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메뉴

기본 메뉴

사용자 성격

커뮤니티


폴더 보기

------------------------------

달력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29
30

블로그 통계

방문자수

  • Today 108
  • Yesterday 358
  • Total 375436

활동지수

  • 인기도 1321
  • 친구 9 명
  • 퍼가기 241 개

기타 정보


즐겨찾기 | 관심 친구

    등록된 즐겨찾기가 없습니다.
  • 게시판 형식으로 보기
  • 앨범 형식으로 보기
  • 포스트 형식으로 보기

한국인이 반드시 일어설 수 밖에 없는 7가지 이유


 한국인이 반드시 일어설 수 밖에 없는 7가지 이유

  저자: 조벽, 최성애
  출판사: 명진출판

      (여는글)
    내가 본 한국인의 희망

  올해 초 한국 주요 일간지의 사설 중에 이런 얘기가 실렸다. 요즈음 겪는 한국의
총체적 위기는 한국인의 성급한 성격에 근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신문을 읽다가
나는 다소 짜증이 났다. 본질을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와는 생각이
정반대였다. 나는 한국인의 성격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고 있었으니까. 다른
무엇보다 한국인의 품성이야말로 희망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그 참에 구상하고 있던 책쓰기를 서둘렀다. 어쨌든 그 사설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많은 자극을 준 셈이다.
  물론 한국에는 뜯어고쳐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인이 아니라, 다시
말해 한국인의 성격이나 품성이 아니라, 제도와 구조 등의 인간 외적인 틀이다.
  특히 지적하자면 단연코 교육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좀 심한 표현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에서 한국 사람만 빼고 다른 것은 다 바꾸어도 된다!"라고
주장하고 싶다. 잘못된 교육이 잘못된 제도를 만들고 잘못된 사회 구조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교육을 바로 잡아야 한국인의 본래 품성이 되살아난다. 때문에 한국인에게는 분명
희망이 있다. 이건 내 눈이 밝아서, 나만 잘난 눈을 가져서 나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실제가 그러하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에서 초청
강의가 올 때마다 빠짐없이 비행기를 탄다. 한국에 계신 분들은 이런 나를 보고
놀라워한다. 어떻게 그렇게 자주 비행기를 탈 수 있느냐고. 비행기 타는 일이
지겹지도 않느냐고 물론 열 시간 이상을 비행기 속에 갇혀 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그래도 난 꼬박꼬박 한국을 향한다.
  그만큼 한국에서 희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외국에서 살아
온 내가 만사를 제쳐놓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애국심 때문에? 그건 솔직하지 못하다. 단순히 애국심만으로 지탱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희망 때문이다. 그것이 한국에 대해서라면 나도 놀랄
만한 열정을 솟아나게 하는 이유다.
  IMF 시대를 겪는 우리들의 마음은 모두가 착잡하고 어둡다. 무엇이 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다들 한숨 섞인 자문을 던져 본다. 그리곤 정치가 무능한
탓이다. 재벌이 너무 오랫동안 특혜를 누려 온 탓이다. 국민 모두에게 거품이 너무
심했다 등등 저마다의 원인 분석 또한 빼놓지 않는다.
  모두 맞는 말들이다. 문제는 무엇부터 바로잡아야 하는 가인데 나는 '교육이
0순위'라고 외치고 싶다. 교육 이데올로기가 바뀌어야 한국의 교육이 바뀌고, 교육이
바뀌어야 현재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힘이 나온다는 확신
때문이다.
  나는 지난 1994 년도에 서울대 객원교수로 강의할 때 학생들이 들려 주었던
우스갯소리를 늘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장학관이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교실을 둘러보던 중 창가에 놓여 있는
지구본이 눈에 띄어 마침 옆에 있는 학생에게 물었다. "학생, 이 지구본이 왜
기울어져 있나?" 학생은 어떨 결에 당황해서 "제가 안 그랬심더."하고 대답했다.
장학관은 그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어 이번에는 교사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선생님, 이 지구본이 왜 비뚤게 서 있지요?" 교사는 질책당하는 줄 알고 대답했다.
"제가 이 학교에 오기 전부터 그리 되었심더." 이제 장학관은 화가 났다. 그래서
교장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교장이 대답하길, "허허, 참 잘 아시면서, 그게 국산품
아닙니꺼!"
  학생들은 농담으로 들려 준 것이었겠지만 농담치곤 대단히 뼈 있는 이야기였다.
그 속에는 한국 교육의 다섯 가지 걸림돌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즉,
책임 회피(내가 안 그랬으니 다른 애가 그랬을 것이다), 타성적 무기력(내가 오기
전부터 그랬으니 나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불신감(국산품은 못 믿겠다), 덧붙여 이
세가지 답변 속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드러나 있다.
  즉, "왜 그럴까? 무엇이 문제일까?"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핵심을 못보는
본질에 대한 이해 부족과 "어떤 답이 있을 수 있을까?"하는 가능성에 대한 창의력
부족이다. 우선 이 다섯 가지의 걸림돌부터 제거해야만 한국인의 본성이 살아난다.
그리고 본성이 살아나는 자리에 희망이 자리잡을 것임은 두말 할 나위 없다.
  표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최성애 교수와 나는 사적으로는 부부 사이다. 그러나
문제 의식을 갖고 있기는 최 교수도 마찬가지였고 우리 둘이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둘의 생각을 근접시킬 수 있었다. 최 교수는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생물학, 통계학이 결합된 인간발달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을 보는
관점에서 남다른 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 교수의 시각과 지식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종 작업은 지난 1월에서 2월 중순까지 이루어졌다. 최 교수가 덕성여대에서
가르치다가, 방학 기간 동안 미국으로 건너와서부터 본격적인 공동 집필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래층에서 아내는 이층에서 밤새 작업하고 다음날 서로 읽어보고
가감, 보완하는 일과가 반복되었다. 한국인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다 보니
나도 최 교수도 신이 나서 가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엔 국수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인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특이하다면 특이한 과정을 거치며 자랐다. 나는
카리브 해의 아름다운 나라 자메이카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열한 살까지는
한국인만 보고 자라다가, 자메이카에서는 온통 흑인 친구들 속에 둘러싸인 유일한
동양 학생이었고, 그 후 미국에서 다닌 대학에서는 현재 일하고 있는 미시간
공대에서처럼 거의 백인들 속에서 생활했다.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체험 때문에 다른 이들은 그냥
지나치고 말 일들도 내겐 의미 있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때문에 나는 국수주의자건
민족주의자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되고 싶지도 않다. 굳이 표현하자면
세계주의자쯤 될까.
  나는 한국인의 개성과 자질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동안 우리는 너무 자기
안에만 갇혀 지냈다. 터무니없는 오만과 또 터무니없는 콤플렉스 사이를 왔다갔다
했을 뿐이다.
  이제 한국인은 스스로의 본질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하나씩 장점들을
살려내야 한다. 무엇이 장점이고 무엇이 단점이 될지, 이제 평가는 독자의 것이다.
아무쪼록 많은 독자분들이 이 책을 읽고 한동안 잃어버리고 있던 한국인의 희망을
가슴속에 다시 품었으면 한다.

          1998 년 3월 3일
        미시간에서 조벽
    1. 결코 이렇게 추락할 순 없다.

    조기 유학은 한국으로

  1994 년 내가 서울대학에 객원 교수로 초빙되었을 때 우리 부부는 아들은
서울대학 후문 쪽에 있는 인현초등학교에, 딸은 동네 유치원에 보냈다. 주위
사람들은 우리 나라 초등학교 수준이 형편 없고 미국에서 살다 온 아이들이
적응하기에 너무 고달플 거라면서 외국인 학교에 보내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
마음들은 모두 고맙게 받았지만 우리는 큰 아이가 마을버스 타고, 정류장에
내려서도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그 학교에 다닌 것을 지금도 참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는 올 봄에 또다시 아이들을 한국으로 조기 유학을
보냈다. "원, 미국으로 아이들을 유학 보낸다는 사람은 많아도 한국으로 조기
유학이라니?" 다들 우리 부부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미국 등 구미 여러 나라로 조기 유학을 보내는 부모들은 외국 학교의 장점과
매력에 이끌리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어릴 때부터 외국어까지 익힌다면
금상첨화라고 여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국에 아이들을 조기 유학보내려고 하는
것도 그만큼 한국이 지닌 강점을 믿고 그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 주고
싶어서이다. 어떤 이들은 한국의 어떤 점이 미국보다 훌륭하다고 믿기에 아이들에게
겪어 보게 하고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일까 의아해할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와
아내가 보기에는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아 보라 한다면 인간 존중 문화를 들겠다. 우리가
자랄 때는 인간 소외가 가장 심한 산업 시대였다. 물질 중심 시대였기 때문이다.
산업 시대는 물질을 가능한 대량으로, 값싸게, 재빨리 만들어 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존중할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인간은 공장 기계의 한
부품처럼 취급 당했다.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존엄한 인간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산업 체제 내의 기계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살 21세기를 인간 존중의 시대라고 본다. 정보화
시대라고도 불리는 새 시대는 아이디어, 창의력, 서비스, 커뮤니케이션과 조화 등이
중요한 시대다. 이런 마음과 능력은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 발휘된다. 인간
존중의 사고 방식(인간 패러다임)이 없이는 안되는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이다.
  서구 '선진국'들은 다른 나라보다 빨리 산업화를 이루어, 수백 년에 걸쳐 물질적
풍요를 얻은 대가로 이미 오랫동안 문명병, 정신병, 가족 해체, 공해 생산 등
비인간적 문제들로 중병을 앓고 있다. 한계에 부딪친 서양에서는 음식도 자연식,
질병 치료도 동양식 등을 찾으려고 하고, 학계, 재계는 물론 화장품, 패션에서도
인간 회복적 요소와 자연 친화적 태도를 배우려고 난리들이다.
  이제 막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뛰어든 중국이나 동남아, 남미의 국가들은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산업화를 감행해서라도 국민들을 먹여 살릴 것이냐 아니면 계속
굶주리며 살 것이냐 하는 양자 택일밖에 달리 선택권이 없다. 그래서 저임금, 인권
무시 등으로 인해 야기된 인간 소외 문제를 외면하면서까지 산업화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는 어떠한가? 우리 나라도 1960 년대에 똑같은 딜레마에 부딪쳤고,
결국 독재와 저임금 정책으로 산업화를 밀어붙였다.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먹는 것,
입는 것 걱정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이로 인해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다.
인간 회복의 정보 시대를 맞고 있는 지금,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인간적이던 우리
과거의 기억이 아직도 따끈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도 집집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정신적 넉넉함을 누리면서
가족끼리의 사랑을 확인, 자연 친화적인 생활 패턴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이렇게
스승과 모범들을 다 모시고 살고 있으니 선진국들보다 더 선진국이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우리 나라는 인간 회복과 인간답게 사는 것을 지향하는, 소위 인간 패러다임
시대의 최선두주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세상의 많은 어린이들이 한국으로 조기 유학 와야 할 시대가 온 것이다.
    해외 여행도 한국으로!

  한국으로 가서 배워야 할 점을 이왕 말이 났으니 하나만 더 하자. 대학원 시절
3주 동안 유럽 배낭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등에다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 안에서,
혹은 기차역에서 잠을 자면서 서유럽의 웬만한 관광지를 두루 돌았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바티칸의 베드로 성전, 라인 강변의 성, 가는 곳곳마다 어마어마한
문화 유산들이 어쩌면 그리도 많은지, 웅장한 규모, 아찔하게 높은 탑,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조각, 그림, 색채, 한눈에 다 보지 못해 자꾸 보다 보면 눈이 아플
정도다.
  내가 한국에 가면 바쁜 일정에 틈 내어 찾는 곳이 박물관이나 유적지다. 경복궁,
창덕궁, 불국사, 대흥사, 도선사 등 참 많이 돌아봤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들고 다니는 열성도 보였다. 잘 보살핌을 받지 못해 쓰러져 가는
석탑들, 거창할 줄 알았던 첨성대, 유럽의 눈부신 문화재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한껏 보아도 물리지 않고, 오히려 보면 볼수록 은근한 멋을 느끼게 만드는
우리 문화재 앞에 서서 나는 오히려 내가 한국인임의 긍지를 다시 느끼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문화가 빈약하다고 한다. 우리는 대리석을 쓰지 않고 목재를
써서 보존이 안 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원래 작은 국토에다 자원마저 없어서
그렇다고도 하고,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중국보다 더 큰 규모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가지 재미있는 해석들을 내놓곤 한다. 모두가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빈약한' 문화재는 곧 우리 나라 사람들이 물질 가치보다 인간
가치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을 압도할 만한 문화 유산을
남긴 민족들은 대개 유럽의 카톨릭처럼 인간과 신을 철저히 분리했거나,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지도자는 죽어도 영속적 지배를 한다고 믿었거나, 잉카 제국처럼 인간을
산 채로 제물로 바치거나 하는 비인간적 요소들이 강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같은 동양권 문화라도 겉보기에는 비슷한 게 많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고
방식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1989 년, 북경을 방문했을 때 근처에 있는
명나라 시대의 능을 구경한 적이 있다. 비록 황제는 죽었더라도 당대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땅 속에 지어 놓은 궁이, 살아 있는 왕이 기거했던 경복궁
규모만큼이나 엄청난 것을 보았다. 또 일본 문화에는 지배층이라고 해서 부하나
식솔의 목을 단칼에 내리칠 수 있는 잔인성이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단군 신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람, 자연, 짐승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우리 민족이 생겨났다고 믿는다. 하늘 세계보다 인간 세계가 더 좋아
땅으로 내려 온 환웅이 있고, 한낱 들짐승이었던 곰이 여자가 되고, 풍백, 운사,
우사 등의 도사들이 자연 법칙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기도 한다. 우리는 신, 인간,
자연이 별다른 갈등이나 지배, 살육 등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지 않고도 조화롭게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천국이 따로 있는가.
  나는 이제 문화를 반드시 유형 가치의 잣대로만 보지 말고 무형 가치로 헤아려야
할 시대가 왔다고 생각한다. 물질주의가 판치는 산업화 시대는 문화 유산마저도
물질적 잣대인 양에다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인지 유럽 예술의 주 관심사는 빈
공간을 아름다움으로 매우는 것에 있다. 유럽 어느 도시를 가든 온갖 예술품과
유적이 빽빽하게 들어찬 거리와 마주치게 되지 않던가!
  그러나 한국인의 미적 감각은 빈 공간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그 넉넉한 여백이
마음을 채워 준다. 그래서 한국의 문화재 앞에서도 나는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나'라는 인간이 우주와 통일되는 숙연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거대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에 압도되어 그 앞에서 위축되기보다, 자연만큼 우주만큼 넓은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수평적 문화 유산은 글로벌 시대와 환경 친화적 시대에 걸맞다.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이기 때문이다.
  새 시대에는 세상의 많은 학생들이 한국으로 문화 관광을 와야 하겠다.
    IMF 서울 상륙 작전

  작년 말 IMF 사태 소식을 접하는 순간 내 머리 속에는 1950 년 유엔 인천 상륙
작전이 떠올랐다. IMF 개입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내겐 UN 인천 상륙 개시와
맞먹는 사건으로 보인다.
  1950 년 9월 15일 유엔 인천 상륙 작전으로 우리는 가까스로 공산군을 물리치고
절망적인 순간을 넘겼다. 그러나 그 대가로 참 오랫동안 눈물겨울 정도로 미국의
간섭을 받아 왔다. IMF로 인해서 우리는 앞으로 경제적 간섭을 미국으로부터 또
받을 것이다. 정말로 서글픈 일이다.
  IMF에 관련된 뉴스가 방송될 때 나는 한국에 와 있었다. 2주 동안 여덟 대학에서
세미나를 하고 한국 공학 기술 학회와 한국 공대 학장 회의에 참석하느라고 중부,
경부, 호남 등 안 타 본 고속도로가 없고, 중앙선, 경부선, 호남선 등 안 타 본
기차가 없을 정도로 벅찬 일정을 가졌다. 늘 무언가를 알고, 배우고, 실천에 옮기고
싶어하는 한국 대학인의 열성과 진지함에 나도 덩달아 피곤한 줄도 모르고, 해 뜨기
전에 일어나 기차 타고 전철 타고 택시 타고 미친 듯이 전국을 돌아다녔다. 뿌듯한
마음으로 미국으로 되돌아가려고 서울에 도착하니 이게 웬일인가. 하루아침에
세상이 그토록 바뀌다니. 원자폭탄이라도 맞으면 이럴까?
  미국에 돌아오니 한인 이민 사회마저 쑥밭이 아닌가? 한국 귀국 선물 센터를
비롯한 한인 가게들이 울상이다. 한국을 대상으로 수출입하는 상인이나 비즈니스는
다들 나가자빠졌다고 한다. 식당에 가 보니 손님이 없어 썰렁하다. 할 일 없거나
빚쟁이 만날까 두려워 집안에 박혀 텔레비전만 보는 바람에 비디오 대여점만
불티나게 잘된다고 한다. 이거 한국서 듣던 이야기가 아니던가. 아, 세상이 좁아져
지구촌이라고 하더니 실감난다.
  한인 신문과 방송은 한국에 달러 보내기 운동을 부르짖고 교민들은 민첩하게
적극적인 호응을 보여 주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국을 걱정하면서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들 있었다. 역시 한 핏줄이다 싶었더니 "싸다 싸.", "거 참
쌤통이네." 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서 입던 헌옷을 보내 줘도 입이 찢어져라
좋아하던 때가 언젠데 조금 잘살게 되자마자 재미 동포들을 미국거지라 부르곤 하던
고국 동포가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거덜난 졸부 보듯 내심
고소한 모양이다.
  사실 88올림픽 전후로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게 되면서 한국인의 돈 씀씀이가
엄청나게 좋아졌고, 초패션 옷치장에 최고품으로 휘감은 한국인에 비해 재미
교포들의 모습이 촌스러워졌다. 그래서 십만 원을 예사로 쓰는 고국 동포는 백 불
쓰며 손 바르르 떠는 재미 동포를 거지 취급하였다. 그렇게 손가락질하며서
통쾌함을 맛보았을 것이다. 왜냐 하면 한때 이민 간 지 이삼년도 채 안 되는
교포들이 '금의환향'하는 척하며 괜히 혀 꼬부라진 말을 하고, 툭하면 한국은 이래서
못 써, 한국인은 저래서 안 돼 하지 않았던가. 그 모습을 지켜 보면서 고국 동포는
얼마나 구역질나고 얄밉고 스트레스 받았더냐. 다 자업 자득이어라.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은, 자랑스러운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낸
민족이다. 이 순간, 각자의 입장이 뒤바뀌어 잠깐 동안의 분풀이야 오고 가겠지만
전쟁의 폐허에서 현재를 있게 한 저력은 또 다른 형태로 반드시 표출될 것이다.
  내가 아는 한자 숙어는 몇 안 되지만 그 중 제일 명심하는 것이 새옹지마다. 이
말은 인생뿐만 아니라 역사에도 비추어 볼 만한 깊은 맛이 있기 때문이다.
    실패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실패했다고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패는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Failure is not a person. It is an event.)" 시험지를 되돌려 줄 때 잊지
않고 칠판에 적는 글이다. 시험 점수가 잘 못 나와 풀이 죽어 있는 학생들을
대하기가 힘들어 조금이라도 격려해 주자고 하는 말이다. 영어 failure는 실패도
되고 실패자라고도 이해되기 때문에 시험 한 번 잘 못 본 학생들이 자신을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희망을 잃을 수 있다. 무엇보다 희망 저버린 학생을
가르치기는 참말로 어렵다.
  나는 실수와 실패란 말을 내 나름대로 구분해서 쓴다. 실수는 하나의 에피소드나
사건에 불과한 것을 지칭하는 반면, 실패는 일이 망쳐 결말 난 상태라고 본다. 다시
말해 실수는 과정이고 실패는 결과라는 말이다. 무엇이든 처음 배울 때는 실수를
많이 저지른다. 그래서 실수를 '성공을 향한 연습 과정'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도
있다.
  IMF를 실패로 볼 것이냐 실수로 볼 것이냐?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과 실천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대로 주저앉거나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한다면 실패하게 될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면서 매번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던가.
  IMF가 하나의 실수 차원으로 남으려면 지금부터 바꾸면 된다. 우선 한국을 망쳐
놓은 원인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서 그것을 바로잡자.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도 못했고,
모르고도 못했던 새 방법을 써 보자. 우리보다 좀 앞선 나라들의 시행착오와 성과를
두루 넓게 보면서 우리에게 맞는 법도 개발해보자.
  요즘 한국 대학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재정 위기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갖가지 알력과 모순으로 안에서 푹푹 곪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이
뒤죽박죽이라고 한탄하는 교수들도 있고, 이 참에 확 뒤집어져서 속속들이 곪은
것이 노출되어야 한다는 학장들도 있다. 이것은 실패를 예견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까? 문제가 많은데도 그것을 은폐하거나 위장하는
것보다는 솔직히 인정하고 새방법을 찾는 것이 더 시원하지 않은가?
 지금 대학, 기업, 정부 모두가 개혁이다, 재조정이다, 위기다 하는 것은 구시대
체재에서 새 시대 체재로 변화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물론 크고 작은 시행
착오가 있을 것이다. 당연히 실수도 많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적시, 적량,
적소다. 지난해만큼 각 신문마다 대학 광고가 크게 실린 적이 또 있었던가?
텔레비전, 라디오는 물론이고 심지어 시내 버스 몸통에도 대학 광고가 나붙었다.
대학의 서열이 바뀌고 있다. 더불어 우리 사고 방식도 바뀌는 것이다. 제2의 재건은
잠깐 동안의 실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렸다.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을 때는 한반도 지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IMF군은 누구로부터 한국을 구출하고자 서울에 상륙하였는가? 이런 질문을 해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막연한 불안과 패배감, 분노를 느낄 뿐 올바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게 된다.
  이번 사태는 경제 문제의 총체적 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올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이런 해설은 현실을 묘사할 뿐,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렇게 되었다 해서
무엇이 나쁜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정경 유착은 사회 기득권자들의 행패다. 이것의 핵심은
모험심도, 창의력도, 창업자 정신도 없는 사회 지도자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땅
짚고 헤엄치기를 했다는 것이다. 정경 유착은 서민들의 '눈감아 줌'(순응)을 전제로
하는 방법이다. 정경 유착은 체제 순응형으로 길들여진 서민들을 우롱하는
짓이었다.
  정경 유착의 산물인 대기업은 새 시대에 맞지 않다. 지금은 온 세상이 정신 없이
빨리 변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 변화에 재빨리 대응하지 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망해 버리는 살벌한 무한 경쟁 시대이다. 급류가 흐르는 계곡에서 대선박을
타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소규모 인원을 싣고 자유자재로 방향과 속도를 바꿀 수
있는 작은 보트가 더 적당하다.
  다시 말해 이제는 순발력 시대다. 느긋하게 앉아서 기다리다가 변화의 결과를
피부로 느낀 다음에 비로소 대책을 강구하는 식의 운영을 해서는 살아 남을 수
없다. 변화를 예측하여 미리미리 대비하거나 '변화 자체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을 가지고 있는 회사만이 경쟁할 수 있는 전문인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기업은 아직도 세습적 인물 중심제로 운영되고 있다. 단지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업의 최고 경영자 자리에 앉아 있는
회사는 전문성, 순발력, 모험심에서 세상의 빠른 변화에 맞추기 어렵다. 능력 대신
친,인척과 연줄로 자리 보전하는 체제는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대가 변했고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과 도구가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구식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오늘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일제 시대에 비극이 있었던 이유는 일본의 야욕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외부적 이유말고도 내부에 무능한 특권층과 이완용 같은 매국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능한 지도력이란 시대 흐름을 무시함을 뜻한다. 오늘날의 위기는 무슨 요인들
때문인가? 외부 요인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나돈다. 나도 나름대로 잡히는 바가
있지만 이 책에서는 내부적 요인만 다루려고 한다.
  그 내부적 요인이란 바로 체제 순응형 인간이요, 창의력 없는 사람들이요,
권위주의자들이다. 한국인이 못나서, 아니면 국민성에 이러저러한 문제가
많아서라고? 그것은 절대 '아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하고 싶다.

  나는 만화를 무척 좋아했다. 다리에 나는 두드러기쯤은 예사로 여길 정도로 습기
차고 곰팡이 낀 만화 가게를 자주 찾는 단골이었다.
  만화 가게가 만화만 보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내 나이 정도 되는 사람들은
기억하리라. 1960 년대 초는 만화 가게에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던 때이다. 만화책
몇 권 이상 보면 덤으로 한두 권을 더 보게 하던 서비스가 텔레비전으로
바뀌어졌다. 그래서 저녁때가 되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면 만화 가게는 '영화관'이
되어 버린다. 나 같은 어린애부터 까까머리를 한 학생들이 코딱지만한 흑백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세상에 둘도 없이 신비스런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였다.
  한 번은 아주 무시무시한 영화가 상영되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이 어두운 밤에 공동 묘지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땅
밑에서 사람 손이 불쑥 나와 발목을 잡는 장면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나는 어두운 골목을 정신없이 뛰었다. 뜀박질 못하는 내가 그렇게 빨리 뛴 적은
아마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았나 싶다. 발이 땅에 닿으면 발목 잡는
귀신한테 잡힐 것만 같아 애간장을 졸이며 뛰었던 것이다.
  다 자라 성인이 된 지금 한국에 와 보니 아직도 발목 잡는 귀신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에게 잡히는 것은 영화 속 주인공의 발목이 아니고 한국 학생들의
발목이다. 만나 보니 너무나도 우수하고 선량한 학생들이 무엇인가에 발목을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뛰고 싶은 욕망은 많은데 무슨 이유에선지
방황하거나 제자리걸음하는 모습이다. 문제는 발목을 잡힌 채로 한 해 두 해
지나가면 뛰고 싶다는 욕망마저 사라진다는 데 있다. 욕심에 안 차는 대학, 하기
싫은 전공, 하기 싫은 수업, 보기 싫은 시험을 억지로 치르는 사이에 학생들의
포부는 점점 졸아들어 버린다.
  무엇을 할 때 사람은 최고로 능력을 발휘하고 가장 행복해할까? 최근의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자기가 정말 꼭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창의력이 가장 왕성해진다고
한다. 우리 나라 학생들 가운데 "이거야말로 정말 내가 배우고 싶은 거다." 하며
공부하는 학생이 몇 명이나 될까? 직장인 가운데 "이 일이야말로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또 몇 퍼센트나 될까?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 기자들이 찍은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결정적인
장면 하나를 잡기 위해 진흙 벌을 헤매고 몇 밤을 설쳐 가며 저런 고생을
하다니."하고 딱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은 "꼭 해 보고 싶었던 일을 하기
때문에 보람 있다.", "다시 태어나도 또 이 일을 하며 살고 싶다."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끝없이 도전하도록 만드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 갖게
되는 태도다.
  나는 아직도 만화를 좋아한다. 우리 아들 녀석이 보는 〈슈퍼맨〉과 〈드래곤
볼〉을 즐겨 빌려 본다. 그 대신 내가 좋아하는 고우영의 〈삼국지〉와 이원복
교수의 〈먼 나라 이웃나라〉도 아들 녀석한테 권한다. 그리고 〈디즈니〉 만화
영화는 온 식구가 같이 본다. 우리 교육도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함께
즐기면서 권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면 좋으련만.
    2, 4, 6 다음에 오는 수는 8 만이 아니다.

  어느 대학 교수의 계산에 따르면 우리 나라 학생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수능
고사를 치를 때까지 한 학생당 사지 선다형 문제를 평균 약 백만 번쯤 풀게 된다고
한다.
  문제 하나."2, 4, 6, 다음에 오는 숫자는?" 그리고 답은 4, 7, 8, 12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초등 학생은 정확히 8을 집는다. 그리고 의기 양양하다. 중, 고등
학생들은 1초도 생각하지 않고 '8'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렇게 싱거운 문제를 왜
묻느냐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대학생들은 머뭇거린다. 정답은 뻔히 8인데,
분명 어떤 농담이나 계략이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과연 답이 하나뿐일까? 2, 4, 6 다음에 오는 숫자는 7 도 되고 7.93 도
되고 8154191111 도 된다. 즉 6보다 큰 숫자는 다 맞는 답이다. 그렇게 무궁무진한
답이 있는 데도 4개 중에서 선택을 요구하는 식을 반복하게 되면 나머지의 무한한
가능성은 미리 차단해 버리고 만다. 창의력이란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던 것조차
과감하게 깨뜨리고 생각의 한계를 넓혀 가는 능력을 말하는데 한국 학생들은 오히려
가능한 것조차 외면하는 훈련을 어릴 때부터 줄곧 받게 되는 것이다.
  우스갯소리겠지만 어떤 젊은이는 선볼 때 한 사람씩 보면 도무지 판단이 서지를
않아서 네 명의 후보자를 동시에 눈앞에 보아야 감이 잡히겠다(잘 찍겠다)고 했단다.
사지 선다형 문제 풀기에 길들여진 탓이다.
  사지 선다형 문제는 문제의 뜻도 모르고 답도 모른채 눈감고 대충 '때려 맞혀도'
맞힐 확률이 25%이다. 그런데 창의력은 100번을 시도해도 한 번이나 성공할까
말까이다. 에디슨은 2000번 시행착오 끝에 전구를 발명했다고 한다. 성공 적중률이
0.05%였던 셈이다. 적중률 25%에 익숙한 학생들이 0.05% 확률에 도전하려고
할까? 총 네 발만 쏘면 장난감 곰이라도 한 마리 잡을 수 있도록 훈련된 사람이
1000발을 쏘아도 잡을까 말까, 며칠씩 찾아 헤매도 볼까 말까 한 산 속의 진짜
호랑이에 도전하려 할까?
  어느 교수가 나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 외국에 유학가려는 학생이 추천서를 들고
오면 수업 태도, 성적 등 다른 항목은 그런 대로 자신 있게 써 줄 수 있겠는데
어찌해 볼 수 없는 곤란한 항목이 있다고. "이 학생의 창의력 수준은?", "이 학생의
자율 학습 능력은?" 아니, 학생들한테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 적이 있어야지
창의력 수준으로 평가하지. 또, 언제 대학생들이 자율 학습을 해 봤나?('자율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밤 12시까지 학교에 붙들려 있던 것?) 조금이라도
있던 것마저 표백되어 없어질 참인데^5,5,5^
  버나드 쇼(Bernard Shaw)는 훗날 자기가 받았던 교육을 회고하면서, '내 교육이
중단됐던 유일한 시기는 바로 내가 학생이었을 때뿐'이라면서 19세기 영국 교육의
무용성을 꼬집었다. 산업화 시대에는 서구의 다른 나라에서도 교육 과정에서
창의성은 무시되거나 억눌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21세기를 코앞에 둔
오늘도 모두 획일적 학교 교육을 받으며 대다수가 창의력 말살 교육에 길들여지고
있다. 비극이다.
  주어진 네 가지의 답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억지가 빚어낸 또 하나의 비극이
있다. 학생들은 선생님, 학교 당국, 교육부가 준 네 가지 답 이외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할 수 없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다가는 낙오자,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학생들은 권위자로부터 주어진 네 가지 답 가운데 정답이
하나 있음을 암암리에 순응한다. 즉, 체제 순응형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다.
  지난가을 지하철 수유역 벽에는 초등학교와 중등 학교 학생들이 4.19 탑 공원을
그린 미술 전시회의 입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어린 학생들 그림 수준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렇게 그릴 대상이 정해져 있을 때는 잘들 하는데 그냥
흰 종이를 주고 보이지 않는 대상을 그리라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미대
교수의 말이다. 데생 훈련을 잘 받고 대학에 들어 온 학생들에게 대상물을 주고
그리라 하면 잘 그리지만 그냥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라 하면 머뭇거린다고 한다.
  사회 과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친구의 말도 비슷하다. 설문 조사를 해도 사람들이
자기 답을 적지 않고 '정답'을 쓰기 때문에 현실을 파악하는 데 어렵다는 것이다. 왜
정답을 쓸까? 아니, 왜 정답이라고 추측하는 답을 쓰면서 출제자의 기준에 맞추려고
할까?
  산업 시대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체제
순응형 인력이 필요하다. 산업화란 기계를 이용해서 똑같은 상품을 빨리, 많이
만들어 내는 생산 경제 체제였으니까. 이런 획일적, 기계적, 대량 생산 체제에서
"남과 다른 생각, 남과 다른 행동"은 위험 천만이다. 교복도 남과 똑같이 입어야
하고, 머리 모양도 같게 하고, 교과서도 한 가지로 배운다. 교복을 입고 자란 지금
40 대 이상의 사람들은 기억하리라. 남보다 머리카락이 단 1센티미터만 길어도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를, 교복 속에 빨간 스웨터라도 입고 간다면 어떤 엄벌이라도
각오해야 했던 것을. 학생들을 이렇게 길들여야 정부의 지도력에 잔소리를 하지
않고, 대기업의 수출 위주 지시에 묵묵히 따라가는 일꾼이 된다.
  아이디어 시대에 상부에서 결정한 대로 따라 주는 예스맨(yesman, 체제 순응형
일꾼)은 필요 없다. 왜냐 하면 사장도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경쟁력이 높아지는지
모를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창의력이 샘솟는 인력이 필요한 시대다.
    부모, 교사, 학생이 빚어낸 삼 박자의 위력

  얼마전 대학 입시 즈음에 어느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실었다. 대입에 성공하는
비결은 부모님 관심, 선생님 지도, 학생의 노력인데 이 삼 박자가 잘 맞아야 한다고.
  이 말을 사회 심리적으로 한 번 살펴보자. 우선 사회적으로 볼 때 부모님의
관심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뒤집에 보면 그만큼 자식 교육에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부모를 두었다는 말이다. 학생 혼자 도시락 서너 개씩 싸고,
밤늦게 지하철.버스를 번갈아 타며 고3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고3을
뒷바라지하려면 독방도 부족해서 온 식구들이 텔레비전 소리를 낮추고 집안 행사나
친척 방문도 거절하고 산 속 절간 같은 환경을 조성해 줄 능력과 열의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고3을 둔 아버지가 어느 날 밤늦게 술에 취해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 부인은 현관문에 서서 황당해하며 "우리 고3짜리
아들이^5,5,5^" 하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와 친구들은 모두 술이 확 깨어
두말 없이 떠나더라는. 슬프게도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얘기다. 방해물이 잘
차단된 보호막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그만큼 부모에게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위해 주면 그 아이는 독선적이고 편협한 사람이 되기 쉽다.
  둘째, 교사의 지도를 잘 따라야 한다는 것은 체제 순응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입에 실패한 학생들은 고3 담임에게 밉보여서 가고 싶은 학교나 학과를 지망할 수
없었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는데 이는 곧 우선 교사의 말을 잘 따르고 봐야
성공의 길로 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셋째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라 해도 심리적으로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자기 밑에 경쟁자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한눈 팔다가는 상위권
자리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어디 불안한 마음이 그 때뿐인가? 초등학교 6 년,
중학교 3 년, 고등학교 3 년. 장장 12 년 동안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과가 하루
남짓한 수능 시험으로 결정난다. 학생은 12 년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입 합격의 삼 박자는 다시 편협성, 체제 순응, 불안감의 삼 박자로
연결된다. 사회 심리학자 아도르노(T. Adorno)는 체제 순응형이고 편협하고
불안감이 높은 사람은 권위주의자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그런 유형의
특징은 흑백 논리를 좋아하고, 강한 자에 약하고 약한 자에 강한 경향이 있으며,
권위에 의존하며 체제를 고수하려는 성향이 높다고 한다.
  아도르노가 한국에서 연구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어찌 그리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의 특징을 '족집게'같이 알아맞히는가. 한국의 사회 기득권자는 체질적으로
변화를 싫어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창의력 말살과 체제 순응형 교육 과정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들이 소위 모범생, 일류생이 되어 졸업 후엔 사회 기득권자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가는 길은 곧 바로 권위주의자들을
만드는 정통 코스가 아닌지!
    억울한 패배자, 갈 곳 없는 승리자

  나는 어릴 때 레슬링을 무척 좋아했다. 비쩍 마른 체구 덕택에 직접 하지는
못하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프로 레슬링 보기를 좋아했다. 그 때 유명했던 역도산,
박치기 잘했던 김일, 그리고 까만 스타킹 신고 당수 한 방으로 끝내 줬던^5,5,5^ 그
누구더라? 역도산이 일본 선수를 이겼을 때는 너무 신나서 내 그림 일기장에 그
장면을 그려 넣기도 했다.
  그 때 그 일본 선수의 이름이 뭐였는지는 도무지 기억에 없다. 패자의 이름이
기억날 리 만무하다. 그렇다. 어느 스포츠든지 우승팀은 다들 기억하지만 상대팀의
이름은 기억 못 한다. 마지막 우승 전까지 올라간 막강한 실력자라도 패자는
패자다.
  이름 없는 패자는 한 해 동안 들인 공이 고스란히 헛수고였다는 허탈감에
빠지리라. 정성껏 쌓아 올린 돌탑이 마지막 돌 하나로 인해 와르르 무너질 때
얼마나 허무한가. 자기가 잘못 놓아 무너져도 뭔가 억울한데, 남이 방해를 했다거나
자기한테 주어진 돌무더기에 반반한 돌 하나 안 보였더라면 그 때는 분하고 이가
갈릴 것이다.
  패배자는 허탈하고 맥없고 억울하고 분하다. 혹시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이런
패배자를 만들어 내는 필터 시스템은 아닌가 걱정스럽다. 모든 초, 중, 고 학생들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한다. 부모가 원하는 대학 가까이만 가도 일단
성공했다고 본다. 그 다음이 문제인데 대학에 가면 또 대학원 입시에나 맞을 만한
과목들을 배운다. 대학생들이 죄다 석사, 박사 받을 것이 아닌데도 이론 위주의
구시대적 학과목들을 열심히들 배운다. 이런 과목 배워 봤자 취직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대학생들은 전공 과목보다는 영어 공부나 자격증 따기에
더 바쁘다. 좀 야심이라도 있으면 공대생도 고시 준비를 하려고 한다. 이렇게
비현실적 교육, 생존과는 상관없는 교육을 받고 졸업장 받으면 이번에는 취직
시험을 본다. 이때에는 무엇을 얼마큼 아느냐 보다 어느 대학.무슨 과 출신인가,
남자인가, 나이는 몇인가 등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이렇게 걸러지는 교육 시스템에서 무사히 빠져 나오면 기득권자가 되어 권위를
누리고, 반대로 이 긴 고난의 체(필터)를 빠져 나가지 못한 사람은 패배자라는
낙인을 받아 살맛 없고, 불만족스럽고, 대우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맡은 일에 대해
자긍심이 생기지 않는다.
  이런 필터 시스템의 가장 큰 해악은 우리 교육 과정이 새 시대에 아무 쓸모 없는
'고급' 노동자를 너무 많이 너무 오랫동안 배출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소모되는 돈과 시간이 아깝고, 발휘 못하는 개성과 창의력이 너무 안타깝다.
생기발랄하던 학생이 대학 재수에 떨어지더니 사람마저 기피하는 모습을 보았다.
대학을 나오고도 여자라는 이유로 입사 시험에 번번이 떨어진다는 아가씨에겐
뭐라고 위로조차 해 줄 말이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보기도 전에
꺾인 이 수많은 인생들을 어쩔 것인가.
    세상이 바뀌면 무기도 갈아야 한다.

  어떤 청년이 골목길을 가다가 불량배를 만난다. 불량배에게 둘러싸이지만 청년은
늠름하다. 청년은 가볍게 기합 소리를 내지른 후 고도의 태권 동작을 시범 보인다.
허공을 찌르고 가르고 긁어 대는 날카로운 맨손 놀림에 놀란 불량배는 똥줄 빠져라
도망간다.
  이소룡의 쿵푸가 미국서 선풍을 일으킬 즈음 미국 영화나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던
장면이다. 그러나 요즘에 나오는 장면은 색다르다. 깡패들에게 둘러싸인 청년은
예전보다 더 세련된 동작과 기합으로 시범을 보인다. 그런데 이제는 깡패들이
오히려 더 늠름하다. 가히 예술적이라 할 만한 손놀림을 다 구경하고 난 후에
깡패는 권총을 꺼내어 청년을 겨눈다. 이번에는 청년이 혼이 빠져 도망간다.
  이 두 장면은 위기에 놓여 있는 한국을 잘 보여준다. 한국이 1970 년대와      
1980 년대에 동서고금을 통틀어 눈부신, 과히 기적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손재주가 비상하고 열심히 일하는 중, 고졸 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능 올림픽의
금메달은 한국인이 싹 쓸지 않았는가. 우리는 외국 기계를 사들여와 그들의 값싼
노동력으로 24시간 돌려 가면서 많은 물건을 값싸게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한
마디로 임금 경쟁을 치렀다. 선진국은 한국의 값싸고 쓸 만한 물건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홀린 듯이 한국물건을 보이는 대로 사들였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 물건 하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품질은 선진국을 못 따라가고
가격은 후발 산업국(중국, 동남아, 남미)보다 비싸니, 세계 시장에 내놓아도 인기가
없다. "못 먹어도 고!"라는 식으로 한국 기업은 물건이 안 팔려도 꾸역꾸역 만들어
낸다. 한국에 삼팔광땡 오복성이 떴다 하니 남의 돈을 꾸어서라도 무조건 '고!'다.
그러다가 '피바가지' 뒤집어쓰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격이다.
  어떻게 된 건가? 왜 여태껏 해 오던 방법이 안 통한단 말인가? 한국은 여태껏
맨손으로도 너무 잘 싸워 세계를 때려 눕힐 것 같았는데 갑자기 어디서 날아온
일격에 기절 초풍할 지경까지 왔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청년의 주먹이 아무리 맵다 한들 총 앞에서는 꼼짝 못 할
수밖에 없듯 한국이 온갖 폼을 잡아 봐도 세계는 눈 깜빡하지 않는 것이다. 되레
어처구니없이 한 방 얻어터진 격이다. 이제는 맨주먹으로 싸우는 시대가 아니다.
  같은 원시인이라도 맨손의 원시인은 뾰족하게 깎은 돌을 쓰는 신석기 원시인에게
졌고, 청동기 시대는 철기 시대에 굴복했고, 인디언이 총 든 백인에게 무너졌듯이,
시대에 따라 싸우는 기술도 따라 변해야 생존하는 법이다. 세상이 변해 선진국의
노동 인력은 첨단 무기로 무장했는데 한국 노동 인력은 계속 맨주먹의 힘으로
덤볐으니 어처구니없이 진 게 아닌가. 마치 왜군의 총 앞에 맨손으로 대결하던
임진왜란의 의병을 상기시켜 준다. 선진국과의 경제 전쟁에서 한국의 노동 인력은
총알받이밖에 안되는 전황인 것이다.
    일본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 될 수 없다.

  미국은 1980 년 후반기에 일본, 독일에 제조업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자 위기
의식을 느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미국을 거부할 수 있는 일본(Japan Who
Can Say No to The US)〉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세계를 장악한 듯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단 10 년도 못 되어서 일본은 벌써 미국에 뒤지고 있다. 왜
그럴까?
  1990 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의 경쟁력이 제조업에서 정보와 지식 산업으로
급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조업이 크게 개편되었다. 가파른 격동기를 거치면서
구산업은 물러나고 다른 새 산업들이 대거 진출했다. 1990 년대 초까지 새 산업을
묘사하는 단어가 아직 정립이 되지 않아서 그냥 '서비스 산업'이라고 불렀다. 사실
산업이란 소비 물품을 만들어 내는 경제 활동이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자동차,
냉장고 등등이 모두 소비 물품이고 이런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산업이다.
  서비스 산업은 물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서비스 산업이란 사람들의
'소비'를 둘러싼 여러 활동을 원활히 해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소비할 물건을
소비자에게 가져다 주는 것도 서비스 산업의 일종인데, 한국에 외국의 유통 업체가
들어오는 이유는 그들의 서비스 개념, 속도, 소비자 만족도가 높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우리가 레스토랑이나 백화점에 가서 소비 활동을 할 때 그것을
편하고 빠르게 해주는 신용카드 업체도 서비스 산업이다. 또 컴퓨터는 샀지만
사용할 줄 모르는 소비자를 위해 컴퓨터를 설치해 주거나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자문 회사, 여행사, 보험 회사, 용역회사 등도 모두 서비스업이다. 덧붙여 말하면
IMF가 한국의 은행 혁신을 요구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런 서비스 산업이
부패, 변질되어 금융권이 새 시대에 맞는 소비자 서비스를 제대로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비스 산업은 새 시대를 살아가는 데 아주 유용하다. 그러나 어느 서비스
업체도 구체적인 물건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유형 생산(하드웨어)이 아니라 무형
생산(소프트웨어)을 한다는 말이다.
  1990 년대 이후 미국이 일본을 다시 앞지르게 된 이유도 그 동안 미국이 무형
생산에 주력해 왔기 때문이다. 서비스 산업만 보더라도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의 유통 시스템은 몇 년 전까지도 도매, 중간 도매, 소매, 소비자 등 여러 중간
단계를 거쳐야 하는 구닥다리 구조였다. 생선, 야채, 쌀 등 생활 필수품도 그렇고,
텔레비전, 냉장고 같은 전기 전자 제품도 이런 유통 체계를 거쳐서 소비자에게
전달되었다.
  그뿐 아니다. 은행 같은 금융 기관도 돈은 많은데, 국민들이 그 돈을 잘
회전시키고 활용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서비스 산업은 한국과
비슷했다. 단지 일본은 한국보다 긴 산업화 기간 동안 돈을 많이 벌어 놨기 때문에
우리보다 좀더 오래 버티면서 최근에 와서야 겨우 서비스 혁신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튼튼한 지식 구조에 기반을 둔 장기전략이 되지 못하고, 단지 가게 이름
바꾸기, 실내 장식 예쁘게 고치기, 고객 끌기용 깜짝 이벤트 등 단기성 살아
남기식이라 불안한 변화다.
  일본이 무형 산업에 힘들어하는 이유가 있다. 유형 물품 위주인 산업 시대는 남의
물건을 베껴서라도 되도록 싼값에 많이 만들면 되었다. 열심히 돈 모으고 새 공장
지어 '정확히' 대량 생산하면 세계 여러 나라에 팔아서 돈을 벌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형 물품은 보고 베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무형 물품은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뇌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즉 새 공장 대신 새 인간을
지어내야 한다. 일본의 한계는 새 인간을 만들어 내는 교육 시스템이 뒤떨어진다는
데에 있다.
  일본 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은 학교를 서비스 산업으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죽어라 공부한 다음 대학 교육(고등 교육)에 소홀한
점은 한국의 대학과 같다. 베끼는 생존 전략 아래에서는 똑같은 교복 입고, 똑같은
교과서를 달달 외워 참고서에 적힌 정답을 그대로 베껴 내면 대학에 합격했다.
기업들도 이런 중등 교육 졸업자 정도의 실력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을
공부 대신 술과 미팅과 낭만으로 때운 졸업생도 기업에서 받아 주었다.
  일단 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중등 교육 시절에 가장 죽도록
고생한 상위 30%라고 인정받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관행은 졸업장만
받으면 대학에서 무엇을 얼마큼 공부했느냐를 따지지 않고도 기업에서 적당히 자리
보존하게 하는 보상 체제를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베낀 것으로 살 수 없는 시대가 왔으므로 일본이 힘들어 하고
있다. 새로운 것을 남보다 앞서 만들 줄 알아야 산다. 그렇게 하려면 지식 구조를
재정비해야 하고 지식 구조의 집합물인 대학을 살려야 한다.
  이제는 중등 교육 과정(중.고등학교)의 지옥 경쟁에서 이긴 자를 보상해 줄것이
아니라 전력을 다해 고등 교육 과정(전문 대학 이상 대학, 대학원을 모두 포함)을
성공적으로 통과했느냐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
지식과 기술을 습득해 나가는 '평생 대학인'들에게 보상 혜택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기업도 살고 나라도 사는 길이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종류는 남의 실수에서
배우는 현명한 사람이고 두 번째는 이런 현명한 사람을 위해 실수를 저질러 주는
부류들이다. 그 동안 한국은 재벌 시스템, 수출 무역 중심의 경제 전략 같은 일본의
성공 사례를 많이 배워왔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의 고등 교육 실패에서 더 귀한
것을 배워야 할 때다.
    이 시대의 명당은 창의력이 흐르는 터

  미시간에 있는 우리 집은 양지바른 언덕 위에 반듯이 놓여 있다. 곧고 높게 자란
소나무가 병풍같이 삥 둘러 있고 저만치 밑으로 호수가 보이는 집을 부모님께서
터가 좋다고 하시기에 두말 없이 샀던 것이다. 서울의 아파트 전세 값도 안 되는
적은 돈을 주고 산 이 집을 난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 식구에게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집터가 좋아서라고 생각하면서 터를 골라 주신 부모님을 고맙게 생각해
왔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한국서 유행했다는 육관 도사의 〈터〉를 사 보게
되었다.
  점, 관상, 사주 같은 역술에 대한 나의 입장은 매우 현실적이다. "좋은 것은 다
믿어라. 밑져야 본전이다." 그래서 나는 오복성이 어쩌고저쩌고 할 때 여간 신나지
않았다. 사실 그 훨씬 전 1980 년대 초에 김정빈의〈단〉이 나돌 때부터 한국에 큰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우주의 기가 히말라야 산맥에서 무슨 산을 거쳐 백두산,
한라산으로 연결된다고 할 때 나는 황홀해 마지않았다.
  한때 한국은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적절히 배수진을
쳤다. 강가에 잡은 전쟁터는 한국에 유리하였고 궁지에 몰렸던 한국은 기적같이
살아났다. 세상 사람들은 그 기적을 일컬어 '한강의 기적'이라 했다.
  나는 아직도 한국이 잘되리라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터는 다 좋은데
막상 세계와 겨루기 위해 자리 잡은 전쟁터는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한국에 여간 불리하지 않다. 용케 살아난 아군의 사기가 충만해서 하늘을 찌르면 그
기세로 치고 나가야 하거늘 배수진에서 재미 본 장군들은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강가는 오래 있을 곳이 못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예전의
승전터는 물이 올라와 진흙탕이 되어 버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다. 아군은
제아무리 용을 써도 꼼짝하지 못한다. 발만 더 깊이 빠져 들 뿐이다.
  그럼 어느 터에다 새 진을 쳐야 할까? 천하에 둘도 없는 지략가 제갈공명이
적벽대전을 어떻게 치렀던가에서 교훈을 얻어야겠다. 풍수지리에 능했던 공명은   
150 만 대군의 조조 군에 대응하기 위해 바람이 부는 방향을 감지하고 터를 잡았다.
  그렇다! 한국이 지금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세상 바람이 어떻게 불고
있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아쉽게도 제갈공명은 없지만 비슷하게 세상 바람의
방향을 잡는 이들은 많다. 〈권력 이동〉의 앨빈 토플러, 〈메가트렌드〉의
나이스비트를 비롯하여 피터 드로커, 트로 등이 있다.
  그들의 공통된 결론은 세상이 변하는 방향이 농경 시대에서 산업화 시대로, 또
한걸음 더 나아가 정보화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
이동〉에서, 이런 시대 흐름에 따라 세계를 다스리는 권력도 폭력, 재력,
정보(지식)력순으로 이동해 간다고 한다. 그의 이론을 짧게 압출하자면 농경
시대에는 주로 폭력으로 토지를 빼앗아 권력을 휘둘렀고, 그 다음 산업 시대에는
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재력이 권력의 바탕이었으며, 지금 오고 있는 후기
산업(정보화) 시대는 지식이 상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보화 시대. 지식이 중요한 시대. 육체력보다 창의력이 중요한 시대. 손재주보다
머리 재주가 필수인 세상. 터를 제대로 잡자. 최고의 명당 자리는 창의력이 흐르는
터다. 두 번째 '한강의 기적'이 일어날 곳은 강물이 흐르는 곳이 아니고 창의력이
흘러 넘치는 머리 속이다.
    졸업장은 장식품인가? 무기인가?

  가끔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는 북한 장교들의 모습을 보면 한심스럽다. 온
몸에 계급장과 훈장으로 더덕더덕 칠보단장한 꼴이 혹시 훈장들을 방탄 조끼
대용으로 사용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시대에 걸맞지 않은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그런데 우리 한국도 화려한 계급장과 훈장으로 온통 칠갑하긴 마찬가지다. 단지
우리는 좀 세련되어 눈에 잘 안 띌 뿐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 보면 나는 웃음 대신
한숨이 나온다. 우리는 장교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이마팍'에 계급장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계급장은 대학 졸업장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어떤 회사에서는 사람을 뽑을 때 무엇을 얼마큼 알고 있는가를 눈여겨보는
것이 아니라 졸업장에 적혀 있는 대학 이름, 사람 이름에서 알 수 있는 성별, 그리고
날짜로 가늠할 수 있는 나이 따위를 우선적으로 본다고 한다. 졸업장은 그저 입사
시험을 볼 수 있다는 자격증이지 능력을 나타내는 학력증이 아닌데도 말이다.
여태껏 한국의 대학 교육은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하나의 확실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의식주가 해결된 상태에서는 신분 상징에 필요한 장식품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새 시대에 있어서 교육은 의식주 그 자체 만큼이나 생존에 필수 요소다.
졸업장은 병사들이 몸에 다는 계급장이나 훈장이 아니라 유사시에 곧 효력을 발휘할
무기여야 한다는 말이다.
  고졸 인력은 맨손으로 한국의 산업화를 눈부시게 일구어 냈다. 그 동안 대졸들은
무얼 했나? 대졸자들도 직급이 낮았을 경우에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지위가 올라갈수록 안일해져 권위와 특혜 누리기에 바빴다. 지도급에 있는
상부 기득권 층은 임금 특혜, 보너스 특혜, 접대비 특혜, 레저 특혜, 세금 특혜 등
온갖 특혜를 누리기만 할 뿐 선진국의 지식도 배우지 못했고, 우리 고유의 기술이나
특성을 키워 볼 생각도 못했다.
  한국은 위로 올라갈수록 편한 사회인 듯하다. 그래서 다들 코피 터지게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양이다. 대학 졸업자들(특히 지도층)이 이렇게
안일한 풍토에 젖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동안 우리 대학이 '고생하며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중등 교육 지옥을 성공적으로 통과했다는 특권을 확인하는  
 '4 년 동안의 놀이터'로 기능했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편하고 쉽게 졸업장을 나눠 주었다. 도무지 대학생들에게 시대에 맞는
교육을 시켜 주지 않았다. 축적된 지식 기반을 바탕으로 각계 각층에서 아이디어를
활용할 수 있는 생존력을 습득하지 못한 채 사회로 배출시키면 그만이었다.
  미국에서는 "편하게 살려면 승진하지 말라."라는 말이 나돈다. 회사에서도 위로
올라갈수록 연봉을 많이 받아도 놀러 갈 시간이 없어서 일부러 회사에서 "머리 좀
쉬십시오."하고 등 떠밀어 휴가를 보내 주는데, 그러면 비행기 속에서도 개인
컴퓨터를 켜 놓고 일한다는 기사가 몇해 전 뉴스위크 지에 실린 적이 있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고등학생보다 대학생이 훨씬 더 열심히 공부한다.
그리고 대학원 연구실보다 교수 연구실이 더 늦도록 불이 켜져 있다. 나도
실감한다. 부교수에서 정교수로 승진되어 이젠 좀 쉬엄쉬엄 일해 볼까 했는데, 웬걸,
교육 개혁 위원회다 혁신 센터 소장이다 하며 왜 그리 떠맡기는 일이
많은지(그렇다고 승진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교수보다 훨씬 더 골머리 쓰는
일이 많아 밤낮 없는 총장은 오히려 더 불쌍해 보인다. 그래서 미국 대학에서는
총장 임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칠팔 년쯤 하고 나면 스스로 자리를 내놓기 일쑤다.
  한국의 산업화가 유엔의 인천 상륙으로 개시되었다면, IMF의 서울 상륙으로 그
막을 내려야 한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고졸 실력 시대의 마감이고 대졸 실력
시대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중, 고졸들의 피땀으로 온 국민이 잘 살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대학 교육 수혜자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 나갈 때다.
  이번 기회에 우리는 산업화 시대를 끝마치고 다음 시대인 정보(지식)시대로
들어가야 한다. 못 들어가면 국제 경쟁에서 지게 된다. 그리고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는 수밖에 없다.
 계급장과 훈장은 엿장수한테나 줘라. 지금 필요한 것은 울릉도 호박엿을
세계화하는 능력이다.
    외제 변기 올라앉기

  변기가 처음으로 수세식으로 바뀌었을 즈음, 변기 위에 앉는 법을 몰랐던 시골
할아버지가 큰일을 보시고 나오시더니 "아이고, 서양 놈들은 재주도 좋아라. 어떻게
그 좁은 발판에 올라가 앉을 꼬, 그리고 엉덩이에 눈이 달렸나, 정확하기도
하재."하셨다는 얘기를 농담 삼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 웃을 일이 아니다. 변기야 앉아서 쓰든 올라앉아 쓰든 하여간 쓰기는 한다.
하지만 나는 비싼 돈 들여 외제 물건을 구입하고는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한 예를 들자.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어느 기업에 자문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이 회사에서는 미국 회사에 큰 돈을 주고 최신 기계를 들여 왔는데 내가 보니
한국의 자동차와는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 기계를 한국의 생산 라인에 맞게
개조하려면 기계를 만든 회사의 기술 자문을 얻어야겠다고 말해주었더니, 자문
비용은 상무나 사장이 결재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비싼 기계를 들여와
놓고도 활용을 못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자문 인식도가 낮을까? 과거 우리가 아주 가난할 때는 선진국에서 다
쓰고 폐기 처분된 기계들을 값싸게 들여 왔다. 그러면 선진국에서 공짜로 생산
기술까지 가르쳐 주었다. 이미 본전을 다 뽑은 기술이고 자기네들에겐 더 이상 쓸모
없는 기술이었으니까. 이제 우리는 후진국 대열에서 벗어났다. 세계 경제 11위면
선진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기술 개발을 하든가 아니면 그 대가를 치르고 첨단
기술을 사 와야 한다. 아직도 공짜 기술을 바라는 경영자는 거지 땟국물을 벗지
못한 졸부 격이다.
  자문 인식도가 낮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처음 이유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품만 돈 내고 살 가치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문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하드웨어 산업화 시대에 구닥다리 경영자들이
많은 한국 기업이 힘들어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자문은 소프트웨어다.
정보화 시대에는 소프트웨어에 아낌없이 투자를 해야 한다.
  대학에서도 소프트웨어에 대한 인식도가 낮은 경우를 봤다. 언젠가 한국의 모
대학에 특강을 하러 갔는데 대강당으로 향하는 내 앞으로 몇 명의 교수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위에서 가는 내가 연사인 줄 모르고, 말을 주고 받았다.
"어이, 김 교수 특강 들으러 가시오?", "예, 들어 주러 가야지요." 시간 때우러
간다는 자조와 마지못해 억지로 간다는 비자발성이 역력히 배어 있는 말투였다.
  듣기 싫으면 안 가면 되지 왜 아까운 시간을 버려 가며 관심없는 특강을 '들어
주러' 갈까?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특강에 빠지면 근무 평가 점수가 깎여
승진에 좋을 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의욕을 불러 일으켜야 할
교수들을 억지로 끌어들여 자발적 강의를 배우게 한다? 앞뒤가 안 맞는다. 아마도
강의를 들어 주러 오던 그 교수에게 교육에 대한 아이디어 대신 필요한 기자재를
준다고 했으면 허겁지겁 뛰어오지 않았을까.
  외래 변기를 사 놓았다고 똥 냄새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냄새 안 나게 사용하려면
하수구 시설부터 개조해야 하듯이 정보화 시대의 시스템을 도입하려면 제반 기초를
다져야 한다. 그 첫 번째가 소프트웨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에 따른 지식의
유통 개혁이다.
    지금은 노하우(know how)가 아니라 노와이(know why) 시대다.

  나는 한국에 가서 여러 대학을 다니기도 하지만 이곳 미시간에 있어도 한국의
대학에서 오는 손님들을 많이 만난다. 1996 년도 한 해만 하더라도 13 대학에서   
 17 명의 교수님들이 방문하셨다. 내가 알기로는 대학 개혁을 위해 여러 대학의
총장, 학장, 교수들이 미국, 일본, 독일 등 소위 선진국의 대학을 시찰하러 다니신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을 좋아하듯이 나는 말 대신 직접 오셔서 피부로 느끼는
일을 매우 환영한다. 사실 방문 오는 분들의 대다수는 외국 여행이 첫나들이가
아니라서 관광은 안 하고 정말로 열심히 배우려고 하신다.
  그분들이 나들이할 때 제일 고통스러운 점은 아마 음식이 아닐까 싶다. 미국에는
우리한테 역겨운 치즈를 넣는 음식이 무척 많다. 치즈를 넣음으로써 맛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즈를 마카로니 국수에다 비벼 먹기도 하고 데친 브로콜리 위에
녹여 먹기도 한다. 또 보통 햄버거보다 조금 더 비싸지만 치즈버거를 더 즐긴다.
  그러나 치즈가 미국 음식을 맛나게 해준다고 해서 우리 나라 냉면이나 오이
나물이나 불고기에다 첨가한다면 그 맛이 어떻게 될까? 서양 맛도 우리맛도 아닌
이상야릇한 음식이 될 것이다. 요리에도 실험 정신이 필요하고 창의력이 중요하지만
무조건 흉내 내는 것은 요리의 기본을 모르는 무식한 짓이다. 비싼 재료를 섞어
넣고서 요리 망치는 첩경이다. 치즈 파이는 '따봉'이어도 치즈 불고기는 영 '파이'다.
  요리에도 이런 기본이 있듯 선지국 시스템을 견학하는 데도 비슷한 기본이 있다.
대학 시스템의 부분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 문맥까지 고려해야 하는 법이다. 평범한
음식마저도 태양인이니 소음인이니 체질을 따져 가면서 먹어야 한다지 않는가.
아무리 좋은 외국 시스템이라도 한국 시스템에 맞지 않을 수 있다. "맞지 않을 수
있다."보다 "운이 좋으면 맞을 수도 있다."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것을 인체에다 비유해 보자. 간 이식 수술을 한다고 간만 덜렁 떼어다 붙일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다른 체질과 맞지 않아 부작용이 생기거나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가끔 다음해 대학 평가 때까지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면서 급하니까 거두절미하고
요점만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한다. 말할 시간이 없으니 데이터만 보내
달라는 대학도 있다. 데이터와 정보는 다르다.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용하는가에 따라 정보 가치가 생기기도 하고 휴지 조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부탁을 받으면 상당히 난처하다.
  하드웨어 시대에는 '어떻게'(노 하우, know how)가 중요한 기술이었다. 그리고
지금, 소프트웨어 시대에는 '왜'(노 와이, know why)가 상대적으로 중요해지고
있다. 남이 창작한 것을 자기한테 걸맞게 개조하기 위해선 '왜'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는 어떻게 해서라도 알아낼 수 있다. 눈만 뜨고 열심히 보면 언젠가는 보일
테니까. 그러나 '왜'는 머리 속 깊이 감춰져 있기 때문에 눈을 감고 봐야 한다.
  눈감고 본다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도사나 눈감고 보겠지, 눈뜨고도 못 보는
것이 허다한 이런 보통 사람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요구다. 맞다. '왜'를 알기란
참말로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여러 학과에 가서 일반 교양 과목을
이것저것 듣게 한다. '왜?' 이 대답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나는 이유를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그 답은 서양 교육의 철학과 역사를 알아야 하고, 미국의 교육 정책을
알아야 하고, 미국 대학의 재어 실태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던 것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일반 시스템마저 이 정도로 복잡한 맥락을 갖추고 있는데 하물며
다른 것은 더 복잡하리라.
  그러니까 힘들여 '왜'를 알아내지 않으려면 스스로 자기한테 알맞은 시스템을
만들어 적용해야 한다. 그러려면 창의력이 필요하다. 모험심이 필요하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치즈 불고기는 창의력 없는 불필요한 시도다.
    돈 없이도 돈 벌 수 있다.

  대학 입학 때 나는 경제학과에 등록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다 돈인 것 같아
보였고 돈의 흐름을 이해해야 세상을 움직일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
학년 첫 학기가 시작된 지 이 주일 만에 보따리 싸 들고 공대로 전과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런 대로 수학을 잘했는데 이상하게도 숫자 앞에 $표시가
붙어 버리면 덧셈 뺄셈마저 안 되지 않는가. 회계학 수업 중엔 $자 붙인 숫자들이
여기저기 뺑뺑 돌아다니는데 도저히 어지러워 견디기가 어려웠다. 고등 수학에
나오는 허수는 아마 경제학에서 개발하지 않았나 싶다.
  돈. 자본주의 사회의 원동력. 산업화 시대의 우상. 생각하면 할수록 참 괴상한
것이다.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물거품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가. 물건이 귀하거나 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물건 값이
비싸진다. 뒤집에서 보면 그만큼 돈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 된다. 이 정도의
경제 원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그렇게 귀했으며 한국인이
뭘 그리 원했기에 한국 돈의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졌단 말인가?
  한국은 달러를 원했지만 달러는 무척 귀했다. 경제 발전을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다 국내에다 풀었다. 많은 돈이 흘러 다니다 보니 옆으로 새는 돈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렇다 치자. 그리 나쁠 게 뭐 있는가. 지금까지 금 40--50 년간 그렇게
해서 한국이 발전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런 성공적인 방법이 먹혀
들지 않는가.
  산업화 시대는 돈 놓고 돈 먹기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우선 돈을 끌어 모아야
한다(자본주의 원칙). 그래서 공장도 짓고, 직원들이 공장 근처에 모여 살 수 있도록
도시도 만들고 고층 아파트도 지어야 한다. 원자재를 수입해오고 생산품을 수출하기
위해 필요한 항만과 대형 선박도 만들어야 한다. 돈이 들어오면 돈을 모두가 나눠
먹기보다는 그대로 재투자해서 더 많은 돈을 모아야 한다. 누굴 위해서? 다들
한국을 위해서라고 했다.
  한국을 위해서라고 하는 데 군말 할 한국인은 없다. 그래서 한국인은 참 오랜
기간 동안 허리띠 졸라 매고 열심히 일했다. 번 돈은 언제쯤 나눠 먹게 될까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했다. 세계 부자 서열 십 등이 코 앞에 보인다
했다. 곧 한국이 지상 천국이 될 거라고 했다. 그뿐 아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지상천국으로 만들 거라고 하면서 힘들어하는 한국인을 달랬다. 본래부터 통
큰 한국인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돈 놓고 돈 먹는 세상이 아니다.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해 돈
모으는 세상이 아닌데 한국은 계속해서 구시대 방법을 쓴 것이다. 안타깝고
애처롭다. 이제는 아이디어 내놓고 돈 먹는 세상인 것이다.
  빌 게이츠는 돈 한 푼 없이 자기 차고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빌 게이츠와 쌍벽을
이루었던 스티브 좁스도 집 창고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이런 예는 그다지 특별한
예가 아니다. 돈 한 푼 없이 기업을 일으키는 창업자 시대가 바로 정보화 시대의
특이한 일면이다.
  미국 대학에서 최근에 제일 번창하는 과목 역시 '창업'에 관한 것들이다. 경영
대학원에서나 조금 다루었던 '창업' 과목을 요즘엔 너도나도 다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아예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는 대학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리더쉽'이나 '혁신'이라는 과목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서점에 가면 '돈 없이 돈
벌기'를 다룬 책들이 무수하게 쏟아져 나와 았다.(그 책들이 다 돈을 버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와서 나는 내가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것을 새삼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에는 돈의 유통과 힘을 깨우쳐 알아야지 돈도 벌고 감투도 쓰고
존경도 받게 된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돈을 버는 세상에선 지식의 유통과 힘(지력)을 깨우쳐 알아야
한다. 나는 내가 교수임이 무척 기쁘다. 학생들에게 새 시대의 필수인 지력을 심어
주고 있다는 자부심. 그것이야말로 나를 부자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날아라 나비야.

  "난 단지 거인의 어깨에 올라앉았기 때문에 멀리 볼 수 있었다." 뉴턴의 말이다.
이것을 그저 겸손의 표현으로 보지 말자. 뉴턴은 중력과 운동력의 법칙을 발견한
대석학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의 손자국이 남아 있지 않은 학문이 없을 정도다.
그토록 방대한 영역에 두루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에게는 남이
이루어 온 결과만 보지 않고 그 다음 단계까지 볼 수 있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잘 되기 위해서는 한국도 우선 거인의 어깨에 올라앉아야 했다. 그러나
한국은 처음부터 스스로 거인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을 배우고 그들의
행동을 흉내 내었다. 그리고 거인들이 걷는 길을 그대로 따라 다녔다. 그러다
거인들이 걸려 넘어진 돈에 한국도 걸려 넘어졌다. 그러나 아직 거인이 못 된
한국은 돌에 걸려 넘어져도 그리 아프지 않았다. 어린애는 걸핏하면 넘어져도 뼈가
부러지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거인들이 빠졌던 함정마저 좇아 빠지고 말았다. 거인들은 큰
덩치 때문에 혼자서도 기어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키가 덜 자란 한국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혼자서는 그 구덩이를 빠져 나오기가 힘들다.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니고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은 죄다 같은 함정에
빠져 버둥거리고 있으니 너무 한국만 탓하지 말자. 아이한테는 불이 뜨겹다고
아무리 말해 줘 봤자 소용없고 결국은 불에 한 번 데여 봐야 조심하는 법. 산업화를
신나 하는 나라에 대고 정보화 시대는 다르다고 아무리 말해 봤자 역시 소용없는
모양이다. 요는 데이기는 데였는데 너무 큰 화상은 입지 않았기를, 그리고 불은 물과
다르게 다루어야 한다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길 바랄 뿐이다.
  뉴턴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신의 영역에서 자연을 분리시키고 인간의 영역으로
끌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200 년 후에 다윈이 나타나 생명마저 신의
영역에서 분리시키고 말았다. 뉴턴의 물리학이 씨앗을 뿌린 산업화 시대는 끝나
가고 다윈의 생물학이 중요한 정보화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생물학은 물리학과 질적으로 다르다. 물리학의 모든 학설은 몇 가지의 원리로
압축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이 세상 모든 법칙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처럼. 그러나 생물학은 다르다. 생물학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그래서
생명의 다양함을 찬양한다. 생물학에는 유기체적, 통합적, 자율적, 시너지 등
물리학에서는 생소한 단어들이 자주 쓰인다. 물리학의 기본 시스템은 선형(linear)
시스템이다. 원인에 대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소위 기계적이고 결정적인
시스템이란 뜻이다. 그러나 생물학의 기본은 비선형(non-linear) 시스템이다.
생물이란 주어진 본질을 언제까지나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예측 불허의 대상이다. 그래서 변태가 가능한 것이다. 생물학에서
배울 것이 많지만 단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그것은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는
생물은 전멸하고 새 환경에 걸맞게 적응하는 생물은 번창한다는 것이다.(다윈의
진화론)
  산업화 시대가 기어 다니는 애벌레와 같다면 정보화 시대는 날아 다니는 호화
찬란한 나비와 같다. 나비는 애벌레가 변신한 것이지만 나비의 모양, 행동 등 생체
구조 어느 하나라도 애벌레의 것과 비슷하지 않다. 나비와 애벌레에게 의식 구조가
있고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그것에도 천지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한국은 경제 선진국을 보면서 그들이 현재 어디에 있으며 그들이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도 파악해야 한다. 경제 선진국은 계속 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번데기 껍데기를 벗고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닐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한국은 그저
애벌레 모습에 취해 조금씩 더 큰 번데기가 되어 가는 것을 기뻐했고 버려진 번데기
껍데기에 미련이 많았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껍데기를 벗고 나비가 되어 날 준비를
해야 한다.
    의병들이여 일어나라.

  나는 어린 시절을 카리브 해에 있는 자메이카라는 섬나라에서 보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아스팔트를 깔아 놓은 앞마당에 온 식구가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별을 올려다보면서 부모님께서 들려 주시는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온종일 열대 햇볕을 받은 아스팔트는 등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별나라 이야기 같은 한국 옛날옛적 이야기는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었다.
  어려서 고국을 떠난 나는 옮겨다 심은 나무 같았고, 그런 내게 고국에 대한
이야기는 축 늘어진 나무를 적셔주는 빗방울 같았다. 그 때 들은 이야기는 내가 본
별만큼 무수히 많았는데 그 중 내가 가장 신나 했던 이야기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일어났던 의병 이야기다. 집안의 조상님들도 대거
가담했다는 부분에는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훗날 한국 역사책을 읽으면서 풍신수길의 군대가 후퇴하게 된 이유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에 비추어 보니^5,5,5^ 아, 역사는 되풀이
되어야만 하는가? 이렇게 말한 투키디데스가 원망스럽다.
  그 때 무력한 조정이 불러들인 구원병은 명나라 군이었다. 이번에도 무식한
사람들이 외지에서 온 IMF군의 구원을 바라고 있다. 그 때 국토는 쑥밭이 되고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방방곡곡 흘러나왔었다. 지금, 전국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매스컴을 타고 미국에 있는 나한테까지 들려 온다. 그 때는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
의병이 등장하여 풍신수길은 꽁지를 감추고 부리나케 내뺐다. 지금은^5,5,5^?
  오늘날의 풍신수길은 누구인가? 의병은 어디에 있는가? 거북선은 무엇하고
있는가? 언젠가 미 해군 무기 연구소의 정물 한가운데에 진열되어 있는 모형
거북선을 본적이 있다. 창의력이 번뜩이는 거북선이 장식품같이 모셔져 있었다.
미국서는 그렇다 치더라고 왜 한국에서마저 거북선이 장식품이어야 하는가. 한국에
창의력 바람을 몰고 올 거북선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정보화 시대에 필요한 창의적 지식 무기를 준비하지 못했고 지식 자원을
축적하지 못한 것은 바로 우리의 교육 체제가 지식 구조를 형성해 나가는 데 전혀
맞지 않고 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IMF 폭탄 (나는 이것을
원화를 절감시킨 '원저' 폭탄이라고 부른다)이 떨어지도록 내버려 둔 내부 요인이
바로 한국의 교육 체제라고 믿고 있다. 우리가 정말 못나서가 아니라, 단지 교육
체제가 사람들을 시대 역행형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토록 경계하던
공산당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었는데 우리 스스로 무너졌다.
  보라, 문제라고 지적된 정치인, 경제인, 법조인, 회사 간부, 은행 관리, 고급
공무원 등 대다수는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대학에 가지 못한 고졸 이하의
노동 인력들은 패배감과 열등감을 떨쳐 내지 못한 채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어린이,
청소년, 학부모, 교사들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면서도 정작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더 정확히 말해서 무엇을 못 배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지식 구조의 이런 삼각 모순이 합쳐져서 오늘과 같은 총체적
위기를 맞은 건 아닐는지.
  몇 해 전인가 한국의 어느 기업가가 "한국의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다."라고 말했다가 욕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욕먹을 각오를 하고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한국의 "교육은 5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분명 한국인의
능력과 잠재력은 세계 초일류급이다.
  교육 체제와 틀을 바꾼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풍부한 정신 문화 유산과 에너지와
두뇌를 최적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교육의 힘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이끌어 낸다고 한다. 한국을 위기로부터 구해 줄 구원 병사는
'아이디어(창의력)'라는 첨단 무기를 지녀야 한다. 구원 병사여! 구원 병사여! 그대
이름은 I Am a Foreigner(나는 외국인)가 아니다. 의병들이여, 일어나라.
    2. 바깥에선 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어지러운 구호 시대

  아마도 이 책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시대'일 것이다. 구시대, 새시대를
비롯하여 농경 시대, 산업 시대, 후기 산업 시대 등 시대 구분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고, 후기 산업 시대의 '별명'으로 정보 시대, 무한경쟁 시대, 경쟁^5,23^협력 시대,
세계화^5,23^글로벌 시대, 인터넷 시대 들이 있다. 그 다음으로 이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고등 교육 시대, 순발력 시대, 다양화 시대들이 등장한다. 이 이외에도
원저(원화가 평가 절하된) 시대, 고졸 실력 시대, 대졸 실력 시대 등 내가 임의로
이름 붙인 것도 많다. 이왕 만드는 김에 하나 더 만들자. 이 시대는 한 마디로
'어지러운 구호 시대'다.
  '정보 시대'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한테서도 들을 수 있는 시대의 변화를 나타내는
구호다. 그러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대 변화를 느끼게 해 줘야 할 텐데 오히려
반대 결과를 초래하는 것 같다. 매일 '정보 시대'라는 말을 들으니 오히려 그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어쩌다 한 귀로 들어온다 해도 순간 다른 귀로 흘러 나가
버린다.
  누가 'X 같은 새끼' 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 X'를 연상하는가. 귀에 익은 단어는
마치 그 단어의 깊은 뜻을 이해하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맛있는 요리를 자주
먹으면 맛 자체에 대해서는 둔감해지고 그저 '맛있는 요리'로 인식되듯이 말이다.
  사실 시대 구분은 아무 사회학 교과서에 다 나오는 얘기다. 그러나 대중을 위한
책으로 앨빈 토플러의 〈권력 이동〉,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를 비롯한 많은
책들이 출판되어 있다. 한국 책으로는 이정전 교수의 〈녹색 경제학〉이 흥미롭다.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세계는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다시 정보 사회로 변해
가고 있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점은 시대 변화는 생산 방식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구조와 생활 방식, 사고 방식까지 덩달아 변한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이 곧 패러다임 이동이다.
  패러다임 이동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지구에 대한 인식과 그로
인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확인되기까지 뱃사람들은 배를
타고 육지가 안 보이는 데까지 나아가기를 무척 두려워했다. 지구 끝이라 생각하던
수평선을 지나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지구가 둥글다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던 시절도 있다.
  담배에 대한 인식과 담배 피우는 방법을 보자. 한 개피 꺼내 물면 뭔가 멋있는
일류 인생을 만끽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던 담배가 지금은 아주 몰상식하거나
무식하거나 불쌍한 인간 같은 대접을 받게 만들고 있다. 아무 때고 어디서나 피울
수 있던 권리를 빼앗긴 채 마치 마약이라도 피우는 듯 흡연실에 '동지'끼리 모여
옹기종기 피워야 한다. 눈총받고 초라하게 느껴지고 죄인이 된 것 같다. 나 역시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껏 피워 온 담배였지만, 범죄자 취급까지
당하면서 피우자니 내 정신 건강을 해치는 것 같아 결국엔 깨끗이 끊고 말았다.
  패러다임 이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대 차이를 느끼게 만들고 순식간에 구닥다리,
구제 불능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답은 87.40080763

  학생들이 해 온 숙제에는 가끔 긴 숫자가 보인다. "답은 87.40080763입니다."
계산기를 두드려서 나온 숫자를 그대로 적은 것이다. 세 자리 수로 87.4 만 적어도
충분한데(오히려 그래야 옳은데) 학생들은 왜 그런지 열 자리 숫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적는다. 계산기에 적힌 숫자는 신이 내려 준 십계명 같은 존재가 아닌데
왜 그래야 할까?
  이런 숫자를 대하는 순간이면 신경질이 팍 돋고 빨간 펜으로 싹 그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엔지니어는 숫자의 신봉자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욱 하는
순간을 겨우 잘 넘기고 나면 그렇게 긴 숫자를 적어 낸 학생이 측은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이 세상을 남 안 속이고 벌어먹겠다고 공돌이 엔지니어 학과에 들어왔는데
싶어서이다. 과부의 설움은 동무 과부가 안다는데 나 역시 공돌이 아닌가.
  불행스럽게도 쓸데없이 긴 숫자를 적는 학생들이 너무 많다. 이상한 노릇은
그러지 말라고 여러 차례 수업 시간에 주의를 주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그런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를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완강하게 지배하는 산업
시대의 사고 방식(구패러다임)에서 찾아본다.
  산업 시대는 증기 기관의 발명으로 시작되었다. 그런 기계의 밑바탕을 이루는
힘은 과학이었다. 과학의 기초는 물리이고, 전통 물리학은 뉴턴의 법칙으로
대표된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객관주의와 이성적 합리주의가 뒷받침이 되어
주었고, 그 역시 사람을 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계몽 운동에서 비롯하였다.
  산업 시대는 돈을 한 곳으로 모은 자본가가 사람도 중앙 한 곳으로 모았고,
사람마저 기계적으로 일하는 공장을 지었다. 플라스틱과 전기 제품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물건들이 획일적으로 대량 생산되어 나왔는가. 가진 것이 별로 없었던
사람들은 뭐든 갖기가 소원이었고 값싼 물건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신형 제품이
나올 때마다 구형 제품들은 쓰레기통에 쌓이고, 남의 집 쓰레기는 골동품이라는
명목 아래 다시 사들여져 집안에 쌓인다. 무조건 크면 좋고 많으면 좋았다.
  기술은 자꾸 발전되어 자동차와 비행기는 공간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켜 주고,
세탁기와 전기 밥통은 시간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그리고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매스미디어는 무지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한
계몽 운동은 사람을 신, 시, 공, 무지로부터 차례로 해방시켜 주었고 지금은 같은
인간으로부터의 해방 운동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노예 해방, 식민지 해방,
여성 해방^5,5,5^  이렇게 인류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한 과학과 과학자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고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경제학마저 사회 '과학'이라
자칭한다. 뉴턴이 전통 물리를 세운 후로 과학은 300 년 동안 서서히 사람을 기계적
논리의 신봉자로 개종시켰다. 과학을 하면서 자신이 과학을 믿기 때문에 한다 하지
않고 그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과학의 신봉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절대 다수가 된 오늘날 과학은 인간을 지배하는 절대적 신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답은 87.40080763입니다."라고 적어 내는 학생은 자신이 신봉하는 기계가 정해
준 정답을 기계적으로 베껴 제출했을 뿐이다. 산업 시대의 획일 적, 기계적 사고
방식과 많으면 많을수록 뿌듯한 대량 생산적 사고 방식에 순종하였을 뿐이다. 결국
그 학생은 산업 시대의 대표 걸작품인 셈이다.
    "답은 87.40080763입니다"는 틀렸습니다.

  뉴턴의 사과가 항상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야 하듯이 산업화 시대에는 뉴턴의 법칙
같은 절대적인 이론들이 인간의 모든 사고와 생활을 지배하고 말았다. 유아기의
경험이 성인의 성격과 정신 건강 상태를 완전히 결정 짓는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대표적인 결정론적 심리 이론이다. 또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또는 스키너의 자극과
반응이라는 기계적 학설이 교육에도 자리를 굳혔다. 따라서 학생도 파블로프의 개
다루듯 말을 잘 들으면 머리 쓰다듬어 주고 안 들으면 때려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꼭 이래야 만 된다는 사고 방식은 뒤집어 놓고 말하면 그것 이외는 아무것도
허용이 안 되는 배타적인 사고 방식이다. 그러니 "눈 파랗고 금발인 아리안
인종만이 최고로 우수하다."라는 히틀러나 "조센징은 안 돼."라고 못 박는
히로히토는 다 한통 속의 배타적이고 닫힌 생각의 원흉인 것이다.
  일차 대전과 이차 대전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과학의 어두운 면을 실감했다. 그로
인하여 과학의 선악설이 나돌기는 하였지만 그 동안 기술은 계속 발달해 나갔다.
전기 제품은 전자 제품으로 대치되고, 자동차 성능보다는 컴퓨터 성능을 더 따지는
세상이 되었다. 아무나 아무 때나 어디서나 일할 수 있게 되자 고속도로 건설보다
정보 고속도로가 더 시급해졌다. 의식주가 해결되어 여유가 생기자 사람들은 취향을
따지기 시작했다. 제조업자는 값싸게 대량 생산해 내봤자 팔리지 않으니 비싸더라도
고품질과 서비스 위주의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로 들어가야만 했다.
  서너 방송국이 주축이 되어, 온 나라 사람의 의견을 한 가지로 동화시키는 요술을
부렸던 매스미디어가 머지 않아 500개 채널의 멀티미디어로 쪼개지고, 사람들은
점점 여러 갈래의 사람들과 색다른 경험을 하고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이래야만 된다."라는 산업 시대의 배타적 사고 방식이 이제는 어이없게
들리는 세상이 되었다.
  환경 오염이라는 범세계적인 문제에 부딪치면서 사람들은 과학 기술과 이성적
합리주의의 한계를 비로소 인식한다. 서로 경쟁을 하더라도 협력을 해야만 사는
'경쟁'협력 체제의 글로벌(지구촌) 시대가 온 것이다. 아시아^5,23^태평양 경제 협력
기구(APEC), 우루과이 라운드(UR), 무역과 관세를 위한 국제 조약(GATT)같은
범세계적인 통합 체제 속에서 각 나라가 협력한다는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각
나라가 세계를 대상으로 해서 경쟁을 치르겠다는 무한 경쟁의 선언을 뜻하기도
한다. 이렇게 동시에 상반된 개념을 지닌 이중성이 이 시대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비결정론적, 가변적, 다양성, 이중성. 이런 기본 성향을 알고 보면 요즘 들리는
어지러운 구호들이 쉽게 파악된다. 골치 아픈 세상으로 느껴지기보다 아주 재미있고
신나는 세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부자를 보면 시대가 보인다.

  지금까지 언급한 시대 변화를 여기서 대략 특징별로 정리하고 지나가자.
  첫째, 시대에 따라 사용한 도구(기술)를 보면 농경은 쟁기와 가축을, 산업은
기계와 공장을, 그리고 정보 사회는 컴퓨터를 주로 사용한다.
  둘째, 이런 도구를 써서 주로 무엇을 만들어 냈느냐 하면 농경은 쌀.밀.가축과
같은 동식물을, 산업은 운동화.자동차 같은 공산품을, 그리고 컴퓨터는 정보를
만들어 낸다.
  셋째, 이런 산출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원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동식물은
토지가 그 토대였고, 공산품은 재료를 값싸게 사다가 인력을 부릴 수 있는 자본이
바탕이 되었으며, 그리고 정보 시대에는 정보를 처리하고 새 기술을 만들 수 있는
지식이 그 기반이 된다.
  넷째, 이 같은 기술과 자원과 산출품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조직했는가를 보면,
농경 사회에서는 가족, 친족, 씨족 단위로 생산과 소비 활동을 했고, 산업
사회에서는 회사나 공장 단위로, 그리고 정보 사회에서는 인터넷 같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생산, 소비, 유통이 이루어진다.
  다섯째, 이런 생산 활동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어디에서 얻었을까를 보면
농경은 사람과 가축의 근육의 힘에서, 산업은 석탄, 석유와 같은 연료에서, 정보는
사람의 두뇌에서 나오는 창의력에서 얻는다.
  이런 시대 흐름에 따라 온 세상이 변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이 어떻게 변하는가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부자들을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미국의 부자들을 예로 든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마지막 장면에
스칼렛 오하라는 "타라, 타라"를 외치며 농장에 희망을 건다. 남북 전쟁 시절만
하더라도 미국의 최고 부자는 스칼렛 오하라와 같은 대지주들이었는데 다들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 다음으로 자동차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개발하여 산업화를
풀가동시킨 헨리 포드가 미국의 최고 부자다. 오늘날의 최고 부자 자리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가 차지한 것을 보면 미국이 정보화 시대에 있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느 시대에 있는가? 선진국은 정보 고속도로를 놓기에 바쁜데
한국은 무슨 도로를 만들고 있는가? 한국에선 땅 부자도 부자요, 대기업 재벌도
부자요, 마이크로 칩으로 떼돈을 번 사람도 부자다. 또 삐삐, 무선 전화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분명 변해도 한참을 변했는데 도대체 뚜렷한 시대
변화를 가늠해 볼 수가 없다.
  구미에서는 산업 혁명이 시작된 후로 근 300 년이나 걸린 시대 변화를
한국에서는 지난 30 년 만에 일구어 냈으니, 세 가지의 시대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마치 1960 년대에 한국의 거리에 소가 끄는 달구지와
자동차가 같이 어울려 다녔듯이 말이다.
    새 시대는 영원한 과도기 시대다.

  내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자주 듣는 이야기 가운데 "과도기라서 그렇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지금은 과도기이니까 조금 지나면 괜찮을 것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좀더 기다려 보고 상태가 안정되면 그 때 가서 상황을
판단하고 대응하겠다는 태도다. 그러나 그러면 이미 때는 늦는다. 그리고 기다려
봤자 안정된 상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새 시대는 영원한 과도기 시대이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들은 컴퓨터의 새 모델이 나올 때는 값이
비싸니 좀 기다렸다가 다른 새 모델이 선보일 즈음에 값이 내려가면 그 때 가서
컴퓨터를 사겠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모델 286이 지나고, 386이 나와도 더 싸질
때를 기다리고, 486 팬티엄1, 팬티엄2를 내내 기다리다가 결국 컴퓨터를 못 사고
만다. 그러는 사이 '과도기'를 잘 활용하는 사람은 남보다 앞서 일을 할 수 있다.
예전에도 분명 변화는 있었다. 그러나 변화에 대해 적응할 기간이 충분했다. 지금은
그 변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게다가 변화의 내용, 성격, 속도, 충격들도 변한다.
가속적으로 빨라지는 변화는 마치 컴퓨터의 발전 속도(4, 16, 32, 64, 256, 512,
1024)와 비례하는 듯하다. 새 시대는 정말로 변화무쌍한 시대다.
  문서가 편지로 오갔을 적엔 한 나라 안에서도 회답을 받기까지 적어도 5--6일쯤
걸렸다. 지금은 FAX와 전자 우편으로 오기 때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해야 한다.
거래처의 요구를 5--6일씩 뜸들이다가는 다른 거래처에 우선권을 빼앗길 수 있다.
거래처도 동네, 지역, 도시, 국가뿐 아니라 인터넷을 통하면 세계 구석구석까지
순간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무한 경쟁 시대라고도 한다. 따라서 무한 경쟁
시대에는 창의력뿐 아니라 순발력까지 필요하다.
  영원한 과도기 시대에는 과도기에 강한 시스템만이 생존 경쟁에서 살아 남는다.
순간 순간 변하는 세상에 순발력으로 대응하려면 유연성이 필수이다. 그래서
개인이나 조직이나 경직된 구조를 가져서는 안 되고 유기체적으로 변해야만 한다.
그러자면 피라미드형 위계 서열 조직보다 프로젝트 중심의 원형 구조로 바뀌어야
유연성, 순발력을 살릴 수 있다.
  좋은 예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의 입시를 보자, 매해가 과도기다. 매년 변하는
입시 제도가 학생과 학부모를 긴장시키고 애간장을 태운다. 느긋하게 기다릴 수가
없다. 눈치코치 다보고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한때는 여러 대학의 경쟁률을 무선
전화로 비교해 가면서 원서 제출 마감 시간을 일 분 남겨 놓고 원서를 내미는
순발력과 유연성을 보이지 않았던가. 지금은 입학식 직전까지 자기가 어느 대학에
가게 될지 모르는 세상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는 성적순으로 위아래가 정해진다.
그러나 조만간에는 반드시 더 큰 변화가 오리라.
  혹시 이제까지 한국의 기업은 순발력 대신 지구력(혹은 배짱)으로 선진국과
대결하기 위해 몸을 비대하게 불리는 데에만 투자를 한 건 아닌지 걱정된다. 문제는
기업만 대기업화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대학들도 대기업처럼 양적 팽창에
치중했다는 점이다. 학생 수 국내 몇 위, 캠퍼스 크기 아시아 몇 위 등을 자랑으로
여기는 대학들이 많이 생겨났다. 사회가 빨리 변하는 만큼 대학도 사회의 요구에
맞게 순발력과 유연성 있는 조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개혁은 정보 유통에서 시작된다.

  가격 파괴! 이것은 물건이 중간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생산자에서 소비자에게
바로 전달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꼭 곧바로는 아니더라도 도매상에서 소매상으로
가는 과정을 대폭 줄이는 유통 개혁의 결과다. 중간 도매상은 문닫을 수밖에 없고
그들이 떼어가던 이윤을 소비자한테 넘겨 주니 값이 싸지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간 도매상을 거치는 동안 생길지 모르는 물품 파손에 대한 손해 비용, 진열비,
보관비, 운송비가 줄어드니 값이 더 내려가기도 한다.
  조퇴, 명퇴! 이것은 회사의 업무가 중간 사무원을 거치지 않고 책임자와
'최전방'에서 일하는 사원들 사이에서 직접 이루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정리
해고는 대개 정보 유통 개혁으로 인한 구조 축소(다운 사이징) 때문에 벌어지는 데
한 마디로 중간 사무원이 없어도 업무 진행에 지장이 없고, 또 그래야 저비용,
고효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격 파괴 현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지시 사항이 세월아네월아
하면서 회장, 사장, 상무, 전무, 부장 과장, 대리의 순서를 거쳐 내려오고, 또
보고서가 다시 이 겹겹의 차례를 지켜 올라가고. 이러다간 회사가 쥐도 새도 모르게
망해 버릴지 모르는데, 때는 지금 순발력 위주, 무한 경쟁 시대이기 때문이다. 푼돈
아끼는 문제가 아니고 회사의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라는 말이다.
  연애 결혼! 이것은 집안의 혼사가 중매쟁이를 거치지 않고 당사자들끼리 직접
일을 벌일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 유통 개혁이라고 말하기가
어색하지만, 남녀 관계 없이 아기가 태어나기도 하는 뉴스를 접하면서 이런 말이
통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유통 개혁은 필요하면서도 하기 힘든 면이 있다. 피해자가 생기기 때문이다. 요즘
정리 해고 때문에 개인, 기업, 국가 모두가 힘들어한다. 그 동안 아무런 잘못 없이
열심히 일해 온 사람들을 정리 해고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예전의 실업 문제는 대개 노동자, 농민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산업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요즘, 실업은 사장부터 신입 사원까지 무차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피라미드식 산업 구조에서 거미줄 정보 구조로 회사 조직이 개편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조직이 피라미드식일 때에는 간부마다 직속 비서가 있었다.
회장의 경우에는 비서가 많아 비서실을 둘 정도였다. 그러나 현대는 자기 생각을
자기가 관리하고 언제 어디서나, 세계 각국 누구와라도 직접 닿을 수 있기 때문에
비서를 통해 약속하고, 확인하고 회답을 주는 것이 훨씬 성가시다. 컴퓨터 한 대면
집에서든 비행기 안에서든, 밤이든 주말이든 생각나는 대로 일 처리를 할 수 있는데,
일일이 시키느라고 비서를 집에 데리고 올 수도 없고, 매번 같이 돌아다니기도
귀찮은 노릇 아닌가. 중간 관리자를 대폭 줄이고도 무리가 없기에 정리 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운 사이징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고용 인력 수만 줄여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조직 자체가 유기체적으로 변해야 한다. 프로젝트 위주로 인력이 개편된다면
한 사람이 몇 군데 프로젝트에서 활약할 수 있어야 한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반드시
어느 부서 어느 직책만을 고집하는 것은 인력 낭비이고, 부서끼리 쓸데없는 경쟁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꼴이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주도한다.

  정보화 하면 컴퓨터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컴퓨터는 손에 잡히는 딱딱한
물품(하드웨어)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보 시대를 하드웨어 시대로 착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하드웨어는 산업화 시대의 물품이고 새 시대는 그 반대로
소프트웨어(무형 물품) 시대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각 시대별로 대표 부자의 대표 물품을 따져 보자. 산업
시대의 세계 부자는 철강 왕 카네기, 석유 왕 록펠러, 자동차 왕 포드 등이었다.
철강이니 석유니 자동차니 모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유형물(하드웨어)이다.
  그러나 정보 시대의 세계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 소프트사는 컴퓨터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다.(세계적으로 컴퓨터를 만드는 회사들은 아주 많다. 세계
각국의 여러 기업들이 컴퓨터를 만들지만 소프트웨어 산업만큼의 돈을 벌지는
못한다) 빌 게이츠가 개발한 마이크로 소프트의 프로그램은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컴퓨터에 넣고 활용하기 시작하면 계산하고 정보를 쏟아
내고 그림을 그려 주고 음악도 만들어 낸다. 이렇게 무형자산을 바탕으로 그에게
'왕'이라는 타이틀도 부족해서 '황제'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의 영향력이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가 필요하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활용할 수 있는 하드웨어 시스템으로 IBM을 선택, 그 회사와
합작해서 오늘의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또 그 덕분에 개인 컴퓨터 산업에서
매킨토시 회사에 헉헉 뒤지고 있던 IBM도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제는 무역 적자의 개념도 달라져야 한다. 수출품을 팔아서 버는 돈보다 수입품
비용이 많아서 무역 적자가 생긴다는 것은 진부한 생각이다. 로열티, 기술 자문,
CNN 뉴스, NBA 농구 경기 중계권, 마이클 잭슨 공연 초청비 등 소프트웨어를
들여올 때 드는 기술, 지식, 문화, 정보 같은 무형 무역상의 적자는 아직까지 무역
적자 계산에 잡히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요즘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고 있는 영화 〈타이타닉〉의 경우, 그
예상 흥행 수익이 우리가 몇 달여에 걸쳐 '금 모으기'를 해서 모은 달러를 단번에
상쇄시키고도 남을 정도라고 하지 않는가. 이런 사실은 1980 년대부터 미국 경제가
어마어마한 무역 적자를 계속해서 내고 있는데도 아직 건재할 수 있는 그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유형 무역에서는 적자를 냈지만 무형 무역에서는
세계를 제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형 물품을 다루는 산업을 가리켜 서비스 산업이라 한다. 신용 카드를
다루는 금융기관도 서비스업이다.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 11 등에 들었을 때 그
근처라도 근접한 은행이 있었는가? 한국이 내세울 수 있었던 서비스업이란
무엇이었나. 이제는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주도하는 시대다. 이 전제는 우리가
어디로 생존 전략 방향을 바꿔야 할지를 한 마디로 압축해 준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게 win-win

  한때 국제화해야 한다는 말을 듣다가 얼마 후에 한국에 나가 보니 구호가 어느새
세계화로 바뀌어 있었다. 국제화는 무엇이고 세계화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자신
있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국제화'라는 단어를 발음하기가
어려워 '세계화'로 바꿨다는 농담이나 들려줄 뿐이었다.
  대학생들은 영어 배우고 해외 연수를 다녀오는 것으로 세계화 준비를 한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가 밖으로 나가는 것만이 세계화가 아니고, 각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오가는 것만이 국제화가 아니다.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조직적으로 연결망을 구축해서 동시에 경쟁과 협력을 해 나가는 것이 글로벌 시대의
세계 체제이다. APEC, GATT, UR, 국제 무역 기구(WTO) 등 국제 협력 기구의
예를 들자면 너무 많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국제 '협력' 기구들이 단지 협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경쟁'도 한다는 것이다. 경쟁과 협력이라. 참으로 이율 배반적이고
모순적인 개념인데도 실제로 현실에서는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항공사의 예를 들어 보자. 원래 국제 항공사들은 자기네 노선과 겹치는 다른
항공사를 경쟁 대상으로 여긴다. 그래서 요금 덤핑이라도 해서 일단 경쟁 회사를
'죽이고' 본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노스웨스트(Northwest) 항공은 아시아나와
'협력'을 하고, 대한 항공은 유나이티드(United Airline)와 공동 노선을 날고 있다.
왜 그럴까? 분명 타회사와 '경쟁'하는 사이들이지만 만일 두 회사가 각각 좌석의
반도 안 되는 표밖에 못 팔았다면 각각 반쯤이 빈 상태로 장거리를 날아가는 것보다
한 비행기에 합쳐서 태우고 가는 것이 서로 이익이다. '협력'해야 서로를 살리는
길인 것이다.
  한국이 망하는데 왜 미국과 일본이 우리를 도우려고 할까? 자선 사업은 분명 아닐
것이다. 내가 아는 미국이란 나라는 철두철미하게 자국의 이권을 챙기는 나라지
보기 딱하다고 돈을 빌려 주는 어수룩한 나라가 아니다. 미국이 한국에 자금 지원을
나선 이유는 우리가 망하면 자기네도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번 한국이
IMF 원조를 신청한 날 미국 증권은 하루에 147점이나 폭락했다. 강 건너 불이 아닌
것이다. 한국이 어느 정도 잘 살아 주어야 자신들이 더 잘 살게 되니 목숨이나
부지시켜 주자는 것이다. 절대로 자기네보다 더 잘 살라고 도와 주는 게 아니다.
  이렇게 새 시대는 예전의 "너 죽고 나 살자(win-lose)"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서
"너도 살고 나도 살자(win-win)" 사고 방식으로 발전해 나간다. 경쟁^5,23^협력
체제의 구축은 국경 없이 무한하게 펼쳐지는 범세계적인 무한 경쟁 대열에 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국 사람은 까딱하면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달려든다. 이런 무서운 정신이
있었기에 이제까지 한국은 산업화를 훌륭하게 치러 냈다. 그러나 새 시대에 그런
사고 방식의 사람은 곤란하다. 그런 사람과 같이 '협력'하다가 괜히 생사람 잡게 될
수도 있으니 어느 누가 팀에 끼어 주겠는가. 이제는 "너 살고 나도 살기" 식으로
생존 전략을 바꿔야 할 때다.
    아인슈타인과 이승희의 만남

  저자 최 교수가 '사회 심리' 과목을 가르치면서 "1997 년도 올 한 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을 세 명 들어 보라."라고 했더니 의외로 적지 않은
학생들이 김현철, 정태수라는 인물 외에 이승희를 꼽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승희의 어떤 점이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을까 궁금해서 그녀가 쓴 자서전
〈할리우드의 노랑나비〉라는 책을 사 보았단다. 의과 대학생인 동시에 누드
모델이다, 한국인이면서 미국인이다, 키가 작으면서도(일명 숏다리) 글래머한 사진
모델이다, 어머니가 여러 번 바뀌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할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고 남동생을 끔찍이 아끼고 있다 등등 상반된 요소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찾아냈다고 한다.
  혹시 이런 애매 모호하고 알쏭달쏭한 이중성이 현대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기
때문에 그렇게 유명해진 것이 아닐까. 아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승희의 사진을
보고 있을 학생들이 많으리라.  아인슈타인은 미녀를 볼 때는 한 시간이 10분 같고
추녀와 같이 있으면 10분이 열 시간같이 느껴지는 것이 바로 상대성 원리라고
말했다. 그는 번뜩이는 재치와 특유의 장난끼가 섞인 설명으로 시간은 일 초 일 초
정확한 속도로 세상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는 획일적, 절대적 사고를
깨뜨려 버렸다. 그로 인해 논리 정연한 뉴턴의 세계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20세기 최고 천재라고 평가되는 이유는 그가 상대성 원리 이외에
빛의 이중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 빛은 미립자냐 파장이냐를 놓고
오랫동안 논쟁을 했는데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 준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빛은 미립자이며 동시에 파장이라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서 이것인 동시에 저것도 된다는 이중성 개념을 성립한 장본인이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성격이 유전 인자의 영향을 받느냐 성장 환경의 영향을
받느냐로 백 년 이상을 논쟁해 왔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주제를 놓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인간은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을 동시에 받으며 이 둘의 상호 작용
속에서 개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예술 영역에서도 이중성의 '개혁'이 있다.
피카소의 그림에는 초상화의 주인공이 앞을 보는 동시에 옆을 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창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동시에 밖에 앉아 있기도 하다.
큐비즘(cubism, 입체파의 기하학적 입체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 양식)의 창시자
피카소는 그림은 하나의 관점(perspective)에서 비롯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과감하게 깨고, 두 관점을 동시에 소화해 낸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동 시대
사람인 사실은 과연 우연일까? 천재가 새 시대의 막을 여는 것일까 아니면 변하는
세월이 천재를 낳아 주는 것일까?
  이미 동양에서는 고대에 간파한 세상의 순리를 서양은 겨우 지금 화서 느끼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특히 이중성 개념은 서양의 사고 방식에 상당히 중대한
변화를 가져다 주고 있다.
  이중성을 현대인의 의식 구조인 과학의 테두리 안에서마저 인정받게 한
아인슈타인은 장자, 노자의 후계자라고 볼 수도 있다. 이중성을 사랑하다 못해
국기에까지 그려 넣은 한국인에게 유리한 세상이 오고 있는 징조다.
    애매함의 새 이름, 퍼지

  마이클 잭슨이 왜 30 년 동안 세계 정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을까? 아마
애매모호한 요소가 그의 매력을 더해 주기 때문은 아닐지? 흑인인지 백인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가수인지 댄서인지 애매 모호하면서도
동시에 그 양면성을 다 지녔기 때문에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일까.
  미국 프로 농구의 데니스 로드맨은 농구장에서는 남성적인 근육 파워를 과시하고
특히 난폭하기로 유명하지만 농구장 밖에서는 화장도 하고 여자 옷도 입고 전혀
다른 여성적인 모습으로 파티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해준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근래에 한국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정섭 씨도 그 인기 비결을 이해할 수 있다.
얼굴은 남자인데 동작과 말투가 여성스러워 애매하다. 한 20 년 전쯤이라면 이런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올 수 있었을까? 나왔다면 아마 저녁 뉴스에 경찰에게
구속받는 장면을 연출했을 것이다.
  요즘 말로 퍼지라고 부를 수 있는 애매함은 이중성과 함께 새 시대의 특징이다.
이중성은 "이것은 이렇다."하는 단선을 거부하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라는 식의 양면성을 존중하는 사고 방식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퍼지는
이것저것이라는 양면성마저 초월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사고 방식이다.
그러니 이중성 역시 퍼지 사고 방식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요즘은 퍼지 사고 방식이 유행이다. 세탁기에도 퍼지라고 적혀 있다. 세탁물에
맞게 기계가 적당히 알아서 돌아간다는 것이다. 퍼지는 자동차에도 쓰인다.
예전에는 차가 거의 기계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문제가 생기면 앞 뚜껑을 열고
좀 아는 척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뚜껑을 열어 봤자 손에 잡히는 게
없다. 자동차의 성능과 열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온통 전자
회로(micro-processor) 장치를 해 놓았으니. 전자 회로를 일컬어 로직 보드라
하는데 그것은 이러저러한 상태가 되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확실한 지시 사항을
미리 적어 놓고 엔진의 작동을 최적화해 놓는 방식이다.
  그러나 자동차 엔진이 복잡해지고 배기가스에 대한 법률이 까다로워지면서 그
많은 지시 사항을 일일이 다 적어 놓기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최근에는 미리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지 않고 매 순간 일어나는 변화 요인에 가장 잘 대응하기 위해
퍼지 로직(fuzzy logic)을 쓴다. 퍼지는 유기체적 사고 방식에 맞게 순발력과 결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한국에는 교통 분야에도 퍼지 사고 방식이 쓰이는 모양이다. 사실 한국을 방문한
교포들이 한결같이 고개를 쩔레쩔레 흔드는 이유는 서울의 교통 문화 때문이다.
"미국은 재미 없는 천당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다."라는 말은 필시 서울서
운전하다가 혼이 난 교포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교통 신호를 지키지 않는 한국인은
매너가 없고 불법을 당연시하는 한국은 후진국이라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사실
미국서는 빨간 신호를 받으면 아무리 오밤중 사거리에 혼자 있다고 하더라도 차를
세운다. 만일 서울에서 미국서 하는 식으로 빨강불은 스톱, 파랑불은 고 하고 신호
등을 지키게 된다면 안 그래도 주차장인 도로가 하루 종일 풀리지 않으리라. 빨강
신호를 받더라도 서는 척하면서 쓱쓱 눈치 봐서 가도 될 것 같으면 가야 한다.
  빨강 신호 받고도 '고'일 수 있는 사고 방식이 바로 퍼지다. 어쩌면 미국인보다 더
퍼지에 강한 한국인이기 때문에 아마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래 없는 '한강의 기적'을
일궈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 무엇에 쓸 건가가 중요하다.

  요즘에는 별 희한한 뉴스를 다 본다. 얼마 전에 맥도날드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그만 엎지르는 바람에 다리가 데인 사람이 맥도날드 회사를 상대로 고발하였다.
그런데 누가 어떻게 하다가 커피를 쏟았는가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재판장은
커피가 쓸데없이 너무 뜨거웠다는 이유로 백만 불 이상의 손해 배상금을
판결하였다. 참, 돈 버는 방법도 다양하다.
  한국에는 아파트 촌에 가보면 새것같이 깨끗한 가구가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사실 나는 아파트 촌 쓰레기통을 지나칠 때 한 번쯤 주춤한다.
너무 괜찮은 물건들이 눈에 뜨기 때문이다. 그러나 줍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는
이유는 '얼굴 팔릴까 봐'가 아니고 그런 물건을 한 두개씩 줍다 보면 우리 집이 금방
쓰레기통으로 되어 버릴까 봐 두려워서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이니 사자는 아내의
제안도 거의 매번 거절하고 집이 훤하게 비어 있도록 하는 괴짜 생활을 고집한다.
  물건이 귀할 때는 아무 물건이고 일단 지니고 봐야 하겠지만 물건이 지천으로
깔렸을 때는 자기가 꼭 필요한 물건만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결국 사람은 항상
쓰임새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쓰임새를 생각하더라도 장기적
안목으로 생각해야 한다. 세일한다고 훗날 쓸 것까지 미리 사 둔 후 정작 쓰고 싶을
때는 못 찾거나, 유행이 지났거나 썩어서 못 쓰고 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니
그때그때 필요한 것만 사 써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변하는 세상에는
순간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물질에만 한정시킬 일이지 사람까지 그렇게
대해야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순간적 말초 신경만 잔뜩 발달해서 사람을 쾌락과
자극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은 인간 가치와 물질 가치를 혼동하기 때문이리라)
  결과주의, 쓰임새 위주, 순간적 판단이라는 이 세 가지 사고방식은 현대인의 생활
패턴을 상당히 지배하고 있다. 귀찮을 정도로 선택의 기회가 많은 다양화 시대에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사고 방식이기도 하다.
  내가 어릴 적 간식 하면 자장면이었다. 지금은 자장면 이외에 맥도날드 햄버거,
KFC 치킨, 피자 헛 피자, 즉석 김밥, 라면 등 간식거리가 넘쳐 난다. 라면이라도
신라면, 해물탕면, 자장라면, 떡라면, 우동라면 등 몇십 가지나 된다. 배고픈데
곰곰이 따져 볼 시간이 없다. 어떤 것이 몸에 좋고 나쁜가는 나중 이야기다. 일단
눈앞에 보이고 입맛을 돋구고 배부르게 해주는 것이 최고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이 과목이 고생스럽고 불필요하다 싶겠지만 훗날 다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공부하길 잘했다고 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 안 '먹혀드는'
시대다. 학생들은 그 과목이 왜 지금 자기한테 꼭 필요한가를 말해 주길 바란다.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는 학생들이 주판 튀기는 어른을 우습게 보아서가 아니다.
그저 지금 당장 이유를 알아야 속이 풀리기 때문이다.
  "왜요?" 하며 따진다고 "못됐다." 하지 말아야 한다. "왜요?"를 따지는 사람은
체제 순응형이 아니라는 표시니, 오히려 따지지 않은 학생들을 '덜 된' 문제아로 볼
일이다. 쓰임새만 고려하는 학생들의 생각이 너무 짧다고 "쯧쯧" 하며 혀 차지도
말아야 하겠다. 오히려 한심한 노릇은 뭐가 뭔지 몰라 멍하게 앉아 있는 상태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나이 들면 다 이해될 것이라는 식으로 무작정
묵살하는 방법은 끝내야 한다. 그저 "날 믿고 따르시오!" 하는 말은 유괴범이나
하는 소리다. 무력으로 밀어붙이거나 사탕 발림으로 졸졸 따라오게 하는 방법은
이제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정보화 시대에는 지식으로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
    참을 수 없는 평가의 다양함

  미국에서 대학 교수 노릇을 하기 힘든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사람을 골병 들게 하는 일이 평가다. 특히 올해는 몇 년 만에 한 번씩하는
평가마저 한꺼번에 겹쳐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매 학기 매 강좌마다 학생들로부터
받는 '강의 평가', 한 해 목표 세운 것을 학과장한테 점검받는 '활동 계획서 평가',
학지에 게재된 '논문 평가', '연구 계획서 평가', 봉급 책정하기 위한 '실적 평가',
매해 학과 전체가 스스로 하는 '자체 평가', 5 년에 한 번씩 받는 '공대 인증 평가',
10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대학 인증 평가'.
  해와 달과 각종 행성들이 우연히 일직선으로 쭉 서게 되면 평상시보다 밀물이
높아지듯, 홍수에 시달린 사람은 물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하듯 나도 올해는
'평가'란 말 한 마디에도 머리칼이 곤두선다.
  평가가 불여우 같은 놈이라는 것을 최근에 느끼게 되었다. 교육 평가에 대해 글도
써 봤고 미국 대학 인증 평가 위원회에서 실시하는 정식 평가 훈련도 받았지만
평가라는 놈은 여간해서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평가를 두고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는 그 평가의 전반적인 특징에 대해 몇 마디 적을까 한다.
  일단 평가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산업 시대는 모든 물건이 획일적으로 대량
생산되는 시대였다. 그래서 우리는 평가하면 하나의 잣대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알고 있다. '이것은 꼭 이래야만 된다'는 산업 시대 특유의 배타적인 사고
방식은 결국 하나의 잣대만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 시대는 완전히 반대다.
다양화 시대다. 대량 생산이 다품종 생산으로 변하고 매스미디어가 멀티미디어로
변했다.
  거리에 걷다 보면 '뽕짝'서부터, 가곡, 판소리, 메탈, 록, 하드 록, 컨트리, 클래식,
그리고 랩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의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나에게는 시끄러운
잡음으로 들리는 '소리'가 신세대한테는 멋진 음악으로 들린다 하니 누구 잣대가
옳다고 말할까. 젊은 사람 한두 명이 좋다고 하면 "너희들이 틀려 먹었다!" 하고 큰
소리로 콱 눌러 버리겠건만 신세대가 다 좋아하니 나만 '썰렁'해지고 만다. 그래서
다양화가 존중되는 시대에서 평가를 하자면 다양한 잣대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다양화 물결은 절대적인, 단 하나의 잣대를 부러뜨리고 만다.
  다른 예를 들어서, 연구 잘하는 교수하고 강의 잘하는 교수를 비교할 경우
누구에게 더 높은 봉급을 줘야 하는가? 미국 교수들을 제일 흥분시키는 질문이다.
왜냐 하면 평가가 봉급 인상으로 연결될 때는 가치 판단을 '정확히'해야 하는데 다른
교수에 비해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어느 교수가 순순히 받아들이겠는가. 설사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기분 좋을 사람은 없으리라. 대답 대신 거꾸로 질문 하나
하자. 판소리와 랩 중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을까?
  그런데 이상도 하다. 다양화가 인정되면 평가란 놈이 고개를 숙이고 점점 자취를
감춰 버려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더 펄펄 날뛰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은
패러독스가 아니다. 지극히 순리적인 현상이다.
  다양화를 인정하는 일은 존재와 표현의 자유를 주는 것이지만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백지 수표가 아니다. 자유를 얻을 때는 항상 그 값을 치러야 하듯이, 생긴
대로 또 하고 싶은 대로 해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면 그 다음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느 때고 평가를 받겠다는 자세다. 정보가
발달된 사회에서는 결과에 대한 평가가 보통 엄격하지 않다. 그리고 열린 사회는
항상 평가의 결과를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새 시대에 평가를 하자면 어느
누가 보더라도 같은 결론을 내리게 하는 신빙성이 절대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한다.
  다양화로 인해 평가가 오히려 중요해진다. 그리고 평가의 쓰임새도 달라진다.
아니, 반대로 다양화 시대에는 평가를 하는 방법과 쓰임새를 바꿔야 한다.
    의도와 결과를 비교하는 시간차 평가

  할머니가 대학에 들어간 손자에게 물었다. "어느 핵교 댕기능가?" 손자는 힘주어
말했다. "과학 기술 대학에 다닙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격려해 준다. "그려어, 공부가 안 되면 기술이라도 배워야재^5,5,5^"
이건 사람 웃기는 이야기다. 하기야 이름 보고 평가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
할머니께서 아실 턱이 있겠는가.
  몇 년 전에 한국의 과기대가 미국 공학 대학 인증 위원을 불러와서 자체 평가를
하게 했다. 평가가 끝나고 기자 회견을 가졌는데 기자들이 한 첫 질문이 "과기대를
평가한 결과 미국 내에서 몇 등 정도 됩니까?"라고 한다. 이건 사람 울리는
이야기다. 교육을 담당한 기자라면 평가해서 서열을 구분 짓는 시대가 지났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았는가.
  다양화 시대는 다양한 존재와 과정을 인정하고 허용할 것을 요구한다. 어디에도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대학을 다른 대학과
비교 평가해서 등수를 매긴다는 것은 사실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럼 상대 비교를
하지 않을 바에 평가는 왜 하느냐고? 새 시대의 평가 역시 상대 비교를 위한 것이긴
하지만 그 색깔이 조금 다르다. 구시대의 비교는 이것과 저것의 상대적 비교다.
반면 새 시대에는 어느 무엇이 한 시점을 두고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가 어떻게
변했나, 즉 하나의 앞뒤를 상대 비교하는 평가다. 구시대 평가가 열 개를 동시에
비교하는 것이라면 새 시대의 평가는 하나를 두고 시간차로 비교하는 일이다.
  사과를 평가해 보자. 구시대는 나무에 걸려 있는 여러 사과 중에 어떤 것이 제일
큰가를 비교하는 것이었던 반면, 새 시대는 사과 하나를 지난주에 재어 보고 이번
주에 다시 재서 얼마나 커졌나를 비교하는 평가 방식을 쓴다. 사과만 키우겠다면
몰라도 오렌지, 배, 감도 키우겠다면 서로 크기를 비교하는 것 차체로는 큰 의미가
없지 않는가. 거기다 수박이나 호박을 곁들이거나 아예 다른 모양의 바나나나
수세미까지 기르겠다면 서열 재기식 평가는 정말로 무의미해진다.
  대학을 평가하는 목적은 그 대학이 내세운 철학, 이념과 약속을 얼마나 충실하게
실행하고 있는가를 측정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평가 방법은 신입생의 성적을
따지기보다 졸업생의 능력과 실력을 재는 쪽으로 방향을 맞추고 있다. 그리하여
대학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의도와 결과적으로 그 의도가 어떻게
구현되었는가를 상대 비교한다. 결과와 의도가 다르거나 결과가 의도를 따라가지
못하였다면 당연히 의도나 과정을 수정해야 한다. 의도와 결과를 비교하는 평가는
피드백을 낳고, 이것은 발전을 가져오는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는 타대학과 상대 비교도 하지만 대학에 등수를 매기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벤치마킹(benchmarking)이라는 통계적 분석을 하는데 이 역시
피드백과 발전에다 초점을 둔다.
  작년에 과기대에 들러 총장을 비롯하여 처장, 학장 등 행정인만 모인 자리에서
'교육 개혁 방향'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연구 중심
대학으로 큰 업적을 내고 있는 과기대가 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저녁 시간까지 내주셨던 윤덕용 총장님과 김충기 부총장님,
그리고 같이 오셨던 여러분들이 정말 고맙다. 스스로 평가를 받고 끊임없는 발전을
추구하는 과기대라면 앞으로 계속해서 많은 능력인들을 키워 내리라 믿는다.
    정보 시대의 필수 '카드라' 통신

  시장이나 백화점에 가면 느끼곤 하는 문제가 있는데 물건의 종류가 하도 많다
보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과 물건에 대해 종업원한테 물어 봐도
신통한 조언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번은 오기가 나서 미국 슈퍼마켓에 진열되어 있는 치약의 종류를 일일이 세어
봤다. 충치 예방 치약,풍치 예방 치약'둘 다 예방하는 치약부터 시작해서 이를
하얗게 하는 치약,민트 치약,계피향 치약,빨강과 파랑색이 꽈배기같이 꼬여진 치약
등 외관 위주의 치약, 시린 치아용 치약,의치용 치약,아동용 치약 등 전용
치약^5,5,5^ 그 기본에다 대, 중, 소 사이즈대로 다 있고, 그밖에 여행용으로
마이크로 사이즈, 짜는 튜브, 병처럼 세워 놓을 수 있는 통 등 모두 53가지가
있었던가?
  치약의 문제만이 아니다. 예전엔 개인 자동차가 다 지프였고 색깔도 모두 까만
색이었다. 돈 있으면 사고 없으면 못 샀다. 지금은 같은 회사에서 나온 차라도 어느
해에 나왔느냐, 무슨 색깔이냐, 자동이냐, 수동이냐, 심지어는 바닥이 양탄자냐
비닐이냐 등 옵션이 너무 많아 내 차와 겉과 속이 똑같은 자동차를 탄 사람을
만나기란 극히 드물게 되었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소비자의 라이프 스타일, 취향, 소비 패턴이 너무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똑같은 상품만 계속 만들어 냈다가는 비지값에 줘도
거들떠보지 않아 망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기업들은 "종류는 다양하게, 그러나
조금씩만 만든다."라는 다품종 소량 생산 전략을 내세우고 시장에다 비슷비슷한
물건을 내놓는 것이다.
  소비자 쪽에서는 그 많은 물건을 일일이 직접 써 볼 수도 없고 설명서를 붙들고
앉아 끝까지 읽어 보기도 귀찮고 하니 그저 광고 때문에 눈에 익숙해진 놈을 하나
골라잡고 '텔레비전까지 출연했으니 사기야 치겠어.' 하며 막연하게 믿을 수밖에.
그러나 정보화 시대는 광고가 정보인 양 둔갑하여 소비자를 홀리기 때문에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미국에선 미식 축구 중계를 한 게임 하는 도중에 텔레비전 광고가
평균 59개나 나오는데 비슷한 물건들이 서로 좋다고 아우성이다. 이렇듯 다양한
물건 앞에 어리둥절해 있는 소비자는 정보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다.
  이 때 소비자의 SOS에 구명 줄을 던져 주는 것이 바로 '카드라' 통신이다.
"친구가 써 보니까 좋다 카드라." 하는 평에 의존해야 할 때, 특히 바깥 껍데기를
보고 속을 알 수 없는 전기, 전자 제품을 살 때는 '카드라' 통신의 효험성이
절대적이다. "옆집에서 XX사 냉장고를 사들여 놨는데 영 신 통치 않다 카드라.",
"우리 시누가 YY 최신 모델을 쓰는데 맘에 꼭 든다 카드라." 식이다. 과학
연구소의 품질 보증서도, 소비자 상담원도 따로 필요 없다. 정보 시대에는 '카드라'
통신이 단연 막강하기 때문이다.
  '카드라'를 전문적으로 하는 곳이 바로 요즘 들어 엄청 늘어나는 자문 서비스
업체들이다. 물론 자문 업체는 예전에도 있었다. 복덕방 주인은 집이나 부동산
소개업자요, 중매쟁이는 사람 소개업자다. 둘 다 정보를 가지고 먹고 사는 서비스
업자들이다.
  그러나 요즘엔 별 희한한 자문 업체가 다 있다. 남의 취향을 알아내는 자문 업체,
생일 파티 자문 업체, 변호사 소개 업체, 해외 연수 소개 업체, 그리고 심지어는
소개 업체를 소개하는 소개 업체까지. 그들은 정보화 시대의 특성인 다양화와
평가화를 잘 이용하는 업체들이다.
  '카드라' 통신은 다품종 소량 생산과 평가를 존중하는 시대에는 필수적인 통신
방법이다. 미국서는 '전문 정보지'라고 하는 것이 곧 한국의 '카드라 통신'이라고
나한테 설명해 주신 분은 경북 대학의 김덕규 교수님이시다. 미국 공학 교육
학회에서도 만났고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만나 뵈었던 분이다. 나도 카드라 통신
하나 띄어 보자구나.
  "김덕규 교수님은 좋은 분이시라 카드라!"
    세금과 변화는 피해 갈 수 없다.

  내 아내는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 좋아하는 음악의 폭도 넓지만 특히나 존 덴버의
음악에는 아주 깊이 빠져 있다. 그래서 존 덴버의 레코드 판(LP)은 모조리 갖추고
있다. 워크맨이 나오자 아내는 존 덴버의 음반을 카세트 테이프로 새로 구입했다.
똑같은 음악을 이중 세트로 지니는 게 다소 불만스러워 내 인상이 약간 찌그러졌다.
  그러나 이건 또 웬일인가. CD가 나오자마자 또다시 새 세트를 구입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내 인상은 완전히 구겨지고 드디어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결국엔
존 덴버의 CD가 이기고 나는 옹졸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변화로 인하여 스트레스 주는 게 어디 음반뿐인가. 현재 내가 가르치는 열역학
기초 과목은 봔 와일렌 교수가 쓴 고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이 첫 출판된
후에 두 번째로 개정판이 나오기까지는 11 년이 걸렸다. 이어 9 년 후에 세 번째
개정판이 나왔고, 4 년 뒤에는 네 번째 개정판이 나왔다. 초본이 나온 이후 열역학
법칙은 전혀 새로운 것이 추가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개정판은 여러 차례 점점
가속적으로 나오고 있지 않는가. 새 책은 새로운 강의 준비를 요구한다. 불변의
기초 학문은 첨단 지식 다루듯 강의 노트를 준비하려니 힘들어 죽겠다.
  세상이 얼마나 잘 변하는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예가 있다. 미국인의 일상 표현
중에 "세금 은 죽음만큼 확실하다."하는 말이 있다. 미국에서는 세금을 내지 않고
살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한 것이 또 하나 더 늘어서 세금과
변화는 죽음만큼 확실하다."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새 시대는 텔레비전같이 흑백, 컬러, 와이드, 하이 데피니션 등 새로운 기술 개발
때문에 계속 변하게 되는 물품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해도 외관만이라도
바꾸어서 소비자를 만족시켜야 하는 세상이다. 새 자동차 모델은 예년 모델과 속은
똑같더라도 겉은 달라 보여야 소비자가 구입한다. 변화에 익숙한 소비자들은 거꾸로
변화를 으레 당연하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변화가 눈에 안 띄면 제자리걸음하고
있지는 않는가 불안을 느끼는 소비자들이 오히려 변화를 재촉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40 대 초반의 어떤 사람이 회사에서 '조퇴'하고 새로운
전공을 하기 위해 모교 대학에 다시 등록하였다. 대학 당국은 그 사람이 20 년 전에
들었던 수강표를 보더니 "다행이군요. 78 학점이나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했다.
그러나 기뻐해야 할 그 사람은 오히려 화를 내고는 곧바로 대학 등록을 취소하였다.
현재 수강 과목 목록이 20 년 전의 과목과 한 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발전 없는 대학에서 배울 것이 뭐 있겠나 싶었던 모양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올 2월 중순에 미국 플로리다의 탐파에서 열린 교양 교육
학회에서 들었다. 교양 교육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미시간 공대를 대표하여 참석한
이 학회에는 나 말고도 미국 전역에서 온 150여 명의 대학 행정인과 교수들이
모였다. 3--4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몇 명 모이지 않은 학회였다고 하는데. 그러나
세상의 변화는 분명 대학마저 변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스맨은 가고 아이디어맨이 온다.

  산업 시대의 사회 문제는 산업 경제 구조에서 찾아야 했듯이 정보 시대의 위기는
지식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지식 구조의 핵심은 바로 교육이다.
  시대 흐름에 따라 변하는 현상들을 교육에 맞추어 보자. 육체 노동으로 농산물을
지배하던 때에는 사실 학교 교육이란 별로 필요 없었다. 극소수의 지배층만이
고전이나 경전을 읽고 풀어서 다수의 무지 몽매한 인력을 다스리면 되었다. 오히려
농부나 노예가 책을 읽고 철학을 논하며 지배 계급을 비판할 수 있게 되면
부려먹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지배층은 백성들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산업 시대는 좀 다르다. 여러 지방에서 도시로 몰려든 각양 각색의 노동
인구를 마치 기계 다루듯 일사불란하고 능률적으로 움직이게 하려면 최소한 똑같이
읽고, 쓰고 셈할 수 있게 가르쳐야 했다. 고급 기술자라 해도 초등 기술 교육 정도를
받으면 일할 수 있었다. 여기에 한 사람의 자본가와 수백, 수천 명의 노동자를
연결시켜 줄 중등 교육 정도를 받은 사무 직원들이 약간 더 필요했을 뿐이다.
따라서 인구의 대다수에게 초등과 중등 교육만 시켜도 산업 사회를 유지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정보 시대에는 더 많은 고급 두뇌 인력이 필요하다. 겨우 읽고, 쓰고,
셈하기를 마친 초등 교육 인력에게서는 지식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겨우
주인의 명령대로(체제 순응형 교육을 받고서), 기계를 부리고 사무 정리를 하는
정도의 고졸 인력으로는 정보 시대를 이끌어 나갈 수가 없다. 정보 시대에서는
사장도 답을 모르는 문제들이 부지기수다. 때로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답이 될 수도 있는데 "문제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사장 말에
"네,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를 되풀이하는 사람은 곤란하다. 즉 언제 어떻게
무엇이 얼마나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 체제 순응형 인력은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정보 시대에는 스스로 아이디어를 찾고 키우고 그에 맞는 기술을 개발하는
아이디어 맨이 필요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아이디어와 지혜와 경험과 지식을
모아야 산다. 그러므로 답은 간단하다. 대다수의 노동 인력이 대학 정도의 교육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교육의 초점이 초, 중,
고에서 고등 교육(전문대, 대학, 대학원)으로 움직여 줘야 한다는 것이다.
  구시대가 토지, 군사력, 상품 경쟁 등의 물질 싸움 시대였다면 지금부터는 지식
싸움 시대다. 오늘날 선진국은 지식(두뇌) 재산을 축적해 가는데, 한국은
물질(의식주)재산만 쌓아 놓았으니 경쟁력을 잃은 것이다. 한말에 일본은 산업화를
준비했는데, 조선은 폐쇄적 농경 사회만 고집하다가 나라를 빼앗긴 것과 같은
패턴이다.
    클린턴이 교육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

  요즘 클린턴 대통령은 교육 대통령이라고 자칭한다. 1997 년 1월 27일자
뉴스위크 지는 겉 표지에 " 클린턴의 평가는 대학 교육 정책의 성패로 판가름 날
것이다."라고 큼직하게 실었다. 영국의 수상 토니 블레어도 '교육 수상'이 되겠다는
공약을 지키느라 애쓰고 있다.
  미국의 경우 겉으로는 초, 중, 고 교육에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세계
초강대국으로서 초, 중, 고 실력이 아시아권보다 뒤지는 것을 걱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대학 교육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재정을 어디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올해 공표한 내용 중에 나이에
상관없이 대학 교육을 받는 사람에게는 톡톡히 세금 우대를 해주겠다는 발표가
있었는데, 그렇게 받는 세금 혜택 액수를 계산하면 대략 2 년 동안의 대학 등록금과
맞먹는 상당한 액수이다.
  미국에서는 정부만 대학 교육에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니다. 연구 중심 대학인
스탠포드 대학에서는 바로 2 년 전(1996 년 5월 17일)에 총장이 그 유명한
'스탠포드 선언'을 내놓았다.
  앞으로 20 명의 교수를 새로 채용할 예정인데 이는 연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학
일 학년생만의 학부 교육(강의 중심)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이며, 이 계획을 위해
예산을 천만 불이나 들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동안 연구 실적 위주로만
달려오던 대학으로서는 정말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어서 대학원 중심 대학
MIT에서도 1996 년 11월에 비슷한 선언을 하면서 앞으로 25 년간 대학 학부
교육에 집중 투자를 할 방침이라고 선언했다. 또 미국 교수들의 돈줄 역할을 해
오던 미국 과학 재단(NSF)에서도 1990 년부터는 고등 교육에 대해 더 열심히
연구하라면서 많은 돈을 교육 연구비에 내놓고 있다. 미국인들은 왜 갑자기 대학
교육에 열을 올리는가?
  미국은 현재 나이 25세 이상인 '늙은' 대학생들이 총 학생 수의 44%나 된다.
젊었을 때 대학을 못 다녔던 사회인이 뒤늦게 대학을 찾거나 졸업한 지 오래 된
직장인들이 되돌아와서 재교육을 받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모자라서 정부에서는 전 국민에게 대학 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개인과
국가의 생존력을 지탱할 수있다는 긴박감 때문이다. 아직 입법까지는 안 되었지만
실제로는 대학까지 의무 교육화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이 모두가 지식 경쟁
체제에서 선두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런 변화는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미국,
독일, 캐나다, 영국, 스위스, 스웨덴 등에서도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이제는 고등 교육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처럼 지금의 대학 수준으로
국민들을 18살까지만 혹사시키다가 그 다음부터 방만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IMF의
지배를 벗어나기 어렵다. 지식 경쟁 시대에 영원한 파산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엔진오일은 언제나, 누구든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대학 교육 시대니 전 국민이 대학을 다녀야 한다고? 안 그래도 머리가 터져라
경쟁이 심한 대학 문턱인데 전 국민이 다 대학에 가겠노라고 몰려든다면 온 나라가
피투성이가 되지 않겠느냐고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게다가 대학 졸업자들이 취업이
안 되어서 백수로 놀고 있는 판에 더 많은 대졸자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오면
그야말로 우리 사회는 실업자로 들끓게 되는 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대학을 아직도 하드웨어 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대학 정원,
교실, 강의실, 졸업장 같은 유형 체계(하드웨어)로 보면 위의 걱정이 백 번 옳다.
그러나 이제는 대학을 아이디어 체계, 즉 소프트웨어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인터넷, 가상 대학, 네트워크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주고 받는데 대학 정원이 무슨
소용이람? 집에 앉아서도 컴퓨터를 통해 세계 유명 대학의 명강의를 마음껏 들을 수
있는데 교문이며 강의 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 사람당 졸업장과 자격증을 열
개, 스무 개 얻을 수 있는 세상인데 대학 졸업장만 고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난센스가 아닌가? 그리고 꼭 18살에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또 무슨
억지인가? 하루가 다르게 지식이 바뀌는 세상에 18--22살에 배운 대학 공부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게 오히려 더 꽉 막힌 생각이 아닐까?
  우리 나라 국민들이 교육에 열을 오리는 것을 실상 따지고 보면 그 열기가 모두
중등 교육에만 치우쳐 있다. 즉 고3까지의 교육열이다. 자녀가 대학에 입학한
다음에 대학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지,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어떤 판단력을
키우고 어떤 지식 체계를 쌓아 가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는 부모는 몇이나 되는가?
대학 문에 턱걸이하려고 중등 교육에 그렇게 열 올리는 만큼 대학 안에서 배우고
키워야 하는 능력 배양에도 온 국민이 관심을 두어야 할 때가 왔다는 말이다.
  중,고교 학생뿐 아니라 상인,예술인,언론인,사원,교사,중역,재벌,정치가,주부들도
새로운 지식에 관심을 두고, 모르면 언제든지 배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 이미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도 현장에서 일하다 새로운 지식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다시 대학
강의를 들어서 '엔진 오일 체인지'를 해야 한다. 대학은 곧 지식 스테이션이다.
  구시대 사회 지도자들처럼 대학 학위를 권위의 장식품으로 걸어 놓아서는 안
된다. 정말 쓸모 있는 정보를 선별할 줄 알고,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도록,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말이다. 미국의 간섭과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도 전 국민이 대학 정도의 실력과 정보 처리 능력과 지식 활용력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이제는 먹을 것을 해결해 주는 농업 시대도 지났고, 살 곳과 입을 것을
해결하는 산업 시대도 지났으니 지금부터는 알아야 살아 남는 정보 시대인 것이다.
    중환자 치료 순서

  3월 새 학기를 코앞에 두고 "사립대 재정난에 허덕이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한국
신문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비상 대책 위원회', 'IMF 대책 위원회' 등을 구성하여
이 어려운 시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사태가 위급하다 보니 비상 체제를 가동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위원회가 궁극적인 해결책을 줄 수는 없다. '경영 위기 대책 총괄
위원회'라는 위원회는 또 뭔가. 바쁜 세상에 이렇게 긴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한국에 걸린 비상이 뭔지 잘 알고나 있는 걸까 의심스럽다.
  한국이 응급실에 실려 들어오는 중환자라고 치자. 인체에 비유해 돈을 피라고
보면 금융,기업인은 심장 전문의, 오기와 배짱의 정치인은 쓸개 전문의, 육체력
위주인 고졸자는 내과 전문의, 고급 인력인 대졸자는 뇌 전문의쯤이 되겠다. 환자의
몸에 구멍이 뻥뻥 뚫려 피가 분수처럼 흐른다. 일단 구멍을 막고 수혈을 해야겠다.
많은 피가 필요하니 너무 급한 나머지 경황이 없어 피를 드라큘라한테서 꾸어 오고
말았다. 되로 받아서 말로 갚는 문제는 일단 나중 문제다.
  환자는 피를 워낙 많이 흘려서 심장이 약해 있다. 그래서 모두들 인공으로 맥을
뛰게 한답시고 심장을 마사지하고 있다. 뇌 전문의도 덩달아 출혈을 막겠노라고
반창고를 들고 야단이다. 아, 그러나 환자는 뇌진탕이 아닌가.
  뇌 전문의의 손에 들린 반창고가 아주 조금의 도움은 되리라. 그러나 환자의
생사는 뇌 전문의의 손에 수술 칼이 들려 있고 없음에 따라 정해진다. 수혈을
계속해서 환자의 목숨을 부지한다 한들 식물 인간이 될 확률이 높다. 환자의 목숨도
구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놓기 위해서는 뇌 전문의가 과감하게 칼질을 해서 과열로
인해 터진 뇌를 원상 복귀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 무슨 어이없는 비극인가.
환자가 바로 뇌 전문의로구나. 이 모든 소동이 마치 카프카 소설에 나오는 장면
같다.
  과연 한국 대학은 'IMF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는 반면 'IMF 책임 위원회' 하든지
'IMF 대척 위원회'도 구성하고 있는가. 새 시대에 걸맞은 대학으로 변화할 자구책은
세우고 있는가. 한국의 대학은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가. 변화무쌍한 이
시대에 대학은 어떠해야 하는가?
  대학과 변화의 관계는 애매하다 변화에 대한 대학의 태도는 완벽한 이중
성격자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대학은 일면 새로운 생각과 첨단 지식을
연구함으로써 변화를 주도해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태껏 인간이 수행하여
온 온갖 변화를 검토하여 그 중 소중한 것을 골라 새로운 변화로부터 보호하고
지존시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래서 대학에는 진보와 보수적인 면이 동등하게
대치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학 내에는 무조건 변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거꾸로 변화를
위한 변화마저도 환영하는 교수들도 있다. 두 그룹 다 대학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로 원수같이 여기는 대학은 도태될 것이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대학은 발전할 것이다. 대학은 변화와 불변이란 상반된 개념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이어야 한다. 공존할 뿐더러 서로 어우러져서 조화를 이루고, 또
그럼으로써 생기가 도는 곳이다.
  대학이 계속해서 존경받는 사회 기관으로 남기 위해선 당연히 시대에 걸맞게
발전해야 한다. 새 시대가 유기적인 주조를 요구하면 유기적으로 재조직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열역학은 기계과에서, 엔진 디자인은 자동차 학과에서 하는 식으로
'갈라 먹기'를 하면 과끼리 파벌과 경쟁이 생길 수밖에 없다. 누가 과장을 할
것이냐를 놓고 주도권 겨루기도 한다 과별로 과목을 짤 것이 아니라 배울 내용을
중심으로 여러 교수들이 유기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가령 〈윤리학〉을 가르친다고 해서 인문대의 철학과 교수만이 가르쳐야 할
필요가 없다. 새 시대에 맞는 윤리학의 내용을 담기 위해서는 법률 윤리, 의학 윤리,
산업 윤리, 교육 윤리, 가정 윤리, 개인 윤리, 미디어 윤리 등으로 세분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고 이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 법대, 의대, 공대, 사범대, 사회대,
인문대 등 여러 분야의 교수들이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가르치게 될 것이다.
  또 학부제를 실시하면 인기학과 교수들만 살아 남고 비인기 학과 교수들은
도태된다는 식으로 대학의 다운 사이징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여러 과목을
유기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교수도 살고 학생들도 유용한 지식을 얻고
대학도 발전하는 지혜를 발휘하면 될 일이다.
  한국 교수님들은 이때껏 훌륭하게 잘해 줬다. 단지 시대 변화가 대학의 변화보다
한 발 더 빨리 움직였기 때문에 무리가 생긴 것이다. 힘들더라도 조금 더 속도를
내어 발전해 보자꾸나.
    상투를 자른다고 죽진 않는다.

  우리 집 거실에는 아주 재미있는 사진이 하나 걸려 있다. 1930 년대 초에 찍은
사진인데 한복에다 정자관을 쓴 어른이 중앙에 앉아 계시고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신사가 한쪽 뒤에 서 있고 다른 한쪽으로 까만 교복에 사각모를 쓴 학생이 서 있다.
  사람들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이렇게 삼대가 기념 촬영한 것이냐고 묻는다.
옷차림으로 보면 당연 그래야만 하는데, 사실 사진 속의 인물은 나의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 아버지 이렇게 삼형제이다. 삼형제가 삼 세대를 방불케 한다. 그만큼 한국은
빨리 변해 왔던 것이다. 너무 빨리 변하다 보니 여러 시대가 한꺼번에 공존하는
모습이 사진 한 장에 담겨질 정도다.
  한 마디로 한국의 위기를 일컬어 "세월이 원수다."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이
변했는데 한국 사회는 구시대를 고집한 그 이유 때문에 그예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명치유신으로 산업화를 시작하는 일본을 옆에 두고 쇄국 정책을 강행하고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던 조선 말기 역사를 읽어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어처구니없어
하였던가.
  물론 그 당시는 산업화가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과거는 어쩔 수 없었다손 치고 지금은 정보화 시대에 걸맞은 패러다임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변하는 시대를 읽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영원히 고생한다.
  지금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은 구한말 상투 자르기를 결사 반대했던 사람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개혁은 왜 하느냐, 하기 싫다 하고 외치는 사람은 변하는
세상이 두려워 눈 딱 감고 땅 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치는 고리타분한 사람이다.
  공포에 질린 채로 질질 끌려가서 결국 아끼던 상투마저 잘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자. 한국인의 정신이 오직 상투에 있지 않듯이 산업 시대적 사회 구조와
사고 방식에 한국인의 얼이 담겨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많은 것을 벗어 버린다 해도 한국은 그대로 있다. 쓸데없는 울부짖음으로 정신을
소모하지 말고, 마음을 가다듬고 세상 흐름에 맞춰 개혁을 시도하되 그 틈틈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차분하게 따지는 것 또한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3. 21세기의 도깨비 방망이, '창'을 주목하라.

    최첨단 교육열은 '창' 교육을 만든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나라의 중등 교육열은 참 뜨거웠고 그 힘이 우리의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다 된 밥에 계속 불을 때면 타게 마련이듯
이제는 더 이상 대학 입시 문턱까지만 가는 중등 교육에 교육열을 탕진해서는 안
된다. 지식 경쟁 시대에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뜨거운 교육열을 최첨단
교육열로 옮겨야 한다.
  교육의 영역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 생각(think), 가치(value), 그리고
행실(behave)이다. 무엇을 아는가(knowledge)와 무엇을 할 수 있는가(skill)의
문제가 위의 세 영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 다섯 단어의 깊은 뜻은 교육학
전문인들에게 맡기고, 이 장에서는 앞으로 우리의 교육 방향이 되었으면 하는,
그리고 우리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창교육'에 관한 나의 주장을 풀어 보려
한다.
  창교육의 첫 번째 원칙은 창의력을 최대로 살려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창교육이다. 학생은 똑같은 틀에다 넣고 계속 찍어 내는 호도 과자가 아니다.
학생들의 두뇌는 무지개처럼 다양하다. 모두가 다방면으로 만능이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다. 예전에는 웬만큼 시키면 만능 박사가 되었으나 새로운 지식이
홍수같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화 시대에는 만능 박사는 게임 쇼 속의 광대 노릇밖에
못 한다. 이제는 학생들의 잠재력을 알아내고 선호도를 참작해서 그들이 각자
다방면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창의력 교육에 신경을 써야 하겠다. 창의력이 다른 능력보다 훨씬 중요해서가
아니라 너무 뒤떨어진 창의력 교육을 다른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창교육의 두 번째 원칙은 번성하여 잘 되도록 하는 창성이다. 온 국민이
어릴때부터 다양한 아이디어와 재능들이 유기적으로 연결, 조합, 분화를 이루어
새로운 지식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정보와 지식 네트워크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여
국민 하나하나가 생존력을 지니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학생들을 하나뿐인 잣대로
재어 소수의 승자와 대다수의 패자를 만들어 내는 교육 시스템을 없애고 모든
학생들이 자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창교육을 해야 한다.
  사람이 사는 목적을 행복에 둔다면 당연히 교육의 목적도 개개인의 행복치를
가능한 높여 주는 데 두어야 하지 않을까? 행복감을 느끼는 욕구 충족에도 단계를
매겨 본다면 기본 욕구 충족은 의식주 해결 수준이고 고차원적인 만족감은 자아
실현을 할 때라고 한다. 교육이 '부려먹을 사람을 단련시키는 제련소'가 아니라
'스스로 기뻐하고 자신과 남에게 유익한 홍익 인간이 되게 하는 자아실현의 장'이 될
때 우리들의 에너지가 시너지로 승화될 것이다.
  창교육의 세 번째 원칙은 열림을 뜻하는 창교육이다. 정보 시대에는 대학이 모든
사람의 지식 창고가 되어야 한다. 양반만이 곡창 열쇠를 지니고 있던 구시대가
스스로 붕괴되었듯이, 소수의 사회 기득권자만이 지식 창고의 열쇠를 지니는 시대는
모두가 망한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지식 창고를 마음껏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 대학 문이 시원하게 열린 창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학은 생리적으로 집단 체제를 거부한다. 교복도 필요 없고 교가를 몰라도 된다.
대학은 지식과 아이디어로 서로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판별하는 집단이다. 그런데
아직도 혈연, 지연, 학연에 연연하는 대학인은 산업 시대의 집단주의 체제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꼴이다. IMF 지배를 하루 빨리 끝내고 싶다면 정보 시대에 맞는
대학으로 변해야 한다 .이제는 지연이 중요한 때, 언제까지나 대학이 고고한 학자의
상아탑으로 남을 수는 없다.
  창교육의 네 번째 원칙은 책임지고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 창도다. 이를
위해 한국인 모두가 교육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진정한 교육 개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육 행정이 바뀌어야 한다.
  행정은 역시 서비스다. 정보화 시대에 서비스는 소비자에 대한 철학과 정보
기술이 필수이듯이 대학 행정에도 철학과 기술이 있어야 하겠다. 교육인(학생, 교원,
직원)을 상이나 벌로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행정은 없어져야 한다. 먼저 모범을
보이고 교육에 대한 철학과 서로를 존중하는 설득력을 바탕으로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인도하는 창교육 행정이 우선돼야 한다. 창교육이란 이 네가지가
조화롭게 실현 됨으로써 다다르게 되는 합일 지점에 있다.
    똘똘이도 똑똑이만큼 소중하다.

  똑똑이와 똘똘이가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똑똑이는 학교에서 이름난 우등생이고
똘똘이는 동네에서 소문 난 개구쟁이다. 그러나 불행스럽게 두 친구는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똑똑이가 척 보니까 호랑이는 250 미터 떨어져 있는데 달려오는 속도는 시속    
 50 킬로미터 정도라고 파악되었다. 똑똑이는 정확히 계산을 해보더니 "야, 우린
이제 17.88초 후면 죽었다!"라고 똑 소리 나게 재빨리 결론 지으면서 친구 똘똘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똘똘이는 태연스럽게 자기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있지 않는가. 그 모습을
본 우등생 똑똑이는 열등생 똘똘이를 비꼬았다. "멍청하긴, 네가 뛰어 봤자지,
호랑이보다 빨리 뛸 것 같아?" 그러자 똘똘이는 씩 웃으면서 말하기를 "아니야,
나는 너보다만 빨리 뛰면 돼."
  이것은 예일 대학 심리학과의 석좌 교수(기업이나 개인이 기부한 기금으로
연구하도록 대학에서 특별히 지정한 교수) 스타인버그(Steinberg)가 쓴 〈성공적
두뇌(Successful Intelligence)〉에 나오는 이야기다. 스타인버그 교수는 오랫동안
인간 두뇌와 능력을 연구한 결과 인간의 지능은 최소한 분석력, 창의력, 적용력으로
구분해서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불행히도 대부분의 교육이 지능의
일부인 분석적 능력만 측정하고 개발하는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나머지 둘, 즉 현실
감각과 창의력은 예술과 같은 특수 분야를 제외하고는 사회나 학교에서 깡그리
소외되어 왔다는 것이다.
  소위 두뇌 능력을 잰다는 IQ 테스트와 대학 입시 수능 시험(SAT)은 전적으로
분석적 지능을 측정하는 것이라는 연구 결론이다.(그래서 미국 대학의 입학 전형은
우리 나라 수능 검사와 비슷한 SAT 성적 외에 지도력, 특별 업적, 사회 봉사,
표현력, 사회성, 교사 추천서, 자기 소개서 등을 다양하게 검토한다)
  위의 예기처럼 우등생 똑똑이는 분석적 지능이 뛰어났다. 학교에서 공부한 식으로
문제를 훌륭하게 풀었다. 그러나 계산으로 푼 답은 실제 위기 상황에서 전혀 가치가
없다. 현실성을 고려해 성공적으로 문제를 풀어내려면 분석적 두뇌, 현실적 두뇌,
창의적 두뇌를 골고루 활용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A학점 졸업자는 B학점 받던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공부만 잘한 우등생보다 공부 잘하는 사람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준우등생들이 사회적으로 더 성공한다는 말이다. 창의력이 필수인 정보화 시대,
순발력이 필수인 무한 경쟁 시대에는 똑똑이가 아닌 똘똘이의 시대다.
  나는 한국에 강연하러 갈 때 되도록 여러 대학을 골고루 다녀 본다. 그런데
한국의 소위 '이류 대학'이라는 데를 가면 교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저희 대학 학생들의 수능 점수가 좀 낮아서^5,5,5^", "우리 대학 학생들이 착하기는
한데^5,5,5^", "학생들이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5,5,5^"
  이 말들을 뒤집어 보면 "교수들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그 대학 학생들의
실력이 미달이니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 봤자 별 성과가 없다."라는 뜻이 다분하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만일 수능 점수가 낮은 학생들만 모여 있다면 수능 점수 높은
대학과 분석적 두뇌 경쟁을 하지 말라.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창의력은 수능
점수 어디에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느 대학에서도 창의력 개발에
나서지 않고 있다. 어느 대학이라도 먼저 나서면 그 방면으로 일등할 수 있다.
  물론 한국에는 똑똑이가 많이 필요하다. 똑똑이를 뽑아 온 대학에서는 그들의
분석적 두뇌를 계속 개발시켜 우수 과학자가 되게끔 지원해 줘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대학에서는 창의력과 응용 능력을 개발시켜 주는 데 주력하면 학생들의
풍부한 잠재력을 키워 낼 수 있다.
  지금의 한국 교육은 분석적 두뇌만 잔뜩 가열해서 태워 버리고, 창의력 쪽은 열을
하나도 못 받아 꽁꽁 얼어 있다. 소모적 교육열은 이제 창의력 두뇌 쪽으로도
확산되어야 한다.
    멀티미디어에 대응하려면 멀티두뇌가 필요하다.

  요즘은 멀티미디어 시대라고 한다. 우리가 대하는 정보나 오락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찰리 채플린이 활약하던 시대에 무성 영화는
보기만 하는 미디어였다. 그러다가 유성 영화가 나옴으로써 보고 듣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텔레비전이 나오면서부터 사람들은 이 채널 저 채널
마음대로 바꿔 가며 볼 수 있고, 비디오가 나오고 나서는 보고 싶은 것만 비디오에
녹화해 두었다가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일방적으로 보는 것에
불만을 느낀 시청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한 쌍방적(인터액티브)
프로그램도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멀티미디어는 약과다. 컴퓨터 인터넷 토론방에 들어가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다. 모르는 사람들과 토론하기 위해 화장하고 머리
빗고 옷 갈아입고 차 타고 가지 않아도 된다. 또 남의 말을 끝까지 다 들을 필요
없이 듣기 싫으면 컴퓨터 화면을 꺼 버리면 그만이다. 다만 이 때 말도 안 되는
글을 지껄이다가는 도처에서 비난이 쏟아져 들어올 것을 각오해야 한다.
  멀티미디어의 이점과 단점은 너무 많아 다 셀 수가 없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특징으로 다양화를 들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대부분 도시에 약 60개 정도의
텔레비전 채널이 방영된다. 100개가 넘는 곳도 있다. 이것도 부족해서 지금 정부는
채널 500개를 보내는 정보 고속 도로를 만들고 있다.
  채널이 많은 것은 그만큼 보는 사람들(시청자)의 취향 역시 다양하다는 말이다.
동시에 만드는 사람들(제작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만큼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인력이 필요하다는 말도 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학이 다양한 학생들을
뽑아서 다양한 방면으로 키워 주어야 하는 이유를 수긍할 수 있으리라.
  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선 분석력이 뛰어난 인재도 필요하고 '감'을 잘 잡는
인재도 필요하고, 기발한 생각을 곧잘 해내는 인재도 필요하다. 대인 관계와 섭외를
잘하는 사람도 물론 꼭 필요하다. 이들이 서로 수평적으로 유기체적으로 협력할 때
우수한 작품이 나온다. 만일 분석력만 뛰어난 사람이 우두머리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부리려' 한다면 500개의 채널은 필요 없어질 것이다. 아무도 똑같은
프로그램을 보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하워드 가드너(Haward Gardner) 박사에 의하면
인간은 두뇌 능력이 7가지 있다고 한다. 이는 프랑스 교육 심리학자 비네(Binnet)가
개발한 IQ테스트법에서, 스타인버그의 세 가지 지능 주장에서, 헤르만(Herrmann)의
네 가지 두뇌 분류법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다. 가드너의 지능 분류법에 따르면
수학^5,23^논리 능력, 언어 능력 외에도 체육 감각 능력, 음악 감각 능력, 대인관계,
자아 감각 능력, 공간 감각 등도 지능의 일부인데 이 일곱 가지 능력들은 서로가
무관하게 발달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음치도 야구 왕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두뇌 능력들이 측정되고 개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학이 아직 발견 못했다고 해서, 혹은 어떤 현상을 아직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인간 능력을 축소하거나 제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에는 다양한 소질을 지닌 학생들이 다양한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교육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다양한 직업과 프로그램을 만들 인력과
인재들이 부족하지 않게 된다.
    창교육의 도화선은 잠재력

  지금 누가 김웅용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 요즘 학생들은 대부분 김웅용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김웅용은 아이큐 210으로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의 아이큐
기록을 가지고 있다. 네댓 살 때 이미 4개 국어를 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 수학인
미적분을 풀었으며, 시도 곧잘 지었다.
  내가 그 천재 소년을 잘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김웅용이 세계의 주목을 받을
무렵인 1967 년에 나는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외국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그 때는 한국이 참 가난했다. 나는 부유한 외국 친구들에게 한국에 대해
자랑할 것이 별로 없어서 천재 소년 김웅용을 자랑했다.
  그 때 그는 나의 유일한 자랑거리였고 긍지였다. 그런데 얼마 안 지나서 그의
명성은 슬그머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왜 그랬을까? 왜 그의 천재적
가능성은 미처 피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았을까?
  아인슈타인과 에디슨과 비교해 보면서 지금도 나는 가끔 김웅용이라는 천재
소년을 생각하곤 한다. 세계 물리학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는 아인슈타인과 발명왕
에디슨은 어릴 때 김웅용과는 반대로 공부도 못 하고 지능도 낮았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니 천재성이 빛나게 된 것이다.
  너무 천재 이야기만 한 것 같다. 이제 평범한 사람 얘기도 하나 하자.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니까 대학원에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꽤 있었지만 학부생은
고작 셋뿐이었다. 우리는 셋 다 어릴 때 한국을 떠나 중, 고 시절까지 한국 학생을
구경조차 못한 '불우한' 학생이었던 터에 우연히 전공마저 같은 기계 공학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금세 불알 친구같이 친해졌다.
  한국 유학생들은 항상 같이 다니는 우리 셋을 삼총사라 불렀고 개성이 뚜렷한
우리를 놓고 비교하길 좋아했다. 머리 회전 속도가 빠른 홍준이를 보고는 공부는
집어치우고 장사를 해 보라 했고, 의젓하고 세련된 세형이는 대기업 중역
타입이라고들 했다. 나보고는 천상 공부나 계속해야지 먹고 살 것이라 했다.
  점쟁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더라. 대학을 졸업한 지 20 년이 지난 오늘 홍준이는
사업을 해서 돈을 벌었고, 세형이는 대기업 중역을 거쳐 버젓하게 잘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공부를 계속하면서 겨우 먹고 산다. 우리에게 돈을 얼마
벌었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단지 지금 각자 걸어온 길에 만족한다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만일 홍준이가 학자이신 자기 아버지의 욕심을 채워 드리기 위하여 사업을 하지
않고 싫은 공부를 계속하였더라면? 만일 멋진 세형이가 부러워 내가 공부를
중단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였더라면? 우리야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이러나 저러나
세상이 달라질 게 없겠지만 그랬더라면 지금만큼 행복하지 못했으리라.
  비범한 학생이나 평범한 학생이나 마찬가지로 개개인 학생이 자신의 잠재력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창교육이다.
    부전자전이 문제

  인간의 두뇌는 좌반구와 우반구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좌측 두뇌는 수학과 논리를
다스리고 우측 두뇌는 직관과 예술 능력을 담당한다. 네드 헤르만은 1988 년에
인간의 두뇌를 한 번 더 나누어 사 등분하였다. 분석적 두뇌가 발달한 사람은
수학.물리.이론 등 분석을 요구하는 일에 능하고, 계획적 두뇌가 발달한 사람은
계획성 있고 꼼꼼하며, 정리 정돈을 잘한다고 한다. 감각적 두뇌가 발달하면
말솜씨와 언어 감각이 뛰어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며, 창의적 두뇌가 발달하면
호기심이 강하고 모험심이 풍부하여 남과 좀 다르게 엉뚱하거나 삐딱한 행동을 곧잘
한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흔히들 사회에서 개구쟁이, 말썽꾸러기, 괴짜,
돌연변이들로 불리는 체제 불순응형 사람들이 대개 창의적인 부분이 발달해 있을
확률이 높다는 점인데 이쪽 두뇌가 바로 높은 창의력과 직결된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사람 성격 분석 도구를 MBTI와 같이 널리
쓰고 있다. 재미있는 연구가 있다. 미시간 공대의 전 학장 럼스데인(Lumsdaine)
박사가 여러 대학 공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공대생들이 졸업할 즈음에는
분석적 두뇌만 압도적으로 발달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아니,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기술 경쟁을 하자면 창의력이 필수인데. 또 서비스 경쟁을 하려면 창의적, 감각적
두뇌도 골고루 발달되어야 하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이리저리 원인을
연구해 보다가 한 번은 공대 교수들을 검사해 보았다고 한다. 그 결과는? 공대
교수들도 분석적 두뇌만 압도적으로 발달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학생들과 완전
일치였다. 부전자전!
  그뿐만 아니다. 수식으로 꽉 차인 공대의 교과서와 커리큘럼이 죄다 분석적
두뇌만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지 않는가. 그러니 창의력이 풍부한
학생들은 설사 공대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배겨내지 못할 수밖에. 미국서는
도중 하차하는 학생들이 꽤 있다.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분석적 두뇌만 요구하는
교과 과정이 따분하기 짝이 없어 '때려 치우는' 것이다.
  창의력이 풍부한 미국 학생들이 공학을 기피하는 현상은 미국이 아직까지는 잡고
있는 정보화 사회의 주도권을 빼앗길 징조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국립 과학 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은 1990 년도부터 공학 교육에 집중
투자를 시작했다. 대학교 하나하나에다 돈을 퍼붓지 않고 열 개 정도 되는 대학들이
모인 그룹에다 투자를 한다. 한 대학에서 개발한 교육 모델이 다른 대학에도 쉽게
파급되도록 그룹을 짜는 것이다. 대학이 경쟁^5,23^협력 체제를 이루는 것이다. 같은
돈으로 많은 개혁을 유도할 수 있는 새 시대에 걸맞은 행정 정책이다.
  지금 미국에서는 창의력 교육에 투자를 많이 한다. 한국 대학에서도 창의력 개발
위주 교육에 적극 투자해야 한다. 한국의 공대 학생과 교수들도 미국의 경우와 같이
분석 쪽 두뇌만 압도적으로 발달되어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국이 공대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보다 단 4--5 년 뒤졌다. 한국인의 실력으로 본다면
4--5 년은 한숨에 따라 잡을 수 있는 시간 차다. 그렇다고 미적거리지 말자.
    '미치도록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곳

  부모의 열망으로 의과 대학에 들어가서 이비인후과 의사가 된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이 40이 넘고 돈도 제법 벌고 나니까 의사 노릇 하기가 진저리치도록
싫어지더라고 한다. 아침에 병원에 갈 때마다 냄새 나는 환자들 입 속을 열어 보고
지저분한 귓속을 들여다볼 상상만 해도 발걸음을 돌리고 싶더라고 고백한다. 직업
의식 없이 돈벌이 수단으로 의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의사는 직업을 바꾸지 않는
한 앞으로도 줄잡아 25 년 정도는 끔찍이도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형벌' 받는 게 아닌가?
  심리학자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에는 다섯 단계가 있다고 했다. 가장 기본으로는
물, 공기, 음식 같은 생존 욕구, 두 번째가 안전에 대한 욕구, 세 번째는 남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네 번째는 자기 존중감을 갖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제일
최상위의 욕구는 자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라고 한다.
  '직장'을 얻는 것에 대학 교육의 목적을 두는 것은 생존과 안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 단계에서 취미나 적성을 고려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산업화를
일구어 내던 1960 년대부터 1980 년대까지 우리 나라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기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일했다. 간혹 시인이나 연극인, 국악인들처럼 미치도록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그 일을 해야만 했던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배고플 각오가 되어 있었다.
  1980 년대 중반쯤부터 국제 회의 통역사, 컴퓨터 시스템 개발 전문가, 편의점
기획자, 문화재 보존 전문가, 고전 번역가, 카피라이터, 광고 기획자, 출판사 편집장
등 전문 직업인이 많이 생겨났다. 또 커피 하우스, 디자인 하우스 같은 작은 규모의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각자의 전문성을 추구하고 직업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 웬만해서는 굶지는 않는다. 다들 자타로부터 인정받고 위신도 세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며 또 그럴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직업'은 매슬로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단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만한 실력과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춰야 된다는
말도 된다. 김밥을 만드는 사람이든 치과 의사든 간에 직업 의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서비스에서 표가 난다. 자신이 하는 일에 마음이 담겨 있느냐가
문제다.
  하고 싶은 작업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욕구의 최고 단계인 자아 실현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싫증나지 않는 일, 남과 다른 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남들이 다
말려도 꼭 하고 싶은 일, 그리고 부모가 결사 반대하더라도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일 들을 할 때 느끼는 충족감이다. 대개 세계 위인전에 나오는 과학자, 탐험가,
예술가, 스포츠맨, 자선 사업가, 작가, 교육자 들은 바로 이런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한 사람들이 아닐는지.
  산악인 박영석 씨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산을 오르는 이유가 매번
자기 한계에 도전하고 이겨낼 때마다 뭉클한 감동과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기 유발에 관해서는 현재 최고 권위자인 시카고 대학의
칙슨트미할리(Czickzintmihalyi) 박사에 따르면 스스로 설정해 놓은 도전에
응하려고 최선을 다할 때 시공을 초월하는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연구에 몰두하느라 달걀 대신 시계를 삶았다는 아이작 뉴턴의 얘기를 우리는 많이
들었다. 학생들 하나하나가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고, 이후에 몰입지경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창교육은 인간에게 최고 차원의 만족도를 주는 수준
높은 교육이다.
    찰거머리가 거미로 변신해야 하는 이유

  미치도록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의 좋은 예가 바로 정치인이 아닌가 싶다.
정치는 마약이라든가? 그들은 호남, 영남, 연희동, 상도동, TK, KS 같은 지연이나
학연으로 얽혀 있다. 꼭 그렇게는 아니더라도 한국 국민에게는 그렇게 연관을 지어
줘야 정치를 쉽게 이해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대기업의 혈맥을 더하면 한국에서 최고로 성공한 사람들은 혈연, 지연,
학연 등 삼연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 나라만큼 동창회를
자주 하는 나라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추석과 설은 또 어떤가. 농경 시대를
잊어버리기도 전에 산업화를 단숨에 이루었기 때문에 한국에는 삼연이 동시에 다
중요하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사회에서 잘되기 위해서는 줄을 잘
서야 하고, 누구누구를 알아야 하고, 부모를 잘 둬야 한다. 구시대의 성공은 연줄을
잘 잡아서 거기에 찰거머리같이 딱 붙어야 했다.
  정보화 시대는 의식주가 해결된 선진국이 주도하는 시대다. 선진국에서는
거지에게도 최소한의 생존과 안전은 보장된다. 그러니 구태여 구질구질하게 다른
사람한테 달라붙어 살 필요가 없다. 그래서 개인주의가 판을 친다. 오히려 제멋대로
저 잘난 대로 살아야 행복하고 성공하는 세상이다. 삼연을 거의 무시하는 미국이
창의력을 발휘하여 얼마나 많은 세상 돈을 긁어모으고 있는가.
  그러나 사람이 무슨 부처라고 온갖 인연을 훌훌 떨어 버리고 살 수 있겠는가.
봐라, 개인주의가 만연한 미국의 사회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위태로운가. 그래서
금방이라도 붕괴될 것 같은데 무너지기는커녕 혼자 신나게 달리고 있지 않는가.
삼연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사는 개인주의는 서로 떨어져 나가는 힘이다. 필시 서로
연결해 주는 어떤 힘이 균형을 맞춰 주고 있으리라.
  내가 보기에 미국은 지연을 구축하였다. 제멋대로 산다는 말이 망나니로 산다는
뜻은 아니지 않는가. 제멋대로 산다는 뜻은 자신의 개성과 능력과 선호도를 묵살한
타인의 희망 사항과 기준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스스로 자신의 개성과 능력과
선호도를 고려한 후 자기를 최고로 성장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균인을 위해 쓰여진 교과서 따위에서는 아이디어와 지지 기반을 얻을 수
없다. 널리 정보망을 활짝 던져 무수히 흘러 다니는 정보를 재빨리 잡아야 한다.
거미가 거미줄을 쳐서 날아다니는 나비를 잡듯이.
  창교육은 찰거머리형 인간을 거미형 인간으로 변신시켜 주는 교육이다. 남의
덕으로 남이 꾼 꿈을 이루는 게 아니고 자기만의 꿈을 자기 힘으로 이루는 게 새
시대에서 창성하는 법이다.
    우리 바둑이는 '바우 와우' 합니다.

  "개는 '야옹'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해 보았자 개가 짖는 소리에 대해 답은커녕
힌트마저 주지 않는다. 개념의 의미를 부정적으로 풀이하면 그 뜻을 인식하는 데 별
소용이 안 된다. 그런데도 나는 먼저 "열린 교육과 열린 대학이란 도서관을 24시간
열어 놓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고 시작하려 한다. 설명하기 힘든
'열림'의 개념을 슬그머니 지나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열림의 참뜻을 말하기
위해서인데,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 약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야겠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 내가 10살 때 부모님을 따라 자메이카로 갔을 때다. 작문
시간에 개가 짖는 표현으로 '멍멍'이라 썼더니 영어 선생님께서 빨간 줄을 쫙 긋고
옆에다 'Bow Wow(바우 와우)' 라고 적으셨다. 집에 돌아와서 "바우 와우는 꼭
바보 개가 짖는 소리 같다." 해서 온 식구가 배를 잡고 웃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개 짖는 소리를 들어 보니 정말로 '바우 와우'하지 않는가.
  이 세상의 개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중에선 분명 멍멍 하고 짖는 놈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놈은 '바우 와우'하기도 할 것이다. 낑낑, 깽깽, 킁킁, 응응, 범같이
으르렁 하는 놈, 아파트용 쥐같이 생긴 놈은 '찍찍'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 짖는 소리는 '멍멍'이라고 배운다. 그래서 나머지의 울음소리는 귓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하나의 정답만을 요구하는 질문을 두고 닫힌 질문이라 하고, 정답이 없고 가능한
답이 무한정 있을 수 있는 질문을 열린 질문이라 하듯이 "열린 대학이란 이런
것이오."하는 것 자체가 열림의 철학을 거스르는 것이니 그렇게 보자면 진실한
열림은 부정함에서 비롯하는 셈이다. 마치 불경에나 나올 듯한 말이다.
  그렇다. 열림의 철학이 서양에서 칼 포퍼로부터 창시되었다. 하지만 정작 칼
포퍼는 동양 사상에서 열림에 대한 철학을 깨달았다 하지 않는가?
  열린 교육의 방법과 모델은 무궁무진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 또한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 하나만 알고 나머지 모든 가능성을 거부하는 고집, 이래야만
된다는 폐쇄적인 사고 방식, 자기 생각만이 옳다는 독단을 버리고 끌어 안기만 하면
된다. 열림은 사람의 기를 틔어 준다. 그래서 열린 조직의 구성원은 무슨 일이라도
최선을 다한다. 열린 사회는 결국 사람의 마음가짐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끌어안음을 당하였다. 전 서울 공대 학장 이기준 교수님께서
시작한 한국 공학 기술 학회가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1995 년도에 유영제
총무님의 초청으로 이 학회를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 후 이병기 이사님과 김우식
회장님께서 나에게 상임이사로 일해 줄 것을 부탁하셨다. 그리고 작년에는 이장규
이사님의 주도로 나에게 학회의 첫 공로패를 증정하였다.
  참 희한한 일이다. 한국이 상당히 폐쇄적인 사회라는 말을 자주 들어 왔다.
끼리끼리 모이고 남은 절대로 끼어 주지 않는 단체가 한둘이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
특히 개방되어야 학자들이 모임이 더 심각하게 배타적이라 한다. 그러나 한국 공학
기술 학회가 평생 떠돌이 이방인으로 살아온 나를 끌어안아 주신 것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울고 있다. 삼십 년 동안 쌓인 떠돌이의 서러움이 녹아 내리고
있다. 미국은 나에게 많은 상패를 안겨 주었고 박수도 많이 보내 주었다. 그러나
이방인은 그저 서럽고 허전하다. 그리고 고국은 그저 고국이기 때문에 그리워하는
것이다. 멍멍이가 그립다는 말은 이방인이 아니었던 사람은 이해를 못한다.
  이기준 교수님, 유영제 교수님, 이병기 교수님, 김우식 교수님, 이장규 교수님의
열린 마음은 꽁꽁 얼어붙었던 내 마음마저 시원하게 열어 주는 것이다. 고마우신
분들. 열린 분들의 모임이 바로 열린 사회를 만들어 간다. 앞으로 한국 공학 학회를
위해서 내 무엇을 아끼리요.
    이제 도서관은 창고에서 창구로

  '열림'의 정체를 설명하자면 도서관을 예로 드는 게 좋겠다. 나는 미시간 공대에서
'21세기의 도서관 설계'를 위해 도서관장의 자문 역할을 맡은 적이 있는데 실은 그
일을 맡는 바람에 오히려 도서관학을 전공한 사람들로부터 거꾸로 많이 배웠다.
나는 도서관이 학교 부설 건물이 아니고 중앙 건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한국에 나올 때마다 틈만 있으면 도서관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한다. 그런 기회가
작년 봄에도 나한테 주어졌다.
  생긴 지 채 5 년이 안 되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한국 기술 교육
대학(한기대)을 나는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한기대는 노동부 산하의 유일한
대학으로서 특수 임무를 띤 대학이다. 특히 존경하는 권원기 총장님의 지도력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어떻게 발전될지 기대되는 대학이다.
  지난봄에는 권 총장님과 만나 도서관에 대해 의논한 적이 있었다. 도서관을
짓는데 무슨 목적으로 지어야 하는가가 주제였다. 기하 급수로 불어나는 지식(책,
논문집, 학회지 등)을 다 갖추자니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 자료들을 추려야 한다면
뭘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는가? 또 무슨 운영 철학을 가져야 하는가? 생각해 보면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다.
  지식을 얻고자 갈망하는 사람을 흔히들 목마른 사람에 비유한다. 그래서 필요한
정보를 찾아 헤매는 사람을 사막을 헤매면서 목말라 하는 사람으로 연상한다. 이
비유에서는 지식은 물이고, 도서관은 타는 목을 축여 줄 물이 고여 있는 오아시스다.
이렇게 볼 때에는 도서관이 바로 지식의 오아시스인 것이다. 좀 딱딱하게
표현하자면 여태까지 도서관을 지식의 집산지 또는 정보 창고로 보아 온 경향이
짙다.
  나의 아내가 한국에 연구 자료를 구하러 갔던 1987 년의 일이다. 책이 많다는
서울 대학 도서관에 갔더니 졸업생이 아니라고 못 들어가게 하더란다. 그래서
모교인 이화 여대에 갔더니 이번엔 재학생이 아니라서 못 들어간다고, 졸업생도 못
들어가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했더니 교무처에서 졸업증명서를 떼고 주민 등록
등본도 가져 오라고 하는 바람에 서류 만드느라 하루 이틀이 걸릴 것이 아까워
포기했다고 한다.(서강 대학에 갔더니 두말 없이 들여보내 주더란다)
  지식을 사막의 물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오아시스에 아무나 들어와 물을 마셔 버려
물이 금방 바닥날 것이 두려울 수밖에! 지식을 사막의 물로 비유하는 한 열린
도서관은 운영할 수 없다.
  학생들의 경우는 아직도 도서관을 '정답'이 있는 정보 창고라고 여기는 것 같다.
외워야 할 많은 정보량이 가득 들어 차 있으니 암기식 공부에 신물난 학생들은
도서관 가기를 꺼리는 게 당연하다. 이들은 책 냄새만 맡아도 골치가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과제물을 내주면 한 학생이 십자가를 메는 셈치고 도서관에 들어가서
책을 찾아 나오고, 이를 기다리던 나머지 학생들이 같은 책을 돌려보며 대충
비슷비슷한 답을 적어 제출한다. 정답(닫힌 생각)을 요구받은 학생들이 마치 답 찾아
꺼내기 식으로 지식 창고를 이용하는 한 열린 도서관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구상하는 도서관은 책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지 않다. 오히려 텅빈 공간이
많아 여유가 있고 창문도 많아 화창하다. 책을 보다가 쉴 만한 소파와 쉼터도
군데군데 마련해 놓아야 한다.
  미국의 최고 갑부 록펠러가 사업에서 번 돈을 지식 산업에 희사하는 뜻에서
지었다는 시카고 대학의 도서관을 보자. 세계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100
명 이상) 배출한 시카고 대학의 저력은 시카고 대학 도서관(Regenstein
Library)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전교생이 도서관 안에 자기 캐비닛이
있고, 공부할 터와 쉴 터가 최적의 상태로 지어진 곳이다. 우리 나라 갑부 중에서도
이 정도의 지식 산업에 희사할 사람은 없을까.
  내가 상상하는 도서관은 보물 단지를 자물쇠로 꽉 잠가 놓은 듯한 닫힌 창고가
아니다. 내가 그리는 도서관은 사람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는 곳이다. 이제 지식은
어느 한 사람이 갖는다 해서 없어지는 보물이 아니다. 열 명, 천 명이 가져도 여전히
그대로 있다. 도서관의 부가 가치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수록 높아진다.
  도서관이나 대학은 지식을 가두어 놓는 탑이 아니라 지식을 주고받고 나누고
창조하는 지식 산업의 생산 본부다. 열린 교육이란 도서관에 창구를 다는 것이다.

    생각만 바꾸면 모두 일등할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의 작품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간 적이
있다. 마침 한국에서 놀러 온 교수 부부도 우리 집에 머무르고 있어 함께 보러
갔다. 교내에는 전교생의 작품이 다 붙여져 있었다. 작품을 한두시간 빙 둘러보고
우리랑 함께 구경 갔던 부부와 약속한 시간에 주차장에서 만났는데 그분들은 뭔가
많이 아쉬워하는 눈치를 보이면서 수상 작품들이 어디에 붙여졌는지 몰라서 못 보고
나왔다고 했다. "수상 작품은 없어요. 각자 능력껏 그린 것들을 전부 다 전시해
놓은 것이에요." 했더니 그 부부가 하는 말, 입상 리본이 붙어 있는 작품들을
찾느라고 정작 그림들은 하나도 못 보았다고 해서 모두 한참을 웃었다. 미국
학교에서는 일등, 이등은 물론 장려상도 없다. 최선을 다했으면 나름대로 다들
일등인 것이다.
  운동회도 작품 전시회만큼이나 싱겁다. 등수도 안 매기고 상품도 없다. 싱글벙글
노는 것 같다. 운동이 취미 없고 하기 싫은 사람은 참가만 하면 된다. 너 때문에
우리 팀 졌다고 비난받을 일도 없다.
  그러나 농구가 유달리 좋아서 방과 후에 하는 농구팀에 들어갔다면 그 땐
경쟁이다. 능력대로 포지션이 정해지고 훈련도 고되다. 학교 내외의 팀과 일 년에
몇 번씩 시합도 한다. 자기가 좋아서 선택한 활동인 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배겨 나지를 못하게 되어 있다.
  이래서 평균적으로 볼 때는 우리 나라 아이들보다도 잘 뛰지도 못하고 체력도
많이 뒤떨어진다(이 점은 미국 정부도 대책 마련을 걱정할 만큼 심각하다). 그러나
올림픽에 나가면 미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휩쓴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에 소질을
모이거나 관심을 가지면, 하고 싶은 것에 최선을 다하도록 키워 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운동회의 달리기 모습을 상상해 본다. 웃는 얼굴로 뛰는 아이가 없다. 달들
일그러지고 찡그린 얼굴로 뛴다. 결승점에 가까울수록 울상이 되는 아이도 있다.
  모두가 한 목적지를 향해 뛸 때 일등은 한 명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패배자가 된다. 기껏 뛰었다가 일등을 놓치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탈한가? 이유 없이
일등한 급우가 얼마나 야속하고 미워지는가? 내 옆에 바짝 붙어 띠는 친구는 얼마나
성가시고 꼴 보기 싫은가? 모두가 얼굴이 찡그려질 수밖에 없다. 느긋하게 웃다가는
일등할 수가 없다.
  그러나 네 명을 사방을 뛰라고 한다면? 다 일등이 될 수 있다. 여덟 명을
팔방으로 뛰게 해도 다들 일등이 된다. 자기가 도전 기준이 된 셈이다 .자기가 정한
속도로 가고 싶은 만큼만 가도 된다. 최선만 다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각자의
개성에 따라 능력껏 사방 팔방으로 커 나가라고 하면 다들 웃으면서도 일등하니까
신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창교육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도록 기회를 열어 주는
교육이다 .그래서 모두가 웃으면서도 일등하는 사회를 만드는 교육이다.
    '^36,36,36^이다'에서 '만약 ^36,36,36^라면?'으로?

  창의력을 존중하는 창교육의 실천 방법 중 하나는 '질문'이다. 창의력은       
"만일 ^36,36,36^라면?"이라는 비결정론적인 가능성을 스스로 질문해 보는 버릇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우리는 "OO는 OO이다."라는 결정론적 생각을 하는 버릇을 길러
주는 듯싶다.
  질문의 종류를 보자. 질문에는 정답이 하나뿐인 질문이 있다. "신라는 서기 몇
년에 삼국을 통일하였습니까?" 이런 질문을 교육자가 던지면 학생들이 대답을 잘
하지 않을 것이다. 책에 있는 '지식'을 머리에 넣어 오지 않는 학생이 대답할 까닭이
있는가? 또 달달 외어 정답을 아는 학생이라 해도 다른 학생들 앞엣 잘난 척하는 것
같아서 선뜻 대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아무도 대꾸하지 않으면 뭐든 잘
아시는(더 정확하게 말하면 학생보다 지식이 많다고 자부하는) 선생님이 스스로
대답하겠지. 이렇게 학생들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이런 질문이 소위 '닫힌
질문'이다.
  닫힌 질문보다 조금 융통성 있는 질문으로 수렴적 질문이 있다. 정답이 몇 가지
더 있을 수 있는 질문이다. "신라가 통일하는 데 크게 공헌한 신라의 장군들은?"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학생들은 삼국 통일 배경에 대해 알아야 하고 이 지식을
바탕으로 답을 찾아야 한다. 학생들의 사고 수준을 약간 더 높이는 질문이다. 이럴
때 계백 장군이라고 대답하는 학생은 문제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알고 있는
'지식'을 잘못 적용한 것이다.
  다음 발산적 질문은 답이 아주 많이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신라는 왜 당나라의
도움을 빌어 통일을 했을까?" 분석력과 종합력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엉터리 답이
나올 수도 있지만 교육자는 여러 주변 정세와 다른 나라의 통일 패턴들을 분석하고
종합해서 설득력 있는 답을 유도해야 한다.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만큼 그들의 사고
차원을 한 단계 높여 주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하려면 교육자도 폭넓게 알고
예리하게 분석할 수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선생님들이라면 논문을 쓸 때 이런
훈련을 거쳤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열린 질문은 묻는 사람이나 답하는 사람이나 자칫하면 당황할 수
있다. "만일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문제엔 정답이 없다. 그러나
수많은 가능성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뜬구름 같은 답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래서 판단력과 나름대로의 논리가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50 명이 강의실에
있다면 50가지 이상의 답이 나올 수 잇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다가도
다른 학생들의 한두 마디에 상상력을 자극 받아 새로운 답을 제안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답을 통해 학생들은 역사가 고정된 연대의 나열이 아니고 선택과
판단의 역동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때 교육자들은 중간 중간에 너무 빗나가지 않도록, 그리고 제자리에서 생각이
맴돌 때 시원한 방향을 제시하고 격려를 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육자 자신이 먼저 이런 질문을 하고 생각을 키워 보는 것을 즐거워해야 한다.
  이런 질문을 하려면 교육자나 학생 모두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답 이외의
가능성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 내 답만 맞고 남의 답은 틀렸다는 식의
편협성을 버려야 한다.
  창교육이란 바로 이런 열린 질문을 하는 교육이다. 열린 답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 위에 이해력, 적용력, 분석력, 종합력, 판단력 등을 갖추어야
한다. 예전 같은 암기 방식으로는 학생들을 이해시키는 것도 어렵게 된다.
  남이 만들어 놓은 지식을 먹게 하려고 지식에 굶주리지 않은 학생들을 끌고 가는
것은 당나귀 등 떠밀기보다도 힘들다. 그러나 학생들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을 찾도록 하면 재미가 생겨 자꾸 더 알고 싶어하고 마침내는 신나게 공부할
마음까지 생긴다.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을 찾아야 하니까 보물찾기하는 기분일
것이다.
    정답이 없을 때 상상력이 동원된다.

  창의력의 또 다른 원칙은 스스로 잘 보는 데 있다. 가령 흰색 바탕의 원 안에 점
하나가 찍혀 있는 그림을 보여 주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어 보라. 대학생들은
열이면 열 다 "까만 점이 보인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유치원생들의 대답은
가지각색이다. 둥근 달이 보인다. 접시다. 심지어는 벽에 붙어 있는 코딱지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까만 점만 보인다고 답하는 것은 이미 정답을 요구하는
교육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정답이란 모든 이가 다 수긍하는 답이다. 모든 이가 다
수긍을 하자면 사물의 최대 공약수만을 뽑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의견(상상력)은
완전히 죽이고 확실한 부분, 즉 둥근 모양과 까만 색깔만 보는 것이다. 정답 맞추기
교육에서는 다양한 관찰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니 획일적 정답에 길들여진
학생한테서 창의력을 기대한다는 건 무리다.
  우리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을 볼 때 괴짜라고 한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하기 때문에 미친 사람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누가 진정
미친 사람일까? 앞의 그림으로 다시 돌아가자. 그림에는 분명 하얀 바탕이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흰 바탕이 보여요."라고 답하는 대학생을 만나 보지 못했다.
분명 보이는 것을 못 보는 사람이나 안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하는 사람이나,
괴짜이기는 매한가지다. 미쳤다 해도 같은 정도로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답을
요구하지 않아야 학생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래야 비로소 눈뜨고도 보고
눈감고도 보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이 하마, 개구리, 만득이 시리즈들을 좋아하는데 이야기 자체는 하나도
우스운 게 없다. 나이 든 사람들은 도무지 웃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 시리즈는 그
하마와 개구리와 만득이의 모습을 제각기 상상해 봄으로써 웃음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유머는 말하는 사람이 나를 웃겨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상상을 해 봐야
우습다.
  창의력 교육은 스스로 보고 스스로 즐거워하는 자발성을 격려할 때 비로소
성공한다.
    여유와 여백은 창의력의 전제 조건

  "여유를 주어라." 창의력 교육이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다. 몇 년 전에 나는
미니애폴리스에 본사가 있는 3M 회사를 4박 5일 동안 견학한 적이 있다. 스카치
테이프로 유명한 3M 회사는 소위 '경영 혁신'을 성공적으로 해서 1980 년대에 미국
전반을 휩쓴 경제 위기를 잘 모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알뜰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3M은 또 세계에서 제일 많은 신제품을 개발한 회사로 유명하다. 그래서
미시간 공대에서는 '대학 행정 개혁'의 모델로써 고려할 만한 부분을 배우자는
취지에서 교수 몇 명을 선발한 뒤 3M 회사로 보냈는데 나도 거기에 끼게 되었다.
  3M에서는 직원들에게 업무 시간의 10%에 해당하는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이
때는 아무거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라고 한다. 무한 경쟁 시대라 하여
종업원을 쥐어짜는 식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 시대의 모범적
기업은 이렇듯 회사원에게 여유를 주는 회사다. 어허, 참. 종업원을 쥐어짜는 회사에
입사하기 싫어 못하는 공부 죽어라고 해서 대학 교수가 되었더니, 그새 세상이 변해
오히려 대학에서 교수를 쥐어짜고 거꾸로 회사가 예전의 대학같이 여유를 부리고
있지 않는가. 길을 잘 못 택해도 영 잘 못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새 시대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열린 교육을 하는 운현 초등학교의 모습은 참 고무적이었다. 잠깐
본 모습이었지만 학생들은 수업 중에 자유롭게 움직이며 얘기하며 활동적인 수업을
한다. 예전의 초등학교에 비하면 노는 것인지 공부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자유로운 모습이었는데 그렇다고 그 학교 아이들이 똑바로 앉아 칠판에 적힌 것을
필기하는 다른 아이들보다 덜 배우는 것은 분명 아니라고 믿는다. 이
아이들이야말로 새 시대에 맞는 교육을 받는 것이다.
  창의력 위주 교육이란 학생들을 더 열심히 몰아치는 교육이 아니다. 창교육이란
학생들이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도록 사고의 숨통을 틔어 주는 교육이다.
  물질 위주의 산업화 시대에는 사물로 공간을 채우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허기진
배를 음식으로 채우고, 빈 공간은 책상.의자.텔레비전.자동차 등등으로 꽉 채운다.
산업 시대에는 교육도 채우는 개념으로 이루어졌다. 백지에다 그림을 그리듯
교육이란 텅 빈 두뇌에다 지식을 채워 넣는 것으로 비유되었다. 공책에 빽빽이 받아
쓰고 깨알같은 문제가 가득한 시험지를 푸는 것을 공부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물건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다. 정보도 무한정으로 깔려
있다. 대량 생산으로 인해 물건 값이 떨어졌듯이, 정보화 시대에는 지식(데이터) 그
자체의 값은 폭락했다. 그러나 지식을 정보로 처리하는 능력은 더 한층 중요해졌다.
공대 지식의 반감기는 5 년이라고 한다. 5 년이면 이제까지의 정보량의 두 배가
새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머리에 아무리 넣어도 다 담을 수 없는 무한한 정보의
시대에 외우기 위주 교육은 곧 쓰레기를 수집하는 교육이다.
  목이 타서 물 마시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수돗물을 틀어 주는 데 지식을 여기에
비유한다면 지금은 쫄쫄 나오는 수돗물이 아니고 펑펑 쏟아져 나오는 소방전의
물이다. 정보의 홍수, 정보의 바다다.
  이런 바다 속에서 익사하지 않고 유유히 헤엄치고 배를 띄어 다니려면 생각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 창교육이란 생각할 여유를 주는 것이다. 문제를 백만 번
풀어야 한다는 것은 비슷한 문제가 나왔을 때 재빨리 푸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한국이 외국 물품을 비슷하게 베껴야 할 때나 필요한 능력이다.
이제 우리만의 고유 물품을 개발하려면 문제 하나를 놓고 이리저리 며칠씩 곰곰이
생각해 보는 여유와 여백의 교육이 필요하다.
    동시에 여러 문제 풀기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배운 '두 문제 풀기'는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일반적으로 시험을 볼 때 문제를 하나씩 푸는 데 반해 이 과목에서는 별개의 두
문제를 동시에 풀어야 했다. 죄송하게도 그 교수의 성함조차 기억 못하지만 어쨌든
그 때는 그냥 재미있는 선택 과목이다 싶어서 택했다. 지금 와서 보니 이런 문제
풀이 방식은 모든 학생들이 한 번쯤은 꼭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한 문제를 푸는 동안 잠재의식으로 다른 문제를
푸는 법을 배우게 된다. 노벨상 수상자 클락은 잠자다가 뱀이 꼬리를 무는 꿈을
꾸고 나서 그 동안 연구해 오던 DNA를 발견했다고 한다. 잠재 의식은 인간이
임의로 만든 제한 구역을 깨뜨리거나 자유 자재로 넘나든다.
  둘째, 세상 문제는 거의 언제나 여러 문제가 동시에 일어나는 데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 두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때 '멋지다!'를 연발하곤 한다. 두
문제를 동시에 풀다 보면 시험 문제뿐 아니라 생활의 실제 문제를 푸는 능력도
암암리에 키워진다. 여러 요인들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창의력을 영어로는 Creativity라고 하는데 이 말은 최근에 만들어진 말이다. 이
말은 '창조하다(Create)'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구약성서에 씌어 있듯이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뜻한다.
  그런데 창의력은 반드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능력만이 아니다. 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연관 짓거나 종합해서 새로운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창의력을 키우려면 겉보기에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연관 지어 보게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세상의 많은 문제는 정답과 현실 사이를 어느 정도 좁힌 타협선에서 해결된다.
그래서 최선책보다 차선책이 채택되는 경우가 많다. 솔로몬 왕의 지혜는 두 문제를
동시에 명쾌하게 푼 창의력에서 나왔다.
    사고 방식을 바꾸려면 말 단속부터

  영어로 남자를 man 또는 he라고 한다. 여자는 woman이거나 she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를 만들었기 때문인지 여자라는 단어에는 남자가 포함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이 단어 때문에 사회 문제가 상당히 생긴다. 인간이나 인류라는
단어가 나오면 문제가 더 한층 심각해진다. 인간은 여자 부류(woman kind)와 남자
부류(man kind)를 통틀어 모은 것인데 어째서 인간을 mankind라고 불러야 하는가.
  영어에는 이것 말고도 곳곳에 남성 위주 단어가 있기 때문에 여성 단체들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무의식적이라도 남존여비를 나타내는 말과 글을 색출해 내고
비판한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았다는 성경까지 비판의 대상이다. 하나님을
'He'로 지칭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영국 문화 중심 아래에서 이민자를 통일해 온 '찜통(melting pot)' 사회
정책을 버리고 이제는 다문화 다민족의 다양화를 존중하고 보존하는 '무지개'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00 년간 고의적으로 추구해 온 '찜통' 정책은 이미 부작용을 초래해
미국 사회와 미국인의 잠재 의식 깊숙이 백인 우월주의 사고 방식이 뿌리내려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 해약이 하루아침에 제거되지는 않는법. 그래서 현재
미국에서는 백인의 우월성을 조금이라도 풍기는 말과 표현은 금물이다.
  프로 야구단 신시내티 레드스팀 사장이 사석에서 흑인을 깔보며 한 말이 누설되는
바람에 야구단 운영권 정지까지 받은 사건은 약소한 경우다. 말 한 마디 잘못
뻥끗해서 퇴직 당하거나 고소를 당해 빈털터리도 된다. 도처에 있는 말 단속
감시원이 언제 어디서 꼬리를 잡을지 몰라 마치 공산 사회에 사는 것 같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사람의 사고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 말 단속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공기 속에 살고 있으면서 공기를 의식 못하듯 우리는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 의식하지 않는다. 일일이 행동과 연결해 보지 않고 거의 자동적으로
되풀이하는 게 곧 사고 방식인 것은 아닐까.
  사고 방식은 눈에 쉽게 보이지는 않지만 누가 어떤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고 싶으면 그 사람 말을 귀담아 들어 보면 된다.(아마 그래서 일제 때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개조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한글과 조선어 말살 정책을 강행했나 보다)
  회사의 사훈을 보면 그 회사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일심동체, 우애'는 농경
시대의 사고 방식이고, '근면, 성실, 수출'이라는 사훈은 산업 시대에 걸맞다.
'대화'나 '조화'가 들어가면 현대 감각이 느껴지고 '각자 알아서'라는 사훈이 있다면
초현대적이라고 할 만하다.
  요즘 대학의 광고문들을 보면 대학의 사고 방식이 크게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인, 미래, 능력, 자기 개발, 인류애, 자부심, 다학문적, 공동체, 주도, 개성,
다양화 등의 단어들이 대학 선전문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한 10 년 전과 비교해도
큰 변화다. 대학을 일류, 이류 식의 서열로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학생이
알아서 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메뉴'를 다양하게 준비해 놓고 입맛대로 고르라는
여유가 있어 좋다. 과연 기호에 맞는 음식을 선택해서 오는 학생들에게 기대에 맞는
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는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앞으로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예전처럼 성적순으로 밀려서 온 학생들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창교육하려는 대학은 말도 선별해서 써야겠지만 무엇보다도 말과
실천이 일치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설탕을 탄다고 물이 넘치진 않는다.

  어느 대학에 커리큘럼 짜는 일을 자문해 주면서 공대 학장이 추진하는 몇 가지
혁신적인 시도에 걸맞은 과목을 새로 개설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새
과목을 넣는 대신 무슨 과목을 빼야 하는가? 신설 과목은 새 시대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모두 수긍하겠지만 대신 빼야 되는 과목을 가르치던 교수는 당연히
반발할 테니 걱정이라고 했다. 과연 걱정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물 한 컵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컵에 물 높이를
표시하고는 설탕 한 숟가락을 큼직하게 떠 넣고 저었다. 그리고는 빙글빙글 돌던
물이 정지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학장보와 교과 과정 연구회 교수들은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물 높이가 변하지 않는 것하고 교과 과정 짜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코도 크고 못생긴 괴짜라고 하더니 역시^5,5,5^'
  설탕을 넣었다 해서 물높이를 유지하기 위해 설탕의 양만큼 물을 쏟아 버려야
했는가. 설탕 한 숟가락을 넣어 봤자 물의 부피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첨가한
약간의 설탕 때문에 물 전체의 질은 확연히 달라진다. 신설 과목 개설을 물에다
설탕 넣기 식으로 본다면 문제될 것이 무언가.
  나의 포인트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학장의 걱정은 대학이 학과목을 지식
덩어리(고체)로 여기는 의식 구조 속에서 비롯된 문제다. 걱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둘째로, 교육 개혁을 너무 어마어마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설탕
한 숟가락을 물 한 컵의 맛이 크게 달라졌듯이, 마찬가지로 교육도 약간의 교육
기술 첨가로 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
  즉 교육(밋밋한 물) 개혁에는 창의적 아이디어(설탕)가 필요하고 그로 인해
유기체적인 시너지(물+설탕=맛있는 음료)를 얻는다는 사고 방식이 필수라는 것이다. 
'1 더하기 2 는 3' 같은 기계적 사고방식에서 '1 더하기 2 는 12'가 될 수도 있는
유기체적 사고 방식으로 변해야 한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함께 있습니다. 몇 명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정답! 두 명." 하면 기계적인 사고 방식이다. 세 명이 정답일 수 있지 않겠는가.
요즘같이 인공 수정으로 일곱 쌍둥이도 낳는 세상이니 유기체적 사고 방식의 정답은
아홉까지도 가능하다.
  알렉산더 대왕이 꽁꽁 엉켜 있는 밧줄을 칼로 쳐서 풀었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도
있지 않는가? 엉켜 있는 밧줄을 손으로 일일이 풀어내야만 한다는 법은 보통
사람들의 일반 상식이었을 뿐이다. 알렉산더는 자기 머리를 꽁꽁 묶어 두는 사고
방식의 밧줄을 먼저 잘라내 버린 것이다.
  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아무도 세우지 못하는 달걀의 밑을
깨서 평평하게 만들어 세우지 않았는가. 주위 사람들은 분개한다. "콜럼버스는
사기꾼이다, 시시하다, 그런 것쯤이야 나도 할 수 있다." 그렇다. 콜럼버스 이후에
너도나도 아메리카 대륙을 오갔듯이, 너도나도 삶은 달걀을 깨서 세울 수야 있다.
그러나 이 콜럼버스 이야기의 핵심은 잘못된 문제(둥글둥글한 달걀은 서지 않는
것인데 세워 보라는 문제)의 근본을 파악하고 문제 자체를 수정한 데에 있다.
콜럼버스는 주어진 문제의 정답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풀 수 있는 문제로
개정하였던 것이다.
  이 세상에 손발을 묶어 놓고 뜀박질하라는 요구가 어디 한두 가지인가? 당연히
묶여진 손발을 풀어 달라는 요구부터 먼저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안타깝게도 손발이 묶인 채로 뛰려고 하는 사람을 숱하게 많이 봤다.
  피아제의 이론에 따르면 새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사람이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생각 체계와 어긋나는 새로운 개념을 만나게 되면
기존의 체계 때문에 매우 불편해 한다. 그 불편함을 두 가지 방법으로 해소하게
되는데 첫째는 상대를 내 쪽으로 변화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내 경험에 비춰 본 바 세 번째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새로운
개념을 대하자마자 아예 신경을 끄고 책상에 엎드려 잠자는 학생과 세미나
참석자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내 강의가 그 정도로 따분했나? 어쨌든 그것은
아예 마음을 닫아 버리는 행위다.
  눈감고도 볼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 창교육인데 눈뜨고도 못 보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은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한테나
해당되는 말일까?
    실력자들은 실력 발휘를!

  우리 나라 대학에 가면 각 대학마다 단과별 교수 리스트가 있다. 이름과 주소와
전화 번호 등이 적힌 종이를 보면서 나는 처음에 이 리스트가 무슨 순서로 적혀진
것일까 의아했다. 분명 가나다순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드시 나이순인 것 같지도
않고, 정교수, 부교수, 조교수 서열도 아니었다. 뭘까? 같은 대학에 여러 번 가보고
회식도 몇 번 하면서야 어렴풋이 교수 명단에 적힌 이름 순서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바로 그 과의 '세도' 순서였다.
  그런데 이 순서를 결정하는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이, 이 학교에 들어와
터주대감이 된 경륜, 대내외에 알려진 지명도, 학위 받은 출신교 등등 몇 가지 핵심
요소들이 복잡하게 조합을 이루어 각 교수들의 위치가 위계적으로 표시된 것이다.
물론 제일 꼭대기에 있다고 반드시 막강하지는 않다. 왜냐 하면 왕년에 군림했던
실력자가 바로 아래의 후계자에게 권력은 넘겨줬어도 은퇴를 하지 않아 명목상
윗자리를 차지할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한 번 이 리스트가 작성되면
자타가 다 인정하기 때문에 좀처럼 순서가 뒤바뀌는 이변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위계 서열은 대학뿐 아니라 우리나라 법조계, 고급 관리, 대학 병원 의사들에게도 다
있다고 들었다.
  이렇게 꽉 짜여진 피라미드형 조직에서는 교육 철학을 논할 일이 못된다. 철학적
논쟁이나 설득력도 무모한 노릇으로 보인다. 그저 가만히만 있으면 체제 안에서
안전하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자기가 군림할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그저
저만 잘났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가소롭고 불쌍해 보일 수밖에.
  그러나 세상이 변해도 이만 저만 변하지 않았다. 1980 년대 이후 우리 나라
대학들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양적 팽창을 해 왔다. 요즘 웬만한 대학에 가 보면
대학 재정은 평균 중소기업 이상이고 학장은 예전의 대학 총장급이 관할하던 만큼의
인원을 다스리고 있다. 학장은 예비 총장으로 학교 돌아가는 이모저모를 일목
요연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대부분의 대학 행정은 예전
그대로이다. 학장들 스스로가 구멍가게식 행정을 하고 있다고 토로한다. 구멍가게란
주인 한 명이 이것저것 다 알아서 차려 놓고 진열과 판매도 임기 응변으로 한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내 생각으로는 대학에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 대학을 다니다
보면 학장이나 처장들이 전문성이나 교육적 안목, 또는 소신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풍토가 되어 있지 않다. 학장들은 2 년 임기로 돌아가면서 하다 보니 첫해는 전임
학장이 해 온 것을 따라 하기에 바쁘고 둘째 해는 임기 마칠 때까지 제발 아무런
사고도 없기만 바라느라 뭔가를 새롭게 시도하지 않으려 한다. 처장들은 또
물귀신처럼 버티고 있는 직원들에게 꼼짝 못한다.
  다들 무엇이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뒤돌아 앉아 불평만 하고 있다. 학장이나
처장이 못난이들이라서 그런가? 천만에 말씀. 한국의 학장과 처장들이 어디 보통
실력자들인가? 그런데도 그들은 반벙어리가 되어 있다. 위로는 교육부가 누르고
있고 아래로는 자존심 강한 교수들이 버티고 있다. 교육부는 말씀이 내려오는
곳이지 말이 먹혀드는 곳이 아니란다. 교수들 또한 말로 먹고 사니 말로 치자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 아니냐. 이래저래 말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저 입 꼭 다물고 임기나 무사히 마쳐 달라고 고사드리는 게 상책이다.
  창교육은 철학 있는 교육 행정을 요구한다. 창교육은 바른 말하는 행정가를
요구한다.
    터주대감이 해야 할 일

  내가 한국의 어느 대학에 자문 나갔을 때의 이야기다 .총장을 비롯하여 여러
처장들을 만났다. 보직 교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대학 사무 직원들이 놀고 먹는다,
방해만 한다고 불만이었다. 그런데 직원들 이야기는 정반대였다. 교직원들은 한
자리에 이십 년 묵기는 예사란다. 당연히 교수보다는 직원들이 학교 돌아가는 일을
더 '빠삭하게' 알고 있다.
  대개 처장들이나 학장들은 그 임기가 고작 두 해 정도다. 일을 배워서 할 만하면
바뀐다. 이렇게 되면 직원들이 알아서 해야지 새로 보직 맡은 지 얼마 안 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간섭해서 될 일도 안 되게 만들어 놓으면 누가
책임지라고^5,5,5^? 또 대학이 일이란 항상 이것저것 보고서 내는 일투성이에 제출
기한은 늘 '어제'까지다. 그러니 보고서 제출은 맡아 놓고 지각인데 무슨 참견이람.
  월급 주는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직원 수는 왜 그리 많은가. 그렇다고 쫓아낼
수도 없다. 직원은 계속해서 일거리를 만들어 내야 자리를 보존한다. 그러니 항상
쓸데없는 일만 잔뜩 불어나는 것이다.
  양쪽 얘기를 종합해 보면 완전히 악순환이다. 그러나 해결 방법이 있다. 직원도
창성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일을 대폭 줄여라. 남아돌아가는 직원은 새 시대에
필요한 전문 직원으로 적극 키워라.
  전문 직원의 예를 들어보자. 학생처나 교무처 직원들 중에서 입학 담당 전문
직원을 키워 보라. 요즘 같은 때엔 신입생 모으기가 얼마나 힘드는가? 상위권
대학에서 특차니 복수 지원이니 다 끌어가고 나면 다른 대학들도 줄줄이 영향을
받아 정신 없다. 한 번이면 족하던 등록이 이제는 네다섯 번도 예사다. 학생들이
대학에 대한 입학 정보를 받아 충분히 생각해 보고 방문하고 상담할 수 있도록
입학처 직원들이 일년 내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
  또 다른 예로는 전문 직원을 키워 학생 직업 알선소를 운영할 수도 있다.
학생들은 점점 실리주의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취업률이 학교 선택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취업 센터를 잘 운영하면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
학부모들도 학교에 대해 대단히 만족해할 것이다.
  그밖에 원격 강의실, 컴퓨터실 등 첨단 시설 운영에도 많은 전문 직원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새 시대에 맞는 인력으로 키워야 직원도 신나고 보직 교수들의 불만도
없어진다. 학생, 교수와 더불어 직원도 창성하게 하는 대학을 두고 창교육 하는
대학이라 한다. 창성 교육은 기회를 펑펑 열어 주는 창달 교육을 필요로 한다.
  나는 대학에 있으니까 대학 얘기를 했지만 병원, 법원, 회사, 호텔, 관공서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아도 사정은 대개 비슷하다. 이제는 컴퓨터 한 대가
예전에 사무 직원 몇 명이 하던 일을 다 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무
직원이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컴퓨터를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 고객 만족도를 올리고 수요를 창출해 내는 전문 인력으로
키운다면, 이제까지의 노하우와 합쳐져서 더 발전할 것이다.
    화수목 교수들의 고민

  교수가 대학 정문의 수위에게 깍듯이 경례를 붙인다는 이야기를 들어 봤는가?
교수가 탄 차를 보고 수위가 경례한다는 이야기도 어느덧 옛이야기가 되어 가는데,
이건 또 무슨 인사성 밝은 교수 이야기인가 하였다. 그러나 속사정을 듣고 나니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니다 .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 출강하는 교수들은 서울에 있는 가족과 주말을 함께 지내기
위해서 화, 수, 목요일만 강의를 맡으려고 한다. 그런데 학교 당국에서는 일 주일에
적어도 나흘을 출강하라고 요구하니 슬쩍 눈가림을 하기 위해서는 수위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의 여러 대학을 다니면서 만나 본 바 내린 결론은 우리 나라 교수들의
대다수는 슈퍼맨, 슈퍼 우먼들이라는 것이다. 강의도 많이 해야 하고, 연구도 해야
하고, 학생 지도도 잘해야 하고^5,5,5^ 그런데 교수들 불평을 들어 보면 그렇게
혹사당하고 있는데도 학교 당국에서는 교수들을 마치 거지처럼 대우한다는 것이다.
교수 채용 때 고자세로 마치 문전 걸식하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로 뽑긴
예사고, 쥐꼬리만한 월급 주면서도 너 싫으면 언제라도 관둬라  하는 태도로 일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잡무는 또 왜 그리 많은지^5,5,5^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교수라는 이름 하나에 목을 걸고 살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다고 푸념하는
교수들이 많다.
  교수 스스로를 불쌍하고 초라하고 위선적으로 만드는 이유는 대학 행정 당국이
통제와 감시가 많기 때문이다. 하기 싫은 일이나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일들을
시키니까 거짓과 위선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이런 패턴은 초등학교
아이들 숙제 검사와 똑같다!)
  예를 들어 많은 대학들은 하나같이 한 학기당 100--200 명 정도의 학생들을
'지도' 하라는 할당을 준다고 한다. 그 시간도 내기 힘든데 또 학생 지도한 내용을
'학생 상담 일지'에 기록해서 제출해야 한다. 이 바쁜 세상에 말한 것을 글로 다
쓰라니! 그렇다고 그 내용을 고스란히 적어 낼 교수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대학이
교무처나 학생처에서도 역시 교수들이 곧이곧대로 일지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기록을 받아 둔다. 왜? 교육부 감사 때 필요하니까. 이런 식으로 대학
안에서도 서로 거짓을 가용하고, 한편으론 거짓을 눈감아 주는 공범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가 존재한다.
  이런 체제에서 비판은 금물이다. 목숨을 내놓는 만용이다. 무조건 해야 한다.
교육부에서 하라니까. 총장과 학장들은 교수들이 따라 주지 않으니까 교수를
'제멋대로하는 망나니'라고 욕한다. 한 나라의 최고 지성인인 교수들이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그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어떤 수준의 교수법이 전달될는지는 뻔하다.
공경받지 못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게 될 때 더 권위적이 된다. 따라서 학생들을
소중하게 대접하기 위해서라도 교수들을 거지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버드 대학의 인문대 학장으로 있는 로봅스키 박사는 평소에는 전혀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일하기 편한 허름한 셔츠에 아무 바지나 입고 학교에 나오는데
그런 그가 반드시 정장 차림을 할 때가 있다. 바로 신임 교수를 초빙하려고 교수
채용 인터뷰를 할 때라고 한다. 그만큼 하버드 대학에 모실 교수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교수를 귀하게 모시는 대학과 거지 취급하는 대학. 둘 중
어디에서 빛나는 연구 실적이 나오고 지식 축적이 제대로 이루어질지는 뻔하지
않은가?
  학교는 학생들만 발전하는 곳이 아니다. 교육자들도 지속적으로 발전을 해야
한다. 그리 되도록 후원하고 기회를 열어 주어야 한다. 학생과 더불어 스승도 계속
창성하는 곳이 바로 창교육하는 학교다.
    상과 벌 대신 설득력으로 움직여라.

  중매 잘못하면 뺨이 석 대고 잘하면 옷 세 벌이라. 사람을 상과 벌로써 다루는
것은 아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습성일 것이다. 사회가 온통 상과 벌로
사람을 움직이려고 한다. 하나님 말씀을 잘 들으면 천당엘 가고 안 들으면 곧바로
지옥행이다. 조상을 잘 모시면 복 받고 못 모시면 천벌 받는다. 상사한테 잘 보이면
승진하고 밉보이면 고달프다.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용돈이나 얻어 탈 텐데 그렇지
않으면 회초리다. 친구와 사이가 좋으면 껌 반쪽이라도 얻어먹다가도 싸우고 집에
오면 야단 맞는다. 상과 벌이 확실한 군대에서는 잘하면 훈장이 주렁주렁, 잘못하면
곤봉 세례에 총살까지 갈 수 있다.
  도대체 상과 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왜 그것에 그토록 매여 있나? 내 생각으론
"중매 못 하면 뺨이 석 댁 잘하면 술이 석 잔(요즘은 옷이 세 벌)이다."라는 속담이
상과 벌이 법칙을 잘 보여 주는 것 같다. '빰이 석 대'는 폭력을 말한다. '옷이 세
벌'은 재력을 말한다. 이것은 바로 앨빈 토플러의 〈권력 이동〉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폭력이 권력의 도구였던 농경 시대는 체벌로써 사람(대부분 무교육자들)을
다스리고, 재력이 권력의 중심이던 산업 시대는 돈으로 사람(대부분 저학력자들)을
다스렸다.
  그러면 그 다음 시대인 정보화 시대는 무엇이 지배 수단이 될까?
갤브레이스(Galbraith)는 '권력 구조'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으로 벌, 상, 다음으로
조직 동기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약간 각색해서 벌, 상, 그리고 창(창도,
설득력)으로 요약한다. 내 생각을 정돈해 보면 아래와 같다.
  교육에다 초점을 맞추어 보자. 아주 어릴 적엔 매가 무서워 하기 싫은 일도
억지로 한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 중고생 정도가 되면 용돈으로 밀고 당긴다.
대학생은? 모르겠다. 다 큰 대학생은 어떻게 다뤄야 하나? 공부 안 한다고 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옷 사 주겠다는 유혹에 코방귀나 뀌겠는가.
  부모도 머리가 큰 자식은 다루기 어렵다고 하는데 하물며 교수인들 그것이 쉬울
리 없다. 대학생들은 말로 꾸짖어도 들은 체 만 체고 잘한다고 점수 잘 주겠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물며 대학교 행정이 교수들을 상과 벌로 다스리겠노라고 한다면 더 가관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일이 많이 벌어진다. 1996 년도부터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교수들 연구 안 하면 쫓아낸다. 실적 좋은 교수는 봉급 더
준다."라는 등의 기사를 볼 때마다 나는 한숨이 나온다. 대학생도 벌과 상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 세상인데 어떻게 교수를 상과 벌로서 다스리겠다고.
  교육부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교육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대학을 상과 벌로
움직이려고 하고 있다. 개혁 추진 보고서를 쓰게 하고 말이 맞든 안 맞든 무조건
교육부 하라는 대로 잘하는 '우수 대학'을 설정해서 6억이라는 큰돈을 상으로
내린다. 그 대신 말을 안 들으면 해주던 일도 안 해줘서 애를 먹인다고 한다.
  이제는 상과 벌 같은 구시대적 방법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전혀 소용없다는 말이 아니다. 구시대 방법은 구시대적 사고 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한테는 여전히 잘 '먹혀'들 것이다. 그러나 상과 벌은 외관상 변화를
가져올 뿐이지 근본적인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상과 벌은 잠시 단기적
효과를 낼 뿐이지 장기적 변화는 얻지 못한다.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현대인을
구시대 방법으로 누르고 앉아 있으니, 주는 사람.받는 사람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는
형편이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설득력이 최고의 방법이다. 간디가 왜
20세기의 최고 영웅인가? 넬슨 만델라가 어떻게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대통령이
되었는가? 테레사 수녀는 왜 성녀로 추대받는가? 다만 맨몸으로 행하는 모범과
원칙에 바탕을 둔 설득력으로 진실을 가로 막고 있는 폭력과 재력을 굴복시킨
위인들이기 때문이다.
  교육 개혁은 벌과 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육 개혁은 교육 행정가들이
앞장 서서 원칙을 외치고 스스로 모범을 보일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공생 공장 공장장

  대학 졸업생들을 '데려가는' 기업인들이 불평이 많다. 입사 후 장기간 재교육을
시켜야지 겨우 쓸 만한 정도니. 안 그래도 바빠 죽을 지경인 세상이고 돈은 없어
쩔쩔매고 있는데 불량품 졸업생의 재교육까지 떠맡게 됐으니 불평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그렇다고 실력 없는 졸업생을 학교에 되물려 줄 수도 없고 졸업생에 문제가
있다고 대학에서 애프터서비스라도 해주기는 하는가? 듣는 사람도 정말 그렇겠다
싶은 불만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 일단 내보내고 나면 나 몰라라 하는 대학을
한심스러워하는 것이다
  "아니, 흑백 텔레비전 공장을 지어 놓고 컬러 안 나온다고 불평하는군." 내가
존경하는 어느 공대 교수님이 말씀이다. 아주 멋진 반격이다. 사실 한국의 대학
교육 여건을 보면 너무 빈약하다.
  학생 대 교수 비율은 한국의 경우 50:1이다. 미국의 14.6이나 독일의 12.3의 배를
넘어도 한참 넘는 숫자다. 같은 동양권의 나라에 비해서도 빈약하다. 시설이 말도
안 되게 초라한 것은 제쳐 두더라도. 그 교수님 지적대로 그 정도나마 대학생들을
대량 배출해 낸 한국 대학과 교수님을 잘했다고 칭찬해야 할 형편이다. 누가
누구한테 책임을 따지고 있는가. 진정 책임져야 할 당사자는 돈줄을 쥐고 있는
교육부와 기업들 아닌가. 정당한 반격이다
  대학의 경제적 문제는 뒤에 더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 나는 대학을 보는 시각,
인식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기업인들은 대학을 졸업생을 생산해 내는 공장으로,
졸업생을 '생산품'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생각이 사회에 전반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퍼져 있으면 창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
  대학이 졸업생을 생산하는 공장이라면 이사나 교육부가 주인이고 총장은 공장장,
교수는 공장 직원, 조교는 '시다' 정도 될 것이다 .신입생이라는 원자재를 받아서
뚱땅뚱땅 쭈그리고 누르고 펴고 다듬어서 가공된 생산품이 곧 졸업생이다. 그러고
나면 생산품을 받아서 쓰는 기업이 고객인 셈이다.
  이런 공장에서 불량품이 나왔다 하면 과연 누구한테 책임을 추궁해야 옳을까? 그
원인은 돈을 아끼기 위해 엉터리 공장을 지은 주인일 수도 있을 것이고, 좋지 않은
원자재를 보내 준 업자(부모, 초, 중, 고등학교) 탓일 수도 있고, 좋은 원자재를
구닥다리 틀에다 억지로 집어넣고는 무조건 돌리는 공장 직원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가끔 공장 재산을 슬쩍 호주머니에 넣는 일도 있으리라. 이들 중 어느 하나
때문이라 해도 사실상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정작 제일 큰 문제는 따로 있다.
학교를 공장으로 보는 사고 방식의 교육 과정에서는 교육에 대한 책임이 학생에게는
전혀 전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입학할 당시 18살이고 졸업하면 적어도 스물 두세 살은 되니까 대학생들은 엄연히
성인인 셈이다. 성인이란 단어에는 책임감이란 개념이 듬뿍 담겨있다. 나라의
앞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에서 군대에도 가고 대선 투표도 하지 않는가. 그런데
자신의 능력과 인격 향상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면죄받은 대학생들은 과연
성인인가 어린애인가. 답은 뻔하다. 기업이 졸업생들을 '데리고 간다' 하면서 마치
코흘리개 어린애를 데려 가듯 하는 데는 졸업생을 성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꼭 교육을 공장으로 비유해야 한다면 창교육장은 공생 공장이다. 다양한 종류의
대학인(학생, 교원, 직원)들이 한 곳에 어우러져 서로 이익을 주고받으며 새로움을
창조해 내는 터다 창교육을 하는 곳은 교육의 책임을 학생을 포함한 모두가 나눠
가지는 곳이다. 다시 말해 창교육의 장은 교육인 모두가 선생이고 학생인 곳이다.

 
    4. 21세기의 인재 만들기 1.
      (20세기 세대들이 해야 할 일)

    부모가 실천하는 창교육
      (아이작 싱어의 어머니)

  미주 한인 교포들에겐 미국의 돈을 갈고리로 쓸어 넣는 유태인들이 선망의
대상이다. 그래서 유태인처럼 부부가 악착같이 일했다. 사실 유태인이 미국에 처음
이민 와서 장악한 시장을 한인들이 고스란히 물려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세탁소, 야채
가게를 운영한다는 게 벌이는 좋지만 여간 고되지 않다.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야
하고,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에 오면 푹 고꾸라진다.
  육체 노동 위주인 세탁소와 야채 가게를 물려 준 유태인은 편히 앉아 돈 버는
전문직으로 생활의 터전을 향상해 나갔다. 현재 뉴욕의 의사, 변호사, 은행장,
회계사, 증권 거래자는 75% 이상이 유태인이라는 말이 나돈 지 오래다. 이런
변화를 유도해 낸 유태인의 교육열에 비하면 한국인들이 교육열은 오히려 무색할
정도다. 자신의 자녀들이 의사 같은 돈 많이 버는 전문인이 되길 바라는 미주 한인
부모들은 또다시 유태인을 동경한다.
  이젠 한인 교포들도 제법 자리가 잡혀 자녀들을 하버드 의대에도 보내고
경영대에도 보냈다. 유태인 못지않게 위신이 서겠다 싶었는데 이게 웬걸, 유태인은
또다시 자리를 뜨고 있지 않는가. 유태인은 지금 미국, 아니 사실상 세계의 연예계,
언론계, 교육계를 잡고 있으며 산업도 하이테크, 은행도 눈에 보이는 돈이 아닌
통신망으로 흘러 다니는 돈의 유통을 장악하고 있다. 아마 한국으로 들어온
IMF자금도 분명 유태인의 손을 거쳤으리라.
  아, 유태인은 어찌 그리도 세상 흐름을 누구보다 빨리 보는가. 육체력 위주의 농경
시대에서는 몸으로 버티고, 재력 위주의 산업 시대에선 돈 벌레가 되더니, 이제
창의력 위주 정보화 시대가 왔는가 싶으니까 어느새 아이디어 박사들이 되어 있지
않는가?
  유태인이 생활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서 유명해진 아이작 싱어(Isaac Singer)의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다. 하도 오래 전 일이라서 내용은 다 잊어 먹고 딱 한
가지만 기억에 남는다. 싱어는 어릴 적에 학교를 다녀오면 어머니께서 빠짐없이
묻는 것이 있었다 한다. "오늘 학교에서 무슨 질문했느냐?"라고. 유태인의 저력은
어머니의 이 질문에서 비롯한다고 싱어는 말한다.
  우리 한국의 어머니들은 학교를 다녀온 자녀에게 무슨 질문을 하고 있을까? "잘
다녀왔냐?"라는 어머니의 질문에 자녀는 "네"라는 '정답'을 드리면서 선생님에게서
야단이나 매 같은 거 안 맞고, 친구들과 싸우지 않은 하루를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육체적 안녕을 상기하게 한다. 농경 시대에 걸맞은 질문이다.
  학업에 관심을 쏟는 어머니는 "학교에서 뭘 배웠냐?"라고 물을 것이다. 배움을
마치 소유할 수 있는 물품같이 생각하는 산업 시대에 매우 적합한 질문이다.
  자, 정보화 시대에 걸맞은 질문은 싱어의 어머니 같은 열린 질문이다. 자녀
스스로가 질문하는 습관을 가정에서부터 키워 주자.
    신식 맹모들이 마음 써야 할 세 가지

  맹자의 어머니는 공동묘지 근처에서 시장 근처를 거쳐 세 번째는 서당 근처로
집을 옮겼다. 아들을 학자로 키우기 위해서는 역시 글소리가 나는 환경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학군 따라 이사하는 한국 어머니들은 맹모와 다름없다. 좋은
학군의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단련되어야 일류 대학에 갈 수 있고, 일류 대학에 가야
능력을 인정받고 사회에서 대접받는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부모들은 자식의 생존 능력을 가능한 한 최대로 키워 주고
싶어한다. 맹모가 살았던 시대에는 공부만이 유일한 출세길이었다. 사농공상의 신분
서열이 엄격한 시대였기에 장사를 해 봤자 사회 밑바닥 대접밖에 받지 못했다.
맹자가 장사 흉내를 내는 모습을 보고 질겁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 상황이었다.
그리고 신분 서열을 바꾸려고 하다간 당장 반역죄로 삼족이 멸하게 되는 처형을
당했다. 당연히 관습에 맞춰 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맹모가 지금 생존하였다면 자식의 개성을 살핀 후 그 개성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이사 갔을 것이다. 자녀의 소질에 환경을 맞춰 주려 했을 것이다. 아이가
노는 것을 눈여겨보든가 대화를 해 봐서 장사에 취미와 소질을 보이면 시장
가까이로 이사 가고, 집짓기를 좋아하면 공사장에 데리고 다니지 않았을까. 축구를
잘했다면 조기 축구 모임에 넣었을 것이고 그림을 잘 그렸다면 전람회에도 자주
데리고 갔을 것 같다.
  지금은 생존 전략이 달라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농업에도 과학이 필요하고
기술도 사업과 손잡는다. 동계 올림픽 경기에서 보는 피겨 스케이팅처럼 예술인지
오락인지 스포츠인지 경계가 모호한 일들이 허다하다. 꼭 공부만 해야 잘 산다 할
근거가 희미해져 버렸다.
  이제는 한 줄로 서서 남보다 앞서겠다는 전략을 버려야 산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찾아보고, 남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환영받는다. '모방은
자살'이라는 현대에 남하는 대로 하라는 가르침은 현명한 맹모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럼 신식 맹모들은 자녀가 하고 싶은 대로 아무거나 하라고 마냥 내버려 두면
될까? 아니다. 수천 년 동안 변함 없던 농경 사회 시대의 맹모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 시대의 신식 맹모는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예전 어머니들보다 더 마음을 써야
한다.
  첫째, 자녀가 남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해줘야 한다. 개성이
강한 세상일수록, 다양화를 추구하는 사회일수록 자기만 잘났다는 독불장군은
고립된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남을 이해하며 남과 더불어 같이 일할 수
있으면서도 자기 의사 표현을 바르고 분명하게 하는 사람이 일을 해도 잘하고 또
즐겁게 한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결혼 생활도 할 테니 집 안팎으로 성공적인
사람이 된다.
  즉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것이 생존 능력이라는 말인데, 이 점에 있어서는
어머니들이 아버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다. 원래 여자들은 언어와 감성 면에서
남자들보다 우수하다지 않은가? 어머니들이 자녀와 남편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고
대화하는 모범을 보이면 자녀들도 저절로 이런 생존 능력을 습득할 것이다.
  둘째, 신식 맹모들은 예전보다 자녀의 정서적 안정에 더 마음을 써야 한다. 요즘은
세상이 정신 없이 빨리 변한다. 사람, 물건, 집, 환경 모두가 채 익숙해질 겨를도
없이 바뀌고 움직이고 오간다. 이런 세상에 미치지 않고 잘 살려면 마음 심지가
든든해야 한다. 밖이 소란할수록 마음에 항상성과 구심력이 있어야 인생을 잘
다스려 나갈 수 있다.
  급변하는 세상에 심리적 안정감이 없다면 외부의 힘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부딪치며 온갖 상처를 입고 마는 딱한 인생이 되어 버릴 것이다. 정서적 안정감은
어떻게 키워 줄까? 우선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하는 기본 욕구가 충족되어야
기본틀이 잡히고, 부부가 화목할 때 든든한 기반이 마련된다. 거기에 "이러저러한
것을 잘해야 예쁘다."라는 조건부 꼬리표는 금물. "그저 너라는 존재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 줄 때 아이는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쑥쑥
잘 큰다. 이 점 역시 아버지보다는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은
어머니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셋째, 신식 맹모들은 예전 어머니들보다 자녀의 기초 체력 관리에 더 노력해야
한다. 구식 맹모 시대에는 일 년 열두 달 거의 집에서 만든 음식을 먹고 살았다. 그
때의 음식은 방부제, 첨가제, 색소를 넣지 않아 지금으로 치면 모두 자연식이고
건강식이었다. 요즘은 도처에 간편하고 유혹적인 유해 음식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학교다, 학원이다, 유학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니까 부모가 조금만 소홀히 하면
아이들이 도대체 뭘 먹는지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바른 식습관과
음식에 대한 개념을 가르쳐 줘야 한다.
  문명의 발달로 예전보다 몸을 덜 움직이는 현대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릴
때부터 운동 감각도 키워 주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평균
수명이 늘어 남들은 80까지 정정하게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며 사는데 자기 자녀는 
 40 도 못 돼 고혈압, 당뇨, 비만, 허리 디스크 같은 성인병을 앓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딱할 것인가? 인스턴트 음식 먹이고 등떠밀어 학원에 보내는 엄마들. 설마
자신의 아이가 '일찍 출세하고 조기 사망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는지?
  내가 보기에는 우리 나라에 신식 맹모들이 아주 많다. 학군 따라 이사 가는
어머니들은 구식 맹모의 열의를 잃지 않되, 거기에다 신식 맹모의 비전까지 갖추게
된다면 세계 최고의 인재들을 키워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석봉 어머니가 보여준 새 시대적 평가 기준

  교육을 잘 시킨 어머니 하면 나는 맹모보다 한석봉 어머니를 더 높이 평가한다.
한석봉 이야기를 모를 한국인이야 없겠지만 다시 여기서 한 번 더 하자꾸나.
  공부를 잔뜩 하고 의기양양하게 집에 돌아 온 아들을 어머니는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어서 모자는 서로를 테스트한다. 어머니는 떡을
썰고 아들은 붓으로 글을 쓰고. 진짜 실력을 보기 위해 불을 끈다. 얼마 후에 불을
켜 보니 어머니의 떡은 하나같이 고른데 아들의 글은 들쭉날쭉 하기가 떡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아들은 아무 말 없이 그 길로 올라가 다시 글쓰기 공부에
전념한다.
  여기에서 나는 새 시대 교육에서 뺄 수 없는 '평가'의 원칙을 발견한다. 이를 세
가지로 압축하자면 공정성, 모범성, 그리고 질적 평가이다.
  첫째, 공정성을 놓고 보자. 한석봉과 어머니는 서로 붓글씨를 써서 비교하지
않았다. 하나의 잣대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석봉이 붓글씨를 쓴 것과
어머니가 떡을 썬 것은 전혀 별개인 것 같으면서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어린이,
노인, 조선 시대 사람, 현대인, 한국인, 외국인 모두가 수긍할 만한 평가 방법이다.
추사 김정희 체에 잣대를 두었다면 애초부터 떡 썰기와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요,
떡 장수에게 보였더라도 마찬가지로 심사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석봉 어머니의 평가는 마음의 평가요 정신의 평가였기 때문에 두루 보편을 갖춘
것이고 그래서 누가 들어도, "그래, 아들이 좀더 노력해야겠군." 하는데 동의하게
된다.
  둘째로 한석봉 어머니의 평가는 평가받는 사람이 군소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데 그 힘이 있다. 잔소리나 설교가 필요 없었다. 스스로 더 공부해야겠구나
하고 깨닫고 그 길로 한양에 올라간다. 이런 힘은 평가자가 행동으로 모범을 보일
때에 나온다. 어머니가 낮잠 자다 일어나서 숙제했냐고, 공부했냐고 다그치고
몰아세운다면 아이에게 스스로 노력하려는 마음이 생길 리 만무하다. 반발심이나
잔뜩 들고 매 맞기 싫어 눈가림하는 타성만 붙을 것이다.
  셋째로 한석봉 어머니의 기준은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현대에도 아주 적합한 평가 방법이 되겠다. 한석봉 어머니는 시간을 재가면서 누가
많이 빠른가를 겨루지 않았다. 고른 모양, 즉 눈감고 할 수 있는 숙달된 경지를
비교한 것이다. 요즘 어머니들은 옆집 아무개는 몇 점 맞고 누구는 몇 등 했는데
하는 양적 개념으로 자녀의 능력과 노력을 평가해 버리기 쉬운데 그보다는 "네가
최선을 다 했느냐?", "어떻게 하면 스스로 부끄럽지 않고 떳떳할 수 있겠느냐?"하는
질적인 기준으로 바뀌어야 할 줄 안다.
    진이 엄마에게 해주고 싶은 말

  나의 조카 진이는 지금 고등학교 1 학년인데 만화 그리기를 무척 좋아한다.
진이는 생후 10개월부터 책을 읽고 두 살 때 천자문을 읽었다. 한글도 금방 배워서
유치원 다닐 때 웬만한 위인전과 명작 전집, 백과 사전을 다 섭렵했다. 초등학교생이
되고 나서는 제 엄마가 보는 소설도 한두 시간에 휙 다 읽고 평할 정도였다.
  초등 학생 때는 학교 공부가 너무 쉬워서 별 노력 없이도 일등만 하더니 중학생이
되면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고집하느라 학교 성적은 점점 뒷전이다. 그 대신
만화에 '미쳐서' 스스로 만화 동호인을 모집하고 잡지도 만드는데 어른인 내가 봐도
흥미진진하고 수준도 높다.
  자, 이런 소질을 가진 아이에게 시험 공부해라, 수학 과외 해라하여 남들과 똑같은
코스만 따라가라고 한다면 과연 그게 잘하는 일일까? 그 머리로는 대충만 하더라도
공부 잘하는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뿜어져 나올 에너지와 상상력은 아직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마치 E.T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스필버그가 어떤 상상력을 가졌는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 했던
것처럼.
  스필버그의 부모는 돌 지난 아기 스필버그가 카메라만 보면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두 살 때 생일 선물로 소형 카메라를 사 줬다고 한다. 그랬더니 네댓 살
때인가는 궤도 위를 달리는 장난감 기차를 설치해 놓고 그 기차를 위에서도 찍고,
뒷모습도 찍고 바닥에 누워서도 찍더라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몰래 MGM
스튜디오에 가느라 결석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나는 진이 엄마를 볼 적마다 진이가 훌륭한 만화가로 컸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물론 어릴 때의 재능만 믿고 공부를 뒷전으로 미루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는 나도
알고 있다. "아이들이 부모가 관찰한 대로 자라주기만 한다면 세상에는 천재만 있을
거다."라면서 자신이 자녀를 과대 평가하는 부모의 '허풍'을 신랄하게 비꼰 괴테의
말도 기억한다. 진이가 어릴 때 만화에 소질을 보였다고 해서 커서도 성공하겠다고
누가 장담하랴. 그러나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진이를 격려해 주지 않고 발전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결코 훌륭한 만화가로 성공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진이 엄마와 친한 세일이 엄마가 있다 세일이는 성악가의 재능이 있어 지금
이태리 유학 중이다. 과연 앞으로 세계 최고의 테너가 될 것인가는 어느 누구도
내다보지 못하지만 어쨌든 그 꿈을 향해서 온갖 열성을 다 바치는 한국의 성악도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흐뭇하게 해준다.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는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닐 것이다. 재능을 존중해 주고 타고난 능력에 걸맞은 꿈을 지니게
해준 영주의 엄마가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 나라에 진이 같은 아이들이 아주 많다. 저자인 최 교수는
지난 12월에 우연한 계기로 서교 초등학교 수영반 학부모들에게 〈21세기 자녀
교육법〉이라는 주제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만난
부모들의 진지함과 열성에 큰 감동을 받았다. 특히 엄마 아빠가 함께 참여하고
공동체 의식을 나누며 자녀들을 지도하는 모습에서 우리 나라가 IMF를 빨리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을 본 것 같다고 했다.
  너도나도 하는 과외를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시키지 말자. 과외를 하더라도
다양하게 하자. 아직까지 진이 엄마는 진이를 과외 지옥으로 몰아 넣지는 않았다.
만일 만화 과외가 생긴다면 그 과외비는 내가 대줄 것을 약속한다.
    아버지는 아부지여선 안 된다.

  지금까지는 어머니 이야기만 잔뜩 나와서 아버지들이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아버지가 자녀들의 창교육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것을 하나만 말하자. 사실
한국에는 자녀 교육에 있어서 아버지의 존재가 희미하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음으로
양으로 큰 영향을 발휘하기는 하겠지만 역시 꼭 꼬집어 말하라 하면 잡히는 게 별로
없다. 나는 우리 아버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많이 받았다. 그 중에서도 내 언어
감각에 대해서는 우리 아버지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내과 전문의시던 우리 아버지는 평생 동안 책을 한권 쓰셨는데 그 책은 의학
서적이 아니고 엉뚱하게 한시집이다. 평소에 한자 뜻풀이 하기를 좋아하셔서 내
이름도 귀조완벽이라는 고사에서 따왔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하시는
바람에 한자와의 만남은 어릴 적 서당에서 배운 한자가 고작이다. 그러다가
자메이카에서 화교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이때 중국어의 중요성을 느끼시고는
나와 둘이서 같이 배우기도 하셨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아버지는 한시를 짓기
시작하셨다.
  나는 영어 배우는 것조차 힘들어 죽겠는데 일단 자메이카에 왔으니 그 나라의 제
2외국어인 스페인어를 배워야 했고 또 카톨릭 학교에 다니는 바람에 신부들이
쓸데없이 가르치는 라틴어까지 배워야 했던 '불쌍한' 처지였다. 그러니 중국어
배우기를 제대로 했을 리가 없다.(물론 지금에 와서는 차라리 스페인어와 라틴어를
건성으로 하고 중국어나 확실히 배워 둘 것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몇
자밖에 아는 건 없어도 한자의 매력을 남달리 느끼고는 있다.
  한자의 매력뿐만이 아니다. 펀(동음이의어, pun)이라고 하는 음운으로
말장난치기를 좋아하는 버릇도 우리 아버지의 영향이다. 한 번은 아버지께서
'아버지'란 단어의 유래를 설명하는 글을 신문에 실은 적이 있었다. 그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경상도에서는 아버지를 가리켜 흔히 아부지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아이한테 그 아이의 아버지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이 너이 부(아비 부)냐?" 학
물으면 아이는 "아부지!"라고 답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아부지(나 아,아닐 부,알
지) "나는 모릅니다."라는 뜻이다. 이 글을 투고하고 나신 후에 아버지의 존재와
한글을 모독했다는 항의 전화로 아버진 한바탕 곤욕을 치르셨다.
  요즘 아버지들은 자녀의 교육에 얼마큼 신경을 쓰고 있는가? 집안의 가장으로
무게 잡는 아버지 모습은 장유유서의 위계질서가 중요했던 봉건 시대에 걸맞다.
용돈을 쥐어 주고 장난감 사 들고 들어오는 자상한 아버지는 재력과 물질 중심인
산업 시대의 아버지다. 물론 아버지는 집안에 가장으로 무게도 잡고 자녀에게
든든한 경제적 후원자 역할도 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보 시대의 아버지는 자녀의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알고 무엇이
나오는지 또한 알아야 한다. 한국의 아버지들에게 자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스스로 "아부지!" 하지 말자.
     미스터 맘의 한 마디 "너라면 해낼 수 있다"

  한국에서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면 흔히 집안에서 요리, 설거지, 청소하고
어린아이를 돌보는 미국 남자의 모습이 나온다. "아, 미스터 맘, 멋쟁이 남자!"
하면서 국제 결혼을 꿈꾸는 한국 여자가 있으리라. 그러나 미국의 텔레비전이나
영화 속에는 하루 종일 집안 일을 하다가 남자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맛있는
음식을 입에 떠 넣어 주고 식후 마사지까지 주는 동양 여성이 묘사되어 나온다.
"아! 천사여!" 하면서 국제 결혼을 꿈꾸는 미국 남자도 있으리라.
  미스터 맘(Mom, 엄마). 집안 일을 돌보는 남자를 일컫는 말이다. 미국에서도
남자가 아이의 양육을 전적으로 맡는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집안 일을
예전보다는 훨씬 많이 거든다. 이유는 미국 남자가 '멋'있기 때문이 아니라 별
도리가 없어서다. 미국에서는 이혼과 미혼모의 급증 때문에 미국 아이들이 절반
정도가 엄마나 아버지 둘 중 한 쪽하고만 같이 살고 있다. 거기다 여성 해방으로
인해 일터로 향한 엄마가 많아져 엄마 대신 아버지가 집에서 애를 보는 경우도
많다.
  나도 몇 개월 동안 미스터 맘 노릇을 한 적이 있다. 친구한테 "집에 가서 애나
봐라."라고 악담하던 때가 언젠데 세상이 한참 달라지고 있음을 한 번 더 느끼게
된다. 남에게 별로 권하고 싶지 않고 나 역시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는 정도로 내 소감을 끝내고 싶은데 〈인간 발달학〉을 전공한 저자 최
교수의 말을 듣다 보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최 교수는 마가렛 대처, 힐러리 클린턴, 탤런트 김수미, 작가 박완서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여자라는 점 빼고). 출생지가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나이와
생김새도 다르니 쉽게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네 여성들뿐 아니라
동서를 막론하고 뛰어난 업적을 이룬 수많은 여성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유달리 많이 받았다는 점이라고 한다.(박완서 씨의
경우는 할아버지의 영향)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아버지의 한 마디, "너라면 해낼 수 있다."라는 말에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았다는 〈인간 성공〉의 이야기가 아주 많다. 대개 이런
여성들은 유명할 뿐 아니라 끈질기고 당차고 직업 생명력도 강하다. 잠깐 피었다
지고 마는 온실의 화초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난가을 최 교수는 심리학 쪽의 국제 회의에 다녀왔는데 〈딸에 대한 아버지의
영향〉이라는 주제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동서고금을 통해 그런 사례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아들과 딸의 차별이 심한 나라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은 큰 효력이 있다는 점이다. 남녀 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
파키스탄에서 온 여성 지도자는 자신은 오빠와 남동생보다 아버지의 총애를 더
받았는데 힘든 시험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격려가 떠올랐다고 한다.
  물론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도 필요하다. 그런데 왜 꼭 딸이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클까? 최 교수 얘기는 이러하다. 엄마는 자녀가 정서적으로
안정감 있게 자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서란 안정감은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 노는 것 같은 기본 욕구가 우선 충족되어야 생긴다. 그리고 집안이 화목할
때 정서가 안정된다는 것은 수천 년에 걸쳐 증명된 이치다. 이렇게 어머니가 바탕을
마련한 위에 아버지는 사회적 눈높이를 키워 준다. 아버지는 꿈을 높게, 멀리, 크게
해준다. 공중 곡예로 친다면 밑에 안전 그물망을 쳐 주는 것은 어머니이고 하늘로
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버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대개 신경증 환자들 중에는
이 역할이 뒤바뀐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많다. '치맛바람' 엄마들이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사람에 대한 학설은 원래 신봉할 것이 못 된다 하지만 자녀를 키우는 데 어머니,
아버지가 밥과 반찬 역할, 바늘과 실 역할, 숟가락과 젓가락 역할을 골고루 해야 잘
성장하리라는 평범한 상식과 통하는 얘기인 듯하다.
  요즘 사회 활동하는 어머니들이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자녀가 어머니를
통해서도 사회적 꿈을 키우고 본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안전망이 쳐져 있지
않아 정서가 불안한 자녀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걱정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 다
합당한 예측이고 고려해 볼 가치가 있는 걱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도
자녀 키우기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만일 내 딸이 커서 훌륭한 사회 여성이 되면 한때 네게는 미스터 맘이
있었노라고 상기시켜 주려고 한다.
    주객이 바뀐다.
    (소비자 만족이 최우선)

  나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제너럴 모터스(GM) 본사를 자주 방문하는 편이다. 연구
프로젝트 때문에 엔지니어들과 만나기도 하고, 원격 강의 덕택에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하는 일반 사원들과도 만난다. 그래서 지난 10 년 사이 GM회사가 상당히 많이
변했고 계속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 해 오고 있다. 그 많은
변화 중에서도 품질에 대한 개념의 변화가 제일 인상적이었다.
  엔지니어 입장에서 어떤 생산품을 놓고 우수 품질이라고 평가할 때 그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생산되어 나온 물건들이 생산자의 의도(설계도)에
얼마나 정확하게 따라 줬는가를 뜻했다. 한 기계가 뽑아 내는 물건들이 완벽한
복사품이어야 하는데 기술 부족이나 공장 직원의 부주위로 들쑥날쑥하면 안 되지
않는가. 어느 정도의 오차는 눈감아 줄 수 있지만 그 정도가 심한 불량품은 폐기
처분해야 한다. 그래서 대량 생산되어 나오는 물건들 사이의 오차를 줄여 회사의
손실을 막는 것이 품질 관리자의 주목적이었다.
  지금은 품질의 개념이 달라져도 보통 달라지지 않았다. 자동차 회사인 제너럴
모터스 회사에서는 품질의 정의를 '소비자가 만족하는 것'이라고 내린다. 생산품이
아무리 비싼 재료와 첨단기술로 만들어졌다 해도 소비자가 만족하지 않으면
고품질이 아니란 말이다. 사실 생산자의 의도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물건이
만들어져 나와 전연 손실이 없다 하더라도 소비자가 외면하면 엄청난 손해를
입는다. 품질의 판단 기준은 더 이상 생산자의 의도가 아니고 이제는 소비자의
'의도'가 되었다.
  품질의 개념이 변하는 이유가 있다. 발에 치이는 것이 돌멩이뿐이었던 시절에는
생산자가 물건을 싸게, 많이만 만들어 내면 소비자가 다 사 갔다. 불량품만 아니라면
소비자는 만족해했다. 그러나 발에 치이는 게 물건인 요즘 세상에는 물건이 싸다
해서 사지 않는다. 불량품이 아닌데도 마음에 안 들면 불평한다. 그리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 늘어나면 '카드라' 통신을 타고 삽시간에 전국으로 소문이 퍼져서
물건은 안 팔리게 된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플 때는 눈에 보이는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었다. 그러나
배가 조금 부르면 입맛이 까다로워지고 맛에 대해 한두 마디 평하게 된다. 조금
싱겁다느니, 정말 싱싱하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이게 다 '순리'이니, '카드라'통신에서
들은대로 상표 보고 물건 사는 사람 우습게 보지 말고, 음식 평하는 사람 너무
나무라지 말자.
  GM이 일부러 많은 돈을 들여 가면서 교수를 회사로 모셔 와서 재교육받는 학생
사원들을 만나게 해주는 이유는 바로 이 교육의 품질을 높이자는 의도다. 강의
내용과 질문^5,23^응답은 전화, 팩스, 인터넷 등으로 충분히 전달된다. 그러나 서로
얼굴을 맞대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임을 확인하고 서로의 존재를 의식할 때
비로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비스도 첨단 기술이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컴퓨터를 한 대 구입한 적이 있다. 마침 한국의 어느
회사에서도 PC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이왕이면 국산품을 사기로 했다. 다른 회사
컴퓨터보다 성능도 좋고, 값도 싸고, 그리고 국산품 애호가라는 뿌듯함에 기분도
좋고 일거 삼득이 아니냐.
  그러나 집에 와서 컴퓨터를 설치하려고 제품 설명서를 읽어 보니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명색이 공대 교수로 컴퓨터를 처음 대하는 사람도 아닌데도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컴퓨터를 만든 사람은 알고
썼겠지만 그것이 설명서를 읽는 소비자의 관점에서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움을 받으러 지점에 전화를 걸었는데 잠깐 기다려라, 누구를 바꿔 주겠다. 내일
연락해 주겠다 등 사람을 뺑뺑 돌리는데 도움은커녕 오히려 잔뜩 신경만 더
곤두서게 되었다. 한 마디로 서비스가 빵점이었다.
  소비자에 대한 배려가 이렇게 형편없으니 다른 동료들에게 그 물건을 권할 수가
있는가. 뿐만 아니라 그 후로 그 컴퓨터는 다시는 안 사게 되었다. 역시 얼마 후에
그 회사는 문을 닫았다. 다른 컴퓨터 회사와의 경쟁에서 고개를 숙인 것이다.
  경쟁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저임금, 서비스, 고기술 경쟁들이다. 앞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한국은 이제 임금 경쟁을 치를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 그러면 남은
경쟁 방법은 기술 경쟁과 서비스 경쟁이다.
  기술 경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창의력을
말살하는 한국의 교육이 기술 경쟁력을 못 받쳐 주고 있다. 첨단 기술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첨단 기술은 창의력이라는 기본 조건이 있을 때 가능하다.
  임금은 중국, 동남아보다 높고, 기술은 일본이나 미국, 독일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 서비스 경쟁이라도 해야 하는데, 한국에는 아직 '서비스'라는 개념을
구시대적인 사고 범주에 놓고 있는 건 아닌지? 서비스라고 하면 손님에게 차 한 잔
가져다 주는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니 말이다.
  서비스도 기술을 요구한다. 서비스는 소비자나 고객의 필요성과 선호도를 정확히
예측하고 파악하는 정보 기술이요, 소비성향을 정확히 분석하는 과학이다.
  슈퍼마켓의 예를 들어 보자.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개념이 없던 구식
슈퍼마켓에서는 상품을 종류별로 진열한다. 야채를 살 고객은 야채 진열대 가고
소스는 소스 진열대로 가야 한다. 그러나 새 시대 슈퍼마켓은 고객들이 사 가는
물건이 바코드에 적힌 정보를 광기술로 입력하고 컴퓨터로 통계 처리한 후 전문가가
분석하여 고객의 선호도를 가려낸다. 그래서 고객이 야채를 살 때 가장 많이 찾는
소스는 야채 바로 옆에다 진열해 놓는다. 고객이 일일이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다.
기술, 정보를 활용하여 소비자의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해 주려는 서비스인 것이다.
  기술 경쟁과 서비스 경쟁은 정보의 차원에서 판가름 난다. 여기서 정보라 함은
'알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스스로 개발한 창조적 앎을 뜻한다. 남이
만들어 놓은 정보를 찾아서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나아가서 남이 아직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것을 찾아보는 것도 '정보 생산'작업이다. 남이 생각해 보지 않은 것,
혹은 남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바로 창조적 앎이다.
    교수도 학생의 고객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줄거리가 대략 비슷하다. 제멋대로 하는 성주
밑에서 배고파하는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연합군이 쳐들어 온다. 성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안하무인이었던 성주의 콧대를 꺾어 버린다. 반란을 예상치 못한 성주가
어리둥절하는 사이, 백성들이 성의 주인이 되고 성주는 거꾸로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이다.
  감상 취향이 덜 세련되어서인지 이런 영화를 보면 나는 감격한 나머지 콧물까지
흘린다. 취향이 다른 게 아니라 나의 지적 발달이 의심스럽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어쨌든, 진리가 언제나 승리하는 3류 영화가 나는 매우 만족스럽다. 그러나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어쩌면 이렇게도 영화와 같은가. 불행스럽게도 진실한
백성도 아니고 정의의 연합군도 아니다. 내가 바로 못된 성주가 되어 있으니
난처하기 짝이 없다. 단지 교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폭군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미국 대학들은 현재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고 있다. 학자들의 고귀한
상아탑이 집중 공격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연합군은 정부 관리와
기업인들이고 그들은 사회와 학생들을 구원하고자 합세하여 상아탑의 성주인 교수를
몰아 부치고 있다. 이례적인 일이라 교수들은 어리둥절해 할 따름이다.
  시대가 변하는 속도를 대학이 따라 주지 못해 수혜자들의 교육 만족도가 땅에
떨어져 있고, 대학 졸업자 중에는 '불량품'이 많다는 이유다. 그런데도 교수들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 도통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니 정부 관리와 기업인이
참견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거 원 '족집게' 아닌가. 아무리
교수가 제멋대로 하는 인간이라 하지만 아직 양심은 남아 있다. 아픈 곳을 확실히
찔렸기 때문에 당황스러울 뿐이다.
  '품질은 소비자 만족'이며 '소비자 만족은 서비스'라는 비즈니스 개념이 이젠
서서히 교육에까지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재학 중인 학생은 대학의 고객이고,
등록금 대 주는 부모도 고객이고, 졸업반생들을 받아 가는 기업도 대학의
고객이라는 것이다 대학에 손님이 이렇게 많았을 줄이야. 사실 차라리 학생들이
손님이라면 좋겠다. 얌전한 손님은 주인이 주는 음식이 맛없어도 고맙게 먹는
척이라도 하지만, 맛없는 음식을 맛없다 하는 고객은 고약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학생들이 툭 하면 자기네들이 고객이네 하면서 대학보고 이래라저래라하는
기사들을 학생 신문에서 자주 접한 적이 있다. 소비자 만족 시대에 "고객이 왕"이란
말이 통하듯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직성에 풀리는 모양이다. 교수님
강의에 열의가 없다든지 실험실에 기자재가 나쁘다든지 해서 발전과 개선에 관한
요구를 할 권리는 학생들에게도 충분하다. 오히려 권리뿐만 아니라 요구할 의무까지
있다고 나는 역설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교의 철학이나 교육 방향이나 특성을
바꾸라고까지 하는 요구는 앞뒤가 맞지 않다. 아무리 어린 손님이라도 맥도날드에
가서 김치 안 준다고 떼쓰는 경우는 없다.
  학생들이 하도 고객 고객 해서 한 번은 학생 신문에다 이렇게 투고했다. "수업
시간에 학생이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공부해 오고 시험을 잘 쳐서 기뻐할 때 나는
행복을 느낀다. 반대로 학생이 의욕도 없고 공부도 안 하고 점수가 안 나와
시무룩할 때면 나는 하루 종일 우울하다. 나의 만족감은 학생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 학생들만 고객이 아니다. 나도 고객이다! 나는 학생 여러분의
고객이다."라고.
    직업 없는 직장인의 비애

  한국에 있을 때는 여러 전문 분야의 특강과 세미나를 하게 된다. 언젠가는 미국
대학원에 제출하려고 작성한 입학 원서를 고쳐 달라는 학생들이 대부분 'A'와
'The'를 혼동하기에, 내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A와 The를 구별해 쓰는 법'이라는
영어 세미나를 한 번 열어 보았다. 그 날 세미나실은 청중들로 꽉 들어찼다. 앉을
자리는 물론이고 뒤에 서서 들을 자리마저 없었다. 서울대 공대 세미나 사상 최대의
청중이 모인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나도 놀랐고, 그 자리에 온 교수와
학생들도 놀랐다.
  이 사건으로 하여 나는 우리 대학생들이 얼마나 영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본 것 같았다. 물론 서울 공대 대학원생들의 경우에는 영어로 논문을 써내야
하기 때문에 영어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지대하지만, 꼭 영어로 논문을 쓰지 않아도
되는 대다수 학생들의 경우에는 대기업 취직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전공
분야보다 취업에 더 급한 나머지 강의실에서도 전공책 안에 영어책을 펴 놓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때서야 실감이 났다.
  물론 영어를 열심히 배우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사실, 영어를 배우는 것은 좋다
싫다의 차원에서 논할 문제가 아니다. 영어는 새 시대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가
아닌가. 세계 문서의 80%가 영어로 작성되어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고 특히
컴퓨터 세계에 들어가면 영어로 주고 받는 정보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미 영어는
외국어의 개념이 아니라, 수학과 같은 세계 공용어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나마 전공책 안에 만화책을 펴 놓지 않은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본다 전공은 젖혀두고 취직시험에
필수인 영어를 우선적으로 공부하는 대학생들은 직업 의식이 없는 것이다. 직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대학 다니는 것과 직업에의 포부를 품고 공부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직장을 얻는다는 것은 의식주 해결이 주목적이다. 그러나 직업은 무엇인가를   
맡아(직) 이룬다(업)는 뜻이다. 언뜻 들으면 그게 그것같이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직장은 남이 시키는 일을 하고 돈 받는 곳이라 한다면 직업은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찾아 하는 것이다. 거기엔 당연히 책임 의식이 있어야 한다. 직업은 돈보다
자아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람의 행복과 만족감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는데
직장은 기본 단계인 의식주 해결을, 직업은 최고 단계인 자아 실현을 지향한다.
  자아 실현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말했으니 직업 없는 직장인의 고달픔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구시대에는 한 직장에 취직하면 대개 그곳에서 잔뼈를 굳히고 평생 머물기를
선호했다. 이리저리 직장을 바꾸는 사람은 성공 못할 사람, 인정 못 받는 사람, 문제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요즘은 어떤가? 1998 년 초 통계를 보니 현재 미국 노동
인력들은 평균 4 년에 한 번 꼴로 직장을 바꾼다고 한다. 한국도 이런 시대가 올
것이다. 지금의 명퇴니 조퇴니 하는 것은 오히려 배부를 때의 이야기다. 앞으로
오고 있는 세상은 퇴직이란 단어가 30 대 사람들한테 적용되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될 그런 세상이다.
  미국에서는 성공하는 사람일수록 한 직장에 몇십 년씩 머물지 않는다. 다른
회사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해 가거나 스스로 더 새로운 것을 경험해
보려고 다른 직장으로 간다. 여러 곳에서 인정받을수록 기회는 더 많아지고, 그래서
한 직장에서 오래 있는 사람을 두고 다른 데 갈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짐작한다. 좀
과장되긴 했겠지만 미국의 보스는 제일 미운 사람에게 가장 공들여 추천서를 써
준다고 한다. 제발 다른 데로 가 주십시오 하는 뜻에서다.
  이렇게 직장을 바꾸어 가며 살려면 뚜렷한 직업 의식이 있어야 한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든 "이 일은 나만이 할 수 있는 내 일이다."라는 마음가짐과 노력을
들여야 살아 남는다. 우리처럼 단지 취직을 위해 학원이다, 영어 공부다 하는 것은
자부심 있는 직업 의식을 키우지 못한다. 일거리 달라고 평생 이 직장, 저 직장
문전에서 구걸하며 산다면 너무 고달픈 일이 아닌가?
  학생들은 무얼 배우고 싶은지를 모른다. 그저 시간 때우며 학점을 벌 뿐이다.
그러니 영어라도 배워 취직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교육은
학생들에게 교육 목적 의식을 심어 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성 미인이 진짜 미인

  여름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해서 학비를 벌어 보겠다고 위스콘신에서 시카고로
'원정'갔던 적이 있다. 유학생 비자라서 정식 취직이 안 되었으므로 제일 만만한
품삯 노동 일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카고 중심가에서 무작정 북쪽을 향해
걸으면서 식당, 주유소, 가게의 문을 일일이 두들긴 적이 있다. 결국 시카고 북쪽의
경계를 넘어서 에반스톤이라는 접경 소도시까지 하루 종일 걸었고 마침내
다행스럽게 어느 부자 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돕게 되었다. 숙식도 해결되고 돈도
벌고, 보통 횡재가 아닌 것이다.
  나의 임무는 사지를 못 쓰는 불구 아이를 돌봐 주는 일이었다. 운동도 시키고
공부도 가르쳐 주고 샤워도 시켜 주는 일이다. 좋게 말하면 가정교사요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몸종' 노릇 하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똥 닦아 주는 일까지도 별 문제
삼지 않았는데 정작 괴로운 일이 하나 있었다. 일 주일에 한 번 그 아이를 재생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는 일이었다. 재생 병원에 가면 별의별 환자를 다 본다.
미라같이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은 화상 환자, 몸뚱이에 머리만 달랑 달려 있는 차
사고 환자, 달려 있긴 한데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키는 팔다리, 도무지 눈뜨고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아주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담이 약해 뱃속이 울렁거려 도무지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재생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원들은 어쩜 그리도 한결같이 웃으면서
환자들을 대하는가. 세상에 천사가 따로 없었다. 내가 돌보는 아이의 담당 간호원은
대학을 갓 졸업한 아리따운 아가씨였는데 특별히 더 환한 미소를 머금고 일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간호원한테 수작도 걸어 볼 겸 해서 말을 걸었다. "나는 단
일 분이라도 빨리 떠나고 싶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곳인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잘
참고 견디죠?" 간호원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여기서 웃을 수 있는 비결은 일
끝나고 집에 가서 한바탕 우는 거에요."
  이것이 직업 정신이다. 직업 정신이 없는 사람이 이런 병원에서 매일같이 일해야
한다면 정신병자가 되고 말리라. 학력을 갖춘다는 것은 지식을 아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학력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것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해낼 만한 지성을 쌓는 것이다. 학력을 갖춘 그 미모의 간호원은
지성적 미인인 것이다.
  요즘 어린이들은 지성미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디즈니 만화로 더 유명해진
〈미녀와 야수〉를 통해 배우지만 나는 어릴 적에 실제 '야수'를 만나 본 적이 있다.
우연히 알게 된 50 대 여자였는데 처녀일 당시엔 아주 인기있는 미인이었다고들
했다. 그런데 질투가 심한 약혼자가 얼굴에다 황산을 뿌렸다고 했다. 귀, 코는 녹아
없어졌고, 엉겨 붙은 눈꺼풀은 수술해서 조그만 눈구멍 하나가 뚫어져 있었다. 그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기까지 몇 개월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그 동안 나는 매번 그
여인을 초대해서 한 밥상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게 하는 부모님을 많이도
원망했다.
  세상의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은 그 여인은 그 외로움의 세월을 독서로 보냈는지
아는 것이 참 많았다. 여인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어느 순간엔가 나는 그 여인을
똑바로 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그 추악한 모습에
적응되었던 걸까. 아니면 환한 서광처럼 그 여인의 지성미가 추악함마저 감싸줬던
탓일까.
    내 직업, 내 직장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새 시대는 우선 직종의 수가 너무 많다. 1984 년 우리 나라 노동부 집계를 보면
노동부에 등록된 직종은 고작 1,200개에 불과 했다. 1992 년에는 그 열 배가 넘는
14,000개나 되는데 앞으로도 몇 십만 개로 늘어날 전망이다. 1994 년에 미국
노동청에서 조사한 바로는 미국에 등록된 직종은 120,715가지라고 한다. 이렇게
많은 가능성 가운데 평생 동안을 꼭 한 직업만 고집한다는 것은 오히려 미련해
보인다.
  도대체 무슨 직업을 염두에 두고 학력을 쌓아 가야 하나? 어느 직종이 전망이
좋을까? 대학 입학 무렵 잠깐 좋다 하더라도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이어질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변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더욱이 학생들이 입학할
때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신업종들이 졸업할 즈음에는 마구 쏟아져 나와 있을
것이다. 만약 누가 4 년 후의 직업 전망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당장 공부
집어치우고 점쟁이로 나가라고 권하겠다.
  하나의 직장을 가지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한 직업을 고집할 수도 없는 것은 과연
새 시대의 패러독스인가? 이것이 과연 변화무쌍한 다양화 시대의 문제일까?
  아니다. 이것은 직장과 직업을 염두에 두고 학력을 쌓았던 구시대 사고 방식을
대학 교육이 새 시대에 적용했기 때문에 빚어진 문제다. 새 시대에는 대학생
개개인이 스스로 자기가 일할 직종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2 년제 전문 대학과 4 년제 대학과의 차이가 쉽게 파악된다. 
 2 년제는 이미 있는 직장이나 곧 쓰여질 직종에 대비해서 학생을 가르치는
대학이다. 4 년제는 지금 당장보다는 앞으로 자기가 원하는 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저력과 안목을 키우는 곳이다. 2 년제가 단거리 선수를 준비하는 대학이라면 4
년제는 중거리, 대학원은 장거리를 뛰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2 년제와 4 년제 대학은 각각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 2 년제는 비교적 적은
투자로 확실한 것을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그 직종에 인력 과잉이 되거나
변화가 오면 다시 유망한 자격증을 얻어야 한다. 반면 4 년제는 전문 대학보다 두
배 이상의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당장 직장이 보장된다는 확실성은 없지만,
기초만 튼튼히 구축해 놓으면 몇이 모여 하고 싶은 일을 창업할 수도 있고 해 보다
안 되면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물론 현실적으로 자금난을 꼽을 수 있겠지만
요즘은 컴퓨터 한 대만으로도 집에서 사업할 수 있는 시대이다. 공장, 대지, 임대,
자본, 임금 등 구시대적인 발상은 접자.)
  요즘 4 년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이 직장 준비에 급급한 것을 보면 딱하다. 학생
개개인에게 직업 의식을 키워 주지 못하는 현재의 대학 교육이 안타깝다. 이런 고급
인력이 채 빛을 발하지 못한다면 곧 아이디어 경쟁에서 뒤지게 될 경제 또한
염려된다.
  창교육이란 학생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과정이다.

    학력 파괴는 안 된다.

  물론 대학이 직업만을 위해서 가는 곳은 아니다. 대학 교육의 목적은 크게 나눠
볼 때 취업 이외에 지적 체험이나 지적 인지 발달이 있다. 특히 지적 인지 발달은
소위 자유 교양 교육에 치중하는 리버럴 아트(liberal arts & sciences) 대학에서 첫
번째로 꼽는 목표다. 꼭 이렇다 할 직업 의식이 없어도 사회에 기여하는 능력인을
만드는 것이다. 대다수의 한국 대학생들이 직업 의식을 키우지 못했다면, 대신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인으로 성숙되어 대학을 졸업하는가?
  언젠가 '간 큰 학부모' 이야기를 들었다. 첫아이가 초등학교 일 학년에 입학할
때까지 읽고 쓰기를 전혀 가르쳐 주지 않고 놀고 싶은 대로 실컷 놀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입학한 지 일 주일도 못 되어서 선생님이 아이의 알림장에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단다. "이 아이는 한글을 쓸 줄 몰라 받아쓰기를 못하니 부모님께서 지도 좀
잘해 주십시오." 이 학부모는 분개해서, "집에서 공부 다 하고 학교 갈 거면 뭣하러
학교에 다니느냐?" 하고 따졌다가 '문제 부모'라는 딱지만 붙이게 됐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둘째 아이는 입학하기 전에 한글을 다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남들 하는
대로.
  이렇게 해서 배운 받아쓰기 능력은 대학에 와서도 긴요하게 쓰인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교수가 불러 주는 대로, 칠판에 적는 대로 노트에 받아쓰면서도
불평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오래 가르치던 교수 한 분은 한국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어 칠판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아무것도 불러 주지 않고
'생각하는 능력'과 '관점을 키우는 토론' 위주로 수업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반
학기쯤 지나니까 학생들이 우리는 언제부터 공부할 거냐고, 시험 공부는 무얼 해야
하느냐고 불안해하더라고 한다. 받아 쓴게 없으니까 공부한 것도 없는 줄 알더라는
말이다.
  하버드 대학의 교육학 교수 페리(Perry)는 대학생들의 인지 발달 단계를 9 단계로
구분하였는데 정답을 추구하는 단계를 제일 초보적인 일 단계로 보고 있다. 조금
발달한 단계의 학생에게는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 보는 능력이 있고, 그 다음은
상대적 가치를 따져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를 가늠하는 단계다. 판단해서 결정을
내리고 그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 단계에 도달했을 때가 고도의 단계다.
  졸업할 때까지도 여전히 정답이 하나뿐인 문제를 풀다 나간다면 한국 대학생들의
인지 발달도는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이다. 사지 선다형이나 단답형 시험만을 치르게
하는 교수들 스스로가 학생들의 인지 발달 수준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리포트 내주고 조교를 시켜 채점하는 교수는 더 악랄하다. 그러나
교수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교육 행정가들도 검토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 한국 대학 교육은 무엇이 목적인가? 직업도 아니요, 지적 인지 발달 중심도
아니다. 그러니 현재 우리 대학에서 하고 있는 대학 교육은 장식품 얻기,
겉포장하기에 불과하다. 학력(배울 학, 힘 력)은 갖추기 못한 채로 학력(배울 학,
지낼 력.=졸업장) 하나 받고 졸업한다. 새 시대에는 가상 학교가 존재한다. 그러나
가치 없는 졸업장을 찍어 내는 학교를 일컬어 가상 학교라 하는 것이 아니다.
  새 시대에는 교육을 인식하는 사고 방식부터 바꾸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공부를 마치고 졸업하면 학위를 '딴다' 한다. 열심히 공들여 키운 과일 나무의
결과인 과일을 따는 시각적 비유를 뜻하기 때문에 나는 이 말을 무척 싫어한다.
공들여 키운 과일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완전 도로아미타불이다.
  학력(배울 학, 지낼 력)이 중요했던 구시대에는 대학교에 다니고 나서도 학위를 못
따면 대학에 다니지 않은 것과 똑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학력(배울 학, 힘 력)이
중요한 새 시대의 관점에서 보는 학위는 단지 지식 소비 영수증에 불과하다. 그래서
대학 교육의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학위와 상관없이 필요한 지식을 얻고자
일반인들이 대학 문을 수시로 들락거린다. 청강도 가능하며 학과 소속도 필요 없다.
  요리의 값이 맛과 일치하지 않듯이 학력(배울 학, 지낼 력)이 학력(배울 학, 힘
력)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대학 졸업장이 취직을 보장해 주는 시대는 사라져 가고
있다. 앞으로 기업은 능력 위주로 사원을 뽑을 것이다. 전문대를 나왔던지, 대학을
나왔던지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뜻에서 창교육은 학력(배울 학, 지낼 력.=지식 소비력)을 파괴하고,
학력(배울 학, 힘 력=지식 생산력)을 증진시키는 데에 주력해야 한다.
    다가오는 절호의 찬스는 여대생이 몫

  아, 내가 잘못 말했다. 한국 대학 졸업장이 가치 없다는 말은 되물리겠다. 고졸
학력이 대학 입시 때 필수이듯이, 대학 졸업장은 입사할 때 그 가치를 최대로
발휘한다. 그리고 취업증은 결혼할 때 톡톡히 효과를 보이지 않는가. IMF 때문에
된서리를 맞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난 수십 년 동안 대학 졸업생들은 대기업을
선망했다. 그 주된 이유는 결혼 상대가 대기업 사원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사람의 가치를 판별할 때 신(몸 신),언(말씀 언),서(글 서),판(판단할
판)을 보았는데, 이제는 어느 학교를 다녔고, 어느 유망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가를
따지는 신원^5,23^사평(몸 신, 으뜸 원, 모일 사, 평론할 평)이 되었는가 보다. 이름
없는 회사에 다니면 그 사람도 덩달아 이름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취직해서 직장 생활하는 남학생들은 그렇다 치고 그럼 여학생들은 어떠한가?
언젠가 한 번 세미나 초청을 받아 한국의 어느 대학을 찾아갔다. 대학으로 향한
길은 급경사로 비탈진 언덕길이었다. 마침 대학 안까지 들어가는 마을 버스가
왔는데 상당히 많은 여대생들이 타기에 나도 따라 탔다. 나는 필시 언덕길을 한참
올라갈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불과 100 미터도 안 가서 버스가 서고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내리는 게 아닌가? 아니, 불과 100 미터를 걷기 싫어 차비 내고 버스를
탔단 말인가! 하도 어이가 없어 그 대학 교수한테 물어 봤다. 여대생들이 굽 높은
구두를 신었기 때문에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기 힘들어서 버스를 타는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정말, 세미나 끝나고 나갈 때 다시 유심히 보니 내려갈 때도 버스를
타지 않는가! 굽 높은 구두는 내리막 길이 더 힘들기도 할 것이다.
  치장에 신경 쓰는 여대생의 대학 교육 목적은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지적 경험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찌 여대생을 탓하랴.
  한국에도 공대에 여학생들이 점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 미국의 23%에
비교하면 적은 숫자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해 무시할 수 없는 숫자로 늘어 가고
있다. 어느 여자 대학에도 공대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여자 공학사가 한국의 회사
구조에서 어떻게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참 궁금했다.
  그러던 중 어느 산업 회사 중견 간부가 공대 교수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공학 좀 알고, 영어 할 줄 알고, 그리고 예쁜 학생 한 명 추천해 달라. 요는 공업체
비서로 쓰겠다는 말이다. 이런 사고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여학생들이 학력(배울
학, 힘 력)을 갖추기보다 학력(배울 학, 지낼 력)을 갖추어 시집가는 것이 상책일
테니 여학생만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공대에서도 여학생들의 성적이 우수하단다. 우수한 학력을 갖춘 대가로 취직이
되고 직업을 가져야 되는데, 그러나 남학생도 들어가기 힘든 대기업 직장마저
빼앗아 가면 남학생들은 어떡하라고! 그래서 공대 교수들도 골치 아프다 한다.
  대학 교육 체제와 산업 체제는 닭과 달걀 같은 관계다. 이제 구산업 체제가 정보
지식 산업 체제로 바뀌면 대기업 하나 대신 수 천 수 만 개의 소기업들이 생길
것이다. 분명 여자 공대생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될 것으로 믿는다. 여자도 벤처
기업을 못 차릴 하등의 이유가 없어진다. 실력만 갖추었다면 남성 중심 회사에서
보조원으로 일하는 것보다 뜻 맞는 동료 몇이서 동업하는 것이 훨씬 더 신날
것이다. 여대생들한테 절호의 찬스가 오고 있다.
    숨통을 틔어야 기가 통한다.

  나는 대학을 인체에다 비유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마치 내가 의사라도 되듯이
한국의 대학을 돌아다니며 이 대학은 허리가 약하다느니, 간이 부었다느니, 중풍
초기다 하며 진단도 하고 처방도 내린다. 아무 부담 없이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진실하게 말할 수 있다.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떠돌아 다니는 돌팔이
의사다."라는 욕밖에 더 듣겠느냐. 아웃사이더는 이래서 좋은 것이다. 대학교의
건강을 진단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미시간
공대에서 몇 가지 행정 일을 맡다 보니 대학을 보는 눈이 어느 정도 생긴 것 같다.
  전체 교수를 대상으로 특강을 할 때는 대강당에 들어서는 순간 대개 그 학교의
통치 스타일과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교수들이 옹기종기 뭉쳐 앉은 곳에는 파벌과
균열의 조짐이 보인다. 학교 당국에 잘 보인 교수들은 앞줄에 모여 있고 나머지들은
구석 쪽으로 모여 중앙부가 대머리처럼 훤히 비어 있다. 영양이 고루 분배되지 않은
것이다.
  앞줄은 다 비고 중간 이후부터 출구 쪽 가까이에 교수들이 앉아 있는 대학은
독재나 전제주의 스타일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특강을 하필 퇴근 시간 가까이나
연휴 앞 뒤 날로 해서 교수들이 학교에 있기 싫은 시간에 맞춘 것부터 맘에 안 드는
데 출석 체크까지 하니 할 수 없이 나온 것이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교수 노릇
하는 것도 따분한데 '교수법 특강'이라니 제목만 듣고도 거부감이 느껴질 것이다.
교수가 알아서 할 일을 감히 누가 와서 지껄인다는 말이냐?
  이런 대학들에 가서 특강하려면 다치 언덕길에 수레를 끌고 올라가는 것처럼 몇
배 힘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교수들이 아무데나 편히 고루 앉되 시간에
맞게 와 있어 주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강의할 때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고
화기애애하다. 서로 존중하는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개 그런 분위기였던 대학들이 우리 나라 우수 대학으로 선정된 대학들이었다. 큰
대학은 다양성 가운데 조화가 느껴지고, 작은 대학일 경우는 일심동체하는 단결력이
보인다.
  한국 대학을 진단해 보면 건강한 점도 많고 허약한 점도 있다. 일단 대부분의
대학들이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양가 푸짐한 음식을 잔뜩
떠 먹인다 하여도 치명적인 결점이 있으면 병을 다스릴 수 없듯이 한국 대학도
재정적 지원만으로는 부족하다. 좀더 자세한 진단은 점차 하기로 하고, 일단 마음
먹기에 달린 치유 방법 하나를 고려해 보자.
  환자가 한의사에게 가면 맥을 짚어 보고 안색을 살펴보고 하다 어디어디가 막혀
있어서 쇠하니 여기에 침을 놓아 시원하게 뚫어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해준다는 뜻이 되겠다. 내가 보기엔 한국 대학은 꽁꽁 묶여 있어
기가 꽉 막혀 있다. 우선적으로 숨통을 열어 줘야 하겠다.
  육체에는 기가 흘러야 건강하듯이 대학은 학생의 유통을 원활하게 해줘야
건강해진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모든 진로가 단 한 곳을 향하고 있다. 입시에
떨어지면 전문대로 탈락한다. 그리고 전문대 다니다가 4 년제 대학으로 옮겨 가기란
하늘에 별따기다. 한 대학에서 다른 대학으로의 전학은 물론이거니와 대학 안에서
타 과로 옮기는 것조차 불가능한 시절이 엊그제였다. 기계공과 졸업생이 의대나
법대 대학원으로 진학하기가 예사인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다른 공과
대학원으로 진학하기조차 보통 큰 모험이 아니다.
  이렇듯 한 번 내딛은 첫 발자국은 그 순간 마지막 발자국까지도 결정지어 버린다.
폐쇄 공포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라도 질식할 정도로 좁은 통로다. 기계 톱니같이
손발 맞추어 일하는 산업 시대는 훌륭한 근육질 체질을 선호하겠지만, 다양함과
유연성이 건강미인 정보화 시대에는 경직된 근육질 체질은 오히려 방해만 된다.
  숨통을 열어 주는 건 누구 맘 먹기인가? 누구는 교육부가 대학의 숨통을 꽉 쥐고
있다고 한다. 교육부가 그리 막강한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교육부에는 제일
무능한 공무원들이 모여 있다고 비꼬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지성인들의 아성인
대학의 멱살을 교육부가 그리 강하게 잡고 있단 말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교육부만을 탓하는 생각은 결국 책임 회피일 뿐이다.
  창교육은 대학 유통 개혁을 통해서 배움의 다양한 통로를 국민 모두에게 열어
줘야 한다. 시원시원하게 열린 대학이라야 대학의 기가 살아나는 것이다.
    삼성 의료원에서 배울 점

  삼성 의료원은 '서비스' 만점이라는 평을 듣는다. 몇 해 전에 우리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삼성 의료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다. 병원에 가보니 소문대로 정말
호텔같이 훤하고 깨끗하고 최첨단 시설을 갖추었다. 간호사들도 예의 바르고
다정했고 식당 종업원들도 부드럽고 친절했던 기억이 남는다. 나도 삼성 의료원이
맘에 들었다. 참 우수한 병원이라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무엇보다도 삼성 의료원의 '서비스'와 친절은 의사들의 태도에서 비롯된 듯 싶다.
의사가 자기의 의견을 낱낱이 환자한테 상세히 설명해 주기 때문이었다. 환자를
검진하고 묵묵히 주사나 한 대 찔러 주고 약 처방을 내리는 의사, 뭔가 물어 보면
귀찮다는 태도가 역력한 종래의 의사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의사의 친절은
'무엇을' 하는가 이외에 '왜'를 고객에게 알려 주는데 있지 않을까? 자기 몸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은 모든 이의 '권리'인데 삼성 의료원 의사들은 이 권리를 존중해 주고
있었다.
  의사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던 의학의 지식 영역이 정보 유통 개혁(정보화)으로
개방되는 바람에 아무라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일반인들을 위한 의학책은 또 얼마나
많이, 자세히, 보기에 편하게 나와 있나? 최신 의학 연구가 CD로 나오기도 하고
인터넷에 들어가면 별 희한한 정보가 다 있다.
  요즘 환자는 상당히 '세련'되어서 자기가 무슨 병을 앓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까지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인간을 기계 부품으로 보던 산업 시대는 환자를
'망가진 기계'같이 다루었다. 의사는 '기술자'처럼 무뚝뚝하고 무표정한데다 심지어는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아도 환자들은 감히 불평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 존중
시대인 새 시대 의사는 환자의 병만 고쳐 주는 게 아니라 치료 과정에서도 환자의
만족도를 채워 줘야 한다. 지금은 소비자 만족 시대가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 때문에 대학이 삼성 의료원같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학생을 대학의 고객(소비자)으로만 보는 관점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본받을 점이 있다고 본다.
  삼성 의료원의 매력은 지적 영역을 경직되게 구분하고 있지 않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귀에 문제가 생겨서 이비인후과를 찾아가도 혹시 심장이나 뇌혈관과 연관될
가능성이 있는가 하여 심장 전문의, 뇌 전문의들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받는다.
병과(병들 병, 과목 과) 사이나 전문의간에 아무런 알력과 체면 차림 없이 환자를
위해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데 모두 최선을 다하는 듯 보였다. 의사 중심이
아닌 환자 중심 체제에서의 환자들은 자기를 진심으로 보살피는 의사의 태도에서 꼭
낫겠다는 믿음이 생기고 덩달아 '기'가 살아나는 것이다.
  과연 대학에서는 학과 교수들과 행정 담당자들이 학생들의 발전을 최우선을 두고,
학과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교수의 체면은 뒷전으로 미루고 있는가? 학생들은
대학에 다니면서 자신들이 자아실현을 하리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는가? 그래서
그들의 '기'가 펄펄 나고 있는가?
  새 시대에는 정보 유통 혁신으로 지적 영역의 터 싸움을 청산한 삼성 의료원 같은
의사들이 환영받는다. 그러면 다른 병원의 의사들은 못나서 그런 대접을 못 받고
심지어 욕까지 얻어먹는가? 아니다. 내가 알기로는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새 시대적
감각과 철학을 실천하는 의료원을 고집했기 때문에 환자도 만족하고 의사도
대접받는다고 본다. 한국의 모든 병원에서도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다고 본다. 단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그렇듯이, 대학에서도 마음먹고 새
시대적 감각과 철학을 도입하면 온 국민에게서 환영받을 것이다.
  열린 대학을 추구하는 창교육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무의미한 터싸움은 이제 그만

  대학에서의 터싸움은 지적 영역을 고수하려 하기 때문에 시작된다. 이것은 지식을
소유 가능한 물품으로 인식하는 구시대 사고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새 시대의
지식은 공기와도 같다. 땅은 내 것 네 것이 분명하고 금을 그을 수 있다. 그러나
"이건 내가 들여마시는 공기야." 하고 공중에다 금 긋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얼마 전에 벌어진 양약사와 한약사 사이의 코피 터지는 대결은 터싸움이다. 약에
대한 정보는 공기와 같이 오만 군데 널려 있으니 약을 짓고 파는데 있어서는 양약사
자격증 소유자나 한약사 자격증 소유자나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학위증이
능력과 무관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한눈에 보여주는 좋은 예다. 터싸움은 정보 유통
개혁으로 인하여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문제다. 다만 정보 유통 개혁이 요구하는
지식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지 못하고 큰 투쟁으로 확산된 점이 아쉬울 뿐이다.
  학내에서는 대중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터싸움이 군데군데 진행 중이다.
여러 대학을 시끄럽게 만드는 학부제 운영도 그 한 예다. 학부제란 유사한 학과들의
통합을 말한다. 통합하면 무슨 이득이 있을까? 기계과, 정밀 기계과, 기계 설계과,
이렇게 세 과의 예를 들어 보자. 이 과들은 기계과 교수인 나마저도 그 차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유사하다. 그 결과 똑같은 기초 과목을 세 과에서 각자
가르치고 있다. 그런 과목이 한두 개가 아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과목이
많다. 통합을 하면 매년 세 번씩 개설했던 똑같거나 비슷한 과목을 이젠 한 번씩만
하면 된다. 효율적 운영이다.
  그뿐만 아니다. 비슷한 기초 과목을 중복하지 않은 대신 교수님의 첨단 연구
분야에 관계된 과목을 신설하고 또 여러 분야가 겹친 다학문적 연구와 강의를 할 수
있게 된다. 학과 통합의 결과, 다양한 학문을 추구할 기회가 활짝 열리는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드디어 자기가 선택할 직종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바탕이 생긴다.
  언뜻 들으면 통합과 다양화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새 시대에는 상반되는
개념이 공존하는 시대다. 이 시대를 두고 경쟁^5,23^협력하는 시대라 하지 않는가.
무엇을 경쟁하고 무엇을 협력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새 시대에 현명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듯이 상당히 애매한 사고가 지배한다. 획일적인 흑백 논리가 통하지 않는
시대이다.
  학부제를 도입하는 데 문제가 많다. 통합을 강요받은 학과들이 외형적으로만
통합하는 바람에 학과장과 학장 사이에 학부장이라는 감투 하나만 더 만드는 건
아닐까? 비대해진 학부 때문에 오히려 새 시대가 요구하는 순발력마저 잃게 될까
염려스럽다. 학문적 영역이 상대적으로 명료하게 구분되던 시대는 옛날 이야기다.
얼마 전만 해도 두어 개 학문이 겹쳐진 접학문적 분야나 여러 학문이 겹쳐진
다학문적인 분야가 중요하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예 학문의 영역을
초월했다하여 초학문적 연구를 해야 선구자라는 말을 듣는다.
  새 시대에는 국경이 큰 의미가 없다. 세계 곳곳에 한국 대기업의 공장이 없는
곳이 없고, 반대로 외국의 자본과 입김이 안 들어가 있는 한국 대기업은 또 없다.
세상의 대기업은 대부분 국경을 초월한 글로벌 회사다. 학문도 지적 영역을
초월해야만 생존하고 번창할 수 있다.
  학부제는 학문의 '기'를 살리고 학생들의 미래를 활짝 열어 주는 도구다. 열린
대학을 추구하는 창교육을 위해 진정한 학부제가 한국에 뿌리를 내려 초학문의
선구자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갈망한다.
    열린 교육은 선구자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버림받은 선구자 이야기를 하나 하자. 미국에 유학 가서 기계공학과 전기공학의
접경 학문인 메카트록닉스라는 최첨단 기술을 공부한 한국 공대생의 이야기다.
학부는 기계공학을 했지만 미국에 와 보니 그 분야의 선두는 전기공학과에서 다뤘기
때문에 그는 대학원 과정을 전기과에서 밟기로 하였다. 그리고 몇 년간 고생 끝에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한국에도 무척 필요한 최첨단 기술이라서 한국에
들어와 후배를 양성하겠다는 생각에 교수 자리를 찾으려고 보니 이게 웬 일인가.
기계공학과는 그이가 전기공학과 박사라 해서 퇴짜 놓고, 전기공학과는 기계공학과
학부 출신이라고 외면하더란다.
  지적 영역을 초월한 선구자를 외면하는 대학은 앞날이 어둡다. MIT가 왜
명문인가? 너무 세세하게 따질 필요없다. MIT 기계공학과에서 전기공학과 박사
두명을 교수로 모셔 온 사실 하나에 그 비결이 보인다. 세상 일을 미리 보는
선견지명이 MIT의 비법이 아니다. 그저 남보다 먼저 세상 흐름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예는 그밖에도 비일비재하다. 한국의 어느 대학 물리학과에서 교수를 뽑는데
지원자 중에 여자가 있었다 한다. 남자의 전유물 같았던 물리학을 여자가 해냈다면
그녀 역시 선구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과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결국, 선구자라는
이유로) 그 여박사의 원서를 옆으로 제쳐놓고 나머지 원서를 고려하였다 한다.
  이 두 가지 에피소드 다 숨통이 꽉 막힌 대학 체제가 대학인(학생, 교수 등)의
기를 꺾어 버린 예다. 거대해진 대학 체제는 그 나름대로 생명을 지니게 되고
학생이나 교수나 대학 본부의 행정인들까지도 어떻게 맘대로 다룰 수 없는 괴물이
된다. 대학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을 두고 어느 누구만을 탓 할 순 없다. 그러나
대학의 숨통을 열어 선구자들을 기꺼이 받아 주는 열린 대학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학인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함은 분명하다.
  나는 교육학 교수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을 사방 팔방 돌아다니면서 새 시대
대학은 이렇다, 새 시대 교육은 이렇다, 새 시대 교수는 이렇게 강의해야 한다 등의
주제로 많은 세미나를 해 왔다. 그 중 절반 정도는 공대 교수들이 대상이었지만
나머지는 인문 사회대 교수들도 참석하는 대학 전체 교수 세미나였다. 가끔
교육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들이 세미나가 끝나고 나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공대
교수가 교육학 세미나를 하시면 우린 뭘 먹고 살라구요!"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분들마저도 내가 남달리 하는 일을 고마워하고 격려해 주었다.
  비록 강가에서 말을 달리지는 않지만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한다는 면에서는 나도
선구자다. 그러나 선구자란 말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박사 학위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 힘들고 희귀한 시대에는 박사가 하늘같이 높아 보였다. 이승만
대통령마저도 이승만 박사로 불리고 싶어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는
발에 걸리는 게 박사이다 보니 박사도 별로 대수로운 존재가 못 된다.
  그렇듯이 혁신을 요구하는 시대에는 남이 안 하는 것을 하는 사람은 다 선구자다.
그리고 그런 선구자들이 득실대는 나라가 바로 선진국이다.
    교수는 지식 유통 업자가 아니다.

  학교의 기와 풍에 대해서 쓰다 보니 갑자기 '삼풍'이 기억 난다. 1995 년 8월
공대 학장들 모임에 초청 받아 '공학 교육의 문제와 해결 방안'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적이 있다. 그 당시 한국 대학들이 최대 관심 중 하나는 대학원 설립과 증진이었다.
나는 학부가 위태하니 대학원에 대한 욕구를 자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부실한
학부 4 년 위에다 대학원을 얹는 것은 4층짜리 삼풍 건물 위에 1층을 더 올리는
격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에서는 공학 박사 한 명 배출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박사 과정만 따져서
자그마치 25 만 불이다. 한국에서도 이 정도 예산으로 운영하는 공대가 두세 곳
있다. 그러나 나머지 70여 공대의 입장으로선 힘겨운 예산이다. 대학원 부실 공사가
눈에 훤히 보이는 일이다.
  교수의 과욕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교수는 욕심쟁이여야 하니까(지식에 대한
욕심!). 그러나 그렇다 해서 교수를 탓할 순 없다. 대학원의 증진은 앞으로 어차피
가야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기 상조다. 한국의 대학은 왜 그리 앞 뒤,
우선 순위를 가리지 않고 급히들 서두르는가. 신중해야 할 학자에게 걸맞지 않은
행동이다.
  대학원이 필요한 이유는 행정측에서 교수들에게 연구 실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연구 안 하는 교수에겐 봉급 덜 준다."라는 신문 기사처럼 한국의 교수는 연구에
대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심지어는 전문대 교수에게도 논문 실적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건 사람을 완전히 병신 만드는 어이없는 요구다.
  그래서 난 교육 개혁은 교육 행정 개혁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에서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한다. 한 가지 예만 들어 보자. 일반적으로 교수 하면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스승과 책에 파묻혀 연구하는 학자가 떠오른다(요즘에는 별의별
연상을 다 하게 하는 신문 기사도 있지만^5,5,5^). 교수가 둘 다를 잘하면 얼마나
좋으련만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나는 보이어의 '학자의 네 가지 역할' 이론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 대학을
방문하면 총장이나 처장한테 항상 그것을 권한다. 세계 교육학의 권위자였던
보이어는 교수의 능력과 업적을 평가할 때 교육, 연구 이렇게 두 가지만을 놓고
따지지 말고 최소한 네 종목으로 확장해서 보라고 말한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일, 지식을 응용하는 일, 그 지식을 통합하는 일, 그리고 지식을 이해시키는 일,
이렇게 네 가지다.
  보라. 이렇게 각자의 장기대로 평가가 이루어지면 교수님도 다양한 업적을
인정받으니 너도 살고 나도 살 수 있다. 뭔가 꽉 막혀 있던 것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지 않는가.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학자의 도를 지식에다 빗대어 새로 정립하지 않았는가.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지식을 단순 전달하는 일이 아닌, 지식을 이해시키는 일이라
한다. 교수는 이제 지식 유통 업자가 아닌 것이다.
    학생 중심의 교육을 실천하는 영남대

  1994 년도 가을, 교육부 국책 대학으로 선정된 영남대학교 공대가 '20세기를 위한
공학 교육'이라는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내게 세미나 하나를 부탁하였다. 쾌히
승낙하고 난 후 세미나 소개장을 받아 보니 여덟 명의 연사 중에 일곱은 장관, 차관,
총장들이고 나만 감투 없는 무명 인사였다. 당황한 나머지 영남대에 전화를 걸어서
무언가 잘못 알고 연사로 초청한 것 같으니 나를 빼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를 초청한 사람은 내 연설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서 본래 계획대로 와 줄 것을
요청하였다. 사실 세미나 소개장과 초청장이 이미 다 돌았으니 엎질러진 물 아닌가.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나는 영남대를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학생 중심의
교육을 적극 권장했고, 그런 뜻에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동아리를
교육적인 방향으로 유도해 기회를 열어 주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영남대와
미시간 공대의 국제 교류를 통해서 서로를 세계화하는 데 도움을 나누자고 뜻을
모았다. 그 때 마침 나는 미시간 공대의 자동차 동아리 담당 교수였고 영남대에는
이미 자동차 동아리가 있었기 때문에 교류 대상은 자연스럽게 자동차 동아리로
정해졌다.
  그래서 나는 1996 년도 봄에 미시간 공대생 일곱 명과 그들이 직접 만든 소형차
두 대를 가지고 영남대를 방문하였다. 그 후에는 영남대 학생과 교수님이 미국의
학생 자동차 경기에 미시간 공대팀과 함께 참석하였다. 그 이후에도 몇 번 더
교류가 있었다.
  동아리를 권장한 첫 번째 이유는 동아리를 포함한 교과과정의 활동이 교육을 학생
중심 교육으로 자연스럽게 옮겨 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동아리 지도 교수는 지식의
중간 도매상이 아니고 코치, 후원자, 자문, 고문 등의 역할을 맡는다. 학생이 배움의
전선에 배치되어 지식과 직접 맞붙어 씨름하는 동안 교수는 후방에서 상황 판단을
하고, 학생들이 제대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살피면서 때때로 도움이
필요하겠다 싶으면 전방에 뛰어들어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때 학교와 교원은
학생과 지식의 직접적인 만남을 위해 최선의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한다.
  우리 교육은 남녀의 '유통'을 책임지는 중매쟁이한테서 배울 것이 있다. 예전에는
집안의 아저씨뻘 되는 사람이 신랑 신부집을 분주히 오가는 심부름꾼이었다. 정작
당사자들인 신랑 신부는 혼례식 때까지 코빼기도 보지 못하지 않았는가.
  현대판 중매쟁이는 어떠한가. 남녀의 신상을 낱낱이 적은 정보 수첩을 들고
다닌다. 멀티미디어 세상이니까 총각 처녀의 사진이나 비디오까지 있다. 그리고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 보게끔 자리를 주선한다. 장소도 당사자들이 구호에 맞는
분위기와 음식이 있는 곳으로 정하느라 신경을 쓴다. 그 다음은 당사자들 마음이니
중매쟁이는 자리를 뜬다.
  연애가 당연시되는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 중매쟁이 역시 나름대로 시대에 맞게
변신했다. 종교도 변신한다. 구교의 혼은 성당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신부, 교황을
통해서 천당으로 가지만, 신교는 아무나 어디서나 언제라도 하나님을 뵐 수 있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신교는 유통 개혁을 단행한 크리스트교다.
  우리 대학들도 변신해야겠다. 우리는 학생에 관한 정보와 지식에 대한 정보를
지녀야 한다. 가르치기와 배우기에 대한 첨단 기술을 습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스스로 지식과 만나고 유익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정보를 조달하고,
환경을 조장하고, 그 결과를 평가해 줘야 한다.
  나는 영남대 국책 사업이 매해마다 우수하게 평가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큰
사업을 성공적으로 끌고 가자면 어려운 일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히 국책
사업에 개입된 대다수의 대학인이 무척 많은 고생을 했고 지금도 그 고생은
계속되고 있으리라. 그리고 대학인들을 상이나 벌 대신 설득력 있는 철학과
아이디어로 이끌어 가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번쩍번쩍 좋아 보이는 감투 대신, 감투
안이 감춰진 지식을 보고 나를 강단에 세운 이상천 국책 단장이 나는 고맙다.
    새 시대가 요구하는 교수의 역할

  지식 하면 우선 책을 연상하게 된다. 그리고 '책'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미국 교수들이 한국 교수를 만나면 두 번 놀란다고 한다. 처음 연구실에
들어와서는 빽빽이 들어 차 있는 책을 보고 놀라고, 집을 방문하고는 또 한 번 더
놀란다. 연구실보다 두세 배 더 많은 책들이 집에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책이 귀했던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내 손을 거친
책은 고스란히 서재에 쌓인다. 그러면서 정말 내가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안 볼
책이거나 아예 볼 생각이 없는 책마저도 버리지 못한다. 그런데 이 또한 무슨
병인지 내가 안 볼 책이면서도 남에겐 주고 싶지 않으니, 버리지도 주지도 못하고
방바닥에서 천장까지 계속 쌓이는 것이다. 왠지 책을 지니고 있으면 괜히 부자가 된
듯 마음에 뿌듯해진다. 학자라면 책 삼 수레 정도는 끌고 다녀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이 이 병을 퍼뜨린 원인일 테다.
  지식이 귀하던 시대에는 지식을 취하기 편하게 책으로 엮어 딱딱한
물건(하드웨어)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책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새 교과서는
어떻게 그리 많이도 쏟아져 나오는가? 미안한 말이지만 출판사에서 공짜로 보내
주는 책들이 귀찮을 정도다. 책이 바닥에도 쌓여 있고 책상 위에도 수북히 엉망인
채로 재어 있다 보니 정작 필요할 땐 찾다가 시간 다 버리고 만다. 그리고  사실상
정말 중요한 정보와 지식은 책에 없을 확률이 높다. 있다 하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아무리 훌륭한 도서실에도 내가 원하는 정보가 소장되어
있을 만한 가능성은 눈에 띄게 적어지고 있다.
  지금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연상은 물이 범람하고 홍수가 져 사막은 간 데 없고
창해가 보인다. 정보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정말 마실 물을 얻지 못해
목말라하는 불쌍한 형상이 바로 내 모습이다. 요즘에는 지식을 하드웨어(유형)로
보지 말고, 손에 잡히지 않는 소프트웨어(무형)로 인식해야 한다. 지식은 한 곳으로
고이는 물이 아니고 사방에 퍼져 있는 공기 같다고 생각하자.
  물은 도매 상인과 소매 상인, 그리고 그들이 정한 유통 과정을 거쳐 비로소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상인은 물에 설탕과 탄산을 섞으면서 그 가치를 한층
높이기도 하고 그 대가를 톡톡히 받아 내기도 한다. 그러나 공기는 어떠한가.
공기를 유통하는 상인이 있는가? 공기를 팔아서 돈 받는 상인이 있는가?
  지식이 물과 같을 때 교수는 지식을 도매로 받아서 학생들에게 소매로 넘겨 주는
일을 해 왔다. 그리고 학자의 신분으로서 연구하고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 내는
임무도 맡았다. 그러나 이제 지식이 공기와 같아졌다면 교수들이 해야 할 일도
달라져야 한다. 교수의 지식 중간 도매상 역할은 끝났다. 그러나 그럼에도 교수가
할 일은 여전히 너무나 많다.
  보라. 공기를 마시더라도 방법에 따라 마시는 사람의 기가 달라진다 하지 않든가.
사람들은 단전 호흡하는 법을 도사님에게서 배우지 않는가. 그렇듯이 교수님은
지식을 흡수하고 소화해 내고 창조하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줘야 한다.
물에서 물고기를 낚아다 주지 않고 낚싯대를 마련해 줘야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결국은 학생 스스로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공기와 같을 때는 낚싯대마저 소용없다. 허공에 떠돌아 다니는
것은 아직 지식이나 정보가 덜 된 팩토이드(factoid)이기 때문이다. 팩토이드는
최근에 새로 만들어진 단어인데 지식이나 정보를 물고기로 본다면 팩토이드는
피라미 새끼거나 그보다도 더 작은 올챙이 정도쯤 된다.
  지식 유통 개혁의 두 번째 작업은 중간 도매상의 제거다. 지식의 중간 도매
상인을 고집하는 교수는 도태될 것이고, 새 시대의 모범이 되어 솔선수범하는
교수는 존경을 받을 것이다. 고로 교수는 학생들과 더불어 끊임없이 공부하는
대학인이 되어서 스스로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지식 창조에 앞장서야 한다. 지식
유통 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은 학생들을 지식 소비자에서 지식 생산자로 변신시키는
일이다.
    정보화 세상 나들이보다 정보어 정돈이 먼저

  팩토이드(factoid). 전 세계 뉴스를 휩쓸고 있는 CNN 뉴스 시간에 설명 없는
간단한 통계나 정보를 팩토이드라는 제목 아래 5초 정도 화면에 비춘다. 다른
미디어에서도 자주 쓰기 때문에 이제는 일반인들에게도 친밀한 단어가 되어 버렸다.
  팩트(fact)+오이드(oid). 최근에 새로 생긴 단어다. 여기서 쓰이는 팩트의 뜻을
담은 한국어를 모르겠어서 영한 사전을 찾아봐도 영 흡족해할 만한 단어가 없다.
'사실', '진실', '실제', '정말', ...정말로 아니올시다. 여기서 쓰인 팩트의 뜻은 아마
데이터 정도 될 것이다. 그럼 데이터는 무엇인가? 데이터가 꼭 숫자 통계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냥 '정보'라고 할 수도 없다. '정보'란 너무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팩트는 그렇다 치고 오이드(oid)의 뜻을 보자. 오이드 역시 의미심장한 말이다.
'비슷한', '인공적으로 생산된', '자동 생산된' 등의 뜻을 품고 있다. 따라서
팩토이드는 팩트이면서 뭔가 좀 덜 되었거나 모자라거나 저질같은 냄새를 풍긴다.
그리고 그 자체의 가치는 별로 없지만 쓰이기 나름이라는 뜻도 암시한다. 팩트와
팩토이드의 관계는 개구리와 올챙이의 관계, 의자와 나무토막의 관계를 연상하게
한다.
  지식이 자원이자 생산품이고 원료인 정보화 시대에는 '정보', '지식'에 관한 단어가
우선 정돈되어야 한다. 눈이 많은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의 언어에는 눈을 지칭하는
단어만도 무려 20가지가 넘듯이 정보에 파묻혀 사는 정보화 세상에는 정보에 관한
단어가 많아야 한다. 그리하여 정보에 대한 인식도를 높이고 구분해서 적절히 쓸 수
있어야 한다. 정보와 지식에 관한 단어를 창조해 내는 작업은 지식 유통 개혁에 빼
놓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지식을 '나무'에다 비유하길 좋아한다. 의자는 나무토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자나 나무토막은 둘 다 나무이긴 하다. 하지만 나무토막이 가다듬어지고 서로
연결되어야 비로소 쓰임새 있는 의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나무토막은 가치를 보유한
존재이고 쓰이기 나름이다.
  데이터를 벽돌이라 봤을 때 정보는 벽이고 지식은 집이 된다. 셋 다 벽돌인 것은
틀림없으나 집하고 벽돌하고 어디 비교가 되나. 보슬비, 장대비, 소나기, 눈,
진눈깨비, 안개 모두 다 물은 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슬비를 보고 물 내린다 하지
않는다. 소나기보고 "물, 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바보같이 보일까.
우박이나 맞고 정신 차려라 할 테다.
  그렇다. 정보화 세상에서는 소나기같이 쏟아지는 것이 '정보'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정보, 정보."하는 사람도 "물, 물."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습다. 되도록
빨리 정보어를 개발하여 한국인도 정보에 세련되어져야 한다.
  외국 세상 나들이에는 영어가 필수이듯이 정보어는 정보화 세상 나들이에 필수다.
해외 여행 나가서 맨(남자 화장실)과 우먼(여자 화장실)을 구분 못하더라도 고작
창피 한 번 당하면 그만이지만 정보 세상에서 정보와 지식을 구분 못 하면 피 본다.

    대학을 살리려면 교육부부터 없애라?

  1994 년 11월, 교육부의 대학 정책 실장을 비롯한 교육부 관료들 17 명과 대우
연수원에서 1박 2일을 같이 지내면서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대우 전자
사장이었던 배순훈 박사님은 그 때 벌써 기술 인력의 부족으로 위험스러운 한국
산업체를 정확히 진단하셨고, 서울 공대 이현구 교수님 산하의 연구팀은 몇 가지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나는 이 책 2장에 서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발표하면서 새
시대가 요구하는 대학교를 '다양화'라는 관점에 맞추어 강의하였다.
  연수가 있기 전에 누군가가 나한테 넌지시 말해 주었다. 한국의 똑똑한 공무원은
경제, 경영 부서에서 먼저 다 발탁해 가고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 등에서 나머지
인재를 거두어 간다. 그러니 교육부 공무원을 만난다 해서 너무 기대도 말고 너무
실망하지도 말라는 충고였다.
  나야 한국 공무원에 대한 선입견이 없었으니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들었다.
그러나 교육부 공무원들하고 1박 2일을 같이 보내고 나니 내 나름대로 판단이 섰다.
나한테 충고해 준 사람이 염려한 대로 연수 시간 내내 조는 공무원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조는 데 '도'가 튼 사람답게 눈만 감았다. 뿐이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연수
기간 내내 바르게 앉아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무슨 시위라도 하듯 노골적으로
엎어져 잠을 잤다. 나머지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가끔 뭔가 메모도 하고, 발표가
끝나자 나에게 와서 발표 내용물을 보내 달라는 사람도 있고. 다른 기관에 가서
발표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봐 왔으니 교육부라 해서 특별히 이렇다저렇다할
성격은 못 된다.
  그러나 대학에 가서 이야기를 해보면 교육부에 대한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국의 대학을 살리려면 교육부부터 없애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사실 대학의
다양화를 획일적으로 요구하는 교육부를 볼 때 안타까운 점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교육부는 앞으로의 대학 발전을 위해서는 계속 필요할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본다.
  교육부는 대학이 다양화, 특성화, 체계화 등에 앞장서고 결과에 대한 평가화,
자유화에 걸맞은 자율화 등을 유도해 내고, 대학간의 경쟁^5,23^협력 체제화, 신입생
선발과 졸업생 후생에 관한 조직화 등의 기본 방침을 설정해야 한다. 할 일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교육부가 지식 유통 개혁을 책임지고 이루어 내야 한다.
대학뿐만 아니라 유통 개혁의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쳐 즉시 단행하여야 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흥망이 걸려 있는 문제라고 본다. 한국은 현재 처한 이 위기를
어떻게 해서라도 잘 넘길 것이다. 그러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이 위(위태로울 위)를 극복한 후 기(베틀 기)를 잘 잡는가는 오직
교육부가 지식 유통 개혁을 얼마나 확실하게 성공시킬 것인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지식 유통 개혁. 정보화 시대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다.
    신뢰는 열림에서 시작된다.

  1996 년도 하순 무렵 서울대 공대 학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의 '새 시대
교수법' 강연을 찍어 놓은 비디오 테이프를 구해서 봤는데 서울 공대에도 와서
강연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해 봄에 경북대 대학 전체 신임 교수님들 90 명과
2박 3일을 같이 보내면서 15시간 동안 강의했던 것을 학장님은 추석 명절에 다
보신 것이다.
  나는 감동을 받았다. 사실 나는 똑같은 추석에 한국의 비디오 가게에 가서 〈제
4공화국〉 드라마를 빌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봤었다. 해주는 밥 먹고 베개와
방석을 여러 차례 바꿔 가면서 열 몇 시간을 줄곧 VTR 앞에서 보낸 것이다.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보는 데도 몸이 뒤틀리고 눈알이 아파서 두 번 다시 못할
짓이다. 느껴졌는데 그 학장님은 개인용 카메라로 찍은 15시간 짜리 비디오를 다
보신 게 아닌가. 한송엽 학장님의 끈기와 열성에 깊은 감동을 받을 수밖에.
  그래서 나는 1997 년도 이른봄에 서울 공대 교수님 쉰대여섯 분을 모시고 1박
2일에 걸쳐 8시간 짜리 강의를 하였다. 그 후로 다른 대학에서도 여러 차례 장시간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할 때마다 느끼는 점인데 사실 강의하는 사람은 강의를 장시간
해도 그리 힘들지 않다. 오히려 신나는 일이다. 장내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기한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니까. 아무리 수줍음을 타는 사람도
겉으로는 떨려도 속으로는 기분 으쓱할 일인 것이다.
  정말 힘든 사람은 강의를 듣는 쪽이다. 특히 항상 강의를 하다가 듣는 입장이
되어 버린 교수님들한테는 한층 더 고역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 주셨던 교수님들이 나는 존경스러웠다. 내 노트를 다른
대학의 교수로 있는 제자들과 돌려보고 싶은데 허락해 줄 수 있겠느냐는 교수님도
계셨다. 그 정도로 열성이신 교수님들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존경하는 한국 교수님들에게 큰 불명예가 있더구나. 지금
한국에서는 교수 비리가 속속들이 터져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리 놀라지 않는다. 어느 집단인들 썩은 무리가 없겠는가. 단지 깨끗한
선비여야 할 학자 집단의 더러움이기에 한결 더 흉측해 보일 뿐이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운이 좋아서인지 내가 만나뵌 대다수의 교수님들은 심지가
바른 분들이었다. 그래서 한국 대학에는 희망이 있어 보였다. 썩은 무리 때문에 그
좋으신 분들마저 망신당하고 기가 꺾일까 봐 염려스럽다. 나는 사실 한편으로는
반가워하고 있다. 비리가 신문지상에 떠오르고 검사의 조사 대상이 되는 것은 내가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다. 비리를 낱낱이 발굴해서 학내의 지적 재산을 정돈하는
작업이야말로 지식 유통 개혁의 첫걸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식 유통 개혁. 그것은 열림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열린 사회의 첫 번째 원칙은
투명성이다. 베일은 벗겨 내고 어느 누구라도 환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하여 정직한
사람을 떳떳하게 해줘야 한다. 과전 불납리, 이하 부정과(오이 밭에 가서 신발 끈
매지 말고 배나무 아래에서 갓끈 매만지지 말라). 순수한 사람이 떳떳하게 행동하기
어렵다는 뜻이 아닌가. 비리가 득실거릴 때의 문제다. 열린 사회에서는 필요 없는
말이다. 비리의 발굴은 단순히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벌주는 차원을 넘어 정직한
사람의 기를 세워 주는 중요한 일이다.
  비리를 들추어내기 시작했으면 확실히 하라. 그리고 썩은 무리는 과감하게 잘라
내라. 그러한 뒤 깨끗함을 인정받은 나머지 교수를 완벽히 믿어 주어라. 열림이
믿음으로 연결되어야만 유통 개혁은 가능하다.
    5. 21세기의 인재 만들기 2
    (천덕꾸러기들이 쥐고 있는 희망의 열쇠)

    X세대는 외계인이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알 수가 없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심지어는 "요즘 애들
무서워요." 하는 교사도 있다. 기성 세대들은 지저분하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
이른바 3D를 기피하는 신세대들을 두고 한탄스러워한다.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밤낮 없이 일하던 40--50 대에 비해 자기네 원하는 것만 추구하는 신세대들이
얌체같아 보이는 것이다. 극도의 이기주의가 얄밉다고도 한다. "학문? 웃기지 마라.
인성 교육부터 시켜야 해!" 기성 세대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때 과연 좋은
교육을 시킬 수 있을까?
  나는 X세대와 그들의 후배인 무명 세대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다. 미시간 공대의 캠퍼스 문화
위원회(Campus Cultural Enrichment Committee)에 있었을 때 내가 책임지고
맡은 일은 학생과 교수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낸 아이디어가 X세대란 말을 대중화시킨 "X세대(Generation X: The
Tales for the Accelerated Culture)"를 몇천 권 사서 학내에 뿌리고, 10 대부터
60 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토론장을 열고, 마지막으로 저자
쿠프랜드(Douglas Coupland)를 초청해서 특강을 듣는 것이었다. 내 짐작대로 그 일
주일 동안의 행사는 교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더불어 X세대에 대한 논쟁이
대학인들 사이에 끊임없이 오갔다.
  나는 "X세대"를 읽으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보통 유명한 소설책을 읽을
때면 주인공이나 적어도 조연쯤의 등장 인물과 동화되게 마련이다. 그만큼 그들과
공감대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를 읽으면서는 시베리아의 허허벌판을
달리는 코삭의 뜨거운 정신과 천민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쿠프랜드의
X세대 주인공은 마치 외계인 같다. 도저히 그들의 마음과 머리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 아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코삭하고는 마음을 나눌 수 있었는데 매일 같은
캠퍼스에서 부대끼면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 X세대와는 완전 남이라!
  X세대는 그 전의 세대(전후 베이비 붐 세대)와 다르다. 그리고 그들의 다음 세대,
다양하다 못해 아예 별명마저 거부하는 무명 세대와 또 다르니 나와는 그만큼
더 멀다. 가르침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해야 하거늘, 이 외계인들을 어떻게
가르친담?
  3D 기피 현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선택권의 여지라는 것을 모르고 지낸
세대는 풍요 속에 자란 젊은이들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기성 세대는 세 끼를
굶지 않는 것만도 감사하던 절대 빈곤 시기를 살았다. 의식주 해결을 위해서라면 이
직장 저 직장 고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반찬이 맛없다고 불평하는 아이, 가방이
셋이나 되는데 새 가방을 또 사겠다고 우기는 아이를 보면 이해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기성 세대는 선택의 경험이 많지 않아서 선택에 약하다. 뷔페 식당이 처음
유행할 때 많은 사람들은 뭘 고를지 몰라서 이것저것 다 가져다 먹고 배탈나기
일쑤였다. 지금도 한국에서 기성 세대들과 맥줏집에 가면 시원한 것으로 서너 병
가져 오라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러나 신세대들은 맥주를 시키더라도 확실히
카스냐, 하이트냐를 구분한다. 구세대들은 다방에 가서 "커피!" 하면 종업원이
알아서 갖다 준다. 그러나 신세대가 잘 찾는 카페에 가서 그냥 "커피 주세요." 하면
원시인 취급을 당한다. 커피 종류가 하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신세대는 전교생이 똑같은 책가방에 똑같은 운동화를 신고 다녔던 기성 세대와는
다르다. 기성 세대가 대량 생산 체제에서 컸다면, 신세대들은 다품종 소량 생산
시대에서 소비 기호를 충족하고 있다. 구세대는 주는 대로 아무 말 없이 받아들여야
기특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신세대는 선택에 강해야 잘 산다.
  이런 차이는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기성 세대는 이것저것 필수과목으로
가득 채운 교육 과정으로 신세대 학생들을 한 틀에다 집어 넣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사하듯 똑같이 찍어 내는 대량 생산 체제 아래 구시대 교육의 표본이다.
선택의 자유를 만끽하며 성장한 3A 현대 청소년들에게 그런 구식 교육이 먹혀들
리가 없다.
  다양화를 추구하는 신세대의 체질과는 상극이라 해서 기성 세대가 그들을 구제
불능인 것같이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 줄 의병들은 바로
외계인 같은 X세대이기 때문이다.
    새 시대를 주도할 3A 젊은이

  우리 아들이 일곱 살 되던 날 비디오 게임기 '슈퍼 닌텐도'를 생일 선물로 주었다.
중독성이 농후한 게임기라서 오래도록 원망의 대상이 되면서까지 안 사 주고 버텨
보았지만 결국 아들놈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딱지치기를 꽤 잘해 동네를
휩쓸며 의기양양해 하던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며 '만일 그 때 누가 딱지치기를
못하게 했더라면 내 어린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을까?' 이런 억지 생각으로
닌텐도에게 마침내 굴복해 버린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게임기가 집에 온 지 한 달 후, 아들 녀석은 제 2 단계에서 머무적거리고 있는데
나는 벌써 8 단계까지 내달리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게임기 중독자는 바로 나였고,
그 와중에도 나는 뒤져 있던 아들 녀석의 인지 발달도를 염려하였다. 그러면서 한
달이 더 지났다. 이제 아들은 이미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고 졸업했지만 나는 눈알이
아프도록 연습한 보람도 없이 겨우 한 단계만 더 진전했을 뿐이었다.
  얼마 전에 '닌텐도 64'라는 최신 모델이 나왔을 때는 안 사겠노라고 버티기는커녕
그 날 당장 달려나가 남들처럼 줄서서 기다려 사왔다. 부리나케 포장을 뜯고 내가
먼저 게임기 작동기를 손에 쥐긴 했건만 도무지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겠더라.
슈퍼 닌텐도의 작동기에는 눌러야 하는 버튼이 몇 개 안 되었는데 니텐도 64의
작동기에는 무려 15개나 붙어 있지 않는가.
  아들이 게임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어지러울 정도다. 삼차원적인 그림과 화려한
색채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고 작동시키는 사람의 눈하고 손은 같이 놀고
있다. 나는 화면을 보고 "어어, 요놈이 이렇게 움직이니까 나는 오른손 엄지로
A버튼을 두 번 눌러야겠구나." 한다. 눈으로 정보 취재, 그 다음 머리 속에서 상황
분석, 판단, 결론, 지시, 그리고 나서 손가락 동작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거치는
셈이다. 그러나 동작을 취하려고 하면 어느새 게임 상황은 달라져 있다. 그러니
나는 "어, 어, 어," 하다가 볼일 다 본다.
  닌텐도 세대라고도 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인들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속도를 살고 있다. 연애도 밤 새워 편지 썼다 지웠다 하지 않고 만남의 현장
그 즉석에서 싫고 좋음을 표현한다. 이것저것 헤아리고 삭이고 뜸들이기보다 직관과
감성으로 파악하려 한다. 언어 속도도 빨라진다. '안녕하세요' 대신 '아냐세요'를
쓴다. 호출기로 '045'를 쳐서 '빵 사와'라는 뜻을 전한다. 음식도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패스트 푸드가 인기다.
  이런 과도기에 적응력을 갖춘 인간이 바로 요즘 젊은이들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3D를 기피하는 것은 그들의 정신 상태가 나빠서가 아니다. 이제는 산업 시대처럼
작업복을 입고 기계처럼 일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요즘 젊은이들은 3A식으로 살기를 원한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Anytime, Anywhere, Anyone) 대응한다는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를 가장 손쉽게 만드는 것은 무선 전화이다. 원래
무전기는 군대에서 전쟁 때 공격 전투용으로만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무선 호출기를 들고 다니는 것은 일상 생활 자체가 전투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기업 경쟁도 3A식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젊은이들이야말로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현대는
조직만 바꾸는 것이 아니고 인간형도 바꾼다.
  현대인의 태도와 행동에는 순발력과 유연성이 필수이다. 단지 적응,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응을 잘 하려면 체제 순응형 사고 방식으로는
힘들다. 대응은 도전에 대한 응전이지 복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은 이 위기에 순응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반항할 수 있는 처지도
못된다. 말 잘 듣던 개를 다그치면 별안간 물어 대듯이, 궁지에 몰린 체제 순응형
인간은 이유 없는 반향을 한다. 지금은 응전이 필요하다. 그것이 분발력과
유연성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잠재적으로 보유한 3A 현대인, 특히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걸어야 하는 이유다.
    볼케이노의 위력
      (사춘기 에너지)

  장시간의 교수법 강연을 자발적으로 듣겠다는 분들은 정말 다음 세대 양성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는 분들이다. 그래서 강연이 끝나면 비장한 결심을 한 듯이
"우리 학생들도 미국 대학생들같이 열심히 시켜야겠다."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천만에요! 열심히 시키면 안 돼요." 하고 전혀 엉뚱한 반박을 한다.
  또 어떤 교수들은 미리부터 "한국식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고 온 대학생들은 구제
불능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시켜 봤자 소용없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나는 이런
결론에도 "천만에요! 시키면 됩니다."라고 반박한다.
  아니, 열심히 시키지 말라고 하다가 열심히 시키면 된다는 얘기를^5,5,5^ 일구이언
아닌가! 이 말에도 나는 "천만에요."라고 반박해야겠다. 좀 엉뚱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죽도록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을 계속 열심히 공부시켜서는
곤란하다고, 거꾸로 지금부터는 미치도록 놀고 싶은 학생들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남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고 역설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미국에는 학생들이 사춘기를 '사춘기답게' 잘 지내고 나서 대학에 들어온다.
찢어진 바지도 입어 보고, 머리 모양과 색깔을 마음대로 바꿔 보고,
귀걸이.코걸이에다 심지어는 배꼽걸이까지 달아봤을 것이다. 자동차를 속도기
끝까지 몰아 보고 술에 만취해 보고 불 같은 연애도 해 봤을 테다. 해 보고 싶은 것
다 해 보고 인생의 꿀맛, 쓴맛은 다 맛보고 온 학생들, 노는 데 어느 정도 신물이 날
무렵에 대학에 온 학생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공부에 몰두한다.
  반면 한국에서 사춘기를 제대로 보내고 입학한 학생들은 아마도 없으리라. 하고
싶은 것 다 해 봤다가는 대학 문전에도 못 왔을 테니까. 싫어도 교사와 부모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무조건 사춘기를 유보하는 것이다. "대학만 가
봐라!"하고 벼르면서.
  과연 사춘기를 대학 입학할 때까지 유보할 수 있는가? 아니면 아예 없애도
되는 걸까? 아니다. 태아가 다 자라면 모체로부터 분리되듯이 사춘기는
보호자로부터의 심리적 분리를 선언하는 의미다. 나도 이제 하나의 독립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사춘기 때는 부보가 하라고 하면 하고
싶었던 일도 하기 싫다. 일부러 반대를 위한 반대도 한다. 기성세대가 하는 꼴이
모두 우습고 가소롭고 창피하다.
  사춘기란 의존적 아동에서 독립적 성인으로 발전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사춘기를 거치지 못했던, 목소리와 육체만 자란 대학생들을 또 죽도록 공부시킨다?
그것은 우리 나라 젊은이들 모두를 '쪼다'로 만드는 일밖에 안 된다. 그래서
대학생을 죽도록 공부시키면 안된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성 세대의 틀을 무조건 거부부터 하고 보는 사춘기의 특징에서 나는 한
가닥 희망을 본다. 사춘기란 제멋대로 해 보고 싶은 충동과 에너지가 펄펄 넘쳐
나는 시기다. 사춘기에는 무조건 새로움을 추구한다. 창의력이 최대로 발산되는
시기다.
  한국 학생들의 이런 사춘기 에너지는 꾹꾹 눌려 오다가 대학에 와서야 비로소
폭발한다. 그런데 막상 그 막강한 에너지를 발산할 만한 마땅한 창구가 별로 없다.
그러니 친구와 어울려 술 마시고 멋 부리고 수다떨고 '운동'에 빠져드는 데 그것을
나무랄 수 없지 않는가. 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 그러나, 만일 대학에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가 대폭 주어진다면. 학생들의 엄청난 사춘기 에너지가 학구적으로
발산된다면^5,5,5^.
  바로 이것이 한국 대학의 잠재된 기회다! 동아리 모임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기쁘게 참여하고 열정을 쏟듯이 대학과 교수들의 할 일은
이런 학생들의 '사춘기다움'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쏟아 부을 수 있도록 방향 제시를
해주거나 미치도록 열심히 몰입할 만한 일거리를 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대학에서 창의력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성공할 확률은 한국이
미국보다 더 높다고 보는 것이다.
  내 말이 순 억지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까지 현실적으로도
중.고등 교육이 바뀌지 않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한국식 입시 위주 교육을 받고
온 대학생들은 구제 불능이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한국은 급하다. 누구의 말이 억지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일은 나중에 하자.
"Premum vivere, deinde philosophare(먼저 살고, 철학 논쟁은 나중에)." 우선
살고 보자. 의병들의 무한한 사춘기 에너지를 적극 이용하자. 밑져야 본전이다.
    한국의 문제아들은 오히려 싹이 푸르다.

  미국 대학생들은 멋 부릴 새도 없고 멋 부리고 강의실에 나타나 봐야 '한심하다',
'방향 잘못 잡았군' 하는 눈총을 받는다. 한국 대학생들이 멋 부리는 것은 모두
당연하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중.고생이 머리 염색하고 온갖 풋 멋을 부리며
다니면 대번에 '싹수가 노랗군' 할 것이다.
  과연 중.고등 시절에 학생 입장 불가 영화를 한두 편 봤다고, 담배 몇 개피
피웠다고 절망적이 되어 버릴까? 역사책 대신 만화책을 더 즐겨 읽는다 해서 그
아인 문제아일까? 정말 문제아의 '싹수'는 노란 것일까?
  입시를 코앞에 둔 고3짜리 엄마의 눈에는 밤늦게까지 전화를 붙들고 앉아
친구들과 몇 시간씩 수다를 떠는 딸이 원수같이 미울 테고, 전화 끊으랬다고
짜증내는 아이의 뒤통수를 보면 꿀밤 한 대라도 쥐어박고 싶을 테다. 또 이렇게
아옹다옹하는 모녀를 보는 아버지는 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과연 대학
입학이 인생의 전부인가?
  한국에서는 청소년을 진단하는 잣대가 딱 하나뿐이다. 하는 짓이 공부와 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 심각한 문제아로 진단 받는다. 반대로 사춘기에도 어른 말씀 잘
듣고, 선생님의 지도도 잘 따르고, 숙제를 꼬박꼬박 해 가면 앞날이 창창한
모범생으로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누가 진짜 '문제아' 일까? 대학
입학이 인생의 전부라면 정답은 뻔하겠지만 그러나 만일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교육 체제는 분석력과 기억력이 뛰어난 아이들에게만 유리하다. 네드
헤르만 박사의 말대로 누구에게나 최소한 네 가지 두뇌가 있다면 분석력과 조직력
말고 대인 관계와 창의력이 뛰어난 학생들은 우리 교육 체제에서는 모두 낙제생,
문제아가 된다는 얘기다. 가드너 박사는 인간 지능에 일곱 가지의 영역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무지개같이 다채로운 색연필을 쥔 학생들에게는 흑백만 허락하는
사회가 미치도록 이상할 거다. 소질을 맘껏 발휘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당연히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요컨대 우리의 교육 체제가 고의적으로 다수의
문제아들을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 발달학'을 전공한 최 교수는 진짜 문제아는 자신과 남에게 해로운 일을
벌이는 청소년들이라고 한다. 자살은 자신에게 해롭고, 살인 강도는 남에게 해롭다.
그러나 약간 해롭다 해도 돌이킬 수 있는 정도의 잘못이라면 해보게 하는 것도
무방하다. 학생 입장 불가 영화를 한두 번 보는 것에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건
아니다. 담배 한 번 피웠다고 당장 폐암에 걸려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
일처럼 되물릴 수 없는 실수라면 행동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해 볼 일이다.
  청소년기에는 자신과 남에게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끼치는 일이 아닌 한 많은
시행 착오를 해 보게 하는 것이 좋다. 창의력은 시행 착오를 겁내지 않을 때 싹이
튼다. 문제아를 만들지 않으려면 소질과 개성이 자랄 수 있는 통로를 활짝 열어
주라는 말이다.
  공자도 교육의 첫째는 예방에 있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학생들의 잠재 에너지를 어떻게 하면 긍정적, 발전적, 생산적으로 이끌어 낼
것인가를 고민할 일이다.
  평균 수명을 75세라고 보면 우리의 문제아들은 지금 겨우 인생의 1/5도 못 산
셈이다. 어떻게 하여 나머지 4/5를 행복하고 생산적으로 살게 할지, 어른들부터
먼저 열린 마음으로 멀리 크게 보자. 기존의 방식만 요구한다면 어른들이 정말
문제다. 소위 문제아라고 낙인 찍힌 아이들을 만나 보면 에너지가 풍부하고 세상을
남과 다르게 보고 색다른 꿈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창의력의 기준으로 보면
잠재력이 풍부한 아이들이다. 한국의 많은 '문제아'들은 오히려 싹이 푸르다.
  아니, 그럼 영어책을 보지 않고 만화책을 보더라도 내버려 두란 말인가? 우리
애가 대학에 못 들어가면 누가 책임질 텐가? 하며 따지는 부모님들도 계실 것이다.
답답하다. 흑백 텔레비전이 아직 남아 있다고 배우들 옷을 죄다 흑백으로
입히겠는가, 아니면 텔레비전을 컬러로 바꾸어야 하겠는가. 학생들을 흑백 사회에
찌그려 넣지 말자. 대신 학교를 개선해서 학생들이 한국의 발전에 힘이 되는
의병으로 클 수 있게끔 도와 주자.
    극기 도사들이 실력 발휘

  미국 대학생들의 평균 수학, 과학 실력은 한국에 비해 훨씬 못하다. 대학에 들어온
후에야 대수, 기하 등 기초를 가르쳐야 한다. 작문도 대학서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니 대학생들을 죽도록 공부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반면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학생들은 기초 훈련이 아주 잘 되어 있다.
외우고 있는 내용물은 방대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동안의 극기 훈련으로 치면
다들 도사급이다. 싫은 것 참기, 새벽부터 밤중까지 책 붙들고 앉아 있기, 하기 싫은
과목 골고루 다 해 보기, 눈뜨고 졸기(는 빼고)^5,5,5^. 이렇게 훌륭한 극기 훈련을
성장기에 받아 보는 것도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극기 도사의 장점이 뭘까? 일단 한 가지만 말해 보자. 극기는 도전에 끝까지
응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능력은 발휘할 기회가 주어져야 발휘된다. 과연 한국
대학에서는 극기 도사들에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고 있는가?
  내가 본 극기 도사들의 실력 발휘는 한총련 데모 때였다. 미국은 1960 년대 말과
1970 년대 초, 그리고 1980 년대 중반에 학생의 데모가 활발했지만 그 정도로는
한총련 극기 도사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주먹 치켜드는 운동이 아니더라도, 공
가지고 운동하는 학생들한테서도 극기 실력이 보인다. 그러나 대학 강의실에서는
극기 도사님들이 어쩌고들 있는지 그건 모르겠다.
  내가 대학원 다닐 적에 만난 한국 유학생 친구는 테니스 광이었다. 오후 내내
치고 어둑어둑해져서 공이 잘 안 보이는 데도 계속 친다. 그러곤 저녁에는 팔이
쑤시고 다리가 아프다며 끙끙댄다. 역시 극기 도사님이시다. 그런데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전화가 온다. 테니스 같이 치겠느냐고. 내가 답할 여유도 안 주고 무조건
나오란다. 남이 알아줄 정도로 잘 치는 테니스 실력도 아니거늘, 그리고 설사 남이
알아준다 한들 강의를 빼 먹으면서까지 테니스를 쳐야 하는 친구가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왜 그럴까?
  바둑에 미친 사람도 봤다. 두세 시간 동안을 꼼짝하지 않고 한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돌멩이만 쳐다보는 짓을 왜 할까? 고3 때의 극기 훈련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걸까? 내 주위에 바둑 두는 사람은 수두룩하지만 바둑으로 유명해진 사람 못 봤고,
바둑으로 돈 벌었다는 사람 역시 보지 못했다. 기껏 벌어 봤자 내기해서  친구
쌈지돈이나 빼앗는 정도다. 바둑의 무엇이 그토록 사람을 홀리는가?
  암벽 타는 사람도 있다. 목숨을 내걸고 암벽을 타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광이다.
극기 도사의 마지막 단계인가 보다. 테니스나 바둑은 그나마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회놀이다. 그까짓 시간 좀 죽이고 몸이 피곤한들 술집에 가서 몸 버리고 돈
버리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양호한 방법이다. 그러나 암벽은 혼자다. 봐 주는
사람도 없다. 삐끗하면 귀신도 모르게 갈 수 있다. 그런데도 암벽 타는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주말이면 산으로 향한다. 왜 그럴까?
  이런 '광'들을 연구한 결과가 있다. 시카고 대학의 칙슨트미할리 박사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의  능력과 실력보다 약간의 높은 경지에 도전할 때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테니스 상대가 너무 못 치면 지루하고 또 너무 잘 치면 겁난다. 공 한 번
치고 줍고 또 한 번 때리고 줍고, 몇 번인가를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금방 싫증이
난다. 그러나 상대가 세계 챔피언이라면 겁이 나서 팔목이 후들거릴 것이다. 그러나
실력이 엇비슷하건 약간 높은 상대를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피곤한 줄 모르고
치게 된다.
  바둑 또한 마찬가지다. 1급과 8급이 붙으면 한 사람은 졸고 한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린다. 상대가 안 되니 둘 다 재미없다. 암벽 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완만한 산을 타다가 싱거워지면 경사가 약간 더
가파른 산을 찾게 된다. 약간씩 도전의 강도를 더 높여 가파른 고봉 준령을 계속
찾아다니다가 마지막에는 경사가 직각인 암벽까지 도전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다.
  이런 광들의 공통점은 도전에 응하는 동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는
데 있다. 그 동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
상태는 두뇌의 호르몬과 뇌파장의 변화와 관계가 있으므로 중독 상태와 비슷하다.
무아지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아, 만일^5,5,5^ 만일 학생들이 공부에서도 이런
무아지경에 빠질 수만 있다면^5,5,5^ 아니, 빠지게만 할 수 있다면^5,5,5^. 능력 있는
사람에겐 마땅히 그 능력을 발휘할 도전의 기회와 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극기 도사님들이여, 드디어 도사님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왔나이다. 부디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 줄 의병이 되어 주시오.
    만물 박사, 만능 박사를 가르치는 법

  재작년인가 아내의 동창생들 다섯 명이 열 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미시간의 우리
집에 보름 동안 놀러 왔다. 그러자 한국에서 '천재 소년 소녀단'이 왔다는 소문이
내가 사는 이 조그만 대학촌에 쫙 퍼졌다. 3 학년짜리가 미국의 5 학년 산수를 풀고
피아노, 플루트, 바이올린 등 다들 악기 하나쯤은 스스럼없이 다루고, 스케치할 때의
손놀림과 색채 감각은 수준급이다. 거기에다 제각기 태권도, 요가를 시범 보일
정도에 아무리 놀다 지쳐도 잠들기 전에는 일기를 꼬박꼬박 쓰는 한국
아이들이었으니 이를 지켜본 미국인들이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한국 아이들은 어쩜
그렇게 모두 우수하고 건강하고 활달하고 예의 바르냐는 거였다. 미국인들 눈에는
외지에서 온 그 아이들이 다 천재나 수재로 보였을 것이다.
  미국서 오래 살아서인지 내 눈에도 그 아이들이 다들 수재로 보였다. 미국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은 그 아이들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같이 노는 모습을 봐도 한국
아이들이 먼저 지치는 걸 못 봤다. 우리 딸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듣다가 그 아이들의
연주를 들으면 그 아이들 모두에게 모차르트 같은 소질이 있는 듯했다.
  또 아는 것은 어찌 그리 많은가. 우리 아이들은 나무를 보면서 그냥 나무가
보인다 하는데 그 아이들은 이건 떡갈나무, 이건 단풍나무, 저건 참나무 하면서
정확히 구별해 알아본다. 쪼끄만 녀석들이 뉴턴의 법칙이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니 말하는 걸 들으면 정말 아는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엄마들 얘기로는 이 아이들도 한국에서는 평범한 수준이란다. 얼마큼이
겸손이고 얼마큼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백 보마다 피아노 학원, 태권도 도장,
미술 학원 등이 줄줄이 서 있던 모습을 생각하면 한국은 극기 도사에다 만능
박사에다 만물 박사 천지다.
  이런 '무시무시한' 아이들을 앞으로는 어떻게 더 교육해야 하는가? 이런 능력을
보유한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무엇을 더 배운단 말인가?
  우선, 나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싶다. 대학이나 전문대 등의 고등
교육 기관을 영어로는 Institute of Higher Education이라 한다. 둘 다 높다는 뜻인
'고'와 'High'를 쓴다. 대학은 무엇을 더 배우는 곳이 아니다. 만약 더 배우는
곳이었다면 Institute of 'More' Education이라 했을 테고 다증 교육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고등 교육은 초등, 중등 교육의 연장이 아니어야 한다.
  그런 높은 교육은 무엇인가? 답은 양적 개념을 떠나 질적 개념에서 찾아야 한다.
  첫째, 정보 시대에는 "무엇을 얼마큼 알고 있다."보다는 "왜 그런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개를 예로 들어보자. 학교에서 개에 대하여 배워 봤자
얼마나 알 수 있을 텐가. 그러나 개라는 단어를 좇아 인터넷에 들어가면 무려
2289개의 웹 사이트가 있다. 흰 세퍼드라고 좀더 세분해서 찾아봐도 1, 2초 안에
무려 18권의 내용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준다. 세계의 개 전문가, 생물학자,
애견가들이 모은 방대한 지식을 순식간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는가. 그러니
대학에서는 정보보다는 정보 처리 능력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둘째, 정보 시대에서 '무엇'을 배울 때 그 '무엇' 자체에는 평균적으로 큰 가치가
없다. 물론 과목에 따라 많이 다르긴 하지만 공학의 경우, 배운 내용의 절반쯤이
졸업할 무렵엔 쓸모 없어져서 물이 간 생선같이 된다고 한다. 마치 전기 진공관에
대해 열심히 배우는 사이 세상은 전자 회로관으로 완전히 대치되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지식 자체에 중점을 두는 것보다는 지식에서 가치를 끌어내는
능력에다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지식이란 단어가 정보란 단어와 어울리면서 서로의 개념이 매우 애매해졌기
때문에 위에 적힌 말이 혼동만 일으킬 수 있겠다. 요점은 만물박사들을 교육하려면
'더 많은 내용 가르치기' 위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정보와 지식의 공간을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도록
사고력, 분별력, 종합력, 판단력 등의 정보 처리 능력을 우선적으로 길러 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수님의 지도 '아래'가 아니고 '받침 위'에서 실력 발휘할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지금은 창고 주인에서 예술가로 변신해야 할 때

  한국 아이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정말로 방대하다. "태정태세문단세^5,5,5^"는
한국 왕들이니까 그렇다 하지만 나폴레옹, 알렉산더, 한니발, 시저 등 세계적으로
모르는 영웅이 없고 워싱턴, 링컨, 투르먼, 루스벨트 같은 미국 대통령 이름을
미국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초, 중,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많은 지식을 가르쳐 주고 배우기를
강요한다. 국어, 산수, 자연, 사회, 음악, 미술 등의 기본 과목에서 시작, 고등학교
때는 스무 과목이 넘는다. 그래서 한국 학생들은 잡동사니 지식의 주인같이 되어
버린다. 자기는 별로 쓰지 않으면서 차곡차곡 지니고 있다가 누가 요구하면 꺼내
주는 지식 창고 주인 말이다.
  문제는 지식을 요구하는 그 '누구'는 선생님이고, 요구되는 상황은 교실 안의 시험
기간이라는 것. 지식에 대한 인식이 시험 준비에서 시작하고 시험 점수에서 끝난다.
지식은 과목별로 단정하게 구분되고 정돈되어 있다. 그리고 지식은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고 되새길 필요도 없는 단지 달달 외워 머리 속에 넣어 두는 내용일
뿐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는 모차르트의 심포니를 연상하는 살리에리가 나온다. 귀에
들리지 않는 음악을 스스로 머리 속에서 '그려' 본다. 피콜로 음 하나가 하늘을
너풀너풀 나는 나비처럼 가볍게 흘러나오다가 저 멀리 천사의 오보에 소리와 짝을
맞추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눈앞에 유령같이 '보이는' 음악 소리에 가슴이 벅차
오름을 느낀다. 한국 학생들은 음악 시간에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무언가를 느낄 새도 없이 이것은 "무슨 무슨 교향곡 몇 악장이다."를
외우기 바쁘다.
  천재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할 수도 있겠다.
음악의 천재성을 구분해 내는 귀는 주면서 그런 음악을 창조해 낼 수 있는 능력은
안 주신 하느님을 저주했던 살리에리는 마침내 미쳐 버리지 않았던가. 살리에리의
비통함과 비참함을 느낄 수 없게 만드는 지식 위주의 음악 교육이 차라리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너무 심하게 비꼬지는 않겠다. 나는 사실 음치의 삼 원칙을 고스란히 이행하는
사람이다. 음절 조정을 못할 뿐더러 가사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지만 꼭 이 절 삼
절을 다 불러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나는 주제 파악을 하기 때문에 노래방에
가서는 굳이 사양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꼭 막무가내로 떠미는 사람이 있다.
사양하고 사양하다가 분위기가 깨질 정도가 되면 할 수 없이 나가 부르지만, 내
노래 실력은 날 떠민 사람이 민망한 나머지 내 얼굴을 쳐다보지 못할 정도다.
  내가 노래를 못 불러서인지 한국 사람들처럼 전 국민이 가수처럼 노래를 잘
부르는 걸 보다 보면 그것이 여간 수수께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
뛰어난 노래 실력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가가 매우 궁금했다. 물론 고대 중국에까지
벌써 한국인이 춤과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기로 유명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의 실력은 역시 학원 다니면서 "우리 유치원^5,5,5^" 하고 매일
불러 댄 기본에서 오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수많은 수업 내용을 마치 노래 부르듯 하지 않았나.
"태정태세문단세^5,5,5^" 노래 부르듯 달달 외워 차곡차곡 쌓아 놓은 지식들은 지식
차고 안에서 아깝게도 썩어 없어진다. 이제 그만 학생들을 창고 주인 노릇에서
벗어나게 해주자. 그리고 그 안의 잡동사니들을 연결하여 가치 있는 물건으로
창조해 내는 예술가로 키워 주자.
  대학에서는 "태정태세문단세^5,5,5^"의 태가 태조에서 불교, 유교, 출가외인,
남존여비를 거쳐 낙태로 연결되기도 하는 연계성, 의문성, 종합성, 판단성의 교육을
해야 하겠다. 역사는 날짜와 이름의 나열이 아니고 종교, 철학, 미학, 사회학,
인류학, 생물학, 심리학, 미래학 들로 연관되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나가야 한다.
이제는 공자 왈 맹자 왈 하면서 세상의 온갖 성인 군자의 말씀을 달달 읊는다고
양반 행세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정보 시대의 양반은 지식 소지자가 아니고
지식 생산자다.
    자식 둔 죄인 해방되다.

  효. 늙은 노인을 업고 있는 자. 상감오륜 중에서도 충과 더불어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 효. 예전엔 불로초 산삼을 캐어다 부모님 봉양하기도 한 효. 지금은 불사조
고삼이 대입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효.
  미국 상놈이 다 되어 버린 내가 효 사상을 논하기는 계면쩍지만 그래도 입으로
벌어먹는 교수다 보니 한 마디 하고 싶은 충동을 비껴 가기 힘들다. 특히 노인들을
폐품같이 여기는 미국 사회의 깊숙한 속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리고 나는 효와 매일 만난다. 추상적 효가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가슴을 아프게도 하는 살아 있는 효를 알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나를
꾸짖는 효와 자주 만나게 된다.
  효에 대한 옛날 이야기가 하나 있다. 대감이 집안에 들어서면서 일부러 다리를
절뚝거린다. 할머니는 "얘야, 어디 다쳤냐?" 하고 아들을 걱정한다. 대감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머니." 하고 안심시켜 드린다. 평생 자식 걱정으로 살아왔던
어머니께 소일거리를 하나 마련해 주려는 배려다.
  이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고 나는 크게 깨우쳤다. 효라는 게 꼭 비행기를 태워
드리는 것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감 흉내내기는 그리 힘들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걱정거리 만들어 내는 데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던 나 아니던가.
  그러나 불효도 천성인 모양인지 대감 흉내내기가 쉽지 않다. 별 시시콜콜한
걱정을 다 하시는 어머니를 대하는 순간 짜증이 먼저 솟는다. 구멍 난 양말 벗어라.
와이셔츠 갈아입어라. 비타민은 먹느냐. 버스 토큰 주랴? 그냥 예, 예 하면
어머니께서 기뻐하실 텐데 소갈머리 없는 나는 픽픽거린다. 그러면 어느새 효라는
놈이 날아와서 나를 또다시 꾸짖는다.
  사실 나는 부모님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입시 근심을 한 번도 치르지 않게
해 드린 보기 드문 효자다. 이제까지 우리 나라 교육의 가장 큰 피해자는 크게 셋이
아니었더냐. 학부모, 여자, 고졸(학생은 명목상 수혜자). 이 중 뭐니 뭐니 해도
학부모가 가장 오랫동안 고통을 감수한다. 소수의 승리를 위해 다수가 패배자가
되어야 하는 교육 체제 때문에 자녀가 공부를 잘해도 불안하고 못해도 낭패다. 돈과
시간과 마음 씀씀이도 헤아릴 수 없다. 그렇게 공부 잘하라고 온갖 공을 들여 키워
놓았더니 자기만 아는 천하의 에고이스트가 되어 버렸다고 한탄하는 부모도 많다.
그렇다고 경쟁에 져도 좋다 할 배짱도 없고. 이래저래 손해 보고 피해 본다.
  지금까지 이런 교육 체제가 유지되어 온 것은 다수를 획일화시키는 대량 생산식
산업 경제와 소수의 기득권자가 다수를 지배하는 피라미드식 사회 구조의 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산업 경제도 정보 경제로 바뀌고 사회 구조도 수평 구조로 바뀌고
있다. 재벌이 무너지고 대통령들도 줄줄이 감옥에 가는 것은 이런 변화의
전주곡이다.
  정보 시대에는 입시가 무의미해진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피해 보던 학부모들이
신나는 세상이 된다. 학부모는 참고서를 안 사 줘도 된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원하는 정보와 지식을 찾을 수 있게 되므로. 지식을 머리에 넣는 대신 활용하는
방식으로 학습이 이루어진다면 수업 시간이 줄어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도시락 세
개씩 싸 주려고 새벽잠을 설쳐 가며 아이들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도 소질만 잘 키워 주면 대학에 갈 수 있고 사회에 나가서도 할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과외 비용 대신 가족이 함께 여행, 운동,
오락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여유를 주는 것이 창의력에 좋다니 "노는 것도
공부다."라면서 부모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다. 그뿐 아니다. 자녀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쳐 달라고 하고 인터넷도 배운다. 아이는 어른의 어버이라든가. 집안도 수직
구조에서 수평 구조로 바뀌면 대화와 웃음도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한국 사람 모두가 효자 효녀가 되고 불효라는 엄청난
무게 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효자 효녀를 둔 부모는 기쁠 테고, 그 존재
자체가 효가 되는 자녀들은 항상 환하게 웃음을 머금고 있을 테니까.
    정보 시대가 여성들을 부른다.

  "메가트렌드" 저자 나이스비트에 따르면 21세기는 여러 면에서 여성에게
유리하고 여성 지도자가 많이 활약할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나에게
사형 선고같이 들렸다. 나는 어릴 적에 다섯 누이 틈에서 홀로, 외롭게 생존 투쟁을
하면서 자랐다. 누이들과 말로 다투어서 이겨 본 적이 없고, 그렇다해서 주먹질 한
번 제대로 해 볼 수도 없었다. 손찌검을 해 봤자 그 날 저녁 내 엉덩이에서 북 치는
소리가 날 것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 대 1로 붙은 다툼은 항상 1 대
2나 1 대 3으로 나에게 불리한 형세로 전개되어 버렸다. 누이들의 막강한 권세에서
이제 겨우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온 세상이 여성의 세상이 되어 버리다니^5,5,5^.
  사실 나는 나이비스트의 말에 수긍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 최 교수는 정보 시대가
여자들에게 아주 유리한 시대라고 한다. 예를 들면, 남자들이 축구 경기를 보느라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전화 벨이 울리는지 아기가 우는지도 모르고 화면의
공만 뒤쫓고 있는 반면 아내는 한 손으로 아기를 어르고 한 손으로 전화를 받고
텔레비전도 가끔씩 봐 가면서 발로 걸레질하는데 왜 그럴까?(더 정확한 질문은 "왜
꼭 그럴까?"이다.)
  답은 원시인이 살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냥을 담당하던 남자
원시인들은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는 데 강해야 한다("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다
하나도 못 잡는다." 라는 속담은 아마 그 때부터 유행했으리라). 그러나 여자
원시인은 큰 아이의 손을 잡고 작은 아기는 업고 먹을 과실을 찾아가며 뱀이 있나도
살펴야 했다. 그래서 여자들은 원래 동시다발적 행동에 강해졌다고 한다. 진화
인류학자들이 내놓은 설명이다. 동시다발적 능력은 정보화 시대에 절대 필수다.
정보는 한 곳에서만 들어오지도 한 곳으로만 나가지도 않는다. 전화 받으면서
컴퓨터 보고 신문까지 훑어보기에는 여자가 더 적격이다. 직업이 많아진 만큼
동시다발적으로 일할 기회도 많아졌다. 전여옥 씨는 작가며, 방송인이며, 아기
엄마이고 사업가다. 남자들은 사회 활동하면 아이는 못 보는 줄 안다. 두뇌 활동이
동시다발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업 시대의 수직 구조는 남성 체질이다. 남자들은 원래 어릴 때부터 서넛만
모여도 대장을 뽑고 졸개가 정해지는 서열 체제로 논다는 연구도 있다. 여자들은
수평 구조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여자들 사이에선 남보다 잘난 여자보다는 남을 잘
도와 주는 여자가 인기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여자들은 정보 서비스업에 더
적합하다.
  여성 시대를 두려워하는 나마저 수긍이 가는 일이니 끝도 한도 없는 예를 더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교육 체제 속의 여자들은
어떠한가이다.
  한국의 여자들은 대학에 안 가면 재미없는 인생만 펼쳐질 것 같아 우선 죽기
살기로 대학에 들어가려 한다. 입학 후 느끼게 되는 의기양양함도 잠깐, 취업과
결혼이 마치 양자 택일처럼 눈앞에 가로 놓인다.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남학생에 비해 여자는 인생의 반쪽만 사라는 것 같아 억울하다.
그나마 취직할 실력을 갖추었어도 여자라고 안 뽑아 준다. 결혼하면 그나마 영영
취직을 못할까 봐 이것도 저것도 확신이 서지 않은 채 졸업을 맞는다. 도무지 여성
시대의 주인 같지 않은 모습이다.
  남존여비, 칠거지악이란 말이 생활에서 사라진 지 오래고 출가외인이란 말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나 들어 볼까 하는 말이 되었다. 여대생들은 자신이 받는
교육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는 시대가 왔다. 그 값을 너무 헐값으로 책정하지
말자.
  여대생은 남학생을 향해 미소를 보내자. 미끼 던지는 식도 좋지만 두고보자는
식의 자신감을 실은 미소도 매력적이다. 자신감의 미소는 동시다발적이라서 건강한
치아에 호감을 느끼는 남자와 인간의 능력을 존중하는 남자를 동시에 끌어올린다.
연애도 하고 직업도 가지고^5,5,5^ 과히 여성 시대로구나.
    창의력은 학벌순이 아니다.

  나는 대학 다닐 적에 육체 노동을 해 본 경험이 많다. 설거지하는 식당 일부터
시작해서 버스 보이, 웨이터, 햄버거 쿡까지 골고루 다 해봤다. 그 이외에도 옷가게
종업원, 페인트공, 정원사, 운전사 등 나름대로 경력이 화려하다.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문제 없이 해냈는데 그런 내가 두 손을 바짝 들어 버린 일이 하나 있다.
  시카고 서부에 있는 프린트 공장 일이었다. 기계에서 찍혀져 나오는 잡지를 한쪽
옆에다 옮겨 놓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손쉬운 일이었다. 어두컴컴한 내부, 먼지와
소음은 그런 대로 버텨낼 수 있었다. 특히 플레이보이 잡지 한가운데 사진을
찍어내는 기계를 맡았기 때문에 노동일치고는 '고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기계 옆에 서서 기계처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은 죽어도 못할 노릇이어서 단
하루만에 집어쳐 버리고 말았다.
  공장, 사람마저 기계화시키는 산업화의 심장부, 대학을 못 간 사람들의 대다수를
기다리고 있는 공장, 몇 년만 일하면 사람을 골병 들게 하는 공장, 마치 생사람 잡는
제물상이 놓인 잉카 제국의 피라미드를 상상케 한다. 그렇다. 공장은 산업 시대의
제물상이고 피라미드인 것이다.
  나는 외아들이기 때문에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미국서도 '깡촌'인 대학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제수용품을 일일이 마련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혼자
제사상 차리느라고 끙끙대는 아내를 보면 화가 난다. 누굴 위해 상을 차리느라고
저렇게 고생해야 하나? 그래, 그래. 설사 영혼이 없어 선친과 조상님께서
음복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 년에 몇 번씩 정해진 날 친지가 함께 모여 우애를
다지는 것은 훌륭한 관습이 아닌가. 그리고 차례대로 절을 올리면서 집안의 어른과
서열, 그에 따른 집안의 질서를 확인해 두는 것도 필요한 일이어라.
  제사상 차린 후 녹초가 되어 버리는 아내는 그나마 조상에게 예쁘게 보인 덕으로
복을 바랄 수 있다 치자. 그러나 공장에서 돌아와 허물어지는 노동자들은 누가
이쁘다 해주고 누구한테서 복을 받을 것인가. 고졸이나 중퇴는 대학 교육의
피해자들이다. 대학에 못 갔든 가기 싫어 안 갔든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은 늘
열등감과 패배감을 느낀다. 취업, 임금, 승진 등에서 차별 받는 것은 물론 결혼 때도
평가절하 당할 것을 감수해야 한다. 선을 볼 때 대학 나왔다고 속여서라도 원하는
사람과 혼인하고 보겠다는 사람도 생긴다. 사람을 보기 전에 학력을 먼저 따지고
드니 할 수 없다고. 어딜 가나 사람 대접 못 받는 것 같아 억울하다.
  그러나 새 시대는 고졸 학력자들도 기쁜 마음으로,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다. 새 시대는 아이큐와 수능 점수 같은 분석적 두뇌의 한계를 절감하는
세상이다. 현실 감각과 이론을 초월하는 직관, 직감, 산 체험이 중시되고 높은
대가를 받는 세상이다. 한국식 교육 테두리 안에서 대졸은 구태 의연한 논리와 달달
외운 구식 지식에 얽매여 신선한 창의력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고졸과
중퇴자들은 현실력, 창의력 면에서 대졸자보다 더 우위에 있을 수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다.
  직공은 직관과 직감을 발휘하여 한국의 재건에 공을 세우는 직공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그 대가로 직공들이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대학과 전문대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꼭 학위를 얻기 위해 4 년간을 꼬박꼬박 다니는 학생만
학생인가. 자기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자아실현을 위해서 수시로 들락거릴 수
있도록 대학을 열어야 한다. 그래서 직공들이 기쁜 마음으로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주자.(이왕 제사 이야기 나왔으니 내가 궁금해하던 것 하나
물어 보자. 미국서 제사 지낼 때는 한국 날짜와 시간에 맞춰야 하는가 아니면 현지
시간에 맞춰야 하는가? 가령 시제를 지내려고 할 때 미국의 정월 초하룻날이면
한국은 이미 초이튿날이 되어 버린다. 여태껏 조상님들을 굶기지 않았는가
걱정된다.
    학교는 창경궁이 되어야 한다.

  초등학교 다닐 때 가 본 창경궁은 나를 참 즐겁게 해주는 곳이었다. 특히 원숭이
앞에서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재미있어 했다. 아찔하게 높은 허공을 나뭇가지
사이로 날아 다니는 듯한 곡예, 여러 놈들이 한데 엉겨 붙어 치는 장난, 또 늠름한
사자와 호랑이를 보고 있노라면 그 놈들의 '기'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그 기운을 전해
받은 나마저 특출한 존재가 된 듯한 착각에 뿌듯함을 맛보기도 했다.
  동물들이 이사 가고 본래 모습을 되찾은 창경궁을 아쉽게도 아직까지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예전 모습을 되찾은 경복궁과 그 뒤로
시원하게 펼쳐진 북한산은 복원된 창경궁과 멋진 조화를 이루리라고 기대해 본다.
  나는 학교가 창경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경궁이란 말 그대로처럼 '기쁘게
하는 곳'이길 바란다. 유치원에는 천진난만함이 있고, 초등학교에는 자유로움과
발랄함, 중학교에는 개성과 어울림이 피어나고, 고등학교에는 다양한 생각이 싹트고,
그리고 대학은 원숭이가 곡예 하듯이 신비로운 이론, 아이디어와 아이디어의 어울림,
멋진 대결이 학생과 교수를 즐겁게 해주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국의 학교에서 본 원숭이는 나를 즐겁게 해주지는 못했다. 아찔하게
높은 나뭇가지에서 자신 만만한 곡예를 하지 않고 불안해하면서 그저 남의 흉내만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다들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전문인 기계공학 교과정은
서울대 교과정과 전국 대학이 똑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서울대에서 교과서를
바꾸면 또 전국 대학들도 다 따라서 바꾼다 한다.
  분명 상당히 과장된 말이었거나 얼마 전까지는 그랬었다고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그 말 속에 뼈가 있다. 스스로 새로움과 변화를 주도하지 않고 그저 선두를
모방하려고 하는 안이한 태도는 지난 30--40 년간 한국의 거의 모든 방면에서 줄곧
보아 오지 않았나. 학교라고 예외는 아니리라. 한국이 정보화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대학이 아이디어를 존중하고 아이디어 맨을 기쁘게 해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나는 얼마 전에 드디어 '기'를 세워 주는 사자를 만났다. 지난 11월 경주에서 열린
공대 학장들 모임에서 포항 공대 장수영 총장님께서 강연 도중 자료 하나를
소개하시면서 "이것은 조벽 교수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라고 밝히시는 것이
아닌가. 아이디어의 원천지를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리 하시는 총장님은
그만큼 아이디어의 창의성을 높게 평가하신 것이다. 정보화 시대는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지적 재산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보호해 주는 환경에서 성장한다.
  나는 그래 주신 총장님이 고맙다. 작년 2월에 포항 공대에서 장시간 동안
세미나를 했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꼬박 들어 주신 것도 고맙고, 저녁 식사 후에
댁으로 가서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모님께서 직접 차와 과일을 내주신
것도 고마웠다. 그러나 내가 제일 고마워하는 일은 역시 나의 '기'를 세워 주셨다는
그 사실이다.
  한국 학교가 학생과 교직원을 기쁘게 해주는 창경궁이 되었으면 좋겠다.
    교육의 장에도 패자 부활전은 필요하다.

  어두웠던 작년 한 해, 축구는 우리를 무척 즐겁게 해주었다. 온 세계인이 열광하는
축구. 느긋하게 전개되다가 느닷없이 터지는 슛이 보는 사람을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 광야를 달리는 말 같은 선수들의 신선한 육체미가 여성 팬을 홀리는
것일까? 아니다. 슛이 터지지 않고 선수가 뛰지 않는데도 흥분하고 소리를 질러
대며 응원하는 관중의 모습은 내림굿 받는 처녀 무당이 무색해질 정도가 아닌가.
  나도 스포츠를 꽤 좋아해서 시간만 나면 이것저것 다 보는데 축구의 매력은
참말로 유별나다. 온 세계인이 하나같이 열광하는 스포츠라면 분명 그 시대에
걸맞은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테니스를 보자. 넓고 잘 다듬어진 구장에 두 명 혹은 네 명만이 참가할 수 있다.
땅 부자나 귀족들만 즐길 수 있었던 스포츠였다. 가난했던 서민은 식탁위에다
줄긋고 조그만 공을 톡탁거리면서 테니스를 흉내 내었다. 그것이 바로 탁구(table
tennis)다. 그렇게 보면 테니스는 농경 시대에 걸맞은 스포츠가 아닌가 싶다.
  피겨 스케이팅을 보자. 한여름에도 냉동 기계를 돌려 얼음판을 만들고,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자면 실내 링크를 전세 내어야 한다. 돈이 보통 많이 드는 스포츠가
아니다. 더욱이 속옷 차림으로 다리를 치켜들고 묘기를 부리지 않는가. 재력과 기계,
상품화된 섹스. 산업화 시대의 대표적인 스포츠라고 생각된다.
  비슷한 공놀이와 팀 게임인 농구나 배구와 비교해 보자. 농구 선수는 자주 있는
작전 타임과 사이드 라인에서 외쳐 대는 코치의 작전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웬 규칙은 그리도 많은가. 심판의 호루라기가 쉴 시간이 없을 정도다. 점수도 일 점,
이 점, 삼 점짜리가 있다. 그리고 높은 점수가 나오는 게임이다.
  배구는 삼세 번이라는 리듬에 따라 센터가 공을 받쳐 주고 지정된 공격수가 공을
때리는 게임이다. 소위 세트 플레이라고 하는 미리 정해 놓은 작전을 정확히
이행하는 것이다. 공이 허공에 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치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는다. 배구의 득점 중 절반 정도는 상대의 실책으로 얻게 된다. 그래서
실수한 선수는 코치를 향하여 머리를 조아린다. 기계적으로 이미 정해진 궤도를
달려야 하므로 개인의 쇼맨십이 돋보이는 게임이 아니다.
  축구는 어떠한가. 넓은 잔디밭이 필요 없다. 축구공이 따로 없다. 우유팩을
쭈그러뜨리고 책상 걸상만 옆으로 치우면 교실 안에서도 할 수 있다. 단 사람만
여럿 모이면 된다. 작전도 필요하고 세트 플레이 연습도 해야 하지만 일단 경기가
시작되면 선수들이 그때그때 알아서 경기를 풀어 나간다. 그리고 실수가 반드시
득점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어서인지 선수들은 느긋하고 생각할 여유도 갖고
있는 것 같다.
  공은 앞으로만 나가지 않는다. 옆으로도, 뒤로도 찰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선수가
공을 차 보게 된다. 선수들도 가지각색이다. 발이 빠른 선수, 주행 범위가 넓은
선수, 게임 센스가 있는 선수, 손재주 있는 골키퍼 등등. 모두가 각자의 다양한
재능과 능력을 발휘한다.
  득점은 양팀 다 합쳐서 이삼 점이면 만족스럽다. 그리고 축구의 슛은 꼭 공격수가
터뜨리란 법이 없다. 아무나 어느 때고 어디에서라고 슛을 날린다. 공이 요술을
부리듯 휘어져 날아가서 골대에 꽂히는 모습은 상상을 초월한다. 발에서 튀겨 나간
공이 머리에서 머리로 연결되는 헤딩 슛은 두 번 만들 수 없을 유일한 창작품이다.
이렇게 보니 축구야말로 새 시대의 특징이 골고루 담겨 있는 스포츠가 아닌가.
  그러나 축구에 매료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패자 부활전. 축구는 한 번 졌다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두 번 져도 우승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축구
관전에서는 끝까지 희망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선수들은 끝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선수들이 경기에 졌어도 '장하다'고 칭찬하고 등을
툭툭 쳐 준다.
  아,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도 모자라 대입에 떨어진 고3에게 '장하다'며 칭찬하고
격려해 주는가. 손으로 등을 툭툭 쳐 주는 대신 몽둥이로 패지나 않는지. 입시에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있다고 혹시 '재수'를 주장하실 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재수는 축구의 패자 부활전과 질적으로 다르다. 패자 부활전은 우승으로
가는 길에 걸림돌을 만나 약간 돌아가는 다른 길이다. 그러나 재수는 대학으로 가는
언덕길을 올라가다 미끄러진 다음, 같은 언덕에 또다시 도전하는 반복이다. 한국에서
축구식 패자 부활전의 혜택을 받고 있는 집단은 재수(다시 재, 닦을 수)생이 아니고
정치 재수(있을 재, 가둘 수)인이 아닌가 싶다.
  배운 내용과 과정을 반복하는 재수생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재수(있을 재, 가들 수)인이나 제자리걸음을 해야지,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녀도
부족할 어린 청소년을 제자리걸음을 시키는 것은 잔인한 벌이다. 고3이 만족해하고
즐거워할 교육이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만일 교육이 축구와 같을 수만
있다면^5,5,5^?
    내 본분은 내가 창조한다.

  한 십 년 전에 한국을 방문하던 중에 어떻게 하다 보니 친구가 데이트를 하는
데에 끼여들게 되었다. 나는 그 당시 이미 관혼상제를 두루 치른 어른이었고 친구는
겨우 댕기풀이나 한 정도였다. 아마 그래서 아가씨에 대한 내 '고견'을 듣고자 나를
곱살 끼운 모양이었다. 어쨌든 셋이 길을 가다가 손자뻘 되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구걸하는 어떤 할머니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나는 가을 바람에
떨고 있는 어린애가 애처로워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몇 개 집어 줬다. 그랬더니
대뜸 아가씨 입에서 한 마디가 무심히 흘러나왔다. "사람은 다 본분이 있어요."
  본분? 사람이 저마다 갖는 본디의 신분이라. 거지는 거지가 본분일 테니 도와줘
봤자 말짱 헛일이라는 말이다. 그럼 자기가 대학 나오고 야들야들한 원피스에다
'뾰족구두' 신고 나들이하는 것도 본분이란 말이지 않은가. 자기야말로
불로소득하기는 거지나 마찬가지 아닌가. 진정 주제 파악 못하고 있는 사람은
아가씨였다. 나는 이 아가씨가 현재 내 친구의 아내가 아닌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본분에 대한 좋은 예가 또 있다. 테레사 수녀와 다이애나 비가 일 주일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다이애나 비는 훤칠하고 매끈한 몸매를 초호화 패션과 황홀한 보석으로 치장한
귀족이었다. 그 반대로 테레사 수녀는 보잘것없이 조그마한 체구에 깊게 파인
주름살이 얼굴을 치장한 천민이었다. 서로의 본분은 천지 차이였지만 두 여인의
죽음은 제각기 다른 의미에서 온 세상의 수많은 사람을 울게했다.
  성녀 다이애나는 전 세계의 세력자와 재벌들과 어울리면서 모은 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선 사업을 했다. 성녀 테레사의 자선사업은 불치병
환자들에게 사랑을 주는 베풂의 정신이었다. 비록 방법은 달랐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었다는 결과는 비슷하다. 본분이 중요한 세상이 아니다. 결과가
중요한 새 시대가 왔다.
  나는 한때 술집 종업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 돈 버는 방법을 따지자면 손 내밀고
구걸하는 거지보다 술병 내밀고 돈을 걷어 가는 술집 종업원이 더 비참한 노릇일
수도 있다. 그 때 내가 "너는 술병 나르는 것이 네 본분이다." 하고 못 박아
버렸더라면 어찌 됐을까.
  나에게는 나의 본분을 가르쳐 주는 상패가 하나 있다. 내가 여태껏 받은 많은
상패는 다 지하 서재에 있는데 그것 하나만 거실에 걸어 놓고 매일 쳐다본다. 평생
처음으로 받은 상패이고 전혀 꾸밈없는 유일한 상패다.
  나는 대학교 일 학년 때 학교 식당에서 아이스크림을 퍼 주는 일을 했다. 여름
방학 동안 대학에 연수 왔던 초등 학생들이 식후 먹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연수가
끝나고 돌아가면서 아이들은 나한테 조그만 편지 한 장을 적어 주고 갔다. 아홉
아이가 서명한 편지 내용은 대충 이렇다. "항상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면서 우리를
대해 주셔서 즐거웠습니다. 우리한테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고 늦게 와도 싫은
눈치를 안 보이고, 우리가 꼭 원하는 아이스크림을 떠 줘서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이 글은 나의 철학이 되어 버렸다. 나는 나의 본분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본분인 양 최선을 다하곤 한다. 나는 본분을 창조해 나간다.
고졸일 때에는 고졸답게, 대졸이면 대졸다운 일을 해내려 매 순간마다 열심히
일했다. 그래야 본분을 얻는 것일 테니까.
    6. 한국인이 반드시 일어설 수밖에 없는 7가지 이유

    생각만 바꾸면 충분히 힘이 되는 교육열

  가히, 교육열에 있어서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나라다. 언젠가
늦가을에 한국을 방문했다가 미국에 돌아가서 미국인 동료에게 11월에 서울에서 본
광경을 들려 주었다.
  "한국에 가니까 어느 날 전국적으로 비행기를 일제히 이착륙 못하게 하더라.
자동차도 천천히, 조용히 다니고 빵빵 소리도 못 내게 하고. 전 국민의 아침 출근
시각을 두어 시간 늦추더라. 증권 시장마저도 30분 늦게 시작하고. 그러나 버스와
전철, 택시 등은 총동원인데 무장 군인인지 전경인지 트럭을 호위하고 다니더라.
경찰도 비상 사태인 듯하고, 거리 곳곳에서 부분적으로 통행을 금지하고, 병원의
구급 차량도 총동원하고^5,5,5^." 말을 끝내기도 전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미국
동료들은 한국에 무슨 전쟁이라도 났느냐? 쿠데타가 일어났느냐? 하고들 묻기에
바빴다.
  그렇다. 한국에서는 수능 시험이 치루어지는 입시 날이면 마치 전쟁을 치르듯이
온 나라가 긴장한다. 이런 교육열이 있었기에 한국이 '한강의 기적'이라는 산업화
신화를 이루어 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교육열은 단지 학교 성적,
학원 과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뭔가 배우려는 열의와
부지런함과 그 투자 행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하철을 타 보면 20 대부터 50 대까지 남녀가 귀에 이어폰을 꼽고 뭔가 열심히
듣는 모습을 자주 본다. 처음에는 노래를 듣는 줄 알았는데 대부분은 외국어 공부를
한다고 한다. 지난해 가을 우리 가족이 함께 전라남도 쪽으로 여행을 갔는데 완도
근처 마량이라는 아주 작은 항구 마을에도 시장 한 귀퉁이에 영어 학원이 있는 것을
보았다. 미국이나 유럽의 어느 시골 변두리에서 외국어 학원을 볼 수 있겠는가? 좀
과장인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한국인의 80% 이상이 모두 뭔가를 배우며
공부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97 년 한 해 동안 무려
6조원이나 되는 사교육비를 지출했다는 통계는 뭔가를 엄청나게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민족처럼 오랜 동안 교육에 대한 기본 존중심이 높았던
나라는 드물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배움을 숭상한 민족이다. 선비들은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나 배움이 부족한 것은 수치로 여겼다. 우리는
6,25 당시처럼 헐벗고 굶주릴 때조차도 으레 학교에는 가야하는 줄 알았다. 지금도
빈부 계층과 무관하게 자식 공부시키려는 나라는 선진국에서도 보기 드물고
후진국에서도 드물다. 우리 민족의 교육열은 한국 땅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유럽, 브라질 등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한국 교민들은 온갖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식들 교육만큼은 최선을 다한다.
  물론 한편에서는 새 시대에는 이런 교육열이 오히려 한국을 망치고 있다고들
한다. 모든 일에는 알맞은 수준, 알맞은 정도, 그리고 알맞은 때가 있는 법,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유별나게 지독하다 할 수 있을 우리의 교육열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그
조화에 금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밥을 짓기 위해서는 쌀에 물을 붓고 열을 가해야
한다. 그런데, 밥이 다 되었는데도 계속해서 가열하면, 잘되면 누룽지요, 잘못하면
타 버리고 만다.
  물적 자원보다 인적 자원이 단연 중요해질 세상. 세계 어느 나라보다 두뇌
'재배'에 주력해 온 우리의 그 열의는 다음 시대를 열게 할 추진력이 될 것이다. 그
불꽃 같은 열기를 창의력을 전환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일 뿐이다.
    한국인은 누구보다도 '퍼지'에 강하다.

  소련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해체되었을 무렵 국제 정치학자들은 21세기에는 과연
어느 나라가 세계를 지배할까를 논했다. 인구로는 중국이 최고지만 12억을 우선
배불리 먹인 뒤에야 세계를 간섭할 테니 아직 멀었다고 했다. 유럽은 통합하면 힘이
커질 수 있겠지만 성공적으로 활약하기까지에는 최소한 10 년, 20 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했고, 경제 대국이라던 일본은? 글세, 경제상으로는 세계의 돈을 모을지
모르지만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볼 때 세계인의 공감과 존경을 받을 만한 마땅한
대상이 없기 때문에 세계 지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미국이
남았다. 미국은 경제력도 크지만 세계인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자유주의, 개성주의,
인권주의, 개척 정신, 모험 정신 등 정신적 지도력을 겸비했기에 세계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는 결론이었다.
  만일 나한테 이 문제를 물어 보았다면 주저하지 않고 한국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여러 번 언급하지만 우리 나라는 너무나 많은 정신 유산을 지닌 나라이다.
  우리의 경쟁력은 자동차, 선박 등의 유형물에서뿐만 아니라 효 정신, 홍익인간
정신, 화랑도 정신, 선비 정신 등 무형 자산으로도 풍부하다. 그리고 우리 일상
생활에 배어 있는 가장 한국적인 정신들은 신기하게도 새 시대에 너무 잘 맞는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요즘은 퍼지 로직(fuzzy logic) 시대라고 한다. 이것은 원리 원칙보다 여러 상황을
두루두루 봐 가며 눈치 있게 적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산업화 교육에 몇 백
년을 길들여진 서양 사람들은 퍼지에 약하다. 맥줏집에 가서 "시원한 것으로 두서너
병 가져오라."라고 주문하면 서양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한다. 서양 논리에 따르면
무슨 맥주 몇 병을 시켜야 정확하다. 네 병 시키고 세 병만 마셔도 네 병 값을
계산해야 한다. 그래서 미리 따져본 뒤에 정확히 시킨다. 더워 죽겠는데 짜증스런
노릇이다.
  그래서 영어에는 두서넛이라는 복합 수 명사가 없다. 'two or three'이지
'twothreefour'라는 단어는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말도 많거니와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주문하면 종업원이 알아서 가지고 온다는 점이다. 얼마나 시원스런
서비스냐. 한국인은 놀라울 정도로 퍼지에 능숙하다.
  새 시대는 상반된 것이 공존하는 세상이라고 했다. 우리 생활에는 이런 것
천지다. 여닫이, 미닫이라는 한 단어 속에는 상반된 것이 함께 들어 있다. 하회탈은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좋아도 울고, 너무 기막혀도
허허 웃는다 .보자기도 포장지보다 용도가 다양하다. 필요할 때만 꺼내서 쓰고 접어
놓으면 감쪽같다. 선물을 포장하고 찢어 버리는 낭비가 없다. 아이디어처럼 쓰고 또
써도 늘 남아 있다. 쓸 때만 펴는 밥상, 이불과 요 같은 공감 활용적인 침실 용품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우리로선 두루뭉실, 얼렁뚱땅 넘기는 것 같아 치밀하고 정확한 서양 논리에 맞설
때마다 내심 스스로를 주눅들게 만들던 이러한 특성들이 새 시대에는 오히려 필요한
자질로 주목받게 될 것이다. 자신감을 갖자.
    한글이 갖고 있는 소비자 중심의 정신

  나는 미국인 손님이 우리 집에 오면 고리타분한 애국자라는 오해를 살 만큼
방문객들에게 열심히 한국의 창의성을 나열한다. 이순신 장군이 고안해 낸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 일본 함대를 무찌른 한산 대첩 이야기는 매번 해도
신난다. 누가 공대 출신 아니랄까 봐 석굴암의 기막힌 건조, 통풍 장치도
레퍼토리에서 빼놓지 않는다. 그리고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최초로 기재된 한글인
'온돌'의 열 효율성은 내가 열역학을 강의할 때마다 반드시 드는 예다.
  그러나 내가 제일 즐겨 말하는 것은 한글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한글이
우수하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다. 일본에 유학 가 있던 일제 말기
무렵, 한국어 말살 정책이 극도로 치닫던 때 아버지께서는 한국어,한글 보호 운동을
하다가 잡혀 시인 윤동주와 한 감옥에서 징역을 치르셨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한글에 대해 유달리 관심이 많았다.
  미국에서 대학 다닐 때 한국에서 온 대학원 유학생들에게 왜 한글이 우수한
글이냐고 물어 봐도 그냥 제일 과학적인 글이라는 설명 외에는 그다지 들은 게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대영 백과 사전을 뒤지다가 "It's one of the most
significant intellectual achievement of mankind." 라고 한글을 소개해 놓은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저 세계 최고의 글이겠거니라고 막연하게만 인식했었는데
"한글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적 업적 중에 하나이다."라고 높게 평가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글은 크게 네 종류로 나누어진다. 한자나 이집트 상형 문자와 같이 그림
위주로 된 글(표의문자), 그 다음으로 발전한 것이 일본글처럼 글자가 소리 하나를
나타내는 글(음절 문자), 그리고 세 번째가 자음과 모음을 구분하여 소리의 일부를
나타내는 글(알파벳), 그리고 네 번째는 일종의 알파벳이기는 한데 음절을 한 단위로
묶어 쓰는 한글이다.
  표의문자는 재미있다. 특히 사물의 모습에서 따 온 철학적 단어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의 슬기와 재치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그러나 한자의 경우 단어가 무려
40000개를 넘는다. 물론 천자문 정도만 배워도 웬만큼 배운 사람 행세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하늘 천 따지' 하면서 열심히 도전해 봤는데, 천자문
외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더라. 하지만 한글은 나같이 머리가 우둔한
사람마저 열흘이면 깨친다지 않는가. 작은 투자로 영구적인 효과를 보는 한글은
참으로 투자 가치가 높은 경제적인 글이다.
  대표적 음절 문자인 일본의 가나 문자는 기본으로 51 표기가 있고 후하게
쳐준다면 201소리까지 나타낼 수 있다. 그렇게 한정된 음에 익숙해진 일본인의
외국어 발음 또한 좋을 리 만무하다. 도대체 '다구시'(taxi, 택시)가 뭐냐.
'초코레토'(chocolate, 초콜릿)는 귀엽다 치자, 그런데 권투 중계 하면서
'아파카토'(uppercut) 하면, 어퍼컷의 산뜻하고 따끔한 맛은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여기에 비한다면 24개의 자모음으로 축소된 한글은 무려 8778 소리를 나타낼
수 있으니 상대가 안 된다.
  영어, 독어, 불어 등 알파벳은 기호가 일직선으로 나열되어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읽으면서 어디서 어디까지 끊어 발음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발음법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action이라는 단어는 분명
ac-tion(액^6,3^티온)이나 ac-ti-on(액^6,3^티온)으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는데도 ac-tion(액^6,3^션)으로 읽는 것처럼, 읽는 사람이 미리 배워 알아서 끊어
읽어야 한다. 그러나 한글을 미리 "액^6,3^션"이라고 한 음절을 한 글자로 묶어주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눈에 보이는 대로 읽으면 된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 그리고 그것을 붙여 읽는 법을 한 번 배워 놓으면 무궁무진한
조합을 한다 해도 무리 없이 다 읽을 수 있다. 한글은 읽는 사람 위주, 즉 소비자
위주의 글인 것이다. 소비자 중심의 시대인 새 시대와 그 정신을 같이하는 선진적인
글이다.
  이렇듯 한글의 창의성은 하나의 문자가 보유한 우수성의 정도를 넘어 창의성의
대명사로 생각할 정도이다. 그러니 이러한 지적 전통을 지닌 한국은 창의력의
대결인 새 시대에 벌써 한 발은 들여 놓은 셈이다. 나머지 한 발을 어떻게 내딛을
것인가는 그 정신을 실행에 옮기겠다는 우리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
    콩나물 국밥에 담긴 철학

  작년 11월 중순, 전북대에 들러 '교육의 커스터마이제이션(custom-ization)'에
대한 세미나를 했다. 세상이 대량 생산 체제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로 가듯,
교육도 학생들을 획일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과 재능, 인지
발달도와 학습 선호도를 고려한 개별적 교육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여건상 그렇게 학생들을 배려하기엔 아직 열악한 상황이므로, 한국은 대량 생산과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의 중간 지점을 한동안 고수해야 한다. 그런
매스커스터마이제이션(mass-customization) 교육 시스템의 핵심은 '학생 중심
교수법의 기술'을 지닌 교수다. 대강 이런 내용과 그 교수법에 관한 특강이었다.
  사실 커스터마이제이션이라는 개념이 교육에서는 조금 이질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설명을 듣고 이해했다 해도 뭔가 찜찜하고 개운하지 못하다. 특히 스승과 제자
사이라는, 유별나고 진득진득한 전통을 지니고 있는 한국에서는 더 소화하기 히든
내용일 수도 있다. 특강을 하면서도 항상 내 설명에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아쉬워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세미나 다음날은 아침 일찍 전남대로 떠날 예정이었다. 해 뜨기 전인데도 전북대
교수님 세 분께서 나와 주셔서 그 유명하다는 전주 콩나물 국밥집에서 아침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전주 시장 한복판에 자리 잡은 콩나물 국밥집이었다.
  주방장 아주머니께서 중앙에 서면 일곱이나 여덟 명 정도가 어깨를 맞대며 둥글게
앉을 수 있도록 된 조그만 포장마차 같은 곳이었다. 콩나물 국밥 한 가지만 하기
때문에 달리 주문을 할 필요도 없다.
  이 집의 콩나물 국밥이 남달리 맛있기로 유명한 이유는 아주머니께서 국밥 한
그릇 한 그릇을 만들 때마다 통마늘을 다지고 파를 썰어 넣기 때문이란다. 그만큼
싱싱한 재료를 쓰고, 또 그만큼 정성을 쏟는다는 얘기다.
  아주머니는 뚝딱뚝딱 하더니 국밥 한 그릇을 내 옆에 있던 교수님 앞을 내밀었다.
그 교수님은 손님을 대접한다고 그 국을 내 앞을 옮겨 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머니가 호통을 치면서 하는 말이, 손님 보고 손님에 맞게 국을 준비해 드렸으니
다른 손님 앞으로 옮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니, 콩나물 국밥을 손님에 따라
하나하나씩 다 다르게 만든단 말인가?!
  내 얼굴은 마르고 길쭉하니까 아마 좀더 살이 붙으라고 밥을 듬뿍 넣어 주신
것일까. 그 옆에 앉은 교수님은 키가 작아 보여서 콩나물을 조금 더 넣어 줬을까.
얼굴과 체격을 보고 식성과 분량을 맞춰 주는 솜씨가 마치 보약을 짓는 한의사
같았다.
  아하! 이것이 바로 매스커스터마이제이션이로다. 국물은 한 솥에서
꺼내더라도 양념만은 조금씩 다르게 쳐주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이다. 학생 한 명 한 명을 개별적으로 가르치자는 게 아니다. 그리고 학생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계속해서(재정상) 많은 학생을 한
방에 넣고 가르치자. 그러나 교수님들은 학생들을 척 보고 가끔 개별적 관심을 가져
주자. 학생들을 배려하는 교수. 그것이 시작의 기본이다.
  역시 등잔불 밑이 어둡구나. 신한국의 희망이 한국의 전통적 재래 시장 한복판에
있었을 줄이야. 그래, 멀리 창 밖을 볼 필요 없다. 우리 모두 거울을 보면 되리라.

    '대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대통'할 수 있다.

  최근 3 년 동안 미국의 미디어에 대거 발표된 소식은 한결같이 창피한
것들뿐이었다. IMF 사태 이전에 성수대교 붕괴로부터 시작하여 삼풍 백화점 붕괴,
대구의 도시 가스 폭발 등등.
  한국 자랑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해 오던 내가 아닌가. 게다가 IMF를 빼면
나머지는 모두 내 전문인 엔지니어링과 관계된 일이라 그런 소식을 접하고 나면
사람 만나기가 두려울 정도다.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놓고 자가 진단하길 한국인들의 잘못된 습성
즉, 일을 꼼꼼히 하지 않고 대충대충 하는 버릇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다고들 말한다. 어딜 가나 그 '대충'이 문제라고들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원래 그렇잖아. 일본 사람들을 봐. 대충이라는 게 없어.
그래서 일제 시대 때 지은 건물이 최근에 지은 건물보다 더 튼튼하다잖아." 물론
홧김에 그렇게 푸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동의 못한다. 그렇다면
석굴암은? 거북선은? 그리고 그 수많은 문화 유산들은 다 외국인들이 만들어 놓고
갔단 말인가? 대충대충 해치우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그렇듯 위대한
조형물들을 줄줄이 지어 놓을 수 있나 말이다.
  나는 나름대로 이러저러한 원인들을 짚어 보다가 한국인 스스로가 말하는 '대충'
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우선 그 뜻부터 명확히 해
보자는 생각에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대강 추려서'라는 뜻과 '다시 채운다(번갈 대,
채울 충)'는 의미, 이렇게 두 가지의 뜻풀이가 있었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대충'은 아마 첫 번째의 의미인 듯하다. 그러나 '대강 추려서' 한다는 게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는가. 전체를 보는 눈이 있어야만 대강이라도 추릴 수 있을
것인데. 그건 그만큼의 스케일을 가져야 만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의 뜻은 흔히 잘 안 쓰이는 것 같은데, 여기에 담긴 의미에 대해 말하고
싶다. 첫째, 일을 대충한다는 것은 하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는 무책임한 행동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일을 끝까지 다하고 나서 마무리 단계에 뭔가 더 한다는
적극적 행동을 나타낸다.
  둘째, 무엇으로 '다시 채우는가'. 나는 '비움'으로 채운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빵
한가운데를 동그란 구멍으로 채우면 도넛이 되듯, 비움이 첨가될 때는 전혀 다른
변형이 생겨난다. 결국 정리하자면, 무언가를 '대충'한다는 것은 일을 알뜰히 끝낸
다음에 여유를 두어 숨통을 틔어 준다는 뜻이 되겠다. 그렇게 보니 여태껏처럼 '일을
끝까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빈틈이나 허점'과는 정반대의 의미가 된다.
  나는 국문학자가 아니라서 요즘 한국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대충'이란
말이 둘 중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모른다. 혹시 첫 번째 뜻으로 써 왔다 해도
지금부터라도 '대충'을 숨통을 틔어 주자는 두 번째 뜻으로 인식했으면 좋겠다.
'대충'의 여유가 존재하는 곳에 '대통'의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다. 활짝 열린 창으로
시원한 공기를 맞아들이듯, 열린 사고와 열린 교육을 통해 만사를 대통시키자.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이룬 것과 마찬가지다.
    인터넷 시대는 한국적인 '빽'과 '줄'의 정신을 요구한다.

  언젠가 교육자 학회에서 정보화 시대의 특징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 도중에
미국에서는 벌써부터 텔레비전 채널 500개를 염두에 둔 소위 정보
고속도로(Information Super Highway)와 컴퓨터 정보망(네트워크)을 만들고
있는데 한국은 언제쯤이나 그런 네트워크를 구축하나 걱정하는 발언이 나왔다. 나는
불쑥 한국인은 혈연, 지연에 학연까지, 자신의 네트워크를 까는 데는 천재성을
지니고 있어서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백 그라운드를 챙기는 한국인을 비꼬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느라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대개 경제적 후진국들은 혈연과 지연으로 사회 조직망을 구축한다. 농경 시대의
잔재다. 인도네시아의 일가족 족벌 특권 체제가 지금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는 것도
이런 구시대 조직으로 현대 사회에서 버티려다가 결국은 다른 나라에까지 경제적
피해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에는 사람들이 핵가족으로 사방팔방 흩어지는 바람에 지연과 혈연은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대신 학연으로 조직망을 구축한다. 최고 학벌은 곧
권력과 재력으로 연결되므로 학연을 통하면 그 영향력을 더 강화시킬 수 있다.
선후배, 동창 연줄을 잘 잡아야 아쉬울 때 언제든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이다.
  정보화 시대의 네트워크는 어떠한가. 인터넷에 들어가면 아이디어와 의견과
느낌만 보인다. 무슨 옷을 입었는지, 어떤 집에 사는지, 직업은 뭐고 수입은
얼마인지, 나이는 몇인지, 고향은 어디고, 출신 학교는 어디인지 등등을 밝힐 필요가
없다. 서로 아이디어가 통하면 동지가 된다. 컴퓨터로 오가다가 만나고 싶어지면
'번개 미팅'도 한다. 인터넷은 동시다발적인 동시에 임의적인 관계망이며, 선택적,
개방적인 인간 관계망이다. 동창회는 그 학교 출신만으로 이루어진 폐쇄적, 배타적인
사회 조직망이지만 인터넷에는 그런 제한이 없다. 아는 것으로 통하기 때문에 세계
누구와라도 통할 수 있는 개방적, 포용적인 연결망인 것이다.
  지식 경쟁 시대에 지연(알 지,인연 연) 연결망이 많아진다는 것은 국력이 그만큼
커진다는 뜻도 된다. 정보화 시대의 선두를 달리는 미국은 혈연, 지연(땅 지,인연
연) 학연을 하나하나 끊어 버리고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두뇌와 두뇌의 연결망인
지연(알 지,인연 연)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극치로 다다른 개인주의로 인하여 미국
사회는 시한 폭탄을 안고 있다. 미혼모, 미국식 고려장, 비만증, 폭력성을 생각하면
오늘내일이라도 곧 무너져 내려앉을 것 같다. 내 생각으론 이 모든 것이 혈연,
지연을 끊은 채 살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다.
  한국이 고도의 산업화를 하면서도 사회 안정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혈연,
지연을 중요시하는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사상이 계속해서 정보화
시대의 파괴적 에너지에 중요한 균형을 이루어 줄 것이다. 배울 것은 지연(알
지,인연 연)이다. 우리가 혈연, 지연(땅 지,인연 연) 학연 위에 지연(알 지,인연
연)까지 갖추면 인터넷 시대에 걸맞은 막강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다. 그를 통해
무한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미국인과 일본인의 베풂은 제로섬, 한국인의 베풂은 시너지

  미국 사람들은 '고맙다'는 표현을 잘 쓴다. 구멍가게에 들러 물건을 하나 샀다고
치자. 가게 주인은 돈 받고 "고맙소.", 손님은 물건을 건네 받으며 "고맙소.",그리고
거스름돈이 있으면 받을 때 다시 "고맙소." 한다. 주인이 "안녕히 가시오." 하면
손님은 또 "고맙소." 한다. 싱거울 정도로 고맙다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걸 보고
어떤 한국 사람은 얼마나 좋은가, 서로를 존중해 주고 서로서로 기분 좋고, 역시
선진 사회다 한다.
  인사성 밝기로는 일본을 빼 놓을 수 있겠는가. 일본은 "아리가토"를 한두 번도
아니고 연거푸 연발한다. 그래도 혹시 못 들었을까 봐 말할 때마다 몸도 굽혀
보인다. 미국보다 한 술 더 뜬 멀티미디어적인 인사성이다.
  일본인의 인사성에 대해선 어릴 때 선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께서
일본에 유학하실 때 이야기다. 어느 아주머니가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가기에 마침
가는 방향이 같아 집까지 들어다 드렸더니, 그 아주머닌 여간 고마워하지 않으면서
보따리 안에서 과자 한 봉지를 꺼내 주었단다. 아버지께서는 그 보답에 감격하신
나머지, 집에 돌아가서 할머니께 그 얘길 전했다.
  그런데 할머니 말씀, 그 아주머니는 과자를 준 것으로 짐을 들어다 준 고마움을
완전히 갚았으니 아마 두 번 다시 그 베풂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데 만약
그이가 한국 사람이었더라면 고맙소와 잘 가시오, 머리 숙여 인사하곤 말없이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그 날 저녁 자녀들을 무릅에
앉히고 낮에 있었던 베풂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 다 옛이야기다. 이 바쁜 세상에 그런 하찮은 일까지 두고두고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나. 그때그때 깨끗하게 갚아 버리는 게 덜 피곤하지. 그리고 이 사람 많고
복잡한 세상에 언제 다시 고마운 사람을 마주치게 될 거라고 빚진 마음으로 산담.
  일본에서는 하나의 베풂이 또 하나의 베풂으로 무가 되어 버린다. 이렇듯 미국인,
일본인의 기본 정신은 제로섬(zero sum)이다.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정확한
로직(logic)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하나의 베풂이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전달되면서 무한정
확산되어 나간다. 한국의 기본 정신은 퍼지 로직이고 시너지(synergy)법칙이다.
제로섬은 이기는 승자 밑에 반드시 패자가 있는 윈루즈(win-lose) 게임이지만
"합은 각자의 합보다 클 수 있다."라는 시너지 법칙은 승자들만 있을 수 있는
윈윈(win-win) 게임, 모두 일등하는 게임이다.
  다가오는 미래는 윈윈을 지향하는 시대, 우리 한국인들이 맘껏 시너지를
이루어 내는 그런 세상이다.
    (닫는글)
  미래를 주도할 정신은 '조화'로부터 비롯된다.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큰 맘 먹고 '대영 백과 사전'과 60권짜리 전집인
'그레이트 북스'를 함께 구입했다.
  그레이트 북스는 서양의 지적 전통을 깡그리 분석해 놓은 광대한 해설집이다.
호머,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등을 거쳐 그리고 현재의 듀이, 러셀까지. 셰익스피어, 괴테, 톨스토이, 버나드
쇼, 카프카, 헤밍웨이의 작품들도 조사의 대상이다. 프톨레미, 뉴턴,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등 과학 계통의 지적 업적마저 광범위하게 다루고 그들의 저서들을
일일이 다 검토하여 제일 많이 토론되어 온 개념 102개를 골라 설명해 놓은 책이다.
  102개의 개념 중에는 신, 사랑, 행복, 진실, 자유, 미, 지혜 등이 거창한 것도
있고, 민주, 정부, 법, 시민, 식구 같은 정치 사회적 개념들도 있고, 우주, 물리, 언어,
지식, 무한대 등 실질적 용어도 들어 있다. 나는 그 책을 유심히 보다가 아주
재미나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 102가지 개념 중에 조화(harmony)라는
단어는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조화로움을 중요시해 왔다. 국기에도 조화의 상징인 태극을
그리지 않았던가. 만물의 조화를 나타내는 색동옷을 입지 않았던가. 아마 한국인의
지적 전통 중 102가지를 선별하려 한다면 그 첫 번째가 '조화'일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102 등 안에도 못 드는 개념이다. 이건 무슨 뜻일까. 혹시 여기에
한국의 희망이 있지 않을까?
  구시대는 정복의 시대다. 구약을 보면 신이 인간에게 자연을 정복하라고 한다.
그래서 서양의 역사는 정복을 향한 끝없는 투쟁으로 연결된다. 적자생존이라는
무자비한 철학이 자연의 법칙으로 승화하여 유럽인의 머리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느 한 부족이 주변의 다른 부족을 완전 정복하여 투쟁을 없앤 상태를 '평화'라고
여기는 사고는 그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서양의 유일한 평화적 시기인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로마 제국이 '천하'를 정복하고 군림할 때였다. 이렇듯
서양의 평화 개념은 정복의 결과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누르고 있어야
한다. 불안정한 상태다. 그래서 서양의 사고 방식이 세상을 지배하는 동안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 평화를 바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 세 명을 직접 만나 보는 행운을 얻었다. 베트남 전쟁의
종말을 지킨 헨리 키신저의 강연을 들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을 구한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데모에 참가했고, 중미의 전쟁을 중재한 코스타리타의
아리아스 대통령을 미시간 공대 관중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키신저는 악(악할 악, 폭탄투하) 쓰기를 조금 자제했다고 평화상을 받았다. 투투는
선과 악의 대립에서 선을 택했기 때문에 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아리아스는 악과
악의 싸움을 말렸다고 평화상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서양의 평화는 선과 악의 대립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을 두고 평화스러운 나라라고 말한다. 어느 나라 한 번 침략한 적 없는
나라라고 한다. 그 말은 타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고 방식을 뜻한다.
어떤 이는 일본이 한국을 삼킬 준비 작업으로 한국의 투쟁 정신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평화스러운 민족이라 치켜세운 데서 비롯된 게 아니냐고 비꼬기도 한다. 또
다른 이는 주변 나라들이 워낙 크고 힘이 세니까 침략할 능력이 없어 못했던 것이지
안 한 것이 아니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간에 한국인의 평화 개념은 공존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의 평화다. 경쟁하되 협력도 할 줄 아는 공존이다. 무자비한 정복 위주의 산업
시대에는 지키기 어려웠을 철학이지만 경쟁^5,23^협력 시대라고도 하는 새 시대에는
걸맞은 철학인 것이다.
  한국의 조화를 인간이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파악하지는
말자. 나는 그것이 수동적인 의미의 것이 아닌, 다양한 만물의 존재를 존중하고 열린
세상을 추구하자는 높은 수준의 철학이라고 본다.
  한국인의 이러한 정신이 세계화되어야만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다.
이렇게 탁월한 전통을 지닌 우리 민족이 얼마나 더 좋은 미덕과 정신력으로
앞으로의 세계를 이끌어 갈지 기대해 본다. 이런 전통과 자질이 있기 때문에 나는
한국의 교육이 조금만 바뀌어서, 한국인들의 자질을 키우는 쪽으로 힘이 모아진다면
엄청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꿈을 키우고 있다. 한국이 어서
빨리 경제적 안정을 되찾고 산업화로 잃어 가던 한국 본래의 정신과 정서와 능력을
되찾아 세계를 이끌게 되기를.
  의병들이여 일어나소서!
    (저자 약력)

    * 조벽
  조벽은 1956 년에 태어나 미국 위스콘신 대학 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노스웨스턴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미시간 공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대학 내 혁신센터 소장도 맡고 있다. 국내 활동으로는
한국공학기술학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1994 년 서울대 객원교수로 초청되면서
본격적인 국내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미시간 공대 혁신센터 소장을 역임하여 쌓은
개혁 노하우를 바탕으로 교육부와 서울대를 비롯한 26개 대학(경북대, 과기대,
덕성여대, 동국대, 명지대, 부산대, 서울산업대, 세종대, 아주대, 영남대, 인하대,
전남대, 전북대, 조선대, 충북대, 포항공대, 한기대 등)에서 초청강의를 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대학 개혁이 왜 중요한가 하면 그것은 한 나라를 지탱하는 지식
구조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의 교육 이데올로기가
바뀌어야 한국인의 생각이 바뀌고, 한국인의 생각이 바뀌어야 현재의 위기 상활을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힘이 나온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이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다.

    * 최성애
  최성애는 1956 년에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워싱턴 주에
있는 곤자가(Gonzkga)대학 심리학과 학부 과정을 이수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를, 시카고 대학의 인간발달학과(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생물학,
통계학을 통합한 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시간 주에 있는
수오미(Suomi)컬리지와 미시간 공대 사회학과에서 강의를 하다가 1997 년 한국에
돌아와 현재 덕성여대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사회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공저자
조벽 교수와는 부부 사이이다. 이 책에서는 조벽 교수가 혹시 놓칠 수 있는 사회학,
심리학적 관점을 잡아주는 데 주력했다. '인간발달학'이라는 통합 학문의 전공자답게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조벽 교수와는 공동 저술가로 활동할 계획이다.

  * 저자 조벽 교수는 1956 년에 태어나 서울에서 초등 교육을, 흑인의 나라
자메이카에서 영국식 중, 고등 교육을 받은 후 미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았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의 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노스웨스턴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대학과 버클리 대학의 로렌스 버클리 국립
연구소를 거쳐, 1988 년부터 현재까지 미시간 공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프린스턴대와 서울대 객원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연소공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으며
논문지 이외에 교과서로서 '환경을 위한 공학'과 '공학과 글쓰기'를 집필하고 있다.
  그는 미시간 공대 114 년 역사상 유일하게 최우수 교수상(Distinguished
Teaching Award)을 두 번 받는 영광을 차지했다. 1992 년에는 미시간 주 최우수
교수상(Distinguished Faculty Award)을, 1996 년에는 미국 전역을 통틀어 열
명에게만 주는 미국 공학교육학회의 교육자상(Outstanding Teaching Award)을
받았다. 이외에도 1990 년 미국과학재단(NSF)의 연구상(Research Initiation
Award), 1991 년 미국 공학교육학회 북서부 지역의 최우수 논문상(The Nikol
Award), 1995 년 미국 우수 공학도회의 우수 엔지니어상(Eminent Engineer) 등
미국 굴지의 교육상과 연구상을 두루 수상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미시간 공대는 미국 전역의 350개 공대 중 10번째로 큰 학교다. 그는 그곳에서
학생들의 창의력을 활성화시키는 혁신 센터(Innovation Center)와 학생들의 학업을
돕는 학습 센터(Learning Center)의 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시간
공대의 신임 교수 연수와 조교 트레이닝을 관장해 왔다. 국내 활동으로는
한국공학기술학회 상임 이사를 맡고 있다.

 


 

포스트 제어

| 메일 | 인쇄

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혼자걷는 이길을 - 이청담큰스님 법어록

        혼자걷는이길을
    지은이: 이청담큰스님 법어록
    출판사: 문예
  

  제1장 인생이 덧없을 때
  생의 외로운 오솔길
  길은 사람이 존재라는한 언제나  있다. 그러므로 그 길은 영원하다. 인간
의 정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완성이란 언제나 없다.  완성은 죽음뿐이다. 그
리고 그 죽음도 다만 전변에 지나지 않는다. 뜬구름과  같은 우리들의 생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을뿐이다. 그 길에 어느 때는 저토록  붉은 놀이 내리
고 눈이 덮이고  인간의 외로운 발자취가 남겨지리라. 그길은 나에게서  젊
음을 빼앗아갔다. 사랑을  빼앗아갔다. 이름과 성까지도 빼앗아 갔다.  그러
나 그 길은 더  많은 것을 주었고, 그 길은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요구하고
또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인간의 애착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생에 대한
애착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이 살기 위한 행동이며  또한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며 노동을 하는 것이 모두  먹고 입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부모의 몸에서 떨어져  나올 때부터 생을
영위하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생에 대한 애착은 욕망과  함께
생기는 것이므로 이 왕생을 누릴 바에는 보다 잘 살고 보다 오랫동안 살기
를 기도하게 된다. 남보다 잘 살려는 애착과 욕망  때문에 인간사회는 서로
반목과 질시가 따르게 되고 타락과 패륜이 계속된다. 물론  잘 살려는 욕망
이 선의의 경쟁으로  나타날 때는 사회의 질서와  도덕이 확립되는 가운데
사회의 발전이 있을 것이나 오늘날의 인간사회는 그와는 반대로 남이야 어
찌 되었든 자기 혼자만의 영락과 안일을 취하면 그만이라는 지극히 이기적
인 사상이 횡행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
다. 아무리 오래살고 보다 잘 살고 싶어도 인연이다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를 살았다고  하면 하루만큼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또한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생각하면 인간은 한조각 구름처럼 생
겼다가 홀연히  없어지는 존재다. 한평생 살아봐도  누구를 위해 살았는지,
나를 위해 살았는지  남을 위해 살았는지 까닭도  모르고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 바보가 되어 한강에 가자 하면 한강으로 가고, 창경원
에 가자 하면  창경원에 가고, 이리 가자 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 하면
저리 가고, 모두가 이런  식이다. 장사하는 사람도 다 그런식이고 정치하는
사람은 더하다. 흘러가는 물과  한가지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정처없이 그
저 흐르다가 바위에  부딪치면 툭치고 흙탕물이 되기도  했다가 또 거기서
뺑뺑 돌다 막 뒤집힌다. 한강물이 어떻게 흐르느냐 하면  여러 억만년 흐르
긴 흘러도 어떤 모양으로 흐르는 일정한 형태가 없다.  저쪽 모래에 부딪혀
모래를 뒤집고 흐르고  그러니 한강 물이 일정한 모양이 없다.  강원도에서
서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참 풍파도 많다. 강원도  오대산 산꼭대기 위
로 올라갔다 아래로 내려갔다  고기가 마셔버리기도 하고 사람이 받아먹기
도 하고 나무뿌리에 들어갔다 돌  뿌리에 들어갔다 또 수증기가 되어 올라
가는 놈 그 신세가 어찌될지는지 모른다. 우리 인간도  한평생 사는 신세가
어찌 될는지, 오늘은  오늘 생각하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고 그러니  서양철
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은 알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니까 그렇게 단정해버린 말에 불과하다.  곧
나는 없다는 소리와 한가지다.  허무한 인생이 물거무품 같다. 아무것도 아
니다. 그래도 나는 시집을 잘  갔느니 장가를 잘 갔느니 돈이 많으니 한다.
그렇지만 그게 어째서 제  돈이냐? 돈한테 이끌리는 것이다. 돈 일원에  구
속되고 저걸 누가 집어갈까 꾸어 달라면 어쩌나, 백만원  모아 놓으면 백만
장 만큼 생각이 많고 백억원 모아 놓으면 백억장이 낱낱이 사람을 눌러 밤
에 잠이 안오고  꿈에서까지 걱정이다. 그러니까 돈 많은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원수가 많아지고  친한 친구가 다 떨어지고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 독해진다. 권리가 높아도  높을수록 원수가 많고 고독해진다. 그러니 돈
도 모을 게 못되고  권리도 높을 게 아니다. 개 돼지소리  들으면서 모았다
가 나중에 죽을때는 (지금  죽을 줄 알았으면 마음이나 좋게 쓰고  죽을걸)
그렇게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러니까 일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 때문에  사
는 건지 그 까닭을  모른다. 꼭 흘러가는 물처럼 아무 까닭없이  부딪고 저
리 부딪치며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인간의 일평생을 백년이라  한다면 이 일평생을 흔히들 살아간다고  한다.
이 귀중한 한평생을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하고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단말
인가? 우리는 흔히 이런 문제들을 전혀 생각지 못한 사이에 머리엔 흰머리
카락이 얹어 있고 얼굴엔 주름살이 잡히고 있다. 만일  인간들이 이런 이유
를 모르고 그저  먹고 자고 성생활만을 지탱해  나간다면 이는 저금수들의
생활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
간다는 말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말이다. 가령 인간이  ○○년의 삶의 권리
를 가지고 와서 하루 살았다는 말은 곧 일년을  죽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우리가  농사짓고 장사하고
정치하고 경제하고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죽지 않으려는 것인데 그래도 죽
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 이는  참으로 비참한 사실이다. 또
권력 재력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일생을  따지고
보면 죽은 이라고  하는 큰 구렁이한테 뒷다리를  물려 들어가는 개구리의
운명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만일
한1천년만 살았으면 족하겠느냐고  물으면, 아니 좀더 한2천년만 살았으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요, 만족의 한도를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기간을  연장하여 1만년이나 만배의 기간을  살 수 있다 하여도
또 인간의 가수 상태가 아무리 장기간 가능하다 한들 유한계에서는 한도가
있게 마련이니 결국  종당에는 사멸을 모면할 도리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오직 육체가  나인줄 알고 물질 문명에서 참다운 자아를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파초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벗겨도 알맹이
는 없고 껍데기뿐이며 그러한 인간 사회는 아무 실상이  없다. 육체를 가지
고 (나)라 하는 뿌리가  박혀서 범부는 이것 때문에 고해를 헤매고  돌아다
니고 있다. 개나 돼지 그게 나라고 하여 남을 다 죽인다. 육체가 나라고 생
각하기 때문에 전생명  다 죽이고라도 나는 살려고 덤비는 것이다.  육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여기에서 온갖 생각을 다 내는 것이다.  왜 빈껍데기만 가
지고 사느냐,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하느냐, 가령 이성끼리 상종하는 것
을 보더라도 여자가 바람이 나면 오늘 저녁은 이런 남자한테 끌려 가고 내
일 저녁은  저런 남자한테 끌려 가고  그런 건 미친짓이다. 그런데  그것도
자꾸하면 또 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이 세상은 혼탁해질 수 밖에 없다. 물
질 문명만이 발달되고 성을 개방해 놓으면 인생이  고독해지고 허탈해진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도 없고 아껴줄 사람도 없는 신세가 되니 이유 없는 반
항과 욕구불만이 되어  자꾸 자살하는 것이다. 결국 물질문명은 인간의  행
복을 객관세계에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돼버린다. 나한테  본래
있는 행복이 정말 행복이다.  죽을 수 없는 마음을 깨쳐 얻어야  영원한 행
복이다. 불에 뛰어 들어도 안 죽고 칼로 쳐도 안  죽고 원자탄 다 퍼부어도
까딱없는 것, 그 자리에서  얻어진 것이 비로소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는 못됐다 하더라도  그런 원리를 알고 믿기라도 해야한다. 안심을  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까짓 돈 천만원 얻어놓고 안심할  수야 있는가. 바람
만 불어도 어느 놈이 담 안넘어오나 깜짝깜짝 놀라고,  불쌍한게 돈버는 재
미이다. 그러나 마음을  깨치면 정말 돈도 필요없고 의식주도 필요없고  생
사고도 아무 상관없는데 행복을 얻는다. 지구가 다 깨져도 나는 까딱 없다.
마음을 깨쳐 놓으면 지옥을 가서  가름 가마에 집어 넣어도 거기가 극락이
된다. 그 자리는 뜨겁고 찬 것도 없고 마음대로 안  돌아가는 게 없으니 이
마음 앞에 나를 어찌할  수 있는 법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원인을 모르고 산다. 그것은 자아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자랑하는  5천년 인류의 문화는 인생을  불안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끝내 절망에서 헤매이게  한다. 여기에 끌려 자아는 물론이지만 삶의
의의조차 모르고 살아오고  있다. 왜냐하면 길을 바로 들지 못하고  엇들었
기 때문이다. 인생이 인생을 자기에게 찾으려 하지 않고  넓은 우주에서 막
연히 헤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원히 헤매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공
상주의자가 인간을 옭매 놓고 밀봉교육을  시키는 것과 같이 여러 가지 사
상과 학문들이 다  자기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과학  철학 종교, 정치 경제
문화 예술들이다 그러하다.  그러나 싯달다는 이 모든 것을 떠나서  인생을
자기 자아에서 찾으려고 했다. 자아에서 석가모니는 발견했다. 그러므로 인
생을 억울한 미결수 즉 신원미상의 존재에 끌려 헤매이고 있는 미결수에서
완전히 무죄수로 석방한 일이다.
  우리들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것은 곧  목숨이라
고 들한다. 그것은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원동력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
고 있다.  그런데, 흔히 세상에서는  자기 목숨은 소중히 여기면서도,  남의
목숨은 무시해버리거나 혹은  무자비하게 죽이는 수가 일쑤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일처럼 여기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나를  살찌게 하기 위해
서 남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야하다니-힘센  놈이 약한 위를 짓밟고도 버젓
할 수 있는 잘못된, 너무나 잘못된 이 풍습! 우리 육체의 힘도 실제로 알고
보면 참는데서 나온다. 금생에 많이 참으면 내생에는 아주 장사가 된다. 평
생 감기 한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있다가 죽을  시간이 되면 앓이도 않고
돌아 앉아 죽는다. 저  아무 것도 아닌 무정 허공이 어찌하여  제 스스로가
변화하여 현상을 할 수 있을  것이가? 공즉시색도 또한 그리하여 진공적인
환영상의 무정 현상계가 어찌하여 그 스스로가 진공으로 변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필연코 커다란 숨은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저 무한
대의 진공포장에다가 색즉공 공즉색이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영화를 상영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  진공과 물질은 다만 자유도 없는 죽음의  무정 환
상이다. 그와 반대로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영화는 반드시  절대 자유한이
삶의 무한 생명으로서  조화의 무한 동력이다. 그러면 저 현상계가  창조되
기 전의 그 무엇인가로서 이  삶의 무한 동력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곧 우
리들의 이 마음이다.  이 세계에는 성 주 괴 공의  무상이 있고, 이 사람의
몸뚱이에는 생로병가사 있고, 마음에는 생  주 이 멸이 있다. 그 사람 잘생
겼다고 좋다고 엎어질 둣 야단이더니 나중에는 슬그머니 권태증이 나 가지
고 보기 싫어진다. 날마다  한 시간도 안 빠지고 가더니 이제  이틀에 한번
씩 가기 시작하고 차차 차차 나중에는 찾아와도 보기  싫을 지경으로 된다.
그렇게 그 사람 좋아하던 마음이  딱 없어지고 그래 가지고 나중에는 미운
생각이 앞서 있게 된다. 그러다가 미운 생각이 차차  차차 없어져가지고 또
좋아하는 생각이 난다. (아이고 불쌍해라 너무했다) 이렇게  변한다. 그러니
마음에 한 생각이 생겨 가지고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벼락같
이 꼭 그대로 내가 죽어도  해야지 하고 글씨를 배운다, 문장을 배운다, 소
설가가 된다하고 죽어도 한다고  이렇게 서둘다가도 슬그머니 하기 싫어지
는 때가 온다.  남녀간에 연애하는 경우에도 이렇게 처음에는 서로  좋아하
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생이라고 하고, 그 좋아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남
아 있는 동안을 주라 하고, 좋아하는 도수가 자꾸  식어지고 마음이 달라지
는 때를 이라 하고,  차차 서로 지조가 없어져 쳐다봐도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좋다는 마음이 하나도 없어진 때를 멸이라고 한다.  중생의 마음에 생
주이멸, 이것이 있기  때문에 몸에 생로병사의 그림자가 나타나고 이  지구
와 세계에 성주괴공의 모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 순전히 마
음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아! 인생이여 똑바로 생각하자. 이 똑바른  길도
바르게 가며 이 똑바른 길도 각각 자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나다. 나는 오
직 나로서만 나다. 나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또 하너만이 아닌 내
가 아니라 저 모든 것들이다. 나는 아니다. 하늘도 땅도 부처님도 하느님도
진리도 다 내가 아니다.  그 너머에서 발견된 이 나는 곧  진리며 조물주며
우주의 본체로서 영원한 자유의 생명이다. 아! 다행한 일이다. 행복한  일이
다. 춤추고 노래 부르며 경축하자, 등불을 밝히고  행진을 하자. 석가세손이
49년간 설법한  것이 바로 이  말이외다. 설족께서는 신원미상의  조물주와
인간의 육신이 마지막 길인 줄만  알고 절망과 무명에 헤메이고 있는 인생
을 우주의  주인공으로 영원불멸의 자아인  마음의 진여를 밝히고,  둘째로
영겁으로 생사윤회하는 고를  깨우쳐 그 해탈의 길을 밝혀주고, 셋째로  인
생의 빈부귀천과 선악과 지혜와  어리석음이 다 전생의 인과응보임을 밝히
고 다 나 자신이 스스로 어두운  길을 헤매일 뿐이고 다른 힘의 지배로 되
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인생으로 하여금 인생  스스로가 우주의 주인공이고
조물주임을 깨달아 자기를 알게 하고 인간 스스로가 영원의 행복을 개척하
도록 했다. 우리들이 갇혀 있다가 혹은 죽음의 절망에서  풀려났을 때의 그
홀가분한 자유러움, 그것은 환희다. 그것은 푸른 하늘이다.  이 환희와 푸른
하늘을 우리와 모양을 달리한  생물에게 베푸는 일을 불교에서는 방생이라
고 한다. 산 목숨을  죽이지 않을 뿐더러 한걸음 나아가 그것을  살리는 자
비! 짐승이나 물고기들이 비록 겉모양은  우리와 다르더라도, 그 목숨에 있
어서는 주금도 다를  수가 없다. 모성애의 숭고함이 우리 인간사회의  전유
물만은 아니다. 동물들의  모성애를 보고 눈시울을 뜨겁게 한 일을  우리는
가끔 경험하고 있으므로-자비가  메말라가는 이 살벌한 오늘의  현실에 이
나직한 목소리들이, 우리들 이웃에  두루 번지어 메마른 가슴을 울려줄 때,
우리들의 눈매는 살기 대신 따뜻한 사랑으로 빛날 것이며 가슴마다 이웃에
대한 포근한 자비로  철철 넘칠 것이다. 해가 기울어도 문단속할  수고조차
없어질 것이며, 담장  위에는 철조망이나 유리병의 시퍼런 서술 대신에  부
드럽고 환한 꽃을 올려놓게  될 것이다. 날던 새들도 우리 팔에  내려와 마
음놓고 쉬어갈 것이고, 물론 살아있는 생명의 푸른  나뭇가지에서처럼-그날
우리는 슬기로운 식물성  왕국의 푸른 깃발을 하늘  높이 올리면서 환희를
합창해도 좋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 의젓한 인간
일 수 있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꿈에서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듯이, 우리가 경험하는 소위  현실
이라는 것도 그대로 꿈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다. 지금  살고 있는 생
시가 바로 꿈이라고 하면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대들  것이다. 그러면 어찌
하여 그 꿈(생시)이 영원한 꿈인데도  꿈인 줄 모르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
은 너무도 똑같기  때문이다. 꿈에서도 연애해 가지고 아들딸 낳아서  대학
까지 공부시키고, 또 장가들이고 시집보내서 손자를 보고 하여 잘 산다. 이
처럼 우리가 꿈속에서 겪는 세계나  생시의 일들이 너무도 같기 때문에 그
꿈을 깨기 전까지는 그게 꿈인 줄 모르는 것이다.  꿈속에서도 태양이 ㄴ고
지구가 있고, 산소 수소가 있으며 온 우주가 다 거기있다, 꿈에서도 설타은
달고 소금은 짜고 춘하추동 사시절이 있어서 날씨가 차고 더우며 어린애들
낳아서 키워보면 어려서부터  점점 자라서 커간다. 그러니 아러한 것을  어
떻게 꿈인 줄로 알 수 있는냐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꿈을 깨어볼라치면
시간은 불과 몇 분도  채 안된다. 인생이 꿈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이
다. 꿈으로 한 일,  그게 사실로 한게 아니고 모두 거짓말로 한 것이다.  성
불했다는 것도 역시  거짓말이다. 성불 아닌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불했
다는 말이 있는  거지 성불해야겠다는 말까지도 그게 꿈이다. 정말  실상자
리에서 보련 제대로 돼있으니 꿈꿀 사람도 없다. 사람이  자는 시간도 대체
로 하룻밤에 일곱 시간 내지 여덟 시간이므로 내가 잠이 든 전시간 동안에
꿈을 꾸었다고 해도 여덟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꿈속에 들
어가서는 여덟 시간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잠자는 동안 꿈속에서  경험
한느 시간은 닷새 사는 때도 있고 한  달 사는 때, 한 해 사는 때,몇 해 사
는 때  까딱 잘못하면 한평생을 사는  때도 있다. 그러니까 밤을  새워가며
꿈을 꾸었다 하더라도 여덟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꿈에 들어
가서는ㄴ 일평생이 되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루나 반나절 꾸도  꾸지마
는 저녁마다 일평생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생시에 반나절 꿈도 꾸지
마는 저녁마다 일평생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생시에 반 시간보다 꿈
속에서 사는 시간이 훨씬 더 많게 된다. 꿈과 현실이  똑같은 것은 다 한마
음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꿈을  꿀 때에도 이 몸뚱이 처자 재산을  다 그대
로 놓아두고 마음만 나아가서 꿈세계를 창조헤 놓는다. 꿈울  깰 때에도 꿈
속에 있던 몸뚱이 재산 처자를 만들어서 꿈하고 똑같은 세계를 만든다.
 꿈만 꿈이 아니라 꿈  아닌 것도 꿈이다. 망상은 꿈을 이룬다.  이것은 곧,
주관은 객관을  조화한다는 실증을 말하는  것이다. 주관밖에 개관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주관이 곧  객관이며 객관이 곧 주관이다.  뜨겁고
찬 것이 불과 물에  있을 수 없다. 주객이 둘이 아니므로  우리의 인식밖에
기둥과 기둥이 있을 수 없으며 기둥과 기둥의 모양 밖에 인식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주관을 쉬어버린 때에는 객관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
러나 주관을  쉰 이 청정한 본래의  마음법에는 기둥도 기둥 모양도  없다.
그러므로 저 기둥한 가지를 볼 때에는 곧 기중이 나타나는 이치와 그 기둥
을 나타낸  이 마음의 본연면목을 동시에  깨달을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저 만물을 다루면 된다.  꿈이 아무리 헛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꿈을 깨
기 전에는 꼼짝없이  사실인 고와 낙을 받는 것과  같이 이 마음을 깨치지
못한 종생들을 업습에서 일어나는 천당 지옥의 꿈을 벗어날  길이 없다. 꿈
에서 죽고 꿈에서 태어난다. 우리 승려들은 꿈이 없다는 소리를 한다. 거짓
말이 아니다 중 노릇을 제대로  하는 수자들느 꿈이 없다. 또 대인들, 수양
이 되어 있는 사람들도  확실히 꿈이 적다. 수양이 되면 마음이  비어서 번
뇌망상이 적으므로  꿈이 적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낮꿈은 평생  살아봐도
70년,80년밖에 안된다. 그것도 잠자는 시간, 병 앓는 시간  다 빼고 나면 몇
십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밤꿈은 몇 백년 몇 천년을 산다. 따라서 생시는
얼마 안되는 시간을  산 것이고 밤꿈은 낮꿈의  몇 배, 몇 십배를 더  사는
결과가 되므로 정말 꿈은 밤꿈이 아니라 생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밤꿈에만 우주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꿈을 깬 낮꿈에도 우주를  창조
해 내고 있다. 그러므로 꿈이라고 하면 낮꿈 밤꿈이 다 꿈이다. 밤 낮 금생
내생이 다 꿈인데 이 꿈 가운데  꿈이 아닌 것은 꿈을 꾸고 우주를 창조해
내는 우리의 마음뿐이다. 밤꿈에는  이 마음 이대로이고, 낮꿈에더 이 마음
이대로이다. 그런데 생각은 그  때 그때 환경에 따라서 추우면 춥다,더우면
덥다 라고 느낀다.  생각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지만 추우면 추운지 알고,
더우면 더운지  아는 이 마음은 불변의  나다. 생사의 변천이 없고  질량의
변화가 있을 수 없는 이 나는 모든 지식의 주체인데,  이 마음의 시간과 공
간을 만들어지가지고 큰 것은 크다, 작은 것은 작다고 하는 것이다. 육신도
마음이 만든 피조물인데 중생들이 육신을 주인으로, 마음을  육신의 종으로
삼아서 주객을 뒤엎고 있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주관  대 객관으로 벌어
져 있는 이  우주와 인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들은
이것을 다루려고 드는 통에 온 우주의 주인공인 유아독존의 자아가 깜빡하
는 순간에 도리어 창해일속으로 한 개의 적은 육체의 인간으로 전락되어서
이 생사대몽을 이루어서  윤회와 인과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안생이  사
는 것도 꿈이요, 죽는 것도 또한 꿈이다.

    어찌할소냐, 이 죽음을
 만물의 연고성쇠와 인간의 생로병사는 만고의 철칙이요,  대자연의 무상법
칙일진대, 어찌 무엇으로든 가로막을  수 있으며, 누구인들 능히 탈피할 수
있으리오. 사람은 나며넛 그 시간부터 죽음의 적에 쫓기고 있다. 사람은 개
구리이고 죽음은 구렁이다. 낮이면  낮, 밤이면 밤마다 찰나도 쉬지 못하고
죽음이란 구렇이에게 쫓긴다.  자는 시간까지는 죽음의 그렁이에ㄱ  쫓기는
개구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생활이다. 그것도  한번 죽고 그
치는 죽음이 아니고 천당 지옥  축생으로 내생에도 무량 겁을 쫓기고 죽는
다. 마음을 깨쳐서 육신이 내각 아닌 것을 확인해야 죽음의 쫓김을 면한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죽기 전에 우리는 먼저 살기부터 해야한다.
산다는 것. 이것은 우리 인생이 태어날 때부터 걸머지고  있는 명예요 권리
다. 그리고 이 삶을  위해 우리는 평생토록 일을 하고 싸우고  또는 휴식을
하곤 하는 것이다.  가령 새까만 연탄을 지고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는  짐
꾼의 경우를 들어보자. 밝기 전에 일어나 어둡도록 일을  하는 농사꾼을 생
각해 보자. 기타 교단에서 강의를  하는 이, 정치를 하는사람, 노동자, 인텔
리 어느 경우를 보든지 그들은  모두 살기 위해 활동을하ㅡ 것이 아니겠는
가.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모두 진정한 삶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저 몸뚱이를  살찌게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일
뿐 시시각각으로 달라져가는,  그리하여 언젠가는 죽고 말 이 육신을  편안
케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활동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  때든지 죽어 없어질
이 육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이
런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불가불 싯달다 태자를 연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싯달다 타자는 실로 이렇게 죽어 없어지는  몸뚱이 이외에 우
리에게는 또 하나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분이다.  도 하나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불성이라 해도 좋고 하느님이라 해도  좋다. 어쨌든 영원
히 살아 있는 나,  다시 말해서 진여라 여래라 하는 것이 바로 이  또 하나
의 삶이다. 이것은 온갖  움직임과 생각과의 주체가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길이다. 가령 어는 사람이  백년의 명을 타고
났다면 우늘 하루  살았다 하는 것은 25시간 목숨을 잘라버렸다는  뜻이다.
산삼 하나을 달여서 쭉 들어마시는  그 시간도 자꾸 죽어가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누워서  자느 것도 죽어가는 것이고 오면서도 죽어가고  가면
서도 죽어가고 사는 것이 다 죽어가는 것뿐이다. 아무  사정도 없이 만분의
일초도 정지함이 없이  자꾸 가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간다는 소리는  죽어
간다는 소리다. 결코 죽고야  마는 인생이 왜 생겨났을까? 아렇다 할  목적
도 없이 왔다가  까닭도 모르게 가버린다.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니
뜬구름 같은 이 세상의 삶을 남을 위해 바쳤는가, 나를  위해 살았는가? 아
무리 따져보아도 나느 모를 일이다. 나는 이 순간에도 흘로 죽어 들어간다.
그것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이렇다면 무엇을 가리켜 산다고 하며, 무엇이
나고,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는 것이냐? 과연  이것뿐인지 아닌지 진실로
알고자 하는  뜻에서 세상살이에 깊이  무상을 깨달아야 한다.  생사거래을
자유로 하는 일이다. 정력의  힘이다. 일평생에 공부를 다해 마치고 대원을
세워 빈틈없이 날뛰어  오히려 어긋날까 걱정이 되는 것인데. 하물며  수도
를 게을리 하는 사람으로서야  무슨 힘으로 다생다겁을 육신본위며 자기본
위로만 저질러놓은  죄악의 업력을 막을 수  있으랴. 설사 지견을 얻은  바
있어서 불법대의는 알았다 하더라도  선정력이 없는 사람은 생로병사에 자
유가 없으므로, 병에 끌리며  죽음에 끌려 속절없이 눈만 감았으니. 일생의
노릇이 헛걸음만 하고 죽어가서  가없는 저 고해의 생사파도에 표류하리니
이 누구을 원망할 것인가?  너는 진짜 열반이 아니다. 진짜 열반이라고  하
는 것은 열반도  아니고 생사도 아니고 부주열반 부주생사하는 것이다.  오
늘날 인간의 수명은 1백년을  넘기지 못하느 것이 고금의 통례이며 무상계
위 숙명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죽는것과 산다는 것, 죽으면 그것으
로 끝나고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유물론적 사고와 내생을 설정하여
사후연생을 믿는 인생관의 분기점에서  우리들은 실로 엄청난 숙제에 부딪
치게 됨을 본다. 이것은 가장 중대한 인생의 명제인  동시에 인류의 역사와
동서고금의 철학사와  더불어 오늘에 이르러  우리 앞에 가로놓여져  있다.
덴마크 총각 처녀들은  자살까지 한다고 한다. 도의적인 구속도 없고  성도
개바했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고 그야말로 지상의 극락세계이고  천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많은  청년들이 자살을 한다. 먹고 배설하고 죽는  것보다
는 좀 통쾌하게  죽자 해서 오토바이를 타곡  가다 수십길되는 낭떠러지로
떠러져 죽고, 택시를 타고 가다 강이나 바다에 떨어져  물이나 꼴딱꼴딱 먹
다 죽자, 그래봤자 하나도  억울한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물사상으로
는 아무리 고도로 진보해 봤자  먹고 똥싸는 것밖엔 인간을 만족시킬 만한
이상이 없다. 결국 자살할 길밖에 없다. 영혼을 부정하는 인간의 말로는 결
국 비참하게 끝난다. 자살이 부쩍 늘어난다면 정말 이것은  생의 애착도 없
어진 상태다. 백년 다 살아봐도 아무것도 아니다. 금방 죽어도 아깝지도 않
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인간이 여기까지 가면 다 끝난 것이다.  물
론 이것이 소수에 한한 일이고  전부는 아니지만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
해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거짓말을 잘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남이 그 사람 말은 곧이듣지
않는다. 술 먹는 사람은 정신이 흐려져서 어리벙벙해지는  것을 좋아했으니
내생에는 바보가 되어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나서 죽는다. 그렇다면 그냥
생사의 궤도마냥 무한대의 평행선을 다라  어쩔 수 없이 망각된 채로 죽어
야 하느냐, 아니야!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 오고가는 것은 분명할 게  아닌
가. 난 이렇ㄱ 내 면목도 타의에 의해 송두리째 앗겨  던져진 채 영영 시들
어져야만 하는가. 아니다. 시들어져야만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늘의 조
그만 인정에 치우친다면 내일 영원히 살고 죽는 대법리를  잊어야 한다. 아
니야 오늘날 숱한 인간들의 조롱과  멸시와 모욕과 증오와 버림의 슬픈 몰
골이 된다 하더라도 난 분명히 대법리를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하여 버리고
온 아내와 그리고  버려져야만 될 자식에겐 무한의  증오와 저주의 시선이
언제까지나 지속이 되더라도 난 각오가 있어야 한다.  실달다 태자께서는 3
천년 전에 이런 걱절을 했다. "사람은 죽는다. 나도 죽을 것이다 어느 누가
나르 죽게 만들었으며 왜 그렇게 된 것이가"그 깊은 비밀을 낱낱이 파헤치
고 쳐부수고 싶다. "우주는  상대적인 원리로 되어 있다. 높은 것이 있으면
낮은 것이 있고 더운 것이 있으면 찬 것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
고 전부 이렇게  대조적인 원리로 되어 있으니 죽는  것의 대조는 안 죽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죽지 않는  원리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안 죽는 원리
를 발견하고야 말겠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밤새도록 잠도 못잤다. 마침내
싯달다 태자는 궁전과 미녀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서 인도천지에 있는 도
인들을 다 만나 물어봤지만 몇 백년  몇 천년 살수 있는 방법은 없지 않으
나 아주 안 죽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 오래 사는  것이 원이
아니고 영원히 안 죽는  방법, 허공이 없어진다 해도 안 죽는  원리를 발견
하자는 것이  나의 원이다." 이렇ㄱ  생각한 삿달다 태자는 개소리  닭소리
안 나는 산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서 그  해결을 위해 참선을 했다.  "내가
영원히 안 죽는다. 뭐가 그리  영원히 안 죽는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나다. 그러면 내가  무엇인데 영원히 안 죽나." 가만히  자꾸 따진다. "이제
까지 나라고  하는 것은 육체였는데, 만일  육체가 나라면 영원히 안  죽을
수 없다. 그러면 정신이 나인가.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 변화무쌍하니 그
가운데 어느 생각을  나라고 할 수도 없다." 싯달다 태자는  선정삼매에 들
어서 모든 생각이  어디서 나오나 살펴보았다. 싯달다 태자의 생각은  아버
지 생각도 어머니 생각도 아우  자식의 생각도 아니고 확실한 자기 생각이
었. "그런데 생사를 면해야 하겠다. 영원히 죽지  않은 원리를 찾아보자. 이
생각은 분명히 내 생각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생
각을 내는 나는 무엇인가. 생각을  내는 것이 나지 생각이 나일 수는 없다.
그러니 생각을 나게 하는 이 주체가 무엇인가" 이것이 의문이었다.

제2장 생각하며 행동할 때
    영광된 봉사
 욕심 버리고 일하다.  남을 위해 할 일밖에 없다.  이 육체는 내가 아니니
완전히 내버리고 나면 육체를  위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정신으
로 다만 내 이 본마음의 자세를 그대로 지니고 간직할  뿐, 오직 부모와 형
제와 아내와 남편을 위해서 살고, 친구와 이웃을 위해서 일하라. 남을 도와
주는 마음은 스스로의 기쁨을 갖는 생명이다. 생은 곧  스스로의 진리인 것
이다. 남을 위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가정과 그  사회는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행복과  불행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따라 있는 것이다. 신의
가호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신을 계몽하고  자기를 찾아야
한다. 자기 마음을 밝혀 인간 자신은 영원한 진리의  주체임을 깨달아 자신
의 입장을 자신이 소멸하는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선악
은 자신의 인과응보에 있는 것이다. 선악의 과보로 얽여  있는 업장은 자신
의 참회로 자기 업장을 소멸하고  새로운 인과를 닦아 새로운 신앙의 힘을
찾아야 한다. 사람의 본성은 곧 무한한 우주의 진리이므로  자기 인과로 자
신을 얽어맨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면  자신의 신앙에 따라 무한한 힘을 이
룰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속세로부터 얽혀 있는 업장이 자기  몸을 구속하
고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밝혀 마음이 곧 천지의 근본이고  자신은 영
원한 생명으로 생사 윤회를 하는  진리이고 선악의 과보가 다 자신에 있는
줄만 알면 인간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부처님은 남을 도와주는 것,
배고픈 사람 밥 주고, 헐벗은 사람  옷 주고, 병든 사람 구원 해 주고 이렇
게 남을 도우는 것을  해롭게 하고 남을 죽이고 하는 행위인데,  이것은 죄
인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게 되고 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보시하고 계
행도 잘 지키고 인욕도 하여 남이 뭐라고 욕을 보이더라도 다 참아서 참았
다는 생각까지 없이  참으라. 남이 욕한다고 야단치고 보복하고 칭찬해  준
다고 좋아하고 이러다 보면 번뇌의  생사심만 늘지 언제 보리를 성취할 것
인가. 아픈 것을 못 참을수록 인욕을 하지 않을수록  벼은 오래가게 마련이
고 겁을 낼수록 병은 오래 가게 마련이다. 시치미 뚝  떼고 있으면 병이 쉽
게 낫고 뼈가 부서져도 그게 갑작스러이 나버리느 수가  있다. 몸뚱이르 버
리고 나면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몸뚱이를 버림녀 아픈 줄 모른다. 그러니
몸뚱이를 챙긴다든지  하는 수양이 필요하다.  애착하기 때문에 내가  살을
잡으면 아프지만 사실 몸뚱이 제가  생명이 없으니 아플 수도 없고 감각할
수 없다. 마음은 또 본래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아픔이 생길 수 없
다. 살이 아픈  것도 마음이 아픈것도 아니다. 그러면 뭐가  아프냐. 마음으
로 생각을 내서  아픈 것뿐이다. (육체가 나라는 착각을   버려보자.) (육체
생활을 좀 정리해 가지고  하루 밥 세 끼 먹던 것을  노력하여 두 끼 먹고
수양하자. 더욱더 자아완성을  위해 노력하자.) 우리 마음의 본래 자세에거
보면 무슨 지식이니  신앙이니 하는 것은 흙탕물처럼  된 것이고 헝클어진
실같이 번잡한  망상이다. (그건 무슨  귀중품이다. 보물이다, 잘 관리하자.
이 사람 무슨 병이냐, 어려서 애들과 장난을 하다 피가  많이 날 정도롤 피
부가 상했어, 그래  균이 들어가 지금 파먹고  있다.) 이 생각이 병이 되고
이 과념이 절대원리라 믿고 중생심으로 얽매이지 말라. 모든  것 다 버리고
마음을 탁 놓아라. 그러면  본래의 마음이 드러나고 육체의 주인공, 우주의
핵심, 생각의 주체를 알게 된다. 마음을 어디다 두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보시도 하고 지계도 하고 육도만행을 하라!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부지런히 농서짓고 종일 일해도  고된 줄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일한다. 이게 내 일이라 생각 말고, 꼭 나만 먹을 거다 이런
생각 말고, 아무나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을 거고 헐벗은 사람이  먼저 입
을 옷이라 생각하여 열 벌이고 한 벌이고 장만하는 것이 도인이 하는 행동
이면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대보살이고 자기도 완전히 의식주를 초
월하고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일아라는  것이 그때그때 어떻
게 됐다고 해서 그게 아주 망하는 건가,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거고, 지금
한참 잘된 거이 나중에는 큰 화근이 되어 백년 살 것을 십년도 못 살고 죽
는 일이 생겨날지도 모르는 것이다. 좋은 일이 아무리  생겨도 그것을 좋다
고 생각 안하고 아무리 지금  불행한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나중
에 복 받은 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도  오히려 조작이 붙은 속임
이다. 그것도 저것도 없는 도대체 아무 생각없이 하는 것이 무소주다. 손바
닥만한 거울을 갖고 서울을 비치면  동서남북으로 이십리 이상 되는 큰 서
울이 입체적으로 다  들여다보인다. 상식적인 이론으로는 손바닥만한  거울
안으로 서울이 들어가면 큰 빌딩이  깨알보다 작데 축소돼서 보여야 할 것
이다. 그렇지만 손바닥만한 거울 안에 몇 억만배난 되는  서울이 그대로 들
어가는 것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 구애 없이  들어간다. 큰 것도 아니
고 작은 것도 아니다.  마음은 그 자체가 저절로 만복을 다  갖추어 있으므
로 일체 탐욕이 없는 것이요, 또한 세상 일에 아끼고  탐낼 만한 일도 없기
때문에 전재산을 버려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며,  또한 처자
와 이 몸까지라도  남의 생명을 도울 수 있다면  다 희생하고야 마는 것이
다.
  둥근 달 외로이
  저 하늘에 밝았는데,
  흰 눈에 덮인 저 강산은
  한없이 고요하다.
  웃노라, 코웃움에 천지는 무색하리.
  그러나 저 어두운 중생들이 이  마음이 진실로 나인 것을 잊어버리고 그
릇된 생각으로 생사에  윤회하며 소나 개나 남자나  여자나 되었을 적마다
나는 남자다 여자다 소다 개다라고 주장하고 고집하던 버릇의 뿌리가 아직
남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없애버리기 위하여 한
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을  제도하되 사실은 중생이 아닌 중생을, 제도  안되
는 제도를 하는  것이며, 내 마음은 또한  그런 생각조아도 없다. 그러므로
이 놀음은 순전한 자리가 되는 동시에 순전한 이타가 되는 것이며 또한 이
마음은 장엄한 것도 되는 것이다. 승려들이여. 사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
다는 점과 말을 위한  말을 경계할 것을 명심하라. 중요한 것은  사상에 있
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으며, 지혜로
울 수도 있다. 각  사람은 그 사상에 동의 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고
묵살할 수도 있다. 모든 불교의 진리란 지식을 구하는  자를 위하여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즉 세계의  비애를 해탈하려는 것이다.  지식을 경계하라는 말과  세계의
비애를 해탈하려는 말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행동하라는 일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각을 얻기  위해서 행동하라. 그리고 그것을 얻은 다음에
도 행동하라.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고,
어느 하나를  배척하지 않으면 안된다. 취하는  길은 곧 버리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불잘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버리고 얻는 데 허위로  외면으로
택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세존의 정신을 따르는 일까지도 그러하다. 우리
들은 세존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저 세계의 비애의 해탈인 것이다. 내가 부족해서  집이 망하고 나라
가 망하고,  나 하나 잘못해서 이  나라가 혼란하는 그런 태도로  참회하고
겸양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복을 받는다. 이런 태도로 부부간에도 참회
하고, 양보하고,  봉사해 주고 참으로  위해 줘야 이것이 자비이고,  진정한
애정이고 행복의 문이다.  세계 45억의 사람이 다같이 남을 살리려는  생각
을 가지고 있다면 세계는  지상 극락이 된다. 이렇게 남을 해치지  않고 위
해 주며 사는 자비 앞에는 적이 있을 수 없다.  노동하는 시간을 빼놓고 나
면 다로 산 시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일생을  노동하는 시간에 소비하
고 만 것이며,  노동하는 시간 외에 따로 산 틈이  전혀 없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만분의 일초도 쉴 새 없이 노동만 하다가 언
제 늙어서 언제 어떻게  죽는지 모른다. 꿈이나 생시나 오직 살기  위한 일
념으로 하긴 했지만, 삶이  무엇인가? 인간이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
인가? 하는 것은 잠시도 생각해 볼  여지가 한 번 없이 1년 3백 65일을 맹
목적으로 살기 위한 노동에 몽땅 다 바친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참다운 삶
이 무엇인지는 젼혀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사는 것이 무
엇인지 생각해 볼 시간이 없다. 허망하게 시간이 다  가버렸다 하면서 마지
막 탄식을 남기게 마련이다.
  과연 삶이란 어떤 것이길래 그것을 위해 24시간 몸과 정신을 온통 다 바
쳐서 희생을 해야 하느냐? 꼭 한 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삶이 무엇이
냐? 어떤 것이  산다고 하는 것이냐?) 이렇게 물어보면, 이런  것이라고 확
실하게 대답할 사람은 없다. 그저 살기 위해서 농사를 짓고, 장사사기 위해
서 산다고 하면 쉬울지  모른다. 이 얼마나 섭섭한 이야기인가? 사람이  우
주 이전부터의 실제로서의  질량이 아닌 자기 마음을 깨쳐서, 생사를  초울
하여 전우주의 심령세계와 육신세계에 자유자재하며 전지전능한 불타의 지
의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이른바 불교에 8만4천가지나 된다. 그러나  실로
는 8만4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일 불타의 49년  설법을 다 기록한다면,
현재 남아 있는 불경의 천만배가 더 될 것이다. 법을  듣는 중생들의 그 개
성과 그릇이 다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8만4천  불법을 다시 종합적
으로 간단하게 분류하면 여섯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이른바 육바라밀이니
육동이니 하는 것이다.
  첫째는 물심양면으로 남에게 이익을 주는 자비심을 행한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자신의 마음을 단속하면  행동을 조심하여 탈선하지 않는 것
이요
  셋째는 자기의 소신을 성공하기 위하여서는 모든 곤란과 애로를 다 극복
하는 것이요
  넷째는 남과 나를 위하여 옳은  일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그 일을 위하여
전후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전진이 있을 뿐이고 중지나 후퇴를 모르는
것이요
  다섯째는 태산 같은 입지와 바다와  같은 안심으로 바라는 바 목적 성공
을 위하여 그 바깥 일에는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는 일이요.
  여섯째는 위의 차례르 따라 쉬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인생의 본연면
목인 이 마음을 깨쳐서 태어날 적마다 일초의 틈도 없이 죽음에 쫓겨서 영
겁에 헤매던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여 영원과 자유과  행복을 누리게 하며
동시에 천상과 인간의 최고의 지도자로 군림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한느 그 마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점령이다. 남의 생명의 자유라는  것은 손끝만큼도
인정하지 않르려고 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곧 도둑이다. 세속의 사랑
은 어디까지 자기본위, 자기중심이다. 남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남자가
장가가는 것도 자기 욕심 채우려는 것이지, 처녀 욕심  채워주려고 가는 것
은 아니다. 그러니까 첫날 저녁부터 싸우고 일평생을 싸운다. 서로 제 욕심
만 채우려고 하니  아이들 여러 명 낳고 살아봐도  개성이 안 맞고 욕심에
안 맞아서 싸우게 된다. 속칭 그것이 사랑이다. 자비를 가진 남자라면 장가
를 가더라도 남이 데려가지 않는  아주 못생긴 처녀를 하나 얻어다가 호강
시켜 줘야겠다. 하루 백만원을  벌어서라도 다 맡기고, 잘살든지 못 살든지
저 여자 뜻대로 하게 해야겠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언제나 상대를 존중하
고 위해 주는 생활을  할 것이다. 이렇게 상대편 본위로만 하고  자기는 조
금도 내세우지 않는  남편 앞에서는 아무리 악녀라도 보살이 된다.  그렇게
하면 그 여자 마음엔 그 남자뿐이고, 우리 남편이  제일이라는 생각만이 있
을 것이다. 남편이  보살로 보이고 보처로 보인다.  그러면 서로 보살이 된
다. 중생들은 언제난 조건부로 상대편을 사랑해 주려 하니, 상대도 네가 하
는 것만큼 사랑해주겠다  그러는 것이다. 네가 나한데 부족하게 해준  만큼
나도 섭섭하게 해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외간에 날마다  싸우
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나쁜 심리로 남을 점령하는  것이고 남을 구속
하려는 것이다. 반대로 자비는 남을 해방하려는 마음이고,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이다. 박애라고 하는  것도 절대의 사랑이 못되고 자기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하고 만나면 내외간이나 부자간에도 서로 38선이 생긴
다. 자기를 전혀  잊어버린 사랑, 어떤 한계를  두지 않는 사랑,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외간에는 사람은 둘이지만 촌수는 없다. 그러니 두 사
람이면서 하나이고 서로  피를 섞어 가지고 아들딸  자꾸만 낳으니 촌수를
댈 수 없이 완전히 하나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이에  어질고 얌전한 부인을
속이고 다른 곳에 여자가 있으면 이것은 이세상을, 아니  이 우주를 배신한
것과 같은 죄가  생긴다. 훌륭하고 착한 남편을 내버려두고 아무도  모르게
다른 남자와 친하고 있다면 이 역시 이세상을 배신한 것과 같은 죄가 생긴
다. 부부간의 배신은 죄 중의 제일  큰 죄다. 재산 많고 지의 높은 것도 관
계없이 인덕 없는 사람이  있다. 내가 먹여 살려주고 낸 신세를  가장 많이
진 부하들까지도 나를 욕한다. 이 사람은 전생에 부부간에  배신을 많이 한
때문이다. 남편이  바람피우고 하니 첫날  저녁부터 생과부가 되어  자기도
일생 동안을  지내는 사람이라도 남편을  나쁘아고 하지 말라.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남편을 따라주어야  한다. 밤에는 남편이 가는 대로 등불  들고
바래다주고 몇 십만원씩이라도 갖다 주면서  우리 남편 비위 좀 잘 맞추어
달라고 붙탁을 해야 한다. 우리  주인은 내 힘 가지고느 위안이 안되니, 당
신이 좀 해주면 내가 그  은혜를 갚겠다고 정성으로 부탁하면서 알지도 못
하게 가만히 놓아두고  오라. 이것은 변태적인 자학생활이거나  히피족들의
경우에서와 같은 막살이  식으로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디까지나  진
심으로 하는 참회생활이고 진심으로  남편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랑으로 하
는 생활이다. 남편이  첩을 얻었을 때, 여자는 흔히 저주를  한다. (두 사람
이 꼭 껴안고 누웠을 때 불이나 나서 타 죽었으면......) 만일 여자가 이러헥
악담을 하였다면 복을 받겠는가? 전생에  제가 나빠 가지고 남편이 그렇게
하는 줄은 모르고, 다시 산 사람 둘이나 불에 타  죽게 하는 죄를 지었으니
이런 여자는 죽어서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다. 낮이고 밤이고  24시간을
도 사람이 타 죽는 생각만 할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질투의 불길이고
성내는 마음이고 어리석은 중생의  인과생활이기 때문에 죄악의 연속이 될
뿐이다. 적어도 불자라면  이런 죄악의 불구덩이로 빠져들어가서는 안된다.
자기를 뉘우쳐야 하고  이런 업의 고랑의 벗어나는 길을  갈 줄 알아야 한
다. 호강도 고생도 내가 다  지은 일이며, 부모나 남이 나를 호강도 고생도
시킬 수 없다. 내 마음 가운데 있는 복을 남이 받을 수 없고, 내 마음이 죄
지은 것을 누구에게나 줄 수도 없으무로, 제 복 제가 받고 제가 당한다. 우
리의 참다운 행복은 육체나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 속아 사는 생활이다. 마음을 깨치지 못해서 현실을
잘못 보고  미래를 잘못  진단해서 속이 어두운 협잡배들이 자기의 진귀한
보배를 사기당한 생활이다. 우리가 오직 구해야 될 것이  있다면 마음의 밝
은 원리를 깨쳐야  하는 일이며, 육체와 현실은 다 꿈이고,  착각이고, 마음
의 그림자임을 깨닫는 일이다. 인간의 육체는 흘러가는  한강물처럼 날마다
변한다. 평생을  사는 부부라 할지라도 사실은  매일 딴 사람과 같이  사는
격이다. 왜냐하면 어제의  남편은 벌써 오늘은 어딘가 달라져 있기  때문이
다. 즉 육체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한강물이 고정으로 존재해
있지 않음과 같다. 만일 한강물을 어떤 그릇에 담았다면  그릇에 담긴 물은
한강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한강물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한강물이란
고정적으로 존재해 있지 않는다. 그래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다. 요새 젊
은 세대이서 흔히 말하는 자아상실이니 자기부재니 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
서 사용되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인간이냐
  무엇이 사람이냐? 어디서 왔으며  잠깐 허덕이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누가 이렇게 만들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저저롤 생긴 것인가? 인생
문제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점점 몰라만 간다.  이 산승이 30년 전  충북
속리산 법주사의 작은 암자에 있을 때 일이다. 심을  끝내자 왔다가 학계에
종사하는 명함을 내어놓은 40여 명 탐방객들은 점심을 끝내자 한시간쯤 틈
이 있으니  불교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되묻기를 사람이면  찌를
듯한느 분들이 차츰 한 분 두  분 머리를 숙이기 시작함으로 아마 깊이 생
각하나 보다 하였더니 한참이나 고요가 흐르다가 복판에 앉은 분이 일어나
서 하는 말이 못죽어서 산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그  해답을 찬동하는 눈치
이며 부정하는 이는 한 분도 없었다. 영웅호걸과 거지  천민 누구나를 막론
하고 인생의 길에 있어서는 다른 바가  없다. 예수나  공자나 석가난 다 마
찬가지다. 어쩌다가 태어나 자기도 이렇게 고해에서 방황하다가  고대 죽어
여 하니...... 이런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편치 않다. 세계의 권
리를 다 거머쥐어 보아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어코
살아야만 할 어떠한 이유를 발견할 도리는 없다.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 또
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등 꼭 살아야 할 조건을 내세울 도리
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인생이 이렇게 허무맹랑할 수야  있을까 무슨 뜻이
있겠지. 조물주가 이런 얄궂은 인간을만들어좋았다면  조물주를 끌어내려야
할 것이요, 저절로 생겼다 해도 답답하기만 하고, 어찌 하다가 생겼다 해도
맞지 않는다. 이렇게  딱한 실정, 맹랑한 현실에 놓인 것이  우리 인생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자연 안에서 사회적으롤 얽혀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러므로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려면 먼저 자연에 있으면서도 자연을 초
월하고 자기 안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초월하는 본성을 발견해야 한다.  즉
우리가 종단, 민족, 인류 등 거대한 공동체를 말하지만 인간의 실존은 역시
각 개인의 인격성에  있기 때문에 상구보리 하와중생을  모토로 하는 우리
불자들은 우선 그 생활태도에  있어서 근면검소하고 창의와 진취에 용감한
생활적 인간이 되어야 하며 인간관계에 있어서 겸손 친절하며 협동 봉사하
는 도덕적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나라는 말은 첫째  네가 아니다라는 뜻이
다. 객관이  없으면 나라는 생각 안난다.  상대가 있으니까, 나라는  생각을
내고 나라는 행동을 한다. 자아완성이란 물질인 육체를 위해  산삼 한 뿌리
씩 먹는 것인가, 대통령되면 완성인가, 세계 대통령이 된다 해도 그것은 인
격완성일 수 없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사람은 자꾹 죽어간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이  나인데, 자아도 쓸데 없고  지식도 신앙도 필요없다. 내가
부처이니 나만 잘  다스리면 된다. 석가여래만 천만 번 맏어봐야  석가여래
믿는 인간이고 중생일 뿐 별 수 없다. 내가 내  마음을 단속해 나아가서 번
뇌망상 자꾸 없애버리는 그것이 자아완성이다. 그래서 순수한  본래의 자기
마음, 청정한  나를 깨달아 놓으면 온  우주가 그대로 먹을 것도  마음대로
무엇이든 안되는 것이 없이 전지전능해진다. 이것이 비로소  해방이고 인격
완성이다. 마음은 모든  생각의 주체가 되어서 모든 행동이나 생각의  주체
는 될 수 있어도  미리 이것의 생가은 없다. 그때 그때 그 사건에  따라 오
관에 미치는 바에 의하여  그때 마음대로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있다. 그러
므로 부정이나 긍정  이것은 내가 아니다. 한  개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행동이나 생각의 주체가  나인 것이다. 주체 그것을 우리는 마음이라  표현
하고 있다.
  마음이 수양이 돼서 맑아지면  소탈해지고 번뇌가 없어져섯 남의 사정을
잘 알게 된다. 마누라를 대할 때도 그렇고 영감을 대할  때로 그렇고 제 감
정으로 대하면 영감 말이  제대로 안 들린다. 그래서 마으이 상했을  때 미
운 생각으로  대하면 좋게 말해도 밉게  나쁘게 말해도 미웁다. 아무  생각
업싱 대하면 영감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지 그것을 척 알게 되니까
마음을 맞추어 나갈 수 있고 해결할 도리가 나온다.  그렇지만 감정이 앞선
중생이 되어놓으니까 마눌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귀에 안 들어오고 팔월 추
석이 되면 아이들  고무신 하나 사주고 옷가지나  사주자고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해서 그렇겠다고 얼른 주고 돈이 없으면 어디가 빚을
내오든짖 해보자고 하고 빚도  못낼 형편이면 (거 참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돈이 없어 참 안됐다)고  (아이들도 불쌍하지만 당신 말을 못 들어주니  참
안됐다)고 말이라도 고맙게 해 줌녀 서로 섭섭한 눈물을 흘리며 목을 안고
울 수도 있는 거고 아무 시비가 없는 세상인데, 꼭  막혀 있으니까 큰 방에
가면 시어머니가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고 그러니 시어머
니 사정  모르고 며느리 사정 모른다.  응무소주로 아무 생각 없이  대하면
시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잔소리를 저렇게  하시는가 하는 걸 환히 알기 애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줄 지혜가 나온다. 인간의 가치체계가  무너지고 말았
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겠는가! 완전한 신을 가능하게 하는 가
치를 찾아 세워야겠다는 데에 우리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 새로운 인
간 문화권을 형성해야 하는 일대 전환기에 서서 모든 종교는 화해일치해야
할 것이며,  또한 정신계와 물질계를  담당했던 종교인과 경제인이  일체의
양면으로서 상부상조하는  협화를 이룩하는 것은  대세가 요구하는 당연한
것이다. 인간 스스로를 관리하고,  스스로를 경영할 줄 아는 인간 주권시대
에 이제 당도한 것이다. 생산을 관리하고 경영할 줄 알고, 우주를 관리하고
경영하려는 듯한 기술 과학이 발달되어 새 시대를 준비하고 있지마는 인간
의 자기 관리를 못하는 데서 새 차원의 세계는 그 문을 열어젖히지를 못하
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관리권을 신명에게 위탁하는 한, 또는 물질
에게 의뢰하는 한, 시의 노예로서 천진의 인권을 스소  행사하지 못하고 또
는 물질의 노예로서  제약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완전함  같이
완전하라 심즉불이니라, 인내천이니라, 물각구태극이니라  루호이니라, 범시
아이니라는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에  대하여도 정면서 위배하고 있는 것이
라 여겨진다. 소위 세상을 산다. 현실을 산다는 말은,  따지고 보면 어느 시
간 어느 장소를 산다는 말로 된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에 대해서 공간적인
면과 시간적인 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객관에만 치중한 생각이다. 그보다도 현실을 인식하는 주관인  나의 인내활
동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중생들은 모든 것을
인정해서 온갖 인정해섯 온갖 것에  걸려 있고 구속돼 있기 때문에 자유롭
지 못하며, 모든 망상에  젖어 있기 때문에 참 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만일 산을 인정하면  산에 구속되고,  돈을 인정할 때엔 돈에
구속되고, 사랑을 인정하면 나를  사랑에 빼앗긴다. 술을 좋아하면 술에 미
친 만큼 자유가 없어진다. 세상 사람들은 아이난 어른이나  유식한 이나 무
식한 이나 모두 제 잘난 맛에  살지만 네가 무엇이냐? 어떤 것이 너냐? 이
렇게 따지면, 이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내세우는 이가 없다. 이것은 나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내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삶이라면 그 얼마나 서글
픈 삶이 되겠는가? 이것이 잘못되면  인생에는 나면서부터 눈물이 있고 괴
로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농사짓고 장사하느라고  자기를  돌아볼 여가조차
없어섯 자기가 무엇이냐 하는 해답을  못 얻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모르
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 놓고, 그러면섯 제 잘난 멋으로  사는 것이
인생이다. 따라서 나라는 말의 뜻도 침착하게 생각해 보지  못하는 것이 사
실이다. 천지와 만물은 그 자체가 생겨난 그 순간부터  그것이 없어질 때까
진 우리가 인내할 수 없은 빠른 속도로 쉴 새 없이 변화하면서 흘러가고만
있다. 저 물건이 그렇고 또한 이 마음도 그렇다. 그럼으로 우리들은 어떠한
사물을 막론하고 그대로는 다 천변만화로 변하면서 토막토막 측정할 수 없
는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연속선이 가상의 환영이다.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그러한 그것들이 또한 그렇게  흘러서 가는 이 인생의 눈앞으로 번갯
불간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았다고 하여야 할  것인가?
그것들을 산이다, 물이다.  너다, 나다하고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다. 나를
이름이 무엇인가? 지을 수 있거든 불러보라. 그러므로  그가 인내하고 있는
기둥이나 기둥 모양은 이 우주간에 실로 업는 존재다.  만약 무엇을 인내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그가 그의 인내를 다시 인내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강한 정신력과 도덕성을 행사하는  능동적인 인간집단
에 의하여 조성될 뿐만 아니라 자연  또는 사회 등 환경의 도전에 대한 역
사의 기능적 중심은  바로 개인의 창조적 인격활동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
에서 볼 때 지금 우리나라와 세계의 환경은 어떠한가? 세계는 지금 양대진
영의 대립이 심각한  대로 있다. 군축을 운위하면서도 군확은 치열하게  경
합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는 화염이 오르고 있다. 핵전쟁을 경계하면서도
인류는 한  찰나에 전멸될 수 있다는  위험신호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의 도전에 인류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이런 도전에 대한 외면은
바로 역사의 사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 불자들은 결코 무관심할 수 없
다. 나를 찾아내야 한다. 나란 무엇인가? 나는 나다.  나는 유무를 초월하여
산 것이며 힘이며  광명이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깨끗한 것이어서
오직 나일 뿐이다. 나는 만법과 더불어 있지 않고  독립, 독존, 독권하며 유
일무이한 실상진아의 실존을  지칭함이 곧 나다. 이 참 나는  발견채득함으
로써 우주의  주인고이 되며 생사의 인과를  초탈해서 자재할 수 있다.  이
진아의 발견이  있은 연후에야 확고부동한  인생관, 세계관 내지  우주관의
확립을 보게 되어  비로곡 신념에 찬 생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
다. 참 삶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비롯될진저-

    그 시대 그 인생
  이 시대를 우리는 불안의 시대라 하고 상극의 시대라 하고 이를 또한 심
판을 받아야 할 말세라고  서슴지 않고 부르고 있다. 고해다, 화택이다고도
한다. 현대는 인간의 지표를 상실한  시대다. 교육이란 지, 정, 의의 조화적
인 발전에 의한 자아완성을 뜻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교육은 과
학만능적인 발전의 결과를 말미암아  지적 측면만의 발전을 꾀하여 인간을
마치 기계난 인간건설을 위한  이른바 인간본위의 교육관을 확립하는데 주
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예술이란  안간생활의 일상적 의미를  예술적
의미로 승화시키는 이른바 인간의식의  내면적 갈등에서 미적 양심과 희열
을 찾아내는 창작적  노력임에도 불구하고 데생 과정도  거치지 않은 듯한
추상 미술, 음률의 조화도 느낄 수 없는 듯한 전위음악, 모든 것이 마구 동
원될 수 있다는 조형조각, 미학이 완전히 배제된 소설, 무의미한 단어의 나
열인 시와 같은 현대예술은 인간 정신의 유기적 질서를 파괴하여 일반대중
에게 미적 공감을 전달하지 못함으로써  풀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저속한
통속문화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퇴폐적인 상업문화르  배격하
고 대중의 지성과 정서를  개발하여 그들을 저속성의 수렁으로부터 빠져나
오게 하는 건전한 대중문화적  예술관을 확립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
야 한다. 매스 미디어란 한 나라의 문화풍조와 그  내용을 개선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이것을 잘만 활용하면
대중의 보다 높은 지적 심미적 자질의 향상과 그것으로 인한 민주시민서을
함양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ATM 미
디어는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들의 선전도구나 영리기관으로 타락됨으로써
다중생활의 안녕과 이익을 가져오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알지 못하는 불안
과 갈등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중의 현대적 기
초가 되는 합리적 사고력과  도덕적 판단력을 길러주며 또한 불교복지사회
(불국정토)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궁극적 실제자에 관한 신념과 과학적  지
식과 새로운 기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 그리고 불교적 인도주의자와 책
임감 등을 교화적으로 제공하는  이른바 실질적인 문화적 문맹성을 지향적
인 매스콤관을  보급하는데 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과학  기술이란
인간생활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적극 활용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고하고
그 발달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한다든가, 의약품의 발달이  인체를 변화시
킨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기호나  일련번호와 같은 기술적 장치에 따라 움
직이게 함으로써 인간서이  말살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위한 인간의 궁극적 행복과 존재의의를 보다 근본적으로 보
장하는데 선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법률이란 통치자나  권력자를 위해서
가 아니라 모든 국민을 위한 법인데 법치주의는 그저 겉치레의 액세서리거
나 프로그램적인 외형에 그침으로써 법률에 의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고 가
능하다는 형식적인 법치주의로  타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인간적
인 법과 행정의 도구화가 국민의  발전과 개선의 능력을 저해시킬 뿐만 아
니라 양심의 공범과 규범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으로 단정하고 이른바 처벌
보다 교도위선의 교육형 주의를 확정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사회란 혁명이건  변혁이건 진보이건간에 개혁은  어디까지나 인간복지의
구현을 위한 제도적 발저을 뜻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사회는 그
개혁과정에서 옛 전통과 새 질서 사이를 이어주는 내면적 규범의 구심점을
상실한데다 사회변혁의 심화 확대롤 말미암아 지역간의 격차,  세대간의 단
절, 계층간의 거리를 크게  빚어내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 종단은 사회변
혁이 몰고 온 정신적 및 공업적인 각종 공해와 사회 각계층간의 대립을 제
거하고 사회발전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이른바 불교적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데 구체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경제란 생산에 기여한  노력과 성과에 대
한 공정한 분배를 뜻하는 것임데도 불구하고 기업간 또는 산업간의 소득격
차는 날이 갈수록 격심해져 그간 저소득만을 감수해야 했던 중소기업 내지
농공업 노동자로하여금 주권자이면서  동시에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 종단은 산업간의  불균형에 의하여 야기된 근로자들의 인간
적 소외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협동적 노동운동의 전개 또는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종교적  여가선용과 기업경영에서의  노동착취의식을 부식함으로써
근로자의 취업기회 및 직업 선택자유의 증대와 기업인의 사회적 소임의 자
각과 공공투자위 확대를 권장하는  이른바 불교적 경제 윤리관을 실천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정치란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되며 국가
의 제도나 시책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야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정치는 비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정치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반면 비정치
적인 것으로서의 인간을 극소화시킴으로써 인간의 자유는 실질적으로 상실
되고 공허한 자유와 형식저인 민주제도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부내 속에서 진행되는 제도적 노예화를 반대하고 자율적 판단과 창조
적의식을 가진 주체적인 나를 회복하는 이른바 인간적 자유화를 위한 민권
신장운동을 전개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현대사회는  고도의
동적인 사회다.  과학기술이 사회생활의 모은 면에  지배적인 영향을 준다.
이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영향력은 가저에도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까닭은 이 영향력이 사회의 구성원을 점점 경제적이고 상식저인 방법에
의존하고 인간적인 관심에 마음을 모이게 하기 때문에 세속적 영역은 점차
좁혀간다. 이러한 경향에  다라서 종교는 그 영향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세
속적 활동속에 뛰어들어간다.  그러나 종교가 세속제도와 경쟁하며  너력하
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이 영향은 종교를 일요일이나 축제일과 같은 한정된
시간과 교회나 사찰과  같은 일정한 장소에 묶어두려고 한다. 말하자면  현
대사회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그 특색일 뿐만 아니라 현대의 복합사회에
있어서 종교  조직체는 분립외고 다원화되어  있다. 그 회원은  자의적으로
가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종교도 이 현대 사회에서는 고대나 중
세처럼 사회구성원 전체의 싱앙적 충성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글히 소
수의 예를 제외하고는  종교기관과 세속 정부간에 공적 관계는 없다.  이러
한 특성들은 사회에 있어서의 종교의 통합기능을 크게 약화시킬 뿐만 아니
라 종교의 다원화는  세속주의의 신장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종
교의 조직력이 갖는 직접적  영향력은 약화되었지만 아직도 간접적으로 사
회를 단결케하는데 공헌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 산업사회
에서는 극히 소소의 성직자를 제외하고는 종교적 가치만으로 그 인격을 형
셩해 가는 일이  적다. 다시 말하면 통합력으로서의 종교적 가치의  약화는
종교집단이 주장하ㅡ 가치체계의 다양성에도 연유하겠지만 그보다 모든 종
교의 가치체계에 대한 주요  경쟁자인 이르ㅂ 상업주의적인 과한, 경제, 정
치둥과 같은 세속의  가치체계가 날로 확대되어 가는 데  더 큰 원인이 있
다. 지난날의 민족정신의  사명이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이었다곡하면
도늘날에 와서는 사회적 정의를 세우는 것이 민족정신의 새로운 과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 민족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하
여선느 빈부의 차별이나 귀천의 가림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물
질생활에 서로 고르지  못한 생활을 불평없이 감당해  왔지만 이제 독립이
된 지도 벌써 성년이 훨씬  지났으니 우리는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하여서
도 사회적 정의를 세울  때가 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족  각자각 자발적
으로 이 나라를 사랑하고 육성하기 위하여서는 우리 사이에 차별의 생화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에 사회적 정의가 이  나라에 세워지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언제나  분렬될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저마다
특수한 사명을 지니고 있는 국민 각자가 저마다 자유로운 권리만인 아니라
독립된 권리를 가지고 공통된  이념(한국사상)과 과거(역사적 경험)의 보편
적인 도덕률(개인양심-민족정기-사회정의)의  발전과 실현이라느 공동목표
에 의하영 지배되는  조국이란 운명공동체로 결합될 때  비로소 참된 나가
실현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다. 우리는 한국 사상을 말하기 전에
이미 한국 사람으로서  살고 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으로서  사는데서
한국 사상도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상도 하루아침에  그 어느 개인
의 머리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이  한반도에
서 삶을 영위한  우리 선조들이 두고 두고 피와  땀으로 싸워 얻어 체험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노력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의  살길
을 찾는데 있다면 한국 사상은 우리가 살아나아갈 앞길을 밝혀주는 것이어
야 할 것이며  우리 삶에 새 힘을 불어넣어주는  활력의 몫을 담당할 수가
있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남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길을 개척하여야
하며 걸어갈 수밖에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한
국의 정치적 독립과 자립을 외치면  그를 위하여 싸울 줄 알면서 어찌하여
그의 정치적 독립과 자립을 외치며  그를 위하여 싸울 줄 알면서 어찌하여
그의 정신적인 밑받침이 될  사상적 자주를 위해서는 그렇게도 무관심하단
말인가? 한국의 지도이념을 떠난 정치적 독립도 경제적 자립도 있을 수 없
는 일이거니와 한국의 지도이념이 딴  것이 아니고 바로 한국 사상이 지니
고 있어야 할 기본  정신인 것이다. 한국 사람이 겪어온 고난  극복의 역사
가 중첩한 파란과 곡절로써 아로새겨질 때마다 한국의 사상느 폭이 ㅇ어지
곡 깊이를 더하여  왔다. 신라의 통리 불교, 고려의 호국불교,  이조의 구국
불교, 일관된 불교사상과 향학,성리학, 실학에 일관된  유교사상을 2대 주축
으롤 한 한국 사상을 배경으로  더욱이 근세에 와서 일본의 침략을 전후하
여 근대정신에 자각한  우리 민족은 3.1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많은  민죽운
동을 경험하여 왔다. 다시 말하면  정치운동으로, 사회운동으로, 문화운동으
로 우리 민족은 일본의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저항적 자각운동을
줄기차게 계속해  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숱한 애국지사들과  선각자들은
생명도 잃고 고초도 당하였다. 따라서 8.15해방까지 우리가 서로 어떠한 길
을 걸어왔던지간에 목표는 오직 하나 독립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느 빈부의
차이나 연령의 고하도  없었고 직업의 귀천이나 학식의 다과도 없었다.  우
리가 옥립을 하려면 먼저 알아야  되고 우리의 물산을 애용하면 우리의 문
화를 사랑하여야 된다고 생각하여 왔다. 그때의 민족의식에는  협잡도 없었
고 권모술수도 없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나에 귀일되는 순수한 민족애만
있었다.

    사상은 육체를 나로 삼는 데서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수자상의 사상을 중시 하는  것은 이것만
떨어지면(마음)이 드러나게  되고 (참나)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상)이라 함은 내가  항상 말하는 육체를 (나)라 하고 생각을  (나)라고하
는 (가아)를 말합니다. 이 (가아)인  (아상)이 있기 때문에 인상, 중생상, 수
자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다시 한 번 더 되풀이해서 사상
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무엇인가. 발심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를 안다는 말은  인생을 바로 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
을 발굴해섯 자기각 갈 수 있는 길을 깨다른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을 깨달은 이인데,  (이런 사람은 어떻게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어떻
게 백팔 번뇌, 발만사천 번뇌를 항복 받아야 하겠읍니까.)하고 수보리가 부
처님께 질문을 하셨는데 그 뜻을 한 번  더 풀어보면 이런 것입니다. (인생
이 꿈 속이란 것은 알지만 그러나  이해가 앞설 때는 욕심도 나고 남녀 이
성끼리 만나면 이상한 생각이 일어나고 이런 쓸데 없는 꿈 속의 일에 시달
립니다. 태평양 바다보다  더 복잡하고 심한 번뇌의 파도가 이러나섯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음시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되니 옳지 않은 이 마음을 어
떻게 항복 받아야  하ㅎ읍니까.)하고 여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
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항복 받아
라.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고도 제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만일 중생을 교
화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은(나다)(남이다)(중생이다)(부처다)(오래산다)
하는 분별심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것은  발심한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중
생은 다 제  잘난 멋에 삽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중생을  제도하라 하시면
서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것이므롤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음녀 중생에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 사상은 곧  (나)로부터 벌어집니다.
(나)란 생각은 본래부터 있는 생각이 아니고 객관을 상대할 때 (나)라는 생
각을 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주체
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 물건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다가도  얼마 안
가면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자기의 바탕
일 수는 없고 그러 것을 좋다 싫다하고 생각내는 주체가  (나)일 수바껭 없
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항상 말한 바와 같이 물질도 허공도  아닌 산
생명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동그라미도 네모 세모도 아닙니다. 마음 자리는
모나고 둥근게 아닌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먹물은  본래
검은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먹을 다  갈아도 하얗게 될 수는 없는 것과 같
습니다. 따라서 물질이나  허공은 본래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아무
리 뭉치고 천충 만층 높이 쌓아봐도 그것이 듣고 보고 생각할 줄은 모릅니
다. 그와 같이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 육체도 무엇을 보고 들을  줄은 모
릅니다. 마음이 보고  싶어야 보고, 듣고 싶어야 들립니다. 육체는  내가 아
니라 나의 것일 뿐이기 때무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육체도 아니고 모
든 것을 다  초월한 자리, 차원 이전이고  태초 이전이며 질량 이전입니다.
이것이 온갖 생각의 주체이고 진아입니다. 따라서 진아의 상대가 가아이며,
생각의 (나)입니다. (진아)니(가아)니 해도  실제 마음은(잔아)(가아)를 초월
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안니 만사의 주체입니다.  그러
므로 이것은 설명으로 될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쳐야 합니다.
  깨달았다 견성했다는 말은  소위 밥 먹고 자고 이러나고  할 줄 아는 그
자기를 깨친 것이니  깨달았다고 해도 말이 안됩니다. 부처님이 깨쳐  놓고
보니 출가하려고 할  때 애쓰던 그 마음 그대로고 싯달태자  그대로입니다.
(육체 말고 자기  마음 그대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아니 진실상 그
대로의 마음이 있겠구나 )하고 이해가 될 때 그래서 우주에 재자유가 이고
전지전능한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이 마음을 깨쳤다고 하는 것
이 밥 먹고 똥  싸는 그 마음, 산모가 아기 어서 나가라고 힘주는  마음 그
대로이니 이것은  깨쳤다고 해도 안됩니다.  본래 미한것도 아닌데  어떻게
깨칩니다. 그런데 육체를  (나)라고 하는 데서 (아상)(가아)가 생기고  안상,
중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이 생기는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나)라고 하
다 보니 술에 미친 사라므 아편에 미친 사람이 되곡  정치에 미친 사람, 문
학에 미친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인간의 본성이 개발되지
않아서 그럽니다.  인간성은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을 뜻하며 선한 것  악한
것이 인간성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번뇌각 이러나는
것을 걱정말고 깨치지  못한 것만 겆겅하라는 것입니다. 망상을 안  일으키
려면 더 이러납니다, 망상 일어나려는 것은 내버려 두고  망상도 내가 일으
키는 것이지 망상 저혼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망상은 가만 두
고 염불이든 참선이든 그것만 하면  오늘 반에 깨칠지 금생에 깨칠지 여하
튼 깨치게 됩니다. 사람이 전생에 공이 많으면 금생에  까치고 공이 적으녀
내생에 깨치게 됩니다. 하여튼 깨치게 될 그 시간을  바라고 금생에 못하면
늙어 죽을 때 까지 염불이나  하고 참선하고 마치면 그러면 내생에는 깨칩
니다. 복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복을 가지고 태어나면 머리도  지금보다
몇억만 배  좋ㄱ 태어납니다. 다만 공부하는  데는 깨치려 해도 안되고  안
깨치려 해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다 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될 그런 요소가  나한테 있구나. 오온이 내가 아니구나. 말하는  여기에, 배
고프면 밥 먹는  여기에 있겠구나. 여기서 자기  관혁을 깨치게 됩니다. 그
부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마음이 부처란 소리가 어떤 ㄸ인
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가 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평생 강사
노릇해서 제자가 수천  명이 돼도 자기가 모르고  가르치니 제자도 모르고
듣습니다. 마치 눈먼 장님에게  매달려 기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는 것도 그렇고 염불도 그렇고 다른 어떤 공부를 해도 불교의 근
본 진리가 어디로부터  어디로 가는지, 생사를 어떻게 해서 해탈할  것인지
를 확실히 알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49년간의 기나긴  설법
을 하셨던 것입니다. 육조 대사께서(응무소주이생기심)을  듣고 깨치셨는데,
그 뜻은 (번뇌 망상없이 살아라. 아무 모양,  주의 ,사상 그런 거 개의치 말
고 지금까지 배운 거 다 청산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라)그런 뜻입
니다. 우리가 기분으로  만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니 제 기분대로  비판해
치워 버립니다. 남의 말을  들어도 자기 기분좋을 때는 그 말이  좋게 들기
고 기분 나쁠 때는 나쁘게 처리되어 버리니 이것이  망상입니다. 그것은 결
국 육체  때문에 하루 밥 세  그릇 먹느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말도 나쁘게 받아들이고 나쁜 말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 없다. 나는
물질도 허공도 아닌니 자살도 할 수  없고 타살도 할 수 없고 죽을 방법이
없다. 그게 이렇게 받아들이고  나쁜 말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없다.
그게 이렇게  얘기하고 듣고  있다. 이것이  마음이다.)늘 이것을 앞세워서
(나)다, (남이다)한는 것이 없는 생활을 해야 중생을 초월하게  된다는 것입
니다. 내가 오늘도 병원에  어떤 보살을 문병 갔다 온 일이  있는데 별안간
사람이 와서 스님 좀 꼭 보자고 해서 누군지도 모르고 따서가서 한 시간이
나 이야기 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복잡해WU서 마음을 쉴 수 없다며 눈물
을 자꾸 흘립니다. 가정불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 얘기를 해 주
고 관세음보살님만  자꾸 부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 세상을  원망하느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불안해지면 대번에  이
것이 독소로 변해서 온갖 병을 일으키는 때문입니다. 그래  당신이 그 마음
을 풀기 전에는 천하없이 기도를 하고  한국 돈 다 갖다 바치고 기도를 천
년 만 년 해도 그 병이 낫질 않습니다. 당신이  전생에 첩이 되어 남편에게
곤란을 주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본  마누라가 되어 가지고도 남편 번 돈으
로 자꾸 딴놈과 쓰고 다니고 나쁜  짓 했기 때문에 이생에 와서 남편이 그
러는 것이지 모든 것이 다  인과법인데 아무 까닭없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는 얘기를 한  시간 정도 애 주었습니다.  그랬더니(정말 그러냐)고 하다가
나중에는 그 말 꼭 믿겠다고 하면서 안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
가 (당신이 인과를 안 믿으면 죽는다. 암은 아무리  째고 해 봐도 별 수 없
어 다른 데 또 생긴다. 기분이 만든 암이기 때문에  뇌가 또 나빠지기도 하
므로 마음부터 항복받아야한다.)고 말해 주고 온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먼
저 바로 안정이 되어야 병도 낫습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것도 (병원에 가면 의사가  우리 병을 책임지고 고쳐 준다)고 믿는  마음의
안정이 있기 때문에 효과가 잘 나타납니다. 치료하기 전에  벌써 자기 마음
이 반은 고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주체는 마음이고  이 현시른 꿈이어서
꿈은 다 마음이 꾸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부터  백까지가 다 마음
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의  피조물이라 맏어
구속되고 자연계의  물리화학의 원리가 절대적이라  하여 그것에 구속되곡
무당이나 점장이에 구속되고 그러지만 중생들의 마음자리 불성자리는 본래
부터 완전한 부처이어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전지전능한 실존이어거 가
사 우주을 창조한 신이 온다 해도 그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항복하게 됩니
다. 그것이 다 자기 마음이 만들었던 망상이었으니 망상이 천  리 만 리 사
라진 본 마음자리가 나타나면  자연히 신이니 과학이니 신앙이니 미신이니
불교니 유교니 하는 따위의  제2의 산물인 그야말로 피조물들은 다 사라지
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이 있다고  믿고 자연과학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지배된다고 믿는  마음에 의해 지배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평소 아무것도 모르고 불법도 모르는 이런 사람이
라도 심어지는 개,소,돼지 같은  금수까지라도 산보고 높다는 말은 안 하지
만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보고 깊은 줄은 압니다.  이렇게 말은 없어도 알
줄 아는 이 자시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시간이나 공간이 아닌 실재이고
물질이나 에네르기처럼 죽은  존재가 아닌 산 생명입니다. 이것이 눈을  통
해서 내다보고 귓구멍을 통해서 듣고  이러지 다른 놈은 다 죽은 것들이므
올 그럴 놈이 없습니다. 보인다 들린다 하는 생각 그것이  보고 들을 줄 아
는게 아니고  일체 보는 마음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으며,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아무 생각도  없는 실재이고 실존이고 실상이고  한 이것이 직접
눈구멍으로 내다보고  귓구머으롤 듣는 것입니다.  생각 그것도 이  실상의
반야인 마음으로부터 생각되어 만들어진 피조물임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어서  어느 정도 인식이 외었으리라 믿습니다. 맨  처
음 절에 돠섯 법문을 듣고 그것이 잘 듣지 못하는대로 들었지 따놈이 들을
놈이 없습니다. 허공이  들을 수 없고 고깃 덩어리인 육체는  물질일뿐이니
역시 못 알아들을 것이고 아른  귀신이나 도깨비각 와서 듣고 알려 준것도
닙니다. 설사 도깨비랄 할  지라도 그 실상은 여시 불성자리인 마음입니다.
지옥에 가서 두들겨  맞고 아픈 줄 아는 것도  알고 보면 역시 실상자리인
그것이 알지 이것 빼놓고는 무엇이 아픈 줄 재미있는 줄을 깨달을 놈이 없
습니다. 그러므로 모르고 들은  그때도 완전히 부처가 돼  가지고 E들었고
차차 법문을 들어서  세상은 무상한 것이다. 참선을 해야겠구나 하고  말을
알다들을 때에도 역시  본랠 완전히 부처각 되어서 듣습니다. 그러니  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주에 번뇌 망상이 없어졌다고 해서 별  것이 아니
고 내내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보고 깊은 줄 아ㅡ 그대로이곡 다른 면목
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도가  다 돼 있는 것이므로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일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멀쩡한  부처각 딴 생각을하고 DltDMSL
까 술 위해섯 길  가는 것 붙들어 준 폭 밖에 안됩니다. 술이  취했다고 해
서 다른 사람인  것은 아니고 술이 깨도  그 사람, 취해도 그 사람인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이 탐진치 삼독주에 위해 가지고 육체만 나인  줄 알고 이
해타산하고 온갖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여 복잡한 세상을  만듭
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탐진치의 삼독주에섯  까어나라.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려라. 내다 남이다 하는 것이 관념이고 업슨 것이다.)하는 법문으
르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공입니다.  번뇌,망상, 온갖 지식과 경험을 쌓아
가지고 하는 법은 이렇고 땅의 이치는 어떻고 인간 사회의 도리는 이런 것
이라는 관념을 가지고는 서로 죽이려고 하고 전쟁을하고  그럽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그런 하늘도 없고 그런 땅도 그런 인생도  DJAT고 그런 아
버지 어머니도 없고 내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도 있는게 아닌 도리를 말
씀하셨는데 이것이 법공입니다. 부처님 법공의 진리를 듣곡  나서 여태까지
의 지식을 다 놓아버니고 온갖 생각이 끊어지면 본래 있던 적멸 그 자라가
나타납니다. 마치 구름이 벗겨지고 나니 본래 있던 밝은  달이 나타난 것과
같아서 아예 없던 달이 그름 벗겨지고 나서 새삼스레  생긴 것이 아님니다.
이렇게 되면 (아아이제  알았구나!)하고 깨달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
서 이 께달았다는 생각마저 놓아버리는 이것이 구공입니다.  그러난 이렇게
아공,법고,구공의 이치를 깨달았다고해서  본래 보처자리인 마음 바탕이 더
밝아진 것도 아니고 알 줄 아는 성품이 잘못된 착각을 품었다고 해서 손상
이있느냐하면 그런것도 아닙니다. 근본 마음 자리는 벌레나  굼벵이가 되었
다고 해서 더러워진 것도 아니고 하나도 중감이 없이 불생불멸이고 불면하
는 일여평등체입니다. 그러니 애당초에 이렇게 완전한 부처각  되어 있으므
로 제도 한다는 생각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을  내가 제
도 하겠다,  깨우쳐 주겠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있다면 이 사람은  중생을
내가 제도하겠다,  깨우쳐 주겠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사람은
중생 제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고 보살이 될 수는  더욱더 없는 것입니다.
그레ㅐ섯 내각 법사거니, 내가 누구를 가르쳐 주었거니, 걔를 내가 일러 주
었으니, 내 제자거니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쳐 주지도
않고 제도하지도 않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제도하기는 하되 그런 생가이
없이 무심으로하고, 하는 것 없이 한다는말씀입니다. 만일 아뭉것도 안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또 소승이고 공에 떨어진 것이며,  대승이 아니고 금강
경의 말씀을 바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말씀은  공의 사상을 철저
히 말하지만 거기에 집착하여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고 상없는 마음으로 머
무름없이 중생을 제도 하고 인류의  구제를 위해 공의 원리로 백천억의 육
신을 바치고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중생을 발심시켜서  일이리 지도를 해서  견성을 KRP  하고 보살만행을
잘 하도록 호념해 주고 부촉애섯 정각을 이루고 성불을 하게 하는 것이 분
명히 있지만 그것은  다 꿈 숙에섯 하는 일이고  관념일뿐 꿈을 깨고 보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거기까지 가는길인  로정기만을
말씀하신 것인지 그  당처 자리는 시방제불이 한  마디도 말씀하시지 못한
것입니다. 그 곳은 말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다
만 꿈 속에  들어가서 꿈으로 꿈 같은 이야기를  해서 꿈으로 꿈을 깨도록
하는 말씀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꿈 밖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이야기하
지 못했고 실상의 소식에  대해서는 입을  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
님도 아무 상관도 없는 말씀한 하셨지 사실로 중생이 제도 받는 일이 없습
니다.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이고 본래부터 그렇게  완전한 자리이므로
제도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도하는 사람도  제도하고
제도받을 것 없는 줄 알고 설법해  주므로 종일 설법을 해도 법을 이럴 줬
거니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 자리는 일체 사상,인륜도덕이 용납되지 않
습니다. 선방에서 참선할 때 조금만 허술하면 방망이가 막 내려 옵니다. 망
상이나 피우는 그런  머리통은 부서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
이 일체 중생을 실제로 제도했다  하더라도 게도 했거니 하는 생각이 있다
고 하면 이 사람은 곧 중생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잘 무르는 사람이고 동시
에 불법을 모르는 사람이니 이런 사람은 보살일 수 없고 중생을 제도할 자
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굶는 사람이게 쌀말이난  주었다 하더라도
주었거니 하는 생각이있으면  아상,인상이 있는 것이고, 중생을 제도하겠다
고 자선 보살이 제도를 했거니  제도를 받았거니 하는 생각이 있어서 선생
이니 제자니 하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고 불법을 성취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제3장 망상에 헤매일 때
    꿈이냐 망상이냐
  참선을 하든지 열불을 하든지 하여 번뇌를 쉬고 망상을  끊어야 한다. 허
망한 것은  간직할 것 없다. 간직해  보아야 없어지니까 허망하지 않은  걸
찾자. 그것은 내 마음밖에 없다. 다른 건 다  허망하다. 우리가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도 허망이고 진리도 허망이며 허망한 것은 전부 허
물어지는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다. 모든 허망에서 탈피하여서 허망을  내 마
음에서 버릴 때 나는 곧  내 본래 부처를 만날 수 있다. 딴 데 간  것도 아
니고 다만 육체를 나라는  착각 때문에, 딴 착각을 해서 그것이  바빠진 것
뿐이다. 우리는 육체를 나라 하고 오온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천당 지옥을
생사윤회하고 있다. 만날 돌아다녀봐도, 시집을 천만번 가봐도 소용없고 장
가가도 별 수  없고 세계 갑부가 되어도  별 수 없다. 생로병사를 면할  수
없고 반야 지혜는  얻을 수 없다. 지금부터  밤낮을 가리지 말고, 오나가나
가만히 있거나 부지런히  일을 하거나 않았고 누워  있는 동안이라도 다만
모든 일에 무심할  줄만 알아가면 자연히 만사에  잘못을 따지는 분별심이
없어지며, 또한 어디에 의지할  생각도 없어지며, 어느 한 곳에도 늘어붙어
살고자 하는 애착도 없으며  또한 사방으로 돌아다니고자 하는 벌떡거리는
망상도 없어지리라.
  우리가 천당 갔다  지옥 갔다 하고 육도세계를  돌아다니고 윤회를 하고
그것이 다 번뇌의 업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번뇌의 잠재
의식이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를  떠나서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돌아 다니
는 것은 아니며 본 마음 자리가 한 것이다. 그러니  죽어서 천당에 가도 그
실상자리, 자기 근본정신이  올라간 것이지 망상 그것이 자체가 있어서  본
마음을 떠나서 올라간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마음이 우주에 편만했다.
즉 크다고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거렇다고 해서 작은 거냐 하면 바늘 가지
고 찔러 볼  수도 없는 아무 것도  없는 존재이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없는
거면서 그 속에 우주가  다 들어가 있다. 지금 그대가 망상을  일으키고 있
으나 그 망상이 일어나는 줄 아는 자리는 망상이 아니므로 그것이 곧 부처
님이다. 그러므로 만약 모든 망상을 근본적으로 딱 끊어버리고  나면 그 자
리는 도한 부처도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도 중생도 아니고 본래부터 그대
로인 이 마음에서 그대가  (나는 부처가 아니다)는 다른 망상을 낸다면  그
것이 허물이 되어서 그대는 또한 다시 이유없는 망상을 일으켜 (나는 성불
해야 할 것이다)고 생각할 것이며, 또 한 중생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저
중생들을 제도해야 한다)고 나설 것이다. 그러니  헤아릴 수 없는 생각들이
다. 그대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볼 뿐이다. 망상의 늪에서 헤매
일 때, 우리는 결코 나를 찾을 수 없다. 망상은 나의 부재에서 생겨나는 괴
물이다. 나의 파괴자는  바로 망상, 그것이다. 도가 높아지면 죽을  때 몸뚱
이를 옷 벗듯 벗고  간다. 실은 죽는 것도 아니지만 육체가  죽는다고 보고
지게를 지고 가다 지게를 세워 놓듯이 한다. 그렇게  놓고도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는 미해서 망상이 일어나고 하는 자세한 이야기는 여러가지 있지
만 탁한 마음, 곧 색정이  일어난다. 금생의 자기 몸뚱이는 옷 벗듯이 했지
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 깜짝 미해서 피로 엉켜서 있다.  그런데 도가
더 높은 사람을 배솟ㄱ에 들어갈  때는 미하지 않고 자기 공부그대로 하고
있는데 그렇게 열 달동안 가만히 하는 이도 있고 아홉 달만에 자기 공부하
던 걸 나와서 미한 사람도 있고 또 여덟 달에 미한 사람,  한 달에 미한 사
람, 또 열 달을  다 선방에 앉아서 공부하는 모양으로 정진하는  사람도 있
다. 그런데 이렇게 2백  80일 동안 하다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그  속
에서 나오느라고  큰 고통을 겪게 되므로  출태할 때 제일 미하다.  그래서
깊고 완전하게 될 때까지 계속 닦지 않으면 안된다.
  마누라를 자기 명령에 복종하도록  만든 것은 정말로 5천년을 통한 영웅
가운데 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 천하없는 영웅도 마누라한테는 꼼짝  못한
다. 백만대병을 거느리는 대장이라도 부하를 물속, 불속으로 들어가게 명령
하는 것은 할 수  있고, 항우 같은 천하장사를 단번에 때려눕힐  수는 있을
지 모르지만 기운 없는 마누라에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고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우리가 기분으로 만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니  제 기분대로 비
판해 치워버린다. 남의 말을 들어도 자기 기분 좋을 때는  그 말이 좋게 들
리고 기분 나쁠때는  나쁘게 처리되어 버리니 이것이 망상이다. 그것은  결
국 육체 때문에 하루  밥 세 그릇 먹느라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좋을 말
도 나쁘게 받아들이고 나쁜 말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없다. 나는 물
질도 허공도 아니니 자살도 할 수 없고 타살도 할 수 없고 죽을 방법이 없
다. 그게 이렇게 얘기하고 듣고도 있다.  이것이 마음이다.) 늘 이것을 앞세
워서 나다, 남이다 하는 것이  없는 생활을 해야 중생을 초월하게 된다. 불
이 꺼져도 눈으로 깜깜하게 어두운 것을 보고 불이 켜져도 환하게 밝은 광
명을 보는 것이니 어두운 때나 밝은 때나 보는 눈은  변동이 없고, 이 마음
자리는 볼 때나 안  볼때나 변하지 않는다. 중생들은 미래 것은  모르고 과
거의 기억은 희미해져서 망각해야 되는 것은 번뇌망상으로 경계를 치고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기 때문에 망상  그것만이 나인 줄 알고 깨끗하고 자유
자재한 본체가 있다고  여간 설명해 줘봐도 좀체로  인정할 생각을 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망상이  어떤 자체가 있어서 능동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
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러는 것이고  마음의 본체가 그러는 것이다.  마치
파도와 물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물의 움직임이 파도고 파도 자체
가 물이듯이 실상 망상도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마
음이 착각을 한 것이 망상일 뿐  마음을 다 정리해 놓고 보아도 그전 마음
그대로이다. 산은 높은 그대로 있고 물도 깊은 그대로이며  성불을 해도 항
상 그대로이다. 육지와  바다가 갈린다는 걸 부처님께서 늘 말씀해  놓으셨
는데 그런 예로  봐서 이 지구가 항상 안전하게  있는 그대로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도 얘기하다가 갑자
기 사망하듯이 지구도 역시 그런 변동이 있다. 그러니까  현상계인 이 땅덩
어리도 그렇게 믿을 수 없는 무상한 존재이고 몸뚱이도 믿을 수 없는 허망
한 것이다. 양은  줄곧 이리떼의 침공을 받아왔지만 결코 그것들을  모방하
려 들지는 않았다.  낭성을 본받아 미친놈처럼 고함을 지르는 허스키의  유
행가가 번지는가 하면, 발작하는 간질환자처럼 온몸을 비틀고  궁둥이를 휘
두르는 것으로 첨예를  자처하거나, 제임스 딘의 영화 한두 편으로  이유없
는 반항을 시도 한다든가,  텍사스 황야의 개척자를 흉내내 권총강도질, 폭
력단의 조직, 몽둥이를 휘둘러 행인을 노리고--확실히 우리는 무언가 빠져
달아난 것만 같다.  정진하는 사람에게 가장 고민되는 것은 망상에  얽히어
정진이 잘되지  않는 그것처럼 괴로운 것이  없다. 무엇을 먹을 수도  없고
바짝바짝 사람이 마른다. 이렇게 고생을 하다가 번뇌 망상이  뚝 끊어질 때
면 참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안 낼 수가 없다.  깊은 산골짜기에만 살던 사
람이 어느날 우연히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앞이  툭 트인 무변대해를
바라다볼 때 앗소리를  안 지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넓은 창해를 볼
때 기쁜 마음이 일어나듯이, 번뇌 망상이 뚝 끊어진  경지에 들어가면 이만
하면 됐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번뇌망상에 짓밟혀  가지고 맥을 못
쓰다가 큰 우주를 발견하고 보면 온 우주가 내 기운이 된다.
  모든 생각을 다  쉬고, 쉬었다는 생각마저 없으면 천진본래의 자기  부처
가 뚜렷이 나타나는  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중생이다. 중생인 시절에도 이 마음은 조금도 덜해진 적이 없었고, 부처
가 된 때에도 이 마음은 또한 늘어나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대들
이 별별 망상을 다 내고 온갖  망동을 다 저지른다 할지라도 어찌 텅 비어
서 아무 것도 아닌  이 마음을 떠나서 할 수 있는 일인가. 비어서  아무 것
도 아닌 이 마음은 본부터 클 수도 작을 수도  없으며, 어디로 새어서 흘러
갈 수도 없으며 아무 것도 하는  일도 없으며 또한 아득한 일도 없으며 깨
달아 아는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도 분명하며 진실하고  확실
하여서 털끝만한 물건도 얻어볼 수가 없으며 또한 범부도 부처도 아니라서
한점 만큼도 아는 것도  없다. 이 마음은 어디에 의지해 있는  것도 아니며
어디다가 붙여서 꾸며진 것도 아니다. 끝까지 청정한 이  마음은 진리며 진
아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따져보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부처는 입
이 없기 때문에 설법을  할 줄 모르는 것이며, 허망하지 아니한  이 마음에
는 귀가 없는데 그 무엇이 들릴 것인가? 당장에 무심한 줄 알면 만법에 두
루하며 천지 이전의 본래 부처 자리가  곧 우리의 이 마음인 것을 알게 되
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저 해가 떠서 온 세계를  비추어 아무 데도 거리낌
이 없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다만 보고 듣고  따지고 생각하며
행동하고자 하는 모든  생각만 놓아버리면, 이 본래 있는 마음만이  온전히
남아 앞뒤가 뚝 끊어져 있으며  또한 깨달아서 들어설 곳도 없으며 들어설
나도 없으므로 보고 듣는 것이  눈이나 귀가 아니고, 곧 이 마음인 것이다.
모든 생각과 일체 망상, 이것은  다 그대가 스스로 일으켜 낸 것이 아닌가.
그대가 일으키면 계속해서 있고, 내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단지 말하는 이
마음이 곧 무심하며  또한 본래 부처인 줄 확실하게  알고 보면 이 마음은
본래 망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 스스로가 부질없이  망상이거나
하는 딴 생각을 낸 것이다. 산은 높고 물은 깊다.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다
는 말인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악의 꽃잎들
  모두 제 욕심만 채우려니 첫날저녁부터 남의 사정 하나도 안봐준다곡 싸우고 원수가
된다. 욕심을 가지면 자추를  맛볼 수 없다. 욕심 없는 대자유의 맛은 안가져본  사람은
모른다. 아무 욕심이 없어야 그때가 비로소 자유뿐이고,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고  창하
가 다 우리집이  된다. 모든 것을 다 털어놓으면  무든 거이 내 것이고, 붙들어 쥐려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점점 더 고독해지고, 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적이 많아진다. 권리와 돈 다버리고 나면 천하 물건이 다 낵 것이 된다.  아
무 욕심 없이 농사짓고 장사하면 무슨 사업을 해도 잘되지만 욕심쟁이는 혼자 돈을 벌
어서 남을 위해 한 푼도 쓰지 않으니 천  사람 만 사람이 다 증오하게 된다. 그런 욕심
버리고 돈을 모으면 온 세상 사람이 다 내 식구고 재미가 날 것이며 욕심을 떠나면 내
가 없어도 하나 걱정이 안된다. 욕심 없는 처녀 시집가면 오직 남편만을 생각하고 위해
주니 이런 아내는 다시  없다고 업고 다니며 좋은 물건 다 사다  줄 거싱다. 욕심 없는
총각이 장가들면 자기의 모든 것  다 희생해서 아내만 위해 줄 것이니 그 아내는 우리
남편 제일이라고 자랑할  것이다. 하나의 업이 멸하지 않고는 하나의  밝음을 볼 수 없
다. 그 하나의 업이 자기  것이나 사회, 국가, 민족, 세계 전체의 업이든간에 주어진  세
업을 멸하지 아니하고는 정의로운 평화룰 이룩할 수 없다. 이 하나의 업은 미망과 어리
석은 판단과 보잘것없는 분노로 자기와 자기 이외의 세계에 있어서 그릇된 역사판단을
가져오는 무명한 욕망니 것이다. 이를 멸하지 아니하고는 부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계
율이 무의미하고 또한 부처님의 지상명형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우리들 부처님 아들이
부처님으 적극하신 엄명을  거역한담녀 세계로 펄럭이면 퍼져가는 부처님의 자비한  인
도주의의 황국의 촌가 누항만이 아니라 도시에도 암답게 펄럭이면 자비와 지혜로 생활
하는 세계민족 소그이 선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는 남으로 인하여 입어집이 아니
라 나로 인하여 깨달아지는 자각으 종교이다. 이 자각적인 종교는 자기 속에 있는 밀알
을 썩히어 많은 밀알을 거두게 하여야 한다.  한 알이 썩어 희생되지 아니하고 많은 열
매를 거두어들이는 영광이  있을수가 없다. 우리들 부처님 제자된  모든 사라밍 자기가
희생하여 이룩할 연업이 무엇인지 믿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애들이나 모두  제 잘난 멋에 살고 있다. 만약
에 내가 못생겼다고 확실하게 확정만 되면 너도 나도 자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렇지 않으면 아무도 없는 데 가서라도 저  혼자지만 제 잘난 멋으로 살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제가 무엇인데 그렇게 잘났단 말이냐 하고 물으면 얼른 대답 못할 것이다.
현재 서양의 물질문명이 진보하여 가다가 마침내 벽에 부딪쳐서 이제 더 찾을 길이 없
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 청년들이 적어도  심리적으론 전부 히피족이 되는 것인데 히피
란 환장했다는 뜻이다. 그들의  머리는 뒤집혔고 알맹이는 없는 거품이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발견할 수 없고 자기를 발견할 수 없으니 히피족이 안되고 어떻게 하는가. 히
피족이라도 되는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이고 히피족도 못되는 것은 비 맞은 쇠똥 한가
지의 썩은 청년들이다. 비 맞은 쇠똥은 거름도 안되기 때문이다. 히피족도 못되는  그것
은 개만도 못하다. 개는 보신탕도 하지마는 히피족도 안된 인간은 곰탕도 못된다.  그러
니까 세월이 그만큼 밝아졌다. 미국 청년들은  무언가 생명의 애창이 있어 환각제를 먹
을지언정 자살은 하지 않는다.  죽기는 뭔가 억울하다는 것이다. 덴마크 청년들은  미국
사람보다 앞서 있다. 그 사람들은 교육도 완전히 의무 교육이고 교통도 무료,  의료기관
도 무료고 전부 공짜로 살 수 있는 극락세계고 지상천국이다. 성도 개방을 해서 여자로
생긴 것은 전부 친척이건 누구건 다 자기 마누라고 남자는 전부 영감이고 자기 남편이
다. 성을 개방해서 법률에 저촉되지 않도록 돼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래놓고  나
닌 지극히 고독한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 성장하면 결혼해서 내 남편 내 아내가 결속되
고 임자가 있어야 될 터인데 개방을 해놓고 나니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뛰어
다녀도 어디가 죽어도 아무도  간섭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덴마크 처녀 총각은
처녀 총각도 아니고 옛날 우리 습관대로  하면 잡년, 잡놈들이 되어버려서 이 사람들은
신에 염증이 난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아직 신에 다한 염증은 안 났기 때문에 애에 대
한 애착이 남아 있다. 인생의 근본이 되고 있는 나란 과연 무엇인가? 죄를 짓고 삼악도
에 떨어져서 한  없는 고생을 하기도 하고 복을  지어서 천상에도 나고 사람도 세상에
나와서도 국왕, 대신이나 큰 부자로 복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그 근본 주제는  다 마음
이란 내가 하는 일이다. 잘산다고 하는 사람도 내용을 알고 보면 내외간과 부자간에 마
음이 맞지 아니하여 서로 불화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전생에 도둑질한 사람과
살생한 사람이다. 또 인덕  없는 것도 큰 고통이다. 부부간에도 맞지 않고 부자  간에도
맞지 않으며, 심지어는 식모하고도 맞지 않는다. 밥을 먹어도 소화가 안되고 밤에  누어
도 맘이 좋지 않아서 잠이  안온다. 부모, 형제, 친구, 동네 사람까지 모두 나를  욕하는
사람뿐이다. 이런 사람은 전생의  내외간에 배신한 죄를 지은 사람이다. 죄업으로  지옥
같은 그런 무서운 업을 지으니까 인간 세상이 그렇게 점차로 나쁜 상태로 된다. 이것을
적은 삼재, 곧 소삼재라 한다. 이 소삼재 때에 거기에서 복이 제일 많고 마음씨가  아주
나쁘지 않은 얼마의 사람만이 뒷 세상까지 살아 남았다가 그게 차차 번져서 인구가 증
가하기 시작하는데 거기서부터 다시 수명도 길어지고 복도 많이 올라간다. 중생들이 십
대 죄악을 다 지어서 죽으면  곧 저 무서운 아비지옥으로 떨어져서 갖은 고통을 다 받
는다. 그러나 그 중생들이 저 큰 죄악을  지을 그때에 내가 죽으면 지옥을 들어갈 것이
라 생각한 일도  업거니와 또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8만 4천 지옥들이 실로
그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중생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그 업습의 그림자가 사실
과 같이 보이는 것 뿐이니 실로 있는  지옥은 아니다. 범부 중생들은 큰 착각을 일으켜
서 정말로 자아인  이 마음의 실재는 오히려 부정해  버리고 무상한 이 세상의 흐르는
가상에 속아서 허덕이니 참으로 애처로운 일이다. 이러한 망령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선
악을 가리지 아니하고 온갖 짓을 저지르고, 마음의 인과법칙에 속박되어 영겁에 생사고
를 벗어나지 못하고  천당 지옥으로 끝없이 윤회한다. 사람을 많이  죽일 수 있는 것을
연구하는게 사람이지만 그래도 짐승들은 그렇지 않다.  그저 일 대 일로 싸우다가 하나
가 지거나 하나가 이기거나 둘이다 죽으면 끝날 뿐인데, 어떻게 하면 좋은 무기로 사람
을 하나 이상  더 많이 죽일 수 없나 해서  이렇게 경쟁이 심해져 점점 많은 죄업으로
엮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극악무도해지는 말겁에는 삼재가 일어난다. 사람의 나이가  20
에 정명이 되면 첫째 기근겁이 와서 융년이  자꾸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고, 둘째는 질
병검이 오는데 생전 이름도  내용도 알 수 없는 나쁜 전염병이 돌아다니면서 집집마다
모두 앓는 사람 천지다. 그 다음 세 번째는 도병겁인데 산천초목이 모두 칼날같이 보이
고 창같이 모두 죄업으로 현상계가 그렇게 되어서 닥치는 곳마다 몸을 상하게 되고 찔
려서 죽기도 하고  모두 이런 것 뿐 이라는 것이다.  자유! 이놈 때문에 좋기는 하지만
큰 낭패다. 부처는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요, 사람은 부처를 속이는 부처다. 어느 사람이
참으로 속이는 사람이며  어느 사람이 진정 속는  사람일까! 정말 속지 말아야 하는데,
과연 어느 곳에서 어느  순간에 어떻게 하여야 안 속는 사람일까!  정말 속이지 말아야
하는데, 과연 어느  곳에서 어느 순간에 어떻게 하여야 안  속는 법인지 부처와 중생의
팀이 어디쯤인지 번뇌는 보리가  아니고 보리는 번뇌가 아닌 것도 같은데 이 번뇌망상
과 보리 열반이 둘이 아니라고 하니 대체 무엇을 어떻게 알고 하는 것인지!

    몽땅 버리고 싶다
  어떤 집념이 강한  생각은 우리를 구속하게 되는데, 소위  지식이 하나하나 늘어나서
학문이 한 가지 한 가지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의 생명을 구속할 상대가 그만큼 늘어나
는 것이다. 이 세상을 탁 내버리고 살아라.  전세계, 재산 전부 내 것 만들어 놓아도 내
것 아니다. 돈 백만원 모아놓으면  돈 한 장 한 장에 내가 구속되는 것이다. 지위가 높
으면 높을수록 생명이  구속되는 것이고 좋은 마누라  얻어놓으면 그 마누라가 완전히
나를 구속하는 것이다. 본심자리,  마음자리, 이것이 진짜 나다. 모든 생각의 주체인  자
리다. 이것이 모든  조화를 부리는 것이며 온 우주에  이 나를 안거친 게 하나도 없다.
영웅이 되든지 바보가 되든지 일체  사건의 주체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네 정신만 다소
곳이 챙겨라. 거기는 호랑이도 못가고 하느님도 못가고 부처님도 못가는 마지막 자리에
도사리고 앉게 되는 자리다.  그러면 그대에는 이제 까지 쓸데 없는 생각을 했구나,  엉
뚱한 데 집착을 했구나 하는 겅ㅂ 알게  된다. 무언가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잠재의식이 되어가지고 마음의 본연 자세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다. 미련만 근본적으
로 끊어지면 잠재의식이 완전히  없어진다. 부처님은 아무생각 없이 남과 얘기하고,  음
식을 잡수셔도, 누가 무엇을 물어도  사실대로 받아들인다. 아무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기분에 따라 싸우고 이해에 끌려 남과 통할 수 없다. 제일 가까운 내
외 사이에도 통하지 않는데 누구와 통할 수 있는가. 모든 생각을 초월했을 때, 아무  생
각도 없을 때, 또는 그 이상 더 신선할  수 없을 때, 모든 죄악도 복도 초월했을 때, 기
분을 떠난 때, 이때가 정말 참 자기이니  이때에야 비로소 서로 이해가 되고 모든 것이
다 통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오고가고 밥얻으러 나가고 공양 자시고 하는 것이
다 마음 그대로의 인생 전체다. 모든  것을 초월한 이것이 진아행세도 하고 가아행세도
하는데 우주의 색심이 이것이고 다른 것이 아니다. 가령 우주를 나누면 죽은 것 한쪽과
산 것 한쪽으로  구별된다. 여하튼 어떻게 살아 있든  산 것은 산 것이다. 지금 말하고
말을 듣는 자리는 산것이며,  무정물인 돌, 막대기는 들을 줄도 생각을 낼 줄도  모르는
죽은 것이다. 죽은 것 가운데는 있는 물질과 없는 진공 허공이 있다. 에너지 자체도  죽
은 것이며 생명이 없다. 과학이다. 철학이다. 종교다 하는 등의 문화는 살아있는 생명세
계의 산물이다. 물질계가 죽은것이고  진공, 허공의 무생명체이고 그러므로 산 것은  있
는 물질도 없는  허공도 아닐 터이니, 유무를  초월한 비유비무의 본질이다. 본래  생길
수도, 없어질 수도 없는데 진공마저 초월한 이 마음 자리는 모든 것을 초월했고 그러니
영원히 살아 있으며, 대자유이며  절대 평등한 것이다. 인류 문화가 5천년이 아니라 앞
으로 5억만년을  진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각으로부터  나는것일 뿐 생각의 주체인
나, 생명 자체의 주인공을  맑힌 것은 아니다. 나라는 말은 네가 아니란 긋으로  상대적
인 일체를 부정한다. 선도  악도 아니고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이전
이고 동시에 일체를 초월한 것이 나라는 뜻이다.  나는 오직 나일 뿐 나에게 무슨 조건
을 붙일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것이며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중생은 다 제 잘난
멋에 살고 있다. 부처님 말씀에  (중생을 제도하라 하시면서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것이므로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결국 사상이
있으면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 사상은 곧  나로부터 벌어진다. 나란 생각은 본래부터 있
는 생각이 아니고 객관을 상대할 때 나라는  생각을 낸다. 그러나 이 생각이 사람을 대
표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지금은 이 물건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
다가도 얼마 안 가면 싫어지고 미워한다.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자기의 바
탕일 수는 없고 그런 것을 좋다 싫다하고 생각해 내는 주체가 나일 수 밖에 없다. 마음
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제 정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름꾼 만나면
노름쟁이가 되고, 술꾼 만나면 술꾼이  되고, 아편쟁이를 만나면 아편쟁이 되고, 도둑놈
만나면 도둑이 되고 깡패  만나면 깡패되어 온갖 곳으로 다 끌려다니며 마음에도 없는
일을 시키는 대로 종 노릇 하느라고 온갖 고생을 다한다. 그러니 자기를 아는 사람,  마
음을 깨쳐 주객을 초월하여 부처를 안 사람은 누구를 따라 가더라도 거기 따라가서 나
한테나 남한테나 이익이 되면 따라가지만 이익이  안되면 안 간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
들 따라다니며 덕 될 것 아무것도 없다.  물질로 복을 짓는 것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하나의 부분밖에 안된다.  부처님 말씀에 성욕 같은 것이 두  가지만 더 있어도 성불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이런 것들은 한번 결
심하고 내던지면 돈을 봐도 욕심이 안생기고 또 좋은 부귀공명, 높은 지윈 그까짓것 헌
신짝처럼 볼 수  있지만 비구니가 미남자를 볼 때  생각이 아무래도 흔들리고 또 이세
비구가 미녀를 볼 때 아무래도 한번 더 쳐다보고 안보는 체해도 옆눈으로라도 한번 슬
쩍 보게 된다. 그러니까 끊기가 참 어려운  것이어서 이놈 같은 것이 두 가지만 있다면
성불할 사람 아무도 없다.  나를 죽이는 사람도 적이 아니요, 살리는 사람도 은인이  아
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해롭게 하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한테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은
오히려 쉽다. 기가 막히게 죽자 하고 그야말로  나를 숭배하고 나를 따르고 온갓 것 갖
다 대접하고 그게  생명을 바쳐서 나를 위하려고 하니  나를 따르는 그런 이를 고맙게
안 생각하는 것이 맞아 죽어가면서 원망 안하기보다 참 어렵다. 남한테 아주 분한 소리
를 들으면 생각할수록  분이 더나서 밥을 먹을 수 없게  된다. 저녁에 드러누워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와서 벌떡 일어나 앉게 된다.  날만 새봐라 칼을 가지고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분한 생각 하나로 골똘하게 될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중대한 문제에 부딪치
게 되면 딴 생각을 멈추고 한 가지  문제에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
고 화는 화를 낳는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을 멀리에서만 찾으려 하는데 가장 가까운 내
마음 안게 계시면서 이 세상을  커다란 배로 한다면 그 배의 노를 젖고 있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거친 노도를 넘도록 무한의 힘을 불어 넣어주는 은인으로 생각하여 그에 감
사해 하고 작은 일에서나 큰 일에서나 서로 사랑해서 부처님의 한 나무의 가지로 인식
해야 하는 것이다. 무아의  사랑을 주는 자만이 그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염념
히 마음의 고요를 찾아서  번뇌망상을 저버리고 고요한 마음의 힘을 길러 고요한 가운
데서 부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여기에 내가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본래 고요헤서 와서 고요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염
불이나 참선하는 수도인들이 처음에는 잠과 잡념과 고통에 시달려서 공부가 잘되지 아
니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써본다. 밖으로 나가서 가벼운 운동을  해 보기도 하고 산책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해 보기도  하고 높은 나무에 올라거서 잠과 싸워보기도 하고 돌을
짊어지고 왔다 갔다 하며  참선을 해보아도 잠이 퍼붓고 잡념만 나기 때문에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기도 하며 칼을 턱  밑에 받치고 만져 보기도 하며 온갖 수단을 다 써가며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도록 가지 가지 방법으로 애를 써 가다 보면 차차로 잠도 없어져
가며 잡념도 덜해져서 가끔 하루나 2,3일씩  시간가는 줄 무르고 염불이나 참선의 일념
으로 쭉 나가는 때가 있다. 이렇게 되면  공부에 힘을 얻고 자신이 생겨서 공부할 재미
가 붙는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용기 백배로 정진하면 멀지 아니하여 이 마음을 깨닫고
대도를 성취하여 생사를 초월하게 된다.


제 4장 진리와 더불어 살 때
    진리는 오직 하나뿐
  진리가 즉 마음이요,  마음이 부처요, 불이 즉  신이요, 신이 즉 마음이요, 마음이  즉
우주요, 우주가 즉 심이요, 심이 즉  진리로 돌고 돌아가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지 둘일
수 없다. 우주의 핵심이 하나지 둘일 수 없으니 따라서 그것은 허공일 수도, 진공일  수
도 없고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물질도 허공도 만들어낼 것이
다. 그런데 이 하나인 한 핵심을 어디로부터 어디로 찾아가느냐. 허공으로 아무리  끝까
지 간다 해도 찾을 수  없다. 또 물질을 아무리 살펴봐도 거기서 생명은 안 나온다. 그
러면 어디서 찾느냐. 지금  말하고 말 듣고 앉아 있는 이  생명,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이 말이 이론에 맞나 안 맞나 생각하는 그 생각의 주체, 그 주체를 찾아 캐어들어가 보
면 거기에 너도 나도 아니고 남편도 선악도 아닌 것이 살아서 분명히 주고받고 얘기할
줄 알고 일체의  주체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부처님, 하나님, 공자님, 여기  가면
다 만난다. 길은 이  길 하나뿐이다. 객관 세계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진리는 찾을  수
없고 진리가 될 수 있는 사건이 하나도 없다.
  옛날부터 진리는 아주 높고 높은  데 있는 줄만 아는 분이 많은데 그러나 요새 와서
는 평범 가운데 진리가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깨치고 있다. 그러나 더욱더 깨쳐야
할 일은 진리 가운데 참 진리는 평범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다. 평범 이하의 평범은 꿈
밖에 없다.
  진리! 생명! 곧 이 마음인 나는 신비다. 영원히 불가사의한 미궁의 것이다. 그러나 가
장 신비한 것은 또한 가장 평범한 데  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깨치면 신비는 없어지
고 해방의 세계, 자유의 세계, 영원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 사상
이 수용되어져 있고 세계의  상극하는 세력들이 우겨 우리 겨레 안에서 여러모로 작용
하고 있어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에게 안겨져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의 과제이기에 경제인이, 문화인이,  또는 종교인이, 정치인이
이것을 회피하려고 할 때에는 역사는 그들에게 철출를 내리게 될 것이며 가장 죄의 값
인 사멸이 올 것이다. 인간을 올바르게  깨닫고 올바로 관리하여 인간을 바르게 세우는
데는 30여 억인의 인간 가족이  하나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지표가 세워져야 할 것
이라 여긴다.
  나를 찾자! 나를  알자! 내가 살자! 인류의 지난  역사는 인간의 자기 관리와 겨영을
위한 예비과정이었다. 인간의 자기 관리와 경영이  무엇을 뜻하기에 그 많은 시련과 희
생을 제공하여야만 했었는가? 인간의  자기 완성은 우주의 완성이며 인간의 자기 관리
와 경영이란 인간에  의한 우주의 관리권과 경영권을 설정함을  말하는 것이다. 우주의
관리 및 경영권자로서의 인간은 어떠한 인간을 정립하여야 하는 것이기에 지나간 인류
사를 그 예비과정이라 해야만 하는 것인가?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내 품안에 계
시고 내가 하느님 품안에서  영육이 쌍전한 완전한 생명을 비로소 인간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내 품에  계시므로 해서 전지전능의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에 올라가면 무상지존의 하느님이  되는 것이며 인간
세상에 내려오면 관리권장인 절대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나와는 일체라
는 것이다. 일체이면서 또한 엄연히 이체로도 될 수 있음은 곧 나의 절대자유권한의 행
셍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불이일체인 나는 유시호에는 우주를 창조하고 만유를 섭리
하기도 하며, 유시호에 단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류사를 이끌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느
님과 나와 우주는 삼위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과 진리와 신과 불과 우주 만
유와 그리고 인간은 자유한 것이며 평등한 것이다. 누구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일인 줄로 믿는다. 생각이란 생각을 다  떼어내고 객관을 세우지 않으면 고스란히 마음
자리만 남는데 그 자리에만 앉아 있으면 어떤 귀신도 날 잡아가지 못하고 하느님이 와
도 안되고 부처님이 와도 안된다. 모든 생각이 떨어지고 나면 나를 볼 사람도 없다.  부
처님도 날 못본다.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통으로도 안 보인다. 그래서  부처님끼리
는 서로 못 본다는 말도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다. 이렇게 못보는 곳까지 가면 완전히
자리를 알게 된다. 정말 큰 건 크다는 소리를 못한다. 전체가 다 내가 되어놓으면  무엇
에다 비교해 많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 많다는 소리가 작다는 소리다. 따라서 모든  착
한 일해서 복을 짓는데 그런  인과로 큰 복을 많이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주의 어
느 부분을 그 복이  다할 동안 잠시 차지한 것이며, 이 우주를  다 차지했다 해도 그건
많은게 아니라 물질을 두고 한 소리니 많다고 할 것이 못된다.
  꿈에도 바위는 무겁고 모래는 가볍고 그렇지만 이것은 전부 거짓말이다. 꿈속의 세계
에서는 중량이 없는 것인데 바위는 무겁다는  생각 그것이 무거웠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 그것만 끊어지면 현실세계를 그대로  초월한다.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이
있다고 믿고 자연과학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지배된다고  믿는 마음에 의해 지배되는
것뿐이다. 양은 본시 우리 겨레의 개성을  상징하듯 온유 순량하고 목자가 인도하는 대
로 회의없이 수종하며, 이지적이 아니어서 개별행동을 취함이 없이 항상 집단으로 움직
인다. 수령의 거동에 따라 행동통일을 긴밀히 할 줄 아뿐 아니라, 단결력과  희생정신이
투철함은 비록 야수계의 생리지만 우리로서도 배울  바 있게 한다. 가령 수급양이 어떤
원인에서건 절벽이나 물속으로  뛰어들게 되면 남김없이 차례대로 좋아서 뛰어드는  예
라든가, 아프리카 들소의 경우, 두령 소를 먼저 사살하면 마지막 한 마리까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맞아 죽는 예는 우리로하여금 생각게 하는  바 있다. 한때 아프리카
지방에 밀생하던 들소떼는 이 규율을 준수하는 순성을 역이용한 교활한 백인 포수들에
의해 몰살, 절종 되었고  통조림으로 화해서 이 도살자들을 치부케 한 예도 있다.  양은
살아서 인류에게 젖과 털을 바치고 죽어서 고기와 뼈와 가죽까지 송두리째 바친다.

    마음은 생각의 주체다
    마음이 모든 생각의  주체다. 그런데 이 마음은 생각이 아니다.  지식,  사상, 정치,
경제, 예술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것조차 아니다. 그런데 결국  이(나)라는 것도 한
개의 생각이다. 자기 마음을 모르고 자기를 모른 사람이 돈 없는 가난한 사람보다도 더
가난한 사람이다. 저 가난한 사람이 밥이 없다고 가난한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이 없어
가난하다. 자기 마음만을 믿으면 이것이  곧 부자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다. 일체가
모두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면 만든 마음과 만들어진 객관
이 있게 되어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벌어질 수 있으니 일체유심이라 지을조자 하나를
빼버려야 알기 쉽다. 오직 마음뿐이다. 일체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불법이다.
  우리 마음이 동서남북, 하늘, 땅, 천당, 지옥으로 쏘다닌다. 어디엘 가면 좋은 음식 좀
얻어먹을까, 어디 가면 좋은  사람을 만날까, 이런 번뇌망상으로 잠을 못자고  부산갔다
대구갔다 하며 이런  짓거리 저런 짓거리로 업을 짓고 있다.  그런데 이 번뇌의 마음을
버리면 부산 대구 생각하던  그 마음이 없어진 것뿐이지 대구나 부산 생각하던 마음자
리까지 어디로 간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고 마음자리만은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
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청정하게  밝지 못하면 만사를 원망과 질투에서 벗어나
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는 미신이  생기는 법입니다. 부처님께서 (내 마음이 청정하면
일체중생이 다  청정하지 못하면 일체중생이 다  나쁘게 보인다.)고 하였다. 내  마음에
때가 있으면 남도 때가 있게  되고 때가 있어 보이고 내 마음이 깨끗하면 남도 깨끗하
면 남도 깨끗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청정하게 밝혀 자신을 계몽해야 한다.  자
신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불만과 자신의 힘을 모르고 남에게 의지하는 미신이 생
기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이 인생은 밥만 먹고 똥이나 싸고, 늙고 병들고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존재인 줄  알았더니, 참 나는 그것이  아니구나! 나의 참 면목은 마음이로구
나! 전체가 하나란 소리가 일체가 다 불법이란  소리와 한가지이니 일체법이 다 불법이
고, 일체법이 다 불법이란 소리는 일체가  다 마음이라는 뜻이고 마음이 부처라는 뜻이
다. 그러다 보니 마음대로 변해서 제망중중으로 이 초 하나에 한량 없는 백성이 들어가
있는 그것이 한번에 봐도 낱낱이 따로따로 보인다.
  나는 마음이 물질이냐  허공이냐 하고 항상 분간하려고 전심을  다하였다. 이것은 한
해결을 보기 위함인데, 즉 이 마음이 물질이냐 물질이 아니냐 판가름만 나면 불교를 이
해하기가 쉽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외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며밖에
있거나 높은 데 있는 것도 아니며, 마음이란 우리가 밥 먹고 옷 입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프면 밥 먹을 것을  생각하고 또 우리가 일이 있어서 어디를 가려고 생각만 하
면 이 몸뚱이는 자연 따라간다. 그러니 천지의 근본이 마음이고 만사의 주체가 이 마음
이다. 마음은 아무 생각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며 사상도 아니고 밝고 어두운 것도 아니
며 둥글고 모난 것도 또한 아니며 남성도  여성도 아니며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일체의 것을 초월하다 보니 만사를  다 통해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것을 내
놓고 우주의 주체가 있을 수 없고 진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런 까닭으로 마음을 깨친 이
말고는 참 지도자라고 할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우주의 핵인 때문이다. 그러니  우주의
핵인 마음을 깨치기 전에는 누가 이 옳은 지도자가 되겠는가?
  짐승이나 사람이나 죽을 때는 아주 죽는 줄 안다. 심지어 공자님도 죽으면 영원히 죽
는 줄 알고 죽었지만 아직까지도 죽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살아 생전의 모습과 같은 존
재로 또 뭐가 되어가지고 돌아다니고 있다.  이 마음 못 깨달았으니 천당이나 지옥이나
개나 소가 되어가지고  지금 돌아다니고 있다. 그것이  그렇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제
마음대로 만들기 때문이다. 조화의 힘이란 이 마음밖에 없다. 물질도 조화를 못하는  것
이고 허공도 조화를  할수 없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이  마음밖에는 조화를 부릴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이  우주의 주체인 진리의 핵이 된다면 산 것이다. 허공은  진리
가 될 수 없다. 또 허공이 우주의 핵이  될 수도 없다. 또 물질이 될 수도 없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이 마음 우주의 핵이 되기 싫어도 되는 수밖에 없다.
  오직 내 마음이  우주를 주재하는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불타의 유심사상만이  참혹한
암흑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구원하는 참된 길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인생이 무엇인
가를 올바르게 알기 전에는 이 지구상에 평화와 자유가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점차 서광이 비치고 있다. 그것은  우리
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인류의 등불인 부처님의 정법의 새
싹이 이 땅에서 싹트고 자랄 수 있는  모든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러니 이 땅에 다행히 태어났을 때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 육신과 이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용맹, 정진, 참회하여야겠다. 육신은 기계와 같고 자동차와 같으며 마음자리는
운전수와 같고 기사와  같으며, 몸뚱이가 옷이라면 말하고 듣는  마음자리는 옷을 입는
사람 몸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알 줄 알고 말할 줄 아는 이 마음자리인 나는 육체를 뒤
집어 쓰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거둬치웠을  때나 변하지 않는다. 중생 놀음하는 범부시
절에도 마음자리는 조금도 덜함이 없이 제 성능을 다 하고 있으며, 이 다음에 성불해서
부처가 되었을 때도 무엇을 알 줄 아는 그  힘은 더 거룩해 지는 것도 아니다. 마치 소
금을 입에 집어넣어서  짠맛을 아는 것은 아기 때나  학사 박사 때난 변함없이 똑같은
것과 마찬가지다.
  육체는 산 채 그대로  송장이다. 눈동자가 무엇을 볼 줄 아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지각성을 가지지 못한 그것이 생리적으로 체계있게 조직이 되어 있다고 해서 알 줄 아
는 능력이 물질에서 나올  수는 없다. 그러므로 눈이 볼 줄 알고  귀가 들을 줄 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법부였을  때는 눈을 빌어서 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사람이  뚫
린 창구멍으로 비치는 것들을  내다보고 알고 필름에 찍혀나온 물건을 보고 느끼고 아
는 것이지, 창구멍이나 렌즈 자체가 알 줄 아는 것은 아닌 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코가 냄새맡는 것이 아니다.  알 줄 아는 마음자리가 직접 보고 냄새맡
고 듣고 하는 것이다. 육체가 내가 아닌 진리를 깨닫고 나면 지식, 사상이 내가  아닌데
그러면서 또 지식을 알고 사상을 아는 참  나를 찾게 된다. 이제까지 육체가 나라는 착
각으로 고생을 하고 육도를 돌아다니나 도인을  만나 마음이 나지 육체가 나는 아니다.
육체는 내 소유는 될지언정 나를 대표할 수는 없다. 이런 진리를 듣고 이제부터는 참마
음을 단속해야겠구나, 지식이나 학사, 박사  노벌상 다 필요없다. 돈도 권리도 의식주도
필요없다고 결심하여 육체 본위의 생활을 차차  청산해 간다. 하루 세끼에서 두끼만 먹
고 두끼에서 한끼로, 나중에는  안 먹어도 된다. 정신의 도가 높아지고 마음의 힘이  커
져서 이 마음이 우주도 창조할 수 있으므로 굶어도 몸이 축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밥을
안 먹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도 아니고 도의 깊이를 굶는 능력으로 안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도 집착이고 구속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나 사건에 대해도 부정긍정의 아무 생
각없이 대하라. 누워 자도,  장사를 해도, 정치를 해도 나를 위해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나는 망하고 내가 없을 때, 그리고 남만을 위해서 살 때 나는 자꾸 커간다. 온 우
주가 전부 내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나의 평생 과제는  오로지 이 마음의 수련에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마음이란 물질도 허공도 아니며 선도 악도 아니며, 여성도 남성
도 아니며, 지식도 사상도 신앙도 아니다. 그리고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닌  것
이 마음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이 마음은 불에 탈  수도 없는 것이고, 물에 젖을 수도
없는 것이고 자살도 타살도  할 방법이 없다. 나라는 나는 영원불멸의 것이요, 또한  절
대자유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완전무결한 실체, 즉 우주 이전의  실체요, 차원 이전의
것이므로 나를 앞서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가 앞서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그것은, 모두가 다 내 이후의 것이다.  즉 모든 것은 이 마음이 창조한 것이다. 다
시 말해서 마음이 창조하면 하느님도 있고, 부처님도 있고 태양도 있고 온 우주가 건설
되는 것이다.
  인류 5천년의 문화가 다 이 마음의 건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이 나의 마
음을 가리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말한다. 오직 나만이 거룩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
리의 육신은 오로지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사멸이 있으나, 마음은 사멸이 없다.  사멸이
없으므로 이 육신이 떠난 후에도 다시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
생윤회(三生輪廻)라 한다. 부처 자리는  청정한 것이며 광명스러운 것이나 훨씬 해탈한
것인 줄로 알고, 중생은 흐리고 더러운  것이며 어둡고 깜깜한 것이며 생사로 말미암아
헤매는 것이라고만 고집한다면, 이 사람은 결코 영겁토록 마음의 대도는 깨닫지 못할것
이니, 그것은 말과 글에 팔려서 명상(名相)을 고집한 까닭이다. 신통묘용이 불보살이 쓰
면 나타나고, 쉬면 없어진 흔적도 없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새들은 죄악의 업신통(業神
通)을 부려서 지옥  천당의 대체 세계를 나타내는 데까지는 자유이지마는  나타난 뒤에
는 인과응보의 구속에는 자유가  없다. 불보살은 때가 묻지 아니한 자심(自心)신통이기
때문에 무한수(無限數) 세계를  벌리거나 없애는데 자유자재의 해탈권이  있는 것이 중
생과 다르다.
  만약에 이 마음자리, 이 소식, 이 도리, 이놈, 이것, 이 법을  의론하고자 한다면, 어찌
그대가 저 말과 글귀에서  이 도리를 알 수 있을 것이며, 또한  한 생각에서나 한 가지
사물로써 이 도리를 알아낼 수 가 있으랴. 그러므로 이 마음, 이 도리, 이놈,  이것은 상
대도 절대도 다  초월한 것이므로 인식조차 미치지  못하거든 하물며 말로써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다만 살짝 가만히 이렇게 들어맞출 뿐인 것이다. 이렇게 되 이 한  소식문
을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아니하는 무위법문이라고  한다. 만일 이 마음을 깨달아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이 마음자리가 본래 무심한 것을 알면 된다. 일체 동작이 다 이마음의  무
심한 소식이니 제 스스로가 가만히 살짝 번개처럼 이것을 챙겨서 자취 없이 깨달아 귀
신도 모르게 돌아서 드어맞는 것은 될 수 있는 일이지마는 그렇지 아니하고 만일 그대
가 남에게서 듣고 보고 배운 찌꺼기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따져서 알려고 든다면 그
럴수록 점점 더  멀어갈 뿐이니 어찌하랴. 그러나 만일 그대가  일체 언어 동자과 모든
생각들이 저 목석과 같이 다  무심한 짓이 된다고 하면 조금이라도 도를 배울 만한 분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마음 하나만 깨달으면 그 사람이 곧 참부처이니, 천지와  만
법이 다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이 그 마음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마치 저 허공이 일체 만물과는 섞여지지도 아니하며 또한 허공은 깨뜨릴 수도 없
는 것과 같으며, 해가 떠서 온 천지가  어둡되 또한 저 허공은 어두워지지 아니하는 것
과 같아서 밝고 어두운 것이 번갈아  바뀌되 허공은 여전히 변동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와 같아서 부처와  중생도 그 마음을 항상 그대로인 것이다.  슬프다. 인생이여! 억울
하게 까닭도 없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데 공연히 천당 지옥으로 돌아다니면서 고
와 낙을 지은  대로 받으며 끝없는 생사고를 여윌  수 없으니 아무리 따지고 생각하여
보아도 이 부처님이 깨치신 실상선나, 곧 달마선을 깨달음만 같지 못하다. 이  선나법은
곧 이 마음이다. 마음밖에  불법은 없다. 이 마음이 곧 불법이므로 불법밖에 마음은  없
다.
  세상 사람들이 도를 배우려고  모든 부처님이 이 마음법을 전하였다는 말을 듣고 스
스로 생각하되, 이 마음 가운데 별달리 깊고  묘한 도리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을 구하
여 얻을 것인가고 - 그러한 사람은 이 마음이  곧 정법이요, 정법이 곧 이 마음인 것을
알지 못하며 또한 믿지도 못한 때문인니,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을 다시 따
로 찾아 구한다면 될 뻔이나 한 일인가? 천만겁을 지내도 마침내 얻을 수 없을 것이니,
아예 당장에 무심하여 문득 본정신 본마음대로인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모든 것을 초
월한 적멸은 곧 이 마음이며 이것은 다행한  일이기도 한다. 그러니 이 우주의 모든 것
이 다 마음에서 흘러가고 흘러오고 한다.  그러나 마음은 오고 가지도 아니하며 그렇다
고 해서 또한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만사는 마음의 장난으로 고
락, 성쇄가 한랴없이 바꾸어지는  유식이며 몽환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것에  의지하
며 그것들을 탐착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부득이하여  이 생각 저 생각을 다 버리고 내
고장이며 진인류의 고장이며 또한  우주의 고장이며 또한 우주의 고장인 이 마음 집으
로 돌아오는 걸음이다. 먹거나 굶거나 죽거나 살거나 하는 것은 다만 인연에 맡겨둘 뿐
이다. 그날 그날을 무사태평으로 뜻없는 세상을 살아가니 마치 넋을 잃은 사람과  같다.
온 세상에서 그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없으며 그대를 역시 세상이 알거나 모르거나 아
무런 관심이 없어져 그 마음씨가  저 만길 땅속에 깊이 묻힌 바위와 같아서 도무지 금
이 간 데가 없을 것이다. 문 어떻게 하여야 이 마음법을 알 수 있을까? 답 이 마음법은
깨달은 것도 없고 또한 아는 것도 없나니, 만약 이 마음 가운데 과연 깨달은 것도 아는
것도 없다면, 이 사람은  법을 아는 사람이다. 법은 알 수도  없고 볼수도 없는 것이니,
이 마음에 안 것도 본것도 없으면 그것은 마음을 본 것이며, 한 법도 깨닫지 못한 것이
법을 얻은 것이며, 한 법도 얻지 못한 것이 법을 얻은 것이며, 한 법도 보지 못하는 것
이 법을 본 것이며, 한 법도 따지지 아니하는 것이 법을 잘 따진 것이다. 문 이 마음은
아무 것도 보는 게 없는 것인데, 아떠한 것이 걸림이 없는 지견인가? 답 아무것도 모르
는 것이 걸림이 없는 일체 알음알이의  바탕인 알음알이이며, 또한 아무것도 보지 못하
는 것이 보는데 걸리지 아니하는 봄이다. 문  탐심과 욕심을 무슨 마음이라고 하나? 답
범부의 마음이라고 한다. 문 생멸이 없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답 성문 나한의 마음이
다. 문 모든법이 다 그 개성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답 연각 독성의 마
음이다. 문 아무 것도 깨달은 것도 없고  또한 아무 소견도 없으면 그것은 무슨 마음인
가? 답 아무 말도 아니하겠다. 이 본래의 마음자리는 생각만 해 보려고 하여도 벌써 10
만 8천리나 어긋나고 마는 것인데 어찌 말로써 대답할 수 있으랴. 이 마음은 무심한 자
리며 말이 없는 자리며,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자리며, 특별한 불법의 정지견도  가
진 것이 없으며, 또한 피차도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생명이다, 영혼이다, 귀신이다,  혹은 불성이다, 보리다, 열반이다, 성품자리다,
중도의 뜻이다 또는 반야다, 법화다, 원각이다, 화엄이다 하는 그 많은 소리가 팔만대장
경 속의 곳곳에 이름이 달리  나오고 그 어의를 좇아서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보니 불
교의 근본대의가 무엇인지 알수 없도록 현혹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술어를 우
리말로 번역하자면 한 마디로밖에 말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자유의사
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죽음 그 자체에 의해서만이 결정된다. 천하의 영
웅과 만고의 호걸도 이 죽음 앞에선 아무런 반하도 못하고 그저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과학자,  종교자, 철학자 등 일체중생이 누구나  다
업보중생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 일체중생이  이 업안을 해탈하여 진리의 눈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심성숭양 곧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함이니 견성(見性)이
다. 견성이란 자기성품(바탕)자리 일체만유의  본성자리 곧 진리이니 이 진리인 본심자
리를 맑고 청정히 가져 만사만리를 통찰할 줄 아는 지혜의 눈을 얻는 것이다.

    생명과 영혼
  우주생명이 곧 나다.  반면에 나는 곧 우주 생명이다라고 우리가  인정을 할 수도 있
다. 이것은 다행히도 3천년 전 인도에 싯달다라고 하는 분이 그 진리에 대해서 깊이 생
각하였다. 그리고 깨달으셨다. 그는 인생의 죽음과 병들음과 늙음과 탄생함을  원통하고
슬프게 생각하였고 왜 내가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없느냐 하고 발버둥친 것이다. 싯달
다 태자는 인생이 무상함에 순응할 수 없다고 반기를 들었다. 인생이 병들고 늙어 죽는
법이 있다면 반대로 영원히 병들지  않고 늙지도 않으며 살 수 있는 법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류 5천년 역사에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하여 보지 못
한 위대한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가장 슬프고 무서운 것은 무엇보다도 죽
음인 것이다. 싯달다는 이렇게도 두려운 죽음의  원리가 있는 거와 같이 영원하고 불멸
하는 삶의 원리도 반드시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싯달다 태자만의 냉철한 판단력
이요, 그야말로 무서운 고집인  것이다. 과거 수많은 성인들이 있었으나 싯달다  태자와
같이 위대한 뜻을 가져본 일도 없었거니와 해결한 분도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귀
중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누구나 다  서슴지 않고 생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이 우주를 다  준다해도 자기 생명과는 바꿔주지 않을 것은 물론
이며 생명은 손톱만큼도  안 떼어 준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  이 생명이지만 그러면 그
생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없다. 요새 무슨 가치, 가치하고 떠들지만 우리의  생
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사람의  참다운 가치를 논하는가. 속담에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하지만 만일 먹으면 죽인다고  총을 갖다 대면 아무리  먹고
싶은 진수성찬이 있어도  먹을 마음을 내지 못한다. 먹는 것은  오직 살기 위한 수단이
다. 농사를 하든가 장사를 하든가 정치를, 철학을, 과학을 하는 것은 다 살기 위한 하나
의 수단이다. 아무리 농사짓기가  싫다 하더라도 부득이 농사를 지어야 하겠고,  부득이
장사를 해야겠고, 부득이 정치인이 되고 경제인이  되고하는 것은 삶의 목적을 위한 수
단이다. 그런데 이 산다는 말은 누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살려고 하느냐가 문제
다. 내가 살아야 한다. 내가 사는 것으로  살아야 만족한 것이다. 현대인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내가 무어냐?  제일 중요한 이 두 가지를 확실히  모르고 산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아닌  셈이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좋지만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이
생명을 어떻게 어디에 바쳐야 할 것인가가 있어야 하고, 확실히 내가 있는데 나는 무엇
인가. 이것이 제일 큰 선결 문제이다. 우리가 아는 우주는 커다란 한 개의 송장이다. 따
라서 우주에서는 어디에서고 생각이 나올 데가 없다. 생각의 주체는 이 우주에는  없다.
나는 허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말은 그것이 일체가 아니지
만 일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참 피눈믈 나게 서러운 말이다.  유물 사상으로 찾아봐도 자기가 없으니까 나
라는 생각 이것이  나가 아닌가 해서 한 말이다. 이것이  소위 동서의 철학을 대표했다
하니 참 불쌍한 일이다. 그것은 죽도 살도 못해서 자살하기는 무언가 아깝고 그러니 그
런 소리를 해서 위안하고 있을 뿐인 것이니,  마치 한강 건너에서 사람이 많이 빠져 죽
는데 잠깐만 하고  외쳐서 우선 위급을 구하는 격이다. 일본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으냐고 현상을 걸었는데, (죠또맛데)가 당선이 됐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뜻이다. 요사이 실존철학이란 바로 이(잠깐만)철학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
로 나는 존재한다)이것 가지고 안심입명하는  철학이 될 수는 없다. 다행히 부처님이 3
천년 전에 이미 생각조차도 아닌 나, 이것이 실재임을 밝혀주셨다. 물질도 아니고  허공
도 아니다. 그것들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생각할 줄 모른다. 허공이 바위로  될
수 없고 진공이 바윗돌로 될 수는 영원히 없을 것이다. 바윗돌은 고사하고 모래도 안될
것이다. 모래뿐 아니라 산소나 수소도 안될 것이고 전자도 에너지로도 안될 것이다.  그
러니 허공은 태초부터 없는  것으로 영원토록 없을 것이다. 없는 것까지도 될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에너지  자체가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물
질 그것은 어떠한 상태에 놓인다 해도 생명으로 변할 수도 없고 거기서 생명이 생겨날
수도 없다.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배운 것을 자꾸 버리자. 이렇게 자꾸 들어가서 마음이 뚜
렷이 드러나면 나중에는 우주에 모를 일이 하나도 없이 모두가 내 목전이다. 마음을 깨
쳐놓으면 내 눈이 하나가 아니라 오관이 다  눈이 되고 귀가 된다. 귀라면 귀고 코라면
코고 거리가 없어진다. 거리가 없다는 말은  둘이 아니라는 말이고 주관 객관이 통일됐
다는 뜻이다. 육체를 나라고 하다 보니 주관 객관의 거리를 인정하게 되고 둘로 생각하
지만 마음도 아닌 이 마음이 나인 줄 어느 정도 깨달으면 이 우주와 나는 둘이 아니라
는 대목이 나온다.  그때 비로소 사람이 살  기분이 생긴다. (나는 영원히 죽을  방법이
없구나.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불에 탈 수도 없다. 내 몸뚱이는 두들기면 깨지지만  이
건 자살도 못한다. 자살할래야  방법이 없다. 세계의 수소탄이 다 내 몸에 맞는다  해도
육체는 죽을지 모르고  지구는 다 녹아 없어질지  모르지만 나는 죽을 수  없구나)하는
진리를 환하게 보게 된다. 지구 같은 물질이나 허공은 말도 못하고 자유나 구속을 느끼
짖 못한다. 물질이나 허공은 생명이 아니므로 무엇을 아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
나 나는  역시 송장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물질과 다르고 허공과 다른 것
이다. 이것이 생명과  생명 아닌 것과 차이다. 아는 마음이  없는 물질이나 허공이라면,
구속이니 자유니 하는 문제가 애초에 논의될 수가 없다. 요새 우리가 말하는 자유는 대
인관계에 있어서 내가 남에게 기본인권을 유린당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마, 그러
나 여기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체객관으로부터 완전하게 해탈된 절대자유를  말하고,
상다세계를 초월하여 천상천하에서 훌쩍 벗어난 대자유를 말한다. 현대학문전체가 총결
하여 생명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교  있으나 아직 그 생명의 본질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
다. 그러나 가장 간단하며 평벙하게 그  생명의 실질을 표현하는 말은 우리말로 마음이
라고 하는 것으로 전부 표현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불교룰 우연한 기회에 듣고 대
강 불교를 안 뒤부터 팔만대장경  전부가 이 마은 두글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마음
두 글자로써 남에게 불교를 이해시킬 수 있고 가르쳐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
는 근50년 가까이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
고 좀 바꾸어 말하면 살아있다는 소리다. 즉 생명이 있는 것을 마음이라 한다. 한문  경
전에도 심죽시불 즉 (마음이 곧 부처)이며  서종도 그러하고 팔만대장경도 중요 고자각
심즉시불을 말한다. 생명이란 영원한 것이며 절대자유인 것이며 그리고 남녀 노소 똑같
이 평등하고완전한 것이다. 이 마음을 내놓고는  상대가 다 있고 대조가 있으면 완전한
게 없다. 가령 막대기는 짧은 것도 긴 것도 아닌데 긴 것이 나타나면 짧아지고 짧은 것
이 나타나면 길어진다. 이 세상에 불이 뜨겁고 태양이 뜨겁다고 하지만 우리가 만약 태
양 가운데 살고 전 우주가 태양으로 돼 있다  하면 뜨러운 게 없다. 뜨겁지 않은 게 있
기 때문에 불이 뜨겁지 불 그놈 자신은 뜨거운 걸 모르고 태양도 제가 뜨러운 걸 모른
다. 이것이 상대성 원리고  불교의 원리이다. 나는 너 때문에 있고 여자 때문에  남자가
있고 나쁜 놈 때문에 착한 놈이 있다. 모두 악한 사람이라면 악한 사람 없고 모두 착하
면 착한 것이 없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합일이기에 영혼만의  구원이나 구제만으로는 인간의 완성이
안되는 것이다. 인류의 조사인 1남 1녀는 영육의 완성체였기에 우리의 완서도 영육합일
의 겸전한 구제하여야 하는 것이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인간이 영육을 온전히 한
오원경에서 벗어난 후  오랫동안을 우리는 영성에만 일변도 되었던 신명주권시대에  살
아왔고, 그에 이따라 내성에 이 영을 치는 인간의 부조리가 세기의  소용돌이쳐 지배하
는 한마당 가운데, 우리들이 오늘날을 살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혼으로 도니
이 나인 이 마음은  곧 전우주의 핵심적인 진리이며 대자연의 성립이면 천지개벽과 음
양조화의 원동력인 것이다. 이렇듯 영원한 실재인  이 생명이 마음을 떠나서 어느 곳에
인생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 무엇이나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인생이며 5천년의 과거를 다시 깨끗이 정리한 다음에 한번 고요히 생각해 보자
꾸나. 과연 그 무엇을 남겨둘 것이 있는가. 또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그 무엇인가?
공무에서 생겨났다가 도로 공무로 돌아가곤 하는 것들뿐이 아닌가. 바로 말하자면 그것
들은 오직 이 자기자신의 환간으로 환생환멸하는  것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생
명은 곧 진리며 신이며 불타이며 무정이며  선이며 악이며 남성이며 여성인 것이다. 따
라서 온 우주인 것이다.  5천년의 인류문화를 자랑하지마는, 아직까지도 과학, 철학,  종
교가들 할 것 없이  다방면으로 연구했지마는 이렇다 할 이 생명의 근본문제에 대해서
는 모르고 있다.  더구나 영혼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죽어보지  않는 한 사후의 영혼에
대하여 누가 분명히 알겠는가? 영혼이 있다하는  사람도 미침 사람이요, 영혼이 없다하
는 사람도 미친  사람이다. 거짓말을 한다면 모드지만 참말이라면  영혼이 있다 없다는
말은 입을 떼지 못할 것이다.

    인연의 수레바퀴
  도대체 흥망성쇠는 누가 하는  일이며, 누가 당하는 일인가? 이 개성 없는 인간들이,
개성없는 하늘, 땅, 만물, 이것들이 다 무엇인가? 어디서 생겨났으며 없어져서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가기는 가나  그 무엇이 가는 것인가? 정말도 답답한  일이다. 도깨비 장
난이 아닌가? 그러니 무엇을 가지고 나다 너다  할 것이며, 어떠한 것을 가리켜서 흥망
성쇠라 할 것인가? 도대체 막연할 뿐이다. 더욱이 이 우주 모든 것이 모두가 연기 법칙
에서 무한으로 저 천문학자들로서는 도저히 추측조차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흐르고  흘러서 최후에는 아주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정말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생에 남 잘되는 것 미워하고, 도둑질이나 하고 협잡이나 하고  그
런 사람은 금생뿐 아니라 내생에서 부모 덕도 없고 시집가도 남편 덕도 없고 장가가야
마누라 복도 없고 자식 낳아봐야  모두 불효하고 명 짧고 박복한 아이만 내 앞에 태어
나게 되는데 그것은  하는 수 없다. 그러나 복만 짓고  나면 엎어지나 자빠지나 잘되니
큰 돈 번  사람들은 꼭 운수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불교에서는 인과라
한다고 일소 하지만 그러나 인과는 알고 보면 과학적인 내용이 다 있다. 운수니 사주팔
자니 하는 것도 들어맞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얼굴도 가령 정치가라든지 큰 사업가라
든지 다 업보로 타고나는 운명이 있다. 누가 돈을 가져가도 그 사람 갚을 건가 안 갚을
건가 그 사람  얼굴에 나타난다. 볼 줄을 몰라서 그렇지  시간시간 미래에 관한 관상이
얼굴에 나와있다. 관상  잘하는 사람은 내일은 뭐가 되고 모레는  뭐가 되고 미래를 다
설명한다. 손금에도 거기 평생이 다  들어 있다. 정말 잘 보는 사람은 피 한 방울만 봐
도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 평생을 알 수 있다.  더 잘 보면 전생도 알 수 있고 죽어 내
생도 알 수 잇다.  인류는 누구든지 간에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사회나 인류의  행복이
신의 가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인간 자신의 노력과 자비스러운 자기 행위에 있는
것이다. 남을 도와주는 자비는 곧 자작자수의  인과로서 자기가 받을 마음의 농사인 것
이다. 마음의 원리를 깨치지 못하면 생사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데, 중생들은  항
상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고  의식주를 위해 생종경쟁을 하다가 죄를 짓고 온갖 고업
을 받는다. 금생은 전생의 연속이며 무한  내생의 연결이며 금생에 주어진 후경이나 운
명은 전생에 지은 원인으로부터 맺어진 결과이며, 금생에서 선악간에 하고 있는 우리의
일거일동은 다 내생에서 받을  결과에 대한 원인이다. 천지만물들은 서로가 연이  되며,
또한 이 연과 연끼리가 서로 모여서 어떠한 사물을 이루었다가 그것들끼리가 흩어져서
홀연히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만사가 저 뜬구름  같으며 꿈 같은 일이
다. 그러니 이 세상만사가 저  뜬 구름 같으며 꿈 같은 일이다. 원한을 푸는 방법은 오
직 참회 뿐이다.  영혼은 전생의 인연과계를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첫눈에 좋은 사
람, 보기 싫은 사람을 다 알고 있다. 부인이 밤에 잘 나가더라도 어디 가느냐고  등불을
들고 바래다 주고 (나의  힘과 재주로는 우리 마누라를 마음껏 즐겁게 해줄 수  없으니
제발 당신이 우리 마누라 비위를 좀 잘 맞추어 주시오) 이렇게 간청을 해야 한다. 이렇
게 참회를 해야 전생의 죄가 참회되고, 그래야 내생에는 그러한 여자를 만나지  않는다.
이 세상만사는 모든 것을  다만 그 인연에 맡겨 지내가면서 억겁다생으로 사생에 윤회
하는 것이며, 항상 그때 그곳에서 받아  태어난 그 몸뚱이만을 자기라고 고집하여 육신
본위의 치열한 생존경쟁에 휩쓸리고 만다. 불과 같이 일어나는 욕심에서 생겨나는 불만
과 고독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와 비애에서 허덕이며 저지른 구원겁의 모든 죄악의 업
습을 쉬어버리고 다시는 이 진아인 마음을 저버리고 허망무상한 육신만을 본위로 하지
말라. 가끔 부처님의 진법신이 허공과 같다고 비유로 말하지마는, 그것은 그런 것이  아
니라 우리의 마음자리인  이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이 법신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말하되, 우리의  마음인 이 법신이 저 허공에  두루하였으므로 허공이 우리의
마음인 이 법신을  포함하고 있다 하니 이것은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인
원리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만일 저 허공과 마음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허공
과 마음을 따로  갈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는 이상, 허공이니
법신이니 하는 것은 다만 제 스스로가 별명을 지어서 그렇게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
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다 무한대는 아닌 것이다. 시간도  그렇
고 공간도 그렇고  또한 법신도 그렇다. 오직 이 마음자리만이  이 우주에 두루할 뿐이
다. 현재는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현재가 없다고 하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과거니
미래니 할 것인가? 과거다 미래다 하는 말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다만
우리가 가정을 해서 하는 말에 불과하다.  진실 그대로를 말한다면 삼라만유의 모든 존
재가 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물질  그 자체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화
하고 있는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일을 추악하다는 말이
지만, 작년은 이미 작년으로서 지나가 버렸다. 작년 3백 65일 다 흘러가 버린 것이므로
작년이라고 하는 것은  다 소모되고 없어진 것이다. 또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도 경험할  수 없고, 미래도 경험할  수
없고 현재도 또한  경험할 수 없다. 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백년에 한번씩 이따금
흘러간다면 현재도 있고 과거도 있겠지만,  억조만분의 1초도 멈추는 일이 없이 찰나찰
나 흘러가는 것이고 보면 우리는 그것을 어떤 것이라고 확실한 기억조차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확한 기억이라는 것은  생길 수는 없다. 비슷한 것, 거의 같은 것에  불과할
뿐인데, 이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사회도의와 질서를 몰각하고, 윤리와 인성을
땅바닥에 처박으려, 사리사욕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해 다툼에는 맹수보다  영
악한가 하면, 인간사회에 상호 불신의 씨를  뿌리며 동족과 이웃의 불행에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국가사회의  이익에 앞질러 개인 축재와 향락에만  몰두하며 탐욕과 음유와
시기와 중상과 위선과 가식과  비열과 무교양과 파렴치의 온갖 죄악을 뱃속에 가득 담
고, 아부의 웃음과 교활의 눈초리를 빈들거리는  무리들이 너무 많이 들끓는 것을 보면
벌써부터 우리 세상은 이  기계 문명의 소산인 가짜 인간들에게 침식당하고 있음이 분
명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구제받을 길 없는 가련한 생명체들을
구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들로 하여금 소유욕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이들의 가슴속에 내일을 심어주고 절망과 체념에서 구출하고 생명의 자유와 영원
성을 믿을 수 있도록 신앙을 가질 줄 아는  마음, 자기 종교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을 넣
어주어야 겠다.

제5장 마음의 밭을 갈 때
    마음을 깨끗이
  지상의 도는 곧 마음이다.  이미 이 마음이거든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밥먹고 옷  입을
줄 알았으면 그만이다. 새삼스러이 깨치려고 하므로  곧 그러한 생각이 큰 장애가 되는
것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망상만 버리면 도는 저절로 훤히 드러나는 것이다.  털
끝만한 생각만 일으켜도 벌써 이 마음의 천진면목과는 하늘과 땅만큼 틈 아닌 틈이 벌
어지고 만 것이다.  마음의 본래 면목이 드러나려면 좋다 싫다  생각을 곧 버리면 되는
것이다. 맞다 안맞다 하고 서로 다투는 것 이것이 도를 닦는데 제일 큰 장애가 되는 것
이므로, 이렇게 드러난 허물인 줄 알지 못하며, 또한 탐욕심과 살해심이 곧  무상대도인
것을 살피지 못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망상을 끊고자하면 할수록 더 일어날 것이다. 이
마음은 동굴에서 저 허공과 같이 두루하여 모자라는 데도 없으며 또한 넘쳐 남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만 밉고 가까움 때문에  이 마음의 본래 면목을 잃고 만 것처
럼 되어 있다. 모든 것을  따르지 말며 텅 비어 공한 경계도 여의고, 오직 그렇게만 지
내면 망상번뇌는 저절로  없어지고 마느니라. 망상을 끊고 마음을  쉬고 앉았으면 잠시
조용하다가 다시 더 큰 화근이 나는 법이라,  밤낮 그러다가 말게 되는 것이니 언제 한
번 이렇게 지낼  수 있으랴. 이렇게 제데로 지낼 줄을  모르면 밤낮 앞뒤로 넘어지다가
말 것이다. 망상은 버리려고  할수록 더 일어나는 것이며, 텅 빈 지경을 지키고자  하는
까닭은 내가 빈  것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니 거기에 팔려  있는 것이다. 말이 수다하고
생각이 많을수록 점점 더 어긋나는 것이며, 말이  없고 생각을 쉬고 나면 어느 곳 어느
때나 이렇게 딱 들어맞는 것이니라. 이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서면 곧 이렇게 제대로이
지마는, 객관 사물에 팔리면  제 마음은 제 마음 뒤로 숨어버리나니, 곧 돌이키면  보다
더 싱싱하여져서 먼젓번에  텅 비었던 경계보다 훨씬 수승하다.  앞에서의 망상을 끊고
따라 나타났던 빈 경계가 돌변하여 복잡한 번뇌로 되는 것은, 한쪽은 끊고 한쪽은 구하
는 망견이다. 이  마음밖에 따로 진리가 없는 것이니 새로이  진리를 구하지도 말 것이
며, 오직 자기의 마음에  있는 일체소견을 다 버리면 된다. 진이니 망이니 하는  소견을
버리고 또한 무엇을  따지며 알아보려고도 하지 말 것이다.  조금이라도 시비심이 남아
있으면 제 정신을 잃어버리느니라. 만물이 다 한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므로,  한마음
도 또한 간직하지 말 것이다. 한마음까지도  간직하지 말면 세상 만법이 다 한마음이라
서 짝의 허물이  없다. 짝의 허물이 없어지면 일체법도 없고  한 생각도 남음이 없으면
그때는 한마음도 아니다.  온갖 생각은 저 경계가  없어짐에 따라 없어지고, 또한  모든
경계는 이 생각이  없어짐에 따라 없어진다. 그러므로 온갖  경계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모든 생각은 경계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저 경계와 이 생각이 그 어느 것이  먼
저였고 나중의 것이냐를 알고자 한다면, 그것들이  본래부터 모두가 아무 것도 아닌 이
한마음이다. 아무 것도 아닌 이 한마음 자리가 주관 객관으로 나타나서 도리어 이 한마
음이 저 온갖 것을  그 안에 있게 하였다. 다만 좋고 궂고  하는 생각만 내지 아니한다
면, 어찌하여 주객이 갈라져서 한쪽 편이 되리오. 이 마음자리가 원래부터 대도인  것이
라 본래 넉넉하고 휼륭한 것이다. 이미 이 마음인 이상 쉽거나 어려울 수가 없다.  좁은
소견으로 따지기만 하다가 따질수록 점전 어긋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나 숭
고한 이념일지라도 그것에 집착하면  그 사람은 그 이념과 맞서는 것이 되어서 상대연
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반쪽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천진 자연한 이 마
음자리를 호호탕탕 제대로  살면 이 마음 자세는 오나가나  머물지도 아니한다. 천진한
이 마음을 조작없이  제대로 가지면 이 마음 이대로가 큰  도이다. 만사에 욕심이 없이
제대로 걸어가면 산도 절도 물도 절로, 꽃피고 새가 우니 만물이 자유롭다.  태평천지이
니 세월, 생사밖에 한 가락은 날날이 닐닐이 제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인생에는
회계가 맞지 아니하는 것이다. 만족은 이 마음에 있는 것이요, 저 세상에 있는 것은  아
니다. 그러하건만 사람들은 그것을  거꾸로 찾는다. 이 짧은 인생으로서 무한대로  일어
나는 이 무지한 이 욕심을  무엇으로서 다 메울 것이가. 다만 애가 탈 뿐이다. 애가 타
면 이 마음만 괴로울 뿐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네니 내니 하는고? 천지만물로 더불어
이 마음이 본래부터 한덩어리인데, 절대한 자유만능의 본래 면목을 알고자 하거든 다만
저 만물을 미워도 고와도 말 것이니라. 만물을 미워도 고와도 아니하면 이 세상이 도리
어 곧 부처님 세상이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은 저지르지 않는데 여여부동 저 어리석
은 사람들은 제 발들을 밟고 넘어지게 마련이다.  저 만물이 곧 마음이요 이 마음이 곧
저 만물이다. 전체가 통틀어서 오직 다름없는  이 마음은 하나뿐인데 저 범부들은 어리
석게 자기는 주관인 양 하여 저것들을 남이라고 여기고 불같은 탐욕을 낸다. 어찌 그것
이 큰 착오가  아니랴. 깨끗한 이 마음자리를 한번  그르쳐놓으면 치우쳐서 고요하거나
산란하거나 하지마는, 깨닫고 나면  좋고 싫은 것이 없다. 좋거니 싫거니 하는 것은  모
두 두 조각의 모순된 살림살이로서 영겁으로 생사고해에서 골몰하는 공연한 궁금증 때
문이다. 이 세상만사는  이 마음에 저지른 꿈결이요.  눈병 때문에 공연히 보이는 공중
꽃이다. 무엇을 애써 알아보려고 할 것인가? 얻었거나 잃었거나 옳으니 그르니 여러 말
말고서 한꺼번에 탕탕  놓아버려라. 눈에 잠이 없어지도록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공부를
힘써 하면 천당이니 지옥이니, 인간, 짐승, 남자, 여자 하는 모든 꿈들이  저절로 없어지
는 것이니, 다 이 마음이 항상 이러하여  변쳔하지 않으면 저 천지만물과 더불어 이 마
음과 한가지로 항상 이러하다. 이러한 이  마음자리는 만법과 둘이 아니면서 항상 이러
하여 우주의 궁극체이며  고독이며 고귀독존이므로 여기에는 맞서는 짝이 끊어진  것이
어서 말과 글월과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만물을 밉다 곱다로 차별하지 아니하고  무아,
무심으로 평등하게 보면 이 마음이 제대로  돌아선다. 이 마음은 그것을 무엇이라도 할
수 없을뿐더러 또한 무엇으로도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이 마음은 까딱도 않고 움직이
니 그것은 곧 움직이는 것이 아니요, 또한 움직이면서 까딱도 아니하니 그것은 곧 까딱
아니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이 마음자리는 움직인다,  아니 움직인다 하는 양쪽을  다
초월하였다. 그러니 어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머엇인 그 하나인들 마음에 남아 있을
수 있으랴. 이 마음자리에는  끝내 아무 법칙이 없으며, 따라서 이 마음은 깨닫는  법조
차도 일정한 법을 말할 수 없다. 이  마음이 본래부터 평등하여지면 모든 망동이 다 쉬
는 것이다. 이 마음밖에 부처나 조물주와  진리가 따로 있는가 하고 따지는 번뇌망상을
깨끗이 정히하면 본래의 정신이 바로잡히는 것이다. 좋고 싫고간에 무슨 일이든지 도무
지 마음 가운데 남기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기억이 남지 아니한다. 텅 비고 밝아서 분명
히 이러하니 애를 쓰지 아니하여도 공부가  저절로 굴러간다. 이 마음자리는 말과 생각
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 따지고 연구하는  법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실재로서
변함없는 마음에는 남도  나도 없다. 누구나 이 마음자리의 본래  면목을 꼭 알고자 한
다. 오직 만법과 이 마음이 둘이 아닐 뿐이다. 둘이 없으면 온 우주 전체가 다 이 마음
하나로 되는 것이요,  이 하나는 도리어 그 전체를  머금고 있다. 온 세상의 지혜 있는
사람들은 다 이 마음을 깨치는 선종으로  들어오느니라. 이 법에 들어서는 법은 시간이
걸리지도 않으며 또한 얼른 빨리 들어설 수도 없다. 왜냐하면 시간을 흘리기 전에 부동
일념의 순간에 곧 만년이 흘러갔으니 만년이  곧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자리는 두
루 가득하여 있고 없는 곳이  없어서 온 우주의 현재 일이나 억만겁의 과거 일이나 미
래 일이 항상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가장 적은 것이 제일 큰 것이기 때문에 저 우주만
유와 이 마음이 서로 맞서는 상대가 아닌 것이며, 가장 큰 것이 제일 작은 것이기 때문
에 변두리를 볼 수가 없느니라. 저 만물이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곧 있
는 것이다. 만약에 이와 같은 도리가 아니면 그것은 간직할 것이 못되는 법이다. 한  가
지가 곧 오만 가지요. 오만  가지가 곧 한 가지이다. 다만 넉넉히 이와 같은 도리를 간
직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성불하지  못할까 걱정하랴. 똑바른 신심은 우주만법과 둘
이 아닌 이 마음이니라. 둘이 아닌 신심은  말할 도리가 없으며 또한 과거도 미래도 현
재도 아니다.
    나의 길, 나의 노래
  길을 보고 있을 때  사람들은 걸어왔다는 사실과 그리고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동
시에 생각하게 된다.
  내가 다시 태어난대도 기꺼이 이 길을 걷겠노라.
  설령 성불을 한 생 미루더라도 모든 중생을 건지리라.
  육신은 죽어도 법신은 영원히 살아 있다.
  맑고 깨끗한 마음만이 나와 가정과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나는 밤의 산길을 좋아한다. 길들은 끝이 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냇물도 끝없이  흘러
간다. 왜 흘러가는 것일까. 냇물은 지면이 낮기 때문에 흘러내리고 길들은 사람들의  발
자국의 때가 묻어서 흘러내릴  것이다. 그 자체의 의지로써 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
데도 달빛 아래 보고 있으면 그것은 한 의지처럼 보인다. 마치도 도라든가 보리라는 말
이 그 자체로서도 품격을 지니고 있는  듯이 생각되면서……. 나는 승려이므로 많은 길
을 걷는다.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들길을 걷는다. 문명이 발달되고 나이가 더해  가
고 도시에 머물게 되면서부터  내발로 땅을 딛고 걷기보다는 승용차를 타고 가는 횟수
가 더 많아졌으나 그  탄다는 사실도 여전히 나에게는 걷는다라는 말로써 번역되고 있
다. 젊은 날에 너무나도  많이 그 걷는 일을 되풀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40년의  수도생
활, 춘하추동이 1백60여를 넘기도 또 산천의 수색과  형경이 네 번이나 변했건만 난 또
어디로 가야 하고 또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 부처님께서 미묘 법문의 광장설이
40여 년이니 또한 내 한평생 수행과 같건만… 돌이켜보니 숱한 사연과 밀어들이 이 고
뇌를 잊고 무상증득의 나를 찾고자 애쓰는 노승의  심정이 조급해질 뿐, 또 어쩔 수 없
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한 해 또  한 해를 보내고 맞는다는 생각뿐이다. 아침 5시가 되
면 승려들은 눈을 뜨고 일어나  대빗자루를 들고 절 뜰을 한 바퀴 쓸고 구석 구석에서
진회색의 냄새가 풍기는 법당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아침 염불을 왼다. 법당문을  열고
나올 때는 벌써 건너산 위로 붉고 미숙한 햇빛이 트고, 나오던 승려들의 손은 합장하여
지고 허리는 겸손하게 구부러진다. 절간을  둘러싼 대숲에서 바람에 이파리가 흔들리는
소리,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 이  아침의 소리들은 너무나도 미세하고 신경질적이다. 마
치 신라인들의 귀금속품과 같다.  그렇게 긴 아침이 서서히 사라지고 난 뒤, 산으로  빼
곡이 둘러싸인 산간에는 저녁이 줄달음치듯이  뒤따라온다. 더욱이 가을과 겨울에는 아
침과 저녁이 거의 일적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만산은 종일 붉은 놀에 잠겨 있
는 듯하다. 낯 씻는  일, 변소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자리를
떠난 일이 없이 정진에 몸을 맡기었다. 무수한 시간이 지나갔으나 나는 동요없이 그 자
리에 앉아 있었고, 한목적, 유일한 목적만이 내 앞에 있었다. 해탈하는 일,  그것이 바로
그 목적이었다. 욕심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기쁨과 슬픔으로부터의 해탈이 목적인  것
이었다. 모든 나로부터 벗어날 때, 모든 욕심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최후의
것, 가장 본질적인 것, 이미 나는 내가  아니라는 큰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문앞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었고,  목이 마르고 괴로움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
지 그러고 있었고, 이윽고 그 괴로움과 불편이 사라져갔다. 점점 무의 경지로 들어갔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앉는 것 같지 않고 오줌을 싸도 싼 것 같지 않았다. 한
숟갈의 밥, 하나의  정좌는 밥이고 정좌이면서 곧 무였다. 아아,  승려들은 놀의 시간을
사랑한다. 더욱이나 그런  시간의 벼랑에서 또는 토굴에서 정진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토해낸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윽고 그 달빛과 놀과
일출 위로 떠올라온다. 그런 다음 그들의 허적허적한 발길은 토굴을 빠져나와 세상으로
향하여진다. 저녁은 아름답다.  나뭇가지에 닫는 바람소리, 골짜기의 물소리, 그리고  일
대를 물들이고 있는 붉은 놀……. 산사람들에게  놀처럼 정겹고 속세를 그립게 하는 것
은 없다. 그것은 정진의 길에서의 그  어떤 의지라기보다는 그 어떤 분위기였고 인간적
인 것의 정경이었다.  그러므로 놀이 내릴 때  산사람들은 가장 많이 동요된다고 한다.
달빛 속에는 사해대중의  아픔이 보이지 않은 밀도로서 들어차  있다. 그래서 대승들은
그 달빛 속으로 나아가 정진하는 것이리라. 승 일연의 기록에도 광덕은 밤마다 달빛 위
에 떠올라 정진하였고 현수도  달빛 속에서 그의 선을 맞아들였었다. 기록만이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도 달빛은  승려들의 정진과 깊은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선사들의 모든
게송 속에는 한두 마디 달빛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아니 달빛만이 아니다.  저녁놀이
라든가 새벽의 써득써득한 빛깔은 승려들이 너무도 사랑하는 색채이다. 숲속을 거닐 때
인생은 마음의 폭이 한없이  넓어지고, 또 한층더 아름다워진다. 고요한 속에서  생각이
되는 일은 모두 소화되고 승화되는 법이다. 대자연을 찾아라. 비록 중이 되지  않더라도
인생의 참맛을 알게 되리다. 만상의 나무들이 누렇게 시드는데 벼랑 위에 오직 한 나무
싱싱하게 푸르러 있더라. 오늘 나는 어두운  도선사의 나무숲을 헤치고 가면서 한 게송
에 의문을 던진다. 어떻게 (잎사귀가 시들고)(홀로  푸르다)는 흔적을 남기고 지혜의 바
다를 건너갈 수 있을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아직도 미망의 그림자를 벗어버리지 못
했다는 것이 아닐까? 마치 바람처럼, 마치  달빛처럼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고, 어
떠한 그릇에도, 어떠한 시간에도 자유자재로 담길 수 있는 것이 대오가 아닐까? 그러한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표현할 수도  없는, 시늉할 수도 없는 그것이라고 부르
는 것이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그 밤에 우리는 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는 육체와 정신이, 세속적인 의리와 그  반대의 것이 서로지지 않으려고 밤새도록 버티
다가, 통곡으로 아버지가 손을  들었고, 그 분에 못이겨 그분은 끝내 그의 단명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별세하시기 전날, 한 마을에 살고 계시던 할아버지와  백
부님이 오셔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그분들은 어떻게 하든지 나로부터 승려가 되지 않겠
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였건만 끝내 실패하였다. 할아버지는 (네 아비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입술에  바른 말이라도 않겠다고 하여라)하고  간천하였지만 (어떻게 거짓말
을 하겠습니가)하고 나는  거절하였다. 그때 병중에서도 휙  몸을 돌리시고 쏘아보시던
아버지의 눈길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무서운, 원망과 저주에 가득찬  눈
이었다. 그와 동시에 할아버지와 백부님께서도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노여움에 찬 어조
로 몇번이고 뱉으시면서 문을 차고 나가시었고,  나는 그분들의 뒤에서 어찌할 바를 몰
라 엉거주춤 성 있어야 했어다. 그 다음날 어버님은 별세하셨ㄷ. 그리고 갓난  이기였던
나의 동생이 따라서 저승으로 갔다. 세속세계를 떠나려고 나의 마음은 그 세속세계로부
터 너무나도 심한 보복을 받은 것이다. 대지의 숨결이 흰 구름에 엉겨 아스라이 지평선
위에 둥실 떠 흘러간다. 양광에 구멍 뚫린 얼음장 밑으로 시냇물이 도도히 소리치며 흐
른다. 후미진 웅덩이에서 송사리 한 마리가 거센 물살을 거슬러 도약을 시도한다.  태초
로부터 이어오는 생명의  약동이다. 검은 잿빛으로 시들어 오그라진  쑥대 밑에서 파란
연두빛 어린 싹들이 짓눌리는 고갈을 제치며 앞 다투어 올라온다. 오늘이 경칩! 지하의
온갖 벌레들이 지루한 동면에서 깨어나 새봄의 생기를 들어마시며 새로운 태동의 기지
개를 켜는 웅성거림을 듣는 듯하다. 하늘에는 구름이 흘렀다. 찬란히 바라보고 있는  그
의 눈에는 구름이 삽시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들어오고 있었다. 코끼리 모
양으로, 젖먹이는 어미니 모양으로, 산 모양으로, 바다모양으로, 물 긷고  가는 아낙네의
모양으로, 그리고 염소 모양으로,  토끼 모양으로 그토록 자유자재로 변하는 구름  모양
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수만가지로 변화하는 생의 무상이었을까, 아니면  다
만 흐르고 변하는다는 구름의 형용이었을까. 어렸을  때의 일을 세세하게 생각해 낼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그는 그때의 구름의 변용에서 일종의 소년다운 감상적인 비애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비애는 장차의 그를 만드는 정서적인 원천을 이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겨울 사원은 언제나 적막하다. 더욱이 흰 눈이 며칠이고 계속  내려
시내로 가는 산길이 흔적도 없어지고, 눈과 나무라는 단조로운 형태로 산이 정리되고나
면, 산엔 바람소리밖에 그 고요를 깨뜨리는 것이 없다. 겨울 산의 바람소리는 쓸쓸하다.
더욱이 황혼이 어둠 속으로 묻히고 그림자들이 밤으로 밤으로 몰리는 초저녁의 바람소
리는 산사람들의 가슴을 몹시도 심하게 흔들어놓는다. 그런 날의 승려들의 모습은 웬지
쓸쓸해 보이고 왜소하다.  앞뜰의 눈을 쓸고 있는  승려들, 그리고 묻힌 길을  더듬으며
걷고 있는 승려들, 꽁꽁  닫힌 방안에서 불경을 낭랑하게 외고 있는 승려들, 그들의  모
습에는 속세를 떠나온 사람들의  떠나왔다는 슬픔이 그리움과 함께 깃들어 있는 것 같
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슬픔 속에서 그 많은 겨울을 맞이하고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
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떨쳐버릴  수 없도록 힘차게 몸에 달라붙어 나의 일부분으로 화
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우중충 얼어붙은 하늘 폭을 쪼개고 사라져가는 제트기의 방향
을 쫓아 저 멀리 남쪽 산 너머 위, 두둥실 흰 구름 한 점, 창공에 걸려 있는  저 너머에
서 희미한 양광을 타고 봄의 숨결이 대기  속에 스며든다. 흰 눈 덮인 산비탈을 죽작으
로 헤쳐오느라면  대가락 굴러가는 고엽의  행방--거기, 말라붙은 잔디를 헤쳐  대지의
맥박이 파아랗게 솟구쳤다. 삼강오륜이라는 유교의 굴레에 꽉 얽매여 있었던 그때의 아
이들은 그 반항심이라는 것을 결코 나타낼  수는 없었다. 그것을 보였다가는 당장 불효
라는 낙인이 찍히고 마을에서 소문난 문제  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뚜렷이 만법
을 성취한 마음의  (여)가 따지는 망상의 바다에 빠져서뜬 갈대와  같이 표류하면서 항
상 입으로는 나는 알았다고 떠들며,  배웠다고 하며, 깨달았다고 하며, 해탈했다고 하며
무슨 도리가 있는 체하면서 우세할 때에는 의기양양하다가 모자라는 입장에서 숨도 못
쉬고 비굴해지니 이러한  작은 알음알음이의 소견은 위  없는 대도를 성취하여 생사를
초월하며 저 고해에 허덕이는  무변한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는 이 마당에 있어서 무
슨 소용이 있겠나.

    마음의 힘은 불가사의
  옛날에 어떤 노장님이 큰  산꼭대기의 암자에서 7·8세 되는 아이를 하나 데리고 있
는데 하루는 김치가 떨어져서 마을에 김치거리를 좀 얻으러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에게 단지 몇 개를 잘  씻어서 뒤집어 놓으라고 시켰습니다. 노장님이 마을에
내려가서 먹을 것과 김치거리를 한 짐 잔뜩 얻어 걸머지고 올라와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낯선 단지가  절에 있었습니다. 우그러지고 비뚤어진 것들이  대여섯 개나 뜰에
널려 있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아마 옹기  장수가 왔었구나.)하면서 (항아리를  사려면
돈을 주고 좋은 걸 사지  왜 이런 것을 샀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사지 않았습니다. 옹
기 장수는 지나가지도 않았습니다.)(그러면 이 단지들은  어디서 난 것이냐, 모두 다 전
에 없던  것들 아니냐.)(아닙니다. 그전에 있던  단지들입니다. 스님이 시키는대로 했을
뿐입니다.)(내가 뭐라 했더냐.)(씻어서  뒤집어 엎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스
님 가신 뒤에 좀 놀다가  씻어서 무릎에 대고 뒤집어 놓았습니다.) 버선짝 뒤집듯 후딱
후딱 잘 뒤집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순집해서 뒤집으면 뒤집어지는 것
으로만 알았던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동문들도 없이  산에서만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놈 거짓말하지 마라. 너  그러면 한번 뒤집어 봐라.) 그래서 아이가  무플을 대고 뒤
집으려고 하니 이제는 무릎이 깨져도 안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심이 전혀 없었기 때
문이고 나중에는 의심이 생겨서 안 됐던 것입니다. 요새 심리학자들도 그런 일을 혹 경
험한다고 합니다.
  중국에 이광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광  사호라고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광은
본래 힘이 센  무사로서 중국 역사에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달밝은 밤에 활쏘는 연습을 하고 저물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동네 앞에 있
는 남산 근처에 왔을 때인데  큰 호랑이가 자기가 타고 오는 말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광은 (저 놈이 배가 고픈  모양인데 나한테 달려들면 나도 죽고 말도 죽
을 것이 틀림없다.  도망을 가자니 호랑이가 따라 올 것만  같고 죽으나 사나 저놈하고
싸움이나 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등에 올라 앉아 활을
호랑이에게 겨누어 정면으로 쏘았습니다. 호랑이는 자기 몸에 활을 맞으면 막 달려들어
서 원수를 죽여 놓고 나서 죽는 영특한 짐승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자기가 소리를
한 번 지르면 자기가 탄  천리마가 단 걸음에 자기 집으로 달려나갈 것이니 동네 앞에
닿으면 큰 소리를  질러서 동네 앞에 닿으면 큰  소리를 질러서 동네 사람들이 횃불과
몽둥이를 들고 나오면 호랑이가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갔
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집에 다  가도록 호랑이가 달려오는 소리는 나지 않았습
니다. 그래서 그는 호랑이가 정통으로 내 활을 맞고 직사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큰 백호 한  마리를 잡았다고 좋아서 밤새도록 잠도 한  숨 못자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호랑이를 잡으면 껍데기는 임금한테 바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받습니
다. 그리고 고기나 뼈는  귀한 약으로 쓰이므로 큰 횡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새벽녘
에 날이 새자마자  지게를 지고 호랑이가 죽은 근처에  가서 보니 호랑이는 꼼짝 않고
있습니다. 그는 (그러면 그렇지 내 활을  네가 피했겠느냐.)하고 가까이 가 보니 화살이
꽂힌 곳은 큰 바윗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내 활 앞에는 이
세상에 감당할 놈이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활을 겨누어 다시 한번 바위를 향해 쏘아봤
습니다. 그러나 화살은 튀어  나왔습니다. 다시 어제 저녁의 그 자리에 가서 활을  쏘았
으나 역시 맞지 않고 튀어 나왔습니다. 이것이 역시 불가사의인데 이것도 4차원 세계의
힘이 발동된 것입니다.  5관의 힘으로 화살이 아무리  세다 해도 불가능합니다. 호랑이
뼈가 아무리 단단하더라도 내 화살이 안 들어갈 수  없다고 자신한 때문이었고 (단지는
뒤집어 놓는 것이다. 아름드리  나무도 내가 던질 수 있는 나무다.)라고  아무 생각없이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아무 사심없이 한 가지로만 생각하면 이
지구도 뚫고 나갑니다.  내가 경험한 일 한가지를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
마산에 있을 때인데 밤중에 일어나 보니 우리 바로 앞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때는 상주
일 땐데 상복을 벗어 놓고 불을 끄려고 나가니까 상주가 그런 짓 하면 안 된다고 말렸
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먼저 보았으니  가야겠다고 달려가서 보니 큰집 한쪽에 불이
붙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고 불은 곧 옆집으로 번지게 생겼습니다. 나는 옆
집 지붕에 얼른 올라가서 (불이야!)하고 사방에다 대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올
라선 그 집은 큰 부자집이었는데, (이 집에 멍석 있으면 올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멍
석이 어찌나 컸는지 약한 사람은 지지도  못합니다. 나는 발이 썩은 닢에 미끄러질까봐
한 손으로는 붙들고 내 몸뚱이도 거기 붙어 있을 수 없는 지경인데 한 짐이나 되는 멍
석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래서 불붙는 집 건너 집에 멍석을 쭉 펴놓고 물가져 오라 해서
물을 끼얹어 불이 안붙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 평소에는 할 수 없는  일인데,
급한 사정에 부딪쳐서 이것을  집어 던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안 된다는 생각없이 던졌
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가고 마음이 온다
  우리가 천당 갔다  지옥 갔다 하고 육도 세계를  돌아다니고 윤회르 하고 그것이 다
번뇌의 업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번뇌의 잠재의식이 우리의 근본 마
은 자리를 더나서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돌아 다니는 것은 아니며 본 마음자리가 한
것입니다. 그러니 죽어서  천당에 가도 그 실상 자리 자기  근본 정신이 올라간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이 우주에 편만샜다, 즉 트다곡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작은 거냐 하면  바늘 가지고 짤러 볼 수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입
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없는  거면서 그 속에 우주가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또 크
기롤 말하면 비행기를 타고 광속으로 몇 억만 년을 달아났다 하더라도 그게 나고 바늘
로도 찌를 수 없는 그 작은 극소 안에 무한대가 들어 있고 거리가 있느 것입니다. 사실
은 무한한 시간을 달렸다고 해도 내내  돌아앉을 자리도 없는 거기입니다. 마치 손바닥
만한 거울에 동서 1백 리가  넘는 서울이 다 비춰 들어오듯이 그런 건데 사실은 그 거
숭ㄹ 속으로 뚫고 나간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거기 동서남북이 있고 사라미 왔다갔
다 하고 전차가 다니고 북악산도 있고 비행기도 떠 다니고 하는 것은 눈 이 숙은 셈입
니다. 이런 것이 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길이 있지만은 과학으로도 불가사의한 일입니
다. 이와같이 우리가 왔다 갔다는 말도 그 거는 꿈 속에 있는 소리입니다. 지상이나  천
다이나 다 공간이고 천당 있는  데가 지옥 있는 데고 극락세계 있는 사바세계 있는 데
고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확실히  거래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육체도 거래를 안합니
다. 내내 그  자리니까 거래할 곳이 없습니다. 사실은  거리가 있다 해도 안 되고 없다
해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왔다갔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게 도대체가 이게 망상이
고 마음으로 생각뿐이지 사실은 그런 건 없는 것이며 형상으롤 나타난 것도 그런 불가
사의였고 이건 크고  저건 작다고 하지만 망상일 뿐입니다. 간장  독을 종지 안에 집어
넣는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고 미친 놈이라 할 겁니다. 몇 짐의 물이 들어 가는 독
이 찻잔보다도 작은 종지 안에  어느 모퉁이 하나 남지도 않고 딱 맞게 들어가 버리는
도리가 마음 법입니다. 그러면 간장종지를 확대해서 넣어졌거나 큰 독이 축소돼서 줄어
들었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는 돼야 할겁니다. 그런데 둘 다 작고 큭 그대로 그렇게 된
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불가사의입니다. 그런데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조금 있는  것
은 이 크다는  것도 거짓말로 큰것이고 작다는 것도 거짓말로  작은 것이니, 작은 것이
큰 것으로 작은 것이고 큰 것이 작은  것으로 큰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느냐하면 다
꿈이기 때문입니다. 꿈으로 크고  꿈으로 작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자긍ㄴ  것도
반드시 큰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생각이지 참
말로 큰게 아니고 작다고 행각하는 간장 종지도 생각이지 실제로 작은 게 아닙니다. 그
렇지 않고는 부처님의  신통이 나올 수 없는 것이고  이 화엄의 도리가 아니면 참말로
성불할 사람도 없고 불법을 얻을 도리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물질 자체도 진공
묘유입니다. 있긴 있으되  진공으로 있는 거고 사실로 있는 게  아니라 없는 걸로 있기
때문에 이게 묘유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 아무것도 없는 데라 하여 아주 없는 거냐
하면 그건 없는  걸로 없는게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게 있고 이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있어도 거짓으로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없는 거냐 하면 또 이
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게 참말로 없는 것이지 없는 걸로 없는 그것은 없는 걸
로 있는 것이며 없는 것의 존재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있다고 하려면 부득이 (묘유)
라고 하고 (진공묘유)의 존재라  그럽니다. 우리가 업이 달라서 안보이는 것 뿐이지 여
기도 천당이 있고  지옥도 있고 다 건립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대로 앉아 잠이
들면 제가끔의 꿈을 각각 꾸는 것과 같습니다.  독립 만세 부를 땐 전부 묶여 들어가서
조금 기대서든지 숙직실이고 유치장이고 빽빽하게  서 있습니다. 밤낮으로 그래 가지고
잠간 자는 동안에 꿈도 꾸고 그러는데 한 사름은 서울을 차려 놓고 하는 또 부산을 건
립해 놓고 하나는 대구를, 또 다른 사람은  평양을 건립하고 모두 이렇게 제가끔 백 가
지 천 가지 꿈을 꾸어도 조금도 혼란하지 않습니다. 제각기 공간을 분리해 가지고 그렇
게 꿈을 꾸는데 그게 모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바늘로도 찌를 수 없는 그 작은 존재
안에 천당·지옥·극락세계가 다 있습니다. 그것이 큰 걸로 작은 것이므로 그렇게 되는
데 이 실상을  우리가 깨닫기 전엔 모릅니다. 우리는 실상  자리를 말로는 이렇게 하고
또 말 들을 때는  그런 것이구나 생각하지만 말 뚝 떨어지고 돌아서면 깜깜해져서  (이
것 촛대고 저건 나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하고 현상계에 끄달리게 됩니다. 그래
서 돌은 물이 아니라고 하고  불은 언제 물이 아니라고 하고 이렇게 자꾸 해오다가 처
음엔 속아서 그랬지만 나중에는 진리라는 고집이 되고 법집으로 됩니다.


  초로인생
  초로인생 이 내 목숨 만년  살 줄 믿지 마소. 앉다가도 엎어지고 서다가도 넘
어지네. 빈부귀천  노소남녀 차별없이 죽어가고 북망산천  저 무덤은 크고 적고
흙이로다. 금은 보배 태산  같고 처자권속 수많아도 애착하던 이 몸조차 헌신같
이 버려두고 영환 홀로 떠난 길에 뉘라서 같이 갈까 홀홀단신 슬픈 걸은 무주고
혼 되었구나. 이  새상에 태어날 적에 맨주먹을  쥐고 났고 저승으로 사는 걸음
진손으로 떠나간다. 알았거나 몰랐거나 지은 죄복 남 못주고 짊어지고 가고오고
눈 어둡고 의지없이 천당지옥  사생육도 돌아설 길 아득하다. 여보시오 가는 손
님 잠시 한말 듣고 가소 꿈결  같은 우리 인생 잠시 왔다 가는 걸음 풀 끝에 이
슬이요 그름 틈에  번개로다 억천만생 왔다가고 한없는  몸 바꾸어도 이 마음은
진실하여 아직 한번 변함없네  꿈이거나 깨쳤거나 산은 높고 물은 깊다. 둥글고
둥글어서 천지에  근원이요. 밝고 밝아 또  밝아서 동서만겁 통달하고 생로병사
없는 세상 자유자재 영원하다. 쾌할쾌할 일 마치고 남은 일은 중생제도 온 우주
를 살펴보니 대자연의 모든  것이 통틀어서 나 하나요 낱낱이가 부처로다. 여보
시오 가는 손님 몰랐거든 생각하소.  잘되고 못되는 일 제될 만틈 될 것이니 불
평없이 인연따라  마음편히 살ㄹ아가며 온갖 망상  그만두고 오나가나 자나깨나
일할 때나 노는 때난  일심으로 생각하소. 이 육신을 운전하는 마음인지 영혼인
지 이름 말고  무엇인고 도대채가 무엇인고 일구월심  생각하여 이 생각이 굳게
뭉쳐 앉고 설 줄 몰라지고  먹고 잘 줄 잊어지고 꿈에서도 이 생각만 이것이 무
엇인고. 하늘땅이 이 생각만  이것이 무엇인고. 하늘땅이 한뭉치로 무엇인고 뿐
이로다. 숨도 미처  쉴 새 없이 일렴정성 뭉쳐지면 꿈속  꿈에 이 내 마음 깨칠
날이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아서 생사꿈을 벗어나고 불법마저 초월하여 무변중
생 건져주고 부처님과  다생부모 그 은혜를 다  갚으세. 구멍 없는 피리부니 귀
없는 이 들어보소.  세월네월 내 모르고 흥망성쇠 꿈밖에서 좋고 궂고 맡겨두고
쾌할 태평 살아가세. 눈코귀와  이 몸까지 남을 위해 아낌없이 인간개조 선구자
로 사회개선 앞장서고  국토세계 개발하여 새생활을 안정하세. 육신을 내라하면
천만겁에 생사윤회 자비하심 군면하여  극락세계 이룩하고 이 마음 개발하여 영
원자유 부처되자. 이 몸 태원 향공양을 부처님께 올려보세 이것은 꿈 아닐까 꿈
깨이는 꿈이 없다. 원컨대 이 공덕이 온 세상에 두루하여 원수사랑 구별없고 지
혜우치 가림없이 온 중생이 한날한시 다같이 부처되세. 또한 곡조 들어보소. 엣
기하는 이 한소리 하늘땅이 간곳 없고 무변허공 폭파로다 다시금 생각하니 또한
곡조 남았구나 마음에 일이  없고 만사에 뜻없으니. 세계는 원래로 태평하고 인
생은 자고로 안락하다. 쿵닐닐  쿵닐닐 얼시구 좋구나 청산은 대지에 솟아 있고
백운은 허공에 오락가락 봉이오니 꽃피고  새가 울고 달 밝고 깊은 밤에 강산마
저 고요하다. 선웃음 한소리에 천지는 깜짝실색 엣끼.

죄와 악
  몸으로 새 가지 죄 첫째는 살생 악하다고 잡아먹고 만만타고 때렸으니 세세생
생 명자르고 가진 병신 온갖  잔병. 둘째는 도적 일 앉고서 먹고 틈틈이 도적질
로 나의 피땀 훔쳐먹고 개소되어 빚갚는다. 셋째는 간음 간음 오입 버릇되어 아
들딸도 다 버리고 패가망국 원흉으로 세세생생 가정불화.
 입으로 네 가지 죄 첫째는  거짓말 거짓말로 남을 속여 사기협잡 일삼는다. 의
지할 곳 없게 되고 세세생생 신용없다. 이 내 신세 고달픔이 이 어찌 남의 일인
가. 둘째는 속임수 사기협잡 갖은 수단 온 세상을 망쳐먹고 악도에 떨어져서 가
진 고초 다  받고 제 슬피우는 귀곡소리  가엾고 불쌍하다. 셋째는 악담 농삼아
하던 일이 악담욕설 버룻되어 싸움패로 품을 팔아 피투성이 일삼으니 세상 사람
다 싫다고 인간대우 못받는다.  넷째는 이간질 시기질투 음해작과 남의 사이 이
간질로 사람오장 다 태우니 간 곳마다 난리로다. 죽어서 갈 곳이란 천만겁에 지
옥살이.
 마음으로 세 가지 죄 첫째는 탐욕심 보는 대로 욕심내어 한없는 탐욕으로 불타
는 정역질투 사회가저 파산된다. 타는 욕심 끝없나니 분수없이 넘지 말자. 둘째
는 복수심 흥망성쇠 돌고도니 권리세력 남용마오. 골을 내면 돌차기로 자손까지
앙화로다. 검정으로 흐르는 일 바로 된 것 누가 봤나. 셋째는 어둔 맘 마음밖에
진리 찾아 삿된 짓은 다 하누나 과학철학 종교하며 음양조화 운수 믿어 갖는 요
망 다 부려도 그 운명은  못고친다. 세상만사 그 모두가 내 마음이 저질러서 원
인결과 정했건만 그 근원을 모르고서 지엽에서 허덕인들 그 은명을 고칠소냐.
 차라리 한  생각을 착실하게 돌이켜서 음양조화  무극태극 그 바깥에 뛰어나서
온 우주에 주인공이 됨만 같지 못하리라. 몸과 입과 마음까지 세 자기의 죄업으
로 주책없이 움직여서 열가지 죄 저질렀다. 몰랐으니 지었지만 열 가지의 그 죄
악을 하나하느 남김없이 뿌리뽑아 참회하고 깨끗이 목욕하고 부처님전 소향합장
수없이 예배하며 팔과 몸을  향사르어 남김없이 참회하고 또다시 맹세하여 모든
죄악 범치 말고 착한 공덕  다 닦으세. 죄악되는 열 가지는 이미 들어 알았으니
열 가지의 착한 공덕 부지런히  고루 닦세. 복과 지혜 구비하게 금생일생 잘 닦
으면 내생부터 세세생생 명도 길도 복도 많고 효자열녀 아들딸도 애국애족 충성
으로 인간오복 고루 타고  온 세상이 부러워한다. 일문권속 정법 믿어 불법천하
이룩하고 온 세상의 사람들이 한날한시 부처되세.

공과 덕
  첫째 대자대비 넓고 깊은  자비은혜 끝없이 베풀어서 원수들을 도와주고 악마
들을 제도하자. 죽어가는 목숨살려  원한을 풀어주고 산 목숨을 사랑하여 풀 한
포기 밟지 마세. 남의 목숨  죽인 죄로 오사급사 단명한다. 둘째 근로봉사 앉지
말고 끈기 있게 부지런히 노력하여 내 힘으로 내 벌어서 없는 사람 살려주고 피
땀으로 정성 내 모아서 다생  빚을 청산하자 앉고 먹고 편히 살면 남의 노력 도
적이요. 앉고 먹은 그 죄악은 세세생생 빈천하니 차라리 굶어죽고 공벗는 덕 입
지 마오. 셋째 정조청정 일편단심  이 내 마음 정조가져 고귀한 덕 청천에 백원
같고 진흙속에 백옥 같이 정조와  신의 지켜 부부간에 서로 믿고 가정화합 만사
성취 백년해로 의지하자. 고래로 전해온 말 부부끼리 화합하면 국가에 충성하며
효자열녀 절로난다.  제행정조 지닌 공덕 그  얼굴이 미묘단정 부정한 인과로는
추한 얼굴 병골신세. 넷째 정직하자 정의 앞에 이 몸 바쳐 만고에 빛이 되고 세
상을 구원한 덕 세세생생 행복하다. 정직하면 위덕 있다. 덕 있는 이 한말 하면
온 천하에 법이 되며 온갖 사람 다 믿는다. 말 한마디 거짓되어 신용 한번 잃고
나면 돈 세상이 믿지 않아 일일이 낭패된다. 남 속인 죄악으로 세세생생 버림받
고 간 곳마다 고독신세 한탄한들  무엇하리. 다섯째 진실하자. 남 속여 모은 재
산 일시잠깐 보관되나 끝내 잘된 예가 없고 자손만대 앙화로다. 듣기 좋게 발라
맞쳐 남 못살게 속인 죄로 모진 병에 죽어가면 발설지옥 고통이다. 여섯째 점잖
하자 한치되는 이 입으로 일생신세 죄우한다. 성현들의 경계말씀 가슴속에 깊이
새겨 자비롭게 일러주고  원만히 해결하면 온 천하의  남녀노소 한 가족이 되고
만다. 악담패설 하는 사람 온 세상이 원수되어 간 곳마다 불평이고 시시때때 싸
움이다. 악담패설  하는 사람 온 세상이  원수되어 간곳마다 불평이고 시시때때
싸움이다. 악담패설 지은 죄는  세세생생 병신험상. 일곱째 공경하자 만물 중에
영장으로 인간세상 행복함은  거로가 공경하며 화합으로 이루었다. 공자님의 인
의예지 공경이 근본이요. 예수님의 박애정신 사랑의 근본이요. 석가여래 대자대
비 하심이  근본이라 낙원행복 바라거둔 하심공경  힘써 닦자. 여덟째 보시적선
한방울의 물이라도  내 덕을 베풀망정 털끝만한  신세라도 공없이는 받지 발자.
보시적선 주인공은 간 곳마다 환영이요. 의식주에 부족없이 세세생생 호강이다.
복은 지어 나눠먹고  죄는 지어 남 못준다.  힘껏 노력 벌어서 소원따라 나눠주
자. 흩어주면 모여들고 감춰두면 가난 든다. 탐내고 아낀 죄로 죽어서 아귀되고
세세생생 추한 얼굴 그 무엇 ㄸ문일까. 아홉째 인욕하자. 허망한 세상일에 제가
속아 된골 내면 십년감수 경계말씀 옛적부터 일러왔다. 이 세상에 모든 일이 내
마음의 그림자다. 제 그림자 미워하니  제 골 내여 돌차기다. 성공은 참는 공덕
한번 참아 내 몸 안락 두 번 참아 가족 행복 세 번 참아 천하태평 내가 참고 네
가 참아  온 세상이 참다보면 사바세계  극락으로 참고참아 이뤄진다. 부처님의
그 성상도 츰는 공이  이루었으니 육도만행 가운데서 인욕공부 제 일된다. 무진
장의 공덕문이 참는 것이 열쇠로다. 열째 정신차려 흩어진 맘 거두고서 온갖 생
각 다 버리고 정신차려 눈뜨고서  올바르게 살펴보라. 산이 높고 물 깊은 줄 잘
도 아는 이 맘자리 이 자리를 깨고 보라. 혼연일체 본래면목 마음밖에 천지밖에
마음 없이 이름 없고 모양없어  모든 흔적 끊어졌다. 무량무수 저 부처님 이 도
리를 깨치시고 천지를 두루  알며 임의대로 자유자재 범부중생 슬퍼하사 간절하
게 일렀건만 꿈속 꿈에 꾸는  미혹한 저중생들 아득하고 아득하여 돌아갈 줄 모
르도다. 마음밖에  진리 찾고 마음밖에부처 찾고  마음밖에 신을 섬겨 과학이니
ㅊ학이니 종교까지 만들어서 이라저리 얽매어니 꿈깰 날이 기약없다. 이 육신은
허망하고 주관객관 거짓이라 이것저것 할것없고 너와 내가 따로 없다. 통틀어서
마음이며 마음마저 아니로다 깨달으면 본래 주인 모르며는 종이로다. 제 좋아서
종칠하며 고독불만 설워 말라 고와 낙은 정한 인과 인연 좇아 살아가라. 일심으
로 공부하여 한눈 깜짝 한  동안에 깨고 보면 변함없이 범부 그냥 부처로다. 제
법신앙 잃은 과보 세세생생 미신사도 잡신사도 권속되어 애닯고도 불쌍하다.
 제 9장 자화상 입산 50년들 돌아보며
    프롤로그
  어언 내 나이  올해 70세, 입산한 지 만  45년이다. 그러니 나는 입산 50년을
회고할 자격이 ㅇ없다. 1926년 저 남쪽 해변가 경남 고성 옥천사에서 중이 되었
다. 그로부터 때론 군상들이 제 나름의 생활에 바쁜 도회의 생활로, 또 어느 땐
심산유곡 노송거암하의 암자에서 생활함에  그 이연을 남기고 또 법연을 간직한
사찰이 두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 숱한 법열의 상존속에 오간 법연과 오뇌 속
에서 한 가닥  뜬그름처럼 자성이란 한낱 가날픈  물건을 찾고자 떠돌다 지금은
삼각산 도선사에 정주하니 마냥 감회가 무상할 뿐이다.
 40년의 수도생활,  춘하추동이 1백60여를 넘기고 또  산천의 수색과 형경이 네
번이나 변했건만 나도 어디로 가야  하고 또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 부
처님께서 미묘 법문의 광장설이 40여 년이니 또한 내 한 평생 수행과 같건만...
돌이켜보니 숱한 사연과 밀어들이 이 고뇌를 잊고 무상증득의 나를 찾고자 애쓰
는 노승의 심정이  조급해질 뿐, 또 어쩔 수 없는  계절의 순환속에서 한 해 또
한 해를 보내고 맞는다는 생각뿐이다. 아니 나 자신 몸과 마음을 운반하여 겨우
어제 오늘을 지나서 내일에 이를 뿐이다.

도산사의 밤숲을 거닐면서
  깊은 반 승려들을 바람과  적요를 만난다. 그것들은 길을 건저고 나무숲을 헤
치면서 풍경소가 뎅그렁뎅그렁  울리는 산간의 사원을 찾아온다. 승려들은 바람
소리를 본다. 바람은 기체이다. 그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데도 본다고 하는 것
은 보는 것이 눈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나뭇잎이 흔
들리는 것을 보고 하늘이 푸른  것을 보고 노을의 아름다움을 보고 적요의 쓸쓸
함을 보고 그것들  곳에 내재한 만상의 이치를  본다. 승려들이, 아니 사유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시간을 이러한 밤으로 택하는 이유는 밤에 가장 조용하게
그 모든 것들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의 밤을 나는 찾아
갔던가! 검은 이파리 사이에서, 냇물가에서 의문들은 머리를 들고 일어서고, 그
것들은 마치 도금한 놋그릇돌처럼 반짝이면서 나의 가슴에 돠 부딪친다. 무수한
파장이 일어난다. 물결은 왜 아래로 흘러가며, 나뭇잎은 왜 한없이 석석이는 것
일까?  왜 나는 그 소리들은 따라 걷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알자는 것일까? 안
다는 것이란 또 무엇일까? 물결은 왜 이리 아리로 흘러가며, 나뭇잎은 왜 이 한
없이 석석이는 것일까? 왜 나는 그 소리들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알
자는 것일까? 안다는 것이란 또 무엇일까?
 물결이 흐른느 것은 땅이 경사졌기 때문에 흐르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바
람에 밀리기 때문에 흔들릴 것이다. 마음이 있어서 흐르고, 흔들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밤에밖에 나와 보면 그런  평면적인 대답이 무미건조하고 그
너머에 그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같다. 그것이 무엇일까? 조주스님은 이럴 ㄸ
무어라고 대답하셨을까? 여전히 무라고 대답하셨을 까?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된
다. 그런데 스님이 무리고  대답하셨을 때에는 다만 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무라는 말로 인해서 얻어질,  보다 크고 절대한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것
이 무었일까? 뒷날 대승들은 그것이 일체를 열어주는 열쇠라고 했고, 일체를 쓸
어버리는 쇠빗자루라고도 했고, 나귀를  매어 두는 말뚝이라고 했다. 여기에 모
든 정진하는  승려들의 위함이 따르는 법이다.  조주스님의 무는 각자의 길로서
보는 수밖에 없다.
 조주스님의 부의  그 의지들은 조주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할지언정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제승들은 조주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할지언정 무자에 떨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무자화두에는  좋은 비유가 하나 있으니 나는 그것을 여러분
에게 보여주리라. 옛날 양귀비가 궁성으로 갔을 때 그는 그의 애인을 궁성 아랫
집에 살게 하고 매일 (소옥아  소옥아)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시종의 이름을 불
러댔었다. 그렇게라도 하여 그의 음성을 애인에게 들려주는 의도에서였다. 다시
말하면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애인에게 전달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와 같이 무자화두는 무자에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자를 통해서 얻어질 그 무엇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
리들은 어째서 조주스님은 무라고 했는가. 그리고 뒷날의 대승들은 어째서 그것
을 일체 명근을 끊어버리는 칼날이라고 했는가를 의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들은 밀고 나아가면 그  끝에거 잡상들이 피어오를 것이다. 그 잡상을 두려
워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을 버려둬야 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의문 하나만
을 간절히 일으키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의문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주면
서 오래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대들은 견성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견성이란 무
었인가? 자기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본성이란  그러면 또 무엇인가?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자기의 본체, 즉 만물의 근원에  자리한 불이다. 어떤 처사는 그
불을 구하여 일생을 보낸 끝에  어느 한 대승을 만나 이야기했었다. (이대로 시
주만을 얻어먹고 도를 얻지 못하면 죽어서 소밖에 될 것이 있겠소?) 이 때 대승
의 말, (소가 되어라도 무비공만 되면 좋지) 무비공이라는 그 말에 순간 처사는
대오하고 끓어 엎드리었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무비공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있어지는 세계였다. 그러나 그 대사와 처사가 간 지 수백년이 지
난 뒤의 한 작은  암자에서 전가선사는 의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무비공이
라는 말에는 없다라는 허물이  있고 미각시아가라는 말엔 깨닫다라는 허물이 있
으니 그런 허물을 가지고 어찌  제 9암마리 식을 건너갈 수 있을끼? 건너간다라
는 말엔 건너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구문상으로 불가피하게 존재하여야 하는 것
이지만 해탈이 있어서는 그것이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해탈을 그르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수한 승려들
은 이렇게 의문에 의문을  넘어간다. 가령 나만 하더라도 일찍이 견성의 미미한
그림자를 보았을 때 세상에 내어던진 소리,

  만상의 나무들이 누렇게 시드는데
  벼랑 위에 오직 한 나무 싱싱하게
  푸르러 있더라

 오늘 나는 도선사의 나무숲을 헤치고 가면서 그 계송에 의문을 던진다. 어떻게
잎사귀가 시들고 홀로  푸르다는 흔적을 남기고 지혜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
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아직도 미망의  그림자를 벗어버리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 마치 바람처럼 마치 달빛처럼,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 있고, 어떠한
그릇에도, 어떠한 시간에도 자유자재로 담길 수 있는 것이 대오가 아닐까? 그러
한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표현할 수도 없는 시늉할 수도 없는 것이라
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그럴 것이다. 그래서 효봉종사꼐서는 입멸하시면서 수
많은 불자들이 송을 바랐을 때,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것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다면
  달빛이 천강에 비추리

 라고 했던 것이다. 효봉이 모든 것을 군더더기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속에
서 말로 표현된 모든 것이 군더더기란 뜻보다는 그 분의 생애에서 모든 것을 그
렇게 표현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법기암토굴에서의 결사적인
정진 끝에 오도한 이후로 그  분은 한국불교의 통합과 불교의 전파를 위해서 몸
을 바쳤고, 그리하여 그 분은  63년 4월 11일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
었다. 아시 말하거니와 개인의 길에서 종정이라든가 전파는 저추장스런 것에 지
나지 않는다. 개인의 길에서는  언제난 정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함께 세상을 태어났다는 인연  때문에 사해대중들을 깨우치치 않으면 안된느 것
이다. 아니다.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다. 차라리 불교는 사해대중의 구제에 더
큰 뜻이 있을지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득도를 한 다음 우베라촌에
서 내려왔고 의상 또한 고국 신라로 돌아왔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그들이 왜
내려왔는가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누구에게로 돌아왔
는가? 그의 나라로, 그의  형제들의 곁으로 온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 태어났다
는 사실은 어떤 사실 앞에서도 우선하는 일이다.
 우리들은 한국인이다. 많은 한국인의 구제가 오늘의 한국 불교의 명제이다. 구
렇다고 해서 내가 여기  애국론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애국자를 배출한다거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아니며 또 대중들을 천당
으로 인도하는 데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죄악과 번뇌와 고통 속에 잠긴 인
간을 참 인간이게 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죄악과 번뇌를 버리고 진정한 안락을
누리게 하도록 하는 것, 지혜롭게 하는 것, 자비로은 협조자이게 하는 것, 그것
이 불교의 참 뜻인 것이다. 그것을 원효는 오직 (자리와 타리를 염원하고 보리,
즉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는 인간의 모든  지식이 필요하다. 아니 오히려 고오다부다가 그러했듯이
그러한 모든 지식은 궁극적인 이해의 진리와 체현에 필수불가결의 기초지식이기
도 한다. 이렇나 불료의 대명제  앞에서 한국불교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매
일의 신문들이 활자화하고 있듯이 내분, 탈퇴, 불만, 파문, 반대 타락의 일변도
가 아닌가? 이러한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는 책임이 다른 파에 있고 나에게 없
다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이유가 있다면 그들에게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
므로 그 책임은 양자에게 다같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따진다거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불교가 대중을 구제하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싶을 뿐이다. 이것
이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나의 (유신 재거론)이라는  것이 되겠지만 나는 굳이
유신이라는 말로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그 말을 너무나도 세상을 떠
들썩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의 유심론
  내가 내세운 세 가지 큰 항목 중의 하나인 불경 한글 번역은 나의 주장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용성대사의 큰 뜻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경번역사업은 일찍
이 대사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불경은 승려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차라리
다 많은 대중들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은 한글을 해독하지 못하는 한글
세대들이 계속 자라나고 있기 때문에  불경 번역은 한국 불교의 가장 시급한 최
대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경 번역과  더불어 또다시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은  불료의 대중화 내지 불교의  현실화 운동이다. 사람들이 한가로운
때, 신심이 두터운  때에는 사찰이 산간에 있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이  분주하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믿음이라는  것을 가지기에 어려운
시대에서는 신자와 승려들의 대화와 이해소통으로 그 갭을 메꾸어야 한다. 사람
들은 시달리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먹고 출근하고 많은 일과 사교에 시달
리고 그리고 저녁이면 솝같이  지쳐서 집으로 돌아간다. 밥을 먹고 잠에 떨어진
다. 다음날도 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 그달이게 사찰을 찾을 만한 시간이 없는
것ㅇ. 불교가 그들을 찾아가야 한단 말인가는 다음 문제가 따라온다. 어떻게 대
중들을 찾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승려들의 교육문제와 연관된다. 이제는 극
락이라든가 기이한 선문답으로  대중들을 거느릴 수 없다. 그러기에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너무나 영악하다.  그들은 환상이라든가 가상적 세계의 약속을 뿌리칠
수 있도록  충분히 영리하다. 그렇기 때문이  승려들은 그들과 정식으로 만나는
수밖에 없다. 정연한 논리로서 보리의  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나로서 이 세
가지 문제는 파벌이라든가 이헤타산을  넘어서서 공감할 수 있고 공감으로써 실
현시킬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랬는데 어떻게 그런 결과가 빚어질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제외한 모든 안건은  깡그리 부결되고 말았었고 그리하여
나는 며칠을 번민한 끝에  탈퇴 성명을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각계의 지인들은
거기서 나의 경솔성을 지적하고 돌이켜 생각하라고 권유했었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런 식으로 한국  불교의 내일을 바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그 탈퇴가 오히려  한국 불교를 제자리로 옮겨놓는 경첩이 되고 말
았지만, 탈퇴라는  너무오 소란스러운 사건으로까지  치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때의 나의 심경엔 많은 앙금을 남기고 말았다. 그 앙금은 지금도 조용한 시간
이면 나를 찾아온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고즈적한 밤에 문을 열고 나가 나무
숲 사이로, 냇물가로 거니는 것이리라.
 도선사의 마지막 층계를  밟고 내려가면 밥나무숲에서는 물큰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그리고 10월의 독특한  산 냉기와 달빛의 매끈매끈한 감촉이 나를 휩싼
다. 그 냉기가 좋다. 그리고  달빛이 좋다. 때때로 나는 밤숲을 거닐면서 (좋다
좋다)라는 말을 무심하게 입밖으로  흘러낼 때가 있는데, 냇물을 따라 흘러내려
가고 있는 한 이파리 단풍을  주워들고 그 앙상히 드러난 엽맥을 보고 있을 때,
이슬 내린 바위에  않아 잠들어 조용해진 시내로  뻗어내린 신작로를 보고 있을
때, 그 말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소리내지 않으면 안되는 성질의 것처럼 보인다.
나는 밤의 산길을 좋아한다. 길들은 끝이 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냇물도 끝없이
흘러간다. 왜 흘러가는 것일까.  냇물은 지면이 낮기 때문에 흘러내리고 길들은
사람들의 발자국의 때가 묻어서  흘러내릴 것이다. 그 자체의 의지로써 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달빛 아래  보고 있으면 그것은 한 의지처럼 보인다. 마
치도 도라든가 보리라는 말이 그 자체로서도 품걱을 지니고 있는 듯이 생각키우
기에. 달빛 속에는 사해대중의 아픔이 보이지 않은 밀도로서 들어차 있다. 그래
서 대승들은 그 달빛 속으로 나아가 정진하는 것이리라. 중 일연의 기록에는 광
덕은 밤마다 달빛 위에 떠올라  정진하였고 현수도 달빛 속에서 그의 선을 맞아
들였었다. 기록만이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도 달빛은 승려들의 정진과 깊은 연
관관계를 맺고 있다. 대승들의 모든 게송 속에는 한두 마디 달빛의 이야기가 들
어가 있다. 아니 달빛만이  아니다. 저녁 노을이가든가 새벽의 써득써득한 빛깔
은 승려들의 너무도 사랑하는  샐체이다. 아침 다섯시가 되면 승려들은 눈을 뜨
고 일어나 대빗자루를 들고 절 뜰을 한바퀴 쓸고 구석구석에서 진희색의 냄새가
풍기는 법당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아침 염불을 왼다. 법당문을 열고 나올 때
는 벌써 건너 산 위로  붉고 미숙한 햇빛이 트고, 나오던 승려들의 손은 합장하
여 지고 허리는 겸손하게 구부러진다. 절간을 둘러싼 대숲에서 바람에 이파리가
흔들리는 소리,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 이 아침의 소리들은 너무나도 미세하고
신경질적이다. 마치 신라인들의 귀금속품과  같다. 그렇게 긴 아침이 서서히 사
라지고 난 뒤, 사능로 빼꼭이 둘러싸인 산간에는 저녁이 줄달음질치듯이 뒤따라
온다. 더욱이  가을과 겨울에는 아침과 저녁이  거의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만산은 종일 붉은  노을에 잠겨 있는 듯하다. 아아, 승려들은 그 시간
을 사랑하다. 더욱이나 그런  시간의 벼랑에서 또는 토굴에서 정신하고 있는 사
람들은 그 노을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온 몸으로 토해낸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윽고 그 달빛과 노을과  일출 위로 떠올라온다. 그런 다음 그들의 허적허적한
발길은 토굴을  빠져나 세상으로 향하여진다. 법설이  시작되는 것이다. 또다시
나는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그래서 머릿글을 빨리 끝내야겠다. 길을 보
고 있을 때 사람들은 걸어왔다는 사실과 그리고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오늘밤 나에게도 그러한 사람들의 상습적인 사고는 되풀이 일고
있다. 나의 반생은 어떤 일을 하면서 걸어왔던가. 그리고 어떻게 앞으로 걸어가
야 할 것인가.  서구의 어는 시인은 (모든  연대기적인 사건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이 어떻게 그의  정신의 성장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는 사실만이 중요
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불교적인 어투로 번역하자면 그의 본성을
어떻게 찾아가고 있던가라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수도기가 될 것이다. 나는 다
음 글이 수도기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을 바라기에는 한 사람의 삶 속에는
너무나 너저분한 사건들이 가득  차 있고 우연이 절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건들 속에서  내가 염원한 나의 유신재건이라는  커다란 명제를 볼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그것이 어떻게 싹트고 어떻게 커 나왔던가를. 그럴 수만 있
다면 그것은 써걱써걱한 관념이  아니고 싱싱한 삶이며 웅변이 아니고 사실이며
허위가 아니고 실체일 것이다. 그렇기만 한다면 그것은 진짜일 것ㅇ. 그러면 대
중들이여! 우리는 이제 저 기릉을 따라 내려가 보자. 과거를 만나러 가자.

글방의 부엉이
  (부엉이 부엉이, 부엉이야, 부엉아, 무엇을 보고 있니? 엉큼한 눈으로..)라고
그가 글방의 마당에서, 짚더미  옆에서,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또 강 언덕에서,
알지 못할 상녕에 잠겨 걷고 있을 때, 생각하고 있을 때, 동무들은 뒤따르고 그
를 놀려댔다. 어떤 때에는 옆구리를 찌르고 어떤 때에는 돌멩이질을 했다. 그러
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소년이었던  그는 그 놀림이 귀찮고 굴욕스럽기는 했으나
그들과 어울려  싸운다거나 대항하여 이기고 싶을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그런
동무들로부터 떨어져 언제나 조용하고 명상적인 분위기에 잠겨 있고 싶었다. 부
모들의 권유로 그는  진주 남강가의 봉연제라는 한문서숙에서(하늘천 따지 검을
현 누를황)이라는 어음만이 들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종종 눈을 멈추고
그 소리를 듣기를 즐겨하였다. 그때마다 스승의 진 담뱃대가 그의 머리 위로 날
아왔다. (이놈아, 그렇게 정신을  팔고 있으니 성적이 떨어지지)이런 꾸중이 들
여왔다. 그는 담뱃대가 머리에 담는 아픔보다도 (정신을 팔다니 그게 무슨 말일
까?정신을 팔 수도 있는  것일까?)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의 생각은
언제나 배우는 그것에 보다도 그  주변에 그 둘레에 더 많이 머물러 있었고, 그
랬으므로 성적은 더욱더 떨어져갔다.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결과
가 왔을지도 모른다. 그난  담뱃대와 퀴퀴한 냄새가 들아차 있는 서숙의 분위기
보다는 쉬는 시란이면 나와  노는 마당의 모든 것이 좋았다. 그것들을 사랑하였
다. 햇빛이 내려 비추면 백색으로  반짝이는 마당, 그 둘레에 심여져 있는 사철
나무의 흔들리는 잎사귀들, 그리고 보이지 않게 일체를 흔들고 가는 바람을. 그
는 마당가의 볏짚에  작은 몸들 기대고 서서 무심한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
다. 지붕위로 흘러내리는 햇빛도 보고 하늘도 보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흘렀다.
찬란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에는 구름이 삽시간 어머니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들어오고 있었다.  코끼리 모양으로, 젖먹이는 어머니  모양으로, 산 모양으로,
바다 모양으로,  물긷고 가는 아낙네의 모양으로,  그리고 염소 모양으로, 토끼
모양으로. 그토록  자유자재로 변하는 구름 모양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
까. 수만 가지로 변화하는 생의 무사이었을까. 아니면 다만 흐르고 변한다는 구
름의 형용이었을까. 어렸을 때의  일을 세세하게 생각해 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그는 그때의 구름의 변용에서 일종의 소년다운 감상적인 비애를 보고 있
었을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비애는 장차의 그를 만드는 정서적인 원천을 이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의 모든 장점을 우리가 오늘 들추어 추겨세워준다
고 할지라도 그 무렵의  그는 분영히 훌륭한 소년은 아니었다. 훌륭한 사람으로
서의 자질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스승은 종종 공부는 못해도 순량한 놈이
라고 했고 동무들은 부엉이  부엉이 하고 놀리면서도 좋은 놈이라고 칭찬하기를
잊지 않았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조용한 그
늘이 아들의 어룩ㄹ에 흐르는 것을  보고 그는 틀림없이 장차 현자가 될 것이라
고 내심으로 기뻐하였고,  그의 어머니도 아들의 걸음걸이에서, 말씨에서, 행동
거지에서 예절 바르며 친절한 성미를  찾아내고 그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사
랑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부모들의 사랑은 그 누구나 맛보고 자라나
는 성질의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사랑으로부터 늘 벗어나려고 반항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삼강오륜이라는 유교의 굴레이 꽉 얽매어 있었던 그
때의 아이들은 그 반항심이라는  것을 켤코 나타낼 수는 없었다. 그것을 보였다
가는 당장 불효라는  낙인이 찍히고 마을에서 소문난  문제 아이가 되기 ㄸ문이
다. 어느 면에서는 몹시도 기민했다고  할 수 있는 그는 켤코 반항하지 않았다.
불편한 대로 부모들의 사랑과 기대를  등에 지고 매일 매일 아무런 재미도 없는
몽련제로 가는 것이었다. 하늘천 따지를 읽기 위해서.
 그날도 그렇게 책을  읽고 쉬는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왔었다. 볏집에 기대어
구름을 보고 있었다.  이백의 초산진산계 백운백운 처처장수군을 생각하고 있었
을지도 모른다. 이미 17세라는  성숫기에 이르렀던 그에게 그 때 임이라는 영상
은 이미 깃들어 있었고, 임이라는 영상의 깃들었다면 구름에서 그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가 무엇인가를 열중하고 있었을 때
였다. 한 친구가 (부엉이 부엉이, 부엉이야 부엉이)하고 너무나도 큰 소리로 그
의 고막을  울리면서 그의 왼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쓰러졌고 일어섰을 때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분노가 전신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그는 친구에게
대들었다. 몃번이고 넘어졌다가 일어섰다. 나중에는 손에 잡히는 대로 돌을, 부
지깽이를, 삽자루를 집어던졌다. 싸움이 끝났을 때는 장독대의 항아리를 부서지
고 창문이 깨어져 마당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선생은 조발대발했다. (이놈 고약
한 놈 같으니라구. 설사 서우가 잘못했다선지어라도 때우쳐 이해시켜 쥐야지 그
렇게 원수처럼 대드는 법이 어디 있는냐. 우리 서숙에서는 너 같은 독종은 필요
없으니 나가러가) 그는 선생의 말이 떨어지는 즉시로 책보를 싸들고 나왔다. 걸
음이 덜덜 떨렸다. 어버지와  어머니가 몇번이고 그에게 (그것은 선생의 잠시로
화풀이니 다시 나가)고 사정했으니 완강히 거절하였다. 어버지는 할 수 없이 그
렇다면 하고 그를 진주 제일보통하교에 입학시켜 주었다.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소년기에는 엉뚱한 변모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예민한 소년들에게
일수록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 나에게도 그 변모가 왔었다. 보통학교 학생이 되
면서부터 나는 어리석은 아이의 틀에서 벗어나 무엇에나 앞장서려고 했고 그 무
엇에나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렸다. 그렇게  서너 달을 하고 나니 나의 성적은 빼
어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학년에는 1,2들을 다투기 시작하였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언제나 우쭐거리는 법이다. 나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어수룩한 아이들
을 놀려 먹기 시작하였고 겨울이면 그런 애들을 찾아가 눈덩이를 옷속에 집어넣
고 도망갔다. 아이들은 내  뒤를 따라왔고 그 대열은 그리하여 너무도 자연스럽
게 달음질 경주가 되는  것이었다. 그때의 남강에는 뱀들이 득실거렸다. 그래서
아이들은 헤엄질이나 고기잡이를 그들끼리  가지 못하고 언제나 나를 앞장 세웠
다. 나는 뱀들을  숭숭 붙잡아 뚝 너머로  집어던졌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와아
하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물발울이 강물  위로 뛰어오르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때 누구나 없이 일인 교사의 말씨와 동작을 사랑했었다는 생각이 든
다. 담배만 피우고 앉아  맹자왈을 가르치는 서숙의 늙은 선생보다 그일인 교사
에게서는 신선하고 향긋한 무어라고  했으면 좋을까 사람을 달게 끌어들이는 일
면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라 하는 말이면 무엇이나 새겨들었고 그가 하
는 일이면 무엇이나 모방하려고  애썼다. 선생은 나를 좋아했었던 듯하다. 선생
은 학생들데게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그것을 대답해 내지 못하면, (이순성,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하고 그 희  목을 나에게로 향하여 돌리는 것이었다. 나는 서
슴없이 일어나, (겨울에 독이 깨어지는  것은 독에거 물이 얼어 그 부피가 커지
기 때문입니다. 나뭇잎이 푸른  것은 나뭇잎 속에 있는 엽록소가 푸르기 때문입
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선생은 (좋아 좋아)하고 카랑카랑한 목
소리로 말씀하시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자리에 앉았다 모든 급우들의 시
선이 나에게 몰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면거 한편으로는 무심한 듯이 눈길을 창밖
으로 돌리었다. 창밖은  언제나 햇볕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마치 소년들이
무한한 꿈처럼 운동장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고 우리들의 꿈은 무한하게 그 밖으
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꿈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붙어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창창하게 타고 있을 때,  우리들에게는 그 꿈의 실체인 사실이라는 것이 찾아오
는 것 같다. 그리하여 그때  나에게도 그 꿈의 형체일 수 있는 사랑이하는 것이
찾아왔던 것 같다.

비장의 밀실과도 같이
  한 사람이 회고록을 쓸 때에  다같이 지나가 버린 일에 대해서라도 어떤 종류
의 기쁨과 따사로움을 가지고  쓰게 되는 부분이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
지 않았던 비장의 가보와 같이, 내밀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부분이 그의 일생에
없다면 그 화고록을 기술하는  사람의 심정은 얼마나 삭막한 잿빛의 것이랴. 다
행히도 나에게 그 생기에 차고 4월의 벚꽂과 같이 화사한 부분이 있다. 내가 누
렸던 짧은 기간의 여우별과 같았던 사랑은 지금은 젊은이들에게는 웃음거리밖에
되니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 때 우리들의 사랑과 오늘의 사랑 사이에는 너무도
심한 격차가  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는 많은  시간과 장소가 있고 서로의
대화가 있으며 사랑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함으로써 그것을 보다 확실하게 그
들의 것으로 누리는데 그때의 우리들은 그저 보고, 웃고 그리고 헤어졌었다.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었다.  한마이로 말해서 소월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다)든가 (못잊어
생각이 나갰지요.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식이었다. 그런 유약하는 식물
성적인 사랑이었으면서도 그것은 그들의  개인과 비장의 것이 되지 못하고 소문
속에 한번 끼이기만 하면 삽시간에  소문은 퍼져 마을 전체의 것으로 변하는 것
이었다. 지금도 생각이난다. 어느 보리밭에, 어느 뚝가에 사랑의 표적이 났다고
하면 아이들은  모두 그곳으로 줄달음쳤었다. 보리닢이  얼마나 쓰러졌는가, 그
어떤 흔적이 남겨져 있었는가를  눈을 부릅뜨고 살렸다. 만약에 그 사랑의 자리
에 붉은  핏자국이라든가 손수건이라도 발견하는 날이면  그것은 마을에 생기를
부어주고, 그리고  젊은이들ㅇ느 그것에서 얻은 환상에  잠겨 마치 그들 자신이
그 주인공이었던 듯한  부끄러움마저 가지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랑하
게 몹시도 어렵고 불편한 시대가  우리들이 살아온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런 시대에서 사랑을  가졌다는 기쁨을 느낄 수 없이 나는 사바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왔지만 이렇게 기술하고 있는 순간에는 잔잔한 기쁨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처럼 그도 지금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었을 것이
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랑하였던 그때에는 그녀는 젊었고 얼굴에 싱싱한 푸르름
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는 나와 한반이었던 황한성의 동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성을 따라 종종 그
의 집에 들었고 자연히  우리는 함께 앉아서 소근거릴 기회가 만들어졌다. 우리
가 나누는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의사표현이 아니
라 누구는 오늘 교정의  포플라 아래서 상투를 잘랐는데, 상투가 땅에 떨어지자
울음이 터뜨렸으며 그의  아버지는 맨머리로 온 아들을  보고 조상을 뵐 면목이
없다고 문을 닫고 들어앉았으며, 오늘 일본 여자가 게다를 신고 재판소 앞을 지
나가느느 것을 보았고, 오늘  뒷산에서 나팔부는 소리가 들였다는 것 등이었다.
그밖에도 우리는 누가  누구와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데, 그런 이야
기를 나눌 때의 우리의 두 불을 빠랗게 달아올랐었다. 그러는 새 우리가 이야기
를 주고받는다는 사실도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져갔던 듯하다. 어느날 아침 책
보를 끼고 사립문을  빠져나가려는 나의 저고리섶을 어머니가 붙잡았다. 어머니
는 말씀하셨다. 남자나 여자에게 결혼을  해야 할 알맞은 시기가 있다는 것, 네
나이가 마침  결환을 해야할 시기에 해당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K와의 사이를
염려하시었다. 남자는 여자나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짓은 삼가야 마땅하며 더욱
이 혼사는 인륜지대사  함부로 처신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어머님의
말씀이 있은 후, 3일동안의  여유를 가지고 결혼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나는
뇌리에 떠날 줄 모르고 살아 있는 K 때문만은 아니었다. K를 지극히도 사랑했지
만 그녀와 결환을 하리라는  사실적인 결심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를 버리고 다
른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암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부모
님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다. 부모으리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은 그때의
시절에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더욱이 외아들이었던 나에게는 더욱
더 그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 쪽도 자리로 선택하지 못하고 나날을
우물쭐물하다가 열아홉살 되던  섣달 어느 날 나는  조랑말을 타고 언덕을 넘어
나의 신부가 살고 있다는 마을로 향하여 갔다. 그의 집에는 생전에 보지도 듣지
도 못한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 여자를 향하여 큰절을 했다. 그
여자도 허리를 구부리었다. 그것이 모든 설명을 제해버린 나의 결혼식의 전말이
었다. 그와는 전연 딴판인  여자와 결혼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생
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나는 K와 결
혼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보다는 우리들은 보다 훌륭하고 뜻있
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랬으므로 내가 그때 느끼고 있
었던 슬픔이 있었다면 결혼을 함으로써 그 꿈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낙심에
서 였을 것이다. 한  집안의 장남이며 외아들이라는 사슬이 이 모든 겉보기에는
한결같이 평범하고 일상사의 잡다함으로 가득 찬 생활 속에거 깊게 나를 구속하
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적 가족제도와 사회제도는 장남에게 얼마나 많은 제약과
억압을 주는 것인지를 지금의  젊은이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를 살
았던 사람들은 뼈 아프게 느껴야 하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일본으로도 서울로도
가서는 안되었다. 그들은 공부에  열중할 수도 없었다. 그것보다는 그들은 부모
곁에서 조상을 받들고  나가야 했다. 내가 일본유학을 포기하고 진주농업학교를
지망하였던 것도 벗어날 수 없는 이런 사회적 배경이 뒤깔려 있었던 것이다. 모
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나는 농업학교의 원서를 사서 제출했다. 드디어 시험날
이 되었다. 나는 시험을 치렀다. 예상한 대로 문제는 아주 쉬었다. 제한된 시간
의 반도 지나지 않아서 난느 해답안의 작성을 끝냈다. 그중 수학문제 하나가 틀
린 것을 뒤에 발견하고 고쳐  쓰려 했으나 시간이 늦어 쓰지 못한 것 이외에 다
른 불비한 점은  전혀 없었다. 나의 합격은  나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랬으므로 나는 나 자신의 합격여부보다는 보통학교
시절에 가장 친했고, K의  오빠이며 황의치씨의 양자인 황한성을 걱정하고 있었
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었을까?  걱정하던 황한성의 이름은 합격자 발표란에 적
혀 있었으나 내 이름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그 놀라움은 나만이  아니고 담임선샌도 친구들도 일반이었다. 내가 답안지
작성에 실수를 했거나 미숙한 점이 있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다. 나는 분
명히 정답을 썼었다.  그런데도 내가 불합격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쓴잔을 마신데
는 그럴만한 사건이 개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저 유명한 기미 삼일 만세사건이
다. 3년 전의 사건이 그때까지 기억되고 치부되어 진학하는데 영향과 누를 끼치
게 될 줄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 것인가.

내가 체험한 삼일운동
  후세의 사람들은 기미3.1만세사건을 커다란 민족운동의 효시라고 서슴치 않고
정의하고 그 정의를 사람들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그대로 받다들인다. 나는 그
것이 오류라고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 상상력, 판단력에는
어떤 종류이든 형태, 윤곽이  있지만 자연이나 사건, 사실에는 그것이 없다. 그
래서 한 사건과 사실에 천태만별의  해석, 이해 윤곽이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겪은 기미운동은 그것이  사전에 계획되고 용의주도하게 의도한 바에 따라
이루어진 민족운동이  아니라 거의 우발적인 항거였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내가 우발적이라고  표현하는 데는 33인이라든가 기타의 숨은 주도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주동적 역할 이상으로 그 운동은
전국적을 퍼지고 민중의 가슴속에서 뜨겁게 발화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외국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의 항쟁 중에
도 이토록  아름답고 슬픈항쟁은 없을 것이다.  인도의 간디가 무저항의 저항을
일컬었지만 한국민은 어떤 지도자가, 어떤 리더가 무저항의 저항을 가장 올바르
고 효과적인  저항이라고 석득하거나 주장하기 이전에  이미 전신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생활의  가난과 고달픔으로 찌들대로 찌들은  검은 얼굴들이 그 얼굴의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이 흰옷으로만 전시느로 감싸고  만세를 부르며 국기를
흔들다가 왜인의 칼과 총에  그대로 쓰러져가고 있는 광경에는 처참한 아름다움
이, 금수의 폐부도 울릴 듯한  슬픔이 있었다. 이 기록이 어느 면에서 평가되어
야 할 지 잘 알지  못한다. 단지 한 진실만은 발견할 수 있었다. 3.1만세사건이
민족의식의 발로이거나 불의에  대한 항재이거나, 시민정신의 각성이거나 한 거
대하고 엄청난 이름을 붙이기  이전에 그것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소박
하고 어는 의미에서는  조건반사적인 반응이었다는 점이다. 외국인을 그토록 감
동적인 무저항이 어떤  효과를 노려서 어떤 의도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길밖에 달린 항거의 방법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직
접적이고 원시적인 짓밟음, 참을 수 없는 차별대우, 이것에 대한 우리의 소박한
항거는 어리석음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양식이었기 때문에 동정하고 연민을 느
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 개인이 아니고 수천의, 수만의 인간이 모여서
이루어진 한 민족에게  무엇이 그토록 인종하고 굴욕을 감내하기를 강요ㅎ던가?
세계 어느 나라의 하늘과 바꿀 수도 없이 푸르다는 하늘인가? 저 가파르고 깡마
른 들판인가? 좁고 간나한 들판인가? 누가 충둥질하지 않았는데도, 누가 사전에
미리 연습시키지 않았는데도 이  어리석고 가난한 민족의 만세사건은 들판을 휩
쓸고 지나는 등불처럼 요원히 번져가고 있을 즈음에 나도 일인과 일제와 일본을
나와 내  나라와 민족과 구별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진주에서 3.1만세사건이
벌어지 직전이었다.  하루는 학교로 어떤 청년이  찾아왔다. 흰 무명두루마기를
입고 미투리를 신은 청년이었다.  그의 동작에는 선뜻선뜻 한 기운이 돌고 있었
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불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성급함이 어투에 묻어 있었
다. 그러나 선뜻한 기운이 배어  있는 동작, 성급하고 떨리면서도 힘 있는 목소
리, 무엇보다 불안해 보이면서도  맑고 빛나던 눈빛이 내 가슴속에 단단하고 응
어리진 무엇을 던져주고  갔다. 청년은 투박하고 저력있는 목소리로 우리들에께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는 사실, 일본인을 쫓아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
기 위해서는  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우리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그가 말하는  독립, 만세 등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는 몰랐다. 그  때 내 나이 17세,  그  청년이 다녀간 이틀 후인가? 나이보도도
키가 껑충하게 크고 기골이 장대한 나는 아침 일찍 학교에 갔었다. 모도들 조용
히 제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필기를 하고 있었다. 여느때 같으면 모여서 시끄
럽게 떠들어댈 것이데  이상하게 모드을 아무말 없이  제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이윽고 나도 조그만 쪽지를 받았다. 만세를 부르자. 진주재판소 앞으로 모여라.
공부도 시간도 못 채우고  끝나버렸다. 나는 진주재판소로 가기 전에 시장에 들
려 장사를 하신느  아버지에게 책보를 맡기려고 가는  길에 일본군 오장을 만났
다. 적갈색 말을 탄 오장은 말했다. (어딜 가느냐?) 나는 시장에서 어버지가 장
사를 하는데 도와주러 가는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헌병 오장은 침착한 아이라고
칭찬해준 다음 언제나  공부를 열심히 하고 부모님의 말을 잘 들어야 나중에 훌
륭한 사람이 된다고 이르고는 사라져갔다. 나는 아버지의 가게에 책보를 맡기고
진주재판소로 달려갔다. 재판소 앞엔 어느 사이에 모여든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
리져 와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장날의 장꾼들과도 같았다. 시위나 독립운동이라
는 말이 풍기는 살벌한 분위기를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곳
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다. 열일곱살에 처음보는 태극기였다. 어떤 사람이
키가 큰 내가 드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태극기를 주었다. 나는 태극기
를 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대열에 끼어 발을 옮겼다. 나아갈
수록 대열에는 열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그리고 그 열기에 힘입어 누군가가
노래를 불렀다. 모두 따라 불렀다.
  무쇠팔뚝 돌주먹 소년 남자야.
  애국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
 노랫소리는 만세로,  만세는 다시 구호로 변했다.  그 열기는 황량한 들판으로
퍼져나갔다. 3월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쌀쌀한 날씨,  벌판은 텅빈 채로 죽음과
같은 검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고 그 끝에서 끝까지 싸늘한 바람이 쉴 사이 없
이 불어왔다. 그  황막하고 쓸쓸한 들판을 우리들은  걸어가고 있었다. 흰 옷을
입은 한떼의 유랑민같이 우리는  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만세를 부르다가 구호를
외치다 하며 앞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그렇게 20여리쯤 나갔을 때였다. 우리 앞
에는 칼을 차고  말을 탄 일본 헌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칼질을
하였고 몽둥이질을  하였다. 시위는 삽시간에  신음소리와 울부짖음으로 가득찬
피바다가 되었다. 아아 나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태극기를 들고 맨 앞
장 섰던 나는 제일 먼저  지나지 않았던 나에게 그들은 무자비한 매질을 주저하
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섬뜩한 것은 장터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헌병 오장의
눈초리였다. 그는 내가 자기를 속였다는 분노 때문에 거의 5분간은 꼼짝도 않고
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산소용접 때 쓰는 그  푸른 불길과 같은 눈초리였다.
그 눈초리를 열일곱살 나  내가 어떻게 감당했던가. 그 사나이의 격분한 매질을
어떻게 이겨 내었던가. 나는  까무라치고 물세례를 일주일동안 거듭한 다음, 그
들의 고문으로부터 풀려나왔다. 나와서 안 일이자만 태극기를 들고 앞장섰던 내
가 그렇게 빠른 시일에 풀려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진주에서 큰 영향력을 지
니고 있었던 황의치씨가 동분서주한 덕이었다. 풀려나와 다시 학교엘 가보니 그
사이에 나는 유명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태극기를 달고 앞장서서 만세를 불렀
다는 것, 일주일간이나 감금당했다는  것, 몸을 쓰지못할 만큼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 들이 나에게 사실보다 더 커다란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온 학교의 학생들
은 나를 거의 영웅처럼 생각했다. 감히 가까이 접근해 오질 못하고 (저 애가 이
번 감옥에 들어갔다 온 애래) (제가 태극기를 들었대)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이었
다. 이런 분위기였으므로 선생은 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성, 네가
왜 시위를 했는가를 일어서서 말할 차례가 된 것 같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우리도 이제는  독립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나 일본의
지배 아래 있을  수 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것은 네가 모르는 소리다.)하고
선생은 말했다. (동양 3국은  오랫동안 서로 도우며 화평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금세게에 접어들면서 서구제국들은  그 3국을 지배하려고 군함과 대포를 끌고와
위협하고 있다. 이미 저 광대한 영토와 수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중국은 영
국과 불란서의 발길에 짓밟혀  들어갔으며 너희들의 조선 역시 불란서와 러시아
가 서로 차지하려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일본이 조선에 온 것은 그러한 위험을
이기고 독립을 할 수 있을때까지 후견인이 되어주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
리는 너희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농지를 개혁해 주고 관청을 세워서 사무를
보게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든 것을 너희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 언제
든 너희들이 자력으로 서양의침입을 막는다면 우리는 물러갈 것이다. 우리를 물
러가게 하는 일은, 그러므로 너희들 자신에 충실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일본군들은 우리를 설득시키지 않고 왜 칼질을 했단 말입니까?) (바보 같으니라
고.) 담임선생은  상기된 얼굴로 악을 썼다.  (그래도 못 알아듣겠는가? 우리는
너희들을 위해거 고향과 부모형제를 버리고 왔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런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한 짓을  하고 있다.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의
고개는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경솔한 짓을 했을 것이다. ㄱ고 공부를 열심
히 하는 길이 독립하는 길이란  말엔 그 어떤 면에서도일지라도 진실이 놓여 있
는 것 같다. 그날부터 나는 더욱 열심히 책 속에 파묻혔다. 나의 성적은 급우들
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빼아났고 학급의 모든 일은 나의 주둥 아래서 처리되
었으며 그리하여 담임선생의 사랑을 나는 독차지할 수 있었다.
 내가 진주농업학교에 원서를 사가지고 왔을 때에 섭섭해하고 안타까와 하는 것
은 나보다는 오히려 선생의 편이었다. 나에게는 장남이라는 구속력이 몸에 배어
있었고 또 결혼 이후에 유학의 꿈을 깡그리 말살세켜 버렸었으므로 담담히 시시
한 농업학교의 입학원서를 사들고  올 수 있었지만 그러나 선생으로서는 그러한
시시한 학교에 자기의 제자를 넣어야  하는 슬픔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
다. 더욱이나 내가 불합격이라는  통지를 받았을 때의 선생의 놀람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날 그는 (이순성, 너는 불합격이다.)하고 교실문을 열고 핑 나가 버
렸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나의 불합격은 시험성적에 관계없이 내가 기미3.1운
동에 앞장을 섰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안 나는 가만히 않아 있을
수 없었다. 합격, 불합격이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한때의 과오(그들편에서는
과오일 수 있으니까)로 모든 것을 재단해 버리려는 그들의 횡포가 참을 수 없었
다. 나는 농교교장선생을 찾아갔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그의 무반응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찾아갔다. 닷새째 되던
날에야 그는 (내일부터  등교하라)짤막한 한 마디를 던져주는 것이었다. 그리하
여 나는 진주농업학교 학생이  되었다. 작은 불씨가 들녁을 태우듯이 하찮은 사
건이 한 사람의 생을 다르게 방향지어 놓는 수들이 너무나도 허다하다. 그 무렵
나에게 그러한 변화가  이중으로 찾아오고 있었다. 진주농업학교를 일인 교장의
닥택으로 다닐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일들과 친숙감을 맺어주기 보다는 오히
려 배일사상과 독립에의 의지를 길러주었고, 그것은 다시 불문에 발딛게까지 했
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안 사실이지만 농교에는 기숙사생들과 통학생들간에 싸
움이 매일 계속되고 있었고, 도둑질이 어떻게나 성행하든지 눈감고 있으면 귀도
떼어간다는 유행어가 학생들에 퍼져 있을 지경이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K
라는 학생은 가난한 빈농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한번 그의 삼촌이 중국음식점에
가서 사준 짜짱면을 먹은 적이 있었다. 어떻게나 그 맛이 일품이었던지 그는 기
숙가선생들의 호주머니를 날마다  뒤져 그 돈으로 짜장면을 사먹었다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실에도 그때의 농교의 풍기가  얼마나 해이되어 있었으며, 더불어
우리나라의 농촌 사정이 얼마나  비참했었던가를 더듬어 알 수 있다. 우리가 그
사건 속에거 주시해야 할  것은 K가 학우들의 호주머니를 뒤졌다는 파럼치 행위
보다 오히려 그런 사건들을  유발시킬수 있던 민족의 빈곤상과 바야흐로 신문명
이 밀어오고 있는 역사의 개명기에서 우리 민족의 도의심이 그만큼 타락되어 있
었고 질서가 문란했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 누구라도 각성을 가진 자라면 개탄
하지 않알 수 없었다. 그  개탄하는 자 중에 대구고보 2년에 다니다 진주농교로
전학온 김욱주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기쁨을 지금도 나는 은
밀히 누리고 있다. 그만큼  그는 영민하고 아름다운 학생이었고, 멸망하는 것들
가운데서의 고결함을 흠뻑 지니고 있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는 이조
명문의 후예이든지 망해가는  토호의 자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무너져가는 자
기 것을  가냘프게 수호라려고 하는 왜소한  아름다음이 전신에 풍기고 있었다.
그의 긴 손, 긴 목, 조용한 움직임, 어느 것이나 나를 끌어당기지 않는 것이 없
었다. 내가 그와 처음 말을  나눈 것은 어느 날 아침의 등교길에서였고, 그것은
엉뚱하게도 학교에 대한 너절한 불평이었는데도 우리 둘은 순식간에 의기투합하
여 교문 안에 들어설 때까지 높은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나는 약간 흥분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정화에 나서자)고 제의
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날부터 교실과 운동장을 찾아다니며 비난과 불평을 수
근덕거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상급생들의 비행, 학교 전체의 분위기를 흐
리게 하고 있는 기숙사생과 통학생들간의 폭력사태, 도둑질 등을 거리낌없이 공
격하였고, 그 공격의 소리는 삽시간에 학생들 사이에 퍼지고 퍼져 수근덕거림으
로 온 하교가 들썩들썩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둘만 모여도 나와 김옥주에 대한
찬동과 비난으로  들뜬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리고
또 긴 오정이 지나가고 해가  뒷산 가까이 이르른 저녁이 되자 상급생들은 전교
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나와  김옥주에 대한 이를테면 성토대회를 벌이는 것이
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를 아무리 들어도 나에 대한 성토의 소리는 들리지 않
고 애매모호하게 하급생들의 불경스런 태도만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듣다 못
해 나는 단상 곁으로 갔다.  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들 사에에 서
는 된다. 안된다 하고  한참 왈가왈부하더니 (요점만...)이란 단서 아래 허락하
여 주었다. 나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말했다. (피지배자의 치욕 속에서
우리가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
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 역시 여러분은 잘 알고 있
을 것이다. 그  무엇을 배우려고 아닌다는 것을  나는 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왜 배우고 있다는 것을 자
각하고 있는 우리들로서 기숙사생이 통학생을 매질하고 상급생이 하급생을 구타
하는 사태가 과연 정당하며,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을 불손하다고
성토한다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우리들을 일본인 교사
들은 무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너희들은  우리의 통치하에 있어야 하고
우리의 지배를 받지 않고는 하루도  유지할 수 없다는 산 증거가 바로 너희들의
행동에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나냐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뭐러고 답변할 수 있
을 것인가. 왜 그들에게 그런  소리를 우리는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소리를
듣지 말기로 하자. 우리도 뭉쳐서 우리의 얼을 저들에게 보여주기로 하자) 나는
대충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두서없는 소리로 주워댔던 듯하다. 더욱이나 그날은
진주장날이어서 장이 열리는 교문  밖에는 장꾼들이 빽빽이 들어차 나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학생들이 히어로였던 시대였었으므로 그 장꾼들은 모두들 내 이야
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렇다는 듯한 공감의 표정을 하고 있더니, 내가 단을 내려
서자 박수를 퍼부어  주었다. 내 이야기의 뜻이 그들에게 전달되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들에게 간절히 주고 있었던 것, 그들을 깨우쳐주려는 것에 대한 나의 열
의가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서였을  것이다. 무어가 무언지 모를 흥분에 싸여 자
리로 들어가자 분위기는 한동안 술렁거리는 것 같았다. 학우단을 만들자는 나의
제의를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
는 일이었다. 그들이 이 모임을 가진 것은 그런 단체를 결성하자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성토하자는 것이었는데, 엉뚱하게도  허를 찔려 그 제의를 거절할 수도 없
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럴 때였다. 한 학생이 옳소!
소리를 연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나에게 초대 회장을 맡으
라고 하였다. 초급생으로서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리하
여 나는 어쩔 수 없이 진주농교 학우회의 초대회장이 되었었고 학생들간의 모든
일들을 자치하게 되었다. 그런  날들이 겹치고 어느덧 여름이 가고 가을이 밀려
왔다.

너무나 놀랍던 마음이란 말
  나는 어느날 서장대의 기슭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목이 탔다. 기슭 아래
자리잡고 있는 호국사를 찾아가  물울 얻어 마셨다. 한참 꿀컥ㄲ컥 마시고 있는
데, 한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더니 이렇게 물었다. (왜 사람은 물을 마셔야
하느냐?) 나는 미처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떠올라 말이 오지 않았다.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지. 만약에 우리가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차다는 관념을 털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저 돌멩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
듯이 우리를 주관하고 있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인 것이다. 육체가 나라고 자
각할 때 사람들은 의식주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 끝에서 그는 죽음의 허무한 허
울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마음에서 나를 발견할  때 우리는 생사를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불타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오욕을 벗어 버리고 마음을 찾는 일
인 것이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너무도 뜻밖에 들은 그 마음을 설법
하여 주신 분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하시고 온 박포명스님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은 뒤로부터 마음이란 말에 중치가 막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벙어리처
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토요일만 되면 다시 호국사로 그 마음을 들으러 갔었다.
갈수록 미로와 같은 세계였다. 인간의 실체란 미도 추도 아니며 고도 낙도 아니
다 다만 공일 뿐이다. 그  공속에서 보는 나만이 영원한 것이다. 세존께서는 그
공을 만나려고 집과 식구들  곁을 떠나 우루베라촌으로 들어가셨다. (그러니 승
려들아, 너희들도 집을 떠나  산으로 가라, 가서 여러분의 공을 만나라)그의 설
법이 어떻게나 독특하고 황당무계한  것이었던지 나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올빼미
같이 눈을 뜨고  그의 입만 보고 있었다.  유난히 큰 그의 입에서는 사바세계의
소년으로서는 매정스럽고  잔인한 것 같지만 소리가  거침없이 튀어나왔고 넘쳐
흘렀다. 나는 그의 말의  무서움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떠나라 떠나라는 말이 어
쩌면 그렇게도 아름답고 쓸쓸할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 떠남은 실행에 옮기려고
마음의 준비를 다져가고 있었다. 드디어 초가을의 어느날 나는 떠났다. 합천 해
인사까지 이틀을 걸어갔다. 일주문을  지나 법당으로 들어갔다. 불상 앞에서 꿇
어 앉았다. 우람찬  자세로 앉아 있는 불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은
소리가 계곡의 돌자갈을 스치고  흐르는 여울물처럼 흐르고 있는 것 같았고, 그
러한 불타의 목소리  속에서도 승려로서의 나의 내일을  기약받고 있는 것 같았
다. 그런데도 그곳 승려들은 나를 학생이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나는 다
시 이틀을 굶고, 진주가 20여리 쯤 남은 고개에서 지나가는 마차에 실린 자전거
를 빌어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마차는 마침 쌀을 싣고 우리 정미소로 가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부탁 한번으로 빌 수 있었다.
1차의 출가에서  실패한 나는 부모님들의 눈치를  조심조심 살피면서 다시 떠날
기회를 노렸다. 집을 빈 이틀 사이에서는 집에서는 소동이 났었던 모양이다. 유
교사상이 깊이 물들어 있는 부모들로서는 거겅뱅이나 되는 중을 그의 아들이 됐
다는 일을 용납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인 내가 대를 이을 생각을 않고
인연을 끊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나는 벌써 그
인연의 끈이 얼마나 가늘고 허무한  것이가를 알고 있었고 가늘고도 질긴 그 줄
을 끊어버리는 일이  대오로 행진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지름길이라고 확신히
믿고 있었다. 나와 배년해로를 하겠다고 온 아내에게만이 그지없이 죄스러웠다.
그의 젊은 나이를  내가 떠난다면 그는 홀로  보낼 것이다. 그 때의 도덕률로서
남편이 떠났다고 하여 재가한다는  것은 허락될 수 없었으며, 그래서 그녀는 더
욱 떠나간 남편을 생각하며  수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 추단은 사실로
서 맞아 떨어졌다.  딸이 하나, 그 뒤에  태어났었다고는 하지만 딸하나를 보고
그가 그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고, 나에의 추억과 그리고 그의 부
덕이 그 많은 밤을 홀로 보낼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 무렵 그 여자는 내가 그
의 곁을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일까를 불안하
게 떠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그런 불안, 기다림 때문에 어쩌면 나는 더 빠리
떠나려고 하였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폭풍전의 바다가 어둡고 지겹듯이 기다
리는 그 시간이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서는 벅찬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
울이 오고 나뭇잎이 땅에 떨어져 흙에 묻힌 날 길을 재촉하였다. 사흘을 걸어가
니까 백양사로 가는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의 탑리고개에는 보기에도 성근 눈이
내려 덮이고 있었다. 전라도의 눈은  몹시도 크고 가볍게 내리는 것 같다. 나뭇
가지에, 풀숲에 내려 앉아  있는 눈색은 마치 내가 찾아가려고 하는 서방정토의
진경인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 눈을 밟으며  다시 더 이틀을 걸어가니 드디어
백양사의 운문암이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가 만공스님을 찾으니, 스님은 서울로
올라가시고 스님이 올때까지는 그  누구도 입문시키지 말라는 엄며이 내려져 있
었다. 닷새를 걸어왔다는  하소연을 해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보리와 나는 인연
이 없는  모양인가)하고 탄식하면서 그날밤 나는  노스님의 방에서 아픈 다리를
쉬었다. 스님은 중병에  걸려 있었다. 끄르륵 끄르륵  목에서 가래 끊는 소리가
밤새도록 들렸다. 새벽2시쯤이었다고  생각된다. 노스님은 부스럭부르럭 일어나
나를 깨워서 말했다.  자기의 고향은 함경도 함흥이며 백만장자의 아들이었는데
부의 누추함이 싫어서 떠나왔다는 것,자기는 내일 모래쯤은 죽을 것이며 산간세
계에서는 그  죽음이 몹시도 냉랭하게 다루어진다는  것, 그러니 숨이 끊어지기
전에 자기의 행적을 깨끗이 청소하겠으니 자기를 좀 일으켜 달라는 것, 나는 스
님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는 벽장을 열고 그 속에서 보자기를 꺼냈다. 그속에서
귀한 듯한 몇권의 책과 노트를  꺼내어 엎으로 치우고는 나머지를 역시 나의 도
움을 받아 부엌으로 가지고 가 태웠다. 모두 태우고 나서 그는 (다 탔구나)하고
중얼거렸다. 밤이 샜다. 염불소리와  빗자루 지나가는 소리에서 아침이 오고 부
조장이 문을 열고 공양을 가지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부저장은 인사 겸(스님
어떻습니까)하고 물은 다음, (그만 단념하기오, 스님 인자 더 못삽니더)하는 것
이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랍기 그지 없는 그 소리를, 그러나
스님은 아무런  동요없이 듣고 가야지 하는  것이었다. 그 가야지라는 말꼬리를
따라 산바람이 솔잎과 대나무숲을 몹시도 시끄럽게 흔들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백양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아마도 그 노스님은 입적하셨을 것이다.
그는 좌선한 채로 그의 죽음을 맞아들였을 것이고, 그의 동료들이 나무아미타불
을 뇌며 사르는 불길에 타재가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의 동료들은 무섭고 끔
찍스런 일을 해날  수 있을까, 죽음이라는 것을  초개같이 여길 수 있어서일까.
그래서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우리집의 사립문을  밀고 우르르 달려나
오신 어머님과 마주하였을 그때까지  끔찍스런 그 죽음의 상념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다음 어머님의 수다스러움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어
디를 갔다가 왔느냐.  아버지가 몹시 노여워하고 계시니 조용히 들어가거라)(어
이쿠 어이쿠 이 무슨 팔자고)소리를 여러번 말씀하셨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불 속에  발을 넣었다. 그러는새에 짧은 저녁해가 지고 밤
이 왔고, 나는 어버님의 기침소리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안방으로부터 새나오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런  긴장을 움직임없이 이겨내기란 어려운 법이다. 긴장을
이긴다는 것은 이미 세속감정을 털어버린 사람들이나 지닐 수 있는 태도인 것이
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을 수 있는 것이 견성한 분들의 정숙인 것이다.
 드디어 그 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왔다. 그 새 아버지의 얼굴은 ㅅ덩이처럼
검게 타 있었다. 인사를 드리려고  들어온 나를 보고 갑자기 (이 나이가 되어서
무슨 꼴이냐, 아들로부터  이런 불효를 받다니.)하고 부르짖더니 대성통곡을 하
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밤에  우리는 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육체와 정신이 , 세속적인  의리와 그 반대의 것이 서로지지 않으려고 밤새도록
버티다가, 통곡으로 아버니가 손을 들었고,  그 분에 못이겨 그 분은 끝내 그의
단명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 같다.
 어버지가 별세하시기 전날, 한  마을에 살고 계시던 할어버지와 백부님이 오셔
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그  분들은 어떻게 하든지 나로부터 중이 되지 않겠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였건만 끝내 실패를 하였다. 할아버지는 (네 아비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입에 바른말이라도 않겠다고 하여라)하고 간청하였건만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하고 나는 거절하였다. 그때 병중에서도 휙 몸을 돌리시고
쏘아보시던 아버지의 눈길을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너무나 무서운 원망과 저주
에 가득 찬 눈이었다. 그와 동시에 할어버지와 백부님께서도 배은망덕한 놈이라
고 노여움에 찬 어조로  몇번이고 뱉으시면서 문을 차고 나가시었고, 나는 그분
들의 뒤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엉거주춤 서 있어야 했었다. 그 다음날 아버님
은 별세하셨다. 그리고 갓난아이였던  나의 동생이 따라서 저승으로 갔다. 세속
세계를 떠나려고 하는 나의 마음은 그 세속세계로부터 너무나도 심한 보복을 받
은 것이다. 언제나 다향스럽게  생각한 것은 그런 보복을 받으면서도 불자가 되
겠다는 결심을 버리지 않고 그  다음에 겨울, 드디어 출가의 길에 나설 수 있었
다는 점이다.

겨울 산의 계독
  겨울 사원은 언제나 적막하다. 더욱이 흰눈이 며칠을고 계속내려 시내로 가는
산길은 흔적오  없어지고, 눈과 나무라는 단조로은  형태로 산이 정리되고 나면
산엔 바랍소리밖에 그 고요를  깨뜨리는 것이 없다. 겨울 산의 바랍소리는 쓸쓸
하다. 더둑이 황혼이 어둠속으로 묻히고 그림자들이 밤으르 밤으로 밀리는 초저
녁의 바람소리는  산사람들의 가슴을 몹시도 심하게  흔들어 놓는다. 그런 날의
승여들의 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이고 왜소하다. 앞뜰의 눈을 쓸고 있는 승려들,
그리고 묻힌 길을 더듬으며 걷고 있는 승려들, 꽁꽁 닫힌 방안에서 불경을 낭랑
하게 외고  있는 승려들, 그들의 모습에는  속세를 떠나온 사람들의 떠나왔다는
슬픔이 그리움과 함께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슬픔속에서 그
많으 겨울을   맞이하고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떨쳐버릴
수 없도록 힘차게 몸에 달라붙어 나의 일부분으로 화아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즈음, 특히 몇 십년만의 폭설이라고 신문들이 떠들던 69년의 세모 무렵에 도
선사에서 선운각까지의 길을 오갈 때의 나의 걸음걸이에는 그 외로움이 더욱 깊
이 스며들어있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 체온만으로 추위를 물리칠 힘이 없어
요즈음 나는 몇  겹으로 옷을 껴입는다. 그리고  그위에 장삼을 입고 죽장을 든
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죽장의 고리에서는 찰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그 죽장
을 잡은 바른손은 춥고 꺼칠꺼칠하다. 우수만이 아니다. 나의 볼도 이마도 이미
메마른 노년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마치도 한 그루의 앙상한 고목과도 같다. 그
렇게 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면서 나는 산길을 걸어 선운각의 다리를 건너 간다.
그 곳에는 한 대의 차가 기다리고 있고, 나는 그 차를 타고 선학원으로 또는 총
무원으로 향한다. 그것이 근래의 나의 일과이다. 그러나 그 옛날에는 그러지 않
았었다. 어지간히 먼  곳이 아니라면 걸어갔었다. 서울에서 부산이라든가, 광주
에서 대구와 같은, 이 끝에서 저 끝과 같은 곳이 아니라면 나는 걸었었고, 승려
의 세계에서는 그긋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여기고 있다. 그 때 이혼수속을 마치
고 진주에서 해인사로 갔을  때에도 나는 걸었었고, 그곳에서 서울로 올 때에도
도보 반, 차편 반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걷는다는 말을 강조할까 하고 독자들
은 의아해 할지도 모른지만, 그것은 이제부터 기술하려고 하는 부분이, 이 회상
기에 가장 많아 걸었던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서울에 도
착하였을 때, 젊은  승려들 사이에서는 불교정화중흥운동의 바람이 일고 일었고
그 중흥운동이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나는 한국 정통불교스호의 기치를 들고 피
곤이 풀릴 새도 없이  이내 다시 여행길에 올랐었다. 지리산의 골짜기를 비롯해
서 충정도,  전라도, 강원도의 심산에 자리한  강원을 찾았다. 간원이라고 해야
초라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지만  그런 곳까지 다니면서 한국불교의 앞날을 위해
일할 동지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그 때의 고통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
는 정도이다.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았지만 그 때에는 승려들이 무일푼으로 떠난
다느 것이 거의 불문율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동전한푼 지니지 않고 떠났던 나
는 두세달 동안의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고 때로는 머슴들이 거처하는
방에서 그들의 온갖  익살과 놀림에 태연히 대꾸해  가며 새우잠을 자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중에는 어떻게나 초라한 몰골로 변해 있었던지 가는 것마다 마을의
아이들이 뒤따라 오며 누더기 중이 라고 놀려대었다. 사실 그 무렵 나는 서울에
서도 (누어기수좌)라고 별명이나 있었다. 그토록 헌옷에 맨발로 다녔던 것이다.
나의 그 고생은 조그만 결실을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얼마 후에 50여명의
젊은 승려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고,그들은 모두 불교정화를 부르며 짖었
다. 이 모임에 세칭 전국학인  대회라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초라하기 짝
이 없는 것이었는데도 그 모임은 의의로서는 그후의 어떤 모임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모임은  한국불교정화운동의 시초인 동시에 나의 염원인 정화불사
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기 ㄸ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젊은이들의 중흥운동도
일경의 탄압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체하여야  하는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그 때 그들에게 모임이란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고, 더욱이나 불교인들의
모임이란 항일의 주체세력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라하여 학인들의 중흥
운동의 기치는 소리없이 내려지고, 곳곳에서 모였던 젊은이들은 다시 뿔뿔이 산
간으로 흩어져  버렸었다. 한국 불교를 위해서는  불행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
다. 그러나 나 개인을 위해서는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때까지  불사의 뒤치다꺼리만을 도맡아 하고  있었고, 또 주의에서도
으레 그러려니 여기고 있었던 터에 일경들의 그 탄압과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
어날 진정한 의미에서의 나를 위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운동이 깨어지고 또 강원수업도 마치게 되자 표연히 길
을 떠나 만공스님이 계시는 충남예산 정혜사로 내려갔다. 정혜사에 도착하던 날
은 섣달 그믐이었다. 그날밤 나는 만공스님과 함께 기울져가는 한국불교를 중심
으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 받았고, 그날방 스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이후
의 내 발걸음에 커다란  지침이 되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로부터 벗어나
해탈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도  나는 사찰 일을 돌보야 했
다. 어쩌면 나는 속인들이 말하는 일복이라는 것을 타고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
다. 내가 처음 승복을 입은 일본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내 일에 몰려 지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 절에서 3년을 보내고 나니  더 이상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스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선방으로 들어갔다. 낯 씻는 일, 변소
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자리를 떠난 일이 없이 정진
에 몸을 맡기었다 나는 문앞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었고, 목이 마르고 괴로움
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고, 이윽고 그 괴로움과 불편이 사라져
갔다. 점점 무의 경지로 들어갔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서 앉아 있어도
앉은 것 같지 않고 오줌을  싸도 싼 것 같지가 않았다. 한숟갈의 밥, 하나의 정
좌는 밥이고  정좌이면서 곧 무였다. 사람들이  뒤에 들려주어서 안 사실이지만
그 때 내  얼굴은 열에 달아올라 새빨게지고  신경이 타서 나중에는 청덩색으로
변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저러다 죽지나 않을까하고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진하는 길에서의 되돌림이란 그 자신만이 하지 않아면 안되는 법이다.
타인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성원하고 기원했을 뿐 제지하
지는 못한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나는 점점 더 무를 확대시켜 가고 있었
다. 창을 두둘기는 빗소리와 풍경을 울리는 소리, 그리고 나뭇잎이 구르는 소리
만아 들렸다. 그리고 밤이 어둠이  밀리고 밀린 끝에 아침이 오고, 창살이 햇빛
을 가득 받아 타올랐다가  꺼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선방의 수좌들 사이에서
는 내가 견성했단느  소문이 떠돌았고, 만공스님께서도 견성했다는 인가를 해주
시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 속에 너무 많은 미혹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느겼었다. 그랬으므로 그 인가를 받을 수 없었다. 겸손히
사양하고 오대산의 적멸궁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퇴락해 가는 불법의 중흥과 세
계의 평화와 안락을 위해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다만 겸손
으로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견성을 한 승려들은 게송을 지어 그의 해탈으리
깊이르 나타내는 법인데 나는  그것을 짓지 않았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그 미혹
을 쫓아내려고 버둥거렸었다.  백일기도를 하러 오대산에 들어갔다는 사실도 그
미혹의 그림자를 쫓기 위한 구실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날 나로부터 게송을 지어 받고  싶다고 한 동료가 어떻게나 심하게 조르는지 그
것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옛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길가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견성과 파계의 사이
  오대산 속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한 장의 편지가 전달되
어 왔다. 그 편지는  진주의 불교신되회에서 정혜사로 보낸 것을 정혜사에서 다
시 오대산으로 부친 것이었다. 내용인즉 진주로 내려와서 훌륭한 부처님의 법을
들여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나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앞
에서도 말ㅎ듯이 나에게는 너무나 많은 미혹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
을 거느린 채로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과감히 뿌
리치고 정진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망설임 속에서 시간을 보낵고 있을
때 다시 정혜사의 만공스님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부처님의 법을 설하여 주
라는 명령이었다. 할 수 없이  행장을 차리고 길을 떠났다. 불심이 대단한 진주
시민들은 (내  고장의 자랑 운운)한 벽보를  사방에 붙이고 나를 맞이해주었다.
법회가 있던 날의  연회사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
는 소리 때문에 나의 설법이 거의 들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데오 그 모임은
소기의 성과를 충분히 거두었다.  왜냐하면 그 무렵의 모임이란 무엇을 듣고 깨
우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  이야기하였다는 데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로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법회가 끝난 뒤에 나를 찾아와 내
장삼자락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님의 모습이었다. 그때 그분의 눈물엔 많
은 감회가 어려있었을 것이다. 당신의 아들이 이 만큼 되었구나 하는 데서 오는
감격과 이미 당신의 곁을 떠난 아들을 보는 모정이 얽혀있었을 것이다. 우는 어
머니를 보는 아들의 심사란  켤코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속기를 따났다
고 할지라도 내가 그의 아들임에는 분명한 사실이고, 그것을 강조하면서 어머니
로서의 자기를 나타내려고  버둥거리는 모습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런 복잡
한 심정의 움직임에는 아마도  나는 떨어져 갔었던 듯하다. 비록 인연을 끊었다
고 할지라도 그 옛집에 하루쯤 쉬어가는 것이 어머님의 뒤를 따라 그 옛집을 찾
아갔거, 거기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님의 간곡한 부탁,(네가 중
이 된 것도 좋지만 집안의 혈통만은 이어야 되지 않느냐)는 청천벽락과 같은 부
탁을 받아들여야  했었다. 이혼한 뒤에도 집에  남아 어머니를 봉양하는 아내와
그들이 처하고 있는 험한 생활이 나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도록 강압되었던
것이다. 나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
드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아내
의 방문을 열었을 때의 흙내와 땀에 절은 여인의 냄새, 그것은 유혹하는 요기스
러운 것이기보다는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짙은 슬픔이었다. 그리
고 나는 또 기억한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그의 죄스러운 눈. 왜 그녀가 죄스러
워야 했을까? 죄스런 것은 오히려 내 편이 었을 것이고, 그녀는 당연한 한 여인
으로서 나를 요구하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나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
계시킨다는 죄책에 떨로 있었다. 나는 슬프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슬프
게 접하였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기 전에 집을  나와 동구길을 걸었다. 사위가
너무나 어둡기만 했다. 그런  시간에 그 회오와 슬픔으로부터 보는 자연의 흑색
은 너무도 아름답고 가슴 깊이 짙은 슬픔으로 젖어 오는 것이었다. 마치 수려한
한편의 산수화가 우리들의 가슴에  끼쳐주는 감동과 같았다. 그리고 다시 1년의
세월이 흘러산 뒤에 나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아내로부터 보내 온 여식을 낳았다
는 편지를 받아 읽었다. 나는  그 죄업을 말없이 받아들여야 했었고, 그것을 씻
기 위하여 다시 적멸보궁으로  들어가 백일참회를 했었다. 그때 태어난 그 파계
의 씨는 20의 젊은 나이로  삭발을 하고 나의 길을 좇아와 수도정진한 결과, 지
금은 전국 비구니 강원에서  법설을 가르치고 있는 강사가 되었다. 강원 이야기
를 하다 보니 생각이난다. 죄업을 ㅆ을려고 전국 각지를 돌아 다니면 수행을 하
다가 광능봉선사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퍽 오랜만에 불경 번역
자로서 이름 있는 운허스님,  현역경원장을 만났었다. 그동안 쌓인 회포를 털어
놓는 중에 우연히 춘원  이광수 선생의 이야기가 나왔다. 운허스님은 춘원이 바
로 자기의 6촌형님이요, 장래가 유망한 청년인데 그가 지금 법화경의 번역을 서
두르고 있으니 그를 설득하여 번역을 중단하게해 달라는 것이었다. 춘원이 비록
법화경을 10여년간 공부했다고 하지만  아직 불법을 옳게 해득하지 못했으니 틀
림없이 오역이 생길 것이며,  일단 춘원이 번역했다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명역으로 알고 그것만을 읾으려 할 것인 즉 미리 그 해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었다. 나는 운허스님의 청을 따라 자하문 밖 소림사로 갔다. 마침 춘원은 그 절
근처에 새집을 짓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런 이들이 갖는 재기를 온몸으로 풍기
고 있었다. 그는  법화경에 심취해 있는 것  같았다. 그 법화경이야말로 완벽한
종교서적이며, 그  문장의 유려함과 비유의 광대함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그는 칭찬이 대단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의 불법의 이해력은 내가 보기엔 미
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법화경은 가야성에서 도를 이룬 부처님의 본도를 말
한 것으로서 경정 중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법화경을 그가 다
이해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러나 나는 그의 그런 허점을 찌르고 들어가기
보다는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그에게 불법을 가르쳐줄 수 있는 방법을 택
하기로 했다. 그것이 그와 교우를 가지는 길이었다. 그런 연후에 나는 춘원과 3
일 동안 쉬지 않고 의견교환을  했다. 심지어는 밥을 먹고 변소에 갈 ㄸ도 대화
를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진지하게 문제점에  대해서 주고받는 데에는 조금도
두 사람 사이의 의견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드디어 나흘째가 되던 날 그의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 기미를 알아챈 나는 더욱 설법에 열
을 올렸다. 그때 그와 나의 애기의 내용은 너무도 오랜시간이 흘러서 지금은 기
억해 낼 수  없지만 그의 재빠른 이해력에  내가 감탐했었다는 사실만은 뚜렷이
떠올릴 수 있다. 그의 넓은 이마엔 조금도 비뚫리지 않고 혼미함이 없이 사물을
정곡으로 뚫어보자는 예지가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불쑥 우리
민족이 독립을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고 물었던 것  같다. 그 때 그는 먼저
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대답했고, 다음 나에게 그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나는 그것을 인과의 법칙으로써  설명하였다. 우리가 피압박 민족이 된 것은 일
종의 과보이다.그러니 일인만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뉘우치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몹시다. 관념적으로 그런 중대한 문제
를 이야기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관념속에서도 그는 그의 입장을 나는 나
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천명했고  그런 상이한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며칠 새에
우리는 많은 것에서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어려움에 대해서는 더
욱 그랬다. 내가 그에게 법화경 속에서 앞으로 자꾸 몰랐던 것들이 발견될 것이
라고 했을 때 그는 조금의  불만도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알면 알수
록 어려운 것이 불경이고 법화경이다. 가지를 붙잡았나 하고 보면 잎사귀요, 줄
기를 붙잡았나 해서 보면  가지인 것이 불법이다. 그처럼 불법의 진리에 도달하
기까지에는 수십 수백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관문을 지나야 되는 것이다. 춘원은
그 한 관물을 그 때 지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때 나는 춘원에게 법화
경을 번역하지 말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남기고 간
말의 뜻에서  그것을 알아차렸고,  그뒤로 그것에서 손을  떼었었다. 그후 그는
(꿈)이니 (이차돈의 죽음)이나 하는  작품을 내었는데 이는 모두 불교의 감화에
서 우러나온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육당과 춘원을 만난
자리에서 그전과는  달리 솔선하여 불교의 의식을  해설한 책자인 (불자필람)을
번역해 주기를 부탁했더니  육당은 능력이 없다고 거절하였고, 춘원은 즉석에서
쾌락하였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미루어 오다가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
북이라는 불행한 사태를  만나고 말았다.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기록하다가 보니 나와 춘원과의 교우가 대단한 것같이 되었지만 그런 것은 아니
다. 그보다는 더 많은 대중들, 대사들과 친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원의
이야기를 길게 쓰게 된 것은  그에게서 불교의 대중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불자와
불법의 관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신도들은 불법을 승려들처럼 알 필요가
있을까, 즉 그 어려운 법화경을 신도을은 이해 할 필요가 있을까? 이론상으로는
지식으로서의 불교는 누구나 알아야 한다. 불승이란 그것을 몸으로 사는 자이고
신도란 그 지식을 믿는 자이다.  그것이 서로의 한계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때
춘원에게 너무 버랐었고,  일반적으로 한국불교는 신도에게 그러한 바람을 너무
갖던가 전혀 갖지 않는다는 병페를 지니고 있다. 가장 바람직한 일은 언제 어디
서나 평형이다. 그리고  그 평형을 얻는 길은  자제로써만이 아니고, 그것을 알
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불교는 학승을 앞으로 대량 배출하
여 불교의 진리를 대중들에게 쉽게 설명하여 공감속에서 평형을 얻어야 할 것이
다. 진리는 아우그스티누스에 의해서도 단테에 의해서도 이야기되어야 하며, 미
컬란젤로에 의해서도 부각되어야  한다. 그렇게 각자가 자기의 길로서 이야기할
때 진리의 전모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서양의 기독교에 비하면 동양의 불교
는 너무 많은 단애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불교의 진경은 승려들에 의해서만이
규명되고 있을 뿐, 그밖에는 무수한  오해와 이설이 범랍하고 있는 것 같다. 앞
으로의 한국 불교가  해내야 할 것길은 그런  오해와 이설을 불식기키고 불교의
다닝ㄹ화 내지는 대중화를 이루는 일일 것이다. 누차 이야기하는 바이지만 불교
정화운동이란 곧 그 대중화운동의 투쟁적 어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제 6장 삶의 보람을 찾을 때
  물고기는 물 속에 살면서도
  물고기는 물속에 살면서도 물을 모르고, 사람은 불법 가운데 있으면서 부처를
모른다. 사람은 불심 속에서 나고  불심 속에서 살며 불심 속으로 죽는다. 공기
도 물도 다 오염되어 있지만,  그러나 마음만은 더럽히고 싶지 않다. 함께 괴로
워하고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웃는 곳에,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영원한 평화가 있다.  꽃을 보고 기뻐하고 함께 웃는  곳에,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영원한 평화가 있다. 꽃을 보고 기뻐하는 것보다도 꽃을 피워놓고 남을
기쁘게 하는 마음, 이것이 곧  자비의 마음씨다. 물건은 싸움의 원인이 되고 마
음은 평화의 씨앗이 된다.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니. 이렇
게 애증을 초월했을 때 완전한 자유가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다. 봄에는 꽃이 피
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가을에는 달이 빛나고 겨울에는 은빛 산하. 다음에
번뇌가 없으면 사시사철 언제난 좋은 계절이다. 자비를 가지고 부르는 소리에는
하늘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 원한에는 자비로, 싸움에는 화평으로, 비방
에는 협동으로 대하는 길만이 곧 부처의 진리이다. 남을 용서하는 것을 배워라.
그러면 너의 인생은 밝아진다.  남을 미워하지 않고 멸시하지 않고 어떤 상대에
게도 사랑을 잃지 않고 상대를 깊이 보살펴 주는 마음, 이것이 곧 자비다. 기쁨
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만 자시의  몸이나 마음을 가꾸는 일에 기쁨을 갖는 사람
은 드물다. 바른 믿음은 등뼈다. 바른 마음은 인생을 밝게 하고 행복은 얻게 한
다. 욕심 때문에 행실은 세상을  구하고 욕심 있는 행실은 사람을 울린다. 덧없
이 변해 가는 세상 가운데서 항상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은 사람의 성실이다.
 믿음이 이 세상 나그네 길의 양식이다. 더 이상 없는 재물이다. 믿음이란 남에
게 감사하고 자신을 참회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아는 일이 부처님을 아는 일이
지요, 부처님을 믿는 일이 스스로를  믿는 일다. 자비 앞에서 어떠한 적도 있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무장될 때 비로소 사회정화나 민족 통일도, 세계 평화도 이
루어질 수 있다. 원수로 무장하지  말고 자비로 무장할 때 즉 자비로 무장된 부
처님 마음만이 나라와 거정과 나 스스로를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
기다. 죽어 없어지는 몸뚱이 이외에 또 하나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불성이
라 해도 좋고 하느님이라 해도  좋다. 어쨌든 영원히 살아있는 나, 물질이 아닌
나, 다시 말해서 진여라, 여래라  하는 것이 바로 이 또 하느의 삶이다. 이것은
온갖 움직임과 생각과의 주체가 되는 존재이기도 한다.
 부처님은 유신과 유물을 초월하여  모든 것은 인간 각자에 영원한 자세의 진리
가 있음을 깨달아 유신사상의  미신과 유물사상의 위기를 구제하여 인간 자신에
영원한 생명과 희망의 길을  개척해 주었다. 즉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윤회하는
인생자체에 영원한 희망을  알려주었다. 많은 부인들이 남편에 대해 자유행사를
하려 하고 남편이 부인에게 자유행사를 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남을 구속하는 것
은 될지언정 참된 의미의  자유는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은 고통이
아닌 줄로 알지만 사랑하는 것도  큰 고통이다. 사랑이 싹트면 밤에 잠도 잘 안
오고 밥맛도 없어지고 먹는  것이 소화도 잘 안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한다
는 것은 남을 소유하겠다는  것이고 구속이요, 고통이다. 참 죄는 나에게 있다.
절대로 남이 잘못했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자.  저 사람을 기쁘게 하여 좋은
사람 만드는 것도  내가 할 수 있고 독사와 같은  나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사라ㅁㄹ이 모두 생각에 얽힌  탓으로 마음이 흐려져서 무엇을 생각한다고 해도
올바른 판단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밝아지면 그것이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생
각을 해달라고 하면 아무 조곤 ㅇ이 생각을 해두는 것이다. 그래야만 아무 부담
이 없고 마음에  꺼리는 데도 없고 참되고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우리가 흔히
악화다든지 선하다는지 하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 기준은 뚜렷하지 못하다. 가
령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악이지만 전쟁터에서는 사람을 많이 죽여야 공로가 크다
고 하듯이 선악의 구별은  분명하지 않는 것이다. 술취한 사람이 졸다가 잠꼬대
를 하는 식으로  번뇌, 망상, 탐욕에 살지  말라. 태풍에 밀려 다니는 파도처럼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에 따라서 이것이다 저것이다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중생 놀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쳐다본다. 생각해 본다. 들여다 본다. 맛을
본다, 무엇을 어떻게 해본다는 이러한 말들을 연구한다, 안다는 뜻을 지니고 있
따. 이 본다는 말은 우리늬 아는 힘을 다 발휘해야 한다는 소리다. 우리에게 아
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지 알줄 아는 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한국의 돈을 전부 다 모았다는 한 끼에 밥 두세 그릇을 먹는 것도 아니고 옷을
한꺼번에 몇번을 껴입을 수도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닌 셈이다. 천당도 있고 지옥
도 있어서 어떤 중생은 지옥에 살 때도 있고 천당에 살기도 하며 또 사바세계에
있어도 그대로 극락세계가 되고 갖가지 차별의 세계를 제 각기 살고 있다. 각각
자기의 꿈세계에서 사로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꿈을  꿀 때 문을 열지 않으면
방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꿈속에 있는 문이 무슨 구애가 있을 수 있으며
꿈속에 있는 이 몸뚱이가  어떻게 걸림이 있겠는가. 한 개의 환상이고 거짓말이
므로 허공이 허공을 지나가는  것처럼 아무 구애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꿈속에 문을 열지  않아면 나가지 못하는 것은  오직 (문을 열지 않으면 못나간
다.)는 관념 때문이다. 전생에 복을 좀 지어서 금생에 돈이 잘 벌어지거든 대로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회사업도 하고 잘 도와야 한
다. 공연히 남이 쓸 돈을  혼자만 갖고서 좋은 일에 사용하지 않으면 죄만 되고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 내 것이  본래 아니고 필경 내 것이 될 수도 없다. 육체
를 나로 알고 의식주를  생명으로 생각한는 착각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뿐이다.
현실세계에서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웃기도 하고 성내고 하는 그것은 하나도 기
억이 안된다. 아무 생각 없이  하기 때문이다. 아무 조건없이 이야기를 하고 듣
고 앉고 눕고 하는 그것이 이익도 안되고 해도 안되고 이 세상만사가 하나도 나
에게 아무 상관이 없다. 마음에  다른 것은 다 생각하고, 보고, 애착을 가질 것
이 없고, 현상도 적멸도 아무  것에도 미련을 둘 것이 없는 줄을 분명히 알아서
모두 집어던져  버리는 그러한 경지에 다다랐을  때가, 무엇을 수양하고 참선할
것이 남아 있을 도중이 아닌 마지막 반야에 들어갔을 때이다. 설탕은 달고 소금
은 짠 것은 수상행식 때문ㅇ고, 관념 때문이다. 파도가 칠때는 파도가 가라앉은
ㄸ나 물은 변함이 없고 물의 성질은 항상 그대로이다. 바람이 부니까 물이 움직
여 보인 것뿐이지  물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우리의 생각이 파도와
물이 다른 것으로 여기는  것뿐이다. 육안은 단순한 물질의 구조에 불과하며 신
경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세포로 구성될 것일 뿐이다. 아무리 치밀한 구조로
이뤄진 세포라 하더라도 신경 그 자체는 물질일 수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물
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닌 아는 능력을 가잔 생명이 있다. 그것이 곧 마음이다.
 도인이 되면 아무  괴로움이 없고 자유스런 사람이  된다. 마음을 깨친 도인이
되어 세상을 그렇게 살면  참으로 편안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조건부로 시
집가려고 하지 말고 조건부로  돈도 모으지 말며, 사람을 대해도 조건부로 대하
지 말라. 그러면 부처님과 똑같은 경지에 도달한다.
 아무리 태풍이  불어와서 백두산만한 파도가 일어난다  해도 물은 변하지 않는
다. 천당을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파도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물의 성질만은
그대로이다. 또 물에다 똥을 섞여서 똥은 똥대로 물의 성질이 단 것으로 변하지
않는다. 단 것은 어디까지나 설탕이 단 것이다. 즉 당분이 수분에 섞여 있는 것
뿐이다. 이와 같이 물과 똥을 섞지 않으며 물과 당분과도 안 섞인다. 물 가운데
로 똥이 돌아 다니는 것이고 물 사이에 당분이 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의 마음도 미워하고 사랑하고  희노애락에 섞여서 물들지 않으면 따라서 더러워
질 것도 깨끗해질 것도  없다. 애착과 소유의 욕망으로 살다보면 이것이 관습이
되고 업이 되어 무서운 힘을  가지고 우리를 지배한다. 이 업에 의해서 다음 생
이 좋게도 나쁘게도 결정된다.  가령 세계에서 좋은 보석을 한 개 선사받았다고
하면 그날부터 잠을 못 잘 것이다. 도둑이 언제 담을 뛰어 넘어올지 모르고, 언
제 어디서 강도를 만날지, 택시를  타고 가도 안심이 안된다. 이와 같이 마음에
소득이 있으면 안심이 안된다.
태양이 아무리 밝다  해도 땅속이나 벽속까지는 밝힐  수 없지만 마음은 땅 속,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다 밝힌다. 우리의 마음은  오가는 곳이 우주에 가득하기
때문에 극락세계도  사바세계도 지옥과 천당도 손바닥에  놓인 구슬보듯이 환히
보인다.
애착심을 버려라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은  스스로가 얻어서 자기를 얽어맨다. 사랑한다는 것
은 상대방을 구속하면서 동시에  나를 구속하는 행위이다. 너는 내 것이니 꼼짝
마라 하고 꽉 잡아매어두고  한발짝도 용납을 하지 않는다. 사랑처럼 무서운 지
옥은 없다. 모두가 자기  중심으로 움직여서 제 욕심만 채우려고 시집가도 장가
간다. 독사보다 나쁜 마음이  이 사랑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사
랑하지 말라)고 하셨다. 분별  시비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오로지 자비만
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사람이 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사람답게 살기
는 어렵다. 물건을  탐내는 마음을 버려라. 사람의  가치는 재물이 많고 적고에
달려 있지 않다. 나는 무엇이냐? 내가 죽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냐? 이렇게 정리
하다보니, 남을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마음, 죽는 것
은 싫어하고 사는 것은 좋아하는 마음, 이 마음을 정리해야 된다.
 인간의 망상은 상대세계를 초월한 진아를 저버리고 물질로 이루어진 가아와 현
실이 실존한느 것으로 인정한 그때서부터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믿는다
는 말은 곧 생사가 없고,  망상이 없는 진아를 믿는다는 뜻이다. 확고한 자기를
발견한 그날부터, 다시 말하면  산택이 업고 증애가 떨어진 진아를 믿는 그날부
터 농사를 짓든 장사를 하든 정치를 하든 참다운 나를 사는 삶을 누리는 것이며
참된 행복을 창조하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한 생각이 털끝만큼만 틀려져도 이
생각과 참 나와는  하늘과 땅처럼 벌어진다. 아니  하늘과 땅보다 더 벌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중생이다 하는 생각은 아예 털끝만큼이라도 가져서는 안되고, 나
는 본래부터 부처다 하는 생각도 가져서는 안된다. 그 모든 생각이 다 망상이며
이것을 망상이라고 하여 떼려고  하는 그것도 역시 망상이다. 부처가 되려고 하
는 것도 망상이다.  이치를 따라 이리저리 따져봐도  망상만 다해 갈 뿐 마음은
드러나지 못한다. 들끊는 생각을  억지로 참으려 하지 말고 마음을 턱 놓아버리
면 못 자던 잠도 잘  자게 되고, 시끄럽던 머리속도 조용해진다. 이렇게 계속하
면 망상은 차차로 없어지고 마음 하느만 남는 것이다.
 마음은  본래 나니 너니 하는 구별이 없으므로 목을 베어가더라도 아무렇지 않
게 앉아 있을 수 있고, 대접을 잘 받거나 욕을 먹더라도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좋다  나쁘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까지는  의식주에 있어서나 모든사물에
대해서 좋다거나 싫다는 생각을 초월해야 한다. 남이 나에게 호떡을 사주든, 따
귀를 때리든,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높은 자리에 앉혀주든 낮은 자리로 밀어
버리든,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순경에나 역경에도 마음이 태산처런 요
지부동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마음 가운데  맞느니 안 맞느니 시비곡절이  없고 보면 마음에 병이 없
다. 불법은 좋고 다른 법은 나쁘다. 이런 분별신 때문에 우리는 제 마음을 바로
지키지 못한다. 이 옳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나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면 나
라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나는 뮈거 될 것인가? 나라는 것도 생각이나까 이 생각
마저도 버려야 한다. 마음은 본래  아무 생각이 없는데 괜히 망상, 시비를 하여
마음 가운데 위순을 두는 것이  큰 병통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확실히 모르고
서는 몇 백겁을 돌아다니며  화두를 한다. 참선을 한다고 애써봐도 헛수고만 될
것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번뇌망상을 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진땀만 뻘뻘
흘릴 뿐 결과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러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모든 사물
을 대하여야 한다.
 마음을 모양에 비교하여 말할때에는,  둥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마음, 이것은
끝이 없고 시작이 없는  무한대한 것이므로 둥글다고 비유하여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둥근 모양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난 사각형은 더욱 아니다.
허공이 무한대하여 끝이 없으니 우리가  그 모양을 생각할 때 둥글 것으로 상상
한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생각이고 추상이지, 하공의 참모습이 둥글다고 할
수는 없다. 허공의 실상은 둥근  것도 모난 것도 아니며, 시작도 끝도 없다. 어
떻게 말할 수 없어서  둥글다고 했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우리늬 생각으로 허공
의 모양을 상상해 본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우리늬 마음자리도 허공처럼 끝
도 없고 시작도  없는 것이다. 이 마음의 참모양을 다  생각해 낼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성불한 셈이다.
 생각, 이것이 나는 아니다.  긍정 부정은 내가 아니고 부정하고 긍정하는 주체
가 나다. 농사짓는 것도 장사하는  것도 내 일이 아니고, 정치, 학문도 내 일이
아니다. 그것을 하는 주체를 알아야겠다. 그게 무엇이냐? 생각하고 말하고 들을
줄 아는 이게 무엇이냐? 태자는  날이 가고 해가 가도록 이것만을 생각했다. 이
생각을 날이 갈수록 가속도로 되어 마치 한 개의 불씨가 커져서 온 태산이 불로
번지듯이 오직 (이 뭐냐)하는 내적 추구의 일념으로 천지가 꽉 찼다. 싯달다 태
자는 이렇게 하다가 납월팔일(음12월8일)새벽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깨달으셨
다. (세벽에 별을 보다가)깨친  것이 아니라, (새벽 별을 보고)깨친 것이다. 이
것은 불교의 최고의 진리이다.  말로도 못 전하고 글로도 못 전하고 행동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도 사상도 신앙도 물질도 허공도 아니어서,
자살할 수도 없고 타살할 수도  없다. 칼로 벨 수도 없고, 불에 탈수도 없으며,
물에 젖을 수도  없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태초 이전이고 차원 이전이어서,
무엇에도 구속되지 앉는 절대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고 나이다. 그
러므로 이걸 발견하여 믿는  것이 불교이다. 움직이는 생각을 억지로 쉬려고 하
면 머리속은 오히려 더 시끄러워진다. 서울이 시끄럽고 번거롭다고 하여 백구산
꼭대기로 도망을 하여 앉아 있어봐도 서울의 생각은 머리속에서 더 세차게 소용
돌이친다. 구러니 억지로 번뇌망상없는 데로 돌아오면 더 큰 망상이 솟는다. 그
리하여 우리는 시끄러움이 싫다고  하여 조용한 곳을 찾든가, 조용한 곳이 나중
에는 싫증이 나서 다시 번잡한 곳으로 나오든가, 또 생사가 싫어서 열반을 구하
든가 하여 양쪽을  왔다갔다 이쪽 저쪽을 건너뛰고  하다 보면 우리의 진면목을
잃어버린다.
 생사를 벗어나려면 오직 생사를 밝고 차고 나가라는 말이다. 어디를 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치셨던 뜻을 필경 알게 되
는 때가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사심망상이 용납되지 않으므로 다만 화
두만을 들어서 (저게 어째서  무가 되는가?)(이게 뭔가?)하는 것만을 의심해 가
는 것뿐이다. 아무 것도  없는 무아지경이 열반처럼 앞에 슬그머니 나타나서 그
곳이 도리어  번뇌자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요망된 분별심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어느  텅 빈 것에 애착하여  주저앉아 가지고, (아, 그렇구나.
이것이 바로 부처도 중생도  아니면서 부처놀음도 하고 중생놀음도 하는 것이로
구나, 이것이 열반이로구나)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주객관이 대립되어 뚜렷이
나타나게 된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좋아서 우리가 이것을 잘못 열반인 줄 알
고 거지가 어쩌다  곰팡이 핀 떡덩어리 하나  얻어가지고 밤새도록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다 결국은 못 먹고 버리듯이 앞에 나타는 열반경계는 나한님이나 독성
님들이 취하는 경계로서 이 경계가 슬그머니 변해서 도 번뇌가 일기 시작한다.
 신물이라는 말을 삼가서 하지  말라. 곧 하지 말라는 말이며, 추심이라는 말은
무엇을 추심한다. 찾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무슨 진리를 찾으려 들지 말고 깨
쳐보려고도 하지 말라는 말이다. 다 되어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부처가 되어
있으므로 깨치려고 하다가는 영원히 깨치신 것을 네가 깨치려고 해서는 안된다.
추심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 가운데 바늘 끝만한 시비를 일으켜도 8만
4천 번뇌가 일어나서 정신을 잃게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옳다 그르다 하는 시비
를 아예 따지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둘이란 하나로 말미암
아 생긴다. 하나가 없으면 둘이 생기지 않는다. 하나하면 벌써 둘이 생기고, 둘
할 때 벌써 셋이 생기고,  이렇게 하나가 있으므로 무한수가 나오게 된다. 그러
면 하나, 이것은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없는 데서 온 것이다. 인간은 본래 동양
이나 서양이나 하나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아왔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없는 데
로터 우주가 생겼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 하는 것과 동시에 백천먼억 무한
수가 벌어진다. 그래서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 이것을 말한다. 마음 가운데 허물이 없고
보면 모든 법이 법이랄 것도 없이 한 법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마음은 본래의
마음 그대로다. 전체가 내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저 무궁한 객관을 상대할 무슨
법이 따로 없다.  어떤 한 생각이 하나도  일지 않으며 이때의 마음은 마음이라
할 수도 없다. 주관 객관을  따지고 드는 짓ㄱ은 버릇 때문에 이 순간에도 거짓
을 짓고 있다.
 음식도 좋은 음식 나쁜 음식을 생각지 않으면 소화도 잘된다. 아무 기분없이만
먹는다면 우리가 비지만 먹더라도  그 속에는 산삼녹용이 다 들어 있는 것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 생각 가운데는  온 우주가 다 벌어지듯이, 이 한 생각 가운
데 독고도 있고 영양도 있다. 그것은 기분으로 정추를 가리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나 가지고 고집을 하게 되면, 우리는 거기 알맞는 도수를 지나쳐서 중도를 잃
어버린다. 벌써 신심을 어긴 것이다. 똑바른 신심이란, 경추를 보지 말고, 지동
을 하지 않으며 시비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시비를 가리지 않겠다는 셍각까지
는 하기 쉽지만, 정말로시비를 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란 쉽지 않다. 바로 그것
이 문제다. 무엇이라도  고집을 하면 안딘다. 그러면  벌써 도수를 넘고 분수를
잃어서, 그 사람은 반드시 나쁜  길로 달아가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놓아두
어라.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불교까지도 믿지 말란 말이다. 탁 놓
아버려서 해방이 되라는 말이다. 이 생명을 해방해 주란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끝가지 제 몸을 동여매어 가지고 스스로 구속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탁 놓아
버리면 자연스러워 본래 그대로의 자세로 된다.
 시집가고 장가갈 생각 내지 말고 일해 가지고 모아서 모두 다 불쌍한 사람에게
주어라. 모든 것이  나에게 필요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성인이라 할
거싱다. 부처님이고 보살이고간에 그 사람과 안 맞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렇
다면 얻어 먹으면서 다리 밑에서 자더라도 마음 편할 것이다. 죽어도 그는 편안
하게 죽는다. 그러니  내 마음 본래 그 자체가  도라는 말이다. 아무 생각 없고
생각 없다는 것도  없이 귀먹은 듯이 일체를  떠나버리는 것이다. 어떤 한 생각
일으키면 그것이 계념이요 벌써 괴진이다. 마음에 파도가 일어서 마음자리가 요
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혼혼침치하여 파도가 친다. 물에다 조
그마한 모래알 하나라도 던지면 그만큼 물결이 일어난다. 무엇을 본다고 생각하
고 분별 망상을 일으키면 정신 상태가 흐려져서 좋지 못하게 된다. 이리하여 우
리에게 생사의 고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늬 마음은 하나뿐 두 가지가 있을 수
없다. 마음이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을 번뇌망상이고 올바른 진리는 아니며, 그
것은 싸우는 진리일 것이다.  마음이란 부처도 중생도 유정도 부정도 아니기 ㄸ
문에, 지금 달 듣고 말하는 이 마음자리느느 서로가 독같고 질량이 똑같다는 말
이다. 똑같다면 구별할 수도 없이 한덩어리겠지만 모든 부처님들 께서는 제각기
중셍과 인연 맺었던  것을 가지고 성불하는 것이므로  확실히 각각 개성이 따로
있는 것이다.
 미한 사람에게  대적멸에 나타날 때도 있고  그러다가 다시 번뇌망상이 앞서고
한다. 대적멸과  번뇌망상이 자주 번갈어서 나타난다는  말인데, 마음을 깨치지
못해서 생사열반 양쪽을 왈래하는  사람은 미한 사람이며 본래의 마음자리에 들
어서지 못한 사람이다.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이 좋고 나쁘고의 구별이 없다. 이
세상 모두가  꿈속이다. 지금 이것은 낮꿈이고  어젯저녁의 꿈은 밤꿈이며 지금
이 삶은 금생 꿈이고 과거는 전생 꿈, 미래는 내생 꿈, 이렇게 꿈으로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나고 죽고 하는 것도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우리가 석가여래를
보았다는 것도 역시 꿈속의  일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보는 이것들이 꿈속
에서 벌어진 한낱 꼭두각시놀음이란 뜻이다. 우리는 잠이 오라고 하면 눈두덩이
벌써 무거워지면 눈을 뜨기가 싫어진다. 눈을 스스로 감다 보면 점점 잠 속으로
취해 들어가면서 꿈속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눈에 잠이 없으면 모든 꿈이 사라
지게 된다. 천당꿈, 지옥꿈, 인간꿈, 중생꿈 내지 부처꿈이 한꺼번에 없어진다.
이러한 꿈을 꾸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눈에 잠이 없는 동안 공부를 하란 말이다. 본래의 마음이 달라지만 않
아면 1만법이 항상 한결같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러하며 우
리 마음자리는 변하지 않는다. 이 지식도 사상도 신도 아니고 모든 생각도 아닌
이 마음은 우주의 모든 사물을  다 알고 있다. 그리하며 죽었다 태어나고, 태어
났다 다시 죽는 우리의  몸뚱이는 달라질지언정 우리의 마음만은 항상 그대로이
다.
 우리가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누가 나
한테 욕을 하거나 병신이 되도록 때리더라도 참으면 아무런 원망하는 마음을 가
지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업이 남지를 않는다. 기억한다는 것은 업이 남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마음에 간직하지 않아야 한다.
까닭만 하여도 나에게 업만 남게 만든다.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가
는 다시 나고, 나서는 병들어 적고 하는 고통이 되플이 된다. 내가 만사에 간섭
만 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생사윤회가 닥치지 않는다. 이것을 믿는다는 일은 참
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먼저 믿음터라도 이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 깨쳐가
지고 능력이 들어서는 것은 둘째 문제로 하고 우선 아무 것도 기억을 하지 않으
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는  망상과 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하루 밥
새끼 먹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하며 애써 다투어가면서 살아간다. 머리속과 마
음이 헝클어지고, 항상 몸뚱이에 마음이 집착해 가지고, 너니 나니 따지면서 생
사고해에서 부침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깨쳐서 생사에 얽매이지 않고 날이
더웁거나 춥거나 상관하지 않을  만큼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마
음을 안심할 수 있다. 이 마음만은 생명이 있어서 생각할 줄을 안다. 물질도 허
공도 선도 악도 여성도 남성도  아니어서 어떻게 변할 게 없으며, 불에 탈 수도
없고 물에 젖을 수도 없고 그러므로 마음은 태초 이전부터 그렇고, 앞으로도 영
원히 그러할 것이며 성불하여  중생제도하는 그 시간까지도 그대로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음뿐이다. 허명자조한 경지, 나도  없고 남도 없는 그래서 아무 것도 없
는, 없는 것마저 없는 경지,  상응을 해서 계합하고자 하거든 둘이 있다고 말하
지 않아야 한다. 석가여래와 내가  둘이 아니고, 개와 내가 둘이 아니며, 저 태
양과 지구와 내가 둘이 아니다.  이렇게 마음이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 서면 모
두가 하나가 된다. 실은  하나도 아니다 모든 것이 나의 마음에 포용되었으면서
하나라는 수자와 형상을 표현하여 내세울 수도 없다. 모든 것이 나의 품에 들어
와 있으며, 있는 그대로 나의 마음속에 포용된다. 그러나 억지로 내것이라도 끌
어들이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들이 어디론지  달아나버리고 포용되지를 않는다.
제멋대로 앉도록 가만히 그대로 두면,  모든 것이 곧 나이고 내가 곧 모든 것이
어서 둘이 아닌 것이다.
 주관과 객관은 거리가 없다.  둘이 아니다. 우리가 육체를 나라고 착각하기 때
문에 거리를 인정하게 된다.  발과 머리 사이는 거리가 있겠지만 나하고 거리가
없는 것처럼, 나와  몸뚱이는 어느 부분과도 거리가  없다. 그러므로 등도 나의
등이면서 나이며, 앞가슴도 나의 앞가슴이면서 나다. 그저 그렇게 생긴 것이 나
이므로 앞도 뒤도 없는 것이다.  머리가 위에 있고 발이 아래에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머리가 나의 위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발이 나의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
다. 그러므로 경계란  없다. 우리의 마음은 작을  때는 바늘끝 위에도 올라앉을
수도 있고 또 클 때는 온 우주를 둘러싸고도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그 크고 작
은 것을 말할 수 없으며 동시에   무슨 거리나 경계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
므러 그 가장자리를 볼 수도 없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있다 없다는 말이 모두 들어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있다고 해
도 안되고, 없다고 해도 안되며, 또 뮈라고 해도 맞지 않지만 표현할 글자가 하
나도 없다. 본래 그 내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있을 유자가 본래 없을
유하렸더라면 없다는 뜻으로 통할  것이고 없을 무자가 있을 무라고 하였더라면
있다는 뜻으로 통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어느 누가 처음 성전헤 놓았으면 그렇
게 쓰이기 마련인 것이니, 글자  그 자체는 아무 의미를 가지고 있지를 않는다.
없다는 말은 우리의 약속일 뿐  말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말이 있다는 것
도 아니다. 그러나 있다 없다라는  말은 확실히 없고 있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
라, 다만 우리의 관념에 따라  그렇게 표현하였을 뿐, 실제로는 없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은  꿈 같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불법을 많이 들어도  별도리가 없고, 부처님 말슴  한마디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세상은 꿈이다.- 이렇게 생각해야만이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이도 해도 될 게 없는데, 다만 이 몸뚱이를 나라고 집착
하기 때문에 하루 밥 세끼를  먹어야 하고, 또 전쟁을 하기 위해서 새파란 젊은
이가 총 메고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 인간은 싸우는 그 시간까지도 살아보려고
애쓴다. 육신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공포증이 나고 억울하고 분해한다. 마음을
똑바로 갖는다는 것- 그것이  마음의 본연자세 갖기이다. 이것을 인식하게 되면
거기에 가까워진다. 아니 아무 것도  인식할 것이 없다. 왜 그것이 꿈이기 때문
에 우리는  꿈에 부처님을 만났다. 옥황상제를  만났다. 예수를 만났다. 극락에
갔다. 천당에 갔다. 절에 갔다. 예배당에 갔다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꿈인
것처럼 중생을 제도하였다는 것도  한낱 꿈이다. 가령 개미 같은 곤충도 기어가
다 앞에 무엇이 툭 떨어지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촉각을 세워가지고 가만히 더
듬거리면서 따져본다. (어떤 다른  짐승이 나를 해치려고 하는가, 어떤 해를 입
히려고 하는가,  아니면 우연하게 위에서 흙덩이가  굴러떨어진 걸 가지고 내가
놀란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을  살핀다. 그렇게 살피다가 무슨 소리가 더 안 나
면 안심을 하고 가던길을 다시  간다. 이것도 역시 사유이다. 자기의 행동을 생
각하여 보고, 그 생각으로부터 판단이 나서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참선을 하면 마음을 깨칠수 있다.
 정신이란 것은 생명의 충동이요 환경의 충동으로 일어난 것이며 제멋대로 일어
난 것일 뿐 본래는 아무  것도 없다. 외계로부터 충동을 받기 전에는 아무 생각
도 안 일어난다. 그러므로 충동에서  일어나는 생각, 그것이 어떻게 나일 수 있
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그때 그때 임시로 생긴 것이어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거기에 충동을 받아 생각을 일으키지만, 본래는
이러한 충동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란 과연 어떤 것이가? 바지껍데게 모
양 따라다니가만 하다가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냐? 나는 도대체 어떤 실재인가?
여기서 나라는  말, 나라는 생각, 이것이  무엇이냐, 천파만랑 파도치는 환경의
충동 속에서 우리는 우주의 주체가  무엇인지 찾을 수 없다. 바람 따라 이는 물
결처럼 우리는  이리저리 불려다닌다. 불려 다니는  이것이 우엇이냐고 물으며,
결국 나라는 생각을 내게 된다. 이것 하나뿐이다. 나라는 생각, 이거 하나 가지
고 우리가 나라고 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가 만일 나라는 생각을 놓아버린다면
죽어버린다. 일체 행동도  없어지고, 아무 연구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근본적으로 이 나를 내놓고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
 부처님께서 막 태어나셔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셨다. 이 독존의 독이
뜻하는 것은 영원불멸한 것,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면서 영원히 살아 있음
을 의미한다. 나라고 하는 데에는  안 죽을련다 하는 뜻이 도사리고 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이 나라는  생각이다. 이 나라는 한  생각이 없다면, 목을 베어가든
옷을 벗겨가든 두들겨맞든 아무 말도 안할 것이다. 죽어도 죽는 것을 모를 것이
다. 그러니 단지 나라는 주체,  이놈 속에 나는 영원히 안 죽는다 하는 뜻이 들
어 있다. 동시에 나란 절대자유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는 어디가지나 남한테
구속을 안 받아려고 하고,  어디가지나 자유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영원 불멸인 동시에 절대자유를 뜻한다. 그러면 이것이 어찌된 말인고 하니, 바
로 생명이란 말이다. 나는 살아  있다는 말이다. 살아 있다라는 말은 이 생명이
온갖 조화를 부리는 주체라는 것이다.
   
    제7장 대지대비할 때
    인생과 불교
  인생과 불교가 둘이  아니고 우주와 인생도 둘이  아니며 불교와 우리 각자는
둘이 아니다.  또한 석가모니불이 깨친 진리와  우리가 자신의 밑바탕의 부처를
찾아 깨치려는 것도 매한가지이다. 내가 오늘 저녁에 해질 무렵에 간다. 너희들
은 부디 딴짓 마라. 극락도 있는  거고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는 줄 알고 또 사
람이 부처가 되는 법이 있으니 잘 명심하고 신심으로 살아야 한다. 인류가 불교
에 돌어오면 전쟁이 없어지고  약소민족들은 완전히 해방이 되어 영원한 독립을
얻을 수 있는 사상이 불교에 있다.
 아! 그것이 그러하건대 개가  되어가지고 서로 먹으려고 머리가 깨어지도록 저
희들 끼리 물고 싸우는가  하면 개미가 되어가지고 저희끼리 싸우고 일체중생이
이와 똑같은 형식으로 싸우며  헤메이고 있다. 이러고 보니 참으로 부처님 말씀
대로 가련하고 슬픈 것이다 어리석음에 의한 슬픔이 얼마나 슬픔의 존재가 되겠
는가. 예수님이나 공자님은 박애니 인이라고 그렇게만 말했지 우리 부처님과 같
이 가련함을 말씀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자비를 말씀하시었다.
 박애나 인은 부처님의 자비의 설법인 사랑의 자심에 해당하고 슬프고 가련하게
여기시는 비심의  설법은 오직 부처님만이  말씀하시었다. (반야심경)의 요지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즉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돋 있는 것이니 진공에
돌아가서 소모되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없느느 것이고 있는 채로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꿈이가  때문이고 나 자신이 꿈을 일으켜 놨기 때문에
있는 채로 없는 것이다
이 손이 아무 것도 거리낄  게 없는데 괜히 쓸데없이 여기 초가 있고 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초가 부러지기 전에는 손이 통과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기 ㄸ문에
손에 초가 걸리게 되는 것이다.  즉, 이렇게 생긴 티끌로 쪼개지기 전에 물체인
채 그대로 지구가  아니라는 말이 되고 그러므로  미진 자체가 미진이 아니라는
게 어디까지나  물질의 근본을 얘기하는 말이면서  그것이 합해서 구성적으로도
그렇고 동시에 바다, 물 보배라  하는 현상계의 존재 그대로 역시  그렇다는 얘
기다. 그런 걸  세계라 하고 미진이라고 한  것이므로 곧 미진이 아니고 세계가
아니다.
 세존이 사해대중과 만났다는 사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되풀이해서 이야기하자면 세존은 대중울 만나기 위해서 그의 정각을 가졌
고, 그러므로 오늘의 불교 역시 오늘의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그의 정각을 가져
야 한다. 정각이란  인생의 고를 벗어버리는 문제의  해결이다. 이 문제의 해결
속에 오늘의 불교의 존재 이유가 있다.
불교사상에 들어서면  우리는 모두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 그러면 가정도
편해지고 내 맘도 편해지고 이렇게 맘이 편하면 전세계가 편해진다. 내 맘이 더
러우면 온 중생이 다 더러운 사람이 되고, 내 맘이 청정해지면 온 국민이 다 청
정해진다. 그러니 이 세상을  자유평화롭게 하려거던 네 맘부터 바로 잠아라.공
연히 세상이 냉혹하다 국가가 어떻다 정치하는 사람 나쁘고 부패했다 하지만 그
렇게 아무리 나쁘다고 해봤자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는다. 우선 너부터 고치면
모두 좋은 사람 돼간다. 그러니  저만 착해지면 모두 착해진다. 우선 너부터 나
쁜 데 가담하지 말고, 저  자신 하나가 정화되면 그러면 너를 대하는 사람도 다
너같이 된다.  사람이 나쁘다, 세상이 나쁘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나쁜 길로 간다는 건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 산이다 물이다 하며, 보이는 대
로 높다 갚다  하고, 분명하게 사물을 판단하는  주관의 본체인 이 마음이 모든
생각을 쉬었을  ㄸ에는 쉬었다는 것까지도 없어져서  청정하거 순진한 이것만이
독립하여 이렇게 이러한 것을  부득이 하여 법이라고 하며, 이 법을 얻어보았으
되, 보이는 것은 없으므러 이것을 부처라고 한 것이다.
 나를 잊어버리면 곧 그것이 불도인 것이다 무엇이든지 생각하거나 따지는 것은
마귀의 친속인 것이다. 이 마음은 비록 그대가 깨닫지 못하고 헤매는 때라고 할
지라도 변하거나 잃어진 것도  아니며, 또한 ㄲ달은 ㄸ라고 할지라도 마치 손에
쥔 물건을 찾는  것과 같아거 새삼스레이 딴  곳에서 얻어온 것도 아닌 것이다.
변할 수 없는 천진자성의 마음은  흩어져 때가 묻거나 닦아 고쳐소 성해질 수가
없는 것이오. 내가 공연한 착각으로 보는 저 무한대의 허공체가 온통 그대로 이
마음 하나뿐인 것이다. 
 유와 무의 상대적 입장에서  본말과 시비를 가리고자 하는 의논의 말을 끝맺을
수가 없는 농담 희롱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똥과 같은 것이니 담아다가 버리
게 한 것이다. 우리의 여래장인 이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하며, 비교 고요하여서
한 법도 간직한 것이 ㅇ으므로,  또한 불성도 마음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경
에서 말하기을 저 모든 부처님의 세계도 그것이 또한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누가 불도를 배우고  닦아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소견이라는 불
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어떤 바보가 있어서 말하되 내기 이러이러
한 기회에 어느 선지식을 만나서 그 스님이 눈썹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문득 도
를 알았다고 하며 달마선의 이치를 증오체득하였다 하여 풍을 치고 도인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다가 정말로 선지식을 마나사는 한 마디도 입을 버릴지 못하고 도
무지 마음이 깜깜하여 칠흑같이 되고말며,그러나 어쩌하다가 한 마디의 맞은 듯
하며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날뒤며, 만약에 대답을 못하고 남에게 눌리고
꺾였을 때에는 그 마음이 불안하여 어쩌할 바를 몰라서 당황하나니 그러한 덜된
정신을 가지고 달마선응 배워 알고  자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경우도 닿지 아니
하는 일이다.
만사에 등한하여 무사히 지내가며  쓸데없는 망상을 내지 말며, 또한 진리를 구
하지도 말고 다만 무슨 소견이든지 다 버려라. 버리려는 생각까지도 버려라. 안
으로 이 마음을 살피려는 소견이나 밖으로 지니를 구하려는 생각까지도 버려라.
마도나 불도나 할것없이 다 악도이다. 그러므고 문수보살이 유무만유를 통 묶어
서 그것이 오직 하나뿐인 이  마음의 살림살이인 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보는 부
처님에 대한 소견을 막 내자마자 홀연히 그 몸이 철위산속에 빠져 있어 보인 것
이다. 문수보살은  큰 진리의 실지이며 보현살은  방편의 권지이라. 보현보살은
권지로써 그 마음을 다스리고  문수보살은 실지로써 그 마음을 다스렸지만 필경
에는 권지와 실지가 다 이 평등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애초에 부처도  중생도 아니어서 아무 분별이 없는 청청한 진
리이기 때문에  만약에 부처의 소견을 일으킨다면  문득 중생의 소견이 앞선다.
유무이거나 단상이거나 한 소견의 주관을 일으키면 곧 객관의 세계가 벌어진다.
주관 객관은 곧 한 물건의  양연인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소승, 대승 나누
는데 소승의 아라한도는 소승불교의  성위로서 곧 번뇌를 끊어가지고 망상을 쉬
고 쉬고 하여 번뇌망상을 완전히 끊어서 남음이 없으면 이것이 나한인데 소승은
이것을 소승열반이라 하는데 대승에  비해 마음의 경계가 적으므로 많은 사람을
실을 수 없다는 뜻으로  소승이라 한 것이다. 이들은 번뇌망상만 끊으면 된다는
지론이다.
 가르치는 사람도 아무 것도 배울 것 없고 깨달을 것도 미할 것도 없는 것을 가
르치고 배우는 사람도 그렇다.  선지식이나 보살이나 부처님도 다  구런 사상이
다. 완전한 대성자가 되기 전에는 감기몸살이 되기전에는 감기몸살이 들면 쌍화
탕이라도 먹어야 하고 병원에 가야겠구나 하지만 쌍화탕 먹는 것이 목적이 아니
고 건강하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듯이  불법 배우는 것도 육체가 모든 소득이 있
는 것이 목표다. 나머지는 다 허튼소리고 육도만행을 해라 하는 것도 부득이 해
서 다른 종교처럼 천당에 가서  즐 편안하게 살려고 하느님에게 어기지 않고 늘
복종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지도자의 부하가 되기  위해서는 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던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제 마음자리 그대로가 곧 진리이
니 이 자리를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을 확인할 때 비로소 불교 믿는 냄새도 나고
불교 믿는 신도이며 참다운 신행이다.
 대슨불법은 중생이 그대로 부처가  다 되어 있으니 몸뚱이가 나라는 생각만 쉬
라는 것이다. 소승불법모양 저 혼자 나한이 되어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다면 초
견성만 해도 할 수 있다. 남의 상좌가 잘못하면 때리고  그런 가운데 그걸 초월
해서 종일 만나 시비를 하였지만 나는 만나 일 없고 시비한 일없고 그런 심정에
서 얘기해 주고 가르쳐준다. 그 사람은 물론 얘기해도 안한거고 얘기 안해도 안
한 것도 없다. 이것이 대승불법이다. 대승불교의 이런 큰 불법을 성퓌하려면 이
몸뚱이를 초월하여 남 잘되면 미워하고 시기질투하고 도대체 남의 말 잘안 듣는
그런 중생들 틈에 끼어 그 사람들을 착하게만 만들고 불법을 깨닫게 한다. 그리
고 내가 중생을 교화했다, 그 공이 내게 있다, 그런 생각 하지 말고 무주상보시
하라. 이것이 대상사상이다.
 세존께서 49년간이나 어두운  중생들을 위하사 일러주신 진리의 불법을 자세히
듣고 철처히 배우자. 그리고 또한  깊이 생각하여 밝게 따져서 할 일과 하지 못
할 일을 철저히 분간한 다음에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치고 개척할 것은
개척하여 하루빨리  중생을 구제하며 대도를 성취하여  부처님의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
 불교는 신비 속에 숨어 있는  객관성의 진리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이
마음이 곧 불교이기 때문이다. 왜?  이 마음은 모든 생각과 행동의 주체이기 때
문이다. 이 마음! 마음!마음!마음!과연  알기 어렵다. 모든 일에 주체성일 뿐이
다. 이 마음! 아예 마음  깨달음을 말라. 이 마음!알고자 하면 벌써 둘이 된다.
둘이면서 또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둘이나 말이다.  어렵다. 어렵지만 신비는
아니다.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이 마음 바로 이놈 보고
안 생각하면 된다. 곧 이놈이다.  이 마음이다. 아무 것도 섞이지 아니한 이 마
음!이놈!물질도 아니요, 허공도 아니다. 유무를 초월했다.
 무엇인고! 알고자 하면 이  마음은 생각으로 변한다. 그러나 변한 것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살피자, 곳  그것이다. 이놈이다. 어렵다. 어려워! 그러나 어렵게
되어서 어렵게 된  것은 아니다. 쉬울 것도 없이 쉬운  것이다. 왜? 곧 너고 나
다. 주인고이여! 주체성이여! 살펴라  챙겨라 너다 나다 이러고 보니 쉽지도 어
렵지도 않다. 무사태평이다.  뛰고 놀아라 춤추고 노래부르자. 천지의 근원이요
만물의 바탕이다. 제발 이 주인공님아!
 이 세상이 다 무상하고 여기는 고해고 불붙은 집이고 그러니 아예 방심하지 말
고 네 일좀 해야지 만날  ㅇ체, 몸뚱이 그렇레 가꾸어줘 봐야 갈 때는 헛수고했
다고 인사도 안하고 나를 배반하고  가는 놈이니 그놈만 위해서 그렇게 살지 말
아라. 나도 평생에 염불해서 이런 좋은 수가 있지 않느냐. 90장수도 하고 병 안
앓고 꼬부라지지도 않고 그리고 가는  날짜 알고 내가 지금 말만 떨어지면 간다
곧 갈 시간이 되었어. 이러니 너희들도 그랬으면 좀 좋겠느냐. 2달이고 1년이고
드러누워 똥을 받아내고 이래  놓으면 그 무슨 꼴이냐. 너희한테도 벌어먹을 것
도 못 벌어먹고 모자간에 사로 정도 떨어지고 얼마나 나쁘냐. 부디 신심으로 염
불도 하고 부디 그렇게 해라.
 일체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중생이고 또 일체부처가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고 일체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불법이다. 세간에서는 국민학교
부터 대학을 나와거 결혼을  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개체성장이 확실히 있다. 그
래서 졸업한 학교가 있고 배운  지식이 있고 그 자식을 평생톤록 기억하여 이용
을 해야 하는 소득이 있다. 그렇지만 불법을 배우는 것은 불법의 맨 첫 자부터,
소승불교에서부터 배울 것도  없고 수도학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득을
목표로 한다.
중생들이 탐진치삼독주에 취해 가지고  육체만 나인 줄 알고 이해타산하고 온갖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여 복잡한 세상을 만든다. 그래서 부처님
께서 (탐진치의 삼독주에서 ㄲ어나라, 율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려라, 내가 남이
다 하는 것이  관념이고 없는 것이다)하는 법문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아공이
다. 번뇌망상, 온갖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지고 하는  법은 이렇고 땅의 이치는
어떻거 인간사회의 도리는 이런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는 서로 죽이려고 하고
전쟁을 하고 그런다.  그러나 네가 생각한느 그런  하늘도 없고 그런 땅도 그런
인생도 없고 그런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도 잇는
게 아닌  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갓이 법공이다.  부처님의 법공이 진리를 듣고
나서 여태까지의 자식을  다 놓아버리고 온갖 생각이  끊어지면 본래 있던 적멸
그 자리가 나타난다.  마치 구름이 벗겨지고 나니  본래 있던 밝은 달이 나타안
것과 같아서 아예  없던 달이 구름 벗겨지고  나서 새삼스레 생긴 것이 아니다.
이렇께 되면 아아, 이제  알았구나!하고 깨달았단느 생각이 있다. 그래서 이 깨
달았다는 생각마저 놓아버리는 이것이 구공이다.
 오래 익혀온 모든 지식과 사상과 고집물을 남김없이 모조리 버려야 한다. 유마
거사는 (나는 모든  소유를 다 버렸노라)하였으며 (법화경)에는 (과거 20년동안
의 설법은 우선 집안의 똥이나 치우게 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 마음
가운데에 지니고 있던 모든 생각과 소견이나 일체 주의주장을 몽땅 버리게 하신
말씀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자기의 본래  마음자리가 곧 도인 것을 잊어버리
고, 또리어 이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을 부정하고 드디어 달리 따로 법을 구하여
깨달으려고 한다. 온갖 공을 들여 갖은 수행을 다 닦아서 점차로 도를 ㄲ쳐가자
고 한다면 아러한 사람은 억만겁을 부지런히 닦아도 영원히 불도를 이우지 못할
것이다.
 수도하는 사람으로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망상과 욕심
으로 먹는 것이요, 둘째는 지혜와 도심으로 먹는 것이다. 지혜와 도심으로 먹는
다는 것은 육신을 거두기 위하여  주는 대로 생기는 대로 받다 먹을 뿐이고, 평
생에 별로 음식에 탐욕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망상과 욕심으로
맛좋은 음식만 찻아서 온갖 망상으로  오직 입에 맞는 것만 찾아서 양껏 먹고도
허덕거리는 것을 말한는 것이다. 음식 먹는 것만 보아도 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구하는  것이 없으면 곧 이 마음이 청정하여 한 생각의
망상도 일어나지 않으며, 무엇이나 애착하는 일이 없으면 모든 망상이 봄바람에
눈 녹아내리듯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 마음에 생멸하는 잡념이 없으면 그
사람은 곧 부처이다. 부처님께서 8만4천법을 마렴하신 것은 저 어두운 중생들의
8만4천의 사견망상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것은 다만 저
중생들을 교화 인도하여 그 마음을 ㄲ닫게 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이 한가로운 때,  신심이 두터운 때에는 사찰이  산간에 있어도 될 것이
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이 분주하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믿음이라는 것
을 가지기에 어려운 시대에에서는  신자와 승려들의 대화와 이해소통으로 그 갭
을 메꾸어야 한다. 전체가  하나이고 하나가 전체이면서 또 그대로가 없는 것이
어서 거금이 아니고 현장이 아니고 모두가 아니다. 이 촛대가 모두 이렇게 섰는
데 우주 전체가 모두 이 촛대  선 곳이 내내 모든 것이 선 자리아고 저기 선 것
이 여기다. 이와 같이 포개  있는 거리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불가사의힌 신통이
다.

  참선의 ㄴ두리
  참선이란 바로 이 마음을 찾는 공부이다. 이리저리 헤매지 않고 이 마음을 직
접 찾는 지름길이 바로  참선이다. 불도를 닦는 사람들도 감히 선법에 들어서지
못하는 것은 모두들 저 아무  것도 아닌 허공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고,겁
을 내어  멀리 절벽만 쳐다보다가 물러거  도망치기가 일쑤다. 그러므로 근래에
불도를 닦는 사람들은 대개가 불교의 지식을 구하는 이들뿐이고, 자심불의 도를
깨닫는 이는 흔들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시달리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먹고 출근하고 많은 일과 사교에 시달리고 그리고 저녁이면 솜같이 지쳐서 집
으로 돌아간다. 밥을 먹고 잠에 떨어진다. 다음날도 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 그
들에게 사찰을 찾은 만한 시간이 없는 것이다. 불교가 그들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그러면 한국 불교는 어떻게 대중들을 ㅊ아가야 한단 말인가? 라
는 다음 문제가 따라온다.
 어떻게 대중들을 찾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승려들의 교육문제돠 연관된다.
이제는 극락이라는 기이한  선문답으로써 대중들을 구제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너무나  영악하다. 그들은 환상이라든가 가상적 세계의 약속
을 뿌리칠 수 있도록  충분히 영리하다. 그러기 때문에 승려들은 그들과 정식으
로 만나는 수밖에 없다. 정연한 논리로서 보리의 참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골목
에서 외치는 저 엿장수는 도리어 이 마음, 이 법, 이 소식을 여지없이 설명하고
있다. (싸구려 싸구려, 말만 잘하면 거져 준아오) 이말을 알아들었는가? 다겁으
로 힘써 마음을 가진 범부들은  밝고 날카롭고 재치있어 입을 버리기 전에 이미
알아듣고 마는 것이다. 이 마음은 이미 이 나의 이 마음에 누가 깨달을 수 있으
며 무엇을 따로 ㄲ달을 것이  있으랴. 이렇게 여지없이 제대로 된 뒤에는 저 청
산 깊숙이 들어가서  산명수려한 곳에서 밝은 달과  흰 구름을 벗삼아 깃들이는
도인도 있고,  혹은 걸인의 행색으로 시정에  들어가 공원이나 거리에나 시장의
한 구석에 앉거나 서거나  돌아아니면서 연대갑자를 다 잊어버리고, ㄴ 빠진 등
신처럼 그날 그날을 자내는  도인도 있다. 그런가 하면 왕사로 출세하여 임금의
스승이요, 국민의 사표로서  인간을 개조하여 사회를 개선하여 지상극락을 건설
하는 도인도 있다. 대수도원을 경영하여 인간과 천상의 사표가 될 수 있는 수천
명의 승도들을  빈틈없이 지도 육성하고 있는  도인도 있다. 또는 대자대비하여
청정엄숙한 도인도 있는 반면에 광인행과 잡승행도 있다. 이렇게 신비막측한 수
도행각에 있어서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므로 법부의 속정으로써 왈가왈부는 범부
와 성인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초월하여 사의불용하는 해탈 아닌 해탈
만행에 대하여 누가 감히 미오를 말할 것이며, 또한 선정이니, 태식이니를 말할
수 있으랴.
 참선하면 견성한다고 자꾸 참선만 하고 앉아만 있지, 그러나 참선을 무엇을 무
엇 ㄸ문에 하는 줄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참선하면 견성성불한다
고 그러는데 견성성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니 큰 일이다. 옳은 선지식 마나
서 그런 걸 아 알고 참선도 다 해본사람, 그런 선지식 마나 공부하면 그 지식이
되기 ㄸ문에 무위법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다.
 요새 정립이란  말알 쓰는데 인생관이  정립됐다, 국가관을 정립한다,확실하게
결정을 해서 흔들리지 않고 튼튼하게  서 있다. 그런 뜻이다. 불교에는 또 선정
이란 말이 있다.  참선을 하는데 다른 생각  하나도 없이 화두만 뚜렷한 그것을
선정이라 하고 삼매에 들었다고 한다. 염불이나 참선이나 진언이나 어떤 공부를
해서 내 몸뚱이도 없고 생사도  없고 그렇다고 자는 것도 아니며 허망한 환상에
빠진 것도 아닌 깨끗한 정신이다. 우리는 동서남북으로 마음이 갈가리 찢겨져서
잠도 못자고 마음도 편치 못한데  이 마음이 딱 정립이 돼서 가장 깨끗한 기분,
잡념이 하나도 없는 또렷한 마음만 남아 있을 ㄸ, 마음이 정립되너 선정 삼매에
들어섰을 그때에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안락할 때다.
 성품이 곧 이 마음이니 마음과 성품이 둘이 아닌 이치를 확실하게 깨친 사람을
조사라고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자기의 심성을 깨닫는 때에야 비로소 달마선종
이 전하는 말도 글원도  아닌 ㄱ외별전의 이상야릇한 이치를 의논할 수 있다.중
생들이 천만억겁을 살아오면서 세세생생에 익힌 버릇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
음의 이 세가지  마음이 뿌리 깊이 마음에서  벅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부득이하여 선정 닦는 방법과 방편지혜를 가르쳤
다. 만약 누구든지  이 마음이 본래부터 언제  한번 번뇌망상을 일으켜 본 적이
없는 것을 알고 보면, 무엇을 닦으며 따로 또한 깨달을 법이 있으랴.
 보통 초학자로서는 오히려 면방하고  의혹하는 것이 무리가 아닌 것이다. 선종
에서 말솜씨나 배우고 돌아  다니는 사람들에 있어서 말로노 생각으로서는 턱도
닿지 않는 앞뒤가  뚝 끊어진 이 화두에 대하여  두 가지로 논평하고 있는데 그
한가지는 조사들의 공안은 이것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그 살림
살이 전체 내용을 그대로  흠뻑 드러내놓은 것이라고 하여, 둘째는 화두를 일심
으로 의심하는 바람에 모든 사견과 번뇌망상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여 본래 마음
자리가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가 다 천만부당한 소견들이다. 참으로 총명 영리한 사람들은 이따위 어리석
은 망상을 내지 않고 바로 정직하고 날카로운 판단으로 뜻깊이 알아차려 화두를
생각 가되, 마치 큰 바위가  태산 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것과 같이 점점 가
속도로 굴러서 보기만 해도 무섭게 정진해 갈 뿐이다.
 선지식, 스님네들이 화두의 참뜻을 몰라  그 의심이 마음 가음데 꽉 맺혀서 자
나깨나 그 의심을 놓을 수가  없게 되면 이것을 참으로 생사를 해탈하고자 하는
진실한 발심인 으로서의 참으로  알고자 한는 의심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얼마
동안은 의심이 죽  잘 나가다가 가끔 의심이  없어지곤 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신심과 결단심과 성심이 부족한  탓이다. 그것은 번뇌망상에 끌리고
잠에 속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공부는, 이것을 주작화두의 공부라고 하여 참
선이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한층더 마음을 가다듬으며 몸
을 다시 한번  더 단정하게 도사리고 앉아서  온젖하고 똑똑한 정신으로 화두를
잡두리해야만 한다. 만약 잠마군이가  와서 덮치고자 하거든 빨리 그 즉시로 자
기가 잠에 쏠려들어가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잠이 오기 시작하면 벌써 눈가죽
이 무겁고 뻣뻣하기 시작한다.이러한  ㄸ에 얼른 다시 정신을 챙겨서 몸을 다시
단정히 입속말로 조용하게 화두를  한두번 들먹거리면 잠이 달아나고 온전한 마
음으로 참선으로 참선이 잘되느니라.
 그래도 만약 잠이 완전히  물러가지 아니하며 화두가 똑똑히 의심이 되지 아니
하고 희미할 때에는 일어나  마당에 내려서서 발끝만을 디디고 수십보를 천천히
걸으면 눈이 가뿐해지고 정신이  깨끗해지느니. 다시 자리에 가 앉아서 천번 만
번 화두를 챙기며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와 같이 생명을 떼어 놓고 애를 써
가며 차차로 공부가 순일해져서  힘쓰지 아니하여도 공부가 저절로 굴러가며 화
두의 의심이 천만배나 힘차게  나가게 되느니라. 이렇게 된 연후에는 화두를 놓
을래야 놓을 수가  없게 된다. 마치 산상에서  막 내리구르는 큰 바위와 같아소
붙잡기는 커녕 그 근처에도 갈 수가 없이 쏜살같이 구르는 것과 같이 되느니라.
참선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첫째로 조심할 일은  저무 욕심을 부려 헛에를
많이 써서 상기가  되거나 몸에 병이 나게  하여서는 공부를 잘 못하는 것이다.
대저 좌선은 힘쓰는 사람은 다만  몸을 단정하게 앉아서 눈을 보통으로 뜨고 또
한 몸과 마음을  구태여 돌아보지도 말며 생명조차  생각지 말고 화두만을 하되
혹시 정신이 희미하여 곤하거나  번뇌망상이 일언나거든 다시 한번 정신을 챙겨
서 정진하면 차차로 힘을 얻어서 눈이 안정하며 따라서 마음이 안정하고 마음이
안정하면 몸이 안정하느니라. 그러면  곧 선정력을 얻어서 시간이 가는 줄을 알
지 못하며 몸과 마음이 가뿐하고 한없이 안럭하느니라. 그러나 기능을 삼아서는
도리어 사도에 떨어진다.  
 참선공부로 성취하고자 하는 이는  첫ㅉ로 인정을 멀리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구멍 뚫린 독에  물을 채우기와 같아거 뒷구멍으로  정신이 새서 흘러가는 곳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자기 허물을 깨닫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내다 보면
공연히 시주들의 공밥만 썩히고  헛되이 늙고 마는 것이리라. 정말로 간절히 공
부하는 사람은 고개를 뒤로 젖혀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며 머리를 숙여도 땅이
보이자 아니하고 산과물을 보아도 산과 물이 아니며 다니더라도 다니는 것을 모
르고 앉아도 앉은 것을 모르며  천만대중 가운데 있어도 한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몸이나 마음 할것없이 전생명을 통틀어 뭉쳐서 한 개의 화
두에 대한 의심덩어리만 남는 것이다.
 이 의심을 타파하지 못하면 맹세코 일어서지 아니할 것을 각오하는 것이다. 마
치 실족하여 큰 불 속에  빠진 사람과 같아서 여기서 무슨 잡념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놈아! 곧 나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낼 사이가 없다. 그저 곧 달아나는
것이 가장 상책인 것이다. 옛과 지금을 막론하고 공부로 성취한 사람들은 다 이
와 같이 했느니라.

  성불하는 길
  모든 것이 다  허망한데 그중에 허망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뿐이
다. 그것을 꼭 알아야겠다다  하면 그것은 이미 견성에 연결된느 생각이다.남이
다 성불하고 맨 나중에  성불헤애 한다. 성불해야 안심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어
디로 가나 고통이다. 천당을 가나 극락을 가는 높은 것 낮은 것 다 있다. 이 마
음을 깨쳐놓고 나면 나 보다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다. 잘날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고 그러니 평등의 세게이다. 거
기는 시기질투도 없고 사람 만나면  서로 부처니까 서로 반갑고 치하를 하고 지
낸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실다운  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객관을 다 떨어버
리면 그처럼 여래를 보다고 한 것이다.

   부처가 중생이요, 중생이 부처니 말이다.

 불법과 세간법을 가릴 것 ㅇ이 일체소견과 주의주장은 모조리 버릴 것이오. 그
러므로 저 부처님  당시의 유마거사는 그 방안에  온갖 물건을 없애버리고 다만
침대 하나만 두고 ㅎ상  일체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병을 앓으며 드러누
워 있다. 우리들이 부처님은 과거사를 다 아신다고 신통이라고 하지만 성불하고
보면 사실은 본래 그런 것 뿐이고 모든 착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어서 종소
리가 깡깡이다 땡땡이다  하고 듣는 그런 업을  해탈했기 ㄸ문에 과거를 과거인
줄 알고 봤던 것인데  이제 보니 항상 목전지사다. 비유하면 어린아이들에게 하
나에 둘울 더하면 몇 개냐고  물으면, 하나, 둘 꼽아 보고서야 셋인 줄 알고 어
른들도 좀 복잡한 계산은 수학적인 지식을 빌어서 알게되지만 부처님은 항상 나
타나 있으니까  연구하고 셈을해서 아시는 것이  아니다. 일체를 분별하지 않고
즉각으로 아는 무분별지다. 
 성불해야 하겠다. 생사를 해탈해야  하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무상하다
고 하지만 이것은 모두  다 쓸데없는 생각일 따름이다.부처가 된다는 생각도 없
어지고, 그것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ㅇ어져서  온갖 생각이 ㅇ어진 자리에
들어가면 성품이 이렇구나,  내가 견성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누구나 한 번 날
수 있다. 이럴 ㄸ 아차!하고 곧 그 생각을 돌려서 저절로 끊을 줄 알아야 한다.
이렇구나!하는 생각도 망상이기 때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가 다 버리고 상대적으
로 존재하는 객관대상, 곧 산보고 높은 줄 알듯 이 객관의 사물을 아는 것이라,
제가 저를 알 ㄸ는 아는  걸로 아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객관세계를 보고 잘못 안
지식을 정리해 버리는 것이므로 아무 생각없고 아무 허물 없는 알줄아는 마음만
남아있다. 그렇게 되면 알았다는 생각도 저절로 없어진다.
 부처님께서눈 무분별지로 분별없이 아시고 과거사도 미래사도 분별없이 아시고
중생을 제도하시는 것도  분별없이 제도하셨다.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견성하는
그날부터 종일설이 미진설로 하루종일  말을 해도 말한 것이 아니다. 견상을 하
고 나면 무슨 색안경을 끼고 어떤 조거능로 무엇을 하지 않고 다만 무심한 마음
으로 무심중에서 말을 하고  듣고 하므로 마치 바람소리와 물소리와 같다. 그래
서 둘이다. 셋이다 하는 것도 앞에 나타나니까 무심히 알지 우리 모양으로 어떤
선입주견을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다.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추는 게 아니라 일
체동작을 우리와 같이 하는 것은 움직임이 아닌 때문이다. 꿈속에서 움직였다는
것이 꿈밖에 가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전혀 거짓말이듯이 사실로 가도 간것이
아니고 와도 온것이 아니고 가도  오도 안했다고 해도 가도오도 안한 것도 아니
다.부처님께서 생사의 큰 꿈을  완전히 깨우게 하는 8만4천 가지 방법으로 지도
하는 그 제일 요긴한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문
제로서의 문제가 아닌 문제가 아닌 문제이기 때문에 깨닫기 이전의 문제도 아니
며 또한 깨달은 이후의  문제도 아니다. 왜냐하면 깨닫기 이전은 어두운 종생들
의 생사 꿈이요, 깨달은 뒤라면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의 꿈을 벗어나지 못한 것
이다. 과연 이  꿈을 어디서 깨야 깨는  것일까? 생시도 이놈이요, 잠시 들어도
이놈이요, 꿈에도 이놈이다. 태중에서도 이놈이요, 배 밖에 나와서도 이놈이요,
늙어서도 이놈이요, 병들어도  이놈이요, 죽는 때에도 이놈이요, 억만집 이후에
도 이놈이요, 소나 개로 태어나도 이놈이요, 지옥을 가도 이놈이요, 천당극락을
가도 이놈이요, 억만겁 이전에도 역시 이놈이었다.
 이 천지에 이놈만은  어디에 빠져 있어도 물  한방울이 묻거나 젖지 아니한다.
진실하고 깨끗하고 자유자재한 변하지 아니하는 실상 자리로서 사고방식이 미치
지 못한다. 어느 때에는 중생도  되었다가 홀연히 부쳐도 된다. 그러나 또한 부
처도 중생도 아니다. 따라서 생사도 열반도 보리도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
인가? 이놈! 잠을 자다가 잠이 아닌 꿈으로 나갔으니 잠도 아니고 꿈도 채 아닌
그 순간은 면목이 무엇일까? 꿈에서 깨어 생시로 나가니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
닌 그 즈음에는 무슨  상태일까? 이놈이 자유 천지에서 뛰노는 법계의 주인공이
다. 이놈이 중생의 생사 꿈도  이루고 부처의 열반 꿈도 이루는 것이다. 무실무
허한 것도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시는  것은 범부가 이
마음 자리 말하는 이것이 불생불멸의 존재구나 하는 원리를 의지해서 그걸 한번
ㄲ달아봐야겠다고 확실히 인식이 돼서 하나부터 열까지 목숨을 걸고 할 일이 이
것뿐이라고 마음 속에 깊이  작정이 되면 이것이 범부의 발심이다. 그렇게 하다
가 정진해서 계행을 지키고 만행을  닦아 점점 깊어져서 아공, 법공, 구공을 초
월해서 뭐라고  이름지을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이르면 그걸 (아뇩다라삼먁삼보
리)라 한다.
 깨달았다는 것은 이 마음자리를  알아낸 것을 말하는 것이니, 육도만행을 닦는
형식과 하등의 상관도 없다.  육도만행이라는 법은 다 이 범부 중생들을 불법으
로 인도해 들어오게 하는 방편이 아닌가. 가령 무량겁을 닦아서 보리진여해탈실
제법심을 얻어 바로 십지에 올라서서 사과성위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다 이것
은 성불해 가는 도중의 일이므로 불심인 이 마음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부처
님의 무심경계에서는 채용이 둘이  아니므로 생각이 움직여도 무심히 움직인 것
이어서 뭉직인 게  아니다. 마치 물이 일어나고  꺼지고 해도 물의 본 성질에는
아무 변동이 없듯이 이 무심히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채용이 둘이 아닌 구경의
자리다. 이 자리는 부처님뿐  아니라 중생들이 제가 몰라서 그렇지 중생들 자신
도 본래는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중생들이 망념, 착각 ㄸ문에 모든 것이 마음대로 안되지만 사실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내가 마음대로 안되도록 해놓은 것이므로 결국은 마음대로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한쪽 신통은 ㅇ은 셈이다. 이렇게 한쪽 신통만을 고집하다 도리
어 구속당하는 중생의 허물을 벗어나는 비밀방법은 오직 한 길 무심뿐이니 인간
은 모든 생각 비울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 전체를 쓰지 못
하고 한 쪽 신통만을 고집해서 도리어 구속을 당하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별다
리 특별한 보리심을 일으켜 가지고 불법을 배워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대 뜻대로 하라. 그러한 별다른 보리심을 가지고는 무량 백천먼겁을 닦더러도
다만 보신불이나 화신불은 될지언정  그 본래 마음자리인 천진불과는 아무런 교
섭도 없는 것이다.
 모든 큰 보살들의 거룩산 일체공덕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이 마음밖에 있
는 것이 아니니, 깨닫기만 하면  곧 이마음이 부처인 것을 안다. 그런데 근래에
불도를 닦는 사람들이 흔히들 곧  이 마음을 ㄲ치려고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마
음 밖인 딴 곳에서  형식적인 가지가지의 방문에 의하여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마음을 닦는 법과는 전반대되는 길이다.모래밭을 한량없이 많은 모든 부
처님과 보살님 또는 8만4천의 왕들이 밝고 지나거도 저 모래들은 기뻐하지도 아
니하며 또한 소, 개, 염소, 똥벌레가 지나가거나 송장이 썩고 있거나 해도 모래
알들은 싫어하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의 이 마음도 또한 청정하여 아무 생각도 모양도 없으므로, 범부
중생과 부처가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이니, 다만  곧 이 마음에서 모심할 줄만
알면, 그것이 곧 불법의 궁극인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당장에 무심할 줄
모르면 영겁에도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또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문자에
사로잡혀도 생사를 벗어나가기 어렵다.  한 마디 법을 듣고 즉석에서 무심해 버
렸거나 무량겁으로 드나들며 한량없이  닦은 뒤에 비로소 무심하여 부처를 이루
는 이거나 그 결과는 다 똑같은 것이다. 무심하면 곧 부처이니 새삼스러이 닦을
것도 없고 깨달아 들어석 곳도  없고, 또한 이 지경에는 사실상 얻은 것도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어서, 진실하며 헛되지 아니한  것이다. 쉽게 깨달았거나 그
도의 공덕에 깊고 얕음의  차별은 없는 것이다. 꿈틀거리는 작은 벌레까지도 저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무량한 보살 대중과 같이 이 마음으로 평등하여 털끌만큼
도 다름이 없다.
 수도하는 사람으로서 주의할 바는 세상만사를 다만 보고 듣는 데서 그칠뿐, 옳
고 그른 것은 따질 것이  없으며, 또한 그러한 일에 불평만으로 감정을 내지 말
것이며,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을 떠나서 따로  이 마음을 찾으려고도 말 것이
며, 보고 듣는  것을 버리며 따로 참되고 좋은  법을 얻으려고 하지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고 듣는 이것만이 곧 참된 본래 마음이라고 생각하여도 어긋나
느 것이다. 또한 보고 듣는 것과 떨어져 있는 줄 알아도 잘못이다. 어떠한 주의
주장을 세우지 말며, 무슨  일이든지 살고 죽는 일에까지라도 태연 무심하면 탕
탕하여 걸림이 없는  경지에 소요자내하므로, 어떠한 곳일지라도 수도장이 아닌
곳이 없다. 본래부터  청정한 부처인 이 마음자리에는  아무 것도 ㅇ으며, 또한
소유물을 간직한 것도 없다.
 어느 때든지 도를 깨닫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순간작이어서 1초도 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깨닫고  보면 저 과거에 천만다행으로 드나들며 수행을 한
것이 다 헛된  짓 한 것임을 마침내 일게 된다.  마치 힘센 장사가 자기 머리에
꽂은 구슬을 찾던 일과 같아서,  다만 본래부터 자기 머리에 꽂혀 있던 그 구슬
을 발견한 것 뿐이므로, 따로  찾느라고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한 것과 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구슬을 구슬대로 온전했던 그 일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선 꿈 밖에서 꿈울  깨어가지고 (그대로 전체가 꿈 아니라)고 하긴 그
게 바로 무실무허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구렇다
고 거짓말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한마디로  하자면 환의 존재이기 때문에
허망하다. 그레서 (내가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 한다)고 하셨다.
 대개 도를 닦는 데는 그  방법이 한량없으나 그것을 묶어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째는 정신으로써 들어서느 법이요. 둘째는 행동으로써 들어서는 법이다.
먼저 정신으로써 들어서는 방법은 불도를 닦아 이 마음을 깨달아 죽지 아니하고
우주에 자연스런 사람이 되고자  하면 부처님의 말씀과 조사들의 말씀을 자세히
배우고 철저히 들은 다음에 백번  죽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아니할 발
심과 정신을 성취하여 부처님과  달마조사에지지 아니할 용기로써 저 청산 깊숙
이 들어가서 조용히 앉아 생각하되 보든 중생들이 다같이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
니하며 천지만물에 걸림없이 자유자재한 이 마음 하나만이 자아일 뿐인데, 다만
이 육신을 자아라고 착각하여 일어나는 번뇌망상 때문에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
이다. 만약 허망한  일을 버리고 마음의 고장으로  돌아가고자 하거든, 먼저 이
마음을 꽉 막힌 벽과간이 부동하게 하여 앞뒤가 뚝 끊어져서 적멸무위하며 청정
본연한 고장 마음이 되게 해야한다.
 여기에는 나도 남도 없으면 범부와 성인도 없나니 이에 굳게 멍추고 어떠한 일
을 막론하고 절대로 딴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일
은 아예 경전이나 어록 같은  것을 공부에 손해가 되는 것이니, 보지 말고 열심
히 정진만 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천진한 본 고장이므로 새삼스러이 이것을
되따지거나 또한  딴 망상을 내지 말고,  그대로만 정진하여 고요하고 깨끗하게
나아가면 이 마음을 크게 깨칠 날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정신 놀음으로 들어서
는 방법이다.
다음 행동으로 들어서는 방법은 이른바 네 가지 방법이 있는데, 8만4천 가지 수
도방법이 다 이 가운데 들어  있다. 그 네 가지 방법이란 원수풀이와 인연 맡겨
두기와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과 조작없는 본연의 마음 그대로 살기이다. 첫
째, (원수풀이)란 것은, 만일에  공부하는 도인이 어떠한 고생을 당할지라도 스
스로 생각하되 내가 과거 무량겁에 이 본연의 마음을 등지고 허망한 업보육신을
가지고 나라고 하여 찬당  지옥으로 생사에 윤회하면서 한량없이 남에게 원수도
맺었을 것이며, 남의  가슴을 태우기도 했을 것이며,  남을 손해보게 하고 남의
생명까지 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금생에는  큰죄를 지은 일이 없지마는
이것은 다 남의 전생에 지은 죄로 인과응보가 닥치는 것이요, 저 하늘이나 인간
들이 만드는 일은 아닌 것이니,  달게 받고 추호도 원망하지 말아야 할 것인 줄
알고 진실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하시기를 (고생을 당하더라도 걱
정할 것은 없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이러한 마음 가짐이 근본마음과 합하는 방법이가 때문에, 원수
를 만날 때 일수룩 도는 더 높아지고 무량겁에 한량없이 지은 죄를 다 창산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렇게 참으로 발심하여  도를 닦는 사람은 저 천당과 지옥에 걸
림이 없어서 자유자재로 때와 곳이 다 수도장이어서 도만 높아지고 본래 마음은
점점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 수행방법을 (원수풀이)라고 한다.
 둘째 (안연에 맡겨두기)라는 것은  인간과 만물이 다 뚜렷한 자아의 본서을 상
실하고 있다. 그것들은 웬일인지  까닭 모를 이것 저것의 인연들이 뭉쳐 있다가
없어질 뿐이다. 그리하여 더러는 고생도 하다가 잘 살기도 하지마는 저 뜬 구름
같이 인간만사가 다 인연들이  서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과보가 닥쳐와서 거들거리고 호강을  하지마는 이것도 또한 뜬그름 같아서 복이
다 되고 인연이 흩어져서 거지가  되는 것이 저 인연 그것들이 그러는 것이지만
이 마음은 털끝만큼도 변동이 없는 것이다. 행복에도 놀아나지 아니하면 이것이
마음의 본연면목에  들어맞는 법니다. 그러므로 이  수행방법을 (인연에 맡겨두
기)라고 한다.
 셋째,(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기)란 것은 일체중생들이  너무도 오랜 동안을
두고 거룩한 이 불멸의 마음이 있는 줄을 모르고 항상 그 허망한 몸뚱이에만 애
착해서 여기서 죽어 저곳에 나고  저것에 죽어 여기서 나고 하여 4생6도로 돌아
가며 태어나 언제나 그 태어난  곳을 내 고장으로 애착하고 온갖 살림살이를 다
구한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이  마음을 깨닫고 저 세속의 허망한 온갖 일을 다
버리고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며  인생의 고장인 이마음으로 돌아와서 다 마
음이 청정하며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서 할 일이 없는데 크게 안심하는 것이다.
이 몸이 비록  세상에 붙어 있으나 천지만물이  허망하여 다없는 것이가 때문에
아무 소원할 것도 없으며, 또한 좋아할 일도 없다. 죄와 복은 정함없이 항상 서
로 꼬리를 물고 바꿔지는 것이므로 그것을 따르다가는 잠시도 믿고 안심할 도리
가 없다. 이러한 삶의  뜻조차 모르면서 한없는 허욕으로 살겠다고 눈코도 뜰새
없이 날뛰어야 하니, 마치 물에  빠진 것 같고 불타는 집안에서 헤매는 것과 같
다. 이 몸이 원래 고생주머니인  것인데 누가 감히편하고자 할 것이가. 이 세상
이 이러한 곳인 줄 알았기 때문에 온갖 생각을 다 쉬어버리고 아무 것도 구하는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기기를  (구하는 것은 다 고생이니 구하지 아니하
면 참 편하리라)고 하셨다.  반드시 그러하다. 세상일에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
하면 그것이 곧 첫째가는 행복이고 자유이며 해탈인 것으로서 또한 도인의 행세
인 것이다.
 넷째 (제대로 살기)라는 것은 이 마음이 본래 모든 형상이 아니므로 온 우주에
두루하였나니 청정하여 아무 욕심이  없는 것이므로 불멸하며 자유하며 빛과 함
을 내며 우주를 창조하며 ㄸ 그를 다스린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일체만물의 바
탕으로 4행6도에 묻는 때의 일이 없으며, 또한 애착된 일도 없으며 피차가 없기
때문에 이 마음을 법이나  진리이니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
음에 법에는 깨졌다는 부처의  허물도 없으며, 탐옥의 중생의 때도 없으며 또한
나라는 아만심도 없다)고 하셨다. 지혜있는 사람이 만약 이 마음의 이치를 믿고
알아들었다면 마땅히  본래 마음으로 돌아와서 이  영원한 생명, 자유의 생명이
제대로 살 것이다.

광명을 찾아서
  우리 마음속의 본태평천진불로서 가없이 일체중생을 비추면 환몽이 곧 진이며
중생어가 곧 여래어며  중생심이 곧 부처마음이다. 치산치업과 사농공상의 생업
은 모두 본 태평 천진불이 전의하는 용상이라 도무지 이 진여의 본성을 떠나 있
는 것은 없다. 다만  중중생생이 조업한 미집으로 인하여 스스로 속아 스스로에
얽매여 미와 오,범,성  생,불,자와타,인과과,염과정,성과상 등을 소유하여 분별
하고 계박해서 해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본태평 천진불은 성성하여 요요일광
이다.
 중생들이며, 항상 진신수수하라.  스스로 조업헌 미집을 절파하는 신심을 개오
수수케 하여라. 신심은 보리심을 발하는 시초이며 일체제불의 근원이 됨이며 불
과성취의 인연이 되느니라. 신심을 이거한 중인은 사나의 신심이 수숩된 만채라
이다.중인들이여, 오늘 우리들이 믿고 있는 것이 몽환인가 살펴보자. 우리가 진
여에 계합하며 진신하고 있다면  중생을 보살피는 자비심을 더욱 현발시키고 우
리가 몽환에 편잠하였다면 이를 간파하여야 한다. 중인의 대병은 몽환인데 스스
로 이병에 빠져  병을 이롭게 하는 삼독치심을  가짐은 타삼악도할 보과일 것이
다.
 오늘날 우리들 산문은 산정의  납일처럼 소란하다. 이것은 공부에 마음을 두어
운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은  맑고 푸른데 밸을 일점이 부유하지 않는 하늘은
구저 무심할 뿐이다. 산문은 운수의 왕래와 담선이 있어야 한다. 사미행자의 율
의가 장로비구의  습행이 되어야 한다. 산문의  청규는 백장의 정맥이요 승증의
생명이다. 이것이 조계산을 푸르게  하는 총림이다. 총림은 신행이 발원하고 행
과가 만발하며 성취가 증득하는 곳이다. 합나행과 마나연이 없는 총림은 한림의
정골처럼 번뇌스럽기만 하다. 그러므로 총림은 계,정,혜, 삼학을 참수하고 이행
을 구족하는  곳이다. 이것은 중생을 제도하는  여래심의 본처이다. 산문처처와
총림방방이 모두  보살의 보시장이 되어 방생을  자재롭게 하여야 한다. 우리들
조계산하의 승가는 일시,일법,일념,일행이  부처님이 유계한 정법에서 수습하여
야 한다. 유계의 범주를  벗어남은 스스로 산문출송을 자인한 소업이리라. 사문
은 고행이다.
 안위한 해탈을 소작함이란 도시  몽한 속의 공화를 견취함이다. 고행은 자기극
복의 시초이다. 자기를  주장하는 자만을 조복받기 위하여는 고생스러운 참회가
있어야 한다. 중노릇을 꿈같이 편하게 하려는 것은 이미 중노릇이 아닌 것이다.
중 노릇은 중생활을 대신하여  사는 삶의 처음이다. 삶의 처음은 황무한 벌판에
서 길을 만들어 나아감이다.  칡덩굴 가시밭길을 탄탄대로 만드는 일이다. 중생
을 앞질러 사는 중  노릇이므로 여기는 각오와 결심이 있어야 하다. 항사모래알
보다 긴 겁수로 중노릇을 하였다 하더라도 중생을 대신하고 중생을 앞질러 고행
하고 제행을 일삼지 아니한 중 노릇이라면 한 찰나 희념보다 못한 죄업 속에 살
아온 것이다. 구러므로 우리들  중인승가는 중 노릇의 큰 마음을 지어 염념증진
하고 신신작불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중생들이여, 중생이 중생을 보살피고, 중
생이 육도를 보살피고, 중생이 인타라망을 보살피고, 중생이 유정무정 일체중생
실유불성을 보살피고,  중생이 인타라망을 보살피고, 또한  중생이 보살피는 그
중생을 보살피는 새 해가  되어야 생불이 호융하여 무별무이한데 생불을 어디서
찾을 건고?중생이여! 사행하여  사과하는 열반을 증득하자. 그러면 범속과 유정
과 정각유정을 어떻게 분별할 것이가. 모두가 일생성불의 우담발체를 개발할 것
이다. 금시금일에 생불을 호응케 하고 중생을 보살피게 할 것이다. 이것은 초발
신심을 구경불과에 오르게 한 문무의 공부다.
 승가여! 조계산문이여! 안으로 계, 정, 혜를 수업하고 밖으로 방생보시하여 출
가장부의 본지를 살리자.  우리의 해태심에 삼아승지겁의 과보가 됨을 자각하여
중 노릇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여 도제양성, 포교사업, 역경불사를
잘 이끌어 나갈 것이다. 이 삼대본업의 처음도 진승의 행동에 있고 회향됴 진승
의 노력에 있는 것이다. 능엄의 대다라니백번 외어 참회한다 손치더라도 중생을
보살피는 큰 마음보다 못하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인데 보살되는 마음이 보살이다.
사부대중즉 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들이여 우리는 정계를 지키며 정법을
수호하여 스스로를 보살피며 구제하는 데 힘쓸지어다. 그리하여 나라 안팍과 시
방셰계가 부처님의 광명받으사 평화롭고 풍요로운 열반 깃들게 하여라.

욕도 칭찬도 없는 자리
 요사이 구두선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 절에서 쓰는 문자가 하나씩 하나씩
사회에 나간 말입니다. 것을  입으로 배운 사람이지 참말로 앉아서 정진한 사람
은 아니라는 뜻을 구두선이라  한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거짓말하는 것, 책임없
는 말, 실천없는 말을  뜻하는데 그러나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이런 말씀을 하
셨습니다. 큰 집에 불이  났는데 집안에서 장난에 정신이 빠진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아이들이 평소에 좋아하던 양수레 사슴 수레 소수레가 밖에 있으니 나와서
가지고 놀라고 하여 아이들을  불덩이의 재난 일보 직전에서 무사히 구출해냈다
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자식들을 살리려고 부모가 거짓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
라 참말보다 더한 참말입니다.  부처님이 49년 동안 고구정년으로 말씀하신 8만
4천의 법문도 사실은  중생들의 꿈을 깨워주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실상 자리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살고 계신 박고봉스님이라고 공부를 잘 하
는 스님인데 송만공스님 제자입니다. 한 번은 고봉스님이 만공스님 계시는 토골
을 내려다보고 (도둑놈 만공아 송  만공아. 네가 견성을 했어? 이 도독놈아. 견
성을 점 내놔 봐라.)이렇게 욕을  한나절을 퍼부어 놓고는 절 큰방에 내려가 앉
아 있었습니다. 그 절에 참나무 절굿대가 큰 게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찧을 수
도 없는 것이데  만공스님은 이것을 들고 (이놈을  이것으로 쳐 없앨 수밖에 없
다. 욕을 해도 분수가  있지)하며 이 몽둥이를 들고 찾아 다닙니다. 만공스님의
힘이 장사입니다. 밥 푸는 놋주걱,  놋그릇 두꺼운 것을 종 만든다고 많이 모았
는대, 만공스님 혼자 앉아서 종이 포개듯이 접어거 갭니다. 우리가 평소에 만공
스님 힘쓰는 것을 이때 처음 봤습니다. 만공스님이 힘이 장사인 줄을 대개 알고
있는 것은 김  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왼팔은 만공스님이 이기고 오른팔은
비기어 승부가 없을 정도입니다.  김 좌진장군과 잘 알아서 가끔 놀러오고 그랬
는데 뚝심으로 우뚝 쓰는 힘은 만공 스님의 힘이 훨씬 세빈다. 구것은 생각없이
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  스님 하품하는 소리가 이십리 밖에서 들린다고 하
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만공  스님이 (이 놈의 자식, 세상에 망신을 줘도 분수
가 있지 이렇게 까지 할 수가 있느냐. 비구니 비구가다 있는 데서 이게 무슨 짓
이냐. 용서할 수 없다. 이놈이  여기 있느냐. 어서 큰 방문을 열어라)호통을 칩
니다. 그러자 고봉스님은 문을 활짝 열고 쓱 내다보면서 (스님 왜 그러십니까.)
하고 태연하게 인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만공 스님은 (허허)하며 돌아서 가면서
바윗돌을 번개처럼 ㄸ리는데 바윗돌이 잘라져서 몇 동강이 나 버렸습니다.
 (스님 왜 이러십니까.)하는 소리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배
웠으니 알  수 있는 소리입니다만 송만공이라는  존재가 뭐 있느냐는 말입니다.
존재가 아닌 존재인데  그것은 욕을 할 수 없는  것은 더 우스운 일아 아니냐는
뜻입니다. 만일 성내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 성불하려고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
렇지만 깨쳤어도 한편은 역시 중생이 남아 있고 한편은 근본자리를 부처님과 같
이 깨쳐 놨고 아직 수치가  덜 떨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자성을 깨쳐서 자기 본
래의 면목을 보면 그중에 공부를 옳게 하거나 약갼 잘못하거나 시장을 돌아다닐
때도 그것을 보고, 산중에 있을  ㄸ도 그것을 보고 전부 그겁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돌아앉을  때도 그것을 보고 그런 경지인데 만공스님 고
봉스님 두 분이 서로 충고한 것입니다.
 당나라 당시  조주스님이라고 괸장한 도인이 있었는데,  그분이 계시던 절에서
십 리 밖 산밑에  한 노인이 호떡장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스님네들
이 조주스님을 한정없이 찾아오는데 처음  오는 사람은 그 노인이 있는 곳에 갈
림길이 있어서 자연히 길을 묻게  됩니다. 그러면 그 노인은 절로 가는 길이 아
닌 다른 갈은  가리켜 줍니다. 그 행인은 바로 가는  줄 알고 한참 올라가면 그
노인이 스님 스님 부러 놓고는 아, 그리 가면 절이 없으니 이리 가라고 합니다.
가래서 되돌아서서 내려와서는 다시 올라가서 절에 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 두 사람이 아니고 열  사람 백 사람이 그렇게 당하고 보니 (늙은이가 처음
부터 바로 길을 가리켜 주지  않고 꼭 한 번 저쩍으로 잘못 가리켜 놓고는 다시
불러서 가리켜 주고 스님네들를 놀린다.)고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문을 둘
은 조주 스님이 당장 주장자를 들고 오늘 이 자를 타살해야겠다. 공부하는 스님
네 한 시간이  바쁜데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니 당장 때려 죽여서 지옥업보를
적게 받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내려가십니다. 그러니 스님네들도 뒤에
멀찌기 떨어져서  어떻게 하나 하고 따라갑니다.  조주스님은 일부러 다른 데서
처음 오는 사람처름 노인 있는 데로 옵니다. 노인 한테 길을 물어 보니까. 역시
다른 길을 가리켜 줍니다.  그래 스님들은 저놈의 늙은이 오늘 혼나다고 하면서
어떻게 되는가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조주스님은 그저 고맙다고 하고 그냥 올라
옵니다. 그리고는 절에 와서 앉아 계십니다. 이것이 조주스님이 그 늙은이를 쳐
서 타살한 것입니다. 그게 어찌해서  타살인가. 여러분 스스로 한 번 풀어 보십
시오. 천 번 만 번 설명한 것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원자가 우주의 궁극체인  줄 알았는데 요새는 또 더윽 분석이 돼
서 전자는 중성자니 양성자니 하는 것을 밝혔고 또 그게 마지막인 줄 알고 이렇
게 생각했더니  더 근본이 되는 에네르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으로
알지 사실은 어떤 것이니 모르는 것입니다. 세밀한 그것도 물질은 물질이겠는데
이놈이 때로는 물질로 전자로 양자로 중성자고 보이고 아떤 때는 그게  또 그것
도 저것도 아닌 에네르기 존재로 보인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물질도 아
니고 전자도  아니고 에네르기 아닙니다. 이래도  보이고 저래도 보이고 하니까
마치 종소리가 깡깡도 땡땡도 아니라고 하면 사실 종소리의 실상은 우리가 모르
고 있는 것과 한  가지입니다. 그러니 아인쉬타인이 현상계가 아니고 먼지가 먼
지가 먼지가 아닌 이 이치까지 충고를 해 준 턱입니다.
 그러니까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참 진리인
실상과 현상계는 틀립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이름을 듣고 어떤 개념을 가졌
은 ㄸ 그 개념과 딱 맞는 사실이나 똑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그 이
름을 듣고 그  내용의 설명을 듣고 짐작해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과 사실과는 맞춰 보면 전혀  반대도 있고 또 비슷한 것도 있지만 딱 맞는 것
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령  비행기의 경우에도 세밀한 설계를 해 가기고 그대로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조립해서 내어 놓는 그 시간부터 숨쉬는 시간부터
설계와는 달리 부패해 가는 세상입니다. 또 만드는 그 도중에 설계와는 달리 부
패해 가는 세상입니다. 또 만드는 그 도중에 설계와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질
적인 모든 것은  찰나도 쉬지 않고 변멸하는  것이므로 완성품의 반만 만들었다
해도 실제의 설계와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천 시간쯤 비행해도 모르지만 엄
밀하게 따져서 물질적으로는 변동은  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설계에 맞은 건축도 제대로 할 수 없는거고 현상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부처
님께서는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따지는 분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불자를 안 들어 보고  하는 소리밖에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진 게 금강경이니 글자의 뜻은 전부 확실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삼천대천세계도 세계가 바세계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는 과학적이요 철
학적이요 동시에 완전한 종교입니다.  과학이 아니 과학, 종교가 아닌 종교, 초
과학, 초종교인 동시에 초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구나 마우것도 없는 걸 가지고
몇억만 배 했아면 말이 안  되고 그게 몇 배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없는  걸 없는 것으로 보는  도수가 있고, 그와 동시에 사실은
아무 도수가 없는 것이기 ㄸ문에  그렇게 뵈는 것이니 도수가 있다고 하면 마지
막이고 없다거 하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부 과학적으로 완전히 이
해할 수 있는 것이고,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이 고도로 발달할지언정 완전히 이
해할 수 있는 것이고,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이 고도로 발달할지언정 이런 원리
를 떠나서 허황되게 설명한 것은 한 자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미진 전자같
은 요소들이 뭉쳐서 태양이니  지구덩이니 화성이니 목성이니 금성이니 하는 세
계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세계가 아닙니다. 그게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있는 것
같은 거지 그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까지 세계가 말하고 중생이라 말
했지만 그게 세계가  중생이 아니며, 있다면 모두  꿈같이 있는 것입니다. 파초
줄기 속에 알맹이가 있는 지 자꾸 벗겨 버면 껍데기 뿌니고 알맹이는 없습니다.
이처럼 현상계 전체를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 아무것도 없는 데 도달합니다. 그
래서 허공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전자 이전에 에네르기 이전에 허공이 변해서 이
렇게 되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됩니다. 역시 광명이 멀리 가서 소모되고 없는 데
로 돌아가는 걸 보니 역시  물질이 생긴 것도 없는 데서 생겨 없는 데로 돌아가
는 게 아니야 하는  것은 과학자들도 인정하는 단계에 도달하거 있습니다. 이렇
듯 우주의 구성이 아무것도 아닌  허공인데 허공이 우주나 전자 산소 수소로 보
일 뿐 참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공즉시색그러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물질, 곧
색이요, 지금 있는 것이 곧 없는 거라는 그 말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은 오
천뎌 자나 되는 요점을 이백칠깁  자로 종합해서 기묘하게 되어 있는데 이 반야
심경의 첫 구절이  (색작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즉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걷 있는 것)이니  진공에 돌아가서 소모되어 있는 게 아니라 있는 그
대로 없는 것이고 있는 채로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꿈이기 때문에 내
자신이 꿈을 일으켜  놨기 때문에 있는 채로  없는 것입니다. 이 손이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는데 괜히 쓸데  없이 여기 초가 있고 손도 있고 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초가 부러지기 전에는 손이  통과되지 않는 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손에
초가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생긴 티끌로 쪼개기 전에 물체인 채 그
대로 지구가 아니라는 말이 되고 그러므로 미진 자체가 미진니 아니라는 게  어
디까지나 물질의 근본을 얘기하는  말이면서 그것이 합해서 구성된 지구라는 이
현상계 모든  물질도 그대로 곧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렇고
동시에 바다 물 보배다하는  현상계의 존재가 그대로 역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
다. 그런 걸 세계라 하고  미진이라고 한 것이므로 곧 미진이 아니고 세계가 아
닌 것입니다.
 그걸 무엇 때문에 문제로 삼았느냐 하면 (이게 지구다, 요거는 우리 대한 민국
이다, 저거는 중공이다.)그런 생각  이런 착각을 갖고 쓸데없는 객관에 대한 욕
심을 가지게 하는 데서 문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 천지가 있는
거고 만일 천지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존재라면  천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천지는 두드려 부숴야 할 것이빈다. 모든 것은 이 (나)를 도외시하고 공자니
맹자니 노자니 예수니 하는  분들이 객관이나 신에게 자신을 예속시켜서 구속되
고 얽히고 만들고 그랬지만, 인류의 오천 년 문화의 사상은 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고 전재하는 것이데  이 (나)를 밝히지 않고 항상 객관에서 진리
를 구할한 데서 잘못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교는 이 (나)의 실제를 깨닫는 것
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러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현인이나 성인은 불교에
서 말하는 불보살의  근처도 못가는 정도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ㄸ 있는 것도
없는 것도 틀린  겁니다. 모두가 다 마음의  그림자고 꿈이고 환으로 있는 겁니
다. 그러나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미진이라 한다는 말은 미진이라 이름지
을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고 무엇이든지 이름을 붙여 주면 있는 것
이란 말입니다. 크다고 하면  안크다는 말이고 작다고 하면 크다는 말이고 이렇
게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상대성 원리를 연구한다고 하
지만 아인쉬타인은 수박 겉 핥기로 조금 애기하려고 하다 갔지 불교에서 말하는
근원을 철두철미하게 알맹이까지는 미처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을 탁 놓아버리고 세상을  살면 수월합니다. 돈 모으는
것도 참말로 모으려는 욕심으로 모으는 게 아니고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하
고 하는 것이므로 남 주는데도 아무 힘 안 들이고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수
물 삼자가 청정한  것입니다. 누가 내 눈이  필요하다면 눈도 빼주고 코도 베어
주고 온갖 것을 다  보시하자는 것입니다. 삼천대천 세계의 먼지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백천 겁을 두고  약도 되어 주고 잡아 먹혀서 양식도 되어 주고 하
면 그 복이 한량없을  겁니다. 그런데 재산이나 칠보를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는 것은 한 생각  비우면 할 수도 있지만 몸뚱이 생명을 보시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한평생 두평생도 아닌 한량
없는 세월을 두고 한량없이 많은  몸을 남에게 보시했다면 그 공덕이 한없이 많
겠지만 그러나 앞에서 조주스님이  길을 잘못 가리켜 주는 노인을 타살하겠다고
내려가서 별일없이 고맙다고만  하고 돌아온 소식, 만공스님이 절구공으로 고봉
스님을 때려 죽인다고 하다가  (스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하는 한 마디에
박장 대소하고 그만 둔 그  소식을 체득하지 못하고서는 참으로 큰 공덕을 지을
수는 없으며 멉다웁게 금강반야의 도리를 받아 지닐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제 8장 인생시초
    산다는 것
  곰곰이 생각하고찬찬히 따져보소  착하거나 악하거나 지은 운명 그대로다. 대
자연과 인과사회 흘러가는 인과법칙 그 테두리 그 안에서 될만치 되고 만다. 원
인은 마음대로 결과는 구속이다. 착하고도 잘못 살고 악한 사람 잘만 사니 세상
이치 진리 없다 함부로 원망마오.  전생에 복 못 지어 명이 짧고 복이 없다. 이
세상을 원망 말고 이 내 마음 바로잡자. 강태공은 성인이되 운수 나쁜 팔십년은
앉은 자리 풀도 안나, 세상 멀리 동정호로 곧은 낚시 드리워서 액운을 넘어서고
행운의 팔십년은 주문왕의 스승되다. 석가여래 세존님은 성인 중의 성인으로 그
재질과 그 인격은 천상천하  독보로다. 사십구년 팔만장경 인류의 태양이요, 생
명근원 이 내 고장 돌아가는  그대로다. 전의 생에 지은 선악 금생 운명 좌우한
다. 천만억겁 전생부터 옳은 스승 못 만나서 이리 짓고 저리 닦아 죄와 복이 원
인되어 결과 이미 정해졌다. 원인  있고 인연 닥쳐 결과 어찌 없을소냐. 원인에
서 결과 맺고 결과 다기  원인되어 나고 죽고 나서 생사고해 돌아치니 억만겁에
끝이 없다.
 부귀빈천 그애로가 영웅법부  할것없이 도대체가 생사윤회 인과법칙 구속한다.
나고 죽고 죽고 나서 생사 서로 꼬리물어 한정없는 생사바다 몽중고생 지루하다
잘되어도 꿈속이요  못되어도 꿈속이다. 천생인간  도사이신 대자대비 불타께서
고해중생 건지고자 삼천년 전 그 옛날에 인도나라 정반왕궁 태자로서 태어났다.
십구세에 입산수도 삼십세에 견성성불 오탁악세 고해중생 암흑천지 횃불들어 사
십구년 전도하니 사부제자  생겼도다. 팔만사천 대장경은 아난존자 전하시고 정
법안장 불조혜명  가섭존자 대를 잇고 팔십평생  갸륵한 일 여덟토막 나눠보자.
첫째는 천상에서 마야부인 태중으로 둘째는 사월팔일 룸비니원 탄생하고 셋째는
사대문 밖  인생허망 깨치시고 넷째는 이월팔일  성을 넘어 출가했다. 다섯째는
설산수도 한번 앉아 육년 동안 여섯째는 정법으로 마왕 파순 항복받고 일곱째는
이월보름 구시라국 열반하다.  이와 같은 거룩하신 여덟가지 모법보여 시방세계
중생제도 팔천번째 왕래로다. 팔만사천 대장경은 둥글고 또한 밝아 인류문화 끼
침이니 보배 중의 보배로다.
 석가여래 전전생에  가리왕의 혐의입어 눈빼이고  코귀베고 사지마저 오려내니
불법보호 대원으로  거룩하신 옥황상제 보다못해 크게  성내 돌개바람 뇌성벽력
돌우박을 퍼부으니  가리왕은 참회하고 천상선약 전단향토  바른 즉시 잣우어서
원상여전 회복되다. 인육선인  대보살은 가리왕과 상제에게 한결같이 무심하다.
석가여래 과거전쟁 백천만생 수도할 제  반구절의 법 듣고자 이 몸 죽어 바치면
서 영홍천도 법을  빌며 내생 일을 부탁하니 내생  일을 부탁하니 법을 배워 도
닦는 이 아니어찌 본안보리 또 한가지 예를 들자. 옛날옛적 국옹 때에 독수리에
쫓겨드난 비둘기를 살리려고 만승천자 귀중한 몸 다 뜯어서 새밥 주다. 몸과 마
음 조복방고 무상대도 성취하여 생사를 초월하여 온 세상을 구제코자 이처럼 애
를 쓰니 시비가왕 갸륵하다. 팔만사천 대장경이 한자한자 낱낱이가 무수생명 바
쳤으니 그대로가 뼈살되다. 다겁다갱 드나들며 세세생생 애써 모아 팔만장경 전
해주사 그 은혜가 망극하다. 뼈를 갈고 살을 밴들 그 은혜를 갚을손가 마음깨쳐
중생구제 이것이 불은보답.
 발심보살 법장비구  사십팔원 세우시고 백천만겁  드나들며 남녀노소 차별없이
평등자비 보는  대로 먼저 인사하심이여 구국국민  대자비로 무량대복 지으시고
역불참선 다라니로  용맹정신 지혜 닦아 성불하신  아미타불 극락정토 장엄하니
시방제불 모든 부처 일삼아  선전이다. 이와 같은 소식 듣고 시방세계 중생들이
가기 쉽고 깨기 쉬워 너도  나도 다루어서 낱낱이 가는 사람 백천만억 되건마는
넓도 좁도 아닌 극락 많도  적도 아닌 적 아닌 대중 마음 닦아 최상공양 향상일
로 구품연대 시방삼보  받들면서 무량중생 구제로다. 탐욕악심 중생업력 오탁사
바 이룩하고 사십팔원  보살공덕 극락세계 장엄토다. 문수보살 대지혜와 보현보
살 두타만행 관음보살 서른두  몸 신통조화 중생구제 지장보살 서원력은 지옥중
생 다하도록 달마조사 구년 동안 말없이 앉으시고 헤가대사 눈속에서 팔을 끊어
법구하고 육조대사 조계종풍  달마대사 예언대로 한꽃송이다섯잎이 결과가 찬란
하다.
 이차돈은 옮음 지켜 목을 바쳐  흔 젖 솟고 자장율사 계율 가짐 죽음으로 맹세
하고 원효대사 두타만행 거리에서 왕궁에서 대자대비 베풀어서 억조창생 건지시
고 불법저통 주인공인 보조국사  태고왕사 지공나옹 무학대사 대대로 법을 잇고
서산사명 대도성취 장하신  자비방편 임진왜적 항복받아 전멸겨레 구원하다. 우
리들은 뒤를 이어 서른일곱  수도방법 육도만행 두루닦고 삼승일승 초월하며 불
법마저 벗어나서 차례단법  전후이어 불보살님 받들면서 중생교화 이룩하자. 유
리왕의 원수 풀어 노소남녀 학살할  제 서가종족 정법 믿고 인과보복 달게 받아
추호도 대항없이 죽음으로 빚갚으니 신앙이야 아마도 이로 모범 삼으리. 시간공
간 만물들이 내 마음의 그림자다. 잘된다고 기뻐 마소 내 마음의 그림자다 잘된
다고 기뻐 마소 내 마음의 그림자다. 못한다고 슬퍼마소 내 마음의 그림자다 세
상을 원망 마소 내 마음의  그림자다 불평하지 마옵소서 내 마음의 그림자다 천
상이나 지옥들이 내  마음의 그림자다. 그림자 굽었다고  미워 말고 바로 서소.
이 내 마음 바로 서면 온 세상이 바로 선다.
 온 세상 사람들아 마음밖에 천지  없다. 내 마음이 참 좋으면 온 세상이 다 좋
다오. 남의 탓을  하지 말고 이 내 마음 바로  갖자. 무서운 저 지옥도 내 발로
걸어가고 한없이  좋은 천당 내 복으로  올라간다. 고해바다 육도중생 제질질러
꿈이로다. 한 생각만 돌이켜서 이  내 보닛ㅁ 바로 깨쳐 꿈속 품의 꿈밖으로 생
사꿈을 깨고 보면 온 우주에  주인고이 내 아니고 누구던가 천상천하 나만 높다
우리마음 가르쳤네. 유정이나 무정이나  생긴 것은 없어진다. 없던 것이 생겼으
니 없는 데로 돌아간다. 근원으로  돌아가고 근원에서 싹이 튼다. 있다 없다 하
는 것이 꼬리물고 일어난다. 기멸하는 그 인연이 상대원리 어길소냐. 같은 인간
얼굴 달라 제가끔 타고난 업보 동업중생 다 각각이 업보마다 다 달라서 죽을 시
간 죽을 장소 죽을 방법 다 다르게 전생전생 그 전생에 이미 벌써 정해졌다. 아
는 것도 쓸에없고  몰랐다고 잘못 없다. 이미  정한 인과대로 사는 대로 살아간
다. 저 무거운 삼악도를 알고서야 누가 가리. 다겁다생 살아오며 오탁악세 돌아
치며 몸과 입과 마음으로 열가지  죄다 저질러 끝없는 생사고해 벗어날 길 아득
하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나의 집념
  내가 불교에 귀의한 이래의 이청담이라면 불교정화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불법은 청정본연을 말하는 것이다. 본래 청정도 주지 않는 것이어늘 하물며, 어
찌부정이 있겠는가. 그러나 정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정이 있음을 또한 어
찌하랴. 모든 종교사는 종교본연의 근본을 좀먹는 비본질적 요소와 대결하여 싸
우는 투쟁의 역사이다. 비본질적 요소는 두선 교단의 토인인계율에 도전하다 이
도전을 받고 계율의 순수를 고수하려는 정화운동은 일어난다. 근대 한국 불교의
정화운동이란 불교와 불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교단을 구성하고 있는 승
단의 정화를 말하는 것이다.  청정하여야 할 승려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
었을 때, 마땅히 본부  세존께서는 정하신 율법에 따라 대치되는 요소는 제거해
야 한다. 이  운동이 바로 근대 한국 불교의  정화이다. 어떻게 보면 현데 한국
불교사에서 정화와 반정화의 투쟁은  가장 치열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한국불
교의 정화문제는 멀리 1920년대로  소급된다. 일제가 이 땅을 침략한 이래 우리
나라 불교계에서는  여러 모로 변동이 일어났다.  그중에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승려들이 술,고기,담배를 먹는 특히 대처문제였다. 원칙적으로는 대처하지 않는
것, 이것은 부처님 이후 출가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이다. 글자 그대로 수천년
동안 움직일 우 없는  권리를 가진 전통이기도 했다. 어쨌든지간에 청정해야 할
불법문중에 훼법분자 대처승이 생겨났으니 근대 한국 불교 승단에서 막행, 막식
하여 처자를 거느린 비법승배들이 종권에 등단하고 교계를 혼탁케 한 데서 마침
내 호법정화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의 한국침략과 더불어 민족의 주체성
을 말살하려는 식민지화정책의  비호아래 파계환법자들이 사찰을 장악하고 교단
데서 당당한 호령하게 됨에  그들의 수효는 순식간에 늘어갔고 이때부터 불교는
타락의 길로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이러는 가운데 적은 비구스님들을 모다 불조
보위책으로 1926년 12월 서울  안국동 선학원을 본거지로 종풍의 중흥을 꾀하였
으니 이것이 바로 불교정화운동의  봉화인 것이다. 1950년 이후 나는 당시의 대
통령 이승만 박가를 찾아  뵙고 불교정화의 동기와 의의를 설명하였다. 그후 대
통령은 (처자있는  승려들을 사찰 밖으로 물러나고  한국 고유의 승풍과 불조의
혜명을 잇기 위해 독신승이  사찰을 지키게 하라)는 담화문운 발표했다. 그것이
정화추진의 일대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드디어 1954년 6월 20일 서울 선학원에
서는 원토비구들이 모여 교단정화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8월 20일에는 전국 비
구승대회를 소집, 정화운동의 기본방침이 결정되었다. 교계 신도의 호응은 물론
사회 일반 여론도 사회정화 민족종교부흥의 관점에서 전폭적인 성원을 보내주었
다. 이 때 나는  도총섭(총무원장)에 선출되었고 정화 완수를 위한 순교단을 조
직하였다. 2월 5일에는 정화의  실천의 제일보로 태고사에 합법적으로 입주, 조
계사라고 했다.  이때부터 정화운동은 격심한  호법투쟁양상을 띠기 시작하였고
쌍방의 충돌이 빈발하여  승가의 본의가 아닌 유혈충돌까지 발생하였으나, 한편
전국 각처에서 비구승들은 축출되고 폭행을 당했으니 충돌을 비구스님들께서 정
법에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낳게 하여 마침내 정화완수 단식기도에 들어갔
다. 1955년  6월 10일 법당에서 철야정진  단식기도를 하고 있는데 비법배(대처
승)3백여명이 새벽의 기습을  감행하였다. 기도 삼매중의 법당은 순식간에 수라
장으로 변하고 2인  3인조로 닥치는 대로 치고  받으면서 기도 중인 대중스님을
끌어내어 내동댕이를  치곤 하였다. 천인공노할 참경은  그저 입을 다물고 펜을
놓을 따름이다. 나는 이때 다친 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몇 년 동안이나 고생하
다가 부처님의 가화를 얻어 회복하긴  했다. 그러나 우리 비구승 3백 50명은 끝
끝내 굴하지 않아 순교적인 정진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피나는 정화불사는 전국
방방곡곡에 진행되어 1968년 8월 13일 총무원장으로 정화운동의 기반은 더욱 굳
히어 전국  사찰의 90퍼센트  이상이 우리  정화교단 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1962년 4월 10일 이른바 통일종단의 형성이 이루어져 이로써 정화불사는 일단락
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통합종단 내에서 일어난 몇 가지 불상사와 각 사
찰에서 자행됐던 불교신앙과는 거리가 먼 미신행위는 쉽사리 근절되지를 아니했
다. 1966년 대학불교조계종 제 2대 종정에 추대된 나는 불교 근대화작업을 추진
하던 중 정법현양을 위한  나의 염원은 더욱 불타고 있었다. 무사안일주의 문중
파벌주의 화합의 미명 아래 고개를 쳐드는 대처승 무리들의 현대사회에 대한 무
관심이 모든 풍조는 나의 염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고 그렇게 16년동안 심혈
을 기울여  투쟁해온 나의 정화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가지 고민 끝에
1969년 7월  5일 대한불교죠계종 중앙종교회에 마지막으로  근대화를 위한 유신
재건안을 내놓았다. 최후로 정화이념을 실천할 기회를 다시 한번 얻어보자는 생
각에서 였다. 화동이란 명목  아래 종회 의원 자격을 얻은 대처승들과 아합하던
무능 비구승들은 나의 유신재건안을 여지없이 묵살시키고 현대한국 불교 조계종
내에서 그토록 애타게  염원하던 불교근대화작업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이 모
든 사태를 나  스스로의 잘못으로 깨닫고 뼈저린  참회의 마음으로 종단을 떠나
불교 근대화, 정화불사의 기치를 또다시 들게 됨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는 없었
다.

청담조사 행장기
    보사의 길목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중흥조라 할 청담큰스님은 한국불교 종단의 대표요, 세
계불교의 지도자이기 앞서  한 도인이었다. 지금부터 75년전에 경상남도 진주변
두리에서 그리 대단치 않은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뜻한 바 있어 출가
를 단행, 45년동안 한경같은 신앙의 용맹정진 끝에 한 떨기 크나큰 연꽃을 피우
게 된 큰스님이다. 한국근대  불교계의 우뚝 솟은 거봉인 청담 큰스님은 조사님
으로 숭앙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미 반세게 전에 불교 학인대회랄 열어 불교의
정통을 되찾는 개혁의 횃불을 들고 씨앗을 뿌려왔으며, 40세에 유교법회를 개최
하여 호국불교로서의 면모를  각추기에 최선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1954년부터
15년 남짓 오직  정화유신을 불사를 성취하기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청정비구로
서의 조계종단을 본궤도에 올려 놓았고, 한국불교를 세계문화의 수준에 끌어 올
린 것도 청담조사가 아니고선느 현실이 어려운 과업이었다. 현세기 있어서 한국
불교에 최고 영도자의 한  분이었던 청담 큰스님으니 그늘에서 19년을 하루같이
수행해 온 나로서는 미좌의 말석에 바다와 같이 그 법을 미래세가 다 하도록 잊
을 길이 없어 부족하나마 큰  스님의 생애를 돌이켜 간추려 보는 글을 청담조사
열반 7주년을 기념하여 쓰게 되었다. 하지만 이 글은 큰스님 행장의 입문기밖에
되지 않는다. 마음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부처님의 길에 이를 것인가? 마
음이 맑고 깨끗하면 우리 사회나 나라도 저절로 잘될 수가 있다. 거듭 참회하면
서 자비의 실천에 실망하지  말 일이다. 이러한 큰스님의 유심사상은 영원한 희
망의 등불일 수 있다.  돌아볼 때 청담스님은 한두마디로써 도저히 표현할 수는
없는 무량광명의 법신이었다. 인성을  갖춘 부처님이요, 마음의 대해가 이를 만
하다. 큰스님은  어떤 일에나 순교자다운 자세로  일관하였다. 올바른 생사관을
지니고 무슨 일이든지 부처님에의  믿음을 완전히 실천하는 종교인의 참된 표본
이 되었다. 우리 같은  우승으로서느 열 배 이상 노력하고 참선공부에 정진한다
하더라도 큰스님의 절반의  절반에도 그 덕행이 미칠  수 없다. 큰 스님은 물론
한 인간으로서 더운 피를 지니고 있었고, 희노애락의 감정을 지닌 터였으나, 오
랜 절차 탁마 속에 수도와 신행으로 마침내 보살의 길에 도달하였다. 이런 점에
서도 청담 큰스님의 길은 인간으로서 누구나 참답게 사는 길목이 되어 줄 수 있
으리라 믿는다.

자비로운 한평생
  청담 큰스님은 20세기의 햇살이  동녘에 눈부신 1920년 11월 19일, 진주시 수
정동 540번지에서 한 농가의  맏아들로 법체를 드러냈다. 성산 이씨화식씨와 제
주고씨를 양친으로 하여 신기한 용꿈을 꾼 태몽 뒤에 산 용으로 세상의 빛을 맞
이하였다. 어린시절의  이름은 찬호였고 입산수도하면서  슨호라는 법명을 받았
다. 도호가 올연이가도 했으나, 큰 스님은 1954년 불교정화ㄹ 횃불을 들면서 법
호를 청담으로 하여 그밖의 다른 이름들을 버렸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청담스
님만으로 구분은 만족하셨다. 의기  논개의 충혼이 어린 진주 남강 기슭 호국사
라는 절에 다니게 되면서 차츰  마음의 눈을 뜨기 시작한 소년은 17세 무렵까지
서당에 다니다가 이듬해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해 3.1운동이 일어난 해로
전국방방곡곡에서 만세의 물결이 소용돌이침에 진주 일대인들 조용할 리가 만무
하였다. 진주 제일  보통학교 학생으로 찬호는 학생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만세
를 부르다가 일본 관헌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1주일만에 훈계방면되었으나 감
수성이 남달리 예민한 그는  항일 의식이 더욱 고조되어 있었다. 진주제일 보통
학교를 거쳐서 22세에 늦게나마  진주농고에 입학한 스님은 당시 사회의 관습에
따라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여러 가지 속박에도 불구하고 찬호 청년은 재학세
에 학우단을 조직하고, 합천해인사 호남 백양사에 입산하려 했지만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일본유학의 꿈을 실현하였고
효고껭쇼윤지에 입산하여 아끼모도 준가문하에 독실한 행자 수업을 했다.
 찬호 행자 1년반만에 환국하여 경남 고성 옥천사에 입산하고, 영호 박 한영 강
백 문하에서 득도한 것은 26세  때였다. 이 때 순호스님이 되기에 이른 그는 출
가 동기로서(나 자신을 구제하자!)  그 다음 (사회와 겨레와 나라를 구제하자!)
라는 원력을 굳혔다. 그러나  큰 스님은 젊은 시절부터우리 불교계의 마틴 루터
였다. 그 해 가을부터 개운사강원에서 운허스님 등과 불교학인대회의 발기를 하
고, 영남 일대를 비롯한 전국사찰을 순례하기도 한 순화 수좌는 이듬해 봄 서울
에서 마침내 학인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27세이 불교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
다. 순호 수좌는 1930년 5월17일  서울에 있는 개운사에서 대원 불교 전문 강원
이 대교과를 졸업하고 난  뒤에 1934년 7월15일 충남예산군 덕숭산 정혜사 능인
선원에서 만공 대선사 문하  수선안거이후, 20여년에 걸쳐 전국 각 선원에서 참
수도하였다.
 그 후 1954년 가을 서울 선학원에서 전국 비승구 대표자 회의를 주도하여 불교
정화운동을 발기했다. 20여년간 오로지 정화 불사에 몸바친 뒤로는 무서운 아라
한으로 돌변하게 된다. 그러나 정화초기의 큰스님의 과격한 행동은 단순한 급진
이 아니라 쓰러져가는 한국 불교의  정통을 바로잡고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눈
물겨운 대비원에서였다. 해방된  지도 10년 가까이 되었건만 이때의 한국불교는
썩을대로 썩어버려 목숨을  건 대수술 없이는 도저히  소생시킬 수 없는 빈사의
지겨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청담큰스님의 생애 중 가장 어렵고도
보람찼던 순간이  시작된 것이데, 흔히 스님을  가리켜 호매불굴의 월력보살로,
불세출의 구국 보살로 격조 높은  대승 보살로 우리 불자들이 추앙하는 것을 홀
로 앉아 소승적 일변사의  행결에만 전념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광명
과 자비 속으로 일체 대중을  안아들이느냐 하는 남달리 높은 이상과 깊은 원력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불교정화운동의  야전 사령관으로서, 앞장섰던 청담 스님
의 높은 법력과 대승적 원력은  사찰마다 세찬 정화유신의 불길을 활활 태워 오
렸다.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를 넘긴 끝에  어느 정도 정화불사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자 큰스님은 종단의 행정수반인 초대 총무원장으로 취임, 그 동안 나장판
이 돼버린 종단 살림을 본궤도에 올려 놓았다. 갖은 곤욕과 시비 속에서도 큰스
님은 미동도 없는 위엄과 굳은  신념으로 천 번이나 만 번이나 참아 이겼다. 종
단의 대소 직책을 싫다  않고 짊어지며 쉬지않고 성숙헤 갔음이 사실이다. 1955
년 8월29일에 대한 불교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에 취임한 큰스님은 다음해인 1956
년 1월5일 총무원장의  자리를 사임하고 대한불교중앙종회의자직에 취임하였다.
한편 이 해 10월 25일 네팔 개최의 제4차 세계불교도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
룸비니 성역화 불사는 이때부터 비롯된다. 그 후 1957년 9월 5일 경남합천 해인
사의 주지로  취임하고 다음해인  10월25일 태극주최세계불교대회에 한국대료로
참석하였다. 3년여 뒤인  1961년 그 한 해  동안 불교계에서의 큰스님의 활약을
알아보면 10월1일엔 중창한  삼각산의 도선사주지로, 다음달인 11월 1일에는 재
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으로 취임하고,11월6일 캄보디아에서 개최된 제 6차 세
계불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3개월후인 이듬해 1962년 2월 15일, 룸비
니 한국협회의 총재로 취임한 큰스님은 다시 4월6일 불교재건 비상 종회 의장직
을 맞아 4월8일 대한  불교 조계종 총무원에서 대중사 법계를 품수하였다. 재단
법인 동국학원 이사장직을 1964년  9월 17일에 맡았으며, 1966년 9월 20일엔 대
한 불교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으로 재임되었다. 1966년12월 31일자로 대한 불교
조계종 통합종단의 제2대 종정에 추대된 청담스님은 1967년 1월1일 대한 불교조
계종 전국 신도회 총재에 취임하였다. 또한 이 해에8월 20일엔 대한 불교조계종
잘로원장, 10월 20일엔  대한민국 종교인협회의장단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1968
년 4월15일  도선사에 호국참회원을 건립하였으며,  동년 8월10일 국민교육헌장
심의위원에 피임된 큰스님이었다.  1970년 7월17일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에
재임된 바 있는 큰스님은  8월15일 광복절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12일 세계불교연합회 장로협의회  회장, 9월 3일 3.1국민회의 의장에 피
선되기도 하였다. 큰 스님은 마지막해인 그 해 10월10일 부터15일까지 6일간 열
린 세계고승합동법회에 참석한는 등 불교계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다대한 업적을
남기고, 청담 큰  스님은 이 해 11월 15일, 70세의  일기로 열반에 든다. 그 날
조계사 법당에서는 경건한 기도회도 베풀어지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는 10시 15
분 주치의 서 순규박사에 의해서 청담큰스님의 임종이 발표되었다. 1971년 11월
15일, 우리 불교계는  너무나 큰 충격의 날이었다.  한평생을 교단 재건괴 불법
중흥에 바쳐 돈  청담 큰스님이 대령바에 드신  날이기 때문이다. 7순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 시도 쉬임없이 불법을 펴다가 사바의 보살행에 홀연히 종언을 고한
큰스님의 업적은 1천만  우리 불자들만의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꽃다운 나이
24세에 출가하여 20년간의 각고 정진  끝에 견성을 이러어 모든 번뇌를 진작 벗
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큰스님은 너무나도 크고 높은 이상 때문에 자기의 인격의
완성이란 미덕에 홀로 유유자적할 줄 모른채, (설령 금생의 성불을 내생으로 미
루는 한이 있어라도 모든  중생을 다 건지고 말겠다.)난 관게음보살님의 대원을
그대로 이어 받아 무며에 허덕이는 우리 중생과 더불어 살며, 우리의 고뇌를 당
신의 고뇌로 알고 살아 왔다.  무려 반 세기 동안 불교 유신, 정화 불사에 있어
서 정법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던 큰스님, 중생제도에 있어 남녀노소빈부귀천을
가림이 없이 중생을 괴로움이 있는  곳이 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고통을 함께 하
여 부처님의 자비와 광명을 나누어 주던 큰스님이었다. 큰스님의 70평생은 고난
과 인욕, 그리고 언제나 교화를 위해서 싫증을 재지 않는 설법 삼매로 일관되어
온 보살의 길이었다. 큰스님은 일찍이 입산 득도한 이래, 원적에 이르기까지 거
의 반세기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24시간 동안 오직 불법 이외에 아무것
도 생각함이 없었고, 입적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어떻게 하면 모든 중생들을
부처님의 광명과 자비 속으로 안아 들이느냐?)하는 높은 이상과 넓은 원력 때문
에, (마음)과 (나)를 설하며, 수 많안 중생들에게 신심을 일깨워 주기에 조금도
지칠 줄을 모르는 참으로  (큰스님)이었다. 또한 불의와 타협할 줄을 몰랐던 큰
스님은 한 나라의 종교적 부패가  그 나라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들고 그 겨레의
정신생활을 타락 시킨다는 사실을 미리 간파하여 우선 불교 정화의 깃발을 높이
는 한편, 나아가서는 사회정화에도 귀감을 보였다. 그리하여 큰스님은 정화불사
의 유신대업을 줄기차게 용맹으로 끝내이룩하였다. 그뿐이겠는가. 널리 세계 여
러나라 불교게에 한국 불교의  우수성을 선양함으로써 국위를 크게 향상시킨 것
도 바로 큰스님이었다. 종회 의장으로서, 세계 불교 연합 장로원장으로 뿐만 아
니라, 사회단체의 최고 협회장으로서의, 세계불교 연합 장로원장으로 뿐만 아니
라, 사회단체의 최고 지도자로서 큰스님이 끼친 바 업적은 참으로 헤아릴 숭 벗
이 많다. 정말로  이 국가와 민족과 더  나아가 세계인류에 남긴 큰스님의 본래
면목인 말고 깨끗한 자비로운  마음과 인자한 마음은, (다시 태어난대도 기꺼이
이 길을 택하겠다)라는 크고 높은  원력으로 켤코 사라지지 않고, 온 우주에 두
루 충만할 터이다. 온 중생의 가슴마다 태양처럼 찬란히 빛날 터이다. 큰스님의
육신은 비록 세상을  떠나고 안 계시더라도 큰스님의  법신만은 늘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서 모든 번뇌를  말끔히 씻어줄 것으로 믿어진다. 세수 70, 법
럽45로 대열반에 든 큰스님의  업적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의 손실이었
으나, 인류전체의 새로운 깨우침을 촉구하였다.
 
믿음의 실천자
  큰스님은 부처님의 믿음을 그대로  살고 간 대표적 불교인의 한 사람이다. 큰
스님같은 신앙인을 일컬어 비로소  우리는 실천적 종교가라고 할 수 있다. 청담
큰스님의 종교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기상이 넘쳐 있었다. 예컨대 스님의 법
어 중에서 "믿음은 죽음보다  강하다."랄 보면 이러하다. 어느 종교룰 막론하고
그 종교에 대한 순교의 가치와  순교자의 위치는 그 종교사에 있어서 지극한 비
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위기를 당했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
고 또는 그 종교의 첫발생세이 필연코 따르는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난데 있어서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든 분파의  종교와 모든 종교인들은 이러한
선각자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서  진리의 전당에서 교주가 설파하신 진리의 말씀
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불교사에도 이와같이 피를 ㅎ려야만 했던 순교
를 일찍이 불교 전수초기에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즉 신라 법흥왕
15년에 있었던  이차돈의 순교가 그것이다. 처음  신라에 불교가 수입,전포되어
왕오 이를 대흥코자 할 때에 여러 신도들이 (승려들은 머리를 깍고 괴상한 옷을
느리고 있으면 말씨도 야릇하니  상도가 아니외다 만일 불법을 백성들이게 미게
하여 필연코 후환이 있으리라)하고 절대적인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정세
를 주의깊게 관망하던 당시  내사사인 이차돈은 (이 불법의 홍전의 비상한 결심
과 실천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왕실에 나아가 자기의 목
슴을 바쳐 불법을  일으켜 뜻과 그 결심을  상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왕은 불도에 어찌  살생이 있겠느냐고 거절했으나 대신들의 의논이 백성을
현혹시키는 이 차돈을 죽어야  한다고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차돈은 (불
버이 신령하오면 나의 이  죽음에 이적이  있으리라)예언하고 목에 칼을 받으니
잘라진 목에는 흰 젖빛의 피가 공중에 속아 오르고 천지가 캄캄해지며 하늘에서
는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감히 불법을 훼방하거나 불신하는
이가 없었고 왕도 불법 신앙을 백상에게 허락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이처럼 극적인 이차돈의 일화에서  그 사실여부를 가리자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담겨진 종교의  순교적인 정신과 그 의의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특히 불교의 포교를 위하여 슨교한 이차돈은 승려가 아니고 일반 신도였다는 데
더욱 주의를 끈다. 다만 그는 법흥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있던 귀족일뿐이
었다. 그를 처형할 때에는  그의 잘려진 목에서 나왔다는 유혈에는 신라의 사회
와 왕실로 하여금 불교에 대한  적대감을 불식시키고 흔연히 신앙 할 수 있도록
합리화시키는 요소가 잠재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라하여 신라 불교는 민간
신앙은 물론 귀족과 왕실에까지 파고 들어 이른바 호국불교라는 명목으로 그 세
력을 신장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신라의 정치 문화등 모든 분야갸 불교의 영향
아래 발달되어 찬란한 불교국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
대와 사회는 급속도로 변모 진전하고 있다. 더구나 교계안에서는 근대화의 소리
가 드높아 가도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는 새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정신과 자세를 취하여 낡은  껍질을 탈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러한 사상의 구현은 오직 이 차돈의 순교정신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의
정법을 호전키 위하여 귀중한 자신의 목슴을 선뜻 바친 이차돈의 순교적 정신으
로, 오늘의 승려는 청청 수행을 철저히 하여 상단을 확립하고 삿된 미신 불교를
타파하여, 또한 사부 대중이  합심하여 불교 현대화의 길을 모색하지 않아면 안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교단 자체의  체질이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구태의연한 낡은 굴
레 속에서 머물러 있는 한, 불교 최고의 목적인 자작이나 중생제도의 실현은 불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자각과  중셍제도가 결여된 즉 상구보리를 하지 못하고,
하화중생도 불가능한 종교는 인간과는  무관한 종교가 되고 말 것이요, 또한 이
러한 종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종교는 이미 그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신라의 이 치돈은 이러한 종교의  생명과 그 사명을 구제하고 순교의 단두대 위
에 기꺼이 그 목숨을 올려  놓았던 것이다. 그 피의 대가로 많은 우리의 선조들
이 참다운 길을 찾았고, 그 생명의 빛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
리도 이 사회에 필요한 종교, 또한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종교로서 불교의 근
대화가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선각자 이 차돈이 1천 5백여
년 전에 피훌린 순교의 정신을 바르게 이해실천하는 길이다.
 여기에 한국불교  1천6백년 이래 청담큰스님의 염원과  과업이 있었던 줄안다.
종교인에 있어 믿음을 간파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믿은을 죽음과
등가물로 삼기에는 참으로 위대한 용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기에 청단 큰스님은
한국 불교중흥의 기수일 수 있었고, 유신정화의 횃불로서 영원히 불타기에 이르
렀던 줄 믿는다. 5년 전에   큰 스님이 열반했을 때 노산선생이 아래와 같이 청
담큰스님 각령앞에 추도의 노래를 지은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칠십 년 한평생 고행과 참선
  발심과 서원으로 오직 한 마음
  없음의 큰 진리를 깨달으시어
  지혜와 법력을 갖추시었네.

  (후렴)
  청담 큰스님 정신의 기둥
  가신 둣 길이 여기 계시옵소서.

  병들고 무딘 중생 건지시려고
  막대 짚고 거리로 내려오시어
  동서도 밤낮도 가림이 없이
  부처님 귀한 말씀 외치시었네.

  열반의 백팔 범종 울려 퍼지고
  금강경 독경 소리 은은한 속에
  육신은 가시어도 법신은 불멸
  성불하신 그 모습 바라봅니다.

불교 정화의 상징
  불교계는 물론 근대 한국의 거대한  정신적 지주의 하나로 살다 간 청담 큰스
님은 이미 국운이  급변하던 시절에 태어나 잠시  속세와의 인연을 맺어 가정을
가지가도 했으나, 24살 때  불법에 귀의하여 당시의 고승인 석학 박 한영강백스
님을 은사로 득도, 마침내 어렵고도 먼 수도의 길을 내디뎠다. 이로부터 큰스님
의 일생은 한  마디로 구도정진과 불교정화를 위한  거룩한 생애였다고 말할 수
있다. 큰스님은 일찍이  수도하는 무명승려로 자리할 때부너 교단정화와 불교중
흥을 위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로지 (내가 설령 금생의 성불을 내생으
로 미루는 한이 있어도 모든 사람을 다 건져 놓고 말리라)는 일대서원에서 비롯
된 것이다.  더욱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싱당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핵심을
읽고 대다수 국민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와좌왕, 사상의 혼란과 퇴폐풍조가 성
행할 무렵 큰스님은 이  나라의 혼란을 실생활과 사고방식의 혼란으로 파악하였
고, 그속에서 전통의 단절과  수도 연마의 미흡으로 한국 불교가 썩어가며 마멸
하는 몸뚱아리를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결국 큰스님은 온갖 번뇌망상을 피
을 짜고  뼈를 깎는 가혹한 수도정신에서  와해시켰고, 이것을 통해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데  어떤 예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해방과 독립, 6.25의
참화가 지나간 54년부터의  활야과 말 그대로 불교  근대화의 총수라고 할 만큼
정력적이고 헌신적인 것이었으며, 62년 통합종단을 이룩함으로써 불교 정화운동
을 일단 매듭을 지어 한국 불교사에 새로운 유신적 전환점을 찍었다. 스님의 훌
륭한 공적은 여기부너 우리가 더욱 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말하자면 민족 종
교로서 현대에 와서 구심점을 일어버린 듯이 보이기도 했던 불교를 스님은 심산
유곡의 사찰에서부터  사회로 이끌고 나와 대중들의  가슴마다 자비로운 따뜻한
손길로 포근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스님은
각 종교간에  대화를 나누었고, 모든 종교의  한국토착화를 위해 투자한 노력은
비단 종교계만의  일이 아니라, 민족적인 저력을  총화축적 시키는 한 지름길이
기도 했다. 과연 스님의 생애는 구국 재건을 위한 청정 비구승단의 부활과 불교
중흥을 위한 교육,포교,역경등의 현대화를  위한 귀한 헌신과 봉사와 희생적 노
력으로 사회정화와 국가의 유신에 전  국민이 융합 단결할 수 있는 내일을 다짐
하는 데 큰 귀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혀 불의와 타협을 몰랐던 스님은 한 나라의 운면을 비참하게 만
든다는 사실을 미리  갈파하고, 불교정화를 불퇴전의 용맹으로 끝내 이룩함으로
써 국민발전을 위한 중요한 종교적 지표를 제시했으며, 더욱이 불교적 가치관으
로써 오늘날과 같은 사상적  무정부 샹태를 극복 지양하고, 인류를 온갖 무지와
죄악, 빈곤과 비참으로부터  진정한 세계평화와 인류번영을 위한 자유로운 이상
사회건설을 일대염원으로 삼고 살아  온 큰스님은 열반의 최후 순간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체  중생을 부처님의 광명과 자비의  품속에 안아들여서 말 그대로
온전한 중생 제도의 대원력을 실천하려다 거룩한 순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생명의 목소리
  큰스님은 (사랑이 산다는  것은 바로 죽는다는 것이다.)라는 윤회사상의 존재
론적 풀이에서부터 (육신은 비록  죽어도 법신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유심철
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설법을 남겼다. 오늘날 처럼 삶의 지표를 잃은 채 그
날그날  뜻없이 살아가는 많은 대중에게 큰스님의 심오한 법어와 숱한 경구는 7
년 가뭄 속의  단비가 아닐 수 없다.  실로 대중들이 목마르게 마시고 싶어하는
생명의 목소리였다. 때문에 큰스님의 사상은 불교 신앙을 통해서 얻은 개인적인
삶을 해결하는 전통 사상의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신앙의 내적 조화로부너 민
족 번영과 인류의해방을 위한 구체화  된 신, 해, 행, 증을 바탕으로 한(월력의
행동론)이었다. 다시 말해서 큰스님 청담사상의 핵심은 중생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제반 질서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불교가 단순히 인
간의 자기 해탈의 표현으로만 고려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질서의 모슨과 질
곡으로 인한  인간의 비참에 반항으로 고려됨으로써  오늘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원력의 불교학),  즉 오늘의 미래에 대한  인간의 창조적 책임성을 바탕으로한
불교적 가치관을 사회적 질서의 전 영역에서 행동적으로 추구하는 실천불교학이
었다. 이 때문에 스님은 그  행적, 그 법문, 그 예술, 그리고 죽음조차 그 하나
하나 모두가 항상 새롭고  순수했을뿐더러 일체만물을 새롭게 하는 부처님의 진
리가 이루어지는 최후 순간까지  설령 성불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일체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민족사의 발전과정  속에서 경험되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정의와
자유의 참된 인간성으리  실현을 위해서 온갖 고난을  기쁨으로 짊어진 이 땅이
(불후의 비구)였다.  따라서 청담스님의 생애와 그  사상을 요악하면, 큰스님은
늘상 승려이기 때문에 전에  인간이라는 차원에서 사바세계를 헤매는 대중과 더
불어 살며 그들의  고뇌를 당신의 괴뇌로 알고  살아 왔다. 그래서 스님은 항상
이 번뇌 많으 세상을 거만하게 굽어보고 살지 않고, 도리어 삶의 무의미와 죄책
감, 그리고 죽음의 공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빛을 잃고 헤매는 무리와 살결을 맞
대고 감성,  이성이 교차되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이를 잡고,  그 속에서 보다
(참된 빛)과 (보다  착한 삶)(보다 아름다은 사랑)을  찾는 해탈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모든 번뇌를 능히 벗어날 수 있을 법한 일이었건만,큰스님은 너무나 인
간적이가 때문에 자기 인격의 완성이란 미덕에 홀로 교만하지 않고 당신이 피를
짜고 뼈를 깎아 성취한 모든 진선미를 적게는 남과 더불어, 크게는 민족과 더불
더, 더 크게를  삼라만상과 더물어 나누어 가지고  섬기며 사는 가장 넓은 길을
스스로 택했다.  말하자면 고뇌를 면하기 위해  부처님을 찾으면서 부처님이 곧
내 마음이기 ㄸ문에 좋은 것,  ㄱ은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포괄한 그 (마음)
을 새롭게 하는 무의 경지에서 스님은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을  자유자재로 오
간 셈이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 단순한 진리의 표현이 아니고 인간의 고통의
표현이며, 역사에 극락정토를  가져오는 혁명적인 힘이며, 사회적불의를 이기는
절대적이고  새롭고 어두움을 이기는 광명, 즉 부처님의 자비 속에서 자기 고통
의 위안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고통과 악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과
뜻을 사회적으로 행동하는 데서만이 구원한 부처님이 역사적,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스님은 (나)라는 소우주와(참나)라는 대우주를 수시로 넘나
들며 일체 만물을 새롭게  제도하려는 서원의 여행에서 그때마다 새로운 마음가
짐으로 대해 온 영원한 구도자였다. 이러한 사상적 특징이 큰 스님의 인격과 성
격을 원력 보살적 인간성으로 발전시켰고, 그러한 창조적 인간성이 애국과 정화
로 원력 보살적 인간성으로 발전시켰고, 그러한 창조적 인간성이 애국과 정화로
상징되는 호국보살적  인간형으로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이타적 인간형인 보리
(깨달음)와 번뇌와 무서운 갈등과 엄청난 독설속에서 인간 때문에 한없이 울고,
또한 인간이란 그 전체 원리 때문에 한없는 침묵을 지켰던 것인데, 이러한 구도
의 특징이  큰스님의 인격을 대승보살적 인간상,  즉 성자적 인간으로 승화시켰
다. 우리는 청담 큰스님을 따를  수 있다. 그 빛나는 길을 걷기 어려운 이 마당
에 어떻게 그  이상을 뛰어 넘느냐 하는 것은  영원한 세기적 과제의 하나인 줄
안다.

에필로그
  불교의 진리를 설파하신 세존께서는 세계를 완전한 것으로 켤코 끊어질 수 없
는 사슬로서 인고의 법칙으로 매인 영원한 사슬로서 설명하셨다. 아무도 세계를
그처럼 분명하게 말하지는 못하였고,  그것에 반대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실로
세존의 말씀을 통하여 이  세계는 수정같이 앍아지고 우연의 지배도, 신들의 지
배도 받지 아니한 홈 없고  완전한 종합체로서 나타났다. 이 세계가 선하냐, 악
하냐, 괴로우냐, 즐거우냐는 차선의 문제이다. 세계의 문제는 그것의 구성과 운
행이다. 그것을 그는 인과로써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 법칙도 그 인과를 벗
어나야 한다는 해탈의 경지에 오면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잃어버리고 만다. 여기서부터 불교는 이론을 떠나서 종교로서의 그의 길은 시작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가부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선인들이 지
적해 주었듯이 논쟁을 유발시키는 사상이나 지식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름다
울 수도 미울  수도, 지혜로울 수도 어리석을 수도  있고, 동의 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세존의 설법은 지식을 구하는 자를 위한 설명이 아니고 비애를 이기
려는 하는 자를 위한 힘인  것이다. ㄱ고 그 법설은 그의 독특한 탐구의 방법인
명상을 통하여, 참선을 통하여,  인식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배움을 통하여 이루
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진리는, 즉 인류의 평화와
안식을 배움으로써 아니고 세존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편력과 고통을 통하여 이
루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이 관계한느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
상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 그것 또한 되풀이되니 말이다.

포스트 제어

| 메일 | 인쇄

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화가 날 때 읽는 책 - 알버트 엘리스

          화가 날 때 읽는 책

  지은이:알버트 엘리스

    차례

  역자서문
  저자서문
  엘리스 사상:지정행의 치료(REBT)란 무엇인가?

  1. 우리는 분노를 느껴야만 하는가?
  사람들이 분노에 대처하는 일상적인 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분노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참신한 방법은 없는가?

  2. 당신은 어떻게 화를 내게 되는가?
  REBT 이론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당신이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고방식 또는 신념 체제에 따라서 당신의 감정(정서)이 좌우된다

  3. 분노의 광기
  적절한 감정과 부적절한 감정이란 무엇인가?
  합리적 신념과 비합리적 신념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사고와 감정은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가?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의 특징적인 사고 형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화를 내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이차적인 이득은 어떤 것인가?
  당신인 화를 냄으로써 어떤 손해를 맛보는가?
  적개심을 통제해 주는 REBT의 원리

  4. 화를 터뜨리는 데에는 우리 나름의 사상(철학)이 작용한다
  정신분석과 REBT에서의 통찰은 어떻게 다른가?
  분노와 관련된 비합리적인 상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불안과 관련된 비합리적인 상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울과 관련된 비합리적인 상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대표적인 비합리적 상념의 특징은 무엇인가?
  비합리적 신념 1
  비합리적 신념 2
  비합리적 신념 3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비난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5. 어떤 생각이 작용했기에 화가 나는가를 이해하라
  통찰 1: 당신에게 일어난 (선행)사건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가?
  통찰 2: 비합리적인 신념은 당신 스스로의 독백에 의해 강화된 것이다
  통찰 3: 비합리적인 신념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논박의 훈련이 필요하다

  6. 자기 분노의 철학을 논박하기
  '실망스럽다'는 감정과 '끔찍하다'는 감정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어떤 상황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비합리적인 생각의 토대를 형성한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말을 독백하고 있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7. 화가 나지 않도록 생각하기
  "견딜 수 없다"주의
  "해야만 한다"주의
  ABCDE의 원리
  행동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과잉 일반화의 오류
  분노란 비합리적인 감정이며 불쾌의 감정만이 합리적인 분노감정이다
  "자존심"과 "자기확신"이라는 용어의 오류를 이해하라
  자신을 가혹하게 평가하는 습관의 오류를 인식하라
  분노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변
화시키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어라

  8. 화가 나지 않도록 느끼기
  화를 내는 자신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합리적-정서적 상상(REI)의 기법을 활용한다
  유쾌한 자기 훈련의 정서적 훈련을 활용한다
  수치심 극복 활동과 모험 활동을 시도하라
  주장 훈련을 활용하라
  역할 놀이와 행동 재연을 활용하라
  정서적 발산의 기법은 오히려 비합리적인 신념과 증오심을 강화시켜 준다

  9. 화가 나지 않도록 행동하기
  실행적인 숙제를 활용한다
  조작적 조건화의 원리를 활용한다
  강화와 벌칙을 활용한다
  주장 훈련을 활용한다
  좋은 본보기의 인물을 찾아본다
  기타의 행동적인 방법들

  10.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비합리적 신념의 논박(DIBS)을 습관화하라
  어의론과 유추의 기법을 활용하라
  유머를 활용하라
  부부 싸움을 해결하려면 분노를 이렇게 처리하라

  11. 분노에 대한 이유를 달지 말라
  화를 내는 데에는 생물학적인 원인이 있다
  화를 내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비합리적인 신념 체제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화를 내지 않고도 단호한 조처를 강구할 수 있다
  화를 참는 데에는 신경증적인 원인이 있다
  분노와 증오를 정의감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TV의 폭력 장면은 폭력성을 증가시킨다
  분노의 표출을 조장하는 정신치료이론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12. 분노를 극복하는 그밖의 방법
  화를 냄으로써 얻게 되는 실용적인 결과를 검토하라
  좌절적 경험을 줄이도록 노력하라
  좌절인내도를 키우라
  자기 도취와 과대망상증을 반격하라
  인간에 대한 자유로운 태도를 지니도록 노력하라
  역사로부터 배우라
  분노와 폭력의 해로움을 자각하라
  귀인이론을 이해하라
  낭만주의와 비현실주의를 격파하라
  열등감을 극복하라
  친밀성을 높이는 의식적 행동을 활용하라
  공정한 싸움을 하라
  약물이나 술을 삼가하라
  분노에 대해 강화를 주지 말라
  실수 가능성의 철학을 지니라
  어린이나 부하의 학대를 반격하라
  당신의 역공심리를 제어하라
  비폭력의 철학을 가지라
  증오가 가지는 아이러니를 인식하라
  희생자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라
  타인과의 관계를 고려하라
  분노가 가지는 건설적인 측면과 파괴적인 측면을 식별하라
  협조적인 견해를 가지라
  분노를 극복하기 위하여 전환적인 방법을 사용하라
  우울증을 방지하는 방법들을 적용하라
  의연하라
  집단 훈련이나 워크숍에 참여하라

  13. 분노까지도 수용하기
  화가 날 때는 그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라
  화를 돋구는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대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화가 날 때는 오히려 문제 해결적인 태도로 임하라

  부록
  과제물 작성의 예

 
        역자서문

  알버트 엘리스(Albert Ellis)의 상담이론이 역자를 통하여 10년 전에 한국에 소개된
것을 시작으로 이제는 그의 사상이 교육학, 심리학, 정신치료학 등의 분야에
광범위하게 알려졌다.
  '이성을 통한 자기성장'과 '정신건강적 사고(A New Guide to Rational Living)'에
이어서 이번에 세번째로 이 책 '화가 날 때 읽는 책'을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인간의 행, 불행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보는 엘리스는 합리적 사고의
능력을 중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일상적인 생활에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마음의
평화와 생산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난해한 정신치료와 상담의 이론보다는 엘리스
사상이 독자들에게 좀더 쉽게 이해되고 수용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이 쓰여진
목적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자기 스스로의 노력을 통하여 화내는 습관에서
해방되는 방법을 자세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거의 모두가 좌절당할 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때로는 극도로 분노하여 인간관계에 상처를 주고
후회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여
의연하고 담담하게 지낼 수 있는가를 고심하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이 책이 유익하게
활용되리라고 생각한다. 엘리스가 서문에서 주장하듯이 우리가 어떠한 용어를
사용하느냐가 우리의 감정을 좌우한다. 다시 말해서 단정적인 단어를 사용하면 흑백
논리로 우리의 사고를 굳혀 주는 오류를 범하는데 이것을 그는 어의학적으로
"E-prime"이라는 공식으로 표현하였다. 이 책을 저술할 당시에 그의 합리적인 치료
사상은 RET(Rational Emotive Therapy)라고 명명되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 그는
REBT(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로 변경하였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에서
나오는 RET를 역자는 REBT로 고쳐서 표현하였다. 또한 각 장의 내용을 독자들이
보다 명료하게 개념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중요한 사상을 찾아서 각각 작은 절로
나누어 편집하였다. 엘리스의 지정행의 요법에 대한 핵심적인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제1장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사상에 대한 해설을 간단하게 첨가하였다.
  독자들이 먼저 "지정행의 요법(REBT)이란 무엇인가?"를 꼭 읽어볼 것을 당부하고
싶다. 그리고 자기의 심리적인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 갈 수 있도록 이 책의
뒷장에 소개된 부록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실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얻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수고하여 주신 학지사의 김진환 사장님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한다.

  1995년 4월 무등산 기슭에서
  역자
@ff
        저자서문

  "화내는 일"에 관한 책이 과연 또 필요한가? 지금까지 나와 있는 많은 책들이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는 울화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분노가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책들은 당신에게 두 가지 방법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한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좋지 않게 대하여 화가
나더라도, 수동적이고 비저항적인 태도를 취하라고 충고한다. 이와 같은 태도로써는,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 자기 자신이나 상황을 매우 잘 통제한다는 인상을 줄지는
모르지만, 그때 느끼는 자기만족감도 실은 의미가 없으며 당신에게 소득이 없다.
사람들은 당신이 인색하고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 것에 아무런 반대 의사가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태도를 바꿀 하등의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고, 계속해서 당신에게 부당한 대접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이처럼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당신에게
행동하도록 허용하는 결과가 된다.
  많은 책들에서 권유하는 또 다른 방법은, 당신이 느끼는 격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충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만약 당신이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대했을 때, 상대방들이 당신에게 분노를 느끼게 되며 원한을
가지고 반응하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의 접근법은 모두
약점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 중의 어느 것도 분노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과연 해결책은 무엇인가? 뛰어난 현자이며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투스는
벌써 2천년 전에, 사람들이 타인의 불쾌한 행동에 과잉반응을 하고 있으며, 약간만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면 훨씬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REBT
이론에서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지혜를 가장 현대적인 심리치료의 기법과
결합시킴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분노의 감정들을
잘 다스리면서 생활하는 요령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이러한 작업을 우리는 혼자서 해낼 수 있을까? 분명히 가능하다. 이 사실을 나는 R.
하퍼 박사와의 공저인, '정신건강적 사고(A New Guide to Rational Living)'에서
구체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 책에서 나는, 당신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절대주의적이고 명령지향적인 사고에 찬성함으로써, 어떻게 당신 스스로 분노의
철학을 형성하여 가는가 하는 점을, 또한 당신이 느끼는 분노의 밑에 깔려 있는
사고와 감정, 그리고 행동들을 바꾸기만 하면 얼마나 당신이 느끼는 분노가 줄어들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당신이 REBT 이론을 주의깊게 살펴보기만
한다면, 당신은 아주 짧은 시간내에 당신이 느끼는 분노를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REBT 이론의 핵심에서, "E-prime"이라 불리어진 독특한 언어이론을
발견하게 된다. E-prime은 유명한 언어학자인 코르지비스키(Alfred Korzybski)와 그의
추종자인 볼란드(D. David Bourland)의 저서에서 유래하는 개념이다. E-prime =
E-e라는 언어학적 공식에서, E는 표준영어 언어의 모든 단어들을 나타내고, e는 모든
형태의 be동사("이다"). 즉 "is", "was", "am", "has been", "being" 등을 나타낸다. 이
이론은, 우리가 "이다"라는 be동사를 주요 술어로 사용할 때에, 흑백 논리를
적응하므로써 진술문의 실제 의미나 생각을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죤은 정신적으로 허약하다"("John is mentally ill")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그 문장을 주어인 "죤"과 술어인 "정신적으로 허약하다"("is mentally ill")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 문장의 술어 부분에서 어떠한 것도 죤의 상태를
제한하거나 한정시켜 주는 것은 없음을 유의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개념을 좀더
자세히 검토해 보면, 우리는 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상호 독립적인 결론들을 한꺼번에
이끌어 낼 수 있다.
  1. 죤은 정신적으로 허약한 행동만을 표출한다.
  2. 죤은 정신적으로 허약한 행동을 언제나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표출할 것이다.
  3. 만약 죤이 정신적으로 허약한 행동을 표출하는 것을 중단한다면, 그것은 원래의
진술문("John is mentally ill")의 참된 뜻과는 모순될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죤"과 "정신적으로 허약함"을 두 개의 개념으로 구분하지
못하고 연결시켜 버림으로써, 우리는 둘의 관계를 마치 동의어처럼 일반화해 버리는
오류를 범한다.
  반면에, 만약 우리가 보다 조심스럽게 죤의 상태에 관하여 정확한 평가를 내리고자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죤은 때때로 정신적으로 허약한 행동을 나타내 보인다"와
같이 말할 수 있다. 위의 문장과 "죤은 정신적으로 허약하다"는 문장을 구분하는 것이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이처럼 어떤 동사의 의미를 분명히
제한시킴으로써 우리는 죤이 순전히 병리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대신에, "죤이 때때로 병리적인 행동을 하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말한다면 정확하다.
  그렇다면 이처럼 정교한 구분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고나 행동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언어라는 것은 단지 우리가 느끼고 보는 것을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언어란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언어에 의거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고한다. 많은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고와 언어의 발달은 곧,
어떤 상황에 대하여 성숙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는 능력과
직결되어 있다. REBT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흑백 논리의 경향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도록 시도하고, 그러한 경향성이 우리들의 행동과 정서생활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
을 미치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이 책에서 분노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REBT에서는 어떤
접근법으로 다루어 가는가를 검토함으로써, 위에서 하였던 논의들이 좀더 분명하게
이해되리라 기대한다. '화를 내지 않고 사는 방법-분노의 자기통제법'이라는 제목의 이
책을 통하여, 나는 앞에 말한 E-prime의 원리를 때때로 인용할 것이며, 그리고
그때그때마다 독자 여러분들은 E-prime, 사고, 행동, REBT 원리, 이들 상호간의
관계를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REBT 원리들을 배움으로써,
당신은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너무나 자주 겪게 되는 모든 곤란하고 불유쾌한 상황들을
잘 다루고 극복해 나가는 요령들을 터득할 것이다.

  뉴욕의 REBT 심리치료 연구소에서
  알버트 엘리스(Albert Ellis, Ph. D.)
@ff
        엘리스 사상:지정행의 요법(REBT)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에픽테투스(Epictetus), A.D. 1세기

  REBT(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는 미국의 알버트 엘리스(Albert
Ellis)박사에 의하여 창안된 독특한 정신치료의 이론이다. REBT는 "합리적, 정서적,
행동적 요법"이라는 뜻이므로 "합리적 정서행동치료"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간의 적응문제가 합리적 사고방식의 유무에 의하여 크게 좌우된다고 보는 그의
사상은 개인의 이성적인 생각 내지 인지적이고 지성적인 사고의 과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자는 그가 말하는 합리성이란 곧 지적인 사고과정이라는 의미라고
받아들여서, REBT를 지정행의 요법이라고 번역하였다.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그의 이론은 미국을 위시하여 세계 여러나라에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있고, 뉴욕에 있는 그의 연구소와 방대한 그의 저서를 통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심리적인 문제에 대한 도움을 받고 있다.
  전통적인 정신분석적 접근에서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이나 경험이 현재의
갈등과 고민의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하여 치료에서는 내담자로 하여금 잊혀졌던
과거 이야기를 의식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인본주의적인 접근에서도 어떤 사건과
관련하여 얽혀 있는 처리되지 않은 내담자의 감정을 상담자가 들어주는 데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치료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엘리스에 의하면 어떤 사건이 내담자의 정서적 혼란이나 고민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내담자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가 내담자의 감정을
좌우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다.
  어느 젊은이가 입학시험에 두세 번 실패한 후에 말할 수 없는 우울증에 빠져들어
매사에 의욕을 상실하고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다고 하자. 이때에 흔히들 "계속해서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건이 우울증을 가져오게 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엘리스가 주장한 지정행의 요법에서는 연속적으로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건이 우울증의
원인이 아니고 "연속적으로 시험에 떨어졌으니 이제 나는 끝장이다. 나는
불효자식이고, 사람들 보기에도 정말 수치스럽다. 내 인생은 이제 절망이다. 나는
무가치한 인간이다!"라고 비합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까지 기도하게 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시험에 떨어진 상황을 놓고서 모든 사람이 다 이 젊은이처럼
우울증과 좌절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계속해서 시험에 떨어져서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 그렇지만 할 수 없는 일. 다른 사람들도 여러 번 떨어지는데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부모님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좀더 열심히 해서 다음에
보답해 드리자"와 같이 대응할 수도 있다. 몇몇 사람은 이처럼 심각한 실의와
자포자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매일을 비관하며 소일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쉽사리 상심을 떨쳐 버리고 재기하여 건전한 삶의 자세를 되찾을 수
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가져오는가? 엘리스에 의하면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합리적인 사람들은 시험에 실패한
경험을 대단히 불편한 사건으로 지각하고,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고 서글프다는 감정을
느끼기는 하나, 그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무가치한 인간이어서 견딜 수 없다"고
까지 자학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REBT의 사상을 엘리스는 ABCDE의 원리로 간단히
도식화하고 있다.
  A(Activating Event, 선행사건) 가령 시험에 떨어졌다든지, 실직하게 되었다든지,
반대하는 결혼을 기어이 고집하는 자녀와 크게 싸웠다든지, 여러 사람 앞에서 직장의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든지와 같이 인간의 정서를 유발하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
또는 행위를 의미한다.
  B(Belief System, 신념체제) 어떤 사건이나 행위 등과 같은 환경적 자극에 대해서
각 개인이 갖게 되는 태도로서, 이것은 그의 신념체제 또는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신경증 내지는 부적응적 반응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비합리적인 신념체제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여기서 비합리적인 신념체제란 위와
같은 사건이나 행위를 아주 수치스럽고 끔찍스러운 현상으로 해석하여 자기를
징벌하고 자포자기하거나 세상을 원망하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C(Consequence, 결과) 선행사건에 접했을 때 다분히 비합리적인태도 내지
사고방식으로 그 사건을 해석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정서적 결과를 말한다.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지나친 불안, 원망, 비관, 죄책감 등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고, 소위 '신경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신신체화 질환을 앓게 되기
쉬우며, 늘 방어적 태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D(Dispute, 논박)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인 신념이나 사고 또는 상념에
대해서 도전해 보고 과연 그 사상이 사리에 맞고 합리적인지를 다시 생각하도록 하기
위하여 치료자는 논박을 시도한다.
  E(Effect, 효과) 비합리적인 신념을 철저하게 논박함으로써 합리적인 신념을 갖게 된
다음에 느끼게 되는 자기수용적인 태도와 긍정적인 감정의 결과를 지칭한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A(선행사건) 연속하여 입학시험에 떨어졌다 -> B(비합리적 신념체제)"연속적으로
시험에 떨어지다니 나는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가! 나는 견딜 수
없다" -> C(결과) 극심한 우울증과 자살경향성

  B(비합리적 신념체제)"연속적으로 시험에 떨어지다니 나는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가! 나는 견딜 수 없다" -> D(반박) "내가 연속적으로 시험에 떨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무가치한 인간인가?"
  "계속 시험에 떨어진 사실이 반드시 참을 수 없는 것인가?"
  "계속하여 시험에 떨어진 것이 실망스럽고 몹시 섭섭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가치한 인간이고 죽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상황을 그런대로
견디고 극복해 낼 수 있다" -> E(효과) 의기소침, 섭섭함의 수준에 머무름.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돌릴 수 있다.

  도표 1:A--=B--=C
  도표 2:A--=B--=D--=E
@ff
        1. 우리는 분노를 느껴야만 하는가?

  우리의 현실은 때때로 비정하여 우리가 인생에서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상황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날마다 겪게 되는 이 "끔찍함" 앞에서 매번 화를 내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가?
  우리가 화를 낼 수밖에 없다고 많은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그들은 갓 태어난
신생아들이 생후 최초의 몇 시간 동안에 분노와 비슷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어느 시대이건, 어떤 세기를 막론하고 인류는 거의 매일 자신과 많은 주변
사람들의 분노와 마주치게 된다. 오늘날 심리학자의 대다수 권위자들은,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이 세상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분노감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만약 당신이 경계 상태를 항상 유지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이용하고, 지배하고, 당신의 수동성이나 착한 성품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심만을 채우려 할뿐, 당신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심리학자들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항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 수동적이거나 침묵을 지키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이용하고
당신의 목표 성취를 방해하도록 허용하게 될 뿐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분노에 대처하는 일상적인 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분노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써, 다음의 두 가지 방안 중의 하나를 택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분노를 느끼되 그 감정을 감추고, 억누르고, 부인하고, 억압하라.
  --분노를 느끼고 그 감정을 자유스럽게 표현하라.

  화를 내지 않고 억압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에게 득이 되지 않으며,
표현되지 않은 분노는 오히려 분노를 솔직하고 자유스럽게 표현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해롭다. 수압의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노와 같은 감정은 끓고 있는 주전자 속의
수증기처럼 압력을 받으면 더 강력해지고 확장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당신이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기만 하고 자유롭게 발산시켜 주지 않는다면 직접적인 해를 입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 위암이나 고혈압 등의 신체적인 질병이나, 여타의
심각한 정신신체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당신 속에 가두어 놓기만 하면, 그 분노는 전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대부분의 경우에 당신의 감정은 더욱
악화된다. 그것은 당신의 분노가 사라지지 않고 당신의 "내장이나 창자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이제는 당신의 권리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하여
자신에게서마저 혹심하게 비판받을 우려가 있다.
  이와 반대로, 당신이 느끼는 분노를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표현한다면,
위의 경우와는 또 다른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적대적인 사람으로 간주할 것이며, 아마도 당신과 가까이하려 하지
않거나, 한층 더 심한 적대감으로 방어적인 대응을 할 수도 있다.
  몇몇 심리치료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여 보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소위 창조적 공격성(혹은 건설적 분노)의 개념을 도입하였는데,
이는 당신의 분노를 약간 통제된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표현과는 다르다.
  다음의 예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해 가면서, 분노를 다루는 여러 이론과 REBT의
해결책을 비교해 보겠다. 만약 당신이 내가 제시하는 원리들을 주의깊게 고찰해
보기만 한다면, 당신은 분노나 다른 감정에 관련된 문제들을 REBT의 지침들을
사용하여 빠르고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하리라고 확신한다.
  가령, 내가 절친한 친구인 당신에게 "너의 아파트에 룸메이트로 같이 지낼 용의가
있고, 집세도 함께 부담하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하자. 나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당신은 계약조건을 이행하기 위하여 집을 수리하느라고 상당한 수고와
개인적인 경비를 지출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와서 내가 당신에게 "내 계획이 변경되어
지난번에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면 당신은 나에게 매우 화가 치밀
것이다. 당신은 상당한 경비를 지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제 와서 다시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해야 하는 큰 불편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당신은 화가 나는 감정을 혼자서 삭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지내다 보니까 나에 대한 원망이 마음 속에 쌓여 우리의 우정은 크게
금이 가게 된다. 갑자기 집의 문제가 복잡하게 되어가면서 당신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는 당신의 다른 활동에도 지장을 주기 때문에, 당신은 참는 방법으로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화가 난 감정을 나에게 솔직하게 표현해 버리자고 마음먹는다.
  "이봐,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가 있나? 처음부터 자네가 함께 지낼 수
없다고 말했더라면 내가 이 따위 수고를 하지는 않았을 거야. 자네, 나한테 아주
형편없이 행동하는구먼. 어떻게 친구인 나에게 그럴 수가 있지? 내가 전에 자네에게
이처럼 치사하게 군 적이 있던가? 자네가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형편없이 대한다면
도대체 어떤 친구와 우정을 유지할 수 있겠나?"
  혹은 당신이 소위 창조적 공격성을 발휘하여,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들일 능력과
마음상태를 고려한 다음에 분노의 감정을 토로할 수도 있다. 즉, 당신의 감정을
이야기해도 되겠는지에 대하여 먼저 양해를 구한 다음에 당신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다.
  당신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신의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하여도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게 되면 득보다는 손실이 더 많다. 결과적으로, 그 상황에서 공격성의 표현은
당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비록 창조적 공격성의
방식이 조금 더 부드러운 방법이긴 하지만, 두 방법은 모두 상대방의 잘못을
이야기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와 같은 초점으로는 결국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나의 "몰지각한" 행동을 노골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당신은 나의 자기방어를 부추기는
셈이 된다. 만일 당신이 나의 몰지각한 행동에 대하여 나 스스로 비판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허용했더라면,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비호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공정하게 대할 수 있는
단계로 비약할 수 있게 되어 참된 성장의 단계로 나아가서, 나의 행동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강한 자기비하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만약
당신이 남의 성격에서 잘못된 점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찾아 지적한다면, 그들은
당신이 의도한 것 이상으로 더 깊이 받아들인다. 따라서 당신의 비판적인 발언이
아무리 훌륭하고 창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죄의식이나 자기비난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며 "반격"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노의 표현을 장려하는 두 가지
접근법에 이러한 문제점이 모두 다 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당신이 지닌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당신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분노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참신한 방법은 없는가?

  앞에서 우리는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것이 좋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도
역시 역반응적인 문제들을 일으킨다는 것도 잘 알게 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간 창조적
공격성의 방식도 약간 더 효과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여전히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또 하나의 대안으로, 한 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을
내민다는 기독교적 용서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이 공격적이고 때로는 적대적이기까지 한 세상에서 그것은 너무나 비실용적인 것
같다. 사람들은 당신을 아무렇게나 대해도 좋은 사람으로 느끼고, 허울좋은 무골호인의
당신을 더 이용하려 할 것이다. 당신의 양보적인 행동이 아름답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이 당신에게 똑같이 양보적으로 대해 주거나 존경해 주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분노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찰해 보았다. 각
접근법들이 때로는 어떤 상황에서 효과를 발휘할 경우도 있으나, 모든 상황에서
분노를 효과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하며, 때로는 파괴적이기까지 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곤란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 다른 사람의
분노나 적대감을 부추기지 않고, 또 우리 자신의 인격적인 통합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색해 보기로
하자.
  다음 장세서는, 실제적으로 분노를 해결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앞에 논의된 다른
방법들이 지닌 결점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겠다. 당신이 이
책에서 제시되는 원리들을 숙고하고 충분히 실험해 볼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이 새로운 개념들을 당신의 생활에 시도해 보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열심히
일정 기간 동안 연습해 본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지정행의 요법(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이 당신의 생활에 가져다주는 새로운 변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ff

        2. 당신은 어떻게 화를 내게 되는가?

  지정행의 치료(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REBT)에서 제시하는 ABC
원리는 당신이 화가 날 때의 감정처리를 세련되도록 하게 하는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ABC가 무슨 마술적인 방법 같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느끼는 모든 분노의 문제를 아주 현실적인 방법으로 해답을 찾아 나가는 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REBT는 마술이나 어떤 신비주의적 요소 같은 것은 동원하지 않고서
다만 논리적 이론을 통하여 증명해 준다. REBT 이론은 공허하거나 환상적인 이론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냉정한 현실에 근거하여 발견할 수 있는 사실들에 의존한다.

     REBT 이론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REBT가 기존의 심리치료의 기법들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점에서 더
효과적인가? REBT의 기초적인 원리들은 나의 오랜 임상경험과 연구에서
발전되었으며, 나의 동료들과 이 분야에서의 수많은 실험들에 의하여 사실로 증명되어
왔다.
  나는 심리치료자로 일해 오는 동안에 많은 환자들을 만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치료법들을 적용해 볼 수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의 임상적인 경험과 연구를 통하여
나와 동료들은 당시의 고전적인 분석기법은 비효과적이고 비능률적일 뿐만 아니라,
치료를 원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이
말은 오로지 나의 임상적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나는 정신분석적 접근이 대부분의
환자나 치료자 모두가 지나치게 시간과 경비를 소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서적인 문제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겪는 것인데, 치료를 위하여
투자한 시간과 경비에 비하여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지 못하였다.
  나는 REBT의 중요한 원리들을 현대 심리학에서 뿐만 아니라 위대한 철학자들의
지혜에서도 많이 도출해 내었다. 나는 젊은 시절에 조예깊은 철학서들을 즐겨 읽었다.
책에서 읽었던 원리들을 내가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에 적용하여 보았더니 정신분석적
기법들을 적용하였을 때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치료의 효과를 보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환자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문제에 대하여 심리학적인 분석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분석까지 제시하였을 때, 그들은 심리학과 철학의 두 학문의 열매를 맛볼 수 있었고,
치료의 효과도 더 지속적이었다.
  당신의 문제가 좀 심각한 정도라면 나는 REBT의 전문치료자를 찾아가 보라고
권유하겠지만, 웬만한 문제일 경우에는 치료자의 도움 없이도 REBT의 원리를
이용하여 당신 스스로를 치료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어떻게 당신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절대적 혹은 명령지향적 사고에 의존하여 당신 스스로를 분노하게
만들어 나가는가를 철학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쓴 목적이다. 이러한
사고체제를 당신 스스로 통제하고 조작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이 책의 도움을 받아 가며 혼자의 힘으로도 너끈히 평소에 화내는 습관을
근절할 수가 있다. REBT는 당신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그것에 구애받지 않고서 언제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과학적 해결 단계의 공식을
고안하였다.
  전통적인 심리치료의 기법들을 사용하면서 깨닫게 되었던 가장 심각한 결점은,
환자들이 수년간의 치료를 받고나서도 여전히 치료자의 지속적인 도움이 없이는 자기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혼자 해결해 나갈 능력이 길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환자들이 그토록 많은 시간과 돈을 치료에 바쳤다면, 당연히 그들은 그에 해당하는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그 당시 나는 아주 심각하게 느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까지 사용해 온 비효과적인 방법들을 파기하고, 나의 새로운 견해에
근거한 실험적 방법들을 환자에게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심리치료에서 사용된 여러
가지 접근법들에 철학적 지식들을 접목하여 나는 REBT의 기초적인 원리들을
수립하였다. 그 결과는 충분히 값진 것이었다. 치료자가 의미없는 분석이나 해석을
해주는 데에 의존하는 대신에, 환자들이 이제 스스로 사고하고 실험해 보며 현실을
보는 안목을 가지도록 하였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자, 환자들은 정신분석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때보다도 빠른 시간내에 지속적인 치료 진전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나는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정신분석적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위하여 사실적인 예들을 사용하였다. 독자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나는 이
책 전체를 통하여 하나의 똑같은 예(이미 1장에서 제시된 예)를 가지고 설명을
해나가겠다. 나는 내 친구인 당신에게 당신의 아파트와 가구를 제공해 주기만 한다면
당신과 함께 룸메이트로 지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때부터는 소요되는 비용도 함께
나누어 지불하기로 동의하였다. 그 후에 내가 충분한 설명이나 해명도 없이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고 통보하였다. 당신은 나에게 매우 화가 났다.

     당신이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위의 예에, REBT의 방법을 사용하여 당신이 느끼는 적대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REBT의 ABC 가운데, 먼저 결과인 C(Consequence)부터 생각해 보자. C는 정서적
혹은 행동적 결과를 말하는데, 위의 경우에는 당신이 느끼는 분노가 C에 해당한다.
  그 다음에 A를 보자. A는 선행사건(Activating Event), 혹은 선행경험(Activating
Experience)이다. 당신과 나, 두 사람이 동의한 중요한 약속을 내가 지키지 않은 것,
이것이 A에 해당한다.
  우리가 A와 C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A가 C를 일으킨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놀랍게도 REBT 이론에서는, 선행사건(A)이 정서적인 결과(C)를 일으키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지는 몰라도, A가 진짜 원인은 아니라고 가정한다. 우리는
항상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에 대한 역학관계를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A와 C의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A와 C 사이에 다른 요소가 끼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즉, 비록 내가 일방적으로 우리의 약속을 깨버린 것이
당신에게 매우 불편하고 실망스러운 일이긴 하지만(나의 행동으로 인해 당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내가 취한 행동 자체만으로 당신이 내게
느끼는 분노감정의 원인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A에서 바로 C가 야기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가 어떤 특정한
상황(A)을 맞게 되었을 때는 항상 특정한 결과(C)가 오는 것으로 가정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물이 어느 지점의 온도에 이르면 끓고 또 어느 지점에 이르면
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 법칙은 물과 온도에 관한 한 어떠한 경우에도
진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상호작용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인과의 법칙이 인간생활에서는 들어맞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주어진 상황에서
보통사람과는 아주 다르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경험들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한 예로, 우리는 잔인한 범죄의 희생이 된 사람들이 경찰이나 법원과 협력하여 그
가해자를 엄벌하려고 하는 대신에 그와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경우를 종종 전해
듣는다. 그들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가해자가 구속되지 않도록 돕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만일 똑같은 범죄로 해를 입은 100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본다면 틀림없이 사람들의 반응이 각각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위의 경우처럼 행동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들은 가해자를 고소하고
구속시키기 위해 안달을 하기도 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또 다른 반응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정서적인 결과는, 비록 선행사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나,
선행사건에 의해서만 직접적으로 유일하게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요점이 있다. 우리는 부딪히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반응들을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으며, 사건 당시에는 엄청나게 느껴져 압도되지만
기실은 우리의 감정이나 반응은 얼마든지 우리가 통제할 여지가 많다는 사실이다. A와
C사이에는 사고의 과정이 중개되어 있다. 즉,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어떻게
적응할까를 결정하는 평가의 과정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사고의 과정(B)인 것이다.
우리가 중개자의 단계인 자신의 사고에 대해 잘 깨우치고 있으면 있을수록, 바람직한
방향으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색의 기회를
통하여, 충동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의 성장을 좌절시키고 혼란스럽게 할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인식이 역동적으로 정서에 주는 영향을 언어학, 철학, 심리학에서는
각각 나름대로의 전문용어를 써서 설명하고 있다. 각 분야는 설명의 관점이 약간씩
다르기 때문에 사고와 정서의 관계에 관련된 문제들이 명료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각 학문별로 꾸준히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 관한
중요한 사실들을 규명해 온 덕에 진전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비전문적인 사람들은,
우리 내부에서 사고와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연결되어 수행된다는
사실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사고과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사고방식이 우리의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당신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장해 오는 동안 어떤 상황이나 사람들,
아이디어, 사건들을 볼 때마다 어떤 평가나 판단을 내리는 가치기준을 형성하여 왔을
것이다. 이러한 가치기준이나 신념체제(B)에는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또한 당신이
소속한 사회나 문화의 가치기준과 일치하는 것도 있다. 문화가 다르면 신념체제는
아주 중요한 측면에서 달라지게 된다. 한 사회의 규범과 가치는 역사적, 문화적
관점에서 매우 달라진다고 사회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가령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아주
야만적이고 잔인한 관습이나 행동 패턴이 오늘날의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 개인은 수많은 신념체제들을 자기 내부에 지니고 있으며, 문화적
규범이라는 것도 개인이 살아가는 동안에 변화할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여러 사물에 대한 자기의 감정이나
견해를 자기 스스로 혹은 사회의 요구에 의하여 변화시키려고 하게 된다.
  모든 사회는 그 구성원들을 협력적으로 결속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지켜야 할 일련의
신념, 가치, 규범들을 제정하며 부모, 교사,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은 우리들 각자의
개인적 신념체제를 발달시키는 데 기초가 될 가르침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개인적인 신념체제가 순전히 우리 자신의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것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우리의 생각은
성인들에게서 영향받은 바가 크다.
  비록 당신의 신념체제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하여도, 신념체제에 관한
일관성 있는 기준이나 보편적 규범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행동이나 사람이 그
자체로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며, 모든 행동에 대한 우리의 판단기준은 변할
수 있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판단은 그 사람과 행동에 단지
간접적으로만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사고방식 또는 신념체제에 따라서 당신의 감정(정서)이 좌우된다

  지금까지 당신의 신념체제가 C지점의 정서적 반응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어느 정도 설명하였으므로 이제부터는 당신의 신념체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B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중요한 점이 있다. 비록 B가 당신의
반응인 C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나, B만이 오로지 C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아니며, A도 역시 상당한 정도로 당신의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항시
기억해야 한다. 당신의 반응인 C는, 어느 경우에든 A와 B의 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당신이 아무리 결사적으로 노력을 해도, 현실적으로 A에
아무런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논의를 한 단계 더 진전시켜 보면, 당신의 현실개념은 단지 당신이 외부의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의 견지에서만 해석될 수는 없다. 당신의 현실개념은 당신의
과거 경험과, 이 경험에 관련된 신념과 연상으로부터 도출된다. 당신이 취하는
행동이나 반응이 겉보기에 자동적인 행동이나 반응처럼 보일지라도 자세히 따져 보면
그것은 당신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고에 뒤따라서 취해진 것이다. 당신이
어떤 상황을 불쾌하고, 해롭고, 역겨운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곳을 피해 도망가고
싶어할 것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거기에 적극적으로 달려들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상을 인정하고, 또 우리 각자의 신념체제들이 다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어떠한 사건이나 경험도 그 자체만으로 가치기준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 신념이 지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선행사건 자체로서는 우리가 선과 악의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선행사건의 배후에 있는 "사고"라는 중개과정이 우리의 판단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장에서는 REBT의 모델을 사용하여 A와 C의 내용을 당신에게 알려주었으므로
이제부터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체제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지금부터 나는
우리가 인생에서 부딪치는 난관을 어떻게 다루어 나갈 것인가를 여러분들에게
보여주고 REBT의 모델을 여러분 스스로에게 적용해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고 한다.
물론 인생에는 수천 가지의 선행사건들이 있고, 수천 가지의 정서적 결과가 뒤따른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간에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지각하는 태도에는 사람들
나름대로의 신념체제나 사고방식이 내재하고 있다. 당신이 그 상황에서 A와 C를
지각해 내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B를 찾아낼 수 있다.
  일단 C(정서적 결과)에서 느끼는 분노의 감정(혹 자기패배적 감정)을 당신이
인식하게 되면, 그 정서(C)는 사실상 "부정적" 경험으로 이루어진 선행사건(A)에서
연유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당신의 신념체제 역시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
(C)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REBT는 당신에게
이러한 부정적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신념체제들이 어떤 것이 있는가를 정확하게
발견해 내고 그 신념체제가 기실은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점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당신에게 차츰 가르쳐 줄 것이다.
@ff

          3. 분노의 광기

  이 장에서는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이나 비합리적인 생각들을 몇 개의 범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 자신에게서 이러한 생각을 발견해 내고 이것을 수정하는
방법도 보여주려고 한다. 앞에서 우리는 지정행의 요법(REBT)을 적용할 때에 먼저
결과인 C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므로 당신의 신념체제에 관하여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소홀히 하기 쉬운 C에 대하여 중요한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적절한 감정과 부적절한 감정이란 무엇인가?

  REBT에서는 모든 감정을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서 고찰한다.
C(Consequence)지점에 나타나는 감정들을 우리는 적절한 감정과 부적절한 감정으로
나눈다.
  이 두 가지의 감정을 구분하는 데에 정확하고 엄밀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적절한 감정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하고
당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보탬이 되는 태도나
행동방식으로 이루어진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당신이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봉착하는 장애물에 접하여 지나치게 좌절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고 보다 합리적이며 행복하고 생산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그러한
감정이나 행동을 가리켜 적절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적절한
감정이란 당신이 인생에서 바라는 바를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경향을 지닌
감정이다.

     합리적 신념과 비합리적 신념이란 무엇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념체제도 합리적 신념(Rational Beliefs:rB), 비합리적
신념(Irrational Beliefs:iB)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합리적 신념에 관하여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사람들은 누구나 일련의 합리적 신념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적인 상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나, 일상생활에서의 행동을 볼 때,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행동을 방향 짓고 통제하는 데에 강한 합리적 신념을 사용하고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인류가 오늘날 이루어 놓은 역사적 진보는 기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제2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 합리적 신념을
기성세대나 조상으로부터 배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시대나 문화에 따라
변천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법률이나 사고양식은 위대한 사상가의 업적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지만 이들도 역사가 흐르면서 점차로 발전되었다. 그러므로 인류의
발전과 합리적 신념의 발전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상호작용 하는 가운데에 이루어져
왔다.
  당신이 어떤 선행경험(A)에 부딪치게 되면 대체로 합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인 방식
중의 하나로 그 상황에 반응하게 된다. 우리는 대개가 이 두 가지 방식이 혼합된
상태로 반응할 수 있지만, 때로는 어느 한 방식에 치중하여 행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합리적 신념은 철저히 외면해 버린 채, 순전히 비합리적으로 그 상황에 반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상황에 대한 당신의 비합리적 신념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당신의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앞에 들었던 예로 다시 돌아가 보자. 당신과의 약속을 내가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림으로써, 내가 취한 행동(A) 때문에 당신은 나에게 매우 화가 났다(C).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은 스스로 이렇게 독백할 수 있다. '그가 나에게 한 행동은 정말로 좋지
않다. 나를 이렇게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다니 그는 정말 터무니없다!' 이것은 일면
합당하고 당연한 독백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신이 이
문장에서 한 가지 생각만을 표현한 것 같지만, 기실은 두 가지의 생각을 이야기한
것이고, 그 두 가지 생각은 각각 따로따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가 나에게 한 행동은 정말로 좋지 않다"는 말을 살펴보자. 이 말의 의미는
"그가 나의 계획을 완전히 어긋나게 만들었고, 그의 행동으로 인해 나는 굉장히
불편을 겪을 뿐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내가 당신에게
'좋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당신의 관찰은 정확하고 또한 '적절'하기도 하다.
  이어서 "나를 이렇게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다니 그는 정말 터무니없다!"는 말을
살펴보자. 이 말에서 당신은 나의 행동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은연중에
이 상황을 비합리적 신념을 동원하여 보려 하고 있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어떤
행동이나 사건을 '터무니없는' 또는 '끔찍한' 것으로 여기는 식의 사고는 부적절하고
비합리적이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사고는 당신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일과 행복을
느끼는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 상황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고 비합리적 신념을 먼저
동원함으로써, 당신은 선행경험의 이면에 존재하는 전체의 현실을 충분히 주목하지
못하게 된다. 당신의 반응(C)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미리 심사숙고해 보지
않는다면 자기파괴적으로 행동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당신은 무조건 분노를 표현하던가 그냥 꾹 눌러 참는 방식과 같은 문제점들을
일으키게 된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 신념들을 자각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는 한, 당신은 계속해서 분노나 다른 패배적 감정을 해결하는 데에
곤란을 겪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물론, REBT에서는 당신의
감정(C)을 변화시키는 일도 아주 중요하게 보고 있으며, 당신이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법을 터득하도록 돕는 것에도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느끼는
감정이나 행동을 빨리, 가장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신념체제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REBT에서는 강조한다.

     당신의 사고와 감정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알다시피, 선행사건(A)에서 나는 우리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뜨림으로써 당신에게
부당한 행동을 취하였다.

  --이때에 당신의 합리적 신념은 "기분이 좋지 않군. 그가 나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이다
  --이때에 당신의 적절한 감정은 '실망, 불쾌감,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이 상황은 좋지는 않다'는 생각은 합리적이고, '실망감을 느낀다'는 적절한
반응이다.

  그러나, 당신은 실망의 감정을 느낀 것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분노의 감정(부적절한
감정 혹은 반응)까지도 경험하였다. 당신이 느낀 분노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고,
당신이 인생의 행복을 성취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므로 우리는 그것을 부적절한
결과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이 화를 내는 것과 같이 부적절한 반응을
보이도록 만든 배후에 어떤 비합리적 신념이 있는가를 지금부터 찾아 내보고자 한다.

  --비합리적 신념:(무엇일까?), 부적절한 반응:(분노)

  당신이 지니고 있는 신념 중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논리적이고 경험적인 검증방법을 사용한다. 어떠한 상황을 당신이 경험했다고
하자. 그때에 REBT의 치료자는 REBT의 공식에 대입해 봄으로써 당신이 A와 C에서
경험한 감정과 행동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낸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합리적 신념과
비합리적 신념을 쉽사리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면, '그가 나에게 그런 식으로 약속을
어기다니, 정말로 불쾌하구나'라는 생각 속에는 논리적으로 살펴볼 때, 비합리적인
신념의 요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일리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느끼게 될 것이다. 또 당신이 상대방의 행동을 단지 불쾌한
것으로 느꼈을 뿐이므로, 분노를 느끼는 지경에는 도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의 생각을 좀더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당신이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이렇게 무책임한 행동을 하다니, 정말 터무니없어. 이건 너무
부당하고 견딜 수 없는 일이야!" 열핏 보면 이 생각이 매우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당신의 그 독백은
분노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고 네 가지 비합리적 진술 중의
하나에 속한다. 즉, 당신은 내가 당신과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하여 터무니없고,
끔찍하고, 견딜 수 없다고 스스로 독백하였다. 당신은 '부당함'이나 '불공평함'을
끔찍함과 동일시 해버림으로써, 불공평한 것과 끔찍한 것의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이, REBT에서는 A와 C지점에서 일어난 사실을 검토해
봄으로써 그 사람의 신념체제가 어떤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감정은 대개 한정되어 있고, 그러한 감정들은 분명히 어떤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은 어떤 방식의 사고를 하기 때문에 어떤 감정을 갖게 된다. 우리가
전에도 강조했던 것처럼, 당신의 신념체제는 당신이 겪은 어떤 경험에 대하여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라는 가치판단을 부여한다. 여기서 당신은 또 한번 사고와
감정간의 강한 관계, 혹은 상호작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경험한 실체를 느끼기 보다는, 당신이 "사고"하는 대로 혹은
"기대"하는 대로 느낀다고 보는 것이 REBT의 가정이다. 당신은 어떤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느껴야 할 것이다"는 당신의 편견에 의해 왜곡된 감정을 갖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고가 감정에 우선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감정을 먼저 변화시킴으로써 사고를
바꾸려하는 것보다는, 사고를 먼저 바꿈으로써 당신의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쉽고, 빠르고, 의미있는 변화를 가져온다.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의 특징적인 사고 형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러면, 당신이 느끼는 감정 때문에 당신의 사고를 바꾸어야 할 경우가 얼마나 많이
생기는가? 당신은 당신이 취하고 있는 어떤 행동이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인 줄은
뻔히 알지만, 감정상으로는 계속해서 바람직하지 않은 그 행동을 지속하고 싶은
경우가 종종 있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감정이 배우 강렬하고 급격하게 일어났다면,
당신 자신의 생각과는 상반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행동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나마 개인적인 신념을
약간 변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그와 같은 행동으로 감정을 만족시키고 난
후에는 다시 예전의 신념으로 되돌아가게 되며, 진심으로 신념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잠깐 옆으로 밀쳐 두었다는 점에서 당신은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신이 어떻게 사고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감정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은,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사고를 변화시켰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의 네 가지의 비합리적인 진술문은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이 가지기 쉬운
비합리적 생각들을 정확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당신이 나에게 그같이 부당한 행동을 하다니,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당신의 무책임하고 부당한 태도를 나는 참을 수 없다"
  --"당신은 나에게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행동한 것을 보면, 당신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벌을 받아
마땅한 엉터리 같은 사람이다"

  이 네 가지 문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문장은 모두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며
또한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즉, 행동을 사람과 동일시하는 것,
혹은 그 사람의 부정적인 행동에 대한 평가를 그 사람 전체에 대한 것으로 확대하는
것이 공통점이다. 이와 같은 흑백 논리적인 판단이나 과잉일반화의 형태를 우리는,
"죤은 정신병을 앓고 있다. 허약하다(John is mentall ill)"는 문장의 예에서 본
E-prime 이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죤"과 "정신병을 앓고
있다"를 동일시함으로써, 죤에게서는 마치 "정신병" 이외의 다른 형태의 행동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 버린다.
  이처럼 "사람"과 그가 한 "행동"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어떠 어떠한 행동을
한 사람은 반드시 이런 사람이고, 또 그런 행동은 반드시 그러한 부류의 사람에
의해서 저질러지게 마련이다"라고 단정짓는 것과도 같다. 이 말을 좀더 구체화시켜
보면, "누군가가 좋지 않은 행동을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나쁜 사람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가 좋은 행동을 한번 하게 되면, 그는 결코 나쁜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좋은 행동만을 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어떤 이가 나쁜 행동을 한번 하게 되면 그는 결코 좋은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나쁜 행동만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는 법률적인 논리에서는 옳다. 그러나 법률적 진리와 현실에서의 실질적
진리는 엄연히 다르다. 위의 진술문의 논리는 얼핏 보기에 확실한 것 같으나, 기실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 참으로 볼 때,
'착하고 존경받는' 사람들이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반대로 사회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이
아주 훌륭하고 좋은 행동을 보여주는 경우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논리적
사고라는 것이 법률에서는 맞을지 모르나 인생에 있어서는 때때로 틀리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파트를 함께 쓰기로 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뜨린 나의 불쾌한 행동을 가지고
나라는 사람 자체를 '불쾌한 사람'으로 보고 당신 스스로 화를 냈던 문제를 자세히
검토해 보자. 이때에, C지점에서 당신이 느낀 분노의 감정에는 비합리적인 요소가
다분히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이 나의 행동과 나라는 사람을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비합리성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REBT가 모든 사람에게 또 모든
상황에 적용 가능한 절대적 법칙이나 규칙을 언급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당신의
신념체제에서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개략적인 원리"는
보여줄 수 있다.

  어떤 행동에 대한 평가를 그 사람에 대한 평가로 확대하지 않는 한, 그 신념은
합리적이다. 좀더 부연설명하자면, 당신이 상대방의 행동을 한정시켜서(당신이 경험한
결과에 한하여) 볼 수 있다면, 당신은 합리적이다. 한 삶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그가
전 생애 동안에 보인 모든 행동을 검토한 이후에야 정확하게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심각한 정신병 환자나 정신지체자가 아닌 한, 어떤 사람의 신념체제가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때때로 어떤 사물에
대한 비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채 살아간다. 우리가 지닌 비합리적 신념체제는 우리의
감정이나 행동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신념체제에는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정도의 비유로 합리적 신념과
비합리적 신념을 가지고 있느냐에 다라 선행경험에 수반되는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만약에, A라는 사건에 대해 당신이 불편함과 실망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합리적이고
적절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불편을 일으킨 사람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느낀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한 평가와 당신의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비합리적이고 부적절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이 구분을 하지 못하며, 지겨운 행동과 지겨운 사람을 혼동함으로써
부질없이 자신을 화나게 만든다. 당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
(C지점에서)실망하고 불편해 하고 의기소침하게 되는 것은 수긍이 갈 만하다. 그러나
그 행동을 한 사람이 "터무니없는 사람이다"라고 가정함으로써, 분노하고 적개심을
느끼는 것은 분명히 비합리적이다.
  좀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당신이 생각하는 사고와 당신이 느끼는 감정간의
상호적인 관계에 대하여 자세히 탐구하는 것도 매우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분명하고 완전하게 설명하는 데 동원해야 할 엄청난 양의 지식을 논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합리적인 상념과 비합리적인 상념이 공존한다는 사상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합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합리적 특성이 없었다면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지점까지 진보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와 같은 합리적인 동물이 어찌해서 비합리적인 신념을
가지게 되어, 인간의 본래의 특성에도 위배되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도 방해가 되는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많은 심리학자들이 바로 이 의문에 대해
논의하고 해답을 구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서, 인간이 나타내는 모든 행동을,
일차적 측면과 이차적(혹은 구성요소적) 측면의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나와 나의 친구의 이야기를 가지고 예를 들어 보겠다.

     화를 내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이차적인 이득은 어떤 것인가?

  당신이 나와 룸메이트가 되기로 결정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아마도 당신이 더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일차적 동기이다. 당신은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일차적 동기이다. 나와 같이 살자고
합의함으로써 행복한 생활을 성취하려고 시도한 것은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그 합의를 깨뜨렸을 때, 당신은 좌절을 경험하였다. 당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에 일이 성사되기 이전부터 우리가 어떤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더라면, 당신은 합의되지 못한 상황에 다소간 낙담하고 실망하였을지는 몰라도
나에게 크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나의 행동을 단지 "좋지 않은" 혹은
유감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수준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우리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마지막 순간에 깨뜨린 상황에서는 비록 이 상황이 당신에게는 처음부터
어떤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경우와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인데, 당신은 내게 매우 화가
나는 것이다.
  당신이 나와 룸메이트로 함께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이 결과는 마찬가지인데,
어떤 경우에는 실망하는 데 그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화가 나는 감정을 경험해야
하는가? 그것은 앞에서 우리가 발견하였던 것처럼, 당신이 나의 인격을 나의 행동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우리가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은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나와 같이 아파트를 쓰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하여 나를 어느 정도 이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의
분노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당신이 이익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니까 나를 비난하게 되고, 당신은 나의 좋지 않은 행동과 결점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나와 함께 살자고 합의함으로써 당신은 현재의 불편한 상태에서
좀 벗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인데 내가 그 합의를 돌연히 철회하게 되자, 그
가능성이 무산되어 버렸던 것이다.
  처음에 당신은 일차적 동기(행복과 만족)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이차적 행위(나와
합의한 것)를 취하였다. 당신이 분노를 느끼는 것도 이와 똑같다. 당신은 분노를
느낌으로써, 적어도 그 상황에서 오는 좌절감이 다소간 줄어드는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들은 이차적인 이익을 얻기 위하여 비합리적 신념("그가
나를 그 따위로 부당하게 대하다니 얼마나 그는 엉터리 같은 사람인가!" 등)을
이용한다. 당신은 나에게 화를 냄으로써, 당신이 처한 상황을 내 탓으로 돌려 비난할
수 있게 되며, 좌절스러운 그 상황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부당하게 행동한 나를 공격함으로써, 당신이 처한 본질적인
불만족의 상황을 직면하지 않아도 되며, 화내는 것만으로도 마치 당신이 그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차적 이득 이외에도 화를 내는 것으로 인하여 얻는 이차적 이익은 매우
많다.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인 존재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비합리적
신념들을 사용하여, 자신을 지배하고, 부적절한 행동을 하게 되는 배후에는 그러한
이차적인 이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사람들이 분노함으로써
이차적 이익을 얻게 된다면, 굳이 분노반응을 없애도록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이차적 이익의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행동의 배후에는
어떤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모든 행동은 그 밑바탕에 특수한 목적이나 의도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분노반응을 보임으로써 우리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결과로 겪게 되는
당황스러운 처리의 복잡한 감정을 완화시켜 주는 이차적 이득이 있다. 당신은 이
의도성을 의식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심리적인
의도를 활용한다. 동시에, 어떤 행동의 의도나 이차적 이익은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비합리적이고 행복의 추구에 방해가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분노는 선행경험과 비합리적 사고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화를 내게 되는
배경에는 그러한 긍정적 의도 또한 깔려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분노 자체가
지니는 엄청난 파괴적 성질을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은 화를 냄으로써 어떤 손해를 맛보는가?

  우리는 여기서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의도와 실제적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내는 행동으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1. 분노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어떤 사람이 하는 행동은 그 사람 자체와 같다"는
당신의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신념에서 비롯된다. 당신이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일방적이고 부정적으로 내림으로써, 당연히 그 사람에 대한 반응도 그러한 식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비합리적인 단정을 내림으로써 상대방의 모든 인격을
매도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은 자기의 이미지와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방어적으로 나올 것이 자명하다. 당신이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매도하는 분위기를 유지하는 한, 사태에 대한 모든 관점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는
좋은 태도를 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당신이 화를 내게 되면 당신이 처한
문제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중대한 장애가 될 것이다.

  2. 분노는 비교적 격렬한 감정으로써, 다른 생활영역에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대개
사람들이 화가 났을 때에는 자기와 관계가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도 적대적인
행동을 나타내기 쉽다. 이로 인하여 때때로 불필요한 긴장을 느끼게 되고, 당신
스스로도 비생산적인 기분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3. 당신은 화를 냄으로써 긴장감을 느끼게 되어 우울과 불안이 수반되고, 당신의
여타의 생활에 있어서도 활발하지 못하게 된다.

  4. 2와 3의 상태가 결합되어, 당신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얻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하여 다시 당신은 자신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으로 되기 쉽다. 이러한
자기비판이 심화되어 자기비하로 발전하며, "점차 내가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하는
존재적 불안감으로 확대되어 간다.

  5. 당신은 반복되는 분노로 인하여 당신 내부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심각한 긴장감을 초래하게 된다. 당신은 화가 나 있는 상황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분노를 느끼게 되며, 그러한 당신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 더욱 사태를 악화시킨다. 따라서, 분노가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키며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어 간다.

  위와 같은 사실을 볼 때에, 우리는 분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차적인 이익보다는
부작용이 훨씬 크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비합리적 신념에서
비롯된 분노반응을 통하여 당신에게 실질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적개심을 통제해 주는 REBT의 원리

  이 장을 마감하면서, 앞에서 제시했던 실례로 되돌아가 보자. REBT 모델을 상기해
보고, REBT 방법을 적용하여 문제의 시작부터 해결까지를 풀어나가 보자.
  당신은 나와 아파트에서 함께 살자는 나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당신이 맡은 부분은
아파트를 구하고 가구를 준비하는 일이었고, 나는 거기에 들어가면 되었다. 그
시간부터 모든 경비는 우리 둘이서 똑같이 부담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판에 와서
사전에 충분한 설명이나 양해도 없이 내가 당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고
꽁무니를 빼는 것이다.

  A(선행경험 또는 선행사건):내가 충분한 양해도 구하지 않고 불쾌한 매너로 약속을
어겼다.

  rB(합리적 신념):"정말 좋지 않은 행동이구나!"
  iB(비합리적 신념):"얼마나 터무니없는가, 나에 대한 그의 행동을 견딜 수 없다. 그는
나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그는 엉터리
같은 인간이며 그런 사람은 벌받아 마땅하다"

  aC(적절한 결과):실망, 거부감, 좋은 기회를 상실했다는 상실감
  iC(부적절한 결과):분노, 적대감, 복수심이나 저주

  당신이 나의 행동을 불쾌하게 판단하였고, 내가 약속을 일방적으로 철회함으로써
당신에게 큰 실망과 불편을 끼쳤으므로 더 이상 나에게 의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그걸로 당신은 현명하게 행동한 셈이다. 만약에 이 상황으로 인하여
당신이 심각한 경비 손실을 입었다면 나에게 직접 그 손실의 일부를 보상해 달라고
요구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변호사의 자문을 구할 수도 있다. 또한
장차에는 나와 되도록이면 관계하지 않음으로써 앞으로 더 실망을 느낄지도 모르는
불쾌한 경험을 예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 행동할 수 있다. 즉, 당신은 나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음으로써 나의 좋은 점을 여전히 발견할 수도 있고,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언젠가는 좋은 관계가 다시 회복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그리고 당신이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주관이 뚜렷하게 행동함으로써 내가 당신을 앞으로는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된다. 나의 행동을 가지고 당신이 나를 전적으로 배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훌륭한 판단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당신을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게 된다.
  이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REBT 방법을 적용하면 우리는 쉽게 화를
냄으로써 초래하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호간의 존경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토대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REBT 이론의 기본 원리를 설명해 왔다. 다음 장에서는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비합리적 신념을 당신 내부에서 찾아내는 여러 가지 방법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ff

          4. 화를 터뜨리는 데에는 우리 나름의 사상(철학)이 작용한다

  지금까지 화를 터뜨리는 습관을 통제하기 위해서 어떻게 REBT의 이론을 적용할
것인가를 설명하였다. 앞장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문제를 단순히 이해한다거나 문제를
야기시킨 원인을 안다고 해서, 당신이 실제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충분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정신분석과 REBT에서의 통찰은 어떻게 다른가?

  REBT 이론에서는 당신의 과거보다는 현재 상황에 대한 통찰을 얻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정신분석적 이론에서의 고전적인 치료기법들을 비판하면서, 내담자의
문제를 실지로 해결해 나가는 데에는 그의 어린 시절이나 먼 과거의 사건에 대한
통찰을 얻도록 하는 것이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좀더 분명히 해두기 위하여, 여기에서 나는 고전적인 정신분석 이론에서 말하는
통찰과, REBT에서 말하는 통찰과의 차이점을 다시 한번 밝혀 보겠다.
  당신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나 교사나 종교지도자와 환경적 여건에 의하여 크게
영향을 받아 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이 당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서, 당신이 이제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거나, 그런 영향이 결정적인
불편의 요소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동물에 대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예를 들어보자. 고전적인
심리치료기법에서는, 그가 두려워하는 특정 동물에 대하여 어린 시절에 어떤 경험을
했는가를 알아내려고 그의 과거사를 파헤쳐 거슬러 올라가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느끼는 공포증에 대하여 분석적인 해석을 내려 그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험에 의하면, 오늘날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내담자들에게는 그와
같은 통찰은 문제 해결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내담자들은 치료를 받을
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파헤쳐 통찰을 얻게 되고 지나간 공포의 상황을 반복
경험함으로써, 공포를 없애기는 커녕 그 공포를 실제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믿게 되어
오히려 강화된다. 공포는 더 커져만 가는 것이다.
  REBT 치료법에서는 그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 신념을 찾아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그가 지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비합리적 신념들을 어떻게 자기
스스로 제거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자 한다. 물론, 자신의 과거에 대한
통찰도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장 시급한 것은, 오늘 당신이 겪고 있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통찰이 아닌가? 10년이나 20년 전에 일어난
일은 오늘날에 와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이미 지나간 일일 뿐이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고정되어 버린 것이지만, 현재와 미래는 당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꾸어 나갈 수 있다.
  아동기에는 모든 것이 어른들의 손에 의하여 좌우된다. 어린 아이들은 환경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선택권을 가지기 힘들며,
그들의 사고나 판단력도 미숙하므로 더 나은 대안을 선택한다든가 하는 능력이 없는
상태이다. 아이들은 어떤 행동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다. 배고픔, 의복, 휴식처
등의 기본적인 욕구를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므로 철저하게 의존적인 위치에서
생활한다. 따라서 주변의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성인이 되어서는 보다 현명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지식과 방향감각과 독립성을 갖추게 된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성인이 된 우리에게 과연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를 정말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부모는 어느 특정 종교를
신봉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믿도록 교육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종교를
180도 바꾸는 사람도 많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신념이나 사회적 규범, 문화적인 취향,
직업 선택, 심지어는 배우자의 선택을 크게 변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사실, 부모는
자녀의 머리 속에 무엇이든지 깊이 새겨 주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 부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곧이듣고 있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고전적인 정신분석의 도움이 없이도 해내고
있는 것이다.
  REBT에서는 우리가 성인이 된 다음에는 자기 삶의 여러 가지 국면에 대한
선택권을 의식적으로 가지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우리 자신이 직접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성숙한 어른이라면 자기의
생각이나 태도,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며, 자기의 생활을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명령에
의지하여 꾸려 나간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하여야 한다. 당신의 인생을 바꾸느냐
바꾸지 못하느냐는 부모가 당신의 행동이나 태도를 관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얼마나
당신이 벗어나고자 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또한, 당신이 현재와 미래의 상황에
관심을 갖느냐의 여부에도 달려 있다. 내가 치료한 많은 환자들은 자기들 속에서
비합리적인 사고를 발견할 것 같으면, 그것을 어린 시절에 부모나 어른들로부터
배웠노라고 나에게 말한다. 실제로 몇몇의 핵심적인 비합리적 상념은 어렸을 때에
획득된 것이고, 후일에 어른이 되어서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사고란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독자적으로 비뚤어진
사고의 형태를 발전시켜 감으로써 형성이 된 것이다.
  자, 이제 REBT의 모델로 다시 돌아와서 그처럼 많은 피해를 주는 비합리적 상념을
제거하기 위하여 당신의 통찰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겠다. 앞장에서
내가 예전에 "통찰 1"이라 불렀던 것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것은 우리의 비합리적
신념(B)이 A지점에서의 우리의 경험과 C지점에서의 우리의 정서나 반응과 관련하여
상호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하여 또 다른 통찰을
얻도록 하자. 신념체제(B)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합리적
상념은 어떤 것이고, 비합리적 상념은 어떤 것인가?
  당신이 지닌 합리적 상념과 비합리적 상념을 찾아내고 구별하기 위해서는 두세
가지의 중복되는 접근법을 사용할 수 있다. 먼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보라. "내가
C지점에서 어떤 결과를 체험하기 바로 직전에 B지점에서 하는 생각이 어떤 것인가?"
이때에 분명한 해답이 얼른 떠오르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원리로 상황을 분석해 보면
된다. 당신은 A에서의 사건과 C에서의 결과를 알고 있다. C에서의 결과가 분노, 불안,
또는 우울과 같은 부적절한 감정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당신 마음
속에 있는 비합리적 신념이 작용하여 당신의 감정에 그렇게 영향을 준 것 때문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분노와 관련된 비합리적인 상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분노에 관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의 비합리적 상념을 다시
한번 적어 보자.

  --"당신이 나에게 이처럼 대하다니,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당신의 무책임한 행동을 나는 참을 수 없다"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대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당신은 부당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벌 받아 마땅한 엉터리 같은 사람이다"

  이러한 말 속에는 분명히 분노의 감정이 들어 있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C지점에서 화가 치미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체험하고 있다면 또 다른 각도에서
검토해 보아야 한다.

     불안과 관련된 비합리적인 상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불안이란,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떠한 이유로 인하여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곧 일어날 것만 같이 느낄 때에 발생하는 내적인
위험신호이다. 분노가 타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 상념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하면, 불안은 자신에 대해서 지니는 비합리적 상념들에 의해서 발생한다. 앞에서 든
예를 가지고 설명해 보자. 그 예의 상황을 약간 바꾸어, 아파트를 함께 쓸 수 없게
될거라는 말을 나에게 직접 듣기 전에, 간접적인 말이나 암시로 당신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자. 가령, 우리의 약속이 지켜질 수 없을거라는 것을 내가 다른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당신이 우연히 듣게 되었다고 치자. 당신은 아직 내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를 노골적으로 내게
물어 보자니 그 정보를 알게 된 것이 나의 사생활 침해로 여겨질 수도 있어 그러기도
곤란하다. 결국 당신은 그 사실에 대한 궁금증과 걱정을 혼자서만 삭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상황이 A라 할 수 있고, 당신이 느끼는 불안감이 C이다. 불안의 감정도
역시 REBT의 공식에서는 부적절한 결과(C)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 역시 REBT의
공식을 사용하여 당신이 A에 대하여 어떤 상념을 가졌는지를 탐색해 보자. 분노가
타인이나 대상에 대한 감정이라면 불안은 당신 내부로 향하는 감정이라는 차이점을
이해하면서, 당신은 불안의 배후에도 비합리적 신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를 함께 쓰기로 한 약속을 내가 취소한 상황에 대하여 당신이 불안을
경험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독백하고 있을 것이다.

  "네 쪽에서 약속을 어겨서 내 일이 엉망이 된 것을 내가 수습하지 못하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이냐!"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져 네가 나에게 끼칠 불편을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너에 관해서나 이 상황에 대해서 내가 시원하게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들다"
  "나에게는 상황을 해결할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내가 만일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나는 열등한 사람이며, 그 대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불안과 관련된 비합리적 상념은 분노의 경우와 거의
똑같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러한 생각이나 상념이 타인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당신
자신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우울과 관련된 비합리적 상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위의 예에서 상황을 또 약간 바꾸어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부적절한 감정을 만들어
내고 불필요하게 자신을 괴롭히는지를 알게 된다. 내가 무조건 약속을 취소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다른 지역으로 전근을 가게 되어 이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고 치자. 그
전근은 내가 정말로 원했던 승진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기에 나로서도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고, 당신은 나의 결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내게 화가 나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당신이 C지점에
매우 우울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당신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일이 그처럼 나쁘게 꼬이다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이냐!"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다"
  "일이 이렇게 불편하게 되다니 이래서는 안돼!"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본 적이 없어. 인생은 나에게 언제나 불공평하단 말이야.
이래서는 안돼!"

  위의 상념들은 분명히 비합리적인 것들이다. 우리가 울적할 때는 대부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분노, 불안, 우울과 관련된 비합리적
상념의 일반적인 특성은 거의 동일하다. 다만 비합리적 상념의 방향을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 당신이 느끼는 감정이 불안이나 분노나 우울의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타인을 비하하는 것, 자신을 비하하는 것, 이 세상을 혹평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비합리적 상념의 특징은 무엇인가?

  수년간 나와 동료들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비합리적 신념들과, 그로 인해
분노하고 불안해하고 우울해 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자세한 분석을 통하여 본
결과, 수많은 비합리적 신념들은 모두 위 네 가지의 주요한 부류 중의 하나에
속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많은 비합리적 신념들을 대표하는 위의 네 가지
신념에 대하여 그 특성을 분명하게 잘 표현해 주는 명칭을 다음과 같이 붙여 보았다.

  '터무니없다' 주의
  '견딜 수 없다' 주의
  '해야만 된다' 주의
  '벌 받아 마땅하다' 주의

  다음 장에서 우리는 위의 비합리적 상념에 대하여 따로따로 상세하게 살펴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위의 명칭만으로도 비합리적 생각이나 상념의 전반적인 색채가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오랜 임상경험을 토대로 하여, 정서적인 애로뿐만 아니라 불행하게도
생리학적인 결함을 가지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겠다. 예를 들면
간질, 난독증, 뇌염, 정신지체 등의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불편을 겪으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은 그들에게 보통사람보다 훨씬 큰 장애물로 여겨지며, 이들이
행복하고 생산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동안 치료기관이나 엄격한 감독하에 생활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심각한 정서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 자신과의 차이점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열등감과 무가치감이라는 심각한 정서적인 문제를 발달시키게 된다. 특히 장애아동은
다른 아이들과 같이 있을 때에 더욱 심한 정서적인 문제를 갖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이러한 아동이 신체적 장애 때문에 심리적인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장애자의 심리적인 고통을
도와주고자 하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REBT의 치료자들은
이와는 정반대의 관점을 취한다.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정서적 문제는,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사고방식으로부터 파생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REBT
치료자들은 그들이 비록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나름대로 행복하고 생산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는 훌륭한
치료법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첫번째 '문제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부차적인
문제'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첫번째의 문제인 유전적, 신경생리적, 영양학적,
기타 생리학적 질병에서 부수적으로 파생되는 '두번째의' 문제인 정서적 문제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장애 자체에 관해서는 도움을 줄 수는 없으나, 장애 때문에 야기되는
정서적인 문제는 도와줄 수 있다.  REBT에서는 이러한 정서적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서 비합리적 상념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장애인은 매일매일의 삶에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장애를 순간순간 확인하며
살아간다. 이 과정 속에서 생활 속의 어려움과 무능력 때문에 자신은 열등한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창출한다. 장애인은 자기에게 꼭 있어야만 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뼈 속에 사무칠 정도로 깊이 느끼며 살고 있다.
  "해야 된다"는 사상이 우리에게 얼마나 나쁜 해악을 끼치는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찌어찌 되어야만 한다? 사람이 어찌어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어떤 근거로 누가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가? '해야만 된다'는 비합리적인
생각이야말로 모든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인 비합리적 신념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해야만 된다'는 생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자기비하하고 의기소침하게 하며,
타인에 대해서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가치저하를 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REBT에서는 당신이 '해야만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당신은 오직 당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할 뿐이며, 최선을 다해 그저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장애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게 된다면, 그리고 이 어려움을 지닌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만 한다면,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훨씬 더 쉽게 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느끼는 열등의식과 같은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깨닫게 함으로써
나는 그동안 많은 장애인과 그 가족의 정서적인 애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어
왔다. 사람들로 하여금 '해야만 된다'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포기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리는 비합리적 신념에는 세 가지의 주요 형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모든
비합리적인 신념은 '해야만 된다'는 주의에서 비롯되고, 비합리적인 몇 개의 생각이
개별적으로 혹은 조합이 되어 생성된다.
  몇 년 전, 나는 저술과 강의와 환자들과의 면담을 통하여 낙담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요구주의"와 "명령주의"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이성을 통한
자기성장'에서 나는, 당신이 만약 인생에 성공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을 바라고, 소망하고, 선호한다면 그러한 소원 자체만으로는 어떤 정서적 곤란에
부딪칠 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당신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을 때에
당신은 분명히 서운하고 좌절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노하고 불안해 하고 우울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분노, 불안, 우울의 감정이 생겼다는 것은 당신이 그 '소원'을 '욕구'로, '선호'를
'요구'와 '고집'으로, '소망'을 절대적인 '명령'으로 상승시켰기 때문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낙담하고 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해야만 된다'는 주의에 속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인간이 지닌 많은 문제들은 '해야만
된다' 주의와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정서적 문제들만은 거의 예외없이 요구주의나
명령주의의 사고나 행동방식에서 파생된다. 정서적 혼란을 겪고 있는 수천명의
사람들은 예외없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기독백을 하고 그것과 연관된 정서적 고통을
창출해 내고 있다.
  수많은 비합리적 상념들은 몇 가지 대표적인 유형 중의 어느 하나에 속한다. 이제,
정서적 혼란을 일으키는 원흉인 비합리적 상념들의 전반적인 범주를 요약해 보겠다.

     비합리적 신념 1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성공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썩어빠진 인간이다"

  이 사실을 일단 믿기 시작하면 당신은 당연히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만일 내가 썩어빠진 열등한 인간으로 평가된다면, 내 인생은 끔찍하며 내 인생의
무가치함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생각이 강한 우울, 불안,
무가치감의 정서를 유발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비합리적 신념 1은 우선 깊은 자기증오와 자기비하의 정서를 잉태한다. 이 비합리적
신념으로부터 추론해 볼 수 있는 몇 가지의 명제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내 인생에서 의미있고 중요한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항상 인정과 사랑을
받아야만 한다"
  "나는 철저하게 유능하고 성취적인 인간이어야 하며, 내가 중시하는 분야에 재능이
있어야만 한다"
  "나는 기분 나쁘고 불유쾌한 상황을 피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내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언제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적인 압력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이러한 외적 압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불안하고 우울하고 열등감과 증오를 느낄 수밖에 없다"
  "내 인생에 있어서 위협적인 일이나 위험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며, 미리 그러한
일들을 염려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까지 해온 방식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나에게
한번 크게 영향을 준 것은 나의 현재 감정이나 행동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므로, 나의 과거생활은 현재에도 역시 중요한 영향력을 갖는다. 내 어린 시절에
조건화된 습관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러한 과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나 혼자서
독립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이 세상이 질서정연하고 확실하고 예측 가능해야만 되며, 그래야 나는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의존하고 도움을 받을 만한 누군가가 항상 있어야만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연약하기 때문에 힘든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상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다"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주의 신비나 특성을 잘 이해해야만 한다"
  "나는 자신에 대하여 한 인간으로서 전체적인 점수를 매겨야 하며, 내가 무언가를
잘 해내고, 가치있는 일을 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에 비로소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나는 결코 낙담하거나 불안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분노에 빠져서는 안된다. 내가
만일 이러한 감정에 항복해 버린다면, 나는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없게
되므로, 허약하고 썩어빠진 인간이 될 것이다"
  "사회나 가족, 동료, 저명인사들이 말하는 의견, 신념, 태도는 확실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만일 그러한 사상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표명한다면, 곧바로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벌할 것이다"

     비합리적 신념 2

  "사람들은 나에게 사려 깊고 친절하게,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행동해야만 한다. 사려
깊지 않고 내게 불친절한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심하게 비난받고 저주받고 벌받아야
한다"

  "사람들은 모두 타인을 대할 때에, 특히 나에게는, 공평하고 사려 깊은 태도로
임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불공평하고 경솔하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벌받고
비난받아 마땅한 형편없는 인간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무능하거나 바보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만약 그런 행동을 하면,
그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고 인생에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철저한
바보라고 낙인찍히는 것이 마땅하다"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책임을 회피하려 하거나 움츠러들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들의 의무를 받아들이고 수행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들도 역시
썩어빠진 인간들이나 마찬가지이며, 자신의 게으름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행복하고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성취해야만
하며, 그렇지 못하면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비평해서는 안된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에서 건질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형편없는 사람들이다"

     비합리적 신념 3

  "이 세상과 삶들의 상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면 무엇이든지 성취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원치 않는 것은 발생하지 않도록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은 곧바로 손쉽게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만사는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인생은 무섭고 끔찍하고 두려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과 일과 위험에 대하여 노심초사하여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상황을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상황을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인생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이나 책임을 직면하고 처리해 나가기 보다는
회피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나는 우선 편안한 것이 좋으며, 미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현재의 고통을 극복해 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행동을 해야 하며, 만일 좋지 못한 행동을 함으로써
나를 쓸데없이 괴롭힌다면, 그들은 형편없는 엉터리 같은 인간이고, 나에게 그들이
초래한 곤경을 나는 견딜 수 없다"
  "내 삶에 장애물이 나타난다면, 그 경로가 어떻든 간에 나는 끊임없이 괴로워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렇게 힘이 드는
인생이란 살 가치조차 없다"
  "내 자신의 변화하는 면에서나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장애물을 변화시키는 데에
결코 어떠한 어려움이 존재해서는 안된다.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힘써야 하는 고생이
너무 힘들고, 상황이 거의 비관적이므로 차라리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겠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공평하고, 정의롭고, 민주적이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못하면,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고 삶을 지속하기조차도 힘들다"
  "내 자신의 문제나 내가 돌보는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 나는 항상 올바르고 정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끔찍하고 두려운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나를 불행하게 만든 외적 원인이 사라져서 내 감정이 변하게 되지 않는 한, 나는
별수 없이 계속해서 불안과 우울과 적대감의 희생자로 무능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생존해 오고 있으니 만치, 나의 인생은
앞으로도 영원히 내가 원하는 때까지 계속해서 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 그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며 불공평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원수만 빼고, 죽음이란
결코 존재해서는 안된다"
  "내가 생존해 있는 한, 나의 삶은 독특하고 특별한 의미나 목적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내가 스스로 이러한 의미나 목적을 창출해 내지 못하면, 우주나 혹은 어떤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힘이 나를 위해 그것을 창출해 주어야만 한다"
  "나는 불안, 우울, 죄책감, 수치심 등의 혼란스러운 감정에서 오는 불편함을 견디기
힘들며, 내가 행여나 미쳐 버려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면 그런 끔찍스런 일을 견딜 수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는 아마 영원히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올 것 같지가
않다"
  "내가 처한 상황이 악화 일로를 달리면서 상당한 기간 동안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거나 나를 책임지고 개선시켜 줄 누군가가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갖지 못하며, 나의 파멸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들은, 세 가지의 중요한 비합리적 신념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이들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적용하고 있는 비합리적인 신념을 대표한다.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비난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비난하거나 타인을 비난하고, 세상을 비난한다. 위의 모든
신념이 "해야만 된다"는 주의와, 사람이나 상황이 "어떠 어떠하니 참으로 끔찍하고
두렵다"는 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위의 사상은 세상과
타인과 자신에 대하여 무력감과 절망감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삶에 대한
무의미감과 숙명론적인 생각은 비합리성의 극치를 이룬다.
  이제 세 가지 비합리적 상념을 하나씩 검토하여 봄으로써, 각 신념의 내용, 발생
원인과 결과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해 보도록 하자.
  비합리적 신념 1은 주로 당신 자신의 개인적 성취에 대한 기대에 관한 것들이다.
그리고 타인이 당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대하여 신경을 쓰는 내용이다. 당신은
자신에 대한 기대를 한번 설정해 놓고 당신이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당신 스스로
열등한 인간이라고 보고, 남들도 그렇게 보리라고 단정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당신이
자기가치감을 재는 유일한 척도는 당신이 어떤 일을 얼마나 성취하느냐의 척도와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 당신이 "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내지 못했을 때에,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비난하고 배척할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잠재능력을 과대 평가하거나, 우리가
존경하고 흠모하는 어떤 이들이 성취한 것, 혹은 우리에게 성취하도록 기대한 것을
우리의 목표로 정해 놓은 경향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가 세운 목표는
우리의 능력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당신이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에
실망스럽게 느끼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고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목표가
적어도 현재로서는 당신의 능력 범위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우울해 하고 불안해하고 분노에 빠질 하등의 이유는 없는 것이다.
  비합리적 신념 2에서도 비합리적 신념 1에서와 같은 부정성, 독단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견해가 당신 자신에 향하기 보다는 타인을 향해
있으며, 타인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갖고 있다.
  때때로 인간은 자기가 마치 이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와 변덕에 장단을 맞춰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 이상이 상호작용 할 때면, 각자가 서로 이러한 사고방식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려는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그렇게 되면, 각자는 자신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항상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있다. 당신 자신의 처지와
타인의 처지를 항상 배려할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바람직한 태도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을 화나게 하고
불공평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항상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는 REBT 공식과 같은 대안을 마련해 두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비합리적 신념 3도 위의 두 경우와 동일한 요소를 가지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비합리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적 조건이 우리의
욕구에 부합하여 변화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요구가 실현되지 않을 때는 곧잘 부질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이럴 때에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날씨가 내 뜻대로
되어 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참을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나요?"
  나는 우리 인간이 이런저런 비합리적 상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이라고 여긴다. 비합리적인 상념을 가진다는 것을 결코 죄라고 볼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비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행동과 반응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잘 인식하고 있게 된다면, 훨씬
더 현명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점을 명심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마술적인
치료법도 아니고, 영원히 행복해질 수 있는 공식 같은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을 보다 잘 성취하도록,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하나의 효과적인
단계인 것이다.
@ff
        5. 어떤 생각이 작용했기에 화가 나는가를 이해하라

  지금까지 화를 내게 되는 것과 같은 부적절한 결과를 초래하는 데에는 비합리적
신념이 근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비합리적 신념체제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도록 하자. 그러한 비합리적 신념들을 어떻게 하면 반박하고
제거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지금부터는 당신이 비합리적
신념들을 반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세 가지의 통찰에 대한 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물론 REBT의 내담자들에게 유도하는 통찰은 다른 치료법에서 강조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당신의 과거에 일어난
사실과, 그것이 현재 당신의 문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에 대한 통찰을 강조한다.
이와 약간 유사한 것으로, 교류분석에서는 어린 시절에 대한 통찰을 강조한다.
  건강한 성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먼저 각자는 자신의 과거의 경험에 충분한
주의와 관심을 가져 보도록 요구한다.
  초기의 카타르시스적인 치료이론들에서는 당신의 어린시절에 깊이 박혀 있는 거대한
고통에 대한 통찰을 강조한다. 그리고 당신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당신의 현재
생활에까지 꾸준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불유쾌한 초기 경험의 고통을 재경험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슈탈트 치료이론에서는 당신이 현재 지니고 있는 감정의 색조
하나하나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지금 - 현재'에 대한 완벽한 자각을 얻을 수 있을
때에 태도나 행동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통찰 1:당신에게 일어난 (선행)사건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가?

  REBT에서는 당신이 현재 느끼는 정서적 혼란이 과거의 삶과 거의 무관하다고 믿고
있다. 통찰 1은 선행사건(A)에 대한 반응(C)이 오기까지에는 그 사이에 우리의
신념체제(B)가 개입하여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A가 C에 대한 진정한 원인은 아니며, B가 C를 일으키는
직접적이고도 기초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념체제(B)가 정서적
결과(C)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면, 과거의 선행사건(A)은 현재의
사건보다도 훨씬 더 그 영향력이 약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다른
치료기법들과 상당히 대조되는 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과거 경험이 현재의 행동에 '전혀' 영향력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 예를 들면,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심하게 벌을 받고 자란 어린이는
그렇지 않은 어린이에 비하여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에게 쉽게 분노하고 난폭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되었다. 이것은 개인의 과거의 경험과 성장
후의 행동간에는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사례에 대한 전후 사정을 상세하게 고찰해 보지 않고서 개인의 과거사가 중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라고 무조건 단정해 버리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유전적 요인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가에 대하여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이것을 상세하게 논의해 볼 것이다.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분위기에서 양육된 아이들의 분노와 난폭성은 후천적으로 획득된 특성이라기 보다는
유전적인 것이 크다. 왜냐하면 부모의 어느 한 쪽이나 양쪽이 유전적으로 공격적인
인자를 가지고 있다면, 그 영향이 아이에게 그대로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현상의
인과적 고리를 추적해 보면, 아이의 타고난 공격적 경향에 대하여 부모는 또 난폭하고
공격적인 훈육방식으로 아이를 대할 것이다. 이것이 또다시 아이의 난폭한 특성을
강화시켜 줄 것이며, 이 특성은 나중에 다시 그 아이의 자녀에게 물려질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난폭한 환경의 악순환을 보게 되며, 이것이 유전적 특성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찰 1은 당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생각 내지 신념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REBT에서는 당신이 어떻게 해서 그러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는가의 과정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마도 당신이 어린 시절에 부모나 어른들에게서 배운 가르침이
그러한 사상을 체득하도록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어떻게 그 신념을
획득하였든 간에, 당신은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REBT의 통찰과 정신분석학 계통의 통찰과의 차이점을 볼 수가 있다.
당신의 신념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의 "근원"에 대한 통찰은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신은 그와 같은 통찰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러한 통찰을
인위적으로 조립하여 만들어 낼 뿐이다. 그런데 정신분석적인 통찰은 오히려 "그런
정신분적인 통찰을 보라. 확실한 통찰의 길로 당신이 들어서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스스로 분노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이제 확실히 깨달았다. 이제 이 비합리적
신념들을 어떻게 하면 없애고 변화시킬 수 있는가?"와 같은 보다 중요한 통찰을
간과하게 할 뿐이다.
  고전적인 정신분석이론에서 제공하는 통찰이 그토록 쓸모없는 것이고 비생산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 그 이론이 그처럼 광범위하게 보급될 수 있었는가를 당연히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어떤 활동에 스스로 탐닉하여 만족감을 얻으려는 선천적인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고전적인 분석은 내담자들에게 바로 이러한 만족감을 주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정신분석이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진정으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주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설명해
보겠다.

  --정신분석에서의 내담자들은 자신에 대해서 끝없이 이야기하고 듣는 것을 즐겼다.
  --그들은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보다 '깊은'
해결책을 찾아서 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변명거리가 있으니까.
  --그들은 편집적으로, 퍼즐 조각들을 완벽한 순서로 짜 맞추듯이, 정신분석 이론에
억지로 꿰어 맞추려고 한다.
  --그들은 미친 듯이 마술의 '열쇠'를 찾아 헤매는데, 그 열쇠만 발견하면 그 순간
내면의 비밀이 자동적으로 열리고 인생이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믿는다.
  --그들은 보다 실제적이고 중요한 현실의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꿈이라든지 환상과
같은 것의 주변을 노닌다.
  --그들은 다른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심층적이지 못하고 표면적'이라고 간주하면서
자기네가 그들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즐긴다.
  --그들은 인생의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까지도 스스로 해결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치료자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려고 한다.
  --그들은 분석가와의 전이관계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자신에게 봉사하고
자신의 편에 서 있는 한 사람을 가지면서, 그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자 하는 절박한
욕구에 항복하고 있다(물론, 그 '사랑'의 대가로 엄청난 치료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통찰 2:비합리적 신념은 당신 스스로의 독백에 의하여 강화된 것이다

  자, 이제 REBT 통찰 2를 살펴보자.
  당신의 신념체제가 제아무리 어린 시절에 획득된 것이라 하여도, 당신에게 정서적
혼란을 야기시키는 비합리적 상념의 상당 부분은 당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반복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강화시키고, 그 타당성에 도전해 보기를 거부함으로써 키워온
것이다. 처음에는 세상 사람들이 당신에게 비합리적인 상념을 주입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도 그러한 신념들을 가지고 있는 첫번째 이유는 당신이 오늘도
끊임없이 당신 자신에게 그 사상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통찰 2는 두 가지의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요점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당신은
어려서 획득한 비합리적 신념을 마음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하고, 그 신념에 의거해서
행동해 옴으로써 스스로 그런 사상을 키워 왔다. 이것이 '자동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당신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 비합리적 생각들을 스스로에게 주입시켜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둘째로, 당신이 비합리적인 철학이나 신념을 오늘날까지 유지시켜 왔기 때문에
부적절한 정서적 결과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비합리적 신념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에게 되뇌여 왔기 때문에 당신은 그 결과(C)로 분노, 불안, 우울과
같은 감정을 계속해서 느끼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면,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었을 때 당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분노는 '자동적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고'
느껴질지 모르나, 실제로는 당신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그가 그런 나쁜 행동을 해서는
안되며, 그는 형편없는 인간이다'라는 독백을 함으로써 분노가 살아 숨쉬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어린아이였을 때는 부모나 선생님이 비합리적인 사상을 가르쳐 주더라도
당신이 그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능력이 아직 없기 때문에 그대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당신 부모가 '당신과의 약속을 깨뜨린 사람은 형편없는
사람이다'라고 당신에게 말하였다면, 당신은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라면서, 당신은 부모의 이러한 말을 점차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순전히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당신의
부모조차도 때로는 당신에게 한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랬다고 해서 그들이 완전하게 썩어빠지고 무가치하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다면, 부당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무가치하다는 신념으로 인하여 발생한 분노는 당신을 더욱 불쾌한 기분으로
몰아갈 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REBT에서는 당신에게 해가 되는 방향이 아닌 득이 되는 방향으로 강화와 벌칙의
원리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당신에게 "어떠 어떠하게 대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할 것이다. REBT
방법을 적절하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사용한다면, 이러한 당신의 비합리적인 사고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이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된 후에 느끼는 분노는 어린
시절의 조건화로 인한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 얻어진 사고방식을 당신이 스스로
끊임없이 반복해 왔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화가 나게 된다든지 하는 감정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다.
  밴듀라(Albert Bandura)는 그의 사회적 강화이론에서 이와 비슷한 원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행동에 관한 학습과 조건화 이론의 공헌자라 할 수 있는
밴듀라는 인간의 행동과 반응에 고도의 인지적 요소가 작용함을 인정하고 있다.
사회적 강화이론이 REBT 이론과 유사한 점이 많지만, 두 이론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밴듀라에 의하면, 내가 만일 당신에게 반사회적인 방식으로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당신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에 대응할 수 있다(이러한 방식들은 대개 사회적인
통념에 비추어서 선택된다). 당신은 수많은 반응방식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할
것이다. 나를 미워하든지, 싫어하든지, 나의 행동을 싫어하든지, 내 꼴을 보지 않든지,
나에게 도전장을 내든지 등등. 아마도 당신은 사회적 의사소통이나 사회적 규칙을
근거로 해서 내가 어떠 어떠한 방식으로 행동해서는 안되며 때로는 법적인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은 사회적 의사소통이나 규칙을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나의 행동에 대해서 불쾌하게 느끼는 것을 당신은 어느 정도
학습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내가 위반한 규칙이 사소한 것인지, 중요한 것인지,
내가 당신에게 끼친 불편이 작은 것인지 큰 것인지, 당신이 자신의 분노를 삭힐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 나에 대해 공격적인 행동을 취할 것인지 아닌지 등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당신은 당신이 느끼는 공격성의 수준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에 사회가 인정하는 수준을 적용하고 선택한다. 즉, 밴듀라는
인간의 모든 감정에는 인지적인 고려와 사회적 학습의 두 요소가 들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REBT도 표면적으로는 인지조건화의 조합을 인정한다. 그러나 REBT에서는
외부의 사회적 영향력에 의한 조건화뿐만 아니라, 자기조건화를 특히 강조한다.
  통찰 2의 두번째 측면은 A지점에서 일어난 어떤 일로부터 연유되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에 관한 것으로서, 특히 분노의 감정에 관한 것이다. REBT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우고 있다.
  "당신이 맨 처음에 경험했던 좌절적 상황은 당신이 그 후에는 오랫동안 계속하여
느끼고 있는 적대감과는 그렇게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계속해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은 당신에게 좌절감을 느끼게 했던 조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
쪽에서 처음에 좌절감을 느꼈던 그 생각이나 관점을 계속하여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부당한 행동을 했을 때, 당신은 화가 난 채로 하루나 이틀 혹은 여러
주일을 보낼 수 있다. 가령,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혹은 당신이 내
모습을 문득문득 떠올릴 때마다 당신이 처음에 나에게 느꼈던 적개심이 살아나서 점점
강해질 것이다. 그러다가도 당신은 짧은 기간 내에 나에 대한 감정을 극복하거나 잊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당신이 그 일을 다시 마음에 떠올리더라도 마음이
뒤집어진다든지 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적개심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 몇 주일이고 몇 달이고 혹은
몇 년이고 계속 분노하고 있다면, 어느 세월에 나에 대한 감정을 망각하게 될 것인가?
분노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조차도 나중에는 잊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의
이름이나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당신은 처음에 분노를 일으켰던 비합리적 사고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그 비합리적 신념을 반복하고, 그것에
당신 자신을 생생하게 내맡기고, 비합리적 신념 속에서 공격적으로 행동하기를 계속할
것이다. 좌절감을 일으켰던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에 대한 당신의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관점이 당신을 분노하게 하는 것이다.

     통찰 3:비합리적 신념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논박의 훈련이 필요하다.

  통찰 3은 분노의 감정과 행동으로 이끈 비합리적 신념을 바꾸며, 혼란된 정서와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연습과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이 지닌 비합리적인 태도나 행동이 자기패배적인 것이라는 점을
당신이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사고를 효과적으로 반박하지 못하면 효과가
없다. 자각한 이후에는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만이 당신은 반박을 잘 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모든 신념은 그 강도와 효과에 있어서 다양하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은
미신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강도가 때때로 세졌다 약해졌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은 고양이나 깨진 거울이나 사다리 밑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행동이
운명의 길흉과 무관하며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데에 동의하면서도 정작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그 상황을 회피하려고 한다. 당신 자신에게 어떤 것을 자문자답하는 것과,
합리성과 비합리성에 관하여 참으로 깨닫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념하기 바란다.
  신념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강도가 일정하지 않다. 그러므로 당신은 논박
지점에서 비합리적 신념을 강하게 반박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비합리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아무리 똑똑하게 잘 알고 있다 할지라도
비합리적 신념을 반박하는 기술을 발달시키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리고 그
비합리적 신념을 강력하게 반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다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 장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는 바이지만, 통찰과 지식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거의 가치가 없다.
  논박 지점에서 분노와 불안을 창출해 내는 비합리적 신념을 꾸준히 반박하면 할수록
당신은 더 빨리 분노와 불안을 축출할 수 있게 된다. 다음 장에서는 당신 속에 들어
있는 비합리적 상념을 찾아내는 방법과, 비합리적 상념과 합리적 상념을 구별하는
방법, 비합리적 상념을 논박하는 방법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ff
          6. 자기 분노의 철학을 논박하기

  지정행의 치료 이론에서는 논박(Dispute)을 D로 표시하기로 한다. 당신의 혼란된
감정이나 행동적 결과를 야기하는 선행사건(A)을 찾아내라. A에 대한 당신의 합리적
신념과 비합리적 신념을 당신 안에서 찾아내고, 그 비합리적 신념이 당신이 현재
느끼는 혼란되고 부적절한 결과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라. 이 비합리적
신념을 물리치려는 노력을 열심히 꾸준하게 하라. 이것이 바로 논박이다. 봄베이에서
나의 동료였던 페드케(Kishor Phadke)는 이 논박하는 일(D)에 관해서 특별한 견해를
보여주었다. 그는 논박을 다음과 같은 세 요소로 구분하였다.

  비합리적 신념을 찾아내기(Detecting)
  비합리적 신념과 합리적 신념을 구별하기(Discriminating)
  비합리적 신념을 반박하기(Debating)

  나는 이와 같은 구분이 매우 유익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논박이란 크게 보아서
당신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비합리적 신념을 찾아내는 과정과, 그것과 합리적 신념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과정, 그 비합리적 신념을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반박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분노감정의 ABC 원리를 소개하고, REBT의 세
가지 통찰을 사용하여 당신 안에서 비합리적 생각을 찾아내는 방법을 보여주려고
노력해 왔다. 이 장에서는 당신이 가진 비합리적 생각을 강력하고 꾸준하게 논박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이 논박의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 당신이 누군가에게 화를 낼 때마다 품게 되는
비합리적 신념의 네 가지 주요 유형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비합리적
신념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타파할 수 있을지에 관하여 설명해 보겠다.
  아파트를 함께 쓰기로 한 앞의 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합리적 신념 1을 볼
수 있다.
  "자네가 나를 그토록 골치 아프게 만들고, 우리의 약속을 철회해 버리다니, 얼마나
터무니 없는가!"
  당신이 이러한 생각에 도전해 보고 그런 생각을 버리고 싶다면 당신은 먼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그가 합당한 이유없이 우리의
약속을 철회한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증거가 무엇인가!'

     '실망스럽다'는 감정과 '끔찍하다'는 감정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자, 이제 그 친구가 약속을 철회해서는 안된다는 증거를 찾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고 실망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 상황을 끔찍하고 두렵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분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당신은 '불편하고 부당하고 실망스러운 상황'을 '그런
끔직한 상황이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보고 있다. '끔찍함'과 '불편함'을 구별하는 것은
단순히 어의적인 말장난이 아니다. 용어상의 표현을 구별하는 것과 우리가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는 합리적 사고와 비합리적 사고를
구별하게 해준다.
  '끔찍한'의 사전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영감적인 두려움 2. 공포, 전율, 그러나 일상적으로 쓰이는 '끔찍한'의 의미는
'매우 나쁘고, 추하고, 동의할 수 없고, 불쾌하고' 등으로(가령, '끔찍한' 농담의
경우처럼) 사용된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단어의 의미와 흔히 사용되는 용법의
문제점은, 사람들이 그 단어가 지니고 있는 실질적 의미를 훨씬 넘어서 감정적인
색채를 얹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끔찍한'이란 단어의 실질적 측면과 감정적 측면을 좀더 분명하게 구별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설명해 보는 것이 좋겠다. '그가 나를 이렇게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하고,
우리의 약속을 철회하다니 얼마나 끔찍한가!'
  위의 사건을 당한 당신은 실망을 느낄 수도 있다. 또는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이처럼 당신은 나의 행동에 관하여 하나는 합리적인 것, 또 하나는 비합리적인 것의
두 가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였을 때, 당신은 내가 당신을
부당하게 대우하였고 그 대우가 '매우 나쁘고, 추하고, 동의할 수 없고, 불쾌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느끼는 것은 합리적이고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느낌은 당신의 기본적인 가치관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우리가 약속을 정한다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당신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약속 취소로 인하여, 당신의 그러한
목적은 좌절당하였고, 그래서 당신은 나의 행동을 불쾌하고 동의할 수 없는 것으로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결코 무관심하거나 냉정하거나 혹은 수동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C의 지점에서 적절한 감정을 가지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생각해 보면, 나의 부당한 조처가 당신에게 불편을 끼쳤으므로 당신은
유감스럽고 불쾌하고 실망스러운 기분을 진하게 느낄 것이다. 즉, 당신은 C지점에서
매우 강한 합리적인 정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을 분노의 감정으로
이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끔찍하다'는 단어에 부착된 감정적인 생각에
의하여 분노를 만들어 내게 된다.

     어떤 상황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비합리적인 생각의 토대를 형성한다

  '재앙시'하는 경향은 비합리성의 토대를 형성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어떤 행동의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불쾌감을 넘어서서 '나쁜 것이라는 추가적인 의미'를 첨가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첨가시킨 이 '끔찍하다'는 표현을 통하여 그 행동이 나쁘다는 것보다
훨씬 더한 어떤 것이라고 여기고, 그런 행동이 '있어서는 결코 안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하여 합리적인 사고에다 '끔찍한', '터무니 없는', '무서운' 등의 의미를
덧붙임으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하게 된다.

  --엘리스 박사는 나를 전적으로 100% 나쁘게 대우하였다.
  --그는 나에게 100% 이상으로 나쁘게 대우하였다.
  --그가 나를 나쁘게 대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는 절대로 나를 나쁘게 대해서는 안되며, 공정하게 '대해야만'한다.

  자, 당신이 받은 대우에 대하여 끔찍하다는 생각을 결부시킨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다면, 이제부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그리하여 비합리적 사고의
논박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사리에 맞는 질문을 던져 보자.
약속을 취소한 행위가 '끔찍하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만약에 100%(혹은
100% 이상으로) 나쁘게 대우한 것이 '끔찍한'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당신을 그보다 더
나쁘게 대했을 가능성은 조금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상황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나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보다 훨씬 더 나쁘게 행동할 여지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약속한 대로 당신과 함께 아파트에 들어갔는데, 그 다음에는 내가
지불하기로 한 비용을 전혀 내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당신에게 훨씬 큰 요구사항을
내걸지도 모른다. 그밖에도 모든 경우를 일일이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끼칠 수 있는 더 나쁜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내가 100% 나쁜 대우를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당신이 받은 대우가
불편하고 나쁘고 실망스러운 것일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은 그것을 비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100% 혹은 그 이상으로 나쁘게 대우한 것이 아닌
이상, 당신은 그것을 '끔찍한'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당신에 대한 나의 행동을 끔찍한 것으로 평가함으로써 내가 당신을 불편하게
한 것 그 이상의 짓을 하였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당신이 C지점에서
실망하고 불편해 하고 좌절감만 느끼는 정도였다면, 굳이 크게 화를 내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내가 당신을 부당하고 불공평하게 대한 것이 어떻게 해서 나쁘고 불쾌한 그 이상의
것으로, 그리고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하여 '끔찍하고', '무섭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묘사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그보다 더 나쁜 경우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REBT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식의 태도를 없애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상황이
극단적으로 나쁘게 되었을 때, 그와 같은 경우를 최악의 나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받은 부당한 대우를 당신이 느끼고 있는 불편과 불공정
그 이상의 것이라고 동일시하고, 그런 일이 나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면 당신은 비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말을 독백하고 있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뛰어난 인지치료자인 미켄바움(Donald Meichenbaum) 박사는 가끔 REBT를
어의치료(semantic therapy)라고 부른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REBT 치료법에서는
일반화와 흑백논리를 구분하게 하고, 현실에 기반을 둔 사고와 비현실적이고 마술적인
사고의 차이를 구분하도록 도와준다. "끔찍하다"는 단어의 경우에, 사람들은 흔히
그것이 "나쁘거나 매우 나쁜" 정도의 의미로 생각하지만, 그 안에 포함된 진짜
정서적인 의미는 "전적으로 나쁜, 혹은 그 이상의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진짜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도와주고자
한다.
  사람들이 오직 단어의 의미를 통해서만, 어떤 "확장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동물이나 어린 아이들도 분명히 감정은 가지고 있으나, 그들은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물이나 아동은 감정을 즉각적으로 빨리
발산시키는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나중에 언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자라면 그들의 감정을 마음 속에 보유하고 있는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자신을 감정적으로 혼란시킬 수도 있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정서적 반응에 관하여 마음 속으로 독백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어떤 것에 관하여 강한 감정을 느끼면, 우리는 그 상태를 관찰하고
그것이 어떤 면에서 좋고 나쁜가를 평가하게 된다. 이렇게 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타인들로부터 어떤 감정은 좋고 어떤 감정은 나쁘며, 어떤 감정은 유익하고 어떤
감정은 해가 된다는 것을 배워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감정적인 반응을 관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며, 어떤 것은 그대로 지닌 채, 어떤 것은
변화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혹은 그런 상황을 극단적으로 간주하며
많은 부정적인 독백을 중얼거릴 수도 있다. 우리는 이처럼 선택권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취한 행동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독백을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당신의 내부에 "유감스럽다"고 느끼는 적절한 감정과,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느끼는 부적절한 감정 중의 어느 하나의 감정상태를 창출한다. 당신이 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식하지는 못하겠지만, 당신에게 일어난 감정적인
반응을 관찰해 보라. 그리고 그것을 평가해 보라. 당신의 감정에 대하여 분명히 어떤
느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감정적인 반응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어떤 단어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 당신이 그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그 단어는 당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단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끔찍하다'거나 '두렵다'는 단어는
대체로 혼란된 감정을 창출한다. '나쁘다'거나 '불쾌하다'는 단어는 적절하고 혼란되지
않은 반응을 창출한다. 물론,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자신에게 '얼마나
불쾌하냐! 괘씸하게 부당한 행동을 감히 나에게 하다니!'라고 이야기하고, 실제로는
불쾌한 것보다 훨씬 더 이상의 강렬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당신이 어떤 사실을 놓고 그것을 '나쁘고 불쾌하다'라고 표현했다고 할 때 그것이
항상 합리적인 것이고, 어떤 상황을 놓고 "끔찍하고 두렵다"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항상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쓰고 있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와
얼마나 강한 의미를 부여하는가는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당신이
"끔찍한", "터무니없는", "두려운"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당신은 거기에 마술적이고
비현실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자각하고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당신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상당히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이러한 행동을 감히 나에게 하다니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다.

  --상대방이 나를 전적으로 부당하게 대하였다.
  --나는 최악의 대우를 당하였다.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당했으니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100% 이상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끔찍하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이러한 모든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표현을 계속해서 함으로써,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 따위 대우를 받다니 얼마나 끔찍한가!"라는 말은 종종 "그들은 항상
나에게 공정한 대우를 해야 하는데!"를 의미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언제나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을 대해 주기를 요구하는 의미의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구를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비논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당신의 사적인 소망에 따라서
항상 타인들이 당신을 대우해 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된다고 독백하는 것은, 당신이 그 행동만을
나쁘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전체까지도 나쁘게 평가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당신은 그 사람이 공정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느끼며, 그가 당신에게
공정하게 대해 주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정당하게
행동하여야 하며, 불공평한 행동을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공정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비합리적인 기대가 있기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점잖은 사람들(당신을 포함하여)도 때로는 부당하고 공정치
못한 일들을 행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이성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더라도 실망과 불편의 감정을 느끼는 선에서 그치는 분별을 가질 수 있다.
  당신이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끔찍하다", "어찌 어찌해야 한다", "그래서는
안된다"와 같은 말들을 자세히 검토해 본다면, 많은 비합리적인 신념들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REBT 기법에 숙달하기만 하면 당신은 나머지 인생을 보다 만족스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7. 화가 나지 않도록 생각하기

  "끔찍하다" 주의와 "해야만 된다" 주의를 타파하는 것은 합리적 사고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당신이 느끼는 분노와 격정과 원한과 공포의 감정을 근절시켜
준다. 당신은 네 가지의 방식으로 "끔찍하다" 주의와 "해야만 된다" 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비합리성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서, 비이성적인 경향을
줄이기 위해서는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REBT에서는 비이성적 사고의 하나로서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 주의를 들고
있다. 그것은 "나는 그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고 큰 불편을 감수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와 같은 독백에서 이러한 형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REBT의 과정에서는 토론이 수반된다. 이것은 당신이 가진 비합리적인 신념에
도전해 보기 위하여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왜?",
"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 "그 증거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한다. 그래서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그런 부당한 대우를 내가 참을 수 없다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증거는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그것이 진정으로 끔찍하다는 증거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니고 기실은 견딜 수 있다"라는 대답이 나왔다면, 당신은 일단
바른 길로 들어선 셈이다. 그러나 그 대답만으로 만족할 만한 단계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끔찍하다"는 단어 자체를 정의하는 데에 당신은
애로를 겪을 것이다. 당신이 그 상황을 분석해본 결과, 그다지 끔찍한 것은 아니라고
발견할지라도 당신의 친구나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끔찍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러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쉽게 동조함으로써 당신은 다시 그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고 그는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되었다고 또다시 믿게 되는 것이다. 전에도
강조한 바와 같이, 사람들에게 정서적 혼란을 일으키는 네 가지의 비합리적 사고의
유형은 상호관련이 되어 있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가 나를 그렇게 대하다니 끔찍하다" 이러한 생각은 또한 다음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가 그처럼 형편없는 태도로 나를 대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런 도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 그런 행동을 하다니, 그는 형편없는 사람이다"

  위의 네 가지 진술은 각기 다른 비합리적 사고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끔찍하다"거나, "견딜 수 없다"거나, "해서는 안된다"거나, "그는 형편없는
사람이다"라고 타인을 비난하는 것은 모두 동일한 명제로서 표현만 다를 뿐이다.
  당신이 위의 네 가지 생각 중의 어느 한 가지라도 철저하게 뿌리 뽑을 수만 있다면,
나머지 사상도 자연적으로 파기할 수 있다.

     "견딜 수 없다"주의

  이제,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 주의에 관하여 토론을 해 보자. 당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왜 내가 그것을 견딜 수 없는가?" 그 상황을
끔찍하다고 여기는 것은 당신이 너무나 많은 불편을 겪었고, 그 부당한 행동 때문에
너무나 많이 고통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너무나 많은 고통과 불편"이라고
상승시킨다. "너무나"라는 단어는 여기서도 마찬가지지만 약간의 마술적인 특성을
가지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의 불편과 곤란은 허용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은 안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어느 지점
이상을 넘어서면 당신은 그것을 "너무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불쾌함이나 불편의 수준을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어떤
일에 좌절을 당할 때에 낮은 좌절인내도(low frustration tolerence, LFT) 때문에도
고통을 겪게 된다. 낮은 좌절인내도는 폭언과 고함을 치는 형태로써 나타날 수도 있다.
폭언이나 고함을 침으로써 당신은 애초에 느꼈던 좌절보다도 훨씬 더 심한 감정을
겪게 된다. 만약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는 당신의 사상에 대한 토론을 스스로
꾸준히 한다면, 당신은 좌절에 대처하는 훨씬 생산적인 태도와 함께 새로운 철학과
인지적 효과를 얻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견딜 수
있다" 주의라고 부른다.
  당신이 이러한 기본적인 태도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객관적 외부 현실을 통제하기는 힘들지만, 객관적 사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거의 완전에 가깝게 당신이 통제할 수 있다. 즉, 내가 당신을 대하는 방식을
당신은 거의 통제하기 힘들지만, 나의 나쁜 행동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관점은 당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신이 나의 행동이 부당하였다고 판단하고
타인들도 여기에 동조한다 할지라도, 당신은 다음과 같은 태도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나의 부당한 처우를 참을 수 없다고 믿을 것인가? 아니면 참을 수 있다고
믿을 것인가?
  --그 부당한 대우를 끔찍하다고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끔찍하다고는 판단하지
않을 것인가?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할 것인가?
  --나를 전적으로 끔찍한 인간이라고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이번의 경우에 좋지
못한 행동을 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인가?

  당신은 나의 그와 같은 행동이 너무나 지나치고, 해서는 안될 행동이기 때문에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당신의 가설을 반박하고 도전해 볼 의사가
있다면, 그리고 실제로 도전해 본다면 당신은 그때서야 비로소 이러한 비합리적
신념을 극복해 볼 수 있게 된다.

     "해야만 한다"주의

  이어서 "그는 나를 그렇게 부당하게 대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라는 생각에 대하여
토론해 보자. 그가 나를 부당하게 대우한 것이 사실이고,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그 생각에 동의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를 그렇게 대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사회적 도덕성의 관점에서 접근해 본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만약 사람들이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 기준으로 볼 때에
"해서는 안된다"는 어떤 규칙이나 통념을 무시한다면 그 사회는 민주적인 사회로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고. 그러나 어떤 것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실지로
결정하는 것이 도덕성은 아니다. 도덕성은 단지 무엇이 옳고 그르냐에 대한 정의와
지침을 설정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문명화된 도덕성이란 우리가 "부적절하게"
행동하기보다는 "적절하게" 행동하기를 권하고, 나쁜 결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지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의 행동으로 나쁜 결과가 발생한다면, 사회의
성원들은 (문명화된 도덕성으로 인하여) 그가 앞으로는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그 위반자에게 어떤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가 어의적인 말장난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해야만 한다" 주의와
"하는 것이 좋겠다" 주의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가려 보기로 하자. "당신이 사회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하게 행동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진술은
바로 다음과 같은 진술로 이어진다. "당신이 그와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지역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야기할 것이고, 모두가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경험에 의하여 도출된 것이며 대단히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옳고 그른 행동을 관찰할 수 있으며, 그 행동이 당신과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번째 진술문인, "당신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바로
다음과 같은 진술문으로 이어진다. "당신이 마땅히 해야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과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발생하고 말 것이다.
  --우주의 법칙에 의하여 당신은 그에 합당한 좋지 못한 결과를 당할 것이고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당신은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받아야 한다.
  --당신은 쓸모없는 인간이고 행복을 느낄 가치도 없다.

  이 가운데 1번 명제는 틀린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신이 나쁜 행동을 한다고
해서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2번과 3번
명제는 마술적이고 타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 나쁜 행동을 한 사람들도 자신을
수용하고 행복을 추구하므로 4번 명제 역시 틀린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생각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러이러하게 대해야 되고, 좀더 잘 대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이 나에게 좀더 나은 행동을 했더라면 내가 훨씬 좋았을 텐데.."
  --그리고 "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그렇게 대해 주어야만 한다"

  첫번째의 생각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번째의 생각은 매우
비합리적이다. 당신이 전적으로 합리적인 생각("그들이 나를 좀더 잘 대해 주면 정말
좋을 텐데"라고)을 고수한다면, 당신이 비록 좋지 않은 대접을 받더라고 단지
유감스럽다거나 불쾌한 수준에서 머무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잘 대해 주었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고집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화를 내지 않고 마음의
평안을 원한다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내가 언제나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만 한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그에 대한 합리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내가 언제나 좋은 대접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고, 사회적인 규칙으로도 사람들이
공정한 태도로 타인을 대하도록 되어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만
한다는 우주의 법칙이나 이성의 명령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위의 말에 동의한다면, 타인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 분노와
증오를 느끼는 대신에 유감과 실망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ABCDE의 원리

  지금까지 논의된 REBT의 전체적인 원리를 다시 한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행사건:내가 우리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함으로써 당신에게 부당하게
대하였다.
  --합리적 신념:그의 처사는 유감스럽고 섭섭한 일이다.
  --비합리적 신념:"얼마나 끔찍한가! 그가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적절한 결과:좌절과 불쾌감
  --부적절한 결과:분노와 증오
  --반박하고 토론하기: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는 해석과 신념에
도전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봄으로써, 비합리적 신념을 찾아내고 반박하고 토론하기
  --인지적 효과와 새로운 철학:"비록 내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나에게 항상
공정하게 대해야만 한다는 적절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행동적 효과:분노의 제거, 위안 그리고 적절한 결과(aC)로 돌아와 유감과 실망의
감정을 느낌

  이 ABC의 과정과 DE의 과정을 아주 여러번 매우 적극적으로 연습하는 반복이
없이는, 당신은 예전의 비합리적 신념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부적절한 결과에 빠지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당신은 때때로 옛날의
습관으로 되돌아가려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다. 어느 누구도 항상 완벽하게 잘
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당신은 항상 당신 안에 들어 있는 비합리적 신념과
부적절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능력을 발휘해야 하고, 그것을 반박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비합리적 신념이 일어날 때 그것을
쉽사리 제거할 수 있다.

     행동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과잉일반화의 오류

  당신이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느끼는 상황이면 거의 예외없이 당신은 분노를
유발시킨 행동과 사람 자체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그가 그런 행동을 했다. 그는
썩어빠진 인간이다"). 당신은 그가 취한 하나의 행동으로 그 사람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내려 버리는 것이다. 이미 3장에서 이러한 식의 유추가 지니는 의미를
논의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당신이 지닌 비합리적 사고 가운데 가장
골치 아픈 것 중의 하나이므로, 여기서 간단히 다시 한번 검토해 보겠다.
  사람과 그 사람이 취한 행동을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당신은 "오직 어떠 어떠한
사람만이 어떠 어떠한 행동을 할 수 있고, 또 모든 어떠 어떠한 행동은 어떠 어떠한
사람에 의하여 저질러진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여긴다. 좀더 상세하게 말해 본다면,
"부당하게 여기는 어떤 일을 저지른 사람은 틀림없이 나쁜 사람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좋은 행동을 하였다면, 그는 절대로 나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좋은 사람이고, 그러므로 좋은 행동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와 같이 보는
것이다. 만일 어떤 나쁜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하였다면, 그는 좋은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쁜 사람이고 오직 나쁜 행동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장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어떤 행동이 합리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가늠할
때에는 그 행동이 인간의 기본철학인, "나는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욕구나 목표
추구에 도움이 되는가 해가 되는가에 따라서 평가된다. 즉, 어떤 행동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개인이 취한 한 가지 행동을 가지고 그
인간의 전체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지나친 흑백 논리이며 과잉일반화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생존권과 행복권을 거부하는 경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REBT에서는 나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좋은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고 어떤 사람은 나쁜 일을 더 많이 할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들은 선악의 행동을 다 한다. 인간은 한 과정이지 물건이나 행위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항상 좋거나 항상 나쁘기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항상 어떤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비합리적이다. 인간이 이와 같이 다차원적인 특성이 있다는 것을 마음 속에 잘 새겨
두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우리는 인류에게나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공헌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예술이나 과학분야에서 지대한 공헌을 하여 인류에게 혜택을 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적인 생활을 보면 부당하고 좋지 않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괴롭힌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였을지라도 그를
전체적으로 평가하기를 삼가함으로써 그의 다른 면을 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파트를 함께 쓰기로 한 경우의 예에서, 내가 부당하게 약속을 어겨서 당신에게
해를 끼쳤다고 해서 당신이 나를 전체적으로 평가해 버린다면, 그리고 나에게
계속해서 화를 낸다면, 처음에 느꼈던 나에 대한 좋은 면들을 당신은 더 이상 향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의 분노로 인해서 당신은 앞으로 나와의 좋은 개인적인
경험을 차단시키게 될 것이다.
  어느 개인을 볼 때에 흑백 논리로써 "좋다"거나 "나쁘다"라고 단순하게 평가해
버리는 경향은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작용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타에게 너무
비현실적으로 높은 기대를 거는 인간의 경향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기대를 채워
가는 과정에서 당신은 자존심이나 자기확신(자아강도라고 부르는)을 얻기를 추구한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정당하고 공정하게 행동했다 할지라도 때때로 당신은 실패할
수도 있다. 이런 실패의 경험이 생기면 당신은 자신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울하게 되고 자기비하감에 빠진다. 엄밀하게 따져 보면
"자기확신"이란 언제나 자기희생의 대가를 요구한다. 또한 "자존심"은 자기비하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자아강도"라는 것도 처음에는 자아상실을 경험하고 나서야
획득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된 말이다. 당신은 한 가지 것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다른
한 가지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옳고 좋은 일을 하고서 자신에 대해 뿌듯하게
느끼는 순간, 나쁘고 잘못한 일, 심지어는 보통 정도 밖에 안되는 일을 하였다고
자신을 미워하고 깎아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이 자존심을 느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존심을 북돋워 줄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당신이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만일, 당신이 자신이나 타인들에 대하여 단순하게 흑백
논리로써 평가하게 된다면 당신은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판단을 끊임없이 변화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사람들이 지닌 특성만을 평가한다면, 훨씬 덜
혼란스럽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판단을 일관성 있게 유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분노란 비합리적인 감정이며 불쾌의 감정만이 합리적인 분노감정이다

  REBT에서는 사람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비합리적이라고 간주한다.
당신이 나의 부당한 특성에 관하여만 분노를 느낀다면, 당신은 기껏해야 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내가 좀더 공정하게 행동하도록 그 면의 행동만 개선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내가 부당한
행동을 하는 한, 나는 필요없이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에 당신이 나의 부당한 행동을 100% 이상으로 전적으로 나쁜 것으로
여긴다면 당신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당신이 나의 부당한 처사를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보고 나의 그 "행동만을" 미워하면 우리는 당신이 적절하게 또
합리적으로 분노를 느끼는 것이라고 보아줄 수 있다. 나의 부당한 "특성"에 대한
불쾌감, 짜증, 분개, 좌절을 당신이 느끼면서, 나의 그 행동 때문에 당신이 나를
멀리하려는 결정을 내리고, 내가 좀더 공정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나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때 "합리적인 분노"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부당한 처사를 끔찍하고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 보고 나라는 사람 전체를 나쁘게 본다면, 당신은 현실을
과장하여 원한, 적개심 등을 느끼게 되는 비현실적인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나의 부당한 행동에 대해서만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분노를
느끼는 합리적인 경험에 머무르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그러나 당신이 분노를
느끼는 시간에 기실은 "이러한 상황은 절대 벌어져서는 안되며, 삶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해서는 절대 안되며,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참으로 끔찍하고, 이 끔찍한
상황의 장본인들은 나쁜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극도로 분개하고 불쾌해 하면서도, 그런 느낌을 합리적인 분노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당신이 실제로는 잔인한 분노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이 비합리적 분노를
직면하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인적으로는 분노의 감정이면
어떤 것이든지 모두 다 부적절하고 자기패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내가
어떤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거의 예외없이 내가 사람들이 잘 행동해
주기를 바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그와 같은 요구나 강요가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분노라면, 그때 당신은 그것을 '합리적인 분노'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감정을 분명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는 "합리적인 분노"를 "심한
성가심"이나 "심한 짜증"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당신이 만일 나의 어떤 특성(가령,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행동을 한다든가
하는)에 대해 훌륭하다고 평가한다면, 이는 정확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바람직한 특성을 지녔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 전체를 훌륭하다고 평가한다면,
이는 부정확하고 비합리적인 것이다. 당신은 나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함으로써
나의 자존심을 올려 주는 데 공헌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편, 당신이 나의 다른 어떤
특성을 "나쁘다고" 평가할 때는 나는 또한 내 자신을 비하하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이란
아무리 좋은 특성을 많이 지녔다 하더라도 또 다른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므로, 이처럼 인간을 온통으로 평가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내가 아무리 공정한
행동을 하였더라도 다른 모든 일까지 다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떠한 인간이라도
그렇다. 그러므로 당신이 내가 성취한 어떤 것을 가지고 나라는 사람을 추켜주는 것은
결점투성이인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존심"과 "자기확신"이라는 용어의 오류를 이해하라

  "자존심"이라든지 "자기확신"과 같은 말은 여기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
내가 만일 타인의 인정을 얻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나 자신을 항상 무엇인가를
잘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도록 자존심을 높여야 한다면, 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잘
해내지 못했을 때면 가차없이 나 자신을 거부하는 경향을 지니게 될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을 잘 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자신감을 잃고, 낮은
자존심을 느끼고, 자존감을 잃는다면 나는 자동적으로 "나"라는 사람이 무능력하고
결점투성이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게 된다. 내가 당신이나
타인들에게 부당하게 행동했다고 해서 나를 장점도 없고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적으로 못박아 평가한다면, 이 썩어빠진 인간이 앞으로 좀더 개선하고 변화할 수
있으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만약 나 자신을 부당한 사람이라고
보아버린다면 자기성취적 예언에 빠져서 항상 부당하게 행동하려고 하는 경향성을
갖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자존심과 자기비하는 결코 우리에게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 존재에 대한 기쁨을 느끼기 위하여 자존심을 사용하는 것은
지속적이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이러한 것이 사실이라면 무엇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평가한단 말인가?
  내가 자신에게 "나는 훌륭한 사람이고 그 훌륭함을 나는 정말로 좋아한다. 그러한
것이 없다면 나는 무가치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훌륭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나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고,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면 나를
싫어하고 비하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신을 "좋다-나쁘다"로 평가하는
것은 나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든다. 나 스스로에게 부과해 놓은 기대치에 내가 항상
맞추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존심"이라는 말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내가 이러이러한 좋은 일을 하고 또한, 여러 가지 면에서 훌륭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남들보다 더 나은 인간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신은 좋은 행동을 할 수 있고 나는 그것을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보다도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느끼며, 그런 나를 진정으로 좋은 인간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내가 보다 훌륭한 인간임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나를 다른 사람보다 더 가치 있고 더 훌륭한 인간으로 느끼려고 한다는 점에서,
자존심이란 '자기확대'나 '자기과장'과 유사하다.
  이처럼 자기평가의 목적은 우리 스스로를 단순히 인간으로 보지 않고 초인간으로
혹은 다른 모든 인간보다 뛰어난 인간으로 보려 하는 것에 있다. "나는 자존심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완벽과 신성과 탁월성과 고상함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우리의 어떤 특성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정말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본질 자체가 남들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뛰어넘지 못하면 그리고 그에 대해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자신을 가혹하게 평가하는 습관의 오류를 인식하라

  내가 사람들에 대하여 항상 흥미롭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그들이 어떤 일을
시원치 않게 해냈을 때 그들은 자기 자신을 아주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보는 반면에,
다른 사람이 똑같은 결함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쉽게 수용하고 눈감아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사람이 글을 아주 형편없이 썼다고 하자.
자신의 작품이 신통치 않다는 것을 알고서 그는 자신을 앞으로는 글을 잘 쓸 수 없는
실패한 인간으로 보려고 한다. 그러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똑같이 볼품없는 글을 썼을
때에는 너그럽게 보아준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완벽한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훨씬 더 가혹한 비판을 한다. 그 결과로 실패가 자기
이미지에 준 타격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자신의 결점을 보충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굴복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당신이 당신보다 훨씬 숙달된 어느 뛰어난 문필가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의 성공에 너무나 압도되고 자신이 원망스러운 나머지 그의 재능을 인정해 줄
아량도 부족하고 그로부터 좋은 것을 배울 수도 없게 된다. 그가 당신보다 뛰어난
점은 글쓰기에 한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당신의 열등감은 당신의 존재가치의 전반에
걸쳐서 자동적으로 파급된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당신이 자신의 특성을 가지고
자타를 평가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그것은 오직 당신을
자기패배적인 결론으로 이끌 뿐이다.
  당신은 어떤 것을 열렬히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한
특성에 대한 판단을 가지고 인간 전체를 평가지 말라는 말이다. 각 특성 하나 하나를
개별적으로 평가하고, 이 모든 특성들을(호감이 가는 것이든, 떨쳐 버리고 싶은 것이든
모두) 다 함께 비교해 보라고 나는 여러분에게 제안한다. 이렇게 검토한 연후에야
비로소 당신이 그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이 좋을지 피하는 것이 좋을지를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쪽으로 결정하였고, 그 결정이 그가 지닌
좋은 점뿐만 아니라 나쁜 점까지도 아는 상태에서 내려진 것이라면, 당신이 싫어하는
특성까지도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맘에
들지 않는 그 사람 특유의 어떤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당신이 누군가의 이러한 특성을 변화시켜주려고 시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성격이
변화한다는 조건하에서 그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고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점은 쉽사리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다 가지고 있으며 어느 한 쪽만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당신이 이 점을 잘 받아들일 때까지는 다른 누군가와 정직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수용할 수 있게 되면, 사람이 언제나 어떠 어떠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비합리적인
완벽주의를 고집하지도 않으며, 실망이나 좌절에 직면할 때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보다 관용을 가지고 자타의 특성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현실적인 태도로 임할 때에 보다 행복하고 생산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지닌 어떤 부정적인 측면을 수용하고 지내기가 참으로
어려울 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우리는 그들이 지닌 좋은 특성도 즐기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아파트를 함께 쓰기로 한 앞의 예는 그와 같은 상황을 아주 잘
보여준다. 당신이 입은 손해에 대하여 좀더 차분하게 대처하고, 내가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죄의식과 열등감을 느껴야만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장래에
언젠가는 우리 둘이서 처음에 좋은 관계를 누렸듯이 나와 좋은 관계를 다시 맺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분노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어라

  REBT에서는 화를 내는 행동과 같은 문제를 다룰 때에 상대방에게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당신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에
해로운 내면의 구조인 분노, 불안, 우울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 휘말려 시간과 생각과 정력을 낭비하는 대신에, 가능하면 신속하게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당신의 잠재적인 힘과 능력을 신장시키도록 한다. 화를 내는 행동을
지속하면 그 대상과 상황을 계속해서 회피하게 하고 불화하게 함으로써 더욱 불쾌감을
일으킬 뿐이다. 그 사람이나 그와 관계된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될 때에 당신의
분노는 다시 타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독자적으로 설 수 있도록 격려하고, 당신이 지닌 결점까지도 담담하게
수용하도록 가르치면서, 당신의 잠재력을 실현시키도록 돕는 것이 REBT의 과제이다.
이제 당신은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 마술적인 것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매우 현실적인 세계에 살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상황을 매우 현실적인
방법으로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을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바라보기를 고집하면서 현실에서 인생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이 세상에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그
문제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현실을 우리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당신이 REBT의 원리를
활용하면 매일매일 부딪치게 되는 좌절과 애로를 극복하고 행복하고 건강하고
합리적으로 살고자 하는 삶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목표를 좌절시키고 성취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나 상황을 잘 다룰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이쯤된다면 REBT 방법에서 요구하는 수고쯤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ff
          8. 화가 나지 않도록 느끼기

  이 장에서는 분노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몇 가지의 정서적인 방법에
관하여 논하여 보겠다. "정서적 방법"이란, 당신의 분노를 변화시키고 제거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강력하고, 적극적이고, 때로는 드라마틱하기도 한 그런 방법과 당신의
"감정"이나 "욕구"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을 의미한다(감정이나 욕구는 언제나 "사고"와
"행동"을 내포하는 것이지만, 인위적으로 어느 정도 구분할 수는 있다). 그리고
"행동적"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다. 행동적 방법은 "정서적" 방법과
중복되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느낌"보다는 "행동"에 강조를 두는 경향이 있다.

     화를 내는 자신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정서적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조건적인 자기수용과
자기인정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몹시 화를 내고 있는 당신 자신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강한 결심을 전제로 한다.
  당신이 치료자인 나에게 찾아와 몹시 화가 나서 고통스러움을 호소할 때에 나는
당신을 완전히 수용해 주는 좋은 본보기가 되어 보인다. 당신이 화를 내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이 잘못된 행동과 함께 당신을 수용하면서
결코 당신을 멸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비록 실수투성이의 삶을 살 망정 그런대로
우리는 엄연히 살아 있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 내담자들에게 자신을
수용하고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해준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수용하지 않고 당신의 감정과 행동에 대하여 심하게 비판을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사람들의 비판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당신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기로 결정한
셈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비난을 들으면서도 당신이 마음 속으로 자기 자신을
서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인간으로 송두리째 평가하지 않으며 다만 자신의 어떤
행동만이 옳지 못하다고 판단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만일 당신이 당신을 전체적으로 깎아 내리는
타인들의 의견에 동의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면,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당신에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고 원래부터
자신을 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이때에도 당신은 당신 내부에 있는 자기비하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가 있다. 당신은 화를 내는 행동이 잘못되었으니까
앞으로 고치겠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화내는 당신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이처럼 좋은 결심을 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기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정서적 방법이다.
  자신을 수용하기로 확고하게 결정하고, 당신이 인생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간에 결코
자신을 비하하지 않겠다고 결정할수록 그만큼 강한 자기수용을 느낄 것이다. 이처럼
강력한 사고와 감정을 얻는 방법은 미드(G. H. Mead)와 설리반(H. S. Sullivan)이
지적한 대로, 당신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칭찬을 들음으로써, 그리고 그 칭찬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당신이 비록 화내는 습관을
고쳐야겠다고 느끼면서 동시에 그러한 자신을 수용하는 쪽을 선택하겠다고 확고하게
결단한다면 당신 혼자서도 그러한 강한 사고와 감정을 획득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이 자기 수용의 감정을 유지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반복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확고한 신념은 우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반복하고 계속하여 "확인시키는" 과정을 통해 획득된다.
  가령, "케이크는 맛이 좋으며, 고기는 맛이 좋지 않다"는 견해처럼 생리학적인
편견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보더라도, 우리는 케이크를 먹을 때마다 "케이크는 얼마나
맛이 좋은가, 고기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라는 식으로, 매번 스스로에게 이 생각을
반복시킨다. 우리가 비록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케이크는 맛이
좋다!"라는 하나의 생각을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는 가운데 "고기는
맛이 좋지 않다!"는 생각을 "타당화"한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반복적인 과정을 통하여
케이크와 고기의 기호에 관한 강력한 정서적인 확신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당신이 느끼는 분노와 함께 당신 자신을 완전하게 수용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 이런 연습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강력하게 할수록 자신을 훨씬 잘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분노는 당신에게 득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므로 분노를 줄이고
행복한 삶을 즐길 수 있기 위하여 당신의 비합리적 사고를 격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REBT의 전 과정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또한 우리는 강조한다.

     합리적, 정서적 상상(REI)의 기법을 활용하라

  지정행의 치료에서는 또 하나의 정서적 기법으로서 "합리적, 정서적
상상"(REI:Rational Emotive Imagery)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인지행동적
치료자인 몰츠비(Maxie C. Maultsby)박사에 의하여 상당히 오래 전에 개발된 것이다.
합리적. 정서적 상상의 기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신이 주로 분노를 느끼게 되는
부정적 사건들을 상상해 보라. 아주 생생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상상을 하는데, 가령
내가 아파트를 함께 쓰자고 한 약속을 몰염치한 태도로 파기하였을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그런 약속을 한 적조차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다. 마치
내가 당신과 아파트를 함께 쓰고 싶은 생각에서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꾸며서 억지를
쓴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부정적인 경험을 상상하고 있으면 강한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일어날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내가 약속을 어겼다는 것과 그러한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는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것이다. 이렇게 화가 나는 감정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
감정이 충분히 살아나도록 내버려 두라. 그리고 몇 분 동안 그 감정에 흠뻑 머물러
있으라.
  이 분노의 감정을 잠시 동안 사실적으로 체험하고 나서 이 감정을 바꾸어 보도록
당신 스스로에게 압력을 가하라. 그리고 진정으로 시도를 해보라. 지금까지 배운
REBT의 이론을 활용하고, ABC과정을 단계적으로 적용하여 보라. 여전히 분노가
느껴지더라도, "나는 이 감정을 바꿀 수 없어"와 같이 스스로에게 말함으로써 당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을 반복함으로써
당신은 거의 언제고 당신의 감정을 변화시킬 수 있다. 당신이 느꼈던 분노의 감정을
생생하게 되살려 보고, 이 감정을 변화시키도록 당신 자신에게 종용해 봄으로써,
당신은 나의 행동에 대해 분노보다는 실망이나 안타까움 정도의 보다 적절한 감정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처럼 정서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노력을 해 보라.
  당신이 (비합리적인) 분노의 감정 대신에, 실망과 안타까움의 (적절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면, 이 변화를 일으키도록 당신이 취한 행동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당신의 머리 속에서 일어난 상세한 변화의 단계를 다시 한번 따라가 보라. B지점에서
당신의 신념체제를 어떤 형태로 바꾸었기 때문에, C지점(정서적인 결과)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감정이 변하게 된 데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독백이 있었을 것이다. "아이 참, 그가 약속을 어기고 약속이 있었던 거조차
부인하다니, 기분이 좋지 않구나. 그러나 그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권리는
분명히 있는 것이니까" 혹은 "그가 나에게 큰 불편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손해 때문에 내 인생이 끝장난 것은 아니다. 이 일이 몹시 불쾌한 것은 사실이지만
100% 나쁜 상태라고만 볼 필요는 없다"
  당신의 신념체제에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를 주의깊게 검토함으로써, 당신이 했던
일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보도록 하라. 불쾌한 선행사건(A)에 대하여 적절한
결과(aC)를 가져온 새로운 합리적 신념(rB)이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인식하도록 하라.
  적절한 감정을 느껴 보도록 당신이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분노감정이
변화하지 않고 여전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더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불쾌했던 그 경험이나 사건을 계속 상상해 보면서, 당신의 정서적인 느낌이 부적절한
것에서 적절한 것으로 변화할 때까지 그 작업을 계속하라. 당신은 당신의 느낌을
창조하고 통제할 수 있으며 그것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다.
  당신이 분노를 느끼기 보다는 실망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고, 몹시 신경이
곤두세워지기 보다는 불쾌하다는 정도로 느끼게 되기까지 당신의 머리 속에서 어떠한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당신이 정확히 깨닫게 되었다면,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하라. 분노를 느껴 보고, 분노 대신에 실망과 곤란을 느껴 보고,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당신이 한 일을 다시 한번 정확히 되새겨 보는 것이다. 그 과정이 매우
익숙하게 되고 점차 아주 쉽게 될 때까지 반복하라.
  당신이 이러한 REBT 과정을 하루에 적어도 10분씩 몇 주일간만 연습한다면, 당신을
늘 화나게 만들었던 어떤 사건을 머리에 떠올리거나 혹은 실제로 분통이 터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하여도, 당신은 화가 나는 대신에 거의 반사적으로 다만 실망감이나
곤혹감을 느끼게 되는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다.
  당신이 REBT의 과정을 날마다 연습하는 데 있어서 끈기가 부족하다면, 연습을 할
때마다 당신이 좋아하는 강화물을 스스로에게 줌으로써 동기를 북돋을 수 있다.
이렇게 연습하지 못한 날은 당신이 싫어하는 벌칙을 스스로에게 부과하거나 좋아하는
어떤 것을 박탈하는 방법을 취할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분노를 감소하기 위하여 REBT 방법을 꾸준히 연습하는 일에
실패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하였다. 지난 몇 년간 내가 이 방법을 사용해 보라고
권장하였던 수백 명의 삶들은 정말로 열심히 이 연습을 수행하였다. 그들 대부분
불꽃처럼 분노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견습을 한 후에 다만 불유쾌한 수준 정도로
감정을 완화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유쾌한 자기훈련의 정서적 훈련을 활용하라

  당신은 어떤 사람에 대한 적대감을 극복하고 그에 대한 좋은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
데에도 REBT를 사용할 수 있다. 암스테르담 대학의 인지행동적 치료자인 람쎄이(R.
W. Ramsay)는 이 분야에 대한 실험을 통하여, "정서적 훈련"이라고 부르는 기법을
개발해 냈다. 람쎄이의 정서적 훈련을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적용하여 볼 수 있다.
  당신이 지금 분노를 느끼고 있는 그 사람과 과거에 가장 즐거웠던 경험 하나를
강렬하게 떠올려 보라. 그 즐거운 경험을 상상하고, 그 상상의 결과로 그 사람에 대한
아주 좋은 따뜻한 감정에 실제로 젖어 들게 되었다면, 그 과정을 반복하라. 즐거운
경험과 좋은 감정을 떠올리고 그 감정이 당신의 적대감을 완전히 압도하도록
노력하라.
  합리적. 정서적 상상의 방법과 유쾌한 자기훈련의 방법은 적대감이 반복됨으로써
비합리적 신념이 형성되게 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이다. 당신은 타인에 대한 분노와
원한의 감정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이 감정을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자동적으로"
되살아날 때까지 연습한 셈이다. 이런 과정을 의식하지 못하였겠지만, 당신은 이와
같은 연습을 꾸준히 계속하여 부적절한 부정적 정서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REI에
의해서는 적절한 부정적 정서를 획득할 수 있고, 람쎄이의 정서적 훈련기법에
의해서는 긍정적이고 유쾌한 정서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정말로 당신의
정서를 선택할 수 있으며, 이 방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분노가 아닌 다른
감정으로 대치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다.

     수치심 극복활동과 모험활동을 시도하라

  REBT에서는 유명한 "수치심 극복활동과 모험활동"이라는 방법을 써서 자기비하의
감정을 극복하도록 하고 있다. 당신의 분노를 줄이는 데에도 역시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김으로써 자신을 혼란시킨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나는 수치심 극복활동과 모험활동을 고안하였다. 타인이 우리의 잘못을 목격했을
때 우리를 무시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부끄러워하며 수치심을 갖는다. 나는
내담자들에게 평소에 "위험하고", "부끄럽고", "당황스럽고", "굴욕적인" 것으로 여겼던
일을 한번 해보라고 촉구한다. 가령,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자기가 방금
정신병원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말한다든지,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고함을 친다든지,
이상스러운 옷을 입는다든지 등을 시도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창피스러운"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창피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실제로는 당황스럽거나
자기비하감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런 부끄러운
행동이 그들이 생각한 것만큼 사람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사실과, 설령 처음엔
사람의 관심을 끌더라도 이내 곧 잊혀져 버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공공장소에서
노래부르는 것처럼, 남들에게 해가 되지는 않는 행동인데도 당신이 끔찍히도 당황해
하고 부끄러워하는 행동이 있을 것이다. 그런 행동 중에 몇 가지를 골라서 당신이
찾아낼 수 있을 때까지(그리고 심지어는 그 행동을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시도해 보라.
  가끔씩 우리는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운 감정을 분노의 감정인 것처럼 위장하기도
한다.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화를 내지 않는 연습을 하는 데에 당신은 위에서 설명한
똑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상류계층의 레스토랑에서 웨이터가 당신에게 서비스를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하자. 당신이 그것을 노골적으로 지적하면 그 웨이터가 당신을 혐오하거나
얕보는 언동을 할까봐 주저한다고 하자. 이때에는 그 웨이터를 불러서 서비스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수프가 차가우면 따뜻한 것으로 교체해 달라고 요청해
보도록 당신 자신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해봄으로써 당신은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 스스로 "그 웨이터는 다만 인간적인 결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행동에 대한 불쾌감만 표현할 일이지 그 웨이터의 인격
전체를 비난할 필요가 없다"는 감정을 느끼도록 노력해 보라.
  당신에게 불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적대감을
느낀다면, 그들이 누군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을 때 끼어들거나, 실제로는 만난
적이 없지만 그를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우겨 보는 행동을 시도해 볼 만하다. 이와
같은 방법을 시도해 봄으로써, 아마도 당신은, 당신이 그들과 맞닥뜨리는 일을
"부끄러워한" 나머지 당신 쪽에서 그들이 불친절하다고 지레짐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그들이 당신에게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처음부터 당신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주장훈련을 활용하라

  모험활동과 수치심 극복활동 등의 과제물에는 주장적인 시도가 들어 있다.
REBT에서는 처음부터 이런 주장훈련을 활용하여 왔다. 주장훈련은 분노의 감정을
완화시키고 예방하는 데에 효과적이다. 수치심이 위장되어 화를 내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처럼, 고질적인 소극성(비주장성)으로 인하여 분노가 폭발한다. 예를 들면 친구가
어떤 요구를 할 때에 거절하고 싶지만 이런 상황에서 당신을 주장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편치가 않다. 아마도 당신은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면 행여나 친구에게서
거부당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래서 싫은 감정을 숨기고 친구의
희망대로 따라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해놓고 나서 당신은 그처럼 나약하게 행동한
자신을 쉽사리 미워하게 되고, 당신이 원치 않는 일을 하도록 만든 그 친구를 또한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적대감이 생긴 것이라면, 보다 주장적으로
행동하도록 당신 자신을 훈련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당신에게 어떻게
하도록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정말 싫지만 억지로 "응해 주기"를 단연코
거부한다면, 당신 자신의 행동을 비난할 이유도 없고, 당신이 원치 않는 어떤 일을
"억지로 하게 했다"는 이유로 타인을 비난할 것도 없다.
  주장훈련은 분노를 제거하는 행동적 방법이다. 그러나 당신이 주장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으면서도 정작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정서적 치료기법을 사용할 수 있다. 당신이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만 행여나
배척당할까봐 두려워 망설이고 있다고 하자. 이때에는 당신이 "스스럼없이" 편안한
기분으로 거절의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당신에게 밀어붙이는 연습을 하기 바란다.
그와 같은 주장훈련을 연습하는 것은 환기적, 정서적 절차에 해당한다.
  당신이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과는 다르게 행동하도록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것은
중요한 정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정서적" 사고나 "정서적" 행위는 강력하고
편파된 행동을 수반한다. 당신은 일이 어떻게 되어주기를 매우 원하거나 "욕구하며",
당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몹시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강렬한 정서상태에
해당한다.
  정서적으로 당신은 "강력하게" 어떤 사람이나 상황들에서 피하거나 가까이 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당신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애써
노력하는 행위는 (특히 당신이 그것을 잘 해내지 못할 때) 강렬한 감정이 개입된다.
그러므로 이런 노력은 정서적이고 극적인 자기수정의 방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주장훈련은 빈번히 이러한 강제의 특성을 띤다.

     역할놀이와 행동재연을 활용하라

  REBT에서는 역할놀이와 행동재연기법을 사용한다. 이 기법은 모레노(J. L.
Moreno)에 의해서 창안되었고, 펄스(Fritz Perls)를 비롯한 형태주의(Gestalt)
치료자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모레노와 펄스 등은 어린 시절의 정서적 경험을
해방시킨다거나 그 경험에 관한 카타르시스를 위하여 주로 감정적인 발산을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행동적인 입장에서 역할놀이와 행동연습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싫어하는 어떤 것에 관하여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표현하기가 힘들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에는 당신이 그 상황에서 느낀 감정을 표현해
보도록 종용한다. 당신이 자기의 역할을 하고 그룹 중의 누군가가 당신의 상대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당신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느끼는가를 정확하게
이야기하는데, 가능하면 정직하게 당신 자신을 표현해 보도록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치료 그룹의 나머지 구성원들은 당신의 표현방식에 대하여 평가를 내린다. 즉, 당신이
말한 때에 너무 적게 표현했는가, 너무나 정직하였는가, 적대심을 가지고 말하였는가,
아주 적절하게 주장하였는가 등에 대한 언급을 한다. 당신이 주장적 표현을 잘 해내면
그것을 몇 번 더 반복하도록 시키고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해 보도록 한다. 당신이
잘못하면 느낌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고 바라는 결과를 성취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표현을 시도해 보도록 요구한다.
  만약 당신이 혼자 있을 때에는 머리 속으로, 거울 앞에서, 혹은 녹음기를 사용하여
역할놀이와 정서적인 행동연습을 해볼 수 있다. 혹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연습할
수도 있다. 연극연습을 할 때에 선생님이나 동료들 앞에서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처럼, 치료자나 치료 그룹에서 역할연습을 하는 것이 유익한 때가 많다.
  REBT식 역할놀이는 혼자서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과 같이 할 수도 있다.
역할놀이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표현하고 당신의 감정을 발산시킬 뿐만 아니라
분노감정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당신 자신이며, 당신이 얼마든지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입증시켜 줄 수 있다. 당신이 분노를 느끼는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노감정을 발산시켜야 한다는 점을 많은 심리치료
이론가는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큰 소리를 지르거나 고함을 치게
한다든지, 베개(당신이 던져 버리고 싶은 어떤 사람을 상징)를 던진다든지, 혹은 다른
방법으로 당신의 분노를 "던져 버리도록"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위와 같은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할수록 당신은 점점 더 화가 나게
된다는 것이 임상적으로 발표되었다. REBT에서는 이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어떤 사람에게 당신이
고의적으로 욕을 한다든지 혹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베개를 내던진다든지 한다면,
거의 틀림없이 당신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독백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명백한 잘못을 했고, 나는 그가 밉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되었고, 나는 정말 그가 두번 다시 내게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서적 발산의 기법은 오히려 비합리적인 신념과 증오심을 강화시켜준다

  당신이 이러한 식의 자기독백으로 당신의 감정을 표현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한 당신의 비합리적인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고 있는 셈이다. "그는 100%
나쁘게 행동했다. 그가 그런 실수를 할 권리는 없다. 그런 행동을 한 그는 썩어빠진
인간이다. 그는 벌받아 마땅하다" 당신이 가진 적개심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나면 아마도 당신은 사태의 자초지종을 검토해 보고, 그의 잘못된 행동을 다소간
용서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개심의 표출로 인하여 오히려 당신은 그 행동의
"끔찍성"을 더욱 악화시키고, 더욱 분노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간혹 가다가 어떤 사람은 타인이나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
표출하고 나서, 그들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얼마나 침소봉대하였는가를 깨닫고 침착을
되찾게 된다. 그 이후에 가서 타인의 행동에 대해 담담한 심경으로 다만 실망하고
유감스럽게 느끼게 되는 수준에 머무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이
자기에게 잘못된 행동을 해서는 절대로 안되며, 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은 전적으로
나쁜 사람들이라는 비합리적인 신념을 더욱 "확고히" 굳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의 분노를 "방출하고", "환기시키고",
"발산하고"(즉, 어린 시절의 경험을 다시 느끼고 재현)하면 할수록 그들은 점점 더
분노하게 되고, 여타의 세상적인 오류에 대해서도 또다시 분노하게 되는 경향을
지닌다. 따라서, 지정행의 치료집단에서는 가슴 속에 응어리진 분노를 집단원 중의
어느 한 사람에게 억지로라도 표출해 보도록 할 때에 우리는 항상 그 분노의 감정을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무조건
화를 터뜨리기 보다는 다만 섭섭한 감정을 느끼는 수준에 머무를 것을 자신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한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부당한 행동을 했을 때에, 당신 내부에 분노의 감정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하자. 이때에는 당신 자신이 어리석게도 이러한 분노의 감정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비합리적인 정서를 가져오게 한 주원인인 당위적
사고인 'shoulds'와 'musts'를 축출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분노 대신에
실망과 유감을 느끼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부적절한) 적대감을 표현하기 보다는
적절한 감정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REBT에서는, 당신이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가지고 잘못된 행동이라고
당신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와 같은 감정을 충분히 인식하고 파악하고
그러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REBT에서는 적절한
감정(난감함이나 불쾌감)과 부적절한 감정(분노와 증오)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지를
당신에게 보여준다. REBT에서는 어떻게 하면 전자의 적절한 감정을 유지시키고
후자의 부적절한 감정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당신에게 가르쳐 준다. 어떤 감정을
표현할 선택권은 당신에게 있다. 어떤 감정을 가지든 간에, 당신이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인정한다"는 것이 꼭 찬성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그것을 "표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당신이
진정으로 느끼는 감정들 중에서 어떤 것은 당신이 전적으로 찬동하고 표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다 표출할 필요는 없다.
@ff
          9. 화가 나지 않도록 행동하기

  현대의 심리치료 이론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지적되어 온 바와 같이, 인간의
정서적인 혼란은 즐거움이나 기쁨의 감정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강한 습관적 혹은
반복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습관적인 경향과 행동적 패턴은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작동하여 우리의 사고와 정서와 행동에 혼란을 야기한다. 이와 같이
반복적인 강박 현상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당신은 삶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거의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에 최초로 당신은 부당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에 당신은
'그들은 나에게 그렇게 부당하게 행동해서는 안돼!'라는 독백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비난을 되돌렸다. 그러나 점차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신은 이러한 비합리적인 생각을 '연습함으로써' 아주 쉽게 '나는 어떠
어떠한 형태의 대우를 받아야 되며,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상념을 자동적으로 갖기 시작했고, 그것이 이제는 당신의 기본 철학의 한 부분으로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이러한 사고가 습관적으로 자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당신은 계속해서 분노를 '연습하는' 셈이 되고, 당신을 화나게 했다고 생각하는(이는
잘못된 생각) 그 대상에게 비난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느끼는 분노는 사고와 감정과 행동의 세 가지 합성물로서,
지속적이고 반사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당신이 분통을 터뜨렸을 당시의
그 과정을 즉시 재현해 보면, 화를 낼 때마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절대
안돼!"라는 독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합리적이고 어린 아이 같은 신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화를
내게 된 당시에는 이런 요인을 매번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이어서
당신은 화를 내게 된 이런 추이 과정을 곧바로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는 누군가
당신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자마자 즉각적으로 분노를 느끼고 그 사람을 비난하게
된다. 아마도 당신은 곧 "이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라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당신의 습관적인 정서적, 행동적 반응이 재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을 진실인 것처럼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습관화 경향이 우리의 의식활동을 상당히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방향 짓는 인지적인 요소를 결코
간과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잘 하고 있을 때면 우리는 거의 언제나 "나는 이
일을 잘 하고 싶고,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라는 철학을 마음 밑바닥에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즉각적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화나게 만든다든가 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일을 잘 못하고 있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그 일을 잘 해보고 싶은
희망이 사라지거나 자기패배적인 행동으로 이끄는 절대적인 명령구호("-해야 한다")나
당위적 태도 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실행적인 숙제를 활용한다

  REBT에서는, 우리가 "자동적이고" 습관화된 정서와 행동 이면에 의식적이고
건설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고 또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REBT에서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철학, 특히 비합리적인 철학을 당신 내부에서
찾아내고, 확인하고, 논박하고, 의미있게 변화시키는 방법을 당신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는 "재습관화된" 행동이 인간의 사고와 정서에 미칠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힘을 건설적으로 활용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 행동적인
숙제를 많이 내준다.
  예를 들어, 당신이 테니스를 배우고 있는데 도무지 향상이 되지 않아 열등감을
느끼고 자기비하를 하기 때문에 아주 힘들어 하고 있다고 하자. 이러한 부정적인
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진전이 있든 없든 간에 날마다 연습을 하도록 당신
자신에게 강요할 수 있다. 자기비하와 열등감이 테니스 연습하는 것을 방해할지
모르지만, 당신이 아예 게임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지경에까지 방해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열등감과 같은 방해적인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꾸준히 연습을
계속하여 마침내는 테니스를 좀더 잘 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그 정도의
진보를 이룬 다음에야 다음과 같이 깨닫는다. "나는 처음에 테니스를 전혀 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지금와서는 나도 테니스를 상당히 잘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도 전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실수가 그렇게 나쁘다고만은 보지
않는다"
  이처럼 자기비하적인 태도나 행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테니스 연습을
계속하도록 당신 스스로를 부추김으로써, 그와 같은 부정적인 태도를 없애고 테니스에
대한 두려움을 실제로 극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당신이 비합리적인
상념을 찾아내고 반박하는 일을 함께 했더라면, 당신은 좀더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이
과정을 극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의 신념이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당신의 행동도 신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의 신념과 행동
중에 두 가지를 다 다룰 것이냐 아니면 그 중 한 가지를 다루어 나머지 것을
변화시키도록 할 것이냐에 관해서는 당신이 선택을 하는 것이다. REBT에서는 신념과
행동의 두 가지 방법을 다 선택해 보도록 권장한다. REBT는 태도와 감정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인지적, 정서적 방법도 사용해 보도록 시도한다. 행동적 방법 중에서
실행적 숙제가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나는 정규 내담자들에게 꾸준히 숙제를
부과하여, 그들이 스스로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정서적인 문제를 극복해 보도록
하거나, 자기 스스로 숙제를 부과해서 실행해 보도록 가르치기도 한다.
  앞에서 든 예에서 보면, 내가 약속을 철회한 것 때문에 당신이 울화가 치밀어 REBT
치료자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 가정하자. 당신이 첫번째 받게 될 숙제는, 상담 중에
분노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이 나와 계속해서 접촉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나에 대한 분노 때문에 나와의 관계를 즉시 끊어
버린다면, 그와 같은 행동은 포기나 도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목표는 나로 하여금 앞으로 당신에게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중단시키는 것뿐만 아니라(이 목표는 당신이 나와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면 아주
훌륭하게 달성될 수 있다), 앞으로도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에
(부적절한)분노 대신에 (보다 적절한)불쾌감이나 실망감을 느낄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을 화나게 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면, 앞으로는 '-때문에'
어떤 정서적인 문제를 겪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이 나라는 존재와 나의
행동을 완전히 망각해 버림으로써 울화가 진정된다면, 당신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을
수 있는가? 아마도 당신은 예전과 똑같은 비합리적인 철학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 철학을 적용할 만한 선행사건이 없었기 때문에 단지 그것을 발동시키고
있지 않을 뿐이다.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무조건 회피하는 것은 화를 내는 습성을 결코 바꾸어 주지
않는다. 그런 생활철학은 여전히 건재하여, 또 다른 좋지 못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당신을 화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부과된 숙제를 통하여 당신이 그와 모종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억울한 대접을 받는 체험을 또 당해 보고 그 가운데에서 그의
행동에 대해 비로소 분노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서야 당신은 전적으로 그 문제를
극복해 냈고 상당한 정도로 당신의 비합리적, 분노생성적 신념을 변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숙제 부과나 행동적인 방법은 두 가지의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접촉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행동적 활동이 있다.
  둘째,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의 행동에 대한 당신의 비합리적 생각을 다루는
것과 같은 인지적 활동이 있다.
  행동적 요소와 인지적 요소를 동시에 구비한 숙제를 우리는 즐겨 부과한다.
그리하여 내담자는 자기의 정서적 문제와 행동적 문제를 동시에 다룰 수 있게 되고,
자신의 사고와 행동에 의해서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어떻게 서로 복합작용을 하는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불안은 분노를 동반하게 된다.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을 직면시키자니 불안이
느껴지기 때문에, 당신은 스스로에게 화를 내게 되는 수가 많다. 자기에게
분노함으로써 불안이 따르는 무력감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단 화를
내봄으로써 당신이 마치 그 상황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는
것이다.
  실행적 숙제를 통하여 당신이 느끼는 분노, 불안, 우울의 문제를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불쾌하고 언짢은 상황에 머물러
보고 그에 대한 당신의 혼란된 감정을 다루어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의 부당한
행동에 대하여 나에게 노골적으로 거론하기가 불안하다면 처음에는 당신은 나와
사귀는 동안에 몇 번 경험했던 나의 결점과 같이 비교적 가벼운 문제부터 거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내가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해 놓고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았다든지, 당신에 대한 나의 점잖치 못한 말투 등을 언급할 수도 있다. 불쾌한
주제에 관하여 일단 말문을 터 놓으면 당신의 불안감이 훨씬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서로 비교적 쉽게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자기가 못났다고 느끼며 불안해 할 것이다.
이 문제는 당신 스스로에게 "나는 한 인간으로서 화나는 감정을 느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종용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당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그 감정에
머물러 봄으로써 자기 수용을 획득할 수 있다. 자신을 수용하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다소간 마음이 편안해지고, 분노를 일으키는 상황에 대해서도 점점 둔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되면 자신의 비합리적 신념을 인식할 수 있게 되므로
그것을 논박하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
  이와 같이 행동적인 숙제는 당신을 "혼란시키는" 경험을 직면하고 그것에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습관을 기르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리하여, 당신은 여러 가지
좌절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숙제를 통하여
훈련을 쌓음으로써 당신은 좌절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키우게 된다. 분노나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정서적인 혼란이 대부분 낮은 좌절 인내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이런
행동적 숙제는 당신에게 유익하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노골적으로 직면할 때에
일어날 수 있는 고통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직면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현실이나 좌절의 상황을 수용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스스로
분노를 느끼는 것이며, 때때로 우리가 그런 상황을 재빨리 제거할 수 없을 때에
염세적으로(그러나 수동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직접적으로 좌절적인
상황에 맞부딪쳐 해결해 보려는 의사가 결여되어 있음으로 해서,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비합리적 태도를 변화시킬 기회를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계속하여 화를 내게 된다.
  그러므로 행동적 숙제를 많이 내주는 것은 당신이 불쾌한 상황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그 상황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때까지 그것을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미래의 이득을 위해서 현재의 여러 가지 고통들을 감수할 수 있는 힘도 준다.
그러므로 REBT에서 부과하는 숙제를 많이 하면 할수록 당신의 좌절에 대한 인내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당신 스스로를 화나게 하고 우울하게 하는 경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
  행동주의 치료자로서 유명한 월페(Joseph Wolpe)는 상호 제지 혹은 단계적
둔화라는 효과적인 기법을 개발하였는데, 이는 실행적 행동보다는 사고와 이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먼저, 당신이 평소에 매우 화를 내게 되는 어떤 상황을 머리 속에
떠올려 본다. 불쾌한 상황을 머리에 그리는 동안에 요가를 한다든지, 즐거웠던 편안한
장면을 상상함으로써 매우 이완된 상태로 만들어 보라. 이완되면 당신의 분노도
사라질 것이다. 이완 연습을 통하여 화를 내지 않게 되는 훈련을 상당한 기간 동안
쌓게 되면, 나중에는 그런 불쾌한 상황에 대하여 더 이상 분노를 느끼지 않게 되는
경지에 도달한다.
  월페가 제안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분노를 일으키는" 장면을 여러 가지 떠올려
그것들간의 위계표를 작성하는 방법이다. 약간씩 화를 내게 하는 일부터 몹시 화를
내게 하는 것까지, 일련의 장면들을 적어 본다. 작은 분노 장면부터 상상하기
시작하는데, 상상을 시작하여 분노가 느껴지면 그때 바로 당신을 이완시킴으로써 마음
속에 일어난 분노가 사라지게 한다. 이 장면에서 더 이상 분노가 느껴지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의 좀더 강한 장면으로 넘어간다. 마음속에서 일어난 분노를 방해하는 이와
같은 과정의 상호 제지와 단계적 훈련을 계속함으로써, 당신은 점차 분노의 상황에
대해서 둔감해지는 단계를 거치게 된다. 당신이 작은 분노부터 큰 분노의 장면까지 더
이상 분노를 느끼지 않고 이완시키는 데 성공하면, 당신은 어떠한 좌절의 상황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격한 감정이 둔감해지게 된다. 이러한 형태의 단계적 둔화를
통해서 당신은 화를 돋구는 자극에 대해 면역 기능을 갖게 되는 경지에 도달한다.
  단계적 둔화(SD)는 합리적, 정서적 상상요법(REI)과 상당히 유사한 면이 있지만,
이들간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단계적 둔화에서는 자극이 가장 약한 상황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극적인 경험으로 넘어가게 된다. 당신이 상상하는 분노 장면들의
단계마다 당신은 매번 이완을 해야 한다. 반면에 REI에서는 가능한 한 최악의
상황부터 시작하도록 하여 당신의 감각이 포화상태가 되도록 한다. 이와 같이 해서,
(분노와 같은) 부적절한 감정으로부터 (실망과 같은) 적절한 감정으로 당신의 느낌을
변화시켜 보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위의 둘 중 어떤 방법이 더 효과적인가는 물론
각자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선호에 따라 다르다.

     조작적 조건화의 원리를 활용한다

  REBT에서는 스키너(B. F. Skinner)의 조작적 조건화의 기법도 활용한다. 이
자기관리의 기법은 보상과 벌칙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당신이 바람직한 행동을
행했을 때에 당신 스스로에게 음식이나 칭찬, 어떤 특권 등과 같은 상을 주고,
바람직한 행동을 수행하지 못했을 때에는 벌을 주는 원칙에 의하여 훈련을 수행하는
것이다.
  벌칙을 준다는 것은 당신이 잘못을 했을 때 자신을 비난하고 비하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벌칙과 징벌은 명백히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바란다. 예를 들어 당신이
약간 화가 나면서 그 행동을 하지 않고자 한다면, 당신은 어떤 벌칙으로 자신에게
제한을 가하고 합당하게 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벌칙을 준다"는
것은 당신이 얻고자 하는 좋은 결과를 위해서 당신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당신에게서 어떤 혜택이나 즐거움이 되는 것을 단지 박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신의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당신 자신을 징벌한다는 것은 방금 위에서 언급한 대로의 벌칙 부과에 더하여, 당신
자신을 인간으로서 격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스키너의 이론은 때로 상당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그 이유는, 조작적 조건화가
강화의 원칙을 사용해서 미묘하게 사람들을 조종하여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많은 일들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학교나 병원, 교도소와 같은 통제된 환경에서
조작적 조건화가 남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REBT와 다른 행동치료에서는 조작적
조건화를 이용하여 자기관리나 자기통제의 효과를 기도하는 것이다. 자기패배적
행동을 변화시키고 싶어하거나, 특히 그들이 보통 때에는 매우 실천하기 힘들어하는
어떤 훈련을 해보고자 하는 내담자들은 치료자가 부과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과제물을
기꺼이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때에만 자신에게
즐거운 강화물을 부여하고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을 때는 어떤 벌칙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한다.
  자기관리의 원리는 자기와의 약속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다. 수세기 동안 작가나 예술가들은 매일매일 정해진 최소한의 시간 동안
작업을 수행하고 나서야 무엇을 먹는다든지, 읽는다든지,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는 행위
등을 스스로에게 허용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나 운동, 또는 하기 싫은 어떤
일을 수행해야 할 때에, 자기와 정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엄격한 벌칙을
부과함으로써 자기를 관리하고 있다.
  이 원리를 REBT 이론에 적용해 보자. 가령 당신이 비합리적 생각을 논박하거나
실행적 숙제를 하는 데 있어서,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실천하기가 힘들다고 하자.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은 자신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 자신과의 계약을 공식화하기
위하여, 자신과의 합의 사항을 매우 명확한 용어를 사용해서 적어 내려가 보라. 당신이
연습을 수행했을 때에, 보상이나 강화물로서 당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활동이나 쾌락을
선택할 수 있다. 날마다 당신이 비합리적 신념을 토론하고 논박하기로 한 시간을
마쳤을 때에는, 스스로를 강화한다. 만약에 계약 조건을 채우지 못했을 때는 당신이
매우 싫어하는 일이나 활동을 자신에게 부과함으로써 벌칙을 가한다. 이 계약을
엄격히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일 수도
있다. 친한 친구나 아는 사람들이 기꺼이 당신의 계획에 협조하여 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강화와 벌칙이 매우 충실하게 실행될 수 있는데, 이것은 조작적 조건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필요하다면 벌칙을 되도록이면 하루 일과 중의 아침에
실시하도록 함으로써, 당신이 이런저런 핑계로 그것을 회피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

     강화와 벌칙을 활용한다

  사람의 기호는 각양각색이므로 여기서는 어떤 것이 강화와 벌칙으로 작용하는지를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에, 강화와 벌칙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을 설명하겠다.
보상을 줄 때에는 너무 과도한 것이 되어 보상을 주기가 부담스러워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애써서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보상은 당신이 매일매일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처럼 너무 가벼운 것이
되어서도 안된다. 당신이 비교적 자주 접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보상으로 선택하라.
또한 당신이 그날 그날의 과제를 완성한 직후에 즉각적으로 줄 수 있는 보상을
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즉각 주어지는 보상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당신이
단계적 둔화나 합리적, 정서적 상상 연습을 하루에 10분간씩 하기로 하였다면, 그
연습시간을 아침에 할당하라고 강력히 권하고 싶다. 만약 오후의 시간으로 배정한다면
연습을 자꾸 미루면서 결국 자신에게 보상이나 벌칙도 없이 잠자리에 들어가게 될
소지가 크다.
  벌칙도 보상과 마찬가지로 합당한 범위 내에서 정하는 것이 좋다. 지나치게 심한
벌칙을 정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벌칙은 효과적인 동기 유발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다. 당신의 일상생활과 관련하여 세 가지의 벌칙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보상을 주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어떤 즐거움을 박탈하거나 방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라면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날에는 벌칙으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다.
  --당신 자신에게 부과하는 어떤 벌칙이 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여 주로 택시를 타거나 손수 운전을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는 당신이 싫어하고 불편하게 여기는 방법인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게 하는
것도 아주 좋은 벌칙이다. 이 방법은 특히 출근하는 길과 퇴근하는 길에 두 차례나
감수해야 된다는 점에서 두 배의 효과를 내는 벌칙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은 보상과
벌칙을 혼합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당신이 그 주일에 매일매일
연습을 완수하였다면 주말에 특별한 장소에서 외식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굉장한 보상을 자신에게 마련할 수 있다. 반면에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면
주말 아침에 아주 일찍 일어나 하기 싫은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은 큰 벌칙을
자기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벌칙과 징벌의 차이점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언급해 보겠다. 내가 늘
내담자들에게도 이야기하는 바이지만, 만약에 실험실의 동물이 잘못된 미로를 헤매게
되면, 바른 미로를 찾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벌칙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신도
쾌히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에게 큰소리를
지르거나 야만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자신이 비효과적인 행동을 했다고 해서 자신을 징벌하고(단순히 벌칙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비하시키지 않는가?
  "나는 쉽게 화내는 습관을 버리기를 원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습관을 버리기가 이렇게도
힘들고 분노에 대처하는 훈련을 하기가 너무나 어려우니, 내가 이 훈련을 좀더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벌칙을 정하기를 원한다"
  당신이 이러한 논리적 공식을 따라간다면, 벌칙을 수용하고자 하는 소원이 이 힘든
훈련을 회피하고자 하는 소원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훈련의 고통을
회피하려는 습관을 개선하기 위하여, 당신은 자신에게 기꺼이 벌칙을 부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스스로에게 벌칙을 부과하는 대신에 징벌을 내린다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화내는 습관을 버려야만 하며, 분노의 습관을
교정하는 훈련을 잘 해내야만 한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못하면, 나는 내
자신에게 벌칙을 내릴 뿐만 아니라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하여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이처럼 징벌의 공식은 마술적인 강요와 그 강요가 가져오는
어리석은 자기비하의 결과를 내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벌칙과 징벌의 차이점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무언가를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을 때에, 마치 자신을 비난하는 우주 내의 어떤 힘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REBT는 사람들이 지닌 이러한 자기 채찍질의 경향을 뿌리뽑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주장훈련을 활용한다

  지정행의 치료에서는 또한 주장훈련을 상당히 활용한다. 공격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적절한 자기표현의 주장적 행동을 하도록 돕는다. 여기에서, 당신이
자기주장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당신이 원치 않는 것을
피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공격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당신의
감정과 행동에 적대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당신의 욕구를 다른 사람이
방해할 권리가 없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 사람이 당신의 소원을 묵살할
때는 그들을 경멸하게 된다. 이것이 공격적인 자기표현이다. REBT에서는 주장성과
공격성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당신이
주장적으로 되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리하여 타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부질없이
적대시하지 않으며, 타협을 거부하지 않고서 당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타인이
해주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면서 당신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쳐 준다.
  REBT에서는 당신이 공격적이 아닌 표현, 곧 주장적으로 표현하는 단계를 명확한
철학에 의하여 구분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REBT는 리치(Wilhelm Reich)나
펄스(Fritz Perls)나 바하(George Bach) 등의 이론보다 훨씬 더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다른 사람이 당신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며, 당신이 공격성과 적대감을
느끼는 것은 당신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충분히 인정하게 되었을 줄로
믿는다. 당신은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 여러 가지의 행동적인 주장훈련연습을 시행해
볼 때에 분노와 증오를 상당히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기주장적 행동은 상당한 정도의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이제부터 당신은 정말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처럼 주장적으로 변화한 당신을 보고서 자연히 당신이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하여 불쾌감을 느끼거나 비난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장적으로 표현하게 될
때에는 어떤 역반응이 수반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충분히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그 상대가 당신의 상사나 감독자인 경우에 있어서 그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고 생각되면 당신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
자기주장을 의도적으로 삼가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당신이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경우에 그 원인을 살펴보자면, 당신이 다른
사람의 인정을 얻는 데 너무나 신경을 쓴 나머지, 보통 정도의 위험부담도 지나친
위험부담으로 간주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는 일은 미련없이 그만두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REBT는 위험을 회피하려고 하는 당신의 태도를 우선적으로 변화하게 한
다음에, 이어서 행동적이고 주장적인 단계로 나아간다.
  REBT에서 흔히 제시하는 주장적 행동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모험을 감수하기
  당신이 평소에 하고 싶어하였으나 매우 두려워하고 그래서 피해 왔던 일들을 몇
가지 생각하라. 가령, 식당에서 잘못된 음식을 되돌리는 일, 화려하게 보이는 옷을
입는 일, 버스나 지하철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일, 청중 속에서 손을 들어 연사에게
질문을 하는 일, 당신과 중요한 관계에 있는 누군가에게 그 사람 자체를 비하하지
않고 그의 행동이 어떠 어떠한 점에서 싫다고 말하는 것 등이다.

  어떤 것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것을 감수하기
  당신이 정말로 하고 싶어 하지만 요청했다가 차갑게 혹은 화를 내면서 거절을 당할
것같이 생각되는 몇 가지 일로서, 성관계라든지 특별한 음식을 요청하는 일, 영화관에
가는 일 등을 떠올려 보라. 당신의 친구나 친척들에게 이것을 요청하여 봄으로써,
감수하게 될 쌀쌀한 감정과 분노를 경험해 보라. 만약 거절을 당하면, 이 거절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또다시 시도를 해보라. 그래도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기회를 보아 다시 요청해 보라.

  어떤 것을 거절하거나 "아니오"라고 말하는 위험을 감수하기
  평소에 당신이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
마지못해 하는 일로서 외식을 한다든지, 어떤 식으로 성관계를 갖는다든지,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끌게 된다든지 등을 떠올려 보고, 이런 일들을 고의로 거부해 보는
위험을 감수하라. 거절하는 모험을 극화시키기 위하여 당신은 불쾌한 어조로 거절할
수도 있다. 또는 상냥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거절하고, 상대방이 끝까지 부탁을 들어
달라고 종용하여도 계속하여 거절하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우스꽝스럽거나 "창피스러운" 일을 해보기
  앞장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당신은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연습을 해볼 수 있다.
공개석상에서 하기에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게 생각되는 몇 가지 일들을 생각해 보고,
이 "부끄럽고 당황스러운"일을 고의로 해보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든가, 머리띠를 매고 그것에 노란 깃털을 꽂는다든가, 길가는 노인을 붙잡고
당신이 길을 건너는 것을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한다든가 등이 있다.

  고의로 당신의 실수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보통 때에는 당신이 실수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실수를 해보라. 그리고 당신의 실수를 그들이 알도록 해보라. 예를 들면
야구게임을 할 때 당신이 잡을 수도 있었던 플라이볼을 고의적으로 떨어뜨리는 것,
대중 앞에서 이야기 할 때에 잠시 동안 말을 더듬는 것, 실제로는 합격을 하였으나
사람들에게 시험에 떨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것 등이다.

  침착하게 자신을 주장하기
  주장훈련의 옹호자들은 상대방과 투쟁하고 자신을 강력하게 주장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들은 침착한 자기주장이 오히려 당신이 원하는 것을 훨씬 더 쉽게 성취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분노를 느끼고, 그
분노가 당신이 만들어낸 감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감정을 밖으로 표현해서는
당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이 되었을 때에는,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다. 당신의 이익을 위하여 감정을 표현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표현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 또한 당신의 솔직한 감정이며,
하나의 자기표현이다. 그래서 억누르고 싶은 감정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이 감정표현을 의도적으로 억제한다면,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감정을 터트릴 때보다
당신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나는 당신이 창자 속에서 어떤 것을 느끼고 있든지 개의치 않는다. 당신이 그
감정을 모조리 꺼내어 언어로 옮길 필요는 없다. 그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 차분하게
이야기하라"고 버드(Lois Bird)가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자기 주장이며,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 버리는 것보다도 더 현명한 처사이다.

  끝까지 저항하는 연습을 해보기
  바아(George Bach)와 골드버그(Herb Goldberg)는 저항연습을 강조하였다. 당신에게
어떤 요구를 하는 상대방에게 그것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면서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이다. 이 연습은 집요하게 요구하는 상대방에 대하여 당신이 마침내 "당신
말이 타당해요"라고 말하면서 타협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하라. 또는 상대방이 "당신을
꺾을 수가 없을 것 같으니 이제 그만하는 게 낫겠군요"라고 말할 때까지 계속하라.

  용감하게 직면하기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적대감이나 폭력은 용기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실행하지 못하거나 타인의 결점을 직면할 용기가 없을 때, 당신은
약하고 비주장적인 자신을 미워하고, 상대방에 대해 화를 내며 싸우고 싶은 감정을
느낀다. 특히 남성의 경우에는, 우드(Sherwyn Woods)가 지적한 바와 같이, "폭력은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행동이며, 남성적인 자존심을 회복시키려는 시도이다" 수동성과
의존성의 감정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적"으로 간주되어, 남자는 그러한 감정을 가진
것을 부인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비주장성을 지양하면서 동시에 화를 터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용감하게 직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게
시도하면 표면적으로 갈등이 노출 될 것은 분명하나, 상황이 오픈 되었으므로
조만간에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 심지어 심각하고 깊은 사회적 갈등의 경우에도
직면의 방법이 탁월한 매카니즘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동의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용감하게 직면하게 되면, 당신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며 당신의 권리를
찾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고 타협하려는 자세도 갖게 해 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직접적인 직면을 실행할 수 있을까? 이것은 상대방의 반대와
무례함을 당신이 견뎌 낼 수 있으며, 설사 상대방이 당신을 싫어한다 해도 당신이
자신을 싫어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신함으로써 가능하다. 당신은 때때로
"그 사람에게 직면시키자"라는 말을 되뇌이면서 당신 스스로에게 강요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처음에 이러한 노력을 시도하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정작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며 지내는 고통이 훨씬 크다는 것을 명심하라.

  피드백 받기
  알버티 (R. E. Alberti)와 에몬스(M. E. Emmons)는 특히 결혼상담에서 내담자를
도울 때, 치료자가 공격적이 아닌 주장적인 행동을 리허설하고 시범을 보이는 방법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당신은 치료자가 없이도 당신 친구에게 당신과 상대방
사이의 모의 싸움을 심판해 달라고 부탁하여 이 과정을 연습해 볼 수 있다. 구체적인
갈등의 장면을 설정하고 관찰자와 함께 당신과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관찰자로 하여금 당신의 역할 연습을 비평하게 하고 "드라마"를 재연출해
본다. 그 다음에 관찰자에게 피드백과 지도를 받는다. 이와 같은 일을 몇 번 번복한다.
  만약에 관찰자가 없다면, 당신이 역할 연습을 하는 동안 당신과 상대방을 "관찰"하기
위하여 녹음기나 비디오를 사용할 수 있고, 이들로부터 당신의 행동과 개선방법에
관하여 피드백을 얻을 수 있다.

  대처방안을 미리 준비해 두기
  바하와 골드버그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수동적 공격을 취하는 사람이나 항상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에게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미리 준배해 두는
것도 또한 주장훈련의 한 방법이다.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요청하는 경우
이외에도 가령, 어떤 친구가 만날 약속을 해놓고 나타나지 않거나 습관적으로 늦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만약 네가 10시 30분까지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없으면, 나는 혼자서 영화관에 가겠다"와 같이 엄격한 약속을
정해 두는 것이다. 이런 규칙을 한번 정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라. 흐지부지한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것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공격성과 주장성을 명확히 구분하기
  알버티와 에몬스는 라자러스(Arnold Lazarus)와 나의 저술을 참고로 하여, 주장적
행동과 공격적 행동을 명확히 구분하는 방법을 지적하고 있다. 라자러스와 페이(Allen
Fay)는 "주장성이란 비이성적인 요구에 저항하며 당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확고한
자세이다. 공격성이란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존경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주장성은
긍정적인 것이고, 공격성은 부정적인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소극적(비주장적) 행동과 주장적 행동, 공격적 행동간의 중요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소극적(비주장적) 행동은 당신이 어떤 것을 원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정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그것을 얻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당신은 수동적이고,
간접적이고, 다소간 자신에게 정직하게 못하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당신은 필요없이 자신을 억제할
때가 많으며, 당신이 지닌 기본적인 욕구조차도 때로는 부인한다. 당신은 불안해하고,
상처 입고, 분노를 느낄 때가 많다.
  주장적 행동은 당신이 어떤 것을 원할 때에 정직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대부분
그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적으로 행동하는 편이며,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언제나 그들에게 전부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 스스로 그것을 얻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열심히 노력한다. 자신에게 항상 흥미와 관심을 가지며,
자기향상감을 느낀다. 타인의 가치나 목표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대개는 자신의 것을
더 중요시한다. 당신은 활발하게 표현적으로 행동한다.
  공격적 행동은 타인이 당신의 생활을 방해하였다고 분노를 느끼며, 자신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행동하여서는 안된다고 당신은 굳게 믿고 있다. 당신은 감정을 정직하게 표현하기는
하나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동해서, 때로 정말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오히려 얻지
못하게 된다. 당신은 활발하게 주장적으로 행동하기는 하나 상대방의 인격에 상처를
준다. 당신은 자신을 때로는 지나치게 표현한다. 당신은 자신만이 옳다고 느끼고,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며, 남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당신이
가진 적개심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당신이 이 세 가지 종류의 행동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소극적(비주장적) 행동이나
공격적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이 책에서 제시된 대로 스스로
훈련을 쌓는다면, 참으로 주장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랑게(Arthur
Lange)와 쟈쿠보우스키(Patricia Jakubowski)와 다른 REBT 치료자들이 강조하는
바이다.

  주장적으로 행동하기
  랑게와 쟈쿠보우스키와 월페가 요약한 것처럼, 주장적 행동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거절할 때에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라.
망설이거나 주저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결정을 뒤집을 기회를 주지 마라. 결코
자신을 변명하거나 사과하는 투로 말하지 말라.
  --분명하고 확고한 음성으로 말하라. 우물쭈물하거나 변명조의 말을 피하라.
  --오랫동안 침묵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짧고 간단하게 대답하라.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정당하게 대해 주도록 노력하고, 그들이 당신에게 섭섭한
대접을 하였을 때에는 그것을 지적하라. 그러나 그것을 그들에게 고집하거나 강요하지
말라.
  --부당하게 여겨지는 요청을 받았을 때에는 상대방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고,
그것을 경청하라. 그 이유가 합당하면 대안적 행동이나 당신이 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 보라.
  --그 이유가 합당하면 정직하게 당신의 감정을 표현하라. 다만 왜곡된 표현이나
타인을 공격하는 말이나 자기변명은 하지 말라.
  --당신이 불쾌감이나 서운한 감정을 표현할 때는 상대방이 보인 어떤 행동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라. 그 사람 자체를 공격하여, 그가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하라.
  --'나 전달법'을 사용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기는 하나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라. 주장훈련의 개척자인 월페는 주장성을 학습하는 데 있어 '나
전달법(I-massage)'과,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라자러스와
후이스(David D. Hewes)는 '나 전달법'도 상당히 자기 패배적인 분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오히려 적절한 '너 전달법(You-message)'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만약, 당신이
한 판매원의 태도를 불쾌하게 여긴다면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은 '나 전달법'으로 말할
수 있다. "내가 셔츠를 하나 사려고 했는데, 당신이 그렇게 대하니 참으로 자존심이
상하는군요!" 그런데, 이것을 '너 전달법'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화내지 않고도 말할
수 있다. "오늘처럼 짜증나는 날씨에 당신은 매우 흥분되어 있는 것 같군요. 당신의
그런 행동도 무리가 아니에요" 라자러스는 이와 같은 '너 전달법'으로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심지어 긍정적인 강화까지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 전달법'을
활용하되, 효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 하지는 말라.

  주장성의 등급에 맞추어 표현하라
  스메비(Marlowe H. Smaby)와 타미넨(Armas W. Tamminen)은 주장행동에는 여러
가지 등급이 있으며, 상황이나 상대방에 따라서 각기 등급이 다른 주장성을
보여주라고 하였다. 가장 기초적인 주장행동은, 당신이 단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침해를 받지 않고자 할 때에 사용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당신
앞에서 새치기를 하려고 할 때에 맨 뒷줄을 가리키며 그곳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는
경유가 이에 해당된다.
  그 다음 강도의 주장행동은, 자신있게 주장적 행동을 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는
당신이 어떤 문제를 또 다른 측면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고,
상대방에게 짜증을 내지 않고 당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지키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친구가 자기를 위해 거짓말을 해달라고 당신에게 부탁한다면, 당신은 "네가 나에게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는 잘 알겠고, 내가 거절하면 네가 얼마나 실망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일을 하기가 싫은 기분이고 정말로 곤란해질 것 같으니,
네가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이런 부탁을 받고 보니 나는
정말로 불편하구나"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강도의 주장행동은 교섭적 주장행동이다. 확고하게 자신의
입장을 지키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의 관점까지도 이해해 보고, 이어서
타협적인 해결 방법을 모색해 보는 단계이다. 당신에게 거짓말을 부탁하는 친구에게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네가 지금 어떤 기분이고, 왜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지, 그리고 내가 거절하면 네가 얼마나 실망할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도
또한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강하고, 정말로 곤란한 지경이니, 내가 왜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은지 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 볼 수 있을 거야. 내가 너에 대하여 거짓말까지 하면서 선전해
주기보다는 너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소개해 주면서 네가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서 그 사람이 너를 채용하도록 설득해 보겠어. 그가 원하는 경력을 지금 당장은
네가 갖추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에 너를 채용하게 되면 너의 능력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추천해 보겠다"
  이처럼 여러 가지 강도의 주장행동을 연습해 보면, 당신이 원할 때에 언제든지
주장행동을 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우호적이며, 친밀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REBT의 범주 안에서 이러한 주장적 행동을 모험적으로 시도해 보기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더 이상 수치심을 느끼거나 자신을 비하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연습을 하는 목적은 모험을 위한 모험이나 단지 사회적인 인습을 깨트리자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이러한 모험을 해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고 그런 모험을
시도해 보면, 그렇게 해보더라도 어떤 끔찍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신
스스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또한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으나, 견딜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당신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남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썩어빠진
인간이다"라는 식으로 인간 됨됨이의 전체를 평가하거나 비하할 합법적인 권리는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불쾌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은 결코 화내는 일없이 단지
적절한 불쾌감만을 느끼는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적절하게 주장적인 행동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세상을 원망하고 절규하는 경향은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인자 중의
하나가 수동적이고 비주장적인 행동이라는 점이다. 당신이 보다 주장적으로 행동하는
연습을 한다면(설사 타인이 당신을 지나치게 주장적인 사람이라고 본다 하여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당신은 지금보다
화를 내는 정도나 빈도가 더 줄어들 것이다.

     좋은 본보기의 인물을 찾아본다

  REBT에서는 내담자들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고, 모든 형태의 심리교육적 방법을
동원한다. 독서 자료, 시청각 기자재, 차트와 도표, 표어와 본보이기 등을 사용한다.
만약에 당신을 부당하게 대우한 사람들에게 자주 화를 내는 것이 문제가 되어 당신이
나에게 상담을 받으러 온다면, 나는 당신에게 REBT의 화내지 않는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행동을 할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치료 시간에 늦게 오거나,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거나, 당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해오지
않거나 저항을 보인다 하여도, 나는 화를 내며 당신을 비난하지 않고, 단지 당신의
행동을 싫어할 뿐임을 분명히 당신에게 보여주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행동에 대해서 내가 전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냉정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나는 치료자로서의 역할을 매우 진지하게 수행해 나갈 것이다. 설령,
당신이 잘 경청하지 않더라도 나는 계속해서 공감적인 태도로 당신의 자기패배적인
철학(비합리적 신념)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근절하는 방법을 가르치고자 노력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내게 감정적으로 의존하고,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당신 자신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의 "난폭한"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난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방어본능을 부채질할 뿐이라는 점을 나는 앞에서
지적하였다. 만약 당신이 상대방에게 그들의 행동을 스스로 비평해 보도록 허용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자신의 "난폭한" 행동을 고집할 필요는 느끼지 않으리라는 점도
지적하였다. 그들은 난폭한 행동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보다 공정하게 대하려는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진정한 성장의 단계로
접어들 것이다. 이와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나는 당신이 진정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역할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나는 당신이 모방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의
행동을 보인다. 나는 마치 당신과 정반대되는 사람처럼 행동함으로써 그 대조를 통해
당신이 자신의 비합리적인 행동(분노)을 보다 잘 느낄 수 있도록 촉구한다. 이렇게
내가 당신과 대조되는 합리적인 모델로서 행동하는 것이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여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해서, 치료자와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었을
때는 당신이 어떻게 계속해서 이 학습을 할 수 있을까?
  해답은 이것이다. 당신의 주변에서 좋은 모델을 발견하라.
  불행하게도,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좋은 모델이 되어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실상 사소한 일에도 자주 분노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당신의 친구나 선생님 중에, 친척 중에, 아는 사람 중에 인생의 유쾌하지 못한
일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간 사람을 찾아 보라. 그러한 사람과 이야기해
보라.
  그들이 인생의 짜증스러운 면에 직면했을 때에 어떻게 이성적으로 관리해
나갔는지를 배워 보라.
  그들의 행동을 관찰해 보라. 그들이 하는 대로 당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따라 해볼
수 있는지 주의해서 보라.
  책이나 자서전 속에서 그러한 모델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문학 작품 속에는 인생의
커다란 좌절과 박해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하거나 압도당하지 않고 극복해 낸
인물들이 무수히 많이 나온다.
  이러한 합리적인 인물을 찾아보고, 그들의 행동이 적절한 것으로 판단되면 그들의
인생에서 배우려고 노력해 보라.

     가타 행동적인 방법

  REBT에서 화내는 습관을 고치기 위하여 사용하는 여타의 행동적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적개심의 표출
  당신이 개인치료나 집단치료를 하고 있다면 치료시간이나 실제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가진 적개심을 표출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적개심
그 자체가 당신을 변화시켜 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쁜 모델로 작용할
때가 많다. 여기서 적개심을 표출시켜 보라는 말은 당신이 치료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적개심에 대처하는 연습을 함으로써 당신의 적개심을 자세히 관찰하고 이해하게 되어
그것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어떤
상황에서 회피하는 것은 단지 그 문제를 미해결의 상태로 남겨둘 뿐이다.

  건설적인 대안을 찾아보기
  왓첼(Andrew S. Wachtel)이나 데이비스(Martha Penn Davis)등이 지적한 바와
같이, 분노나 난폭성으로 가득찬 사람은 일반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고, 익명성과
비인간성을 띠는 경향이 있다. 깊고 만성적인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매우 건설적인
활동단체에 참여하여 헌신할 수 있게 되면, 그들의 소외감이나 비인간성과 분노로부터
상당히 벗어나게 된다.

  초기의 바른 조건화
  대댄버그(Victor H. Dedenberg)와 째로우(M. J. Sarrow)는 새로 태어난 새앙쥐들을
대상으로 하여 획기적인 실험을 하였다. 실험집단은 쥐에 의해 양육되고 통제집단은
새앙쥐에 의해 양육되도록 하였다. 그 실험의 결과에 의하면 "쥐에 의해 양육된
새앙쥐는 새앙쥐에 의해 양육된 새앙쥐(통제집단)보다 무게가 더 많이 나갔다. 또한
그들은 트인 장소에서 더 위축되었고, 새앙쥐보다는 쥐들 곁에서 더 머무르려 하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는, 쥐에 의해 길러진 새앙쥐들은 싸움상자 안에 놓여졌을 때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이는 새앙쥐에 의해 길러진 새앙쥐들(통제집단)이
매우 자주 싸우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는데, 이 결과는 새앙쥐들의 "선천적인"
투쟁 경향성이 "후천적인" 양육에 의하여 의미있게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실험에서도, 개나 고양이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길러진 새앙쥐들은 나중에는 이
"천적"에 의해 공격당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격성이
경험에 의해 변경될 수 없는, 선천적으로 결정된 본능적 반응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말은 유전적인 요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유전적 요소가
중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행동 패턴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전적 배경과 그것이 자라고 발달하는 환경의 양자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라고 대댄버그와 째로우는 결론지었다.
  우리가 이 지식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상태와 결부시켜 본다면, 분노를 줄이기
위하여 어린 시절부터 조건화를 시키면 화를 내고 난폭한 행동을 하려는 선천적인
생리적 경향을 상당히 줄여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물론, 당신은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어린
자녀를 두었다면, 그들이 적개심을 덜 느끼며 성장하도록 조건화하는 데에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보탬이 될 것이다.

  전환적 방법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건설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적개심을 전환시키는 좋은
수단이 된다. 제임스(William James)와 프로이드(Freud)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
찐버그(Norman Zinberg)는 분노나 폭력을 승화시키는 데에는 영화나 개인적인 오락과
같은 활동보다는 조직적인 스포츠나 정치와 같은 경쟁적이고 약간은 파괴적인 활동이
더 효과가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아무도 그 정답은 모른다. 하지만
각박한 산업경쟁이나 권투경기와 같은 고도의 공격적인 활동이 사람들의 행동이나
정서에 적대감을 증가시킨다고 REBT에서는 간주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종의 전환적 방법으로서 상호제지를 사용하면 분노의
감정을 완화시킬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즐겁고 전설적인 활동으로의 전환은 심지어
별로 재미없는 전환이라 할지라도 적개심을 해소하는 데에 일시적이나마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러므로 화를 터뜨리는 일을 스스로 통제하고 싶다면
전환의 방법을 사용하여 일시적으로 분노를 해소해 보든지, 아니면 영구적으로 당신이
불쾌한 자극에 직면하여도 화를 적게 낼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스스로를 훈련시킬 수
있다. 전환적 방법으로는 사고, 상상, 게임, 운동, 정서적 활동, 오락 등이 있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당신에게 잘 맞는 활동을 선택하면 된다.

  맞서서 대항하기
  정서적으로 혼란된 반응을 줄이는 방법 중의 하나로서, 효과적으로 대항하기의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피사노(Richard Pisano)와 테일러(Stuart P. Taylor)는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40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다. 그들의 공격성을
감소시키는 데에 효과가 있었던 방법은 공격성에 대해 벌을 주거나 공격하지 않을
때에 돈을 주는 식의 방법이 아니라, 자신들을 공격한 상대방에 대하여 그들이 똑같은
벌을 가하도록 허용되었을 때였다.
  나는 이 실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사람들이 그들의 적대자에 대해
유능하게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고 느낄 때에 그들은 훨씬 더 안정되고 적대감과
처벌적인 생각을 줄일 수 있게 된다. 다른 유사한 실험들에서도 사람들은 자지가
확실히 어떤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을 때에, 그 상황을 잘 다루고 그에 대한
혼란을 덜 겪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당신이 효과적으로 대항하는 방법을
개발해 둔다면, 차후에 당신이 불쾌한 사건이나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부딪쳤을 때에 그 방법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부당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자각하고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한 분노가 상당히 경감될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당신이 공격자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항하지 못했을 때에는
오직 자신의 무능력을 자각하게 될 것이므로, 언제나 이상적인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다.

  인지적인 자각과 둔감화
  노바코(R. Novaco)는 사람들이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으로서 이완요법만을
사용한 경우, REBT만을 사용한 경우, REBT와 이완요법을 병행한 경우의 세
집단으로 구분하여 실험을 해보았다. 그 결과에 의하면 REBT가 이완요법보다는
효과적이었으며, REBT와 이완요법을 병행한 경우가 분노를 조절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었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결과를 REBT의 정규적인 치료시간을 통하여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내담자들이 스스로의 생각에 의하여 분노감정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즉, 그들이 푸념하고, 불공평한 처사가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화가 나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 다음에,
자신을 이완하고 분노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화를 내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는 방법과 종국에는 분노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도와준다.
  REBT의 원리를 적용하면 당신은 혼자서도 이와 같은 일을 수행할 수 있다. 분노의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당신 자신이라는 점을 먼저 충분히 인식하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해야 한다고 고집하거나, 확실히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함으로써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이해하고, 세상 사람과
우주에 대해 명령하는 습관을 수정하고 제거하는 작업을 하기 바란다. 그리고 이
장에서 소개된 다양한 행동적 방법을 적용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REBT가 많은 치료적인 기법들을 절충적으로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지정행의 요법을 절충적인 이론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지정행의 치료이론은 약
30))40개가 넘는 다양한 기법들을 사용하는데, 그것들은 REBT의 전체적인 이론의
맥락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서로 다른 많은 기법들이 전체적인 REBT 이론의
구조 안에서 활용된다.
  예를 들면, REBT에서 사용하는 행동적 방법들은 단지 증상 제거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지정행의 치료자가 당신에게 화내는 습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몇 가지의
행동적 숙제나 조작적 조건화나 주장훈련 등을 적용해 보도록 권할 때가 있다. 그가
의도하는 것은 단지 치료시간 동안의 당장의 분노를 제거하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화를 내는 마음을 어떻게 생성해 내는가를 이해하고, 미래에까지도
분노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차
부딪치게 될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서도 결코 화를 내어 이성을 잃지 않도록 말이다.
  REBT는 당신에게 이론적인 지식과 혼자서 실제 적용할 수 있는 기법을 가르쳐
준다. 그리하여 좀더 기분 좋게 느끼고 실제로 더 향상되고 큰 효과를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의 능력을 키워 주는 것이다.

 
        10.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지정행의 치료는 성격이론과 심리치료이론상 기본적으로 인지적 접근에 속하지만,
정서적, 행동적 요소를 매우 강하게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화를 내는
습관의 배후에 놓여 있는 생각과 감정을 근절하기 위해서 주로 인지적 절차만을
제시하여 왔다. 즉, ABCDE에서의 D(논박)만을 이야기해 온 것이다. 논박이 철학적,
인지적 접근인 것은 사실이다.
  당신이 이 논박의 방법을 집중적으로 꾸준히 시행한다면 여타의 인지적 방법을
사용할 필요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REBT 치료자들은 다년간에 걸쳐서,
내담자들이 자신의 비합리적 신념을 검토하고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의 다른
방법들을 개발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중요하고 유익한 몇 가지의 예를 여기에
소개해 보겠다.

     비합리적 신념의 논박(DIBS)을 습관화하라

  제일 먼저, 우리가 비합리적 신념의 논박(DIBS:Disputing Irrational Belief
systems)이라고 부르는 방법이 있는데, 이 방법은 당신이 신봉하는 생각 하나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여러 차례 반복하여 "쪼개 보는" 것이다. 당신은 이 비합리적
신념의 논박을 최소한 하루에 10분씩, 20일이나 30여일 동안 계속해 보아야 한다.
DIBS의 방법에 대하여는 '정신건강적 사고'의 마지막 장에서 소개한 바 있다. 화내는
습관을 통제하는 데에 이 방법을 적용해 볼 수 있도록 여기서 다시 소개해 보겠다.
  다시 한번 앞의 예로 돌아가, 내가 당신과 아파트를 함께 쓰기로 약속해 놓고,
당신으로 하여금 상당한 경비를 지불하도록 설득한 다음에, 무책임하게 그 약속을
취소하고 당신이 입은 손해나 곤란을 배상하지도 않았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나에게
극도로 화가 날 것이며, 내 얼굴을 본다든지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거론만 하여도
화가 솟구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당신을 화나게 한 최초의 비합리적 신념이, "그는
나에게 그와 같은 부당한 행동을 해서는 안돼!"라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당신은 이 문제에 논박(DIBS)을 적용하여, 이 비합리적 사고에 도전장을
내보자. DIBS를 사용하면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종이에 쭉 적어 보고 그
해답도 역시 적어내려가 보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그것을 날마다 검토하고 추가하고 변화시키며 그 생각을 더 굳히게 될 것이다.

  질문 1:내가 논박하고 굴복시키고 싶은 비합리적 신념은 어떤 것인가?
  "그는 나에게 그와 같은 부당한 행동을 해서는 안돼!"

  질문 2:이 신념이 옳다고 할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가?
  "아니다. 그런 증거는 없다"

  질문 3:이 신념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가 그렇게까지 심하게 부당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그의
행동을 완전히 잘못되고 틀리고 무책임한 것으로 본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관해서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의 견해도 어떤 면에서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행동을 100%
잘못되고 무책임한 것으로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다"

  "그가 나에게 한 행동이 명백히 잘못되고 부당한 것이라고 가정하여도, 그가 그렇게
행동해서는 절대로 안되며 반드시 공정하게 행동하여야만 한다는 우주의 법칙이라도
존재하는가? 그런 법칙은 없다! 나를 포함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가 공정하게 행동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지, 그가 그렇게 행동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가 나에게 공정하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을 어찌 그가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나를 공정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결과적으로, 그가 무슨 일이 있어도 공정하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절대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준 셈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그가 나에게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돼!'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그가 나에게 그런 행동을 했을 당시에 존재했던 조건들이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런 조건들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들을 따라 해서는 안된다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의 환경적 여건, 자라온 배경, 성격, 생리적 특성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요구하는 것처럼 그가 그런 조건들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가령, 예를 들어
그의 어머니가 나와의 약속을 강력히 반대하므로 자기 어머니의 의견을 좇아서 나와의
약속을 깨트렸다고 가정하자. '그가 나를 그렇게 부당하게 대해서는 절대로 안돼!'라는
나의 독백에는 그가 어머니의 의사를 따라서는 안된다는 것을 고집하는 나의 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수단으로 그의 어머니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어머니의 의사를 무시하도록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가 나에게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명령조로 요구함으로써 나는 그것을
진실인 것처럼 믿는 경향이 있다. 이 사건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그가
나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 쪽으로 선택할 수도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곧 "그가 나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 쪽으로 선택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내게 공정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속에는, 내가 그렇게
행동하기를 강하게 원하므로 그는 무조건 내 소원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명제가 어떻게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분명히
타당성이 없는 명제이다!

  "우리가 사귀는 동안 나는 그에게 공정하게 행동하였으므로, 그도 나에게 똑같이
공정하게 행동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데, 이것 역시 바보 같은 생각이다.

  "나에게 불쾌하게 대했으니, 그는 순전히 불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나를
불쾌하게 대한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수긍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가 취한 한두 가지의
행동을 가지고 그의 전 인격을 송두리째 판단하여 불쾌한 사람이라고 낙인찍는 것은
독단적이고 지나친 일반화이며 타당하지 않다. 그도 역시 다른 면으로는 어떤 좋은
특성과 업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내가 그의 전 인격을 버러지
같은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나를 그렇게 부당하게 대해서는 절대로 안돼!"라는 독백 속에 나는 '절대로
안돼!'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절대성을 가정하고 있다. '그가 나를 공정하게 대하면
더 좋겠다'라거나, '그가 나나 다른 사람에게 공정하게 행동하면 자신이나 사회를 위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텐데'라고 말하지 않고, '그는 나를 공정하게 대해야만 돼!'라고
절대화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절대성이란 검정할 수 없으며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확신하는 것은 무익할 뿐이다.

  "그가 나를 그렇게 부당하게 대해서는 절대로 안돼!"라는 신념이 진리라고 증명할
길은 없다. 나는 틀림없이 그에게 매우 분노를 느끼고, 앞으로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계속해서 이 분노를 지속함으로써, 그와 좀더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기회를 박탈해
버릴 것이라는 점은 확실히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신념을 포기하는 편이 더
이롭다!

  "그가 나에게 공정하게 대해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행위는 내가 그의 부당한 행동을
참을 수 없으며,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우주의 어떤 힘이 그의 잘못을
고쳐서 나에게 정당하게 행동하도록 할 때에야만 가능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물론 나의 이런 생각은 엉터리이다. 왜냐하면 그의 부당한 행동을 비록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그에게 어리석게도 화를 내는
일을 그치기만 한다면, 그가 과거나 현재, 미래 언제든 간에 부당한 행동을 한다
하여도 나는 여전히 행복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 4:그가 나에게 부당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나의 가정과 그가 괘씸하게
부당한 행동을 했으니 기생충 같은 인간이라는 나의 평가가 옳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그렇게 생각할 만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경험적인 증거는 쉽게 얻을 수 있고, 그가 나를 부당하게 대하였다는 데 대한 다른
사람들의 동의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행동이 불쾌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동을 했으니 그가 비열한 인간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나의 신념은 기껏해야 부분적인 타당성 밖에
없으며, 상당히 과장된 것이고 기본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질문 5:그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에게 부당한 행동을 한다고 가정할 때, 어떤 좋지
못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게 될까?

  "그가 아파트를 나와 함께 쓰기로 한 약속을 믿고서 내가 아파트의 내부를 장식하는
데 소요한 시간과 수고와 비용을 배상 받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약속을 철회한
결과로 나는 상당한 불편을 계속 겪을 것이다"

  "그가 우리의 사건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가 한 행동이 옳고 나는 그르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나의
이름과 명예에 먹칠을 할 수도 있다"

  "그가 나를 싫어하게 되고, 또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를 악평하여 나를
싫어하게 만듦으로써 내가 더욱 불편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결과로 내가 새 아파트에서 혼자 살게 되거나 혹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된다면, 그것은 매우 짜증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특히, 앞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한다면 나는 그와 계속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두 사람이 피차간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극복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서로에 대해 언짢은 기분이 남아 있고, 예전의 신뢰와 우정을 잃게 될 것이다"

  질문 6:그가 나를 계속해서 부당하게 대할 때, 그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주장적으로 행동하여 그의 부당한 행동을 직면시키거나, 그의 행동과 태도를
변화시켜 보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의 새 아파트에서 즐겁게 혼자 살거나, 함께 살 다른 사람을 찾아볼 것이다"

  "그와의 우정을 유지하는 데 소비했던 시간과 정력을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데 투자하거나 혹은 나 혼자서 다른 방법으로 즐거움을 누리는 데 사용할
것이다"

  "나는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나에 대한 부당한 행동을 시정할 수 있도록 그의
태도를 변화시켜 보려고 시도할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내 자신의 태도를 고치는 절호의 기회로 삼을 것이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화내는 감정을 창출한
장본인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사람들이
나에게 불공평한 대우를 하더라도 화를 터뜨려 파괴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기 보다는
건설적으로 행동하도록 내 자신을 연마할 것이다"

  DIBS의 기법은 불쾌한 상황이 일어났을 때 발생하는 비합리적 신념을 논박하는
중요한 측면을 공식화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당신이 C지점에서 정서적으로 혼란될
때마다 당신 자신에게 일련의 질문을 던져봄으로써 효과적으로 논박을 해보는 것이다.
이 DIBS의 방법은 불안, 우울, 절망, 자기 연민, 낮은 좌절 인내도와 같은 정서를 느낄
때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 기법을 매일 매일의 연습에 기초하여 규칙적으로 적용하라.
노트에 적거나 녹음기를 이용하여 논박한 내용을 공고히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어의론과 유추의 기법을 활용하라

  비합리적 사고를 뿌리뽑는 또 다른 인지적 기법으로 데니쉬(Joseph Danysh)에 의해
발명된 기법이 있다. 이것은 언어식별학을 창시한 코르지브스키(Alfreed Korzybski)의
일반적인 의미론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코르지브시키는 모든 인간이 천성적으로
단순한 흑백 논리를 취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사람들이
부정확한 어의를 사용하기 때문에 부정확한 결론을 내리게 되며, 그 결과로 부적절한
행동을 하게 되고 자기패배적인 경향을 나타낸다고 지적하였다. 코르지브시키 이론의
상당 부분이 REBT 이론과 결합되었다. 많은 권위자들이 이것을 어의론의 효시라고
부르고 있다.
  데니쉬의 이론은 위와 같은 어의적인 과잉 일반화의 원리를 담고 있다. 그가 제시한
유추의 기법은,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고, 그런 어리석은
생각들을 제거할 수 있는 실질적, 인지적인 기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유추의 기법을 분노의 문제에 적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과거에 당신을 "화나게
만든" 사건을 다시 들을 때마다 당신은 새삼스럽게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당신이 이제는 그 사람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씻어 버리고 싶다고 하자. 당신
자신에게 "화내지 말자, 화내지 말자"라고 말해 보았자 효과가 없다. 그런 말은
일시적으로 그 분노를 억압하는 효과는 있을지 모르나 그 분노를 없애 주지는 못할
것이다.
  당신은 평화적이고 지나치게 단순한 양식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해석하는
유추(혼동하거나 연합시키는 사고)의 과정을 거치게 되기 때문에 감정적인 문제가
야기된다. 그래서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의 머리 속에서 지금 떠오른 것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의 행동은 비도덕적이고
형편없고, 부당하고, 끔찍하고, 저주스럽다. 그는 좋지 않은 사람이고, 언제나 형편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와 같은 사람을 정말로 견딜 수 없다"
  이와 같이 그 사람의 행동과 사람 자체에 관하여 배타적이고 일방적이고 흑백
논리로 과잉 일반화된 연결을 시킴으로써, 그에 대해 극도의 적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당신이 이 연결을 고집하고 있는 한은, 화를 내지 않고서 그의 행동과
그 사람을 객관화시켜 볼 가능성은 전혀 없게 된다.
  데니쉬의 유추기법을 사용하면, 편파적인 판단을 지양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볼 수 있게 된다. 사실상 "행동"이라는 단어는 모호한 용어이다.
그러므로 유추의 기법을 써서 좀더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보도록 하는 것이다.
데니쉬의 방법에서는, 어떤 단어에 대해 다양한 의미를 많이 생각해 보도록 촉구한다.
어떤 여자의 행동을 예로 들어 본다면, 백지 위에 나쁘고, 썩어빠지고, 부당하고,
끔찍하고, 저주스럽고, 불쾌한 따위의 단어들을 나열해 보라. 그리고 나서 당신의
생각을 바꾸어, 가령 이번의 경우를 빼고는 대체로 그가 공정한 행동을 하였다든가,
나의 관점이 아닌 그의 관점에서는 옳은 행동이었을 수 있다든가, 나도 그런 것처럼
그도 자신의 관심사대로 행동했을 것이라든가, 때로는 타인에 대해 훌륭하고 사려
깊은 행동을 한다든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든가 하는 좋은 점을 적어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객관적인 측면들, 가령 음악을 매우 좋아한다거나,
운동을 싫어한다거나, 대중 앞에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거나 등과 같은 중립적인
행동을 적어 본다.
  가능한 한 자세하고 정확하게 목록을 나열해 보면, 당신이 그의 행동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그에 대해 보다 전체적이고, 정확하고, 비교적 공정한
견해를 가지게 된다. 그 결과로 "썩어빠지고, 좋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고, 부당하고
끔찍한 것으로 보았던 편파된 견해는 사라질 것이다. 당신은 그의 행동을 어느 특정한
예를 가지고 당신의 마음 속에서 왜곡하고 조작한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허심탄회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당신은 처음에는 부정적으로만 나열했던 그의 행동을 이제는 좀더
우호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종이에 적어 보거나 녹음기에 녹음을 해보는 것이다. 가령,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좋은 행동을 하기도 하는 사람이고,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지닌 사람이며, 때로는 옳지 않게 행동하지만 대부분은 사리에 맞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적어 나갈 수 있다. 또는 그 사람에 대해 좀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글을
쓸 수도 있다. 단순히 기술적인 차원에서 예를 들면, "키가 5피트 5인치인 여자,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 좋은 사람을 많이 사귀고 있는 사람, 당뇨병을 앓는 사람,
좋은 책을 많이 쓴 사람" 등으로 묘사해 보는 방법도 있다.
  당신이 특히 누군가에게 매우 분노를 느끼고 있을 때 이 유추기법을 자주 사용해
보면, 당신은 거의 틀림없이 그 사람의 나쁜 특성을 "희석시킬 수" 있으며, 그 결과로
그 사람에 대한 좀더 정확하고, 현실적이고, 트인 견해를 획득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추기법을 쓰면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나 모든 불쾌한 상황에
대한 분노가 자동적으로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유추기법은 분명히 효과가
있다. 그 기법을 자주 사용하다 보면 어느덧 사람들에게 더 이상 화를 내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지적 방법과 행동적 방법을 병용하는 또 하나의 좋은 예로 프랑클(Viktor Franl)이
제안한 "역설적 의도"라는 것이 있다. 많은 치료자들이 이 방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면서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REBT에서는 이 역설적 의도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한다. 먼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비합리적 사고를 택하여 그것을 엉터리 같은 수준으로 확대시킨다. 그
생각을 당신의 마음 속에서 아주 많이 부풀려 과장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무언가를 원했는데 그것을 들어주지 않아 매우 화가 났다면, 당신이
그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과장해 보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만 한다! 그는 내 손아귀에 달려
있다. 그가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후프 속으로 점프하겠다고 말해 놓고 실행하지
않으면, 나는 얼마든지 그를 사슬로 묶어 두고 채찍질하며 밀어붙일 수 있다! 내가
만일 그에게 백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하거나 내 앞에서 땅바닥에 머리를 대고 하루에
열 번씩 조아리라고 하여도, 그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해야만 한다! 그가 만일 거절한다면 나는 즉시 그에게 벼락을
내리거나 없애 버릴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이 우스꽝스럽고 극단적인 수준까지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상상해 본다면, 상당히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는 당신이 그에 대해 아무런 통제력을 가질 수 없으며, 그도 역시 그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결과로
당신은 자신의 어리석은 고집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설명한 것은 역설적 의도를 당신의 머리 속에서 인지적으로 사용한
경우였다. 당신은 정반대 되는 행동을 통하여 역설적 의도를 연습해 볼 수 있다. 만약
삶들이 당신을 부당하게 대하여 당신이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면, 고의적으로 그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해 보는 것이다. 그들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정관계를 지속하여 보는 것이다. 그들이 즐거워하리라고 예상되는 어떤 일에
초대하고, 호의를 베풀고, 그들에게 각별한 배려와 친절을 보여 주라. 그와 같은
역설적인 행동을 통하여 무엇보다 먼저 당신은 그들에게 화내지 않는 연습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혐오스러운" 행동에 대하여도 기분 좋게 느껴지거나, 혹은
적어도 중립적인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둘째로, 이와 같이 한쪽 뺨을 얻어맞고 반대쪽 뺨을 내미는 식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당신은 그들에게 어떤 사람들의 부당한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꼭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된다. 셋째, 당신의 그러한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자기가 얼마나 나쁜 행동을 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그들이 앞으로는 당신에게 아주 훌륭하게
행동하고 또 이미 저지른 잘못까지도 고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다른 쪽 뺨을 내미는" 철학이 항상 효과가 있다거나, 당신이
이것을 언제나 효과적으로 잘 실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다른 사람이
당신을 부당하게 대했을 때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역설적인 행동을
가끔씩 현명하게 사용하며 의식적으로 실천하노라면 화나는 감정이 사라지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을 것이라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역설적 의도는 우리 인간의 아집을 고치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그 사람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면, 당신은 당신의 인격적
통합성(잘못된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집스럽게 그 사람에게 분노한다. 당신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기 위하여(실제로는 당신이 약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데도)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어린 시절에 당신과 부모님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졌던 현상이다.
  부모는 당신에게, 순전히 당신을 위하여, 아침에 시계가 울리면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늦지 않도록 하라고 충고한다. 당신은 일찍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래서
부모의 말에 저항한다. 당신은 그렇게 저항함으로써 학교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게
된다거나,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이나 당신이 바라는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 등과 같은 인생 목표의 달성에도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자신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일찍 일어날 수는 없어! 빌어먹을! 난 그렇게 못해! 내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는 바보 밖에는 안돼. 나는 그들에게 보여주겠어! 고의로 늦잠을 자서 내가
강하다는 걸 보여주고, 내 의지대로 행동하겠어!" 어린 시절이나 성인이 되어서나 이런
방식으로 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부모님 쪽에서 일찍 일어나라고 충고를
했으므로, 부모님의 말을 따르는 것은 그들의 규칙을 추종하는 것이며 그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어리석고 고집스럽게 확신하고 있다. 규칙을 따르는 것이 실제로는
강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비겁한 짓이라고 믿고 있다. 당신은 "강하게"
저항하고, 실제로는 어리석게(약하게) 행동한다.
  분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화를 내는 것이 자기패배적이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타인의
행동에 대하여 당신의 철학을 고수하고, 그들에게 분노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당신이 화를 내지
않으면 약하고 의지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확신하고 애써 화내는 습관을 고집
한다. 기실은 어떤 부당한 행동이 매우 싫을 때에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더욱 강한
사람의 행동이며 그 결과도 또한 더 좋다. 그러나 당신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집요하게 화를 내고 복수하려 한다면 당신의 분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 의도를 사용하여 "강한" 고집을 꺾고, 부당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상냥하고 친절하게 행동한다면, 역설적으로 당신은 자신의 비합리성을 물리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합리적인 방식으로 행동함으로써 보다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헤어(Rachel T. Hare)는 또 다른 형태의 역설적 의도기법을 창안하였다. 나는 이
기법을 내담자들에게 적용하여, 그들이 화를 터뜨리는 습관을 없애도록 도와주었다. 그
방법은 당신이 마음대로 화를 터뜨려 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나의
내담자 중의 한 사람은, 행인이 자기 옆에서 침을 뱉어 자기의 바지나 구두에
조금이라도 튄다든지 하면 그때마다 매우 화가 나고 주먹을 휘두르고 싶어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설득하여, 침이 실제로 자기에게 닿았다는 명백한 외부적
증거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화를 내는 것을 허용하도록 자기와의 약속을 정해 보라고
권하였다. 그는 이것을 거의 증명해 내지 못하였다. 그러자 화내는 습관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와 똑같은 제한적 기법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여 보자. 당신이 억울하게
대접받았다고 느끼고 자주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 이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분노를 허용하는 한계를 설정해 보기 바란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가 당신에게 부당하게 행동하였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동의할 때
  --그 부당함이 당신에게 상당한 해를 끼쳤다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때
  --금전적으로 볼 때, 그 부당한 행동 때문에 당신이 상당한 양의 돈을 손해본 것이
분명할 때에 한하여 당신이 화를 내는 것을 허용해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역설적인 방법으로 인위적인 한도 내에서 "자유스럽게" 표현하도록
스스로에게 허용해 보면, 당신은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즉, 당신은 어떤 한도
내에서 화를 낸다는 조건하에서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으며, 당신 스스로가
울화를 터뜨리고 있으니 만치 화를 내지 않고 통제할 수 있는 것도 곧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와 같이 역설적인 기법이 효과가 있는 것은, 당신이
"나는 분노를 느껴야만 돼!"라거나 "나는 분노를 느껴서는 안돼!"와 같은 식의
절망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법은 당신에게도 여러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당신이 다양한 반응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

     유머를 활용하라

  REBT에서는 유머도 폭넓게 활용한다. 당신이 불쾌한 상황을 아주 심각하게
봄으로써 필요 이상으로 당신 스스로를 더욱 화나게 하기 때문에, REBT 치료자는
내담자의 심각한 성향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다양한 익살이나 농담을 사용한다.
지금에 와서는 이미 유명한 논문이 되었는데, 나는 "재미를 이용한 정신치료(Fun as
Psychotherapy)"라는 논문을 워싱턴에서의 미국심리학회(APA) 연례회의에서
발표하였고, 발표 도중에 "합리적 노래(Rational Songs)"라는 유머러스한 두 개의
노래를 불러 히트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어떤 상황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고통과 혼란이 생긴
것이라고 한다면, 치료자가 이런 내담자의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사고의 전환을
가져오기 위하여 유머나 재미보다 더 좋은 수단이 어디 있겠는가?...유머라고 하는
치료 상표는 지금까지 개발된 모든 종류의 해학-과장하기, 엉터리로 하기, 역설적
의도, 재담, 위트, 아이러니, 변덕, 자극적 언어, 은어, 쾌활한 외설, 기타의 익살을 모두
함축하는 것이다"
  REBT의 익살을 따라가다 보면,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거나,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만족시켜 주어야 하고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세상사가 어찌어찌
되어야만 한다고 머리 속에서 과장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슬그머니 웃음이 나올
것이며, 그와 같은 어리석은 견해를 인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행동을 하도록 요구할 때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 나는 언제나 완벽하게 행동해 왔어! 나는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대한 적이 없으며, 약속을 어긴 적도 없어! 앞으로도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당신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고, 당신 뜻대로
해주지 않을 때 그들을 쥐새끼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비난한다고 하자. 그것은 당신이
자신을 얼간이같이 인정에 굶주린 노예로 전락시키거나, 전지전능한 여호와의 위치로
승격시키거나, 썩어빠진 인간으로 격하시키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라.
  만약에 당신이 처한 빈약한 경제적, 예술적, 사회적 여건에 대해 불평하고
한탄한다면, 다음과 같이 자신에게 말해 보라:"오, 그래. 이 우주는 나의 것이야!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 즉시 손에 넣어야만 해! 모든 사람들은 좌절과 분노를
겪고 살아가지만, 나만은 예외야!"
  또한 내가 나의 내담자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려 보라.
"인생이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싸움 그 자체이다"
  당신이 기어코 어떤 확실성을 보장받아야만 하며 성공, 사랑, 공정, 편안함 등을
보장받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고집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해 보라.
  "내가 원하는 것이면 언제든지 정확하게 바로 그 순간에 얻을 수 있도록 절대적으로
보증하여 주는 멋진 보증서를 가져야만 해!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신나게 살 수 있을
것이며, 어떤 일에도 화를 낼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당신의 인격 전체에 대해서가 아니고 다만 어리석은 생각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유머를 사용해 보라. 그리고 만일 당신이 나의 유머 노래를 같이 불러
보고자 한다면, 나의 노래집인 "A Garland of Rational Songs"에서 이러한 노래를
찾아볼 수 있다.

     우는 소리로 푸념하고, 푸념하자!

  나는 내 모든 욕구를 채울 수 없어
  우는 소리로 푸념하고, 푸념하자!
  나는 내 모든 좌절을 달랠 수 없어
  우는 소리로 푸념하고, 푸념하자!
  인생은 정말 내 소망을 들어주지 않는구나!
  운명은 내게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데!
  이 정도에서 내가 만족해야 하다니 견딜 수 없어.
  우는 소리로 푸념하고, 푸념하자!

     완전한 이성

  사람들은 세상이 옳게 되어 가야 한다고 말하네
  나도 그렇다네, 나도 그렇다네!
  조금만 불완전하여도 참을 수 없다고 말하네
  나도 그렇다네, 나도 그렇다네!
  나는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초능력을 가진 인간이어야 하네.
  내가 언제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불가사의한 사람임을 보여 주리라.
  완전한, 완전한 이성이여
  나에게는 오직 이 길밖에 없다!
  바보처럼 사는 나의 모습을
  내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성이야말로 나에게는 완전한 것을!

     나는 미치고 싶지 않아

  에나멜 가죽처럼 부드럽고 훌륭한
  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
  이처럼 사랑스러운 상태로
  완성된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그러나 내가 타락하는 운명으로 떨어질까봐
  나는 두려워
  얼마나 슬플까!
  오, 나는 정말 미치고 싶지 않아!
  제발 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았으면!
  물론, 내가 미치지 않도록 노력해 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오 하나님! 나는 너무나 게을러 노력하기도 싫어요.

     사랑해 줘요, 사랑해 줘요, 오직 나만을!

  사랑해 줘요, 사랑해 줘요, 오직 나만을,
  당신이 없으면 나는 죽어요!
  당신의 사랑을 보장해 줘요
  내가 당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도록!
  사랑해 줘요, 나의 전부를
  그래야 나는 살 수 있어요, 그대여!
  나 혼자 살아가야 한다면
  죽을 때까지 당신을 미워할 테요, 제기랄!
  사랑해 줘요, 사랑해 줘요, 언제까지나!
  영원히 그리고 모든 것을.
  당신이 나만을 사랑해 주지 않으면
  내 인생은 진흙탕으로 변하고 말아요.
  아주 부드럽게 나를 사랑해 줘요
  어떠한 조건도 없이, 그대여!
  당신의 사랑이 조금이라도 식게 되면
  나는 당신을 죽도록 미워할 거에요, 빌어먹을! 그대여!

     부부싸움을 해결하려면 분노를 이렇게 처리하라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하면 자기의 배우자나 애인에게 화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는지를 곧잘 문의한다. 유명한 결혼상담가인 매이스(David Mace) 박사는 결혼과
가족상담 학술지 ("Journal of Marriage and Family Counseling")에 실린 논문에서,
사랑을 방해하고 친밀한 일체감을 붕괴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속으로 품고 있는
분노의 감정이나 표면화된 분노의 감정이라고 지적하였다. 매이스 박사는 바하(G.
Bach)와 그의 추종자들이 제안한 "부부싸움"의 개념을 비난하면서, 배우자와 언쟁을
할 때에, 분노를 다른 데로 돌리거나 완화시켜서 표현하는 대신에 REBT를 이용하여
분노를 해소하거나 사라지게 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당신이 느끼는 분노를 인정하라.
  당신의 배우자에게 "나는 당신에게 화가 나 있어요"라는 말을, 마치, "나는
피곤해요"라거나, "나는 무서워요"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솔직하게 해보라.

  당신의 분노를 부적절한 것으로 여기고 단념하라.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사실이라 하여도, 울화를 일으킨 것은
당신 자신이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직시하고, 당신이 분노를 느끼고
표현함으로써 부부관계를 손상시켜 왔다는 점을 인정하라.

  당신의 배우자에게 도움을 청하라.
  당신이 화가 나 있으니 그것이 문제라는 점을 배우자에게 알리고 화를 내지 않고 두
사람간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제안을 해 줄 수 있는지를 알아 보라.

  매이스는 여기에 첨가하여 몇 가지의 현명한 제안을 하고 있는데,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의 후속 연구를 나는 "결혼과 가족 상담 학술지"에 발표하였다.
거기에서 나는 당신이 배우자나 가족에게 화가 날 때에 도움이 될 만한 REBT적인
방법들을 추가하여 제시하였다.

  당신의 분노를 당신 스스로도 인정하라.
  당신의 분노감정을 배우자에게만 알리려고 하지 말고 당신 자신에게도 솔직하게
말하라.
  "자, 솔직하게 직면하자. 나는 나의 배우자에게 정말로 화가 나 있다. 단순히 불쾌한
정도가 아니다. 단순히 그의 행동에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배우자의 인간 그
자체에 분노를 느낀다. 나는 그를 저주하고 싶고, 그의 모든 것이 바꾸어지기를
원한다"
  당신이 이와 같은 식으로 해보지 않으면 자신의 분노를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며,
단지 분노를 "인정한다"라고 말로만 하는 차원에 머무를 것이다. 먼저 당신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가서 화가 나지 않도록
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당신은 배우자가 상처받을 것인가,
배우자가 당신의 분노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가 등을 고려하여 그에게 화난
감정을 표현할 것인가의 여부를 알 수 있게 된다.

  당신의 화난 감정에 충분한 책임을 지라.
  화난 감정을 창출한 것은 당신 자신이라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라. 당신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그래, 나의 배우자가 나에게 부당하게 대한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는 나에게
좌절을 주었을 뿐이다. 내가 불쾌하게 느끼고 짜증이 난 것은 적절한 감정이야. 그러나
그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만 한다고, 그로 인해 내
인생 전체가 끔찍하고 엉망이 되었다고,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불쾌한 인간이라고
한탄하고 명령함으로써 나 스스로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정말 부적절해. 이런 생각은
내 쪽에서 선택한 거야. 그러니까 화가 났지. 이와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무작정 화를 내기 보다는 다만 섭섭할 뿐이라는 느낌만 가질 수도 있거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화난 감정에 대해 충분히 책임을 져본다면 화가 나는
것이 상당히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분노를 느끼는 당신 자신까지도 수용하라.
  당신이 분노, 불안, 우울, 무가치감 등과 같은 신경증적 증상을 가졌다고 해서
자신을 비난하고 저주하면, 당신은 전혀 진보할 수 없다. 가령 당신이 배우자에게
분노를 느낀다고 해서 자신을 버러지같이 생각한다면, 버러지뿐인 당신이 어떻게
미래에는 버러지와 같지 않은 훌륭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바보같이 스스로 분노를 만들어 낸다는 이유로 당신 자신을 경멸한다면,
당신이 과연 분노를 만들어낸 자신의 독백을 정확히 이해하고 또 제거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경주할 의욕이 생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당신 자신을 분노와 함께 수용하라. 그렇다고 해서 분노의 감정이 "좋고",
"적절하고", "건설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화를 내는 것은 인간이 지닌 오류의 한
측면이며, 인간의 조건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고,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수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화를 내게 되면 거의 예외없이 당신은 인생의 게임에서 패배자가 되고
친밀한 인간관계도 피해를 받게 된다.

  스스로를 불안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비하하는 생각을 중단하라.
  당신이 몹시 화를 내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한 자신을 수용하라.
그렇게 되면 어떠한 그릇된 행동도 스스로 수용할 수 있게 되며 당신의 상처받기 쉬운
특성(때때로 또 분노를 일으키는 자기연민이나 상처받은 느낌)도 많이 없어질 것이다.

  당신이 분통을 터뜨리게 되는 배후에 깔려 있는 생각 내지 철학적인 근원을
찾아내라.
  당신이 창자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낄 때마다 그 감정 뒤에는
깊은 철학적인 가정이 숨어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 가정은 해야만 한다는
당위적인 사고라고 하자. 그러한 should를 파헤쳐보고, must를 파헤쳐 보라! "당신은
나에게 친절하고, 사려 깊고, 다정하고, 만족스럽게 대해야만 해!"라고 하는 원망의
요구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별 수고하지 않고도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내 생활은
쾌적하고 좌절이 없어야만 해!"라고 하는 사상이 항상 들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배우자에게 화가 났을 때, 당신은 보통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나의 배우자는 나에게 사려 깊고 다정하게 대해야만 해! 그런데 그는 부당하고
불만스럽게 행동했어. 나는 이 행동을 참을 수 없다! 이건 정말 끔찍해! 그는 얼마나
변변치 못한 사람인가!"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한 것은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경제적, 사회적, 성적으로, 혹은 자녀 양육의 문제가 있다. 이런 식의
결혼생활이 계속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이렇게 되다니 얼마나 끔찍한가! 나는 견딜 수
없어! 그러므로 그와 함께 산다면 싸움밖에 할 것이 없다. 이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아!"
  그러므로 당신이 가지고 있는 shoulds와 musts와 oughts를 배우자에 대한 것,
자녀들에 대한 것, 당신의 여러 가지 생활 여건에 대한 것, 인척들에 대한 것,
배우자와의 성관계에 대한 것 등으로 일일이 세분하여 이와 같은 당위적 사고를 전부
다 찾아낼 때까지 작업을 계속하면, 당신이 분노하고 있는 핵심적인 근원을 찾아낼 수
있다. 이에 관한 내용을 하퍼 박사와 나는 '성공적인 결혼생활 안내서'라는 책에서
밝힌 바 있다.

  소망과 강요를 확실히 구분하라.
  당신의 배우자나 인척에 대해서 바라는 희망사항과 그들에 대한 해야만 된다는 식의
강요하는 마음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의
성관계를 가지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다. 그러나 "그는 일주일에 두 번은
성관계를 해주어야만 돼!"라고 말한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 된다. 당신이
배우자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마음 속에는 현실적으로 타당한 소망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머리 속과 가슴 속을 모두 뒤져 소망사항과
소망을 만족시켜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강요의 마음을 모두 찾아 보라.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아주 명확하게 구분하여 보라!

  당신의 절대론적인 사상인 강요성을 토론하고 논박하라.
  당신이 배우자나 이 세상에 대해 어떤 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만 가지고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 나는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정확하게 채워 줘야 한다고 그에게 강요하기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그처럼 강요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것을 가볍게 바란다는 소망의
정도로 바꾸어야겠다" 물론 이렇게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요구를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논박하고 질문하고 도전하지
않으면, 아마도 그것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관의 배경이 되는
절대론적인 사상을 철저하게 변화시킴으로써만이 증오나 분노감정을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분노를 해결한다는 의미는, 분노를 억압하거나 회피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노의 뿌리를 뽑는다는 것이며 또한 당신이 미래에도 다시
분노에 휩싸이지 않게 통제한다는 뜻이다.

  당신의 분노감정을 근절하기 위하여 행동적, 정서적 방법을 사용하라.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분노감정을 만들어 낸 사람은 당신 자신이다.
그리고 당신은 여러 가지 정서적, 행동적 행위를 통해서 분노의 감정을 계속 강화한다.
그러므로 분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환경적-정서적-극적인 방법과
행위적-직접적-행동적 방법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 정서적 방법으로는
당신의 배우자에 대해서 화난 감정보다는 사랑스러운 감정으로 대하도록 의도적으로
행동해 보는 것이다. 배우자의 관점에서 보도록 당신 자신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로저스(Carl Rogers)가 말하는 "무조건적인 긍정적 배려(존경)"이고, REBT에서
말하는 "그 사람에 대한 수용"이다. 당신 배우자의 행동에 대해서 비난하는 "너
진술"의 방식 대신에, 비난의 요소가 섞이지 않는 "나 진술"의 방식을 사용해 보는
것이다. 또 배우자에게 느끼는 적대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대신에, 제 3자(가령,
친구)에게 표현해 볼 수도 있다. 배우자에 대한 분노반응을 역할놀이로 표현해 볼 수도
있다. 또는 합리적-정서적 상상기법(REI)을 이용하여 배우자의 좋지 못한 행동을
상상해 보도록 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그에 대한 심한 분노감정을 느껴 보고, 그
다음에는 당신의 감정을 분노가 아닌 실망의 감정으로 변화시켜 보는 연습을 할 수도
있다.
  행동적 방법으로는, 당신의 분노감정에서 "해야만 된다 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분노를 일으키는 장면에 고의적으로 머물러 본다든지,
일부러 상상을 하여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연습을 해보고, 그 과정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당신의 기본 철학을 변화시켜 보도록 하는 것이다. 주장적인 태도를
연습하여 보라. 그리하여 배우자에 대하여 당신 자신을 적절하게 주장하지 못함으로써
가슴 속에 울화를 쌓아 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또는, 조작적 조건화의
기법이나 자기관리의 방법을 사용하여, 당신이 배우자에게 화내지 않고 반응했을
때에는 보상을 주고, 반대로 화를 내는 반응을 했을 때는 자신에게 벌칙을
주는(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써 보는 것이다. 혹은 행동적 연습의
방법을 사용하라.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의 속을 뒤집는 어떤 행동을 하였다고
가정하고, 어떤 모델이나 역할놀이의 역할을 해줄 사람과 함께 그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연습해 보는 것이다. 혹은 당신의 배우자와 서면이나 구두로 약속할 수 있다.
만약에 당신이 원하는 일을 배우자가 해주면, 당신도 그가 원하는 어떤 일을
해주겠다고 할 수도 있다. 혹은 당신이 잠시나마 울화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비합리적인 철학을 바꾸어 볼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당신
스스로 갖기 위하여 이완요법이나 명상, 사고중지기법이나 둔감화기법, 전환적 방법을
사용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실제로 적용하여 당신이 배우자나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러한 분노감정을 제거하여 보다 좋은 감정을 즐길 수 있는 관계로 만들어 갈 수
있다.
  내가 저술한 책 '인간주의적 심리치료:합리적 정서적 접근'과 로버트 하퍼 박사의
공저인 '정신건강적 사고'에는 화를 내지 않게 하는 방법들이 실려 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뉴욕에 있는 "합리적 생활연구소"에서는
당신의 분노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포스터, 녹음 테이프, 주머니 카드, 비디오
테이프, 필름 등을 발간하고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REBT 치료를 전혀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료들을 꾸준하게 활용함으로써 화내는 습관을
수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노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뉴욕의 연구소에서 열리는 토론회, 세미나, 워크숍, 마라톤 그룹과 다른 대중 발표회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지 않는 면에서 도움을 받고 있다. "일상생활의
문제들"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금요일 밤의 워크숍은 지금까지 12년이 훨씬 넘게
내가 거의 매주 진행을 해오고 있다(1994년으로서 25년이 넘었다:편집자주). 참여한
사람들이 개인적인 문제를 가져오면 나나 혹은 청중의 멤버들로부터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다만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상담과정을
관찰만 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간접적으로 배울 수도 있다.
  REBT에서는 사람들이 분노와 같은 자기패배적인 감정을 타파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모든 심리교육적 방법을 총망라하여 사용한다. 당신이 어떤 독백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화나게 하고 있나를 인식하고, 분노를 만들어 내는 비합리성에 어떻게
도전하고 논박할 것인가를 연구하라. 그리고 화내는 것과 반대의 방향으로 꾸준하게
느끼고 행동할 수 있도록 많은 방법을 탐색해 보라. 그리고 그 중에서 당신에게
알맞는 방법을 선택하여 사용하도록 하라.
@ff
          11. 분노에 대한 이유를 달지 말라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고, 분노를 통제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실천이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분노의 상태에 머무르려 하고, 때로는 즐기기까지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분노감정이 분명히 생물학적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분노가 가지는 생물학적 근원을 자세하게
살펴보자.

     화를 내는 데에는 생물학적인 원인이 있다

  생리학자와 성격이론자나 사회학자 등이 밝힌 바에 의하며, 당신이 스스로를 화나게
하는 데에는 비록 결론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부분적으로 생물학적 원인에
근거한다. 예를 들면, 룬데(Donald T. Lunde)와 햄버그(David H. Hamburg)에 따르면,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들의 싸우는 행동(거친 놀이나 협박 등과 같은 형태의
적개심도 포함하여)이 암컷보다는 수컷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 그것은 남성호르몬의
일종인 안드로겐이 적대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자페(Yoram Jaffe) 등에 따르면, 성적으로 자극된 남성과 여성은 공격성을 외부적으로
더 나타낸다. 돈너슈타인(Edward Donnerstein) 등은 고도로 에로틱한 자극이 남성
피험자들에게 공격성을 촉진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뵐킨스(R. C. Boelkins)와 하이슈터(J. F. Heister)는 동물과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 결과를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공격성이란 "적용적 행동의 하나로서 유전학적으로
기호화된 신경 매카니즘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호르몬과 심리사회학적 요인에 의하여
행사된다"고 결론지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할로우(Harry F. Harlow)는 "공격성이란
그 사람의 생물학적 유전인자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프로이드는 방대한 양의 임상적, 인류학적 증거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 모든 사실의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은, 인간이란 사랑을 추구하는 부드럽고
친절한 존재이며, 공격을 받았을 때만 자신을 방어하는 존재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공격에 대한 강한 욕구를 지닌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상호간에
이러한 원초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대하기 때문에 문명사회는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다...공격하려는 경향성은 인간에게 있어서 내면적이고, 본능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이며...이 점이 바로 문화에 대한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다"

  국립 정신건강심리실험연구소의 소장인 로젠탈(Dasvid Rosenthal)박사는, 미국
과학진흥협회에서 범죄에 관한 심리학적, 생리학적 연구를 실시하였다. 그가 발표한
"범죄의 유전성"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환경적 요인뿐만 아니라 상당히 강한 유전적인
요인이 범죄의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솔로몬(Philip Slolmon)과 클리만(Susan T. Kleeman)은 "폭력의 의학적 측면"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수족의 질환이나 뇌의 피질질환으로 인해 의식의 손상, 혼돈,
비합리성이 나타나고 이런 현상 때문에 폭력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영국의 정신의학자인 군(John Gunn) 등은 비정상적인 뇌파를 가진 사람들이 정상적인
뇌파를 가진 사람들보다 이유없이 난폭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더 많은 것으로
밝혀 내었다.
  멀도치(B. D. Murdoch)는 범죄자들의 노파에 관한 연구에서 공격적인 정신과
환자들이 정신질환이 없는 죄수들보다도 대뇌의 불안정성 수준이 높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윌리암스(Denis Williams) 역시 공격적인 범죄자들이 다른 "정상적인"
범죄자들보다 비정상적인 뇌파를 훨씬 많이 만들어 낸다고 밝혔다.
  공격성이 생화학적 요소나 호르몬과 관계가 있다는 구체적인 연구 결과들이 또 다른
연구자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케르마니(E. J. Kermani)는 남성에게
있어서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호르몬(여성의 경우는 그보다 더 약하게)이 공격성을
조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곳트샬크(L. A. Gottschalk) 등은
여자들의 생리주기에 관한 바이오리듬을 연구한 결과, 불안과 적대감이 배란기에
일시적으로 감소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감소 이유가 아마도 호르몬 변화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에컬스(C. L. Ekkers)는 젊은 남성에게 있어서 공격적 행동과
"틸로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의 분비간에는 정적인 상호관계가 있다는 학설을
확인하였다. 라이언(J. R. Lion)과 리타(G. Bach-y-Rita)와 에르빈(F. R. Ervin)은
폭력적인 사람들에 관한 연구에서, "적어도 천만명 내지 이천만의 미국인들이 뇌기능
손상을 입고 있기 때문에 공격적인 에너지를 인식하고 통제하고 조정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사회학과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공격성에는 심리적, 사회적 학습의 요소와 더불어,
생물학적, 유전적, 화학적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프랑크(Jerome D.
Frank)는 젊은 남성들에게서 많은 양의 남성호르몬이 방출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전쟁
발발의 패턴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델가도(Jose M. R. Delgado)박사는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뇌의 주요 부분에 미세한 전극을 장치하는 실험을 하였다. 그가
버튼을 누르고 방사신호를 보내면, 평화롭던 원숭이는 갑자기 격분하면서 다른
원숭이를 공격한다. 로센펠드(Albert Rosenfeld)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가 버튼에서
손을 떼면 원숭이는 다시 평화로워진다.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공격욕구를
포함하여 인간의 결핍욕구는 본능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소간 "유전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일(Paul Meehl) 등의 심리학자도 인간이란 "순한 양과 같은 동물이 아니라,
분노와 공격성의 경향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스포크(Benjamin
Spock)박사도 아동 발달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여, 인간이란 "타고난 격한 기질"과
"즉시적인 적대감"과 "본성상 불가결한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일펠드(Frederick W. Ilfeld, Jr.)는 "공격의 한 형태인 폭력은 선천적으로 향유한
인간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몬테구(Ashley Montagu)와 같은 사회적 사상가는 이러한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몬테구는 "인간이 지닌 공격성은 학습된 행동이다. 인간이 공격적으로
행동하게끔 선천적으로 '프로그램화'되어 있다는 절대적인 증거는 없다"고 하였다.
  몬테구의 이 말은 부분적으로 옳다. 인간에게 공격성, 분노, 폭력이 프로그램화되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권위 있는 학자들은 인간이
공격성, 분노 등을 내면에서 쉽게 작동시킬 수 있는 선천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우리 인간이 지닌 생물학적 경향성은
쉽게 분노반응을 일으키도록 미리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모이어(K. E. Moyer)는 호르몬 주입, 전기 자극, 외과적인 뇌 손상 등의 신체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자극적인 공격성은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가 쓴 '공격의 심리학'이라는 저서에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어떤
물질들은 신경조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 비염증성 뇌의 평창을 가져온다고
밝혀졌다. 그 결과로,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날카롭고 만성적인 신체적 폭력 행동을
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인류학자인 볼튼(Ralph Bolton)은 페루의 쿠올라족과 같은 극도로 험악한
투쟁심리를 가지고 있는 부족을 대상으로 연구하였다. 그 결과, 고단백 음식을 섭취
하면 살인율이 낮아지고 평화스러운 행동을 하며, 단백질 섭취를 거의 하지 않으면
살인과 적대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유전학자인 반덴버그(Steven G. Vandenberg) 교수는 일란성 쌍생아의 경우에
공격적인 경향에 있어서 이란성 쌍생아보다 훨씬 유사한 행동을 나타낸 것을 밝혀
냈다. 그리하여 적대감을 느끼는 데에는 유전적 요소가 의미있게 작용한다고
주장하였다.
  최근 들어 많은 성격이론가들도 인간의 적대감이 명백한 생물학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심지어는, 그들의 "발견"에 비판적이었던 라이터
벤드(Edward C. Ryterband) 같은 사람까지도 성격이론가들의 주장에는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라이터밴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행동에 있어서 환경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인할 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근 들어 우리 행동의 대부분은 유전과 환경의 양자의 영향으로
결정된다는 증거가 축적되어 가고 있다. 인간의 지능이나 행동 장애에 유전과 환경이
동시에 영향을 준다는 자료는 이미 풍부하게 나와 있으며 새로운 지식이 아니다.
인간의 공격성 등에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지닌 공격성은
그의 현재의 환경적 요소뿐만 아니라 과거의 유전적 요소의 산물이기도 하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인간의 파괴성의 해부'라는 저서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끊임없는 불화와 싸움을 벌이려는 본능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활용하지 않으면 우리를 전쟁이라든지
대량학살, 자살 등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로랑(Frend
Loreng) 등은 주장한다. 그러나 프롬은 이 이론을 완강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프롬은
신경과학의 연구 결과를 통하여 생명을 보존하며, 생물학적으로 적응하는 데에 필요한
방어적 공격성의 개념을 수립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생물학적인 공격성
개념은, 인간이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여 발동시킬 수 있는 잠재적인 공격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유용하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프롬도 분명히 분노와 공격성에는 생물학적인 원인이
작용한다는 이론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 단지 그는, 프로이드와 같은
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그러한 유전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초가 대량학살과
같은 극단적인 공격의 형태로 우리를 몰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프롬은 가령, 우리의 무력감, 무지, 죽음에 대해 자각하는 것과 같은 실존적인 상황
안에서 우리의 욕구충족과 사회적인 조건간의 상호작용 과정 중에 인간의 파괴성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존적인 욕구 자체가 분명히 생물학적인
기초를 가진 것은 아니다. 나는 프롬도 기꺼이 이를 인정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에 대한 생물학적 영향력에 대해서 반대하는 이론에는 타당성이 미약하다.

     화를 내는 것은 스스로가 비합리적 신념체제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인간의 분노에는 사회적인 원인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원인이
있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그 이론을 구실로 하여 당신이 화내는 행동을 교정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당신에게는 세상의 불공평한 처사에 대해서
스스로를 화나게 만드는 선천적인 경향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자. 다른 사람의
부분적인 행동을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비난하고, "비도덕적인" "틀린"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한 경향성을 지니고 당신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당신에게 묻겠다. 그러한 생리학적인
경향성에 당신이 순종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당신의 화내는 행위를 변명하려고
그와 같은 이론을 거론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와 관련해서, 당신이 수많은 생물학적인 충동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저런 합당한
이유 때문에 그 충동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아야 한다. 당신이 침을
뱉고 트림을 하는 것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생물학적 현상이다. 그렇다고 하여 당신은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항상 침을 뱉고 트림을 하는가?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크게 잘못을 했을 때 그들을 비난하고 매도하려는
경향성을 당신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당신이 이러한 일들을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노력만 한다면 상당한 정도로 이러한 행동을 근절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나는 거의 매일 그리고 거의 매시간마다 나의 사적,
생리적인 쾌락추구의 욕구를 억제하고 살아간다. 먹고 싶은 양보다 적게 먹고,
성생활도 횟수를 제한하고, 말을 삼가하고, 날씨가 뜨거운 날에도 정장을 하고, 이
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나의 생물학적인 욕구들을 억제한다. 이런 식으로
나를 제한하는 것은 상당한 불편을 주지만, 또한 그와 같은 제한에서 때때로 얻는
즐거움도 있다. 예를 들면, 나에게는 당뇨병이 있는데 나는 즐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