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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최초로 일제의 수도 동경에서 두 번씩이나 국회의원에 오른 사람이 있었음. 바로 박춘금. 대부분의 친일파가 정치적 지위, 재산 등 사회적 기반이 있었던 것에 비해, 박춘금은 단돈 1원 49전으로 재일 친일파의 거두로 떠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음. 박춘금은 일본 내 친일 조선인 세력을 규합,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과 친분을 다짐. 이때 관계를 다진 정치인들의 후원으로 1932년 총선에서 동경 5구에 출마, 중의원에 당선. 1940년 20회 총선에서 다시 피선, 그 뒤 조선에 귀국해 모략과 협박, 폭력을 동원한 친일 활동에 나섬. 일제의 패전 후 일본으로 밀항, 귀국하지 못하고 1973년 사망함.
(박춘금의 자세한 정보는 이곳에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좌측 사진). 그의 아버지 우범선은 친일 부대의 대대장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조선인이었음. 이때 일로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 일본 여성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둠. (우측 사진: 우범선은 1903년 조선에서 온 자객에 암살됨.) 장남 우장춘은 극심한 빈곤과 학대 속에서도 동경 제국대학을 졸업, 일본 유전학계 최고 권위자가 됨. 1950년 전쟁 중 남한에 귀국, 죽을 때까지 조국의 근대 농업산업을 위해 힘쓰다 1959년 타계. 우장춘 박사는 감자와 배추, 무를 식량자원으로 보급했으며, 제주도에 밀감 재배단지를 세우는 등 근대 한국 농업의 기틀을 세웠음. 이런 업적에도 우 박사는 일본의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하는 등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적지 않은 홀대를 당함. (우장춘과 그의 아버지의 일대기는 일본 여류 작가 쓰노다 후사코의 [나의 조국]에 잘 나와 있음. 이 밖에 우장춘 박사의 일생, 연합뉴스 이종호 기자의 우장춘 박사의 선택 참고.)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5일자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을사오적 이근택(좌측 사진)이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집에 돌아와 가족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을 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토록 혁혁할 거요.' 그러자 부엌에서 식칼로 도마를 후려치는 소리가 나더니 계집종이 마당으로 뛰쳐나오며 이렇게 호통을 쳤다. "이 집 주인 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도 모르고 몇 년간 이 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으리오." 그 길로 계집종은 집을 나가버렸다.



한일합방을 주도한 두 명의 조선 대신은 이완용과 박제순. 이후 서울의 공중 변소에는 "이-박 요리점"이란 낙서가 등장함. 이완용-박제순은 변소의 오물을 먹는 개돼지라는 표현이었음.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의 왕위를 순종에게 이양시킨 이완용은 집이 테러를 당해 남의 집에 얹혀 살게 됨. 이때 재미있게도 이완용에게 집을 마련해 준 사람이 이완용의 '노력'에 의해 물러난 고종이었음. (이완용은 당시 조선 황실을 지키는 길은 양위 밖에 없다고 믿고 고종을 설득했으나, 장안엔 이완용이 고종 앞에서 칼을 꺼내 위협했다는 낭설이 퍼짐.)
[이완용 자세히 보기]



이완용은 대표적인 친일파이었음에도 일본말을 거의 할 줄 몰랐으며, 이토 히로부미 이외엔 제대로 아는 일본인 실세도 없었음.



이완용 가족묘는 1970년대까지 숱한 테러를 당함. 소풍 나온 초등학생들까지 묘를 부수고 짓밟았을 정도. 이에 견디다 못한 증손 이석형이 묘를 폐쇄하고 시신을 화장하는 극단적 조치를 취함.



1992년 이완용의 땅을 되찾고자 소송을 낸 사람은 캐나다로 이민간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이었음.



3.1 운동 직전 민족 지도자 손병희는 이완용, 박영효 등 당시 '명망 높은' 친일파들에게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으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했음. 이들 친일파들은 모두 요청을 거절했으나, 어느 누구도 3.1 운동에 대해 밀고하지 않았다고 함.



최남선(좌측 사진)은 1943년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학도병에 입대하라는 유세 연설을 하게 됨. 그러나 당시 동경대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그의 아들 최한검은 끝까지 학병 출정을 거부함. 최한검은 해방 후 월북해 명망 있는 대학 교수를 지냈으나 아버지의 친일 행적으로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음.



윤치호는 애국가의 작사가로 추정되고 있다. 1907년에 애국가의 첫번째 작사(좌측 사진)를 기록하고, 광복 직후 다듬어 내놓았음. 태극기와 애국가의 가사 모두 소위 친일파라 불리는 사람들 손(박영효와 윤치호)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이채롭다.



독립투사의 의기를 그린 가곡 [선구자]는 만주에서 어느 독립군 청년이 홀연히 나타나 곡을 붙여달라며 두고 간 시 한편에서 만들어졌다는 비화가 있음. 그러나 이후 이 '독립군 청년'은 친일파 시인이었던 윤혜영으로 밝혀짐. (그러나 최근 들어, [선구자]는 원래 만주 유랑민의 설움을 그린 [용정의 노래]를 해방 후 개사했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음.)



일본에서 건달로 생활하던 송병준(좌측 사진), 1894년 동경에 들어가 가쓰라 총리에게 거창한 사업 구상을 전달함. 그는 조선 땅과 2천만명의 인구를 한꺼번에 팔아 넘기겠다며 1억 5천엔만 달라고 제안함. 가쓰라는 어렵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송병준은 이 정도면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이라며 자신의 황당한 주장을 접지 않았음.
[송병준 자세히 보기]



2005년 송병준의 후손들이 소유권을 주장한 인천 미군기지 캠프 마켓 일대는 원래 을사조약에 항의해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땅이었음. 송병준은 어린 시절 민영환의 일가 집에 들어가 그의 후원을 받으며 자랐는데, 자신이 권력을 잡은 후에 민씨 일가의 자산을 횡탈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짐. 민영환의 후손들은 공동 소송을 제기함. ( 참고자료: 오마이뉴스 2003년 12월 25일자 "부평땅은 송병준이 1925년에 판 땅" )



안중근 의사에 의해 피살된 이토 히로부미(좌측 사진)는 원래 일본의 한국 지배를 반대하던 인물이었음. 이 때문에 한때 조선의 독립을 지켜줄 '은인'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사실 이토는 '선 안정, 후 팽창' 정책을 주장한 또 다른 종류의 제국주의자였음. 그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으며(한때 1000엔 지폐에 얼굴이 오르기도 함), 일본 헌법 초안을 작성하고 전세계에 일본의 존재를 각인 시킨 세계적인 정치인이기도 했음
일제 시대에 일본의 여성 간첩으로 활약한 배정자(일본식으로 개명한 이름)라는 미모의 여성이 있었음. 유랑 생활 중 관가의 기생으로 팔렸다가 비구니가 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배정자는 우연히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망명 중이었던 김옥균을 만남. 그의 천거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배정자. 이때부터 조선 내 밀정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아 1894년 귀국, 조선 왕실로부터 각종 기밀을 빼가는 일을 도모했으며, 한일합방 후엔 독립 운동가의 탄압과 체포에 앞장섬.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 옥살이를 하다가 극심한 빈곤 속에서 서울 성북동에서 1952년 사망. (배정자의 일생과 최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사이트, 그리고 조선일보 1999년 7월 8일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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