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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동을 기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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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처.PNG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최승자는
내가 워낙 좋아하는 시인이다.
 
아득한 그 시절
80년대 시인의 시 <삼십세>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는 직핍의 언어로 시작된다.

90년대 중반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만큼이나
유명세를 탔던 시다.
 
당시 여류 시인들이 즐겨 차용하던
여린 감수성에 매달리지 않고
도발적 감각과 자유분방한 언어로 여성시와 남성시의 경계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는 평가를 받던 분이다.
 
그토록이나 유명하던 바로 그 시인이
얼마전 
가족도 없이 3평짜리 고시원을 전전하다가
정신분열증에 시달린다는
충격적인 기사를 접하고 나는 그만 멘붕에 빠졌다.

그 시절
하늘의 별처럼 빛나던 시인이 어쩌다가
이렇게도 궁핍하고
이다지도 험난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
진정 가슴 아픈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가 되어 살고 계시다는데
이 겨울은 어떻게 지내시나?
문득
혹독하게 망가진 시인의 모습이 어둠 속을
망령처럼 부유하던 밤
불면의 밤을 다독이면서
시인의 시들을 찾아 읽고 또 읽었다.
 
그대
아직도 추억할만한 청파동이 남아 있는지
아무도 그립지 않는 것도 죄라는 듯
시인은 진지하게 묻는다.

사랑이란 감정이 영원하지 않듯이
사랑이 머물렀던 장소 또한 
일회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어디, 시인의 청파동 뿐이겠는가
영화의 경우 예외적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장소는 언제나 일시적이다.
겨우 추억으로만 기억될 뿐.

그래서 특별한 어떤 장소라 하더라도
저마다 전혀 다른 색깔과 의미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청파동은 내게도 묵직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동네다.

불쑥 어딘가에 비명처럼 숨어 있던 기억들이
바스락 깨어난다.
한때는 고통이자 아픔이던 기억들마저

그럴듯한 추억으로.

유난히도 긴 여름 해가 이울도록

당신을 기다리고 서 있던 골목길 입구
당신은 그때

내가 속한 세계의 전부였는데,

간절함도 없이 
혀 끝에 굴려보는 당신의 이름은
왜 이렇게 낯선지
...... .
 
거듭 시인의 쾌유를 빌면서
뚜벅뚜벅
희미한 추억의 골목길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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