄은 여섯 개가 적당하고,  뒤 판은 밤나무로
위 판은 오동나무의 속을 비운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동나무 위에
홰나무로 여섯 줄을 지탱하는 괘를 16개 두어 오늘날  거문고라고 불리는 악기를 만들었다.
거문고를 타는 방법은 단단한 대나무로 만든 체인 술대를  오른손에 끼우고, 왼손으로는 16
개의 괘를 따라 뜯도록 되어 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맑고 점잖은지 고구려의 기상처럼 우
렁찼다.
  어느 날 그가 혼자서 악기를 타고 있는데  난데없이 검은 학이 날아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왕산악은 자신이 타고있는 악기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래 검은 학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는 것으로 이름을 짓자. 검을  현, 학 학, 악기
금. 현학금 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현학금을 우리말로 하면 '검은 금'이다. 이 악기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그 이름
이 변하여 거문고라고 불리워졌다.
  고구려에서 거문고가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퍼져갈 때, 신라에서도 새로운 음악에 대한 관
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551년 봄, 신라 진흥왕은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시찰하고  있었
다. 진흥왕이 낭성(오늘날의 청주)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아주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아주 듣기 좋은 소리구나. 이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임금의 명령을 받은 신하들은 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임금 앞에 데리고 왔다. 왕은 이들을
자신에게 가까이 오게 하고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늘 아래 이런 재주는 다시  없으리라. 악기의 소리도 귀를 즐겁게  하지만 그 곡 또한
뛰어나도다. 나를 위해 한 곡 더  들려주오."
  우륵은 그 자리에서 진흥왕을 찬양하는 곡을 지어 진흥왕을 즐겁게 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고, 또 그 악기의 이름은 무엇인가?"
  "네, 소인이 이름은 우륵이라 하옵고  이쪽은 저의 제자 이문이옵니다. 그리고  이 악기의
이름은 가야금이라 하옵니다."
  "가야금이라..."
  진흥왕은 우륵의 가야금 타는 소리에 탐복하여  우륵과 그의 제자를 왕궁으로 데리고  갔
다. 우륵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주를 지녀 보리피리, 버들피리를 만들어 부는 등
소리를 내거나 듣는 일을 몹시 좋아했다. 이러한 우륵에게 그의  음악적 재질을 살릴 수 있
는 기회가 왔다. 그는 가야의 서울에서 왔다는 한 나그네를 만나게 되어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나그네는 이상한 악기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할아버지, 그 악기 이름이 뭐예요?"
  "응, 이건 당나라에서 들어온 건데 쟁이라고 부른단다."
  쟁은 명주실을 꼬아 만든 13줄로 구성되어 오른손 손가락으로 줄을 뜯으며 연주하는 악기
였다. 우륵은 나그네와 친하게 지내며  쟁을 배우기 시작했다. 수업이 시작되면서  나그네는
우륵의 악기 다루는 실력에 감탄하고 말았다. 실제로 우륵은  보름만에 쟁을 마음대로 다루
게 되었다. 나그네는 이러한 우륵을 정식으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마을을 떠나면서 당부
했다.
  "나는 일찍이 너같이 음악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아이를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런 시골
에서 있지 말고 나를 찾아서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도록 해라."
  그 후 우륵은 나그네를 찾아가 음악을 공부하였고 일년 뒤에는 나그네의 추천에 의해 궁
중의 악사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가야의 가실왕은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줄이 열세 개인 쟁과 줄이 스물다섯개인 비파를 보면서 가야의 악기가 없는 것을 아쉬워했
다. 가실왕의 명을 받은 우륵은 왕이 보내준 목수와 함께 새 악기 연구에 들어갔다.  우륵은
목수가 나무를 깎아오면 소리를 내어 그 음질을 비교해 보았다.
  "역시 몸통은 오동나무로 하는 것이 좋겠군. 그리고 그 위에 열두 줄을 올리자."
  몸통을 오동나무로 정한 우륵은 그 위에 열두 줄을 올리고 기러기발 모양의 괘를 괴어 줄
의 소리가 고르게 하고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그리고 가운뎃손가락으로  줄의
머리를 퉁기면, 왼손 각 손가락으로 기러기발 바깥쪽을 눌러다 놓았다 하면서 줄이 떨려 소
리가 나도록 했다. 악기가 완성이 되자 가실왕은 몹시 기뻐하며 가야의 이름을 따 가야금이
라 부르도록 했다. 이에 우륵이 가야의 여러 곳을 다니며  가야금에 맞는 곡을 작곡하기 시
작하여 마침내 12곡을 완성하자, 가실왕은 이 12곡을 가야국의 음악으로 삼았다.
  하지만 가야는 날로 쇠약해지고 신라의  힘은 강대해져 기어이 신라에게  망하고 말았다.
이에 나라 잃은 설움에 낭성에서 가야금을  치며 후진양성에 힘쓰던 우륵은 진흥왕을  만나
신라의 궁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가야금의 소리는 은은하고 아름다워 우리 신라인들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는 악기다. 나
는 이 가야금을 모든 신라인들이 즐길 것을 명하겠다."
  "마마, 아니 되옵니다. 가야금은 신라의 소리가 아니라   가야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어떻
게 신라인들이 이미 사라진 가야의 음악을 즐길 수 있단 말입니까!"
  "무슨 말이오. 가야는 우리 신라와 합병을 맺어 이미 우리의 땅이 아니오. 그런데 어찌 경
들은 아직도 가야를 미워하고 있소. 가야인도 우리 신라인임을 잊었단 말인가!"
  진흥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야금을 온 신라에서 즐기도록 했다. 그래서 신라
사람들은 명절 때가 되면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가야금을 즐기며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
다. 거문곡을 만든 왕산악은 무려 187곡을 작곡하여 고구려의 힘찬 기상을 유감없이 전달하
였으며, 우륵은 이후 국원(충주)으로 가, 계고,  법지, 만덕 이라는 제자를 양성했다.  우륵이
가야금을 치던 강가의 절벽 위를 사람들은 탄금대라고 불렀다.
  이 두 사람은 조선시대의 박연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음악가로서 꼽히는 사람들이다. 그
들의 음악적 재능과 소리를 연구하는 열정은 보통사람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
다. 이들에 의해서 고구려와 신라의 백성들은  음악을 들으며 노래와 춤을 즐길 수  있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악기를  가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삼국시대에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는 힘뿐이 아니라  음악에서도 서로가 앞선 문화인임을  뽐내려 했다.
그리고 가야금과 거문고를 만들어 낸 우륵과 왕산악은 그 국가를 대표하는 음악인으로서 손
꼽히는 맞수였다. 이들이 만나 서로 어울려 음악을  연주했다면 어떠했을까? 웅장하고 강한
힘을 지닌 거문고와 애절한 사연을 말하는  듯한 가야금이 어우러진 국악을 들으며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아련히 떠오르는 산과 강의 어우러짐에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악성과 천재-베토벤과 모차르트
  "모차르트 선생님, 음악을 공부한다는 학생이 찾아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또 한 명이 왔군. 날마다 자신이 음악의 천재라며  수차례 연습을 거듭해 자기들 나름대
로 됐다 싶은 곳을 내 앞에서 연주하는군. 아무튼 들어오라고 해요."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방문 또한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며 그를 맞이했다. 하지
만 베토벤으로선 과감한 도전이었다.
  "모차르트 선생님, 전 단순한 연주가  아니라 뭔가 주제에 대한  즉흥 연주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베토벤의 태도에 모차르트는 흥미를 느꼈다.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호오 그래. 아주 자신만만하군."
  모차르트 가 주제를 정해 주자 이내 베토벤의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실로 아름다운 소리의
흐름이 이어졌다. 모차르트는 그 음률을 즐겁게 감상하고는 베토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좋았어. 아주 훌륭해! 자네는 어디서 그렇게 음악을 배웠나? 자네는 장래성이 충분히 있
어."
  당시 음악의 대가라고 불리던 모차르트에게서 칭찬을 받은 베토벤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 오늘은 마침내 저 위대한 대 작곡가 모차르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저
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시고 매우 훌륭하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어머니..."
  16세의 나이에 빈으로 홀로 음악공부를 하러 온 베토벤에게는 말로 다 하지 못할 감격스
러운 일이었다. 이는 바로 현재 음악의 천재라 불리는  모차르트와 음악의 악성으로 불리는
베토벤과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었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의 천재라는  칭송을
들으며 유럽 전역에서 자신이 지닌 음악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1756년 1월 27일 밤
8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음악작곡가인 아버지의 밑에서  4세  때부터 엄격한 음
악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도 모차르트가 천부적인 음악가임을 알지는 못했다.  7
세 무렵에는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시작하여 그가 8세 때는 그의 최초의 소나타들이 파리에
서 출판될 정도였다.
  "자 지금부터 일곱 살인 이 아이가 건반에 천을 두르고 연주를 해 보이겠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빈의 많은 귀족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
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저 어린아이가 어떻게 건반을 천으로 가리고 피아노를 칠 수 있단 말인가?  거짓말
도 정도가 지나치군."
  "따라라랑!"
  하지만 모차르트는 그를 지켜보던 많은 귀족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실제로 아름다
운 피아노 연주를 해냈다. 이후 모차르트의  소문은 전 유럽을 흥분으로 들끓게 했다.  그의
신동 기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열두 살에는 자신의 최초 오페라 극 {거짓 바보 아가씨}를
작곡하자 그의 천재적인 음악성에 두려움을  느낀 많은 음악가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그 뿐 아니라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뛰어난 어학실력으로 모차르트는 각  나라에
맞는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에 비하면 베토벤은 어린 시절에는 그리 큰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으며, 집안도 가난
하여 어린 나이에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생활을  했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
고 어머니는 그의 나이 16세에 폐병으로 돌아가셨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베토벤은 굴하지 않고 이러한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베토
벤의 음악성을 믿는 발트슈타인은 그에게 경제적인 후원을 베풀어 그가 대학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사람이었다. 베토벤은 대학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배웠으며, 당시 프랑스에서 일
어난 혁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음악의 도시 빈으로 가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와 두 동생의 생계를 맡고  있었기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결코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라는 신념으로 틈틈이 작곡을 하면서 언젠가 다가올 빈 유학
을 꿈꾸었다. 이렇게 고뇌하는 베토벤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빈에서 모차르트에게 그
가 칭찬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은 하이든이 런던으로 가던 중에 본에 들르게 되었다. 프란츠
후작은 하이든에게 베토벤을 소개하였고 베토벤은 자신이 작곡한 많은 악보를 안고 그 중에
서 둘을 골라 하이든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악보를 읽어보던  하이든은 밝은 표정으로 베토
벤에게 말했다. 
  "자네는 훌륭한 음악적 재능을 가졌어. 꼭 빈에 오도록 하게. 내가 지도해 줄 테니까."
  "하지만 보살펴야 할아버지와 두 동생이 있어서..."
  베토벤은 하이든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이 처한 생활을 말해 주었다. 하지만 하
이든은 베토벤의 음악을 성장시키고 싶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프란츠 후작께 자네 가족 앞으로 특별 지급을 하도록 의논하겠네."
  베토벤은 드디어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위해서 빈으로 출발하게  된다. 빈에 도착한 베토
벤은 음악을 사랑하는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공작의 집에서는 매주 금
요일마다 연주회가 열렸는데 어느 날 베토벤의 차례가 되었다.  그가 연주를 하자 청중들은
모두 그의 음악 속으로 빠져들어 이내 환호성을 올렸다.
  "즉흥 연주를 부탁합시다! 이미 악보로 나와 있는 음악 말고요!"
  한 청중이 외치자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이렇게 dsu주된
그의 음악은 언제나 정열적이며 듣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숨은 인재가 있었군. 베토벤이라는 저 사람 아주 대단하군."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음악가가 되겠는걸. 아주 독특해!"
  당시 빈의 음악은 모차르트풍의  섬세하고 우아한, 맑고 경쾌한  흐름의 매끄러운 음악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베토벤의 연주는 정열적이고, 독특한 열기를 지녔을 뿐 아니라  즉흥
적으로 만들어 내는 그의 음악은 다채롭고 훌륭했다. 이렇게 몇 번의 연주회에 출연하는 사
이에 베토벤은 빈의 귀족들 사이에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을 무렵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에 유럽 전체는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12월 14일  그의 추도미사에는 프라하의 저명한
음악가 전원과 다수의 시민들이 4천 명을 수용하는 교회를  가득 메웠다. 모차르트는 {피가
로의 결혼}, {돈 조바니}, {레퀴엠}, {마적} 등  수많은 음악작품을 남긴 천재적인 음악가였
다. 그의 음악은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며 마치 영혼을 달래는  마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뛰어난 음악가를 잃은 유럽은 동시에 새로이 떠오르는 베토벤을 만나고 있었다. 베토벤은
하이든에게서 작곡을 배우면서도 틈틈이 요한 생크와 대위법의 대가인 알브레히트 베르거에
게 열심히 음악을 베웠다. 모차르트가 타고난 천재성으로 그의  음악성을 발휘한 반면에 베
토벤 그는 맹렬한 노력과 강철같은 의지에 의하여 많은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이후 베토벤
은 1799년 {제 1번 교향곡}을 완성하여 그 발표회에서 대단한 찬사를 받으며 자신의 음악성
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거대한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가 점점  들리지
않기 시작했던 것이다. 음악가가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엄청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죽음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가 동생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인 하이리겐슈타트의 유서가 그것이다. 하지만 베토벤은 실의 병, 그리고 청력의 약화를
이겨내기 위해 이 모든 아픔을 감수해 가며 들리지 않는 귀로 자신의 최대 역작인 5번 교향
곡 {운명}을 1808년에 발표하여 주변의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불편한 몸으로 적절한 음률에 악기를 사용했다는 것 뿐 아니라 그의 교향곡에 강하게 드
러나 있는 그의 인간적 고뇌와 방황, 그리고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는 위대한 의지가 수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이 정열적인 음악을 감상한 사람들은  다시 베토벤의 음악성에 혀
를 내둘렀다. 그 후 베토벤은 독창과 합창이 함께 어우러진 {제 9번 교향곡}을 작곡했다. 이
것은 최초로 교향곡에 사람의 음성을 가미했다는 점에서 아주 새로웠다. 이 곡이 처음 발표
되었을 때 사람들은 베토벤의 명성을 기억하며 연주회로 몰려들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각
악장이 끝날 때마다 박수가 터져  나왔으며, 마지막 장이 끝났을  때는  청중들의 열광적인
박수가 극장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지휘를  하고 있던 베토벤은 안타깝게도  그  소리를 들
을 수 없었다. 그는 거의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무감각하게 서 있는 베토벤을 보다  못한
한 연주자가 관객석으로 그의 몸을 돌려주자  그제서야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이 성공했음을 
귀가 아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제 9번 교향곡}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 몸이 날로 쇠약해진 그는 1827년 3월 24일  혼수
상태에 빠졌다. 3일 후 번개 치고 뇌성이 울리는  때에 순간적으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
는 두 눈을 부릅뜨고 오른손 주먹을 치켜올리며 허공을 노려보다가 이내 숨을 거두었다.
  모차르트가 신이 내린 음악가라면, 베토벤은 인간의 노력이 만들어낸 음악가였다. 또한 모
차르트는 음악의 천재이며, 베토벤은 악성이라 불리운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부드럽고  섬세
한 반면 베토벤의 음악은 언제나 열정적이며 인간의 고뇌와 힘이 가득 실려 있다고 평가되
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은 비록 같은  시대에 음악으로 마주서지는 않았지만 지
금까지도 그들의 음악은 많은 사람들의 귓가에 그리고 가슴 깊이  살아 숨쉬고 있다. 두 사
람은 앞으로도 영원히 시공을 초월한, 위대한 음악의 맞수로 우리의 가슴 깊이 기억될 것이
다.


        제3부 영원한 스타는 없다
    코트 위의 흑과 백-매직 조슨, 래리 버드
  "존슨 맹렬한 드리블! 슛, 골인!"
  L.A. 레이커즈의 명 가드, 2미터 6센티미터의 매직 존슨, 그의 현란한 움직임에 보스턴 셀
틱스의 수비수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NBA 최고의 영웅 매직 존슨의 플레이는 상상을 넘어
서는 날타로운 패스와 상대의 허를 찌르는 드리블로 관중의  환호성을 이끌어 내었다. 하지
만 이에 맞서는 보스턴 셀틱스의 래리 버드는 존슨의 득점을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버드에게 패스. 볼 잡은 버드 곧 바로 3점슛. 아 골인입니다."
  "저렇게 수비가 붙는데도 3점슛을 성공시킨다는 것은 대단한 플레이입니다."
  "와아아아아!"
  관중들은 두 선수의 플레이에 환호성을 지르며 열심히  응원했다. 숙명의 라이벌 L.A. 레
이커즈와 보스턴 셀틱스의 대결은 미 프로농구 최대 관심거리인 만큼 각각 팀을 대표하는
두 선수의 플레이는 관중을 완전히 농구에 빨아들여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예측 불허의 슛을 날리는 버드, 총알 같은 순발력의 드리블 귀재인 존슨...경기가 진행될수록
열기를 더해 갔다.
  매직 존슨은 1991년 4월  16일,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에서 벌어진  댈러스 매머릭스와의
경기에서 미국 농구사상 최대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존슨, 볼 잡았습니다. 두 선수 사이를 가로질러 골 밑으로 패스! 볼을 잡은 앤드류 슛 골
인입니다! 드디어 매직  존슨이 어시스트부문 최고기록을 깨는 순간입니다."
  "와아아아아!"
  존슨이 어시스트를 성공시키자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10여분 이상 기립박수를  치면서
그의 놀라운 플레이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는 이 날 19개의 어시스트를 성공시켜 이
부문 최고기록 보유자인 오스카 로버츠의 9천 8백 87개를 열 개나 앞지르는 경이적인 기록
을 수립했다. 오스카 로버츠가 14시즌 동안 자신의 최고기록을  세운데 반해 존슨은 12시즌
만에 세운 기록이라 더욱 값진  것이었다. 존슨과 비견할 만한 래리  버드는 거의 흑인들이
잠식한 NBA에서 '백인농구의 자존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미터 6센티미터의 키에서 쏘아대는 슛은 거의 링에 꽂히어 득점을 올림은 말할 것도 없
고 팬들을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게 만든다. 그는 골  밑에서든 3점슛 거리에서든
기회만 생기면 슛을 쏘아 득점을 올려 팀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1992
년 8월 18일 은퇴를 선언하기 전까지 래리 버드는 13년 동안 총 2만 1천 7백 91점을 기록하
여 NBA 역사상 열한 번째로 많은 득점을 올려 게임당 24.3점이라는 높은 득점력을 자랑했
다.
  존슨도 득점에서는 프로데뷔 이후 2점 슛 50퍼센트, 3점슛  30퍼센트 이상의 성공률을 유
지하여 결코 슛에서도 버드에 뒤지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슛을  쏜 뒤 잽싸게 골 밑
으로 달려가 리바운드를 따내는 재주도  겸비해 '만능 플레이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두
선수의 대결은 NBA 최고의 명문팀 L.A. 레이커즈와  보스턴 셀틱스의 자존심 싸움에서 시
작된다.
  매직 존슨은 79년 미시간주립대학을 대학선수권 정상에 올려 놓은 후 L.A. 레이커즈에 입
단하여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았
던 존슨은 프로에 입단해서도 끊임없이 실력을 갈고 닦아 그의 명성을 서서히 높여갔다. 압
둘 자바, 자말 월크스 등 쟁쟁한 스타들을 데리고서도 중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던 L.A. 레이
커즈 팀을 79년 이후 다섯 번이나 NBA 타이틀을 차지하게  하는가 하면 팀을 여덟 차례나
연속으로 동부리그에서 우승시켜 정상의  팀으로 이끌었다. 농구공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틈이 생기면 팀의 선수들이 골을 넣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의 훌륭한 어시스트 솜씨는 농구
팬들은 물론 선수들도 긴장하게끔 만들었다.
  "존슨의 화려한 플레이는 농구를 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정말로 멋진 드리블
과 패스입니다."
  "존슨이 공을 잡으면 1대 1로는 도저히 뺏을 수 없어요."
  이러한 말들이 존슨의 월등한 기량을 대변해 준다. 그의  본명은 어빈 존슨 주니어이지만
농구를 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렸다는 이유로 '매직'이란 애칭이  붙은 그야말로  미국인
들의 우상이 되고 있다.
  '인디언 촌놈'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래리 버드는   대학시절부터 '백인의 마지막 자
존심'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78년 보스턴 셀틱스에 입단했다. NBA에 입문한  버드도 존슨과
마찬가지로 비지땀 흘리는 노력 끝에 팀의 중심이 되어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시작했
다. 그의 슛은 경이로울 만큼 정확하고 빨랐다. 이러한 버드의  활약에 힘입어 보스턴 샐틱
스는 81년, 84년, 86년 세 차례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버드는 득점 뿐 아니라 리바운드
와 어시스트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하여 게임당  10개의 리바운드와 6.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여 전천후 선수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79년 이후 존슨이 이끄는 L.A. 레이커즈와 버드가  이끄는 보스턴 셀틱스는 NBA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결승전에서 대결을 펼쳤으며,  그
때마다 어느 팀이 우세하다고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대등한 실력을 나타내었다. 두 팀간의
대결은 곧 존슨과 버드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매직 존슨은 내가 두려워했던 유일한 라이벌이며, 내가 상대한  선수 중 가장 뛰어난 기
량을 보여준 선수이다."
  "그는 나의 기량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진 선수이다."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는 서로 겸손한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서로가 가장 두려워하는
라이벌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들이 NBA에서 가장 뛰어난 기량을 지닌 최고의 라이벌임은
MVP 수상 경력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래리 버드는 84, 85, 86년 3년 연속 선수로서
는 최고의 영예인 MVP를 차지했다. 매직 존슨도  87, 89, 90년 세 차례나 MVP에 올라  두
선수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대결도 91년 이후에는 볼
수 없게 되었다. 91년에는 존슨이, 92년에는 버드가 각각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버드는 선수생활 중에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들어 허리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
끼기 시작했다. 30대를 넘긴 나이에도 시리즈 전 경기에 출전한다는 것은 그에겐  무리였다.
이후 버드는 슬럼프에 빠져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꿈
의 팀' 일원으로 전 경기에 출전하였으나 여덟 경기에서 67득점이라는  부진한 성적으로 자
신의 은퇴가 가까이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해  래리 버드는 '지난 2년간 나를 괴롭히
던 척추부상의 후유증 때문에  정들었던 코트를 떠나기로  결심했다.'라는 고별사를 남기며
쓸쓸히 코트를 떠났다. 백인의 우상이던 그의 은퇴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90년대에 들어오면서 AIDS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병으로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기 시
작했다. 이 병은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되기 때문에 병원균의  정체와 치료백신의 개발에 장
애요인이 많아 지구 역사상 최대의 문제로 지목되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이병에 대해 사람
들은 그저 무관심했고 점점 AIDS  환자들은 늘어나기만 했다. 이때  존슨은 폭탄과도 같은
선언을 하게 된다.
  "저는 지금 AIDS에 걸려 있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밝히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이 병
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AIDS에 대항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병
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존슨의 선언에 미국인들 뿐 아니라 전세계 농구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걸리면 무조
건 사망으로 이어지는 AIDS에 농구의 영웅 존슨이 걸렸다는 것은 거대한 충격이었다. 하지
만 이 병을 숨기지 않고 용기있게 발표한 그에게 또 한 번의 찬사가 보내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미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부시는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
낸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미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라고 격려해 주었다. 존슨은 이후 20
세기의 페스트라 불리는 AIDS를 퇴치하기 위해 전  재산을 모아 연구소를 설치하여 또 다
시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존슨과 버드는 미프로농구를 팬들로부터 사랑 받게 하는 촉매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선
수들의 연봉을 올리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들이 달구어 놓
은 코트의 뜨거운 열기는 이후 등장한 마이클  조단, 찰스 버클리, 샤크 오닐 등으로 이어지
고 있다. 영원한 스타는 없다는 말처럼 새로운 스타들이 그들의 자리를 천천히 메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게임도  팬들의 가슴속에 환호성과 함께 자리  잡은 버드와 존슨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병은 단지 사라질 뿐이다-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
  가장 남자다운 스포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복싱이라고 대답할  것
이다. 일정한 링 안에서 상대방을 이기기 위하여 끊임없이 주먹을 내밀고, 또 상대의 날아오
는 주먹을 피하기 위하여 몸을 움직여야 하는 힘들고도 힘든 스포츠, 복싱. 그래도 굳이  복
싱을 하려고 하는 젊은 선수들이 많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스포츠의 세계에서는 1등만이
존재한다는 진리 앞에 오늘도 수많은 선수들이 샌드백을 두드리며 최강자가 되기 위해 비지
땀을 흘리고 있다. 훈련에서 땀을 많이 흘린 선수만이 챔피언의  영광된 자리를 지킬 수 있
는 경기가 바로 권투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복싱 선수들이  정상의 자리인 챔피언이 되었다
가 쓸쓸히 쓰러져 가는 모습을 많이 보아 왔다. 그런 선수들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영원
한 맞수가 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헤비급 프로 복싱을 양분하며 전 세계인들의 눈과 귀를 붙잡은 무
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 당시 복싱을 좋아하던 팬들은 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귀를 기
울였다. 그만큼 두 선수는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었고, 또 누구보다도  열심히 권투를 했다.
두 선수 모두 맨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했을 뿐 아니라 공허 누구보다도 강한 주먹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 지구촌의 복싱계를 주름잡았던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복싱 인생은 끊
임 없는 화제를 몰고 다니며 팬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들의 복싱 인생을 살
펴보면 약간은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지만 같은 복싱 선수라는 이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
기에 재미있는 일화도 많이 있다.
  무하마드 알리.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겠다.'
  세계 권투계의 명언처럼 언제나 따라 다니는 이 말은 알리가 경기장에 나가면서 기자들에
게 한 말이었다. 무하마드 알리는 복싱을 하면서 항상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사람
들은 알리를 두고 '떠버리'라는 별명가지 지어 주었다. 맨주먹 하나로 세계를 평정한 사나이
무하마드 알리...
  복싱의 제왕. 아직까지도 그는 헤비급의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물론 오래 전에  은퇴했
지만 그를 아끼는 팬들은 아직도  그가 경기하는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알리는
영원한 헤비급의 챔피언이라고 말한다. 경쾌한  발놀림. 번개처럼 빠른 펀치, 예리한  눈...그
앞에서 수많은 헤비급 선수들은 기가 죽었고 패배자의 명예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알
리의 앞에는 항상 승리라는 말만이 남아 있었다. 무하마드 알리가 이 세상에 권투 선수로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올림픽이 열렸을  때의 일이다. 이미 천
재적인 복싱 재질을 타고난 알리는 미국의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승승장구하며 마침내 국
가 대표가 되었다. 복싱 선수로서의 명함을 미국 국민들에게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로마 올
림픽에서도 알리는 여유 있게 결승전에 올랐다. 질풍처럼 뻗는  알리의 강펀치에 모든 선수
들이 무릎을 꿇었다. 결승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알리는 올림픽에서 라이트헤비급의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이 때부터 세계가 알리
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훈련만이 살길임을 안  알리는 결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침내 2년 뒤  '늙은 곰'이라 불리는 소니   리스튼을 7회에 통쾌하게 KO로
눕히고 마침내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무하마드 알리의 세계가 열린 것이었다. 그러나  승자
의 길은 역시 험하고 어려웠다. 무적이라 일컬어지던 알리도  새롭게 등장하는 강자들 앞에
서는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알리는 챔피언에 있으면서 벨트를 빼앗겼다
가 다시 뺏는 과정을 네 번이나  반복했다. 그 가운데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가장 오래 기
억되고 있는 경기가 바로 권투의 맞수인 조지 포먼과 1974년 경기를 가졌을 때일 것이다.
  조지 포먼은 헤비급의 가장 촉망받는 해머 펀치의 소유자였고, 알리는 도전자로서 강인한
승부사였다. 그러나 결과는 알리의 KO 승. 알리의 노련미가 포먼의 젊음을 이기고 만 것이
다. 알리는 늘 권투를 하면서도 한 가지의 문제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것은 흑인가  백인
의 인종 차별 문제였다. 자신 스스로가 흑인이었기에 백인들에게서 받는 고통은 일반인들의
이상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챔피언이 된 후에도 흑인으로서의 설움은 여전했다 자연 백인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알리는 흑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가장 훌륭
한 권투 예술가로 추앙을 받았지만 백인들에게는 언제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알리는 자신이
권투를 해서 번 돈으로 못하는 흑인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권투를 그만두고 파킨슨씨병에
걸려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불굴의 투지로 딛고 일어서 지금은 세계의 스포츠 대사로 열
심히 활동하고 있다.
  조지 포먼.
  1993년 6월 8일. 미국의 어느 복싱 경기장.
  거구의 사나이들이 링 위에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심히  펀치를 주고받았다. 한 사나이
는 나이가 젊어 몸을 빨리빨리 움직이며 공격과 수비를 적절히 취하는 반면 다른 한 선수는
거구의 몸집으로 마치 곰이 움직이듯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버지와 아들이
권투 시합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움직임이 느린 거구의 사나이는 그리
지친 기색도 없이 열심히 손을 내밀어 상대방에게 펀치를 먹였다. 그러나 주먹에는 이미 힘
이 빠져 있었다. 거구의 사나이가 주먹을 맞고 휘청거릴 때마다 관중들은 안타까운 듯한 신
음소리를 밖에로 토해냈다. 거구의 사나이는 열심히 상대 선수를 공격하고 끌어안았다. 얼굴
에는 굵은 땀방울이 비오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거구의 사나이는 한때 주먹 하나로 세계를 평정했던  조지 포먼이었다. 권투 선수로서
는 이미 환갑이 지났다고 할만큼 포먼의 나이는 많았다. 이에  비해 포먼과 싸우고 있는 선
수는 포먼 보다 자그마치 스무 살이나 어린 선수.
  경기를 지켜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 나이에 무슨 권투냐고 했지만 포먼은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싸웠다. 마흔 네 살의 조지 포먼, 그리고 그물 네 살의 토미 모리슨. 이 경기는 챔피
언 벨트가 걸린 아주 중요한 경기였다. 당연한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이 경기에서 포먼은 판
정으로 패하게 되면서 영원히 링을 떠났다. 다시 한번 은퇴를 공식 선언한 것이었다. 알리의
가장 강력한 맞수였으나 경기를 주선하는 사람들이  알리만을 키워 포먼은 그리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와 한번쯤 경기를 치러 본 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포먼의 강펀
치에 혀를 내둘렀다. 어쩌면 알리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이 권투를  한 것이 포먼에게는
불행이었는지 모른다.
  1971년 3월 '세기의 철권'이라고 불리던  조 프레이저 선수를 2회에  KO시키고 처음으로
챔피언 벨트를 목에 건 조지 포먼. 1974년 알리에게 패하고  1976년 다시 챔피언 벨트를 찾
았으나 다시 다음해에 패배를 기록하고는  쓸쓸하게 링을 떠났다. 그런  조지  포먼이 40이
다된 나이에 다시 권투를 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하고 나섰다.   그리고는 거짓말 같은 기록
행진을 계속했다. 재기를 준비하면서 18명의  선수들과 싸워 모조리 KO  승을 거두었던 것
이다. 급기야 포먼은 당대 최고의 헤비급 복서로 아려진 타이슨에게 도전장을 던지기도  했
다. 성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조지 포먼은 많은 나이에도 불구, 후배들의  귀감이 될 수 있는
권투 인생을 살았다. 지금은 휴스턴이라는  곳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며  불우 청소년들을 위
해 건물을 짓고 희망을 주는 등대가 되어 그의 찬란했던 권투 인생을 회상하고 있다.

    진정한 승리-칼 루이스와 벤 존슨
  1975년 자메이카의 초라한 뒷골목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바싹 마른 소년은
보다 많은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골목 안을 달렸다. 드디어 마지막  배달을 마치자 소년은
하루 종일 비어 있던 배를 움켜쥐고 집을 향해 달렸다. 벤저민 시먼스 존슨 주니어, 14세.
  하루도 빠짐없이 자메이카의 지저분한 뒷골목을  달려야 만이 전기공사 인부인  아버지를
그나마 도울 수 있는 소년. 그런데 오늘은 이 일이 유난히 힘들게 느껴졌다. 아버지도  한계
에 부딪혔던 걸까? 그 날 저녁 초라한  식탁에서 어느 때보다도 지쳐 보이는 아버지가  조
용히 입을 열었다.
  "내 얘기를 잘 들어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전화공사 일로는 더 이상 살아가기가 힘들다.
무론 에드워드와 존슨이 도와주고 있긴 하지만 그걸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모자라니 이즘에
서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구나. 앞으로 삼일 후에 우린 캐나다로 간다."
  참으로 중대한 선언이었다.
  1988년 7만여 관중이 자리한 서울 올림픽  주 경기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
다. 남자 100미터 경기를 보기 위해 모여든 관중들은 곧 세기의 대결을 보게 됐다며 저마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 전 취리히 대회에서는 루이스가 이겼는데 오늘은 어떻게 될까?"
  "글쎄, 그때 루이스 기록이 아마 9초 93, 존슨이 10초였다지?"
  "벤 존슨이 그 동안 연습을 무섭게 했다는데...자넨 누가 이길 것 같나? 난 존슨이네."
  선수들이 드디어 출발선에 나타났다. 그 순간 관중석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다. 관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선수에게 쏠렸다.
  미국 육상 국가대표 칼 루이스, 85년 머데스토 대회  때까지 당당히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선수다. 그러나 그 후 엄청난 경쟁자의 등장으로 자신의 위치를 위협받고 있었다. 그래
서 그런지 유난히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벤 존슨. 27새 캐나다 육상 국가대표.  85년 쾰른 대회와 88년 취리히 대회를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세계기록을 세운 선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존슨은 오늘도 유난히  빛을 발하는
눈으로 결승점을 노려보았다. 유일한 경쟁자 칼 루이스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아마  그
는 살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캐나다로 향했던 그 날의 가족들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존슨 가족의 캐나다 이민 생활은 여전히 힘들었다. 생각처럼 쉽게  직업을 구할 수 없게 된
아버지가 다시 자메이카로 돌아가면서부터는 더욱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달리기 실력이 뛰어난 형 에드워드가 주정부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을 받아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드워드가 존슨을 운동장으로 불러냈다.
  "너, 자메이카에서 물건 배달할 때 생각나니?"
  "그럼, 형. 그때보다 넉넉하게 살지도 못할 걸 괜히 고향만 떠났다는 생각 가끔 하는걸."
  "존슨, 너 지금부터 저기까지 한번 달려 봐!"
  존슨의 달리기 실력을 측정해 본 형 에드워드는 곧장  존슨을 육상클럽으로 데리고 갔다.
육상 실력만 조금 있으면 숙박비와 식사대를 보조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클럽의 코
치에게 존슨을 소개하자 바로 테스트에  들어갔다. 그때 존슨은 11초  5를 기록했고 곧바로
육상클럽에 발탁되는 행운을 안게 되었다. 그의 재빠른 스타트를  발견한 코치는 그러한 비
상한 자질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코치는 이미 존슨의 빠른 스타트를 발견했던 것이다.
  '음, 잘 키우면 훌륭한 선수가 되겠는걸!'
  형과 함께 육상을 하게 된 존슨은 자주 형에게 시합을  요구했다. 그럴 때마다 형은 일부
러 사람이 많은 곳을 택해 시합을 했다. 언제나 자신감에  넘쳐 형에게 도전하곤 했지만 이
상하게도 존슨이 번번이 지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매번 망신만 당하자 존슨은 너무
나 분한 마음에 눈물까지 흘렸다.  게다가 사람들은 역시 형 만한  아우는 없다면서 형만을
칭찬하는 게 아닌가.
  "형 만한 아우가 없다고? 내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망신을 당할 일은 없을거다!"
  존슨은 형한테 질 때마다 밤늦게까지 이를 악물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럴 때면 형
에드워드는 저만치서 존슨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에드워드는 존슨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존슨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첫  기록이
11초 5밖에 안되던 존슨은 2년만에 10초 79라는 기록을 수립했고 이는 곧바로 대성의 길로
이어졌다. 80년에는 캐나다 국가대표로 발탁돼, 84년 칼 루이스가 9초 99로 금메달을 딴  로
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면서부터 서서히 세계 스포츠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
다. 그러더니 지난 87년 로마대회에서는 9초 83이라는 기록을 세워 기립박수를 받기에 이르
렀다. 그런 존슨을 보고 사람들은 노력형이라고 말했다.
  존슨의 10년간의 기록을 보면 이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10초 79의 기록을 9초 83으로 단
축시킨다는 것은 뼈를 깎는 노력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천재형으로 불
리는 루이스도 바로 이 점에서 존슨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존슨은 자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천부적인 재능이 우선 이고 노력은 그  다음이지만 나는  내 몸을 다듬는데 주력했습니
다. 오늘의 기록은 그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은 옳았다. 사실 1미터 80센티미터의 존슨은 단거리 선수로서는 키가 작은 편이라
중간 질주 때 보폭이 작고 상체의 움직임도 완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피나는 노력으로
그 모든 장애를 극복해 당당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달리기로 대성하겠다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그저 숙박비와 식대를 보조받아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달리기가 이제는 어느새 인생  자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은 무시할 수 없는 적 칼 루이스와 함께 세기의 대결을 보
러 온 관중들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여전히 결승점을  노려보는 존슨과 불안한 기색으로 존
슨을 의식하고 있는 루이스. 어쨌든 이들은 저 짧은 100미터에 또  한 번 인생을 걸어야 한
다. 선수들 못지 않게 바싹 긴장한 관중들 가운데 두 손을 모은  채 지그시 눈을 감은 노부
인이 있었다. 지난 2월 서독 실내  육상경기에서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 출전한 아들
의 경기를 보러 온 존슨의 어머니였다.  존슨은 물로 대수롭지  않다고  이야기했지만 기권
까지 했던 아들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극진한 모성으로 기도만 드릴뿐이었다.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9초 79!
  존슨의 어머니가 눈을 떴다.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쁠 때 흐르는 눈물만큼 복잡한 의
미를 담고 있는 게 또 있을까? 어머니는 존슨이 승리를 거둘 때마다 자메이카와 캐나다에서
의 생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세계의  통신들은
다투어 존슨의 승리를 보도했다.
  9초 79!
  실로 믿어지지 않는 기록이었다. 누구보다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칼 루이스였다.  패자의
반응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루이스는 존슨의 기록이 나와 있는 전광판에서  눈
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정말 추스릴 수 없는 포기였다. 서울을 비롯해서 신문이든  텔레비전이든 서울 올림픽 소
식을 전하는 매체는 하나같이 존슨의 승리를  톱기사로 삼았다. 그러나 4일 후인 9월  28일,
존슨의 승리를 톱기사로 삼았다. 그러나 4일 후인 9월 28일, 존슨을 칭송했던 각종 매체들은
이제 앞을 다투어 존슨의 금메달 박탈 소식을 알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문 봤나? 나 참 기가 막혀서 약물 복용이라니."
  "믿어지지 않는군. 아니 운동선수가 그런 불건전한 생각을 해도 된단 말인가?"
  남자 일백 미터 경기가 끝나고 서울 올림픽 도핑센터는 존슨의 소변을 체취 해 검사를 실
시했다. 그 결과 존슨의 소변에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검출되었고 이 사실이 즉각 IOC 의
무 분과위원회에 통보되었다. 다시 2차  검사가 실시되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실이
이렇게 판명되자 IOC는 금지 약물을  복용한 벤 존슨의 금메달을 박탈하고  앞으로 2년 동
안 국제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도 박탈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88 서울 올림픽 남자 일백 미터 금메달은 존슨의 라이벌인
칼 루이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선의의  경쟁
상대가 그렇게 불순한 스포츠인이었다는 사실에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 동
안 높아진 기록만큼이나 자만심이 컸던 존슨도  이번 사건으로 사기가  떨어졌다.  존슨 일
행은 출국을 서둘렀다. 예정을 앞당겨 출국하는 존슨에게 항공사 여직원이 물었다.
  "예정보다 빨리 돌아가네요? 왜 벌써 돌아가죠?"
  검은색 점퍼와 바지 차림의 존슨은 어머니와 조치의 등에  둘러싸여 대답을 회피했다. 공
항에 있던 시민들도 존슨에게 물었다.
  "정말 약을 먹었소?"
  "아니오, 그저 향수병을 견디기 힘들어서 일찍 떠나는 것뿐이오."
  더 이상 대답을 피할 수 없게 된 존슨은 이렇게 변명 아닌 변명 한마디만을 남긴 채 일행
과 함께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스포츠의 진정한 의미를 거스른 비겁한 자의 뒷모습이었다.

    민족 자존심의 한판 승부-황영조와 하야타
  1994년 10월 9일, 빅아치 스타디움에는 스포츠제전의 꽃  마라톤을 지켜보려는 많은 사람
들로 붐볐다. 경기는 10시임에도 불구하고 세 시간 전인 7시부터 1만여 명의 인파가 관람석
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제 12회 아시안게임에서 한국과  일본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경기
는 축구와 마라톤이었다. 하지만 축구에서는 이미 한국이 일본을 3:2로 제쳐 일본인들은 한
결같이 마라톤에서만큼은 꼭 자국선수가 이겨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서도 결코 내줄 수 없는 경기였다. 마라톤의 도착지점이  히로시마 시내 평화공원이었기 때
문이다. 이곳에는 한국인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있어 민족혼을  심는다는 의미도
함께 있었다.
  "황영조, 김재룡, 꼭 일본  선수를 누르고 우승해라. 이곳의  하늘에도 태극기를 휘날려야
재일 동포들도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게다."
  출발 30분 전 베를린의 영웅 손기정 옹은 두 선수를  바라보며 승리를 당부했다. 이 말을
듣는 황영조의 눈매는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한국 마라톤의  자랑인 그는 90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투혼을 발휘하여 앞서가던 일본  선수 모리시타를 극적으로 역전하여  금메달을
따내 일본의 마라톤을 앞서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는 경기  후 '더 이상 일본은 상대가 되
지 않는다'라고 말하여 영원한 숙적 일본 마라톤에 당당하게 승리를 선언했었다.
  "일본 선수와 경쟁한다는 생각은 이미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나의 적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경기에서 w의 최고기록인  2시간 8분 9초를 깨고 일본 선수
고마다가 보유하고 있는 아시아 최고 신기록인 2시간 7분 35초를 보기좋게 깨는 것이 목표
입니다."
  황영조는 경기 전부터 자신감에 차 있었고 여유있게 일본  마라톤을 꺾을 것을 장담했다.
이에 일본은 자국 선수들이 유리하도록 마라톤  코스를 초반에 언덕진 곳에서 출발하게  했
다. 이 경기에 한국은 황영조(2시간 8분 9초), 김재룡(2시간 9분 30초)을  일본은 하야타(2시
간 10분 37초), 스즈키(2시간 11분 04초)를 출전시켜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패배를 만회하려
고 잔뜩 벼르고 있었다.
  "황영조, 파이팅! 힘내라!"
  "스즈키, 하야타, 이번에는 꼭 이겨라!"
  "파앙!"
  열띤 한일 응원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심판의 출발총성이 경기장에 울려퍼지자 11개국  16
명이 힘차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출발  5분 뒤 예상대로 한국과  일본 선수들이 선두그룹을
형성하며 레이스를 시작했다. 일본 선수들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특수 선글라스를 쓰
고 나와 승부욕에 대한 강한 집념을 드러냈다. 이 대회는  한일 마라톤 자존심 싸움 외에도
신발경쟁 또한 치열했다. 세계 마라톤화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 아식스사가 자국 선수
들에게 내리막 전용 마라톤화를 공급하여 출전시켰고 한국 또한 코오롱이 처음으로  마라톤
전용화를 개발하여 황영조 선수에게 지급함으로써 경기뿐만 아니라 양국의 마라톤화에 대한
기술 경쟁도 아울러 진행되어 관심을 집중시켰다.
  "오늘 날씨는 약간 구름이 끼었고요, 낮 최고 기온이 26도로 약간 더운 날씨가 계속될 것
으로 예상됩니다."
  "네, 마라톤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닙니다. 하지만 기록면에서나 경험면에서 한국 선수들이
일본 선수들을 무난히 누를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좋은 기록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
습니다."
  온 국민들은 일요일 아침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선수들을 응원하였고 방송국도 현장  생중
계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처음 내리막 8.3km가 부담이 되었는지 황영조는 앞으로 나오지
않고 뒤에서 천천히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하며 힘을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 줄곧 4위를  지
키며 달렸다.
  "아, 황영조 선수 10km  지점에서 선두로 달려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하야타,
스즈키, 김재룡 선수가 따르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 선수들은 철저히 서로 경계하며 무리한 체력소비를 줄이기 위한  눈치경쟁이
치열했다. 그래서 선두로 앞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구간기록도 이미 아시아  기록과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황영조가 앞서 나가자  놀란 일본 선수들은 황영조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선두그룹이 확실하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국 선수 두 명, 일본
선수 두 명, 중국 선수 두 명 총 여섯명이 레이스를 진행했다. 하지만 아무도 중국 선수들에
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경쟁의 상대가 아니었다.
  "아 갑자기 하야타가 스퍼트를 시작했습니다. 예상 밖의 질주입니다."
  하야타와 스즈키를 견제하고 있던 황영조로서는 뜻밖의  상황이었다. 옆에는 스즈키가 달
리고 있었다.
  '지금은 20km 지점이야. 아무리 선두로 나선다 해도 무리하게  달리면 마지막 35km 지점
에서는 힘이 떨어질텐데, 혹시 일본은 스즈키를 우승시키기 위해 하야타에게 무리하게 달릴
것을 지시하여 뒤따르는 내가 힘이 빠지면 스즈키가 마지막에 스퍼트해서 우승시키려는  작
전이 아닐까?'
  아무리 올림픽 우승자라 해도 초반에 무리하게 달린다면 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황영
조는 조심스럽게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하야타는 이미 1백m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하야타 잘 달린다! 하야타, 하야타!"
  하야타가 선수에 나서자 거리로 나온 일본인들은 일장기를 휘날리며 자국선수가 황영조를
누르고 우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응원했다. 하지만 틈틈이 날리는 태극기들은 황
영조와 김재룡이 어서 달려가 하야타를 누르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영조의 예상과
는 달리 시종일관 힘을 내지 못했다. 그제서야 하야타의  다독질주가 일본의 작전이 아니라
는 것을 눈치챈 황영조는 김재룡과 함께 선두 하야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두 선수가 발을
놀리면 놀릴수록 하야타와의 거리는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황영조가 처음 마라톤을 시작할 때는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사이클 선수를
거쳐 88년 명륜고 2년 때 경부역전 마라톤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그 가능성은 인정받았지만,
당시 마라톤을 주도하고 있던 김재룡과 김완기의 그늘에서 그가 뛸 자리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 마라톤은 마의 10분 벽을 깨지 못하고  있는 상황으로 새로운 영웅의 등
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영조는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연습했다.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왔다. 92년 2월 일본에
서 열린 벳푸마라톤에게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
았다. 어릴 때부터 키워져 온 승부사 기질이 발휘되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훌륭한 레이
스를 펼쳤다. 기록은 2시간 8분 47초. 한국 신기록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10분대
벽을 무너뜨리는 순간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황영조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가 세
계적인 마라토너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이 영웅에게 사람들은 뜨거운 찬사를 보냈고, 올림픽 대표선발전에 출전
하지 않은 그를 출전시키자는 여론이  형성되어 그를 바르셀로나의 무대에  보내게 되었다.
황영조의 첫 등극이 일본이었기에 그가 선두 하야타를 잡기 위해 달려나가자 일본인들은 몹
시 불안해했다. 일본인들은 여러모로 황영조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26km 지점에서
김재룡과 황영조는 여유 있게 하야타를 따라잡아 다시  선두그룹을  형성하였다. 이미 스즈
키는 멀찍이서 앞서가는 선수들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 김재룡 선수 물통을 잡지 못했어요."
  "네, 너무 빨리 지나치다가 물통을 떨어뜨리고 말았네요. 물을 제때 공급받지 못한다면 큰
문제인데요."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김재룡이 물통을 놓치자 안타까운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김재
룡은 황영조에게 급히 달려가 손짓했다.
  "영조야, 물통 좀..."
  황영조는 자신이 마실 만큼만 먹고서  물통을 넘겨주었다. 물을 마신 후  두 사람은 잠시
서로 쳐다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하야타를 따라잡기 위해 어려울 때 서로 도우며 달리는
두 선수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했다.
  "정말 훌륭한 모습입니다. 자신도 물이 모자랄 텐데 동료 선수에게 재빨리 물통을 건네주
는 황영조 선수. 정말 보기 좋은 순간입니다."
  이제 레이스는 마지막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해야겠다. 결코 일본 선수에겐 질 수 없어.  꼭 이겨야 해. 그래야  일제시
대 때 무고하게 끌려왔다 원폭에 희생된 2만 동포의 한을 풀 수 있어...'
  황영조는 시합 전인 7일에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며 억울한 죽음으로 하늘을
떠돌고 있을 원혼들이 고이 잠들 수 있도록 반드시 마라톤에서 우승하여 이곳에서 태극기를
휘날릴 것을 다짐했었다. 그는 레이스의 승리보다도 민족적 자존심을  더 크게 생각하고 있
었던 것이다.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악바리같은 승부사의 기질도 점점 가슴  속에서
용솟음쳐 나왔다.
  "황영조 선수, 드디어 스퍼트를 시작했습니다. 쭉쭉 앞으로 나서는 황영조!"
  황영조가 자신을 제치고 나아가자 하야타는 쳐지지 않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했다. 하지
만 그가 황영조를 따라잡기에는 무리였다.  달리는 기관차처럼 황영조는 조금도  수지 않고
발을 놀려댔다. 마치 단거리 선수가 마라톤에 출전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야타와의 거리는 거의 2백m 정도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황영조 선수 엄청난 힘입니
다."
  "이제 하야타 선수가 따라오기에는 무리입니다. 마지막 35km 지점에서 이 정도의 거리차
이는 도저히 회복될 수 없어요."
  해설자는 황영조의 승리를 거리낌없이 단언했다. 앞서가는  황영조를 바라보며 많은 일본
인들은 바르셀로나의 악몽을 되살리고 있었다. 마지막 언덕만 넘으면  우승을 눈앞에 둔 모
리시타가 갑자기 힘겹게 레이스를 벌이자 줄곧 그의 뒤를 쫓던 황영조가 혼신의 힘을 다해
추월하기 시작했다. 이미 힘이 다한 모리시타는 앞서가는 황영조의 뒷모습만 쳐다볼 뿐이었
다. 결국 승리의 월계관은 황영조의 미리에 씌워졌다. 대  역전극. 이는 손기정 이후의 쾌거
였다. 손기정 옹이 일장기를 달고 우승했다면, 황영조는 태극기를 자랑스럽게 달고 일본  선
수를 앞질러 우승했다는 점에서 한국 마라톤의 치욕을 깨끗이 지우는 순간이었다. 하야타는
결승점까지 있는 힘을 다했지만, 이미 황영조는 골인하여 대형 태극기를 휘날리며 평화공원
을 감격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의  골인을 지켜보던 많은 재일동포들은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만세를 외친 반면 일본인들은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오직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한국 마라톤은 일본이 가지고 있는 아시아
최고 기록을 깨야 한다는 숙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아직 한국에서는 7분대를 뛰는 선수가
없다. 7분대를 넘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한국과 일본의 끝없는 마라톤 경쟁은  앞으로
도 계속될 것이다.

    지구촌의 축제-월드컵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하면 바로 축구다. FIFA에   가입한 나라가 UN에 가입
한 국가보다도 많다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월드컵은
전세계 축구인의 잔치이다. 프로와 아마를 가리지 않고 출전할 수 있기에 그 실력이나 경기
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을 연출한다. 단일종목으로는  지상 최대의 잔치인 셈이다. 
 
월드컵에서 가장 강력하게 자리를 매김하고 있는 국가로는 브라질과 서독, 이탈리아, 아르헨
티나가 있다. 그 중에서도 꼽으라면  브라질과 이탈리아다. 각기 화려한 개인기를  중심으로
한 남미와 팀플레이 위주의 공격축구를 구사하는 유럽을 대표하는 강팀들이기에 축구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브라질 축구는 58년 6회 대회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이 대회는 17세의 무명
소년 펠레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첫 무대이기도 하다.  예선 4조에 속한 브라질은 오스트
리아와 영국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에 소련전에서는 새로운  활력소를 찾기 위해 펠레
라는 앳된 소년을 투입하였다.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브라질
이 힘겨운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관
중들의 이러한 예상은 경기 초반에 무너졌다. 펠레는 당시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던 소련의
야신을 시종일관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는 평원에  풀어놓은 야생마처럼 그라운드를 질주했
다. 경쾌한 드리블, 쏜살같은 패스, 그리고 절묘한 볼  컨트롤로 환상적인 득점을 올려 오히
려 관중을 열광시켰고 새로운 축구천재의  탄생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브라질은 바바,  자갈
로, 펠레 등과 같은 강력한 공격수들의 활약에 힘입어 웨일스와 프랑스를 가볍게 꺾으며 승
승장구했다. 특히 펠레는 프랑스와의 준결승전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여 수많은 축구 팬들
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강호 이탈리아는 준결승에도 오르지 못하는 부진을 보였다.
  6월 29일 스웨덴과의 결승전이 벌어졌다.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리기라도 하듯 스웨덴
은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리트홀름이 선취골을 넣어 경기는 점점  무르
익어 갔다. 스웨덴의 기습을 당한 브라질이 이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스웨덴 문전을 공
격하기 시작하자 공이 발에 붙어 다니는 브라질의 개인기에 스웨덴 수비수들은  속수무책이
었다. 펠레, 바바, 자갈로의 발을 떠난 공들은 거침없이 골대를 흔들었다. 결국 5:2로 브라질
이 낙승을 거두어 브라질의 4,2,4 전법의 성공과 새로운 축구스타 펠레의 등장을 멋있게  등
록했다.
  브라질의 축구는 4년 뒤 제7회 월드컵에서도 맹위를 떨치며 영국과 칠레를 쉽게 이겨내어
결승에 선착했다. 하지만 예선전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했던 체코가 유고를 꺾고 결승에 진
출하여 못 다한 승부를 결정 내고자 강력하게 도전해왔다. 이때 브라질에게는 한 가지 고민
이 생겼다. 펠레의 화려한 플레이에 놀란 영국 수비수들이 그에게 계속해서 강한 태클로 달
려들어 결국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만 것이다. 브라질은 결승전을 펠레없이 치르지 않으
면 안 되는 입장에 놓여졌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브라질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다.  오히
려 예선전에서 선전을 펼친 체코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하지만 브라질은 그렇게
약한 팀이 아니었다. 그 비장의 무기는 검은 표범과 같이 질주하는 아마릴도였다. 7월  16일
산티아고에서 체코와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펠레가 빠진  브라질을 놀리기라도 하듯 체코
는 전반 15분에 유럽  제일의 스트라이커 마조푸스트가  선취점을 뽑아내면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월드컵 축구 결승전은 항상 역전극으로  끝난다'라는 징크스가 입증되기
라도 하듯이 2분 뒤 비장의 무기 아마릴도가 동점골을 터뜨림을 시작으로, 후반에는 지토와
바바가 연속으로 체코의 문전을 뒤흔들며 경기를 끝마쳤다. 브라질이 체코에 3:1로 승리하며
대회 2연패라는 금자탑을 쌓은 것이다.  브라질의 공격축구의 이 같은  막강함에 감명 받은
세계축구는 이탈리아의 압박축구가 나오기 전까지 4.2.4 전법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68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2회(34년),  3회(38년)에 우승한 이래 32년만의  우승을 노리는
이탈리아가 마침내 결승전에 진출하여 주리메 컵에 손을 뻗치며 맹렬히 다가갔다. 하지만 3
회 프랑스 월드컵 준결승에서 2:1로 패한 브라질이 대회 3회 우승은 물론 32년 전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듯 우루과이의 산을 거침없이 넘으며  이탈리아와의 한판승부를 선언했다. 공격
의 명문 브라질과 수비의 명수 이탈리아 양 팀 모두 2회 우승한 전적을 갖춘 팀으로서  주
리메 컵을 먼저 차지하기 위한 최후의 일전을 예고했다.  결승전이 벌어진 아즈텍 경기장에
는 12만 관중이 빈틈없이 가득 메우며 세기의 대결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이탈리아가 브라질을 거칠게 몰아붙였고 이에 놀란 브라질은 제  위치를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전반 18분에 자이르징요가 멋있게 올려준  볼을 갑자기 나타난 펠
레가 골문 좌측으로 몰아넣으면서 경기의 대세는 이제 브라질이  이끌기 시작했다. 이때 펠
레가 넣은 골은 언론으로부터 환상적이라는 찬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브라질 대표팀이 월드
컵 대회에서 넣은 1백번째 골이어서  더욱 유명해졌다. 후반 21분  펠레의 멋진 어시스트를
받은 게르손이 거침없이 슛을 날려  이탈리아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을  내지 못했다. 승리는
브라질의 것이었으며, 주리메 컵의 영광도 32년 전의 설욕도 모두 브라질의 것이 되었다.
  "오늘 브라질의 승리는 브라질에만 국한되지 않고 바로 유럽에 대한 남미의  승리며 수비
축구에 대한 공격축구의 승리다!"
  3:1 승리의 기쁨을 억누르지 못한 브라질의 자갈로 감독은 소리쳤다. 브라질의 완벽한 승
리였다. 아즈텍 경기장뿐 아니라 브라질의 전 국토는 축구팬들의 열광으로 떠들썩했다. 대통
령은 이틀간을 공휴일로 공포하여 리우데자네이루는 광란의 축제로 밤을 지새웠다. 반면 이
탈리아의 발카레기 감독은 '지금 이 세상에는 브라질팀을 이길 그  어떤 팀도 없다'라는 말
을 남기며 쓸쓸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펠레에 대한 찬
사를 아끼지 않았다. 화려한 개인기와 득점력 뿐 아니라 뛰어난  어시스트를 제공하는 그를
목마 태우며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이렇게 브라질의 화려한 축제는 떠들썩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비록 패했지만 또  다른 월드컵을 차지하기 위
해서 전력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새로운 골잡이 파울로
로시를 앞세워 다른 팀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거장 베아르조트 감독의 절묘한 작전은  매
경기마다 승리를 안겨 주었다. 또한 74년 처음으로 월드컵을  차지한 서독도 강력한 전차부
대임을 과시하며 로마군단 이탈리아와의 한판승부를 결정짓기 위해 프랑스를 누르고 결승에
진출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서독 선수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득점기계'라는 애
칭을 얻으며 월드컵의 스타가 된 로시가 수비형 링커로 뛰고 있었던 것이다. 동물적 감각으
로 볼을 따라 다니는 로시가 수비에 자리하고 있자 독일의 수비들은 그에게 시선을 주느라
제대로 플레이를 전개시키지 못했다. 전반  24분, 긴장된 서독은 결국 이탈리아에게  페널티 
킥을 내주고야 말았다. 하지만 최고의 골키퍼 슈마허는 이탈리아의  키커 카브린을 잘 막아
내어 볼은 골대를 흔들지 못했다. 카브린의 실축이었다. 후반전에 들어선 서독은 로시를  맡
고있던 선수들을 공격으로 전환하며 과감한  플레이를 전개했다. 수비에 있는  로시를 감시
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독의 맹렬한  공격에  이탈리아는 특유의 수비축
구를 구사하며 위험을 안전하게 막아냈다. 이때 느슨해진 서독의 수비를 눈치챈 이탈리아의
베아르조트 감독의 손길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로시를 잊은 서독의   허점을 이용하기 위해
공격명령을 내린 것이다. 로시는 우리에  갇혔던 호랑이처럼 맹렬히 서독의 문전으로  달려
갔다. 이탈리아 선수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서독 문전으로 길게  올려진 공이 원 바운
드되면서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를 지나는  순간, '득점기계' 로시가 정확하게  날린 슛은 슈
마허의 손을 피해 골인되었다. 거대한 함성이 운동장을 흔들고  신출귀몰한  로시의 행동에
서독 수비수들은 놀라기만 할뿐이었다. 기선을  제압한 이탈리아는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
환하면서 기가 꺾인 서독에게 계속해서 골을 퍼부었다.
  위대한 영웅 로시의 탄생과 함께 이탈리아는 서독에 3:1 승을 거두며 꿈에도 그리던 월드
컵을 영원히 안게 되었다. 브라질에게 주리메 컵을 내주어야  했던 아쉬움을 달래는 순간이
었다. 승전보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 국민들은 온통 거리로  뛰쳐나와 축제를 벌였고 선수들
은 영웅으로 칭송 받았다. 월드컵에서 우승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은 이탈리아는 브
라질에 이어 세 번째 누리는 순간이었다.
  이 두 맞수는 세 번째 대결을 펼칠 날을 대비해 수많은 축구스타들을 키워내면서 다음 대
회를 기다렸다. 하지만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두 팀을 프랑스로부터 일격을 당하면서 4강
에도 오르지 못하는 부진한 성적을 남기고 말았다. 하지만  최강의 축구를 구사하는 그들의
자존심은 꺾이지 않았다.
  94년 미국 애틀랜타 월드컵에서 브라질과 이탈리아는 다시 한번 월드컵을 차지하기  위해
서 맹렬히 분투하였다. 브라질은 세계 최고의 골게터 로마리오와 베베토를 투톱으로 내세워
다른 여러 팀들을 물리쳐 초반 부진을 씻으며 결승을 향해  돌진했다. 두 팀의 결승전을 세
계인들은 잠을 설쳐가며 관전했다. 경기는 초반부터 팽팽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세계 최강
의 전력이라는 찬사를 받는 브라질의  공격은 이탈리아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베베토는
질풍처럼 볼을 몰아 센터링을 올렸다. 공은 이탈리아 장신 수비수의 머리를 지나서 165센티
미터의 단신 로마리오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로마리오는 비어 있는  골대에 정확하게
밀어 넣음으로써 또 다시 이탈리아를 아프게 하는 신호탄을 울렸다. 브라질의 승리였다.  그
리고 브라질은 또 한번의 축제로 온 나라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공격축구와 수비축구의 전통을 자랑하는 브라질과 이탈리아 두 팀은 앞으로도 각각  남미
와 유럽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서 뛰어난 기량을 앞다투어 선보여 팬들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게될 것이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스포츠 경기, 다음 대결에서는 과연 누가
승리를 이룰 것인지...

    그라운드의 두 기관차-펠레,마라도나
  "애드슨 선수 슛, 골인! 17세의 브라질 대표팀 선수 애드슨의 결정적인 골입니다."
  오른쪽 센터서클에서 넘어오는 볼을 앳된 얼굴의 애드슨은 주저하지 않고 프랑스의  골대
에 멋지게 차 넣었다. 관중들은 이 어린 선수의 플레이에 매료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랑
스에 고전하던 브라질에 희망을 불어넣었다. 애드슨은 계속해서 두 골을 더 넣어 이날 헤트
트릭을 기록했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그의 아주  빠른 드리블, 현란한 몸동작, 멋
잇는 슈팅에 기립박수를 쳐주며 이 새 영웅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이 어린 소년은 '검은 진주'라는 별명을 얻은 즉 지금의 펠레이다.
  프로 축구 선수였던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펠레는 아버지가 부
상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13세의 어린나이에 신문 배달을  해야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누구
도 축구만큼은 빼앗을 수 없었다. 1955년  산토스 주니어팀에 입단하여  자신의  기량을 마
음껏 발휘한 펠레는 전문가들의 눈에 띄어 1958년 17세의 나이로 월드컵에 출전하여 프랑스
를 상대로 헤트트릭을 기록했다. 또한 그는 브라질의 첫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 되면서 세계
축구 팬들에게 기억되었고 그의 현란한 개인기와 드리블은 축구열풍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자이르징요 센터링 골대를 지나는 볼, 앗 펠레선수 점프 헤딩 슛! 골인, 골인입니다!"
  펠레의 멋진 헤딩슛에 관중들은 과연 펠레라는 탄성을 질렀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
다. 그라운드를 마치  자신의 집처럼 뛰어다니며  강력한 이탈리아의  수비진들을 따돌리고
172센티미터의 작은 키로 헤딩슛을 성공한 것이다.
  "오른쪽 라인을 타고 드리블해  들어가는 펠레. 문전으로  센터링, 아 달려드는  게르손의
슛, 골인 골인입니다!"
  오른쪽 라인을 치고 들어오던 펠레는 게르손을 발견하고 왼쪽으로 약간 휘는 패스를 날렸
다. 공이 곧 게르손이 슛하기 좋은 위치에 놓여지자 게르손의 발이 공을 힘껏 찼다.  관중의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어시스트를 성공시킨 것이다. 제9회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이탈
리아를 사대로 두 개의 어시스트와 1득점을  내 브라질이 주리메 컵을 영원히 보관하는  첫
영광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후 펠레에게는 '축구의 황제'라는  칭호가 따라다녔고 누구도 그
의 플레이를 모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대를 1986년 멕시코로 바꾸어 보면 또 하나의 영웅 탄생을 지켜볼 수 있다.
  "마라도나 선수 미드필드에서 잉글랜드의 문전으로  대시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달려나오
는 잉글랜드 수비, 하지만 이를  제치는 마라도나 쏜살같이 잉글랜드 문전으로  돌진합니다.
위험을 느낀 골키퍼 골을 향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아, 골키퍼마저 여유있게 제치는  마라도
나. 슛, 골인입니다!"
  미드필드에서부터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잉글랜드의 다섯 명의 수비를 뚫고 마지막에는 골
키퍼까지 제치며 골인시킨 마라돈,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묘기였다. 마라도나는 60년 10월
30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가난한 집안에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부터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벗은
축구였다. 아버지로부터 축구공을 받은 다섯 살 때부터 마라도나는 끼니도 거른 채 볼을 차
는데 여념이 없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오로지 동네 아이들과 볼차기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그가 여덟 살 때 동네 대항 축구대회에서 혼자 터득한 드리블로 그라운드를 쉴 새 없이  뛰
어다녔다. 그 결과 후에 가장 뛰어난 선수로 성장하여 프로팀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2부 리
그에 스카우트되었다. 마라도나는 아홉 살때부터 축구로 돈벌이를  시작하여 열다섯 살에는
1부리그 선수가 되었고, 열일곱 살 때에는 제2회  세계  청소년축구대회에 출전하여 아르헨
티나를 우승시킴과 동시에 최우수선수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신기의
왼발 소유자'. '괴물'. '화성인' 등 갖가지 별명들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볼이 그의 발에 붙어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력한 드리블로 마라도나는 월드컵 사상
아주 유명한 골을 넣었다. 수반 6분경 아르헨티나의 발다노가 잉글랜드의 왼쪽 진영을 돌파
하여 센터링을 올렸다. 볼이 문전으로 날아오자 181센티미터의 장신 골키퍼 실턴과 166센티
미터의 단신 마라도나가 동시에 공중으로 떠올랐다. 두 사람의  신장 차이는 무려 15센티미
터나 되어 골키퍼가 손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50센티미터도 훨씬  넘었지만
두 사람이 볼을 지나치며 땅에 내려오는 순간 볼은 이미 잉글랜드의 문전에 들어가 있었다.
  "골인! 골인입니다!"
  골을 넣은 마라도나는 손을 흔들며 관중석으로  내달렸으며, 아르헨티나 응원단은 열광적
으로 그의 골을 기뻐했다. 하지만 골키퍼 실턴은 마라도나가  왼손으로 공을 쳤다고 강력하
게 항의했다. 그러나 주심의 판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관계자들이 사진과 TV로 확인한
결과, 마라도나의 손이 공을 살짝 건드렸음을 발견했다. 명백한 반칙이었으나 이미 늦은  일
이었다.
  "신의 손이 볼을 때렸고, 골인이 되었다. 볼을 가격한 왼손은 나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
었다."
  마라도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같이 말하였고 이후 그의  손은 '신의 손'이라고 불리워
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라도나의 환상적인 드리블과 플레이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들을 잊
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그는 또 한번의  황금의 왼발을 선보였기 때문
이다. 서독진영으로 볼을 몰로 가던 마라도나는  반대 쪽에서 문전으로 달려들어가는  발다
노를 발견했다. 마라도나는 지체없이 발다노  앞으로 볼을 패스했다. 정확하게 떨어진  볼을
발다노가 깨끗하게 문전으로 차 넣었다.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고   자랑하던 서독의 슈마허
는 그저 쳐다만 볼 뿐 미처 손쓸 새도 없었다.
  "굉장합니다, 마라도나. 펠레 이후 최고의 선수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정확한 패스와 완
벽한 드리블. 정말 뭐라고 나무랄 데가 없는 선수입니다."
  마라도나의 활약으로 아르헨티나는 월드컵을 차지할 수 있었고 이탈리아와 서독의 스카우
터들은 수십 억원의 계약금을 내걸며 자신들의 팀으로 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86년 멕시코 월드컵의  MVP로 선정되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라도나와 펠레, 두 사람 중 누가 더 뛰어난 축구선수일까?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베토벤과 모차르트 중 누가 더 훌륭한 음악가인가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펠레의 플레이는
삼바음악에 맞춰 춤추는 듯한 모습이다.  볼을 잡으면 나긋나긋하고 우아한 몸놀림.  그러나
폭발적인 순발력으로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절묘한 패스가  팬들을 사로잡는다. 그는 172센
티미터라는 보통키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헤딩력과 필드 전체를 조망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
마라도나는 이와는 다른 강렬한 리듬을 지녔다. 166센티미터의  작은 키에 근육으로 뭉쳐진
단단한 체격, 그는 성난 바람처럼 상대수비를 제친다. 무엇보다도 감탄스러운 것은 바람처럼
질주하다가도 정지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는  능력이다. 마라도나는 잉글랜드 전
에서 일곱 명의 수비를 드리블로 제치고 미드필드에서부터 시작하여 골을 성공시켰다. 펠레
도 1961년 브라질리그 산토스 대 블루미넨스 전에서 자기 팀 페널티 지역에서부터 볼을 몰
아 여섯 명의 수비를 제치고 골을 성공시키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비교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사람이 아닐 수 없다. 펠레
는 은퇴 전까지 총 1천3백56게임에 출전하여  1천2백80골을 기록했으며, 97번이나 헤트트릭
을 성공시키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펠레가 모습을 드러낸  나라만도 65개국이며 그의 자
서전이 모두 100여개 국에서 번역되어 출판될 정도로 그는 세계적인 스타로 군림했다. 1977
년 1월 1일 북미축구리그 뉴욕 코스모스 구장에서 그의 은퇴식은 7만6천 관중이 가득 메운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고 40여 개 국가로 중계되었다. 많은  팬들은 그의 은퇴를 아쉬워했
다. 애틀랜타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아르헨티나는 예선탈락의 위기에 가지 몰려있었다. 하지
만 마라도나가 가세함으로써 본선진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본선에서도 마라도나의  도움으
로 볼품없던 선수들은 빛을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적재적소에 볼을  공급하여 그의 패스를
받은 공격수들은 어김없이 골로 연결시켜 황금의 왼발이 살아있음을 과시했다.
  "제2의 펠레가 나왔다는 말이 이제는 지겹다.  펠레는 단 한 사람이다. 그리고 또한  단지
한 사람의 마라도나가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펠레와 마라도나를 비교하자 펠레의 동료였던 자갈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마라도나에게  많은 점수를 주고 있다. 펠레가  월드컵에서
뛰었던 58년, 62년 그리고  70년대보다 축구수준이 크게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유명선수에
대한 수비수들의 능력도 놀라울 정도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향상된 축구무대에서
수비수들을 따돌리고 마음대로 그라운드를 누빈 마라도나가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하지만
펠레가 뛰던 당시는 태클에 대한 규정이 지금처럼 엄격하지 않았었고 힘의 축구가 유행하던
시절이었기에 드리블을 하기 위해서는 사나운 태클의 장벽을 넘어야 했다.
  "나와 마라도나를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  마라도나는 분명 뛰어난 선수지
만 과거 내가 했던 것과 시대뿐 아니라 상대선수조차도 틀리지 않느냐."
  "나는 마라도나일 뿐 펠레는 아니다."
  펠레와 마라도나는 자신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을 몹시 불쾌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어쩌면
두 사람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두  선수는 시대가 다른 상황에서 축구를 했기  때문이다.
과거 축구황제가 펠레였다면, 지금의 황제는 마라도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두 사람의 공통
점이라면 어린 시절 집안의 가난을  극복하고 오직 축구만을 사랑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의지가 오늘의 펠레와 마
라도나를 만든 것이다.
  펠레는 현재 유네스코 대사로 세계를 누비며 분주히 활동하고 있고 마라도나는  약물중독
혐의를 받아 선수자격을 박탈당하고 현재 아르헨티나 프로팀 감독을  맡고 있다. 두 사람의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축구로써 이들이 세계인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는 점
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검은 돌과 흰 돌의 접전-조훈현과 맞수들
  1989년 9월 5일, 싱가포르 웨스틴 스템포드호텔의 특설  대국장에서 중국의 섭위평 9단은
짓눌린 인상을 펴지 못했다. 그의 앞에는 조훈현 9단이 특유의 장미담배를 피우며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1회 응창기배 국제바둑대회의 마지막날 2:2의 팽팽한 접전을 마무리하는
다섯 번째 대국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둑의 최고수를 가르는  이 날의 대국에서 조훈현 9단
은 재빠른 공격으로, 옥쇄작전으로 탄탄한 수비벽을 쌓은 섭위평 9단의 집을 무너뜨리고 있
었다.
  '마지막 옥쇄 작전으로도 조훈현을 막지 못한다면  승부는 이미 끝난 것이다. 내가  곰처
럼 밀어붙인다면 조훈현은 호랑이처럼 맹렬하게 공격해 들어올 것이다. 상황이 점점 불리하
다.'
  '섭위평이 흔들리고 있다. 바둑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어. 이대로 간다면 쉽
게 이길 수 있겠군.'
  백의 집은 밀리고 있었고, 흑의 집은 점점 넓어져 갔다. 섭위평은 계속해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조훈현은 흰 돌이 바둑판에 집을 짓도록 방관하지 않았다.
  "딱!"
  "..."
  섭위평은 두 눈을 조용히 감으며 흰 바둑알을 엉뚱한 자리에 두었다. 스스로 패배를 자인
하는 돌이었다. 조훈현의 불계승이었다. 중국의 만리장성을 넘어 한국바둑이 세계 최고의 자
리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승패가 가려진 후 섭위평 9단은  침통한 표정이었고 그의 부인 손
상명 8단은 얼굴을 감싸쥐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 중간의 자존심 대결뿐 아니라 프로기사라
면 한번쯤 오르고 싶은 자리였다. 조훈현은 빠른 스피드, 순발력, 강인한 승부기질로 섭위평
9단의 느릿하고 두터운 바둑을 격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즐거움을 참을 수 없었
다. 한국바둑이 일본과 중국에 이어 세 번째라는 그 동안의  수모를 깨끗이 씻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조훈현은 네 살 때부터 아버지가 두는 바둑을 구경하다 흥미를 느껴 가르쳐 달라고 졸랐
다고 한다. 바둑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와 맞두기에  이르렀고 머지않아 바로
훈수를 둘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그 뒤부터 조훈현은 심심할  때는 신문에 난 기보를 들여
다보고 혼자 두었다. 아이의 행동을 범상치 않게 여긴 아버지는 집 근처의 기원으로 데리고
갔다. 기원에서 많은 사람들과 바둑을 둔 조훈현은 불과 여섯 살의 나이에 인근에서는 바둑
의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훈현이는 바둑에 남다른 재주가 있으니까 서울로 데리고 가서 선생 밑에서  정식으로 바
둑을 배우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1985년 가을 서울로 상경한 그는 명동의  송환 기원에서 조남철 6단의 지도를 받게  되었
다. 이 소년기사에게 흥미를 느낀 많은 프로기사들은 그에게 초보적인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이리하여 조훈현은 국민학교 3학년, 아홉 살의 나이에 프로 기사의 대열에 끼어들었으며, 그
후 주변의 권유에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바둑을 배우다가 군대문제로 귀국하여 다시 국내무
대에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많은 기대를 모으며 돌아온  조훈현은 갈수록 승리보다는 패
가 많아 좀처럼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했다. 이 때 1972년 제4기 명인전에서 약관 20세의
서봉수 2단이 승리하며 바둑계에 큰 파란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1974년 제6기 명인전에 조
훈현이 도전하자 드디어 두 사람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결과는 3:1, 서봉수의 승
리였다. 하지만 이는 그에게 있어서 승부근성을 길러주는 좋은 대국이었다. 군에 입대한  조
훈현은 '이기면 걸어 들어오고 지면 영문 앞에서 포복으로 들어온다'는  각오로 바둑을  두
어 백남배, 최강자전, 국수전 등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는  그칠 줄 모르는 승부근성으로 하
나둘씩 타이틀을 획득해 갔지만  서봉수 5단과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1977년 왕위전에서는
3:2로 서봉수를 누름으로써 국내의 11개 타이틀 가운데 7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만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 일본의 바둑을 지켜보았던 그는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일본 바둑은 확실히 강해요.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저들의 연구  자세는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공부해야 해요. 공부하지 않으면 뒤져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우리가 극복하고 뛰어
넘어야 할 대상으로 일본을 꼽아왔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어요. 중국 또한 정상급입니다."
  조훈현의 목표는 국내에 있지 않았다. 국제적인 시각을 가지고 앞서가는 일본과 중국바둑
을 누르기 위해 바둑판을 놓고 끊임없이 자신의 바둑을 높여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가 넘어
야 할 산은 국내에 있었다. 서봉수 7단. 서봉수는 조훈현이 꼭 따내고자 하는 명인전만은 내
주지 않았다. 그는 항상 조훈현을 긴장시키는 유일한 상대였다. 두 사람은 명인전에서  뺏고
뺏기는 실랑이를 계속하다가 1979년에는 조훈현이 기어이 명인전을 다시 찾아와 국내의  모
든 타이틀을 소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봉수는 그의 독주를  인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80년 7개 타이틀전에서 20회 이상의 대결을 펼치면서 조훈현에게 왕위, 국기, 최고위의 타
이틀을 가져가 전관왕의 명예를 무너뜨렸다. '명인전의  사나이', '된장찌개 냄새가 물씬 나
는 순 국산 기사'라는 애칭을 가진 서봉수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조훈현과
함께 한국바둑계를 양분하였다.
  1982년 5월 4일, 그는 드디어 '입신'의  경지에 올라 9단이 되었다.  그가 바둑을  시작한
지 28년만의 일이었다. 9단을 획득한 조훈현은 다시 타이틀  공력에 나서 1982년에 두 번째
로 전 타이틀을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일한  호적수인 서봉수 7단은 그에게
가장 많은 도전장을 띄웠다. 조9단은 1년여 동안 거의   모든 타이틀전에서 서7단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기어이 명인위와 기왕위를 내주고 말았다.
  [조훈현은 서봉수라는 적수가 있어 정상의 고독감을 덜 수 있었고  서봉수는 언제나 조훈
현이 있기에 투지와 희망을 불태울 수 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어느 신문기사의 한 논평이다.
  "조훈현은 뛰어난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그에게서 배운 셈이다. 특히 내가 제일  많이 배
웠다."
  "그는 나의 전 타이틀을 두 번이나 깬 유일한 경쟁자이며 적수이다."
  조훈현과 서봉수는 각각 서로가 맞수임을 인정했다.  담나 국제적인 무대에서는 조훈현이
뛰어나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섭위평이 돌을 던져 조훈현의 우승이 확정되자 대국장 옆에 마련된 한국측 검토실에서 상
황을 지켜보던 윤기현 한국측 진행위원,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를 비롯한 교민들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모두 여러분의 덕분입니다."
  대국장에서 나오던 그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겸손하게 말했다. 세계제패의 순간이었다.  이
제 그의 맞수였던 섭위평을 넘고 세계 정상의 자리에 홀로  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선배들
을 추격해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왔듯이  그를 뒤쫓는 후배들이 국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강하게 도전해 오는 이가 바로 이창호였다. 이창호는 조훈현이 그의 가능성
을 점쳐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바둑을 가르친 수제자였다. 이창호는 자신이 생각한 궁
금증이 풀리지 않으면 잠도 자지 않고 문제가 풀릴 때까지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고 한
다. 바둑판을 보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바둑의 황제가 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아끼
지 않고 있었다. 이창호는 1989년 KBS 바둑왕전에서의 우승으로 14세의  나이에 세계 최연
소 바둑 챔피언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본격적으로 바둑계에 태풍을 일으키기  시작했
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조훈현에게 도전하는 신진기사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창호를  중심
으로 유창혁이 가세하여 조훈현의 독주를 강력하게 견제했으며, 타이틀을 하나, 둘씩 빼앗아
갔다. 그리고 이창호와의 대결도 갈수록 늘어만 갔다.
  "또 너냐?"
  "네, 선생님."
  "할 수 없지."
  제 34기 국수위전에서 두 사람은 이렇게 관례화 된 대화를   나누며 대국에 들어갔다. 이
창호의 바둑은 그 동안 몰라보게 강해져 수제자답게 스승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집은 두
텁고 수읽기도 깊다.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노림수가 강해서  상대의 실수를 잡고 늘어지
는 것이 무서울 정도였다. 계산력도 뛰어나고 종반 수습도 잘했다. 얼마 후 조훈현은 담배를
피워 물고 이창호는 고개를 숙이며 미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이창호의 승리였다.  조훈
현은 뛰어난 제자를 길러냈다는 뿌듯함과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는 승부근성이 발동하여 이
창호와 마주칠 때면 늘 신중하게 바둑을 두었다. 두 사람이   대국을 펼칠 때마다 사람들은
스승과 제자가 가르치고 배우는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 같다고 두 사람을 칭찬
했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결은 1989년 13:3, 1990년   5:7, 1991년 8:16으로 이창호가 90년
이후부터 앞서기 시작했다. 응창기배를 재패한 세계 최강이라는 찬사에 걸맞지 않게 조훈현
은 타이틀을 지키지 못했다. 피로가 쌓이고  정신력도 해이해진 탓도 있었지만 양재호  7단,
유창혁 5단, 이창호 5단 등 뛰어난 신진 기사들의 활약상에 기인한 것이었다.
  조훈현은 섭위평, 서봉수 외에도 또 여러 명의 맞수와 대결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대결
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자신을 새롭게 무장하고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다가올  다음
대결을 준비했다. 승부의 세계는 언제나 냉정하다. 이긴 자에게는 웃음을 선사하지만 패자에
게는 쓰라린 상처가 남는 법이다.  모두들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바둑판에서 눈을 떼
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최강의   자리에 있다고 하지만 조훈
현도 쉴 수만은 없는 것이 승부의  세계다. 특히 맞수가 가장 많이  존재하는 바둑판에서는
언제 어느 곳에서 적수와 마주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둑의  형세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색다른 전법이 개발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최고의 고
수를 보내 조선의 자존심을 꺾으려 했고 그 때마다 조선에서도 최고수를 찾아내어 맞대결을
시켰다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목숨을 건 바둑을 둔 적도 있다고 한다. 이만큼 바둑은  한
국가의 자존심이었으며, 동네와 동네간의 학문적 우위를 가를 때도  행해졌다고 한다. 조훈
현, 이창호, 서봉수, 유창혁 한국을 대표하는 바둑기사들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칠 때마다
국위선양과 함께 그들에게는 세계 최강이라는 명예가 주어질 것이다.

    신대륙을 찾아라-콜럼버스와 마젤란
  "배를 돌려라! 이대로 항해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콜럼버스 선장을 없애고 배를 돌리자!"
  바다에 나온 지 30여 일이 된  산타마리아 호의 선상에서 승무원들은 콜럼버스가  약속한
날짜가 지나도 육지가 보이지 않자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의 각국들은 인도,  중국
과의 무역을 하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짧은 항로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콜럼버스
는 그 당시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굳게 믿고 대서양을 넘어 서쪽으
로 배를 몰고 가면 반드시 일본이나 중국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폐하, 제가 알아본 바로는 중국에 보다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있는 듯 하옵니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 조안 2세를 알현하여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중국과 교역을 단
시간에 한다면 엄청난 금은보화를 얻을 것이기에 그의 제안은 왕을 흥미롭게 했다.
  "어떤 방법으로 인도에 빨리 갈 수 있단 말이냐?"
  "네, 지구의 전문가 바올로 토스카넬리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까지의 거리가  해로로 5,000
해리(약 9,260km)라 하옵니다. 만약 대서양 서쪽으로 항로를 잡는다면 약 5,680km로 줄어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 이 계획이 성공하도록 저를 지원해 주십시오."
  콜럼버스의 당당한 태도에 믿음이 간 왕은 그가 계산한 수치가 정확한지 여부를 알아보고
자 많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어보았다.  에스파냐의 여왕도 콜럼버스의 태도를  보고 그를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 호를 타고 망망대
해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가도가도 끝없는 바다가 이어질 뿐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날들이 오래되자 기어이 10월 10일, 선원들은 콜럼버스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우리의 항해가 성공리에 끝난다면 당신들은 엄청난 부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인도와 중국에는 어마어마한  금은보화가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
다."
  콜럼버스는 어떻게 해서라도 선원들을 설득하려고 외쳐댔다. 하지만 그의 말을 믿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그를 묶으려 하였다. 콜럼버스는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하고는 침
착하게 얘기했다.
  "오늘부터 3일 안에 육지를 볼 수 없다면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니 동요하지 말고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랍니다."
  선원들은 콜럼버스의 제안에 찬성하고 모두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콜럼버스
는 3일 내에 육지가 나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하늘을 날고 있
는 갈매기 몇 마리를 볼 수 있었다. 갈매기는 해안 근처에서 살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육지
가 나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10월 12일 오전 두시, 밝게 비치는 달빛 아래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육지다! 육지가 보인다!"
  "어디 어디!"
  선원들은 모두 갑판으로 올라와 눈앞에 보이는 육지를 보면서 즐거움에 기뻐 날뛰었다.
  "자 모두들 진정하고 서둘러 배를 정박시키시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육지로 들어갈 준비
를 갖추도록!"
  중국을 발견했다는 기쁨으로 날뛰는 선원들을  진정시킨 콜럼버스는 자신의 생각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에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카리브 제도에 있는 워틀링 섬
이었다. 다음날 섬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주변을 살폈다. 그 곳에서 아라와크 타이노  인디언
들이 그들을 반겼다. 인디언들은 금으로 된 코걸이를 달고  있었기에 그는 이곳이 인도라고
생각했다. 콜럼버스는 마르코폴로의 여행기를  탐독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탐험이 여행기와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이제 일본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중국을 찾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
다."
  일본을 찾기 위해 다시 출항을 한 콜럼버스 일행은 15일 후, 쿠바 섬을 발견했다. 그는 이
곳에 사는 인디언에게서 담배를 배운 최초의 유럽인이었고 이 발견으로 서양에 담배를 전하
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항해를 마감하고 에스파냐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
해 같은 길을 여러 번 항해하였고 네 번째 항해인 1502년 여름, 중앙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이 중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기에 마르코폴로가 말한 말레이  반도
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말레이 반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육지였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이곳이 지금의 미국인 중앙 아메리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는 이
항해를 마지막으로 1504년 에스파냐로 돌아와 2년 뒤 55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뱃사람으로서 또 지휘자로서, 빈틈없고 실제적 예언자로  역사의 위대한 추진력이 되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중앙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을 발견하자 많은 유럽
국가들은 이곳을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앞을 다투어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 위대
한 땅을 발견한 사람이 콜럼버스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미국인
들은 그의 탐험가적 정신과 개척정신을 높이 칭송하며 미대륙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으로 길
이 기억하고 있다.
  그 후 1519년 9월 말 에스파냐를 떠나는 다섯 척의 배가 또 다른 항로를 발견하기 위해서
힘차게 출항했다. 이 선단의 선장은 바로 그 유명한 마젤란이었다. 그는 포르투갈의  귀족이
었으나 왕의 신뢰를 잃어 방황하다 에스파냐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하고 에스파냐 국왕 카를
로스 1세에게 정중히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폐하, 에스파냐의 배가 아메리카라는 장애물을 최남단으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포르투
갈이 아프리카를 횡단하여 도달한 것과 마찬가지로 동인도에 간단히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
하옵니다."
  마젤란의 이러한 제안이 타당한 계획이라고 생각한 국왕은 다섯 척의 배를 마련해 마젤란
의 항해를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브라질의 북해안에 도달하면 다시 남으
로 방향을 바꾸어 태평양 항로를 개척한다는 그의 포부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아니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육지엔 언제 도착한다는 거야?"
  "마젤란 선장이 우리를 속인 거 아냐?"
  마젤란 선단은 엉뚱하게 리우데자네이루로 진입하고 말아 플라타 강 하구에서 겨울을  기
다려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였다. 결국 에스파냐를 떠난 지도 5개월이 되어가는 마당에 그저
남쪽 파타고니아만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선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하여 드디어 반란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한 척은 난파로  잃고 한 척은 노획당하고 말
았다.
  1520년 마젤란은 다시 출항하여 3월  이상이나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는 절망적인  항해를
계속해야 했다. 그를 맞이한 것은 오직 바다 뿐 이었다. 이후 3월 16일 필리핀 군도에  도착
한 마젤란 일행은 그곳 원주민들이 몸에 금치장을 한 것을 보고는 모두들 기뻐하였다. 그들
은 이제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들은 원주민의 추장과 우호조약을 맺
으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주민들이 다른 부족과의 전쟁을  벌이자
이 전쟁에 참석하여 친근감을 주려던 마젤란은 4월 27일 무참히 살해당하고 말았다.
  마젤란이 죽은 뒤 남은 선원들은 가까스로 에스파냐에 도착했다.  그들은 인류 최초로 거
대한 일을 수행하고 돌아온 것이다.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출발점 에스파냐로 돌아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한 최초의 사람들이 되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세운 마젤란은 그 영광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중앙 아메리카를 발견하고도 영광을 누리지 못한 콜럼버스처럼 그도
역시 역사의 한 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두 항해사의 지칠 줄 모르는 탐구욕과 도전정신은 중국을 찾는 새로운 항로를 위한 노
력 속에서 새로운 대륙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확인한 엉뚱한 결과를 얻기는 했지만 결
과적으로 이 두 사람이 인류역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인류 최초의 발자취-피어리와 아문센
  지독한 추위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가 끊임없이 북극의  대지 위로 불어왔다.
개들도 지친 듯이 혀를 내밀며 썰매를 끌고 있었다. 그 뒤로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한 일행들
이 나침반을 열심히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대장님,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현재 위치는 북위 89도 57분  지점에 도착했습니
다."
  "그래, 북극점에 도착할 것을 대비해서 성조기를 준비해 두는 것이 좋겠군."
  "이제야 동상 걸린 보상을 받게 되는군요."
  "그런가? 하하하하하."
  헨슨 대원의 엉뚱한 말에 탐사대원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오래간만에 웃어 보
는 순간이었다. 2월 28일 북극점을 향하여 이들이 컬럼비아 곶을 떠날 당시만 해도 십여 명
이 넘는 인원이었으나 이제는 피어리 대장,  바아트릿 선장, 헨슨 그리고 세 명의  에스키모
등 이렇게 여섯 명만이 남았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은데?"
  "온도도 그래도. 오늘은 영하 25도밖에 되지 않아요. 아마도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축하해
주려는 것이 아닐까요?"
  평상시 영하 57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비한다면 정말이지 좋은  날씨였다. 1909년 4월 6
일 낮 12시, 드디어 피어리 일행은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일행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북극점 위에 성조기를 꽂으며  미국 국가를
부르고는 잠시 명상에 잠겼다. 피어리는 이 날의 감격을 일기에 적었다.
  [20년 동안 꿈에도 그리던 북극점이다. 마침내 나는 정복하고야 말았다.]
  오랫동안 북극에 대한 열정을 태우던 그는 그린란드에서 많은  훈련을 했었다. 그리고 자
신의 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다한 최선이 피어리에게 지금의 영광을 안겨 주었다. 북극점
정복 소식은 전세계로 퍼져나가 그들이 기지로 돌아왔을 때는 수많은 축하 메시지로 홍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이 미국으로 돌아오자 문제가 생겼다. 1891년의 탐험대원이었던  쿠크
가 피어리보다 먼저 북극점에 도착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를 어떻게 보고 쿠크는 이따위 행동을 하는 거지?"
  "대장님의 북극점 정복으로 세계 각지에서 영웅대접을 하자 배가 아팠나 봐요."
  쿠크의 이러한 엉뚱한 발언에 피어리는 발끈 성이 났지만 달리 쿠크의 주장에 반박할 만
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에 대해서 과학적인  조사가 진행된 바
피어리가 정확하게 북극점에 깃발을 세운 반면  쿠크는 북극점을 지나 엉뚱한 곳에  깃발을
꽂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하지만 정작 피어리의 북극점 정복을 진정으로 아쉬워 한 사람은 아문센이라는  노르웨이
극지 탐험가였다. 그가 북극점을 정복하기 위해 그린란드에서 피나는  훈련을 하던 중 접한
피어리의 정복소식은 그의 꿈을 빼앗는거나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허탈하군. 피어리가 북극점을 정복한다는 소식을 조금  일찍 알았다면 같이 출발
하여 경쟁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문센은 고개를 숙이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문센, 너무 실망하지 말게. 북극이 있다면 남극도 있지 않은가?"
  "아, 맞아.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아문센은 동료의 말에 힘이 다시 솟는 것을 느꼈다. 비록 북극점 정복은 놓쳤지만, 남극점
만은 자신이 정복해야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1910년 8
월 9일 남극을 향해서 18명의 대원과 87마리의 개를 이끌고 노르웨이를 출발하였다. 하지만
아문센을 또 다시 긴장시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문센 대장님, 소식에 의하면 영국의 스콧 대령이 이끄는  탐험대가 지난 6월 6일 남극
을 향해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두 달이나 앞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번만은 양보하지 않겠어.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그들보다 먼저 남극에 도착해야 한다."
  아문센은 남극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었다. 대원의 보고를  받은 아문센은
오히려 더욱 힘차게 지휘를 시작했다. 모든 대원들 역시 그를 따라 열심히 남극탐험을 준비
하였다. 마침내 다음해인 1911년 10월 20일 아문센은 네 명의 대원을 데리고 남극점을 향해
출발하였다. 아문센 일행은 각각 13마리의  에스키모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얼음 골짜기를
조심히 지나치며 남극점을 향해 전진을 계속했다. 추위와 거친  눈보라와 싸우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얼음벌판을 하루 평균 36.7킬로미터를 걸었다. 남극은 북극과는 다른  대륙이어서
얼음으로 덮인 산과 골짜기를 지나야 하기에 더욱 힘이  들었다. 일정이 진행되면서 개들을
죽여야 하는 경우도 생겼으며, 가파른 절벽을 올라야 하는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12월 6일, 해발 3225미터로 남극 대륙에서 제일 높은 지점을 통과하기에 이르렀다.
  "대장님, 지금의 위치가 남위 88도 23분입니다. 몇 년 전 영국의 색클튼  탐험대장이 식량
이 떨어져 돌아간 지점입니다. 이제부터의 길은 우리가 바로 인류 최초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며칠이면 남극점에 도착한다. 모두 힘을 내자."
  아무센은 지쳐가는 대원들의 힘을 돋구었다.
  12월 14시 오후 3시, 마침내 경위의(천체나 다른 물체의 방위각과 망각을 재는 기계)가 남
귀 90도를 가리키는 지점에 도착했다. 기지를  떠난 지 55일 만의 감격이었다. 이는  영국의
스콧 일행보다 35일이나 앞선 정복이었다.  아문센의 가슴은 벅찬 기쁨으로 가득했다.  북극
점 정복을 놓쳤던 그 깊은 실망감이 그 반대편인 남극점의 정복으로써 기쁨으로 바뀌는 순
간이었다. 당시 피어리의 북극점 정복에 좌절한 나머지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면 그는 결코
오늘의 영광을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극점이다!"
  "아아. 남극점!"
  아무센과 대원들은 서로 껴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자 조국의 기를 세웁시다."
  일행은 노르웨이 국기를 꺼내어 남극점에 단단하게 꽂았다. 그들의 정복을 축하라도 하듯
이 햇살은 더욱 따스했고 깃발은 힘차게 나부꼈다. 서로의 꿈은 같았다. 그리고 이 두  사람
은 그 후에도 여러 곳을 탐험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가를 보여준
위대한 탐험가로 굳게 자리잡았다.

    홈런에 실은 야구 인생-행크 아론과 왕정치
  "쳤습니다. 큽니다! 홈런이냐! 홈런이냐! 네, 홈런입니다."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야구 중계.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소리를 듣는 순
간 날아갈 듯한 기분을 느낀다. 지구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의 하나가 바로 야구
다. 물론 축구나 육상처럼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다 야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야구가 가장 큰 인기를 누리는 나라는 잘 알다시피 미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 나라다. 이
들 나라의 공통점은 다같이 프로야구를 운영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동작 하나 하나가 어린
이들에게는 꿈이요, 즐거움이다. 어느  분야에서나 마찬가지지만 스타에 버금가는  선수들이
있다. 이들을 일컬어 우리는 맞수  또는 라이벌이라고 부른다. 야구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인기가 있는 스포츠인 만큼 다른  어떤 종목보다도 맞수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 나라
프로 야구도 이미 10년이 넘어섰다.  뼈를 깎는 훈련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달리는 선수들...스포츠에서 승자는 하나라는 말이 이들을 훈련으로 자신을 다스
리게 만드는 것이다. 야구가 시작된지 100년을  훨씬 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물론 햇수만큼이나 일일이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맞수도 많이 있다.
  야구의 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다수가 '홈런'이라고 할 것이다.
  '딱!'
  타구음과 함께 하늘을 날아가는 하얀 공.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날아가는 야구공
과 함께 가슴속의 슬픔이나 고민을 날려버린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홈런은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준다. 그러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친 야구 선수는 누구일까? 그는 다
름 아닌 일본에서 활약한 왕정치 선수이다. 그는 생애 통산 868개의 홈런을 때려 냈다. 야구
를 모르는 사람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야구를 아는  사람이라면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대단한 기록인 것이다. 물론 왕정치가 세계  최다
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는 미국의 행크 아론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그가 기록한 통산 홈런
수는 755개.
  두 선수의 홈런 수는 100개 이상의 차이가 나지만 어쨌든 각자 자기 나라에서는 최고기록
으로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좀처럼 깨기 어려운 기록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을
하고 있다. 두 선수 모두 20년 이상 프로 선수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과 40세가 넘어서도 줄
곧  홈런을 쳤다는 진기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야구계의 영원한  맞수로 남을 왕정치와 행
크 아론의 야구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먼저 세계에서 홈런을 가장
많이 친 왕정치 선수. 왕정치를  아는 많은 야구인들은 그를 두고  야구를 밥먹듯이 했다고
전하고 있다. 앉으나 서나 그는 오로지 야구만을 생각했다. 지독한 연습 벌레였다고  동료들
은 말한다. 그런 탓인지 왕정치는 중학교 때부터 단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중학생 왕
정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나 왕정치의 연습을 아까부터 지켜보던 한 낯선 사람은 그의 타격 실력에 그만 흠뻑 취
하고 말았다. 어른 못지 않은 힘에 공이 빨랫줄처럼 뻗어나가는 것을 본 것이다. 중학생이라
고는 믿기 어려운 타격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왕정치
선수에게 다가가 왼쪽으로 타격을 해 보라고 했다. 바로 왕정치의 야구 인생이 바뀌는 순간
이었다.
  왕정치는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동경의 외곽지대인 스미다구 나리히라교
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했던 왕정치는 어릴 때부터  야구 선수로는 그다지 어울리
지 않는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훈련하고  연습을 많이 해
당대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 그야말로 피나는 훈련의 결과였다. 도대체 178센티미터의  키에
78킬로그램의 몸무게로 어떻게 그렇게 많은 홈런을 칠 수 있었을까? 잘 알다시피 그의 체격
은 야구 선수로서는 그리 좋은 체격 조건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어떤 비결
이 있는 것은 아닐까?
  왕정치와 선수 생활을 같이 한 사람들의 말을 빌자면 그는 끊임없는 노력 뿐 아니라 남들
보다 한 박자 빠른 배팅 속도에서 그런 괴력이 나온다고  했다. 왕정치 선수의 배팅 속도는
보통 선수들의 1.5배나 빨랐다고 한다. 도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
는 그 유명한 외다리 타법이다.  오른쪽 발을 들었다가 내려놓으면서 모든  체중을 싣는 이
외다리 타법을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보완한 타격 방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977년 9월 3일. 야구 선수 왕정치는 평생을 잊지 못할  세계 최고의 홈런 신기록을 세웠
다. 관중들은 왕정치가 세계 신기록이 될 홈런을 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었
다. 관중들의 지나친 기대 탓일까. 왕정치 선수는 부담이  갈 수밖에 없는 경기였다. 야쿠르
트 스왈로스의 선발 투수인 스즈키 고오치로는 왕정치의 신기록 제물이 될 수 없다는 각오
로 열심히 던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일순간 관중석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공이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자 왕정치는 특유의 외다리 타법으로 힘차게 받아쳤다. 공은 쭉쭉
뻗어 오른쪽 외야석 중간에 떨어졌다. 세계에서 최고로 많은 홈런을 치는 순간이었다.  관중
들은 숨을 죽이며 그가 그라운드를  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전까지  최다 홈런 기록을
보유하던 행크 아론의 기록(755개)를 깨는 순간이었다.
  756개. 왕정치는 그 후에도 3년 동안 더 선수 생활을 하며 홈런 기록을 차곡차곡 쌓아 나
갔다. 일본 프로 야구에서 21년이라는 긴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왕정치는 홈런 786개(세계
최고)와 일본 최다 타점(2,170점), 최다 루타(5,862), 최다 볼넷(사사구 2,39개)  등 불멸의 금
자탑을 세웠다. 왕정치 이전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미국의 행크 아론
이었다. 그는 은퇴하기 전까지 755개의 홈런을 때려 세계 최고의 홈런왕이라는 평을 들었다.
1934년 2월 5일 앨라배마주의 모빌 시에서 태어난 아론은 20세 때인 1954년 프로 야구 선수
가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속했던 팀은 '밀워키  브레이브스'로 지금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로 더 잘 알려진 이 팀에서 아론은 자신의 야구  감각과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입단
첫해에 당당히 13개의 홈런을 때려 일약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행크 아론은 다음해부터
는 본격적으로 홈런 타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행크 아론의 홈런 행진은 그
다음해부터 해마다 20개가 넘는 홈런으로 자그마치 20년이나 계속되었다.
  182센티미터의 키에 82킬로그램의 몸무게. 야구 선수로는 체격 조건이 그리 좋은 편은 아
니었다. 그러나 아론은 이러한 체격의 열세를 자신의 피나는  노력과 훈련으로 극복하여 많
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1974년 4월 4일. 아론은 신시내티에서 영원히 깨지지  않으리라
믿어왔던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과도 같은 714호 홈런을 날렸다. 그것으로도 행크 아론은
위대한 야구 선수였다. 그러나 아론의 욕심을 타의 기록이 아닌 세계에서 가장 많이 홈런을
친 선수로서, 자기만의 기록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나흘 수인 1974년 4월 8일. 마침내 세계
야구 역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할 위대한 홈런이 터졌다. 자신의 홈 경기장인 애틀랜
타의 자리를 꽉 메운 수많은 관중들이 아론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해
낸 것이다. 나흘 저에 기록한 714호 홈런을 영원불멸의 기록으로 얘기한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아론은 715번째의 홈런을 날렸다. 그것도  자신이 처음부터 몸담았던 애
틀랜타의 홈구장에서...
  왕정치와 행크 아론은 서로 뛰는 나라만 달랐을 뿐 둘 다 위대한 선수이자 영원한 맞수임
에는 틀림이 없다. 벌써 50을 넘은 나이의 그들. 한 사람은 일본의 다이에 호크스라는  팀의
감독으로 또 한 사람은 미국 프로야구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선수 개발 위원장으로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야구팬들의 두 우상. 그들이 그렇게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피땀어린 훈련 덕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들은 참고 인내하는 자
만이 승리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몸으로 보여준 선수들이라 할 수 있다.

    모래판의 황제와 신사-이만기와 이준희
  어느 분야에서든지 선의의 경쟁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서로 상
대방을 의식하며 끊임없는 훈련과 노력으로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맞수는 있게 마련이며, 선의의 경쟁으로 상대방 선수를 이겼을 때 우리는 그 선수를 스포츠
의 진정한 승자라고 말한다. 스포츠맨십이라든가  스포츠가 아름답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고대부터 우리 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고유의 스포츠로 꾸준히  사랑받는 종목이 있다. 씨
름이 바로 그것이다. 두 선수가 샅바를 잡고 모래판 위에서  승부를 겨루는 씨름은 보는 이
들로 하여금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게 하는 긴장감을 맛보게 하며 통쾌한 한 판 승부는 짜
릿함을 더해 준다. 100킬로그램이 훨씬  넘는 선수들이 좁은 모래판  위에서 상대방 선수를
넘어드리는 씨름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가지 시원해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이 씨름이
아마추어의 경기로 남아 있다가 프로 경기로 된 것은 1983년. 관중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자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프로화를 선언했다. 아마추어에서 명성을 날리던 수많은 선
수들이 프로로 전향했고, 대회가 열릴 때마다 묘기를 구경하러  오는 관중들이 꼬리에 꼬리
를 물었다. 이 민속 씨름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어 모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두 인물이
있다. 모래판의 제왕, 기술 씨름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이만기와 씨름판의 신사, 모래판의 뚝
심이라 불렸던 이준희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우리 나라 씨름계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
한 것이다.
  씨름의 천재, 최고의 씨름꾼. 씨름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만기 선수를 두고 이렇게  말을
한다. 씨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결코 빠지지 않는 인물 이만기. 이만기가 처음부터 씨름
을 잘했던 것은 아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계속 씨름을 하긴 했지만  뚜렷하게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다니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만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피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훈련을
쌓았다. 182센티미터에 105킬로그램. 결코 씨름 선수로서의 이상적인 체격은 아니다. 그나마
몸무게는 백두장사로 체급을 바꾸면서 늘린 것이다. 그러나 이만기 선수는 끊임없는 노력으
로 정사의 자리에 섰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정상에서 밀려나지 않았다. 자신을  다듬는
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만기는 경상남도 마산의 무학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씨름을 시작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에 다니면서도 샅바를 놓지 않은 이만기는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는 생각으로 묵묵하게 연
습을 했다. 경남대학교 진학해서도 씨름을 계속하기는 했지만 그리  자랑할 만한 성적을 내
지는 못했다. 중학교 때 운동선수로서는 치명적인 병이라고 할 수 있는 황달에 걸려 거의 2
년 동안이나 씨름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언제나 모래판에 머물러 있었다는 이만
기. 또 대학 때는 변변한 성적을 내지 못해 씨름을 그만두고 싶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
다는 이만기. 그러나 실업팀에 들어가자마자 민속 씨름이 출범하였고 마침내 이만기는 자신
의 숨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흙 속의 진주는 언젠가는 빛을 발하는 법이라
고 하던가. 수도 없이 포기하려는 이만기를 다시 씨름판으로 내몬 것은 그를 국민학교 때부
터 지도한 황경수(현재 현대 씨름단 감독)감독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만기는 제 1회 천하장사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고 그의 기술 씨름은 찬란히
빛을 발해 마침내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 때부터 민속 씨름판은 언제나 이만기를 위해 상이
존재한다고 할 정도로 번번이 우승을 차지했다. 10번째 천하장사가 되던 날, 이만기는  황경
수 감독을 꽃가마에 태우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만기는 민속
씨름 모래판에서 8년 동안 씨름꾼으로 살았다. 그 8년  동안 이만기는 10차례의 천하장사와
18차례의 백두장사, 그리고 한라장사를 7번이나 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해
서 그가 8년 동안 민속 씨름에서 우승한 타이틀은 총 38개. 1년에 자그마치 거의 다섯 번의
우승을 차지한 셈이다. 빛나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만기 선수가 씨름판에서 거둔 성적을
보면 놀랍다. 통산 344전 293승 51패. 승률이 자그마치 8할 5푼이다. 10번을 싸우면  8.9번은
이겼다는 이야기다.
  씨름판에서 이만기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또 한  명 있다. 이만기 선수처럼 그렇
게 화려하게 씨름판을 수놓지는 못했지만 그는 언제나 묵묵하게 모래판을 지키는  사나이였
다. 잘 생긴 외모에 말이 없는 이준희. 이길 때나 질 때나 덤덤하게 매한가지로 겸손한 예우
를 갖추는 모래판의 신사. 마치 샌님처럼 언제나 씨름에만 열중하고 있는 그를 보면 진정한
씨름꾼은 바로 저런 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준희가 처음으로 샅바를 잡은 것은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의성중학교 1학년 때로 씨름
이 그리 인기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이준희가 고등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씨름이
지금처럼 인기가 있다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종목이 아니었기에 적지 않은 방황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조용한 성격의 이준희는 이고 비를 잘 넘겨 대 선수로서의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 이준희는  아마추어로서 많은 대회에 참가하였고, 출전할  때마다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정상에 서 본 선수만이 그 어려움을 안다고 했던가. 이준희는
한때 씨름을 그만두고 집안 일을 거들며 새로운 삶을 살 준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타
고난 씨름꾼 이준희는 민속 시름이 출범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짐을 꾸려 다시 선수 생
활을 시작했다.
  이왕 다시 시작한 씨름. 이준희 선수는 이를 악물고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여 마침내 다시
민속 씨름의 왕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준희는 이미 씨름  선수에게는 환갑이나 같은 스물여
덟이었다. 그 후에도 이준희는 천하장사를 두 번이나 더 따냈다. 그리고 그 후 자랑스럽게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씨름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배운 것은 바로 참는 것이라고 입버릇처
럼 말하던 씨름판의 신사 이준희. 이제는 모래판에서 몸으로 뛰는 선수가 아닌 후배들을 가
르치고 기술을 전수하는 지도자로서 많은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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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퍼온글]고사성어 이야기 - 김경선

        고사 성어 이야기
   지은이: 김경선 엮음
   출판사: 바른사


  거안사위
  안전함 가운데 있을 때 위태로운 경우를 생각한다.
  거는 있다, 안은 편안하다,사는 생각하다,위는 위태롭다.요컨대 거안사위는
안전할 때 위태로운 경우를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에로부터 훌륭한 군주라 일컬어진 임금일수록 이 말을 명심했지요. 한 사람을
에로 들어 볼까요? 그는 다름 아닌 당나라의 태종입니다.
  중국에 정관정요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태종이 한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나라를 유지하는 일은 어려운 일일까, 쉬운 일일까?"
  태종의 질문에 위징이라는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매우 어려운 일이옵니다."
  그러자 태종이 다시 물었습니다.
  "뛰어난 인물을 등용하고, 그들의 좋은 의견을 받아들여 정치를 하면 되지
않는가. 나는 나라를 유지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데....."
  태종의 말에 위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의 황제들을 보십시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는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여 그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만, 나라의 기반이 튼튼해진 후에는 마음이
해이해집니다. 임금뿐만 아니라 신하도 나라보다는 자기 몸의 편안함만
생각하여, 군주가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감히 그것을 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군주는 자꾸 잘못을 저지르고 신하는 신하대로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게 되어, 나라의 힘이 갈수록 약해지는 것입니다. 나라의 힘이 약해지면
마침내 강한 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겠지요. 에로부터 성인은 안전함 가운데
있을 때 위태로운 경우를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라가 태평할 때에야말로
한층 더 마음을 긴장시켜 정치에 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나라를
유지하는 일은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태종은 이와 같은 신하의 말을 듣고 거안사위를 마음에 새겨, 23년 동안 잊지
않았습니다.
  태종이 중국의 오랜 역사 가운데에서 얼마 안 되는 명군으로 칭송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태종은 옛날 중국의 황제였지만, 태종의 이런 마음가짐은 현재 어린이
여러분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공부를 아주 잘 해서 성적이 좋다고 합시다. 그래서 조금
마음을 놓고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금세 성적이 뚝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성적이 떨어진 다음에 만회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적이
좋을 때에 떨어지는 경우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한다면, 여러분은 언제나
공부를 잘 하는 우등생이 되겠지요
거실:집에 있는 방.
거주: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머물러 사는 곳.
안락:편안하고 온전함.탈이 없음.
안전:편안하고 온전함.탈이 없음.
사고:생각하는 것. 또는 궁리하는 것.
사색: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생각함.
위급:위태하고 급함. 위태로운 어려움이 닥침.
위기:위험한 때.
      교언영색
    입에 발린 말과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생글거리는 얼굴 표정
  공자는 논어라는 책에서 알랑거리는 말과 비위를 맞추는 얼굴 색은 인이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러한 태도를 나쁘다 하였습니다. 교언은 입에 발린 말이나
알랑거리는 말, 영색은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생글생글 웃는 얼굴빛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교언영색은, 겉뿐이고 성의 없는 말이나 표정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답니다.
  그럼 인이란 무엇일까요? 인이란 상대에 대한 인간적인 공감입니다. 여러분이
알기 숩도록 이야기하면, 친절한 마음이나 사랑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사회 생활을 하는 사회인이라면, 이 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공자님의
주장이랍니다.
  논어에는 교언영색이 또 한 번 나옵니다. 그 말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입에 발린 말,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생글생글 웃는 얼굴 표정,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는 태도 등을 좌구명이라는 사람은 부끄러운 일로 생각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또, 마음 속으로는 그 사람을 업수이 여기면서 겉으로만
친구로 사귀는 짓을 좌구명이라는 사람은 부끄러운 일로 생각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공자님은 어째서 교언영색을 싫어하셨을까요? 공자님께서는 그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인간은 사회인으로서 나름대로 자존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로지 암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생글거리는 얼굴
표정을 짓게 되면, 자존심이 없어지고 비굴함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는
곤란하겠지요.
  둘째, 입에 발린 말을 하거나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알랑거리는
사람에게서는 역시 인간으로서의 성의와 성실함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남의 비위를 맞추어 주는 일이 인간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윤활유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것은 못 미치는 것만
못하다는 옛말이 있지요?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지나치면 이렇게 비굴한
사람이 되어 버리니 조심해야겠어요.
교언:교묘하게 꾸며대는 말.
언론:말이나 글로써 자기의 사상을 발표하여 논의함.
언약:말로 약속하는 것또는 그 약속.
영식:남의 아들에 대한 존칭.
색맹:빛깔을 식별하지 못하는 상태.
      교토삼굴
    슬기로운 토끼는 세 개의 굴을 준비한다.
  교는 간교하다,슬기롭다를 토는 토끼를 삼은 셋을 굴은 토끼의 굴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토끼는 세 개의 굴을 준비한다라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위험이 닥칠 것에 미리 대비하여 준비를 해 놓는다는 의미지요.
  옛날 중국에는 춘추 시대.전국 시대라고 해서 많은 나라로 갈라져 서로
싸움을 일삼던 어지러운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전국 시대 말기의 제나라에
맹상군이라는 정승이 있었습니다.
  맹상군은 인재를 좋아해서 많은 식객을 집에 두고 있었던 사람으로도
유명하거니와 그 식객들의 도움으로 정치,외교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뿐만 아니라,맹상군에게는 일화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
교토삼굴의 이야기도 맹상군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맹상군의 집에는 언제난 식객이 많았다고 이야기했지요? 그 식객들 중에
풍훤이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맹상군은 풍훤이라는 남자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나의 영지인 설에 가서 내가 사람들에게  꾸워 주었던 돈을 좀
받아다 주지 않겠나?"
  "예, 알겠습니다."
  풍훤은 시원스럽게 대답을 하고는, 맹상군이 주는 빚 문서를 받아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맹상군의 영지인 설에 도착한 풍훤은 맹상군에게 빚을 진 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어디 빚문서를 이리 주어 보십시오."
  풍훤이 맹상군에게서 받아온 빚문서와 대조해 보니 모두 맞았습니다.
  "흠, 모두 맞는군. 그럼......"
  모두들 풍훤이 빚을 받으러 왔으리라 생각하고 기가 죽어 있던 사람들 앞에서
풍훤은 정말 뜻밖의 행동을 했습니다.
  애써 모은 빚문서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에 태워 버리는 게 아니겠어요.
빚문서를 태워 버린 풍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지신 맹상군께서는 여러분이 고생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를 내려보내 여러분의 빚을 탕감해 주고 오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풍훤의 말에 그만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오, 고마우신 맹상군님! 우리 백성들의 사정을 이렇게 잘 알아 주시는
정승이 계시다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백성들인가!"
하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빚을 받아 오라고 내려보낸 풍훤이 빚을 한푼도 받아오지 않은 것을 알고
맹상군은 떫은 얼굴을 했지만, 풍훤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습니다.
  "부와 귀를 모두 다 가지고 계신 정승님께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의(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입니다. 빚문서를 태워 벅리고, 저는 대신
정승님을 위해 은의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일 년 후, 맹상군은 제나라 민왕의 역정을 사, 그만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맹산군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기운 없이 영지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재상 자리에서 쫓겨난 맹상군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맹상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까지 마중을 나와
환영을 해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맹상군을 위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지신 맹산군님께서 정승이 되지 않으시면 누가 정승을 하겠습니까.
부디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임금님께서 다시 부르시는 날을 기다리세요."
  이것이 바로, 풍훤이 맹상군을 위해 준비해 놓은 첫 번째 굴입니다.
  다음에 풍훤은, 맹상군을 위해 두 번째 굴을 준비하기 위해 위나라로 가서
혜왕에게 말했습니다.
  "제나라의 민왕은 사소한 일로 맹상군을 정승 자리에서 해임시켰습니다.
지금이 맹상군을 불러들이실 좋은 기회입니다. 맹상군이 위나라의 정승이
된다면, 위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맹상군의 명성을 들어오던 위나라의 혜왕은 크게 기뻐하며
풍훤에게 상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사자에게 황금 천 근과 마차 백 량(지금으로
말하면 값비싼 자가용 백 대)을 주어 뱅상군에게 전하도록 한 다음, 정중히
위나라의 재상으로 모셔오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맹상군은 정중히
거절을 했습니다.
  사실은 이것도 풍훤의 지혜로, 위나라 쪽의 움직임이 제나라 민왕의 귀에
들어갈 것을 계산하여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한편 위나라에서 맹상군을 재상으로 앉히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제나라
민왕은 만약 그렇게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얼른 사자를
맹상군엑게로 보내 자신의 처사를 사과하고, 다시 맹상군을 재상으로
불러들었습니다.
  이것이 풍훤이 맹상군을 위해 마련한 두 번ㅉ재 굴이랍니다.
  세 번째 굴로서, 풍훤은 제나라 왕실의 종묘(사당)를 맹상군의 영지인 설에
세우도록 했습니다. 왕실의 종묘가 맹상군의 영지에 있는 한, 맹상군이
미워지더라도, 민왕은 맹상군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앞길에는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사람은, 미리 위험이 있을 것을 생각하여 그에 대한 대비를
해 놓는 것이징요. 남에게 덕을 베푸는 일도 그에 대한 한 가지 대비가
되겠지요. 자기에게 많이 있을 때 남에게 베풀어 놓으면, 나중에 자기가 곤궁할
ㄸ대에 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교동:교활한 아이.
교지:간사하고 꾀가 많은 지혜.
탈토:달아나는 토끼. 몹시 빨리 달아남을 일컫는 말.
토육:토끼의 고기.
삼분:셋으로 나눔.
삼월:삼월. 일 년 중의 세 번째 달.
굴형:굴처럼 생긴 모양.
      국사무쌍
    한 나라에 둘도 없는 뛰어난 인물
  국사란 나라를 짊어지고 나가는 인물을 뜻하고, 무쌍이란 두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즉 국사무쌍이란 한 나라에 둘도 없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의미이지요.
  옛날, 초의 항우와 한의 유방이 패권을 겨루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의
군대에 한신이라는 무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디 항우의 부하였는데, 한신의 생각이 번번이 항우에게 채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방에게로 온 것이었습니다.
  승상 소하는 한신의 뛰어난 재능을 꿰뚫어보고 몇번이나 유방에게 한신을
천거했지만, 유방도 그를 등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진이 멸망한 후, 유방은 한중왕으로 봉해져 도성인 남정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한중왕이라고 하니 듣기에는 굉장한 것 같지만, 유방에게 주어진
영지는 깊은 산과 계곡을 몇 개나 넘어가야 하는 벽지였습니다.
  중국의 산은 우리 나라의 산과는 다릅니다. 그 험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첩첩 산중을 군사들은 기진 맥진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도망가는 병사들이 나올 수밖에요. 병사들은 자꾸 수가 줄어 갔습니다. 한신도
더 이상 유방 곁에 있어 보았자 별 뾰족한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병사들과
함께 도망을 쳤습니다.
  한신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고, 소하는 한왕인 유방에게 이야기할 틈도 없이
도망치는 한신을 뒤쫓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가 잘못 알고는 유방에게
  "승상 소하가 도망쳤습니다."
하고 보고를 했습니다.
  유방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승상이 도망을 쳤다니! 유방의 양팔이 잘려져
나간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에 소하가 돌아왔습니다. 유방은 화가
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소하에게 소리쳤습니다.
  "승상까지 도망을 치다니!"
  "아니, 저는 도망을 친 것이 아닙니다. 도망친 자를 쫓아갔었을 뿐입니다.
한신이라는 남자를......."
  "도망친 자가 수십 명에 이르렀지만 승상은 아무도 쫓아가지를 않았다. 그런데
한신이라는 자를 쫓아가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다른 자들은 얼마든지 도망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신은 다릅니다.
한신이야말로 우리 나라에 둘도 없는 인물입니다. 벽촌의 한왕에 머무를
생각이시라면 또 몰라도, 천하를 다툴 생각이시라면, 그 남자 외에는 달리
큰일을 함께 도모할 인물이 없습니다."
  승상의 말을 듣고 있던 유방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승상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럼 한신이라는 자를 장군으로 삼도록 하지."
  "장군 정도로는......"
  "그럼 대장군은 어떤가?"
  그제서야 승상 소하는 큰절을 하고 유방 앞을 물러나왔습니다.
   소하의 눈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대장군으로서 전권을 쥐게 된 한신은, 그 후
차례 차례 훌륭한 전략을 전개하여, 마침내 유방을 천하의 패자로 만들었습니다.
국기:한 나라를 상징하며 그나라의 표지로 제정한 기.
국산:자기 나라에서 만든 물건.
사인:학문에 좋사하는 사람, 선비
사화:옳은 말을 하는 선비들이 간악한 무리에게 받는 참혹한 화.
무고:아무 사고 없이 평안함.
무시:눈여겨 보지 않음
쌍두마차: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
쌍수:두손.
     군자지교
    군자의 교제
  군자는 요즈음 말로 말하자면 남을 지도할 수 았는 능력이 있고, 동시에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하고 할 수 있습니다(다음에 나오는 군자표변에서
군자를 자세히 설명하겠어요). 지는 -의 뜻을 가진 어조사고 교는
교제하다,사귄다는 뜻입니다.
  즉 군자지교란 군자가 남과 사귈 때는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교제법을
이야기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군자의 교제법이란 어떤 걸까요?
  장자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군자의 교제는 그 담담하기가 물과 같다. 소인의 교제는 그 달콤하기가
감주와 같다."
  물처럼 담담하고 산뜻한 ㅓ이 군장듸 교제 방법이고, 이에 대해 감주처럼
달콤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소인의 교제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소린이란 군자와 반대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감주는 여러분도 알고
있지요? 감주는 식혜라 하기도 하지요.
]  남과 사귈 때 어려운 일은 어느 정도의 사이를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딱 달라붙으면 끈적끈적하여 오래 계속되지가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떨어져서 사이가 멀면 완적히 모르는 사람 같은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지나치게 가까이 하지도 않고, 멀리하지도 않는 것이 교제를 오래
지속시키는 요령인 것 같은데, 그 군형을 맞추기가 어려운 거지요.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과 친해지면 무조건 상대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고,
모든 일에 참견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쓸데없는 참견까지 하게 되어, 그
사람이 싫어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또 한 가지 군자의 교제를 생각하면서 참고가 되는 것이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군자는 교제가 끊어지더라도 그 사람의 ㅇ을 하지 않는다."
  설령 언짢은 일로 해서 교제가 끊어지게 되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 녀석
정말 비열한 놈이야. 사실은 말야. 이런 일이 있었다구' 하는 따위의 험담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깨뜨리기 일쑤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될까요? 다른 사람에게 한 험담은, 반드시 한 바퀴 돌아서 본인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험담을 들은 사람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 원망은 언젠가 어디선가 터지게 마련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런
나쁜 경우도 별로 없을 듯합니다.
  군자는 그런 경우를 알고 있기 때문에, 교제가 끊어지더라도, 상대의 험담을
하지 않도록 명심하는 것이랍니다.
  여러분도 친구를 사귈 때 군자지교를 명심해서 사귀도록 하세요.
군명:임금의 명령.
군은:임금이 내리는 은혜.
자손:아들과 손자. 또는 후손.
자정:밤 열두 시.
교역:물품을 서로 교환하여 장사함.
교우:벗,친구,또는 벗을 사귀는 일.
      군자표변
    군자는 잘못한 점이 있으면 곧 반성하여, 분명히 고친다
  군자라는 말은 여러분도 많이 들어 보셨을 거예요. 알기 쉽게 말하면, 훌륭한
사회인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사회인이라 해도,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겠지요.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과 조직을 이끌어 가는 사람의 두 부류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군자란 분명히 후자(조직을 이끌어 가는 사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만 잘 한다고 해서 군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훌륭한 인격이
더해져야만 비로소 군자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표는 여러분이 모두 알고 있는 표범이라는 동물을 의미하고 변은
바꾼다,고친다,변화한다는 의미입니다.
  군자표변이라는 말은 사서 삼경 중의 하나인 역경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표범이라는 놈은 가을이 되면 털갈이를 하는데, 털갈이를 한 표범의 털가죽은
그 무늬가 뚜렷하고 매우 아름답다고 합니다. 표범의 털가죽이 뚜렷하고
아름답게 바뀌듯이, 군자는 자기의 잘못을 깨달으면 즉시 고친다는 것이지요.
  군자표변이란 말은 본디 이렇게 좋은 의미였는데 그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이랬다 저랬다 하고 태도를 바꾸는 의미로 많이 쓰이게 되었습니다.
  현대는 움직임이 심한 시대로, 주위의 상황이 시시 각각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자신을 게발하고 자신의 능력을 기르는 일을 게을리하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변덕이 일어나는 대로 홱홱 태도를 바꾸는 표변이 아니라
본디의 뜻인 표변, 
요컨대 창조적인 혁신 쪽을 명심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군신:임금과 신하.
군주:나라의 주권을 쥐고 있는 사람.
자도:자식이 지켜야 할 도리.
자식:아들과 딸을 일컬어 이르는 말.
표문:표범의 무늬와 같이 아름다운 무늬.
표피:표범의 가죽.
변혁:바꾸어 새롭게 함.
변화:사물의 모양 성질이 다르게 바뀌는 것.
      권토중래
    흙먼지를 말아올리며 달려오는 기세로 다시 온다
  권은 말다, 토는 흙 흙먼지, 중래는 다시오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자를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흙먼지를 말아올리며 달려오는 기세로 다시 온다가
되는데 권토중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어, 한 번 패하거나 실패한 자가
태세를 가다듬어 다시 일어서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지요.
  이야기는 사면초가의 계속이 됩니다. 해하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달아난
항우는 유방군에 쫓겨 자신을 따르던 8백 기를 대부분 잃고, 장강의 북쪽
기슭인 오강에 이르렀습니다. 건너편 기슭은 항우의 고향인 강동땅입니다.
오강에는 이미 배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배에 오르십시오. 일단 강동으로 몸을 피하셨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일어나십시오."
하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나와 함께 일어나 싸웠던 강동의 8천 젊은이들은 한 사람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데 무슨 낯으로 나혼자 도망쳐서 부모 형제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
하고 대답하고는 스스로 유방의 대군 사이로 뛰어들어 장렬한 전사를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천 년 후, 당나라 시인 두목은, 오강정에 시를 기록하여 항우의
성급함을 애석해했습니다.
  이기고 짐은 병가에서도 예측할 수 없는 것.
  일시의 굴욕을 참고 견디는 것이
  참다운 남아가 아닌가.
  강동의 젊은이들 중에는 뛰어난 전사가 많으니,
  일단 물러가 힘을 기른 후에
  흙먼지를 말아올리는 기세로 다시 나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을 것을......
  권토중래는 이 두목의 시 속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항우의 비장한 최후는 후세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참으로
영웅다운 행동이었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 두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영웅이었기 때문에 최후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싸웠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권토중래--어떠한 절망적인 상황도 견뎌내고 살아나갑시다. 고통의
밑바닥으로부터 힘을 퍼올려 쌓아나간다면, 마침내는 밝은 희망의 아침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권두:책의 첫마리.
권설:혀를 맒. 혹은 놀라거나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아니함을 이름.
토기:질그롯.
토산:어느 한 지방에서 나는 물건.
중요:귀중하고 종요로움.
중력:지구가 지구 위에 있는 물체를 끄는 힘.
내일:오늘의 바로 다음 날. 후일.
내객:찾아온 손님.
      기인지우
    기나라 사람의 걱정
  기는 기나라, 인은 사람, 지는 의, 우는 걱정이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기인지우는 기나라 사람의 걱정이라는 뜻이 되지요. 기인지우를 생략하여
기우라고도 합니다.
  열자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날 기나라에 어떤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날마다 날마다
걱정을 하느라고 일도 하지 못하고 음식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무슨 걱정을 그렇게 했느냐고요? 글세 들어 보세요.
  '아아, 지금이라도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아아, 지금이라도 땅이 꺼지면 어떻게 하나?'
  이런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보다 못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은 기(정기0가 쌓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무너질 염려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해나 달이나 별은 떨어지지 않을까요?"
  "해도 달도 별도 모두 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다만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설령 떨어져서 부딪친다해도 상처를 입을 염려는 없지요."
  "그러면 땅이 꺼지면 어떻게 하지요?"
  "땅은 흙덩이가 쌓여 있는 것입니다. 땅은 어디나 흙덩이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것을 날마다 사람들이 밟고 다닙니다. 무너질 염려 따위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제서야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땅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던
남자는 걱정거리가 풀려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처럼 기인지우란 먼 앞날에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을 이것 저것 걱정하고 있는 사람을 비웃는 말입니다. 분명히 그런 문제를
가지고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하 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게 사는 길이겠지요.
  하지만 핵무기가 발달한 오늘날엔 그런 기인지우를 단순히 웃어 넘길 수만은
없게 되지 ㅇ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핵무기를 사용하는 날엔 정말 하늘도 무너지고 땅도 꺼져 버리지 않을까요?
지구가 멸망할 것이 뻔하니까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사실 오늘날의
대기 오염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리 더운 날도 자동차의 문을 열어 놓기가 싫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나요?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맑고 시원한 바람이 아니라
자동차들이 뿜어내는 가스에 오염되어 더러워진 바람입니다.
  우리는 자연이 우리에게 베푸는 은혜를 듬뿍 누리기 위해서도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겠습니다.
  어디서나 달콤하고 맑은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킬 수 있고, 어디서나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간이 아끼고 보호하는 만큼 자연은 우리에게 베풀것입니다.
기우:쓸데없는 걱정.
인격:사람의 됨됨이.
우국:나라 일을 걱정함.
      다기망양
    갈림길이 많아서 양을 잃어버리다
  다는 많다, 기는 갈림길, 망은 잃어버리다, 양은 양. 즉 다기망양은 갈림깅이
많아서 양을 잃어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이 다기망양이라는 말이 오늘날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이야기하기 전에, 이
말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합시다.
  열자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국 시대의 학자로, 양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이웃집에서 양을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양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그 집 사람들이 모두 나서고,
나중에는 양수의 집 하인까지 나서서 찾았으나 끝내 양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는데도 어째서 양을 찾지 못했는지 궁금해진
양수는 이웃집 주인에게 물엇습니다.
  "어째서 양을 찾지 못하셨습니까?"
  이웃집 주인의 대답인 즉
  "처음에는 외길이었던 것이 두 갈래로 갈라지고, 두 갈래길이 다시 또
갈라져서 네 갈래길이 되고, 그것이 또 갈라지고..... 나중에는 갈림길이 너무나
많아져서 그만 양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부터 다기망양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말이, 학문하는 방법이 너무나 많아 옆길로 새기 쉽기 때문에
진리에 도달하기가 어렵다는 비유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엔, 지나치게
여러 방면으로 관심을 가져 이리 저리 쫓다가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게 되는
경우나, 방침이 여러 가지여서 어떤 방침을 선택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경우에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그 다음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양수는 양을 찾지 못한
이유를 듣자, 그만 깊은 생각에 잠겨 말도 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까짓 양 한 마리, 그것도 다른 사람이 양을 잃어버린 것 가지고 어째서
저렇게 우울해하시는 걸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양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황하 근처에서 헤엄을 매우 잘 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뭉에 들어가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물고기 같았다. 그에게는 ㅅ헤엄치는 법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에는 헤엄치는 법을 배워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배우지도 못하고 물에 빠져 죽는 자도 있었다. 똑같은 것을 배우면서,
수영을 배우는 자와 물에 빠져 죽는 자가 있다. 이렇게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양수가 이 이야기를 한 의미를 이해한 사람은 제자들중에서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큰 길에는 갈림길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을 잃어버립니다. 헤엄치는
법을 배우려다가 물에 빠져 죽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배우는 자도 그 길을
그르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학문은 본디 하나, 나뉘어지는 것은
말절(본줄기에서 멀리 떨어진 하찮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본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잘못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양수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하라고 주장하여, 맹자
등으로부터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로 간주되어 비난을 받은 사상가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방해받지 않고 자기의 본성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그의 이상에는
공감되는 점도 많습니다.
  오늘날 학문이나 직업이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 학문이나 직업을 통해 본래의 자기를 실현하고 싶어하는 사람 또한
많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본래의 자기는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양을 잃어버린 사건을 계기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의 중요함을, 양수는
제자에게 가르쳐 주려 한 것입니다.
다다:대단히 많은 모양
기로:갈림길.
분기:나뉘어서 갈라짐. 또는 그 갈래.
망명:자기 나라에 살지 못하고 남의 나라로 피함.
망조:망할 징조.
양모:양의 털.
양유:양의 젖.
      단도직입
    한 자루의 칼을 들고 똑바로 들어가다
  단은 하나, 도는 칼, 직은 똑바로, 입은 들어가다는 뜻. 따라서 단도직입은 한
자루의 칼을 들고 똑바로 들어가다는 뜻입니다.
  "응, 한 자루의 칼을 들고 똑바로 들어가다니, 어디엘 들어간다는 말이야?"
  자아 그 이야기를 해 봅시다.
  후에 남제의 장군이 된 대승정이라는 사람이 아직 유명해지기 전, 북위의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 대승정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이
남사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승정, 군사의 모집에 응해 나가 싸웠다. 하나의 칼을 거머쥐고 똑바로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위군, 패하여 도망쳤다."
  이처럼 단 한 자루의 칼에 의지하고 적진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단도직입의
본디 뜻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목표를 정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의 비유로 쓰이게
되었고, 나아가 오늘날에는 앞의 인사말 같은 서두를 빼고 직접 본론으로
들어가는 이야기 방법을 형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어른이 하시는 말씀을 듣다 보면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
하고 말을 꺼내시는 것을 들은 일이 있을 거예요.
  어때요? 알고 보니 참 재미있지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고 있는 말들이
모두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놀랐을 거예요.  
단독:단 한 사람. 또는 혼자.
단어:낱말.
도공:칼을 만드는 사람.
도련:종이의 가장자리를 가지런하게 베는 일.
직감:설명을 듣지 않고 그 뜻을 마음으로 느껴 앎.
직후:바로 그 다음.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
입구:드나드는 어귀.
입학:학교에 들어감.
      담대심소
    대담하고도 세심하게
  담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쓸개를 의미하는 한자인데, 달리 '기백,용기' 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대는 크다, 심은 마음, 소는 작다는 뜻.
  '대담하기를 원하고, 세심하기를 원한다라는 말은 당나라의 손사막이라는
사람이 한 말인데, 이 말을 줄인 것이 담대심소입니다.
  대담한 것과 세심한 것은 본디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대담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면, 가만히 주위의 친구들을 살펴보세요.
개중에 유난히 겁이 없고 무엇이든지 앞장서서 용기 있게 하는 친구가 있지요?
그런 사람을 대담한 사람이라고 한답니다.
  반면에 작은 일에도 마음을 쓰는 친구가 있을 거예요. 친구의 어려운 사정을
유난히 잘 알아서 그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 준다든지, 어쨌든
조그마한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을 세심한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대담한 사람은 용기 있게 무엇이든지 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지나치면 만용이 되기 쉽습니다. 만용이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하부로
날뛰는 거지요. 그에 대해 세심한 사람은 무슨 일에나 생각을 깊이 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지나치면 소극적인 사람이 되기 쉽지요. 이렇게 각각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습니다. 만약 이 두 가지 성격을 혼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쁜 점은 보완이 되고 좋은 점은 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담대심소-대담하면서도 세심한 사람. 이런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건 잘 해
나갈 게 틀림없습니다.
  여러분도 담대심소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 보세요.
담력:겁이 없고 용감함.
담지:두려움 없이 용감하며 지혜까지 있음.
대기: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기체의 층.
대범:마음이 넓고 큼.
심경:마음의 상태.
심신:마음과 몸.
소국:작은 나라.
소인:인격이 천박하고 덕이 없는 사람. 또는 키가 작은 사람, 난쟁이.
      대기만성
    큰 그릇은 만들어지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노자라는 책에 대지에는 귀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큰 인물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질 수 없다는 말이지요.
  중국의 삼국 시대 때 위나라에 최염이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
장군은 체격도 늠름할 뿐만 아니라, 무장으로서도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촌 동생인 림이라는 사람은 생기기도 못생겼을 뿐만 아니라 뛰어나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늘 사람들에게서 바보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최염만은 자기 동생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집안 어른들이 림을 손가락질하며
  "에이, 저 바보 녀석! 형은 잘났는데, 어째서 저녀석은 저리도 바보 같을꼬."
하고 혀를 끌끌 차면, 언제나
  "커다란 종이나 커다란 솥은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재능도 마찬가지이지요. 완성이 되려면 당연히 오랜 시일이 필요합니다. 두고
보세요. 림은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하고 동생을 두둔했습니다.
  그렇게 늘 격려해 주고 보살펴 준 형의 따뜻한 정성에 힘입어서인지, 과연
림은 나중에 전자를 보필하는 막중한 임무를 완수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위지라는 책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을 쉽게 판단하려
하지 않고, 긴 안목으로 보려 한 사랑이 담긴 이 말이, 지금은 역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쩔쩔 매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말의 본디 뜻을 마음에 잘 새기어, 지금은 무언가를 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ㄲ구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남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될 테니까요.
대가:학문,기술에 뛰어나, 훌륭하고 권위를 이룬 사람.
대의:마땅히 행해야 할 중대한 의리.
기구:세간,그릇,연장 등의 총칭.
기질:타고난 재능이 있는 바탕.
만풍:날이 저물어서 부는 바람.
만학:나이가 들어 늦게야 배움.
성공:목적을 이룸. 사회적 지위를 이룸.
성년:만 이십 세 이상.
      마이동풍
    말의 귀에 동풍
  마는 말, 이는 귀, 동풍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입니다. 그러므로
마이동풍은 말의 귀에 동풍이라고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데, 마이동풍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며, 어떤 때에 쓰이는 말인지를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정확히 알아봅시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이백(이태백)이 벼슬살이에 실패하고 도성에서
추방되어 강남 지방을 방랑하고 있을 무렵, 자기와 똑같이 불우한 친구에게 긴
시를 한편 보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인기가 있는 것은 투계(닭싸움)의 명인이나 무예에 능한 군인
정도인걸. 우리는 둘 다 그런 흉내조차 싫어하지 않는가. 우리가 아무리
고심하여 시를 지어도 세상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할 줄을 모르니 마치 말의
귀에 동풍이 불어오는 것과 같은 형편일세. 이런 속된 세상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가난해도 자유로운 산생활이야말로 우리의 이상에 맞는
듯하군.
  동풍이 전해오는 봄의 기쁨도, 둔감한 말의 귀에는 아무런 반응을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흘려 버리는 것을 마이동풍이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쇠 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이 있는데 마이동풍과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마차:말이 끄는 수레.
이식:귀로 들어서 음식물의 맛을 판단한다는 것에서부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뿐으로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그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귀엣말.
동문서답:어떤 물음에 엉뚱한 대답을 함.
풍속:예로부터 사회적으로 행하여 온 모든 생활에 관한 습관.
풍문:바람결에 들리는 소문.
      망국지음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
  망은 망하다, 국은 나라, 음은 소리의 뜻입니다. 따라서 망국지음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이라는 뜻입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이라니, 어떤 음악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말일까요?
  예기라는 책에 음악에 관해 기록해 놓은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마음에서 감정이 생겨나, 그것이
움직이는 대로 소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소리를 글로 나타낸 것을 음악이라고
한다. 따라서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을 때는 화평하고 즐거운 음악이
생겨나니, 정치가 바르게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원망하고 분노에 찬 음악들이 생겨나니, 그것은 정치가 바르게 행해지지 않기
ㄸ대문이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은 슬픈 마음이 일어나게 하니, 그 백성이
곤궁하기 때문이다."
  망국지음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말이랍니다.
  정치가 혼란하여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부패해있다면, 일부 부유층
사람들은 퇴폐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많은 백성들은 곤궁한 생활을 할
것입니다. 퇴폐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퇴폐적인 음악이 유행할
것이고, 곤궁한 생활을 하는 백성들 사이에서는 슬픈 음악이 유행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곧 나라가 망할 징조이니, 결국 슬픈 음악과 음란하고 퇴폐적인
음악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이 되는 것입니다.
  한비자라는 책에 다음과 가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 춘추 시대의 일입니다. 위나라의 영공이 진나라로 가던 도중 복수
부근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무척 슬픈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악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눈물이 나올 만큼 구슬픈 음악 소리였습니다.
영공은
  "참으로 구슬픈 음악이로다. 이 소리가 어디서 들려 오는 것인고."
하며 악사장인 사연에게 명하여, 그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이윽고 진나라에 도착한 영공은, 진나라의 평공이 초대한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영공은
  "제가 이곳으로 오던 도중에 참으로 구슬픈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악사장으로 하여금 배우게 했는데, 그 음악을 한 번 들어 보시지요."
하며, 복수 부근에서 배우게 한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였습니다.
  사연이 한참 음악을 연주하는데, 갑자기 진나라 평공의 악사장인 사광이
말했습니다.
  "이 곡을 더 이상 연주하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평공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어째서 안 된다는 말인가?"
  "이 곡은 은나라의 악사장이 주왕을 위해 만든 사치스럽고 음란한 음악입니다.
그 소리가 구슬퍼 사람의 애간장을 끊어 놓을 듯하니, 이런 음악을 들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입니다. 주나라의 무왕이 주왕을 정벌했을 때, 이
음악을 만든 악사장은 복수에 와서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
음악을 더 이상 듣지 마십시오."
  그러나 평공은 사광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들어 보니, 참으로 감동적인 음악이로다. 계속해서
연주하라."
  음악은 계속해서 연주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하자,
서북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피어 오르고, 계속해서 연주하자,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연주하자, 마침내 거센 비가 장막을
찢고 음식상을 부수었으며, 지붕의 기와를 떨어뜨렸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고, 평공은 복도 구석에 엎드려 벌벌
떡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진나라에는 심한 가뭄이 3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평공은 심한 종기로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망국지음-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
  망국지음은 나라를 망하게 할 뿐만 아니라, 먼저 그런 음악을 즐기는 사람의
정신을 병들게 합니다.
  여러분은 건전하고 즐거운 음악을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망부:돌아가신 아버지.
망실:잃어버리다.
국경일:법으로 정한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
국사:자기 나라의 역사.
음조:소리의 높낮이와 강약, 빠르고 느린 정도.
음치:소리에 대한 감각이 둔한 사람.   
      맹모삼천
    맹자의 어머니 세 번 이사를 하다
  맹은 맹자 모는 어머니, 천은 이사하다는 뜻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옛일에서, 어머니가 아이의
교육에 열심인 것에 비유해서 쓰는 말이 되었습니다.
  맹자의 집은 처음에 묘지 근처에 있었습니다. 어린 맹자는 날마다 장례식
치르는 흉내를 내며 놀았지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묘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해야겠다.'
고 생각한 어린 맹자의 어머니는 서둘러 집을 팔고 이사를 했습니다. 새로
이사한 곳은 시장 근처였습니다.
  '이젠 아들이 장례식 흉내를 내는 일은 없겠지.'
하고 안심을 하며 아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 맹자가 무언가를 잔뜩 쌓아놓고, 아이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흉내를 내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아, 이곳도 아들을 키울 만한 곳은 아니로구나.'
하고 생각한 어머니는 또다시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번에 이사한 곳은 학교 옆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어린 맹자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니, 학생들이 예의 범절을 실습하는
흉내를 내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서야 어머니는
'여기가 나의 아들을 키울 만한 곳이다.'
하고 아들이 클 때까지 학교 옆에서 살았답니다.
  이 이야기는 열녀전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자가 청년이 되었을 때입ㄴ디ㅏ. 어머니와 떨어져서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맹자가 느닷없이 집엘 왔습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고 웃으며 집으로 들어서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공부를 다 하고 왔느냐?"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아들의 대답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를 칼로 싹둑 잘라 버렸습니다.
  아들이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아니 어머니! 어째서 애쓰고 짜시던 베를 잘라 버리십니까?"
  "네가 학문을 중단하는 것은, 애써 짜던 베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다. 너와
같이 의지가 약해서야 앞날이 걱정스럽구나."
  맹자는 즉시 어머니에게 사죄하고, 다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 후 맹자는 학문에 힘써, 오늘날까지 모두가 다 아는 유명한 사상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학문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도중에 중단하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중단하지 않고 무언가를 끝까지 이루어 내는 인내력을 가져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시다.
맹자:사람의 이름. 본디 이름은 맹가이다, 책 이름.
맹하:초여름.
모교:자기가 졸업한 학교.
모성애: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
삼익우:곧은 벗.성실한 벗. 즉, 사귀어서 이익이 되는 세 가지 타입의 벗.
삼척동자:키가 석자 되는 아이. 곧 어린아이.
      명경지수
    맑은 거울과 조용히 머물러 있는 물과 같은 마음
  명은 밝다, 경은 거울, 지는 조용하다, 수는 물. 그러므로 명경지수는 맑은
거울과 조용히 머물러 있는 물을 의미합니다.
  자아,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해서 명경지수라는 말이 생겨났는지 알아보기로
할까요?
  옛날 노나라에 왕태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왕태는 발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은 전과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습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강의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 하나
가르치는 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그 곳에 가면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왕태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기에 그럴까요?
  공자는 왕태라는 사람의 위대한 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사물의 근원은 하나이다. 예를 들면 살고 죽는 이조차 근원은 하나이다.
이 진리를 체득한 왕태에게 있어서는, 발목 하나를 잃는 것도 흙덩이를 버리는
일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의 마음은 마치 정지해 있는 물과 같다. 흐르는
물은 거울이 되지 못하지만, 정지해 있는 물은 모든 모습을 비쳐낼 수가 있다."
  이상과 같은 말은 장자라는 책에 있는데,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전히
받아 들이는 깨달음의 경지에 달하여, 다른 사람의 미혹(정신이 헷갈려서
갈팡질팡 헤맴)을 비쳐내는 거울 같은 존재가 된 사람을 명경지수에 비유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기 쉽게 다시 말하면, 명경지수는 무언가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어때요? 명경지수라는 말을 알았으니, 여러분도 명경지수와 같은 고요한
마음을 가져 보지 않겠어요?
명년:이듬해. 내년.
명철:총명하고 사리에 밝음.
경면:거울이 비치는 면.
경청:거울과 같이 맑고 깨끗함.
지숙:어떤 곳에서 머물러 잠.
지혈:밖으로 나오던 피가 멈춤.
수온:물의 온도.
수재:큰 물로 인한 재앙.
      무용지용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쓸모가 있다
  무용은 쓸모가 없는 것, 용은 유용을 생략한 것으로 쓸모가 있는 것, 따라서
무용지용이라는 말은 평상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던 것이 실은 쓸모가 있다,
아니,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야말로 실은 쓸모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째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지요?
무용지용이라는 말은 장자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장자라는 책은 장자라는
사람의 주장을 모아 놓은 책인데 그는 이 책 속에서 되풀이하여 무용지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용지용의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지요.
  만약 여러분이 친구와 열심히 토론을 하고 있는 중에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네 이론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그럴 때 여러분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을 거예요.
  "쓸모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쓸모 있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 보지. 우리 두 사람이 서있는
지구는 한없이 넓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서 있기 위해 필요한 땅은 두 발을
놓을 수 있는 약간의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발을 놓을
수 있는 땅만 남겨 놓고 주위의 땅을 모두 깎아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도 발을 딛고 있는 땅이 우리에게 쓸모가 있을ㄲ?"
  그러면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할 거예요.
  "그야, 그런 상태에서는 발을 딛고 있는 땅도 쓸모가 없어지겠지."
  "그것 봐라. 쓸모 없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쓸모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았겠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통쾌한 승리지요? 이것이 바로 장자라는 사람이
주장하는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잘 생각하면서 한 번 주위를 살펴보세요. 쓸모 없는 듯하지만
실은 쓸모 있는 것들이 의외로 많을 거에요.
  안녕하세요!,안녕히 가세요! 하는 인사말 같은 것이 일을 하는 데에는 별로
쓸모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인사말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무척 서먹서먹해질 거예요. 만나면 웃는 낯으로 인사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아주 즐거운 하루가 될 수 있겠지요.
  얼른 생각할 때 별로 쓸모가 없는 것 같아도 이렇게 인간의 생활에 윤기를
주거나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의외로 많답니다.
  무용지물-쓸모 없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쓸모가 있는 것이다! 모두 아셨지요?
무명: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음.
무상:인생의 덧없음.
용구:무엇을 하거나 만드는 데에 쓰는 기구.
용무:볼일, 필요한 임무.
용법:쓰는 방법.
용지:어떤 일에 쓰이는 종이.
      미생지신
    미생이라는 사람의 약속 지키는 마음
  미생은 사람의 이름이고, 지는 의, 신은 믿는다는 뜻입니다.다시 말해
신이라는 한자는 본디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 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신으 인간 관계의 기본으로, 사회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태연히 거짓말을 한다든지, 약속을 함부로
깨뜨린다든지 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신은 미덕 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덕도, 지나치거나 그에 너무 구애를 받으면 오히려
나쁠 경우도 있습니다.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생활에 융통성이
없어 집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미생지신 입니다.
  옛날 중국의 노나라에 미생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생에게는 사람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우 사람은 데이트를 즐기고, 다음에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잘 가요. 다음엔 저기 보이는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해요."
  "예."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 미생은 일찌감치 다리 밑에 가서
기다렸습니다. 강가엔 버들이 늘어져 있고, 강물은 평화롭게 흐르고 있습니다.
미생은 다리 밑에서 강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연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글세,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뿌리지 않겠어요. 처음에는
조금씩 내리던 비가 금세 장대같이 굵은 빗줄기가 되어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미생의 옷은 비에 완전히 젖었습니다.
  '아아, 어째서 나의 임은 오시지 않을까?'
  이제 비는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부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강물은 자꾸 불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생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가 와서 늦어지고 있을 뿐이야. 곧 오시겠지.'
  미생이 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강물은 점점 불어 미생의
허리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래도 연인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미생의 목까지 강물이 차올랐습니다.
  마침내 미생은 다리를 붙잡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던 듯, 장자라는 책에도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그밖에 전국책,회남자,사기 등의 책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읽고 무엇을 느꼈나요?
  사람은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약속을 잘 지킨다는 것은 현대인의
교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생처럼 목숨을 잃어 가면서 약속 장소를 지키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불어나는 강물을 피해 다른데 가 있다가 다시 왔으면 목숨도 잃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도 다시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어린이 여러분은 약속을 잘 지키되, 미생과 같은 우직함을 범하지는
말아야겠죠?
미말:끝. 맨 아래.
미행:몰래 사람의 뒤를 따라감.
생게:살아나갈 방법.
생존:살아있음. 끝까지 살아 남음.
신념:굳게 믿어 의심하지 않는 마음.
신용:약속 지킬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음.
      방약무인
    마치 곁에 사람이 없는 것같이 하다
  방은 옆의 뜻이고, 약은 마치-같다는 뜻이고, 무는 없다, 인은 사람의
뜻입니다. 따라서 방약무인은 마치 곁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같이 행동한다는
뜻이 됩니다.
  사기의 자객열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의 시황제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형가라는 사람이 아직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지사들을 사귀고 있을 무렵입니다. 연나라에서 축(거문고와 비슷한
악기)의 명수인 고점리라는 사람과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곧 의기가
투합하여, 같이 술을 마시며 돌아다녔습니다. 술에 취하면, 고점리는 축을
연주하고, 형가는 노래를 부르다가, 이윽고는 서로 잡고 소리내어 울었는데,
마치 가까이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같이 하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로부터 방약무인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오늘날에는 방약무인한 행동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무례한 행동을 의미합니다만, 사기의 자객열전에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가리켜 방약무인이라는 말로 표현했을 뿐, 비난하는 의미로는
쓰고 있지 않습니다.
방관:어떤 일에 관계하지 아니하고 옆에서 구경함.
방조:옆에서 도와 줌.
약간:얼마 안 됨.
약명:젊은이의 목숨.
무식:지식이 없음.
무죄:아무 잘못과 허물이 없음.
인공:사람이 자연물에 가공하는 일.
인명:사람의 목숨.
      배수지진
    강을 뒤로 하고 친 진
  배는 뒤, 수는 물, 진은 진(적과 싸울 때 대오를 편성하는 것).
  배수지진은 생략해서 배수진리라 하기도 하며, 강을 뒤로 하고 치는 진을
말합니다.따라서 심상치 않은 결의를 가슴에 품고 최악의 사태를 각오하고 일에
임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사기라는 역사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결룰 때 유방의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한신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백만대군을 자유 자재로 움직였다고 하니 용병에는 특히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 한신이 유방의 명령을 받고 조나라를 공략할 때의 일입니다.
  한신의 군대는 겨우 일만 명. 그런데 조나라 군대는 이십만 명입니다.
정상으로 싸워서는 백에 하나도 이길 확률이 없습니다. 이 때 한신은 일부러
강을 뒤로 하고 진을 쳤습니다. 바로 배수진입니다.
  그것을 보고 적은 "흥 바보 같은 장군이로군 아주 죽으려고 각오를
했구나"하며 의기 양양하게 쳐들어 왔습니다.
  뒤에는 강물입니다. 도망갈 데도 없습니다. 한신의 군대는 죽을 힘을 다해
싸울 수밖에 별 도리가 없습니다. 정신 없이 싸우고 있는 동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십만 적의 대군이 크게 패해 도망을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승리입니다. 일만 명이 이십만 명을 무찌른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싸움이 끝난 후에 참모들이 한신에게 물었습니다.
  "배수진같은 터무니 없는 작전으로 어떻게 쾌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까?"
  참모들의 물음에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병법에도 군사를 사지에 두고서야 비로소 사는 길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을 조금 응용한 것이 이 배수진이지. 우리 군대는 여기 저기서 끌어모은
그야말로 오합지중이 아닌가. 게다가 숫자에 있어서도 1만과 20만이고. 정면으로
붙어 싸우면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져 도망갈 것은 뻔한 일이지.
그래서 사지에 두어 본 것일세."
  여기서 말하는 사지란 절체 절명의 상태 즉 아무리 하여도 빠져 나올 수 없는
궁한 상태를 말합니다.
  손자의 병법에 병사를 사지에 둔 연후에 산다고했습니다. 병사를 사지에 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가운데에서 살길을 찾아 필사적으로 싸우게 된다는 것이지요.
  한신의 배수진은 이것을 응용한 것이었습니다.
  병법에서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몇 번쯤 막다른 곳에 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한신처럼 배수진을 치고 자신을 분발시키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 할 수 있겠지요.
배경:뒤의 경치. 혹은 무대 뒷벽에 꾸민 경치. 흔히 뒤에서 도와 주는 사람이나
힘을 배경이라고도 한다.
배신:믿음과 의리를 저버림.
수륙:바다와 육지.
수산:물 속에서 나오는 산물.
진용:진의 모습.
진지:적과 싸울 목적으로 부대가 배치되어 있는 터.
      사면초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 소리
  그 때까지 한편이었던 사람까지 적으로 돌아서 버려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상태일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사면은 사방 초는 초나라 가는 노래.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
소리는 사면초가라는 한자의 뜻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 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면초가에 얽혀 있는 이야기를 모른다면, '아니,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 소리가 뭘 어쨌다는 거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게
틀림없습니다.
 자아, 그럼 지금부터 사면초가라는 말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합시다.
 이야기는 옛날 중국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장군 항우는 진시황제에 의해 멸망한
초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초나라 장군을 지낸 명문 귀족 집안의
자제로,비할 데 없는 용기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장군이었지요.항우는
자신의 부하는 아끼고 사랑한 반면 적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진시황이 죽자, 진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들고
일어났는데, 그 때 항우도 '강동'의 젊은이들 8천 명을 이끌고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진을 멸망시키고 천하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무렵, 한왕 유방도 점차 실력을 길러 가고 있었습니다. 유방은 관대한
성품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람을 잘 쓸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한 번은 항우에 의해서 파.촉의 변두리 땅으로 밀려간 적이 있었지만, 그 후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곡창지대인 관중땅을 근거지로 삼아 항우와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싸움을 할 때마다 유방의 군대는 언제나 항우의 정예군에 의해
여지없이 깨져 패주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뒤에 관중이라는 풍부한
보급원을 가진 유방의 군대는 항우군이 물러가면 곧 세력을 회복하곤 했습니다.
반면 항우는 각지를 다니면서 싸울 수 밖에 에 없게 되어 서서히 유방군의
세력이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항우는 해하(지금의 안휘성 내)라는 곳으로 밀려 성 안에 틀어박히게
되었는데 이미 싸울 힘은 없어지고 식량도 바닥이 난 상태였습니다. 성 주위는
유방군과 제후의 연합 군대가 완전히 둘러싸고 있고요.
  그날 밤 잠을 자던 항우는 귓결에 들려오는 노래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났습니다. 그 노래 소리는 적의 진지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는데, 모두가
초나라의 노래였습니다.
  '이럴 수가! 우리 초나라 병사들이 모두 적에게 항복을 했단 말인가!'
  완전히 잠에서 깬 항우는 애인인 우희를 상대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술을 마시던 항우는 격렬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산을 들어올리는 힘도
천하를 압도하는 기개도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되었구나.
추야, 너도 걸을 수가 없느냐.
아아, 우희야!우희야! 너를 어찌할 거나.
  추는 항우가 아끼던 말의 이름이고 우희는 항우가 가장 사랑하던 애첩입니다.
우희도 항우와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항우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항우를 가까이 모시던 신하도 엎드려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날이 밝자, 항우는 정예 8백기를 이끌고 좌충우돌 적진을 뚫고 오강까지
이르렀으나, 그 곳에서 최후의 분전을 하고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항우가 어째서 사면초가의 상태에까지 이르러
멸망했을까요?
  항우라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크나큰 자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만큼
부하가 아무리 훌륭한 대책을 말해도 너희들 따위가 무엇을 알겠느냐는 태도로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능력만 믿고
부하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면초가의 상태로까지 그를
몰고 간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계:봄,여름,가을,겨울.
사군자:군자와 같다는 매화,국화,난초,대나무를 일컫는 말.
면목:남을 대하는 낯.
면전:서로 보는 앞.
초성:초나라의 음악.
초죽:초나라 지방에서 나는 대의 일종.
가무:노래와 춤.
가수:노래 부르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
      사족
    뱀의다리
  사는 '뱀', 족은'다리'. 따라서 사족은 '뱀의 다리'를 의미합니다. '뱀의
다리'라고? 아니, 뱀에는 다리가 없잖아요.
  그렇습니다. 뱀에는 다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족이란 말은 '있어도 유익하지
않은 것', 혹은'아무런 이익이 없는 쓸데없는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사족에 얽혀 있는 이야기를 알아봅시다.
  <전국책>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초나라에 '소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초나라를 위해 위나라를 쳐서
여덟 개의 성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제나라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진진'이라는 사람이 제나라를 위해 소양을 설득하려
왔습니다.
  진진은 우선 소양에게 큰절로 전쟁에 이긴 것을 축하하고,몸을 일으켜
물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초나라를 위해 위나라의 여덟 성을 빼앗으셨습니다. 초나라에서는
그런 공을 세우면 어떤 벼슬을 내려 주시는지요."
  "그야, 최고의 벼슬이 주어질 테지요."
  "그러면, 최고의 벼슬은 어떤 것입니까?"
  "영윤(재상)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영윤은 귀한 벼슬입니다. 그러나 장군께서는 이미 영운의 자리에
계십니다. 제가 장군울 위해 은밀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하고 진진은 소양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초나라에 사자(제사를 맡은 사람)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어느날 제사를
끝내고 보니, 술이 큰 잔으로 한 잔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술을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시종들에게 주었습니다. 참으로 향기롭고 맛있는
술이었습니다.
  시종들은 그 술을 받아들고 의논을 했습니다.
  "여럿이 나누어 마시기에는 적은 술이지만 혼자 먹기에는 충분한 술일세.
그러니 우리 내기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다 마시는게 어떻겠나?"
  "그것 좋네. 그럼 무슨 내기를 할까?"
  "뱀을 그리기로 하세. 뱀을 가장 먼저 그리는 사람이 이 술을 다 먹는 걸세."
  이렇게 하여 시종들은 땅에 열심히 뱀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뱀을 아주 잘 그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능숙하게 뱀을
그렸습니다.
"자아 나는 벌써 뱀을 다 그렸으니, 이 술은 내것일세."
하면서 그는 왼손으로 술잔을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끙끙거리며
뱀을 그리고 있습니다. 뱀을 다 그린 사람은 은근히 자신의 솜씨를 뽐내고
싶어졌습니다.
  "흠 모두들 정말 못 그리는군. 나는 뱀에 다리도 그릴 수 있다구!"
하면서, 그는 왼손에 술잔을 든 채, 오른손으로 뱀에 다리를 그렸습니다. 그가
뱀에 다리를 그려 넣는 동안, 다른 사람이 뱀을 다 그리고는 얼른 술잔을
빼앗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뱀에는 다리가 없는데 다리를 그렸으니,
그것은 뱀이 아닐세. 그러므로 내가 제일 먼저 뱀을 그렸으니, 이 술은 내
것일세."
  그리하여, 제일 먼저 뱀을 그렸던 사람은 술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진진은 이야기를 끝내고 다시 소양에게 말했습니다.
  "장군은 지금 위나라를 쳐서 여덟 성을 빼앗아 초나라에 더했습니다. 그런데도
장군께서는 다시 조나라를 치려 하십니다. 조나라에서는 장군의 위세에
벌벌떨고 있습니다. 그토록 장군의 위세와 명성은 천하를 뒤흔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게다가 장군은 이미 영윤의 자리에 계십니다. 더 이상 높아질 벼슬이
없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투를 해서 패하는 일이 없고, 더구나 멈출
줄을 모르는 사람은 멀지 않아 그의 벼슬을 다른 사람이 하게 될 것입니다.
  뱀의 발을 그려서 좋은 술을 마시지 못한 사람과 똑같은 일이지요."
  진진의 말에 소양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과연 그렇구려."
  그렇게 하여, 소양은 제나라를 치지 않고 군사를 돌렸다고 합니다.
  사족이라는 말은 이로부터 나온 말입니다.
사독:뱀의 몸 속에 있는 독.
사심:뱀과 같이 표독스럽고 질투가 심한 마음.
족음:발짝 소리.
족적:걸어 온 발자취.
      새옹지마
    변방에 사는 늙은이의 말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어른들이 쓰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지요?새옹지마는 오늘날에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고사 성어 중의 하나입니다.
  새는 변방, 옹은 늙은이, 지 는의,마는 말. 따라서 새옹지마는 변방에서 사는
늙은이의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변방에서 사는 늙은이의 말이 어찌 되었다는 말인가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 봅시다.
  옛날 중국의 변방에 한 늙은이가 살았습니다. 그 늙은이에게는 가족이라곤
아들 하나와 말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늙은이의 말이 국경을
넘어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참 큰일이지요?
  동네 사람들이 늙은이를 불쌍하게 여겨 위로해 주고자 했습니다.
  "정말 안 되셨습니다. 한 마리밖에 없던 말이 도망을 가 버렸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말을 잃어버린 늙은이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웬걸요. 말을 잃어버린 지 몇 달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정말 행운이 굴러
들어왔습니다. 도망갔던 말이 훌륭한 수말과 함께 돌아온 거예요. 게다가
도망갔던 말은 새끼를 배고 있었습니다. 늙은이의 집은 금세 말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말이 큰 재산이었던 옛날입니다. 늙은이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축하하고 기뻐해 주었습니다.
  "노인장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도망간 줄 알았던 말이 수말을 데리고 오고,
게다가 새끼까지 낳다니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고 있는데도, 늙은이는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노인장은 기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늙은이는
  "이 행운이 언젠가 불행의 씨앗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니 크게 기뻐할
일이 아니지요."
  그러던 중 늙은이의 아들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쯧쯧, 어쩌다가. 아드님이 저렇게 다리가 부러졌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십니까!"
하고 늙은이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늙은이는
  "이 불행한 일이 언젠가 행운을 불러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며 별로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북쪽 오랑캐가 국경을 넘어 쳐들어 왔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을의 청년이란 청년은 모두 나가서 싸움을 하다가 전사를 했는데,
늙은이의 아들만은 한쪽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에 싸움터에 나가지 않아
무사했답니다.
  이것이 새옹지마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생에는 행복한 상태와 불행한 상태가 번갈아
찾아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읽고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아직 공부를 하는 학생의 신분이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얼마나 많은 일이 생기는지 잘 모를 거예요.
  사라미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길 때도 있고, 나쁜 일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 날뛰고, 나쁜 일이 생기면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옹지마에 얽힌 이야기를 읽어서 알았습니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그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을.그러므로 좋은 일이
생길 때 나쁜 일이 생길 것을 생각하여 미리 대비해야 겠어요. 반대로 나쁜
일이 생겼다고 언제까지나 나쁜일만 계속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나쁜 일이 생겼다고 절망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런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참아내는 지혜를
가져야겠습니다.
새북:북방, 변경의 땅.
새외:요새의 밖.
옹고: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옹주:왕의 첩의 몸에서 난 딸.
마력:말 한 필의 힘이라는 뜻. 동력의 단위로 쓰인다.
마부:말을 부리는 사람.
      수어지교
    물과 물고기 같은 사귐
  수는 물, 어는 물고기, 지는 의, 교는 사귐을 의미합니다. 즉 수어지교는 물과
물고기 같은 사귐이라는 뜻이지요.
  유비 현덕이 제갈공명의 오두막집에 세 번이나 찾아가서 마침내 제갈공명의
오두막집에 세 번이나 찾아가서 마침내 제갈공명을 군사로 모셔오는 장면은
삼국지에서 유명한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유비는 공명을 군사로 맞아들인 후에도 그를 두터이 신뢰하여, 모든 작전
계획을 그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바로 이 점이 유비라는 인물의 위대한 점이라
할 수 있겠지요.
  통속편이라는 책에서는 사람을 쓰는 요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으면 등용을 하지 말고, 일단 등용을 했으면 믿어라."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을 믿을 수 없으면 그 사람을 쓰지 말고, 일단 그 사람을
썼으면 철저히 믿고 일을 맡기라는 말이지요.
  유비의 방법도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유비가 새로이 군사로 맞아들인 공명하고만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너무나 많아지자, 오래 전부터 유비를 모셔 온 관우와 장비는 불만스러울
수밖에요. 마침내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걱정한 유비는 어느 날 두 사람을 가까이 불러 잘 알아듣도록
타일렀습니다.
  "내게 있어서 공명은 물고기에 있어서 물과 같다. 그러니 앞으로 너희들은
나와 공명의 사귐을 시기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그로부터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불평을 하지 않게 되었답니다.
  이 이야기로부터 수어지교, 또는 군신수어지교라는 말이 생겨 났습니다. 말할
나위 없이 군신 간의 깊은 신뢰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우두머리 되는 사람이 아래 사람을 믿고 쓰면 아래 사람도 그 믿음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공명이 유비가 죽은 다음에도 그 아들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은, 유비의 두터운 믿음에 보답하려고 한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똑같습니다. 서로 믿는 곳에 좋은 인간 관계가
싹틉니다. 친구 사이도 그렇고, 부모와 자식 사이도 그렇고, 형제 상이도 그렇고,
선생님과 학생 사이도 그렇습니다.
  이 다음에 여러분이 어른이 되어서 한 회사의 사장님이 되었을 때 이 말을
명심했다가 실천해 보세요.
수심:연못 또는 하천 등의 중심.
수평선:바다 위에 있어서 물과 하늘이 맞닿은 경계선.
어미:물고기의 꼬리.
어유:물고기에서 짜낸 기름.
교대:서로 번갈아 들어서 대신함.
교통:서로 오고 가는 일.
      양상군자
    들보 위의 군자
  양은 들보. 들보란 지붕에 가로댄 나무를 가리킵니다. 즉 양상군자는 들보위의
군자라고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데, 그러면 들보 위의 군자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양상군자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얽혀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보기로 하지요.
  후한 말기의 일입니다.태구현의 장관은 진식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공정하고 관대하여 그 현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식량이 모자라 굶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진식이 밤늦도록 책을 보며 어떻게 하면 어려운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까 골몰하고 있는데 무언가가 지붕의 들보 위에 웅크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옳지, 도둑이로구나.'
  진식은 이것을 자손들에게 산 교훈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옷깃을 단정히 여미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아들 내외와 손자들을
불렀습니다. 아들 내외와 손자들은 밤에 무슨 일인가 싶어 황급히 진식의 앞에
대령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버님!"
하고 아들 내외가 묻자 진식은 지붕의 들보 위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본디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다. 습관이 잘못 들어,
그것이 어느 틈엔가 마치 그의 본성처럼 되었을 뿐이다. 들보 위의 군자도
그래서 나쁜 짓을 하게 된 것이니, 너희들은 습관을 잘 들이도록 해야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들보 위에 있던 도둑은 황급히 내려와 진식에게 사죄를
하였습니다.
  "제가 잘봇했습니다. 제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도둑이 사죄하자, 진식은
  "너의 얼굴을 보아하니, 나쁜 짓을 할 사람 같지는 않구나. 깊이 반성하여
나쁜 짓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긴다면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며, 도둑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돌려보냈답니다.
  이 이야기에서부터 양상군자는 도둑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둑이라는 뜻에서부터 양상군자를 쥐에 비유하여 쓰기도 합니다.
양동:동량이라고도 한다. 들보와 마룻대. 들보와 마룻대는 집을 짓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매우 중요한 것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주량:기둥과 들보.
상경:서울로 올라감.
상하일치: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마음을 합침.
군신:임금과 신하. 군위 군주의 지위.
자녀:아들과 딸.
자식:아들, 자식.
      양약고어구
    좋은 약은 입에 쓰다
  양약은 좋은 약, 고는 쓰다, 구는 입. 따라서 양약고어구는 좋은 약은 입에
쓰다의 뜻이 됩니다.
  그러면 이 말이 생겨난 유래를 알아봅시다.
  여러 나라로 갈라져 서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일삼던 중국을 진시황이
통일하여 진나라를 세웠지만, 진시황이 죽자, 천하는 또다시 어지러워졌습니다.
  서로 천하의 패권을 잡기 위해 일어섰는데, 그 중에서 끝까지 다툰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한의 유방과 초의 항우였습니다. 두사람은 진나라 서울인
함양에 누가 먼저 들어가느냐를 놓고 서로 경쟁을 했습니다.
  경쟁 상대인 항우보다 한 발 앞서 진나라 서울을 점령한 유방은 진나라
궁전의 호화로움과 아름다운 미인에 정신이 빠져 그만 마음이 헤이해져
버렸습니다.
  그 때 번쾌라는 용감한 장군이 유방에게 나아와 말했습니다.
  "지금 미인과 보물에 정신을 쏟으실 때가 아니옵니다. 우리의 경쟁 상대인
항우가 벌써 함곡관 가까이 도달했다 하옵니다. 우리의 위치가 불안합니다."
  그러나 유방은 장군 번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곳 함양을 점령하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생을 해 오지 않았소? 그
공으로 봐서도 좀 편안히 쉬어도 될 것 같은데. 장군도 예쁜 여인을 하나
골라잡아 편히 즐기시구려."
하는 속 편한 대답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사인 장량이 유방에게
간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무도한 진을 멸하여 사람들을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자신의 신상에 이롭고,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을 낫게 합니다. 부디 장군 번쾌의 말에 따르십시오."
  그제서야 유방은 미인과 보물을 아까운 듯이 한 차례 둘러보고는 자신이
점령한 궁에서 물러나왔습니다.
  만약 우방이 변쾌와 장량의 말을 듣고 궁에서 물러나오지 않았더라면, 나중에
우방은 항우에게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양약고어구 라는  말은, 당시에는 고통스럽지만 나중에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유익한 말, 또는 꾸지람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역사책 가운데 하나인 <사기>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도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의 꾸지람에 무조건 불평만 하지 말고, 이
말을 한 변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양민:선량한 백성.
양심: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도리.
약국:약을 지어 파는 곳.
약용:약으로 씀.
고생:괴롭고 어려운 생활.
고학:학비를 자기 힘으로 고생하여 벌어서 배움.
구두:마주 대하여 입으로 하는 말.
구령:여러 사람의 행동을 같이 하기 위히서 부르는 호평.
      어부지리
    어부의 이득
  유명한 논객 소진의 동생인 소대도 형을 닮아 변설이 교묘한 사람이었습니다.
  소대는 특히 연나라를 위해서 일을 했는데, 조나라가 연나라를 치려 했습니다.
  그래서 소대는 연나라를 위해 조나라에 가서 혜왕을 설득하게 되었습니다.
  소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혜왕에게 했습니다.
  제가 이리로 오던 도둥에 역수를 건너다가 큰 조개가 입을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도요새가 조개의 살을
쪼았습니다. 그러자 조개는 화가 나서 입을 딱 다물었습니다.
  도요새가 말했습니다.
  "만약 오늘도 비가 오지 않고 내일도 비가 오지 않는다면 너는 말라 죽을
거다."
  그러자 조개도 지지 않고 대꾸했습니다.
  "흥! 내가 오늘도 네 부리를 놓아 주지 않고 내일도 놓아 주지 않는다면, 너는
굶어 죽을 거다."
  도요새와 조개는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그 때 마침 어부가
둘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옳지! 두 녀석이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구나. 이럴 때 두 놈을 다 잡아야지."
  어부는 도요새와 조개가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둘다 잡았습니다.
  "왕이시여, 지금 왕께서는 연나라를 치려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연나라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만약 왕께서 연나라를 치신다면, 연나라는 온힘을 기울여
왕의 군대를 막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나라 백성의 생활이 모두
곤궁해진다면, 강한 진나라가 어부가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
  소대의 말을 듣고 조나라 혜왕은 연나라를 치지 않았답니다.
  이 이야기로부터 어부지리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틈을 타 이득을 얻는 것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어망:물고기를 잡는 그물.
어업:물고기를 잡거나 기르는 직업.
부부:남편과 아내.
부역:공공의 일을 위해, 국민을 강제로 사역하는 것.
이기심: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남을 돌보지 않는 마음.
이용:쓸모 있게 씀.
      여도지죄
    먹다 남긴 복숭아의 죄
  여는 남기다, 도는 복숭아, 죄는 죄. 따라서 여도지죄는 먹다 남긴 복숭아의
죄로 얾길 수 있습니다.
  '먹다 남긴 복숭아의 죄'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렇게 고사성어에는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모르면 절대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여도지죄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보기로 하지요.
  옛날 위나라에 미자하라는 미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매우 아름다워,
위나라 왕에게 깊은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한밤중에 미자하는 급한 전갈을 받았습니다.
  "미자하님, 어머니께서 몹시 위독하십니다!"
  그 소리를 듣자, 미자하는 앞 뒤 생각도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타고 궁전을
빠져나가 어머니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임금의 허락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타면 다리를 자르는 형벌에 처해지던
때입니다.
  신하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임금에게 고했습니다.
  "미자하가 불충스럽게도 제 마음대로 임금님의 수레를 탔습니다. 다리를
자르는 벌을 내리시옵소서."
  그러자 왕은
  "참으로 효성이 깊은 소년이 아니냐. 다리가 잘리는 형벌에 처해질 것을
알면서도 나의 수레를 타고 나가다니, 그 효성이 갸륵하도다."
하며 벌을 주기는커녕 상을 주었습니다.
  또 임금과 과수원에서 산책을 하며 놀고 있을 때였습니다.
  미자하는 자기가 한 입 깨물어 먹은 복숭아를 왕께 올리며 말했습니다.
  "임금님, 참으로 맛있는 복숭아이옵니다. 드셔 보십시오."
  왕은 미자하가 내미는 복숭아를 받아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신하들이
말했습니다.
  "미자하는 참으로 불충스러운 놈입니다. 감히 제가 먹던 복숭아를 임금님께
드리다니, 중벌을 내리시옵서어."
  그러나 왕은
  "아니다. 그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가. 그렇게 맛있는 봉숭아를 자기가 먹지
않고 나를 주었도다."
하면서, 벌을 주기는커녕 상을 주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사랑스럽던 미자하는 세월은
어쩌는 수가 없어서, 옛날처럼 아름답지가 못했습니다.
  임금은 이제 미자하가 옛날처럼 사랑스럽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하는
짓마다 예쁘게 보이더니 이젠 하는 짓마다 밉게만 보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미자하는 작은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위나라 왕이 말했습니다.
  "저 녀석은 옛날에 거짓말을 하고 나의 수레를 탔으며, 또 내게 먹던 복숭아를
먹인 불측한 녀석이로다. 그러니 당장 벌을 내리도록 하라!"
  그래서 미자하는 자기가 지은 죄보다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많은 것을 느낍니다. 사실 미자하의 행동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똑같은 행동이 사랑을 받을 때는 덕이 되고, 사랑을 잃었을 때는 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우선 우리는 오랫동안 변함없는 사랑을
받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상대가 한
나라의 임금인 경우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겠지요.
  자아, 이 이야기를 읽고 느낀 정을 이야기하고, 또 어떻게 공동 생활을 해
나가 야 좋을지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세요.
여념:딴 생각.
여생:앞으로 남은 인생.
도림:복숭아 나무 숲.
도화:복숭아 꽃.
죄목:범죄 행위의 명목.
죄수:죄를 지어 벌을 받고 있는 사람.           
      오십보백보
    오십 발짝이나 백 발짝이나 그게 그거
  오십보백보는 약간의 차이는 그게 그거로 별로 다를게 없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옛날 중국이 전국 시대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에는 나라마다 어떻게
하면 자기의 나라가 강해질 수 있을까 고심을 했습니다.
  그 무렵 맹자는
  "국민을 괴롭히는 정치를 해서는 안 도니다. 국민을 사랑하는 도덕적 정치를
해야 한다. 핵무기보다는 밥이다. 국민의 배가 부르면, 핵무기가 없어도 국민이
단결을 하기 ㄸ대문에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주위의 나라도 그에
감화되어, 전쟁이 없어지고 천하에 평화가 올 것이다."
라고 각 나라의 왕들을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맹자가 양나라에 갔을 때입니다. 양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서 국민을 소중히 했습니다만, 별로 강한 나라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선생의 도덕적ㄷ 정치라는 것은 실제로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혜왕의 말에 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전쟁을 좋아하시니까, 전쟁 이야기를 예로 들지요.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적군의 기세가 무서워 도망친 병사가 있습니다. 한 병사는
오십 발짝을 도망치고, 한 병사는 백 발짝을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오십 발짝을
도망친 병사가 백 발짝을 도망친 병사에게 백 발짝이나 도망치다니,
겁장이놈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오십 발짝을 도망친 놈이나 백 발짝을 도망친
놈이나 도망치긴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그것을 아신다면, 왕께서 국민을 소중히 한다는 것도, 다른 나라 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이 이야기에서부터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나왔답니다.
  혜왕의 이른바 도덕 정치라는 것도, 근본적인 도덕정치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다른 나라의 왕과 오십보백보라는 거지요.
  우리 나라의 속담에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는데,
같은 의미로 쓰여지는 말입니다.
오관:사람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
오륜기:올림픽 대회에 쓰이는 기. 십년지계:앞으로 십 년간을 목표로 한 긴 계획.
십우:십일 안에 한 번 오는 비. 때를 ㅁ춘 좋은 비.
보도: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
백대:멀고 오랜 세대.
백전노장: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은 사람.
보행:걸어감.
      오월동주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다
  오는 오나라, 월은 월나라, 동은 같다, 주는 배입니다. 즉 오월동주는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다라는 뜻인데 어째서 이 말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생겨났을까요?
  오나라와 월나라는 춘추 시대 후기, 양자강 하류의남방에 세력을 뻗은 신흥
국가입니다. 서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지요.
  수리의 싸움에서 오왕 합려가 부상당하여 죽은 것에 의해서 시적된 오나라와
월나라의 이십여 년에 걸친 복수전은 와신상담의 고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오나라와 월나라의 백성들은 서로 만나기만하면 으르렁거리는
원수지간이 되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사이가 나쁜 원수지간이라도, 함께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위험하게 되면 서로 왼팔과 오른팔처럼 협력하여 위험에
대처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비유하여 말할 때, 우리는 오월동주라는
말을 씁니다.
  손자 병법이란 책에서는 이런 비유를 인용하여 전쟁의 요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손자에 의하면, 군대는 상산의 뱀처럼 긴밀히 협조하는 체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산에 솔연이라는 이름의 뱀이 한 마리 있었습니다. 이 뱀은 사람이 머리를
치면 꼬리로 공격해 오고 꼬리를 치면 머리로 공격해 오고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로 동시에 공격해 온다고 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대도 긴밀한 협조
체제하에 임기 응변(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모든 사태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손자는 가능하다고 하면서 이 오월동주의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경우엔 원수지간의 나라 사람들끼리도 서로 돕게
된다는 것. 그러므로 군대를 절체 절명의 위기에 서게 하여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이 필사적인 마음을 가지게 하면,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장군 한신은 조나라를 공격할 때 강을 뒤에 두고 진을
쳤습니다(배수지진). 그것을 보고 조나라 군대는 한군을 비웃으면서 공격해
왔습니다. 그러나 일단 싸움이 시작되자, 한의 전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대항해
왔습니다. 필사적인 한군의 저항 앞에 조군은 주춤거리다가 마침내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배수진으로 유명한 전법입니다.
  병사의 입장으로 보면 여기서 패하면 도망갈 길이 없어 전멸하게 되니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지요.
  오월동주와 맥락이 통하는 사고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아:오나라의 아이.
오어:오나라의 말.
월년: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함.
월등:훨씬 나음.
동갑:나이가 같음.
동행:길을 같이 감. 또는 그 사람.
주거:배에서 하는 살림.
주전:배를 타고 하는 싸움.
      온고지신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
  온은 본디 고기를 걸쭉하게 익혀 수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는
과거의 사건 즉 역사를 의미합니다. 지는 알다, 신은 새로운 것. 따라서
온고지신은 역사를 탐구하여, 그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엔 앞일을 알기가 너무나 어려워."
  그래서 큰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님들은 옛날보다 회사를 꾸려 가기가 더
힘들다고 합니다.
  사실 무슨 일을 할 때 앞일을 알고 일을 한다면 실패하는 일이 없겠지요.
실패하기는커녕 남보다 월등하게 앞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옛날에는 앞일을 잘 알 수 있었는데 오늘날만 그렇게 앞일을 알기가
glaemfs 걸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이든 앞일을 아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 역시 어떻게 하면 앞일을 예측할 수 있을까
고심해 왔습니다.
  그런 선조들의 고심과 행적을 기록한 것이 이른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책을 읽고 선조들의 행적을 배운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을 말한 것이 온고지신입니다.
  논어에 있는 구절을 여기에 옮겨 보지요.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면 그로써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하고 배우는 것에 의해서 현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사람은 남을 지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우리 인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아는 것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쉽고도 분명한 사실을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는게 아닌지요.
  옛것을 배우는 일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오도:덥고 추운 정도.
온천:뜨거운 물이 나오는 샘.
고사:옛날에 있었던 일. 에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일.
고향: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지기:자기를 잘 알아 주는 친구.
지족:분수를 지키어 만족할 줄 앎.
신식:새로운 형식.
신품:새로운 물품.
      와신상담
    땔나무 위에 눕고 쓸개를 핥다
  와는 눕다, 신은 땔나무, 상은 핥다, 담은 쓸개. 따라서 와신상담은 땔나무
위에 눕고 쓸개를 핥다가 됩니다.
  무엇 때문에 푹신한 이부 자리 위에 눕지 않고 땔나무 위에 눕고, 그 쓴
쓸개를 핥을까요?
  그럼 이제부터 무엇 때문에 와신상담을 했는지 알아보기로 합시다.
  18사략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이천오백 년 전쯤의 일입니다.강남의 땅을 무대로 오나라와
월나라가 심한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중국 역사에서는 오월의
싸움이라고 힙니다.
  오나라의 합려가 군대를 이끌고 월나라를 공격했습니다. 그 때 월나라의 왕은
구천. 구천은 합려가 이끄는 군대를 수리라는 곳에서 보기 좋게 격파했습니다.
그 싸움에서 오왕 합려는 부상을 당해 이윽고 죽게 되었습니다.
  합려는 태자 부차에게 복ㅅ할 것을 당부하고 죽었습니다.
  "태자야, 아버지의 원수는 월왕 구천이니라. 반드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다오."
  마침내 합려는 죽고, 부차가 오왕이 되었습니다.
  부차는 아버지가 죽자, 푹신한 비단 이불에서 자지않고, 가시가 마구 찌르는
땔나무 위에서 잤습니다. 그리고 문 앞에 사람을 세워 놓고, 자기가 들어오고
나갈 때면
  "부차여 그대는 아버지의 원수를 잊었느가!"
하고 말하게 했습니다.
  리렇게 밤낮으로 부차가 원수를 갚기 위해 벼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월왕
구천은 중신인 범려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오나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월왕 구천의 쓰디쓴 패배.
  월왕은 회계산에서 굴욕적으로 부차에게 항복을 했습니다. 월나라의 모든
보배를 부차에게 바치고 구천 자신은 부차의 하인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구천이 오나라의 궁전에서 부차의 하인 노릇 하기를 몇 년, 그 동안 범려는
뇌물을 좋아하는 월나라의 벼슬아치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구천이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백비가 힘쓴 결과 구천은 겨우 월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 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자리 옆에 쓸개를 걸어놓고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그 쓸개를 핥으며 스스로 말했습니다.
  "구천아,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는가!"
  그러기를 20년 마침내 구천은 부차를 멸망시켜 회계의 치욕을 씻었던
것입니다.
  와신상담이란 이 두 사람이 각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심하고 노력한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현대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는 말인 듯합니다만 그러나 어떤 목적이든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노력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습니다.
목적이 크면 클수록 노력도 많이 해야 하고, 고통도 크겠지요. 그러나 그런
고통을 이겨내고 목적을 달성한 뒤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입니다. 큰 목적을 가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와식:누워서 먹는다는 뜻에서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것을 뜻하게 죄었다.
와치:자면서 다스린다는 뜻으로, 힘쓰지 않고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신목:땔나무,장작.
신수:땔나무와 마실 물. 땔나무와 마실 물은 모두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봉급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상미:핥아 맛봄.
상식:음식의 맛을 봄. 또는 음식에 독이 섞여 있나 맛을 보는 일.
담대:겁이 없고 용기가 있음.
담략:겁이 없고 꾀가 많음.
      와우각상
    달팽이 뿔 위에서의 싸움
  와우는 달팽이, 각은 뿔입니다. 와우각상은 본디 와우각상지쟁(달팽이 뿔
위에서의 싸움)을 생략한 말입니다.
  전국 시대의 일입니다. 위나라의 혜왕은 제나라 왕이 약속을 어긴 일로 해서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제 나라를 공격하려고 중신들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공격해야 한다는 자도 있고, 공격하면 안 된다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 때 재상인 혜자가 현자로서 이름 높은 대진인이라는 사람을 혜왕과 만나게
했습니다.
  대진인이라는 사람은 혜왕게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왕께서는 달팽이를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소. 그게 어쨌다는 거지요?"
  "그 달팽이의 왼쪽 뿔에는 만씨라는 자의 나라가 있어서, 끊임없이 영토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에끼 농담도 정도껏 하시구려. 달팽이 뿔이 얼마나 크다고 거기서 영토
싸움을 벌인단 말이오."
  "조금 더 들어 보십시오. 왕께서는 이 우주의 위아래사방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없다고 생각하오."
  "그럼 그 끝없는 세계에서 노니는 자가 이땅 위의 나라들을 보면 이 땅의
아무리 큰 나라라 할지라도 그야말로 티끌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겠지요.
그런티끌 같은 나라들 중에 위나라가 있고, 위나라 안에 이 도읍이 있고, 이
도읍 안에 왕이 살고 계십니다. 그러고 보면 왕은 촉씨나 만씨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흠 별로 다를게 없다고 볼 수 있군."
  위왕은 어안이 벙벙하여 대진인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분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무한한 우주에 비하면 아주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속해 있는 조직은 그야말로 달팽이의 뿔에나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작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속에서
날마다 여거가지 사소한 일에 매달려 악착같이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그렇게 사소한 일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되어 있다 해도
여러분, 우리 마음만은 크게 가집시다.
  사소한 일로 친구와 싸우지 맙시다. 혹 친구와 마음 상하는 일이 있거든 이
와우각상을 생각하세요.
와각:달팽이 뿔.
와적:달팽이가 기어간 자국.
우경:소를 부려 밭을 갊.
우유:암소에서 짜낸 젖.
각도:한 점에서 갈려 나간 수직선의 벌어진 크기.
각립:맞버티어 이기려고 함.
상수:높은 솜씨. 또는 그런 솜씨를 가진 사람.
상위:높은 위치 또는 지위.
      우공이산
    우공 산을 옮기다
  우공이란 사람의 이름이고, 이는 옮긴다는 뜻이며, 산은 여러분이 모두 알고
있는 산입니다. 열자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 중국에 태행산과 왕옥산이라는 산이 있었습니다.그 두산 사이에 조그만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은 산을 넘지 않으면 다른 곳에 나갈 수가
없었지요. 지금도 첩첩 산중에는 교통이 불편한 곳이 많지요?그러니 옛날엔
오죽했게Tdjdyy.
  rm 마을에 우공이라는 90세 먹은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노인이
집에 앉아 산을 쳐다보다가 무릎을 탁치며 말했습니다.
  "옳지! 저 두산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 산의 흙을 깎아다가 바다에 버리면
될거야. 그러면 거어다니기가 얼마나 편할까."
  노인은 즉시 가족을 모아 놓고 의논을 했습니다.
  "저 두 산을 다른 곳에 옮겨 놓으면 우리가 이웃 마을에 다닐 때 편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저 산을 옮기는 게 어떠냐?"
  노인의 말에 할머니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아니 영감은 그걸 말이라고 하슈. 어떻게 저 산을 옮긴단 말이우."
  그러나 노인의 두 아들은 찬성을 했습니다.
  "그것 좋은 의견입니다. 아버님. 그러면 즉시 일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그리하여 노인과 두 아들은 삼태기와 괭이를 들고 산 기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산의 흙을 파서 삼태기에 담아 바다에 가져다 쏟았습니다. 노인은
아침에 눈을 뜨기만 하면 산으로 달려가 흙을 팠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상ㄴ의
흙을 파서는 바다에 가져다 버리는 노인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아니, 도대체 저 노인이 무엇을 하는 거지?"
  그런데 그 마을에 지수라고 하는 또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노인이 우공이라는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나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보면 몰르나. 산을 옮기고 있는 중이라네."
  그러자 지수라는 노인은
  "자네가 아무리 열심히 해 보아도 산은 꿈쩍도 하지 않을 걸세. 원 바보 같은
사람 같으니라구."
하며 비웃었습니다. 우공 노인은 지수 노인의 말을 듣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아들이 할 거고, 나의 아들이 죽으면 또 나의 손자가 할
걸세. 나의 손자가 죽으면 또 그 아들이 할거고. 이렇게 자손 대대로 게으름
피우지 않고 산을 깎아 바다에 버리면 산은 불어나지 않으니 언젠가는 옮겨지지
않겠는가?"
  천제께서 이 말을 듣고 우공의 한결같은 마음에 감동하여 힘 있는 신에게
명령을 내리셨답니다.
  "너는 태행산과 왕옥산을 가져다가 하나는 삭동에 하나는 옹남에 옮겨
놓거라."
하고 말이지요.
  무언가를 꾸준히 하면 이토록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해 보세요. 도저히 일등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어느
사이엔가 일등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나라에도 이런 시조가 있지요.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메이로다.
오르고 또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메만 높다 하더라.
  우리는 어떤 일을 해 보기 전에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맙시다.
우민:어리석은 백성.
우직:어리석고 고지식함.
공고:세상 사람에게 널리 알림.
공평:한 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함.
이동:자리를 변하여 바꿈.
이주:딴 곳으로 옮기어 가서 삶.
산운:산에 끼어 있는 구름.
산하:산과 큰 내.
      월하빙인
    처녀와 총각을 맺어 주는 할아버지
  월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달이고, 하는 아래, 빙은 얼음, 인은 사람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월하빙인은 본디 월하노(달 아래의 노인)와
빙하인(얼음아래의 사람)이 합쳐진 것으로, 결혼의 중매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아, 월하빙인이 어째서 결혼 중매인을 가리키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중국 당나라 초기에 위고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부모님을
여의고 외로웠기 때문에 일찍 장가를 들어 가정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청년의 색시로 오겠다는 아가씨가 없었습니다.
  '아아! 이만하면 인물도 괜찮고, 돈도 웬만큼 있는데 어째서 나의 색시로
오겠다는 아가씨가 없는 거지?'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내쉬는 청년이 딱해서, 어떤 사람이 한 아가씨를
소개해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아가씨와 만나기로 한 날, 청년은 한껏 멋을 부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가씨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 해가 지고, 대지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아가씨는 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둥근 달이
떠서 어두워진 밤을 밝혀 주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실망한 청년이 발길을
돌리려 할 때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이상한 노인이 기묘한 글자로 씌어진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청년은 호기심에 끌려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어른, 그 책이 무엇입니까?"
  "이 책은 결혼 장부일세. 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빨간 실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것으로 남자와 여자의 발을 이어 놓으면 두 사람은 반드시
부부가 된다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의 혼인은 언제 이룽지겠습니까?"
  "아아, 자네는 아직 일러. 자네의 색시가 될 아가씨는 지금 세 살밖에 되지
않았는걸. 그 아이가 열일곱살이 되면 자네에게 시집을 오게 될 걸세."
  노인의 말에 청년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지금 장가를 갈 나이가 되었는데, 내 색시감은
아직 세 살밖에 되지 않았다니, 하지만, 아무래도 보통 노인 같지는 않아. 어디
내 색시감이라는 아기를 한번 보러 갈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말입니까. 노인이 가르쳐 준 아기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못생긴
노파가 안고 있는 아기였습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청년은 하인에게 비수를 주며 아기를 찔러 죽이라고
했습니다.
  하인은 시장의 북적북적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기회를 엿보다가, 노파가 안고
있는 아기에게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가 다리가 삐끗하면서 비수를 들고
있던 손이 빗나가, 칼은 아기의 이마를 스키고 떨어졌습니다. 노파는 기겁을
해서 도망치고 말았지요.
  r런 일이 있은 후 청년에게는 몇 번의 혼담이 있었지만 하나도 맺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대로 세월은 흘러, 어느덧 14년이 흘러갔습니다.
 그 때까지도 위고는 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 위고의 능력을 높이 사서, 위고를 몹시 아껴 주던 장관이 말했습니다.
  "내게 양녀가 있는데, 아주 예쁘다네. 자네를 아껴 그 아이를 자네에게 주려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위고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장관의 딸이라면 자기에게 과분한 신분의
사람인데, 게다가 그 딸은 소문난 미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그 딸은 꽃으로 언제나 이마를 가리고 다니는 점이었습니다.
  나중에 결혼을 한 다음에 알고 보니, 부인은 바로 14년 전에 자기가 하인을
시켜 죽이려 했던 그 아기였습니다.
  위고는 운명의 신비함을 깊이 깨닫고, 평생동안 자기 부인을 아꼈다고 합니다.
월간:다달이 한 번씩 간행하는 일.
월광:달 빛.
하락:값이 떨어짐.
하산:산에서 내려옴.
빙수:얼음 물.
빙해:의심이나 의문이 얼음 녹듯이 풀어짐.
인산인해:사람으로 이룬 산과 바다란 뜻으로 사람이 많이 있다는 말.
인재:재주가 놀라운 사람.
      위편삼절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지다
  위는 무두질한 가죽끈이고, 편은 묶다, 절은 끊어지다는 뜻입니다. 즉
위편삼절은 죽간을 묶은 가죽끊이 여러 번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독서하는 것을
형용하는 말입니다.
  중국에서 종이가 벌명된 것은 후한 시대입니다. 그 전에는 대나무를 얇게
깎아, 그 거죽에 옻으로 글자를 썼습니다. 이것을 죽간이라고 하며, 죽간이
많아지면 그것을 가죽끈으로 묶는데 그것이 바로 위입니다.
  그러므로 위편이란 죽간을 위로 묶은 것을 마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책이
됩니다.
  사기라는 책에 의하면, 공자는 만년에 역경에 열중하여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결과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했다고 합니다.
  위편삼절할 정도로 독서를 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알고야 말
것입니다.
  요즘엔 읽으라고 권할 수 없는 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이 나며,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지혜와 용기를 주는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 책을 위편삼절할 정도로 읽는다면,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위의: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사냥할 때 입는 옷.
위포:가죽 띠와 가죽 옷. 요즘에는 가죽으로 만든 옷이 비싸지만,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죽옷을 입었답니다. 그래서 위포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의
의복을 뜻합니다.
편물:털실이나 기타의 실로 의복,장갑,목도리 등을 뜨는 일.
삼등분:셋으로 똑같이 나눔.
삼삼오오:사람이 때를 지어 다니거나, 무슨 일을 하는 모양.
절경:더할 수 없이 훌륭한 경치.
절명:목숨이 끊어짐.
      의심암귀
    의심은 암귀를 만들어 낸다
  의는 의심, 심은 마음, 암귀는 실제론ㄴ 존재하지 않는 괴물을 뜻합니다.
  의심암귀는 본디 의심생암귀가 줄어서 된 말로 의심은 암귀를 만들어 낸다는
뜻입니다.
  의심은 암귀를 만들어 낸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요?
  고대 중국의 우화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 열자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소중히 여기던 큰 도끼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왠지 옆집
아들의 태도가 수상합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수상해. 혹시 내 도끼를 저 녀석이 훔쳐간 것이 아닐까?'
하고 도끼를 잃어버린 남자는 옆집 아들을 수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의심을 하면서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밖에서 어쩌다 마주치면, 옆집 아들은 자기를 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흘끔 흘끔 보는 거 g아며, 말을 조금 더듬는 거 하며, 수상하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틀림없어. 내 도끼는 저 녀석이 훔쳐간 거야. 어떻게 하면 내 도끼를 찾을 수
있을까.'
하고 날마다 생각하던 어느 날, 잃어버렸던 도끼가 곳간의 짚더미 속에서
발련도었습니다.
  "아니, 내 도끼가 여기에 있었단.!"
  도끼를 찾자, 하는 짓마다 수상하게만 보이던 옆집 아들의 태도가 조금도
수상하지 않게 보이는 겁니다.
  우리도 종종 경험하는 것이지만, 정마러 누군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공연히
그 사람의 하는 짓이 모두 수상하게 보이지요. 그러다가 의심이 밝혀지면, 그
때까지 그렇게 수상하게 보이던 행동이, 조금도 수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 말이 의심암귀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공연히 의심하여, 의심암귀가 되지 말아야겠어요.
의문:의심하여 묻는 일.
의심:미심쩍게 여기는 마음. 믿지 못해 이상하게 여기는 마음.
심성:본디부터 타고난 마음씨.
심신:마음과 몸. 또는 정신과 신체.
암기:머리 속에 기억하여 잊지 아니함.
암시:넌지시 깨우쳐 줌.
귀곡:귀신이 우는 소리.
귀재:세상에 드물게 뛰어난 재주. 또는 그 사람.
      익자삼우
    사귀어서 이익이 되는 친구의 세 가지 타입.
  익은 이익이 죄다, 자는 사람, 삼은 셋, 우는 벗. 따라서 익자삼우는 사귀어서
이익이 되는 친구의 세 가지 타입이라는 의미입니ㄷ.
  그러면 사귀어서 이익이 되는 친구란 어떤 친구일까요? 공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강직한 사람을 친구로 하고, 성실한 사람을 친구로 하고, 박식한 사람을
친구로 하면 이익이 된다."
  강직한 사람이란 비뚤어진 것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면 올바른
사람이지요. 어째서 그런 사람이 익우가 될까죠?
  말할 나위도 없이 자기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했을 때 거리낌 없이 지적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친구로 하면 설령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늦기
전에 그 잘못을 고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실한 사람을 친구로 하면 자기도 그 사람에게 감화를 받아서
그릇된 길에서 방황하지 않게 되겠지요. 이역시 고맙고 이익이 되는 친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의 박식한 사람이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사람을 친구로
하면 자신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냉혹한 사회 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익자삼우를 이야기하면서, 공자는 사귀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친구,
아니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로운 친구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타입을 들고
있습니다.
  첫째, 쉽게 붙좇는 사람.
  둘째, 남의 방해를 일삼는 사람.
  셋째, 입만 살아서 떠드는 사람.
  사귀어서 이익이 되는 친구와 사귀어서 해가 되는 친구를 살펴보았습니다.
친구를 사귈 때는 말할 나위도 없이 이익이 되는 친구를 사귀어야겠지요?
  어떤 친구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좌우되기도 합니다.
친구를 사귈 때에는 공자님이 하신 말씀을 꼭 기억합시다.
익우:사귀어 유익한 벗.
익조:사람에게 유익한 새.
신자: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
인자:마음이 어진 사람.
삼국지:중국 삼국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
삼분:셋으로 나눔.
우정:친구와의 정.
우호:개인끼리나 나라끼리나 서로 사이가 좋음.
      일수백확
    하나를 심어서 백을 거둔다
  일은 하나, 수는 나무라는 뜻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심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백은 백, 확은 수확하다는 뜻. 따라서 일수백확은 하느를
심어서 백을 거둔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를 심어서 백을 거두다니, 무엇을 심으면 그렇게 많이 거둘 수 있을까요?
  관자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일 년의 계획은 곡물을 심는 것과 같다. 십 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백 년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과 같다."
  일 년의 계획을 생각한다면 곡물을 심는 것이 가장 좋고, 십 년의 계획을
생각한다면 나무를 심는 것이 가장 좋으며, 백 년의 계획을 생각한다면 인재를
기르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입니다.
  관자에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를 심어서 하나를 거두는 것은 곡물이다. 하나를 심어서 열을 거두는
것은 나무이다. 하나를 심어서 백을 거두는 것은 사람이다."
  곡물은 하나를 심어서 하나를 거둘 수 있고, 나무는 하나를 심어서 열을 거둘
수 있지만, 사람은 길러 놓으면 백을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어떤 것보다 인재를 기르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 말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두뇌 싸움으로 돌입했습니다. 어느 나라에 얼마나 뛰어난
인재들이 있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의 운명이 좌우될 정도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도 뛰어난 인재들을 기르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지요.
  더구나 우리 나라는 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있는 것은
사람뿐 백년을 계획하고 많이 거두기 위해서는 사람을 기르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나라를 짊어지고 나아갈 여러분!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많은
열매를 거두는 사람이 됩시다.
일구이언:한 입으로 두 말을 함. 이랬다 저랬다 함.
일미:첫째가는 좋은 맛.
수림:나무가 우거진 숲.
수피:나무 껍질.
백과:온갖 과실.
백구:백 사람의 식구라는 뜻으로 많은 가족을 일컫는 말이다.
경확:경작하여 거두어 들임.
수확:곡식을 거두어 들임.
      조삼모사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조는 아침, 모는 저녁, 즉 조삼모사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뜻입니다.
  엉뚱하게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그러나
조삼모사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나면,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옛날 송나라에 원숭이르 좋아하는 저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원숭이는 저공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알아들을 정도로 저공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원숭이가 자꾸 늘어감에 따라, 원숭이의 먹이를 사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마침내 저공은 가족의 식비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될
상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원숭이에게 주던 먹이도 줄여야 할 형편이
되었지요.
  그래서 결심을 하고 원숭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너희들에게 나무 열매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공은 꾀를 내어, 원숭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도록 하지."
  그제서야 ㄷ숭이들은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열자라는 책에도 기록되어 있고, 장자라는 책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대한 생각은 두 책이 조금씩 다릅니다.
  열자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 교묘한 말로 사람을 설득하는 예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고, 장자에서는 눈앞의 이해나 시비에 사로잡혀서 사물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예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4=4+3. 이런 간단한 계산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지능 지수 제로라고 할 수
밖에 없겠지요. 조삼모사의 원숭이를 비웃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어른들의 경우엔, 봉급이 많이 올랐다고 좋아하고 있는데, 봉급이 오른 만큼
물가가 껑충 뛰어올라, 실제로는 봉급이 전혀 오르지 않은 것과 똑같은 경우가
참 많습니다.
조석:아침과 저녁.
조식:아침밥.
삼대:조부와 아비와 아들. 또는 아비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
삼성:매일 세 번씩 자신의 일을 반성함.
모개:아침에 정한 것을 저녁에 고침.
모경:저녁때의 경치.
사방:동,서,남,북의 총칭.
사산:사방으로 흩어짐.
      주지육림
    술로 가득 찬 연못과 고기로 이루어진 수풀
  주는 술, 지는 연못, 육은 고기, 림은 수풀. 따라서 주지육림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다면, 술로 가득 찬 연못과 고기로 이루어진 수풀이 됩니다.
  옛날 은나라 주왕이 술로 연못을 가득 채우고 나뭇가지마다 고기를 꽃아 고기
수풀을 만들어 놓고 잔치를 벌인 데에서 온 말로, 오늘날엔 호사스러운 잔치나
사치스럽고 타락한 생활을 비유하여 씁니다.
  옛날 은나라 주왕 때입니다.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은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폭군으로 유명한 왕입니다.
  전해져 오는 바에 의하면, 주왕은 선천적으로 말을 잘 하고 머리의 회전이
빨랐다고 합니다. 게다가 맹수를 맨손으로 잡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머리가 좋으니, 신하의 서투른 간언 따위는 아예 효과도 없었고, 말을 잘
하니, 자신의 어떠한 잘못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주왕은 이 세상에 자기보다 더 잘난 사람은 없다고 뽐내면서 걸핏하면 신하를
바보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주왕은 술을 매우 좋아해서, 술독에 빠질 정도로 술을 마셔대곤
했습니다. 물론 여자에 대해서도 분별이 없었습니다. 특히 달기라는 미녀를
좋아해서, 그녀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습니다.
  주왕은 이 미녀를 곁에 앉히고, 날마다 신하들과 힘께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기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잔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형용하고 있습니다.
  즉, 이궁의 연못을 술로 가득 채우고, 주변의 나무마다 고기를 늘어뜨린
것입니다.
  사기에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잔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녀를 벌거벗겨, 육림사이로 서로 좇게 하고 밤낮을 술로 지새웠다."
  밤새도록 계속하고 날이 밝아도 계속하는 잔치를 장야지음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지육림이라고 하면, 호화로운 잔치에 그치지 않고 미녀들을 곁에
두고 술을 마시며 야단 법석을 떠는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그런 잔치를 낮이고 밤이고 계속했으니, 당연히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질
수밖에요. 나중에는 제후들까지 그런 천자를 못마땅히 여겼으므로 주왕은
포락이라는 형벌을 만들어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벌주었습니다.
  포락이라는 형벌은 새빨갛게 달군 구리 기둥 위를 걸어서 건너게 하는 잔혹한
형벌입니다.
  그러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폭군 주왕은 망하고,
무왕이 주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주량:마시고 견디어 낼 만큼의 술의 분량.
주실:술에 취하여 저지르는 실수.
지수:연못의 물.
지원:연못과 동산.
육식:짐승이나 물고기 등의 고기를 먹는 것.
육체:살아 있는 사람의 몸.
임야:개간하지 않은 벌판.
임업: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산림을 경영하는 사업.
      죽마지우
    대마무 말을 함께 타고 놀던 친구
  죽마는 대나무로 만든 말, 우는 벗. 따라사 죽마지우란, 대나무말을 함께 타고
놀던 친구, 즉, 어릴 때의 친구를 말합니다.
  이 죽마지우란 말은 진나라의 무제가 제갈정에게 처음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제갈정이라는 사람의 아버지 제갈탄은 정직한 벼슬아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정의 높은 관리였던 사마소의 횡포를 말리다가 그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무제가 진나라를 세워 왕이 되자, 무제는 어릴 적 친구인 제갈정을
불러 높은 벼슬 자리에 앉히려고 했습니다.
  무제는 신하에게 명을 내렸습니다.
  "나의 어릴 적 친구인 제갈정을 찾아라. 그리고 그를 우리 진나라의
대사마로서 후히 모셔오너라."
  그러나 그 무렵 제갈정은 아버지 제갈탄이 무제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진나라를 원수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진나라의 대사마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무제는 몇 번 제갈정을 불렀으나, 제갈정은 끝내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제는 어릴 적 친구인 제갈정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제갈정이 오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그를 만나 볼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하던 무제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옳지, 숙모에게 부탁하면 되겠다!'
  무제의 숙모 제갈비는 제갈정의 누나입니다.
  제갈비는 무제의 부탁을 받아들여 제갈정을 집으로 불렀습니다. 제갈정이
그의 누나 제갈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무제는 우연히 들렀다는 듯이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무제가 제갈정에게 말했습니다.
  "경도 우리가 어렸을 적 죽마를 타고 같이 돌아 다니며 놀던 때의 우정을
잊지는 않았겠지?"
  그러자 제갈정은
  "신은 용기가 없어, 숯을 삼키지도 못했고, 몸에 옻칠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비열한 목숨을 이어 오늘 폐하를 뵙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제는 비로소 제갈정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런 그를 억지로 만나려 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숯을 삼키고 몸에 옻칠을 한다는 말은 진나라의 예양이라는 사람에 얽힌
이야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양은 자기 은인인 지백의 원수 조양자를 죽이려고
숯을 먹어 목소리를 바꾸었으며, 몸에 옻을 발라 문둥이로 변장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죽마지우라는 말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말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쓰면, 좀더 확실한 의미로 쓸 수 있을 것이고, 또 재미있기도
하겠지요.
죽원:주위에 대나무를 심은 집. 옛날에 서원 주위에는 대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서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죽창:대나무로 만든 창.
마구:말을 타는 데에 쓰는 기구.
마패:말을 새긴 동패. 이것을 가지고 가면, 역마에서 말을 내주었음. 맘행어사는
주로 말이 세 마리 그려진 마패를 가지고 다녔음.
우인:벗.
우호:형제간이나 벗 사이에 우정이 깊음.
      지록위마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다
  지는 가리키다, 록은 사슴, 위는 만들다,마는 말. 따라서 지록위마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아니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니,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해 봅시다.
  천하를 통일하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 위해 널리
불사약을 구하던 진시황제였지만, 죽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진시황은
황제가 된지 37년 만에 순행을 하다가 평대라는 곳에서 죽었습니다.
  진시황이 죽기 전에 변방을 지키고 있는 장자(큰아들) 부소를 함양으로 불러
황제로 등극시키도록 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일어납니다.
  황제의 곁에는 늘 조고라는 환관이 붙ㅇ어 있었는데, 그가 야심을 품은
것입니다. 조고는 황제가 죽자, 곧 황제와 힘께 순행을 하던 둘째 왕자 호해를
불러 말했습니다.
  "황제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완자님께는 두 번 다시 없는 좋은 기회입니다.
모든 일은 제가 할 테니, 왕자님께서는 잠자코 황제가 되시기만 하면 됩니다."
  황자 호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고는 승상 이사를 협박하여, 자기의 일에
가담하도록 했습니다.
  조고는 황제가 승하한 것을 감추고, 즉시 함양(당시 진나라의 서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황제의 조서를 가짜로 꾸며 장자 부소를 자결케 하고
황제가 승하하셨음을 온 국민에게 알린 다음, 둘째 왕자 호해를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했습니다.
  조고 덕분에 황제가 된 2세 황제 호해는 나라의 모든 일을 조고와 의논해서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조고가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지요.
  조고는 자기를 방해하는 자는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처형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궁전의 모든 벼슬아치들은 조고의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으며, 일부
벼슬아치들은 조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아부를 다 했습니다.
  그러나 조고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슬슬 무능한 황제를 몰아내고,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었습니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이 순순히 나를 따라 줄지가
문제인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조고에게 사슴을 뇌물로 가지고
왔습니다. 사슴을 바라보던 조고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옳지, 좋은 생각이 났다!'
  조고는 뇌물로 들어온 사슴을 가지고 2세 황제에게로 가서 물었습니다.
  "폐하,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2세 황제는 조고의 방자한 태도에도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허허, 경은 참 이상한 질문도 다 하는구려. 그건 사슴이 아니오."
  그러자 조고가 말했습니다.
  "폐하! 이것은 말이옵니다. 말을 사슴이라고 하다니, 폐하의 기운이 몹시
쇠약해지신 모양입니다. 이것 참 큰일이군."
  "허허, 내 기운이 아무리 쇠해졌기로, 말과 사슴을 구별치 못할 리가 있겠도."
  "그러면 폐하! 신하들에게 물어 보시지요. 이게 말인지 사슴인지."
  조고는 신하들에게 사슴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의 눈에는 이것이 사슴으로 보입니까, 말로 보입니까?"
  이 때 조고에게 아부하려는 신하는
  "예, 그것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하고 대답했고 거짓말은 할 수 없고 조고의 위세는 무서운 겁장이 신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몇몇 정직한 신하만이
  "그것이 사슴이지 어째서 말이란 말씀입니까."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대답한 신하를 기억해 두었다가, 한 사람 한 사람 구실을
붙여서 처형해 버렸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조고는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 신하를 알아 가지고 없애
버렸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로부터 지록위마는 잘못을 강요하여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 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뒷이야기지만, 조고는 2세 황제가 말을 사슴이라고 했다고 미친 사람 취급을
하여, 본궁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이궁으로 요양을 보내 버립니다. 그리고는 제
마음대로 정권을 휘둘렀지요.
  오늘날엔 2세 황제처럼 남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 주이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남의 꼬둑각시
노릇을 하는 사람이 의외로 있습니다.
  언제나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하면, 절대로 그런 상황에 빠질 일이
없을 텐데 말이지요.
  우리 어린이 여러분은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겠어요.
지도:기르치고 이끌어 줌.
지시:가리키어 보임. 또는 시킴.
녹각:사슴의 뿔.
녹혈:사슴의 피.
위국:나라를 위함.
위정자:정치를 하는 사람.
마미:말의 꼬리.
마초:말에게 먹이는 풀.
      천의무봉
    하늘 나라의 옷엔 꿰맨 자국이 없다
  천은 하늘, 의는 옷, 무는 없다, 봉은 꿰맨 자국. 따라서 천의무봉은 하늘
나라의 옷엔 꿰맨 자국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당나라 시대의 전기 소설(기이한 이야기를 소재로 쓴 소설) 곽한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직녀가 인간 세상의 곽한이라는 청년을 매우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곽한은 잘 생긴 청년으로 문학에도 뛰어나고 글씨도 아주 잘
썼습니다. 직녀는 하늘 나라에서 그런 곽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병이날
지경이었습니다.
  '아아, 한 번만이라도 곽한님을 만났으면......'
  마침내 직녀는 옥황상제님께 간청을 했습니다.
  "옥황상제님! 소녀를 가엾게 여기시어, 제 사랑을 이룰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눈물로 간청하는 직녀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옥황상제님은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좋다, 너희들의 사랑을 허락하마. 그러나 딱 일 년뿐이니라. 알겠느냐?"
  "예 고맙습니다. 옥황상제님."
  옥황상제의 허락을 받은 직녀는 그날 밤 곽한의 집뜰로 내려갔습니다.
  달빛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곽한의 준수한 모습이 직녀의 가슴을 더욱 설레게
했습니다. 
  "아니 그대는 뉘시오?"
  달빛 사이로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 나타나자, 곽한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저는 하늘 나라의 직녀이옵니다."
  여인의 수줍은 듯한 말소리와 함께,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향기로운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왔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선비님의 모습을 보고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여 이렇게
찾아왔나이다."
  놀라 쳐다보는 곽한에게 직녀는 큰절을 했습니다.
  "아, 아니, 제게 절을 하시다니요."
  곽한은 직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넋이
나갈 정도였습니다.
  직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선비님께서는 저의 사랑을 받아 주시겠나이까?"
  곽한은 이미 직녀에게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리오.
  직녀가 마루 위로 올라서자, 곽한의 집은 아름다운 빛과 향기로 넘쳐나고,
어디선가 선녀들이 나타나 수정으로 엮은 발로 침상을 가렸습니다.
  곽한은 직녀를 부드럽게 안아 침상으로 올렸습니다.
  직녀는 곽한과 사랑을 나누고는 동녘 하늘에 해가 솟아오르기 전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로부터 매일 밤 직녀는 곽한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곽한은 직녀의 옷에 한 군데도 꿰맨 자국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직녀, 그대의 옷엔 꿰맨 자국이 한 군데도 없구려."
  직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하늘 나라 사람들이 입는 옷은 바늘과 실로 만들지 않는답니다."
  "그렇구려. 정말 무엇에도 견줄 데 없이 아름다운 옷이오."
  곽한과 직녀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빨리도 지나갑니다.
직녀의 마음은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벌써 옥황상제와 약속한 일 년이 가까워
온 것입니다.
  마침내 그날은 돌아왔습니다. 직녀는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곽한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선비님의 사랑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지상의 행복을 누리시며, 잘
사시길 바랍니다."
  "안 되오. 직녀가 없이는 난 하루도 살 수 없소."
  "옥활상제님의 명령은 지엄하십니다. 아무도 어길 수 없습니다. 그럼, 안녕히."
  직녀는 슬퍼 울며, 새벽 하늘로 구름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곽한이 울부짖으며 소리쳐 불러도 직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곽한은 아무리 예쁜 여자를 보아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로부터 천의무봉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요컨대 천의무봉이란, 인간
세계의 기교를 초월했다는 의미로 전혀 기교를 부리지 않았음에도 불고하고
시나 문장이 기가 막히게 훌륭한 경우를 가리켜 쓰이게 되었습니다.
천재:날 때부터 갖춘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
천지:하늘과 땅 즉, 온 세상.
의건:옷과 수건.
의식주:옷과 음식과 집. 곧 인간의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
무익:이로울 것이 없음.
무지:아는 것이 없음. 또는 어리석음.
봉인:붙인 데나 봉한 데에 찍는 도장.
봉침:바늘.
      타산지석
    남의 산에서 나오는 거친 돌
  타산은 남의산, 석은 돌. 따라서 타산지석은 남의 산의 돌, 남의 산에서
나오는 거친 돌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남의 산에서 나오는 거친 돌이라도
자신의 옥을 가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뜻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패 등도, 자신을 연마하는 재료로서 활용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남의 잘못을 보고 나의 잘못을 고친다는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고대의 시와 노래를 엮어 만든 시경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싯귀가
나옵니다.
  "남의 산과 돌, 그로써 나의 옥을 갈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연마하는 것은 능력과 인격의 양면에 걸쳐 자신을 연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회에
나와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해 가야 합니다. 하루나 이틀 힘써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요. 조금씩이라도 좋습니다. 날마다 계속하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을 연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책을 읽어야 합니다. 책 중에서도 고전이 좋겠지요. 고전이라는 것은
오랜 역사 속을 살아남아 온 선조의 지혜의 결정입니다. 반짝 하다가 금세
사라져 버리는 베스트 셀러 따위를 읽는 것보다는 훨씬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생활 가운데에서 실천하여 체험을 쌓아야 합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그것만으로는 산 지혜가 되지 못합니다. 책을 읽어 안 사실을 산 지헤로
높이기 위해서는 실천과 경험이 뒤따라야 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직 공부하는 학생의 신분이므로, 우선 책을 많이 읽는
일에 힘써야겠지요.
  여러분이 선배들을 볼 때, 에이 나라면 저렇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점들이 많지요? 그러나 몇 년 후 여러분이 선배가 되었을 때 앞의 선배들이
저지른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래서는
타산지석으로서 배운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고 또 실패를 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실패를 비웃기보다는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결점을
고치고 자신은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현명하겠지요.
타국:자기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
타향:자기가 태어난 고장이 아닌 다른 고장.
산곡:산골짜기.
산촌:산 속에 있는 마을.
석공:돌을 다루어 물건을 만드는 사람.
석탑:돌로 쌓은 탑. 즉, 돌탑.
      태연자약
    마음이 크고 대범하여, 조금도 동요되지 않음
  태연의 태는 마음이 크고 넓다,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논어에서 공자님은
  "군자는 마음이 크고 넓되, 교만하지 않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크고 대범하지만, 다른 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
군자라는 것입니다. 태연이란 그런 상태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자약은 마음이나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태연과 자약은 결과적으로는 같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두 말을 조합하여,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
태연자약이지요.
  따라서 태연자약은 마음이 매우크고 대범하여, 웬만한 일에도 동요되지 않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웬만한 일에는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태연자약한 태도는 물론 평상시에도
바람직스러운 태도입니다. 그러나 태연자약한 태도가 가장 필요한 경우는
위험한 때에나 절망에 빠졌을 때입니다.
  무언가 큰 일이 생겼다고 합시다. 그럴 때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거나
허둥대서는 좋은 생각이 떠오를 리가 없습니다. 허둥대다가 자칫 잘못하면,
위기에서 빠져나가기는커녕 더욱 위험한 상태로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 위험한 경우일수록 태연자약한 태도로 대처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나쁜 사람들에게 붙들렸다고 합시다. 그럴 때 당황해서
공연히 소리를 지르거나 몸부림치면 아마 나쁜 사람들은 여러분을 꽁꽁 묶어
놓을 뿐만 아니라, 입까지 틀어막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위급한 경우를 당하면 우리는 정말로 태연자약한 태도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태도로 나쁜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침착하게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면 반드시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또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은 일이 겹쳐 생겨 의기 양양해질 때가 있는가 하면,
나쁜 일이 자꾸 생겨 절망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뻐하고
낙담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기 양양할 때에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담담한 태도를 취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낙담하거나 초조해하지 말고 역시 담담한 태도로 대처합니다.
  그런데 현대는 격변하는 시대입니다. 태연자약한 태도를 취한다고 지나치게
유유하면, 금세 시대의 낙오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태연자약한 태도를
취하되  변화에는 민감하게 대응해야겠지요.
태산:중국의 다섯 큰 산 중의 하나, 높고 큰 산.
태평:몸이나 마음이나 집안이 매우 평안함.
연부:그러함과 그렇지 아니함.
연찬:그렇다고 찬성함.
자득:스스로 터득함.
자신:자기의 능력이나 가치를 스스로 믿음.
약간:얼마 되지 아니함.
약시:이와 같이.
      필부지용
    한 남자의 용기
  필부는 한 사람의 남자, 쪼는 비천한 남자, 지는 의의 뜻을 가진 어조사, 용은
용기, 따라서 필부지용은 한 남자의 용기, 또는 비천한 남자의 용기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필부지용이라는 말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고 또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지 알아보기로 합시다.
  맹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맹자가 여기 저기 ㅇ세를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제나라엘 갔을 때입니다.
  제나라의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이웃나라와는 어떻게 사귀는 것이 좋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했습니다.
  "인으로 사귀는 것이 좋습니다. 오직 인자만이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지혜로운 왕만이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도를 즐기는 것이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도를 두려워하는 것이니, 하늘의 도를
즐기는 사람은 천하를 편안케 하고, 하늘의 도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안케 합니다."
  맹자의 대답을 들은 선왕이 말했습니다.
  "선생의 말씀은 참으로 크십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한 가지 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용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왕이시여, 부디 작은 용기를 좋아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칼자루를
쥐고 노려보면서 제 어찌 감히 나를 당할소냐! 하고 큰소리치는 것은 못난 한
남자의 용기일 뿐입니다. 필부지용은 한 사람밖에 대적을 못하니, 왕께선 부디
큰 용기를 가지십시오."
  맹자의 이 말에서부터 필부지용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필부지용은 앞뒤 분별없이 혈기에 넘쳐 마구 행동하는 것을 경멸하여 말할 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참된 용기, 즉 큰 용기란 어떤 것일까요?
  '큰 용기는 겁이 많은 거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일까요. 말할 나위도
없이, 큰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깊이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행동에 따른 이해 득실을 충분히 검토합니다. 그런 신중함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겁장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지요.
  살다 보면 누구나, 이렇게 해야 할까 저렇게 해야 할까 하는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필부지용을 발휘해서는 참으로
곤란하겠지요.
  여러분도 그런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여러 번 있을 거에요. 친구가 극장
구경을 가자고 유혹합니다.
  "학생 입장 불가라지만, 정말 끝나게 재미있대. 우리 선생님께 들키지 않도록
몰래 가자."
  이럴 때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서 극장을 가야 할지 가지 말아야 할지......
  "에이, 까짓것! 나중에 선생님께 한 번 야단 맞고 말지, 뭐!"
하고 자못 용감한 듯이 극장을 가는 것은 필부지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니, 극장을 가서는 안 돼. 학생의 신분에서 버서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내게 조금도 이익될 것이 없어."
하고 신중히 생각을 하고 극장 구경을 가지 않는다면, 그런 것이 바로 큰
용기라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도 큰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기를 바라겠어요.
필마:한 필의 말.
필적:어슷비슷함.맞섬.
부군:남편의 존칭.
부부:남편과 아내.
용기:씩씩하고 굳센 기운.
용사:용감한 사람.
      형설지공
    반딧불과 눈의 빛으로 이룬 공
  형은 반딧불, 설은 눈, 공은 보람을 이루다는 의미입니다. 즉 형설지공을
그대로 우리 말로 옮긴다면 반딧불과 눈의 빛으로 보람을 이루다가 될
것입니다. 형설지공이라는 말은 여러분도 많이 들어 보았지요?
  대개 형설지공의 의미를 몹시 고생하며 공부하여, 그 보람이 이루어진 것
정도로 알고 있을 거예요. 맞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형설지공이 그런 뜻으로
쓰이게 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할까요.
  옛날 동진에 차윤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책을 많이 읽어야
출세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나 보지요. 게다가 차윤이라는 소년은
책읽기를 몹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난처한 일은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기름 살 돈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밤에도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하던 차윤 소년은 갑자기 무릎을 탁 쳤습니다.
  "옳지! 반디를 잡아서 꽁무니의 불빛으로 책을 읽어야겠다.
  그로부터 차윤 소년은 여름이면 빈디를 많이 잡아다가 얇은 비단 주머니에
넣고, 그 불빛으로 밤새도록 책을 읽었답니다.
  나중에 차윤 소년은 상서랑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지냈지요.
  같은 무렵에 소강이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강 소년의 집도 찢어질
듯이 가난한 것은 차윤 소년네와 비슷했습니다.
  소강 소년도 큰 뜻을 품고 열심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역시 기름 살 돈이
없었던 소강 소년은 겨울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다가 동녘에서
해가 둥싯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날이 밝았는 줄을 알았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내가 밤새도록 책을 읽었단 말인가? 어째서 내가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밝았을까?'
하고 밖을 내다보니, 밖엔 하얀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옳지! 눈의 빛이 창으로 흘러들어 방 안이 밝았었구나."
  그 때부터 소강 소년은 눈이 오는 날이면, 그 눈빛을 의지하여 밤새도록 책을
읽었다고 힙니다.
  물론 소강 소년도 나중에 어사대부라는 높은 벼슬을 했지요.
  반디의 불빛과 눈의 빛을 의지해서 공부하여 마침내 높은 벼슬을 지낸 이 두
소년의 이야기로부터 형설지공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요즘의 우리와는 참으로 동떨어진 이야기 같지요? 오늘날엔 불을 켜지 못해서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갖추어진 오늘날의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열심히 공부해야겠죠?
형창:형설지공의 고사로부터 형창이 공부하는 방의 창을 뜻하게 되었다.
형화:반디의 불빛.
설야:눈이 오는 밤.
설화:눈을 꽃에 비유한 말.
공과:일의 성적.
공로:일에 애쓴 보람.
      호연지기
    사물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
  아무리 작은 국어 사전에도 호연지기라는 말이 실려 잇습니다. 그 뜻을
살펴보면, 하늘과 땅 사이에 넘치도록 가득 찬 넓고도 큰 원기, 공명 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 사물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의 세 가지로 뜻풀이를 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맹자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실려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같으신 분도 한 나라의 재상이 되어 정치를 하게 된다면, 역시 마음에
동요가 일어날까요?"
  제자의 질문에 맹자는
  "아니, 나는 마흔 살을 넘기고부터는 어떤 일에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게
되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
  제자의 질문에 맹자는
  "그것은 평상시에 늘 호연지기를 기르고 있기 때문이지."
하고 대답하고는 호연지깅 대해서 다으뫄 같이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 기운은 매우 크고 굳센 것으로 그것을 바르게 기르면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하게 된다. 그것이 호연지기다. 그러나 그것은 도와 의를 수반해야만
존재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 가끔 의를 행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 마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 있어도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은 맹자의 말에 의하면 도의에서 버서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확신, 그러한 확신으로부터 생겨나는 태연자약한 마음이 호연지기인 듯합니다.
  과연 그런 기운이 마음에 충만해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넓고 자유로울 수
있으며, 또 어떤 사태에 맞닥뜨려도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마음, 즉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맹자는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그 노력에 대한
결과를 미리 내다본다거나 미리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
호연지기를 기르려 하는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되되, 그것을 성급히 이루려 하여
조장해서는 안 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장해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도대체 조장이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맹자는 조장이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 송나라 사람의 어리석은 행위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송나라의 어떤 사람이 밭에 곡식을 심어 놓고, 날마다 얼마나 자랐는지 보러
나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싹이 도무지 자라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정말 너무 안 자라는 구나. 내가 얼른 자라도록 도와 주어야지.'
하고 생각한 그는 애써서 곡식의 싹을 모두 뽑아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곤 집에
돌아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난 오늘 정말 지쳤다. 싹이 빨리 자라도록 도와 주고 왔단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들이 밭에 나가 보니, 싹은 모두 말라 죽어 있더랍니다.
  여러분, 송나라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요? 우습지요?
  그러나 우리도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맹자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억지로 빨리 이루려고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물에 구애됨이 없는 넓고 자유로운 마음-호연지기.
  이 호연지기를 여러분도 길러 보세요. 참된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호소:크게 웃음.
호은:큰 은헤.
자연:사람이 손대지 않은 본디 그대로의 모습. 또는 인간 이외의 세계.
필연: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
기분:마음에 저절로 느껴지는 상태.
기상:사람이 타고난 마음씨와 겉으로 드러난 몸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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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아름다운 인생론 - 권장회편

도서명: 아름다운 인생론
저자: 권장회편

차례
머리말
인생론
인생론 (김동길)
인생론 (톨스토이)
인생론 (헤세)
우정론
우정론 (김진만)
우정론 (보나르)
행복론
행복론 (유상근)
행복론 (칼.힐티)
행복론 (알랑)
행복론 (러셀)
애정론
사랑론 (김남조)
연애론 (스탕달)
결혼론
결혼론 (윤태림)
결혼론 (보우먼)

머리말
한 나라의 국력이 신장하려면 물질 문명의 발전보다 더욱 중요한 정신문화의
신장이 따라야 한다.
한 국민의 문학은 곧 그 국민의 과거의 기록이고 그 국민의 희망의 표현이다.
그것은 국민 발전의 모든 단계에 있어 국민의 넋 곧 국민의 집단적 정신을
명백하게 한다.
문학이 있으므로 국민의 생존의 불꽃이 생생하게 보존되고 국민의
괴로움이라든가 자랑이라든가 동경이라든가 사랑의 추억에서 만들어진  횃불 이
시대에서 시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내일의 역사를 창조할 주체인 청소년들에게 이 횃불의 봉송에 참여하여 발전적
창조의 역할을 담당시키고자 본 교양 필독도서를 펴낸다.
그리고 본 교양필독도서는 각 분야별 사계의 권위 집필진만을 정선하여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담당하였으면 하는 것이 본 집필진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아무쪼록 중고등학생 독서 권장이란 측면과 국민개독 운동에서 적극이바지하고
아울러 작문실력의 향상에도 도움이 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990년 3월 1일
인생론
이러한 취지에 부응하여본  교양필독.도서 는 먼저 문장을 이해하고 그 다음
자신 있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데다 주안점을 두고 편집되었다.  따라서
논술시험용  백과사전 의 역할과 교양필독 도서로서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책이라 자부한다.
@김동길
@톨스토이
@헤세
김동길(1928--)
인생론
저자소개
교수.수필가.철학박사.평남 평산 출생. 연희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애반스대 사학과,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수료. 연세대학교
조교수.부교수.교수를 거쳐 부총장으로 재적하였다. 전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은
오누이로써 독신주의자로 남매가 함께 지내고 있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그의 독신주의는 일반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먼 공인으로써 활약에 가정이 부담이
된다는 논리이고 실제 많은 사회활동을 하였다.
저서로서  대통령의 웃음   석양에 홀로 서서   하늘을 우러러   하느님의 나의
하느님   죽어서 흙이 될지라도   내가 부르다 죽을 노래여  등 다수가 있다.
인생론
고독한 인생
 혼자서 왔다가 혼자서 가는 세상 이라는 넋두리가 있는데 그 어감이 여간
처량하지 않다. 고독하게 세상에 태어났다가 고독하게 저승길을 가는 인간의
쓸쓸한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구약 창세기에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들은 어머니 리브가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다가 해산의 기한이 차서 세상에
나올 때 동생 야곱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있었다고 한다. 세 쌍동, 네
쌍동, 심지어는 다섯 쌍동도 있는 것이 사실이니 출생의 고독함을 한결같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것은 어디 아무에게나 허락된 특권인가!
죽음의 길도 또한 그렇다. 원치 않는 떼죽음은 그 이별의 자리가 매우 소란하고
복잡하니 야단스러워 고독과는 매우 인연이 먼 막판을 벌이게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을 한탄하면서,  저 세상에서나 함께 살리라
는 한마디를 남기고 끌어안은 채 물어 빠지는 남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백에 아흔아홉은 쓸쓸하게 눈을 감고 외로운 길을 홀로 떠나게 마련이다.
천군천사 호위를 진정으로 받는 사람은 없다. 죽음은 과연 고독한 것이다.
고독을 사랑한다는 사람을 가끔 본다. 니애체,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같은
철인, 알렉산더 포우프, 윌리암 워즈워드같은 시인이 아마도 이런 범주에 속하는
인물들일 것이다. 포우프는  고독 이라고 제목한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이러한 사람이면 행복할진저
바라고 간직할 것 많지도 않아
조상이 물려 준 땅 몇 마지기 뿐
제 땅에 살면서 고향의 공기
마음껏 마시나니 만족이라네.

보이지 않는 곳에 남몰래 살다
죽으면 통곡없이 가고 싶어라,
이 풍진 세상을 외면했으니
돌 하나도 나 누운 곳
못일러 주리.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의 고독이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에 시달리고 그 관계에 진저리가 나서 세상을 버리고 산으로 가는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거기서도 완전무결한 고독을 누리지는 못하는 법이다. 꿈과
낭만 속의 고독은 있어도 인간의 실존에는 고독의 여지가 없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혼자서는 살 수 없게 되어 있다.
새로 태어난 어린 생명에게 있어서도 부모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관계를
강요한다. 적어도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기까지는 그 아기에게 있어서 부모는
나무요 자신은 어린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꺾이거나 잘려나가면
말라서 죽을 수밖에 없다. 아기는 혼자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맺어진 인연을 쉽게 끊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죽으면 끝난다고
하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관계는 남는다. 아들이 죽었다고 그가 어머니와 맺었던
사랑의 관계가 끊어질 것인가. 외국에 가서 공부하던 자식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만 듣고도 몸져 누워 버리는 어머니가 있다. 아무리 낯선 땅에 혼자
고생하고 있다 하여도 그는 결코 혼자 그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자살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용기를 지녔다고 자랑스럽게 뇌까리는 철부지는 한심한 인간이다. 자살이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 때문에 결국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만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극도의 신경 쇠약증세를 나타내는 환자는 고층건물 꼭대기에 올라갈것이 아니라
병원 입원실에서 권위있는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아야 마땅하다. 복지사회가 거의
완벽을 기하여 지상의 낙원이라고까지 높이 평가되는 스웨덴같은 나라엣
자살자가 가장 많이 생기는 까닭이 무엇인가? 생활이 어렵거나 배가 고파서
자살하는 사람보다는 먹을 것 입을 것이 넉넉한 사람이 더 많이 자기 목숨을 제
손으로 끊는 이 새로운 추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력을 안해도 먹고 살 수 있는 사회나 집단은 그 구성원에게 연대의식이나
책임감같은 것을 희박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로하여금 자기와 자기 이외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하게 여기게 할 우려가 있다. 사회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상상도 못할 엄청난 범죄는 대개 특권층이라고들 불리우는 소수집단에 의해서
저질러지고, 서민층의 범죄란 비율로 따질 때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귀담아 들을 만한 말이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겁주는 사람은
없다. 그는 무엇 짓이라도 해치울 가능성이 짙은데 특권의식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나:ego'는 점점 더 확대되어 이른 바 과대망상증에 걸리기가 일쑤다
심리상태가 이 지역에 이른 정신병자에게는 자기밖에 없다.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다.  어쩌면 저렇게도 잔인할까 하며 뭇사람이
손가락질하게 되는 그 장본인은 태연하기 짝이 없다.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이란 별 것 아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자기만을
내세울 때 일어나는 병적 현상인데 그런 상태에서 가족이니 친척이니 동지니
동료니 이웃이니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빈곤 속에서 풍요를 만끽하는 소수 특권계급이나(아직도 전세계 인구의 3분의
1은 하루에 2천 킬로리도 섭취하지 못하는 가난 속에 허덕이고 있다),
신생불가침의 절대권을 행사하는 전체주의사회의 집권층은 한결같이  자기상실
이나  자기파멸 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어찌하여 자아(ego)의 극대화가
자기상실 내지 자기파멸을 초래하게 되는가 하면 그것은 마치 고무풍선에 바람을
계속 불어넣기만 하면 마침내 터지고마는 이치와 비슷하다. 어른은  그만 불라
고 타이르지만 아이는 그런 충고는 아랑곳없이 (때로는 그런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어른을 성난 눈초리로 쏘아보면서) 계속 불고 또 불다가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나야 비로소  아차  하는데,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진나라의
시황제로부터 우간다의 이디 아민에 이르기까지, 독재자란  정 하는 소리가 날
때까지 자기 손의 고무풍선을 불어대는 역사의 악동들에 불과하다.

 권력에의 의지 가 전적으로 악일 수는 없다. 나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분수를 모르고 절제없이 무턱대고 권력을 추구하는 일이 잘못이란 말이다.
인삼 녹용이 좋은 약이지만 과용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힘은 공정한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만큼 행사되면 족한데, 한번 맛을 들이면
아편장이가 아편에 중독되듯이 권력에 중독되는 현상이 모든 불행의 원인인 것
같다. 마약은 점점 단위를 높이지 않고는 종전의 쾌감을 유지하지 못 한다고
하니 권력에도 이와 비슷한 증세가 나타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람이 이 병을 고치고 다시 건강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잃어 버린  나 를 되찾고 산산조각이 된 자신의 인간관계를 바로잡는 길은
없을까?
내가 보기에 비단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가 현재 앓고 있는 중병의 증세는
인간의 자기상실과 관계파탄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 같다. 한방의는 환자의 병든
신체의 그 부분만을 고치려 하지 않고 그 환자의 몸 전체를 진단하여 그로
하여금 그 병을 극복하는 힘을 가지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고 한다.
뭐니뭐니 해도 현대사회의 근본 바탕은 자유와 평등이다. 이 두 개의 가치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이것 때문에 저것을 희생하거나 저것을 위해 이것을
버리거나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냉소하면 할수록, 천대하면
할수록, 이 시대의 병은 점점 더 무거워질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하고 피차에 어울려 떳떳하게 사는 길이 자유와 평등의 추구 아니고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두 개의 기둥이라고도 할말한 자유와 평등은 공존하기
어려운 가치가 아닌가! 자유있는 곳에 평등은 실현되기 어렵고 평등을 강조하다
보면 자유는 여지없이 짓밟히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 를 지향하며 개척자의 정신으로 과거 2백 년 동안 분투 노력한
미국사회가 결코 평등한 사회가 아닌 것처럼 계급없는 사회를 주창하며 지나간
60년 동안 피투성이가 되어 달음박질한 소련사회에는 자유의 그림자도 찾아 보기
어렵게 되었으니 이 두가지의 이념이 서로 양립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세계 도처에서 사회주의자가 점차 득세하고 판을 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일까? 특히 사회가 뒤떨어졌으면 뒤떨어졌을수록 자유 보다는 평등에
치우치고 때로는 자유를 전혀 밟아 버리는 비극도 비일비재인데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탈선행위임이 명백하다. 사실상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신봉하는
날들에서는 평등조차도 실속없는 슬로건에 지나지 않고, 사회주의 정권은
극소수의 실력자들 수중에서 독재의 무기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자유라는 가치에다 크게 중점을 부여하는 나라들에서 민중의 생활은
질적으로 향상되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람다웁게 어울려 사는 환경이 마련된
이 역사의 추세를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 것인가? 가령 남 북한을 비교해 볼 때,
1970년으로부터 1975년까지의 5년 동안 GNP의 상승률은 우리가 배나 더 높고,
개인당 교육비의 지출은 3배, 자동차의 수는 7배가 더 된다고 한다. 미국과
소련의 교육비 지출이나 자동차의 수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이 동시에 실현될 수 없을 때에는 자유를 통해 평등에 이르는 것이
정도라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어쨌든 현대사회의 숙제인 인간회복이 자유와 평등의 구현을 전제로 한다면
인간회복은 이제 불가능한 꿈이라고 포기할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물과
불을 같이 가지지 못할 것이 뻔 한터에 공연히 시간만 낭비해서 무엇하겠는가
하는 논리도 있을 법하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의 풍운아들은 아마도 자유와
평등에다 박애라는 엉뚱한 표어를 하나 더 첨부하였을지도 모른다. 혁명을 하는
사람들에게 박애가 무슨 호소력있는 슬로건이야 되었으랴마는 그것없이는 자유와
평등의 접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부족사회를 형성하고 석기시대를 살던 그 시절에도 혼자의 힘으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개인은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산업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어울려
살지 않으려면 삶을 포기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같이 살기 를 거부하고
혼자만 행복을 누려보겠다는 맹랑한 사람들이 어쩌면 길거리와 점포, 관청과
학교, 여관과 목욕탕을 이렇게 꽉 메우고 있는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의나
관심조차도 점차 시들해가는 까닭은 사랑의 가능서이 절망적으로밖에 내다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다면 자유도 평등도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마련이다. 병든 개인과 사회를 구제하는 길이 사랑의 능력과 감격을 되찾는 데
있음은 두말 할 여지가 없는 줄 안다.
불교는 자비를 내세우고 유고는 인을 강조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nirvana
이나 유고의 근본인  차마 못하는 마음:부인지심 이 다 사랑의 세계에 대한
별개의 풀이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하늘나라 도 모든 사람이 지극히 사랑하며
피차에 돕고 사는 이상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서로 어울려 행복을 누리는  멋진
새 세계 는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야만 이룩될 수 있다. 그래서 역사가 토인비는
위기에 직면한 이 시대를 구제하는 힘을  세계종교 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나  중심의 삶을 이제 파멸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생의
중심을  너 에게다 두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나타나지 않는 한, 인류의
미래는 암담하다는 말이다.
너와 나의 사이를 가로막는 높다란 담을 그대로 두고 어떻게 같이 사는 운동을
전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담을 헐어 버리는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는가?
-그것이 문제로다. 너와 나는 지금도 하나이고 또한 영원히 하나일 것이다.
사랑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우리가 절망해야 할 까닭은 없다고 믿는다.

삶이란 외로운 것

사람은 태어날 때 혼자이고 떠나갈 때 또한 혼자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을 해 봐도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기억이야 있을 리는 없지만 내가 태어날 때 어머니는 혼자 계셨단다 전하여 들은
이야기이지마는 아버지는 맹산 고을에 일이 있어 출타중이었으므로 그날
새벽에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기 받는 일에 능숙한 그 마을 아주머니들 가운데 어느 한분이라도 와
있었겠지 아무러면 면장댁에 산기가 있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어쩌면 동네 아낙네들이 여러 사람 와서 그  역사의 순간 을 지켜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혼자 태어났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도 혼자였고 나올 때도 혼자였음이
명백하다. 물론 쌍둥이로 태어나는 이들이 간혹있다 그넌 사람들은 출발부터
외롭지는 않게 삶이 꾸며지는게 아닌가 부럽게 여길수도 있겠지만 순서는 있는
것이어서 나올 때는 역시 하나씩이다.
그뿐 아니라, 구약 창세기에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쌍둥이로
태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고독을 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그것이 오히려 큰
불행의 원인이 될 수 도 있는가 보다. 사실상 그 두 사람은 헤어져 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혼자 왔다 혼자 간다 -이 말이 젊었을 때에는 공연한 말장난 처럼 들리지만
삶이 오후 3시쯤에 접어 든 사람에게는 상당히 절실한 뜻을 지닌 격언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도대체 개인이란 무슨 뜻인가? 우리 조상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개념이었을
것이다. 동양적 전통에는  나 라는 관념도 뚜렷하지가 못했던 것 같다.  가족 이
 나 였다. 그러니, 개인이나 개성은 더욱 문제되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나 를 찾는 노력에 있어서는 서양사람들이 동양사람들보다 훨씬 앞섰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이 철학을 시작한
모양인데 사실 그 말의 참 뜻을 올게 헤아리지는 못해냈지만  너 라고 뚝 떼어서
하나를 지칭하고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 보도록 했던 것은 삼강과 오륜이
규범이던 사회에서는 아무도 못냈던 엉뚱한 철학의 출발이었다.
어쨌건 그  너 와 그  나 는 개체요 개인인데 영어로 individual은
indivisible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Indivisible은 그 이상 나눌 divide수가
없었으므로 최종적인  하나 라는 뜻이니 외로운 존재이다.
그 외로운  나 의 개성이 뚜렷하면 뚜렷할수록 그의 삶은 더욱 고독을 면치
못하게 된다. 무골호인이어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잘 지내면서 친구가 언제나 그 주변에 와글와글 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은 개성이 아주 없거나, 있어도 잘 감추고 사는 능청맞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 있어서 외롭다고만은 할 수가 없고 여럿이 같이 있어도
외로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개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젊어서, 집단생활, 단체생활이라는 것을 해 본 경험이 있다. 일제 말기에는
학생으로 평안남도 용강이라는 곳에 이른바 근로보국대로 끌려가 비행장 닦는
일에 한 여름 진땀을 흘린 적이 있다. 막사 비슷한 판잣집에 수용되는 주먹밥을
받아 먹으며 수백 명 학우들이 함께 살았지만 그때 나는 무척 외로움을 느꼈다.
6.25때에는 군인으로 뽑혀 추사 김정희가 귀향살이 하였다는 제주도 모슬프에서
한 동안 살았다. 그때에도 매우 고독하였다. 각계 각층에서 가지 각색의
장정들이 모여 한솥의 밥을 먹고 살았지만 각자 외롭기는 매한가지였다.
군중속의 고독이란 어쩌면 더 뼈 아픈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어떤 구역에는 수만명이 얄팍한
벽을 사이에 두고 밀집해 살지만 바로 옆집과도 전혀 상종이 없고 상관이 없으니
더욱 외롭기만 할 것이다. 그래서 풍요로운 산업사회가 오히려 먹고 사는 것조차
힘겹던 농경사회에 비해  소외 니  고독 이니 하는 문제들을 더 심각하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것 뿐이 아니라 과정도 삶 자체도 혼자 처리하고
처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모여 사는 기쁨보다는 모여 사는 고통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사실, 남에게 맡겨서 되는 일이란 거의 없다. 신탁도 협동도 불가능한 것이
현대인의 고민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그런 불신감이 좀 두드러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언필칭 법치국가라는 나라에 살면서 서민층이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운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특권층의 고독은 더욱 심하다. 가난한 서민보다 더 외로운 권력과
금력! 이 대통령, 박 대통령이 다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재벌이라고
이름이 알려진 사람치고 외롭지 않은 이가 없다.
유신체제 하에서는 부동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 늘 쫓기는 신세요, 외로운
몸이었다. 이른바 8.3조치라는 것이 발표된 오늘에는 현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외롭다. 수십억을 은행에 맡겼으면서도, 수백억을 사채로 들이밀고도,  그게 내
돈이다 라고 큰소리 칠 수 없는 그는 얼마나 고독한 사람인가?
기독교의 사도 바울이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라고 호소했지만, 아마
요새 돈푼이나 있는 사람은 모두들  나는 과연 고독한 인간입니다. 라고
울부짖고 있을 것이다.
서울 근교의 소위 약수터라는 데는 새벽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서
조그만한 물통에다 똑똑 한 방울씩 떨어지는  약수 를 받아 간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약수를 물통에 받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다. 식구들을 먹여 살릴 걱정을
정말 하고 있는 이는 그 집의 아버지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독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우리 아버지는 집을 떠나 방탕에 방랑을 거듭하고
어머니가 우리 어린 것들의 손목을 잡고 맹산이라는 시골서 평양이라는 도시로
혼자 나왔다. 나는 이제 나이가 오십도 많이 넘었지만 지금도 그날의 정경을
그려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머니 수중에 돈이 있었겠는가? 우리를 반겨줄 가까운 친척이라도 있었겠는가?
전기불이 번쩍번쩍하던 평양거리, 먹을 것이 꽉꽉 차 있던 가게들-유치원에도
들어가기 전이던 나는 아마 철없이 졸랐을 것이다.  엄마, 나 저거 사 줘!
사랑하는 아들이 원하는 것을 사 주지 못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는가?
어머니는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청춘도 외롭고 노년도 외롭다.  모디 빅 의 저자 허먼 멜빌이 남긴 말  책임의
고독함:loneliness of responsibility 이란 생각할수록 맛이 나는 의미심장한
한마디이다. 큰감투 하나 쓴 사람,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한 사람-사실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인가?
이 승만 박사도, 박 정희 대통령도 따지고 보면 매우 고독한 삶을 살고 간
사람들이다. 그분들이 어디를 가나 부하들은 많이 따라 다녔었다. 경무대에는
노대통령의 신발을 신겨 드리고 구두끈을 매 주는 사람도 따라 다녔을
정도였단다.
10월 26일 밤 궁정동에서 술상이 벌어졌을 때에도 밖에는 상당할 수의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막상 그가 총에 맞고 쓰러졌을 때
누가 거기 있었는가? 누가 거기에 있어서 그의 외로움을 덜어 주었는가? 아무도
없었다. 정상은 크나 작으나 높으나 낮으나 고독하고 적막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죽을 때 누가 내 곁에 있어 줄까?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 같으면 아내가
자녀들이 임종을 지켜보아 줄 것이나 결혼도 안하여 처자도 없는 나는 외로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이 옆에 있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려 준다고 해서 가는 길이
덜 외롭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외롭기는 옆에 누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것 은 누구에게 있어서나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믿는다.

괴로운 인생길

산다는 것이 외로운 것 뿐이 아니라 괴로운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지닌 두가지의 가장 강력한 본능이 식욕과 성욕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두 개의 욕망이 다 끝없이 괴로운 욕망이다.
넉넉한 집안에 태어나 먹을 것 걱정을 전혀 하지 않고 놀면서 한 평생을 사는
사람은 인생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다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이유는 제
손으로 밥을 벌어 먹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전에 라디오에서 여가직공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하는데 한 달의 노임이
7만원에서 10만원이라고 하였다. 7만원 월급이면 하루 평균 2천 3백 33원
정도이고 10만원이래야 하루에 겨우 3천원이 조금 더 된다. 그 2--3천원을 벌기
위하여 꽃다운 청춘이 8시간 내지 10시간을 공장에서 기계와 씨름해야 하니,
밥벌이가 괴로운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원생활을 꿈꾸며, 농부가 밭에서 일하는 광경을 시적이고 낭만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호미자루를 쥐어 주면서 삼복 더위 뙤약볕에
나가서 두서너 시간 김을 매 보라고 권하고 싶다. 거기엔 시도 낭만도 없고 오직
생존을 위한 괴로움이 있을 뿐이다.
 노동은 신성하다 -말은 퍽 듣기 좋다. 그러나 연탄을 한 짐 지고 비탈길을
오르는 일꾼을 보면서 차마  노동이 신성하다 고 말하지는 못 할 것이다. 우리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날 때 야훼 하나님께서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낱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하셨을 때, 이것이 저주가 아니었다고 할 사람이 누구인가?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이 말은 확실히 저주이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낱알을 얻어 먹으리라 -이 말도 확실히 저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무슨 방법이로든지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목숨을 이어갈 수 있으니 삶이
괴로움이다. 그래서 사람은 밥벌이하는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을 가장
두려워한다. 과장이니 부장이니 하는 잦ㄱ자들이하도 아니꼬와 당장 사표를
던지고 나오려 하다가도  어떻게 먹고 살지? 하는 생각에 높은 양반들 앞에
허리가 굽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얼핏 듣기에는 비겁한 인간같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간다. 특히 처자를
거느린 사람이 밥줄이 끊기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고 쪽박을 들고
길거리에 나설 수도 없고! 옛말에도 잊지 않은가. 구걸하기가 정승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성욕이라는 것도 매우 괴로운 욕망이다.  목구멍이 포도청 이라는 말이 있지만
성 도 이에 못지 않게 건강한 인간에게는 큰 괴로움이다.
존 스타인벡이  에덴의 동쪽 이라는 작품에서, 사람이 만일 (sex)성을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자유롭겠느냐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이어서  성을 떠난 인간을
이미 인간이 아니고 괴물이다. 라고 하였다. 어찌 생각하면, 그저 한평생 성에
시달리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미묘한 동물인 것 같다.
다른 짐승들에는 발정의 시기라는 것이 있다. 그때만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가 못하다. 사춘기로부터 노쇠기에 이르는 장장 50년 동안,
사람은 날마다 시간마다 성 때문에 고민이다.
이 말에 사람은 결혼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말이다. 성욕이 맹목인데 어떻게 그 요구를 다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이는(톨스토이처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성욕은 자녀를 낳기
위해서만 필요한 욕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무리 부부사이라 하더라도 성교는
1년에 한 번이면 족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요새처럼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나아 잘 키우자 는 것이 이상이라면
성적 욕망은 일생에 두서너 번만 충족시키면 된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부부가 어디 있으며 그렇게 믿는 남녀가 어디 있겠는가?
 성 의 개방이니 해방이니 혁명이니 하고 떠들지만 사실은 아직 우리가 성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좋게 말하자면 성은 여전히 신비롭고 나쁘게
말하자면 성은 여전히 함정이다. 사람이 빠질 수 있는 가장 깊은 함정이다.
 글세 나는 이미 나이 지천명의 언덕을 넘었지만 아직도 성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데도!
가끔 서울의 골목길을 가다가  양기부족 조루증에 특효약 이라는 광고가
전신주에 붙어 있는 것을 보면 내 일이 아니건만 같아 부끄러운 느낌이 든다.
그것이 인생고가 아니고 무엇인가? 성이 에너지인 것만은 확실한데, 왜 그
에너지를 남용하다가 약을 먹어야 할 처지가 되었는고 생각하니 처량한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아무리 운동장을 달려도, 아무리 냉수를 끼얹어도, 일단 일어난 성욕이 가라않질
않는 고통을 겪지 못한 젊은이가 누구이겠는가? 그래서 그 에너지를 쏟아 어떤
이는 혁명의 대열에 뛰어들고, 어떤 이는 신에게 매어달리고, 어떤 이는 힘껏
피아노를 두들기고, 어떤 이는 종이 위에 붓을 휘두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에는 혁명이 있고 종교가 잇고 예술이 있다고도 믿어진다.
나는 결혼 안한 사실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내 삶은 성 과의 대결로
일관되어 왔고, 그 대결에서 나는 큰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앞으로 죽는
날까지 성은 내게 있어 무서운 매력이고 아찔아찔한 모험일 것이다. 성이 쉽고
가깝고 마음대로 되고 언제나 거기 있는 것이라면 삶의 흥미의 태반이 사라질 것
같다.
성은 끝까지 내게 있어 마치 곡예사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줄을 매고 타듯,
목숨을 거는 모험이기를 바란다. 아슬아슬하며, 그래도 멋있게 이 줄을 타고
나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믿고 산다.
나처럼 묘하게 사는 인생이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먹고 사는 일이
괴로움인 줄을 알고 일단 굶어 죽어도 좋으니 먹는 일에 노예는 안되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나서 먹는 일에는 내가 자유를 얻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나는 그런 걱정은 아예 하지도 않고 살아간다.
나는 성이 고통인 줄을 알고 엉뚱하게 진을 치고 이날까지 나를 지키고
살아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성 때문에 고민을 한다. 날마다 줄타기를
한다. 그러나 이 모험이 내 삶을 풍요롭게도 하고 끊임없는 성장을 가져다
주기도한다.
인생이란 넓게도 살 수 있고 좁게도 살 수 있다. 두서너 자를 파면 잡수밖에
나오지 않지만 서른 자, 마흔 자 깊이 파면 말고 시원한 물을 얻게 되는 이치와
다를 바가 없다.

사랑 때문에

너 죽어도 흙이 되고
난 죽어도 흙 될 인생

이것은  춘향전 의 일 절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고생 끝에는 죽음밖에는 남을
것이 없고 죽으면 다 흙이 되니 허무한 것이 인생이라는 뜻이 분명하다.
과연 인생은 외로운 것,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고독과 고통이  사랑
이라는 과녁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외롭지도 괴롭지도 않을 것이란 말이다.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사랑이 있는데 왜 외롭습니까?   사랑이 있는데 왜
괴롭습니까? 라고 말이다.
나는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배웠다. 어려서는 어머니만 계시면
나는 늘 든든하고 만족스럽고 즐거웠다. 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생활도 부지런하게 하였다.
성공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지만, 고생하는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만 내게는 오직 성공이 필요했다. 어머니의 그 사랑이 나의 목숨을 이어
주었고 그 사랑 때문에 나는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더 큰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어려서는 어머니의
사랑밖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러나 차차 커가면서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동기간의 사랑이 잘 사는 집안에 비해 훨씬 강하고
뜨거웠다. 누이는 내 학비를 마련하였고 나는 동생들의 등록금을 조달하였다.
나는 대학 다닐 때에도 대학을 졸업하고도 남보다 부지런히 열심히 일해서
되도록 많이 벌었다.
게을러서 할 일을 안하고 넘긴 적은 없다. 나는 우리집이 가나했던 사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그 가난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적당하게 가난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된다. 그렇지만 그
사랑은 아직도 내 가슴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고 또 그 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이어져 있으므로 걱정이 없다. 나는 내 누이와 동생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와 얽혀진 남자와 여자들-가까운
내 친구들을 사랑한다. 그뿐 아니라  조국의 민족주의 라는 큰 주제 때문에
가까워진 동지들, 선배와 후배들도 사랑한다.
이렇게 해서 내 삶의 터전은 이루어져 있고, 내가 살고 간 흔적은 아무 것도
남을 것이 없다 하여도  사랑의 추억 만은 남을 것이라 짐작한다.
바울이라는 사도가 사랑을 이렇게 가르쳤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궤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물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양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몬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바울은 끝으로 언제까지나 있어야 할 것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라고 전제하고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 이라고 하였다.
나는 내 젊은 후배들에게, 사랑에 관하여 바울의 이 말씀보다 더 값진 교훈을
남길 수 없으리라고 믿는다. 아무리 삶의 현장이 외롭고 괴로워도 우리는 사랑
때문에 용감하고 고상하게 살아야 하고 또 그렇게 살수 있다는 확실한 근거를
가져야 한다.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만 있다면 흙이 되어도
영광이겠다.

어느 여대생의 겪은 죽음
서울에 있는 어느 유명한 대학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하는 똑똑한 여대생이
있었다. 그녀는 공부만 뛰어나게 잘한 것이 아니라 얼굴도 남달리 예뻐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 이었다. 재와 색은 겸비되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조물주는 가끔 그런 엉뚱한 짓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젊은 여성에게 하나 결함이 있었다면 다소 교만하다는 그 한 가지
분이었으리라.  내가 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 내가 원해서 얻지 못할 것은
없다.  이런 생각이 그녀의 어여쁜 머리 속에서 항시 지배적이었던 사실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기야 예쁘고 머리 좋은 묘령의 처녀가 그만한 교만에 빠지는
것쯤이야 탓할 일도 아닐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녀는 발랄하고 자신만만하고
야망에 가득한 뚜렷한 개성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면 그녀가 몸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대학 3학년이 되던 그해
여름이었다. 아랫배 왼쪽에 손으로 만져서 잡힐만한 무슨 혹같은 것이 생겼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그 혹이 안으로 커지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
언저리에는 항상 막연한 통증이 가시질 않았고 누르면 그 아픔은 더욱 심해지는
것이었다.
 이 일을 어쩌나?
몸에 병이 생기면 감추지 말고 소문을 내야 한다는 어른들은 말하지만, 젊은
처녀가 뱃속에 혹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가까운 친구에겐들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가 있었겠는가? 고민 끝에 하루는 혼자서 종합병원을 찾아가 진단을 받기로
결심하고 수속절차를 밟게 되었다.
환자가 한 사람 들어섰을 때 병원에서 하자고 하는 일들이 어디 한두가지인가!
피 검사, 변 검사를 비롯하여 심전기, X광선을 다 거치고 나서도 3, 4일은
지나야 소위 진단의 결과라는 것이 환자에게 알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오라는 날 정해진 시간에 담당 의사의 방을 찾아갔더니 그는 친절하게 걸상을
권하면서 앉으라고 하더니 전화로 또 다른 의사 한 사람을 불러들였다. X레이
사진도 끼어있는 검사결과 서류들 둘이서 한참 뒤적거리다가 두 사람은 돌연
독일어로 용어를 바꾸어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이 아가씨가
졸업 때 대통령상 아니면 총장상을 노리는 독일어 전공의 우등생이라는 사실을
그 두 의사는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최 박사 의견은 어떠세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담당 의사가 말꼬를 흐려 버렸다.
 과장님 생각이 틀림없을 겁니다. 십중팔구는 암일 것으로 저도 짐작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의사들의 대화 내용을 아는 척 할 수도 없는 처지였으니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는 두 의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저는 어떻게 할까요?
이 아가씨가 자기들의 독일어 회화를 알아들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한
담당 의사는 매우 침착한 표정으로,
 학생, 뱃속에 혹이 있기는 한데 d주 악성 종양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더
자라기 전에 수술을 하는 것이 옳다고 우리는 판단하지만, 그래도 보호자의 수술
동의는 사전에 얻어야 될 것 같군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넋을 잃고 창 밖을 바라보던 이 여대생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자신의
의향을 진술하였다.
 그러면 소정의 양식을 주시지요. 제가 동의서에 아버님 도장을 받아 가지고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아예 입원 날짜를 정해 주시면 거기 맞추어 모든 준비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매우 다부진 여성이라고 생각했던지 과장은 입원시킬 사정과 수술 일정을
알아보고 나서, 어느날 입원하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입원 절차도 순조로왔다. 부모는 시골에 계시고 학교 근처에 방 한칸을 얻어
자취하면서 학교에 다니던 그녀로서는, 아버지도 모르게 아버지 동장을 찍는
일쯤은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입원하고 나서, 2, 3일 동안 다시 정밀검사를 한 후 드디어 수술하는 날짜와
시간이 정해졌다.
암을 수술하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던 그녀의 심경이
복잡하였을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내 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니 저절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부모 앞으로 유서 비슷한 짧은 글을
하나 적어 책갈피에 꽂아 놓고 운명의 시각을 기다리며 누워있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두서너 시간 전으로 때마침 점심식사 시간이었다.
 죽기 전에 내가 살던 세상을 한번만 더 둘러보고 싶다. 차마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여대생은 몰래 옷을 갈아 입고 슬쩍 병실을 빠져나와 그
병원이 자리잡은 명동 일대를 한번 거닐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길어야 두세 시간뿐인 줄을 그녀 자신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1년만 더 산다면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의 명동거리에는 문자 그대로 사람이 물결치듯 오가고
있었으며, 비를 기다리는 도심지의 공기가 흐리고 탁하였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한두 시간 앞둔 그녀의 눈에 어쩌면 오가는 속인들의 얼굴과
옷차림이 그리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까! 몹시 교만하고 이기적인 그녀의
눈에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인간이 좀처럼 보이지가 않던 것인데, 이날 이 시간
명동거리를 거닐던 남녀는 모두 선남선녀였을 뿐 아니라 그 표정 그 말씨가
무한히 어여쁘고 다정하였다.
 하나님, 내게 1년만 더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이웃을 섬기고 받들고 살ㅇ하는 일만을 하겠습니다. 이렇게도 인생과
자연이 아름다운 줄을 정말 모르고 지금까지 자신만을 위해 살았을 뿐입니다.
그녀는 종교적 신앙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지닌 적이 없던 정신적으로 메마른
여성이었는데, 그 절박한 상황에서는 기도가 저절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나님, 내게 1년만 더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의사들은 예정대로 그녀의 배를 갈랐고 혹을 떼어냈는데 다행히도 그 살덩어리는
암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물체였다. 다시 꿰맨 후 마취에서 깨어난 그녀는
얼마 후에 곧 건강을 회복할 수가 있었다.
그런 놀라운 체험을 가진 이 여성이 오늘도 우리 사회의 어느 모퉁이에 조용히
살면서, 그때 그 약속대로 이웃을 섬기고 받들고 사랑하는 일에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답고 세상은 더욱
살만한 곳이 되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의 죽는 날이나 시간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있을 것만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죽지 않고 영원히 이 땅 위에 살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과연
누구이겠는가?
새는 죽으려 할 때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은 죽으려 할 때 그 하는 말이
착하다는 옛글도 있거니와, 죽음이 다가왔음을 의식할 때에만 사람은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남은 날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앞으로 백 년 또는 2백년을 더 살기나 할 것처럼 주제넘게 구는
사람은 삶의 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살다 그저 가는 불쌍한 사람이다.

눈을들어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런 가운데도 가장 두드러진
것 하나를 지적한다고 한다면, 짐승을 아직도 네 발로 기어다는데 사람은 오래
전부터 두 발로 서서 다니게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언뜻 행각하기에는 대단한 차이가 아닌 듯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보다 더 크고
놀라운 차이는 없다. 우리도 다른 동물들과 다름없이 네 발로 기어다니면서
먹이를 구하여 고된 삶을 여러 백만년 이어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찌하여
사람만이 홀로 서서 이 놀라운 문화생활을 창조하게 된 것일까? 그 사실은 인간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혁명이었다. 그때부터 사람은 사람 구실을 하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사람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원시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지는 아직 10만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곧게 서서 두 발로
다니게 된 이 한가지 사실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두 손이 자유롭게 되어서 이손 가지고 문화를 창조하였다는 말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주로 걷는 일에만 쓰여온 사람의 발은 마룻바닥에 떨어진 숟가락
하나를 아직 제대로 집어올리지 못하지만, 사람의 손은 기기묘묘하여
소매치기로부터 심장수술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이 손으로 김 홍도는
그림을 그렸고 황 진이는 거문고를 뜯었다. 아직도 손이 발이라면 문화도 예술도
우리와는 아무 인연이 없는 꿈나라의 이야기밖에 아니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곧은 자세로 서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머리가 네 발로
기어다닐 때보다 하늘을 가까이 의식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짐승은 대개 땅만
보면서 사는데 사람은 푸른 하늘가에 흘러가는 흰 구름을 즐기며,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없는 별들과 외롭게 뜨는 이지러진 조각달을 사랑한다. 그래서
사람에겐 시가 있고 노래가 있다.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까닭은 반드시 구름과 별과 달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사람은 오히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보다 더
높고 아득한 곳에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존재, 그 힘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을 사람의 운명과 결부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별을
보고 점을 쳤다는 말은 별의 뒤에 숨은 무슨 알 수 없는 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해를 숭배하고 예배하게 된 것도 비슷한 동기에서였다. 두 발로 땅을
디디고 곧게 서서 고개를 들게 된 우리 인류의 조상의 가장 큰 관심은 하늘에
있었다. 살기는 땅에 살지만 관심만은 하늘에 두고, 이 날 이 시간까지 생명의
불씨를 간직해온 것이 사람이라고 하는 수수께끼 같은 동물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나는 이렇게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나도 이성을 존중하고 과학을 숭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하나의 신비이다. 이성만 가지고 삶의 신비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성에는 한계가 있다. 나의 생존의 수수께끼를 과학만 가지고 풀어 볼 수는
없다. 과학에도 한계가 있다.
인간의 관심이 무한한 것과 영원한 것에 기울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겼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난 것이다. 우리의
7,80년의 생은 영원한 시간의 지극히 짧은 한토막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하고,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우리의 신성한
사명이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반드시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왜 사느냐? 는
물음을 자신에게 수없이 던지면서 하루 하루의 삶을 이어나간다.  왜? 하는
물음이 우리에게 없었던들 우리가 다른 짐승들과 다를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먹고 마시고 물고 뜯고 때로는 좋아하고 새끼 낳고 장난치면서 이 날 이
시간까지 꼭같은 삶을 되풀이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원시인이던 10만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자연 도태된 짐승들도 꽤 있다고
하지만) 호랑이의 굴은 여전히 호랑이의 굴이고 독수리의 둥지는 여전히
독수리의 둥지이다. 그런데 사람은 영 몰라보게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다.
 왜?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이 되었다. 만일에 우리의
조상이 하늘의 별들을 보고  왜? 하는 물음을 마음 속으로 되풀이하지 않았다면
점성술도 생기지 않았고 천문학도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에 아이작
뉴우톤이 사과가 나뭇가지에서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왜? 하고 묻지
않았다면 과학이 오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까?
사람과 친숙한 동물이 개인데, 동물 행동학의 권위자로 노벨상을 받은 콘라드
로렌츠는 개는 사람이 몽둥이를 들고 그 뒷다리를 후려갈기면 자기가 잘못했다고
믿고는 한 번도 내가 왜 맞아야 하나하고 따져보는 일이 없다고 밝힌 바가 있다.
그래서 그는 개를 가지고 생리학 실험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개에게
고통을 주면 줄수록 개는 복종만 더 하며, 그 고통의 원인이 자기의 잘못에
있다고만 믿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도 그런 경향이 있고 특히 권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 전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절대 복종을 미덕으로 알고 알고 살아왔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말이면 그만이다. 아버지의 명령이나 행동에 대하여  왜? 하고 묻고
나서는 것은 매우 부도덕하고 상스러운 일로 여겨 왔다.  아버지가 하라면 할
일이지, 이놈아, 왜라니 버릇없는 후레자식!  - 이렇게 당장 벼락이 떨어지지
일쑤였다.
임금이 하는 말, 임금이 하는 일 은 다 절대였으므로 어느 누구도 감히 그 말과
그 일에 대하여  왜? 하며 따지고 들지 못했다.  왜 구테타를 감행하였소? 하고
이 성계에게 대들었다가는 살아 남을 수가 없었다. 고려의 옛 임금이 그리워,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하고 말 한마디라도 입 밖에 낸 자는 어김없이 예성강의
고기밥이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가 한 덩어리가 되어,  왜?왜?  하는 놈은 그냥 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이  어린 백성 이  왜? 하는 한 마디를 마음
놓고 해보지 못한 채로 이 날에 이르렀다. 오죽하면 왜정 시대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고  왜?왜? 하면, 왜놈이 잡아간다 고 하였겠는가!
앞에서 지적한대로,  왜? 라는 당돌한 질문을 자연과 사람을 향해 던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인류의 오늘이 있게 되었는데 어째서 우리의 사정을 줄곧
그렇지가 못하였을까? 그 대답은 뻔하다.  왜?왜? 하다가는 끝내 목숨을 잃게
되거나 매을 맞아 허리가 부러질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렌츠가 개를 두고
한 말이 다시 생각난다. 개는 얻어 맞으면 으레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믿고,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복종하고자 하는 뜻만 더욱 굳어진다고 한다. 사람이
개를 닮아간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이 또 있겠는가?  왜? 가 없던 역사를  왜 가
있는 역사로 바꾸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신성한 임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선  왜 사느냐? 는 질문부터 던지고 그 반응을 한 번 살펴 보기로
하자.  왜? 사느냐? 이렇게 물으면 어떤 한국인들은 월파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 의 끝절을 가지고 대답을 삼기도 할 것이다.  왜 사냐건, 웃지요
이 웃음은 참으로 묘한 웃음이다. 남편의 치구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자기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줄곧 모나리자가 지은 야릇한 웃음도 아니요, 1억원
주택복권에 당첨되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어느 학교 도서관 수위의 흐믓한
웃음도 아니다. 이 웃음은  왜 사느냐? 고 묻는 그 물음 자체를 비웃는 웃음에
지나지 않는다. 삶에 이렇다 할 목적이 있는게 아니고 부모가 어쩌다
낳아주었으니 그저 사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지극히 퇴폐적인 반응이다.  웃지요 를 어찌하여 그토록 나쁘게 말하는가 하면,
삶에 대한 어중간한 무관심  이것도 철저하면 도통한 어떤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나 이 기회만 있으며 쾌락을 탐하여 타락의 길로 빠지는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건전한 오락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글쎄, 진정한 뜻의
건전한 오락이 있을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까닭은,
이런 사회에서 어떤 사람의 오락은 엄밀하게 따질 때에 다른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지않고는 있을 수 없는 사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과 시간의 여유를 듬뿍 가진 사람들이 어디  건전한 오락 따위로 만족하게
되는가! 술과 여자, 히로뽕 아니면 도박. 오늘날 재벌 2세라고 불리는 젊은이들
중에서 꽤 많은 친구들을 이런 병을 알고 있거나 그런 중세를 보이고 있다.
돈을 벌려는 한 가지 뜻만을 가슴에 품고 악착같이 사는 무리들도 적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욕심을 나무라지 않을뿐더러 훌륭한 야망이라고 오히려
칭찬한다. 그래서,  돈을 좀 벌어야겠다 고 솔직하게 말하는 젊은이를 격려해
주는 사람들은 많아도,  이 사람아, 돈만   다 보면 미리 생각도 못했던 함정에
빠질 염려가 있으니 조심하게 하고 일러 주는 어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돈이란 되도록 짧은 기간에 되도록 많이 버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돋은 버는 과정에서 남을 속이고 남을 못살게
만들더라도 돈만 벌면 왕이 된다. 그를 찾아와 연상 굽실거리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그런데, 돈을 쫓는 사람치고 잡은 것만 가지고 만족하는 위인은
드물다. 1억만 있으면 되겠다고 하던 사람이 1억원을 벌면 2억원을 바라고
2억원을 손에 쥐면 3억원을 노리게 되니, 자본주의의 약점이 바로 이런 데에
있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자식들 때문에 산다는 사람들도 꽤 많다. 혼자 뿐이라면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만 그래도 아들 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가 살아야겠다는
사람들이다. 하기야 오늘에 살아 있는 우리의 태반이 그런 부모들이 있어서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만일에 우리의 부모가 그런 책임도 느끼지 않고
자식을 키우는 일에서조차 아무런 뜻을 발견할 수 없었다면 우리는 버려진지
오래 되었을 것이고 살아 남았을 가능성은 아주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자녀는 생물학적으로 볼 때에 자기 목숨의 연장이니까. 거기서 삶의 보람을 찾는
일을 마달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사람의 생명을 동물의 차원에서만 다루는 일이
결코 옳지는 아니하다. 엄밀한 뜻에서  내 자식 이란 없는 것이고, 핏줄을
따지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앞으로는 가족이나 자녀도 정신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고, 지금이 그때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예수는 이미 2천 년 전에 말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물으신 뒤에 거기에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바로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라고 한 것이다. 저자들로부터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서 찾고 있다.
는 전갈을 받고 그는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핏줄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문제이기 때문에 혈연 관계에나 매달리는 사람은 시대의
찌꺼기처럼 역사의 길목에 버림을 받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가족 때문에 산다는
사람도 반성할 여지가 있다.
이제 와서 충효를 강조한다고 해서 쓰려져가는 초가집이 얼마나 더 오래 지탱될
수 있을 것인가? 낡은 시대의 유물, 봉건 제도의 찌꺼기, 가뜩이나 가족 때문에
살아서 도무지 보람있는 일을 못해 보는 이 국민에게 또다시 효를 강요하는 것은
식견이 모자라는 처사일 뿐 아니라 그 뒷 동기마저 의심스럽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있어야 할 것은 충효가아니라, 정직해지려는 노력이나 책임을 다 하고자
하는 정성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 살림이 온통 거짓으로 뒤덮였고 사람들이 제
할 일은 아니하고 남의 흉만 보는 바로 이것이 탈인데, 충효사상 양양은 또
하나의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 에 지나지 않는게 아닐까?
가족을 보고 사는 사람이 가족도 돌보지 않는 사람보다는 백배나 더 우러러볼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런 삶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이 아님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애국운동을 한답시고 집안을 전혀 돌보지 않아
자식들은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채로 길거리를 헤매고 아내는 이 집 저 집에
구걸이나 해야 먹고 사는 형편을 두둔할 수는 없다.  나라 사랑, 겨레 사랑 은
얼마나 빛좋은 개살구냐! 궁극의 목적은 자기 배를 채우는 데에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체하고 큰소리만 치던 사람들도 이제는 많이 기가 죽었다. 아니, 한
30년 동안 속여 먹었으면 됐지, 그 이상 또 어쩌자는 것인가? 그래도 아직 여기
저기에서  애국 을 팔아먹는 자들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한자리 하면 먼저 제
집부터 크게 짓고 좋은 물건 사다가 집안 꾸미고 어린 아들 딸을 몰래 외국에
보내 공부시키면서도 입으로는 애국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다.
유명해지려고 사는 사람도 많기는 하다. 삶의 보람이 오직 그것뿐이다. 오늘
한자리 잡고 앉은 사람들만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말은 아니다.
유명해지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가 않아서 초야에 묻혀 사는 사람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이다. 유명한 사람에게 아첨하는 인간이나, 반대로 그런 사람을
시기하는 인간이나 결국은  오십보 백보 라고 생각한다. 배우이건 가수이건
정치인이건, 인기가 없으면 시들한 사람들이다 이 테두리에 속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학문을 위해 산다는 사람들을 우리는 존경한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민물고기와 바다고기만을 연구하며 여든 살에 이르렀다는 어느 어류학자가
최근에 책 한 권을 펴냈는데 거기에는 9백 종류에 가까운 어류를 다 실었다. 그
책을 쓰는 데에는  10년 남짓한 긴 세월이 걸렸다고 하니 그 수고를 치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학자가 이 나라에 몇 사람이나 더
있을까? 석사가 되고 박사가 되는 것이 오직 이름을 날리려는 한 가지 욕심
때문이니, 불공보다는 잿밥에는 독을 들이고 있다고나 할까?
안할 말이지만, 학자라는 사람들처럼 마음은 좁고 명예욕만 그 속에 가득찬
족속도 많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명함을 남들도 하여금 깨닫게 하는 데에만 급급하고 부스러기
지식일지라도 이것을 어떻게 최대한 우려 먹을까 하고 마음을 조릴 뿐이다.
답답한 일이다. 그러니, 이 나라에서 학자가 없고 오직 학문의 보따리 장사만이
있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아인쉬타인은 언젠가 그의 상대성 원리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가름하는 중대한
실험이 있는 시간에도 그토록 태연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떤 신문기자가 그
실험에 의해 아인쉬타인의 이론이 옳다는 것이 증명된 뒤에 그를 찾아가,
선생님, 그 시간에 얼마난 초조하셨을니까? 하였더니, 아인쉬타인의 의아스런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며  이 사람아, 내가 초조할 까닭이 무엇인가 진리가
밝혀지는 것만이 문제이지! 하고 말했다. 얼마나 시원한 반응인가! 그런 삶에
보람을 느끼는 학자는 이땅에 없을까?
우리는 예술을 위해 사는 사람을 참으로 존경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그 일을 함으로써 밥을 먹고, 고생 끝에 얻은 작품이 후세에까지도 값있는
것으로 남는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하고 보람있는 나그네의 삶은 없을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인류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건축한 베드로
성당은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있어서, 사람의 머리와 손이 이룬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줄 것이다. 정선의  금강전도 는 삼팔선에 가리워보이지 않는
금강산의 화려함을 지금도 유감없이 우리에게 보여 준다. 예술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위해 사는 것은 더욱 아름답다. 남의 자유를 지켜 주려고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는 삶은 더욱 고상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는
한마디를 남기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간 예수는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삶을 살고 간 사람이다. 눌린 자를 자유롭게하며, 매인 자를 풀어 주려고 그는
괴로운 삶을 외롭게 살고 간 것이다 그처럼 자유를 위해 힘차게 살 수만 있다면
아픔도 외로움도 두려워할 것은 못된다. 끝에 가서 이기는 것만 확실하다면
죽음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자유를 거치지 않고서는 참된 평등을 실현할 수가 없다. 폭력으로써 이루어진
평등은 늘 불안한 것이다. 따라서 주변의 환경이 변할 때마다 그 평등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소련을 빠져나온 젊은 망명객 올라디미르 부코프스키가 뭐라고
증언했는가? 소련에는 자유가 없을뿐더러 올바른 평등도 없고, 거대한 소련의
사회를 버티는 기둥은 허위의 기둥뿐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사람의 타고난
권리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거나 그것을 바로 잡아 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참 사람일 수는 없다. 그것은 곧 거짓이다. 산
송장이 별것이 아니다. 정의감이 없는 사람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몸은
살았어도 정신이 죽었으면 송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평등은 꼭 있어야 하지만 그 밑바닥에 사랑의 샘이 흐르고 있지 않다면 그
평등은 사람에게 행복보다는 오히려 괴로움을 더 할뿐이다. 아들 딸 사남매에게
먹을 것을 골고루 나눠 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어야 비로서 그  집의 평화와
행복이 유지되는데, 나라의 평화와 행복도 또한 그렇다. 존 러스킨의 경제관에
새로운 차원을 마련해 준 것은  마태오 장에 있는 포도원 일꾼이 품삯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오 하고 말하니 그들은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 일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시 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삭을 더 많이 받으려니 하고 생각했지만 그들고 한
데리니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들고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 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은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맨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그 주인의 사랑이 일꾼들에게도 전해져서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인류의
오랜 꿈이라면 꿈이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 꿈 때문에 산다고 말하고 싶다.

바르게 사는 길
옛날의 우리 조상들은 쌀을 퍼가지고 가서 옷감과 바꾸었고 일꾼의 품삯을 콩 몇
되, 보리 몇 말로 치렀으므로 사실상 돈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도 살 수가 있었던
같다. 감투를 탐내는 시골의 부자가 서울 사는 정승을 한 차례 찾아볼라치면
소달구지에 제 고장 특산물이나 한 바리 해 싣고 어쩌다 캐낸 산삼이라도 한
뿌리 비단 보자기에 곱게 싸들고 가면 될 일이었다.
돈이 언제부터 우리 살림에 이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  지 알수는 없으나,
하여간 오늘날 돈은 무서운 위력을 지닌 괴춤처럼 이 사바세계에서 판을 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세 살 난 어린애로부터 여든살 먹은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입을 가진 사람은 죄다  돈, 돈 하니 이 세상이 어딘가 잘못된 것만은 확실하다.
돈이 대관절 무언데 이다지도  돈, 돈 하는 것일까?
물론 돈만 있으면 땅도 살 수 있고 집도 살 수 있다. 맛나는 음식이나 화려한
옷, 금은보석상에 진열된 모든 값진 것들이 다 제 것이 될 수 있다. 아침 저녁
만원 버스에 시달리는 것보다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것이 편한 것은 확실하고,
돈만 있으면 롤즈로이스나 벤츠같은 비싼 차도 사서 타고 다닐 수 있다.
그러나 돈을 가지고 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호화롭게 살 수는 있어도 평화롭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일이 돈만 가지고 될
수는 없는 법이다. 행복을 돈 주고 샀다는 사람을 본일이 있는가? 정신적 차원의
기쁨을 물질적 차원에서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나만 잘 살아 보겠다 는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자 는 격려는 더욱 잘못된 것이었다. 잘 살기
위해서는 돈이 많아야 하고, 남부럽지 않게 잘 살기 위해서는 돈이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한심스런 생각이 이 나의 백성들을 돈의 종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수출고나 개인 소득의 액수만 가지고 인간의 행복을 측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정신적이며 도덕적인 존재이므로 그러한 욕구가 충족되기
전에는 사람에게 행복감이 있을 수 없다.
 잘 살아 보자 는 구호에 앞서  바르게 살아 보자 는 부르짖음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각자가 단지 잘 사는 것만을 추구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분쟁, 사기, 모략, 중상, 부정, 부패와 같은 독버섯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살기 위해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우선 거짓을 몰아내고 스스로 타고난 능력이나 재간을 제대로 발휘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제 돈은 한 푼도 없으면서 순전히 남의 돈만 가지고 재벌이
되고자 꿈꾸는 가운데 사기와 협잡을 일삼는다든가, 뻔히 참새이면서 황새
걸음을 걸음으로써 신세를 망치는 일이 있어서도 안된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대학에 들어가 전공을 택하는 데서부터 자신의 소질이나
적성을 살리려 하지 않고,  돈벌이 가 좋은 분야나 출세에 도움이 되는 과에
머리를 싸매고 몰려드는 현상도 서글프거니와, 일단 대학에서 문학이나 어학,
예술이나 미술을 전공하고도 사회에 진출하는 마당에는 오히려 전공을 버리고
수입이 좀 나은 기업체에 들어가 책상이나 붙잡고 앉아 있기를 바라는 이 추세는
더욱 통탄할 만하다. 그렇게도 자존심이 없는가?
 나만 잘 살아 보겠다 는 따위의 천박하고 저속한 철학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망치고 있다. 다만 몇 푼이라도 더 준다고 하면 일년에도 몇 차례씩 직장을
옮기고 일터를 바꾸는 일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일로 아는 그들만을 나무랄 수는 없는 것 같다. 사회적 풍토가 그렇고
많은 사람의 가치관이 그런 터에 어찌 젊은이들만이 올바른 인생관을 지녀주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는 나라라도 돈이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돈보다 귀한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법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부강한 국민이 되느니보다는
정의로운 질서 위에 사는 정직한 국민이 되는 것이 백 배는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잘 사는 것보다는 바르게 사는 일이 더 시급하다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톨스토이(Nikolaevich Tolstoi;1828--1910)
인생론

저자 소개
톨스토이는 남러시아 툴라 지방의 야스나야 포랴니에서 출생하였으며,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코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인
동시에 문명 비평가. 사상가로서도 유명한 세계 3대 문호로 일컬는다.
저서로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중심으로한 러시아 사회를 파헤친 대작
전쟁과 평화 , 죽음의 공포, 인생의 무상에 관해서 과학. 철학. 예술에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종교로 파고 들어가서 완성한  참회   나의 신앙   요약복음서 등과
그 밖에  부활   두 노인   바보 이반 이 있다.
인생론
1
인간은 자연 속에서도 가장 미약한 지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 이것을 짓누르는데, 우주 전체는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한
차례의 바람, 물 한 방울로 충분하다. 그러나 설사 우주가 짓누르더라도 인간은
사람을 죽이는 자보다는 더욱 고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며 우주가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경도 모두 사고 속에 있다.
우리가 일어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며 우리가 채우지
못하는 공간이나 시간 때문에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생각하도록 노력
하자. 거기에 도덕의 근원이 있다. -파스칼-

그것에 관하여, 되풀이 하여 곰곰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더 힘차고
새로워지는 감탄과 존경을 가지고 마음을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나의 머리 위에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의
법칙이다. ... 전자는, 내가 외적인 감성의 세계에 차지하는 장소에서 시작되어,
세계 위의 세계나 체계의 체제를 포함한 무한의 천계에까지 나와 외계와의
결합을 확대시켜, 그 위에 그 주기 운동의 시초와 지속을 넓힌다. 또한 후자는,
나의 눈에 보이는 자아, 즉 나의 인격에서 시작하여, 참된 무한성을 지니고는
있으나 그러나 오성만이 갈수 있는 세계 - 이 세계(그것을 통하여 동시에 또한
일체 눈에 보이는 세계)와 나와의 관계는, 첫째 경우처럼 단순히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결합을 가졌다고, 내가 인식하는 그러한 세계에
나를 놓는다. -칸트 실천 이성 비판 결론-

너희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리니, 서로 사랑할 지어다. -요한복음 제13장 34절-

2
지금 이곳에 물레방아를 유일한 생활 수단으로 삼는 한 남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 남자는 할아버지 적부터 물레방앗간을 해 내려 왔기 때문에 좋은 가루를
빻으려면 물레방아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늘 보아 왔기에 잘
알고 있는 터이다. 이 남자는 기계에 대한 지식은 전연 없지만, 좋은 가루를
알뜰하게 빻기 위하여 물레방아의 부분을 조정하는 데는 익숙한 솜씨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남자는 우연히 물레방아의 구조를 캐고 싶은 마음이 내켜, 기계에
대한 이것 저것 애매한 의견을 남에게서 들어오다가 마침내 물레방아의 어디가
어떻게 회전하는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가리에서, 맷돌로, 맷돌에서 굴대로, 굴대에서 수레로, 수레에서
방죽으로 물로, 라는 식으로 관찰을 해가던 중에 기어코 모든 원인은 방죽과
개울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나이는 이 발견을 굉장히 기뻐하며, 전처럼
빻아서 나오는 가루의 질을 비교하고 맷돌을 올렸다 내렸다 하거나, 그것을 닦아
내거나, 또는 피대를 죄거나 느슨하게 조절하는 대신에 개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 뒤부터 물레방앗간은 기계가 제대로 돌지 않게 되었다.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고 모든 사람들이 권하였으나 그는 충고를 하는 사람들과 언쟁을
벌이고 나서도 여전히 개울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남자는 오랜 동안 개울에 대한 연구에만 몰두하였을 뿐 아니라.
그 생각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과는 핏대를 올려가며 여러 차례 언쟁을
벌이고 나서 결국은 개울이 곧 물레방아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라고 하는 일체의 논증에 대하여 이 제분업자는 대답할
것이다.  어떤 물방아도 물 없이는 밀을 빻지 못한다. 따라서 물레방아를
알려며는 어떻게 물을 끌어들이면 좋을지를 알지 못하면 안된다. 물이 작용하는
힘은 물이 흐르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안된다. 그러므로 물레방아를 알려며는
개울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론상으로는 이 남자의 사고방식에 반대하기란 어렵다. 이러한 망상에서
깨어나도록 해주는 데는 단 한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만사를 생각할 경우에 중요한 것은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는
순서라는 점, 즉 처음에 무엇을 생각하며 나중에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모르면
아무리 생각한들 소용없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또한 합리적인
활동과 비합리적인 활동이 구별되는 것도 합리적인 활도의 경우는 중요한
생각부터 차례로 하나하나 질서를 세워서 일을 처리해 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합리적인 활동 쪽은 전연 순서가 없는 생각에 따라서 일을 해 나간다는
차이점을 잘 납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순서를 정하는 것은 단순히 우연한
것이 아니고 무엇 때문에 생각하는가 라는 목적에 의거한다는 점도 잊지 말고
동시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
모든 생각하는 목적이 이 순서를 정하며, 이 순서 속에 하나 하나의 생각은
이치에 맞도록 배정되어야 한다. 목적을 잊은 생각은 설사 아무리 논리적이라
하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분별이 결여된 데가 있는 법이다.
이 남자의 목적은 밀을 잘 빻는 것이므로 그 사실을 그가 잊지 않고 있는 한,
맷돌이나 수레나 둑이나 물에 대하여 생각하는 경우의 순서를 이 목적이 불가불
명확하게 정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긴한 이 목적을 완전히 잊고 있다면 이 제분업자의 사고방식이 아무리
아름답고 논리에 맞는다 할지라도 결국은 옳다고는 할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우선 무익한 것으로 외어 버릴 것이다. 저 기이퍼.모오게빗치(고오고리
죽은영혼  제1부 2장의 에피소우드 중의 인물)가 생각한 것처럼 만약 코끼리가
새처럼 알에서 부화된다면 코끼리 알의 껍질은 두께가 얼마나 될까 따위를
생각하는 것과 어리석음은 다를바가 없다.
나에게 말해 보라면 인생에 대해서 논하는 현대의 학문도 또한 이와 유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인생이란 저 남자가 연구하려던 물레방아와 같다. 물레방아는 밀을 갈기 위해
필요하였다. 인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잠시나마
사람은, 이 연구의 목적을 내팽개쳐서는 안된다. 만약에 목적을 버린다면 그
연구는 완전히 기초를 잃게 되어, 마치 코끼리의 알을 깨는 데는 어떤 종류의
화약이 필요한가를 생각했던 키이퍼.모오게빗치의 사고 방식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사람은 인생을 보다 멋지게 하기 위한 일념으로 이 연구에 종사한다. 인류의
지식을 쌓아 올린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연구해왔다. 그러나 이런
인류의 은인이나 참다운 스승이 있는 반면 생각하는 목적은 내팽개치고 그대신
왜 생명이 생겨났느냐, 왜 물레방아는 돌아가는가 라는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사상가는 어느 시대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다. 어떤 사람은 물 때문이라고
주장하나, 구조에 의한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논쟁이 백열화 함에
따라 사고의 핵심에서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 끝내는 완전히 별개의 제목이
본래의 제목과 뒤바뀌는 결과가 된다.
옛 우수개말에, 그리스도교 신자와 유대교 신자 사이의 싸움을 다룬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도 교도가 유대교 신자에게 끄집어낸 복잡 미묘한 문제에
대답하면서 상대의 대머리를 한 대 찰싹 치고는 지금의 소리는 손바닥에서 난
것이냐 대머리에서 난 소리냐고 질문하게 되어, 신앙에 대한 토론이 어느새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로 바뀌었다는 이야기이다.
옛부터 인간의 참다운 지식에서나, 인생문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
왔다.
생명의 기원이 정신적인 시초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물질이 각양각색으로
구성된 것에 의한 것이냐는 문제에 관해서도 옛부터 논쟁의 분분하였다. 이
문제는 시원스럽게 해결될 가망이 없을뿐더러 지금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사고하는 목적을 망각해 버리고 그 목적과는 하등의 관계없는 생명이
논의되고 있기 때문에 생명이라는 본질에서 이탈된 엉뚱한 문제, 즉 생명의
시초는 무엇인가 하는 따위 문제로 바뀐 때문이다.
지금까지 과학책 뿐만 아니라, 일상 대화 속에서까지도 생명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생명-누구나가 무서워하고 미워하는 괴로움에
의하여 누구나가 바라는 기쁨이나 즐거움에 의하여 인식되고 있는 생명은 말하지
않고 무엇인가 어떤 물리적인 현상의 우연한 희롱으로 일어나는 것이거나, 혹은
신비적이며 알 수 없는 원인으로 해서 일이나는 것만을 이야기한다.
요즈음에 와서  생명 이란 말은 생명의 주요한 특징-괴로움이나 즐거움의
의식이라든가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라든가 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무엇인지 어리석은 화제로 까지 격이 떨어졌다.
 생명이란 일반적인 동시에 연속적인 분해와 결합과는 이중의 과정이다.
생명이란 잇달아 일어나는 각종 변화의 일정한 결합이다. 생명이란 활동하는
유기체이다. 생명이란 유기체의 특수한 활동이다. 생명이란 외부에 대한 내부의
관계의 적응이다.
이런한 정의에 붙어 다니는 애매한 표현이나 같은 내용을 무의미하게 되풀이
된다는 것은 제쳐 놓고라도, 이러한 정의의 본질로 되어 있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한가지 점이다. 즉 정의되어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대체로  생명 이란
말에서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나 그 밖의 현상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어떤 과정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형성되는 결정의 활동이며 그 어떤
것에만 해당되는 것이 발효와 부채의 작용이며, 또한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이 전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인간 신체의 하나 하나의 세포의 생명이다.
결정이든, 원형질이든 원형질의 핵이든, 내 몸이거나 딴 사람들의 신체의
세포이거나 그러한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과정이 내 속에서 행복을 바라는
의식과 밀착되어 결부되어 있는 하나의 말- 생명 이란 말과 전적으로 같은 말로
불리우고 있다.
생명의 조건을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생각은 원래
그들이 연구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전연 동떨어진 것이므로 그 사고방식으로
내려진 인생에 관한 모든 결론은 아무래도 거짓이 아닐 수 없다.
 생명 이라는 말은 실제로 매우 간단 명료하여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뜻하는 바를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하여 이해하고
잇으므로 그만큼 우리들은 언제나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이 말이 세상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이 말이 세상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것이
딴 말이나 관념으로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이 말에서
많은 다른 관념이 갖가지 결론을 끌어내는 데는 무엇보다도 우선, 모든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인정되고 있는 근본적인 뜻에서, 이 관념을 우리들은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 중요한 점이 아무래도 생명이라는 관념을
논하는 쪽에서 등한히 하고 있는 듯하다. 생명이라는 기초가 되는 관념이
처음부터 근본적인 뜻에서, 이 관념을 우리들은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 중요한 점이 아무래도 생명이라는 관념을 논하는 쪽에서 등한히 하고 있는
듯하다. 생명이라는 기초가 되는 관념이 처음부터 근본적인 뜻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있는 형편이므로 생명에 관한 여러 의론의 결과가 점점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있는 기초적인 근본 의미에서 멀어지게 되어 결국 그 기초적인 의미는
전적으로 사라지고, 그와는 전연 별개의 얼토당토 않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하나의 도형을 그리면서 중도에서 그 도형의 가장  긴요한 중심을 딴점으로
옮기는 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생명은 세포냐 원형질이냐, 또는 무기물 속에 있는 것이냐 라는 따위가
논의되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주제가 논의되기 전에 차분히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들에게는 참말로 생명이라는 관념을 세포에 뒤집어 씌울
권리가 있는지를?
우리들은 예를 들어 생명은 세포 속에 있다거나, 세포는 살아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의 관념과 세포 속에 있는 생명의 관념과는 전연 별개의
것으로서 이 두가지는 결코 결합 될 수 없는 별개의 대립된 관념인 것이다.
한쪽의 관념은 딴쪽의 관념을 배척한다.
나도 내 몸 전체가 빈틈없이 세포로 성립되어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
위에 이 세포는 나와 같은 생명의 특징을 지닌 나와 똑같은 생명체라는 것도
들어서 안다. 그러나 내가 살아 있다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많은
세포로 성립되어 있는 자기를 이 이상은 더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 몸은 속속들이 살아 있는 세포로 꽉
들어차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다대고 나는 생명의 특징을 물어보면 좋을지?
세포에게냐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냐? 만약에 세포가 생명을
갖고 있다고 인정한다면 그때는 생명이라는 관념에서 자기 생명의 중요한
증거-자기가 하나의 생물로 보는 의식을 나는 물리쳐야 한다. 만약 내가 모든
생물이 느끼듯이 자기도 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면 나는 이몸을
형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의식을 가졌는지 유무까지는 알 도리도 없는 세포에서
자기 생명과 마찬가지 특징을 인정해 주기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내가 살아 있고, 내 몸 속에 생명이 없는 세포가 모여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라는 것은 생명이 있는 세포의 집합체에 불과하며, 나의 생명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이 실은 생명도 아무 것도 아닌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인지 어느
쪽일 것이다.
우리들은 세포 속에 우리가 부루이즈니(살아서 약동하는 것)라고 불리우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은 아니고 생명이 있다고 말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 말에서
이해되는 것은 *따위라고 하는 무엇인지 뚜렸하지 않은 관념이 아니고, 충분히
한정된 관념-그것도 자기 자신의 실감에 의하여 육체를 가진 자기를 나눌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보는 의식으로서 우리들 모두가 다같이 알고 있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은 내 몸을 형성하고 있는 세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가령 사람이 어떤 연구나 관찰을 하더라도 그 관찰한 것을 표현하는 경우에는
모두가 다 같이 이해할 수 있는 뜻을 지닌 말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생명이라는 말이, 세포로 이루어진 동물과 세포의 경우에 해당되듯이 어떤
생명체 전체의 본질에도 그것을 형성하는 부분 부분의 전연 다른 본질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구별없이 의미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다른 말도 역시
그러한 식으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사상을 말로 표현하며,
말은 글자로, 글자는 선으로 표현하므로, 선을 긋는 것이, 두말 할 것 없이,
사상을 표현 하는 것, 즉 선이 사상이라는 식으로 되어 버리는 것과 같다.
오늘날 과학계에서는 물리적인 힘, 기계적인 힘이 어울려서 생명이 발생한다는
의론이 흔히 통용되고 있다. 게다가 과학자의 대부분의 의견인 듯하면서도
의견이 아니, 역설인 듯하면서도 역설이 아닌 말하자면 하찮은 의론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렇게 하여 본래의 관념과는 거리가 멀며 얼통당토 않게 쓰여지고 있는
생명이라는 이 말은 점점 원래의 뜻에서 벗어나, 우리들이 보통의 뜻으로
생각하면 생명 따위는 있을성 싶지도 않은 곳에 생명을 예상할 만큰 핵심에서
멀어져 있다. 원주 밖에 원이 있다고 믿는 것과 흡사하다.
실제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향하는 욕구로서 밖에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은
내가 행복인지 불행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곳으로 옮겨져 버렸다. 생명이라는
관념의 중심이 완전히 바꿔 놓여졌다. 나는 많은 관념이나 말을 보아 왔으나,
그것은 모두가 과학 용어로서 조건이 붙은 의미를 가지고는 있으나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관념과는 전연 일치하지 않는 것들 뿐이다.
말하자면, 과학 연구에 있어서는 인간다운 말은 점점 쫓겨나고 현재 존재하는
사물이나 관념을 표현하는 수단인 말 대신에 과학적인 세계언어가 군림하고
있다. 이 세계어가 진짜 세계어와 다른 점은, 진짜의 세계어는 보통 말로 현재
존재하는 사물이나 관념 따위를 부르지만 과학적 세계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말로 실존하지 않는 관념을 부르는 데 있다.
인간의 정신적인 결합을 위한 유일한 수단은 말이다. 이 결합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낱말 하나 하나가, 모든 사람에게 적당하며 정확한 관념을 틀림없이
전달 하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만약 말을 아무렇게나 입에서 나오는대로 하거나
그 말을 문득 떠오른 뜻을 포함시켜 쓰거나 할 바에는 차라리 함구하고 무엇이든
기호로 표시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실험도 관찰도 하지 않고, 단지 이지에서 짜낸 결론만으로 세계의 법칙을
정의한다는 것이 틀린 비과학적인 방법이라는 것, 즉 진실한 지식을 부여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실험과 관찰을 통하여 세계의
현상을 연구하면서, 동시에 그 실험이나 관찰을 함에 있어서 일반적이거나
근본적인 아니 조건부의 관찰에 의지하거나, 그러한 실험 결과를 여러 가지
뜻으로 색일 수 있는 말로 기록하거나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쁜 결과가 되지
않을는지? 만약 약병의 라벨을, 내용을 무시하고, 약제가 제멋데로 편의만
생각하고 적당히 붙여 놓았다고 한다면 아무리 유명한 약국의 경우라 할지라도
굉장한 해독을 끼칠 것이 틀림 없다.
그러나 내게 이런 말을 해올지도 모른다.  과학은 인생(의지라든가, 행복에 대한
요구라든가 정신세계라는 따위를 포함하는) 전체의 연구를 그 과업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 단지 인생이란 관념에서 실험에 의한 연구의 가능한 현상을 다를
뿐이다.
확실히 이것은 훌륭하며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다시피
현대의 과학자가 쓴 것을 보면 전연 그렇지가 않다. 실제로 있는 것은 말해야
하며 숨겨서는 안된다. 생명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실험 과학자의 대부분은
생명의 일면뿐 아니라, 생명 전체를 연구하고 있다고 자기 스스로가 믿고 있는
것을 도대체 우리가 모르고 있는줄 아는지?
천문학, 물리학, 화학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과학은 모두가 생명 전반에
관해서는 아무 연구 성과도 올리지 않고 각각 말은 범위에서 생명의 일면만을
연구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오로지 이러한 과학 중에서도 어떤 것은 그것이
요람기였을 때는 생명의 온갖 형상을 자기 나름대로 포착하고자 하여 새로운
관념이나 말을 여러 가지로 궁리하면서 스스로 혼란에 빠졌던 것이다. 천문학이
점성술에 지나지 않았거나, 화학이 연금술이었을 시절에 이런 현상이 일어
났었다. 그러나 현재에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 일이 실험적인 진화론의 경우에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 과학은 생명의 일면이거나 기껏해야 이면 아니면 삼면을
검토하면서 그것을 생명 전체의 연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과학에 대하여 이러한 틀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연구가 생명의 2, 3면에만 미치고 있다는 점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을뿐더러 그 외면적인 실험 방법을 툭하면 생명 전체가 그것에 따르는 일체의
현상을 포함하여 규명되는 것이 틀림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들은 설사, 한 쪽
면에서라도 차분히 다부지게 사물을 열심히 관찰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여러
면에서 아니 내면에서 조차도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라고 말한다.
미신에 사로잡혔다고나 할까,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설이 아무리 해괴할지라도
뻐젓이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하고 있으며 온갖 야만적이며 광신적인 교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상적인 활동을 그릇된 길로 이끌어 파괴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성실한 학도가 그 생애를 거의 아무 필요도 없는 연구에 몰두하다가
사라지며, 인간의 물질의 힘을 불필요한 방향에 쏟아 헛되이 없애고 마는 일이
허다하다.
흔히 과학은 모든 면에서 생명을 연구하고 있다고들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떤
것에도 둥근 공에는 반지름이 무수하게 있듯이 무수한 면이 더욱 중요하며
필요한 면인지, 어떤 것이 덜 중요하고 불필요한 면일지를 분간하고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의 현상은 온갖 면에서 일시에 규명할 수는 없다. 싫든 좋든
순서가 정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이 순서란 생명을 이해하고 나서 비로소 정해지는 것이다. 오로지 생명의
올바른 이해만이 과학전반에 대하여 특히, 개개의 과학을 분류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 전부가 납득하고 있듯이 생명이 이해되고 있지 않으면 과학
그 자체도 잘못된 것으로될 수밖에 없다.
과학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인생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생관이
과학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결정한다. 따라서 과학이 과학으로 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과학이며 무엇이 과학이 아닌가라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므로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관이 뚜렸하게 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솔직히 나의 생각을 말하기로 하겠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이러한 틀린
실험과학의 신앙을 버티는 근본적인 도그머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물질과 그 에네르기가 있다. 에네르기는 운동하며, 에네르기의 기계적인 운동은
분자운동에 대신하여, 분자의 운동은 온도라든가, 전기라든가, 신경이나 뇌의
작용으로서 나타난다. 생명의 현상도 예외없이 일체 이 에네르기의 갖가지
관계로서 설명된다. 이래서 과학에 의하면 모든 것은 간단명료하며, 아름답고
더욱이 편리하므로 만약에 우리들 인생 전체를 이처럼 단순하게 처리할 수 있는
해결-우리가 이처럼 구하고 있는 해결책이 아무것도 없다며는 어쩌하여서건,
그러한 것을 기필코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것이다.
결국, 나의 불손한 생각을 송두리째 털어 놓는다면, 시험과학의 활동을 버티는
정열과 에네르기의 태반은 이러한 편리한 관념을 뒷받침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생각해 보고 싶다는 욕망에 의하여 선동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학의 일체의 활동에는 생명의 현상을 요구하고자 하는
욕구보다도 그 근본의 도그머는 정당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몸에 밴 평소의
마음가짐 쪽을 더욱 분명하게 간과할 수 있다.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발생한다는
것, 유기물의 작용에 의하여 정신활동이 일어 난다는 것-이런 것을 어찌해서라도
설명하고자 하여 얼마나 많은 힘이 낭비되었을까? 무기라든가, 모네라 라고
불리우는 그런 따위가 발견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없더라도 그런 현상이 여하간 발견되는 것에는 틀림없다고 믿을
수는 있다. 하물며 영원에 걸친 무한의 시간을 좋을대로 이용한다면,
신념으로서는 확실히 있을 법한 것이나 실제로는 없는 일체의 것을 그곳에
뒤집어 씌울 수 없으므로 더욱 그렇다.
유기물의 활동에서 정신적인 활동이 일어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일은
있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러리라는 것이 틀림 없음을 믿고 그
가능성만이라도 적어도 증명하려고 온갖 지혜를 짜낸다.
도대체 생명은 무엇에서 발생했는가? 그것은 아니미즘이라든가,
바이탈리즘이라는 둥, 인생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의론이, 인생의 중요한
문제-그것이 없이는 인생관도 무의미하게 되는 문제를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감춰버렸을 뿐 아니라, 사람을 인도해야 할 과학자를 혼미한 상태로 점점 끌어
들였다.
그러나 자칫하면 바로 내가, 과학이 현재 지향해 나가면서 올리고 있는 큰
성과를 일부러 눈을 가리려고나 하는 것이 아닌지? 그렇지만, 어떤 성과라
할지라도 잘못된 방향까지 바로 잡을 수는 없다. 가령 지금 생명에 관해서
현대의 과학이 알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 단언하고 있다는 점, 따위 이것 저것이
모조리 밝혀진다는, 여간해서는 있을 법하지도 않은 것을 여기서 인정해 본다고
하자. 모든 것이 밝혀지고 모든 것이 대낮 같이 명확해졌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하여 무기물에서 순응이라는 경로를 밟아 유기물이 생겨나는지도
분명하다면 또한 어떻게 하여 물리적인 에네르기가 감정, 의지, 사상에
변화하는지도 분명하여 이런 것이라면 무엇이곤, 중학생뿐 아니라
국민학교생까지도 알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나 역시 이러한 사상이나 감정은 이러 이러한 운동에 의하여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상상하자. 자, 그래서 어떻다는 것일까? 그런 경우 나는 내 자신
속에 이러 저러한 사상을 이것 저것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과연 자기의 그러한
운동까지 제대로 지배할 수 있을는지? 참말로 그렇게 된 경우일지라도 내가
자신이나 타인 속에 어떤 사상이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귀중한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거의 손도 대지 못한 채 그대로 남는다.
나는 이 문제의 답을 내는데 과학자는 조금치도 곤란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은 과학자 쪽에서 보면 매우 간단한 것으로
여긴다. 마치 아무리 어려운 문제의 해결이라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간단하게 생각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라는 문제도 인생이 우리들 손에 맡겨져 있는 한 과학자의 생각으로는
지극히 간단한 것이기만 하다. 과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즉 인생은 사람들이
각자가 그의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다스려져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과학이 여러 가지 방법을 안출하고 있으므로 어떻든지 우선 그러한 요구의
민족이 정당하게 때문되며 다음에는 일체의 요구를 직각 만족시키는 방법이 여러
가지로 문제없이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어 사람들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 틀림
없다 라고 말한다.
요구란 무엇인가, 요구의 한도를 어디다 두는가 라고 물어본다 하더라도
과학자는 이것도 역시 간단하게 대답할 뿐이다. 과학은 요구라는 것을 육체,
정신, 아름다움, 더욱이 도덕의 면에서도 분류하여 어떤 요구가 어느 정도로
옳고, 어떤 요구가 어느 정도로 옳지 않은가를 명확하게 결정짓기 위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과학인 것이다 하고 대답할 뿐이다.
과학은 점차 이러한 것까지도 결정짓게 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정당한 요구와
그렇지 않은 요구를 결정하는데 무엇이 기준이 되는가, 물어본다 하더라도
과학자는 주저치 않고 즉석에서 요구의 연구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미리 알려
두지만 이 요구라는 말에는 단지 두 개의 뜻밖에 없다. 즉 하나는 생존의
조건이라지만 한사람 한사람의 인간의 생존 조건은 각각 무한하게 있으므로 그
조건을 모조리 연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고, 또 하나는 생물에
있어서의 행복의 욕구이나 그 것은 각자의 의식을 통해서 비로소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실험과학에 의하여 연구될 가능성은 적은 까닭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일반 사람들이나 세상의 식자에 의해서도 조직된 회의라든가
단체 또는 기관 따위에는 아무데도 험잡을 데 없고 훌륭히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결코 없지는 않다. 이러한 참다운 과학이 머지않아 필요한 일체의
것을 차츰 명확하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으나 모두가 마치 모양을 바꾼 메시아의 왕국 같은 것으로서
메시아의 역할을 여기서는 과학자가 대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실로 이런
과학적인 설명에 다소라도 무엇인가를 설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신봉하듯이 역시 과학의 도그머라는 자를 구질구질하게 믿어야겠지만
또한 정통파의  과학자들은 착실하게 그런 식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메시아를 신의 사도로 간주하는 정통의 유대 교도라면 메시아가 그의 힘으로
일체의 것을 옳게 다스리라고 믿을 수도 있겠지마는 정통파의 과학자에 있어서는
일의 본질에서 말하더라도 갖가지 요구의 표면적인 연구에 의하여 생명이라는 단
하나의 중대한 문제가 해명되기란 과연 믿을 수가 없으므로 이 점에 다소의
차이가 간단히 볼 수 있을 뿐이다.

행복이란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며 생활한다. 자기의 속에서 이
행복에 대한 욕구를 느끼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가 살아
있다고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란 자기의 행복을 바라지 않고는 인생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누구에게나 산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행복을 바라고
그것을 얻는 것이므로 행복을 추구하고 얻는 것이 결국은 산다는 것이 된다.
사람은 자기라는 개인 속에서만 생명을 느낀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자기가
원하는 행복은 다만 자기 혼자만의 행복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
자기만이 살고 있고 참말로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남의 생명은 자기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다만 생명 비슷한 것으로 밖엔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은 다만 남의 생명에 대해서는 특히 생각하며 들지 않는
한 세월이 지나도 알 까닭이 없지만 일단 그것이 자기 생명에 관한 한 겨우
일순간이나마 살아 있다는 의식이 끊일 사이가 없을 만큼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생명만이 참된 생명이며 자기 주위의 생명 따위는 자기의 생존상
하나의 조건밖에는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설사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남의 고통을 보는 것이
자기의 행복을 해친다는 이유에 불과하다. 또한 남이 행복하지는 것을 원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의 경우와는 전적으로 다르며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이쪽이
상대방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남이 행복한 것을 보고 자기 인생의
행복을 한층더 크게 하기 위해서에 불과하다. 인간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다만 자기만의 느껴지는 생명의 기쁨, 즉 자기의 행복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행복을 얻고자 원하는 중에 곧 그 행복이 남에 의하여
좌우되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남을 잘 관찰하고 연구해 보면 그것이
또한 모두-인간 뿐이랴, 동물까지도-자기와 다름없이 같은 생명의 관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도 역시 자기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생명과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느끼며 자기 자심의 생명만을 중요한 진실한 거승로 생각하고
남의 생명 따위는 자기우 행복을 위한 단순한 수단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은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된다. 즉 일반적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거래가 아주 하찮은 행복을 얻기 위해서도 남의 훨씬 큰 행복은 고사하고
생명마저도 빼앗을 각오를 해야하므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기도 그 예외는
물론 아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싫든 좋든 간에 그렇게 당할 것이
틀림없다. 라는 생각이다. 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하면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약 이런 것이 사실이라 한다면(이렇게
말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빤히 알고 있지만)이야말로 우물쭈물 넘길
수는 없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가 각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잠시나마 쉴 사이도 없이 자기를-참말로 생명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자기를 망치려고 덤벼들 것이 틀림 없다고 상상하지 않고는
뱃길 수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은 자기의 행복이라는 것-그것이
없다면 인생도 의미를 잃게 되는 자기 한 사람만의 행복 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사리 얻어지지 않을뿐더러 어쩌면 아주 자기 손아귀에서 강탈 당할 지도
모른다고 깨닫게 된다.
사람이 오래 살면 살수록 이 생각은 경험을 통하여 점점 명확해진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 뜯어먹고 상쟁하는 개인 개인이 결합하여 구성된 이 세상의
생활-자기도 한 몫 끼어들고 있는 이런 생활이 결코 자기의 행복은 되지
않을뿐더러 오래지 않아 큰 재상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이렇게 깨닫는다.
아니 그 뿐이랴, 사람이 만약 자기 개인을 위하여 아무 거리낌도 없이 남과 시종
잘 싸울 유리한 조건에 있다 하더라도 이성과 경험은 곧 이러한 것을 사람에게
가르쳐 준다. 그것은 인생에서 이런 식으로 탈취하여 자기만의 향락으로 삼아
보더라도 그 실은 행복하기는커녕 기껏해야 행복의 모조품 정도의 것이며,
향락에는 반드시 뒤따르는 고뇌를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역할 정도밖에는
못한다, 라고 가르쳐 준다. 사람은 오래 살면 살수록 향락은 적고 권태, 포만,
노고, 고통이라는 느낌만이 커져가는 것을 점점 뚜렷하게 알게된다. 그러나
그뿐은 아니다. 병을 앓거나 힘의 쇠퇴를 느끼기 시작할 때나 또한 남의 병이나
노쇠나 죽음을 볼 때나 사람은 그것에만 참말로 충실한 생명을 느끼고 있던
자기의 존재 그 자체가 시시각각으로 일거일동마다 쇠약, 노쇠, 죽음에 다가가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자기의 생명이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부터 싸움을 걸어와
멸망되어가는 수 천의 기회에 노출되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을 계산에 넣지
않더라도 생명 그 자체의 성질상 싫든 좋든 간에 죽음이라는 즉, 어떤 행복의
가능성도 개인의 생명과 함께 근절시키거나 죽게 하는 상태로 끊임없이 다가가는
수밖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람은 그곳에만 생명을 느끼고 있는 이
둘도 없는 자기라는 것이 도저히 강대하여 싸울 엄두도 못낼 것-세계 전체를
상대로 하여 싸울 분 아니라, 언제나 행복의 모조품을 쥐게 할 뿐이고 고통으로
끝날 향락을 찾아 헤매며 보존할 방법이 없는 생명을 어떻게서든지 지속시키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에 유의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자기 혼자만을 위해 오로지
행복을 원하며 생명을 빌고 있으나 그 중요한 자기가 전연 행복도 생명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오로지 손에 넣기를 원하고 있는 이
행복과 생명-그런 것은 자기가 느끼지도 않지만 느낄 수도 없다. 전혀 자기와는
관계도 인연도 없는 존재, 아니 참말로 있는지 없는지 조차 알 방법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존재 밖에 가지고 있지는 않다.
결국은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단지 그것만이 필요하며 그것만이 참말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 필경, 이 나 라는 개인은 머지 않아서 사멸하여
구더기가 되고 흙이 되어 자기가 아닌 것으로 되어버리건만, 자기에게는
필요하지도 않고 소중하지도 않은 생물의 세계는 자기가 사멸한 뒤에도 남아서
영구히 살아간다. 이러한 것만이 참말로 참다운 생명이다. 따라서 자기에게 둘도
없는 유일한 것으로 느끼고 있는 생명-자기의 일체 활동의 원동력으로 되어 있는
이 생명은 무엇인지 믿어지지 않는 가짜이며, 실제로는 있을 법하지도 않기만
하고 자기 밖에는 있으며 사랑하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는 무엇인지 까닭모를
생명이 실은 유일한 참된 생명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느끼지도 않는 것이 자기만이 갖고 싶다고 바라던 여러 가지 성질을 혼자
독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위에 이러한 생각은 사람의 우울한 기분, 나쁜
때에만 일어난다고만 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의심할여지도 없는 명확한
진리이므로 만약 이 사상이 한번이라도 마음 속에 깊이 뿌리 박아 여간해서는
자기 의식에서 쫓아낼 수 없게 된다.

인류의 스승들
사람이 우선 최초로 생각하는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의 일개 개인의
행복이다. 그러나 개인에 있어서 행복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만약 인생에
무엇인지 행복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 곳에만 행복을 생각할 수 있는
인생-개인의 인생은 일거일동이 숨을 내쉬고 들이 쉴 때마다 고통, 재앙, 파멸
쪽으로 질질 끌려 가므로 붙잡을 방법도 없다.
이러한 것은 사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젊은 사람이건 늙은이건 교육을 받았건
못받았건 누구나가 알고 있을 것으로서 그만큼 이해하기 쉬운 자명한 사실이다.
이 생각은 실로 이토록 간단하고 자연스러우므로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곧 생각해 낼 수 있으며 옛적부터 인류가 알고 있었다.
 서로 멸망시키거나 스스로 멸망해 가는 동류의 무수한 개성 속에 섞여서 사람이
자기의 행복만을 구하는 개인으로서 생활한다는 것은 불행하며 무의미하다.
참다운 생활은 이런 것이 아닐 것이다  옛적부터 사람은 이렇게 자기에게 타일러
왔다. 인도.중국.이집트.그리이스의 현인들도 인간 생활의 이 내면의 모순을
강력하고도 뚜렷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옛부터 생존경쟁이나 고통이나
죽음으로 손상되지 않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행복을 밝혀온 것이야말로 유사
이래 인류에게 진보가 있게 한 것이다.
매우 오랜 시대부터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민족 사이에서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에게 계시하고 인간에게 알맞는 참다운 행복이나 참다운 생활을 가르쳐
왔으나 결국은 모든 사람들의 이 세상에서의 입장이라는 것이 통털어서 동일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개인이 행복을 원하는 심정과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보는 의식과의 모순도 누구나가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가장
위대한 두뇌에 의하여 계시된 이 참다운 행복, 나아가서는 참다운 생활의 갖가지
정의도 본질적으로는 전적으로 하나이며,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인생이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하늘에서 사람들 속에 내려온 빛이 널리
골고루 퍼지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 더욱 더 큰 행복에 끊임없이 도달하려는 영혼의 편력이며 완성이다
같은 시대의 파라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 행복한 열반에 도달하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역시 공자의
동시대 사람인 불타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 행복해 지기 위하여 겸손과 비천에 투철하는 길이다  역시 공자와
동시대 사람인 노자의 말이다.
 인생이란 신의 율법을 지키면서 사람이 행복해지도록 신이 사람 속에 불어 넣은
생명의 숨이다  유대의 어느 현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생이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이성에 복종하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랑-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지나지 않다
선지자의 모든 가르침을 한데 묶어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했다.
옛적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 천년 동안에 거짓에 불과한 불가능한 개인의
행복 대신에 참말로 불명의 행복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인간생활의 모순을
해결하여 그것의 합리적인 의미를 부여한 인생의 정의라는 것은 이런 식의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정의는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고 더욱 정확하고 명료한
표현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이러한 정의를
승인하는 것이 인생의 모순을 없애며 자기 혼자의 손으로는 도저히 잡을 수 없는
행복에 대한 욕구로 바꿔서 인생에 합리적인 의미를 주게 되는 것은 인정 안 할
수 없다. 이러한 정의가 이론적으로 옳을 뿐 아니라 인생에 합리적인 의미를
주게 되는 것은 인정 안 할 수 없다. 이러한 정의가 이론적으로 옳을 뿐 아니라
인생의 경험에 의하여 확인되어 있다는 것, 결국 예나 지금이나 그러한 인생의
정의를 인정한 수백 수천만일지도 모를 사람들이 자기 혼자의 행복에 대한
욕구를 고통이나 죽음으로 깰 수 없는 별개의 행복에 대한 욕구를 고통이나
죽음으로 깰 수 없는 별개의 행복에 대한 욕구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끊임없이 보이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에 의하여 계시된 인생의 정의를 이해하고 그것에 의하여 생활하고 있는
이러한 사람들 외에 생애의 어느 시기, 아니 때로는 인생을 통하여 다만
동물적인 생활 밖에는 염두에 없고 인간 생활의 모순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인생의 정의를 이해 못할뿐더러 그것이 해결하고 있는 인생의 모순마저도 모르고
생활하고 있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표면상의 특별한 지위 때문에 자기를 인류의 지도자처럼
생각하고 인간 생활의 뜻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기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자기도 알지 못하는 인생사를, 인간 생활은 개인적인 생존에 불과한 것이다.
따위로 남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언제난 있었고 또한 지금까지도 있다. 이러한
사이비 스승들은 어떤 시대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어떤 자는
자기들이 그 전통을 이어 받고자란 교사들의 가르침을 운운하나 실은 그
합리적인 의미 따위에는 전연 개의치 않고 그러한 가르침을 사람들의 과거나
미래의 생활에 관한 초자연적인 계시로 해버리고, 다만 의식의 실행만을
존중하고 있다. 이것은 극히 넓은 의미에서의 바리새 교도-즉, 불합리한 이
인생을 바로 잡으려면 형식적인 의식을 오로지 실행하고 내세를 믿으면 된다고
풀이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이다.
또한 어떤 자는 눈에 보이는 이 인생 이외에는 내세 따위를 일체 인정하지 않고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것 따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여 인간의 생활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나 동물적인 생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서슴치 않고
단언하고 있다. 이 학자들-즉, 동물로서의 인간 생활에 불합리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풀이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이다.
이 두 개의 가르침은 어느 것이고 마찬가지로 인생의 근본 모순이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 것이나, 그 주제에 이 두 파의 사이비
스승들은 언제난 서로 적대시하고 반목을 일삼아 왔다. 이 두 개의 교리는
오늘날에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위에 다를 바 없이, 서로 반목하고 서로의
싸움으로 충만시키고 있으므로 이미 천년 전에 인류에게 참다운 행복의 길을
계시한 인생의 정의도 이러한 싸움으로 밀려나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되어버렸다.
바리새 교도는 자기들이 조상처럼 떠 받드는 스승들이 사람들에게 계시한 인생의
정의를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기류의 엉터리 내세의 해석으로
왜곡한 끝에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인류의 다른 뛰어난 스승들의 정의까지 자기
해석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하고 싶은 일념에서 과감하고도 난폭하게
엉망으로 왜곡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그 참모습을 사람에게 감추려고 애쓰고
있다. 인류 중에서 다른 뛰어난 스승들의 인생의 정의에도 인정되고 있는 공통된
하나의 합리적인 의미가 그들에게는 그러한 교리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확고한
근거가 되리라고는 절대로 생각조차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실제로
증명되기라도 한다면 원래의 교리의 본질을 왜곡한 자기들의 저 불합리한 거짓
해석의 신용이 단번에 땅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학자들은 이러한 바리새 교도의 교리에도 근원을 캔다면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을 변변히 확인도 않고 내세에 관한 일체의 교리를 아주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유례없는 교리 따위는 아무 근거도
없으며 무지한 시대의 야만적인 습관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끝에 인간의 동물적인 생존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넘는 인생 문제는 아예
과제로도 삼지 않으며, 인류는 전진한다고 단언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생활의 지침
 인생에 관하여 아무런 정의를 내리지 않은들 어떻단 말이냐? 인생이 어떤
것인가 쯤은, 누구나가 알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은가. 그 따위
문제보다는 우리 살 궁리나 하세  그릇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이런 소리를 흔히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인생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가
남처럼 살고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다. 전연 아무 목표도 없이 파도치는대로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 착실하게 목적지를 향해서 헤엄치고 있다고 저 혼자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한 아이가 가난한 집안이거나 부자집에 태어나서 바리새
식이든 학자식의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면 좋다. 인생의 모순이라든가 인생
문제라는 것도 대체로 아이들이나 청년에게는 아직 그토록 깊이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므로 원래는 바리새 신도의 가르침이든 학자의 가르침이든 간에 조금도 아무
필요도 없는 까닭에 그 생활을 지도하는 힘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본을 받아 성장한다. 더구나 그 본이라는 것이 바리새
신도이건, 학자이건 간에, 모두가 비슷한 것으로서 어느 것이든 개인적인 생활의
행복만을 추구하기에 발버둥치는 그런 본 밖에는 가르쳐 주지 못하는 본이다.
만약 부모가 가난하다면 그 아이는 어버이에게서 이런 것을 배울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란 가능한 한 일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많은 빵과 돈을 얻어
동물적인 자아에 최대한 만족을 주는 것이다  또한 그 아이가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다면 이렇게 깨달을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될 수 있는 한 유쾌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재산과 명예를 가지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 측에서 보면, 배운 일체의 지식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더하게
하는데만 필요한 것이다. 부자에 있어서는 습득한 과학이나 예술의 일체의
지식도, 아무리 과학이나 에술의 의의에 관해서 고상한 말을 해본대야 기껏
권태를 몰아내거나 기분좋은 파적으로서 필요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일지라도 오래 살면 살수록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저속한 관념을
더욱 더 강하게 마음 속에 뿌리 박게 된다. 두 사람 모두 각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가족에 이끌리어 안달복달 해가며 동물적인 생활의 행복을
전보다도 더욱 혈안이 되어 추구하는 중에는 남과의 투쟁도 점점 치열해질뿐더러
개인적인 행복만을 오로지 바라며 생활하는 습관(타성)도 아주 몸에 배어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만약 이 두사람 중에 가난뱅이건, 부자이건 어느 누구인가가 이런 생활의
합리성에 대하여 문득 의심을 품었다 하더라도 그 뿐만이라 또한 아이들
대에까지 계속할 것이 뻔한 이러한 목적 없는 생존경쟁이 있는 것은
무엇때문인지, 자기나 아이들에게 결국은 고통으로 끝날 공허한 향락을 뒤쫓기만
하는 것은 무엇때문이냐 하는 문제를 뼈저리게 느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오랜
옛적 수 천년 전에 나타나서 이것과 똑같은 의문을 해결한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일이나, 그들이 남긴 인생의 정의에 관한 일 따위를 이 남자들은 알게
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불행한 인생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물으면 듣는 상대가
바리새 신도라면  인생이란 불행한 것이다. 언제건 그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게다. 인간의 행복이란 이승에는 없다. 행복은 태어나기 전인 과거와 죽은 뒤인
미래에 있다 라고 판에 박은 듯이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파라문교도, 불교도,
유교 신자이든, 또한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이든간에 이와 비슷한 말을 언제곤
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말을 시키면 현재의 생활은 악이다. 그 악의 원인은
과거에-이 세상과 인간의 출현에 있다. 이승의 악에 대한 보상은 미래에-사후의
세계에 있다. 이승이 아닌 저승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 단지 일념으로 자기들의 교리를 믿고 자기들이 명하는 의식을
실행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여 살고 있을뿐더러 그렇게
말하는 바리새 신도 자신도 이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설명의 진실성에 의심을 품은 사람은 이제는 바리새 신도를 전연
신용하지 않고, 그들의 답변도 깊이 파고 들어 생각하려 하지 않고 이번에는
학자들에게 의문을 물어보려 한다.
 우리들이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생활 외에는 저승이라든가 하는 따위를 말하는
교리는 모두 무지의 소산이랄 수 밖에 없다  학자는 학자로서 이렇게 말한다.
생활 합리성에 의심을 품은 당신의 생각이라는 것은 분명히 말하면 쓸데 없는
공상이다. 우주이든, 지구이든, 인간이든, 동물, 식물이든 그 생활에는 각각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들이 연구하고 있는 것은 이 법칙인 것이다.
우리들은 우주나 인간이나 동식물이나 일체의 물질의 기원을 조사하고 있다.
장래 이 우주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또는 태양은 언제 냉각되는가 하는 따위를
조사하고 있으며 옛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나 일체의 동식물의 변천 또는
그 장래의 운명도 연구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들은 이 우주의 만물이 과거에
있어서 우리들이 말한대로였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을뿐더러 장래에 있어서도
우리각이 말하는 것처럼 될 것이라고 자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의 연구는 인간 생활의 행복을 원하는 당신의 심정이라든가, 그런
것에 관해서는 전연 무엇이라 답변할 수 없다. 하여튼 이런 것이라면 당신도 잘
알겠지만 살고 있는 이상은 되도록 멋지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하여 인생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 바리새 신도에게서도 학자에게서도
조금도 만족할 만한 해답을 듣지 못하였으므로 전처럼 생활지침 따위 아무 것도
없는 채로 당장의 충동에 맡겨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여하간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살아 나간다는 것, 인간의 생활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갖가지로 엄청나게 많은 행동을 해야 하며 그 많은 행동 중에서 항상
골라서 하지 않으며 안된다. 그러한 행동의 지침으로 말하면 저승의 생활의
신비를 말하는 바리새 신도의 교리도 우주나 인간의 기원을 조사하며, 그 미래의
운명까지 규명하는 학자의 가르침도 전연 쓸모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의
행동을 선택하는데 무엇인가 지침이 될 만한 것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좋든 싫든 간에 인간 사회에 언제나 존재해 온 경박한 생활 지침에
따르게 되어 이성적인 판단에서 더욱 더 멀어지게 된다.
이러한 지침은 합리적인 설명이 전연 결여되어 있는 것이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행동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지침은 인간 사회 생활의
단순한 습관이므로 그 지배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사람은 자기 생활의
의미를 모르게 된다. 이 지침은 그러므로 이렇다고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게
정해진 것은 아니고 시간과 장소에 따로 실로 각양각색으로 나타난다. 중국
사람이 선조의 위패에 받드는 초, 마호멧 교도의 성지 순례, 인도 사람의
반복하는 기도의 말, 군인이 명예로 하는 군복-충성을 바치는 군기, 사교계의
인사와의 결투, 코카서스인의 복수, 또는 정한 날짜에는 반드시 먹는 정해진
식사, 어린이에게 시키는 어떤 종류의 교육, 그 밖에 방문이라든가, 주택의 판에
박힌 장식, 장례식이나 출산이나 결혼 때에 정해진 의식이나 축하하든가, 인생
생활에 무수히 충만된 사건이나 행동은 모두 그러한 지침의 표현에 지나지 않다.
흔히 의식이나 관례라고 불리우는 것, 아니 곧잘 의무라든가 신성한
성직이라든가 라고 불리우는 것 마저 전연 그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세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자나 바리새 신도의 가르침이외에 오늘날
이러한 지침에 따라 살고 있다. 실제로 한 사람의 인간이 어린 시절부터 자기
주위에서 기껏 보는 것이라야 어디를 가나 젠 체하는 얼굴로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고 이런 식의 일을 하며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 뿐이므로 인생의
이상적인 해석 따위는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자기로서도 보고 배운대로 같은
일을 하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여러 가지 행동에 합리적인 의미를
억지로 붙이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 형편이다. 이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지, 적어도
본인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심정이다. 그것은
그런 식의 행동은 어떻든 간에 합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설령
자기에게도 그런 의미의 해석을 잘 달 수 없다 할라지도 딴 사람들은 확실하게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려 든다. 그렇지만 딴 사람들인들 대개는 역시 인생의
합리적인 해석 따위는 될 리도 없으며 그 인간도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것도 주위가 모두를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똑같이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까닭에서다. 이래서
사람은 마음에도 없이 서로가 속이면서 합리적인 의미라고는 전연 없는 이러한
생활 방도에 아주 익숙해 질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식에 자기로서도 까닭 모를
신비로운 것 같은 의미를 붙이는 데도 차츰 익숙해 진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짓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으며 않을수록 의심스러우면 그럴수록
더욱 더 그런 것을 중요시하여 전체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가난뱅이도, 부자도
주위사람들이 하는 짓을 역시 마찬가지로 실행하면서 실제로 중요한 일이
아니면야 무엇 때문에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옛부터 실행해 왔으며 남에게도
권장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아주 안심하고 그것을 자기의 의무 또는 신성한
일이라고 부르는 형편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가 무엇 때문에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지를 설사 모를지라도 딴 사람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억지로라도 믿으려
하면서 완전히 나이가 차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딴
사람들인들 그런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므로 역시 같은 일을 같은 생각으로 살아
가는 것뿐이다.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면 우선 보는 것이 흔히
인생이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생활의 혼잡이다. 게다가 존경을 한몸에 모으고
있는 백발 노인의 모습까지도 그 곳에서 볼 수 있으므로 이러한 아무 의미도
갖지 않는 단순한 혼잡이 곧 인생이며 따로 생활하는 법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인생의 문턱에서 밀치락달치락 하다가 이 세상을 작별하고 만다. 마치 집회라는
모임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입구에서 밀치락달치락 하며 떠들썩하는 사람들을
본것만으로 그것을 집회의 자체라고 지레 짐작하고 나서 문턱에서 조금 밀고
밀리고 한 것을 제대로 집회에 참석한 것으로 알고 채인 엽구리를 누르며 집으로
돌아 오는 것과 같다.
사람은 산을 뚫거나 세계를 날아 다닌다.
전기.현미경.전화.전쟁.의회.박애.당파.쟁의.대학.학회.박물관... 각양각색의
것을 써서 갖가지 활동을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이 과연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무역.전쟁.교통.과학.예술이라든가 하는 따위에 종사하는 인간의 치열하고도
복잡한 활동은 대부분 인생의 문턱에서 밀치며 웅성대는 어리석은 군중의 혼잡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은 괴롭다.
 그러나, 너희들에게 이르겠다. 죽은 사람이 신의 아들의 소리를 들으며, 듣고는
소생활 때가 오리라. 이리 그때가 온 것이다  참말로 그때가 온 것이다. 실제로
죽고 나서 비로소 생활은 행복해지며 이성에 적응하는 것으로 된다거나,
개인적인 생활만이 행복하며 이성이 적응하는 따위로 아무리 믿으려 해보았자,
아무리 설명을 듣는다 할지라도 사람은 여간해서 그런 것을 믿으려 들지 않는다.
사람은 마음속 깊이 자기 생활을 행복하게 하고 싶고 합리적인 의미가 있게 하고
싶은 끈질긴 요구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죽은 다음의 생활이라든가
불가능한 개인의 생활이라든가 하는 것을 별개로 친다면 행선지에 목적다운
목적이 아무 것도 없게 되어 생활은 불행하며 무의미한 것이다.
내세를 위해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에
있어서 인생의 유일한 견본이라고도 할 이 생활-자기의 지금의 생활이 아무래도
무의미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면 사람은 그외에 합리적인 생활이 있다는 등,
자기의 실감으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한 발 나아가서
인생이란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서 무의미한 인생 이외에는 어떠한 생활도
생각할 수 없다고 단정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현명할 것인가? 그러나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자기의
개인적인 생활은 불행하며 무의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이
좋을까? 동지를 위해선가? 아니면 조국, 인류를 위해선가? 그러나 자기
개인생활이 불행하며 무의미하다고 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의 개인생활도 역시
또한 무의미하므로 그렇게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개인생활을 아무리 무수히 모아
보아야, 하나의 통합된 것으로서 행복하며 합리적인 생활이 이루어 질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자기로서도 까닭도 모르면서 남이 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흉내내어 살아가면 좋을 것인가? 그렇지만 알다시피 다른 사람들이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가 지금하고 있는 것을 도대체 왜 하는지를 자기도 전혀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의식이 그릇된 가르침을 초월하여 성장하고 사람이 인생의
한복판에 서서 설명을 요구하는 그때는 이미 다가오고 있다.
생활 형편이 자기와는 다른 사람과는 교제하려 들지 않는 연인이거나 식물이든,
곤충이든, 동물이든, 각각 법칙에 따라 평온하고 즐거우며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인 경우에는 자연에서 해택을 받은 이 최고의 능력도
결국 굉장히 괴로운 상태에 인간을 몰아넣기만 하므로 최근에는 이런 이성을
인정한 내면의 모순에서 오는 불안-현대에 이르러 더욱 더 극한점까지 심각성을
증대시킨 그 불안에서 이렇게 해서든지 빠져나오고자 얼키고 설켜 처리를 하지
못했던 자기의 인생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길-자살로 줄달음치는 자가 날이
갈수록 수가 많아지는 형편이다.

인간생활과 동물 생활과
인간은 마음 속에 잠에서 깬 이성적인 의식이 자기 생활을 갈기갈기 찢어서,
생활의 흐름을 멈춰버리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사람이
오로지 전연 인생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자기의 생활이라는 둥 생각하는 까닭에
불과하다.
인생이란 태어나면 곧 시작되는 개인적인 생활에 지나지 않다고 풀이하는 현대의
그릇된 교육을 받고 자라온 사람이고 보면 자기는 갓난 아이나 어린아이였을
시절에도 생활하고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므로 곧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줄곧 자기가 생활해 온 것처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의
생각으로서는 생활의 흐름이 왠지 별안간 교란되고 멈춰져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까지 처럼은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는 항상 늘
끊임 없이 착실하게 생활해 왔는데 꽤 오랜 세월, 그렇게 하여 착실히
살아왔건만, 이라고 생각한다.
그 위에 그릇된 교육은 인생이란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라는 관념을 뿌리
깊게 사람에게 심어 놓았기 때문에 그런 머리로 눈에 보이는 동물적인 생활을
보는 중에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이 생활이 다름아닌 자기의 인생이라고
철두철미하게 믿어 버렸다.
그러나 사람 속에 눈을 뜬 이성적인 의식은 동물적인 생활로 인해서 충족되지
못한 여러 가지 요구를 들고 나와서 이런 인생관의 그릇됨을 가르치려고
하지마는 뼈에 사무쳐 사람속에 남아있는 그릇된 가르침이 그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동물적인 생존을 인생이라고 보는 견해를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생활의 흐름이 이성의 각성으로 인하여 멈춰진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자기의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 지금 그 흐름이
멈춘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아직 한번도 존재해 본 적이라고
없었다. 사람은 자기의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 즉 태어났을 때부터 자기의
생존은 결코 자기의 생활이라고는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 순간까지 줄곧 자기가 생활에 온 것이라는 등 사람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마치 꿈을 꾸었을 때의 착각과 비슷한 의식의 흑미상태에 불과하다. 필경 잠이
깰 때까지는 아무 꿈도 없었으므로 그러한 꿈은 모두 잠이 깨는 순간에 생겨난
것이다. 이성적인 의식이 깰 때까지는 어떤 생활도 없었으므로 과거의 생활에
관한 관념은 이성적인 의식이 눈을 떴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은 아이 적에는 동물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생활을 보내며 인생따위라고는
아무 것도 모른다. 만약 사람이 열달밖에 살지 않았다면, 자기의 생활도 남의
생활도 전연 몰랐을 것이다. 마치 어머니 태내에서 죽은 것이라고는 다름 없이
인생에 관한 것이라고는 거의 몰랐을 것이 틀림없다. 아니 아이들뿐이랴, 이성이
발달하지 않은 어른이나 완전한 백치도 역시 자기가 살고 있다는 것, 남이 살고
있다는 의의 따위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생활하고
있지 않는 것이 된다.
이성적인 의식이 없는 곳에는 인간으로서의 생활도 없다. 이성적인 의식-과거,
현재의 자기의 생활이나 남의 생활을 동시에 인간에게 보여주는 위에, 이런
생활에서 당연히 생겨날 온갖 것, 고통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하는 것도
명확하게 보여 주는 이 의식, 곧 인간 속에 개인적인 생활의 행복을 부정하는
심정과 생활의 흐름을 멈추지나 않나하고 여겨질 정도의 모순을 각성시키는
이러한 의식이 나타나야만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사람은 자기 밖에 있는 눈에 보이는 것을 정의할 때처럼 자기의 생활마저
자칫하면 시간에 의하여 정의하려 든다. 그런데다가 육신이 탄생하는 시간과
일치하지 않는 생활이 자기 속에서 갑자기 의식되므로 시간에 의하여 정의되지
않는 생활이 이처럼 엄연히 있는데도 그것이 참말로는 아무래도 믿을 마음이
내키지 않는 형편이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시간의 흐름 속에 자기의 이성적인
생활의 시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한 점을 탐구해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발견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추억 속에 이 한 점, 즉 이러한 이성의 의식의 시초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성적인 의식은 언제나 자기 속에 있었다고 사람은
상상한다. 설령 사람이 무언가 이러한 의식의 시초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결코 육체의 탄생 따위라는 점에서 찾아볼 수 없고 육체의
탄생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곳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사람은 자기의
이성적인 의식의 발생을 생각할 때, 이성적인 존재인 이 자기가 아무 아무 해에
출생한 부모의 자식으로서 조부모의 손자이다 하는 식으로는 결코 생각하지는
않고 항상 자기를 누군가의 자식이라기 보다는 시간도 장소도 거리가 멀며
인연도 없는 인간-때로는 수천년 전 옛날인 이 세상 다른 끝에 살았을지도 모를
이성적인 인간의 의식과 하나로 융합되는 것 같은 그러한 것으로서 자각한다.
이렇게 하여 이성적인 의식 속에서는 사람은 자기의 출신 따위는 문제로도 하지
않고 다른 이성적인 의식과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로 서로 융합되는
것을 자각한다. 이리하여 남은 내 안으로 들어오며 나는 남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 안에서 자각한 이 이성적인 의식이 보통 인생이라고 여기고 있는
제법 그럴 듯한 생활의 흐름을 멈추는 것 같은 작용을 하므로 갈피를 잡지
못하기 쉬운 사람들은 이 의식이 눈을 뜨는 순간부터 생활의 움직임이 제대로
취해지지 않게 되어 옴쭉달싹 못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릇된 교육에 의한 분열과 모순
현재, 사람들은 교육하며, 그 지주가 되고 있는 교육-곧, 인간의 생활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동물적인 생존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파하는
잘못된 가르침만이 이성적인 의식에 눈을 뜨자마자 사람들이 느끼는 저 괴로운
분열을 야기시킨다.
이러한 상태에서 몹시 갈피를 못잡는 사람에게는 인생이란 자기 안에서 두
가닥으로 분열된 것으로 느껴진다.
사람은 자기의 인생이 하나라고는 알고 있지만 두 개인 것 같이만 느껴진다.
손가락 두 개를 묶어서 그 사이에서 작은 구슬을 굴려보면 구슬은 하나인 줄
알고 있지만 두 개가 구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지만 꼭 이와 마찬가지 현상이
그릇된 인생관을 가진 사람에게도 일어난다.
이런 부류의 이성은 그릇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전연 인생도 아무 것도
아닌 자기 혼자의 육체적인 생존을 인생이라고 인식하도록 교육을 받아 왔다.
단순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 이런 틀린 인생관을 가지고 인생을 보고 사람은
자기가 공상환 것과 실제로 있는 것과 그 두 가지의 인생을 거기에서 본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이성의 의식에 의해 개인적인 생존의 행복을 부정하는
것이라든가, 남의 행복을 열심히 기원해 준다거나 하는 따위가 왠지 병적이고
부자연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성적인 존재인 사람에 있어서는 개인의 행복이나 생활을 부정한다는
등, 개인적인 생활 그 자체의 본질에서 말해도, 그것과 반대의 이성적인 의식의
본질에서 말해도 실로 당연한 경과이며 결과에 불과하다. 개인의 행복이나
생활을 부정하는 것이 이성적인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생명의 자연스러운
본질이므로 마치 새에 있어서 날개로 날으는 것이 발로 부자연스럽게 뛰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과 마찬가지 이유이다. 설령 깃털이 나기 시작한 병아리가
뒤뚱거리며 뛰었다해서 그것이 별로 날으는 것이 그 새의 본성이 아니라는
증명은 되지 않는다. 또한 가령 우리들이 주변에서 인생의 목적은 개인의 행복에
있다는 둥, 아직 자각하지 못한 의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치더라도 그것이 특별히 이성의 의식에 의하여 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는 증명은 되지 않는다. 사람이 자기의 본성을 살리는 참다운 생명에 눈을
뜬다고 하는 단지 그것만이 오늘날의 세계에 이토록 심한 병적인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원인을 캐면 생명의 환상이 생명 그 자체로서 참다운 생활의
출현에 의해 생명은 파괴된다는 등, 사람들을 농락하며, 잘못도 이만 저만이
아닌 가르침이 지금 세상에도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더욱 참다운 생활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자의 본성을
아직 들어나지 않고 있는 처녀에게서 일어나는 것과 꼭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이 성숙했다는 징조를 느끼게 되면 그런 처녀는 그 상태가 미래의
가정생활-어머니로서의 의무와 기쁨을 약속하는 미래의 생활로의 부름의
표시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골똘히 병적이며 부자연스러운 상태라고만 뇌심하며
곧잘 절망 속에 빠진다.
이와 비숫한 절망을 현대인들도 참다운 인간생활을 각성하는 최초의 징후를
느꼈을 때 경험하는 과정이다.
이성적인 의식이 눈을 뜨고 있는데도 변함없이 개인의 생활로서 밖에 자기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런 사람이 놓인 상태는 굉장히 괴로울 것이 틀림없다.
예를 들어보면 물질의 운동만이 자기 생활이라고 말하며 자기 본래의 생활의
법칙 따위는 송두리째 버리고 돌보지 않으며 조금도 노력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행하여지는 물질의 법칙에 따르는 외에는 자기의 생활의 의미를 찾고자 하지
않는 동물-이런 동물이 처해있는 상태와 비숫하다고나 할까. 여하튼 이런
동물이라면 괴로운 내면의 모순과 분열과를 경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물질의 법칙만을 오로지 따르고 있는 것이라면 옆으로 길에 누워 있는 일밖에는
생활방도가 없을 것이나 그러나 본능은 그것과 전연 별개의 것인 즉 자기 몸을
단련하여 종족을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물도 자기가 분열이나 모순을 느끼는 듯한 감을 가질 것이
틀림없다.  생활의 목적은  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중력의 법칙에 따를 뿐이다. 즉 꼼짝 않고 누워 체내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지금 나는 그렇게 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허전하다. 역수 움직여야만 할 것 같다. 먹지 않으며 안될 것이며
그밖에 암컷도 데려와야 할 게다.
이 동물은 이런 상태에서 말할 수 없이 고민하던 끝에 괴로운 모순과 분열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지만 인생의 낮은 법칙-동물적인 본능을 자기의 생활의 법칙으로
삼도록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도 일어나는 법이다.
인생의 최고의 법칙-이성의 의식의 법칙은 다른 것을 요구하건만 주위의 모든
사람의 생활이나 그릇된 지도가 그 의식을 흐리게 하려 들므로 사람은 모순과
분열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고민이다. 마치 예에서 비유로 든 동물이 그 괴로움에서
해방되려며는 물질의 낮은 법칙이 아니고 본능이라는 본래의 생활의 법칙을
자기의 법칙으로 인정한 위에 그 법칙을 따르면서 물질의 법칙도 잘 이용하여
생활의 목적을 만족시키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또한 자기의 생활을
본능의 낮은 법칙 안에서가 아니라 그 법칙도 포함된 최고의 법칙-이성의 의식에
의하여 계시된 법칙 안에서 인정만 한다면 곧 모순은 해소되어 본능도 뜻대로
이성의 의식에 따를 뿐아니라 그것에 봉사하게 될 것이다.

생명의 탄생
인간이라는 존재 중에 참된 생명이 나타나는 경과를 관찰하여 조사해보면 잘
알겠지만, 참된 생명이라는 것은 곡물의 낱알에도 생명이 잠재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속에서 항상 잠재하고 있어서 때가 오면 그 모습을 겉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이 동물적인 본능에 끌리면서도 이성의 소리를 듣고
그러한 자기 혼자만의 행복 따위는 결국 불가능하며 별도로 무엇인가 별개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 때 이미 참된 생명은 그 모습을 나타냈다고 하겠다.
거기서 사람은 이 별개의 행복-멀리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행복을 뚫어지게
시선을 집중 시키지만, 그것을 분간할 만큼의 힘이 없으므로, 처음에는 그런
행복 따위는 믿지도 않고, 원래의 개인적인 행복으로 되돌아가 버린다. 그러나
별개의 행복에 관한 것이라고 이렇게 애매한 지도 방법 밖에는 쓰지 않았던
이성적인 의식도 개인적인 행복의 불가능을 풀이할 경우가 되면 애매한 곳이라곤
조금만큼도 없고 과연 확신이 있어 보이므로 사람은 재차 개인적인 행복을
부정하고 이 새로운 별개의 행복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성에 순응한 행복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개인적인 행복이 이토록 확실하게 버리게 되며는, 이제 이
이상 개인적인 생존을 계속할 수는 없게 된다. 이리하여,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성적인 의식과 동물적인 의식과의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사람은
참말로 인간다운 생활에 눈을 뜨게 된다. 인간속에 참된 생명이 싹트는 것이다.
물질계에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물체가 생겨날 때에 일어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여기서도 일어난다. 태아가 태어나는 것은, 별로 태어나고 싶다거나
태어나는 편이 좋다고 생각 하기 때문에도 태어나는 것이 좋은 줄 알기 때문도
아니고 단지, 이제는 완전히 성숙하여서 이대로는 살아가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과하다. 별로 새로운 생활 속에서 불러들인 것도 아니고, 원래대로는
살아갈 가능성이 없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생활로 들어 왔을 뿐이다.
이성의 의식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의 자아속에서 자라나서, 끝내는 좁은
속에서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성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체의 것이 태어날 때에 일어나는 것과 전적으로 같은 것이 일어난다.
생명의 원래의 낟알 형태가 변형되어, 새싹이 튼다는 것이라든가, 낟알이 썩어서
원래의 모양이 쭈글쭈글하게 변해감에 따라 새싹이 자라간다든가 썩어가는
낟알이 그래도 싹의 양분이 되어 있다는 점이라든가, 그 모든 현상이 같으며,
이성의 의식의 성장이라 할지라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이성의 의식의 발생과
눈에 보이는 육체의 탄생과의 차이는, 우리들 입장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점이
있다. 즉, 육체가 탄생하는 경우에는 우리들은 언제, 무엇에서, 이떻게,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시간과 공간 속에서,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종족, 말하자면
곡물의 낟알을 예로 봐서 일정한 조건만 갖추게 하면 그 씨앗에서 식물이 싹을
내밀고, 꽃을 피게 하며 머지 않아 씨앗과 같은 열매를 맺는(이렇게 하여,
생명의 순환은 우리들 눈앞에서 완성됨)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이성의 의식의 성장은 시간 속에서 의식할 수도 없고, 그 순환도 볼 수도 없다.
그런 점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성의 의식의 성장이나, 그
순환을 볼 수 없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들 자신이 그것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불과하다. 즉, 우리들 속에서 이성의 의식이라는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일어나므로 그 탄생을 바꿔 말해서, 우리들의 생활이므로, 따라서 우리들은
아무리 해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들이 이 새로운 것의 탄생, 동물적인 의식에 대한 이성의 의식의 새로운
관계를 보지 못하는 것은, 마치 씨앗이 그 줄기의 성장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성의 의식이 잠재해 있던 상태에서 빠져나와 모습을 나타낼 때,
우리들은 모순을 느끼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런 모순이 전연 없는 것은 싹을
트게 한 씨앗에 모순이 없는 것과 전적으로 같다. 싹을 트게 한 종자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원래 씨앗 껍질 안에 있던 생명이 지금에 와서는 싹 안에 있다는
것 뿐이다. 이성의 의식에 눈을 뜬 사람의 경우도 꼭 이와 같으며 거기에는 아무
모순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새로운 것의 탄생, 동물적인 의식과 이성의
의식과의 새로운 관계의 발생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남아 살고 있는 것도 모르고, 향락의 허무함도 모르고, 자기가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것도 모르며 생존하고 있기만 한다면,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다는 것도, 자기 속에 모순 따위란 없다는 사실도 역시 모르고 끝날 것이
뻔하다.
그와는 달리, 만약 사람이 남도 자기와 같다고 깨닫고 자기의 존재가 고통에
위협을 받고 있을뿐더러, 한 발 한 발 죽음에 다가서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리고 자기 속에서 이성의 의식이 사로잡힌 자아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을 분명히 느낀다면 사람은 이제 이 이상 이 무너져 가는
자아에게 자기의 생활을 맡겨둘 수는 없어 눈 앞에 펼치는 새로운 생활로 뛰어
들게 될 것이다. 더구나 거기에는 역시 모순 따위가 없는 것은 마치 싹을 트게
하고 점점 썩어가는 씨앗에 모순이 없는 것과 같다.

이성에 의한 인간 완성
인간의 참된 생활은, 동물적인 자아를 누르고자 하는 이성의 의식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동물적인 자아를 구하는 행복이 부정될 대 비로소 참된 생활이
시작된다. 이성의 의식이 눈을 뜰 때 동물적인 자아의 행복은 부정된다.
그러나 도대체 이성의 의식이란 무엇인가? 요한 복음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태고부터 말, Logos(로고스란 이성, 영지, 말의)뜻이 있나니  일체의
것이 그 속에 있으며, 그 속에서 일체의 것이 생겨나는 즉, 이성은 다른 모든
것을 정의하지만, 다른 것들은 이성을 전연 정의하지 못한다, 하는 것이다.
이성을 정의하려 하여도 정의할 수가 없다. 우리들이 정의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 모두가 이성이라는 것을 알 뿐더러, 다만 그것만이 우리들의
판단의 근본이 되어 있다. 사람이 서로 접촉함으로써, 우선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납득이 가는 이러한 이성에 모두가 한결같이
따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만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기초라고 우리들은 믿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무엇보다도 먼저 하는 것은 이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이러한 의심할 여지 없는 이성의 법칙에 꼭 들어맞는 것이며 바로
그렇게 때문에 우리들도 그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성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알지 않을 수 없다. 알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곧 이성만이 이성적인
존재인 사람들이 생활하는데 있어서 어떻든 따르지 않으며 안될 법칙인
까닭이다. 인간에 있어서 이성이란 그것에 따라서 생활하지 않으며 안될
법칙이다. 그것은 동물에 있어서는 먹이를 찾아 다니고 새끼를 번식시키는 것이
식물에 있어서는 풀이나 나무로 성장하여 꽃을 피게 하는 것이 천체의 경우는
지구나 별처럼 운행하는 것이 각각 그 법칙인 것과 같다. 우리들이 생활의
법칙으로서 자기 속에 인정 하고 있는 법칙은 세계의 일체의 외면의 현상을
지배하고 있는 법칙과 같은 것으며 다만 차이점은 우리들이 자기 속에서는 이
법칙을 자기가 직접행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반해 외면의 현상에서는
자기와는 관계 없이 이 법칙이 행해지고 있다고 인식하는 점뿐이다. 천체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간에 우리들의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체의 현상은
이성에 순응한다는 점이 세계에 관하여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의 전부이다.
외부의 세계에서는 우리들은 이성의 법칙에 대한 이런 종속 관계를 보는
것이지만 자기 속에서는 이 법칙을 우리들 스스로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철칙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생각할 때, 사람은 곧잘 이런 착각을 일으키기 쉽다. 인간의
동물적인 육체가 눈에 띄기 쉬운 곳에서 적나라하게, 그 육체의 법칙에 따르는
것을 그만 그대로를 인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원래 이런 법칙은 나무라든가,
결정체라든가, 전체 속에서 작용하는 법칙과 마찬가지로 동물적인 육체(이성적인
의식과 결부되고는 있지만) 속에서 인간에 있어서 무의식 중에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여간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의 생활
법칙-동물적인 육체를 이성에 따르게 한다는 법칙은 아무 데를 가도 사람 눈에는
띄지 않으며 접촉할 수 없는 법칙이다. 왜냐하며, 그것은 아직 제대로
완성되지도 않은 위에 우리의 생명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 인생의 행복은 이 법칙을 실행하는 것, 동물적인 육체의
이성의 법칙에 따르게 하는 것에 달려 있다. 따라서 동물적인 자아를 이성의
법칙에 따르게 하는 것에 우리의 행복도 생명도 달려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동물적인 자아를 이성의 법칙에 따르게 하는 것에 우리의 행복도
생명도 달려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동물적인 자아가 구하는 행복이나
생존의 법을 인생의 모두라고 생각하고 우리에게 정해진 인생의 일을 거부할
때에는 우리는 참된 행복과 참된 생명을 자기 스스로가 버리려는 것이 된다.
참된 행복과 참된 생명 대신에 우리들은 자기와 관계 없이 행하여지므로 도저히
이성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오직 동물적인 활동-눈에 보이기만 하는 시시한
생활을 싫든 좋든 간에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사물과 인식
개가 아파한다-이 송아지는 나를 따르며, 귀엽다-새가 줄거워 한다-말이 겁내고
있다-호인-고약한 동물-이런 말 이상으로 알기 쉬운 것이 어디 있으랴? 더욱이
이런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알기 쉬운 일체의 말은 공간이나 시간에 의하여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물의 현상에 따르는 법칙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다. 그런데 반대로 사물의 현상에 따르는 법칙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해하기 곤란하면 할수록 그러한 현상은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점점 더
정확하게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지구나, 달이나, 태양의 운동을 일개하는
인력의 법칙 따위, 도대체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일식만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며 이런 따위는 공간과 시간에 의하여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게 한정되어 있다.
우리들이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 자기의 생명과,행복을 구하는
심정과, 이 행복을 가르쳐 주는 이성뿐이다. 다음으로 잘 알고 있는 것은 행복을
바라는 이성의 법칙에 따르게 되는 자기의 동물적인 자아이다. 이 동물적인
자아에 관한 지식에는 이미 벌써 보인다거나, 손으로 만져본다거나,
관찰한다거나 하는, 우리들이 이해하기 힘든 공간적인 조건이 끼어들어 있다.
이에 대해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은 자기와 같은 다른 동물적인 자아로서,
거기서는 행복에 대한 욕구도, 이성의 의식도, 자기와 공통된 것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 개인의 생활이 행복에 대한 욕구와, 이성의 법칙에의
종속이라는 우리들의 생활 법칙에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공간적 시간적 조건에 얽매이면 매일수록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들은 인간의 일을 제일 잘 알고 있다. 그 다음으로 잘 알고 있는 것은
동물이지만 거기에는 행복을 바라는 우리들의 심정과 비슷한 것은 인정하지만,
이성의 의식이라는 점에서 우리와 동물 사이에는 뚜렷한 선이 그어진다. 동물
다음으로는 식물이지만, 식물에서는 행복에 대한 욕구 같은 것은 인정하기
곤란하다. 이러한 식의 존재는 대개 시간적 공간적인 현상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더욱 더 우리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워 진다.
우리들이 그러한 존재를 아는 것은 우리의 동물적인 자아와 비슷한 것이 그곳에
인정되며 그것이 우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행복을 추구하고 공간과 시간의
조건 속에서 물질을 이성의 법칙에 따르게 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다며는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생명이 없는 물질을 말하자면 더군다나 알기 힘든다. 거기에는 전연
우리들이 개성과 비슷한 것도 볼 수 없고 행복에 대한 욕구도 전연 인정할 수
없으며 단지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그러한 물질이 따르고 있는 이성의 법칙의
시간적 공간적인 현상뿐이다.
우리들의 지식의 진실성은 어떤 사물이 공간적 시간 속에서 관찰되느냐 안되느냐
라는 점 따위에 달려 있는 것은 켤코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어떤 사물이 공간적
시간적인 현상으로서 뚜렷하게 관찰되면 될 수록 더욱 더 우리들에 있어서는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행복을 추구하며 동물적인 자악와 이성에 따르는 필연성을 인정하는 의식이
우리들 인식의 근본에 있다는 것이야 말로 이 세계를 여러 모로 말게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동물의 생활을 안다고 하면 그것도 동물 속에 행복에
대한 욕구와 이성의 법칙-동물에서는 유기체의 법칙으로 나타나는 이성의 법칙에
따를 필연성을 우리들이 인정하는데 불과하다.
또한 만약 물질을 안다고 하면 그것도 우리들이 물질 속에서 행복에 대한 욕구는
인정하지 못할 망정 역시 우리와 같은 현상-물질을 지배하는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필연성을 인정하므로 안다는 것 뿐이다.
우리들에 있어서 지식이라는 것은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들이 진짜로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이성의 법칙에 따라서 행복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이 지식을 딴사물에 옮겨 놓고 맞도록 하는 것에 불과하다.
동물에 지배하는 법칙에 의하여 자기를 안다는 따위는 우리들로서는 할 수
없지만 자기 속에 인정하는 법칙에 의하여 동물을 아는 것이라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더구나 물질의 현상으로 바뀌어버린 생활의 법칙에서 자기를 알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바깥 세계에 대하여 사람이 아는 모든 일은 사람이 자기를 알고 자기속에 이
세계에 대한 세계의 서로 다른 관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이 관계라는 것은 첫째는 자기의 이성적인 의식과의 관계, 둘째는
자기의 동물적인 자아와의 관계이다. 사람은 이 세계의 서로 다른 관계를 자기
속에서 알고 있으므로 그 때문에 이 세계에서 보는 일체의 것을 1, 이성적 존재,
2, 동식물, 3, 무생물이라고 하는 각각 서로 다른 세 개의 부분으로 된 원근법에
따라서 안배해 보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계에 언제나 이러한 세 종류의 것을 보는 것은 자기 자신 속에 이
세 개의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를 다음과
같은 것으로서 알고 있다. 결국, 1, 동물적인 자아를 따르는 이성의 의식으로서
2, 이성의 의식에 따르는 동물적인 자아로서 3, 동물적인 자아에 따르는
물질로서 알고 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듯이 우리들이 유기체의 법칙을 알 수 있는 것은 물질의
법칙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또한 이성의 의식으로서의 자기를 알 수 있기
때문이 아니고 또한 이성의 의식으로서의 자기를 알 수 있음은 유기체의 법칙을
알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선 첫째로, 우리들이 알 수 있으며,
알지 않으면 안될 것은 자기 자신이 결국은 행복하게 되기 위하여 우리들의
자아가 따르지 않으면 안될 이성의 법칙인 것이다. 이 지식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들은 자기의 동물적인 자아와 그것과 비슷한 딴 자아의 법칙도, 더욱이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진 물질의 법칙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에 대하여 참말로 아는 것은 자기에
관한 것 뿐이다. 동물의 세계로 말하면 우리들에게는 이미 벌써 자기 속에서
알고 있는 것의 단순한 반영에 불과하다. 더구나 물질의 세계로 말하면,
그것이야말로 반영의 그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물질의 법칙이 우리들에게 각별히 알기 쉽고 붑명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마치 천편일률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그렇게 보이는 것은 결국 그것이 우리가 의식하는 생활의 법칙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이다.
또한 유기체의 법칙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역시 우리의 생활법칙과
비교하면 훨씬 간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서는 우리들은 그 법칙을
다만 관찰할 뿐이지 자기가 몸소 실행해야만 하는 이성의 법칙을 알 듯이 알지는
못한다.
이러한 법칙 따위는 어떻든 간에 우리는 알지 못한다. 자기 밖에서보고
관찰하는데 불과하다.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자기 이성의 의식의
법칙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성의 법칙이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성의 의식에 의하여 우리는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
의식을 밖에서 볼 수 없는 것은 그러한 관찰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안목을 우리는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성의 의식이 동물적인 자아를 따르게 하고 동물적인 자아(유기체)가
물질을 따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약 이성의 의식에 따를 수 있는 더욱
높은 존재가 무엇인가 있다고 치면 그런 존재야 말로 우리가 동물적인 존재나
물질적인 존재를 보듯이 우리의 이성적인 생활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인간의 생활은 거기에 포함되는 두 개의 생활양식-동물적 식물적인(유기체의)
생존과 물질적인 생존에 대단히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진실한 생활을 자기가 구축하고 스스로 그대로 지내고는
있지만 그 생활과 결부된 두 가지 생활 양식에는 절대로 참가하지 못한다.
인간의 형성하고 있는 육체와 물질은 그것만으로 독립하여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생활 양식은 마치 인간의 생활 속에 물려 받아서 남은 그 이전의 생활과
같은 것, 말하자면 과거의 생활의 추억과 같은 것이다.
인간이 참된 생활을 보내는 경우, 이러한 두 가지의 생활 양식이 인간에게 일의
도구나 재료는 제공하여도 일까지는 제공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기 일의 재료를 연구하는 것은 확실히 다행한 일이다. 그러한 것을 잘
알면 알수록 일은 하기 쉬울 것이다. 결국 인간의 생활 속에 포함된 이런 생활
속에 포함된 이런 생활 양식-동물적인 자아와 동물적인 자기를 형성하는 물질을
연구하는 것은 이성의 법칙에 대한 종속이라는 일체의 존재에 통하는 법칙을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여러 모양으로 보이게 할뿐더러 그것에 의하여 동물적인
자아가 이 법칙에 따를 필요를 사람에게 알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일의 재료와 도구를 일 그 자체와 혼동할 수는 없으며 혼동해서는 안된다.
자기나 다른 사람 속에서 눈에 보이고, 손을 대고, 관찰할 수 있는 생활-자기가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생활을 사랑이 아무리 연구해 본들 이런
생활은 사람 손에 언제나 신비스러운 것으로 남을 것이다.
이런 관찰을 하는 한 사람은 이러한 자기에게 의식되지 않는 생활을 결코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 잠재한이 신비적인
생활을 관찰할 뿐이지 자기의 참된 생활을 분명하게 한다는 따위는 아무래도
될성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잘 알고 있는 참말로 인간 특유의 행복을
얻기 위해 역시 무엇보다도 사람이 잘 알고 전적으로 인간 독특한 이성의 법칙에
이것도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모든 것에서 고립된 독특한 동물적인 자아를
따르게 함으로써 성립되는 참된 생활-자기의 의식 속에 발견되는 참된 생활은
아무래도 그런 것 쯤으로는 우리들 앞에 밝혀지지는 않는다.
헤세(Hermann Heses;1877--1962)
인생론
저자 소개
헤세는 남부 독일 시바벤의 카르프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코스모폴리턴적인
평화주의에의 지향과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현대 신로맨티시즘
문학의 완성자로서 그는 체험과 생활을 아름답고 원숙한 필치로 조형시켜
구름.산천.바람.바다 등의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평화스런 인간의 생활을
동경하고, 내면 생활의 변화와 성장을 깊이 표현하여 예술적 향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기 내면을 응시하는 이 시인은 동시에 또한 현실에 직면한
여러문제에 대해서도 엄격한 경고를 내리기를 잊지 않았고, 세게 제 1차 대전
당시에는 평화를 주장하여 완전히 고립되었었다.
뒷날 스위스에서 국적을 얻어 이탈리아에서 가까운 루가노에서 작고하였다.
1946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인생론
푸른 언덕
소년 적부터 나는 가끔 산상 꼭대기에 혼자 올라가 서기를 좋아했었다. 그리고
그때 마다 나의 눈길은 저 멀리 자욱한 안개 너머 펼쳐지 부드러운 언덕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아아! 저 언덕너머 세계는 아름다운 보라빛 속에 잠겨
있으리라. 나의 젊음에 찬, 잠시도 쉬지 않고 그 뭔가를 희구해 마지 않는
마음속 저 깊은 바닥의 영혼에서부터 우러나는 모든 애정은 하나의 커다란
동경이 되어, 그리고 눈물이 되어 나의 눈을 적시곤 했었다. 그리고 그 젖은
눈은 꿈을 꾸듯, 저 먼 다정한 푸르름을 마음껏 흡수해 들이는 것이었다. 발밑에
가로놓인 이편 고장은 내 눈에 너무나도 정이 선 고장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딱딱하고 너무나도 낯익은 고장으로 비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편
세계는 저와 같은 정다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고, 저와 같이 해음과 수수께끼의
유혹에 가득차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방탕을 좋아하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저 멀고 먼 언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찾아가서는 그 위에 서 보곤 했다. 그 언덕들도 너무나도
차고, 딱딱하고, 그리고 모든 것이 지나치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저
멀리에는, 아니 그보다도 더 먼 저 멀리에는 저렇듯 예감을 가득 포태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푸른 심해가-보다 높은 기품을 지니면서 보다 큰 소리로
우리들의 영혼에 부르름의 소리를 보내면서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 이후도 이따금 나는 저 멀리 부른 세계가 이리로 오라는 듯이 손짓을 하는
것을 보아왔다. 나는 그 매력을 지어하지 않았다. 나는 그 먼 세계와
친숙해지려고 애섰다. 그리고 보다 가까운 발아래의 언덕에 대해서는 외면을
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저 멀리, 손짓하는 세계를 행복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저 멀리, 보다 더 멀리 어스름한 모색속으로 바라다 보이는 푸른
들을... 그리고 가까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이따금씩 잊을 수
있는 나의 영혼의 세계를... 그러나 그것은 소년시대에 생각했던 그것과는 다른
행복이었다 남이 모르는 고독한 행복이었다. 아름답지만 쾌활한 행복 그것은
아니었다.

겸손속의 행복
나는 남모르는 겸손 속의 행복에서 마음에 드는 지혜를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사물에서 거리라는 솜깃을 뽑아버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고 나를 에워싸고 있는 차갑고 가혹한 빛에 쏘여서는 안된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일에 임했을 때는 엷은 금박으로 보호된 물건을 어루만지듯
하는 기분으로 그것에 임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가볍게 살며시, 그리고
위로하듯이 조심스럽게...
아무리 귀중한 보석이라도, 너무 익숙해져서 소홀히 취급하게 되면 가치있는
것으로서의 광택이 줄어드는 법이다. 소홀히 다루어도 그 광택이 잃어지지 않을
만큼,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보석이란 없다. 그와 같이 고귀한 직업도 없다.
마찬가지로 풍요로운 시인도 없다. 그와 같이 다복한 국토도 없다. 때문에 나는
다음의 것은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기술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멀리 떨어진 아름다운 사물에 쏟는 귀의와 사랑과를 가까운
익숙한 사물에도 쏟을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아침의 태양과 영원의 성좌를
신성한 것으로 받드는 마음은 그대로 두고서 우선, 우리들은 우리들에 가까운
사소한 것들에게 다정한 미광과 향기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두둔해
주고, 다정하게 대해 줌에 의해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어떠한 점에서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시적 분위기를 손상하는 일이 없음으로써... 사물을
아무렇게난 향수하면, 그 물건은 쓴 것 같이 느껴지고, 향수자의 품위도
손상된다. 초대받은 손님과 같은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귀중한 것이 되고 우리들 자신을 또한 고귀하게 만든다.

다정한 옛 고향
이러한 것을 배울 수 있는 학교로 말한다면, 절제, 금욕의 학교 이상 가는
학교는 없다. 그대는 그대의 고향생활에 만족할 수는 없는가. 그대는 보다
아름답고 보다 풍요롭고 보다 다정한 고장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래 그대는
그대의 동경하는 바를 쫓아 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그대는 보다 아름답고, 보다
햇빛이 번쩍이는 타국으로 떠난다고 하자. 그대의 마음은 넓어지고, 온화로운
하늘이 그대의 새로운 행복을 감싸준다고 하자. 그곳이 그대의 낙원이라고 하자.
그러나 잠시 기다려라. 그대가 그곳을 상찬하는 것을 수년동안만 기다려라.
아니, 적어도 최초의 기쁨과 최초의 신선감이 가셔질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라.
머잖아 때가 올 것이다. 그때, 그대는 산에 올라 그대의 옛 고향이 있는 방향을
찾으려고 기를 쓰게 될 것이다. 고향의 여기 이 언덕, 저기 저 언덕이 얼마나
다정스럽고 푸르렀던 것인고, 그리고 그대는 비로소 알게 될 것이고 비로소
느끼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아직도 그대가 어린 시절 노닐었던 집과 들이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거기에 그대의 모든 청춘의 성스러운 추억이 아직도
자욱히 서려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곳 지하에 그대의 어머니가 조용히 잠들고
있다는 사실을.
이같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옛 고향은 그대에게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고장은 정이 설면서도 너무나 가까운 존재가 되어
버리고... 그리고 이것은  소유하는 것 과  익숙해지는 것 과의 모든 경우를
통해서 그렇게 돼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덧없는 그리고 약속 없는 생의
약속인 것이다.

순수한 관조의 자세
의욕의 눈길은 본시가 불순한 것이어서 진실을 삐뚤어지게 만든다. 우리들이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때, 우리들의 사물을 보는 눈길이 분수한 관조의 자세를
취하게 될 때, 처음으로 사물의 끗끗한 미가 열려져 오는 것이다. 내가 숲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살까, 빌릴까, 벌목을 할까, 그속에 들어가서 수렵을 할까,
그것을 저당에 잡히고 돈을 빌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 내가 보는 것은
이미 숲이 아니고 다만 나의 의욕, 계획, 배려, 또는, 돈지갑과 숲과의 관계인
것이다. 그때, 숲은 단지 나무로 이루어져 있을 뿐으로, 그것이 햇 것인가 묵은
것인가, 나물들의 자람새가 무성하냐, 무성하지 않으냐, 다만 그러한 것들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숲을 두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때 내가
무심히  그 푸르름의 전당으로 눈을 돌릴 때, 그때 비로소 숲은 숲 그대로의
것이며, 자연 그대로의 것이며, 바로 산 그대로의 모습이며, 그리고 아름다운
그대로의 존재로 비치게 되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볼 때도 그렇다. 내가 괘념이나 희망이나 원망이나,
욕구등을 마음에 품고서 볼 때의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오직 나의 의욕으로 인해
흐려져 눈에 비치는 영상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의식하고서나 또는
의식하지 않고서나 다만 삐뚤어진 흐려진 전착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사귀기 쉬운 사람일까, 편벽된 사람일까, 예술을 알고 있는 사람이F까
등등으로 무수한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들은 우리들이 사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들의 외모나 모습이나 거동걸이에서 용케
우리들이 바라는 바 범주에 드는 일, 들지 않는 일들을 가려내게 될 때 사람들은
우리들을 보고, 인간통 또는 심리학자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치에
닿지 않을뿐만 아니라 떳떳하지 못한 얕은 견해인 것이다. 이같은 심리학에
있어서는 농민, 행상인 편이 웬만한 정치가나 학자보다도 더 뛰어나 있다.
의욕이 휴지되고 관조적인 순수한 사심이 없는 마음의 눈이 빛나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인다.
그때 인간인 이용성이 있는가, 위협성이 있는가, 이쪽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가,
귀찮게 여기고 있는가, 친절한가, 조야한가, 강자인가, 약자인가, 하는
표현방법을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때,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순수한 관조적인 눈을 앗아가는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아름답고 또
우리의 마음 속에 매력을 던져주는 것으로 화해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조는
본시 요구나 비평과는 성질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 그것이기 때문에... 요구를 도외시한 사랑, 이것이 우리들의
정신의 가장 높은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상태인 것이다.
우리들이 이러한 상태속에 수분간이든 수일간이든 머물러 있을 수가 있다고 하면
(이것을 언제까지고 지속시킬 수가 있다면, 그야말로 완전한 행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들의 눈에 비치는 인간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외관의
것이 된다. 그것은 이미 우리들의 의욕의 영상도 아니고 회화도 아니다. 그것은
자연으로 돌아간 자연물의 하나인 것이다. 미추, 노약, 친절, 악의, 쾌할, 내향,
엄격, 연약 같은 것은 이미 비교나 평가의 기준이 되지 못하고 만다.
조용한 관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연계의 모든 것은 다만 영원히, 생산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그리고 간단없는 생명의 불명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이 부과받은 바
역할과 임무는 특히 바로 그 사람의 정신의 표현 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정신 이 인간에게만 특히 있는 것인지 동물이나 식물에도 그러한 것이
있는 것인지 하는 의론은 무용하다. 확실히 정신 또는 영혼은 도처에 존재하고
있으며, 도처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며, 도처에 싹틀 수 있는 조건을 부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동물을 운동이 가능한 존재로 보는 한편에 돌을 운동이
가능한 존재로 보지 않는 듯이, (돌에도 운동, 생명 생장, 쇠멸, 파동 같은 것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들은 정신이란 것을 특히 인간에서만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정신을 정신이 보다 더 분명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고 또 그로
해서 고민을 하고 또한 일을 할 수 있는 대상에서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우리에게 있어서는 정신의 전개 및 개발을 목하의 임무로 삼고 있는
특수영역의 존재에 불과하다-일찌기는 두 개의 다리로 걷는 작전에 성공을 했고
털투성이의 피부를 벗어던졌으며, 도구를 발명해냈고 불을 만들어 낸 것이
인간의 사명이 돼 있었지만...
이와 같이 우리들에게는 인간 세계의 전체 전용이 정신의 한 구현으로서 뜻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산이나 암석에서는 중력의 강함을, 동물에서는
경쾌함을 찾아보고 또 그것을 하나의 달성된 운동이나 자유라고 보고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인간(물론 인간은 그러한 것을 모조리 구비하고 있긴 하지마는)에게는
특히 우리들이 정신이라고 일컫는 생의 형식 내지 구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
형식 그 구현의 방식은 우리들 인간에게는 몇천이라 하는 생 발로의 형식, 그
속의 우연한 임의의 하나로밖에 생각될 수가 없으며 특수한 선택된 고도의
발전을 한  발로의 형식  즉,  종착점 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가령 우리들의 개개인의 입장이 유물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관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혹은 그밖의 것이라 할지라도,-또는, 우리들이  정신 을
신적인 것이라 생각할지라도, 염소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어쨌든
우리들 모든 사람들은 정신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또 정신
그것을 존중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들 모든 인간에 있어 감격에 찬
인간의 눈길, 예술, 마음의 표현은 모든 유기적 생명 가운데서 가장 높은, 가장
싱싱한, 가장 가치에 찬 단계이며 파동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들에게는 같은 끼리인 인간이 관조의 가장 고귀한 그리고
고위한, 가치있는 대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만인이 자연스럽게
아무런 구애를 받음이 없이 이러한 당연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나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있다. 아는 젊은 시절, 인간에 대해서보다도
풍경이나 예술에 의하여 보다 친밀감을 배우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오랫동안
다만 공기나,흙이나, 물이나 수목이나 산이나, 동물만이 등장하고 인간은
한사람도 등장하지 않는 문학작품을 꿈꾸어 왔다. 나는 인간이 너무나도 멀리
정신에서 떠나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의욕에 구애받고,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지나치게 동물적인 원시적인 목표만을 좇고, 너무나도 하잘 것 없는
일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동떨어진
오해에 빠지기도 했던 것이다. 인간은 영혼에 도달하는 도정에 있어서는
구제하기가 어려운 존재라고, 이미 퇴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어딘지는 모르나 다른  자연 의 장소에서, 이 샘-영혼-이 흐르기 시작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흔히 보게 되는 두 사람의 현대인이 바로 조금전에 우연히 만나서 아는 사이가
되었다고 하자. 그러나 아직 두 사람이 사이에는 물질적 교섭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자, 이 경우 이 두 사람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것인가를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우리들은 얼마나 모든 사람이 그 어떤 움직일 수 없는 분위기, 보호와
방어를 위한 그 어떤 각, 사람을 영원에서 이탈시켜 제 2의 적인 목표를
추구하여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을 멀리 하게 하는 계획이나 개념이나 원망등으로
해서 기만의 그물에 들씌워져 있다고 것을 통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상상은 마치, 영혼은 말을 통해 발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같이 영혼에는 높은
담장, 소심과 수줍음의 담장을 둘러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어 있는
모양 같다. 구함이 있는 사랑만이 이 거물을 타파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물이 타파될 때 비로소 영혼은 그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인관계
기차속에서 우연히 자리를 이웃하게 된 연고로 인사를 나누게 되는 두 사람의
젊은 신사를 관찰해 보라. 그들의 인사는 참으로 엉뚱스럽게도 기묘한 것이다.
그것은 비극 그것이다. 아무런 악의도 없는데도, 이 두 사람은, 멀고 먼 추운
이향, 얼음에 갇혀 있는 고독의 남북 양극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이것은 물론 말레지아인이나 중국인을 두고 하는 a라이 아니고 유럼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그들이 제각기 자부, 위협을 받고 있는 자부, 의심, 냉단의
성속에 살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들이 하는 말을 밖에서 관찰할라치면
완전히 넌센스이다. 영혼이 없는 세계에서 전해진 경직한 상형문자나 다를 바
없다. 그러한 세계를 우리들 인간은 쉴새없이 벗어던지고 있긴 하나 이 융해되지
않은 얼음의 파편이 지금도 우리의 몸에 부착되어 있는 것이다. 일상 하는
회화속에도 영혼이 내 비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한 사람은 그것 하나를
가지고도 이미 시인을 능가하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거의 성인에 가까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하긴  민족 도 영혼이란 것을 지니고 있다. 말레지아인도
그렇고 흑인도 그렇다. 그리고 인사나 회화에 있어 그들은 우리들 대부분의
유럽사람들보다 더 풍부한 영혼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영혼은 우리들이 바라는 영혼 그것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영혼 속에도 우리들은
사랑과 친근감을 느끼기는 하지마는... 또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나 신을
상실하고 기계화한 세계의 슬픔을 모르는 원시인의 영혼의 집단적ㅇ니 소박한
어린이의 영혼인 것이다. 아름답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마는, 우리들의
목적하고 있는 영혼 그것은 아니다. 차중에 있는 우리 두 사람의 유럽 청년은
이미 그 단계에서 일보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거의 또는 전혀 영혼이란
것을 내비치지 않는다. 그들은 완전히 조직화된 의지와 오성과 기획과
계획으로써 이루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들은 금전, 기계, 불신의 세계
속에서 그들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하면 그들은 병에 걸려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침내 다시 손에 넣을 수 있는 영혼은 이미
그전에 잃어버린 어린이의 영혼이 아니고 보다 훨씬 세련된 보다 훨씬 인격적인,
보다 훨씬 자유스런 그러고 책임을 질 능력을 지닌 영혼일 것이다. 어린이나
원시인으로 우리가 되돌아가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보다 전진하여 인격에로
책임에로, 또는 자유에로 도달하는 되돌아감이 아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과 그 실현에 예감은 현재 이곳에서는 조금도 인지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의 청년신사는 원시인도 아니고 또 성인도 아니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매일 우리가 쓰는 일상어다. 그것은 영혼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언어이다.
그것은 고릴라의 털북숭이 피부와 같은 것으로 우리들 인간이 이모 저모로 갖은
수단을 다해서 가까스로 거기서부터 이탈해 나오는 하는 성질의 것인 것이다.
그 고릴라적인 야만스런, 완전치 않은 언어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몰겐(오늘도 반갑습니다) 하고 한쪽이 말한다.
 다이크(안녕하세요) 하고 다른 쪽이 말한다.
 실례합니다 하고 다른 쪽이 말하면  안녕히 가세요 하고 한쪽이 대답한다.
이것으로 할 말은 다 한 것이다. 그들 말에는 뜻이 없다. 그것은 전혀 원시인의
장식물인 것이다. 그 목적과 가치는 흑인들이 코를 뚫어 달고 있는 그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러한 의례어를 입에 올릴 때의 품이 또한 묘한 것이다. 그것은
은근한 언어이다. 그러나 그것을 말할 때의 태도는 이상하게도 쌀쌀하고
짤막하고 인색하고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악의가 있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불화가 될 이유는 아무 데도 없다.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쪽도 악의적인
생각을 가질 이유가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표정과 말씨가 지극히
쌀쌀하다. 조심을 하다 말고 냉담하다 말고 기분을 잡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부론드 신사는  아무쪼록 이란 말을 할 때, 거의 경멸에 가까운 표정으로
눈꼬리를 치킨다. 그렇다고 그러한 감정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끼리의 영혼이 죽은 교제의 수십년을 쌓아 오는 동안 방어형식으로
되어버린 형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는 영혼은 오직 발로하는
일과 바치는 일을 통해서만 뻗어나간다간 것을 모르고 있다. 그는 자금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일개의 인격이다. 그는 이미 원시적인 야만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자금심은 애처러울 정도로 취약하다. 그는 자신의 주위에 방벽을
쌓고, 냉정을 울처럼 둘러치지 않으면 안된다. 남에게 웃음을 보이기만해도
무너져버리는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양있는 사람 끼리의 교제의 이
차갑고 이 심술궂고 신경질적이고 오만하고, 그리고 이 애매한 품은 곧 영혼의
병인 것이다. 그것은 무교양에 대하여 이러한 방법밖에 못가지는 영혼의 병이며,
모든 사람이 한번은 걸리지 않으면 안되는 병인 것이다. 영혼은 어쩌면 이렇게도
소심한가. 이렇게도 갸날픈가. 이 영혼은 자신의 나이가 젊기 때문에 함부로
덤벼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겁이 많은지 모르겠다.

영혼
지금 만일 이 두 사람의 신사 중에 그 어느 편이 참으로 자신이 행하고 싶은
것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는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고 그 어깨를 두들기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말 고마운 일이야. 날씨가 좋군, 오늘 아침은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보석과
같군. 그리고 나는 지금 휴가야, 어때, 내 넥타이가 좋지! 자네, 그 가방 속에
사과가 있어, 하나 먹어보지 않겠나.
만약 그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면 상대방은 적잖은 기쁨과 감동을 받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웃음과 흐느낌에 닮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문제는 사과나
넥타이나 그리고 그 이외의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지금 그 어떠한 것이
쏟아나와 넘쳐 흐른다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것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모두가 모두 그 어떤 약속 밑에서 억제되어 있는 것들이다.-그 약속은 지금도
효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멀지 않아 무너진다는 것도 우리들은 이미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감정을 표면에 나타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기계적인 방어수단을 취하여, 뜻없는 언어의 파면,
몇천이라는 대용어의 스포크 중의 하나의 언어를 중얼거릴 것이다.  예... 정말
좋은 날씨군요... 라든가, 그와 비슷한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시련을 받은
인내의 고통을 느끼고, 얼굴을 외로 돌릴 것이다. 그는 시계줄을 만지작
거리거나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거나 그러한 종류의 상형문자를 스물가량 나열해
놓고 다음과 마음 속을 표현하려고 할 것이다.
자기는 자신의 마음속의 기쁨을 절대로 밖에 내놓지 않는다. 자기는 무슨 일이든
남앞에 내놓거나 고백하거나 할 수가 없다. 기껏해야 이 주제넘는 사람에게 대해
일종의 연민을 느낄 정도뿐이다.
그러나, 결국은 이상과 같은 일 이외의 일은 일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허지만 좀더 그들은 괄찰해 보기로 하자. 영혼이 언어에 얼굴의 표정에 목소리에
찾아볼 수 없다 하더라도 어딘가에 그것이 숨어 있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론드는 경계를 잊어버린 것이다. 사람이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차창으로부터 이 숲 저 숲의 앉은 새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눈길은
자유로와지고 가장을 벗어던지게 된다. 젊음과 동경과 소박한 열열한 꿈으로
그의 눈은 빛나기 시작한다. 그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젊고
천진스럽고, 특히 아름다운 얼굴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이 또한 훌륭한 그리고 근접하기 어렵기는 매마찬가지인 신사는 일어서서 가방이
얹혀있는 머리 위의 그물 선반으로 손을 뻗친다. 가방은 단단한 위치를 차지한
채, 거기 얹혀 있다.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주의는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다.
청년은 다만 가방이 거기 있다는 안심감을 자신에 주기 위하여, 가방을 한 번
건드려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 가방 속에는 사과와 셔쓰이외에도 소중한 것이
들어 있다. 신성한 것이 들어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기차여행 중, 한 시간에 걸쳐 젊은 두 사람을 관찰한
셈이다. 그들은 어쨌든 상당한 교양을 가진 현대의 보통 인간인 것이다. 그들은
말을 주고 받았다. 인사를 주고 받았다. 의견을 주고 받았다.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손을 여기 놓아 보기도 하고 저기 놓아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느 일에도 그의 영혼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언어에도, 눈길에도 모든 것이
가면이고 꼭두각시 놀음이었다. 창밖으로부터 먼 담청색의 숲을 바라본 단
한번의 부주의한 눈길과, 가죽으로 된 가방을 건드려 본 어쩡쩡한 손길을
제외하고는...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아아 소심하고 암된 영혼이여, 너희들은 언제
그 각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인가, 신부와의 언약이나 신앙을 위한 싸움이나
활동이나 희생 등의 지복한 체험에 있어 언제 그 아름다움과 다정한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또는 억압된 심정의 미칠 것 같은 복수, 힘에 부칠 정도의
엄청난 저주, 범죄 흉행등의 형식으로 격한, 목숨을 걸다시피한 작용을 할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우리들의 영혼을 표현해야 좋을 것인가. 형혼에게
바른 위치를 제공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우리들의 태도나 언어속에 깃들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우리들은 결국 체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가. 군중과 관습에 따라 나래치는 새를 장속으로 틀어박고 틀어박곤 하여
언제나 장식용 고리를 코에 걸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영혼은 곧 사랑
다시 우리는 생각한다. 코의 고리와 고릴라의 피부만 제거할 수 있으면 영혼은
자유로이 활동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영혼이 방해만 받지 않으면 우리들은
서로 괴테의 각종 인물처럼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나눌수 있을 것이다. 호흡 하나
하나를 노래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가련하고 그리고 초라한 영혼이여,
그대가 출현하는 곳에 혁명이 있고 퇴폐와의 결연이 있고 신생이 있고 또 신이
있다. 영혼은 사랑이다. 영혼은 미래이다. 모든 여타의 일은 우리들이 거기에
형체를 부여하고 또는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신에게서 점지 받은 우리들의 힘을
수련하는 소재이며 물질이며 때로는 그 장애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또 이러한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새로운
것이 소리 크게 제창되어 인류의 모든 구속이 그 토대에서부터 흔들려 거대한
규모로 폭력사태가 행해지고 죽음이 행해지고 절망이 아무성치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때문에 영혼도 또한 이러한 사상의 배후로 숨어버린 것이 아닌가고.
그대의 영혼에게 물어보라. 미래이며 사랑이기도 한 영혼에게 물어보라. 그대의
오성에 물어서는 안된다. 세계사의 이면을 뒤지려고 들지 말아라. 그대의 영혼은
그대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대가 한 일의 양이 부족했다. 적에 대한
증오가 모자랐다고 해서 그대를 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의 영혼이 그대를
책할 수 있는 것은 그대가 너무도 번번히 영혼의 요구를 두려워하며 몸을
사렸다는 사실, 그대의 막내둥이요, 마지막 아들인 영혼과 화목하게 지내고,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그대가 조금도 가지려고 하지 않았던 일 또,
그대가 재상 돈을 위하여 영혼을 팔고 이익을 위하여 배신한 일을 가지고 서일
것이다. 실로 몇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이다. 어디를 보나
신경질적인 고뇌를 얼굴에 새긴 심술궂은 얼굴을 한 인간들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용한 것-거래소와 병원 이외에는 시간을 소비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달갑지 않은 상태야말로 혈액 속의 경종인 것이다-라고 영혼은 고하는
것이다. 그대가 나를 소홀히 하지 않는 한-그같이 영혼은 말한다-그대는
신경질이 되고 생명을 저주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나에게 전혀
새로운 사랑과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그대는 언제까지나 그와 같은 상태를
계속하게 되고 그로 해서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대 때문에 병에 걸려
행복에의 능력을 잃는 것은 결코 약한자 무가치한 자들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선량한 사람, 미래의 맹아 구실을 할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은 만족스런 영혼을
소지한 사람들인 것이다. 다만, 현재는 소심한 데서 뒤틀린 세계질서에 대한
항전을 피하고 있지마는, 아마도 내일이 되면 정면으로 대항할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그 영혼은 말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현재의 유럽은 수면자가
잠에 빠져 함부로 칼을 휘두르고 스스로 상처를 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 우리들은 어떤 교수가 언젠가 이와 비숫한 말을 한 적이 있는 것이
생각난다. 세계는 유물주의와 주지주의로 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고, 이 교수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의 병을 고치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자신의 병마져 고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지가 그를 멸망시킬
때까지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마침내 몰락할
것이다.

영혼이 가리키는 일
세계가 어떠한 길을 걷든 의사, 구원자, 미래의 새로운 동인은 오직 그대의
내부, 그대의 불쌍한, 학대된 그리고 상냥하고 멸망시킬수 없는 영혼속에서만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영혼속에는 지식이나 판단이나 그리고 프로그램은
없다. 영혼속에는 다만 재촉과 미래와 감정이 있을 뿐이다. 우대한 성자나
설교자는 영혼이 가리키는 바를 따랐다. 영웅이면서 인고자 우대한 장군이면서
정복자, 위대한 마법사이면서 예술가, 일상생활 속에 길을 잡기 시작하여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높은 곳에 차지한 모든 사람은 모두 이 영혼의 뒤를 따라 걸어
온 사람들인 것이다. 세상만인의 길은 이와 다르다. 그 길은 양로원에서 끝이
나는 것이다.
투쟁은 개미도 한다. 사회는 꿀벌도 가지고 있다. 부는 산쥐도 가지고 있다.
그대의 영혼은 그보다 다른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영혼은
그보다 다른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영혼이 도중에서 좌절되고
그대가 영혼의 희생으로 해서 실리를 얻게 되었을 때, 그대는 결코 행복할 수도
없을뿐더러 번영도 할 수 없다. 왜 그런고 하니  행복 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은
다만 영혼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오성이 아니다. 밥주머니가 아니다.
두뇌도 아니고 돈지갑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옛날 먼 옛날부터 이러한 사상을
궁극까지 규명하고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말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것은
먼 옛날에 발설된 것으로서, 시간을 초월하고 영구적인 새로움을 가진 소수의
인류적 언어의 하나인 것이다.
 사람이 전 세계를 업는다 해도, 자시느이 영혼이 상처를 입었을 때는 무슨
이익이 있다 하랴.

영혼의 움직임
어제밤에 나는 계속 꿈을 꾸었는데, 분명히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이러했을 것이라는 것만은 기억에 남아 있다. 그 꿈속에 나타난
체험과 사상은 두 가지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한쪽의 체험과 사상은 나에게
대드는 종류의 고통으로 가득찼고 헝클어져 있었다.-또 한쪽은 이 고통을 완전한
이해성 있는 마음씨에 의하여 극복하려고 하는 동경과 노력에 가득차 있었다.
이러한 비참함과 자각, 고뇌와 열심의 틈바구니에 끼어 나의 사상, 원망, 공상은
몇 시간이나 험준한 낭떠러지의 가장자리에까지 발걸음이 가 닿도록 달리고
달려서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때로는 그 상념은 박쥐처럼 육체를 곁들인
감정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슬픔이나 피로한 감정의 갖가지 양성이 하나 하나
개별활되어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묘하게도 느낌이 흡사한 형태나 음향에 의하여
눈에 보이고,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영혼의 다른 층에서는 좀더
정신적인 에너지를 가진 흥분 상태가 나타난다. 인내하라, 싸워라, 가엾는 길을
계속 걸어가라고 권하는 경고의 소리가 외쳐대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한숨이
토해지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용감한 진전이 일보일보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체험을 문제로 하여 취급하고 자신의 내부의 심연의 격류를 바라보는
일에 그런 뭔가의 의의가 있다고 한다면, 그 의의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이
영혼의 움직임을 될 수 있는데로 충실하고 정밀하게-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보다 훨씬 멀리, 훨씬 깊게-발자취를 새길때 비로소 생겨나느 것이다.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두려고 하는 사람은 어슬픈 불완전한 외국어로
델리게이트한, 표현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tlarud을 토로하려고 할 때와 같은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고통
말하자면 나의 상태와 경험은 얼추 이러한 것이다. 한쪽에서는 간절한 고통,
다른 한쪽에서는 그 고통의 극복, 그리고 운명과의 깨끗한 화해를 목적하는
의식적인 노력, 그와 같은 식으로 나의 의식 내지 나의 의식속의 제 1성은
판단을 했다. 그런데 좀더 낮든가, 좀더 깊은, 좀더 여운이 풍부한 제 2의
소리가 있어, 그것은 나의 상태에 대해 그와는 다른 해석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
소리(그것을 나는 제 1성과 같이 수면과 꿈속 먼 곳에서였지마는 분명히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는 고뇌를 부당하다고, 정신적 에너지에 여유가 있는
완성에의 추구를 정당하다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양자 어느 쪽도 동시에
정당시하고 부당시했다. 이 제 2성의 소리는 고뇌를 감미를 노래부를고 있었다.
고뇌의 피할 수 없음을 노래부르고 있었다. 이 소리는 고뇌의 극복이라든가
배제라든가 하는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고늬의 심화와 생동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제 1의 소리는 그것을 대강 언어로 번역을 해 보면 이러한
것이 되었다.  고통은 고통이다. 그런 것에는 값어치가 없다. 그것은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다. 가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에는 이같은 고뇌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 힘을 찾아라, 그 힘을 길러서 자기
것으로 받아 들여라. 만일 그대가 영원히 고뇌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대는 바보가 아니면 약골이다.
그러나 제 2의 소리는, 그 대략을 언어로 번출하면 다음과 같다. 고통이
그대에게 괴로움을 갖다 안겨주는 것은 오직 그대가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서다. 고통이 고뇌를 가져오는 것이 오직 그대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도망치려고 해서는 안된다. 책해서도 안된다.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그대는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은 그대는 모든 것을
지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깊은 마음 속에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계에는 단 한가지의 마법, 보 한가지의 힘, 단 한가지의 구원, 단 한가지의
행복이 있을 뿐이고, 또 그 이름을 사랑이라고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고통을
사랑하라. 고통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아라. 고통에서 도망치지 말아라. 고통의
깊은 곳이 얼마나 감미로운가를 맛보아라. 고통에 몸을 내맡겨라. 혐오의 정이
그대로 하여금 고통을 고통을 생각게 하는 것이다. 다른 데에 그통의 원인이라곤
없다.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고통도 죽음도 다만 그대가
그렇게 만들고 있을 뿐인 것이다. 고통은 멋들어진 음악인 것이다-만일 그대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들으려 한다면 ,그러나 그대는 결코 거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언제나 엉뚱스런 기묘한 아집의 음악과
음조만을 들으려 하고, 그것을 거부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통의 음악은 그러한
것 하고는 보조를 맞출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말을 들어라. 나의 말을 듣고
깨달아라.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은 망집인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만들
따름인 것이다. 그대가 그대에게 고통을 주고 있을 뿐인 것이다.

두 가지 소리
이와  같이 고통과 거기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의지 이외에, 이 같은 두 가지의
소리가 있어 그것이 간단 없이 서로 책망질을 하고, 확집을 해왔었다. 제 1의
소리는 의식에 보다 인연이 깊고 많은 지지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막연한
무의식의 세계와 대항함에 있어 그 명석한 논리로써 했다. 이 진영에는 모든
권위가 참가하고 있었다. 모 오제가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학교의
성원이 있고, 칸트와 피이테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리고 고통 자신속에서 나는 것 같이 보였다. 이 제 2의 소리는 혼돈의
바다속의 그 어느 메마른 섬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체가
암흑이고 그 자신이 궁극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소리의 합창 내지 경합이 어떻게 해서 전개해 갔느냐를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즉 노래 불리어진 쌍방의 소리는 각각 두
가닥으로 갈라져 나간 것이다. 그리고 새로 생긴 베이스가 다시 그것을 두 개로
분열시켰다. 그것도 단순히 대립하는 두 종류의 소리의 한 조, 이를테면 밝은
그것과 어두운 그것, 고음의 그것 저음의 그것, 남성의 그것, 여성의 그것 등
하는 식으로 생긴 것이 아니고, 차례차례로 노래 불리어진 소리는 모두 쌍방
저마다 최고의 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즉, 혼돈의 진동과 형식의지의
진동, 낮과 밤, 남성과 여성 등을 저마다 다른 혼합방식으로 그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차례차례로 생겨나는 소리는 모두 원래의 소리의 아들이나
일부분인 모양으로 그 소리와 같은 약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혼돈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모성의 하나의 새로운 저음이 더욱더 강하게 분명하게 의지적으로,
정리적으로 들려오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명쾌한 가락을 띤 소리가 혼돈된
소리로 변음돼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소리는 혼합된 소리인 것이다. 모든
소리가 자신의 소리와는 반대적인 원리로 향하려고 하는 동경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윤회
이렇게 하여 여기에 다성음악과 다양성이 일어나 그 속에는 수백만의 각양각색의
가능성을 가진 일대세계가 그 속에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와 같은
가능성은 모두가 서로 평형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대세계가 간단없이
계속되는 경미한 통증을 더불면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나의 영혼속에서
연주되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힘이 있고 힘의 고양이
있었다. 그러나 또 많은 마찰, 상반된 비통한 저항이 있었다. 세계는 아름다움
속에 정열적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축은 소리를 그리고 마찰열을 내고
있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는 이미 꿈의 내용은 잊어 버리고 기억에 없다. 음부는
무산되어 버리고 없다. 다만 그 노래소리의 가락만이 나의 기억속에 기록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 내가 지금도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이 한 가지 사실뿐인
것이다. 나는 많은 괴로운 경험을 체험했다. 그러나 새로운 고토과 함께 새로이
해방과 구원을 바라는 희구에 불타 있었다. 이리하여 영원한 윤회, 진격과 감수,
형성과 수고 행위와 수동의 한 없는 순환이 생긴 것이다.
그러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결코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전체로서의 느낌은
흥미라기보다도 괴로움이었다. 그리고 꿈속의 온갖 상태가 육체감을 가지고
나타났을 때에는 그것은 그야말로 가책 그것이었다. 나는 두통, 현기, 공포를
느꼈다.

모범상
거기서 일어난 것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체험과 고통이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다른 소리가 생겨나서 거기에 응했다. 나아가려고 하면 또
마음속에서 다른 경계의 소리가 들려왔다. 각양각색의 본보기, 모범상이
떠올랐다. 그속에 너는  카라마조프의 형제 의 장로 조시마가 모범으로서,
봄보기로서 출현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영원한 옛날옛적부터 있어온 그러면서
항상 새로운 형식으로 나타나는 저 모성적인  본원적인 소리 는 그럴 때마다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항의라기보다는 차라리 친절한 사람이 먼 발치에서
염려하는 나머지 말없이 머리를 흔들고 있는 상황의 느낌과 비슷했다.
 본보기를 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고, 그 소리는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본보기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가 손수 그대 자신을
위하여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본보기를 구해놓고 그것을 모방하려고 드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진물은 자기속에서 우러나는 법이다. 내 아들아,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해라. 그리고 그 괴로움의 잔까지 마셔라, 네가 그것을
억지로 피하려고 할수록, 그 음료는 더욱 더 쓰어지는 것이다. 겁자는 운명을
독이나 약인 것처럼 마신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포도주를 마시듯 마시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때 그것은 감미로운 맛으로 그대의 목구멍을 넘어갈 것이다.

명 과 실
그러나 그 맛은 쓴 것이었다. 그리고 밤을 새워가며 아까 말한 세계의 차바퀴는
헐떡이면서, 마찰연을 뿜고 있는 축의 주위를 돌았다. 여기에는 맹목의 자연이
있고, 저편에는 정신의 투철한 눈이 있었다-그리나 그 정신이 한없이
되풀이해가며 맹목적인 생명이 없는 지루한 것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었다-도덕, 철학, 그밖의 여러 종류의 처방전으로, 그리고 한편 맹목의
자연은 그 어떤 일로해서 또다시 눈을 떴다. 이상한 윤기있는 눈을, 그러나 맑게
개인 눈을 조심조심 뜨는 것이었다. 일체가 변동하여 무엇하나, 이름 그대로의
것은 없었다. 일체의 것은 다만  이름  그것뿐이며, 일체의 것은 오직  실
그것뿐이었다. 명과 실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일체의
배후에서 성스러운 생과 심비의 사명은 각 일각 변화해가는 것이었다. 보다 멀고
보다 불안에 찬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의 세계는 축이 견디는
한 마찰연을 뿜으면서 회전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꿈 과 잠
내가 눈을 떴을 적에는 밤은 거의 물러가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나는 그럴만큼 완전히는 잠에서 깨어나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잠시동안 눈을 떠서 희멀겋게 새어가는 이른 빛이 이미 선반과 의자와 나의
옷가지를 발그스레히 물들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셔츠의 한쪽 소매가
비비꼬여진 채 축 쳐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그 어떤 형성적인
공상활동을 재촉하고 있었다-우리들의 영혼에게 있어 박명처럼 자극을 주고
풍요로운 생산력을 주는 rjte 없다. 주위의 암흑속에 스며들 듯 하는 한 조각의
하얀 파편 어슴푸레한 땅색깔 위에 어른거리는 흑과 백의 얼룩무늬, 이보다 더
우리의 영혼의 손을 끄는 것이 또 있을까, 그런 말을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자극에 응하지 않았다. 하늘하늘 하느적거리는 하나의 흰
조각에서 바람에 춤을 추는 무희의 모습이나 은하의 운행이나 눈에 덮인
봉우리나 성스러운 여신의 입상을 그려내는 형성작용은 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긴 꿈의 연속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의식은
다만 내가 눈을 떠 있으면서 아침이 가깝다, 나는 두통이 나고 있는가, 좀더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비는 지붕과 추녀 끝을
조용히 두들기고 있었다.
슬픔과 따분함이 한꺼번에 마음속에서 치솟아 올라왔다. 달아나듯이 나는 눈을
도로 감고 잠과 꿈을 좀더 좇아 쓰려고 자리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러나 꿈과 잠은 이미 그전의 그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피로도 고통도 느끼지
않는 희박한 어슬픈 반수상태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경험을 체험했다. 그것은 꿈을 닮았으면서도 꿈이 아니었다.
사상을 닮았으면서 사상이 아니었다. 환상과도 비슷했고 의식의 광파를 가지고
무의식 세계를 살짝 쓸 듯이 비춘 상태와도 비슷했다.
나는 최후의 반수상태속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한 사람의  성자 였다.
한쪽에서는 나 자신이 성자의 생각을 대신하고 그의 느낌을 대신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이렇게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별인으로서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속속들이 그를 통찰하고 있어 일심동체처럼 그를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그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사람들로부터 그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에 관한 전기를 읽고 있는 것이 그 자신 같기도
했다. 나 자신이 직접, 그 성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 그 자신 같기도 했다.
나 자신이 직접, 그 성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기도 했으나 동시에, 그가
나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같기도 하고, 또 그가 나의 인생의 법례로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뭔가 나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을 내가
내 자신의 생활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이도 생각되는 것이었다.

성자
그 성자는-그것이 나라도 좋고 내가 아니라도 좋지마는-그 성자는 커다란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나 이외의 사람에게서 일어난 것 같이
이야기할 수가 없다. 나 자신이 그것을 체험하고 느낀 것이다. 나는 느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이 나에게서 앗겨져 갔다.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이 죽어버렸다.
또 방금 숨을 거두려고 하고 있다. 하는 식으로...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나의
현실의 어린이들 그 눈, 그 이마, 그 작은 손, 그 소리를 가지고 있는 현실이
살아있는 어린이들만이 아니고-나의 눈앞에서 죽어 나에게서 떠나려 하고 있는
것은, 나의 정신적인 애들과 정신적인 소유물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의 진수의
진수, 내가 아니면 가질 수가 없는 더 할 수 없이 내가 사랑하고 있는 최상의
사상이며 사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의 예술, 나의 생각, 나의 눈동자, 나의
생명이었다. 이보다 더한 것을 일찍이 내가 잃어버린 적이 있었던가, 이보다 더
잔혹한 일을 일찍이 당한 적이 있었던가, 소중한 나의 눈동자가 빛을 빼앗기고
이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나의 입술이 이제 숨을 쉴 수 없게
되리라고는...
이상의 것을 나는 체험을 했다-내가 아니면 이 성자가, 그는 눈을 감고 미소를
띄었다. 그리고 그의 가냘픈 미소속에는,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비통한 것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모든 약함, 모든 사랑, 모든 상처 입기 쉬운 고백
그것이었다.

생명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고 조용했다. 이 가녀린 슬픔의 미소는... 그리고 그것은
가만히 그리고 아리땁게 그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수목도 그와 같은 표정을
할 때가 있다. 늦가을의 따가운 햇볕 속에서 황금빛 마지막 잎새가 나무가지를
떠나 떨어질 때 묵은 흙도 그렇다. 얼음이나 불속으로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그 모습이 일허져 갈 때에는 그것은 슬픔 그것이었다. 괴로움 그것이었다. 깊은
고뇌 그것이었다.-그러나 그것은 결코, 대항 그것은 아니었다. 항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동의 그것이었다. 자신을 내놓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 그것인 것이다. 만물과 더불어 지각하고 만물과 더불어 의지를 같이 하는
모습 그것인 것이다. 성자는 희생을 바쳤다. 그리고 그 희생을 수긍했다. 그는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는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는 싸우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왜냐하면 그는 불사의 몸이기 때문에, 그는 사랑하고
기쁨을 받아들고, 그리고 그것을 다시 남에게 준다. 돌려준다.-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분명-그것은 그 자신이지마는-주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상념이 기억 속으로 침전되어 가듯이 또 정적의 사람이 거둥의
일부분이 그 사람 전체의 편안한 모습속에 휩싸여져 가듯이, 이 성자도 그렇다.
그의 아이들과, 그의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은 그로부터 떠나버렸다. 슬픔속에서
사라져버렸다-그러나 잃어져버린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의 마음속으로 침전되어
간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죽은 것은 아니다. 모습은 달라졌지만
무로 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깊은 곳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세계의 저
안켠으로-그리고 인고자의 곁으로, 그것은  생명 이란 모습으로 화신하여 나타나
 비유 의 구실을 완수하고 되돌아간 것이다. 실로 일체의 것은 비유이며, 그것은
때가 오면 언젠가는 비통한 가운데, 다른 모습을 빌려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방종
내가 몹시 사랑하고 있는 사나이의 아니 유일한 덕목이었다. 그 이름을  방종
이라고 한다. 우리들이 책을 읽거나, 선생님으로부터 설교를 듣거나 할 때
나타나는 그 많은 덕목에는 나는 그다지 큰 가치를 인정할 수가 없다. 그것들은
수는 많으나 인간이 그 어떤 장식적 필요에서 발명해낸 것이어서, 오직 하나의
명으로서 그것들을 총칭할 수가 있다. 덕이란  복종 이다. 문제는 다만 누군가에
복종하는가에 있다. 즉 방종은 곧 복종인 것이다. 그러나 방종 이외의 덕목은
모두 인간에 의해 주어진 규칙에 대한 복종인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그다지도
평판이 좋고,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다만 방종만이 그러한 법칙을 문제로
삼지 않고 있다. 방종이 복종하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법칙인 것이다. 유일한
조건없이 신성한, 자신 속에 있는 법칙으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제멋대로의
마음, 그것이 방종이 복종하고 있는 법칙인 것이다. 유일한 조건없이 신성한,
자신 속에 있는 법칙으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제멋대로의 마음, 그것이 방종이
복종하고 있는 법칙인 것이다. 방종이 세간에서 나쁜 평을 받고 있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그것은 조금도 존중을 받고 있지 않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악덕이라고까지 평을 받고 있다. 아니면 개탄할 행위라고 세상사람들은 그것이
표면상에 드러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증오를 사게 되었을 때 비로소 본래의
이름을 가지고 불러준다.
참된 덕 치고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참된 덕은 언제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증오를 불러 일으키는 법이다. 소크라테스, 죠루다, 부루우노,
그밖의 모든 방종을 보라) 세상사람들이 방종을 다소라도 바람직한 장식으로
간주하려고 할 때는, 그들은 귀에 거슬리는 이 언짢은 이름을 될 수 있는대로
약화시키려고 한다. 성격 또는 인격이라고,-이것 같으면  방종 과 같은 악덕적인
여운이 풍기지 않는다. 왕국에도 참입할 자격이 있을 것 같다.  독창성 이
이름도 때로는 통용될 것 같다. 그것은 물론 세상에서 괴짜로 평가되고 있는
인종, 예술가나 그와 유사한 부류에 속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다.  방종 이 득세를
해도 자본이나 사회에 대해 이렇다 할 손해를 끼치지 않는 예술의 세계에서는
방종 은 독창성이란 이름으로 크게 인정을 받기도 한다. 예술가 사이에서는 어떤
종류의 방종은 도리어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좋은 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성격 이라든가  인격 이라든가 하는 말은
오늘날의 일상어에 있어서는 대단히 번거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어떤
사람에게 일종의  성격 이란 것이 있기는 있다. 그것은 평소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겉치레의 자료가 되어 있기도 하지마는, 일단 중대한 경우에 임했을 때는
재빠르게 다른 법칙에 복종하고 마는 정도의 것을 가리키고 있다. 다소는
일가지설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마는 그것에 의존하고만 생활하고 있지 않은
인간이  성격 을 가진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한 사람은 대에 따라
경우에 따라 대단히 교묘하게 자기는 남과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다. 즉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빛을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것뿐인 것이다. 이러한 온화한
겉치레만의 형식속에 있을 때는  성격 은 세상사람들 속에 묻혀 있을 때도  덕목
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자기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진실로 거기에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성격 이란 칭찬적인 평어를 잃게 된다.
오직  방종 이란 각인만이 찍히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관용은 무시하고
우리들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보기로 하자. 그 경우 방종은 어떠한 뜻을
가질 것인가. 제멋대로의 사상과 행동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이론을 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제멋대로의 마음은 지상에
있어서의 만물, 전혀 예외없이 만물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돌도, 풀도,
관목도, 동물도, 그 하나 하나가 제멋대로의 마음에 따라 생각하고 생활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세계는 풍요롭고 아름답고, 그것은 다만 만유에 있어서의
최미의 것일망정, 자기의  마음  자기멋대로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 실로
정확하게 그리고 단호히 그 법칙을 지키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지상에 있어서 다만 두 종류의 불쌍한 저주받은 존재만이 불행하게도 이 영원한
부름에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의 마음이 명하는 대로의 생존,
생장, 생사를 성취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에게 길들여진
가축만이 생명과 생장의 소리에 따르지 못하는 불행한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좇고 있는 법칙은 인간에 의하여 생겨지고 따라서 또
쉴새없이 인간에 의하여 타파되고 변형되고 있는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단히 신기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러한 것이다. 외적인 우연의 법칙을
경멸하고, 자기 자신의 자연스런 법칙을 좇고 있는 소수의 인간-그러한 사람들은
대개 유죄의 선고를 받고 돌의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때가 지나면 이러한
사람들이 아니 이러한 사람들만이 영원히 영의 해방자로서 숭배를 받게된다.
외적인 우연의 법칙에의 복종을 최고의 덕으로 삼고 상친하고 장려한 그 인류가
그 장려에 항거하여 타고난 마음에 대한 충성을 깨뜨리기보다는 차라리 생명을
버리기를 선택한 사라들을 영원한 판테온 속에 모시는 것이다.
그  비극적 이란 말은 인류의 신화적인 소장시대 때부터 계승되고 있는 외포적인
감정에 찬, 더할 수 없이 숭고하고, 신비하고 신성한 말로-그것은 날마다 허구
많은 신문기자들에 의해 남용되고 있지마는-이 말이야말로 관례의 법칙을 어기고
자기 자신의 별을 따른 까닭으로 해서 멸망의 걷는 길은 영웅의 운명을 의미하는
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영웅의 이와 같은 행적에 의해서만 인류는 항상
그리고 새로이 생긴 그대로의 마음을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비극적인
영웅, 생긴 그대로의 자신을 지켜온 사람들이 수백만의 통상인 또는 겁자들에게
인간이 만든 법칙을 어기는 것은 절대로 방자한 마음에서가 아니고 보다 높은
신성한 법칙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항상 새로이 가르쳐 주고 있다.
다른 표현을 빌린다면 인간의 군거정신은 모든 인간으로부터 순응과 종속을
요구하지마는, 최고의 영예는 결코 온유하고 겁이 많은 다루기가 쉬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나 영웅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신문기자들이 말을 남용하여 공자 등의 사고를  비극적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실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단순히  가엾은  하는 뜻으로 쓰여지고
있지마는) 세상의 유행도 이에 못지 않은 남용을 보여주고 있다. 도살당하거나
다름없는 불쌍한 병사의 죽음을 가리켜  영웅적인 죽음 이라고 하고 있다.
그것은 감상적인 인종, 특히 국내에 있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표현인 것이다.
전쟁에서 쓰러진 병사들은 확실히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긴 하다. 그들은
적지않은 일을 용감하게 수행했고 또 고생도 많이 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종내에
가서는 생명까지 바쳤다. 그렇더라도 그들이 영웅일 수가 없는 것은, 무지한
신병이 개처럼 사관의 호령에 우롱을 당한 끝에 총알을 맞고 쓰려졌다 해서
영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집단의 수백만인의 영웅 이란 관념은 그
자체가 벌써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영웅 이란 유순한, 무난한 시민이나
의무수행자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마음, 자신의 숭고한 자연의 천성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운명과 심정과는
동일한 개념이다 고 가장 지혜가 깊고 가장 드러나지 않은 독일의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 노바리는 말했다. 요컨대 자신의 운명을 감당할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영웅인 것이다.
인류의 과반수가 이 용기와 제 갈 길을 가는 마음을 가졌었더라면 세계의 양상은
일변했을 것이다. 월급으로 일을 하고 있는 교사들은 (과거의 영웅이나 제
소신껏 산 사람들을 입에 침을 발라가며 칭찬하면서도) 그렇게 되면 세상이
뒤죽박죽이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그렇다고 주장할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긴 논리 같은 것은 그들에겐 무용한 것이지마는 그러나
독립을 지키고 자신의 내부의 법칙에 충실한 사람들에 의하여 인생은 보다
융성해지고 보다 번영해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이룩하는
세계에 있어서는 오늘날 당당한 사법관들을 번거롭게 만들고 있는 명예훼손
사건이라든가 구타 사건의 대부분은 경우에 따라서는 무시당해 버릴지도 모른다.
때로는 살인사건까지 일어날지도 모른다-그렇게도 엄중한 법률과 형벌이
시행되고 있는 오늘날만 해도 그것은 근절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질서정연한 세계 속에서도 그대로 횡행하고 있는 상식을 벗어난 슬픈 일들의
가지가지는 그 세계 속에서는 무연의 사건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를테면
국제전쟁 같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관헌의 소리가 들린다.  너는 혁명을 선동하고 있는가
그러나, 이 또한 군거인 사이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오해이다. 나는  소신 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지 전복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혁명이란 곧 전쟁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쟁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폭력에 의한
정지의 계속 인 것이다. 그러나 한번 자기자신의 용기를 인식하고 자기자신의
운명에 귀를 기울인 사람에게 있어서는 정치는 전혀 무관심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급진파이든 보수당이든 모든 정치적 입장이 그에게는 무연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의 관심은 보다 다른 곳에 향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고집 은
풀줄기 하나하나에 머물고 있는 저 깊고, 저 놀라운 신의 마음과도 비겨질
고집과 같은 것으로 오로지 자기자신의 생장이란 것에만 향해져 있다.
에고이즘에 향해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다만 이 에고이즘은 수전노나
권력지상주의자들의 염치없는 에고이즘과는 전연 별종의 것인 것이다.
내가 말하는  고집 을 가진 사람은 금전이나 권력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들이 이른바 덕행가이고 체념적인 이타주의자이기 때문에 이를 멸시하려는
것은 아니다-아니 그러한 사람은 이타주의 자이기는 커녕 차라리 에고이스트인
것이다. 그러나 투쟁과 증오, 나아가서는 살인행위의 근원이 되기도 하는
금전이나 권력, 그리고 그 밖의 것은 자각한 인간 즉 아집의 사람편에서 볼 때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그는 다만 한 가지만을 중시한다. 그 자신 속에 있어
그에게 살기를 명하고 그의 생장을 돕는 저 신비한 힘만을, 이 힘은 금전 기타의
것을 가지고는 유지도 증대도 심화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금전이나 권력은
불신뢰의 마음이 발견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생명력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생명력이 결핍된 사람이 금전과 같은 대용물로 그
생명력을 보충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신뢰하고 있는 사람 자기자신의
운명을 순수하게 자유롭게 자신의 내부에 있어 체험하고 발휘하는 일만을
염원하고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그것들의 지나칠 정도로 과대평가되고 있는
효용, 즉 보조수단은 종속적기구로 하락되고 마는 것이다. 그 것들은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편리한 일이기는 하나, 그 자체 결정적인 의미는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 나는 이 아집이란 덕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사람들이 이
덕의 좋은 점을 깨닫고 이 덕의 얼마만큼이라도 가질 수가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추상받고 있는 덕목의 가치가 크게 의심스러워 질 것이다.
가령 애국심 같은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나는 애국심을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개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보다 큰 집합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덕이 덕으로서 존중받고 있는 것은 포경이- 정치의 계속 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이 소박하고 우스광스러울이만큼 졸열한 수단이-개시되었을 때다. 적군을
사살한 병사 쪽이 토지를 훌륭히 경작하는 농부보다도 위대한 애국자로
간주되기가 일쑤다. 라는 것은 농부는 그 노동에 의하여 자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럽게도 세간의 기묘한 모랄에 있어서는 어느
덕목이 그 소지주 자신에게 이익과 쾌감을 줄 때에는 그것은 언제나 의심의
대상으로 보여지게 마련인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우리들은 평소 남에게 손해를 보이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빼앗아서 자기가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개인의 추장은 자신이 적을 죽이면 그 적의 활력이 자기 몸으로 옮겨 앉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신앙을 믿고 있다. 이 니그로의 신앙과 같은 이
연  스런 신앙이 인간계의 모든 전쟁, 모든 신념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F까, 그렇다.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해 질수 있는 것일가. 만일 우리가
성실한 농부를 병사와 동열로 보는 경우에 일개인, 일국민의 획득하는 생명력
내지 생활력은 타인에 있어서 생의 그것과 동량의 손실을 더불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미신을 버릴 수가 있다고 할 때...
이렇게 말하니 나의 귀에는 벌써부터 선생의 말버릇이 들려오고 있다.  너가 한
말은 참으로 그럴싸한 말이다. 그러나 바라건대 좀더 구체적사실을 경제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게, 세계의 생산은...
거기에 대하여 나는 생각한다.  아니, 그만 해두게, 경제적 입장은 결코 구체적
입장이 될 수가 없어요. 그것은 각양각색의 사상을 보는데 편리한 안경의 일종에
불과하다. 가령 전전에는 사람들은 세계대전은 불가능하다. 아니면 길게 계속할
수가 없음을 경제적으로 논증할 수가 있었지, 오늘날은 그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그와 반대되는 논증을 할 수가 있어요, 아니, 우리들은 어디 한번
서로 다같이 현실을 생각해바야 하겠어요. 경제니 뭐니 하고 공상적인 머리
놀음은 그만 집어치우고...
이와 같은  입장 같은 데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가령 그것에 어떠한
명칭이 붙어있든 또는 체험이 많은 대학교수에 의해 그것이 신봉되고 있든 말든,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부질없는 것들인 것이다. 우리들은 인간인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는 단 하나 자연스런 입장, 단 하나의 자연스러운 척도가 있을 때 따를
것이다. 그것은 아집만이 가질수 있는 척도인 것이다. 아집이 가리고 있는
척도인 것이다. 아집자의 눈에는 자본주의의 문명도, 사회주의자의 운명도 눈에
비치지 않는다. 그의 눈에는 영국도 없고 아메리카도 없다. 그에게 있어서는
다만 자기의 가슴속의 필연적이며 부동한 법칙만이 살아 있을 뿐인 것이다. 이
법칙에 따른다는 것은 안이한 관습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뛰어 넘을 수
없는 난사인 것이다. 그러나 아집자에게 있어서는 그 법칙은, 운명을 그리고
신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유형
여러가지 유형을 마련해 놓고 거기에 따라  인간 을 분류하는 것은 우리들의
타고난 요구인 것이다. 데오스토의  인간의 여러 종류 나 우리들의 조부시대의
네 개의 기질관에서 최근의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유형을 세우려 하고
있다. 그리고 또 무의식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주위의 사람들을 자신의
소년시대 인연이 많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여러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온 것이든 또는 과학적인 유형학을
목표로하고 있는 경우든 실로 유익한 발전인 것이다.-그러나 때로는 경험세계의
또 다른 횡단면을 만들어 인간 하나하나가 모든 유형의 특징을 몸에 구비하고
있고 각양각색의 성격이나 기질이 번갈아 나타나는 상태로서 일개인의
내부에서도 볼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헛된 일이 아니며 우리들의 눈을
보다 예리하게 만드는 유익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다음에 독서의 3개의
단계를 제시한다 해서 거기에 의하여 독서가의 세계가 그 세 개의 분류로
나누어져 있어, 한 사람은 이 종류에 속하고 한 사람은 저 부류에 속한다는 것을
가름질 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때에 따라서는 이 무리에도 저 무리에도 속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인 것이다.
제 1의 형은 소박한 독서가인 것이다. 우리들 누구나 다 때로는 소박한 도서를
한다. 이러한 독서는 식사를 하는 경우와도 같다. 독서가는 오로지 받아들일
뿐인 것이다. 어린이가 인디안의 그림책을 보는 경우든 식모가 백작부인 소설을
읽는 경우든, 또는 학생이 쇼펜하우엘을 읽는 경우든 어쨌든 이러한 독서가는
음식을 먹고 우유를 마시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배를 채우는 경우와 같다.
이 독서가의 서적에 대한 관계는 사람대 사람의 그것이 아니고 말과 꼴, 또는
말과 마부와의 관계 그것인 것이다. 즉, 서적이 고삐를 잡고 독자가 그 끝에
달려 따라가는 것이다. 서적의 소재는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현실로서
승인된다. 소재 뿐만 아니다. 세상에는 대단히 교양이 있는 아니 지독히
날카로운 독자로서 이 소박한 독자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다. 특히 문학서적
독자가운데 이러한 사람들은 소재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가령 그들이 어떤
소설을 그속에 나타나는 죽음이라든가 결혼이라든가에 의거하여 그것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신 이 사람들은 그 작품을 쓴 시인이나 그 작품의 미를
완전히 객관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시인의 마음의 진폭에
공감을 느끼고 세계에 대한 그 시인의 태도에 완전히 동화되어 신이 그 자신의
작품에 시도한 해석을 남김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박한 사람들이 소설의
소재 상황 줄거리에 대하여 취한 태도를 이 교양 있는 도서인들은 예술, 언어,
시인의 교양, 시인의 정신에 대하여 취하는 것이다.-그러한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일종 최종최고의 문학가치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치, 칼.미이를 읽는
청년들이 올트, 셔타한트의 행위를 참된 공적으로서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이러한 소박한  독자는 독서에 대한 관계 그 자체를 두고 말한다면 대체적으로
인격적 존재랄 수가 없다. 본래의 그 자신이 아니다. 이 사람은 소설중의 사건을
흥분과 모험, 남녀간의 사랑사건, 행복, 불행 등에 의하여 가치지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시인의 일을 결국 하나의 관례에 지나지 않은 미학상의 기준에 맞추어
평가한다. 이러한 독자는 거리낌없이 이렇게 생각한다. 서적은 충실하게 주의
깊게 읽어서 그 내용이나 형식의 가치를 음미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오직 그
때문에 존재한다고 빵은 먹기 위해 베드는 자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세계의 모든 사물에 대하여 전연 별개의 입장을 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서적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천성을 따르게
된다면 그 길로 그는 어린아이가 되어 사물의 정을 들이고 놀게 되는 것이다.
빵은 산이 되기도 하고 그 속에 터널이 뚫리기도 한다. 베드는 암굴이 되기도
하고, 정원이 되기도 하고 눈이 내린 들판이 되기도 한다. 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과 이 유희에 관계되는 제주와도 같은 것을 독서가의 제 2의 형은 보여준다.
이 독서가는 서적의 소재도 형식도 중요시하지 않는다. 중요시하는 것은 그 서적
자체의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가치 뿐인 것이다. 이 독서가는 어린이가 그것을
알고 있듯이 모든 일은 열 아니 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령 이 독서가는 시인이나 철학자가 각양각색의 일에 대한 자기자신의 해석이나
평가를 자기 자신이나 독자들에게 믿게 하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울 수가 있다. 그리고 일견하여 시인의 임의, 자유로운
발상으로 생각되는 그 속에 구속과 수동을 보는 것이다. 이 독서가는 이미
대부분의 문학교수들이나 문예비평가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노래나 형식의 자유로운 선택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라는 어느
어느 해에 이 이 소재를 선택하여 그것을 오각의 억양격으로 만들어 내려고
결심했다 고 문학사가가 말했을 때, 이 독서가는 소재도 억양격도 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독서가의 만족은 소재가
시인의 손에 의해 어떻게 다루어져 있는가를 보는 데에 있지 않고 시인이 어떠한
모양으로 소재의 강제를 받고 있는가를 보는 데 있는 것이다. 이 입장에
있어서는 이른바 미적 가치라는 것은 거의 볼품이 없는 것으로 되어버린다.
그리고 시인이 궤도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최대의
매력과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독자가 시인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말이 마부의 인도를 받는 것과는 경우가 다른 것이어서 포수가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일견하여 시인의
자유행위라고 생각되는 피안 즉, 시인의 수동과 구속의 세계를 걷 듯 들여다 볼
수가 있다면 그것은 교묘한 기교, 세련된 언어의 구사, 등 모든 매력 이상으로
그를 즐겁게 만드는 것이다.
이 길을 다시 밀고 나아가 최후의 한계에 달하면 우리들은 독서가의 제 3형을 볼
수가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양해를 얻고저 하는 것은 우리들 가운데 누구라도
이 형의 그 어느 하나에 영속적으로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든 오늘
제 2의 형에 내일은 제 3의 형에 모레는 또는 제 1의 형에 속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제 3인 최후의 단계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도 얼핏보면 가장
좋은 독서방법이라고 보통 보아지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형이다. 이 제 3의
독서가는 전혀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는, 인격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는
철두철미 자유로운 태도로서 적을 대하는 것이다. 그는 독서에 의하여 교양을
얻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또 즐거움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서적을 그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취급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취급하는 것이다. 서적은 그에게
있어 오직 출발점일뿐이고 자극제일뿐인 것이다. 그가 무엇을 읽고 있는가는
처음부터 그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인 것이다. 그가 그 어느 철학자의 저작을
읽는 것은 그 철학자를 믿기 때문도 그 주장에 따르기 위한 때문도 또 그 주장을
반박하거나 비평하거나 하기 때문도 아닌 것이다. 그가 그 어느 시인을 읽는
것이 다인에게 서계를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침 받기 위한 때문도 아닌 것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가를 해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완전히 어린이인 것이다. 그는 모든 것과 어울려 즐겁게 노는-그 점을 말한다면
모든 것과  즐겁게 논다는  것 만큼 생산적인 실속있는 행위는 없는 것이다. 이
독서가가 그 어느 서적 속에 어떤 아름다운 문귀, 어떤 슬기로운 지혜 어떤 참된
진리가 이야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는 그것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그것을
자기나름의 방법으로 이리 들어보고 저리 쑤셔보고 한다. 그는 훨씬 전부터
어떠한 진리도 그 반대의 것도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정신적
입장에서도 그것은 하나의 극이며 그와 똑같은 훌륭한 비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연상적인 생각방식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점에서는 그는 그대로 어린애인
것이다. 다만 어린애와 다른 것은 그밖의 여러 가지 일도 알고 있다는 점인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이 독서가라기 보다는 우리들 모두가 이 단계속에
들어갔을 때는 어떠한 것도 독서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는 것이다. 소설도
좋고 문법서적도 좋고 시간표도 좋고 인쇄소의 활자견본도 좋다. 우리들이
공상과 연상능력이 충분히 고조되어 있을 때는 우리들은 종이 위에 쓰여진
글자나 글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서 오는 자극과 착상과의 흐름속을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극과 착상은 그 책의 본문에서 오는 수도 있고
단순히 활자에서 오는 수도 있을 것이다. 신문의 광고도 계시의 사단이 되는
수가 있다. 전혀 취할 것이 없는 데데한 글귀에서도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긍정적인 사상을 점지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즉 하잘 것 없는 그 문귀를 이리
비틀어보고 저리 비틀어보고 하면서 모자이크 놀이를 하듯이 그 한자 한자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이 상태에 있으면  붉은 모자의 갓난아기 의 동화를
우주개벽론이나 철학서 같은 내용으로 바꾸어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는 한창
향기를 풍겨내는 꽃과 같은 에로틱한 문학으로서도 읽을 수도 있다. 또
궐련상자에 인쇄된(Co-rado maduro)라는 글을 읽고, 그 말 철자, 그 여운 같은
것과 쌍이 되어 즐겁게 놀며 머리속에 있는 지식이나 추억이나 사색의 몇백배나
되는 세계를 편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대하여 이런 항의가 날아 든다. -그것도 독서라 할 수 있는 가,
괴테의 일페이지를 괴테의 의도나 의견에는 아랑곳 없이 광고나 우연스런 활자와
활자자 뒤얽힌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읽고 있는 인간을 독서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대가 제 3의 최고라고 말하고 있는 독서의 단계는 보다 낮은 것보다
무리한 것이 아닐까. 그러한 독서가에 있어서는 헬다린의 음악성도, 헤에다우의
정열도, 스탕달의 의지도 섹스피어의 위대함도 무나 다름없는 것인가고. 이
이론은 당연하다. 제 3의 단계의 독서가는 이미 독서가 아닌 것이다. 영속적으로
이 단계에 속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침내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융단의 무늬도 돌담장의 돌의 쌓임새도 그에게는 모두 깊은
의미를 가지고 문자가 나열되어 있는 최선최미의 페이지와 전혀 마찬가지로
귀중한 것이 될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 들고 있는 한 권의 서적은 알페벳의
문자가 이어지고 있는 한 장의 종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최후의 단계의 독서가는 이미 독서가가 아닌 것이다. 그는 괴테를
경멸하면서 휘파람을 분다. 그는 섹스피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최후의 단계의
독서가는 이미 독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서적이란 무엇인가. 그는 세계
전체를 자신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래 계속해서 이 단계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무 책도 읽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아무도 영속적으로는 이 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 단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정도가 낮은 미숙한
독서인인 것이다. 그 사람은 세계의 모든 시작, 모든 철학은 그 자신의 내부에도
있다. 그리고 최대의 시인도 우리들 모든 사람이 가슴에 지니고 있는 그것과
같은 샘에서 영감을 길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한 생에 단
한번, 한 시간만, 하루만, 이 제 3의 단계 즉 독서하지 않는 독서의 단계에
서보라. 그렇게 하면 그대는 그뒤(기기에서 되돌아오기는 지극히 쉬운 일이다)
보다 훌륭한 독서가 즉 쓰여진 모든 것을 곧이곧대로 이해하는 좋은  듣는 사람
, 해석자가 될 것이다. 길가의 돌멩이가, 그대에게 대하여 괴테나
톨스토이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단계에 단 한번이라도 설 수가 있다면
그대는 그러고부터 이후 괴테나 톨스토이나 모두 시인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어떤
때보다도 무한히 많은 가치, 수액과 꿀 생명과 그대 자신에의 긍정을 끌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괴테의 작품이 괴테의 것이 아니고
도스토에프스키의 재권이 도스토에프스키 그 자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의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각양각색의 소리, 각양각색의 뜻에 가득찬
세계를 자신이라는 중심 지점에서 서적속에 주박하려고 하는 그의 어설픈 끝내
목적에 도달할 수 없는 시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한번이라도 산보 때 그대의 마음에 일어난 사소한 사상의 흐름, 또는 그편이
보다 용이한 것 같이 생각될 것이기도 하지마는 뭐든지 단순한 밤에 꾼 꿈을
분명히 규명하도록 해보라, 그대는 이러한 꿈을 꾸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먼저 그가 가진 스틱으로 그대를 위협하고 그리고서 손바닥을 뒤엎듯이 태도를
돌변하여 그대에게 훈장을 주더라고, 그런데 그가 누구였을까, 그대는 머리를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할 것이다. 그대는 그 사람의 모습에서 그대의 위인이나
그대의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 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다른 점이
있다. 그리고 그 인물이 치켜올린 스틱의 손잡이는 그대에게 그때의 그 스틱을
상기케 한다. 그대가 학생시절 처음으로 도보여행을 했을 때의 스틱을 그리고
기천 기만의 기억이 그대의 머리속에 쇄도해 올 것이다. 그기고 만일 그대가 그
단순한 꿈의 내용을 분명히 하고 그리고 그것을 종이에 기록해 두려고 하면 가령
속기로 기록해 둔다 해도 아니면 메모에 가까운 단어를 적어두는 것 만으로서도
훈장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대는 한권의 책을 완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니 때에 따라서는 두 권이든 열권이든 왜냐하면 이 꿈은 그대가 그대의
영혼속을 들여다 보는 구멍이며 그리고 영혼의 알멩이란 것은 곧 세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실로, 그것은 그대가 탄생해서 지금까지
호로매스에서부터 하인리만까지, 붉은 모자로서 베그르손까지의 전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꿈을 기록해두고자 하는 그대의 마음이 그 꿈속에 포괄되는
전세계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 밖에 표현할 수가 있을 만큼은 작가의 작품, 그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 의 제 2부를 뒤적여, 많은 학자나 문예 애호가가 이미 거의
백년이란 세월에 걸쳐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해왔다. 더할나위 없는 훌륭한 것,
어리석은 것, 심원한 것, 천박한 것, 가지각색의 해석이 출현되었다. 그러나
비단  파우스트  뿐만 아니라, 모든 문예작품에는 표면으로는 그다지 평가받지
않고 있지마는 내부에 은밀히 이 이름 붙이기 어려운 다의성, 새로운 심리학이
말하는  상징의 소규정성 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무한의 풍요성, 설명할 길이
없음을 단 한번도 인식한 일이 없을뿐더러, 그대는 모든 시인이나 사상가를 바늘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판국이 되어 일소부분을 전체로 오인한 나머지 표면조차도
잘 보이지 않는 해석을 믿게 되고 말 것이다.
말할 것도 없겠지마는 독서가가 이 3개의 단계를 이리저리 유보하는 태도는 모든
사람에 있어 모든 영역에 있어 가능하다. 이 3개의 입장, 그리고 천에 이른
중간의 입장을 그대는 건축이나 회하나 동물학이나 역사에 대하여 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단계는 항상
독사가라는 그대의 이름을 말살하려고 할 것이다. 문학 예술, 세계역사를
해체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를 어슴푸레하나마 알지 못하면 그대는
모든 서적, 학문, 예술은 언제나 학생이 문법서를 읽듯이 읽는데 끝나고 말
것이다.
우정론

@김진만
@보나르
김진만(1926--)
우정론
저자 소개
영문학자, 교수,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문리대 졸업. 영국으로 유학,
명문옥스포드대학에서 수학했다.
1957년부터 성균관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고, 61년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옮겨, 현재 재직중이다.
성공회 교리학원장을 역임하면서 1970년 공동성서 번역위원으로 활약하고,
1974년 한미협회부회장을 역임했다.
작품으로는  어글리코리언 , 수필집  켄터베리의 일기  외에 많은 번역서가
있다.
우정론

우정과 연정은 다른가
우정과 연정은 어떻게 다를까? 동성간의 사랑을 우정이라고 하고, 이성간의
그것을 연정이라고 할까? 이성간에는 우정이란 싹틀 수 없는 것일까? 또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면에 있어서 연정과 같은 내용이ㅡ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소위 동성애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성의
구별이 문제될 수 없고, 그 속에 섹스가 개재할 여지가 없는, 이를테면 신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생각해야 옳을까? 국가나 주의에 대한 사랑과
연정이나 우정의 차이는 결국 무엇일까?
그러나 우리는 연정과 우정을 구별하고, 프랑스인들은  아무우르 와  아미티에
를 구별한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이 서로 느끼는 이 두가지 감정의 차이는 결코
분명치 않다. 동성애라는 것이 분명히 있고, 그 당사자들은 이성사이에
이루어지는 연정보다 동성애가 오히려 더 청순하고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두가지의 구별은 성별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두가지 감정이 반드시 어떤 특정한 개인만을 상댈 하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우리의 생활관습에 있어서는 신.국가.모교.동포.인류.이데올로기 등
형이상학적 존재나, 기관.제도 또는 인간의 집단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감정이
발동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연인과 우인을 구별하며,
영어나 불어에도 이에 대응하는 두 개의 명사가 있다. 그러나, 우인과 연인끼리
느끼는 감정을 표시하는 말이  좋아한다 와  사랑한다 , 또는  라이크 와  러브
로 각각 다르게 쓰인다고 생각하면 속단이다. 좋아하거나  라이크 하지 않는
대상을 사랑 또는  러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보통 우리가
연인이라고 부르지 않는 대상, 즉 앞에서 든 형이상학적인 존재나 추상적인 것
또는 자식이나 양친 등도 사랑하고  러브 한다.
결국 연정이니 우정이니 할 때의  정 이란 무엇일까? 연인에0 대한 사랑만을
연정이라고 하고 그 이외의 대상에 대한 사랑을 애정이라고 고쳐 불러보 
연정.애정.우정의 구별이 좀처럼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감정에는 부인할 수 없는 공통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까?

애정과 증오는 인간의 본능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오고가는 감정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애정과 증오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 사이의 애정이나 증오는 인간과 인간 아닌 다른
대상에까지도 미칠 수 있다. 여기서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는
나르시시즘  곧 자기애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그리고 애정과 증오의
관계를 당사자들 사이의 상호접근과 상호 배제의 현상이라고 극히 상식적으로
규정해 보자.
서로 미워하는 사이의 거리를 되도록 멀리 하려 하고 그것이 어떤 극에 이르면
미워하는 대상을 영구적으로 없애버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서로 사이의 거리를 되도록 가까이 하려 하고, 그것이 어떤 시점에 이르면 두
당사자의 일치를 노리게 된다. 연정과 애정과 우정의 세 가지에 공통하는 요소의
하나는, 분명히 궁극에 가서 사랑하는 양자의 일치를 갈구하는 상호 접근의
욕구이고 과정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란 물론 그와 같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대상을 두고
동시에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러브 해이트 라는 말이
표시하듯이, 같은 대상을 동시에 미워하고 또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실상 우리의 마음 가운데 미워하는 정이
추호도 발동하지 않고, 오직 사랑하는 열정만으로 대할 수 있는 대상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반성해 보면 재미있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해서, 또는 애인이라고 해서, 하루 스물 네시간 동안
끊임없이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만은 아니다. 다만 사랑하는 마음이, 곧 그를
가까이 하려는 욕구가 때때로 우러나는 미움이나 배제욕을 압도할 따름이다.

오는 정에 가는 정
그러나 과연 연정.애정.우정의 세 가지 정 사이의 공통 요인이 상호간에
접근하려는 욕구나 과정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 정은 속담에 있듯이,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 식의 교감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실제의 일상생활에서 같은 질과 같은 강도의 정이 오고 가서 이루어지는,
이를테면 이상적인 애정의 교류보다는 질과 강도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균형이
잡히지 않는 관계를 더 많이 보고, 또 가는 정은 있되 오는 정은 없는 일방적인
관계 역시 수없이 많이 본다.
신이나 국가에 바치는 지성이 그렇다. 있는 정을 다 바쳐도 신이나 국가로부터
따로 기대할 정이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모정과 그 정을 받는 자식이
제어미에게 느끼는 정 사이에는 흔히 큰 차이가 있다. 연애의 경우  짝사랑
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관계도 흔히 있다. 사실 연정이든 애정이든 우정이든
간에, 정이란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오는 정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 세가지 정의 공통 요소를
타산이 전개되지 않는 애정이라고 고쳐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대상이 나를 생각하거나 또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정이 서로
사이에 오가면 좋겠지만, 되돌아올 정이 없어도 정을 주지 않고 배기지 못하는
것, 극단적인 경우에는 대상이 나를 미워하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도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않을 수 없는 정이 연정과 애정과 우정에 공통하는 특징이다.
이것은 일종의 이기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세가지 정이 다 같이 대상의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의 희생을 달게 받는 용의를 내포하고 있고, 그러한 희생
역시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이기심의 소치라고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우정은 아름다운 자애
사랑하는 자가 스스로 지원하고 나서는 희생이 때로는 대상이 구태여 원치 않은
것이거나, 또 때로는 대상에게 오히려 불행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보면, 우리가 무의식 중에 느끼는 연정.애정.우정의 정은 실상
대상의 반을 고려하지 않는, 또는 고려할 여지가 없는 자기 욕구의 충족을
바라는 하나의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그 이기심은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자신의 희생을 지원하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보다는 사랑하는 대상의 행복과 이익을 갈구하는 점이
특이할 따름이다.
 아무우르 고  아미티에 고 간에, 그것이 결국  아무우르 프로프르 , 즉 자애로
귀일 한다고 하면,  라 로쉬코프  공류의  아포리즘 이 되고 만다. 그것이
자애인 것은 틀림없으나, 그 자애가 남이 아니라 나의 희생을 자원하고 감수하는
감정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면 일종의 감상론된다. 그 세 가지 정이 모두
인간의 미흡한 자신을 완성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라고 하면 그럴 듯하게 들리는
형이상학적 관찰이다.
설명이야 어떻든 간에 연정이라든지 모든 종류의 애정이라든지 그리고 우정 등이
극히 아름다운 자애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또 이 세 가지 정이 모두 우리로
하여금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감정이요, 또 생 자체로 보더라도 보람있는
내용이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죽마고우는 추억의 샘터
친구란 어느 시절에 사귄 친구가 가장 정다울까? 우리가 친구를 사귀는 동기나
계제에는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의 교우의
경력은 그가 세상에 나서 자란 다음, 사회생활을 영위하다 죽을 때까지 몇
단계의 시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어릴 때, 국민학교 때, 중학교 때,
대학시절, 그리고 20대, 30대, 40대, 이후 따위로 구분해서 범상한 한 인간의
교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어느 시절에 사귄 친구에게 가장 강한 우정을
느낄 수 있을까?
친구란 현재 사귀고 있는 친구보다는 옛 친구가 더욱 정답고, 오랜 세월을 두고
사귄 친구에게 더욱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성인에게는 죽마고우가
가장 정다운 친구일 수 있다. 죽마고우는 추억의 샘터요, 고향의 상징이다.
그리고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 있어서나 그것은 민요와 가곡의 소재이다.
갓난아기가 커서 제 발로 문턱을 넘나들 수 있게 되면 동무가 생긴다. 소꿉장난
상대를 찾아서 집 안팎을 부리나케 드나든다. 미처  세속 의 명리에 물들지 않은
동심의 세계-그 속에도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즐기는 사귐이 있다. 더욱 그
사귐이 목가적인 전원을 배경으로 하고 이루어질 때, 성인들의 안목으로 보면 그
속에 낭만이 있고 아득한 추억이 있다.

벗없는 이방의 땅에서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화하며 도시화라는 현상은 사람들로부터 전원과
함께 낭만을, 그리고 고향을 앗아간 듯이 보인다. 우리가 찾는 마음의 고향은,
일찍이 등진 또는 도시에서 낳아서 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가보지 못한 시골에
있고 전원에 있다. 그러나 그 전원이 차차 사라져 가고 있고, 고향이 사라져
가고 있고, 또 고향에서 사귄 죽마고우가 없어져 가고 있다.
어릴 때 같이 놀던 동무들이 없는 고향이란 찾을 보람이 없는 이방이다. 도시의
골목길에서 사귄 동무란 있고, 뒷동산과 시냇물과 논두렁을 함께 즐긴 동무를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고향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왜냐 하면 고향에서 같이 놀던
동무들과 그들에 얽힌 추억은 영원히 그 고향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지만, 도시의 골목길에서 사귄 소꿉 친구란 일정한 정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는 동심의 세계는 서라벌의 신화와 같은 하나의 상념의
세계가 되어버렸고, 죽마 고우 역시 그저 아름답기만할 뿐 붙들고 더불어 정을
나누기 어려운 허구가 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나만의 감상일까.

개구쟁이들의 교우
그러나 동심의 세계에서의 동무의 사귐이 마냥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것은
아니다. 도시의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에게도 인간 관계에 있어서
공통적인 심리라고 할 수 있는 선택 작용은 있다. 어린이들이 사귐을 틀 때는
사회적 명리나 성의 구별이나 더욱이 계급의식 같은 것은 작용되지 않는다. 미의
추구라는 예술적 본능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리.골목.유치원 따위의 생활 터전을 바탕으로 하는 어린이들 사이의
교제에도 선택은 있다. 보다 큰 흥미와 즐거움을 위해서 연령.체격 그리고
성향의 일치를 추구한다. 또 자기 보호의 본능에 따라 자기에게 육체적인 또는
정신적인 해를 끼칠만한 상대는 이를 피한다. 그래서  왈패 의 그룹이 생기고,
개구쟁이 떼가 있고, 이들의 위압에 눌려서 안마당이나 대청으로 몰려 다니는
얌전한 아이들의 사귐이 생긴다.
성인의 사귐에서 작용하는 것과 결국 같은 여러 가지 심리가 어린이들의
사귐에도 나타난다. 친해지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미워하는 사이가 있고, 물욕이
껴들고 거짓말과 모함의 가능성도 있게 된다. 그러나 어린이들의 사귐은, 흔히
뜻있는 우정의 경지에까지 이르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사귈 상대의 선택에 있어서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성인들이  마련해주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정도가 크기 때문이다. 죽마 고우가 다만 감상적인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치지 않고 보람있는 교우의 상대가 되려면, 오랜 세월에 걸친
지속적인 사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 어느때인가는 스스로의 성숙한
판단력과 의지에 의한 선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든 후에야 참다운 우정이
우정이란 분명히 발전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우정은 서로가 자아를
의식할 수 있을 정도의  소피스티케이션 을 요구한다. 다시 말하면, 철이 든
후에야 비로소 뜻있는 우정이 싹틀 수 있고, 철이 난 이후의 사귐만이 실속있는
우정으로 발전될 수 있다. 우정이란 서로  허물없이  사귀는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각자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러한  허물 을 의식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판단력을 갖추어야 비로소 맺어질 수 있고, 또 그렇게 맺어진
교우라야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 다음은 우리의 기억력의 허실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활 터전을 달리하고,
오랫 동안 만나지 못한 어린 시절의 동무에게 어떤 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동무를 그리워하기보다는 그와 더불어 놀던, 이젠 사라진 환경과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름은 물론 얼굴의 윤곽마저 잊은 옛동무가 우정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러한 동무와는,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나서  구정을 새로이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마음과 마음을 시멘트하는 비밀
국민학교 시절의 동무는 어떨까? 이 시절에 사귄 동무는 같이 숨박꼭질하던
동무들과는 달리 먼 훗날에까지 사귐이 지속될 가능성이 많다. 지적인 자아가
어렴풋이 싹트기 시작하는 시기가 이 때이고, 국민학교를 마칠 무렵이면
사춘기의 첫문에 이르기도 한다. 그리하여 교실에서 또는 통학길에서, 또는
중학교의 선택에서 앞날의 동지를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사귄 동무와는 교리에서 생애를 크게 좌우할 영향을 받는 일은
드물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중요한 요소를
배우기에는 이 시기라고 하여 결코 이른 것은 아니다. 즉 사귀는 동무와의
사귐에서 단순한 재미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귐을 귀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는 서로 마음을 허락한 동무 사이에서만
공개되고 또 지켜지는 비밀이 쌓인다.
서양 중세의 말에  비밀을 지킬 줄 모르는 자는 사랑할 수 없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당시의 이성간의 사랑, 특히  로멘스 에 나오는 사랑이 흔히는
사련이었기 때문에 비밀을 지킨다는 것이 생명의 보전과 직접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우정은 물론, 모든 종류의 애정에는 사랑하는
당사자 끼리만 알고 지키는 비밀의 추적이 수반된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남이 알까 두려워할 아무런 비밀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그런
사람이란 현실적으로 있을 수도 없거니와-누구하고도 깊은 정을 맺을 수 없고
맺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실은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굳게 약속한 사이에  시멘트 의 역할을 하는 것이,
둘이만 아는 또는 친구들 끼리만 아는 비밀이라고 할수 있다. 그 비밀을 타인이
아는 것을 힘을 모아 막아내는 동안 우정이 깊어지고 또 유지된다. 그 비밀이
어느 한쪽이나 양쪽에 의해서 천하에 공개되는 날, 그 사귐은 파탄에 이르고
우정은 산산조각이 난다. 국민학교 아동들이 가지는 비밀이 그다지 심각한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국민학교 아동이라고 해서 그러한 비밀이 없을 수는 없다.

장벽 없는 우정을
생존경쟁이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되는 오늘날의 한국, 특히 한국의 도시에서
국민학교 시절부터 교우의 선택에 사회적인 계급의식이 가미되고 있다는 사실은
극히 중요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민학교 아동들이 맺는 우정이
생활수준이나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러한 우정은 더욱 오랜 세월에
걸쳐서 유지될 공산이 큰 반면, 그 우정은 사회적으로 배타적인 것으로 발전될
가능성도 큰 것이다.
급속한 도시화로 말미암아 어린 시절의 교우에서 낭만이 사라져가는 한
머리에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교우가 국민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면 그
결과는 과연 어떨까? 우정이 사회적 계층의 장벽을 뚫고 맺어지기 어려운 것은
어느 사회에서든지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국민학교 시절부터 사회적 계층이
어린이들의 사귐에 대한 장벽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정은 결국 서로
가까이 알고 이해하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물리적 또는 정신적인 생활
터전을 같이하는 친구뿐 아니라  이름도 낯도 모른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쳐야
하는 것이다.
좁은 뜰을 가진 집에서나
그리고 이 지상 어느 곳에서도
 삶 의 뜻을 높여보자는 사람들이
허다할 것을 느낄 때
이름도 낯도 모르는
피부색마저 달리하는 벗들이 모여
내 가슴 속에는
아담한 소우주를 이룬다.
   이상용-사우

이것은 대단한  소피스티케이션 의 경지이다. 그러나 결국 우정이란 이와 같은
경지에까지 승화됨 직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의 멸리에 물들지도 않고, 동심
이외의 아무 것으로부터도 제약받지 않는 동심의 세계에서 사귐의 훈련을 쌓은
사람들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륜의 붕우유신이란
우애라는 것은 원래 형제 사이의 사랑을 말하고, 혈육을 나누지 않은 친구끼리의
사귐은 붕우의 그것이다. 우애와 우정이란 결국 같은 질의 정리일 것이다.
그러나 남남끼리의 우정이 형제 사이의 우애보다 오히려 더 큰 강도를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주의의 테두리 속에서 권장되는 우애가 진정한 애정으로
발전하기 어려운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하나는 상하.장유의
계서의 질서가 엄격히 지켜져야 하는 것과, 장자 상속이라는 제도로 말미암아
재물의 분배를 에워싸고 비정이 반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우정을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는 계서의 질서가 사실상 필요 없다. 우애나 부자애가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식의 계서적 애정이라면, 우정이란
횡적.평면적으로 작용하는 애정이기 때문이다.
오륜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비단 봉건 중국의 형이상학일뿐아니라,
이조말까지의 우리 나라 권력구조의 이론적 기반이던 유교라는 이름의
형이상학의 한 큰 대목이었고, 또 오늘날에도 그 유습과 집념이 우리 주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군신.부자.부부.장유 그리고 붕우의
질서가 그것이다. 군신 사이에는 의를, 부자 사이에는 친을, 부부 사이에는
별을, 장유 사이에는 서를, 그리고 붕우 사이에는 신을 강조했다.
이 다섯 가지 중에서 맨 나중의 붕우의 관계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관계는,
실상 엄격한상하 계서의 관계이고, 붕우의 그것만이 그 질서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붕우 사이에는 장유의 질서마저 어느 정도 누그러져서 열살 내외의
연령 차이로는 사람들이 서로 벗으로 대하고 허물없는  농 을 하며 사귈 수
있었다. 엄격한 계서 질서에 얽매어 살아야 하고, 위로 공격과 충성을 바쳐야
하고, 아래로 복종과 권위를 강요하는 일사불란의 사회생활의 구조에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한 하나의 탈출구가 마련되어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허물 없는
친구끼리의 사귐 이었다.

전통사회에서의 교우
계서 질서에서의 해방은 곧 인간적인 친밀도를 크게 더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군신의 사이는 말할 것도 없고 효공이라는 어려운 덕목이 요구되는 부자 사이와,
어버이와 자식 사이면서도 상하 계서가 그다지 까다롭게 들먹여지지 않는 모자의
사이를 비교해보면 계서 질서와 인간관계의 친밀도의 비례를 짐작할 수 있다.
부부유별이라고 해서 남녀의 기능의 차이를 엄격히 구별했을 뿐 아니라, 여자의
남자에 대한 예속을 전제로 한 오륜의 통제 하에서는 부부 사이의 허물없는
교정이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규제에서 빚어지는 욕구불만을 해결하는 방도와 탈출구의 역할을
할 제도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으니, 그것이 곧 관기제.공창제,축첩제였다.
관기와 창녀와 여첩과의 사귐에서 남자는 부부유별을 위시한 오륜의 굴레를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전통사회에서는 결혼을 통해서 또는
결혼밖에서의 남녀간의 사귐은 적어도 남성의 견지에서 보아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며, 그 동기에 있어서도 반드시 진지한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남성 사이의
사귐은 비단 계서 질서에서 해방된 허물 없는 인간관계로서 귀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교우란 한 선비의  커리어 에도 큰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극히 중요한
일로 생각되었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 오니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냐 는 말은  논어 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공자가  벗 이라고 한 것은 죽마지우를 가리킨
것도 아니고 인생 향로에서 우연히 사귄 친구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붕 이란
이름 높은 스승을 따라 그의 그늘 아래서 함께 공부하는 학우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벗을 사귀는 기회가 반드시 같은 스승이 베푸는 배움터에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스승 밑에서의 강습이 끝난 다음, 조정에 출사해서
비로소 알게 된 동료 중에서도 친구를 발견할 수 있고 야에서 인생의 반려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배움터에서 맺어지는 교우
그러나 종래의 중국이나 한국의 전통사회는 양반 출신의 선비들이 좌우하는
사회였고, 선비가 관록을 얻는 유일한 길은 나라가 베푸는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서 학습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고, 그 사업이
시작되는 곳이 서당이요, 학원이었다. 서당이며 학원은 지적 생활의
시발점이었고, 또 붕우가 모여 서로 강습하는 도장이었고, 장차 오랜 세월을
두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죽마지우의 사교장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배움터를 거점으로 해서 맺어지는 교우관계는 사실은 전통적
사회에서만 볼 수 있었던 사라진 풍습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또 문명된 어느
나라에도 살아 있는 유풍이다. 동창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동문이라는 것도 또한
같은 것이다. 동창과 동문은 단순히 같은 배움터에서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죽마지우 못지 않게 정다운 우의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동창이며 동문 사이의 교제에도 장유의 구별은 있을 수 있고, 선배와 후배라는
말로 구분되는 일종의 계서 질서도 있다. 그래서 동기 동창이라는 것이 있고,
동기 동창이라야 비로소 허물 없는 교우가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동창이나 동문 사이는 다소의 나이 차이가 있더라도 가장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붕우의 그것이고 보면 그 속에 장유의 계서니 하는 것이 개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맹자의 교우훈
 맹자 에 만장이 맹자에게 벗을 사귀는 도리를 물은 구절이 있다. 그 물음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붕우 사이의 사귐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설파한 것으로
오늘날에도 그것이 진리임에는 변함이 없다.

나이 많은 것을 개재시키고 말고, 존귀한 세도를 개재시키지 말고, 형제의 힘을
개재시키고 말고 벗을 사귀어야 한다. 벗 사귀는 것이란 그의 덕을 벗으로
사귀는 것이므로 그 사이에 개재시키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한 배움터에서 배출된 붕우들의 사귐이 서로의 덕을 벗삼기보다는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서 붕당을 만드는 경향은 옛날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다.
동창회니 하는 것이 서로 사이의 친목을 위한 모임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일종의 압력단체로 변하는 예를 우리는 흔히 보고 듣고 있다. 친구가 역경에
있을 때 서로 돕고 서로 의지 한다는 것은 관중과 포숙의 고사 이래로 떳떳한
일이요, 그렇다고 덕을 벗삼아야 한다는 맹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실로 보람있는 우정은 부귀와 유복속에서 움트기보다는 곤궁과 역경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꽃핀다.
그러나 붕우의 사귐이 조직을 갖게 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세력이
생긴다면 거기엔 맹자가 교우에 개재시켜서는 안된다고 가르침 거의 모든 해독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특히 그 모임이 어떤 특권적인 배경을 이루는 경우, 개인과
개인 사이의 순정의 사귐을 돕기보다는 사회악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족히
짐작할 수 있다.

스쿨보이 네트워크
 파블릭 스쿨 의 동창들이 그와 같은 압력단체를 이루어서 부조리한 특권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역사가 5, 6백년에 달하고, 동창
중에서 나라의 재상이 수십명이나오고, 각료회의를 소집하고 보면 각료의
대다수가, 가령 똑 같은  이이튼  고등학교의 타이틀 매고 나와 앉는 경우, 그
학교의 붕우들이 휘둘를 수 있는 세력이란 막대할 수 있고, 맹자의 이른바 덕을
벗삼는 도의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이튼  동문이라고 해서 그 전부가 특권층의 자제들만은 아니다. 그리고
대다수 특권층의 자제들 사이에 낀 가난한 집안의 자제의 학교생활은 자못
불행할 수도 있다. 미천한 식민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서 장학금으로  이이튼
을 다니,  1984년 이라는 소설의 저자 (조오지 오우웰)은  이이튼 과  이이튼
에서의 생활을 증오했다. 그는 그곳에선 명목상의 붕우를 가졌을 뿐, 진실로
허물없는 우정을 나눌 참된 벗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에서는 이와같은 특권적인 붕우들의 모임과 조직을  스쿨보이 네트워크 라고
해서 비난하고 비웃는 풍습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남의 나라의 일일까.
붕당의 전통이 있어서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맹자의 교우훈이 아랑곳 없는 붕우들의 사회적
조직이 더욱 성해가는 느낌이 없지 않다. 거기엔 교우에는 금물인 장유의 질서를
개재시키는 선후배의 관념이 있다. 이것은 필경 일본사람들로부터 배운 폐습이고
우리들의 조상들은 몰랐던 것이리라. 이러고 보면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와
주어도 별반 반갑지 않는 서글픈 세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홍안의 문화인들
나는 어릴 때부터 허약했고 두드러진 의지력도 없었다. 그러기에 더욱 친구와의
사귐을 원했고, 언제나 나를 도와주고 나를 반겨주는 벗이 있었다. 나는 어릴
때에는 곧잘 울음보를 터뜨리는 약질인 데다가, 신경은 남달리 날카로와서 잘
토라지고, 잘 삐뚤어지곤 하는 어이없는 소년이었다. 그런 데도 나에게는 언제나
다정한 벗이 있었고, 나는 나를 감싸주고 나를 아껴주는 벗들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동무들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은 것이
기이하다면 기이하다. 실상 아무 것도 기이할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벗이란
그저 좋아하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자아의식이
형성되어 그 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벗을 구하고 벗에게 접근하는 노력을
해야만 비로소 뜻있는 우정이 움틀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벗을 구하고
그는 노력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벗과 더불어 하는 노력일 때, 그 우정에
보람이 생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나의 전 생애를 통해서 지워질 수 없는
마음의 흔적을 남길 때, 나의 벗은 나의 진실한 반려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벗 몇 사람을 중학시절에 얻었다. 그들을 빼놓은 나머지 동급생이며
같은 시기에 같은 교문을 드나든 수없이 많은 동창이란,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남이었다. 나는 그들과 중학 5년 동안을 줄곧 같이 붙어 다녔다. 우리들의
거의 배타적인 교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학년 중간쯤서부터였다.
우리들은 모두가 국내외의 소설을 서로 다투어 읽었고,  와끼 니  하이꾸 니
하는 일본의 정형시를 즐겨 지었다. 함께 거리로 몰려 다니면서 제법 격식 바른
식당을 찾아,  나이프 와  포크 를 놀려대는 것이 취미요 자랑이기도 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엄청난 문화인이었다. 문화소년의 경지는 쉽사리 가시고,
우리는 하숙을 자택으로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고전음악을 듣고, 합창을 하고
또  모짜르크 며  베에토벤 의 레코오드를 모으기 시작했다. 실상 우리들
사이에는 네 것과 내 것이 구별이 없었고, 밤을 세워가며 부풀대로 부푼 회로를
이야기했다.

칸트와 더불어 인생을 담론
우리들은 문화인인 동시에 우리들의 사귐에서 그리고 우리가 함께 지내는 많은
시간에서, 도 우리 함께 읽는 책에서, 함께 듣고 노래하는 음악에서, 무궁무진한
미를 추구하고 공감하는 낭만주의자들이었다.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의
비밀이있었다. 학교에서 정규학과로 과하는 수학이며 물리며 하는 학교 공부의
성적이 영점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서로 걱정하면서도, 그러한 학교 공부보다는
더욱 보람있고, 더욱 아름답고 깊이 있는 교양을 우리가 공유 한다는 의식이
우리들만의 커다란 비밀이었다. 이 비밀은 대단히 감미로왔다.
우리는 곧잘 학교를 쉬면서 교련이니 검도니 하는 야만스러운 고역을 함께
피했다. 겨울철 가장 추운 날씨가 계속되는 한 주일 동안, 이른 아침에 있는
검도 연습 때에는 집이나 하숙에서 천연스럽게 나와서 효자동 가는 길 모통이에
있던 설렁탕 집에 가서 아침을 연습이 끝날 무렵 도장에 기어 들어가곤 했다.
그러한 어머어머한 불량성이 우리의 또 다른 비밀의 하나였다.
우리는 어느덧 그림자 같이 함께 붙어 다니는 사이일 뿐 아니라, 식성과 교양과
사고방식과 감수성까지 거의 일치하는 우리 자신들을 발견하곤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우리는 어떤 교사나 책이나 음악을 똑같이 사랑했고, 또는 똑같이
증오하곤 했다. 그러다가 3학년 후반부터는 모두가  괴테 와  칸트 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점 좋은 상급학교에 갈 수 있는 수재나 우등생의 처지와
우리들 사이의 차이를 함께 느끼게 되었고, 그럴수록 우리들 자신은 더욱
문화적으로, 철학적으로 줄달음쳤다.
우리는 분명히 실패한 중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실패를 함께
나누어 가지는 벗이 있어서 슬프지 않았고, 우리가 귀하게 여기던 교양과 철학과
미의 추구하는 안목으로 볼 때 수재와 우등생에 대한 우리 자신의 우월을 또한
함께 느끼는 용기가 생겼다.

신의를 생명처럼
그러다가 우리가 4학년에 진급한 어느 때, 우리의 우정을 보증하는 신의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한 계기가 생겼다. 내가 평소에 그다지 가깝게 지나지
않던 한 친구로부터 단파수신기를 만들어 받은 것이다. 처음에는 나 혼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영어 방송이며,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내오는 우리말 방송을
들었다. 1943년의 일이었으니, 교양과 문화를 함께 하는 벗들에게조차 함부로
털어놓을 수 없는 무서운 반역 행위였다.
그러나 나는 나 혼자의 비밀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값싼 보급형
라디오를 개조한 엉성한  세트 에서 흘러나오는 이방의 소리가 너무나도
신기했을 뿐 아니라, 나 혼자 지키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비밀이었다. 한 달쯤
지난 다음에 나는 그 무서운 범행을 벗들에게 고백했다. 철이 들대로 든
우리들은 사태의 중대함을 함께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말없이 나와 함께
이불 속에 기어들어 그 수신기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나의 공범자가 되어 주었고,
우리들만이 아는 그 비밀은 끝내 지켜졌다. 우리들의 우정에는 비장한 신의가
있었다.
우리는 중학시절 5년동안 성 문제를 크게 걱정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다소의
염문은 있었다. 나는 우연히 같은 기차를 타고 서울서 대전까지 가는 동안에
사귄 여학생에게 주려고  모짜르트 를 한 장 사들고 그가 살던 기숙사 근처를
여러번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P에게는 국민학교 때부터 사귀어 오던  리이베 가
있었다. J는 졸업할 무렵 도서관에서 본 여학생을 그의 집까지 따라가서
보기좋게 거절당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 어는 것도 이루어지지 못한
에피소오드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웃음과 농담과 서로 야유하는 기회를 주었을
뿐 그로 인해서 우리의 우정은 조금도 금가지 않았다.

사람은 가고 추억만 남아
우리는 졸업하자 각기 헤어졌다. J는 함경도 제 집으로 돌아갔고, P는 서울에
남았고, 나는 일본에 갔다. 해방 후 J는 영영 보지 못했다. 그리고 P는 6.25
동란 때 소식이 없어졌다. J와는 5년 동안, P와는 7, 8년 동안 즐긴 우리의
우정의 결말은 이토록 서글프기만 했다. 그러나 그 우정을 되새기지 않고 나는
나의 중학시절을 생각할 수 없다. 그들과의 사귐이 나의 중학시절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들과 사귀지 않았던들 오늘의 나는 크게 다른 인간이 되었을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의 교우를 세상 아무 것과도 바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중학시절의 나의 벗들을 생각할 때 나의 마음은 아마도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 벗들과, 또 그들과 함께 지낸 시간과 시간들을 더듬으며 헛되이
아득한 추억만을 어루만지고 있지는 않는다. 왜냐 하면 그들과 그들과의 사귐은
오늘의 내 자신 속에 너무나도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게 된
나의 중학 생활은 분명히 나의 성공이었다.

우정은 청순한 것
인간과 인간 사이에 주고 받는 많은 정 가운데서 어떤 것이 가장 귀하고 가장
청순한 것이냐 하는 것을 모색한 사람들은 동양에도 있었고 서양에도 있었다.
그것이 우정이라고 굳게 믿었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로마의  키케로 와
프랑스의  몽테뉴 였다.  키케로 에게는  우정에 관하여 라는 대화체의 글이
있고,  몽테뉴 에게는 꼭 같은 제목의 유명한 수필이 있다.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사회의 완성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요결은 우정이다. 왜냐 하면 쾌략이나
이득, 공공의 이익이나 개인의 이익이 만들어 내고, 또 그것을 위해 유지되는
모든 인간 관계는 우정보다 그만큼 덜 아름답고 덜 고귀하다. 우정 이외의 다른
동기와 의도를 우정에 개재시키면 우정은 그만큼 덜해지는 것이다.
이 말은 맹자의 교우훈을 연상시키는 명언이다. 그리고  몽테뉴 는 인간이 맺는
다른 모든 애정의 관계는 진실한 우정을 따르지 못다고 설파했다. 맹자의
가르침을 연상시켜 주는말은  키케로 에게도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우정이란 유덕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는 명언이다.
벗이란 덕을 벗삼는 것이라고 한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덕없는 상대를
구해서 사귀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덕있는 상대를 구한다는 것은
반드시 쉬운 일이 아니고, 또 교우 관계는 그러한 선택능력이 생기기 전에도
맺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선택을 그르쳐서, 소위 악우에 휩쓸린 탓으로 행복보다는 불행을 맛보는 예를
우리는 많이 보고 또 경계한다. 또 덕이 무엇이냐 하는 것도 결코 명백하지
않다. 결국 진실로 보람있는 우정에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사귐의 상대를
구하려면,  나 자신이 선해야 하고, 그 다음에 나와 같은 사람을 구하면 된다 는
 키케로 의 말이 제일 알기 쉬운 명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서
키케로 의 이른바  정과 애착을 수반하는 감정의 완전한 일치 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정엔 꾸밈이 없다
우정엔 거짓이나 가식이 있을 수 없고, 우정에 속하는 모든 것은 진지하고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키케로 의 신념이었다. 가장 진지하고 자발적인
교우란 붕우애만이 작용하는 관계, 붕우애만을 추구하는 관계에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키케로 가 설파하고  몽테뉴 가 부연한, 우정에 관한 가장 슬기로운
발견은  양자의 사귐이 나이를 더할수록 강화되고 성숙해지는 것만을 우정이라고
할 수 있다 는 말이다. 성격이 형성되고 인품이 성숙한 다음에 맺어진 우정만을
우정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이외의 것, 즉 우리가 흔히
교우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나 편의에 의해서 맺어지는 친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진신한 우정으로 맺어진 두 사람은 그들을 연결지은 유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맺어진다. 누가 나보고 왜 그를 사랑하는가하고 굳이 물음녀
그가 그였고 나는 나였기에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진실한 우정을
낳는다는 것은  몽테뉴 의 말이다.  몽테뉴 는 어디선가 우정을 이야기 하다가
숙명에 언급한 적이 있다. 자아가 눈을 뜨고 이성으로 마음놓고 어울리고
마음을 허락할 수 있는  선한 자신과 같은 대상을 선택하였을 경우에도, 결국
우정이란 숙명이 지어주는 인연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로 인해서 자기의 생애나  커어리 가 크게 영향받는 교우의 경우, 벗의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는 교육의 영향에 못지 않게 결정적일 수 없다는 것은 흔히
우리의 경험이 입증해 주는 바이다. 우정이 지니고 있는 숙명성이 서로 사귀는
벗의 덕과 선을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이끌어 가도록 보장해 주는 것은
벗 서로 서로가 언제나 허심탄회한 태도로 서로를 충고하고, 서로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서 가능하다. 그래서  키케로 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기에 충고를 주고 받고 하는 것이 진정한 우정의 특징이며, 충고하는 편은
자유로이 그러나 온순하게 충고의 의무를 이행하고, 받는 편은 인내심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진실로 맹목적인 숭배나 아첨보다 우정을 더 그르치는 해독은
없다.

벗은 덕으로 사귀어야
우정은 두 벗 사이에서, 기껏해서 서너 사람의 벗 사이에서 맺어지는 것이기에
더욱 귀하다는 것이  몽테뉴 의 의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흔히 동지애라는
말로 부르는 우정 이외의 다른 동기나 의도로 맺어진 사귐을 생각해 본다.
사귐이 같은 직업이나 취미로 트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고, 어떤 사업이나
이데오로기를 같이 함으로써 맺어지는 우정도 흔히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사귐에서 그 사귐을 트게 한 공통의 관심사가 소멸되면 그 사귐도 따라서
해소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다.
그러나 덕과 선의 상호인식으로부터 시작해서 오직 우정만을 추구하는 벗끼리의
사귐과 동질의 우정이, 공통의 관심사가 소멸한 후에까지 유지되는 경우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학시절에 맺는 우정의 대부분은 이러한 것이다. 그리고
실생활은 경험은, 범인이 바랄수 있는 우정이란  키케로 나  몽테뉴 의 이를테면
순수한 우정보다 이와 같이 순수하지 못한 인연에서 비롯하여 마침내 순수한
우정으로 발전하는 우정이 더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죽마고우나
중학시절에 맺은 우정이 더욱 오랜 세월에 걸쳐서 유지되고 즐겨질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키케로 의  우정론 은  랠리우스 와  아프리카누스  사이의 깊은 우정,
이를테면 서양의 관포지교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특히  랠리우스 의 입을
통해서 진실한 우정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웅변은 여전히 큰 진리를 담고 있다.
 나는  아프리카누스 로부터 무엇을 원했는가? 아무 것도 없다. 그가 나에게
바란 것은 무엇인가?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그의 뛰어난 덕성을 보고
그를 사랑했고, 그 역시 나의 성품을 귀하게 여겨 나를 아껴준 것이리라. 그렇게
해서 우리 둘 사이의 사귐은 날이 갈수록 더욱 굳어졌다. 애정과 정다운 정은
유덕의 증거가 명백할 때 인간의 본성이 주어주는 것이며, 덕을 갖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가까이 다가서고 그 덕을 사랑하며, 그로해서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의 우의와 성품을 즐기고, 또 그에 보답하려 한다. 편의가 주어준
우정은 그 편의가 사라지면 곧 무산하고 만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우정은 영구이 변치 않는 것이다.
보나르(BONNARCL 1883--1968)
우정론
저자 소개(시인, 평론가)
불란서 쁘와띠애에서 출생 신문기자를 거쳐 작가와 평론가로 활약함.
2차 대전당시 친독 비시정부의 문교상을 지냇고, 전후대독협력자로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음 독일과 스페인으로 망명 1932년 프랑세스 아카데미회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44년 제명됨.
저서로는  어린시절   우정론  정치평론집 등 다수가 있다.
우정론

습관과 동맹관계
공통적인 것은 오직 이름뿐이라는 점에서 우정도 역시 모든 위대한 감정과 같다
하겠다. 보통 우정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은 습관이나 동맹에 지나지 않는다.
대개의 인간은 별로 사랑하는 일 없이도 지낼 수 있긴 하나 그들은 혼자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며 따라서 그 위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면 누가
자기를 그 위험에서 보호해 줄 것인가 올바르게 판단해 본다는 것 등은 그들에게
있어서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다. 명 사람의 인간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철저한 에고이스트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 몇사람인가를 자기의
에고이즘 속에 넣어 자못 그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감정을 분명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표현되는 것을 관찰하면 족할 것이다.
이를테면 가을의 한때를 한 친구와 늘 지냈는데 그 친구가 모임에 늦기라도 하면
원망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당사자는 10월에는 조바심을 하고
기다리면서 8월달에는 그 친구와 만나는 일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무렵에는 그가 딴 일로 몹시 바빴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자기네의
생활과 가까웠던 사람의 죽음에서 느끼는 서글픔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기
습관이 무너져 나간 것에 멍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이 사라져간 데
대한 탄식보다도 자기의 시간의 공허를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친구가
언제나 그와 같이 스스럼 없고, 만만하고 또 그토록 환영받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형성지울 수 있는 모든 관계 속에서 이와 같이 습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이토록 진정한 선택이 극히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는
관계란 없는 것이다. 하긴 가령 우리가 그러한 친구를 그토록의 호의를 갖고
대하는 것도 그들이 우리에게 우리들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 보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견유주의
모든 우정의 대부분은 그들의 의지에 속한다 하기 보다는 나태의 결과라 하겠다.
더없는 다종다양한 사정이 그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없었던들 우리가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되는 인간이 우리를
존경하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그 때문에 우리에 대한 어느 권리를 손에 넣을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를 선택해 준 인간을 택하지 않기 위해서는 또한
자기를 특별 취급하려고 하는 인간을 별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의 자유와 독립이 필요한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와 같은
모든 우발적인 우정이 굳건히 되고, 마침내는 우리들 자신에게도 그것이
처음에는 우연히 지배되어 생긴 것이라는 것이 잊혀지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습관만이 아니라, 이해 관계에 의해서도 긴밀해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일에 종사하고 있어서 여러 장해에 걸려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똑같은 곤란에 부딪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은연중에 장차 자기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인간을 돕게 되는 것이다. 손해를 본다고 느껴지면 즉각 계약을
취소할 심산으로 저쪽에서 받는 친절과 이쪽에서는 주는 친절을 살짝, 그리고
면밀히 계산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거래라고 불리는 것이다.
간혹 만나는 두 사람이 서로가 상대방을 탐색하고 저쪽에서 자기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이모 저모로 계산하면서 상대방의 뱃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모습을 관찰하는 것처럼 흥미있는 것은 없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거래가
성립되면 밝은 곳에 나와서 자못 우정의 깃발을 쳐든다. 아마도 이런 경우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는 편이 보다 솔직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유주의는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대담한
마음과 명석한 정신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맛보고 있는 감정의 성질을 자기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으나 이러한 과오는 다만 허영심이 거기에 작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의 과오를 판별할 만큼 예민하지 못한데 일어나는 것이다.

자유로운 우정
대개의 경우 그들의 감정은 착오를 허용할 만큼 막연한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이젠 홀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만족감이나, 그러대로 괜찮은 교우 관계를 맺고
있다는 허영심이나, 나아가서는 거기에서 어떠한 이익이라도 얻을 수 있다는
희망 등이 그들 마음속에 우정이라고 믿게끔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사실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기가 가장 믿음직한 동맹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대단히 좋은 친구라는 것을 증며하고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다. 협약을
맺고 잇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무엇엔가 공격당하기라도 하면 즉시로 도와 주려
하고 있는 힘음 다하여 보라는 듯이 지켜 준다. 그러나 이것을 더욱 세밀히
관찰해 보면 이와 같이 함으로써 어떤 크나큰 이익을 머리에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토록 눈부시게 사람 눈에 띄도록 행동하는 것은 다만 자기가
지켜주고 보호해 준 인간에 그러한 소문을 들려 주고 싶었던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장차 그 은혜를 받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열성적으로 나오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국외자들도 이런 든든한
협력자가 자기네들에게도 있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게 할 수도 있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동맹자의 수효가 늘면 자기가 계획하고 있는 여러 가지
야심적인 계획에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 더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진정한 우정이란 공리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두사람의 친구가 서로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친구를 긍지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재산을 다
써 버린다거나 또한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경우일지라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곧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뿐이랴, 완전한 우정은 도움을 받은 측에 대해서도 똑같이 그러한 모든 일을
잊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것을 모리 속에 담고 있는 것은 훌륭한
애정 속에 있는 가장 중대한 과오 즉 취미상의 과오를 저지르게 되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친구들이 서로가 베푸는 자유로운 향연에 있어서는
고마운 생각까지도 어딘지 예의에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을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가까워진 사이는 습관의 느슨한 사슬로 이어져 있고
동맹을 맺은 사람들에 있어 서는 이해의 가는 새끼줄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우정에 의해서 가까워진 사람들 사이에는 계약도 없을 것이며 약속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같이 있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우정은 서로 주고 받은 일체의
마음씨에는 아랑곳 없고 다만 그들이 만나게 된 사실에 유쾌할 뿐이다. 다른
일체의 일들은 모두가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참된 벗의 발견
사실상, 우정이란 우리가 그 성질을 분명하게 가려내고 결정적으로 선택한 한
사람의 인간을 절대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 원칙에서 보더라도 이러한
감정에 맞는 인간은 거의 없음을 알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거의 비슷한
것이다. 편리하다든가, 유리하다든가 하는 선택 이유가 없는 고르려 해도 무엇
하나 이유가 발견 되지 않을 만큼 사람과 만날 때는 그만큼 더욱 편리함이나
유리한 것에 기인하여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성질을
식별하거나 가려 내는 일 보다는 그의 지위를 생각한다. 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좌를 보게 된다. 따라서 비록 초라한 인간일지라도 훌륭한 대좌에 앉아
있으며 한층 돋보이게 뵈는 것이다. 그토록 사람들이 말하는 영혼의 고독도
그들을 괴롭히지는 않는다. 사막에라도가지 않는 이상, 그들은 자기를
고독하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친구를 원하기엔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진정한 우정을 떠치받고 있는 화강암의 토대는 이와 반대로 사람들의 성질
사이에 있는 놀라우리 만큼 큰 상위와 불균형을 한시도 잊지 않고 깊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박애주의자나 인간 혐오자도 우정에 적합하지는 않다. 전자는 너무
쉽사리 사람을 믿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후자는 사람을 사귀는 데 너무 딱딱하고
서투르다. 전자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후자는 상대 여하를 막론하고
거부한다. 위대한 우정이란 함은 인간성에 있어서의 귀족주의적인 관념에
유래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총체를 하나의 피라밋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래쪽은 거친 금속으로 되어 있으나 피라밋이 끝나는 꼭대기를 금과
다이아몬드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그 재료는 면이 작으면 작을수록 귀중해
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하고도 인간이 싫어지지 않았다는 사람, 경험을
쌓는데 따라 신뢰하는 마음이 더해 갔다는 사람, 대중 속에서 몇 사람의 위대한
영혼이나 멋있는 정신이나 매혹적인 심정이 곳곳이 흩어져 있음을 믿고 또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우정에
적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벗을 발견한다는 것은 흔하디 흔한 사람들
속에서 좀체로 없는 사람들의 대표자를 발견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들에 있어서 이 이상의 행복은 있을 수 없으며 이
이상 중요한 것도 또한 없을 것이다.

우정과 사회적 관계
모든 진정한 우정은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을 자기 자신의 생활을 넘어서
자신의 생활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까지 높인다. 친구끼리 모여서 아무리
이야기하여도 싫증이 안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지적인 생활만이 우정에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보다는 꽃피우기 위하여 풍부함을 주는 것이다. 범상한
사람도 한패나 동맹자나 또는 공범자가 될 수 는 있다. 단순한 인간도 형제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친구가 되는 것은 오직 교양있는 인간뿐일 것이다. 교양없는
인간은 현재에만 종속되어 있어서 언제나 모든 것이 환경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교양있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넘어선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결코 오직 하나만의 때와 장소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근심이나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이 이상 더 견디지 못하게 될
때에도 일찍이 그와 비슷한 비탄을 경험한 바 있는 시의 한귀절이나 현인의
반성어를 생각해 내기만 하면 어느덧 그는 마음이 가라 앉고 비탄을 극복할 수
있게 되며 자칫하면 마음 산란해질뻔했던 일에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되는 것이다. 교양있는 친구끼리 모여 있을 때는 그야말로 속사를 초월한
대귀족이라 하겠다. 이들은 서로가 마음을 터 놓으려고 자기 자신의 일만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으며 전혀 개인적인 일이 아닌 문제만을 이야기하고는 마치
마음속의 모든 것을 털어놓은 일이 아닌 문제만을 이야기하고는 마치 마음속의
모든 것을 털어놓은 양 흐뭇한 감정을 안고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신상 문제를
이야기한들 그것은 불행을 털어 놓는 것밖에는 안된다. 오래도록 이야기를 주고
받은 끝에 그들은 반성하게되고 무언가 잠언을 외기도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경험을 멀리서 바라보고 마치 전망이 좋은 곳에서 자리를 같이 하게 된
여행자들이 자기네가 걸어온 길이나, 겨우 넘어 온 협곡이나 어려웠던 강들은
신기한 마음으로 새삼스레 바라보는 것과 같이 자기의 비탄이나 괴로움,
나아가서는 실패한 일들까지도 이 평화로운 관측소에서 서로가 돌이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친구라는 것은 세속적인 것에는 전혀 무관심할지 모르나 우정은
뛰어난 사회에서만이 꽃 필 수 있는 것이다. 즉, 우정은 그러한 사회의 인간성을
측정하고 그 정점에   으로 장식하는 것이다. 여성이 유럽 전체에서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주어진 그와 같은 중요성을 미쳐 몰랐을 때에는 우정이란
남성의 크나큰 정열에 지나지 않는 다고 종종 말하여 왔었다. 이러한 의견에는
진실한 점도 있으며 몇 가지의 예, 그 중에서도 고대 사람의 예를 들어 지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정에 그 역량을 보인 것이다. 그 후 우리는 숭고한
맺어짐이라는 관념을 연애에 옮겨 그 때문에 이 관념은 그것이 연애에서 발견한
몇 개의 요소와 뒤섞이어 많은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페르샤나 인디아와 같이 아라비아인들 사이에서도 연애와 우정이 대립되는
발달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반대로 여성의 지배권이 그것에 의해서 하등의
이득을 보는 것도 아닌데, 남자끼리의 훌륭한 우정은 그 수가 적어진 것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개의 감정은 같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는 발전하기
어렵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높은 우정이라 함은 가장 고귀한 사회에
있어서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지 않을까. 특히
아시아에서는 전역에 걸쳐서 세련된 우정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중국처럼 그것이 섬세한 것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횝다도 더욱
개화하였던 이 사회에서는 내심의 혈연으로 맺어졌던 사람들이 때로는 지극히
판이한 외관을 보이기도 했었다. 즉 어떤 사람은 인심도야의 구감으로서 황제의
측근에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은 불기의 시인으로서 백성과 함께 주정에서 술을
즐기기도 했다. 때에 따라서는 또한 그 지위 관계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정우와 선택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 그 총애를 잃고 초야에 파묻히게 되는가하면 또 반면
황제의 총애가 천부의 재능이 있는 시인에게 쏠려 그를 음주 방탕한 생활에서
구출하여 궁정 제일의 지위에 올려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두 친구들은
서로가 이와 같은 외견상의 변동조차도 신경을 쓰는 것을 꺼려 하였다. 도시
그런 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헤어져서 지내게 될 때에는 시작을
교환하고, 그 시작은, 마치 나르는 새와 같이 제국의 광대한 하늘을 스치고
지났다. 또한 재회하는 날에는 서로가 초청을 하여 꽃을 감상하고 또는 절도와
통찰을 겸비한 소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인디아나 페르샤에는 이와 같은 교제가
존재하였다. 대신들은 박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하여 찾았다. 정복자는 한때
권력의 갑옷을 벗어 던지고 자기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계가 도대체 어떠한
것인가를 배우기 위하여 성현을 찾았다. 이와 같이 어떠한 나라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도 진정한 친구이며 교양있는 사회의 인사가 아닌 것은 없었다. 키케로의
서한이나 푸리니우스의 서한을, 혹은 옛적 프랑스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편지를 다시 읽어보아라. 또는 약 백년 전에 스탕달이 메리메나
마레스토와 교환했던 편지를 읽어도 좋다. 이들에서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특징을 찾아 보   수가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제각기의 운명을 넘어 자유로운
모임에서 서로 만나 자신이 해나간 것, 이겨온 것 등에 대하여 지성을
보임으로써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아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는
이와 같은 우정은 거기 성립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오늘의 사회에는 오직
하나의 계층만이 있는 것이다. 생각과 이애만이 가득 찬 계층에서는 두 사람이
마음으로부터의 공감을 느끼고 있을 때에도 보다 높은 모임의 장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덧 제각기 소속되어 있는 직무에 얽매어 있어 거의 몸을
바치다시피 하고 있다. 때로는 자기의 하는 일을 위에서 내려다 봄으로써 더욱
훌륭히 일을 수행할 수도 있는 것이련만 이미 그들은 그럴 여유를 상실한 것
같다. 이리하여 마침내는 꿀벌의 벌통이나 개미굴과도 같이 유유낙낙하게 일이
정해지는 사회에서 어느덧 여러 계층에 걸려 또다시 노예제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간혹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이란 단순한 교양 문제만도 아닌 것이다. 우선, 첫째로 시간적인 여유 즉
한가함이다. 한가함이란 휴식과는 완전히 그 뜻이 다르다, 휴식은 휴식일지라도
다른 어떠한 일보다도 사람 눈에 띄지 않는 미묘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만큼의
힘을 남긴 채 맞이하는 휴식의 시간인 것이다. 어떠한 일보다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미묘하다 하는 것은 그것이 무언가 우리와 관계없는 재료을
취급한다는 것은 아니고 우리들 자신을 완성하는 일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숨이 가쁘고 머리는 복잡하며 몹시 초조한 가운데 겨우 얼마간의
휴식을 얻고도 막상 한숨 좀 돌리려 할 때는 이미 완전히 지쳐 있어서 이때는
벌써 무언가 천한 것이나 속된 즐거움 밖에는 맛보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우정은 자기가 선택해낸 인간에 전달하는 무언가 내면적인 풍부함 같은 것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애정은 공허한 영혼 사이에 심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마치 나그네와도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대체 어찌하면    적을지라도 마음의 저축을 남길수가 있을 것인가?
남자도 여자도 대부분은 모두가 상점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도대체 무엇에 의해서 우정을 기를 수가 있을 것인가. 그들이
가장 친하다고 하는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직 세심한 주의로 말미암아 세상 눈에 띄이지 않으려 하는
비소함이나 누열 이외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사회가 퇴학 상태에 되돌아간다 해도 연애는 육체와 관련이 있는 이상은 존속할
것이다. 다만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 될 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정은 그 모습을 감출 것이다. 그리고는 그때도 역시 같은 습관을
맺어지고 같은 즐거움에 매어서 회합을 계속해 나가는 그룹은 있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의 애정도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인생은 괴롭고 힘들수록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되어 버린 여러 동맹도
무언가 형성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선택된 사람들이 없는 세계에는 이미 우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놀이 와 싸움
우선 첫째로, 우정은 그 가장 명료한 단계 즉 친구끼리 서로가 상대를 알아 내는
정신적인 활동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의 즐거움이란 서로가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저급한 우정에 의해서 맺어진 사람들의
의견이 대립하게 되면 이전과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 그들의 잘못된
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써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그들은 우정이 만들어 내는
사상의 향연 등은 상상조차도 못한다. 논쟁이란 그들에게 있어서는 제각기의
입장을 지키면서 주먹을 휘두르지 않으면 안되는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뿐이랴. 평범한 인간은 언제나 허영심을 들고 다니므로 그들이 모든 위대한
일의 문턱에서 거부당하는 것은 이 허영이라는 짐을 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반대하는 이견이 나오게 되면 체면을 손상당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제딴에는 친구라고 여겨 왔는데 이런 모욕을
받다니 참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다운 친구끼리인
경우에는 물론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우선 시초에 일치되어 있는 것이다.
즉 서로가 상대방의 반대의견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동일 단계에 속하는
정신인 것이며 그러기에 한층 더 반대의견을 주고 받을 수가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재치있게 반대자는 무미건조한 찬성자보다도 천 배나 더
좋고 귀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 대한 공격의 방법 그 자체의 의해서 그는 우리에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명확하고 집중적인 것으로 하려 한다. 또한 우리에게 일찍이 가지고 있던 이상의
사상을 갖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가 발견하는 가장 섬세하고 예민한 것은
그의 덕분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떻게 그에게 감사해야 좋을 것인가.
대개의 논쟁이 심한 오해에서 생기는 것이고 자칫하다가 끌려 가게 되는
것이라는 것도 생각하기엔 우선 혼자있이야 하는 것도 또한 진실인 것이다.
그들은 서로가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방에게 자기애정인 우월감을 갖는 일은
추호도 없다. 즉 진리를 구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놀이이며 즐거움인 것이다.
그런데 이 놀이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할 수가 있다. 어느 때에는 무수한
술책으로써 사상에 접근하려는 사냥인이며 극히 작은 소리에도 겁을 먹고
도망치는 사슴의 그 날씬하고도 화사한 모습을 갑자기 여실히 보이고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것이다. 또 어느 대에는 합주하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그때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논쟁은 4중주에 있어서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사이에 일어나는
미묘함과 같아서 올려 퍼지는 음의 건축에 하늘 높이 솟은 탑이나 뾰쭉뾰쭉 솟은
철탑을 덧붙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끝으로 간혹 가다가 그들은 서로가 거침없이
사양않고 덤벼드는 전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친구 사이에는
상처 받기 쉬운 감정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심없는 싸움이 가지는
즐거움은 더 할수 없이 생동하는 자기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상대방을
한칼로 자르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는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싸움이 끝나면, 그들 사이에에 모든 부상자들을 낫게
하고 죽은자를 소생시키는 불가사의한 효력의 향유를 가지는 기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 같은 마술사와 같이 우정이 이 싸움터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우정과 시대환경
이와 같이 철저하게 논쟁하는 것은 우정이 가지는 특권의 하나이다. 그뿐이랴.
이와 같은 대비에 의해서만이 살아 가는 우정조차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탕달의 메리메와의 우정이 바로 그런 것이였다. 그는 이 일에 대해서 지극히
분명한 의견의 상위처럼 멋진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위가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를 주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논쟁이
번져 나가는 범위는 당사자에게 교양이 있으면 있을수록 즉 자기의 관념과
정념과를 구별하는데 익숙해 있으면 있을수록 커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할나위 없이 자유로운 정신이라면 물론 모든 일에 대해서
논쟁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제의 들(그리이스, 로마 신화에서 신에게 사랑
받았던 사람들의 사후의 안식처로 되어 있는 들이다)에서의 죽은자의 즐거움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더할 수 없이 현명하여도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이와 같이 태연하게 평온한 마음으로 행동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친구 사이의 의견은 위기에 처해 있을 때보다 오히려 평온한 시기에 더 한층
상위한 것이 되는 것은 명백한 일이 아닌가. 질서가 잘 잡힌 사회에서는 정신은
현실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으므로 비록 아무리 중대한 일이
생길지라도 조용하고 기분 좋은 논쟁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당과 싸움의 결과가 사람들의 장래를 좌우하는 것 같은 어지러운 시기에서는
우리는 친구가 자기와 같은 편에 서서 싸워 주기를 바란다. 즉,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지러운 시대에서는 우정에 필요한 자유가 감소되고 지적 요소보다
감정적 요소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므로 우정은 타락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동맹에만 빠지게 된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의견에 다음과 같은 이론이 있을 수도 있다. 즉 질서가 잘된
시대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어떤 사상의 획일성을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된다.
이것은 그 시대에 지배적인 평화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데 반면 그렇지 못한
시대에서는 한편으로는 사회질서의 파괴를 가져 오면서도 한 번쯤은 모든 것을
문제 삼을 수 있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견해는 옳지 못하다고 나는 말하겠다. 모든 것이 안정된 사회가 그 모든 성원에
대해서 자신의 안정을 보증하는 원리에의 공정한 찬사를 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한 일이다. 그리고 나서 진정으로 정신생활에 알맞는 사람들은
일체의 이해를 떠나 자유롭게 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의사 대립
그리고 친구간에서는 그 의견의 불일치보다는 크나큰 대립이 더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마치 그들이 싸움을 하기엔 너무나 거리가 먼 두
국민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작은 불일치라면 서로가 엇갈리는 감정에 마음이
언잖고 이웃이면서도 반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순전히 지적인 논쟁은
영혼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곳에 머물 수 있는 것은 극히 적은 것이며 대개의
인간들은 이러한 논쟁에까지도 도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토론이 있는 곳에
구론이 따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나타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그들의 정신의 만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성격이 부딪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의견에 신경이 쓰일 때 우리는 언제나 부담없는 사상의 대립을
통하여 어느 기질이 자기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두 지성
사이에서 무수한 사물에 대해서 즐기는 기분도 이렇게 되면 이미 볼장은 다보는
셈이다. 모든 사람은 현재 자기가 존재한다는 거만으로 타인과는 양립할 수 없는
무엇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기 주장대로 이쪽이 모조리 상처를
받고 싸움이 걸려 왔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부류의 인간과 만나게 되어 상대방의 의견이 자기 의견과 대립이라도 되면
이렇게 의견이 안맞으니 상대방이 좋아질 수가 없다고 단정하게 되는데 옳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간혹 그가
이쪽과 같은 의견을 내세우기라도 하면 우리는 한층 더 신경이 쓰이기만 하고
그의 동의를 거부하게 되기 때문이다. 연인을 뺏기기 싫어하는 마음과 같이
우리는 사상도 뺏기는 것을 원치 않으며 더럽히는 것조차 허락치 않는다 즉
사람들은 의견이 반대되기 때문에 구론하는 것이 아니고, 구론할 수 있도록
반대의견을 품게 되는 것이다. 마음껏 해 댈 수만 있다면야 이유가 매우
서툴어도 그런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사상이 대립된 것 같이 보이나 사실상
대립되어 있는 것은 서로 간의 성격적인 반발인 것이다. 그러기에 사회에 커다란
위기가 닥쳐왔을 때, 그토록 신속히 몇 개의 당파가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여지껏의 친절함은 모두가 기만이었다. 가장 마음이 맞는 것 같은 사람들이나
무엇보다도 가장 결속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가족 속에 까지 발생하는 저 불화나
광열 상태야말로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때야말로 누구나를
막론하고 가면을 던져 버릴 수 이쓴ㄴ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며, 자기의 본능적인
감정을 사람 앞에서 털어 놓을 수도 있어 마음이 후련해 지는 것이다. 평소에
발산하지 못한 여러 가지의 정념을 안고 있느니만큼 더욱 더 심하게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말다툼 가운데도, 그들은 평소에 말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스광스런 것이 바로 여기에서 생기고 있다. 사제들은 입으로는
자비를 부르짖으면서 서로 상대를 짓밟고 학자들은 공정, 진리, 이성을
말하면서도 상대를 헐뜯고 비꼬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 본능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기네들에게도 역시 본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만큼 솔직한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해의 참모습
그러나 이해 관계에서의 경쟁이 얼마만큼 가차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참모습은 더욱 딴 데에 있는 것이다. 즉, 직접적인 이익을 구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해를 위한 경쟁처럼 탐욕적인 것은 아니다. 동시에 보다 더 필연적인
싸움-누구나 즐겨 끼어드는 것은 아니고, 오직 자기의 성질을 지키기 위하여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속에서 그것을 구하지 않으며 안된다. 이 성격적인
싸움이란 결코 승부가 지어질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친구의 참된 역할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됐다. 그들은 이해를 위한
싸움에서의 동맹자는 아니며 성격상의 싸움의 동맹자인 것이다. 그들은 인생을
우리와 다를지라도 우리는 곧 참고 이해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친구가 우리의
의견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의 의견에 따르든가 하면 이와 같은 지적인
엇갈림은 쉽게 해결될 수가 있고 따라서 그러한 것은 사람들의 성격 깊숙이까지
닿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커다란 문제에 관해서는 아주 자유롭게 의견을
내세울 수는 있어도 작은 일에는 친구와 일치되어야 함은 절대로 필요한 일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사람의 성격이란 뜻하지 않을 때 분명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므로 그럴 때 사람들 마음속 깊이 접할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인 경우에는 그 마음 속에 비단결 같음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친구의 한 사람이 철학이나, 예술 문제로 반대하게 되면 우리는 그와 즐거운
마음으로 토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인간이 가난한 사람에게 가혹하거나 여성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거나 손아래 사람에게 심하게 대하거나 하면 비록 우리에게는 있는 말을
다하여 친절하게 대해 준다 해도 이미 그러한 인간은 우리들의 종속에는 속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인간인 것이다.

감추어진 맛
우정은 정신적인 면에서 발전해 나간다 해도, 그것이 형성되어지는 것은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친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싸움을 하게
되는 데 그러면서도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있다. 그들이 정면으로 대하고
싸우는 곳은 그 우정이 가장 밝게 비추인 부분이긴 하나 한편 가장 좁은
부분임에는 변함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을 둘러싸고 그들이 일치되어 있는 모든
영역이 어둠 속에서 퍼져 있는 것이다. 서로의 본능의 유사점, 취미의 근사점
등은 적어도 지성상의 화합과 같은 만큼 우정에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재에 있어서는 정신에서 유래하는 것은 모두 빛나고 반짝이는 데 반하여
감수성에서 유래하는 것은 나타나지 않고 있으므로 그다지 명백하게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가장 추상적이며 감정의 색깔에 물들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자기네들의 토론 깊숙한 곳에 서로의 은밀한 친근성을 느끼지 않고
있다면 그토록 즐겁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은 역시 진실인 것이다. 친구지간의
회화라는 것은 거기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모든 사상에 의해서와 같이 감추어진
감정에 의해서도 무궁무진한 맛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비록 우리를
슬프게 하였던 것도 상대방에게 알림으로써 즐겁게 되지 않은 것은 없고, 교재가
그러한 것을 느끼지 않게 하는 그때 시대의 추악을 더불어 개탄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또한 친구와 함께 인간 혐오를 가장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책망받아 마땅한, 그러한 친구와 인간의 험담을 주고 받는 것도 역시 즐거운
일이다.
이와 같이 하여 이를데 없이 완전무결한 것이 되었을 때 우정이란 정신의 궁전에
있어서의 심정들의 향연인 것이다.
참된 우정은 지적인 교제밑에서 형성되는 것에 착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넘어서 계속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같은 유연에서
시작되어 같은 갈망에서 끝나는 것이다. 두 개의 감수성의 공감없이는 현실적인
우정은 존재하지 않으며 위대함에 대한 공통적인 숭경이 없이는 완전한 우정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정이라는 이 감정이 어떠한 조건의
것으로 자기 속에서 발전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의
내적생활의 풍부함과 관계가 있다. 사람이 육체를 지나고 있는 이상 언제나
애정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정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영혼이 얼마만큼
결정되어 성장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습관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둔해
지고 세상 일에만 마음이 쏠리고 있다면, 우리는 우연히 생긴 이윳에 만족하게
되고 우연히 생긴 이웃에 만족하게 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능력이 모두 고양되고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멀어졌을 때야말로 우리는 인간성을 그리워 하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에게서 또다시 인간성을 붙들어 보려고 한다. 친구란 고결한 반려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가 천성의 가장 드높은 표현에 다다르려는 것을 도우며 우리는
또한 그가 같은 목표에 달하는 것을 돕기도 한다. 자칫하면 홀로 되 우려가 있는
높이에서 진정한 벗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감정이 가지는 비극인 동시에
또한 아름다움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우정이란 단둘이서 고독의 이를데 없이
높은 공기를 호흡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우정의 영웅적인 즐거움을 보다 강하게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산정에 세워지는 천문대
우정을 분명하게 이해하기에는 여러 단계에서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온화한 것이 있는가 하면 열렬한 우정도 있는 것이다.
전자는 이 감정이 거칠 것 없이 태평스럽게 즐기고 있는 모습이며 이럴 때
우리는 이 우정을 맛보기에는 정신적 탁월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후자는
그것이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여기에는 평혼의 위대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이서 함께 인생을 논하는 친구는 고원을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다. 한편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 언제나 다시 없는
기쁨과 자랑을 느끼게 하는 친구란 같은 정상을 향하여 오르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것이다. 한편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즐기기 위하여 모인 것이며 다른
한편은 있음직한 일을 위하여 모이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야말로 가장 멋있는
우정의 모습이다. 이러한 친구는 우리가 어느 이상에 대해서 품고 있던 신회를
확신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더 없이 고결한 신념이라 할지라도 실제의 경험에서
그정당함을 증명하지 않는 한 거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것이 남아 있을 수
있다.
확실히 우리는 언제나 자기의 신념의 지주로서 위대한 인간들이 예술이나 역사
속에서 자신에 대해 남긴 확실한 증언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하여 빛나는 망령들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우리와 함께 나날이
평범한 생활 속에 있으면서도 현재 우리의 눈 앞에 있다는 것 만을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과 만나는 것과의 사이에는 크나큰 거리가 있는
것이다. 후에도 우리는 그의 눈초리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으며, 영혼과 육체의
쌍방이 그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하여 빛나는 망령들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우리와 함께 나날의
평범한 생활 속에 있으면서도 현재 우리의 눈 앞에 있다는 것 만으로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과 만나는 것과의 사이에는 크나큰 거리가 있는
것이다. 후에도 우리는 그의 눈초리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으며, 영혼과 육체의
쌍방이 그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진실로 뛰어난 것과 만나게 되면 그 후부터는 이미 어떠한 속된
것에도 속아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행복한 해후가 되어 그가
우리의 친구라도 된다면 그야말로 이보다 더한 행운은 없을 것이다. 뛰어난
인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은혜는 우리가 가지는 가장 sv은 것에
확고하게 결부될 것이다. 그러하여 우리는 자신의 성격이 변한 것 같이 생각되고
여지껏 생각해 온 것과는 반대로 우리들에게 가장 값싼 것 같은 것들이 가장
애매한 것으로 생각되며 허영심이나 완미함이나 에고이즘 등 우리들에게 가장
비천스럽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비참한 부분이 그 형체를 잃어가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의 삶은 자신의 절정에서 빛나며 저녁 때가 되면 거의 현실적인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희미하게 흐려 있던 산들의 정상이   색으로 혹은
히야신스색으로 물들고, 어둠 속에 파묻힌 풍경 속의 오직 견고하고 확고한
부분으로서 한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정에는 자신의 마음에
평소 충분한 양식을 제공하고 있는 영역을 넘어서 신의 은총을 주는 행복이 있는
것이다. 끝없는 신뢰의 기쁨이나 언제나 이해해 줄 것을 깊이 믿는 까닭에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다는 즐거움, 나아가서는 아무런 가식도 없는 생활의 도취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우정에는 한층 희귀한 특권이 있는 것이다.
즉, 모든 숭고한 것을 가깝게 하는 것이다. 이 우정의 부름에 거역할 만큼
위대한 것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친구와 만나게 되면 그들의 감정의 움직임은
정신생활에 있어서까지 유효하게 미치는 것이다. 즉 그들의 지성은 산정에
세워지는 천무대와도 같은 것이다. 구름 한 점 없는 것과 같이 그들의 주의 깊은
찬탄의 마음을 인간이라는 우주의 하늘에 빛나는 별들에게 향하게 하면 모든
천재들이 내려오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별들의 빛나는 세계
이와 같이 큰 행복을 위협하는 위험은 오직 하나가 있는데 그 위협은 측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 중에서 하나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뒤에 남게 되는 친구는 일찍이 잊고 있었던 사람들속에 다시 뛰어들어,
라.보에서(1530--63, 프랑스의 작가 몬테에느의 친구)의 사후의 몬테에느와 같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해매는 방랑의 생활을 보내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크나큰 불행도 그 우정도 주는 이익을 잃지는 않는
것이다. 친구를 잃은 것은 우리들의 즐거움을 파괴는 할망정 벗에 의해서 얻은
확신을 박탈하지는 않는 것이다. 뒤에 남게 된 우리에게 있어서 그는 역시 모든
것의 고귀한 증인인 것이다.
이와 같은 멋진 교재 앞에서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과의 자못 즐거운 듯한
교제만으로 만족학 있는 우정은 모두가 퇘색해 보인다. 분명히 대개의 경우
진정한 친구가 생기지 않더라도 몇 사람의 친구만 있으면 마치 형제가 없는 자가
  ㄴ형제라도 있는 것을 다행하게 생각하게 하는 것과 같이 우선은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도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가지는 가치와 매력도
무시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보통의 우정 속에도 그
우정 속에도 그 우정을 숭고하게 하는 효모는 항상 얼마 정도는 남아 있는
것이다. 다른 여러 사람들과 만나 더러워진 몸을 서로가 정결하게 하는 고아한
사람들은 비록 말로는 신중을 기한다 하더라도 이미 판가름하는 입장에 서
있으며, 그들은 모든 범속한 것에 청랑한 보복을 가하는 자들인 것이다.
어리석은 자 비뚤어진 자, 비굴한 자, 시기심 많은 자, 등 이러한 무리들은
그러한 일원으로서 허락하지 않는다.
친우들이란 아무리 신중을 기한다해도 그 모임은 언제나 별개의 인간성의 시작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잠재적인 신비성 없이는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있을 대 그들은 친구끼리 은근히
마음을 합해서 인간의 저속한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비록 아무리 자기를 회의적인 인간이락 생각학 있더라도 이미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는 한 함께 있는 것조   없었을 것이다. 모이기만 하면 그때부터 그들은
스스로가 생각할 것도 없이 인류가 만들어낼 가장 고귀한 사람들도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이어서 그들이 그 뛰어난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기에는 그저 단 하나의
아주 작은 암시 정도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들이 가장 냉정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또는 자기의 이성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어서 거의 영혼을 생각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때, 이럴 때 조차도 늘 친구들 간의 머리 위에는 별들의 빛나는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설 이야기하면서 때땔 그 별들의 세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우정의 별들에
에워싸여진 이 하늘이야말로 위대한 인간들인 것이다.

영혼의 갈망
우리들은 우정의 선택이 아무리 절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이제야 우리는 그것이
단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는 우리들의 모든 천성을
가지고 참가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하여 그중 몇 개의 부분은 은밀한
가운데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역시 표면적으로 내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진정한 친구는 서로의 숨겨진 유사점에서 가까워지는 가 하면 범용한
친구들은 표면적인 유사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가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기엔 하는 일이 같다거나 같은 종류의 취미를 내보이거나
가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견상의 유사가 때로는 반감만
자아내게 하는 데 반하여 상대방의 하나하나의 행동이 거의 자기와는
동떨어지게만 생각되는데 오히려 이들에게 한층 마음이 끌리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이런 경우 분명히 그들이 우리들의 마음에게 주는 공감에는 아무런
우연적인 원인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
알아야 한다. 다시 없이 단단하고 진실한 우정에 있을 수 있는 그 깊숙한 곳의
어떤 감정은 자기 혼자서는 도저히 완전하게 자기의 모습으로 되기가 힘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모습에 의해서 자신을 확대해 보려고 하는 영혼의 갈망인
것이다. 범용한 인간에게는 현재의 생활 이외의 생활은 상상조차도 못할 것이다.
이 현재의 생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취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친구를
자기와 비슷한 부류에서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상반된 결합
이와는 반대로 한 사람의 인간이 어느 정도의 내면적 풍부함에 도달하게 되면,
자기가 여지껏 해온 것은 모두가 자기의 모든 천성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 자기에게는 현재 단련하고 있는 여러 능력밑에 자기가 아직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몇 사람의 자기와 비슷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자질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그자신의 환상에 답하여 주는
것이 바로 친구의 인격인 것이다. 친구들 통해서 완전하게 되기도 한다. 그들은
소위 우리가 이행하지 못했던 모든 종류의 활동에 있어서 대표자인 동시에
대리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과 같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기가 현재 그러한 것과 그렇게 못했던 것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유연성과 향수에 의해서 벗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끝까지 사람과
떨어지지 않는 착각인 것이다. 학자에 있어서도 만약 그가 일의 노예에 불과한
인간이 아니라면 때로는 얼굴을 들어 하늘 높이 떠도는 한 줌의 구름에서 어떤
신비함을 바라보고 일의 공허함과 또한 쾌락의 공허함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탕아에게 있어서도 만약 편집적으로만 향락을 구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가지가지의 추억이 자신 속에서 떨어져 쌓인 장미와 같이 썩어가는
것에 지쳐 버려 조용히 쌓아가는 학구의 생활이 부럽게 되는 것이 아닐까.
평범한 인간이 당파적으로 맺어져 있는 것은 속되고 또한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재정가나 시인이나 정치가나 또는 군인이나 의사들은 제각기 특수한
경험의 일반적인 결과를 서로 전하여 가며 그것으로 서로가 성장해 갈 수 있으며
그것은 그것으로 자신들의 우수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친구가 됨으로써
대등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다시 한번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가장 풍부하고 또한 가장 흐뭇하기도 한 친구란 본질적인 유사를
향하여 하고 많은 상위점을 결합시키고 있는 듯한 우정이라 하겠다. 어디를 보나
상반되는 것 같은 두 사람이 결국에 가서 자기들이 형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어느 연극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오직 인자인 것이다.

결점에 대하여
친구의 성질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요구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어떤
종류의 요구인지 분명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친구에게 평범한 완전함
같은 것은 바라지 않는다. 진정한 우수함을 바라는 것이다. 적어도 바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좀 다르게 행동이라도 하게 되면
우리는 즉석해서 그의 본래의 성질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
사람의 인간을 이의적인 괴상함이나 우스꽝스렁움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중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그러한 불완전함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해서 올바르게 대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는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인간이 가지는 본질적인 것을 파악하고 그가 살아가고 있는
마당을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의 성격 맨 끝의 특성에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나중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무슨 일엔가
부딪치면 결점있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데 사실은 거기에는 몇 가지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잘 구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말은  보통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기보다 뛰어난 것들을 헐뜯는 일에 쓰이곤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오히려 보통 일반적인 사람에게 결여된 장점을 나타낼 때도 있는
것이다. 또한 때로는 특수하고 별난 태도를 말할 때도 있는데 그런 태도는
칭찬하기도 하고 또 비난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서 우리를
이끄는 어느 성격의 가장 날카로운 첨단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될 때에는 이
태도는 실로 매력있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어느 종류의
결점이 실로 그 인간의 전면적인 저급함을 보일 때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점을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런 경우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점을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런 경우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점을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런 경우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는 성질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가령 사람이 우리의 결점을
파악하여도 그것에 의해서 우리들 자체를 파악한다고 자랑할 수 없는 이상 몇
가지의 결점을 지나고 있다는 것은 그리 중대한 것은 아니다.

존경하는 우정
따라서 친구가 비록 어떠한 종류의 것이건 간에 남보다 뛰어났다고 생각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들의 선택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도덕적인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사람의 장점이
얼마만큼 빛나고 매혹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만약 그 사람이 도덕적 가치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데가 있지 않고는 벗이라고 할 수 없다고 공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요구처럼 훌륭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 뜻하는
바를 충분히 명백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선 첫째로 친구에게 그와
같은 견고한 미덕을 원하는 것은 우리들의 갈망이 고결한 것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것을 이용하고자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그들이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용감하며 충실하기만 하면 그만큼 우리가
그들을 결합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도덕에 대해서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것은 눈에 뛸 때마다 허영심을 상하게 하는 재능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매혹적인 재능으로 보면 마땅히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것 같은
예술가들은 그렇게 자주 그렇게 무궤도한 생활이나 그밖의 약점을 비난해 온
것도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까지 생각해온 바에는 우정이란
역시 존경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올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감정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도덕적 가치를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다든가 하는 것이다.
도덕상의 계층은 보통 사람들이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거기에는 등급이 따라서 올라 가는
사다리가 똑똑하게 눈에 띄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재능의 우수함 같은 것은
그들의 눈에는 언제난 어렴풋한 것들이고 따라서 사상이나 예술의 왕후보다는
미덕의 대좌의 성실함이 훨씬 상상하기 쉽다. 다만 한 가지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도덕상의 계층에 고집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즉, 거기에는 그들이
승진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는 것이다. 즉, 거기에는 그들이 승진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문자 그대로 범용한
인간이라는 것은 어떠한 영역에 있어서도 아무것도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보다는 월등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덕에 있어서는 진보할 수 있을지언정
가령 자신의 정신을 완성시키려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그들은 무엇하나 손에 넣으려 하지
않으면 성격 속에 있는 결점을 바로잡는 일에는 대단한 열심히나, 오성 속의
결점에는 차라리 단념해 버리고 평생 동안 지나게 된다. 성실한 정신에서는 어느
정도의 진보는 있을 수도 있으나 하나의 역사를 가지는 것은 위대한 정신뿐인
것이다.

도덕적인 미의 사랑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는 누구나가 지성에 의해서보다는 훨씬 더 성격에 의해서
정의되기 때문에 사람을 선택하는 데는 도덕적 고려에 종점을 두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은 일견 가장 타당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자세히 생각하면 진상은 다소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우리는 누구나가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제각기 모두가 분명하게 자기의 것인 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간혹 상대방이 주로 정신적으로 살아
가고 있다고 하면 그때는 이미 문제는 그의 성격이 아니고 그의 지성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직 그의 성격이 파악되는 것이다. 지성이라는 이 능력이 얼마나
비개인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의 느끼는 것 행동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해성
속에서 그라는 인물이 더욱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만약에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 인생에 대한 가지가게의 받아들이는 방법을 함께
느껴 왔다면 그리고 또한, 가지가지의 이질적인 계층이 얽히고 설켜 위대함이
때로는 무시되고 저열함이 또한 그토록 존경까지 받게 되는 이 광격을 상상하면
어떤 인간에게도 가치의 판단은 일정하지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한 사람에 대한 우리들의 우정은 만약 그 사람이 인간의 일반적 가치에 해당하는
능력에 진정한 우수함을 나타낸다면 충분히 근거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일반에 걸친 범용에 둘러 싸여서도 더욱 도덕적인 미의
진정한 기사 같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우정속의 도덕
그러나 또한 다시 없이 허약하고 더구나 보잘 것 없는 성격이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그의 모든 성질이 힘을 가지게 하는 정신적인 힘과 섬세함과 자유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도 하는 것이 아니F까. 오직 그들이 가지는
최악의 것이 그 최약의 것을 망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약점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할지 몰라도 그들의 탁월한점 또는 좀처럼 굴복하려 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매우 까다롭게 하는 것이다. 우정에 있어서 이와같이
나아가는 것은 도덕적인 문제를 경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더욱 자상히
이해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어떠한 영역의 것일지라도
도덕이라는 뼈대를 받치고 있지 않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격은
모든 일에 마음대로 작용할 수 있으나 정신은 어떠한 것에도 유혹되는 일 없이
독자의 생활을 펼치고 있는 인간은 그 점에 있어서는 역시 고귀한 사람인
것이며,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하나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한없는
난맥 상태에 있으면서도 일에 몰두할 때에는 오직 자기의 이상을 향하여
정진하는 예술가는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버지이기는 하나 금전을 위한 일이라면
적당히 일을 해치우는 예술가와 적어도 도덕적으로는 비슷한 것이다. 아니 그의
덕은 그의 중심부에 있으며 그의 본질적인 움직임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오히려
보다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정의 다양성
이와 같이 인간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이 닦여지고 깊어짐에 따라 우정의 선택
범위도 자연히 넓어지게 마련이다. 우정의 다양성은 우리들의 취미나 성질의
다양성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일도 있을 수 있다.
즉, 우리에게는 모두 친구나 되고 있는데 그들 서로간에는 친구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다종다양한 사람들을 우리들의 공감 속에 모아 놓는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운 영혼을 희구하는 것처럼 고귀한 것이 없다면 누구보다 월등히
뛰어나고 섬세하며 잡기 어려운 성질이 가지는 갖가지 가치에 대해서 비도덕적인
탄환 등으로 파괴하려 하는 것처럼 속악한 것은 없다는 것도 족히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서로가 양립가지 않는 것 같은 가치를 사람들로부터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또한 알수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풍부하고 깊은
경험에 의해서 우리들을 끌게 할 경우에 하나도 더럽혀지지 않는 결백을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을 굳이 지키려 하였다면 그는 그토록 많은 것을
배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다시 없는 유덕한 인물은 정의상 최단거리인
직선의 길을 가는 것이다. 최상으로 순수한 인간이 동시에 최상으로 풍성한
인간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느 인간이 그를 유혹하는 그 많은 것들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인생에 있어서의 그 많은 부름에 그토록 쉽사리 굴복하지
않았더라면 물속 깊이에서 올라오는 잠수부와 같이 우리들의 발치에 펼쳐져 있는
저 신기하고 흥미 깊은 보룸을 주어 모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도덕적 배려의 색깔에도 물들지 않은 어느 호의에서 일어난 우정을 맺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찬미하는 마음조차도 존경심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때는 존경 따위는 받을 것 같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은근히
존경심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기도 한다. 가장 올바른 도덕심을 지니고 있다
해서, 그가 누구보다도 매사에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행동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고아한 성질의 발견
형식주의자는 조잡한 과오를 피할 뿐이나, 항상 나무랄 데 없이 행동해 왔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무슨 일에 부딪쳤을 때 아주 고결하게 기사적으로
나오는 것을 왕왕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가 되는
경우에는 그들에 대한 신뢰는 다소 성질이 달라지기는 하나 역시 변함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인가 나쁜 짓은 하지 않는다고는 굳이 생각지
않더라도 추한 것은 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는 있다. 즉 각별히 세상 사람들의
비난으로부터 보호하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호의는 아무
때고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벗을 발견하기 위해서 인간들 속을 헤쳐
나아가는 그러한 탐험이 가지는 매력은 이런 경우 위험을 저지르는 것은 우리들
뿐이며 우리들에게 관계되는 탐구가 어디까지나 문제이므로 우리는 절대적으로
자유라는 점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최후의 심판과 같은 즐거움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그 원천, 근성, 본질
등의 관점에서 고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판가름한 다 하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만의 문제이므로 판가름이 허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음탕한 사람들에게까지도 좀체로 볼 수 없는 섬세한 인간을 찾아 보러 갈
수 있으며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영혼의 빈곤함을 덕행으로만 장식해 온 것 같은 인간을 경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외견상으로 보면, 어떤 종류의 연애와 마찬가지로 어느 우정에 있어서도
우리들이 일종의 미묘한 타락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연애에 있어서는 우리들의
즐거움이란 사실 타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반하여 우정의 경우에는
그 뒤에 숨어 있는 고아한 성질을 발견하는 것만이 언제나 문제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친구를 무엇보다도 특별한 마음의 명령과 각별한
선택에 의해서 특별히 골라 낸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마음에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들과 가장 가까운 우리의 것이며, 그들과
만나게 되면 그들에게 이끌리는 자기의 즐거움(기호)이 한층 더 진정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그들은 단순히 인간으로써 만이 아니고
어느 정도는 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천재의 향기, 말하자면 꽃과 같은 향내를 맡는것이라 하겠다.

우정의 기반
친구라는 것은 와전한 평등 가운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평등은 첫째로
그들이 만났을 때 서로간의 일체의 상위를 잊어 버리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정신이나 재능의 상위는 남게 되나 그런 경우도 그로 말미암아
방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네들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그들은 평등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세속적인 질서를 초월하고 있기는 하나 역시 거의 비슷한 계급
출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 따라서 애정이
방해되거나 하는 점은 없는 것이다. 잘 정돈된 사회에서는 모두가 자기의 지위를
받아들이는 데 따라서 그런 것은 잊어 버리게 되고 그 결과 허영심 따위가 눈떠
있지 않고 있는 만큼 자유로운 마음으로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사회가 가지는 가장 큰 잇점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정은 애정과는 다른
것이다. 저명한 옛사람으로서 그들의 노예와 친구가 되었던 예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 사이의 사회적인 상위는 극도로 큰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같은 지식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런 것쯤 무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습이나 교양이 결여되어 있을 때에는
그보다 훨씬 눈에 띄지 않는 사회적 상위라 할지라도 쉽사리 눈에 띄기 쉽고
우저의 발전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매우 오랜 문명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그 국민이 타락하고 있지 않는 한 그 본심 깊숙한 곳에 두드러질
정도로 세련은 되지 않았어도 이미 그곳에는 무엇하나도 조잡한 점이 없으며,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반드시 교양이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모르는 사리에
교양의 향기가 몸에 베어 있는 것같은 그러한 사람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는 두드러진 눈에 띄지 않는 신사라 할 수 있으며,
노점에서나마 일하고 있는 직공 역시 엄염한 명인인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인간을 더욱 완전한 교육을 받은 인간과 맺어주는 우정의 기반이야말로 고귀하고
견고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평등성은 양자가 다같이
이를데 없는 우정인 경우처럼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그에 못지 않게 진실한
것이기는 하다. 여기서, 한 쪽은, 변하지 않은 본래의 모습에 의해서 제각기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아마도 전자는 박식한 편일 것이고 반면 후자에 있어서는
전자보다 영지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등주의적인 사츄르느 제는 아니고,
이 진지하고 평온한 우정 속에서야 말로 사람들의 형제와도 같은 사랑이
느껴지는 것이다.

예외적인 우정
친구라는 것은 완전한 평등 가운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평등은 첫째로
그들이 만났을 때 서로간의 일체의 상위를 잊어 버리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정신이나 재능의 상위는 남게 되나 그런 경우도 그로 말미암아
방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네들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그들은 평등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세속적인 질서를 초월하고 있기는 하나 역시 거의 비슷한 계급
출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 따라서 애정이
방해되거나 하는 점은 없는 것이다. 잘 정돈된 사회에서는 모두가 자기의 지위를
받아들이는 데 따라서 그런 것은 잊어 버리게    그 결과 허영심 따위가 눈떠
있지 않고 있는 만큼 자유로운 마음으로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사회가 가지는 가장 큰 잇점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정은 애정과는 다른
것이다. 저명한 옛사람으로서 그들의 노예와 친구가 되었던 예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 사이의 사회적인 상위는 극도로 큰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같은 지식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런 것쯤 무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습이나 교양이 결여되어 있을 때에는
그보다도 훨씬 눈에 띄지 않는 사회적 상위라 할지라도 쉽사리 눈에 띄기 쉽고
우정은 발전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매우 오랜 문명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그 국민이 타락하고 있지 않는 한 그 본심 깊숙한 곳에 두드러질
정도로 세련은 되지 않았어도 이미 그곳에는 무엇 하나도 조자반 점이 없으며,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반드시 교양이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모르는 사이에
교양의 향기가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은 그러한 사람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는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 않는 신사라 할 수 있으며,
노점에서나마 일하고 있는 직공 역시 엄연한 명인인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인간을 더욱 완전한 교육을 받은 인간과 맺어주는 우정의 기반이야말로 고귀하고
견고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평등성은 양자가 다같이
이를데 없는 우정인 경우처럼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그에 못지 않게 진실한
것이기는 하다. 여기서, 한 쪽은 그가 이미 무엇인가 이루어진 모습에 따라서 또
다른 한 쪽은, 변하지 않은 본래의 모습에 의해서 제각기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아마도 전자는 박식한 편일 것이고 반면 후자에 있어서는 전자보다 영지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등주의적인 사츄르느 제는 아니고, 이 진지하고
평온한 우정 속에서야 말로 사람들의 형제와도 같은 사랑이 느껴지는 것이다.

예외적인 우정
우정은 대개의 경우, 이미 인생의 모든 것을 맛본 사람들에게서 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나 이것은 우정이 가지는 조건 그 자체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한다. 즉,
친구끼리 서로 존중하는 보물이란 경험이라고 하는 보물인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좀 주저하는 듯 하면서도 대담하게 나올 때가 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감정적으로 나오는 경우일지라도, 대개는 연애 기분을 맛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들의 우정은 극단적이기는 하나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며 아주
사소한 일로 친구와 경쟁 상대가 되기도 한다.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 우정이
맺어질 수 있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관계가 많지는 않으나 좀 예외적인
인간에 있어서는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기네들이 같은
종속에 tr하여 있다는 것 만이 중요할 뿐 연령의 차이 정도는 결국에 가서
우연한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성질이 중요하게 되면
될 수록 나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게 된다는 것을 또한 첨부할 필요가 있다.
성질이라는 것은 생애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의 단계를 일관하여 항상 변치 않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친구가 되기에 필요한 저 인간이나 사물의 지식에는
경험을 쌓는 힘이 있는 인간은 아주 일찍부터 쌓기 시작하고 있으나 그러한
능력이 없는 인간은 아주 일찍부터 쌓기 시작하고 있으나 그러한 능력이 없는
인간은 머리 하얗게 휠 때까지도 여전히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나이의 차이가 많은 우정에는 깊은 유연에 의해서 가까우지고 있는 친구
사이에 이해나 허영심의 경쟁이 잇을 수 없다는 잇점이 있는 것이다. 경쟁상대가
되지 않고 있으므로 그만큼 자유롭게 서로의 성질을 관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정과 연애의 다른점
옛날의 나그네는 평온한 마음으로 들길을 걸어가면서도 차츰 가까워지고 있는
산에 대해서 어딘지 다소의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길목에서
혹시도 적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하는 애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대목에 있어서도 좀 짖  은 독자가 있다면 필경 저자로
하여금 어떻게 피할 길 없는 곤궁에 빠뜨려서 즐거워할지도 모른다. 연애와
우정과의 비교 대조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나는 이 제목을 피하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하여 넘기는가 몹시 호기심을 가지고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실망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이 비교 대조에 있어서 우정
문제를 참되게 전달하려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연애의 힘이라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불어 넣는 여러 가지의 감정의 혼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연애 속에는 사람들이 언제나 내세우고 있는 보다
높은 요구와 이와는 좀 덜하지만 그래도 그에 못지 않는 강한 타락에의 요구가
있는 것이다. 즉, 확대시키지 못하면 차라지 자기를 파괴하고, 정상을 놓치면
반대로 심연을 구하며 평화를 끝내 알지 못했던 영혼은 반면 향락의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또한, 비록 일종의 파국에 의해서까지라도 생활의 범용을
타파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도 우리들을 얼마든지 우리들을 얼마든지
환혹시킬수 있는 것이다. 연애는 승화된 관념으로 우리를 이끌지 못할 때에는
반대로 타락의 관념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그것은 우리들 가운데에 있는 가장
고귀한 것과 가장 비천한 것에 고루고루 관계된다. 필설로 다하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뒤흔드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정은 오로지 우리들 속에 있는 보다 나은 부분을 향하여 이야기를
걸어 오는 것이다. 오직 고귀하기만 한 연애에는 오히려 언젠가는 낡고 빈곤한
것이 되어 버릴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필요한 거름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정에 있어서는
고귀한 것일수록 더욱 더 강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때야말로 우정은 이미
사멸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달하고 있다 하겠다.
연인들은 모두가 비록 그들이 제각기의 그 섬세함을 얼마나 자랑삼고 있는지는
몰라도 가장 야비한 사람들과 같이 똑같은 즐거움 속에 잠기어 온갖 생물들이
물을 찾아 모여 드는 저 호젓한 샘에서 짐승들과 나란히 갈증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을 오직 지상의 행복으로 생각할 때가 있는 것이다.

우정의 결작
그러나 우정에는 그와 같은 타락은 없는 것이다. 연애에 있어서 최대의 행복
중의 하나가 우리들의 자아를 마침내는 보편적 생명 속에 용해시키는 것에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정의 최대 행복은 우리를 지고의 개인적 생명에까지
이끄는 것에 있는 것이다. 연애속에는 생의 매혹과 죽음의 매혹이 동시에 뒤섞여
있는데 우정은 오직 생명과 빛뿐인 것이다. 연애는 자연이 우리에게 빌려 준
여러 가지의 힘이나 우리들의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들 속에 존재하는 갖가지
본능에 의해서 거의 반 이상이 만들어지고 엮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정은
완전히 우리들의 작품인 것이며 본래 우리에게 속하여 있는 것이다. 우정이
가지는 이와 같은 귀족적인 성질이기에 우둔한 인간이나 속된 인간에게는 결코
우정이 존재하는 높이까지 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혹은 그러한
무리들은 참된 연애도 모를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조금이라도 강건한 체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연애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착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들 자신의 우월감뿐만 아니라, 그들의 희생자들의 증언을
뒷받침 할 수도 있으므로 더욱 더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는 가장 야비한
정사까지도 이 감정의 본질과 결부시키려 한다. 연애의 걸작은 수많은
모방자들에 의해서 묘사되며 때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 졸렬한 그림속에서도 가장
심한 것에게까지 표본이 가지는 훌륭함과 아름다움이 얼마만큼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정의 걸작이란 범속한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경이인 것이다. 그것을 모방하려는 생각은 오직 자기가 다시 한번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만이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인간에게도
다소의 연애는 존재하나 우정만은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애와 우정의 가치
만약 서로 대립하고 있는 두 힘 중의 하나를 다른 하나의 희생에 이용한다면
이런 비교대로는 다시 없는 어리석은 시험이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두
힘의 각각에 그것이 가지는 가장 깊은 점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연애는 그것이 가지는 일변도적인 것, 맹목적인 것, 사람을 기만하는 것 등에
의해서 우리를 현혹시킨다. 옛날에 바다에서 항로를 잃고 헤매게 된 뱃사람들이
저녁 때가 되면 구름이 자아내는 모환의 모습에서 간절히 찾아 헤매던 진짜
육지로 착각했던 것과 같이 우리들은 연애가 눈앞에 전개하는 황홀한 전망
속에서 무언가 확실한 진실의 모습을 허덕이면서 구하는 것이다. 즉, 연애는
지키지도 않는 여러 가지의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정은 하지 않은
약속가지 지키려 한다. 허위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연애는 적어도 과장을
좋아하게 되고 또 언어도 남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우정은 언어의 사용에는
어디까지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우정이란 고백하지 않는 정열인 것이다.
서로가 무엇하나 숨기려 하지 않는 두 사이에 아직도 존재하는 유일한 비밀이란
그 어느 쪽에서도 상대방이 어떠한 점에서 자기를 선택하고 특히 사랑하게
되었는가를 결코 모르고 있다는 점인 것이다. 연인끼리 자기네들의 약한 감정을
서로가 숨기려하는 것과 똑같은 주의력으로 친구끼리는 제각기의 감정의 강한
점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마땅히 표현해야 할 감정에 비해서 언제나 사양하는
듯한 말투가 오고가는 것이야말로 그들은 감정을 조금도 주저없이 즉시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감정을 조금도 주저없이 즉시로 표현하는
것을 점잖치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연인들의 예외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을 실제보다도 더욱 과장해서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면서 둘은 다같이 그저 상대를 납득시키거나 아양을 부릴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기도 그런 기분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연애는 무엇인가 모험심
없이는 존속하기 어려운 것이다. 거기에는 외견상의 화려함이 필요해서 금박을
한 조그마한 상자에 남이나 동을 넣을 것이 된다. 그러나 우정은 은으로 된 작은
상자에 황금을 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연애의 약한 원리
만약 서로 대립하고 있는 두 힘 중의 하나를 다른 하나의 희생에 이용한다면
이런 비교대로는 다시 없는 어리석은 시험이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두
힘의 각각에 그것이 가지는 가장 깊은 점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연애는 그것이 가지는 일변도적인 것, 맹목적인 것, 사람을 기만하는 것 등에
의해서 우리를 현혹시킨다. 옛날에 바다에서 항로를 잃고 헤매게 된 뱃사람들이
저녁 때가 되면 구름이 자아내는 몽환의 모습에서 간절히 찾아 헤매던 진짜
육지로 착각했던 것과 같이 우리들은 연애가 눈앞에 전개하는 황홀한 전망
속에서 무언가 확실한 진실의 모습을 허덕이면서 구하는 것이다. 즉, 연애는
지키지도 않는 여러 가지의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정은 하지않는
약속까지 지키려 한다. 허위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연애는 적어도 과장을
좋아하게 되고 또 언어도 남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우정은 언어의 사용에는
어디까지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우정이란 고백하지 않는 정열인 것이다.
서로가 무엇하나 숨기려 하지 않는 둘 사이에 아직도 존재하는 유일한 비밀이란
그 어느 쪽에서도 상대방이 어떠한 점에서 자기를 선택하고 특히 사랑하게
되었는가를 결코 모르고 있다는 점인 것이다. 연인끼리 자기네들의 약한 감정을
서로가 숨기려 하는 것과 똑같은 주의력으로 친구끼리는 제각기의 감정의 강한
점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마땅히 표현해야 할 감정에 비해서 언제나 사양하는
듯한 말투가 오고가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멋지고 우아한 애전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감정을 조금도 주저없이 즉시로 표현하는 것을 점잖치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연인들의 예외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을 실제보다도 더욱
과장해서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면서 둘은 다같이 그저 상대를
납득시키거나 아양을 부릴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기도 그런 기분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외견상의 화려함이 필요해서 금박을 한 조그마한 상자에
납이나 동을 넣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우정은 은으로 된 작은 상자에 황금을 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연애의 약한 원리
우정의 숭고한 것이 되는 것은 진리에 가득 찬 나라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애보다도 강하고 동시에 섬세한 것이다. 연애는 비난도 중상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언쟁이나 구론에 의해서 메말라 가는
정열에 다시 한 번 허위의 실마리가 주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연인들은 아무튼
무언가 변명을 내세우기 좋아하는데, 그들이 탄식하는 오해는 그것에 의해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하게 맺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깨어지기까지는 몇 번이나 새롭게 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정은
이러한 타격에는 견뎌내지 못한다. 또한 견뎌내게 되어 있지도 않다. 아무것도
속이는 것이 없는 이상 친구는 무엇을 다툴 것인가? 가령, 어느 편에서건
상대방에게 놀라움이나 고통을 주는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불과 두어마디 정도로
모든 것이 훈풍에 얼음 녹듯 사그라질 것이다. 거의가 항상 정신적인 승인없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연애가 내포하는 가장 약한 원리인 것이다.
연애가 이미 힘을 얻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정신에 대해서 정신적인 것이
없이 했던 선택의 승인을 강요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신은 결코 쉽사리
매수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매수가 잘 안 되는 관찰자의 눈에 띄게 되는
곳으로부터 사랑하는 여인을 언제나 멀리 떼어 놓으려 애쓰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교묘한 연인들인 것이다. 만일 그녀가 호락호락 위험을 저질러서 그러한
곳에 들어가게 되면 얼른 껴안아서 나가서는 안 될 장미의 화원에 황급히 데려
간다. 이에 반하여 우정의 선택은 싫증나는 일 없이 정신에게 내보이며 정신은
그 커다란 면허장에 그것을 증명하고 추인하는 도장을 찍는 것을 보려고 한다.

인식과 분별
연인들 사이라는 것은 제 아무리 성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뿐만은 아니며 외견적인 것에 의하여 사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자에
있어서는 언제까지나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그리고 남자에 있어서는 언제까지나
강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마음속에 잘 담아 두어야 할 것은
만약 어느 편이건 한 사람이 뜻하지 않게 세상 사람들의 호의를 잃게 될 때
갑자기 달라진 몰락한 모습으로 인해 잃게 되는 최초의 사람은 그야말로
자기에게 가장 친하고 달콤한 말을 해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연심을 불어
넣고자 하는 상대방의 자존심에 아첨할 수도 없게 되며 지위 따위는 거의 아무런
희망의 조건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연인들은 서로가 무엇이나 다 털어놓고
지낸다고 자랑할지 모르나 사실은 대개가 늘 무엇인가를 숨겨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아무런 비밀도 없는 양 계속적으로 무엇이나 털어 놓고
이야기하여,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남자를 놀라게도 하고, 끌어당기게도 할 때
그러한 시원스런 태도의 배후에는 한결같이 하나의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즉,
남자에게 알려서는 안되는 어느 한 가지의 일을 숨겨야 하겠기에 그러한 많은
비밀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무엇인가 은익한
장소 위에 넝쿨나무를 기르는 것과 같이 자기의 비밀 위에 숨김없는 이야기로써
무성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즐거움 그 자체가 서로의 본래부터 있는 바로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서로가 평온한 마음으로 존경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언제나 진지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하등의 솔직함 같은
특별한 수단을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정은 연애가 언제나 자만하고
있는 것을 완수한다. 즉, 우리들을 어느 높은 생활로 인도한다. 그곳에서는
우리들의 의식의 광휘가 추오도 착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 순수한 노래를
즐기는 가운데서도 때로는 끊임없이 자신을 광적으로 몰아넣는 야단스러움이나,
이 세상의 빛이 모조리 우리들에게 향하는 도취와 야성의 소박함에 가득 찬
행복을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무조건 모든
것을 단념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즐겨 머물 수 있는 곳을 완전히 인식하고
분별하여야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정과 연애
우정에서 느끼는 어느 실망이 연애인 경우보다도 훨씬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도
역시 우정의 성질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때 육체는 상처받은 짐승과 같은
외침은 않더라도 그것을 큰 소리로 서러워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움은 한층 더
쓰라린 것이다. 사랑하는 한 여자에게 얼마난 사무치게 격렬한 애정을 느끼고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남자가 평소에 늘 여성 일반을 사랑해온 남자일 것
같으면 그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여자가 멋진 약속, 비록 그것이 막연한
것이었을지라도-작용이 그에게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 이 연애라는
영역에서는 아무리 심각한 절망일지라도 의외로 쉽게 아물을 때가 간혹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친구의 한 사람이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배신이라도 하게
되면 우리들의 인간에 대한 관념 그 자체가 흔들리게 되고 어느 경우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남자의 수효 등은 오히려 우리의 고독을 한층 더 견디기
어렵게 하고 만다. 그런데 우정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실망은 다시 없이 괴로운
것이기는 하나 반면에 몇 가지의 이유로써 아주 드물게 있는 일이다. 즉 육체가
우리를 마음껏 끌고 다니며 행세하는 것 같은 감정에 있어서는 우리가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반면에 우정에 있어서는 판단을
그르치는 것은 그다지 자연스런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분명히 우정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때 맛보는 즐거움에서 환상을 그려보고 싶을 때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선택은 지성의 불길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성이 그
인정하지 않은 것 같은 감정이 커져 가고 있는 것을 방지한다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다. 어리석은 연애라기보다는 이성에 비추어 보면 어리석은 것이 되기는
하나, 그래도 자못 여봐란 듯이 정열을 발산하고 있는 것 같은 연애는 종종 눈에
띈다. 그러나 위대한 우정에 우열한 것이라고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의 애정 중 어느 쪽이 문제인가에 따라서 곤란함도 다르게
마련이다.

우정의 선택에 따르는 위험
연애에 있어서는 지속하는 것이 곤란한 것이 되겠고, 우정에 있어서는 존재하는
것이 곤란한 것이다. 연인이 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곤란한 것은
언제까지나 연인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우정이 이루어지면 그
한쪽의 죽음 이외에는 그것이 끝나는 모습 같은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것이
모든 것이 진실일 뿐이며 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확신에는 무엇하나
부르조아적인 없음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우정에는 언제나 신뢰가 존재하고
또 필요하다. 정신적인 판단이 심정의 공감을 시인하고 그것이 우리들의 우정에
얼마만큼의 확실함을 가해 준다해도 위대한 선택에는 항상 상당한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우리가 사람에게 자기를 바치는 것도 이와 같은 값어치를
지불해서만이 비로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 그를 미워해야 하는가와
같이 친구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고 하는 바아스의 잠언처럼 저속한 것은
없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우정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라하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귀한 정신은 신뢰를 거부할 수는 있어도 주어서 섭섭해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일단 신뢰하게 되면 자신이 드러낸 크나큰 위험을 보고 기뻐하게
된다. 우리들의 감정은 분명하게 중대한 것이면 것일수록 그만큼 많은 위험이
깃들게 된다. 선택을 너무 경솔하게 할 필요는 조금도 없으나 결국에 상대방에
대한 조심을 너무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필요하긴 하다.

우정의 차이
우정이 진실로 존재한다면 그 앞날은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경우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통의 경우는 그것이 보다 쉽고 꿈결처럼 습관적으로 계속될 수 있으므로 보다
확실하게 계속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뛰어난 우정에는 잠자는 것 같은 것은 없다.그러한 우정으로 생활이
윤택하게 된 사람은 끊임없이 그것을 의지하고 또한 그 우정을 이루고 있는
요소의 순수함 그 자체는 비록 그 존속을 보증한다 하더라도 그 지속은 그것이
진실인 동시에 거기에는 모든 순간이 문제가 되는 만큼 더욱 많은 위험에
휩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정인 경우에는 사정은 모든 위대한 감정과
같으며 우정으로 맺어지고 있는 두 사람 중에서 한 쪽은 언제나 상대방 이상으로
그 유지에 마음쓰고 있고 또 다른 한편은 그것을 이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성질을 달리하고 만사에 대립하고 있는 연인들 간에서
볼수 있는 차이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친구와는 한 쪽이 너그러움에
있어서는 상대방보다 휠씬 나을 때에는 항상 같은 종족에 속하여 대등한 체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순수한 슬픔
우정에는 갖가지의 비극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오직 순수한 것이어서 연애의
감정은 그것이 가지는 고귀한 것에서만이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은 질투하는 것은 자기를 n이한 것이 되며 친구를 질투하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인 것이다. 반해버린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연적이 실지로 자기보다 여러모로 나은
남자라고 생각되면 언제나 쓰라린 사랑의 고뇌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자존심만
더해 가는 것이다. 되도록 연인을 가둬 놓고 싶은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정의
경우 우리는 친구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인간과 관계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만
슬픔을 느낀다. 만약 그가 훌륭한 인간을 발견 하였다면 우리는 그에게 정당한
존경을 바치고 있는 사람이 늘어간 것을 보고 기뻐할 뿐아니라 그는 그러한
발견은 자기를 위하여 했으나 또한 우리를 위해서도 해 준 것이라고 생각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친구의 모음이란 결코 이 문이 닫혀져 있는 있는
것이 아니고 저속한 인간이 끼어드는 것만을 두려워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후의 정열
우정이야말로 지고의 최후로 남겨 두어야 할 정열인 것이다. 자기를 남보다 높여
보려고 할 때 우정의 필요함은 더해 가기만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위대한
사람들의 생활에 확실하게 나타난다. 운명이 정하는 방에 의하여 고독하게 될
때도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떠나가면서도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남겨 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에는 파르메니용이 있었고 시이저에게는 블르터스가
있었다. 그 시이저는 평소에 싫증이 나도록 경험을 쌓았으면서도 장래 자기를
죽이게 되는 한 사람의 남자에게 소박한 눈길을 보내기만 했다. 나폴레옹은 더욱
저속한 기질이었으나 듀로크의 선의에 찬 소재를 신변에서 느끼게 됨녀 매우
마음을 흐뭇하게 가질 수 있었으며, 또한 전능한 고독 속에 있으면서도 저
남자라면 친구로서 세상이 다할 때까지 변치 않는 친구가 되었으려니 하고 항상
도세의 죽음을 슬퍼하였던 것이다. 위대한 인간이 일체의 인간적인 즐거움을
결정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연애를 단념할 때가 아니고 우정을 단념할 때인
것이다.

참된 고독
친구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늘어 놓은 것 같으나 마지막으로 고독한 인간에
대해서 적어야 하겠다. 어떤 사람이 고립하여 지내고 있다해서 반드시 그가
그와같이 고립을 원하였다고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결과에 불과하다. 그는 보다 높은 생활에 접근하기 위해서 소소한
일로부터 손을 떼려고 하였을 뿐이다. 사람들과 떨어져 보려고 굳게 결심하였던
것은 아닐 것이고 어쩌다 보니 거기에는 아무도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마음이 메말라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은 아무래도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데가 있긴 하다. 세상은 자기들 없이 헤어 나갈 수 있는 인간이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무례하게도 그들을 떠나간 인간은 슬픔과 고통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까다로운 고독의 인간도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참된 고독의 인간은 아닌 것이다. 그러한 옹졸한 사람들은 다시
자기네들을 불러들일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는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들이 걸핏하면 성을 내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다는 증거인 것이다.

별에 가득차있는 세계
진정으로 고독한 인간은 신선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수단이 그에게는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시인인 경우에는 인간을 초월한
곳에서 여러 가지의 우정을 맺는 매혹적인 능력이 남아 있는 것이다. 푸른 하늘
속에 뭉개뭉개 떠 있는 구름에 넋을 일고 무아보다도 화려한 무도회조차도
차라리   피는 초원의 아름다움만 못하게 생각되는 한 어찌하여 자기를
고독하다고 생각될 것인가. 혹은 또 이와 같은 소박한 행복을 맛볼 능력은 없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서재라는 엄격한 낙원이 남아 있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