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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화학

애석하게도또는 희한하게도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은 기억이 없다중고등학교 시절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도 읽었으니아마 그 중간에 끼어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도 읽었을 것 같지만내 기억엔 없다그래도 그녀의 소설에서 자주 쓰인 범죄의 방식에 대해선 대충 안다바로 독살!

 

독약을 이용한 살인을 소재로 삼는 것은 상당히 위험 부담이 크다왜냐하면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들이 꽤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그 독약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어떤 증상을 나타내는지어떻게 검출하는지어떻게 해독하는지 등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이는 함부로 쓰지(writing) 못할 것 같다애거서 크리스티가 그런 독약을 이용한 살인 방식을 자주 기술했다는 것은그녀가 그에 관해서 상당히 많이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관련 분야에 종사했으며또 소설을 쓰면서도 꽤 공부를 했다모든 독약에 대해서 완벽하게 쓴 것은 아니지만추리소설의 여왕답게 상당히 엄밀성을 가지고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어떤 경우엔 그녀의 추리소설이 실제 범죄에 아이디어를 주었다고 비난을 받을 만큼.

 

화학자이자 애거서 크리스티 덕후인 캐스린 하쿠프가 쓴 『죽이는 화학』은애거서 크리스티가 소설 속에서 사용한 독약 14가지를 소재로 삼고 있다잘 알려진 독약들인 비소나청산가리독미나리아편리신 같은 것에서 벨라도나디기탈리스메세린바꽃니코틴스트리크닌탈륨베로날을 포함한다(‘잘 알려진이란 내가 좀더 알고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독약계(?)에선 이 모두가 유명한 모양이다). 대부분 식물에서 추출한 알칼로이드 계열의 화학 물질인 이 독약들은 때로는 신경 반응을 지나치게 활성화하거나혹은 신경 반응을 저지하거나 하면서 사람을 죽인다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해독제로 사용되기도 하고이 많은 독약들이 한때는또는 지금도 약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약으로 사용될 수 있는 이 물질들이 독약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인간의 욕망과 비뚤어진 심성이 얄팍하거나 심오한 화학 지식과 결합했을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알 수 있다애거서 크리스티는 그 욕망과 심성을 독약과 잘 결합했던 셈이다.

 




모든 독약에 대한 설명은 거의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해당 독약을 이용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간단히 소개한 후 그 물질에 대해서 설명한다어디서 온 것인지어떤 원리로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지그래서 어떻게 약으로 쓰일 수 있으며또 어떻게 독약이 되는지그리고 그에 대한 해독 방법에 대해서도 소개한다실제로 그 독약과 관련해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소개하고다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로 돌아온다특이한 것은단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범인을 밝히지도 않고범인을 찾아낸 결정적 단서를 이야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직접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으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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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은 척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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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으면서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의식하고 있었다이야기는 악()을 목격하고 괴로워하는 주인공을 다루고 있지만결국 악은 척결되지 않을 것이란 예감그리고 그 예감은 맞아떨어졌다내 예상보다도 더 파국적으로정유정의 『종의 기원』보다도 더 충격적으로정유정의 『종의 기원』에서 악인(惡人)은 악인으로 남았으며 단죄 받지 않을 뿐이었다박지리는 악이 단죄 받지 않을 뿐더러 악이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우뚝 서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이 비관적 세계관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다.

 

2.

세 가족이 있다아버지들은 친구였다완벽하다고 여겨졌지만열여섯의 나이에 살해된 제이 헌터와 낙오자가 될 것 같았지만 그의 죽음 이후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어 문교부 차관 자리에까지 오른 니스 영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 버즈 마샬제이 헌터의 조카 루미 헌터와 니스 영의 아들 다윈 영버즈 마샬의 아들 레오 마샬은 제이 헌터가 죽은 나이인 열여섯이 된다다윈 영과 레오 마샬은 누구나 선망하며 창창한 앞길을 보장하는 프라임스쿨의 학생이고루미 헌터는 프라임스쿨에 대응될 만한 프리메라 여학교의 학생이다제이 헌터는 프라임스쿨에 합격했지만 친구들과 놀기 위해 입학을 포기하면서(실제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지만신화적인 인물이 되었고버브 마샬은 프라임스쿨이라는 숨막힌 기숙학교가 싫어 일부러 시험을 망쳤다고 했다(역시 실제는 그렇지 않았지만). 니스 영은 프라임스쿨은 꿈도 꾸지 못할 성적이었다모두 자신의 선택과 관련해서는 비밀을 간직한 인물들이었고관계는 대를 이어가며 이어진다.

 

3. 아이들의 현재가 아버지에게서 이어지듯아버지들의 과거와 현재도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왔다비극은 그들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다혹은 그렇게 믿는다그들 아버지에게서 온 비극도 사실은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리라그렇다면 악의 기원의 종의 기원처럼 정말로 아주 오래 전 인류가 하나의 종()으로 확립되면서부터이지 않을까아니 생명의 기원부터?

너무 많이 나갔다어쨌든 제목은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이다다윈 영이라는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인물이 어떻게 악을 받아들이고, ‘완벽한’ 인간이 되는지를 그렸다마치 악을 품지 않고서는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처럼진실 찾는 걸 포기해야만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4.

박지리가 그린 세상은 기이하다. 1지구에서 9지구까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는 사회다상위 지구로 올라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각 지구마다 역할이 구분되어 있다철저한 신분 사회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맞는 것이며그렇게 함으로써 안전이 유지되고사회가 발전한다고 믿는다적어도 1지구의 사람들은그런데 다른 지구 인물들도 아마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하다사회의 혼란은 60년 전 12월의 폭동이 마지막이었다. 60년의 안정이런 불평등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고 그린 것 자체가 작가의 사회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다.

 

5.

우리나라 작가가 등장인물로 한국인(또는 한국인 이름을 갖는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는다는 점 역시 특이하다가상의 세계이고세계가 하나의 나라로 가정되어 있으니지금의 상황으로 봐서 당연히 미국식 이름이 통용되고 있으리라는 가정이리라그럼에도 불구하고일단은 독특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프라임스쿨이 원래는 수도원 건물이었다는 점이나 여러 분위기는 유럽의 어느 도시를 상상하게 하지만그래도 작가는 외국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먼 곳을 가리키는 듯 하지만 그건 속임수다누구라도 알 수 있는 속임수작가는 분명히 이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이 사회의 구조를 가장 억압적인 양상으로 비틀면서도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구조를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6.

박지리라는 작가가 그린 세계와 인물들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으면서도 소설에 빠져들었다뻔한 권선징악또는 뻔한 파멸이 아니라 여운을 가질 수 있었다예감은 했지만만일 그런 권선징악또는 파멸의 소설이었다면 마음은 편했을지 모르지만 이 소설을 금방 잊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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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읽으며 적어둔 문구들

박지리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문구들을 적어 두었다그 문구들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며 메모한 건데글세… 이 문장들도 박지리라는 소설가가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이라는 소설을 쓰면서 생각한그리고 원래부터의 그녀의 생각을 드러낸 것일 거다하지만 옳음보다 그름을 남겨둔 소설의 결말을 생각하면

 

루미야그건 어린아이들이 꾸는 하룻밤의 몽상일 뿐이란다갖고 놀던 장난감이 지루해 발로 부수어서 재조립하는 것과 비슷하지아이들은 잠깐씩 그래도 돼어차피 금방 꿈에서 깰 테니하지만 나이를 먹고도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단다이 완벽한 세상을 바꾸려 한다면 그건 용서할 수 없는 반란이고 폭동이니……. (213)

 

이 세계를 생각하고의심하고판단할 줄 아는 진정한 인간” (241)

 

『종의 기원』이 첫 번째에 있어야 모든 순서가 바로 잡히는 기분이 들거든.”

제목만으로도 완벽한 책이니까종의 기원이라니꼭 이 세상 모든 질문의 해답이 되는 문구 같지 않니?” (346)

 

진실의 가치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그것이 내가 믿는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진실이다.”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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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 철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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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와 철학’. 조금은 연결짓는 게 낯선 이 조합이 로제 폴 드루아는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전제하고전개하고또 결론짓는다.

 

드루아는 걷기특히 인간이라는 종()의 단독파생형질인 두발로 걷기란 매우 불안정한 것이어서 일단은 추락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본다그러나 인간은 그 추락을 저지하고혹은 추락을 저지하기 위해서 재빨리 다음 발을 앞으로 내밀고다시 추락의 위기에서 다시 한 발을 내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인간이 안정적인 자세에 만족했다면 이 불안정한 두 발로 걷기라는 놀라운 발명품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과학적 설명은 좀 다를 수 있다).

철학도 다를 바 없다는 게 드루아의 주장이다철학 역시 영혼의 평온을 거부하고문제를 끄집어 내는 데서 시작된다질문을 하며그것이 옳은지그른지를 따진다그렇게 비틀거리다가 자세를 바로잡지만다시 질문을 던지며 비틀거린다그렇게 정신은 앞으로 나아간다그렇게 걷기와 철학은 서로 은유한다.

 

걷기와 관련된많은 철학자들을 소개한다.

어떤 철학자는 정말 걷기와 철학하기를 거의 동일선상에 놓았던 철학자도 있다이를테면아리스토텔레서나 칸트티야나의 아폴로니우스루소니체 같은 이들이다그들의 철학을 걷기로 이해할 수 있는 철학자도 있다이를테면 붓다도 그렇고데카르트도 그렇고헤겔도 그렇다마르크스도 빼놓을 수 없다.

직접적 관련성을 갖거나은유적으로 관련성을 갖거나 할 것 없이 드루아의 관점에서는 철학하는 것은 걷는 것이다앞으로 걷는 것여기서 앞으로가 중요하다는 것은 소로에 대한 글에서 나타난다드루아는 소로의 걷기가 퇴행이라고 규정한다문화 밖으로문화에 맞선 걷는 것야생으로 들어가기 위해 걷는 것그리고 그것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지독하고 위험한 악취를 풍긴다고 쓴다드루아는 이른바 진보를 믿는다믿는다기 보다는 걷는다는 것의 본질은 빠르거나 느리거나 비틀거리거나 바른 자세이거나 모두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그런 면에서 철학도뒤를 돌아볼지언정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칸트에 관한 중요한 에피소드가 문득 끼어든다.

그런데 어느 날기계가 고장 났다칸트가 여정을 바꾼 것이다그가 정신을 딴 데 판 것도 아니고아픈 것도 아니었다. ... 이날그는 급히 신문을 사러 가야 했던 것이다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고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보편적 선언이 선포되었으며민중이 공화 체제를 쟁취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151)

칸트의 걷기를 멈춘 그것그것은 또 다른 걷기였던 것이다역사의 걸음.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음악을 듣지 않으면서 걷는다매일매일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걸으며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연구 주제를 생각하며논문을 어떻게 써야 할 지를 구상한다내일은 누구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 지 가늠해보기도 한다이런 걸 철학이라고 할 수 없을 지 모르지만그래도 걷는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생각하는 것을 조금만 넓히면 철학이다.




걷는다는 것은 철학하는 것이다이제 그다지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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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

지금 박지리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앞에 두고 있다.

한 페이지도 읽지 않고저자의 약력부터 본다.

 

박지리

1985년 생스물다섯의 나이에 『합체』로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수항하며 등단독특한 글쓰기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주목받고 있다그동안 쓴 작품으로 『합체』『맨홀』『양춘단 대학 탐방기』가 있다.

 

나는 박지리라는 작가를 모른다분명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따왔음에 분명한 소설 제목이 이끌려서 책을 골랐을 뿐이다혹은 역시 ()’의 끝간 데를 그린 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의식했을까?

언뜻 요절했다는 얘기를 들었다요절(夭折). 참 오랜만에 떠올린 단어다그래 요절. 1985년 생 소설가가 2016혹은 2017년에 죽었다면 요절이다다른 직업의 사람이라면 쓰지 않을 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요절한 천재(이 말을 써야 요절의 의미가 더 분명해질 것 같다작가의 마지막 소설인 셈이다. 856쪽의 분량도 어떤 운명을 느끼게도 한다무엇이 적혀 있을지 궁금하다.






(정보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쓰고, 수정 없이 업로드했다.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확인해보니,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이 아니라 <맨홀>이 마지막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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