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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 -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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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 - 터키
[중국의 동북정공의 음모와 한국의 고구려 - 삼국사에 보이는 두서없는 관심]

'터키'하면 형제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떠오르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리어지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6.25 때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4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이 전사했다고.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전사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그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건 궁극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른다. 우리가 코리아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역사를 배웠다면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같은 우랄 알타이 계통이었던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원래, 나라와 나라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고있다. 즉,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형제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점 하나.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리고 터키인들은 왜 아직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까? 답은 간단하다. 역사 교과서의 차이다. 우리나라의 중,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돌궐이 이동해 터키가 됐다느니 훈족이 이동해 헝가리가 됐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무하다.

터키는 다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이며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하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을 사랑한다. 설령 한국이 그들을 몰라줄지라도. 실제로 터키인들은 한국인들 역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들도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칭하며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88 서울 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다. 충격을 받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 자국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한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이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다.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그들의 한국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자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다.

우리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터키가 형제의 나라가 된 궁극적인 이유를 모르면 KBS의 어느 아나운서가 패널이었던 터키인에게 '아우님'이라 불렀던 어리석은 짓도 가능한 것이다. 형제는 '형과 동생'을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형제는 곧 친구며 우방이니까.

터키의 언어에는 순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참 많다. 말뿐 아니라 음식, 문화, 습성, 국민정서 (터키인 우월주의에, 감정적 다혈질이면서 반대로 다정다감하고, 거나하게 놀기 좋아하고, 어쩜 그렇게 성질 급한 것까지..)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다.

유럽인치고는 흔하지 않게 몽고반점도 있다. 과거 돌궐(투르크 => 터키)과 고구려는 그냥 우방이 아니라, 이와 잇몸 같은 관계였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와 결혼을 하였을 정도니까.

고구려 멸망 후 돌궐도 망했으며 서쪽으로 옮겨 서돌궐을 건국하게 된다. 서돌궐이 훗날 오스만 제국. 그리고 터키가 된다. 혈통이 고구려와 혼혈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서 돌궐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돌궐의 위치 때문이 아니였나 생각된다. 사서에는 고구려와 돌궐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당시 돌궐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은 고구려의 영토가 중앙아시아, 즉 실크로드(서안) 부근까지 그 영토를 확보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돌궐은 만주 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힌 적도 없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와 한반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앙 아시아 까지(돌궐과 맞닿은), 매우 방대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터키'라는 나라는 과거 청동기시대인 배달국, 고조선, 부여 시대에는 동이족에 속해 있다가 고구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고구려가 부여를 정벌하자 그곳에 살던 원주민(예맥 동이족)들이 요하를 건너가 이루게된 민족이다.

돌궐족은 중국의 대부분을 수나라가 통일하자 고구려와 돌궐은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수나라의 침략을 받아 요서지방은 수나라에 점령되고 돌궐은 서쪽으로 쫓겨나게 되는데 그들이 서쪽으로 이주해 정착하여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건설하였고, 아랍과 발칸반도를 지배하며 강성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9세기 중반부터 쇠퇴하면서 주변의 영토를 잃고(소수민족 모두 독립) 지금에 터키만 남게 된 것이다.

같은 우랄-알타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는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을 사용했고, 터키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언어는 전혀 다르게 발전하게 된다.

유전학이나 인류학적으로도 터키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몇개 안되는 북방계 몽골리언국가(몽고, 한국, 일본, 에스키모, 인디언) 중 하나로, 헝가리 와 함께 북방계 몽골리언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는 유럽국가이다.

터키인은 '코리아'의 어원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영문표기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다. 대단한 형제사랑인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도 같은 민족인데 어째서 한국과 형제인 터키가 6.25 때 남한편에만 병력을 파병했을까..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큼이나 아르메니아인들과 터키는 견원지간이다. 아니, 원수지간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것이다. 과거 아르메니아인(오스만 기독교인들)들이 터키인(투르크 이슬람교도)에게 대학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과거 오스만터키에서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하면서 쇠약해진 국력과 맞물린 굴절된 민족주의로 말미암아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죽임을 당하는 1차 대학살의 참사가 벌어진다.

유럽으로 남진하려하는 러시아의 힘을 얻어 루마니아와 세르비아가 독립을 하게되고 오스만터키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셈이 되자 이에 분노한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와 붙어먹은 아르메인들을 표적으로 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을 감행한거다.

1차 대학살 20년후 또 다시 오스만터키 정부의 도움을 받은 투르크 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인 5만명에 대학살을 자행한다. (2차대학살) 게다가 정부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 외 175만명을 추가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추방하고 그 추방하는 과정에 60만명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1894년~1915년까지 250만명이였던 아르메니아인은 30만명만이 살아남게 된다.

그후 1912년 발칸전쟁 때 몬테니그로, 불가리아, 그리스가 오스만터키에서 독립할 때도 알게모르게 러시아가 개입하여 아르메니아인을 도와준다.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하기 때문에 당연히 터키는 그 반대 쪽인 남한에만 병력을 파견한 거다.

물론 당시의 국제적 역학관계상 미국이 국제적 외톨이 신세인 터키에게 우호적인 관계로 자국의 실리와 국제적 이득을 노린 어쩔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범주에서 바라본다면, 터키가 2차 세계대전 때 우리의 동맹국 중의 하나였던 이유가 필연적으로 러시아와 적대 관계일 수 밖에 없는 과거사 때문에 터키에겐 명분이 자연스러웠다.

형제의 나라..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후 터키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다.

이런 관계를 지닌, 자기 나라로부터 수백만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의리와 애정을 받는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중국 동북정공 획책속에 고구려 역사에 두서없이 보이는 한국의 냄비근성을 보며 생각해 보았다.
노란장미(ones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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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님께 ...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 - 터키"의 글에 반론을 다신 연구자님께

... 저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십여년에 걸친 이국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터키친구들을 알고 있고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다소 거친 내용을 여러해전에도 이곳에 꼬리글로 달기도 했지요.

그때도 많은 우물안 사학도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이 여러해 노력을 드린 역사공부 - 소위 식민사관 - 가 방향이 바뀔것 같아 신경이 민감해질수 있음도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무슬림의 코란송처럼 구전으로 전승되는 고구려와 돌골의 이야기는 사실이며 역사의식을 가진 학력이 좀 높은 터키인들을 만나면 이 우리의 오랜 역사의 이.야.기. 는 밤을 세우게 만들 더군요.

식민사관으로 얼룩진 역사를 보는 좁은 안목이 넒고 넒은 세계를 향한 안목으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비록 좋은 평을 못듣는 월간조선에 실린 글이긴 하나 참조하시라 달아봅니다.

건승하시길 ...)

터키(突厥ㆍ돌궐)와 한국

趙南俊 월간조선 이사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이 현재 방문중인 터키는 우리 민족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우방이다.

터키는 한자로 突厥(돌궐)이라고 표기한다. 몽골과 함께 중국에서 匈奴(흉노)라 칭하던 민족의 하나로, 6세기 중엽부터 8세기 중엽까지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우리 한민족과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이다. 고구려 전성기엔 글안, 여진(숙신)과 마찬가지로 일부는 고구려의 基層(기층)민중에 속했다.

돌궐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668년), 고구려의 遺民(유민)을 많이 받아들이면서 우리 민족과 특별히 긴밀해졌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부분의 서민들은 초기엔 唐(당), 후엔 신라의 지배를 받으면 한반도에서 살아갔으나, 귀족계급 등 중상류층 가운데 일부는 唐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일부는 몽골, 글안, 돌궐 등 타민족에 섞여 살다가 682년 동돌궐이 올란바토르(현 몽고의 수도)에 「돌궐 제2제국」을 수립할 때, 여기에 참여했다. 그 숫자는 전 인구의 절반인 20만명이 넘었다는 설도 있다.

돌궐의 왕은 「單于(선우)」 또는 「可汗(가한)」이라고 불리며 그 아래에 左賢王(좌현왕), 右賢王(우현왕)이 있었다. 돌궐 제2제국의 單于는 고구려 遺民을 우대하여, 고구려 왕족의 일원이며 遺民의 수장인 高文簡(고문간)을 高麗王(고려왕)으로 봉했다. 왕은 둘 밖에 없는 것이 돌궐의 전통이었으나, 고구려 유민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이들을 통치하기 쉽도록 王을 한명 더 늘려 고구려인을 앉힌 것이다.

돌궐은 특히 고구려 遺民 가운데 여성을 뽑아 종교의 首長(수장)인 제사장에 임명했다. 이를 탕구르, 또는 탱글리라고 했다고 한다. 고조선 시대 샤머니즘의 首長 호칭이 「단군」이었다는 설을 인정한다면 아마도 같은 계통의 단어가 아닐까 싶다.

돌궐은 7세기에 톤유크라는 사람이 중앙아시아 소그드語 계통의 문자를 만들어 역사를 기록했다. 고대 터키어로 기록된 돌궐 碑文(비문)이 몽골 오르혼江, 남시베리아 예니세이江 상류 및 서북 몽골지방에 세워져 있다.

(특히 오르혼 江 비문은 1893년 덴마크의 언어학자 톰센이 현대 터어키어로 해독을 함으로써 터키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논쟁을 종식시켰다. 터키의 역사첵 가운데 고대사 부분을 보면 흉노와 돌궐족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자신들의 조상이 흉노, 돌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碑文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제대로 해석되지 않았다면 많은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현재의 터키에서 수천리 떨어진 몽골고원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나라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된 돌궐은 8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의 용병으로 南下(남하)한다. 사라센은 이슬람교 창시자 모하메트의 후계자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 걸쳐 이룩한 대제국이었다. 용병에 불과했던 돌궐은 11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을 멸망시키고 셀주크투르크 제국을 건설했다. 징기스칸의 몽골에 패해 그들의 지배를 받던 투르크는 13세기 말, 다시 오스만투르크를 세워 20세기 초반까지 7세기를 이어오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국민혁명으로 멸망했다. 동서양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던 터키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을 들다 독일이 패하는 바람에 많은 영토를 잃고 오늘날의 소국으로 전락했다.

터키는 과거 고구려의 기층민중이었으며, 「돌궐 제2제국」을 같이 한 우리 한민족에 대해 깊은 유대감과 함께 형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6ㆍ25때 북괴가 남침하자,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군대(1만4936명, 전사 721명, 부상2147명)를 파견해 우리를 도왔던 것이다. 파병이 늦어지자, 터키의 고등학생들이 『왜 형제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면서 데모를 벌였다는 말이 있다. 7세기 때부터 문자를 갖고 있는 그들은 역사를 통해 터키와 한민족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양국간의 경제 및 군사협력은 물론이고, 터키에 대한 깊은 연구가 행해졌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희망이다. 옛 터키어를 연구하면 잃어버린 우리의 과거 역사도 일부 그 속에서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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