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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羅雲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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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운규(羅雲奎)
 
 
출생 :  1902년 10월 7일
사망 :  1937년 8월 9일
출생지 :  함경북도 회령
학력 :  간도명동중학교 
 
경력 :  1927년 나운규 프로덕션 창립
1931년 배구자 일행과 일본영화계 시찰
1936년 아리랑 제3편 녹음장치 시용
 
수상 :  1993년 건국훈장 추서
데뷔 :  1925년 영화 운영전 가마꾼역



춘사 나운규는 1902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회령 만세사건 주동자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피신한다.

1년 후 간도로 돌아와 독립군 비밀조직 도판부에 가입하고 중동학교에 입학하였다. 중동학교 재학 중 도판부 사건 혐의자로 체포되어 청진형무소에 감된다. 감옥에서 독립투사 이춘식으로부터 춘사라는 호를 받게 된다.
만기출소 후 회령으로 돌아와 극단 예림회에 가입하고 안종화의 소개로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연구생 배우로 입사를 한다.

1925년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제2회 작 <운영전>에 단역으로 출연하여 영화에 데뷔한다.
같은 해 윤백남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심청전>에서 심 봉사 역을 맡는다.
1926년 계림영화협회에서 제작한 <장한몽>에 출연해 촬영 도중 화재사고로 부상을 입는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 <농중조>에 출연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다. 이 해에 <아리랑>의 원작·각본·주연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풍운아>를 각색하고 감독하고 주연까지 맡는다.

1927년에 <아리랑>과 <풍운아> 필름을 가지고 고향에 가서 <야서(들쥐)>를 제작한다. 김택윤영화사에서 제작한 <흑과백>에 조연으로 출연하고, <금붕어>를 각색?감독하고 주연을 맡는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탈퇴하고 나운규가 중심이 된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한다. 창립작으로 <잘 있거라>를 제작(원작, 각색, 감독, 주연)한다.

1928년에는 <옥녀>, <사랑을 찾아서>, <사나이>와 1929년에는 <벙어리 삼룡>를 제작한다. 이 해에 나운규프로덕션이 해산된다. 1930년 찬영회 사건으로 연루되며, 원방각사에서 제작한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의 주연을 맡는다.미나도좌 연극부에서 연극공연을 하기도 한다.
1931년 도야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한 <금강한>과 <남편은 경비대로>에 출연한다. 1932년에는 원방각사에서 제작한 <개화당 이문>을 감독·주연하고, 유신키네마에서 제작한 <임자없는 나룻배> 주연을 맡는다. 극단 신무대에 가입하여 연쇄극 <암굴왕> 등에 출연한다. 1933년 대구영화촬영소에서 제작한 <종로>의 주연을 맡고, 1934년에는 극단 형제좌에 소속되어 지방순회 공연을 다닌다. 조선키네마사에서 제작한 <칠번통 소사건>의 각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까지 맡는다.

1935년 조선키네마사에서 제작한 <무화과>와 <그림자>, 한양영화사에서 제작한 <강 건너 마을>을 감독한다. 1935년에는 발성영화인 <아리랑 제3편>과 <오몽녀>를 각색, 감독하며 미발표 시나리오 <황무지>를 집필한다.
1937년 8월 9일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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