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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영 자작의 옥인동 아방궁 송석원의 시작과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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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동리 명물] 옥인동 송석원(玉仁洞 松石園)
정해자 옥인동 34 정분(鄭焚)
<동아일보> 1924년 7월 21일자
<> 착한 이만 사람입니까. 악한 자도 사람입니다. 충신도 명인입니다. 이름 나니 명인이지요. 북부위생소는 똥냄새로 명물이요, 새문밖 천연지는 연향(蓮香)으로 명물입니다. 청탁을 가릴 것 없는 바에 윤자작(尹子爵) 송석원인들 명물이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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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식을 모떠서 별별 사치를 다한 집이라, 대궐도 못따르겠지요. 그런데 어린 아이라도 이 집은 때 악마(惡魔)가 얼어붙은 것처럼 흉하게 보아서 저집 참 좋다고 불없게 알지 않습니다. 더구나 뾰족한 머리를 얹어 밉게 보았던지 이집 위에 있는 피뢰침만 보아도 만가지 궁휼한 수단이 그리로 솟아오를 것 같이 안답니다. 이집 마당 연못이 어느 해인지 장마통에 터져서 앞동리 초가집들이 물벼락을 맞았섰는데 손해는 대궐안에서 물어주었답니다. 그러기에 충심이 그리 갸륵하지요.
 
<> 회동은 구선복(具善復)이 다리가 있고 계동으로 올라가면 서쪽 골목이 홍술해(洪述海) 꼴이랍니다. 문앞 다리와 살던 골목이 무슨 죄입니까. 이집을 송석원이라 말고 윤자작저(邸)라고 하시지요. 푸른 솔, 흰돌이 원통하다 할 것입니다.
 
[편집]언커크 2.jpg

매도설(賣渡說)을 전(傳)하는 한양아방궁(漢陽 阿房宮)
윤덕영 자작의 손을 떠나서 이본궁가의 별장이 된다고
<조선일보> 1926년 5월 23일자
일찍이 수십만원의 거액과 십여년의 긴 세월을 두고 몇몇 청부업자(請負業者)의 짧은 밑천을 털음하여 가며 한양의 서북(西北)편에 있는 인왕산록(仁旺山麓)에 올연히 서서 한양의 아방궁이라는 별명을 들어가며 주인의 부귀가 극치(極致)함을 자랑하는 듯한 시내 옥인동(玉仁洞) 47번지에 있는 자작 윤덕영(尹德榮)씨의 송석원(松石園)은 그 궁사극치(窮奢極侈)함은 삼척동자이라도 아는 터이나 이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창덕궁(昌德宮) 왕비(王妃) 전하의 어친가이신 이본궁(梨本宮, 나시모토미야)에서 얼마전부터 경성의 별장(別莊)을 경영하던 중 송석원이 마땅하다 하여 쌍방에서 매매의 의론이 있던 중 근자에 이르러 상방의 의론이 일치하여 불원간 윤씨의 손을 떠나 이본궁가의 별장으로 넘어가리라더라. (사진은 송석원)
 
불국귀족(佛國貴族)의 저택설계(邸宅設計)로
조선한양(朝鮮漢陽)에 '아방궁(阿房宮)' 건축(建築)
민영찬씨가 파리에서 복사해온 설계도
그것이 윤덕영씨 손으로 들어가기까지
매도설(賣渡說)이 훤전(喧傳)되는 송석원양관 내력담(松石園洋館 來歷談) (1)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자
 
[편집]언커크 4.jpg

 
인왕산복(仁旺山腹)의 화려(華麗)한 양관(洋館)
집 한 채를 14, 5년이나 두고 건축하고도 오히려 필역(畢役)치 못하였다 하면 누구나 경이(驚異)의 눈을 뜰 것이다. 그러나 그 건물은 삼십여만의 경성시민이 날마다 치어다 보는 한양(漢陽)의 서편 인왕산(仁旺山) 아래에 있는 다갈색 연화제(茶褐色 煉瓦製)의 삼층양관(洋館)이 그것이니 이 양관은 일국 부원군(府院君)의 형님인 윤덕영(尹德榮) 자작의 송석원(松石園)이 그것이다.
 
세상에서는 이 건물이 송석원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되 통칭 '한양 아방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만으로는 능히 이 건물이 얼마나 윤환미(輪奐美)를 다 하였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인 바 근자에 이르러 경서으이 명물 '한양 아방궁'이 팔려넘어간다는 말이 세상에 전하게 되었는데 그와 같이 굉장하고도 화려한 건물의 설계(設計)는 어느 나라에서 생긴 것이며 도 그 설계가 윤자작의 손에 들어가서 건물로 실현되기까지에는 과연 어떠한 과정(過程)을 밝았는가?
 
때는 정히 대한 광무 8년경이다. 조선도 개명(開明)을 하여서 열국과 공대사(公大使)를 서로 바꾸게 되어 세계 각국수부에는 조선의 공사들이 가 있었는데 당시 불란서(佛蘭西) 주차공사로 '파리'에 가 있었기는 현금 시내 익선동(益善洞)에 사는 민영찬(閔泳瓚)씨였었다. 그런데 민씨는 '파리'에 가서 발을 들여놓은 후 그곳의 미려한 저택들을 보고 그 화려장엄함에 놀랐었다.
 
불국귀족(佛國貴族)의 저택설계복사(邸宅設計複寫)
그리하여 그와 같은 설계로 고국에 돌아와서 이상적으로 집을 짓고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불란서의 어떤 귀족의 별장(別莊)설게를 복사(複寫)하야 두었섰다. 그러다가 을사년(乙巳年)에 보호조약(保護條約)이 체결되어 한국이 보호국으로 되고 각국에 있던 공사관을 철귀(撤歸)할 적에 민씨도 돌아오게 되었었는데 민씨는 중국 상해(上海)에 와서 약 이태동안이나 두류하다가 귀국하여 그것을 건축코자 하였으나 재력(財力)이 미치지 못하여 이상만 품고 이내 그것을 실현치 못하고 안타까운 생각만 품고 있었섰다.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인 민영찬은 안국동에 100간이 넘는 한옥을
지어 거주하다가 윤치소에게 넘어가 윤보선 대통령의 고택이 되었다)
 
http://blog.joins.com/liberum/11987535
 
X     X     X
이야기는 잠시 바뀌인다 ㅡ. 일변 '한양 아방궁'의 현재 주인공인 윤자작은 일찍이 의정대신(議政大臣)을 지낸 윤용선(尹容善)씨의 손자로 상당한 지체와 재산이 있었으나 윤용선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 어찌어찌하다가 가산을 탕패하고 세궁력진하여 집 한칸도 없이 현금 시내 돈의동(敦義洞)에 있는 누동궁(樓洞宮) 이해승(李海昇)씨의 집 산정사랑에서 약 삼년 동안이나 군색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갑진(甲辰)년에 순명황후(純明皇后)께서 승하하시자 그 이듬해인 을사(乙巳)년 겨울에 윤자작의 수양부(收養父)인 이용복(李容復)이라는 이의 주선으로 그때 벽동(碧洞) 있는 큰 저택을 나라에서 사제(賜第)하시고 뒤를 이어 현금 창덕궁 대비전하께옵서 황후로 입궁하신 후부터 차차로 윤자작은 득의의 추(得意秋)를 만나게 되어 즉시 황후궁대부(皇后宮大夫)라는 직명을 띄고 이름만 남은 당시의 정계(政界0에 출마하여 얼마를 지내다가 얼마 아니되어 시종경(侍從卿)이라는 벼슬을 하게 되었섰는데 그러다가 또 얼마가 되지 못하여 경술(庚戌)년을 당하여 한국이 일본에 합병을 당하게 되었섰는데 한국이 일본에 합병을 하고 본즉 황제의 가지시던 어보(御寶)를 당시 통감부(統監府)로 갖다주게 되었섰던 바 어보는 마침 어떠한 사정으로 윤자작이 맡아서 통감부로 가져가게 되었섰던 관계로 어보가 윤자작의 집에 약 열흘 동안 유하게 되었섰다 한다.
 
사십만원(四十萬圓) 탄 후(後) 송석원(松石園)을 매입(買入)
그후에 일본정부에서 조선귀족들에게 처지와 공로를 따라 작(爵)을 주고 황실에서는 은사금이 내릴 적에 보통 자작(子爵)에 대한 은사는 대개 삼만원 가량이었섰으나 윤자작만은 다른 공로도 있으려니와 귀중한 어보를 자기집에서 열흘씩이나 잘 간수하노라고 애를 쓴 공로로 사십육만원의 공채증권이 내리게 되었섰다. 그리하여 일시는 넉넉한 집이 없어 아무리 최분은 있다 할지라도 남의 집에서 삼년 동안이나 지내이던 윤자작은 새로 집을 지을 궁리를 하던 중 친밀한 친구인 전기 민영찬씨가 그와 같이 좋은 설계도를 가졌다는 말이 들리자 윤자작은 본시부터 민씨와 골육보다 더 가까운 사이이므로 민씨에게 말하여 그것을 수중에 넣은 것이라 한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 듯 흐르는 세월은 대정 2년(즉 1913년)이 되어 그 건축설계도를 건물화시키는 제일보를 내디디게 되었섰는데 이만큼 훌륭한 건물을 세움에는 또한 그만큼 훌륭한 터를 고르지 않으면 아니되겠다는 생각으로 윤자작은 사람을 사방으로 놓아 별장터를 물색(物色)하다가 지금 그 건물이 서 있는 송석원(松石園)을 고르게 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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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6년 5월 10일자
조선의 아방궁(阿房宮) ㅡ 윤덕영 자작저(尹德榮 子爵邸) ㅡ 송석원(松石園) 인왕산 마루턱에 청운공보 너머로 멀리 바라보이는 이 유명한 붉은 벽돌집을 둘러보는 사람은 서울사람이 아니라고 ㅡ 그것은 좀 심하다 하더라도 하여튼 이 서울 북촌일대를 우뚝서서 내려다 보는 '르네쌍스'식의 웅대한 건물은 벌써 26, 7년동안 우리들의 눈에 익었고 마음에 익었고 ㅡ 그것이 주는 인상이 조○나 ○든 우리들은 그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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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원을 싸고도는 전설의 하나 ㅡ 벽돌담을 두겹으로 하고 그 속에다 금붕어를 담아 두었느니 바른편으로 뾰죽하게 뻗친 담속에는 악마가 주야로 들끓느니 ㅡ 그러나 그 호화와 사치가 궁궐도 못따를 것임을 시기한 우매한 민중의 욕설이라 할지라도 외로이 서 있는 그 모양을 바라보면 누가 우매한고 ㅡ 하고 감개무량해집니다.
 
순화원(順化院, 표기착오) 옆을 지나 약간 올라가면 철문이 보이고 ㅡ 여기가 아방궁 대문인데 ㅡ 그러나 그런 것 생각하기보다 앞서 우리들을 압도하는 듯이 '세계홍卍자회 조선본부'라는 간판이 눈에 띄이고 ㅡ 주춤하여 발을 멈춘 기자의 등뒤로 유선형 '세단'차가 느릿느릿 언덕을 기어내려갔습니다. (사진은 송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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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커크 건물(建物)에 불
산소용접(酸素鎔接)하다 2, 3층(層)을 태워
<경향신문> 1966년 4월 5일자
5일 상오 10시 서울 옥인동 47 '언커크' 3층 지붕에서 '벤틸레이터' 교환작업중 산소용접기에서 불똥이 지붕에 인화, 건물(연건평 6백평)중 2, 3층을 태웠다.
이 불은 배기통을 교환하기 위해 태창공업사 용접공 최홍섭(崔洪燮, 32)씨가 헌 환기통을 떼어내기 위해 산소용접기로 절단작업중 불똥이 지붕에 튀어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날 이 작업을 위해 '언커크' 건물에는 수도토건대표 장량기(張良基, 48)씨가 현장을 감독, 4명의 용접공이 작업을 했었다. 불이 붙자 최(崔)씨와 다른 용접공들은 2층 세면대로 달려가 '바께스'에 물을 길어 불을 끄려고 했으나 불은 더 크게 번져갔다.
이들은 당황해지자 3층비상'벨'을 올려 화재를 알리고 소방대에 연락, 서울시내 전 소방대와 미군소방차 등 도합 30여대가 동원되었으나 길고 현장이 좁아 소화작업에 애를 먹었다.
 
'언커크' 직원 전부가 서류를 들어내어 1층에 있던 중요서류는 대부분 건져냈다 한다.
이 건물은 1층은 사무실, 2층은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3층은 무전실이다.
경찰은 이날 실화혐의로 장(張)씨와 용접공 최(崔)씨와 조점식(趙点植, 33), 박동민(朴東珉, 21), 전기성(全基成, 18)씨 등 5명을 연행, 문초중이며 장(張)사장과 최(崔)씨를 중실화혐의로 영장을 신청했다.
 
이 건물은 88년전 고윤(尹)후작의 백부였던 윤덕영씨가 별장으로 지은 집으로 사변 전까지는 병원으로 쓰이다가 동란중에는 주한미군장교의 숙소로 쓰였으며 54년 이후 지금가지 '언커크'에서 사용해왔다. 경찰은 피해액을 2백 40만원으로 보고 있다. 한편 '언커크'는 '유엔'본부에 화재발생을 긴급보고했다.

경향신문, 매일신보, 서울 육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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