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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나라 ~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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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수나라 ~ 당나라


양귀비

   당현종의 사랑인

   양귀비는 실은 그의 18번째 아들인 수왕(壽王)의 세자비로 궁에 들어왔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세력가인 숙부 양현교의 양녀로 자랐습니다.

   재기넘치고 풍만한 미녀로 세자비로 들어온

   그녀는 마침 아내 '무혜비'를 잃고 외로워 하던 현종의 마음을 흔든 것이지요.

   740년 양귀비가 21세때, 54세이던 현종은 그녀를 수왕의 품에서 떼어냈고,

   6년 후 그녀에게 '귀비'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정식 황후는 아니었지만 그와 맞먹는 것이었죠.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고개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의 스캔들이지만

   사실 옛날 중국에는 별 이상한 일이 많았습니다.

   왕들은 10세도 안된 소년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고,

   남매지간의 혼인도 빈번했습니다.

   '터부'란 문화마다 다르게 마련이지요.  

   물론 이들의 사랑은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황제의 뜻이라면'하는 분위기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현종은 양귀비를 "말하는 꽃"이라며  애지중지 했다는 데,

   33살이나  어린 여성을 보면 대부분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양귀비가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양귀비의 친척들은 모두 고관대작에 오르며 천하를 호령하게 됩니다.

   6촌 오빠인 '양소'라는 이는 현종으로부터 '국충'이라는 이름을  받아

   재상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현종이 나라 일을 등한히하고,

   양국충이 현종의 양아들이었던 安祿山과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결국 756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나라를 망쳐 먹은 여자,

   양귀비는 명주천을 꼬아 만든 줄로 목이 졸려 죽는 액살(縊殺)형에 처해집니다.

   물론 이 명령을 내린 것은 안록산의 종용을 받은 현종이었죠.  

   '美人薄命'이란 말도 여기서 생긴 겁니다.

   여자가 예쁘면 이사람  저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그러다 보면  '팔자'가 사나워 진다는 게 옛날 우리 어른들의 생각이었죠.

   '미인은 복이 없다' 일직 죽는다'도 바로 '조용한 현모양처'를  바라는

   가부장적 심리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양귀비가 궁에 들어온 것이 16세때, 혹 이때 바로 사랑에 빠졌다면 그의 나이 49세.

  그리고 그녀가 죽은 것이 37세니까,  둘의 사랑은 21년이 유지된 거지요.

  그 기간 동안 두 사람의 사랑은 식지 않은 것은 물론 황제가 장안 재탈환한 후에도,

  영혼과의 사랑이 이어졌다고 전해집니다.

  현종은 남은 생애 내내 양귀비의 그림을 보면서 아침 저녁으로 눈물을 흘렸다는 데,

  현종은 꽤나 로맨티스트였던 것 같습니다.


  황제와 양귀비가 사랑을 나눴던 침향

  중국의 무장가 중의 하나인 백거이 (白居易)는 '장한가'라는 애절한 한시,

  진홍(陳鴻)은 '장한가전'이란  이야기를 남겨 후대에 전해집니다.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우리가 죽어 하늘나라로 가면 비익조가 될 것이요/

  이 땅에 영원히 살며 연리지가  됩시다.

  비익조는 암컷, 수것이 날개가 하나씩이라 언제나 함께 날아 다니 는 새,

  연리지는 두 나무의 가지가 하나로 합쳐진 것을 말하죠.

  결혼식장중에 '연리지예식홀'이라는 곳이 있는데,

  두 단어 모두 영원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장한가가 발표 되자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싯구를 외우는 것이 일대 유행이었다지요.


안록산의 난

  

   ① 돌궐 제국의 멸망과 위구르 제국의 성립

     

      8세기 중엽 몽고초원에서는 돌궐제국이 위구르 부족에 의해 멸망하고

      이로 인해 당의 체제는 위기가 심화됐다.

    741년 돌궐제국에서는 샤드(Shad: 돌궐의 제2관등)인

   오즈미시(Ozmish)가 텡그리 카간을 살해하고 카간(Qagan, 可汗)으로 즉위했다.

   이는 돌궐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즈미시가 카간 자리를 찬탈하자 돌궐의 지배층은 742년 당에 대규모 망명했다.
     바스밀 부족, 카를룩 부족, 위구르는

   오즈미시를 카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744년 오즈미시는 바스밀 부족에게 죽음을 당했고 그의 머리는 당으로 보내졌다.

   이제 세 부족 중 어느 부족이 초원의 지배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다.

   위구르가 카를룩 부족의 도움을 얻어 바스밀을 격파하고

   위구르 부족장인 쿠틀룩 보일라(骨力裵羅)가 745년 카간이 됐다.

   그의 칭호는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이었다.

   위구르제국은 13세기에 몽고족이 징기스칸에 의해 통일돼 이 지역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할 때까지 중국 문화권과 대결한 마지막 투르크계 국가였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위구르는 흉노족의 먼 후예다.

   이는 위구르족이 흉노 공주와 이리의 교합으로 생겨났다는

   민족 기원설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위구르족은 북위시대에는 고거(高車), 수나라 때는 위홀(韋紇),

   당나라 때는 회흘(回紇) 또는 회골(回?),

   송과 원나라 시대에는 외오아(畏吾兒)라 불렸다.

   당나라 때에 명칭이 회흘에서 회골로 바뀐 것은

   위구르의 카간이 788년 당의 덕종(德宗, 재위 779~805)에게 요구한 때문인데,

   회골은 빠르기가 매와 같다는 뜻을 가진다.

   위구르의 초기 역사에 대해 알려진 지식은

   그들이 5세기 후반 철륵(鐵勒) 부족연맹의 일원이었다는 정도다.

   위구르는 돌궐제국 시대에도 독립된 부족 형태로 셀렝가 강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위구르는 중국과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돌궐과는 적대적 관계였다.  
     그러다가 7세기 초 철륵 부족연맹이 와해되자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했다.

   처음에는 6부족으로 구성된 설연타(薛延陀, Tardus) 연합에 참여했다가,

   곧 부고, 동라(同羅), 바이르쿠 등 다섯 부족과 연대해 위구르 연합을 구성했다. 
     부족장들은 ‘에르킨’(Erki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5만의 군을 보유했다.

   당 태종은 629년 위구르의 독립을 인정했고,

   이 해에 위구르 사신이 장안에 와서 조공을 했다.

   당 태종의 기습공격으로 제1 돌궐제국이 무너진

   630년 무렵 위구르는 부족장 테현 에르킨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의 사후 아들 보살(菩薩)이 에르킨 자리를 이었는데,

   설연타의 지도자 이난(夷南)과 연대해 5천의 기병으로

   돌궐 실리 카간의 아들이 지휘하는 동돌궐군을 패퇴시켰다.

   이후 위구르 부족장은 에르킨 대신 ‘일 테베르’(Il-teber)란 칭호를 썼으며, 
     설연타를 공격해 소멸시켰다.

   당 고종의 고구려 원정에 참전하기도 했던

   위구르는 680년대 초에 부흥한 돌궐제국에 복속됐다.

   제2 돌궐제국의 붕괴는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돌궐제국이라는 체제 속에서 느슨하게 연결돼 있던 투르크족 연합은 와해되고

   다시 이합집산이 시작됐다.

    위구르제국 내에 머무른 부족도 있었으나,

    많은 투르크계 부족들이 서아시아나 남러시아 초원지대로 이주해

    다수의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국가를 건설했다.

    일부는 발해 영내로 이동, 발해의 주민이 됐다.

    또한 당으로 남하한 유목민도 많았는데 안록산이 이들을 휘하에 두어 세력이 커졌다.

 ② 당의 체제 모순 심화

    유목세계의 정세변화는 당 내부의 위기와 결합되면서 끝내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다. 
      당 현종의 치세는 ‘개원의 치’(開元之治)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의 전성기로 칭송을 받고 있다.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이 시대에 활약했고

    李思訓, 왕유(王維) 등이 중국 회화에서 산수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당 왕조가 갖는 국제적 성격의 표현으로 신라, 발해, 일본 등

    동아시아 제국 사람들이 건너와 당의 선진문물을 배워 갔다.

    서방과의 교류도 활발해 당의 문화에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넘쳤다.

    인구를 보더라도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전 해인 754년에는 당 왕조를 통해서

    가장 많은 호구수 920만에 인구 5,280만여 명이었다.

    그러나 두보가 “주작문에는 술과 고기냄새가 진동하는데,

    길에는 얼어죽은 뼈가 널려 있네”라고 읊었듯이

    이 번영의 뒤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호구수는 많았으나 정남(丁男: 21세부터 59세까지의 서민 남자)이 차지하는 비율은
      기형적으로 적었다.

    정남은 조용조(租庸調)와 군역을 부담하는 사람들로

    이들이야말로 국가를 지탱하는 근본이었다.

    국가에 의해 파악돼 호적에 들어 있으면서도

    조용조 등의 의무가 없는 자를 불과구(不課口),

    불과구만 있는 집을 불과호(不課戶)라 불렀다.

    법적으로 불과구로 인정받는 자는 관료, 20세 이하이거나 60세 이상의 남자,  
      신체장애자, 일반 여성, 천민신분의 부곡(部曲)? 객녀(客女) ? 노비 등이었다.

    755년의 인구통계를 보면 891만 호 가운데 약 356만 호가 불과호로 40%를 차지했다. 
      인구로 보면 5,292만 가운데 84%가 불과구였다.

    인구의 태반은 여자이므로 불과구의 비율이 50% 정도 되는 것이 정상이었는데,

    이 정도로 높은 것은 정남이 되기를 회피하는 사회현실의 반영이었다.

    농민들이 호적을 작성할 때 정남을 제대로 기재하지 않아 불과구가 많았다.

    이보다 심각한 것이 도호(逃戶) 문제였다.

    중국 역대 왕조가 파악하는 인구는 언제나 실제와 괴리가 있었다.

    이미 7세기 말부터 도호가 급증하였는데 현종 때에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당 중기의 관료이자 학자인 두우(杜佑)는 중국 역대 제도의 연혁을 기술한

    명저 ??통전??(通典)에서

    754년의 실제 호구수를 적어도 1,300만에서 1,400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도호였던 셈이다.

    불과호와 도호의 급증은 국가 재정수입에 타격을 주고 부병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더구나 주변국가들의 성장으로 변경 방위체제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처음 당의 변경 방위체제는 부병이 변경에 근무하는 양식으로,

    방인(防人)이 소규모 병력으로 편성된 진(鎭) ? 수(戍)가 변경을 따라  
      점재(點在)하고 위에서 도호부(都護府)가 통괄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기미정책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당은 630년 돌궐을, 646년 설연타를 무너뜨린 뒤

    막남(고비사막 남쪽)지역의 투르크계 유목민을 기미 지배하고 있었다.

    680년대 초 돌궐제국이 부흥한 후에도 이들은 그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 지역의 유목부족 추장들은 당의 관직을 가지고 자신의 부족민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당에 봉사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부족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의 부병제가 붕괴되면서

    막남 지역의 투르크계 유목부족이 당의 군사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 커졌다.

    주변 민족의 성장과 과도한 군역 부담으로 7세기 말이 되자

    당 초기의 변경 방어체제인 진?수제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 진?수제와 별도로 수천 명 혹은 그 이상으로 구성되는

    군진(軍鎭)을 변경에 배치해 변경 방위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했다.

    그러나 군진도 열악한 근무조건으로 탈영병이 늘고 부유한 집의 병역기피가 만연해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당 조정은 710년부터 군진을 통할하는 번진(藩鎭)을 설치하고

    그 최고지휘자로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서북변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가 두어진 것이 처음이었다. 
      이것은 당의 변경 방위체제가 도호부에서 번진제도로 이행했음을 말한다.

    733년에는 변방지역에 9명의 절도사와 1명의 경략사(經略使)를 두게 됐다.

    개원 25년(737)에는 장정건아(長征健兒)로 불리는

    직업적 용병제도가 실시돼 병농일치의 부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다.

    모병제는 이전에도 있었으나 이때 전면 실시됐다.

    이후 모병에서 유목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모병제 실시로 변경에 주둔한 병사들에게 곡물과 의복을 지급해야 했으므로

    이전에 비해 군사비 부담이 막대해졌다.

    문관이 점차 절도사 부임을 회피하자 전국 번진의 절도사는 모두 무관으로 바뀌고,  
      계속되는 중앙의 부패와 사치로 각 번진의 군사비조차 내려 보낼 수 없게 됐다.

    결국 각 번진의 경비는 절도사 개인의 능력에 일임돼

    무신 절도사의 번진 내 권력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은 국초 이래 이민족 출신을 병사와 장교로 기용했으나

    고위직은 여간해서 주지 않았다.

    지방의 군정을 책임지는 절도사는 모두가 한인(漢人)이었다.

    그러나 당 현종 대에는 이민족 출신 무장을 대대적으로 고위직에 기용했다.

    당의 기미지배를 받는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위협받거나 견제를 받으면

    반발해 이탈하는 일이 많았는데, 당 현종 대의 국방정책으로 그 위험성이 커졌다. 


 ③ 안록산의 반란

    현종 대의 재상 이임보(李林甫)는 이민족 출신 무장을 절도사로 기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그의 당파적 이익과도 관련이 있었다.

    첫째, 이들은 당시 당쟁에 휘말려 있던 한인 무장과 달리 당파의 후원이 없었으므로 
      조종?통제가 용이한 측면이 있었다.

    둘째, 한인 무장이 공을 세워 재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빈천하고 문맹인 이민족 출신 무장이 절도사가 되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변경에 주둔하는 병사 중 유목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으므로

    이민족 출신을 절도사로 임명해야 병력동원이 용이했다.

    742년 무렵 변경 10개 번진의 총병력은 약 49만이었고 전투마는 약 8만여 두였다. 
     이에 비해 좌우 우림군(羽林軍)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 방위군은 10만이 못 됐다.

    이민족 출신 절도사 가운데 안록산(安祿山)의 세력이 급격히 커졌다.

    안록산은 이란 계통인 소그드인을 아버지로,

    돌궐 여자를 어머니로 한 혼혈 이민족으로 평로(平盧)의 영주(營州)에서 태어났다.  
      안록산의 심복인 사사명(史思明) 역시 돌궐 계통의 혼혈 이민족으로

    안록산과 고향이 같다.

    이 지방에는 여러 이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둘 다 이민족의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
      이들은 평로절도사 장규수(張守珪)의 인정을 받아 장교가 됐으며,

    특히 안록산은 장규수의 가자(假子)가 됐다.

    가자란 가문의 계승자가 없을 경우 두는 양자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주인이 가부(假父)가 되어 뛰어난 부하를 자신과

    보다 긴밀하게 결탁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가부?가자 관계는 주종적 결합이었다.  

    장규수 사후 안록산은 이임보에 의해 742년 평로절도사로 임명됐다.

    현종과 이임보의 신임을 받은 안록산은 744년에는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를, 
      751년에는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까지 겸임해 세 번진을 장악했다.

    그 휘하의 병사는 18만으로 변경 방위병력의 약 37%를 차지했다.

    게다가 절도사 재임기간은 대개 2년이었으나,

    안록산은 3개 절도사직을 각각 14년, 12년, 5년간 유지했다.

    안록산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사적인 주종관계도 만들었다.

    천보 10년(751)에는 항복한 동라(同羅: 투르크계 부족)와 해(奚)?거란족 8천여 명을 
      예락하(曳落下)라 이름 붙여 가자(假子)로 삼아 특별히 우대했다.

    예락하는 ‘남자답다’라는 뜻의 돌궐어 또는 경장병(輕裝兵)이라는 뜻의

    소그드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752년 이임보가 죽고 양귀비의 인척인 양국충(楊國忠)이 재상이 되자

    안록산의 권세에 위기가 왔다.

    양국충이 안록산을 견제하자 결국 안록산은 반란을 일으켰다.

    안록산이 처음부터 반란을 일으키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강화한 것인지, 아니면 양국충으로부터 강한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현종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양귀비 등을 거느리고

    장안의 동쪽에 있는 온천지에 소재한 화청궁에 가 연말까지 체류하는 것이 상례였다.  
      천보(天寶) 14년(755) 11월 갑자일(甲子日, 9일)

    안록산은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그 예하 군대와 동라?거란?해?실위(室韋)등 
      이민족 군대 15만을 이끌고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안록산의 군대는 기병한 지 10일도 되지 않아 박릉(博陵)을 점령했다.

    당시 당 왕조측에는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

    수도 장안에 있던 우림군의 병사는 장안 상인의 자식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상인의 국가부담을 합법적으로 피하기 위해 병적에 들어왔을 뿐

    훈련은 전혀 받지 않았다.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던 이들은 무기를 다룰 줄도 몰랐다.

    당 현종은 안록산의 아들인 안경종(安慶宗)을 참하고,

    11월 21일 안서절도사 봉상청(封常淸)을 안록산 대신 범양?평로 절도사로 임명하고,
      서민 중에서 급히 모병해 토벌군의 제1진으로 낙양을 향하게 했다.

    또한 영왕(榮王) 이인(李璘)을 정토군 원수로, 고구려 출신으로

    서역 원정에 뛰어난 전공을 세웠던 고선지(高仙芝)를 부원수로 임명했다.

    고선지는 12월 2일 새로 모집한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출발했다.

    고선지는 장안과 낙양 사이에 있는 섬주(陝州)에 주둔했다.

    12월 3일 황하를 건넌 안록산 군은 낙양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고,

    12월 13일 반란을 일으킨 지 30여 일 만에

    봉상청 부대를 대패시키고 낙양을 점령했다.

    당의 군대는 훈련을 받지 않은 무리였으므로 전투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봉상청은 살아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패주해 섬주의 고선지 군과 합류해

    장안으로 통하는 관문인 동관(潼關)을 수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고선지와 봉상청은 변영성(邊令誠)의 모함을 받아 참수됐다.


    한편 투르크계 유목민이 주축인 삭방군(朔方軍)은 안록산 휘하의 
      대동병마사(大同兵馬使) 고수엄(高秀嚴)과 설충의(薛忠義)의 공격을 막아냈고,

    이에 안록산은 원주지로 귀환했다.

    이듬해인 천보 15년(756) 정월 안록산은 제위에 오르고 연호를 성무(聖武),

    국호를 대연(大燕)이라 했다.

    이 무렵 발해는 안록산이 당에 대한 공격이 여의치 않을 경우

    동쪽으로 자신을 공격해 올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대비해 당에서 보다 멀리 떨어진 상경(上京)으로 수도를 옮겼다.

    당 조정은 이민족 출신으로 농우?하서절도사(?右河西節度使)를 겸하고 있던
      가서한(哥舒翰)을 새로이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가 이전부터 안록산과 경쟁관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도

    등용의 중요한 이유였다.

    가서한의 부대와 안록산은 천보 15년(756) 1월 이래 동관에서 반년 가까이 대치했다.

    양국충은 수비 위주로 작전을 펴는 가서한을 의심,

    안록산에게 동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양국충은 군사징집을 위해 시간을 얻자는 가서한의 의견을 묵살하고,

    삭방군과 동시에 범양을 공격하자는 삭방절도사 곽자의(郭子義)의 의견을 수용했다. 
      곽자의가 이끄는 삭방군은 5월에 사사명의 군대에 승리했다.

    이에 고무된 현종과 양국충은 가서한에게 출병을 재촉했다.

    천보 15년(756) 6월 4일 가서한은 동관을 나와 안록산 군을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동관도 함락됐다.

    이에 따라 당의 방어선이 무너져 장안의 방어가 불가능해졌다.

    반란군이 장안으로 진격하자 현종은 사천(四川)지역으로 도망하고 장안은 함락됐다. 
      달아난 현종을 대신해 황태자가 7월 갑자일에 군신의 추대로 제위에 오르니,

    그가 숙종(肅宗, 재위 756~762)이다. 연호는 지덕(至德)이라 했다.

    동관의 당군이 대패하고 장안이 함락되자

    하서지역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당의 지배에서 이탈?독립하려 했다.

    동라부족도 이에 동참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당에게도, 안록산에게도, 위구르에게도 심각한 문제였다.

    8월 위구르와 토번(吐藩)은 당에 사신을 파견해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당은 토번의 제의를 물리치고 위구르와의 연합을 선택했다.

    이 무렵 당의 평로유후사(平盧留後事) 서귀도(徐歸道)는 과의도위(果毅都尉)
      장원윤(張元潤)을 발해에 보내 안록산을 치는 데 도와달라고 하면서

    발해의 기병 4만을 파병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발해는 서귀도의 진의를 의심해 장원윤을 구금했다.

    위구르와 당의 연합군은 11월 신유일(辛酉日) 투르크와 동라를 대파해

    3만을 참수하고 1만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위구르는 돌궐의 부흥을 막을 수 있었다.

    서귀도는 발해가 의심한 대로 12월 안록산과 내통했다.

    발해는 안록산의 난에는 개입하지 않기로 하고 요동 방면으로 세력을 뻗쳐
     목저주(木底州)와 현도주(玄?州) 등을 병합했다.

    태자하(太子河) 상류에 위치한 목저주는 발해의 서경 압록부인

    국내성(國內城)에서 태자하 계곡을 따라 요동평야로 나가는 길목이다.

    현도주는 고구려 때의 현도성으로 지금의 무순(撫順) 부근이다.

    한편 757년에 들어서면서 안록산측의 상황도 급변했다.

    장자인 안경서(安慶緖)는 이복동생에게 상속권이 돌아가자

    757년 정월 안록산을 독살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연호는 재초(載初)로 고쳤다.

    이후 안경서는 당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위해

    장통유(張通儒)와 안수충(安守忠)을 장안에, 사사명을 범양에,

    우정개(牛廷?)를 안양(安陽)에, 장지충(張志忠)을 정형(井?)에 주둔시킨 다음 
      각지에서 모병(募兵)을 했다. 4월에는 당군을 격파했다.

 ④ 위구르의 당 원조

    당은 위구르와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에 파병을 요청했다

    (당은 압바스 왕조와 751년 탈라스전투를 벌였으나 다음해부터 계속 교류했다). 
      압바스의 할리파인 알 만수르(al-Mansur)는 군사 2만을 파병했다.

    위구르의 카를룩 카간(재위 747~759)은

    자신의 아들인 타르두슈 울룩 빌게 야브구와 함께 4천의 기병을 파병했다.

    숙종의 장자이며 연합군 사령관인 광평왕(廣平王) 이숙(李?)은

    빌게 야브구와 형제의 맹약을 했고,

    장안을 회복한다면 토지와 사서(士庶)를 제외한

    금백(金帛)과 자녀(子女)를 모두 위구르가 취하게 한다는 약속까지 했다.

     9월 임인일(壬寅日) 연합군 20만이 안경서의 반군을 협공해 6만을 참수하는

    대승을 거두고 장안을 회복했다.

    장안은 해(奚)족을 주축으로 하는 10만의 반군이 지키고 있었으나,

    이들은 평소에 위구르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쉽게 격파됐다.

    반란군을 추격한 연합군은 10월에 신점(新店)에서 다시 패주시켰고,

    계속 추적해 10만 이상을 참수하는 전과를 거두며 낙양을 수복했다.

    위구르는 3일 동안 낙양을 대규모로 약탈했고 중국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758년 당은 위구르의 요청대로 숙종의 딸 영국공주(寧國公主)를 카를룩 카간에게 
      화번공주(和蕃公主)로 보내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 해에 발해에 일본 사신이 와서 신라 협공을 제안했다.

    당이 내란을 겪고 있으므로 신라를 원조하지 못할 것을 알고 제안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후지와라 가문의 후지와라 노나카마로(藤原仲麻呂)가 막 집권한 때였다.
      노나카마로는 경덕왕 18년(759) 6월 행군식을 거행하고

    9월에는 병선 5백 척 건조를 명령하였다.

    이어 경덕왕 19년(760)에는 수도사인(授刀舍人) 등 6인을 대재부(大宰府)에 보내어
      제갈량의 팔진도와 손자병법을 익히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소년 20명에게

    신라어를 익히게 하는 등 762년 말까지 전국적으로 군사 동원 체제를 정비했다.

    노나카마로의 신라 정벌계획은 전시체제로 이행하여

    반대파를 누르려는 구실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고구려?백제 유민의 책동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사실 신라와 경제적 교류가 활발했던

    일본으로서는 신라를 공격할 이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전쟁 준비가 한창이던 760년 신라 사신 김정권(金貞卷) 일행이 일본에 왔으나
      대재부에서 귀환시키거나 억류하지 않은 것도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려 했는지 의심이 가는 일이다.

    사실상의 정변으로 자신이 지지한 왕자 순인(淳仁)을 천황으로 즉위시킨   
      노나카마로는 일본 내의 반대파로부터의 반격에 더 신경을 써야할 처지였다.

    아무튼 안록산의 난으로

    당이 주변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환경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장안과 낙양을 잃은 안경서는 업(?)으로 후퇴했다.

    758년 9월 곽자의가 지휘하는 20만의 군이 업으로 진격했고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젊은 시절부터 안록산과 행동을 같이한 사사명은 이때 13만의 군대를 거느려
      안경서보다 세력이 훨씬 컸다.

    사사명은 안경서를 구하려 군대를 파견했고,

    759년 3월에는 안경서에게 양위를 받고 그를 죽였다.

    이 반란군은 장안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으나,

    사사명은 내분으로 761년 3월 아들인 사조의(史朝義)에게 교살당했다.

    사조의가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현성(顯聖)이라 했다.

    759년 4월 위구르에서는 카를룩 카간이 사망하고

    그 아들인 타르두슈 울룩 빌게 야브구가 즉위하니,

    그가 뵈귀 카간(재위 759~780)이다.

    관례에 따라 위구르에서는 카간의 배우자인 영국공주를 순장하려 했는데,

    공주는 이를 거부하고 얼굴을 자해하고 곡을 하는 것으로 조의를 표했다.

    영국공주는 당의 조문사절 이통(李通)과 함께 8월에 장안으로 귀환했다.

    위구르의 풍습으로는 영국공주는 계승자인 뵈귀 카간과 다시 결혼해야 했다.

    이것을 무시하고 전례 없이 화번공주가 귀국하자 위구르와 당의 관계는 멀어졌다. 
      위구르와 당의 교역도 중지됐다.

    762년 4월 숙종이 사망하고 광평왕 이숙이 즉위하니

    그가 대종(代宗, 재위 762~ 779)이다.

    대종은 사조의 토벌군을 일으키면서 위구르를 설득하려

    유청담(劉淸澹)을 사신으로 보냈다.

    뵈귀 카간이 사조의의 제안을 받아들여 당을 공격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당은 또한 발해에도 사신을 보내 발해 왕을 군왕(郡王)에서

    국왕(國王)으로 인정하여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이는 발해를 독립 국가로 승인한 것이므로 발해로서는 큰 소득이었다.

    이에 발해는 신라 공격을 포기하고 10월 사신을 일본에 보내 이를 통보했다.

    8월에 유청담은 세폐(歲幣)를 제공할 것을 제안하면서 설득하려 했으나,

    뵈귀 카간은 그에게 모욕을 주어 쫓아 버렸다.

    조정으로 돌아온 유청담은 뵈귀 카간이 병력 10만을 이끌고 내려온다고 보고해

    당의 조정을 소란스럽게 했다.

    실제로 뵈귀 카간은 장정 4천, 노소 부녀자 1만여 명,

    전마 4만 필을 이끌고 남하했다.

    뵈귀 카간이 황하 북방에 주둔하고 있을 때,

    대종의 장자이자 당의 토벌군 대원수인 옹왕(雍王) 이괄(李适)이 그를 맞으러 갔다.
      카간은 자신과 대종이 형제의 맹약을 맺은 일을 강조하면서

    옹왕은 조카가 되니 절을 하고 춤을 출 것을 요구했고,

    이에 항의하는 당의 관리 약자앙(藥子?)을 매질해 죽였다.

    이 일은 당에게 아주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됐고 두 나라 군의 갈등을 초래했다. 
      또한 후일 황제가 된 옹왕, 즉 덕종(德宗)이 위구르와의 화친을 거부하고

    토번과 손을 잡게 된 주요 동기가 됐다.

    우여곡절 끝에 뵈귀 카간을 설득한 당은 사조의 군을 대파했다.

    10월 낙양에 입성한 위구르군은 과거처럼 약탈과 살육을 했는데,

    ??신당서??에 따르면 학살을 피해 성선사(聖善寺)와 백마사(白馬寺)로 들어간

    주민들을 불태워 만여 명을 죽였을 정도로 잔혹했다.

    사조의는 달아나다가 763년 정월 안록산의 장수였던

    범양절도사 이회선(李懷仙)에게 죽음을 당했다.

    사조의의 부장들도 모두 당에 귀순해 안사의 난은 종식됐다.

    안록산의 난으로 당의 기미 지배체제는 완전히 와해됐고

    발해와 위구르는 세력을 신장시켰다.

    특히 위구르는 유목세계에서 경쟁자였던 카를룩과 키르기즈 등을 제압해

    위상이 확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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