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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사라진 명소/서울 시사 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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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군부 총무당(三軍府 總武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7호)
삼군부 총무당
삼군부 총무당
성북구 돈암동 512-160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고종 5년(1868)에 건립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주당(主堂)이었던 총무당으로서 당초 광화문 앞 서쪽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 때에 이곳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서울시에서 1979년 공사를 착수하여 복원하였다.

○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8호)
은평구 진관내동 428번지에 있다.
이 비는 조선 정조가 그 25년(1781)에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면서 할아버지인 영조의 옛일을 생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세운 것이다.
비문은 영조가 세제(世弟)시절인 경종 원년(1720)에 부왕인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금암(黔巖)의 덕수천변(德水川邊)에 머물면서 이곳의 참장(站長)이 소도둑을 잡았다가 그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타일러 보낸 일을 목격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를 거울삼아 훌륭한 정치를 행하였다는 내용이다.

○ 화산군신도비(花山君神道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1호)
화산군신도비
화산군신도비

서대문구 북가좌동 73-3번지에 있다.
속칭 거북비로 통하는 이 신도비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화산군의 행적과 그 세계(世系)를 기록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낙창군(洛昌君)이 영조 23년(1747)에 건립한 것이다.
화산군의 이름은 곤(滾)인데, 선조의 일곱째 왕자인 인성군(仁城君) 공(拱)의 손자이다.

○ 세종대왕신도비(世宗大王神道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2호)
세종대왕신도비
세종대왕신도비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 1-157번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내에 있다.
이 신도비의 원 위치는 세종의 초장지(初藏地)인 강남구 내곡동 산 13번지였으나 1974년 4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문(碑文)은 정인지(鄭麟趾)가 짓고 비음기(碑陰記)는 김조(金 )가 지었으며 글씨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썼다.

○ 연령군신도비(延齡君神道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3호)
연령군신도비
연령군신도비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안에 있다.
이 신도비의 원래 소재지는 금천현(衿川縣) 초당리(楚塘里), 지금의 영등포구 대방초등학교 교정이었다. 그 후 1940년 당시 경성지구 구역정리로 인하여 묘역은 충남 예산군 덕산으로 옮겨지고 현지에 이 신도비만 남아 있었다. 따라서 이 비는 [안국동별궁비(安國洞別宮碑)]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1967년 8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보존 중에 있다. 비문은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이명(李 命)이 지었고 글씨는 조태구(趙泰耉)가 썼다.
연령군은 숙종의 아들로서 숙종 25년(1699)에 나서 21세에 요절하였다.

○ 상봉동 오층석탑(上鳳洞 五層石塔,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4호)
중랑구 상봉동 344-1번지 한독약품주식회사 뜰에 옮겨져 있다. 이 탑은 전체의 높이가 820㎝나 되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오층탑으로서 본래는 전라북도 익산(益山)에 있던 것이다.
그 양식에 있어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定林寺址 五層石塔)과 같아서 백제말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 상봉동 석제태실신석(上鳳洞 石製胎室身石,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5호)
중랑구 상봉동 344-1번지 한독약품주식회사 뜰에 놓여져 있다.
높이가 114㎝로서 둥근 대석(臺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구성은 신석(身石)과 개석(蓋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확한 출처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왕실의 태(胎)를 묻었던 유품(遺品)으로 추정되고 있다.

○ 광평대군묘역 일원(廣平大君墓域 一圓,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8호)
광평대군묘역 일원
광평대군묘역 일원
강남구 수서동 산 10-1번지에 있다.
옛날에는 궁말 혹은 궁촌(宮村)이라 불리어졌던 수서동의 광수산(光秀山)에 자리하고 있는 이 묘역 일원은 서울 근교에 현존하는 왕손(王孫)의 묘역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유지되어 있다.
이 곳은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내외의 묘소를 비롯하여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내외의 묘소와 광평대군의 아들인 영순군(永順君)의 묘 등 약 700여기에 달하는 묘들이 있다.
광평대군의 묘소는 본래는 광주 학당리(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가 초장지(初葬地)였으나 이곳에 성종의 선릉(宣陵)이 들어서게 되자 연산군 원년(1495)에 현재의 이곳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 중명전(重明殿,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3호)
중구 정동 1-11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1900년대에 건축되었으나 1925년 화재로 외벽체만 남고 완전히 불타자 곧 복원, 준공한 2층 벽돌집이다.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은 외국사신들이 고종을 알현하는 알현장으로,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

○ 어정(御井,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3호)
중구 훈정동 66-5번지에 있다. 이 우물의 축조연대는 조선초기로 추정되며, 임금이 종묘에 전배(殿拜)하러 나올 때 이 우물물을 마셨다 하여 '어수우물·어정(御井)'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 충헌김공신도비(忠憲金公神道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9호)
충헌김공신도비
충헌김공신도비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안에 있다.
이 비는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헌공(忠憲公) 김구(金構)의 신도비로서 영조 19년(1743)에 세워졌다.
이 비의 특징은 암·수막새기와를 드리운 기와지붕 모양의 개석(蓋石)과 다른 신도비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용·봉황·불로초·구름 등의 문양들이 다채롭게 새겨져 있는 점이다.

○ 봉은사 선불당(奉恩寺 選佛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4호)
강남구 삼성동 73번지에 있다.
선불당은 신라 원성왕 10년(794)에 창건된 봉은사 대웅전의 한단아래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일종의 대중 선방(禪房)으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9세기에 세워진 이 건물은 비록 연대가 오래지 않지만 이만한 크기의 거창한 선불당은 서울시내에 유례가 없으며 당시의 귀중한 목조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 화계사 대웅전(華溪寺 大雄殿,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5호)
강북구 수유동 487번지에 있다.
삼각산에 위치한 이 절은 중종 17년(1523) 신월(信月)스님이 창건하였다. 화계사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보아 1800년대 후반의 불전(佛殿)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단엄한 건물로 당시에 유행하던 법당양식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 봉원사 대웅전(奉元寺 大雄殿,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8호)
봉원사 대웅전
봉원사 대웅전

서대문구 봉원동 1번지에 있다.
봉원사는 신라 진성여왕 3년(889)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현 위치의 봉원사는 영조 24년(1748)에 세워진 것이다.
봉원사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19세기 한성에 세워진 사찰 내 대웅전의 공통적 특징인 여러 층의 정면층단, 판벽, 천장양식 등을 나타내고 있는 대표적 건물로서 당시 한성 사찰의 주법당(主法堂)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사라진 명소
○ 국사당(國祠堂)
"남산 꼭대기에 국사당이 있었는 바, 이를 곧 목멱신사(木覓神祠)라 하였다."는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기록이 있다. 이로써 서울 남산(또는 목멱산) 꼭대기에 국사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 때는 이 곳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나 그래도 건물만은 남아있던 것을 1925년 일본인들에 의해 헐리고 말았다.

○ 남산봉수대(南山烽燧臺)
남산에는 일찍이 5개소의 봉수대가 있었는데, 조선초기부터 고중 31년(1894) 갑오개혁 때 없어지기까지 근 5백년간 존속하였다.
남산의 봉수대는 일명 경봉수(京烽燧)라고도 하며, 전국 각지의 경보를 받아 병조(兵曹)에 종합 보고하는 중앙봉수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산봉수대는 1992년 [남산 제모습 찾기사업]의 일환으로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1993년 7월 완공되었다.

○ 녹천정(鹿川亭)
남산 기슭 예장동에는 조선초기에 녹천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은 이곳을 소위 총독관사(總督官舍)로 정하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정자를 새로 꾸민 일도 있었지만 원래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터잡은 곳이라 한다..

○ 청학동(靑鶴洞)
남산의 청학동은 조선초기 이래 삼청동(三淸洞), 인왕동(仁旺洞), 쌍계동(雙溪洞), 백운동(白雲洞)과 함께 도성 내에서 경치좋은 곳으로 이름 높던 곳이다. 이곳에는 일찍이 연산군 때의 천재시인 박은(朴誾), 그리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대제학 이행(李荇) 등이 별장을 가졌다. 이후 조선말까지 남산에는 숱한 시인 묵객들이 별장과 정자를 짓고 경관을 즐겼다.

○ 균역청터(均役廳址)
남학동(남학동)에 있는 일신초등학교 자리는 옛날 균역청이 있던 자리이다.
균역청은 영조 27년(1751)에 창설되었는데, 징병을 피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고 면제해 주는 사무를 집행하고 양반들이 노비를 팔고 사는데 세금을 부과하는 사무를 담당하였다. 그 외에도 소금과 어업에 대한 부가세 등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 영희전터(永禧殿址)
지금 중부경찰서 자리인 저동(苧洞) 2가 62번지 부근은 일찍이 영희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에는 원래 세조의 의숙공주(懿淑公主)의 저택이 있었다. 중종 때는 단경왕후(端敬王后)를 옮겨 살게 하였고, 광해군 2년에는 묘사(廟祠)로 꾸며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영위를 모시기도 하였다.

○ 장충단공원(奬忠壇公園)
이 곳은 영조 이래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南小營)이 있었고, 광무 4년(1900)에 장충단을 꾸민 이래로 장충단이라 불렀다. 고종은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식(李耕植)과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등 몸을 희생하여 절개를 지킨 장졸들의 영혼을 모시고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근린공원인 장충단공원은 1984년 9월 22일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에 흡수 합병되었다.

○ 남소영(南小營)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버티고개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는데, 남소문 옆에는 남소영이 건립되어 있었다. 남소영은 조선시대에 수도방위와 왕실호위를 맡은 분영(分營)이었다.

○ 태평관(太平館)
지금의 상공회의소 일대에는 조선초기에 건립된 태평관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남대문 안쪽의 서부 양생방(養生坊)으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중종 때의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선조 때의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이곳에서 성혼식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조 이전에 이미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전환국(典 局)
지금의 상공회의소 근처에 전환국이 있었다. 고종 22년(1885)에 처음으로 전환국을 설치하고 독일의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백동전(白銅錢)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주조된 백동전의 시초이다.

○ 선혜청(宣惠廳)
지금 남대문시장가 접해 있는 남창동(南倉洞)에는 일찍이 대동미(大同米)와 포전(布錢)을 받아들이고 내주던 선혜청이 있었다.

○ 혜민서(惠民署)
현재 외환은행 본점 동쪽인 을지로 2가 192번지는 조선시대 혜민서가 있던 자리이다. 혜민서는 태조 원년(1392)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설치되어 고종 19년(1882) 폐지될 때까지 서민의 질병치료를 담당하였던 의료기관이었다.

○ 훈련원(訓練院)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 맞은 편에는 조선시대의 훈련원이 있었다. 훈련원은 태조 원년(1392)에 설치되어 고종 31년(1894)까지 5백년동안 유지되었던 기관이다. 무관들이 과거를 보기도 하였고 무예를 훈련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곳에서 과거를 보았다. 이 안에는 서울 장안에서 물맛 좋기로 이름났던 통우물(桶井)이 있었다.

○ 군기시(軍器寺)
지금의 서울특별시청사가 있는 자리에는 병기(兵器)와 기치(旗幟), 융장(戎仗) 등을 만들던 군기시가 있었다. 태조 때는 군기감(軍器監)이었는데, 태종 14년(1414)에 군기시로 고쳐 불렀다. 고종 31년(1894) 이 제도는 폐지되었다.

○ 덕안궁터(德安宮址)
중구 태평로 1가 조선일보사 자리는 고종 때의 덕안궁터이다. 본래 이 곳은 명례궁(明禮宮)이 있던 자리였는데, 광무 원년 (1897)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부터 덕수궁으로 돌아오자, 그 해 엄씨를 빈(嬪)으로 책봉하면서 명례궁 터전에 경선궁을 이룩하였다. 1912년 엄비가 돌아감에 따라 이 곳에 사묘(私廟)를 세우고 경선궁을 덕안궁으로 고쳐 불렀다.

○ 저경궁터(儲慶宮址)
남대문로 3가 111번지에는 저경궁이 있었다. 원래 이곳은 선조의 다섯째 왕자인 원종(元宗)이 살던 저택이었다. 그때는 송현궁(松峴宮)으로 불렀는데, 영조 31년(1755)에 인빈(仁嬪) 김씨의 사판(祠板)을 모시고부터 저경궁이라 불리었다.

○ 부녀시장(婦女市場)
동대문 동묘(東廟) 남서쪽에는 여인네들만 모이는 채소난전이 있었다. 부녀자들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에 채소난전이 서게 된 것은 단종의 왕비인 송비(宋妃)가 단종이 영월에서 세상을 떠난 후 정업원(淨業院)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인네들이 그 근방에 채소난전이 서게 하여 채소를 송비에게 몰래 바치곤 하였기 때문이란 것이다.

○ 낙천정터(樂天亭址)
광진구 자양동에서 동남쪽으로 한강변을 끼고 거슬러 올라간 산 위에 낙천정이 있었다.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이궁(離宮)을 짓고 정자를 꾸몄는데 이를 낙천정이라 하였다. 이 산을 일명 발산(鉢山)이라고도 부르고 그 동북쪽 기슭을 대궐터로 부른 이유가 그 까닭이다.

○ 전관원터(箭串院址)
살곶이다리에서 서북쪽 지금의 성동교 서북쪽에 전관원이 있었다. 서울 근교에는 전관원과 함께 동쪽에 보제원(普濟院), 북쪽에 홍제원(弘濟院), 남쪽에 이태원(梨泰院)의 4개의 원(院)이 있었다.
원은 역로(驛路)에 부수되는 역(驛)과 같은 것으로, 공문서의 전달과 관청에서 쓰는 물품의 운송이라든지 공무를 띠고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던 곳이다.

○ 독서당터(讀書堂址)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 일대는 옛날에 두뭇개(豆毛浦)로 불리었다. 이곳 응봉(鷹峯) 아래에는 중종 12년(1512)에 지은 독서당이 있었다. 독서당이란 본래 세종이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 옛정 장의사(藏義寺)에서 독서에 전념케 한 것이 그 시초였다. 그러나 독서당이라 불리우기는 성종이 용산에 독서당을 마련하고 부터였다.

○ 동빙고(東氷庫)
지금의 옥수동에는 동빙고가 있었다. 이곳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궁중의 제사용으로 썼다. 서빙고동에는 서빙고가 있었다.

○ 동·서활인서터(東·西活人署址)
동·서활인서는 태조 원년(1392) 설치되어 고종 19년(1882)에 폐지된 의료기관이었다. 활인서는 서민들의 질병치료를 담당하였는데, 특히 전염병 치료를 전담하였다. 이와 함께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들을 위한 구제사업도 행하였다.
동활인서의 위치는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번지(전의 돈암장 자리)이며, 서활인서는 처음 마포구 아현동 267번지 아현중학교 자리에 있다가 조선말에 중구 신당동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 경기감영터(京畿監營址)
지금의 서대문적십자병원과 서대문우체국이 있는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서대문 밖으로써 경기감영이 있었다. 태조 2년(1393)에 설치되었는데 속칭 포정사(布政司)로 부르기도 하였다.
경기감영의 선화당(宣化堂)은 건양 원년(1896)에 수원으로 옮겨가면서 군영(軍營)이나 한성부의 일부로 쓰이기도 했다.

○ 연희궁터(衍禧宮址)
서대문구 연희동 연희입체교차로 부근에는 연희궁이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종이 왕위를 물러난 뒤 일시 머물렀으며 세종은 그 8년(1426)에 이 궁에 옮겨 살다가 이듬해 3월 창덕궁으로 되돌아간 일도 있었다. 또 연산군은 그 11년(1505)에 창의문 밖에 탕춘대(蕩春臺)를 꾸미고 연희궁을 연회장소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 망원정터(望遠亭址)
복원된 망원정
복원된 망원정

마포구 망원동 137, 207-1 번지 일대 양화나루 서쪽 언덕에 있었다. 태종의 아들이며 세종의 형인 효녕대군이 세운 정자로 세종 6년(1424)에 건립되었다.
경치가 매우 좋아 중국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되었으나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 군자감터(軍資監址)
원효로 3가 1번지에 있었다. 군자감은 조선시대에 전국의 군전(軍田)으로부터 곡식을 받아들여서 군용으로 쓰기 위해 곡식을 비축하는 사무를 맡아보던 기관이었다. 군자감은 태조때 창건되었는데, 분감(分監은) 남대문 안에 두었고 용산강 북쪽에 강감(江監)을 두었다.

○ 새남터(沙南基)
용산역을 지나서 한강철교에 이르기 직전에 천주교도들이 세운 기념탑이 있다. 이 기념탑이 서 있는 부근 서부이촌동 일대는 조선시대 사형장이던 새남터였다. 고종 3년(1866)에 대원군에 의해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 한강진(漢江鎭)
한남동에는 조선시대의 한강진이 있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강상류에 송파진(松坡鎭)이 있었고, 하류에 양화진(楊花鎭), 그리고 중간에 한강진이 있었다. 이 진영들은 한강의 대안인 노량진(鷺梁鎭)과 개성의 남쪽인 임진도(臨津渡)와 함께 서울을 경비하는 5대 요지였다.

○ 제천정터(濟天亭址)
한남당과 보광동 사이 아래 기슭에는 조선시대의 제천정이 있었다. 제천정 터전의 정자는 모두 나라의 소유였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이 곳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 마포(麻浦, 삼개)
한강은 조선시대 중부지방의 수상교통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 부근의 한강은 5강(五江)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하는데, 뚝섬·노량·용산·마포·양화진이 이에 해당된다.
이 중 마포, 즉 삼개는 오늘날 마포구 마포동 일대의 한강수역을 의미하며 용산과 양화진 사이에 있었다. 이 곳 마포에는 삼남지방의 곡식을 비롯하여 서해안에서 들어오는 소금과 어물 등이 집적되었다. 또한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李之 )이 이 지역에서 움막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주변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유명하였다.


3. 유명인물이 살던 곳

○ 세종이 탄생한 곳
세종 탄생지
세종 탄생지

현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 일대이다. 1956년 12월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와 한글학회가 공동으로 이곳을 답사하여 고증하였다.

○ 효녕대군(孝寧大君)의 주택지
효녕대군의 저택은 현 종로구 부암동 329번지의 4호이다. 옛 인왕산 아래 무계동(武溪洞)에 있었다. 이곳은 비해당(匪懈堂)이 있었다.

○ 인원왕후(仁元王后)가 탄생한 곳
종로구 궁정동 1번지 대은암(大隱岩)이 있는 부근은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가 태어난 곳이다.

○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태어난 곳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중앙일보사 사옥 맞은편 순화빌딩의 주차장 터이다. 인현왕후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 15세 때 숙종의 계비가 되었는데 20세까지 왕자를 낳지 못해 숙종에게 장희빈(張禧嬪)을 후궁으로 천거하였으나 장희빈의 모함으로 6년동안 안국동 감고당(感古堂)에서 칩거하였다.

○ 조대비(趙大妃)가 태어난 곳
성동구 옥수동 295번지 옥정초등학교 뒤쪽에는 헌종의 모후(母后)인 조대비의 생가가 있었다.

○ 강감찬(姜邯贊)장군이 태어난 곳
관악구 봉천동 218번지로 지금 낙성대공원 북쪽으로 약 100m되는 지점이다. 강감찬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40만 대군을 대파시켜 국위를 떨친 장군이다.

○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살던 곳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 마른내 일대이다. 이곳에는 서애 유성룡도 같이 살았다 한다.

○ 권율(權慄)장군이 살던 곳
서대문구 행림동 1번지 부근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도원수(都元帥)였고 행주(幸州)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에겐 아들이 없었으므로 사위였던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에게 이 집터를 물려주었다.

○ 정도전(鄭道傳)의 집터
조선 개국 공신이었던 정도전의 옛집은 종로구 수송동 146번지(종로구청자리)였다. 태종에게 몰려 죽음을 당한 후에는 집을 헐고, 비단·포목·인삼·의복을 대궐에 납품하는 기관인 제용감(濟用監)과 말을 관리하고 사육하는 관청인 사복시(司僕寺)가 들어섰다.

○ 유관(柳寬)의 집터
종로구 창신동사거리 창신초등학교 골목 안의 우산각골(雨傘閣里)은 청백리(淸白吏)로서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이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하루는 비가 와서 지붕이 새고 있었으므로 방안에서 우산을 받치고 있던 유관이 부인에게 "우리는 우산이 있어서 비를 피하고 있지만 우산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낭패는 어찌 하겠소"라고 백성들을 걱정하였다 한다. 이 곳을 우산각골로 부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 성삼문(成三問)의 집터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성삼문의 집은 종로구 화동 1번지(정독도서관 뒤)에 있었다. 집터에 비석이 있었으나 광복 이전에 없어졌다.

○ 권람(權擥)의 집터
세조 때의 문신 권람의 집은 지금 남산 1호터널 입구 서쪽에 위치하였다.

○ 김정희(金正喜)의 집터
종로구 통의동 7번지 창의궁(彰義宮) 자리였다. 김정희는 조선말기의 금석학자(金石學者)이며 우리나라 서예사(書藝史)에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다.

○ 김종서(金宗瑞)의 집터
서대문구 충정로 1가와 의주로 1가 사이에 있었다.

○ 남이(南怡)장군의 집터
종로구 연건동 126번지에 있었다.

○ 맹사성(孟思誠)의 집터
종로구 정독도서관에서 가회동으로 넘어가는 삼청동 35-119 일대 맹현(孟峴)에 있었다. 조선초기에 청렴과 덕행으로 이름났던 맹사성은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공무가 끝나면 이 곳의 초라한 집으로 돌아갔다.

○ 정철(鄭澈)의 집터
종로구 청운동 123번지 청운초등학교 근처이다. 그는 조선조 시가사상(詩歌史上)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쌍벽을 이룬 시가문학의 거장이었다.

○ 조광조(趙光祖)의 집터
종로구 운니동 18번지 교동초등학교 부근이다.
중종 때의 유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사림파(士林派)의 영수이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고, 상소(上疏)하는 사람을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 이안눌(李安訥)의 집터
중구 필동 3가 동국대학교 내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에 수행하였고 청백리였다. 시문학(詩文學)의 대가였다.

○ 손순효(孫舜孝)의 집터
성종 때 우찬성(右贊成)을 지낸 청백리로 중구 명동 2가 1번지에 살았다. 그는 손님이 찾아오면 막걸리를 대접하였는데 항상 안주가 없었으므로 성종이 가끔 내시를 시켜 음식을 보내주곤 하였다.

○ 유성룡(柳成龍)의 집터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 부근이다. 이 부근을 옛날에는 마른내(乾川洞)라 하였다. 생민동(生民洞)에 흘러내리는 개천이 비가 내리지 않는 동안 항상 메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곳 앞길이 마른내길이다. 이곳에는 단종 때 김종서, 정인지, 선조 때의 원균, 이순신 등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 이덕형(李德馨)의 집터
용산구 도동(桃洞)과 동자동(東子洞) 경계의 송경재가 그곳이다. 현재 중구 남대문로5가 대우재단빌딩 자리이다. 그는 선조,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명망이 높았다.

○ 이율곡(李栗谷)의 집터
종로구 관훈동 197번지에 살았다. 태어나기는 강릉 외가였다. 이곳에는 그 후에 조선말기에 사동대신(寺洞大臣)으로 알려진 김병학(金炳學)의 대저택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이율곡은 이곳에서 4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 이지함(李之 )의 집터
지금의 마포대교 북쪽 입체교차로 유수지 옆이다. 고서(古書)인 {토정비결(土亭秘訣)}로 널리 알려진 이지함은 재산을 탐하지 않고 고결한 언행으로 일생을 마쳤다.

○ 이퇴계(李退溪)의 집터
중구 서소문동 57번지 일대 구 중앙일보사옥 건너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일대를 학다리골이라 하였는데, 당시에는 이곳이 서울의 명승지였다.

○ 정광필(鄭光弼)의 집터
중구 회현동 1가 14번지이다. 그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 옛터를 중심으로 그의 동래 정씨 후손들이 계속 살아왔으므로 회현동(會賢洞)이란 이름이 붙기도 하였다. 그는 연산군이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자 이를 간언하다가 귀양갔으나 중종반정으로 복귀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 송시열(宋時烈)의 집터
종로구 명륜동 1가 2번지이다. 그는 현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 양성지(梁誠之)의 집터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이다. 그는 성종 때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 이완(李浣)의 집터
종로구 인사동 222번지이다. 효종 때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추진했던 이완대장의 집을 그가 죽은지 20년후에 민종도(閔宗道)가 빼앗아 들어간 후에 심은 오얏나무의 열매가 맺지 않았다고 한다.

○ 김좌근(金左根)의 집터
종로구 경운동 66번지이다. 김좌근이 아들 병기(炳冀)와 함께 이 곳에서 세도정치를 하였는데, 이곳이 교동(校洞)의 일부였으므로 그를 교동대감으로 불렀다.

○ 김홍근(金興根)의 집터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태화관(泰和館)터이다. 그 뒤에는 이완용이 살기도 하였다. 김홍근은 철종실록을 편찬했고, 안동김씨의 배경으로 방자한 행동을 하다가 귀양가기도 하였다.

○ 윤선도(尹善道)의 집터
중구 명동 명동성당 부근이다. 이곳은 옛부터 명당터로 이름난 곳이었다. 윤선도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인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는데 그가 지은 시가(詩歌)는 뛰어나다.

○ 민영익(閔泳翊)의 집터
종로구 관훈동 198번지 18호이다. 그는 민승호(閔升鎬)의 아들로 미국전권대사,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원래 이 집터는 죽동궁(竹洞宮)으로 순조의 첫째 사위 김현근(金賢根)의 집이었다.

○ 민영환(閔泳煥)의 집터
종로구 견지동 27번지 2호이다. 그는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외부(外部)·학부(學部)·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을 역임하다가 광무 9년(1905) 을사조약이 맺어져 나라의 주권이 빼앗기자 자결하였다.

○ 박승종(朴承宗)의 집터
중구 예장동 2번지이다. 그는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냈다. 당시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키자 극력 반대한 의리있는 정치가였다.

○ 박영효(朴泳孝)의 집터
종로구 관훈동 30번지 1호 경인미술관 자리이다. 철종의 사위이다.

○ 김상옥(金相玉)의 집터
종로 5가 동대문 부근이다. 그는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후암동과 효제동에서 혈전을 전개하였다. 그의 묘는 국립묘지에 있다.

○ 김옥균(金玉均)의 집터
종로구 화동 106번지(전 경기고등학교 교정)이다. 그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했던 개화파였다



-서울 시사 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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