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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 1 - 1

        상도 1
    지은이: 최인호
    출판사: 여백미디어
    봉사자: 김민주
 
    책머리에
  소설 '상도'는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던 소재였다. 내가 이 소설
을 처음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수많은 기업인들을 만났을 때 우리나
라에는 본받을 만한 역사적인 상인이 없다는 자조적인 탄식을 듣기 시작
하였을 때부터였다. 역사적으로도 '사농공상'이라하여 상업을 가장 낮은
 가치로 인식해왔던 우리 민족은 이처럼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을 '가장
 떳떳치 못한 천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고 있었다. 이데올로기도 사라지고 국경도 사라진 21세기,
 밀레니엄의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경제의 세기이며
이에 따른 경제에 대한 신철학이 생겨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의 신철학' 그것이 내가 쓰는 상도의 주제였다. 2백
여 년 전에 실재하였던 의주 상인 '임상옥'. 우리나라가 낳은 최대의
 무역왕이자 거상이었던 임상옥의 발견은 우리나라에도 상업에 도를 이룬
 성인이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하였으며,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기업
인들에게도 자랑할 만한 사표로서 임상옥을 부각시키는 것이 올바른 도리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임상옥은 죽기 직전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였고, 이란 유언을 남긴 최고의 거상이었다. '재물은 평등하기
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라는 그의 유언은, 평
등하여 물과 같은 재물을 독점하려는 어리석은 재산가는 반드시 그 재물
에 의해서 비극을 맞을 것이며, 저울과 같이 바르고 정직하지 못한 재
산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 재물에 의해서 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경제는 정경유착,
부정부패, 매점매석과 같은 사도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
제는 우리의 상업도 공자가 말하였듯 '이'보다는 '의'를 추구하는 올
바른 길, 즉 정도를 통해 바르기가 저울과 같은 상도로 나아가 기업가
들도 '상업의 길'를 통해 부처를 이룰 수 있으며, 또 그럴 때가 되
었다고 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또 다른 주
인공들, 홍경래와 김정희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의
 방식이 올바른 것인가를 선험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임상
옥에게 석숭 스님이 내려주었던 '죽을 사'와 '솥 정'과 '계영배"의
 세 활구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간직해야 할 화두라고 나
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하나의 소설이 끝나면 그와 함께 살
았던 인생도 세월도 모두 함께 사라져버린다. 마치 가을이 되면 무성했
던 나뭇잎들도 떨어져 바람에 구르고 땅 위를 덮어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부처는 금강경에서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소설이
태어나기까지의 3년의 세월도 없고, 삼제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데서 나온 일물인가. 묻노니, 이
일물은 도대체 누가 만든 일물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가가가가
  2000년 깊은 가을 해인당에서 최인호
 
      제1부 천하제일상
    제1장 바퀴벌레
  1
  내가 김기섭 회장의 돌발적인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1999년 12월 말이었다.
해마다 연말이면 묵은해를 보
내는 각종 행사들과 그에 따른 술자리, 연회 등으로 바쁘고, 새해를
맞는 설레임으로 몸과 마음이 분주하기 마련인데 1999년의 연말은 다
른 해보다도 한층 더 바쁜 나날이었다. 그것은 며칠만 지나면 마침내
서기 2000년으로 접어들어 신세기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인간
의 역사 속에서 천년 동안 우리의 일상을 지배해 왔던 서기 1000년
의 숫자가 마침내 '2'의 숫자로 바뀌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
다. 그뿐인가. 그리스도교의 일부에서는 1999년을 세기말적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해라고 하여 어쩌면 인류의 멸망이 이해의 한순간
에 다가올지도 모른다고 일년 동안 줄곧 경고해 왔었다. 그러나 오히려
  새로운 세기, 새로운 2000년의 세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막연한 희
망 같은 것으로 모든 사람이, 모든 사회와 모든 국가가, 지구촌 전체
가 흥분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물론 21세기는 며칠 뒤인 새해 20
00년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다. 21세기는 서기 2001년부터 시
작되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서기 2000년을 신세기가 열리
는 그 원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1999년의 성탄절은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밤 열두 시에 열리는 자정미사에
참석했었다. 교황은 다가오는 2000년의 신세기에는 전지구와 전인류에
게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는 성탄절 메시지를 내렸으며, 지구촌에서 유일
한 분단국인 한국이 2000년대에는 반드시 통일된 국가를 이루기 바란
다는 전언을 한국 교회에 보내왔다. 아내와 나는 미사가 끝난 후 성당
  마당에 만들어진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곁에 누운 아기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은 헛간 속에는 예수를 낳은 마리아와 그
의 남편 요셉이 앉아 있었고, 말과 소의 먹이를 담아주는 구유속에는
아기예수가 태어나 누워 있었다. 헛간 속에는 말과 소뿐 아니라 양과
염소도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헛간 문밖에는 아기예수를 경배하기
위해서 먼 동방에서부터 찾아온 세 명의 박사들이 선물을 들고 서 있었
다. 나는 인파 너머로 구유 속에 누워 있는 아기예수의 인형을 쳐다보
면서 생각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인류
의 역사 속에 아기예수가 태어난 것이 오늘로 1999년째가 되는 예수
의 생일인 것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예수가 태어난 지 2000년
이 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미사가 끝나고 밤 두 시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습관적으로 TV를 틀었다. TV에
서는 KBS교향악단의 연주가 방송되고 있었다. 베토벤의 심포니 제9번
, 합창교향곡이었다. 교향곡은 절정에 이르러 웅장한 합창곡이 터져 흐
르고 있었다. '찬양하라 노래하라 창조자의 영광을. 뻗어나는 새싹들은
 쉬지 않고 자란다. 봄비 내려 새싹 나는 나무들을 보아라...'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합창곡의 절정에서 음악이 멈췄다. 방송사고인가
하고 나는 본능적으로 화면을 보았다. 대형 무대의 오케스트라를 비추던
 TV화면이 갑자기 스튜디오로 장면이 바뀌었다. "뉴스 속보를 말씀드
리겠습니다." 성급히 나온 듯 아나운서는 넥타이를 고쳐 매면서 말을
시작하였다. 나는 외출복을 벗다 말고 TV앞으로 다가갔다. 성탄절의
특별연주 실황방송을 중단시킬 만큼 큰 사건이라도 벌여졌단 말인가, 이
 좋은 성탄절날 밤에. "방금 들어온 뉴스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나운서는 같은 말을 두 번씩 되풀이한 다음 황급히 쓴 것 같은 원
고를 읽기 시작했다. "기평그룹의 총수 김기섭 회장이 교통사고로 별세
했습니다. 독일의 비스바덴 고속도로 위에서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나는 털썩 소파 위에 주저 앉았다. 뭐라는 소리인가. 아니 도대체 무
슨 소리인가. "...김기섭 회장은 21세기를 겨냥하여 기평그룹에서
총력을 기울여 만든 신차를 직접 몰고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시운전하
다 비스바덴 근처의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일으켜 별세했다고 합니다...
"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TV 화면에는
 김기섭회장의 사진이 고정되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틀림없는 그의 얼굴
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나운서는 짧은 뉴스의 내용
을 되풀이해서 읽기 시작했다. "방금 들어온 뉴스  속보를 말씀드리겠
습니다." 낡은 흑백사진의 얼굴 위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기
 시작했다. "기평그룹의 총수 김기섭회장이 교통사고로 별세했습니다.
독일의 비스바덴의 고속도로 위에서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나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자세한 뉴스는
 아침 여섯 시 첫 뉴스 시간에 속보가 들어오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불과 일이 분쯤 지났을까. 짧은 뉴스 시간이 끝나자마자 다시 멈
췄던 베토벤의 합창곡이 화면을 가득 채우면 터져 흐르기 시작하였다.
이 우주만물을 창조한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한 쉴러의 시에 곡을 붙인
베토벤의 웅대한 합창소리는 한 인간의 죽음 따위는 강물을 흐르는 물거
품에 불과하다는 듯이 순식간에 뒤덮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내
게 있어 김기섭 회장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그 이상이었다. 내게 있어
 인간 김기섭은 베토벤 그 이상이었다. 그가 죽었다. 나는 외출복을
갈아입는 것을 잊은 채 망연하게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김기섭 회장
이 마침내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교통사고로 죽고야 말았다.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가 그 기초를 닦았다는 고속도로, 제한속도 없이 달리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달릴 수 있는 독일의 아우토반. 일년에 한 번이나
 두 번은 반드시 직접 스포츠카를 몰고 독일의 고속도로에서 아무도 태
우지 않고 혼자서 시속 2백 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는 스피드광. 그가
 마침내 독일의 고속도로에서 직접 차를 몰고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어
죽고 말았다. 1999년이 저물어 가는 이날 밤에, 모여서 술을 마시
고 노래를 하는 이 즐거운 성탄절날 밤에. 대기업의 총수가 마치 어머
니의 꾸중을 듣고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와 가출한 소년처럼 차를 몰고
 가다가 그대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2천년대의 신세기가 열리는
 그 성탄절 전야에 김기섭 회장은 시대에 반항하듯, 지구에 넘쳐나는
축제 분위기에 저항하듯 21세기를 겨냥해서 만든 신차를 타고 그 성능
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혼자서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차를 몰고 가다
가 알 수 없는 사고를 일으켜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차에 미친 사람
. 사람들은 김기섭 회장을 그렇게 부르곤 했었다. 그러나 본인은 남들
이 그렇게 자신을 불러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딱 한 번 그는
내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당신에게만 고백하는 말이오. 난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어. 난 내가 차에 미친 사람이라고는 생각
지 않아. 어떤 사람은 나를 스피드광이라고 하지만 내가 미친 것은 차
가 아니야." "그럼 무엇에 미치셨습니까." 내가 묻자 김회장은 정색
을 하고 대답했다. "재가 미친 것은 바퀴야. 나는 어릴 때부터 바퀴
가 좋았어. 바퀴는 그 어떤 무거운 물건도 쉽게 운반시켜 주지. 바퀴
는 사물을 이동시켜 줄 뿐만 아니라 빨리 굴리면 속도가 나거든. 바퀴
는 또 둥글고 모난 데가 없어. 난 그래서 바퀴가 좋아. 그래서 말인
데, 사람들이 나를 차에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알맞은  별명일
 수가 없거든." "그럼 남들이 뭐라고 부르면 좋겠습니까." 내 질문
에 그는 싱긋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바퀴벌레." 김 회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남들이 불러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자신의 별명. 물론 그의
 설명대로 차에 미친 것이 아니라 바퀴에 미친 것이라 해서 스스로 붙
인 자신의 별명, 바퀴벌레. "사람들은 바퀴벌레를 싫어하고 징그러워하
지. 그런데 말이야. 어떤 음식점에서는 바퀴벌레를 돈벌레라고 해서 봐
도 잡지 않고 그래도 키우기도 한단 말이야. 또 바퀴벌레는 어두운 곳
을 좋아하고 밝은 곳을 싫어하거든. 중국사람들은 바퀴벌레를 '향낭자'
라고 부르지.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이지." "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십니까. 바퀴벌레처럼 나타나지 않
고 어두운 곳에서 숩기를 좋아하십니까." 김 회장의 대인기피증은 정평
이 나 있었다. 그는 매스컴의 집요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는 물론
 사진을 찍히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런가. 그렇군. 허허허허." 크
게 파안대소를 하면서 그는 무릎을 쳤다. 뭔가 마음에 들면 그는 크게
 웃으며 손으로 무엇인가를 치는 버릇이 있었다. 책상이 있으면 책상을
 치고 탁자가 있으면 탁자를 치고 아무것도 없으면 그는 무릎이라도 쳤
다. 크게 웃으면 치는 힘도 강해지는데, 그래서 번번이 탁자 위의 물
이 쏟아지곤 했다. 바퀴벌레. 스스로 붙인 자신의 별명처럼 차에 미친
 것이 아니라 바퀴에 미친 사람. 바퀴벌레 김기섭 회장이 성탄절 전야
에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혼자서 차를 몰고 가다가 죽어버린 것이다.
 도대체 무슨 사고였을까. 그러나 알 수 없었다. 밤 두 시는 뉴스의
 사각지대로, 이리저리 채널을 바꿔 보았지만 성탄절의 특집만 방송하고
 있을 뿐이었다. 좀더 상세한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서는 아나운서의
 말처럼 여섯 시 첫 뉴스 방송시간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조간신문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잠옷으로 갈아입었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나는 한 잔 가득 위스키를 따라 얼음을 채
워 들고 아파트의 베란다로 나가 보았다. 밤 두 시가 가까운 깊은 밤
중이었는데도 아파트의 많은 방들은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나는 위스
키를 마시면서 베란다와 거실을 서성이었다. 문득 거실의 장식장 위에
놓인 벽돌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나는 다가가서 그 벽돌을 들어 보았
다. Freihei. 벽돌 위에는 붉은 글씨로 그렇게 씌어져 있었다.
 프라이하이트. 독일어로 자유를 뜻하는 말이다. 처음에 나는 그 벽돌
을 발견했을 때 그 붉은 글씨가 페인트가 아닌 붉은 피로 씌어진 글씨
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만큼 그 붉은 글씨는 선혈처럼 섬
뜩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 벽돌을 무너진 베를린 장벽의 잔
해더미에서 주웠다. 그때가 1989년 11월 9일. 지금으로부터 정확
히 10년 전의 일이었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서냉전시
대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그 역사적 현장을 취재하기 위
해 방송국 팀과 함께 독일에 머무르고 있었다. 내가 김기섭 회장을 처
음으로 만난 것은 바로 그 무렵의 독일에서였다. 베를린에서 광란과 같
은 축제를 취재한 우리 촬영팀은 일단 프랑크푸르트로 철수하였다. 그
전날 밤, 나는 우연히 브란덴부르크 문 옆 장벽의 잔해더미에서 붉은
벽돌 한 장을 발견했었다. 그 벽돌 위에는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
Freiheit'라는 글씨가 낙서되어 있었다. 그 글씨를 본 순간 나
는 자유를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벽돌로 이루어진 장벽을 넘다
가 피를 흘리며 죽어갔음을 떠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 벽돌 한 장은
 자유를 위해 죽어간 이름 없는 사람들의 묘비명인 것이다. 지금은 다
만 하나의 돌멩이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이 벽돌 한 장은 미치광이 히틀
러와 공산주의 냉전체제의 갈등과 스탈린 등 20세기의 역사를 증언하는
 기념비로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벽돌인 것이다. 나는 1
0년 전 독일의 베를린에서 주운 그 벽돌을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이
제 일주일 뒤면 20세기는 종말을 고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아
편전쟁으로 인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홍콩도 이미 2년 전, 199
7년 7월 1일자로 중국으로 다시 귀속되었다. 그 숨가쁜 20세기의
역사는 이처럼 붉은 벽돌 한 장만을 남기고 종말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 그 막바지의 절정에서 김 회장은 독일의 아우토반, 그 고속도로 위
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내가 김기섭 회장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프
랑크푸르트에서였다. 그때 독일을 운항하는 항공 직항로가 프랑크푸르트밖
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독일에서의 모든 촬영을 마치고 프랑크푸르트로
 되돌아왔다. 그날 저녁, 나는 호텔 방에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
를 받았다. 그는 대뜸 전화를 받는 사람이 정상진 선생님이냐고 물어왔
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다시 그렇다면 소설을
쓰는 정 선생님이 맞느냐고 물어왔다. 내가 다시 그렇다고 대답하자,
상대방은 곧 호텔로 찾아뵐 테니 로비에서 잠깐만 만나주셨으면 좋겠다고
 제의를 해왔었다. 낯선 도시에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만나자는 제의가
 썩 기분 내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화를 해온 말투와 태도가 무척 예
의바르고 정중하였으므로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로비로 내려갔을
때 이미 로비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의자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 선생님 맞으시죠."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명함은
한쪽에는 독일어로, 뒷면에는 한국어로 되어 있는, 주로 현지 주재원들
이 사용하는 다목적용 명함이었다. '기평그룹 프랑크푸르트 지사장 한기
철' 명함에는 그렇게 인쇄되어 있었다. "전 명함이 없습니다." 명함
을 받았지만 따로 내어줄 명함이 없었으므로 내가 겸연쩍게 대답하자 그
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정 선생님 같은 분이 무슨 명함이
필요하시겠습니까. 명함같은 것은 저희와 같은 장사꾼들이나 필요한 겁니
다. 정 선생님의 존함은 글을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뵙는
 것은 처음인데요. 독일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사내에서는 외국
 주재원 냄새가 풍겨나고 있었다. 빈틈없는 태도에 말쑥한 옷차림으로
비지니스맨이라기보다는 무슨 정보원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독일의
 통일을 취재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방금 베를린에서 오는 길입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취재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언제 돌아가실
예정이신데요." 그는 습관적인 듯 수첩과 볼펜을 챙겨들고 있었다. 그
것은 그의 버릇인 모양이었다. "내일 오후 비행기로 떠납니다." "일
행이 있으십니까." "방송국 직원 다섯 명입니다. 프로듀서, 촬영감독
과 같은 스태프들과 저까지 합하면 여섯 명이 됩니다." "일정이 괜찮
으시다면." 사내는 내가 하는 말을 수첩 위에 메모하다 말고 말을 잘
랐다. "며칠 더 이곳에서 머무르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글쎄요."
 나는 좀 난처했다. "함께 왔으니 함께 떠나야죠. 또 돌아가서 할
일도 있구요." 사실 내겐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번 특별기획 취재
에 나는 리포터로 참석하였을 뿐 아니라 3부작 다큐멘터리에 처음부터
끝까지 내레이션을 작가인 내가 직접 쓰도록 계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연말 특집방송이어서 약 한 달 정도 남아 있었지만 촬영한 필름을
편집하고 내레이션을 녹음하려면 빠듯한 스케줄이었기 때문이었다. 할 일
이 많이 남아 있어 일행들과 함께 돌아가야 한다는 내 말을 듣자 그
는 난처한 표정으로 수첩을 덮었다. "정 선생님만 남아 주십시오. 물
론 여행경비와 체제비 등은 저희들이 모두 전담하겠습니다. 돌아가실 때
까지 모든 편의는 저희들이 제공하겠습니다." "도대체."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게 무슨 용건이 있으시죠. 도대체 제게 무슨 일이
 있으신겁니까." "정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
는 갑자기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구요. 어디에서요." "독일에서입니다. 바로 프랑크푸르트에서입니다
." "그분이 누구신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는 사무적인 어
조로 말을 이었다. "저희그룹의 회장님이십니다." 한순간 나는 당황스
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좀 전에 그가 주었던 명함을 다시 한번 들
여다보았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로 무슨 기업이나 사업에는 전혀 문외
한이었다. 그래서 명함에 씌어 있는 기평그룹이 어떤 회사인지, 또한
그 그룹의 회장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회장님이
 정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제가 정 선생님을 찾아뵙는 것도
회장님의 명령입니다. 회장님의 명령을 받고 저희 지사에서는 전시내의
호텔을 모두 뒤졌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호텔에 묵고 계시다는 사
실을 확인하게 됐던 것입니다." "잠깐." 나는 무슨 미스터리에 빠진
 느낌이었다. "한 가지 묻겠는데요. 그렇다면 회장님을 어떻게 제가
이 프랑크푸르트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것일까요." "그건
솔직히 말씀드려서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오후에 K-2의 수행비서로부
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전호텔을 뒤져서 소설가 정상진
씨의 숙소를 확인해서 보고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K-2의 수행비서
라니요."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 K-2라면 히말라야에 있는 유명
한 산봉우리의 이름이 아닙니까." 한기철은 내 가벼운 농담에도 전혀
웃지 않았다. " K-2는 저희 회장님의 암호명입니다. 저희들은 회장
님을 K-2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K-2가 도대체 누구십
니까." "김기섭 회장님이십니다." 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경제에는
 전혀 백지인 나였지만 김기섭이라는 이름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제
서야 나는 기평그룹이 어떤 회사인가 하는 초보적인 상식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기평그룹은 한때 많은 계열회사를 거느린 재벌기업이었지만 9
0년대 초부터는 일체 자동차에 관련된 사업만 일관되게 추진한 외곬수
기업이었다. 기평그룹의 그러한 독특한 성격은 그 그룹을 창업한 김기섭
이라는 인물에서 비롯되는데 사람들은 그를 '자동차에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곤 했다. 자동차는 그의 종교였고, 자동차는 그의 신앙이었다.
뿐 아니라 나는 그에 대한 수많은 소문을 이미 듣고 있었다. 매스컴을
 기피하여 한국판 하워드 휴즈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의 석유왕
이자 항공산업의 개척자였던 하워드 휴즈는 말년에 저택에만 은거하고 자
신의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었다. 세균 노이로제에 걸려 사람들과
악수할 때도 전신을 소독하게 하였으며, 홀로 있을 때도 세균을 모두
죽인 보호막 속에서 숨어 살다가 비참한 생애를 마쳤었다. 자동차에 미
친 사람. 김기섭 회장은 이 세균 노이로제에 걸린 하워드 휴즈처럼 매
스컴을 극도로 기피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를 신비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
었다.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재벌의 총수
로서 공식적인 모임에도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한 수수께끼의 인물
이 자신의 사업과는 전혀 무관한 단지 소설가일 뿐인 나를 왜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나는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한기철은 대
답했다.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정 선생님이 K-
2가 만나고 싶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
은 그것뿐입니다." "좋습니다. 하룻밤만 더 생각해 보고 내일 아침에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일행들과 의논을 해봐야 하니까요." 우리는 일
단 헤어졌다.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 떼지어 시내 구경
과 쇼핑을 나간 일행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TV를 켰다. 국영방송에서는 내가 방금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베
를린 장벽에서 세기의 첼리스트 로스트르포비치가 연주하는 첼로 협주곡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첼로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는 휘황한 조명에 비춰
지고 있는 한밤의 베를린 장벽 잔해더미 속에서 홀로 연주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전쟁과 살인, 광기와 이데올로기가 무너진,
새로운 평화를 기원하는 첼로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떤 소녀
는 자유를 찾기 위해서 장벽을 넘다가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넋을 달래
기 위해 울면서 헌화하고 있었다. 베토벤이 말했던가. "음악은 어떠한
 지혜, 어떠한 철학보다도 높은 계시다." 마침내 무너진 베를린 장벽
 위에서 연주하는 거장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협주곡을 듣는 순간 내
머리 속에는 베토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것이야말로 예슬의 힘인 것
이다. 그 어떤 정치, 그 어떤 전쟁,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증오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예술만이 그런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약속대로 한기철 지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
려왔다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프랑크푸르트에 남겠다고 대답을 했다
. 그러자 그는 오전 열한 시쯤 차를 갖고 호텔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아침 일찍 방송국 직원들이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공항으로 떠나자 나
는 곧바로 짐을 싸들고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열한 시 정각에 한기철
은 나를 픽업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이렇게 해서 수수께끼의 인물. 자
신의 표현대로 바퀴에 미친 '바퀴벌레' 김기섭 회장과의 첫 만남이 시
작된 것이다. 내가 '바퀴벌레' 김 회장을 만난 날은 1989년 11
월 12일이었다.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여기서 잠깐, 그 당시
독일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가를 어느 정도 설명할 필
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김 회장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첫 번째 만남을 가지게 된 것도 역사적인 독일의 현장 속에서였기 때문
이다. 결국 독일이 통일이 된 것은 그로부터 1년 뒤인 1990년 1
0월 3일 , 정확히 밤 0시부터였다. 바로 그때, 서베를린의 시청에
서는 '자유의 종'이 울리고 동베를린의 국립극장에서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장'이 연주됨으로서 반세기 동안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대표적 분단국이었던 독일은 통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단결과
권리의 자유, 독일인의 조국을 위하여." 독일인들은 절치부심, 하나된
 독일의 통일을 위하여 쉼없이 반세기를 달려오고 노력해 왔었다. 마침
내 독일의 콜 수상은 민족의 화합을 이룬 통일을 완수하고 나서 '마침
내 기쁨과 감사와 희망의 빛이 밝아졌다'고 울부짖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의 전조를 보인 것인 내가 베를린에서 장벽이 무너지는 것
을 취재하러 갔다가 김기섭 회장을 처음으로 만났던 바로 그 무렵이었던
 것이다. 1989년 11월 9일 밤.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어
 무너진 것이다. 이날 밤, 백만 명의 동독 인들이 장벽을 무너뜨리고,
장벽을 뛰어넘어 서베를린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서독 정부는 각 은행
 지점을 통해 환영금 1백 마르크를 베를린 장벽을 넘어온 자유인 동독
인들 모두에게 나눠주어 서독에서 약간의 물건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
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모든 상점과 백화점에서 동독 인들은 넘쳐흐르고
 있었다. 서독 인들은 대부분 동독 인들에게 맥주를 무료로 마시도록 하였
으며 밤이 깊어지자 기쁨과 환희에 넘친 광란의 축제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그 역사적인 현자에 나는 취재차 들렀으며 후에 알게 된 것이
지만 김기섭 회장도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그 숨가쁜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바로 그 현장에서 나는 20세기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소.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다가오는 21세기에 내가 무엇을 어
떻게 해야 하는가 그 구상을 떠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부터 그가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에
서 자신이 직접 차를 몰고 가다 죽은 1999년의 성탄절날 밤까지의
10년간 김 회장은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에서 구상했던 자신의 사업계획
을 미친 듯이 추진해 나갔던 것이다.
 
 나는 잔에 가득 들어 있던 위스키를 다 마셨다. 한 잔 더 따라 들고
거실의 불을 켰다. 레코드들 속에서  로스트로포비치가 연주한 바흐의
 판을 뽑아 들고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바로 10년 전 독일을
 떠날 때 공항에서 샀던 판이었다.
 파리에 살고 있던 세기적인 거장 로스트로포비치는 자신의 전용
비행기를 타고 세 시간씩이나 걸려 베를린으로 날아왔다. 그는 분단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성문 옆 장벽 아래 의자 하나만을 갖다 놓은 자리에
서 모인 관중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을 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순간 장벽을 때려부수던 관중들이 행동을
멈추고 침묵하였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다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역사적인 장벽 앞에서 자유를 찾기 위해 생명을 잃어 버린 모든
사람들을 회상하며 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연주를 합니다." 그가
 연주했던 곳은 바흐의 선율. 사라반드 C장조와 B단조. 그리고
나서 프랑스의 농민무곡 부레를 연주했었다. 11월의 밤은 쌀쌀해서 외
투를 걸치고 연주한 그는 연주를 끝내고 나서 독일의 독한 술 슈납스
한 잔을 마시고 싶다면서 그 자리를 떴던 것이다. 스피커에서는 그날
밤 베를린 장벽 아래서 연주했던 로스트로포비치의 바로 그 음악. 바흐
의 사라반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내 귓가에는 김 회장이 내게 했
던 질문의 내용이 떠올랐다. " 도대체 무엇을 보기 위해 베를린에 왔
습니까." 그것이 내게 던진 김기섭 회장의 첫 질문이었다. "베를린에
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무엇을 느꼈습니까." 나는 몹시 당황했었다.
그때 나는 짐 속에서 베를린 장벽의 잔해더미에서 내가 주웠던 그 벽돌
 한 장을 보여줬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의 첫 질문이 상상을 초월한
예상 밖의 충격이어서 달리 대답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아
마도 그런 행동을 취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준 벽돌을 유심히 들
여다보았다. 그는 벽돌 위에 낙서된 붉은 빛깔의 'Freiheit'란
 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을 줍기 위
해서 베를린에 왔습니까." 나는 기분이 나빴다. 초면에 그는 나를 무
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아무리 대기업의 총수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
의 부하직원은 아니다. 도한 그가 나보다 열다섯 살 정도나 위의 연상
이라 할지라도 인간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대등한 자유인인 것이다. "이것
은 그저 하나의 돌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줍기 위해서 베를린
에 오신 것이라면 나 같으면 당장에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겠소." 그는
 10층의 호텔 창문 밖으로 당장이라도 벽돌을 던져버릴 듯한 행동을
취하면서 그러나 유쾌하게 큰소리로 웃었다. 사실 첫 대면한 생면부지의
 나에게 던진 기상천외한 첫 질문이나 , 벽돌을 던져버릴 듯한 무례한
 행동들은 평소의 김기섭 회장으로 보면 예외적인 행동이었다. 김기섭
회장은 몹시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 부끄러워
했다. 자신의 부하직원 아닌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가 매스컴을 기피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은 아마도 낯을 가리
고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성격을
가진 김 회장이 내게 던진 질문이나 행동은 전혀 이례적인 것이었다.
"프라이하이트. 자유라는 낙서가 새겨진 벽돌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한
갓 돌멩이에 불과합니다. 정 박사. 내가 정 박사를 만나고
싶었던 것은 유명한 소설가인 정 박사가 1989년 11월 9일 밤 베
를린의 무너지는 장벽 아래서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그
 대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소."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어
떻게 아셨습니까. 또 제가 프랑크푸르트에 온 것도 어떻게 아셨습니까.
" "나도 그 자리에 정 박사와 함께 있었으니까. 베를린 장벽 아래서
 촬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소. 낯익은 방송국의 이름이 있어 바
라보니 정 박사 일행이  촬영을 하고 있더군. 독일을 떠나려면 프랑크
푸르트로 돌아올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는 무릎을 치면서 웃었다
. "그럼 이번에는 제가 묻겠습니다." 나는 복수하는 심정으로 그가
내게 했던 똑같은 질문을 했다. "회장님은 그러면 무엇을 보기 위해서
 베를린에 오셨습니까." "무엇을 보기 위해서 독일에 왔느냐구요?"
김 회장은 내 질문을 되뇌었다. 그리고 나서 내 모습을 정면으로 보았
다. 그는 좀처럼 남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 없었다. 그 무
렵 그의 나이는 거의 환갑에 가까웠지만 그는 노인이 아니라 발가벗은
소년에 불과하였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의 소년같은 치기를 꿰뚫어 볼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기 위해
독일에 왔는지. ...함께 밖으로 나갑시다, 정 박사." 그리고 나서
 그가 보여준 행동은 독일의 고속도로로 나와 함께 나선 것이었다. 나
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해외에 출장을 떠날 때면 일년에 한 번이
나 두 번씩은 반드시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차를 몬다는 것이었다. 이때
는 옆에 비서를 앉히거나 하는 일 없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직접 운전대를 잡고 차를 몬다는 것이었다. 시속 2백 킬로미터 이상
차를 몰아 비서진들은 일년에 한두 번 있는 이 상황을 'K-2의 비상
작전'이라는 특별 암호명으로 부르고 있는데, 어쨌든 이 한 시간 남짓
의 미친 듯한 광란의 질주야말로 초비상사태라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
서 나는 'K-2의 비상작전'에 함께 동승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
는 그의 미친 듯한 운전, 바퀴에 미친 바퀴벌레의 그 무서운 집념을
바로 한 자동차 속에서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였던 것이다. 우리가 출발
한 곳은 프랑크푸르트의 외곽지대, 고속도로의 시작 지점이었는데 이미
그곳에는 김 회장이 탈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에 대해서는 전혀 문
외한인 나였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차가 한 대 고
속도로 입구에 서 있었다. 전체가 완전하게 붉고, 공기의 저항을 최대
한도 줄이기 위해 유선형으로 만든 스포츠카였다. 이태리의 명차로 이름
은 페라리. 기종의 이름은 'F355베를리네타' 였다.
 그때가 오후 세 시쯤 되었을까. 하지만 만추의 독일에서는 이미 땅거미가
 어스름한 초저녁이랄 수 있었다. 차는 바퀴만 빼놓으면 전체가 붉어서
 마치 적토마처럼 보였다. 김기섭 회장이 탑승하기 전에 미리 예열을
 시켜놓기 위해 시동을 걸어놓고 있었으므로 차는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질주의 욕망으로 부르릉거리면서 몸을 떨고 있었다.
말갈기를 휘날리면서 말발굽소리를 힘차게 내며 주인의 명령을 좇아
 산을 넘고 내를 건너, 절벽을 지나고 강을 뛰어넘으려는 흥분과 기
다림으로 붉은 스포츠카, 페라리는 헤드라이트의 두 눈을 부릅뜬 채 이
를 악물고 고속도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차는 김 회장에 있어 말이었다
. 나는 왜 김 회장이 평생을 두고 차에 미친 일평생을 보냈는가 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김 회장에게 있어  차는 더 이상
의 차가운 금속과 죽어버린 쇳덩어리가 아니라 따뜻한 체온과 언어가 통
하는 , 살아 있는 말이었다. 그에게 있어 차는 한 점의 거짓말이 없
는 정직한 말이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김기섭 회장이 나를 만나
고 싶어한 것은 내가 쓴 광개토대왕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읽었기 대
문이었다. 그는 그 소설 속에서 광개토대왕이 그토록 많은 영토를 점령
하며 동양의 알렉산더라는 별명을 얻은 우리 민족 최대의 영웅이 된 것
은 그가 기마병으로 고구려 군사를 무장시켰기 때문이라고 쓴 내용에 동
감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해양국 영국에서는 이런 신념을 젊은이들에
게 불어넣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만이 세계를 지배한다." 섬나라
영국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길은 오직 바다뿐이었다. 바다로 나아가기 위
해서는 오직 배를 타는 것뿐이었다. 그 결과 영국은 마침내 전 세계에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차를 지배하는 자만이 세계를 지배한다." 그것이 김 회장
의 철학이었다. "이 차의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정 박사." 김 회
장은 손으로 윤기가 흐르는 차의 겉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게 물었
다. "모릅니다. 전 차에 대해서는 전혀 백지입니다." " 차를 운전
하십니까." " 운전은 하고 있습니다." "차종은 뭡니까." 나는 미
안했다. 나는 김기섭 회장의 라이벌 회사 차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 승용차 이름을 대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했다. "앞으
로는 우리 차 타시오. 우리 차가 안전도에 있어서는 월등하니까." 그
리고 나서 그는 붉은 스포츠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차의 이름
은 페라리요. 이 자동차를 처음으로 만든 엔초 페라리를 기념해서 그의
 이름을 붙인, 명차 중의 하나요 작년엔가 내가 직접 그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소. 이 차는 2년 전인 1987년엔 엔초 할아버지가 자
신의 차가 처음으로 출고된 지 4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해서 만든 차인
데, 이 차를 만들 때 할아버지의 나이는 89세였소."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입안에 털어넣었다. 은단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라 박하향
이 나는 작은 사탕의 일종이었다.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피우던 그는
 마침 담배를 끊고 그 무료함을 박하사탕으로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차는 지금 전세계에 4백 대밖에 없습니다. 이 차는 그러니까 
4백 대밖에 없는 그 중에서 뽑힌 '미스터 페라리'인 셈이지. 나머지
는 타고 나서 말을 합시다. 참, 타기 전에 미리 말해둘 것이 있는데
 난 운전면허가 없거든. 생명보험도 들지 않았고. 그러니까 무서우면
타지 말고 차에서 내리시오. 정 박사." 나는 그의 말을 그저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차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차는 네 개의
 문이 있는 승용차와는 달리 두 개의 문만 있는 2인승의 쿠페였다.
"유명한 자동차 평론가가 이 차를 시승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더군 페라
리 F355 베를리네타와 함께 하는 드라이빙은 떠들썩한 사랑의 서사시와
 같다고. 몇 번의 말다툼이 있더라도 이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에 빠
지게 된다고." 그는 신사복의 윗도리를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그는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 운전대를 잡았다. "자, 정박사. 우리도 떠들썩한
 사랑의 서사시를 읊어 봅시다." 실내는 완전히 항공기의 조종석처럼
꾸며져 있었다. 계기판들이 형광램프로 명멸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
굴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은 흥분과 끓어오르는 기쁨으로 생
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계를 차고 있습니까, 정 박사." 느닷없이
 그는 내게 질문을 했다. "차고 있습니다." "초침이 있는 시겝니까
." 나는 구형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래서 내 시계에는 초를 가리키는
 시계바늘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 그렇담 잘됐습니다. 정 박사
. 여기 있는 속도계기판이 보이시죠. 내가 출발해서 시속 백 킬로미터
에 오를 때까지 몇 초가 걸리는가 한번 시간을 재어 봐 주겠습니까."
 "좋습니다." 나는 시계를 벗어 들고 초침과 속도를 가리키는 계기판
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자, 출발합니다." 김 회장은 힘차게 액셀러
레이터를 밟았다. 차는 순간 박차에 채인 말처럼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무서운 기세로 속도를 가리키는 계기판의 바늘이 떠오르기 시작
하였다. 60km,70km,80km,90km 그리고 마침내 100km
. 나는 시계의 초침을 확인해 보았다. 5초. 정지된 제로의 상
태에서 시속 백 킬로미터에 도달할 때까지의 시간은 불과 5초밖에 걸리
지 않은 것이다. "몇 초 걸렸습니까." 김 회장은 시선을 앞 차창에
서 떼지 않은 채 내게 물었다. " 5초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
스톱워치로 재었더라면 아마도 정확히 4.8초가 걸렸을 것입니다."차는
 점점 더 속력을 높이고 있었다. 외곽으로 나아갈수록 도로는 왕복 8
차선으로 넓어지고 있었다. 독일의 행정수도인 본으로 직통하는 메인 도
로였지만 차량의 통행은 한산한 편이었다. 벌써부터 하나의 유럽을 꿈꿔
서 통일된 유럽국가를 원하는 유럽인들이 때마침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적인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서 프랑스에서, 영국에서부터 온 차량
들이 고속도로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자동차는 후면에
'F'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고, 덴마크에서 온 자동차는 'DK'의
 스티커를, 네덜란드에서 온 자동차는 'NL' 의 스티커를, 영국에서
 온 자동차는 'GB'의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그 자동차들은 대부
분 자신들의 국적에 따른 자국 생산의 승용차들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가 생산한 승용차를, 스웨덴 사람들은 스웨덴이 생산한 자동차를
 타고 있었다. 때문에 그 차에 붙인 스티커만 봐도 그 차 속에서 운
전을 하고 있는 사람의 국적을 자동적으로 알 수 있었으며, 또한 그
각양각색의 자동차들이 어느 국가에서 제작된 승용차인가를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160km, 180km, 200km. 차는 무서
운 속도로 질주해 나아갔다. 김 회장이 모는 페라리는 마치 장애물경주
라도 하듯이 앞서가는 모든 차들을 따라잡았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그는
 말을 끊고 무겁게 입을 닫았다. 그리고 불타는 눈으로 정면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차의 뒤쪽에서 깜박깜박 헤드라이
트의 불빛이 명멸하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시속 2백 킬로미터로 달려가는 페라리 바로 뒤쪽에서 차를 비켜달라는
듯  회색빛 스포츠가 한 대가 전조등을 번쩍거리고 있었다. 순간 김
회장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뒷 차의 기세에 눌렸는지 차선을 바꿔 피
해 주었다. 바짝 따라오던 스포츠카는 굉음을 내면서 앞서 나갔다. 차
안에 선글라스를 쓴 젊은 남자와 연인이 앉아 있었다. "저 차가 무슨
 차인줄 아세요." 묵묵히 차를 몰던 김 회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 모릅니다." "포르세요. 차종은 911 터보. 게르만 민족의 혼
이 담긴 꿈의 스포츠카라고도 하지요." 김 회장은 꿈꾸듯 중얼거려
말하였다. "벨트를 맸습니까." "맸습니다." 순간 페라리는 곤두박질
치면서 가속하였다. 저만큼 앞서가는 포르세를 따라잡기 위해서 액셀러레
이터를 밟기 시작했던 것이다. " 저 차는 백 미터를 불과 3.7초
만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정 박사, 저 차가 아무리 달리는  꿈의 궁
전이라고 해도 페라리는 당할 수 없을걸. 이 차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 실력을 겨루는 포뮬라원레이스에서 자그마치 105회나
우승하였소. 다른 것은 몰라도 빠르기에서 이 페라리를 당할 차는 이
지상에는 없소. 비행기를 빼어  놓으면, 페라리는 살아 있는  카 레
이스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
  페라리의 계기판이 올라가고 있었다. 시속 230킬로미터를 넘어
 서고 있었다. 페라리의 최대속도는 300킬로미터에 조금 모자라는
296킬로미터. 그러나 카 레이스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도로에서나
가능한 최대시속일 뿐, 아무리 넓고, 아무리 시설이 잘된 독일의
 고속도로라고는 해도 25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는 도로 사정상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 회장의 페라리는 미친 듯이 포르세를 따라잡기 위
해서 속력을 올리고 있었다. 
  이러한 김 회장의 욕망을 눈치챘는지 포르세도 갑자기 속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런 내용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고속도로 위에서는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선의 
의 속도 경쟁을 벌인다는 해외토픽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마치 카 레이스를 벌이듯 고속도로 위에서 경주를 벌인다는 내 
용을. 바로 그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었다.
  독일의 마크 'D'가 새겨진 포르세를 탄 독일의 젊은 청년과 
한국에서 온 대기업의 총수 바퀴벌레 김기섭의 생명을 건 무서 
운 자동차 경주가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포르세는 고속도로 위를 달려가는 
차와 차 사이를 곡예하듯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고 있었고, 김 
회장이 모는 페라리는 오직 포르세 하나만을 목표로 돌진하고 
페라리의 속력이 250킬로미터를 육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포
르세의 속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페라리의 최대속도가 시속 296킬로미터라면 포르세의 최대속
 도는 290.9킬로미터. 최대속도에 있어서는 페라리가 조금 앞서지
 만 풀타임 구동시스템을 적용한 엔진 부분에 있어서는 포르세가
 41400마력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속도는 페라리가 조금 앞서지
 만 힘은 포르세가 훨씬 앞서고 있는 것이다.
  나는 와이셔츠를 팔뚝까지 걷어붙인 채 낯모르는 독일 청년과
 필사의 카 레이스를 벌이는 초로의 재벌총수 김기섭 회장의 옆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의 속력 계기판은 시속 250킬로미터에 육박하고 있었지만
 차안은 오히려 정적에 쌓인 듯 조용했다. 오직 고속도로의 노면
 과 부딪치는 바퀴의 입맛 다시는 듯한 접촉소리만 들려올 뿐이
었다. 차체의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차량 높이를 3단으로 조정해서 속력을 내면 낼수록 20밀리미
 터 정도 낮아지도록 고안된 페라리였으므로 오히려 속력을 낼 수
 록 차는 노면에 달라붙어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불이 붙은 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의 두 눈빛을 보
 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이렇게 미친 듯이 달리고 있
 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저 포르세를 따라잡기 위해 이렇게 달리
 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부정을 했다.
  이 사람의 목표는 타인이 아니다. 이 사람의 목표는 언제나 한
  발자국 앞서가는 자기 자신이다. 욕망의 화신인 자기 자신을 향
해서 김기섭 회장은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포르세가 백기를 들었다. 집요하게 쫓아오는 페라리의
공세에 지친 듯 포르세가 도로 한 곁으로 물러섰다. 그 틈을 노려
페라리가 총알처럼 앞서 나갔다. 차창 너머로 선글라스를 쓴 청
년이 앞질러 나가는 페라리의 운전석에 탄 김 회장을 향해 주먹
을 들어 빈정대는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사
라졌다
  생명을 건 자동차 경주에서 김 회장의 페라리가 이긴 것이었

  포르세와의 속도 경쟁에서 마침내 승자가 된 김 회장은 목표
를 상실한 듯 갑자기 차의 속도를 줄였다
  "이제 그만 돌아가기로 할까요,"
  그 동안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던 김 회장은 꿈에서 깨어난 듯
입을 열어 말하였다 
  차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인터체인지에 이르러서 그는 비로
소 미소를 떤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서우셨습니까, 정 박사."
  "아닙니다. "
  나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그의 미친 듯한 고속
주행에 일말의 불안감이나 공포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차입니다. "
  그는 지친 말을 달래며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듯 평균시속 120
킬로미터 속도로 고속도로를 거슬러 달리고 있었다. 이미 하늘에
는 붉은 노을이 걸려 있었다 
  "원래 이 페라리는 엔초 할아버지가 4백 대만 만들어서 한정
판매를 하였습니다. 대당 가격은 1억 7천만원 정도. 한데 소비자
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지금 독일에서는 한 대당 얼마에 거
래 되고 있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판매가의 네 배인 6억 7천만원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정 박사. 이 승용차 한 대에 백만 불이라니. 결국 폭발
 적인 인기에 엔초 영감이 추가 생산을 결정, 아마 천 대 정도로
확대 생산될 것 같습니다. "
  밖이 어두워질수록 차 안의 운전석은 야간비행을 하는 비행기
의 조종석처럼 눈부시게 밝아지고 있었다. 나는 차에 탔을 때부
터 마음속으로 느껴왔던 궁금증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왜 이렇게 무모한 드라이브를 하십니까. 이런 명차 하나를 생
전에 만들어 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이런 운전을 즐기시나요"
  나는 오랫동안 참았던 질문을 김 회장에게 던졌다. 바로 그 순
간 김 회장은 운전대를 손으로 세게 때리면서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이 차가 명차라구. 오 이 페라리 F355 베를리네타가 명차라구
천만에요, 정 박사."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차는 한마디로 똥차요 이 차는 여자로 말하면 한마디로
 똥갈보요"
  김 회장은 자기 말에 자기가 유쾌한 듯 크게 웃으면서 차의 운
 전대를 내리쳤다. 제풀에 빠방빠방-경적이 울렸다.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껏 이 폐라리에 대해서는 입이 닳도록 예찬을 퍼붓
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대당 백만 달러의 이 고급 명차를 똥차라고 표현하
다니. 이 지구상에서 4백 대에 불과한 이 최고의 스포츠카를 똥
갈보라는 저속어로 표현하다니 
  "한 대당 백만 달러의 초 고급차라고 회장님이 방금 전에 말씀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소 한 대당 백만 달러의 똥차요 백만 불의 똥 갈보차요."
  "어째서 입니까." 
  내 질문에 그는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이 차는 마치 유명 잡지에 나오는 세계적 모델의 벌거벗은 육 
체에 불과하지. 그 육체는 아름답긴 하지만 성욕과는 거리가 멀
어, 여인의 벌거벗은 육체를 보면 성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이 차는 최고급의 창녀와 같아. 밍크 코트를 입은 세계적
모델의 고급 콜걸 말이오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가고 싶고 평생
을 같이 있고 싶은 사랑하는 여인은 아니란 말이오. 그렇소 이
차는 충분히 찬탄할 만큼 아름답지만 어딘지 천박해."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차를 명 차라고 합니까." 
  "이봐요, 정 박사." 
  김 회장은 정색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진정으로 명 차라고 생각하는 차가 있소. 평생을 두고 만
들고 싶은 차. 살아 생전에 단 한 번이라도 내 손으로 직접 만들 
고 싶은 명 차. 그래요, 정 박사. 내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독
일의 역사적인 현장에 온 것은 바로 그 차를 내 몸으로 느끼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한바탕 낮선 독일 청년과 생명을 건 필
 사의 경주를 벌이고 되돌아오는 길에 내게 던진 김 회장의 이
 말 한마디는 그를 재벌 총수 김기섭 회장에서 그 모든 직책을
 모두 집어던진 자연인 김기섭으로 돌아가게 했던 것이다. 그날
 나는 그 스포츠카 속에서 인간 김기섭을 보았다.
 -회장님이 만들고 싶은 차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묻자 김 회장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내 머리 속에 있소"
  그리고 나서 김 회장은 다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리고 내 가슴속에 들어 있소"
  김 회장은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내가 평생을 두고 만들어 보고 싶었던 차가 바로 저 앞에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
  김 회장은 손을 들어 차창 밖을 가리켰다.
  나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는 딱정벌레 모습을 한 구형의 폴크스바겐 한 대가 느
 린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건 폴크스바겐 아닙니까."
 차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 나로서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
 는 차. 곤충의 일종인 딱정벌레의 독특한 디자인으로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가도 전혀 새로운 모습의 신형이 나오지 않은 전통
 적인 독일의 국민차, 폴크스바겐.
"그렇소, 정 박사."
 김기섭은 머리를 끄덕였다.
 ·저 차의 이름은 폴크스바겐. 독일어로 국민의 차라는 뜻입니다.
다. 내가 만들고 싶은 명 차는 바로 저와 같은 폴크스바겐이지, 이
런 페라리가 아니. 오 이런 페라리는 한번 데리고 놀다 버리는 고
급 창녀와 같은 차지만 저런 폴크스바겐은 평생을 함께 사는 조
강지처 같은 차라고 말할 수 있지. 저 폴크스바겐을 디자인한 사
람이 누구인지 아시오."
  "모릅니다. " 
  "저 폴크스바겐을 디자인한 사람이 바로 조금 전에 나와 함께
자동차 경주를 했던 게르만 민족의 혼이 담겼다는 포르세 911
터보를 만든 바로 포르세 그 사람입니다. 그렇소. 진정으로 게르
만 민족의 혼이 담긴 꿈의 차는 바로 저 느리게 달려가는 폴크
스바겐입니다, 정 박사."
  순간 김 회장의 눈이 번쩍이며 빛났다.
  '난 만들고 싶소. 게르만 민족의 혼이 담겼다는 폴크스바겐처
럼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꿈의 차, 그런 명차를 다가오는 21세기
에는 반드시 만들고 싶소"
 
    2
  로스트로포비치가 연주하는 바흐의 사라반드 C장조의 음악이
 첼로의 그 둔중한 소리를 끝으로 멈췄다.
 나는 턴테이블의 스위치를 내렸다. 얼음만 남아 있는 유리잔에
다시 위스키를 채워 넣고 나는 다시 서성이기 시작했다.
  거실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느린 속도로 세 시를 가리켰다. 그
러나 나는 좀처럼 잡을 이를 수가 없었다. 마신 위스키로 취기가
오르긴 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또릿또릿 맑아지고 있었다. 내 귓
가에는 10년 전 페라리를 타고 되돌아오는 독일의 아우토반 위
 에서 내뱉던 김 회장의 힘찬 목소리가 되살아나 들려 왔다. 
 '난 만들고 싶소 게르만 민족의 혼이 담겼다는 폴크스바겐처
 럼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꿈의 차, 그런 명 차를 다가오는 21세
 기에는 반드시 만들고 싶소"
  게르만 민족의 혼이 담긴 꿈의 차, 폴크스바겐처럼 우리 민족
 의 혼이 담긴 꿈의 차를 다가오는 21세기에는 반드시 만들고 싶
 다던 김 회장은 그러나 어젯밤 죽었다. 21세기를 며칠 앞둔 크리
스마스 전야에. 21세기를 겨냥해서 총력을 기울여 만든 신차를
 타고 그 성능을 직접 테스트해 보기 위해 나와 함께 달렸던 그
  고속도로, 비스바덴 근처에서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었다.
 김 회장은 느린 속도로 달려가는 독일의 국민차 폴크스바겐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을 했었다.
 "저 차는 페르디난드 포르세가 1930년대 초에 슈투트가르트에
 서 디자인한 세계적인 명 차 중의 하나입니다. 그때 포르세는 이
 미 자동차 개발의 디자이너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지요
 1934년 마침내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전 독일에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자, 포르세 박사는 독재자 히틀러에게 다음과 같
 은 친서를 보냅니다. '총통 각하. 위대한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차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 친서를 받은 히틀러
 는 포르세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냅니다. '포르세 박사.
 일년 이내에 전 독일 국민이 사랑할 수 있는 국민차를 완성 하도
 록 하십시오.'"
  김 회장은 고속도로 위를 달려가는 또 다른 폴크스바겐을 가
 리키면서 말했다.
  "히틀러와 약속했던 대로 포르세 박사가 디자인한 독일의 국
민차가 바로 폴크스바겐입니다. 히틀러는 베를린 올림픽과 더불
어 전 세계에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또 하나
의 야심 찬 계획을 하고 있었소. 그게 뭔 줄 아시오, 정 박사,"
  "모릅니다. "
  내가 대답하자 그는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 빨라서 어떨 때는 혼잣말을 하는 사람과도 같았다. 그것은
그의 급한 성격에서 비롯된 말투였는데, 따라서 어떨 때는 그의
말이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 그 핵심을 놓칠 때도 있었다.
  "히틀러는 올림픽과 더불어 베를린 자동차 전시회'를 계획하
고 있었습니다. 자동차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미국을
기계문명의 꽃인 자동차로 눌러 보고 싶었던 것이 히틀러의 야
심이었소. 포르세 박사와 히틀러의 야망은 이렇게 합작을 보게
되었지. 마침내 전시회 전인 1938년 폴크스바겐은 포르세 박사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메르세데스 벤츠에서 30대의 폴크스바겐이
최초로 제작되어 탄생되었고 마침내 히틀러는 베를린 자동차
전시회에서 국민차가 완성되었음을 선포하였소. 전 세계는
전시회에 나타난 폴크스바겐을 보고 경악하였소. 그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저 차는 50년이 넘도록 같은 모델,
같은 성능으로 독일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소 아니, 독일뿐 아
니라 전 세계의 도로 위를 저 차는 달려가고 있소, 정 박사.'
  김 회장은 나를 쳐다보았다
  "명 차는 이런 페라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런 차를
가리키는 것이오. 세월이 흘러가도 한결같은 차, 언제 봐도 새것
같고, 세월이 흐르면 정이 들어 다정한 친구 같은 차, 그것이 바
 로 명 차인 것이오. 내가 평생을 두고 만들고 싶은 차는 이런 똥
 갈보 같은 페라리가 아니라 바로 저 폴크스바겐 같은 차요. 나
 는,"
  김 회장은 갑자기 운전대를 내리쳤다.
 "이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나라가 만든 명 차가 다가오는 21세
 기에 파도처럼 넘치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보고 싶소."
김 회장은 천천히 말을 뱉었다. 빠르고 어눌한 평소의 어투와
는 달리 그는 마치 국어 책을 낭독하듯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하
였다.
"정 박사는 도대체 무엇을 보기 위해 베를린에 왔습니까.'
김 회장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호텔 방안에서 내게 던졌던 질
  문과 같은 질문을 다시 한번 똑같이 되물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 독일에 온 것입니
 까. 그 역사적 현장을 보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
 서 죽어간 그 핏자국을 눈으로 화인하기 위해서 독일에 온 것입
 니까. 도대체 무엇을 보기 위해서 독일에 온 것입니까.'
 김 회장은 갑자기 예언자처럼 말을 이었다.
 "보십시오, 정 박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다만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두고 보시오. 20세기가
 다 가기 전에 모든 것이 다 무너질 것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
 너지면서 동독이 붕괴될 것입니다. 폴란드가 무너지고 체코가 무
 너질 것입니다. 루마니아가 무너지고, 알바니아가 무너질 것입니
 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소련이 산산조각이 날 것입니다. 소련의
 연방국들이 속속 독립을 선포하고 유럽에서는 민족과 민족끼리,
 종교와 종교끼리의 전쟁이 일어나 서로가 죽고 죽이는 내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비단 유럽뿐 아닙니다. 베트남이 무너지고 캄보
 디아가 무너질 것입니다. 중국이 꿈틀거리고 홍콩이 무너질 것입
 니다. 이 모든 일들이 20세기가 다 가기 전에 일어날 것입니다‥‥ 
 난 그때 솔직히 그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그의 말은 너무 비
 약적 이었으며 과장되어 있었다
  20세기가 다 가기 전에 그런 극적인 변화가 이 지구상에 모든
  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다니
  "21세기까지는 겨우 10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
  나는 솔직히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자 김 회장은 대답했다 
  "그렇소 정확히 11년밖에 남지 않았지." 
  "그럼 지금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모든 변화가 그 짧은 11
 년 안에 모두 실제로 분명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분명히, 분명히 일어납니다. "
  그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분명하게 대답했다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내기를 걸어도 좋소-
  '내기에 무엇을 거시겠습니까."
  나는 짓궂은 심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김 회장은 쾌활하고 단순하게 대답했다. 
  '내 목숨을 걸겠소 20세기가 다 가기 전에 내 말이 틀린다면
 그땐 바로 당신에게 내 생명을 내놓겠소."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의 예언은 적중되었다. 베를린 장벽의 붕
괴는 단순히 베를린 장벽의 붕괴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단 한
개의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으로 시작되어 수만 개의 도미노가
파장을 이루면서 무너지듯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부터 동독은
무너지고  독일은 통일되었다. 유고가 무너지고 종교간에, 민족 간엔
전쟁이 일어나고 유고연방은 세 조각으로, 네 조각으로 쪼개졌다.
루마니아가 무너지고 알바니아가 무너졌다. 소련연방은 붕괴되고
수많은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 모든 일들이
1989년 11월 12일 일요일, 프랑크푸르트로 되돌아오는 페라리
차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기로 걸고 김 회장이 내게 예언했던
그 내용대로 불과 10년 사이에 모두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다. 흥
콩이 중국에게 반환되었으며 중국이 용처럼 꿈틀거리면서 일어
서고 있었다.
  예언자.
 그렇다. 바퀴에 미친 김기섭 회장은 내게 있어 시대의 징조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예언자였던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내기에 걸겠다던 김 회장은 내기에 이기고서도
스스로 목숨을 잃었다. 정답을 다 맞추고서도 시험에 떨어진 억
울한 낙방생처럼 김 회장은 모든 미래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서
도 20세기가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전날에 자신의 표현처
럼 현대의 말인 승용차를 몰고 독일의 고속도로를 달려가다가
사고를 내고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바퀴에 미친 바퀴벌레 김기섭.
시대의 징표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던 예언자 김기섭 회장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일까.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김 회장은 1999년 12월 24일 오후 세
  시에서 네 시경에 독일의 고속도로 비스바덴 근처에서 교통사고
  로 목숨을 잃었다. 내가 그 소식을 최초로 접한 시간이 성당에서
 자정미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직후였으니까 보다 정화한 시
간은 독일 현지시각으로 오후 네 시경이 맞을 것이다. 오후 네
 시라면 아직 아기 예수는 태어나지 않은 그 시간에 김 회장은 21
세기를 겨냥해서 총력을 기울여 만든 자신의 신차를 타고
달려가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어떤 사고였을까. 무한속도로 달
려가는 차들과 부딪쳐서 충돌사고를 일으킨 것일까. 아니면 고속
도로의 가드레일을 박고 도로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일까. 운전 부
주의로 중앙분리대를 받고 고속도로 위에서 차가 뒤집혀 전복 사
고를 일으킨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순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혹시 그것도 아니라면 무슨 다른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는 어쩌면 사고를 가장한 어떤 치밀한 범죄에 의해서 피살
된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라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살을
해버린 것이었을까
  그는 충분히 그럴 만큼의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었다. 그는 아
직 공산세력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동구권을 상대로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소련연방이나 한때 그 연방의 일원이었던 독립국
가들과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국을 상대로 싸웠던 동구권의
여러 나라들은 실질적으로 구 소련의 정보기관이었던 KGB출신
들이 그 조직을 바탕으로 만든 마피아에 의해 모든 상권을 통제
받고 있었던 것이다
  김기섭 회장은 없앨 수 없이 이들과 접선을 하고 거래를 하고
상담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
  그렇다면 김기섭 회장은 폭력조직들간의 암투에서 어쩌면 청
부 살인업자에 의해 교통사고로 위장된 교묘한 범죄에 의해 피살
  되어 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럴 만한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나는 팔짱을 끼고 거실을 서성이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살을 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나
  는 알고 있다. 그에게는 심각한 우울증 증상이 엿보이고 일었다.
  정신과 의사는 아니지만 작가적 직관으로 나는 김 회장이 심각
  한 우울 증세와 싸우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은 그의 전부였다. 불교를
믿거나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고 무신론자였던 그에 있어 부처는
일이었고 하느님 역시 그의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자동차는 그
의 종교였고 신앙이었다. 술을 마시거나 취미활동을 하거나, 따로
즐기는 운동도 없이 그는 하루 24시간을 모두 일에 전념하고 있
었다. 자신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일종의 자해행위
와 같은 무모한 짓이었다.
 자살은 자해행위의 가장 마지막 선택.
더 이상 탈출구가 없는 생애의 마지막 기로에서 어쩌면 김기
섭 회장은 죽음이야말로 최고의 휴식임을 얼핏 느꼈을지도 모른
다. 그리하여 전혀 예정했던 계획도 없이 어느 순간 갑자기 날개
를 가진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로 날고 싶어서 운전대를 도로의
바깥으로 꺾고 차는 그대로 가드레일을 받은 채 언덕 아래로 굴
러서 휴지처럼 구겨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김기섭 회장은 사고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스스
로 목숨을 끊어 자살해 버렸을 지도 모른다.
 이윽고 새벽 여섯 시가 되자 생각했던 대로 각 방송국에서는
 일제히 첫 뉴스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뉴스의 첫머리는
모두 세계 각 국의 크리스마스 표정이었다. 서투른 한국말로 "여
러분, 성탄을 축하합니다"로 시작되는 교황의 메시지로부터 눈
덮인 전선에서 보초를 서는 젊은 병사의 표정에 이르기까지 21
세기를 앞둔 성탄절의 다양한 모습들이 길게 나오고 있었다. 그 
특집뉴스가 끝나자 비로소 김기섭 회장에 관한 기사가 흘러나오 
기 시작하였다
  "방금 들어온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
  간밤에 성탄절 특별연주 방송 도중에 갑자기 베토벤 심포니
제9번 합창교향곡을 중단시키고 성급히 뉴스를 방송하였던 그
젊은 아나운서가 똑같이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기평 그룹의 총수 김기섭 회장이 교통사고로 별세했습니다. 우
리 나라 시각으로는 24일 밤 열두 시, 독일의 현지시각으로는 오 
후 네 시. 김기섭 회장은 독일의 비스바덴 근처의 고속도로 위에
서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현지의 특파원
으로부터 전해 듣겠습니다. " 
  나는 숨을 죽이고 TV 화면을 노려보았다. TV 화면에는 바바
리 코트를 입은 낯익은 특파원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다. 그는 어 
두운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 서 있었다
  "김기섭 회장은 성탄절을 앞둔 현지시각으로 오후 네 시, 기평 
그룹에서 21세기를 겨냥해서 만든 신차를 직접 몰고 독일의 고
속도로 위에서 시운전을 하다 바로 비스바덴 근처의 이 고속도
로에서 이 가드레일을 받고 언덕 아래로 굴렀습니다. "
  카메라는 특파원의 말대로 부서진 가드레일과 실제 상황을 중
계하듯 부서진 가드레일 너머로의 언덕 아래를 비추고 있었다.
  사고가 난 시각이 오후 네 시였지만 특파원이 달려간 시간은
훨씬 뒤의 일이었는지 도로는 물론 언덕 아래도 캄캄하게 어두
웠다.
  카메라 앞으로 총탄과 같은 눈발이 쏟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
 아 독일에서는 성탄절 전야에 눈이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인
 모양이었다.
  독일의 고속도로 앞에 서 있던 특파원의 모습은 병원 앞으로
바뀌어졌다. 눈발은 한층 더 거세어졌다.
  "여기는 김기섭 회장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프랑크푸르트의
 메디컬 센터입니다. 김기섭 회장의 시신은 사고 즉시 이 병원으
 로 이송되었지만 담당의사의 말로는 이미 이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절명했다고 합니다. 김기섭 회장은 사고 즉시 현장에서 즉
  사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기평그룹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성탄
  절이 지나는 첫 비행기로 김 회장의 시신을 한국으로 운구
  한다고 합니다. 김 회장의 사인으로는 현지 경찰에서는 운전부주
 의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새천년을 며칠 앞둔 성탄절 전야에 평
  생을 차에 바친 김기섭 회장의 죽음은 비극이 아닐 수가 없습니
  다. "
화면은 다시 다른 화면으로 바뀌어졌다. 화면에는 추상적인 물
 건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차의 모습이라는 것
  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처참한 모습으로 구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 물건은 승용차가 아니라 무슨 행위미술의 조각품처럼 보이고
 있었다. 화면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에 의해서 촬영
  을 제지당하고 있음에도 기자라는 신분으로 촬영을 강행하고 있
  는 듯 화면은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이 차가 바로 김기섭 회장이 타고 가다가 사고를 냈던 바로
그 승용차입니다. "
  다시 TV 화면은 특파원의 얼굴로 바뀌어졌다
  "이 승용차의 이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기평그룹
내에서는 암호명으로 I-카 라고 부르고만 있습니다. 김기섭 회장은
 21세기를 겨냥해서 만든 이 I-카를 타고 직접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시운전을 하고 가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 같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김기섭 회장의 일생은 차에 바친 것이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차에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일년에 한두 번은 직접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무제한의 속도로
 차를 몰던 스피드 광이기도 했던 김기섭 회장의 돌발적인 죽음은
 우리나라 경제에 심각한 충격을 줄 것임이 분명합니다. "
  갑작스런 김기섭 회장의 죽음으로 성탄절 휴가 중에 현장으로
성급히 달려간 현지 특파원의 뉴스는 상황만 있을 뿐 알맹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세한 뉴스를 전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짧은,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1세기를 겨냥해서 전 유럽의 자동차를 석권하려 하였던 김 
회장의 야심찬 계획은 이로써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김 회장의 개인적인 비극이 기평 그룹의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
치게 될 것인가는 전적으로 기평 그룹 자체의 의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이상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케이비에스 뉴우스 박대경 
입니다. "
  잠은 뉴스가 끝났다
  간밤에 들었던 속보보다 양만 늘었을 뿐 더 진전된 내용이 없
는 현장 뉴스였다. 김기섭 회장이 무슨 이유로, 왜, 그리고 어떻
 게 목숨을 잃었는가는 다만 현지 경찰의 애매 모호한 '운전 부주
  의'라는 판단만 전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다만 현장 스케치에
  불과한 내용이었다.
  그는 죽었다.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성탄절을 앞둔 현지시각으로 오후 네
  시, 독일의 비스바덴 근처의 고속도로 위에서 가드레일을 받고
  경사진 언덕길 아래로 굴렀다. 차체는 마치 휴지 조각처림 구겨졌
  으며 그는 운전대를 잡은 채 현장에서 즉사했다. 시신은 발견 즉
  시 프랑크푸르트의 메디컬 센터로 옮겨졌지만 이미 목숨이 끊어
  진 직후였다.
그의 시신은 성탄절 아침 첫 비행기로 우리나라로 운구되어
 올 것이다.
나는 결정적인 골인 장면을 몇 번이고 느린 속도로 되풀이해
  서 보여주는 중계방송처럼 현지 특파원이 전한 뉴스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새겨 보았다.
  바퀴에 미친 인간 김기섭. 자신이 스스로 붙인 별명처럼 바퀴
  에 미친 바퀴벌레, 김기섭.
굴렁쇠를 굴리던 소년시절부터 바퀴라면 환장을 했던 꿈꾸는
  소년 김기섭.
하나의 바퀴인 굴렁쇠를 굴리던 김기섭은 두 개의 바퀴를 가
  진 자전거에 미친다. 자전거의 생명인 바퀴. 림의 비밀을
  풀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밀항까지 했었던 청년 김기섭.
림이라면 자전거의 타이어를 끼우는 외륜.
그러나 자전거의 생명은 바로 이 림에 있다. 보다 완벽한 원일수록
보다 완벽한 바퀴임을 알게 된 김 기섭은 보다 완벽한 바퀴를 만들다가
손가락 하나를 잃어버린다 .
  오른손의 새끼손가락. 
  김기섭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마디 하나는 절단되어 있다. 그
의 오른손은 한마디로 불구인 것이다
  '내 오른손의 새끼손가락과 자전거의 바퀴 하나를 바꿔 버렸지.
그러나 난 전혀 아깝지 않았소. 보다 완벽한 림을 만들기 위해서
라면 난 새끼손가락은 물론 오른손 하나와도 맞바꿀 마음이 있
었으니까. 아니, 그 이상이었지. 오른손은 물론 내 목숨과도 맞바
꿀 마음도 있었으니까,"
  두 개의 바퀴를 가진 자전거에 미쳤던 청년 김기섭은 다시 두
개의 바퀴를 가진 오토바이에 미친다. 두 개의 바퀴를 가진 오토
바이에 미쳤던 김기섭은 다시 세 개의 바퀴를 가진 삼륜차에 미
쳐버린다. 그리고는 세 개의 바퀴를 가진 삼륜차에 미쳤던 김기
섭은 마침내 네 개의 바쥐를 가진 승용차에 미쳐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한 개의 바퀴를 가진 굴렁쇠에서 네 개의 바퀴를 가진 
승용차에 이르기까지 온통 평생을 바퀴에 바친 김기섭이야말로
인간이라기보다는 한 마리의 벌레, 바퀴벌레인 것이다.
  마침내 죽을 때도 자신이 만든 차 속에서 자신이 차를 몰다 차
와 함께 죽어 버린 바퀴벌레 인간 김기섭.
  나는 일어섰다
  꼬박 밤을 새운 아파트의 베란다 너머로 성탄의 새아침이 밝
아 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우편함을 들여다보았다. 조간신문이 배달
되어 와 있었다. 갓 배달되어 온 신문에서 채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기평 그룹의 총수 김기섭 회장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교통
 사고로 사망'
  주먹만한 활자로 제1면 톱뉴스였다.
  나는 신문을 펼쳐 보았다. 천연색으로 인쇄된, 바티칸성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로마의 성탄미사를 밀쳐 낼 만큼 김기섭 회장의
죽음이 톱뉴스로 기사화 되었지만 내용은 TV에서 흘러나온 첫
 뉴스처럼 빈약하였다.
  현지 및 특파원의 전송 형식으로 된 톱기사는 김 회장이 무슨
이유로 어떻게 죽음을 맞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는 여전히 '부
 주의한 운전' 때문일 것이라는 현지 경찰의 형식적인 대답을 인
용 보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한 가지 내 시선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흥
미로운 기사의 내용이 있었다.
  "김기섭 회장은 소문난 스피드 광이어서 일년에 한두 번은 독
 일이나 이탈리아의 고속도로에서 세계적 명 차들을 직접 시속 2
 백 킬로미터 이상으로 모는 버릇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번에 탄 차는 기평 그룹에서 21세기를 겨냥해서 자사의 총력을
 기울여 제작한 신차인 것이다. 김기섭 회장은 신차의 성능을 직
접 테스트하기 위해서 시운전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 승용차의 이름은 아직 비밀에 붙여져서 암호명으로
 I-카라고만 불리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확한 소
식통에 의하면 서기 2000년 1월부터 전 세계로 본격적으로 출고
될 예정인 신차의 이름은 이카로스.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신차의 이름은 김기섭 회장이 직접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는 너무나 태양을 향해 가까이
날아갔으므로 태양에 날개가 녹아 바다에 빠져 죽어 버리는 비극
의 주인공인데 자신이 직접 이름을 붙인 신차를 타고 독일의 고
속도로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김기섭 회장이야말로 태양을 향
해 날아가다가 날개가 녹아 그대로 추락해서 바다에 빠져 죽어
버리는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인 주인공 이카로스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이카로스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정확한 소식통'이라면 대부분 90%
센트 이상의 정확도를 가진 정보인 것이다
  신문의 현지 특파원은 암호명이 단지 I-카로만 알려져 있는
신차의 새 이름이 이카로스임을 밝혀낸 것이다. 보통 수 천억의
돈을 들여 새로 개발하는 신차의 이름은 정식으로 '신차발표회'
를 열기까지는 비밀에 붙여지게 되어 있다. 국내의 라이벌 회사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자동차 메이커들은 새로 탄생하는 신차의
디자인, 새로운 기능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신차의 이름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그 신차의 이름에 대해서 사전에 정보
를 빼내려고 고도의 첩보 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I-카
  기평 그룹에서 21세기를 겨냥해서 만든 신차의 암호명 I-카는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이카로스를 본 따 지은 신차
의 암호임이 밝혀진 것이다 
  21세기 유럽의 도로 위를 달려가는 차의 이름을 바로 유럽 정
 신의 근원인 그리스 신화에서 찾으려는 김기섭 회장의 강력한
 의지는 그러나 현지 특파원의 기사 내용처럼 '김기섭 회장이야
 말로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가 날개가 녹아 그대로 추락해서 바
 다에 빠져 죽어 버리는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인 주인공 이카로스
 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
  비극의 주인공 이카로스는 명공 다이달로스의 아들로 아
 버지와 함께 크레타섬으로 간다. 그러나 크레타섬의 왕 미노스는
 두 사람을 미워해서 미궁에 유폐 시켜 버린다. 부자는 왕비
 마시파에의 도움을 받아 탈출을 꾀해 보지만 미노스왕은 이미
 이를 알고 해변에 있는 모든 배를 치워 버린다. 이에 명공 다이달
 로스는 날개를 만들어 이를 몸에 달고 날아서 탈출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는 것이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뛰어난 손재주를 지녔던 다이달로스는
 마침내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몸에 붙인다. 섬을 탈출하기 전
 아버지는 아들 이카로스에게 말한다.
  "아들아, 날기 전에 너에게 말해 줄 것이 있다. 우리의 날개는
 날개가 아니다. 이것은 밀랍으로 만든 인공의 날개일 뿐이다. 너
 는 조금 있으면 하늘로 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로 날
 면 더 높이 날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는 절대
 로 안된다. 왜냐하면 높이 날수록 태양에 가까이 가 날개가 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날개는 다만 시칠리섬으로 도망갈 정
 도의 높이로만 날아야 한다. "
  그리고 두 사람은 하늘을 날기 시작한다. 아버지 다이달로스는
 무사히 날아 시칠리섬에 도착하였지만 아들 이카로스는 하늘 위
 로 솟아오르자 아버지의 주의를 잊어버린다.
  더 높이, 더 멀리. 날면 날수록 쾌감을 느낀 이카로스는 하늘 높이
 날개짓하며 날아간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간 이카로스의 날개는
태양에 녹아 마침내 바다에 떨어져 익사해서 숨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이카로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비극의 주인공.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무모하게 더 높이, 더 멀리 날다가
태양에 날개가 녹아 바다에 빠져 죽는 이카로스.
  하나의 바퀴에 미쳐 두 개의 바퀴를 가진 자전거, 그리고는 세
개의 바퀴로, 마침내는 네 개의 바퀴를 가진 승용차에 미쳐서 마
치 자기 몸 전체가 바퀴인 양 더 빠르게' 더 빠르게'를 향해
달려가다가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죽어 버린 김기섭
  이카로스와 김 기섭.
  두 인물에게는 유사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를 겨냥해서 만든 신차에 김기섭 회장이 직접 이카로스의 이름
을 붙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자신이 바다에 빠져 죽은 이카로
스처럼 언젠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것을
예견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제 2장 서곡
  2000년 1월.
  Y호텔 컨벤션 홀에서는 기평 그룹에서 21세기를 겨냥해서 만든
 '이카로스' 의 신차발표회가 열렸다.
  오후 여섯 시.
  컨벤션 홀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서 몰려온 유명인사들과 자
동차의 딜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홀 중앙에는 아직 한 번도 공개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
았던 신차 '이카로스'가 횐 베일로 가려진 채 전시되어 있었고,
홀의 전면을 메운 플래카드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21세기의 월드카. 이카로스 신차발표회'
  시간이 되자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과 기업인들 그리고 이를
취재하기 위해서 온 기자들과 TV매체들의 촬영 팀들이 속속 도
착하고 있었다 
  아직 베일로 가려진 이카로스의 전면과 후면에는 네 명의 여
성 도우미들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서 있었고, 당대 최고의 배우
인 C양이 최초로 이카로스의 운전석에 앉을 수 있는 미의 여왕
으로 선정되어 회장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한구석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만원을 이룬 회장 한복판에 전시된 이카로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수천 명의 인파들이 대만원을 이룬 이 축제 마당에 막상 그 주 
인공인 김기섭은 없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도 햇수를 바꿔 벌써
한 달 정도 지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신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곧바로 비행기에 실려 우리나
라로 운구 되었으며, 그의 장례식은 불교 식으로 진행되었다. 생전
에 종교는 전혀 갖지 않았던 그였지만 김기섭 회장의 부인이 독
실한 불교신자였기 때문에 서울에서 가까운 절에 그의 빈소를
마련하였다
  나는 정릉에 있는 절까지 나아가서 분향을 했었다. 몹시 춥고
눈이 많이 내리던 세모의 겨울날이었다. 대기업의 총수를 애도하
는 장례식치고는 지나치게 조촐하고 검소하였다
  향을 집어들고 촛불로 불을 붙여 향로에 꽂으면서 나는 검은
테이프로 가려진 영정 속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액자 속에서 김
기섭은 수줍게 웃고 있었다. 마치 이런 자리에 주인공으로 누워
있다는 것이 부끄럽고 겸연쩍다는 듯 불교 식으로 장례를
치렀으면서도 김 회장의 시신은 화장되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서 가까운 교외에 묻혔다. 그러나 나는 정릉
 에 있는 그의 빈소에만 들러서 조의를 표했을 뿐 그 이상의 조
 문은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그와의 우정에 대한 예의는 모두 갖추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나는 생각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전화를 받
 았다. 기평그룹의 기획조정실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보니 낯익은 사람이었다. 한기철이었다. 그는 10여 년 전 독일 프
 랑크푸르트에서 만났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김기섭 회장의
 특명을 받고 전시내의 호텔을 뒤져 내가 있는 곳을 찾아내었던
 프랑크푸르트의 지사장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후에도 나는 그를
 몇 번이나 다시 만났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지사장에서 그는 김
 회장의 수행비서로 자리를 옮겼는데 김 회장을 만날 때마다 그
 가 먼저 내게 전화를 걸어왔었다. 최근에 그는 그룹을 총괄하는
 기획조정실 실장으로 영전하였는데 자리를 옮긴 후로는 첫 번째
 의 전화였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기억하고 말고요."
  내가 대답하자 그는 바로 오늘 저녁 여섯 시에 Y호텔 컨벤션
 홀에서 신차발표회가 있는데 꼭 참석해 달라고 부탁을 해 오는
 것이었다. 사실 그런 일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무
 슨 모임이나 파티 같은 곳에 참석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었다. 깊
 은 우정이 없고 다만 가벼운 사교만이 오고가는 연회장의 분위
 기는 내가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이었다.
  내가 선뜻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그는 내게 간곡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 선생님께 발표회장으로 오시라고 하는 것은 의례적인 것
이 아닙니다. 발표회가 끝난 후 따로 만나서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
  신차발표회가 끝난 후 따로 만나서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다
는 한기철의 부탁을 나는 물리칠 수가 없었다. 정확한 내용을 물
어보지는 않았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말을 덧붙
이는 것으로 보아 나는 본능적으로 만나자는 용무가 죽은 김기
섭 회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직감했다
  정각 여섯 시가 되었는지 갑자기 실내악단이 연주를 시작 하였
다 
  나는 발돋움을 하고 흘 중앙에 자리잡은 '이카로스'를 바라 보 
았다. 베일에 둘러싸인 차의 휘장을 벗겨 내기 위해서 총리를 비
롯한 관계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서서 줄을 잡고 있었다. 그룹 관
계자로부터 간단한 신차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는 신차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이 차를 타고 가다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눈을
감은 김기섭 회장에 대한 회상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고인
에 대한 간단한 묵념과 함께 마침내 제막식이 시작됐다. 우렁찬
팡파르와 함께 허공에서 레이저 광선이 푸른빛을 번쩍거리면서
 '이카로스'를 향해 집중되었다. 거의 동시에 붉고 푸른 조명이
명멸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차를 중심으로 둘러서 있던 내빈들의 손에서 줄이 잡아 당겨졌 
다. 그러자 차의 전면을 덮고 있던 휘장이 벗겨지고 마침내 신차
의 모습이 드러났다
  "와아..."
  순간 커튼이 젖혀지기를 기다리던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탄
  성이 흘러나왔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물질문명에 중독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현란한 조명과 레이저 광선을 받으면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이카로스'는 마치 제우스의 신상처럼 보였다. 전체적으로 둥글
 어 마치 강인한 헤라클레스의 힘과 근육을 연상케 하는 후드 캐
 릭터 라인의 모습은 이제라도 막 스타트 라인을 박차고 뛰쳐 나
 가려는 옛 그리스의 올림픽 전사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낸 것은 붉고 푸른 현란한 조명 속에서 마
 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신차의 빛깔이었다. 그 빛깔은 이제껏 우
 리들이 봐 왔던 검고 푸른, 혹은 붉고 횐 도색의 자동차 색이 아
 니었다. 신차 '이카로스'의 색은 그 원색의 빛깔 속에 형광물질
 이 포함되어 있어 스스로가 발광하는 심해어의 비늘처럼 눈이
 부셨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차체의 빛깔이 광 량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차체의 페인트에 함유
 된 특수 도료에 따라서 대낮의 차체 빛깔과 어둠이 내린 한밤의
 차의 빛깔은 전혀 달라 보였다. 이른바 색의 혁명이었던 것
 이다.
  최고속도 19837n
  길이 4,670mm
  너비 1,778mm
  높이 1,437mm
  직렬 4기통 DOHC의 4도어 세단의 보디 형식,
  배기량은 1798cc의 신세대차 '이카로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세기의 명 차인 폴크스바겐과 같은 승용
차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김기섭 회장. 사상 처음
단일 차종으로 2천만 대 생산이라는 천문학적 기록을 세운 폴크
스바겐 비틀. 그에 버금가는 21세기의 월드카를 생산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로 만들어 낸 이카로스 디자인은 유럽 특유의 고전적인
모습이면서도 차체의 빛깔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빛의 혁명
을 이룬 첨단예술. 그리고 차의 내부는 마치 우주선의 조종석 처
럼 첨단과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이카로스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카로스 앞으로 바짝 몰려들고 있었다. 영화배우 C
양은 승용차의 운전석에 앉아서 특유의 밝은 미소로 활짝 웃고
있었고 각 신문과 잡지, TV에서 나온 촬영기자들이 C양의 모습
을 잡기 위해서 카메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번쩍
이며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외 귀빈들은 서둘러 전시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세계 각 국에서 몰려온 딜러 들과 즉석 상담을 하는 부산한 모습
만 보일 뿐 발표회장은 썰물처럼 인파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긴 채 썰렁해진 회랑을 가로질러 이카로스 앞으
로 다가가 보았다 제 스스로 움직이면서 360도 방향으로 회전 하
게 되어 있는 이카로스의 차체를 가만히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
다. 
  이것인가.
  나는 차체를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이 차가 바로 김기섭 회장의 생명을 앗아간 바로 그 차인가.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김 회장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
든 이 차를 타고 달려가다가 불의의 사고로 가드레일을 받고 경
사진 언덕 아래로 굴러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카로스의 최고 속도는 198킬로미터.
 나는 페라리를 타고 250킬로미터까지 차를 질주하는 모습을
 직접 그의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차가 허락하는
 최고속도인 198킬로미터까지 차의 스피드를 올려 보았을 것이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바로 아침에 전화를 걸었
 던 한기철 그 사람이었다.
"어디 계신가 한참을 찾았습니다. 안 보이시길래 오시지 않았
 는가 걱정했습니다. "
그는 말쑥한 정장 차림에 가슴에는 꽃을 한 송이 꽂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새 차의 모습이,"
  그는 횐 장갑을 벗으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다.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첫눈에 매우 매력적인 차라는 느
 낌을 받았습니다. "
  "고맙습니다. "
컨벤션 흘은 순식간에 빠져나간 사람들로 파장을 이루고 있었
다. 손님들은 거의 없고 손님들을 접대하던 회사측 사람들만 남
아서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시지요, 선생님,"
  한기철은 앞장섰다.
  그제서야 나는 '발표회가 끝난 후 따로 만나서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전화를 걸어왔
  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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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 모랫말 아이들 - 황석영

제목: 모랫말 아이들
지은이 : 황석영 동화, 김세현 그림
펴낸이 : 강병선
출판사 : 문학동네
출판년도 : 1판 1쇄 2001년 1월 20일
           1판 5쇄 2002년 8월 1일
저자소개 : 황석영
          경복고교 재학중인 1962년 단편 입석부근으로 신인문학상 수상
          1989년 무기의 그늘로 만해문학상 수상
          2000년 오래된 정원으로 이산문학상과 단재상을 수상
          김세현
          화가. 1963년 충남 연기 출생
          경희대 미술교육과 졸업
봉사자 이름 : 김윤경
차례 : 꼼배 다리
      금단추
      지붕 위의 전투
      도깨비 사냥
      친이 할머니
      삼봉이 아저씨
      내 애인
      낯선 사람
      남매
      잡초
      작가의 말


꼼배 다리

  멀리 비행장에서 시동을 거는 프로펠러 소리로 모랫말의 겨울 아침은 시작된다.
  잠이 깨어 코까지 둘러썼던 이불 사이로 내다보면, 제일 먼저 성에가 두텁게 낀 유리창이
마주 보였다. 여름에 누나들이 창살에 실을 매주어 타고  오르던 나팔꽃은 시들어 말라버려
바람에 불려서 날아가고, 창문마다 예리한  얼음의 꽃이 매달렸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아침
햇볕에 창문의 귀퉁이가 녹아내리면서 작은 얼음의 입자들은 무수한 빛 조각으로 변하는 것
이었다. 어린이 잡지에서 숨은 그림을 찾을 때처럼, 우리는 유리창 위에서 갖가지 동물과 수
풀을 보았다. 어느 때는 깊은 바다에서  자라는 음산하고 아름다운 물풀이 가득 피었고,  그
사이의 허공 위에서 뿔 돋친 고기들이 날아다녔다.
  겨울날의 모랫말 동네를 떠올리면 비행기가 엔진을 데우느라고 시동을 거는 소리, 두터운
성에의 그림, 만두 파는 소년, 배추 꼬리, 양지쪽에서 머리의 서캐를 잡는 모녀들, 코크스 줍
는 아이들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른풀에 질러놓던 쥐불놀이로 겨울 풍
경이 완전해진다.
  쥐불은 어디에 놓다. 둑 밑 갈대밭에 놓지. 둑 밑 갈대밭에는 춘근이네 움막이 있었고  그
아래 얼어붙은 샛강이 지나갔다.
  춘근이는 먼 데서 혼자 흘러들어온 거지였는데 어른들은 그를 땅끈이라거나 혹은  각설이
라고 불렀고 흔히 땅그지 춘근이로 통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에게 꼼배라는 별명을 붙였
다. 그의 오른쪽 팔목이 호미처럼 구부러졌기 때문이었다.
  "팔은 곰배팔, 그지는 땅그지, 애비는 배암이......."
  아이들이 놀려대면 그는 늘 갖고 다니는 갈고리 달린 지팡이를 휘두르며 쫓아오는 시늉을
했다. 아이들은 문둥이나 만난 듯 흩어져  달아나고 춘근이는 커다란 입을 주욱 찢으며  힝,
웃고는 돌아섰다. 그렇지만 달아나는 아이들 중에 넘어지는 애가 있으면 쫓아가서 일으키고
흙 묻은 옷을 털어주곤 했다.
  춘근이가 우리 동네로 들어와서 아침마다 입바람과 발장단으로 찬밥을 구걸하거나 둑  밑
의 강변 숲속에 뱀을 찾으러 헤매다니기 시작한 것은 두  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마누라까지 거느리게 된 것은 '꼼배 다리'를 놓기 일 년 전의 봄이었다.
  "꼼배가 장가갔다!"
  "꼼배 마누라가 고목나무면, 꼼배는 매아미 꼴이라네."
하는 얘기가 오고 갔다. 둑 너머  채소 시장 어귀에서 꼼배는 돈을 걷고  웬 뚱뚱한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데 이난영이 뺨치게 하더라는 것이다. 과연 채소 시장 입구의 꼼배 부부는 우
리 동네뿐만 아니라 다른 동네에서도 소문이 나서 어언 이 고장의 명물이 되어갔던 터였다.
그네는 피난민 촌에 살던 함경도 여자인데 남편과 아이를 화재에 잃고 오갈 데가 없다가 꼼
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얘기다. 피난통에 굶주렸을 텐데 꼼배의 아낙은 다리 하나가 우
리 한 아름드리는 되어 보였다.
  "두고봐, 여편네 관상이 거지 노릇 할 상판이 아니란 말야. 제법 복이 붙었거든."
  "좌우간에 춘근이 녀석, 몽달 귀신을 면했으니 호박 잡았는걸."
  시장의 막벌이 일꾼들은 모여앉기만 하면 꼼배를 부러워했다. 꼼배는  제 아내의 곁에 히
죽거리는 얼굴로 얌전히 서서 노래를 열중해서 듣고 있었다.  고개를 주억이며 박자를 맞추
기도 했고 손뼉을 두드리기도 했다. 그네는 검정물 들인 헐렁한 군복 저고리에 누더기로 기
운 담요 몸빼를 입고서 두 손을 얌전히 모은 채 노래를 불렀다. <목포의  눈물>이나 <굳세
어라 금순아> 같은 노래들이 그네가 즐기는 곡이었다. 작은 눈은 늘 웃음으로 잔주름투성이
고 느슨하게 늘어진 볼따구니 사이의 작은 입은 참새 부리처럼 보였다. 전체적으로 꼭 화랑
건빵 같은 인상이었다.
  그들은 아침밥을 구걸하러 동냥을 올 적에도 꼭 같이  붙어다녔는데, 어느 날인가 우리집
에 내려왔을 때엔 꼼배 혼자였다. 꼼배는 보통 거지처럼 밥  한술만 줍쇼오 하는 게 아니라
그 집 어린아이의 이름을 부르곤  한다. 그는 동네 아이들 이름응ㄹ  거의 빠짐없이 외우고
있었다.
  "수남아, 수남아!"
  갓 퍼놓은 밥을 들고 나가면서 어머니는 조금 짜증이 났던 게다.
  "끼니 때나 지나서 오지...... 한창 바쁜 때에 원......."
  밥을 깡통에 넣어주고 돌아서던 어머니는 그제서야 꼼배가 혼자서 있음을 알았다.
  "아니 마누라는 어쩌구 자네 혼자 왔나?"
  "요즈음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머나...... 도망갔나 봐?"
  "실은 저...... 집사람이 만삭이라......."
  꼼배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애기를 가졌어, 몇 달짼데?"
  "글쎄요, 저희가 뭘 아나요, 그저 통 기동을 못 허니까. 뚱뚱한 게 애까지 배구 누워 있습
죠."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꼼배 처가 아이를 뱄다는 사실을 알았고,  요즈음 들어 몸이 더욱 불
어난 게 아니라 만삭임이 밝혀졌던 것이다.
  날씨가 풀린 어느 포근한 오후에 밤섬서 통학하는 아이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시내를 건
너다가 그만 얼음이 꺼져서 빠졌다. 아이들은 얼음 구멍에서 허우적거리는 친구를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중 생각 있는 아이가 꼼배네 움막으로 달려가 살려달라고 도움을 청
했다.
  그러나 꼼배는 집에 없었고 만삭이  된 그의 처가 몸져누워 있었다.  그네가 거북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밖으로 나왔을 때 물에 빠졌던 아이는 이미  자취가 보이질 않았다. 구멍 속
으로 들어가자마자 급류에 쓸려서 아래로 흘러내려갔을 것이다.
  "그런 망할 놈 같으니...... 제가 동네 밥을 먹고 일가를 이룬 놈이 아이 하나 못 건지구 뭘
하는게야."
  "마누라 혼자 있었다는데 뭘 그래."
  "아따, 손만 잡아주면 살 것을...... 그런 밥버러지들은 당장에 동네에서 쫓아내버려야해."
  밤섬 사람들도 모랫말 사람들도 모두 꼼배네  움막이 천변에 있었으니 그의 책임은  면할
수가 없다고들 이야기하였다. 그 뒤부터 꼼배는 아침 구걸을  피하고 시장에만 나가고 있었
는데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동정심 많은 부인네들 몇이 미역을 사가지고 움막
에 다녀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날, 나는 국원이와 함께 거기에 있었다. 내가 그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저 끔찍한  일
이 일어나던 날을 말한다.
  우리는 포근한 바람이 불어오는 마른 갈대밭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나서 들쥐 사냥을 벌이
기로 했다. 들쥐의 구멍을 찾아내어 입구에다 마른풀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면 견디다 못한
들쥐 가족들이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불을 지르고는 기다리다가 한 마리씩 들쥐를 타격하는
재미가 기막힌 놀이였다. 그런데 어디서였을까, 미처 밟아서 완전히 꺼놓지 못한 곳에서  불
길이 번져 위쪽의 갈대밭으로 옮겨붙게 되었다.
  "야 불이 커지면 야단이다."
  "둑이 전부 타버려두 상관없어. 거름이 되어서 잔디가 더 잘 자라니까."
  아이들은 양편으로 갈라서서 번져가는 불길을 윗도리를 벗어서 두드리며 막아보려고 애를
썼다. 우리는 온통 땀과 재투성이가 되어서도 키들거리며 즐거워했다. 바싹 마른 갈대가  바
지직거리며 듣기 좋은 소리를 내고 활활 타올랐다. 훨씬 먼  곳에 있는 꼼배네 움막에서 꼼
배 처가 뛰어나왔다. 우리는 그네가 우리 바로 뒤에까지 달려온 것을 처음에는 보지 못했다.
갑자기 째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불......불......불!"
  국원이가 웃으면서 소리쳤다.
  "거기까진 안 가요. 밭터가 있잖아요."
  "불, 불...... 우리 애기, 애기."
  여자가 불붙는 갈대 위로 뒹굴기 시작했고 우리는 말릴 수도  없었다. 꼼배의 처가 꼭 미
친 사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네는 불길이 잡힐 때까지 줄곧 뒹굴었다. 우리의  쥐불놀이는
꼼배 마누라 때문에 완전히 잡쳐버렸던 셈이다. 검게 타버린 검의  재 위에 그네는 큰 대자
로 누워서 헐떡거렸다. 담요 몸빼가 누릿누릿하게 타 있었다.
  이틀 뒤에 그 여자는 시립병원까지 실려가서 죽어버렸다. 화상  때문에 피부 구멍이 모두
막혀서 그랬다는 소문이었다. 꼼배는 오랫동안 바깥  출입을 않는 것 같았다. 어느 밤에  온
동네로 외치면서 다니는 그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야 이놈들아, 느이만 사람이냐, 느이만 사람이야?"
  갓난아이도 간 곳이 없었다. 아마도  강변 모래밭 어딘가에 묻었을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그것 참 안되었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꼼배 처가 화재로 식구를
잃고 나서 충격을 지니고 살았는데, 불을 보자 그만 환장을 해버렸으니 아이들의 잘못은 아
니라고들 말했다. 더구나 그들의 식구는 동네 사람 축에 끼지 못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혀를 차며 가여워하면서도 깊이 새겨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즈음부터 시냇가에 이상한 변화가 생겼으니 돌과 흙으로 쌓은 축대 비슷한 것이
한 군데씩 늘어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것은 다니 모양을 갖추었다. 드디어 봄이  오기
전에 시내 위에는 두 사람이 엇갈릴 만한 넓이의 근사한 다리가 생겨났다. 그맘때부터 어찌
된 일인지 꼼배는 마을에서도 시장에서도 그의 움막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허허, 춘근이가 밥값을 하구 갔군!"
  모랫말의 노인들은 그렇게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 다리를 볼 적마다 모두들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동네에서는 몇 해 동안 움막 앞으로 지나던 다리를 '꼼배 다리'라고 불렀고, 그 뒤에도 새
로운 다리가 생기고 드디어는 미군 공병대가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을 때까지  꼼배
다리라고 불렀다. 내가 자라서 키 큰 소년이 되었을 때까지  그 다리는 같은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금단추

  비가 몹시 내리던 가을 저녁이었다.
  동네의 텃밭마다 가꾸어진 배추 속에 살이 찌고 뿌리가  굵어갈 무렵이었다. 가을에 내리
는 비는 썰렁했고 더구나 밤에 지붕과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가 몹시 을씨년스러웠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인근 기지촌 동네의 양색시들에게서 주문
받아온 옷을 만드느라고 밤 늦게까지 윗목 재봉틀 앞에  앉아 있었다. 누나들은 건넌방에서
이미 잠들어 있었지만 나는 '문지기 아들 브레에스'라는 책에 열중해서 어머니의 눈총을  받
으면서도 늦게까지 일어나 있었다.
  "계세요. 계십니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시 발틀 돌리기를 멈추었던 어머니가 잇따른 음성을 듣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누가......."
  그리고는 여러 가닥의 낙하산 천을  치우고 밖으로 나갔다. 브레에스가  주인집 아들에게
곤욕을 당하는 장면을 읽고 있던 참이었으나, 나도 책을 덮고 귀를 기울였다. 십구부대 앞의
양색시가 왔다면 귤이나 레이션이나 젤리 따위를 두툼한 종이 봉지에 싸가지고 왔을지도 모
르기 때문이다. 문간에서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지요?"
  "야아...... 똑바루 찾아왔네. 너 나 모르갔니...... 너 영숙이디? 나 은진이야."
  "머 은진이라구? 오마나, 이게 몇 해 만이가. 야, 이젠 잘 몰라보갔구나. 언제 이남 내려왔
네? 들어오라, 비 맞가서. 어서 들오라우."
  "벌써 다 젖어서. 찾기 쉽구나."
  나는 마루로 뛰어나갔다. 어른인 그들의  아이들 적 말투가 재미있었다. 그들은  떠들면서
마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아주머니 옆에 어른의 털  스웨터를 머리까지 들쳐쓴 계집아
이를 먼저 발견했다. 어머니는 뒤늦게 그 아이를 보았다.
  "야는 누구가...... 거 춥갔구나야. 더 젖지 않아서?"
  어머니가 그애를 냉큼 들어다 처마 밑에 옮겨주며 말했다.
  "이건 우리 큰놈이야...... 너 인사 안 해?"
  나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꾸벅하며 허리를 꺾었다. 아주머니가  차가운 손으로 내 머리
를 쓰다듬었다.
  "기래, 참 잘생겼구나. 아이들 홈자 키우노라 고생 많디?"
  "머...... 그낭 그래."
  "세월이 빠르기두 하디."
  우리가 떠들썩하며 방 안에 들어선 뒤, 환한 불빛 아래에서야 나는 그 계집아이를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옷은 달포 전의 추석빔을 그대로 입은 듯 노랑 저고리에 빨강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그애의 생김새는 우리와는 몹시 달랐다. 눈빛이 유리 구슬처럼 초록색이었고 머리
는 구불구불한 곱슬에 밤색이었다. 그리고 눈두덩이 깊숙한데다 코가 오똑했고 우리보다 살
결이 훨씬 희었다. 내게는 가슴이 짜릿하도록 예쁜 계집아이로 보였다.
  "야, 야는 너의...... 딸이가?"
  어머니가 당황해서 더듬었고 아주머니는 비에 젖은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희
미하게 웃었다.
  "넌 아는 줄 알아서...... 아, 모르갔구나. 나 신의주서 교원 노릇 했디."
  "오...... 풍문으룬 들었디만. 그거의 해방 직후 얘기가?"
  "이남에서 핏줄이라군 저거 하나란다. 난 쭉 홈자 살았대서."
  "홈자라니......."
  "저 아이 아버지레 누군지두 난 몰라야. 어두워서...... 몰랐디. 교원  숙소에 있뎄는데 점령
군들이 트럭을 타구 몰려와개지군......."
  계집아이는 제 어머니 곁에 얌전히 앉아서 방 안을 둘러보는 척했다. 사실은 제 어머니의
말을 빼놓지 않고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랬구나...... 넌 상기두 이렇게 고운데......."
  그들은 고향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고 가을비가 밤새껏 내렸다.
  눈이 새파란 계집아이의 이름은 의외로 귀남이었다. 그애 어머니가  꼭 열흘 동안만 부탁
하겠다며 귀남이를 우리집에 맡겨놓고는 아침 일찍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좀 난처한 기색이
었다. 귀남이는 그날부터 누나들은 물론 동네 아이들의 관심을 독차지해버렸다. 하지만 그애
는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고 언제나 울타리에 기대서서  행길 쪽만 내다보았다. 밥상머
리에 앉았을 때에도 고개를 절대로 들지 않고 밥그릇에 코를 박고 숟가락질만 했다.
  일 주일이 지나자 귀남이는 차츰 우리 식구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특히 누나
들은 그애가 얄밉다고 했다. 귀남이는 한 번도 웃지를 않았다. 또한 누구든 가까이 가서  말
을 시키거나 집적거리면 갑자기 앙칼진 표정이 되어서 손톱을  세우고 할퀴는 것이었다. 드
디어는 어머니가 그애를 데리고 있기가 매우 어렵다고 동네 아낙네들에게 하소연하게  되었
다. 한 달이 지나도록 그애의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이모가 찾아왔다. 이모는 귀남이 엄마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으며 새로운 소식을
한다름 안고 왔던 것이다. 그애의 엄마는 지금 일선의 어느 기지촌에서 아예 양공주로 나섰
다는 얘기다.
  "그 미친년, 이번엔 아마 깜둥이 새끼를 낳을 거야요."
  이모가 분개해서 말했다.
  "여자 홈자 살긴 너무 거틴 세월이다."
  어머니도 중얼거렸다. 이모는 그네가 저 로스케의 트기 계집아이를  찾으로 오지 않는 것
은 어머니의 약한 마음을 알고 떠맡기려는 수작이라고 흥분을 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며 귀
남이는 우리집에 와서 언제나 그랬듯이, 말라붙은 담쟁이의 가지가 가득 찬 양지 쪽 울타리
에 기대서서 행길 쪽만 바라보았다.
  그애가 꼭 한 번 입을 열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오전 수업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그날은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귀남이는 울타리 앞으로 나오지는 못하고 대신에 창가에 붙어서서 바
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애를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공
책을 펴놓고 숙제를 했다. 그때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 눈 온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굴뚝 위로 바람에 흩날리는 재와 같은 작은 날 것들이 가득 차 있었
다. 나도 창가에 섰다. 땅에는 젖은 자취가 보였으며 내리자마자 녹아버리는지 눈의  흔적이
없었다. 첫눈이었다. 내게는 그 눈보다도 귀남이가 말을 한 것이 더 신기했다.
  "너두 눈 오는 걸 좋아하니?"
  귀남이는 나를 힐끗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흰빛이 점점 빽빽해졌다.
  "하...... 많이 오네."
  귀남이는 늘 말썽을 피우고 벌을 서는  아이처럼 윗목의 방구석에 단정히 앉아서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지냈다.
  드디어 십이월이 거의 지났갔을 무렵, 소식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귀남이를 보내기로 작정
했다.
  마태오 신부님이 저애를 좋은 곳에 소개한다는구나. 귀남이한테두 그게 훨씬 나을 거야.
  마태오 신부님은 염창 마을에 있는 성당 곁의 '나카무라  집'에 사는 서양 선교사였다. 나
카무라 집은 옛날 일본인 교장이 살던 낡은 이층 목조  가옥이다. 그 집에는 울긋불긋한 구
제품 옷을 입는 귀남이 또래의 서양 얼굴을 가진 아이들이  늘 대여섯 명씩 있었고, 여름에
는 수녀가 아이들을 발가벗겨 목욕을 시키는 광경도 본 적이 있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처음에는 엄하게 굴던 어머니가, 내가 졸라대니까  하는 수 없이 그러면
동구밖까지만 쫓아와도 좋다고 승낙했다. 나는 나카무라  집까지 따라가기로 혼자서 작정해
버렸다.
  오정 때쯤에 집을 나섰다. 누나들은 역시 콧등도 내밀지 않았다. 귀남이는 우리  어머니가
지어준 담요 기지로 만든 바지에다. 자기 어머니의 그 낡고  커다란 털 스웨터의 소매를 걷
어서 뒤집어쓰듯 걸치고 있었다. 귀남이는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똑바로  보면서 어머니의
뒤를 타박타박 쫓아갔다.
  그애는 한 번도 우리 동네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그애의 곁에서 붙어서 저기는 중
국집이고, 또 저기는 모퉁이에 과자집이 있다는 둥 하면서  공연히 지껄일 때마다 귀남이는
그쪽은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마태오 신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털이 길고 키가  작은 삽살개가 쫓아나와서 우리
에게 무턱대고 꼬리를 내저었다. 어머니는 신부와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검은  가운을
입은 키가 큰 신부가 성큼성큼 다가와 귀남이를 안아올려 입을 맞추었다. 그애는 상을 찡그
렸을 뿐이다. 어머니가 인사를 했다. 우리가 돌아서서 얼마쯤 걸었을 때였다.
  귀남이가 밤색 머리를 나풀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애는 곧장 내게로 달려왔다. 귀남이
의 할딱이는 숨소리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나는 또 할퀴려는  줄로 알고 여차하면 뒤로 피
할 자세를 취했다. 귀남이는 내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주었다.
  "잘 가."
  짧게 말한 뒤, 그애는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이번에는 천천히 나카무라 집 쪽으로 걸어갔
다.
  어머니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내게 물었다.
  "뭘 줬니?"
  나는 손을 펴보았다.
  "단추예요."
  사슴이 새겨진 금색 멕기의 낡은 쇠단추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단추는
따뜻했다.


지붕 위의 전투

  집 앞으로 동네 사람들이 수군대며 몰려 지나가는 게  보였다. 아이들이란 구경거리가 생
기면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게 마련이다.
  나도 행길로 뛰어나갔다. 썽성루 위쪽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썽성루에서 마주 뚫
린 길 모퉁이에는 작은 이발소와  솜틀집이 붙어 있었고, 그 옆에는  언제나 쌀겨와 먼지가
뽀얗게 날아 다니는 방앗간이 있었다.
  방앗간이라기엔 좀 미안하게도 그것은 여러 개의 바퀴와 피댓줄이 돌아가는 작은 공장 같
은 정미소였다. 아이들은 정미소라는 말이 생소했는지 언제나 방앗간이라고만 불렀다.  방앗
간 뜨락에는 용감한 거의 한 쌍이 돌아다녔는데, 우리가 길을 질러가기 위해 뜨락을 통과하
면 요란하게 짖어대며 쫓아왔다. 머리를 땅에 댈 듯이 숙여  공격 자세를 취하고 빠른 걸을
으로 덤벼드는데 진땀이 날 정도로 제법 무서웠다.
  하여튼 나는 방앗간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사람들의 술렁임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국원이를 도중에서 만났다. 국원이는 벌써 소동의 내막을 대충 들었다고 했다. 염색
소 다니는 일꾼이 심부름을 갔다 오다가 보고는 얘길 해주더란 것이다.
  "굵은 전깃줄이 지붕 위루 늘어진 걸 모르고 어떤 애가 지붕에 얹힌 공을  꺼내러 올라갔
다가 붙어버렸대. 난 거기까지만 들었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지금은 다 끝났는지
두 모르겠다."
  "아직 안 끝났을 거다. 사람들이 저렇게 몰려가는데......."
  우리는 이발소 앞길에 이르렀는데 벌써 진을 치고 구경하는  사람들로 길이 막혀 있었다.
순경 한 사람이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지르며 혼자서  쩔쩔매는 중이었다. 자전거를 끌어
다 짐 싣는 판을 딛고 서서 구경하는 사람, 맞은편 담 위에 나란히 걸터앉은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은 어디 더 잘 보일  만한 장소가 없나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어른들
사이에 서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곤 그들의 궁둥이와 고작해야 머리꼭지의  가마뿐이
었다. 국원이와 나는 몹시 난감해져서 뒷전에서 어정거리기만 했다. 그때 국원이가 손가락을
양키처럼 딱 튕기며 말했다.
  "아참, 썽성루 옥상을 잊어버렸구나. 거기선 우리 동네가 다 내려다 보이잖아."
  "그래, 목재소 위루 해서 거기 쇠다리에 닿는 데가 있지."
  우리들은 그 동네 아이들이었으므로 어느 집과  길이 어떻고 거기 어디쯤이 무슨  모양의
돌이 박혀 있는지도 잘 기억할  정도였다. 우리는 일꾼들 눈에 띄지  않게 목재소로 들어가
쌓아놓은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끝에 이르니 쌍성루 삼층 바깥에  튀어나온 쇠사다리의 중간쯤에 닿는  것이었다. 우리는
녹슨 쇠사다리를 조심해서 딛고 올라갔다. 그러나 옥상에 닿기도  전에 고개를 위로 내밀었
다가 곧 실망해버리고 말았다.
  "요논들 먼때메 온나오니?"
  옥상에는 고문관이 먼저 와서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는 상이군이이었다. 중부전선에서
파편을 맞고 제대를 했다는데, 언젠가 우리가 병정놀이를 할 때에 계급 순위에 대해 자랑스
럽게 설명해준 적이 있었고 경례하는 모범 동작을 가르쳐준  일도 있었다. 전쟁에 나갔으면
뭘 해. 혀 짧은 묘한 말씨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그는 쌍성루  아래
일세집 구석방에서 노모와 누이동생들이랑 같이 사는는 누이는 양키를 끌어들이는 양공주였
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들 씽씽한 젊은 놈이 빈둥빈둥 놀면서 누이를 그따위 짓이나 하도록
내버려둔다고 비웃었고, 그런 생각은 곧 아이들에게도 전염되었던 터였다. 며칠 전에도 아이
들은 그가 군대에서 신통했을 리가 없다고 벌써 의논을 마친 상태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바
보라 한들 그는 어른이고 우리는 아이가 아닌가.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방앗간 지붕이 보고 싶어 그래요."
  "짜식든 또 고문관이다구 논녀바다. 온나와서 구경해다."
  고문관이 너그럽게 허락했다. 국원이와 나는 생쥐처럼 또르르 달려가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정미소의 지붕이 손바닥처럼 내려다보였다.
  정미소 위로는 굵다란 전선이 늘어져 있었는데 아이가 전선에 휘감긴 채 쓰러졌고 등에서
는 옷이 타는지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낙수받이에 걸린 고무공도 보였다. 지붕 위에는 정미소
사람 몇이 올라서서 긴 장대로 전선을 걷어내려고 휘젓고 있었는데 갈라진 전선들이 마찰될
때마다 뿌지직거리며 푸른 불빛이 번쩍였다. 어느 노인 하나가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지붕으
로 올라왔다. 두 손에는 찢어진 자동차 튜브를 감고 있었다. 노인이 튜브 감은 손으로  전선
을 잡아챘지만 여전히 아이에게 휘감긴 부분은 떨어지질 않았다.  아이는 전선이 좌우로 뒤
틀릴 때마다 꿈틀꿈틀했다. 노인은 다시  아이를 떼어내려고 몸에 닿은  전선을 잡아채는데
왼손 위에 늘어졌던 전깃줄이 정말  살아 있는 뱀처럼 노인의 팔뚝에  철썩 엉겼다. 노인이
비틀거리며 왼쪽으로 쏠리다가 넘어졌고 이어서 다리에 전선이 또 한번 휘감겼다.
  "으...... 으으!"
  나머지 손을 뻣뻣하게 쳐들면서 노인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노인은  전선에 휘감겨
붙어버린 다리를 빼내려고 버둥대다가 간신히 한쪽 다리를 떼어냈는데 피부가 벗겨져나갔는
지 피가 흘러내렸다. 노인은 자유로운 손으로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아
래에서 구경하고 섰던 사람들은 모두 쥐죽은 듯했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변전소에 연락을 한 거냐, 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다 내버려두면 죽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경은 초조하게 시계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나쁜놈든 가트니...... 구경만 함 다야? 얘든아 내가 가따온다. 경네해다, 경네."
  나는 벌떡 일어선 고문관을 어리둥절하여 바라보았다.
  "선인하사가 전투에 나가는데 경네 안 하기냐?"
  국원이와 나는 어쩐지 그가 농을 걸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서 나란히 기립해서 경례를 척
올려붙였다.
  "쪼아!"
  고문관이 멋지게 일직선으로 손을 내리며 경례를 받았다. 잠시 후에 구경꾼들의 술렁대는
소리와 함께 고문관이 지붕 위로 나타났다. 그는 전혀 맨손이었다. 먼저 노인에게  달려들어
감긴 전선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온몸은 거세게 떨렸고  전압을 견디느라고 경직된 근
육들이 부풀었으며, 고통을 참는 그의 눈알이 생선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전선이 붙었다가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깊은 상처가 나면서 피가 흘러 고문관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드디어 그가 노인을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다른 사람들이 상체를  굽히
고 조심스럽게 기어가 노인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고문관은 다시  아이 몸에 감긴 전깃줄을
잡아떼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피와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국원이와 나는 정말로  고문관
아저씨가 불쌍해서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가 아이의 등에 감긴 전깃줄을 떼어내고 다시 다리에  감긴 부분까지 떼어냈는데, 이번
에는 아이를 떼어내자마자 뒤로 넘어졌다. 전선이 그의 온몸을 휘감아버린 것이다. 그는  고
무 튜브를 손에 쥐고 허우적거렸다.  아이가 지붕 아래로 끌어내려지자  구경꾼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나 고문관은 식인수에 휘감긴 타잔처럼 지붕 가운데서  전깃줄에 붙잡힌 채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고문관이 몸을 굴렸다. 그리고 지붕 끝까지 가서 하반신이 아래로 축 처졌다. 사람들이 일
시에 와아, 하고 놀라는 소리를 질렀다. 잠깐 그런 자세로 매달려 있었는데 행길 쪽에서  고
물 드리쿼터 한 대가 털털거리며 달려왔다. 순경이 다시  활기를 되찾아 사람들에게 비키라
고 고함을 쳤다. 그것은 두 사람의 전공을 태운 전기회사 차였다. 그들은 전선이 늘어진  전
봇대 위로 올라가서 시작했는데 지붕 끝 쪽에 걸려있던 고문관이 다리를 버둥거리더니 전선
을 몸에 매단 채로 아래로  뚝 떨어졌다. 고문관을 휘감았던 전선이  이발소 앞에까지 길게
늘어져 있고 놓여난 그가 길 위에 넘어져 있었다. 국원이가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죽었을 거다."
  사람들이 몰려가서 고문관을 떠메어가려고 겨드랑이를 잡았을 때, 그가 다리와 팔을 휘저
어 뿌리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피 묻은 양쪽 팔뚝을 쳐들어 모여든 사람들에게 흔
들어 보였다.
  며칠 지나서 그가 다시 거리에 나타났을 적에 어른들은 아무도 그를 바보라고 여기지 않
는 것 같았다. 나와 국원이는 다리를 절뚝이며 쌍성루  쪽으로 걸어가는 붕대투성이의 고문
관을 앞지르고 달려갔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저 옥상에서처럼 경례를 척 올려붙였다.
  "쪼아!"
하면서 그가 답례를 해왔는데 그때부터 우리는 그를 특무상사라고 고쳐 부르기로 했다.

 

도깨비 사냥

  "둑 너머에서 모두 모이기루 했다."
  이런 일에는 언제나 앞장을 서는 목재소 집의 정삼이란 아이가 털어놓았다.
  "국원이두 나온댔어."
  "몇 명이나 갈 거니?"
  내 물음에 정삼이가 으스대는 말투로 대답했다.
  "쬐끄만 애들은 붙이지 않구 우리만 가기루 했다. 모두 사학년 이상이야. 너는  내가 뽑았
다."
  정삼이 따위에게 뽑힌다는 게 기분이 상해서 나는 슬쩍 뻗대어보았다.
  "난 못 나올지두 몰라. 시골 가셨던 아버지가 돌아오시거든."
  "무서우니까 그러지 너?"
  "무섭다구...... 내가? 임마, 나는 귀신바위에서 헤엄두 쳤어. 태영이네 장의사 상여 속에 지
금이라두 들어갈 수 있다."
  정삼이는 곧 그 점은 인정을 했는지 다른 방법으로 나를 꾀었다.
  "너, 광국이두 간다."
  나는 솔깃해졌다. 광국이는 정말로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아이였다. 그애는 술 장수인  제
엄마의 매질을 피하여 오래 전에 집에서 달아났던 적이 있었다. 광국이는 가출해서 온갖 곳
을 떠돌아다니다가 일년 만에 돌아왔던 것이다. 고아원에서 취침과  기상 나팔을 불었던 광
국이는 지금도 목에다 나팔 꼭지만을 걸어메고 다녔다. 고양이 울음 같은 소리로 그애는 나
팔 꼭지를 불었는데, 우리는 깊은 밤에 그애가 샛강 둑 위에서 부는 소리를 듣곤 했다. 광국
이는 동네 아이들 중에서 단연 어른이었다. 그애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세상의 고통에 대하
여 제법 아는 듯했고 특히 우리들 중에  누군가 어리석은 질문이라도 할적엔 아무 말 없이
빙긋 웃는 얼굴이 근사했다. 나는 광국이에게서 그 무렵에  한창 어른들이 부르던 유행가도
배웠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제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
루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광국이가 간다면 나두 간다."
  참지 못하고 나는 불쑥 그렇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사실 이번에두 광국이가 젤 먼저 생각해낸 거야."
  "내가 갖구 갈 건 전짓불이랬지?"
  "응, 담요두 한 장씩 필요하대. 요새 밤에는 아주 추우니까......."
  처음에는 심드렁했던 나도 일단 마음이 내키니까 아랫배가 간질거리도록 안달이 났다. 우
리는 지난겨울부터 말로만 했왔던 도깨비 구경을 실지로 해보려는 참이었다.
  모랫말 동네에서 동쪽으로 쭉 나가면 둑이 가로막혀 있었고, 둑을 지나 잡초가 자란 황폐
한 습지를 질러가노라면 들판 끝에 우중충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건물이랬자 군데군데 시
멘트벽이 벗겨져서 벽돌이 벌겋게 드러난 창고 같은 집이었다. 우리 동네 길 건너편의 공장
관사 쪽에 가면 그런 건물들이 수십 채나 있었지만 이  건물만은 좀 달랐다. 전쟁통에 온통
부서진 공장 부근에는 아이들이 떼지어 놀러 다녔어도 들판에 있는 그 건물 근처에는 아무
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누나들이 간혹 나물을 캐러 근처에 가면,  얘들아 귀신 나올라! 하고
서로 놀리면서 금방이라도 뭔가 뒤를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달아나곤 했다.
  우리는 그 건물 모퉁이에 삐죽이 솟은 굴뚝을 특히 두려워했다. 거기서 검은 연기가 올라
파란 하늘에 흩어질 때면 모두들 속삭이는 것이었다.
  "누가 죽었구나."
  "사람이 메뚜기처럼 타겠지."
  우리 또래들은 모두들 전쟁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거기서는 샛강 백사장
에서 학살당한 수입여 구의 썩은 시체를 밤새껏 태운 적이 있었다.
  나는 시체의 썩은 냄새를 생생히 기억한다. 거기서는 간장 졸일 때 같은, 그리고 비린  것
이 삭는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발을 오래 씻지 않아 발가락 사이에 끼는 때에
서 풍기는 냄새와 같았다. 그런 냄새와 더불어 화로 안에서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타는 듯한
냄새.
  전쟁이 온 마을과 거리를 휩쓸고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죽건 말건 아직은 두려울 겨를이
없었다. 차츰 산과 들판과 강이나  나무 숲에 대한 눈길이 되살아나고  어느 정도 아이다운
생활이 시작될 무렵에야 우리는 그때를 악몽처럼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깊
은 못에 가라앉은 돌처럼 그것은 묵직했다. 들판 가운데 음산하게 서서 가끔씩 불길한 연기
를 뿜어올리는 반쯤 부서진 벽돌 건물은 전쟁 때 그대로였다. 머리 풀고 올라가는 게 뭐지?
그건 히히히, 화장터 굴뚝에서 오르는 연기지 뭐야. 석탄이나 솔가지가 타는 게 아니라 시체
가 타구 있단 말야.
  별이나 달이나 해는 아주 멀리서 가끔 지거나 뜨거나 사라지곤 했지만, 사람이 죽는 일은
늘 우리 근처 우리 동네  가운데 있었다. 거기서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소문이 많이 나돌게
마련이었다. 어두워지기만 하면 그 건물에서 타죽은  모든 귀신들이 모여들어 희희덕거리고
다투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뿔 돋치고 털이 많이 나고  수영 빤쓰를 입은
도깨비가 아니라, 전화줄에 손이 묶인 해골 바가지들이 줄지어 나온다는 소문이었다. 우리는
바로 거기 가서 밤을 새우며 기다렸다가 한 마리만 잡아올 계획이었다.
  저녁에 나는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는 틈과 누나들이 잡지에 열중한 틈을 이용해서 두 가
지 물건을 챙겨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국방색의 미제 플래시와 낡은 담요를 옆구리에 꼭
끼고 있었다.
  둑 위에 올라서니 포근한 봄바람이 볼에 부딪혔고 샛강의  물풀 냄새가 상쾌했다. 우리는
서로 찾을 필요도 없었다. 광국이가 불어대는 나팔 꼭지 소리를 따라서 아이들은 제각기 모
여들고 있었다. 모두 다섯 명이었다. 나, 광국이, 정삼이, 국원이, 영달이 들이었다.
  "또 있냐?"
  광국이가 꼭지를 불다 말고 물었다.
  "수남이가 왔으니까 이제 다 모였다."
  정삼이가 손가락으로 꼽아보면서 대답했다.  샛강 건너편 비행장에서  탐조등이 좌우에서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스치는 불빛이  어두운 강의 수면을 일직선으로  가르면서 지나가곤
했다. 우리는 미군 부대의 송유관을 타넘고 둑방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데......."
  "어디쯤인지 알지?"
  "응, 저기 봐라. 저쪽에 희미하게 불빛이 보이지?"
  광국이가 어둠 속에 까물대고 있는 불빛 한 점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우리는 그게 화부의
집임을 알고 있었다. 화장터는 그 부근일 테지.
  "참, 모두들 준비해왔니?"
  "그래 난 담요하구 플래시."
  "나는 대영빵 다섯 개."
  "담요 대신에 나는 우리 형 군복 잠바를 가져왔다."
  "나는 몽둥이하구......."
  말하는 국원이를 광국이가 가로막았다.
  "야, 누가 그 따위를 가져오랬어?"
  "정삼이가 그러더라."
  광국이는 소리내어 웃었다.
  "몽둥이루 어떻게 귀신을 잡니, 연기를 몽둥이로 때려봐라 아프겠어? 그보다 담배는 누가
가졌지?"
  정삼이가 뒤적이더니 담배 두 개비를 내밀었다.
  "어휴, 이거 쌔비느라구 혼났다. 우리 아버지 주머닐  뒤졌거든. 그런데 애들이 담배 피면
키가 안 큰다던데......."
  그러나 광국이는 담배를 받아 절반씩 자른 다음에 한 개비를 물고 제 성냥으로 붙여 물었
다.
  "이건 피울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귀신들은 불을 무서워할 테니까."
  우리들은 밭고랑을 넘어서 화장장으로 접근했다. 물 흐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화장장의 굴뚝을 알아보자 나는 그만 심장이 딱 멎는 것만 같았다.
  "정말...... 괜찮을까?"
  영달이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중얼거렸고 광국이가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정삼이가 우겨서 나두 따라온 거다. 느이들 진짜 귀신을 잡을 수 있다구 생각하니?"
  국원이와 내가 차례로 말했다.
  "잡는 게 아니라, 그냥 한번 만나보려구 그런다."
  "여기서두 잘 보이구, 잘 들리겠다."
  광국이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너희들 무서운 게로구나."
  "아냐, 절대루 무섭지 않아."
  "그러니? 난 무섭더라. 귀신은 만물의 영장이 죽어서 생긴다니까 아마 되게 무서울걸."
하고 나서 광국이는 귀신을 막는다던 담배꽁초를 서슴없이 버렸다.
  "어떻게...... 그냥 바람이나 쐬다 갈테야?"
  "나는 간다. 겁쟁이들은 집으루 가버려두 좋아."
  정삼이가 내 전짓불을 뺏어들고 앞장을 섰다. 광국이는 두고 보겠다는 듯이 그 뒤를 슬슬
따라갔고 우리는 셋이 똘똘 뭉쳐서 쫓아갔다.
  건물 안은 몹시 캄캄했다. 별빛마저 새어들지 않는 안쪽에 벽돌 가마가 있었다.  밖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건물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강바람 소리가  제법 스산했다. 슬레이트 지
붕이 덜거덕거리는 소리에 진땀이 솟았다. 우리는 흙바닥에 동그랗게 쪼그려 앉았다. 광국이
가 전짓불을 쳐들어 이곳저곳을 비춰보았다. 짜식이 우리에게 겁을 주느라고 목소리까지 낮
게 깔고 불빛을 비추며 말했다.
  "바로 저기에 시체를 넣는다."
  네모반듯한 쇠문이 보였다. 쇠문 앞에는 넓다란 시멘트의 받침이 있었다.
  "저기선 타버린 재 속에서 뜨거운 뼈를 골라내지."
  바람 소리와 건물이 덜컹대는 소리에도 차츰 익숙해졌다. 얼마쯤  지나서 우리는 굳은 대
영빵을 나눠먹을 정도로 긴장이 풀어졌다. 그렇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우
리가 동네에 돌아가면 계집아이들과 꼬마들 사이에서 자랑스럽게 화장터의 하룻밤을 부풀려
서 떠들 수 있게 되었다.
  "가만 있어봐......."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영달이가 속삭이자 모두들 숨을 죽였다.  분명히 사람의 기침 소리
가 들려왔다. 기침 소리는 쿨럭거리면서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내가 보구 오지."
  광국이가 일어나서 판자문 앞으로 되돌아오더니 중얼거렸다.
  "누가등불을 들고 이리로 오구 있다."
  "달아나자."
  "나가지 말아, 마주치게 될 거야. 어디...... 빨리 숨어 있자."
  우리는 광국이가 이끄는 대로 한데 몰려서 가마 앞의 받침대 뒤로 숨었다. 드르륵, 하면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가 화장장 안에 들어섰다.  우리는 서로의 가슴팍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는데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등불을 쳐들고 이곳저곳 비춰보
더니 벽에다 걸었다. 그리고는 기침을 쿨럭거리면서 기름통을 날라다가 가마 앞에 내려놓았
다. 바로 그때에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나중에 영달이로 밝혀졌지만-재채기를  터뜨리고 말
았다.
  "누구야......?"
  화부 자신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루 썩 나오너라!"
  광국이가 제일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 뒤이어서 우리들도 하나씩 일어섰다. 화부는 어처구
니없다는 듯 우리들을 한참이나 살펴보았다.
  "느이들 어느 동네 애들이냐?"
  "모랫말 살아요."
  광국이가 또렷하게 말하고선,
  "여기서 담력 기르는 중입니다."
하고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화부는 기름통을 들어가 화구 뒤에 쏟아 부으면서 중얼거렸다.
  "어서들 가거라."
  우리들이 나가려고 하자, 광국이는 화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아저씨, 내일두 불을 때나요?"
  "빨리 가지 않으면 느이놈들 저 안에다 하나씩 처넣을 테야."
하자마자 국원이가 이젠 못 참겠는지 울어버리고 말았다. 화부는 한숨을 쉬었다.
  "여긴 애들이 올 데가 못 된다. 이놈들아 귀신이 정말로 나온단 말여."
  광국이가 물었다.
  "아저씨 봤어요?"
  "매일 밤 본다."
  화부의 입에서는 지독한 술냄새가 끼쳐왔다.
  "느이들 그전부터 모랫말 살았냐, 사변 때두 살았어?"
  "여기서 났죠."
  "그땐 꼬마였잖아......."
  광국이와 정삼이가 대답했다. 화부는 뜨림을 꺼억 하더니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무렵엔 밤새도록 일했지. 그렇게 많은 시첸 내 평생 처음이여."
  "그런데...... 왜 우리들은 귀신이 안 보이지?"
  광국이가 중얼거렸고 화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아 귀신 보구 싶냐? 어른이 돼서 죄를 많이 지어봐라."
  화부 아저씨가 가래침을 돋우어 뱉고는 우리에게 물었다.
  "느이들 아버지 중에 누구 청년단 들어갔던 사람 있냐?"
  "우리 아부지요."
  정삼이가 대답했다.
  "느이 아버지가 누군데......."
  영달이가 정삼이 대신 말했다.
  "얘네 아부지는 모랫말 목재소 주인이래요."
  "어...... 그 사람 아직 살았나?"
  화부는 알 수 없는 소리로 혼자서 중얼거렸다.
  "느이 아버지보구 공작창 뒷마당 우물에 가봤냐구 물어봐라."
  광국이가 말했다.
  "얘네 집엔 애들이...... 정삼이만 남았어요. 목재소에 불이 났거든요. 그땐  모랫말이 다 타
는 줄 알았는데."
  화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안다, 알어. 세상 일에 공짜가 어딨어. 자, 이놈들아 어서들 가지 못해?"
  밖으로 나오니 강변에 안개가 짙게 내려 덮이고 있는  봄밤이었다. 아이들은 제각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언제 그랬냐 싶게 무섬증이 모두 사라지고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동네 가서 뭐가구 풍길까?"
  나는 풀냄새를 한껏 들이마시면서 물었다.
  "뭐라긴...... 귀신을 봤다구 해야지."
  정삼이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밭고랑을 넘어서 둑으로 올라갔다. 비행장의  불
빛들이 아까보다 더욱 희미하게 껌벅이고 있었다. 뒤처져서 따라오던 광국이가 말했다.
  "정삼아 느이 아부지한텐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째서......."
  광국이는 담배를 꺼내 물더니 불을 붙였다.
  "놀라실걸."
  우리는 둑방 위에 서 있었다. 이미  생쥐들도 잠든 깊은 밤이었다. 모랫말 쪽에는  창문의
불빛이 몇 점 남아 있지 않았다.
  "내일은 십구부대 앞에 가보자."
  광국이가 담배연기를 멋지게 내뿜으면서 말했다.
  "거기 하꼬방 동네에 가면 좋은 구경거리가 많지. 대낮에 양갈보하구 코쟁이들이 막 붙는
단 말야."

 

친이 할머니

  쌍성여관은 붉은 벽돌의 이층 건물이었다. 원래는 쌍성루라는 큰 중국 요릿집이었는데, 전
쟁 뒤에 주인네는 망해서 아래편 단층 건물로 식당을 옮기고 이층 집은 미국의 댄스홀이 되
었다.
  썽성여관과 쌍성루 사이에는 오물이 가득 찬 비좁고 더러운 골목이 있었는데 곳곳에 벽이
움푹 파이거나 불쑥 튀어나온 곳이 많아서 숨바꼭질에 적당했다.  특히 빈 지하실은 우리들
의 본부로 알맞는 장소였다. 비록 출입구가 깨어진 유리창 아래로 늘어진 쇠사슬을 타고 오
르게 되어 있어 아주 불편했지만, 일단 들어가고 나면 집을 잊어버릴 정도로 오붓하고 재미
가 있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에 우리는 그  안에서 쥐잡기 놀이를 했다. 시멘트의  벽에 작은 구멍이
뚫겨 있었는데 맞은편 벽의 한 뼘 크기의 하수구를 빼놓고는 그곳이 지하실의 유일한 구멍
이었다. 그 속에는 아마도 쥐의 커다란 마을이 있는 성싶었다. 우리는 가끔씩 쇠사슬을 타고
내려갈 제 지하실 바닥에서 우글거리며 기어다니던 쥐들이 요란하게 울부짖으며 그 구멍 속
으로 일시에 자취를 감추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각자 몽둥이와 부지깽
이를 가지고 쌍성홀의 지하실 본부로 모여서 쥐의 소탕작전을  벌이기로 했다. 그무렵에 학
교에서는 쥐꼬리를 모아오라는 숙제를 내주었고 많이 모은 아이들은 상품도 받았다.
  집에서 쥐약을 놓으면 어디로들 기어가서 죽는지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또한 쥐덫
을 놓는다 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꼬리는 고작해야 두어 개뿐이었다. 그렇다고 아직은 잡초
가 무성한 쌀집 텃밭의 덤불 속을 뒤져서 들쥐를 잡기도  어려웠다. 또한 들쥐는 몸집도 작
고 주둥이가 뭉툭해서 잡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귀여운 데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본부 청
소도 할 겸 쥐꼬리도 모을 겸 하여 지하실의 구멍속을 습격하기로 모의했다.
  우리가 지하실 바닥에 내려섰을 때에도 역시 쥐들은 맞은편의 하수구를 들락거리며  음식
물 찌꺼기를 나르고 있었다. 우리는 보통 때처럼 별로  놀라거나 징그러워하지도 않고서 전
투원답게 여유 있는 웃음을 씹으면서, 이 불쌍한 적이 부지런히 구멍 속으로 도피하는 꼴을
오만하게 바라보았다.
  "먹이를 구멍에서 제일 먼 곳에다 뿌려두자."
  "그래, 너는 구멍을 지켰다가 많이 쏟아져나오거든 막대기를 쑤셔박아."
  우리는 제각기 떠들어대면서 참기름을 듬뿍 바른 밥덩이를 지하실 구석에다 떨어뜨려놓고
영달이만 구멍 옆에 남겨놓았다. 국원이와 나는 일층으로 오르는 막힌 통로에 닿은 계단 위
로 냉큼 뛰어올라가서 살기에 가득 찬 몽둥이를 쥔 채 조바심치며 기다렸다. 쥐들이 머리를
하나둘씩 구멍 밖으로 내밀더니 먼저 한 놈이 적당한 거리만큼 기어 나왔다가 쪼르르 되돌
아 들어갔다. 그리고는 또 한 번 기어나와서 저만큼 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짓을 되풀이하고
나서, 이번에는 두 마리가 한꺼번에 기어나왔다. 기어나온 쥐들은 고소한 냄새를 따라서  더
듬어갔다가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다시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는 좀처럼  나올 것
같지 않다가 두 마리, 세 마리, 다섯 마리가 차례로 기어나와 제법 대담하게 일직선으로  먹
이를 향하여 달려갔다. 벽에다 새워둔 빗자루처럼 꼼짝 않고 서 있던 영달이가 막대기로 시
멘트 구멍을 꼭 막아버리고 나서 그제사 숨을 몰아쉬며 낄낄 웃었다.
  "잘 걸렸다. 다섯 마리야."
  "저 흉칙하게 생긴 놈부터 때려잡자."
  우리가 이빨을 드러내고 살의에 가득 차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기 직전에, 이 가엾
은 족속들은 필사적으로 구멍을 향하여  돌진했다. 막힌 구멍 앞에까지  되돌아갔다가 벽을
따라서 길길이 뛰면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제풀에 놀라기도 하고  낄낄거리며 서로
나무라기도 하면서 이놈들은 모두 때려잡았다. 세 아이들은 포획물의 꼬리를 잡고서 유리창
밖으로 한 마리씩 내던져두고 나서 다시 구멍을 열어놓곤 했다.
  한 차례의 사냥 뒤에는 제법 기다려야만 했다. 쥐들이 점점 신중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먹음직한 고소한 참기름의 냄새가 쥐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지 유혹을  참지
못하고 한두 마리씩은 꼭 기어나오곤 했다. 우리가 법석대며  몽둥이를 이리 휘두르고 저리
치고 하는 중인데, 누군가가 지상의 유리창 사이로 고개를  처박으며 지하실에 대고 소리쳤
다.
  "야 뭘 해?"
  쌍성루 집의 친이 그 넓적한 상판을 불쑥 내밀고 있었고 곁에는 검은색 바지와 헝겊신을
신은 작은 두 발이 보였다.
  "왜 임마...... 여기서 쥐 잡는다."
  "학교에서 쥐 꼬랑지 모아오래."
  "야, 누가여기서 쥐 잡으라구 해서."
  친은 예전의 자기 집이라 막을 권리라도 있다는 건지 제법 뻑세게 나왔다. 우리는 평소에
친을 아주 만만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애의 솜누비옷이나 이상한 단추가 여럿 달린 흰 무명
저고리도 우스웠고 무엇보다도 친은 어린애로서는 엄청난 뚱보였다. 늘어진 볼에 눌려서 눈
과 코와 입은 마치 찐빵의 주름과도 같았다. 턱에는 주름이  셋이나 잡혔고 다리 하나가 우
리들의 허리만했다. 국원이가 친의 말투를 흉내내어 대답했다.
  "우리 쌀람이 잡구 싶어 잡아해."
  "야, 너 혼이 난다. 주인집 안경 여자 알아해면 고반소에 잡혀간다."
  "일러라 찔러라, 니 콧구멍 콕콕 찔러라."
  친의 곁에 보이던 작은 헝겊신이 움직이더니, 술래뱃장 할망구가 유리창 사이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친이네 할머니의 어머니였다. 우리 동네에서는 그 여자의 나이를 아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우리가 듣기로는 아득한 옛날에 둑이 터져서 홍수가 났었다는데, 그때에도  친
이네 할머니의 어머니는 아주 늙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백 살은 넘었을 거라는 얘기였
다. 우리가 그 할멈을 술래뱃장 할망구라고 부르는 이유는 해마다 겨울이면 길가 양지 쪽에
나와 앉아서 친이네 누이의 머리에서 서캐를 골라내는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할망구가 그걸
골라내서는 연신 빨아먹고 버린다고 수군거렸다.
  술래뱃장 개뱃장 이불 밑에 이 잡아먹고
  송장 밑에 피 빨아먹고
하고 술래를 놀리는 노래에서 따온 게 분명했다. 어른들 말대로 여자가 귀한 고장에서 도망
가지 못하게 묶어버려서 우리 발보다도 작았고, 허리는 잔뜩  굽었으며 머리는 듬성듬성 빠
지고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우리는 골목에서 놀다가도 그 노파가 먼 곳에 보이기만해도 뿔
뿔히 흩어져서 달아나곤 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텅 빈 입을 벌리고 웃는 모양을 해 보이
고 있었다.
  "큰탈났다. 달아나야지."
  "어디루 달아나니?"
  "쥐새끼 꼴이 됐는걸."
  서로 두리번대며 겁먹고 있는데 할멈이 뭐라고 작게 말했고, 친이 다시 저희 말로 쏼라쏼
라한 다음에 우리에게 외쳤다.
  "쥐 하나 주면 일르지 않아해."
  "거기서 아무 거나 골라 가져라."
  의외로 수월한 요구였으므로 우리는 아깝지  않게 꼬리 하나를 손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친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이었다.
  "아니 아니, 살아한 거 하나 잡아. 우리 할머니 준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아무튼 뒷보가 약한 건 우리 쪽이니까 선선히 대
답했다.
  "그래 산 채루 한 마리 잡아다가 줄게. 까짓거 두 마리쯤까지는 문제 없다."
  "아니 하나만 잡아해면 좋아."
  친이와 할망구는 저희끼리 지껄였다.
  "뒤루 와해. 앞에 가지 말아."
  친이의 말은 반점으로 들어오지 말고 뒤채인 살림집으로 돌아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우리
는 쥐를 스무 마리쯤 잡았고 꼬리를 끊어서 골고루 나눴다.  그리고 우리들 중에 제일 강심
장이었던 국원이가 발로 꼬리를 밟아서 사로잡은 쥐 한 마리를 노끈에 꿰어서 친이네 뒤채
로 갔다. 친은 반색을 하면서 쥐를 갖고 들어가더니 끝내 쓰다 달다 말이 없었다. 우리는 궁
금한 김에 서로 이러쿵 저러쿵 입씨름을 하게 되었다.
  "야, 친이 할머니가 쥐를 잡아서 구워 먹을라구 그럴까?"
  "설마 그렇기야할라구."
  "서캐도 잡아먹는데?"
  "임마 그건 먹는 게 아니야."
  "아냐, 혹시 만두에다 넣을라구 그러나 부다."
  "그런 게 아닐 거다. 아마 심심해서 가지구 놀라구 그럴 거야."
  "징그럽게 그건 왜 가지구 놀아?"
  "알았다, 기르려구 그럴 거야."
  서로 아니라거니 그렇다느니 의견을  나누어보았지만 아무래도 신통하게  짚이질 않았다.
우리는 월요일 오후에도 지하실 본부로 쥐를 잡으러 갔는데 그때에도 친이 나타나서 산 쥐
한 마리를 얻어갔다. 우리들은 더욱  궁금해졌고 결국은 술래뱃장 할망구가  요리해서 먹을
거라는 생각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날마다 산 채로 한 마리씩 들여놓았다가는 나중엔 집 안
팎에 쥐가 득시글거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쥐꼬리를 구하는 일보다도  친이 할머니
일이 더욱 못 견디도록 수상해서 이번에는  화요일 오후에 쥐 한 마리만을  사로잡아가지고
친이를 불러냈다.
  "왜 오늘은 안 가져가니? 여기 잡아왔다."
  친이는 심드렁하게 쓱 훑어보고는 말했다.
  "그만이다. 소용없어해."
  "어째서?"
  "아까 우리 아버지가 쥐 잡는 그릇을 사와서."
  어랍쇼, 쥐덫을 샀다니. 이젠 정말  쥐잡기에 열이 올랐구나 싶었다.  역시 국원이가 그런
방면에 빠른 편이라 친이를 슬슬 놀려대기 시작했다.
  "느이 할망구가 쥐고기루 반찬 해먹는다지?"
  "아니, 아니, 못써한다. 그런 말이 어딨어해."
  "그럼 날마다 그걸 얻어다 뭐에 썼니?"
  친은 벌써 살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가지고 어깨를 들썩이며 씨근거렸다.
  "우리 롱이하구 놀아해. 어디 두고 보자. 들어와, 어서 들어와."
  친이 울상이 되어 손짓했다. 우리는 넉살좋게 그애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친이는  마당에
들어서면서 저희 말로 뭐라고 연신 떠들었는데,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마루에 조는 듯이  걸
터앉았던 술래 할망구가 기침인지 웃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면서 우리들에게 손짓
했다. 우리는 주저주저했다. 가마솥에다 거꾸로 처박으려고 꼬이는  게 아닐까. 할머니가 마
루 밑에서 꺼낸 쥐덫 속에는 생쥐 한 마리가 그물망을 움켜쥐고 새까만 눈알을 굴리고 있었
다 할머니는 쥐덫을 무릎 앞에 놓더니 아주 부드럽고 다정하고 쇠잔한 목소리로 롱, 롱,  하
고 불렀다. 그랬더니 어디선가 해수를 앓는 늙은이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이는  기침
소리가 가까워져서 우리는 어딘가 하고 두리번거렸으나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아이구 엄마야!"
  영달이가 펄쩍 뛰어 일어났고, 건넌방의 열린 미닫이 사이로  뭔가 시꺼먼 것이 기어나왔
다. 그것은 크기가 중개만이나 한 고양이였다. 검은 털이 부스스하고 수염이 몹시  길었으며
동작은 느릿느릿했다. 고양이는 꺼칠한 머리를 늘어뜨리고 연신 해수 비슷한 기침을 터뜨리
며 슬그머니 할멈에게로 다가갔다.
  "롱, 로옹......."
  할머니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쥐덫을 내밀었다. 고양이가 굵은 음성으로 한번 울
더니 발끝으로 덫을 툭툭 건드리자 생쥐는 더욱 조그맣게 움츠려서 마치 회색빛의 털공처럼
보였다. 할머니가 쥐덫의 문을 열자 쥐는 나오지도 못하고 더욱 가녘에 붙었다.
  고양이가 입구 쪽에 앞발을 밀어넣어 생쥐를 몇 번 건드렸다. 쥐는 조금 앞쪽으로 기어나
왔고, 고양이가 쥐를 덥석 물었다.  쥐가 처량하게 찍찍거리면서 발버둥을 쳤는데  고양이는
금방 놓아주고는 다시 두발로 톡톡 건드리면서 쥐를 놀렸다.  우리는 비켜서서 침만 꼴딱거
리고 있었다. 쥐가 제법 마지막 용기를 냈는지 마루 아래의 마당을 향해서 뛰어내렸다. 그때
에 고양이가 굵고 힘차게 울더니 놀랄 만큼 재빠르게 한걸음에 뛰어서 쥐의 등을 앞발로 눌
렀다. 쥐가 계속 찍찍거리며 울었다. 고양이는  다시 몇 번을 앞발로 희롱하고 나서-우리는
한입에 삼키려는 줄로 알았다-슬그머니 뒷걸음질치더니 돌아서는 것이었다. 쥐는 완전히 기
력을 회복하고 쏜살같이 달려가 몇  번 허둥지둥하다가 수챗구멍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롱은 배를 헐떡이며 마루 아래에서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는 또 그 괴상한 기침을 떠뜨렸다.
할머니가 앙상한 손을 내밀어 마루 위로 올려주자 고양이는 다시 고개를 내려뜨리고 사라졌
다.
  "두고봤지, 두고봤지."
  친이 의기양양하게 떠들었고, 할멈은 텅 빈  입을 벌리고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우리는 머쓱해져서 친이네 집을 되돌아 나왔다. 그것 참, 기묘한 구경거리였다.
  "하나두 재미없다."
  "고양이두 되게 늙었는가 봐."
  "하여간에 늙으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희한해지는 모양이다. 그렇지?"
  그날 저녁때 아이들이 모이는 전봇대의 외등 밑에서 국원이와 만났을 때, 그애는 더욱 알
쏭달쏭한 자기 할아버지의 말을 들려주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다. 그 할망구 오래 못 살 것 같대."
  "어째서......."
  "늙은이가 봄을 타면 그해에 죽는대나?"
  역시 그 말이 옳았는지 아니면 때가 되었던지 친이네 할머니는 봄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
가셨다.


삼봉이 아저씨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보면,  상둣도가 마당 앞에 울긋불긋한 단청에다  희고 붉은 띠와
깃발과 색실이 주렁주렁 늘어진 상여가 놓여 있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가 누군가가 죽어서
알 수도 없는 먼 곳으로 떠나간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상여를 꾸미는 사람은 언제나 삼봉이 아저씨다. 그는 아이들 말대로 한쪽 눈이 없는 깨꾸
였는데, 손재주가 비상해서 작은 장도칼 하나면 온 세상의  물건들을 무엇이나 깎아낼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삼봉이 아저씨를 알게 된 것은 '도둑놈 잡기'라는 놀이 때문이었다. 술래에게 쫓기는
도둑인 나는 컴컴한 상둣도가의 작업장으로 기어들어 음식을 나르는 작은 꽃가마 안에 숨었
다. 그 속이 음산하고 두렵기보다는 우선 술래에게 발각될까 조마조마했다.
  "누가 거기에 들어갔냐?"
  굵다란 남자 어른의 음성과 뒤이어 막대기로 가마의 헝겊 지붕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
가 들렸다.
  "빨리 나오지 않으면 잠가버릴 테다."
  나는 긴장한데가 갑자기 혼구멍이 나서 턱을 덜덜 떨며 질려 있었다. 그때 앙증맞은 가마
의 창호지 문이 열리며 애꾸눈만 확대된 듯한 남자의 커다란 얼굴이 나타났다. 머리를 삭발
해서 도자기 그릇처럼 윤이 났고 코 밑에는 험상궃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일루 나오너라."
  생긴 것과는 달리 그는 부드럽게 말하고서 바깥으로 나를 안아올렸다.
  "산 사람은 그런 델 들어가는 게 아니다."
  내가 겁이 나서 울기 시작하자 아저씨가 당황해서 나를 달랬다.
  "놀랄 건 없다. 나는 삼봉이 아저씨다.  아저씨가 뭐든 만들어줄게. 가만 있자,  호랑이 한
마리를 깎아줄까?"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나는  삼봉이 아저씨랑 친해졌다. 그는 언제나  상여의 네 귀퉁이를
장식할 봉황의 머리나 상여틀을 끼워맞출 용을 깎았고, 여러 모양의 짐승을 만들었으며,  거
기에다 물결무늬, 연꽃무늬, 구름무늬 등의 고운 색을 칠하고 있었다. 아이들과의 놀이에 싫
증이 나거나 집에서 꾸중이라도 들으면 삼봉이 아저씨의 작업장을 피난처로 삼아서  찾아갔
다. 곰팡내 풍기는 그의 토방 거적때기에 쭈그리고 앉아 물건이 되어가는 신기한 과정을 구
경했다.
  "아저씨는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
  "음, 오래 전에 내가 너만했을 때......."
하면서 그는 새파랗게 윤기가 들도록 삭발한 머리를 긁는 것이었다.
  "절에서 살았단다. 거기서 노스님께 배웠지."
  "스님이 뭐야?"
  "아주 어려운 도를 닦는 사람이다."
  한번은 내가 늦저녁에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만취한 삼봉이 아저씨를 만났다.  그는 나를
자기의 토방에 데려가서 찹쌀과자와 생밤을 주었다. 향도잡이가 되어 아저씨는 먼산엘 다녀
온 참이었다.
  "아저씨, 사람이 죽으면 땅에다 파묻나?"
  "그렇지, 꽁꽁 파묻는단다."
  "그럼 아주 없어지나?"
  "아니다. 몸은 모두 없어져도 혼이 남는다."
  "혼이 뭔데?"
  "밤에 잠자면 꿈을 꾸지 않냐? 그게 바루 혼이 나다니며 겪는 일이란다."
  "그러면 혼은 안 보이겠네?"
  "왜 안 보여, 네 할아버지 혼이  네 아버지한테 남았다가, 네 아버지 혼이  너한테 옮겨지
고...... 그렇게 쭉 계속된다."
  "응, 그러면 혼은 애기들한테 옮는구나."
  "이담에 크면 더 자세히 알게 될 거다."
  나는 당분간 상둣도가로 놀러 가지  못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꾸중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노름과 술타령으로 나날을 보내는  상두꾼들이 들끓는 장소에 어린애가  드나들면
나쁜 버릇만 배우리라고 염려했다. 더구나 도가 주인인 유 노인은 칠십 고령인데 스물두 살
짜리 시골 작부를 재취로 데려와 살고 있었다.
  나는 상여집에 갈 적마다 노랑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재취댁의 창백한 얼굴과 커다
란 눈을 보면 어쩐지 썰렁한 기분이 들곤 했다. 동네  사람들 말에 의하면 포구에서 그네를
쌀 열 섬에 데려왔는데, 어릴 적부터 작부짓을 해왔다는 것이다. 여자의 배가 차차 불러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를 했다.
  "거 사내놈들만 득실거리는 집안에 계집은 단 하나니...... 알 게 뭐야."
  "누가 아니래. 칠순 노인네가 미륵님 덕택으로 회춘했을 리두 없구."
  주인인 유 노인은 장사에 있어서는 철저해서 해소 기침을 연방 쿨럭이면서도 상여가 나갈
때엔 희 두루마기를 입고 장례 행렬의 뒤를 따라가곤 했다.
  언젠가 삼봉이 아저씨의 토방에 갔더니 그는 유 노인의 재취댁과 함께 뭔가 다투는 것 같
았다. 아저씨는 삶은 돼지고기에다 그 집에서 거른 막걸리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가 취한 눈
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이리 들어오너라. 술찌께미에 설탕 타서 주랴?"
  재취댁이 치마를 싸쥐고 부른 배를 앞세워 내 앞을 지나쳐갔는데 울었던 흔적으로 눈두덩
이 퉁퉁 부어 있었다. 여자가 쑬찌께에 흑설탕을 쳐서 내게 갖다 주었다.
  "어쨌거나 여기선 못 살아요."
라고 여자가 말했던 듯싶다. 삼봉이 아저씨는 술을 벌컥 들이켜고 나서 천장을 쳐다보며 말
했다.
  "사람 맘먹은 대로 되는 세상이 아냐."
  나는 술찌끼를 한 그릇이나 얻어먹고 벌겋게 취해서 토방에 쓰러져 한나절이나 잠들었다.
  깨어보니 어두워져 있었고, 뒷방에서 상두꾼들의 화투 치는 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왔다.
  "깨었냐?"
  삼봉이 아저씨가 어둠 속에 까치다리를 하고 앉아서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얼른 집에 가거라. 집에서들 걱정하실라. 그러구 이건 전부 너 가져라."
  아저씨가 조그만 헝겊 구럭에 못 쓰게  된 용두, 봉황, 범이라든가 하는 물건들을  가득히
넣어서 내게 주었다. 나는 소근소근 말했다.
  "어저씨, 어디 가는 거야?"
  "쉬이...... 떠들지 마라. 나는 다시 절에 간다."
  "거기 가서 오랫동안 있나?"
  "아주 오래...... 죽을 때까지 있을 거다. 내가 부처님께 몹쓸 죄를 지었다."
  "부처님이 누구야?"
  "음...... 우리 큰형님뻘 되는 분이다. 잘 있거라, 아무한테두 얘기하지 말아라."
  그날 밤 삼봉이 아저씨는 어디론가 몰래 떠나갔다. 처음에 유 노인과 재취댁과 삼봉이 아
저씨에 대해서 쑥덕거리던 동네 사람들도 두어달 지나고 나니까 모두들 잊어버리기  시작했
지만 나만은 그러지 못했다. 삼봉이 아저씨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한아름 갖고 있었기 때
문이다.
  봄비가 촉촉히 내리는 어느 아침이었다. 상둣도가 앞에 화사한  상여가 꾸며져 묘지로 떠
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를 낳던 재취댁이  당산 동네의 석산파가 밤을 새운
보람도 없이 죽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상두꾼 칠팔 명과 그날따라 더욱 새하얀 무명 두루마
기를 입은 유 노인만이 비를 맞으며 산으로 갔다.
  삼봉이 아저씨가 없어진 뒤에 새로 온 얼굴 검은 상여의 앞에 향도잡이가 되어 요령을 흔
들면서 목쉰 소리로 선소리를 매겼다.
    어허이 어허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이 어허 내년 이때 춘삼월에
    어허이 어허 죽은 나무 꽃이 피면
  유 노인은 얼마 안 가서 중년의 행상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였다. 죽은 여자가 낳아
놓은 아기는 태영이라고 불렀는데 건강하게 자랐다.
  나는 상둣도가 앞을 지나며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적마다,  아기가 할아버지 또 아버지
의 혼으로 남겨진다는 삼봉이 아저씨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내 애인

  영화네 집은 역전 네거리에 있는 이층의 목조건물이었다. 저녁때가  되면 누구나 그 근처
에서 요란한 밴드 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는데  이층 계단은 언제나 삐걱거렸다.
낮에는 폐가처럼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웠고 밤이 되면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그 집  근처엘
가지 않았다.
  영화네는 댄스홀을 하고 있었다. 가끔 검둥이들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칼부림을 하면서 술
주정을 벌이는 날도 있었다. 무섭게 화장한 여자들이 초저녁부터  계단 아래 즐비하게 늘어
서 있었다.
  영화는 일학년부터 삼학년까지 나와 한 반이었던 계집아이였다. 우리는  늘 같은 길로 학
교를 오갔는데, 학교에서 철길 건널목을 지나 방직공장 앞으로  해서 시장으로 가로질러 역
앞을 돌아오는 순서였다. 처음에 나는 영화에게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느 때인가 말썽
을 피워서 벌 청소를 하고 늦게 돌아오던 날이었다. 시장을 지나오는데 그날도 사람들의 작
은 무리가 모여 있었다. 언제나 그 모퉁이에는 약장수들이  몰려와 바이올린을 켜기도 하고
간단한 요술도 부리고 노래를 부르거나  원숭이를 놀리기도 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공터에는 작은 천막이 둘러쳐져 있었다. 이상한 그림 앞에서 한 사내가 큰 소리로 떠들어대
고 있었다.
  자아, 보시라! 사람이냐 뱀이냐, 뱀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괴물이 나왔습니다. 직접 두 눈
으로 보시기 전엔 말하지 마시오. 반은 뱀, 반은 사람인 이 괴물을 구경하시는 데 단돈 삼십
환!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머리는 산발하고 예쁘게 화장
한 여자의 얼굴이요, 목에서부터 몸까지는  징그러운 구렁이로 변해 있는 그림이었다.  나는
침을 꼴깍거리면서 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들어가볼  수 없을까 하고는 빈 호주
머니에 손을 찌르고 공연히 천막 주위를 서성거렸다. 구경하고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낄낄
대며 웃기도 하고, 구역질이 난다고 연신 침을 뱉는 축으로 각양각색이었다. 천막의 뒤로 돌
아갔는데 천막 사이를 헤치며 웬 계집아이가 빠져나오다가 나를 보자 놀란 시늉을 해 보였
다.
  "어머나!"
  나는 처음엔 그애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으므로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너 수남이 아니야?"
  "응,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아니?"
  "정말 모르겠니?"
  어른처럼 지진 머리를 붉은 리본으로 묶고 구제품 옷을 입은 그 예쁜 계입아이가 기억에
없었으므로, 나는 얼굴만 붉어진 채로 어리둥절했을 뿐이었다.
  "삼학년 삼반에 다니던 이영화야. 왜 지프차 타구 학교에 다녔잖아."
  그제서야 나는 생각이 났다. 영화는 일, 이학년까지만 해도 키가 작아서 언제나 맨 앞줄에
서곤했다. 그애는 십구부대 앞 기지촌에 살았는데 아침마다 배불뚝이의 미군이 가교사로 지
어진 반달 퀀셋에 태워다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애를 '양갈보'라고 심하게 놀려대
곤 했다. 한편으로 나는 그애를 은근히 좋아했던 것 같다. 영화는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계
집아이였고 어딘가 어른처럼 까먹은 데가 있었다. 머리를 지진 모양도 그랬고, 구제품의  옷
고 그랬는데, 고무줄이나 공기 따위의 애들 놀이는 하지도 않았다. 늘 속눈썹이 길다란 눈을
아래로 착 깔고는 교실 구석에 혼자 앉아 있고는 했다.
  "그런데 네가 여기 웬일이니?"
  영화는 반가워하면서 내게 물었다.
  "응, 구경이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말이지."
  영화는 가볍게 풋 하는 소리를 내었던 것 같다.
  "이젠 다 끝났더라. 그리구 아무 재미두 없어."
  "정말 봤니? 반은 사람이구 반은 뱀이라며?"
  "응......."
  영화는 도무지 흥미가 없다는 투였다.
  "너 집에 가는 길이니?"
  "벌 청소를 했어. 누구하고 싸웠거든. 유리창을 두장이나 깼단다."
  "원...... 그럼 너 배고프겠다 그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뭐 사줄게, 잠깐 기다리구 있어."
  영화가 천막 사이로 사라졌다가 한참  뒤에 나타났다. 벌써 주위는 어둑어둑했다.  천막이
앞에서부터 걷혀지는 중이었다. 영화가 나와서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자, 가자."
  그때에 뒤에서 굵직한 어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화야. 우린 저녁 먹었다구 그래라."
  "알았어요."
  나는 뒤를 돌아보고 그 어른이 아까 천막 앞에서 구경꾼을 모으던 남자임을 알았다. 우리
는 시장 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큰길을 건너서 역전으로 나갔다.
  "그 사람이 누구니?"
  "우리 삼촌이야."
  "너희 삼촌이라구?"
  "응, 며칠 전에 일선에서 돌아왔단다. 엄마가 편지해서 찾아왔지."
  "그럼 느이 삼촌이 그 괴물을 잡아왔구나, 그치?"
  영화는 대답없이 배새시 웃기만 했다.
  "일선에는 그런 게 많이 있는 모양이지?"
  영화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우리 아버지두 함께 갔는데, 오지 않았어. 아는 아마......."
  그애가 거의 안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학교에 못 다닐 거야."
  "그래 널 학교에서 못 봤어."
  "싸젠이 미국에 갔는데...... 엄마는 텍사스에 나가거든."
  "텍사스가 뭐니?"
  영화는 턱짓으로 바로 그 이층의 목조가옥을 가리켰다.
  "우린 며칠 전부터 저기서 산다."
  영화와 나는 국화빵을 구워 파는 가게에서 단팥죽과 빵을 사먹었다. 네거리에서 헤어지려
는데 영화가 말했다.
  "내가 너한테 뭐 줄게. 우리집에 잠깐만 같이 갈래?"
  "잠깐이면 괜찮아. 집에서는 늦는다구 걱정하시겠지만......."
  아직 밴드의 소리가 그리 높지도 않았고, 사람들도 뜸했지만  계단 아래와 홀에는 무섭게
화장한 여자들이 거의 벌거숭이의 몸으로 웃고 떠들며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몇몇 여자
들이 영화에게 알은체를 했다. 나는 겁이 났지만, 나중에 아이들에게 자랑할 거리를  생각해
두느라고 연신 두리번거리며 여자들을 관찰했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홀로 들어가지 않
고 맞은편으로 통한 복도를 지나갔다. 복도 양쪽으로는 중국집처럼  작은 방에 베니어의 찌
그러진 문이 연이어 있었다. 우리는 맨 끝방으로 들어갔다.
  "들어와."
  방 안에는 군용 야전침대가 놓였고 신문지로  바른 벽 위에는 양키들의 잡지에서  오려낸
벌거숭이 여자들의 사진이 사방에 붙어 있었다. 냄비와 그릇  따위의 취사도구와 여자 어른
들의 손개의가 방 안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영화가 경대 서랍을 열더니 초
콜릿을 꺼내어 반을 뚝 꺽어서 내밀었다.
  "먹어, 그리구 이것두 가져."
  영화는 요요를 내게 주었다. 우리가 손팽이라고 하는 신기한 서양 장난감이었다. 실에  감
아서 퉁겨주면 요요는 아래위로 오르내리면서 팽글팽글  돌아가는 것이었다. 요요를 돌려보
는 중인데 거칠게 문이 열리면서 술에 만취한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의 등뒤에는 키가 전봇
대만하고 얼굴이 어둠 속에 묻혀버린  검둥이 병사가 버티가 서 있었다.  나는 놀라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이 이게 누구야. 내 쌔끼로구나. 야야, 어서 께라리 해라. 엄마 돈 벌어야지. 오케이?"
  검둥이는 성큼 따라 들어오더니 뭐라고  쏼라대면서 야구공만한 오렌지를 영화에게  주었
다. 영화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고는 문가에 나와서 외쳤다.
  "삼촌은 저녁 먹구 늦게 온대."
  우리는 복도로 나왔다. 아까 들어왔던 길로 나가려는데 영화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이쪽이야......."
  영화는 복도의 맨 끝에 있는 문으로 나를 끌고 나갔다. 반 넘어 허물어져 사용할 수 없는
다 썩은 계단이 뒷골목에 늘어져 있었다. 우리는 거기 나란히 걸터앉았다. 영화는  오렌지를
벗겨서 내게 주었다. 어두운 하늘 속에 별들이 작은 모래알처럼 박혀서 반짝이고 있었다.
  "여기선 기차가 오가는 게 잘 보여."
  영화가 역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기관차가  흰 연기를 내뿜으면서 역  구내로 들어오고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가득 차고 있었다.
  "별두 잘 보인단다."
  영화는 또 하늘도 가리켰다.
  "너 시장에 구경하러 가지 마라."
  "어째서......."
  "그건 순 거짓말이거든. 뱀 껍질을 목에 감구 상자 속에 들어가 있는 거야. 돈이 아깝지."
  영화는 갑자기 내 어깨를 잡더니 볼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어쩐지 집에 돌아가고픈 생각
이 들질 않았다.


낯선 사람

  오후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니 어머니가 장에 갔는지 문이 잠겨 있었다. 누나들은 그즈음
학교에서 날마다 늦게 돌아오곤 했다. 전교생이 무슨 궐기대회인가를 나간다고 했다. 적성국
감시위원단을 쫓아내고 휴전을 반대한다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오기를 기다릴 겸 해서 말님이네 가게로 갔다. 거기선 찹쌀 꽈배기와 붕어
풀빵을 팔았다. 미국 만화에 번역글을 써붙인 것도 있었고, '밀림의 왕자' 연속편이  새로 나
온 것도 있었으며, 설탕에 소다를 섞어서 만든 아령 모양의 또뽑기도 있었다.
  "말님이 아부지, 저 붕어빵 두 개만 주세요."
  "그래그래, 방금 나와서 아주 말랑말랑하구나."
  "돈은 이따 울엄마 오시면 드릴게요. '밀림의 왕자' 삼편 나왔어요?"
  "아직 안 나왔다. '도토리 일등병'은 나왔지."
  나는 풀빵을 먹으면서 '도토리 일등병'을 보았다. 외상  군것질을 한다고 어머니에게 꾸중
들을 일이 걱정이었지만 달리 별 도리가 없었다. 문이 잠겼으니 집에 들어가서 찬장을 뒤적
거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때 문 밖에서 어떤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머 식사될 거 있습네까?"
  "아, 예예, 있구말굽쇼. 들어오십시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상한 남자가 들어왔다. 중학생처럼 박박 깎은 머리가 채 자라지 못
해서 아직 밤송이 같았고,  얼굴의 왼쪽 볼따구니부터 입술  언저리까지의 살갗이 쭈글쭈글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가 꼭 문둥이인 것만 같아서 빵을 움켜쥐고 달아날 뻔했다.
  사내는 헐렁하게 늘어진 커다란 미군 군복을 입었고 지카다비를 신었으며 하늘빛  보통이
를 옆에 끼고 있었다. 말님이 아버지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헛기침을 연신 터뜨리며
그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사내가 눈치를 채고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머 벨루 보기 도틴 않을 거외다. 화상을 입었디요. 화염방사기가 무섭긴 합데다레."
  사내는 오리의자에 앉더니 두 손을 내보이기까지 했다. 손등이 쭈글쭈글하고 흰 반점으로
얼룩져 있었다.
  "허어...... 거 안됐구먼."
  말님이 아버지는 그제서야 앞치마에 손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웃었다.
  "뭘 드시카...... 국수 말아디릴까?"
  "예, 되우 맵게 비베달라우요."
  "제대군인이신 걸 모르구 괜히 난 또......."
  "아니야요. 내레 석방 포로외다. 어제 밤차루 부산서 올라왔시오."
  "고생 많으셨겠소."
  "말해 머하갔습네까. 같은 동포끼리 좌우켄이 무슨 상관이갔나요. 참 서분한 세월이디요."
  "어디 연고지라도 있으슈?"
  말님이 아버지가 벌겋게 비빈 국수 그릇을 그에게 밀어주었다.  얼굴 흉한 남자는 하얗게
칠해진 회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고지가 어디메 있갔시요. 누구레 찾아볼 사람이 있긴 하디만......."
  "누군데, 이 동네에 산다면 내가 대강은 알지."
  "여게가 모랫말이 확실하디요?"
  "그렇소."
  "한 열세 쌀쯤 났갔는데...... 국원이란 아이네 집이 어디야요?"
  "국원이...... 국원이라."
하며 말님이 아버지가 더듬었고 참지 못한 내가 붕어빵을 내려놓고 외쳤다.
  "국원이네 나 알아요. 요 위에 땅꾼언덕 위에서 염색소 하지요."
  "오 염색소! 맞아서...... 네가 아누나."
  사내가 반색을 했고 기회를 놓친 말님이 아버지가 못내 아쉽다는 듯이 한몫 거들었다.
  "응, 거 쌍둥이네 말이로군."
  사내가 젓가락질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었다.
  "쌍둥이라구요?"
  "그렇소. 그 집 맏딸이 지난겨울에 아들 쌍둥이를 낳았지요."
  "맏딸이래문......."
  그때에 또 한번 나는 참지 못했다.
  "국원이 큰누나 말예요. 걔네 매부가 염색소 주인이지요."
  사내가 국수를 먹다 말고 아까처럼 회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참 후에 굵게 일그러
져 아래로 말린 그의 입술이 벙긋하더니 성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우리는 그가 웃고 있
음을 간신히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는 갑자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야 너 혹시 잘못 안 거 아니가. 국원이 작은 누나를 잘못 알았갔디."
  "아냐요. 국원이 큰누나요. 키가 크구 볼따구에 점이 있지요."
  "그럴 리가 없갔는데, 그럴 리라......."
  사내는 자꾸만 고개를 내저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한데 그 친구레 와 그 얘긴 전하지 않았을까. 주소는 갈테주구선......."
하고 나서 사내가 말님이 아버지를 향하여 말했다.
  "부산 국데시장에서 학교 동창을 만났대시요. 국원이 큰누나  되는 사람하구두 같이 동창
이디요."
  "아, 그랬군요. 만나면 모두들 반가워하겠구료."
  "가럼요, 모두 한 고향 사람들 아닙네까. 하디만...... 전쟁이 있댔으니끼니......."
  사내가 자기의 손을 펼치고 들여다보았다.
  "많이 변했갔디요."
  사내가 일어서면서 나를 불렀다.
  "너 그 집 안다구 했디. 그런데 여기 어드메 꽃집 없습네까?"
하다 말고 말님이 아버지와 사내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꽃집이라구? 허허허."
  "기럼요, 서분한 세월이디요. 꽃집이 어디 있갔나요. 허허."
  사내와 나는 말집 텃밭의 명아주 덤불 사이를 지나  땅꾼언덕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메
를 캐어낸 구덩이가 드문드문 파여 있었다. 사내가 중얼거렸다.
  "어드메나 없어진 거투성이갔디. 어드메나 다 기렇갔디. 야,  이 동니에두 죽은 사람이 많
디 잉?"
  "이 언덕에서두 사람이 많이 죽었대요."
  "많이 죽어서......?"
  "전화선에 묶여가지구요...... 밤새 총을 쐈어요. 어휴, 냄새가 지독했는데......."
  "온갖 무서운 것두 이담엔 다 맥을 못 추게 된다."
하면서 사내는 언덕 위 곳곳에 피어 있는 민들레며 자운영 오랑케꽃의 무리를 가리켰다.
  "저절로 피어서 가득 차 있지 않네?"
  우리는 언덕에 올라갔다. 전에는 솔밭이었던  그곳에 피난밑의 동네가 생겨나 있었다.  긴
장대를 세우고 물들인 미군복을 여러 줄로 걸어 놓은 건조장과, 작은 판자 헛간과, 두  개의
커다란 쇠솥이 걸린 염색소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사내가 먼저 그쪽을 보고 말했
다.
  "저기가 국원이네 집이가?"
  "아니에요. 거긴 염색소구요. 집은 저쪽이에요."
  사내와 나는 쓰레기 소각장 앞을 지나갔다. 검은 석탄재나 타다 남은 상자들과 헝겊 조각
이 널린 길을 가는데 풀밭 너머로 누군가 나타났다. 연두색  치마에다 흰 반소매를 입은 국
원이 큰누나였다. 그네는 쟁반에 보자기를 씌워서 들고 있었다. 아마 염색소에 저녁밥을  갖
다주러 가는 모양이다.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저기 국원이 큰누나가 오네요."
  사내가 불에 데인 것처럼 그 자리에 흠칫, 서더니 내 손목을 꼭 잡았다.
  "내 얘길 해서는 안 된다."
  여자는 무심하게 우리 쪽으로 왔고,  그네의 치마가 경쾌하게 무릎 부근에서  출렁거렸다.
사내의 팔이 내 손목 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온 국원이 누나에게 인사
했다.
  "국원이 집에 있어요?"
  "오, 수남이로구나. 국원인 심부름 갔는데...... 왜 요사이는 놀러오디 않네. 좀 놀러 오라."
  쟁반 위의 그릇이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그네는 우리들 가까이 엇갈려
지나갔다. 그 동안 사내는 고개를 외면하고 돌아서 있었다. 지나가자마자 사내가 내  손목을
놓고 여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국원이 큰누나가 걸을 때마다  연두색 치마가 한결같이 경쾌
하게 흔들렸다.
  그때에, 우연이었는지 그네가 얼마쯤 가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어딘가 좀 미씸쩍다는
듯이 천천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돌렸
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멀어져갔다.


남매

  "곡마단이 들어왔대!"
  학교에서 오는 길에 만난 목재소 집 정삼이가 바삐 뛰어오며 내게 말했다.
  "언제?"
  "어젯밤에, 지금은 쌍썽여관에 묵고 있댄다. 원숭이두 있더래."
  나도 그애와 함께 뛰어가며 말했다.
  "그래, 쌍성여관으로 가니?"
  "아냐, 말집 텃밭으루 간다."
  변사가 해설해주는 가설극장이나 약장수며 서커스가 우리 동네에 와서 공연할 곳은  말집
텃밭밖에 없었다. 말집이란 왜정 때 기마순경들을 위해서 군마를  먹이던 마구간이 있는 공
터를 말했다. 나중에 그 자리에 학교가 섰다. 말집 텃밭은 곳곳에 잡초가 우거졌고 동네에서
내다버린 쓰레기와 인분이 널려 있었지만 우리의  놀이터로는 거기보다 더 좋은 데가  없었
다. 정삼이가 말했다.
  "거기서 천막을 치구 있대. 오정때쯤엔 악대가 행진할 거야."
  "구경거리가 많겠구나."
  그애는 픽 웃고 나서 내게 핀잔을 주었다.
  "손님 모으러 다니는 행진을 봐서 뭘 하니, 초대권을 얻어야지."
  "어떻게 공짜루 표를 얻어내니?"
  "거기 가서 일을 시켜달라구 하는 거다. 그럼 날마다 공짜루  볼 수도 있구 표두 여러 장
얻는다. 늦으면 딴놈들에게 모두 뺏길지두 몰라."
  말집 텃밭 위에는 벌써 가느다란 통나무로 천막의 골조가  세워지고 있었다. 곳곳에 가빠
를 씌운 짐이 풀어지지 않은 채 널려 있고  조무라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원숭이, 비둘기,
토끼, 백마도 있었으며 사람의 말귀를 척척 알아듣는 영리한 개도 있었다.
  우리는 입을 벌리고 구경하고 서 있는  한떼의 꼬마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대를  엮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갔다. 정삼이가 말했다.
  "아씨, 시킬 일 없어요?"
  "응? 그래 마침 잘 왔다. 저기 하얀 운동모자를 쓴 무대감독한테 가봐라."
  무대감독이 우리에게 일을 맡겼다. 정삼이는 잠시 후에 있을  행진에서 큰 북을 둘러메기
로 했고, 나는 곡마단 아이와 풀통을 들고 포스터를 붙이러 나가기로 했다. 나는 화려한  일
을 맡게 된 정삼이가 무척 부러웠다. 울긋불긋한 구제품 셔츠를 입고 앞 머리털을 계집애처
럼 지져 넘긴 곡마단 아이가 내 짝패가 되었다. 그애가 묵은 포스터를 한뭉치 들고 왔다. 나
는 무거운 풀통을 들고 그애의 앞장을 서서 동네 골목으로  나섰다. 석 장이나 붙일 때까지
그 녀석은 말을 하지 않았고 더구나 무거운 풀통을 나만  들게 했다. 드디어 기분이 나빠진
내가 풀통을 그 녀석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이젠 바꾸자, 팔이 아파 못 견디겠어."
  "미안해."
  의외로 그애가 아주 나약하게 대답하면서 풀통을 받아들었다. 그애는  얼마 못 가서 풀통
진 손을 바꿔 잡았다가 또 다시 바꿔 잡고 하면서 마침내 숨을 몰아쉬더니 멈춰 서서  쉬는
것이었다. 나는 녀석이 좀 얄미워졌다.
  "참 형편없는 약골이구나. 그렇게 기운이 없니?"
  "넌 밥을 먹었잖아. 나두 너처럼 잘 먹으면 기운을 낼 수가 있다."
  그애가 항의하듯이 내게 말했다. 나는 좀 너무했다 싶어서 곧 풀통을 마주 들어주면 물었
다.
  "어디 아픈 모양이구나."
  "아니야. 약간...... 배가 고파서 그래."
  "밥 안 먹었니?"
  "아침부터 여태껏 대영빵 한 개 먹었을 뿐이야. 출연할 사람들은 밥을 나누어 먹고, 나 같
은 아이들은 빵을 먹었어."
  "어째서...... 곡마단은 돈을 많이 벌 텐데."
  "그렇지두 않다. 우리 단장은 빚이 많대. 여러  사람들이 우리를 따라다니거든. 공연이 끝
나면 그치들이 돈을 모두 거둬가버린다."
  "단장이 네 아버지냐?"
  "아니, 나는 누나하구 고아원에 살았어. 줄 타는 아저씰 따라 곡마단에 들어왔다."
  "그럼 다시 돌아가면 되잖아?"
  "너는 몰라."
  그때 아이가 아주 행복한 눈초리가 되면서 웃었다.
  "얼마나 재밌는지 넌 모를 거야. 여긴 훨씬  자유스럽단다. 트럭을 타구 어디든지 간다구.
너는 바다를 못 봤겠구나. 우린 섬에두 간다."
  "야, 바다에 가봤으면 좋겠다. 근데 자동차는 안 보이던데......."
  "트럭은 지난달에 빚쟁이들이 가져갔어. 요새는  짐만 기차에 부치고 대개는  걸어다닌다.
그래두 감옥살이 같은 '소망원' 보다야 훨씬 낫지."
  나도 그애의 쾌활해진 기분을 건드리고 싶기는커녕, 오히려 그애처럼 훨훨 떠다니며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싶었으므로 부러워 못 견딜 지경이었다. 곡마단 아이가 작은 돌을 발끝으
로 차면서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걱정거리가 생겼어. 나는 누라랑 헤어지게 될지두  몰라. 다른 단체 사람들이 누나를  빚
대신 데려갈려구 그러거든."
  "안 가면 되잖아, 너두 따라가든지."
  "누나는 여러 거지 곡예를 한다구. 난 심부름밖에 못  하는 걸 뭐. 단장이 그랬어, 섭섭하
지만 누나를 보내는 수밖엔 도리가 없대."
  "느이 누나가 다른 데루 가면 너는 어쩔 작정이니?"
  "글쎄에......."
  곡마단 아이가 고개를 위로 치켜들어 하늘을 바라보더니 소매로 얼굴을 쓱 닦았다.
  "소마원으로 돌아가야지. 아무도 나를 먹여주지 않을 테니까."
  우리가 시장 앞 네거리에서 우체국의 회색 담에다 포스터를 붙이고 있을 때 갑자기 곡마
단의 행렬이 나타났다. 길게 끌며 까불어대는 나팔 소리와  걸음걸이에 맞춰 두드리는 북소
리가 들려왔다. 단원들 모두 원색의 곡예복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하고 있
었다. 원숭이도 아장아장 걸어갔다. 군중들 틈에서  붉은 술이 늘어진 하얀 분꽃 같은  작은
몸집이 팔딱 튀어올랐다. 그것은 흰 무도복에 붉은 띠를 맨 소녀였다. 소녀가 멋지게 땅재주
를 넘으면서 행렬의 앞으로 나갔다.  곡마단 아이가 풀붓으로 그쪽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누나다. 멋있지?"
  "정말 멋있다. 땅재주가 기막히다."
  "땅재주가 아냐. 저건 아크로바트라는 곡예란다."
  "아크로...... 라구. 근사하다."
  목재소 집 정삼이도 붉은 원뿔 모자를 쓰고 북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맨 뒤에서 이상스런
화상을 얼굴에 그린 남자가 울긋불긋한 아기 옷을 입고 우스운 춤을 추며 삐라를 뿌렸다.
  "야! 저기 까불이도 가는데."
  "까불이가 아니라, 도화역자라는 거야."
  아이들과 어른들이 웃고 떠들며 삐라를 줍기도 하고 행렬의 뒤를 쫓아갔다. 우리는 빈 풀
통을 들고 그 시끌작한 군중들의 뒤를 느릿느릿 따라갔다.
  나는 곡마단 아이와 은근히 친해지고 싶었는데 그의 분꽃 같은 누나 때문이었다. 나는 그
날 서 장의 표를 받았고 못내 흥분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초대권이란 원래가 첫날 둘째날
은 써먹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공연히 말집 텃밭에 지어진  곡마단의 천막 앞에 가서 서
성거렸다. 오색 테이프와 만국기가 펄럭였는데 장막 안에서는 저  흐느끼는 듯한 나팔 소리
와 손풍금 소리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몰려나오는 사람 중에서 학급 아이라도 만나면 나는
대뜸, 재미있게 하디? 하고 애타게 묻곤 했다.
  기다리던 날이 왔다. 초대권에 찍힌 날짜가 돌아온 것이다. 천막 안에는 가마니 냄새와 손
님 중의 대부분인 아이들의 땀냄새, 어른들의 담배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었
다. 마술, 접시 돌리기, 통 굴리기, 얼음줄타기, 원숭이  재주, 장대타기, 별의별 꿈같은 놀이
가 계속되고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분꽃 같은 소녀의 공중그네 타기가 있었다.
  나는 연속으로 두 번이나 보았고 그 소녀를 보기 위해 나중에 한 회를 더 보았다. 소녀가
줄사다리를 타고 천막의 꼭대기로 기어올라갔다. 네 개의 그네가 있었고 좌우에 어른 두 사
람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소녀가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로 새처럼 날아갔다. 흰 무도복
의 옷자락이 새의 꽁지처럼 펄럭였다. 낮은 그네에서 높은 그네로 그리고 다시 날아서 사뿐
낮은 그네 위에 올랐다. 거기까지는 중간에 그물을 받쳐놓은  채로 했지만 결정적인 마지막
곡예 때에는 그물을 걷어치웠다. 사람들은 숨도 죽이고 모두  조용해졌고 낮고 음산하게 두
드리는 북소리만 들렸다. 소녀가 그네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려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
다. 밑에서 감독이 얏! 하는 기합을 넣자마자  소녀의 몸이 팽그르르 재주를 넘으면서 기다
리고 있는 어른의 팔을 향해 날아갔다. 붉은 띠가 공중에 팔랑, 나부끼는가 했더니 못  미치
고 바람에 불린 꽃잎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
다.
  이튿날 나는 쌍성여관 앞에서 기다리다가 그 곡마단 아이를  만났다. 그애는 내게 속삭였
다.
  "우리 누나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았다. 나 땜에 일부러 두 바퀴 더 돌았대."
  공연이 끝나자 그들은 천막을 걷고 초라한 짐을 꾸려서 동구 밖으로 떠나갔다. 다리에 깁
스를 댄 소녀가 남자 어른의 등에 업혀 있었고 이제는 헤어질 염려가 없게 된 동생이 그 옆
에서 웃고 있었다.


잡초

  그해 여름의 땡볕을 생각하면 지금도 혀뿌리에 끈끈한 침이  엉겨붙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집은 그 무렵에 제철공장과 방직공장 부근에 있는 영단주택  동네에 있었고, 밤에 창문
을 열면 철도청 영등포 공작창의 찬란한 용광로의 불똥과 거뭇거뭇한 사내들의 벗은 몸집이
분주하게 불빛 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먼길을 달려온 기차가 지친 숨을 내뿜으며 공작창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가 매일 그맘
때에 들렸는데, 그러고 얼마쯤 지나면 밤일을 나가는 남자들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오던 것
이다.
  요즈음에도 그 거리의 풍경은 어딘가 인적이 끊긴 삭막한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듬성듬성 서 있는 먼지  덮인 가로수며, 퇴색한 군복 빛깔의  시멘트 벽, 짓눌린 듯한
낮은 지붕들, 한산한 골목길과 검은 흙빛이 그대로다.  다만 아스팔트만이 반듯한데, 그때에
는 움푹 팬 흙탕길 위로 밤마다 군용트럭이 지나가곤 했었다. 군데군데 풀밭과 폐수의 웅덩
이가 못처럼 고여 있어서 녹색 거품을 내며 썩어가고 있었다. 키가 넘게 자란 잡초 속에 모
기떼는 물론이고 사마귀나 송장메뚜기 같은 기분 나쁜 벌레들만이 우글거렸다.
  트럭이 지나가면 규칙적으로 들리던 기관차의 김 빼는 소리와 제철 공장의 쇠 부딪는 소
리들을 뒤덮고 요란한 군가 소리가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
사랑" 하면서 잠을 깨웠다. 지금 내게 또렷하게 기억되는  것은 먼 데서 들려오던 연발사격
의 총성과, 부서진 창고 속에 앉아 무수히 새어들어온 흰 빛줄기 가운데서 꼬물거리며 떠오
르던 먼지를 바라보던 일이며, 나직하고 힘있는 남자의 목소리와  짜릿한 느낌이 들던 여럿
의 고함 소리들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태금이의 이상야릇하게 썰렁했던 노래 곡조는 잊혀지
질 않는다.
  아버지는 해방이 되자마자 생활에 무능해져버렸고 대신에 어머니가 살림을 억척으로 꾸려
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무일푼으로 만주에서  평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어머니는 점령
군 가족들을 상대로 양장점을 경영해서 우리 식구가 겨우  먹고 살았다. 남쪽에 내려와서도
어머니는 방직공장에 사무원으로 취직을 했으며 아버지는 사업을 한답시고 지방에 내려가서
며칠씩 돌아오지 않고는 했다. 어머니는 공장에 출근하고 누나들  둘은 학교엘 가야 했으므
로 집과 나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어머니가 어느 날 키가 자그마하고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땋아내린 처녀와 함께 퇴근해왔
다. 몽당치마 아래 흰 버선을 신고 있던 그네는 나를 보자마자 번쩍 치켜올리면서 쾌활하게
말했다.
  "니가 수남이여? 온 지지바처럼 생겼구먼. 안녕하세요, 라구 인살해야지."
  "태금이 누나란다."
  어머니가 옆에서 소개를 했다. 태금이는 내게 줄 게  있다면서 보따리를 뒤적이더니 네모
반듯하게 썬 갱엿을 꺼내어 먼지를 치맛자락에 쓱쓱 문지르고 나서 내밀었다. 나는 받지 않
고 여느 때처럼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가 마지못해 받으라고 말하자마자 나는 그네
에게서 엿을 빼앗아 가졌다. 태금이는 금방 어머니께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따 언니가 왜 이렇기 까다롭디야...... 누가 못 먹을 걸 주남유?"
  어머니는 또 동네 탓을 하면서 애 기르는 어려움에 관해서 그네와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
는 처음부터 태금이가 좋아졌다. 어머니에게 대놓고 핀잔을 주는 사람을 처음 보았을뿐더러,
언제나 잘났다고 까불대는 누나들에게 호령을 했을 때에는 나는 완전히 태금이가 내 편이라
고 믿게 되었다. 태금이는 좋은 나라였고 엄마와 누나들은 때때로 나쁜 나라였다.
  그전에 나는 늘 혼자 놀았다. 어머니와 누나들이 현관문을  걸어 잠그고 이웃집 여자에게
나를 맡기고 가버리면 나는 거의 한나절을 혼자 보냈다.  워낙에 주의가 단단했으므로 나는
그 집 마당 근처에서만 맴돌며 놀았다. 누나들은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제 친구와 놀러 가거
나 해서 나를 상대하지 않았고  나도 여자애들을 무시해버렸다. 혼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그것도 싫증나면 활석을 가지고 땅바닥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며 속으로 중얼중얼 설명을
하면서 놀았다. 어머니는 내가 옷  버리는 것은 딱 질색이었으므로 옷에  흙이 묻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었다. 나는 누나들의 원피스를  고친 셔츠나 모직의 윗도리를  입었고 반바지에
긴 양말을 신었는데 언제나 내 꼬락서니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상고머리를 길게 길
러 가르마까지 타서 얌전히 빗어 넘겼으니, 나는 꼭 계집아이 꼴이었다. 동네의 내 또래  아
이들은 나와 별로 친해지질 않았다. 어머니가 놀지 못하게  했을뿐더러 그애들도 나를 한심
하게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혼자 집에 있는 날이면 누나들 그림물감으로 얼굴에다
수염을 그리고 보자기를 망토대신 쓰고 거울을 보며 장군놀이를 했다.
  태금이는 곧 내 기분을 알아차렸다. 그네는 나의 짝패였다. 나는 어머니의 대나무 매를 두
려워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검은 빤쓰에 러닝만 걸친 차림으로  하루 종일 집에서 먼 곳까
지 싸돌아다니다가 어머니가 돌아올 때쯤 해서 집에 오곤 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영공'
의 기차 수리장으로 구경 나갈 수가 있었고, 석탄더미 위에  올라가 동네 애들과 연도 날리
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과 차츰 친해져서 비행장 근처로 메를 캐러  갔고, 고사떡을 얻어먹으러 다녔
으며, 밭고랑에 뒹굴고 있는 제웅의 속을  빼먹는 짓도 알게 되었다. 태금이는 나를  데리고
신기한 곳만 찾아다녔다. 굿거리 구경을 가서 나는 태금이의 무릎에 앉아 무당이 작두 위에
서 춤추는 것도 보았다. 시장에 가면 진창 위에 서서  소라나 우묵을 사먹었고 원숭이를 놀
리는 약장수도 구경했다.
  "너는 똑 꾀주머니여 히힛."
  어머니가 돌아오면 시치미를 떼는 내 모양을 보고 태금이는  속상이던 것이다. 그러면 나
는 태금이의 펑퍼짐한 등이나 투실투실한 넓적 다리께를 쥐어질렀다.
  "아이구...... 왜 쌔리냐, 왜 쌔려."
  킥킥 웃으면서 그네가 내 코를 쥐어 비틀었고 나는 그게 더욱 재미가 나서 태금이를 때려
주곤 했다.
  오줌밥이 끼어서 내 고추가 퉁퉁 불었던  적이 있었는데 태금이는 나를 함지에  세워놓고
씻어주었다. 그네가 내 고추를 잡고 씻는 바람에 뻣뻣해지니까  태금이는 갑자기 얼굴이 빨
개지더니 내 볼기를 철썩철썩 갈기면서 화난 얼굴을 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서 큰
소리로 울었다. 태금이가 나를 들쳐업고 공작창 앞 빈터로 바람을 쐬러 나갈 즈음에야 나는
울음을 그쳤다.
  언제나 우리가 거기에 가면 새 풀이 돋아나기 시작한 언덕에 앉아 빈터에서 배구하는 남
자들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건장한 체구의 직공들이 둥글게 모여서서  하늘 높이 공을 주고
받는 게 보기가 좋았다. 점심시간 끝나는 사이렌이 불기까지  그들은 화들짝하니 웃고 떠들
며 배구를 했다. 실수한 사람이 가운데 엎드려 있고 공을  치는 사람은 그 술래를 때리느라
고 땅볼을 쳤는데, 그때마다 태금이가 큰 소리로 웃었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웃었다. 한번은
공이 우리 쪽으로 굴러온 적이 있었다. 태금이가 공을 집어들었고  청년 한 사람이 공을 쫓
아 따라왔다. 얼굴이 새까맣고 키가  작은 남자였다. 몸집은 작았는데 목소리만은  굵직하고
점잖았다.
  "아가씨 좀 던져주쇼."
  태금이가 공을 던져주었다. 태금이의 얼굴은 온통 자두처럼 붉어져 있었다. 우리는 이튿날
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공작창 빈터  앞 언덕에 갔다. 새까맣고 키가 작은  그 청년이 없는
날도 있었고 어쩌다 우리를 향해서 씽긋 웃어 보이는 날도 있었다.
  태금이는 그 무렵부터 살구씨 냄새가 나는 어머니의 크림을  몰래 바르기 시작했다. 언젠
가는 저녁밥을 먹고 나서 한밤중이 될  때까지 태금이가 돌아오지 않아서 어머니가  일부러
찾아나섰던 때도 있었다. 태금이는 밥을 태우거나 그릇을 깨쳤으며  창문을 열고 바깥을 멍
하니 내다보는 일이 차츰 많아졌다. 누나들 도시락 싸주기를  잊거나 빨래를 게을리한 탓으
로 옷을 갈아입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으므로 드디어 식구들은 태금이에게 뭔가  심상찮은
변화가 왔다고 알아채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무래두 내보내든지 해야지. 달떠가지구 꼭 혼이 빠진 년 같구나."
  그러나 태금이는 여전히 내게만은 전보다 더욱 잘해주었다. 밀 부침개를 부쳐준다든가 어
머니 몰래 쌀을 퍼내어 떡도 해주었는데 나머지는 싸가지고  밖으로 내가는 것이었다. 어쨌
든 나는 아직은 태금이의 편이었으므로  비밀을 지키기로 했다. 태금이는  어머니처럼 나를
이웃집에 맡기지는 않았지만 아직 학교에 가지 않는 내 또래의 동네 꼬마들에게 나와 사이
좋게 놀라고 타이르고는 어디론가 바삐 나갔다. 처음에는 나도 따라가겠다고 발버둥질을 쳤
지만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게 차츰 재미가 생겨났다.
  우리는 녹슨 화물차의 골조를 쌓아놓는 곳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철재를 가득 실
은 트럭의 행렬이 먼지를 일으키면서 지나갔고 먼지 사이로 청년 두 사람이 도로를 건너갔
다. 길 건너편에는 방직공장의 회색 담이 쌍성루 중국요릿집이  있는 네거리 모퉁이까지 계
속되고 있었다. 쌍성루 뒤에는 널따란 거름 구덩이가 있었고, 땅콩밭 터가 있었는데 가끔 곡
마단이나 약장수의 천막이 그곳에 세워졌다. 청년 한 사람은  풀통을 들고 있었으며 또하나
는 커다란 종이뭉치를 둘둘말아 팔에 끼고 있었다. 그무렵에  동네 부근의 기다란 담벼락마
다 울긋불긋한 글씨를 쓴 종이가 붙여져 비바람에 바랠  때까지 너덜거렸던 것이다. 어렸던
우리들도 그것이 <조국의 어머니>나 혹은 <자유만세> 같은 활동사진이나 새로  들어온 악
극단의 <아리아 공주>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는데 오히려  가까이
한다든가 찢어서는 더욱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두 사람의  청년은 좌우를 바삐 살피고 나
서 담에다 글씨 쓴 널따란 종이를 붙이기 시작했다. 쌍성루  쪽에서 네댓 명의 남자들이 뭐
라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왔다. 종이를 붙이던 두 사람은 풀통과 종이를 들고 달아났다.
우리는 술래잡기를 멈추고 그들의 싸움을 구경했으며 동네 아낙네들은 우리들 중의  몇몇을
데리고 황급히 집 안으로 사라졌다. 길  가운데서 부딪친 그들은 한편을 돌을 던졌고,  다른
한편은 몽둥이를 휘둘렀다. 몽둥이를 든 남자가 풀통 가진 사람의 머리를 때려서 피가 얼굴
로 흘러내렸다. 그는 한길 가운데 넘어져버렸다. 다른 그의 동료는 종이뭉치를 버리고  달아
났는데, 잠시 후에 대여섯 명의 청년들과 함께 그는 돌아왔다. 그들은 골목마다 뒤지고 큰길
을 살펴본 다음 쓰러진 사람을 떠메고 가버렸다. 그때에 나는 맨 앞에서 사람들에게 이리로
가라 저쪽으로 쫓아가라, 큰 소리로 이르는 남자가 바로 공작창 빈터에서 보았던 얼굴이 새
까맣고 키 작은 남자라는 걸 알았다. 우리네 꼬마들은 별로  무서워하지도 않고 그 모든 것
들을 지켜보았다. 반장네 아이가 알은체를 했다.
  "다친 사람을 메구 간 어른이 누군 줄 아니? 뚝발이네 큰형이다."
  나도 한마디 했다.
  "그래, 그 사람은 날마다 배구 뽈을 친다. 공작창서 대장이다."
  푸줏간집 큰아이는 반대했다.
  "우리 형이 그러는데 뚝발이 형은 공장 그만뒀대. 까딱하면 유치장 갈 거래. 아주 나쁜 놈
이라구."
  그 뒤에도 나는 어른들이 골목이나 밭고랑에서 패싸움하는 모양을 여러 번 볼 수가 있었
다. 태금이가 우리집에 온 지 석 달이나 지나서 지방에 내려가 있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
버지는 피곤한 얼굴이었고 장사는 몹시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세상이 점점 어지러워져간
다는 얘기였다. 남쪽에서는 버스도 마음놓고 타고 다니지 못한다고 어버지는 실패한 장사에
관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머니도 회사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이  모두들 이쪽 저쪽으로 패
를 갈라 싸움질뿐이라면서 얘기가 태금이에게까지 이르렀다. 어머니는 말했다.
  "이건 처녀애들까지 궁둥일 들썩이게 만드는 세상이에요. 마루보시 다녔다는 주정뱅이 목
수 영감 아시죠? 태금이 상대가 바로 그 집 큰아들 녀석이래요. 걔가 공작창서두 말썽을 일
으켜서 지난달에 쫓겨난 아이래요."
  "왜 인사성 바르구 똑똑하던데."
  "사람이 제 분수를 알아야죠. 요즘 얼마나  무서운 세상이라구...... 태금일 내보내나? 어쩌
지, 내가 시골서 그애 오빠에게서 부탁까지 받았는데."
  "당신이 여공 자리라두 없나 알아보구려."
  어느 날 나는 둑 너머 비행장 근처로 아이들과 함께  채를 가지고 송사리를 건지러 갔다.
물풀 아래 으슥한 기슭을 훑으면 손가락만큼씩 굵은 송사리들이  걸려나왔다. 아직 물은 차
가웠지만 모래는 제법 따뜻했다. 극성스런  몇 아이들이 물에 들어가  첨벙대다가 오들오들
떨며 나와서 모래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하기도 했다. 요란한  시동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다
가 우리 머리 위로 번쩍이는 새 같은 연습기가 시원스럽게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해가 뉘
엿뉘엿할 즈음에야 나는 집에 돌아갈 생각이 났는데 신고 왔던 파란 운동화가 보이질 않았
다. 나는 아이들이 다 돌아가버린 다음에도 오랫동안 신발을 찾아 물가를 헤맸다.  어두워지
니까 귀신바위 쪽의 검푸른 물 속에서 뭔가 나올 것만 같았고, 둑 밑에 키만큼 자란 거무칙
칙한 수수밭이 바람에 불리는 소리 때문에 억지로 노래를 하면서 둑으로 퇴각했다.
  시바까리 나와나미 짚새기를 삼아서 장에 갖다 팔았더니 십전밖에 안 남아, 오전은 떡 사
먹고 오전은 짚 사고......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아름다운 역사 반만년.......
하는 누나들의 고무줄 노래를 부르면서 둑으로 올라갔다. 둑을  넘어 가려는데 어둠 속에서
뭔가 검은 것이 펄쩍 일어났다. 나는  그것들은 일부러 못 본 체 피해  가면서 목청을 더욱
드높였다.
  "수남이 아녀? 워딜 갔다가 오는 겨, 누나가 시방 찾으러 왔어."
  태금이 누나는 남자와 함께 있었다. 동네 애들에게서 남자랑 여자랑 그 둑길에 나와서 연
애를 건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어도 나는 그게 뭔지는  몰랐다. 하여간 이런 데서 남자랑
같이 있는 태금이 누나와 마주치게 된 게 부끄러웠다. 태금이는 싫다는 나를 막무가내로 업
었다. 우리는 둑길을 걸어 철교가 보이는  곳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은 우리 동네의  길
건너편 쪽에 있는 창고 동네였다. 부서진 창고들이 똑같은  모양으로 늘어서 있었는데 우리
보다도 훨씬 가난한 사람들이 그  창고 몇 채를 차지하고서 칸막이를  하고 살았다. 우리는
그 지저분하고 어두운 동네로 들어섰다. 창고 안은 컴컴했고  칸막이 마다에서 희미한 감빛
불빛이 번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남자네 집으로 들어서는 걸 알았다.
  "지금 오냐?"
  기침 섞인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방은 하나였는데 그  안에 사람들이 가득 찬 것
으로 보였다. 나는 태금이의 저고리 자락을 꽉 붙잡은 채 그네 등에 업혀 있었다.
  "색시가 웬일이야, 어서들 들어오너라."
  노인과 나란히 문간에 앉았던 늙은 부인이 말했다. 나는 태금이의 등에서 내렸다.  방에는
노부부 외에도 중년 부인과 남자의 동생인 듯한 소년과 나보다 두어 살 위일 성싶은 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온식구가 봉투 붙이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도 사방에 널린 종이 때문에 방 안이 가득 찬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허 고놈 참 귀엽게 생겼다."
  담배 쌈지를 뒤적이던 노인이 또 가래 섞인 목소리로 나를  향해 말했다. 나는 구석에 앉
아서 될 수 있는 대로 태금이의 등뒤에 숨으려 하면서 방 안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알
수 없이 퀴퀴하기도 하고 구수한 것도 같은 냄새가 났다.  남폿불의 그을음 때문에 눈이 아
팠다. 그집 식구들은 모두들 표정이 비슷했으며 입을 꾹 다물고 두 손만을 부지런히 놀리고
있었다.
  "뭐 줄 게 잇어야지 쯧쯧."
  딱하다는 듯이 중년 부인이 혀를 차면서 일어나 선반  위를 더듬으며 부스럭거렸다. 비스
듬히 앉아서 종이를 자르던 소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에이 엄마두 그걸 걔가 먹겠수?"
  "아니야 맛이 제법이다 뭐."
  부인이 내게 이상스런 음식을 주었다. 약간 짭짤하기도 했고 씹는 맛이 꺼끌꺼끌했다.  나
중에 전쟁이 일어나 시골로 갔을 때 나는 그것이 개떡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또래의 아
이는 다리를 절었다. 오른쪽 다리가 갓난아이 다리처럼 가냘프게  휘어져 있어서 걸을 때마
다 허리를 크게 흔들고 두  손을 내저었다. 그애도 개떡을 먹으면서  태금이 누나 맞은편에
앉아 적의에 가득 찬 시선으로  나를 살폈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석탄더미  위에 와서 연을
날리던 아이였다. 땅바닥에 꼴아박힌 연을 주우러 갔을 적에  아이들이 그애의 절뚝이는 박
자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일도 생각났다. 그애가 나에게 낮은 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너 영단 살지? 다 안다. 우리 동네서 걸리면 넌 국물두 없을걸."
  그애는 공연히 내 등을 툭툭 치거나 밀기도 하면서 집적거렸기 때문에 나는 불안했다. 노
부부는 쉬지 않고 봉투를 붙이면서 한참씩 사이를 두고 태금이에게 말을 걸었다가 다시 자
기 아들의 눈치를 살피곤 하는 것 같았다. 노인은 거세게 연속적인 기침을 터뜨리다가는 무
지무지하게 큰 소리로 가래를 뱉어냈다. 종이를 자르고 있는 소년은 태금이 쪽을 보면서 공
연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부인이 말했다.
  "얘, 내가 말할래다 잊고 있었다.  그래 어쩌자구 일은 않구,  쓸데없이 어울려 다니는 거
냐? 아까두 한떼거리 몰려왔었어."
  형이 동생에게 물었다.
  "누가 왔었니?"
  "공장에서지 뭐."
  소년은 말하면서 대꾸하지 말라는 듯이 자기 형에게 손가락을  입술에 세워 보였다. 부인
네가 투덜댔다.
  "재취업할 생각은 않구 어쩌자구...... 그 녀석들 또 삐란지 뭔지를 잔뜩 갖다가 맡겨놓길래
저기 쑤셔박아두었어. 느이들 하는 꼴 봐선 아궁지에 처넣구 싶더라만, 느이 애비두  그러다
죽구......."
  "아아, 시끄러! 그만 좀 해라."
  침묵하고 있던 노인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는 외치고 나서 가래침을 칵 뱉었다.
  내가 집에 돌아갔더니 어머니는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신발 잃어버린 데 대해서는  전혀
야단을 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날 태금이를 앉혀놓고 뭔지  오랫동안 얘기를 했는데 나는
잠결에 태금이가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신학기인 오월부터 학교에 나가게 되어 벌써부터 나는 책가방과 공책 연필 필통 크레용을
준비해놓고 기다렸다. 동네 한길가에 줄지어선 가죽나무에서는 연두색의 콩잎 같은 꽃이 피
어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뒤따라 영단 끝에 있는  공장장네 이층집을 둘러싼
울타리의 아카시아꽃이 아이들의 입맛을 돋우었다. 비가 자주 내렸다.
  내가 입학을 했던 날도 가랑비가 왔다. 그날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작은 일들까
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새 가방의 가죽 냄새와 끝을 뾰죽하게  깎은 고운 색깔의 연필과 교
과서의 아름다운 그림들, 그리고 교정에 가득 찬 버드나무에선  싱싱한 비린내가 났고 땅바
닥에 무수한 물방울 자국들이 뚫어져 있었다. 낡은 풍금 소리와 여선생의 경쾌한 호각 소리,
우리들 가슴에 매달린 하얀 손수건, 교실에 들어썬을 때 책상에서 풍기던 칠 냄새로 골치가
아프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음 때문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귓구멍을
막았다가 열었다가 하면서 웅성대는 소음이 내 안팎으로 밀려왔다가 나가게 하는 놀이를 혼
자서 즐겼다. 떠드는 아이, 웃는 애, 싸우는 녀석, 우는 놈들을 자세히 관찰하노라면  갑자기
그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과 동무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복도 밖에선 태금이가 따라와서 수
업이 파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금이는 그날따라 곱게 화장을  했는데 어머니의 양장 차
림에다 살색 양말까지 신고 있어서 우리 여선생님보다도 훨씬 예뻐 보였다. 태금이는 곧 취
직을 하게 되어 우리집을 떠날 예정이었다.
  교문 밖을 나서자 지우산을 쓰고  기다리고 섰던 뚝발이의 큰형이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나는 어쩐지 그 남자가 태금이 누나를 데려가버릴 것만 같아서 싫고 무서웠다. 그의 표정은
전보다 더욱 침울해 보였다. 그들은 내 양쪽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내가 태금이  쪽으로
빠져나가려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면 그 남자는 손을 꽉 조여잡고 나를 내려다보며 씽긋 웃는
것이었다. 흙탕물 있는 곳을 지나면서 둘은 간혹 나를 위로 번쩍 치켜들곤 했다. 남자가  집
을 떠나겠다고 말을 한 것 같고 태금이가 뭐라고 부지런히 남자에게 사정조의 만류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태금이의 얼굴이 울상인 것을 보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뚝발이 형이 미
웠다.
  "지는 얘를 데려다줘야 할 텐디 어쩌쥬......."
하면서 그네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집에 가면 언니가 못 나가게 허는디."
  남자가 들어가보라고 말했고 태금이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수남아 너 누나랑 아저씨랑 같이 놀러 갈텨, 아님 집 앞에까지 데려다줄 테니께 혼자 들
어갈래?"
  나는 태금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발을 땅에 붙이고 서서 완강하게 고개와 몸을 흔
들었다. 태금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마주 보았다.
  "아마 잘될 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아녜유, 저 돈 있는디 구경두 하구 청요리두 사디릴께유. 수남이두잉?"
  우리와 헤어져 가려는 남자를 이번에는 태금이가 꼭 붙들고  놓지를 않았다. 우리들은 여
성국악단의 <자명고>라는 창극을 구경했다. 나는 별로 시큰둥한  느낌이었지만 나올 때 보
니까 태금이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튿날 나는 여러 사람들의 합창 소리에 잠이 깼다. 창  밖으로 공작창 앞에 모여든 남자
들이 뭐라고 크게 외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어 시간쯤  지나니까 남자들은 점점 더 많
아졌다. 그들의 고함 소리에는 어딘지 열기가 섞여서 후텁지근한  입김의 바람이 온 동네를
뒤덮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현관을 꼭 잠그고  조심스럽게 바깥을 내다보고 있
었지만, 태금이는 이미 길 밖에까지 나가서 동네 사람들 틈에 파묻혀 있었다. 군중들 틈에서
서서히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곧 사람들은  혼란스럽게 뒤엉클어졌다. 군중들 사이에
서 패싸움이 일어난 것이었다. 길가에까지  나가 있던 동네 아낙네들은  호들갑스런 비명을
지르면서 골목 안으로 쫓겨 들어왔다. 사람의 떼가 차츰  흩어지고 걷혀가기 시작하자 돌연
무기를 든 청년들이 군중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뒷전에는 두 트럭이나 몰려온 순경들이
합세하고 있었다. 저런, 아유 끔찍해! 어버지와 어머니는 유리창 밖을 내다보면서 연방 중얼
거렸다. 사람들이 늘비하게 길바닥에 쓰러졌다. 길가 집의 유리창과 장독들이 돌팔매로 모두
깨져버렸다. 우리집 유리창도 몇 장이나 깨어졌다. 싸움이 끝난 뒤에도 며칠 동안  동네에는
경비를 서는 순경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고 뚝발이네 큰형도 잡혀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며칠 뒤에 학교 갔다 돌아오니 태금이는  견습여공으로 취직이 되어 우리집
에서 나갔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홀가분하다고 말하면서도  남자네 남은 식구들을 걸머지게
될 태금이가 가엾다고 했다. 달반이 지나갔다. 그 동안에 나는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여 태금
이에 관해서는 새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어머니 말을 들으면 뚝발이  작은형이 태금이의
더운 도시락을 갖고 공장에 들른다는 것이었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역전 부근에서였다. 조종사가 보일정도로 낮게 뜬 비행기
가 굉장한 폭음을 울리며 날아왔다.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들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빛이 번쩍, 하더니 역사 쪽에서 유리창들이 일사에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곤 검은 연기가 솟았고 불꽃을  올리며 건물이 타기 시작했다. 길에 서  있던
사람들은 길가의 건물들 아래 바짝 붙어서 뛰었다. 내가 멍하니 서서 역을 보라보고 있는데
행인 중의 어떤 사람이 소리쳤다.
  "얘, 빨리 피해라. 폭격이다, 죽는다."
  비행기가 되돌아왔다. 날개를 좌우로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막대기로 마룻장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직도 멀기만 한 집을 바라고 뛰었다. 집에 와서야 난리가 났
다는 걸 알았다. 나는 공포와 호기심이 반반이었다. 피난민들이 동네 앞길로 꾸역꾸역  밀려
갔지만 우리 식구는 안절부절못하며 늑장을 부리다가 적절한 시기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낯선 군인들이 별 전투도 없이 우리 동네로 조용히 진주해왔다. 새벽에 육중한 쇠바퀴 굴
러가는 소리를 들었던 날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주검을 보지 못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포성이 들려오는 것으로밖에 난리를 실감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어른에 보호되
어 있고 그런 형편에 대해서 전혀 무방비하고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알처럼
무참하게 깨어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커서도 어른들이  그때의 난리 얘기가 나오면
밤새는 줄고 모르고 끊임없이 체험담을 엮어나가는 많은 경우를  보았다. 그런데 우리 또래
들은 개개는 몸이 불편할 경우 그 시절의 경험을 악몽으로 꾸는 것이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청년들이 동네에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렸고 나는 완장을 친 남
자들과 군인들이 공장으로 바삐 드나드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에 태금이가 우리에게 찾아왔
던 것이다. 태금이를 대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태도는 냉정하면서도 지나치게 예의를 갖추
는 것 같았다. 태금이는 우리집에 처음 왔을 적의 쾌활함을 완전히 회복하고 있었다. 그네는
처음처럼 내 겨드랑이에 팔을 껴서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어머니가 뭔지 태금이와 오랫동
안 속삭였다. 돌아가는 태금이를 어머니가 먼 데까지 따라나가며 얘기했다. 나는 누나들이랑
마루에서 부모들의 얘기를 엿들었다.
  "아무래두 당신 먼저 시골루 가셔야겠어요."
  "이 동네서 인심 잃을 짓을 한 적이 없는데 별일 있을라구."
  "그런 게 아녜요. 어떻게든 협조를 해얀다지 않아요? 나중 일을 봐서라두 먼저 가 계세요.
며칠 있다가 내가 애들 데리구 살며시 빠져나갈 테니."
  나는 늦게까지 자지 않고 기다렸는데 누나들도 아직 잠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버지가 조
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며 밖으로 나가는 소리. 어머니가 속삭이는 소리. 그러고는 멀어져가
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와 누나들과 나는 그날따라 한방에서 같이 잤다.
  우리 식구들은 시월 중순께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시골 피난생활을  하는 동안에
나는 꽤 무감각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어른들 뒤를 따라  타박타박 걸으면서 먼지 나는 신
작로 위에서 내가 본 것은 하얗게 내리쬐는 땡볕과 죽은 개처럼 부패하고 잇는 사람의 시체
들이었다. 간장을 끓이는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났고 혼자서 아무 데나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나는 우리 동네 밭고랑이나 수챗구멍에서 보았던 쥐새끼의 시체를 대하던 버릇대로 침을 뱉
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지금도 내게는 죽음이 뜨거운 뙤약볕과  직결되어 있고 점액질과 같
은 끈적한 느낌 가운데 있는 듯이 여겨진다. 그 끈끈한  죽음의 느낌은 세계가 화려하게 번
창하고 있는 여름의 열기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우리 동네뿐 아니라 온 거리의 곳곳이 파괴되어 있었다. 한  달 반은 그런 시절에는 너무
긴 시간이어서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불탄 자리로부터 쓸 만한 것들을 추려내거나 소식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재빨리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뚝발이네 식구들에 관한 얘기는
아직도 남아서 돌아다녔다. 공작창은 진작에 폭격으로 타버리고 수복 전날의 맹렬한 포격으
로 방직공장도 모조리 파괴되어버렸다. 공장 앞 빈터 언덕에  총살당한 이들의 시신이 일렬
로 늘어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내 또래의 뚝발이를 포함한 그애네 식구 전부가 있었
다고 했다. 부역자 가족이라고 치안대 청년들이 그렇게 했다고도 한다.
  우리가 멀리 남쪽으로 두번째의 피난을  다녀온 이듬해까지도 태금이는 동네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부서진 공장터와 집터마다 잡초가  을씨년스럽게 자라났으며 아이들 사이에서
는 한창 불놀이와 전쟁놀이가 유행하고 있었다. 고여서 썩은 웅덩이마다 장구벌레가 득시글
거려서 모기가 유난히 극성을 부렸는데, 사람들은 모기도 난리를 닮는다고 투덜댔다. 모기는
그해 여름에 먼 데서 돌아온 동네 사람들의 피를 빨아 오랜만에 살이 쪘을 것이다.
  전쟁놀이를 하노라면 아이들은 예전과 달랐다. 그전에는 땅, 하고 쏘면 제자리에 잠시  쪼
그려 앉거나 손을 들고 서 있는 법이었는데 이제는 목을 뒤로 꺾고 땅 위에 벌렁  나뒹굴어
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정한 계급을 엄중히 지킬 줄을 알았다. 내가 너보다 높잖아, 하면 곧
기가 죽어서 항의를 그치는 것이었다. 그래야 진짜 같으니까 그랬을까.
  어느 날 정오 무렵에, 아이들이 가죽나무 그늘에 앉아서 무더위에 헐떡이고 있는데 다 떨
어진 남자 양복바지에 두꺼운 겨울 군복을 걸친 거지 하나가 도로의 가녘을 곧장 따라서 걸
어왔다. 누군가 장난삼아 돌을 던져봤지만 그는 우리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머리까
지 짧아서 남자인가 했었는데 여자가 분명했고 표정이 온전치가 않았다.
  "미, 미친년이다, 미친년!"
  드디어 한 아이가 환희에 가득  차서 숨막힌 듯이 외쳤다. 아이들은  이빨 사이로 웃음을
씹으면서 미친 여자를 따라갔다.
  태금이의 옛 모습은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딴 세상에서  온 것 같은 무서운 얼굴이
었다. 앙상하게 마르고 볕에 그을은 얼굴 가운데서 눈만이 번들거렸다. 나는 가슴을  졸이며
태금이 앞에서 똑바로 바라보았으나 그네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울기만
했다. 어머니도 그 꼴을 보고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태금이는 영혼이 없어져버린 듯
한 얼굴로 온 동네를 매일 쏘다녔다.
  사람들은 차츰 그네를 알아보는 모양이었지만 역시  반응은 냉담했다. 기억을 떠올리기에
지쳐 있었고 고작해야 난세에 흔한 일이라는 식이었다. 태금이는 황혼 무렵이면 방직공장의
무너진 담을 지나 폐허가 된 공작창 앞 언덕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네는 작고 희
미한 목소리로 군가조의 노래를 부르다가 땅거미가 완전히 내려덮이면 자기 잠자리로  돌아
갔다. 한번은 내가 그 방직공장 폐허의 기둥과 지붕 일부분만이  남은 벽돌 건물 가까이 태
금이의 모습을 살피러 갔던 적이 있었다. 참새들이 시끌직하게  울어서 나는 깊은 산골짜기
에라도 들어선 느낌이었다.
  태금이는 끼진 벽돌 쪼가리와 휘어진 철근 사이에 서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뚫어
진 천장 사이사이로 푸른 하늘이 엿보였다. 태금이는 여러 줄로  꽂힌 햇살 가운데 그런 모
습으로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해 늦가을까지 사람들은 저녁 먹을 즈음하여 그 미친 여자의 음산한 군가 소리를 듣곤
했다. 불쌍한 년, 해질 무렵에는 더 환장하는 모양이야, 라고 모두들 얘기했다. 노을을  배경
으로 검은 음영만이 떠있는 꼴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무너진 공장 건물처럼
거기 늘 있던 풍경이어서 나중에는 사람들 눈에 유별나게 보이지는 않게 되었다.


작가의 말

  <모랫말 아이들>은 젊었을 적에 아이들에게 자신의 유년 시절을 이야기해주려는  마음으
로 썼던 것들이다. 사실은 더 쓰고 싶은 얘깃거리가 많건만 여러 가지 일에 쫓기다 보니 그
만 중도에 그쳐버리고 말았다. 내 아이들도 이제는 성인이 되어 제 식구를 거느리게 되었지
마는.
  사정은 책을 내게 된 지금도 비슷하여 작년에 출판사의 권유로 원고를 다시 살펴보게 된
셈이었는데 뒤를 이어서 좀더 길게 쓰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다.
  그렇지만 살아가는 일이 늘 아쉬운 채로 마무리되지 않던가.
  여기에 나오는 때는 전쟁 직후의 시절이다. 이제 그  어린이들은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암
울하던 사정은 세대를 물려서 지금도 진행중이다.
  삽화를 맡은 분의 그림을 보면서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귀퉁이가
닳아빠진 도화지에 남아 있을 그 시절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어린 날에 대청마루 안방으로 들어가는 미닫이 위쪽 벽에 걸려 있던 먼지 앉은 사진틀을
올려다보던 생각이 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의 옛날 사진은 누렇게 퇴색되
었지만 꿈결같이 보였다.
  지금 어린이 되어 나는 알고 있다. 삶은 덧없는 것  같지만 매순간 없어지지 않는 아름다
움이며 따뜻함이 어둣 속에서 빛난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다.
  아이들과 어른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하여 오늘도 여러  마을과 거리 모퉁이에서 살아낸
시간들을 기억시키고 싶다.
  책을 만드신 분들에게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드린다.

2001년 1월 덕산 한티재에서
황석영

포스트 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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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느낌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지은이:박완서
출판사:웅진출판
봉사자:박진아


1. 야성의 시기
늘 코를 흘리고 다녔다. 콧물이 아니라 누렇고 차진 코여서 훌쩍거려도잘 들어가지 않았다. 나만 아니라 그때 아이들은 다들 그랬다. 어른들이아이들을 싸잡아서 코흘리개라고 부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여북해야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아이들에 대해 제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감기가 들지 않고는 절대로 코를 안 흘린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들뿐아니라 딴 아이도 안 흘렸다. 그래서 학교나 유치원 길 때 가슴에 손수건매다는 습관까지 없어져 버렸다. 나도 이제는 요즘 아이들이 코를 안흘리는 걸 이상해하는 대신 그땐 왜 그렇게 코를 흘렸는지를 이상하게여기게 되었다.
종이나 헝겊이 귀했다. 손수건 같은 게 이 세상에 있다는 것도 몰랐다.
코가 흘러서 입으로 들어갈 때쯤 되면 소매로 쓱 씻었다. 그래서 한겨울을나고 나면 소맷부리에 고약이 엉겨붙은 것처럼 새카만 더께가 앉았다.
등덩산같이 솜을 둔 저고리 하나면 겨울을 났다. 엄마가 동정을 갈아 줄때마다 소맷부리의 더께도 쓱쓱 비벼서 털어 내주건만도 그러했다.
아랫도리는 솜바지 위에다 어깨 허리가 달린 통치마를 입었다. 옷감은무명에다 울긋불긋 물을 들여 풀을 먹여 반들반들하게 다듬이질 한것이었다.
시골에서 물감은 아주 귀물이었다. 할아버지가 송도에서 사 오셨다. 내가태어난 고장은 개성에서 남서쪽으로 이십 리 가량 떨어진 개풍군 청교면묵송리 박적골이라는 이십 호가 채 안 되는 벽촌인데 마을 사람들은개성을 송도라고 불렀다. 어린 나에게 송도는 꿈의 고장이었다. 물감뿐아니라 고무신이나 참빗이나 금박댕기나 식칼이나 호미나 낫도 다 송도에가야만 살 수가 있었다.
딴 집에선 여자들이 송도에 다녔다. 우리 집에선 할아버지하고 삼촌들만송도에 다닐 수가 있었다. 그게 딴 집하고 우리 집하고의 차이였다. 여자가송도에 못 가는 집이 박적골에서 우리 집말고 또 한 집이 있었다. 두 집다 박가였고 서로 친척이었다. 그 밖에 집들은 홍가였고 그들끼리친척이었다. 근데도 마을 이름은 박적골이었다. 할아버지는 우리는양반이고 그들은 상것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양반 노릇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잘 모른다.
개성지방은 전통적으로 양반 따위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까할아버지는 독불장군이셨을 것이다. 할아버지 때문에 송도 나들이가자유롭지 못한 우리 집 여자들도 마음으로부터 할아버지에게 승복하고 산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할머니에게 양반이 뭐냐고 물어 보았더니 픽웃으시면서 "개 팔아 두 냥 반이란다."라고 대답하셨다. 할머니는 입이걸었다. 우스운 소리도 잘 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앞에선 설설 기는시늉을 했다. 할아버지는 집안 여자들을 송도에만 안 보낸 게 아니고논이나 밭에도 안 내보냈다. 그것도 딴 집과 우리 집의 다른 점이었다.
할아버지는 그것도 양반 노릇이라고 여기시는 듯했다.
박적골엔 이렇게 두 양반집과, 열여섯인가 열일곱 호의 양반 아닌 집이있었지만 지주와 소작인으로 나누어져 있진 않았다. 바위라고는 하나도없이 능선이 부드럽고 밋밋한 동산이 두 팔을 벌려 얼싸안은 듯한 동네는탁 트이고 벌이 넓었다. 넓은 벌 한가운데를 개울이 흐르고, 정지용의 시말마따나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은 아무 데나 있었다. 우리 집에서뒷간에 가려도 실개천을 건너야 했다. 실개천은 흐르다가 논을 만나면곧잘 웅덩이를 만들곤 했는데 우리는 그걸 군 우물이라고 해서 먹는우물과 구별했다. 지금 생각하니 소규모의 저수지가 아니었던가 싶다. 거의흉년이 들지 않는 넓은 농지는 다 우리 마을 사람들 소유였다. 땅을독차지한 집도 땅을 못 가진 집도 없었다. 다들 일 년 먹을 양식 걱정은안 해도 될 자작농들이었고 부지런했다.
그런 고장에서 여덟 살까지 자라는 동안 이 세상에 부자와 가난뱅이가따로 있다는 걸 알 기회가 없었다. 동무들과 손잡고 딴 동네를 가 볼기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넓은 앞벌로는 아무리 멀리 나가도 딴 마을이나오지 않았다. 뒷동산을 넘어야만 이웃마을이 나왔고, 이웃마을의 풍경도별로 신기할 게 없었다. 옆구리에 텃밭을 낀 집들이 산기슭에 안겨 있었고,넓은 벌을 풍성한 치맛자락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사는 줄만 알았다.
아무리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도 조선땅이고 조선 사람밖에 없는 줄알다가 처음 들은 딴 나라 이름은 덕국이었다. 아주 오랜 훗날에야 덕국이우리가 독일이라고 부르는 나라라는 걸 알게되었지만 그걸 모를 때도 내가들은 최초의 외국은 나에게 충분히 신비로웠다. 할아버지가 송도에서물감을 사 오시는 것은 대개 추석이나 설을 앞둔 무렵이었는데 "이건 덕국물감이다."라고 따로 꺼내 놓는 물감은 네모난 봉지에 들어 있었는데, 빨간물감에는 빨간 종이로 파란 물감에는 파란 종이로 표시가 돼 있었다.
우표딱지를 대각선으로 접은 것만한 세모난 표시는 빤들빤들하고 선명해서꼭 진한 꽃잎을 문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덕국 물감만보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건 아마도 내가 최초로 맡은 문명의 냄새,문화의 예감이었다.
우리 집 여자들은 할머니도 엄마도 숙모들도 다들 덕국 물감에는 사죽을못 썼다. 그걸 사 온 할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엄에 넘쳤고 그런할아버지에 대한 며느리들의 존경은 비굴과 아부에 가까웠다. 언제나며느리들이 시아버지를 마음으로부터 공경한 건 아니었다. 웃음거리로삼을 때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걸음이 재고, 화가 날 때는 무엄한 말로하면 방정맞다 싶을 정도였는데, 안채로 그렇게 급하게 들어오신다는 것은불호령이 떨어질 징조였다. 며느리들이 황황히 일손을 놓고 또 무슨벼락이 떨어지나 기다리는 순간에도 슬쩍슬쩍 농담들을 했다.
그런 농담은 우리 엄마가 제일 잘 했다. "여보게 부엌에서 밥이 타나보이."라고 엄마가 숙모 귀에 대고 소곤대면 숙모는 웃음을 참느라 사색이되곤 했다. 부엌에서 진짜 밥이 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건 주걱턱이라는할아버지의 별명과 관계가 있었다. 수염이 길게 자라지 못하고 고슬고슬엉겨붙어서 양간 튀어나온 듯한 턱을 더욱 밥주걱처럼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며느리들이 덕국물감을 사 오신 할아버지에게 표한 최대의 경의는 실은 할아버지의 인격과는 무관한, 요새말로 하면 외제선호 같은 게아니었을까.
나는 속으로도 것으로도 할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세 살 때아버지를 여읜 나에 대한 할아버지의 자애는 각별했다. 나를 볼 때의할아버지는 봉의 눈이 살짝 처지면서 그 안에서 뭔가가 자글자글 끓고있다는 것을 어린 마음에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마도 그건 애간장이녹도록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을 테지만 나는 중대한 약점이라도 잡은것처럼 여겼다. 아무리 고약한 짓을 해도 역성들어 주겠거니 믿었다.
할아버지를 믿고 일부러 말썽을 부리진 않았지만 안 계실 때는 현저하게풀이 죽었다.
언젠가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당신이 너무 오냐오냐하니까 째 버릇이저 모양이라고, 당신만 안 계시면 쟤가 얼마나 고분고분해지는지아시느냐고 타박을 하신 일이 있다. 그때 할아버지는 무섭게 화를 내셨다.
애가 믿는 데가 없어서 풀이 죽은 게 그렇게 보기 좋습디까? 으응, 그렇게보기 좋아, 하고 버럭 역정을 내시면서 할머니 면전에 삿대질까지 하셨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나들이가 잦으셨다. 송도뿐 아니라 친척이나 친구의대소사에 가족을 대표해서 빠지지 않고 참석하시는 듯했다. 늘 흰 옷만입으셨기 때문에 집안 여자들은 그 수발이 큰일이었다. 특히 버선을 기워대는 일이 여간 아니었을 것이다. 자다깨면 엄마와 숙모들이 흐릿한등잔불 밑에 둘러앉아 버선볼을 대면서 두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있었다. 할아버지 버선은 내가 종종 머리에 써 볼 정도로 컸다.
한번 출타하시면 며칠 만에 돌아오실 적도 있었지만 할아버지를기다리는 것은 어린 나에게 가장 큰 낙이었다. 사랑 마루는 울타리 없는바깥마당에 면해 있었다. 아래 윗간으로 나누어진 사랑채는 마루도 길어서가운뎃기둥이 있었다. 그 가운뎃기둥을 한 팔로 안거나 기대고 앉아있으면 동구 밖으로 난 달구지길이 저 멀리 산모롱이 아스라이 사라지는지점까지 바라볼 수가 있었다.
흰옷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초가지붕마다 뿜어올린 저녁연기가스멀스멀 먹물처럼 처져 길과 논밭과 수풀과 동산의 경계를 부드럽게 지워버려, 마침내 잿빛 하늘을 인 거대한 한덩어리가 되었을 때도 흰옷 입은사람이 산모롱이를 돌아오는 것은 잘 분간이 되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다들 흰옷을 입었다. 특히 송도 나들이를 갈 때는 때도 안 묻은고운 흰옷으로 호사를 했다. 그래도 나는 할아버지와 딴 사람이 헷갈리지않았다.
할아버지의 독특한 걸음걸이는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강렬한빛처럼 직통으로 나에게 와 박혔다. '우리 할아버지다!'라고 생각하자마자나는 총알처럼 동구 밖으로 내달았다. 단 한 번도 착각 같은 건 하지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열렬하게 매달린 할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은다듬이질이 잘 돼 늘 칼날처럼 차게 서슬이 서 있었다. 그리고 송도의냄새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곧 오냐,오냐, 내 새끼, 하면서 번쩍 안아 올렸고, 그의 품은 든든하고 입김은훈훈했다. 할아버지의 입김에선 언제나 술 냄새가 났다. 나는 할아버지의훈훈함과 함께 그 술 냄새 또한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내려놓고 나서 두루마기 주머니에서 먹을 것을주섬주섬 꺼내 손에 쥐어 주는 것을 잊으신 적이 없었다. 노란 편지봉투에싼 미라사탕 아니면 잔칫상에서 염치 불구하고 집어넣었음직한 약과나다식 따위였다. 그런 것들을 맛보느라 할아버지 손목을 놓고 깡충깡충앞장서 뛸 때는 얼마나 의기양양했던지, 집에 들어가면 할머니한테 눈꼴이시다는 핀잔을 들을 지경이었다. 할머니 눈엔 요새말로 백이 생긴 내가다소 밉살스러워도 보였으리라. 그러나 그때의 내 기분은 기다림의 성취감같은 것이었다.
기다림이 번번이 성취된 것은 아니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산모롱이에딴 사람만 나타나거나 아무도 안 나타날 적엔 서러움이 목구멍까지복받쳤다. 계절에 따라서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 때도 있었다. 안에서 몇번이나 부르러 나와도 막무가내였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청승떤다고 했다.
엄마는 청승 좀 작작 떨라고 혀를 찼고, 할머니는 머리를 쥐어박기도 했다.
할아버지한테 일러 줄 테다, 일러 줄 테다, 나는 이렇게 벼르면서 그 모든구박을 견디었다. 그러나 진짜로 이른 적은 없었다. 그건 그냥 기다리는재미였다.
기다리는 재미는 그 밖에도 또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시방 소리개고개까지 오셨으면 내 엄지손가락이 가운뎃손가락에 척척 붙어라,"안붙으면 "우리 할아버지가 시방 농바위 고개까지 오셨으면 내 엄지손가락이가운뎃손가락에 척척 붙어라."로 바꾸면 되었다. 내가 아는 고개나 내의이름은 많았지만 어디 있는지는 잘 몰랐기 때문에 아무 데나 붙는 게 안붙는 것보다는 나았다. 붙으면 그 자리로부터 할아버지를 몰래몰래 뒤쫓아고개를 넘고 벌을 지나고 내를 건넜다.
할아버지가 걷는 길은 깜깜한 밤일 적도 있었고 휘영청한 달밤일 적도있었다. 별빛밖에 없는 그믐밤일지라도 표표히 나부끼는 할아버지의두루마기 자락은 너무도 새하얗고 당당해서 놓칠 염려가 없었다. 걸음이빠른 할아버지는 순식간에 동구 밖까지 왔다. 나는 할아버지를 숨가쁘게뒤쫓아며 한편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산모롱이에 할아버지는 안나타나고 뒤쫓던 나는 제자리걸음만 하는 할아버지를 안타깝게 지켜보다가정신의 긴장이 몽롱하게 이완되곤 했다. 기다리다 지쳐 잠든 나를어른들이 안고 들어갈 때, 나는 반밖에 잠들지 않았으면서도 일부러곯아떨어진 시늉을 했다.
내 유년기의 기억의 첫 장을 꽉 채우다시피 한 기다림은 그리 오래 가지않았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뒷간에서 넘어지신 채 못 일어나고 고래고래소리를 질러 사람을 불렀다. 뒷간은 사랑채에서 세 벌이나 되는 댓돌을내려와 꽤 넓은 바깥마당을 가로질러 마당을 에워싼 뽕나무 밑을 지나실개천을 넘어 텃밭머리에 있었다. 누군가 지나가던 사람이 연통을 해서식구들이 온통 황황히 달려나가 할아버지를 간신히 사랑채에다 뉘었다.
동풍이라고 했고, 동풍은 못 낫는 병이라고 했다. 특히 뒷간에서 걸린동풍에는 약이 없다는 걸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그 시절의 선비가 흔히 그랬듯이 한방에 대한 소양이 상식이상이어서 자식들 약방문도 손수 내고, 약초를 수집해 환약 같은 걸만들어서 약장에 보관하고 있다가 동네에 급한 환자가 생기면 내주곤하셨건만 자신의 병에 대해선 일찌거니 단념하고 화만 냈다. 할머니는사랑에서 똥 요강을 가지고 나올 때마다 할아버지의 역마살을 비롯해 술좋아하고 친구 좋아한 것까지 온갖 비행을 중얼중얼 나열해 가며 꼴좋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다. 집안에 먹구름이 끼고, 특히 나는 죽지떨어진 새처럼 초라해졌다. 아버지를 여읜 것은 세 사 때라 아무 것도생각나지 않지만 할아버지가 동풍으로 무력해지신 걸 보는 것은 나에게 두번째의 아버지 상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엄마가 서울로 오빠 뒷바라지를 하러 떠났다.
오빠는 면소재지에 있는 사년제 소학교를 졸업하고 송도로 가서 이 년을더 다녀 그때 개정된 학제로 육년 동안의 초등교육 과정을 마쳤다.
숙부들은 다 사년제 소학교만 나왔는데도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학문을 한청년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오빠가 송도에서 이 년 더 배운 걸 굉장한고학력으로 여기셨다. 서울의 더 놓은 학교에 간다는 것은 집안 형편에도벅찼지만 장손에 대한 기대에도 어긋났다.
그때 두 숙부는 다 혼인을 해서 한집에서 같이 살았건만 이상하게도그때까지 자녀간에 소생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우리 남매를 장중보옥에비유하시곤 했는데 덜컥 동풍까지 걸리셨으니 장손이자 유일한 손자인오빠를 너른 세상으로 내보내기보다는 옆에 끼고 집안의 대를 잇고 선영을지킬 의무를 훈도하고 장가도 일찍 들이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어른들하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오빠를 서울의상업학교에 보냈다. 상업학교는 송도에도 있는데 서울에까지 보낸 것은엄마의 중대한 반란이었다. 그 사건으로 집안이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혼자 된 맏며느리가 아들 공부를 핑계로 시부모 모시는 걸 포기한다는것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인들의 심적 타격도 컸고무엇보다도 집안 망신이었다. 할아버지가 그 작은 동네에서나마 양반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양반의 체통에 어긋나지 않게 집안을 다스려야했다. 누가 알아 주건 말건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은 그 마을에서모범적으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몹시노했고 엄마는 의무를 포기한 대가로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자식을 어떡하든지 서울에서 길러야 되겠다는 것은 아무도 못말릴 엄마의 숨은 신앙이었다. 엄마는 우리가 도회지에서만 살았어도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엄마의 생각엔 나도 훗날 철들고 나서 동의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형제 중 가장 체격이 좋고 잔병 한 번 치른 일 없는 건강체였다고 한다.
그런 분이 어느 날 갑자기 복통으로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할아버지는당신의 약방문에 의한 생약 한약  등으로만 다스리고, 할머니는무당집에서 푸닥거리를 하는 사이에 마침내 기지사경에 이르렀다.
그때서야 엄마는 단호히 아버지를 달구지로 송도까지 싣고 갈 수가있었다. 이미 아버지의 맹장염은 복막염을 일으켜 뱃속 가득 고름이 찬것을 뒤늦게 수술을 했지만 항생제도 없을 때라 결국은 덧나서 죽음에이르렀다고 한다. 엄마가 그걸 팔자소관으로 돌리지 못하고 시골의무지몽매 탓으로 단정하고, 자식들이라도 어떡 하든 그 곳에서 빼내고자한 것은 처녀 적의 엄마의 서울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엄마의 친정 역시 시골이었지만 엄마의 외가 쪽은 서울에서 꽤 잘 살고있어서 박적골로 시집오기 전 처녀 시절의 한때를 서울에서 외사촌들과보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외사촌들은 진명 숙명등에 다니고있었는데 그게 무척 좋아보이고 부러웠었나 보다. 엄마는 통치마 입고구두 신고 신식교육받은 여자들을 휘뚜루신여성이라고 칭했고, 나도그렇게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어렸고 또 형편상 딸까지는엄두를 못 내고 우선 아들을 서울 학교에 집어넣고 자기도 뒷바라지를핑계로 맏며느리 자리를 훨훨 박차고 서울로 가 버렸다. 나는 할머니할아버지는 물론 숙모들까지 수군대며 엄마를 비난하는 소리를 듣지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밖에 없는 손녀여서 숙모들에게 상전 노릇을 톡톡히했고 할아버지의 반신불수와 엄마의 부재로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게되었다. 개성지방과 그 근교의 주거 양식의 특색으로는 바깥채를 낮고소박하게, 안채는 높고 정결하게 꾸미는 것과 함께 마당치레의 유난함을꼽을 수가 있다. 사랑채에 면한 바깥마당은 앞이 트이게 하고 양쪽에뽕나무나 빗자루를 만드는 댑싸리 나무로 둘러치고 함박꽃이나 국화를 몇그루 심는 정도지만 뒤란치레는 공이 들고 화려했다.
우리 집 뒤란도 한겨울 빼 놓고는 줄창 꽃을 볼 수 있는 작은 동산이요넉넉한 놀이터였다. 장독대도 뒤란에 있었고 터줏대감을 모신 터줏자리도뒤란에 있었다. 울타리는 개나리로 치고 열매 맛은 별로지만 꽃이 장한돌배나무와 개살구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고, 앵두나무가 여러 그루, 그리고바닥에선 딸기가 해마다 저절로 음침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개나리울타리 밑에선 꽈리가 지천으로 자랐고 장독대로 올라가는 둔덕은 층층의단은 만들어 일년초를 심도록 돼 있었다.
혼자 쓸쓸히 놀던 뒤란에 이제 동무들을 끌어들이거나 동무들하고 온동네를 휘젓고 다니거나 내 마음대로 였다. 할아버지가 무력해진 것은 곧집안의 법도에 구멍이 뚫린 거라는 것을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건만알아차리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누렸다. 하다못해 뒷간까지도 놀이터로만들었다. 할아버진가 뒷간에서 넘어져서 반신불수가 되셨기 때문에뒷간에서 넘어지면 어떡하나 겁을 먹은 것도 잠시고 뒷간은 내 유년기의추억어린 여러 놀이터 중에서도 가장 환상적인 놀이터였다.
우리 고장에 내려오는 뒷간 얘기는 다 도깨비 얘기였지만 무서운도깨비는 아니고 조금은 못나고 유쾌한 도깨비였다. 코가 막혀 냄새를 못맡는 도깨비가 뒷간에서 밤새도록 똥으로 조찰떡을 빚는다고 했다. 재를콩고물이나 팥고물인 줄 알고 맵시 있게 빚은 조찰떡을 재에다 굴리기를되풀이하면서도 아까워서 한 입도 맛을 안 보다가 새벽녘에 다 빚고 나서비로소 맛을 보고는 퉤퉤, 욕지기 하면서 홧김에 원상대로 휘젓고 간다는것이다. 만일 한창 그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기침을 안 하고 뒷간문을열면 도깨비는 들킨 게 무안해서 얼른 "조찰떡 한 개만 잡수." 하면서 그중에서 제일 큰 걸 내놓는데 안 먹으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것이었다.
도깨비 얘기 말고 이런 것도 있었다. 동짓날 팥죽을 맛있게 쑨 며느리가한 그릇 먹는 것만으로는 감질이 나서 식구 몰래 한 그릇을 더 퍼가지고뒷간으로 갔더란다. 며느리보다 앞서서 팥죽을 몰래 먹으려고 뒷간에 와있던 시아버지가 며느리가 들이닥치자 놀라서 팥죽 그릇을 얼른 머리에다썼다고 한다. 며느리 또한 임기응변으로 "아버님 팥죽 잡수세요." 하면서가져온 팥죽 대접을 앞으로 내밀자 시아버지 왈 "얘야, 난 팥죽을안먹어도 이렇게 팥죽 같은 땀이 흐르는구나." 했다는 것이다. 두 이야기는다 뒷간에 갈 때는 반드시 문 앞에서 인기척을 내라는 걸 훈계하기 위해어른들이 흔히 해 주던 얘기였다.
시골 뒷간에 대해 공포감부터 갖고 있는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구역질이날 소리지만 실제로 우리 고장 뒷간은 팥죽을 먹어도 좋을 만큼 청결했다.
칸살도 서너 칸은 되게 넓었고, 어른이 일을 보는 데는 한 켠에 나무로 된틀이 따로 있었지만 아이들은 땅바닥에 앉아서 보게 돼 있었다. 아이들이똥을 누는 헛간 같은 흙바닥은 뒤쪽이 낮아서 똥이 자연히 낮은 데로떨어지게 돼 있지만 깊지는 않았고, 그 낮은 곳은 아궁이의 재를 갖다버리는 곳을 겸하고 있었다. 물색없이 키만 큰 사람을 똥 친 막대라고하듯이 아주 긴 나무막대기 끝에 네모난 나무판자가 달린 똥 치는막대기가 준비돼 있어 아이들도 자기가 눈 것을 잿더미 속으로 밀어넣을수가 있었다. 뒷간의 그런 구조를 모르면 도깨비가 조찰떡에 콩고물팥고물을 묻힌 얘기도 물론 이해하지 못하리라.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조석으로 뒷간바닥을 쓸어 선명한 싸리빗자루자국을 내놓았다. 퇴비와 함께 인분을 거름으로 쓸 때였다. 농토에 비해인구가 적어 늘 인분이 달렸다. 뒷간에 재를 갖다 버리는 것도 인분을 안보이게 하려는 목적과 함께 인분의 거름으로서 효용가치와 분한을늘리려는 목적도 있었을 거이다.
어떤 때는 송도까지 나가서 인분을 사 오는 수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개성 깍쟁이들은 오줌 똥에다 물을 타서 똥 지게 수효를 늘려서 팔았다고욕들을 하곤 했다. 그렇게 욕하는 마을 사람 또한 개성 깍쟁이여서 마실갔다가도 오줌이 마려우면 제 집 밭머리에 와서 누지 남의 밭에 누는 법이없었다.
어려서 그런 계산까지 한 것은 아니건만도 뒷간에 갈 때는 동무들하고떼로 몰려서 갔다. 소꿉장난을 하다가 한 아이가 술래잡기를 할래? 하면우르르 따라 하듯이 누군가가 뒷간에 가자 하면 똥이 안 마려워도 다들따라가서 일제히 동그란 엉덩이를 까고 앉아 힘을 주곤 했다. 계집애들도치마 밑에 엉덩이를 쉽게 깔 수 있는 풍차비지를 입을 때였다. 대낮에도뒷간 속은 어둑시근해서 계집애들의 흰궁둥이가 뒷간 지붕의 덜 여문 박을으스름 달밤에 보는 것처럼 보얗고도 몽롱했다.
엉덩이는 깠지만 똥이 안 마려워도 손해날 것은 없었다. 줄느런히앉아서 똥을 누면서 하는 얘기는 왜 그렇게 재미가 있었는지, 가히환상적이었다. 옥수수 먹고 옥수수같이 생긴 똥을 누면서 갑순네 누렁이가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았는데 누렁이는 한 마리도 없고 검둥이하고흰둥이하고 흰 바탕에 검정 점이 박인 것밖에 없으니 참 이상하다는 따위하찮은 얘기가 그 어둑시근하고 격리된 고장에선 호들갑스러운 탄성을지르게도 하고, 옥시글옥시글 재미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뒷간에서는 잘생긴 똥을 많이 누는 게 수였다. 똥은더러운 것이 아니라 땅으로 돌아가 오이 호박이 주렁주렁 열게 하고,수박과 참외의 단물을 오르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본능적인 배설의 기쁨뿐 아니라 유익한 것을 생산하고 있다는 긍지까지맛볼 수가 있었다.
뒷간도 재미있지만 뒷간에서 너무 오래 있다 나왔을 때의 세상의아름다움은 유별났다. 텃밭 푸성귀와 풀숲과 나무와 실개천에서 반짝이는햇빛이 너무도 눈부시고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어 우리는 눈을 가느스름히뜨고 한숨을 쉬었다. 뭔가 금지된 쾌락에서 놓여난 기분마저 들었다. 훗날학생 입장 불가의 영화를 교복의 흰 깃을 안으로 구겨 넣고 보고 나와세상의 밝음과 낯섦에 접할 때마다 나는 유년기의 뒷간 체험이 되풀이되고있는 것처럼 느끼곤 했다.
그로부터 더 오랜 훗날 이상의 권태라는 수필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놀이기구라고는 없는 오륙 명의 시골 아이가 무얼가지고 어떻게 놀아야될지 몰라 돌멩이로 풀을 짓이기다가 곧 싫증이 나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벌리고 괜히 기성을 지르다가 맨 나중에는 나란히 앉아서 대변을 한무더기씩 누더라는 얘기였다. 이상은 그것을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창작유희라고 묘사해 놓고 있었다. 그런 설명이 없더라도 그의 뛰어난글솜씨 때문에 돌파구 없는 권태의 극치가 섬뜩하도록 실감되는 글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뼛속까지 서울내기인 이상의 감수성이 만들어낸 관념의 유희일 뿐 정말은 그렇지 않다. 시골 애들은 심심해서 어떻게살까 불쌍하게 여기는 건 서울내기들의 자유이지만 내가 심심하다는의식이 싹트고 거기 거의 짓눌리다시피 한 것은 서울로 오고 나서였다.
서울 아이들의 장난감보다 자연의 경이가 훨씬 더 유익한노리갯감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호들갑일 뿐, 그 또한 정말은아니다.
우리는 그냥 자연의 일부였다. 자연이 한시도 정지해 있지 않고 살아움직이고 변화하니까 우리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농사꾼이 곡식이나푸성귀를 씨 뿌리고, 싹트고 줄기 뻗고 꽃피고 열매 맺는 동안 제아무리부지런히 수고해 봤자 결코 그것들이 스스로 그렇게 돼 가는 부산함을앞지르지 못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삼시 밥 외의 군것질거리와소일거리를 스스로 산과 들에서 구했다. 삘기, 찔레순, 산딸기, 칡뿌리,메뿌리, 싱아, 밤 도토리가 지천이었고, 궁금한 입맛뿐 아니라 어른을기쁘게 하는 일거리도 많았다. 산나물이나 벗이 그러했다. 특히항아리버섯이나 싸리버섯은 어찌나 빨리 돋아나는지 우리가 돌아서면 땅밑에서 누가 손가락으로 쏘옥 밀어 올리는 것 같았다. 마을 도처에 흐르는실개천에서 물장구치며 놀 때도 누가 해진 체 하나만 가지고 나오면오도방정떨기 선수인 보리새우를 얼마든지 건져 올려 저녁의 된장국을구수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었다. 가지고 놀 것도 다 살아 있는것들이었다. 왕개미의 새큼한 똥구멍을 핥아 보다가 불개미떼들한테종아리를 뜯어먹히기도 했고, 잠자리를 잡아서 날씬한 꽁지를 자르고 대신더 긴 밀짚 고갱이를 꽂아서 날려 보내기도 했다.
풀로 각시를 만들어 쪽찌어 시집 보낼 때, 게 딱지로 솥을 걸로솔잎으로 국수 말고 새금풀로 김치를 담갔다. 마지막으로 쇠비름 뿌리를뽑아 열심히 "신랑 방에 불켜라. 각시 방에 불켜라." 주문을 외면서손가락으로 비벼서 새빨갛게 만들어서 등불을 밝혀 주었다. 가지고 놀것은 무궁무진했고 우리는 한번도 어제 놀던 걸 오늘 또 가지고 놀 필요가없었다.
뙤약볕에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실개천이 합쳐져서 냇물이 된 동구밖까지 원정을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만나는 소나기는 실로장관이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을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행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 치기 시작하나.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뛴다.
불안인지 환희인지 모를 것으로 터질 듯한 마음을 부채질하듯이 벌판의모든 곡식과 푸성귀와 풀들도 축 늘어졌던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웅성대며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미친 듯한환성을 지르며 비를 흠뻑 맞았고, 웅성대던 들판도 덩달아 환희의 춤을추었다. 그럴 때 우리는 너울대는 옥수수나무나 피마자 나무와 자신을구별할 수가 없었다. 환희 뿐 아니라 비애도 자연으로부터 왔다.
내가 최초로 맛본 비애의 기억은 앞뒤에 아무런 사건도 없이 외따로인채 다만 풍경만 있다. 엄마등에 업혀 있었다. 막내라 커서도 어른들에게 잘업혔으니 다섯 살때쯤이 아니었을까. 저녁 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듯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을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전한 비애였다.
그와 유사한 체험은 그 후에도 또 있었다. 바람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느껴지는 저녁나절 동무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올 때, 홍시빛깔의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이삭을바라볼 때의 비애를 무엇에 비길까.
그때만 해도 엄마 등에 업혔을 때하고는 달리 서러움을 적당히고조시키고 싶어 꾀까지 썼다. 어떡하면 저 수수이삭을 건들댐이 더슬프고 쓸쓸하게 보일까, 그 적당한 시점을 잡느라 키를 낮춰보기도 하고고개를 요리조리 돌려 보기도 하다가 풀숲에 아예 누워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가슴에 고인 슬픔이 눈물이 되어 흐르길 가만히 기다렸다.
할아버지가 동풍이 들어 집안이 우울하고 기강이 해이해진 동안은 나의전성시대였다. 할아버지가 정정하셨을 때 집안 여자들을 송도 나들이도들일도 안 시켰던 것처럼 내가 동무들과 어울려 싸돌아 다니는 것도질색이었다. 할아버지는 다행히 왼쪽 팔다리만 마비가 되었다. 동풍초기에는 출입을 못 하게 된 울화증으로 식구들을 들볶았지만 차츰 그불편한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 한도내에서 소일거리를 찾게 되었다.
그건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는 거였다. 우리 집 사랑이서당이 되었다. 숙부들이 사년제 소학교를 나온 걸 인근에서는 신학문을한 걸로 쳐 줄 만큼 개화가 더딘 고장이었기 때문에 한문을 진서라고 믿고숭상하는 풍조가 남아 있었다. 한글은 언문이라고 해서 낮게 쳤는데배우기가 쉽다는 것도 업신여기는 까닭 중의 하나였다.
할아버지의 서당은 잘 되었다. 박적골 사람들 뿐 아니라 고개 너머마을에서도 아들들을 우리 서당으로 보냈다. 사랑에선 온종일 글 읽는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괜히 잘난 척할 때보다 마을 사람들이우리 식구를 대하는 태도도 훨씬 달라졌다. 나는 노인들까지 나한테굽실댄다고 느낄 정도였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나도 사랑으로 불러 냈다. 나는 그날부터 천자문을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내 몫으로 준 천지문 책엔언문으로 토가 달려 있었다. 언문이 우리글인 한글이라는 것도 모를때였지만 나는 그때 이미 언문을 반쯤 깨친 상태였다. 엄마가 가르쳐주었는데 가르치는 방법이 매우 우격다짐이었다. 자기는 하룻밤새에배웠으니까 나도 그래야만 한다는 식이었다.
엄마는 동네 여자들의 편지를 도맡아 대필해 줄만큼 그 마을부녀자들중에서는 그래도 유식한 편이었다. 마을 부녀자들이 엄마한테 편지를 써달라고 오는 건 대개 밤늦은 시간이었다. 자다 깨서 흐릿한 등잔불 밑에서두루마리 종이를 풀어 가며 붓을 잡는 엄마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한사람씩 오기가 뭣해서 엄마가 한가한 시간을 타서 그렇게 한꺼번에 일을보러 오는 것 같았다.
엄마가 다 쓴 편지를 읽어 줄 때면 여자들은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기도 하고, 넋 나간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기도 했다. 그런 여자들한테둘러싸인 엄마의 표정은 딴 사람처럼 으리으리했고, 목소리는 장중했다.
그럴 때 나는 우리 엄마하고도 달라 보이고, 딴 여자들하고도 달라 보이는엄마가 두렵고 자랑스러워 가슴이 울렁거렸고 다음 날 아침에 깨면 꿈을꾼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는 자신이 언문을 읽고 쓸 수가 있기 때문에 마을에서그만큼 잘난 척을 할 수 있으면서도 언문의 내력에 대해선 여간무식하지가 않았다. 무식하다 못해 무지막지했다. 세종대왕이 만든글이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대왕이 뒷간에 앉아 뒤를 보는 동안문살을 보고 생각이 떠올라 당장에 만든 글자라는 것이었다.
글자모양이 문살을 대강 뜯어 맞출 수 있게 생겨서 그런 말이생겨났는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그렇게 쉬운 글을 깨치는 데 오래 걸리면바보 취급을 하려고 그걸 특별히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그런 줄 알다가 해방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글이 언문이 아니라자랑스러운 우리 한글이고 세종대왕과 학자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노심초사해서 만들었나를 알게 되었다.
금방깨치지 못하면 바보가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엄마가 써준가갸거겨를 줄줄 외기는 했지만 깨친 건 아니었다. 그걸 이용해서 어떻게뜻이 있는 낱말이나 문장을 만드나도 몰랐고, 그걸 시험해 볼 만한 읽을거리도 집안에 없었다. 엄마가 손수 베낀 이야기책이 안방에 여러 권있었지만 그건 한줄 한줄이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는 것처럼 흘려서 쓴것이어서 엄마가 또박또박 써준 가갸거겨하고는 생판 다른 나라 글자같았다. 깨치기는커녕 내 눈엔 단 한 자도 아는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가 서울 간 후 할머니가 때때로 "가에다 기역 하면 각, 니은 하면간." 하는 식으로 뚱겨 주시지 않았으면 그나마 아주 까먹었을 것이다.
엄마는 무슨 배짱인지 혹은 교만인지 아주 조금밖에 안 가르쳐 주고도 다알기를 바랐고, 또 그렇게 믿으려 들었다. 나로서는 깨쳤다기보다는 깨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중간하던 언문이 하늘 천, 따 지 하고할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천자문을 따라 읽으면서 비로소 문리가 텄다.
한자 밑에 붙은 언문 토가 바로 그 소리라는 걸 알게 되자, 한문보다 언문읽는 데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그건 일거양득이었다. 두 상이한 문자끼리 서로 커닝을 할 수가 있었기때문에 할아버지로부터는 한번 가르쳐 주면 안 잊어버리는 아이라는칭찬을 들을 수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장가 가게 생긴 다 큰 머슴애가글을 안 외워 왔다고 종아리를 치실 때도 나의 총명을 예로 들어 가면서호령을 하셨다. 나는 의기양양했지만 천자문 다음에 배우는 책에는 언문토가 없는 게 은근히 겁이 났다. 내 총명의 허구가 드러나고 말 테니까.
그러나 할아버지의 서당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동풍이드신 것이다. 이번 동풍은 뒷간에서 넘어지는 것 같은 극적 사건 없이왔는데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다운 마지막 위풍까지 꺾어 버린 참담한것이었다. 오른쪽 수족까지 떨려서 간신히 회복됐던 뒷간 출입도 못 하게되었고 수저질도 어줍어서 국 국물을 줄줄 흘리셨다. 말씀을 할 때도 침이흘러 그런 것들을 닦아 낼 베수건을 늘 무릎에 놓고 앉아 계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눌해졌지만 여전히 쨍쨍한 음성으로 나를 불러잔심부름을 시키거나 말벗을 삼으려 드셨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할아버지가 불쌍해서 안 보고 싶은데도, 우두커니 있다가 지치거나 울화가치밀면 나를 부르시는 것 같았다.
먹을 갈게 하고 편지를 쓰실 적도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아주 오래걸려서 삐뚤빼뚤한 필적을 남겼다. 도저히 누가 알아볼 것 같지 않은글씨여서 나는 속으로 나한테 먹을 갈게 하려고 일부러 심술을 부리고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받기도 하는 유일한분이셨다. 엄마나 오빠도 문안 편지를 올렸고 딴 데서 오는 편지도 꽤있었다.
자연히 우리 사랑은 사흘에 한 번씩 오는 우체부가 쉬어가는 장소였다.
전할 편지가 없을 때도 부칠 편지가 있나 하고 들렀다. 그 때는 편지 부칠일이 있으면 우체부한테 맡기면 되었다. 할아버지도 우체부를 기다리고반가워하고 붙들고 얘기시키기를 좋아했는데 이차로 동풍이 들고 나선더욱 그랬다.
우체부는 가방 속에 든 편지보다 여러 동네를 돌면서 보고 들은 소문이훨씬 더 풍부했다. 할아버지가 그를 쉬어 가라고 사랑 마루에 붙들어앉히면 나는 냉큼 안에다 연통을 해서 입맛 다실 걸 내오도록 했다. 그건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묵계 같은 거였다. 그런 나를 할아버지는 "요, 입의혀 같은 거." 하면서 예뻐하셨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베수건에 싸서 감춰 놓았던 삶은 밤이나 떡쪼가리같은 걸 상으로 주실 때는 정말 싫었다. 음식 국물과 침을 닦아 내는 데쓰는 베수건은 늘 눅눅하고 시척지근한 냄새가 났다.
심부름을 잘못해 꾸중을 들을 적도 있었다. 한번은 급한 소리로부르시기에 달려갔더니 화롯불이 사위어 담뱃불을 붙일 수가 없으니성냥을 켜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성냥불을 켜 본 적이 없었다.
며느리가 불씨를 꺼트리면 쫓겨날 정도의 옛날은 아니었지만 더울 때도 집어딘가에 화로가 있어서 성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다 남이켜는 걸 본 적은 있어도, 내가 직접 그걸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울상을 짓자 할아버지는 나더러는 성냥갑만 잡고 있으라고 하시곤당신이 성냥개비를 그으려고 하셨지만 손이 떨려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불쌍하던지 차마 바로 보기 민망했다. 딴 일도아니겠다 그까짓 담배 피우는 일 그쯤 해서 단념을 하셨으면 좋으련만이번에는 당신아 성냥갑을 잡고 있을 테니 나더러 성냥개비를 그어 보라고했다. 만일 내가 힘껏 그어 내 손끝에서 확 불이 일어나면 나는 그걸내던지고 말 것 같았다. 그러면 움직이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그냥 타 죽고 말 것이 아닌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나는 마치 내가그 일을 저지른 것처럼 공포에 질려 큰 소리로 울면서 사랑을 뛰쳐나왔다.
나는 그때 참 잘 우는 아이였다.
그러나 불에 대한 내 무섬증은 그럴 만한 내력이 있었다. 나는 그전부터불을 낼 뻔한 계집애란 소리를 들어 온 바가 있었다. 오빠가 개성에 있는북부 소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언젠가 집에 다니러 올 때 화경을 가지고 온적이 있었다. 까만 테를 두르고 손잡이가 달린 그 작은 화경은 아마 이과시간의 실습교재였을 것이다.
그 동그란 유리로 비춰 보면 오빠의 눈이 황소 눈깔처럼 커 보이기도하고, 내 손가락이 엄마 손가락처럼 굵어 보이기도 하는 걸 내가 하도재미나하니까 오빠는 더 신기한 걸 보여 주었다. 화경으로 햇빛을 모아종이를 태우는 게 왜 그렇게 신기했던지.
동그란 유리를 통과한 햇빛이 점점 도타워지고 오므라들면서 꼭 칠흑속에 숨은 고양이 눈깔처럼 요괴롭게 빛나다가, 마침내 종이에서 모락모락연기를 뿜어올리고, 구멍을 내고, 구멍이 실고추처럼 가늘고 새빨갛게종이를 먹어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동안 나는 숨이 막히고 배창자가쪼글쪼글 오그라들면서 오줌이 마려웠다.
그날 밤 나는 정말 오줌을 쌌다. 그래서 요즘도 나는 아이들이 불장난을하면 오줌 싼다는 항간의 속설을 믿는다. 거기까지는 기억이 선명한데 그후에 내가 불을 낼 뻔했다는 사건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어른들한테들은 얘기대로라면 추수하고 나서 이엉을 엮으려고 헛간에 쌓아 놓은 짚단사이에서 몰래 화경 장난을 하다가 그만 지푸라기에 불이 붙었다는것이다.
사랑 마루에서 대문을 중심으로 반대쪽은 마당에 널어 놓은 곡식이나고추 따위가 소나기를 만났을 때 얼른 거둬들일 수 있도록 지붕만 있고문은 없이 바깥으로 열린 헛간이었다. 불을 처음 발견한 이웃집새댁은마침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던 중이어서 이고 있던 물동이를 곧장쏟아부어 쉽게 불을 끌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하마터면 집을 태울 뻔한 불상사인데도 왜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져버렸는지, 내 기억력 중 특히 어릴 적 기억에서 자신이 있다가도 그대목에선 고개가 갸우뚱해지면서 어른들이 혹시 내 불장난을 막아 보려고꾸미거나 과장한 얘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된다. 그래도 불을 낼뻔한 계집애란 소리는 오랫동안 내 의식을 짓눌렀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성냥불 켜는 걸 두려워해서 불편 할 적도많았지만, 할아버지 담뱃불을 못 붙여 드렸을 때가 가장 슬펐다.
할아버지를 위해서 무언가 내 속의 한계 같은 걸 박차 보려고허둥대면서도 그렇게 안 되던 조바심과, 난 왜 이렇게 못났을까 싶은자기혐오 등, 복잡한 심리적 갈등까지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2. 아득한 서울
할아버지의 두 번째 동풍으로 집안엔 더욱 먹구름이 끼고 가세가 기우는걸 어린 마음에도 느낄 수가 있었다. 작은숙부 내외도 서울로 떠났다.
엄마에게 고무된 바가 컸다. 엄마가 먼저 서울을 개척했으니 과연잘나기는 잘난 엄마였다. 엄마를 괘씸하게만 여기던 어른들의 마음도 많이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건 누그러졌다기보다는 굽잡히고 있는 건지도몰랐다.
엄마는 지난 방학에도 교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오빠를 데리고 내려와방학을 보내는 동안 몹시 당당했고 오빠가 얼마나 들어가기 어려운공립학교에 들어갔나 은근히 자랑을 했다. 거기만 나오면 총독부나 부청에취직하는 건 문제도 없다고 했다.
우리 집안은 겨우 까막눈이나 면한 시골 선비 집안이었다. 부끄럽지만할아버지도 양반 타령만 유별났지 민족적 자부심이나 역사의식이 있는분은 못 되었다. 할아버지의 양반 노릇은 오직 우리보다 낮은 양반을무시하는 것이었고, 양반으로서의 책임감이 있다면 자식들 혼사를 맺을 때우리와 걸맞은 양반 중에서도 우리 하고 같은 노론 집안하고만 맺어야한다는 고집 정도였다. 남을 높이 보거나 우습게 볼 때 할아버지가 가장잘 하시는 말씀도 다 속여도 뼈다귀만은 못 속인다는 단정이었다.
이 정도의 알량한 양반 의식밖에 없었으니까 일본 관청이라도 관청에만다니면 벼슬인 줄 알고, 장손이 장차 집안을 일으킬 만큼 출세하는 꿈에부풀 수가 있었다. 할아버지까지 그 정도였으니 식구 중 누가 감히 출세가보장된 아들을 둔 엄마를 깔볼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작은숙부까지엄마를 언덕삼아 서울로 간 마당에.
그때까지도 두 숙부가 다 아이가 없었다. 막내숙부까지 떠나자 집안이더욱 횅해졌다. 그 집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지었다고 했다.
삼형제가 한집에서 양친부모 모시고 자식을 많이 낳아 길이길이 화목하고번성하자고 널찍널찍하고도 오밀조밀하게 지은 집이었다.
식구가 주니까 괜히 청승을 떨 만한 구석도 많아졌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사랑 마루 가운데 기둥에 오도카니 기대 앉아 하염없이 동구 밖을바라보는 것만큼 마음에 드는 청승떨기도 없었다. 그러고 있다가식구들한테 들키면 누구든지 내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을 알아주었다. 특히할머니는 황망히 당신의 품안에 포옥 싸안기부터 하면서 잠긴 소리로"불쌍한 내 새끼." 소리를 되뇌었다.
식구들은 내가 그러고 앉아 엄마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들이 그러니까 그런 것도 같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를 기다릴 때와 같은감미로운 설렘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기다림은 나로서는 처음 맛보는생소한 느낌이었다. "우리 엄마가 농바위 고개까지 왔으면 내엄지손가락이 가운뎃손가락에 척척 붙어라." 이런 점을 골백번 쳐 봤댔자들어맞지 않을 게 뻔한 기약 없는 기다림을 내가 하고 있다고 믿고 싶지도않았다. 그래서 누구 입에서라도 제가 엄마 생각이 나서 저렇게 풀이죽었단 소리만 나오면 발광을 하듯이 울어 댔다. 그러나 온몸으로아니라고 부정할수록 그건 점점 확실해졌다.
손가락점보다 더 강력한 게 통한 것처럼 어느 날 엄마가 홀연히나타났다. 방학 때도 아닌데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돌아온 엄마를보자 나는 무엇보다도 엄마도 나를 보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었다는 걸확인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엄마는 단지 내가 보고 싶어서 온게 아니라 서울로 데려가려고 왔다고 했다. "너도 서울 가서 학교에가야지." 엄마가 말했다. 나는 좋은지 싫은지 알 수가 없었다. 서울이란데를 동경한 것도 같지만 거기서 학교를 다닌다는 일은 상상해 보지않았다. 엄마의 의도를 안 할머니가 먼저 "세상에, 계집애를 소학교부터서울에서?" 하고 기함하는 소리를 내셨다. 다시 집안에 분란이 일어났다.
"네가 무슨 짓을 해서 서울서 돈을 얼마나 벌었기에 계집애를 다 서울서공부를 시키겠다는 게냐, 응? 누가 들을까 봐 겁난다."
할머니는 이런 막말까지 하셨다. 엄마가 아무런 대꾸도 안 하자 "느이아버님 저 모양 되셔 갖고 순전히 쟤 하나 들락날락하고 슬하에서고물고물하는 거 바라보는 낙으로 사신다. 그래도 네가 쟬 데려가야옳겠냐? 증말 너무한다 너무해."
이렇게 애걸로 바꾸어도 엄마의 마음이 돌아선 것 같지 않았다.
할머니는 작전을 바꾸어 나한테 종주먹을 댔다. "너 할미가 좋으냐?
에미가 좋으냐? 후딱 대답해봐, 요년아. 할미가 좋으면 엄마한테 할미하고살겠다고 말해. 후딱."
그럴 때 나는 "몰라, 몰라." 하고 우는 게 수였다. 어린 나이에 도무지이해할 수 없는 궁지였다. 어른 된 후에도 나는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좋으냐? 따위 질문을 어린애한테 하는 사람을 보면 싫은 생각이 들곤했다.
소용없는 분란에 먼저 종지부를 찍은 건 엄마였다. 실상 엄마에겐 마냥그러고 있을 시간도 없었으리라. 엄마는 아무에게도 상의 안 하고, 심지어나한테도 안 물어 보고 내 머리를 빗겨 주는 척 하면서 싹둑 잘라 버렸다.
나는 그때까지 우리 동네 계집애들이 다 그랬듯이 종종머리를 땋고있었다.
종종머리란 계집애들이 댕기를 들여 길게 머리꼬랑이를 땋을 수 있게되기 전까지 빗는 머리로, 정수리로부터 머리칼을 바둑판처럼 나누어가닥가닥 땋다가 색실이나 헝겊오라기를 들여 끝마무리를 하는 머리였다.
손이 많이 가고 매일 손질해 주지 않으면 두억시니같이 돼 버리기 때문에머리만 봐도 집에서 위해 기르는 아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가 있었다.
내 머리는 고모가 시집가기 전서부터 취미 삼아 가꾸며 길들여 놓은 걸숙모가 이어받아 늘 단정하고 반들반들하게 빗겨 놓아, 난 그게 은근히자랑스러웠다. 어려서부터 혹시 누가 나한테 예쁘다든가 앙증맞다는소리를 하면 내 머리를 가지고 그러는구나, 알아차릴 만큼 내가 가진 것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거기도 했다.
그런 머리를 엄마는 싹둑 잘라 냈을 뿐 아니라 뒤를 높이 치깎고되통수를 허옇게 밀어 버렸다. 서울 애들은 다들 그런 머리를 하고 있다고엄마는 내가 앙탈할 새도 없이 윽박지르기부터 했다. "세상에, 망칙해라."
할머니도 벌린 입을 못 다물었고 나도 이마에서 일직선으로 자른앞머리보다 뒤통수의 허전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약했다. "알라리꼴라리, 누구누구는 뒤통수에도 얼굴이 달렸대요." 당시의 단발머리는 뒤를너무 높이 깎아 정말 뒤에도 얼굴이 달린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동무들의 놀림을 받으면서도 믿는 데가 있어서 그다지 기죽지 않았다.
"서울 아이들은 다 이런 머리를 하고 있단다. 너희들은 모르지만."
나는 재빨리 그것도 모르는 동무들을 얕잡고 있었다. 내 단발머리는할머니를 단념시켰을 뿐 아니라 내 마음도 시골에서 뜨게 했다. 어서엄마하고 떠나고 싶었다.
할아버지께 하직 인사를 드리러 사랑에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나를 바로보지 않고도 모든 걸 다 아시는 듯 "어허, 망칙한지고." 하고 한 번 크게꾸짖으셨다. 그러고는 쌈지를 뒤적여 오십전짜리 은전 한 닢을 던져주셨다. 이왕 주실 거 던져 주실 게 뭔가, 자존심이 상했지만 나는 장판을데구루루 구르는 은전을 손바닥으로 덮쳐서 꼭 쥐고 고맙습니다, 라고인사를 올렸다. 나의 굴욕감보다는 할아버지의 상심에 더 위로가 필요할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약한 마음을 내보이시면 울어 버릴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어서 물러가라고 역정을 내셨다.
엄마는 이렇게 어른들의 노여움을 살 짓만 했지만, 맏며느리에다 손귀한 집 장손의 엄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맨손으로 서울이라는 눈 감으면코 베어 간다는 대처에다 최초로 말뚝을 박은 담대한 여자였다. 어른들이미워하면서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밖에 싸 놓은 짐만 봐도 알 수가있었다. 사람까지 사서 곡식이랑 고춧가루랑 올망졸망한 자루들을 한 지게실어 놓고 있었다. 할머니도 나들이옷을 떨쳐입고 우리를 따라 나섰다.
개성까지의 이십 리 길은 멀고도 멀었다. 고개를 넘고 들을 지났다. 들과산이 있으면 마을도 있었다. 박적골보다 큰 마을도 있고 작은 마을도있었지만 마을이 앉은 자리나 집의 생김새가 비슷해서 조금도 낯설거나신기하지 않았다. 마을도 그냥 늘 봐 온 자연의 일부였다. 네 번째로당도한 고개가 마지막 고개인 농바위 고개라고 했는데 유난히 가팔랐다.
아마 다리가 아파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 고개만 넘으면 송도니까힘내라고 엄마가 말했다. 허위허위 숨을 몰아쉬는 나를 엄마가 뒤에서밀어 주었다. 입 속이 바싹 마르게 힘들여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발 아래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말로만 듣던 송도였다. 나는탄성을 질렀다.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길도 집도 왜 그렇게새하얗게만 보였던지. 나중에 안 것이지만 송도고보, 호수돈고녀를 비롯한신식의 큰 건물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지었고, 토지도 사질이어서 길이나바위가 유난히 흰게 개성 지방의 특징이었다. 사람이 저렇게도 살 수 있는거로구나, 나는 벌린 입을 못 다물고 구 인공적인 정연함과 정결함에 오직황홀한 눈길을 보냈다.
그때였다. 네모난 건물 한귀퉁이에서 눈부신 불덩이 같은 게 이글거리는게 내 눈을 쏘았다. 여태껏 내가 본 어떤 빛하고도 달랐다. 불길이치솟지는 않았지만 불길보다 더 강렬한 빛이었다. 나는 두려워하면서엄마에게 매달렸다. 엄마는 바보처럼 굴지 말라고, 저건 유리창에 햇빛이비친 거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해가 뭐하고 부딪쳐 박살이 난 것 같은빛이었다. 엄마는 내가 유리창을 못 알아듣자 송도나 서울 같은대처에서는 집집마다 유리로 들창을 만든다고 했다.
박적골 집에도 유리로 만든 게 있긴 있었다. 어른들은 정종병이라고했는데 유리로 된 투명한 병을 툇마루 밑에다 두고 석유초롱에서 석유를조금씩 덜어다 두는 데 썼다. 그렇게 비치는 걸로 들창을 만든 집에서사람이 살다니, 신기하고도 불안했다. 아까 송도를 처음 보고 느낀황홀감도 반은 실은 불안감이었다. 나는 농바위 고개 위에 서 있는 게아니라 전혀 이질적인 두 개의 세계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
미지의 세계에 덮어놓고 이끌리면서 한편 뒷걸음질치고 싶었다.
가슴이 두근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서평화와 조화가 깨지는 소리였고, 순응하던 삶에서 투쟁하는 삶으로 가는갈림길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두려움이었다.
내리막길은 쉬웠다. 중간에 육면체의 큰 바위들이 마치 장롱을 한 마리무려 놓은 것처럼 제멋대로 모여 있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농바위고개였다. 바위 사이에선 달콤한 약수까지 샘솟고 있었다. 기다란 돈궤처럼누워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샘물로 목을 축였다.
마침내 송도로 진입했다. 철길을 건너고 반듯한 기와집들이 붙어 있는골목길을 지났다. 길바닥이 딱딱하고 유리창이 달린 이층 삼층의 네모난집들이 늘어선 한길로 접어들었다. 처음 보는 것 천지였지만 기죽지 말고두리번거리지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그러했으므로.
송도 거리에서의 엄마의 당당함이 어딘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게 되레나더러 닮기를 바라는 본보기처럼 보였다. 만나는 계집애 마다 나처럼뒤통수를 하얗게 민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것도 엄마에 대한 존경심을불러일으켰다. 한 가닥으로 땋아 댕기를 들인 처녀들은 더러 있었지만종종머리 딴 계집애는 한번도 못 만났다.
드디어 당도한 개성역은 웅장하고 그 안은 복잡하고 시끌시끌 했다.
여기서 어른을 놓치면 어떻게 될까? 여태껏 한번도 할 필요가 없었던상상이어서 그 공포감은 더욱 낯설고도 생생했다. 엄마가 그 많은보따리를 개찰구 가까이 포개 놓고 표를 사러 가고 하는 동안 나는 엄마의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표를 내고 나가니까 엄청나게 큰사닥다리가 공중에 걸려 있었다. 엄마는 그게 구름다리라고 했다. 그와중에도 서울역의 구름다리는 여기 댈 것도 아니게 크고 복잡하다는 서울자랑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짐이 많은 우리에겐 여간 힘든 길이 아니었다. 엄마도 이고 들고,입장권을 사 가지고 따라온 할머니도 이고, 나도 뭔가를 들고 열심히뛰었다. 엄마가 뛰니까, 남들도 다 뛰었다. 나도 죽자꾸나 뛰었다. 유리창이많이 달린 엄청나게 큰 구렁이 같은 기차에 얼떨결에 올라탔다. 할머니도따라 올라와 짐을 선반위에 얹는 걸 도와 주고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내가 앉은 자리에 달린 유리창 밖에 섰다. 할머니가 뭐라고그러는 것 같았지만 잘 안 들렸다. 유리창 밖에는 전송하는 사람들이 참많았다. 그 중에서도 할머니는 제일 작고 초라해 보였다. 그 초라함이 나를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유리창이란 얼마나 신기한가. 할머니에게 안겨'아이고 내 새끼.' 하고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따라 울고 싶었다.
나는 온몸으로 유리창에 달라붙었다. 얼굴만 얼음장에 눌리듯 사정없이퍼졌을 뿐 한치도 할머니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기차는 크고 구슬픈소리를 내지르고 나서 움직였다. 전송객도 따라 움직이다가 점점 안보였다. 나는 할머니도 따라 움직였는지 그냥 서 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펑펑펑 눈물이 마구 나왔다. 눈물이 안 나오는데도 소리내어 운 적은많아도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나오는데 엉엉 소리를 내지 않기는 생전처음이었다. 가슴이 쪼개지는 것처럼 힘들었다.
마침내 서울이었다. 과연 개성역보다 몇 배나 더 넓고 복잡한구름다리를 우리 모녀는 맨 나중에 처져서 헉헉대며 올랐다. 많은 보따리때문이었다. 딴 사람들은 웬만한 짐도 빨간 모자 쓰고 곤색 양복 입은짐꾼한테 맡기는데 엄마는 우리 보따리를 죄다 한몸에 주렁주렁 매달고고약한 꿈 속에서처럼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주 오래 걸려서 표 받는 데를지나 역전에 너른 마당까지 나올 수가 있었다. 엄마는 그 한가운데다보따리를 쏟아붓듯이 내던지고 주저 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모이고 흩어지는 가운데 나도 얼이 빠져서 여기가 서울이라는 생각도 나지않았다.
각설이떼처럼 너덜너덜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지게꾼들이 우리 곁으로우르르 몰려왔다. 서로 우리 짐을 지겠다고 난리였다. 물어 보지도 않고 짐먼저 실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에도 박적골에서 개성역까지 나올때처럼 지게에 짐을 싣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자 살 것 같았다. 그러나엄마는 전차 타고 갈 거라고 그들을 물리쳤다.
기차의 한 토막보다도 짧고 파란 전차가 등에다 뿔을 달고 한길한가운데를 달리는 게 보였다. 뿔하고 공중에 걸린 줄하고 사이에서 파란불꽃이 튀는 걸 보니까 전차를 타는 게 호기심보다는 겁이 났다. 말만그렇게 하고 엄마가 마냥 그 자리에 퍼더버리고 앉아 있으니까 흩어졌던지게꾼이 다시 하나 둘 모여들었다.
엄마가 그 중 한 사람을 지목해서 흥정을 시작했다. 엄마가 어떤기준으로 그를 골라잡았는지 그건 나의 이해력 밖의 일이었다. 엄마는턱짓으로 길 건너를 가리키며 조오기 서대문 밖까지 가는 데 얼마냐고물었다. 그가 얼마라고 말하자 그렇게는 안 하겠다고 벌써 싣기 시작한짐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그럼 얼마나 주실 거냐고 그쪽에서 물었다. 서로한참 에누리를 하고 나서 마침내 우리 모녀는 보따리에서 해방되어지게꾼을 앞서갔다.
번잡하고 시끄럽고 더러운 거리를 지났다. 사람들이 입은 입성도,땅바닥도 꾀죄죄한 먼지 빛깔을 하고 있었다. 전차가 지나가는 큰네거리를 지나자 행인도 좀 줄고 길도 개성의 한길가 비슷해 졌다. 저만치길을 가로막고 큰 문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독립문이란다." 엄마가말했다. 뒤따라오던 지게꾼이 거진 다 왔느냐고 숨찬 소리로 물었다. "조금더 갑시다." 엄마의 얼굴에 느닷없이 비굴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아,조금이 어디냐니까요?" "조오기, 현저동..." 엄마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그는 그 자리에 딱 버티고 서더니 누굴 놀리냐고, 그 산꼭대기를 누가 그돈 받고 가냐고 눈을 부라렸다. 엄마도 지지 않고, 평지면 전차를 타고편안히 가지 뭣하러 전차값 몇 곱절이나 주고 품을 샀겠느냐고 따지고나서, 막걸리 값은 더 생각하고 있으니 어서 가자고 달래기 시작했다. 오늘재수 옴 붙었다고 투덜대면서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엄마 입에서현저동이라는 말이 떨어지고 나서 그는 눈에 띄게 불손해졌다. 우리를넘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도대체 현저동이 어딘데 저러는 걸까. 나는눈치로 감을 잡은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다.
줄기차게 우리를 따라오던 네 줄의 전찻길이 끊긴 지점에서 엄마는골목으로 접어들었고 골목은 곧 깎아지른 듯한 층층다리로 변했다. 집들도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이상한 동네였다. 층층다리 양쪽도 다 그런 집들이었다. 집집마다 널빤지로된 일각대문은 있으나마나 하게 살림살이를 거리로 발랑 드러내고 있었다.
오줌과 밥풀과 우거지가 한데 썩은 시궁창물까지 층층다리 양쪽가장자리의 파인 데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허위단심 꼭대기까지 올랐는데도 동네는 계속됐다. 사람들이 겨우비비고 지날 만한 실 같은 골목을 한참이나 더 꼬불대며 오르다가 다시 첫번째 층층다리보다 더 불규칙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나고 그 중간에비켜선 층층대 위의 초가집 앞에서 엄마는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그동네서도 초가집은 드물었다. 그 집이나마 우리 집이 아니었다. 엄마는 그집 문간방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작은 쪽마루가 달린 문간방은 옹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사슴, 거북,불로초 따위를 울긋불긋 원색으로 그린 종이로 싸발라 놓은 반닫이가유일한 세간이었다. 우리 집 여자들은 들일을 안 하니까 장에 걸레칠시간이 많아서 그랬겠지만, 시골집 윗목의 장롱들은 유난히 반질반질했다.
할머니가 시집 오실 때 해 가지고 오셨다는 삼층장은 백통 장식이 떨어져나가 문짝을 건성으로 붙여 놓았건만도 나뭇결은 깊고 은은한 윤기를지니고 있었다.
장롱이 있는 윗방 한 귀퉁이에 있는 배가 부르고 목이 긴 초병은 또얼마나 보기 좋았던가. 불투명한 청회색 병에 너무 오래 초만 담아 놓아서독한 신 기운이 배어 나와 얼룩이 진 게 자연스러운 무늬처럼 보였다.
뒤란의 터줏자리와 함께 윗방의 초병은 나에겐 신령한 무엇이었다.
약주술이나 막걸리 같은 게 남으면 거기다 부어서 초를 만드는 것같았는데 작은 나방이 날아 나올 때도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 집 초맛이동네에서 제일 간다고 그 초병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지만 누가 초를 좀달라고 하면 우리 초맛을 따라가면 어떡하냐고 안 주셨다. 아주 엄숙하게그렇게 말하셨기 때문에 인심이 나쁘단 생각은 안 들고 그 안에 신비한힘이 깃들여 있는 것처럼 여기곤 했다.
모가지가 긴 초병과 나뭇결이 고운 장롱과 이 조화롭던 윗방이 잃어버린낙원의 한 장면처럼 가슴 뭉클하게 떠올랐다. 천 년을 내려온 것처럼안정된 구도에 익숙해진 나의 심미안에 조약한 원색으로 처바른 반닫이는너무도 생급스러웠다.


3. 문 밖에서
"여기가 서울이야?" 나의 항의 섞인 물음에 엄마는 뜻밖에도 아니라고대답했다. "여기는 서울의 문 밖이란다. 느이 오래비가 이담에 취직해서 돈많이 벌면 우리도 그때 가선 버젓이 문 안에서 살아 보자꾸나."
엄마가 이렇게 좋은 말로 달랬다. 그날 밤 늦도록 창 밖으론 사람이외치는 소리가 가까워졌다가는 멀어지곤 했다. "만주나 호야 호오야."
뭘 사라는 소리 같았지만 그게 뭔지 엄마한테 물어 보지 않았다. 별로궁금하지 않았다.
시골집에서도 가끔 울 밖에서 들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잠을 깬 적이있었다. 그럴 때는 어른들도 깨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저놈의승냥이가 왜 또 내려왔나."
이렇게 중얼대며 할머니가 일어나 앉으실 적도 있었다. 승냥이한테 닭이물려 갈까 봐 근심이 되시는 것 같았다. 울음소리는 들었어도 한번도승냥이를 본 적은 없었다. 나는 다시 승냥이 울음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서울서 사는 법도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건실상 서울살이의 법도라기보다는 샛방살이의 법도였다. 눈뜨자마자 뒷간이어디냐고 묻는 나에게 엄마는 변소는 안집 식구들이 다 다녀나온 다음에가는 거라고 했다. 뒷간을 변소라고 한다는 것은 기차간에서 이미 배운바가 있고, 한 사람씩 밖에 못 들어가게 돼 있는 안집 변소도 어제 한 번다녀나오긴 했어도 똥마려운 것까지 안집한테 양보해야 된다는 건 그날처음 알았다.
엄마는 한술 더떠서 "너를 데려오면서 안집한테 얼마나 눈치가 보인줄아니? 방얻을 때 두 식구라고 했거든. 주인집도 네 또래들이 있으니까싫어할 것 같아서." 이러는 게 아닌가. 속일게 따로 있지, 어떻게 있는자식을 없는 척할 수 가 있을까. 그 잘난 우리 엄마가? 오냐 오냐떠받드는 대우만 받다가 갑자기 천덕꾸러기로 전락을 하고 보니 엄마가싫고 다시 보였다. 나야말로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한테일러바치고 할머니한테 구원을 청하고 싶었지만 두 분은 너무 멀었다.
"안집 애하곤 안 노는 게 수다. 까딱하단 애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
"안집 애가 뭐 먹을 땐 쳐다보지도 마라."
"안집 애가 기지고 노는 걸 탐내거나 만져 보지 마라."
"안집엔 들어가지 않을수록 좋다."
숫제 새끼줄로 발목을 매 기둥에 매달아 놓는 게 낫지. 도대체 나더러어쩌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내가 있어도 없는 아이처럼 굴길바라고 있었다. 박적골이 좁다라고 천방지축 망아지처럼 뛰놀던 여덟살짜리에게 그게 얼마나 못 할 노릇인지 엄마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셋방살이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교 갈날이 임박하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가 가난하니까 사는 건 문 밖에서 살아도 할 수 없지만학교는 문 안에 있는 좋은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다. 그건 이미 엄마가그렇게 다 정해 놓은 일이었다. 내 의견 같은 건 듣고 말고 할 것도없었다. 그 때는 국민학교도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시험을 쳐야만 들어갈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 학교나 제 맘대로 시험을 칠 수 있는 건아니어서, 지금의 학구제처럼 사는 동네에 따라 갈 수 있는 학교가 정해져있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엄마가 벌써 지금의 주민등록에 해당하는기류계를 사직동에 사는 친척집에 옮겨 놓은 뒤였다.
문 안에 있는, 엄마 마음에 드는 학교 중에서 다시 나의 통학거리를감안해서 골라잡은 학교가 매동국민학교였다. 현저동에서 그 학교엘가려면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인왕산 자락이었다. 현저동 중턱에서성터가 남아 있는 근처까지 더 올라가면 사직공원으로 통하는 꽤 평탄한길이 나 있었다. 길이 험하진 않았지만 거의 사람의 왕래가 없는 휑한길이고,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숲속에 문둥이들이 득시글댄다고알려져 있었다. 시험 칠 날이 임박해서 엄마는 나를 데리고 그 길을답사하면서 문둥이에 대해 세상에 떠도는 끔찍한 말을 일소에 부쳤다.
문둥이가 애들을 잡아다가 간을 째먹는다는 말을 믿지 마라. 그사람들도 우리하고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 차마 못 하는 건 그 사람들도못 한다. 있지도 않은 걸 만들어서 무서워하는 것처럼 바보는 없다. 문둥이같은 사람을 만나도 놀라지도 도망가지도 말고 천연스럽게만 굴어라. 좋은거고 나쁜 거고 한눈팔지 말고 앞만 보고 걷는 게 수다.
엄마의 말투는 늘 너무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차 있어서 정말 옳은소리도 우격다짐으로 들렸다. 나는 그게 싫었다. 그러나 문둥이 얘기를 할때는 엄마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래도 나는엄마가 타일러 준 여러 가지 중에서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나는 왠지문둥이를 만나는 게 겁나지 않았다. 학교길을 답사하고 나서 본격적으로시험공부가 시작됐다. 넌 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도 엄마는하루에도 몇 번씩 예상문제를 만들어 가지고 나를 못 살게 굴었다.
이름쓰기, 수세기, 시계 보기, 더하기, 빼기 따위였다.
다 잘 했지만 내가 제일 싫은 건 주소를 두 개 외는 거였다. 엄마가처음 가르쳐 준 주소는 마땅히 기류계를 옮긴 사직동 주소였다. 나는그까짓 거 금방 외웠다. 그걸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엄마는 갑자기 내가길을 잃었을 때 그 주소를 대면 큰일이다 싶었나 보다. 현저동 집 주소도외울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켰다. 번지에다 호수까지 달린 긴 거였지만나불나불 뭐든지 암기를 잘 할 나이였으니 그 또한 어려울 게 없었는데도엄마의 걱정은 좀 지나쳤다. 필시 주소를 속여서 입학원서를 낸 게 양심에걸리는 순박함 때문이었겠지만, 두 주소를 금방 외자 이번엔 또 시험을 칠때 헷갈려서 잘못 말할까봐 근심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순전히 당신이안심하기 위해 나를 들볶았다. 가만히 있다가 불시에 "너 어디 살지? 느이집 어디야? 넌 지금 길을 잃은 거다."
그러면 난 현저동 주소를 대야 했다. 반대로 "느이 집 어디냐? 넌 지금선생님 앞에서 시험을 치고 있는 거야."
이렇게 물어 보면 사직동의 가짜 주소를 대야 했다. 엄마는 내가 행여나이 두 개의 주소를 헷갈릴까 봐 전전긍긍했다. 나는 문제없이 안 헷갈릴텐데도 엄마가 자꾸 그러니까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죽이 돼 버렸다.
엄마의 기습적인 질문에 잘못 대답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엄마는 저 맹추한테 괜히 주소를 두 개씩 가르쳐 주었다고 들입다후회를 하면서, 시험 날짜까지 현저동 주소는 아주 잊어버리고 있으라고했다. 잊어버리란다고 잊어버려지는 게 아니었다. 엄마가 그럴수록 그주소는 내 머릿속에 늘어붙었다. 사직동 주소는 물론이고 서울에서 그후에 거친 수많은 집의 주소를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현저동 46번지418호란 내 최초의 주소는 여태껏 안 잊어버리고 있다.
시험에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주소 때문에 머릿속이고 암기력이고엉망이 된 채 시험 날짜가 됐다. 엄마가 박적골로 데리러 올 때 해 가지고온 연두색 수단 두루마기를 입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도 새로 깎고 시험을치러 갔다. 주소 같은 건 물어 보지도 않았다. 바둑알을 네 개와 세 개로따로 놓고 모두 몇 개냐고 물었고, 신사와 학생이 서 있는 그림과중절모와 학생모가 있는 그림을 각각 보여 주면서 각자에게 맞는 모자를골라 보라고 했다. 그리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그림을 놓고 지금 바람이어디서 어디로 불고 있느냐고도 물었다. 문제를 세 개 내줬는데 나는 그중에서 두 개밖에 못 맞혔다. 바람이 연기가 나부끼는 반대 방향으로분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엄마는 주소를 안 물어 봤단 소리에 일단 안심을 하고 나서, 그래도틀린 문제가 나오자 실망이 여간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고단정을 했으면 그만이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 두루마기 자락,운동장 깃대 맨 꼭대기에 꼿힌 일본 국기 등을 맹렬하게 손가락질하면서"시방 바람이 어디로 부냐? 응 어디로 불어? 시상에, 그것도 모르다니떨어져 싸다 싸."
이러면서 분해했다. 운동장이 엄청나게 넓고 주위에 인가가 없었던매동학교 운동장엔 그날따라 왜 그렇게 바람이 세찼던지, 그날 저녁에엄마는 오빠를 붙들고도 내가 떨어진 걸 분해했다. "뚜껑은 열어 봐야알죠."
소학교를 열 살이나 돼서 보내서 아직 중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나하고나이 차이가 많이 지는 오빠는 과묵하고 사려 깊었다.
합격이 됐나 안 됐나는 엽서로 통지가 오게 돼 있었다. 물론 사직동가짜 주소로 오든지 안 오든지 할 것이다. 엽서가 오고도 남을 만큼넉넉하게 기다리고 나서 엄마는 시험 보던 날처럼 나에게 수단 두루마기를입혀 가지고 사직동 친척 집으로 갔다. 주소 때문에 지긋지긋하던 집을나는 그때 처음 가 보았다. 가면서 엄마는 여기가 바로 문 안이라는 것을누누이 강조했다.
과연 현저동보다 훨씬 정돈되고 아늑한 동네였다. 무엇보다도 집이비탈에 붙어 있지 않고 평지에 자리잡은 게 마음에 들었다. 친척 집은길게 바깥채가 길로 면해 있고 안채는 중문 안에 따로 있었다. 바깥채도기와집이긴 한데 시골집의 사랑채하곤 딴판이었다. 너절하고 구질구질하고냄새가 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거긴 사랑채가 아니라 행랑채라고 했다.
행랑채에 딸린 골목 같은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행랑 어멈이 엄마를보자 반색을 하면서 일어섰다. "아씨, 좋으시겠어요, 아가씨가 붙었대요."
그러면서 연방 굽실거렸다. 우리가 아씨니 아가씨니 하는 높임말로대접받기도 처음이었지만 엄마가 그렇게 거만하게 구는 걸 보기도처음이었다. "웬 수선인가, 그까짓 소학교 붙은 걸 가지고."
엄마는 갑자기 도도하게 굴었다. 중문을 들어가니까 딴 세상 같았다어른어른 비치는 유리문이 달린 대청마루는 화강암 깨끗한 댓 돌 위에높이 솟아 있고, 정갈하게 비질한 마당가엔 수도꼭지와 양회로 싸바른네모난 물확이 보였다. 물통을 들고 따라 들어온 행랑 어멈이 물확에서넘치는 물을 길어 담았다.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꼭지가 제일 신기하고부러웠다.
현저동엔 수도 있는 집이 없었다. 집집마다 물을 사 먹거나 길어다먹었다. 그 높은 층층다리 밑 평지에 있는 공동수도에는 언제나 두 개씩짝을 지은 물통 행렬이 끝도 없이 줄 서고 있곤 했다. 물통들은 다생철통으로 만든 거고 물지게에 늘어진 쇠고리가 잘걸리도록 홈이 파인나무 손잡이가 달린 거였지만, 물장수 물통과 손수 길어 먹는 집 물통이달랐다. 직업적 물장수 물통은 석유초롱하고 같은 규격의 네모난 통이었고,손수 길어 먹는 집 물통은 물장수 물통의 갑절은 들어가게 생긴원통형이었다. 통의 크기에 관계없이 물값은 한 지게에 일 전씩이지만하루 아침에 몇십 집씩 물을 공급해야 하는 물장수는 될 수 있으면 힘을덜 들이고 싶었을 것이고 제 집 물은 같은 값이면 많이 가지고 싶었을것이다.
엄마도 물지게를 질 줄 몰라 하루 한 지게씩 물장수 물을 대 먹고있었다. 먹는 물만이 아니라 씻고 빠는 모든 걸 그 물 두 초롱에 의지해야했다. 서울 오고 나서 달포 남짓 동안에 셋방살이 법도 다음으로 많이들은 잔소리가 물 아껴 쓰는 법이었다. 세숫물 버리지 말고 거기다 발닦아라. 발 닦은 물 버리지 말고 거기다 걸레 빨아라. 걸레 빤 물도 버리지말고 놔 둬라. 이따가 마당 쓸 때 뿌릴 거니까. 이런 식이었다. 집 앞골목을 엄마는 마당이라고 했고 제 집 마당도 안 쓰는 동네 사람들을흉보기 위해서 엄마는 매일매일 마당을 쓸었다. 엄마가 아까워하면서 퍼준 내 세숫물이 만약 내 실수로 최종단계까지 못 가고 찍 버려지기라도한다면 엄마는 중대한 손재수라도 당한 것처럼 혀를 차곤 했다.
우리가 부엌으로 쓰는 대문간 한귀퉁이엔 물독이 땅에 묻혀 있었다.
물장수는 어스름 새벽에 왔다. 안집도 물장수 말을 먹으니까 누가 미리빗장을 때 놓는지 훔쳐 갈 것도 없는 집구석이니까 밤새도록 따놓고자는지 대문 여는 소리는 못 듣고 철썩 하고 독에 물 붓는 소리에 잠이깨곤 했다. 철썩, 철썩 하고 두 번 나는 물소리는 어떤 궁핍감보다도실감나게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두 바가지의 물로 하루를 살아야하다니, 물을 다 아껴야 한다는 건 시골선 상상도 못 했었다.
사랑마당과 뒷간이 있는 텃밭사이를 흐르는 개울은 뒤란 개나리 울타리밖을 휘돌아 내려오는 거였다. 뒤란은 또한 안방 머리 맡이기도 해서장마철엔 물소리가 콸콸 시끄럽게 들렸다. 보통 때는 조잘대는 것처럼유쾌하게 들릴 적도 있고, 졸졸졸 귀기울여도 들릴락 말락 할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물이 넘치거나 마른 적은 없었다. 겨울에도 가장자리만 얼고가운데는 쉬지 않고 흘렀다. 가장자리의 얼음장은 별의별 신기한 무늬로아롱거렸었다. 추운 줄도 모르고 환상적인 모양의 살얼음을 깨트려서 입속에 넣고 아삭거리면 핏줄까지 씻겨 내려가는 것처럼 상쾌했다.
먹는 물을 따로 엄마나 숙모가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우물에서 기어왔지만 놀다가 목마르면 개울물을 손바닥으로 길어 먹길 잘 했다. 빨래도거기서 하고 감자나 고구마도 거기서 깎고, 푸성귀도 거기서 씻었다. 물론뒷간에 갔다 오다 손도 거기서 닦았다. 무슨 짓을 해도 새 물이란 걸의심하지 않았으니까 더럽다는 생각도 없었다. 어디를 가나 물 흐르는소리가 따라다녔다.
물도 아껴야 한다는 걸 배우는 건 겨울에 더운물로 세수할 때뿐이었다.
큰 가마솥에다 한 솥씩 물을 데우면서도 대야로 하나 가득 물을 퍼내면야단을 맞았다. 그렇게 헤프게 세수해 버릇하다 죽으면 이담에 저승에서물을 대야로 하나씩 들여마시는 벌을 받는다고 좀 독한 야단이었다. 이불속에서 하루에 단 한 번 철썩하고 나는 물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내속에서도 물기가 말라, 명태가 말라 북어가 되듯이 나 아닌 다른 게 돼가는 것 같은 황당한 공포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수돗물이 콸콸 나오는 사직동 집 안주인은 엄마를 대모라고 부르면서반갑게 맞아 주었다. 엄마만큼 나이가 들어 보이는 데도 자주 고름이 달린미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나한테도 "아주머이 학교 붙어서 얼마나좋우." 하고 말을 놓지 않았다. 나중에 안 거지만 우리가 항렬이 높아 그여자가 엄마한테는 손자며느리뻘이 된다고 했다. 엄마는 하게를 했고, 그여자는 존대말을 했다. 그 여자는 행랑어멈을 불러 더운 점심을 지으라고이르고 학교에서 왔다는 입학 통지서를 엄마 앞에 꺼내 놓았다. 엄마는 그엽서를 쉰 떡 보듯 제대로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떨어지길 바랐는데붙었지 뭔가."
달갑잖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엄마가 왜 그렇게 속 다르고 겉 다르게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직동 친척은 펄쩍 뛰면서 그 동네서는유치원까지 나온 아이 중에서도 떨어진 애가 수두룩 하다고 나를 치켜세워주었다. 그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는, 그까짓거 떨어지면 공부할팔자가 아니거니 하고 시골로 내려 보내면 짐도 가벼워지고 여한도 없을것 같아 아무것도 안 가르쳐서 보냈는데도 붙었다고 또 한 번 속들여다뵈는 거짓말을 했다. 그 법석을 떨고도 마치 떨어지라고 고사라도지낸 듯한 표정을 짓는 엄마를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 보았다.
행랑 어멈이 반듯하게 점심상을 차려 들여왔다. 상에 하나 가득 놓인하얀 그릇들이 하나같이 뚜껑이 덮여 있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면 반찬은조끔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콩자반도 여남은 알갱이, 조개젓이나북어무침도 딱 한 젓가락씩이었다. 배가 고픈데도 밥맛이 나지 않았다. 그여자가 엄마한테 바느질거리를 한 보따리 싸 주었다. 그 집 바느질 뿐아니라 그 여자가 여기저기 엄마의 바느질 솜씨를 선전해 모아 놓은거였다. "자네 신세가 많네 그려." 엄마는 간단하게 인사치레를 하면서도당당하려고 애쓰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런 어른들 사이에서 비켜나있고 싶었지만, 엄마는 그 여자와 여러 말을 했다. "아이고 대모 그런 걱정마시고 제가 저번에 말씀 드린 거나 생각해 보시라니까요." "기생 바느질말인가? 그 짓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올해부터 식구랑 학비가 늘어날생각을 하니 더운밥 찬밥 가릴 형편도 못되네. 말이 난 김에 자네가그쪽에 연줄을 좀 터 주게." "대모, 잘 생각하셨어요. 말이야 바른 대로말이지, 여염집 바느질이 좀 까다로워요. 그것들은 맨 진솔 바느질에다입어서 편하고 동정 이나 맞으면 그만이지 깃이나 섶이 어떻게 생겨먹은게 잘 한 바느질인지도 분간을 못 한 대요. 타박 안 하고 품삯 후하면그만이지 망설일 게 뭐 있어요." "서울서 무슨 짓을 하길래 계집애까지데려다 공부를 시키냐는 시골 어른들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 어른들한테책잡힐 짓은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네." "아니, 기생질이라면 모를가. 기생바느질이 왜 책잡힐 일이래요?" "워낙 그런 양반들 아닌가." "염려 마세요.
못 할소리 하시면 제가 증인 설 테니까요." "천생 자네가 일거리를 알아봐줘야겠구면. 큰 덤터기 썼네." "오늘 가져가는 바느질 중에도 이 동네 사는소실 게 있거든요. 소실 근본이 다 그렇고 그렇잖아요. 기생 알음알이가많으니까 알아봐 달랠게요. 대모 바느질 솜씨를 마음에 들어하니까 잘 될거예요. 심부름은 행랑 어멈 시키면 되니까 대모가 기생 집까지 드나들진않아도 될 거예요."
어른들의 이런 뒷공론을 엿들은 덕에 합격 통지서 받은 날은 우울했다.
하나만 더 틀렸어도 떨어져서 엄마에게 그렇듯 어려운 짐을 지우진 않았을걸 후회가 됐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그전서부터도바느질품을 팔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반닫이 말고 작은 질화로와 반짇고리또한 방 안의 중요한 세간이었다. 한두 단씩 사다 때는 장작으로 겨우밥을 짓고 나서는 다 사위기 전에 얼른 화로에다 담고 인두로 꼭꼭 눌러놓앗다가 온종일 썼다. 인두질 안 하고는 바느질을 할 수 없었다.
기생 바느질을 하기 전에도 삯바느질로 들어오는 옷감들은 시골서 입던,무명에다 물감을 들인 것과는 댈 것도 아니게 부드럽고 고운 본견이었다.
엄마는 조각보에다 마름질하고 남은 예쁜 헝겊들을 가득 싸 놓고 있었다.
내가 심심해서 그런 걸 가지고 조각보 모으는 흉내라도 내려고 하면엄마는 질색을 하고 빼앗았다. 시골선 내 나이에 홈질이나 감침질 정도는다 했다. 제 치마 허리를 달 줄 아는 애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그까짓 건 배워서 뭐 하냐고 했다. "너는 공부를 많이 해서 신여성이 돼야한다."
오로지 이게 엄마의 신조였다. 나는 신여성이 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신여성이란 말은 개화기 때부터 생긴말이지만 엄마에겐 그때까지도 해득되지 못한, 그러나 매혹적인 그무엇이었다. 구식 여자들이 살아온 것과는 전혀 딴 운명을 살 수 있는가능성에 대한 엄마의 한 맺힌 매혹을 내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엄마의 피를 받고, 성질을 닮았는지는 모르지만 여자의 삶을 미처살아 보기 전이었다. 나에겐 당장의 자유가 더 아쉬웠다. 엄마는 안집애하고만 못 놀게 하는 게 아니라, 나가서 동네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것도질색이었다.
"너는 근지 있는 집 자식이다. 본데없이 자란 이 동네 아이들하고어울려 봤댔자 못된 물만 든다. 나가 놀지 마라."
엄마는 기생 바느질이나 하면서도 근지만 따졌다. 근지가 뭔지 잘은모르지만 신여성보다는 쉬웠다. 시골에서 행세깨나 하는 집안, 체면존중하면서 살아온 우리 집안의 생활방식을 말한다는 것 대강 눈치챌 수가있었다. 나도 내가 살던 생활방식이 그리웠고, 내가 이 동네 아이들하고는다르다는 느낌 때문에 그 뜻이 알기가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는왜 저럴까? 하고, 자기가 하는 일은 무조건 다 옳다고 믿는 엄마를 은근히한심하게 여길 꼬투리가 되기도 했다. 시골에 두고 온 우리의 뿌리와바탕을 자랑스러워할 때의 엄마는 시골 와서 식구들에게 자기의 서울사람됨을 은근히 과시하며 으스댈 때하고 똑같았기 때문이다. 시골선서울을 핑계로 으스대고, 서울선 시골을 핑계로 잘난 척할 수 있는 엄마의두 얼굴은 나를 혼란스럽게도 했지만, 나만 아는 엄마의 약점이기도 했다.
엄마가 나를 줄창 반짇고리 옆에 붙들어 두는 건 불가능했다.
삯바느질거리는 그치지 않았지만 다 된 걸 사직동 친척 집까지 가지고가는 것도 엄마의 일이었다. 행랑 어멈은 기생 집까지만 심부름을 해 주는것이지 현저동까지 와 주는 건 아니었다. 사직동 친척 집이 중간지점이었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그 친척의 신세가 태산 같다고 했다.
엄마가 없는 사이에 여덟 살 먹은 아이가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을 순없었다. 차츰 바깥 맛을 알게 되었다. 이웃엔 땜장이 집도 있고, 아버지는지게꾼이고 엄마는 체장수인 집도 있고, 굴뚝장이집도 있었다. 체장수엄마는 키가 작았다. 구멍이 굵은 어레미로부터 가는 체까지 이삼십 개는돼 보이는 체를 쳇바퀴에 달린 고리로 둥글게 이어서 양쪽 어깨에 걸고나갔다. 둥근 쳇바퀴를 다시 둥글게 연결한 무수한 동그라미 사이에파묻혀 그녀의 머리는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그 집 딸은 나보다 큰데학교에 안 다녔다.
체장수는 말없이 나가는데 굴뚝 장이는 대문간을 나설 때부터 징을쳤다. 그도 어깨에다 연장을 메고 다녔는데, 둘둘 말았다가 펼 수 있도록대나무를 길게 쪼갠 것이었다. 그 끝엔 사람 머리통만한 다박솔이 달려있었는데, 얼마나 여러 번 굴뚝에서 아궁이까지 드나들었는지솔이라기보다는 그을음 덩어리처럼 보였다. 굴뚝장이는 또 그 다박솔을 한줌 뚝 떼어다 붙인 것처럼 새카만 수염을 달고 있어 입이 잘 보이지않았다. 그래서 그가 입 대신 징을 사용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말고도 그 동네는 굴뚝장이가 잘 지나다녔는데 버젓이 입 달린굴뚝장이도 역시 말없이 징만 치고 다니는 게 참 이상해 보였다. 온통새까만 그들의 몸에서 놋쇠로 된 징은 유일하게 빛나는 물건이었다.
그들이 솜방망이 같은 걸로 치는 징소리는 공통적으로 은은하고도 여운이길었다. 아무도 조급하게 치지 않고 여운이 하늘까지 닿을 때까지기다렸다가 무디게 한 번씩 쳤다.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시골밭머리에서 가을바람에 너울대는 수수이삭을 바라보았을 때와 같은 비애를맛보곤 했다. 굴뚝장이 집엔 아이가 많았다. 그 밖에 뭘 해 먹고 사는지모르겠는 집 아이들도 골목에 나가면 많았다.
어느 날 어떤 아이가 나보고 "시골때기 꼴때기."라고 놀리자 다른아이들도 일제히 따라서 같은 소리를 합창했다. 나는 그 애들이 나를 놀릴수 있는 근거가 되는 시골이란 데와 그 애들이 현재 살고 있는 형편을비교하면서 참 별꼴 다 본다고 가소롭게 생각했다. 나도 어느 틈에 엄마의속들여다보이는 교만을 그대로 닮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애들 앞에서울긴 싫고 울지 않으려면 엄마한테 들은 근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시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뻔뻔스러워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럿이 모이면 괜히 나를 따돌리고 놀려먹고 하던 아이도 하나씩 만나면"노올자."라고 말을 시켰다. 서울 아이들의 노올자 소리는 참으로 듣기좋았다. 우리 시골 말은 어미가 좀 다를 뿐 억양은 서울 말과 거의같것만도 그렇게 달콤하고 감칠맛 있게 노올자 소리를 발음할 수는없었다. 그러나 노올자에 동의하고 동무가 됐다고 해서 할 만한 놀이가있는 건 아니었다. 사방치기를 할 만한 평지조차 없었다.
어느 날은 길에서 주운 석필 조각으로 땅바닥이나 남의 집 담벼락에다뭔가를 그리면서 같이 놀던 동무가 이상한 제안을 했다. 엉덩이를 까고앉아 서로의 성기를 땅바닥에다 그리는 일이었다. 왜 그런 기상천외의놀이를 했을까. 너무 심심해서였다. 좀 커서 공중변소 같은 데서 성기를비롯한 이상한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그때 생각이 나면서 호기심이나혐오감보다는 아아, 얼마나 심심했으면, 하고 안쓰러워지곤 했다.
우리는 서로 사생하듯이 성기를 그리다가 익숙해진 솜씨를 우리 집담벼락에까지 써먹다가 엄마한테 들켜 지독하게 얻어맞았다. 다시는 그아이하고 놀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지만 나는 다시 엄마 몰래 그 아이하고놀았다. 엄마는 나를 때리면서 그 아이 탓만 했다. 나는 그 아이하고 같이논 것이지 그 아이가 시키는 대로 한 게 결코 아니었다. 나는 매보다도 내동무뿐 아니라 동무네 부모까지 싸잡아 엄마한테 욕을 먹는 게 참을 수가없었다.
하루는 엄마 없는 사이에 몰래 그 아이하고 동네를 벗어났다. 그 애가끄는 대로 복잡한 골목과 층층다리를 지나 전차소리가 들리는 데까지 오자나는 갑자기 불안해져서 물었다.
"너 느이 집 주소 아니?"
"그까짓 건 알아서 뭐 하게?"
"집 잊어버릴까 봐."
"걱정마, 나만 놓치지마. 알았지?"
그러면서 그 아이가 나하고 어깨동무를 했다. 어깨동무도 시골선 못 해본 거였다. 나보다 한 뼘은 큰 아이하고 어깨동무를 하니까 마음이 저절로활발해졌다. 그 아이는 믿음직스러웠다. 엄마는 알지도 못하고 그 아이를못된 애 취급하고 아직도 노는지 가끔 물어 보곤 했다.
우리는 발을 맞춰 씩씩하게 걸었다. 전찻길을 건넜다. 너른 마당이나오고, 십 리나 되게 긴 붉은 담장이 너른 마당보다 한 단 높은 지대에바라보였다. 그 담장은 끝이 안 보이게 길기도 했지만 또한 높기도 해서담장 안에 무엇이 있는지 엿본다는 건 엄두도 안 났다.
담장을 둘러싸고 큰 길이 나 있고 너른 마당은 그 큰길보다 몇길아래여서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게 돼 있었다. 계단은 현저동집 올라가는계단보다 넓고 반듯하고 양쪽엔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홈이 파져 있었다.
아이들 궁둥이가 들어가기 알맞은 너비의 양회로 싸바른 홈은반들반들했다. 아이들이 여럿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나도 같이 간 동무와 신나게 미끄럼을 타고 놀았다. 얼마나 재미난지 해저무는 줄도 몰랐다. 여북해야 처음으로 서울 온 보람을 느낄 만큼, 시골에있었으면 맛보지 못했을 새로운 재미였다. 미끄러져 내려오기 위해선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오라가면 붉은 담장을 에워싼 큰길 건너로바로 높다란 철문이 보였다. 아무도 넘을 엄두를 못 낼 것처럼 높고도무섭게 생긴 철문이건만 양쪽에 칼 찬 순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내가순사를 보고 주춤할 때마다 내 동무는 안 잡아갈 테니 겁내지 말라고했지만, 미끄러져 내려올 때마다 순사가 덜미를 잡는 것처럼 등골이오싹오싹했는데 그 맛이 미끄럼 타는 재미를 더했다.
한번은 아무도 안 다니던 그 넓은 길을 휘돌아 한 무리의 이상한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게 보였다. 앞뒤를 칼 찬 순사가 지키는 그 행렬은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불그죽죽한 게 꼭 핏자국이 말라붙은 것같은 기분 나쁜 빛깔의 옷이었다. 가까이 보니 발에다 쇠사슬까지 차고있었다. 쇠사슬을 보자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내 동무도현저하게 두려워하는 얼굴이 되더니 발로 세 번 땅을 탕탕탕 구르고 나서침을 퉤 뱉었다. 그러곤 나더러도 빨리 지가 하는 대로 따라 하라고말했다. 그렇게 안하면 부정을 탄다는 것이었다. 나는 엉겁결에 따라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본 건 전중이고, 전중이를 봤으니까 부정을 탄 거고,부정을 탔으니까 그런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는 설명은 그 자리를 피해발리 집으로 오는 도중에 들었다. 전중이가 뭔지에 대해선 그 아이도 저높은 담장 안에 사는 나쁜 사람이라는 것 밖엔 몰랐다. 발목에서 철커덕소리를 내던 쇠사슬을 생각하면 그걸 본 것도 나쁜 짓 같은 생각이들었다. 동무가 가르쳐 준 대로 침도 뱉고 발도 굴렀지만 두렵고 께름칙한마음은 가시지 않아 엄마에게 전중이를 본 얘기를 했다. 미끄럼 재미에팔려 풍차바지 대신 엄마가 사준 신식 내복 궁둥이가 해지는 줄도몰랐다는 건 매맞을 짓이라는 각오가 돼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메리야스 해뜨린 것보다 감옥소 마당에서 논 걸 더큰일로 여기는 듯했다. 노발대발하고 나서 감옥소 앞동네에 사는 처지를장탄식하는 눈물까지 비치는 게 아닌가. 그러고 나서 다시 감옥소마당에서 놀면 당장 시골로 쫓아 버리겠다고 위협을 했다. 나는 다시는거기서 안 놀겠다고 맹세를 했다. 시골로 쫓겨 나는 건 무섭지 않았지만엄마가 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기가 셌다. 시어머니한테 같은 잔소리를 듣고도 숙모들은부뚜막에서 눈물을 짰지만 엄마는 웃기는 소리로 단박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딸을 감옥소 마당에서 놀릴 수밖에 없는 처지를 엄마가그렇게까지 수치스럽고 비참하게 여긴다는 것은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그아이하고 다시는 동무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고분고분하게 했다.
할아버지가 시골서 동네 사람들은 상것들이라고 업신여긴 것보다 엄마는한술 더 떠서 바닥 상것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쌈박질이 그치지 않는 동네였다. 내외간에도 이년, 저놈하고 싸우다가나중엔 길거리로 싸움판을 옮겨 "아이고, 나 죽소. 이놈이 사람 잡네. 이동네엔 사람도 안 사나?" 하면서 동네 사람까지 참여를 시키려 들었다.
그럴 때 엄마는 인두판 위에서 기생 저고리의 간드러진 선을 자신 있게인두질하면서 "저런 바닥 상것들 봤나, 언제나 이 숭한 동네를 면할고."
나직하게 탄식하곤 했다. 엄마는 그럴 때, 우리야말로 겨우 기생들 덕에먹고 산다는 걸 잠시 깜박한 것일까.
엄마의 모순은 그뿐이 아니었다. 체장수네, 굴뚝장이네, 미장이네,땜장이네 등 동네 사람들을 대하는 엄마의 태도는 속으로는 무시하면서겉으로는 지나치게 예절발라, 깊은 상종은 안 하겠다는 게 은연중에나타났지만 그들보다 주금도 나을 것이 없는 물장수 한테만은 예외적으로굴었다.
물장수는 밤새도록 일하고 대낮에는 자는지 아무튼 밝은 날 그들을 본적이 없었다. 그들도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으니까, 손수 길어 먹는사람들의 긴 줄을 피해 능률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물장수 물을 대 먹는 집에서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일이 다달이 품삯 주는것말고 또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건 돌아가면서 저녁밥을 한 끼씩 먹이는일이었다. 단골이 차례로 먹이는 거니까 대개 한 달에 한 번 꼴로돌아왔다.
엄마는 그날 물장수를 완전히 상객 취급을 했다. 그전에도 엄마는물장수한테만은 바닥 상것이라는 소리를 안 했지만 상객 취급은 좀유난스러워 보였다. 물장수만은 하대하면 안 된다는 관례가 있는 것도아니라는 것은 안집에서 물장수 밥 먹이는 걸 봐도 알 수가 있었다.
일부러 잡곡을 많이 둔 밥을 고봉으로 퍼담고 짠지 쪼가리에다 된장뚝배기면 다였다. 그것도 마루나 방에 차려 주는 법이 없이 마당이나 부엌바닥에 거적을 깔고 먹였다.
엄마는 남이야 그러건 말건 장을 봐다가 이것저것 나물을 무치고 고소한기름냄새를 풍기며 부침질을 했다. 그 궁색한 살림에 고기가 다 들어왔다.
그러고는 이밥을 한 솥 지어서 큰 밥그릇에 푸는데, 아주 정확하게 밥그릇위에다 밥그릇을 하나 더 엎어 높은 것만큼 펐다. 그건 아마 아무도흉내낼 수 없는 엄마만의 솜씨일 듯 싶었다. 그렇게 차리려니 아침부터잔칫집 같은 기분이 났다.
하긴 시골집 가풍도 남을 툭하면 무시하긴 잘 했어도 음식 층하는질색이었다. 음식을 층하해서 먹이는 집치고 안 망하는 것 못 봤다는 식의심한 말로 할아버지가 안식구들을 경계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물장수 상을 오빠의 생일상보다 더 차린 다는 것도 뒤바뀐 것이긴하지만 음식 층하였다.
그렇게 잘 차린 상이면 우리가 부엌으로 쓰는 대문간에서 먹여도좋으련만 방에다 방석을 갈고 불러들여 물장수를 몸둘 바를 모르게 했다.
엄마도 마루쯤이 적당한 대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툇마루는 상도 놓을 수없이 좁았다. 늙수그레하지만 건강한 물장수가 들어앉으면 방 안이 가득찼다. 내외법이 지엄할 때였으므로 어린 눈에도 망측해 보였다. 밥뿐만아니라 뭐든지 푸짐하게 담은 반찬을 물장수는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그러면 엄마는 그 그릇들을 말끔히 비워 딴 그릇에 담아 목판에 받치고조각조각 모은 상보를 덮어서 그가 가져가게 했다. 물장수 상은 워낙그렇게 하는 거라고 했다. 배불리 먹고도 많이 남겨 갈 수 있도록 일부러그렇게 넉넉하게 장만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물장수는 황송해서 어쩔줄을 모르면서 물 많이 쓸 일이 생기면 미리 말해 달라고 했다. 거저로 한지게 더 부어 주겠다는 뜻인데 엄마는 안 그럴 게 뻔했다.
내가 보기에도 엄마는 물장수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쥐뿔도 없이거만하기만 한 엄마가 물장수만은 대등하게 대하는 것 이상이었다.
존경까지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여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나가 놀라는 엄마 말까지 곡해를 하고 방구석에서 꼼짝 않고 물장수가 밥먹는 걸 빤히 노려보았다. 나는 내 영역이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고생각했으므로 온몸으로 그 도전에 대항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내 의혹은 곧 풀렸다. 엄마가 무슨 말 끝엔가물장수를 존경할 뿐 아니라 부러워하고 있는 까닭을 말했다. 그는 물장수노릇해서 아들을 전문학교까지 보낸다고 했다.
"그 영감이 그래봬도 아들을 사각모까지 씌운 생각을 하면 난 절로우러러뵈더라."
그러면서 한숨을 쉬었다. 상고가 엄마가 죽도록 바늘품을 팔아 시킬 수있는 한계라는 게 그렇게 한심스러웠나 보다. 나는 이상한 의혹이 풀려홀가분했지만 한편 우리 엄마는 참 꿈도 크다고 딱한 생각이 들었다.
반찬 하나 안 남기고 깨끗이 먹어 치운 상을 보고 물장수는 상이라고말하는 걸 요새도 흔히 듣게 되는데, 그런 비유가 물장수는 워낙 먹성이좋은 데서 유래된 건지, 먹다 남은 걸 다 싸 가지고 가던 관습에서 유래된건지, 별것도 아닌 걸 궁금해하는 버릇이 있다. 그거야말로 나의 가장현저동 출신다운 의문인지도 모르겠다.


4. 동무 없는 아이
국민학교 입학식은 4월이었다. 나는 또 수단 두루마기를 입고 엄마손잡고 산을 넘어 학교에 갔다. 점잖은 동네 아이들이라 과연 우리 동네아이들하고는 달라 보였다. 예쁘장하고 깡똥한 양복으로 차려입은 애가대부분이었다. 학부형은 일 주일 동안만 따라 오라고 했다. 한 달 가량을교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에서 노래도 하고 유희도 하고 선생님 뒤를졸졸 따라다니면서 학교 시설물의 이름을 일본말로 익히는 연습도 했다.
제일 먼저 배운 일본말은 호안덴이었다. 호안덴은 운동장 우측 꽃나무를잘 가꾸어 놓은 화단 속에 있는 회색빛 작은 집이었다. 교문에 들어설 때,반드시 그쪽을 향해 절을 해야 하고 그 절은 선생님한테 하는 절보다 더많이 굽혀 몸을 직각으로 만드는 최경례라야 된다는 것도 배웠다. 그 집은창도 없고 문도 굳게 닫혀 있다가 경절날만 열렸다. 수없이 없이 식만있는 경절날이면 우리는 식을 하기 전에 먼저 황금빛 술이 달린 검정비로드 책상보로 장식한 단상으로부터 호안덴까지 양쪽으로 늘어서서기다렸다.
이윽고 까만 양복에 흰 장갑을 끼고 훈장까지 단 교장 선생님이 빛나는얼굴로 앞장을 서고 그 뒤로는 내빈이 몇 명 따라서 마침내 그 집 앞에이른다 그 엄엄한 행렬이 그 집으로 갈 때까지는 우리가 그냥 서 있어도되지만 그 집을 돌아나올 때는 벼락같이 "최경례."라는 구호가 떨어지고우리는 머리를 깊이 조아리고 그 높은 사람들의 구두 끝이나 겨우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나는 마치 시골집 터줏자리 속을 몰래 들여다볼 때처럼 옥죄는 마음으로살짝 머리를 들고 교장이 새카맣게 옻칠한 상자를 자기 논높이로 받들고걸어가는 걸 훔쳐 보았다. 식을 할 때 교장은 그 상자 안에 든 걸 펼쳐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그러니까 호안덴은 천황의 칙어를 넣어 두는 데였다. 천황의 칙어는일본말을 익힌 후에도 한마디도 못 알아듣게 어렵고 길었으며, 교장의식사는 더 길었다.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아이가 생길 정도로 지루한식이었지만 끝나면 모찌를 두 개씩 나누어 주었다. 그 재미로 주리 참듯영문 모를 식을 참아냈다.
호안덴 다음으로 우리가 곡 알아 둬야 할 일본말은 변소였다. 그리고선생님, 학교, 교실, 운동장, 동무, 몇 학년 몇 반 따위를 일본말로익히면서 한 달 동안을 운동장에서 선생님을 졸졸 따라 다녔다.
입학하자마자 조선말은 한마디도 못 쓰게 하고 눈에 보이는 사물과 행동을일본말로 반복해서 주입시켰다. 모든 사물이 거듭 태어났다. 나처럼일본말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하나도 없는 아이에겐 여간 힘든 시기가아니었다.
그러나 엄마는 글씨만 공부인 줄 알았다. "오늘도 글씬 안 썼냐?"하고물어 보고는 비싼 월사금 받고 아무것도 안 가르친다고 불만스러워했다.
월사금은 팔십 전이었다. 아이들은 거의 다 일원짜리 한 장하고저금통장하고 가지고 가서 거스름돈 이십전은 저금을 했다. 엄마는 팔십전씩만 주다가 내가 다달이 저금하는 아이들을 부러워하자 가금 구십 전씩줄 때도 있었다. 엄마가 월사금을 아까워한 동안은 그러나 선생님이조선말을 안 쓰고도 아이들을 통솔하고, 서로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가능할수 있도록 길들이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선생님은 예쁘고 향기로웠다. 엄마가 말하는 신여성이란 바로 저런여성이로구나, 딱 들어맞는 본보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누구나선생님을 따랐다. 운동장에서 반별로 우르르 몰려 다니는 동안 서로선생님 손을 잡으려고 아우성이었다. 예쁜 선생님은 마음씨도 고와어미닭을 종종종 따라 다니는 병아리 같은 아이들에게 그의 관심과 애정을공평하게 분배하려고 무척 신경을 썼다. 그래서 손 잡은 아이, 치마꼬리잡은 아이를 자주 바꾸어 멀리 있는 아이를 가까이 부르곤 했다.
왠지 나는 선생님의 그런 세심한 안배에도 끼지 못하고 늘 가장 자리에처져 있었다. 가장자리에선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잘 보였고 선생님이아무리 공평하려고 노력해도 선생님 손이나 치맛자락을 잡을 수 있는아이는 정해져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그런 애들은 대개 예쁘고똑똑하고 잘 까불었다. 시골이나 현저동에서 사귄 동무들하고는 다른 진짜서울 아이들이었다.
나는 중심부의 그런 애들을 입을 해 벌리고 침을 흘릴 정도로부러워하고 시기도 했지만 닮을 자신은 없었다. 사람에겐 누구나 죽었다살아나도 흉내 못 낼 것 같은 게 있는 법인데 나에겐 그게 집단의 중심이되는 것이었다.
교실에 들어와 교과서에서 제일 먼저 배운 건 "봄이 왔네, 봄이 왔네.
어디에 왔나? 산에 왔네, 들에도 왔네." 하는 일본말이었다. 교과서엔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노래로도 배웠다. 사직공원에선 이미 벚꽃이지고 있었고, 나는 매일 산을 넘어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진짜 산과진짜 봄에 갈증을 느꼈다.
내가 넘어 다니는 인왕산 자락에 쑥 하나 돋아나지 않았고, 바위가부스러진 것처럼 메마른 흙에선 겨우 아카시아가 악착같이 자라고 있었다.
아카시아는 우리 시골에선 한번도 못 보던 새로운 수종이어서 도무지 정이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나무 그늘에선 아무것도 자라고 잇지 않아 뻔한 길을 벗어나숲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유혹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산의 독특한향기도 없었고 새의 지저귐도 없었다. 문둥이도 만나지 못했다. 몰래나무를 해 가다 들킨 여자들은 틀림없이 현저동 여자들일 거라고생각하면서 나는 두려움과 수치감을 느꼈다.
통학길은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나를 문 안에 있는 학교에밀어 넣을 생각만 했지 같은 또래를 사귈 수 없는 게 얼마나 큰 불행감이된다는 걸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외로울 때마다 동무보다는 시골의뒷동산을 더 많이 그리워했다. 오래 가뭄이 든 것처럼 생기 없는 나무가듬성듬성 있을 뿐 맨땅을 드러낸 산이 너무도 이상했다.
나는 산도 들과 마찬가지로 무진장한 먹을 것을 생산한다고 믿었고,아이들하고 친한 먹을 것은 역시 나무 위보다는 그 그늘에 있다고 알고있었다. 우리 시골 동산엔 소나무도 잇었지만, 밤나무, 오리나무,도토리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등 갈잎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가을이면집집마다 겨울 땔감으로 마당에다 집채 만한 갈잎가리를 몇 동씩 만들어놓을 수가 있었다. 그래도 그 많은 잎들을 박박 긁어 내지는 못하는지해마다 쌓여 썩은 흙은 부드럽고 습기 차 온갖 풀과 나물과 버섯과 들꽃을키웠다. 물론 다 쓸 만한 풀만 자라는 건 아니었다.
뒷간 모퉁이에서 뒷동산으로 난 길엔 달개비가 쫙 깔려 있었다. 청아한아침이슬을 머금은 남빛 달개비꽃을 무참히 짓밟노라면 발은 저절로씻겨지고 상쾌한 환희가 수액처럼 땅에서 몸으로 옮아오게 돼 있다.
충동적인 기쁨에 겨워 달개비잎으로 피리를 만들면 여리고도 떨리는소리를 낸다.
그러나 동산으로 진입하기 전 등성이의 풀숲은 아이들 머리통이 겨우남실댈 만큼 극성스럽게 자랐다. 그런 풀숲에서 벗어 놓은 뱀의 허물을발견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허물도 있었지만, 혹시 산 속의신선이 내려왔다가 뒤가 마려워 끌러 놓은 허리띠가 아닐까 싶게 새하얀바탕에 무늬가 섬세한 허물도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 근처를 두릿두릿인적을 찾을 적도 있었다. 실상 신선이 살 만큼 거하거나 수려한 산도아니건만 그랬다.
일단 허물을 발견하면 집으로 걷어 가야 했다. 뱀 허물을 옷장 속에간직하면 재수가 좋다는 미신이 우리 마을엔 있었기 때문에 어른들한테산나물이나 버섯보다 더 환영을 받았다. 잘 자란 풀밭엔 으레 날카롭게날이 선 고약한 풀이 숨어 있게 마련이어서 뱀허물을 얻는 대신 종아리를난도질당하는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을 뒷동산은아기처럼 부드럽고 만만하면서도 신비와 생명력이 넘치고 있었다.
서울 아이들이 알기나 할까, 쫙 깔린 달개비꽃의 남색이 얼마나영롱하다는 걸. 그리고 달개비 이파리엔 얼마나 고운 소리가 숨어 있다는것을. 달개비 이파리의 도톰하고 반잘반질한 잎살을 손톱으로 조심스럽게긁어 내면 노방보다도 얇고 섬세한 잎맥만 남았다. 그 잎맥을 입술에서떨게 하면 소리가 나는데 나는 겨우 소리만 냈지만, 구슬픈 곡조를 붙일줄 아는 애도 있었다.
나는 숨넘어가는 늙은이처럼 헐벗고 정기 없는 산을 혼자서 매일 넘는메마른 고독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추억을 만들고, 서울 아이들이경멸할 구실을 찾았다. 사직공원에 벚꽃이 지고 나면 이윽고 온 산에비릿한 젖내를 풍기며 아카시아꽃이 피어났다. 아카시아꽃이 만개하자사내 아이들이 산에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냥질하듯 모질게 탐스러운가장귀를 꺾어서 꽃을 따 먹었다.
너무 큰 가장귀를 꺾으면 산림 감독이 뛰어나와 아이들 손목을 비틀어비명을 내지르게 했다. 그런 애들도 주로 못 사는 현저동 아이들이었다. 세끼 밥만으로는 온종일 입이 궁금할 나이이기도 했지만 감독한테 들켜서도망다니고 야단맞는 재미에 더 그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한바탕휩쓸고 지나가면 꽃들이 넝마처럼 시든 아카시아 가장귀가 여기저기널브러져 있었다.
아카시아꽃도 처음 보는 꽃이려니와 서울 아이들도 자연에서 곧장 먹을걸 취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꽃을 통해서였다. 잘 먹는 아이는 송이째들고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따 먹듯이 차례차례 맛있게 먹어 들어갔다.
나도 누가 볼세라 몰래 그 꽃을 한 송이 먹어 보았더니 비릿하고들척지근했다. 그리고는 헛구역질이 났다. 무언가로 입가심을 해야 들뜬비위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나는 불현 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 안에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 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그만일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상처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산 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나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초여름에 가정방문이 있었다. 엄마는 우리 남매에게 완벽한 정직을요구했고,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정직 교육에가장 역점을 두는 듯했다. 수신교과서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도 천황에대한 충성 다음이 정직이었다. 거짓말을 시킨 아이가 선생님에게 가장 큰수모를 받았다. 물건이나 돈을 주웠을 때 학교에선 선생님에게, 학교밖에서는 파출소에 갖다 주어야 한다는 것도 반복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엄마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엄마는 비웃는 것처럼 말했다.
"너는 떨어진 물건을 보고도 못 본 척해라. 줍긴 왜 주워. 떨어트린사람은 되짚어오게 마련이니까 그 사람이 찾아가게 그냥 놔두면 될걸.
잘난 척하고 싶은 사람이나 파출소나 선생님한테 갖다바치는 거란다."
아주 그럴 듯한 말이었지만 주인이 찾으러 오기 전에 딴 사람이 집어가면 어떻게 하냐고 당연한 걱정을 하면, 엄마는 그건 남의 것 가져가는사람의 잘못이니까 우리가 그것까지 상관할 거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엄마가 꿈꾼 건 황금보따리를 떨어트렸다가도 제자리에서 도로 찾을 수있는 이상 사회였을까? 아니면 선행의 이기주의였을까? 여기선 그게중요한 게 아니라, 정직의 완벽주의가 거짓말까지도 완벽하게 하려는 게문제였다.
엄마는 내 기류계를 가짜로 옮겨 원하는 학교에 집어넣었으면 그만이지,그걸 가정방문 때까지 밀고 나가려고 했다. 아마 중간에라도 탄로가 나면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촌사람다운 고지식한 우려 때문에 그런 거겠지만,나는 엄마의 그런 이중성에 맞장구치기가 지겨웠다. 그만하고 싶었다.
엄마는 학교 생활에 대해 뭘 너무 모르면서 그날 하루만 때우면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직동 방면을 도는 날은 미리 정해졌기때문에 엄마는 그날만 그집 안주인 노릇을 하기로 친척 집의 양해를구했다.
그날은 사직동 방면 아이들만 교실에 남아 있다가 선생님하고 같이하교를 했다. 그 애들은 이웃해 살거나 등하교길에 만나는 아이들이라서로 누구 집이 어디라는 것도 대강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가까운 순서로순번을 짜는데 나는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으로 처졌다. 교실에서도존재 없는 아이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다가 어떤 아이가 쟤는 우리동네서 처음 보는 아이라고 하자, 딴 아이들도 그래그래 하면서 나를이상한 눈으로 흘끗거렸다. 그 아이들과는 딴판인 내 촌스러운 복장이 그말 한마디로 이단시 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나는 재빨리 시골서 이사온 지 얼마 안돼서 그럴 거라고 꾸며 댔다.
그 고비는 그렇게 얼버무렸는데 맨 나중까지 남은 애가 우리 친척 집바로 이웃이었다. 그애는 영악하고 상냥하게 생긴 애였는데 내일서부터학교 갈 때 서로 불러서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안 돼, 우린 내일 모레또 이사 갈 거야."라고 거짓말에다 거짓말을 덧칠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친척 집 대청마루에 높이 앉아 선생님을 맞았고행랑 어멈이 화채를 은빛으로 닦은 놋쟁반에다 받쳐 내왔다. 그날을무사히 넘긴 엄마는 안도의 숨을 쉬었지만 친척 집 옆에 산다는 아이는나에게 오랫동안 화근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애 앞에서 기를 못 폈다. 그 애가 시키는 심부름은뭐든지 했다. 고무줄을 나더러는 잡고만 있게 하고 혼자서만 깡충깡충뛰어넘는 건 약과였다. 신을 괜히 벗어던지고 나보고 주워 오라고명령하면 별 수 없이 주워 왔다. 그 애는 그걸 즐겼고 아이들 사이에선내가 그 애의 꼬붕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 애가 정말 내가 주소를 속인 걸큰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군림한 건지, 내 자격지심으로 괜히주눅이 들었기 때문에 그 애한테 만만하게 보인 건지, 어느 것이먼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아이들 사회에서 그런 주종관계가 일단 성립되면 그걸뒤바꾸기는 쉽지 않다. 나는 학교 생활이 지옥 같았고, 집에 와도 심심해서몸이 비비 꼬였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자연히 우리 동네 학교 다니는아이들끼리만 몰려다녔다. 산까지 넘어 문 안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중뿔난 시골뜨기를 이단시했다.
매동학교로 넘어가는 방향 말고, 우리 동네가 뻗어올라간 쪽으로 비탈을더 올라가면 인가가 끝나고 바위산이 나온다. 사람들은 거기를 선바위라고했고 선바위에서 물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 오른쪽으로는 굿당이나오고 건너쪽엔 사람들이 신령한 바위라고 믿는 형제바위가 보였다.
형제바위는 누가 보기에도 신령해 보였다. 뒤에 있는 절벽과는 따로 두사람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형상의 거대한 바위였다.
그 앞에는 뭔가를 비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고, 굿당에 큰 굿이 들었을때도 거기다 먼저 고수레를 했기 때문에 그 앞엔 떡부스러기가 늘 널려있었다.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자지러진 풍악소리만 나면 엉덩춤을 추면서굿당으로 치닫는 게 취미랄까, 심심한 나날에 돌파구가 되었다.
나에겐 굿 구경은 신기한 게 아니라 익숙한 거였다. 박적골은 유명한무속의 본산인 덕물산과 멀지 않았다. 최영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고,거기서 삼 년에 한 번씩 타지방 무당까지 많이 모여서 하는 큰 굿은유명했다. 그런 전국적인 굿말고도 무당집이 많이 모여 있는 산이니까개성 부자들이 재수를 비는 크고 작은 굿이 그치지 않았다.
최영 장군이 생전에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가르쳤건 말건부자들은 최영 장군에게 돈 더 벌게 해 달라고 성대한 굿으로 아첨하고빌었다. 큰 굿이 든다는 소문은 상관없는 사람까지를 들쑤시는마력이있었다. 남자들이 장사하러 외지에 나가 있는 집이 많기 때문에무꾸리들도 잘 다녔다.
농가에서도 설 쇠고 나서 보름 안에 일 년 신수를 보러 가는 건기본이었다. 정확하게 담당구역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몇 개 동네에 한집씩 동네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건사해 줄 무당집이 있게 마련이었다.
박적골엔 무당집이 없었기 때문에 딴 동네까지 가야 했다.
새해에 신수점 보러 갈 때는 쌀을 두어 됫박씩 자루에 담아 이고 갔다.
서로 연통을 해서 같이 갔기 때문에 그만그만한 쌀자루를 인 여자들이부옇게 동구 밖으로 몰려나가는 걸 보면 무당집에 간다는 걸 알 수가있었다. 우리 집에선 할머니가 그 일을 담당했고 나는 해마다 따라다녔다.
무당집엔 아래윗방에 신수점 보러 온 여인네들이 꽉 들어차 있었고,무꾸리에 나오는 일 년 신수도 엇비슷했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무당이라 해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단순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할머니는 식구들 신수를 다 보고 나서 맨 꼴찌로 나를 넣었다. 오뉴월엔물가에 가지 말고 동지섣달엔 불을 조심하라는 따위 어느 아이한테나 할수 있는 소리를 했다.
어른들의 점괘 또한 특별한 사연이 있는 사람 아니면 심각하게 믿는 것같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랜만에 만난 타동네 사람들끼리 이야기꽃을피우는 게 더 신이 나 보였다. 무당짐은 여자들의 스트레스 해소와정보교환의 장이었고, 혼담이 오갈 때도 있었다. 자기 신수를 다 봤다고해서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초 무꾸리 끝에는 으레 떡국상이 나오게 돼 있었다. 무당집은 농사를안 짓기 때문에 정초에 들어온 쌀로 일 년의 기본양식을 삼는다니 그사례로 떡국을 대접할 만했다. 그러니까 거기는 나눔의 자리이기도 했다.
무당집 조랑이떡국은 유난히 맛있었다. 그 맛에 따라다녔다.
엄마는 내가 그런 데 따라 다니는 걸 말리진 않았지만 무당이나무꾸리에 대하서 매우 냉소적이었다. 할머니가 집에 와서 무꾸리에 나타난식구들 신수를 일러 줄 때도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할머니가 무당말만 믿고 일각을 다투는 아버지의 병을 푸닥거리로 고치려 한 데 대한엄마의 통한은 여간 집요하지 않았다. 잘 모르는 일을 아는 척하고덤볐다가 그르쳤을 때 흔히 쓰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도엄마가 말하면 가시가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나였다. 나는 무당에 대해 친밀감과 함께 외경심까지 갖고있었다. 딱 한 번 덕물산에 가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할머니를따라서였다. 우리뿐 아니라 동네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갔으니까 아마 몇년 만에 한 번씩 볼 수 있는 대제 때였을 것이다. 큰 곳이란 그 신명이며칠씩 계속되게 마련이지만 그 중에도 천명을 다하지 못한 최영 장군의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장군놀이는 어린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남겼다.
굿판 한가운데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물을 하나 가득 길어 담은물동이를 놓는다. 물동이에다 나무 뚜껑을 덮고는 그 위에다가 다시쌀자루를 놓고 쌀자루 위에다가 시퍼렇게 간 작두를 두 개 나란히올려놓는다. 그때가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작두의시퍼런 날을 떠올릴 때마다 휘황한 횃불에 괴기하게 번득였던 것처럼느끼곤 한다.
장군의 복색에 벙거지까지 쓴 무당이 버선을 벗는다. 늘 버선에옥죄여서 발가락이 겹쳐진 무당의 작고 흰 발바닥이 작두를 탄다.
나비처럼 자유롭고 무게 없이, 평행으로 선 작두날 위를 훨훨 난다. 그순간에는 풍악소리도 극도로 자지러져 마침내 정적의 경지에 이르고무당의 몸도 소멸하여 흰 나비 두 마리만 남는다. 그건 굿구경이라기보다는 내 생애를 통틀어 유일한 신비체험이었다. 단 한 번 본,이론으로는 설명할 길 없는 입신의 경지였다.
거기에 비하면 인왕산 굿당에서 본 서울 굿은 어린애 장난 같았다. 칼을휘두르는 무당은 있어도 칼 위에 올라타는 무당은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는 굿 구경을 좋아했다. 남색 쾌자 자락을 휘날리며 길길이뛴느 무당의 외씨 같은 버선 발을 보고 있노라면 아슬아슬하도록 팽팽한긴장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무당이 오색의 기를 휘휘말아 구경꾼들한테 내밀어 뽑게 하고공수를 주는 소리를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거짓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무당이 아무렇게나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희비가 엇갈리는 어른을속으로 은근히 딱하게 여겼으니, 그 점은 나도 모르게 엄마를 닮았다하겠다.
큰 굿이 들었을 때는 구경꾼에게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떡이나알록달록한 색사탕 같은 걸 노느매기해 줄 때도 있었다. 실은 그 기대가없었다면 굿 구경이 그렇게 신바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참 입이궁금할 나이였다. 삼시 밥을 주리진 않았지만 군것질할 만한 것이 전무한긴긴 여름날의 오후의 권태를 무엇에 비길까.
그러나 바로 그런 쏠쏠한 실속 때문에 굿 구경 또한 금지당하지 않으면안 되었다. 여름 교복은 흰 반소매 윗도리에 어깨허리가 달린 청색치마였는데, 어느 날 그 치마 앞에다 굿 음식을 받아 먹었다는 게 탄로가나고 말았다. 색사탕의 물이 들어 얼룩덜룩해 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형무소 앞마당에서 미끄럼 탄 것을 적발했을 때와 다름없이 화를내고 야단을 치고 나서, 이놈의 동네를 언제 면하냐는 그 판에 박은한탄을 또 했다. 엄마는 아마 맹자의 엄마처럼 당장에 여봐란 듯이 그동네를 뜨고 싶었겠지만 우린 맹자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 엄마는돈이 없었고, 나는 맹자보다 똑똑하게 굴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빌었고 곧 다른 소일거리를 찾아 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엄마의 바느질거리도 깨끼나 적삼으로 바뀌어 필히재봉틀이 있어야 했다. 재봉틀 살 돈이 있을리 없는 엄마는 그것까지사직동 친척의 신세를 지기로 했다. 우리를 학교에 보내고 나서 친척 집에가서 온종일 바느질을 하고 점심까지 신세를 지고 나서 저녁을 지으러부랴부랴 돌아오는 날이 계속 됐다.
일학년 수업은 왜 그렇게 금방 끝나는지 오정도 치기 전에 하학을 해서돌아와 어두컴컴한 셋방 구석에서 오도카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점심밥그릇을 보면 쓸쓸하고 쓸쓸한 분노가 치밀었다. 시골서 가져온 주먹만한내 놋바리는 방 안의 궁기와 어울리지 않게 늘 깊고 은밀하게 빛났다.
엄마는 어울리지 않는 짓 하는 데는 선수였다. 근지 있는 집 아이라는엄마의 세뇌가 먹혀들어갔는지 나도 동네 아이들이나 안집 아이들이뜨악했고, 그 애들 또한 즈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우습게 보고 타동네학교를 다니는 내가 눈꼴이 시었을 것이다. 해는 길고 집안에서고 집밖에서고 도무지 마음 붙일 데가 없었다.
딴 아이들은 그럴 때 뭘 하고 놀까? 나는 엄마의 세간과 오빠의 서랍을뒤졌다. 그리고 울긋불긋한 색종이로 싸바른 궤짝 속, 엄마의 버선갈피에서지갑을 찾아냈다. 그건 지갑이라기보다는 쌈지였다. 할아버지 쌈지는기름종이로 만든 거였는데 엄마의 쌈지는 헝겊으로 만든 거였다.
엄마는 나에게 콩나물이나 파 심부름을 시킬 때, 거기서 일 전짜리나 오전짜리를 꺼내 주었다. 나는 엄마가 거기다 돈을 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심심해서 세간을 뒤진 게 아니라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뒤진거였다. 엄마는 온종일 방을 비울 때나 지갑을 그렇게 깊이 찔러 넣지보통 때는 아무데나 굴렸고, 심부름하고 거스름돈을 가져와도 지갑에넣으렴, 하면 그만이지 자세히 챙겨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월사금이나 집세등 큰 돈 쓸 때나 꼬깃꼬깃한 지전까지 다 꺼내서 헤아려 보고, 꼭도둑맞은 것 같다니까, 하고 한숨을 쉬었지만 아무리 아껴 써도 모자라는씀씀이에 대한 탄식일 뿐 정말 누굴 의심해서가 아니리라는 것쯤을 알고있었다.
나는 쌈지 속에서 누런 일 전짜리를 한 닢 꺼냈다. 엄마의 허술한 돈관리를 아는지라 탄로가 날 걱정도 안 했지만 나쁜 짓이란 생각도 들지않았다. 비탈을 더 올라가 모퉁이집이 구멍가게였다. 내가 곧잘 심부름을다니는 평지의 반찬가게와는 달리 이 가게는 순전히 아이들 코묻은 돈을노리고 일 전에서 오 전짜리 군것질거리를 파는 가게였다. 거기서 뭘 사보는 게 나의 소원이었기 때문에 나는 곧장 그리로 갔다.
눈깔사탕이 일 전에 다섯 개였다. 시골서도 단것에 굶주리진 않았었다.
겨울에 곤 엿을 몇 달씩 두고 먹었고 조청이나 꿀 같은 것은 일 년 내내벽장 속에 두고 긴요할 때 썼다. 나는 서울 아이보다 더 새까맣게 썩은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건만도 할아버지가 송도 갔다 오실 때 사다주시는 과자나 사탕의 맛은 별미였다. 엿보다 세련된 단맛이라고나 할까,징건해지지 않아 자꾸자꾸 더 먹고 싶었다.
아물며 몇 달 만에 맛보는 단맛은 황홀했다. 다섯 알의 눈깔사탕으로하여 주체할 수 없이 심심하던 오후가 한없이 달콤하고 짜릿짜릿한 시간이되었다. 엄마는 하루 일 전씩 없어지는 걸 알아 보지 못했다. 나는 며칠에한 번씩은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오 전짜리도 집어 내게 되었다. 오전이면 훨씬 다양한 미각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집에 있을 때였는데 손님이 왔다. 더위가시작될 무렵이어서 아이스케키 장수가 그 비탈 동네에도 심심찮게 다녔다.
손님은 아무것도 못 사 온 걸 미안해하다가 아이스케키 장수 소리를듣더니 오 전짜리 한 닢 주면서 아이스케키를 사 오라고 했다. 다요?
엄마가 물으니까 손님은 우리도 하나씩 먹읍시다, 하면서 땀을 닦았다.
엄마는 내가 다섯 개나 된는 아이스케키를 제대로 간수할 수 없을 줄 알고냄비를 주었다. 냄비를 들고 뛰어나갔을 때는 장수는 온데간데 없었다.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불확실했다.
그렇다고 그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냄비를 들고 전차종점 쪽으로 뛰어내려갔다. 종점엔 큰 아이스케키 가게가 있다는 걸 알고있었다. 오 전어치를 사니까 덤까지 한 개 주었다. 그러나 오르막길은 쉽지않았다. 그 지긋지긋한 층층다리를 헉헉대며 오르는 동안도 뙤약볕은사정없이 내리쪼였다. 허덕이며 집에 당도했을 때는 아이스케키는 거의막대기만 남고 냄비 속엔 불그죽죽한 물만 고여 있었다. 손님이 기가막히다는 듯이 끌끌 혀를 찼다.
"아니, 너라도 빨아먹을 것이지, 어쩌자고 몽땅 물을 만들어 가지고오냐?"
손님이 한심해하는 말투에 엄마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우리 애는 그렇게 고지식하답니다."
엄마가 이렇게 철석같이 정직성을 믿는 딸이 매일 한 푼 두 푼 엄마의지갑을 축내고 있었다. 잘못한다는 죄의식조차 없이. 그러나 꼬리가 길면잡힌다던가. 당시의 구멍가게는 좌판 위에 줄느런히 늘어놓은 나무상자에다 사탕이나 과자를 종류별로 넣어 놓고 팔고 있었다. 일정규격의상자에는 유리로 된 뚜껑이 달려 있었는데 어느 날 나는 앞쪽에 있는유리를 손으로 짚고 안쪽에 있는 상자 뚜껑을 열려다가 그만 유리를깨트리고 말았다.
가게에 달린 껌껌한 방에 죽치고 앉아서 말없이 코묻은 돈을 챙기기만하지 한번도 손수 꺼내 준 적이 없는 무뚝뚝한 주인 남자는 내가 놀라서울상이 되어도 무표정한 채 어서 사탕이나 가지고 가라고 했다. 사탕은 안주고 돈만 받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탕을 가져가라니까 나는용서받은 줄 알고 얼른 그 자리에서 도망을 쳤다.
저녁때 엄마가 돌아와 문간에서 밥을 짓고 오빠는 방에서 공부를 하고있을 때였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엄마가 대꾸하는 소리도들렸다. 나는 어떤 예감으로 가슴에서 마구 콩콩 소리가 났다.
아니나다를까, 엄마가 나를 불렀다. 나게 보니 가겟집 남자가 마누라와아이들가지 데리고 엄마에게 삿대질을 하며 서 있었다. 그 집 식구들이 다행패를 부리기로 작정을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좀 큰 아이는테만 남은 상자 뚜껑을 들고 있었다.
네가 정말 깨트렸느냐고 엄마가 나에게 조용히 물었고 나는 고개를끄덕여 시인했다. 나는 유리를 깨트린 잘못보다 돈을 훔친게 탄로난 게 더무섭고 수치스러웠다. 수치감으로 정신이 다 아득해지면서 당장 죽고싶었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선선히 유리값을 물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정도로 끝냈으면 워낙 없이 살아 반 푼을 가지고도 사생결단을 하려 드는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점잖은 결말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오늘해 안으로 당장 유리를 끼워다 달라고 뻥뚫린 뚜껑을 놓고 가는 일가족의뒤통수를 향해 한마디하고 말았다.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겠네. 내 자식이 깨트린 유리 어련히 물어 줄까봐, 사내가 변변치 못하게 식솔까지 거느리고 와서 얻다 대고 행패야,행패가. 자식들 자알 가르친다. 자알 가르쳐."
엄마는 유리값 물어 주는 것보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부부가 합세해서나타난 게 더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들 또한 엄마가 들으라는 듯이 한말을 못 들은 척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조금은 머쓱해하면서 가던 그들이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서면서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사내가 먼저엄마의 멱살을 잡았고 엄마는 대항하지 않고 오빠를 불렀다. 엄마는 나도아들이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겠지만 사려 깊고 말수 적은 오빠는자기가 끼어들지 않고 이 싸움이 끝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구원 요청이 뛰어나온 오빠는 얼떨결에 우선 사나이를엄마로부터 뜯어 낸다는 것이 저만치 메다꽂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쪽여편네가 사내를 일으키면서 저 후레자식이 어른을 친다고 악을 썼다.
구경꾼이 더 많이 모이고 신이 난 여편네는 엄마에게 너는 자식 참 잘가르쳤다, 잘 가르쳤어라고 당장 앙갚음을 했고 엄마는 그때부터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오빠도 고개를 숙였고, 세 식구가 끽 소리도 못 하고먼저 철수함으로써 싸움은 어이없이 끝났다.
방으로 철수한 우리 식구는 침통한 심정으로 아직도 남은 가겟집여편네의 푸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 동안에 다음에 시킬거짓말을 준비했다. 엄마는 의당 돈이 어디서 나서 군것질을 했느냐고물을 테고, 그러면 길에서 주웠다고 대답할 작정이었다. 죽었으면 죽었지훔쳤다고는 말 못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는 나에게 군것질한 돈의 출처를 묻지 않았다. 엄마는 아주오랫동안 침울해했는데 그건 오빠가 후레자식이란 욕을 먹은 데 대한충격이었다. 엄마는 오빠에게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고 오빠도 엄마에게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려 죄송하다고 사죄 했다. 두 사람 다 입에 담지는않았지만 후레 자식 수리를 듣게 된 데 대한 사과였다.
엄마는 아들이 후레자식 소리를 들은 것을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왜그런 일이 생겼는가 자초지종을 따져 보는 것까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
덕택에 나는 엄마의 문초를 모면했다. 그날 당장만 모면한 게 아니라 다음날 전차 종점까지 가서 유리를 끼워 오면서도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고,영영 안 꺼냈다.
엄마는 빈틈없이 깐깐한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허술한 데가 있었다.
엄마가 셈이 바른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이나 막상 자신의 가난한돈지갑이 새는 것도 모르는 것이 엄마의 또 다른 면이었다. 나는지금가지도 엄마에게 그런 허술한 일면이 있었음을 감사하고 또한 그로인해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가 만일 그때 나를 의심하고 따지고 들었으면 어떡하든지 진상을규명했을 테고 그때 내가 맛볼 수밖에 없었을 수치감을 생각하면 지금도아찔하다. 나는 그 후 다시는 엄마 돈을 훔치지 않았다. 남의 물건에대해서도 마찬가지였고 엄마의 소원대로 지금까지 길에 떨어진 돈도 주운적이 없다.
하진 욕심이 날 만큼 큰 돈이나 물건이 떨어진 걸 본 적도 없긴 하지만,적은 돈을 아무런 갈등 없이 안 줍고 지날 때면 엄마를 생각하고 괜히웃음이 난다. 그것이 선행이란 생각 같은 건 물론 손톱만큼도 없다. 육친의손때 묻은 물건처럼 나만 아는 애착 반 싫증 반으로 어쩔 수 없이간직하게 된 습관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때 엄마가 내 도벽을 알아 내어 유난히 민감한 내수치심이 보호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민감하다는 건 깨어지기가쉽다는 뜻도 된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못된 애가 되었을 것이다. 하여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에 수없는 선악의갈림길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름내내 인왕산의 살벌함은 변하지 않았다. 계곡은 장마가 져야만 물이조금 흘렀고 굿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온통 암벽이었고, 오른쪽으로잡목숲이 좀 남아 있는 곳에선 어스름녘이면 개를 때려 잡는 처절한비명이 들리곤 했다. 사내애들은 그 소리만 들리면 눈빛을 번득이며 떼를지어 숲속으로 치닫곤 했는데, 개를 때려 잡기 위해 매단다는 나무도정해져 있었다. 그 나뭇가지엔 새끼줄이 매달려 있었고 주위엔 개를그스른 누릿한 냄새가 늘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가뜩이나 헐벗은 숲이무섭고 구역질이 났다.
더위가 심해지면서 진중한 오빠도 방에서 견디기가 힘든지 저녁만 먹고나면 내 손을 잡고 선바위까지 바람을 쐬러 올라갔다. 나는 그때가 가장즐거웠다. 선바위에 바람을 쐬러 나온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빠가 제일잘나 보이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오빠와의 친밀감을 과시하기 위해 멀리까지 가서 조리풀을 따다가오빠한테 붙들게 하고 조리를 엮었다. 조리풀을 뜯을 때마다 습관적으로먹을 만한 풀을 찾았지만, 선바위 주위 척박한 땅에는 모질고 억센잡풀밖에 자라지 않았다. 가끔 나는 손을 놓고 우리 시골의 그 많던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하염엾이 생각하곤 했다. 말수 적은 오빠도 내향수를 알아차리고는 여름방학이 며칠 안 남았다는 걸 손가락으로 헤아려보여 주곤 했다.
방학이 다섯 손가락 안으로 임박하고 나서 엄마는 나를 데리고야시장으로 나갔다. 영천서부터 서대문 네거리까지 밤이면 야시장이 섰다.
식칼이나 요강, 빗자루 등 일회용 잡화도 팔았지만 주로 포목전이 많았다.
차일을 치고 포목을 삼면에 커튼처럼 늘이고 파는 장수들은 입심도 좋아타령조로 외치는 소리가 흥을 돋웠고, 전깃불 빛에 보이는 옷감은하나같이 화려하고 하늘하늘해 보여 나는 반쯤 넋이 나갔다. 사람들도포목전 앞에 가장 와글와글 붐볐다.
엄마는 여러 가게에서 흥정을 하다가는 값이 안 맞아 그만두곤 했다.
나에게 내리닫이를 해 줄 모양이었다. 내 몸에 옷감을 대 볼때마다장수들은 참 잘 어울린다고 허풍을 떨었고 나는 가슴이 울렁거렸지만엄마의 흥정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겨우 흰 바탕에 남색 물방울무늬가 있는 자투리를 끊을 수가 있었다. 엄마는 꼭 내리닫이 할 만큼만끊으려고 했고, 야시장은 옷감을 피륙으로 갖다 넣지 않고 치마 저고리 한벌 단위로 떼어다 팔고 있었기 때문에 픙정이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고향에 돌아간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났다. 마음이 설레어 잠이 다 잘안 왔다. 일학년 첫 원족 때도 못 느껴 본 느낌이었다. 일학년 첫 원족은총독부 뒷마당으로 갔다. 총독부는 시골뜨기가 주눅들기에 충분한어마어마한 집이었다. 드넓은 뒤뜰에 당도한 우리는 담임 선생님으로부터그 안에서 절대로 하면 안 돼는 수많은 금기 사항을 반복해서 듣고 나서해산하자마자 따라온 엄마하고 점심을 먹었다. 담 대신 안이 훤히들여다보이는 드높은 쇠창살을 둘러치고 문마다 칼 찬 순사가 지키는 그큰 집이 바로 엄마가 장차 아들을 취직시키고 싶어하는 집이라는 걸확인하고 질린 것밖에는 아무런 기쁨도 없는 원족이었다.
엄마는 자로 내 키와 품을 대강 재서 옷감을 어설프게 마름질하고 나서다시 내 몸에 걸쳐 보고는 시침질을 했다. 그건 다음 날 친척 집재봉틀에서 그럴 듯한 내리닫이로 완성됐다. 요새말로 치면 원피스를우리는 그때 내리닫이라고 불렀다. 엄마의 바느질 솜씨는 소문이 나 기생바느질말고도 부잣집 혼인 바느질 일습이 들어온 적도 있었지만 양장바느질엔 자신이 없었나 보다. 자꾸 입혀 보고 앞뒤로 뜯어보며불안해했고 과히 어색하진 않다는 오빠의 인색한 평헤도 기뻐했다.
방학식날엔 선생님이 방학 동안에 시골에 가는 아이는 손들어 보라고했다. 방학 기간에도 두 차례의 소집일이 있는데 시골에 가는 아이는 미리신고하면 결석 처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비로소 방학을시골에서 지낼 수 있는 아이가 한반에 불과 두세 명밖에 없다는 걸알았고, 여름내 서울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토박이 서울 아이들한테마음으로부터 연민을 느꼈다. 너희들이 온종일 답답한 골목에서 공기나고무줄을 하다가 기껏 어른을 졸라 일 전씩 까먹는 동안 나는 모든 것이살아 숨쉬고 너울대는 들판에서 강아지처럼 뛰어놀 것이다.
내일이면 고개를 넘고 들을 지나고 개울을 건널 것이다. 풀과 들꽃과두엄 냄새가 어울린 공기를 마음껏 들이 마실 것이다. 상상만으로도초여름 첫새벽에 달개비가 깔린 푸른 길의 이슬을 맨발로 밟을 때처럼순수한 희열을 느꼈다. 그건 향수라기 보다는 짐승같은 굶주림이었고, 서울아이에 대한 최초의 우월감이었다. 서울 아이를 불쌍하게 여길 수 있다는것은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기분 좋아할것은 아니었다.
방학식날 통신부를 받았다. 1학년 1학기건만 6에서 10까지의 점수로성적을 표시할 때였다. 나는 평균은 8점이었지만 사사오입한 8인듯한 9가둘이고 나머지는 온통 7이었고 창가는 최하점인 6이었다. 엄마는 나한테공부하라고 성화한 적도 없고, 숙제 한번 제대로 봐 준 적이 없었다.
학군까지 어긴 극성 엄마이면서도 학교 보내는 것 외엔 공부에 따로신경을 써 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엄마가 내 통신부를 보고 기함을하게 놀란 걸 보면 무관심조차도 내 자식은 안 가르쳐도 잘 하려니 믿은엄마 식의 교만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런 식으로 내버려 둬도 오빠는 늘우등만 했고 시골 소학교에선 월반까지 한 일이 있다는 건 엄마의 큰자랑거리였다. 내 통신부를 본 엄마의 탄식은 특이했다.
"아이구머니, 이 망신을 어쩔꼬. 내 자식 통신부도 기러기가 날아갈 줄뉘 알았을꼬."
엄마가 7을 기러기라고 하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바느질 다니는 사직동친척 집 행랑 어멈 아들도 소학교엘 다니는데 공부를 곧잘 한다고 어멈이줄창 자랑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 아이 통신부를 본 적이있는데 모조리 7이었고 한문으로 흘려 쓴 7자가 나란히 늘어선 게 흡사기러기가 날아가는 형상이더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심각한 상황을웃음으로 눙치는 재주가 뛰어났지만, 그 아이 통신부의 기러기는 유머감각이라기보다는 내 자식만 제일로 치고 남의 자식을 얕잡아보기 잘 하는엄마의 교만의 좋은 예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걸 다 뉘우칠 만큼 엄마의낙담은 심각했다.
나는 엄마가 어른들 뵐 낯이 없어 시골로 안 가고 말 것처럼 말했을때에야 비로소 발버둥질치며 울었지만 잘못했단 생각 같은 건 안 들었다.
앞으로 잘 할 것 같은 자신도 없었다. 오빠가 가장 적절하게 엄마의 상한자존심을 위로했다. 국어, 산수가 9점이니 나머지는 좀 못 해도 상관없다고했다. 오빠의 이런 통신부 보는 법을 엄마는 여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창가나 체조, 도화 따위는 공부 못 하는 애나 잘 할 수 있는것으로 당장 비약을 시켰다.
우리 남매가 통신부를 받아 온 날이기도 하고 다음 날이 시골 가는날이기도 해서 밤 늦게 작은숙부 내외가 찾아왔다. 그때도 엄마는 조금도기죽지 않고 내 통신부를 내보이며 오빠한테 배운 통신부 보는 법에다살을 붙여 설명했다. 창가나 체조 점수 잘 받는 아이치고 공부 잘 하는아이 못 봤다는 식이었다. 못 된 것은 조상 탓이라고, 나는 그 후 지금까지음치 신세를 못 면한 걸 엄마 탓으로 여기고 있다.
숙부 내외는 엄마의 강변에 무조건 동의했다. 같은 서울에 사는 유일한집안이고, 또 당시의 풍습으로는 아버지 없는 조카자식에 대해서는아버지의 형제가 아버지와 동등한 책임을 느낄 때라, 두 집은 늘 서로왕래하고 염려하고 의논하며 살았었다. 숙부네는 소생이 없었기 때문에 두집 가느이 이런 관계는 의무를 넘어서는 전국스러운 우애였다.
숙부네는 염천교 너머 봉래동에 살았는데 숙부는 일본인 생선 도매상의배달꾼으로 나가고 숙모는 잡화 도매상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물건의전표를 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숙부한테서는 늘 생선냄새가 나고막노동꾼 티가 박여 가는 데 비해, 쪽을 갈라 히사시가미(앞머리와 살쩍을쑥 내밀게 빗은 머리모양)를 하고 살짝 화장도 해서 날로 하이칼라가 돼가는 숙모는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엄마가 숙모의 직장에 가 본 적도 있었다. 엄청나게 큰 창고 같은 건물안에는 물건이 가득 든 상자들이 산적해 있었고, 등에 상표가 붙은 일본하오리 비슷한 윗도리를 걸친 소년들이 여럿 일하고 있었다. 숙모도 치마저고리 위에다 푸른 사무복을 입고 소년들을 군자를 붙여 부르면서이것저것 지시하는 게 여간 그럴 듯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숙모가 맨 처음 들어간 데는 일본집 식모였다고한다. 숙모가 식모 살 동안은 숙부도 생선 도매상 얼음 창고 위다락방에서 자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일본말도 곧잘 하고눈썰미도 있는 숙모는 불과 몇 달 안에 주인의 신용을 얻어 주인이경영하는 잡화 도매상을 일을 보게 해 비로소 부부가 합쳐 살 수 있게 된것이었다.
숙부 내외가 같이 노는 날을 잡아 우리 식구를 다 초대해서 고기니생선이니 푸짐하게 먹여 준 적도 몇 번 있었는데 차린 걸로 봐서는 돈을잘 버는 것 같았지만 사는 환경은 우리 집만도 못한 것 같았다. 셋방만십여 가구가 양쪽으로 길게 붙은 골목 같은 마당은 하늘을 함석으로가려서 생전 볕이 들지 않았고 바닥은 울퉁불퉁하고도 습했다.
막다른 집처럼 맨 끄트머리에 있는 숙부네까지 가려면 여간 조심하지않고는 구정물이 고인 웅덩이를 밟기 일수였다. 현저동처럼 물이 귀하지않은지는 몰라도 더 비위생적인 동네였다. 엄마는 사대문 안을 일률적으로문 안이라고 부르며 문 안만 사람 살 동네처럼 여기고, 언젠가는 문 안에살아 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문 안에도 이런 빈민굴은 있었다.
마침내 개성역이었다. 엄마는 여름 교복을 산뜻하게 차려입은 아들과물방울 무늬 내리닫이로 양장을 한 딸을 자랑스럽게 앞세우고 역에내렸다. 할머니와 큰숙부 내외가 다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안아 보고 나서 등을 들이대면서 자꾸만 업히라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ㄷ.
고향 산천은 온통 푸르고 싱그러웠다. 고개를 넘고 들꽃을 꺾고 개울물에땀을 닦으며 여름내 서울을 못 벗어날 서울 아이들은 참 불쌍하다고생각했다. 들판의 싱아도 여전히 지천이었지만 이미 쇠서 먹을 만하지는않았다.
그러나 텃밭에는 먹을 게 한창일 때였다. 당장 따서 쪄낸 옥수수의감미를 무엇에 비길까. 더위가 퍼지기 전 이른 아침 이슬이 고인 풍성한이파리 밑에 수줍게 누워 있는 애호박의 날씬하고도 요염한 자태를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또 어떻고, 못생긴 걸 호박에 비기는 건 아무것도모르는 도시 사람들이 지어 낸 말이다 늙은 호박에 비한 거라고 해도 그건불공평하다. 사람도 의당 늙은이하고 비교해야 할진대 사람의 노후가 늙은호박만큼만 넉넉하고 쓸모 있다면 누가 늙음을 두려워하랴.
어른들은 한창 바쁠 때였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윗도리를안 입거나 아예 고추까지 내 놓고 사는 아이들의 맹꽁이처럼 부른 배 위로참외 국물이 줄줄 흘러, 그 위로 파리가 성가시게 엉겨 붙으면 개울로풍덩 뛰어들면 그만이었다. 우리 집 뒷간 가는 길에 건너야 하는 실개천은뛰어들 만큼 깊지는 않았지만 개울가에 당개나리가 한창이었다. 뒤란안팎의 살구나무, 앵두나무, 돌배나무가 다 꽃이 진 뒤여서  주황색 꽃잎에자주색 점이 박인 당개나리의 만개 상태가 유난히 화려해 보였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반가웠고, 나를 가장 반겨 주신 분은 역시할아버지였다. 사랑의 할아버지는 반 년 전보다 훨씬 더 고적하고 추비해보였다. 불수가 된 왼쪽 뺨이 깎아지른 듯이 야위고 가끔 경련까지 일고있었다. 오십 전짜리 은화를 던져 줄 때만큼의 노여움도 남아 있지 않은할아버지가 불쌍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빠를 따라 절을 하면서 방학동안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지성껏 해야지 하고 별렀다.
그해 여름 방학에 처음으로 사촌 동생을 보았다. 여동생이었다. 시골집을지키고 있는 큰 숙모가 낳았으니까 숙모가 배부른 것도 보았을 테고삼십을 넘은 후의 초산이었으니 그전에 어른들이 기뻐하면서도 순산을바라는 소리도 꽤 했으련만 어떻게 된 게 내 기억으로는 사전 지식 없이돌연 동생이 태어난 걸로 돼 있다.
밤이었는데 옆에 아무도 없어서 깼는지 두런두런하는 기색에 눈을떴는지, 아무튼 잠이 달아나고 보니 안방이 아니고 건넌방이었고, 곁에아무도 없었다. 할머니 옆으로 가려고 마루로 나가니까 안방에 불이켜졌기에 문을 열었더니 어서 문 닫으라고 엄마는 뒷손질을 하고 할머니는대야에서 뭔가를 주무르고 계셨다. 나는 잠이 덜 깬 소리로 할머니 닭잡아? 하고 물었다. 엄마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나를 내몰아 건넌방으로돌아와 다시 잠이 들었다.
쇠고기, 돼지고기는 설하고 추석 때나 썼고 생일이나 손님이 왔을 때는닭을 잡았기 때문에 닭 잡는 것은 어려서부터 봐 왔다. 아무리그렇기로서니 아기를 씻기려면 의당 우는 소리도 났으련만 어떻게 닭을잡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 때 나의 기상천외한 물음은 두고두고 어른들의웃음거리가 되었다.
오랜만에 아기가 생기니까 집안이 훨씬 활기 있어졌다. 조그만 목숨하나가 집안에 드리운 죽음과 우환의 어둑신한 그림자를 몰아 내고 밝은웃음을 가져왔다. 할아버지도 기뻐하시면서 '서'자 항렬자에다 '밝을명'자를 넣어 명서라고 이름을 지으셨고, 대문에 써 붙이는'산후기부정'이라는 방도 떨리는 필적으로 손수 쓰셨다. 우리 고장에선해산집에 금줄을 거는 대신 이렇게 방을 써 붙였다.
이웃이나 친척으로부터 이왕 낳을 거 아들이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고섭섭해하는 소리가 나와도 아기집이 열린 것만도 고맙지, 더 바라면죄받는다고 완곡하게 윽박지르셨다. 나도 아기 근처를 맴도느라고 거의나가 놀지 않았다.
같이 놀던 동무들을 만나도 그전 같지가 않았다. 엄마가 애써 만들어붙인 서울 태도 동무들과의 사이를 서먹하게 했지만 문제는 내마음이었다. 나는 서울 생활 반 년 만에 벌써 내가 시골 아이들과는 격이다른 것처럼 느꼈고, 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려 했으니 그 애들 보기에얼마나 눈꼴이 시었을까.
그해 겨울 방학 때의 귀향은 한층 가관이었다. 겨울 교복은 따로 없었고될 수 있으면 곤색 가운을 입도록 했다. 나는 검정 치마 저고리 위에다두루마기 대신 가운을 입고 한쪽 어깨에다 스케이트를 메고 귀향을 했다.
오빠가 언제부터 스케이트를 탔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상을 타 온 걸 본적도 있었고 창경원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걸 구경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이 하는 운동 중 가장 낯설지 않은 운동이긴 했지만나는 그걸 하고 싶어한 적도 그걸 신어 본 적도 없었다. 엄마는 그걸어디서 얻어 왔는지 나에게 신겨 보고는 발에 꼭 맞으니 시골 가서 논에서타면 되겠다고 했다. 발에 잘 맞기는 했지만 그걸 신고는 방바닥에 따로설 수도 없었다. 엄마는 방에서는 못 서도 얼음판에서는 다 타게 돼있다고 했다. 나는 오빠가 여러 사람들과 섞여 유연하게 스케이트를 타는걸 본 경험이 있는지라 아마 그런 신발만 신으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거로구나 여겼다.
무엇보다도 시골 아이들은 한번도 구경한 적이 없는 신발을 여봐란 듯이메고 귀향할 일이 마음에 들었다. 엄마와 이심전심으로 죽이 맞았달까,서울 문 밖에서 궁색하기 짝이 없이 사는 주제에 시골 가면 어떡하든 뻐길궁리부터 했다. 모녀가 합심해 여름엔 내리닫이로, 겨울엔 스케이트로어렵사리 금의환향의 꿈을 엉군 일은 지금 생각해도 무슨 코미디 같다스케이트를 시골 동무들이 부러워했는지 신기해했는지는 생각 나지않지만 충분한 구경거리는 되었으리라. 그때만 해도 겨울이 지금보다 훨씬추웠다. 귀향한 다음 날로 즉시 매끄럽게 얼어붙은 논으로 그걸 가지고나갔다. 썰매를 타고 있던 아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지켜보는앞에서 그걸 신고 끈을 매는 데까지는 잘 됐지만 저절로 타질 리가없었다. 일어섰단 넘어지고 일어섰단 넘어지기만을 되풀이했다. 타고나기를무디게 타고난 운동 신경에다가 뭔가 보여 줘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까지겹친 내 몸짓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던지 아이들은 웃지도 못했다. 다행히사랑에서 할아버지가 내다보고 계셔서 곧 그악몽 같은 스케이트 쇼에서놓여날 수가 있었다.
그 논은 우리 논은 아니었지만 바로 우리 사랑마당에서 실개천과 동구밖으로 통하는 달구지길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언제부턴지 할아버지는창호지에다 작은 유릿조각을 붙여 놓고 바깥을 내다보는 걸 취미로 삼고계셨다. 내 이상한 몸짓을 본 할아버지는 안에다 대고 고래고래 악을쓰셔서 그 사실을 알리고 나를 당장 사랑으로 잡아들이도록 했다.
할아버지는 연유도 묻지 않고 다짜고짜 그 긴 장죽으로 내 정수리를세차게 내리치시면서 호통을 치셨다.
"아니 계집애가 집안 망신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무슨 흉내를 못내하필이면 덕물산 무당의 작두춤 흉내를 내느냐?"
나는 정수리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아프면서도 복받치는 웃음을 참기가어려웠다. 나는 그때 이미 스케이트가 뭔지도 모르고 고작 덕물산 무당의작두춤이 상상력의 한계인 할아버지를 경멸 할 수 있을 만큼 앙큼해져있었다. 그러나 그 후 오늘날까지 다시는 스케이트라는 걸 신어 본 적도배웠으면 해 본 적도 없다. 처음 얼음판에 섰을 때, 이건 안 되겠구나 싶어당황스럽고 부끄러웠던 느낌이 평생 갔다.
그 사건 빼고는 겨울 방학도 여름 방학 못지않게 즐거웠다. 여름에태어난 사촌 동생은 한창 예쁠 때였고, 할아버지 명령으로 양력 과세를했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이 지천이었다. 양력 정초를 일본 설, 음력 정초는조선 설이라고 부를 때였다. 일제는 물론 일본 설을 권장했고, 조선 설엔학교나 관공서가 평일과 마찬가지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직 단속까지는안 할 때였다. 도시에선 더러 이중 과세도 했지만 시골에선 일본 설날이어느 날인지도 모르고 지냈다.
시골의 설 기간은 유난히 길었다. 설빔 바느질로부터 시작해서 엿 고고두부하고 몇 집이 어울려 돼지 잡고 편수 빚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준비기간과, 설날 차례 지내고부터 대보름까지 세배, 성묘, 덕담, 새해 무꾸리,연령, 성별에 맞는 각종 높이 등 먹고 마시고 즐기고 화합하는 기간을합치면 거의 달포는 걸렸다. 일 년 중 가장 길고도 느긋한 농사꾼의 축제기간이었다.
할아버지가 일본 설을 쇠면서까지 방학 기간과 설 기간을 일치시키고자한 것은 손자들이 빠진 설을 무의미하게 여긴 애틋한 손자 사랑때문이었을테지만 그전부터도 할아버지는 양력이 더 옳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할아버지한테는 누가 부쳐 주는 건지 측후소에서 나온 책력이 해마다왔다. 거기엔 음력, 양력뿐 아니라 이십사 절기, 일진, 월건 등이 나와 있어달력도 귀한 때라 마을 사람들이 장 담그는 날, 고사 지내는 날, 먼 길떠나는 날 등을 할아버지한테 물으러 왔다.
심지어 올겨울 추위가 심할까 견딜 만할까, 장마가 질까 가물까등도책력을 보고 예언하시곤 했다. 특히 반신불수가 되신 후엔 책력 들추어보는 걸 취미처럼 일삼으시더니 마침내 어떤 깨달음에 이르신 듯했다.
음력을 안 쓰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농사꾼들의 일반적인 상식이 옳지않다고 여기시자 그걸 참지 못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마을 사람들을계도하려 드셨다.
"아니, 입춘이 섣달에 들었다, 정월에 들었나 물으러 올 게 뭐 있나?
양력으로 치면 해마다 같은 날인데, 생각해 보게나 절기가 딱 정해져있어서 밤낮의 길이가 같거나, 밤이 제일 길거나, 낮이 제일 긴 날이해마다 같은 날로 정해진 달력이 옳겠나, 그게 해마다 들쭉날쭉하다가툭하면 윤달이 한 달씩이나 드는 달력이 옳겠나? 아무리 왜놈의 것이라도옳은 건 옳다고 해야지, 왜놈이 흰 것을 희다고 했다고 해서 우리는검다고 우겨야 옳겠나?"
이렇게 답답히 여기시고 흥분하셨지만 이십사 절기가 정해져 있는것보다 해마다 달라지는데 따라 여러 가지 증후를 예견하는 묘미에익숙해진 농민들에겐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로서는 스스로 터득한유일한 개화사상이었지만 일본 설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의 벽을허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 설은 그 후 마을 공동체이서소외된 독불장군의 설이 되고 말았다.
돼지도 두 박씨 집이 어울려서 한 마리를 잡았는데 직접 잡는 일은마을에서 사람을 사서 시켰다. 섣달 그믐께의 얼어붙은 밤, 안마당에서뒤란으로 돌아가는 머릿방 모퉁이에 불을 환히 밝히고, 장정들이웅성거리고, 이어서 돼지 목따는 소리가 처절하게 들렸다. 엿을 고느라후끈후끈한 안방 이불 속에서 나는 죽어 가는 돼지가 불쌍하단 생각보다는창호지에 너울대는 불빛과 일꾼들의 활기찬 목소리와 어우러진 돼지목따는 소리에서 흥겨운 축제 분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돼지 잡는 걸 직접 목격한 오빠는 돼지고기도 순대도 일체 입에대지 않아 어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오빠는 장손이자 유일한 아들손자였다. 오빠가 입에 대지 않는 음식은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차린의의를 잃고 말았다. 할아버진 사내가 그렇게 심약해서 무엇에 쓸 거냐고몹시 언짢아하시다가 억지로라도 먹이라고 역정을 내셨다. 심지어는 나를지목하시면서 손자와 손녀가 바뀌었더라면, 하는 억지 말씀까지 하셨다.
그건 오빠에게뿐 아니라 나에게도 상처가 되는 심한 말씀이었다.
차례지낼 때 탕에만 겨우 쇠고기를 쓰고 편수나 누름적, 녹두지짐 등돼지고기 안 들어가는 음식이 거의 없는지라 오빠에겐 따로 게장이나왔다. 나는 오빠가 숟가락, 젓가락을 다 동원해 깨끗이 파 먹은 게딱지를물려받아 그 안에다 게장 간장을 조금만 치고 밥을 비벼도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었다. 나는 전에도 할아버지 상에서 곧잘 그 짓을 했었다. 아무것도안 남아 있는 게딱지라 해도 그 안에다 비벼 먹으면 밥그릇에다 비벼 먹는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게는 전국적으로 파주 게가 유명하다지만 우리 고장 게 맛도 그에못지않았다. 민물게는 씨가 말라 게장 맛을 모르는 요새 사람하고는 안통하는 얘기지만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먹어 본 음식 중에서 가장 잊을수 없는 진미를 대라면 서슴지 않고 게장을 대리라. 논에서 벼가 누렇게익을 무렵이면 암게는 딱지 속에 고약처럼 검은 장이 꽉 찬다. 이때 담아오래 삭혔다 먹는 게장 맛은 아무리 극찬을 해도 모자라 열이 먹다 아홉이죽어도 모르는 맛이라는 좀 야만적인 표현을 써야만 성에 찬다.
오빠가 돼지고기를 못 먹게 된 사건은 할아버지 심기를 오래도록불편하게 했다. 장손으로서 못 미덥게까지 여기신 듯했다. 방학이 끝나고돌아올 때 사내자식은 이러저러해야 된다는 훈계를 길고도 간절하게하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담임 선생님 갖다 드리라고 깨강정을 한 보따리싸 주셨다.
우리 고장의 설 음식 중 엿을 고아 강정을 만든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튀밥이나 볶은콩, 땅콩 따위로 만든 강정은 생긴 것도 두루뭉실하고먹음직스럽게 만들어 주로 아이들 주전부리거리로 썼지만, 흰깨와흑임자를 따로따로 볶아 만든 깨강정은 얇고 모양도 긴 마름모로반듯반듯하고 일정하게 썬 공든 것이어서 주로 손님상에나 올렸다. 그런깨강정을 싸 주시면서 이건 만들 때부터 우리 담임 선생님을 염두에 두고특별히 정성들여 만든 거라고 하셨다.
그라나 나는 속알맹이는 어찌 됐든지 간에 누렇고 꾸깃꾸깃한 양회봉지종이에다가 노끈으로 싸맨 그 보따리를 선생님한테 갖다 드릴 일이난감했다. 선생님은 변소에도 안 갈 것처럼 여길 때였다. 예쁘고 상냥한선생님 둘레에는 늘 아이들이 어미닭 곁의 병아리처럼 모여들어어떡하든지 손을 잡아 보려고 암투를 벌였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미소와손길을 공평하게 분배하려고 애쎴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런 공평한 애정의 분배에서조차 처음부터 제외된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 촌스러운 보따리로 나를 알리는것보다는 선생님이 내 이름도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은 존재 없는 아이의소외감과 열등감에 안주하는 게 훨씬 속편했다. 나는 학교 갈 때 강정보따리를 가져가긴 했지만 선생님한테 드리진 않았다. 하교길에 양지바른사직공원에 아이들을 불러모아 그 달고도 고소한 깨강정을 다 나눠 먹어없애 버렸다.
그 보따리를 감쪽같이 없애 버리긴 아주 쉬웠다. 만만해 보이는 한두아이한테 먼저 맛을 보이고 나서 더 먹고 싶은 사람은 여기 붙으라고놀리면서 숨차게 사직공원까지 달려가는 기분이 껍질을 깨고 날아오르는것만치나 상쾌했다. 별안간 비굴하게 구는 아이를 일부러 못 본 척하고도하고 촌스러워 보이는 아이한테 더 주기도 했다. 그 일을 기회로 친한애가 생긴 건 아니지만, 서울 애들을 거느려 본 것 같은 기분과 한께 나를알아주지 않는 선생님한테 복수한 것 같은 느낌까지를 맛보았다. 그러나뒷맛은 말할 수 없이 쓸쓸했다.
초가을부터 엄마가 다시 집에서 삯바느질을 하기 시작한 게 큰 위안이되었다. 집에 가면 엄마가 방에 있겠거니 생각만 해도 산을 넘는 발걸음에힘이 났다. 엄마한테 들어오는 바느질거리는 거의 노랑 빨강 분홍 자주초록 남색 등 곱고 진한 비단이어서 우중충한 방 안을 딴 세상처럼화려하게 만들었다. 겨울 방학이 지나고 음력 설이 임박해지자 밤을 새도모자랄 만큼 바느질거리가 밀렸다. 그럴 때 엄마는 자신의 시름도 달랠 겸잠도 쫓을 겸 옛날 얘기 하나 해 줄까 하고 나에게 말을 시켰다.
엄마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할멈 할멈 떡하나 주면 안잡아먹지, 혹 팔아먹은 얘기, 단 방귀장수 얘기, 콩쥐 팥쥐, 장화 홍련 등은할머니한테도 여러 번 들은 거였지만 엄마한테 들으면 새 맛이 났다.
엄마는 그 밖에도 모르는 이야기가 없었다. 박씨부인전, 사씨남정기,구운몽, 수호지, 삼국지 등 내 나이엔 어려운 이야기까지 엄마는 내 수준에맞게 꾸며서 이야기하는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도 박씨 부인전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몇 번씩 졸라서 또듣고 또 듣곤 했다. 처음엔 심심풀이 삼아 자진해서 해 주던 이야기에내가 흠뻑 빠지자 엄마는 "이야기를 바치면 가난하다는데." 하고 걱정을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다시 이야기 보따리를 풀곤 했다.
세상에 우리 엄마만큼 삼국지를 재미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있을까? 엄마가 "옛다 조조야, 칼 받아라." 하면서 그 동작까지 흉내내느라바느질하던 손을 높이 쳐들었을 때 엄마의 손 끝에서 번쩍이는 바늘 빛은칼빛 못지않게 섬뜩하고도 찬란했고, 나는 장검을 휘둘러도 시원치 않을우리 엄마가 겨우 바느질 품밖에 못 파는 게 안타까워 가슴 속에 짜릿하니전율이 일곤했다.
가장 궁핍했던 시절 엄마의 이야기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된것은 사실이나 나쁜 영향도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소학교 다니는 동안동무 없이도 심각한 불행감 없이 그 외톨이 상태를 거의 즐기다시피했는데 그건 내 머릿속에 잔뜩 들어 있는 이야기가 나에게 그런 건방진능력을 준 것이 아니었을까.
훗날 돌이켜보며 해 본 공 없는 생각이다. 육 년 동안 서울에서는드물게 산을 넘어 통학을 하면서도 무섭다거나 심심하다는 생각이 조금도안 들었고 어쩌다 길동무가 생기는 경우도 서로 무슨 말이든지 해야 할 것같은 부담감이 귀찮아서 혼자 다니는 걸 그 중 편하고 자유롭게 여겼다.
어린 나이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도 이야기에서 촉발된 공상하는 재미때문이었는데 그 또한 정상적인 정서 발달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5. 괴불마당 집
오빠가 드디어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다. 할아버지와 엄마의 소원대로총독부에 취직이 된 것이었다. 그보다 앞서 혼자 짓는 농사를 벅차해하던시골의 큰숙부가 면서기로 취직을 했다. 텃밭만 남기고 몇십 석 정도의논은 소작을 주었다. 마을에 소작만 부쳐 먹는 밭이 따로 있었던 것은아니고 우리 정도의 농토를 가진 자작농 중 일손이 넉넉한 집에 부탁하여부쳐 먹도록 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보다 더 배웠다 자부하고, 툭하면 마을 사람들을상것들이라고 무시하고 싶어하는 할아버지의 양반의식이란 것도 실은얼마나 비루한 것이었던지, 자손이 총독부고 면사무소고 그저 관청에취직한 것만 대견해하셨다. 내 나라야 어느 지경에 가 있든지 간에 땅파먹는 것보다는 붓대 몰려 먹고 사는 걸 더 낫게 치고, 이왕 붓대를놀리려면 관청에서 놀리는 걸 더 높이 여긴 걸 보면, 양반의식 중에서선비 정신은 빼 버리고 아전근성같이 고약한 것만 남아난 게 우리 집안의소위 근지가 아니었나 싶다.
숙부가 면서기로 취직하는 데도 백이 필요했는데 백이 돼 준 분은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이었다. 그분의 아버지는 역사책에도나오는 나라 팔아먹은 문서에 도장 찍은 역적이라 그분도 일본의 작위까지가지고 있었다. 면서기 정도에는 과람한 백이었고, 면서기 정도를 출세라고생각하는 할아버지이고 보니 그분에게 설설기는 건 차마 눈뜨고 못 볼정도였다.
그분이 시골에 내려오는 일이 어쩌다가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같은항렬의 친척을 마치 신하가 상전 대하듯 했고, 분수에 넘치는 최상급의대접을 하기 위해 여자들을 며칠 전부터 들들 볶아댔다. 여북해야할머니는 며느리들한테 그놈의 자작 영감이 일 년에 두 번만 내려왔다간우리들 다 콩가루 되고 말지 싶다고 농담을 하시곤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천격스러운 하치 양반 집안에서 총독부에 취직이된 자식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엄마가 더욱 당당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오빠는 반 년 만에 총독부를 그만두었다. 오빠의 다음 취직 자리는와타나베 철공소라는 일인의 개인 회사였다.
엄마는 철공소라는 소리에 대경실색을 했다. 기껏 공부를 시켜 놓았더니대장간이 웬 말이냐는 것이었다. 오빠는 그 회사가 큰 대장간과 다름없는건 사실이나 자기는 사무직이고 총독부보다 월급도 배가 넘는다고 엄마를위로했다. 엄마는 할아버지나 시골 사람들한테 회사 다닌다고 말하지 행여철공소 소리를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당부하면 총독부에 대한 미련을 못버렸다.
오빠가 철공소에서 처음으로 타 온 상여금이 백몇십 원이었다. 서울사는 작은 숙부네까지 함께 모여 우리는 가슴이 울렁이며 푸르스름한 백원짜리를 돌아가며 구경을 했다. 숙부 내외는 어쨌는지 모르지만 엄마와나는 생전 처음 보는 백 원짜리였다. 자루 같은 걸 어깨에 멘 복스럽게생긴 노인 그림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진지하게 그게 쌀자루일까돈자루일까 궁금하게 여겼다.
오빠는 엄마가 삯바느질을 그만두고 편히 지내길 바랐지만 엄마는 집 살때까지는 안 그만두겠다고 선언을 했다. 사십여 원의 월급과 백 원이 넘는상여금으로 앞당겨진 엄마의 집 살 꿈은 총독부를 그만둔 서운함을달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삯바느질은 여전히 밀렸지만, 간간이 틈을내서 집을 보러 다니는 게 엄마의 취미였다.
집을 보러 갈 때 엄마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표정도 거만하게 꾸몄다.
돈도 없이 연습삼아 보러 다니는 거니까 복덕방한테 그런 속사정을 들킬것 같은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분수에 넘치는 큰 집을보러 다니는 것 같진 않았지만 문 안의 점잖은 주택가를 골라 다니는것만은 확실했다. 가끔 문 안과 문 밖의 현격한 집값의 차이를 한탄하곤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집을 사게 되는 날이 곧 현저동을 면하는날이거니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집을 너무 일찍 샀고, 역시 현저동이었다. 차근차근 집 살계획을 세우던 엄마가 별안간 무리를 해서 집을 사게 된 것은 순전히 나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주인 집 아이하고 노는 게 질색이었지만 이태씩한 집에서 살면서 무슨 원수가 졌어도 전혀 상종을 안 하고 살 수는 없는일이었다. 더군다나 아이들 세계엔 그 나름의 끄는 힘이랄까 친화감이있는데다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심보까지 있어서 은근히 친한사이었다.
골목에서 석필을 가지고 뭔가를 그리면서 놀다가 싸움이 붙었는데 마침퇴근하던 오빠가 보고 싸움을 말리려고 했지만 나는 든든한 백이 생긴김에 그 애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는 게 얼굴을 할퀴었고 드디어 아이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고 말았다.
내가 동네 아이를 할퀴거나 꼬집은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삐쩍마르고 허약해 보인다는 열등감 때문이었는지 싸우다가 몸싸움만 됐다하면 나도 모르게 손톱을 사용했다. 남한테 맞으면 대신 한 대 쥐어박고말지 제발 손톱 자국만은 내지 말라고 엄마가 누누이 타일렀건만 또 그짓을 하고 만 것이다.
주인 집 여자에게는 자기 자식 얼굴에 손톱 자국 난 것도 분했지만,평소 누구하고 잘 어울릴 줄 모르는 아이가 툭하면 그런 해코지를 하니요새말로 하면 심각한 문제아로 보였을 것이다. 엄마한테 나중에 무슨꼴을 보려고 자식을 그 따위로 가르치느냐고 동정어린 악담을 했다. 그걸옆에서 보고도 안 말렸다고 오빠까지 싸잡아 욕을 먹었다.
엄마는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어떡하든 밀고 나가는 강한 성격인데다가교만하기도 해서 안집식구를 은근히 경멸하고 있었다. 안집의 여러 식구의관계는 복잡해서 첩도 있고 전실 자식도 있었다. 수입이 일정치 않은가난뱅이 주제에 씀씀이가 헤픈 것도 엄마는 기회 있을 때마다 비웃었다.
가끔 주인 집 여자가 엄마한테 돈을 꾸러 올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여자 앞에서는 흔쾌히 꿔 주고 나서 가고 나면 중얼중얼 욕을 했다.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지. 쌀이나 장작이 떨어졌다면 돈을 꿔서라도사야지만, 암 사야구말구. 그렇지만 어떻게 소증난다고 곰국거리 사게 돈을꿔 달래누. 내가 세 사는 죄로 꿔 줬지. 딴 집 여편네가 그 따위수작했다간 망신을 줘서 보내지 안 꿔 준다."
아마 곰국거리 사게 돈을 꿔 달란 모양이었다. 이렇게 얕보던 여자한테천금 같은 자식들이 욕을 먹고 훈계까지 당했으니 엄마 심정이오죽했을까. 그러나 엄마는 우리 남매는 별로 야단치지 않았고 주인 여자욕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나는 더 무서웠다.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같았다. 그후 현저동에 처음으로 집을 산 경위를 경제정의 지에 소상하게소개한 것이 있어 여기 그 중 몇 대목을 인용한다.
다음 날 어머니는 당장 집을 사러 나섰고, 며칠 안 돼 정말 집을계약하고 말았다. 같은 빈촌의 더 꼭대기의 여섯 칸짜리 작은 집이었지만,어디 가서 도둑질을 하지 않은 바에야 우리가 집을 산다는 건 있을 수없는 일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동안 어머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머니는 그 동안 정말 도둑질을 한 것이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그나마 먼저 서울에 자리잡았고 해서 시골 사람들이심심찮게 드나들었다. 마침 그 중 한 사람이 서울서 장사를 시작해보겠다고 땅을 팔아 목돈을 만들어 가지고 와 며칠 우리 지에서 신세를지다가 시골 그의 집에 일이 생겨 어머니에게 그 돈을 맡기고 내려간사이에 그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는 남의 돈을 슬쩍유용해서 집을 계약한 것이었다. 일부터 저질러 놓고 나서야 시골조부모님과 숙부한테 자초지종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 급히 땅도 좀 팔고급전을 끌어대는 등 우선 남의 돈을 메우는 데 힘을 합쳤기 때문에 남에게손해도 안 입히고 망신도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한동안 어머니는 집안 어른들과 동기간 앞에서 죽어지내야했고, 내가 보기에도 어머니는 참 이상한 분이었다. 어쩜 우리 엄마가 그럴수가 있을까. (중략) 그때만 해도 어머니를 도덕적으로 완벽한 분이라고여길 때였으므로 어머니가 죄인처럼 굴던 상황은 동심에 심한 혼란을가져왔다. 굶주린 자식을 위해 찬밥을 훔친 거나 다름없는 비장하고맹목적인 모성애였다는 걸 이해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다.
어머니의 성품으로 보아 광기에 가까운 용단과 차마 견디기 힘든 곤욕을치르고 서울에 최초로 장만한 내 집은 그대로 기와집이었다. 여섯 칸짜리집에 방이 세 개나 되고도 부엌과 마루와 대문간을 갖추고 있었으니 이모든 구색이 공평하게 한 칸씩이었다. 어찌나 반지빠른 자투리 땅에다지은 집인지 명색만 있는 마당은 삼각형이었고 축대가 높았다.
그때나 이때나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날품팔이꾼에게 집 치장을 기대할순 없는 일이나 전 주인이 땜장이고 식구가 많던 그 집의 형편은 더 심한편이었다. 빈대가 없으면 서울 집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집집마다빈대가 들끓을 때였지만 언제 적에 도배를 했는지 찌들고 해진 벽지에빈틈없이 찍힌 빈대 핏자국은 정말 끔찍했다. 오빠니 내가 뜨악해하건말건 어머니는 급한 돈 문제가 해결되자 신바람이 나서 온 집안의 문짝을다 떼어 내어 양잿물로 닦고 기둥과 서까래까지 손닿는 데는 온통양잿물로 닦아냈다.
어머니 말로는 집이 뼈대가 좋기 때문에 좀 험하게 쓴 것은 문제가 되지않는다는 것이었다. 뼈대란 기둥과 서까래가 얼마나 실하냐를 뜻했다. 과연몇날 며칠을 쓸고 닦고 도배하고 나니 한결 집 꼴이 되어가긴 했지만어머니가 왜 오직 뼈대 하나만 보고 그 귀살스러운 집을 샀나를 이해한것은 나중이었다. 우리 몫의 약간의 토지를 처분한 것 말고 숙부한테신세진 것은 그 집을 은행에 저당을 잡혀서 갚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서민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금융기관은 금융조합이었다.
융자 신청을 하고 나면 조합에서 감정하는 사람을 내보내 그만한 액수를융자해 줘도 되나를 감정토록 하는데 그 사람은 나오도록 규정된 날틀림없이 나왔고, 어머니는 그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정방문 오는 날처럼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렸다.
감정인은 어머니의 예상대로 과연 도배 장판보다는 뼈대를 주의 깊게보았고, 어머니에게 얼마나 융자 받고 싶은가를 물었다. 어머니는 이만한집이면 팔백 원은 받을 만하지 않겠느냐고 되레 배짱을 부렸고, 그는 아무말도 아무런 언질도 안 주고 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고,냉수 한 모금 담배 한 대 대접하지도 않았고 굽실대거나 아부하지도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곧 팔백 원의 융자가 나왔고 어머니는 그걸로 모든문제를 깨끗이 해결할 수가 있었지만 융자에 대해 특별히 고마워하거나운이 좋았다고 여기는 것 같진 않았다. 당시 그 정도의 서민 금융혜택은절차만 밟으면 누구나 쉽게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였다.
그때 어머니는 현저동 꼭대기에 그 여섯 칸짜리 기와집을 천오백 원에사서 반이 조금 넘는 팔백 원을 융자 받은 것이었다. 금융조합에 아는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머니에게 남다른 교제술이 있었던 것도아니다. 관청이나 파출소 앞에선 괜히 안색이 조금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관청이나 파출소 앞에선 괜히 안색이 조금 달라지는 평범한 촌부에 지나지않았따. 그런 촌부가 은행문은 겁없이 두드릴 수가 있었고, 원하는 만큼의혜택도 받아 낼 수가 있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건만 남들이 안 믿어 줄까 봐 걱정이 되는 건 무슨까닭일까? 아마 해방 후에 비뚤어진 금융 풍토 때문에 융자라면 특혜나특권 등 비리 아니면 남다른 수완이 있어야만 인연이 닿는다는 우리모두의 선입관을 의식해서일 것이다.
면서기나 동서기만 되어도 반말을 일삼던 하급관리들, 멀리서 그번쩍거리는 칼빛만 보아도 오금이 저려 죄 없이도 뺑소니칠 궁리부터 하던순사들, 쇠사슬을 발목에 찬 죄수들을 짐승처럼 잔혹하게 다루던 간수들,살기와 오기가 충천하던 일본 병정들, 가정 방문 와서 일본말을 한마디도못 하는 어머니를 야만인 보듯 경멸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본인선생 등등, 유년기와 소녀기의 의식을 짓누르던 일제의 지긋지긋한 악몽을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그러나 그때뿐 아니라 그 후에도 어머니가 집을 늘려 갈 때 손쉽게도움을 받곤 했던 금융기관만은 그 지겨운 관료주의와 별도로 생각이되어서 거의 적의가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일제시대 때 은행문이 낮았기때문에 함부로 꾸어 쓰고 갚지 못하여 얼떨결에 재산을 수탈당하는 주요한원인이 된 사실을 묵과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는 그 집을 괴불마당 집이라고 불렀다. 마당이 괴불처럼 세모였기때문이다. 우리는 다 같이 그 집에 만족했고 또한 사랑했다. 오빠는건넌방을 혼자 쓸 수가 있었고 문간방은 세를 주었다. 기역자 집의 양끝인 건넌방과 대문간을 직선으로 이으면 마당이 삼각형이 된다. 집이들어앉지 않은 삼각형의 한쪽 변은 높은 축대고 축대 밑은 그 아랫집뒤꼍이었다. 엄마는 축대 밑에 있는 집의 양해를 구하고는 우리 마당을추녀처럼 그 뒤란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늘어난 마당을 꽃밭으로 만들었다.
밑의 집에선 뒤꼍에 지붕이 생겼다고 좋아하고 나는 꽃밭을 가질 수가있어서 좋았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널빤지를 깔로 흙을 부은 꽃밭에서도 분꽃과금잔화가 어찌나 잘 퍼졌는지 볼 만했다. 가을에 고사도 푸짐하게 지내이웃과 넉넉히 나누어 먹었다. 세 살던 집보다 더 꼭대기였지만 엄마는이사 간 동네를 마음에 들어했다. 나가 놀지 말란 소리도 안 했다. 엄마가진저리를 치면서 싫어한 것은 안집 사람과 안집의 사는 방법이었지 동네사람 다는 아니었나 보다.
괴불마당 집 바로 앞집은 구장 집이었는데 집도 반듯하고 화초를 많이길렀다. 특히 옥잠화가 여러 분이어서 꽃이 피어날 어스름녘이면 감미로운향기가 우리 집까지 끼쳐 왔다. 골목이 좁고 다들 대문을 열어 놓고 살때였으니까. 우리는 그 집을 구장 집이라 부르지 않고 옥잠화 집이라고불렀다. 그 집에 나보다 두 살 위인 언니도 있어서 옥잠화 알뿌리를 몇번씩 우리한테 찢어 주었지만 우리 집에선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우리다음 집은 일각대문 집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옥잠화 집하고도 일각대문집하고도 친했다.
방세도 들어오고 오빠가 월급도 많이 타 와 엄마는 삯바느질을 덜 했다.
오빠 몰래 꼭 엄마의 솜씨를 원하는 사람한테만 해 주는 것 같았다.
오빠는 효성이 지극해서 엄마가 남의 바느질하는 것만 보면 슬픈 얼굴로골을 냈다. 내 집에서 산다는 것과 월급을 타서 한 달을 설계하고식구끼리 서로 화목한 것이 얼마나 좋다는 게 어린 마음에도 느껴졌다.
비록 현저동은 못 면했지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도시 생활에적응하고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 시기였다.
방학을 하기가 무섭게 시골에 내려가는 건 전과 다름없었다. 귀향을앞두고는 가슴이 설레고 방학 내내 서울서 지낼 수밖에 없는 서울내기들을참 안됐다고 여기는 것도 여전했다. 그러나 시골에 눌러 살라면 못 살 것같았다. 침침한 등잔불이 제일 갑갑했다. 개학해서 서울로 돌아올 때면대낮 같은 전깃불이 반가워 고향의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을 때 못지않은기쁨을 맛보았다.
취직한 오빠는 방학 동안 서울에 혼자남아 숙부네서 출퇴근을 했다.
숙부는 험한 고생 끝에 남대문통에 자기 가게를 가질 만큼 돈을 모았다.
그래서 우리가 집 살 때도 적지 않은 돈을 돌려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생선 도매상에 다닐 때의 연줄인지 숙부가 처음 시작한 장사는 얼음장사였다. 깨끗한 식료품상이 밀집한 상가에 있는 숙부네 얼음 가게는 늘바쁘고 활기가 넘쳤다.
숙부네 놀러 갈 수 있다는 것도 서울 생활의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숙부네는 그때까지도 아이가 없어서 우리 남매에 대한 애정이 극진했다.
방학해서 시골 갈 때도 먼저 숙부한테 통신부를 보이고 칭찬도 받고 기차안에서 먹을 것도 듬뿍 받았다. 내 성적은 삼사 학년이 될 때까지중간에서 약간 처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숙부 또한 국어 산수만 잘 하면창가나 체조는 못 할수록 좋다는 엄마의 통신부 보는 법을 무조건 따랐기때문에 조금도 기죽을 필요가 없었다. 숙부네 가면 귀여움을 받을 수 있는것도 좋았지만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이 반반씩 섞인 상가의 독특한분위기가 현저동과는 딴 세상 같은 것도 마음에 끌렸다. 숙부네 가게는 큰얼음 창고가 있었고 그때만 해도 아주 귀한 전화도 가지고 있었다.
겨울에는 숯도 팔았지만 그 상가에선 '고리야상'으로 통했다.
숙부네가 서울서 장사로 성공했단 소리는 실제보다 과장되게 시골에알려진 듯했다. 장삿길을 터 보려고, 혹은 남의 상점에 고용살이라도들어가 보려고 숙부를 믿고 상경하는 고향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숙부로부터 장장한 숙부의 입지전을 들어야 했다. 무작정상경해서 일본인 생선 도매상 얼음 창고 위 다락방에서 겨울을 나면서고생한 이야기였다. 숙부가 그런 사람들한테 실컷 으스댄 것밖에 그다지큰 도움을 준 것 같지는 않고, 또 그럴 처지도 못 됐건만 숙부네 집에항상 시골 사람들 발길이 그치지 않았던 것은 숙부네 상점이 바로 경성역코앞이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은 그런 연줄로 숙부는 고향 마을 소년을 한 사람 부리게 되었는데자기의 입지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소년을 훈련시키려 들었다. 자기가 당한것처럼 얼음 창고 천장에다 다락방을 들이고 소년을 기거하게 했다.
그러나 깔끔하고 상냥한 숙모가 꾸며 놓은 다락방은 내가 보기엔 여간근사하지 않았다. 한창 이층집을 동경할 때였다.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야하는 게 이층집 기분이 났다. 바닥에 다다미가 깔린 것까지 그럴 듯해보였다. 나는 어쩌면 막연히 일본식 생활 방식을 동경하고 있었는지도모르겠다.
그 다락방에서 나는 처음으로 만화책을 접하게 되었다. 일본 사무라이가칼싸움하는 만화였는데 숙부한테 들키자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나뿐아니라 소년까지 불러다가 야학 갈 공부 한다기에 밤늦도록 전깃불을 켜놓고 있어도 봐 주었더니 이 따위 못된 책을 보느라고 전기값을축냈더냐고 만화책으로 소년의 빡빡머리를 탁탁 때리며 야단을 쳤다. 나는소년에게 괜히 미안했고 읽다만 만화책의 재미도 여간 감질이 나지않았다. 덮어놓고 못된 짓 취급을 당하니까 더욱 그 재미를 잊을 수가없었다.
오랫동안 만화 속의 그림이 눈에 삼삼하고 다음 줄거리가 궁금해서 어디가서 훔칠 수 있는 거라면 훔쳐서라도 마저 보고 싶었다. 요즈음 세상의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얘기나 내가 교과서 외의 읽을 거리를 접해 본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 집이 가난한 탓도 있었지만 동무들 중에도동화책 같은 걸 가지고 있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
엄마는 당신의 이야기 재주로 딸을 이야기를 좋아하도록 길들여만 놓고,의당 그 다음에 나타날 욕구에 대해서는 전혀 무책임했다. 학기 초에 새교과서를 받으면 국어나 수신 책을 뒤져서 미리 재미있는 얘기를 골라놨다가 심심할 때면 소리를 높여 읽고 또 읽는 게 기껏 내 나름의 갈증의해소 방법이었다. 큰 소리로 책을 읽고 있으면 엄마는 내가 공부하는 줄알고 좋아했다. 그러면 나는 혀를 낼름대며 엄마를 속여먹고 있다는 묘한쾌감을 맛보곤 했다.
오빠 방엔 얼마 안 되는 오빠의 책이 따로 있었지만 거의가 조선말로 된소설책이어서 나는 조금도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조선말을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내 또래는 아주드물었다. 나는 그런 드문 아이 중의 하나였지만, 그걸 긍지로 여기기엔나는 너무 철이 없었다.
시골서 어렸을 때 배운 거니까 잊어버릴 법도 한데 안 잊어버린 것은한글을 써먹을 기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인데 나는 그 기회가 돌아오는 게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그 기회란 시골에 계신 조부모님께 문안 편지를쓰는 일이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마음으로부터 좋아했다. 나에게고향과 조부모님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한덩어리였다. 만약 고향에그분들이 안 계신다면 일 년에 두 차례의 귀향이 그렇게 가슴 설레는희열일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분들이 박적골 아닌 딴 데 계신다면그분들이 그렇게 그리울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반신불수인 것까지도 박적골의 터줏대감답다고생각했다. 방학이 가까워 오면 할아버지의 침에 절어 시척지근한 냄새가밴 베수건에 싸 둔 곶감이나 밤 따위가 다 절절히 그리워지곤 했다. 그건먹고 싶다는 것하고는 달랐다. 핏빛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건들대는수수이삭을 보고 싶은 것과 같은 감미롭고도 쓸쓸한 정서였다. 할아버지화로에 불이 꺼졌을 때 누가 담뱃불 붙이는 걸 도와 드릴까. 사촌 동생은아직 어리고. 아아, 이번 방학에 내려가면 할아버지 말씀대로 입의 혀처럼심부름을 잘 해야지. 내가 쓰고 싶은 편지는 그런 내 마음을 나타내는것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내 마음대로 편지를 쓰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엄마는 편지에는 일정한 틀이 있다고 믿고 있었고 거기에 어긋나는 편지를딴 사람도 아닌 웃어른에게 드린다는 건 말도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불러앉히고 마치 받아쓰기처럼 편지를 쓰게했다.
편지는 늘 비슷한 말로 시작했다. "할아버님 전 상사리. 할아버님 기체후일향만강하옵시고..." 대강 이런 식이었다. 항렬 순서로 온 집안 식구안부를 다 묻고 나서 이쪽도 하념하옵신 덕택으로 몸 성히 잘 있다는 것을식구마다 따로 아뢰고 나서, 다시 춘하추동 계절에 따라 말만 약간 바꾸어,일기가 이만저만 불순한 계절에 행여 옥체 미령하실까 봐 문안 여쭙는다는사연으로 끝맺게 돼 있었다.
나는 이런 받아쓰기가 어찌나 따분하고 재미가 없는지 쓸 때마다 몸이비비 꼬이고 조선글만 쓸 줄 몰랐다면 이런 고역을 안치르는 건데 하는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조선글의 유일한 씀씀이가 이렇게지겹기만 한 나머지 조선말로 된 읽을 거리에도 관심이 없었다. 으레재미없고 따분하려니 했다.
이차대전을 맞은 것도 괴불마당 집에서였다. 일본 사람들은대동아전쟁이라고 했다. 무언지도 모르고 신이 났다. 우리는 그전부터 이미호전적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일본은 벌써부터 지나사변이라 부르는전쟁(중일전쟁)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중국을 '짱골라' 장개석을'쇼오가이세끼'라고 부르면서 덮어놓고 무시할 때였다. 아침에 운동장에서조회를 할 때마다 황국신민의 맹세를 하고 나서 군가 행진곡에 발을 맞춰교실에 들어갈 때면 괜히 피가 뜨거워지곤 했는데 그건 뭔가를 무찌르고용약해야 할 것 같은 호전적인 정열이었다.
짱골라한테는 줄창 이기고 있다고만 들어서 적으로는 시시했다. 우리는우리도 모르게 더 큰 적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쇼오가이세끼에다 '루스벧또, 짜아찌루'가 무찔러야 할 악의 괴수로추가되고, 매일매일 승전의 소식이 전해졌다. "깨어졌다 싱가폴, 물러서라영국아." 하는 노래를 조선의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가 불러 단박 유행을시켰고, 남양군도를 하나하나 함락시킨 걸 뽐내고 자축하기 위해 밤엔등불 행렬이 장안을 누볐다. 고무가 무진장 나는 남양군도가 다 일본땅이됐다고 전국의 국민학생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거저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자랑 끝에 불붙는다고 그 후 얼마 안 돼 쌀이 배급제가 되더니운동화와 고무신까지 배급제가 되었다. 쌀은 식구에 따라 배급통장을만들어 주었지만 고무신은 애국반을 통해 한 반에 한 두 켤레씩 나오면제비를 뽑아서 차례를 정했다. 반상회 때마다 꽝밖에 못 뽑고 나서 엄마는우리는 제비에는 소질이 없나 보다고 한탄을 하곤 했다. 생활 필수품이하루하루 귀해졌다.
창씨개명령은 그보다 앞서 내렸는데 살기가 각박해지면서 그 강제성도심해져 더욱 시국을 흉흉하게 했다. 우리는 창씨를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그것만은 안 된다고 완강하게나오셨기 때문이다. 호주의 권한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남대문통에서장사하는 숙부는 성을 안 갈아서 장사가 잘 안 된다는 식으로 할아버지를원망했다. 엄마는 엄마대로 오빠의 사회 생활이나 내 학교 생활에 지장이있을까 봐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이키시길 고대했다.
사오학년 이 년 연속해서 담임이 일본 사람이었다. 엄마는 자주 나에게그 일본 선생이 너 성 안 갈았다고 뭐라지 않더냐고 물어보곤 했다. 내가그런 일 없다고 하면 엄마는 네가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왜 구박을 안하겠느냐고 당신 편한 대로 넘겨짚곤 했다. 내가 운수가 좋아 좋은선생님을 만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한 반에 창씨 안 한 애가 서너 명밖에안 남았을 때도 그런 애들을 선생님이 특별히 구박하거나 무언의 압박을가한 것 같은 기억은 전혀 없다.
불령선인으로 낙인이 찍힌 특별한 집안이라면 모를까, 우리네 같은 보통집안 사정은 대개 비슷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단시일내에 창씨가그렇게 급속히 확산됐던 것은 너무 내 경험 위주로만 생각하는 건지는몰라도 아직까지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다. 박적골 사람들도 두 박씨집만 빼고 나머지 홍씨들은 초기에 일찌거니 도쿠야마로 성을 갈았다.
성을 안 갈아서 실질적인 불이익이 우려되는 건 면서기인 큰숙부련만,면서기 정도의 관직도 출세한 것처럼 여기는 할아버지가 창씨 문제에있어서만은 이상하도록 줏대 있게 구셨다.
그게 할아버지의 모순이라면 음력 설만이 조선 설이라고 온갖 장애를무릅쓰고 지켜 나가면서도 성 가는 건, 알아서 간 건 마을 사람들의모순일 터였다. 우리 엄마도 물론 알아서 기는 대표적인 케이스였지만나는 그와는 좀 다른 까닭으로 역시 창씨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내이름을 일본말로 부르면 '보쿠엔쇼'가 되는데 비상시국이 되면서방공연습을 매일같이 했는데 방공연습을 일본 말로 하면 '보쿠엔슈'가되었다. 발음이 비슷해서 방공연습 때마다 아이들이 나를 놀렸다.
창씨개명을 하면 한자를 음으로 읽지 않고 뜻으로 읽게 되는데 하나코니하루에니 하는 여자 이름이 그렇게 듣기 좋고 부러울 수가 없었다.
집에서도 일본말로 생활한다고 자랑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 애의엄마는 대개 젊고 멋쟁이였다. 우리 처지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얘기였다.
엄마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쓸개 빠진 것들이라고 격분을 했다.
학부형회가 있으면 엄마는 꼭 참석을 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일인이고학부형이 일본말을 모르는 경우에는 반장을 불러서 통역을 시켰다. 일본인선생님 앞에 풀을 세게 먹인 뻣뻣한 무명옷을 뻗쳐입고, 쪽에 흑각 비녀를꽂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꼬마 통역에 대한 배려라곤 조금도 없이 당신하고 싶은 말을 엄숙하게 하고 있는 엄마를 바라본다는 것은 고문처럼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엄마의 개인적인 자존이었을 뿐 민족의식과는상관이 없지 않았나 싶다. 왜냐 하면 엄마는 창씨 안 한 게 자식들에게행여 어떤 불이익이 되어 돌아올까 봐만 지나치게 걱정했을 뿐, 만약에불이익이나 박해를 받을 경우 자식들이 떳떳하게 견딜 수 있도록 도와 줄준비가 돼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바라는 자식의 출세도 물론일제의 그늘 아래에서의 일일 뿐 조선이 자주적인 운명에 대한 바늘구멍만한 예감도 갖고 있지 않은 범용한 아낙에 지나지 않았다.


6. 할아버지와 할머니학부형회 때마다 엄마가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도 창피해 죽겠는데어느 날 수업 중에 엄마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그리고 고무신도 벗지 않고교실문을 드르륵 열었다. 일본인 남자 선생님이 담임할 때였는데 엄마는마치 그가 일본인이라는 걸 모르는 것처럼 예절 바른 어려운 조선말로시골의 조부님이 위독하다는 전보가 와서 딸애를 데리러 왔다는 뜻의 말을했다.
선생님도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챘는지 반장한테 시키지 않고 나를불러 통역을 시켰다. 나는 그때 엄마가 쓴 장엄하기까지 한 고급의우리말을 그대로 옮길 수 없는 게 억울하고 초조한 나머지 울상이 되어형편없는 통역을 했다. 아무튼 뜻은 전달이 됐으므로 선생님은 어서가라고 허락을 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 경황 중에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경우 장례를 치르는동안은 결석 처리를 하지 않는 게 교칙인 줄 아는데 그게 맞지요? 하는확인까지 통역을 시키고서야 내 손을 잡고 교실을 물러났다. 엄마는 시골갈 준비를 다 해 가지고 학교에 들렀는지라 나는 책가방을 멘 채경성역으로 직행을 해 기다리고 있던 오빠와 숙부 숙모와 합류했다.
방학 대 귀향할 때는 토성행 완행 열차를 탔었는데 그날 처음으로신의주행 급행 열차를 탔다. 기차는 한번도 안 쉬고 달리다가 처음으로개성역에 잠시 정차했다. 깜깜한 밤이었지만 우리 다섯 식구는 쉬지 않고이십 리 길을 달려갔다.
사랑에 불이 환하고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할아버지는 의식은 없지만아직 생존해 계신다고 했다. 세 번째 동풍이어서 다들 임종을 각오하고있었다. 사랑에 모인 사람들이 나는 어리다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나도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할아버지를 뵙는 게 무서웠기 때문에 얼른 그자리를 피했다.
안채에도 불을 밝히고 아무도 자는 사람이 없었지만 나는 깊은 잠에빠졌고 곡하는 소리에 깨어났다. 새벽녘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소리를 듣고도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오일장을 치르는 동안 당시의풍습에 따라 한시도 곡이 그치지 않았지만 호상답게 집안 분위기가침울하지는 않았다.
박적골 사람들은 물론 인근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까지 안동하고 와상가에서 침식을 해결했고, 그 비상시국에 그런 일을 넉넉하게 치렀기때문에 모두 돌아간 분의 복을 기리고 부러워했다. 다 할아버지를 끝까지모신 큰숙부 덕이었다. 막상 큰일을 당하니까 서울 가서 돈도 벌고 출세도한 걸로 알려진 작은숙부나 오빠보다도 면서기의 세도가 더 빛을발휘했다. 그 때 큰숙부는 면의 총무부장이었다.
상 중에 할아버지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 이는 오빠였다. 오빠는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애통이 지나쳐 한때 몸을 다 해쳐 엄마의애간장을 태웠다고 한다. 내가 세 살 때였으므로 내 기억 속에 아버지의죽음은 없다.
이번에도 오빠가 맏상주였으므로 오빠는 굴건제복을 했다. 지금 오빠는늠름한 청년이지만 아버지의 상 중에서 열 살 남짓한 소년이 굴건제복을하고 서럽게 울었을 생각을 하면 나는 그런 일이 나와는 상관없는오빠만의 운명인 양 애틋한 슬픔을 느꼈다. 그건 오빠의 약하고 여린 면에대한 연민이었다. 집에서 집은 돼지고기를 끝내 못 먹고만 오빠를어른들이 걱정하던 생각까지 나면서 나도 비슷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출상하는 날은 선산이 가깝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만장의 행렬이 집앞에서 산까지 연달았다. 상여도 그렇고 서울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호사스러운 광경이었다. 당시의 풍습이 그러했는지, 우리 집안만의가풍이었는지 안상제들은 상여채를 부여잡고 서럽게 울기만 하다가슬그머니 물러나고 장지까지 따라가지 않았다.
숨이 넘어간 후에 오히려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고, 복잡하고도 밑도끝도 없는 절차와 격식으로 닷새 동안의 시간을 밤낮없이 지배하던 유해가떠난 후의 공허함은 많은 뒤치다꺼리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안상제들을 어쩔 줄을 모르게 만들었다. 채울 길 없는 공허감은 어린마음에도 크나큰 공포감으로 다가왔다. 툭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절박한 상황에서 엄마가 느닷없이 나에게 모진 말을 했다.
"툭하면 울기 잘 하는 년이 어쩌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눈물 한방울을 안 흘리냐 안 흘리길? 저깐 년을 그렇게 귀애하시다니. 기르던강아지라도 그만큼 귀애했으면 며칠 끼니라도 굶겠다. 그저 딸년이고손녀는 계집애 기르는 일은 말짱 헛일이라니까."
엄마는 말만 그렇게 모질게 했을 뿐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눈길도 오만정이 다 떨어진 것처럼 뜨악하고 냉랭했다. 그때부터 나는 울기 시작했다.
정신이 가물가물하고 온몸이 탈진할 때까지 몸부림을 치며 통곡을 했다.
할머니와 숙모들은 내가 그 동안 참았던 설움을 폭발시킨 줄 알고, 속모르는 말을 한 엄마를 나무라며 나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분명한 것은 그때의 내 울음은 슬픔 때문이 아니라모욕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내 마음의 정곡을 찌른 것도아니었다. 나는 비록 상 중에 울진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오래 할아버지를여읜 상실감과 할아버지에 대한 자잘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진을남기지 않은 할아버지 신관의 섬세한 부분까지, 그리고 다들 잊어버린사소한 버릇이나 일화까지를 어른이 되고 시집 간 후에도 기억하고 있어서기억력 좋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그게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 마루엔 서까래로부터 삼으로 탄탄하게 꼰 새끼줄 굵기의 줄이사람들이 붙들고 오르내리기 알맞은 높이에 늘어져 있었다. 동풍이 들기전에도 할아버지는 그 줄을 가볍게 잡고 오르내리셨지만 일차 동풍 후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뒷간이나 마당 출입이 가능했던 시기엔 그 줄에매달려 다리를 부들부들 떠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줄은 거기 늘어져 있었고 나는 방학에귀향할 적마다 멀리서도 텅 빈 사랑채에 늘어져 있는 그 줄만 눈에 띄면심장에 균열이 가는 것처럼 가슴에 진한 아픔이 왔다. 그래서 오래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달려가듯이 제일 먼저 그 줄을 향해 달려가어루만져 보곤 했다. 할아버지의 손때에 절어 그 줄은 찐득찐득했고 그게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자주 그 줄에 매달려 할아버지 품에안겼을 때와 같은 감동을 맛보곤 했지만, 그 짓을 누가 눈치챌세라은밀하게 하곤 했다.
전쟁이 점점 불리해지면서 방공연습도 잦아지고 처음으로 몸빼라는 걸교복처럼 의무적으로 입게 되었다. 학교에서 하라는 건 어기면 큰일나는줄 아는 엄마인지라 곧 검정물을 들인 광목을 끊어다가 몸빼를 손수만들어 주었지만 입혀 보고는 한탄을 금하지 못했다.
"시상에, 왜놈 훈도시만 망칙한 줄 알았더니 여자 가랭이 드러나는 꼴은더 못 봐 주겠네. 더 살면 무슨 꼴을 볼꼬."
엄마가 일본 풍습을 얕잡는 것 중에 복식이 제일 유별났다. 옛날에맨발에다 겨우 아랫도리만 기저귀 같은 천으로 가리고 살던 일인이 조선에와서 그들에게 알맞은 옷과 신발 짓는 법을 하교해 달라고 애걸하여 옷은우리의 상복을, 신발은 우리의 도마를 가르쳐 준 게 지금의 일본 하오리와게다짝이 됐단 얘기를 엄마는 역사적 사실처럼 우리에게 얘기해 주곤했다.
그건 마치 세종대왕이 문살에서 힌트를 얻어 하룻밤새에 한글을만들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역사적 사실처럼 믿는 것만큼이나 아무도못 말릴 엄마의 고정관념이었다. 밤이 이슥한 한여름의 남대문통이나본정통에는 아직도 훈도시만 차고 어슬렁거리는 일인이 있는 것까지도엄마는 우리가 상복이나마 의복을 하교해 주기 전의 풍습이 남아 있는 산고증처럼 얘기하곤 했다.
그러나 엄마의 반일 감정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됐다. 할아버지 장례를치르고 상경하자마자 엄마는 오빠와 숙부에게 우리도 창씨개명을 하자고재촉했다. 그건 나도 은근히 바라는 바였고 또 으레 그럴 수 있으려니했다. 그러나 이번엔 오빠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여태껏도 견뎌 왔는데 좀더 견뎌 보자는 것이었다. 좀 더 견뎌 보자는 것은 그때의 비상시국의어떤 끝장을 바라보는 말 같아서 좀 섬뜩하게 들렸다.
오빠의 태도도 평소의 심약한 오빠답지 않게 강경하고 어딘지 비장해보였다. 나는 어려서 그러했겠지만 꽤 잘난 엄마도 일본을 미워하고얕잡기는 잘 했어도 일본의 끝장은 곧 우리의 끝장이란 생각에 굳어져있어 일본의 끝장이 우리에게 새로운 갈림길을 열어 주리라는 생각 같은건 꿈에도 안 해 본 듯했다.
엄마보다 더 놀란 건 작은숙부였다. 창씨를 안 하고 일본인 상가에서장사 해먹기는 앞으로 점점 쌀의 뉘처럼 껄끄러워지리라고 하소연했다.
오빠는 정 그러면 숙부네가 따로 분가해서 성을 가는 게 어떻겠느냐는제안을 했다. 할아버지 다음으로 오빠가 호주를 승계했고 그때만 해도호주의 권한이 막강했다. 오빠의 이 새로운 제안은 숙부를 노엽게도슬프게도 했다. 내가 자식이 없어도 느이 남매를 친자식이나 다름없이여겨 섭섭한 줄 몰랐거늘 호적을 파 가라는 수모를 당하다니, 하면서탄식했고 엄마가 중간에서 사죄와 화해를 시키느라 쩔쩔맸다.
성을 안 갈아서 곤란하기는 작은숙부보다는 말단 공무원인 시골의큰숙부가 더 했으련만 역시 오빠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엄마는엄마대로 생전 어른 석이라고는 썩일 줄 모르던 오빠가 왜 별안간 객쩍은자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번도 뜻이 안 맞아 본 일이 없는 세집이 창씨 문제로 처음으로옥신각신했다. 그러나 다들 오빠의 뜻을 따르기로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진걸 보면 숙부들은 그래도 오빠의 주장을 단순한 객기로만 보진 않은듯하다.
나는 처음으로 오빠를 딴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대한 묘한긍지를 느꼈다. 나야말로 무엇을 알아서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속물의세계에서 별안간 우뚝 솟은 어떤 정신의 높이를 본 것 같은 환각이었다.
그런 건방진 느낌은 그 무렵 왕성해진 독서 체험과도 무관하지 않을듯하다.
오학년 때였는데 처음으로 친한 친구가 생겼다. 전학생이었는데선생님이 나하고 짝을 시켰다. 전학해 온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동안 마음이 순한 아이하고 짝을 시키는 게 선생님들의 공통된버릇이었다. 나는 반에서 존재 없는 아이여서 아무 일에도 뽑힌 적이없건만 그런 일엔 단골로 뽑혔다. 나는 속으로 모욕감을 느꼈지만 드러내놓고 싫은 눈치도 못 했다. 나는 내가 착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는 걸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바라는 유일한 기대를 배반할 용기가 없어그런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애는 성만 일본 식으로 갈고 이름은복순이라는 촌스러운 본명 그대로였다. 생긴 것도 촌스럽고 의복도 남루한편이었다.
그 애하고 짝이 된 첫 시간에 배운 국어가 도서관에 대한 거였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출해서 읽고 반납하는 과정이 자세히 나오는데선생님은 너희들도 실제로 도서관을 한 번 이용해 보면 좋은 경험이 될거라고 도서관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근면해서 성공한 이야기가 나오면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고 했고, 정직에대해서 나오면 정직이야말로 가장 가치있는 도덕이라고 강조하는 것과마찬가지로 그런가 보다 들어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 촌스러운 복순이가 다음 일요일날 같이 도서관에 가보자고나를 꼬였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공립도서관의 위치를 잘 들어 두었는데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국어책에 나온 대로 거기서 보고 싶은 책을실컷 빌려 보면 얼마나 신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애는 책보는 재미에대해 나보다 뭔가를 더 알고 있었다. 그 애에 비해 나는 처녀지와 다름이없었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도서관은 지금의 롯데 백화점 자리였다. 그때그 도서관을 우리는 공립도서관이라고도 했고 총독부 도서관이라고도했다. 해방 되고 나서 국립도서관이 된 바로 그 건물이었다. 일요일날 같이가기로 하고 먼저 그 애 집을 알아 놓기로 했다.
그 애 집은 누상동이었다. 문 안에도 그런 집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초가집 추녀가 어찌나 낮게 땅으로 드리웠는지 문자 그대로 기어들어가고기어나오게 생긴 집이었다. 평지라 수돗물이 나오는 것만 빼면 우리집보다 훨씬 못했다. 삼남매에다 부모님 할머님까지 여섯 식구가코딱지만한 방 두 칸에서 기거한다는 것도 안 돼 모였다. 게다가 하나밖에없는 남동생은 온종일 침을 흘리며 외마디소리를 지르는 박약아였고,엄마는 홧김에 그렇게 됐는지 시어머니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줄담배를피우고 있었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도 구김살없이 명랑한 그 애가불쌍하면서도 존경스러웠다. 그 애는 손수 부엌에 들어가 감자 껍질을몽당 숟가락으로 박박 벗기더니 쪄서 나에게 대접했다. 그런 꾸밈없는태도도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나에게도 드디어 동무가생겼다는 걸 느꼈다. 그때까지 놀 애가 아주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내 우정에 대한 갈망을 채워 준 건 그 애가 처음이었다.
도서관 가는 게 학교 숙제라고 했더니 단박 엄마의 허락이 떨어 졌다.
공일날 아침, 그 애네 집에서부터 도서관까지의 길은 나에게 멀고도낯설었다. 그 애도 처음이어서 겁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길을 물어간신히 당도한 곳은 아이들이 만만하게 이용할 수 있게 생긴 건물이아니었다. 붉은 벽돌 건물엔 권위주의적인 정적이 감돌고 있었고 감히어디로 어떻게 들어가 책을 비리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 지 도무지 감을잡을 수가 없었다.
안에 충충하게 고여 있는 어둡고도 서늘한 정적을 훔쳐보는 것조차두려워서 가슴을 졸이며 열려 있는 문을 이 문 저 문 조심스럽게 엿보고다니는데 정복을 입은 수위가 달려왔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하는데 내 동무는 또박또박 교과서에서 배운 도서관이용법을 직접 해 보려고 왔노라고 말했다. 당장 몰아 낼 듯이 눈을부라리며 달려온 수위였지만 내 동무의 똑똑함에는 감동을 한 듯했다. "허,고것들 참." 하면서 이 도서관에는 아이들 열람실이 없으니 딴 도서관엘가 보라고 했다.
수위 아저씨가 가르쳐 준 딴 도서관은 거기서 가까웠다. 지금의조선호텔 정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부립도서관이었다. 해방 후엔 서울대치대도 됐다가 여러 번 용도가 바뀌었지만 그때는 총독부도서관 다음으로큰 도서관이었다. 그 도서관 역시 우리 같은 촌뜨기가 만만하게 이용할 수있을 것 같지 않게 당당하고 음침한 분위기의 건물이었지만 아이들열람실은 본관에서 따로 떨어진 단층의 학교 교실만한 별관이었다.
들어가는 데 아무런 수속 절차가 필요없었고 아저씨 한 사람이선생님처럼 앞의 책상에 앉아 있고 아저씨 뒷면 벽이 온통 책장이었는데아무나 자유롭게 꺼내다 볼 수 있는 개가식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것같은 열람을 위한 수속 절차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제 집 서가의책처럼 마음대로 꺼내다 보고 재미 없으면 갖다 꽂고 딴 책을 가져오기를아무리 자주 되풀이해도 그만이었다. 실제로 읽지는 않고 그렇게촐싹거리가만 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저씨는 어린이들을 향해 앉아 있을뿐 이래라 저래라 말이 없었다. 그 또한 온종일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곳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꿔 본 별천지였다.
그날 처음 빌려 본 책이 아아, 무정이라는 제목으로 아동용으로 쉽게간추려진 레 미제라블이었다. 물론 일본말이었고 삽화가 이루 말할 수없이 아름다워 읽는 재미에다 황홀감을 더해 주었다. 간추려졌다고는하지만 상당한 두께의 책이어서 도서관을 닫을 시간까지 속독을 했는데도다 읽지 못했다. 대출은 허락되지 않았다. 못다 읽은 책을 그냥 놓고 와야하는 심정은 내 혼을 거기다 반 넘게 남겨 놓고 오는 것 같았다. 숙부네다락방에서 만화책을 빼앗겼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그것과는 댈 것도아니게 허전했다. 미칠 것 같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내 동무가 읽은건 소공녀였고 끝까지 다 읽었다고 했다. 우리는 몹시 흥분해서 서로가읽은 책 얘기를 주고 받았고 다음 공일에도 또 가자고 약속했다.
엄마는 내가 공일날마다 도서관에 가는 것을 덮어놓고 기특해 했고오빠는 내가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동화책을 읽으러 간다는 걸알았지만 도서관에 비치된 책에 대해 신뢰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말리지않았다. 그날 이후 공일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씩 읽는 건 내 어린날의 찬란한 빛이 되었고, 복순이와 나는 더욱 단짝이 되었다.
매일 밤 꿈에서 왕이 되는 행복한 거지와, 매일 밤 꿈에서 거지가 되지않으면 안 되는 불행한 왕 얘기도 그때 읽었고, 복순이가 먼저 읽은소공녀도 물론 따라 읽었다. 소공녀 세라도 하녀로 전락한 후 어느때부터인가 문득 밤마다 그의 귀가를 기다리는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과훈훈한 난로를 꿈처럼 경험하게 된다. 나에게 부립도서관의 어린이열람실은 바로 그런 꿈의 세계였다.
내 꿈의 세계 창 밖엔 미루나무들이 어린이 열람실의 단층 건물 보다훨씬 크게 자라 여름이면 그 잎이 무수한 은화가 매달린 것처럼 강렬하게빛났고, 겨울이면 차가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힘찬 가지가 감화력을지닌 위대한 의지처럼 보였다. 책을 읽는 재미는 어쩌면 책 속에 있지않고 책 밖에 있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창 밖의 하늘이나 녹음을 보면줄창 봐 온 범상한 그것들하곤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사물의 그러한낯섦에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
육학년이 되자 상급학교 입시준비가 요새 같지는 않았어도 담임도무서운 선생님이 맡게 되었고 정규수업이 끝난 후에도 남아서 늦게까지공부도 하고 시험도 쳤다. 그러나 복순이하고 나는 여전히 일요일이면도서관에 가서 책 읽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숙제도 많이 내주었지만토요일날 둘이서 같이 후딱후딱 해치웠다. 복순이와 나는 늘 붙어다녀선생님이나 반 애들이 다 알아주는 단짝이 되었다. 복순이는 공부도 아주잘 했다. 나도 복순이와 단짝이 된 후 성적이 좀 올랐다. 단짝을 잃고 싶지않은 마음이 되레 단짝과의 경쟁의식이 되지 않았나 싶다.
사학년 때부터 원족이 수학여행으로 바뀌는 건 모든 국민학교의 정해진관례였다. 사학년 땐 인천, 오학년 땐 수원, 육학년 땐 개성으로,목적지까지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여행이라지만 자고 오는 건 아니고단지 기차를 타고 갔다 온다는 걸로 그렇게 불렀다. 나는 우리 고향으로수학여행을 가는 게 싫고 은근히 근심이 되었다. 개성에 대해 다 알아서시들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실상 개성은 귀향할 때마다 거치는 고장일 뿐변변히 구경한 적은 없었다. 내가 걱정이 되는 건 엄마가 미리 편지를 해놨기 때문에 할머니나 숙모가 마중을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우리는 식구들이 고향에 오갈 때마다 역까지 전송하고 마중하는 게유난스러웠다. 방학 때 시골 가는 것도 오빠를 숙부네 맡기고까지 꼭엄마가 데리고 가고 오건만도 양쪽 숙부 숙모들의 떠들썩한 전송과 마중을받았다. 나는 나이 들수록 그게 싫었다. 작은집, 큰집 사이가 딴 집의한식구끼리보다 더 강하고 끈끈하게 엉켜 사는 것도 마땅찮았고 엄마나할머니가 나를 마냥 어린애 취급하는 것도 싫었다.
개성 가는 표를 사려면 같은 경의선인 봉천행 표 파는 데 바로 옆에줄을 서곤 했다. 개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비슷했는지아닌지까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덮어놓고 일찍 나가서 오래 줄 서서기다리는 걸 고달픈 운명처럼 감수할 때였다. 가까이서 바라본 봉천으로가는 여객은 국내 여객하고는 전혀 달라 보였다. 이불 보따리 등 짐이많았고, 바가지가 올망졸망 매달린 보따리에 기대어 조는 노인네가 있는가하면 개떡이나 조밥 따위를 펼쳐 놓고 아귀아귀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남녀노소가 고루 섞인 솔가해서 떠나는 일가족이 많아 시끄럽고구질구질했다.
봉천은 우리 나라 지도에는 없는 땅이었다. 하룻밤 하루 낮도 더 걸리는먼 만주땅이라고 했다. 봉천은 내가 아는 외국 땅 이름 중 유일하게 내가한 발자국만 옆으로 비켜서면 도달할 수 있는 고장이었다. "호텐, 호텐유키"하고 봉천행 개찰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그 줄이 웅성거리면 나는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 무질서한 행렬로 슬쩍 끼여들어 가족들의보호로부터 행방불명이 돼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미지의고장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다만 가출의 꿈이었다. 이렇다 할 까닭도 없이그냥 가족들의 간섭이 지긋지긋할 때였다. 그럴수록 복순이하고의 우정은점점 더 배타적으로 돼 갔다.
개성으로 수학여행 떠나는 날 엄마는 경성역까지 배웅을 나와서 혹시개성역에 누가 마중을 안 나오더라도 너무 섭섭해하지 말고 잘 놀다오라고 타이르고 들어갔다. 제발 아무도 안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꼭 나올 것 같아 마음이 영 개운치 않은 채 기차가 개성역에 도착했다.
육학년은 총 다섯 반이었다. 개성역 앞 광장에 반끼리 줄을 서서 인원점검을 할 때였다. "완서야, 완서야." 하고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났다. 저만치서 할머니가 무법자처럼 아이들 사이를 마구 헤집고 다니면서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숙모도 아니고 할머니였다. 어찌나 창피한지 잠시꺼질 수 있는 거라면 꺼지고 싶었다.
할머니는 풀을 세게 먹여 다듬은 옥양목 치마 저고리를 뻗쳐 입고머리에는 베 보자기에 싼 커다란 임을 이고 있었다. 수치감과 분노로화끈해진 얼굴을 깊이 숙이고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복순이의손을 꼭 붙들었다. 내 조선말 이름은 복순이밖에 누가 알랴 싶었다.
할머니한텐 좀 안됐지만 눈 딱 감고, 귀먹은 셈치고 이 고비를 넘기자,그런 속셈이었다.
그러나 웬걸,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이 애 저 애 붙들고 물어 봐도소용이 없자 할머니는 어디서 배워 왔는지 이번엔 일본말로 내 이름을부르기 시작했다. 그건 아무도 못 알아들을 혀 꼬부라진 어눌한 소리에불과했지만 나는 더는 참지 못했다. 할머니한테 그 어려운 발음을 시킨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진저리가 쳐졌다. 그럴 땐 우는 게 유일한 내재주였다. 나는 "할머니!"하면서 그 뻣뻣한 치마폭으로 달려들어 서럽게울기 시작했다. 할머니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내새끼." 하면서 연방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치 오랫동안 몇천 리 밖에 떨어져 지낸 손녀와할머니처럼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우리를 구경했다.
할머니가 베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엔 다시 작은 보따리가 세 개 들어있었다. 송편이었다. 필경 며느리를 닦달질 해 밤새 빚어 새벽에 쪄 가지고달려오신 듯 말랑한 송편에서 솔내와 참기름내가 물씬 났다.
그러나 나는 오직 아이들 보기에 창피하단 생각밖에 없었다. 어서 그고역스러운 시간을 면하고 싶었다. 흐트러진 열을 바로 세우려는 선생님의호루라기 소리가 나자 할머니는 한 보따리는 선생님 드리고, 한 보따리는서울로 가지고 가서 작은집과 나누어 먹고, 또 한 보따리는 아이들하고나누어 먹으라고 송편이 세 보따리인 까닭을 설명해 주고 비로소 작별을아쉬워했다.
다행이 그때 우리 담임 선생님은 다리를 삐어서 여행에 따라오지 못하고딴 반 선생님이 우리를 인솔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혹시담임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싶어할까 봐 그 얘기를 재빨리 할머니 귀에속삭이고는 어서 가시라고 밀어 냈다. 그리고 할머니가 저만치 떨어져서우리가 정렬하여 차례로 역 광장을 떠날 때까지 지켜보는 걸 의식하며참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행이 복순이가 말없이 나에게 덧붙여진 짐을같이 들어 주었다.
만월대, 선죽교 등 정해진 코스를 도는 동안 내내 우울했다. 점심을 먹을때 나는 그 송편을 아무하고도 나누어 먹지 않았다. 물론 선생님한테드리지도 않았다. 다 큰 나이라 내가 할머니를 창피하게 여긴 데 대해반성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할머니를 창피하게 여기는마음하나로 그렇게 우울하다는 건 정확하지 않았다. 나는 왜 이럴까 싶은반성과 우리 집안은 왜 이럴까 반발하는 마음이 반반씩이었다. 친족간의끈끈한 유대감과 과보호가 점차 나를 옥죄는 것 같아 그게 참을 수 없이짜증스러웠다.
밤에 도착한 경성역엔 또 오빠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오빠에게 송편보따리를 인계할 때까지 꾸준하게 그걸 같이 들어 주고 내 배배 꼬인심보를 이해해 준 복순이에게도 단 한 개의 송편도 맛뵈지 않았다. 오빠와나는 먼저 남대문통 작은 숙부네에 들러서 송편 보따리를 끌러 두 집이공평하게 노느매기를 하면서, 작은 숙부 내외가 큰 숙모의 노고와 솜씨를찬양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국민학교 마지막 수학여행은 이렇게우울하게 끝났다.


7. 오빠와 엄마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졌다. 조선 청년에대한 지원병제가 징병제도로 바뀌었다. 오빠는 징병엔 걸리지 않을나이였지만 징용이라는 노무 동원제도가 따로 있어 언제 징집이 될지모르는 형편이었다. 엄마는 오빠가 총독부에만 그냥 다녔어도 징용에는 안걸리는 건데 하면서 아쉬워했다. 오빠는 와타나베 철공소가 군수품 공장이됐으니까 징용 걱정은 말라고 엄마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오빠 자신이그걸 다행스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 조선에서 제일 먼저 지원병으로 나가 전사한 이인석이라는상등병을 영웅 취급하여 그의 일대기를 일본의 창극 비슷한 나니와부시로엮은 게 있었는데,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일에 혈안이되고부터는 그게 매일같이 방송이 되었다. 오빠는 그 소리만 나오면질색을 하고 꺼 버리라고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곤 했다.
이학기부터는 아무래도 입시공부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다리를 몹시 삐어 집에서 쉬는 동안도 반장과 긴밀히 연락하여시험문제를 내주고 채점을 해서 보내고 체벌까지도 하달을 하였다. 조선선생님이었고 아기가 하나 딸린 부인이어서 엄마는 여간 마음에 들어하지않았다. 그때만 해도 조선인 선생까지도 일본말을 모르는 학부형하고상담할 때는 통역을 내세우는 짓을 더러 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고 상대해주는 것만으로도 엄마의 호감을 살 만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하는 체벌은 매우 독특하고 혐오스러운것이었다. 육학년 다섯 반 중 두 반이 여자 반이었는데, 우리의 성적을올릴 의도였겠지만 선생님은 끊임없이 다른 반과의 경쟁의식을 부추겼다.
일제고사 성적이 그 반보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자기 점수에 상관없이전체가 벌을 받았는데 선생님은 손끝하나 까딱 안 하고 우리에게 가혹한체벌을 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건 짝끼리 서로 마주 보고 서서상대방 뺨을 선생님이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때리게 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끼리 때리면 살살 때릴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살살 때리는기미가 보이면 선생님이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고 너희들이 그런 잔꾀를부리면 마냥 때리게 할 거라고 위협을 하기도 했지만, 내가 때리는것보다는 상대방이 더 아프게 때리고 있다는 느낌은 피할 길이 없었고,그렇게 되면 억울해서라도 상대방보다 더 세게 때리고 싶어진다. 생각해보라. 열서너 살밖에 안 된 계집애들이 마주보고 서서 서로의 증오심을무진장 상승시켜 가며 꽃 같은 뺨이 시뻘겋게 부풀어오르도록 사매질을하는 광경을. 그거야말로 구원의 여지가 없는 지옥도였다.
복순이와 나는 성적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해서 성적 순으로 앉을 때나키 순으로 앉을 때나 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도 별수없이 이야만적인 증오심에 씌어 점점 강도가 높게 서로의 뺨을 때렸다. 어느고비를 지나면 누가 더 아프게 때리나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고 우리의 그짓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비인간적인 채찍을 우리의 배후에느낄 뿐이었다. 선생님의 그만 소리가 떨어지고 나면 우리의 증오심은 곧수치심으로 변해 서로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생각하기도 싫은끔찍한 체벌이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여태껏 만나 본 어떤선생님보다도 수더분하여 마음에 든다고 했지만 그런 분이 왜 우리로하여금 그 나이에 그런 짐승의 시간을 갖게 했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엄마는 나의 경기고녀에 보내고 싶어했다. 원하면 못 갈 것도 없다는담임 선생님의 말이 화근이 되었다. 나는 육 년 동안 한번도 우등을 한적이 없었고, 내가 생각해도 처음부터 경기고녀감으로 선생님이 지목한아이들의 실력에 내 성적은 못 미쳤다. 엄마도 그걸 눈치 못 챘을 리가없었다. 욕심은 있어도 모험을 마다하지 않을 만한 배짱은 없는 엄마였다.
그러자니 엄마에겐 욕심을 낮출 만한 구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엄마는오빠에게 창씨만 했어도 경기고녀를 보낼 수 있을 텐데 창씨 안 한 게암만 해도 걸린다고 엉뚱한 원망을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창씨문제가 다시 재연됐다.
엄마는 당신 생각에 확신을 얻기 위해 선생님하고도 그 문제를의논했다. 선생님은 그런 규정은 없지만 공립학교니까 혹시 동점인 경우불리할지도 모른다는 정도로 자기 의견을 말했을 뿐 결정적인 회답은피했건만도 엄마에겐 충분한 구실이 되었다. 나는 뻔히 억지인 줄 알면서오빠를 괴롭히는 엄마가 싫었고 엄마의 성화를 의연하게 견디는 오빠가존경스러웠다. 잘은 모르지만 엄마나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신념을가진 오빠를 나라도 도와 줘야 할 것처럼 느꼈다.
나는 엄마를 설득해서 숙명고녀에 지원했다. 그때만 해도 선생님이성적에 따라 정해 주는 학교는 참고가 될 뿔 각자의 취향과 형편에 따른자유 재량권이 존중될 때였다. 복순이가 경기고녀에 지원한 것도 내가경기를 피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였다. 너무 붙어다녀 지쳤다고나 할까,요새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져 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 애도 우리가헤어져야 한다는 데 동감이었다. 센티한 소녀소설에 감염된 우리는 편지로더 많은 사연을 주고받기로 하고 건방지게도 이별을 모의했다.
엄마는 내가 숙명에 원서를 낸 후에도 여전히 창씨 안 한 걱정을 했고하나 덧붙여서 신체검사에 떨어질 걱정까지 했다. 나는 엄마의 이런걱정을 들으며 엄마가 벌써부터 만약에 불합격했을 때의 구실을 마련하고있다는 걸 느꼈다. 꿈에도 실력이 모자라서 떨어졌다고는 말하고 싶지않은 엄마였다. 어디서 알아 냈는지 엄마는 몸무게가 얼마 이상이 안 되면불합격시킨다는 불확실한 정보를 입수해 가지고 내 체중을 빨리 늘리려고갖은 애를 썼다.
나는 강단은 있었으나 굉장히 말라깽이였다. 복순이는 키는 나하고비슷했지만 얼굴이 둥글고 몸이 뚱뚱해 반에서 별명이 '오타후쿠'였다.
우리는 늘 붙어다녔고 또 네것 내것 없이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선생님까지도 복순이한테 네 살 좀 재한테 나눠 주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엄마가 성화한다고 체질적으로 없는 살이 별안간 찔리 만무했다.
신체검사날 엄마는 내 속옷에다가 은반지 등 무게 나갈 만한 것들을여기저기 찔러 넣어 주었다. 그러나 입시날 엿이나 찰밥을 먹이는, 그때도누구나 하는 비방에는 초연한 엄마였다. 만약 엄마가 그런 미신적비법에도 극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복받친다.
복순이도 나도 무난히 합격을 했다. 입시가 졸업 전에 있었기 때문에합격하고 나서도 학교는 그대로 다녔는데 선생님은 수업은 건성으로 하고신파극 본 얘기도 해 주고 지금의 성교육 비슷한 얘기도 해 주었다.
합격한 아이는 틈을 내어 신사참배를 하란 얘기도 했다. 입시를 앞두고는합격을 빌기 위해 단체로 신사참배를 했었다.
어느 날 복순이가 우리 둘이서 신사참배를 가자고 했다. 아무리선생님이 한 번 일러 준 거라 해도 그건 기발한 제안이었다. 선생님이지나가는 말로 한 것까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가 융통성없는 모범생이었던 것도 아니었고, 도서관을 찾아갈 때 같은 호기심이신사에 대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두말 없이 동의했고 복순이가참으로 적절한 생각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졸업식날이 며칠 안 남았을 때였다.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각기 다른학교를 지원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고 그냥 헤어질 순 없다고 생각하고있었다. 우리에겐 어떤 형태로든 간에 이별의 의식이 필요했다. 그러나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어쩔 줄을 모르긴 둘 다 마찬가지였다. 마음껏센티해져서 어른 흉내를 낼 만한 나만의 방을 가지고 있지 않기는복순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겨우 생각해낸 집 밖의 장소가신사였던 것이다.
하필 그날 진눈깨비가 왔다. 3월인데도 지금의 한겨울 못지 않게 춥고바람 부는 날이었다. 조선 신궁 올라가는 그 높고 높은 계단에 사람의그림자라곤 거의 없었다. 우리는 질척하게 쌓인 눈속에 운동화가 푹푹빠져 양말을 적시고 발끝이 얼어붙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 높은층층다리를, 누구한테 심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씩씩대며 돌파를 했다.
신궁 앞까지의 자갈이 깔린 길도 아무도 밟지 않은 눈으로 평평해 보였다.
우리는 신궁 쪽은 흘끗 한 번 쳐다만 보고 경성신사가 가는 쪽의 완만한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계절이 좋을 때 그 길은 연인들의 산책로로유명했다. 우리 사이에 요새말로 무드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거기를생각해 낸 것도 아마 그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워낙 날씨가 험해 지나가는 사람도 만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뭔가 풀어야 할 응어리가 있는 것처럼 느꼈지만 끝내 풀지 못하고일본 사람들만이 사는 남산정에 이르렀고, 저만치 길 건너로 본정통에 한집 두 집 불이 들어오는 걸 바라보았다.
눈물이 날 것처럼 참담한 고행길이었다. 둘이 만났다 하면 그렇게도죽이 잘 맞아 온종일 수다를 떨어도 미진했었는데 그날은 거의 말을 하지않았다. 그리고 아주 뜨악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서로 마음이 어긋나고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그걸 어떻든지 만회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날 든 감기로 졸업식날까지 학교를 쉬었다.
그 동안에 복순이는 한번도 문병을 와 주지 않았고, 오빠가 한 번 입학축하로 양식을 사 주겠다며 화신백화점에 데리고 갔다. 오빠로서도 상당히멋을 부린 생각이었겠지만 나도 양식집에 가 보긴 그날이 생전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때 벌써 일본사람들이 총후라고 부르는 일반민간인의 생활은 궁핍할 대로 궁핍해졌을 때였다. 화신백화점 사층인가오층에 있는 양식부에 한 번 들어가기 위해 아래층에서부터 온종일 줄을서야만 했다.
오빠가 나를 데리고 나갈 때 엄마는 나더러 오라비 잘 둔 덕으로 별호강을 다 한다고 말했지만 막상 당해 보니 하나도 호강하는 기분이 안났다. 그 줄에도 새치기가 있었다는 것과, 오랜 기다림 끝에 당도한 식당의깨끗한 식탁보와, 접시에 담은 국물과, 주먹만한 빵 두 개가 생각날 뿐정작 주메뉴가 뭐였는지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졸업식날은 우리 식구는 물론 숙부네까지 다 왔다. 복순이는 우등상도타고 개근상도 탔지만 나는 아무 상도 못 탔다. 우리 식구는 그것 때문에섭섭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의 요지부동한 지론에 의하면창가하고 체조를 못 하니까 우등상 안 주는 건 당연하고, 세상에 공부를얼마나 잘 했으면 창씨도 안 했는데 그 좋은 학교를 붙었겠느냐는것이었다. 엄마가 경기에 미련을 못 버렸을 때는 경기가 '그 좋은 학교'
였지만 일단 숙명으로 정하고 합격하고 나서는 숙명이 '그 좋은 학교'가 돼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울했고 나에게 딸린 가족이 많은 것까지 창피하고부아가 났다. 복순이는 아버지 혼자만 와 있는 게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없었다.
졸업식이 끝나자 단체로 또 신사참배를 하고 헤어진다는 것이었다.
복순이와 나는 낭패스러운 눈길을 교환했다. 나는 그 애가 나하고 같은심정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치른 의식이 모독당한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우리가 갔던 날과 며칠 상간이었지만 봄기운이완연한 화창한 날씨였다. 졸업할 때까지도 우리는 짝이었기 때문에 같이손잡고 필운동에서 남산 꼭대기까지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허우적댔던 진눈깨비는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 사이는 더욱 뜨악해져 있었다. 나는 내 느낌이 질투와열등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참담했다. 복순이와 나는그렇게 헤어졌다. 해방 후 그 애가 학교를 중퇴하고 시골 국민학교선생님이 되어 나를 찾아올 때까지 우리는 편지 한 통이 없이 지냈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옹졸한 심보에 대해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는대목이다.
여고로 진학하면서 비로소 인왕산 자락을 넘어서 통학하는 일을 면하고전차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울의 헐벗은 산에 정을 붙이지못했지만 육 년을 한결 같이 걸어다닌 산길이었다. 사월의 벚꽃, 오월의아카시아, 겨울의 설경 등이 그립게 회상 되고 서울 아이들이 좀처럼 누릴수 없는 혜택 받은 통학길이었다고 회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육 년 동안을줄창 혼자 다녔다는 것은 내 성격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생각한다.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은 법을 터득했다고나 할까. 지금도걸어가건 무엇을 타고 가건 간에 어디를 가고 오는 길에 누가 옆에 있으면그가 무척 친해서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혼자인것만 못하다.
상급학교에 가니까 등하교길을 꼭 짝지어 다니는 짝궁들이 정해져있어서 한쪽이 청소를 하거나 해서 늦는 경우는 기다렸다가 같이 가 주는등 혼자 다니는 걸 불행하게 여기는 애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나는 그반대로 동행이 생길 기회도 일부러 피했다. 그렇다고 어디서나 혼자 있는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고, 다만 나다닐 때 혼자인 게 편할 뿐 아니라그걸 즐기는 편이고, 그 동안을 방심, 한눈팔기, 공상, 구상, 관찰 등 내나름으로 무척 달콤하게 써먹고 있다는 것은 국민학교 때 길들여진 버릇이아닌가 생각한다.
여고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시국은 이미 일제 말기였다. 정규 수업을며칠 받아 보지도 못하고 우리는 군수품 산업에 동원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전에 두 시간 수업을 받고 나면 교실이 곧장 공장으로 변했다.
군복에 단추를 다는 작업도 했지만 가장 오래 지속된 작업은 운모작업이었다. 육각, 오각, 사각 등으로 각이 진 반투명의 운모조각은 얇게벗겨지길 잘 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상자로 하나씩 운모를 받아다가 끝이뾰족한 칼로 얇게 박리를 시키는 일이었다.
그걸 어디다 쓰는지는 누가 알려 주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떠도는 말로는 비행기 유리창에 쓴다고도 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유리창으로만 된 비행기가 있다면 모를 까 비행기 동체를 만들 물자가있을지도 의심스러운 때, 우리가 일할 운모는 마냥 공급이 되었다.
대포알을 만든다고 집집의 놋그릇까지 다 걷어 갈 때였다. 궁핍이 극도로달했고 혹독하게 추운 날 솔방울을 줍는 일에 동원되어 신촌 어딘가의산을 헤매다가 언 밥을 덜덜 떨며 먹은 적도 있다. 솔방울은 좀처럼찾아지지 않았고, 도처에 껍질까지 벗겨 가 죽어 버린 나무들을 보고사람보다 더욱 헐벗고 피폐해진 국토를 느낄 수가 있었다.
방공 연습도 자주 했고, 우리 학교의 대피 장소는 기숙사 지하의 석탄도저장해 두고 아궁이도 있는 데였다. 한 번 거기 들어갔다 나오면 콧구멍이새까매졌다. 연습이 아닌 진짜 공습 경보가 날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집으로 보냈는데 아직도 현저동에 살고 있는 나는 혼자서 집까지 뛰는동안 도중에서 죽을 듯한 공포감을 맛보곤 했다. 책가방 없이 등교할 수있는 날도 반드시 휴대 해야하는 게 구급낭이었다. 구급낭 속엔 아주초라한 구급약과 함께 부상을 당했을 때 지혈을 시킬 수 있는 삼각건이들어있었고, 각자의 성명, 주소, 혈액형 등이 명기되어 있었다. 삼각건 매는법도 되풀이해서 교습을 받았지만 실제 상황에서 그게 유효하리라고는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동경, 대판 등이 공습으로 처참하게 파괴됐단 소식은 신문에도 났지만풍문으로 더 적나라하게 전해졌다. 그렇게 전해지는 소식은 일본 당국을유언비어라는 죄목까지 만들어 놓고 단속을 했다. 엄마는 어디서 들었는지미국이 조선을 폭격을 안 할 거라고 자신있게 말하곤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가 사색이 돼 있었다. 드디어오빠에게 징용 영장이 나온 것이었다. 와타나베 철공소가 군수 공장이됐기 때문에 지용은 안 나가도 된다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엄마는오빠를 어디로 도망시키고 우리 식구도 다 야반도주를 하자고 했다.
엄마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와타나베 철공소만 철석같이 믿고있었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배급 통장 없이는 어디 가서 밥 한끼 제대로 얻어먹을 수 없는 각박한세상이었다. 제일 만만한 건 박적골이었지만 어디에나 버젓이 명기된본적지가 피신처일 수는 없었다. 지금 같으면 재까닥 전화로 의논을했겠지만 일각이 여삼추로 오빠가 들어올 때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근수공장이라 매일같이 야근을 하는 오빠는 자정이 가까워서나들어왔다. 엄마는 불안을 용케 감추고 오빠가 저녁 밥을 다 먹고 난 후에비로소 지용 영장을 내 놓았다. 오빠는 염려 말라고만 말하고 무덤덤하게잠자리에 들었다. 어른한테 절대로 걱정을 안 시키는 오빠의 습관적인말투인지 정말 그렇게 자신이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건엄마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도망을 가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그 밤을밝혔다.
다음 날 오빠는 회사에서 증명서를 떼 주어 다 잘 됐다고만 말했고사흘째 되는 날이 징집에 응해야 하는 기한인데, 평상시와 다름없이출근을 하고도 별탈이 없었으니 정식으로 모면이 되긴 된 모양이었다.
엄마는 두고두고 와타나베 철공소의 위력에 감격을 하면서 성도 안 간고집쟁이를 그 일본 사장이 뭐가 이뻐서 봐 줬을까 신통해하곤 했다.
엄마의 생각은 뒤죽박죽이었다. 등화 관제로 전깃불을 끄고 깜깜한 방에죽치고 앉았을 때는 폭격을 맞아 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일본 놈들 폭삭망하는 꼴이나 좀 봤으면 좋겠다고 폭언을 해서 누가 들을까 봐 겁나게하다가도 아들이 일본인한테 잘 보이고 중하게 쓰인다는 것은 또 그렇게자랑스러워할 수가 없었다. 남들한테도 자랑을 하고 싶겠지만 워낙 때가때니만치 참고 있는 거였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이름을 들은 것도 방공 연습이나 진짜 공습경보로일찌거니 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을 때 엄마가 옛날 얘기처럼 해 준비현실적인 정보를 통해서 였다. 김일성은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하는장순데 기운이 장사일 뿐 아니라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에 험준한 산길도천릿길을 간다고 했고, 이승만은 미국서 독립운동하는 학식 높은 선빈데조선 땅은 절대로 폭격을 안 할 테니 안심하라고 방송도 하고 비행기에서삐라도 뿌린다고 했다. 왜놈들이 미국 비행기만 왔다 하면 우리를방공호로 처넣는 게 우리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비행기에서 그런삐라가 떨어지는 걸 못보게 하려고 그런다고도 했다. 왜놈들이 그런삐라를 보면 얼마나 약이 오를까 하면서 장난꾸러기처럼 웃을 때면 나는엄마가 나보다도 어린 친구처럼 만만해지곤 했다. 엄마는 이렇게 그런중대한 얘기를 전혀 심각하지 않게 재담처럼 했기 때문에 당시 우리가처한 단칸방 속에서의 암흑에는 위안이 됐지만, 시대적인 암흑에 어떤빛이나 용기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게 결국은 우리 엄마의 한계였다.
그러나 오빠는 달랐다. 우리는 오빠가 징용도 빠질 수 있는 회사에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격해서 오빠가 고민스러워하는 문제를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오빠가 선반 기술자를 한 사람 취직시켜준 일이있었다. 오빠보다 나이도 많고 처자식이 딸려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지용 영장이 나왔을 때 회사에서는 그를 위해 징용을 면제해 줄 만한 증명서류를 해 주는 걸 거부했다. 오빠는 그것 때문에 사장하고 옥신각신한모양이었다. 심지어는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 순서로 따지자면 나보다는그 기술자가 우선인데 나는 되고 그가 안되는 까닭이 뭐냐고까지 따진모양이었다. 그 기술자는 지용을 나가면서도 그로 인해 오빠에게 고맙다는인사를 와 그런 얘기를 해서 우리도 알게 되었다. 엄마가 기가 막혀 한것은 당연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자기 보신도 언제 어떻게 될지모르는 판국에 남 걱정 해 주려고 자기 보신까지 위태롭게 하려는 오빠가딱하고 유치해 보이기까지 했다. 오빠가 하루하루 회사에 나가는 게물가에 어린애 내보내는 것처럼 안심이 안 되는 날이 계속됐다.
식량 배급은 줄고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콩깻묵까지 섞여 나와 엄마의시골 나들이가 잦아졌다. 쌀을 얻으로 거는 것이었다. 시골집은 숙부가면서기여서 일정량의 공출만 내면 억울하기 수탈을 당하는 일을 면할 수가있었다. 그러나 식량 수탈에는 대가 면서기들이 앞장서야 했으니 숙부는그만큼 원성의 대상이었을 듯 했다. 오빠가 아무리 자기가 누리는 작은특권에 고민해 봤댔자였다. 결국은 시골에서 숙부가 누리는 치사한 특권에빌붙어 굶주림을 면하고 있었다.
1944년 겨울방학에 귀향했을 때는 박적골 사정도 매우 흉흉했다. 순사와면서기가 합동을 해서 식량을 뒤지러 나오는데 그때는 온 동네가 발칵뒤집혔다. 우선 그들이 들고 다니는 기구가 무기보다 더 섬뜩했다. 긴 장대끝에 창같이 생긴 날카로운 쇠붙이를 꽂고 다니면서 그걸로 천장, 아궁이,볏짚단, 갈잎가리 등을 마구 찔러 보았다. 우리 마을은 아니었지만 이웃마을에서 갈잎가리 속에 숨었던 소녀가 그 창 끝에 옆구리를 찔렸다는소문은 너무도 끔찍해 백주의 악몽이었다..
소녀가 거기 숨은 까닭은 정신대 때문이었다. 마침 그보다 며칠 전에 딴마을에서 우물에서 물을 긷던 소녀를 일본 순사가 정신대로 끌고 간 일이있었다는 소문을 들은 소녀의 부모가 동구 밖에 양복 입은 사람들이나타나니까 지레 겁을 먹고 딸을 거기다 감춘 것이었다. 사람을 빼앗기는건 먹을 걸 빼앗기는 것보다 더 무서웠고 사람과 먹을 걸 한꺼번에빼앗기는 세상은 보나마나 말세였다.
말세의 징후가 도처에 비죽거리고 있었다. 나하고 동갑내기를 멀리 시집보낸 소꿉 동무 엄마가 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내 나이에 시집을가다니. 그때 나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그러나 시골에선 조혼이유행이었다. 극도의 식량난으로 딸 가진 집에서 한 식구라도 덜고 싶은데정신대 문제까지 겹치니 하루빨리 치우는게 수였고, 아들 가진 집에선병정 내보내기 전에 손이라도 받아 놓고 싶어했으니까.
시골 숙부네가 심한 수탈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면서기라는알량한 벼슬 덕이었는데 그 방법이 알고 보면 매우 치사했다. 면의총무부장이니까 직접 뒤지러 다니지는 않았지만 뒤지러 다니는 일선 공출독려반원들을 만단 면서기와 주재서 순사로 구성돼 있어 그들이 슬쩍눈감아 주는 거였다. 그렇다고 우리 집만 그냥 통과하는 건 아니었고,도리어 딴 집보다 더 여기저기를 찔러 보고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정작 쌀독은 그냥 지나쳐 주었다. 순전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식이었다. 이런 우리의 특권을 눈치 못 챌 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날강도들이 달려들기 전에 황급히 우리 집 울타리 너머로 쌀자루를 넘겨주었다가 나중에 찾아가면서 제사에 쓸 쌀이었다고 변명하는 이웄도있었다.
그런 판국이니 숙부네라고 식량이 넉넉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큰숙부는우리에게 주는 걸 최우선으로 쳤기 때문에 우리는 시골집 건 다 우리 건줄 알면서 자랐다. 남보기에는 별로 많은 농토는 아니지만 오빠가 의당이어받아야 할 장손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겠으니,그보다는 큰숙부는 아버지 없는 우리에게 아버지 노릇을 대신 해야 된다는의무감에 철저한 분이었다. 끝내 자기 자식을 낳아 보지 못한작은숙부에게서 내가 느낀게 친아버지나 다름없는 자애였다면 좀 늦긴했지만 자기 자식을 사남매나 둔 큰숙부에게서 느낀 건 아버지의 권위와의무였다.
그러나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고 아무리 마음대로 퍼 올 수있는 쌀이 독독이 있다고 해도 운반을 해 오지 않으면 우리 입에 들어갈수가 없는데 운반이 쉽지 않았다. 순사가 쌀을 뒤지러 다니는 것은농가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기차 속에서의 단속은 더욱 극악스러웠다. 야미장수 단속반이 수시로 기차간을 돌면서 수상한 보따리는 뒤져 보고 찔러보고 했다. 들키면 망신당하고 빼앗기는 건 물론이었다. 그들도 사람인지라그리고 명색이 야미장수 단속인지라 몇 됫박 안 되는 쌀은 팔아먹을 게아니라 식구들 먹을 거라고 사정하면 봐 주었기 때문에 엄마는 조금씩날라왔고 그러자니 차비는 차비대로 들고 감질만 났다. 엄마도 차츰대담해져 옷보따리에뿐 아니라 배에도 쌀을 차고 다니게 되어 나는 엄마가시골 가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졸이곤 했다. 후방 경제를교란시킨다고 해서 암거래 단속이 심했고 특히 쌀 암거래를 혹독하게다스렸지만 그럴수록 수법도 교묘해져 입은 옷 속에다 쌀 서너 말 정도는거뜬하게 누벼 넣고 다니는 야미장수도 있다는 소문이었다.
시골서는 그런 고생 하지 말고 차라리 정당하게 반출증을 내서 갖다먹으라고 했지만 오빠가 질색이었다. 시골에 농토가 있는 지주에게는반출증이라는 걸 내주어 일정량의 쌀을 서울에 들여오는 걸 허락했지만 그대신 배급을 탈 수가 없었다. 오빠는 우리가 무슨 지주라고 그들이 주는쌀을 마다하고 시골 쌀을 축내느냐는 것이었다. 오빠의 말을 옳았지만오빠는 엄마 덕에 콩깻묵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딸이라고 음식 차별을 해 본 적이 없는 엄마가 그 비상시국 때만은 오빠밥은 따로 지었다. 콩깻묵 냄새가 워낙 흉해서 같이 지어서 가려 푸기조차싫었던 것이다. 콩깻묵 둔 밥은 엄마하고 나하고 먹었지만 물론 거기에도층하가 있었다. 밥그릇 위는 비슷하게 섞인 것 같아도 밑으로 들어갈수록엄마 밥에서는 콩깻묵이 더 많이 나왔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콩깻묵만은 정말 먹기가 싫었기 때문에 모른 척했다.
엄마가 절대로 아들딸을 음식 층하 안 하는 것은 숙모들 사이에서도유별난 걸로 알려져 있었다. 그만큼 남자와 여자는 기를 때부터 차별을두어서 기르는 게 예사로운 시대였다. 여북하면 숙모들로부터 딸을 그렇게길러서 나중에 어떻게 시집을 보내시려고 그러느냐는 핀잔을 다들었겠는가.
그러면 엄마는 "나는 내 딸 입만 가지고 시집 보내려네."라고천연덕스럽게 말하곤 했다. 엄마는 정말로 내가 시집가기 전까지 엄마의그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딸일수록 맛있는 걸로 이밧을 높여 놔야음식을 맛있게 만들 수 있지 먹어 보지 않은 음식은 결코 맛있게 만들 수없다는 엄마의 생각은 "입병난 며느리는 써도 눈병난 며느리는 못쓴다."는 지독한 말이 아직도 유용하던 당시로서는 너무도 파격적이었다.
오죽해야 나는 시집갈 때까지도 숙모들로부터 "쟤는 입만 가지고 시집갈아이니까."라는 다소 빈정거리는 투의 별명을 들어야 했다.


8. 고향의 봄
오빠가 와타나베 철공소를 그만두었다. 자기는 징용에 빠지고 자기가취직시켜 준 기술자는 징용에서 못 빼낸 사건은 기어코 회사를 그만두는데까지 이르렀다. 고향에 내려가 이 꼴 저 꼴 안 보고 농사나 짓겠다고했다. 자기가 사무직이면서도 기술직이 사무직에 비해 차별 대우 받는것을 참지 못하고 밥줄을 걸고까지 저항하고 고민한 오빠를 아무도이해하지 못했다. 때가 어느 때인가. 각자가 자기 보신책에 수단 방법을가리지 않아도 살아남을까 말까 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행위는 얼핏보기에는 정의감 같으면서 실은 도피였다. 오빠는 국방복 입고 각반 치고징 박은 군화 신고 군수 공장에 다니는 일을 못 견디어 했다. 그러나시골의 큰숙부가 면의 노무부장이 되지만 않았어도 오빠가 그렇게 선선히신분이 보장되는 직장을 그만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면의 노무부장이란면민 중 노동력이 될 만한 장정을 징용이나 보국대로 뽑아들이는 일을관장하는 부서였다. 숙부의 그늘을 믿는 마음이 그러한 용단을 내리게했다면 그건 용기가 아니라 응석일 터였다.
마침 경성에 소개령이 내렸을 무렵이었다. 공습과 식량난을 핑계로경성부민들을 시골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그렇게 불렀다. 사람뿐 아니라일부 도심의 집들을 강제로 헐어 내고 큰 길을 만든 것도 바로 그소개령에 의해서였다. 정말 서울도 동경처럼 불바다가 되려나, 아니면 식량반이빙 끊겨 굶어 죽으려나 내남없이 전전긍긍할 무렵이어서 되레 엄마의충격을 최소한으로 죽일 수가 있었다.
그렇잖아도 시골의 숙부로부터 우리도 소개를 해서 내려오는 게어떻겠느냐의 기별이 종종 오고 있는 터였고, 무엇보다도 엄마는 우리가밥줄이 끊어져 낙향하는 신세로 마을 사람들에게 비칠 염려가 없다는 것이중요했다. 그럴 만도 했다. 엄마가 어떻게 자리잡은 서울이가. 금의환향은아니라도 시국 탓이라도 하면서 귀향하고 싶었을 것이다.
서울의 작은 숙부도 얼음 도매상은 거의 폐업상태였다. 얼음도사치품이었기 때문에 가게 안에는 숯과 장작이나 몇 단 놔 두고 썰렁하게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상업적 감각이 뛰어난 숙부는 벌써부터'야미도리히키꾼'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통제경제와 물자난은필연적으로 귀한 물자의 암거래를 유발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지하경제로 높은 이익을 남기는 장사꾼을 그렇게 불렀다. 아버지와다름없는 숙부네의 이런 숨은 경제력도 오빠가 아니꼬운 직장을 선뜻그만둘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숙부네도 우리와 함께 소개를하겠다고 했다. 벌써부터 가게를 걷어치울 구실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몰래 사람을 만나서 수군대고 기차로 지방을 오르락내리락하면 되는야미장수가 꼭 서울에 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 모든 일이 내가 이학년으로 진학할 무렵에 일어났고, 해방되기 반 년전쯤이었다. 소개로 시골 가는 학생은 전학도 편리하게 돼 있었다.
학무국에 가서 소개하는 고장과 그 고장의 학교 중 가고 싶은 학교만신고하면 되었다. 나는 개성의 호수돈고녀를 신청했고 괴불마당 집도팔려고 내 놓았다. 박적골에서 개성까지 통학을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집만팔리면 개성 시내에다 집을 하나 장만해서 숙부네와 같이 쓰자고 합의를보았다. 야미장수라도 상업 활동을 하려면 대처에 근거를 두어야겠기에 두집 다 아주 박적골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오빠는 엄마가 까무러치지 않을 정도로 뜸을 들여 가며 충격을 주었다.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했다. "그럼, 네가 연애를 걸었다구?"그런 표현은나도 듣기 싫었지만 오빠도 듣기 싫었던 모양이다. 눈살을 찌푸리며 왜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느냐고 했다.
지금이야 연애도 못 건다면 바보취급을 하는 데 있어서 남녀차별이없지만, 그때만 해도 엄마는 아들이 잠깐 실수로 연애를 거는 건 몰라도오죽한 여자가 남자가 집적댄다고 거기 걸려들었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고있었다. 연애를 거는 것과 바람이 나는 걸 같이 취급해서 종종 우리한테처신하는 법을 가르쳐 왔기 때문에 엄마의 그런 말투는 단박 상대방여자에 대한 멸시로 들렸다.
그러나 엄마 입장에서 보면 오빠의 공손치 못한 태도가 그 여자에 대한역성으로 들렸을 것이다. 효자 아들로 자타가 공인하는 오빠에 대한배신감으로 엄마는 눈물까지 보였고 오빠는 자신의 불공을 빌고 또빌었으나 여자를 한 번 보기만 해 달라는 간청을 철회하진 않았다. "내가졌다. 보기만 하는 거다. 본다고 색시 얼굴이 닳을 것도 아니고 내 체면이깎일 것도 아니고."하는 선까지 양보를 했다.
그러나 선을 보러 가라는 곳이 하필이면 적십자병원 입원실이었다. 집이팔려 짐을 쌀 때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전학 수속이 끝나학교도 안 가고 있을 때여서 엄마하고 같이 가기로 했다. 집에서적십자병원까지는 지척이었지만 나는 미지의 문을 여는 것처럼 흥분해있었고 엄마는 한꺼번에 밀어닥친 일에 지쳐 보였다. 여자는 넓고 정결한특실에 들어 있었고 왜 입원했는지 모르게 멀쩡했다. 미리 오빠로부터연락을 받은 듯 그 여자는 우리를 어머님과 작은 아씨로 불렀다. 어디가아파서 입원까지 했느냐고 엄마가 물었고 그 여자는 감기로 입원을 했는데다 나았다고 했다. 암만 해도 석연치가 않았다.
오빠는 우리가 시골 가기 전에 만나려면 병실로 찾아가야 된다고만 하고그 여자가 무슨 병으로 입원했는지에 대해선 우물쭈물 했기 때문에 곧퇴원할 수 없는 수술을 받았으려니 했었다. 그래서 병원까지 가는 동안도엄마는 연애 거는 여자도 마땅찮은 데 더군다나 몸에 칼자국 있는 여자를내 집에 들일 수는 없다고 벼르곤 했다. 몸에 칼자국이 있을 것 같지도않았거니와 상당한 미인이었다. 어디가 특별나게 예쁘다기보다는 요새말로하면 세련됐다고나 할까. 풍기는 분위기에 우리가 봐 온 어떤 여자하고도다른 멋이 있었다.
나는 엄마도 그 여자에게 끌리는 한편 꿀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안됐지만 엄마가 또 지겠구나 생각했다. 나는 가벼운 질투를 느꼈지만동경하는 마음 또한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도 반쯤은 이 혼사를 반대할수 없다고 체념한 듯했다.
오는 길에 엄마는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으면서 오빠의 사직 이후 연달아일어난 사건들이 며칠 만에 일어났나를 헤아려 보고는 깊은 한숨을쉬었다. 서울에 애면글면 말뚝을 박은 일이며 외아들에 대한 기대와자랑이 온통 허망한 눈치였다. 그날 밤 엄마는 오빠에게 그 여자가 무슨병으로 입원했느냐고 따졌다. 오빠는 그여자가 엄마 보기에 어떻더냐부터얘기해 달라고 했다.
"널 호릴만 하더라."
엄마는 악을 썼다. 오빠는 그 여자가 늑막염으로 입원을 했는데 다 나아곧 퇴원을 할 거라고 했다.
"아아, 예서 더 무슨 소리를 들을꼬."
엄마는 신음했지만 침착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그 여자의 환경을따졌다. 천안에 딸만 넷 있는 집 막내딸이라고 했다. 명문 여고 출신이라는것밖에는 엄마를 실망시키는 조건 뿐이었다. 양친은 생존해 계시지만넉넉한 집안도 아니라고 했다. 꼬치꼬치 따진 끝에 특실에 입원시킨 것도오빠의 도움이 컸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새록새록 실망과 분노를거듭하면서도 엄마는 오빠와 그 여자를 갈라놓을 자신이 점점 없어지는 것같았다. 나하고 단둘이 되었을 때 엄마는 나에게 "늑막염이라고 다 폐병이되는 건 아니겠지?"하면서 한 가닥 위안을 구했다. 늑막염은 대개폐결핵으로 진행하고 결핵은 패가망신하는 무서운 병으로 인식되어 있을때였다.
그런 와중에 나는 다니던 학교에 인사를 갈 경황도 없이 개성으로이사를 했고, 며칠 만에 학무국으로부터 호수돈으로 등교하라는 통지가나와 저절로 전학이 되었다. 오빠는 서울이 처졌고 그 여자는 완쾌해서퇴원을 해 고향으로 내려가 몸보신 중이라고 했다.
우리가 개성에 새로 장만한 집은 농바위고개 밑 남산동에 있었다.
박적골을 자주 드나들 것을 고려해 거기다 산 것 같았다. 호수돈고녀하고도 별로 멀지 않았다. 엄마하고 처음 등교한 호수돈고녀는 지대가노고 화강암이 장중하고도 아름다운 교사에다가 마당이 넓고 녹지대가많았다. 마침 벚꽃이 만발해 별천지 같았다. 그러나 왠지 내가 장차 다닐학교라는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가뜩이나 붙임성도 없는데다가 우리학교라는 생각까지 없으니까 꽁하니 입다물고 옆에 앉은 짝의 얼굴도변변히 거들떠보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나에게 불어닥친환경의 변화가 분하고 억울해서 툭하면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열흘쯤 다니고 나서 감기를 핑계로 며칠 결석을 했다. 분명히 꾀병을앓을 작정이었는데 계속해서 미열이 있었다. 가까운 병원에 갔더니도립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 보라고 했다. 엄마는 그때부터 지나친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도립병원에서 찍어 본 엑스레이 결과는폐침윤이라고 했다. 폐 소리만 듣고도 질겁을 한 엄마는 혹시 폐병이 되는병은 아니냐고 했고 요양을 잘못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의사의 대답을얻어 냈다.
나는 한약 보따리를 싸들고 박적골로 보내졌다. 엄마는 오빠가 좋아하는여자가 혹시 폐병이 되면 어쩌나 하는 숨은 걱정을 엉뚱하게 나에게다발산을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 하면 그 동안 감기 한 번 안앓아 봤을 리도 없거니와 배탈, 학질, 횟배등 더 나쁜 병을 앓을 때도 결석한 번을 제대로 못 해 봤기 때문이다. 죽을 병이 들지 않은 바에야 학교를결석하면 큰일나는 줄 알았다. 세상에 나서 엑스레이를 찍어 본 것도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아무튼 옳다꾸나 하고 박적골로 갔다.
박적골의 봄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처음 알았다. 서울로 간 후 그계절에 내려와 보는 게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는 천방지축 어린나이였고 이제는 한창 감수성이 피어날 열다섯 소녀였다. 나는 동무 없이혼자서 몽유병자처럼 산과 들을 누볐다. 올망졸망 어린 사촌 동생들을거느리고 산나물을 억수로 많이 해온 적도 있었다. 박적골 여자들처럼종댕이(종다래끼)를 옆구리에 차고 다니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게책가방보다 훨씬 나에게 어울렸다. 엄마가 아무리 애써도 나는 공부할팔자가 아닌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나에게 쏟은 엄마의 정성과소망을 헛되게 하는 건 참 안되었지만 나는 다시 학교에 갈 생각이없었다.
그러나 산골짜기에서는 은방울꽃의 군생지를 발견했을 때는 그리움으로가슴이 아렸다. 혼자서 산길을 헤매다가 나도 모르게 음습한 골짜기로들어가게 되었다.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진하면서도 고상한, 환각이 아닌가싶게 비현실적인 향기에 이끌려서였다. 그늘진 평평한 골짜기에그림으로만 본 은방울꽃이 쫙 깔려 있었다. 아니 꽃이 깔려 있다기보다는그 풍성하고 잘생긴 잎이 깔려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밥풀만한 크기의작은 종이 조롱조롱 맺힌 것 같은 흰 끛은 입 사이에 수줍게 고개를숙이고 있었지만 앙큼하도록 농밀한 꿀 샘을 가지고 있었다.
은방울꽃은 숙명의 교화였다. 가슴에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던 배지도은방울꽃을 도안한 거였고, 교가도 은방울 꽃의 수줍음과 향기를 찬양한내용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하도 각박한 시대에 입학을 해서 그런지 살아있는 은방울꽃을 본 적은 없었다. 관념적으로 모호하게 미화됐던은방울꽃의 실체를 발견한 날은 온종일 이상하게 우울하고 마음이 아팠다.
장차 이 세상은 어찌 될 것이며 나는 어찌 될 것인가. 내가 지금의 이상태에서 완벽한 기쁨을 느끼는것은 이 상태가 영속되지 않을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막연하게지만 자연과 행복하게 일치된 것 같은자신을 믿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겼고, 나의 중요한 일부를 서울에 남겨놓고 온 것처럼 느꼈다.
우리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개성으로 소개해 온 작은 숙부도 며칠에 한번씩은 박적골에 와서 지내다 갔다. 처음엔 우리가 남산동에 산 집에 가있다가 곧 셋방을 얻어서 따로 났다. 오빠는 원하던 여자와의 혼담이정식으로 급진전이 돼 예식날을 받아 놓고 있었다. 세 사람이 들어오는데숙부네가 같이 있으면 거북할 것 같다고 미리 따로 난 것이었다.
야미장수로 돈을 굴리는 데 이골이 난 숙부라 집 같은 거 사는 데 돈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숙부가 박적골에 올 때는 야미장수를 한탕 하고오는 길이라 기분이 매우 좋을 때였다.
나도 숙부가 오는 날이 가장 신났다. 그 시절의 보통 아이들이아버지하고 친한 것보다 우리는 훨씬 더 친했다. 요새 친한 부녀간처럼스스럼없이 어리광도 부리고 귀여움도 받았다. 가끔 속으로 만약작은숙부에게도 아이가 생기면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생겨나지도 않은아이에게 은밀한 질투를 다 느낄 지경이었다.
그 숙부의 취미는 고기잡이였다. 낚시질을 하는 게 아니라 그물을던져서 잡았는데 숙부가 광문을 열고 어깨에 그물을 메면 나는 으레종댕이를 들고 신이 나서 따라라나섰다. 저수지까지는 십 리가 넘었지만거기까지 안 가더라도 그물을 던질 만한 웅덩이가 개울은 도처에 있었다.
숙부가 수면을 향해 그물을 힘차게 던지는 모습은 그렇게 멋있어 보일수가 없엇다.
우리 고장 말로 그런 그물을 죙이 그물이라고 했는데 공중에서 넓은원을 그리면서 퍼지고 나서 수면을 덮치면서 무겁게 침몰해 갔다. 그물의원주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무거운 추가 달려 있어서 덮친 수면 아래물고기들을 쓸어 모으면서 숙부가 끈을 당기는 대로 오므라들었다. 조여진그물 안에서 비늘을 번득이며 요동치는 물고기를 종댕이에 주워 담을 때면심장이 터질 듯한 희열을 느꼈다. 가끔 재수 나쁘게 물 속에 잠겨 있던나뭇등걸 같은 것에 그물이 걸려 숙부가 헤엄쳐 들어가 찢긴 그물을가까스로 빼 올적도 있었지만,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뱀장어가 잡힐 적도있었다.
뱀장어란 놈은 여간 힘이 세지 않았다. 길길이 날뛰어 내가 종댕이에간수하는 건 불가능 했다. 한번은 꽤 큰 뱀장어가 잡힌 적이 있는데어찌나 무섭게 날뛰는지 숙부는 그놈을 바위에다 패대기 치고 도롤 머리를짓이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자 그대로 사투였다.
뱀장어만 잡히면 숙부는 이건 네 몫이라고 하면서도 투망질을 그만두고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살아 있을 때 뼈를 바르고 소금을 뿌려 굽기위해서였다. 날씨가 하루하루 더워 오는데도 부엌에는 늘 불화로가 있었다.
그 위에다 석쇠를 얹고 뼈를 발라낸 뱀장어에다 굵은 소금만 훌훌 뿌려서구워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한창 기름이 올랐을 때의 뱀장어는구워지면서도 맹렬한 불꽃을 일으켰다. 사촌들이 달려들어도 삼촌은 나만먹이고 싶어했다. 그때 나는 폐가 나빠 요양 중인 아이로 돼 있었으므로.
나는 어려서부터 강단이 있단 소리는 들어 왔어도 늘 기운이 좀 없는편이어서 스스로를 건강하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해 봄부터 여름에 걸쳐서 박적골에서 보낼 때는 삶의환희랄까, 내 몸에 싱그러운 물이 오르는 것 같은 건강에 기쁨을 만끽할때였다. 하필 그럴 때 병자 취급을 당하는 기분은 묘했다. 그러나 다나았다고 떨치고 일어날 마음은 없었다. 호수돈에 다시 가기가 싫었다.
나의 병자 취급은 어쩌면 엄마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나를 박적골로 요양만 보내 놓고 오빠의 결혼준비로 정신이없었다. 외아들의 외며느리 보는 일이니 경사 중의 경사라 힘닿는 데까지잘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더욱 경황이 없어하곤 했다.
"뭘 하려도 손이 예가 뇌고 제가 뇌고, 뭘 사러 가도 뭘 사러 나왔더라정신이 아뜩해지면서 근심만이 가득해지니 이러고도 이 혼사를 해야되는지 모르겠네."
이렇게 숙모들한테 하소연하며 한숨짓는 엄마를 보면 나도 막연히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숙모들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형님 생각이 정 그러시면 지금이라도 작파를 하시지 그러세요. 아, 아들가진 쪽이 좋다는게 뭐예요. 남자야 연애 좀 건 게 뭐가 흉이 된다고그렇게 호락호락 승낙을 하시고 나서."
"내가 이 혼인 말려서 남의 딸 하나 망쳐 놓는 거라면 내가 왜 처음부터죽기 살기로 안 말렸겠나. 나도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인데 보아 하니 내아들 먼저 잡게 생긴 걸 어쩌겠나? 다 가운이지 뭐 하필 그런 병추기가있는 것도 가운이지만, 누가 아나 또 내 식구가 당할 재앙을 남의 식구가대신 때워 줄지."
엄마의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어쩜 우리 엄마가 저럴 수가 있을까, 자식사랑의 잔혹한 이기심에 어안이 벙벙해지곤 했다. 나는 병원에서 처음올켓감을 보고 느낀 호감과 아련한 동경심을 그냥 간직하고 있었다. 말은그렇게 해도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원래 자식이좋아하는 것은 다 따라서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오빠가 고른규수도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허약할지도 모른다는 한 가지 흠이 유난히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엄마의 근심 때문에 나는 거의 잊혀진 채 받아놓은 날이 다가왔다. 어찌나 급하게들 볶아쳤는지 신부쪽에서도 장롱을목수한테 맞췄는데 그날까지 될지 말지 하니 며칠 늦게 보내더라도 양해해달라는 기별이 다 왔다.
서울에서 신식으로 예식을 올리고 다시 박적골에서 구식 혼례와 잔치를하기로 했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나 할까, 오빠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신부를 한껏 화려하게, 그리고 격식을 고루 갖추어 맞고 싶어했다. 나는요양 중이라는 핑계로 서울까지는 안 가고 시골에서 대대적인 잔치준비를하는 걸 구경만 했다.
1945년 초여름이었다. 해방을 두어 달 앞둔 어려운 시기였지만 개성에서성적 잘 하기로 이름난 머리 어멈을 불러다가 개성지방의 전통적인신부차림을 재현했다. 화관을 쓴 올케 언니는 누구나 숨을 죽이도록아름다웠다. 피부가 창백한 듯하면서도 볼과 입술에 장밋빛 혈색이 돌아화관의 화려함을 무색하게 했다. 오빠는 의기양양해서 입을 다물 줄을몰랐다. 하객에게는 신부가 자랑스럽고, 신부와 후행에게는 개성 풍습이자랑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그때 화관을 쓴 올케 언니에게서 받은 황홀한 인상을 오랫동안잊지 못하고 있다가 훗날 미망을 쓸 때 여주인공 혼례장면에서 울거먹은바가 있다. 혼례를 치르고 신행까지 다녀온 신혼 부부는 남산동 집에정착했다. 올케는 정말 옷보따리만 가져오고 장도 못 가져왔다. 운송 등제반 사정이 극도로 어려울 때였다. 세상이야 어찌 됐든지 간에 오빠와올케는 신혼 재미에 푹 빠져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엄마는 아직도 새며느리의 건강이 못 미더워 될 수 있으면 편하게 해 주려고 남산동집보다는 박적고렝 더 많이 와 있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유난히 길고 화평스러운여름날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어디 가셨는지 안 보이고 엄마와 두 숙모가모처럼 박적골 집에 다 모여 있었다. 점심으로는 메밀 칼싹두기를 해 먹고난 후였다. 삼동서가 주거니 받거니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큰 함지박만한것도 있고 작은 반병두리만한 것도 있었다.
그때 우리 시골에선 종이로 그릇 만드는 게 크게 유행했다. 책이건창호지 뜯은 거건 한지로 된 거면 무엇이든지 재료가 되었다. 맹물에 오래담가 놓는 건지 양잿물 같은 걸 섞은 물에 담가 높은 건지, 아무튼 헌한지가 하얗게 될 때까지 담가 놓았다가 꼭 짜서 걸쭉하게 쑨 풀물과 함께절구에다 잘 찧은 게 재료였다. 그렇게 찧어서 찰흙처럼 찐득찐득해진 걸집에 있는 큰 함지박이나 작은 동고리짝 같은 기존의 그릇 위에 적당한두께로 입히기도 하고, 혹은 본없이 손으로 자유롭게 빚기도 해서 말리면그릇 모양이 된다. 거기다가 치자물을 들이고 콩댐을 해서 잘 길을 들이면견고하고도 미려한 그릇이 된다. 솜씨에 따라서는 깜짝 놀랄 만큼기발하고도 쓸모 있는 그릇이 나오기도 했다. 서로 솜씨 자랑을 하면서마른 곡식이나 씨앗, 강정 등을 넣어 두는 데 유용하게 썼다.
그걸 본 시골집의 큰숙모가 옳다꾸나 하고 사랑 골방 속에 있는할아버지의 서책을 다 꺼내 물에 담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골방 하나 가득 남기신 고서 때문에 우리는마을에서 제일 많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그릇부자가 된 셈이었다. 그걸부러워하는 마을 사람들에겐 더러 나누어 주기도 해 가며 삼동서가 그릇을만드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하고도 행복해 보였다. 눈썰미가 있는작은 숙모는 끌자국이 그냥 남아 있는 큰 나무 함지박 속에다 그 재료를알맞은 부께로 발라 갔다. 아마 그 투박한 끌자국이 그대로 옮아붙기를바라고 하는 일일 터였다. 큰숙모는 작은 동고리짝 겉에다가 그 종이 풀을입혔다. 엄마는 아무런 본 없이 그냥 만들려다가 자꾸 실패를 하면서 주로입담으로 한 몫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책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주로 할아버지 얘기였다. 거의험담이었지만 충분히 애정이 어린 거여서 듣기 싫진 않았다. 날도 새기 전꼭두새벽에 엄엄한 큰 기침과 나막신소리를 내면서 안뜰로 들어서실 때자지러지게 놀란 새색시 적 얘기며, 며느리 귀애하신답시고 상에 고깃국이오르는 날은 수염이 빠졌던 고깃국을 조금 남겨 상머리에서 시중들던며느리에게 얼른 마시라고 독촉할 적에 안 마실 수도 마실 수도 없었던얘기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말끝마다 허리를 잡고 웃느라 그릇 만드는건 건성이었다.
괜히 조마조마하던 오빠의 결혼을 잘 치른 후의 안도감과 허탈감,그리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이 불안한 시국을 의식 안 할 수 없는감질나는  평화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반평생의 며느리 노릇을짓누르던 권위주의로부터의 당돌하고도 상쾌한 해방감 때문이었을까, 나는다만 구경꾼에 불과했건만도 그 장면은 어제 떠올려도 선명하고도 정겹다.
먼 훗날, 신문 같은 데에 시골 선비집에서 귀중한 자료가 될 만한고서나 국보적 가치가 있는 문헌이 발견됐단 소식이 나면 엄마는 "그때우리가 참 무지막지한 짓을 했지." 하면서 계면쩍게 웃곤 했다. 할아버지책 중에도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었지 않나 하는 후회의 뜻이겠으나 나는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장서를 무시해서가 아니라문헌의 가치도 중요하겠지만 그 때 며느리들의 누린 해방감도 그에못지않게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그들이 내 눈에어린애처럼 자유롭고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이 티 없는귀여움으로 인상에 남기는 쉽지 않다. 고서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릇도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엄마와 숙모들이 요새말로 스트레스를 풀고 나서맛본 건강한 즐거움은 죽는 날까지 그분들의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박적골 집의 마지막 평화였다. 엄마는개성으로 오빠 내외가 사는 걸 가 보고 오면 근심스러운 듯이 말하곤했다.
"사돈집에선 여태 세간도 안 보내면서 웬 보약은 그렇게 자꾸 지어보내는지. 신접살림집에서 한약 냄새가 떠날 날이 없으니..."
"형님은 시어머니 노릇도 참 별나게도 하세요. 오랜만에 가셨으면편안하게 앉아서 효도나 받을 것이지 웬 냄새는 그리 밭고 다니셨을까."
숙모들은 이렇게 엄마의 신경과민 탓으로 돌렸지만 나는 엄마의 눈은 못속이는 무엇인가가 올케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련히 느끼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방학 중이었다. 나는 너무 건강했기 때문에 여름 방학이끝나면 도저히 학교에 안 가겠다고 할 면목이 없을 것 같아 초조했다. 내나름으로 뭔가 중대한 결단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지만 그게 쉽지가않았다.
그러나 개학하기 전에 일본이 망하고 우리는 해방이 되었다. 박적골에일본이 망한 사실이 알려진 건 8월 15일보다 사나흘 후였다. 16일날에도평상시와 다름없이 면사무소에 출근한 숙부가 그날도 그 다음 날도 집에안 들어오긴 했지만 그건 늘있는 일이었다. 그때 숙부는 면 소재지가까이에 소실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었지만 숙부는 극구 부인했고 면의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하급 관청이정신없이 들볶일 때였으므로 숙부 말도 그럴싸했고 무엇보다도 그런문제라면 가장 민감해야 할 숙모가 태평이었으므로 아무도 걱정하지않았다


9. 패대기쳐진 문패
우리가 일본이 망했다는 걸 안 것은 느닷없이 한 떼의 청년들이몽둥이를 들고 우리 집으로 쳐들어오고 나서였다. 그들은 저희들끼리만희희낙락 우쭐대면서 우지끈뚝딱 우리 집 세간이며 문짝을 때려 부수기시작했다. 우리 마을 청년도 한두 명 섞여 있는 듯 했지만 거의 모르는얼굴들이었다.
그러나 그 고장 토박이인 큰숙모는 거의 다 안면이 있는 듯 자네들이별안간 환장을 했나,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영문이나 좀 알자고 몸을사시나무 떨 듯하면서도 의젓하게 호령을 했다. 앞으로 나서진 못하고뒤에 처졌던 박적골 청년이 잠시 파해 있는게 좋을 듯하다면서 일본이망하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됐다는 걸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박적골에선 우리 집이 친일파 집으로 몰려 분풀이를 당하고 있는것이었다.
벌써 몇 마을 째 돌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청년들은 그렇게 이마을 저마을을 돌면서 세를 불렸고 자기 마을 친일파 집을 때려 부술 때는 그마을 청년은 나서지 않고 뒤에서 구경만 했다. 몇십년을 내리 한 우물을먹으며 경조사를 같이 해 온 의리였다. 하필 그때 오빠도 개성에서박적골에 당도했다. 세상이 헤까닥 바뀌었는데 박적골 쪽에선 아무런소식도 없는지라 걱정도 되고 기쁨도 나누고 싶고 해서 달려온모양이었다. 때려부수고 있던 청년 중에는 오빠한테 반갑게 인사를 하는이도 있었다. 그러나 아는 얼굴이 약간 머쓱해한다고 해서 끝날 일이아니었다. 그들은 의기가 충천했고 신들린 것 같았다. 튼튼한 대문짝까지우지끈 깨부수고 난 청년 중의 하나가 문패를 떼서 패대기를 쳤다. 내가어려서부터 익히 봐 온 할아버지의 문패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나서도 그 문패는 여전히 붙어 있었고, 숙부도 오빠도 그 옆이나 밑에다른 문패를 추가하지 않았다.
나는 뭐라고 목청껏 악을 쓰며 그 청년을 향해 돌진했다. 할아버지서책으로 그릇을 만드는 걸 볼 때는 재미만 있었는데 문패를 패대기치는건 왜 그렇게 참을 수가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난생 처음 보는 폭력의장면이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고 사생결단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고생각했다. 아마 오빠만 아니었다면 누구 한 사람 물어뜯기라도 하고 나서기함을 하고 나자빠졌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어렸을 때이긴 하지만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성깔 때문에 기함을 한 일이 더러 있었다.
오빠가 나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집 뒤를 돌아 뒷동산에 올랐다. 숙모와할머니가 땅을 치며 통곡을 하고, 청년 중의 상당수는 고정하시라고그들을 달래느라 쩔쩔매는 걸로 봐서 사람을 해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끌려가면서도 그들에게 정중하게 어른들의 안전을 부탁하는오빠가 너무 바보 같고 어수룩해 보여서 기가 막혔다. 나는 뒷동산에끌려가서도 오빠에게 마구 대들었다. 우리가 어째서 친일파냐? 우리는창씨개명도 안 했지 않느냐, 똥 뭍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도 분수가있지, 도쿠야마, 아라이, 기무라 들이 뭐가 잘났다고 감히 반남 박씨 집을때려부수느냐는 게 내 항변의 대강의 요지였다.
오빠는 노한 청년들이 제풀에 물러날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우리 집이망가지는 걸 바라보면서 한편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우리 집이 망가지는걸 바라보면서 한편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내 생각이 옳지 않다는 걸알아듣게 하려고 애썼다. 내가 막무가내로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했기때문에 오빠가 하도 여러 말을 해서 자세한 것은 생각나지 않지만,도쿠야마, 아라이 들이 당한 건 박해요 수난이요 치욕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편안히 특혜를 누려왔다는 요지였다. 오빠는 그게 너무도 부끄러워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했다. 저렇게라도 분풀이를 당했으니까 마을 청년보기가 덜 부끄러울 것 같다고도 했다.
나는 이윽고 조용하고 비통해졌다. 오빠한테 설득을 당해서가 아니라헛된 분노 끝에 오는 허탈감 때문에 그랬고,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 집때문에도 그러했다. 우리는 그 집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오빠가 내 속을알아차렸는지 실컷 울다가 내려가자고 했다.
그날 우리 집이 당한 것은 깊은 원한이 사무친 조직적인폭력이라기보다는 갑자기 억압이 풀리면서 억눌렸던 힘들이 그렇게 분출한일종의 축제행사였던 듯하다. 몇 마을을 더 돌고 나서 제풀에 진정이되었고 망가진 문짝과 세간살이들이 다시 몸담고 살 수 있을 만큼수습되기까지는 마을사람들의 위로와 협조가 컸다. 청년단이니 자위대니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정치적인 색깔이 사람들의 심성을 혼란스럽게하기 전의 일이다.
숙부는 소문대로 소실의 집에서 세상의 변화를 관망하다 돌아와 그지경이 된 집안 꼴을 보고는 몇 달 전에 노무부장만 안 됐더라도 이런일까지는 안 당했을 걸 하고 말했다. 그 자리는 악명 높은 자리였지만피할 길이 없었다고 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후회나 하고있는 숙부보다는 문짝에 못이라도 하나 쳐주는 마을 사람들이 훨씬 더의지가 되었다. 붓대로 먹고 살던 이가 그걸 못 하게 되면 무능력자나다름이 없었다.
박적골 집에 불화의 기운이 돌고 나쁜 일은 엎친 데 덮친다고 올케가기어코 각혈을 했다. 오빠가 올케를 데리고 서울로 갔다. 엄마와 나는남산동 집도 비워 둘 수가 없고, 다시 서울로 이사갈 준비도 해야겠기에급히 개성으로 돌아왔다. 셋방을 얻어 임시 거처를 마련했던 작은숙부네는 거칠 것이 없어 오빠 뒤미처 서울로 떠났다. 작은 숙부는장사하기 좋은 세상이 될 것 같다면서 돈벌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엄마는 오빠와 올케가 황급히 떠난 남산동 집을 치우면서 말끝마다한숨이요 눈물이었다. 세간은 그때까지도 안 들어와서 신혼 살림다운아기자기한 볼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럴싸해서 그런지 쫓기는사람들이 잠시 몸을 숨겼다가 도망친 자리처럼 두서없이 어수선한 가운데두 사람의 절박한 마음이 잡힐 듯 했다. 그리고 구메구메 나오느니 그저한약 생악 등 약보따리였다. 한 뼘도 넘게 큰 지네 말린 것도 징그러워죽겠는데 거기서 다시 벌레가 난 것을 수습할 때 엄마는 얼굴색이바래면서 손을 덜덜 떨었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아들을 길렀단 말인가."
한숨짓는 엄마를 보면서 나도 오빠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빠는누구보다도 올케의 병세에 대해 잘알고 있었을 텐데 병을 고쳐 가지고결혼을 할 생각은 안 하고 꼭 무엇에 쫓기듯이 그 병에는 가장 해롭다는결혼 먼저 서두를 게 뭐였을까? 엄마도 나도 그 까닭은 끝내 모르고말았지만 세상의 누가 돌연 젊음을 엄습하는 운명적이고도 무분별한정열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본인도 아마 숨기고 싶어서가 아니라설명할 수가 없어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성에 처음 주둔한 외국군대는 미군이었다. 그들이 주둔할 때 구경을나가 보고 그 자유분방한 행진에 놀랐다. 껌을 쩌덕쩌덕 씹기도 하고여자들에게 눈도 찡긋찡긋하고 어린이를 번쩍 안아 보기도 했다. 도대체군기라는 게 없는 군대 같았다. 한길 가마다 담벼락마다 벽보가 붙기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자유니 민주주의니 인민이니 하는 말은생전 처음 들어 보는 경이로운 말이었다. 친일파 매국노를 처단하자는구호도 많았고 누구누구 절대지지, 누구누구 결사반대라는 의사표시도난무했다.
올케는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집이 팔리는 대로 발리서울로 올라오라는 기별이 왔다. 엄마가 한 번 서울 다녀와서 더욱서둘렀다. 올케의 친정 어머니가 와서 간호를 하고 있는데 연로해서 차마못 보겠고 우리 식군데 우리가 간호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엄마는 오빠가 너무 올케 가까이 붙어서 애를 태우는 것도 물론 불안했을것이다. 우리가 올케 문제에 만 골몰해 있는 동안 작은 숙부는 혼란기의서울에서 마음껏 수완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자기는 아는 일본 사람가옥을 한 채 접수해서 살게 됐으니 우리가 집 사는 데 보태 줄 수가 있을것 같다면서 헐값에라도 남산동 집을 팔고 어서 올라오라고 재촉이성화같았다. 집이 팔릴 무렵이었다.
개성에 미군이 들어온 건 삼팔선을 잘못 그어서 그렇게 된 거라면서느닷없이 미군이 철수하고 소련군이 주둔을 했다. 미군이 진주하기전부터도 개성엔 미군이 들어올지 소련군이 들어올지 예측을 할 수가 없을만큼 삼팔선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고 있다면서 과연 어느쪽이 들어오는게 유리할까 흥미롭게 예상도 하고 논쟁도 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지만삼팔선이란 추상적인 선이 현실적으로 어떤 구속력을 갖게 될지는 아무도몰랐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미군은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소련군이주둔을 하자 세상이 갑자기 흉흉해졌다.
다와이라는 말이 유행을 하면서 시장이 다와이를 당했다, 밭의 채소도다와이를 당했다, 여자들까지 다와이를 당했다고 난리였다. 외국 살마들은우리 나라 여자의 얼굴만 보고는 늙고 젊고를 분별 못 해 늙은 여자까지겁탈을 한다고도 했고 시계만 보면 빼앗아 차는지라 어떤 군인은팔목에서부터 팔뚝까지 열 개도 넘는 시계를 차고 다닌다고도 했다.
엄마는 워낙 근심이 많아서 그러했겠지만 그런 공포 분위기에 대체로무관심했다. 너무들 오도방정을 떤다는 식으로 말했다. 집에서 철길이가까웠다. 철길을 타고 걸어서 북쪽에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의행렬이 날마다 그 수효를 더해갔다. 아직 삼팔선 통행이 자유로울 때여서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이북 사람도 생겨나기 전이었으니까, 지용이나가난에 쫓겨 만주 등지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길어었다. 소련군이 진주하고 나서는 웬일인지 개성에서 남으로 가는기차는 끊긴 상태여서 그렇게 걸을 수밖에 없는 거였다. 개성까지도 운수좋으면 타고 여의치 않으면 걸어서 온 듯 모두 지치고 배고파 보였다.
철도편이 엉망이 돼 있었다. 서울 가려면 봉동역까지 걸어가서 기차를타야 한다고 했다. 지용이나 징병으로 남편이나 아들을 빼앗긴 가족들이철길에 나와 온종일 지나가는 사람을 살펴보기도 하고 붙들고 어디서 언제떠나 오나를 묻기도 하는 광경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밀려오는군중 속에는 일본인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말을 붙였다가 일본 사람인걸 알면 고생해 싸다고 욕을 하거나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그때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는 우리 동포들이 고생이 쫓겨가는 일본사람의 고생에 배하면 조금이라도 덜한 건 아니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니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처음으로 우리말로 된 소설을 읽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오빠방에 있는책 중 우리말로 된 소설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생겼다. 내 또래들이 거의한글을 모를 때였다. 급히 배우느라 야단들이었 만 나는 벌써부터 알고있어서 그 무렵 쏟아져 나오는 벽보다 삐라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는 데묘한 쾌감과 자부심을 느꼈다. 제 나라 글을 알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대한 자부심이 우리 문학에 대한 최초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제목에 이끌려 이광수의 사랑을 읽고 나서 같은 작가의 단종애사를읽었다. 박화성의 백화도 읽고, 최서해의 탈출기도 읽었다. 제목은잊어버렸지만 강경애의 단편도 읽었다. 단종애사와 강경애의 단편에 가장큰 충격을 받았다. 단종애사를 읽고는 잠을 못 잤고, 강경애의 단편을일고는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지만 비위가 덧나 며칠 밥맛을잃었다. 부스럼이 잔뜩 난 아이의 머리에다 약이라고 발라 주는 게 결국나중에는 머리에서 온통 구더기가 들끓게 되는 얘기인데, 나도 살갗을데면 당장 된장이나 발라주는 환경에서 자랐건만도 징그럽고 끔찍해서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때까지의 독서가 내가 발붙이고 사는 현실에서 붕 떠올라 공상의세계에 몰입하는 재미였다면 새로운 독서 체험은 현실을 지긋지긋하도록바로 보게 하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단종애사는 소설이지만 나는고스란히 사실로 받아들였고, 우리 역사를 좀더 깊이 계통적으로 알고싶다는 관심의 단서가 되었다.
그후 학교에서 정식으로 국사를 배우게 되었고 어른이 된 후에도개인적인 취미로 저자에 따라 사관이 다른 몇 종류의 역사책에 접할기회가 있었지만, 그때 그때 흥미본위로 잡다하게 취한 지식은 전혀두서가 없어 꼭 정리를 안 하고 함부로 쳐 넣은 서랍처럼 아무짝에도쓸모없는 그야말로 잡식에 머물러 있다. 그나마도 세종 대에서 세조대까지를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곤 하는데 그런 착각은순전히 단종애사에 근거하고 있지 않나 싶다.
감수성과 기억력이 함께 왕성할 때 입력된 것들이 개인의 정신사에미치는 영향이 이렇듯 결정적이라는 걸 생각할 때, 나의 그런 시기를문화적 환경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너무도 척박했었다는 게 여간억울하지가 않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밑바닥 가난 속에서도 드물게사랑과 이성이 조화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이었다고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강경애의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
아침 저녁 차렵이불을 끌어당겨야 할 만큼 여름이 물러나고 나서 비로소엄마하고 나는 개성을 뜰 수가 있었다. 여전히 개성에는 소련군이주둔하고 있어서 개성역에는 서울가는 기차가 없었다. 서울 가려면봉동역에 가서 타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장단까지는 가야 한다는 사람도있었다. 다 풍문이었고 확실한 건 개성역엔 남쪽으로 가는 기차는 없다는사실 하나뿐이었다. 봉동역까지는 이십 리였지만 장단역까지는 오십 리길이었다. 당장 필요한 것만 해도 엄마도 나도 이고 지고 해도 모자랄판이었지만 몇십리 길을 걸을 각오를 해야 했으니 욕심은 금물이었다.
다행히 우리 집을 산 사람이 식구가 단출해 우리 세간을 당분간 맡아주기로 했다. 봉동역까지 가려면 야다리를 건너야 했다.
고려가 전성을 누릴 때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 교역을 하러 드나들어약대(낙타)를 매놓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는 야다리는 개성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다리였다. 개성서 자란 사람치고 야다리 밑에서주워 온 아이라는 놀림이나 꾸지람을 듣고 자라지 않은 이는 별반없으리라. 어려서부터 워낙 울길 잘 한 까닭도 있었지만, 내가 어려서어른들한테 가장 많이 들은 구박도 저 계집애는 야다리 밑에서 얻어왔나보다는 소리였다. 우리말고도 이고 지고 야다리 쪽으로 이동하는 군중이길을 메우고 있었다. 원래 서울 왕래가 반번하던 고장이 그 길이 막히고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야다리 이쪽엔 소련군이, 저쪽엔 미군이 보초를서고 있었다.
그러나 통행을 제한하거나 검문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흉흉한 소문때문에 머리를 구질구질한 수건으로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가는 젊은여자도 있었지만 겉보기에 소련군이나 미군이나 다 같이 갈색 머리에노르스름한 눈을 하고 있었고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야다리 한가운데도삼팔선이라고 추정할 만한 선이 그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새끼줄 한 오라기 쳐 있지 않았다.
삼팔선 무서운 건 전혀 모를 때지만 군인을 괜히 무서워하는 버릇은일제 잔재인지라, 죄진 일 없이도 가슴을 두근대며 경직된 표정으로 양국군인 앞을 통과했다. 아무런 표지도 없었지만 사람들이 다들 봉동역에집결해 있기에 우리도 장단역까지 갈 것 없이 거기서 기다리기로 했다.
참을성 있게 마냥 기다렸다. 기차표 파는 데도 없어서 마음대로 철길로나가 서 있었다.
드디어 기차가 남으로부터 왔고 우리는 일제히 달려들었다. 출입문보다창으로 타는 사람이 더 많았다. 닫힌 창은 유리를 부수었고 이미 많은유리창이 부서져 있었다. 엄마가 나를 들어 유리창을 통해 안으로밀어넣었고 누군가 안에서 끌어당겨 주었다. 나도 밖에 남은 엄마를필사적으로 도와 안으로 끌어들였다. 자리를 잡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기차 속은 너무도 난장판이었다. 유리창도 성한 데가 없었지만 의자도망가지고 뒤틀린 건 연일 이런 혼잡을 견디었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의자를 싼 우단 헝겊을 여기저기 예리한 면도칼로 도려 내어 더러운내용물이 꾸역꾸역 꿰져 나오고 엉성한 골조까지 모이는 건 도무지 이해가되지 않았다. 그 혼란 중에도 이것이 해방이냐고 비분강개하는 사람도있었다.
기차는 아무데서나 쉬면서 아주 오래 걸려서 서울에 도착했다. 신촌 좀지나 서울역에 도착하기 전에 남들이 다 내리기에 우리도 내렸다.
서울역에서 내리면 혹시 표를 안 산 게 문제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더 미리 내리지 않았나 싶다.
한강로의 적산가옥에 든 작은 숙부네에다 우선 짐을 풀었다. 올케언니는 다행히 많이 좋아져서 몸보신만 잘 하면 된다고 병원에서 퇴원을권유해 천안에 있는 친정에 내려가 있는 중이었다. 올케 언니를위해서라도 우리가 살 집을 결정하는 게 급했다. 숙부네는 늘 동경하던이층집이었지만 도무지 정이 붙지 않고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했다.
일본 사람들이 쓰던 물건이나 가옥은 다 국가에 귀속될 적신이니 행여 돈주고 사고 팔거나 연고권을 주장하지 말고 고스란히 버리고 가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건 신문 사설이나 군정청의 경고문을 통해 너무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거기 산다는 게 위법행위처럼 창피하고 싫었다. 오빠는더했고 그게 작은 숙부와 우리의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적산가옥은 약삭빠른 사람들이 다 차지해서 그로 인해서울의 집값이 가장 쌀 때였다. 우리는 개성 집 판 손에다 작은숙부가보태 준 돈을 합해 당시에도 서울서 가장 집값이 비싸다는 광화문 근처신문로에다 집을 샀다. 엄마가 그렇게도 소원하던 문 안 사람이 된것이었다. 지대만 좋을 뿐 아니라 새로 지은 반들반들하고도 반듯한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그때로서는 드물게 목욕탕까지 있는 집이었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집다운 집을 장만한 것은 올케 언니와의 행복한생활을 아직도 단념 못 하는 오빠의 새신랑다운 허영도 있었을 것 같다.
엄마는 열심히 신방을 꾸미고 며느리 올 날을 기다리고 나는 숙명고녀에복학을 했다. 그냥 결석했다 출석한 것처럼 아무런 문제 없이받아들여졌고 출석부에도 내 이름이 그냥 남아 있었다. 여름 방학 동안에해방이 됐기 때문에 고향이 이북인 아이들 중엔 아직 안 돌아온 아이들이많았고 그런 아이들의 자리는 계속 비원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그동안에 나에게 일어난 일의 부피와 세월의 부피를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내가 겨우 한 학기 동안 결석하고 돌아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인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안보이는 건 당연했지만 일본어를 가르치던 국어 선생님이 그냥 우리말의국어 선생님으로 눌러앉아 있는 건 잘 이해가 안 됐다. 우리가 입학할 때학제로는 중학교에 해당하는 기간을 고등학교라고 불렀는데 고등학교이학년짜리가 가갸거겨부터 배우느라 법석이었다. 선생님들한테 야단을맞아 가면서도 어려운 의사소통은 으레 일본말이 튀어나왔고 교과서 외의읽을 거리는 거의 일본의 소설류 아니면 일본말로 된 번역물이었다.
나도 신문로 집에서 처음으로 문학전집을 한 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신조사에서 나온 서른여덟 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은 내가 갖기를꿈꾸던 책이었다. 어느 날 오빠가 나를 위해 그걸 들여 놔 주었는데 물론일본 사람이 버리고 간 헌 책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헐값으로 팔거나버리고 간 착들이 일용잡화와 함께 길거리 노점에 범람할 깨였다. 아무리책이 흔해졌다고 해도 그 문학전집이 내 것이 됐다는 것은 꿈만 같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불어넣어진 생각인지 그 전집은 처음부터 끝까지모조리 독하를 해야 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상당히 부담스럽기도 했다. 쿠오 바디스나 몽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것은깨가 쏟아지게 재미가 있었지만 신곡이나 파우스트는 그런 맹목적사명감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못 읽겠는, 난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억지로 읽은 걸 결코 잘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슨 뜻인지 이해도못 하고 하여튼 읽긴 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는 안 읽었고, 누가그런 걸 좋다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알고 그럴까 열등감 반 의심반으로 받아들이니 말이다.
세계문학전집을 갖게 되고 나서 뒤미처 톨스토이 전집도 갖게 되었다.
역시 오빠가 헌 책방에서 보고 사다 주었는데 갈색표지의 장정이 하도엄숙하여 도저히 읽어 낼 것 같지 않은 인상부터 받았다. 그러나 안나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 톨스토이의 중요한 장편들은 그 후오랫동안에 걸쳐서이긴 하지만 여러 번 거듭해서 읽고 또 읽은 나에게매우 중요한 문학이 되었다.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그렇고, 어려워서 잘이해가 안 돼도 그렇고 한 번 읽은 걸 또 읽는 성질은 아닌데 그것들만이예외였던 것은 처음엔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 되면서도 뭔가 있긴 있는 것같아 또 읽다가 차츰 재미를 느끼게 되고 무엇보다도 성격 묘사의 묘미에최초로 매료당했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금 우울해진 집안분위기도 집중적으로 독서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이 되었다.
엄마와 오빠가 그렇게 정성을 다해 올케 언니를 맞을 준비를 했음에도불구하고 올케가 신문로 집에서 새색시 흉내라도 내 본 것은 한 달도 안됐다. 올케 친정에선 그때까지도 세간을 보내오지 않았다. 엄마는 약간남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드러내 놓고 그런 눈치를 보이진않았다. 불길한 것이긴 하지만 짚이는 게 있어서 꾹 참고 있었는데 그러길참 잘한 일이라고 엄마는 훗날 말하곤 했다. 올케의 친정에서는 우리보다딸의 병세를 훨씬 더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고, 잘못됐을 경우 올케의유물이 너무 많은 것도 안 좋다는 생각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올케는 다시세브란스병원에 입원을 했고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어느 날 새벽 통곡소리에 깨어났다. 병원에서는 마음대로 울지 못하다가대문간을 들어서자마자 통곡을 터뜨린 엄마와 올케의 친정어머니였다.
올케의 친정 어머니는 실컷 울 자리를 찾아 사돈집까지 따라온 것이었으니그 통곡의 처절함은 말해 무엇하랴. 나도 대강은 예상하고 있었지만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팠다. 그 나이에 어떻게 죽을 수가 있을까.
내가 몸담은 사랑이 충만한 세계가 깊이 모를 나락으로 함몰돼 가는 듯한공포를 맛보았다.
그들이 결혼한 지 일 연도 안된 해방된 지 이듬해 봄이었다. 그 동안오빠와 엄마는 눈물겹도록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오빠의건강을 생각해서 엄마한테 어쩌자고 두 내외를 떼어 놓지 않고 모자가같이 엎드러져 그 유난을 떠느냐고 염려도 하고 비난도 하는 소리가높았다. 그러면 엄마는 애저녁에 못 떼어 놓고 이왕 우리 식구 된 거, 내자식에게 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해 주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올케도눈을 감기 전에 그걸 엄마에게 깊이깊이 감사하고 떠났다고 한다.
엄마의 그런 면은 나도 전혀 예상 못 한 새로운 면이었고, 엄마를존경스럽고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한편 꽤 철난 후까지도 폐결핵을 동경하고 미화하는 버릇을 못 버린 것은올케가 그런 유별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고 폐결핵을앓는 남자와 열렬한 사랑을 해 보고 시은 게 내가 사춘기에 꿈꾼 사랑의예감이었다.


10. 암중모색
사춘기에 오빠의 열렬하고도 헌신적인 연애를 지켜봤음에도 불구하고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사랑을 하는것일까? 하는 문제는 나에게 꽉 잠긴 문저쪽 암흑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성문제에 있어서 그러했다. 그건 일찍이 홀로 된 엄마 밑에서 자라 엄마아빠가 서로 금실 좋게 지내고 동생도 태어나고 하는 걸 일상적으로경험할 기회가 없었을 뿐 아니라, 내 앞에서 누가 조금이라도 성적인암시가 들어 있는 소리를 하면 어린애 앞에서 무슨 소리냐고 질색을 하는엄마의 유난스러운 순결교육 때문이기도 했다.
그 무렵까지도 한가족이나 다름없이 좋은 일 궂은 일은 물론 물질까지도공유해 온 두 숙부들 또한 우리 앞에서 숙모들을 대하는 태도는데면데면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숙부들의 그런 태도가 홀로 된 형수를휘한 당시의 법도에 맞는 배려였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된 후였지만아기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성관계가 있어야 된다는 걸 안 건 꽤일찍부터였다고 생각한다. 기억할 만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고 어려서흔히 본 짐승의 암수 관계와 조숙한 시골동무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아진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태어났다는 건인정하기가 싫었고 숙부들에게도 그런 생활이 있다는 건 상상도 하기가싫었다.
나는 요새도 가끔 내가 유난히 운동신경이 둔하고 노래를 못 하는 것을,엄마가 체조나 창가를 못 하는 걸 되레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적이 있다. 그와 비슷한 핑계가 될 지도 모르지만, 사춘기에 성적인상상이나 심지어는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알고 있다는 것조차 속으로몹시 부끄러워하고 자책한 것은 엄마가 나를 성적으로는 마냥 어린애이길바랐기 대문이 아니가 싶다.
큰숙부가 소실을 두었다는 소문은 해방이 되고 나서 드디어 표면화됐다.
숙부보다 열 살이나 연상의 과부라고 했다. 면소재지에서 박적골까지 오는사이에 있는 외딴 마을에서 딸 하나를 데리고 혼자 된 과부와 숙부가가까워진 까닭은 이해가 되었다. 일제 시대의 시골 면의 총무부장이나노무부장은 혼자 사는 과부가 제법 의지할 만한 벼슬이어서 그쪽에서 먼저유혹을 했으리라고 다들 생각했고, 숙모는 한술 더 떠서 그 과부를측은하게 여기는 도량까지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간단하지가 않았다.
해방이 되자 숙부는 당연히 면사무소에 더 이상 나갈 수가 없는실직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농사를 짓기에는 마을 공동체로부터입은 피해 의식이 너무도 컸다. 마을 사람들한테 친일파로 몰려 대대로내려오는 집이 그 지경을 당한 후에도 숙모는 금방 그 사람들에게 집수리를 맡길 만큼 이웃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숙부는 끝내 박적골에 정을못 붙이고 겉돌았다. 그렇다고 빤한 시골에서 그 과부한테 가 있는 것도아니었다. 벌어놓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겠다 그나마 세도라고 부리던면서기 자리도 쫓겨났겠다 과부가 더 이상 숙부를 가까이할 까닭은 없는것처럼 보였다. 숙모도 숙부가 직업이 없어진 건 안됐지만 소실이 저절로떨어져 나가게 된 것 때문에 속으로야 어찌 고소하게 여기는 마음이없었겠는가.
그러나 땅도 좀 있고 돈도 쏠쏠하게 굴리던 과부는 소문이 시끄러운시골을 떠나 개성에다 조그마한 집을 장만하고 숙부의 공공연한 소실이되었다. 남자의 덕을 보기 위해 소실이 됐다고 생각 할 때는 한껏너그럽던 사람들이 남자를 부양하면서까지 소실이 된 데 대해서는경악했고 분개하고 욕하느라 집안이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시끄러워졌다. 그 여자에게 쏟아지는 집안내의 온갖 원색적인 욕설과망측한 억측의 소리를 얻어들으며, 나도 은밀히 불어나는 나의 불결한상상력에 소스라치곤 했다.
그러나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과감히 자기 정체를 드러낸 그 여자는시일이 지나면서 점점 더 노골적으로 소실로서의 지위를 확보해 갔다.
숙부가 그 집을 떠나지 않으니 누구나 숙부를 만나려면 그 집까지 가야했고, 그 여자는 우선 그런 까닭으로 자기 집에 들르는 사람들은대접하기를 극진하게 해서 인심은 얻기 시작했다. 시일이 좀 지나자할머니 생신 때 같은 큰일에는 박적골까지 나타나 물질적으로나육체적으로나 육례를 갖춘 며느리들의 갑절은 되게 효도를 해서 할머니마음에까지 들게 되었다. 첩며느리는 꽃방석에 앉힌다는 옛말 그르지 않은사태가 우리 집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다. 자연히 숙모와 할머니사이엔 불화의 기운이 감돌았다.
박적골 집이 이렇게 피폐해진 후에도 나는 방학 때마다 귀향을 거르지않았다. 해방 후 미군이 들어왔다 소련군이 들어왔다 한동안업치락뒤치락하던 개성은 결국 삼팔선 이남으로 확정이 되어 왕래가자유스러웠다. 할머니가 생존해 계시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방학 동안을 쭉서울서 보낸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엄마가 따라 다니는 것은 면할수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방학이 가까워 질 때마다 가슴이 뛰놀던 버릇은여전했다. 그건 나의 심신의 중요한 리듬이었다. 박적골이야말로 내 생기의젖줄이었다.
그러나 어느 틈에 고역스러운 의무가 한 새로 생겼는데 그건 개성역에내리면 우선 숙부네 소실 집을 거쳐서 박적골까지 가야 되는 것이었다.
할머니도 그러길 바라셨고 그 여자에 대해선 입에 올리는 것조차 자존심상해하는 엄마조차 거기를 거쳐야만 숙부를 뵐 수 있으니까 별수없지않느냐는 식이었다. 심지어는 숙모까지도 투기와 의무를 엄연히 구별해서자기 자식들도 가끔 그리로 보내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게 하는모양이었다.
경우 바른 할머니를 자기 편으로 만든 숙부의 소실이니만치 시집식구에게 잘 하는게 유난스러웠다. 내가 가도 버선발로 뛰어나와 동지섣달꽃 본듯이 호들갑스럽게 반겼고, 뛰어난 음식솜씨로 아첨했다. 그럴수록나는 요사스러운 데라곤 손톱만큼도 없이 다만 진국스럽기한 숙모에 대한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여자에겐 쌀쌀하게 굴어야 한다고 마음을도사려먹곤 했다.
그러나 한편 그 여자가 싫으면서도 야릇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가없었다. 그여자하고 같이 있을 때 숙부는 내가 아는 근엄하기만 한숙부하고 전혀 달라 보였다. 그여자 앞에서 숙부는 딴 사람처럼흐늑흐늑해 보였고 숙부는 자신이 그꼴이 된걸 부끄러워하기보다는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제주로 숙부를 저렇게 흐늑흐늑하게길들였을까? 금실 좋은 부부의 모습을 모르고 자란 나에게 숙부와그여자와의 깨가 쏟아지는 장면은 불길하고도 문란한 상상력을 자극했고,그 집을 벗어난 후에도 뭔가 크게 오염된것처럼 께적지근한 자기협오감에사로잡히곤 했다.
삼학년 때던가 사학년 때였다. 기차가 장시간 여연착을 했다. 해방되고나서 열차 사정이 엉망이 된게 몇 년 후까지도 바로잡아지지 않은 채였다.
연발착은 다반사였고 겨울에도 난방은커녕 유리창은 다 깨지고 껍데기를벗겨가 골조만 남은 의자에 앉아서 덜덜 떨면서 여행하기 일쑤였다.
그날의 연착은 좀 심한 편이어서 어둑어둑해서 내렸으니 혼자서 시골길이십리 길을 가는 건 무리였다. 그덜 때는 개성 시내에 자고 갈 만한 집이있다는게 여간 든든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숙부가 으레 나를박적골까지 데려다 주려니 하면서 그 여자네로 갔다. 물론 저녁을 잘대접받고 나서였는데 숙부는 나를 데려다 줄 생각도 안했고, 그 여자도으레 내가 자고 가려니 했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자기 딸이 혼자 자는 뒷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득부득나를 안방에 재우려고 했다. 그렇게 하는게 나에 대한 극상의 대우라고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그여자의 딸하고 같이 자는것도 내키지 않았지만그 여자하고 숙부하고 자는 방에서 같이 잠자는 데에는 거의 공포감을느꼈다. 그건 어쩌면 강렬한 호기심일 수도 있었다. 나는 내 호기심이수치스러웠기 때문에 되레 그 방에서 같이 자는 걸 아무렇지도 않아하는것처럼 꾸몄다.
내 자리를 맨 아랫목에 깔고, 조금 떨어져서 숙부와 그여자가 한자리에들었다. 불을 끈 후에도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깊은 잠을 위장했다.
그러나 내 촉각은 낱낱이 곤드서고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남자와 여자가저지르는 어떤 일을 보게 되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알게됨으로써 내가 더럽혀질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알고 싶었다. 그러나 두사람은 시시덕대며 얘기만 했다. 숙부는 주로 듣기만 하는 편이었다.
시골서 행세께나 하는 집이 망한 내력이 그날의 화제였다. 딴 걸기다리는 마음 때문에 지루하게 듣다가 나도 서서히 그 이야기에 빨려들게되었다. 그 집엔 인물이빼어나고 성미가 차갑고 도도하기로 소문난청상과부 며느리가 있었는데, 그 며느리가 머슴하고 정을 통해 애를 낳고,결국은 그 일이 그집안의 패가망신을 가져온 얘기였다. 아주 복잡한줄거리를 그 여자는 소상하고도 흥미진진하게 얘기했다. 그 여자는 맨나중에 "그 얼음장 같은 여자가 어드렇게 그 두엄더미만도 못한무지랭이하고 붙어먹었을까?"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오랫동안 킬킬댔다.
그여자는 그 대목을 어찌나 육감적으로 말했던지 나는 징그러워서진저리가 쳐졌다.
그날 밤 그 여자와 숙부 사이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때로는사춘기 소녀의 상상력이 무르익는 중년의 실생활보다 더 외설스러울 수도있다. 나는 숙부와 그 여자가 먼저 잠든 후까지도 잠을 못이루고얼음장같은 미인과 두엄더미만도 못한 무지랭이를 느닷없이 한 운명으로떠다민 이상한 힘에 대해 전율했다. 어쩌면 그건 아직도 깜깜하기만 한미지의 세계에서 최초로 감지한 불가사의한 정욕의 눈이 아니었을까. 나는그날 밤 엿들은 이야기를 오랫동안 잊지 못했고 그후 몇십 년 후 내 소설중 가장 긴 장편 미망을 쓰는 데 중요한 모티브로 삼았다.
그 시기는 내적으로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나에게 매우 힘겨운 시기였다.
가정 환경도 그렇고 시국도 그랬다.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도처에범람했지만 별안간 그 눈부신 걸 바로 보기엔 우리가 눈을 뜬지 불과 얼마안 돼 있었다.
학교에 자치회라는 게 생겼다. 어떻게 해서 그런 분위기가 조성됐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툭하면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학생회를 했다.
바깥 세상이 좌우익의 대립의 날로 치열해지면서 아무개 절대지지,누구누구 절대반대란는 정치적 구호와 시위가 매일같이 교차되는 데 발을맞춰 우리는 어떤 선생님은 친일파이나까 내쫓아야 한다든가 어떤선생님은 사임하면 안된다든가 하는 걸 학생회에서 결정하려 들었다.
우리는 그때 자유와 민주주의라는걸 학생에게 무한한 권리가 있는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수업도 거부하고 강당에 전교생이 모여서 찬반양쪽으로 갈라져 열띤 토론을 벌이는 날이 많았다.
해방 후 대부분의 학교 재단이 이북에 있어서 여러 가지 재정적 곤란을겪고 있는 학교 사정은 조금도 고려 안 하고 철없이혼란만 조성한셈이지만 그 나름으로 우리에겐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다수결로무엇을 결정하기 전에 격력한 토론을 벌이곤 했는데 그때 논리적으로  말잘 하는 상급생 언니가 돋보였고, 같은 학년 중에도 자기 의견으로 남의생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애도 나타났다.
새로운 교장 선생님이 오시게 되었을때도 우리는 학생회를 했고, 어떻게그렇게 되었는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새 교장 선생님을 거부하고 전 교장선생님을  지지해야 된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러나 그건우리의 권한 밖의 인사 문제였으니 새 교장 선생님은 예정대로 취임을했다. 우리는 취임식을 거행하는 강당에 가지 않고 교실에서 버티는 걸로끝까지 반항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근래의 대학생 시위와 비슷한 짓을 하지 않았나 싶다.
새 교장 선생님은 노련하게 혼미한 학교 분위기를 일긴 시켰고 휼륭한선생님을 여러 분 모셔와 일제시대와는 전혀 다른 황홀한 수업을 받을기회를 우리에게 주어 우리의 주장이 옳지 않았다는 걸 충분하게입증했다. 학내의 혼란기는 이렇게 비교적 짧게 끝났다. 그동안 내가학생회에서 발언 한번 제대로 한 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수의편에서 박수 치고 손들고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시기가 내 성장기의 매듭처럼 회상되는 것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내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기 사작한 시토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상그때 우리가 날 뛴것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닌, 학교 재단문제일 수도,미 군정이 밀가루나 드롭스처럼 흥청망청 쏟아부은 자유와 민주주의를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앓는 배탈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혼란을 좌익과 우익, 진보와 반동의 대립이라는이념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 들었고, 내가 박수치고 역성들어 줘야할 편은 좌익이라는 생각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건 말끝마다 절재지지아니면 결사반대가 붙은 당신의 말버릇에서도 짐작할수 있듯이 너나 없이어느 한쪽 이념에 붙지 않으면 불안한 해방 후의 사회상 탓도 있었지만 그중에도 하필 좌익었다는 건 오빠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그렇다고 오빠가 나에게 의식화교육을 시킨 건 아니다. 오빠는어려서부터 머리가 좋은 걸로 소문이 나 있었고 용모가 준수하고 말수가적고 우애가 깊었다. 게다가 장손이었으니까 자연히 집안내에서떠받들어졌다. 이런 오빠는 나에게 큰 백이었을 뿐 아니라 무조건추종하고 싶은 우상이었다. 여북해야 오빠의 첫사랑이 결핵을 앓았으므로나도 결핵환자와 사랑을 하여야겠다고 생각했겠는가.
올케가 죽은 후 오빠는 더욱 말수가 적고 우울한 성격으로 변했다. 나는그런 것까지 멋있게 보였고, 숙부들을 위시해 속물들만 모여 있는 것 같은우리 집안 내에서 유일하게 정신적인 높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빠의 높은 생각을 나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은 마음과 어떤 것이든이해하고 흉내내고 싶은 마음이 감지한 게 오빠의 사사의 빛깔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빠가 사들인 책이 맨 그런 책이었으므로 그 중 쉬운것만 빼다 읽어도 감화 받기엔 충분했다. 얄팍한 팜플랫 종류는 쉬울 뿐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선동시키는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생각나는걸로는 프랑스에서 공산주의 운동가가 된 어떤부두노농자 이야기가 있다. 그는 부두에서 하역에 종사하는 평범한노동자였는데 하루는 밀가루를 육지에다 내리는 게 아니라 바다에갖다버리는 일을 하게 된다. 임금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라 해도 굶주림에허덕이는 빈민들이 무수한데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수없어 고민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 밀값이하락하는 걸 우려한 자본자들이 그런 방법으로 곡물의 양을 감소시켜 높은곡물가를 유지하려는 계획임을 알게 된다. 자본주의란 바로 빈민들이야굶건 말건 이윤추구만이 최상목표라는 걸 깨달은 그 부두 노동자는그때부터 자본가에게 치를 떨며 유능한 공산혁명가로 바뀐다는 이야기가마치 이세상에 대한 새로운 개안처럼 찬란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렇게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가 있을 수가 있을까? 나는 내가그걸 깨우친 데 기쁨을 느꼈고 그걸로 세상만사를 재는 잣대를 삼으려고들었다. 그러나 오빠가 그런 선동적인 팜플렛만 읽는 건 아닐 터였다.
오빠는 식구들이 상처한 아픔을 다치지않게 하려고 가만히 내 버려 두는사이에 점점 더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갔다. 낯선 사람들을 한 방씩불러들여 수군수군 모임을 갖는가 하면 어디론지 우르르 몰려가기도 했다.
어떤때는 이승만 박사나 당시의 수도청장, 치안국장 등을 격렬하게원색적으로 비난하는 표어를 여럿이 모여 앉아 쓰다가 밤에 몰래 전봇대나남의 집 담벼락에 붙이는 짓을 하기도 했다. 아침에 학교 가다가 그런불온삐라 중 오빠의 필적을 발견하고는 역시 오빠의 사상은 내 생각과틀림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기쁜 건 아니었다. 나는 오빠 정도면 당연히거물급이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욕지거리나 써 가지고 밤에몰래 풀칠을 하고 다녔을 오빠를 상상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 있어 오빠는 꽤 거물급이 체포된 데 이어피해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엄마가 울고불고 작은숙부한테 구원을 청했고,작은숙부가 어디다 어떻게 청을 넣었는지 집에 들어와 자도 된다는연락이왔다. 그때부터 엄마와 오빠의 끈질긴 갈등이 시작되었다.  엄마는원래 자식들이 좋아하는 거나 옳다고 여기는 건 무조건 따라 하는분이었다. 내가 집에서 무심히 학교 얘기를 하다가 어떤 선생님이나친구를 좋게 말하면 엄마도 덩달아서 좋아해서 이름까지 기억해 주었고,반대로 누구를 욕하거나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면 그러는 게 아니라고타이르기는커녕 나보다 더 열렬하게 미워했다. 그런 엄마이고 보니 오빠가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동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빨갱이 짓에 한해서는 집안 망치고 제몸 망친다는 일관된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가 이해하는 빨갱이 짓의 초보는 이승만박사를 반대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거기 까지는 이해하고 동조할아량이 있다는 것을 늘 강조했다.
"나도 이승만 박사는 싫다. 그렇지만 일생을 독립운동만 한 어른이니한번 대통령 해먹게 눈감아 줘야지 어떡하니? 빨갱이들은 어쩌면 그렇게의리가 없냐? 하긴 에미 에비도 몰라보는 어머니동무, 아버지동무한다니까." 이런식의 설득과 한탄에 오빠는 다만 쓸쓸하게 웃을 뿐 쓰다달다 말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엄마 입에서 에미를 동무라고 불러도좋으니 말이나 좀 시원히 했으면 좋겠다는 한탄이 다 나왔을까.
그때도 빨갱이 짓 하다 붙들려 들어가면 모진 고문을 당하고 병신되기도 십상이라는 게 거의 상식처럼 돼있었다. 엄마는 자나깨나 손찌검한 번 안하고 기른 아들이 감옥소에 들어가고 모진 고문으로 반죽음을당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수상한 친구들이 드나들면 수군거리는 게 질색이었고 모든 잘못을 그 친구들 탓으로 돌리면서 그들하고 오빠를 떼어놓기만 하면 오빠가 정신을 차리려리 믿는 것 같았다.
한번은 형사가 신문로 집에 그런 친구 중의 한 사람을 찾아온 사건을기화로 엄마는 갑자기 그 집을 팔기로 결심을 했다. 오빠가 생활을 돌보지않아 숙부의 도움으로 살림을 꾸릴때라 집을 줄여 돈암동으로 이사를했다. 마침 돈암동 전찻길 가에 살림집이 딸린 큰 가게터가 하나 나왔는데숙부가 그걸 사고 싶어하던 중이었다. 이것 저것 브로커 노릇을 하던숙부가 세상이 조금씩 안정되는 것과 발을 맞추어 안전한 장사를 해보려는 것 같았다.
엄만는 집을 줄이고 남은 돈을 자청해서 거기다 보태고 조금이라도떳떳하게 생활비를 받으려고 했다. 누울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고 오빠가국학대학 야간부에입학을 했다. 숙부도 엄마도 오빠를 대학 공부 못 시킨걸 안타까워하던 터라 주간의 좀더 나은 대학에 가기를 권했다. 어느정도믿어도 될 얘긴지 모르지만 숙부는 전통깊은 사립대학에 돈을 쓰고 자리를다 마련해 놓은 것처럼 서둘렀다. 한창 대학 가는 일이 유행처럼번질때였고 우리 학교에서도 졸업이 아직 멀었는데 대학으로 가는 아이도심심찮게 생겨났으니 그 정도는 가능한 얘기였을 것이다. 이렇듯 숙부와엄마가 오빠의 대학 진학을 대환영했던 것은 학벌보다도 좌익운동으로부터발을 뺄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빠의 속셈은 어른들의 그런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해방과 함께 당연히 고조된 우리 것을 알아야겠다는 분위기에 힘입어 교양정도를 목적으로 그 학교를 선택한 것이지 좌익운동에서 발을 뺄 생각이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였다. 하긴 대학의 좌익조직이 더 막강할때였으니까 엄마가 오빠의 대학 진학에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것은 뭘너무 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는 돈암동 집에서도 안정을 못하고 6.25가 날때까지 거의 일년에 한번꼴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신문로 집에서처럼 우리집이 불온한모의의 아지트가 됐다고 판단되는 즉시 엄마는 치를 떨며 발작적으로이사를 결심했고, 어떤 때는 집에 있는 세간이를 그냥 놔 둔채 야반도주를해서 숙부네와 합쳐서 산적도 있다. 아마 오빠가 그들이 좋아하는투쟁경력이라는 걸 정직하게 쓴다면 엄마와의 투쟁경력이 가장 찬란할것이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나는 어쩔수 없이 오빠가 하는 일을 지지하고성원하는 마음과 엄마를 딱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같이 가질 수밖에없었다. 학제가 바뀌어 사년제 여자 고등학교가 육년제 여자중학교가되었다. 중학교를 다니다는게 지루했던지 재학 중에 시집을 가는 애도생기고 앞서 말했듯이 대학으로 빠져나가는 애도 생겼다. 과도기여서그랬는지 입학할 때의 약속이 사년제였기 때문인지 수단껏 대학으로 가면그런대로 학력을 인정해 주었다. 학년 말도 해방되던 달을 기준삼고 구미선진국의 본을 따 8월달로 변경이 된 지 오래였다.
우리 학교에도 민청조직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삼학년 때였다. 내가어떻게 돼서 그 조직의 눈에 들고 포섭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별로친하지 않은 아이로부터 독서회에 나와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나는즉각 그 뜻을 알아차렸고 약간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주저하지 않고응낙했다. 모임이 있는 아지트를 찾아가는 방법 등이 뭔가 비빌을 갖고싶은 욕망을 충족시켜주었지만 거기서 돌아가며 읽는 책이나 토론하는주제는 나를 최초로 사로잡은 팜플렛 지식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실망이 컷지만 나도 드디어 오빠의 동지가 됐다는 만족감으로 뿌듯했다.
메이 데이가 돌아왔다. 메이 데이 행사를 좌익에선 남산에서, 우익에선서울 운동장에서 따로따로 편갈라 하는데, 우리는 학교를 결석하고남산에서 하는 메이 데이 행사에 꼭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학교를결석하고까지 남산에 갈것인가는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엄마 때문에도그랬지만 나는 좌익이고 우익이고를 막론하고 집회나 시위, 구호 외치는것 따위가 싫었다. 그러나 독서회가 있을때마다 가장 가혹한 비판의대상이 되는게 이런 개인주의적 경향에 대해서였기 때문에 나도 언제가는극복해야 할 내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학교를 빼먹고 남산으로 갔다. 노동자와 학생의 인력을최대한으로 동원한 굉장한 집회였다. 온종일 선창자를 따라 격렬한 구호를외쳤고 인민가요를 한도 없이 따라 불렀다. 저녁에 파김치가 돼서 귀가한나는 엄마의 추궁을 당해 낼수가 없어서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엄마의낙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계집애가 유치장 들어가면 어떤 일을당할지 알기나 하느냐고 어디서 얻어들은 소리인지 온갖 끔찍한 소리를다해서 나에게 잔뜩 겁을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학교 가는 걸 한사코말렸다. 학교에다 전화를 걸어 줄 테니 어제부터 아팠던 걸로 하고 며칠결석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겁한 일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엄마의애원을 뿌리치지 못했다.
결석을 하고 뒤로 알아본 결과 메이 데이 날 결석을 한 아이는 일제히교무실로 불려가 남산에 갔나 안갔나 조사를 받고, 갔다온 것이 알려지면굉장한 꾸지람을 듣고 학부형까지 불려가 용서를 빌어야 했던 모양이다.
딴 학교에서는 경찰에 넘기기도 했는데 다행이 우리학교에서는 학내문제로 온건하게 처리한 것이 그정도였다. 아무도 내가 간 것을고해바치지 않아 사나흘 후에 학교에 가니 아무런 문책도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일이 두고두고 부끄러웠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때얼마나 비겁하게 보였을까, 생각만해도 자신이 협오스러웠다. 메이 데이건에 대해선 선생님으로부터 아무런 의심도 안 받았을 뿐아니라 반친구들도 내가 그런 데 갔으려니 여기는 애가 없었다 그건 내가 평소너무도 고지식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이고 생각되어 나는 나의 철저한이중성에도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후 민청조직이 와해된 건지 나만따돌렸는지 다시는 접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정환경이 안정되지 않아서인지 학교 생활도 거의 건성으로했다. 그나이에 한창 관심 있어하고 고민이나 기쁨의 원인이 되는 교우관계에도시들해서 그 시절 누구하고 어떻게 친했었는지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책읽기가 유일한 위안이었고 이념 서적에서 차츰 해방 후에 나온 우리문학으로 취항을 옮겨갔지만 내가 사보는게 아니고 오빠의 서가에서뽑다가 보는 것이기 때문에 오빠의 영향력을 못 벗어난 것었다. 오빠는문예지도 좌익계 문학단체인 문학가동맹에서 나오는 [문학]만 보았고사들이는 딴 책도 선호하는 기준이 이념편향적이었다.
그 무렵 얻어 본 신간 중 김동석이란 평론가의 수필집이었던지평론집이었던지 분명치 않은 산문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문장이 어찌나명쾌하던지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일본말 소설에 먼저 맛들인 감각으로아직도 우리말로 된 책 읽기가 답답할때였다. 그중에서도 춘향전 해설을둘러싸고 누구하고 논쟁을 벌인 대목은 매우 흥미가 있었고 공감이되었다. 춘향전이 널리 사랑받는 생명력은 춘향의 절개에 있다는 주장을반박하고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두하기 전 변학도의 잔치 자리에서쓴시"금준 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요는 만성고라."야말로 춘향전의참생명이라는 논조가 그럴듯했다.
그러나 역시 오빠의 책이니만치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쓰여진
평론집이었던 듯하다. 김동석이란 이름은 6.25동란 이후 지워진채 다시는만나지 못했다. 근래에 해빙기를 맞아 지워진 이름들과 그들이 남긴작품이 거의 복원되는 걸 보고 그의 글도 있나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아직못 만난 걸 보면 그때 내가 생각한 것만큼 대단한 평론가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6.25전까지 돈암동에서만 세 번 이사를 다녔는데 아마 삼선교근처에 살 때가 오빠가 가장 깊숙이 좌익운동에 투신했을 때가 아닌가싶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뿐이다. 시대적으로도 남로당이 가장 활발하게지하운동을 조종할 때였고 오빠의 태도도 그때는 도무지 우리 식구 같지가않을 정도로 정신이 완전히 딴 데 사로 잡혀 있었다. 밤에 누가 찾아오면도망갈 길까지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집엔 분명 부엌에 뒷문이 있었는데 뒷문 밖은 옆집과의 사잇담이 있는좁은 골목이었다. 겨우 사람 하나 비비고 나갈 만한 골목은 그 끝이 길로면한 높은 벽돌담이었고, 반대로 가면 딴집 뒤꼍을 여러번 통과해, 정당한길로 가면 한참 걸릴 우리 집과는 반대쪽 동네에 다다르게 돼 있었다.
오빠가 도망을 간다면 그길을 택할게 뻔해 가끔 엄마는 여러 집의 뒤꼍이연결된 그 어두운 미로에 혹시 장애물은 없나 살펴보곤 했다. 그리고"이집에 이길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누." 하면서 대견해 했다. 오빠를위해선 어쩌면 상당히 유리한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년도 안돼서별안간 뜬 것은 다행이랄까 오빠 때문만이 아니였다.
그집은 방이 우리 식구 수효보다 많아 넷이나 되었다. 돈도 아쉽고 해서문간방을 세를 주면서 엄마는 오빠 때문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그러나고르고 골라 세를 준 사람이 지내고 보니 오빠를 닮은 사람이었다. 별로살기가 어려워 보이지도 않으면서 바깥 남자는 직업이 없었고 시일이지나자 그 방에서 수상한 사람들이 모여 모의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즉각 엄마는 그집도 빨갱이 집이라는걸 알아차렸다. 그 무렵 오빠가 우리집을 아지트로 제공하는 일은 없어졌는데 교대로 문간방이 아지트가되었으니 엄마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오빠하고는 전혀 관계 없는일이었지만 엄마는 집터 탓까지 하면서 한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동병상련 같은 마음도 있어서 내보낼 생각은 안 한 것 같다.
엄마는 그 집 걱정까지 떠맡아서 불안해 했다. 그리고 얼마안 있다 경찰이우리집을 에워싸고 그 남자를 잡아갔다. 그때 놀란 엄마는 마치 시골서염병이 돌 때, 그병으로 온 식구가 몰사한 집을 마을 사람들이 태워없애듯이 발작적으로 우리 집을 버리고 숙부네로 들어갔다. 집이팔릴때까지 그 집엔 그 남자의 식구들이 남아 있기로 했다. 그 남자에겐아내와 남매가 딸려 있었다.

11 그 전날 밤의 평화돈암교 가까운 전찻길 가에 가게터가 달린 숙부네는 안채로 넓어서 양쪽집을 합쳐 봐야 다섯 명에 불과한 식구가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나는 독방까지 쓸 수가 있었다. 거기사는 동안 오빠의 혼담이 무르익었다.
오빠를 지하운동에서 손떼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그전부터도집안내에선 엄마가 아들의 재혼을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이 많았었다.
엄마라고 왜 그런 생각이 없었을까만 누구보다도 아들에 대해서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안 먹혀들어갈 일은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선보는 것조차 한번도 말을 안 들어 주던 오빠가 연줄연줄로 세겹의사돈쯤 되는 규수를 친척 집에서 우연히 본 후, 그 색시라면 어떻겠냐고누가 한번 지나가는 말삼아 물어 본걸 솔깃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오빠가 나더러 한번 봐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선을 보이고 있다는 눈치를보이지 말라는 어려운 부탁이어서 규수가 들고나는 시간에 그집 근처에잠복해 있다가 얼핏 볼 수 가 있었다. 참 구차스러운 방법이었지만 나는오빠가 나한테 먼저보라고 한 게 어쩌나 기쁘던지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했다. 예쁘진 않았지만 지적인 인상이었고 전체적으로 여자답다기보다는늠름해 보였다. 나는 내가 본 인상을 그대로 말했고 오빠는 여간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삼선교 집에 남아 있던 문간방 식구들도 시골의시가로 내려가서 집을 비워 놓으니까 팔리는 게 더디다고 근심들을 했다.
그래도 그 집이 팔리고 새로 돈암동 종점 쪽으로 이사할 동안이 오빠가 그여자하고 충분히 교제할 수 있는 기간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숙부네를나와 이사하면서 새 식구를 맞아들였다.
중학교 오학년이 되면서 반을 문과, 이과, 가사과로 나누었다. 입학할때도 세반을 뽑았기 때문에 각각 한 반씩이었다.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생각해 보지 않고 문과를 택했다. 습관적인 독서 버릇 때문에 문과를 가장편하게 여겼을 뿐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방면에 소질이 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예전 학제같으면 졸업하고 전문학교 갈 때였으니까 웬만큼은 싹수가 보일 때였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나는 되레 문학소녀적인 기질이 두드러지는 애를보면 나는 절대로 될 수 없을 것 갈은 이질감을 느꼈다.
문과 담임은 새로 부임해 온 박노갑 선생님이 되었는데 소설가라고했다. 소설은 많이 읽었지만 소설가의 실물을 보는건 처음이었다. 마침그때 우리 집에서 구독하고 있는 일간신문에 그분의 소설이 연재되고있어서 정말 소설가는 소설가로구나 싶어 약간 흥분까지 되었다. 오빠의서가를 뒤져 문학가동맹 기관지인 문학에도 그분 단편이 실린 걸 보고그분의 빛깔을 알아 버린 것 같은 친말감과 연민까지 느낀 것도 유별난오빠를 둔 덕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입시를 위한 준비교육은 전혀없어서 문과에선 꽤 여러 시간을 문학이니 창작이니 하는 시간에 할애하고있었다. 그분이 국어뿐 아니라 그런 시간까지 담당을 했다.
그 무렵에 그분의 40년이라는 장편도 출간이 되었다. 가능한 한 그런것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지만, 그분의 작품으로부터 영향받은 바는 그리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참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읽는 데불과했다. 그러나 창작시간의 그분의 문장지도는 매우 엄격했고 나도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주었다. 그분이 가장싫어하는 것은 '아아!'니'오오!'니 하는 투의 감탄사가 많이 들어가는 감상과잉의 문장이었다. 그걸 어찌나 싫어하는지 그분이 그런 글을 야단칠때는 그분 살갗에 닭살이 돋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옆에서 느낄 정도였다.
당연히 남의 느낌이나 표현을 빌려다 써먹은 미사여구도 질색을 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센티한 미사여구를 적절하게 구사하면 다들 그걸문학에 소질이 있다고 말했고, 그런 재간이 있는 애를 문학소녀라고 불러왔기 때문에 선생의 그런 문장 지도법은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문학소녀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할 수가 있었고, 나도소질이 있을 것 같은 자기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처음으로 좋아하는선생님을 갖게 되었다. 그분은 눈이 맑고 크고 엄격한 인상이었지만웃으면 금방 그 엄격함이 허물어지면서 어린애 같은 표정이 되었다.
겨울엔 주로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좋은 감이 아니라 옥양목에 검정물감을 들인 검소한 것이었다. 한문도 가르쳤는데 흥에 겨워 한시를낭랑한 목소리로 읊을 적에는 그 검정 두루마기가 참 잘 어울렸다.
문과에는 문학이나 예능 방면으로 가고 싶어하는 애들 말고도 공부는대강하고 놀고 싶어하는 애도 많이 모여서 분위기가 참 자유스럽고재미있었다. 책상의 배치를 가운데는 둘씩 짝을 지어 앉히고 양쪽창가에는 짝 없이 외줄로 앉혔는데 나는 운동장 쪽 창가에 짝 없이 앉게되었다. 자연히 앞뒤로 친하게 되었는데 훗날 나보다 훨씰 먼저 등단해문명을 날린 한말숙, 서울음대 교수가 된 이경숙, 나, 그러고 소설도썼지만 번역을 더 많이 한 김종숙이 앞뒤로 나란히 앉아서 죽이 잘 맞아수업시간에 못된 장난도 많이 했다.
누가 하나 읽을 만한 소설책을 가져오면 수업시간에도 교과서는건성으로 펴 놓고 그것만 읽다가 선생님이 무얼 시키면 딴청을 해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때그때 떠오른 기발한 생각을 쪽지에 적어돌리고 회답을 받는 데 시간 가는 줄 모르기도 했다. 한 말숙이가 자기집에 있는 아크타카와 전집을 한 권 한 권 빼와 돌려 읽으며 굉장히흥분을 했었는데 뭘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는 조금도 생각나지 않는다.
김종숙이는 그때 자기 집이 종로서관을 했다. 지금의 종로서적의 전신이바로 그 애네 집 거였다. 걔한테서 그 무렵의 순수 문예지인 문예도 빌려보고 신간 서적도 빌려 보았다. 지금처럼 신간이 많이 나올 때도아니었건만 종로서관에 들를 때마다 그 많은 책이 다 그 애 거만 같아서여간 부럽지가 않았다. 또 그때마다 그 애 할아버지가 매장 한가운데서감시꾼 노릇을 하고 서 계신 게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는지, 지금돌이켜보니 훔칠 기회를 엿봤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때도종로서관 하면 서울에서 제일 큰 책방이었는데도 온 집안이 총동원이 돼서팔기도 하고 경리도 보고 감시도 하는 가족경영체제였다.
겉으로는 착실한 모범생처럼 굴면서 싫어하는 수업시간에 딴 짓 하는버릇말고 또 하나의 고양한 장기는 학생입장불가의 영화관 출입하기였다.
돈암동의 동도극장은 프로가 갈릴 때마다 놓치지 않고 가는 단골이었다.
숙부네 가게가 바로 동도극장에서 비스듬히 건너편에 있었는데 가게유리창이나 벽에다 극장 포스터를 붙이는 대가로 표를 주고 갔다. 숙부는그걸 나한테 넘겨 주기도 하고 같이 가자고 꾀기도 했다. 동도극장이단골이란 건 엄마에게도 반 친구들에게도 비밀이었지만, 따로친구들하고도 곧잘 극장출입을 했다. 어둠 속에서 교복의 흰 깃은 단박눈에 띄게 돼 있어서 날쌔게 안으로 구겨 넣고 시치미떼고 앉았다고 누가학생인걸 모를까마는 세상을 감쪽같이 속여먹은 것 같은 쾌감을 맛보곤했다.
한번은 김종숙하고 수업을 빼먹고 화신 오층에 있는 영화관엘 갔다.
선생님이 안 나오시거나 사정이 생기면 그 시간은 결과라고 예고가 되는데두 시간 내리 결과인 날이었다. 마침 보고 싶은 영화가 화신 영화관에들어와 있다고 해서 그 시간에 갔다 오자는데 둘의 마음이 일치했다.
예감이 웅성대는 신비한 어둠 속으로 은근 슬쩍 숨어들어가 흰 깃을안으로 구겨 넣고 앉았노라면 언제나 가슴이 뛰어놀게 마련이지만 수업을빼먹고 그러고 있는 맛은 더욱 진진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왜 그렇게 정전이 자주 되는지 재미있을 만하면 화면이꺼지고 사방에서 휘파람소리가 나곤 했다. 해방되고 나서 북쪽으로부터의송전이 끊기고 극도로 나빠졌던 전기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는 게 그모양이었다. 늘 당하는 일이 그날은 좀 심했다. 여북해야 극장측에서무대에다 촛불을 켜 놓고 가수를 불러다 가극 비슷한 짓을 다 시키면서관객을 달래려 들었다. 우리는 그래도 끈질기게 기다려 하여튼 영화를 한바퀴 다 보고 나서야 극장을 물러났다. 둘 다 시계도 없어 시간 가는 줄몰랐지만 설마 밖이 벌써 어두워 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서둘러 학교로 돌아갔다. 지척인데도 뛰는 가슴 때문에 헐레벌떡 당도한교실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깨끗이 청소까지 끝난 교실엔 두 사람의책가방만이 나란히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따. 엄명과 함께 우리 두 사람의이름이 적혀 있었다. 교무실로 부랴부랴 내려갔으나 선생님들도 다 퇴근한후였다. 수업시간에 영화관에 간 배짱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날 안으로담임 선생님을 못만나고 집으로 가면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그런고지식함은 김종숙도 마찬가지여서 숙직 선생님을 찾아갔다. 어떻게든지선생님댁을 알고 싶어하는 우리를 위해 숙직 선생님이 교사들의 신상 카드철을 꺼내다가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자택의 주소 뿐 아니라 약도까지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박노갑 선생님이 현저동에 산다는 걸알았다. 가슴이뭉클하면서 말할 수 없는 친애감을 느꼈다. 숙직 선생님도 현저동에 대해뭘 좀 아는지 이런 약도 가지고 찾을 수 있는 동네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약도를 보면서 벌써 대강 짐작이 갔다. 찾을 자신이 있었지만종숙이한테는 그런 내색을 안하고 그냥 가 보자고만 했다. 왠지 그 동네에대해 아는 척하기가 싫었다. 수치감 같은 것하고는 달랐다. 찾기가생각처럼 쉽지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전차가 다닐때라 영천까지는 쉽게 갔지만 집 찾는 덴 과연 오래 걸렸다. 그 동안 많이변해 있었고 밤이라 가뜩이나 복잡한 골목이 더 꼬여 보였다. 나는종숙이한테 생전 처음 와 보는 동네처럼 굴면서 혹시 그 애가 그 동네를흉볼까 봐 조마조마했다.
선생님 댁을 찾았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아직 안 들어오셨다고했다. 선생님 댁은 아주 조그만 일각대문 집이어서 대문 밖에서도 그구차한 살림형편이 다 들여다 보였다. 사모님한테 찾아온 뜻을 전하면서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 걸 느꼈다. 그날 엄마한테는늦게 온 걸 야단맞았지만 다음 날 아침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는뭘 그까짓 일로 집까지 찾아 왔었느냐고 관대하게 넘어갔다. 그러나 나는그 후 선생님과 나와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성립된 것처럼 느꼈고 그건현저동을 공유한 데서 오는 연대감이었다.
조카가 생겼다. 오빠에게 아들이 생겨난 것이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그건 대단한 경사였다. 작은숙부는 친손자가 태어난 것 이상으로 좋아서어쩔 줄을 몰라했다. 올케 언니가 복덩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첫아들을낳았다고 해서만이 아니었다. 올케 언니가 들어온 후 줄창 집안을억누르던 그 전전긍긍한 불안감이 많이 가셨는데 그건 오빠가지하운동에서 손을 떼었기 때문이 아니라 올케가 엄마처럼 법석을 떨거나극성을 부리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 했기 때문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있었다.
올케는 오빠가 하는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한편 오빠가 잊고 지내는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일깨우기를 게을리하지않았다. 밥도 안 굶어 보고 쌀 중한 걸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노동으로 밥 벌어 본 경험도 없이 어떻게 노동자를 위할 줄 알겠느냐는소리도 힘 안 들이고 툭툭 잘 했다. 언니의 화법은 특이했다. 옆에서 듣는사람 속까지 시원하게 해 주면서도 오빠의 자존심을 긁는 신랄함이 없이다만 구수했다. 오빠가 언니를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어한 것도 아마이성간의 직감으로 그런 소질을 감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때가마침 오빠에게 얼마나 충고와 위안이 필요한 시기였던가도 알 것 같았다.
오빠는 조직으로부터 멀어졌을 뿐 아니라 보도연맹까지 든 눈치였다.
그리고 구파발 지나 고양군 신도면에 있는 고양중학교 국어 선생으로취직을 했다. 취직을 하기 위해 보도연맹에 들었는지 취직하고 나서들었는지 그 전후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심리적이었든 실제적이었든간에 그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었다고 생각된다.
마침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나서 일 년을 바라볼무렵이었다. 좌익을 탄압하는 정도가 아니라 근절을 신생 독립국가의 기본방침으로 삼고 있었다. 골수 공산주의자는 삼팔선을 넘어 월북을 하거나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오빠처럼 이상주의적인 얼치기빨갱이에겐 보도연맹이라는 퇴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오빠가 회유에의해서 거기 들게 되었는지 강압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자만아무튼 집안식구하고 의논하고 결정한 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안건 오빠의 술주정을 통해서였다.
비록 취중일망정 오빠는 전에 없이 유치하고 졸렬하게 굴었다. 엉엉소리내어 울면서 마치 엄마 때문에 좌익운동에서 발을 빼고 엄마 보란듯이 보도연맹에도 가입한 것처럼 모든 것을 엄마 탓으로 돌렸다. 엄마는이렇게 온갖 주접을 다 떨다 잠든 아들을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생전안 하던 술 처먹고 우는 버릇을 왜 했을꼬"라는 말밖에 안 했다. 아들이자는 머리맡도 지나가 본 적이 없는 엄마로서는 그 정도만 해도 큰 욕을한 셈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본인보다도 엄마가 더 전향의 후유증 같은걸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후에도 엄마는 두고두고 오빠 몰래 그 일을 심란해했다. 오빠가 하는일을 그만두게 하려고 집요하게 극성을 떨 때하고는 딴판으로 문득문득후회하는 기색이랄까 미련 같은 눈치까지 보인 적도 있었다. 자식의안전을 위해 법에서 금하는 불온한 사상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식이 위험을무릅쓰고 하는 일이니만치 뭔가 위대한 일이라고 믿고 싶은, 가장 우리엄마다운 이중성이었을까? 아니면 엄마도 임의로 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때문이었을까?
하여튼 엄마의 태도는 뜻밖이었다. 나는 이런 엄마를 보고 당시의유행어를 빌려 우리 엄마야말로 수박 빨갱이였다고 버릇없이 놀려 먹곤했지만 엄마는 꽤 오래도록 남몰래 외롭게 전향의 후유증을 앓았다. 그런엄마가 내가 보기에는 오빠가 하는 일을 쌍지팡이를 들고 말릴 때보다 더지겨웠다. 모성애도 이념투쟁의 영향을 받으면 이렇게 악몽이 되고 만다.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더러운 시대였다.
오빠가 취직한 중학교가 있는 시골은 지금은 전철도 통하는 서울시내가됐지만 40년대 말의 교통사정으로 매일 통근은 무리였다. 학교 근처에서하숙을 하면서 집에는 일 주일에 한 번 자전거로 토요일 오후에 왔다가월요일 새벽에 떠났다. 그때 그 학교는 농업학교가 아니었는데도 딸린논밭이 꽤 있어서 월급날이면 현금과 함께 한 달 양식으로 충분한 쌀을주었다. 월급날이면 오빠는 쌀자루를 자랑스럽게 자전거 꽁무니에 싣고왔다. 덤으로 감자나 고구마가 딸려 있을 적도 있었다. 생활비 중에서양식값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을 때라 살림이 단박 안정되기 시작했고,생활인으로 떳떳해진 오빠는 차츰 어두은 그림자를 씻고 평범한가장으로서의 관록이 붙어 갔다.
토요일날 귀가하면 오빠는 허둥대며 목욕탕 먼저 다녀왔다. 우리가올케를 맞으면서 이사 간 집은 신안탕이라는 목욕탕 바로 뒷집이었다.
그러나 목욕탕이 가까워서라기보다는 멀리 구파발서부터 서울 장안 먼지를다 뒤집어쓰고 온몸으로 아기를 안을 수 없다는, 유별난 자식사랑 때문에그렇게 목욕을 급하게 구는 거였다. 그러고는 헐렁하고 편한 옷으로갈아입고 아기하고 놀기 시작하고, 올케 언니는 부엌에서 지글지글 고소한기름냄새를 풍기며 음식을 만들었다. 오빠는 아기에게 깊이깊이 매혹당해정신이 없었고, 올케는 이런 부자의 모습에 황홀한 눈길을 보냈다. 나는그런 세 식구의 모습에 소외감 비슷한 걸 느꼈지만 심술이 날 정도는아니었다.
나 역시 오래간만에 돌아온 우리 집안의 평화가 기분 좋았다. 마치쾌적할 정도로 데워진 물에 몸이 반쯤 잠긴 것처럼 나른하게 퍼지는 듯한기쁨을 맛보곤 했다. 엄마만이 계속해서 좀 이상했다. 가장 다행스러워해야할 엄마가 그렇지 않았다. 아직도 무슨 발작처럼 오빠가 이미 청산한 것에대한 미련을 나타낼 적이 있었다. 오빠가 타 온 쌀을 뒤주에 부으면서도어두운 얼굴로 "목구멍이 포도청이지."하면서 한숨을 쉬곤 했다. 마치오빠에게 딸린 가족의 생계 걱정만 안 시켰어도 전향을 안 했을 걸 하고아쉬워 하는 투였다. 오빠의 술주정이 가시가 되어 계속 따끔거리는 걸까,아니면 해방 후 처음으로 맛보는 가족끼리의 평화와 자립이 너무도 대견해뭔가를 막연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엄마 스스로도 그걸 느끼는 듯가끔 나한테까지 오빠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야, 말이야 바른대로 말이지, 요새야말로 느이 오래비가 공산당질 바로하는 것 아니냐? 한 달 내낸 뼛골 빠지게 뇌동해서 처자식 밥 안 굶기면그게 공산당이지 더 어떻게 공산당질을 잘 하냐 잘 하길."
그럴 때 엄마는 나한테 말하는게 아니라 오빠의 전향을 지켜보고 있는어떤 음산한 시선을 향해 변명을 하고 있는게 아니가 싶게 열성스럽고조금은 비굴하게 굴었다. 엄마가 노농을 뇌동, 노동자를 뇌동자라고 부를때의 발음은 특이했다. 엄마는 흠잡을 나위 없이 고운 표준말을 쓰는분이었는데도 오빠가 좌익운동을 하고부터 그 발음만은 그렇게 귀에거슬리게 했으니까, 그건 말투라기보다도 의도적인 거였다. 그래서남로당을 말할 때도 꼭꼭 뇌동당이라고 '뇌' 소리에다 듣기 싫게 오금을박았다.
그러나 엄마가 오빠의 사상에 기를 쓰고 간섭한 것은 단지 그게위법이기 때문이었지 공산주의나 공산당에 대해서 뭘 알아서가 아니었던듯하다. 공산주의에 대한 엄마의 단순 소박한 지식은 오히려 상당히호의적이 거였다. 엄마가 오빠보다 더 전향에 대해  떳떳지 못해 한것도그런 섣부른 호의하고 무관하지 않았고, 그래서 엄마에겐 전향을 전적으로변절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엄마는 아들이 쫓겨다니는 위법자인것도 견딜 수가 없었지만 변절자라는 것은 더욱 꺼림칙했을 것이다.
엄마가 발작적으로 이사를 다닌 것도 어떡하든 변절자는 낙인만은 찍히지않고, 그쪽 조직과의 접선을 끊게 해 보려는 엄마 나름의 약은 꾀였을 뿐범법을 두려워하는 것만큼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변절 얘기가 나오니까 생각나는 게 있다. 그로부터 사십년이 지난근래의 일이지만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의 몇 년간을 다친 다리 때문에바깥 출입을 못하고 집 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셨지만절에도 못 다니고 텔레비전하고 독서가 유일한 낙이어서 우리 집에 와계실 동안은 책이 많은걸 좋아하셨다. 내가 카톨릭에 입교하고 나서는쉽게 풀이한 성경 이야기나 신앙에 도움이 될 만한 명상집 같은 것도 즐겨읽으셨다. 읽고 나서는 참 좋더라고 칭찬도 하고 머리맡에 두고되풀이해서 읽으시는 책도 있는지라 한번은 개종을 하시는 게 어떻겠냐고여쭤 본 적이 있다. 나뿐 아니라 손자 손부가 다 카톨릭 입교한지 오래고그때마다 한번도 반대하신 적이 없는 엄마였기 때문에 나의 이런 권고는되레 때 늦은 감이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의외로 안색에 단박 불쾌한 빛을 드러내면서 나를꾸짖으셨다. 자기가 삼십에 과부가 됐을망정 누구한테도 장차 일부종사를어찌할까 싶은 걱정이나 의심은 물론 동정도 받아 본적이 없거늘딸자식한테 별 해괴 망칙한 소리를 듣는다는 진노였다. 나는 개종과일부종사의 엉뚱한 비유 때문에 그만 웃음이 복받치고 말았지만, 곧 입을다물었고, 불현듯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옛날 일이 생각났다. 그 옛날 오빠가어렵게 획득한 오붓하고 화평한 가정의 단란에 음흉하게 잠복해 있다가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던 것도 바로 저런 자랑스럽고도유구한 정조관념의 뿌리였구나하고.
그러고 나서 다시는 엄마의 개종을 권할 엄둘르 낸 적이 없건만 엄마또한 그 후 다시는 내 앞에서 기독교 계통의 책을 보는 모습을 보이지않았다. 불교를 믿으면서 예수교 책에 흥미를 갖는게 자식한테 처신을잃는 짓이라고 생각하시는게 뻔했다. 참으로 지겨운 엄마였다, 그러나육친이란 싫어하는 면을 더 닮게 마련인가. 엄마가 자식한테일수록 처신을잃는 짓을 극도로 경계했듯이 나 또한 엄마한테 처신을 잃지 않으려고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 내가 엄마한테 가장 처신을 잃는 일이라고생각한 것은 낸가 쓴 책을 엄마가 읽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우리 집에 오시기 전에 제일 먼저 준비하는게 내책을 서가 제일 높은 층에다 책등이 안 보이도록 반대로 꽂아 놓는일이었다. 엄마 또한 내 서재에 들어와 이것저것 읽을 만 한 책을고르시며서 어쩌다 한 번 쯤은 "네가 책을 여러 권 썼다는데 다 어딨냐?"
라고 물을 법도 하건만 전혀 안 그러셨다. 그렇다고 엄마가 다른 경로를통해 내 책을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아주 없는 것도아니었건만, 나는 어머니 생전에 한번도 정식으로 내 책을 헌정한 적이없다. 노출증 환자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다 까발려 보일 수 잇는 내치부를 엄마에게만은 보이기 싫었다는 게 말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쓴 걸 어떡하든지 엄마 눈에 안 띄게 하려는 단속이 신문연재를 할때만은 여의치 않았다. 그럴 때는 서로 모르는 척하는 게 수였고,우리 모녀는 약속 없이도 그런 눈치는 잘 통했다. 한번은 동아일본가에연재가 끝나고 나서 어떤 잡지사에서 나하고 우리엄마하고 같이 인터뷰를하겠다고 졸랐다. 고사하다가 그 기자하고는 너무 박절하게 굴 수만도없는 사이여서 우선 엄마에게 양해를 구해 보라고 발뺌을 했다. 쉽지는않앗지만 허락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때 친정집은 화곡동이어서 내가기자하고 같이 화곡동으로 갔다.
엄마는 처음 당하는 인터뷰건만 썩 잘 받아넘기셔서 나는 속으로 연간자랑스럽지가 않았다. 인터뷰 마무리 단계에서 기자가 따님이 쓰는 신문연재소설을 혹시 읽으셨냐는 질문을 했다. '우리도 그 신문을 보니까요."
엄마는 즉시 도도하게 표정을 가다듬으면서 결코 소설 때문에 그 신문을본 건 아니라는 것부터 강조했다. 나는 역시 엄마답다고 속으로 쓴웃음을지었다. 기자는 그 소설을 읽는 소감을 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심장이죄여들었다. 비평가한테 무슨 소리를 들어도 그다지 기분이 좋아질 줄도나빠질 줄도 모르는 심장을 타고난 내가 말이다. 다음 엄마 입에서 떨어진소리는 싸늘하고도 간략했다.
"원 그것도 소설이라고 썼는지."
나의 죄여들었던 심장이 퍼지면서 얼굴이 모닥불을 담아부은 것처럼달아올랐다. 그 후에도 엄마의 그 차가운 평은 문득문득 나에게 상처가되었다. 그러 때마다 나는 결코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만은 삼가리라고다짐하는 것으로 엄마에 대한 앙심을 달랬다.
한참 옆길로 샜던 얘기를 다시 돈암동, 목욕탕 뒷골목집에서 살던시절로 되돌려야겠다.  내가 보기에는 엄마가 가끔 보이는 신경불안증세는 터무니없는 거였다. 불안해할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빠는 비로소 제곬을 찾은 거였다 오빠에게도 현저동 시절이 깊은 인상을 남겼으리라는 건이해가 되었다. 오빠는 현저동 출신이라는 티를 내고 싶어했고 그들에게진 빚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싶어했다. 그들 편에 서야겠다는 순진한정의감 때문에 쉽사리 공산주의 사상에 공감할 수 있었겠지만 행동을하기엔 너무도 허약하고 사치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오빠는 현저동사람들이 콩깻묵도 실컷 못먹고 죽을 쑤어 먹을 때 동생의 입학축하로양식을 사 먹이려 들었고, 폐를 앓는 애인을 특실에 입원시켰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자기 자식에게 어찌 안정을 주고 싶지않았겠는가. 그가 몸담았던 조직에서 소시민 근성이라고 매도하는안정일망정. 나는 이렇게 엄마뿐 아니라 오빠의 심정의 변화까지도 손금보듯이 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꼈다. 세상 경험은 없이 한참건방지기만 할 나이였다. 오빠가 전향을 하고 우리 집안의 평화가 돌아온것은 내가 중학교 6학년 때 지금으로치면 고3때였으니까.
1950년, 나는 열아홉 살에서 스무살이 되었고, 황금 같은 고3시절은그해에 한해서 9개월밖에 안 됐다. 3월 말에 학년을 끝내고 4월에 학기초이던 일제시대의 학제가 해방이 된 8월을 기준으로 구미의 제도처럼8월에 학년을 끝내고 9월에 새 학기를 시작하도록 바꾼 것이 49년까지통용됐었다. 그걸 원래대로 3월 학기 말로 환원시키지 위한 과도조치로50년도에는 학기를 3개월 단축해서 5월로 하기로 했는데 그때 마침졸업반이어서 5월 졸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아마 우리 나라에 신식교육제도가 들어오고 유일한 경우였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행운이었던가는 엄동설한에 들어 있는 입시와, 꼭 을씨년스러운 늦추위가끼는 요즈음 입학과 졸업을 볼 때마다 느끼곤 한다.
그해 5월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때는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아무꽃이나 피어난 시대가 아니었다. 오직 5월만이 잎도 꽃처럼 피어날 때였고,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계절이었다. 교정에 꽃내음이 그득했고벌들이 윙윙댔다. 나는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합친 도합 12년간의 교육기간중 처음으로 우등상이라는걸 받으면서 졸업을 했다. 엄마는 물론 오빠,올케, 숙부, 숙모가 다 졸업식에 참석해 축하를 해 주었고 나는 속으로기고만장했다.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거뜬히 합격한 뒤였다. 지금의인문대와 자연대를 합쳐서 그때는 문리대라고 했는데 실용적인 것을선호하는 풍조는 전쟁 후에 생겨났고, 그때까지만 해도 일제잔재랄까,순수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승할 때라 문리대는 '대학의 대학'이 라고자처하며 기고만장할 때였다.
힘 안 들이고 합격을 하고 보니 머리가 붕 뜨는것처럼 교만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여학교에선 대학에 자원하는 비율이 높지않아서였는지 입시를 위한 수업이라는 게 따로 없었다. 모의고사를 두어번 본 것 빼고는 각자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가 알아서 한수험공부는 종로서관 집 딸이 김종숙한테 예상문제집을 빌려 본 것이전부였다. 꽤 두꺼운 문제집이었는데 아마 지질이 형편없는 갱지여서 더욱부피가 나갔을 것이다. 나말고도 뒤에 기다리는 아이가 있어서 사나흘집중적으로 보았다, 마치 소설책 돌리듯이 돌리고 난 책을 그 후에 다시책방에 갖다 팔았는지 어쨌는지 그 뒷일까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마음씨좋은 친구 덕으로 그 책을 한 권 떼고 나니까 배운 것이 정리가 된기분이었다. 그때 우리집 형편이 그런 책이 필요하다면 못 사 줄 형편은아니었는데도 안 사 달란 것은 시험공부 안하는 것처럼 굴다가 쓰윽합격해 보이겠다는 유치한 허영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학시험은 4월 말경이었는데, 그때가 또한 문리대 근처가 가장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지금은 마로니에 공원으로 변하고 개천도복개되었지만 그때는 동숭동 초입부터 이화동까지 길게 대학천이 흐르고대학천을 향해 개나리가 눈부시게 늘어져 있고 마당에선 벚꽃이 어지럽게흩날리고, 마로니에가 움트고 있었다. 전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일 시절이라입학원서 낼때나 시험 칠 때나 문리대 정문을 빠져나오면 곧장 길을 건너의대 정문을 지나 대학병원 정문으로 해서 원남동으로 나가 전차를 탔다.
의대와 대학병원이 연결된 길이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스무 살에 꿀수 있는 온갖 황홀한 꿈 때문에 그 길이 그렇게 좋았던지,그 길의 나무와 꽃과 풀과 훈풍이 그렇게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는지, 그길은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매혹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렇다. 그 계절에 나를 매혹시킨 것은 자유에의 예감이었다. 중학생에서대학생이 된다는 것도 온갖 금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지만 나는엄마로부터의 자유까지를 이미 예비해 놓고 있었다. 시집이나 가면 또모를까, 처녀시절에 엄마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꿈이나 꿔 봤을까.
아니 꿈도 안 꿔 봤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건 내 꿈 속의 꿈, 가장 내밀한욕망이었다. 그것이 현실이 되어 바로 목전에 예비돼 있었다. 그 엄청난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가, 악용, 선용, 남용, 절제 아무거나 다매혹적이었다, 앞으로는 모든 것을 그것과 더불어 공모하리라. 그꿈이야말로 장미와 라일락과 모란을 피게 하는 5월의 햇빛보다 더찬란했다.  엄마로부터 놓여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 날 갑자기 왔다.
50년 봄, 언제나처럼 시골 학교에서 주말에 자전거로 돌아온 오빠가 좀긴장되게 피곤해했다. 그때 올케는 두 번째 아이가 생겼는지 입덧이한창이었다. 연년생을 낳을 모양이었다. 아무리 손이 귀한 집안이라 해도돌 안에 들어서 아우는 엄마에게도 아기에게도 다 같이 못 할 노릇이었다.
가장이 시골 학교 선생이 됐다고 온 식구가 마음을 합해 행복해하던 때가엊그저께건만 벌써 식구가 느는 것 외엔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따분한 생활에 지친 기미를 우리는 서로 감추지 못했다. 그날 저녁상을받고 나서 오빠가 지나가는 말처럼 운을 떼었다.
"학교 사택이 한 채 날 것 같아요. 우리 집 보다 널찍하고 텃밭까지딸려 있어서 소일거리도 될 것 같긴 한데."
그러면서 흐린 말끝을 엄마가 잽싸게 낚아챘다.
"우리가 들고 싶으면 들 수도 있단 말이지? 그 사택인지 관사에."
옆에서 나는 오빠가 사택이라고 말한 걸 관사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엄마때문에 웃음이 났지만 현실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은요. 곧 비는데 신청자가 없으니까요. 교장이 오늘 저에게 의향을물어 보길래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잊어버리세요."
"가자, 우리."
"예?"
너무도 간단하고 단호한 결정에 식구들이다들 숟갈질을 멈추고 엄마의입만 쳐다보았다.
"하숙밥을 삼년만 먹으면 뼛속이 다 빈다더니 삼 년은커녕 반 년만에벌써 애비꼴이 못쓰게 돼 은근히 애가 닳던 참이다. 에미도 그렇지, 젊은내외가 그게 할 노릇이냐."
"그렇지만 어머니, 쟤는 어떡하구요?"
오빠가 나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대학교만 붙고 나면 작은집에서 다니도록 하지 뭐. 서로 좋아할 걸아마."
엄마가 숙부네하고 의논도 하기 전에 서로 좋아할 거라고 단정을 할만큼 작은숙부, 숙모는 나를 친딸처럼 사랑했고 나역시 그들을 따랐다.
아들이고 딸이고 낳아 본 적도 없는 작은숙부는 한때 시골 형님의 딸을데려다 길러 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큰숙부는 일남 삼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 년 남짓 갖은 정성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엄마와 시골을못 잊어해 결국은 돌려 보내야만 했다. 그때의 상심을 바로 이웃에서지켜보았는지라 나라도 잘 해 드리려고 애썼고, 그분들 역시 너 밖에없다는 식으로 나에게 정성을 쏟았었다. 그러나 장차 작은집에서 학교를다니게 될 지도 모른다는걸 알았을때 속으로 뛸둣이 기뻤던 것은 숙질간의그런 유별난 관계하곤 무관했다. 엄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대해서만 생각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숙부네는 내 방까지 있었다. 한때 우리 식구가 다 들어가 살때도 나한테따로 독방을 주었었는데 우리집에선 아직도 엄마하고 한방을 쓰고 있었다.
남아도는 방이 있는데도 장작값을 아끼느라 비워 놓았고 여름에라도 그방을 혼자 쓰고 싶었지만 엄마가 섭섭해할 것 같아 먼저 말을 못 꺼냈다.
같은 이유로 내가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걸 얼마나 기뻐하고있다는 걸 엄마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매우 조심조심했다. 그러니까아무리 잘 해줘도 작은집을 내 가족으로 여기진 않았었나 보다. 대학합격과 자유는 내가 쥔 양손의 떡이었지만 결코 하나만 먹을 수는 없도록돼있었다. 차선이라고는 없는 선택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시험 날짜까지아슬아슬하게 긴장을 유지 할 수가 있었다. 엄마는 그말이 나자마자우리가 이사 갈 집을 가 보고 싶어했다. 그날도 나도 엄마하고 동행을했는데 전차로 영천 종점까지 가서 거기서 구파발까지 가는 시외버스를탔다.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동안도 오래 걸렸거니와 구파발에서고양중학까지 걸어 들어가는 거리도 만만치가 않았다. 봄 가뭄이 계속되고있어 황톳길은 풀썩풀썩 먼지가 심하게 났다. 나는 단박 촌스럽게 변한 내검정 운동화를 내려다보면서 오빠에게 형헌할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 그집은 이미 비어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신병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된선생님의 세간만 일부 남아 있을 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썩 좋은인상은 아니었는데도 엄마는 집은 보는 둥 마는 둥 먼저 텃밭으로들어갔다.
한참이나 밭고랑에 쭈구리고 앉았기에 나는 엄마가 거기서 오줌을 누는줄 알고 일부러 딴데를 보았다. 한참 있다가 돌아다보았더니 어린애처럼흙을 주무르고 있었다. 나하고 시선이 마주치자 감자꽃처럼 초라하고계면쩍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난 하루라도 빨리 여기 살고 싶구나. 땅이어쩌면 이렇게 거냐? 세상에 이좋은 땅을 이대로 놀리다니." 햇볕이졸리도록 따스운 봄날이었다.
딴 밭에서는 푸성귀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이는데 그 밭만은 놀고있었다. 나는 주말마다 그 밭에다 고추, 상추, 오이, 호박, 참깨, 들깨, 온갖푸성귀를 심고 그 너울대는 초록의 한가운데서 김을 매고 있을 엄마를향해 손을 번쩍 들고 달음박질해 귀가할 내 장차의 모습을 상상하고가슴이 울렁거렸다. 텃밭이 거기 있음으로써 그건 귀가가 아니라 귀향이될 터였다. 다시 귀향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은 자유의 예감못지않게 감동스러웠다. 새로운 고향은 앞으로 내가 누리게 될 자유와기막힌 균형이 될 수 있으리라.
마침 그 무렵 우리는 박적골 고향을 잃으려 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나서 집을 겉돌기 시작한 큰숙부는 그후에도 박적골이 영 뜨악한지 개성시내에 있는 소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 집안 형편이 눈에 띄게 기울고있었다. 게다가 아이들 교육문제도 있고 해서 오빠와 작은 숙부는 이참에고향을 뜨게 해서 서울서 새출발을 시키도록 뜻을 모아 이미 구체적인데까지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엄마는 돈암동 집을 복덕방에 전세로내놓았다. 그리고 분주하게 이사 준비를 했다. 오빠는 여름 방학에 하고싶어했으나 엄마는 여름엔 밭에서 따 온 상추쌈으로 점심을 먹지 않으면큰일날 것처럼 서둘러댔다. 꼭 무엇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이사만 한다면무슨 발작처럼 생기가 나는 것도 여전했다.
"엄마는 이사가 취민가봐." 이젠 쫓길 것도 없건만 안정된 지 일 년남짓해서 다시 이삿짐을 싸고 싶어하는 엄마를 나는 이렇게 빈정댔다.
오로지 이사에만 정신이 팔려서 나를 작은집에 떼어놓게 된것에 대해선조금도 신경을 안 쓰는 엄마가 다소 야속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엄마는 스르르 풀이 죽으면서 아득한 표정으로"자고로 죽을 수에 이사한단다."
하고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아직도 쫓기고 있었다. 엄마는좌익조직으로부터 헛되게 도망을 다녔듯이 이번에 전향한 후환으로부터의도피를 시도 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전전긍긍하는 것을 전혀 터무니없는 일종의 신경불안 증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 이사야말로 가장성공적인 치료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새롭게 전개될생활에 대한 예감에 충만한 특별히 아름다운 5월이었다. 그러나 하필1950년의 5월이었다. 남달리 명철한 엄마도 환멸을 예비하지 않고 마냥마음을 부풀린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해 6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12 찬란한 예감
5월이 학년 말이었으나 당연히 6월 초에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문리대는 그해에는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중순경에 입학식을 했다. 자연히강의도 며칠 못 듣고 25일이 되었다. 집은 그 동안에 전세를 들 만한마땅한 사람이 생겨서 계약도 중도금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작은집의내방도 도배를 새로 했고, 학교 사택도 언제든지 이사할 수 있도록 대강의수리와 도배를 끝마치고 엄마가 받아 놓은 손 없는 날만 기다리는중이었다. 언제나처럼 주말에 돌아온 오빠와 나는 서로 나눠 가질 책을분류했다.
인민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듣긴 했지만전에도 38선 충돌이 잦았고 그때마다 국군이 잘 물리쳐왔기 때문에 그저그런가 보다 했다. 설사 전하고는 다른 전면전이 된다고 해도 우리가시골로 들어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겪은 지 얼마 안되는 이차대전의 경험에 미루어 다분히 이기적인생각이었지만, 전쟁이 날수록 시골로 가길 참 잘 했다고 야비다리를피우면서 살 수 있을지언정 후회할 까닭이 없었다. 그때까지 이승만정부가 장담해 온, 만약 전쟁이 나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점심은평양에서 저녁은 압록강에서 먹으리라는 선전을 그대로 믿은 건 아니라해도 세뇌 효과는 무시 못 했다. 최악의 경우라해도 다만 몇 발자국이라도38선 이북에서 밀었다 당겼다 하는 장기전이 되려니 했다.
다음 날 오빠는 새벽같이 학교로 출근했고, 나는 동숭동 문리대로등교했다. 등교하면서 가로수를 꺾어서 철모와 군용차를 시퍼렇게위장하고 미아리고개 쪽으로 이동하는 국군을 보고 비로소 섬뜩한 전쟁의현장감을 느꼈으나 남들이 하는 대로 씩씩하게 박수도 치고 만세도불렀다. 오전 강의가 끝나고 누군가가 양주동 선생님 강의를 도강하러가자고 했다. 도강이란 말도 대학생이 된 기분을 쾌적하게 자극했지만,유명한 학자의 실물을 본다는 건 더욱 신나는 일이있다. 도강은아니었지만 입학하고 얼마 안 있다 들은 가람 이병기 선생님의강의시간에도 그렇게 설랬었는데 역시 유명한 분을 적접 뵙는다 게자랑스러웠을 뿐 그분의 학문이나 업적에 대해 뭘 좀 알고 있는 건아니었다.
고명한 학자나 명사가 지금처럼 대중 앞에 모습이나 목소리를 드러낼기회가 없는 문자 그대로 상아탑에 갇혀 있을 때였다. 그러니 그분들을구경한다는 것만으로도 가히 도취할 만한 대학생의 특권이었다, 그때도양주동 선생님의 인기는 대단해서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맨뒤에 끼어 서서 해학과 유식을 폭포수처럼 토해 내며 강단을 자유자재로누비는 선생님의 강의에 황홀한 눈길을 보냈는데, 간간이 강의실 유리창이들들들 울릴만큼 포소리가 가까워질 적이 있었다. 작달막하지만 몸매가다부진 그분이 그 소리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강의를 계속하는 게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학길은 아침과 좀 달랐다. 여전히 미아리고개 쪽으로 군대가이동하는 걸 볼 수 있었지만 용감해 보이기보다는 비장해 보였고 환송하는시민의 태도 또한 불안하고 어설퍼 보였다. 그날 밤새도록 엄마가구시렁대면서 이럴 때는 식구가 같이 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소리를 하고또 했다. 나도 오빠가 걱정되긴 마찬가지여서 더욱 엄마가 그러는게 듣기싫었고, 진작 독방을 갖지 못한게 짜증스러웠다.
다음 날 아침에는 포소리가 미아리고개 너머에서 쏘는 것처럼 가까이들렸다. 그러나 긴급 뉴스는 국군이 인민군을 거의 다 섬멸한 것처럼말하면서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기를 당부했다. 그러면 그렇지하고 학교로 향했다. 미아리고개로 뻗은 돈암동 전찻길로 달구지에가재도구를 실은 피난민이 꾸역꾸역 넘어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들에게시민들이 뭔가를 물러보는 걸 순경이 말리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그래도이사람 저사람의 입을 통해 그들이 의정부에서 피난 오는 길이라는 걸 알수가 있었다. 피난민을 눈으로 보고서야 덜컥 겁이 났지만, 설마 순수한양민은 아니겠지, 아만 지레 겁을 먹은 악덕지주나 좌익탄압에 앞장섰던경찰 가족쯤 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꿈에도 인민군이쳐들어오는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나의 그런 견해는 다분히 좌경사상에서영향받은 바가 없지 않았다.  학교에서의 강의 없이 여학생에겐 귀가조치가 취해졌고, 남학생들은 따로 학도호국단 명의로 북진통일을다짐하는 궐기대회를 여는 것 같았다. 나는 호국단 간부들이 목청껏결의문을 읽고 구호를 선창하는 걸 옆에서 잠시 지켜보았지만 거의 위로가되지 못했다.
귀가길은 시시각각으로 촉박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고, 간단없는포소리에 행인들은 무작정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빠일이갑자기 걱정되어 집을 향해 뛰었다. 그 동안 오빠가 돌아와 있기를 간절히바랐으나 엄마가 문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걸 보니 아직 소식이 없는 것같았다. 엄마는 나를 보자 "어서 피난을 가얄 텐데."라고 혼잣말을중얼거렸다. 절박하다 못해 멍해진 엄마의 시선이 기분 나빴다. 부엌에선올케가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칭얼대는 데도 모르는 척하고 임신한 지여덟 달이 꽉 찬 올케가 어깨로 숨을 쉬면서 커다란 나무주걱으로누룻누룻해진 쌀을 하염없이 젓고 있는걸 보자 나를 벌컥 화가 났다.
"언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예요?"
"보면 몰라요? 미숫가루 만들고 있잖아요."
언니는 나보다 더 화가 난 목소리로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마루끝에한눈에 엄마의 솜씨라는 걸 알게 하는 광목배낭이 불룩하게 나자빠져있었다. 엄마가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노릇이라는게 뻔하건만 나는 올케의손에서 나무주걱을 빼앗으며 물었다.
"그몸으로 피난을 갈 작정이유?" "어떡해요? 내쫓으시면 가는 척이라도해야죠. 그나저나 오빠가 와야지 내쫓기든지 말든지 하죠,"
엄청난 굉음이 들리고 이어서 산봉우리가 하나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여운에 집의 분합문 유리가 들들들 오래도록 공명했다. 엄마가 대문간에서뛰어들어오면서 어서 미숫가루를 담으라고 자루를 벌렸다.
"아직 빻지도 않았잖아요?"
"빻을 새가 어딨냐? 한 움큼씩 집어 먹으려면 안 빻는게 나아."
엄마가 우리가 성의 없이 볶아 갈색으로 탄 쌀을 야단도 치지 않고급하게 자루에다 처넣기에 오빠가 저만치 오는 걸 보고 뛰어들어온 줄알았다. 올케도 곧 내쫓길 줄 알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오빠만 피난시키자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게 뭐 그렇게 급하냐? 느이 오래비도 안 왔는데."
엄마도 얼떨결에 부린 자신의 경망이 어처구니없는지 낭패스럽게 웃으며다시 대문간으로 나갔다. 그날 밤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숙부네가게에는 전화가 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물론 숙부네 쪽에서도온종일 학교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밤늦게 숙부네가 우리 집으로피난을 왔다. 미아리고개로 통하는 대로변보다는 아늑한 주택가가안전하게 느껴진 까닭도 있고, 여럿이 뭉쳐 있으면 서로 의지가 돼 덜무서울 듯싶어서였다.
그러나 큰집 작은집까지 뭉쳐 있을수록 오빠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느껴졌다. 포탄이 서울 하늘을 가르고 있다는 걸 느끼고부터 우리는 방속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을 못 했다. 대포나 폭탄 파편이 솜은 잘못 뚫는다는 일제 말기에 얻어들은 어설픈 지식 때문에 땀을 흘리면서도그러고 있는 거였다. 숙부는 솜이불 속에서도 열심히 라디오를 들었다.
그리고 위로가 될만한 뉴스가 나오면 즉시 우리에게 전해 주곤 했다.
그 밤을 견디는 태도가 삼촌하고 엄마하고 그렇게 대조적일수가 없었다.
엄마는 우리가 무슨 소리를 해도 솜이불을 뒤집어쓰지도 않았고 방에도들어오지 않았다. 안마당과 대문 밖을 서성이면서 꼬박 밖에서 그 밤을보냈다. 바깥 동정을 살피는 것도 이젠 오빠를 기다려서가 아니라지나가는 사람이나 동네 사람들의 동정에서 뭔가를 알아 내려는 것같았다. 허둥지둥 피난 나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더니 지금은 좀뜸해졌다든가, 가면 어디로 갈거냐고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사람도있더라는 얘기를 방안에 있는 식구들에게 전해 주었다. 바깥에 인적이아주 끊기고부터는 마루 끝에 꼼짝 않고 앉아서 포탄이 쌔앵 공기를가르는 소리와 명중해서 폭발하는 소리를 가지고 마치 전문가처럼자신있게 전선의 위치를 짐작하기도 했다. 엄마도 숙부처럼 자신의 추측을우리에게 보고해서 동의를 구하려 했고 엄마의 보고와 숙부의 보고는번번이 상반됐다.
우리는 두 사람이 말하는 전황을 다 믿지 못했고 위로 받지도 못했다.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싸움구경처럼 황당할 뿐이었다. 낮엔 그렇게허둥대던 엄마가 너무 침착하게 담대하게 구는 것도 어쩐지 보기가싫었다. 새벽녘에 전쟁의 소음이 한결 가라앉자 숙부는 이제 좀 마음이놓인다는 듯이 우리더러 한숨자자며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대통령이 수도 서울은 꼬옥 사수한다고 국민한테철썩같이 약속을 했으니까."
이러면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숙부를 엄마는 딱하다는 듯이바라보면서 말했다.
"서방님도 참, 늙은이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날이 밝자 숙부와 숙모는 오늘은 상점을 열 수 있을 것도 같다며 집으로떠났다. 우리도 다들 밖이 조용해진 걸 전쟁이 진정된 것과 같이 생각했기때문에 붙들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헐레벌떡 되돌아온 숙부는몹시 얼뜬 목소리로 밤사이에 세상이 바뀐걸 알려주었다. 엄마의 안색이하얗게 변했다. "어쩔꼬, 이를어쩔꼬," 헛소리처럼 탄식하는 엄마의 손을잡으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숙부는 그런 엄마가 잘 이해가 안되는모양이었다. 싱글대며 농담을 다 했다.
"아 형수님이야 무슨 걱정이유. 툭하면 겁 없이 이승만박사 욕도 잘하시더니만 잘 됐지 뭐 그래요."
그리고 우리한테도 빨리 나가 보라고 했다. 길가에 인민군을 환영하는인파가 적지 않다고 했다. 엄마가 굳은 표정으로 못 나가게 했다. 대통령이남기 목소리를 곧이 곧대로 믿던 숙부는 이미 바람 부는 대로 살 각오가돼있는 반면 같은 대통령을 그렇게 못마땅해하던 엄마는 되레 새 세상에심함 낯가림을 하고 있었다. 오빠 때문에 그러는 줄은 알지만 좀 지나친것 같았다. 전향한 게 투쟁경력에 흠이 되긴 하겠지만 설마 정상을참작해주겠지 하는 치사한 생각을 난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정말로 더럽고 치사했다. 나는 바뀐 세상에 대해 숙부처럼바람 부는 대로 살지, 정도가 아니라 좀더 적극적이고 희망적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빠의 투쟁경력과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나의 일시적인동조를 상기함으로써 더욱 생생하졌다. 나는 오빠의 투쟁능력에 대해서만생각했다. 그리고 엄마가 두려워하는 것은 전향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전향에서 또 한 번 전향하게될지도 모르는 사태였다.
엄마는 혼자 나가서 세상이 바뀐 걸  확인하고 들어와서는 숫제안암천이 흐르는 개천가 큰길까지 나가 오빠를 기다렸다. 개천가에선성북경찰서 뒤뜰이 곧바로 바라보였다. 인민군이 경찰서를 접수하고 벌써반동을 잡아들이는 것 같다고 엄마가 치를 떨며 말했다. 오빠를 눈이빠지게 기다리다 들어온 엄마는 눈에 정기가 하나도 없이 흐릿하게 풀려보였다. 오빠에겐 그런일이 일어나지는 않을테니 걱정 말라고, 오빠는인제부터 뜻을 펴고 살수 있을 거라고 나는 엄마를 위로했다. 그건 나의희망사항이기도 했다.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냐?"
엄마는 딸을 노골적으로 능멸하는 투로 말했다. 또 그놈의 정조관념인가. 정말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엄마였다. 하늘의 해와 달처럼명명백백하고도 오직 두 개밖에 없는 이데올로기말고 따로 신봉할게 있는엄마가 우스꽝스러워보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다 나타난 오빠보다 더우스꽝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아마 오빠를 바뀐 세상으로부터감쪽같이 감춰둘 요량으로 그렇게 기다렸을 것이다. 아예 집엔 들이지않고 숙부네나 외가로 빼돌릴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필 오빠가기다리다 지친 엄마가 자시 집에 들어온 사이에 돌아왔다. 그건 마치분꽃이나 나팔꽃 봉오리가, 지키고 있던 어린이가 잠시 한눈을 팔고 있는사이에 피는 것처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오빠는 일생일대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귀가했다. 설사엄마의 계획대로 지키고 있던 길목에서 만났다고 해도 사태는 조금도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빠는 거의 한 트럭분은 됨직한 죄수들을거느리고 들어왔다. 죄수라고 했지만 머리를 빡빡깎고 죄수복을 입고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그들의 표정은 훈장을 주렁주렁 단개선장군보다 더 당당하게 위엄과 영광에 넘치고 있었다. 그들에 비해평상복을 입은 오빠가 되레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이해못하는 사람처럼 멍하니 무표정했다. 그들 중 하나가 댓돌 아래서 역시표정이 바랜 채 우두망찰하고 서 있는 엄마를 사뿐히 안아올려 좌정을시키고 큰절을 하자 모두 따라했다. 엄마도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 그의손을잡고 그간의 고생을 위로했지만 한번 바랜 핏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한테 먼저 큰 절을 올린 이는 우리가 삼선교 집에서 살 때 문간방에세들어 살다가 바로 우리 집에서 잡혀간 바로 그 사내였다. 오빠도 그때는조직생활을 할 때였기 때문에 비록 횡적인 관련은 없지만 그의 정체를간파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체포된 후 남은 가족에게 우리가 그다지야박하게 굴질 않은걸, 아내한테 듣고 옥중에서도 늘 감사하고 있었다고한다.
28일 아침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대는 제일 먼저 갇힌 사상범들을해방시켰고, 갈아입을 옷도 없었겠지만 있다고 해도 안 갈아입을 만큼죄수복 자체가 혁명투사의 자랑스러운 표지가 된 그들은 그대로 트럭에올라타 시내를 누비며 군중의 환호에 답하는 일반 군중의 열광을 유도했을 것이다. 오빠의 학교가 있는 시골에선 비교적 조용하게 세상이바뀌었다고 한다. 포소리도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아 설마 했었는데아침에 면소와 주재소에 인공기가 게양된걸 누가 일러 주면서 서울서는 큰전투가 벌어졌다고 해서 부랴부랴 서울로 오다가 그 트럭을 만난 거였다.
일러준 사람이 친절하게도 오빠에게 붉은 리본을 단 밀짚모자도씌워주고 자전거에도 붉은 헝겊을 매달아 줘서 오빠는 그게 계면쩍어도중에 떼었다 붙었다 했더니 그의 소심함을 짐작할만 했다. 그렇게이쪽에도 저쪽에도 자신이 없는 오빠니만치 혁명투사들이 탄 트럭을보고도 못 본척도 못하고 열광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트럭이 오빠 곁으로 바싹 다가오는 것 같아 비실비실 피하려는데 누가손을 내밀더라고 했다. 트럭에 탄 사람과 행인들과의 열렬한 악수와포옹을 이미 무수히 목격한 오빠가 수줍게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순간오빠는 "이럴수가, 동지를 이렇게 만날수가." 하는 감격스러운 소리와 함께붕떠서 트럭위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내자전거'하고 아끼던 자전거 한번불러 볼 새가 없었다. 그리고 한나절을 지칠줄 모르는 흥분의 도가니 속에쌀의 뉘처럼 어설프게 끼어 있다가 마지못해 그들을 달고 귀가한것이었다.
곧 우리 집 좁다란 마루가 그 트럭위가 되었다. 엄마하고 올케하고 나는부엌에서 밥을 짓고 찌개도 끓이고 지짐질도 했다. 동네 반찬가게에서두부는 목판째, 술은 짝으로 들여왔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지치지도 않고인민가요를 불러댔다. 조그만 집이 떠나갈 듯했다. 지붕에서 기왓장이 다들썩들썩하는 것 같았다. 활짝 열어제친 대문 밖에는 동네 사람들이몰려들어 큰구경거리가 난 것처럼 안을 기웃댔다. 얼이 반 넘게 빠진엄마는 다리를 후들대며 실수를 연발했다. 접시를 깨트리고 소금과 설탕을구별 못 했다. 가끔 이마를 짚으면서 "이게 무슨 징졸꼬?" 라고 뇌 까렸다.
그렇다. 그들은 엄마에게 죄수도 아니고 혁명투사사도 아니고 다만징조였다.
그런 와중에도 엄마는 올케나 나에게 될 수 잇는 대로 음식 시중을 안시키고 손수 하려 들었다. 그들에게 음식을 나를 때마다 "세상에 집에서얼마나 기다릴텐데..." 하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던지 다들 그 날 밤 늦게 뿔뿔이 헤어졌다.
다음날  우리 집에 전세들기로 한 사람이 계약금과 중도금을 찾으러왔다. 우리도 하룻밤 새에 그 계약이 무효가 됐다는데 이의가 없었으므로선뜻 내주었다. 엄마는 다락에 올라가 한참을 어딘지 쑤석거리고 나서 그돈을 가지고 내려 왔다. 그러고는 "쓰고 싶은데가 참 많았는데 조금이라도헐어 썼더라면 무슨 망신일꼬." 하면서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나는 불현듯 텃밭 사이에서 감자꽃처럼 웃던 엄마 생각이 나면서 가슴이깊이 아렸다. 최근의 일이라기보다는 진행중이던 일이었건만 중턱이잘리고 나니 먼먼 옛날 일 같았다. 이땅에 당장 지상 낙원이 온다해도우리 엄마가 꾼, 아기자기한 백 평 텃밭의 꿈과 바꾸지 않다는 반혁명적인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끝전까지 받으면 그 모갯돈을 숙부네 장사에투자해 이자를 받고, 텃밭을 가꾸어 푸성귀는 안 사 먹고, 그래서 우리가자꾸자꾸 부자가 될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수의를 입은 혁명가들이 우리 집에서 대대적인 축제를 벌이고 난 후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거물급을 미처 모르고지낸걸 송구스러워하는 것처럼 굽실대며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가 걱정한 것보다 일일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바늘 방석에 앉은것처럼 불안하긴 차라리 걱정하던 일이 일어난 것보다 더했다. 물론속사정까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는건 아니었다. 하나 둘 오빠의 옛동지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오빠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접한 그들은 당에속죄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은근히 비난도 하고 회유도 했다. 그럴때마다 오빠는 몸담고 있던 학교로 돌아가 진짜 노동자 농민의 아들들을혁명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자가가 할 수 있는 당을 위하는 일일 짓같다고 발뺌을 했다.
그 한 트럭의 징조들 때문에 용의주도하게 세운 계획을 실천할 기회를놓치고 난 엄마는 실의에 빠져 그저 하루하루를 살얼음 밟듯이 조심조심지냈다. 엄마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거물 취급하려는 동네 사람들 때문에늘 전전긍긍했다. 한 골목 안에서 대문 열어놓고 서로 무관하게 드나들던사이였다. 특히 손자를 본 노인네들은 골목안 장맛을 집집마다 분별하 수있을 만큼 마실이 잦았다. 업힌 아기는 어디든지 가야만 아 보채는 건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내집 새끼나 남의 집 새끼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흉허물 없이지내던 이웃하고 식량 걱정도 같이 할 수 없다는 건 못할노릇이었다. 그들이 죽 먹을 때 우리도 죽 먹고 그들이 뒤주 밑을긁을때도 우리도 그런다는걸 그들은 믿어 주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어우러져 뚝섬으로 열무를 사러 갈 때도 우리는 쏙 빼놨다.
재앙은 우리집에만 그치지 않았다 장사꾼에겐 안정된 사회보다뒤숭숭하거나 헤까닥 잘 바뀌는 사회가 더 유리하다는 숙부의 생각이이번엔 들어맞지 않았다. 상점은 곧 문을 닫았다. 전찻길로 면한 쪽이넓어서 반은 세를 주었었는데 그집도 마찬가지였다. 텅빈 상점 안이빈창고처럼 보였던지 우마차에다 무슨 장비인지 가득 실은 한 떼의인민군들이 거기다 말을 매놓고 싶어했다. 어느 영이라 거스르겠는가.
숙모 말에 의하면 인민군 중에서도 높은 보위군관들이라고 했다. 그들은말만 했을 뿐 아니라 숙식을 다 숙부네서 해결하려 들었다. 숙모가 인민군잡데기가 된 것이다. 처음ㅇ[는 이게 웬 재앙인가 싶었지만 식량난이혹심해지면서부터 두식구 밥 걱정은 안하게 된걸 다행스럽게 여기게되었다. 밥뿐 아니라 반찬 걱정도 안 했다. 소를 통째로 잡아다가 각을떠서 딴 부대하고 나누긴 했지만 한 이틀 약비나게 고기로만 배를 불린적도 있다고 했다. 냉장고가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것이다.
그런때는 누린내가 온동네로 퍼져 비록 시켜서 하는 일이지만 큰 죄를짓는 것 같았다고 했다 소 잡을 때 훗날 장사 밑천으로 숨겨 두었던 술이들통나 그날로 바닥이 났다고 했다. 숙부네 장사의 주종목은 주류도매였다.
빼앗긴 술에 대한 보상이나 삼시 밥 해대는 수고비는 조금도 바랄 수 없는상황이었는데도 세끼를 흰밥으로 배불릴 수 있다는건 굉장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숙모는 그런 호강을 혼자서만 하고 나눌 수 없는 게 미안해서어쩔 줄 몰라했다. 동네 사람 앞에서 얼굴을 못 든다고 했다. 하다못해누룽지라도 좀 나눠 먹고 싶은데 먹을 것에 관한 한 감시가 하도 철통같아 도저히 엄두를 못 냈다. 친척이 드나드는 것까지 뭐라지는않는다지만 숙모가 그들 몰래 밥 한 그릇이라도 먹일 기회를 엿볼 것이뻔해 우리 쪽에서 발길을 끊고 살았다. 먹는 것에 츱츱한 걸 가장 좋지못한 일로 교육받아 온 우리는 남에게 그런 합의를 받는다고 상상하는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그 정도의 숙부네 소식도 어쩌다밤늦게 마실오는 숙모를 통해서였다. 온종일 부엌에서 사는 숙모는 몸에음식 냄새가 배 있었지만 누룽지 조각 한쪽 가지고 오지 못했다. 바라지도않건만 숙모는 그게 미안한지 우리 집에 들어서자마자 변명부터 했다.
"그것들이 의심할까 봐 내가 먼저 그것들 코앞에다 대고 치마를 이렇게훌훌 털어 보이고 나왔단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고쟁이가 보이도록 치마를 펄렁 거려 보였다. 우리식구가 극도로 허기가 지고부터는 숙모는 그럼 밤 마실 조차 삼갔다.
8월초에 오빠가 드디어 시골 중학교로 돌아갔다. 지하로 숨을 기회도놓치고 당에 속죄할 기회도 놓치고 마냥 어정쩡한 무소속상태로 지낼 수잇는 세상이 아니였다. 청년 장년 할 것 없이 길에서도 의용군으로잡아들일 때였다. 오빠가 겉보기에 한유롭게 시국을 관망하고 지 낼 수있었던 것도 인민위원회로 변한 동회사람들이나 한 골목 사는 인민반장쪽에서도 오빠가 거물급인가 아닌가 관망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그런 상태에서 느끼는 어떤 위기의식과 이웃으로부터의 따돌림으로늘 우두망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이래라저래라 자기 의견을 말하지않았다. 최초의 계획이 어긋나고부터 자기판단력에 자신을 잃은 엄마는시심하고 과묵해졌다. 그 줏대는 어디 갔는지 숫제 자기 의견 같은 건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오빠는 아마 월급은 못 줘도 쌀 배급은 준다는, 출근공작 나온동료교사의 말에 가장 끌렸을 것이다. 내달이 올케의 해산달이었다. 흰쌀몇 움큼을 남겨 놓으려고 엄마는 손자 베갯속에 든 좁쌀을 다 꺼내서 멀건우거지 죽에다 보탰다. 그 동료교사는 다음 번에는 오빠의 신임장까지해가지고 와 통행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출근한 오빠는불과 사흘만에 의용군으로 붙들려갔다. 붙들려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밤중에 누가 숙부네 집 유리창을 두드려서 나가 보니 오빠가 서 있고뒤에는 통 든 인민군이 두사람이나 따라왔더라고 했다.
미아리고개로 통하는 전찻길 가에 있는 숙부네 집에선 야밤에 군대나민간인이 이동하는 소리를 늘 들을 수가 있었다. 오빠도 북으로끌려가면서 인솔하는 인민군에게 잠시 양해를 구해 가족에게 소식이라도전하고자 들렀던 것이다. 겨우 그 말만 전하고 다시 끌려가는 조카를 그냥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나로 숙부하고 숙모는 속옷 바람으로 무작정미아리고갯마루까지 따라가다가 인솔자가 총대로 밀어내는 바람에놓쳤다고 했다. 길가로 물러나 바라보니 어둠을 틈타 끌려가는 장정들의행렬이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다소 위로가 되더라고도 했다. 숙모는 그행렬을 끝까지 보고 나서 곧장 우리 집으로 달려와서 일러 주는 건데도우린 잘 믿기지가 않아 어리벙벙했다. 날이 밝으니 더욱 숙모가 헛것을보고 나서 헛소리를 지껄이고 갔으려니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엄마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구파발로 떠날 채비를하면서 나도 같이 가자고 했다. 국도는 특히 폭격이 심했다. 그래서 군대고민간인이고 밤에 이동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공습을 만나 밭이나논으로 뛰어들어 포복해서 있다가 다시 걷곤 했다. 오빠가 의용군에 나간건 틀림이 없었다. 중등교사가 재교육을 실시할 테니 한 학교에서 꼭 몇명씩은 의무적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상부 지시가 있어서 그렇게출근공작에 열을 올린 거였다. 재교육을 청운국민학교에서 받다가 곧장전원이 의용군으로 지원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누굴 원망할 수도없었다. 우리 집에 출근 공작을 왔던 지도교사도 같이 끌려갔다니까 그도속았을 뿐, 그에게 속은 것도 아니었다. 탓을 하려면 순진한 시골 인심이나탓할까, 우리를 속여먹고 있는 것은 그 보다 훨씬 조직적인 힘이었다.
들판엔 고추 잠자리가 평화로이 날고 시냇가 미루나무에선 쓰르라미가자지러지게 울고, 우리의 텃밭은 아직도 주인을 못 만나싸는지 쇠비름에뒤덮혀 있었다. 우리 모녀는 허름하게 늙은 노교사 한 분이 지키고 있는교무실 창으로 이런 것들을 내다보면서, 심한 허기증 때문인지 전쟁의근심과 공포가 꿈결같이 아찔하게 멀어져 가는 걸 느꼈다. 노교사가자기보다 더 늙은 소사하고 같이 창고로 가서 쌀가마에서 쌀을퍼내주었다. 우리는 감지덕지 그걸 받았다. 엄마는 이고 난 지고 와서 그날저녁은 그걸로 배부르게 쌀밥을 지어먹었다. 엄마는 오빠가 첫 월급과쌀을 타 왔을때 별로 기뻐하지 않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한탄을했었다. 엄마는 그 소리를 왜 이렇게 미리 했을까, 되레 그날 저녁엔암말도 안 했다. 그러나 그 식사야말로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나는 진즉부터 학교에 나가고 있었다. 오빠와 달리 바뀐 세상에서슴없이 공감했다. 그들이 이승만 정부 욕하는 데 공감했고, 노동자농민에 대한 약속에 공감했다. 거의 잊고 지내던 팜플렛을 보고 맛본공산주의에 대한 최초의 감동과 매혹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 그들의승승장구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었고, 한때 민청조직에 들어 있었다는 걸대단한 투쟁경력처럼 자부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게다가 입학한 지얼마 안 되는 대학에 대한 애착도 무시 못했다. 나는 바뀐 세상에참여하고 싶었고, 내가 속할만한 데는 대학밖에 없었다. 등교해 보니문리대 건물은 인민군이 차지하고, 연건동에 있는 수의과대학에서 등록을받는 걸로 돼 있었다.
아마 7월 중순쯤 되서였을 것이다. 마음은 급했지만 뒤숭숭한 집안 사정때문에 등교 시기는 좀 늦었었다. 지신도 임의로 할 수 없는 불안감에짓눌려 어떤 경우에도 잘 하던 우스갯소리까지 잊어버린 엄마는 내가등교를 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그래도 내 딴엔 용기 있는 등교였는데학생 수도 민청 간부를 빼면 과마다 한두 명으로 셀 정도밖에 안 됐다. 그소수의 주요과제는 등교 공작이라는 거였다. 학교에 비치된 신상 카드를한 사람 앞에 몇 장씩 나눠 주면서 약도대로 집을 찾아가 등교를 권하라고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 학생을 긁어보아 의용군으로내보낸 적이 벌써 몇 번 있었다고 했다. 오빠가 당한 것과 똑같은수법이었다. 그런 수법이라는 걸 모를 때도 나는 그 짓은 안 했다. 집 찾는데는 워낙 소질도 없었거니와 대학생에게 학교를 나와라 말아라 권한다는게 암만 해도 말이 안 됐다. 당하는 쪽보다 내 자존심에 관한 문제였다.
그런 일말고도 매일매일 말 안 되는 일만 시켰다. 문리대생 중 반동분자명단을 복사하는 건데 누가 작성했는지 모를 명단을 왜 그렇게 자꾸복사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명단 맨 처음에 나오는 이름은나중에 국회의원을 지낸 손도심 씨였다. 아마 그때 정치과에 재학주이었을 것이다. 학습시간이라는 것도 있긴 했다. 그러나 교수를 본 적은한번도 없었다. 끝끝내 교수는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학교의 주인은 민청이었다. 민주학생동맹다운 민주적인 학습방법은소련공산당사나 신문의 전면을 차지한 김일성 수령의 교시를 돌아가며일고 예찬하고 열광하는 일이었다. 우러나오지 않는 예찬과 열광처럼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도 없었다. 몸에서 서서히 생기가 증발해 가고있다는 걸 현저하게 느꼈다. 같은 교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도 처음과다름없는 고조된 열광을 유지해야 했고 불을 지펴야 했다. 그게 어떻게가능한가? 가능했다면 그건 틀림없이 가짜였을 것이다. 가짜를 좋아하는수령은 얼마나 멍텅구리일까. 이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할 짓이 못되었다.
나는 체질적으로 예습을 싫어했다. 고교시절에도 시험 때 복습은 어쩔수 없이 하지만 예습은 하지 않았다. 집중력도 산만했다. 싫어하는 과목시간에는 수업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소설책을 읽는 못된 버릇이있었고, 좋아하는 과목도 예습 없이 간간이 딴 생각도 좀 하면서 듣길좋아했다. 그래도 꼭 알아야 할 새로운 지식은 그런 방심의 시간을느닷없이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싱싱하게 요동치게 하는 법이다. 괜해예습 따위를 해서 그 시간을 한물간 생선 같은 복습의 시간으로 만들기가싫었다. 그러니까 정말 싫어하는 건 예습이 아니라 복습인지도 몰랐다.
민청학습은 소학생도 알아들을 빤한 소리의 무한한 복습이었다. 저절로지쳐 떨어져 물 간 생선이 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엔 스스로 박제가 돼버린 것처럼 느꼈다. 여북해야 민청 간부나 동무라고 부른 남학생 중엔잘생긴 남자도 있었을 법한데 어깨를 맞대고 학습도 하고 툭하면 악수도잘 했건만 한번도 야릇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건 결코 연애감정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성간에만 있는 것이면서도연애감정 이전의 이끌림이 남자와 여자가 섞여서 하는 일 가운데는 반드시있는 법이다. 그 남자와 여자가 남매나 부녀나 모자간이라 해도 말이다.
생기라 해도 좋고, 윤기나 부드러움이라 해도 좋은 그런 정서 때문에남자와 여자가 더불어 하는 일 가운데는 따로따로 하는 일에서는 맛볼 수없는 잔재미가 있는 법이다 어떻게 된 게 그것까지 말라 버린 느낌이었다.
아니, 그건 느낌이 아니라 실제였다. 황폐의 극치였다.
나는 전쟁 중 생리가 멎어 버렸고, 비슷한 경험을 했단 소리를 나중에여러 번 들었는데, 대개는 영양부족 탓으로 돌리는 듯했다. 물론영양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심리적 중성화 현상의 영향도 있지않았을까. 여북해야 그 무렵 나는 북조선이 과연 노동자의 낙원일까를의심하는 것보다는 북조선서는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인구를 증가시킬까를궁금해하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재미있고 싶었다. 나는오빠가 의용군에 붙들려 간 걸 기화로 학교에 나가는 걸 그만두었다. 오빠때문이라고 말하진 않겠다. 그냥 지쳐 나자빠진 거였다. 수정이 안 된열매처럼 말라 비틀어져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따져 보면 얼마 안되는 동안인데 그때도 그랬고, 훗날 돌이켜볼 때도 그렇고, 그동안이인민군 치하의 석 달 동안보다도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엄마는 매일 밤 장독대에다 정안수를 떠 놓고 치성을 드렸다.
달빛이라도 휘영청 하거나 비는 동안이 유난히 오래 걸릴 때는 엄마가 꼭무당 같았다. 오빠가 인민군이 됐다면 인민군대가 이기길 바라야겠지만유난히 극성스러워진 폭격과 간단없는 박격포탄 소리를 들으면 그 반대의기대로 가슴이 울렁거리곤 했다. 남쪽에서 들리는 포 소리가함포사격소리라는 걸 안 것은 무슨 질긴 인연인지 삼선교 집에서 잡혀간혁명가의 아내의 방문을 통해서였다.
6월 28일 우리 집에서 그렇게 뻑적지근한 축제를 치르고 간 그 남자는그 후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오빠는 그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엄마는 한두 번 그 남자가 거물이었을까 송사리였을까 하고 궁금해하는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아내의 방문으로 그 남자가 그 후 지금까지인천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 정도면거물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매우 초라하고 초췌해 보였고,겁에 질린 듯한 남매를 대동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통해서 인천시가밤낮없는 집중적인 함포사격으로 거의 초토화돼 가고 있다는 걸 알았고인천시를 포기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소리도 들었다. 가족을 먼저 북으로피난시키고 당 고위간부만 끝까지 남아 있으라는 지령이 내려졌다는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북으로 가는 길에 들른 건데, 도대체 우리집이저네들한테 뭐관데 빨랑빨랑 제 갈 길이나 갈 것이지 들렀을까, 하는 이런야박한 생각에 짜증부터 났다. 그러나 엄마는 잠자리랑 먹을 거랑 극진히해서 돌려 보냈다. 다음 날 새벽, 부디 가는 곳마다 귀인을 만나 고생덜하고 평양에 도착하라는 덕담까지 길게 늘어놓으면서 그들을 배웅하는엄마를 보고 나는 화가 나서 엄마의 비위를 긁을 소리를 한마디하고말았다.
"그 사람이 다시 세도 잡을 줄 알구요? 틀렸어요."
엄마는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즉각 생생하게 떠오른 표정은 부정을 탄것처럼 공구하고 꺼리는 기색이었다.
"듣기 싫다. 조 조 방정맞은 놈의 주둥이. 내가 귀인 노릇하지 않고 느이오래비가 어떻게 귀인을 만나길 바라냐, 바라길."
나는 그만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 동네만 남겨 놓고 온 천지가 불바다가 됐다 싶게 시내 쪽 하늘에화광이 충천하고 폭격과 포격이 잠시의 숨돌릴 새도 주지 않고 도시를짓이기는 날 아침에 하필 올케는 산가가 있었다. 첫 손자 볼 때난산이었던 걸 본 엄마는 혼자 당하기가 겁이 났던지 나한테 빨리 숙모를좀 불러오라고 했다. 나도 얼떨결에 밖으로 뛰쳐나오긴 했지만 보통걸음으로 십 분이 채 안 걸리는 숙모네를 한 시간 가까이 걸려서도도달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거리엔 인적이 끊기고 무기들만이 삼지사방에서 그리고 공중에서태산이라도 무너뜨릴 것처럼 포효하면서 맹렬한 살의를 내뿜고 있었다.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만 봤다 하면 병아리를 발견한 매처럼 곧장 땅을향해 내려꽂히는 비행기의 기총소사 때문에 추녀 끝과 가로수 밑만을 골라이동하느라 그렇게 오래 걸렸건만 거의 다 가서 돌아오고 만 것은전찻길을 건널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에 올케는 순산을 해서 아기를 뉘어 놓고 조용히 울고 있었고,엄마는 첫국밥을 짓고 있었다. 또 아들이었다. 뱃속에서 못 얻어먹어서그런지 고구마만한 얼굴에 보이는 건 이마에 굵은 주름뿐이었다. 너무작아서 산고도 없이 쑥 빠져나오더라고 했다.
며칠 안 있어 세상이 다시 바뀌었다. 석 달 동안에 청년들은 씨가 마른줄 알았는데 어디에 그렇게 감쪽같이 숨어 있었는지 머리칼이 길길이자라고 얼굴이 백지장같이 센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와 서로 얼싸안고 또는개선한 국군을 붙들고 미친 듯이 환호하고 춤췄다. 그 기나긴 날들을어떻게 숨어서 견딜 수가 있었을까. 인내력이나 가족들의 보호만으로가능한 일이 아닐 터였다. 우리만 바보 같았다.
그러나 그 동안 끌려가고 죽임을 당한 수효가 속속 드러남에 따라 그엄청남과 잔혹함 또한 하늘 무서운 것이었다. 살아남은 자는 제각기구사일생이나 간발의 차이를 안 거친 이가 없었으니, 천명이 아닌 이 또한없었다. 누구나 한번 사선을 넘고 나면 담대해지고 뭔가 보람 있는 일에몸바치고 싶은 의욕이 충만해지는 법이다. 복수의 정열이 그들을살기충천하게 했다. 게다가 아직도 전쟁 중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게 돼있는 전쟁을 동족끼리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적은 피부색이나언어가 다른 이민족이 아니라 그냥 공산당이었다. 국군과 함께 적의수중에서 우리를 구해 준 유엔군도 고마웠지만 독립된 정부가 있음으로써그런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으니 나라 있음이야말로 얼마나 감격스러운일인지 몰랐다. 내남없이 애국심이 가슴에서 목구멍까지 벅차 올랐다.
그러나 애국은 곧 반공이었다. 애국과 반공은 손바닥의 앞뒤처럼 따로성립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애국하고 싶은 마음들이 급해 많은단체들이 생겨났고 무슨무슨 청년단이니 자위대니 하는 애국 단체가 하는일도 주로 빨갱이 족치기였다. 정부와 경찰, 군인, 헌병 등 치안을 유지할수 있는 기관이나 다 환도했지만 그들의 주업무도 공산분자를 색출하는일었다. 계엄령 하였다. 적 치하에서 부역한 빨갱이들을 유치장이 메어지게잡아들이고 즉결처분도 성행했다. 빨갱이 목숨이 사람 목숨과 같을 수없었다. 저기 빨갱이가 간다는 뒷손가락질 한 번으로 그 자리에서 총을맞고 즉사한 사례도 있었다.
워낙 저지르고 간 일이 엄청났으므로 뒷손가락질해 주고 싶은 사람도많았으리라. 고발과 밀고가 창궐했다. 고발당할까 봐 미리 고발하는 수도있었다. 따지고 들어가면 공산 치하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도 죄가 될 수있었다. 천장 속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다고 해도 누군가가 먹을 걸디밀어 주었으니까 연명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이 아내나 어머니가 여맹에나가 열성분자보다 덜 열렬히 수령을 찬양하고 목청을 드높여 인민가요를불렀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렇듯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에겐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일단은부역의 혐의를 걸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마련이었다. 비록 그들이야말로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정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순순한 양민이었다고해도 말이다. 정상은 참작되지 않았다. 부역에 있어서 한 점 부끄러움도없이 결백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한강다리를 건너 피난을 갔다 왔다는게 제일이었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반공주의자 내에서도 도강파라는특권계급이 생겨났다.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꾀어 놓고떠난 사람들 같지 않게 안하무인이었다. 어쩌면 자기 잘못에 대한자격지심 때문에 선수를 치느라고 그렇게 위세를 부리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일파의 정상은 그렇게도 잘 참작해 주던, 그야말로성은이 하해와 같던 정부가 부역에는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는노릇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참아 내기 힘든 가혹한 고통의 시기가 닥쳐왔다. 그건우리 집안의 일이면서 나 혼자 겪어 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동네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집을 거물 빨갱이라고 여기고 싶어했다. 수복이되고 나서 밖에 나간 엄마를 보고 옆집 사람이 질겁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북으로 안 가고 남아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일 뿐 아니라 기분 나쁜일이었을 것이다. 기분 나쁜 정도가 아니라 시한폭탄을 옆에 끼고 사는것처럼 무섭고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짓을 해서가 아니라 우리의존재 자체가 사회 불안 요소였다. 제거 당해야 마땅했다.
동네 사람의 고발에 의해 우리는 가택수색을 당했다. 가족이 월북하지않은 걸 보면 그 거물도 어디 숨어 있을 거라고 고해바친 듯했다. 의용군중 자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군인이나 경찰의 형제 중에도 의용군으로끌려간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건 그다지 죄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오빠가 의용군 나갔다는 걸 그들에게 믿게 하려고 호소하고애원하고 울고 빌었다. 올케는 산모고 엄마는 늙어 내가 대표로 연행되어온갖 수모를 다 당했지만 구속당하지는 않았다. 유치장이 넘칠 때였고,빨갱이 다루는 전문가의 눈엔 별 것 아니게 보였던 것 같다. 그만한사람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어떤 일에고 전문가보다 비전문가가 더무서운 법이지만 사람 잡는 일에서는 더했다.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후 나는 끊임없이 끌려 다녀야 했다.
고발이 그렇게 잇달았는지 저희끼리 나 하나를 가지고 서로 조리돌리는건지 그 내막은 알 도리가 없고, 또 궁금해할 경황조차 없었다. 별의별청년단체들이 다 나를 보자고 했다. 그들은 나를 빨갱이 년이라고 불렀다.
빨갱이고 빨갱이 년이고 간에 그 물만 들었다 하면 사람도 아니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영자이고 나발이고 인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빨갱이를 색출하고 혼내 줄수 있는 기관은 수도 없이 난립돼 있었고,이웃이 계속 우리를 수상쩍게 여기는 한 난 그들의 밥이었다. 그들은 나를함부로 욕하고 위협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 비하면 그정도는 인권침해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다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돼 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정말로 그들에겐 징그러운 벌레를가지고도 오락거리를 삼을 수 있는 어린애 같은 단순성이 있었다. 다행이그들은 빨갱이를 너무도 혐오했기 때문에 빨갱이의 몸을 가지고 희롱할생각은 안했다. 나는 내가 너무 귀족적으로 자란 걸 다 원망했다. 잘 먹고잘 입고 떠받들여졌다는 소리가 아니라 수모에 길들여질 기회없이 커왔다는 뜻이다.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미친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들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린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여러군데서개별적으로 당한 일들이 한 묶음으로 단순화돼 남아 있어, 구체적인사건들을 추상적으로밖에 생각해 낼 수가 없다. 그건 몸으로 벌레처럼기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폭력에 굴복당했다는 증거겠지만 어쩌랴,그렇게 생겨먹은 게 보통 사람이 안 미치고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의 한계인것을.
숙부네의 몰락에 비하면 내가 당한 건 약과였다. 그만한 사람을 만난것도 엄마가 아직도 정안수 떠 놓고 회구하는 귀인을 만난거나다름없었다. 숙부네는 시월 중순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말똥냄새를 닦아내고 장사를 새로 시작할 준비를 서둘고 있었다. 걱정이 있다면 우리 집걱정이었다. 우리 일만 생각하면 일이 손에 안 접혀 뭔 일이 안 된다고했다. 오빠가 끌려가면서 숙부네 들렀을 때, 뒤따라온 인민군에게 얼른금반지라도 빼주고 흥정했더라면 빼돌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하고 또 했다. 인민군에게는 뇌물이 안 통하는 건 줄 알았는데 뇌물을써서 안 될 일을 되게 만든 경험을 어디서 얻어듣고 만날 그걸 분해하다가숙모하고 다투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금반지 같은 건 남자가 생각하기전에 여자가 먼저 생각이 미쳤어야 하지 않느냐는 숙부의 생트집때문이었다.
그런 숙부네가 역시 동네 사람들한테 고발을 당했다. 정치보위부앞잡이가 되어 호의호식했다는 치명적인 제보에 의해서였다. 숙부하고숙모하고 따로따로 연행됐는데 처음엔 숙모가 즉결처분을 당했다고 했다.
그쪽 동네 사람 중 숙모하고 친했던 사람이 일러 주면서 성신여중뒷산으로 여럿이 함께 끌려가는  걸 봤고 연이어 여러 발의 총소리를들었다고 했다. 그러니 어서 가서 시체라도 거두라는 거였다. 우리말고도그 사람이 일러 주어 시체를 찾은 사람이 있고, 식구가 끌려간 후 소식이없자 행여나 해서 그 산으로 시체더미를 뒤지러 오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의리 없게도 거기를 직접 가보지 않았다. 마침 우리가가택수색이네 연행이네 하도 경황이 없을 때이기도 했고, 집안 내에 사형당할 만한 빨갱이가 또 있다는 게 알려지면 또 무슨 꼴을 당할까 싶은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황망 중에 숙모의 친정 어머니한테 알렸다.
사돈마님이 미친 듯이 달려와 남은 시체를 일일이 확인해 봤는데 없더라고했다.
나중에 숙모한테 들어서 안 일이지만 즉결처분을 단행한 군 장교가여자가 무슨 죽을죄까지 지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여자들만 따로세워 두었다가 경찰서로 넘겼다고 했다. 숙모는 그 후 재판까지 받고1·4후퇴 못 미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동안 친정 어머니가 지성껏옥바라지를 했고 우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처음부터 경찰로 붙들려간 숙부는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사실을 출옥하는 사람편에 숙부가 보낸 편지를 통해 알았을 정도로 우리는숙부에게 옥바라지도 제대로 할 형편이 못 됐다. 숙부의 편지는 내가 왜사형을 당해햐 하는지 모르겠다, 변호사라도 대서 나를 좀 살려 달라는거였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힘이 나 백이 돼 줄 만한 친적이 그렇게도없었던지 우리 집안이 무밑동 잘라 놓은 것처럼 고적하고 보잘 것 없는처지라는 걸 그때처럼 절감한 적도 없었다.
부역한 죄수가 하도 많을 때라 솜옷 한번 차입하는 데도 온종일 걸렸다.
마침 오래 형무관 생활을 한 친척이 있어 그 정도의 편의는 봐 주길기대하고 청을 해 봤는데 어림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말단 공무원이부역자하고 상종하기를 꺼릴 수밖에 없는 세상이란 걸 알면서도 치가떨리게 야속했다. 될 수 있는대로 이른 새벽에 줄을 서려고 엄마는 예전에현저동에서 각별하게 지내던 집을 찾아가 염치없이 하룻밤을 드새곤했는데 그럴 때마다 따뜻한 위로와 대접을 받았다며 없는 사람이 훨씬인정스럽더라도 했다.
그나마의 옥바라지나마 못 하게 된 사이에 숙부는 처형을 당했다. 실은언제 처형을 당했는지 그 날짜도 모른다. 숙부의 편지 한 장 외엔 아무런연락도 없었고, 사형을 집행했으니 시체를 인수해 가란 통고 같은 것도물론 받은 바 없다. 사형을 당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지만, 곧 1·4후퇴가있었고, 그 후 숙부의 존재나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후퇴 전의 제반 상황으로 미루어 집단적으로 처형됐을 것이다. 빨갱이목숨은 파리 목숨만도 못했고, 빨갱이 가족 또한 벌레나 다름없었다.
옥바라지고 뭐고 경황이 없이 된 시초는 시민증에서 시작된다. 보통사람도 양민임을 입증하는 증명서가 있어야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제도가 9·28수복 후에 비로소 생겼는데 그때는 그걸 시민증이라고 했다.
나중에야 대한민국 국민이며 다 받을 수가 있었지만 그 제도가 처음 생긴때가 때이니만치 양민과 잠복해 있는 적색분자를 구별하려는 목적성이강했다. 따라서 아무에게나 발급해 주는 게 아니라 엄격한 심사를 거쳤다.
심사도 받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반장은 시민증 발급 신청서류를집집마다 나누어 주면서 우리 집만 쏙 빼 놓았다. 그건 밀고를 당할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시민증이 없으면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고여길 만큼 그게 사람 노릇 할 수 있는 기본요건이 될 때였다. 반쯤 등신이된 것처럼 모든 환난을 말없이 견디던 엄마도 땅을 치며 탄식을 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해도 너무 하는구나. 서로 고사떡 나누고 비단치마무명치마 안 가리고 서로 손주새끼 오줌 똥 받았거늘. 어찌 이럴 수가."
이사오던 사람마다 팥죽 쒀서 나누고, 고사떡 돌리고, 그러고는 이내 내집 네 집 없이 마실 다니며 남의 손자 오줌 똥도 더러운 줄 모르고 지낸사이라는 걸 엄마는 이렇게 넋두리했다. 아니꼬운 걸 무릅쓰고 심사를해서 시민증을 발급 받고 못 받고는 우리 일이고 신청서라도 줄 수없느냐고 했더니 마침 한 장이 모자라서 우리를 빼 놓았으니 동회에 가서말해 보라고 했다. 반장 하다 인민반장 하다 다시 반장하는위인한테까지도 이런 구박을 받아야만 했다. 신청서 한 장 받는 데까지동회 직원한테 굽실대며 예비심사를 받았지만 정작 본심은 우리를 모르는기관에서 나와서 했기 때문에 엄마하고 올케는 무난히 시민증을 교부받을수가 있었다. 나는 학생이니까 학교에 가서 학생등록증을 받아 오라는것이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대학을 다시 다니게 될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공산치하에서 학교에 나간 것은 명백한 부역이기 때문에 나는 처벌이 무서워학교 앞엔 얼씬도 못 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학마다 학도호국단감찰부에서 학생을 심사하는데 학교에 따라서는 가혹행위도 한다는 소리를전해 듣고 있었다. 각 기관마다 심사가 유행이었고 심사과정에서 별의별일이 다 있었다. 두려웠지만 시민증이 없다는 것은 죽은목숨이나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어떤 수모나 폭력도 견딜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학교에나갔다.
이번엔 유엔군이 문리대를 쓰고 있어서 대학 업무는 동숭동 교수관사에서 한다고 했다. 등교해서 등록서류를 작성하는 걸 옆에서 보고벌써 내가 누구라는 걸 알고 수군댈 만큼 나는 이미 부역한 학생명단에올라 있었다. 그런 형편이니 그날로 등록증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며칠걸려 최종적으로 감찰부장이 심문을 하고 훈계를 하고 학생등록증을발급해 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발급받은 등록증을 제시하니 시민증도 쉽게 나왔다.
지금까지도 그때 문리대에서 받은 심사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간직하고 있는데 그건 시민증을 받는데 도움이 됐기 때문만이 아니라처음으로 인간대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역의 혐의와인간대접의 양립은 두고두고 고마웠고 결과적으로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믿음만은 잃지 않게 도와 주었다. 내가 그런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에더욱 그렇게 느꼈겠지만 부역자 숙청이 한창일 때는 제일 무서운 게사람이어서 사회가 온통 흉흉한 공포분위기였다.
단박 압록강가지 밀고 올라갈 만큼 승승장구할 때 승자가 과연그렇게까지 모질게 굴 필요가 있었을까. 승리의 시간은 있어도 관용의시간은 있어선 안 되는 게 이데올로기의 싸움의 특성인 것 같다.
애국단체는 또 왜 그렇게 많이 생겨났던지, 그들이 내건 구호와성명으로 거리거리의 벽마다 도배를 하다시피 했는데 하나같이 공산당의만행을 규탄하고 적색분자를 남김없이 색출해 이참에 씨를 말려야 한다는격렬하고도 호전적인 것들이었다. 한번은 그런 벽보가운데 '자유주의만세'라고만 쓴 초라한 벽보를 보고 이상 느낌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한참심신이 황폐할 때였는데 그걸 보자 무릎이 스스로 꺾일 만큼 힘이 빠졌다.
이런 수모와 단련을 받으면서도 북쪽에서 설사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준대도 바꾸고 싶지 않은 건 저것 때문이었을까? 수모와 단련 끝에감옥살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 땅을 택할 만큼 이 땅에 더 있는자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래, 참 국가원수를 광신하지 않을 자유가 있었지.
나는 쓸쓸하게 자조했지만, 한편 그 정도의 자유도 태산만한 희망이었다.
북진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우리가 밀리기시작했다. 이번엔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거짓말을 안 하고 작전상후퇴를 할 수도 있을을 미리미리 비췄다. 여름에 놀란 가슴들이 있는지라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은 일찌거니 피난을 서두르고 없는 사람들도 설마설마 하면서도 피난짐을 싸 놓고 있었다. 하루도 정안수 떠 놓고 치성을드리지 않은 날이 없는 엄마와 올케의 실망과 비탄은 이루 말할 수가없었다. 집안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가운데서도 그들을 버텨준 것은희망이었다.
국군이 빠른 속도로 북진하는 동안 탈출하거나 일부러 낙오한의용군들이 귀환하는 일이 많았다. 엄마는 길에서라도 거지 꼴을 한청년을 만나면 혹시 의용군 갔다 오지 않느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하면반색을 하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뭐든지 대접해 가며 이것저것 묻고싶어했다. 남의 일을 내 일 같이 기뻐하고 감탄도 하는 사이에 우리에게도그 같은 기쁨이 있었으면, 하는 희망에 확신이 생기는 듯했다. 끼니 때마다오빠의 밥을 제일 먼저 퍼 놓았고, 바람이 대문을 흔드는 소리에도 생기를섬광처럼 내뿜으며 뛰쳐나가곤 했다. 내 아들이 미처 도망쳐 나오기 전에후퇴를 해버리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란 말인가. 엄마는 상상력속에서도 아들을 죽일 수가 없었으므로 계속 인민군으로 남겨 둘 수밖에없었다.  작전상 후퇴가 서울보다 훨씬 남쪽까지 이를 게 거의 확실시되고있었다. 첫추위가 몰아치는 가운데 서울 인구가 반 이상 줄자 엄마는중대한 결심을 했다. 딸의 운명을 분리시키기로.
"너 혼자라도 피난을 가야 한다."
실은 나도 그럴 작정이었지만 막상 엄마의 입에서 금 날이 떨어지자설움이 북받쳤다. 그건 나만 빼놓고 엄마와 올케와 조카들은 오빠와운명을 같이 해야 된다는 뜻도 되었다. 인민군이 된 오빠는 잘 상상이 안됐지만, 인민군이 된 오빠와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분명했다. 작전상 후퇴라니까 곧 다시 서울이 수복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있다 해도 다들 떠나고 집은 비어 있으리라. 혼자서 피난은 갈 수 있다해도 영이별을 할 각오는 쉽지 않았다. 엄마는 이미 그런 각오까지도 굳힌듯 구메구메 껴두었던 혼숫감 같은 것까지 다 꺼내 내 피난짐을 챙기면서연방 "너라도 좋은 세상 살아야지." 하는 소리를 되풀이했다.
내가 떠나기 전에 오빠가 돌아왔다. 아아, 오빠가 돌아온 것이다. 거지중에도 상거지 꼴이었지만 인민군이 안돼서 돌아왔으니 금의환향 부럽지않았다. 그러나 곧 오빠의 귀향은 우리에게 설상가상이 되었다. 이게꿈인가 생신가 붙들고 울고불고 웃는 것도 잠시. 우리는 너무도 달라진오빠의 태도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떻게 그 몸으로 전선을 돌파하고 먼 길을 걸어 집까지 돌아올 수있었을까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이 못 쓰게 된건 약과였다. 집에돌아왔는데도 조금도 기쁜 기색이 없었다. 자기가 없는 동안에 태어난아들을 보고도 안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그렇다고 무표정한 것하고도 달랐다. 시선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불안하게 흔들리고, 작은 소리에도 유난스럽게 놀랐다. 잔뜩 겁을 먹은표정은 무슨 소리를 해도 바뀌지 않았다.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도 그를안정시키진 못했다. 밤에는 바람소리, 쥐 부스럭대는 소리에도 놀라 한잠을못 잤다. 어디를 어떻게 무슨 꼴을 당하며 왔기에 그 꼴이 되었을까.
죽기를 무릅쓰고 사선을 넘은 무용담도 있으련만 말하지 않았다. 그런흔적도 안 보였다. 오빠는 심한 피해망상을 앓고 있었다.
기가 막힌 엄마는 울부짖다시피 그 동안에 숙부네서 일어난 얘기와우리가 겪은 고초를 쏟아 놓으면서 정신 차리라고 하소연했다. 엄마로서는오빠의 닫힌 마음을 두드리려는 충격요법이었겠지만 오히려 피해망상만가중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어서 피난을 가자고 서둘기 시작했다. 제풀에놀라 머리 먼저 아무데나 쑤셔 박고 덜덜 떠는 증세까지 새로 생겨났다.
"어서 가자 인민군 들어오면 난 죽어, 응 어서 가자." 모든 사람들이떠나고 있다는 급박한 분위기만은 정상인보다 더 예민하게 느끼는 듯했다.
안절부절 못했다. 온 집안 식구가 더불어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만 떠날 계획은 자동으로 취소되었다. 아직은 가족의 운명과 분리될때가 안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다지도 공교롭게 일이 꼬일수가 없었다. 오빠가 서둘지 않더라도 우리도 어서 피난을 떠나고 싶었다.
피난을 못 가고 서울에 남아 있게 된다고 해도 이제 북쪽에 붙는 최악의상상은 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수복된 후에 또 어떤 일을 당할지는 생각만해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속여 놓고 도망갔다 와서도그렇게 으스대던 사람들이, 한사람도 남김없이 피난을 가라고 미리미리한강에 가교까지 설치해 놓고 내모는데도 안 가고 남아있던 사람들을어떻게 취급할 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어서 떠나고 싶었다. 미치게 떠나고싶었다.
그러나 오빠가 한강다리 건너는 데는 문제가 많았다. 또 그놈의시민증이 문제였다. 피난민중에 간첩이 섞여 있을까봐 도처에서 검문이심했다. 후퇴를 앞두고 시민증을 발급한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의용군 갔다 도망쳐 온 사람을 비록 빨갱이로 몰지는 않는다 해도시민증을 발급 받으려면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했다. 오빠가 그걸 견딜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본인도 그건 싫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시민증은빨리 내달라고 졸랐다.
"어쩌면 나 시민증 하나 그냥 내다 줄 빽도 없냐? 우린."
이런 소리까지 부끄러움 없이 했다. 어쩜 우리 오빠가 저렇게까지비굴해질 수 있을까. 피해망상의 결과겠지만 비굴은 피해망상보다 더꼴보기 싫었다. 안보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묶인 한 운명의 줄을 끊을가망은 없었다.
오빠의 백 성화에 올케가 생각해 낸 게 다시 시골 학교였다. 교사들의소박한 사람됨과 시골에서의 교사에 대한 존경심은 기대해 볼 만했다.
올케가 먼저 가서 의논하니 기꺼이 협조해 주겠다고 해서 오빠를 설득해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 머물면서 시민증 대신 도민증을 발급받을수가 있었다. 거기도 거의 다 피난을 떠나고 몇 사람 안 남은 동료교사와동네 사람들의 소박한 위로와 도민증을 손에 쥔 안도감으로 오빠가 약간의소강 상태를 보인 사이에 올케도 집으로 돌아와 피난 갈 채비를 했다.
피난을 하도 벼르고 부러워했기 때문에 도무지 고생길이란 생각이 안들었다. 강 건너, 산 넘고, 들 지나 우리도 마침내 피난을 가게 됐다는 게꿈같이 그저 즐겁기만 했다. 연년생 두 아이를 어떻게 건사해야 얼어죽이지 않을 것이며, 무엇을 어느만큼 어떻게 가지고 가야 우리 식구가굶어 죽지 않을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조금도 걱정이 안됐다. 사실그런 현실적인 짐은 몽땅 내 몫인데도 한강다리만 건너면 모든 문제를떠맡고 안식을 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덮어놓고부풀었다. 피난짐을 피크닉 준비처럼 쌀 수는 없건만 그랬다. 우리는 피난갈 자격도 없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식구는 마음 속 깊이에 피난을 못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묻어 두고 있었다. 그건 적중했다.
최악의 소식이 왔다. 그 무렵 국도 주변의 들판은 밤이면 후퇴하는유엔군과 국군들의 야영장으로 변하곤 했는데 큰 건물도 마찬가지였을것이다. 나중에는 국민방위군과 합쳐졌지만 당시에는 청년방위군이라는 게있었는데 국군과는 어떻게 다른지 모르지만 아무튼 무장도 하고 전투도하고 후퇴도 하는 중이었다. 그 청년방위군이 마침 그 학교에 주둔하게되었고, 숙직실에 머물던 오빠는 따뜻한 구들목을 찾는 장교와 같이 자게된 모양이었다. 아침나절 총기를 분해해 점검하던 사병이 잘못해서 총알이나간게 오빠의 다리를 관통했다는 것이었다.
급보를 받고 달려 나갔을 때 오빠는 구파발의 아직 피난을 못 가고 남아있던 조그만 병원에 방치돼 있었고 부대는 이동한 뒤였다. 진상을 더자세히 알아도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오빠는 우리가 전해 들은 거 이상을말하려 들지 않았다. 다량의 출혈로 창백해진 오빠는 되레 평온해 보였다.
초로의 의사는 친절했지만 그 집도 피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생명에는지장이 없지만 덧나면 골치 아프다고 앞으로 계속해야 할 치료법을 일러주었다. 치료법이래야 간단한 최소한의 것이었다. 의사가 시범으로 관통한총구멍에서 피 묻은 심을 빼고, 소독한 심을 서리서리 한없이 집어넣는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그 구명이 지옥으로 통하는 나락만큼이나어둡고 깊게 느껴졌고, 그 안으로 하염없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공포감을맛보았다.
오빠는 비명 한번 안 지르고 희미하게 웃기까지 했다. 희망을 잃은평온함이 처절해 보였다. 심으로 쓸 가제와 붕대, 소독약, 연고 등 있는대로 우리에게 다 주고 의사도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나고 동네가 텅비었다. 우리가 남의 병원을 독차지한 지 사나흘만에 마지막 후퇴령이내렸다. 이른바 일사후퇴였다. 거의 다 떠난 줄 알았는데 행여나 하고관망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국도를 질주하는 소리와 낮게 뜬헬리콥터에서 마이크를 대고 피난을 독려하는 소리가 어우러져 조그만병원을 들썩들썩 흔드는 것 같았다. 실상 집보다 우리 마음은 더 심하게흔들리고 있었다. 엄마가 먼저 우리의 동요를 대변했다.
"떠나자, 죽는 한이 있어도 가는 데까지 가다가 죽자. 저렇게 내모는데안 가고 있어 봐라. 나중에 우릴 얼마나 못 살게 굴겠니? 그 꼴을 또당하느니 죽는게 낫다.."
병원 뒤뜰에 부실하지만 손수레가 하나 남아 있는걸 봐 두고 있었다.
차를 어어 탈 수 있는건 소수의 혜택 받은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은 다진즉 떴고, 나중판에는 널빤지에다 바퀴만 달아 손수레를 만들어서 아이나긴요한 짐을 싣는게 유행처럼 돼 있었다. 십중팔구는 부실해서 버리고떠났을 손수레다 오빠를 실었다. 엄마하고 올케는 아이를 하나씩 업고보따리를 이고 들었으니 손수레는 내 몫이었다. 내 짐은 천근이었다.
마지막 후퇴의 대열에 무작정 뛰어들긴 했지만 우리는 점점 뒤처졌고 겨우무악재를 넘고 나서 나는 지쳐서 나자빠졌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자, 으응 조금만 더."
엄마가 무자비하게 다그쳤다.
"한강다리가 어떻게 조금만 더야."
나는 쌓이고 쌓인 분노로 당장 폭발할 것 같았다.
"피난도 팔자에 있어야 가지 아무나 가는게 아닌가 보다. 그러니 피난가는 척이라도 해 보자꾸나. 저 동네에 아는 집이 있으니 거기 머물렀다가세상이 또 한 번 바뀌어 사람들이 돌아올 무렵 우리도 피난 갔다 오는것처럼 우리 동네로 돌아가자꾸나. 그 수밖에 없다."
엄마는 줄창 그런 계략을 짜고 있었던 듯 차분하고 조리 있게 말하며거기서 바라보이는 동네를 가리켰다. 우리가 가짜 피난지로 정한 동네는현저동이었다. 다시 현저동이라니.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으면서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것 같던 팔다리에 새로운 힘이 솟았다. 층층다리를통하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좀 돌게 돼 있었지만 손수레 때문에 그길을 택했다. 마지막 피난민이 드문드문 맹수에 놀란 토끼처럼 화들짝뛰어내리는 길을 거슬러 우리는 숨가쁘게 새로운 피난처에 도착했다.
엄마가 점찍어 놓은 집은 숙부네 옥바라지할 때도 신세진 일이 있는바로 그집이었다. 그 집도 피난을 떠나고 집이 잠겨 있었다. 그러나 허술한집일수록 자물쇠도 허술한 법이어서 우리는 힘을 합에 아예 문고리째낚아챘다. 방금 떠난 것처럼 아랫목에 온기가 남아 있었고, 윗목엔 먹다남은 밥상이 그냥 헤벌어져 있었다. 총각김치의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우리는 먼저 양식이 있을 만한 데를 뒤졌다.
우리가 가진 양식은 너무 적었고 어느 세상에서나 목구멍이포도청이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짓에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않았다. 쌀은 없고 잡곡 한 움큼과 밀가루가 반 자루 가량 남아 있었다.
저녁은 새로 짓지 않고 남기고 간 찬밥으로 때웠다. 군불도 뜨끈뜨끈하게지폈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날 건덕지가 없을 지경까지 몰렸을 때의평화로움 안에서 우리는 깊은 숙면에 빠졌다.
새날이 밝았다. 오빠가 오래간만에 잘 잤노라고 기지개를 폈다. 나는앞으로 후퇴한 정부가 수복됐을 때 생각만 하고, 당장에 대해선 대책없는식구들이 답답하고 짐스러웠다. 오빠를 손수레에서 내려놨다고 해서 내짐이 가벼워진 건 아니였다. 나는 바뀐 세상의 눈치를 보려고 조심스럽게문밖으로 나갔다.
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혁명가들을 해방시키고숙부를 사형시킨 형무소도 곧장 바라다 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느껴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독립문까지 빤히 보이는 한길에도골목길에도 집집마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연기가 오르는 집이 어쩌면 한집도 없단 말인가. 형무소에 인공기라도 꽂혀 있다면 오히려 덜 무서울 것같았다.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그게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싶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것이다. 그거야 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이 거대한 공허 뿐이야.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몰아 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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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 백범일지 - 강현진

    김구선생 일대기
  백범일지


  지은이:김구
  펴낸이:강현진

         차례

  저자의 말

    상권
  머리말--인, 신 두 어린 아들에게
  1.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2. 기구한 젊은 때
  3. 방랑의 길
  4. 민족에 내 놓은 몸

    하권
  머리말
  1. 3.1운동의 상해
  2. 기적장강만리풍

    나의 소원
  1. 민족 국가
  2. 정치 이념
  3.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저자 연보


    저자의 말

  이 책은 내가 상해와 중경에 있을 때에 써 놓은 "백범일지"를 한글 철자법에
준하여 국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끝에 본국에 돌아온 뒤의 일을 써 넣었다.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서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에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내가 지낸 일을 알리자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권이다. 그리고 하권은 윤봉길의사 사건 이후에
중일 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에는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아니하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회를 고하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 고국에 돌아와서 이 책을 출판할 것은 몽상도 아니하였다. 나는
완전한 우리의 독립국가가 선 뒤에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의 눈에 비치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행이라 할까, 불행이라 할까, 아직 독립의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내
죽지 못한 생명만이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동포의 앞에 내놓게 되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나를 사랑하는 몇몇 친구들이 이 책을 발행하는 것이 동포에게 다소나마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하기에 나도 허락하였다. 이 책을 발행하기 위하여 국사원 안에 출판사를
두고 김지림 군과 삼종질 홍두가 편집과 예약 수리의 일을 하고 있는 바, 혹은
번역과 한글 철자법 수정으로, 혹은 비용과 용지의 마련으로, 혹은 인쇄 때문에 여러
친구와 여러 기관에서 힘쓰고 수고한 데 대하여 고마운 뜻을 표하여 둔다.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끼리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이러한 동기, 이러한 의미에서 실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품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철학의 대강령을 적어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은 이 한
편을 주의하여 읽어 주셔서 저마다의 민족철학을 찾아 세우는 데  참고를 삼고 자극을
삼아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내가 이 책 상권을 쓸 때에 열 살 내외이던 두 아들 중에서 큰 아들 인은 그 젊은
아내와 어린 딸 하나를 남기고 연전에 중경에서 죽고 작은 아들 신이가 스물 여섯
살이 되어서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아직 홀몸으로 내 시중을 들고 있다. 그는 중국의
군인인 동시에 미국의 비행장교이다. 그는 장차 우리 나라의 군인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동지들 중에 대부분은 생존하여서 독립의 일에 헌신하고 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많다.
  최광옥, 안창호, 양기탁, 현익철, 이동녕, 차이석 이들도 다 이제는 없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나 할 수 없는 일이어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는 나보다 앞서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이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 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김 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을 잘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기에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므로서이다.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만한 것은 대한 사람이면, 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자와 여자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거니와, 그와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에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단군 기원 사천이백팔십년 십일월 십오일 개천절날
  김구

    상권

  머리말--인, 신 두 어린 아들에게
  1.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2. 기구한 젊은 때
  3. 방랑의 길
  4. 민족에 내 놓은 몸

    머리말
    인, 신 두 어린 아들에게

  아비는 이제 너희가 있는 고향에서 수륙 오천리나 떨어진 먼 나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린 너희를 앞에 놓고 말하여 들려 줄 수 없으매 그동안 나의 지난 일을
대략 기록하여서 몇몇 동지에게 남겨 장래 너희가 자라서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할
때가 되거든 너희에게 보여 주라고 부탁하였거니와, 너희가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직접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디 세상사가 뜻과 같이 되느냐.
  내 나이는 벌써 쉰 셋이언마는 너희는 이제 열 살과 일곱 살밖에 안 되었으니
너희의 나이와 지식이 자라질 때에는 내 정신과 기력은 벌써 쇠할 뿐 아니라, 이 몸은
이미 원수 왜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고 지금 사선에 서 있으니 내 목숨을 어찌 믿어
너희가 자라서 면대하여 말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겠느냐. 이러하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써 두려는 것이다.
  내가 내 경력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기는 것은 결코 너희에게 나를 본받으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너희도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니 동서와
고금의 허다한 위인 중에서 가장 숭배할 만한 이를 택하여 스승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너희가 자라더라도 아비의 경력이 알 길이 없겠기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되는 것은 이 책에 적는 것이 모두 오랜 일이므로 잊어버린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도 보태거나 지어 넣은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 믿어 주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11년 5월 3일
  중국 상해에서 아비

    1.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 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팔세 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의 21대 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이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매 내게
11대조 되시는 어른이 처자를 끌고 서울을 도망하여 일시 고향에 망명하시더니,
그곳도 서울에서 가까워 안전하지 못하므로 해주 부중에서 서쪽으로 80리 백운방 텃골
팔봉산 양가봉 밑에 숨을 자리를 구하시게 되었다. 그곳 뒷개에 있는 선영에는 11대
조부모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산이 계시고 조모님도 이 선영에 모셨다.
  그때에 우리 집이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었으니, 그것은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 행색으로 묵은장이를 일구어 농사를 짓다가 군역전이라는 땅을
짓게 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이 땅을 부치는 사람은 나라에서
부를 때에는 언제나 군사로 나서는 법이니, 그때에는 나라에서 문을 높이고 무를
낮추어 군사라면 천역 즉 천한 일이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를 쇠약하게 한 큰 원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으로, 텃골 근동에서 양반
행세하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들에게 대대로 천대와 제압을 받아왔다. 우리 문중의
딸들이 저들에게 시집가는 일은 있어도 우리가 저들의 딸에게 장가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중년에는 우리 가문이 꽤 창성하였던 모양이어서 텃골 우리터에는 기와집이
즐비하였고 또 선산에는 석물도 크고 많았으며 내가 여남은 살 적까지도 우리 문중에
혼상대사가 있을 때에는 이정길이란 사람이 언제나 와서 일을 보았는데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집의 종으로서 속량받은 사람이라 생각하니,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의 집에
종으로 태어났던 것이라, 참으로 흉악한 팔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해주에 와서 산 뒤로 역대를 상고하여 보면 글하는 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이름난 이는 없었고 매양 불평객이 많았다. 내 증조부는 가어사질을 하다가 해주
영문에 갇혔지만 서울 어느 양반의 청편지를 얻어다 대고 겨우 형벌을 면하셨다는
말을 집안 어른들께 들었다. 암행어사라는 것은 임금이 시골 사정을 알기 위하여
신임하는 젊은 관원에게 무서운 권세를 주어서 순회시키는 벼슬인데, 허름한 과객의
행색을 차리고 다니는 것이 상례이다.
  증조항렬 네 분 중에 한 분은 내가 대여섯 살 때까지 생존하셨고 조부 형제는
구존하셨고 아버지 4형제도 다 살아 계시다가 백부 백영은 얼마 아니하여 돌아가셔서
나는 다섯 살 적에 종형들과 함께 곡하던 것이 기억된다.
  아버지 휘 순영은 4형제 중에 둘째 분으로서,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못 가고
노총각으로 계시다가 24세 때에 삼각혼인이라는 기괴한 방법으로 장연에 사는 현풍
곽씨의 딸, 열네 살 된 이와 성혼하여 종조부 댁에 붙어 살다가 2, 3년 후에 독립한
살림을 하시게 된 때에 내가 태어났다. 그때 어머님의 나이는 열 일곱이요, 푸른
밤송이 속에서 붉은 밤 한 개를 얻어서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라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병자년 7월 11일(이 날은 조모님 기일이었다) 자시에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
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가 없는 난산이었다. 진통이 일어난 지 6, 7일이 되어도 순산은
아니되고, 어머님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어 혹은 약으로, 혹은 예방으로 온갖 시험을
다해도 효험이 없어서, 어른들의 강제로 아버지가 소의 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의 소리를 내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나왔다고 한다. 겨우 열 일곱 살
되시는 어머님은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며 동네 아기 있는 어머니
젖을 얻어 먹이셨다. 먼 촌 족대모 핏개댁이 밤중이라도 싫은 빛 없이 내게 젖을
물리셨단 말을 듣고 내가 열 살 갓 넘어 그 어른이 작고하신 뒤에는 나는 그 산소
앞을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였다. 내가 마마를 치른 것이 세 살 아니면 네 살
적인데 몸에 돋은 것을 어머니가 예사 부스럼 다루듯 죽침으로 따서 고름을
빼었으므로 내 얼굴에 굵은 벼슬 자국이 생긴 것이다.
  내가 다섯 살 적에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셨다. 거기는 뒤는
산이요, 앞은 바다였다. 종조, 재종조, 삼종조, 여러 댁이 그리로 떠나가시기 때문에
우리 집도 따라간 것이었다. 여기서 이태를 살았는데 우리 집이 어떻게나 호젓한지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우리 문전으로 지나갔다. 산 어귀 호랑이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밤이면 한 걸음도 문 밖에는 나가지 못하였다. 낮이면
부모님은 농사하러 나가시거나 혹은 바다에 무엇을 잡으러 가시고, 나는 거기서 그 중
가까운 신풍 이생원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가 오는 것이 일과였다. 그 집
아이들 중에는 나와 동갑 되는 아이도 있었으나 두세 살 위 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애들이 '이놈 해줏놈 때려 주자'고 공모하여, 나는 무지하게 한 차례 매를 맞았다. 나는
분해서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서 큰 식칼을 가지고 다시 이생원 집으로 가서 기습으로
그놈들을 다 찔러 죽일 생각으로 울타리를 뜯고 있는 것을 열 여덟 살 된 그 집 딸이
보고 소리소리 질러 오라비들을 불렀기 때문에 나는 목적을 달치 못하고 또 그
놈들에게 붙들려 실컷 얻어 맞고 칼만 빼앗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칼을 잃은 죄로
부모님께 매를 맞을 것이 두려워서 어머니께서 식칼이 없다고 찾으실 때에도 나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또 하루는 집에 혼자 있노라니까 엿장수가 문전으로 지나가면서,
  "헌 유기나 부러진 수저로 엿들 사시오." 하고 외쳤다.
  나는 엿을 먹고 싶으나 엿장수가 아이들의 자지를 잘라 간다는 말을 어른들께 들은
일이 있으므로 방문을 꽉 닫아 걸고 엿장수를 부른 뒤에 아버지의 성한 숟가락을 발로
디디고 분질러서 반은 두고 반만 창구멍으로 내밀었다. 헌 숟가락이라야 엿을 주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엿장수는 내가 내어미는 반 동강 숟가락을 받고 엿을 한 주먹
뭉쳐서 창구멍으로 들이 밀었다. 내가 반 동강 숟가락을 옆에 놓고 한창 맛있게 엿을
먹고 있을 즈음에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 나는 사실대로 아뢰었더니, 다시 그런 일을
하면 경을 치겠다고 꾸중만 하시고 때리지는 아니하였다.
  또 한 번은, 역시 그때의 일로, 아버지께서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두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나 혼자만 있을 때에 심심은 하고 동구 밖
거릿집에 가서 떡이나 사 먹으리라 하고 그 스무 냥 꾸러미를 온통 꺼내어 허리에
감고 문을 나섰다. 얼마를 가다가 마침 우리 집으로 오시는 삼종조를 만났다.
  "너 이 녀석, 돈은 가지고 어디를 가느냐?" 하고 내 앞을 막아 서신다.
  "떡 사 먹으로 가요." 하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였다.
  "네 애비가 보면 이 녀석 매맞는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거라." 하고 삼종조는 내
몸에 감은 돈을 빼앗아다가 아버지를 주셨다. 먹고 싶은 떡도 못 사
먹고 마음이 자못 불평하여 집에 와 있노라니, 뒤따라 아버지께서 돌아오셔서 아무
말씀도 없이 빨랫줄로 나를 꽁꽁 동여서 들보 위에 매달고 회초리로 후려갈기시니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머니도 밭에서 아니 돌아오신 때라 말려줄 이도 없이 나는
매를 맞고 달려 있었다. 이때에 마침 장련 할아버지라는 재종조께서 들어오셨다. 이
어른은 의술을 하는 이로서 나를 귀애하시던 이다. 내게는 참말 천행으로 이 어른이
우리 집 앞을 지나시다가 내가 악을 쓰고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 들어오신
것이었다. 장련 할아버지는 들어오시는 길로 불문곡직하고 들보에 달린 나를 끌러 내려
놓으신 뒤에야 아버지께 까닭을 물으셨다. 아버지가 내 죄를 고하시는 말씀을 다
듣지도 아니하시고 장련 할아버지는, 나이는 아버지와 동갑이시지마는 아저씨의
위엄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치시던 회초리를 빼앗아서 아버지의 머리와 다리를 함부로
한참 동안이나 때리시고 나서야 비로소,
  "어린 것을 그렇게 무지하게 때리느냐?" 하고 말씀으로 책망하셨다. 아버지께서
매를 맞으시는 것이 퍽도 고소하고 장련 할아버지가 퍽도 고마웠다. 장련 할아버지는
나를 업고 들로 나가서 참외와 수박을 실컷 사 먹이고 또 그 할아버지 댁으로 업고
가셨다. 장련 할아버지의 어머니 되시는 종증조모께서도 그 아드님으로부터 내가
아버지한테 매맞은 연유를 들으시고,
  "네 아비 밉다. 집에 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살자."
하고 아버지의 잘못을 누누이 책망하시고 밥과 반찬을 맛있게 하여 주셨다. 나는 매우
마음이 기쁘고 아버지가 그 할아버지한테 맞던 것을 생각하니 상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모양으로 이 댁에서 여러 날을 묵어서 집에 돌아왔다.
  한 번은 장마비가 많이 와서 근처의 샘들이 넘쳐 여러 갈래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나는 빨강이 파랑이 물감통을 집에서 꺼내다가 한 시내에는 빨강이를 풀고, 또 한
시내에는 파랑이를 풀어서 붉은 시내, 푸른 시내가 한데 모여서 어울려지는 양을
장난으로 구경하고 좋아하다가 어머니께 몹시 매를 맞았다.
  종조께서 이 땅에서 작고하셔서 백여 리나 되는 해주 본향으로 힘들여 행상한 것이
별미가 된 것인지,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이르러서는 여기 와서 살던 바툰 일가들이
한 집 두 집 해주 본향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도 이 통에 텃골로 돌아올 때에 나는
어른들의 등에 업혀 오던 것이 기억난다.
  고향에 돌아와서 우리 집은 농사로 살아가게 되었으나 아버지께서 비록 기성명
정도이지마는 허위대가 좋고 성정이 호방하고 술이 한량이 없으셔서 강씨 이씨라면
만나는 대로 막 때려 주고는 해주 감영에 잡혀 갇히기를 한 해에도 몇 번씩 하셔서
문중에 소동을 일으키셨다. 인근 양반들이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시골 습관에 누가 사람을 때려서 상처를 내면 맞은 사람을 때린
사람의 집에 떠메다가 누이고 그가 죽나 살아나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한 달에도 몇 번씩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 죽게 된 사람을 떠메다가 사랑에
누이곤 하였다. 아버지가 이렇게 사람을 때리시는 것은 비록 취중에 한 일이라
하더라도 다 무슨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신께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양반이나 강한 자들이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볼 때면 참지 못하시고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들식으로 친불친을 막론하고 패어 주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불같은 성정이신 줄을 알므로, 인근 상놈들은 두려워 공경하고 양반들은 무서워서
피하였다.
  해마다 세말이 되면 아버지는 닭의 알, 담배 같은 것을 많이 장만하여서 감영의
영리청, 사령청에 선사를 하였다. 그러면 그 회사로 책력이며 해주먹 같은 것이 왔다.
이것은 강씨 이씨 같은 양반들이 감사나 판관에게 가 붙는 것에 대응하는 수였다.
영리청이나 사령청에 친하게 하는 것을 계방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계방이 되어 두면
감사의 영문이나 본아에 잡혀가서 영리청이나 옥에 갇히는 일이 있더라도 영리와
사령들이 사정을 두기 때문에 갇히는 것은 명색 뿐이요, 기실은 영리, 사령들과 같은
방에서 같은 밥을 먹고 편히 지내며 또 설사 태장, 곤장을 맞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령들은 매우 치는 시늉만 하고, 맞는 편에서는 죽어가는 엄살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뿐더러 만일 아버지께서 되잡아 양반들을 걸어서 소송을 하여서 그들이
잡혀오게 되면 제아무리 감사나 판관에게 뇌물을 써서 모면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편인 범 같은 영속들에게 호되게 경을 치고, 많은 재물을 허비하게 된다. 이렇게 망한
부자가 일년 동안에 십여 명이나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인근 양반들은 그를 달래려 함인지 아버지를 도존위에
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도존위 행공을 할 때에는 다른 도존위와는 반대로 양반에게
용서없이 대하고, 빈천한 사람들에게는 후하였다. 세금을 받는 데도 빈천한 사람의 것은
자담하여 내주기는 하였을망정 그들에게 가혹히 하는 일은 없었다. 이 때문에 3년이
못되어서 아버지는 공전흠포로 면직을 당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인근에 사는
양반들의 꺼림과 미움을 받아서 그들의 아낙네와 아이들까지도 김순영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차를 떨었다.
  아버지의 아이 적 별명은 효자였다. 그것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가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할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으셨기 때문에 소생하셔서
사흘을 더 사셨다는 데서 생긴 것이다.
  아버지 4형제 중에 백부(휘백영)는 보통 농군이셨고, 셋째 숙부도 특기할 일이
없으나 넷째 계부(휘준연)가 아버지와 같이 특이한 편이셨다. 계부는 국문을 배우는
데도 한겨울 동안에 가자에 기억자도 못 깨우치고 말았으되, 술은 무량으로 자시고 또
주사가 대단하여서 취하기만 하면 꼭 풍파를 일으키는데 아버지는 양반에게만 주정을
하셨지마는 준영 계부는 아무리 취하여도 양반에게는 감히 손을 못 대고 인가
사람에게만 덤비셨다. 그러다가 조부님께 매를 얻어 맞으시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내가 아홉 살 적에 조부님 상사가 났는데 장례날에 이 삼촌이 상여 메는 사람들에게
야료를 하여서 결국은 그를 결박을 지어 놓고야 장례를 모셨다. 장례를 지낸 뒤에
종증조의 발의로 문회를 열고 이러한 패류는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단단히 징치를
하여서 후환을 막아야 한다고 의논한 결과, 준영 삼촌을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발뒤꿈치를 베었으나, 분김에 한 일이라 힘줄은 다 끊어지지 아니하여서
병신까지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가 조부댁 사랑에 누워서 호랑이처럼 영각을 하는
바람에 나는 무서워서 그 근처에도 못 가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니 상놈의
소위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때에 어머니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의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이니 두고 보아서 네가 또 술을 먹는다면
나는 자살을 하여서 네 꼴을 안 보겠다."
  나는 이 말씀을 깊이 새겨 들었다.
  이때 쯤에는 나도 국문을 배워서 이야기책은 읽을 줄 알았고, 천자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얻어 배워서 다 떼었다. 그러나 내가 글공부를 하리라고 결심한 데는 한
동기가 있었다.
  하루는 어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들었다. 몇 해 전 일이다. 문중에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서울 갔던 길에 사다가 두셨던 관을 밤에 내어 쓰고
새사돈을 대하셨던 것이 양반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그 관은 열파를 당하고 그로부터
다시는 우리 김씨는 관을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몹시 울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어찌해서 양반이 되고, 우리는 어찌해서 상놈이 되었는가고
물었다. 어른들이 대답하는 말은 이러하였다. 방아메 강씨도 그 조상은 우리 조상만
못하였지마는 일문에 진사가 셋이나 살아 있고, 자라소 이씨도 그러하다고, 나는
어떻게 하면 진사가 되느냐고 물었다. 진사나 대과나 다 글을 잘 공부하여 큰 선비가
되어서 과거에 급제를 하면 된다는 대답이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나는 부쩍 공부할 마음이 생겨서 아버지께 글방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지도 주저하지 아니할 수 없으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으니
이웃 동네 양반네 서당에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반네 서당에서 나를
받아줄지 말지도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또 거기 들어간다 하더라도 양반의 자식들의
등살에 견디어 낼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얼른 결단을 못하다가 마침내 우리
동네 아이들과 이웃 동네 상놈의 아이들을 모아서 새로 서당을 하나 만들고 청수리
이생원이라는 양반 한 분을 선생으로 모셔 오기로 하였다. 이생원은 지체는
양반이지마는 글이 얕아서 양반 서당에서는 데려가는 데가 없기 때문에 우리 서당으로
오신 것이었다.
  이 선생이 오신다는 날, 나는 머리를 빗고 새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를 따라서 마중을
나갔다. 저리로서 쉰 남짓 되어 보이는 키가 후리후리한 노인 한 분이 오시는데
아버지께서 먼저 인사를 하시고 나서 날더러,
  "창암아, 선생님께 절하여라."하셨다. 나는 공손하게 너붓이 절을 하고 나서 그 선생을
우러러보니 신인이라 할지 하느님이라 할지 어떻게나 거룩해 보이는지 몰랐다.
  우선 우리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우리 집에서 선생의 식사를 받들기로 하였다.
그때에 내 나이가 열 두 살이었다.
  개학하기 전날 나는 '마상봉한식' 다섯 자를 배웠는데 뜻은 알든 모르든 기쁜 맛에
자꾸 읽었다. 밤에도 어머니께서 밀매가리하시는 것을 도와드리면서 자꾸 외웠다.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선생님 방에 나가서 누구보다도 먼저 배워서 밥그릇 망태를
메고 먼 데서 오는 동무들을 가르쳐 주었다.
  이 모양으로 우리 집에서 석 달을 지내고는 산골 신 존위 집 사랑으로 글방을
옮기게 되어서 나는 밥그릇 망태를 메고 고개를 넘어서 다녔다. 집에서 서당에
가기까지 서당에서 집에 오기까지 내 입에서는 글 소리가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글
동무들 중에는 나보다 정도가 높은 아이도 있었으나 배운 것을 강을 하는 데는 언제나
내가 최우등이었다. 이러한지 반 년 만에 선생과 신 존위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필경
이 선생을 내보내게 되었는데 신 존위가 말하는 이유는 이 선생이 밥을 너무 많이
자신다는 것이거니와 사실은 그 아들이 둔재여서 공부를 잘 못하는데 내 공부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시기함이었다. 한 번은 월강(한 달에 한 번 하는 시험) 때에 선생에
내게 조용히 부탁하신 일이 있었다. 내가 늘 우등을 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잘못하고 선생이 뜻을 물어도 일부러 모른 체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하오리다
하고 약속하고 그대로 하였다. 이리하여 이날은 신 존위의 아들이 처음으로 장원을
하였다. 신 존위는 대단히 기뻐서 이날 닭을 잡고 한턱을 잘 내었다. 그러나 번번이
신 존위의 아들을 장원시키지 못한 죄로 이 선생을 물러나게 하였으니 참으로 상놈의
행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루는 내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나를 불러 작별 인사를 하실 때에,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서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소리를 내어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나는 며칠 동안은 밥도 잘
아니 먹고 울기만 하였다.
  그 후에도 어떤 돌림 선생 한 분을 모셔다가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갑자기 전신불수가 되셔서 자리에 누우셨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전폐하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근본 빈한한 살림에 의원이야
약이야 하고 가산을 탕진한 끝에 겨우 아버지는 반신불수로 변하여서 한쪽 팔과
다리를 쓰시게 된 것만도 천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반신불수로서는 살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여서라도 병은 고쳐야
하겠다 하여 어머니는 병신 아버지를 모시고 무전여행을 나서시게 되었다. 문전걸식을
하면서 고명 의원을 찾아 남편의 병을 고치자는 것이었다. 집도 가마솥도 다 팔아
없어지고, 나는 백모님 댁에 맡긴 몸이 되어서 종형들과 소 고삐를 끌고 산과 들로
다니며 세월을 보내었다.
  부모님은 안악, 신천, 장연 등지로 유리하시는 동안에 아버지 병환이 신기하게도
차도가 있어 못 쓰던 팔다리를 잘은 못해도 쓰셨다. 일가들이 얼마씩 추렴을 내어서
의리를 장만하고, 나는 또 서당에를 다니게 되었다.
  책은 남의 것을 빌어서 읽는다 하더라도 지필묵 값이 나올 데가 없었다. 어머니가
김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지필묵을 사주실 때에는 어찌나 고마운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내 나이가 열 네 살이 되매 선생이라는 이가 모두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아니하였다. 벼 열 섬 짜리, 닷 섬 짜리 하고 훈료가 많고 적은 것으로 선생의 학력을
평가하였다. 그들은 다만 글만 부족할 뿐 아니라 그 마음씨나 일하는 것에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밥 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행문이나 배우라는 것이었다. '우명문표사단'하는 땅문서 쓰기,
'우근진소지단'하는 소장 쓰기, '유세차감소고우'하는 축문 쓰기,
'복지제기자미유항려'라는 혼서지 쓰기, '복미심차시'하는 편지 쓰기를 배우라 하시므로,
나는 틈틈이 이 공부를 하여서 무식촌 중에 문장이 되어서 문중에서는 내가 장차 존위
하나는 하리라고 촉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글은 이제 겨우 속문 정도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뜻은 한 동네의 존위에 있지 아니하였다. "통감", "사략"을 읽을 때에
'왕후장영유종호(제왕, 제후, 장수, 재상의 씨(혈통)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하는 진승의 말이나 칼을 빼어서 뱀을 베었다는 유방의 일이나 빨래하는
아낙네에게 밥을 빌어먹은 한신의 사적을 볼 때에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바람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세로는 고명한 스승을 찾아갈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서도 무척 걱정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침 공부할 길이 하나 뚫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으로
10리쯤 되는 학골이라는 곳에 정문재라는 이가 글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 이의 문벌은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상놈이었으나 과문(과거하는 글)으로는 당시에 굴지되는 큰
선비여서 그 문하에는 사처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 정선생이 내 백모와
재종간이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간청하여 훈료(수업료)없이 통학하며 배우는 허락을
얻으셨다. 이에 나는 날마다 밥망태를 메고 험한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가는 일이 많았다.
  제작으로는 과문의 초보인 대고풍 십팔구요, 학과로는 한당시와 대학통감 등이요,
습자에서는 분판만을 썼다.
  이때에 임진경과를 해주에서 보인다는 공포가 났으니 이것이 우리 나라의 마지막
과거였다. 어떤 날 정선생은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하시고 나도 과거를 보기 위하여
명지(과거에 글지어 바치는 종이)를 쓰는 연습으로 장지를 좀 쓸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천신만고로 장지 다섯 장을 구해 오셔서 나는 그 다섯 장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글씨를 익혔다.
  과거날이 가까워오매 우리 부자는 돈이 없으므로 과거중에 먹을 좁쌀을 지고
정선생을 쫓아 해주로 갔다. 여관에 들 형편이 못되므로 전에 아버지께서 친해 두셨던
계방에 사처를 정하였다.
  과거날이 왔다. 선화당 옆에 있는 관풍각 주위에는 새끼줄을 둘러 늘였다. 정각에
부문을 한다는데 선비들이 접(글방)을 제 접 이름을 쓴 백포기를 장대 끝에 높이 들고
모여들었다. 산동접, 석담접 이 모양이었다. 선비들은 검은 베로 만든 유건을 머리에
쓰고, 도포를 입고 접기를 따라 꾸역꾸역 밀려들어 좋은 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앞장선
용사패들이 아우성을 하는 것도 볼만하였다. 원래 과장에는 노소도 없고 귀천도 없이
무질서한 것이 유풍이라 한다. 또 가관인 것은 늙은 선비들의 걸과(과거에 급제를
시켜 달라고 비는 것)라는 것이다. 둘러 늘인 새끼 그물 구멍으로 목을 쑥 들이 밀고
이런 소리를 외치는 것이다.
  "소생의 성명은 아무이옵는데, 먼 시골에 거행하면서 과거마다 참예하였사옵는데
금년이 일흔 몇 살이올시다. 요 다음은 다시 참가 못하겠사오니 이번에 초시라도
합격이 되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 모양으로 혹은 큰소리로 부르짖고, 혹은 방성대곡도 하니 한편 비루도 하거니와
또 한편 가련도 하였다.
  내 글은 짓기는 정선생이 하시고 쓰기만 내가 하기로 하였으나 내가 과거를 내
이름으로 아니 보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지를 드린다는 말에 감복하여서 접장 한
분이 내 명지를 써 주기로 하였다. 나보다는 글씨가 낫기 때문이었다. 제 글과 제
글씨로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으나 차작으로라도 아버지가 급제를 하셨으면 좋을 것
같았다.
  차작으로 말하면 누구나 차작 아닌 것이 없었다. 세력 있고 재산있는 사람들은 다들
글 잘하는 사람에게 글을 빌고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글씨를 빌어서 과거를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좋은 편이었다. 어찌 되었던지 서울 권문세가의 청편지 한 장이나
시관의 수청기생에게 주는 명주 한 필이 진사 급제가 되기에는 글 잘하는 큰 선비의
글보다도 빨랐다. 물론 우리 글 따위는 통인의 집 식지감이나 되었을 것이요, 시관의
눈에도 띄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진사 급제는 미리 정해 놓고 과거는 나중 보는
것이었다.
  이번 과거에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아무리 글 공부를 한댔자 그것으로 발천하여
양반이 되기는 그른 세상인 줄을 깨달았다. 모처럼 글을 잘해서 세도 있는 자제들의
대서인이나 되는 것이 상지상일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과거에 실망한 뜻을 아뢰었더니 아버지도 내가 바로 깨달았다고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그러면 풍수 공부나 관상 공부를 하여 보아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조상님네 산소를 잘 써서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
보아서 성인 군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유리하게 여겨서 아버지께 청하여 "마의상서"를 빌어다가
독방에서 석달 동안 꼼짝 아니하고 공부하였다. 그 방법은 면경을 앞에 놓고 내
얼굴을 보면서 일변 얼굴의 여러 부분의 이름을 배우고 일변 내상의 길흉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얼굴을 관찰해 보아도 귀격이나 부격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겨, 빈격, 흉격 뿐이었다. 전자에 과장에서 실망하였던 것을 상서에서나 회복하려
하였더니, 제 상을 보니 그보다도 더욱 낙심이 되었다. 짐승 모양으로 그저 살기
위해서 살다가 죽을까. 세상에 살아 있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나에게 오직 한 가지 희망을 주는 것은 "마의상서"중에 있는 이
구절이었다--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좋지
못하던 사람으로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이 무엇인가. 여기 대하여서는
"마의상서"는 아무 대답도 주지 못하였다. 이래서 상서는 덮어 버리고 지가서를 좀
보았으나 거기도 취미를 얻지 못하고, 이번에는 병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손무자",
"오기자", "삼략", "육도" 등을 읽어 보았다. 알지 못할 것도 많으나, 장수의 재목을
말한 곳에,

  태산이 무너지더라도 마음을 동치 말고,
  사졸로 더불어 달고 씀을 같이 하며,
  나아가고 물러감을 범과 같이 하며,
  남을 알고 저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지지 아니하리라.
  (태산복어전 심불망동 여사졸동감고)
  (진퇴여호 지피지기 백전불패)

  이 구절이 내 마음을 끌었다. 이때에 내 나이가 열 일곱 살, 나는 일가 아이들을
모아서 훈장질을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병서를 읽고 일년의 세월을 보냈다.
  이때에 사방에는 여러 가지 괴질이 돌았다. 어디서는 진인이 나타나서 바다에
달리는 화륜선을 못 가게 딱 잡아 놓고 세금을 받고야 놓아 주었다는 등, 머지
아니하여 계룡산에 정 도령이 도읍을 할 터이니 바른 목에 가 있어야 새 나라에
양반이 된다 하여 세간을 팔아 가지고 아무개는 계룡산으로 이사를 하였다는 등, 이러한
소리였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남쪽으로 20리쯤 가서 갯골이란 곳에 사는 오응선과 그 이웃
동네에 사는 최유현이라는 사람이 충청도 최도명이라는 동학 선생에게서 도를 받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방에 들고 나기에 문을 열지 아니하며, 문득 있다가 문득
없어지며, 능히 공중으로 걸어다니므로 충청도 그 선생 최도명한테 밤 동안
다녀온다고 하였다. 나는 이 동학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 이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남에게 들은 말대로 누린 것, 비린 것을 끊고 목욕하고 새 옷을 입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야 받아준다는 것이었다. 내 행색으로 말하면 머리는 빗어서 땋아 늘이고
옥색 도포에 끈목띠를 띠었다. 때는 내가 열 여덟 살 되던 정초였다.
  갯골 오씨 집 문전에 다다르니 안에서 무슨 글을 읽는 소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보통 경전이나 시를 외우는 소리와는 달라서 마치 노래를 합창하는 것과 같았다.
공문에 나아가 주인을 찾았더니 통천관을 쓴 말쑥한 젊은 선비 한 사람이 나와서 나를
맞는다. 내가 공손히 절을 한즉 그도 공손히 맞절을 하기로, 나는 황공하여서 내
성명과 문벌을 말하고 내가 비록 성관을 하였더라도 양반댁 서방님인 주인의 맞절을
받을 수 없거늘, 하물며 편발 아이에게 이런 대우가 과도한 것을 말하였다. 그랬더니
선비는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그는 동학도인이라 선생의 훈계를 지켜 빈부귀천에
차별이 없고 누구나 평등으로 대접하는 것이니 미안해 할 것 없다고 말하고 내가
찾아온 뜻을 물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매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내가 도를 들으러
온 뜻을 고하니 그는 쾌히 동학의 내력과 도리의 요령을 설명하였다. 이 도는 용담
최수운 선생께서 천명하신 것이나, 그 어른은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님
최해월 선생이 대도주가 되셔서 포교를 하신다는 것이며, 이 도의 종지로 말하면
말세의 간사한 인류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서 새 백성이 되어 가지고 장래에
진주(참진 임금주:참 임금)를 뫼시어 계룡산에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 하는 것 등을
말하였다. 나는 한 번 들으매 심히 환희심이 발하였다. 내 상호가 나쁜 것을 깨닫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맹세한 나에게는 하느님을 몸에 모시고 하늘도를 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일일 뿐더러 상놈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씨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새 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의 과거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의 부패함에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입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입도절차를 물은 즉 쌀 한
말, 백지 세 권, 황초 한 쌍을 가지고 오면 입도식을 행하여 준다고 하였다.
"동경대전", "팔편가사", "궁을가" 등 동학의 서적을 열람하고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께
오씨에게서 들은 말을 여쭙고 입도할 의사를 품하였더니 아버지께서는 곧 허락하시고
입도식에 쓸 예물을 준비하여 주셨다. 이렇게 하여서 내가 동학에 입도한 것이었다.
  동학에 입도한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동시에 포덕(전도)에 힘을 썼다.
아버지께서도 입도하셨다. 이때의 형편으로 말하면 양반은 동학에 오는 이가 적고
나와 같은 상놈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내가 입도한 지 불과 몇 개월만에
연비(포덕하여 얻은 신자라는 뜻)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 이름이 널리
소문이 나서 도를 물으러 찾아오는 이도 있고 내게 대한 무근지설을 전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대가 동학을 하여 보니 무슨 조화가 나던가?"
  하는 것이 가장 흔히 내게 와서 묻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요술과 같은 조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 도의 조화이니라."
  이것이 나의 솔직하고 정당한 대답이건마는 듣는 이는 내가 조화를 감추고
자기네에게 아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창수(창암이라던
아이명을 이때부터 이 이름을 썼다)는 한 길이나 떠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모양으로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섞어 전하여서 내 명성이
황해도 일대 뿐만 아니라 멀리 평안남도에까지 퍼져서 당년에 내 밑에 연비가 무려
수천에 달하였다. 당시 황평 양서 동학당 중에서 내가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서 많은
연비를 가졌다 하여 나를 아기 접주라고 별명 지었다. 접주라는 것은 한 접의 수령이란
말로서 위에서 내리는 직함이다.
  이듬해인 계사년 가을에 해월(최시형) 대도주로부터 오응선, 최유현 등에게 각기
연비의 성명 단자(명부)를 보고하라는 경통(공함이라는 뜻)이 왔으므로 황해도 내에서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인망 높은 도유 열 다섯 명을 뽑을 때에 나도 뽑혔다. 편발로는
불편하다 하여 성관하고 떠나게 되었다. 연비들이 내 노자를 모아 내고 또 도주님께
올릴 예물로는 해주 향목도 특제로 맞추어 가지고 육로, 수로를 거쳐서 충청도 보은군
장안이라는 해월선생 계신 데 다다랐다. 동네에 쑥 들어서니 이 집에서도 저 집에서도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하는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고 또 일변으로는 해월 대도주를 찾아서 오는 무리,
일변으로는 뵈옵고 가는 무리가 연락부절하고 집이란 집은 어디나 가득 찼었다.
우리는 접대인에게 우리 일행 15명의 명단을 부탁하여 대도주께 우리가 온 것을
통하였더니, 한 시간이나 지나서 황해도에서 온 도인을 부르신다는 통지가 왔다. 우리
일행 열 다섯은 인도자를 따라서 해월 선생의 처소에 이르러 선생 앞에 한꺼번에 절을
드리니 선생은 앉으신 채로 상체를 굽히고 두 손을 방바닥에 짚어 답배를 하시고 먼
길에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다며 간단히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가지고 온
예물과 도인의 명단을 드리니, 선생은 맡은 소임을 부르셔서 처리하라고 명하셨다.
우리가 불원천리하고 온 뜻은 선생의 선풍도골도 뵈오려니와, 선생께 무슨 신통한
조화 줌치나 받을까 함이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선생은 연기가 육십은 되어
보이는데 구레나룻이 보기 좋게 났으며 약간 검게 보이고 얼굴은 여위었으나 맑은
맵시다. 크고 검은 갓을 쓰시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일을 보고 계셨다. 방문 앞에 놓인
수철 화로에서 약탕관이 김이 나며 끓고 있었는데 독삼탕 냄새가 났다. 선생이
잡수시는 것이라고 했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가장
친근하게 모시는 이는 손응구, 김연구, 박인호 같은 이들인데, 손응구는 장차 해월
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김은 연기가
사십은 되어 보이는데 순실한 농부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다 해월 선생의 사위라고
들었다. 손씨는 유식해 보이고 '천을천수'라고 쓴 부적을 보건대 글씨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일행이 해월 선생 앞에 있을 때에 보고가 들어왔다.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가 벌써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또 후보가 들어왔다. 어떤 고을
원이 도유(동학 도를 닦는 선비)의 전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선생은 진노하는 낯빛을 띠고 순경상도 사투리로,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우지."
  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이었다. 각지에서 와서 대령하던 대접주들이
물끓듯 살기를 띠고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
  우리 황해도에서 온 일행도 각각 접주라는 첩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두건 속에
'해월인'이라고 전자로 새긴 인이 찍혀 있었다.
  선생께 하직하는 절을 하고 물러나와 잠시 속리산을 구경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곳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이고 평복에 칼 찬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었다. 광혜원 장거리에 오니 만 명이나 됨직한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평시에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길가에 앉혀 놓고
짚신을 삼기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증거를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 부근
촌락에서 밥을 짐으로 지어 가지고 도소(이를테면 사령부)로 날라 오는 것을 무수히
길에서 만났다. 논에서 벼를 베던 농민들이 동학군이 물밀 듯 모여드는 것을 보고 낫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도 보았고, 서울에 이르러서는 경군(서울 군사)이 삼남을 향해서
행군하는 것도 만났다. 해주에 돌아왔을 때는 9월이었다.
  황해도 동학당들도 들먹들먹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양반과 관리의 압박으로
도인들의 생활이 불안하였고 둘째로는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으로부터
향응하라는 경통이 빗발치듯 왔다. 그래서 15접주를 위시하여 여러 두목들이 회의한
결과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제1회 총소집의 위치를 해주 죽천장으로 정하고 각처
도인에게 경통을 발하였다. 나는 팔봉산 밑에 산다고 하여서 접 이름을 팔봉이라고
짓고 푸른 갑사에 팔봉도소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고 표어로는 척양척왜 넉 자를 써서
높이 달았다. 그리고는 서울서 토벌하러 내려올 경군과 왜병과 싸우기 위하여 연비
중에서 총기를 가진 이를 모아서 군대를 편재하기로 하였다. 나는 본시 산협장쟁이요,
또 상놈인 까닭에 산포수 연비가 많아서 다 모아본즉 총을 가진 군사가 7백명이나
되어 무력으로는 누구의 접보다도 나았다. 인근 부호의 집에 간직하였던 약간의
호신용 무기도 모아들였다.
  최고회의에서 작정한 전략으로는 우선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성을 빼앗아 탐관오리와
왜놈을 다 잡아 죽이기로 하고 팔봉 접주 김창수로 선봉장을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병서에 소양이 있고 내 부대에 산 포수가 많은 것도 이유겠지마는
자기네가 앞장을 서서 총알받이가 되기 싫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쾌히 선봉이 되기를 허락하고 다른 부대더러 따라 오라 하고 나는
'선봉'이라고 쓴 사령기를 들고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해주성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해주성 서문 밖 선녀산에 진을 치고 총공격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총지휘부에서 총공격령이 내리고 작전 계획은 선봉장인 나에게 일임한다는
명령이 왔다. 나는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본부에 아뢰고 곧 작전을 개시하였다. 지금
성내에 아직 경군은 도착하지 아니하고 오합지중으로 된 수성군 2백 명과 왜병 일곱
명이 있을 뿐이니,. 선발대로 하여금 먼저 남문을 엄습케 하여 수성군의 힘을 그리로
끌게 한 후에 나는 서문을 깨뜨릴 터인즉 총소(도소에 대한 말이니 총사령부라는
뜻)에서 형세를 보아서 허약한 편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총소에서는 내 계획을
채용하여 한 부대를 남문으로 향하여 행진케 하였다.
  이때에 수명의 왜병이 성 위에 올라 대여섯 방이나 시험 사격을 하는 바람에
남문으로 향하던 선발대는 도망하기 시작하였다. 왜병은 이것을 보고 돌아와서
달아나는 무리에게 총을 연발하였다. 나는 이에 전군을 지휘하여서 서문을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돌연 총소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리고 우리 선봉대는
머리도 돌리기 전에 따르던 군사가 산으로 들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한 군사를
붙들어 퇴각하는 까닭을 물으니 남문밖에  도유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은
까닭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니 선봉대만 혼자 머물 수도 없어서 비교적 질서 있게 퇴각하여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 되는 회학동 곽감역 댁에 유진하기로 하였다. 무장한 군사는 축이 안
나고 거의 전부 따라와 있는 것이 대견하였다.
  나는 이번의 실패에 분개하여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에 힘을 다하기로 하였다.
동학 도유거나 아니거나 전에 장교의 경험이 있는 자는 비사후폐로 초빙하여 군사를
훈련하는 교관을 삼았다. 총 쏘기는 말할 것도 없고 행보하는 법이며 체조며 온갖
조련을 다하였다. 좋은 군대를 만드는 것이 싸움에 이기는 비결이라고 믿은 것이다.
하루는 어떤 사람 둘이 내게 면회를 청하였다. 구월산 밑에 사는 정덕현, 우종서라는
사람들이었다.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그 대답이 놀라웠다.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것이 없는데 들은즉 내가 좀 낫단 말을 듣고 한 번 보러 왔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내
부하들이 두 사람의 말이 심히 불공함을 분개하였다. 나는 도리어 부하를 책망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이상한 손님과 셋이서 마주 앉았다. 나는 공손히 두 사람을 향하여,
'선생'이라 존칭하고 이처럼 찾아와 주시니 무슨 좋은 계책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런즉 정씨가 더욱 교만한 태도로 말하기를 비록 계책을
말하기로니 네가 알아듣기나 할까, 실행할 자격이 없으리라고 비웃은 뒤에, 더욱
호기 있는 어성으로, 동학 접주나 하는 자들은 어줍지 않게 호기가 충천하여 선비를
초개와 같이 보니 너도 그런 사람이 아니냐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더욱 공손한
태도로,
  "이 접주는 다른 접주와는 다르다는 것을 선생께서 한 번 가르쳐 보신 뒤에야 알
것이 아닙니까?"하였다. 그들은 둘 다 나보다 십년은 연상일 것 같았다.
  그제야 정씨가 혼연히 내 손을 잡으며 계책을 말하였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1. 군기를 정숙히 하되 비록 병졸을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
  2. 인심을 얻을 것이니, 동학군이 총을 가지고 민가로 다니며 집곡이니 집전이니
하고 강도적 행위를 하는 것을 엄금할 것.
  3. 초현이니, 어진 이를 구하는 글을 돌려 널리 좋은 사람을 모을 것.
  4. 전군을 구월산에 모으고 훈련할 것.
  5. 재령, 신천 두 고을에 왜가 사서 쌓아 둔 쌀 2천 석을 몰수하여 구월산 패엽사에
쌓아 두고  군량으로 쓸 것.
  나는 곧 이 계획을 실시하기로 하고 즉시 전군을 집합장에 모아 정씨를 모주라,
우씨를 종사라고 공포하고 전군을 지휘하여 두 사람에게 최경례를 시켰다. 그리고는
구월산으로 진을 옮길 준비를 하던 차에, 어느 날 밤 신천 청계동 안진사로부터
밀사가 왔다. 안진사의 이름은 태훈이니 그의 맏아들 중근은 나중에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이다. 그는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서울에까지 떨치고, 또 지략도 있어 당시
조정의 대관들까지도 그를 무섭게 대우하였다. 동학당이 일어나매 안진사를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청계동 자택에 의려소를 두고 그의 자제들로 하여금
모두 의병이 되게 하고 포수 3백명을 모집하여서 벌써 신천 지경 안에 있는 동학당을
토벌하기에 많은 성공을 하여서 각 접이 다 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던 터였다.
  나는 정 모주로 하여금 이 밀사를 만나게 하였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나의 본진이
있는 회학동과 안진사의 청계동이 불과 20리 상거이나 만일 내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패하면 내 생명과 명성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러하면 좋은 인재를
하나 잃어버리게 될 것인즉 안진사가 나를 위하는 호의로 이 밀사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곧 나는 참모회의를 열어서 의논한 결과 저편에서 나를 치지 아니하면
나도 저편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 서로 도울 것이라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예정대로 나의 군사는 구월산으로 집결하였다. 재령, 신천에 있던 쌀도 패엽사로
옮겨왔다. 한 섬을 져오면 서 말을 준다고 하였더니 당일로 다 옮겨졌다. 날마다 군사
훈련도 여행하였다. 또 인근 각동에 훈령하여 동학당이라고 자칭하고 민간에 행패하는
자를 적발하여 엄벌하였더니 며칠이 안 지나서 질서가 회복되고 백성이 안도하였다.
또 초현문을 발표하여 널리 인재도 수탐하여 송종호, 허곤 같은 유식한 사람을 얻었다.
패엽사에는 하온당이라는 도승이 있어서 수백 명 남녀 승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나는
가끔 그의 법설을 들었다.
  이러는 동안에 경군과 왜병이 해주로 접령하고 옹진, 강령 등지를 평정하고 학령을
넘어온다는 기별이 들렸다. 그들의 목표가 구월산일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화근은 경군이나 왜병에 있지 아니하고 나와 같은 동학당인 이동엽의 군사에
있었다. 이동엽은 구월산 부근 일대에 가장 큰 세력을 잡은 접주로서 그의 부하는
나의 본진 가까이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함부로 하였다. 우리 군에서는 사정없이
그들을 체포하여 처벌하였기 때문에 피차간에 반목이 깊어진데다가, 우리 군사들 중에
우리 군율에 의한 형벌을 받고 앙심을 품은 자와, 노략질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들이 이동엽의 군대로 달아나는 일이 날로 늘었다. 이리하여 이동엽의 세력은 날로
커지고 내 세력은 날로 줄었다. 이에 나는 최고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나는
동학접주인 칭호를 버리기로 하고 군대를 허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이는 나의
병권을 빼앗으려 함이 아니요, 나를 살려내고자 하는 계책이었다. 이에 허곤은
송종호로 평양에 있는 장호민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가지고 평양으로 떠났으니,
이것은 황주 병사의 양해를 얻어서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함이었다.
  이때는 내 나이가 열 아홉, 갑오년 섣달이었다. 나는 몸에 열이 나고 두통이
심하여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하은당 대사는 나를 그의 사처인 조실에 혼자 있게
하고 몸소 병구완을 하였다. 며칠 후에 내 병이 홍역인 것이 판명되어서 하은당은,
  "홍역도 못한 대장이로군.'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홍역을 다스린 경험이 있는 늙은 승수자 한 분을 가리어 내
조리를 맡게 하였다.
  이렇게 병석에 누워 있노라니, 하루는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패엽사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있고, 뒤이어 어지러이 총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절 경내에는
양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원래 사기가 저상한 데다가 장수를 잃은 나의
군사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일패도지하고, 나의 본진은 적의 제압한 바 되고
말았다. 나의 군사들은 보기도 흉하게 도망하여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이동엽의 호령이 들렸다.
  "김접주에게 손을 대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영장 이종선 이놈 막 잡아 죽여라."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을 차고 마루 끝에 뛰어나서서,
  "이종선은 내 명령을 받아서 무슨 일이나 한 사람이니 만일 이종선이가 죽을 죄를
지었거든 나를 죽여라."
  하고 외쳤다.
  이동엽이 부하에게 명하여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게 하고 이종선만을 끌고
나가더니, 이윽고 동구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이동엽의 부하는 다 물러가고 말았다.
  이종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동구로 달려 내려갔다. 과연 그는 총에 맞아
쓰러졌고 그의 옷에서는 아직도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안고
통곡하다가 내 저고리를 벗어 그 머리를 싸주었다. 그 저고리는 내가 남의 웃사람이
되었다 하여 어머니께서 지어 보내선 평생에 처음 입어 보는 명주 저고리였다.
동민들은 백설 위에 내가 벌거벗고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복을 가져다가 입혀
주었다. 나는 동민들을 지휘하여 이종선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이종선은 함경도 정평 사람으로, 장사차 황해도에 와서 살던 사람이다. 총사냥을
잘하고, 비록 무식하나 사람을 거느리는 재주가 있어서 내가 그를 화포령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종선을 매장한 나는 패엽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부산동 정덕현 집으로 갔다.
내게서 그동안 지낸 일을 들은 정씨는 태연한 태도로,
  "이제 형은 할 일 다한 사람이니 나와 함께 평안히 유람이나 떠나자."
  하고 내가 이종선의 원수 갚을 말까지도 눌러 버리고 말았다. 이동엽이가 패엽사를
친 것은 제 손으로 저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경군과 왜병이 이동엽을 치기를 재촉한
것이라고 하던 정씨의 말이 그대로 맞아서 정씨와 내가 몽금포 근처에 숨어 있는
동안에 이동엽은 잡혀가서 사형을 당하였다. 구월산의 내 군사와 이동엽의 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의 동학당은 전멸이 된 셈이었다.
  몽금포 근동에 석 달을 숨어 있다가 나는 정씨와 작반하여 텃골에 부모를 찾아
뵈옵고 정씨의 의견을 안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나는 패군지장으로
일찍 적군이던 안진사의 밑에 들어가 포로 신세가 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나,
정씨는 안진사의 위인이 그렇지 아니하며 심히 인재를 사랑한다는 말과, 전에
안진사가 밀사를 보낸 것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자기에게 오라는 뜻이라고 역설함에
나는 그 말대로 한 것이었다.
  텃골 본향에서 부모님을 뵈온 이튿날, 정씨와 나는 곧 천봉산을 넘어 청계동에
다다랐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하고 수령한 봉란으로 에워 있고, 동네에는 띄엄띄엄
4, 50호의 인가가 있으며, 동구 앞으로 한 줄기 개울이 흐르고 그곳 바위 위에는
'청계동천'이라는 안진사의 자필 각자가 있었다. 동구를 막을 듯이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포대가 있고 길 어귀에 파수병이 있어서 우리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명함을 내주고 얼마 있노라니 의려장의 허가가 있다 하여 한 군사가 우리를
안내하여 의려소인 안진사 댁으로 갔다. 문전에는 연당이 있고 그 가운데는,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안진사 6형제가 평일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곳이라고
했다. 대청 벽상에는 의려소 석 자를 횡액으로 써 붙였다. 안진사는 우리를 정청에
영접하여 수인사를 한 후에 첫 말이,
  "김 석사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면하신 줄은 알았으나 그 후 사람을 놓아서
수탐하여도 계신 곳을 몰라서 우려하였더니 오늘 이처럼 찾아 주시니 감사하외다."
  하고 다시,
  "들으니 구경하시던데 양위분은 안접하실 곳이 있으시오?"
  하고 내 부모에 관한 것을 물으신다.
  내가 별로 안접하실 곳이 없는 뜻을 말하였더니 안진사는 즉시 오일선에게 총멘
군사 30명을 맡기며,
  "오늘 안으로 텃골로 가서 김 석사 부모 양위를 뫼셔 오되, 근동에 있는 우마를
징발하여 그 댁 가산 전부를 반이 해 오렷다."
  하고 영을 내렸다.
  이리하여 우리 집이 청계동에 우접하게 되니 내가 스무 살 되던 을미년 2월
일이었다.
  내가 청계동에 머문 것은 불과 4, 5개월이었지만, 그동안은 내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첫째로는 내가 안진사와 같은 큰 인격에 접한 것이요, 둘째로는 고
산림과 같은 의기 있는 학자의 훈도를 받게 된 것이었다.
  안진사는 해주 부중에 10여 대나 살아 오던 구가의 자제였다. 그 조부 인수가 진해
현감을 지내고는 세상이 차차 어지러워짐을 보고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자 하여,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 주고 약 3백석 추수하는 재산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들어오니 이는 산천이 수려하고 족히 피난처가 될 만한 것을 취함이었다. 이때는
장손인 중근이 두 살 때였다. 안진사는 과거를 하려고 서울 김종한의 문객이 되어
다년 유경하다가 진사가 되고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형제 여섯
사람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고 뜻 있는 벗을 사귀기로 낙을 삼고 있었다. 안씨
6형제가 다 문장재사라 할 만하지마는 그 중에서도 셋째인 안진사가 눈에 정기가
있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고 기상이 뇌락하여 비록 조정의 대관이라도 그와
면대하면 자연 경외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내가 보기에도 퍽 소탈하여서 비록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이 친절하고 정녕하여서 상류나
하류나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얼굴이 매우 청수하나 술이 과하여 코끝이 붉은
것이 흠이었다. 그는 율을 잘하여서 당시에도 그의 시가 많이 전송되었고 내게도 그가
득의의 작을 흥있게 읊어 주는 일이 있었다. 그는 '황석공소서'를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이고 취흥이 나면 소리를 높여서 그것을 낭독하였다.
  그때에 안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열 세 살로 상투를 짜고 있었는데 머리를 자주색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있어,.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하고 청계동 군사들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나 새나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계부 태건과 언제나 함께
사냥을 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로는 군사들을 먹이고 또 진사
6형제의 주연의 안주를 삼았다. 진사의 둘째 아들 정근과 셋째 공근은 다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도련님들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진사는 이 두
아들에 대해서는 글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 대해서는 아무 간섭도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고 산림의 이름은 능선인데 그는 해주 서문 밖 비동에 세거하던 사람으로서, 중암
조중교의 문인이요, 의암 유인석과 동문으로서, 해서에서는 행검으로 굴지 되는
학자였다. 이도 안진사의 초청으로 이 청계동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내가 고 산림을 처음 대한 것은 안진사의 사랑에서였다. 그런데 내게 자기의 사랑에
놀러 오라는 그의 말에 나는 크게 감복하여 이튿날 그의 집에 찾아갔다. 선생은
늙으신 낯에 기쁨을 띠우시고 친절하게 나를 영접하시며 맏아들인 원명을 불러 나와
상면케 하였다. 원명은 나이 서른 살쯤 되어 보였는데 자품은 명민한 듯하나 크고
넓음이 그 부친의 뒤를 이을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원명에게는 15, 6세나 된 맏딸이
있었다.
  고 선생이 거처하시는 방은 작은 사랑이었는데, 방 안에는 책이 가득 쌓여 있고 네
벽에는 옛날에 이름난 사람들의 좌우명과 선생 자신의 심득 같은 것을 둘러 붙였으며,
선생은 가만히 꿇어 앉아서 마음을 가다듬는 공부를 하시며 간간이 "손무자",
"삼략" 같은 병서도 읽으셨다.
  고 선생은 날더러, 내가 매일 안진사의 사랑에 가서 놀더라도 정신 수양에는
효과가 적을 듯하니, 매일 선생의 사랑에 와서 같이 세상사도 말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떠냐고 하였다. 나는 이러한 대선생이 내게 대하여 이처럼 특별한 지우를 주시는
것을 눈물겹게 황송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는 좋은 마음 가진 사람이 되려던
소원을 말씀드리고 모든 것을 고 선생의 지도에 맡긴다는 성의를 표하였다. 과거에
낙심하고 관상에 낙심하고 동학에 실패한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리를 가지게
되었었는데 나 같은 것도 고 선생과 같으신 큰 학자의 지도로 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말씀을 아뢰었더니 고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남의 일을 어찌 알랴. 그러므로
내가 그대의 장래를 판단할 힘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그대에게 확실히 말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성현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자취를 밟으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힘써
가노라면 성현의 지경에 달하는 자도 있고 못 미치는 자도 있거니와, 이왕 그대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될 뜻을 가졌으니 몇 번 길을 잘못 들더라도 본심만 변치 말고
고치고 또 고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목적지에 달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괴로워하지 말고 행하기만 힘쓰라."
  이로부터 나는 매일 고 선생 사랑에 갔다. 선생은 내게 고금의 위인을 비평하여
주고 당신이 연구하여 깨달은 바를 가르쳐 주고, "화서아언"이며 "주자백선"에서
긴요한 절구를 보여 주셨다. 선생이 특히 역설하시는 바는 의리에 관해서였다. 비록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단이 된다고 하셨다.
  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치는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내 정신과 재질을 보셔서
뚫어진 곳은 깁고 빈 구석을 채워 주는 구전심수의 첩경을 택하셨다. 선생은 나를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보셨음인지, 아무리 많이 알고 잘 판단하였더라도 실행할
과단력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고 말씀을 하시고,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
  '나뭇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언덕에 매달려도 손에 힘주지 않는 것이
장부이다.'

  라는 글구를 힘있게 설명하셨다.
  가끔 안진사가 고 선생을 찾아 오셔서 두 분이 고금의 일을 강론하심을 옆에서
듣는 것은 참으로 비할 데 없이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끔 그 선생 댁에서 놀다가 저녁밥을 선생과 같이 먹고 밤이 깊고 인적이
고요할 때까지 국사를 논하는 일이 있었다.
  고 선생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 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그와는 반대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전국에 충만하여 궐내에까지
침입하여서 대신도 적의 마음대로 내고 들이게 되었으니 우리 나라가 제2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고에 망하지 아니한 나라가 없고 천하에 죽지 아니한 사람 있던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의 일건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선생은 비감한 낯으로 나를 보시며 이 말씀을 하셨다. 나는 비분을 못 이겨 울었다.
  망하는 우리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는가 하는 내 물음에 대해서
청국과 서로 맺는 것이 좋다 하시고 그 이유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국이 갑오년 싸움(청일전쟁. 1894년)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서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그 국정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교의를
맺어 두었다가 훗일에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에 감동하여 청국으로 갈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나와 같이
어린 것이 한 사람 간다고 해서 무슨 일이 되랴 하는 뜻을 말씀드린즉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니 저마다 남이 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저마다 제 일을 하면 자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라. 어떤 사람은 정계에 또 어떤 사람은 학계나
상계에 이처럼 자기가 합당한 방면으로 활동하여서 그 결과가 모이면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나는 청국으로 갈 결심을 하고 그 뜻을 고 선생께 아뢰었다. 선생은 크게
기뻐하셔서 내가 떠난 뒤에는 내 부모까지도 염려 말라 하셨다.
  나는 의리로 보아 이 뜻을 안진사에게 통함이 옳을까 하였으나, 고 선생은 이에
반대하셨다. 안진사가 천주학을 믿을 의향이 있는 모양인데, 만일 그렇다면 이는
양이(서양 오랑캐)를 의뢰하려 함이니 대의에 어긋나는 일인즉 지금 이런 큰일을
의논할 수 없다. 그러나 안진사는 확실한 인재니, 내가 청국을 유력한 뒤에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서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아니하니 이번에는 말없이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나 고 선생의 지시대로 하기로 결심하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2. 기구한 젊은 때

  내가 청국을 향하여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작정한 바로 전날, 나는 넌지시 안진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속으로만이라도 하직하는 정을 표하려고 안진사 댁 사랑에를
갔다가 참빗장수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언어 동작이 아무리 보아도 예사 사람이 아닌
듯하여 인사를 청한즉 그는 전라도 남원 귓골 사는 김형진이란 사람이요, 나와 같은
안동 김씨요, 연치는 나보다 8, 9세 위였다. 나는 참빗을 사겠노라고 그를 내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같이 자면서 그의 인물을 떠보았다. 과연 그는 보통 참빗장수가
아니요, 안진사가 당시에 대문장, 대영웅이라는 말을 듣고 한 번 찾아보러 일부러
떠나온 것이라고 한다. 인격이 그리 뛰어나거나 학식이 도저한 인물은 못 되나 시국에
대하여서 불평을 품고 무슨 일이나 하여 보자는 결심은 있어 보였다. 이튿날 그를
데리고 고 선생을 찾아 선생에게 인불 감정을 청하였더니 선생은, 그가 비록 주뇌가
될 인물은 못 되나 남을 도와서 일할 만한 소질은 있어 보인다는 판단을 내리셨다.
이에 나는 김씨를 내 길동무 삼기로 하고, 집에서 먹이던 말 한 필을 팔아 여비를
만들어 청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백두산을 보고 동삼성(만주)을 돌아서 북경으로 가기로 하였다. 평양까지는
예사대로 가서 거기서부터는 나도 김형진 모양으로 참빗과 황아장수로 차리기로 하고
참빗과 붓, 먹과 기타 산읍에서 팔릴 만한 물건을 사서 둘이서 한 짐씩 걸머졌다.
그리고 평양을 떠나서 을밀대와 모란봉을 잠시 구경하고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서 고원, 정평을 지나 함흥 감영에 도착하였다. 강동 어느 장거리에서
하룻밤을 자다가 칠십 늙은이 주정장이한테 까닭 모를 매를 얻어맞고 한 신이
회음에서 어떤 젊은놈에게 봉변 당하던 것을 이야기하고 웃은 일이 있었다. 고원
함관령에서 이태조가 말갈을 쳐 물린 승전비를 보고, 함흥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길다는 남대천 나무 다리와 네 가지 큰 것 중에 하나라는 장승을 보았다. 이 장승은
큰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인데,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주홍칠을 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매우 위엄이 있었다. 장승은 두 개씩 남대천 다리 머리에 갈라 서
있었다. 옛날에 장승은 큰 길목에는 어디나 서 있었으나 함흥의 장승이 그 중 가장
크기로 유명하여서 경주의 인경과 은진의 돌미륵과 연산의 쇠가마와 함께
사대물이라고 꼽히던 것이었다.
  함흥의 낙민루는 이 태조가 세운 것으로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흥원, 신포에서는 명태잡이 하는 것을 보고, 어떤 튼튼한 아낙네가 광주리에 꽃게 한
마리를 담아서 힘껏 이고 가는데 게의 다리가 모두 내 팔뚝보다도 굵은 것을 보고
놀랐다.
  함경도에 들어서서 가장 감복한 것은 교육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달된
것이었다. 아무리 초가집만 있는 가난한 동네에도 서재와 도청은 기와집이었다. 흥원
지경 어느 서재에는 선생이 세 사람이 있어서 학과를 고등, 중등, 초등으로 나눠서
각각 한 반씩 담당하여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옛날 서당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서당 대청 좌우에는 북과 종을 달고 북을 치면 글 읽기를 시작하고 종을
치면 쉬었다. 더구나 북청은 함경도 중에서도 글을 숭상하는 고을이어서 내가 그곳을
지날 때에도 살아 있는 진사가 30여 명이요, 대과에 급제한 조관이 일곱이나 있었다.
과연 문향이라고 나는 크게 탄복하였다.
  도청이란 것은 동네에서 공용으로 쓰는 집이다. 여염집보다 크기도 하고 화려하기도
하다. 사람들은 밤이면 여기 모여서 동네 일을 의논도 하고 새끼꼬기, 신삼기도 하고,
이야기도 듣고 놀기도 하고, 또 동네 안에 뉘 집에나 손님이 오면 집에서 식사만
대접하고 잠은 도청에서 자게 하니 이를테면 공동 사랑이요, 여관이요, 공회당이다.
만일 돈 없는 나그네가 오면 도청 예산 중에서 식사를 공궤하기로 되어 있다. 모두
본받을 미풍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단천 마운령을 넘어서 갑산읍에 도착한 것이 을미년 칠월이었다. 여기 와서
놀란 것은 기와를 인 관청을 제외하고는 집집마다 지붕에 풀이 무성하여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빈터와 같았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이것은 지붕을 덮은 붓껍질을
흙덩이로 눌러 놓으면 거기에서 풀이 무성하게 자라 아무리 악수가 퍼부어도 흙이
씻기지 아니한다고 한다.
  붓껍질은 희고 빤빤하고 단단하여서 기와보다도 오래 간다 하며, 사람이 죽어
붓껍질로 싸서 묻으면 만 년이 가도 해골이 흩어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혜산진에 이르니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만주를 바라보는 곳이라 건너편 중국 사람의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는 압록강도 걸어서 건널 만하였다.
  혜산진에 있는 제천당은 우리 나라 산맥의 조종이 되는 백두산 밑에 있어 예로부터
나라에서 제관을 보내어 하늘과 백두산 신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유월설색산백두이운무
  만고유성수압록이흉용
  눈쌓인 6월의 백두산에 운무가 감돌고 만고에 끊이지 않고 흐르는 압록강이
용솟음친다.'

  우리는 백두산 가는 길을 물어가면서 서대령을 넘어 삼주, 장진, 후창을 거쳐 자성의
중강을 건너서 중국땅인 마울산에 다다랐다.
  지나 온 길을 무비 험산준령이요, 어떤 곳은 7, 80리나 무인지경도 있어서 밥을 싸
가지고 간 적도 있었다. 산은 심히 험하나 맹수는 별로 없었고, 수풀이 깊어서 지척을
분별치 못할 데가 많았다. 나무는 하나를 벤 그루 위에 7, 8인이 모여 앉아서 밥을 먹을
만한 것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내가 본 것 중에도, 통나무로 곡식 넣을 통을 파느라고
장정 하나가 그 통 속에 들어서서 도끼질을 하는 것이 있었다. 장관인 것은 이
산봉우리에 섰던 나무가 쓰러져서 저 산봉우리에 걸쳐 있는 것을 우리가 다리 삼아서
건너간 일이었다.
  이 지경은 인심이 대단히 순후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여서 나그네가 오면 극히
반가워하여 얼마든지 묵여 보내었다. 곡식은 대개 귀밀과 감자요, 산 개천에는
이면수라는 물고기가 많이 있는데 대단히 맛이 좋았다. 옷감으로 짐승의 가죽을 쓰는
것이 퍽이나 원시적이었다. 삼수 읍내에는 민가가 겨우 30호 밖에 없었다.
  마울산에서 서북으로 노인치라는 영을 넘고 또 넘어 서대령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백 리에 두어 사람이나 우리 동포를 만났는데, 대부분은 금점꾼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더러 백두산 가는 것이 향마적 때문에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하므로
우리는 유감이나마 백두산 참배를 중지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돌려 만주
구경이나 하리라 하고 통화로 갔다.
  통화는 압록강 연변의 다른 현상과 마찬가지로 설립된 지 얼마 아니 되어서 관사와
성루의 서까래가 아직도 흰빛을 잃지 아니하였다. 성내에 인가가 모두 5백 호라는데 그
중에는 우리 나라 사람의 집도 하나 있었다. 남자는 변발을 하여서 중국 사람의
모양을 하고 현청에 통사로 있다는데, 그의 처자들은 우리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서
10리쯤 가서 심생원이라는 동포가 산다 하기로 찾아갔더니 정신없이 아편만 먹는
사람이었다.
  만주로 돌아다니는 중에 가장 미운 것은 호통사였다. 몇 마디 한어를 배워
가지고는 불쌍한 동포의 등을 긁어 피를 빨아 먹는 것이었다. 우리 동포들은 갑오년
난리를 피하여 생소한 이 땅에 건너와서 중국 사람이 살 수가 없어서 내버린 험한
산골을 택하여 화전을 일구어서 조나 강냉이를 지어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호통사라는 놈들은 중국 사람들에게 붙어서 무리한 핑계를 만들어 가지고 혹은 동포의
전곡을 빼앗고, 혹은 부녀의 정조를 유린하는 것이었다. 어떤 곳에를 가노라니
중국인의 집에 한복을 입은 처녀가 있기에 이웃 사람에게 물어본즉 그 역시 호통사의
농간으로 그 부모의 빚값으로 중국인의 집에 끌려온 것이라고 하였다. 관전, 임강,
환인, 어디를 가도 호통사의 폐해는 마찬가지였다.
  어디나 토지는 비옥하여서 한 사람이 지으면 열 사람이 먹을 만하였다. 오직 귀한
것은 소금이어서 이것은 의주에서 배로 물을 거슬러 올라와 사람의 등으로 져 나르는
것이라 한다. 동포들의 인심은 참으로 순후하여 본국 사람이 오면, '앞대나그네'가 왔다
하여 혈속과 같이 반가워하고, 집집이 다투어서 맛있는 것을 대접하려고 애를 쓰고,
남녀노소가 모여 와서 본국 이야기를 돌려 달라고 졸랐다. 대부분이 청일전쟁 때
피난간 사람들이지만 간혹 본국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는
민요에 장두가 되었던 호걸도 있고 공금을 포흠한 관속도 있었다.
  집안의 광개토왕비는 아직 몰랐던 때라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거니와, 관전(?)의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본 것이 기뻤다.
  '삼국충신임경업지비'라고 비면에 새겨 있는데 이 지방 중국 사람들은 병이 나면 이
비각에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이 지방으로 방랑하는 동안에 김이언이란 사람이 청국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에
반항할 의병을 꾸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이언은
벽동 사람으로서 기운이 있고 글도 잘하여 심양자사에게 말 한 필과 "삼국지"한 벌을
상으로 받았기 때문에 중국 사람 장렬들에게도 대접을 받는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을 찾아보기로 작정하고 먼저 그 인물이 참으로 지사인가, 협잡꾼이나 아닌가를
염탐하기 위하여 김형진을 먼저 떠나 보내고 나는 다른 길로 수소문을 하면서
뒤따라가기로 하였다.
  하루는 압록강을 거의 백 리나 격한 노중에서 궁둥이에 관인을 찍은 말을 타고 오는
젊은 청국 장교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머리에 쓴 마라기(청국 군인의 모자)에는
옥로가 빛나고 붉은 솔이 너풀거렸다. 나는 덮어놓고 그의 말 머리를 잡았다. 그는
말에서 내렸다. 나는 중국말을 몰랐으므로 내가 여행하는 취지를 적은 글을 만들어서
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 장교에게 내어 보였다. 그는 내가 주는 글을 받아
읽더니 다 읽기도 전에 소리를 내어서 울었다. 내가 놀라서 그가 우는 까닭을 물으니
그는 내 글 중에,

  '(통피왜적여아불공대천지수)
  왜적과는 더불어 평생을 같이 살 수 없는 철천지 원수로다.'

  라는 구절을 가르키며 다시 나를 붙들고 울었다. 내가 필담을 하기 위해 필통을
꺼냈더니 그가 먼저 붓을 들어 왜가 어찌하여 그대의 원수냐고 도리어 내게 묻는다.
나는 일본이 임진으로부터 세세에 원수일 뿐만 아니라, 지난날에 왜가 우리 국모를
불살라 죽였다고 쓰고, 다음에 그대야말로 무슨 연유로 내 글을 보고 이토록
통곡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을 듣건대, 그는 작년 평양 싸움에서 전사한 청국
장수, 서옥생의 아들로서 강계 관찰사에게 그 부친의 시체를 찾아주기를 청하였던 바,
찾았다 하기로 가본즉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시체가 아니므로 허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나는 평양 보통문 밖에 '서옥생전사지지'라는 목패를
보았다는 말을 하였다. 그의 집은 금주요, 집에는 1천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 옥생이 그 중에서 천 명을 데리고 출정하여서 전멸하였고 지금
집에는 5백명이 남아 있으며, 재산은 넉넉하고, 자기의 나이는 서른 살이요, 아내는 몇
살이며, 아들이 몇, 딸이 몇이라고 자세히 가르쳐 준 뒤에 내 나이를 물어, 내가
그보다 연하인 것을 알고는 그는 나를 아우라고 부를 터이니 그를 형이라고 부르라
하여 피차에 형제의 의를 맺기를 청하고 서로 같은 원수를 가졌으니 함께 살면서
시기를 기다리자 하여 나더러 그와 같이 금주로 가기를 청하고,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내 등에 진 짐을 벗겨 말에 달아매고 나를 붙들어 말안장에 올려놓고 자기는
걸어서 뒤를 따랐다.
  나는 얼마를 가며 곰곰이 생각하였다. 기회는 썩 좋은 기회였다. 내가 원래 이 길을
떠난 것이 중국의 인사들과 교의를 맺자는 것이었는데, 이제 서씨와 같은 명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소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김형진에게 알릴 길이 없는 것이었다. 만일 김형진만 같이 있었던들 나는 이때에 서를
따라 갔을 것이다.
  나는 근 일년이나 집을 떠나 있어 부모님 안부도 모르고 또 서울 형편도 못
들었으니 이 길로 본국에 돌아가 근친도 하고, 나라 일이 되어가는 양도 알아본 뒤에
금주로 형을 따라 갈 것을 말하고 결연하게 그와 서로 작별하였다.
  나는 참빗장수의 행세로 이집저집에서 김이언의 일을 물어 가며 서와 작별한 지
5,6일 만에 김이언의 근거지 삼도구에 다다랐다.
  김이언은 당년 50여 세에, 심양에서 5백 근 되는 대포를 앉아서 두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할 만큼 기운이 있는 사람이다. 보기에 용기가 부족한 것 같고, 또 자신이
과하여 남의 의사를 용납하는 도량이 없는 것 같았다. 도리어 그의 동지인, 초산에서
이방을 지냈다니 김규현이란 사람이 의리도 있고 책략도 있어 보였다.
  김이언은 자기가 창의의 수령이 되어서 초산, 강계, 위원, 벽동 등지의 포수와, 강
건너 중국 땅에 사는 동포 중에 사냥총이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서 약 3백명 가량
무장한 군사를 두고 있었다. 창의의 명의로는 국모가 왜적의 손에 죽었으니 국민
전체의 욕이라 참을 수 없다는 것이요, 이 뜻으로 글 잘하는 김규현의 붓으로 격문을
지어서 사방에 산포하였다. 나와 김형진 두 사람도 참가하기로 하여 나는 초산, 위원
등지에 숨어 다니며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 성중에 들어가서 화약을 사오는 일을
맡았다. 거사할 시기는 을미년 동짓달 초생 압록강이 얼어붙을 때로 하였다. 군사를
얼음 위로 몰아서 강계성을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위원에서 내가 맡은 일을 끝내고 책원지인 삼도구로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다가 엷은 얼음을 밟아서 두 팔만 얼음 위에 남고 몸이 온통 강 속으로 빠져
버렸다. 나는 솟아오를 길이 없어서 목청껏 사람 살리라고 소리지를 뿐이었다. 내
소리를 들을 동민들이 나와서 나를 얼음 구멍에서 꺼내어 인가로 데리고 갔을 때에 내
의복은 벌써 딱딱한 얼음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강계성을 습격할 날이 왔다. 우선 고산리를 쳐 거기 있는 무기를 빼앗아서
무기 없는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이 첫 실책이었다. 나는 고산리를 먼저 치지
말고 곧장 강계성을 엄습하자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고산리를 쳤다는 소문이 들어가면
강계성의 수비가 더욱 엄중할 것이니 고산리에서 약간의 무기를 더 얻는 것보다는
출기불의로 강계를 덮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김규현, 백진사 등 참모도 내
의견에 찬성하였으나 김이언은 종시 제 고집을 세우고 듣지 아니하였다.
  고산전에서 무기를 빼앗은 우리 군사는 이튿날 강계로 진군하여 야반에 독로강
빙판으로 적군을 몰아 선두가 인풍루에서 10리쯤 되는 곳에 다다랐을 때에 강남쪽
송림속에서 화승불이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그때에는 모두 화승총이었으므로
군사는 불붙는 화송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송림 속으로부터 강계대 장교 몇 명이
나와 김이언을 찾아보고 첫말로 묻는 말이, 이번에 오는 군사 중에 청병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김이언은 이에 대하여 이번에는 청병은 아니 왔다. 그러나 우리가
강계를 점령하였다고 기별하는 대로 오기로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정직한
말일는지 모르거니와 전략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여기 대하여서도 작전계획에
김이언은 실수가 있었다. 애초에 나는 우리 중에 몇 사람이 청국 장교로 차리고
선두에 설 것을 주장하였으나 김이언은 우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이 싸움에
청병의 위력을 가장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니 강계성 점령은 당당하게 흰옷을 입은
우리가 할 것이요, 또 강계대의 장교도 이미 내응할 약속이 있으니 염려 없다고
고집하였다.
  나는 이에 대하여 강계대의 장교라는 것이 애국심으로 움직이기보다도 세력에 쏠릴
것이라 하여 청국 장교로 가장하는 것이 전략상 극히 필요하다고 하였으나, 김이언은
끝까지 듣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랬던 차에 이제 강계대 장교가 머리를 흔들고
돌아가는 것을 보니 나는 벌써 대세가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장교들이 그들의 진지로 돌아갈 때쯤 하여 화승불들이 일제히 움직이더니 탕탕하고
포성이 진동하고 탄알이 빗발같이 이리로 날아왔다. 잔뜩 믿고 마음을 놓고 있던
이편의 천여 명 군마는 얼음판 위에서 대혼란을 일으켜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달아나기를 시작하고 벌써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자,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고 우는 자가
여기저기 있었다.
  나는 일이 다 틀렸음을 알고, 또 김이언으로 보면 이번에 여기서 패하고는 다시
회복 못할 것으로 보고 김형진과 함께 슬며시 떨어져서 몸을 피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군사들이 달아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리어 강계성에 가까운 쪽으로
피하였다. 인풍루 바로 밑인 동네로 갔더니 어느 집에도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그
중에 큼직한 집으로 갔다. 밖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안에 들어가도 사람은 없는데,
빈 집에 큰 젯상이 놓이고 그 위에는 갖은 음식이 벌어져 있고 상 밑에는 술병이
있었다. 우리는 우선 술과 안주를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나중에 주인이 들어와서 하는
말이 그 아버지 대상제를 지내다가 총소리에 놀라서 식구들과 손님들이 모두 산으로
피난하였던 것이라 한다.
  우리는 이튿날 강계를 떠나 되넘이고개를 넘어 수일 만에 신천으로 돌아왔다.
청계동으로 가는 길에 나는 호열자(콜레라)로 하여서 고 선생의 맏아들 원명의 부처가
구몰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나는 집에도 가기 전에 먼저 고 선생 댁을
찾았더니, 선생은 도리어 태연자약하셨다. 나는 어색하여 말문이 막혔다. 내가 부모님
계신 집으로 가려고 하직을 할 때에 고 선생은 뜻모를 말씀을 하셨다.
  "곧 성례를 하게 하자."
  하시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부모님의 말씀을 듣잡고 비로소 내가 없는 동안에 고
선생의 손녀, 즉 원명의 딸과 나와 약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은 번을
갈아서 약혼이 되던 경로를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하루는 고 선생이 집에 찾아오셔서 아버지를 보시고 요새는 아들도 없고 고적할
터이니 선생의 사랑에 오셔서 담화나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지께서 고
선생 댁 사랑에를 가셨더니 고 선생은 아버지께 내가 어려서 자라던 일을 물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려서 공부를 열심히 하던 일, 해주에 과거보러 갔다가 비관하고
돌아오던 일, 상서를 보고는 제 상이 좋지 못하였다고 낙심하던 일, 상이 좋지 못하니
마음이나 좋은 사람이 된다고 동학에 들어가 도를 닦던 일, 이웃 동네에 사는 강씨와
이씨들은 조상의 뼈를 파는 죽은 양반이지마는 저는 마음을 닦고 몸으로 행하여 산
양반이 되겠다던 일 등이었다.
  어머님은, 내가 어렸을 때 강령에서 살 적에 칼을 가지고 그 집 식구들 모두 찔러
죽인다고 신풍 이생원 집에 갔다가 칼을 빼앗기고 매만 맞고 돌아왔다는 것, 돈 스무
냥을 허리에 두르고 떡을 사 먹으러 가다가 아버지께 되게 매를 맞은 것, 푸른 물감
붉은 물감을 온통 꺼내다가 개천에 풀어 놓은 것을 어머니가 단단히 때려 주셨다는 것
같은 것이었다.
  이랬더니 하루는 고 선생이 아버지께, 나와 고 선생의 장손녀와 혼인하면 어떠냐고
말을 내시고, 아버지께서는 문벌로 보거나 덕행으로 보거나, 또 내 외모로 보거나 어찌
감히 선생의 가문을 욕되게 하랴 하여 사양하셨다. 그런즉 고 선생은 아버지를 보시고
내가 못생긴 것을 한탄 말라고, 창수는 범의 상이나 장차 범의 냄새를 피우고 범의
소리를 내어서 천하를 놀라게 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리하여서 내
약혼이 된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고 선생께서 나 같은 것을 그처럼 촉망하셔서
사랑하시는 손녀를 허하심에 대하여 큰 책임을 감당키 어렵게 생각하였다. 더구나
선생께서,
  "나도 맏아들 부처가 다 죽었으니 앞으로는 창수에게 의탁하려오."
  하셨다는 것과 또,
  "내가 청계동에 와서 청년을 많이 대하여 보았으나 창수만한 남아는 없었소."
  하셨다는 말씀을 듣자올 때에는 더욱 몸둘 곳이 없었다. 그 규수로 보더라도 그
얼굴이나 마음이나 가정 교훈을 받은 점으로나 나는 만족하였다.
  이 약혼에 대하여 부모님이 기뻐하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외아들을 장가들인다는
것만도 기쁜 일이거늘, 하물며 이름 높은 학자요, 양반의 집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을
더욱 영광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비록 없는 살림이라도 혼인 준비에 두
집이 다 바빴다.
  아직 성례전이지마는 고 선생 댁에서는 나를 사위로 보는 모양이어서 혹시 선생
댁에서 저녁을 먹게 되면 그 처녀가 상을 들고 나오고, 6, 7세 되는 그의 어린 동생은
나를 아재라고까지 부르고 반가워하였다. 이를테면 내 장인 장모인 원명 부처의
장례도 내가 조력하여서 지냈다.
  나는 선생께 이번 여행에서 본 바를 보고하였다. 두만강, 압록강 건너편의 땅이
비옥하고 또 지세도 요새로 되어 족히 동포를 이식하고 양병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곳 인심이 순후한 것이며, 또 서 옥생의 아들과 결의형제가 되었다는 것 등을
낱낱이 아뢰었다.
  때는 마침 김홍집 일파가 일본의 후원으로 우리나라 정권을 잡아서 신장정이라는
법령을 발하여 급진적으로 모든 제도를 개혁하던 무렵으로서, 그 새 법의 하나로 나온
것이 단발령이었다. 대군주폐하라고 부르는 상감께서 먼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으시고는 관리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깎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단발령이
팔도에 내렸으나 백성들이 응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서울을 비롯하여 감영, 병영
같은 큰 도회지에서는 목목이 군사가 지켜 서서 행인을 막 붙들고 상투를 잘랐다.
이것을 늑삭(억지로 깎는다는 뜻)이라 하여 늑삭을 당한 사람은 큰일이나 난 것처럼
통곡을 하였다. 이 단발령은 크게 민원을 일으켜서 어떤 선비는 도끼를 메고,
  "이 목은 자를지언정 이 머리는 깎지 못하리라."
  하는 뜻으로 상소를 올렸다. '차라리 지하에 목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머리
깎은 사람은 아니 되리라'는 글이 마치 격서 모양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파하여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처럼 단발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이유가 다만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
  내 온몸을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감히 이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요, 이것은 일본이 시키는 것이라는 반감에서 온 것이었다.
  군대와 경찰관은 이미 단발이 끝나고 문관도 공리에 이르기까지 실시하는 중이었다.
  나는 고 선생께 안진사와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진언하였다. 이를테면 단발
반대의 의병이었고 단발 반대를 곧 일본 배척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회의는 열렸으나 안진사의 뜻은 우리와 달랐다. 이길 가망이 없는 일을 일으킨다면
실패할 것밖에 없으니 천주교나 믿고 있다가 시기를 보아서 일어나자는 것이 안진사의
의사였다. 그는 머리를 깎이게 되면 깎아도 좋다고까지 말하였다.
  안진사의 말에 고 선생은 두말하지 않고,
  "진사, 오늘부터 자네와 끊네."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나갔다. 끊는다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예로부터 선비가
절교를 선언하는 말이다.
  이 광경을 보고 나도 안진사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이 났다. 안진사 같은
인격으로서 되었거나 못 되었거나 제 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목숨을 내어놓고
토벌까지 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천주학을 한다는 것부터도 괴이한 일이거니와, 그는
그렇다 하고라도 목을 잘릴지언정 머리를 깎지 못하겠다는 생각은커녕 단발할
생각까지 가졌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안진사의 태도에 실망한 고 선생과 나는 얼른 내 혼인이나 하고 청계동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나는 금주 서옥생의 아들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천만염외에 불행한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어느 날 아침 일찍이 고 선생이
나를 찾아오셔서 대단히 낙심한 얼굴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제 내가 사랑에 앉았노라니 웬 감기라는 자가 찾아와서 '당신이 고
아무개요?' 하기로 그렇다 한즉, 그 자가 내 앞에다가 칼을 내어 놓으며 하는 말이,
'들으니 당신이 손녀를 김창수에게 허혼을 하였다 하니, 그러면 첩으로 준다면 모르되
정실로는 아니 되리라. 김창수는 벌써 내 딸과 약혼한 지가 오래요.' 그러기로 나는,
'김창수가 정혼한 데가 없는 줄 알고 내 손녀를 허한 것이지 만일 약혼한 데가
있다면야 그러할 리가 있는가. 내가 김창수를 만나서 해결할 터이니 돌아가라.'고 해서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내 집안에서는 모두 큰 소동이 났네."
  나는 이 말을 듣고 모든 일이 재미없이 된 줄을 알았다. 그래서 선생께 뚝 잘라
이렇게 여쭈었다.
  "제가 선생님을 사모하옵기는 높으신 가르침을 받잡고자 함이옵지 손서가 되는 것이
본의는 아니오니 혼인하고 못하는 것에 무슨 큰 상관이 있사오리까. 저는 혼인은
단념하고 사제의 의리로만 평생에 선생님을 받들겠습니다."
  내 말을 듣고 고 선생은 눈물을 흘리시고, 장래에 몸과 마음을 의탁할 사람을
찾으려고 많은 심력을 허비하여서 나를 얻어 손서를 삼으려다가 이 괴변이 났다는
것을 자탄하시고 끝으로,
  "그러면 혼인 일자는 갱무거론일세. 그런데 지금 관리의 단발이 끝나고는
백성에게도 단발을 실시할 모양이니 시급히 피신하여 단발화(머리 깎이는 화)를
면하게, 나는 단발화가 미치면 죽기로 작정했네.".
하셨다.
  나는 마음을 지어 먹고 고 선생의 손녀와 혼인을 아니 하여도 좋다고 장담은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여간 섭섭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그 처녀를 깊이 사랑하고 정이
들었던 것이었다.
  이 혼사에 훼사를 놓은 김가라는 사람은 함경도 정평에 본적을 둔 김치경이다. 10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 술집에서 그를 만나 술을 같이 자시다가 김에게 8, 9세 되는 딸이
있단 말을 들으시고 취담으로, "내 아들과 혼사하자." 하여 서로 언약을 하고 그 후에
아버지는 그 언약을 지키셔서 내 사주도 보내시고 또 그 계집애를 가끔 우리 집에
데려다 두기로 하셨는데, 서당 동무들이 '함지박장수 사위'라고 나를 놀리는 것도
싫었고, 또 한 번은 얼음판에 핑구를 돌리고 있는데 그 계집애가 따라와서 제게도
핑구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나를 조르는 것이 싫고 미워서,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떼를 써서 그 애를 제 집으로 돌려 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약혼을 깨뜨린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여러 해를 지내어서 갑오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아들딸을 혼인이나
시켜야 한다고 어린 것들까지도 부랴부랴 성례를 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때 동학
접주로 동분서주하던 내가 하루는 여행을 하고 돌아오니 집에서는 그 여자와 나와
성례를 한다고 술과 떡을 마련하고 모든 혼구를 다 차려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사코 싫다고 버티어서 마침내 김치경도 도리어 무방하게 생각하여 아주
이 혼인은 파혼이 되고 김은 그 딸을 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정혼까지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고씨 집에 장가든다는 소문을 듣고 김은 돈이라도 좀 얻어먹을 양으로 고
선생댁에 와서 야료를 한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크게 분노하여 김치경을 찾아가서
김과 한바탕 싸우셨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내 혼인 문제는 불행한 끝을 맺고 고 선생도 청계동에 더 계실 뜻이 없어 해주 비동의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나는 금주 서씨의 집으로 가노라고 역시 청계동을 떠났다.
이리하여 내 방랑의 길을 다시 계속되었다.
  평양 감영에 다다르니 관찰사 이하로 관리 전부가 벌써 단발을 하였고, 이제는
길목을 막고 행인을 막 붙들어서 상투를 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머리를 아니
깎으려고 슬몃슬몃 평양을 빠져나와 촌으로 산 읍으로 피난을 가고 백성의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찼다. 이것을 보고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하여서라도 왜의 손에 노는 이 나쁜 정부를 들어 엎어야 한다고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다.
  안주 병영에 도착하니 게시판에 단발을 정지하라는 영이 붙어 있었다. 임금은
개혁파가 싫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하시고 수구파들은 러시아의 세력에 등을
대고 총리 대신 김홍집을 때려 죽이고 개혁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 놓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우리나라에 러시아와 일본과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고 친아파와 친일파의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나는 한성 정국의 변동으로 심기가 일전하였다. 구태여 외국으로 갈 것이 무엇이냐,
삼남에서는 곳곳에 의병이 일어난다고 하니 본국에 머물러 시세를 관망하여서 새로
거취를 정하기로 하고 길을 돌려 용강을 거쳐서 안악으로 가기로 하였다.
  나는 치하포 나룻배에 올랐다. 때는 병신년 2월 하순이라 대동강 하류인 이 물길에는
얼음산이 수없이 흘러내렸다. 남녀 15, 6명을 태운 우리 나룻배는 얼음산에 싸여서
행동의 자유를 잃고 진남포 아래까지 밀려 내려갔다가 조수를 따라서 다시 상류로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었다. 선객은 말할 것도 없고 선부들까지 이제는 죽었다고
울고불고하였다. 해마다 이때 이목에서는 이런 참변이 생기는 일이 많았는데 우리가
지금 그것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배에는 양식이 없으면 비록 파선하기를 면하더라도
사람들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것이다. 다행히 나귀 한 마리가 있으니 이 모양으로
여러 날이 가게 될 경우에는 잔인하나마 잡아 먹기로 하고 한갖 울고만 있어도 쓸데
없으니 선객들도 선부들과 함께 힘을 써 보자고 내가 발론하였다. 여럿이 힘을
합하여서 얼음산을 떠밀어 보자는 것이다.
  나는 몸을 날려 성큼 얼음산에 뛰어올라서 형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큰 산을
의지하여 작은 산을 떠밀고, 이러한 방법을 반복하여서 간신히 한 줄기 산길을 찾았다.
이리하여 치하포에서 5리쯤 떨어진 강언덕에 내리니 강 건너 서쪽 산에 지는 달이
아직 빛을 남기고 있었다. 찬 바람 속에 밤길을 걸어서 치하포 배주인 집에 드니
풍랑으로 뱃길이 막혀서 묵는 손님이 삼간방에 가득히 누워서 코를 골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그 틈에 끼어 막 잠이 들려 할 즈음에 벌써 먼저 들었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오늘 일기가 좋으니 새벽물에 배를 건네 달라고 야단들이다. 이윽고
아랫방에서부터 벌써 밥상이 들기 시작한다.
  나도 할 수 없이 일어나 앉아서 내 상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가운뎃방에 단발한 사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가 어떤 행객과 인사하는 것을 들으니
그의 성은 정씨요, 장연에 산다고 한다. 장연에서는 일찍 단발령이 실시되어서
민간인들도 머리를 깎은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 말씨가 장연 사투리가 아니요,
서울말이었다. 조선말이 썩 능숙하지마는 내 눈에는 분명 왜놈이었다. 자세히 살펴
보니 그의 흰 두루마기 밑으로 군도집이 보였다. 어디로 가느냐 한즉 그는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보통으로 장사나 공업을 하는 일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 변성명을
할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민비)를 죽인 삼포오루 놈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한 일이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하나의 수치를 씻어보리라고 나는
결심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힘과 환경을 헤아려 보았다. 삼간방 40여 명 손님 중에
그놈의 패가 몇이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열 일여덟 살 되어 보이는 총각 하나가
그의 곁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다.
  나는 궁리하였다. 저놈은 둘이요 또 칼이 있고, 나는 혼자요 또 적수공권이다.
게다가 내가 저놈에게 손을 대면 필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말릴 것이요,
사람들이 나를 붙들고 있는 틈을 타서 저놈의 칼은 내 목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망설일 때에 내 가슴은 울렁거리고 심신이 혼란하여 진정할 수가 없이 심히 마음에
고민하였다. 그 때에 문득 고 선생의 교훈 중에,
  '들수반지부족기 현애철수장부아'라는 글이 생각났다. 벌레를 잡은 손을 탁 놓아라
그것이 대장부다. 나는 가슴 속에 한 줄기 광명이 비침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자답하였다.
  "저 왜놈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옳다."
  "네가 어려서부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느냐?"
  "그렇다."
  "의를 보았거든 할 것이요, 일의 성불성을 교계하고 망설이는 것은 몸을 좋아하고
이름을 좋아하는 자의 일이 아니냐."
  "그렇다. 나는 의를 위하는 자요, 몸이나 이름을 위하는 자가 아니다."
  이렇게 자문자답하고 나니 내 마음의 바다에 바람은 자고 물결은 고요하여 모든
계교가 저절로 솟아오른다. 나는 40명 객과 수백 명 동민을 눈에 안 보이는 줄로 꽁꽁
동여 수족을 못 놀리게 하여 놓고, 다음에는 저 왜놈에게 티끌 만한 의심도 일으키지
말아서 안심하고 있게 하여 놓고, 나 한 사람만이 자유자재로 연극을 할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다.
  다른 손님들이 자던 입에 새벽 밥상을 받아 아직 삼분지 일도 밥을 먹기 전에
그보다 나중 상을 받은 나는 네댓 술에 한 그릇 밥을 다 먹고 일어나서 주인을 불러
내가 오늘 해 전으로 7백 리 길을 걸어야 하겠으니, 밥 일곱 상을 더 차려 오라고
하였다. 37,8세 됨직한 골격이 준수한 주인은 내 말에 대답은 아니하고 방 안에 있는
다른 손님들을 둘러보며,
  "젊은 사람이 불쌍하다. 미친놈이로군."
하고 들어가 버렸다.
  나는 목침을 베고 한편에 드러누워서 방 안의 물의와 그 왜놈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어떤 유식한 듯한 청년은 주인의 말을 받아 나를 미친 놈이라 하고, 또
담뱃대를 붙여 문 어떤 노인은 그 젊은 사람을 책하는 말로,
  "여보게, 말을 함부로 말게. 지금인들 이인이 없으란 법이 있겠나. 이러한 말세에
이인이 나는 법일세."
  하고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그 젊은 사람도 노인의 눈을 따라 나를 흘끗 보더니
입을 삐죽하고 비웃는 어조로,
  "이인이 없을 리야 없겠죠마는 아 저 사람 생긴 꼴을 보세요. 무슨 이인이
저렇겠어요."
하고 내게 들려라 하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 왜는 별로 내게 주목하는 기색도 없이 식사를 필하고는 밖으로 나가
문설주에 몸을 기대고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면서 총각이 연가(밥값) 회계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때가 왔다 하고 서서히 일어나 '이놈!'소리를 치면서 발길로 그 왜놈의 복장을
차니 그는 한 길이나 거진 되는 계하에 나가 떨어졌다. 나는 나는 듯이 쫓아 내려가
그놈의 모가지를 밟았다. 삼간 방문 네 짝이 일제히 열리며 그리로서 사람들의
모가지가 쑥쑥 내밀어졌다. 나는 몰려나오는 무리를 향하여,
  "누구나 이 왜놈을 위하여 감히 내게 범접하는 놈은 모조리 죽일테니 그리 알아라!"
  하고 선언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발에 채이고 눌렸던 왜놈이 몸을 빼쳐서 칼을 빼어
번쩍거리며 내게로 덤비었다. 나는 내 면상에 떨어지는 그의 칼날을 피하면서 발길을
들어 그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을 잡은 손목을 힘껏 밟은즉 칼이 저절로 언
땅에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나는 그 칼을 들어 왜놈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를 쳤다. 2월 추운 새벽이라 빙판이 진 땅 위에 피가 샘솟듯 흘렀다. 나는 손으로
그 피를 움켜 마시고 또 왜의 피를 내 낯에 바르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아까 왜놈을 위하여 내게 범하려던 놈이 누구냐 하고 호령하였다.
미쳐 도망하지 못한 행객들은 모조리 방바닥에 넙적 엎드려,  어떤 이는,
  "장군님, 살려줍시오. 나는 그놈이 왜놈인 줄 모르고 예사 사람으로 알고 말리려고
나갔던 것입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나는 어저께 바다에서 장군님과 함께 고생하던 사람입니다. 왜놈과 같이 온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모두 겁이 나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 중에 아까 나를 미친놈이라고 비웃던
청년을 책망하던 노인만이 가슴을 떡 내밀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장군님. 아직 지각없는 젊은 것들이니 용서하십시오."
하였다.
  이때에 주인 이 선달 화보가 감히 방 안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밖에
꿇어앉아서,
  "소인이 눈깔만 있고 눈동자가 없사와 누구신 줄을 몰라 뵈옵고 장군님을
멸시하였사오니 죽어도 한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나 그 왜놈과는 아무 관계도 없삽고,
다만 밥을 팔아 먹은 죄밖에 없사옵니다. 아까 장군님을 능욕한 죄로 그저 죽여
줍소서."
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린다. 내가 주인에게 그 왜가 누구냐고 물어서 얻은 바에
의하면, 그 왜는 황주에서 조선의 배 하나를 얻어 타고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 한다.
나는 주인에게 명하여 그 배의 선원을 부르고 배에 있는 그 왜의 소지품을 조속히
들이라 하였다. 이윽고 선원들이 그 왜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저희들은 다만 선가를
받고 그 왜를 태운 죄밖에 없으니 살려 달라고 빌었다.
  소지품에 의하여 조사한즉 그 왜는 육군 중위 토전양량이란 자요, 엽전 8백 냥이
짐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돈에서 선인들의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이 동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분부하였다. 주인 이 선달이 곧 동장이었다.
  시체의 처치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분부하였다. 왜놈은 다만 우리 나라와 국민의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물속에 있는 어별에게도 원수인즉 이 왜의 시체를 강에 넣어
고기들로 하여금 나라의 원수의 살을 먹게 하라 하였다.
  주인 이 선달을 매우 능간하게 일변 세수 제구를 들이고, 일변 밥 일곱 그릇을 한
상에 놓고 다른 상 하나에는 국수와 찬수를 놓아서 들였다. 나는 세수를 하여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씻고 밥상을 당기어서 먹기 시작하였다. 밥 한 그릇을 다 먹은 지가
10분밖에 안되었지마는 과격한 운동을 한 탓으로 한두 그릇은 더 먹을 법하여도 일곱
그릇을 다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까 한 말을 거짓말로 돌리기도 창피하여서
양푼을 하나 올리라 하여 양푼에 밥과 식찬을 한데 쏟아 비비고 숟가락을 하나 더
청하여 두 숟가락을 포개어 가지고 한 숟가락 밥이 사발통만 하도록 보기 좋게
큼직큼직하게 떠서 두어 그릇 턱이나 먹은 뒤에 숟가락을 던지고 혼잣말로,
  "오늘은 먹고 싶은 왜놈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아니 들어가는고."
  하고 시치미를 뗐다.
  식후에 토전의 시체와 그의 돈 처치를 다 분별하고 나서 주인 이 화보를 불러
지필을 대령하라 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 하는 뜻의 포고문을
한 장 쓰고 그 끝에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라고 서명까지 하여 큰 길가 벽상에
붙이게 하고 동장인 이 화보더러 이 사실을 안악 군수에게 보고 하라고 명한 후에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신천읍에 오니 이 날이 마침 장날이라 장꾼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곳저곳에서
치하포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렸다. 어떤 장사가 나타나서 한 주먹으로 일인을 때려
죽였다는 둥, 나룻배가 빙산에 끼인 것을 그 장사가 강에 뛰어들어서 손으로 얼음을
밀어서 그 배에 탄 사람을 살렸다는 둥, 밥 일곱 그릇을 눈 깜짝할 새에 다 먹더라는
둥 말들을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지난 일을 낱낱이 아뢰었더니, 부모님은 날더러 어디로
피하라고 하셨으나, 나는 나라를 위하여서 정정당당한 일을 한 것이니 비겁하게
피하기를 원치 않을 뿐더러, 만일 내가 잡혀가 목이 떨어지더라도 이로써 만민에게
교훈을 준다 하면 죽어도 영광이라 하여 태연히 집에서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석 달이나 지나서 병신년 5월 열 하룻날 새벽에 내가 아직 자리에 누워
일어나기도 전에 어머니께서 사랑문을 여시고,
  "이애, 우리 집을 앞뒤로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둘러 싸누나."
하시는 말씀이 끝나자 철편과 철퇴를 든 수십 명이,
  "네가 김창수냐?"
  하고 덤벼든다.
  나는,
  "그렇다. 나는 김창수여니와 그대들을 무슨 사람이관대 요란하게 남의 집에
들어오느냐."
  한즉 그제야 그 중의 한 사람이 '내부훈령등인'이라 한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나를
묶어 앞세웠다. 순검과 사령이 도합 30여 명이요, 내 몸은 쇠사슬로 여러 겹을
동여매고 한 사람씩 앞뒤에서 나를 결박한 쇠사슬 끝을 잡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후
좌우로 나를 옹위하고 해주로 향하여 길을 재촉했다. 동네 20여 호가 일가이지마는
모두 겁을 내어 하나도 감히 문을 열고 내다보는 이가 없었다. 이웃 동네 강씨, 이씨네
사람들을 김창수가 동학을 한 죄로 저렇게 잡혀 간다고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틀 만에 나는 해주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어머니는 밥을 빌어다가 내 옥바라지를
하시고 아버지는 영리청, 사령청 계방을 찾아 예전 낯으로 내 석방운동을 하셨으나
사건이 워낙 중대한지라, 아무 효과도 없었다.
  옥에 갇힌 지 한 달이나 넘어서 목에 큰 칼을 쓴 채로 선화당 뜰에 끌려 들어가서
감사 민영철에게 첫 심문을 받았다.
  민영철은,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일인을 살해하고 도적질을 하였다지?"
하는 말에 나는,
  "그런 일이 없소."
하고 딱 잡아떼었다.
  감사가 어성을 높여서,
  "이놈. 네 행적에 증거가 소연하거든 그래도 모른다 할까?" 이봐라, 저놈을 단단히
다루렷다."
하는 호령에 사령들이 달려들어 내 두 발목과 무릎을 칭칭이 동이고 붉은 칠을 한
몽둥이 두 개를 다리 새에 들이밀고 한 놈이 한 개씩 몽둥이를 잡고 힘껏 눌러서
주리를 틀었다. 단번에 내 정강이의 살이 터져서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 지금 내 왼편
정강이 마루에 있는 큰 허물은 그때에 상한 자리다. 나는 입을 다물고 대답을
아니하다가 마침내 기절하였다.
  이에 주리를 그치고 내 면상에 냉수를 뿜어서 소생시킨 뒤에 감사는 다시 같은 말을
물었다. 나는 소리를 가다듬어서,
  "민의 체포장을 보온즉 내부훈령등인이라 하였은즉 이것은 관찰부에서 처리할
안건이 아니오니 내부로 보고하여 주시오."
하였다. 나는 서울에 가기 전에는 내가 그 일인을 죽인 동기를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작정한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민 감사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다시 내려 가두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7월 초승에 나는 인천으로 이수가 되었다. 인천
감리영으로부터 4, 5명의 순검이 해주로 와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내가 집에 돌아올 기약이 망연하여서 아버지는, 집이며
가장집물을 모두 방매하여 가지고 서울이거나 인천이거나 내가 끌려가는 대로 따라
가셔서 하회에 보시기로 하여 일단 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나를 따라오셨다.
  해주를 떠난 첫날은 연안읍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나진포로 가는 길에 읍에서
5리쯤 가서 길가 어느 무덤 곁에서 쉬게 되었다. 이날은 일기가 대단히 더워서
순검들도 참외를 사먹으며 다리 쉼을 하였다. 우리가 쉬고 있는 곁 무덤 앞에는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앞에는 효자이창매지묘라
하고 뒤에는 그의 사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 비문에 의하건대, 이 창매는 본래
연안부의 통인(원을 곁에 모시면서 말을 받아 내리고 올리고 하는 천한 구실)으로서
그 어머니가 죽으매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한결같이 그 어머니의
산소를 모셨다 하여 나라에서 효자정문을 내렸다 하였고, 또 이 창매의 산소 옆의 그
아버지의 묘소 앞에는 그가 신을 벗어 놓고 계절 앞으로 걸어 들어간 발자국과 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향로와 향합을 놓았던 자리에는 영영 풀이 나지 못하였고 혹시
사람들이 그 움푹 파인 자리를 메우는 일이 있으면 곧 뇌성이 진동하며 큰 비가
퍼부어 메운 흙을 씻어 내고야 만다고 한다.
  그 근처 사람들과 순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귀로 듣고 돌비에 새긴 사적을
눈으로 보매 나는 순검들이 알세라 어머님이 알세라 하고 피섞인 눈물을 흘렸다. 저
이 창매는 죽은 부모에 대하여서도 저처럼 효성이 지극하였거늘 부모의 생전에야
오죽하였으랴. 그런데 거의 넋을 잃으시고 허둥허둥 나를 따라오시는 내 어머니를
보라. 나는 얼마나 불효한 자식인가. 나는 쇠사슬에 끌려서 그 자리를 떠나면서 다시금
다시금 이 효자의 무덤을 돌아보고 수없이 마음으로 절을 하였다.
  내가 나진포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이 병진년 7월 25일, 달빛도 없이 캄캄한
밤이었다. 물결조차 아니 보이고 다만 소리뿐이었다. 배가 강화도를 지날 때쯤하여
나를 호송하는 순검들이 여름 더위 길에 몸이 곤하여 마음놓고 잠든 것을 보시고
어머니는 뱃사공에게도 안 들릴 만한 입 안의 말씀으로,
  "애야, 네가 이제 가면 왜놈의 손에 죽을 터이니 차라리 맑고 맑은 물에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가 같이 다니자."
하시며 내 손을 이끄시고 뱃전으로 가까이 나가셨다. 나는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이렇게 여쭈었다.
  "제가 이번 가서 죽을 줄 아십니까, 결코 안 죽습니다. 제가 나라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친 정성으로 한 일이니 하늘이 도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안 죽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바다에 빠져 죽자고 손을 끄시므로, 마는 더욱 자신있게,
  "어머니, 저는 분명히 안 죽습니다."
하고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그제야 어머니도 결심을 버리시고,
"나는 네 아버지하고 약속했다. 네가 죽는 날이면 양주가 같이 죽자고."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비비시면서 알아듣지 못할 낮은 음성으로 축원을
올리셨다. 여전히 천지는 캄캄하고 보이지 않는 물결소리만 들렸다.
  나는 인천옥에 들어갔다. 내가 인천옥에 이수된 것은, 갑오경장에 외국사람과 관련된
사건을 심리하는 특별재판소를 인천에 둔 까닭이었다.
  내가 들어 있는 감옥은 내리에 있었다. 마루터기에 감리서가 있고 그 좌익이 경무청,
우익이 순검청인데, 감옥은 순검청 앞에 있고 그 앞에 이 모든 관아로 들어오는 2층
문루가 있었다. 높이 둘러쌓은 담 안에 나지막한 건물이 옥인데, 이것을 반으로 갈라서
한 편에는 징역하는 전중이와 강도, 절도, 살인 등의 큰 죄를 지은 미결수를 가두고
다른 편에는 잡수를 수용하였다. 미결수는 평복이지마는 징역하는 죄수들은 퍼런 옷을
입었고 저고리 등에는 강도, 살인, 절도, 이 모양으로 먹으로 죄명을 썼다. 이 죄수들이
일하러 옥 밖에 끌려 나갈 때에는 좌우 어깨를 아울러 쇠사슬로 동여서 이런 것을
둘씩둘씩 한 쇠사슬에 잡아매어 짝패를 만들고, 쇠사슬 끝 매듭이 죄수의 등에 가게
하였는데 여기를 자물쇠로 채웠다. 이렇게 한 죄수들을 압뢰(간수)가 몰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처음 인천옥에 갇힐 때에 나는 도적으로 취급되어서 아홉 사람을 함께 채우는
기다란 착고에 다른 도적 여덟 명의 한복판에 발목을 잠궜다. 한 달 전에 잡혀왔다는
치하포 주인이 화보가 내가 옥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가워하였다. 그날 내가
토전양량을 죽인 이유를 써서 이 화보의 집 벽에 붙인 것을 일인이 떼어서 감추고
나를 완전히 강도로 몬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옥문 밖까지 따라오셔서 눈물을
흘리고 서 계신 것을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서 뵈었다.
  어머니는 향촌에서 생장하셨으나 무슨 일에나 과감하시고 더욱 참선이 능하시므로
감리서 삼문 밖 개성 사람 박 영문의 집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시고 그 집 식모로
들어가셔서 이 자식의 목숨을 살리시려 하셨다. 이 집은 당시 인천항에서 유명한
물상객주로 살림이 크기 때문에 식모, 침모의 일이 많았다. 어머니는 이런 일을 하시는
값으로 하루 삼시 내게 밥을 들이게 한 것이었다. 하루는 옥사정이 나를 불러서
어머니도 의접할 곳을 얻으시었고 밥도 하루 삼시 들어오게 되었으니 안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다른 죄수들이 퍽 나를 부러워하였다. 나는 옛 사람이

  '애애부모 생아구로
  욕보기은 호천망극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고생하심이 커서 그 은혜에 보답코자 하나
하늘처럼 높아 다할 길이 없음이 슬프도다.'

  이라 한 것을 다시금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먹여
살리시느라고 천겹 만겹의 고생을 하셨다. 불경에, 부모와 자식은 천천생의 은애의
인연이란 말이 진실로 허사가 아니다.
  옥 속은 더할 수 없이 불결하고 아직도 여름이라 참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장질부사가 들어서 고통이 극도에 달하였다. 한 번은 나는 자살을 할 생각으로
다른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에 손톱으로 '충'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매어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숨이 끊어진 동안의 일이었다. 나는 삽시간에 고향으로 가서
내가 평소에 친애하던 재종제 창학(지금은 태운)과 놀았다.

  '고원장재목 혼거불수초
  오랜 세월 고향을 눈 앞에 그리며 지내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내 영혼은 이미 가
있구나.'

  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문득 정신이 드니 옆에 있는 죄수들이 죽겠다고 고함을 치고 야단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죽은 것을 걱정하여 그자들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아마 인사불성 중에 내가 몹시
요동을 하여서 착고가 흔들려서 그자들의 발목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 후로는 사람들이 지켜서 내가 자살할 기회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나 자신도
병에 죽거나 원수가 나를 죽여서 죽는 것은 무가내하라 하더라도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는 일은 아니하리라고 작정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땀은 났으나 보름 동안이나 음식을 입에 대어보지 못하여서 기운이
탈진하여 갱신을 못하였다. 그런 때에 나를 심문한다는 기별이 왔다.
  나는 생각하였다. 해주에서 다리뼈가 드러나는 악형을 겪으면서도 함구불언한 뜻은
내부에 가서 대관들을 대하여 한 번 크게 말하려 함이었지마는, 이제는 불행히 병으로
인하여 언제 죽을는지 모르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를 죽인 취지를 다 말하리라고.
  나는 옥사정의 등에 업혀서 경무청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도적문초하는 형구가
삼엄하게 벌여 놓인 것을 보았다. 옥사정이 업어다가 내려놓은 내 꼴을 보고 경무관
김윤정은 어찌하여 내 형용이 저렇게 되었느냐고 물은즉, 옥사정은 열병을 앓아서
그리 되었다고 아뢰었다.
  김윤정은 나를 향하여,
  "네가 정신이 있어, 족히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있느냐?"하고 묻기로 나는,
  "정신은 있으나 목이 말라붙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아니하니 물을 한잔 주면 마시고
말하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런즉 김 경무관은 술을 들이라 하여 물 대신에 술을 먹여 주었다.
  김 경무관은 청상에 앉아 차례대로 성명, 주소, 연령을 물은 뒤에, 모월 모일 안악
치하포에서 일인 하나를 살해한 일이 있느냐고 묻기로 나는,
  "있소."
하고 분명히 대답하였다.
  "그 일인을 왜 죽였어? 그 재물을 강탈할 목적으로 죽였다지?"
하고 경무관이 묻는다. 나는 이때로다 하고, 없는 기운이건마는 소리를 가다듬어,
  "나는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구 한 명을 때려 죽인 사실은 있으나, 재물을
강탈한 일은 없소."
하였다. 그런즉 청상에 늘어 앉은 경무관, 총순, 권임 등이 서로 맥맥히 돌아볼
뿐이요, 정내는 고요하였다.
  옆 의자에 걸터앉아서 방청인지 감시인지 하고 있던 일본 순사(뒤에 들으니
와다나베라고 한다)가 심문 벽두에 정내의 공기가 수상한 것을 보았음인지 통역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모양인 것을 보고 나는 죽을 힘을 다하여,
  "이놈!"
하는 한 소리 호령을 하고 말을 이어서,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 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왕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이 해서 우리 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
하고 소리를 높여서 꾸짖었더니 와다나베 순사는 그것이 무서웠던지,
"칙쇼, 칙쇼."하면서 대청 뒤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칙쇼'는 짐승이란 뜻으로
일본말의 욕이란 것을 나중에 들어서 알았다. 정내의 공기는 더욱 긴장하여졌다.
  배석하였던, 총순인지 주사인지 분명치 아니하나, 어떤 관원이 경무관 김윤정에게 이
사건이 심히 중대하니 감리 영감께 아뢰어 친히 심문하게 함이 마땅하다는 뜻을
진언하니, 김 경무관이 고개를 끄덕여 그 의견에 동의한다. 이윽고 감리사 이재정이
들어와서 경무관이 물러난 주석에 앉고 경무관은 이 감리사에게 지금까지의 심문
경과를 보고한다. 정내에 있는 관속들은 상관의 분부가 없이 내게 물을 갖다가
먹여준다.
  나는 이 감리사가 나를 심문하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나 김창수는 하향 일개 천생이건마는 국모 폐하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 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말)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은
잊어버리고 한갖 영귀와 총록을 도적질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요?"
  감리사 이재정, 경무관 김윤정,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모두 찔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내 말이 다 끝난 뒤에도 한참 잠자코 있던 이 감리사가 마치 내게 하소연하는 것과
같은 어성으로,
  "창수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감을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참괴한
마음이 비길 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 하고 경어를 쓴다. 이때에 김윤정이 내 병이 아직 위험상태에
있다는 뜻으로 이 감리사에게 수군수군하더니, 옥사정을 명하여 나를 옥으로
데려가라고 명한다. 내가 옥사정의 등에 업혀 나가노라니 많은 군중 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 얼굴에 희색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아마 군중이나
관속들에게서 내가 관정에서 한 일을 듣고 약간 안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어머니께 들은 말씀이거니와 그날 내가 심문을 당한다는 말을 들으시고
어머니는 옥문밖에 와서 기다리시다가 내가 업혀 나오는 꼴을 보시고 '저것이
병중에 정신없이 잘못 대답하다가 당장에 맞아 죽지나 않나'하고 무척 근심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감리사를 책망하는데 감리사는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는
둥, 내가 일본 순사를 호령하여 내어 쫓았다는 둥, 김창수는 해주 사는 소년인데 민
중전마마의 원수를 갚노라고 왜놈을 때려죽였다는 둥 하는 말을 듣고 안심이 되셨다고
하셨다. 나를 업고 가는 옥사정이 어머니 앞을 지나가며,
  "마나님, 아무 걱정 마시오. 어쩌면 이런 호랑이 같은 아들을 두셨소?"
하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감방에 돌아오는 길로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나를 전과 같이 다른 도적과
함께 착고를 채워 두는데 대하여 나는 크게 분개하여 벽력 같은 소리로,
  "내가 아무 의사도 발표하기 전에는 나를 강도로 대우하거나 무엇으로 하거나
잠자코 있었다마는 이왕 내가 할 말을 다한 오늘날에도 나를 이렇게 홀대한단 말이냐.
땅에 금을 그어 놓고 이것이 옥이라 하더라도 그 금을 넘을 내가 아니다. 내가 당초에
도망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 왜놈을 죽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문을
붙이고 집에 와서 석 달이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겠느냐. 너희 관리들은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한단 말이냐" 하면서 어떻게나 내가 몸을
요동하였던지 한 착고 구멍에 발목을 넣고 있는 여덟 명 죄수가 말을 더 보태어서,
내가 한 다리로 착고를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자기네 발목이 다 부러졌노라고
떠들었다. 이 소동을 듣고 경무관 김윤정이 들어 와서,
  "이 사람은 다른 죄수와 다르거든 왜 도적 죄수와 같이 둔 단 말이냐. 즉각으로 이
사람을 좋은 방으로 옮기고 일체 몸은 구속치 말고 너희들이 잘 보호하렷다."
하고 옥사정을 한끝 책망하고 한끝 명령하였다. 이로부터 나는 옥중에서 왕이 되었다.
  그런 지 얼마 아니하여서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 말씀이, 아까 내가 심문을
받고 나온 뒤에 김 경무관이 돈 일 백 쉰 냥(30원)을 보내며 내게 보약을 사 먹이라
하였다 하며, 어머니께서 우거하시는 집주인 내외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
손님들까지도 매우 나를 존경하여서, "옥중에 있는 아드님이 무엇을 자시고
싶어하거든 말만 해 드리리다." 하더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홉 사람의 발목을 넣은 큰 착고를 한 발로 들고 일어났다는 것은 이 화보를
여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다. 대개 그가 잡혀 와서 고생하는 이유가 살인한 죄인을
놓아 보냈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밥 일곱 그릇 먹고 하루 7백리 가는 장사를 어떻게
결박을 지우느냐고 변명하던 그의 말이 오늘에야 증명된 것이었다.
  이튿날부터는 내게 면회를 구하는 사람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감리서, 경무청,
순검청, 사령청의 수백 명 관속들이 내게 대한 선전을 한 것이었다. 인천항에서 세력
있는 사람 중에도, 또 말벌이꾼 중에도 다음 번 내 심문날에는 미리 알려 달라고 아는
관속들에게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둘째 심문날에도 나는 전번과 같이 압뢰의 등에 업혀서 나갔는데, 옥문밖에
나서면서 둘러보니 길에는 사람이 가득찼고 경무청에는 각 관아의 관리와 항내의
유력자들이 모인 모양이요, 담장이나 지붕이나 내가 심문을 받을 경무청 뜰이 보이는
곳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올라가 있었다.
  정내에 들어가 앉으니 김윤정이 슬쩍 내 곁으로 지나가며,
  "오늘도 왜놈이 왔으니 기운껏 호령을 하시오."
한다. 김윤정은 지금은 경기도 참여관이라는 왜의 벼슬을 하고 있으나 그때에 나는
그가 의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었다. 설마 관청을 연극장으로 알고 나를 한
배우로 삼아서 구경거리를 만든 것일 리는 없으니, 필시 항심없는 무리의 일이라
그때에는 참으로 의기가 생겼다가 날이 감에 따라서 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두 번째 심문에서 나는 할 말은 전번에 다 하였으니 더 할 말은 없다고 한마디로
끝내고, 뒷방에 앉아서 나를 넘겨다 보고 있는 와다베나베를 향하여 또 일본을 꾸짖는
말을 퍼부었다.
  그 이튿날부터는 더욱더욱 면회하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내 의기를
사모하여 왔노라, 어디 사는 아무개니 내가 출옥하거든 만나자, 설마 내 고생이
오래랴, 안심하라,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찾아 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음식을 한
상씩 잘 차려 가지고 와서 나더러 먹으라고 권하였다. 나는 가져온 사람이 보는 데서
한두 젓가락 먹고는 나머지는 죄수들에게 차례로 나누어 주었다.
  그때의 감옥 제도는 지금과는 달라서 옥에서 하루 삼시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수가 짚신을 삼아서 거리에 내다 팔아서 쌀을 사다가 죽이나 끓여 먹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내게 들어온 좋은 음식을 얻어 먹는 것은 그들의 큰 낙이었다.
  제 3차 심문은 경무청에서가 아니요, 감리서에서 감리 이재정 자신이 하였는데,
인천 인사가 많이 모인 모양이었다. 요샛말로 하면 방청이다. 감리는 내게 대하여 매우
친절히 말을 묻고, 다 묻고 나서는 심문서를 내게 보여 읽게 하고 고칠 것은 나더러
고치라 하여 수정이 끝난 뒤에 나는 '백'지에 이름을 두었다. 이날은 일인이 없었다.
  수일 후에 일인이 내 사진을 박는다 하여 나는 또 경무청으로 업혀 들어갔다. 이날도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김윤정은 내 귀에 들리라고,
  "오늘 저 사람들이 창수의 사진을 박으러 왔으니,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딱
부릅뜨고 박히시오."
한다.
  그러나 우리 관원과 일인 사이에 사진을 박히리, 못 박히리 하는 문제가 일어나서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다가 필경은 청사 내에서 사진을 박는 것은 허할 수 없으니
노상에서나 박으라 하여서 나를 노상에 앉혔다. 일인이 나를 수갑을 채우든지,
포승으로 얽든지 하여 죄인 모양을 하여 달라고 요구한데 대하여 김윤정은,
  "이 사람은 계하죄인(임금이 친히 알아 하시는 죄인이라는 뜻)인즉 대군주 폐하께서
분부가 계시기 전에는 그 몸에 형구를 대일 수 없다."
하여서 딱 거절하였다.
  그런즉 일인이 다시 말하기를,
  "형법이 곧 대군주 폐하의 명령이 아니오? 그런즉 김창수를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얽는 것이 옳지 않소?"
하고 기어이 나를 결박하여 놓고 사진박기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윤정은,
  "갑오경장 이후에 우리 나라에서는 형구를 폐하였소." 하고 잡아뗀다. 그런즉 왜는
또,
  "귀국 감옥 죄수를 본즉 다 쇠사슬을 차고 다니는데..."
하고 깐깐하게 대들었다.
  이에 김 경무관은 와락 성을 내며,
  "죄수의 사진을 찍는 것은 조약에 정한 의무는 아니오. 참고 자료에 불과한 세세한
일에 내정 간섭은 받을 수 없소."
하고 소리를 높여서 꾸짖는다. 둘러섰던 관중들은 경무관이 명관이라고 칭찬하고
있었다.
  이리하여서 나는 자유로운 몸으로 길에 앉은 대로 사진을 박게 되었는데, 일인은
다시 경무관에게 애걸하여 겨우 내 옆에 포승을 놓고 사진을 박는 허가를 얻었다.
  나는 며칠 전보다는 기운이 회복되었으므로 모여 선 사람들을 향하여 한바탕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왜놈들이 우리 국모 민 중전마마를 죽였으니 우리 국민에게 이런 수치와
원한이 또 어디 있소? 왜놈의 독이 궐내에만 그칠 줄 아시오? 바로 당신들의 아들과
딸들이 필경은 왜놈의 손에 다 죽을 것이오. 그러니 여러분!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서
왜놈을 만나는 대로 다 때려 죽이시오. 왜놈을 죽여야 우리가 사오."
하고 나는 고함을 하였다.
  와나다베놈이 내 곁에 와서,
  "네가 그렇게 충의가 있으면 왜 벼슬을 못하였나?"
하고 직접 내게 말을 붙인다.
  "나는 벼슬을 못 할 상놈이니까 조그마한 왜놈이나 죽였다마는, 벼슬을 하는
양반들은 너의 황제의 모가지를 베어서 원수를 갚을 것이다."
하고 나는 와다나베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날 김윤정에게 이 화보를 놓아 달라고 청하였더니 이 화보는 그날로
석방되어서 좋아라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나는 심문은 다 끝나고 판결만을 기다리는 한가한 몸이 되었다. 내가 이
동안에 한 일은 독서, 죄수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 죄수들을 위하여 소장을 대서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들여 주신 "대학"을 읽고 또 읽었다. 글도 좋거니와 다른 책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감리서에 다니는 어떤 젊은 관리의 덕으로 천만의외에
여기서 내 20평생에 꿈도 못 꾸던 새로운 책을 읽어서 새로운 문화에 접촉할 수가
있었다. 그 관리는 나를 찾아와서 여러 가지 새로운 말을 하여 주었다. 주미 문명국의
이야기며, 우리 나라가 옛 사상, 옛 지식만 지키고 척양척왜로 외국을 배척만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널리 세계의 정치, 문화, 경제, 과학
등을 연구하여서 좋은 것은 받아들여서 우리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창수와 같은 의기남아로는 마땅히 신학식을 구하여서 구가와 국민을 새롭게 할
것이니 이것이 영웅의 사업이지, 한갖 배외사상만을 가지고는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지 아니한가."
하여 나를 일깨워 줄 뿐더러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 "세계지지" 등 한문으로 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조선책도 들여 주었다. 나는 언제 사형의 판결과 집행을
받을지 모르는 몸인 줄 알면서도 아침에 옳은 길을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이 신서적을 수불석권하고 탐독하였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읽는 것을 보고
감리서 관리도 매우 좋아하셨다
  이런 책들을 읽는 동안에 나는 서양이란 것이 무엇이며, 오늘날 세계의 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나 자신과 우리 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나는
고 선생이 조상의 제사에 부르는 축문에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 몇 년을 쓰는 것이
우리 민족으로서는 옳지 아니한 것도 깨달았고, 안진사가 서양 학문을 공부한다고
절교하던 것이 고 선생의 달관이 아니라고(?) 보게 되었다.
  내가 청계동에 있을 때에는 고 선생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 척양척왜를 나의 유일한
천직으로 알았고, 옳은 도가 한 줄기 살아 있는 데는 오직 우리 나라 뿐이요, 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무리들은 모두 금수와 같은 오랑캐라고만 믿고 있었다. 그러나
"태서신사" 한 권만 보아도 저 눈이 움푹 들어 가고 코가 우뚝 솟은 사람들이 결코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아니한 오랑캐가 아니요, 오히려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법과 아름다운 풍속을 가졌고 저 큰 갓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른 신선과
같은 우리 탐관오리야말로 오랑캐의 존호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에 우리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저마다 배우고 사람마다 가르치는 것이라
깨달았다. 옥중에 있는 죄수들을 보니 글을 아는 이는 없고 또 그들의 생각이나 말이
모두 무지하기가 짝이  없어서 이 백성을 이대로 두고는 결코 나라의 수치를 씻을
수도 없고 다른 나라와 겨루어 나갈 부강한 힘을 얻을 수도 없다고 단정하였다.
  이에 나는 내가 깨달은 바를 곧 실행하여서 내 목숨이 있는 날까지 같이 옥중에
있는 죄수들만이라도 가르쳐 보려 하였다. 죄수는 들락날락하는 자를 아울러 평균 백
명 가량인데 그 열에 아홉까지는 양서부지였다. 내가 글을 가르쳐 주마 한즉 그들은
마다고는 아니하고 배우는 체를 하였으나 그 중에 몇 사람을 제하고는 글에 뜻이 있는
것보다 내 눈에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으려는 것이 목적인 것 같았다. 도적이나
살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글을 배워서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 같았다.
  조덕근이란 자는 "대학"을 배우기로 하였는데, 그 서문에 '인생팔세 개입소학'이라는
구절을 소리 높이 읽다가, '개입소학'을 '개 아가리 소학'이라고 하여서 나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었다. 이 자는 화개동 갈보의 서방으로서 갈보 하나를 중국으로 팔아
보낸 죄로 10년 징역을 받은 것이었다. 때는 건양 2년 즈음이라, '황성신문'이
창간되었다 하여 누가 내게 들여 주는 어느 날 신문에, 내 사건의 전말을 대강 적고
나서 김창수가 인천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므로 감옥은 학교가 되었다고
씌어 있었다.
  나는 죄수의 선생 노릇을 하는 한편, 또 대서소도 벌인 셈이 되었다. 억울하게 잡혀
온 죄수의 말을 듣고 내가 소장을 써주면 그것으로 놓여 나가는 이도 있어서 내 소장
대서가 소문이 나게 되었다. 더구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밖에 있는 대서인에게 소장을
써달래려면 매우 힘도 들고 돈도 들었다. 그런데 같은 감방에 마주 앉아서 충분히 할
말을 다 하고 소장을 쓰는 것은 인찰지 사는 값밖에는 도무지 비용이 들지
아니하였다. 내가 소장을 쓰면 꼭 득송한다고 사람들이 헛소문을 내어서 관리 중에
내게 소장을 지어달라는 자도 있고, 어느 관원에게 돈을 빼앗겼다 하는 사람의 원정을
지어서 상관에게 드려 그 관리를 파면시킨 일도 있었다. 이러므로 옥리들도 나를
꺼려서 죄수를 함무로 학대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글을 가르치고, 대서를 한 여가에 나는 죄수들에게 소리를 시키고 나도
소리를 배우고 놀았다. 나는 농촌 생장이지마는 기음 노래 한 가락, 갈까보다 한
마디도 할 줄을 몰랐다.
  그때 옥의 규칙이 지금과는 달라서 낮잠을 재우고 밤에는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다들 잠든 틈을 타서 죄수가 도망할 것을 염려함에서였다.
그러므로 죄수들은 밤새도록 소리도 하고 이야기 책도 읽기를 허하였던 것이다. 이
규칙은 내게는 적용되지 아니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므로 나도 자연 늦도록
놀다가 자게 되었다. 자꾸 듣는 동안에 자연 시조니 타령이니 남이 하는 소리의 맛을
알게 되어서 나도 배울 생각이 났다. 나는 갈보 서방 조덕근에게 평시조, 엮음시조,
남창 지름, 여창 지름, 적벽가, 새타령, 개구리타령 등을 배워서 남들이 할 때면 나도
한몫 들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서 7월도 거의 다 갔다. 하루는 '황성신문에 다른
살인 죄인, 강도 죄인 몇과 함께 인천 감옥에 있는 살인강도 김창수를 아무 날
처교(목을 달아 죽임)한다는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그 날짜는 7월 스무 이렛날이든가
한다.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하면 부러 태연한 태도를 꾸밀 법도 하지마는 어찌된
일인지 내 마음은 조금도 경동되지 아니하였다. 교수대에 오를 시간을 겨우 반 일을
격하고도 나는 음식이나 독서나 담화를 평상시처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고
선생께 들은 말씀 중에 박태보가 보습으로 단근질을 받을 때에,
  "이 쇠가 식었으니 더 달구어 오너라."
한 것이며, 심양에 잡혀 갔던 심학사의 사적을 들은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형을 당한다는 신문기사를 본 사람들은 뒤를 이어 찾아와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를테면 조상이다. 아무 나으리, 아무 영감 하는 사람들도
찾아와서,
  "김 석사, 살아 나와서 상면할 줄 알았더니 이것이 웬일이요?"
하고 두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밥을 손수 들고 오시는 어머니가 평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심이었다. 아마 사람들이 내게 죽게 되었다는 말을 아니 알려 드린 것인가 하였다.
  나는 조상하는 손님이 돌아간 뒤에도 여느 때처럼 "대학"을 읽고 있었다. 인천 감옥
죄수의 사형 집행은 언제나 오후에 하게 되었고, 처소는 우각동이란 것을 알므로 나는
아침과 점심을 잘 먹었다. 죽을 때에는 어떻게 하리라 하는 마음 준비도 할 마음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아무러하지도 아니하건마는 다른 죄수들이 나를 위하여 슬퍼해
주는 정상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내게 음식을 얻어 먹은 죄수들이며 글을 배운
제자들, 그리고 나한테 소장을 써 받고 소사에 대한 지도를 받아 오던 잡수들이
애통하는 양은 그들이 제 부모상에 그러하였을까 의심할 만큼 간절하였다.
  차차 시간은 흘러서 오후가 되고 저녁 때가 되었다. 교수대로 끌려나갈 시각이
바싹바싹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내 목숨이 끊어질 순간까지 성현의 말씀에 잠심하여
성현과 동행하리라 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대학"을 읽고 있었다. 그럭저럭
저녁밥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내가 특별한 죄수가 되어서 밤에 집행하는 것이라고
생각들 하고 있었다. 나는 예기하지 아니하였던 저녁 한 때를 이 세상에서 더 먹은
것이었다.
  밤이 초경이 되어서 밖에서 여러 사람이 떠들석하고 가까이 오는 인기척이 나더니
옥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옳지. 이제 때가 왔구나."
하고 올 것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한방에 있는 죄수들은 제가 죽으러
나가기나 하는 것처럼 모두 낯색이 변하여 덜덜 떨고 있었다. 이 때 문 밖에서,
  "창수, 어느 방에 있소?"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 방이요."
하는 내 대답은 듣는 것 같지도 않고, 방문도 열기 전부터 어떤 소리가,
  "아이구, 이제는 창수 살았소! 아이구, 감리 영감과 전 서원과 각청 직원이 아침부터
밥 한 술 못 먹고 끌탕만 하고 있었소---창수를 어찌 차마 우리 손으로 죽이느냐고.
그랬더니 지금 대군주 폐하께옵서 대청에서 감리 영감을 불러 계시고, 김창수 사형은
정지하랍신 친칙을 받잡고 밤이라도 옥에 내려가 김창수에게 전지하여 주랍신 분부를
듣고 왔소. 오늘 얼마나 상심하였소?"
하고 관속들은 친동기가 죽기를 면하기나 한 것처럼 기뻐하였다. 이것이 병진년 윤
8월 26일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내가 사형을 면하고 살아난 데는 두 번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리하였다.
  법무대신이 내 이름과 함께 몇 사형 죄인의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상감의 칙재를
받았다. 상감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때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에 하나가 내
죄명이, 국모보수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어전에 나아가 임금께 뵈인즉, 상감께서는 즉시 어전 회의를 여시와 내 사형을
정지하기로 결정하시고 곧 인천 감리 이재정을 전화로 부르신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나는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이
되었을 것이니, 이것이 첫째로 이상한 인연이었다.
  둘째로는 전화가 인천에 통하게 된 것이 바로 내게 관한 전화가 오기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아니 되었던들 아무리 위에서
나를 살리려 하셨더라도 그 은명이 오기 전에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감리서 주사가 뒤이어 찾아와서 하는 말에 의하면 내가 사형을 당하기로
작정되었던 날 인천항 내 서른 두 물상객주들이 통문을 돌려서 매호에 한 사람 이상
우각동으로 김창수 처형 구경을 가되, 각기 엽전 한 냥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모아
김창수의 몸값을 삼자, 만일 그것만으로 안 되거든 부족액은 서른 두 객주가
담당하자고 작정하였더라고 한다. 감리서 주사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 주고 끝으로,
  "아무러나 김 석사, 이제는 천행으로 살아났소. 며칠 안으로 궐내에서 은명이 계실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계시오."
하고 갔다.
  이제는 다들 내가 분명히 사형을 면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상설이 날리다가
춘풍이 부는 것과 같다. 옥문이 열리는 소리에 벌벌 떨고 있던 죄수들은 내게 전하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좋아서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신골 방망이로 착고를 두드리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청바지저고리짜리들이 얼씨구나 좋을씨구 하고 춤을 춘다,
익살을 부린다, 마치 푸른 옷을 입은 배우들의 연극장을 지어낸 듯하였다.
  죄수들은 내가 그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태연자약한 것은 이렇게 무사하게 될 줄을
미리 알았던 것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나를 이인이라 하여 앞날 일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떠들었다. 더구나 어머님은 갑꼬지 바다에서 "내가 안 죽습니다."하던 말을
기억하시고 내가 무엇을 아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시는 모양이요, 아버지도 그런
생각을 가지시는 것 같았다.
  대군주의 칙령으로 김창수의 사형이 정지되었다는 소문이 전파되자 전일에 와서
영결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조상이 아니요, 치하하러 왔다. 하도 면회인이 많으므로
나는 옥문 안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몇날 동안 응접을 하였다. 전에는 다만 나의 젊은
의기를 애석히 여기는 것 뿐이었거니와, 칙명으로 내 사형이 정지되는 것을 보고는
미구에 위에서 소명이 내려서 내가 영귀하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벌써부터 내게
아첨하는 사람조차 생기게 되었다. 이런 일은 일반 사람들만 아니라 관리 중에도
있었다.
  하루는 감리서 주사가 의복 한 벌을 가지고 와서 내게 주고 말하기를, 이것을
병마우후 김주경이라는 강화 사람이 감리 사또에게 청하여 전하는 것인즉 이 옷을
갈아입고 있다가 그 김주경이 오거든 만나라고 하였다.
  이윽고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나이는 사십이나 되어 보이고, 면목이 단단하게 생겼다.
별 말이 없고 다만,
  "고생이나 잘하시오. 나는 김주경이오."
하고는 돌아갔다.
  어머니께서 저녁밥을 가지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김우후가 아버지를 찾아서
부모님 양주의 옷감과, 용처에 보태라고 돈 2백 냥을 두고 가며 열흘 후에 또 오마고
하였다 한다. 이 말 끝에 어머니는,
  "네가 보니 그 양반이 어떻더냐. 밖에서 듣기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구나."
하시기로 나는,
  "사람을 한 번 보고 어찌 잘 알 수 있습니까마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은 고맙습니다."
하였다.
  김주경에게 내 일을 알린 것은 인천옥에 사령반수로 있는 최덕만이었다. 최덕만은
본래 김의 집 비부였었다. 김주경의 자는 경득이니, 강화 아전의 자식이었다. 병인양요
뒤에 대원군이 강화에 3천 명의 무사를 양성하고 섬 주위에 두루 포루를 쌓아 국방
영문을 세울 때에 포량 고지기(군량을 둔 창고를 지키는 소임)가 된 것이 그의 출세의
시초였다. 그는 성품이 호방하여 초립동이 시절에도 글읽기를 싫어하고 투전을
일삼았다.
  한 번은 그 부모가 그를 징계하기 위하여 며칠 동안 고방 속에 가두었더니, 들어갈
때에 그는 투전목 하나를 감추어 가지고 들어가서 거기 갇혀 있는 동안에 투전에 대한
여러 가지 묘법을 터득하여 가지고 나와서 투전목을 여러 만 개 만들되 투전짝마다
저만 알 수 있는 표를 하였다. 이 투전목을 강화도 안에 있는 여러 포구에 분배하여
뱃사람들에게 팔게 하고 자기는 이 배 저 배로 돌아다니면서 투전을 하였다. 어느
배에서나 쓰는 투전목은 다 김주경이 만든 것이라, 그는 투전짝의 표를 보아 알기
때문에 얼마 아니하여서 수십 만 냥의 돈을 땄다.
  김주경은 그렇게 투전하여 얻은 돈으로 강화와 인천의 각 관청의 관속을 매수하여
그의 지휘에 복종케 하고, 또 꾀있고 용맹있는 날탕패를 많이 모아 제 식구를 만들어
놓고는 어떠한 세도 있는 양반이라도 비리의 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직접이거나
간접이거나 꼭 혼을 내고야 말았다. 경내에 도적이 나서 포교가 범인을 잡으러
나오더라도 먼저 김주경에게 물어보아서 그가 잡아가라면 잡아 가고, 그에게 맡기고
가라면 포교들은 거역을 못 하였다. 당시에 강화에는 큰 인물 둘이 있으니 양반에는
이건창이요, 상놈에는 김주경이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은 강화유수도 건드리지를
못하였다. 대원군은 이런 말을 듣고 김주경에게 군량을 맡는 중임을 맡긴 것이다.
  하루는 사령반수 최덕만이 내게 와서 하는 말이, 김주경이가 어느 날 자기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면서 말하기를, 김창수를 살려 내야 할 터인데, 요새 정부의
대관놈들이 모두 눈깔에 동록이 슬어서 돈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니 이번에
집에 가서 가산을 모두 족쳐 팔아 가지고 김창수의 부모 중에 한 분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석방운동을 하겠노라 하더라고 하였다. 최덕만이 이 말을
한 지 10여 일 후에 과연 김주경이가 인천에 와서 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갔다.
  뒤에 듣건대 김주경은 첫째로 당시 법무대신 한규설을 찾아서 내 말을 하고, 이런
사람을 살려 내어야 충의지사가 많이 나올 터이니, 폐하께 입주하여 나를 놓아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한규설도 내심으로는 찬성이나, 일본공사 임권조가 벌써 김창수를
아니 죽였다는 것을 문제 삼아서 대신 중에 누구든지 김창수를 옹호하는 자는 무슨
수단으로든지 해치려 하니, 막무가내 하라고 폐하께 입주하는 일을 거절하므로
김주경은 분개하여 대관들을 무수히 졸욕하고 나와서 공식으로 법부에 김창수 석방을
요구하는 소지를 올렸더니 그 제사에

  '(기의가상 사관중대 미가천편향사)
  그 의는 가상하나 일이 중대하니 여기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였다.
  그 뒤에도 제 2차, 제 3차로 관계있는 각 아문(관청)에 소장을 드려 보았으나 어디나
마찬가지로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고 결말을 보지 못하였다. 이 모양으로 김주경은
7,8개월 동안이나 나를 위하여 송사를 하는 통에 그 집 재산은 다 탕진되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번갈아서 인천에서 서울로 오르락내리락하셨으나 필경 아무 효과도
없이 김주경도 마침내 나를 석방하는 운동을 중지하고 말았다.
  김주경은 소송을 단념하고 집에 돌아와서 내게 편지를 하였는데, 보통으로
위문하는 말을 한 끝에 오언절구 한 수를 적었다.

  '(탈농진호조 발호기상린 구충필어효 청간의려인)
  새는 조롱을 벗어나야 좋은 상이며 고기가 통발을 벗어나니 어찌 예사스러우랴.
충신은 반드시 효 있는 집에서 찾고 효자는 평민의 집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내게 탈옥을 권하는 말이다. 나는 김주경이가 그간 나를 위하여
심력을 다한 것을 감사하고, 구차히 살길을 위하여 생명보다 중한 광경을 버릴 뜻이
없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답장하였다.
  김주경은 그 후 동지를 규합하여 관용선 청룡환, 현익호, 해룡환 세 척 중에서
하나를 탈취하여 해적이 될 준비를 하다가 강화 군수의 염탐한 바가 되어서 일이
틀어지고 도망하였는데, 중로에서 그 군수의 행차를 만나서 군수를 실컷 두들겨 주고
해삼위 방면으로 갔다고도 하고 근방 어느 곳에 숨어 있다고도 하였다.
  그 후에 아버지는 김주경이가 서울 각 아문에 드렸던 소송 문서 전부를 가지고
강화에 이건창을 찾아서 나를 구출할 방책을 물으셨으나 그도 역시 탄식만 할
뿐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대로 옥중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나는
만사를 하늘의 뜻에 맡기고 성현으로 더불어 동행하자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으므로
탈옥 도주는 염두에도 두지 아니하고 있었다. 그러나 10년역 조덕근, 김백석, 3년수
양봉구, 이름은 잊었으나 종신수도 하나 있어서 그들은 조용할 때면 가끔 내게
탈옥하자는 뜻을 비추었다. 그들은 내가 하려고만 하면 한 손에 몇 명씩 쥐고
공중으로 날아서라도 그들을 건져낼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두고두고
그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살려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내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생각에는 나는 얼마 아니하여 위로부터 은명이 내려서 크게 귀하게 되겠지마는
나마저 나가면 자기들은 어떻게 살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하였다. 상감께서 나를 죄인으로 알지 아니하심은 내 사형을 정지하라신
친칙으로 보아 분명하고, 동포들이 내가 살기를 원하는 것도 김주경을 비롯하여
인천항의 물상객주들이 돈을 모아서 내 목숨을 사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지
아니하냐. 상하가 다 내가 살기를 원하나 나를 놓아 주지 못하는 것은 오직 왜놈
때문이다. 내가 옥중에서 죽어 버린다면 왜놈을 기쁘게 할 뿐인즉 내가 탈옥을
하더라도 의리에 어그러질 것이 없다고, 이리하여 나는 탈옥할 결심을 하였다. 내가
조덕근에게 내 결심을 말한즉 그는 벌써 살아난 듯이 기뻐하면서 무엇이나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맹세하였다. 나는 그에게 집에 말하여 돈 2백냥을 들여 오라 하였더니
밥을 나르는 사람 편에 기별하여서 곧 가져왔다. 이것으로 탈옥의 한 가지 준비는 된
것이었다.
  둘째로 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강화 사람 황순용이라는 사람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황가는 절도죄로 3년 징역을 거의 다 치르고 앞으로 나갈 날이 멀지
아니하므로 감옥의 규례대로 다른 죄수를 감독하는 직책을 맡아 가지고 있었다.
이놈을 손에 넣지 아니하고는 일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황가에게 한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김백석을 남색으로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었다. 김백석은 아직
17, 8세의 미소년으로서 절도 3범으로 10년 징역의 판결을 받고 복역하는 지가 한 달쯤
된 사람이었다. 나는 김백석을 이용하여 황가를 손에 넣기로 계획을 정하였다.
  나는 조덕근으로 하여금 김백석을 충동하여, 김백석으로 하여금 황가를 졸라서,
황가로 하여금 내게 김백석을 탈옥시켜 주기를 빌게 하였다. 계교는 맞았다. 황가는
날더러 김백석을 놓아 달라고 졸랐다. 나는 그를 준절히 책망하고 다시는 그런 죄 될
말은 말라고 엄명하였다. 그러나 김백석에게 자꾸 졸리우는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졸랐다. 내가 뿌리치면 뿌리칠수록 그의 청은 간절하여서 한
번은,
  "제가 대신 징역을 져도 좋으니 백석이만 살려 줍시오."
하고 황가는 울었다. 비록 더러운 애정이라 하여도 애정의 힘은 과연 컸다. 그제야
내가 황가의 청을 듣는 것같이, 그러면 그러라고 허락하였다. 황은 백배 사례하고
기뻐하였다. 이리하여 둘째 준비도 끝이 났다.
  다음에 나는 아버지께 면회를 청하여 한 자 길이 되는 세모난 철장 하나를 들여
줍소사고 여쭈었다. 아버지께서는 얼른 알아차리고 그날 저녁에 새 옷 한 벌에 그
창을 싸서 들여 주셨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탈옥할 날을 정하였으니 그것은, 무술년 3월 초 아흐렛날이었다.
  이날 나는 당번하는 옥사정 김가에게 돈 1백 50냥을 주어, 오늘 밤에 내가
죄수들에게 한턱을 낼 터이니 쌀과 고기와 모주 한 통을 사 달라 하고 따로 돈 스물
닷 냥을 옥사정에게 주어 그것으로는 아편을 사 먹으라고 하였다. 옥사정이 아편장인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죄수에게 턱을 낸 것은 전에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옥사정도 예사로이 알았을 뿐더러 아편값 스물 닷 냥이 생긴 것이 무엇보다도
좋아서 두말 없이 모든 것을 내 말대로 하였다. 관속이나 죄수나 나는 조만간
은명으로 귀히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탈옥 도주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리가 없었다. 조덕근, 양봉구, 황순용, 김백석, 네 사람도 나는 그냥 옥에
머물러 있고 자기네만을 빼어 놓을 줄만 믿고 있었다.
  저녁밥을 들고 오신 어머니께, 자식은 오늘밤으로 옥에서 나가겠으니, 이 밤으로
배를 얻어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자식이 찾아갈 때를 기다리라고 여쭈었다.
  50명 징역수와 30명 미결수들은 주렸던 창자에 고깃국과 모주를 실컷 먹고 취흥이
도도하였다.
  옥사정 김가더러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죄수들 소리나 시키며 놀자고 내가
청하였더니 김가는 좋아라고,
  "이놈들아, 김 서방님 들으시게 장기대로 소리들이나 해라."
하고 생색을 보이고 저는 소리보다 좋은 아편을 피우려고 제방에 들어가 버렸다.
  나는 적수 방에서 잡수 방으로, 잡수 방에서 적수 방으로 왔다갔다 하다가 슬쩍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바닥에 깐 박석(정방형으로 구운 옛날 벽돌)을 창 끝으로 들쳐
내고 땅을 파서 옥밖에 나섰다. 그리고 옥담을 넘을 줄사다리를 매어 놓고 나니
문득 딴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다가 무슨 일이 날는지 모르니, 이 길로
나 혼자만 나가 버리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좋은 사람도 아니니 기어코 건져낸들
무엇하랴. 그러나 얼른 돌려 생각하였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를 지어도
부끄러웁거늘 하물며 저들과 같은 죄인에게 죄인이 되고서야 어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랴. 종신토록 수치가 될 것이다.
  나는 내가 나온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서 천연덕스럽게 내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들은 여전히 흥에 겨워서 놀고 있었다. 나는 눈짓으로 조덕근의 무리를 하나씩
불러서 나가는 길을 일러주어 다 내보내고 다섯째로 내가 나가 보니 먼저 나온 네
녀석들은 담을 넘을 생각도 아니하고 밑에 소복하니 모여 앉아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하나씩 하나씩 궁둥이를 떠받쳐서 담을 넘겨 보내고 마지막으로 내가
담을 넘으려 할 때 먼저 나간 녀석들이 용동 마루로 통하는 길에 면한 판장을
넘느라고 왈가닥거리고 소리를 내어서 경무청과 순검청에서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비상소집의 호각소리가 나고 옥문밖에서는 벌써 퉁탕퉁탕하고 급히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직도 옥담 밑에 서 있었다. 이제는 내 방으로 돌아갈 수도 없은즉 재빨리
달아나는 것밖에 없건마는 남을 넘겨 주기는 쉬워도 길 반이나 넘는 담을 혼자 넘기가
어려웠다. 나 혼자는 줄사다리로 어름어름 넘어갈 새가 없었다. 옥문 열리는 소리,
죄수들이 떠들석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나는 죄수들이 물통을 마주 메는 한 길이나
되는 몽둥이를 짚고 몸을 솟구쳐서 담 꼭대기에 손을 걸고 저편으로 뛰어 넘었다.
이렇게 된 이상에는 내 길을 막는 자가 있으면 사생의 결단을 하고 결투할 결심으로
판장을 넘지 아니하고 내 쇠창을 손에 들고 바로 삼문을 나갔다. 삼문을 지키던 파수
순검들은 비상소집에 들어간 모양이어서 거기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탄탄대로로
나왔다. 들어온 지 2년 만에 인천옥을 나온 것이었다.


    3. 방랑의 길

 옥에서는 나왔으나 어디로 갈 바를 몰랐다. 늦은 봄 안개가 자욱한 데다가 인천은
연전 서울 구경왔을 때에 한 번 지났을 뿐이라, 길이 생소하여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에 물결소리를 더듬어서 모래사장을
헤매다가 훤히 동이 틀 때에 보니 기껏 달아난다는 것이 감리서 바로 뒤 용동
마루턱이에 와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휘휘 둘러보노라니 수십 보밖에 순검 한
명이 칼 소리를 제그럭제그럭 하고 내가 있는 데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길가 어떤
가겟집 함실 아궁이를 덮은 널빤지 밑에 몸을 숨겼다. 순검의 흔들리는 환도집이 바로
코끝을 스칠 듯이 지나갔다.
  아궁이에서 나오니 벌써 환하게 밝았는데, 천주교당의 뾰족집이 보였다. 그것이
동쪽인 줄 알고 걸어갔다.
  나는 어떤 집에 가서 주인을 불렀다. 누구냐 하기로 "아저씨 나와 보세요."하였더니
그는 나와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김창수인데 간밤에 인천감리가
비밀히 석방하여 주었으나 이 꼴을 하고 대낮에 길을 갈 수가 없으니 날이 저물
때까지 집에 머물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주인은 안된다고 거절하였다. 또  얼마를
가노라니까 모군꾼 하나가 상투바람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소리를 하며 내려왔다. 그는
식전에 막걸리 집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또 사실을 말하고 빠져날갈 길을
물었더니, 그 사람은 대단히 친절하게 나를 이끌고 좁은 뒷골목 길로 요리조리 사람의
눈에 안띄게 화개동 마루터기까지 가서 이리 가면 수원이요, 저리 가면 시흥이니,
마음대로 어느 길로든지 가라고 일러주었다. 미처 그의 이름을 못 물어 본 것이
한이다.
  나는 서울로 갈 작정으로 시흥 가는 길로 들어섰다. 내 행색을 보면 누가 보든지
참말로 도적놈이라고 할 것이다. 염병에 머리털은 다 빠져서 새로 난 머리카락을
노끈으로 비끌어 매어서 솔잎상투로 짜고 머리에는 수건을 동이고, 두루마기도 없이
동저고릿바람인데, 옷은 가난한 사람의 것이 아닌 새 것이면서 땅 밑으로 기어 나올
때에 군데군데 묻은 흙이 물이 들어서 스스로 살펴보아도 평상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아니하였다.
  인천 시가를 벗어나서 5리쯤 가서 해가 떴다. 바람결에 호각소리가 들리고 산에도
사람이 희끗희끗 하였다. 내 이런 꼴로는 산에 숨더라도 수사망에 걸릴 것 같으므로
허허실실로 차라리 대로변에 숨으리라 하고 길가 잔솔밭에 들어가서 솔포기 밑에 몸을
감추고 드러누웠다. 얼굴이 감추어지지 않는 것은 솔가지를 꺾어서 덮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칼찬 순검과 벙거지 쓴 압뢰들이 지껄이며, 내가 누워 있는 옆으로 지나갔다.
그들의 주고 받는 말에서 나는 조덕근은 서울로, 양봉구는 배로 달아난 것을 알았고,
내게 대해서는 "김창수는 장사니까 잡기 어려울 거야. 허기야 잘 달아났지. 옥에서
썩으면 무얼하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나는 다 알 수
있었다.
  나는 온종일 솔포기 밑에 누워 있다가 순검이 누구누구며 압뢰 김장석 등이 도로 내
발부리를 지나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야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니 벌써
황혼이었다. 나오기는 하였으나 어제 이른 저녁밥 이후로는 물 한 방울 못 먹어 보고
눈 한 번 못 붙인 나는 배는 고프고 몸은 곤하여 촌보를 옮기기가 어려웠다.
  나는 가까운 동네 어떤 집에 가서, 황해도 연안에 가서 쌀을 사 가지고 오다가
북성고지 앞에서 배 파선을 한 서울 청파 사람이라고 말하고 밥을 좀 달라고 하였더니
주인이 죽 한 그릇을 내다 주었다. 나는 누구에게 정표를 받아서 몸에 지니고 있던
화류 면경을 꺼내어 그 집 아이에게 뇌물로 주고 하룻밤 드새기를 청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다. 그러고 보니 죽 한 그릇에 엽전 한 냥을 주고 사먹은 셈이 되었다. 그때
엽전 한 냥이면 쌀 한 말 값도 더 되었다. 나는 또 한 집 사랑에 들어갔으나 또
퇴짜를 맞고 하릴없이 방앗간에서 자기로 하였다. 나는 옆에 놓인 짚단을 날라다가
깔고 덮고 드러누웠다. 인천 감옥 이태의 연극이 이에 막을 내리고 방앗간 잠이 둘째
막의 개시로구나, 하면서 소리를 내어서 "손무자"와 "삼략"을 외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지가 글을 다 읽는다."
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또 어떤 사람이,
  "예사 거지가 아니야. 아까 저 사랑에 온 것을 보니 수상한 사람이야."
하는 말에는 대단히 켕겼다. 그래서 나는 미친 사람의 모양을 하노라고 귀둥대둥 혼자
욕설을 퍼붓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버리고개를 향하고 소로로 가다가 밥을 빌어 먹을 생각으로
어떤 집 문전에 섰다. 나는 거지들이 기운차고 넌출지게 밥을 내라고 떠들던 양을
생각하고,
  "밥 좀 주시우."
하고 불러 보았으나, 내깐에는 소리껏 외친다는 것이 개가 짖을 만한 소리밖에 안
나왔다. 주인은 밥은 없으니 숭늉이나 먹으라고 숭늉 한 그릇을 주었다. 그것을 얻어
먹고 또 걸었다.
  오랫동안 좁은 세계에서 살다가 넓은 천지에 나와서 가고 싶은 대로 활활 갈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신통하고 상쾌하였다. 나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옥에서 배운 시조와
타령을 하면서 부평, 시흥을 지나 그날 당일로 양화도 나루에 다다랐다. 강만 건너면
서울이건마는 날은 저물고 배는 고프고, 또 나룻배를 탈래야 선가 줄 돈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네 서당을 찾아 들어갔다.
선생과 인사를 청한즉 그는 내가 나이 어리고 의관이 분명치 못함을 봄인지 초면에
하대를 하였다. 나는 정색하고,
  "선생이 이렇게 교만무례하고 어찌 남을 가르치겠소? 내가 일시 운수가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의관과 행리를 다 빼앗기고 이 꼴로 선생을 대하게 되었소마는
사람을 그렇게 괄시하는 법이 어디 있소. 허, 예절을 알 만한 이를 찾아온다는 것이,
어 참, 봉변이로고."
하고 일변 책하고 일변 빼었다. 선생은 곧 사과하고 다시 인사를 청하였다. 그러고는
그날 밤을 글 토론으로 지내고 아침에는 선생이 아이 하나에게 편지를 써 주기에
나룻배 주인에게 전하여 나를 선가 없이 건너게 하였다.
  나는 옥에서 사귀었던 진오위장을 찾아갔다. 이 사람은 남영희궁에 청지기로 있는
사람으로서 배오개 유기장이 5, 6인과 짜고 배를 타고 인천 바다에 떠서 백동전을
사주하다가 깡그리 붙들려서 일년 동안이나 나와 함께 옥살이를 하였다. 그들은 내게
생전 못잊을 신세를 졌노라 하여 나에게 출옥하는 날에는 꼭 찾아 달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내가 영희궁을 찾아간 것은 황혼이었다. 진오위장은 마루 끝에 나와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아이구머니, 이게 누구요?"
하고 버선발로 마당에 뛰어내려 와서 내게 매달렸다. 그리고 내 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서 내가 나온 곡절을 듣고는 일변 식구들을 불러서 내게 인사를 시키고 일변
사람을 보내어 예전 공범들을 청해 왔다. 그들은 내 행색이 수상하다 하여 '나는 갓을
사 오리다.' '나는 망건을 사 오겠소.' '나는 두루마기를 내리다.'하여 한 사람이 한
가지씩 추렴을 모아서 나는 3, 4년 만에 비로소 의관을 하고 나니 저절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렇게 나는 날마다 진오위장 일파와 모여 놀며 며칠을 유련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조덕근을 두 번이나 찾아 갔으나, 이 핑계 저 핑계 하고 나를
전혀 만나주지 아니하였다. 중죄인인 나를 아는 체하는 것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오위장 집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수일을 쉬어서 여러 사람이 모아 주는 노자를 한
짐 잔뜩 걸머지고 삼남 구경을 떠나노라고 동작이 나루를 건넜다. 그때에 내 심회가
심히 울적하여 승방뜰이라는 데서부터 술 먹기를 시작하여 매일 장취로 비틀거리고
걷는 길이 수원 오산장에 다다랐을 때에 벌써 한 짐 돈을 다 써 버리고 말았다. 나는
오산장에서 서쪽에 있는 김삼척의 집을 찾기로 하였다. 주인은 삼척 영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아들이 6형제가 있는데 그 중에 맏아들인 김동훈이 인천항에서 장사를
하다가 실패한 관계로 인천옥에서 한 달 정도 고생을 할 때에 나와 절친하게
되었었다. 그가 옥에서 나올 때 내 손을 잡고 꼭 훗일에 서로 만나기를 약속한
것이었다. 나는 김삼척 집에서 대환영을 받아서 그 아들 6형제와 더불어 밤낮으로
술을 먹고 소리를 하며 며칠을 놀다가 노자까지 얻어 가지고 또 길을 떠났다.
  강경에 공종렬을 찾으니 그도 인천옥에서 사귄 사람으로서 그 어머니도 옥에
면회하러 왔을 때에 알았으므로 많은 우대를 받고, 공종렬의 소개로 그의 매부
진선전을 전라도 무주에서 찾은 후, 나는 이왕 삼남에 왔던 길이니 남원에 김형진을
찾아 보리라 하고 이동을 찾아갔다. 동네 사람 말이 김형진의 집이 과연 대대로 이
동네에 살았으나 연전에 김형진이 동학에 들어서 가족을 끌고 도망한 후로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나는 대단히 섭섭하였다.
  전주 남문 안서에 약국을 하는 최군선이가 자기의 매부라는 말을 김형진한테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찾아갔으나 최는 대단히 냉냉하게, 그가 처남인 것은 사실이나
무거운 짐을 그에게 지우고 벌써 죽었다고 원망조로 말한 뿐이었다. 나는 비감을 누를
수 없어서 부중으로 헤매었다. 마침 그날이 전주 장날이어서 사람이 많았다. 나는 어떤
백목전 앞에 서서 백목을 파는 청년 하나를 보았다. 그의 모습이 김형진과
흡사하기로 그가 흥정을 하여 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려서 붙잡고,
  "당신 김 서방 아니오?"
하고 물은즉, 그가 그렇다고 하기로 나는 다시,
  "노형이 김형진씨 계씨 아니시오?"
하였더니 그는 무슨 의심이 났는지 머뭇머뭇하고 대답을 못했다. 나는,
  "나는 황해도 해주 사는 김창수요. 노형 백씨 생전에 혹시 내 말을 못 들으셨소?"
하였더니, 그제서야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형이 생전에 노상 내 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임종시에도 나를 못 보고 죽는 것이 한이라고 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그 청년을 따라서 금구 원평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조그마한 농가였다.
그가 그 어머니와 형수에게 내가 왔다는 말을 고하니 집안에서는 곡성이 진동하였다.
김형진이 죽은 지 열 아흐레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궤연(신주를 모신 곳)에 곡하고 늙은 어머니와 젊은 과수에게 인사를 하였다.
고인에게는 맹문이라는 8, 9세 되는 아들이 있고, 그의 아우에게는 맹렬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나는 이 집에서 가버린 벗을 생각하여 수일을 더 쉬고 목포로 갔다. 그것도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목포는 아직 신개항지여서 관청의 건축도 채
아니 된 엉성한 곳이었다. 여기서 우연히 양봉구를 만났다. 나와 같이 탈옥한 넷 중의
한 사람이다. 그에게서 나는 조덕근이가 다시 잡혀서 눈 하나가 빠지고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과 그때에 당직이던 김가가 아편인으로 옥에서 죽었단 말을 들었다.
내게 관한 소문은 못 들었다고 하였다. 양봉구는 약간의 노자를 내게 주고 이곳은
개항장이 되어서 팔도 사람이 다 모여드는 데니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하여 어서
떠나라고 권하였다.
  나는 목포를 떠나서 광주를 지나 함평에 이름난 육모정 이진사 집에 과객으로
하룻밤을 잤다. 이 진사는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육모정에는 언제나 빈객이
많았고 손님들께 조석을 대접할 때에는 이 진사도 손님들과 함께 상을 받았다. 식상은
주인이나 손님이나 일체 평등이요, 조금도 차별이 없었고 하인들이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 주인께 대하는 것과 꼭같이 하였다. 이것은 주인 이진사의 인격의
표현이어서 참으로 놀라운 규모요, 가풍이었다.
  육모정은 이진사의 정자여니와 그 속에는 침실, 식당, 응접실, 독서실, 휴양실 등이
구비되었다. 그때에 글을 읽던 두 학동이 지금의 이재혁, 이재승 형제다.
  나는 하룻밤을 쉬어 떠나려 하였으나 이 진사가 굳이 만류하여 얼마든지 더 묵어서
가라는 말에는 은근한 신정이 품겨 있었다. 나는 주인의 정성에 감동되어 육모정에서
보름을 묵었다.
  내가 내일은 이 진사 집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자기 집으로 청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다소 연장자인 장년의 한 선비로 내가 육모정에 묵는 동안 날마다 와서
담화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청을 물리칠 수가 없어서 저녁밥을 먹으러 그의 집으로 갔다. 집은 참말
게딱지와 같고 방은 단 한 칸 뿐이었다. 그 부인이 개다리 소반에 주인과 겸상으로
저녁상을 들여 왔다. 주발 뚜껑을 열고 보니 밥은 아니요, 무엇인지 모를 것이었다.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으니 맛이 쓰기가 곰의 쓸개와 같았다. 이것은 쌀겨와 팥으로
만든 겨범벅이었다. 주인은 내가 이 진사 집에서 매일 흰 밥에 좋은 반찬을 먹는 것을
보았지마는 조금도 안 되었다는 말도 없고 미안하다는 빛도 없이 흔연히 저도 먹고
내게도 권하였다. 나는 그의 높은 뜻과 깊은 정에 감격하여 조금도 아니 남기고 다
먹었다.
  나는 함평을 떠나 강진, 고금도, 완도를 구경하고 장흥을 거쳐 보성으로 갔다.
보성서는 송곡면(지금은 득량면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득량리에 사는 종씨
김광언이라는 이를 만나 그 여러 댁에서 40여 일이나 묵고 떠날 때에는 그 동네에
사는 선씨 부인한테 필냥 하나를 신행 선물로 받았다.
  보성을 떠나 나는 화순, 동복, 순창, 담양을 두루 구경하고 하동 쌍계사에 들러
칠자아자방을 보고 다시 충청도로 올라와 계룡산 갑사에 도착한 것은 감이 벌겋게
익어 달리고, 낙엽이 날리는 늦은 가을이었다. 나는 절에서 점심을 사먹고 앉았더니
동학사로부터 왔노라고 점심을 시켜 먹는 유산객 하나가 있었다. 통성명을 한즉, 그는
공주에 사는 이 서방이라고 하였다. 연기는 40이 넘은 듯한데 그가 들려 주는 자작의
시로 보거나 그의 말로 보거나 퍽 비관을 품은 사람이었다. 비록 초면이라도 피차가
다 허심탄회한 말이 서로 맞았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기로, 나는 개성에서
생장하여 장사를 업으로 삼다가 실패하여 홧김에 강산 구경을 떠나서 삼남으로
돌아다닌 지가 일년이 장근하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마곡사가 40리 밖에 아니 되니
같이 가서 구경하자고 하였다. 마곡사라면 내가 어려서 동국명현록을 읽을 때에
서화담 경덕이 마곡사 팥죽가마에 중이 빠져 죽는 것을 대궐 안에 동지 하례를 하면서
보았다는 말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서방과 같이 마곡사를 향하여 계룡산을
떠났다.
  길을 걸으면서 이 서방은 홀아비라는 것이며, 사숙의 훈장으로 여러 해 있었다는
것이며, 지금은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려 하니 나도 같이 하면 어떠냐고 하였다.
나도 중이 될 마음이 없지는 아니하나 돌연히 일어난 문제라 당장에 대답은
아니하였다.
  마곡사 앞 고개에 올라선 때는 벌써 황혼이었다. 산에 가득 단풍이 누릇불긋하여
'유자비추풍'의 감회를 깊게 하였다. 마곡사는 저녁 안개에 잠겨 있어서 풍진에 더럽힌
우리의 눈을 피하는 듯 하였다. 뎅, 뎅, 인경이 울려 왔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소리다.
일체 번뇌를 버리라 하는 것 같이 들렸다.
  이 서방이 다시 다져 물었다.
  "김형, 어찌하시려오? 세사를 다 잊고 나와 같이 중이 됩시다."
  나는 웃으며,
  "여기서 말하면 무엇하오?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드는 자와 마주 대한 자리에서
작정합시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안개를 헤치고 고개를 내려서 산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걸음마다 내 몸은 더러운 세계에서 깨끗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옮아 가는 것이었다. 매화당을 지나 소리쳐 흐르는 내 위에 걸린 긴
나무다리를 건너 심검당에 들어가니 머리 벗어진 노승 한 분이 그림폭을 펴 놓고
보다가 우리를 보고 인사했다. 이 서방은 전부터 노승과 숙면이었고, 그는
포봉당이라는 이었다. 이 서방이 나를 심검당에 두고 자기는 다른 데로 갔다. 이윽고
나를 위하여 밥이 나왔다. 저녁상을 물리고 앉았노라니 어떤 하얗게 센 노승 한 분이
와서 내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나는 거짓말로 본래 송도 태생이던., 조실부모하고
강근지친도 없어서 혈혈단신이 강상 구경이나 다니노라고 말하였다. 그런즉 그 노승은
속성은 소씨요, 익산 사람으로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지가 50년이나 되노라 하고,
은근히 나더러 상좌가 되기를 청하였다. 나는 본시 재질이 둔탁하고 학식이 척박하여
노사에게 누가 될까 저어하노라 하고 겸사하였더니 그는 내가 상좌만 되면, 고명한
스승의 밑에서 불학을 공부하면 장차 큰 강사가 될지 아느냐고 강권하였다.
  이튿날 이 서방은 벌써 머리를 달걀같이 밀고 와서 내게 문안을 하고 하는 말이,
하은당이 이 질 안에 갑부인 보경 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부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나도 하룻밤
청정한 생활에 모든 세상 잡념이 식은 재와 같이 되었으므로 출가하기로 작정하였다.
  얼마 후에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을 따라서 냇가로 나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덕삼은 삭발진언을 송알송알 부르더니 머리가 선뜩하며 내 상투가 모래 위에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한 일이건마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법당에서는 종이 울렸다. 나의 득도식을 알리는 것이었다. 산내 각 암자로부터
착가사 장삼한 수백 명의 승려가 모여 들고 향적실에서는 공양주가 불공밥을 짓고
있었다. 나도 검은 장삼, 붉은 가사를 입고 대웅보전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곁에서
덕삼이가 배불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은사 하은당이 내 법명을 원종이라고 명하여
불전에 고하고 수계사 용담 회상이 경문을 낭독하고 내게 오계를 준다. 예불의 절차가
끝난 뒤에는 보경 대사를 위시하여 산중에 나이 많은 여러 대사들께 차례로 절을
드렸다. 그리고는 날마다 절하는 공부를 하고 진언집을 외우고 초발심자경문을 읽고
중의 여러 가지 예법과 규율을 배웠다. 정신 수양에 대하여는,
  '승행에는 하심이 제일이라.' 
  하여 교만한 마음을 떼는 것을 주고 삼았다. 사람에게 대하여서만이 아니라 짐승.
벌레에 대하여서까지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어젯밤 나더러 중이 되라고
교섭할 때에는 그렇게도 공손하던 은사 하은당이 오늘 낮부터는,
  "얘, 원종아."
하고 말 해라를 하고,
  "이놈 생기기를 미련하게 생겨 먹었으니 고명한 중은 될까 싶지 않다. 상판대기가
저렇게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가서 나무도 해오고 물도 길어!"
하고 막 종으로 부리려 든다. 나는 깜짝 놀랐다. 중이 되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망명객이 되어 사방으로 유리하는 몸은 되었지마는 영웅심도 있고
공명심도 있고 평생에 한이 되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양반이 되어도 월등한 양반이
되어서 우리 집을 멸시하던 양반들을 한번 내려다 보겠다는 생각을 가슴 속에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중놈이 되고 보니 이러한 허영적인 야심은 불씨 문중에서는
터럭끝만치도 용서하지 못하는 악마여서 이러한 악념이 마음에 움틀 때에는
호법선신의 힘을 빌어서 일체법공의 칼로 뿌리째 베어 버려야 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데를 들어왔나 하고 혼자 웃고 혼자 탄식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기왕 중이
되었으니 하라는 대로 순종할 길밖에 없었다. 나는 장작도 패고 물도 긷고 하라는
것은 다하였다.
  하루는 물을 길어오다가 물통 하나를 깨뜨린 죄로 스님한테 눈알이 빠지도록 야단을
맞았다. 어떻게 심하게 스님이 나를 나무라셨는지 보경당 노승님께서 한탄을 하셨다.
"전자에도 남들이 다 괜찮다는 상좌를 들여 주었건마는 저렇게 못 견디게 굴어서 다
내어 쫓더니 이제 또 저렇게 하니 원종인들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있나. 잘 가르치면
제 앞쓸이는 할 만하건마는."하고 하은당을 책망하셨다. 이것을 보니 나는 적이 위로가
되었다.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다른 사미들과 같이 예불하는 법이며 "천수경",
"심경" 같은 것을 외고 또 수계사이신 용담 스님께 "보각서장"을 배웠다. 용담은 다시
마곡에서 불학만이 아니라 유가의 학문도 잘 아시기로 유명한 이었다. 학식만이
아니라, 위인이 대체를 아는 이어서 누구나 존경할 만한 높은 스승이었다.
  용담께 시중하는 상좌 혜명이라는 젊은 불자가 내게 동정이 깊었고 또 용담 스님도
하은당의 가풍이 괴상함을 가끔 걱정하시면서 나를 위로하셨다. '견월망지'라 달을
보면 그만이지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야 아무러면 어떠냐 하는 말씀을 하시고, 또
칼날 같은 마음을 품어 성나는 마음을 끊으라 하여 '인'자의 이치를 가르쳐 주셨다.
하은당이 심하게 나를 볶으시는 것이 모두 내 공부를 도우심으로 알라는 뜻이다.
  이 모양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반 년의 세월이 흘러서 무술 년도 다 가고 기해년이
되었다. 나는 고생이 되지마는 다른 중들은 나를 부러워하였다.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7, 80 노인이시니 그 분네만 작고하시면 그 많은 재산이 다 내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추수기를 보면 백미로만 받는 것이 2백 석이나 되고, 돈과 물건으로 있는
것이 수십만 냥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청징적멸의 도법에 일생을 바칠 생각이
생기지 아니하였다. 인천옥에서 떠난 후에 소식을 모르는 부모님도 그 후에
어찌되셨는지 알고 싶고, 나를 구해 내려다가 집과 몸을 아울러 망쳐 버린 김주경의
간 곳도 찾고 싶고, 해주 비동에 고 후조 선생(후조는 고 선생의 당호다)도 뵙고 싶고,
그때에 천주학을 한다고 해서 대의의 반역으로 곡해하고 불평을 품고 떠난 청계동의
안 진사를 찾아 사과도 할 마음이 때때로 흉중에 오락가락하여 보경당의 재물에 탐을
낼 생각은 꿈에도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보경당께 뵈옵고,
  "소승이 기왕 중이 된 이상에는 중으로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하겠사오니 금강산으로
가서 경공부를 하고 일생에 충실한 불자가 되겠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보경당은 내 말을 들으시고,
  "내 벌써 그럴 줄 알았다. 네 원이 그런데야 할 수 있느냐."
하시고 즉석에 하은당을 부르셔서 한참 동안 서로 다투시다가 마침내 나에게 세간을
내어주셨다. 나는 백미 열 말과 의발을 받아 가지고 하은당을 떠나 큰 방으로
옮아왔다. 그날부터 나는 자유였다. 나는 그 쌀 열 말을 팔아서 노자를 만들어 마곡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
  수일을 걸어 서울에 도착한 것은 기해년 봄이었다. 그때까지 서울성 안에는 승니를
들이지 않는 국금이 있었다. 나는 문 밖으로 이 절 저 절 돌아다니다가 서대문 밖
새절에 가서 하루 묵는 중에 사형 혜명을 만났다. 그는 장단 화장사에 은사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하고 나는 금강산에 공부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혜명과 작별하고
나는 풍기 혜정이라는 중을 만났다. 그가 평양 구경을 가는 길이라 하기로 나와
동행하자고 하였다. 임진강을 건너 송도를 구경하고 나는 해주 감영을 보고 평양으로
가자 하여 혜정을 이끌고 해주로 갔다.
  수양산 신광사 부근의 북암이라는 암자에 머물면서 나는 혜정에게 약간 내 사정을
통하고 그에게 텃골 집에 가서 내 부모와 비밀히 만나 그 안부를 알아오되, 내가 잘
있단 말만 사뢰고 어디 있단 것은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이렇게 부탁해 놓고
혜정의 회보만 기다리고 있었더니 바로 4월 29일 석양에 혜정의 뒤를 따라 부모님
양주께서 오셨다. 혜정에게서 내 안부를 들으신 부모님은, 네가 내 아들이 있는 곳을
알 터이니 너만 따라가면 내 아들을 볼 것이다. 하고 혜정을 따라 나서신 것이었다.
  북암에서 하루를 묵어서 양친을 모시고 나는 중의 행색으로 혜정과 같이 평양 길을
떠났다. 길을 가면서 한마디씩 하시는 말씀을 종합하건대, 무술년 3월 초아흐렛날
부모님은 해주 본향에 돌아오셨으나 순검이 뒤따라와서 두 분을 다 잡아다가 3월
13일에 인천옥에 가두었다. 어머니는 얼마 아니하여 놓으시고 아버지는 석 달 후에야
석방되셨다. 그로부터는 두 분이 꿈자리만 사나와도 종일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리하신
지 이태 만에 혜정이 찾아간 것이었다. 만나고 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다행하나
중이 된 것은 슬프다고 하셨다.
  5월 초나흗날 평양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여관에서 쉬고, 이튿날인 단오날에 모란봉
그네 뛰는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앞길에 중대한 영향을 준 사람을
만났다.
  관동 골목을 지나노라니 어떤 집 사랑에, 머리에 지포관을 쓰고 몸에 심수의를 입고
두 무릎을 모으고 점잔하게 꿇어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문득 호기심을 내어
한 번 수작을 붙여 보리라 하고 계하에 이르러,
  "소승 문안 드리오."
하고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 학자님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들어가 인사를 한즉 그는 간재 전우의 문인 최재학으로 호를 극암이라 하여
상당히 이름이 높은 이었다. 나는 공주 마곡사 중이란 말과 이번 오는 길에 천안
금곡에 전 간재 선생을 찾았으나 마침 출타하신 중이어서 못 만났다는 말과, 이제
우연히 고명하신 최 선생을 뵈오니 이만 다행이 없다는 말을 하고 몇 마디 도리의
문답을 하였더니 최 선생은 나를 옆에 앉은 어떤 수염이 좋고 위풍이 늠름한 노인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당시 평양 진위대에 참령으로 있는 전효순이었다. 소개가 끝난 뒤에
최극암은 전참령에게,
  "이 대사는 학식이 놀라우니 영천암 방주를 내이시면 영감 자제와 외손들의 공부에
유익하겠소. 영감 의향이 어떠시오?"
하고 나를 추천한다.
  전참령은,
  "거 좋은 말씀이요. 지금 곁에서 듣는 바에도 대사의 고명하심을 흠모하오. 대사
의향이 어떠시오? 내가 내 자식놈 하나와 외손자놈들을 최 선생께 맡겨서 영천암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데, 지금 있는 주지승이 성행이 불량하여 술만 먹고 도무지 음식
제절을 잘 돌아보지를 아니하여서 곤란 막심하던 중이요."
하고 내 허락을 청하였다. 나는 웃으며,
  "소승의 방랑이 본래 있던 중보다 더할지 어찌 아시오?"
하고 한번 사양했으나 속으로 다행히 여겼다. 부모님을 모시고 구걸하기도 황송하던
터이라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고 싶었던 까닭이다.
  전참령은 평양서윤 홍순욱을 찾아가더니 얼마 아니하여 '승 원종으로 영천사
방주를 차정함'하는 첩지를 가지고 와서 즉일로 부임하라고 나를 재촉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영천암 주지가 되었다.
  영천암은 평양서 서쪽으로 약 40리, 대보산에 있는 암자로서 대동강 넓은 들과
평양을 바라보는 경치 좋은 곳에 있었다. 나는 혜정과 같이 영천암으로 가서 부모님을
조용한 방에 거처하시게 하고 나는 혜정과 같이 한 방을 차지하였다. 학생이란 것은
전효순의 아들 병헌, 그의 사위 김윤문의 세 아들 장손, 중손, 차손과 그 밖에 김동원
등 몇몇이 있었다. 전효순은 간일하여 좋은 음식을 평양에서 지워 보내고 또 산밑
신흥동에 있는 육고에서 영천사에 고기를 대기로 하여 나는 매일 내려가서 고기를 한
짐씩 져다가 끓이고 굽고 하여 중의 옷을 입은 채로 터놓고 막 먹었다. 때때로
최재학을 따라 평양에 들어가서도 사숭재에서 시인 황경환 등과 시화나 하고 고기로
꾸미한 국수를 막 먹었다. 그리고 염불은 아니하고 시만 외우니 불가에서 이르는 바
'손에 돼지 대가리를 들고 입으로 경을 읽는' 중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서 시승
원종이라는 칭호는 얻었으나 같이 와 있던 혜정에게 실망을 주었다. 혜정은 내 심신이
쇠하고 속심만 증장하는 것을 보고 매우 걱정하였으나 고기 안주에 술 취한 중의 귀에
그런 충고가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는 내 불심이 회복되기 어려운 것을 보고
영천암을 떠난다 하여 행리를 지고 나서서 산을 내려가다가는 차마 나와 작별하기가
어려워서 되돌아오기를 달포나 하다가 마침내 경상도로 간다고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도 내가 다시 머리를 깎는 것을 원치 아니하셔서 나는 머리를 기르고 중노릇을
하다가 그 해 가을도 늦어서 나는 다리를 들여서 상투를 짜고 선비의 의관을 하고
부모를 모시고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나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고, 창수가 돌아왔으니 또 무슨 일
저지르기를 하지나 않나 하고 친한 이는 걱정하고 남들은 비웃었다. 그 중에도 준영
계부는 아무리 하여도 나를 신임하지 아니하셨다. 그는 지금은 마음을 잡아서 그
중씨이신 아버지께도 공순하고 농사도 잘하시건마는 내게 대하여는 도리없는 난봉으로
아시는 모양이어서,
  "되지 못한 그놈의 글 다 내버리고 부지런히 농사를 한다면 장가도 들여 주고
살림도 시켜 주지만 그렇지 아니한다면 나는 몰라요."
하고 부모님께 나를 농군이 되도록 명령하시기를 권하셨다. 그러나 부모님은 나를
농군을 만드실 뜻이 없으셔서 그래도 무슨 큰 뜻이 있어 장래에 이름난 사람이 되려니
하고 내게 희망을 붙이시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내가 농군이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버지 형제분 사이에 논쟁이 되고 있는 동안에 기해년도 다 가고 경자년 봄
농사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계부는 조카인 나를 꼭 사람을 만들려고 결심하신 모양이어서 새벽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내 단잠을 깨워서 밥을 먹여 가지고는 가래질터로 끌고 나갔다. 나는 며칠
동안 순순히 계부의 명령에 복종하였으나 아무리 하여도 마음이 붙지 아니하여 몰래
강화를 향하여 고향을 떠나고 말았다. 고 선생과 안 진사를 못 찾고 가는 것이
섭섭하였으나 아직 내어놓고 다닐 계제도 아니므로 생소한 곳으로 가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김두래라고 변명하고 강화에 도착하여서 남문 안 김주경의 집을 찾으니
김주경은 어디 갔는지 소식이 없다 하고 그 세째 아우 진경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나를
접대하였다.
  "나는 연안 사는 김두래일세. 자네 백씨와 막역한 동지일러니 수년간 소식을 몰라서
전위해 찾아온 길일세."
하고 나를 소개하였다. 경진은 나를 반가이 맞아 그동안 지낸 일을 말하였다. 그 말에
의하면 주경은 집을 떠난 후로 3, 4년이 되어도 음신이 없어서 진경이가 형수를 모시고
조카들을 기르고 있다고 했다. 집은 비록 초가나, 본래는 크고 넓게 썩 잘 지었는데
여러 해 거두지를 아니하여 많이 퇴락되었다.
  사랑에는 평소에 주경이 앉았던 보료가 있고 신의를 어기는 동지를 친히 벌하기에
쓰던 것이라는 나무 몽둥이가 벽상에 걸려 있었다. 나와 노는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주경의 아들인데 이름이 윤태라고 했다.
  나는 진경에게 모처럼 그 형을 찾아왔다가 그저 돌아가기가 섭섭하니 얼마 동안
윤태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소식을 기다리고 싶다고 하였더니 진경은, 그렇지 않아도
윤태와 그 중형의 두 아들이 글을 배울 나이가 되었건마는 적당한 선생이 없어서
놀리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곧 그 중형 무경에게로 가서 조카 둘을 데려왔다. 나는
이날부터 촌 학구가 된 것이었다. 윤태는 "동몽선습", 무경의 큰 아들은 "사략초권",
작은 놈은 "천자문"을 배우기로 하였다. 내가 글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서 차차
학동이 늘어서 한 달이 못 되어 삼십 명이나 되었다. 나는 심혈을 다하여 가르쳤다.
  이렇게 한 지 석 달을 지낸 어느 날, 진경은 이상한 소리를 혼자 중얼거렸다.
  "글쎄 유인무도 우스운 사람이야. 김창수가 왜 우리 집에를 온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으나 모르는 체하였다. 그래도 진경은
내게 설명하였다. 그 말은 이러하였다.__
  유인무는 부평 양반으로서 연전에 상제로 읍에서 삼십 리쯤 되는 곳에 이우해 와서
3년쯤 살다가 간 사람인데, 그때에 김주경과 반상의 별을 초월하여 서로 친하게 지낸
일이 있었는데 김창수가 인천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후에 여러 번째 해주 김창수가
오거든 급히 알려 달라는 편지를 하였는데 이번에 통진 사는 이춘백이라는 김주경과도
친한 친구를 보내니 의심 말고 김창수의 소식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진경이가 내 행색을 아나 떠보려고,
  "김창수가 그래 한 번도 안 왔나?"
하고 물었다. 진경은 딱하다는 듯,
  "형장도 생각해 보시오. 여기서 인천이 지척인데 피신해 다니는 김창수가 왜
오겠소?"
한다.
  "그럼 유인무가 왜놈의 염탐군인 게지."
나는 이렇게 진경에게 물어 보았다. 진경은,
  "아니오. 유인무라는 이는 그런 양반이 아니오. 친히 뵈온 적은 없으나, 형님 말씀이
유 생원은 보통 벼슬하는 양반과는 달라서 학자의 기풍이 있다고 하오."
하고 유인무의 인물을 극구 칭송한다. 나는 그 이상 더 묻는 것도 수상쩍을 것 같아서
그만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튿날 조반 후에 어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숨숨 얽은, 50세나 되었음직한
사람이 서슴지 않고 사랑으로 들어오더니 내 앞에서 글을 배우고 있는 윤태를 보고,
  "그 새에 퍽 컸구나. 안에 들어가서 작은 아버지 나오시래라 내가 왔다고."
하는 양이 이춘백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윽고 진경이가 윤태를 앞세우고 나와서 그 손님에게 인사를 한다.
  "백씨 소식 못 들었지?"
  "아직 아무 소식 없습니다."
  "허어, 걱정이로군. 유인무의 편지 보았지?"
  "네, 어제 받았습니다."
  주객간에 이런 문답이 있고는 진경이가 장지를 닫아서 내가 앉아 있는 방을 막고
둘이서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는 아니 듣고 두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문답은 이러하였다.
  "유인무란 양반이 지각이 없으시지, 김창수가 형님도 안 계신 우리 집에 왜
오리라고 자꾸 편지를 하는 거야요?"
  "자네 말이 옳지마는 여기밖에 알아 볼 데가 없지 아니한가. 그가 해주 본 고향에
갔을 리는 없고 설사 그 집에서 김창수 있는 데를 알기로서니 발설을 할 리가 있겠나.
유인무로 말하면 아랫녁에 내려가 살다가 서울 다니러 왔던 길에 자네 백씨가
김창수를 구해 내려고 가산을 탕진하고 부지거처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나네 백씨의
의기를 장히 여겨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김창수를 건져 내야 한다고 결심하였으나,
법으로 백씨가 할 것을 다하여도 안 되었으니 인제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여서
열 세 명 결사대를 조직하였던 것일세.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야. 그래서 인천항 중요한
곳 7,8처에 석유를 한 통씩 지고 들어가서 불을 놓고 그 소란통에 옥을 깨뜨리고
김창수를 살려 내기로 하고 유인무가 나에게 두 사람을 데리고 인천에 가서 감옥
형편을 알아오라 하기로 가 본즉, 김창수는 벌써 사흘전에 다른 죄수 네 명을 데리고
달아난 뒤라 말이야. 일이 이렇게 된 것일세. 그러니 유인무가 자네 백씨나 김창수의
소식을 알고 싶어 할 것이 아닌가. 그래 정말 김창수한테서 무슨 편지라도 온 것이
없나?"
  "편지도 없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회답을 기다릴 만하면 본인이 오지요."
  "그도 그러이."
  "이 생원께서는 인제 서울로 가시렵니까?"
  "오늘은 친구나 몇 찾고 내일 가겠네. 떠날 때에 또 옴세."
  이러한 문답이 있고 이춘백은 가 버렸다.
  나는 유인무를 믿고 그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내게 그처럼 성의를 가진 사람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설사 그가 성의를 가장한 염탐꾼일는지 모른다 하여도 군자는
가기이방이라 의리로 알고 속은 것이 내 허물은 아니다. 이만큼 하는 데도 안
믿는다면 그것은 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진경에게 이튿날 이춘백이 오거든
나를 그에게 소개하기를 청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진경에게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자백하고 유인무를 만나기
위하여 이춘백을 따라서 떠날 것을 말하였다. 진경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형님이 과시 그러시면 제가 만류를 어찌합니까."
하고 인천옥에 사령반수로서 처음으로 김주경에게 내 말을 알린 최덕만은 작년에
죽었다는 말을 하고 학동들에게는 선생님이 오늘 본댁에를 가시니 다들 집으로
돌아가라 하여 돌려보냈다.
  이윽고 이춘백이 왔다. 진경은 그에게 나를 소개하였다. 나도 서울을 가니
동행하자고 하였더니 이춘백은 보통 길동무로 알고 좋다고 하였다. 진경은 춘백의
소매를 끌고 뒷방에 들어가서 내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나는 이춘백과 함께 진경의 집을 떠났다. 남문통에는 30명 학동과 그
학부형들이 길이 메이도록 모여서 나를 전송하였다. 내가 도무지 아무 훈료도 아니
받고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친 것이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준 모양이어서 나는 기뻤다.
우리는 당일로 공덕리 박진사 태병의 집에 도착하였다. 이춘백이 먼저 안사랑으로
들어가서 얼마 있더니 키는 중키가 못 되고 얼굴은 볕에 그을려 가무스름하고 망건에
검은 갓을 쓰고 검소한 옷을 입은 생원님 한 분이 나와서 나를 방으로 맞아 들였다.
  "내가 유인무요, 오시기에 신고하셨소. 남아하처불상봉이라더니 마침내 창수 형을
만나고 말았소."
하고 유인무는 희색이 만면하여 춘백을 보며,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한다손 낙심할 것이 아니란 말일세. 끝끝내 구하면
반드시 얻는 날이 있단 말야. 전일에도 안 그러던가."
하는 말에서 나는 그네가 나를 찾던 심경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나는 유인무에게,
  "강화 김주경 댁에서 선생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허다한 근로하신 것을 알았고,
오늘 존안을 뵈옵거니와 세상에서 침소봉대로 전하는 말을 들으시고 이제 실물로
보시니 낙심되실 줄 아오. 부끄럽소이다."
하였다.
  "내가 내 과거를 검사하였더니 용두사미란 말요."
  유인무는,
  "뱀의 꼬리를 붙들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보겠지요."
하고 웃었다.
  주인 박태병은 유인무와 동서라고 하였다. 나는 박진사 집에서 저녁을 먹고 문안
유인무의 숙소로 가서 거기서 묵으면서 음식점에 가서 놀기도 하고 구경도 하고
돌아다녔다. 며칠을 지나서 유인무는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 나를 충청도 연산
광이다리 도림리 이천경의 집으로 지시하였다. 이천경은 흔연히 나를 맞아서 한
달이나 잘 먹이고 잘 이야기하다가 또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서 나를 전라도
무주읍에서 삼포를 하는 이시발에게 보냈다. 이시발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또
이시발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지례군 천곡 성태영을 찾아갔다. 성태영의 조부가 원주
목사를 지냈으므로 성 원주 댁이라고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니 수청방, 상노방에
하인이 수십 명이요, 사랑에 앉은 사람들은 다 귀족의 풍이 있었다. 주인 성태영이
내가 전하는 이시발의 편지를 보더니 나를 크게 환영하여 상좌에 앉히니 하인들의
대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성태영의 자는 능하요, 호는 일주였다. 성태영은 나를 이끌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물을 캐며 혹은 물에 나아가 고기를 보는 취미있는 소일을 하고,
혹은 등하에 고금사를 문답하여 어언 일삭이 되었는데, 하루는 유인무가 성태영의
집에 왔다. 반가이 만나서 성태영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같은
무주 읍내에 있는 유인무의 집으로 같이 가서 그로부터는 거기서 숙식을 하였다.
유인무는 내가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불편하리라 하여 이름은 거북 구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 호를 연하라고 지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부를 때에는
연하라는 호를 썼다.
  유인무는 큰 딸은 시집을 가고 집에는 아들 형제가 있는데, 맏이의 이름은
한경이었고 무주 군수 이탁도 그와 연척인 듯하였다.
  유인무는 그동안 나를 이리저리로 돌린 연유를 설명하였다. 이천경이나 이시발이나
성태영이나 유인무와는 다 동지여서 새로운 인물을 얻으면 내가 당한 모양으로 이
집에서 한 달, 저 집에서 얼마, 이 모양으로 동지들의 집으로 돌려서 그 인물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종합하여 그 인물이 벼슬하기에 합당하면 벼슬을 시키고, 장사나
농사에 합당하면 그것을 시키도록 약속이 되어 있던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시험의
결과로 아직 학식이 천박하니 공부를 더 시키도록 하고 또 상놈인 내 문벌을 높이기
위하여 내 부모에게 연산 이천경의 가대를 주어 거기 사시게 하고 인근 몇 양반과
결탁하여 우리 집을 양반 축에 넣자는 것이었다.
  유인무는 이런 설명을 하고,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문벌이 양반이 아니고는 일을 할 수가 없어."
하고 한탄하였다.
  나는 유인무의 깊은 뜻에 감사하면서 고향으로 가서 2월까지 부모님을 모시고 연산
이천경의 가대로 이사하기로 작정하였다. 유인무는 내게 편지 한 장을 주어서 강화
버드러지 주 진사 윤호에게로 보내었다. 나는 김주경 집 소식을 염문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주 진사는 내게 백동전으로 4천냥을 내어 주고 노자를
삼으라고 하였다. 대체 유인무의 동지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고, 그들은 편지 한
장으로 만사에 서로 어김이 없었다. 주 진사 집은 바닷가여서 동짓달인데도 아직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생선이 흔하여서 수일간 잘 대접을 받았다. 나는
백동전 4천 냥을 전대에 넣어서 칭칭 몸에 둘러 감고 서울을 향하여 강화를 떠났다.
  서울에 와서 유인무의 집에 묵다가 어느 날 밤에 아버지께서 황천이라고 쓰라시는
꿈을 꾸고 유인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 봄에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계시다가 조금 나으신 것을 뵙고 떠나서 서울에 와서
탕약 보제를 지어 우편으로 보내 드리고 이내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러한
흉몽을 꾸니 하루도 지체할 수가 없어서 그 이튿날로 해주 길을 떠났다. 나흘만에
해주읍 비동 고 선생을 뵈오니 지나간 4, 5년간에 그다지 노쇠하셨는지, 돋보기가
아니고는 글을 못 보시는 모양이셨다. 나와 약혼하였던 선생의 장손녀는 청계동
김사집이란 어떤 농가집 며느리로 시집을 보내었다 하고, 나더러 아재라고 부르던
작은 손녀가 벌써 10여 세가 된 것이, 나를 알아 보고 여전히 아재라고 부르는 것이
감개무량하였다. 내가 왜를 죽인 일을 고 선생께서 유의암에게 말씀하여 유의암이
그의 저인 "소의신편"의 속편에 나를 의기남아라고 써 넣었다는 말씀도 하셨다. 의암이
의병에 실패하고 평산으로 왔을 때, 고 선생은 내가 서간도에 다녀왔을 때에 보고했던
것을 말씀하여 의암이 그리로 가서 근거를 정하고 양병하기로 하였다는 말씀도
하셨다. 의암이 거기서 공자상을 모시고 무사를 모아서 훈련하니 나도 그리로 감이
어떠냐 하셨으나 존중화양이적이란 고 선생 일류의 사상은 벌써 나를 움직일 힘이
없었다. 나는 내 신사상을 힘써 말하였으나 고 선생의 귀에는 그것이 들어가지
아니하는 모양이어서,
  "자네도 개화꾼이 되었네 그려."
하실 뿐이었다. 나는 서양 문명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도저히 상투와
공자왈 맹자왈만으로는 저항할 수 없으니 우리 나라에서도 그 문명을 수입하여
신교육을 실시하고 모든 제도를 서양식으로 개혁함이 아니고는 국맥을 보존할 수 없는
연유를 설명하였으나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이적의 도는 좇을 수 없다 하여 내
말을 물리치시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선생은 이미 나와는 딴 시대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 선생 댁에서는 당 성냥 하나라도 외국 물건이라고는, 쓰지 않는 것이 매우
고상하게 보였다. 고 선생을 모시고 하룻밤을 쉬고 이튿날 떠난 것이 선생과 나와의
영결이 되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 선생은 그 후 충청도 제천의 어느 일가
집에서 객사하셨다고 한다. 슬프고 슬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날까지 30여년에
나와 용심과 처사에 하나라도 옳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온전히 청계동에서 받은,
선생의 심혈을 쏟아서 구전심수하신 교훈의 힘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 자애가
깊으신 존안을 뵈올 수 없으니 아아, 슬프고 슬프다.
  나는 고 선생을 하직하고 떠나서 당일로 텃골 본집에 다다르니 황혼이었다.
안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께서 부엌으로 나오시며,
  "아이 네가 오는구나. 아버지 병세가 위중하시다. 아까 아버지가 이 애가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왜 뜰에 서서 있느냐 하시기로 헛소리로만 여겼더니 네가 정말
오는구나."
하셨다.
  내가 급히 들어가 뵈오니 아버지께서 반가워하시기는 하나 병세는 과연 위중하였다.
나는 정성껏 시탕을 하였으나 약효를 보지 못하고 열 나흘만에 아버지는 내 무릎을
베고 돌아가셨다. 내 손목을 꼭 쥐셨던 아버지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리시더니 곧
운명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나는 나의 평생의 지기인 유인무, 성태영 등의
호의대로 부모님을 연산으로 모시고 가서 만년에나 강씨, 이씨에게 상놈 대우를 받던
뼈에 사무치는 한을 면하시게 할까 하고 속으로 기대하였더니 이제 아주 다시 못
돌아오실 길을 떠나시니 천고의 유한이다.
  집이 원래 궁벽한 산촌인 데다가 빈한한 우리 가세로는 명의나 영약을 쓸 처지도 못
되어서 나는 예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가 단지하시던 것을 생각하고 나도
단지나 하여 일각이라도 아버지의 생명을 붙들어 보리라 하였으나 내가 단지를 하는
것을 보시면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실 것이 두려워서 단지 대신에 내 넙적다리의 살을
한 점 베어서 피는 받아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고 살은 불에 구워서 약이라고 하여
아버지가 잡수시게 하였다. 그래도 시원한 효험이 없는 것은 피와 살의 분량이 적은
것인 듯하기로 나는 다시 칼을 들어서 먼저 것보다 더 크게 살을 떼리라 하고 어썩
뜨기는 떴으나 떼어 내자니 몹시 아파서 베어만 놓고 떼지는 못하였다. 단지나 할고는
효자나 할 것이지, 나 같은 불효로는 못할 것이라고 자탄하였다. 독신 상제로 조객을
대하자니 상청을 비울 수는 없고 다리는 아프고 설한풍은 살을 에이고 하여서 나는
다리 살을 벤 것을 후회하는 생각까지 났다.
  유인무와 성태영에게 부고를 하였더니 유인무는 서울에 없었다 하여 성태영이 혼자
나귀를 달려 5백 리 먼 길에 조상을 왔다.
  나는 집상 중에 아무 데도 출입을 아니하고 준영 계부의 농사를 도와 드렸더니
계부는 매우 나를 기특하게 여기시는 모양이어서 당신이 돈 2백 냥을 내어서 이웃
동네 어떤 상놈의 딸과 혼인을 하라고 내게 명령하셨다. 아버지도 없는 조카를 당신의
힘으로 장가들이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또 큰 영광으로 아시는 준영 계부는 내가
돈을 쓰고 하는 혼인이면 정승의 딸이라도 나는 아니한다고 거절하는 것을 보시고
대로 하여 낫을 들고 내게 달려 드시는 것을, 어머니께서 가로 막아서 나를 피하게
하여 주셨다.
  임인년 정월에 장연 먼 촌 일가 댁에 세배를 갔더니, 내게 할머니 되는 어른이 그
친정 당질녀로 17세 되는 처녀가 있으니 장가들 마음이 없는가고 물었다. 나는 세
가지 조건에만 맞으면 혼인한다고 말하였다. 세 가지라는 것은, 돈 말이 없을 것과
신부될 사람이 학식이 있을 것과 당자와 서로 대면하여서 말을 해볼 것 등이었다.
  어떤 날 할머니는 나를 끌고 그 처자의 집으로 갔다. 그 처자의 어머니는 딸
4형제를 둔 과댁으로서, 위로 3형제는 다 시집을 가고 지금 나와 말이 되는 이는
여옥이라는 끝의 딸이었다. 여옥은 국문을 깨치고 바느질을 잘 가르쳤다고 하였다.
집은 오막살이여서 더할 수 없이 작은 집이었다.
  나를 방에 들여 앉혀 놓고 세 사람이 부엌에서 한참이나 쑥덕거리더니, 다른 것은
다하여도 당자 대면 만은 어렵다고 하였다.
  "나와 대면하기를 꺼리는 여자라면 내 아내가 될 자격이 없소."
하고 내가 강경하게 나간 결과로 처녀를 불러들였다.
  나는 처자를 향하여 인사말을 붙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다.
나는 다시,
  "당신이 나와 혼인할 마음이 있소?"
하고 물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나는 또,
  "내가 지금 상중이니 일년 후에 탈상을 하고야 성례를 할 터인데, 그동안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내게 글을 배우겠소?"
하고 물었다. 그래도 처녀의 대답 소리가 내 귀에는 아니 들렸는데, 할머니와 처녀의
어머니는 여옥이가 다 그런다고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이리하여서 그와 나와는 약혼이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이러이러한 처자와 약혼하였다는 말을 하여도 준영 계부는 믿지
아니하고 어머니더러 가서 보고 오시라고 하시더니 어머니께서 알아보고 오신 뒤에야
준영 계부가,
  "세상에 어수룩한 사람도 있다."고 빈정거리셨다.
  나는 여자 독본이라 할 만한 것을 한 권 만들어서 틈만 나면 내 아내될 사람을
가르쳤다.
  어느덧 일년도 지나서 계묘년 2월에 아버지의 담제도 끝나고 어머니께서는 어서
나를 성례시켜야 한다고 분주하실 때에 여옥의 병이 위급하다는 기별이 왔다. 내가
놀라서 달려갔을 때에는 아직도 여옥은 나를 반겨할 정신이 있었으나 내가 간 지
사흘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나는 손수, 그를 염습하여 남산에 안장하고 장모는 김동
김윤오 집에 인도하여 예수를 믿고 여생을 보내도록 하였다. 내 나이 30에 이 일을
당한 것이었다.
  이 해 2월에 장연읍 사직동으로 반이하였다. 오진사 인형이 나로 하여금 집 걱정이
없이 공공사업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내게 준 가대로서 20여 마지기 전답에 산과
과수까지 낀 것이었다. 해주에서 종형 태수 부처를 옮겨다가 집일을 보게 하고 나는
오 진사 집 사랑에 학교를 설립하고 오 진사의 딸 신애, 아들 기원, 오봉형의 아들 둘,
오면형의 아들과 딸, 오순형의 딸 형제와 그 밖에 남녀 몇 아이를 모아서 생도로
삼았다.
  방 중간을 병풍으로 막아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였다. 순형은 인형의 세째 아우로서
사람이 근실하고 예수를 잘 믿어 교육에 열심하여서 나와 함께 학생을 가르치고
예수교를 전도하여 일년 이내에 교회도 흥왕하고 학교도 차차 확장되었다. 당시에
주색장으로 출입하던 백남훈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봉양학교의 교원이 되게 하고
나는 공립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당시 황해도에서 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공립으로 해주와 장연에 각각 하나씩 있었을 뿐인데, 해주에 있는 것은 이름만
학교여서 여전히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있었고, 정말 칠판을 걸고 산술, 지리, 역사 등
신학문을 가르친 것은 장연학교 뿐이었다.
  여름에 평양 예수교의 주최인 사범 강습소에 갔을 적에 최광옥을 만났다. 그는
숭실중학교의 학생이면서 교육가로, 애국자로 이름이 높았고 나와도 뜻이 맞았다.
최광옥은 내가 아직 혼자라는 말을 듣고 안신호라는 신여성과 결혼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영매로 나이는 스무 살, 극히 활발하고 당시 신여성 중에
명성이라고 최광옥은 말하였다.
  나는 안 도산의 장인 이석관의 집에서 안신호와 처음 만났다. 주인 이씨와 최광옥과
함께였다. 회견이 끝나고 사관에 돌아왔더니 최광옥이 뒤따라와서 안신호의 승낙을
얻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신호와 혼인이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튿날 이석관과 최광옥이 달려와서 혼약이 깨졌다고 내게 알렸다. 그 까닭이라는
것은 이러하였다. 안 도산이 미국으로 가는 길에 상해 어느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양주삼에게 신호와의 혼인 말을 하고, 양주삼이 졸업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라는 말을
신호에게도 편지로 한 일이 있었는데, 어제 나와 약혼이 된 뒤에 양주삼에게서 이제는
학교를 졸업하였으니 허혼하라는 편지가 왔다. 이 편지를 받고 밤새도록 고통한
신호는 두 손에 떡이라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기도 어려워 양주삼과 김구를
둘 다 거절하고 한 동네에 자라난 김성택(뒤에 목사가 되었다)과 혼인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가내하거니와 퍽 마음에 섭섭하였다. 그러자 얼마
아니하여 신호가 몸소 나를 찾아와서 미안한 말을 하고 나를 오라비라 부르겠다고
말하여 나는 그의 쾌쾌한 결단성을 도리어 흠모하였다.
  한 번은 군수 윤구영이 나를 불러 해주에 가서 농상공부에서 보내는 뽕나무 묘목을
찾아오는 일을 맡겼다. 수리 정창극이 나를 군수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나는 2백 냥
노자를 타 가지고 걸어서 해주로 갔다. 말이나 교군을 타라는 것이었지만 아니 탔다.
  해주에는 농상공부 주사가 특파되어 와서 묘목을 각군에 배부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전국에 양잠을 장려하노라고 일본으로부터 뽕나무 묘목을 실어 들여온 것이다.
  묘목은 다 마른 것이었다. 나는 마른 묘목을 무엇하느냐고 아니 받는다고 하였더니
농상공부 주사는 대로하여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느냐고 나를 꾸짖었다. 나도 마주
대로하여 나라에서 보내시는 묘목을 마르게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하고 관찰부에 이 사유를 보고한다고 하였더니, 주사는 겁이 나는 모양이어서 나에게
생생한 것으로 마음대로 골라 가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이리하여 산 묘목 수천 본을
골라서 말에 싣고 돌아왔다. 노자는 모두 일흔 냥을 쓰고 일백 서른 냥을 정창극에게
돌렸다. 나는 집세기 한 켤레에 얼마, 냉면 한 그릇에 얼마, 이 모양으로 돈 쓴 데를
자세히 적어서 남은 돈과 함께 주었다. 정창극은 그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사람들이 다 선생 같으면 나라 일이 걱정이 없겠소. 다른 사람이 갔더면 적어도
2백 냥은 더 청구했을 것이오."
하였다.
  정창극은 실로 진실한 아전이었다. 당시 상하를 물론하고 관리라는 관리는 모두
나라와 백성의 것을 도적하는 탐관으로 되었건마는 정창극만은 일 푼도 받을 것
이외의 것을 받음이 없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군수도 감히 탐학을 못하였다.
  얼마 후에 농상공부로부터 나를 종상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사령서가 왔다. 이것은 큰
벼슬이어서 관속들이며 천민들은 내가 지나가는 앞에서는 담뱃대를 감추고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태 동안이나 살던 사직동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은 오 진사와 내 종형이 죽은 때문이었다. 오 진사는 고기잡이 배를 부리기
이태만에 가산을 패하고 세상을 떠나니, 나는 사직동 가대를 그의 유족에게 돌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또 종형은 본래는 낫 놓고 기억자도 몰랐었으나, 나를 따라 장연에
와서 예수를 믿은 뒤로는 국문에 능통하여 종교서적을 보고 강단에서 설교까지 하게
되었었는데, 불행히 예배보는 중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서 나는
종형수에게 개가하기를 허하여 그 친정으로 돌려 보내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로
떠났다. 내가 사직동에 있는 동안에 유인무와 주윤호가 다녀갔다. 그들은 예전 복간도
관리사 서상무와 합력하여 북간도에 한 근거지를 건설할 차로 국내에서 동지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지기들이라 하여 밤을 삶고 닭을 잡아서
정성으로 그들을 대접하셨다. 우리는 밤과 닭고기를 먹으면서 연일 밤이 늦도록
국사를 이야기하였다.
  유, 주 두 사람에게 듣건대 김주경은 몸을 숨긴 후로 붓장사를 하여서 수만 금을
모았다가 금천에서 객사하였는데, 그 유산은 주경이 묵던 주막집 주인이 먹어 버리고
주경의 유족에게는 한 푼도 아니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김주경이 그렇게 돈을 모은
것은 필시 무슨 경륜이 있었으리라고 말하였다. 주경의 아우 진경도 전라도에서
객사하여서 그 집이 말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심히 슬퍼하였다.
  여러 번 혼약이 되고도 깨어지던 나는 마침내 신천 사평동 최준례와 말썽 많은
혼인을 하였다. 준례는 본래 서울 태생으로, 그 어머니 김씨 부인이 젊은 과부로서
길러 낸 두 딸 중의 막내 딸이었다. 김씨 부인은 그때 구리개에 임시로 내었던
제중원(지금의 세브란스)에 고용되어서 두 딸을 길러 맏딸은 의사 신창희에게
시집보내고 신창희가 신천에서 개업하매 여덟 살 된 준례를 데리고 신천에 와서 사위의
집에 우접하여 있었다. 나는 양성칙 영수의 중매로 준례와 약혼하였는데 이 때문에
교회에 큰 문제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준례의 어머니가 준례를
강성모라는 사람에게 허혼을 하였는데 준례는 어머니의 말을 아니 듣고 내게 허혼한
것이었다. 당시 18세인 준례는 혼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미국 선교사 한위렴,
군예분 두 분까지 나서서 준례더러 강성모에게 시집가라고 권하였으나 준례는 당연히
거절하였다. 내게 대하여도 이 혼인을 말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나는 본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부모의 허혼을 반대한다 하여 기어이 준례와 혼인하기로 작정하고
신창희로 하여금 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오게 하여 굳이 약혼을 한 뒤에 서울
정신여학교로 공부를 보내어 버렸다. 나와 준례는 교회에 반항한다는 죄로 책벌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 군예진 목사가 우리의 혼례서를 만들어 주고 두 사람의 책벌을
풀었으니 이리하여 나는 비로소 혼인한 사람이 되었다.

    4. 민족에 내놓은 몸

  을사신조약이 체결되어서 대한의 독립권이 깨어지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사방에서 지사와 산림학자들이 일어나서 경기, 충청, 경상, 강원 제도에 의병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허위, 이강년, 최익현, 민긍호, 유인석, 이진룡, 우동선 등은 다
의병대장으로 각각 일방의 웅이었다. 그들은 오직 하늘을 찌르는 의분이 있을 뿐이요,
군사의 지식이 없기 때문에 도처에서 패전하였다.
  이때에 나는 진남포 엡웜 청년회의 총무로서 대표의 임무를 띠고 경성대회에 출석케
되었다. 대회는 상동 교회에서 열렸는데 표면은 교회 사업을 의논한다 하나 속살은
순전한 애국운동의 회의였다. 의병을 일으킨 이들이 구사상의 애국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사상의 애국운동이라 할 것이다.
  그때에 상동에 모인 인물은 전덕기, 정순만, 이준, 이동녕, 최재학, 계명륙, 김인즙,
옥관빈, 이승길, 차병수, 신상민, 김태연, 표영각, 조성환, 서상팔, 이항직, 이희간,
기산도, 김병헌(현재는 왕삼덕), 유두환, 김기홍 그리고 나 김구였다.
  우리가 회의한 결과로 작정한 것은 도끼를 메고 상소하는 것이었다. 1회, 2회로
4, 5명씩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잡혀 갇히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자는 것이었다.
  제 1회 상소하는 글은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주가 되고 그 밖의 네 사람이 더
서명하여 신민 대표로 다섯 명이 연명하였다. 상소를 하러 가기 전에 정순만의 인도로
우리 일동은 상동교회에 모여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죽기까지 일심하자고
맹약하는 기도를 올리고 일제히 대한문 앞으로 몰려갔다. 문 밖에 이르러 상소에
서명한 다섯 사람은 형식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소를 한다는 결의를 하였으나 기실
상소는 별감의 손을 통하여 벌써 대황제께 입람이 된 때였다.
  홀연 왜 순사대가 달려와서 우리에게 해산을 명하였다. 우리는 내정간섭이라 하여
일변 반항하며 일변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하여 우리 2천만 신민으로 노예를 삼는
조약을 억지로 맺으니 우리는 죽기로 싸우자고 격렬한 연설을 하였다. 마침내 왜
순사대는 상소에 이름을 둔 다섯 지사를 경무청으로 잡아가고 말았다.
  우리는 다섯 지사가 잡혀 가는 것을 보고 종로로 몰려와서 가두 연설을 시작하였다.
거기도 왜 순사가 와서 발검으로 군중을 해산하려 하므로 연설하던 청년 하나가
단신으로 달려 들어 왜 순사 하나를 발길로 차서 거꾸러뜨렸더니 왜 순사들은 총을
쏘았다. 우리는 어물전도가 불탄 자리에 쌓인 와륵을 던져서 왜 순사대와 접전을
하였다. 왜 순사대는 중과부적하여 중국인 점포에 들어가 숨어서 총을 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점포를 향하여 빗발같이 와륵을 던졌다. 이때에 왜 보병 한 중대가
달려와서 군중을 해산하고 한인을 잡히는 대로 포박하여 수십 명이나 잡아갔다.
  이날 민영환이 자살하였다 하므로 나는 몇 동지와 함께 민 댁에 가서 조상하고
돌아서 큰 길에 나서니, 웬 40세나 되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맨상투바람으로 피묻은
흰 명주저고리를 입고 여러 사람에게 옹위되어서 인력거에 앉아 큰 소리를 내어 울며
끌려가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 즉 참찬 이상설이 자살하려다가 미수한 것이라고
하였다.
  당초 상동회의에서는 몇 번이고 상소를 반복하려 하였으나 으례 사형에 처할 줄
알았던 최재학 이하는 흐지부지 효유방송이나 할 모양이어서 큰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같았고, 또 정세를 돌아보니 상소 같은 것으로 무슨 효과가 생길 것 같지도
아니하여서 우리 동지들은 방침을 고쳐서 각각 전국에 흩어져 교육사업에 힘을 쓰기로
하였다. 지식이 멸이하고 애국심이 박약한 이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 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황해도로 내려와서 문화 초리면 종산 서명의숙의 교원이
되었다가 이듬해 김용제 등 지기의 초청으로 안악으로 이사하여 그곳 양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종산에서 안악으로 떠나온 것이 기유년 정월 18일이라 갓난 첫딸이
찬바람을 쐬서 안악에 오는 길로 죽었다.
  안악에는 김용제, 김용진 등 종형제와 그들의 자질 김홍량과 최명식 같은 지사들이
있어서 신교육에 열심하였다. 이때에는 안악 뿐이 아니라 각처에 학교가 많이
일어났으나 신지식을 가진 교원이 부족한 때라 당시 교육가로 이름이 높은 최광옥을
평양으로부터 연빙하여 안악 양산학교에 하기 사범강습회를 여니 사숙훈장들까지
강습생으로 오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있었다. 멀리 경기도, 충청도에서까지 와서
강습생이 사백여 명에 달하였다. 강사로는 김홍량, 이시복, 이상진, 한필호,
이보경(지금은 광수), 김낙영, 최재원 등이요, 여자 강사로는 김낙희, 방신영 등이
있었고, 강구봉, 박혜명 같은 중도 강습생 중에 끼어 있었다.
  박혜명은 전에 말한 일이 있는 마곡사 시대의 사형으로, 연전 서울서 서로 작별한
뒤에는 소식을 몰랐다가 이번 강습회에 서로 만나니 반갑기 그지 없었다. 그는 당시
구월산 패엽사의 주지였다. 나는 그를 양산학교의 사무실로 인도하여 내 형이라고
소개하고 내 친구들이 그를 내 친형으로 대우하기를 청하였다.
  혜명에게 들은즉 내 은사 보경당, 하은당은 석유 한 초롱을 사다가 그 호부를
시험하노라고 불붙은 막대기를 석유통에 넣었다가 그것이 폭발하여 포봉당까지 세
분이 일시에 죽었고, 그 남긴 재산을 맡기기 위하여 금강산에 내가 있는 곳을 두루
찾았으나 종적을 몰라서 할 수 없이 유산 전부를 사중에 붙였다고 하였다.
  나는 여기서 김효영 선생의 일을 아니 적을 수 없다. 선생은 김용진의 부친이요,
김홍량의 조부다. 젊어서 글을 읽더니 집이 가난함을 한탄하여 황해도 소산인 면포를
사서 몸소 등에 지고 평안도 강계, 초산 등 산읍으로 행상을 하여서 밑천을 잡아
가지고 근검으로 치부한 이라는데, 내가 가서 교사가 되었을 때에는 벌써 연세가 70이
넘고 허리가 기억자로 굽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탈속하여 보매 위엄이
있었다. 선생은 일찍부터 신교육이 필요함을 깨닫고 그 장손 홍량을 일본에 유학케
하였다. 한 번은 양산학교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에 무명씨로 벼 백 석을 기부하였는데,
나중에야 그가 자여질에게도 알리지 아니하고 한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나로 말하면
선생의 자질의 연배건마는 며칠에 한 번씩 정해 놓고 내 집 문전에 와서,
  "선생님 평안하시오?"
하고 문안을 하였다. 이것은 자손의 스승을 존경하는 성의를 보임인 동시에 사마골
오백금 격이라고 나는 탄복하였다.
  나는 교육에 종사한 이래로 성묘도 못하고 있다가 여러 해만에 본 해주 본향에 가
보니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첫째로 감개무량한 것은 나를 안아 주고 귀애해 주던
노인들이 많이 세상을 떠나고 전에는 어린아이던 것들이 인제는 커다란 어른들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막히는 것은 그 어른된 사람들이 아무 지각이 나지 아니하여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었다.
  예전에 양반이라는 사람들도 찾아 보았으나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효몽한 중에
있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권하면 머리를 깎으니만 못한다 하고 있었다. 내게
대하여서는 전과 같이 아주 하대는 못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어물어물하였다.
상놈은 여전히 상놈이요, 양반은 새로운 상놈이 될 뿐, 한 번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쳐서 새로운 양반이 되리라는 기개를 볼 수 없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고향에 와서 이렇게 실망되는 일이 많은 중에 가장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준형
계부께서 나를 사랑하심이었다. 항상 나를 집안을 망칠 난봉으로 아시다가 내가
장연에서 오 진사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것을 목도하시고부터는 비로소 나를
믿으셨다.
  나는 본향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내가 지고 온 환등을 보이면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삼천리 강토와 2천만 동포에게 충성을 다하여라."
하고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안악에서는 하기사범강습소를 마친 뒤에 양산학교를 크게 확장하여 중학부와
소학부를 두고 김 홍량이 교장이 되었다.
  나는 최광옥 등 교육가들과 함께 해서 교육총회를 조직하고 내가 그 학무총감이
되었다. 황해도 내에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그것을 잘 경영하도록 설도하는 것이 내
직무였다. 나는 이 사명을 띠고 도내 각 군을 순회하는 길을 떠났다.
  배천 순수 전봉훈의 초청을 받았다. 읍 못 미쳐 오리정에 군내 각 면의 주민들이
나와서 등대하다가 내가 당도한즉 군수가 선창으로,
  "김구 선생 만세!"를 부르니 일동이 화하여 부른다. 나는 경황실색하여 손으로
군수의 입을 막으며
그것이 망발인 것을 말하였다. 만세라는 것은 오직 황제에 대하여서만 부르는 것이요,
황태자도 천세라고 밖에 못 부르는 것이 옛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일개 서민인
내게 만세를 부르니 내가 경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군수는 웃으며 내 손을
잡고 개화시대에는 친구 송영에도 만세를 부르는 법이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나는
군수의 사제에 머물렀다.
  전봉훈은 본시 재령 아전으로 해주에서 총순으로 오래 있을 때에 교육에 많은 힘을
썼다. 해주 정내학교를 세운 것도 그요, 각 전방에 명령하여 사환하는 아이들을 야학에
보내게 하고 만일 안 보내면 주인을 벌하는 일을 한 것도 그여서 해주 부내의 교육의
발달은 전총순의 힘으로 됨이 컸다. 그의 외아들은 조사하고 장손무길이 5, 6세였다.
  전 군수는 대단히 경골한 이어서 다른 고을에서는 일본 수비대에게 동헌을 내어
맡기되 그는 강경히 거절하여서 여전히 동헌은 군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왜의 미움을 받았으나 그는 벼슬자리를 탐내어 뜻을 굽힐 사람이 아니었다.
  전봉훈은 최광옥을 연빙하여 사범강습소를 설립하고 강연회를 각지에 열어 민중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최광옥은 배천 읍내에서 강연을 하는 중에 강단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황평양서 인사들이 그의 공적을 사모하고 뜻과 재주를 아껴서
사리원에 큰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평양 안태국에게 비석 만드는 일을 맡기기까지
하였으나 합병조약에 되었기 때문에 중지하고 말았다. 최광옥의 유골은 배천읍 남산에
묻혀 있다.
  나는 배천을 떠나 재령 양원학교에서 유림을 소집하여 교육의 필요와 계획을 말하고
장연 군수의 청으로 읍내와 각 면을 순회하고, 송화 군수 성낙영의 간청으로 수년
만에 송화읍을 찾았다. 이곳은 해서의 의병을 토벌하던 요해지이므로 읍내에는 왜의
수비대, 헌병대, 경찰서, 우편국 등의 기관이 있어서 관사를 전부 그런 것에 점령이
되고 정작 군수는 사가를 빌어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분한 마음에 머리카락이
가락가락 일어날 지경이었다.
  환등회를 여니 남녀 청중이 무려 수천 명이니, 군수 성낙영, 세무서장 구자록을
위시하여 각 관청의 관리며 왜의 장교와 경관들도 많이 출석하였다. 나는 대황제
폐하의 어진영을 뫼셔오라 하여 강단 정면에 봉안하고 일동 기립 국궁을 명하고 왜의
장교들까지 다 그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니 벌써 무언중에 장내에는 엄중한 기운이
돌았다.
  나는 '한인이 배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고.'하는 연제로 일장의 연설을 하였다. 과거
일청, 일아 두 전쟁 때에는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신뢰하는 감정이 극히 두터웠다. 그
후에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 주권을 상하는 조약을 맺음으로 우리의 악감이
격발되었다. 또 일병이 촌락으로 횡행하며 남의 집에 막 들어가고 닭이나 달걀을 막
빼앗아서 약탈의 행동을 하므로 우리는 배일을 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일본의
잘못이요 한인이 책임이 아니라고 탁을 두드리며 외쳤다. 자리를 돌아보니 성낙영.
구자록은 낯빛이 흙빛이요, 일반 청중의 얼굴에는 격앙의 빛이 완연하고 왜인의
눈에는 노기가 등등하였다. 홀연 경찰이 환등회의 해산을 명하고 나는 경찰서로 불려
가서 한인 감독 순사 숙직실에 구류되었다. 각 학교 학생들의 위문대가 뒤를 이어
밤이 새도록 나를 찾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하르빈 전보라 하여 이등박문이 '은치안'이라는 한인의 손에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은치안'이 누구일까 하고 궁금하였더니 이튿날 신문으로 그것이
안응칠 중근인 줄을 알고 십 수년 전 내가 청계동에서 보던 총 잘 쏘던 소년을
회상하였다.
  나는 내가 구금된 것이 안중근 관계인 것을 알고 오래 놓이지 못할 것을
각오하였다. 한 달이나 지난 후에 나를 불러 내어서 몇 마디를 묻고는 해주
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수교장을 지날 때에 감승무의 집에서 낮참을 하는데, 시내
학교의 교직원들이 교육 공로자인 나를 위하여 한턱의 위로연을 베풀게 하여 달라고
호송하는 왜 순사에게 청하였더니 내가 해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하면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곧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튿날 검사정에 불려 안중근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나는 그 부친과 세의가 있을 뿐이요, 안중근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검사는 지나간 수년간의 내 행적을 적은 책을 내어놓고
이것저것 심문하였으나 결국 불기소로 방면이 되었다.
  나는 행구를 가지고 감옥에서 나와서 박창진의 책사로 갔다가 유훈영을 만나 그
아버지 유장단의 환갑연에 참예하고 송화에서 나를 호송해 올 때에 왜 순사와 같이
왔던 한인 순사들이 내 일의 하회를 알고 가려고 아직도 해주에 묵고 있단 말을 듣고
그들 전부를 술집에 청하여서 한턱을 먹이고 지난 일을 말하여서 돌려보냈다. 한인
순사는 기회만 있으면 왜 순사의 눈을 피하여 내게 동정하였던 것이다.
  안악 동지들은 내 일을 염려하여 한정교를 위해 해주로 보내어 왔으므로 나는
이승준, 김영택, 양낙주 등 몇 친구를 방문하고는 곧 안악으로 돌아왔다.
  안악에 와서 나는 양산학교 소학부의 유년반을 담임하면서 재령군 북률면 무상동
보강학교의 교장을 겸무하였다. 이 학교는 나무리벌의 한 끝에 있어 가난한 사람들이
힘을 내어 세운 것이었다. 전임 교원으로는 전승근이 있고 장덕준은 반 교사, 반
학생으로 그 아우 덕수를 데리고 학교 안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내가 보강학교 교장이 된 뒤에 우스운 삽화가 있었다. 그것은 학교에 세 번이나
도깨비불이 났다는 것이다. 학교를 지을 때에 옆에 있는 고목을 찍어서 불을
때었으므로 도깨비가 불을 놓는 것이니 이것을 막으려면 부군당에 치성을 드려야
한다고 다들 말하였다. 나는 직원을 명하여 밤에 숨어서 지키라 하였다. 이틀 만에
불을 놓는 도깨비를 등시 포착하고 보니 동네 서당의 훈장이었다. 그는 학교가 서기
때문에 서당이 없어서 제가 직업을 잃은 것이 분하여서 이렇게 학교에 불을 놓는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나는 그를 경찰서에 보내지 아니하고 동네를 떠나라고 명하였다.
  이 지방에는 큰 부자는 없으나 나무리가 크고 살진 벌이 있어서 다들 가난하지는
아니하였다. 또 주민들이 다 명민하여서 시대의 변천을 잘 깨달아 운수, 진초, 보강,
기독 등 학교들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는 한편으로는 농무회를 조직하여 농업의 발달을
도모하는 등 공익사업에 착안함이 실로 보암직하였다. 의사 나석주도 이곳 사람이다.
아직 20내외의 청년으로서 소년, 소녀 8, 9명을 배에 싣고 왜의 철망을 벗어나 중국
방면에 가서 마음대로 교육할 양으로 떠나가 장연 오리포에서 왜경에게 붙들려서 여러
달 옥고를 받고 나와서 겉으로는 장사도 하고 농사도 한다 하면서 속으로 청년간에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직접 간접으로 교육에 힘을 써서 나무리벌 청년의 신망을 받는
중심 인물이 되어 있었다. 나는 종종 나무리에 내왕하면서 그와 만났다.
  하루는 안악에서 노백린을 만났다. 그는 그때에 육군정령의 군직을 버리고 그의
향리인 풍천에서 교육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서울로 가는 길에 안악을 지나는
것이었다. 나는 부강학교로 갈 겸 그와 작반하여 나무리 진초등 김정홍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김은 그 동네의 교육가였다.
  저녁에 진초 학교 직원들도 와서 주연을 벌이고 있노라니 동네가 갑자기
요란하여졌다. 주인 김정흥이 놀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설명하는 말이 이러하였다.
진초학교에 오인성이라는 여교원이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그의 남편 이재명이
와서 단총으로 오인성을 위협하여 인성은 학교 일을 못 보고 어느 집에 피신하여
있는데 이재명은 매국적을 모조리 죽인다고 부르짖으면서 미쳐 날뛰며 방포를 하므로
동네가 이렇게 소란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노백린과 상의하고 이재명이라는 사람을 불러왔다. 그는 22, 3세의 청년으로서
미우에 가득하게 분기를 띠고 들어섰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자기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서 거기서 공부를 하던 중에 우리나라가 왜에게 빼앗긴다는 말을 듣고 두어 달
전에 환국하였다는 말과, 제 목적은 이완용 이하의 매국적을 죽임에 있다 하여 단도와
권총을 내어 보이고, 또 자기는 평양에서 오인성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였는데 그가
남편의 충의의 뜻을 몰라본다는 말을 기탄없이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장차 서울 북달은재에서 이완용을 단도로 찌른 의사
이재명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한 허열에 뜬 청년으로만 보았다. 노백린도
나와 같이 생각한 모양이어서 그의 손을 잡고 큰 일을 하려는 사람이 큰 일을 할
무기를 가지고 아내를 위협하고 동네를 소란케 하는 것은 아직 수양이 부족한
것이라고 간곡히 말하고 그 단총을 자기에서 맡겨 두고 마음을 더 수양하고 동지도 더
얻어 가지고 일을 단행하라고 권하였더니, 이재명은 총과 칼을 노백린에게 주기는
주면서도 선선하게 주는 빛은 없었다.
  노백린이 사리원역에서 차를 타고 막 떠나려 할 때에 문득 이재명이 그곳에
나타나서 노에게 그 맡긴 물건을 도로 달라고 하였으나 노는 "서울 와서 찾으시오."
하고 떠나버렸다.
  그 후 일삭이 못 되어 이 의사는 동지 몇 사람과 서울에 들어와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천주교당에 다녀오는 이완용을 찌른 것이었다. 완용이 탔던 인력거꾼은
즉사하고 완용의 목숨은 살아나서 나라를 파는 마지막 도장을 찍을 날을 주었으니
이것은 노백린이나 내가 공연한 간섭으로 그의 단총을 빼앗은 때문이었다.
  나라의 명맥이 경각에 달렸으되 국민 중에는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많았다.
이에 일변 깨달은 지사들이 한데 뭉치고 또 일변 못 깨달은 동포를 계발하여서 다
기울어진 국운을 만회하려는 큰 비밀운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신민회였다. 안창호는
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 교육을 표면의 사업으로
하면서 이면으로는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 등과 기타 몇 사람을 중심으로 하고 4백여명 정수분자로 신민회를
조직하여 훈련. 지도하다가 안창호는 용산 헌병대에 잡혀 갇혔다. 합병이 된 뒤에는
소위 주의인물을 일망타진할 것을 미리 알았음인지, 안창호는 장연군 송천에서 비밀히
위해위로 가고, 이종호, 이갑, 유동열 등 동지는 뒤를 이어서 압록강을 건넜다.
  서울에서 양기탁의 이름으로 비밀회의를 할 터이니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로 나도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로 나도 출석하였다. 그때 양기탁의 집에 모인 사람은 주인
양기탁과 이동녕,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김도희와 그리고 나 김구였다. 이 회의의
결과는 이러하였다.
  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 각 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서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 계획을 세우고 또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 전쟁에 쓸 장교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 도 대표를 선정하니
황해도에 김구,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이었다. 이 대표들은 급히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판비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경술년 11월 1일 아침, 서울을 떠났다. 양기탁의 친 아우 인탁이 재령 재판소
서기로 부임하는 길로 그 부인과 같이 동차하였으나 기탁은 내게 인탁에게도 통정은
말라고 일렀다. 부자와 형제간에도 필요 없이는 비밀을 누설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사리원에서 인탁과 작별하고 안악으로 돌아와 김홍량에게 이번 비밀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말하였더니 김홍량은 그대로 실행하기 위하여 자기의 가산을 팔기로 내놓았다.
그리고 신천 유문형 등 이웃 고을 동지들께도 비밀히 이 뜻을 통하였다. 장연
이명서는 우선 그 어머니와 아우 명선을 서간도로 보내어 추후하여 들어오는 동지들을
위하여 준비하기로 하고 일행이 안악에 도착하였기로 내가 인도하여 출발시켰다.
이렇게 우리 일은 착착 진행중에 있었다.
  어느 날 밤중에 안명근이 양산학교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가 서울 가
있는 동안에도 누차 찾아왔었던 것이었다. 그가 나를 찾은 목적은,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돈을 내마 하고 자기에게 허락하고도 안 내는 부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우선 안악 부자들을 육혈포로 위협하여 본을 보일 터이니, 나에게 지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과는 상관이 없고 안명근이 독자로
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돈을 가지고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의 계획에
의하면 동지를 많이 모아서 황해도의 전신과 전화를 끊어 각지에 있는 왜적이 서로
연락하는 길을 막아 놓고 지방지방이 일어나서 제 지방에 있는 왜적을 죽이라는 영을
내리면 반드시 성사가 될 것이니 설사 타지방에서 왜병이 대부대로 온다 하더라도
닷새는 걸릴 것인즉 그동안은 우리의 자유로운 세상이고 실컷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명근의 손을 잡고 이 계획은 버리라고 만류하였다. 여순에서 그 종형 중근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달리 격분도 할 일이지마는, 국가의 독립은 그런
일시적 설원으로 되는 것이 아닌즉 널리 동지를 모으고 동포를 가르쳐서 실력을 기른
뒤에 크게 싸울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뜻을 말하고, 서간도에 이민을 할 것과 의기
있는 청년을 많이 그리로 인도하여 인재를 양성함이 급무라는 뜻을 설명하였다. 내
말을 듣고 그도 그렇다고 수긍은 하나 자기의 생각과 같지 아니한 것이 불만한
모양으로 서로 작별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아니하여서 안명근이 사리원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이 신문으로 전하였다.
  해가 바뀌어 신해년 정월 초닷샛날 새벽, 내가 아직 기침도 하기 전에 왜 헌병
하나가 내 숙소인 양산학교 사무실에 와서 헌병 소장이 잠깐 만나자 한다 하고 나를
헌병 분견소로 데리고 갔다. 가보니 벌써 김홍량, 도인권, 이상진, 양성진, 박도병,
한필호, 장명선 등 양산학교 직원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 모양으로 불려 왔다.
경무총감부의 명령이라 하고 곧 우리를 끌어내어 사리원으로 가더니 거기서 서울 가는
차를 태웠다. 같은 차로 잡혀가는 사람들 중에는 송화 반정 신석충 진사도 있었으나
그는 재령강 철교를 건널 적에 차창으로 몸을 던져서 자살하고 말았다.
 신 진사는 해서에 유명한 학자요 또 자선가였고 그 아우 석제도 진사였다. 한 번
내가 석제 진사를 찾아갔을 때에 그 아들 낙영과 손자 상호가 동구까지 마중 나오기로
내가 모자를 벗어서 인사하였더니 그들은 황망히 갓을 벗어서 답례한 일이 있었다.
  또 차중에서 이승훈을 만났다. 그는 잡혀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포박되어
가는 것을 보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차가
용산역에 닿았을 때에(그때에는 경의선도 용산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왔었다) 형사
하나가 뛰어올라 와서 이승훈을 보고,
  "당신 이승훈 씨 아니오?"
하고 물었다. 그렇다 한즉 그 형사놈이,
  "경무총감부에서 영감을 부르니 좀 가십시다."
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와 같이 결박을 지어서 끌고 갔다. 후에 알고 보니
황해도를 중심으로 다수의 애국자가 잡힌 것이었다. 이것은 왜가 한국을 강제로
빼앗은 뒤에 그것을 아주 제 것을 만들어 볼 양으로 우리 나라의 애국자인 지식계급과
부호를 모조리 없애 버리려는 계획의 제일회였다. 그러기 위하여는 감옥과 이왕 있는
유치장만으로는 부족하여 창고 같은 건물을 벌의 집 모양으로 간을 막아서 임시
유치장을 많이 준비하여 놓고 우리들을 잡아 올린 것이었다.
  이번 통에 잡혀 온 사람은 황해도에서 안명근을 비롯하여 신천에서 이원식, 박만준,
신백서, 이학구,유원봉, 유문형, 이승조, 박제윤, 민영룡, 신효범, 안악에서 김홍량,
김용제, 양성진, 김구, 박도병, 이상진, 장명선, 한필호, 박형병, 고봉수, 한정교, 최익형,
고정화, 도인권, 이태주, 장응선, 원행섭, 김용진등이요, 장연에서 장의택, 장원용,
최상륜, 은률에서 김용원, 송화에서 오덕겸, 장홍범, 권태선, 이종록, 김익룡, 장연에서
김재형, 해주에서 이승준, 이재림, 김영택, 봉산에서 이승길, 이효건 그리고 배천에서
김병옥, 연안에서 편강렬등이었고, 평안남도에서는 안태국, 옥관빈, 평안북도에서는
이승훈, 유동열, 김용규의 형제가 붙들리고, 경성에서는 양기탁, 김도희, 강원도에서
주진수, 함경도에서 이동휘가 잡혀와서 다들 유치되어 있었다. 나는 이동휘와는 전면이
없었으나 유치장에서 명패를 보고 그가 잡혀온 줄을 알았다.
  나는 생각하였다. 평거에 나라를 위하여 십분 정성과 힘을 쓰지 못한 죄로 이 벌을
받는 것이라고, 이제 와서 내게 남은 일은 고후조 선생의 훈계대로 육신과 삼학사를
본받아 죽어도 굴치 않는 것뿐이라고 결심하였다.
  심문실에 끌려나가는 날이 왔다. 심문하는 왜놈이 나의 주소. 성명 등을 묻고 나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왔는지 아느냐." 하기로 나는, "잡아오니 끌려 왔을 뿐이요,
이유는 모른다." 하였더니 다시는 묻지도 아니하고 내 수족을 결박하여 천정에
매달았다. 처음에는 고통을 깨달았으나 차차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이 들어보니
나는 고요한 겨울 달빛을 받고 심문실 한구석에 누워 있는데 얼굴과 몸에 냉수를
끼얹는 감각 뿐이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왜놈은 비로소 나와 안명근과의 관계를 묻기로 나는
안명근과는 서로 아는 사이나 같이 일한 것은 없다고 하였더니, 그놈은 와락 성을
내어서 다시 나를 묶어 천정에 달고 세 놈이 둘러서서 막대기와 단장으로 수없이 내
몸을 후려갈겨서 나는 또 정신을 잃었다. 세 놈이 나를 끌어다가 유치장에 누일
때에는 벌써 훤하게 밝은 때였다. 어제 해질 때에 시작한 내 심문이 오늘 해뜰 때까지
계속된 것이었다.
  처음에 내 성명을 묻던 놈이 밤이 새도록 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놈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일에 충성된 것을 알았다. 저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 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이렇게 악형을 받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옆 방에 있는 김홍량, 한필호, 안태국,
안명근 등도 심문을 받으러 끌려나갈 때에는 기운 있게 제 발로 걸어나가나 왜놈의
혹독한 단련을 받고 유치장으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반죽음이 다 되어 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치미는 분함을 누를 길이 없었다.
  한 번은 안명근이 소리소리 지르면서,
  "이놈들아, 죽일 때에 죽이더라도 애국 의사의 대접을 이렇게 한단 말이냐."
하고 호령하는 사이사이에,
  "나는 내 말만 하였고 김구, 김홍량들은 관계가 없다고 하였소."
하는 말을 끼어서 우리의 귀에 넣었다.
  우리들은 감방에서 서로 통화하는 방법을 발명하여서 우리의 사건을 보안법 위반과
모살급 강도의 둘로 나누어서 아무쪼록 동지의 희생을 적게 하기로 의논하였다.
양기탁의 방에서 안태국의 방과 내가 있는 방으로, 내게서 이재림이 있는 방으로 이
모양으로 좌우 줄 20여 방, 40여 명이 비밀리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왜놈들은 우리의 심문이 진행됨을 따라 이것을 통방이라고 칭하였다. 사건의 범위가
점점 축소됨을 보고 의심이 났던 모양이어서 우리 중에서 한순직을 살살 꾀어 우리가
밀어하는 내용을 밀고하게 하였다. 어느 날 양기탁이 밥 받는 구멍에 손바닥을 대고,
우리의 비밀한 통화를 한순직이가 밀고 하니 금후로는 통방을 폐하자는 뜻을 손가락
필답으로 전하였다. 과연 센 바람을 겪고야 단단한 풀을 알 것이었다. 안명근이 한
순직을 내게 소개할 때에 그는 용감한 청년이라고 칭하더니 이 꼴이었다. 어찌 한
순직뿐이랴, 최명식도 악형을 못 이겨서 없는 소리를 자백하였으나 나중에 후회하여
긍허라고 호를 지어서 평생에 자책하였다. 그때의 형편으로 보면 내 혀끝이 한 번
움직이는 데 몇 사람의 생명이 달렸으므로 나는 단단히 결심을 하였다.
  하루는 또 불려 나가서 내 평생의 지기가 누구냐 하기로 나는 서슴지 않고,
  "오인형이 내 평생의 지기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종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는 일이 없던 내 입에서 평생의 지기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극히 반가워하는 낯빛으로 그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천연하게,
  "오인형은 장연에 살더니 연전에 죽었다."
하였더니 그놈들이 대로하여 또 내가 정신을 잃도록 악형을 하였다.
  한 번은 학생 중에는 누가 가장 너를 사모하더냐 하는 질문에 나는 창졸간에 내
집에 와서 공부하고 있던 최중호의 이름을 말하고서는 나는 내 혀를 물어 끊고
싶었다. 젊은 것이 또 잡혀와서 경을 치겠다고 아픈 가슴으로 창 밖을 바라보니 언제
잡혀왔는지 반쯤 죽은 최중호가 왜놈에게 끌려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진고개 끝 남산 기슭에 있는 소위 경무총감부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도수장에서 소나
돼지를 때려 잡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었다. 이것은 우리 애국자들이 왜놈에게 악형을
당하는 소리였다.
  하루는 한필호 의사가 심문을 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겨우 머리를 들어 밥구멍으로
나를 들여다보면서,
  "모두 부인했더니 지독한 악형을 받아서 나는 죽습니다."
하고 작별하는 모양을 보이기로, 나는
  "그렇게 낙심 말고 물이나 좀 자시오."
하고 위로하였더니, 한 의사는,
  "인제는 물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는 다시 소식을 몰랐는데 공판 때에야 비로소 한필호 선생이 순국한 것과 신석충
진사가 사리원으로 끌려오는 도중에 재령강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을 알았다.
  하루는 나는 최고심문실이라는 데로 끌려갔다. 뉘라서 뜻하였으랴, 17년 전 내가
인천 경무청에서 심문을 당할 때에 방청석에 앉았다가 내가 호령하는 바람에 '칙쇼
칙쇼'하고 뒷방으로 피신하던 도변 순사놈이 나를 심문하려고 앉았을 줄이야. 그놈은
전과같이 검은 수염을 길러 늘이고 낯바닥에는 약간 노쇠한 빛이 보였으나 이제는
경무총감부의 기밀과장으로 경시의 제복을 입고 위의가 엄숙하였다.
  도변이 놈은 나를 보고 첫말이, 제 가슴에는 엑스광선이 있어서 내 평생의 역사와
가슴 속에 품은 비밀은 소상히 다 알고 있으니 일호도 숨김이 없이 다 자백을 하면
괜찮거니와 만일에 은휘하는 곳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나를 때려 죽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변이 놈의 엑스광선은 내가 17년 전 인천 감옥의 김창수인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연전 해주 검사국에서 검사가 보고 있던 '김구'라는 책에도 내가
치하포에서 토전양량을 죽인 것이나 인천 감옥에서 사형정지를 받고 탈옥 도주한 것은
적혀 있지 아니하였던 것과 같이 이번 사건에 내게 관한 기록에도 그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내 일을 일러바치는 한인 형사와 정탐들도 그 일만은 빼고 내
보고를 하는 모양이니 그들이 비록 왜의 수족이 되어서 창귀 노릇을 한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의 한구석에는 한인 혼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도변이 놈이 나의 경력을 묻는데 대하여서 나는 어려서는 농사를 하다가 근년에
종교와 교육사업을 하고 있거니와 모든 일을 내놓고 하고 숨어서 하는 것이 없으며,
현재에는 안악 양산학교의 교장으로 있노라고 대답하였더니 도변은 와락 성을 내며,
내가 종교와 교육에 종사한다는 것은 껍데기요, 속으로는 여러 가지 큰 음모를 하고
있는 것을 제가 소상히 다 알고 있노라 하면서, 내가 안명근과 공모하여 총독을
암살할 음모를 하고,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하려고 부자의
돈을 강탈한 사실을 은휘한들 되겠느냐고 나를 엄포하였다. 이에 대하여 나는
안명근과는 전연 관계가 없고 서간도에 이민이란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빈한한
농민에게 생활의 근거를 주자는 것뿐이라고 답변한 뒤에, 나는 화두를 돌려서 지방
경찰의 도량이 좁고 의심만 많아서 걸핏하면 배일로 사람을 보니 이러고는 백성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서 모든 사업에 방해가 많으나 이후로는 지방의 경찰에 주의하여
우리 같은 사람들이 교육이나 잘 하고 있도록 하여 달라, 학교 개학기도 벌써
넘었으니 속히 가서 학교일을 보게 하여 달라 하였다. 도변이 놈은 악형은 아니하고
나를 유치장으로 돌려보냈다.
  이제 보니 도변이 놈은 내가 김창수인 것을 전연 모른 것이 확실하고 그렇다 하면
내 과거를 소상히 잘 아는 형사들이 그 말을 아니 한 것도 분명하였다. 나는 기뻤다.
  나라는 망하였으나 민족은 망하지 아니하였다. 왜 경찰에 형사질을 하는 한인의
마음에도 애국심은 남아 있으니 우리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아니하리라고 믿고 기뻐하는
동시에 형사들까지도 내게 이러한 동정을 주었으니 나로서는 최후의 일각까지 동지를
위하여 싸우고 원수의 요구에 응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김홍량은 나보다
활동할 능력도 많고 인물의 품격도 높으니 나를 희생하여서라도 그를 살리리라 하고
심문시에도 내게 불리하면서도 그에게 유리하게 답변하였고, 또

  "(구몰니중홍비해외)
  거북은 진흙 속에 있으며 기러기는 바다 위를 나른다."

  라고 중얼거렸다.
  전후 일곱 번 심문 중에 도변의 것을 제하고 여섯 번은 번번이 악형을 당하여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악형을 받고 유치장으로 끌려 돌아올 때마다 나는,
  "나의 목숨은 너희가 빼앗아도 나의 정신은 너희가 빼앗지 못하리라."
하고 소리를 높여 외쳐서 동지들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내가 그렇게
떠들면 왜놈들은,
  "나쁜 말이 해소도 다다꾸."
하고 위협하였으나 동지들의 마음은 내 말에 격려되었으리라고 믿는다.
  내게 대한 제 8회 심문은 과장과 각 주임경시 7, 8명 열석 하에 열렸다. 이놈들이
나를 향하여 하는 말이,
  "네 동류가 거개 자백을 하였는데 네놈 한 놈이 자백을 아니하니 참 어리석고
완고한 놈이다. 네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아니하기로서니 다른 놈들의 실토에서 나온
네놈의 죄가 숨겨지겠느냐. 너, 생각해 보아라, 새로 토지를 매수한 지주가 밭에
거치장거리는 돌멩이를 추려 내지 아니하고 그냥 둘 것이냐. 그러니 똑바로 말을 하면
괜찮거니와 일향 고집하면 이 자리에서 네놈을 때려 죽일 터이니 그리 알아라."
한다. 이 말에 나는,
  "오냐, 이제 잘 알았다. 내가 너희가 새로 산 밭에 돌이라면 그것을 맞았다. 너희가
나를 돌로 알고 파내려는 수고보다 패어내우는 내 고통이 더 심하니, 그렇다면
너희들의 손을 빌 것이 없이 내 스스로 내 목숨을 끊어 버릴 터이니 보아라."
하고 머리로 옆에 있는 기둥을 받고 정신을 잃고 엎어졌다.
  여러 놈들이 인공 호흡을 한다, 냉수를 면상에 뿜는다 하여 내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에 여러 놈 중에서 한 놈이 능청스럽게,
  "김구는 조선인 중에 존경을 받는 인물이니 이같이 대우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본직에게 맡기시기를 바라오."
하고 청을 하니 여러 놈들이 즉시 승낙한다.
  승낙을 받은 그놈이 나를 제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담배도 주고 말도 좋은 말을
쓰고 대우가 융숭하다. 그놈의 말이 자기는 황해도에 출장하여 내게 관한 조사를 하여
가지고 왔는데 그 결과로 보면 나는 교육에 열심하여 월급을 받거나 못 받거나
여일하게 교무에 열심하고 일반 인민의 여론을 듣더라도 나는 정직한 사람인데
경무총감부에서도 내 신분을 잘 모르고 악형을 많이 한 모양이니 대단히
유감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심문하는 데는 이렇게 할 사람과 저렇게 할 사람이
따로 있는데 나 같은 인물에 대하여서 그렇게 한 것은 크게 실례라고 아주 뻔뻔스럽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한다.
  왜놈들이 우리 애국자들의 자백을 짜내기 위하여 하는 수단은 대개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으니 첫째는 악형이요, 둘째는 배고프게 하는 것이요, 그리고 세째는
우대하는 것이다. 악형에는 회초리와 막대기로 전신을 두들긴 뒤에 다 죽게 된 사람을
등상 위에 올려 세우고 붉은 오라줄로 뒷짐결박을 지워서 천정에 있는 쇠갈고리에
달아 올리고는 발등상을 빼어버리면 사람이 대룽대룽 공중에 달리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얼마 동안을 지나면 사람은 고통을 못 이기어 정신을 잃어버린다. 그런 뒤에
사람을 끌러 내려놓고 얼굴과 몸에 냉수를 끼얹으면 다시 소생하여 정신이 든다. 나는
난장을 맞을 때에 내복 위로 맞으니 덜 아프다 하고 내복을 벗어 버리고 맞았다.
  그 다음의 악형은 화로에 쇠꼬챙이를 달구어 놓고 그것으로 벌거벗은 사람의 몸을
막 지지는 것이다.
  그 다음의 악형은 세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만한 모난 막대기를 끼우고 그 막대기 두
끝을 노끈으로 꼭 졸라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사람을 거꾸로 달고 코에 물을 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형을 당하면 나도 악을 내어서 참을 수도 있지마는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굶기는 벌이다. 밥을 부쩍 줄여서 겨우 죽지 아니할 만큼 먹이는
것인데 이리하여 배가 고플 대로 고픈 때에 차입밥을 받아서 먹는 고기국과 김치
냄새를 맡을 때에는 미칠 듯이 먹고 싶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늘 들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난다. 박영효의 부친이
옥중에서 섬거적을 뜯어 먹다가 죽었다는 말이며, 옛날 소무가 전을 씹어 먹으며 19년
동안 한나라 절개를 지켰다는 글을 생각할 때에 나는 사람의 마음은 배고파서 잃고
짐승의 성품만이 남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자책하였다.
  차입밥! 얼마나 반가운 것인가. 그러나 왜놈들이 원하는 자백을 아니하면 차입은
허하지 아니한다. 참말이나 거짓말이나 저희들의 비위에 맞는 소리로 답변을 해야만
차입을 허하는 것이다. 나는 종내 차입을 못 받았다. 조석 때면 내 아내가 내게
들리라고 큰 소리로,
  "김구 밥 가져 왔어요."
하고 소리치는 것이 들리나 그때마다 왜놈이,
  "깅 가메 나쁜 말이 했소데. 사시이래 일이 오브소다."
하고 물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깅가메'라는 것은 왜놈들이 부르는 내 별명이다.
  그러나 배고픈 것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대였다.
  내가 아내를 팔아서라도 맛있는 것을 실컷 먹고 싶다고 생각할 때에 경무총감
명석의 방으로 나를 불러들여 극진히 우대하였다. 더할 수 없는 하지하천의 대우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에게 이 우대가 기쁘지 않음이 아니었다.
  명석이 놈이 내게 한 말의 요령은 이러하였다. 내가 신부민으로 일본에 대한 충성만
표시하면 즉각으로 자기가 총독에게 보고하여 옥고를 면하게 할 터이요, 또 일본이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서 순전히 일본인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덕망이 높은 조선
인사를 얻어서 정치를 하게 하려 하니 그대와 같이 충후한 장자로서 대세의 추이를
모를 바 아닌즉 순응함이 어떠냐. 그런즉 안명근 사건에 대한 것은 사실대로 자백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명석에게 대하여,
  "당신이 나의 충후함을 인정하거든 내가 자초로부터 공술한 것도 믿으시오."
하였다. 그놈은 가장 점잖은 체모를 가지나 기색은 좋지 못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오늘 내가 불려 나와서 처음에 당장 때려 죽인다고 하다가
이놈의 방으로 끌려 들어온 것이었다.
  이놈은 국우라는 경시다. 그는 제가 대만에 있을 때에 어떤 대만인 피의자 하나를
담임하여 심문하였는데 그 사람이 나와 같이 고집하다가 검사국에 가서야 일체를
자백하였노라 하는 편지를 국우에게 보내었다 하며, 나도 검사국에 넘어가거든 잘
자백을 할 터이니 그러면 검사의 동정을 얻으리라 하고 전화로 국수장국에 고기를
많이 넣어서 가져오라고 명하여 그것을 내 앞에 놓고 먹기를 청한다. 나는 나를
무죄로 한다면 이 음식을 먹으려니와 나를 유죄로 한다면 나는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하고 숟가락을 들지 아니하였다.
  그런즉 그놈이,
  "김구씨는 한문병자야. 김구는 내게 동정을 아니하지마는 나는 자연히 김구씨께
동정이 간단 말요. 그래서 변변치 못하나마 드리는 대접이니 식기 전에 어서 자시오."
한다. 그래도 나는 일향 사양하였더니 국우는 웃으면서 한자로,

  '(군의치독부)
  그대는 음식에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가.'

  하는 다섯 자를 써 보이며, 이제는 심문도 종결되었고 오늘부터는 사식 차입도
허한다고 하였다. 나는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라 하고 그 장국을 받아
먹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부터 사식이 들어왔다.
  나와 같은 방에 이종록이라 하는 청년이 있는데 그를 따라온 친척이 없어서 사식을
들여 줄 이가 없었다. 내가 밥을 그와 한 방에서만 먹으면 그를 나눠줄 수도
있겠지마는 사식은 딴 방에 불러내어서 먹이기 때문에 그리할 수가 없어서 나는 밥과
반찬을 한 입 잔뜩 물고 방에 들어와서 제비가 새끼 먹이듯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
먹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뿐이요, 이튿날 나는 종로 구치감으로 넘어갔다. 방은
독방이라 심심하나 모든 것이 총감부보다는 편하고 거기서 주는 감식이라는 밥도
총감부의 것보다는 훨씬 많았다.
  내 사건은 사실대로만 처단한다 하면 보안법 위반으로 극형이라 하여 징역 일년밖에
안될 것이지마는 나를 억지로 안명근의 강도사건에 끌어다 붙이려 하였다. 내가
억지로라 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가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서간도에
이민을 하고 무관학교를 세울 목적으로 이동녕을 파견할 회의를 한 날짜가 바로
안악에서 안명근, 김홍량 등이 부호를 협박할 의논을 하였다 하는 그 날짜이므로 나는
도저히 안악에서 한 회의에 참예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하건마는 안악
양산학교 교직의 아들 이원형이라 하는 14세 되는 어린아이를 협박하여 내가 그
자리에 참예하는 것을 보았노라고 거짓 증언을 시켜서 나를 안명근의 강도 사건에
옭아 넣었다. 애매하기로 말하면 김홍량이나 도인권이나 김용제나 다 애매하지마는
그래도 이들은 그날 안악에는 있었으니 회의에 참예했다고 억지로 우겨댈 수도
있겠으나 5백 리 밖에서 다른 회의에 참예하였다고 저희 기록에 써놓은 내가, 같은
날에 안악의 회의에도 참예했다는 것은 요술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나는 내게 대한 유일한 증인인 이원형 소년이 내가 심문 받는 옆방에서 심문 받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너는 안명근과 김구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
하는 심문에 대하여 이 소년은,
  "나는 안명근이라는 사람은 얼굴도 모르고, 김구는 그 자리에 없었소."
하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옆에서 어떤 조선 순사가,
  "이 미련한 놈아. 안명근이도 김구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만 하면 너의 아버지를
따라 집에 가게 해줄 터이니 시키는 대로 대답을 해."
하는 말에 원형은,
  "그러면 그렇게 할 터이니 때리지 마셔요."
하였다.
  검사정에서도 이원형을 증인으로 불러 들였으나, 이 소년이,
  "네."
하는 대답이 있자마자 다른 말이 더 나오는 것을 꺼리는 듯 곧 문 밖으로 몰아내었다.
나는 5백 리를 새에 둔 회의에 한 날에 참예하는 김구를 만드노라고 매우
수고롭겠다고 검사에게 말하였더니 검사는 그 말에 대답도 아니하고,
  "종결!"
하고 심문이 끝난 것을 선언하였다.
  내가 경무총감부에 갇혀 있을 그때 의병장 강기동도 잡혀 와 있었다. 그는 애초에
의병으로 다니다가 귀순하여서 헌병 보조원이 되었다. 한 번은 사형을 당할 의병
10여명이 갇힌 감방을 수직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감방문을 열어 의병들을 다
내어놓고 무기고를 깨뜨리고 무기를 꺼내어 일제히 무장을 하고 그도 같이 달아나서
경기, 충청, 강원도 등지로 왜병과 싸우고 돌아다니다가 안기동이라고 변명하고 원산에
들어가 무슨 계획을 하다가 붙들려 온 것이었다. 그는 육군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김좌진도 애국운동으로 강도로 몰려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은 감방에서
고생을 하였다.
  하루는 안악 군수 이모라는 자가 감옥으로 나를 찾아와서 양산학교 집과 기구를
공립보통학교에 내어놓는다는 도장을 찍으라고 하므로, 나는 집은 나랏집이니까
내어놓지마는 기구는 사삿 것이니 사립학교인 양산학교에 기부한다고 하였으나 그것도
공립으로 가져가고 말았다. 양산학교는 우리들 불온분자들의 학교라 하여 강제로
폐지해 버린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은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이 다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특별히 손두환과 우기범 두 학생이 생각났다. 재주로나
뜻으로나 특출하였고 어리면서도 망국 한을 느낄 줄 아는 이들이었다.
  어떻게 하여서라도 이 자리를 모면하여 해외에서 활동하고 싶던 김홍량도 자기가
안명근의 부탁으로 신천 이원식에게 권고하였다는 것을 자백하였으니 도저히 빠지기
어려울 것이다. 심혈을 다 바치던 교육사업도 수포로 돌아가고 믿고 사랑하던 동지도
이제는 살아 나갈 길이 망연하니 분하기 그지 없었다. 어머니는 안악에 있던
가장집물을 다 팔아 가지고 내 옥바라지를 하시려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내 처와 딸
화경이는 평산 처형네 집에 들렸다가 공판날이 되어서 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셨다.
  어머니가 손수 담으신 밥그릇을 열어 밥을 떠 먹으며 생각하니 이 밥에 어머니
눈물이 점점이 떨어졌을 것이었다. 18년 전 해주에서의 옥바라지와 인천 옥바라지를
하실 때에는 내외분이 고생을 나누기나 하셨건마는 이제는 어머니 혼자셨다. 어머님께
도움이 되기는커녕 위로를 드릴 능력이 있는 자가 그 누군가.
  이렁저렁 공판날이 되었다. 죄수를 태우는 마차를 타고 경성 지방 재판소 문전에
다다르니 어머니가 화경이를 업으시고 아내를 데리고 거기 서 계셨다.
  우리는 2호 법정이라는 데로 끌려 들어갔다. 법정 피고석 걸상에 앉은 차례는
수석에 안명근, 다음에 김홍량, 세째로는 나 그리고는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도인권,
양성진, 최익형, 김용제, 최명식,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 등 모두 열 다섯 명이
늘어앉고 방청석을 돌아 보니 피고인의 친척, 친지와 남녀 학생들이 와 있었다.
변호사, 신문기자석에도 다 사람이 있었다. 한필호 선생이 경무총감부에서 매맞아
별세하고 신석충 진사는 사리원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재령강 철교에서 투신 자살을
하였단 말을 여기서 들었다.
  소위 판결이라는 것은 안명근이 징역 종신이요, 김홍량, 김구,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원행섭, 박만준 등 일곱 명은 징역15년(원행섭, 박만준은 궐석이었다), 도인권,
양성진이 10년, 최익형, 김용제,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은 각각 7년, 또는
5년이니 이것은 강도사건 관계요, 보안법사건으로는 양기탁을 주범으로 하여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 김도희, 김용규, 고정화, 정달하, 감익룡과 이름은
잊었으나 김용규의 족질 한 사람이 있었는데 판결되기는 양기탁,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은 징역 2년이요, 나머지는 1년으로부터 6개월이었다. 그리고 재판을
통하지 아니하고 소위 행정처분으로 이동휘, 이승훈, 박도병, 최종호, 정문원, 김영옥
등 19인은 무의도, 제주도, 고금도, 울릉도로 일년간 거주 제한이라는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김홍량이나 나는 강도로 15년, 보안법으로 2년, 모두 17년
징역살이를 하게 된 것이었다.
  판결이 확정되어 우리는 종로 구치감을 떠나서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갔다. 지금까지
미결수였으나 이제부터는 변통없는 전중이었다. 동지들의 얼굴을 날마다 서로 대하게
되고 이따금 말로 통정도 할 수 있는 것이 큰 위로였다.
  7년, 5년 징역까지는 세상에 나갈 희망이 있지마는 10년, 15년으로는 살아서 나갈
희망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몸은 왜에 포로가 되어 징역을 지면서도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과 같이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낙천 생활을 하리라고 작정하였다. 다른
동지들도 다 나와 뜻이 같았다.
  옥중에 있는 동지들은 대개 아들이 있었으나 나는 딸이 하나가 있을 뿐이요, 아들이
없었다. 김용제 군은 아들이 4형제나 되므로 그 세째 아들 문량으로 하여금 내 뒤를
잇게 한다고 허락하였다. 나도 동지의 호의를 고맙게 받았다.
  또 한 가지 나로 하여금 비관을 품지 않게 하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일본이 내가
잡혀오기 전에 생각하던 것과 같이 크고 무서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본 것이었다.
밑으로는 형사, 순사로부터 꼭지로는 경무총감까지 만나 보는 동안에 모두 좀것들이요,
대국민다운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가슴에 엑스광선을 대어서 내 속과 내력을 다
뚫어본다면서도 내가 17년 전의 김창수인 줄도 몰라보고 깝죽대는 도변이야말로
일본을 대표한 자인 것 같다.
  '일본은 한국을 오래 제 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일본의 운수는 길지 못하다.'
  나는 이렇게 단정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하여서 비관하지 아니하게
되었다.
  허위 이강년 같은 큰 애국지사의 부하로 의병을 다니다가 들어왔다는 사람들이
인물로나 식견으로나 보잘 것 없음을 볼 때에는 낙심도 되지마는 이재명, 안중근 같은
의사의 동지로 잡혀 들어온 사람들의 애국심이 불같고 정신이 씩씩한 것을 보면,
교육만 하면 우리 민족은 좋은 국민이 될 것을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저 무지한
의병들도 일본에 복종하는 백성이 되지 아니하고 10년, 15년의 벌을 받는 사람이 된
것만 해도 고맙고 존경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도 고후조 선생 같은 어른의
가르침이 없었던들 어찌 대의를 아는 사람이 되었으랴.
  옥에 있는 동안에 나는 내 심리가 차차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난 10여
년간에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무엇에나 저를 책망할지언정 남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남의 허물은 어디까지나 용서하는 그러한 부드러운 태도가 변하여서 일본에 대한
것이면 무엇이나 미워하고 반항하고 파괴하려는 결심이 생긴 것이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다른 죄수들과 같이 왜 간수에게 절을 하는 것이 무척 괴롭고
부끄러웠다. 다른 죄수들은 대의를 몰라서 그러하거니와 너는 고 선생의 제자가
아니냐 하고 양심을 때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내 손으로 밭갈고 길쌈함이 없이 오늘까지 먹고 입고 살아왔다. 그 먹은 밥과
입은 옷이 뉘게서 나왔느냐, 우리 대한 나라의 것이 아니냐. 나라가 나를 오늘날까지
먹이고 입힌 것이 왜놈에게 순종하여 붉은 요에 콩밥이나 얻어먹으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식인지식의인 소지평생막유위)
  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었으니, 품은 뜻은 평생토록 어김이 없어야 한다.'

  내가 대한 나라의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살아 왔으니 이 수치를 참고 살아나서
앞으로 17년 후에 이 은혜를 갚을 공을 세울 수가 있느냐.
  내가 이 모양으로 고민할 때에 안명근 군이 굶어 죽기를 결심하였노라고 내게
말하기로 나는 서슴지 않고,
  "할 수 있거든 단행하시오."
하였다. 그날부터 안명근은 배가 아프다고 칭하고 제게 들어오는 밥은 다른 죄수에게
나눠주고 4,5일을 연해 굶어서 기운이 탈진하였다. 감옥에서는 의사를 시켜 진찰케
하였으나 아무 병이 없으므로 안명근을 결박하고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계란 등속을
흘려 넣어서 죽으려는 목숨을 억지로 붙들었다. 죽을 자유조차 없는 이 자리였다.
  "나는 또 밥을 먹소,"하고 안명근은 내게 기별하였다.
  우리가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온 후에 얼마 아니하여서 또 중대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소위 사내 총독 암살음모라는 맹랑한 사건으로 전국에서 무려 7백여 명
애국자가 검거되어 경무총감부에서 우리가 당한 악형을 다 겪은 뒤에는 105인이
공판으로 회부된 사건이다. 105인 사건이라고도 하고 신민회 사건이라고도 한다. 2년
형의 진행 중에 있던 양기탁, 안태국, 옥관빈과 제주도로 정배갔던 이승훈도 붙들려
올라왔다. 왜놈들은 새로 산 밭에 뭉우리돌을 다 골라 버리고야 말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대한이 제것으로 될까?
  내가 복역한 지 칠팔 삭 만에 어머니께서 서대문 감옥으로 나를 면회하러 오셨다.
  딸깍하고 주먹 하나 드나들 만한 구멍이 열리기로 내다본즉 어머니가 서 계시고 그
곁에는 왜간수 한놈이 지키고 있다. 어머니는 태연한 안색으로,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면회는 한 사람밖에
못한다고 해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와 있다. 우리 세 식구는 잘 있으니 염려
말아라. 옥중에서 네 몸이나 잘 보중하여라. 밥이 부족하거든 하루 두 번씩 사식 들여
주랴?"
하시고 어성 하나도 떨리심이 없었다. 저렇게 씩씩하신 어머니께서 자식을 왜놈에게
빼앗기시고 면회를 하겠다고 왜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청원을 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황송하고도 분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참말 갸륵하셨다! 17년 징역을 받은 아들을 대할 때에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었으랴. 그러나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발부리가 아니 보이셨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하루 두 번 들여 주시는 사식을 한 번은 내가 먹고 한 번은 다른
죄수들에게 번갈아 나눠 주었다. 그들은 받아 먹을 때에는 평생에 그 은혜를 아니
잊을 듯이 굽신거리지마는 다음 번에 저를 아니 주고 다른 사람을 줄 때에는 "그게 네
의붓아비냐, 효자정문 내릴라."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
그때에 내게 얻어 먹는 편이 들고 나서 나를 역성하므로 마침내 툭탁거리고 싸움이
벌어져서 둘이 다 간수에게 흠씬 얻어 맞는 일도 있었다. 나는 선을 한다는 것이
도리어 악이 되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는 먼저 들어온 패들이 나를 멸시하였으나
소위 국사 강도범이란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는 대접이 변하였다. 더구나 이재명 의사의
동지들이 모두 학식이 있고 일어에 능통하여서 죄수와 간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통역을 하기 때문에 죄수들간에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를 우대하는 것을
보고 다른 죄수들도 나를 어려워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한 백여 일 동안 수갑을 채인 대로 있었다. 더구나 첫날 수갑을
채우는 놈이 너무 단단하게 졸라서 살이 패이고 손목이 통통 부었으므로 이튿날
문제가 되어서,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고 하기로 나는,
  "무엇이나 시키는 대로 복종하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다. 그랬더니,
  "이 다음에는 불편한 일이 있거든 말하라."
고 하였다.
  손목은 아프고 방은 좁아서 몹시 괴로웠으나 나는 꾹 참았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이러한 생활에도 차차 익으면 심상하게 되었다. 수갑도 끄르게 되어서
몸이 좀 편하게 되니 불현듯 최명식 군이 보고 싶었다. 수갑 끄른 자리에 허물은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 최군은 옴이 올라서 옴방에 있다 하니 나도 옴이 생기면
최군과 같이 있게 되리라 하여 인공적으로 옴을 만들었다. 의사의 순회가 있기 30분
전쯤하여 철사 끝으로 손가락 사이를 꼭꼭 찔러 놓으면 그 자리가 볼록볼록 부르트고
말간 진물이 나와서 천연 옴으로 보였다. 이것은 내가 감옥살이에서 배운 부끄러운
재주였다.
  이 속임수가 성공하여 나는 옴장이 방으로 옮겨져서 최명식과 반가이 만날 수가
있었다. 반가운 김에 밤이 늦도록 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좌동이라 하는 간수놈에게
들켜서 누가 먼저 말을 하였느냐 하기로 내가 먼저 하였노라 하였더니 나를 창살
밑으로 나오라 하여 내어 세워 놓고 곤봉으로 난타하였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아니하고 맞았으나 그때에 맞은 것으로 내 왼편 귀 위의 연골이 상하여 봉충이가
되어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다행히 최군은 용서한다 하고 다시 왜말로,
  "하나시 헷소도 다다꾸도(이야기하면 때려줄 테야.)"
하고 좌등은 물러갔다.
  감옥에서 죄수에게 이렇게 가혹한 대우를 하기 때문에 죄수들은 더욱 반항심과
자포자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사기나 횡령으로 들어온 자는 절도나 강도질을 하였다.
그리고 만기로 출옥하였던 자들도 다시 들어오는 자를 가끔 보았다. 민족적 반감이
충만한 우리를 왜놈의 그 좁은 소갈머리로는 도저히 감화할 수 없겠지마는 내
민족끼리의 나라에서 감옥을 다스린다 하면 단지 남의 나라를 모방만 하지 말고
우리의 독특한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즉 감옥의 간수부터 대학교수의 자격이
있는 자를 쓰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는 국민의 불행한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힘을 쓸 것이요, 일반 사회에서도 입감자를 멸시하는 감정을
버리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한다면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왜의 감옥제도로는 사람을 작은 죄인으로부터 큰 죄인을 만들 뿐더러 사람의
자존심과 도덕심마저도 마비시켰다. 예하면 죄수들은 어디서 무엇을 도둑질하던
이야기, 누구를 어떻게 죽이던 이야기를 부끄러워함도 없이 도리어 자랑삼아서 하고
있었다. 그도 친한 친구에게면 몰라도 초면인 사람에게도 꺼림이 없고, 또 세상에
드러난 죄도 아니고 저 혼자만 아는 죄를 뻔뻔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아도 그들이
감옥에 들어와서 부끄러워하는 감정을 잃어버린 표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잃을진대
무슨 짓은 못하랴. 짐승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감옥이란 이런 곳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최명식과 함께 소제부의 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죄수들이 부러워하는
'벼슬'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죄수들에게 일감을 돌려주고 뜰이나 쓸고 나면 할 일이
없어서 남들이 일하는 구경이나 돌아다녔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최 군과 나와는 죄수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고르기로 하였다. 내가 돌아보다가 눈에 띄는 죄수의 번호를
기억하고 명식 군도 기억하여 나중에 맞추어 보아서 둘의 본 바가 일치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내력과 인물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으로 우리는 한 사람을 골랐다. 그는 다른 죄수와 같이 차리고 같은 일을
하지마는 그 눈에 정기가 있고 동작에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나이는 40내외였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충청북도 광산 사람이요, 5년 징역을 받아 이태를 치르고 앞으로
3년을 남긴 강도범으로 통칭 김진사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며 무슨 죄로 왔느냐고
묻기로, 나는 황해도 안악 사람이요, 강도로 15년을 받았다고 하였더니 김진사는,
  "거, 짐이 좀 무겁소 그려."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나에게 '초범이시오?' 하기로 그렇다고 대답할 때에 왜
간수가 와서 더 말을 못하고 헤어졌다.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본 어떤 죄수가 나에게 그 사람을 아느냐 하기로
초면이라 하였더니, 그 죄수의 말이,
  "남도 도적 치고 그 사람 모르는 도적은 없습니다. 그가 유명한 삼남 불한당 괴수
김진사요. 그 패거리가 많이 잡혀 들어왔는데 더러는 병나 죽고 사형도 당하고 놓여
나간 자도 많지요."
하였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에 우리들이 벌거벗고 공장에서 감방으로 들어올 때에 그 역시
벌거벗고 우리 뒤를 따라서,
  "오늘부터 이 방에서 괴로움을 끼치게 됩니다."
하고 내가 있는 감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퍽이나 반가워서,
  "이 방으로 전방이 되셨소?"
하고 물은즉 그는,
  "네. 아, 노형 계신 방이구려."
하고 그도 기쁜 빛을 보인다. 옷을 입고 점검도 끝난 뒤에 나는 죄수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철창에 귀를 대어 간수가 오는 소리를 지켜 달라 하고 김진사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어, 아까 공장에서는 서로 할 말을 다 못하여서 유감일러니 이제
한 방에 있게 되니 다행이란 말을 하였더니 그도 동감이라고 말하고는 계속하여서
그는 마치 목사가 신입 교인에게 세례문답을 하듯이 내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 첫
질문은,
  "노형은 강도 15년이라 하셨지요?"
하는 것이었다.
  "네, 그렇소이다."
  "그러면 어느 계통이시오, 추설이요, 목단설이시요? 북대요? 또 행락은 얼마
동안이나 하셨소?"
  나는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추설', '목단설'은
무엇이요, '북대'는 무엇이며, '행락'은 대체 무엇일까?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김진사는 빙긋 웃으며,
  "노형이 북대인가 싶으오."
하고 경멸하는 빛을 보였다.
  내 옆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죄수 하나가 김진사를 대하여 나를
가리키며, 나는 국사범 강도라, 그런 말을 하여도 못 알아 들을 것이라고 변명하여
주었다. 그는 찰강도라 계통 있는 도적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야 김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째 이상하다 했소. 아까 공장에서 노형이 강도 15년이라기에 위아래로
훑어보아도 강도 냄새가 안 나기에 아마 북대인가 보다 하였소이다."
한다.
  나는 연전에 양산학교 사무실에서 교원들과 함께 하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상에 활빈당이니 불한당이니 하는 큰 도적 떼가 있어서 능히 장거리와 큰
고을을 쳐서 관원을 죽이고 전재를 빼앗되 단결이 굳고 용기가 있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작이 민활하여 나라 군사의 힘으로도 그들을 잡지 못한단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자면 견고한 조직과 기민한 훈련이 필요한즉 이 도적 떼의
결사와 훈련의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여 두루 탐문해 보았으나 마침내 아무
단서도 얻지 못하고만 일이었다.
  사흘을 굶으면 도적질할 마음이 난다고 하지마는 마음만으로 도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니 거지도 용기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담을 넘고 구멍을 뚫는 좀도둑은 몰라도,
수십 명 수백 명 떼를 지어 다니는 도적이라면 거기는 조직도 있고 훈련도 있고
의리도 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두목되는 지도자가 있을 것인즉 수십 명 수백 명 도적
떼의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면 능히 한 나라를 다스려 갈 만한 지혜와 용기와
위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진사에게 도적 떼의 조직에 관한 것을 물었다. 그런즉 진사는
의외에도 은휘함 없이 내 요구에 응하였다.
  "우리 나라의 기상이 다 해이한 이때까지도 그대로 남은 것은 벌과 도적의
법뿐이외다."
라는 허두로 시작된 김진사의 말에 의하면, 고려 이전은 상고할 길이 없으나
이조시대의 도적 떼의 기원은 이성계의 이신벌군의 불의에 분개한 지사들이 도당을
모아 일변 이성계를 따라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소위 양반들의 생명과 재물을 빼앗고
일변 그들이 세우려는 질서를 파괴하여서 불의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데서 나왔으니,
그 정신에 있어서는 두문동 72현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적이라 하나 약한
백성의 것은 건드리지 아니하고 나라 재물이나 관원이나 양반의 것을 약탈하여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구제함으로 쾌사를 삼았다. 이 모양으로 나라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법이 엄하고 단결이 굳어서 적은 무리의 힘으로 능히 5백 년간 나라의
힘과 겨루어 온 것이었다.
  이 도적의 떼는 근본이 하나요, 또 노사장이라는 한 지도자의 밑에 있으나 그
중에서 강원도에 근거를 둔 일파를 '목단설'이라고 부르고, 삼남에 있는 것을
'추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설에 속한 자는 서로 만나면 곧 동지로
서로 믿고 친밀하게 되었다. 이 두 설에 들지 아니하고 임시임시로 도당을 모아서
도적질하는 자를 '북대'라고 하는데 이 북대는 목단설과 추설의 공동의 적으로 알아서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리게 되었다.
  노사장 밑에는 유사가 있고 각 지방의 두목도 유사라고 하여 국가의 행정조직과
방사하게 전국의 도적을 통괄하였다. 일년에 일차 '대장'을 부르니 이것은 한 설만의
대회였다. 대회라고 전원이 출석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각 도와 각 군에서 몇 명씩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되었는데, 그 대표자는 각기 유사가 지명하게 되며 한 번 지명을
받으면 절대 복종이었다.
  이 '장' 부르는 처소는 흔히 큰 절이나 장거리였다. 대소공사를 혹은 의논하고 혹은
지시하여 장이 끝난 뒤에는 으례 어느 고을이나 장거리를 쳐서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회에 참예하러 갈 때에는 혹은 양반으로 혹은 등짐장수로 혹은 장돌림,
혹은 중, 혹은 상제로 별별 가장을 하여서 관민의 눈을 피하였다. 어디를 습격하러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세상을 놀라게 한 하동장 습격은 장례를 가장하여
무기를 관에 넣어 상여에 싣고 도적들은 혹은 상제, 혹은 복인, 혹은 상두꾼, 혹은
화장객이 되어서 장날 백주에 당당히 하동 읍내로 들어간 것이었다.
  김진사는 이러한 설명을 구변 좋게 한 후에 내게,
  "노형, 황해도라셨지? 그러면 연전에 청단장을 치고 곡산원을 죽인 사건을
아시겠구려?"
하기로 아노라고 대답하였더니, 김진사는 지난 일을 회상하고 유쾌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그때에 도당을 지휘한 것이 바로 나요. 나는 양반의 행차로 차리고 사인교를 타고
구종별배로 앞뒤 벽제까지 시키면서 호기당당하게 청단장에를 들어갔던 것이요. 장에
볼일을 다 보고 질풍신뢰와 같이 곡산읍으로 들이 몰아서 곡산 군수를 잡아 죽였으니
이것은 그놈이 학정을 하여서 인민을 어육을 삼는다 하기로 체천 행도를 한
것이었소."
하고 말을 마쳤다.
  "그러면 이번 징역이 그 사건 때문이요."
하고 내가 묻는 말에 그는,
  "아니오. 만일 그 사건이라면 5년 만으로 되겠소? 기위면키 어려울 듯하기로 대단치
아니한 사건 하나를 실토하여서 5년 징역을 졌소이다."
  나는 그들이 새 동지를 구할 때에 어떻게 신중하게 오래 두고 그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며, 이만하면 동지가 되겠다고 판단한 뒤에도 어떻게 그의 심지를 시험하는
것이며, 이 모양으로 동지를 고르기 때문에 한 번 동지가 된 뒤에는 서로 다투거나
배반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장물(도적한 재물)을 나눌 때에 어떻게 공평하다는
것이며, 또 동지의 의리를 배반하는 자가 만일에 있으면 어떻게 형벌이 엄중하다는
것도 김진사에게 들었다.
  인물을 고를 때에는 먼저 눈 정기를 본다는 것이며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동지의
처첩을 범하는 것과 장물을 감추는 것이요, 상 중에 가장 큰 상은 불행히 관에
잡혀가더라도 동지를 불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그 가족이
편안히 살도록 하여 준다는 말도 들었다.
  김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나라의 독립을 찾는다는 우리 무리의 단결이 저 도적만도
못한 것을 무한히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여기서 나는 동지 도인권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는 본시 용강 사람으로
노백린, 김희선, 이갑 등이 장령으로 있을 때에 군인이 되어서 정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군대가 해산되매 향리에 돌아와 있는 것을 양산학교 체육 선생으로 연빙하여
와서 우리와 동지가 되어 이번 사건에도 10년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이 고생을 하게 된
사람이다. 이때에 옥중에서는 죄수를 모아서 불상 앞에 예불을 시키는 예가 있었는데,
도인권은 자기는 예수교인이니 우상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없다 하여 아무리
위협하여도 고개를 빳빳이 하고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마침내 강제로 시키지
아니하기로 작정이 되었다.
  또 옥에서 상표를 주는 것을 그는 거절하였다. 자기는 죄를 지은 일도 없고 따라서
회개한 일도 없으니 개준을 이유로 하는 상표를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그 후에 가출옥을 시킬 적에도 도인권은, 내가 본래 무죄한 것을 지금 와서
깨달았으니 판결을 취소하고 나가라 하면 나가겠지마는 가출옥이라는 '가'자가
불쾌하니 아니 받는다고 버티어서 옥에서도 할 수 없이 형기를 태우고 도로 내보냈다.
도인권의 이러한 행동은 강도로서는 능히 못할 일이라, '만산고목일지청'의 기개가
있었다.

  '(외외낙낙적나나 독보건곤수반아)
  홀로 높고 정갈하여 구애됨이 없으니 천하를 홀로 걸으매 누가 나를 짝하랴.'

  라고 한 불가의 귀절을 나는 도군을 위하여 한 번 읊었다.
  하루는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일을 중지하고 명치가 죽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대사를 내린다는 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최고 2년인 보안법 위반에 걸린
동지들은 즉일로 나가고 나는 8년을 감하여 7년이 되고 김홍량 기타 15년은 7년을
감하여 8년이 되고 10년이라도  다 그 비례로 감형이 되었다. 그런 뒤 수삭이 지나서
또 명치의 처가 죽었다 하여 다시 잔기의 3분지 1을 감하니 내 형은 5년 남짓한
경형이 되고 말았다.
  이때 종신이던 것이 20년으로 감하여진 안명근은 형을 가하여 죽임을 받을지언정
감형은 아니 받는다고 항거하였으나 죄수에게 대하여서는 일체를 강제로 집행하는
것인즉 감형을 아니 받을 자유도 죄수에게는 있지 아니하다 하여 필경 20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안명근은 새로 지은 마포 감옥으로 이감이 되어서 다시는 그의
면목을 대할 기회도 없게 되었다. 안명근은 전후 17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연전에
방면되어 신천 청계동에서 그 부인과 같이 여생을 보내고 있더니 아령에 있는 그
부친과 친 아우를 그려서 권하고 그리로 가던 길에 만주 화룡현에서 만고의 한을 품고
못 돌아올 길을 떠나고 말았다.
  이렇게 연거푸 감형을 당하고 보니 이미 꺾어 버린 3년 남짓을 떼면 나머지 형기가
2년밖에 아니된다. 이때부터는 확실히 세상에 나가서 활동할 희망이 생겼다. 나는
세상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할까, 지사들이 옥에 다녀 나가서는 왜놈에게 순종하여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나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왜놈이
지어준 뭉우리돌대로 가리라 하고 굳게 결심하고 그 표로 내 이름 김구를 고쳐 김구라
하고 당호 연하를 버리고 백범이라고 하여 옥중 동지들께 알렸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를
닦을 때마다 하나님께 빌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 하고.
  나는 앞으로 2년을 다 못 남기고 인천 감옥으로 이감이 되었다. 나는 그 원인을
안다. 내가 서대문 감옥 제 2과장 왜놈하고 싸운 일이 있는데 그 보복으로 그놈이
나를 힘드는 인천 축항공사로 돌린 것이었다.
  여러 동지가 서로 만나고 위로하며 쾌활하게 3년이나 살던 서대문 감옥과 작별하고
40명 붉은 옷 입은 전중이 떼에 편입이 되어서 쇠사슬로 허리를 얽혀서 인천으로
끌려갔다. 무술년 3월 초열흘날 밤중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내가 17년 만에
쇠사슬에 묶인 몸으로 다시 이 옥문으로 들어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문을 들어서서 둘러보니 새로이 감방이 증축되었으나 내가 글을 읽던 그 감방이
그대로 있고 산보하던 뜰도 변함이 없다. 내가 호랑이같이 소리를 질러 도변이 놈을
꾸짖던 경무청은 매음녀 검사소가 되고 감리사가 좌기하던 내원당은 감옥의 집물을
두는 곳간이 되고, 옛날 주사, 순검이 들끓던 곳은 왜놈의 천지를 이루었다. 마치
죽었던 사람이 몇 십 년 후에 살아나서 제 고향에 돌아와서 보는 것 같다. 감옥 뒷담
너머 용동 마루터에서 옥에 갇힌 불효한 이 자식을 보겠다고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시던 선친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늘의 김구가 그날의 김창수라고
하는 자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감방에 들어가니 서대문에서 먼저 전감된 낯익은 사람도 있어서 반가웠다.
  어떤 자가 내 곁으로 쓱 다가앉아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분 낯이 매우 익은데, 당신 김창수 아니오."
한다.
  참말 청천벽력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본즉 17년 전에 나와 한 감방에 있던
절도 10년의 문종칠이었다. 늙었을망정 젊을 때 면목이 그대로 있다. 오직 그때와 다른
것은 이마에 움쑥 들어간 구멍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의아한 듯이 짐짓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제 낯바닥을 내 앞으로 쑥 내밀어 나를 쳐다보면서,
  "창수 김서방. 나를 모를 리가 있소. 지금 내 면상에 이 구멍이 없다고 보면 아실 것
아니오? 나는 당신이 달아난 후에 죽도록 매를 맞은 문종칠이요, 그만하면 알겠구려."
하는데는 나는 모른다고 버틸 수가 없어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 자가 밉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문가는 나에게,
  "당시에 인천 항구를 진동하던 충신이 무슨 죄를 짓고 또 들어오셨소?"
하고 묻는다. 나는 귀찮게 생각하여서,
  "15년 강도요."
하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문가는 입을 삐죽거리며,
  "충신과 강도는 상거가 심원한데요. 그때의 창수는 우리 같은 도적놈들과
동거케한다고 경무관한테까지 들이대지 않았소? 강도 15년은 맛이 꽤 무던하겠구려."
하고 빈정거린다.
  나는 속에 불끈 치미는 것이 있었으나 문의 말을 탓하기는 고사하고 빌붙는 어조로,
  "충신 노릇도 사람이 하고 강도도 사람이 하는 것 아니오? 한때에는 그렇게 놀고
한때에는 이렇게 노는 게지요. 대관절 문 서방은 어찌하여 또 이렇게 고생을 하시오?"
하고 농쳐 버렸다.
  "나요? 나는 이번까지 감옥 출입이 일곱 번째니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셈이요."
  "역한(징역 기한)은 얼마요?"
  "강도 7년에 5년이 되어서 한 반 년 지내면 또 한 번 세상에 다녀오겠소."
  "또 한 번 다녀오다니, 여보시오 끔찍한 말도 하시오. 또 여기를 들어와서야
되겠소?"
  "자본 없는 장사가 거지와 도적질이지요. 더우기 도적질에 맛을 붙이면 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여기서는 별꿈을 다 꾸리다마는 사회에 나가만 보시오. 도적질하다가
징역한 놈이라고 누가 받자를 하오? 자연 농공상에 접촉을 못하지요. 개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도적질하던 놈은 배운 길이 그것이라 또 도적질을 하지 않소?"
  문가는 이렇게 술회를 한다.
  "그렇게 여러 번째라면 어떻게 감형이 되었소?"
하고 내가 물었더니 문은,
  "번번이 초범이지요. 지난 일을 다 말했다가는 영영 바깥 바람을 못 쏘여 보게요?"
하고 흥 하고 턱을 춘다.
  나는 서대문에 있을 적에 어떤 강도가 중형을 지고 징역을 하는 중에 그의
공범으로서 잡히지 않고 있다가 횡령죄의 경형으로 들어온 것을 보고 밀고하여 중형을
지우고 저는 감형을 받아서 다른 죄수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을 보았다. 이것을
생각하니 문가를 덧들여 놓았다가는 큰일이다. 이자가 내가 17년 전의 김창수라는
것을 밀고하거나 떠벌리는 날이면 모처럼 일년 남짓하면 세상에 나가리라던 희망은
허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문가에게 친절 또 친절하게 대접하였다. 사식도 틈을
타서 문가를 주어 먹게 하고 감식(감옥에서 주는 밥)이라도 문가가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굶으면서도 그를 먹였다. 이러다가 문가가 만기가 되어 출옥할 때에 나의
시원함이란 내가 출옥하는 것 못지 아니하였다.
  나는 아침이면 다른 죄수 하나와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어 짝을 지어 축항
공사장으로 나갔다. 흙지게를 등에 지고 십여 길이나 되는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것이다. 서대문 감옥에서 하던 생활은 여기 비기면 실로 호강이었다. 반 달 못하여
어깨는 붓고 등은 헐고 발은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면할 도리는
없었다. 나는 여러 번 무거운 짐을 진 채로 높은 사닥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도
하였으나 그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나와 마주 맨 사람은 대개 인천에서 구두켤레나
담뱃갑이나 훔치고 두서너 달 징역을 지는 판이라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편하려 하는 잔꾀를 버리고

  '(열즉열살도리 한즉한살도리)
  더울 때는 더위로 도리를 죽이고 추울 때는 추위로 도리를 죽여라'

  의 선가의 병법으로 일하기에 아주 몸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였더니 몸이
아프기는 마찬가지라도 마음은 편안하였다.
  이렇게 한 지 두어 달에 소위 상표라는 것을 주었다. 나는 도인권과 같이 이를
거절할 용기는 없고 도리어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날마다 축항공사장에 가는 길에 나는 17년 전 부모님께 친절하던 박영문의
물상객주집 앞을 지났다. 옥문을 나서서 오른편 첫째집이었다. 그는 후덕한 사람이요,
내게는 깊은 동정을 준 이였다. 아버지와는 동갑이라 해서 매우 친밀히 지냈다고 했다.
우리들이 옥문으로 들고 날 때에 박노인은 자기 집 문전에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목전에 보면서도 가서 내가 아무개요 하고 절할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박씨 집 맞은편 집이 안호연의 물상객주였다. 안씨 역시 내게나 부모님께나
극진하게 하던 이었다. 그도 전대로 살고 있었다. 나는 옥문을 출입할 때마다
마음으로만 늘 두 분께 절하였다.
  7월 어느 심히 더운 날 돌연히 수인 전부를 교회당으로 부르기로,
  나도 가서 앉았다. 이윽고 분감장인 왜놈이 좌중을 향하여,
  "55호!"
하고 부른다. 나는 대답하였다. 곧 일어나 나오라 하기로 단위로 올라갔다. 가출옥으로
내보낸다는 뜻을 선언한다. 좌중 수인들을 향하여 점두레를 하고 곧 간수의 인도로
사무실로 가니 옷 한 벌을 내어 준다. 이로써 붉은 전중이가 변하여 흰 옷 입은
사람이 되었다. 옥에 맡아 두었던 내 돈이며 물건이며 내 품값이며 조수히 내어준다.
  옥문을 나서서 첫번째 생각은 박영문, 안호연 두 분을 찾는 일이었으나 지금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이롭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안 떨어지는 발길을
억지로 떼어서 그 집 앞을 지나 옥중에서 사귄 어떤 중국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그날
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에 전화국으로 가서 안악 우편국으로 전화를 걸고 내 아내를 불러달라고
하였더니 전화를 맡아 보는 사람이 마침 내게 배운 사람이라 내 이름을 듣고는 반기며
곧 집으로 기별한다고 약속하였다.
  나는 당일로 서울로 올라가 경의선 기차를 타고 신막에서 일숙하고 이튿날 사리원에
내려 배넘이 나루를 건너 나무리벌을 지나니 전에 없던 신작로에 수십 명 사람이
쏟아져 나오고 그 선두에 선 것은 어머니이셨다. 어머니는 내 걸음걸이를 보시며 마주
오셔서 나를 붙들고 낙루하시면서,
  "너는 살아왔지마는 너를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화경이 네 딸은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게 말할 것 없다고 네 친구들이 그러길래 기별도 아니하였다. 그나
그뿐인가. 일곱 살밖에 안 된 그 어린 것이 죽을 때에 저 죽거든 아예 옥중에 계신
아버지한테 기별 말라고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느냐고 그랬단다."
하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후에 곧 화경의 무덤을 찾아 보아 주었다. 화경의 무덤은
안악읍 동쪽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었다.
  어머니 뒤로 김용제 등 여러 사람이 반갑게, 또 감개 깊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안신학교로 갔다. 내 아내가 안신학교에 교원으로 있으면서 교실 한 칸을 얻어
가지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다른 부인들 틈에 섞여서 잠깐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는 내 친구들과 함께 내가 저녁을 먹게 하려고
음식을 차리러 간 것이었다. 퍽 수척한 것이 눈에 띄었다.
  며칠 후에 읍내 이인배의 집에서 나를 위하여 위로연을 배설하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시켰다. 잔치 중도에 나는 어머니께 불려 가서,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
하시는 걱정을 들었다. 나를 연회석에서 불러 낸 것은 아내가 어머니께 고발한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내 아내와는 전에는 충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내가 옥에 간 후로 서울로,
시골로 고생하고 다니시는 동안에 고부가 일심동체가 되어서 한 번도 뜻 아니 맞은
일이 없었다고 아내가 말하였다. 아내는 서울서 책 매는 공장에도 다녔고 어떤 서양
부인 선교사가 학비를 줄 테니 공부를 하라는 것도 어머니와 화경이가 고생이 될까
보아서 아니했노라고, 내외간에 말다툼이 있을 때면 번번이 그 말을 내세웠다. 우리
내외간에 다툼이 생기면 어머니는 반드시 아내의 편이 되셔서 나를 책망하셨다.
경험에 의하면 고부간에 무슨 귓속말이 있으면 반드시 내게 불리하였다. 내가 아내의
말을 반대하거나 조금이라도 아내에게 불쾌한 빛을 보이면 으례 어머니의 호령이
내렸다.
  "네가 옥에 있는 동안에 그렇게 절을 지키고 고생한 아내를 박대해서는 안 된다. 네
동지들의 아내들 중에 별별 일이 다 있었지마는 네 처만은 참 절행이 갸륵하다.
그래서는 못 쓴다."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안 일에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해본 일이 없었고 내외
싸움에 한 번도 이겨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옥에서 나와서 또 한 가지 기뻤던 것은
준영 삼촌이 내 가족에 대하여 극진히 하신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아내와 화경이를
데리고 내 옥바라지하러 서울로 가시는 길에 해주 본향에 들르셨을 적에 준영 삼촌은
어머니께, 젊은 며느리를 데리고 어떻게 사고무친한 타향에 가느냐고, 당신이 집을
하나 마련하고 형수님과 조카 며느리 고생을 아니 시킬 테니 서울 갈 생각은 말고
본향에 계시라고 굳이 만류하시는 것을 어머니는 며느리는 옥과 같은 사람이라 어디를
가도 걱정이 없다 하녀 뿌리치고 서울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또 어머니와 아내가 서울서 내려와서 종산 우종서 목사에게 의탁하여 있을 때에는
준영 삼촌이 소바리에 양식을 실어다 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렇게 준영 삼촌의 일을 고맙게 말씀하시고 나서,
  "네 삼촌님이 네게 대한 정분이 전과 달라 매우 애절하시다. 네가 나온 줄만 알면
보러 오실 것이다. 편지나 하여라."
하셨다.
  어머니는 또 내 장모도 전 같지 않아서 나를 소중하게 아니, 거기도 출옥하였다는
기별을 하라고 하셨다. 내가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에 장모가 여러 번 면회를 와
주셨다.
  나는 곧이라도 준영 숙부를 찾아가 뵈옵고 싶었으나 아직 가출옥중이라 어디를
가려면 일일이 헌병대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왜놈에게 고개 숙이고 청하기가 싫어서
만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정초에 세배 겸 준영 숙부를 찾을 작정이었다.
  그 후 내 거주 제한이 해제되어서 김용진군의 부탁으로 수일 타작간검을 다녀왔더니
준영 숙부가 다녀가셨다. 점잖은 조카를 보러오는 길이라 하여 남의 말을 빌어 타고
오셨는데 이틀이 지나도 내가 아니 돌아오기 때문에 섭섭하게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정초가 되었다. 나는 찾을 어른들을 찾고, 어머니를 찾아 세배 오는 손님들 접대도
끝이 나서 초닷샛날은 해주로 가서 준영 숙부님을 뵈옵고 오래간만에 성묘도 하리라고
벼르고 있던 차에 바로 초나흗날 저녁때에 제종제 태운이가 준영 숙부께서
별세하셨다는 기별을 가지고 왔다. 참으로 경악하였다. 다시는 준영 숙부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 4형제 중에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뿐, 준영 숙부는 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오직 하나인 조카 나를 못 보고 떠나시는 숙부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백영 백부는 관수, 태수 두 아들이 있었으나 다 조졸하여 없고 딸 둘도
시집간 지 얼마 아니하여 죽어서 자손이 없고 필영, 준영 두 숙부는 각각 딸 하나씩이
있을 뿐이었다.
  날이 새는 대로 나는 태운과 함께 해주로 달려가서 준영 숙부의 장례를 주장하여
텃골 고개 동녘 기슭에 산소를 모셨다. 그리고는 돌아가신 준영 숙부의 가사 처리를
대강하고 선친 묘소에 손수 심은 잣나무를 점검하고 거기를 떠난 뒤로는 이내 다시
본향을 찾지 못하였다. 당숙모와 재종조가 생존하시다 하나 뵈올 길이 망연하다.
  나는 아내가 보고 있는 안신학교 일을 좀 거들어 주었으나 소위 전과자인 나로서,
그뿐 아니라 시국이 변하여서 나같은 사람이 전과같이 당당하게 교육 사업에 종사할
수도, 더구나 신민회와 같은 정치 운동을 다시 계속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애국자이던 사람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문을 닫고 숨을 길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왜놈은 우리 민족의 청소년을 우리 지도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백방으로
막아 놓고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농촌 사업이나 해보려고 마음을 먹고
김홍량 일문의 농장 중에 소작인의 풍기가 괴악한 동산평 농장의 농감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동산평이란 데는 수백년 궁장으로, 감관들이 협잡을 하고 농민을
타락시켜서 집집이 도박이요, 사람사람이 모두 속임질과 음해로 일을 삼아서 할 수
없이 가난하고 괴악하게 된 부락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수토가 좋지 못하여 토질
구덩이로 소문이 났었다.
  김씨네는 내가 이런 데로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여 경치도 수토도 좋은 다른
농장으로 가라고 권하였다. 그들은 내가 한문 야학으로 벗을 삼아 은거하는 생활을
하려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집하여 동산평으로 왔다.
  나는 도박하는 자, 학령 아동이 있고도 학교에 안 보내는 자의 소작을 불허하고 그
대신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자에게 상등답 이 두락을 주는 법을 내었다. 이리하여
학부형이 아니고는 땅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랫 동안 이 농장 마름으로 있으면서 소작인을 착취하고 도박을 시키던
노형극군 형제의 과분한 소작지를 회수하여서 근면하고도 땅이 부족한 사람에게
분배하였다. 이 때문에 나는 노형극에게 팔을 물리고 집에 불을 놓는다는 위협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치 아니하고 마침내 이들 형제에게 항복 받아서 다시는
성군작당하여 남을 음해하는 일을 아니하기로 맹세를 시켰다.
  이곳은 본래 학교가 없던 데라 나는 곧 학교를 세우고 교원을 연빙하였다. 처음에는
20명 가량의 아동으로 시작하였으나 이 농장 작인의 자녀가 다 입학하게 되니 제법
학교가 커져서 교원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여 나 자신도 시간을 내어서 도왔다.
장덕준은 재령에서, 지일청은 나와 같은 지방에서 나와 비슷한 농촌 개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내 운동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서 동산평에는 도박이 없어지고 이듬해 추수 때에는
작인의 집에 볏섬이 들어가 쌓였다고 작인의 아내들이 기뻐하였다. 지금까지는
노름빚과 술값으로 타작 마당에서 일년 소출을 몽땅 빚장이에게 빼앗기고 농민은 키만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농촌 중에도 가장 괴악한 동산평을 이
모양으로 그만하면 쓰겠다 할 정도의 농촌을 만들어 보려 하였다. 그러나 기미년
3월에 일어난 만세 소리에 나는 이 사업에서 손을 떼고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떠날
날을 하루 앞두고 나는 작인들을 동원하여 만세 부르는 운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이 가래질을 하고 있었다. 내 동정을 살피러 왔던 왜 헌병도 이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 이튿날 나는 사리원으로 가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신의주에서
재목상이라 하여 무사히 통과하고 안동현에서는 좁쌀 사러 왔다고 칭하였다.
  안동현에서 이레를 묵고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를 타고 동지 15명이 나흘 만에
무사히 상해 포동 마두에 도착하였다. 안동현을 떠날 때에는 아직도 얼음덩어리가
첩첩이 쌓인 것을 보았는데 황포강가에 벌써 녹음이 우거졌다. 공승서리 15호에서
첫날밤을 잤다.
  이때에 상해에 모인 인물 중에 내가 전부터 잘 아는 이는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네 사람이었고 그 밖에 일본, 아령, 구미 등지에서 이번 일로 모인 인사와
본래부터 와 있는 이가 5백여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튿날 나는 벌써부터 가족을 데리고 상해에 와 있는 김보연 집을 찾아서 거기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김군은 내가 장연에서 교육사업을 총감하는 일을 할 때에 나를
성심으로 사랑하던 청년이다. 김 군의 지도로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
옛동지를 만났다.
  임시정부의 조직에 관하여서는 후일 국사에 자세히 오를 것이니 약하거니와 나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었다. 얼마 후에 안창호 동지가 미주로부터 와서
내무총장으로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고, 총장들이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차장제를 채용하였다. 나는 안 내무총장에게 임시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에는 내 뜻을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이 청원을
한 동기를 말하자 쾌락하였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순사 시험 과목을 어디서 보고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혼자 답안을 보았으나 합격이 못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할 뿐더러,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 정부의 정청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줍소서 하였단 말을 도산 동지에게 한 것이었다.
  안 내무청장은 내 청원을 국무회의에 제출한 결과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다른 총장들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윤현지, 이춘숙, 신익회 등 새파란 젊은
차장들이 총장의 직무를 대행할 때라 나이 많은 선배로 문 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자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사될 자격도 못
되는 사람이 경무국장이 당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은,
  "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하라."고 강권하기로 나는 부득이 취임하여 시무하였다.
  대한민국 2년에 아내가 인을 데리고 상해로 오고 4년에 어머니께서 또 오시니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 해에 신이 났다.
  나의 국모 복수사건이, 24년 만에 이제야 왜의 귀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왔다. 내가
본국을 떠난 뒤에야 형사들도 안심하고 김구가 김창수라는 것을 왜 경찰에 말한
것이었다. 아아, 눈물나는 민족의식이여! 왜의 정탐 노릇은 하여도 속에는 애국심과
동포애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정신이 족히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독립 민족의
행복을 누리게 할 것을 아니 믿고 어이하랴.
  민국 15년에 내가 내무총장이 되었다.
  그 안에 아내는 신을 낳은 뒤에 낙상으로 인하여 폐렴이 되어서 몇 해를 고생하다가
상해 보륭의원의 진찰로 서양인이 시설한 격리 병원인 홍구폐병원에 입원하기로 되어
보륭의원에서 한 작별이 아주 영결이 되어 민국 6년 1월 1일에 세상을 떠나매 법계
숭산로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내 본의는 독립운동 기간 중에는 혼상을 물론하고 성대한 의식을 쓰는 것을
불가하게 알아서 아내의 장례를 극히 검소하게 할 생각이었으나 여러 동지들이, 내
아내가 나를 위하여 평생에 무쌍한 고생을 한 것이 곧 나라 일이라 하여 돈을 거두어
성대하게 장례를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 주었다. 그 중에도 유세관, 인욱군은
병원교섭과 묘지 주선에 성력을 다하여 주었다.
  아내가 입원할 무렵에는 인이도 병이 중하였으나 아내 장례 후에는 완쾌하였고
신이는 겨우 걸음발을 탈 때요, 아직 젖을 떼지 아니하였으므로 먹기는 우유를
먹었으나 잘 때에는 어머니의 빈 젖을 물었다. 그러므로 신이가 말을 배우게 된
때에도 할머니란 말을 알고 어머니란 말을 몰랐다.
  민국 8년에 어머니는 신이를 데리고 환국하시고 이듬해 9년에는 인이도 보내시라는
어머니의 명으로 인이도 내 곁을 떠나서 본국으로 갔다. 나는 외로운 몸으로 상해에
남아 있었다.
  민국 9년 11월에 나는 국무령으로 선거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수령이다.
나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을 보고, 아무리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국가라 하더라도
나같이 미미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에 관계된다 하여
고사하였으나 강권에 못 이기어 부득이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으로 내각을 조직한 후에 헌법 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서 평등인 위원제로 하고 지금은 나
자신도 국무위원의 하나로 일하고 있다.
  내 육십 평생을 돌아보니 상리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고는 귀함이 없을 것이건마는, 나는 귀역궁 불귀역궁으로
평생을 궁하게 지내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는 날에는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거니와 지금의 나는 넓고 넓은 지구면에 한 치 땅, 한 칸 집도 가진 것이
없다. 나는 과거에는 궁을 면하고 영화를 얻으려고 몽상도 하고 버둥거려보기도
하였다. 옛날 한유는 '송궁문'을 지었으나 나는 차라리 '우궁문'을 짓고 싶다.
자식들에게 대하여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니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를 원치 아니한다. 너희들은 사회의 윤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 되어 사회를 아비로 여겨 효도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붓을 놓기 전에 두어 가지 더 적을 것이 있다.
  내가 동산평 농장에 있을 때 일이다. 기미년 2월 26일이 어머니의 환갑이므로 약간
음식을 차려서 가까운 친구나 모아 간략하나마 어머니의 수연을 삼으리라 하고 내외가
상의하여 진행하던 차에 어머니께서 눈치를 채시고, 지금 이 어려운 때에 환갑 잔치가
당치 아니하니 후년에 더 넉넉하게 살게 된 때로 미루라 하시므로 중지하였더니 그 후
며칠이 못하여 나는 본국을 떠났다. 어머니께서 상해에 오신 뒤에도 마음은 먹고
있었으나 독립운동을 하노라고 날마다 수십 수백의 동포가 혹은 목숨을, 혹은 집을
잃는 참보를 듣고 앉아서 설사 힘이 있기로서니 어떻게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을 차릴
경황이 있으랴. 하물며 내 생일 같은 것은 입밖에 낸 일도 없었다.
  민국 8년이었다. 하루는 나석주가 조반 전에 고기와 반찬거리를 들고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를 보고 오늘이 내 생일이라, 옷을 전당 잡혀서 생일 차릴 것을 사왔노라
하여서, 처음으로 영광스럽게 내 생일을 차려 먹은 일이 있었다. 나석주는 나라를
위하여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제 손으로 저를 쏘아 충혼이 되었다. 나는 그가
차려 준 생일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또 어머니의 화연을 못드린 것이 황송하여
평생에 다시는 내 생일을 기념치 않기로 하고 이 글에도 내 생일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인천 소식을 듣건대 박영문은 별세하고 안호연은 생존한다 하기로선 편에 회중시계
한 개를 사 보내고 내가 김창수란 말을 하여 달라 하였으나 회보는 없었고 성태영은
길림에 와 산다 하기로 통신하였으며, 유인무는 북간도에서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들 한경은 아직도 거기 살고 있다고 한다. 나와 서대문 감옥에서 이태나 한 방에
있으며 내게 글을 배우고 또 내게 끔찍이 하여 주던 이종근은 아라사 여자를 얻어
가지고 상해에 와서 종종 만났다. 이종근은 의병장 이운룡의 종제로, 헌병 보조원을
다니다가 이운룡이 죽이려 하매 회개하고 그를 따라 의병으로 다니다가 잡혀 왔었다.
김형진 유족의 소식은 아직도 모르고 강화 김주경 유족의 소식도 탐문하는 중이다.
  지난 일의 연월일은 어머니께 편지로 여짜와서 기입한 것이다.
  내 일생에 제일 행복은 몸이 건강한 것이다. 감옥 생활 5년에 하루도 병으로 쉰
날은 없었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로 반 일을 쉰 일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라고는 혹을
떼느라고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서는 서반아감기로 20일 동안 입원하였을 뿐이다.
  기미년에 고국을 떠난 지 우금 10여 년에 중요한 일, 진기한 일도 많으나 독립 완성
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매 아니 적기로 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일년 넘은 대한민국 11년 5월 3일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붓을 놓는다.
  --상권 끝--


    .1하권

  1. 3.1운동의 상해
  2. 기적장강만리풍

    .1머리말

  내 나이 이제 육십 칠,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다시
이 붓을 드니, 오십 삼세 때 상해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백범일지" 상권을 쓰던 때에서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이다.
  나는 왜 "백범일지"를 썼던고?
  내가 젊어서 붓대를 던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제 힘도 재주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성패도 영욕도 돌아봄이 없이 분투하기 30 여 년, 그리고 명의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지키기 10 여 년에 이루어 놓은 일은 하나도 없이 내 나이는 60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나는 침체된 국면을 타개하고 국민의 쓰러지려 하는 3.1
운동의 정신을 다시 떨치기 위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로
독립운동의 위기를 말하여 돈의 후원을 얻어 가지고 열혈남자를 물색하여 암살과
파괴의 테러 운동을 계획한 것이었다. 동경사건과 상해사건 등이 다행히 성공되는
날이면 냄새나는 내 가죽껍데기도 최후가 될 것을 예기하고 본국에 있는 두 아들이
장성하여 해외로 나오거든 그들에게 전하여 달라는 뜻으로 쓴 것이 이 "백범일지"다.
나는 이것을 등사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몇 분 동지에게 보내어 후일 내 아들에게
보여주기를 부탁하였었다.
  그러나 나는 죽을 땅을 얻지 못하고, 천한 목숨이 아직 남아서 "백범일지" 하권을
쓰게 되었다. 이때에는 내 두 아들도 이미 장성하였으니 그날을 위하여서 이런 것을
쓸 필요는 없어졌다. 내가 지금 이것을 쓰는 목적은 해외에 있는 동지들이 내 50년
분투 사정을 보고 허다한 과오를 은감으로 삼아서 다시 복철을 밟지 말기를 원하는
노파심에 있는 것이다.
  지금 이 하권을 쓸 때의 정세는 상해에서 상권을 쓸 때의 것보다는 훨씬
호전되었다. 그때로 말하면 임시정부라고, 외국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한인으로도 국무위원과 십수 인의 의정원 의원 외에는 와 보는 자도 없었다. 그야말로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는 임시정부였었다. 그런데 하권을 쓰는 오늘날로 말하면 중국
본토에 있는 한인의 각당 각파가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옹호할 뿐더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만여 명 동포가 이 정부를 추대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상납하고 있다. 또 외교로
보더라도 종래에는 중국, 소련, 미국의 정부 당국자가 비밀한 찬조는 한 일이 있으나
공식으로는 거래가 없었던 것이, 지금에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씨가,
  "한국은 장래에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될 것이라."
고 방송하였고 중국에서도 입법원장 손과씨가 공공한 석상에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박멸하는 중국의 양책은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함에 있다."고
부르짖었으며, 우리 자신도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두어 이승만 박사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외교와 선전에 힘을 쓰고 있고, 또 군정으로 보더라도 한국 광복군이
정식으로 조직되어 이청천으로 총사령을 삼아 서안에 사령부를 두고 군사의 모집과
훈련과 작전을 계획 중이며, 재정도 종래에는 독립운동의 침체, 인심의 퇴축, 적의 압박,
경제의 곤란 등으로 임시정부의 수입이 해가 갈수록 감하여 집세를 내기도 어려울
지경이던 것이 홍구 포탄 사건 이래로 내외국인의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변하여서
점차로 정부의 수입도 늘어, 민국 23년도에는 수입이 53만원 이상에 달하였으니, 실로
임시정부 설립 이래의 첫기록이었다. 이 모양으로 임시정부의 상태는 이 책 상권을 쓸
때보다 나아졌지마는 나 자신으로 말하면 일부일 노병과 노쇠를 영접하기에
골몰했다. 상해시대를 죽자고나 하던 시대라 하면 중경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고 할
것이다. 만일 누가 어떤 모양으로 죽는 것이 네 소원이냐 한다면 나는 최대한 욕망은
독립이 다 된 날 본국에 들어가 영광의 입성식을 한 뒤에 죽는 것이지마는 적어도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 보고 오는 길에 비행기 위에서 죽어서 내 시체를
던져 그것이 산에 떨어지면 날짐승 길짐승의 밥이 되고 물에 떨어지면 물고기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나는 서대문 감옥에서와
인천 축항공사장에서 몇 번 자살할 생각을 가졌으나 되지 못하였고, 안매산, 명근 형도
모처럼 죽으려고 나흘이나 식음을 전폐한 것을 서대문 옥리들이 억지로 달걀을 입에
흘려 넣어 죽지 못하였으니, 죽는 것도 자유가 있는 자라야 할 일이어서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하여 산 것이 아니요, 살아져서 산 것이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지 못한 이 몸이 필경은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

    .11. 3.1 운동의 상해
 
  기미년 3월, 안동현에서 영국 사람 쏠지의 배를 타고 상해에 온 나는 김보연 군을
앞세우고 이동녕 선생을 찾았다. 서울 양기탁 사랑에서 서간도 무관학교 의논을 하고
헤어지고는 10여 년 만에 서로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에 광복사업을 준비할 전권의
임무를 맡았던 선생의 좋던 신수는 10여 년 고생에 약간 쇠하여 얼굴에 주름살이
보였다. 서로 악수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내가 상해에 갔을 때에는 먼저 와 있던 인사들이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에 대한민족 대표로 파견한 지 벌써 두 달이나 후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뒤에 각지로부터 모여온 인사들이 임시정부와 임시
의정원을 조직하여 중외에 선포한 것이 4월 초순이었다. 이에 탄생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은 국무총리 이승만 박사, 그 밑에 내무, 외무, 재무, 법무, 교통 등
부서가 있어 광복운동의 여러 선배 수령을 그 총장에 추대하였다. 총장들이 원지에
있어서 취임치 못하므로 청년들을 차장으로 임명하여 총장을 대리케 하였다. 내가
내무총장 안창호 선생에게 정부 문파수를 청원한 것이 이 때였다.
  나는 문 파수를 청원한 것이 경무국장으로 취임하게 되니 이후 5년간 심문관 판사.
검사의 직무와 사형 집행까지 혼자 겸하여서 하게 되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때에
범죄자의 처벌이 설유방송이 아니면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도순이라는
17세의 소년이 본국에 특파되었던 임시정부 특파원의 뒤를 따라 상해에 와서 왜의
영사관에 매수되어 그 특파원을 잡는 앞잡이가 되려고 돈 10원을 받은 죄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극형에 처한 것은 기성 국가에서는 보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맡은 경무국의 임무는 기성 국가에서 보통 경찰 행정이 아니요, 왜의 정탐의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가 왜에게 투항하는 것을 감시하며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데 있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나는 정복과 사복의
경호원 20여 명을 썼다. 이로써 홍구의 왜 영사관과 대립하여 암투가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 조제 당국은 우리의 국정을 잘 알므로 일본 영사관에서 우리 동포의
체포를 요구해 온 때에는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피하게 한 뒤에 일본 경관을
대동하고 빈 집을 수사할 뿐이었다.
  왜구 전중의일이 상해에 왔을 때에 황포마두에서 오성륜이 그에게 포탄을 던졌으나
폭발되지 아니하므로 권총을 쏜 것이 전중은 아니 맞고 미국인 여자 한 명이 맞아
죽은 사건이 났을 때에 일본, 영국, 법국 세 나라가 합작하여 법조계의 한인을 대거
수색한 일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어머니가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오신 때였다. 하루는
이른 새벽에 왜 경관 일곱 놈이 프랑스 경관 서대납을 앞세우고 내 침실로 들어섰다.
서대납은 나와 잘 아는 자라 나를 보더니 옷을 입고 따라오라 하며 왜 경관이 나를
결박하려는 것을 금하였다. 프랑스 경무청에 가니 원세훈 등 다섯 사람이 벌써 잡혀와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왜 경관이 우리를 심문하는 것도 허치 아니하고 왜 영사관으로
넘기라는 것도 아니 듣고, 나로 하여금 다섯 사람을 담보케 한 후에 나를 아울러 모두
석방해 버렸다. 우리 동포 관계의 일에는 내가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언제나 배심관이
되어 프랑스 조계의 법정에 출석하였으므로 현행범이 아닌 이상 내가 담보하면
석방하는 것이었다. 왜 경찰이 나와 프랑스 당국과의 관계를 안 뒤로는 다시는 내
체포를 프랑스 당국에 요구하는 일이 없고 나를 법조계 밖으로 유인해 내려는 수단을
쓰므로 나는 한 걸음도 조계 밖에는 나가지 아니하였다.
  내가 5년간 경무국장을 하는 동안에 생긴 기이한 일을 일일이 적을 수도 없고 또
이루 다 기억도 못하거니와 그 중에 몇 가지만을 말하련다.
  고동 정탐 선우갑을 잡았을 때에 그는 죽을 죄를 깨닫고 사형을 자원하기로,
장공속죄를 할 서약을 받고 살려 주었더니 나흘 만에 도망하여 본국으로 들어갔다.
  강인우는 왜 경부로 상해에 와서 총독부에서 받아 가지고 온 사명을 말하고 내게
거짓 보고 자료를 달라 하기로 그리하였더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공으로 풍산 군수가
되었다.
  구한군 내무대신 동농 김가진 선생이 3.1 선언 후에 왜에게 받았던 남작을
버리고 대동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아들 의한 군을 데리고 상해에 왔을 적 일이다.
왜는 남작이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는 것이 수치라 하여 의한의 처의 종형 정필화를
보내어 동농 선생을 귀국케 할 운동을 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정가를 검거하여
심문한즉 낱낱이 자백하므로 처교하였다.
  황학선은 해주 사람으로 3.1 운동 이전에 상해에 온 자인데 가장 우리 운동에
열심이 있는 듯하기로 타처에 오는 지사들을 그 집에 유숙케 하였더니 그 자가 이것을
기화로 하여 일변 왜 영사관과 통하여 거기서 돈을 얻어 쓰고 일변 애국 청년에게
임시정부를 악선전하여 나창헌, 김의한 등 십수 명이 작당하여 임시정부를 습격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것은 곧 진압되고 범인은 전부 경무국의 손에 체포되었다가 그들이
황학선의 모략에 속은 것이 분명하므로 모두 설유하여 방송하고 그때에 중상한
나창헌, 김기제는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황학선이가 왜
영사관에서 자금과 지령을 받아 우리 정부 각 총장과 경무국장을 살해할 계획으로
나창헌이 경성의전의 학생이던 것을 이용하여 삼 층 양옥을 세 내어 병원 간판을
붙이고, 총장들과 나를 그리로 유인하여 살해할 계획이던 것이 판명되었다.
  나는 이 문초의 기록을 나 창헌에게 보였더니 그는 펄펄 뛰며 속은 것을 자백하고
장인 황학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황학선은 처교된
뒤였다. 나는 나. 김 등이 전연 악의가 없고 황의 모략에 속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한 번은 박 모라는 청년이 경무국장 면회를 청하기로 만났다. 그는 나를 대하자 곧
낙루하며 단총 한 자루와 수첩 하나를 내 앞에 내어 놓으며, 자기는 수일 전에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왔는데 왜 영사관에서 그의 체격이 건장함을 보고 김 구를
죽이라 하고 성공하면 돈도 많이 주려니와 설사 실패하여 그가 죽는 경우에는 그의
가족에게는 나라에서 좋은 토지를 주어 편안히 살도록 할 터이라 하고, 만일 이에
응치 아니하면 그를 '불령선인'으로 엄벌한다 하기로 부득이 그러마 하고 무기를 품고
법조계에 들어와 길에서 나를 보기도 하였으나 독립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자기도
대한 사람이면서 어찌 감히 상하랴 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 단총과 수첩을 내게 바치고
자기는 먼 지방으로 달아나서 장사나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놓아 보냈다.
  나는 '의심하는 사람이거든 쓰지를 말고, 쓰는 사람이거든 의심을 말라.'는 것을
신조로 하여 살아왔거니와 그 때문에 실패한 일도 없지 아니하였으니 한태규 사건이
그 예다.
  한태규는 평양 사람으로서 매우 근실하여 내가 7, 8년을 부리는 동안에 내외국인의
신임을 얻었었다. 내가 경무국장을 사면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경무국 일을 보고
있었다.
  하루는 계원 노백린 형이 아침 일찍 내 집에 와서 뒤 노변에 한복 입은 젊은 여자의
시체가 있다 하기로 나가 본즉 그것은 명주의 시체였다.
  명주는 상해에 온 후로 정인과, 황석남이 빌어 가지고 있는 집에 식모로도 있었고
젊은 사내들과 추행도 있다는 소문이 있던 여자다. 어느 날 밤에 한 번 한태규가 이
여자를 동반하여 가는 것을 보고 한 군도 젊은 사람이니 그러나 보다 하고 지나친
것이 얼마 오래지 아니한 것이 기억되었다.
  시체를 검사하니 피살이 분명하다. 머리에 피가 묻었으니 처음에는 때린 모양이요,
목에는 바로 매었던 자국이 있는데 그 수법이 내가 서대문 감옥에서 활빈당 김
진사에게 배운 것을 경호원들에게 가르쳐 준 그것이었다. 여기서 단서를 얻어 가지고
조사한 결과 그 범인이 한태규인 것이 판명되어 그 프랑스 경찰에 말하여 그를 체포케
하여 내가 배심관으로 그의 문초를 듣건대, 그는 내가 경무국장을 사임한 후로부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왜에게 매수되어 그 밀정이 되어, 명주와 비밀히 통기하던 중,
명주가 한이 밀정인 눈치를 알게 되매 한은 명주가 자기의 일을 내게 밀고할 것을
겁내어서 죽인 것이라는 것을 자백하였다. 명주는 행실이 부정할망정 애국심은 열렬한
여자였다. 그는 종신징역의 형을 받았다. 후에 나와 동관이던 나우도 한태규가 돈을
흔히 쓰는 것으로 보아 오래 의심은 하였으나 확적한 증거도 없이 내게 그런 말을
고하면 내가 동지를 의심한다고 책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아니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후에 한태규는 다른 죄수들을 선동하여 양력 1월 1일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하기로
약속을 하여 놓고 제가 도리어 감옥 당국에 밀고하여 간수들이 담총하고 경비하게 한
후에 약속한 시간이 되매 여러 감방문이 일제히 열리며 칼. 몽둥이. 돌멩이. 재 같은
것을 가지고 죄수들이 뛰어 나오는 것을, 한태규가 총을 쏘아 죄수 여덟 명을 즉사케
하니, 다른 죄수들은 겁은 내어 움직이지 못하매 이 파옥 소동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재판하는 마당에 한태규는 제가 쏘아 죽인 여덟 명의 시체를 담은 관머리에
증인으로 출정하더란 말을 들었고, 또 그 후에 한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같은 죄수
여덟 명을 죽인 것이 큰 공로라 하여 방면이 되었고, 전에 잘못한 것은 다 회개하니
다시 써 달라고 하였다. 나중에 듣건대 이 편지에 대한 회답이 없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본국으로 도망하여 무슨 조그마한 장사를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내가 이런
흉악한 놈을 절대로 신임한 것이 다시 세상에 머리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서
심히 고민하였다.
  내가 경무국장이던 때에 있던 일은 여기에서 끝내고 상해에 임시정부가 생긴 이후에
일어난 우리 운동 전체의 파란곡절을 회상해 보기로 하자.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신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 안공근, 한형권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 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서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 위대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톡의 우리 음)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가기를 청하기로 따라 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에게 즐겨 쓰는 말이다)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 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 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섰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소련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백만 루우블이라고
대답한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데 2백만 루우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례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백만 루우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제 1차 분으로 40만 루우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 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우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들어와 공산당 무리들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회의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 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코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의 지도를 받는 김준연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 이정규 두 형제와
유자명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말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백여 대표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코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코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란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하므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되었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 공금 횡령법 김립은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권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별효과가 없어서 임시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적 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동맹, 주중국 청년동맹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로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은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혁명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한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여라.'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었다. 이에 어제까지 민족독립운동을 비난하고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은 경각간에 민족독립운동을 비난하고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은
경각간에 민족독립운동자로 졸변하여 민족독립이 공산당의 당시라고 부르짖었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독립당
촉성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 넣고는 그들의 소위 헤게모니(주도권)로
옭아 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 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이니 이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의 단체여서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이유필, 차이석, 김붕준, 송병조 및 내가 수뇌가 되어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딴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하면 이상룡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아비 죽이는 회)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남군정서, 북군정서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 김좌진, 김규식(나중에 박사라고 된 김규식은 아니다)등 우리 운동에 없지
못할 큰 일꾼들이 이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국제 정세의 우리에게 대한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 사상이 날로
감쇄하던 중에 공산주의자의 교란으로 민족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로 굴러떨어져 갈 뿐이었는데, 엎친데 덮치기로 만주의 주인이라 할 장작림이
일본의 꾀에 넘어가서 그의 치하에 있는 독립운동자를 닥치는 대로 잡아 일본에
넘기고, 심지어는 중국 백성들이 한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서 왜 영사관에서 한
개에 많으면 10원, 적으면 3,4원의 상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우리 동포 중에도
독립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여기는 독립운동자들이 통일이 없이 셋,
다섯으로 갈라져서 재물, 기타로 동포에게 귀찮음을 준 책임도 없지 아니하다.
이러하던 끝에 왜가 만주를 점령하여, 소위 만주국이란 것을 만드니 우리 운동의 최대
근거지라 할 만주에 있어서의 우리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애초에 만주에 있던 독립운동 단체는 다 임시정부를 추대하였으나 차차로
군웅할거의 폐풍이 생겨, 정의부와 신민부가 우선 임시정부의 절제를 안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만은 끝까지 임시정부에 대한 의리를 지키더니 이 셋이 합하여 새로
정의부가 된 뒤에는 아주 임시정부와는 관계를 끊고 자기들끼리도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 살을 깎고 있다가 마침내 공산당으로 하여 서로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상해의 정세도 소위 양패구상으로 둘이 싸워 둘이 다 망한 셈이 되었고 한국독립당
하나로 겨우 민족진영의 껍데기를 유지할 뿐이었다.
  임시정부에는 사람도 돈도 들어오지 아니하여 대통령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은식이
대신 대통령이 되었으나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쳐 놓았을 뿐으로 나가고, 제 1세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은 서간도로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 도로 서간도로 물러가고, 다음에 홍면희(나중에 홍진)가 선거되어
진강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조직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한참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의정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하루는 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국무령이 되기를 권하였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사양하였다. 첫째 이유는 나는 해주 서촌의 일개 김존위(경기도
지방의 영좌에 상당한 것)의 아들이니 우리 정부가 아무리 아직 초창 시대의 추형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나같이 미천한 사람이 일국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 말하면 이상룡, 홍면희 두 사람도 사람을 못
얻어서 내각조직에 실패하였거늘 나 같은 자에게 더욱 응할 인물이 없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런즉 이씨 말이 첫째는 이유가 안 되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둘째로
말하면 나만 나서면 따라 나설 사람이 있다고 강권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이에
의정원의 정식 절차를 밟아서 내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 등으로 내각을 조직하고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번번이 곤한할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국무위원의 주석이 되었으나 제도로 말하면 주석은 다만 회의의 주석이 될
뿐이요, 모든 국무위원은 권리에나 책임에나 평등이었다. 그리고 주석은 위원들이 번
차례로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매우 편리하여 종래의 모든 분리를 일소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부는 자리가 잡혔으나 경제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이
망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꾼 월급이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 번 송사를 겪었다.
  다른 위원들은 거의 다 가권이 있었으나 나는 아이들 둘도 다 본국 어머니께로
돌려보낸 뒤라 홀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시정부 정청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얻어 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 하여 전차
회사의 차표 검사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은 직업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 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다. 다들 내
처지를 잘 알므로 누구나 내게 미운밥은 아니 주었다고 믿는다. 특히 조봉길, 이춘태,
나우, 진희창, 김의한 같은 이들은 절친한 동지들이니 더 말할 것 없고 다른 동포들도
내게 진정으로 동정하였다.
  엄항섭 군은 프랑스 공무국에서 받은 월급으로 석오(이동녕의 당호)나 나 같은 궁한
운동자를 먹여 살렸다. 그의 전실 임씨는 내가 그 집에 갔다가 나올 때면 대문 밖에
따라나와서 은전 한두 푼을 내 손에 쥐어 주며,
  "애기 사탕이나 사주셔요."
하였다. 아기라 함은 내 둘째 아들 신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는 초산에 딸 하나를 낳고
가엾이 세상을 떠나서 노가만 공동묘지에 묻혔다. 나는 그 무덤을 볼 때마다 만일
엄군에게 그러할 힘이 아니 생기면 나라도 묘비 하나는 해 세우리라 하였으나 숨어서
상해를 떠나는 몸이라, 그것을 못한 것이 유감이다. 오늘날도 노가만 공동묘지 임씨의
무덤이 눈에 암암하다. 그는 그 남편이 존경하는 늙은이라 하여 내게 그렇게 끔찍하게
해주었다.
  나는 애초에 임시정부의 문 파수를 지원하였던 것이 경무국장으로, 노동국총판으로,
내무총장으로, 국무령으로 오를 대로 다 올라서 다시 국무위원이 되고 주석이 되었다.
이것은 문 파수의 자격이던 내가 진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비기건대 이름났던 대가가 몰락하여 거지의 소굴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찍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시무할 때에는 중국인은 물론이요, 눈 푸르고 코 높은 영. 미.
법(법국, 즉 프랑스)등 외국인도 정청에 찾아오는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양
사람이라고는 프랑스 순포가 왜 경관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밀린 집세
채근을 받으러 오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한창 적에는 천여 명이나 되는
독립운동자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 되는 형편이었다.
  왜 이렇게 독립운동자가 줄었는가. 첫째로는 임시정부의 군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같은 무리는 왜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들어가고, 둘째로는 국내 각 도, 군, 면에 조직하였던 연통제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가
왜에게 잡혔고, 셋째로는 생활난으로 하여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임시정부의 할 일이 무엇인가.
  첫째로 돈이 있어야 할 터인데 돈이 어디서 나오나?
  본국과 만주와는 이미 연락이 끊겼으니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에게 임시정부의
곤란한 사정을 말하여 그 지지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내 편지
정책이었다. 나는 미주와 하와이 재류 동포의 열렬한 애국심을 믿었다. 그것은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의 훈도를 받은 까닭이었다.
  나는 영문에는 문맹이므로 편지 겉봉도 쓸 줄 몰랐으므로, 엄항섭, 안공근 등에게
의뢰하여서 쓰게 하였다.
  이 편지 정책의 효과를 기다리기는 벅찼다. 그때에는 아직 항공 우편이 없었으므로
상해. 미국간에 한 번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받으려면 두 달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다린 보람은 있어서 차차 동정하는 회답이 왔고, 시카고에 있는 김경은 그곳
공동회에서 모은 것이라 하여 집세나 하라고 미화 2백 불을 보내 왔다. 당시
임시정부의 형편으로는 이것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돈도 돈이려니와 동포들의
정성이 고마왔다. 김경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와이에서도 안창호, 가와이, 현순, 김상호, 이홍기, 임성우, 박종수, 문인화, 조병요,
김현구, 황인환, 김윤배, 박신애, 심영신 등 제씨가 임시 정부를 위하여 정성을 쓰기
시작하고 미주에서는 국민회에서 점차로 정부에 대한 향심이 생겨서 김호, 이종소,
홍언, 한시대, 송종익, 최진하, 송헌주, 백일규 등 제씨가 일어나 정부를 지지하고
멕시코에서는 김기창, 이종오 쿠바에서는 임천택, 박창운 등 제씨가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동지회 방면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위시하여 이원순, 손덕인, 안현경 제씨가
임시정부를 유지하는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하와이에 있는 안창호(도산 말고), 임성우 양씨는 내가 민족에 생색날 일을
한다면 돈을 주선하마 하였다.
  하루는 어떤 청년 동지 한 사람이 거류민단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봉창이라
하였다.(나는 그때에 상해 거류민단장도 겸임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일본서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독립운동에 참예하고 싶어서 왔으니 자기와 같은 노동자도
노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그는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 쓰고
임시정부를 가정부라고 왜식으로 부르므로 나는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민단 사무원을 시켜 여관을 잡아주라 하고 그 청년더러는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또 만나자 하였다.
  며칠 후였다. 하루는 내가 민단 사무실에 있노라니 부엌에서 술 먹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청년이 이런 소리를 하였다.
  "당신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오?"
  이 말에 어떤 민단 사무원이,
  "일개 문관이나 무관 하나도 죽이기가 어려운데 천황을 어떻게 죽이오?"
  한즉, 그 청년은,
  "내가 작년에 천황이 능행을 하는 것을 길가에 엎드려서 보았는데, 그때에 나는
지금 내 손에 폭발탄 한 개만 있었으면 천황을 죽이겠다고 생각하였소."
하였다.
  나는 그날 밤에 이봉창을 그 여관으로 찾았다. 그는 상해에 온 뜻을 이렇게
말하였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하여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겠으니까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은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씨의 이 말에 내 눈에는 눈물이 찼다.
  이봉창 선생은 공경하는 태도로 내게 국사에 헌신할 길을 지도하기를 청하였다.
나는 그러마 하고 쾌락하고 1년 이내에는 그가 할 일을 준비할 터이나 시방
임시정부의 사정으로는 그의 생활비를 댈 길이 없으니 그동안 어떻게 하려는가고
물었더니, 그는 자기는 철공에 배운 재주가 있고 또 일어를 잘하여 일본서도 일본
사람으로 행세하였고, 또 일본 사람의 양자로 들어가 성명도 목하창장이라 하여
상해에 오는 배에서도 그 이름을 썼으니, 자기는 공장에서 생활비를 벌면서 일본 사람
행세를 하며 언제까지나 나의 지도가 있기를 기다리노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그에게, 나하고는 빈번한 교제를 말고 한 달에 한 번씩 밤에 나를
찾아와 만나자고 주의시킨 후에 일인이 많이 사는 홍구로 떠나보냈다.
  수일 후에 그가 내게 와서 월급 80원에 일본인의 공장에 취직하였노라 하였다.
  그 후부터 그는 종종 술과 고기와 국수를 사 가지고 민단 사무소에 와서 민단
직원들과 놀고 술이 취하면 일본 소리를 잘하므로 '일본경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어느 날은 하오리에 게다를 신고 정부 문을 들어서다가 중국인 하인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동녕 선생과 기타 국무원들에게 한인인지 일인인지
판단키 어려운 인물을 정부 문 내에 출입시킨다는 책망을 받았고, 그때마다 조사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다고 변명하였으나 동지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럭저럭 이씨와 폭탄도 돈도 다 준비가 되었다. 폭탄 한 개는 왕웅을 시켜 상해
병공창에서, 한 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한테 보내어 얻어온 것이니 모두
수류탄이었다. 이 중에 한 개는 일본 천황에게 쓸 것이요, 한 개는 이씨 자살용이었다.
  나는 거지 복색을 입고 돈을 몸에 지니고 거지 생활을 계속하니 아무도 내 품에
천여 원의 큰 돈이 든 줄을 아는 이가 없었다.
  1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이봉창 선생을 비밀리 법조계 중흥여사로 청하여 하룻밤을
같이 자며 이 선생이 일본에 갈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만일 자살이
실패되어 왜 관헌에게 심문을 받게 되거든 이 선생이 대답할 문구까지 일러주었다. 그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 돈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하여 놓고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
  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 함께 잤다. 그때에
이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으로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내가 이 돈을 떼어 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과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길로 나는 그를 안공근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선서식을 행하고 폭탄 두 개를
주고 다시 그에게 돈 3백원을 주며 이 돈은 모두 동경까지 가기에 다 쓰고 동경 가서
전보만 하면 곧 돈을 더 보내마고 말하였다. 그리고 기념 사진을 찍을 때에 내 낯에는
처연한 빛이 있던 모양이어서 이씨가 나를 돌아보고,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
하고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띄운다. 나도 그를 따라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자동차에 올라 앉은 그는 나를 향하여 깊이 허리를 굽히고 홍구를 향하여 가
버렸다.
  10 여 일 후에 그는 동경에서 전보를 보내었는데 물품은 1월 8일에 방매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곧 2백원을 전보환으로 부쳤더니, 편지로 미친놈처럼 돈을 다 쓰고
여관비 밥값이 밀렸던 차에 2백원 돈을 받아 주인의 빚을 청산하고도 돈이 남았다고
하였다.
  당시 정세로 말하면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을 떨치기로 보거나 또 만보산 사건,
만주사변 같은 것으로 우리 한인에 대하여 심히 악화된 중국인의 악감을 풀기로
보거나 무슨 새로운 국면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임시정부에서 회의한
결과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과 파괴공작을 하되, 돈이나 사람이나 내가 전담하여
하고 다만 그 결과를 정부에 보고하라는 전권을 위임받았었다. 1월 8일이 임박하므로
나는 국무위원에 한하여 그동안 경과를 보고하여 두었었다. 기다리던 1월 8일 중국
신문에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부중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했다.'

  이라고 하는 동경 전보가 게재되었다.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하였다는 것은 좋으나
맞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극히 불쾌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은 나를 위로하였다.
일본 천황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만은 못하나 우리 한인이 정신상으로는 그를 죽인
것이요, 또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니 이번 일은 성공으로 볼 것이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지들은 내
신변을 주의할 것을 부탁하였다.
  아니나다를까, 이튿날 조조에 프랑스 공무국으로부터 비밀리 통지가 왔다. 과거
10년간 프랑스 관헌이 김구를 보호하였으나, 이번 김구의 부하가 일황에게 폭탄을
던진 데 대하여서는 일본의 김구 체포 인도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청도의 '국민일보'는 특호 활자로,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 맞지 않음'

  이라고 썼다 하여 당지 주둔 일본 군대와 경찰이 그 신문사를 습격하여 파괴하였고,
그 밖에 장사 등 여러 신문에서도 '불행부중'이라고 문구를 썼다 하여 일본이 중국
정부에 엄중한 항의를 한 결과로 '불행'자를 쓴 신문사는 모두 폐쇄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상해에서 일본 중 하나가 중국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을 비밀로 하여
일본은 1.28 상해사변을 일으켰으니, 기실은 이봉창 의사의 일황 저격과 이에 대한
중국인의 '불행부중'이라고 말한 감정이 전쟁의 주요 원인인 것이었다.
  나는 동지들의 권에 의하여 낮에는 일체 활동을 쉬고, 밤에는 동지의 집이나 창기의
집에서 자고, 밥은 동포의 집으로 돌아 다니면서 얻어 먹었다. 동포들은 정성껏 나를
대접하였다.
  19로군의 채정해와 중앙군 제 5군장 장치중의 참전으로 일본군에 대한 상해 싸움은
가장 격렬하게 되어서 법조계 안에도 후방 병원이 설치되어 중국측 전사병의 시체와
전상병을 가뜩가뜩 실은 트럭이 피를 흘리고 왕래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언제 우리도
왜와 싸워 본국 강산을 피로 물들일 날이 올까 하도 눈물이 흘러 통행인들이 수상히
볼 것이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피해 버렸다.
  동경사건이 전하자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많은 편지가 오고 그 중에는 이번
중일 전쟁에 우리도 한몫 끼어 중국을 도와서 일본과 싸우는 일을 하라는 이도 있고,
적당한 사업을 한다면 거기 필요한 돈을 마련하마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중일전쟁에 한몫 끼이기는 임갈굴정이라 준비도 없이 무엇을 하랴. 나는 한인중에,
일본군 중에 노동자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 비행기 격납고와 군수품 창고에
연소탄을 장치하여 이것을 태워 버릴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송호협정으로 중국이
일본에 굴복하여 상해전쟁이 끝을 막으니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송호협정의 중국측 전권은 곽태기였다.
  이에 나는 암살과 파괴계획을 계속하여 실시하려고 인물을 물색하였다. 내가 믿던
제자요 동지인 나석주는 벌써 연전에 서울 동양척식회사에 침입하여 7명의 일인을
쏘아 죽이고 자살하였고, 이승춘은 천진에서 붙들려 사형을 당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을
생각하여도 하릴없었다.
  새로 얻은 동지 이덕주, 유진식은 왜 총독의 암살을 명하여 먼저 본국으로 보냈고
유상근, 최흥식은 왜의 관동군 사령관 본장번의 암살을 명하여 만주로 보내려고 할
즈음에, 윤봉길이 나를 찾아왔다. 윤 군은 동포 박진이가 경영하는, 말총으로 모자
기타 일용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근래에는 홍구 소채장에서 소채 장수를 하던
사람이다.
  윤봉길 군은 자기가 애초에 상해에 온 것이 무슨 큰 일을 하려 함이었고 소채를
지고 홍구 방면으로 돌아다닌 것도 무슨 기회를 기다렸던 것인데, 이제는 중일간의
전쟁도 끝이 났으니 아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한 뒤에, 내게
동경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는 큰 뜻이 있는 것을 보고 기꺼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마침 그대와 같은 인물을 구하던 중이니 안심하시오."
  그리고 나는 왜놈들이 이번 상해 싸움에 이긴 것으로 자못 의기양양하여 오는 4월
29일에 홍구 공원에서 그놈들의 소위 천장절 축하식을 성대히 거행한다 하니 이때에
한 번 큰 목적을 달래 봄이 어떠냐 하고 그 일의 계획을 말하였다. 내 말을 듣더니 윤
군은,
  "할랍니다. 이제부텀은 마음이 편안합니다. 준비해 줍시오."
하고 쾌히 응낙하였다.
  그 후, 왜의 신문인 상해 일일신문에 천장절 축하식에 참예하는 사람은 점심 벤또와
물통 하나와 일장기 하나를 휴대하라는 포고가 났다. 이 신문을 보고 나는 곧 서문로
왕웅(본명은 김홍일)을 방문하여 상해 병공창장 송식마에게 교섭하여 일인이 메는
물통과 벤또 그릇에 폭탄 장치를 하여 사흘 안에 보내주기를 부탁케 하였더니 왕웅이
다녀와서 말하기를 내가 친히 병공창으로 오라고 한다 하므로 가보니 기사 왕백수의
지도 밑에 물통과 벤또 그릇으로 만든 두 가지 폭탄의 성능을 시험하여 보여주었다.
시험 방법은 마당에 토굴을 파서 그 속의 사면을 철판으로 싸고 폭탄을 그 속에 넣고
뇌관에 긴 줄을 달아서 사람 하나가 수십 보 밖에 엎드려서 그 줄을 당기니 토굴
안에서 벼락소리가 나며 깨어진 철판 조각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주
장관이었다. 뇌관을 이 모양으로 20개나 실험하여서 한 번도 실패가 없는 것을 보고야
실물에 장치한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이 병공창에서 정성을 들이는 까닭은
동경사건에 쓴 폭탄이 성능이 부족하였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때문이라고 왕
기사는 말하였다. 그래 20여 개 폭탄을 이 모양으로 무료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물통 폭탄과 벤또 폭탄을 병공창 자동차로 서문로 왕웅 군의 집까지 실어다
주었다. 이런 금물은 우리가 운반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 친절에서였다.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중국 거지 복색을 벗어 버리고 넝마전에 가서 양복 한 벌을 사 입어 엄연한
신사가 되어 가지고 하나씩 둘씩 이 폭탄을 날라다가, 법조계 안에 사는 친한 동포의
집에 주인에게도 그것이 무엇이라고는 알리지 아니하고, 다만 귀중한 약이니 불조심만
하라고 이르고 가마귀 떡 감추듯 이집 저집 집에를 가나 내외가 없었다. 더구나
동경사건 이래로 그러하여서 부인네들도 나와 허물없이 되어,
  "선생님, 아이 좀 보아 주세요."
하고 우는 젖먹이를 내게 안겨 놓고 제 일들을 하였다. 내게 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잘 논다는 소문이 났다.
4월 29일이 점점 박두하여 왔다. 윤봉길 군은 말쑥하게 일본식 양복을 사 입혀서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살펴서 그 당일에 자기가 행사할 적당한
위치를 고르게 하고 일변 백천대장의 사진이며 일본 국기 같은 것도 마련하게 하였다.
하루는 윤군이 홍구에 갔다가 와서,
  "오늘 백천이 놈도 식장 설비하는 데 왔겠지요. 바로 내 곁에 와 선단 말야요. 내게
폭탄만 있었더면 그때에 해 버리는 겐데."
하고 아까워하였다. 나는 정색하고 윤군을 책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포수가 사냥을 하는 법이 앉은 새와 자는 짐승은 아니 쏜다는
것이오. 날려 놓고 쏘고 달려 놓고 쏘는 것이야. 윤군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내일 일에 자신이 없나 보구려."
  윤 군은 내 말에 무료한 듯이,
  "아니오. 그놈이 내 곁에 있는 것을 보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입니다.
내일 일에 왜 자신이 없어요, 있지요."
하고 변명하였다.
  나는 웃는 낯으로,
  "나도 윤 군의 성공을 확신하오. 처음 이 계획을 내가 말할 때에 윤 군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지 않았소? 그것이 성공할 증거라고 나는 믿고 있소.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되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 마음이 움직이는 게요."
하고 내가 치하포에 토전양랑을 타살하려 할 때에 가슴이 울렁거리던 것과 고능선
선생에게 들은, '득수반지부족기 현애철수장부아'라는 글귀를 생각하매 마음이 고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니 윤 군은 마음에 새기는 모양이었다.
  윤군을 여관으로 보내고 나는 폭탄 두 개를 가지고 김해산군 집으로 가서 김군
내외에게, 내일 윤봉길 군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동삼성(만주라는 뜻)으로 떠나니,
고기를 사서 이른 조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튿날은 4월 29일이었다. 나는 김해산 집에서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
하였다. 밥을 먹으며 가만히 윤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김해산 군은 윤군의 침착하고도 용감한 태도를 보고, 조용히 내게 이런 권고를
하였다.
  "지금 상해에 민족 체면을 위하여 할 일이 많은데 윤군 같은 인물을 구태여 다른
데로 보낼 것은 무엇이요?"
  "일은 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윤 군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내나
들어봅시다."
  나는 김해산 군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 점을 친다. 윤군은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내게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준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군은,
  "자동차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 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 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그 길로 나는 조상섭의 상점에 들려 편지 한 장을 써서 점원 김영린을 주어 급히
안창호 선생에게 전하라 하였다. 그 내용은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시오.
무슨 대사건이 있을 듯합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석오 선생께로 가서
지금까지 진행한 일을 보고하고 점심을 먹고 무슨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1시쯤 해서야 중국 사람들의 입으로 홍구 공원에서 누가 폭탄을 던져서 일인이
많이 죽었다고 술렁술렁하기 시작하였다. 혹은 중국인이 던진 것이라 하고, 혹은
고려인의 소위라고 하였다. 우리 동포 중에도 어제까지 소채바구니를 지고 다니던
윤봉길이 오늘에 경천위지할 이 일을 했으리라고 아는 사람은 김구 이외에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같은 몇 사람이나 짐작하였을 것이다.
  이 날 일은 순전히 내가 혼자 한 일이므로, 이동녕 선생에게도 이 날은 처음 자세한
보고를 하고 자세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3시에 비로소 신문 호외로,
  '홍구 공원 일인의 천장절 경축 대상에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하단은
즉사하고 백천 대장, 중광 대사, 야촌 중장 등 문무대관이 다수 중상.'이라는 것이
보도되었다.
  그 날 일인의 신문에는 폭탄을 던진 것은 중국인의 소위라고 하더니 이튿날
신문에야 일치하게 윤봉길의 이름을 크게 박고 법조계에 대수색이 일어났다.
  나는 안공근과 엄항섭을 비밀히 불러 이로부터 나를 따라 일을 같이할 것을 명하고
미국인 피취(비오생이라고 중국식으로 번역한다)씨에게 잠시 숨겨 주기를
교섭하였더니 피취 씨는 쾌락하고 그 집 2층을 전부 내게 제공하므로 나와 김철,
안공근, 엄항섭 넷이 그 집에 있게 되었다. 피취 씨는 고 피취 목사의 아들이요, 피취
목사는 우리 상해 독립운동의 숨은 은인이었다. 피취 부인은 손수 우리의 식절을
보살폈다.
  우리는 피취 댁 전화를 이용하여 누가 잡힌 것 등을 알고 또 잡혀간 동지외 가족의
구제며 피난할 동지의 여비 지급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전인하여 편지까지
하였건마는 불행히 안창호 선생이 이유필의 집에 갔다가 잡히고, 그 밖에 장헌근,
김덕근과 몇몇 젊은 학생들이 잡혔을 뿐이요, 독립운동 동지들은 대개 무사함을 알고
다행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수색의 손이 날마다 움직이니 재류동포가 안거할 수가
없고 또 애매한 동포들이 잡힐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동경사건과 이번 홍구
폭탄사건의 책임자는 나 김구라는 성명서를 즉시로 발표하려 하였으나, 안공근의
반대로 유예하다가 마침내 엄항섭으로 하여금 이 성명서를 기초케 하고 피취 부인에게
번역을 부탁하여 통신사에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사건이나, 상해에 백천 대장 이하를 살상한 윤봉길 사건이나 그 주모자는 김구라는
것이 전세계에 알려진 것이었다.
  이 일이 생기자 은주부, 주경란 같은 중국 명사가 내게 특별 면회를 청하고 남경에
있던 남파 박찬익 형의 활동도 있어 물질로도 원조가 답지하였다. 만주사변, 만보산
사건 등으로 악화하였던 중국인의 우리 한인에게 대한 감정은 윤봉길 의사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호전하였다.
  왜는 제 1차로 내 몸에 20만원 현상을 하더니 제 2차로 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해 주둔군 사령부의 3부 합작으로 60만원 현상으로 나를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전에는 법조계에서 한 발자국도 아니 나가던 나는 자동차로 영조계, 법조계 할 것
없이 막 돌아다녔다. 하루는 전차공사 인스펙터로 다니는 별명 박 대장 집에 혼인
국수를 먹으러 가는 것이 10여 명의 왜 경관대에게 발견되어 박 대장 집 아궁까지
수색되었으나, 나는 부엌에서 선 채로 국수를 얻어 먹고 벌써 나온 뒤여서
아슬아슬하게 면하였다.
  남경 정부에서는 내가 신변이 위험하다면 비행기를 보내마고까지 말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데려가려 함은 반드시 무슨 요구가 있을 것인데, 내게는 그들을
만족시킬 아무 도리도 없음을 생각하고 헛되이 남의 나라의 신세를 질 것이 없다 하여
모두 사절하여 버렸다.
  이러하는 동안에 20여 일이 지났다. 하루는 피취 부인이 나를 보고 내가 피취 댁에
있는 것을 정탐이 알고 그들이 넌지시 집을 포위하고 지키고 있다 하므로, 나는 피취
댁에 더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피취 댁 자동차에 피취 부인과 나는 내외인 것처럼
동승하고 피취 씨가 운전수가 되어 대문을 나서 보니 과연 중국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정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피취 씨가 차를 빨리 법조계를 지나 중국 땅에
있는 정거장으로 가서 기차로 가흥 수륜사창에 피신하였다. 이는 박남파가 은주부,
저보성 제씨에게 주선하여 얻어 놓은 곳으로, 이동녕 선생을 비롯하여 엄항섭, 김의한
양군의 가족은 수일 전에 벌써 반이해 와 있었다.
  나중에 들은즉 우리가 피취 댁에 숨은 것이 발각된 것은 우리가 그 집 전화를
남용한 데서 단서가 나온 것이라 하였다.

    .12. 기적장강만리풍

  나는 이로부터 일시 가흥에 몸을 붙이게 되었다. 성은 조모님을 따라 장이라 하고
이름은 진구, 또는 진이라고 행세하였다.
  가흥은 내가 의탁하여 있는 저보성씨의 고향인데, 저씨는 일찍 강소성장을 지낸
이로 덕망이 높은 신사요, 그 맏아들 봉장을 미국 유학생으로 그곳 동문 밖
민풍지창이라는 종이 공장의 기사장이었다. 저씨의 집은 가흥 남문 밖에 있는데 구식
집으로 그리 굉장하지는 아니하나 대부의 저택으로 보였다. 저씨는 그의 수양자인
진동손 군의 정자를 내 숙소로 지정하였는데 이것은 호숫가에 반양제로 지은 말쑥한
집이었다. 수륜사창이 바라보이고 경치가 좋았다. 저씨 댁에 내 본색을 아는 이는 저씨
내외와 그 아들 내외와 진동손 내외뿐인데 가장 곤란한 것은 내가 중국 말을 통치
못함이었다. 비록 광동인이라고 행세는 하지마는 이렇게도 말을 모르는 광동인이 어디
있으랴. 가흥에는 산은 없으나 호수와 운하가 낙지발같이 사통팔달하여서 7, 8세 되는
아이들도 배 저을 줄을 알았다.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은
상해와는 딴판으로 순후하여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고객이 물건을 잊고 가면 잘
두었다가 주었다.
  나는 진씨 내외와 동반하여 남호 연우루와 서문 밖 삼탑 등을 구경하였다. 여기는
명나라 때에 왜구가 침입하여 횡포하던 유적이 있었다. 동문 밖으로 10리 쯤 나아가면
한나라 적 주매신의 무덤이 있고 북문 밖 낙범정은 주매신이 글을 읽다가 나락 멍석을
떠내려 보내고 아내 최씨에게 소박을 받은 유적이라고 한다. 나중에 주매신이
회계태수가 되어 올 때에 최씨는 엎지른 동이의 물을 주워담지 못하여 낙범정 밑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가흥에 우접한 지 얼마 아니하여 상해 일본 영사관에 있는 일인 관리 중에 우리의
손에 매수된 자로부터, 호항선(상해, 항주 철도)을 수색하러 일본 경관이 가니
조심하라는 기별이 왔다. 가흥 정거장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 보았더니 과연 변장한 왜
경관이 내려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갔다고 하므로 저 봉장의 처가인 주씨 댁 산정으로
가기로 하였다. 주씨는 저 봉장 씨의 재취로 첫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아니되는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저씨는 이러한 그 부인을 단독으로 내 동행을 삼아서 기선으로
하룻길 되는 해염현성 주씨 댁으로 나를 보내었다.
  주씨 댁은 성내에서 제일 큰 집이라 하는데 과연 굉장하였다. 내 숙소인 양옥은 그
집 후원에 있는데, 대문 밖은 돌을 깔아 놓은 길이요, 길 건너는 대소 선박이 내왕하는
호수다. 그리고 대문 안은 정원이요, 한 협문을 들어가면 사무실이 있는데 여기는 주씨
댁 총경리가 매일 이집 살림살이를 맡아 보는 곳이다. 예전에는 4백여 명 식구가 한
식당에 모여서 식사를 했으나 지금은 사농공상의 직업을 따라서 대부분이 각처로
분산하고 남아 있는 식구들도 소가족으로 자취를 원하므로 사무실에서는 물자만
배급한다고 한다.
  집의 생김은 벌의 집과 같아서 세 채나 네 채가 한 가족 차지가 되었는데 앞에는 큰
객청이 있고 뒤에는 양옥과 화원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운동장이 있다.
  해염에 대화원 셋이 있는데 전가 화원이 첫째요, 주가 화원이 둘째라 하기로 전가
화원도 구경하였다. 과연 전씨 댁이 화원으로는 주씨 것보다 컸으나 집과 설비로는
주씨 것이 전씨 것보다 나았다.
  해염 주씨 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다시 주씨 부인과 함께 기차로
노리언까지 가서 거기서부터는 서남으로 산길 5,6리를 걸어 올라갔다. 저 부인이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연방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7, 8월 염천에 고개를 걸어 넘는
광경을 영화로 찍어 만대 후손에게 전할 마음이 간절하였다. 부인의 친정 시비 하나가
내가 먹을 것과 기타 일용품을 들고 우리를 따랐다.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 부인의
정성과 친절을 내 자손이나 우리 동포가 누구든 감사하지 아니하랴. 영화로는 못
찍어도 글로라도 전하려고 이것을 쓰는 바이다.
  고개턱에 오르니 주씨가 지은 한 정자가 있다. 거기서 잠시 쉬고 다시 걸어 수백
보를 내려가니 산 중턱에 소쇄한 양옥 한 채가 있다. 집을 수호하는 비복들이 나와서
공손하게 저 부인을 맞는다.
  부인은 시비에게 들려 가지고 온 고기며 과일을 꺼내어 비복들에게 주며 내 식성과
어떻게 요리할 것을 설명하고, 또 나를 안내하여 어디를 가거든 얼마, 어디 어딘
얼마를 받으라고 안내 요금까지 자상하게 분별하여 놓고 당일로 해염 친가로
돌아갔다.
  나는 이로부터 매일 산에 오르기로 일을 삼았다. 나는 상해에 온 지 14년이 되어
남들이 다 보고 말하는 소주니 항주니 남경이니 하는데를 구경하기는 고사하고 상해
테두리 밖에 한 걸음을 내어 놓은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마음대로 산과 물을 즐길
기회를 얻으니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집은 본래 저 부인의 친정 숙부의 여름 별장이러니, 그가 별세하매 이 집 가까이
매장한 뒤로는 이 집은 그 묘소의 묘막과 제각을 겸한 것이라고 한다. 명가가 산장을
지을 만한 곳이라 풍경이 자못 아름다웠다. 산에 오르면 앞으로는 바다요, 좌우는 푸른
솔, 붉은 가을 잎이었다.
  하루는 응과정에를 올랐다. 거기는 일좌 승방이 있어, 한 늙은 여승이 나와 맞았다.
그는 말끝마다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원로 잘 오셔 계시오. 아미타불, 내 불당으로 들어오시오. 아미타불!"
이 모양이었다. 그를 따라 암자로 들어가니 방방이 얼굴 희고 입술 붉은 젊은 여승이
승복을 맵시있게 입고 목에는 긴 염주, 손에는 단주를 들고 저두추파로 인사를 하였다.
  암자 뒤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 지남침을 놓으면 거꾸로 북을 가리킨다
하기로 내 시계에 달린 윤도를 놓아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아마 자철광 관계인가
하였다.
  하루는 해변 어느 진에 장구경을 갔다가 경찰의 눈에 걸려서 마침내 정체가 이 지방
경찰에 알려지게 되었으므로 안전치 못하다 하여 도로 가흥으로 돌아왔다.
  가흥에 와서는 거진 매일 배를 타고 호수에 뜨거나 운하로 오르내리고 혹은
엄가빈이라는 농촌의 농가에 몸을 붙여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강남의 농촌을 보니 누에를 쳐서 길쌈을 하는 법이나 벼농사를 짓는 법이나
다 우리 나라보다는 발달된 것이 부러웠다. 구미 문명이 들어와서 그런 것 외에
고래의 것도 그러하였다. 나는 생각하였다. 우리 선인들은 한, 당, 송, 원, 명, 청 시대에
끊임이 없이 사절이 내왕하면서 왜 이 나라의 좋은 것은 못 배워 오고 궂은 것만
들여왔는고. 의관 문물 실준중화라는 것이 이조 오백 년의 당책이라 하건마는 머리
아픈 망건과 기타 망하기 좋은 것 뿐이요, 이용후생에 관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민족의 머리에 들어박힌 것은 원수의 사대사상뿐이 아니냐. 주자학을 주자 이상으로
발달시킨 결과는 공수위좌하여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 주둥이만 까게 하여서 민족의
원기를 소진하여 버리니 남는 것은 편협한 당파싸움과 의뢰심 뿐이다.
  오늘날로 보아서 요새 일부 청년들이 제정신을 잃고 러시아로 조국을 삼고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어제까지의 민족혁명은 두 번 피흘릴 운동이니, 대번에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고 떠들던 자들이 레닌의 말 한마디에 돌연히 민족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전면목인 것처럼 들고 나오지 않는가. 주자님의 방구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유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아니한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잃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나는 엄가빈에서 다시 사회교 엄항섭 군 집으로, 오룡료 진동생의 집으로
옮아 다니며 숙식하고 낮에는 주애보라는 여자가 사공이 되어 부리는 배를 타고 이
운하 저 운하로 농촌 구경을 돌아 다니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가흥 성내에 있는 진명사는 유명한 도주공의 집터라 한다. 그 속에는 축오자(암소
다섯 마리를 기른다)하고 또 양어하던 못이 있고 절문 밖에는 도주공유지라는 돌비가
있다.
  하루는 길로 돌아다니다가 큰 길가 마당에서 군사가 조련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있기로 나도 그 틈에 끼었더니 군관 하나가 나를 유심히 보며 내 앞으로 와서 누구냐
하기로 나는 언제나 하는 대로 광동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군관이 정작 광동인인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나는 곧 보안대 본부로 붙들려 갔다. 저씨 댁과 진씨 댁에
조사한 결과로 무사하게는 되었으나 저 봉장 군은 내가 피신할 줄을 모른다고 책하고
그의 친우요, 중학교 교원인 과부가 하나 있으니 그와 혼인하여 살면서 행색을
감추라고 권하였다. 나는, 그런 유식한 여자와 같이 살면 더욱 내 본색이 탄로되기
쉬우니 차라리 무식한 뱃사공 주애보에게 몸을 의탁하리라 하여 아주 배 속에서
살기로 하였다. 오늘은 남문 밖 호수가에서 자고 내일을 북문 밖 운하 옆에서 자고
낮에는 육지에 나와 다녔다.
  이러는 동안에도 박남파, 엄일파, 안신암 세 사람은 줄곧 외교 정보와 수집에
종사하였다. 중국인 친구의 동정과 미주 동포의 후원으로 활동하는 비용에는 곤란이
없었다.
  박남파가 중국 국민당 당원이던 관계로 당의 조직부장이요, 강소성 주석인 진과부와
면식이 있어, 그의 소개로 장개석 장군이 내게 면회를 청한다는 통지를 받고 나는
안공근, 엄항섭 두 사람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갔다. 공패성, 소쟁 등 요인들이 진 과부
씨를 대표하여 나를 나와 맞아 중앙반점에 숙소를 정하였다.
  이튿날 밤에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장개석 장군의 자택으로 진 과부 씨의
자동차를 타고 박남파 군을 통역으로 데리고 갔다. 중국 옷을 입은 장씨는 온화한
낯빛으로 나를 접하여 주었다. 인사가 끝난 뒤에 장 주석은 간명한 어조로,
  "동방 각 민족은 손중산 선생의 삼민주의(중국의 손문이 제창한 민족. 민권. 민생)에
부합하는 민주정치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고 하기로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일본의 대륙 침략의 마수가 각일각으로 중국에 침입하니 벽좌우를 하시면 필담으로
몇 마디를 하겠소."
하였더니 장씨는,
  "하도하오(좋소)."
하므로 진 과부와 박남파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붓을 들어,
  "선생이 백만 금을 허하시면 이태 안에 일본, 조선, 만주 세 방면에 폭풍을 일으켜
일본의 대륙침략의 다리를 끊을 터이니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써서 보였다.
  그것을 보더니 이번에는 장씨가 붓을 들어,

  "청이계획서상시"
  청하건대, 계획서로 상세히 보이시오.

  라고 써서 내게 보이기로 나는 물러나왔다.
  이튿날 간단한 계획서를 만들어 장 주석에게 드렸더니 진 과부 씨가 자기의 별장에
나를 초대하여 연석을 베풀고 장 주석의 뜻을 대신 내게 전한다. 특무공작으로는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으니 장래의 독립전쟁을
위하여 무관을 양성함이 어떠한가 하기로 나는 이야말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하남성 낙양의 군관학교 분교를 우리 동포의 무관양성소로 삼기로
작정되어 제 1차로 북평,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서 백여 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학적에 올리고, 만주로부터 이청천과 이범석을 청하여 교관과 영관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군관학교는 겨우 제 1기생의 필업을 하고는 일본 영사 수마의 항의로
남경정부에서 폐쇄령이 내렸다)
  이때에 대일전선 통일동맹이란 것이 발동하여 또 통일론이 일어났다. 김원봉이 내게
특별히 만나기를 청하기로 어느 날 진회에서 만났더니 그는 자기도 통일운동에
참가하겠은 즉 나더러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는
통일이 목적인 것보다도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기로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런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 통일운동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얼마 후에 소위 5당 통일회의라는 것이 개최되어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대한인독립단이 통일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이 되어 나왔다. 이 통일에
주동자가 된 김원봉, 김두봉 등 의열단은 임시정부를 눈에 든 가시와 같이 싫어하는
패라 임시정부의 해소를 극렬히 주장하였고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던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송병조, 차이석, 양기탁, 유동열 일곱 사람 중에 차이석, 송병조 두
사람을 내어놓고 그외 다섯 사람이 통일이란 말에 취하여 임시정부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니 김두봉은 좋다고 하고 임시정부 소재지인 항주로 가서 차이석, 송병조
양씨에게 5당이 통일된 이 날에 이름만 남은 임시정부는 취소해 버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하였으나, 송병조, 차이석 양씨는 굳이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문패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일곱 사람에서 다섯이 빠졌으니 국무회의를 열 수도 없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조완구 형이 편지로 내게 이런 사정을 전하였으므로 나는 분개하여 즉시 항주로
달려갔다. 이때에 김철은 벌써 작고하여 없고 5당 통일에 참가하였던 조소앙은 벌써
거기서 탈퇴하고 없었다.
  나는 이시영, 조완구, 김붕준, 양소벽, 송병조, 차이석 제씨와 임시정부 유지 문제를
협의한 결과 의견이 일치하기로, 일동이 가흥으로 가서 거기 있던 이동녕, 안공근,
안경근, 엄항섭 등을 가하여 남호의 놀잇배 한 척을 얻어 타고 호상에 떠서 선 중에서
의회를 열고 국무위원 세 사람을 더 뽑으니 이동녕, 조완구와 김구였다. 이에 송병조.
차이석을 합하여 국무위원이 다섯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국무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5당 통일론이 났을 때에도 여러 동지들은 한 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나는
차마 또 한 단체를 만들어 파쟁을 늘이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이유로 줄곧 반대하여
왔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유지하려면 그 배경이 될 단체가 필요하였고 또 조소앙이
벌써 한국 독립당을 재건한다 하니 내가 새 단체를 재건하더라도 통일을 파괴하는
책임은 지지 아니하리라 하여 동지들의 찬동을 얻어 대한국민당을 조직하였다.
  나는 다시 남경으로 돌아왔으나 왜는 내가 남경에 있는 냄새를 맡고 일변 중국
관헌에 대하여 나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고 일변 암살대를 보내어 내 생명을 엿보고
있었다. 남경 경비사령관 곡정륜은 나를 면대하여 말하기를, 일본측에서 대역 김구를
체포할 것이니 입적 기타의 이유로 방해 말라 하기로, 자기가 김구를 잡거든 일본서
걸어 놓은 상금은 자기에게 달라고 대답하였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또 사복 입은
일본 경관 일곱이 부자묘 부근으로 돌아다니더라는 말도 들었다.
  이에 나는 남경에서도 내 신변이 위험함을 깨닫고 회청교에 집 하나를 얻고
가흥에서 배 저어주던 주애보를 매삯 15원씩 주기로 하고 데려다가 동거하며, 직업은
고물상이요, 원적은 광동성 해남도라고 멀찍이 대었다. 혹시 경관이 호구조사를
오더라도 주애보가 나서서 설명하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본색을 탄로할 필요는
없었다.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항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재류한인의
인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 통일로 되었던 민족혁명당이 쪽쪽이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대한독립단은 탈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의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단과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모든 애국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점점 힘을 얻게 되었다.
  중일전쟁은 강남에까지 미쳐서 상해의 전투가 날로 중국에 불리하였다. 일본 공군의
남경 폭격도 갈수록 우심하여 회청교의 내가 들어있는 집도 폭격에 무너졌으나 나와
주애보는 간신히 죽기를 면하고 이웃에는 시체가 수두룩하였다. 나와보니 남경
각처에는 불이 일어나서 밤하늘은 붉은 모전과 같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무너진
집과 흩어진 시체 사이로 마로가에 어머니가 계신 집을 찾아 갔더니 어머니가 친히
문을 열으시며 놀라셨겠다는 나의 말에 어머니는,
  "놀라기는 무얼 놀라. 침대가 들썩들썩하드군."
하시고,
  "우리 사람은 상하지 않았나?"
하고 물으셨다.
  나는 그 길로 동포 사는 데를 돌아보았으나 남기가에 많이 있는 학생들도 다
무고하였다.
  남경의 정세가 위험하여 정부 각 기관도 중경으로 옮기게 되므로 우리 광복전선
삼당의 백여 명 대가족은 물가가 싼 장사로 피난하기로 정하고 상해, 행주에 있는
동지들에게 남경에 모이라는 지시를 하였다. 율양 고당암에게 선도를 공부하고 있는
양기탁에게도 같은 기별을 하였다. 그리고 안공근을 상해로 보내어 그 가권을
데려오되 그의 맏 형수 고 안중근 의사 부인을 꼭 모셔 오라고 신신 부탁하였더니
안공근이 돌아올 때에 보니 제 가권 뿐이요 안 의사 부인이 없으므로 나는 크게
책망하였다.
양반의 집에 불이 나면 신주부터 먼저 안아 뫼시는 법이어늘 혁명가가 피난을 하면서
나라 위하여 몸을 버린 의사의 부인을 적진중에 버리고 가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는
다만 안공근 한 집의 잘못만이 아니라 혁명가의 도덕에 어그러지고 우리 민족의
수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공근은 피난하는 동포들의 단체에 들기를 원치 아니하므로
제 뜻에 맡겨 버렸다.
  나는 안휘 둔계중학에 재학중인 신아를 불러오고, 어머니를 모시고 영국 윤선으로
한구로 가고 대가족 백여 식구는 중국 목선 두 척에 행리까지 잔뜩 싣고 남경을
떠났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신아를 데리고 한구를 거쳐서 무사히 장사에 도착하였다.
선발대로 임시정부의 문부를 가지고 진강을 떠난 조성환, 조완구 등은 남경서 오는
일행보다 수일 먼저 도착하였고 목선으로 오는 대가족 일행도 풍랑은 겪었다. 하나
무고히 장사에 왔다. 남기가 사무소에서 부리던 중국인 채군이 무호 부근에서
풍랑중에 물을 길어 올리다가 실족하여 익사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는 사람이
충실하니 데리고 가라 하시는 어머님 명령으로 일행 중에 편입하였던 것이다.
  내가 남경서 데리고 있던 주애보는 거기를 떠날 때에 제 본향 가흥으로
돌려보내었다. 그 후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때에 여비 백원만 준 일이다. 그는
5년이나 가깝게 나를 광동인으로만 알고 섬겨 왔고 나와는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
중에 생겨서 실로 내게 대한 공로란 적지 아니한데,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 줄 알고
노자 이외에 돈이라도 넉넉하게 못 준 것이 참으로 유감천만이다.
  안공근의 식구는 중경으로 갔거니와 장사에 모인 백여 식구도 공동 생활을 할 줄
모르므로 저마다 방을 얻어서 제각기 밥을 짓는 살림을 하였다. 나도 어머니를 모시고
또 한 번 살림을 시작하여서 어머니가 손수 지어 주시는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글을 쓰는 오늘날에는 이미 이 세상에 아니 계시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상권을 쓸 때와 같이 지난 일과 날짜도 많이 여쭈어 볼 것이건마는 이제는 어머니가
안 계시다.
  이 기회에 내가 상처 후에 어머니가 본국으로 가셨다가 다시 오시던 일을
기록하련다.
  어머니가 신아를 데리고 인천에 상륙하셨을 때에는 노자가 다 떨어졌었다. 그때에는
우리가 상해에서 조석이 어려워서 어머니가 중국 사람들의 쓰레기통에 버린 배추
떡잎을 뒤져다가 겨우 반찬을 만드시던 때라 노자를 넉넉히 드렸을 리가 만무하다.
  인천서 노자가 떨어진 어머니는 내가 말씀도 한 일이 없건마는 동아일보 지국으로
가셔서 사정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벌써 신문 보도로 어머니가 귀국하시는 것을
알았다 하면서 서울까지 차표를 사 드렸다. 어머님은 서울에 내려서는 동아일보사를
찾아가셨다. 동아일보사에서는 사리원까지 차표를 사드렸다.
  어머니는 해주 본향에 선영과 친족을 찾으시지 않고 안악 김씨 일문에서 미리
준비하여 놓은 집에 계시게 하였다.
  내가 인아를 데리고 있는 동안, 어머님은 당신의 생활비를 절약하셔서 때때로 내게
돈을 보내 주셨다.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사건이 생기매 경찰이 가끔 어머니를 괴롭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어머니께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나오시라고 기별하였다.
그때에는 내게는 어머니께서 굶지 않으시게 할 만한 힘이 있다고 여쭈었다.
  어머님은 중국으로 오실 결심을 하시고 안악 경찰서에 친히 가셔서 출국 허가를
청하였더니 의외에 좋다고 하므로 살림을 걷어치우셨다.
  그랬더니 서울 경무국으로부터 관리 하나가 안악으로 일부러 내려와서 어머니께,
경찰의 힘으로도 못 찾는 아들을 노인이 어떻게 찾느냐고, 그러니 출국 허가를
취소한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대로하여서,
  "내 아들을 찾는 데는 내가 경관들보다 나을 터이고, 또 가라고 허가를 하여서
가장집물을 다 팔게 해놓고 이제 또 못 간다는 것이 무슨 법이냐. 너희놈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아 먹고 이렇게 정치를 하고도 오래 갈 줄 아느냐."
하면서 기절하셨다. 이에 경찰은 어머니를 김씨네에게 맡기고 가 버렸다.
  그 후에 경찰이 물으면 어머니는,
  "그렇게 말썽 많은 길은 안 떠난다."
하시고는 목수를 불러 다시 집을 수리하고 집물을 마련하시는 등 오래 사실 모양을
보이셨다.
  이러하신 지 수삭 후에 어머니는 송화 동생을 보러 가신다 칭하고 신아를 데리시고
신천으로, 재령으로, 사리원으로 도막도막 몸을 옮겨서 평양에 도착하여 숭실중학교에
재학 중인 인아를 데리고 안동현으로 가는 직행차를 타셨다. 대련서 왜 경찰의 취조를
받았으나 거기서 인아가 늙은 조모를 모시고 위해위 친척의 집에 간다고 대답하여서
무사히 통과하셨다. 어머니가 상해 안공근 집을 거쳐 가흥 엄항섭 집에 오셨다는
기별을 남경에서 듣고 나는 곧 가흥으로 달려가서 9년 만에 다시 모자가 서로 만났다.
  나를 보시자마자 어머님은 이러한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는 책하더라도 초달로
자네를 때리지는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그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
  나는 어머니의 이 분부에 황송하였고, 또 이것을 큰 은전으로 알았다.
  나는 어머니를 남경에서 따로 집을 잡고 계시게 하다가 1년이 못 되어 장사로 가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가 남경에 계실 때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니의 생신 축하연을
베풀려 함을 눈치 채시고 어머니는 그들에게, 그 돈을 돈으로 달라, 그러면 당신이
자시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시므로 발기하던 사람들은 어머니의 청구대로 그 돈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그것으로 단총 두 자루를 사서 그것을 독립운동에 쓰라 하고 내어
놓으셨다.
  장사로 옮아온 우리 백여 명 대가족은 중국 중앙정부의 보조와 미국에 있는
동포들의 후원으로 생활에 곤란은 없어서 피난민으로는 고등 피난민이라 할 만하게
살았다. 더욱이 장사는 곡식이 흔하고 물가가 지천하였고 호남성 부주석으로 새로
도임한 장치중 장군은 나와는 숙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이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주었다.
  나는 상해, 항주, 남경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변성명을 하였으나 장사에서는
언제나 버젓이 김구로 행세하였다.
  오는 노중에서부터 발론이 되었던 3당 합동문제가 장사에 들어와서는 더욱 활발하게
진전되었다. 합동하려는 3당의 진용은 이러하였다.
  첫째는 조선혁명당이니, 이청천, 유동열, 최동오, 김학규, 황학수, 이복원, 안일청,
현익철 등이 중심이요.
  둘째는 한국독립당이니, 조소앙, 홍진, 조시원 등이 그 간부며,
  다음으로 셋째는 내가 한국 국민당이니,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차이석, 송병조,
김봉준, 엄항섭, 안공근, 양묵, 민병길, 손일민, 조성환 등이 그 중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상 3당이 통합문제를 토의하려고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에 모였는데 나도 거기
출석하여 있었다.

  내가 의식을 회복하여 보니 병원인 듯하였다. 웬일이냐 한즉, 내가 술에 취하여
졸도하여서 입원한 것이라고 하였다. 의사가 회진할 때에 내 가슴에 웬 상처가 있는
것을 알고 이것은 웬것이냐 한즉 그것은 내가 졸도할 때에 상머리에 부딪친 것이라
하므로 그런 줄만 알고 병석에 누워 있었다. 한 달이나 지나서야 엄항섭 군이 내게
비로소 진상을 설명하여 주었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그날 밤, 조선혁명당원으로서 내가 남경 있을 때에 상해로 특수공작을 간다고
하여서 내게 금전의 도움을 받은 일이 있는 이운한이 회장에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하여 첫방에 내가 맞고, 둘째로 현익철, 셋째로 유동열이 다 중상하고 넷째 방에
이청천이 경상하였는데 현익철은 입원하자 절명하고 유동열은 치료 경과가 양호하다는
것이었다.
  범인 이운한은 장사 교외의 작은 정거장에서 곧 체포되고 연루자로 강창제, 박창세
등도 잡혔었으나 강, 박 양인은 석방되고 이운한은 탈옥하여 도망하였다.
  성주석 장치중 장군은 친히 내가 입원한 상아의원에 나를 위문하고 병원 당국에
대하여서는 치료비는 얼마가 들든지 성 정부에서 담당할 것을 말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구에 있던 장개석 장군은 하루에도 두세 번 전보로 내 병상을 묻고 내가 퇴원한
기별을 듣고는 나하천을 대표로 내게 보내어 돈 3천원을 요양비로 쓰라고 주었다.
  퇴원하여 어머니를 찾아뵈니 어머니는,
  "자네 생명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불범정이지."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
  "한인의 총에 맞고 살아 있는 것이 왜놈의 총에 맞아 죽은 것만 못해."
하시기도 하였다.
  애초에 내 상처는 중상이어서 병원에서 의사가 보고 입원 수속도 할 필요가 없다
하여 문간방에 두고 절명하기만 기다렸던 것이 네 시간이 되어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병실로 옮기고 치료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내가 이런 상태이므로 향항에 있던
인아에게는 내가 총을 맞아 죽었다는 전보를 놓아서 안공근은 인아와 함께 내 장례에
참여할 생각으로 달려왔었다.
  전쟁의 위험이 장사에도 파급되어서 성 정부에서도 끝까지 이 사건을 법적으로
규명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이운한이 강창제, 박창세 두 사람의
악선전에 혹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인 듯하다.
  내가 퇴원하여 심항섭 군 집에서 정양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갑자기 신기가
불편하고 구역이 나며 오른편 다리가 마비되어서 다시 상아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엑스광선으로 본 결과, 서양인 외과 주임이 말하기를 내 심장 옆에 박혀 있던
탄환이 혈관을 통하여 오른편 갈빗대 옆에 옮아가 있으니 불편하면 수술하기도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로 두어도 생명에는 관계가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른편 다리가
마비되는 것은 탄환이 대혈관을 압박하는 때문이거니와 작은 혈관들이 확대되어서
압박된 혈관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면 다리가 마비되던 것도 차차 나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장사가 또 위험하게 되매 우리 3당의 백여 명 가족은 또 광주로
이전하였으니 호남의 장치중 주석이 광동성 주석 오철성씨에게 소개하여 준 것이었다.
광주에서는 중국 군대에 있는 동포 이준식, 채원개 두 분의 알선으로 동산백원을 임시
정부의 청사로, 아세아 여관을 전부 우리 대가족의 숙사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정부와
가족을 안돈하고 나는 안의사 미망인과 가족을 상해에서 나오게 할 계획으로 다시
향항으로 가서 안정근, 안공근 형제를 만나 강경하게 그 일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은
교통이 어렵다는 이유로 듣지 아니하였다. 사실상 그때 사정으로는 어렵기도 하였다.
나는 안의사의 유족을 적진 중에 둔 것과 율양고당암에서 중국 도사 임한정에게
선도를 공부하고 있던 양기탁을 구출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향항에서 이틀을 묵어서 광주로 돌아오니 거기도 왜의 폭격이 시작되었으므로 또
나는 어머님과 우리 대가족을 불산으로 이접하게 하였다. 이것은 오철성 주석의
호의와 주선에 의함이었다.
  이 모양으로 광주에서 두 달을 지나, 장개석 주석에게 우리도 중경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청하였더니 오라는 회전이 왔기로 조성환, 나태섭 두 동지를 대동하고 나는
다시 장사로 가서 장치중 주석에게 교섭하여 공로 차표석 장과 귀주성 주석 오정창
씨에게로 하는 소개장을 얻어 가지고 중경 길을 떠나 10여 일 만에 귀주성 수부
귀양에 도착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본 중국은 물산이 풍부한 지방뿐이었으나 귀주 지경에 들어서는 눈에
띄는 것이 모두 빈궁뿐이었다. 귀양 시중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의복이 남루하고 혈색이 좋지 못하였다. 원체 산이 많은
지방인데다가 산들이 다 돌로 되고 흙이 적어서 농가에서는 바위 위에다 흙을 펴고
씨를 뿌리는 형편이었다. 그 중에도 한족은 좀 나으나 원주민인 묘족의 생활을 더욱
곤궁하고 야매한 모양이었다. 중국 말을 모르는 나는 말을 듣고 한족과 묘족을 구별할
수는 없으나 복색으로는 묘족의 여자를 알아낼 수 있고 안광으로는 묘족의 남자를
지적할 수가 있었다. 한족의 눈에는 문화의 빛이 있는데 묘족의 눈에는 그것이 없었다.
  묘족은 요순 시대의 삼묘씨의 자손으로서, 4천 년 이래로 이렇게 꼴사나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전생의 업보인고, 요순이후로는 역사상에 묘족의 이름이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기로 그들은 이미 다 절멸된 줄만 알았더니 호남 광동, 광서, 운남,
귀주, 사천, 서강 등지에 수십 백 종족으로 갈린 묘족이 퍼져 있으면서도 이렇게
소문이 없는 것은 그들 중에 인물이 나지 못한 까닭이다. 현재 광서의 백승희와
운남의 용운 두 장군이 묘족의 후예라 하는 말도 있으나 나는 그 진부를 단정할
자료를 가지지 못하였다.
  귀양에서 여드레를 묵어서 나는 무사히 중경에 도착하였으나 그동안 광주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우리 대가족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다 무사히 광주를
탈출하여 유주에 와 있다는 전보를 받고 안심하였다. 그들은 다 중경에 오기를
희망하므로 내가 교통부와 중앙당부에 교섭하여 자동차 여섯 대를 얻어서 기강이라는
곳에 대가족을 옮겨왔다. 군수품 운송에도 자동차가 극히 부족하던 이 때에 이렇게
빌어 준 중국의 호의는 이루 감사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내가 미주서 오는 통신을 기다리노라고 우정국(우편국)에 가 있는 때에 인아가 왔다.
유주에 계신 어머니는 병환이 중하신데 중경으로 오기를 원하시므로 모시고 온
것이었다. 내가 인아를 따라 달려가니 어머님은 내 여관인 저기문 홍빈여사 맞은편에
와 계셨다. 곧 내 여관으로 모시고 와서 하룻밤을 지내시게 하고 강남쪽 아궁보
손가화원에 있는 김홍서군 집으로 가 계시게 하였다. 이것은 김홍서 군이 호의로
자청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병환은 인후증인데 의사의 말이 이것은 광서의 수토병으로, 젊은 사람이면
수술을 할 수 있으나 어머니 같은 노인으로서는 그리할 수도 없고 또 이미 치료할
시기를 놓쳐서 손 쓸 길이 없다고 하였다.
  어머님이 중경으로 오시는 일에 관하여 잊지 못할 은인이 있으니 그는 의사
유진동군과 그 부인 강영파 여사였다. 이 부처는 상해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나를
위하여 주던 사람들인데 쿨링에서 요양원 경영하던 것을 걷어치우고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나를 대신하여 내 어머니를 모시고 간호하기 위하여 중경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유의사 부처가 왔을 때는 벌써 더 손 쓸 수가 없게 되신 뒤였다.
  내가 중경에 와서 할 일은 세 가지였었다. 첫째는 차를 얻어서 대가족을 실어 오는
일이요, 둘째는 미주, 하와이와 연락하여 경제적 후원을 받는 일이요, 셋째로는
장사에서부터 말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여러 단체의 통일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대가족도 안돈이 되고 미주와 연락도 되었으므로 나는 세째 사업인 단체 통일에
착수하였다.
  나는 중경에서 강 건너 아궁보에 있는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 본부를 찾았다. 그
당수 김약산은 계림에 있었으나 윤기섭, 성주식, 김홍서, 석정, 김두봉, 최석순, 김상덕
등 간부가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모든 단체를 통일하여
민족주의의 단일당을 만들 것을 제의하였더니 그 자리에 있던 이는 일치하여
찬성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여러 단체에도 참가를
권유하기로 결의하였다.
  미주와 하와이에서는 곧 회답이 왔다. 통일에는 찬성이나, 김약산은 공산주의자인즉
만일 내가 그와 일을 같이 한다면 그들은 나와의 관계까지도 끊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약산과 상의한 결과 그와 나의 연명으로, 민족운동이야말로 조국
광복에 필요하다는 뜻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기 의외의 고장이 생겼으니 그것은 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한 단일당을 조직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주의가 서로 다른 자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기강으로 가서 국민당의 전체회의를 열고 노력한지 1개월 만에
비로소 단일당으로 모든 당들을 통일하자는 의견에 국민당의 합의를 얻었다. 그래서
민족운동 진영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과 공산주의전선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의 일곱으로 된
7당 통일 회의를 열게 되었다.
  회의가 진행됨에 따라 민족운동 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은 민족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의 조직을 해산할 수 없다고 말하고
퇴석하였다. 이렇게 되니 7당이 5당으로 줄어서 순전한 민족주의적인 새 당을
조직하고 8개조의 협정에 5당의 당수들이 서명하였다.
  이에 좌우 5당의 통일이 성공하였으므로 며칠을 쉬고 있던 차에, 이미 해산하였을
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이 돌연히 탈퇴를 선언하였으니,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만일 8개조의
협정을 수정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다 달아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5당 통일도 실패되어서 나는 민족진영 3당의 동지들과 미주, 하와이 여러
단체에 대하여 나의 불명한 허물을 사과하고 이어서 원동에 있는 3당만을 통일하여
새로 한국독립당이 생기게 되었다. 하와이 애국단과 하와이 단합회가 각각 해소하고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가 되었으니 역시 5당 통일은 된 셈이었다.
  새로 된 한국독립당의 간부로는 집행위원장에 김구, 위원으로는 홍진, 조소앙,
조시원, 이청천, 김학규, 유동열, 안훈, 송병조, 조완구, 엄항섭, 김붕준, 양묵, 조성환,
차이석, 이복원이요, 감찰위원장에 이동녕, 위원에 이시영, 공진원, 김의한 등이었다.
  임시 의정원에는 나를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거하였는데, 종래의 주석을
국무위원이 번갈아 하던 제도를 고쳐서 대내. 대외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국, 서울,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 박사를 그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중국 중앙정부에서는 우리 대가족을 위하여 토교 동감폭포 위에 기와집 세
채를 짓고 또 시가에도 집 한 채를 사주었으나 그 밖에 우리 독립운동을 원조하여
달라는 청에 대하여서는 냉담하였다. 그래서 나는 중국이 일본군의 손에 여러
대도시를 빼앗겨 자신의 항전에 골몰한 이때에 우리를 위한 원조를 바라기가 미안하니
나는 미국으로 가서 미국의 원조를 청할 의사인즉 여행권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즉
중앙정부의 서은증씨가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중국에 있었으니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하나 남김이 좋지 아니하냐 하고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기를 청하므로 나는 장래
독립한 한국의 국군의 기초가 될 광복군 조직의 계획을 제출하였더니 곧 좋다는
회답이 왔다.
  이에 임시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미주와 하와이
동포가 보내어 준 돈 4만원)을 다하여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등 중요 인사를
초청하여 한국광복군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 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 있던 조성환 등과 합하여 한국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이범석을
제 1지대장으로 하여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본명 공진원)를 제 2지대장으로
하여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학규를 제 3지대장으로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
등의 한국청년 전지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제 5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 3전구 사령부 정치부에서
일을 보고 있는 김문호를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조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총회로부터 중국 돈으로
10만원의 기부가 있었다.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지 못하여 몇 달 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여 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로, 학병으로 일본 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지대를 찾아온 것인데 지대장 김학규가 임시정부로 보낸
것이었다. 이 사실은 중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어 중한문화협회 식당에서 환영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양 여러 나라의 통신기자들이며 대사관원들도 출석하여 우리
학병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발하였다. 어려서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아 국어도 잘
모르는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총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시정부를 찾아왔다는 그들의 말에 우리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목이 메었거니와
외국인들도 감격에 넘친 모양이었다.
  이것을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어, 미국의 OSS(미국 전략
사무국)를 주관하는 싸전트 박사는 광복군 제 2지대장 이범석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쓰 중위는 제3지대장 김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게 비밀 훈련을
실시하였다. 예정대로 3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정탐과 파괴 공작의 임무를 띠고 그들을
비밀히 본국으로 파견할 준비가 된 때에 나는 미국 작전부장 다노배 장군과
군사협의를 하기 위하여 미국 비행기로 서안으로 갔다.
  회의는 광복군 제 2지대 본부 사무실에서 열렸는데 정면 오른쪽 태극기 밑에는 나와
제 2지대 간부가, 왼쪽 미국기 밑에는 다노배 장군과 미국인 훈련관들이 앉았다.
다노배 장군이 일어나,
  "오늘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적 일본을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된다."고 선언하였다.
  다노배 장군과 내가 정문으로 나올 때에 활동사진의 촬영이 있고 식이 끝났다.
  이튿날 미국 군관들의 요청으로 훈련받은 학생들의 실지 공작을 시험하기로 하여
두곡에서 동남으로 40리, 옛날 한시에 유명한 종남산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동구에서
차를 버리고 5리쯤 걸어가면 한 고찰이 있는데 이것이 우리 청년들이 훈련을 받은
비밀 훈련소였다. 여기서 미국 군대식으로 오찬을 먹고 참외와 수박을 먹었다.
  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적으로 모험에 능한 자, 슬기가 있어서 정탐에 능한 자, 눈과
귀가 밝아서 무선전선에 능한 자를 고르는 것이었다. 이 시험을 한 심리학자는 한국
청년이 용기로나 지능으로나 다 우량하여서 장래에 희망이 많다고 결론하였다.
  다음에는 청년 일곱을 뽑아서 한 사람에게 숙마바 하나씩을 주고 수백 길이나 되는
절벽 밑에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가지고 오라는 시험이었다.
  일곱 청년은 잠깐 모여서 의논하더니 그들의 숙마바를 이어서 하나의 긴 바를
만들어, 한 끝을 바위에 매고 그 줄을 붙들고 일곱이 다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입에 물고 다시 그 줄에 달려 일곱이 차례차례로 다 올라왔다. 시험관은 이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중국 학생 4백 명을 모아 놓고 시켰건마는 그들이 해결치 못한 문제를 한국
청년 일곱이 훌륭하게 하였소. 참으로 한국사람은 전도 유망한 국민이요."
  일곱 청년이 이 칭찬을 받을 때에 나는 대단히 기뻤다.
  다음에는 폭파술, 사격술, 비밀히 강을 건너가는 재주 같은 것을 시험하여 다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을 보고 나는 만족하여 그날로 두곡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은 중국 친구들을 찾을 생각으로 서안으로 들어갔다. 두곡서 서안은 40리였다.
  호종남 장군은 출타하여서 참모장만을 만나고 성주석 축소주 선생은 나와 막역한
친우라 이튿날 그의 사저에서 석반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성당부에서는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개최한다 하고 서안 부인회에서는 나를 환영하기 위하여 특별히 연극을
준비한다 하고 서안의 각 신문사에서도 환영회를 개최하겠으니 출석하여 달라는
초청이 왔다.
  나는 그 밤을 우리 동포 김종만씨 댁에서 지내고 이튿날은 서안의 명소를 대개
구경하고 저녁에는 어제 약속대로 축 주석 댁 만찬에 불려갔다.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돌아와 수박을 먹으며 담화를 하는 중에 문득 전령이 울었다. 축 주석은 놀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나 보다고 전화실로 가더니 잠시 후에 뛰어
나오며,
  "왜적이 항복한다!"
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 보내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가석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의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더 있을 마음이 없어서 곧 축씨 댁에서 나왔다. 내 차가 큰 길에 나설 때에는
벌써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 소리가 성중에 진동하였다.
  나는 서안에서 준비되고 있던 나를 위한 모든 환영회를 사퇴하고 즉시 두곡으로
돌아왔다. 와 보니 우리 광복군은 제 임무를 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것을 실망하여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데 미국 교관들과 군인들은 질서를 잊으리만큼 기뻐 뛰고
있었다. 미국이 우리 광복군 수천 명을 수용할 병사를 건축하려고 일변 종남산에서
재목을 운반하고 벽돌가마에서 벽돌을 실어 나르던 것도 이날부터 일제히 중지하고
말았다. 내 이번 길의 목적은 서안에서 훈련받은 우리 군인들을 제 1차로 본국으로
보내고 그 길로 부양으로 가서 거기서 훈련받은 이들을 제 2차로 떠나보낸 후에
중경으로 돌아감이었으나 그 계획도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중경서 올
때에는 군용기를 탔으나 그리로 돌아갈 때에는 여객기를 타게 되었다.
  중경에 와 보니 중국인들은 벌써 전쟁중의 긴장이 풀어져서 모두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고 우리 동포들은 지향할 바를 모르는 형편에 있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그동안
임시 의정원을 소집하여 혹은 임시 정부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주장하고 혹은 이를
해산하고 본국으로 들어가자고 발론하여 귀결이 못나다가, 주석인 내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정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의정원에 나아가 해산도 총사직도 천부당하다고 단언하고,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의 앞에 정부를 내어 바칠 때까지 현상대로 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 서울에는 미국 군정부가 있으니 임시정부로는
입국을 허락할 수 없은즉 개인의 자격으로 오라 하기로 우리는 할 수 없이 개인의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의 중경 생활을 마치게 되니, 실로 감개가 많아서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두서를 찾기가 어렵다.
  나는 교자를 타고 강 건너 화강산에 있는 어머니 묘소와 아들 인의 무덤에 가서
꽃을 놓고 축문은 읽어 하직하고 묘지기를 불러 금품을 후히 주어 수호를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가죽 상지 여덟 개를 사서 정부의 모든 문서를 싸고 중경에 거주하는
5백여 명 동포의 선후책을 정하고, 임시정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 중국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주중화대표단을 두어 박찬익을 단장으로 민필호, 이광, 이상만,
김은충 등을 단원으로 임명하였다.
  우리가 중경을 떠나게 되매 중국공산당 본부에서는 주은래, 동필무 제씨가 임시정부
국무원 전원을 청하여 송별연을 하였고 중앙정부와 국민당에서는 장개석 부처를
위시하여 정부, 당부, 각계 요인 2백여 명이 모여 우리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들을 초청하여 국민당 중앙당부 대례당에서 중국기와 태극기를
교차하고 융숭하고도 간곡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장개석 주석과 송미령 여사가
선두로 일어나 장래 중국과 한국 두 나라가 영구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자는 축사가
있고 우리 편에서도 답사가 있었다.
  중경을 떠나던 일을 기록하기 전에 7년간의 중경 생활에서 잊지 못할 것 몇 가지를
적으려 한다.
  첫째 중경에 있던 우리 동포의 생활에 관하여서다. 중경은 원래 인구 몇 만밖에 안
되던 작은 도시였으나, 중앙정부가 이리로 옮겨온 후로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지방의
관리와 피난민이 모여들어서 일약 인구 백만에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아무리 새로
집을 지어도 미처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여름에는 한데에서 사는 사람에 수십만이나
되었다.
  식량은 배급제여서 배급소 앞에는 언제나 장사진을 치고 서로 욕하고 때리고 하여
분규가 아니 일어나는 때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동포는 따로 인구를 선책하여서
한몫으로 양식을 타서 하인을 시켜 집집에 배급하기 때문에 대단히 편하였고 뜰을
쓸기까지 하였다. 먹을 물도 사용인을 시켜 길었다. 중경시 안에 사는 동포들 뿐만
아니라, 교외인 토교에 사는 이들도 한인촌을 이루고 중국 사람의 중산계급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간혹 부족하다는 불평도 있었으나 규율 있고 안전한 단체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나 자신의 중경 생활은 임시정부를 지고 피난하는 것이 일이요, 틈틈이 먹고 잤다고
할 수 있었다. 중경의 폭격이 점점 심하여 가매 임시정부도 네 번이나 옮겼다. 첫 번
정청인 양류가 집은 폭격에 견딜 수가 없어서 석판가로 옮겼다가 이 집이 폭격으로
일어난 불에 전소하여 의복까지 다 태우고 오사야항으로 갔다가 이 집이 또 폭격을
당하여 무너진 것을 고쳤으나 정청으로 쓸 수는 없어서 직원의 주택으로 하고 네
번째로 연화지에 70여 칸 집을 얻었는데 집세가 일년에 40만원이라, 그러나 이 돈은
장 주석의 보조를 받게 되어 임시정부가 중경을 떠날 때까지 이 집을 쓰고 있었다.
 이 모양으로 연이어 오는 폭격에 중경에는 인명과 가옥의 손해가 막대하였으며 동포
중에 죽은 이는 신익희씨 조카와 김영린의 아내, 두 사람이 있었다.
  이 두 동포가 죽던 폭격이 가장 심한 것이어서 한 방공호에서 4백명이니 8백명이니
하는 질식자를 낸 것도 이때였다. 그 시체를 운반하는 광경을 내가 목도하였는데
화물자동차에 짐을 싣듯 시체를 싣고 달리면 시체가 흔들려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고
그것을 다시 싣기가 귀찮아서 모가지를 매어 자동차 뒤에 달면 그 시체가 땅바닥으로
엎치락 뒤치락 끌려가는 것이었다. 시체는 남녀를 물론하고 옷이 다 찢겨서 살이
나왔는데 이것은 서로 앞을 다투어 발악한 형적이었다.
  가족을 이 모양으로 잃어 한 편에 통곡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편에는 방공호에서
시체를 끌어내는 인부들이 시체가 지녔던 금. 은. 보화를 뒤져서 대번에 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질식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 밀매음녀 많기로 유명한
교장구이기 때문에 죽은 자의 대다수가 밀매음녀였다.
  중경은 옛날 이름으로는 파인데, 지금은 성도라고 부르는 촉과 아울러 파촉이라고
하던 곳이다. 시가의 왼편으로 가릉강이 흘러와서 바른편에서 오는 양자강과 합하는
곳으로, 천톤급의 기선이 정박하는 중요한 항구다. 지명을 파라고 하는 것은 옛날
파장군이란 사람이 도읍하였던 때문이어서, 연화지에는 파장군의 분묘가 있다.
  중경의 기후는 심히 건강에 좋지 못하여 호흡기병이 많다. 7년간에 우리 동포도
폐병으로 죽은 자가 80명이나 된다. 9월 초생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운무가 많아 볕을
보기가 드물고, 기압이 낮은 우묵한 땅이라 지변의 악취가 흩어지지를 아니하여
공기가 심히 불결하다. 내 맏아들 인도 이 기후의 희생이 되어서 중경에 묻혔다.
  11월 5일에 우리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기타 직원은 비행기 두 대에 갈라 타고
중경을 떠나 다섯 시간 걸려 떠난 지 13년 만에 상해의 땅을 밟았다. 우리 비행기가
착륙한 비행장이 곧 홍구 신공원이라 하는데 우리를 환영하는 남녀 동포가 장내에
넘쳤다. 나는 14년을 상해에 살았건마는 홍구 공원에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일찍
없었었다. 신공원에서 나와서 시내로 들어가려 한즉 아침 여섯 시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6천 명 동포가 열을 지어서 고대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 있는
길(사람의 키의 한 길)이 넘는 단 위에 올라서 동포들에게 인사말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본즉 그 단이야말로 13년전 윤봉길 의사가 왜적 백천대장 등을 폭격한 자리에
왜적들이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단을 모으고 군대를 지휘하던 곳이라고 한다.
세상에 우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양자반점에 묵었다. 13년은 사람의 일생에는 긴 세월이었다.
  내가 상해를 떠날 적에 아직 어리던 이들은 벌써 장정이 되었고 장정이던 사람들은
노쇠하였다. 이 오랜 동안에 까딱도 하지 아니하고 깨끗이 고절을 지킨 옛 동지
선우혁, 장덕로, 서병호, 한진교, 조봉길, 이용환, 하상린, 한백원, 원우관 제씨와 서병호
댁에서 만찬을 같이하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상해에 재류하는 동포들 중에
부정한 직업을 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말이 나를 슬프게 하였다. 나는 우리 동포가
가는 곳마다 정당한 직업에 정직하게 종사하여서 우리 민족의 신용과 위신을 높이는
애국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나는 법조계 공동묘지로 아내의 무덤을 찾고 상해에서 10여 일을 묵어서 미국
비행기로 본국을 향하여서 상해를 떠났다. 이동녕 선생, 현익철 동지 같은 이들이
이역에 묻혀서 함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나는 기쁨과 슬픔이 한데 엉클어진 가슴으로 27년 만에 조국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그리운 흙을 밟으니 김포 비행장이요, 상해를 떠난 지 세 시간 후였다.
  나는 조국의 땅에 들어오는 길로 한 가지 기쁨과 한 가지 슬픔을 느꼈다. 책보를
메고 가는 학생들의 모양이 심히 활발하고 명랑한 것이 한 기쁨이요, 그와는 반대로
동포들이 사는 집들이 납작하게 땅에 붙어서 퍽 가난해 보이는 것이 한 슬픔이었다.
동포들이 여러 날을 우리를 환영하려고 모였더라는데 비행기 도착 시일이 분명히
알려지지 못하여 이날에는 우리를 맞아 주는 동포가 많지 못하였다. 늙은 몸을
자동차에 의지하고 서울에 들어오니 의구한 산천이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내 숙소는 새문 밖 최창학씨의 집이요, 국무원 일행은 한미호텔에 머물도록 우리를
환영하는 유지들이 미리 준비하여 주었었다.
  나는 곧 신문을 통하여 윤봉길, 이봉창 두 의사와 강화 김주경 선생의 유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말하였더니 윤 의사의 아드님이 덕산으로부터 찾아오고 이 의사의
조카따님이 서울에서 찾아오고 김주경 선생의 아드님 윤태 군은 38 이북에 있어서
못보고 그 따님과 친척들이 혹은 강화에서 혹은 김포에서 와서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분묘가 계시고 친척과 고구가 사는 그리운 내 고향은
소위 38선의 장벽 때문에 가보지 못하고 재중형제들과 종매들의 가족이 상경하여서
반갑게 만날 수가 있었다.
  군정청에 소속한 각 기관과 정당, 사회단체, 교육계, 공장 등 각계가 빠짐없이
연합환영회를 조직하여서 우리는 개인의 자격으로 들어왔건마는 '임시정부환영'이라고
크게 쓴 시위행진을 하고, 그 끝에 덕수궁에 식탁이 4백여 개로 환영연을 배설하고
하지 중장 이하 미국 군정 간부들도 출석하여 덕수궁 뜰이 좁을 지경이었으니 참으로
찬란하고 성대한 환영회이었다. 나는 이러한 환영을 받을 공로가 없음이 부끄럽고도
미안하였으나 동포들이 해외에서 오래 신고한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라고 강잉하여
고맙게 받았다.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나는 38이남 만이라도 돌아보라리 하고 첫 번째 길로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깊은 곳이다. 스물 두 살에 인천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스물 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 적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이
불효를 위하여 부모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여 마흔 아홉
해전 기억이 어제런 듯 새롭다. 인천서도 시민의 큰 환영을 받았다.
  두 번째 길로 나는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공주에 도착하니 충청남북도 열 한 개
군에서 10여 만 동포가 모여서 나를 환영하는 회를 열어 주었다.
  공주를 떠나 마곡사로 가는 길에 김복한, 최익현 두 선생의 영정 모신 데를 찾아서
배례하고 그 유가족을 위로하고 동민의 환영하는 정성을 고맙게 받았다.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로 마곡사까지 나를 따르는 이가 3백 50여 명이었고 마곡사 승려의
대표는 공주까지 마중을 왔으며 마곡사 동구에는 남녀 승려가 도열하여 지성으로 나를
환영하니, 옛날에 이 절에 있던 한 중이 일국의 주석이 되어서 온다고 생각함이었다.
48년 전에 머리에 굴갓을 쓰고 목에 염주를 걸고 출입하던 길이었다. 산천도 예와
같거니와 대웅전에 걸린 주련(기둥에 써 붙이는 글)도 옛날 그대로였다.

  '갈래관세간 유여몽중사
  한 걸음 물러나 세상을 보니 꿈 속의 일만 같구나.'

  그때에는 무심히 보았던 이 글구를 오늘에 자세히 보니 나를 두고 이른 말인 것
같았다. 용담 스님께 보각서장을 배우던 염화실에서 뜻깊은 하룻밤을 지냈다. 승려들은
나를 위하여 이날 밤에 불공을 드렸다. 그러나 승려들 중에는 내가 알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세 번째 길로 나는 윤봉길 의사의 본댁을 찾으니 4월 29일이라, 기념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는 일본 동경에 있는 박열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 오게 하고,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는 날
나는 특별 열차로 부산까지 갔다.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분의 유골을 모신 열차가
정거하는 역마다 사회, 교육 각 단체며 일반 인사들이 모여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자 유골을 담은 영구를 태고사에 봉안하여 동포들의 참배에 편케
하였다가 내가 친히 잡아 놓은 효창공원 안에 있는 자리에 매장하기로 하였다.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 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날 미국인 군정간부도 전부 회장하였으며 미국 군대까지 출동할 예정이었으나
그것은 중지되고 조선인 경찰관, 육해군 경비대, 정당, 단체, 교육기관, 공장의
종업원들이 총출동하고 일반 동포들도 구름같이 모여서 태고사로부터 효창공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일시 전차, 자동차, 행인까지도 교통을 차단하였다.
  선두에는 애도하는 비곡을 아뢰는 음악대가 서고 다음에는 화환대, 만장대가 따르고
세 분 의사의 영여는 여학생대가 모시니 옛날 인산보다 더 성대한 장의였다.
  나는 삼남 지방을 순회하는 길에 보성군 득량면 득량리 김씨 촌을 찾았다. 내가
48년 전에 망명 중에 석 달이나 몸을 붙여 있던 곳이요 김씨네는 나와 동족이었다.
내가 온다는 선문을 듣고 동구에는 솔문을 세우고 길을 닦기까지 하였다. 남녀
동민들이 동구까지 나와서 도열하여 나를 맞았다.
  내가 그때에 유숙하던 김광언 댁을 찾으니 집은 예와 같으되 주인은 벌써 세상을
떠났었다. 그 유족의 환영을 받아 내가 그 때에 상을 받던 자리에서 한 때 음식대접을
한다 하여서 마루에 병풍을 치고 정결한 자리를 깔고 나를 앉혔다. 모인 이들 중에
나를 알아 보는 이는 늙은 부인네 한 분과 김판남 종씨 한 분뿐이었다. 김씨는 그때에
내 손으로 쓴 책 한 권을 가져다가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에
자별히 친하게 지내던 나와 동갑인 선씨는 이미 작고하고 내게 필낭을 기워서 작별
선물로 주던 그의 부인은 보성읍에서 그 자손들을 데리고 나와서 나를 환영하여
주었다. 부인도 나와 동갑이라 하였다.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도중에서 함평 동포들이 길을 막고 들르라 하므로 나는
함평읍으로 가서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환영회에 한 차례 강연을 하고 나주로 갔다.
나주에서 육모정 이 진사의 집을 물은즉, 이 진사 집은 나주가 아니요, 지금 지나온
함평이며, 함평 환영회에서 나를 위하여 만세를 선창한 것이 바로 이 진사의
종손이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에 나는 함평과 나주를 섞바꾼 것이었다. 그 후에 이
진사(나와 작별한 후에는 이 승지가 되었다 한다)의 종손 재승, 재혁 두 형제가 예물을
가지고 서울로 나를 찾아왔기로 함평을 나주로 잘못 기억하고 찾지 못하였던 것을
사과하였다.
  이 길에 김해에 들리니 마침 수로왕릉의 추향이라 김씨네와 허씨네가 많이 참배하는
중에 나도 그들이 준비하여 주어 평생 처음으로 사모와 각대로 참배하였다.
  전주에서는 옛벗 김형진의 아들 맹문과 그 종제 맹열과 그 내종형 최경열 세 사람을
만난 것이 기뻤다. 전주의 일반 환영회가 끝난 뒤에 이 세 사람의 가족과 한데 모여서
고인을 추억하며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강경에서 공종렬의 소식을 물으니 그는 젊어서 자살하고 자손도 없으며 내가 그
집에서 자던 날 밤의 비극은 친족간에 생긴 일이었다고 한다.
  그 후 강화에 김주경 선생의 집을 찾아 그의 친족들과 사진을 같이 찍고 내가
그때에 가르치던 30명 학동 중에 하나였다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개성, 연안 등을 순회하는 노차에 이 효자의 무덤을 찾았다.
  '고효자이창매지묘'
  나는 해주 감옥에서 인천 감옥으로 끌려가던 길에 이 묘비 앞에 쉬던 49년 전
옛날을 생각하면서 묘전에 절하고 그날 어머니가 앉으셨던 자리를 눈어림으로 찾아서
그 위에 내 몸을 던졌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의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였다.
중경서 운명하실 때에 마지막 말씀으로,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하시던 것을 추억하였다.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고 모자가 함께 고국에 돌아가 함께 지난 일을 이야기하지 못하심이 그
원통하심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저 멀고 먼 서쪽 화상산 한 모퉁이에 손자와 같이
누워 계신 것을 생각하니 비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서 내가
동포들에게 받는 환영을 보시기나 하여도 다소 어머니의 마음이 위안이 아니 될까.
  배천에서 최광옥 선생과 전봉훈 군수의 옛일을 추억하고 장단 고랑포에서 나의 선조
경순왕릉에 참배할 적에는 능말에 사는 경주 김씨들이 내가 오는 줄 알고 제전을
준비하였었다.
  나는 대한 나라 자주 독립의 날을 기다려서 다시 이 글을 계속하기로 하고 지금은
붓을 놓는다.
  서울 새문 밖에서 -하권 끝-

    .1나의 소원

  1. 민족 국가
  2. 정치 이념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11. 민족 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 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 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 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칠십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는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 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 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이,
  "내 차라리 계림(신라 때의 나라 이름)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을 물리치고 달게 죽음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이었다.
  근래에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 나라를 어느 큰 이웃 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 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 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댄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내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에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나는(날 생)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오 내오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고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 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안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 알력, 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 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
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이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의
청년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댄 삼십 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12. 정치 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 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 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을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온다. 일 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체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며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 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거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 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독재거니와 이것은 수백 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이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 중에서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었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쳤다.
  우리 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직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 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어떻게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아담 스미드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 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의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인류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의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튼,
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노자의 무위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거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빠른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길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 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대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하여서 헌헌효효하여 귀일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마는 갑론을박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제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다.
국론, 즉 국민의 의사의 내용은 그때그때의 국민의 언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어느 개인이나 당파의 특정한 철학적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특색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 투표, 다수결 복종이라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뿐이다. 그런데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 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는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야 된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로 보아도 그러하다.
  이상에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이 대강 짐작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결코 독재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초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떠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 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것을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 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 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맛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 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을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
나라의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13.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우리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일차. 이차의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 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한 민족은 일언이폐지하면 모두 성인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 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 투쟁의 정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이 태탕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 번 마음을 고쳐 먹음으로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를 사명으로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의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이란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에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당한 보복은 국제적, 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이상에 말한 것은 내가 바라는 새 나라 용모의 일단을 그린 것이거니와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의 기자가 우리 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은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 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칠십이 넘었으니 몸소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 번 크게 마음을 고쳐 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1저자 연보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빈농의 김순영의 외아들로 태어남. 어머니는 곽락원이며 당 17세. 아명은 창암.
  1879년 천연두를 앓음.
  1880년 집안이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다.
  1884년 조부상을 당함. 국문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1887년 집에 서당을 만들고 이생원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를 하다.
  1889년 "통감", "사략" 등의 병서를 읽음.
  1890년 학골 정문재의 서당에서 "당시", "대학", "과문" 등을 배우다.
  1892년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매관매직의 타락한 과거에 실망. 그 후 풍수와
관상공부 등을 했고, 병서를 탐독함.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라 개명함.
  1893년 황해도 도유사의 한 사람으로 뽑혀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를 만남.
  1894년 팔봉접주로서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략했으나 실패.
  1895년 신천 안태훈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했고, 그의 아들 소년 안중근을 만남.
당시에 명망이 높은 해서 거유 고능선의 지도를 받음. 압록강을 건너가 김이언이
지휘하는 의병대에 참가.
  1896년 2월,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군사 간첩 토전양량을 죽여 국모의 원한을
품음. 5월 2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인천 감영에 투옥됨. 감옥에서 "태서신사",
"세계지지" 등을 읽고 신학문에 눈뜸.
  1897년 7월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특사령이 내려짐.
  1898년 3월 9일 밤 탈옥,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됨.
  1899년 환속하여 고향에 돌아옴.
  1900년 김두래란 이름으로 변명하고 다시 방랑길에 오름.
  1901년 12월 9일 엄친 김순영씨 세상을 떠남.
  1902년 장연 친척집에서 여옥이라는 처녀와 약혼함.
  1903년 여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기독교에 입교함. 안창호의 영매 신호와
약혼했으나 파혼.
  1904년 신천 사평동 최준례와 결혼함.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준. 이동녕 등과 함께 구국운동에 앞장섬.
  1906년 해서 교육회 총감이 되어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함.
  1907년 장녀 화경 출생.
  1908년 신민회를 통하여 구국운동에 앞장 서는 한편,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움.
  1909년 전국의 강습소를 순회하였고,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이 됨. 10월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좌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19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참석함.
  1911년 1월 5일 사내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안명근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언도 받음.
  1913년 옥중에서 이름을 구, 호를 백범이라 함.
  1914년 감형으로 7년의 형기를 끝내고 7월에 가출옥함.
  1916년 출옥 후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관리인으로 있으면서 농촌계몽운동에 힘씀.
  1917년 장남 인 출생함.
  1919년 3.1 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 됨.
  1922년 차남 신이 상해에서 태어남.
  1923년 임시정부 내무국장에 취임.
  1924년 1월 1일 상해에서 부인 최여사 폐렴으로 세상을 떠남.
  1926년 12월 임시정부의 원수인 국무령에 취임.
  1927년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쳐 국무위원에 취임
  1928년 자서전 "백범일지" 상권의 집필을 시작함. 3월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1929년 5월 자서전 "백범일지" 탈고함. 재중 거류민단장을 겸임.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그 단장이 되어 독립투사를 양성.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일황 저격에 실패함. 4월 29일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지게 함.
  1933년 윤의사 의거 후 신변이 위험해지자 강소성 가흥으로 피신. 가흥에서
주애보라는 여사공에게 몸을 의탁함. 중국의 장개석 장군을 만나 친교를 맺고, 낙양
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할 것을 결정.
  1934년 다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함.
  1935년 11월 가흥에서 임시의정원 비상회의를 열어 기구를 강화.
  1936년 이동녕 등의 동지들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함.
  1937년 임시정부를 진강에서 장사로 옮김.
  1938년 민족주의 3당 통합문제를 논의하던 남목청에서 조선 혁명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아 1개월 동안 입원 치료함.
  1939년 다시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취임. 어머니 곽씨부인 인후염으로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1940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로 갔다가 장개석 주석의 도움으로 다시 중경으로
감. 5월 혁명 투쟁 각 단체를 통합, 한국독립당에 집중케 하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함. 군사특파단을 협서성 서안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노력.
  1941년 12월 9일 임시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함.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 협정이 체결 공포됨.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 작전에 진력하게 됨.
  1944년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주석으로 재선됨. 협서성 서안과 안취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고 미군의 원조로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기술 훈련을 적극
추진 지휘.
  1945년 2월 임시정부는 일본군과 독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함. 장남 인
호흡기병으로 세상을 떠남. 11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개인 자격으로
환국함.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보고 12월 28일 이후 반탁 국민운동을 적극 추진.
  1946년 2월 비상국무회의가 조직되어 그 총리에 취임함. 인천. 마곡사 등 전국을
순회.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골을 효창공원에 봉안함.
  1947년 1월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그 부주석에 취임함. 2차 미, 소
공동위원회가 열리자 반탁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 11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 결의안을 지지함. 그의 정치 이념을 표현한 '나의
소원'을 발표.
  1948년 2월 2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함. 4월 19일 남북 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감. 5.10 선거 후부터는 건국실천원양성소에 힘을
기울임.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함. 7월 5일 거족적인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영면함.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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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에 대한 행동


오장군의 발톱 - 박조열

오장군의발톱
-박조열
무대화를 위한 작자의 협조
- 연기, 연출, 무대미술, 의상에 대하여 -
1. 가장 중요한 것은 동화적 상상력이다. 여기서는 태양이 웃고, 나무가 걸어다니고, 소가 인간을 사랑한다.
2. <오장군>은 <장군>이 아니다. 한국인으로 단정하는 것도 잘못이다. 아들이 태어나면 <장군>이라는 아명으로 부르면서 건강하고 고명한 대장부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미소로운 욕심에서 발상을 얻었을 뿐이다.
3. 오장군은 몹시 가난한 소작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군에 징집되기 전까지는 집에서 사방 십리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고, <별을 보며 밭에 나가고 달을 보며 집에 돌아오는 삶> 밖에는 몰랐다. 그가 아는 어휘가 극히 적은 것은 당연하다.
4. 군 복무중, 오장군의 행적은 자신에게는 비극이었지만 타인에게는 소극의 연속이었다. 그는 소위 <사고뭉치>, 또는 <고문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운 최초의 병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5. 오장군이 참전한 시기는 쌍발 프로펠라 추진식 폭격기가 출현한 1920년대 후반기에 해당된다. 그가 출전하기 직전에 찍은 기념사진을 보니 철모는 프러시아 군대를, 군복은 일본의 제국 군대를 닮은 데가 많았다.
6. 수십명의 등장인물중, 오장군을 빼고는 몇가지 역을 겸할 수 있고, 또 그러기를 바란다.
7. 오장군, 그의 어머니, 그의 약혼녀를 제외한 인물들은 예외없이 늘 약간 찡그린 표정을 지우면 효과적일 것이다. 그들의 복장은 물론, 모든 무대장치는 동화적인 단순성과 과장, 그리고 시대적·공간적 거리감을 함께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 등장인물 >

오장군  엄마  꽃분
먹쇠  집배원A  집배원 B
동쪽나라 신병훈련소 
교관 동 조교 A,B 동 기관총수
동 군의관  동 인턴 
동 간호장교  동 인사장교 
동 훈련병 A,B,C,D 외 다수 
관리 A, B, C  운전병  
동쪽나라 야전군 사령부
사령관   동 전속부관
동 정보참모  동 작전참모 
동 수색중대장  동 수색중대 상사
동 참모장교 다수 동 영현 하사관
병사 수명
서쪽나라 야전군
사령관   동 정보장교 (나무 A)
동 중사 (나무 B)  동 하사 (나무 C) 
동 병장 (나무 D) 동 상병 (나무 E) 
동 포병 관측장교와 관측병 
동 헌병장교와 헌병수명
동 참모장교 다수
고향의 걸어다니는 나무들과 짐승들
제 1 경 감자밭
(칠흑, 암울한 클라리넷의 멜로디…… 그 멜로디를 찾아가듯이 한줄기의 빛이 점화되면서 무대를 가로지른다.
검은 장속의 클라리넷 주자와 여인이 그 빛을 따라 무대를 지나간다.
무대 가운데쯤에서 멈추더니 호리전트쪽을 바라본다.
중얼거리듯 하는 흐느낌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잠시 그 소리를 듣는다. 검은 장속의 여인, 울음소리를 달래듯이 낮게 구음을 시작한다.
클라리넷이 구음을 받쳐준다. 두사람, 호리전트와 관객쪽에 동정을 구하듯 시선을 보내고 나서 무대의 왼쪽가에 가서 등에 지고 있던 의자에 앉는다.
두사람, 앉음새를 가다듬는다. 클라리넷 주자, 호리전트로 향해서 한결높은, 주술스러운 짧은 멜로디를 연주한다. 그 소리에 점화되듯 호리전트에 해가 떠오른다. 육안으로 느끼는 것보다 다섯배나 더 크다.
무대는 해와 더불어 밝아졌다. 클라리넷 주자와 구음자는 말없는 나레이터이며, 요술장이이며, 이 연극을 위한 연주자이며, 관극자이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은 물론 두 사람을 볼 수 없다. 두 사람은 원칙적으로는 시종 그들의 정위치를 지켜야 한다.
요술의 멜로디가 계속되자 빈상의 나무 세그루가 미끄러지듯이 나타나서 제자리에 선다. 꽃들이 아장 걸음으로 뒤따르더니 나무 주위에 다소곳이 앉는다.
암캐와 수캐가 치근거리면서 오더니 서로 애무를 시작한다. 늙은 고양이가 개들의 수작을 보고 멈칫, 이내 못본척하면서 지나가다 말고 슬그머니 심술이 나서 정떨어지는 목소리로 <야옹 !>…….
개들이 감짝 놀라서 한길 쯤 솟아 오르고 나서 도망친다. 음치스런 오장군의 노래가 다가온다.)

오장군  (노래) 엄마야 엄마야
 울엄마야.
 무엇할라고 날 낳았소.
 날라면은 잘 낳던지,
 어정퍼정 낳아놓고 고생만 시키오.
 날만 새면 일을 하니
 내가 무슨 황소아들인가 아으아으아으아 ………….
 (어깨에 메고 있던 쟁기를 내동뎅이 치려다 말고 얌전히 놓고 뒤돌아 보며) 저것이 또 쳐졌네. 야! 먹쇠야! 빨리 좀 와다우.
(무대 밖에서 방울소리가 들리더니 황소가 나타난다. 먹쇠는 황소이름이었다. 먹쇠는 두발로 걷는다는 것 말고는 매우 사실적이다. 목에 방울과 쟁기용 멍에를 걸치고 있다. 쥐고 있던 회초리를 주인에게 바친다.)
오장군  (회초리로 때리는 시늉만 하면서) 너! 요새 굼떠졌어. 너두 봄을 타는거니? (먹쇠 당연한 소릴 하는구나- 투의 표정으로 관객쪽을 흘끔본다) 하긴 사람만 봄을 타라는 법이 없지. (쟁기와 멍에를 연결시키면서) 엄마가 그러는데, 옛날 한 옛날에는 짐승들도 사람처럼 말을 할 수가 있었다드라. 너, 오줌 안눌래? 난 오줌눠야겠다. (나무에 대고 배뇨하면서) 한 옛날엔 나무들도 말을 할 수가 있었다는거야. 이 나문 13대 선조 할아버지께서 심으신거래. 그땐 이 나무도 말을 할 수가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한 옛날처럼 너두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먹  쇠  뫼에에에……. (안타깝다는 듯이 가슴을 친다)
오장군  (다른 나무로 옮겨가면서) 그래두 넌 들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야. 대장간집 아저씬 듣지도 못하지 않니. (사타구니를 내려 보다가) 어! 으아 큰일났네!
먹  쇠  …… ? !
오장군  봐! 빨갛게 부었지? (먹쇠, 머리를 쳐박듯이 들여다본다) 너 눈이 나쁘구나, 이제보니 (먹쇠 끄덕인다). 어제 밤에 빈대한테 물린 자리야.
먹  쇠  머리를 들고 오장군을 빤히 쳐다보고 나서 화난 듯한 몸짓으로 제자리로 돌아간다.)
오장군  하필이면 거길 물어가지구…… (잠시 뭔가 상상하는 표정. 느닷없이 킬킬 웃어 댄다)
먹  쇠  …… ? !
오장군  내가 왜 웃는지 궁금하지? 꽃분이 생각이 나서 그러는 거야. 꽃분에게 이 얘길 하면 어떤 얼굴을 지을까, 하구 생각하니까 말이야. (제풀에 또 웃어대다가) 먹쇠야, 넌 우습지도 않니?
먹  쇠  (힐책하듯이 오장군의 가슴을 툭 친다)
오장군  어우! 야, 니 주먹은 무쇠 덩어리처럼 단단하다는 걸 또 잊었니? 살짝 건드리기만 해두 멍이 든다구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줬는데. 조심해! 게다가 사람이든 짐승이든 남자들은 거칠은 여잘 싫어한다는 걸 알아야 해. 니가 손이 거칠다는 소문이 동네 총각소들에게 퍼져봐. 넌 평생 시집 못간다.
먹  쇠  (고개를 떨군다)
오장군  그렇다구 그렇게 풀이 죽을 것까진 없어. 니가 손이 거칠다는 건 나만 아는 비밀이니까. (먹쇠의 어깨를 쳐준다) 자아! 그럼 슬슬 이제부터 감자밭가리 시작하자!
(소와 인간은 잠시 워밍엎)
오장군  (가락을 붙여서) 이랴 가자 먹쇠야…… 아니야, 이쪽이야…… 옳지 옳지…… 좀 더 빨리 가자…… 너무 빠르다…… 옳지 옳지…… (종달새 소리, 하늘을 쳐다보며) 종달새야 종달새야, 니 목소릴 들으면 꽃분이 생각난다.
 니 목소린 꽃분일 닮았지.
 니 목소린 언제나 간지러워.
 종달새야, 종달새야.
 꽃분아, 꽃분아, 아아……
 (길게 길게 끝소리를 끄는데, 멀리서 숫소 우는 소리, 먹쇠가 우뚝서며 귀를 기울인다) 누가 서라고 했어. (또 숫소 우는 소리)…… ! 오라, 너 꽃분이네 총각소가 우는 소릴 듣고 있구나. 그러고보니 너……? (쟁기를 놓고, 먹쇠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으음, 그래애, 너두 이제 정말 시집 갈때가 됐구나, 궁뎅이가 함지만 해가지구. (먹쇠 엉덩이와 가슴을 한껏 과시한다) 알았다, 알았어. 난 아직도 니가 덜 자란 줄로만 알았어. 그렇담 너두 어서 시집을 가야지. 한데…… 하지만 말이다…… (감자 밭을 둘러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 감자밭을 다아 갈려면 닷새는 걸리거야. 하루를 푹 쉬고 나서 그 다음에…… 그럼 이레째 되는 날에, (놀라듯 하며) 안돼! 이레째 되는 날은 우리 아버지 제삿날이야. 제삿날에 그런짓하면 부정타지.
먹  쇠  뫼에, 뫼뫼뫼에 (왜 부정탄다는거냐- 라고 말하듯 하는 리듬이다.)
오장군  왜 부정타느냐구? 야아 너 정말 짐승같은 소리 하는구나.
먹  쇠  뫼뫼뫼! (날 모욕하지마)
오장군  …… 하긴, 네게까지 우리아버지 제삿날을 정하게 지내랄 수는 없지. 좋아, 그럼 우리 아버지 제삿날에 시집보내 주마.
먹  쇠  (깡충뛰며) 뫼에.
오장군  그대신 너 열심히 일해줘야 한다.
먹  쇠  뫼에.
(먹쇠, 신이나서 주인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밭을 갈기 시작한다. 오장군이 쫓아간다. 꽃분이네 숫소가 <뫼에 !>. 먹쇠의 화답. 반복……. 클라리넷이 오장군을 부추긴다. 구음자, 밭갈이요를 도창하듯 소리를 낸다.)
오장군  (도창을 따르며 가락을 붙여서) 이랴 먹쇠야 빨리 가자아으으아……
 얼른 얼른 돌아가자 아으아으아……
 한눈 팔면 사팔뜨기 된다 으아으아……
 해는 벌써 한나절 됐구나 으아으아……빨리 갈구 점심 먹자 아으아으아……
(오장군의 노래 소리는 두 음악가의 연주와 조화않는다. 둔중스런 폭격기 편대음이 들려온다. 구음자의 소리가 사그러지고, 클라리넷 주자도 연주를 멈춘다. 오장군과 먹쇠도 불안스레 하늘을 쳐다본다. 편대음은 마치 대지를 잔인하게 압사하듯이 천천히 지나간다. 인간과 소는 편대음이 멀리 사라질때까지 꼼짝않고 주시한다.)
오장군  망할놈들! 꼭 우리마을 위로만 지나간단 말이야. 잘못해서 폭탄을 떨구기라도 하는날엔 우린 어떻게 되는거야! (침묵. 상상)
 …… 수웃, 쾅! (침묵. 상상)
 …… (사방을 크게 손젓고 나서)
 조심해애 ! 이 망할 놈들아아……
먹  쇠  뫼뫼에 ! 뫼뫼뫼에 (조심해! 망할놈들아!)
어머니  (함지를 머리에 이고 등장하다말고) 하늘에 대고 그런 쌍소리 하는 게 아니야.
오장군  하늘에 대고 하는게 아녜요. 비행기에 대고 하는 소리에요. 잘못해서 폭탄을 떨구면 우린 박살날것 아녜요. 논밭두 엉망이 될거구요.
어머니  너 아직 산너머 마을의 소문을 못들은 게로구나.
오장군  무슨 소리요?
어머니  산너머 마을에 사는 어느 할아버지 한분도 너처럼 지나가는 비행기에다 대고 욕을 퍼부었다는구나. 아 그랬더니 비행기에 탄 군인이 그 소릴 듣구 밧줄을 타구 내려와서는 그 할아버질 인사불성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다시 밧줄을 타고 올라가드라는게야.
오장군  ……! (겁을 먹으면서 하늘을 쳐다본다) 누가 그럽디까?
어머니  소금장수 할아버지가 그러시드라.
오장군  에이 설마.
어머니  설마가 아냐. 얻어맞은 할아버지가 바로 소금장수 할아버지와 사둔간이시라는게야. 그러니 거짓말일 리가 있겠니?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드란다. 온 몸에 백금처런 빛나는 갑옷을 걸치구……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냥 두들겨 패기만 하더라는 게야.
오장군  (새삼스럽게 겁에 질리면서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어머니  걱정할 것 없다. 그냥 지나간걸 봐서는 니가 욕하는 소릴 못 들은게 분명하니까. 이제부턴 비행기가 지나가더라두 못들은척 못본척 하거라.
오장군  (끄덕) 엄마두요.
어머니  아암! 나두 그래야지. (함지의 보를 치우면서) 안거라.
오장군  먹쇠야. 너두 외양간에 가서 점심먹구 와.
먹  쇠  뫼에. (손을 내민다. 회초리를 달라를 뜻이다)
오장군  점심먹구 나서 너무 오래 낮잠자믄 안된다. 500셀 동안, 아니 1000, 에에라 1500셀 동안 만큼만 쉬고와, 오늘은 여느날 보다 일을 많이 했으니까.
먹  쇠  뫼에.
어머니  오늘은 여물에 콩도 많이 삶아 넣었느니라.
뫼  쇠  뫼뫼뫼! (야 신난다)
(먹쇠, 회초리로 재주를 부리며 퇴장. 오장군, 밥먹는 판토마임)
오장군  (다 먹고나서 벌렁 누우며) 천5백 세거든 깨워주세요.
엄  마  오냐. (이미 드르렁대는 아들에게) 맘놓고 자거라. (자장가 부르듯) ……하나, 둘, 셋…… (비행기 편대음이 지나간다. 그 소리에서 보호라도 하듯 목소리를 높이며 센다)
(집배원이 등장한다. 키다리. 구두밑에 한자 높이나 되는 징을 박고 있다)
집배원  안녕하세요. 우체국에서 왔습니다.
엄  마  (끄덕이며 여전히 센다)……
집배원  오장군씨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엄  마  (끄덕이며 오장군을 가리킨다)
집배원  (깨우려 한다)
엄  마  (질색하며 편지를 내놓으라고 손짓)
집배원  (가방속에서 두텁고 큰 징집영장을 꺼낸다)
엄  마  (받아들고 본다. 문맹이다. 집배원에게 읽어달라고 손짓)
집배원  (옆으로 째지는 입과 귀와 눈) 징집영장! 제일국민역 오장군 귀하. 병역법 몇조에 의하여 현역으로 징집한다. 몇월 몇일 몇시까지 제5지구 장정집결지에 출두하라. 불응시는 병역법 몇조에 의하여 종신형에 처함. 제5지구 집결지는 아무데다. 서기 몇천 몇백 몇십 몇년 몇일. 제5지구 모병사령관 서명. (잠시 위엄을 더 부리고 나서) 아셨죠?
엄  마  (여전히 세며 끄덕 - 알리가 없는데도)
집배원  내일까지 집결하라는 명령입니다. 아셨죠?
엄  마  (잠깐 생각하더니 모른다고 가로 젓는다)
집배원  예?
오장군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엄마!
엄  마  왜 벌써 깨느냐? 이제 겨우 00를 세었는데…… 더 자거라.
오장군  꿈을 꿨는데 말야, (하다가 집배원을 보고)…… 엄마 저사람 누구야?
엄  마  우체국이란 데서 왔다는구나.
오장군  우체국이요? (이내 무관심해지며) 엄마, 내가 군인이 돼 가지구 전쟁에 나갔지 뭐야!
엄  마  넌 잠이 들었다 하면 개꿈을 꾼다니깐. 어서 더 자거라.
오장군  어우 무서워! 이만한 대포알이 위잉 소리를 내면서 번개 같이 날아오더니 내 입속으로…….
엄  마  듣기싫다. 그보다두 얘, 이걸 저 나리께서 가져왔다. 난 도무지 무슨 소린지……
집배원  오장군씨, 당신은 정말 군에 입대하게 됐습니다. 그건 바로 군대로 나오라는 명령섭니다.
엄  마  뭐, 뭐요?
오장군  (읽는다)
엄  마  얘, 정말이냐?
오장군  아마 그런말 인가봐.
엄  마  아유 이를 어째! 그렇담 그 편질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편지를 빼앗아서 집배원에게 내밀며) 나 이 편지 안받겠수.
집배원  그렇잖아두 어느 마을에서건 징집영장을 안받을려구 억지를 부리는 어머니가 꼭 한두사람 있답니다. 자, 여기에 손도장을 찍어요.
오장군  (엄지손가락으로 찍는다)
집배원  (관객을 향해서) 꼭 내 엄지 발가락만 하군. (장군과 엄마에게) 20년전에 서쪽나라와 전쟁이 벌어졌을땐 나두 출전했었죠. 난 키가 큰 덕에 중대 연락병으로 뽑혔습니다. 전쟁이 끝난때 까지 난 중대 지휘소와 대대지휘소 사이를 365회나 왕복했습니다. 난 참 운이 좋았죠. (손가락으로 몸의 여기저기를 총알이 지나가는 흉내를 내면서) 총알이 한번은 여기를 스쳐 지나가고 또 한번은 여기를 스쳐 지나가고, 또 한번은 여기를 스쳐 지나가고 또 한번은 여기를 스쳐 지나갔어요. 하지만 난 여지껏 우리 어머니에게만은 이 얘길 안했습니다. 어머니가 이 얘길 들으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마치 그리운 옛날을 회상하는듯한 자세로) 그 전쟁때 생각을 할적마다 나는 꿈꾸는 듯한 기분이 되곤 하죠. (손가락으로 총알이 여기저기를 지나간 흉내를 되풀이 하고 나서 오장군과 엄마의 존재를 잃어버린듯 휘적휘적 나간다)
엄  마  (멍해 있다)
오장군  엄마, 나 꽃분이한테 알리고 올께.
엄  마  이럴줄 알았으면 진작에 꽃분이한테 장가라도 보낼걸.
오장군  먹쇠더러 천5백 세구나서 또 천5백 셀 동안만큼 더 자라고 일러주세요. (퇴장하며) 꽃분아아! (무대뒤에서 멀어져가며 계속 부른다)
엄  마  (그 소리를 멍하게 한참 듣고 있다가 불쑥) 내아들.
(클라리넷. 구음. 어머니가 퇴장한다. 감자밭의 나무들도 퇴장한다.)
제 2 경  우물가
(계속되는 클라리넷과 구음……. 같은 태양. 울창한 나무 한그루가 미끄러지듯이 등장. 꽃분이가 물동이를 이고 손에 커다란 궤짝을 들고 나온다. 무대 가운데에 그 궤짝을 놓자 궤짝은 우물이 된다. 물동이에 물을 길으며 부르는 꽃분이의 노래)
꽃  분  퐁퐁퐁퐁 샘물은
 우리엄마 젖같이
 오줌싸개 오줌같이
 밤이나 낮이나
 퐁퐁퐁퐁 퐁퐁퐁퐁
(무대 뒤에서 꽃분이를 부르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오장군이 등장해서 꽃분이 앞에 선다)
오장군  (마지막으로 한번 더 크게 길게) 꼬옷부운아!
꽃  분  니 목소린 언제 들어도 좋구나.
오장군  (다시한번) 꼬옷부운아아! 이거 읽어봐.
꽃  분  뭔데? …… (읽고나서 멍해진다)
오장군  난 아마 대포알에 맞아서 죽을라는가 봐.
꽃  분  …… 군대 간다구 다 죽나 뭐 !
오장군  다 죽었잖아, 쇠돌이, 북쇠, 칠보 …… 그리고 칠월이, 돌쇠 ……
(멀리서 숫소 암소가 서로 부르는 소리)
꽃  분  장군아, 우리 지금 당장 결혼하자.
오장군  ……?
꽃  분  저 나무 뒤에 가서 지금 결혼하는거야. 니가 군에 가기 전에 우리들의 아이를 만드는 거야.
오장군  미쳤니 너!
꽃  분  (장군의 손을 잡고 나무뒤로)……
(요란스러운 까치소리, 종달새소리, 얼굴을 돌리는 태양. 나무가 허리를 굽히며 그들을 가려준다. 클라리넷 주자와 구음자가 나무 가까이 가서 사랑을 반주해 주다가 물러난다. 이윽고 두사람 나온다. 허리를 펴는 나무)
오장군  (등을 긁으며……) 개미한테 물렸나봐…… 난 그만 가봐야겠어. 군대 가기전에 감자밭을 더 갈아야해. 그래야 나 없는새 엄마가 덜 고생할 것 아냐.
꽃  분  아들일까, 딸 일까?
오장군 (가다말고) 쌍둥일 낳아줘, 아들하구 딸하구…… (퇴장)
꽃  분  (멍해있다가 불쑥) 내남편.
(클라리넷, 구음, 꽃분퇴장, 나무퇴장)
제 3 경 훈련장 A
(어둠속에서 행진하는 군화소리. 소위 군대식의 힐책하는 소리. <개새끼>, <밥통새끼>, <걸레같은 새끼>, <앞으로 가>, <뒤로 가>, <경례>, <눈을 똑바로 떠라> 등등 하사관의 왜가리 같은 소리. 그중에서도 <번호!> 하는 소리가 한결 크다. <하나, 둘, 셋, 다섯> <다시!>할때 무대가 밝아진다. 철조망이 비스듬히 가로 지나가고 있다. 그 앞에 육군 이등병 오장군과 분대원이 횡대로 서서 번호를 부르고 있는 중이다. 오장군 이등병이 또 틀렸다.)
조  교  야, 너 이리 나와…… 너 셈셀줄 모르나?
오장군  압니다.
조  교  세어봐.
오장군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조  교  그만! 돌아가 새꺄!
오장군  옛!
조  교  밥통같은 새끼!
오장군  (대열에 끼어들며) 옛!
훈련병들 (웃는다)
조  교  웃지마! 번호!
(또 오장군이 태연하게 <다섯 !> 클라리넷……)
제 4 경 훈련장 B
(어둠속에서 교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교  관  (목소리만) 이상으로 야간 침투 방법에 대한 강의를 마치겠다.
조  교 라이트!
(무대가 밝아진다. 철조망 뒤에 기관총좌가 있다)
교  관 저 기관총좌가 공격 목표다. 목표에 이르기까지 세가지 장애물이 있으리라고 예상해야 한다. 첫째, 지뢰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다. 다행하게도 지뢰를 피했다고 하자. 둘째, 철조망이다. 철조망에는 으레 경보장치가 돼있는 법이다. 다행하게도 철조망까지 넘었다고 하자. 셋째, 적의 눈이다. 다행하게도 적의 눈까지 피했다고 하자. 이렇게 되면 가장 완벽한 침투 성공이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선 이런 행운이 있을 수 없다. 대부분의 침투기도는 조만간 적에게 노출된채 맹렬한 사격과 폭발하는 지뢰와 철조망의 저항을 받으면서 강행되는 것이다. 그럼 1분대부터 침투훈련을 실시한다. 침투 도중에 모의지뢰가 폭발하며, 실제로 기관총 사격을 한다. 그러나 기관총탄은 지상에서 1메타 50 위를 나른다. 조교는 기관총 탄도의 높이를 보여줄 준비를 하라! (조교 2명이 기관총좌 앞에 엎드려서 나무 판대기를 든다) 사격 ! (기관총좌가 불을 뿜자 두개의 나무판대기가 1메타 50 높이에서 순식간에 부러진다) 라이트 꺼! (무대가 어두워지자) 1분대부터 전진! (어둠속에서 기관총성, 지뢰 폭발음, 이윽고) 빨리 빨리 전진해라! …… 야, 저기 꼼짝않고 있는 놈이 누구야! 야아 임마! 뭘 하고 있어! …… 조교, 라이트!
(머리를 처박고 와들와들 떨고 있는 오장군 이등병이 보인다)
교  관  조교! 저놈이 누구야? 뭐 포장군? 아 오장군, 오장군! 너 거기서 뭘하고 있는거야? …… 사격중지! 조교 가봐!
(조교 2명이 달려와서 오장군 이등병을 내려다 본다)
조교A  임마!
조교B  이새끼야!
교  관  발길로 차봐.
(조교A 찬다. 조교B 찬다. 무반응. A B, 교관 목소리 나는 방향을 향하여 명령을 기다린다)
교  관  한번 더 차봐!
(조교 A B, 다시 한번씩 찬다. 무반응. 명령을 기다린다)
교  관  죽었나?
조교AB  (함께) 살았습니닷.
교  관  걸레 같은놈! 끄집어 내!
(오장군 이등병, 눈을 부릅뜬채 와들와들 떨며 하반신이 마비되었는지 서지도 못하는채 끌려나간다)
교  관  라이트 꺼! 훈련을 계속한다. 사격개시! 이분대 전진하라!
(기관총성이 한참 계속된다)
제 5 경 의무실
(청진기를 목에 건 군의관, 학생티가 가시지 않은 애숭이 인턴, 꽃분이를 닮은 간호장교)
군의관  자네 인턴으로 몇개월째 근무지?
인  턴  일주일째입니다.
군의관  무엇보다도 먼저 병사들의 꾀병을 판별하는 요령을 배워야 한다.
인  턴  예.
(오장군 이등병이 조교 A,B에 부축되어 들어온다)
군의관  (인턴에게 눈짓하고) 거기 앉혀.
조교A  앉지 못합니다.
군의관  엉뎅이를 다쳤나?
조교A  아닙니다.
군의관  그럼?
조교A  훈련도중 갑자기……
군의관  무골충이 됐단 말이지?
조교A  옛.
군의관  내가 앉히지. (뚜벅뚜벅 걸어가서 위협적인 어조로) 당장 앉지 않으면 너의 엉뎅일 없애버릴 테다! (조교 A,B에게) 앉혀!
(조교AB 오장군을 앉힌다. 앉는다. 조교 AB 신기하다! ……)
군의관  노오트! (오장군 목을 무례하게 만지더니 인식표를 끄집어 내서 일는다) 군번 024378596. 성명 오장군, 계급 이등병, 전직 농부, 교육정도 고등학교 문맹퇴치반에 의하여 동기 방학때마다 3년간 글을 배웠음.
인  턴  물어보시지도 않고 어떻게 그런 사실을……
군의관  경험은 최선의 교사다, 카아라일. 노오트! 임상질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라.
조교A  침투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조교B  1분대가 전진했습니다.
조교A  적에게 노출되었습니다.
조교B  기관총 사격, 탄도는 1메타 50센치 높이.
조교A  모의지뢰 폭발.
조교B  1분대는 계속 전진.
군의관  알았네. 이놈만은 전진을 못하더란 말이지?
조교A,B 예.
군의관  노트! 진단, 지뢰 폭발음과 기관총성으로 인한 정서적 혼란 및 무능력 상태. (끝났다는 몸짓을 하며 담배를 꺼낸다) 처치는…… (불을 붙이며) 훈련을 계속시킬것. 자주 놀라게 할것, 놀라지 않을때까지…… (간호장교에게) 에피드린 3cc !
간호장교 (주사를 놓는다)_
오장군  (간호장교를 빤히 쳐다보다가) 꽃분아! (하면서 잠에 빠진다)
군의관  눕혀!
조교A,B (바닥에 눕힌다)
인  턴  꽃분이라고 했죠?
군의관  씨스터 콤플렉스야. 누이 이름이겠지.
(납득하는 인턴. 코를 고는 오장군 이등병. 모두들 잠시 오장군 이등병의 꼴을 내려다보고 있다.)
군의관  농부가 틀림없지?
인  턴  (끄덕)
(모두들 다시 오장군 이등병을 내려다본다. 무대가 어두워지며 오장군 이등병만이 남는다. 멀리서 먹쇠가 뫼에 뫼에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장군  (자면서) 꽃분아…… 꽃분아……
(어느새 꽃분이가 옆에 와 있다)
꽃  분  어머나, 너두 이제 제법 군인답구나.
오장군  (줄곧 누워서 눈을 감은채) 나두 다른 군인들처럼 무섭게 보여?
꽃  분  응, 총도 쏴봤니?
오장군 그럼! 오늘은 하마터면 내가 쏜 총알에 내가 맞아 죽을뻔했단다. 오발을 했거든.
꽃  분  어머나!
오장군  내가 보낸 편지 몇번 받았니?
꽃  분  열한번.
오장군  열두번째는 내 머리속에 있다. 읽어줄까?
꽃  분  그만둬. 받는 쪽이 더 기쁘단다.
오장군  매일 저녁 꽃분이 꿈을 꾼다.
꽃  분  같이 자는 꿈?
오장군  너는?
꽃  분  나두야.
오장군  어젯밤엔 샘터 옆에서 꽃분이와 나란히 오줌을 쐈단다. 너는 앉아서 쏘구 나는 서서 쏘구. 청개구리 두마리가 우릴 보구 있더라.
꽃  분  호호
오장군  히히…… (누운채 이리저리 뒤채면서 웃는다. 한참 웃더니 뚝 그리고 쿨쿨 자다가) 참 우리들의 아인 아직두 소식 없니?
꽃  분  며칠 전부터 좀 이상해진 것 같애.
오장군  어떻게?
꽃  분  뭔가 아랫배에서 자라고 있는것 같애.
오장군  틀림없다. 너와 내가 만든 아이다. 쌍둥이다. 아랫배를 잘 간수해라. 이불도 꼭꼭 덮어주구.
꽃  분  그래 조심할께 (아랫배에 치마를 겹으로 두르고 나서) 그럼 간다.
오장군  잘가. (하며 스르르 일어난다. 한참 서 있다가 불쑥) 나의 아내. (스르르 무너지더니 다시 쿨쿨 잔다)
(구음…… 뒤따르는 클라리넷……)
제 6 경 훈련장 C
(인사장8교만이 라이트 속에 있다)
인사장교 (여성적) 전 훈련소 본부 인사장교입니다. 오장군 이등병의 훈련연대는 오늘 오전으로 소정의 훈련과정을 마쳤습니다. 기간중 오장군의 훈련성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차아트를 넘기며)
 사격술 0점
 화기 분해법 0점
 분대전술 0점
 내무생활 2점
 상벌사항, 기간중 상을 받은 적은 없고 두번의 징계 처분을 받았습니다.
 첫번째 징계처분은 중노동 2일간, 이것은 오장군 이등병이 장군 전용변소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훈련소장 각하께서는 이날 오장군 이등병 때문에 30분간 변소밖에서 대기하셨습니다. 훈련소장 각하의 회고담에 의하면, 그 30분 동안, 변소 안에서는 줄곧 흥얼흥얼 주절대는 소리가 들려 오드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징계처분은 경영창 3일간. 야간 수색훈련 도중에 무단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이날밤 1개 훈련연대가 훈련을 중단하고 오장군 이등병의 행방을 수색했습니다. 3시간후 훈련장에 인접한 어떤 농장에서 젖소와 함게 자고 있는 오장군 이등병이 발견되었습니다. 오장군 이등병의 훈련 연대는 내일 08시 30분, 제5야전군 산하 보충대에 수송됩니다. 훈련소에서는 이들 신병들이 일선에 수송되기에 앞서 손톱과 머리카락을 받아둬야 합니다. 이것은 전사자의 시체를 찾지 못했을 경우에 대비하는 조칩니다.
(무대가 밝아진다. 인사장교 뒤에 오장군 이등병을 비롯한 신병들이 가위로 손톱을 깎고 있다. 오장군 이등병은 발톱을 깎고 있다)
인사장교 빨리 깎아 주세요.
병사들  예.
병사A  이럴줄 알았더람 손톱을 길러둘 걸 그랬어.
병사B  내가 전사하면 아내와 아들 녀석은 내 이 때묻은 손톱에 대고 절을 하겠구나.
병사A  때를 딲으렴, 나처럼.
병사B  그럴까. (침을 묻혀 닦는다)
인사장교 오장군 이등병! 손톱을 깎으라고 했지 발톱도 깎으라고는 안했어요.
오장군  손톱도 깎았습니다.
병사B  너 발톱도 절을 받게 할 작정이냐?
병사A  이왕임 나도 발톱을 깍아야겠다.
병사C  나두 그래야겠는걸.
병사B  나두.
(모두 쪼구리고 발톱을 깎는다. 어느새 이들은 말이 없다.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클라리넷. 구음)
제 7 장 감자밭
(클라리넷, 구음과 함께……. 그 밭과 나무와 태양. 엄마가 먹쇠를 몰려 밭갈이를 하고 있다. 태양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엄  마  먹쇠야, 좀 천천히 가다우. 난 장군하군 다르지 않니.
먹  쇠 뫼에 (천천히 천천히 간다)
(한참 침묵. 밭갈이는 계속된다. 엄마가 걸음에 맞춰 무의식중에 한숨섞인 노동요 가락을 구슬프게 흥얼거린다. 처음 한동안은 콧노래로만 흥얼댄다)
엄  마  (슬프디 슬프게) 장군아 장군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먹  쇠  (마치 박자를 맞추듯 슬프게) 뫼에…… 뫼에…… 뫼에…….
(구음자가 그들과 합창한다. 인간과 소의 합창은 마치 상여를 메고 가는 것 처럼 보인다)
엄  마  (가락을 붙여서) 어이구 허리야 (하며 주저앉는다)
먹  쇠  (역시 가락을 붙이며) 메에 (주저 앉는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편대 비행음……. 꽃분이 등장)
꽃  분  어머님!
엄  마  오냐, 또 편질 받은 게로구나.
꽃  분  네에, 읽어 드릴께요. (읽는다) <열두번째 편지, 모두들 안녕하신지 궁금하다.>
엄  마  녀석, 우리들 걱정은 하지말라니까
꽃  분  글세 말예요. <어젯밤에도 고향꿈을 꿨단다>
엄  마  그렇게 자주 꿈을 꾸면 잠은 언제 자는지……
꽃  분 글쎄 말예요. <어머님은 아직도 밭갈이를 하시고 계시더라>
엄  마 그래에 네 녀석이 있었더람 벌써 끝냈으려만……
꽃  분  <그리구 꽃분이는 우리들의 아이들 배었다면서 아래배가 불룩 튀어나왔더라> 어머머!
엄  마  미친녀석! 군대에 가면 개꿈 꾸는 버릇이 고쳐질 줄 알았더니 …… 어서 다음을 읽어다오.
꽃  분  네. <꽃분이가 정말 우리들의 아일 배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  마  인석아, 너 정말 실성한 거 아니냐!
꽃  분  ………….
(잠깐 사이)
엄  마  꽃분이는 아이가 어떻게 해야만 생기는지 알테지?
꽃  분  어머님두!
엄  마  그래 아이란 그렇게 해야만 생기는 거란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안생기는 법이다. 옛날 옛적부터. 어서 다음을 읽어다오.
꽃  분  <여기 의무실에 꼭 꽃분이를 닮은 간호장교님이 계시다>
엄  마  개눈엔 똥밖에 안보인다드니…….
꽃  분  호호호…… <며칠내로 일선에 나가리라는 소문이다. 오늘은 이만. 지금부터 불침번이다>
엄  마  다아냐?
꽃  분  네
엄  마  꽃분아, 그 편지 내게 주련?
꽃  분  그러세요. 하지만…….
엄  마  읽지도 못하면서 가져서 어쩌겠느냐는 거냐?
꽃  분  …….
엄  마 내 그냥 허리춤에 끼고 있다가 낼 줄께. 괜찮지?
꽃  분 그럼요.
(잠깐 사이)
엄  마  며칠내로 일선에 나간다고 했지?
꽃  분  네.
엄  마  일선에 나간다고 다 죽는건 아니겠지?
꽃  분  그럼요.
엄  마  물론 죽는 사람도 많겠지?
꽃  분  ……….
(잠깐 사이)
엄  마  전쟁이 끝날 날은 아직도 멀었다더냐?
꽃  분  글쎄요.
엄  마  언제고 끝나긴 끝나겠지?
꽃  분  그럼요.
(잠깐 사이)
엄  마  오늘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꽃  분  뭐가요?
엄  마  전쟁이 끝나는 날이 말이다.
(잠깐 사이. 비행기 편대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엄  마  요샌 비행기들이 더 자주 다니는것 같지?
꽃  분  예.
(하늘을 덮어버리듯 하는 편대음, 엄마는 편지를 만지며 꽃분이는 배를 만지며 하늘을 쳐다본다. 한참……. 엄마가 눈에 손을 댄다. 꽃분이도 눈에 손을 댄다. 꽃분이는 그 자세로 천천히 퇴장한다. 먹쇠가 엄마에게 다가와서 회초리를 내민다. 엄마, 회초리를 받아들고 맥없이 일어나 밭갈이를 시작. 판토마임. 엄마가 기진맥진해서 서서히 졸음에 빠진다. 드디어 고삐를 쥔채 스르르 무너진다. 먹쇠의 전진은 잠시 계속된다. 엄마 손에서 고삐가 빠져 나간다. 먹쇠는 한참 만에야 엄마가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먹쇠, 살금살금 엄마 옆으로 와서 한참 들여다 보더니 관객을 보고 슬프디 슬프게 뫼에…… 그 바람에 엄마가 놀라며 벌떡 일어난다. 먹쇠, 황급히 뫼에 소리를 그치고 엄마를 눕히고 나서 손으로 또닥거리며 재운다. 그러나 먹쇠의 거친 또닥거림 때문에 오히려 엄마가 또 깨어난다. 먹쇠, 매우 조심스럽게 또닥거려주며 다시 잠에 들게 하고는 관객석을 향하여 소리는 안내고 뫼에……. 먹쇠, 혼자서 다시 밭갈이를 하며 낮게 낮게 밭갈이요 가락을 붙여서 뫼에 뫼에…….)
엄  마  (누워서 크게 크게 길게 길게 한숨……)
(엄마의 한숨이 두세번 반복되는 동안 무대가 어두워지면서 엄마만 조명을 받는다. 꿈이다. 오장군이 나타난다. 한참동안 엄마를 내려다 보고 섰다)
오장군  …… 엄마 …… 엄마 …….
엄  마  (천천히 일어나며) 넌 꼭 꿈에만 나타나는구나.
오장군  엄마도 꿈에만 날 찾아오면서…….
엄  마  한번쯤 생시에 찾아올 수도 있잖니.
오장군  몇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군대에선 휴가증이나 외출증 없인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니깐. 꿈 속에서만 아무 증명서 없이 다닐 수 있단 말이야.
엄  마  짜증은 내지 말구…… 저녁은 먹었니?
오장군  지금은 대낮이란 말이야. 엄마는 지금 대낮에 꿈을 꾸고 있단 말이야.
엄  마  참 그렇지.
오장군  (유심히 보고) 엄마, 그동안 많이 늙었구나.
엄  마  니가 떠난 후로는 하루가 1년이란다.
오장군  엄마, 오래 살아야 해.
엄  마  니가 돌아올때 까지만이라도 살아야 할텐데…… 하지만 장군아, 난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할때가 더 많단다. 내가 일찍 죽는만큼 네가 더 오래 살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구 말이야.
오장군  그런 바보같은 생각이 어딨어.
엄  마  하눌님, 정말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죽겠소이다.
오장군  하눌님이 그따위 부탁 들어줄 것 같애?
먹  쇠  (소리만) 뫼에.
오장군  이크, 또 집합이구나, 엄마 잘있어.
엄  마  아니 왜 갑자기 가겠다는 거냐?
오장군  방금 고함소리가 들렸죠? 그거 집합하라는 소리야.
엄  마  인석아, 그건 먹쇠가 우는 소리였어. (하는데 또 먹쇠 울음소리) 봐, 먹쇠 울음소리잖니!
오장군  아아…… 난 큰소리만 들리문 모두 집합하라는 명령인것 같아서 말이야, 히히히……. 어차피 이젠 돌아가야 해요. 엄마 잘있어.
엄  마  얘얘, 꿈속에서까지 뭘 그렇게 서두르니, 천천히 가려마.
오장군  안돼요. 군인에겐 한가하게 얘기할 시간이 없단 말이야.
엄  마  아유, 얘얘……
(엄마, 눈을 감은채 오장군이 사라진 쪽으로 손을 내밀고 한참 서 있다가 스르르 무너져서 잔다. 잠에 빠진채 흐느껴 운다. 무대 밝아진다. 집배원B가 등장한다. 역시 키다리다.)
집배원B 할머니…… 할머니……
엄  마  (깨어나서 집배원을 본다. 이내 무관심해지며 꿈속에선 울던 움음을 계속한다)
집배원B 할머니…… 할머니……
엄  마 (비로소 정신이 들며 집배원을 본다)
집배원B 오장군씨 어머님이시죠? 우체국에서 왔습니다.
엄  마  아유, 우리 아들한테서 편지가 왔구먼.
집배원B 아닙니다. 아드님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엄  마  아들에게요? 아니 누구한테설까? 난 글을 모르니 좀 읽어 주시겠수?
집배원B 그러죠. 징집영장. 제일국민역 오장군 귀하 병역법 몇조에 의하여 현역으로 징집한다. 몇월 몇일 몇시까지 제5지구 집결지에 출두하라. 불응시는 병역법 몇조에 의하여 종신형에 처함. 서기 몇천 몇백 몇십 몇월 며칠 제5지구 모병사령관. 서명.
엄  마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것 같은 소리오만.
집배원B 쉽게 말해서 아드님을 군대로 뽑아 간다는 통집니다.
엄  마  어쩐지! 댁에선 한발 늦었수.
집배원B 늦었다뇨?
엄  마  댁보다 한달이나 먼저 그런 편지를 전하구 가신 나으리가 있었단 말이우.
집배원B 예?
엄  마  혹시 우리 아들이 아직도 훈련소에 안갔을까봐 또 그런 편지를 보냈는진 모르겠소만, 걘 벌써 훈련소로 간지가 한달두 더 됐단 말이우.
집배원B 그럴리가? 아니 그게 정말이십니까?
엄  마  (허리춤에서 편지를 꺼낸다) 못 믿겠으면 이걸 보시오.
집배원B (급히 읽는다) 열두번째 편지. (이하 간간히 소리를 내며) 모두들 안녕히…… 어젯밤에도 고향꿈을…… 어머님은 아직도 밭갈이…… 꽃분이가 우리들의 아이를…… 아래배가 불룩 튀어나와…… 지금부터 불침번이다. (할머니와 편질 번갈아 보다가 편지를 돌려준다)
(클라리넷 연주)
제 8 경 관료지대
(무대에 3각형을 이루며 서있는 관료 A, B, C. 어머니와 꽃분이가 A앞에 서 있다. A, B, C는 모두 무표정한 관료적 포오즈)
관료A  이런 착오의 원인은 오장군이란 이름은 가진 장정이 한 동네에 두사람이나 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엄  마  하지만 얼굴은 영 다르지 않습니까요.
꽃  분  제 약혼자는 황소처럼 몸집이 크고, 오부자님네 아들은 사슴처럼 날씬한걸요.
관료A  우리는 징집영장을 잘못 전달한 집배원을 즉시 파면했습니다. 동시에 제5지구 모병사령부에 이 사실을 통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착오에 대해선 오장군씨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꽃  분  무슨 책임을요?
관료A  그는 왜 남의 징집영장을 받습니까?
엄  마  그야 주니까 받았습죠.
관료A  징집영장 뒷면에 생년월일이 적혀 있습니다. 천 구백 몇년 몇월 며칠이라고. 그것은 오부자 아들인 오장군씨의 생년월일이지 댁의 아드님인 오장군씨의 생년월일이 아닙니다.
엄  마  나으리들께서 아들의 생일은 잘못 적은 줄로만 알았겠습죠.
관료A  지번도 적혀 있었습니다. 124번지는 오부자네 번지고, 할머니네 번지는 124번집니다.
엄  마  ……? 언제부터요?
관료A  …… (어처구니 없다는 뜻의 침묵)……, 아가씨, 할머닐 모시구 모병 사령부에 가보십시오. 소개장을 써드리겠습니다. (메모지를 꺼내서 몇자 적고 봉투에 넣어 건넨다. 엄마와 꽃분이가 B에게로 옮겨가는 것을 지켜 보다가) 오장군이란 이름의 어디가 좋아서 두놈이나 그 이름을 쓴단 말인가.
관료B  우리 모병 사령부가 발부한 두개의 징집영장은 완전무결 했습니다. 우체국에서 그런 얘길 안하던가요?
꾳  분  우체국에선 여길 가보라고 하셨어요. 여기서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구요.
관료B  우리 모병 사령부로선 즉시 군에 잘못 입대한 댁의 아드님에게 징집영장을 반환하도록 요구하는 문서를 발송했습니다. 그것은 댁의 아드님은 오장군씨가 아닌 다른 오장군씨에게 전달되어야 할 영장이니까요.
엄  마  그럼 그 영장과 함께 제 아들도 돌아올까요?
관료B  글쎄요. 우리로선 그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 드릴 입장이 못됩니다. 육군 당국에 소개장을 써 드리죠. (할머니와 꽃분이가 C에게 옮기는 동안) 우리로선 오장군이란 이름은 세사람이 나누어 가졌더라도 상관없어. 생년월일과 지번을 정확하게 기입만 하면 되는거야.
관료C  육군 당국은 이런 착오에 대비하기 위해 장정 집결지에서 인적사항을 재확인 합니다. 조사에 의하면 오장군 이등병은 장정 집결지에서 생년월일과 주소번지를 확인했을 때 한마디의 부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엄  마  (신경질적으로) 제아들은 남이 물으면 무턱대고 예예하는 버릇이 있답니다. 원채 순해 빠져서요.
관료C  우리 육군당국이 잘못한게 없다는 걸 인정하시는 거죠?
꽃  분  우린 다만 그이를 되돌려 주시길 원할 뿐이예요.
관료C  알았습니다. 하지만 남 대신 육군에 잘못 입대 하였다는 사실과 일단 군번을 받은 육군 이등병이라는 사실과는 전연 별개의 문제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오장군씨가 남의 영장으로 입대하였다면 그는 당연히 육군에서 추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행 육군 규정에는 군번을 받은 병사를 남대신 입대하였다는 이유로 제대시키는 절차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곧 새로운 육군 규정을 제정하여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육군 규정을 제정하기 위해선 시일이 필요합니다. 전시라 모두 바쁩니다. 육군 규정 제정위원들이 한자리에 모이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제네랄 최를 아시죠? 제네랄 최를 모르세요! 우리 동쪽나라의 가장 뛰어난 군사 전략갑니다. 그분은, 어제 저녁 며느님이 쌍둥일 낳았다는 전보를 받고도 너무 바빠서 절반 밖에 읽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는 제가 읽어 드렸습니다. 하하하…… (뚝 그리고) 참, 그 문제는 아뭏든 최선을 다해서 신속히 처리하겠습니다.
꽃  분  며칠전에 편지가 왔는데 곧 일선으로 배치될 거라더군요.
엄  마  훈련소로 간지 한달밖에 안됐는데두요.
관료C  일선에서 사상자들이 예상외로 급증하기 때문에 신병훈련기간을 부득이 단축했습니다.
꽃  분  일선으로 가기 전에 처리해주세요.
관료C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엄  마  오오, 장군아 운수 나쁜 장군아, 내 아들아.
(꽃분, 엄마를 한손으로 감싸고 한손으로는 자기 배에 손을 댄다. 엄마를 부축하며 천천히 퇴장)
관료C  오장군, 다섯개의 장군, 다섯개의 별, 파이브 스타아…… (자기 계급장에 손을 대본다)
(클라리넷……)
제9경 일선으로 가는 길
(위장한 장갑차에 앉아 흔들리고 있는 병사들. 길이 험하다. 언덕, 내리막, 시궁창, 자갈길, 병사들은 흔들리며 몰리며 한다)
병사A  운전수! 운전수!
운전병  운전병이라고 불러!
병사A  운전병!
운전병  님을 붙여! 난 일등병이다.
병사A  운전병님!
운전병  왜?
병사A  좀 얌전히 몰아줄 수 없습니까?
운전병  …… (더 거칠게 운전) ……
(병사들, 한참 이리저리 쏠린다)
병사A  오장육부가 다 뒤집혔다.
병사B  엉뎅이가 다 문들어졌다.
병사C  머리속에 자갈이 들어찬것 같다.
(잠시 침묵)
오장군  (졸고 있다가) 소잔등이 젤 편하지.
(한참 더 난폭운전)
운전병  (차를 급정거시키고 내리면서) 모두 내려서 오줌을 싸라.
(병사들 모두 내린다)
병사A  아직 멀었습니까?
운전병  20킬로 남았다.
병사B  어, 오줌이 샛노랗네.
병사C  나두!
(병사들 일제히 거기를 내려다보며 갖가지 포오즈로 오줌을 눈다)
운전병  천천히 한방울도 남기지 말고 싸버려. 최일선에 도착해서 너무 놀라갖고 바지에 흘리지 않도록……
(사이, 멀리 포성)
병  사  어, 포소리가 들린다.
(병사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점점 커지는 포소리)
(클라리넷……)

제10경
동쪽나라 사령관실
(커다란 상황지도. 그 앞에서 정보참모가 브리핑중이다)
정보참모 또한 공중정찰에 의하여 적의 포병부대들이 일제히 10킬로 이상 전방으로 이동하였음을 확인하였을 뿐아니라, 방어진지 구축작업을 중단하고 연일 침투훈련만을 계속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상의 여러 정보자료를 종합 판단컨대 1, 적은 아군이 공세를 취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이 확실하며, 2, 적이 일주일 내에 우리를 공격할 것이 확실하며, 3, 적이 공격할시, 그 주공방향은 제4군단 전면임이 확실합니다.
사령관  으음, 제4군단 담장 지역이야말로 우리들의 최대 취약지역임을 적이 알고 있다니.
정보참모 …….
사령관  작전참모.
작전참모 예.
사령관  (나가서 설명하라고 턱으로 지시)
작전참모 정보참모의 정보판단대로 적이 반격작전을 감행할 것이 확실하다면 아군은 B선으로 철수할 것을 건의합니다. B선에서라면 그 유리한 지형상의 이점이 우세한 적의 전력을 크게 상쇄시켜주리라고 판단합니다.
사령관  현 진출선에서 방어 작전을 펼 때 아군의 손실은 어느 정도일 것으로 예상하는가.
작전참모 2개사단이 소모될 것입니다.
사령관  B선에서 현 위치까지 진출하는데 1개사단 병력이 소모됐다. 우리가 B선으로 철수했다가 다시 현 위치까지 진출하려면 또 다시 1개사단이 소모될 것이다. 게다가 B선에서 방어를 한대도 또 1개 사단은 소모된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현위치에서 2개 사단을 소모하길 원한다.
작전참모 하지만 B선에서 방어하면 현진출선에서 보다 훨씬 더 적의 손실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사령관  난 한번도 전선에서 후퇴한 적이 없다. 아니 꼭 한번 있었지. 지난번 어깨를 부상당했을때…… (어깨를 득썩이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이놈의 어깨 상처는 꼭 암캐의 꼬리같단 말이야. 자기 이름을 부르기가 무섭게 요사를 떨거든…… (단호하게) 현 전선을 고수한다. 지금부터 각급 지휘관에게 후퇴하는 장병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1주일후면 우리 야전군 산하에 2개 신설 보병사단과 1개 기병연대, 그리고 1개 중포병 여단이 추가된다. 그때까지 우리는 현 위치에서 적의 공격을 견디다가 반격으로 전환한다. 정보참모만 남고 해산.
(참모들 나간다. 긴 사이)
사령관  …… 적이 공격작전으로 나오면 우린 일거에 유린당할 거야. 그렇지?
정보참모 …….
사령관  따라서 내 결심은 아주 무모해, 그렇지?
정보참모 …….
사령관  전쟁은 도박이야. 난 지금 도박을 하려는 거야. 도박에선 끗발이 높다구 반드시 이기는 게 아니야. 세끗밖에 안쥔놈이 팔땡쥔놈의 기를 죽이는 수가 있지. (지그시 본다)
정보참모 사령관각하께선 역정보 공작을 암시하고 계십니까?
사령관  맞았네. 적이 우리 능력을 과대평가하도록 역정보 공작을 해서 적으로 하여금 공격계획을 포기하게 하는 거야. 나는 이 역정보 공작의 성공을 전제로 하고 현 전선을 고수하겠다고 결심했던 거야.
정보참모 하지만 역정보 공작이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사령관  성공을 확신하는 것. 승리만을 생각한다는 점에 있어서 도박사와 군인을 서로 닮았지. 더욱이나 이 도박은 밑져야 본전이야. 실패했을 경우에 우리는 단 한명의 역정보 공작원을 잃을 뿐이지.
정보참모 …….
사령관  …… 유능한 정보장교로 하여금 적에게 자연스럽게 붙잡히고 저들이 포로심문을 할때 그럴듯한 거짓 정보를 늘어놓게끔 공작을 꾸미게.
정보참모 알았습니다.
사령관  (어깨를 만지면서 턱으로 나가라고 한다)
정보참모 (나간다)
사령관  전속부관!
(전속부관이 들어온다)
사령관  내 어깨를 주물러줄 병사를 골라봤나?
전속부관 예. 오늘 도착한 신병 가운데에 고릴라처럼 힘이 센 놈이 있었습니다.
사령관  그래! 어서 들여보내게.
전속부관 예. (나간다)
사령관  (어깨를 주무르며 의자에 앉는다)
(오장군 나타난다. 너무 긴장해서 마치 뻗장다리처럼 걷는다)
오장군  (사령관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우뚝 서더니 번개같이 손을 올리고 소리를 질러댄다.) 육군 이등병 오장군, 사령관 각하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려 왔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져서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사령관  음, 이름이 뭐랬지?
오장군  오장군입니다.
사령관  오장군?
오장군  옛!
사령관  음. 오장군이라?
오장군  (오해하고) 옛!
사령관  ……(싱긋 웃고) 이제부턴 큰소리 지르지 않아도 돼. (어깨를 손짓하며) 부탁하네.
오장군  옛. (뻗장다리 걸음으로 사령관 뒤로가서 주무르기 시작한다)
사령관  (대번에 신음소리 낸다. 오장군의 손 기운이 너무 센것이다) 으음 …… 고향이 어딘가?
오장군  까치골입니다.
사령관  가족은?
오장군  엄마뿐입니다.
사령관  보고 싶겠군.
오장군  옛. (코를 훌쩍 들이 마신다. 엄마 생각이 난 것이다.)
사령관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나?
오장군  제가 세상에 태어난지 1년 하고 닷새만입니다. (또 코를 쿨적)
사령관  어머님 나이는 몇인가?
오장군  환갑하구 두살입니다. (목소리가 울먹해진다)
사령관  군인정신이 전혀 안들었군.
오장군  옛.
사령관  (어처구니가 없다. 사이) …… 군대에 들어온 지가 얼마나 됐지?
오장군  한달하구 나흘쨉니다.
사령관  어떤가, 군대생활 해보니.
오장군  …….
사령관  상관이 질문하면, 즉시 명확하게 대답해야 한다.
오장군  …… 무, 무섭습니다.
사령관  뭐가?
오장군  다입니다. 무섭지 않은 것은 하나두 없습니다.
사령관  겁쟁이군.
오장군.  옛.
사령관  (어처구니 없다)…… 너 같은 군인답지 않은 군인은 처음본다. 그만하고 내앞에 서봐.
오장군  옛. (사령관 앞으로 가서 선다)
사령관  (한참 말없이 본다.)
오장군  (부동자세로 잔득 긴장한채 서 있다. 손가락이 긴장을 이기지 못해서 까딱거리고 있다)
(정보참모가 들어온다)
사령관  (오장군에게) 전속부관에게 가 있게.
오장군  옛. (고함) 육군 이등병 오장군 용무 마치고 돌아갑니다. (번개같이 경례를 하고 홱 돌아서- 너무 급히 돌아서 균형을 잃고 휘청이며 나간다)
정보참모 (서류를 내밀며) 역정보공작에 투입할 장교의 인사기록입니다.
사령관  (물리치며) 내가 직접 선발했네. 방금 나간 병사에 대해 귀관은 너무 무관심하더군.
정보참모 그 병사를…….
사령관  영감을 주는 얼굴이야. 그 얼굴을 보는 동안 난 또 하나의 도박을 생각해냈다. 아니, 이건 도박이랄 수도 없지. 아무리 유능하고 강직한 정보장교를 역정보 공작에 투입하다고 해도 위험율은 매우 높다, 적의 정보장교들도 바보는 아닐테니까……. 그 병사로 하여금 자신이 역정보 공작에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채 적에게 포로가 되도록 꾸미는 거야. 이제부터 참모회의 때마다 그 병사는 내 어깨를 주무르면서 나와 함께 브리핑을 받게 된다. 물론 그 브리핑 내용은 모두 거짓이지. 그 거짓 브리핑 내용은 그 병사가 적에게 포로가 되었을때 고스란히 적에게 제공되는 거야. (정보참모를 지그시 본다)
(클라니넷……)
제11경
동쪽나라 사령관실
(사령관과 정모참모, 수색중대장이 그들 앞에 서 있다.)
사령관  적은 공격을 앞두고 아군에 대한 보다 광범하고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아군 장병을 사로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다. 수색 중대장은 적의 관측소에서 잘 보이는 곳에 그 겁쟁이 병사를 팽개쳐 놓고 돌아 오기만 하는 되는 거다.
중대장  그곳에 혼자 남겨놓고 오면 도망할텐데요.
사령관 도망하는데도 최소한의 용기는 필요한 거다. 또 다른 질문은?
중대장  없습니다.
사령관  그럼 그 병사를 불러들일 테니까. 시나리오 대로 잘해보세. 전속부관. 오장군 이등병을 들여보내게.
전속부관 (밖에서) 옛.
사령관  정보참모는 눈에 안 띄는게 좋겠군.
정보참모 예.
(정보참모가 퇴장하고 오장군이 들어온다)
오장군  육군 이등병 오장군, 사령관 각하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러 왔습니다.
(오장군, 여전히 뻗장다리 걸음으로 사령관에게로. 중대장은 오장군을 착잡한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다. 오장군은 사령관에게 다가가면서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한다. 준비운동인 것이다.)
사령관  오늘은 잠깐만 주물러도 돼. 너무 힘도 주지 말고.
오장군  옛.
(긴 사이)
사령관  오늘 아침두 배부르게 먹었나?
오장군  옛, 3인분 먹었습니다.
(긴 사이)
사령관  어젯밤에도 고향꿈을 꾸었나?
오장군  아닙니다. 어젯밤엔 꾸지 못했습니다. 그대신 오늘 아침 고향에서 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사령관  음 기뻤겠군.
오장군  (대답 대신 콧소리를 쉬익 낸다……) 그런데 각하, 그 편지에 이 육군 이등병 오장군이 같은 동네에 사는 오부자네 아들인 오장군 대신 군에 잘못 들어왔다고 씌어 있는 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사령관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오장군  예. (순하게 수긍하며) 저도 무슨 뜻인지 통 모르겠습니다, 각하.
(긴 사이)
사령관  (수색중대장에게) 참 수색중대장, 어제 수색작전에서 몇명이나 잃었지?
중대장  전사 5명, 부상자 11명입니다.
사령관  으음.
(사이)
사령관  오장군 이등병.
오장군  옛.
사령관  매일같이 많은 장병들이 최일선에서 죽고 다치고 하는데 자네가 하는 일이란 내 어깨를 주무르는 것뿐이니 민망하지 않나?
오장군  옛 각하. 하지만 전 총 쏠줄 모르니까 어깨나 주무르고 있어야 합니다. 전 총을 쏘려는 생각만해도 가슴이 막 두근거립니다. 그래서 훈련소에선 사격훈련할 때마다 교관님들이나 조교님들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신같은 놈아, 총알이 아깝다!>
(긴 사이)
사령관  수색중대장, 이 병사를 수색중대에 데려다가 군인답게 단련시켜 줘야겠네.
오장군  (흠칫 놀란다)
중대장  각하, 수색중대엔 당장 제몫을 할 수 있는 용감하고 기민한 병사가 필요합니다. 저런 겁쟁이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사령관  (막으면서) 오해말게. 수색중대에 아주 전속시키겠다는게 아니구, 당분간만 맡아서 군인다운 담력을 길러줬으면 하는 거야. 최일선에서 고생한 적이 없는 병사에게 내 어깨를 주무르게 하는 것도 불만이구.
중대장  알았습니다.
사령관  오장군 이등병두 방금 내가 한말 들었겠지?
오장군  (울상) 옛 각하. (소리가 들릴락말락)
사령관  (중대장에게) 그만 돌아가도 좋아.
중대장  옛, 저 겁쟁이는 언제 보내시겠습니까?
사령관  지금 데려가도록 하게.
중대장  알았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경례하고, 오장군에게) 날 따라와.
오장군  (중대장을 빤히 보며 사령관의 어깨를 마구 주물러대고 있다. 사령관의 결심이 변경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사령관  (비로소 오장군을 되돌아보며) 따라가기 싫은가?
오장군  (울상) 예, 각하.
사령관  겁내지 말구 따라가. 중대장은 아마 너에게 위험한 임무는 주지 않을 거다. 넌 내게로 다시 돌아와서 내 어깨를 주물러야 할 병사니까.
오장군  (그냥 계속 주물러 댄다)
(사이)
사령관  (거역할 수 없는, 냉엄한 낮은 음성으로) 그만해.
오장군  (멈칫)
사령관  …… 따라가.
(오장군, 비참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중대장에게로 간다.)
사령관  (부드럽게) 다시 불러들일거야. 잘가게 오장군 이등병.
오장군  (울먹이며) …… 안녕히 계십시오 각하. (하며 돌아선다)
사령관  오장군 이등병, 경례하는 걸 잊었어.
오장군  (급히 돌아서서 경례를 붙인다)
사령관  (받는다)
(오장군과 중대장 퇴장. 사령관, 잠시 오장군이 사라진 쪽에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정보참모가 들어온다. 사령관 뒤에 겸손하게 서서 함께 오장군이 사라진 쪽을 본다. 사이.)
사령관  …… 나를 감상적으로 만든 유일한 병사야. 나는 여지껏 수만 명을 죽이고 부상시켰는데……. 저 병사 더러 내 어깨를 좀 더 주무르게 내 버려둘걸 그랬어.
정보참모 ……
(사이)
사령관  (무표정하게, 마치 억양이 없는 어조르 글을 읽듯이) 저 병사를 다시 불러와, 저 병사를 다시 불러와. (정보참모를 돌아보며) 움직이면 안돼!
(클라리넷……)
제12경 숲(A)
(어둠속에서 고함소리가 들린다)
중대장  (소리) 선임하사관, 저 겁쟁이를 전초진지에 데려다가 팽개치고 와, 거기서 혼자 밤을 새노라면 담력이 조금은 길러질거야.
상  사  (소리만) 옛. 가자, 이 밥통아!
(무대 약간 밝아진다. 이상한 숲. 상사와 오장군이 관객쪽을 향해 엎드려 있다.)
상  사  날이 밝으면 널 다시 데리러 올테다. 그럼 떠나기 전에 임무 및 주의사항을 일러주겠다. 1, 앞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거나 뭐가 나타나면 즉시 <암호>, 대답이 없으면 그냥 갈겨버려. 앞쪽에서라는 걸 잊지마, 뒷쪽은 아군이니까. 알았나 밥통아!
오장군  옛.
상  사 2, 절대로 담배를 피지 말것. 담배불은 4킬로 밖에서도 보인다. 그런데 적은 2킬로 전방에 있다. 알았나 밥통아!
오장군  예.
상  사  3. 이하는 생략이다. (오장군의 어깨를 툭 치면서) 그럼 내일 새벽에 다시 만나자. (포복하면서 되돌아 가다가) 참, 암호를 안 가르쳐줬군. 오늘밤 암호는 <아가씨>, <궁뎅이>다. 아가씨, 궁뎅이, 한번 외어봐, 밥통아.
오장군  아가씨, 궁뎅이.
상  사  다시 한번.
오장군  아가씨, 궁뎅이.
상  사  밥통새끼! 간다 그럼. (포복해서 되돌아가다가 말고 갑자기 엉덩이를 들며) 어우우! 쌍놈의 암호 때문이야! (남근이 아픈 것이다)
(상사가 퇴장한 한참후까지도 오장군은 그냥 떨고만 있다. 갑자기 괴조를 연상시키는 높고 긴 새소리.
사이.
여우소리.
사이.
부엉이소리.
사이.
사자소리.
사이.
마지막으로, 이때까지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주 귀엽고 명랑한 방울새 소리. 긴 사이.)
오장군  (비로소 꿈지락거리며 담배를 꺼낸다) 참, 아까 상사님이 담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갸우뚱하다가 포기하고 담배불을 붙인다)
(그순간, 전방에서 소리가 들리면서 서쪽나라의 포병관측소가 라이트속에 나타난다.)
관측A  적 발견, 좌표, 지도C의 2445 1256.
관측B  잠깐. 적을 발견시는 먼저 정보참모부에 보고하라는 명령이야. (하며 수화기를 들고 보고하는 몸짓)
(서쪽나라 관측장교B가 수화기를 드는 순간에, 상사, 수색중대장, 정보참모, 사령관이 라이트 속에 나타난다.)
상  사  저 밥통새끼, 절대로 담배는 피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는데.
사령관  (죽여버릴듯한 표정으로 홱 돌아보고 나서) 만약 저 담뱃불 때문에 오장군 이등병이 포격을 받아 죽으면 (손가락으로 세번 격발 흉내를 내면서) …… 너희들도 모두 죽어야 한다.
관측B  (수화기를 놓으며) 정보참모부에 맡기라는군.
(오장군은 여전히 떨며 담배를 뻐끔거리고 있다. 긴 사이)
사령관  졸고 있는 모양이군, (큰소리로 셋을 돌아보며) 적의 포병 관측소놈들이 말이야……. (담배를 꺼내문다. 정보참모가 재빨리 불을 붙여준다)
(긴사이. 오장군의 전방에서 나무 다섯그루가 살금 살금 걸어온다. 오장군, 한참동안 모르고 있다가 기척을 느끼고 굳어 버린다. 나무들도 멈춰선다. 사이)
오장군  …… (낮게, 떨며) 아, 아가씨!
나무A  (음산한 쉰 목소리로) 궁뎅이!
오장군  (흠칫하며 두리번거린다) …… 분명히 대답소리가 들렸는데……
(사이. 오장군 다시 담배불을 붙이려한다. 나무들이 다시 움직인다. 오장군, 또 기척을 느끼고 굳어진다. 나무들 멈춘다. 사이.)
오장군  …… 아가씨이 ……
나무A  궁뎅이 (이번에는 가날픈 여성의 목소리) ……
오장군  (흠칫하며 두리번거린다)
(사이. 오장군, 벌벌 떨며 담배를 빤다. 나무A가 느닷없이 오장군의 총을 밟아 서고 B, C, D, E가 오장군을 둘러싼다. 오장군은 너무 놀라서 소리도 못내고 그냥 멀거니 올려다볼 뿐이다. 나무B의 기둥속에서 손이 불쑥 나오더니 담배를 빼앗는다. 오장군, 나무B를 멀거니 올려다 본다. 나무C의 기둥에서 손이 불쑥 나오더니 오장군의 오른 뺨을 갈긴다. 오장군, 그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나무E가 발길로 걷어 차려다가 나무A에게 제지당한다.)
나무A  그만해!
(나무A, 쓰고 있던 나무를 벗어버린다. 서쪽나라 정보장교이다. 나무B에서는 중사, 나무C에서는 하사, 나무D에서는 병장 나무E에서는 상병이 나온다.)
오장군  누, 누굽니까 댁들은?
중  사  궁뎅이랬잖아!
모  두  (웃는다)
정보장교 몸을 수색해!
중  사  예, 일어서!
오장군  ……
상  병  일어서랬잖아, 이 새끼야! (하며 발길로 걷어찬다)
오장군  (스프링이 튕기듯 벌떡 일어선다)
(B, C, D, E가 와락 달려들어서 몸을 뒤지기 시작한다. 매우 재빠르고 치밀하고 능숙하다. 오장군을 꺼꾸로 세워서 긴 자루털듯 털어보기까지 한다. 검색을 끝낸 그들은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장교, 끌고가라는 몸짓.)
상  병  (발길로 걷어차며) 가자.
(오장군, 상병의 총구에 밀리며 간다. 동쪽나라 사령관 일행은 처음부터 망원경으로 보고 있다.)
사령관  잔인무도한 놈들! 양보다도 순한 병사를 저렇게 거칠게 다루다니! (억양이 없는 어조로)
(전속부관이 헌병을 대동하고 급히 등장)
전속부관 각하! 그놈은 사기입대자입니다.
사령관  (망원경을 떼며) ……?
전속부관 오장군 이등병말입니다. (헌병에게) 체포영장을 읽어드려.
헌  병  (읽는다) 체포영장. 계급 이등병, 군번 024378596, 성명 오장군, 상기자를 타인의 명의를 도용, 육군에 사기 입대한 혐의로 체포함. 소속 부대장은 즉시 상기자를 임무에서 해제하고 본 체포영장을 제시하는 헌병에게 그 신병을 인도할 것. 몇년 몇월 몇일. 육군 총사령관명에 의하여, 군법회의 검찰관, 서명.
(사이. 사령관, 모두를 돌아본다)
전속부관 ……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놈은 너무 어리석고 너무 순진하고 너무 정직하고 너무 겁장이였습니다.
정보참모 그리고 보니 놈은 오히려 대담무쌍한 놈이었습니다. 아까 숲에서 태연히 담배를 피워댄 것을 보아도…… 놈은 적이 침투시킨 첩보공작원임에 틀림없습니다. 담배불은 사전에 약속한 귀환신호였습니다.
헌  병  각하, 혐의자로 하여금 즉시 임무에서 해제하고 그 신병을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령관  (갑자기 폭소를 터뜨린다) 하하하…… 이제야 알겠군, 오늘 아침 오장군 이등병이 말한 얘기의 뜻을…… 하하하……
(클라리넷……)
제13경
서쪽나라 포로 심문실
(정보장교와 오장군이 조그마한 책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있다. 사병들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
정보장교 심문에 앞서 너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네가 만약 나의 질문에 거짓 대답을 했을때는 지금부터 벌어지는 광경과 꼭 같은 고통을 당할 것이다. (사병들에게 눈짓)
(중사가 공중에서 내려온 밧줄을 잡아 당기자 바닥에 누워 있던 인형 군인이 그 줄을 따라 올라가서 허공에 거꾸로 뜬다. 하사가 몽둥이를 들고와서 그 인형을 갈긴다. 인형이 얻어맞을 때마다 병장과 상병이 인형 군인의 비명을 대신 해준다. 인형은 얻어맞을 때마다 맑은 종소리를 낸다.)
정보장교 그만! …… (냉냉하게) 알겠나?
오장군  (겁에 질려서 대답 대신 침을 꿀꺽 삼킨다)
정보장교 좋아, 그럼 시작하겠다. 군번은?
오장군  (빨리 대답하려고 덤비는 나머지 더듬대며) 024 (뚝그치고) 024 (또 뚝 그치고 당황한다. 겁에 질려서 잊어먹은 것이다. 허공에 매어달린 인형을 흘끔거리며) 024…… 378576……
정보장교 …… 이름은?
오장군  오, 오장군입니다.
정보장교 ……? 오장군이야, 아니면 오 오장군이야?
오장군  오, 오장군 아니 오…… 오…… 오장군입니다.
정보장교 요컨대, 오장군이란 말인가?
오장군  예.
정보장교 군에 들어오기 전에 뭘했지?
오장군  감자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정보장교 농부란 말이지?
오장군  예.
정보장교 현재 소속은?
오장군  제5야전군 사령부 직할 수색중대 1소대 1분댑니다.
정보장교 현 소속 전입일자는?
오장군  오늘입니다.
정보장교 오늘? 그전 소속은?
오장군  제5야전군 사령부 사령관실입니다.
정보장교 (놀란다) …… 다시 말해봐.
오장군  제5야전군 사령부 사령관실입니다.
(정보장교, 벌떡 일어난다. 그바람에 오장군도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선다. 정보장교, 구석으로 가서 손짓으로 중사를 부른다)
정보장교 (속삭이듯) 정보참모님에게 가서 우선 중간 보고를 하고 와야겠다. (급히 나간다)
(중사, 서 있는 오장군을 콱 눌러 앉힌다. 오장군 겁에 질린 시선으로 들리면서 무대가 다시 밝아진다. 정보장교 이하 전원이 무대 바깥쪽을 향해 차렷자세로 서 있다. 서쪽나라 사령관이 참모들을 대동하고 들어온다. 그들의 뒤에서 사병들이 의자를 하나씩 들고 들어와서 사령과과 참모들의 뒤에다 받쳐준다. 사병들 나간다. 사이)
사령관  결론만 간단히 말해.
정보장교 옛. 포로 심문결과, 우리는 적의 전투력을 실제보다 엄청나게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차아트를 넘기고) 이것은 아군이 지금까지 파악한 적의 전투력과 포로심문결과 밝혀진 적의 실제 전투력과의 비교표입니다. 보시는 바와같이 아군 전면의 적은 3개 보병사단과 1개 포병여단 뿐인줄 알았는데, 4개보병사단과 1개 기병사단, 2개 포병여단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모두 웅성거린다. 차아트를 넘기며) 이것이 포로심문결과 추가로 확인된 적의 전투서열입니다.
(사이)
정보장교 질문을 받겠습니다.
참모A  포로의 진술내용에 대한 신빙도는 어느 정도인가?
정보참모 포로는 군사지식이 전혀없는 무식한 농부 출신의 신병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듣고 본 사실을 과장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저능한 기억력으로 인하여 실제로 보고 들은것 중에서 빠뜨린 것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사령관  대위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돼지같이 미련하게 생긴놈이야. 대위, 참모들에게도 그 병사를 보여주는게 좋겠다.
정보장교 옛.
(정보장교, 무대옆으로 나간다. 참모들 주시한다. 정보장교가 다시 오고, 뒤이어 오장군이 어마어마하고 호위당하며 들어온다. 오장군은 겁에 먹혀버려서 쭉정이가 됐다. 안정을 잃은 눈이 참모들을 퀭하니 바라본다. 사령관, 손짓으로 퇴장시키라고 지시한다. 오장군 일행이 나가자 사령관이 일어선다.)
사령관  우리는 하마터면 적의 계략에 빠질 뻔했다. 적은 그들의 전투력을 우리가 과소하게 평가하게끔 교묘하게 속여왔다. 적은 우리가 그들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방어진지 구축을 소홀히 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적은 우리가 공격을 취하도록 유인, 전투력을 소모시키고 적당한 시기에 일대 반격으로 전환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 공격계획을 취소한다. 각 단위대는 즉시 현위치에서 방어계획을 수립함과 동시에 방어진지 구축에 전력을 다할 것을 명령한다.
(참모들 기립한다. 사령관 나간다. 참모들 뒤따라 나간다)
(클라리넷……)
제14경
서쪽나라 포로심문실과 총 살 형 장
(어둠속에서 오장군의 비명소리. 때리는 소리…… 무대 밝아진다. 오장군이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받고 있다. 사령관이 들어온다. 뒤에 참모A가 따라 들어온다.)
사령관  그처어! (모두 차렷자세) 어서 내려놔!
(매달렸던 오장군이 재빨리 내리어진다. 오장군, 뻗어버린다.)
사령관  (정보장교에게 다가가서 말채찍으로 마구 갈겨대고 나서) 쓰레기 같은 놈! 넌 이 장교에 비하면 발톱의 때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안드나! 어서 의자로 모셔!
(정보장교, 중사와 함께 오장군을 재빨리 안아 일으켜서 의자에 앉히고나서 양쪽에서 받쳐준다. 긴 사이. 기절했던 오장군이 정신을 차린다. 사령관이 손수 물주전자에서 물을 따라준다. 오장군, 그것을 순하게 받아 마시더니 갑자기 엉엉 울어댄다.)
사령관  …… 이제 연기는 그만하지. 귀관의 임무는 끝났으니까. 귀관 덕분에 적은 시간을 벌었고 우리는 공격할 기회를 놓쳤네…… 귀관의 진술이 거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에야 알았지…… 제발, 이제 연기는 그만하라니까 …… 귀관의 진자 이름은 뭐며 진짜 계급은?
(오장군 더 크게 엉엉 소리를 낸다. 그는 똑같은 질문에 너무 시달려 이젠 그냥 울음이 앞서는 것이다.)
사령관  (한참동안 감탄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참모A를 구석으로 데리고가서) …… 그에게서 무엇이든 알아내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여섯시 정각에 총살을 집행하도록.
참모A  예.
사령관  단, 총살집행때 사령부 전병장을 집합시켜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게 할 것.
참모A  예.
(사령관 퇴장. 참모들이 뒤따른다. 무대 그 상태에서 정리되고 총살대가 정렬하고 들어온다. 헌병들이 그때까지도 울고 있는 오장군을 부축해서 나무 기둥에 붙들어맨다. 헌병장교, 검은 수건으로 그의 눈을 가린다.)
헌병장교 ……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
오장군  (하늘을 향해서 혼신의 힘으로) 엄마야…… 꽃분아…… 먹쇠야……
(긴사이. 헌병장교, 사령관을 본다. 사령관, 그대로 집행하라고 손짓.)
헌병장교 사격준비!
오장군  (또다시 혼신의 힘으로) 엄마야…… 꽃분아…… 먹쇠야…
헌병장교 사격!
(일제사격. 오장군, 머리를 떨군다.)
사령관 (참모A를 돌아보며) 그는 죽음까지도 연기로 장식했다. (흉내) 엄마야아, 꽃분아아…… 아무리 무식한 시골뜨기라도 그보다 더 시골뜨기를 닮을 수는 없을거야.
(사령관, 오장군에게 경례를 한다. 모두 그를 따른다.)
(구음과 클라리넷의 합창)
제 15 경
오장군의 집 마당
(영현 하사관이 유골상자를 들고 들어온다. 그 앞에 엄마와 꽃분이와 먹쇠.)
영현하사관 (전사통지서를 읽는다) 나, 동쪽나라 제5야전군 사령관은 더할 수 없는 슬픔으로 육군일등병 오장군의 장렬한 정사를 통지합니다. 오장군 일등병은 그 애국심과 군인정신에 있어서 온 동쪽 나라 군인의 으뜸이었습니다. 오장군 일등병이 남긴 유언은 단 한마디 <동쪽나라 만세에!>였습니다.
엄  마 아니 그럼 내 아들 장군이가 이 속에 들어가 있단 말이오?
영  현 아드님의 시신은 적지에 있기 때문에 모실 수가 없습니다. 그대신 일선에 나가기 전에 깎아 두었던 머리카락과 손톱을 넣어가지고 왔습니다.
엄  마 (유골상자의 뚜껑을 열어본다) …… (그속을 들여다 보는 자세대로 움직이지 않고) 오오 장군아, 내 아들아아…….
꽃  분  (배를 만지면서 꼿꼿이 선채) 장군아아, 우리 애기 아빠야아…….
먹  쇠  (하늘을 쳐다보며 숨이 다할때까지 길게 길게) 뫼에에에에…….
(감자밭과 우물가에 서있던 나무들이 운구하는 의장벼의 발걸음을 흉내내면서 마당으로 들어선다. 먹쇠는 길고 긴 곡성을 반봅하면서 마치 상주인양 나무들을 맞이하고 엄마와 꽃분이를 달래듯 하는 못짓을 하기도 한다.)
(구음이 시작된다. 한순간, 클라리넷이 한결 높게 끼어든다. 그것을 신호로 모든 동작이 정지된다. 클라리넷의 신호에 따라 무대가 어두워진다.
칠흑…….
클라리넷 주자와 구음자가 의자를 등에 메고 무대를 가로지른다.
무대 중앙에 서서 칠흑을 잠시 보고, 동정을 구하듯 관객석을 쳐다 본다. 두사람, 다시 천천히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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