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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부산- 부산진성, 두모진해관, 자성대왜관, 초량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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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편집]두모진 해관.jpg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관세가 부과된 곳은 1878년 부산이었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으로 개항을 하면서 일본에 무관세 통상을 보장했다. 일본의 강압 때문에 관세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맺은 일종의 자유무역협정이었다. 조선은 뒤늦게 잘못을 깨달았으나 일본인에게 세금을 부과할 방법이 없었다.
대신 일본과 교역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세금을 매겼다. 나름대로 조약을 피해 가는 묘수를 동원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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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세관이 설치된 곳이 동래부사 휘하에 있던 두모진(豆毛鎭)이다. 당시는 해관(海關)이라 불렀다.

60냥짜리 소가죽 100척에 14냥(23%), 10냥짜리 양가죽에 3냥(30%) 등 꽤 무거운 세금이 부과됐다. 효과는 컸다. 거래 물품 가격이 급등했고, 일본 상인들이 동래부에 난입해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조선은 내국인에게 부과하는 세금이므로 일본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태도를 취했다. 결국 일본 군함이 동원됐다. 일본군은 부산 앞바다에서 함포를 발사하고 병사들을 상륙시키는 등 무력시위를 계속했고, 조선은 굴복했다. 두모진 해관은 이렇게 해서 9월28일부터 12월19일까지 석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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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의 모습으로 상당히 자세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정산성과 동래읍성, 경상좌수영성, 부산진성, 왜관, 다대포진성이 그려져 있으며 두모포진, 서평포진의 경우 간락하게 그려져 있다. 부산진성의 경우 영가대가 보이고 포구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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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부산진성의 모습으로 4대문의 모습이 다 보이고 부산진성안에 자성대왜성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또한 부산진성안에 객사(拱辰館 공진관)와 동헌(劒嘯樓 검소루)의 모습이 보이고 영가대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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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린(李聖麟),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1748년경의 부산진성과 영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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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승구도'중 영가대를 확대해본 모습
 영가대 앞까지 성곽이 이어져 있고 동문앞에는 민가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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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그린 회본태합기의 부산진성/ 부산자성대 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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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병풍중 한장면으로 동래부사가 왜관으로 가는 행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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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병풍중 부산진성이 있는 부분
부산진성안에는 객사(拱辰館 공진관)와 동헌(劒嘯樓 검소루)의 모습도 보이고 자성대왜성이 있는 곳에는 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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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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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접왜사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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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접왜사도-국립진주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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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그린 부산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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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경 영가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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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무렵 영가대 주변 출처는 우리문화재연구원
1929년(소화4년) 발행 동래군 지도


 

부산부, 서면 동래면 남면 기장면 북면 철마면 일광면 정관면 장안면 구포면 사상면 사하면

 

1678년 초량왜관 설치

1916년 용두산공원 조성

부산 중구 광복동과 남포동, 중앙동 등 이른바 원도심 일원은 부산을 근대도시로 탈바꿈시킨

장소였다.

1678년 용두산 주변인 현재의 남포동, 광복동, 동광동, 신창동, 대청동 등 35만㎡에 초량왜관이

설치되면서 이 일대는 다양한 문물교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1607년 동구 수정동

일원에 세워진 두모진왜관을 확장 이전한 것이다.

 

초량왜관 시대가 열리면서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예전 200여명 수준에서 500여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왜관은 일본상인들이 중국 상품을 구입해 가는 중계무역 기지인 동시에 조선과 일본간의 국제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외교특구였다. 이곳을 통해 양 국가는 외교, 경제, 문화, 풍속 등에 걸친 다양한

교류를 시작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부산은 본격적인 개항장으로 탈바꿈했다.

이후 ‘부산항일본인거류지계조약’이 체결되면서 기존의 초량왜관은 일본인 외교관들이 머무르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로 개방됐다. 비록 압제와 침탈을 위한 공간으로 변질되기는 했으나 광복동 일원이 본격적인 근대문물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도 됐다.

 

개항이후 유입되는 일본인들이 급증하면서 지금은 복개된 광복로의 실개천 주변으로 주택도 크게 늘어났다. 이후 각종 공공기관과 업무, 상업시설은 물론 항만과 철도 등 각종 산업시설들이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들어섰다.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침탈한 1910년 8월29일 이후 이 일대에 대한 일본의 개발야욕은 더욱 본격화됐다. 1915년 11월부터 1916년 6월 사이에 용두산공원을 조성, 현재 부산타워가 있는 곳에 신사를 세워 부산시민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 시절 광복동은 일본인들의 상업중심지로 자리매김 했다. 식당, 극장, 백화점, 은행 등 근대식 업종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당시 장수통 또는 변천정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사람들은 남부민동과 아미동 등 고지대에 살고, 일본사람들은 자갈치 시장

인근 평지에서 생활하는 등 주거 차별도 심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이 패망, 광복을 맞으면서 다시 주권을 회복했다는 의미에서 이 일대는 비로소 ‘광복동’으로 이름 지어지고  광복로도 현재의 명칭을 갖게 되었다. 5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광복동 일원은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설치되는 등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자료 : 우리문화연구원, 팬저의 국방여행, 구글 이미지, 부산세관 책자

한겨레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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