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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와 사산왕조 페르시아 제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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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산왕조 페르시아 제국(Sasanian Persia : 208 ~ 651)

(1)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성립

중국의 진·한 시대(221 BC ~ 220 AD)에 서아시아에서는 아르사케스의 파르티아 제국이 등장하여 영화를 누렸고(250? BC ~ 224 AD), 중국의 후한이 220년에 망하고, 파르티아 역시 224년에 멸망하였으므로 동서의 강력한 지배세력의 교체가 그의 동시에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라기 보다는 인류가 한 단계씩 발전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순환의 과정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로마제국은 5현제시대를 마지막으로 로마의 평화가 사라지고 군인황제시대의 혼란기에 접어들었으며, 인도에서는 쿠샨왕조가 번영하다가 사산조페르시아에게 멸망 당했으며,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는 아직도 부족연맹 단계의 여러 나라가 혼재해 있었다.

아케메네스조의 페르시아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된 후(330 BC) 서아시아에서는 셀레우코스조의 시리아가 성립되어 명목상 이 지역을 통활하고 있었으나 다양한 인종과 민족을 포용하기에는 한계를 들어내어 300 여 년 간 전운(戰雲)이 그칠 날이 거의 없었다.

동쪽에는 그리스계가 세운 박트리아와 월지라고 중국의 사서(史書)에 기록된 스키타이계 유목민이 세운 쿠샨왕국이 일어나 인도 서북부를 차지하였고, 다시 이란계의 유목민이 세운 파르티아가 이지역에서 맹주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서쪽에서는 로마제국이 지중해세계를 통합하고 동진을 계속하여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파르티아에 뒤를 이어 이 지역에서 다시 풍운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 사산왕조 페르시아 제국이다. 사산왕조라고 접두사를 붙인 것은 이 왕조를 세운 것이 사산 가(家)였기 때문에 아케메네스 가(家)의 페르시아제국과 구분하기 위해서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다.

사산 가의 조상 사산은 물과 풍요, 생식 그리고 전쟁의 조로아스터교의 여신 아나히트를 모시는 신전(神殿)의 사제(司祭)로서 명망 높은 집안이었다. 그리고 아나히트 신전이 옛 페르시아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부근인 이스타흐르에 있었고 이 일대를 파르스(Pars : Fars)라 하였다. 페르시아라는 이름은 이 파르스에서 기원한 것이고 따라서 예부터 이곳은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파르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사산 가는 사산의 손자 아르다시르(Ardashir)가 시리아와 파르티아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여 왕(Shah)이라고 칭하고(208), 이어서 파르티아를 멸하고 "샤안 샤(Shahan Shah : 왕중의 왕)"라 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400 여 년 간 신비와 영광의 베일에 쌓인 페르시아제국이 다시 탄생하였다(226)

역사에 순환(循環)법칙이 있다면, 이것은 남부 이란민족이 북부 이란민족에 대한 반동으로서, 정주민들이 유목민들에게 당했던 지배를 다시 정주민들 손으로 넘겨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파르티아 보다는 이 사산 가의 페르시아는 신비의 베일에 쌓여 아리비안 나이트의 중심 무대가 되었고,

특히 영명한 창업군주 아르다시르의 격언(格言)들, 이를테면 "폭군 밑에 번영은 없다" "현명한 군주는 가뭄을 당하면 비보다는 도움을 준다" "세금은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다. 선정(善政)만큼 세수(稅收)를 늘리는 것은 없고, 폭정(暴政)만큼 세수를 줄이는 것도 없다" 등등은 이슬람 시대 까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후세에까지 명언으로 전해 졌다.

그는 티그리스강 동쪽 옛 파르티아왕국의 수도였던 (크)테시폰(Ctesiphon)에 도읍을 정했다. 그런데 이 주변은 아람(Aram)말을 사용하는 셈계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마치 바다 속의 섬처럼 이민족 가운데 수도를 정한 것이다.

그의 아들 사푸르1세(Shapur 1 : 241 ~ 272) 또한 부왕 못지 않은 영명한 군주로서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지역 특성을 잘 살펴서 동방의 강적 쿠샨왕국을 격파하고 인더스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괴뢰(傀儡)정권을 수립해 놓고, 다시 서쪽의 로마제국과 대결해서 발레리아누스 등 3명의 로마황제를 격파하고 이 장면을 전승기념비에 새겨 두기도 했다.

특히 서 아시아의 로마인들의 근거지였던 안티오키아(Antiocheia)를 점령하면서 로마황제 발레시아누스를 포로로 잡고 아스파한으로 귀환 중 비옥한 벌판에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의 이름을 군데사푸르(Gunde-Shapur: 안티오키아보다 훌륭한 사푸르의 도시)라고 이름을 지었고,

로마황제 발레시아누스와 그 포로들을 성벽을 쌓는 노역을 시켰다가 풀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코를 베어 돌려 보냈다고도 하며, 사형을 시켰다고도 하는데, 이들 역시 체계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구비(口碑)전승(傳承)의 호기심만 자극하다가 1936년 이래 프랑스의 고고학 조사단의 발굴로 그 전모가 밝혀졌다.

비샤푸르(Bishapur)로 알려진 이 도시는 이란 남부 파르스 지방 카제룬의 북쪽 약 20 km에 있는데, 프랑스 고고학조사단의 발굴로 조로아스터교 신전(神殿)·봉헌비(奉獻碑)·궁전 터 등이 확인되었고, 출토된 비문(碑文)에 의하여 샤푸르 1세가 266년 창건한 도시로 판명되었다.

도성(都城)은 히포다모스식(바둑판모양)의 직사각형 플랜을 따라 성벽과 도랑을 두르고, 언덕에는 요새를 구축하였으며, 건축은 이란 형식 및 기술을 구사(驅使)하였으나, 시리아 공인(工人)과 로마 미술의 세례를 받은 현지 공인도 참가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특히 궁전에 남아있는 모자이크 벽화에는 시리아 로마 미술의 반영이 현저하고, 도성 서쪽의 루드이샤푸르의 협로(峽路)에는 샤푸르 1세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사로잡은 전승도(戰勝圖)를 비롯, 사산왕조 제왕(諸王)의 마애부조(磨崖浮彫)가 남아 있었다.

또한, 협로의 산정에는 무단이라는 동굴이 있고, 그 안에는 샤푸르 1세의 거상(巨像) 일부가 가로놓여 있어서 이것이 그의 무덤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7세기의 아라비아정복 뒤에는 성밖에 모스크 등이 건립되었으나, 그 뒤 이 도시는 쇠퇴하여 유적만을 남기고 있다가 발굴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나라가 신비에 가득차게 된 것은 배화교의 제주인 사산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들이 높여서 제주(祭主)니 사제(司祭)라고 부르지만, 이들의 하는 일이나 생각은 우리들의 옛 점쟁이나 무당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따라서 이들이 지배하는 나라는 신정(神政)국가의 성격이 강하다. 왕은 신의 화신(化神)으로서 절대적인 군주권을 행사하였는데, 아무리 높은 관리라 할지라도 왕으로부터 10미터 이내로 근접할 수 없었고, 가운데 막을 치고 관리들은 막(휘장) 밖에서 시립(侍立)하였다가 왕의 명령을 받도록 엄격하게 규정하였다고 한다.

(2) 마니교의 성립과 교조의 순교

사푸르1세의 재세 기간에 이란의 고유종교인 마니교(Manichaeism : 摩尼敎)가 등장하였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에서 파생되었고, 그 외에도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여러 요소를 가미한 종교로서, 교조(敎祖) 마니의 이름을 따서 마니교라고 한다.

마니에 관한 사실(史實)은 불확실한 점이 많으나,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파르티아 왕가였고 아버지는 파테크 어머니는 마리암(마리아)이 였다니 예수를 낳은 마리아의 이름과 같다. 그에게는 두 가지의 갈등이 늘 그를 괴롭혔는데 하나는 멸망한 왕조(파르티아)의 후예라는 것과 또 하나는 신체적으로 절름발이가 그것이었다.

일찍이 조로아스터교에 귀의하여 신의 계시를 받고, 30세 때 예언자로서의 자각을 한 후, 사푸르1세의 후원으로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깨달음을 열심히 포교(布敎)하였으나, 사푸르1세의 사후 바(흐)람1세로 부터는 박해를 받고 그 자신도 처형당했다.

마지막 예언자를 자처한 그의 가르침은 간명한 교의(敎義)와 예배 양식, 엄격한 도덕계율이 었는데, 그 교의는 조로아스터교의 광명(선)과 암흑(악)의 이원론(二元論)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실세계는 명·암이 혼돈되어 있으나 멀지 않아 광명의 세계가 예정되어 있고, 그 예언자이며 지상의 구제자로서 마니가 파견되었다고 말하였다.

광명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 마니교도가 지켜야 할 계율(戒律)로는 육식과 음주를 엄금하고, 악행을 삼가며, 정욕을 멀리하여, 각자 속에 내재하는 광명의 소인(素因)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 중 육식과 정욕의 금지가 바람1세의 비위를 상하게 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처형되었다.

전승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처형 후 그의 육신을 갈기 갈기 찢기고, 목은 성문에 걸어 백성들에게 구경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사후 교세가 확장되어 중앙아시아 일대와 로마제국, 인도,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나 13∼14세기에 쇠퇴, 소멸하였다.

그가 남긴 마니교의 성전(聖典)과 여러 문서, 즉 생명의 책, 샤브라칸, 신비의 책, 마니서한(書翰), 교훈 집, 거인(巨人)의 책, 등이 마니교 소멸 후 없어 졌다가 20세기 유럽 학자에 의해 그 사본이 발견됨으로써 그 실상을 좀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 후 바람 2세(재위 277∼293)는 세이스탄을 정복하여 인도에까지 세력을 뻗쳤지만, 그가 죽은 뒤 수십 년간은 카루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침입을 받아서, 때로는 수도가 위협받기도 하였다.

결국 나르세(재위 293∼303)는 로마와 굴욕적 강화조약을 맺고 국가의 소강(小康)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샤푸르 2세(재위 309∼379) 때는 아라비아인과 투르크족의 침입을 받고, 또 아르메니아 영유권 문제로 동로마제국과 싸워야만 했다. 야즈다기르드 1세(재위 399∼420) 때부터는 동북 변경에 투르크계의 에프탈족의 위협이 가중되었고, 카바드 1세(재위 488∼531) 때는 통혼(通婚)과 조공(朝貢)을 통해 그 침략을 회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3) 페르시아제국의 중흥(中興)과 쇠망(衰亡)

이렇게 쇠퇴한 왕조를 소생시킨 황제가 호스로 1세(Khosro I : 재위 531∼579)로서 사산조 페르시아 29명의 왕중에서 가장 위해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선왕(先王) 이래의 마즈다키즘에 의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외적의 침입을 일소시킨 뒤,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이 왕조 최대의 황금시대를 이루었으며,

당시의 제국 경계는 서쪽은 안티오키아에서 동쪽은 중앙아시아, 남쪽은 예멘까지 미쳤다. 호스로1세를 누시르완(Nushirwan or Anushirwan)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불멸의 영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호스로1세는 즉위 후 저음으로 단행한 것이 마즈다키즘(Mazdakism)의 소탕이 었다. 이것은 호스로1세의 부왕 카바드 1세 치하(488∼531) 때에 마즈다크(Mazdak)에 의해 마니교의 여러 이론을 종합해서 만들어 낸 새로운 종교로서, 인류의 평등을 주장하고 부녀와 토지를 교단(敎團)의 공유 재산으로 하는 일종의 공산사회의 실현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민심을 몹시 흥분시켜 사회가 매우 불안했는데, 호스로1세가 즉위 후 교조와 수많은 신도를 처형하고 조로아스터교를 다시 국교로 삼아 국가의 질서를 회복하였다. 그 밖에 토지대장을 완성하고 세제를 확립하는 한편, 샤푸르1세 때 시작한 수도 크테시폰의 조영(造營)도 완성하였는데, 그 장대한 유적의 일부는 오늘까지도 남아서 당시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호스로라는 이름의 왕은 1세에서부터 4세 까지 4명이 있다. 이 호스로라는 이름이 이슬람시대 이후 문헌에는 키스라(Kisra)로 부르면서 왕을 일컫는 보통 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자주 등장하는 "키스라의 취향"이라는 것은 페르시아왕의 호화스러운 취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매우 호사스러운 것을 말할 때 이렇게 불렀다. 정식으로 기록으로 남긴 것은 없으면서도 구비전승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그 중 호스로1세 때에 있었던 몇 가지만 간단히 이야기에 적고자 한다.

호스로1세는 호학(好學)의 군주로서 이름 난 그리스나 인도의 명저를 모두 페르시아 말로 번역시켰다. 인도에 판차탄트라(Panchatantra : Bidpai우화집) 라고 하는 재미있는 책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의 시의(侍醫)이자 고관이었던 부르주야(Burzuya)를 보내어 아무리 비싼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반드시 이 책을 구해 오라는 밀령(密令)을 내렸다.

이에 부르주야(Burzuya)는 금화 2만장을 휴대하고 인도의 서울 카나우지(kanauji)까지 가서 온갖 고생 끝에 이 책을 구하여 왕에게 바치자 왕은 다시 그에게 페르시아 어로 번역하라고 명령하여 페르시아 어로 번역 되었고, 이 후 이 책은 8세기 중엽, 이슬람제국의 아바스(Abas)왕조 초기에 이르러 이브눌 무가피아(Ibn al-Muqapia)가 아라비아 말로 중역(重譯)한 것이 칼릴라 와 딤나(Kalilah wa Dimnah)라는 아라비아 산문문학의 대표작이 되었다.

"칼릴라 와 딤나"는 두 마리의 늑대 이름이라다. 이 아라비아어의 역본은 세련된 문장으로 아라비아 문학의 고전이 되였으며, 그 후 시리아어·터키어·그리스어 등의 번역을 거쳐, 동서 50 여 국어로 번역되었으며 전세계의 문학작품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부르주야(Burzuya)가 인도에서 비드파이우화집을 가지고 오면서 체스(Chess:서양장기)도 같이 가져왔다고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인도의 라자(왕)가 호스로에게 사절을 보내면서 많은 선물과 함께 차트르앙가(Chatrang:체스)도 보냈는데, 인도의 사절은 "왕께서는 저와 이 게임을 하시어 이기지 못하시면 이 후 인도에 공물을 보내셔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내기를 자청했다.

이에 호스로1세는 7일간의 여유를 구하고 연구를 했으나 누구하나 아는 사람이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부르주야(Burzuya)가 게임의 이치를 연구하여 백관이 보는 앞에서 인도 왕의 사자를 보기 좋게 패배시켰다. 그 후부터 페르시아에는 체스가 유행했고, 이것이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까지 전파되어 서양장기가 되었다.

인도에서 시작한 이 장기가 여러 지역으로 퍼지면서 그 지역의 특성에 맞추어 "말"의 이름도 달라지는데 인도에선 왕, 상, 기사(騎士), 배(船, 보졸(步卒)이 아랍사회에서는 왕, 여왕, 상, 말, 성(城), 보졸이 되고, 중국에 가서는 장(將), 사(士),상, 말, 차, 포, 병과 졸로 나누어 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장기는 고려시대 송나를 통하여 들여왔다고 보여지며, 조선시대 전기 까지는 양반 층의 유회로 사용되다가 조선 후기 이후 서민층으로 확대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1973년에는 한국장기협회가 동호인들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장기의 원산지는 중국이 아니고 인도가 되는 것이다.

번영을 누리던 사산조 페르시아도 왕조 말기가 되자 재차 비잔틴제국과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고 궁정(宮廷) 내의 세력 갈등이 곁들여 국력이 갑자기 쇠약해졌다. 야즈다기르드 3세(재위 632∼651) 때 이슬람교도의 아라비아 군의 침입을 받아 주권을 상실하고 400년 이상 영화를 누린 이 왕조도 문을 닫고 다시 이 지역은 이슬람이라는 종교국가가 담당하게 되었다. 야즈다기르드3세의 아들 페로즈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국의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4)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의 문화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잘 정비된 국가체제는, 후세의 무굴제국과 이슬람 국가에 의해 계승되었고, 카바드 1세 때 만들어진 토지대장(土地臺帳)을 기초로, 호스로 1세는 인두세(人頭稅)와 재산세(地租)의 조세제도를 제정 실시하였다.이 새로운 조세제도는 여러 나라로 전해져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아테네 학림(學林)을 폐쇄시킨 뒤, 많은 신(新)플라톤파의 그리스 학자가 내조(來朝)하여 호스로 1세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 왕조에서의 철학(哲學)과 과학(科學)의 유행은 이슬람 세계의 학문진흥의 전초가 되어 매개적인 구실을 하였다.

또, 인도의 산스크리트 우화집 "판차탄트라"가 번역되고, 다시 아라비아어로 중역(重譯)되어 후세의 설화문학(說話文學)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 옛날부터 이란의 민족종교인 조로아스터교(배화교)가 이 왕조에서 국교(國敎)로 되어 국민의 정신생활을 지배하는 문화적 기반이 되었다는 것,

호스로 1세 때는 아베스타 성전(聖典)이 편찬되고, 그 고대어적(古代語的) 표현으로 아람계(系) 문자를 모체로 하는 구어(口語)인 팔라비어(語)의 번역·주석(註釋) 또는 종교문학이 출현하였다는 것, 다수의 민족을 포함하는 제국인 만큼 국내에는 여러 종교가 유행하였다는 것,

마니가 창시한 마니교는 배화교에서 파생(派生)된 종교로 한때 궁정 내에도 신봉자가 있었으나, 국교인 배화교로부터 배척을 받아 금지되고 마니는 사형되었다는 것, 등이 이 왕조의 문학과 신정국가로서의 종교적인 단면들이다.

한편으로는 비잔틴제국의 수차에 걸친 종교회의의 결과 이단(異端)으로 지목된 그리스도교도에게는(아리우스 파) 페르시아 제국이 그 도피장소로 적합하였지만,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의 대립관계에 의한 정치적 압력이 어떠한 형태로든 이들 교도의 생활에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景敎]는 그 본산(本山)을 이 나라의 수도 (크)테시폰에 두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멀리 중국에까지 교세(敎勢)를 떨쳤다.

이 왕조의 조형적(造形的) 문화는 당시 세계 제1급의 것으로, 그 영향이 사방으로 파급되었고, 특히 이슬람과 비잔틴 건축 양식에 공헌하였으며, 뛰어난 공예(工藝)와 그림무늬의 도안(圖案) 등은 특기할 만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동쪽의 소그드인과 투르크인들의 교역에 의해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국에도 전해졌는데, 벽걸이·보석·직포(織布)·동기(銅器)·화장품 등의 진품(珍品)들이 중국인의 환영을 받았다. 그래서 회화·건축 등에서 남긴 유적이나 유물은 적지만, 조각과 공예에는 걸작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마애(磨崖)한 부조(浮彫)로 된 샤푸르 1세의 전승도(戰勝圖)와 아르다시르 1세의 서임도(敍任圖 : 둘 다 서남부 이란의 나크시에로스탐)와 타크이부스탄(서부 이란의 케르만샤)의 호스로 2세의 서임도 등이 있다. 회화에는 호스로 2세의 제왕저록수렵도(帝王猪鹿狩獵圖)(타크이루스탐)와 같은 박육부조도(薄肉浮彫圖) 외에 비샤푸르궁전터[宮殿址]에서 출토된 모자이크 인물상(像) 등이 있다.

공예작품은 특히 금은기(金銀器)를 중심으로 한 금속공예품이 우수하고, 이밖에 유리·조석·염직면에서도 고도의 수준이었음이 작품과 그밖의 회화·조각, 그리고 문헌 등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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